12월 17일(수) 로마서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선한데 지혜롭게(16: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Everyone has heard about your obedience, so I am full
of joy over you; but I want you to be wise about what is good, and
innocent about what is evil.
새한글 성경 / 여러분이 순종한다는 소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두고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되고, 악한 일에는 엮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선한 일과 악한 일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선한 일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되라!
악한 일에는 엮이지 말라!
그런데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 후에 그 배경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범죄자들의 공통점은 악한 일에 쉽게 엮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만 더 갖기 위하여 아니면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얻기 위하여 실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그릇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때 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앉아야 할 자리와 누워야 할 자리를 구분해야만 합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는 성경 구절(로마서 16:19)로,
좋은 일에는 분별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행하고, 악한 일이나 유혹에는 어리석을 만큼 순진하고 미련해져서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선에는 똑똑하고 악에는 순진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삶을 살라는 권면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분쟁과 악한 자들에게 속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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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데 지혜롭다 :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선한 일에 적극적이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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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데 미련하다 : 나쁘고 해로운 일에 대해서는 속기 쉽고 어리석을 만큼 순진하여,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멀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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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근거 :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로마서 16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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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악한 자들의 꾀임에 넘어가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순진한 마음으로 악한 일에 엮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옛날 그리스에 유명한 애꾸눈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죽기 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려낸 초상화를 보고 장군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화가는 애꾸눈을 그대로 그렸고, 또 어떤 화가는 장군의 심중을 짐작한 나머지 양쪽 눈이 모두 성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장군은 애꾸눈의 흉한 자기 초상화도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성한 모습으로 그렸던 것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초상화로 고민하고 있는 장군에게 나이도 어리고 이름도 없는 화가가 나타나서 자기가 장군의 초상화를 그려보겠다고 했습니다.
장군은 못 미더웠지만 마지못해 허락을 했습니다.
얼마 후 이 화가가 그림을 완성해서 장군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장군은 이 무명 화가의 초상화를 보고는 매우 만족스러워 하면서 많은 상금을 내리고 후한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그림이었기에 이 화가는 장군에게 많은 상금을 받았을까요?
이 화가는 장군의 성한 눈이 있는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장군의 성한 눈 쪽에 있는 얼굴에 가리워져서 애꾸 눈은 그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화가의 지혜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순종은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로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로마서16장19절, 새번역)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개역개정4판 성경)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새번역성경)
I want you to be wise about what is good, and innocent about what is evil(NIV성경)
θέλω δὲ ὑμᾶς σοφοὺς εἶναι εἰς τὸ ἀγαθόν, ἀκεραίους δὲ εἰς τὸ κακόν(헬라어 성경)
원문대로 보면, 선한데(아가도스, ἀγαθόν)는 탁월하고 우수하고 좋은 일에는 지혜롭고(소포스, σοφοὺς), 즉 숙련되고 능숙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한데(카코스, κακόν)는 즉 나쁘고 쓸모없고 좋지 않은 일에는 '미련하라'는 것입니다.
'미련하다'는 원문이 “아케라이오스(ἀκεραίους)”인데 그 뜻이 실천할 줄 모르는, 즉 '거룩하고 순진한 바보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에는 숙달된 숙련공같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악한 일에는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든지 악한 그 일에 함께할 수는 있지만 할 줄 모르는 사람같이 행동하는 거룩하고 순진한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대로 선한 일에는 '모르쇠!'하고 악한 일에는 재빠르게 합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기 보다, 악한 일을 하는데 더 부지런합니다.
밤새워 고스톱을 쳤다는 사람은 많아도, 밤새워 기도하였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밤새워 술을 마쳤다는 사람은 많아도, 밤새워 말씀을 읽었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원수를 갚기 위하여 오래도록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사람은 있어도, 은혜 갚기 위하여 오래도록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는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선한 일을 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죄를 짓는데 머리를 쓰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한 일을 하는데 머리를 써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까지는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조심스럽게 걱정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말에나 누구의 말에나 쉽게 믿고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선한 것을 따르는 데에는 '슬기롭고(지혜롭고)' 악에 이끌리는 데에는 '순진함(우둔함)'으로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길에는 능숙하고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좋은 진리, 좋은 임무, 좋은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할 때 선한 일을 할 때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서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은 혼자서 피난을 왔는데 그래도 한번도 그렇게 배고픈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 가나 좋은 분들을 만나서 일이 잘 되고 넉넉하게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고도 나고 못살기도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잘 될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 할아버지의 생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할아버지가 일 년에 몇 차례씩 거지 잔치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거지가 많았는데 할아버지가그 거지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천막을 쳐 놓고 잔치를 하면 일주일 동안 동네 사람들 못사는 거지들이 와글와글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86세 때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에 마지막 임종하실 때
"나 오늘 갈 거다. 이리 모여라!"
다 앉혀 놓고 마지막 기도를 하고 유언을 하시기를
"내가 죽으면 창고를 열어서 일주일 동안 거지 잔치해라"
이렇게 유언을 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은 안하고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을 아는 고향사람들이 목사님을 만나면
"자네는 자네 어른들의 덕분에 잘 사는 것이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잘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고독해지고 자기 자신을 망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더 잘 살게 됩니다.
선한 일들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와 달란트를 사용하여 선한 일을 하면 그 일을 통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이 잘 될 것입니다.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개역개정4판 성경)
'미련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 아케라이오스(ἀκεραίους) '는 고대 형용사로 '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미련하다'는 실천할 줄 모르는, 즉 '거룩하고 순진한 바보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의 복음 전파하러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은 단어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마태복음 10장16절 -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는 말씀은 당시 유대인 사이의 격언으로 사용되는 문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미드라쉬(מדרש)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게 대해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워라!'
즉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격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러나 순결함을 잃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복음 전파의 승리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둘기 같이 거짓이 없고 순수와 순결함을 지키되 부패나
방탕함과 교활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지혜로우나 교활하지 말고 순박함으로 말미암아 그
지혜가 아름답게 살아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다'에서 '순결하다'와 같은 단어로서 원래 순수하여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악한 일에 있어서는 미련할 정도로 순수하고 단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일이라고 하면 관심조차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줄 알면서도 거기 뭐 선한 것은 없을까 하고 머리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식하게 무시하고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을 것 같고 많은 이익이 있을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선한 일이 아니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꾀는 그것이 자기를 올무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남을 죽이려고 파 논 함정에 자기가 빠지기 쉽고 남을 해치기 위해 만든 무기로 자신이 다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12월 16일(화) 로마서 12-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Rather, clothe yourselves with the Lord Jesus Christ, and do not think about how to gratify 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은 성경 로마서 13장 14절에서 나온 구절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처럼 살아가며, 정욕과 육신의 일을 쫓기보다 사랑과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옷을 입듯 그리스도의 성품과 가치를 몸에 두르는 것으로, 죄를 멀리하고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실천하라는 권면입니다.
의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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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심: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예수님을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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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과 육신의 일 도모하지 않음: 방탕, 음란, 시기, 다툼과 같은 죄악된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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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옷을 입음: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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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준비하는 삶: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부끄러운 모습이 아닌 깨끗한 옷을 입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영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결론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특히 사랑)을 따라 살며, 죄악된 본성을 벗어버리고 성화되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로마서 13:8~14
/ 이재훈 목사
오늘 본문은 전체 맥락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의 실천에 관한 교훈입니다. 전체 주제 말씀은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 몸을 영적 예배로 드리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모습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말씀의 주제는 로마서 1장 16~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주제는 12장 1절의 “영적 예배자로 드려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3장
전반부까지 말씀에 나오는 영적예배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선한 일에 힘쓰는 삶,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국가 일원으로서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영적 예배로 드려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삶’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4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게 복음적인 신앙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옷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담당하셨을 때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옷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옷을 입는다는 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특징입니다. 지구상 그 어떤 존재가 옷을 만들어
입습니까? 어떤 동물이 제작된 옷을 입습니까? 모든 생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인간만이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옷 아닙니까?
성경이 타락한 인간과 회복된 인간을 옷과 관련해서 표현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의
수치심과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 있을 때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 옷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옷이 필요했던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옷을 집어 던지고 나체주의로 살면 죄를 극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옷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히신 것은 영구적으로 좋은 옷을 입히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죽이 생기려면 한 생명이 죽어야 합니다. “생명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야 내 앞에 합당하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옷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예수 그리스도 의의 옷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현할 때 “흰옷을 입은 큰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흰옷을 입은 이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으면
빨갛게 물들지 어떻게 흰색이 되느냐?”고 따지면 안 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 된 상태를 ‘흰옷을 입은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옷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옷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옷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반드시 옷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고, 어린 양의 보혈이고, 죽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의의 옷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들이기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왕이 초대한 결혼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 초대한 결혼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시고 그 상황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왕이 결혼잔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결혼잔치를 포기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잔치에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냈다는 비유입니다. 왜 왕은 그 사람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아냈습니까? 이 비유는 당시 왕이
초대한 잔치에는 합당한 예복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을지라도 왕의 여는
잔치에서는 반드시 왕국이 정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의 옷을 벗고 이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으라”고 할 때 “내가 왜 옷을 벗어야 합니까? 나는 결코 벗을 수 없습니다”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옷을 입어야 한다면
그 옷을 입는 게 일종의 기쁨이요 축하입니다. 그것이 예입니다. 왕이 초대한 사람 중에 옷을 갈아입는 것 자체를 거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반항이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실 때 단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의 옷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능력인지를 아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도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욕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
즐거움, 축복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으로 옷을 입고 살면서 새롭게 빚어지면 두 가지 성품이 나타납니다. 첫째,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8절).
사랑을 갚아야 할 ‘빚’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 말씀에 비춰보면 “서로 빚을 갚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랑은 갚아야 할 빚이고,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결코 끝나는 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사랑할 만큼 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이상 사랑할 의무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는 할 만큼 다 했어. 더는
사랑이 없어. 더는 줄 사랑은 없어”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은 빚진 사람
같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또 못 줘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무감이 아니라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은 빚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십자가를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아무리 갚아도 깊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세상에서 가장 비쌉니다. 죄가 고귀하고 가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 대가가 예수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기에 죄가 가장 비쌉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대가를 스스로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었습니다. 죄를 범했다면 형벌을 내리고 끝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셔야 할 의무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건 우리입니다. 죽을 의무가 없는 분이 왜 죽으셨습니까? 빚진 마음입니다. 그 빚진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사랑하셔서 창조하셨는데 배신하고 불순종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무슨 빚을 지셨기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십니까? 빚진 마음입니다. 참된 사랑은 빚진 마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주고 또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강렬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 옷
입은 사람들은 늘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녀, 가까운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원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때로 예수님 믿는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원수는 안 보면 되고, 복수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용서에 대한 마음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힘듭니다. 용서해야 하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원수 앞에서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빚진 마음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으로
살아갑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b, 10b).
왜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살아갈 때 율법을 완성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채웁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 모든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 가운데 다 요약돼 있습니다”(9절).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왜 해야 하고, 왜 하지 말아야 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왜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도둑질하지 말고, 왜 탐내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이 이웃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거짓을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율법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사랑의 빚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율법을 결코 어기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고 삽니다”
둘째, 그리스도 옷 입은 자들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고 삽니다.
“여러분이 이 시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벌써 잠에서 깨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11절).
구원의 세 가지 시제 중에서 마지막 단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의롭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고,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와 연결이 되어 있고, 그것을 ‘낮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의 악함이 어둠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어둠의 일들을 행하는 것은 밝은 빛이 임할 때가 올 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쁜 짓을 불 꺼놓고 하고, 어둠
속에서 하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많은 은밀한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둠이 계속될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들을
계속하도록 잠들게 만든 것입니다.
구약의 예를 보면 요나가 불순종해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키셨는데, 그 배 속에서 요나는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 잠은 정말 피곤해서 자는 잠이 아닙니다. 불순종한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를 무시할 때 드는 잠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잠자는 영혼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코로나19
팬데믹, 전쟁의 위협, 지진의 발생 등 여러 종말의 징조로 풍랑을 일으키셔서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시는데 잠자고 있습니다. 이 시대
악한 세력들이 사람들이 잠자게 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동합시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2~14절).
그냥 옷이 아닙니다. 갑옷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냥 옷이 아니라 전투복입니다. 악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 군사들이 전투에 출정할 때처럼 무기를 챙기고,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쟁이 났는데 잠옷 입고 나가 싸우는 군사는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전투화가 너무 무겁습니다, 소총이 너무 무겁습니다,
전투복이 너무 무겁습니다”라고 불평하는 군사는 없습니다. 군사는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빛의 갑옷을 입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이 시대 엄청난 문화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빛의 갑옷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 원하시는 것만 보는 것이요, 듣기 원하시는 것만 듣는 것이요, 예수님이 말하기 원하시는 것만 말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생각하기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요청했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긴박하게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 도망했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말씀이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보면 노래가 반복되는데 그
내용은 ‘톨레 레게(들고 읽어라)’입니다. 저런 노래가 있었나 생각하다가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펴서 가장 처음 읽은 말씀이 로마서 13장 13~14절입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임해서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아구스티누스에게 임했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랑과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에 잠자는 성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옷이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랑의 옷을 입고,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월 15일(월) 로마서 10-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물이 주에게서(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새한글 성경 /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서, 하나님을 통해서 지탱되며,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아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성경 구절(로마서 11:36)
이는 모든 만물의 시작(창조), 운행,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지가 하나님(주)이심을 선언하는 구절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찬양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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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From Him) :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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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말미암고 (Through Him) : 모든 존재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유지되고 다스려집니다.
-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To Him) : 결국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이는 모든 것의 종착점이자 완성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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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과 통치권을 가지심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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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구원 : 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을 넘어, 인간의 구원과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까지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
영광 찬양 : 이 구절 뒤에는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 이어져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로,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마지막임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이라" 이 말씀은 앞의 문장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 자신의 선한 것을 결코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은, 우리 자
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무(無)에서 창조함
그리고 지금은 우 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밝히고 있다.
그는 이같은 자실로 미루어서, 우리의 존재 목적 이 그의 영광을 지향 하는 것 이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한 보존해 수시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이외의 목적을가 지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모순되는 것 이겠는가!
(에이스 아우 돈 ; 수 에게로) 이라는 어휘 가 때로는 (엔 아우토 ;주수 -안에 서 또는 두로_말미암아 )라는 뜻으로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인 '수에게로’가 본문의 문맥에 더 잘 어울리므로, 부정확한 용례를 따르는 것보다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낫다.
본문의 말씀의 요지는, 만일 만물의 시작(창조자)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 서 또한 끝(완성자)이 아니시라고 하면 자연의 전체
질서가 뒤집힐 것이 라는 것이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수의 영광이 모든 곳에서 영구불변하게 납아 있어야
한다고 하는 명제가 확실하게 입증된 것으로 바 울은 아제 자신 있게 생각하고 있다. 본문의 문장은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 될 것
같으면 전의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본문의 경우는 문맥을 살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 문맥에 의하만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 하시는 것이 당연하며, 그리고 그의 영광, 이외 에는 아무것도 인류와 온 피조계가 옥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려고 하는 견해는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이고,
갑으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어 말할 수가 있다.
주에게서 나오고 - 거룩에게서 나오고주에게로 돌아가고 - 거룩에게로 돌아가고안식일 - 시간의 거룩성막 - 공간의 거룩예배는 시간에서 거룩의 장소로 옮겨가는 것예배 후에는 공간의 거룩에서 시간의 거룩으로 돌아가는 것
출애굽기 20장 - 창조주 하나님
신명기 5장 - 구속주 하나님
안식일은 얼마동안 지켜야 하는가?
소요리문답
질문 59. 하나님께서 일곱 날 중 어느 날을 안식일 또는 주일로 정하셨습니까?
답변 : 세상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하나님께서는 일곱 날 중 일곱째 날을 안식일 또는 주일로 정하셨고(143),
그 이후부터 세상 끝까지 일곱 날 중 첫째 날을 지키도록 정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144).
143 창세기 2:2-3. 출애굽기 20:11.
144 마가복음 2:27-28. 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요한계시록 1:10.
질문 60. 안식일은 어떻게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까?
답변 : 안식일은 다른 날에는 합법적인 세상적인 일과 오락으로부터까지 쉬면서(145),
그 날 하루 종일 거룩하게 쉬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비로운 일을 행하는 데 사용되는 시간을 제외하고(146),
그 시간 전체를 공적이고 사적인 하나님의 예배 활동에 사용함으로써(147),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145 출애굽기 20:10. 느헤미야 13:15-22. 이사야 58:13-14.
146 마태복음 12:1-13.
147 출애굽기 20:8. 레위기 23:3. 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20:7.
질문 61. 제4계명에서 금지된 것은 무엇입니까?
답변: 제4계명은 요구되는 의무의 누락이나 부주의한 이행, 그리고 게으름, 그 자체로 죄가 되는 행위, 또는 우리의 세상적인 고용이나 오락에 대한 불필요한 생각, 말, 행동으로 그 날(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을 금합니다(148).
148 느헤미야 13:15-22. 이사야 58:13-14. 아모스 8:4-6.
질문 62. 제4계명에 덧붙여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 제4계명에 덧붙여진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주일 중 엿새를 우리의 일에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점(149), 일곱째 날에 대한 특별한 소유권을 주장하신다는 점, 그분 자신의 모범, 그리고 그분이 안식일을 복 주셨다는 점입니다(150).
149 출애굽기 20:9. 출애굽기 31:15. 레위기 23:3.
150 창세기 2:2-3. 출애굽기 20:11. 출애굽기 31:17.
이삭,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약속의 자녀 | 생애, 사건, 상징적 의미
이삭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출생을 예고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사로 정하신 ‘약속의 자녀’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삭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표상하는 인물이자,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를 상징한다고
증거한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이삭의 생애와 주요 사건을 살펴보고, 각각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상징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이삭의 생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원래 아브라함은 나이 많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로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후사로 정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며 이름을
‘이삭’으로 지어주시고 나아가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에도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 돌아올 것이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재차 약속하셨다(창
18:1~15).
그로부터 1년 뒤,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쁨이 되었다.
형
이스마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으나,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냄으로써 아브라함의 독자(獨子)이자 유일한
후사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장성한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동생 나홀의 일가가 사는 밧단 아람으로 종을 보냈다.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데려왔다.
당시 브엘 라해로이에 살던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이삭과
결혼하고 20년이 다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리브가의 태 안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며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강하고 큰 자(형)는 어린 자(동생)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
이삭이 60세 되던 해에 쌍둥이가 태어났다.
먼저 나온 아이는
‘털이 많다’는 뜻의 '에서'
나중에 나온 아이는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 이름했다(창 25:19~26).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에 든 흉년으로 인해 그랄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랄에 거했다.
그 결과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산이 점점 늘어 큰 부자가 되었다.
이삭의 세력이 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견제하며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메우고 떠나라고 협박했다.
이에 이삭은
그랄 골짜기, 르호봇, 브엘세바로 이동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디에서든지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심을 알게 된 블레셋 왕이 이삭에게 화해를 청했고, 이삭은 그들과 평화 약속을 맺고 브엘세바에 거했다.
1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됐다.
이삭 관련 주요 사건 / 번제로 드려질 뻔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린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든 채 산에 올랐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번제에 쓸 어린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답했다.
예정된 장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 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렀다.
천사는 아브라함이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였다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해 수풀에 걸린 숫양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산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 터가 되었다(대하 3:1).
이삭의 번제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대속물로 희생하실 것을 표상한다(요 3:16, 마 20:28).
야곱을 축복함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에서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장막에서 집안일을 도왔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해 그를
아꼈지만 아내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다.
나이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이삭은, 죽기 전에 장자를 축복하기 위해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음식을 만들어 이삭에게 가져가게 했다.
야곱을 에서로 착각한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가 방성대곡하며 복을 간청했지만, 이삭으로서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창 25장 23절) 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삭의 상징적 의미 /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른다(눅 16:19~24).
천국에서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므로, 아브라함이 아버지 하나님을 표상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요 8:54~56, 갈 3:16).
갈라디아서 3:16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제지하며 이삭 대신 어린양을 제물로 삼게 했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어린양의 실체인 예수님께서(요 1:29)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희생하시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짐승을 잡아 절기를 지킬 것을 예표한다.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약속 없이 태어난 이스마엘과 달리, 이삭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후사로 축복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삭을 가리켜 약속의 자녀라 칭했다(롬 9:7~9).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나
야곱처럼 출생 전에 하나님이 미리 예언으로 그 축복을 약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새 언약을 지키며, 미리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해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성도들 역시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후사 이삭은 하나님의 후사인 성도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갈 3:29).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으며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재림 예수님 / 새 언약을 회복하시다
많은 기독교인이 하늘을 바라보며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나, 그는 이미 오셨다.
약속의 자녀
약속의 자녀(약속의 자손, Children of promise)는 출생 전에 하나님이 예언으로 축복을 약속한 사람이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삭과 야곱을 대표적인 약속의 자녀로 꼽을 수 있다.[1]
또한 구원받을 성도들이 약속의 자녀로서 신구약 성경에 연결적으로 예언되어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이 되어야 구원받을 교회가 된다.[2]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성경에는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삭과 야곱을 들어 약속의 자녀를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로마서 9:7-13
하나님께 씨로 여기심을 입는 자녀는 오직 약속의 자녀다. 약속의 자녀는 출생 전에 미리 예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약속 없이 태어난 자들은 육신의 자녀로서 약속의 자손과 대비된다.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영혼 구원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85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후사를 선정하는 일로 근심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후처로 주었고,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다.[3]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 없이 태어난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 창세기 17:18-19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 하나님이 사람되어 나타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는 다음 해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었다.
야곱과 에서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약 20년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어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하니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태중에서 서로 다투는 까닭에 리브가가 하나님께 괴로움을 호소하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에서]는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 창세기 25:23
두 민족은 야곱과 에서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 그 예언을 성취한 야곱이 바로 약속의 자녀다. 원칙적으로는 형인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 결국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삭의 상속권은 약속의 자녀인 야곱에게 돌아갔다.[4]
참 교회와 거짓 교회
교회도 약속의 자손과 육신의 자손이 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으면 약속의 자손이다. 현재 크게 번영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할 육신의 자손에 불과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동방에서 하나님의 모략을 이룰 한 선지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5] 선지자 말라기는 오늘날 이루어질 마지막 선지자와 마지막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 말라기 4:5-6
지중해 밧모섬에서 계시를 본 사도 요한은 해 돋는 곳(동방)에서 마지막 인 치는 천사가 올라올 것이라고 기록했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 7:2-3
이 시대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는 구약과 신약에 연결되어 있는 예언을 성취한 교회다. 말라기, 이사야,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따라 동방 해 돋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印)을 가지고 등장하며, 엘리야의 사명을 이룬다는 예언이 성취되어 있는 교회가 약속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약속의 자녀와 남은 자손
한편,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받을 '남은 자'에 대해 예언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 이사야 10:20-22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예언이라고 기록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 로마서 9:27-28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전 세계에 바다 모래 수와 같이 많지만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의 대상이 된다. 성경은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도 하고 남은 자손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약속의 자손이 곧
남은 자손이라는 뜻이다. 엘리야 시대에 우상 숭배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알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7000명을 남겨두셨다.[6]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7] '남은 자'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나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라는 같은 예언이다.
여자의 남은 자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 약속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를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말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요한계시록 12:17
용은 옛 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꾄 뱀으로 사단 마귀를 의미한다.[8] 마지막 때 여자의 남은 자손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 마귀와 결전을 치른다. 여자, 즉 남은 자손의 어머니에 대한 예언은 성경의 역사가 시작되는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서로의 후손끼리도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예수 초림 때
일차 성취되었지만, 마지막 때에 여자의 남은 자손을 통해 다시 성취된다. 종교암흑세기 이후 여자의 남은 자손이 용(옛 뱀)과
대적하게 된다고 요한계시록 12장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9] 창세기 3장의 여자는 아담의 아내인 하와를 가리킨다. 일곱째 날 안식 직전에 창조된 하와는 영원한 안식이 가까운 때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아내를 표상하므로 용과 대적할 여자의 남은 자손은 재림 그리스도의 아내인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라고도 예언했고,[10][11]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에게 하늘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어머니가 계심을 언급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갈라디아서 4:26-31
약속의 자녀는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다. 어느 때든지 미리 예언으로 약속하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의 사람이 약속의 자손이 되는
동시에 성령을 따라 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오늘날에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세워진 교회의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가 되고
약속의 자손이 된다. 성경의 모든 예언을 따라 엘리야의 사명을 성취하신 재림 그리스도와 어머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남은 자', 곧 성령 시대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다.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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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9:7-13.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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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홍, “제5장 약속의 자손과 남은 백성”, 《하나님의 비밀과 생명수의 샘》, 멜기세덱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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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
↑ 창세기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야곱)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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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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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19:18.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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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1:3-5.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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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
↑ 요한계시록 12:14-17.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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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 21: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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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이제 곧 성탄절이 돌아온다.
낮은 곳에 오셔서, 몸소 참된 신앙의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되새겨 본다.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에서, 모든 이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신 분.
나그네 된 가족이, 묵을 숙소조차 없어서, 마구간에 잠시 머물 때 태어나신 예수. 말먹이 통에 누이신 예수.
그 초라하고 궁색함이, 그 어떤 궁핍한 자들보다 덜하지 않았지. 가난하고 이름 없는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결국 강도—혹은 열혈당 투사들—두 명과 함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셨어. 왜 하필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었나.
빨간 배경 위에 별, 하트, 천사, 종 등 흰색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
세상을 지배하던, 정치적, 종교적 권력 집단,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게, 개혁적이고 획기적인 그분이 일으키고 다니는 변화의 바람이, 달가웠을 리가 없었겠지.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일탈이나, 교리에 대한 불순종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겠지. 그걸 용납하는 순간, 그들의 존재 기반은 사라졌을 테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에게, 그들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임을 일깨우고 다녔잖아. 정결하다고, 선택받았다고, 잘난척하며 그 소외된 자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 취급하던 그들이,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종교적으로 완전한, 정결하고 고귀한 분을, 정치적인 죄목인 "유대인의 왕"이라고 낙인찍어 죽인 거지.
지금은 어때? 뭐 그때와 크게 다른 게 있나? 아, 아니다 크게 다르긴 하지. 최근 몇 년간 "일부" 목사들 그리고 중들이 보여준, 믿기지 않는 행동들을 봤잖아. 목사들이나 중들이나, 돈과 욕정의 노예가 되어, 추하고 더러운 행동들을 서슴지 않더구먼. 일부라고 하지 말자. 그 "일부"를 못 막고, 못 없애는 "대부분"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뭔가 의미 있는 일 좀 하려고 해도, 어떤 사연이든, 너무도 답답해서 호소 좀 하려고 해도,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려고 해도, 평화와 화해를 말하려고 해도, 이 모두가 포퓰리즘이고, 종북이고, 좌파고, 이단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비난받잖아. 우리 사는 곳이 깨끗해지고, 정의로워지고, 공평해지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참 많은 것 같아. 아니 그런 이들의 힘이 정말 강한 건 아닐까?
이런 때에, 예수의 정신을 심장에 품고, 온몸을 바쳐서 전파해야 할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그분이 했던 그 행동들을, 그저 따라 하면 될 텐데. 쓴잔은 다 엎어 버리고, 은혜, 축복, 영광, 부활, 영생의 달콤한 잔들만 달라고 아우성치잖아. 무슨 죄든 짓고 나서, 회개했다고 하면 그만인,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종교. 이타는 없고 배타와 독선만 가득한 막무가내 종교. 이런 신앙으로 물들여진 우리와 같은 이들을, 그래도 구원하려는 분의 마음은 어떤 심정일까.
나 자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가 참 창피하고 두렵다.
감당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워서, 아직 발도 못 내민, 그 "구원으로 가는 길"에 언제쯤이나 들어설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아마 끝내 나서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라. 구원은 받고 싶은데, 그에 상응하는 희생과 의무는 감당하기가 싫어, 솔직히. 좀 쉬운 방법이 없을까?
흐릿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는 이미지.
올해도 그 어리신 분이 다시 오신다.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든 구원해 보겠다고, 말먹이 통 마른풀 위에 초라하게 오셔서, 또 고초당하고, 또 처형당하고. 물과 같으신 분이 또 오신다.
그 마음과 몸이 늘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분.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온 세상천지와 하늘과 바다를 아우르는 분. 눈, 비, 구름, 강물 등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분. 목마른 생명들을 살리는 분. 추위에 얼고, 강한 열기에 수증기가 되어 증발할지라도, 그의 존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분.
그리고 맑고 투명하여, 나를 비추면 나는 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분. 온 세상 더럽고 추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분.
마라나타, 예수여 오소서. 오셔서 구원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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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과의 전쟁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 금연 운동을 강조했습니다.
1895년 장로교회와 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되었습니다.
금주 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또한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금주· 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미래적 비전을 갖고 금주 금연 운동을 정착시켰습니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 · 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언해야 할 시대적 사명은 기우러진 사상에 심취된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쳐서 진리의 말씀위에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월 13일(토) 로마서 8-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속의 자녀(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natural children who
are God's children, but it is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regarded as Abraham's offspring.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원칙을 강조합니다.
1. 정죄함 없음(8:1)
– 새로운 자유의 시작
2. 성령 안에서의 삶(8:2)
– 진정한 자유의 능력
3.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8:14)
– 모든 것을 바꾸는 이름
4. 구속된 고통(8:18)
– 헛되지 않은 시련
5.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8:38-39)
– 영원한 확신
로마서 6장 / 죄와 육체의 관계
죄의 결과는 죽음(6:23)
로마서 7장 / 죄와 마음의 관계
죄의 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에 나는 곤고한 사람(7:25)
로마서 8장 / 죄와 성령의 관계
죄를 다스리는 비결은 생명의 성령의 법(8:2)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원칙
1. 정죄함 없음,
2. 성령 안에서의 삶,
3.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4.구속된 고통,
5.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중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는 C.S. 루이스의 통찰과 함께, 성경 구절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진리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 속에 적용하도록 인도하는 영적 성찰입니다.
1. 정죄함 없음 – 새로운 자유의 시작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이 말씀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책감의 사슬을 끊으셨다는 강력한 복음의 외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실수와 죄로 인해 정죄감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바울의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뿌리채
바꾸는 선언이며,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받았어야 할 형벌이 이미 사하여졌음을 말합니다.
이제 죄책감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도전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믿지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은 우리에게 그 믿음으로 살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2. 성령 안에서의 삶 – 진정한 자유의 능력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2).
기독교인의 삶은 단지 죄를 피하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변화되는 삶입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의무감이 아닌 은혜의 흐름 속에서 열매가 맺히는 삶입니다.
C.S. 루이스는 "기독교는 단지 삶의 향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 모든 것을 바꾸는 이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죄 사함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정체성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겨내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재판장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는 평범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4. 구속된 고통 – 헛되지 않은 시련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고통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연단하고, 영혼을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이끕니다.
성령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이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메가폰”이라 했습니다.
고통은 영적 눈을 뜨게 하고,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합니다.
5.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 – 영원한 확신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실패도, 두려움도, 죽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고, 변함 없고, 영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잘할 때만이 아니라, 연약할 때에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C.S. 루이스는는 하나님을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는 반석입니다.
결론 – 삶으로 살아내는 로마서 8장
로마서 8장은 단지 지적인 이해를 위한 장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정죄함 없음, 성령의 삶, 자녀의 정체성, 구속된 고통, 끊을 수 없는 사랑
이 다섯 가지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 걷습니다.
고통도 헛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promise)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과 이방인 중에서도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라는 두 개념을 다루는 9장-11장의 서두 부분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애끓는 사랑의 마음(1절-3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자격(4절-5절), 참된 이스라엘: 이삭(6절-9절), 참된 이스라엘: 야곱(10-13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 사역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효력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계속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갈 것임을 역설합니다. 바울은 혈통적인 정통성과 약속 곧 믿음에 의한 자녀라는 새로운 도식을 통해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자손에 포함시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 24절 말씀이 특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는 구절이 더 그랬습니다.
바울은 자타가 인정하듯이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에 몰입하던 그는 오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혈통적 정통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의한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복락을 누리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약속의 자녀로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었습니다.
육신의 자녀는 혈통적인 자녀를 말한 반면,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과 계획안에서 태어난 자를 말합니다. 약속의 자녀는 단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정해진 구원의 계보를 따른 자녀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된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선포였습니다. 정통성을 주장하고 믿어왔던 이스라엘에게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새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10절-13절에서 보듯이 그것은 이스라엘이 불평하지 못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내세울 처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의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일어난
감사였습니다.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제게 구속의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이 은혜는 이생과 내생에 두루 누리는 복중의 복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이 감사의 마음이 식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다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평생 감사하며 나아가자고 다짐해 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혈통이나 육신의 자랑은 결코 참다운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늘 본문은 일깨워주었습니다. 재력, 학벌, 직장, 외모, 가정 등 외적 조건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른 믿음만이 전부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을 외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럴진대, 감히 내가 누구를 평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마 7:1-2; 눅 6:37). 다른 성경에서 바울과 야고보도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롬 14:4; 약 4:11-12). 외적 조건이나 외적 상황을 두고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이웃들이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소개하고 이들을 약속의 세계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단단히 했습니다. 그동안 다소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도 더욱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약속의 자녀답게 믿음의 계보를 잘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 자신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참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자녀들도 내가 예수 믿기에 당연히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믿음을 통해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므로 자녀들이 믿음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이들을 잘 이끌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자녀가 되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겉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약속의 믿음 안에서 살게 하소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구원에 대한 깨달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Justification by Faith)
오스왈드 챔버(Oswald Chambers)
내가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구원 받았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단순한 표지일 뿐입니다.
원인 대신에 결과를 강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나의 순종, 정진, 헌신으로 인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놀라운 대속의 구원이 곧바로 나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내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 은혜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놀랍고 찬란한 빛으로 내가 의롭게 되었음을 알게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알지 못해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베푸신 구원은 인간의 논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 대속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대속에 의해서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는 것은 회개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에 앞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 고후 5:17-19)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보장, 우리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보장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것들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하여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일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하신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지정의(知情意)
인간의 정신 활동을 지(知, 앎/지성), 정(情, 느낌/감성), 의(意, 의지)
세 가지 요소로 나눈 개념으로,
인격의 삼요소로 불리며, 지식, 감정, 의지가 조화롭게 발달해야 완전한 인격이 된다고 봅니다.
이 단어는 심리학,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특히 기독교에서는 '지정의적 신앙'처럼 믿음의 영역에서도 지식(이해), 감정(사랑), 의지(순종)의
통합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지정의(知情意)의 각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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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 앎/지성) : 지식, 지혜, 인식, 분별, 이해, 성찰 등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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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 느낌/감성) : 감정, 사랑, 기쁨, 슬픔, 열정, 배려, 애착 등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
의(意: 의지) : 의지, 결단, 행동, 실천 등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주요 사용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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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형성 : 인격이 성숙하려면 지, 정, 의 세 가지가 모두 풍부해야 함.
-
신앙/종교 : 성경적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지),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정), 그 뜻에 순종하는 의지(의)가 통합된 상태를 '지정의적 신앙'이라 함
육신이란 무엇인가요?
존 녹스(1510-1572)는 스코틀랜드인 성직자, 종교 개혁의 지도자였으며 스코틀랜드 장로 교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녹스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의 화신이자 성경과 거룩한 삶의 진리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현대 신학자들의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성인 녹스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신도 개인적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 (로마서 5:12)과
싸운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녹스는 “나는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 아래서 벌어지는 육신과 영의 전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압니다. 그
싸움에는 세상적인 방어도 없고 당장의 죽음만 보입니다. 나는 육신이 마지못해하는 것과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압니다…”
녹스의 진술은 죄 본성과의 개인적인 고군분투를 공개적으로 시인한 사도 바울의 말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4-24).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쓴 서신에서 “나의 육신”이라 부르는 자기 몸의 “지체 안에” 무엇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크리스천 삶
속에 어려움을 낳고 크리스천을 죄에 갇힌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는 로마서 서문에서 바울이
“육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육신’을 나쁜 행실과 관련된 ‘육신’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 바울은 육체와 영혼, 사고, 그의 모든 능력을 포함한 전인적인 것에 대해 ‘육신’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육신을 좇아 열망하며 분투하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언급은 “육신”이 성적인 활동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께 반대되는 애착 및 갈망이라고 지적합니다.
“육신”이라는 용어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그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또 정의는 무엇인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 속에서 그 말이 어떠한 의미를 나타내는지, 그것이 낳는 결과 및 그것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정의
신약성경의 “육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성경 속에서 종종 육체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사륵스입니다. 그러나, 신약과 그밖에 초기
기독교 문헌들의 헬라어 영어 사전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능하는 독립체로서의 육체.
특별히 바울의 견해에 따르면, 몸의 모든 부분은 육신으로 알려진 총체를 구성하며, 육신은 그것이 어디에 거하느냐 따라 그만큼 죄에
지배당한다. 육신에는 모든 형태의 죄가 거하며 아무 선한 것도 살지 않는다.”
성경은 인류가 이러한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는 인류가 원래 선하고 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결과는 본질적으로 그것의
원인을 나타내므로 [즉,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한 것만을 창조하실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태복음 7:18)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모두 죄 없이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본성은 타락했고, 후손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세기 5:3, 강조 추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죄의 본성에 대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불륜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모가
죄의 본성을 전해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때때로 인간 본성에 대한 “영혼 출생론” (Traducian,
“가지로부터”를 의미하는 라틴어 용어에서 파생) 관점으로 불려집니다. 영혼 출생론 관점은 사람의 영혼이 그 부모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즉 잉태 과정 속에서 자녀가 부모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헬라 철학적 관점과 구별됩니다. 성경은 인류의 육체적 영적 본성이 본래는 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반해, 플라톤 (Plato)과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원론으로 이분하여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과적으로 몸 (육체적인
것)은 악한 것이고, 사람의 영은 선한 것이라는 이론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데미우르고스” (Demiurge)라고
불리는 반신반인이 실수로 물질계를 창조했다고 믿는 영지주의자들 (Gnostics)같은 무리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가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육체의 형태를 결코 취하실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에 반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이러한 유형의 가르침을 접하고, 이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1-3).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영만이 중요한 것이므로, 사람이 자기 몸에 무엇을 하든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은 1세기 때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그 이론은 금욕주의 아니면 방탕주의로 이끌었으며,
둘은 모두 성경이 정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23, 유다서 1:4). 성경은 그래서, 헬라 철학과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선했지만, 둘 다 죄에 의해 악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결과는 성경 속에서 종종 “육신”으로
언급되는 본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가 되는 희열을 찾는 그 무엇입니다. 마크 부벡 (Mark Bubek) 목사는
육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육신은 자연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섬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재된 실패의 법칙입니다.
이는 사람의 타락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제적이며 내적인 힘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에 반대하는 일반적이고도 구체적인 반항으로
나타납니다. 육신은 결코 새롭게 되거나, 개선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완전히 처형되고 교체되는 데 있습니다. ”
육신의 현현과 싸움
인간 존재 안에서 육신은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까요? 성경은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19-21).
세상에서 육신의 일이 드러나는 사례들은 명백합니다. 미국 내 음란물의 영향에 대한 최근 조사에서 밝혀진 안타까운 사실들을 살펴봅시다. 이 연구에 따르면, 매 1초마다 미국 내에서는,
• $3,075.64가 음란물에 소비되고 있으며,
• 28,258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음란물을 시청하고,
• 372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검색 엔진에 성인 검색어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39분 마다 미국에서 새로운 음란물 영상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사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이라고 슬퍼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진술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육신의 결과물
성경은 육신 안에서 살면 몇 가지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성경은 육신에 따라 살면서 자신들의 죄 된 행동을
결코 바꾸거나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이생과 다음 생에서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로마서 6:21)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3)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8)
게다가, 사람은 육신적 본성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이
노예 생활은 언제나 파괴적인 생활 방식과 악화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호세아 8:7)라고 말했습니다.
문제의 사실은 육신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도덕률을 깨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의미에서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깰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가 목에
망토를 두르고 중력의 법칙을 깨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지붕에서 뛰어내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날 수 없다는
것과 중력의 법칙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며 결과적으로 깨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도덕적 행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도덕률이 사실임을 증명하게 될 뿐입니다.
육신 극복하기
성경은 육신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악한 행동을 인정하는, 정직의 행보입니다. 이것은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 즉,
사람들은 죄인이고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이 세상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 130:3)
•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8, 10)
다음 단계는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며 육신의 욕망에 순종하지
않도록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것을 수반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새로운 삶의 행보는 성경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1)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7)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4)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마지막 단계는 죽음의 행보입니다. 즉 육신이 그 욕망하는 것에 굶주려 결국 죽게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거듭난다고 해도,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어 새로운 본성과 성령으로부터 오는 바람들과 싸우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크리스천은 의도적으로 옛 자아, 육신의 본성이 가진 욕구 채우기를 피하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 받는 새로운
행위를 연습해야 합니다.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죄된 행동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디모데전서 6:11)
•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디모데후서 2:22)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5)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0-24)
결론
위대한 설교가들이자 찬송가 작가들이었던 요한과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는 죄와 육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너의
사고력을 약화시키거나 너의 양심을 민감하지 못하게 손상시키거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감각을 모호하게 하거나 영적인 것들에 대한
너의 기쁨을 빼앗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요컨대 어떤 것이라도 성령보다 육신의 권한과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그 자체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에게 죄가 된단다.” 크리스천 삶의 목적 중 하나는 육신을 이기는 성령의 승리이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매우 현실적이겠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육신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마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거의 1,000번 정도 언급합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감정과 욕구가 거하는 영적인 부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계시므로, 또한 “마음”도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을 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도행전
13:22)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지도자들과 함께,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사무엘상
2:35, 예레미야 3:15).
사람의 마음은 천성적으로 악하고,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합니다.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욕구는 죄에 의해 부패되었습니다 – 게다가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비밀을 아[십니다]” (시편
44:21, 또한 고린도전서 14:25 참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고],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24-25).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므로
정당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타락 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로마서 10:10).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51:10, 에스겔 36:26).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겠다고]” (이사야
57:15)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 (시편 17:3, 신명기 8:2)하고,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개념, 새로운 지혜, 그리고 새로운 욕구를 채우시는 일 (느헤미야 7:5, 열왕기상 10:24, 고린도후서 8:16)을
수반합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부이며,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12월 12일(금) 로마서 6-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Thanks be to God--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I myself in my mind am a slave to God's law, but in the sinful
nature a slave to the law of sin.
로마서 6장은 죄와 육체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6:23).
로마서 7장은 죄와 마음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를 이기지 못하는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7:24).
로마서 8장은 죄와 성령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를 다스실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것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8:28).
"마음은 원이로되"는 성경 구절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에서 나온 표현으로,
마음은 ~하고 싶어 하지만 몸(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상황을 뜻하며,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약함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자세한 의미 :
-
마음(Spirit/Will) : ~하기를 원하고 바라는 선한 의지, 영적인 소망.
-
육신(Flesh) : 연약한 인간의 몸,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나약함, 현실적인 한계.
-
전체 의미 : '좋은 뜻은 있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유혹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적 배경 :
-
마가복음 14:38 (마태복음 26:41) :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적 활용 :
- 다이어트나 금연처럼 의지는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혹은 신앙생활에서 결심은 했으나 실천이 어려울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 마음의 원함, 영혼의 갈망
우리들도
우리 안에 주님이 심어주신 마음의 원함, 영혼의 갈망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비록 우리 자신이 그 갈망을 강하게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비록 아직도 세상에 대한 끌림이 더 현저하게 느낄지 몰라도, 여러분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육신의 연약함이 우리 안에 함께 있음을 자각하고,
우리도 스스로 깨어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잠들어 버린 제자들, 실패한 제자들 안에서 여전히
긍정의 요소를 인정하고 격려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자신의 실패한 모습만 기억하며 낙심한 성도가 있습니까? 주님은 여러분 안에 ‘마음의 간절한 원함’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우리 안의 마음의 원함이, 영혼의 갈망이 내 안에서 더 힘있게 역사할 수 있도록
스스로 돕는 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 내면의 영혼의 소리와 열망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 갈망에 더 자주 순종하기를 힘씁시다.
거스르는 육체의 소리와 본성에는 단호하게 처음부터 거절하기를 훈련합시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늘 주님께 기도로써 도움을
청합시다.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영적 진보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마가복음
14:38 말씀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한평생
마음에 새겨서, 주님이 우리 안에 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다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두 가지 마음이 무엇인가?
바울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고 그와 함께 여전히 구원받기 이전에 나의 삶의 형식 즉 죄를 짓고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존재하고있다.
그럼 누가 이기는가?
‘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항상 지체의 법 즉 육신의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이기고 마음의 법은 육체의 법에게 사로 잡히는 것을 보았다.
율법은 선 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어 선한 율법인 줄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항상 죄의 법이 이긴다.
아주 단호하다.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을 이긴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과는 늘 죄의 법에 따라 무릎 꿇고 있는 자신을 볼 뿐이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알아 날마다 말씀 안에서 살겠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노력하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나 자신을 발견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에 율법을 정해 놓고, 노력해서 그렇게 살면 교만해지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죄의식 속에 빠진다.
내 속의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그 판단으로 자신이 올무가 되어 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다.
누구에게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존재하고 항상 선한 마음보다 악한 마음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탄식을 한다. 이 탄식은 비단 바울의 탄식이 아니라 나의 탄식이고 죄 아래 있는 우리 모두의 탄식이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결국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율법으로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알지만 우리는 선을 행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에 해결책은 율법의 선한 행동이 아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
내가 선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선한 마음이 나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 주실이, 나를 이 죽음의 죄에서 건져 주실 분, 나를 살리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 은혜일 뿐이다.
여러분이 늘 묵상하는 분이든, 우연히 오늘의 묵상을 읽게 되었는 마음에 한 가지 약속하자!
나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선하지 못하다.
오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평생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날마다 나 자신만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살겠다.
본 묵상의 전개와 적용은 개인의 묵상과 적용이 아닌 묵상 가족을 위한 보편 묵상과 적용임을 알려 드립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기 바로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될 정도로 고민하시며 기도하실 때, 같이 올라갔던 가까운 제자 세 명이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조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악하다”(마 26:40)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데 종종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기독교인 친구는 술 먹을 때 이런 변명을 하곤 하여 주위를 웃기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하나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이러한 죄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오랜 세월 인 박힌 죄나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이런 말로 변명도 하고 위안도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가 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또 우리가 자주 원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롬 7:23,24). 우리는 이 구절도 인용하며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이런 약함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우리 같은 평신도가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느냐며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 변명이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일어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하지만,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정말 근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 인간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한 시도 깨어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크게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잘못을 대변해 주시는 것처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전에도 여러 번 “주님은 유대인에게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않으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8:38,39).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육체와 본성의 약함과 결점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계속 주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을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잘못을 크나큰 슬픔으로, 그리고 하루 빨리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육신의 약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불가피한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잡아야 할 상태에 대한 진단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페넬롱은 “십자가의 왕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약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압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약합니다.
자신의 어떠함을 깨닫는 것은 매우 큰 유익입니다.
하지만 약함이 인간의 본성과 분리될 수 없는 속성이라고 할지라도 약함을 과장하지 마십시오.
참된 힘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오직 내면으로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비열한 것들을 담대히 경멸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참된 힘의 근원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았기에 로마서 7:25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말합니다. 또 주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과 함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약함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면이 바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밀접하고도 꾸준한 교제와 기도를 통하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과거의 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Clement Clarke Moore와 도시의 산타
많은 사람들이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1779-1863)가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구절을
통해 미국에서 산타 클로스의 대중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권리로 중요한 뉴요커였습니다.
무어는 1779 년 맨해튼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번영 Desobry. 첼시의 CC Moore에 속한 부동산의지도. 1835. 뉴욕시 박물관. 47.294.2
번영 Desobry. 첼시의 CC Moore에 속한 부동산의지도. 1835. 뉴욕시 박물관. 47.294.2
무어는 그의 학문적 추구 외에도 헌신적 인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1813 년에 캐서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으며,
1830 명의 자녀가있었습니다. 캐서린은 15 년에 사망하여 XNUMX 살에서 XNUMX 살 사이의 아이들을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남겨 두었습니다. 그는 그의 딸 자선 엘리자베스 무어에게 쓴“세인트 니콜라스에서”를 포함하여 그의 자녀와 손자를 위해시를 쓰는
것을 즐겼습니다. 시는 박물관의 일부입니다 원고 수집.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세인트 니콜라스에서. ca. 1816-1830. 뉴욕시 박물관. 54.331.4
23 년 1823 월 1837 일에 트로이 센티넬에서 익명으로 '성 니콜라스 방문'(현재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처음으로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1844 년까지 자신의 자녀를 촉구 할 때 출판 된시를 책에 포함시킬 때까지 자신의시를 지었다.
1844 년 무어는 트로이 센티넬 (Troy Sentinel) 출판사 인 N. 터틀 (N. Tuttle)에게이 논문이 출판 한시의
저자에 대해 물었다.
“처음 출판 당시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저자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는 [Orville L.]
Holley 씨로부터이 도시의 상인이었던 Daniel Sackett 씨의 아내 인 Sackett 부인으로부터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두 번 출판되었다 트로이 센티넬; 어린 반 학생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고이 책의 다른쪽에있는 판화를 만들어 여러 판을 출판했습니다.”
Moore는 "Blixom"에서 "Blitzen"으로 순록 중 하나의 이름을 포함하여 Tuttle이 보낸시의 버전을 몇 가지 수정했습니다.
N. Tuttle에서 Clement Clarke Moore에게 보낸 편지. 1844. 뉴욕시 박물관. 54.331.17b
N. 터틀. 세인트 니콜라스 또는 산타 클로스 방문 기록. 뉴욕시 박물관. 54.331.17
무어의 지연된 주장은“성 니콜라스 방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종종 논쟁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뉴요커 인 헨리 리빙스턴 소령의 조상은 20 대 초에 나왔다th 리빙스턴이 실제로 저자라고 주장하는 세기. 분쟁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 있습니다 LINK. 뉴욕시 박물관은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컬렉션에서 찾을 수있는 관련 자료를 제시합니다.
“성 니콜라스의 방문”은 우리가 읽는 법을 배운 이래로 크리스마스 이브에“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큰 소리로 읽은 형제와 저를
포함하여 여러 세대의 어린이들을 기쁘게했습니다. 집에서! 이번 휴가철에 방문객들이“From St. Nicholas”에 똑같이
매료되기를 바랍니다.
Emily Chapin은 박물관 원고 및 Ephemera 보유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감독합니다.
유혹(誘惑)을 물리치려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우리 모두는 새들이 나의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새들이 내 머리털 속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승의 자랑 등 세상의 온갖 유혹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일은 막아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죄성(罪性)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아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세상의 모든 유혹을 다 물리칠 수는 없다.
이는 사도 바울(Apostle Paul)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2-24절)”라고 고백한 데에서 잘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시련과 유혹)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라고 하면서 우리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그 방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믿고 구함으로 그의 능력을 빌려 우리가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 내가 특히 세상의 유혹을 받기 쉬운 약한 곳들이 어디인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길만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실상은 이렇게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이후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나가는 것뿐이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렇게 세상의 온갖 유혹들을 물리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리더로서 나서서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실상은 여기서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히 다수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정치지도자를 하겠다고 나서서 설치고 다니니 말이다.
이것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국민들의 인륜도의(人倫道義)에 대한 의식수준을 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정신문화개혁운동이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현 대통령조차 이런 사명감이 전혀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이제는 양식 있는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님의 스토리 • 18시간 • 17분 읽음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올해는 기독교 한국 선교 140주년 되는 해. 한국 개신교계는 188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독교는 140년 동안 종교를 넘어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초석이 됐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모습을 정리했다.
1.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교육기관 설립
1885년 초기 배재학당 교사.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다. 동아일보DB
개신교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발을 디딘 미국 북장로회와 미국 북감리회는 선교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각 언더우드 학당과 배재학당을 설립했는데 뒤를 이어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 캐나다 장로회 등은 물론 성공회, 구세군 등 군소교파까지도 학교 설립을 선교의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에 문을 연 배재학당(남학교)은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가 됐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여학교인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은 당시 여성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AD
서울에서 미 북장로회가 주도한 교육사업 중 가장 큰 성과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의 설립. 1912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고 미국 독지가 스팀슨 등의 기부금으로 현재의 신촌 캠퍼스 부지를 마련했다. 1917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의전과의 통합을 거쳐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2.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의 산실
기독교가 이 땅의 여성 문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기본적 인권 회복에 끼친 영향은 실로 혁명적로, 한국 근대 여성운동은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평등사상은 기독교에 앞서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하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과 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개신교 선교와 함께였다. 복음이 전파된 뒤 감리교에서는 전득삼이, 장로교에서는 한씨 부인이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던 당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여성들은 예수 앞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갇혀 살던 규방 생활에서 나와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예배 참석은 여성 교육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3. 항일과 독립운동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
100여 년 전 이 땅에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6년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가 충남 공주에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 1914년 12세의 나이로 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2년여를 수학한 뒤 엘리스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1919년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은 유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된 거사다. 그 구심점은 동경의 조선 YMCA였고 이 때문에 선언 장소도 YMCA였다. 이후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계 학교와 학생들이 차지한 비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 등 기독교계 학생들은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과는 별개로 기독교 학교 학생연합체가 주도하는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서울 숭동교회를 회합 장소로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구체적인 단계까지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 계획을 알고 이에 합류하게 된다.
4. 개화의 산실이 된 기독교
1885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내에 처음 도착한 인천 제물포항 자리에 세워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동아일보DB
선교사들은 수백 년간 내려온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풍속을 개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선교를 위해 지방을 다니던 한 선교사는 “내가 시골 농가에 가서 보니 방 안에 더러운 흙만 붙이고 종이로 도배하지 아니하고, 또 방을 쓸지도 아니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농부의 집은 정결하게 하면 못 쓰는 게 풍속이다’라고 했다”라며 당시 농촌 실정을 지적했다. 또 “병이 들어 치료하고 약을 쓰는 데도 위생 등 이치는 상관하지 않고 자기 풍속만 지키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인식은 이 땅에서 미신, 아편 등을 몰아내고 허례허식에 물든 관혼상제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5. 술, 담배, 아편과의 전쟁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 장로교회와 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기도 했다.
금주· 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의 금주· 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됐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6. 근대 의료기관의 확대
2019년 복원된 보구녀관 전경. 동아일보DB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교육과 의료 부문부터 시작됐다.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신의 치료에 힘쓰고 무지를 계몽해 새로운 세계를 밝혀주는 게 선교의 첩경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정부의 포교 금지 정책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설립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병원은 학교에 비해 남녀노소, 신분에 차이 없이 누구나 이용하고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교의 큰 수단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다. 1904년 9월 설립된 이 병원은 설립 기금 1만 달러를 헌금한 루이스 세브란스의 이름을 땄는데 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 인가를 받고, 194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했다.1887년 10월 문을 연 보구녀관(普救女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 기관이다. 보구녀관은 ‘모든 여성을 위한 병원’이란 뜻으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를 비롯한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진료에 나섰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으로 보구녀관은 진료 외에 의료 선교와 의학교육, 간호교육에도 매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 김마르다를 배출했다.
7. 우상과 미신의 타파
초기 선교사들에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미신과 우상 신봉 문화는 그 고유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바꿔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알렌은 ‘한국의 풍습, 무당’이란 글에서 당시 미신과 관련된 모습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울의 밤은 매우 조용한데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 중 하나가 무당이 내는 소리다. 무당의 말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사용하는 도구는 장구, 심벌, 구리 막대기, 징, 바구니, 우산, 부채, 인형 등이며 이 중 바구니는 콜레라에 걸린 사람의 몸에 쥐가 있다고 믿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긁는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무당은 사용하는 도구나 인형 등을 결정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의 일상이 돼 버린 우상과 미신을 보면서 이런 현실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런 일 역시 교육이나 의료 활동을 통해 점차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이의 타파를 계몽하고자 했다.
8. 노비와 백정의 해방
계급 타파와 평등의 이상 실현에서 교회의 백정(白丁) 해방운동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없다. 이들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가장 비천한 하층 구성원이었다. 비록 갑오경장(1894년)으로 제도상 신분적 평등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 관심을 보인 것은 1895년 4월이었는데 서울 곤당골 장로교회(승동교회) 무어 선교사(1860∼1906)는 조정에 보낸 진정서를 통해 백정들의 가련한 상태를 낱낱이 알리면서 비인도적인 천대를 막아달라고 건의했다. 이런 노력으로 같은 해 5월 전국에 백정에 대한 신분 해방과 갓 착용 허용을 알리는 방이 붙었고 승동교회에는 6명의 백정이 입교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백정이었던 사람이 양반 신자들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 장로교 선교활동으로 전국에서 입교한 교인이 200여 명에 불과하던 시절에 6명이나 되는 백정의 입교는 그 자체로 큰 진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회의록이나 문서 등에 이런 백정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식은 이후 실질적인 신분 타파 사회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됐다.
9. 한글의 보급과 재발견
선교사들은 한글을 보급하고 대중화시키는 데도 힘을 썼다. 교회에서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경을 보급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인 중에 한문으로 성경을 보는 이도 별로 없고, 더구나 국문으로 보는 이도 몇이 못 된다. 금년부터는 주일 오후마다 국문 공부를 착실히 한다 하니 성경의 뜻을 많이 깨닫고 영혼의 양식을 넉넉히 만들기에 유조할 뿐더러 문자상에도 유식한 사람들이 되겠더라’ (1902년 5월 경기 남방지역의 한 교회 통신 중)
교회의 성경을 통한 한글 보급은 결과적으로 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배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부녀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경 보급도 크게 늘었는데 1886년까지 1만5690권이던 성경 보급은 1887년 한 해에만 6600권이, 1892년까지는 57만8000권이 보급됐다. 이런 분위기는 1893년 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담당하는 기구인 대한성교서회 창설로 이어졌다.
10. 출판 문화의 보급1885년 한국지부를 설치한 대영 성서공회가 1936년까지 이 땅에서 출판한 성경은 무려 1807만9466권에 이른다. 전체 국민이 2000만 명 남짓하던 시대에 성경 출판 1800만 권이란 숫자는 기독교가 이 땅의 출판문화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선교에서 출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1885년 아펜젤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을 파견한 미 북감리교 선교부였다. 북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에서의 출판 사업을 위해 1887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 목사(1845∼1919)를 파견했다. 그는 영어, 한문, 한국어를 인쇄하는 삼문출판소를 설립하고 기독교문서협회도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됐다. 1892년 그가 월간지로 간행한 ‘Korean Repository(한국 지식·정보 보관소)’는 당시 한국 사정을 과학적·문헌적으로 제공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이기도 했다.
올링거 목사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서적 출판의 역사는 이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로 이어졌고, 이후 국내외 종교인들과 신자들이 각종 출판사를 설립하고 서적을 출간하며 기독교를 넘어 한국 출판문화로 성장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어려운 이와 함께 한 140년
11. 사회복지 사업의 초석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 전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지역과 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한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이다. 이런 활동은 개화기,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엘림복지타운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은 1984년 21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000여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줬다. 대상 국가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등으로 확대됐고 특히 지난해 7월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용사의 손자 테카렌 메릿 베주아엣(7세) 어린이를 포함해 5명의 어린이가 무사히 수술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 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은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 약 6만6000㎡(2만여 평)의 부지에서 500여 명의 불우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직업 교육을 제공하고 200여 명의 무의탁 노인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복지시설이었다. 1988년 경로원과 직업전문학교로 시작한 엘림복지타운은 1994년 선교원, 1997년 요양원을 개원했다.
12. 시민운동의 산실이 되다
2012년 2월 굿피플 지원으로 주택 70가구와 정화조 7개가 준공된 필리핀 마니바악 마을을 이영훈 목사(가운데)와 굿피플 관계자들이 걷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한국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는 일제강점기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선, 오래된 시민단체 중 하나.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시민단체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인 1903년 영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들여왔는데 당시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리며 개신교와 서양 문화 유입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단체를 통해 이 땅에 야구, 농구, 배구, 수영이 들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1910∼1912년 YMCA 간사로 재직하며 교회 설교, 성경연구반 인도, 전국적인 YMCA망 구축, 번역 사업 등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YMCA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정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부마민주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 자문을 맡기도 했다. YMCA가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시절에도 재야 운동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YMCA가 외국인 선교사와 사제들이 활동하는 국제단체라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백한 기독교 단체기에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흔히 덮어씌웠던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13. 새 나라의 기틀을 만들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첫 국회인 ‘제헌 국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개회됐다. 옛 중앙청 회의실에서 198명의 의원이 참석했는데 당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의 이 일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사인 이윤영 의원의 기도가 이어졌다.
우리나라 첫 헌법인 제헌헌법에 예수 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사상이 반영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4.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가 되다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애초부터 양립 불가능한 관계였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는 6·25전쟁 당시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60여 명의 전 교인이 신앙과 자유를 지키려다 인민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는 이런 역사의 산증인. 야월교회는 광주·목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 선교사(1868∼1925)가 1908년 설립한 곳으로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턴 선교사는 인요한(존 린턴)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조부이기도 하다. 인근 염산교회도 전쟁 당시 77명의 교인이 순교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염산교회를 이끈 김방호 목사는 교인들이 피란을 권했으나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를 두고 다른 곳에 가느냐”라며 남아 있다가 변을 당했다.
이런 사례는 전쟁 당시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이 벌어졌는데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라는 인민군의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념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15.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희망’을 일깨운 지도자들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은 한국 교회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전쟁 후 폐허가 된 극빈국 대한민국 국민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일으켜 세운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958년 서울의 변두리인 은평구 대조동 깨밭에서 천막 교회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2년에 이르러 성도 수 7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
조용기 목사는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나에게도 큰 힘이 됐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힘이 국민적 용기와 희망으로 승화해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고, 오늘 선진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지난해 7월 ‘제13회 인구의 날’ 기념식에서 저출생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이영훈 담임목사(오른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대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가 부임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희망의 목회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성도들에게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랑 실천과 봉사의 가치를 강조하는 성숙의 길로 나아갔다. 이 또한 갈등과 경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6.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202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해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진행한 ‘한국교회의 한국 사회 기여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해방 전은 ‘항일 민족 운동(85%)’, 해방 후는 ‘민주화운동(57%)’을 가장 큰 기여로 꼽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가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큰데 그 상징 중 하나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국기독교회관이다.
1970년 1월 문을 연 한국기독교회관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불리던 재야 운동 세력의 구심지. 1970년대 초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기독교학생총연합,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등의 단체들과 진보적 성향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곳에 입주해 민청학련사건 구속자들의 석방 운동과 목요기도회 등을 전개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 구국 선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가 투신자살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
17. 통일을 꿈꾸며 북한 지원에 나서다
2023년 11월 평화통일연대가 주최한 ‘한국교회 초청 화해와 평화, 평화통일을 위한 포럼’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북한 지원 규모는 국내 대북 민간 지원단체 지원 총액의 7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남북 평화 구축의 조성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평양 봉수교회에서 평양심장병원 착공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양 심장병원 건립 추진은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남북통일이라는 더 큰 꿈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걸음이다. 1984년부터 국내에서 심장병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온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의 심장병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2007년 12월 평양 중심부에 3만3000㎡ 규모의 심장병 치료 전문 종합병원을 착공했다.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이 병원은 안타깝게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공사도 중단된 상태. 남북한 민간 교류의 상징이었던 평양심장병원은 현재 7층 건물의 골조 공사만 끝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남북 관계가 회복돼 병원이 완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병원이 완공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와 함께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역할 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8.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와 교회 역사는 국가와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선 희생과 봉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이태원 참사, 지진과 산불 등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지원금을 보내고, 직접 사고 현장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10억 원의 긴급 구호헌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한 것은 그 작은 예 중 하나. 구호헌금은 경북 의성군, 안동시·청송군·영양군·영덕군을 비롯해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울주군 등 산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을 위해 사용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20년 코로나19 대구·경북 지역 확산 당시에도, 2023년 튀르키예 대지진과 이태원 참사 때도 각각 10억 원을 지원했다.
19.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한국 기독교계의 해외 선교와 봉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만든 국제구호 NGO ‘굿피플’이다.
대사회적 구제 사업을 더 전문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1999년 7월 설립된 ‘굿피플’은 2005년 파키스탄 지진, 2008년 미얀마 사이클론 재해, 2011년 일본 대지진, 2023년 시리아 강진 등이 발생했을 때마다 긴급 구호단을 파견해 재난 구조와 인명 구조, 의료봉사 등 사업을 전개해 왔다.
굿피플의 해외 지원 사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개됐는데 보건소 건축 및 운영, 보건의료 전문 인력 양성, 건강검진 및 의약품 지원 등 보건 분야에만 무려 156만700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아동센터 건립,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과 급식 지원, 전문교육 커리큘럼 구축을 통해서는 9만9800여 명이 도움을 받았고, 우물 등 정수 센터와 정수시설, 상수도, 화장실 설치 등으로 5만5400여 명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
20. 저출생 극복으로 미래를 세우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국가와 미래세대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는 활동은 ‘저출생 극복’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12년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매년 출산장려금 지원을 시작했다. 결혼격려금, 미혼모 자립 지원 등 지금까지 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지원한 금액은 800억 원이 넘는다. 정부 기관도 아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에 앞장서는 이유는 국민이 없으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 이영훈 목사는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2명대에서 1명대로 급격히 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국민이 사라져 국가가 소멸하는 날이 오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라며 “저출생 문제 해결은 국가는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법(율법, 토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전체로, 인간의 바른 삶과 행위를 인도하는 기준이며, 하나님 백성의 삶의 지침이자 창조 질서를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법칙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생명'에 관한 내용이며, 이를 통해 사람은 의롭게 되고 지혜를 얻으며 복을 받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주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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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구약의 토라(Torah)에서부터 신약의 새 언약까지 포함하며,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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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함: 인간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고, 의로움의 궁극적인 표준을 제시하는 완전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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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인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험한 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돕는 기준점이며, 영혼을 소성케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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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안식일 규례처럼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이 되며,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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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완성되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법으로 주어졌습니다.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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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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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구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지만, 따르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근거가 됩니다.
요약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는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창조주가 주신 사랑과 생명의 선물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누리는 기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법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儀式法)과 재판법으로 구성되어 있다.95)
도덕법(moral laws)
도덕법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도덕법은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십계명의 구분에 대하여, 역사상 몇 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2을 제1계명으로,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2계명으로 보았다.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는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우리의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9계명으로, ‘네 이웃의 아내 등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10계명으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우리의 구분대로 구분한다.
십계명에 대한 간략한 해석
십계명의 해석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9문답에 잘 진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즉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보인다. ② 같은 종류의 죄들을 대표적으로 간결히 표현하였다. 십계명은 도덕법 전반의 요약이다. ③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금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④ 행위 뿐만 아니라, 또한 생각과 마음에도 적용된다. 율법은 영적이다(롬 7:14).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1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물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우상을 인정하는 모든 생각을 정죄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리아와 성인들과 천사들에게 기도하고 종교적 경의를 표하게 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정죄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형상화하는 것은 큰 오류요 죄악이다.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것도 비록 그것이 제2계명을 어기는 죄는 아닐지라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예배당 안 강단 뒷벽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3계명은 우리가 일상 생활이나 종교 의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망녕되이’라는 말은 ‘헛되이, 함부로, 무의미하게’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와 기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구절을 농담거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큰 죄이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제4계명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에 대해 명령한다. 구약시대에는 한 주간 가운데 제7일을 안식일로 성별하여 지키라고 명령되었다.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미리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야 했다(출 16:2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나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출 31:14, 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낼 때 안식일에 나무가지를 줍던 한 사람은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 계명이 문자 그대로 유효한가?’라는 문제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도덕법인가 의식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루터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을 도덕적 교훈을 가진 의식법으로 보았다.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儀式的) 부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식적 집회와 휴식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열심히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독교강요, 2. 8. 28, 31-34).
1618-19년 화란에서 열린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9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하여 “. . .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구별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도 시대에 이미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집회의 날이 되었다. 주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그 다음 주일에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27). 성령께서는 주일에 처음으로 제자들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2:1-4).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날은 주일이었다(계 1:10). 드로아의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떡을 떼며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 주일 정기적으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 2).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증거했다.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고 썼다(15). 익나시우스는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9). 순교자 저스틴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트리포와의 대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모범과 장로교회의 예배 모범대로 주일에 온 가족이 세속적 직업의 일들을 중단하고 매매(賣買)를 금하며 오락을 금해야 할 것이다(느 13:15-22; 사 58:13, 14). 신약 성도들은 복음적 자유를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구약 성도보다 못하게가 아니고 더 풍성한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친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물론, 또한 노인과 청년,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피고용인, 정부와 국민의 관계 등 연령적, 지위적 상하 관계에도 적용된다.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베드로전서 2: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6계명은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결투, 폭동,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의 모든 살인 행위를 금한다. 출애굽기 21:22- 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또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요일 3:15).
그러나 사형, 정당 방위, 정당한 전쟁, 동물의 살해 등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은 사람의 순결성 곧 정조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모든 성 행위는 간음이다. 또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으로 정죄된다(마 5:28). 또한 간음의 이유 외의 이혼와 중혼(마 5:32), 근친 상간, 동성애 등의 모든 부당한 성적 탈선 행위를 정죄한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은 사유 재산의 권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절도, 강도 뿐만 아니라, 또한 사기, 횡령, 과분한 빚, 땅이나 집 등의 계약 위반, 거짓된 저울과 되, 투기, 고리 대금 등의 부정당한 경제 활동을 금한다.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시편 15:5, “변리로 대금치[고리대금하지] 아니하며.”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거짓된 비난, 중상 모략, 위증, 불공정한 판결, 아첨, 과장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금한다. 출애굽기 23:1-3,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기타 소유물을 탐내지 말지니라.”
제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의 죄의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탐심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더 가지려는 욕심은 그 여러 죄들의 뿌리이다. 야고보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했다. 모든 불평과 불만, 색욕이나 부정한 욕망, 그리고 물질로 인한 지나친 근심 등도 탐심의 결과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말한다(골 3:5).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결국 물질이나 육신의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이다. 성도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 처지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도덕법의 목적
도덕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도덕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둘째, 도덕법은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준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도덕법은 마치 거울과 같다. 셋째, 도덕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παιδαgωgός, 교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도덕법의 영속성
도덕법은 영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았다. 성화의 목표는 의(義)와 거룩, 즉 죄 없는 성결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구원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유익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마태복음 5:17, 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5, 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법은 모든 사람들, 즉 다른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도, 영원히 그것을 순종할 의무 아래 두는데; 그것은 단지 그것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또한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해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이 의무를 해제하지 않으시고, 크게 강화하신다.
비록 참신자들이 행위언약으로서의 법 아래 있어서, 그것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활의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줌으로, 그들이 그에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며 속박하고; 또한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의 죄악된 부패성들을 드러냄으로, 그들이 그로 인해 자신들을 살펴 죄를 더 깨달으며, 죄 때문에 겸손해지며,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순종의 완전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중생한 자들이 그들의 부패성들을 제어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금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의 경고들은, 비록 그들이 법 안에 경고된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죄들도 마땅히 무엇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것들 때문에 어떤 고난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것의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그것을 행한 경우에, 비록 행위언약으로서의 법에 의해 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어떤 복들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법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그가 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다.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s)
둘째로, 의식법은 할례, 성막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십일조 등에 대한 법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의식법들의 한 부분은 예배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들을 예표한다. 예를 들어, 성막제도에서 번제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물두멍은 그의 성결함을, 떡상은 그가 생명의 떡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예표한다. 제사들에서 번제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사역을, 소제는 그가 자신을 즐거이 드리심을, 화목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심을,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의 속죄사역을 예표한다.
절기들에서 안식일은 그가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셨음을, 유월절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맥추절은 그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맺힘을, 나팔절은 그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파함을, 속죄일은 그의 십자가 단번 속죄의 사역을, 수장절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을, 안식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참안식을, 희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만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도덕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죄 씻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법은 또한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의식법들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소득의 십일조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헌금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을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특히 신약 히브리서는 의식법의 폐지, 더 정확히 말해, 율법제도의 폐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 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97)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10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들이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판법(judicial laws)
셋째로, 재판법은 신정(神政)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 생활에 관한 법들이다. 출애굽기 21:1의 ‘율례’라는 원어(미슈파팀)는 ‘판단들’이라는 뜻으로 재판법을 의미한다. 재판법의 한 예는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죽이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구약의 어떤 법이 도덕법에 속하는지, 재판법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구약의 어떤 법이 신약에서 인정되거나 혹은 그 이유가 영구적이면 신약에서도 유효한 도덕법이라고 보고 그 외에는 재판법으로 볼 수 있다(박형룡, 인간론, 312쪽).
구약의 재판법들은 신약 아래서 역시 폐지되었다. 신정 국가에서 사용되었던 법들은 오늘날 세속 사회들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4, “또한 한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재판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끝났고,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것들의 일반적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도덕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한다. 자범죄는 도덕법을 어긴 죄들이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그것들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죄, 하나님을 첫째로,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지 않은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사람을 죽이는 죄,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범죄들,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죄, 거짓말 하는 죄, 남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품는 죄 등이다.
성경에서 도덕적 죄들을 열거한 대표적 두 구절을 들어보자. 로마서 1:29-31, “곧 모든 불의, 음란(전통사본),98)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사본)99) 무자비한 자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100)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101)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의 법
'죄의 법'은 주로 성경, 특히 바울 서신(로마서)에서 사용되는 용어
인간 내면에 있어 선을 행하려 해도 악을 행하게 만들고 결국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 또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과 대조되며, 율법 자체를 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율법을 통해 죄를 더욱 드러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주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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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싸움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내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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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권세 : 죄의 법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이어지며,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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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의 관계 : 율법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그 죄의 실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때 '죄의 법'처럼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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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성령의 법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생명의 법을 따르도록 이끄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주어집니다.
요약
'죄의 법'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죄의 세력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원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이 법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 롬 7:23 야누스의 두 얼굴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을 상징하는 두개의 얼굴
야누스는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는 두 얼굴이나 머리가 있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가 많다. 거짓과 진실 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을 지칭할 때,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녔다고 우리는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정확한 의미는 없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내 안에 선한 “나”이고 또 하나는 악한 “나”입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합니다. 페르소나는 영어의 퍼슨(person), 즉 사람입니다. 사람은 가면을 쓴 동물입니다.
왜냐하면 지성과 감성을 가진 인성으로서 영장류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된 타고난 배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변신하고 저렇게도 변신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 방어 그리고 쟁취를 하고자 하는 이 세대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persona의 어원을 성경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7)라고 하여 인간의 이미지를 말합니다.하나님의 의도적이고 특별한 계획에 의해 "헬라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 히브리어로 "쩰렘 엘로힘"(צלם אלהים)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시작하여, 생육하라는 명령, 그리고 인간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시며 구원과 재림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또한 이 말은 어원적으로는 가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두 얼굴,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그
얼굴이며, 다른 또 하나의 내 안에 악한 나는 세상적으로 찌들고 휩싸이고 갖은 추악한 내면을 가진 나의 또 다른 변신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나중에 참고하기 바랍니다. 참고로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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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인간.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낮에는 보험국 관리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소설가의 삶을 살았다.
변신의
작가 카프카는 "프라하와 자신의 답답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했건만 결국 떠나지 못한 사람, 세 번이나 약혼했으나 평생
독신이었다가 마흔한 살 생일을 앞두고 결핵으로 죽은 사람, 문학에 유례없을 만큼 모든 것을 걸었으면서도 작품을 불사르게 하고
나머지도 없애라고 유언을 하고 간 작가, 또한 그 작품에 대하여 무수한 해설서가 있어도 불가해하기만 한 작가"라고 정의했다.
'변신'은
1915년에 출간됐다. 카프카가 32세였을 때다. 길지 않은 글인데도 읽는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는,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물음표와 느낌표가 무수히 떠다녔다.
참고로 이 책은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학생들에게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에 선정된 소설이며 이후 많은 작가들의 테마 주제로 인용된 글이다.
돈 못 벌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세상
내용 자체는 단순하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 떠 보니 자신이 흉측하고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이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출근하지 않자, 직장에서 매니저가 집으로 찾아온다. 매니저와 가족들은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발견한다. 놀란 매니저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가 버리고,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한동안 가족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슬퍼하며 그레고르의 방도 청소해주고, 먹을 것도 챙겨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심지어 훼방을 놓기까지 하는 그를 그저 성가신 존재로 여긴다.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거나 이 집을 나가버렸으면 하고 은근히 바란다. 그 사실을 알아챈 그레고르는 어느 날 먼지와 쓰레기들로 가득한
자신의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가족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며 소설은 끝이 난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의 문장과 행간 속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 그는
무엇을 의미할까. 일할 능력을 잃은 사람, 가족에게 물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을 굳이 벌레로 그린 건, 물질 만능
사회 속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말하려는 의도 아니었을까.
'이
얼마나 고요한 생활을 식구들은 영위하고 있는가' 하고 말하며 그레고르는 자기 앞의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스스로가 부모와
누이에게 그러한 삶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데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이
졸지에 충격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떨까? (33쪽)
그러니 이제 어쩌면,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힘이 들 만큼 호흡이
가빠져서 하루 건너 열린 창가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는, 천식으로 고생하는, 늙은 어머니가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열일곱
살에다 아직 어린아이이고 지금까지의 사는 방식이라곤 예쁘장하게 옷 입고, 실컷 자고, 살림을 조금 돕고, 몇 가지 소박한 오락이
끼이고, 무엇보다 바이올린이나 켜는 것이 고작이었던 누이동생이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이야기가 이 돈을 벌어야 할 필연성에 미치면, 우선 언제나 그레고르는 문을 떠나 문 곁에 놓인 서늘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41쪽)
아빠는 왜 새우처럼 자야만 했을까
예전에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레고르의 아버지, 그리고 그레고르에게 느꼈던 감정은 조소에 가까웠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돈 벌어다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양 식구들을 자기 아랫사람 대하듯 무시하는 소설 속 두 인물의 모습이
이 시대의 아버지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시 읽은 지금은 그들에게 조소보다 연민을 더 크게 느낀다. 느닷없이 아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당황스럽게도 코끝이 찡해지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아빠는 평생 몸 쓰는 일만 해왔다.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 늘 거뭇거뭇했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땀을 뻘뻘
흘렸다. 수십 년을 그렇게 일했다.
그렇게
고되게 일하고도 밤에는 편히 누워 자는 법이 없었다. 항상 무슨 고민을 하는 자세로,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높이 받쳐 들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편하게 누워 자라고 몸을 흔들면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 깨서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이내 같은
자세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는 새벽같이 일어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집을 나서곤 했다.
아버지는
완전히 옷을 차려입은 채 자기 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마치 언제나 일할 태세가 되어 있고 여기서도 상사의 명을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그리하여 처음부터 새 옷 티가 안 나던 제복이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온갖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청결함을 잃어,
그레고르는 자주 저녁 내내, 온 사방에 얼룩이 지고 언제나 닦여진 금단추로 빛나는 옷, 그 옷에 감싸여 늙은 잠자 씨가 지극히
불편하게 그러면서도 고요히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57쪽)
무엇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밤에 편히 잠들지도 못하게 하는가. 아빠는 무슨 걱정과 고민이 그리 많았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편히 자지도 못하고 잠결에도 한숨을 쉬었을까.
본인의
몸과 영혼을 갈아 넣어 처자식을 먹여 살린 아빠는 어쩌면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아빠는 정말 처자식만
보고 그 힘든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가슴속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희망 같은 걸 품고 있었을까.
그레고르가
결국 먼지와 쓰레기로 가득한 방에서 쓸쓸히 죽어버린 뒤, 가족들은 새집으로 이사한다. 다소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다.
그리고 부모의 눈에는 아들이 떠나고 하나 남은 자식인 딸이 보인다. 어느새 훌쩍 자라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가 되어버린 딸의
모습이. 나는 이제 슬프게도 그녀의 미래에서 희망 같은 것을 볼 수가 없다.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은 점차 생기를 띠어가는 딸을 보고 거의 동시에 딸이,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로 꽃 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어지며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초리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내외는 이제 딸을 위해 착실한 남자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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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싸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어떻게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우리 속에서 싸우는 두 개의 “나” 때문에
가책과 고통과 무기력속에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해서 우리의 삶이 반드시 승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영원한 화두(명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될 수 있음을
기도하고 확신하여 믿는 믿음 위에서 승리하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2.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자기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지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말해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안 것입니다.
2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롬7:23,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개의 “나”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죄의 법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법입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잘 맞지 않아 항상 투닥 투닥 서로 싸웁니다.
그중에서도
죄의 법이 더 강해서 내 마음의 선한 법을 자주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죄“를 “법”이란 말로 바꿔 쓰고 있습니다.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때 법은 별 것이 아닌데 일단 법을 어기면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은 power를 말하고
지배를 말합니다. 롬7:1절에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여 꼼짝 못하게 하는 power입니다. 힘입니다. 지배력입니다. 그래서 “법”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20절입니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샤칸”,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오는 방문객이 아닙니다. 아예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안 나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과거에 박해자였고 폭행자였는 데, 지금도 죄인중의 괴수다“. 디모데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주후 약 63-4년에 디모데서를 썼습니다.
내일
모레 순교할 바울, 그는 그때 거의 성자였습니다.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자신이
지금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나마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었지만 지금도 죄인이다.
죄인중의 괴수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주 안에서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일컬어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이 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장차 성도들도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3. 우리는 의인이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그럴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구름 밑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선과 함께 악이 있고 우리 속에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것이 reality,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는 이미 거룩해졌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합니다.
그냥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문제는 죄가 우리속에 거할 뿐 우리가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속에 죄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영어 NIV 번역으로 보면 ”It is sin
living in me“. ”내안에 사는 죄“입니다. 죄가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는 아닙니다. 죄는 내 안에
살고 있지만 나는 죄를 가진 존재일 뿐 내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은혜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롬7장에 내 안에 죄가 있다고 3번 말했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이란 말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는 자는 ”현실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본성적 나“가 또 있습니다. 그 ”나“는 죄와 상관없습니다. 17절 봅니다.
롬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죄속에 거하는
“나”와 죄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나”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나는 죄를 짓기 원치 않습니다.
19절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현실적인 나는 죄와 함께
삽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나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합니다. 현실적인 내가 죄를 짓는다고 본래적인 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나를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본래적인 나를 성경은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옛사람, 곧 죄가 거하는 우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이 생겼는 데 그것이 본질적인 “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이 롬7장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려는 “나”입니다. 본래 죄의 지배를 받던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께끗해지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롬5:19을
보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아담 이래 우리를 지배했던 옛
본성이 죽고 새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고전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죄를 다 없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들이고 죄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속에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은 맞지만 로마서 어디에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는 단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롬3:21절 이전입니다. 롬3:2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이후” 로마서는 한번도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죄인과 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우리안에 죄가 거하여 우리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일 뿐입니다.
롬3:21절 이후 성경은 예수믿고 달라진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 데 그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 수가 무려 63번이나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입니다. 할렐루야
결론 : 그리스도만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두 개의 내가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절입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와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이지만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잘못입니다. 다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더 사랑합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세 마디 말을 합니다.
첫 번째가 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21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아들이라 불러 달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19절,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시고 종이라 부르소서”. 아들이 아니니 이제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죄를 지었다는 아들에게 옷을 입힙니다. 아들이 아니라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줍니다. 종이라 불러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줍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의 잘못보다 아버지의 자비가 더 컷습니다. 아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아들의 잘못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옷을 입힙니다. 옷은 사람을 입습니다.
사람에게 옷이 필요하지만 옷이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잘못도 덮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맞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로운 본성의 사람과 매일 죄를 짓고 사는 현실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싸워 자주 죄의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괜찮아. 너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이야. 너의 본성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의로워졌고 너는 이미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어. 지금 짓는 죄는 죄의 패잔병이야. 곧 모두 사라질거야. 힘내”. 또 말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서 롬8:1-9절 말씀이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5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말씀이 주는 주님의 질문과 해답은 모두 성경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만나인은 하나님의 법만 가슴에 안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갑니다.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새기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살전 5:16-18 그리고 22절입니다.
죄의 법, 하나님의 법, 은혜의 법(요한복음 21:15-18)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상처입은 영혼
우리의 영적인 존재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가?
죄로 인해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바울만의 고백이겠는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원죄(原罪. Original Sin)라고 말한다.
법이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법 아래 있는 사람은 그 명령에 따른다. 인간은 죄의 법 아래 있어, 그 명령을 따른다. 누구나 죄인이다.
심지어 믿음을 가진 신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들어와 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갈등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 갈등 속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아는가?
그리고 급기야 ‘죄의 법’에 사로잡혀 사망에 이끌리는 것을 경험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딜레마를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다윗이 궁중 옥상을 거닐며,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에 불일 듯 일어난 정욕으로 인해 갈등하지 않았겠는가?
죄는 우리를 포박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이 있다.
1. 현혹(眩惑) 유혹(誘惑)
우리의 생각을 현혹하고 기만하며 속인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뱀은 하와를 꾀일 때, 동산 중앙의 실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실과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시험을 당할 때 우리의 감정은 온통 그것만 보도록
만든다. 정말 그게 절대적으로 좋아 보인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부끄럽고 후회한다.
2. 합리화(合理化)
현실적인 의무나 상황을 빌미로 삼도록 유도한다. 대신에 본질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유도한다. 잠시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은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다 하는데,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급기야,
죄짓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이 들고,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된다.
3. 끈질김
생각을 미혹하고 끈질기게 유혹한다. 서운하고 속상한 일은 자꾸 떠오르고, 아니다 하면서도 섭섭하다. 별것도 아닌데, 자꾸
베베 꼬인 생각이 들고 견디지 못한다. 중독은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면서, 그 쾌감을 느끼던 때가 순식간에 떠올라 참고 참다가
결국 다시 그것을 하게 만든다. 쾌락을 멀리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그 암시를 넌지시 던짐으로써, 유혹하고 또다시 범죄하게 한다.
4. 꼼수
죄는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은밀히 말이다. 그래서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대적함’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갈등할 때, 우리 속에 나타난다. 히스기야가 죽음의
문턱에 있던 병상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회복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때, 그 안도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졌다.
죄 때문에 우리가 겪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실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자유한 마음이 없었다.
가인은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악한 일을 계획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해야 하는 이에게는 은총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불행을 겪는 것이다.
2. 선한 양심의 격동
양심의 가책은 우리를 짓누른다.
죄악된 행위에 짓눌린 고통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편 32:3-4)
3. 죄책감의 무게
경미한 죄들 때문에 일어나는
영적인 상태가 있다.
세상의 것을 쟁취해놓고서도 만족함을 모르고 기쁨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게 모르게 짓는 작은 죄들이
자기를 두르고 덮을 때, 영혼과 심령을 무디고 메마르게 만든다. 솔로몬을 보라. 그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가장 화려한 번영을
누렸던 왕 중 하나다. 열왕기상11:3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이미 만족함을 모르게 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만큼 공허한 사람이 없다.
솔로몬의 것으로 전해지는 표제어가 붙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보았으랴?”(전2:25), 이 말의 결론에 붙은 말이 이것이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2:26)
4.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그 세계가 어디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죄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무지하고
부인하고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돈만을 좋아하고, 세상 것만 탐하며, 주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다. 부자가 음부에 들어갔다.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거지였던 나사로에게 손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그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거절되자, 그렇다면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리게 해달라고 한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들이, 설령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현세의 탐심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율법의 역할, 은혜의 법 역할
이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 역할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죄를 깨닫게 되고, 마음으로 그 법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 있는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무력화시킨다.
왜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 못할까?
이상하지 않은가?
당연히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모든 역사와 교회사를 봐도, 하나님이 법이 죄의 법을 이긴 역사가 없다.
구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울은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는 하나님의 법으로 죄의 법을 이기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의 법을 영영히 이길 수 없는 것인가?
기억하라.
그 역할은 거기까지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데까지다. 딱 거기까지다. 율법으로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거기까지인 율법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붙들려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다.
은혜의 법이 있다.
하나님 사랑의 법이다.
은혜의 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직도 죄의 법 아래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 오늘 이 복음의 소식을 들으시기 바란다. 복음을 경험하라. 확실하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당하고, 번번이 실패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시켜준다.
성령충만해야 한다.
믿음충만해야 한다.
은혜충만해야 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0)
성령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라.
은혜의 법에 복종하고 순종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기쁨과 평화를 느낀다.
이 시간 그 주님을 영접하라.
지금 여기에 찾아와 계시다.
여러분 심령 가운데 모셔들이기를 원하신다.
믿음으로 영접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만약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그는 평생을 배신자요, 비겁자로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일을 평생 자기 상처로 안고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너 왜 그랬니? 다시는 안그럴꺼니?” 묻지 않으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지, 물으셨다.
전자는 ‘또다시 죄를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후자는 은혜의 법에 복종하느냐의 문제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해서 찾아오셨고, 평생 그 고통 속에
내버려둘 수 없어 찾아오셔서, 회복시켜주셨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복되기를 원하신다.
은혜주시기를 원하신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했으니, 믿음으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 믿음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동일한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게 회복과 치유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부터라도 주변에서 도와, 심신과 영혼이 건강하길 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가 했던 경험을 동일하게 하길 원하신다.
용서받는 경험, 죄가 사해지는 경험, 주님을
사랑하며 회복되는 경험 말이다.
죄에서 자유하며,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목적을 분리시킨다.
무슨 말인가?
죄를 지어도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선에
대한 노력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암시다.
은혜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거룩해지고 성결하고,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이것을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바울은 거듭난 자였다.
그런데 고민이 있었다.
거듭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칭의를 얻어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달라지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검토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서 4개의 법칙들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 '내 마음의 법',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들이 상호 어떤 관련을 맺으며 돌아가는지를 정리한다.
그래서 이것들이 모두가 다 항상 동일한 값을 나타낸다고는 것을 착안하고는
이 네 가지 법을 정리한 후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죄를 짓지 아니하고 죄된 본성에서 해방되며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사람이 4가지 법들 중에 최고 상위의 법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할 때 과연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4가지 법을 살펴보고 이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왜 또다시 죄를 지으며,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또다시 죄를 짓고 죄된 본성을 따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의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면, 죄의 법이 이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보다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가 더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를 따라가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사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한 채 악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칭의라는 것이 사람을 온전히 바꾸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일은 외적인 신분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일 뿐 아직 내면은 변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달라진 삶을 살려면 외적인 신분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속 성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성분의 변화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적인 성분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2가지 법칙을 제안하였다. 하나는 여김의 법칙이다.
내가 칭의를 받았으나 아직 내면의 변화는 겪지 않았으니, 자신의 내면에 속한 영역의 하나인 혼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채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혼이 죽어버린다면 결코 화를 낼
수도 없고 음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펴보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
몸도 함께 죽은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이후 자아 곧 자기의 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여길 때에 비로소 자아가 죽음에 넘겨지게 되어 더 이상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드림의 법칙이다. 이제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따르는 자아가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자신의 몸인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 받을 지위와 신분
그리고 상을 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드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이 비록
자아가 죽었지만 여전히 죄된 본성에 빠져 헤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여김의 법칙과 드림의 법칙만으로는 사람이
죄된 본성을 이기기가 어렵고,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마음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게 해주는 어떤 또 다른 것이 필욯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4가지 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4가지 법칙은 무엇인가? 여기서 '법칙'이라 함은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연적인 불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항상 답이 일정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법칙이라는 뜻은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살아보면 그렇게 결론이 남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네 가지 법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자신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또한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자기의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작동하면, 자신의 마음이 그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죄의 법'을 따라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죄의 법'이 사람의 '마음의 법'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데 사람 속에는 또 하나의 법이 더 존재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는 최고의 법으로서 아무리 강한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한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언제 어디서나 죄와 사망의 법을 항상 이기게 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죄의 법'이라 함은
사람의 육체 속에 는 영적인 존재들 곧 뱀들과 귀신들이 주장하는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서 한 번 죄의 법이 작동하면
사람은 반드시 죄를 짓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죄의 법을 이기려면 더 강력한 상위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죄와 사망을 이기기 때문이다. 이것의
예표가 바로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부활생명이 사망을 항상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4가지 법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였다.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나를 주장하면 나도 그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법이 나를
주장할 때에는 즉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면 죄와 사망이라도 성령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죄와 사망을 인격화시키면 그것은 곧 귀신들과 뱀들이다. 그러므로 죄의 법으로 역사하고 있는 뱀들과 귀신들이 아무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가려고 한다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버리면 죄와 사망을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기는 원하나 악을 행하고 있는 '내 속 내 육신 속에 있는 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게 되는가? 그것은 선을 행하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자 선의 법인 율법을 성취하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기를 원했어도 결국
악을 행하고 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분명 왜 자신은 선을 행하지 못한 채 악을 행하게
되는지를 깊이 묵상한 후,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속 곧 자신의 육신의 속에 거주하는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롬7:17,18~20). 그러므로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육신 속에 거주하는 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와 예수님의 말씀을 합쳤을 때에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람 속에 거주하는 죄를 가리켜 '자기의 육신 속에 거주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거주하는'는 단어를 먼저 보면 이 단어는 '오이케오'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오이코스'에서 온 말이다. '오이코스'는 '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이케오'라는 단어는 그 뜻이 '집으로 삼다. 집에
살다. 집에 거주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사람의 육체를 자기의 집으로 삼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특수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귀신의 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영)'이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죄란 자기의 집으로 삼고 있는 어떤 공간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사람의 육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사항을 합치면 사람의 육체는 곧 죄가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럼 누가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은
'더러운 영들'이다. 그러므로 죄(Sin)란 결국 '더러운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들 그러므로 죄를 지어
더럽혀진 영적 존재들의 뱀들과 귀신들이 곧 죄의 실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있는가?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한 방법들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될 때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육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에 두는 것이다(롬 8:6).
왜냐하면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는 즉시 자신의 영을 작동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고, 또한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게 되면 즉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성령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의 온 영과 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된 본성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항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려고 할 때 그래서 죄된 본성이 자신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즉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6. 나오며
오늘날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는 원리를 모르는 분들이 아주 많다.
자기의 영 안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주는 영이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분들이 많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 한 번
작동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분이 많지 않다. 그러면 그대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칭의인이 되었지만 실상은 죄를
짓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칭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를 죽음에 넘기고 있는 자라고 반드시
알아야 할 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기 때문이다.그러면 영이 우리 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채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이 더이상 죄된 육체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지체들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언제든지 생각을 영에 두고 영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영을 따라 가지 못하고 오히려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를 따라 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최종적인 성화의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은 자신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악한 영들인 뱀들과 귀신들을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
몸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회개할 때에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오고, 예수님의 피가 자기의 몸 속에
들어오면, 그 피가 더러운 영들을 밖으로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더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인데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직책입니다.
선지자(先知者)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직책입니다.
왕(王)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책입니다.
○ 예수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에게 사죄의 대속, 칭의의 대속, 화친의 대속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과 또 사죄자, 칭의자, 화친자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셨습니다.
1.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생명의 길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어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길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죽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서 생명이 된 것은 이 세상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며, 또한 사망의 길을 걸어서 사망이 된 것도 이 세상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데 주력하고 중심하고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
당면되고 있는 이 일이 자기가 아닌 그 누구의 일이라면 혹 몰라도 이 일은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해당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줄 알고 삽니다. 이렇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쫓아서 영원한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죄의 사망의 법을 쫓아서 영원한 사망이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생명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충만을 자기가 받아서 그 충만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춤만이 전해주는 것이 생명입니다.
이래서 창1:22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셨고
또 엡1:23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셨습니다.
○ 사망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죽고 망하므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이래서 출12:30에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셨고
또 '계20:14에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하셨습니다.
이 생명과 사망을 한 말로 말한다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 가는 것이며,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불태워짐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은 성령의 감화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도록 하는데 곧 바로 이것이 생명이 되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 죄와 사망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사는 것이 죄인데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사는 이것이 곧 바로 사망이 되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대속역사, 예수님의 영으로는 구속역사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율법
'율법'은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을 지킨 그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인도하는 법이 율법입니다.
○ 육신
우리의 '육신'은 원죄와 본죄가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이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는 법칙의 요구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이 율법의
요구인데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으로서 우리가 지킬
계명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 그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예수님을 보내어 '그 육신으로는' 사죄의 대속, 칭의의 대속, 화친의 대속역사를 하셨습니다.
○ 그의 영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의 영으로는'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영'은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으니, '그의 영'은 '예수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곧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대속역사를 하셨고, 예수님의 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서 구속역사를 하셨습니다.
3.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로마서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을 쫓는 자
육신은 마음과 몸이 육신입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또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가 육신을 쫓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들이 똘똘 뭉쳐진 것이 세상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 한 덩어리 된 큰 성 바벨론
바벨탑입니다.
○ 영을 좇는 자
영은 성령을 말하는데 곧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을 쫓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는 자가 영을 쫓는 자이며, 또 예수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죄 없는 자, 의로운 자, 하나님과 화친
된 자로 사는 자가 영을 쫓는 자입니다.
4.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의 생각은 사망
육신의 생각 곧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과 몸으로 된 그 어떤 것이라도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떠나서 이루어진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요? 돈, 권세, 지위. 명예,
배경, 도덕, 사상, 등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으로 산 것의 그 결말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계14:8에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하셨고 또
계18:21에는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하셨습니다.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영의 생각 곧 성령의 감화감동의 인도대로 산 것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으로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또 '평안'은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므로 그에 침해를 받지 않는 것이 평안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마귀의 미혹을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면 그 평안을 침해할 자는 없습니다 또 침해할 권세도 없습니다.
結論
우리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있는 줄 알고 분별하여 조심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의 일과 영의 생각 곧
성령의 감화감동 대로 살아서 생명과 평안에 거하고, 육신의 생각 곧 악한 영 마귀의 미혹대로 살아서 죄를 지어 죄의 삯인 사망에
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떻게 해야 사망의 길을 피하고 어떻게 해야 생명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지를 몰라서 어두운 캄캄한 길을 갈
지(之) 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런 이종교 저런 이종교를 만들었고, 또 이런 사상 저런 주의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쫓아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피와 성령과 진리로 구속받은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두 길을 밝히 알려주셨으니 감사히 받아서 성령의 감화감동의 인도대로 꼭 살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하셨으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의 법칙이며 사망의 길이며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의 법칙이며 생명과 평안의 길이며 생명과 평안입니다. 즉 육신의 생각은 죽는 길이며 영의 생각은 사는 길입니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즐거워하나니(274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 기노스코 - 육적인 앎을 강조
* 에이도 -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
로마서 5:2
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카우카오마이. kauchaŏmai) καυχάομαι
Storng number 2744
1. 자랑하다. 2. 자랑삼아 말하다.
Pronunciation
[ kauchaŏmai ]
Etymology / 디포넌트. 미래 καυχήσο- μαι, 제1부정과거 ἐκαυχησάμην, 완료 κεκαύχημαι, 폐어가 된 어떤 어간과 2172에서 유래
-
1. [자동사] 자랑하다, 뽐내다, 고전1:31, 4:7, 13:3, 고후10:17.
-
2.
[타동사] 자랑하다, 자랑삼아 말하다, 고후10:8, 11:16,30.
관련 성경 / 자랑하다(롬 2:17, 고전 1:31, 약 1:9), 즐거워하다(롬 5:2, 3, 11), 칭찬받다(고후 12:11).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 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작사 : Horatio G. Spafford (호라티오 G. 스패포드, 1828–1888)
작곡 : Philip P. Bliss (필립 P. 블리스, 1838–1876)
이 찬송가는 비극적인 배경에서 탄생한 곡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라티오
스패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재산을 모두 잃고, 얼마
후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보내던 중 배가 침몰해 네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아내만 생존해 “혼자 살아남았다”는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그는 배를 타고 아내에게 가는 길에서 이 찬송의
가사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작곡가 필립 블리스는 스패포드의 시를 곡으로 붙여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찬송가로 만들었습니다.
이 찬송은 고난 중에서도 잃지 않는 믿음과 하나님의 평강을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찬송가 해설
‘내 평생에 가는 길’은 인생 여정이 평탄할 때나 풍랑 가운데 있을 때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쉼을 얻는다는 고백입니다.
2절은 영적 싸움에서 주님이 우리의 대장이심을 선언하며, 3절은 죄 사함의 은혜를, 4절은 마지막 심판날에도 두려움 없는 평안을 노래합니다.
이 찬송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평안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곡입니다.
관련 성경구절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빌립보서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은혜로운 묵상
이 찬송의 감동은 단순히 ‘평안하다’는 고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 그리고 눈물 속에서 오히려 솟아나는 믿음의 평안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때로는 큰 풍파가 몰아치고,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대장이 되어 끝까지 함께 싸우십니다.
설령 마지막 날이 온다 해도, 그분의
보혈로 씻음 받은 우리의 영혼은 두려움 없이 찬양할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垂直的 關係)
내적(內的)
수평적 관계(水平的 關係)
외적(外的)
편안함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평안은 정신적이고 마음적인 상태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편안하다고 해서 마음으로나 영적으로 평안함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육체적으로 편안한 곳은 어쩌면 정신적으로 엄청 힘들 수 있다.
편안함이 평안함을 가져다준다고 보장할 수
없다. 육체적인 편안함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어 마음에 평안함을 앗아간다. 그리고 주거지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곳이라면 생활이 너무 편하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이 정말 평안함을 줄 수 있을까?
넓은 주거지에서 값비싼 침대에 자면 육체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숙면(熟眠)을 통한 평안을 담보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한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함이 있으며
단잠을 잘 수 있고, 육체적인 쉼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W.
Target이 쓴 ‘창’이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이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 말기 환자의 상황이 훨씬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 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그의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밖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언제나 기뻐하기로
마음먹고 아름다운 호수를 상상하면서 기뻐하며 살았다.
그렇다. 편안함과
평안함의 차이가 무엇일까?
‘편안’은 몸과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의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편안함은 주어지는
것이고, 평안함은 내가 취하는 것이다.
환경이 편안하다고 마음까지 평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평안하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편안할 수 있다.
생활이 편안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생활이 편안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쉬운 삶이 아니라 ‘땀 흘리며 수고’하는 근면을 요구하면서 참 평안(샬롬)을 누리며 살 것을 강조한다.
이
평화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죄는 평화를 깨는 주범이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과 깊은 관계가 더할수록 평안함은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환경을 탓하거나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만끽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기원한다.
현대 교회에 편안한 교인들은 많은데 평안한
제자들은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예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되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해야할 일을 하지만 혹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종을 해야할 상황이 되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돌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명령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라.” 이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무엇 때문에
보시려고 하나는 생각으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는 한 말씀으로 살리셨다면 무덤의 돌도 말씀으로 옮기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돌을 옮기는 게 더
쉬웠을텐데 굳이 마르다가 돌을 옮기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편안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함이 내 삶에 있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의 돌을 옮겨 놓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노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옮겨야할 돌입니다.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이렇게 불편하지만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일은 예수님께 맡기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돌을
옮겨놓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더 이상 핑계대지 마시고, 더 이상 피하지 마시고,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고, 그 불편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알수도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편안과 평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은 불편한 것보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와 선지자는 일순간의 안일과 편안함보다는 역경과 고난 뒤에 도래될 참된 ‘평안’을 내다보고 그것을 준비했다.
‘편안’과 ‘평안’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나 실상 그 의미가 다르다. ‘편안’은 외부환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상태지만,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푹신한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면 결단코 평안한
상태가 될 수 없다. 반면 힘든 노동이나 직장일로 몸은 고되지만 그 사람에게 뚜렷한 꿈과 소망이 있어 마음만은 평안하다면,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알려주신 인사법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누가복음 10:5)
세상에는
여러 인사말이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실례합니다” 등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여러 인사말들 가운데 최고의
인사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바로 이웃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평안을 누리도록 깨우치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21)
우리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명예, 지위, 부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며 하나님과의 유대를 중요시 여겼다(로마서 8:5~6).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우리의 생명을 위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해놓으신 것이 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4~15, 19~20)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이날의 만찬은 평소의 만찬과 다른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은 만찬에 놓인 떡을 “나의 살”이라고 하셨고, 만찬에 놓인 포도주를
“나의 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의해 찢기고 흘리실 당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인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이 예식을 성경은 ‘새 언약 유월절’이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이 새 언약 유월절을 선포한 이날은 예수님의 유언의
자리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행한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것은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새 언약 유월절 지키기를 바라셨을까? 성경 『마태복음』, 『로마서』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인류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마태복음 26:28, 로마서 6:23). 인류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 평안과 화목을 위해 세우신 이 절기의 의미를 깨달았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에도 새 언약을 지켰다(고린도전서 5:7~8, 11:23~26).
사람들은 흔히 돈 많은 부자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마음엔 천석꾼, 만석꾼처럼 걱정이 가득하다면 과연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근본 영혼의 평안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한시적인 삶으로 막을 내린다면 그것은 잘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고 해서 슬퍼하고만 있지 말고, 유월절을 기억하여 지켜서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편안과 평안, 어느 것이 진짜 축복인가?
사탄은 속이기 위해서 아주 비슷한 복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유혹한다. 편안과 평안, 어느 것이 진짜 복이고, 어느 것이 가짜 복이겠는가?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
배달해주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살을 빼기 위해서 약도 먹고 수영도 한다, 헬스다, 등산이다 여러 가지 운동을 한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우유배달 같은 힘든 일을 권하고 싶다. 신문배달도 좋겠다. 돈도 벌고, 비만도 해결하고, 잠도 잘 오지 않겠는가?
나는 1986년부터 자가용을 탔다. 10년쯤 타다보니 편리해진 대신 나빠진 것이 많았다. 이전에 걸어서 심방할 때는 다리와 허리가 튼튼해서 등산을 하면 언제나 일등이었다. 그런데 십년 후에는 조금만 심하게 걸어도 다리가 아팠다.
등산을
하면 제일 뒤쳐지게 되었다. 갑자기 체중이 늘고 지방간이 생긴 것이다.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 왔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 불편해질
것이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고,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돈 때문에
평안을 잃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편안함이지, 결코 평안함은 아니다.
필자는
중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중국인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이제 중국에도 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별 것 아닙디다. 담쌓고 철조망
칩디다.” 맞다. 부자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담쌓고, 철조망 치는 일이다.
조금 편안해졌지만, 많이 불안해진
까닭이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요14:27> 다윗도 평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나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무엇보다도 양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이 왜 이렇게 틀리게 말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누워서 잠을 자는 동물이 몇 있기는 하지만, 양은 절대로 눕지를 않는 동물이다. 사자가 누워서 잔다.
그리고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가 누워서 잔다. 그러나 야성을 가진 고양이나 개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 장난하면서 딩굴 수는 있겠지만,
누워서 잠을 자진 않는다. 사자가 누워서 자도 되는 것은 건드릴 짐승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짐승들은 깊은 잠 한 번 자지
못한다. 잠결에 바스락 소리만 나도 우선 뛰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
신다”고 말한 것일까? 그것을 모르고 한 것인가? 아니다. 다윗이 모를 리가 없다. 결코 누울 수 없는 양, 불안해서 깊은 잠 한
번 자지 못하는 양일지라도,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평안하게 누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도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이러한 평안을 줄 수가 있다. 세상은 평안을 줄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다윗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편27:3> 다윗은 사울 왕의 3000의 정예군대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에워 쌓고 있는데도 굴속에서 평안히 잠을 잤다. 한 부하가 ‘어찌 잠이 오느냐’고 묻자, “여호와가 나를 붙드심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평안, 평강, 평화 - Peace (요 14:27)
사전의
의미를 살펴보면 평안平安은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을 말하고 평강平康도 이와 같이 걱정이나 탈이 없음을 말하며
평화平和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평화의 주라는 말은 혼용될 수
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혼용해 사용한다. 원문에서 크게 차이가 없거나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고 100여년이 지난 요사이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평안 보다는 평화일 것이다.
평화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Peace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 (שָׁלוֹם, shalom)’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
eirene)’이며 라틴어로는 ‘팍스 (Pax)’로 사용되었고 각기 사용된 시기나 장소가 다르므로 다른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전에 불리던 복음성가에 내게 강같은 평화(Peace like a river)와 같은 곡이 있었고 뉴스도 연일 평화
회담(peace talk)이 보도된다.
평화란
'고요함의 상태'를 뜻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 파괴와 혼돈이 가득한 상태로 그 한 예로는 전쟁이
있다. 개인 간의 평화는 화합harmony과 일치accord의 상태를 말하며 이것이 개인의 상태에서는 tranquility 즉
평온이나 평정平靜의 상태를 말한다.
평화의 상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평화는
화합과 일치를 만들고 이는 우리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 구약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인사로 삼아 ‘샬롬’을 말해왔고
신약 시대에는 평안히 가라(Go in peace)는 인사를 더하기도 했다. 예수님도 부활 후 이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구약의
전통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바울은 서신서들 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이란 문구로 인사를
하는 것을 쉽게 볼수 있다.
우리에게
근심이 가득한 동안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머물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는 동안에도 평화는 함께하기
힘들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자신의 성공과 부요를 염려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 오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소유하고
있거나 성공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염려가 있는 동안에는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장소에 가더라도 평화가 없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로부터 나오며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주는 평화 수여자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두려움이나 근심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또한 예수의 평화는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평화를 줄수 있는 분으로 먼저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 대개는 앞선 걱정이고 앞선 근심이다. 오늘 누리는 은혜에 감사하고 집중하는 것이 내일 있을 걱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늘에 집중하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예수께서는 믿는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것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를 평화의 수여자로 믿으면 오늘 염려보다 내일 걱정보다 진정한 평화를 얻을수 있다. 당신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가?
"평안"과 "편안"
다윗은 시편 16편 2절에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다.
복은
주 안에만 있다는 말이다.
사탄은 우리가 주 안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아 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가짜로 복을
만들어 우리를 속인다.
그런데 사탄이 얼마나 교묘한지 그 가짜 복이 꼭 진짜 같아 나는 그것을 유사 복이라고도
부른다.
평안과 편안. 둘 중에 하나는 진짜 복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복이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이 진짜 복이고 어떤
것이 가짜 복인 것처럼 보이시는가?
맞다. 평안이 진짜 복이고 편안은 가짜 복 즉 유사 복이다.
편안이 나쁜 것은 아니다.
편안이 축복은
아니다.
편안함만으로는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과 물질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과 물질은
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돈과 물질은 우리에게 편안은 줄 수 있으나 평안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에서 요즘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담 쌓고 철망을 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돈 때문에 좀 편히 살 수는 있게 되었지만 돈 때문에 오히려 불안해져서 담을 쌓고 철망을 치는 것이다.
돈으로
편안을 살 수는 있어도 평안을 살 수는 없다.
평안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평안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는 절대로 불안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어도 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불편한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데 불안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것'은 편안을 말씀 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평안인
것이다.
평안하기를 빌라(마태복음 10:11-13)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에피그노시스의 힘
The Power Of “Epignosis”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귀한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떤 종류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식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에피그노시스(Epignosis)”로,
전문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관계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뜻합니다. 지식의 대상이나 알려진 것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을 지적으로 알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충만하고, 깊고, 정확한 지식입니다. 축구 선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 일부는 놀라운 솜씨로 공을 다룰 수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공과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공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공은 더 이상 가죽 조각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둥근 가죽 공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공의 재료, 크기, 구조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공의 디자인에 숨겨진 과학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공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공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숙련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에피그노시스”는 우리를 숙련자로 만드는 지식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을 하나로 만듭니다. 이는 말씀 묵상을 통해 옵니다. 말씀이 당신에게 개인적인 것이 되고 이론에서 관계로 바뀔 때
옵니다. 말씀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삶에서 은혜와 평강이 배가되게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십시오. 말씀이 정보 그
이상이 되게 하십시오. 말씀이 살아있는 실재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삶은 꽃을 피울 것이고, 당신은 세상에 경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말씀을 통해 나를 하나님을 아는 더 깊고 친밀한 지식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배가된 은혜와 평강 가운데 행하며, 말씀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으로 기능합니다. 내 영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으로 세워지고, 강건해지고, 조정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The “Epignosis” Of The Truth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헬라어: 에피그노시스epignosis)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심판을 피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아 그 진리와 교제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2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는 당신이 말씀으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육체로 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은 말씀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28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당신은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패배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같은 부류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이 계시를 이해한다면 실패나 가난과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기본
진리들입니다.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이 초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 3:7)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의 유업과 정체성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결코 진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공과 승리와 형통과 영광스러운 삶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들어감으로써, 다시 말해 그 진리와 하나 됨으로써, 맴돌기만 하는 삶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부류에 속한
자라는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The “Epignosis” Of The Truth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헬라어:에피그노시스 epignosis)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심판을 피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아 그 진리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뜻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패배당할 수 없다는 뜻 이 계시를 이해한다면 실패나 가난과 같은 것들은 없다.
우리에게 계시된 기본 진리들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이 초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될 것.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 3: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유업과 정체성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 그 결과, 그들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결코 진보하지 못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공과 승리와 형통과 영광스러운 삶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들어감으로써, 그 진리와 하나 됨으로써,
맴돌기만 하는 삶을 깨뜨릴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부류에 속한 자라는 진리의 지식(에피그노시스)에 이르러야 한다.
12월 11일(목) 로마서 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평안(平安)과 편안(便安) - Peace & Comfort
평안 /
- 1. 평평하다
- 2. 나누다
- 3. 바르게 하다
- 4. 평정하다
- 5. 고르다
획수 5획
부수 干(방패간, 3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편안하다
- 2. 편안하게 하다
- 3. 즐기다
- 4. 안으로
- 5. 값이 싸다
획수 6획
부수 宀(갓머리, 3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편안 / 편할 편, 편안할 안
- 1. 편하다
- 2. 똥오줌
- 3. 분뇨(糞尿)
- 4. 편의
- 5. 익히다
획수 9획
부수 亻(사람인변, 2획)
난이도 읽기 7급, 쓰기 6급
평안과 편안
Ειρήνη και άνεση
-
-
a.
[πόλεμος의 반대말] 눅11:21, 14: 32, 행12:20, 24:2, 계6:4.
-
b.
[비유적으로] 평화, 조화, 어우러짐,
마10:34, 눅12: 51, 행7:26, 엡4:3, 히7:2. ㉠ 평화의 길, 롬3:17. ㉡ 평안하게, 히11:31. ㉢
평화하라, 엡2:15. ㉣ 화평하게 하는 자들, 약3:18. ㉤ 평화를 구하다, 갈5:22, 딤후2:22.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히12:14. ㉦ 평안을 추구하다, 롬14:19, 벧전3:11. ㉧ 평화에 관한 것,
눅19:42.
-
c.
질서,《반》ἀκαταστασία, 고전14: 33, [참조] 고전7:15.
-
2.
[히브리어 샬롬과 일치된 뜻으로] 안녕, 복지, 건강,
마10:13, 막5:34, 눅 7:50, 8:48, 10:5, 24:36, 요20:19, 20:26, 행15:33, 16:36,
고전16:11, 약2:16. [주] 새롭고 특징적인 발전으로 헬라의 편지 서두의 인사말인 ‘은혜’가 바울서신 등에서 ‘은혜와
평강’ 이란 인사형식으로 결합된 것이 있다, 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엡1:2, 골1:2, 살전1:1,
딤후1:2, 딛1:4, 몬3, 계1:4.
-
3.
[선지자들에 따르면 평화는 메시아 왕국의 본질적 특성이다.
따라서 기독교 사상은 흔히 평화를 메시아적 구원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요14:27, 16:33, 행10:36, 롬5:1,
10:15, 15:33, 16:20, 고후13:11, 엡2:17, 6:15, 빌4:7,9, 골3:15, 살전5:23,
살후3:16, 히13:20. [기타] 눅2:14, 29, 롬8:6, 14:17, 15: 33, 벧후3:14.
Related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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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평안(마10:13, 눅2:29, 행9:31),
화평(마10: 34, 눅12:51, 행10:36), 평강(눅1:79, 요20:19, 롬1:7), 평화(눅2:14, 19:42),
안전(눅11:21), 화친(눅14:32), 화해(행7:26), 태평(행24:3).
나는 참 평안합니다.
나는 정말 편안합니다.
I am very peaceful.
I am truly comfortable.
편안과 평안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Comfort and Peace
편안과 평안의 차이
“우리는 편안함을 좋아한다. 편안한 사람,편안한 공간,편안한 시간… 편안하다는 것은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다(중략). 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이란 뜻이다(중략).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김소연 저(著) 《마음 사전》 (마음산책, 61-6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을 좀 더 편안하게 사는 데 있다고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행복은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 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잠언을 통해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편안’은 몸과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들이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부족함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고백을 할까요.
주님이 주시는 평안 때문입니다.
편안함은 물질로 해결할 수 있지만 평안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안은 주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하늘이 축복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27-2
강남 비전교회
한재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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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tn(뤼튼)을 사용했습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Comfort and Peace
"We like comfort. A comfortable person, a comfortable space, a comfortable time… Being comfortable means being convenient and safe (excerpt). Being peaceful means being peaceful and stable (excerpt). Comfort may come at the expense of someone else's discomfort, but my peace can become a shared value with others."
This passage is from Kim So-yeon's "Dictionary of the Heart" (Mind Walk, pages 61-62).
Many people believe that the happiness of life lies in living more comfortably.
To some extent, this is correct.
However, the true happiness of life lies not in 'comfort' but in 'peace'.
God speaks this truth through Proverbs.
"Better is a dry morsel, and quietness therewith, than a house full of sacrifices with strife." (Proverbs 17:1)
'Comfort' pertains to the body and environment, while 'peace' emanates from within the heart.
If we look at the Bible, the saints often use the expression "lacking nothing."
Considering how much is lacking, why would they make such a confession?
It is because of the peace that the Lord gives.
Comfort can be solved with material things, but peace cannot.
Peace is a heavenly blessing that the Lord gives to the saints.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 Let not your hearts be troubled, neither let them be afraid." (John 14:27)
편안함과 평안함의 차이
유대인의 인사말은 “샬롬”입니다.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입니다. 한국인의 인사말은 “안녕하세요”입니다. 안녕이란
단어는 편안할 안(安)과 평안할 녕(寧)이란 한자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편안한지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샬롬”이나 “안녕하세요”의 인사말은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편안함”과 “평안함”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라고 축복하시면서 제자들이 진정 추구해야할 것은 평안함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돈을 열심히 버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직장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성공을 해야 평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도 공부를 잘해도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도 마음은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불안 속에서 더 많이 소유하고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얼마큼 돈을 벌어야, 그 평안함을 얻을 수 있게될까’라는 질문을 하게됩니다.
예수님은
“평안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있는 “편안함”을 “평안함”으로 착각하며 살기에 몸은
편안할 수 있지만 마음은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면 평안함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서 자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조롱을 다하고, 무시를 당하는 속에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인생의 실패자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아가야 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편안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다 이루었다”라는 고백을 통해 그의 삶의 목적이 아름답게 이루어졌기에 그 마음에 큰 평안이 있으심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현대 교회에 편안한 교인들은 많은데 평안한 제자들은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예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되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해야할 일을 하지만 혹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종을 해야할 상황이 되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돌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명령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라.” 이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무엇 때문에 보시려고 하나는 생각으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는 한 말씀으로 살리셨다면 무덤의 돌도 말씀으로 옮기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돌을 옮기는 게 더 쉬웠을텐데 굳이 마르다가 돌을 옮기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편안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함이 내 삶에 있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의 돌을 옮겨 놓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노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옮겨야할 돌입니다.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이렇게 불편하지만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일은 예수님께 맡기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돌을 옮겨놓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더 이상 핑계대지 마시고, 더 이상 피하지 마시고,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고, 그 불편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알수도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샬롬!
로마서 5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수 있게 된 것이 축복의 근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 결과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라틴 십자가의 모양(十)에서 화평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첫번째 관계의 화평은 위로 올라가는 하나님과의 화평
두번째 관계의 화평은 아래로 내려가는 세상과의 화평
세번째 관계의 화평은 좌우로 뻗은 이웃들과의 화평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즐거워하는 자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근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워하는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와 많은 여러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온갖 문제와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장차 영원하도록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요 내용 :
더 깊이 이해하기 :
-
연속성 : 이 구절은 로마서 3-4장에서 설명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의 결론이자, 뒤이어 이어지는 5-8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 환난 속에서의 소망,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됩니다.
-
누리는 복 :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은혜로 나아가는 특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포함합니다.
간단히 말해, 로마서 5:1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약
2천 년 전에 이 로마서가 기록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약 300년 동안 그 당시에 크리스찬들은 무서운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로
로마제국과 그 주변에서 살던 크리스찬들을 향해서 일어났던 로마 황제들의 무서운 박해는 약 열 번 이나 있었습니다.
첫번째
박해는 네로(AD 64년) 의 박해
어떤 학자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로마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짐승의 가죽에 매여 투기장에 끌려나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개에게 물어
뜯기고, 맹수에게 던져지고, 온 몸에 역청을 뒤집어 쓰고 네로의 정원에 있는 기둥에 묶여서 그들의 몸은 밤에 네로의 정원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었다. 네로황제는 수레를 타고 다니며 벌거벗고서 한밤에 술에 도취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치는 모습을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 때에 바울과 베드로도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둘째 박해는 도미시안 박해(AD 96년)
수천 명의 크리스찬들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셋째 박해는 트라얀 박해 (AD 98-117년)
넷째 박해는 하드리안 박해(AD 117-138년)
다섯째 박해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박해(AD 138-161년)
폴리갑이 살해당했습니다.
여섯번째 박해는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박해(AD 161-180년)
순교자 저스틴과 많은 크리스찬들이 목이 잘리고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박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박해(AD 193-211)
여덟 번째 박해는 막시민 박해(AD 235-238 년)
아홉 번째 박해는 발레리안 박해(AD 235-260년)
열번
째 박해는 디오클레시안 박해(AD 284-305년)
이것은 황제들의 박해 중에서 마지막 박해로 가장 심하고
전국적이었습니다.
10년 동안 동굴이나 숲 속에서 크리스찬들을 찾아내어 화형시키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모든
잔인한 방법을 다 사용하여 기독교의 이름을 없애려고 그들을 박해였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은 이런 무서운 박해를 당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온갖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주의 일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온갖 문제와 고난 중에서도 범사에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
우리는 오늘, 그리고 매일 매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앞에서 주어진 가르침에 대한 결론이자, 이후의 가르침을 위한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음을 가진다면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한 결론을 내면서 이 의롭다하심, 곧 칭의와 구원의 은혜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설명이고, 내일은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것입니다.
즉 오늘 다룰 5:1~11은 이후에 이어질 6~8장의 내용과, 5:12~21은 9~11장의 내용과 상응한다고 보면 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제사와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성전)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화목제) 것이 성전과 제물이 없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바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울은 이방인들이 굳이 성전에 들어가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에 세워져 있던 성전은 그저 유대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 뿐,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고,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영적인 유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얻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인내, 연단,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믿는 자들의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의롭게 되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법적인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로, 여기서 바울이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진정하게 믿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안전하게 연결시켜주는 첫 번째 고리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벌이는 가장 중요한 공격은 그들이 얻은 구원의 실제와 보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파괴적인 생각을 조장함으로써, 한 개인의 구원의 보존은
전적으로 믿는 이의 성실함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구원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반하는 이러한 오도된 해석에 대응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4장에서 구원은 오로지 인간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고 적었습니다. 창세기 15:6 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로마서 4:3).
누군가가 실제로는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선한 행실이 한 사람의 구원을 보존받는 조건이 되는지를 의문시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5:1-11 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있다고 강조하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3; 히브리서 10:23). 우리를 구세주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 중의 하나가 오늘 구절에서 읽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나님께 대적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고, 하나님도 그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7; 에베소서 5:6).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각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7:25) 이러한 평화는 영구하고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베소서 2:14).
그 사실은 우리 구원의 보장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사탄의
공격을 굳건히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선함과 장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39).
[ 기도 ]
주님, 저희를 구원해 주시고 당신과 저희 사이에 평화를 이루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을 더욱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저희를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 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말씀 요약 >
오늘 본문 5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롬 1~4장),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이신칭의 교리)에 관하여 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된다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추구해 보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롬 3:23),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20).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아무리 해보아도, 우리에게는 의가 없고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다 충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이 의를 얻을 수 없었을
때에, 율법 외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하셨습니다(롬 1:17;
3:21). 이 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3: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5:1-2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그 결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된 것은 무엇인지를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가장 먼저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1절).
이 화평은 관계적, 객관적 화평이다
먼저
우리는 이 화평(peace)이 어떤 화평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화평은 주관적인 마음의 평안이나 행복감, 또는 일시적인 마음의
평정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담이나 최면술, 약물이나 음식, 좋은 음악이나 자연 경치, 많은 재물이나 친구들, 금욕적인
생활이나 고요한 명상, 또는 극도의 방탕과 육체적 쾌락 같은 것들을 통한 행복감과 만족감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과 평강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객관적 화평이요, 관계적 화평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화목과
화친과 화해에 따르는 평화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샬롬(평화, 평강)”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움의 객관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의롭다 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실제적이고도 치명적인 적대감과 원수된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화해된
것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화목은 언제나 한 쌍입니다. 칭의 안에는 화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롭다 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과의 불목의 요소가 제거되어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신자가 구원과 관련하여 받아가지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이 화평(peace)도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공로로 획득할 수 있는 평화와 평강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평강을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사 9:6).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엡 2:1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이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을 전해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가리켜서
평안의 복음, 화평의 복음이라고 하셨습니다(엡 6:15; 사 52:7; 나 1:15 참조).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중에 으뜸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화평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교제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목한 가운데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적대적인 관계로 살고 있는
자이므로,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요 큰 위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악인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며(시 7:11), 또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우리 편에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우리에게 그
의를 마련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의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의와 화평을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부자라도 거지요, 아무리 학자라도 무지한
자요, 아무리 권세자라도 비천한 자요, 파산한 자요, 불행한 자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칭의로부터
받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기를 원하셨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 20:19,21,26 참조).
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누린다는 뜻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된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나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의 전능의 능력으로 나를 돌보시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요 14:27).
특별히 이 화평은
양심의 평안을 가리킵니다(칼빈, 루터, 로이드존스, 존 머레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은 우리의 양심을 평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화평이라는 말은 양심의 평온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생긴다”(로마서 주석). 호라티우스 보나르도 “십자가의 평강은... 바로 양심의 평강입니다.”라고 했습니다([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173).
하나님과의 이 화평 안에는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쁨은 비참하고 가련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모든 부요함
가운데 다시 살게 된 큰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은 자들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공통된 경험이었습니다(행 16:34 참조).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에서부터 오는 큰
기쁨입니다. 이러한 화평의 큰 기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화평의 떡과 잔을 받으라
여러분은
어디에서 평화를 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평안합니까? 기쁨이 충만합니까? 어디에서 양심의 평안을 얻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참된 평화와 평강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참된
평강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은 우리에게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은
평화의 떡이고 성찬의 잔도 평강의 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요일 4:10 참조). 성찬의 떡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17 참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우리 것으로 삼고
날마다 이것을 누리고 확신하며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의롭다 인정받은 다음에 평화, 구원,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은혜
1-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3장 후반-4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말했습니다.
5-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의롭다 인정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구원을 누리자(1-11절)
2. 의롭게 하심의 은혜로 왕 노릇하며 영생을 누리자(12-21절)
1. 의롭다 인정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구원을 누리자(1-11절)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바로 앞쪽 4장을 한 번 더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평화)을 누리자.” 의롭게 되는 것에서 화평으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12절의 “들어옴”과 비슷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떠나 좋은 관계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다음에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누립니다(10절). 2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3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구원, 평화는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화목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공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은 것도 예수님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이유는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생명을 향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다음에, 이제는 죄와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계속 이깁니다.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하니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
4절의 “이룬다”는 일하여 이루어낸다는 뜻입니다. 3-5절, 환난 가운데 인내로써 일하여 만들어냅니다. 인내 가운데 단련됨을 이루고, 단련됨이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소망은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칭의와 화목됨으로 시작합니다. 은혜로 이 화목됨이라는 문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구원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문으로 들어온 다음에 더 나가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겨서 고난 가운데서 영광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이 복은 엄청난 복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나에게 죄가 발견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는 매 순간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 용서받습니다. 나를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환난이 영광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기 바랍니다.
“의롭게 인정됨”(1절)과 “평화를 누림”을 9절에서 표현을 다르게 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의롭게 여겨짐”과 “구원”은 “의롭게 인정됨”과 “평화를 누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결과로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히브리말로 “승리”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 의로움까지 포함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의로움의 다음 단계 삶을 말합니다. 평화와 구원은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의롭게 됨을 화목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화목을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의롭게 된 것을 화목이라고 하고, 평화를 누리는 것도 화목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화목을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죄인 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하게 된 자는 더 나아가 더욱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여기서 화목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과거형입니다. 화목을 얻게 하신 일이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나 교회는 율법적 의만 말하고, 화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 봉사를 많이 하는 배경에 구원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위한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봉사가 공로가 되어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기가 노력하여 눈에 보이는 선행을 많이 할 때는 “구원받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행이 부족해 보이면 구원에 대해 의심합니다. 신앙의 확신이 없고 양심에 불안이 항상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들도 은혜로 화목하게 됨을 확신합니다.
어떤 교회와 성도는 죄 용서받았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그 다음 단계로 구원과 화평, 평화, 생명, 승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 이야기하고 거룩한 삶이 빈약합니다.
죄 용서와 평화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방향을 잡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2. 의롭게 하심의 은혜로 왕 노릇하며 영생을 누리자(12-21절)
12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생명이 왕 노릇 한다고 강조합니다. 앞에서 “화평”, “구원”을 말하고, 여기서는 “왕 노릇 함”을 말합니다. 구원과 평화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합니다. 14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은 하나의 타입입니다. 진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2절,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14절, 죄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 했습니다. 그런데 15절,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에 대한 정죄가 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다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정죄를 받는 대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의롭게 된 우리에게는 사망 대신 생명이 왕 노릇 합니다. 17절,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아래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 하는 것”이 5장 후반부터 6장 후반까지 중요한 단어입니다. 21절,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죄가 사망을 통해서 왕 노릇 합니다. 은혜는 의를 통해서 왕 노릇 합니다. 그 결과 영생으로 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는 우리를 의롭다 함에서 시작해서 생명의 왕 노릇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누리게 합니다.
10절 “그(그리스도)의 살아나심으로(생명 안에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을 17절이 반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구원은 실제적 새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의와 생명이 우리 삶에 가득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은 죄 용서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 것도 포함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미 영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용서의 은혜를 매일매일 경험하십시오. 죄 용서의 은혜 위에서 화평을 누립시다. 고난 가운데 승리합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누립시다.
우리가 죄와 싸워서 넘어지더라도 완전히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죄와 싸워서 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진 것을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니까 이긴 것만 계속 쌓아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어떠한 작은 유혹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세력들, 절망과 고통, 자연적으로는 힘든 상황이 생길 때 자연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연적인 감정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올 때마다 믿음으로 이깁니다.
우울감이 오고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마귀와 싸워 이기고 죄와 싸워 이기고 생명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은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이 생명을 받고 나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왕 되심 안에서 우리도 승리하는 왕으로 살아갑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하나님과”(프로스, 1절) = ‘하나님을 향하여’ = 12절, “들어감” (프로스-아고게)
“하나님과”(프로스, 1절)는 하나님을 ‘향하여’입니다.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12절, “들어감”(프로스-아고게)과 비슷합니다. 같은 전치사를 통해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참고> 3-4장에서 말하는 ‘자랑’이라는 주제가 5장으로 이어짐
앞서 3-4장은 의로움과 자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기에,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3:27).
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후손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자손과 땅의 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의롭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4:1).
3,4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5장도 자랑에 대해 말합니다. “즐거워한다”(3,11절)는 직역하면 ‘자랑한다’입니다. 5장은 의롭게 된 이후의 삶에서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편안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평화, 구원의 능력, 생명을 누리는 축복을 가르칩니다. 이 자랑은 고난 가운데서 누리는 자랑입니다.
구속, 구원, 원죄, 복음, 다른 종교들
1. 구속(救贖) 혹은 대속(代贖) 혹은 속량(贖良)
구속의 뜻
1)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제하여 은총속에 하느님과 재(再)일치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 혹은 ‘대가를 치르고(돈을 주고) 소유권을 회복하거나 자유와 석방을 얻어내는 것’, 혹은 ‘잃어버린 생명을
건지는 것’.
2) 죄악으로부터의 구제라는 측면과 하느님과의 재일치라는 측면이 있다.
구속의 과정
1) 죄는 우리를 하느님과 분리한다.
a) 성경은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원죄의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인간은 원죄로 저주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하느님의 사랑에 도전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원죄는 인류 전체인 아담의 모든 후손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숨겨져 있다.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악하고 이기적인 열정을 포옹하는 경향을 만드는 것은 원죄이다. 원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을 두는데, 원죄의 결과는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누구도 그 자신의 의지로 원죄에 내재된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다.
b) 성 바오로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23)라고 말한다. 원죄와 본죄는 인간과 하느님을 분리한다. 하느님은 거룩하고 공의롭고 선한 모든 것의
완전이시기 때문에, 충만한 임재 안에서 죄 많은 인류를 용납하실 수 없다.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틈을 두는데, 이 틈은
인간의 종교, 은혜 없는 선행,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시도들로는 극복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어떤
피조물인 인간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죄라는 틈을 연결할 수 없다.
2) 하느님은 유다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약속하셨다: 우리는 사랑 많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갖게 되어 매우 행운아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틈을 넘어갈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사실,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타락한 후, 하느님께서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신성한 계획을 시작하셨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아브라함의
자녀인 유다 민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 사랑, 희망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새로운 민족
유다인의 조상으로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들은 예언자들로부터 주님의 예언과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희망을 얻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죄의 구속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유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12).
3) ‘고난받는 종’은 유다의 율법을 이행하신다: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유다 민족의 옛
계약을 새 계약에서 완전할 정도로 완벽하게 이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율법에 새로운 완전성을 가져오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두 계명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으로 율법의 새로운
정신을 전파하고 지키셨다. 그는 유다인의 옛 계약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행하고,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인의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유다인의 할례는 결국 은혜에 인해 세례로 넘어갔고, 동물의 희생은 미사라는 제사에서의 완전한 제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파스카 어린 양인 자신의 궁극적인 희생을 통해 파스카 잔치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라고 하시면서, 예식 정화에 관한 유다의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셨다. 죄에 관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맥락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규칙과 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신적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에 따라 완벽하게 설명하고, 성취하며 살 수 있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속을 위해 고난받고 죽으셨다.
a)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고 죄의 용서를 완전히 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3-15)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마르 10:45), 목숨을
바치셨다. 실제로,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 최고 의회와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분을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다인들 사이에 불화를 선동하고,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라고
신성 모독적인 말씀을 한 것처럼 보이는 거짓 혐의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언하시고,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라고 증언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인간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b)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신성한, 인간의 제물로
봉사했다. 그의 율법의 완전한 성취, 수난의 고통,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모든 죄값을 단 한 번에 지불했다. 예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하느님의 공의는 죄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갚을 수 없는 속죄를 요구했다. 오직 하느님의 아들의 완전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은
희생만이 죄를 속죄하고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교회 교리서 615).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의롭고 참으로 인간적이셨기 때문에,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순수한 사랑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죄로 죽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은총의 새 생명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어설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c. 구속의 선물
1) 구속은 우리에게 죄의 죄책감, 비난과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2) 구속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유를 준다.
3) 구속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승인과 수용을 구하는 자유를 준다.
4) 구속은 우리에게 두려움, 걱정,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5) 구속은 우리에게 적대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박해자들을 축복할 자유를 준다.
6) 구속은 우리에게 실패의 자유를 주지만, 여전히 우리가 깊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7) 구속은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준다.
2. 구원(救援, salvation)
a. 구속과 구원의 차이
1)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고 영원한 정죄의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속의 행위이다. 구속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삶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속은 하느님의 영광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제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3) 구속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까지 경주를 달려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b. 구원의 측면 내지 요소
1) 죄(sin)
a) 원죄(original sin): * 간단히 말하면, 아담의 죄의 결과로 하느님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
b) 십계명: 각종 미신행위(점, 굿, 부적 등), 독성죄(모고해, 모령성체; 1코린 11:27-32), 파공관면, 간음, 살인, 낙태, 도둑질, 사기 등. * cf. 지역에 따라서는 주일에 쉬는 꿀벌도 발견됩니다.
c) 기타: 심각한 미움과 분노, 철저한 이기심, 무절제한 애착, 거듭되는 범죄행위, 싸움, 험담, 폭음과 술주정, 심각한
교만, 저주하는 마음들 등(1코린 5:11; 6:9-10; 갈라 5:19-21; 에페 4:25─5:20 등). (로마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d) 삼구(三仇): 악마, 세속, 육신
e) 칠죄종(seven deadly sins)
(1) 자기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여 생기는 칠죄종: 교만 pride; 인색 greed; 음욕 lust; 탐욕(탐식) gluttony
(2) 자기의 불편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데서 생기는 칠죄종: 분노 anger, wrath; 질투(시기) envy; 나태 sloth
f) 신칠죄종(2008):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 세포연구, 마약 거래,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財), 낙태, 소아 성애
2) 고통(라 dolor; 영 suffering)
a) 구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통: 전쟁, 포로, 가난, 착취, 살인, 낙태, 간음, 부정부패, 폭력, 조롱 등의 고난, 사망, 죄 등
b) 불교에서의 팔고
(1) 생고(生苦): 이 세상에 태어나는 괴로움.
(2) 노고(老苦): 늙어 가는 괴로움.
(3) 병고(病苦): 병으로 겪는 괴로움.
(4) 사고(死苦): 죽어야 하는 괴로움.
(5)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6)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살아야 하는 괴로움.
(7)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8) 오성음고(五盛陰苦; 오온성고, 五蘊盛苦): 심신의 구성요소 색•수•상•행•식의 오음(五陰)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여 발생하는 고통을 말함.
(a) ‘색(色, form)’: 물질요소, 즉 물질적인 형태로서의 육체
(b) ‘수(受, sensation or feeling)’: ‘색’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단순한 반응.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작용
(c) ‘상(想, perception)’: ‘수’에 대한 인식 혹은 해석.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 작용으로서 표상•개념 등의 작용
(d) ‘행(行, mental formation or activity)’: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
(e) ‘식(識, consciousness)’: 간단히 말해서, ‘색’에서 ‘행’까지에 대한 인식.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
c) 고통의 일반적인 유형
(1) 육체적 고통: 질병, 산고, 고문, 죽음 등
(2) 정신적 고통: 걱정, 두려움, 분노, 실의에 빠지는 것, 좌절감 등
(3) 영적(靈的) 고통: 인생의 궁극문제와 관련하여 느끼는 것 등
d)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고통의 유형
(1) 타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고통
(2) 개인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로서의 고통
(3)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지옥에서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
(4)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뢰와 순종을 높이려고 하느님의 사랑의 손에 의해, 본의 아니게 겪게 겪는 고통
(5)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겪는 고통
e)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고통의 의미
(1) 5가지 고난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서로 관련되어 있다.
(2) 모든 고통은 주님의 구원사업 안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져야 하며, 또한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더라도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허락하신다.
(3) 그렇다면, 내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성찰해 보아야만 한다.
(a) 정직의 결핍은 아닌지
(b) 겸손의 결핍은 아닌지
(4)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고통의 의미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절망(despair)
a)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갖는 모든 희망을 자발적이고 완전하게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는다든가, 유혹을 이길 만한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실하심을 불신하여, 자포자기함으로써 회개하지 않고 더욱 잘못에 떨어지게 한다. 가까운 말들로서는 낙망,
체념, 낙담, 비관, 좌절, 실망 등이 있다. * (1사무 4:7; 27:1; 1역대 29:15; 2마카 3:29; 9:18; 욥
7:6; 9:23; 14:19; 17:15; 19:10; 27:8; 지혜 3:18; 집회 27:21; 에제 37:11; 즈카
9:5; 사도 16:19; 27:20 등)
b) 일반적으로는 미래에의 희망을 잃은 정신적 상태,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거나, 끊어버린 상태, 혹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4) 죽음(라 mors; 영 death): 육신의 죽음
(요한 8: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히브 2:14-15)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c. 구원의 내용상의 차이
1) 구약 시대의 구원
a) 구약 시대 초기에 ‘구원’은 민족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어떠한 위험이나 악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즉, 전쟁,
포로, 가난. 착취, 살인, 낙태, 간음, 부정부패, 폭력, 조롱 등의 고통, 사망, 죄 등으로부터의 구출이다. 이 구원 행위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이집트에서의 탈출이다.
b) 하지만 왕국 시대로 오면서 점차 예언자들에 의해 구원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에 포함되었다(1열왕 8:41-43; 이사 52:10).
c) 개인 차원에서의 구원도 점점 증가되었다. 곧, 구원은 집단적으로 민족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 곧 의인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d) 더욱이 구약시대 후반부로 오면서 메시아사상이 발전하여 구원은 점점 ‘죄로부터의 구원’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으로 발전함. 곧 구원자 메시아는 죄와 그 결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는 분이라는 사상이 강하게 나타남(이사
52:13─53:12). * 세상적 의미의 구원 → 영원한 생명으로(시편 133:3; 다니 12:2; 2마카 7:9.36)
2) 신약 시대의 구원
a) 신약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에페 2:13-18). 즉,
신약에서의 구원은 죄를 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셔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성혈을 쏟게 하심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다(로마 5:9).
b) 그 결과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됨.
(사도 13:39)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집회 13:14) “네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너를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여라.”
c) 하지만 이 구원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육화론적)이지만, 동시에 세상 마지막 날 신자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것이다.
d.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
1) 하느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첫 번째 계명이자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고, 하느님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정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
2) 이웃 사랑: 우리의 이웃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 가족, 친구,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존경과 연민 그리고 용서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그분의 자녀처럼 사랑하신다.
3) 의로운 생활: 성경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의 좋은 원천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한 평화를 경험하기를 원하시고,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방식대로 살 때만 성취될 수 있다.
4) 회개: 죄의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고립되고, 평화의 부족과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이전의 은총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회개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로 진정으로 결심하는 것이다.
5) 기도
a)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혼의 대화 혹은 호흡이다.
b)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10% 정도이고, 90% 정도는 성경, 책들, 다른 사람, 매스컴 등을 통해 주어진다고 한다.
3. 원죄
a. 교회는 첫 사람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가르친다. 첫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은
초성은혜와 과성은혜를 거두어 버렸고 그 결과 사람은 죽음과 고통의 그늘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결과를 원죄라 한다.
이런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출생으로서 후손에게 계속 전달된다.
b. 원죄라는 용어는 4세기말 성 아우구스티노가 처음 사용한 이래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과 연관되어 이해된다. 사실 죄는 죄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비추어 보아야 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서, 죄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원죄는 모방으로서가 아니라 출생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c. 만일 하느님께서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첫 사람의 죄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지,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유죄로
판단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d.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갓난 아기도 원죄가 있는가? 그렇다. 원죄는 출생으로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갓난 아기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직 본죄를 짓지 않은 아기에게 아담의 불순명의 결과가 미치는 이유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이다. 즉 인류는 공동 운명을 가진 연대적인 인격체로 보는 성경의 사상, 특별히 로마 5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세례의 필요성과 죄사함의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의 성격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는 유아도 예외가 없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일찍부터
유아세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아들은 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는 것뿐이다.
e. 원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원죄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원죄는 이마에 찍힌 도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원죄에 물들어 태어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부모가 은총 지위에 있는 신자라 하여 거기서 태어나는 자녀가 자동으로 은총 지위에 있는 신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부모에게는 원죄가 없어졌는데도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기에게 원죄가 있다는 교리는 부모가 단순한
인간성만 아기에게 전해줄 뿐,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는 전할 수 없음을 깨우쳐 준다. 원죄 교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f. 그런데 만일 유아세례를 부정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교리도 필요 없게 되고, 원죄 교리를
부정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은총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원죄 교리, 유아세례 전통,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은총, 이 세 가지는 서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가 원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죄악의 보편성에 맞서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g.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원죄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89항)라고
설명한다.
4. 복음(라 Evangelium; 영 Gospel)
a. 복음이란?
1) ‘기쁜 소식’을 말한다. 로마 시민들에게 복음이란, ‘로마의 황제와 그 행적 그리고 그 법과 이방의 무법한 왕국에의 승리 및 정복, 로마 왕국에 의한 통치, 그리고 로마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2) 이 용어가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천국으로 대체된다. 로마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부의 아들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부활·가르침으로 문을 여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 즉 하느님 나라 및 그 통치를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차용되면서 현재와 같은 복음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3) 구약의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의 나라 및 그 통치이고, 메시아는 그 나라의 임금이시다. 예수는 메시아이시고 임금이시며,
교회는 그 나라의 정복 현장이다. 이처럼, 복음이란, 인간 구원과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 또는 예수에 의한 인간 구원의 길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죄인인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부활하셨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은총 등 구원을 가져다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요한 3:16;
14:16; 로마 3:25; 콜로 1:20).
4) 좁은 의미의 복음은, 신약성경의 ‘4 복음서’를 말한다.
b. 복음의 성격
1)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로마 1:2)이요,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힘(로마 1:16-17)이며, 새 계약(예레 31:31-34; 히브 10:9)이다.
2)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에페 2:4-10). 그래서 ‘하느님의 복음’(로마 1:1;
1테살 2:2),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로마 15:19; 16:25 등), ‘예수님에 관한 복음’(사도 8:35),
‘주 예수님의 복음’(사도 11:20; 2테살 1:8), ‘그분 아드님의 복음(로마 1:9), ‘하느님 은총의 복음’(사도
20:24), ‘구원의 복음’(에페 1:13), ‘하늘 나라의 복음’(마태 4:23), ‘하느님 나라의 복음’(루카 16:16),
‘복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복음’(1티모 1:11),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2코린 4:4), ‘평화의
복음’(사도 10:36; 에페 6:15), ‘영원한 복음’(묵시 14:6) 등으로 표현됨.
5. 다른 종교들
a. 불교
1)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Buddha: 깨달으신 분, 覺者, 佛)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의 기본 요소는 삼보(三寶), 즉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 Samgha).
2) 중요 특징: 타종교들과 비교해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b)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c)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나 원한을 가지지 않음.
d)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e)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f)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g)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혹은 解脫)을 이상의 경지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하고, 교의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b. 유다교(유다이즘): 일반적으로 헬레니즘(Hellenism) 세계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이, 주변 사람들과 차별을
두고 지칭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2마카 2:21; 갈라 1:13). 유다교의 기초는 모세가 다져 놓았지만, 그 기원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 유다교의 근본은 토라에 있는데, 24권으로 된 구약으로 인간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을 망라한 가르침이다.
이는 3세기에 집대성된 미쉬나(Mishnah: 공식 주해서)와 6~7세기에 완성된 탈무드(Talmud: 미쉬나의 주해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c.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불린다. 무하마드(570~632)가 40세부터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를 수록한 코란(Koran)을 경전으로 하고 있다. 코란은 가브리엘 천사가 무하마드에게 전달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들의 주요 신조는 알라(Allah), 즉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자이다. 114장으로 된 믿음과
사상의 중심인 코란은 6신(信) 5행(行)으로 표현된다. 즉 알라, 천사, 예언자(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하마드),
성경, 심판, 천명(天命)을 믿으며(六信), 신앙 고백, 예배, 종교세(稅), 단식, 순례 등을 실천해야 한다(五行).
구속과 구원의 차이
1.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고 영원한 정죄의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속의 행위
구속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삶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속은 하느님의 영광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제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3. 구속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까지 경주를 달려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구속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로마서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Not only so, but we ourselves, who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eagerly for our adoption as sons,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구원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로마서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로마서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로마서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로마서 15: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12월 10일(수) 로마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속(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한글개역 성경에서 구속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84구절
구원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530구절이라고 합니다.
* 자료 출처 - 다국어 성경 인터넷 검색
구속과 구원이란 용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그 의미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속(救贖)을 영어로 리뎀션(redemption)
구원(救援)을 영어로 샐베이션(salvation)
ἀπολύτρω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629
1. 풀어 놓음. 2.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나 제한에서 해방됨. 3. 구속
Pronunciation
[ apŏlütrō- sis ]
Etymology / 575와 3083의 합성어에서 유래 [원래 노예나 포로를 다시 사거나 혹은 속물을 받고 자유를 줌]
-
1. [문자적으로] 풀어 놓음, 해방, 히11:35.
-
2.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나 제한에서 해방됨.
-
a. 구속(救贖), 구속받은 상태, 눅21: 28, 롬3:24, 8:23, 엡1:7, 4:30, 골1:14, 히9:15.
-
b. 구속(救贖)자[그리스도], 고전1:30.
-
관련 성경 / 속량(눅 21:28, 롬 3:24, 엡 1:7, 14, 히 9:15), 구원함(고전 1:30), 풀려남(히 11:35).
구속
τήρησις, εως, ἡ
5084
[tērēsis]
-
2.
감옥, 행4:3, 5:18.
-
3.
준행, 준수, 고전7:1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구속, 속량, 해방, 눅1:68, 2:38, 히9:12.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올가미, 차꼬, 속박, 구속, 막7:35, 눅13:16. [복수] 눅8:29, 행16:26, 22:30, 23:29, 26:29,31, 빌1:7,13,14,17, 골4:18, 딤후2:9, 몬1:10, 13, 유1:6.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구속(救贖), 구속받은 상태, 눅21: 28, 롬3:24, 8:23, 엡1:7, 4:30, 골1:14, 히9:15.
-
2.
구속(救贖)자[그리스도], 고전1:30.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2.
놓아주다, 구출하다, 구원하다, 눅24: 21, 딛2:14.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사다, 구속하다, 속량하다, 구하여 내다, 갈4: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감금하다, 가두다, 구속하다, 갈3:23.
-
2.
망보다, 수호하다, 고후11:32.
-
3.
보호하다, 지키다, 빌4:7, 벧전1: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상징적으로] 구속하다, 감금하다, 옥에 가두다, 롬11:32, 갈3:22,23.
-
2.
함께 닫아 버리다, 둘러막다, 둘러싸다.
-
3.
[문자적으로] 눅5:6.
σωτηρία, ας, ἡ
Storng number4991
-
Pronunciation
[ sōtēria ]
-
-
a.
[위함이나 임박한 죽음에서의 구출] 눅1:71, 행7:25, 히11:7.
-
b.
구원, 눅1:69,77, 행13:26, 롬1:16, 10:1,10, 고후7:10, 빌1:28, 2:12, 살전5: 8,9, 히5:9.
Reference
- Grammar Explanation
-
4990의 파생어의 여성형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구원(눅1:69, 롬1:16, 히2:3), 구원하여 주시는 것(눅1:71, 행7:25, 히11:7).
구원
σωτηρία, ας, ἡ
4991
[sōtēria]
-
1.
구원, 구출, 보존.
-
2.
구원, 눅1:69,77, 행13:26, 롬1:16, 10:1,10, 고후7:10, 빌1:28, 2:12, 살전5: 8,9, 히5: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2.
얻는 것, 살전5:9, 살후2:14.
-
3.
소유, 재산, 엡1:14, 벧전2: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휴식, 구원, 풀림, 쉼, 안심, 고후2:13, 7:5, 8:13, 살후1:7.
-
2.
늦춤, 풀림.
-
3.
[문자적으로] 감금에서 풀림, 행24:23.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구원, 갈3:18, 엡1:14, 5:5, 골3:24, 히9:15, 벧전1:4.
-
2.
기업, 유산, 상속물, 마21:38, 막12:7, 눅20:14.
-
3.
소유, 재산, 행7:5, 히11:8.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
2.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
3.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안전하게 살려내다, 구원하다, 구출하다, 행23:24, 27:43, 28:4, 벧전3:20.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구원하다, 구출하다, 건져내다, 보존 하다, 마6:13, 27:43, 눅1:74, 11:4, 롬7:24, 11:26, 벧후2:9, 딤후4:18.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2.
보호하다, 방어하다, 막6:20.
-
3.
간직하다, 눅2:1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놓아주다, 구출하다, 구원하다, 눅24: 21, 딛2:14.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의문불변사 1) [직접의문문과 함께] ~옳으니이까?, 마12:10, 19:3, 막10:2, 행21:37, 22: 25.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 눅13:23, 22:49, 행1:6, 7:1, 19:2.
-
2.
[현재직설법과 함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26:63, 저를 구원하는지, 마27:49, 막15:36, [참조] 눅14:31, 고후13:5, 요일4:1. [미래직설법과 함께]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막3:2, 눅6:7. 남편을 구원할는지, ...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2.
[능동태, 타동사]
-
3.
가지다, 소유하다.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2.
[능동]
-
3.
[타동사] 깨우다, 일으키다.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단수로] ἐν τ. ἡμέρᾳ τ. πονηρᾷ: 악한 날에, 엡6:13, ἐν ἡμ. σωτηρίας: 구원의 때에, 고후6:2, 이집트로부터 구출되던 때, 히8:9.
-
2.
날.
-
3.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자연적인] 날.
예를 들면 어느 노예가 노예시장에 팔려나왔습니다.
그 노예를 불쌍하게 생각한 어느 사람이 노예를 값을 지불한 후에 노예에게 당신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노예가 나는 자유인이다 라고 외치며 자유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속이란 값을 지불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Salvation)과 구속(Redemption)의 관계 : 성경적 분석
1. 구원과 구속의 관계 및 성경적 차이점
'구원'과 '구속'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지만, 성경은 그 역할과 초점을 달리하여 제시함.
-
구속은 구원의 수단이자 근거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 구원을 얻음)
-
구속(Redemption)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적이고 기초적인 행위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구속)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됨.
-
히브리서 9:12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redemption)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피로 인한 속죄(구속)가 구원의 근거가 됨을 분명히 함.
-
골로새서 1:13-14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여, 속량(redemption)을 통해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구원의 한 측면)을 받았음을 보여줌.
-
구원은 구속의 결과:
- 구원(Salvation)은 구속을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상태와 모든 유익을 의미함.
1) 죄 사함, 2) 의롭다 함, 3) 하나님과의 화목, 4) 성화, 5)영생, 6) 장차 올 영광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임.
-
로마서 5:9-10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salvation)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salvation)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구속의 근거)을 통해 화목하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됨을 설명함.
-
구속은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값 지불' 행위 또는 '해방의 대가'이며,
- 구원은 그 '값 지불'을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자유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임
- 마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주인이 값을 지불하는 행위가
'구속(redemption)'이고, 그 결과로 노예가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구원(salvation)'인 것과
같음. 성경은 이 두 개념을 동시에 사용하면서도, 구속은 구원의 필수적인 토대와 방법임을 분명히 드러냄.
구속(救贖. redemption)과 구원(救援. salvation)
구속(Redemptio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죄의 빚을 갚아 우리를 마귀의 속박에서 사내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법적,
근원적 행위를 말합니다.
구원(Salvation)은 이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생을 얻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응답'이자 '결과'를 의미하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 (Redemption, 救贖)
-
의미 : '값을 치르고 사서 되찾는다'는 뜻으로, 노예 상태의 사람을 값을 주고 해방시키는 행위.
-
성경적 의미 :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죄의 종 된 인류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행위.
-
특징 :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법리적인 측면을 강조 (예: 죄의 빚 청산).
구원 (Salvation, 救援)
-
의미 : 죄와 사망, 고난으로부터 보호받고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 것.
-
성경적 의미 :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 (죄 사함, 칭의, 화목, 성화, 영화 포함).
-
특징 :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응답)이 필요하며, 유기적인(살아있는) 측면을 강조.
구속과 구원의 관계
-
하나님의 선물 : 구속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선물이며, 구원은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결과.
-
분리될 수 없는 과정 : 구속이 없이는 구원이 없고, 구속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
-
결론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구속)으로 구원의 길은 열렸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시 구절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믿음으로 얻는 구원
구속 (拘束, Bondage/Restraint)
-
일반적 의미: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하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물리적인 구속(감금, 포박)뿐만 아니라, 법적인 제약, 사회적 관습, 심리적 압박, 경제적 빈곤 등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
종교적 의미: 인간이 죄, 악업(惡業), 무지, 욕망 또는 죽음과 같은 영적 한계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속박으로 간주됩니다.
구원 (救援, Salvation/Redemption)
-
일반적 의미: 위험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출하거나 구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난 구호, 위기 탈출 등을 포함합니다.
-
종교적 의미:
구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영원한 생명, 깨달음, 또는 신과의 화합에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영생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계 및 대조
이 두 개념은 문제점과 해결책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구속이 인간이 처한 비극적이고 제한적인 상태를 나타낸다면, 구원은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적인 해방을 제시합니다.
요약하자면, 구속은 묶여 있는 상태이고, 구원은 그 묶임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구속(Redemption)과 구원(Salvation)
구속(Redemption)과 구원(Salvation)은 성경과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와 초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개념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은혜로운 사역
- 구속과 구원 모두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역을 나타낸다.
- 인간의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과 구원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3:16, 로마서 3:24)
죄와의 관련성
- 두 개념 모두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 구속은 죄로부터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해방을 의미하고, 구원은 죄와 그 결과인 심판으로부터의 전반적 구조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성됨
- 구속은 예수님이 피로 값을 치르심으로 이루어졌고(에베소서 1:7), 구원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전해졌다. (로마서 10:9-10)
인간의 삶에 변화를 가져옴
- 구속과 구원은 모두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며, 죄와 심판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한다.
-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을 갖게 한다. (고린도후서 5:17)
차이점
의미와 초점
구속 : 구속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치러진 대가를 강조한다.
헬라어로는 "뤼트로시스(λύτρωσις)"로, 본래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구속의 초점은 예수님의 희생(속죄)과 그 대가이다. (마태복음 20:28)
구원 :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구출되는 상태를 강조하며,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전반적인 구조와 회복을 의미한다.
구원의 초점은 결과적 상태, 즉 영생, 하나님과의 화목, 죄와 심판에서의 자유이다. (에베소서 2:8-9)
시간적 관점
구속 : 구속은 과거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된 사역이다.
(골로새서 1:14)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구원: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받았고(칭의),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며(성화),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기대한다(영화). (빌립보서 2:12)
적용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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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구속은 하나님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이루신 보편적인 사역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값을 치렀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적용된다. (요한일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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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구원은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결과이다. (에베소서 2:8)
행위와 목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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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은 죄값을 치르는 행위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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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구속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생을 의미한다.
구속의 제한성과 구원의 포괄성
- 구속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로 한정되지만, 구원은 죄뿐만 아니라 심판, 사망, 멸망으로부터의 총체적인 구조를 포함한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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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을 말하며,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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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구속을 통해 죄와 그 결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총체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 구속은 구원의 기초이며, 구원은 구속의 결과이다.
- 두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연결되어 있으며, 믿음을 통해 개인의 삶에 적용된다.
따라서 구속과 구원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안에서 긴밀히 연결된 필수적인 두 측면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두 개념을 묵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와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
성경에 구속이라는 단어가 약 80회 나오고, 구원이란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두 단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구원과 구속의 차이점을 알아야 성경이 해석된다.모르면 신앙생활 하는데 큰 혼란과 혼선이 빚어진다.
많은 교인들이 잘못 알고있는 구속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정확히 깨닫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교인들이 구속을 구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그 결과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와 교인들이 타락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 받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구속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를 회개할 때 예수 피로 죄를 씻는 것이 구속받는 것이다.
구속된 자가 죄를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옵니다.하나님이 그의 삶을 일일 체크하고 주관하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인들이 천국을 향해 가는 과정이 구속된 삶인 것이다.
한 번 구속을 받은 사람이 계속 불순종하고, 징계해도 회개치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구원받는 자가 없다.
성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고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잘 믿다가 타락하면 그의 구속받음은 무효다.
그러나 회개하면 죄사함이 회복된다. 그의 구속받음은 다시 유효해진다.
질병 치료는 육체의 구원이지 영혼 구원이 아니다.
순종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 때 그는 구원의 길을 정확히 가는 것이다.
구원의 길을 끝까지 갔을 때 그의 구원이 이뤄지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중간에 회개의 삶을 포기해 버리면 지옥가는 것이다.
구속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다는 뜻이다.
구속받은 자는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죄를 지을 때 주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한다.
이런 주님을 체험하고도 욕심 때문에 계속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을 때,
징계는 심해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버림받는 것이다.
한 번 구속은 절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죄에서 구속된 자가 회개의 삶을 끝짜지 살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죄에서 구속받는 순간, 그때부터 구원받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성경을 통해 모두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면 아무런 공로없이 죄를 용서받는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놓여진다.이것이 구속이다.
금과 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그는 천국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받은 삶이다.
세상 철학이나, 어떤 종교가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가야할 길을 제정하시고,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가 하신다.
그 창조주가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천하에 다른 구원자 없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 피로 구속받고 천국 길을 가는 것을 세상일에 비유한다면,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국가가 제정한 교정생활이 시작된다.
국가는 먼저 그를 세상과 분리시킨다.
피해 가족이 너무 분노하여 그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가 구약시대 도피성 제도이다.
둘이 나무하다 도끼 자루가 빠져 앞에 있는 사람을 쳐서 죽였을 때, 신속히 도피성으로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 가족들에게 죽는 것이다.
교도소에 교정생활 있다.
죄수들에게 무조건 밥만 먹이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형기을 마치고 세상에 복귀했을 때, 그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그를 지도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순응하는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계속 사고치고 말썽부리면, 그는 특별 공간에 가두어진다.
이런 교도소 행정이 예수믿고 구속받은 자의 삶과 유사성이 있다.
물론 전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일부 유사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항상 훈련받는데,
이것이 죄수들의 훈련에 비유된다.
주님은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를 주님을 닮도록 훈련시킵니다.
남을 용서하는 훈련, 이웃과 화목해지는 훈련, 선하게 사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계속 가르칩니다. 주님 뜻에 순응하면 천국에 들어간다.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으면, 징계받는다, 징계받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고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계속되는 극한의 징계에도 변화되지 못하면 결국 버림받는 것이다.
이런 자가 누구인가? 평생 신앙생활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다.
예수 피로 죄를 구속받는 것은 결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 구원받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베드로후서 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예수님 피로 구속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고, 예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뭔가? 육신의 정욕과 교만과 자기 자랑이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예수피로 구속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거룩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거룩해지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예수 마음을 닮기 위해 평생 동안 받는다.
세상에 완벽한 자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교인은 예수님 밖에 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얼마 후에 원가지에서 잘리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다시 붙어야 된다.
훈련이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라,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이 끈을 놓치면 교회 안에서 낙오자 되는 것이다,
평생 교회만 다니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9-10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실족이 무엇인가? 길가다 넘어지는 것이다.옛 죄를 깨끗게 해주신 것을 잊는다. 구속해 주신 것을 잊는 것이다.
예수믿으며 세상을 더 사랑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해주신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세게 해야한다.
구원의 길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이 순종과 회개이다.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예수 피의 구속을 무효화시킨다.
죄에서 한 번 구속으로 천국에 못들어간다.가다가 이탈하면 불신자와 같다.
구속과 구원을 혼돈하지 말라.
회개의 삶을 중지하면 구원의 길에서 실족하는 것이다.교회만 다니고, 순종을 버리는 것이 지옥가는 길이다.
한 번의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 아니다.
항상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구속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예수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 가기 원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선을 추구하라, 자기의 부족함을 매일 회개하라.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다.
사탄이 순종을 방해한다, 끝까지 사탄 방해를 이겨야 한다.
예수피로 죄를 씻은 자,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확실하게 천국 길을 가라.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구원을 얻을 때까지 회개의 삶을 살라.
항상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라. 이는 회개하는 방법밖에 없다.
거짓된 사랑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라.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인간 자신은 이렇게 할 능력이 없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한 번 회개하고 구속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구속받은 자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
그 결과가 구원이다.
구속받은 자는 천국을 향해 가는 자이다. 가다가 그치면 천국 길에서 탈락한다.하나님의 은사와 능력과 예언은 구속받고 구원받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은사 능력 행하고 교만해지면, 그것 때문에 더 빨리 지옥에 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1-2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구원은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피로 구속받은자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때, 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시간을 두고 점점 자라는 것이다.
계속 순종할 때 구원이 자란다. 이는 자신이 천국 문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이뤄졌다는 표현이 없다.
육체 구원, 치료는 세상에서 이뤄질 때 많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항상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세상을 떠날 때 영혼 구원을 받기 때이다.
예수피로 구속받은 자는 영혼 구원에 이르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
악하고 독한 말을 하지 말라.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을 속이지 말라.
자존심 상한다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갓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죄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신령한 젖을 반드시 사모해야 한다.
신령한 젖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애쓰는 것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다.
구원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곧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예수님으로 오신 것을 믿는다, 성령이 예수님의 영인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이고,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창조주를 믿는 자는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가 신령한 젖을 먹고 믿음이 자란다.
천국 들어갈 때까지 믿음이 자라야 한다.
사랑 실천과 관계없는 교리는 헛된 것이다.많은 자들이 인간이 만든 교리를 사모하고 따라간다.
오염된 젖을 먹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영혼이 썩어버린다.
인간 교리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피로 한 번만 구속받으면 천국에 간다고 인간 교리가 주장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 맥락에 전혀 맞지 않다.
나기 전에 선택받아서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사탄이 만든 것이다.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누구든지 예수믿고 회개하고 순종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신령한 젖이다.
머리로만 알지 말고, 주님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수록 천국 길이 열리고 선명해진다.
욥기 19:25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이 극한 훈련을 받고 깨달았다.
구약 때의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 때에 구속자 예수님으로 오신다는 것을 그가 알게되었다. 물론 주님이 그를 통해 계시하신 것이다.
구약 때는 양의 피를 통해서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셨다.
그러나 신약 때는 예수님의 피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의 피 외에는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없다.
구속받은 자들의 삶이 어떠 해야 된다는 것을 명백히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한다,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을 때,
주님이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부정한 돼지 피로 제사드렸다고 주님이 호통하셨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 불순종하고 회개없이 예배를 드리면,
예수피를 헛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피를 짓밟고 헛되게 만들었다” 하신 것입니다.
시편 78편 40-42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갔다, 애굽 백성들을 치시매,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그들이 하나님을 수없이 시험하고 말씀에 거역했습니다.
불순종하면서 죄를 회개할 줄 몰랐다.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너무나 격노케 만들었다.
주님이 견딜 수 없어 대부분을 멸망시켰습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입니다.
그런데 구속받으면 천국에 간다니 성경에 맞지 않는다.
애굽의 압제에서 구속하신 은혜를 잊어버렸다.사탄의 압제에서 구속하신 것을 잊은 것이다.
너희가 이런 짓을 한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생각해 보라!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주님이 멸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런데도, 한 번 구속되면 무조건 천국에 가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천국으로 전진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멸망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 74편 1-2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주여, 옛적부터 구속하사 주님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주님이 지금까지 치시던 양을 버리시나이까?
주님의 기업으로 삼으신 이 백성을 버리지 마옵소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므로 주님께 버려질 때입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번 구속받으면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회개치 않으면 다 버려진다.
패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다윗이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한 번 구속이 이런 기도 필요 없다.
“저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주님은 결국 모두를 천국에 보낼 것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하고 말았을 것입니다.주님이여 그동한 함께 거하셨던 시온산을 기억하소서
그 시온산은 예루살렘을 상징했고, 그 예루살렘은 오늘날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타락하여 목사가 길을 잃고 헤매면 모두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다윗이 깨어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 전체가 멸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야 54장7-8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 교리따라 살던 자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이 크게 긍휼을 베푸십니다.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징계받는다.
그러나 돌아오면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회개할 때 예수의 피가 그의 죄를 씻고 다시 인도하십니다.이런 인도하심이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거역할 때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십니다.그러나 회개할 때는 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이것이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4: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죄악이 빼빽한 구름처럼 가리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의심의 구름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진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천국 길이 선명해진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해주셨기 때문에 이런 생명 길이 열리는 것이다.
구속하심을 받았을지라도, 다시 죄악에 빠지고 회개없이 살 때,
의심이 들어오고 천국 소망이 사라진다.
교회는 다니지만 주님이 멀어지고 천국이 멀어진다.
구속받은 자가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저주와 멸망의 늪에 다시 빠진다.유일한 해결책은 다시 순종하는 것 밖에 없다.
답답하다고 예언자 은사자 찾으면, 더욱 미궁에 빠진다.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징계가 왔다.
풀기 위해서는 다시 회개하고 순종해야 한다.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안 된다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라.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다.십계명을 기준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악한 생활을 버려라.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남의 가슴을 도려내는 독한 말을 금지하라.
음란한 생각을 버려라. 불의의 소득을 탐하지 말라.주님 뜻을 거역하면서 교회만 열심히 다니는 것은 구속받은 자의 길이 아니다. 주님의 저주가 더 심해진다.
고통과 저주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요엘 2장 12-13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고통 속에 있을 때 이제라도 금식하며 애통하며 회개하라.
남 보라고 옷을찟지 말고, 너의 완악해진 마음을 찢어라.
형식적인 신앙생활 버려라.
구속받은 자들이 순종할 때, 주님의 재앙이 그치리라.
한 번의 구속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기 때문에 타락이 오고, 타락하기 때문에 멸망이 오는 것이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너무나 크십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동안에 회개하는 자를 다 받아주십니다.
죄를 지었을 때 때렸지만 회개할 때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자들이 왜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가?
재앙이 쏟아지는데도 왜 인간 교리를 버리지 못하는가?
말라기 3장 7-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주님이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더니,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돌아가오리까?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도다. 그것이 십일조와 헌물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극도로 가난한 자들은 헌금 드릴 여유가 없다. 이런 사람은 생활비를 교회서 지원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 전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주님 주신 축복으로 자기 배만 불리면 저주와 고통이 온다.
아직 재산이 많을지라도 그의 심신의 피곤함과 닫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말라기 3장 13-15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예수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잘 사니까 이렇게 말한다.
완악한 말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것은 헛된 것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고생스선 것이지, 즐거운 것이 아니다. 자기 죄를 슬프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인간 교리에 빠진자들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신경쓰는 자들이다.
이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십니까? 거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탄이 그들을 지배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창성해 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칼빈주의자들이고. 천주교 교리고, 이단 종교들이다.
회개할 기간이 끝나면 즉시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다.
스가랴 1장 3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조상들의 타락한 삶을 본받지 말라. 악한 행실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
주님이 이렇게 외치시지만 주님께 돌아오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외치시는 말씀인가? 예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거짓된 교리를 만들었다.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 순순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오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악한 행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행동입니다.주님께 구속받은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효과가 언제 나타나는가?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순종할 때이다.
구속받은 자가 순종할 때 평강 가운데 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레미야 24장 7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은 항상 성경을 읽지만 그러나 항상 헛된 교리를 만들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구속받고 교회만 다니고,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자이다.
한 번 죄에서 구속받았다고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죽는 날까지 회개하며 순종하기를 힘쓰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사야 1장 27-28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시온은 예루살렘이고,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공평함으로 구속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귀정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가 누구인가?
의롭게 살기 위해서, 예수 피로 구속받는 자들이다.그러나 교회에 돌아와서 패역하는 자, 다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는 패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 구속받는 것이다.이 구속은 구원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평과 의를 이루며 살 때, 그 결과가 구원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해 주신 이유는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패역한 삶을 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결국 버림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14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서, 그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밖으로 나가면 우리의 구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밖으로 나갔다는 뜻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이다.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헛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사랑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조금이라도 사랑의 질서를 깨뜨렸을 때, 즉시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탄이 그 틈을 타서 그의 천국 길을 망가뜨린다.
그의 욕심을 더 강하게 하여 주님을 떠나게 만든다.
교회 직분을 가지고, 더 욕심부리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간음을 한다.
이런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사탄의 놀이터로 변한 것이다.
이사야 51: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들고 건너게 하신 분이 어찌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겠는가? 이스라엘을 사탄의 손에서 구출하시고 구속해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에 나와서 주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항상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주님의 보호가 그들을 떠났고, 고통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적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다급해진 모세가 손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이 그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위기가 올 때 먼저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구속된 자들이 회개와 순종을 중단할 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때 회개치 않으면 멸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양의 피로 구속받고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 때 모세가 결사적인 기도를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았다.
한 번의 구속은 결코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항상 구속받은 자 답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장 2-5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짐승의 피를 통해서 구속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구속과 은혜를 받았던 자들이 타락하기 때문에 멸망되었다.
오늘날도 예수 피로 구속받고, 죽을병에서 치료받고, 많은 문제해결을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되는 것이다.
어떻게 몇 번 죄에서 구속받은 것이 구원받은 것이 되는가?
구속은 세상에 살면서 회개할 때 받는 것이고,
영원한 구원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 받는 것이다.
몇 번 죄에서 구속받은 경험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렇게 착각하는 자들이 칼빈주의자들이다.
처음 교회 나오는 순간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혀 성경에 맞지 않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어떻게 순종하려고 노력하겠는가?
하나님의 일을 귀찮게 여기고, 오직 세상 것을 얻기위해 달려갈 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6-7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구속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의 거울됩니다.
거울은 사람이 행동하는 그 대로를 나타나게 합니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구속받은 교인들이 불순종하고 멸망하는 장면을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우상숭배하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오늘날도 우상숭배하면 지옥가는 것이다.돌부처 섬기는 것만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는가?아니다, 성경은 탐심가지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교회 다니면서 돌부처 앞에 절하는 자가 어디있는가?그러나 세상 것을 탐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다.
하나님보다 세상 쾌락과 명예와 돈을 더 사랑하는가? 자존심 버리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지는 죄이다.
고린도전서 10장 7-8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구속받은 자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삼천명이 죽었다.
우리도 간음하지 말자. 신약에서는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 행위다.
동성애는 남녀간의 간음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교회가 너무 타락하니, 동성애를 두둔한다..
마태복음 5: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tv, 인터넷에 음란물이 넘친다.
오래 보면 저절로 간음자가 된다. 저절로 음욕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세대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관리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음란의 홍수에 떠내려간다.
모든 교인들이 그렇기 때문에 나도 괜찮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지 말라.
회개치 않는 자는 모두가 심판을 받는다.
노아의 때를 생각해 보라, 세계에 수억의 인구가 살았지만 오직 8명, 회개하는 노아의 가족들만 물에서 구원을 받았다.
남이 지옥에 간다고 나도 가는가?
이런 자는 너무나 어리석은 자다.
지옥은 견딜만한 곳이 아니다.
어떤 권사님은 지옥 불이 던져졌는데,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기 눈알을 뽑아버렸다. 눈을 뽚는다고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 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9-10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양의 피로 구속받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자들이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려죽었다.
예수피로 죄를 씻음 받은 자는 구속받은 자이다. 그러나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면 영적인 뱀인 귀신들에게 죽는 것이다.
천국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행활하면서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을 탓하는 것은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멸망을 보면서 우리는 멸망하지 않아야 된다.
인간 설교는 교회에 헌금만 많이 하고, 주일만 잘 지키면 천국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구속받은 후에 멸망했던 것을 잊지 말라.이 말씀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한 사건을 기록하였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저들의 멸망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죄에서 한 번 구속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순종하라.
구속받은 자는 끝까지 순종하고 회개해야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2-13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만하면 됬다 하는 순간에 그는 넘어진 것이다.온전해진 자는 하나도 없다. 항상 부복한 가운데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자신이 완벽하다고 하는가? 거짓말하기 때문에 사탄이 합법적 들어올 통로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훈련받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주님이 허락하십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징계하실 때, 원망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라.
훈련받기 싫어하고, 회개하기 싫어하는 자는 버림받는다.
고린도전서 10장 20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하나님 백성이 죽은 조상을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아니고 귀신이 받는 예배이다.
부모가 천국에 갔던 지옥에 갔던 제삿날 올 수 없다.
죽은 자를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은 모두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 된다.
효도는 부모가 살았을 때 하라. 죽은 후에 하는 것은 가짜다.
시편 106편 10-12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죽이려고 무장군대가 추격하였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그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셨다.군인들이 뒤 따라오다가 홍해에 수장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하나님이 원수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그러나 구속받은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시편 106편 13-15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미구에,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망각했다.
그들이 욕심부렸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애굽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설마 내가 불순종한다고 주님이 나를 버리겠는가? ”
구속받은 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세상 욕심을 이루며 살았다.
지금 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들은 불종하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만 주님께 달라고 요구했다.
주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파리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 열심히 기도하여, 물질 축복받고, 병고치고, 은사 능력받고, 예언하는 자들의 실상이 어떤가?
세상 것들을 풍성히 받지만,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기쁨과 평안이 없고, 천국 소망이 없고, 우울해지고, 그 영혼이 파리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 축복에 목마르지 말고, 천국 길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 106편 16-18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
자기 명예와 욕심 때문에 간부들이 모세를 질투하고 대적했다.
그 때 불이 나타나 그들을 살라버렸습니다.
이들도 애굽에서 나올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홍해를 건널 때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여 주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구속받은 후에 불순종하니까 멸망당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2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불순종하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결렬되게 만들었다.
모든 약속은 쌍방이 지키는 것이다. 한 쪽이 지키지 않으면 그 약속은 자동 결렬되는 것이다.
약속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 모세가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한 번만 저들을 용서해주세요.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에, 주님이 노를 멈쳤습니다. 한 두 번은 주님의 종이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진노를 멈추십니다. 그러나 계속 거역한다면 주님은 심판을 멈추지 않습니다.
시편 106편 24-27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스라엘이 낙토를 멸시했다, 낙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을 갖지않고 장막 안에서 원망했다.
오늘날 천국의 소망을 갖지 않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원망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맹세하기를 너희는 광야에서 엎드러지리라.
광야 길 가면서 멸망하는 것은 신앙생활하면서 멸망하는 것이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왜 이렇게 멸망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고, 남을 미워하며 ,자기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 주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교인들이 많다.
구속함을 받은 자가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다 멸망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29-29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오늘날 교회서 가장 큰 문제는 죽은자를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는 것이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죽은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얻어먹고 죽었다.
주님이 그들에게 노를 폭발하셨습니다.
재앙이 쏟아지고 극한 유행병이 온 백성에게 돌았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도 죽은 조상을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고 제사지낸 음식들을 나눠먹는가?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 깨닫고 순종해야 한다.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이 별개인가?
김세윤 박사의 구원론에 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가 택자의 죄를 위해 ‘단 한 번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그의 원죄(original sin, 原罪)’ 그리고
‘그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자범죄(actual sin, 自犯罪)’를 다 구속(救贖)했으며, 그 결과 그가 구원(救援)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구속(redemption, 救贖)’과 ‘구원(salvation, 救援)’을
연속선상에 두지 않고, 전혀 별개로 구분지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다고 절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구속을 받아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속받은 자’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그가 삶을 다 산 후에라야 결정된다고 한다.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ism)’을 비롯해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 Church)’ 등이
그렇게 가르친다(한국의 김세윤 박사 역시 이들의 견해를 추종하는 듯하다).
안식교 창시자 ‘엘렌 지 화잇(Ellen G. White)’의 ‘조사 심판론(調査審判論)’은 이들의 주장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의 배경엔 두 가지 논거가 있다.
◈ ‘구속’과 ‘구원’을 별개로 봄
그들은 ‘구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이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인 동시에 인간의 영역’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 ‘구속’을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속’도 ‘구원’도 다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또 그리스도가 택자를 ‘구속’만 해놓고
‘구원’은 인간에게 떠넘기질 않으며, 구속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신다고 한다. 다음 구절은 ‘구속’은 물론 ‘구원’도
‘사람의 일’이 아닌 ‘그리스도의 일’로 규정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구속, 엡 1:7)’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0-10).”
성경이 하나님을 ‘구속자(救贖者)’인 동시에 ‘구원자(救援者)’로 일컫는 것 역시 ‘구속’과 ‘구원’을 동일시 한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사
60:16).”
실제로 성경은 어휘상 ‘구속’과 ‘구원’을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영어번역에서도 구속(redemption, 救贖)을
구원(salvation, 救援)으로, ‘구원(salvation, 救援)을 구속(redemption, 救贖)으로 서로 혼용한다.
물론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에선 논리상 ‘구속’이 앞에 위치하고 ‘구원’이 마지막에 존치되지만,
실제로 둘은 동일선상 위에 있으며 ‘시간차(時間差)’가 없다. 이는 ‘구속’의 효과가 최종의 ‘구원’에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값으로 사서 소유한다’는 ‘구속(救贖)’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구원’개념이 함의 돼 있다.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는 그의 절대적인 주권과 보호아래 있어 그의 구원이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딤후 4:18).”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함
그들은 ‘구원의 확신(confidence of salvation)’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한다. 그에 대한
그들의 논거는 ‘구원’은 인생 최후에 결정되는데, ‘구속’만 받아놓고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구원'을 미리 예단할 순
없다는 것이다.
설사 누가 이제껏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만큼 완전한 삶을 살았더라도, 아직 그에겐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남아 있으며, 그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예컨대 그가 어떤 심대한 도덕적인 타락을 할지 혹은 배교하고 하나님을 떠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가변적인 미증유(未曾有)의 미래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이렇게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그것들이 마치 단절된 불연속선(Iine of discontinuity, 不連續線)상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그들의 논거가 비과학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시간이란 그렇게 무우 자르듯 토막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계 초침이 ‘째깍’하는 순간 ‘현재’는 이미 ‘과거’로 넘겨지고, 과거로 넘겨진 ‘현재의 공석(空席)’에 ‘미래’가 곧 바로 들어와 또아리를 튼다.
이런 점에서 ‘현재 없는 미래만의 미래, 미래 없는 현재만의 현재는 없다’고 함이 옳으며,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토막내 그의 신앙을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지성적이고 위험하다.
그가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곧바로 현재로 유입될 미래에도 그를 믿을 것을 예단할 수 있다. 아니 ‘구속의 효력(the effect of redemption)’이 그로 하여금 계속 믿음을 견지토록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설사 그에게 일시적인 ‘도덕적 타락과 배교’가 있을지라도 그가 받은 구속과 그의 믿음은 무효화되지 않고 ‘회개와 새 출발’을 가능케 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여전히 견지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한 영원 속에서 성취됐다’는 사실에서 ‘구원의 확신’은 더
‘설득의 근거’를 갖는다. 자기가 기여한 것이 없는 ‘자신의 원죄’를 소급해 속(贖)할 수 있다면, 아직 맞닥뜨리지 않는 ‘미래의
자범죄’를 앞당겨 속(贖)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오직 자기(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효력이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뜻과 함께 ‘택자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다 속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도 ‘구원’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동시에 다 포함시켰다. “하나님이 그처럼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며 또 건져 주시리라 믿습니다(고후 1:10).”
이는 다만 ‘현세의 환난에서의 구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속사적(救贖事的)인 구원’까지 다 함의한다.
호크마(Chokmah) 주석은 이 구절을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횟수에 제한 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고
해석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원성’에 대한 다음의 한 신학자의 말 역시 적절해 보인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속죄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 뿐이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시간을 느끼고 사는
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이다. 영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영단번에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창세기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로마서 5: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
1. 축복의 원천인 은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물질적이고 영적인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귀한 은혜를
거저 주십니다.
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의해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이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로
표현됩니다.
따져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이 땅에 사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빛과 공기와 물 등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실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생명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단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용된 은혜라는 의미의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은총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약 250회나 사용된 ‘헤세드’는 ‘인자하심’이요 ‘은총과 은혜’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70인 역은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긴급히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실 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욥이 심히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셨다고 할 때 ‘친절’의 단어가 곧 ‘헤세드’이고
또 다윗이 대적에 의해 가난하고
궁핍하고 금식으로 인하여 육체가 수척하실 때 하나님이 ‘헤세드’(인자)를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헨’이 있는데(약 65회 사용) 이는 ‘매력’, 또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그 주된 의미는 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내려주는 ’은총‘으로서 이 은총의 행위를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헤브’가 있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족장들이나 이스라엘의 믿는 자들, 특히 야곱이나 솔로몬 등 개인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로서 학자들은 이 단어를 두고 구속용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5:10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텍함 받은 주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헤브’입니다.
‘라함’이라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심판을 유보하실 때(신 13:7, 왕하
13:23),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실 때(사 55:7), 이스라엘을 자기 땅으로 회복하실 때(신 30:3, 왕하 13:23)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은혜’ 즉, ‘카리스’라는 단어가 약 155회 정도 등장하는데 생명과 구원 모두가 하나님의 한없는 선하심과
은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모두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쌍히 여기시고 무조건적인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카리스’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버려진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이나 자비로운 인자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로마서 5:17)
무엇보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출현 자체가 가장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이 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임을 시사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그렇다면 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에 관한 은혜입니다.
지옥에 갈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은혜는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순간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한 끼의 식사 대접이 아닙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한 것은
구원의 밧줄입니다.
모든 위기에 처한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에게 쓸데없이 적합하지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조롱이요 놀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를 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 즉 당장
위험에서 구출하는 일입니다. 그만큼 사망에 처한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고 망가진 존재로 전락했는지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범죄 한 결과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가야 하는 곳은 지옥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유일한 살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입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감사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속의 능력과 동일시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궁극적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자연 만물을 운행하시고 통치하시고
구속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다시 말해,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고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솟아나고 바닷물결이 출렁거리는 것이 죄인의 눈에는 그저 생기는 것 같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소리 같지만 아침에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것도 우리 구원을 위한 은혜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은혜(이사야 63:7 ~ 14)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헤세드)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사 이제 어디 계시냐.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히브리서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 특별은혜가 왜 특별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자면 두 가지 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인간의 안에는 양심이라고 부르는 도덕법을 심어두셨고,
인간 밖에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도록 조치했습니다.
이것을 일반은혜라 부릅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즉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곧바로 거부하거나 왜곡하고(롬 1:18, 21~23, 28)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필요와 지식을 모두 상실한 채 영적인 어둠에 갇혀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는데 이것을 우리는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이
명백히 증언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특별은혜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들을 알아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구원하는
은혜가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존재들에 대해 동일한 은혜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보편구원론자인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같은 이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이전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아담, 에녹, 노아 등)은 오직 일반은혜만을 소유했고 일반계시의 빛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이도 자연의 빛과 그들의 문화 속에 심겨진 모든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와 에녹과 노아 등이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았음을
증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가죽옷의 보호’(창 3:21)를 받았습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뒤에 승천하였고(창 5:24),
노아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창 6:8).
이 모든
사례들이 범죄한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증언합니다.
이에 오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 왜 특별한 은혜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별은혜가 왜 특별한가를 알아봅니다.
첫째, 특별은혜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나, 헨, 아헤브, 라함 그리고 헬라어 카리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을
뜻합니다.
죄인이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거듭나지 않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과 관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사도 바울은 ‘큰 사랑’(아가페)라고
표현했습니다.
“긍휼(엘레오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아가페)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 (파피루스로 된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125년경의 P52가 있고, 현존하는 98개 파피루스 필사본 중 2세기경의
것으로 P90, P98 등이 있고 나머지는 3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았기에 오래된
것은 낡아지고 사본 간에도 차이가 나고 불일치가 나면서 원본과 같은 내용을 복원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성경의 ( )안의 내용은 사본
간의 이런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크레스토테스)으로써 그 은혜(카리스)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7)
둘째, 특별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심으로 특별합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어 구원을 받은 백성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겐 구원을 획득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의지가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숨 쉬며 기동하고 생존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즐기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더 기막힌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업만 쌓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일이 우리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회사를 위한
일이었다면 누가 그를 잘했다고 인정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무자격자에게 은혜를 주시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셋째, 특별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카리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며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넷째, 특별은혜는 구속받은 사람 안에서 특별한 능력으로 나타나기에 특별합니다.
특별은혜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인생을 180도로 바뀌게 합니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 안에 함께 내주하면서 이 인생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죄와 마귀를 섬기던 옛날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조금씩 거룩한 삶의 자리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킵니다. 정말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난 얼굴, 짜증
내던 습관, 고함치고 불친절한 말투와 태도가 바뀌어 집니다. 전에는 조금만 지적하고 찔러도 금새 얼굴이 벌개지고 경직되고 불편해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모든 공격과 반대와 조롱과 지적에도 굴하지 않고 다만 평화롭게, 여유롭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능력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려 애를 씁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2. 두 개의 은혜
신학적으로 이 구원의 은혜는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일반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은혜입니다.
무엇이 ‘일반은혜’입니까?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자연의 변화를 유지하십니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이용하시어 과학 문명을 창달케 하시어 우리가 문명의 생활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노래를 즐겨하고 시를
짓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반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일반은혜가 없다면 이 지구상에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노예가 된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죄인에 대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어 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순종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도록 돕습니다.
이것을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원죄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 본성은 물려받은 원죄로 인해
부패되고 타락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능력을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로 올 능력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통해 은혜를 얻을 수 없고, 다만 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Admonition and
Grace/ 훈계와 은혜).
그는 이 은혜가 ‘특별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새로운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특별은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역사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2)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신자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심어 주어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사망의 감옥에서 죄인을 자유롭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은혜의 감격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허공에 떠도는 빈말일 뿐일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아무리 강조하고 설명해도 아이는 눈만 껌벅거린 채 무슨 영문인지 모를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우이독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정말로 은혜이고 선물인지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은혜의 몇 가지 특징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은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이 행한 덕있는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따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둘째, 은혜는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로 특정한 사람들을 창세 전에 택하여 두셨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대로 기울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 은혜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옵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이 패역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갈 때 오직 의인 노아만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창세전에 택하시어 그를
통해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8)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은밀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늠하지 못합니다. 시련을 거친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행함이 하나님에 비해 얼마나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무능력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을 누가 놓았느냐”(욥 38:2~6)
그런데 이 엄청난 역사하심이 인간에게는 비밀하게 임하고 알려지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토라지고, 자신의 한 일을 부풀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은 내가 한 일이다’고 소리치며 자랑하는 것이 속성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우주 역사를 창조하시고도 전혀 내색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이러한 은혜의 역사하심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도하는(preventing) 은혜’와 ‘따르는(subsequent) 은혜’, ‘시작하는(operating) 은혜’, ‘협력하는(cooperating) 은혜’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1) 인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심령을 성령으로 변화시키심으로 죄인의 필요를 자비롭게 미리 만족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영적으로 치유하고 새 생명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시59:10)
2) 따르는 은혜란,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죄의 오염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촉진하는 은혜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6)
3) 시작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거듭나지 않은 자의 영혼에 그들의 협조 없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4) 협력하는 은혜란 성령께서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율에 따라 뜻하고 행동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3)
4. 결어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인간 본성의 능력에 대한 유명론과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의 낙관론에 날카롭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불신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며 그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를
배격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감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 이외 가진 것이 없다”고 갈파했습니다.
불신자의 의지는 오직 죄를 짓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성취하고 이룬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3~!4)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하고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에 인간의 선의나 공로 따위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징계를 행할 자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하고 놀랍고 비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숨 쉬고 살고 기동하고 생동하며 희로애락을 가지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은혜는 정말로 부질없는 이 인생, 나무토막 같은 이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인 인생을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구속하심과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심과 영생 복락의 축복하심의 은혜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평생토록 가슴에 담아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액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다섯째, 특별은혜는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므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진짜 은혜는 지옥에 가는 길을 멈추고 천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차량을 안전한 길로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고 했고 구원받은 상태를 “너희가 법 아래(히포 노몬)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히포
카린)에 있음이니라”(롬 6;14)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거하도록
하였습니다(벧전 5: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거대한
담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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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 책 제목
헬라어 본문에는 ‘프로스 로마이우스’(προς Ρωμαιους: 로마에 있는)라는 표제어로 되어 있다. 이 책은 바울서신으로 수신자가 로마교인들이었으므로 한글성경에서는 바울서신의 일반적인 제목에 따라 ‘로마서’로 불린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서 저술 당시부터 거의 의심된 바 없다. 본서의 초두에서 기록자 자신이 바울임을 밝힌
것이나(1:1) 초대 교부들의 증언(이레네우스,이그나티우스,로마의 클레멘트 등), 본서에서 사용된 문체나 내용 그리고 성격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유사함을 보아서도 본서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본서의 끝부분의 두 장 곧 15,
16장이 바울의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약 300여 개에 이르는 로마서 사본 등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이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후에 삽입되었다는 중거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약시 바울의 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서는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더디오에 의해 대필되었다(16:22).
한편 기록자 바울은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평원에 위치한 다소에서 출생한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매우 엄격한 바리새파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더
명료하게 설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 특히 로마서는 그러한
바울의 역량이 잘 드러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2) 기록연대
본서의 기록 연대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5:19을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A.D.53-57)을 거의 끝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중 한 곳에서 본서를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울은 여러 번
로마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히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하였는데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로마로 가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곧바로
가지 못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함 연보를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15:22-29). 이 사실의 배경이 되고있는 고후 9장에 기록된 연보 기사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본서는 고린도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마게도냐에서의 바울의 사역과 이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계획이 기록된 행 20장의
기사와 또한 이러한 배경이 반영된 롬 15:22-29를 비교해 볼 때 본서는 바울의 제 5차 예루살렘 방문(A.D.58년) 직전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고린도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겨울을 맞아 항해를 재개하는
이듬해 봄까지 3개월을 기다려야 했으므로(행 20:3) 이 기간 동안 본서를 집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의 기록 시기는 대략
A.D.57년 후반기가 될 것이다.
3) 배경
본서의 일차적인 수신자들이 살았던 당시의 로마에는 사도들에 의해 직접 세워진 교회가 없었다. 단지 전쟁 포로 또는 상업 등의
이유로 로마에 머물게 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들이 모여 자체적으로 교회를 이루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로마는 영국에서 아라비아까지 뻗어있는 대제국의 수도로서 교외 지역의 주민까지
포함해서 약 80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매우 거대한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는 매우 부요했으며 세계적인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으며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잡다한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대내외적인 문제점들에 봉착하기가 쉬웠다.)
먼저 내적인 문제들을 살펴보면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함께 섞여 있었던 그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마찰이다. 여기서 첫째로
유대인 성도들에 문제가 있었다. 즉 유대인 성도들은 비록 예수를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여 보내주신 메시야로 믿긴 했으나 여전히
구약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야만 구원을 얻으며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유대교
육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구원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릇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하게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그릇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과는 반대로 이방인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참 자유가
아닌 방종에 이르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그들은 비록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방 풍습과 생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구원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적용 문제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단히 힘써야 할 것과 속히
썩어질 구습에서 벗어남으로써 성화에 이를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로마 교회는 로마 정부의 세속 권력에 대한 순종 문제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A.D.41-54년) 황제 때에 로마에서 추방되는 박해까지도 겪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 현실적 관심사였다. 이에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윤리적 의무들에 대해 설파함으로써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각각의
삶의 현장 속에서도 성실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훈하였다.
3. 기록 목적
1) 로마 방문을 위한 준비
당시 로마 제국 도처에서 이방 선교 사역에 몰두하던 바울은 자신이 친히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시급한 문제로
인해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로마 교회에 알리며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로마 성도들에게 참 구원의 원리를
미리 편지로 설명함으로써 전에 그들이 들었던 복음에 대한 오해, 곧 구원이 인간의 선생이나 공적 또는 율법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인
양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시정하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구원받음을 설파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했다.
2) 로마 교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바울은 로마 교회가 당면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등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이를 해결함으로써 로마 교회 내의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목하게 하는 것이었다.
4. 주제
1) 복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택된 사도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1:1).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신 복음(1:2)이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1:1; 15:16).
둘째, 복음은 선지자로 말미암아 미리 약속되었다(1:2).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복음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
셋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된 것이다(1:2). 성경에 기록된 복음 약속의 대상,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넷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복음은 말과 글, 사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다.
다섯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이다(1: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이고, 이 의(義)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3:22).
여섯째, 복음은 심판에 관하여 말한다(2:16).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2) 하나님의 의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의’라고 밝힌다(1:17). 하나님의 의란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신자들에게 선물로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결코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이방인은 율법을 받지
못했으나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2:14-15). 그러나 이방인 중에서 양심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9).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를 얻을 수 있다(3:22-24).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만이 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다(10:9).
3) 의에 합당한 삶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얻었다고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6:1-2).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으니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6:11). 그런데 죄를 짓지 않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8:3-4).
아울러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다양한 삶(하나님, 교회, 사회, 세상권세,
이웃) 속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12:1-2).
5. 특징
1)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 드러냄
로마서는은 로마서가 서신(書信)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와 윤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문 같은 인상을 주며,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죄, 진노, 사망, 율법, 의, 칭의, 신앙, 생명, 소망, 할례, 이스라엘
등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2) 가장 길고 자세한 서신
서신의 분량 자체도 가장 길뿐만 아니라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자세히 언급되고 있는 점도 그의 다른 서신과 구별된다. 아울러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함으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6. 구조
1) 도입 : 인사와 간구(1:1-17)
2) 하나님의 의(1:18-11:36)
3) 의인의 삶(12:1-15:14)
4) 종결 : 방문 계획과 문안 인사(15:4-1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