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사람(시편 9:1)
I will praise you, O LORD, with all my heart; I will of all your wonders.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뭇랍벤에 맞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무트 랍벤'(*)은 지금까지도 난해한 용어이지만 아마도 노래의 곡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알무트'튤 분리된 두 용어로 보지 않고 한 단어로 본다면 이 용어는 '여성의 목소리로'라는 뜻이 된다(Craigie).
성 경: [시9:1]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주의 모든 기사 - 이 말은 다윗이 이방의 군대와 싸워 크게 승리한 것을 가리킨다(5, 15절). 혹자는 이 승리가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물리쳤던 승리(삼하 10:6-10)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Rawlinson). 한편, '기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플레오트' (*)는 '경이로운 일'을 의미하는 용어로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말씀의 사람(시편 18:30)
암송성구 #.56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As for God, his way is perfect; the word of the LORD is flawless. He is a shield for all who take refuge in him.
(도입 이야기)
희랍의 민화 이야기 중에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이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마을에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가사는 아주 단순하여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하였다.
하루는 임금님이 그 가게에 들어가서 묻기를 "왜 자네는 항상 같은 노래만 부르는가?"
그러자
그 포대 만드는 사람은 "예, 그것은 제가 너무 가난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인도하는 아주 넓은 광야로 나갔는데 그
광야에는 수 많은 샘물들이 솟아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샘물 앞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샘물을 찾았는데 내
샘에서는 물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샘물의 구멍을 넓게 뚫어주면 샘물이 많이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에 긴
장대를 가져다가 샘물을 마구 쑤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샘물이 솟구치더니 그 다음에는 아예 물이 솟아오르지 않았지요.
천사가
말하기를 샘물이 솟아나는만큼 세상에서 재물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내가 내 샘물을 막아버렸기에 내 신세 한탄을 하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어진 임금님은 포대만드는 사람에게 신하를 시켜 그 날 저녁 빵 한 덩어리를 보냈습니다.
궁궐에서
보낸 떡을 받은 포대만드는 사람은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인데 떡 한덩어리로는 끼니를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 제과점을 찾아가서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낸 빵인데 이 빵을 받고 마른 빵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빵집 주인은 한 바구니의 빵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임금님이 그 가계 앞을 지나는데 여전히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상하구나!
아직도 부족한가?
그 다음에는 거위요리를 접시에 담아 보냈습니다.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사람은 고기도 늘 먹던 사람이 먹어야지 갑자기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안 될텐데 하며 거위요리를 고깃간 집 주인에게 가지고 가서 한 주일 동안 가족들이 먹을 빵을 구할 돈으로 바꿨습니다.
참 이상하구나!
아직도 해결이 안되었다니 하며 이번에는 임금님이 신하에게 일을 마치고 좁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 위에 금화를 담은 자루를 놓아두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포대만드는 사람은 몇 십년을 건넜던 다리인데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며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금화를 담은 자루를 신하가 다시 궁궐로 가져왔습니다.
밀가루 포대만드는 사람은 자기에게 굴러온 복을 자기 스스로 막아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일생동안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무슨 복을 받았는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을 내가 막아버린 밀가루 포대 만드는 노인은 아니었는지요?
하나님의 도(말씀)의 특징
첫째는 완전(完全)하다(타밈)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한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정미(精美)하다(차라프)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하여 진실한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방패가 되신다(마겐)
방패가 되는 말씀은 공격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수비용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일생동안 겨우 겨우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경우를 돌이켜 보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용산구 용산동 일명 해방촌이라는 곳에서 북아현동 한성 중학교까지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무려 2시간 가량 소요됩니다.
그런데 3년 개근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남산 도서관 앞을 지나 서울역을 지나 만리동 기를 지나 아현동으로 갑니다.
그리고 굴레방다리 을 거쳐 한성중학교로 가는데 근처에 중앙여자중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등교길에 남여학생들이 골목에 가득합니다.
길 도(道), 말할 도(道) / 책받침(辶) / 쉬엄쉬엄 갈 착(辶) + 머리 수(首)
미끄러지다, 물러가다, 선위하다
道자는 ‘길’이나 ‘도리’, ‘이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道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首(머리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首자는 ‘머리’라는 뜻이 있다.
道자는 길을 뜻하는 착(辶)자에 수(首)자를 결합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인도하다’ 또는 ‘이끌다’였다.
그러나 후에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바른길’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도리’나 ‘이치’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寸(마디 촌)자를 더한 導(이끌 도)자가 ‘인도하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1. 다니는 길.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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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聽而塗說 論語
도청이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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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也者 不可須臾離也 中庸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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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者 萬物之始 韓非子
도자 만물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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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陰一陽之謂道 易經
일음일양지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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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未知吾道 左氏傳
오미지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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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道非耶 吾何爲於此 史記
오도비야 오하위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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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謂禮樂 禮記·注
도위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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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樂得其道 禮記
군자악득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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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有道者 有德者 周禮
범유도자 유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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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瞻周道 詩經
고첨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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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何道何行而可 荀子
설하도하행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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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道姚氏 史記
북도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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倍道赴援 南史
배도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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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旍亂烟道 龍駕溢雲區 王融
봉정란연도 용가일운구
은혜 관련된 예화
은혜(恩惠)
1. 히브리어
헨 : 자비함, 즉 주관적으로 호의, 은혜, 또는 객관적으로(아름다운) 은총, 은혜(로운), 즐거운, 현숙 한, 사랑스러운.
토브 : 넓은 의미에서 선하다(또는 잘되다, 타동사로 선을 행하다, 선하게 하다, - 더 낫다(더나은 일 을 행하다), 기쁘게 하다, 선하다(선을 행하다, 선히 여기다)
라하밈 : 죄사함을 말하는데(출 34:6), 긍휼, 사랑, 호의 자비, 애정 등 표현.
2. 헬라어
카리토 : 은총을 베풀다, 크게 호의를 가지다, 축복을 하다.
카리스 : 긍휼, 은혜로운 행위, 선물, 애정스러움, 기쁨을 주는 것
기쁨(카라) - 은혜(카리스) - 은사(카리스마)
3. 한자
恩惠 : 베풀어 주는 혜택, 고마움.
은혜에 대한 성구
1. 은혜란 무엇인가?
삼하 15:25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
시 5:12 - 호위하는 것
행 20:24 - 복음
갈 1:15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엡2:8 - 거저 받은 것이 은혜
벧전 1:7-10 - 구원이
벧전 3:7 - 생명의 은혜
2. 은혜는 누가 주는가?
왕상 3:6 - 주께서
출 33:19 - 하나님께서
요 1:17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후 1:2 -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살후 2:16)
시 90:17 - 하나님께서
롬 12:6 - 은사를 받게 됨
3. 은혜의 가치 평가
행 15:11 - 은혜로 구원얻음
롬 3:24 - 의롭게 함
롬 4:16 - 후사가 됨
롬 5:17 - 생명의 왕 노릇함
고전 15:10 -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고후 9:14 -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것
4. 은혜를 받은 자세
욥 33:26 -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시 31:19 - 주께 피하는 자
잠 3:34 - 겸손한 자에게
잠 14:9 - 정직한 자가
롬 5:20 - 죄를 인식함으로
히 4:16 - 보좌앞을 담대히 나아감으로
벧전 1:13 - 은혜를 바라므로
가장 큰 은혜는 "겸손(謙遜)"
인도의 철학자 브하그완은 겸손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 합니다.
겸손은 약자가 아니라 강한자가 가진 “Self-Control” 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겸허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함으로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즉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올바른 지성, 상대가 가진 장점을 장점으로 볼 줄 아는 안목과 인격적 여유, 상대에게서 배울 것을 찾고 배우려는 자세처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인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배움의 지경을 넓히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힘을 제공하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환경을 바꾸며 나를 세우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강한 당신, 용기 있는 당신,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당신에게서 드러나는 당신의 겸손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성공 여정에 힘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Humility)
- 앤드류 머레이(Andew Murray)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192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9세에 영국의 아버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십대에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후
네덜란드의 우크레흐트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0세 되던 해에 남아프리카 부롬폰테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볼체스터,
케이프타운, 웰링턴에서도 다년간 목회를 하였고 그 밖에 선교, 교육 분야에 정통한 인재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책 외에도 수많은 경건 서적들을 남겼는데 심오함과 평이함, 실제성을 두루 갖춘 그의 책들을 읽고 영적인 도움을 얻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수도 없을 것입니다.
토기장이에서는
이번호부터 비록 짧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번역하여 실고자 합니다. 이 책은 이미 전 총신대학교 학장을 지내신
김희보 목사님께서 1977년에 번역, 출간하셨지만 이 책은 원서의 완역이 아니고 번역본의 어법과 어휘 등이 현대 젊은이들에게
익숙치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비록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졸역이라는 비난은 면치 못하겠지만
저자가 말하는대로 지극히 아름다운 겸손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은혜와 같이 넘쳐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의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더라."(계 4:10,11)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에게는 한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자신의 영광과 완전함에 참여하는 존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고, 그리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피조물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선(goodness)과 영광(glory)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선과 영광을 소유할 수 있거나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goodness)과 영광(glory)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고 그 관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진실하게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원한 축복과 행복을 위하여 현재는 물론 영원토록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빈 그릇과 같이 비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신의 능력과 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은 그저 한 순간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삶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한 영역입니다. 본빌작인 면에서 볼 때 겸손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것과 더불어 겸손의 상실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가 됩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이미 타락해 버린 천사들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빛으로부터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뱀이 교만-그의 교만함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의 독을 우리의 최초의 부모라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내쉴 때, 그들 또한 그들의 높은 지위를 잃고 멸망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서나 교만과 자기를 높이는 것은 지옥의 저주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다시금 인간이 하나님과 원래의 진실한 관계를 누리기 위해 상실된 겸손을 회복시킬 만한 수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겸손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겸손의 영광에 참여케 하셨고,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 분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겸손을 소유하셨고,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도 그분의 성품이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셨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셨던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은 가장 귀한 것이 되었고, 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단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님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토양과 뿌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의 구속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완전한 겸손의 삶으로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셨고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겸손이 곧 우리의 구원이고, 그의 구원이 곧 우리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죄악에서 옮기웠다는 증표를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원래의 상태(original sin)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 모두는 겸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없이는 신앙이나 사랑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기쁨과 삶을 살아갈 힘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겸손이야말로 은혜가 뿌리내리는 유일한 토양입니다. 우리의 모든 흠과 부족함들은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근본된 뿌리가 됩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하고, 하나님을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reason)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이성으로 인해 우리가 실재의 본성과 하나님의 명령의 명백한 필요를 알아갈수록 우리가 더욱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동안 교회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겸손의 본질과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취하여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의 의지와 뜻과 정성을 다해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그에게 역사하여 채워지도록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위치를 내어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했던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뛰어난 신앙을 나타내 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겸손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모본에 있어 겸손에 정당하게 부여되어야 할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 진리-겸손-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도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징표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축복을 받는 비결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모든 우선권을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의 온유와 겸손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겸손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망과 기도, 믿음과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에 관하여 매우 강조하시면서 자주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겸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을 시작하면서 교만은 우리의 본성이며, 교만만큼 더럽고 다루기 어려워서 우리의 통찰을 흐리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잠잠히 그리고 끝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겸손을 얻기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공부합시다. 우리가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고 지쳐서 더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그 교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2 장 구속의 비밀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7-8)
어떤 나무든지 근본된 뿌리를 따라 자라게 마련입니다. 즉 그 나무가 존재하는 모든 기간동안 나무의 씨가 처음 가졌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필요성과 본질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옛 뱀-그는 교만으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로서 그의 본성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이 하와의 귀에 유혹의 말을 속삭일 때, 그의 말들은 지옥의 독을 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뱀의 말을 듣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욕심에 넘어 갔을 때 지옥의 독이 그녀의 영혼과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독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축복받은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dependence)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서 말미암을 모든 후손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었고, 교만이라고 하는 사단의 독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끔찍한 죄와 저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은 우리 인간들 모두 안에 잠재해 있는 교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라들간의 모든 전쟁과 피흘림, 모든 이기주의와 고통, 모든 욕망과 시기, 그리고 모든 상한 마음과 아픔의 삶, 매일 겪는 불행들은 모두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우리 가운데 들어오 교만의 본성과 권세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의 삶에 던져 놓은 교만의 권세는 원래는 지옥에 속해 있던 것이며, 모든 영역을 통하여 막강한 권세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 권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며, 때로는 투쟁하기도 하며, 그것을 멀리 쫓아 내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의 권세가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기인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만으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내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에 있어서도 강한 영적인 권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을 고백해야 하고, 통회해야 하며 교만이 사단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극복하여 떨쳐 버리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영적 권세 아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한 부질없는 싸움은 교만의 뒤에 감추어진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권세와 생명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그가 심어 놓은 교만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부으시는 하늘에 속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알기 위해 "첫째 아담"과 그의 타락을 보았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교만했던 자신을 극복하여, 또다시 교만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겸손의 생명을 주시는 "둘째 아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7)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하심"(골 2:19)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인간의 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가 서고 자라야 할 뿌리입니다. 그 생명은 이 땅 위에서 사역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한가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생명을 연구하고 알며, 더 나아가 그 생명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소유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그분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지를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고 또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은 오직 '겸손' 그 한가지뿐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를 낯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진정한 속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늘로 올리우심과 그 영광은 보좌 앞과 영광의 관을 쓰신 주님께 마땅히 올려져야 할 겸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이 땅위에서 살아가신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어 보좌 위에 앉히신 모든 것이 그의 겸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섬기기 위해 온유와 친절함으로 옷입으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케하심이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보혜사와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보혜사이고 종이시며, 앞으로도 겸손의 표상이 되실 것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셔서까지도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겸손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겸손의 본질이 모든 가지와 잎, 그리고 열매에서 나타아냐 할 것입니다. 겸손이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전부이고 가장 요한 것이며 속죄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힘 또한 우리 안에 그 겸손의 은혜를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며,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겸손으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력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구하지 않을 때 구원의 기쁨이 식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주님만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쁨보다도 겸손을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임하는 것을 환영한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세상을 이길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함과 자신을 낮추심이 얼마나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와 느낌, 연약함들에 대해 무관심한가를 생각해십시오. 또한 정직과 고결함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이웃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그리고 쉽게 화를 내고 그들의 마음에 쓴뿌리를 주며 이간질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만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단에게서 오는 교만은 거의 모든 곳에서 살며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성도인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겸손에 영원토록 입도함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 내 안에 예수님의 겸손이 가득차 있고,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겸손이 넘쳐 흐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보여졌던 그러한 겸손이 없음을 정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이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을 구할 때에야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여!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십시오. 겸손이야말로 구속의 근저에 감춰진 비밀입니다. 날마다 더욱더 이 겸손에 깊이 잠기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곧 우리가 겸손함을 배워 갖추도록 우리의 온 삶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다. 구원이 그러하듯이 겸손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제 3 장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내면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과 아버지(God the Father)와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는 근원과 행하는 권세에 대해 자신이 영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비록 성경에 '겸손'이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도 주님의 겸손하심이 성경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겸손이라고 하는 이 은혜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도록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땅에서는 인간이셨던 예수님에게서 완전한 복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8-9)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자신을 가리켜 "아니요"(not, nothing)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내가 아니요"(not I)라고 표현했던 바울의 표현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리켜 여러번 말씀하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요 5:19)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요 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요 7:28)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요 8:5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요 14:1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요 14:24)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진정한 뿌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위대한 능력의 구속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지금도 교통하시는 구속의 본질과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아무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그의 모든 의지와 능력을 전부 아버지께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사역과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의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나는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만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지만 결국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존귀하게 하사 그의 영광의 오른손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낯추셨고, 항상 하나님이 그 앞에 계셨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더욱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 영과 뜻과 성품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은혜에 동참할 수 있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가득 채우시도록 비워져 있는 그릇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진정한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욕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소욕을 버리고 예수님께 늘 순응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지 않고 아무것도 행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뿌리와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그렇게 피상적이고 무력한 것은 우리가 겸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요, 진정한 겸손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겸손이 어디에서 나며, 또 그 힘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우리 임의대로 행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나누어주신 그 생명은 우리의 죄와 우리 자아를 죽임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생명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그 생명을 얻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거룩한 지식의 비밀을 알고자 노력하십시오. 이 비밀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시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지 빈 그릇으로, 통로로 내어드리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만물이 증인이며,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늬 모든 자녀들이 그 증인입니다. 모든 덕과 은혜의 근원, 그리고 모든 신앙과 진정한 예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주시도록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경배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그의 전 삶 속에 가득차 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와 가졌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셨던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존귀하게 되는 것을 구하지 않으셨고, 그의 능력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당신은 겸손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당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친구들과 세상을 향해서도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겸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드리십시오. 이전까지 결코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이 겸손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제 4 장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 20:27-28)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의 마음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겸손이 나타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그는 사람들이, 특히 그의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겸손한 자가 되기를 얼마나 원하셨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단순히 인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그 말씀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겸손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겸손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산상수훈 중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3, 5)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처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마음이 온유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겸손은 이땅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축복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온유와 겸손 가운데서우리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3.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께 묻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중에 세워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라 칭함을 받는 자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천국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은혜 중에 가장 놀라운 은혜는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가장 큰 자니라."(눅 9:48)
4.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 누가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며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겸손의 세례를 받을 준비된 잔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표이며, 겸손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영광을 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자가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5.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의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에 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리라."(마 23:11)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닥다리입니다.
6. 또 다른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 상좌에 앉으려는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4: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임을 받는 비결입니다.
7. 바리새인들과 세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4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전에서 예배할 때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깊고 진실한 겸손을 충만치 못한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8.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의 권위와 모범,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생각들과 순종하신 모습들을 볼 때 겸손은 제자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9. 최후 만찬 석상에서조차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의 문제를 놓고 다투었습니다.(눅 22:26-27)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길은 겸손에 의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도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겸손에 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을 삶으로 행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겸손이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자의 기도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겸손을 찾아 볼 수가 없음은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모든 성도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와 참된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을 합니다. 또한 신실한 종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번성함과 존귀, 행복을 즐거워 합니다. 언제나 그런 신실한 종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이름은 곧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자유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의 다른 면에 관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 주님의 그 섬김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영향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새롭고 완전한 자유인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한 자유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완전하게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곧 피조물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정신이며, 하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조차 도 섬겨야 하는 섬김의 도를 전심으로 받아 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섬김의 도 위에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화(sanctification)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하는 예수님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눈다면, 너무 낮은 자리라 하여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굽혀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여기 지극히 높은 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더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던 그의 제자들에게 늘 하신 말씀입니다. 높아지고자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이 되고자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함 분이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마음 속에 흘려 보내 주셔서 우리를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지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난님께서는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가 우리에게서 고상함과 대담함, 그리고 남자다운 용기를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가장 고상한 성품임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겸손이야말로 천국의 왕이 보여준 하늘의 정신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겸손케 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보여 주신 것들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과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믿읍시다. 온유하시며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들어와 거하실 것입니다.
제 5 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주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니라"
(눅 22:26)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열두명의 동역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본다면 겸손이 어떠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들에게 있어 오순절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였는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인간에게 불어 넣은 교만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겸손에 우리도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제자들이 얼마나 겸손이라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음을 몇몇 기록을 통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또 한번은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 중 하나는 우편에, 나머지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그들중 누가 과연 우두머리인가를 놓고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항상 겸손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보여지는 겸손의 모습들이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들을 버리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이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에 관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겸손의 중요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열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지만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가르치는 모든 계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에도 그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들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던 어두움의 권세는 구세주되신 예수님의 권능을 전파하기 위해 증인들이 되기 전에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많지만 정작 겸손의 은혜가 결핍된 교수와 목회자, 사역자, 그리고 선교사와 교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전달해주는 통로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는 겸손의 은혜를 지키려는 노력이 미미해서 그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은 가장 중요하고 높은 은혜 가운데 하나라는 교훈을 확인시켜 줍니다.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고, 우선적으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겸손은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실 때에만 능력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외적인 가르침과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교만을 이길 수도 없으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겸손 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리새인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놀라운 겸손으로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도 자신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에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그들 중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그에 따라 일하는 사람에 의한 인간의 미덕입니다. 겸손은 자부심과 반대되는 가치입니다.
겸손의 의미는 어원 적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이 단어는 라틴어 humilĭtas 에서 유래하며 , 이는 '육지'를 의미 하는 근원 부식 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 감각이 나타납니다.
가치로서의 겸손,
사회 경제적 기원으로서의 겸손,
복종으로서의 겸손.
가치로서의 겸손
가치로서 겸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사람의 질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각 사람이 "땅에서"올 때마다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의미는 겸손을 겸허 의 미덕과 관련된 태도로 만듭니다 .
겸손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 한 인간의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누구보다 위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존재가 같은 정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이 굴욕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겸손의 가치는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우월한 복합물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업적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짓밟 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적습니다.
겸손하게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발육, 오만 및 자부심을 거부하고 겸허, 절제 및 구속과 같은 가치를 행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겸손의 특성
미덕으로서 겸손은 행동에 명백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주제의 평등과 존엄성 이해; 일과 노력의 가치 평가;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면서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 친밀감으로 표현하기; 겸손하고 단순하고 구속력있는 행동; 수평 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기; 듣기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고려하고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십시오.
경제적 근원으로서의 겸손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입장은 종종 겸손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은 자원이 거의없고 번영 할 기회가없는 가정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Juan은 겸손한 원산지"라는 표현은 경제적 자원이 거의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복종으로서의 겸손
특정 상황에서 겸손은 더 높은 사례의 권위에 복종하거나 항복하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복종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수장이나 경찰 당국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피하고 오히려 준수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의 겸손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우월과 완전성 앞에서, 그리고 존재의 은혜를 주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하는 선덕 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겸손은 인생의 신비에 앞서 자신의 작은 것을 인식하고,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받아들이고, 선하고 유쾌하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 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은 교만에 저항하고 겸손에 은혜를 베푸시 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겸손을 베푸십시오 ."
그러므로 겸손은 인간이 하느님의 눈에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양심을 요구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겸손의 가장 큰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 안에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신 박탈하는 것으로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이 느낌이 종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남자처럼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상태에있을 때, 그는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순종하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 빌립보서 2:5-8.
겸손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절대 진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 능력으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회의하면서 아는 체하는 회의론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하나님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겸손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시작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 .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진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논쟁을 좌지우지하거나 논쟁에서 이김으로써 자아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섬김과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주장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예수]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 . .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 4:5)
4. 겸손은 모든 지식과 믿음이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비판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념을 허용하셨고 때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원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6. 겸손은 우리 삶이 수증기와 같으며, 하나님이 우리 죽음의 때를 결정하고, 우리의 모든 업적을 주관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3-16)
1908년에 영국의 작가 G.K. 체스터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그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는 미숙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천박한 상대주의"(마이클 노박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한 표징은 인간의 확신에 대해 "오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도하고 인간의 의심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겸손이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불행스러운 일이다.
겸손은 더이상 야망 혹은 야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 겸손은 확신에 반대되는 개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렸다.
전에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었다.
하지만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확신하지 말하야 하는 부분 - 자기 자신- 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 - 하나님의 이성(신적 이성) 등 - 에 대해서는 의심한다.
오늘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회의론자들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조차 의심한다...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겸손이 있는데, 고행을 통해 덕을 쌓으려는 격렬한 노력보다 실제로 더 독성이 강한 겸손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일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겸손해서 구구단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길 위에 서 있다. (Orthodoxy [Garden City, NY: Doubleday and Co., 1957], pp. 31-32)
우리는 가장 최근에 이러한 겸손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서 그러한 겸손의 실상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확신에 대한 세상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시대의 겸손은 절대로 "불이야!" 라고 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기가 세탁 건조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겸손이 미숙한 회의론의 상대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겸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에 대해 적어도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래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느낌으로 시작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바라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함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된 권리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논쟁을 주도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자아를 높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며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 [예수님]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전서 4:5).
4. 겸손은 모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위하여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in humility)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비판을 고려하고 그로부터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신을 허락해 주신 것과 다른 이들을 설득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포대 만드는 사람(희랍의 민화)
그리스 민담
“다리 위에 놓고 올 수가 없어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글쎄, 포대 만드는 사람이 다리에 가까이 오더니 ‘지난 수년 동안은 눈을 뜬 채 이 다리를 건넜으니 오늘 한 번만은 눈을 감고 건너봐야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는 바람에 이 자루를 보지 못하고 건넜답니다. 그리고 발을 헛디딜 뻔하기도 했답니다.”
“아이고, 저 못난 사람을 어쩌면 좋은가! 정말로 들어오는 복도 제대로 못 받고 발로 걷어차는구먼!”
다음 날이 되자 왕은 포대 만드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는 어째서 그렇게도 생각이 없느냐! 잘난 척하고 떡과 거위를 팔아먹었으니 너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너를 부자로 만들어주려고 그 속을 금화로 가득 채워놓았었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어제는 또 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서 내가 너를 위해 놓아둔 금화가 든 돈 자루도 못 보고 지나갔단 말이냐?”
“임금님,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제 운명이 그런 것을 어찌합니까?”
그 다음에 왕은 사람을 시켜 음식점 주인을 불러오게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너는 어째서 이 사람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느냐? 떡과 거위에 금화가 든 것을 알았으면 적어도 그중 반은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지 않고 더러운 음식과 마른 빵만 주어 보냈느냐? 당장 돌아가서 한 푼도 빠짐없이 금화를 전부 이리 가지고 오너라. 그 금화는 내가 저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음식점 주인은 집으로 가서 금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그 금화를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 스스로가 네 운명의 샘을 막았고 나는 너 몰래 막힌 샘을 뚫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너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마저 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이 금화를 받아 가지고 편안하게 살면서 그 노래만은 더 이상 부르지 않도록 해라.”
포대 만드는 사람은 왕에게서 금화를 받아 그 돈을 밑천으로 후에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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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가사는 아주 단순하여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하였다.
하루는 임금님이 그 가게에 들어가서 묻기를 "왜 자네는 항상 같은 노래만 부르는가?"
그러자
그 포대 만드는 사람은 "예, 그것은 제가 너무 가난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인도하는 아주 넓은 광야로 나갔는데 그
광야에는 수 많은 샘물들이 솟아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샘물 앞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샘물을 찾았는데 내
샘에서는 물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샘물의 구멍을 넓게 뚫어주면 샘물이 많이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에 긴
장대를 가져다가 샘물을 마구 쑤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샘물이 솟구치더니 그 다음에는 아예 물이 솟아오르지 않았지요.
천사가
말하기를 샘물이 솟아나는만큼 세상에서 재물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내가 내 샘물을 막아버렸기에 내 신세 한탄을 하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어진 임금님은 포대만드는 사람에게 신하를 시켜 그 날 저녁 빵 한 덩어리를 보냈습니다.
궁궐에서
보낸 떡을 받은 포대만드는 사람은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인데 떡 한덩어리로는 끼니를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 제과점을 찾아가서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낸 빵인데 이 빵을 받고 마른 빵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빵집 주인은 한 바구니의 빵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임금님이 그 가계 앞을 지나는데 여전히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상하구나!
아직도 부족한가?
그 다음에는 거위요리를 접시에 담아 보냈습니다.
일을 마치고 좁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 위에 금화를 담은 자루를 놓아두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포대만드는 사람은 몇 십년을 건넜던 다리인데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며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금화를 담은 자루를 신하가 다시 궁궐로 가져왔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潘碩枰 1472-154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인간이로되 인간 취급을 못받으며 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만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기어이 스스로를 키워야한다고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은 아무 조건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 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했다.
어느 날이다.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 몰골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모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 라고 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앞에 넙죽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그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샇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군망상(欺君罔上)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고 아울러 즉각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뒷날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 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어떻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애써 키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 바 은헤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는 에수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멋진 영적 향취를 맡을 수 있다.
반석평(潘碩枰, 1472년 ~ 1540년 6월 24일)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다.
1507년(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가두리 꿩사냥 (은혜. 사랑)
수꿩은 어느 한 산에 한 마리 밖에 살지 않는다. 일부다처이긴 하지만 자신이 행세하는 영역 밖에 사는 남의 각시 꿩들을 넘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남녀유별하다 하여 시어(詩語)에서 꿩을 덕조(德鳥)라 곧잘 읊었던 것이다.
만약 바람기 있는 암컷이 옆산의 남의 서방 꿩에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있으면 수놈끼리 피투성이의 결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두 마리 다 죽거나 하는 사생 결단이지, 약세라 하여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는 법이 없다 한다.
옛날 무신들이 머리에 꿩깃을 꽂고 다닌 이유는 바로 사생 결단하는 수꿩의 용기를 숭상하고 본뜨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자신이 활동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보호 사수하는 영역 감각이 대단한 속성도 무신이 꿩깃을 꽂고 다니게 한 요인이라고도 한다. 옛 병법에 보면 수꿩이 지배하는 영역 그대로를 요새화하면 난공불락이라 하여 치성(雉城)들을 많이 쌓고 있기도 하다.
꿩이 우리 한국인의 인상에 좋게 아로새겨진 데는 그 밖에 강인한 모성애 때문이기도 하다.
산불 속에서 제 새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그를 구하러 날아들어 타 죽거나 알을 품고 있는 중에 산불이 나면 불에 타 죽을지언정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려진 꿩의 습성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은혜를 입으면 보은한다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구렁이한테 감겨 죽어가고 있던 꿩을 살려준 한 서생에게 그 꿩이 죽음으로써 보은한 설화에서 치악산(稚岳山)이란 산 이름과 상원사(上院寺)가 연기(緣起)되고 있다.
그런 꿩을 가로 세로 겨우 7-8 미터 남짓한 방에 가두어놓고 석궁을 쏘아 살생하는 가두리 꿩사냥이 성행하고 있다 한다.
장마가 지면 길에 나다니는 벌레를 밟더라도 죽이지 않게 하고자 오합혜(五合鞋)라는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고 나들이했던 우리 선조요, 피를 빠는 이를 잡더라도 죽이지 않고 보살통(菩薩筒)이라는 대통에 담아 나뭇가지에 매어두었을 만큼 살생에서 초연한 조상들이었다. 그 후손들의 동물 학대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충격이 더 크다. 짐승을 가두어 놓고 쏘는 가두리 사냥을 한 사람은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연산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냥을 삼가하길 상소하는 소문에 보면, 짐승은 가두어 놓고 쏘지 않으며, 불을 지르거나 물을 등지게 하고서 몰지 않으며, 새끼와 더불어 있으면 쏘지 않으며, 쫓겨가다가 지쳐 도망치기를 멎고 돌아보고 서 있으면 쏘지 않으며, 떼지어 있으면 놀라게 하여 분산시킨 다음 한 마리만 쫓는 것이 엽도(獵道)라고 했으니 너무나 인간적인 사냥 정신이 우리에게 계승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데도 하필이면 온 세상이 자연 환경과 동식물 보호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이 시점에 그 못된 짓을 자행하다니 말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
날씸한 몸매를 자랑하는 방아깨비는 유난히 벗겨져 있고 고지새라는 새는 별나게 심술 궂은 부리를 지니고 있다.한편 개미의 허리는 끊어질 듯이 잘록하지 않은가?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을 연관지어 엮어 낸 전래의 고담 하나가 있다.
한 여름 내내 일만 하고 있는 개미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동물이 있다. 방아깨비와 물가에서 물고기 잡아 먹고 사는 고지새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개미를 꼬드겨 여름철의 낭만을 함께 즐겨보자고 유혹한다.
남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개미가 흔쾌히 승락하고 함께 즐길 요량으로신나게 물가로 달려 갔다.
경망스러운 방아깨비가 선뜻 나서며 자기가 우선 솜씨를 보여 고기 한마리를 멋있게 잡아ㅗ겠노라고 큰소리치더니 첨벙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큼직한 메기가 입을 벌려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순간적으로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으니 남아있는 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개미는 발만 구르고 안타까와 하는데 고지새는 메기를 찾아 천벙지축 날뛰더니 마침내 놈을 찾은 모양이다.
잽사개 물속으로 뛰어들어 순건적으로 메기를 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지체하면 친구가 죽는다.
고지새는 급히 그 예리한 부리로 메기의 배를 갈라 방아깨비를 구출한다. 여부없이 요나 신세가 된 방아깨비는 메기 뱃속에서 나오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 야, 내가 잡은 물고기 좀 좌 크지?이 녀석 잡느라고 놈의 뱃속에 들어가 땀을 꽤나 흘렸지"라고 말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지새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은혜를 베풀적엔 그 은혜를 구하지 말라]는 식의 교훈은 아예 들어 본 적이 엇는 고지새가 아니던가? 메기를 제가 잡았노라고 기고 만장한 상대를 보고 어찌 그 입이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터무니 없는 자랑을 계속하는 방아깨비의 엄행과 묘한 앙상불을 이루는 고지새의 입술이 어찌나 우스운지 개미는 웃고 또 웃다가 허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울러 고지새의 튀어나온 부리는 그대로 귿어 버렸는데 하나님은 남의 공을 제것이라고 설치는 공짜 근성의 얌체 방아깨비가 하도 얄미워서 그 이마를 홀랑 벗겨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받은 은혜 때문에
중국 춘추 전국시대를 대표할만한 영웅으로 오자서(俉子胥,B.C.? -48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초나라 평왕의 충신으로 못난왕과 간신의 흉계에걸려 목숨을 잃은 오사(俉奢)의 둘째아들이다.
이에 평왕은 자서마저 죽이기 위하여 그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5만석의 곳식을 주고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상대부 벼슬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오자서가 요행으로 소관이라는 국경 검문소를 벗어나려면 눈앞에 놓인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갈대밭이 숨어서 물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한 어부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자서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차고 있던 전가의 보도를 그 노인에게 끌러 주었다.
어부는 한사코 받기를 거절하면서 내 듣건데 당신을 잡아 바치면 초나라 임금이 5만석의 곡식과 상대부의 벼슬을 준다고 합디다.
그 엄청난 상급도 초개같이 여기고 당신을 도망시켜 주었는데 어찌 이따위 칼을 받겠소라고 말한다.
자서가 어옹을 떠나면서 만약 뒤쫓아 오는 군사가 있거들랑 이몸의 종적을 누설하지 말아주시오 한마디 당부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난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를 구했는데 그대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니 그대가 붙들리면 당장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내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의 의심을 풀어 주리다 하더니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뒷날의 일이다.
자서는 오나라의 왕 함려에게 발탁되어 초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깨끗히 복수한다.
이어서 그는 망명생활을 할 때 자기를 괴롭힌 정나라마저 징벌하기위하여 군대를 그리로 향했다.
약소국 정나라로써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한것이다.
이에 정나라 왕은 만알 오자서를 자기 나라에서 물러가게 한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사람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노라고 선언했다.
어느 날이었다.
정나라에 초라한 어부 한사람이 자기가 오자서의 군대를 돌아가게 하겠노라고 나섰다.
예날 악저땅에서 오자서를 구출해 주고 죽은 그 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오자서를 찾아가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봐서라도 정나라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이에 남다른 의리의 사나이 오자서는 즉각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에서 철수했고 그 노인의 아들은 사방 백리의 땅의 주인이되어 살았다고 하는 중국 고사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죄의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지 자기들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하지 않은가?
성경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새로운 피조물 - 새 사람
새로운 관계 : 새색시의 경우 저희 집의 새사람입니다.
새로운 소유 : 중고품을 구입하였어도 이전 주인은 아무런 기득권이 없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소유주가 된다.
새로운 선택 : 놋 요강을 놋 밥주발로 만들 경우 전혀 새로운 모양의 도구가 된다.
7월 6일(성령강림후 제4주, 맥추감사주일) /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비결(갈라디아서 2:20)
믿음의 사람
06-15-2025(주일) 설교 7월 6일 성령강림 후 204주, 맥추감사주일
암송성구 #.55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믿음의 사람(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1. 영적 연합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디스마와 게스다)
- 영적 연합은 믿음의 내용을 안에서부터 채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종교적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의 기도, 금식, 구제는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겉 모양에 열중해기 때문입니다.
영적 연합은 겉 모양이 아니라 속 내용을 채우는 것입니다.
2. 영적 생활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영적 생활은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3. 영적 믿음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영적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믿도록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은, 아무리 좋은 것도 제대로 사용하거나
활용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속담에서 '구슬'은 가치 있는 것이나 재능, 기회 등을
상징하며, '꿰어야 보배'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결합시켜야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속담의 유래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재능과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로 추정됩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속담 및 영어 표현
이 속담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다른 속담으로는 '아무리 좋은 칼도 쓰지 않으면
무뎌진다'가 있습니다.
이 또한 좋은 것이라도 활용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영어로는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굴러가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변화와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기회나 재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불란서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이었던 파스칼은 그의 유명하 작품 수상록에서 사람을 중간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사람이 중간적 존재로 정의되는 이유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공간적 이유
사람은 하늘 위가 아니고 또는 땅 아래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중간적 존재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간적 이유
시간은 세 가지 시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과거와 미래의 중간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에 중간적 존재라고 합니다.
셋째는 형태적 이유
사람은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을 중간적 존재라고 합니다.
지난 6월 8일 주일(성령강림주일)에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새 사람"이라고 하겠으며 새 사람이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소유, 새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7월 6일(맥추감사주일, 성령강림 후 제4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본문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간략하게 정리하면 "믿음의 사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강도가(디스마, 게스다) 함께 못박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히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실 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 공회로 끌고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영적 연합"을 말합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적인 영적 연합의 생활"을 말합니다.
영적 연합이란 시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졌던 사건이었으나 지금 내가 그 사건이 일어났던 때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가능한 시간입니다.
영적 연합의 삶을 유지하려면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삶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말합니다.
영적 연합과 삶의 주도권을 주님이 갖는다는 것은 곧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삶을 설명하였을까요?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성령이 내주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직분을 의미합니다.
예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들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뿐이었습니다.
특별한 신분의 사람에게만 기름을 부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특별한 직분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의 영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
"성도(거룩한 무리)"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그 육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몸입니다.
그 육체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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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살아가가는 비결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쨰는 영적 연합
둘째는 삶의 주도권을 주님에게
셋째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라
(도입 이야기)
"이야기철학"이라는 책은 채필근목사님이 저자로 목사님께서 행하셨던 각종 예화와 같은 이야기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소제목으로 "어학선생"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어가 익숙하지 않아 영어와 조선말을 할 수 있는 통역사 즉 어학선생을 모시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미국 선교사가 어학선생과 함깨 활동하며 대략 3-4년을 지냈습니다.
이제는 선교사 혼자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으므로 어학선생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합니다.
"어학선생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경치가 좋고 최고로 좋은 땅에 가장 좋은 재료와 최고의 목수를 고용하여 조선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십시오."
선교사의 부탁을 듣고 어학선생은 이제 내 일자리가 끝이구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면 이번 기회에 한 몫을 잡아야지 다짐하고 가장 나쁜 땅을 최고의 주택지라고 속여 매입합니다.
가장 좋은 재료라고 하며 가장 낮은 재료를 구입하여 기와집을 짓게 합니다.
최고의 목수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목수를 고용하여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얼마후 기와집이 완공되어 어학선생은 선교사에게 그 집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어학선생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 집은 제가 살 집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수고하셨던 선생님과 선생님의 가족들을 위하여 지은 집입니다.
이제부터 이 집에서 모든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어학선생은 후회가 막심합니다.
내 집을 짓는 줄 알았다면 가장 좋은 최고급 재료를 사용했을텐데,
내 집을 짓는 줄 알았다면 일유 목수를 고용하여 집을 지어야 했는데,
내 집을 짓는 줄 알았다면 냇가 근처에 집을 지을 것이 아니라 배산임수가 뚜렸한 택지를 골랐을텐데,
비가 심하게 내리고 바람이 불면 집이 흔들리는 것같고 냇물이 불어 집이 물에 잠길 것같아 하루하루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안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까?
정말 예수님께서 내 안에 좌정하셔서 내 삶을 이끌고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며 적용하고 있습니까?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선교지에서, 또는 삶의 현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생활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생활하는 선교사에게 세 가지 삶을 소개합니다.
첫쨰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하라
영적 연합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내 삶이 다시 드러나게 될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삶의 주인도권을 주님에게 양도하라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되신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셋째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라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라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다면 하나님도 감동해 복 주시죠"
창립 30주년 맞은 '새사람선교회' 김중기 목사
서울 4대문 안 개척교회는 성공 못한다는 통념 깨뜨리고 어느새 교인 1000여명으로…
1980년 11월 연세대 신과대 교수였던 김중기 목사(71)는 서울 한남동의
한 가정집에서 부부 일곱 쌍과 함께 매주 월요일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모임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참가자가 100명을 훌쩍 넘을
정도로 커졌다.
이듬해에는 서울 명동 일대 백화점 점원들을 상대로 매주 화요일 '일터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몇 달 후에는
매주 목요일 장충동에서 몇 가정이 모여 성경을 배우는 '가정 성경 공부반'도 마련됐다.
이 세 모임을 토대로 1987년 사단법인
'새사람선교회'가 공식 출범했고, 1995년에는 성경 공부만 아니라 예배도 함께 드리자는 회원들의 바람이 모여 서울 청운동에
'새사람교회'가 세워졌다.
새사람교회는 '서울 4대문 안에서 개척 교회는 성공 못한다'는 개신교계의 통념을 깨뜨리고 교인
1000여명을 헤아리는 탄탄한 교회로 자리 잡았다.
'새사람선교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23일 오후 7시 30분 새사람교회에서 기념 예배를 갖는다. 30주년 기념 도서 '새사람 이야기'도 출간한다. 12월 5일 오후 8시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창립 기념 '제20회 사랑과 영혼의 노래' 공연도 연다.
새사람선교회를 이끌어 온 김중기 목사는 "세상을 살면서 머리를 찡 울리거나 가슴을 쿵 치는 '감동(感動)', 그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감격(感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도 감동해서 복을 내려주시는 '감복(感福)'의 '삼중 감동' 체험이 신앙을 생기게 한다"면서 "성경에서 '삼중 감동'을 주는 대목을 찾아 함께 읽고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30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삼중 감동'의 예로 솔로몬을 들었다.
다윗왕의 16번째 막내아들인 솔로몬은 왕이 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고 스스로 감동해 하나님께 1000번의 번제(燔祭)를 올렸다.
이를 보고 국민도 감동해 '훌륭한 왕'이라며 감격해 했다.
이
모습에 감동한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했다. 이 말에 하나님도 감복해 부귀와 영화까지 주었다.
김 목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감동시켜야 한다.
사장은 사원을 감동시키고, 사원은 고객을 감동시켜야 한다.
목사는 교인을 감동시키고, 음악가는 청중을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사람선교회는
올해 4월부터 영성(靈性) 강화 프로그램인 '새프로(SAPro·Spritual Awakening Program)'를 시작했다.
묵상과 성경 읽기, 금식과 노동 등을 통해 신앙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과정이다.
2년 전 마련한 경기도 안성 새사람수련원
생활관에서 2박3일씩 2차에 걸쳐 훈련하고, 유럽·미국 등의
수도원을 찾아 수도사 생활을 체험하는 10일간의 3차 프로그램을 마치면 '마침보람(수료) 증서'를 준다.
김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앙의 의식화, 주님의 제자가 되는 신앙의 생활화를 통해 생동하는 신앙을 가진 새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학교 선생을 35년간 해서 제자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이들과 함께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감동받으며 몸에 배는 생활화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감격시킬 수 있는 창의적인 목회 연구 모임을 만들 생각입니다."
김중기 목사는 "지난 30년간 내가 실천해온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목회 현장에 적용하도록 하면 한국 교계가 새로워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마아스)
티끌과(아파르) 재(에페르)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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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고 / despise(멸시하다)
마아스(mâʼaç) מָאַס 거절하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6월 8일(성령강림주일) /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도입 이야기)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미국과 소련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정치 제도를 장로교회 정치 원리에서 찾았습니다.
장로교회는 당회와 제직회로 구성됩니다.
당회는 상원으로 제직회는 하원으로 조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원과 하원에서 제안한 것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대통령이 제안한 의견도 상원과 하원에서 거부하면 실행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소련은 공산주의 정치 제도를 도입하여 통치권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관할하도록 했습니다.
소련의 수상은 최고의 권력자가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으며 만일 반대하면 무조건 숙청합니다.
처음에는 통치가 아주 쉽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근로자와 노동자 또한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습니다.
대충 시간만 채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95년도에 제가 어머님과 중국을 방문하면서 그 현장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기차 정거장에 사람들이 밀려와도 매표소 직원은 관심이 없습니다.
구태여 힘들게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 국가들을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 공사주의 정치 원리를 도입할 때 동구라파 대부분의 나라들이 동조하여 그 제도를 따랐습니다.
대략 30여개 나라가 참여했다고 합니다.
결국 동구라파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무너져버렸습니다.
공산주의 원리 즉 칼 막스의 주장은 물질생활과 사회 구조를 먼저 바꿈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먼저 인간이 바뀔 때 사회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이 먼저냐?
물질과 사회구조가 먼저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회구조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기업을 몰수하고 모든 수익을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 현실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미 타락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이 바뀌어야 하고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먼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전개 이야기)
사람이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그 대표적인 예가 김문수씨라고 하겠습니다.
한 때는 노동운동에 심취되어 밑바닥에서부터 개조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말 미친듯이 몰두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을 하는 친구가 소련이 무너진 것을 직접 목격하도록 함께 여행을 가서 현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미녀들이 밤중에 여자 스타킹 하나만 줘도 호텔에서 하룻밤을 즐길 수 있는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공산주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회로 신앙을 무장하고 결국에는 경기도 도지사 2회, 국회의원 3선, 고용 노동부장관을 지낸 후에 대통령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청빈의 삶을 즐기면서 어려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적용 이야기)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사람인가?
삼위일체 신앙의 관점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예수를 믿기 전과 후의 모습
2. 성령을 받기 전과 후의 모습
깨진 놋 요강으로 만든 것
- 방짜 유기( 鍮器 )(놋그릇) / 방짜(품질이 좋은 놋쇠를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 )
(전개)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는 깨진 놋 요강처럼 쓸모 없는 것
그런데 예수를 믿은 후에 모든 죄를 씻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존재
2. 성령을 받기 전과 후의 모습에서
(예화) 영국의 과학자 미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 9. 22~1867. 8. 25)
학생 때 신문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하루는 어느 귀족의 집에 신문을 집어넣으려고 대문 창살 사이로
손을 넣고 신문을 던지는데 갑자기 철문이 열리면서 손이 철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철문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철문 밖에 있는 것인가?
(전개) 예수를 믿고 죄 씻음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고 가장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베드로가 성령을 받기 전과
성령을 받은 후의 삶을 전혀 다른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새것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새로운 관계
- 어느 집에 며느리를 맞이한 후에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 며느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저희 집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입니다.
시집 오기 전에는 친정의 가족들과 관계를 유지했으나 시집 온 후에는 시댁 식구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합니다.
딸 - 며느리, 새아기, 새아씨, 새언니, 형수
2. 새로운 소유
- 공장에서 제품을 만든 후에 상점에 진열된 물건을 구입하여 집으로 가져옵니다.
처음 사용하는 제품이므로 사용설명서를 잘 읽고 방법에 따라 사용하면 익숙해 집니다.
(예) 브라더 미싱 2701
바지를 줄이고 헤어진 곳을 수선하여 재미를 느낍니다.
3. 새로운 선택
- 사람의 모양은 그대로 있지만 그 중심이 변화된 것이다.
(예) 놋그릇을 새것으로 만드는 사람 - 고물장수, 방물장수 / 깨진 놋그릇, 양은 남비, 유리 병
소련 1922. 12. 30-1991. 12. 26
미국 1776. 7. 2 - 현재
* 설교 / 06-08-2025.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 연합의 원리 /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을 때
2.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주위 사람, 나 자신, 성령께서 증거 /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
3. 새것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a. 새로운 관계
- 어느 집에 며느리를 맞이한 후에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 며느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저희 집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입니다.
시집 오기 전에는 친정의 가족들과 관계를 유지했으나 시집 온 후에는 시댁 식구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합니다.
딸 - 며느리, 새아기, 새아씨, 새언니, 형수
b. 새로운 소유
- 공장에서 제품을 만든 후에 상점에 진열된 물건을 구입하여 집으로 가져옵니다.
처음 사용하는 제품이므로 사용설명서를 잘 읽고 방법에 따라 사용하면 익숙해 집니다.
(예) 브라더 미싱 2701
바지를 줄이고 헤어진 곳을 수선하여 재미를 느낍니다.
c. 새로운 선택
- 사람의 모양은 그대로 있지만 그 중심이 변화된 것이다.
(예) 놋그릇을 새것으로 만드는 사람 - 고물장수, 방물장수 / 깨진 놋그릇, 양은 남비, 유리 병
소련 1922. 12. 30-1991. 12. 26
미국 1776. 7. 2 - 현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러시아어: Совет)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회의'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병사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소련이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현재 소련이 해체된 후, 구소련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미합중국(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United States, USA/US, 한국 한자: 美合衆國), 약칭 미국(영어: America, 한국 한자: 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하와이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에 맞닿는다. 또한 북서측에 위치한 알래스카는 동측으로 캐나다와 서측으로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플로리다반도의 남동쪽으로는 바하마와 쿠바가 있다.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 번째로 넓은 국가이고, 북아메리카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세계에서 손꼽는 다문화 국가 중 하나로, 주로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으며 그중에서 백인이 가장 많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7] 미국의 경제는 2024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30조 3404억 달러로,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경제이다.[8][9]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의 미국 본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원주민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미국의 시작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이다. 13개 식민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결국 177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으로 영국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10]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 미합중국 헌법을 채택했으며, 이듬해에 비준하여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했으며, 여러 자연권을 보장한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에서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인 미국 남부와 산업화 중심인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 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한 산업화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11]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을 종결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를 선도하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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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칼 막스(Karl max)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미국과 소련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 독립하면서 정치 제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던 중 얻은 결론이 장로교회 정치 원리에서 교훈을 찾았습니다.
당회와 제직회의 구성에서 당회는 상원으로 제직회는 하원으로 조직을 합니다.
그리고 상원과 하원에서 제안한 것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도입했습니다.
또한 대통령이 제안한 의견도 상원과 하원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도록 합니다.
반면에 소련은 구라파에서 유행하던 공산주의 정치 제도를 도입하여 통치권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관할하도록 했습니다.
소련의 수상은 최고의 권력자가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으며 만일 반대하면 무조건 숙청합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 국가들을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 공사주의 정치 원리를 도입할 때 동구라파 대부분의 나라들이 동조하여 그 제도를 따랐습니다.
결국 동구라파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무너져버렸습니다.
공산주의 원리 즉 칼 막스의 주장은 물질생활과 사회 구조를 먼저 바꿈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먼저 인간이 바뀔 때 사회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이 먼저냐?
물질과 사회구조가 먼저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회구조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기업을 몰수하고 모든 수익을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 현실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미 타락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이 바뀌어야 하고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자신의 어떤
윤리적인 면이 먼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심령을 먼저 개조함으로써 물질 생활이나 사회 구조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인간 자신의 문제가 먼저요, 제도나 구조가 먼저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문제는 인간 중에도 심령
즉 속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속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혁명을
말하되 인간 혁명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혁명이라 함은 기존 질서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며 부정에서 머물지 않고 좀 더
능동적으로 파괴하고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인간 혁명을 먼저로 생각하며 그 속사람의 재창조가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새 피조물은 어떤 존재입니까? 먼저는 목적의 전환입니다. 목적의
전환은 곧 근본적인 전환을 뜻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서 생의 의미와 가치관이 모두 함께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전적인 그리고
근본적이요 구체적인 변화를 새창조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의문과 형식에는 이렇다 할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를 믿는 순간, 즉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하며
고백하는 순간에 실로 창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위하여"가 중요한 점입니다.
목적의 전환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던 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목적이던 자가 그리스도가 목적이 된 자로 완전히 소속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목적과 주인과 중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은 그대로
두고 방법만 바꾸는 정도의 전환을 신앙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정욕에 매어서 단순히 복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당도 찾고 우상도 섬기며 이곳 저곳을 헤매다가 이제는 교회를 찾아 나와서 그 목적 그대로 복을 구하고 있는 교인이
허다합니다. 방법만 바꾼 정도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 복 자체의 뜻부터 다시 해석하고 근본으로 복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알고 믿게 되는 변화를 신앙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목적 자체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에게 전 생명을 위탁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어느 부분을 개조하던가 수리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집을 다 헐어 버리며 기초까지 뽑아 버리고 이제 다시 기초부터 새롭게 짓는다는 뜻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간조는 "실패는 죄가 아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목적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있다면 현실적인 굴곡과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목적만은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목적지로 향해서 가는 차만은 바로 타야 합니다. 급행이냐 완행이냐 자리가 편하냐 불편하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요는 목적지로 가는 차를 타야 합니다. 자리가 좋다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탈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차만은 바로 타야 합니다. 나를 목적하고 중심하던 생활이 그리스도를 중심하며 그리스도만이 나의 목적이요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따라 가치관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이 변하면 가치관도 자연히 변하게 마련입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기록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육체대로, 즉 보이는 것, 세상적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였으나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 것, 신령한 것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인 것에 기준하여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집을 부럽게 쳐다보십니까?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하십시다.
집보다는 그 속에 사는 사람이 귀중한 것이고 사람도 외모보다는 인격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보다 신령한 것, 보다 영원한 것, 보다 하나님께 향한 것, 보다 그리스도의 생과 교훈에 가까운 것, 보다 이웃을 위하는 것을 값비싼 일로 그리고 가치 있는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전에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이제는 분토 즉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치관의 전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바라는 소원도 달라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너는 내게 구하라.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나는 당신(곧 그리스도)외에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마치 입맛이 싹 변해 버리듯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가치관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정욕적인 일에 매력을 느끼며 세속적인 권세를 부러워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불의한 재물을 저주스럽게 알고 죄된 부귀와 권세를 치욕적인 것으로 느끼며 동시에 진실한 가난의 길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영광된 것으로 알며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수난의 길을 가장 큰 행복의 길로 아는 그러한 가치판단이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그의 의식구조가 변하면 습관이 달라지며 생활이 달라지고 따라서 운명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본문 13절에 "미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미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처녀들이 결혼 전에는 자기를 낳고 키워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여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보면 언제부터
알았다고 그같이 속히 변하여 친정 집에 와서도 남편과 시집만 생각하며 심지어는 한 가지 물건이라도 시집으로 더가져 가려고 애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결혼하면 즉시 친정집 중심하던 의식구조가 시집 중심의 의식구조로 바꾸어집니다.
결혼한지 한 달도
못되는 어떤 여자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까?
이제야 딸을 낳으면 부모들이 섭섭해하는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같이 의식구조가 변화되어야 그의 생활도 따라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축구 경기장에 경기를 보러 갔었는데 한참 경기가 무르익어 갈 때 흥분된 관중들은 자주 일어서고는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뒤에 앉은 사람은 앞에서 일어서는 사람에게 앉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때로는 입에 못 담을 욕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욕설을 들은 사람이 뒤돌아보고 빙그레 웃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축구 구경에 미친 사람들은 욕설 좀 들었다고 해서 화를 내든가
싸우지도 않습니다.
경기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윤리관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 진정 미친 사람은 이 세상 문제가 문제되지 않고 적은 실패나 성공 따위가 그의 마음에 가득찬 사랑을 결코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끌린 자,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자가 되어야 합니다(로마서 8장). 꿈을 꾸어도 그리스도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의식구조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으나 만날 수는
있다"
만남은 종합적인 인식입니다.
이 만남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만의 원인을
스스로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꼭 만나야 할 분을 못 만났기 때문이며 들어야 할 음성을 못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해서 오직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위탁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길로만,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음성만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뜻을 사랑하며 그에게 완전히 미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우리의 생명과 오늘의 현실과 운명을 주장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 피조물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며 새 피조물에게 만물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이실 것이며 새로운 기업과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순결하라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비둘기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먹기 싫어하는 것은 먹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안 먹는 것은 배가
고파도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둘기의 생태랍니다.
이것은 성도가 지녀야 할 믿음의 순결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함께 가져야 서로
가치가 있습니다.
지혜롭기만 하고 순결이 없으면 교활해집니다.
순결을 가진 지혜라야 겸손합니다.
지혜가 없이 순결하기만 하면
무능해지고, 남에게 속임 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순결이라야 용감하고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순결을 요구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이것을 지니고 이리 가운데 가도 거뜬히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가서 부딪히라, 너희들이 가는 그 현장에 너희들을 끌고 가고, 잡아가고, 너희들을 핍박하는 손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내가 있느니라, 거뜬히 이기게 하느니라.
이것이 우리를 보내신 자의 당부입니다.
보냄 받은 우리들은 우리를 보낸 그 분의 당부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이 당부를 놓쳐버리면 보냄 받은 자들은 당황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무거운 압박들, 짐들, 고통들, 수많은 질고에 시달리며 온갖 땅위의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가는 그 곳에는 이리들이 있는 곳이다. 온갖 것들이 인간들을 괴롭히는 이리로 변장을 해서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지혜롭고 순결한 보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당당한 보냄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 늦둥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아버지의 나이가 52살입니다.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만 아버지를 반항합니다. 아버지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잘 다니던 교회도 한 번 빠지고, 두 번 빠지고, 교회생활도 불규칙하고 이렇게 빗나가고 반항을 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윽박질러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사님께 상담을 했습니다. “이놈이 저런 모습인데 내가 가만히 보니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저렇지 않을텐데요.”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의 믿음 없음을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학교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주인공이 이 성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사연을 알아보니 단순한 학생들 싸움이 아니고 알고 보니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아주 신나는 싸움을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을 했었던가 봅니다. 그 예수 믿는 사람을 비난하고, 교회도 비난하고, 하나님도 비난하니까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있던 믿음이 발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아이들 앞에서 복음을 변호하고 당당히 맞섰지만 이길 리가 없습니다. 상대방 쪽에서 자기의 말을 들어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주먹질을 하고 결국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아이는 현장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족합니다.
현장의 용기를 발휘하라
우리는 이리가 있는 그 현장에서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리가 없는 데서 큰소리치지 말고 이리가 물려고 하는 거기서 지혜롭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대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일날 일등신자가 되려하지 마세요. 평일날 현장에서 일등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일날은 다 일등입니다. 주일날은 다 믿음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평일날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인격자로서 우리가 충성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의 설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충만 자체를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다.” 즉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은혜 받고 살아가면서 성령 충만한 성도로 살아갔다는 모습이 사도행전에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면서가 아니라 성도들은 살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분들 앞에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사역했음을 머레이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보냄 받은 자는 보내신 자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늘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존중하면서 보냄 받은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보냄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은 소명장, 혹은 사명장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소명을 받은 자요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책임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신비로움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기자들이 끊임없이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과학자로서 성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이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열 마디를 물어도 겨우 한마디를 하는 정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유창한 대중 강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침묵하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과학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S=X+Y+Z라는 공식입니다.
S는 success 성공입니다.
X, Y, Z는 영어 알파벳의 맨 끝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강조하려면 ‘하나, 둘, 셋’ ‘A, B, C’ 이렇게 앞에부터 정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X, Y, Z 끝에 것을
가지고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필요한 교훈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설교자, 목사, 사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의 말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과 많이 통하고 있습니다.
성공의 비결 첫 번째 X는 말을 적게 하고 실천하라.
그러면 성공에 이른다.
두 번째 Y는 삶을 즐기라.
네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라.
일 자체를 즐거워하라.
세 번째 Z는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살라.
저는 세 번째를 영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아인슈타인이 생각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과학자로서 과학의 진리를 생각하고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바쁘게 사십시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보내신 그 분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까지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그분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분을
만나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뵙는 말씀을 먹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현대인들이 들어두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줄 모릅니다. 온통 속력만 낼 줄 알지 속력을 멈추고 생각을 할 줄 아는 것에 매우 서툴다고 봅니다. 우리가 고난이 올 때도 그 고난만 붙잡고 씨름하지 말고 그 고난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내어 놓고 그분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괴로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감정을 중단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곁들여져야 합니다. 이 아인슈타인의 교훈은 일반적인 교훈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고 증거이고 실천입니다. 우리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내가 하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자요, 우리는 하나님께 은사를 받은 자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보냄 받은 존재입니다. 보냄 받은 존재는 보내신 자를 보지 않고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보내신 그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알려면 나를 보내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아무리 거울을 붙잡고 씨름을 해도 하나도 수정이 되지 않습니다. 거울 속에 있는 내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다 해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아무리 닦아도 되지 않습니다. 내 실체를 닦아야 합니다. 내 실체의 얼굴에 묻은 것을 제거하고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나도 제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내진 존재입니다.
스스로 솟아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내신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보낸 그분을 잊어버리든지 그분을 등지든지 그분을 무시해 버리면 나라는 삶의 존재는 산산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내 존재의
목적이 있고 내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그분을 알 때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보낸 그분의 의도를 알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나를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삶 속에서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냄 받은 자로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17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새로운 피조물(카이네 크티시스) καινη κτισις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1. 새로운.
-
a. 쓰지 않은, 써보지 않은, 마 9:17, 막2:22, 눅5:38.
-
b. [전에는 없었던 이라는 뜻으로]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놀라운, 막1:27, 요13:34, 행17:19, 계2:17.
-
c. [옛 것이나 낡은 것의 반대] 마26:28, 막14:24, 눅22:20, 고전11:25, 고후5:17, 갈6:15, 엡4:24, 벧후3:13, 계21:1.
-
1. 창조.
-
a. 창조하는 동작, 롬1:20.
-
b. 창조된 것, 피조물, 롬8:39, 고후5:17, 갈6:15, 골1:15, 히4:13, 창조, 세계, 막13:19, 롬1:25, 히9:11, 벧후3:4.
-
-
2. 권위, 제도, 벧전2:13.
-
관련 성경 / 창조(막10:6, 히9:11, 계3:14), 피조물(롬1: 25, 고후5:17), 창세(롬1:20), 제도(벧전2:13), 지으신 것(히4:13), 지음을 받는 것(갈6:15), 만민(골1:23).
1. 시간. 2. 유예
-
1. 시간, 때, 마25:19, 눅8:27, 요7:33, 행8:11.
-
2. 유예, 지체, 계2:21, 10:6.
-
관련 성경 /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새로운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합니다.
그 제품이 신상품이라고 하면서 광고를 시작합니다.
신상품이란 새로 나온 제품을 말합니다.
어느 가정에 외동딸이 출생하여 성장한 후에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결혼 후에 시댁의 어른들이 그 여자를 문중 어른들에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번에 저희 집에 시집 온 며느리입니다.
아니면 새댁입니다."
이미 외동딸로 태어난 친정에서는 새댁이 아닙니다.
다만 시댁에서만 새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친정에서는 여전히 외동딸이지만 시집에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새댁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은 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관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님과의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세상 풍속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삶의 방식에는 세상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 세상 것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존재를 말합니까?
생각의 변화가 시작된 사람
언어의 변화가 시작된 사람
행동의 변화가 시작된 사람
생활의 변화가 시작된 사람
결국에는 삶의 내용 자체가완전히 바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제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생각과 언어와 행동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몸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선택하셨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기에 그의 몸에 남아 있던 어부의 흔적을 따라 그물을 던졌습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물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물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어부의 습성과 제자의 습성이 충돌을 일으켰지만 베드로기 이때문 제자의 습성에 따라 그물을 깊은 곳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듯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순간 베드로는 제자의 본능이 솟구쳤습니다.
아,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구나!
그물을 내려놓고 예수님앞으로 나갔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후에 온전히 예수님만을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의 잡다한 것들에 시달리면서도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상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래도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온전한 예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이러한 갈등 구조를 갖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갈등 구조를 잘 견디면서 마지막까지 주님만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을 따라가려면 몇 가지 변화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생각, 언어, 행동, 습관, 운명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란 것이 참 묘합니다.
아침에 배부르게 음식을 먹었는데도 점심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프다고 합니다.
또 점심을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음식을 섭취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도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생각의 중심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람과 그의 조타 롯
둘째는 언어의 변화
몸은 행동을 지배합니다
미국에서 온 한 청년이
프랑스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산을 오르던 청년은
갈증이 나던 찰나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발견했습니다.
벌컥벌컥,
꿀맛 같은 계곡물을 들이켠 후
몸을 돌리는 순간,
청년의 눈에
팻말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POISON / 독약]
순간 자신이
독약이 들어있는
물을 마셨다고 생각한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구토가 나고,
몸에 열까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허둥지둥 산에서 내려와
병원을 찾았습니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며,
병원을 찾게 된
경위를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사가
껄껄 웃으며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 팻말은 프랑스어로
[POISSON X / 낚시 금지]입니다."
청년은 혈색이 돌아오고
구토가 멈추더니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주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상식이나
그에 대한 믿음 때문에
포기한
일들이 있었나요?
생각은 몸을 지배하고,
몸은 행동을 지배합니다.
할 수 있다는
강력한 자기 암시를 하고
다시 도전해 보세요.
그럼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벽에 부딪히거든,
그것이 절실함을
나에게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랜디 포시(Randy" Pausch)
1960년 10월 23일 ~ 2008년 7월 25일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ktisis. κτίσις)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 고전 5:12, 13; 갈 3:28; 엡2:11-22; 골 3:11).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활의 변화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언어의 변화,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 습관의 변화, 운명의 변화
Thoughts Language Behavior Life Habits Fate
(성경적인 예) 창세기 13:1-18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라함의 신앙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온 것인지 아니면 어린 조카를 방치할 수 없었기에 아브라함이 데리고 나온 것인지.......?
아브라함과 롯
롯은
아브라함의 쌍둥이 형제인 ‘하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첫 조카이었습니다.
그 집안의 장자이었으니 아브라함도 롯을
무척 귀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란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롯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존재로 다가옵니다.
이제 단순한 조카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돌보아야 할 피붙이와 같이 된 것이지요.
롯에 대한 귀여움보다는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브라함을 사로잡습니다.
자연적으로 롯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커져갑니다.
롯도 아브라함을 아버지 같이 대합니다.
모든 것을
아브라함과 의논하고 그를 따라합니다.
그 결과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또한 가나안을 향해 하란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길은 그가 가야 할 길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브라함도 그런 롯을 자식처럼 계속 데리고 다닙니다.
둘
사이에는 둘만이 아는 깊은 믿음이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런
관계는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각기 많아지고 둘의 하인들간에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합니다.
롯과 헤어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이제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대로 같이 지내다가는 하인들뿐만
아니라 나와 롯도 서로 의를 상할 수 있겠구나.
롯도 이제 독립을 해서 그의 길을 가야 할 때이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롯을 불러 그의 길을 가라 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귀를 의심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삼촌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던 롯은 무척 당황해 합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는 아브라함의 말이 맞는다고 깨닫게 됩니다.
언제까지 삼촌
밑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과 이제 자기 혼자서 성공해 삼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갑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가 넘었으니 롯의 나이도 50세는 넘었을 겁니다.
독립하기에는 오히려 늦은 나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선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영원히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계속 같이 있었으면
싸움이 잦아졌을 것이고, 둘 사이가 더 멀어졌을 것입니다.
수놈 사자는 다 크면 자기가 자란 무리를 떠나 새로운 자기의 무리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사자 어미는 수놈 자식이 어려울 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수놈 자식을 쫓아냅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자기 자식도 영원히 끼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마마보이로 만드는 것은 자식의 인생을 망가트리는 지름길이라 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결별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찾아 하란을 떠난 것을 믿음생활의 시작이라 본다면 롯과의
결별은 우리 믿음생활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믿음생활 이전에 참 많은 사람들, 많은 것들과 함께
했고, 참 많은 생각들, 많은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흔히 ‘세상 것’이라고 하지요.
세상 것들은 믿음생활을 시작해서도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있다가 충돌을 일으키곤 합니다.
믿음생활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 둘 세상 것들과 결별하게 됩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먹는 음식이 달라지고, 보는 책이 달라지고, 하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불가사의한 변화도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변화된 모습을 보고 “교회 나가기 시작하더니 사람 버렸다”는 말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냈듯이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지녔던 것들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고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우리는 대부분 그것들을 조금씩 잊어버려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롯을 떠난 보낸 다음 아브라함은 어떠했을까요?
이제 하인들끼리 싸울 일이 없을 테니 속이
시원했을까요, 아니면 아들 같던 롯을 떠나보내고 걱정 때문에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새웠을까요?
자기 일에 바빠 롯에 대해서는 신경도
못쓰고 조금씩 잊어버렸을까요?
성경에 쓰여 있질 않으니 알 수가 없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보통 사람들과 같이 롯을 점점
잊고 지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자식 같은 롯을 떠나보내고 안심할 수 없었겠지요.
아마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것 때문에
성공에 대한 염원이 유난히 큰 롯의 성격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눈물로만 보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염려만 했을 뿐이지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아브라함은 계속 바쁜 일에 쫓기게 되고
점점 롯을 잊고 지내게 됩니다.
몸이 멀어지니 자연히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지요.
간혹 주위 사람들을 통해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롯의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한 번 찾아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아브라함은 롯이 사는 지역에 부족간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혹시 롯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는 중에 전쟁에서 도망 나온 사람에게서 롯이 재산을 다 빼앗기고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정신이 아득합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롯을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자신을 이제야
한탄해 보지만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은 했었지만 실제로 당하고 보니 롯을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체할 겨를이 없습니다.
곧바로 수하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을 데리고 롯을 구하러 갑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빌면서 먼 길을 달려갑니다.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상대 부족들은 기습적인 아브라함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승리한 아브라함은 롯을 찾아 헤맵니다.
다행히 롯은 살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롯을 발견한 아브라함은 그의
살아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롯을 부둥켜안고 웁니다.
이게 얼마만의 일입니까?
이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롯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었는지 실감합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다시는 이러한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롯을 떠나보낼 때 는 다 이유가 있어서였지만 또 떨어져 산다면 언제 다시
이런 위험에 빠질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제 같이 지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롯은 거절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성공해
보겠다고 합니다.
몇 번 더 이야기해 보았지만 롯의 마음은 확고합니다.
억지로 롯을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롯을
살던 동네에 그대로 두고 아브라함은 혼자 돌아옵니다.
롯의 인생을 아브라함이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켜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멜기세덱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롯을 구한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이라
여겨집니다.
물불 안 가리고 롯을 구하러 간 아브라함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에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그 의미를 알아챕니다.
자신이 잘 나서 롯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래서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이후
아브라함과 롯은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롯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은 끊이지 않습니다.
주변사람들을 통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롯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롯이 살고 있는 소돔지역은 이미 죄악이 판을 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롯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 롯을 찾아가 설득해서 데려올까도 했지만 롯의 고집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도 못합니다.
대신 롯을
위해 매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가 찾아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한다고 했을 때 그곳에 있는 롯을 생각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그 곳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50명에서 시작해서 45명, 30명,
20명으로 계속 내려가, 최종적으로는 의인 10명만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 여호와는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소돔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소돔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를 생각하고 롯에게는
미리 이야기를 해 주어 가족과 함께 소돔성을 떠나도록 합니다.
롯이 떠난 뒤 소돔성에는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립니다.
아침에
일어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온 지역에서 연기가 치솟음을 봅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이제 롯을 영영 볼 수가 없는
것인가?” 안타까움이 그의 가슴 속 깊이 밀려옵니다.
“아! 내가 어떻게 했어야 롯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아브라함의
안타까움이 저에게까지 전해옵니다.
롯이 소돔성을 탈출한 것을 아브라함은 알지 못합니다.
그 뒤 롯이 아브라함에게 연락을 끊으며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롯을
죽음에서 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에서 무심코 잊고 지내는, 아니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내듯 우리는 같이 지내던 많은 사람들, 많은 것들(소위 ‘세상
것’)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고는 잊고 지냅니다. 자연히 멀어지는 것이지요.
아니 어떨 때에는 변화하지 못하는 그들을 깔보거나
경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를 바라보고 자족하면서 우리들만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롯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깨졌던 것처럼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깨어졌을
때 그제야 우리는 ‘롯’(세상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멀리 떠나보내고 그저 잊고 지낼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 것’들이 아무리 못났거나 하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인생에 아무 뜻 없이
다가왔다가 그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미가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 자신이 ‘세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냈듯이 우리는 ‘세상 것’들과 결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듯 ‘세상 것’들을 죽음에서 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하듯
‘세상 것’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것’들은 결코 망각, 회피, 경멸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우르며 나가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진 창고일 수도 있습니다.
‘롯’을 우리가 버려야 할 습관이나 성격으로 비유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하듯이
과감하게 그것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 이해되질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롯과의 관계는 버려야 하는 관계가 아니고 자유로워져야 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며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잘난 것과 못난 것으로 가르고 우리에게 못나 보이는 것은 모두 버리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수줍음을 너무 타던 성격이 싫어 대학 들어가 술로 이를 타개하려 했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없애려는데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집니다.
일순간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자리에 몰래 숨어있습니다.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 못난 것들이 나의 중요한 한 모습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애정을 갖고 바라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못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해서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가 끝이 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가슴 깊이 롯이 남아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롯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있었을 겁니다.
눈물로 롯의 파멸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브라함은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음을 통감하며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아내 ‘사라’를 진정으로 보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를 묵상하며 나에게 ‘롯’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가슴에 더욱 와 닿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고향을 떠날 때 그의 조카 롯도 함께였다고 기록합니다. 롯의 아버지이자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 이 빨리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롯은 삼촌인 롯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가축을 키우며 재산을 모았으나, 점차 아브라함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롯은 비옥한 소돔 땅에 욕심이 생겨 그곳으로 이주합니다. 소돔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동시에 죄악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롯은 소돔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소돔의 죄악에 물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은 롯의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소돔의 죄악을 심판하기로 결정하고, 아브라함의 간청으로 롯과 그의 가족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롯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소돔을 탈출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어긴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롯은 소돔의 멸망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며 산속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롯은 두 딸과 함께 동굴에서 살면서 술에 취해 딸들과 관계를 맺는 끔찍한 죄를 저지릅니다. 롯의 두 딸은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을 통해 각각 아들 모압과 암몬을 낳았고, 이들은 후에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이주한 초기에는 믿음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점차 세상의 욕심에 눈이 멀어 죄악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소돔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롯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물질에 대한 욕심과 세상과의 타협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지만, 그의 삶은 죄악과 불행으로 가득했습니다. 롯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며,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Lot)도 믿음이 있었나?
1. 구원 받은 롯
롯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을 롯을 통해 알 수가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롯의 배경
롯은 아브라함과 나홀의 형제였던 하란의 아들로 아브라함의 조카(창 11: 27, 31)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우상을 섬기던 우르 땅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 데라를 따라 하란 땅으로 갔으며 그 후에는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서 산 인물입니다(창 12:4-5).
3. 삼촌 아브라함과의 갈등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람(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목자들 사이에 벌어진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에게 가축이 많아지면서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를 얻으려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주변엔 이방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이들의 갈등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심한 가뭄이 들면서 애굽으로 들어갔다가 겪은 시련으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다투기보다 양보를 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기를 권합니다(창 13:9).
4. 롯의 믿음의 선택!(창 13장 10-13절)
1) 롯의 선택
롯은 삼촌의 양보에 따라 눈으로 보기에 보암직한 동편의 소돔 근처 요단강 유역을 택하였고 아브람은 가나안을 택하여 두 사람이 갈라섭니다. 소돔 근처는 물도 풍부하고 땅이 마치 애굽의 비옥한 땅과도 같고 에덴동산 같았습니다.
2) 롯의 그릇된 선택
세상 눈으로 보면 롯의 선택이 탁월해 보입니다. 하지만 롯이 보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소돔의 사람들은 대단히 악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한 사람들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한 적은 없습니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소돔으로 갔고 아브람은 하나님 보기에 좋은 길(창 13: 18절=천막을 옮겨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숲 근처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경배함)을 택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브람은 어리석은 길을 택했고 롯은 이득을 보고 성공한 듯했습니다(시 106:15). 누가 보아도 롯이 탁월한 선택을 한 듯 보입니다.
5. 믿음으로 선한 길을 택한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과 약속(창 13장 14-18절)
1)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롯이 떠나자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2) 자손의 복: 아브람은 조카 롯을 잃었으나 약속의 허다한 자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롯과 달리 약속의 후손인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복 된 약속이었습니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1)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롯도 분명 믿는 자였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2:7: 의로운 롯).
2) 그렇다면 롯은 도대체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롯은 아직 변화되지 못한 육적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으나 신앙생활이 온통 세상의 쾌락과 자신의 유익(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육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적 그리스도인, 현세적 그리스도인, 예수 믿고도 예수 소망과 영생보다 현세적 세상 재미, 세상 욕구에 가득 차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롯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3) 아마 훗날 롯은 좀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하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육적 신앙인으로 산 댓가는 매서웠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롯의 이웃(소돔) 사람들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심판 당하는 동안 롯은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한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세상길을 좆아 살았던 롯의 아내와 자녀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불순종한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으며 롯의 두 딸은 아버지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아 요단 동편에 거주 하던 모압족(창 19:37)과 암몬족(창 19:38)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들 족속은 에서의 후손(에돔)과 이삭의 형제 이스마엘의 후손 등과 더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족속이 되었음을 시편 기자는 기록(시 83:4-8)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크리스천이 새 피조물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14-16절에서 바울이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옛 죄된 본성을 가리킵니다.
옛 본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으며,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을 때 우리도 일어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6:4).
첫째, 새로운 피조물
새롭게 살아난 이 새
생명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에서 말하는 “새 피조물”입니다.
새 피조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것 또한 피조물,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3은 하나님의
의지로 새 창조가 일어났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물려받았거나 스스로를 새롭게 재창조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의 옛 본성을 깨끗이 정리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것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새 피조물은
완전히 새롭고, 마치 온 우주가 엑스 니힐로, 즉 무(無)로부터 창조된 것처럼 무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조주만이 그런 일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둘째,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옛 본성에 속한 모든 것, 즉 본성적인 교만, 죄를
사랑하는 마음, 공로에 의지하는 태도, 우리의 예전 의견과 습관과 열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이
지나갔습니다.
특히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자기 의, 자기 높임, 자기 정당화가 사라진 것입니다.
새 피조물은 안으로
눈을 돌려 자아를 쳐다보는 대신 바깥으로 눈을 돌려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옛 것은 죽어 우리의 죄된 본성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옛 것이 지나가며 “새 것이 되었”습니다!
오래되고 죽은 것들은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새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고 세상과 육신에 속한 일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표와 감정과 소망과 이해가 새롭게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성경이 새로운 책처럼 보여서, 예전에 읽었던 성경에서 전에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이전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게 됩니다.
자연 전체도 달라진 것 같아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하늘과 땅에 새로운 놀라움이 가득 차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생겨납니다.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생겨나고, 이전에는 품지 못했던 연민을 원수에게 품게 되며,
모든 인류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때 집착했던 죄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로새서 3:9),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됩니다(에베소서 4:24).
계속해서 죄를 짓는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과 계속해서 죄 안에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누구도 살면서 죄 없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속된 크리스천은 나날이 성화(거룩하게 변화)되는 중이며, 실패할
때마다 죄를 더 미워하게 됩니다.
예,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어 가면서 죄를 덜 자발적으로 덜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자아는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 죄를 미워합니다.
차이점은 새 피조물은 더 이상 우리가 예전에
그랬듯 죄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에서 자유를 얻어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않습니다(로마서
6:6-7).
이제 우리는 의로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가 지배하게”하거나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 것 중에 택할 수 있습니다(로마서 6:11-12).
가장 좋은
것은 이제 우리는 후자를 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 피조물은 하나님의 의지로 구상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놀라운 존재입니다.
예전에 놋으로 만든 물건들을 사용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놋 그릇, 놋 수저, 놋 요강.....
하루는 어느 목사님 댁에 평소에 잘 아는 장로님이 찾아왔습니다.
대청 마루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장로님이 돌아가려고 마당에 발을 내려놓다가 마루 아래에 던져둔 깨어진 놋요강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마루 아래 있는 저 놋요강을 저를 주십시오”
“아니 그까짓 깨진 요강을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런 것은 묻지 마시고요”
장로님은 깨진 놋요강을 신문지에 싸가지고 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에, 장로님이 다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빛이 반짝이는 놋으로 만든 밥그릇과 국그릇 한 벌을 내어 놓았습니다.
“웬 그릇입니까?”
“목사님, 이 그릇이 어디서 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몇 달 전에 저에게 깨진 놋요강을 하나 주신 적이 있잖습니까? 그 요강을 녹여서 이 그릇들을 만든 것입니다.”
녹슬고 깨진 놋요강과 그것을 녹여서 만든 밥그릇과 국그릇을 비교해 보세요.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킨츠기(金継ぎ)
킨츠쿠로이(金繕い)
일본에서 유래한 도자기 수리 기법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밀가루 풀이나 옻칠로 이어 붙이고 깨진 선을 따라 금가루나 은가루로 장식해 아름답게 장식 및
보수, 수리하는 공예이다. 이것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2~3시간은 기본이며 10시간 넘게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킨츠키는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일본의 와비사비 정신을 반영한다.
킨츠기
자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다른 나라에서 제조된 도자기에도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어떤
물건을 오래 사용하여 못 쓰게 될지라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모되거나 부서지는 것도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계속 사용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인 차이점을 보인다.
방물장수, 아파(牙婆)
주로 노파들이 이 행상에 나셨기 때문에 "아파(牙婆)"라고도 불렀다.
아파(牙婆) : 어금니 아, 할머니 파
이들은 팔 물건을 보퉁이에 싸서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는데, 본업 외에 여염집 여성에게
세상 소식을 알려 주거나 특수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구실도 겸하였다.
특히, 내외가 엄격하던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집 여성의
바깥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방물장수의 입을 통해서 세상물정을 아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한편, 방물장수는 대갓집 안채에까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므로 단골을 맺은 마나님들의 말동무도 되어 주고, 나중에는 집안 큰일에 의논 상대로까지 끼어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혼사(婚事)에 관한 것이다.
방물장수는 대소가의 내력과 형편은 물론, 혼기에 이른 처녀나 총각의 있고 없음에도 소상하므로 통혼길을 트는 매파로서의 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절하는 딸자식을 가진 집에서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방물장수의 출입을 매우 꺼렸다.
홀어미가 방물장수의 눈에 띄면 여기 저기 소문을 퍼뜨리게 되고, 그 결과 혼사가 거론되어 번잡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방물장수를 상대방 가문의 사정을 염탐하는 정보 수집꾼으로 이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Casting(캐스팅)
금속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방식.
청동기 시대의 동검이나 거울 등이 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 거푸집을 모래로 만드는데(사형주조) 이 모래를 '주물사'라고 하며, 녹색 모래, 마른 모래 및 양토 모래 등의 여러 유형의 모래 주형 재료 가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의 우리의 상태와 믿기 이전의 상태를 비교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한 변화는 깨진 놋요강이 빛을 발하는 새 그릇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보다 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 이유는, 놋그릇은 처음 한 동안은 새것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아지고 떨어져 금이 가고 깨어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본질이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과거에 서양에서는 연금술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연금술사들은 구리나 철이나 납과 같은 값싼 금속을 가지고 은이나 금과 같은 귀금속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구리나 철이나 납으로 금을 만들어 낼 수 없듯이, 사람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법이나 도덕규범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억눌러서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위 ‘억제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법과 도덕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은 예의 바르고 양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법과 도덕이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타락한 본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은 존재적인 차원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새롭게 지음 받은 존재를 말합니다. 이 시간,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지는 본질적인 변화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가지는 포도나무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가지가 포도나무와 연합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서 진액을 공급받는 한 둘은 한 나무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 때부터는 더 이상 포도나무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진액을 공급받지 못하므로 말라 죽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가지들은 예수 믿는 우리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따른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영적 생명이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때에는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처럼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므로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도들의 관계를 머리와 몸과 지체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머리와 몸은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몸의 각 지체들도 몸을 통해 머리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지체는 몸에 속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누리고 지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즉시로 죽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는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 또는 몸과 지체의 관계로 비유한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이루는 관계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성경은 이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느 날 밤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뵙자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의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이처럼 예수님을 칭송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칭송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영이 거듭나게 됩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신,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 말씀이 이를 가리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하신 대로, 예수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하신 결과입니다. 어두운 우리 마음의 눈을 성령께서 밝혀 주시고, 완고한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그 자체로서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방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방주와 같은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고, 밖에 있으면 멸망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여러분의 유일하신 구주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이름들이 부여됩니다.
먼저, 성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을 받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을 가진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귀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지옥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니 “빛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친히 믿는 자들을 일컬어 “나의 형제요 친구”라고 하셨습니다(마 12:50; 요 15:14).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우리의 영적 신분을 자각하고 이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실생활 속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 곧 선민이었습니다. 모세 오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얼마나 특별하게 대우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 바로의 압제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 그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매일 아침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으며, 반석에서 생수를 내서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대적들의 손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에게 특별대우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요구하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거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을 비롯해서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우상들을 숭배하면 안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숭배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 미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율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생활 규례가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그 중에 정결하고 의롭지 않은 규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기만 하면 순결하고 정직하고 지혜롭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절로 과실을 맺습니다. 가지가 과실을 맺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포도나무가 진액을 원활하게 공급해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맺는 과실이란, 곧 성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선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실을 함으로 이웃 사람들로부터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말을 듣는다면,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악행을 하여 이웃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다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보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이 같이 비교해서 말씀합니다.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시험과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늘 자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각오하지 않으면 세상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전에 티비에서 어미 갈매기가 새끼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공중에서 쏜살 같이 내려가서 물속의 고기를 낚아채는 훈련을 시키는데, 미숙한 새끼 갈매기들이 거리와 각도를 잘못 측정해서 물이 아닌 해변에 떨어져서 곤두박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여우에게 잡혀 먹히는 새끼 갈매기들도 있었습니다. 공중을 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으며, 갈매기니까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매기도 방금 설명한 것처럼 실수로 땅에 곤두박질치는 일이 생깁니다.
성도들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하며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욕심을 따라 살면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실족하여 믿음생활에 큰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4장 17절 이하에 이 같이 권면합니다.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어린 갈매기가 숱한 시행착오와 연습을 통해서 원하는 비행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치 결단력이 있고 영적 자질이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삼년 반이나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대적들에게 붙잡혀 가시자 다 주님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조차 하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같은 나약한 상태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하였더니 오순절 날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며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풍조를 따라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생활을 하면 그 심령이 고통을 느낍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거짓말이나 위선적인 행동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거나 위선을 하면 신앙양심이 가책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마음이 편치 않고 하나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더러운 옷은 오물이 묻어도 표시가 나지 않지만, 깨끗한 옷은 작은 오물이 튀어도 금방 표시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깨끗한 신앙양심을 갖기 위해 회개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한 번 두 번 악을 행하다보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유혹이 다가올 때 단호하게 물리칠 뿐 아니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기도했던 다윗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심령을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옛 사람이 좋아하는 세속적인 생활을 벗어던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답게 성결한 생활을 힘차게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우리는 새해 벽두에만 새로운 결심을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성도답게 날로 새로워지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 이 말씀이 성도님들의 삶을 통해서 명백하게 입증되는 금년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교회사 이야기 / 김익두목사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생애와 부흥운동(1910~1940)
“한국의 베드로”, “이적과 치유의 안악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는 1910년대로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한국부흥운동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28,000회의 설교를 하며 인생의 3분의2를 하나님께 드린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전익선”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 김응선은 기와집에 터전을 잡고 사는 중산층이었으며 지역에 사는 걸인들을 구제하고 평촌리의 노인들을 공경하여 주민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는 대원면 유지였습니다.
김익두는 6세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10세의 나이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3세되던 해, 모친이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30리길(12km) 거리를 달려가 한의사를 모셔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의사는 정성으로 치료하고 모친을 낫게 하였으며 치료비도 받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채 낙방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총명한 두뇌와 천재성을 가진 김익두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예선탈락은 아버지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이 일로 몸져 누우신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채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뒤로 한 채 부친을 잃은 김익두는 날마다 부친 산소에 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지만 응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무상에 빠진 김익두는 구월산 패엽사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사상에 환멸을 느끼고 더 큰 고민의 늪에 빠진 김익두는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습니다.
부친이 별세하고 집안의 가장이 된 김익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안악지방 토산물을 구매하여 평양에 가서 판매하고 평양에서 생활용품과 일용잡화를 재 구매하여 안악에서 판매하는 이중소득으로 가정생계를 원활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줍게 되었는데 주머니 안에는 큰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며칠을 돌아다니며 주인을 찾아 그 돈주머니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돈의 주인은 안악읍내 가장 큰 상점을 경영하는 상인이었고 김익두의 정직한 마음에 감동한 주인은 상점의 지배인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영업능력이 좋고 정직하여서 많은 손님들이 상점을 찾아와 수익은 날로날로 증가하였습니다.
특별히 김익두의 고객은 그의 정직함과 성실함에 매우 신뢰하였고, 자기집 귀중품을 맡기고 보관하는 전당포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안악읍 최고 상점의 지배인으로서 좋은 직업을 가진 김익두에게 곳곳에서 혼사처가 들어왔고 18세의 나이에 16세의 “전익선”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신혼생활에 하루하루가 즐거운 어느날, 친구가 찾아와 동네에 큰 공장이 입주하는데 이곳에 투자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하여 연대보증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수 없어서 보증서의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그것은 친구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상 전래의 토지와 집이 몰수되고 김익두는 하루 아침에 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김익두는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에 취한 김익두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시비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장날에는 부녀자들과 할머니들의 노점상을 갈아 엎거나 던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날이 하루, 한주, 한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자 시장 상인들이 오늘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비는 일이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졌습니다.
이렇게 방탕의 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김익두는 오늘도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시비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서양 여선교사(소알론 선교사 부인. 샐리)가 시장에서 전도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선교사는 김익두에게도 전도지를 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지를 건네받은 김익두는 “뭐라고? 나보고 서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지로 코를 풀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며 꾸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를 잘 알지 못했던 여선교사와 여선교사가 전해주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라고 건네주는 선교사의 전도지를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은채로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무심코 구겨진 전도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라는 네 글자에 심장이 떨리는 느낌을 받고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선교사가 전해준 종이에 적혀 있는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이라고 했고 그 세세토록은 “영원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일까?
이 말씀은 며칠동안 김익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으며 잠을 설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째 고민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친구이며 예수교를 신앙하는 “박태환”(후일금산교회 장로로 피택되었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훌륭한 선교사가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하는데 함께 교회에 가자는 권유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평소때의 김익두 라면 “교회는 무슨? 조상도 모르는 서양귀신에게 홀려서 잘하는 짓이다!”라고 해야 당연한 것인데 그날은 박태환의 권유를 못이긴 척 하고 받아 주었습니다.
1900년 3월, 금산교회에서 개최된 남자 부흥사경회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스왈렌”(소안론, Swallen. W. L.)이 강사로 초빙되어 “영생”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서양사람이 한국말에 능숙한 것에 한번 놀라고, 서양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없이 몰려든 한국사람들에 또 한번 놀라고, 방탕한 생활로 교회라면 치를 떨었던 자신이 교회당에 앉아 있는 현실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물론 주먹깡패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도 모두 놀라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시골장터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할 사람이 부흥사경회에 앉아 있으니 혹시 무슨 행패라도 부려서 집회를 망치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입견이었고 기우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실패하고 술이 아니면 하루도 살수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 김익두는 스왈론의 설교속에서 녹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받아들게 된 전도지 한 장과 박태환이라는 친구의 소개와 스왈론 선교사의 만남을 우연하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지난날의 무섭고 두려웠던 모든 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자복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요?
김익두는 아직도 통회하며 얼굴과 온몸은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 왔던 인생의 죄짐들은 이제 가벼워 졌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님도 김익두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처음 만나는 김익두를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는 놀라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김익두에게 순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는 이제 주먹깡패와 술주정군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성경을 읽었으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랜 술친구였던 김선봉을 전도한 김익두는 그와 함께 교회 안팎의 궃은 일과 힘든 일들을 척척 해내는 등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생집에 가서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김익두는 김선봉과 함께 술집을 찾았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기생, 월선과 옥화를 전도한 김익두와 김선봉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별주 한잔씩 하자고 무심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술을 마시던 김익두가 감전사를 일으키며 충격을 받고 쓰러져 기절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선봉이 깜짝 놀라 겨우 집까지 업고 돌아 왔으나 1주일 동안 혼수상태를 거듭하며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겨우 일어나게 된 김익두는 예수 믿은 후 다시 술을 마신 것을 회개하며 3일간 금식하고 통회하며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지 1개월째,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은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교인들 앞에서 공개 자복을 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선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장에 나가서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청결하게 하며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김익두의 변화에 교인들은 점차 신뢰를 보냈고 그는 친구인 김선봉과 함께 교회의 환경정리와 크고 작은 일들에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모펫 선교사와 함께 한국 부흥의 주역이었던 스왈론 선교사와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론 선교사로부터 받아든 순한문신약성경을 1년간 100독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김익두는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에 도전한 김익두가 산에서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산하던 중 하늘에서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견딜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 한없이 울고 찬송하며 밤을 맞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7월, 세례를 받기로 예정하여 부부가 각방을 쓰고 매일 목욕재개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세례를 준비하였으나 선교사의 순례가 늦어져 1901년 7월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까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김익두는 전도왕이었습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김익두의 영혼은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던 김익두가 안악장터에 다시 나타나자 장사꾼들은 모두 당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김익두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있을까 의구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몽둥이와 쇠망치를 들었던 김익두의 손에는 성경과 전도지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김익두입니다.
안악장터에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살게 하였던 깡패 김익두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고 여러분앞에 용서를 빌고 회개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당했던 여러분들께서 저를 한없이 때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떤 상인들은 예전의 앙심이 있었던지 보복적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욕설을 하기도 하였지만 진심어린 반성에 함께 울며 용서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익두의 진심과 용서에 감동을 받은 일부 상인들은 예수를 믿기로 결신하고 그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01년, 28세의 변화된 김익두에 관한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 지면서 “재령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하겠다는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의 큰 약방에서도 15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김익두에게 채용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재령교회의 사례가 30원이었으니 김익두에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익두는 순간 기도하며 생각하였습니다.
서울의 약방도 종살이고, 교회의 전도사도 종살이인데 같은 종살이라면 사람의 종보다 하나님의 종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으로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김익두가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그곳에는 남자 1명과 여자 10명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부임즉시, 김익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름성경학교에 등록한 어린이들이 김익두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회개를 하자 그들의 부모들도 이어서 회개를 시작하였고 교회는 온통 자복함과 통회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놀라운 역사였으며 재령교회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재령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힘을 잃은 성도들은 전도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김익두의 첫 번째 사역은 이렇게 대성공을 이루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예고하였습니다.
재령교회의 부흥은 신천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김익두는 그후 신천교회의 선교사와 동사전도사로 청빙을 받고 사역지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천교회는 교회만 있고 교인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6개월간 매일 철야기도를 하고 애원하는 중에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절름발이 장애인 여자 한명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그리웠을까요? 장애인 거지 여자라도 한사람이 함께 있으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익두는 장애인 거지 여자를 보통의 정상적인 교인으로 자라게 하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후, 이번엔 남자 거지 한사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그도 돌려 보내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핌으로 보통의 일 잘하는 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한 김익두 전도사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신천교회를 찾아왔고 한주일에 10명, 어떤 주일에는 20명이 찾아와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3년간의 노력 끝에 한사람의 교인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300명의 교인으로 부흥을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고, 하루에 세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읽는 것을 숨쉬는 것처럼 하였고, 길에서는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를 습관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김익두 전도사를 평양신학교에 파송하여 목사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로서 1901년에 설립되어 1907년, 길선주와 서경조 등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김익두 전도사는 김관근, 박정찬, 김종섭, 안승원, 우종서, 주공삼, 채정민 등 27명과 함께 1910년 제3회 졸업생이었습니다. 1910년 9월20일, 37세의 김익두는 평안북도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익두가 목회한 신천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700명의 교세로 확장되었습니다. 한명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이제 협소하다 못해 교인들이 밖에서 까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성전건축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3일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의 환상중에 노아의 방주모양을 한 대예배당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인 김익두 목사는 교인들에게 성전건축을 선포하고 건축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한주만에 쏟아진 교인들의 작정헌금은 힘에 겨울 정도로 지나친 액수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설계를 마친 교회당 건축비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하는 중에 선천지역 유지들에게 가서 교회 건축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도저히 말이 않되는 김익두 목사의 제안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그렇게 인색하고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유지들이 큰 기쁨으로 호응하며 김익두목사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같은 불신자들의 헌금에 충격을 받은 성도들이 추가로 헌금을 하여 신천교회 대성전은 재정부담없이 여유롭게 완공될 수 있었으며, 그 때 건축헌금을 하였던 지역의 유지들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신천교회 성전헌당식을 끝낸 후, 김익두 목사는 신천 시내 길가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베드로의 이적을 기록한 성경을 믿는 김익두 목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신감과 확신없는 믿음이 그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앞에 자복하고 회개하였으며 다시 1주일간 금식기도를 마친후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상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향후 39년간 수십만명의 병자를 치유하는 신유의 은사를 일으킨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신유집회로 명성을 더 높여가던 어느 여름날,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산고개를 넘어 가던중 너무나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나무그늘에서 잠시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술에 취한 남자가 올라와 “왜 당신이 여기에 먼저 올라와 있느냐”면서 시비를 걸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다 맞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 폭력을 멈추자 김익두 목사가 “형님, 이제 다 때렸소?”라고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 다 때렸다, 왜? 어쩔건데!” 하면서 다시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정색을 하고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얼굴이 반쪽이 되어 머리를 땅에 엎드리고 “형님! 제가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하면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 나를 따라와!”하면서 그 사람을 자기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데리고 가서 참석케 하였고 그는 훗날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예전의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이제 주먹쟁이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성경다독”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성경다독을 권유하였고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은 신천교회 교인들 또한 성경을 많이 읽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일설에 구약을 100독, 신약을 1,000독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주제도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김익두의 신앙생활의 기본원칙이었고 주제였으며 생활법률과 규범이었습니다.
1919년 12월25일, 대구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박수진”이란 거지가 집회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을 누워서만 먹던 자였습니다. 거지로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회시간에 다시 그를 불러 기도를 하였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스스로도 놀라고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도 다 놀라게 되었습니다.아래턱이 나은 박수진은 그 길로 동네를 다니며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춤을 추며 뛰어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역사를 이어갔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대구 경산읍교회에서는 수십명의 환자들이 집단으로 치유를 받았고, 대구교회 집회에서도 수백병의 병자들이 한꺼번에 치유를 받는 기적같은 일이 눈앞에서 목도되었습니다. 김해군 진영리교회에서는 23년된 혈루증 여인이 나음을 입었고, 평양교회에서는 11년된 벙어리 여인이 말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능력을 대서 특필하고 그의 능력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기도와 함께 역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대구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은 1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으로 돌아간 그녀는 중풍이 재발하였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안악군 동문면에 사는 “최석황”이라는 사람은 30년된 종기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료받았지만 후에 타락한 인생을 살면서 병이 재발함은 물론 그 병으로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20년 10월20일, 2주간의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제8회(1919) 마펫 선교사에 이어 서울 안동교회당에서 제9회 장로교 총회의 총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승동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도로와 교통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 1만명이 회집한 부흥회에는 교회당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마당과 인도변까지 명석을 깔고 앉아 부흥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당시 승동교회 집회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만국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지도자들도 김익두의 명성을 듣고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반대하였던 “밀스” 선교사는 회심하였으며 “로스” 선교사 등 해외교계 지도자들은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승동집회에 참석한 “김재준”은 훗날 목사와 대 신학자가 되었고, 1920년 5월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부경사경회에 지수광, 배익자, 이약신과 함께 참석한 “주기철” 목사는 “성신을 받으라”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놀라운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1922년 3월, 주기철 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훗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5월9일자신문)는 초기에 김익두 목사의 치유를 사람을 미혹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해노회 “임택권” 목사는 노회 산하에 “이적증명회”를 조직하고 김익두가 이적을 행할 때 그 당사자들의 사진을 모두 찍어서 “이적증명서”라는 노회차원의 공식적인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이적은 과학으로 증명할수 없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질병이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말씀과 기도와 환자의 회개로 온전히 치유되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기적이 아닐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치유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회개와 믿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언론의 대표지였던 기독신문 259호는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세계3대 불가사의“라고 보고 하였고, 동아일보 58호와 매일신보 4645호에도 대서특필 되는 등 김익두 목사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북새통을 이루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부산경남20개지역, 대구경북 25개지역, 전남광주외 21개지역, 전북전주외 15개지역, 충남보령외17개지역, 충북제천외 10개지역, 강원횡성외 22개지역, 경기수원외 20개지역, 황해재령외 24개지역, 평남평양외 17개지역, 평북연변외 22개지역, 함북나진외 16개지역, 함남원산외 22개지역, 제주도 전역 등 전국 258개지역에서 776회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28,000회의 설교와 1천5백만명이 참석하여 288만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일이 김익두의 집회에 있었습니다. 150개의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었고, 140개 교회는 넘쳐나는 성도들로 인하여 증축이 시급하였으며, 120여개의 유치원을 신설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치유한 완전 장애인이 1만여명에 달하였고,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주기철, 유원봉, 유해천, 유만식, 오윤호, 김정묵, 양석진, 김재준, 이성봉, 전재선 등 58명의 목사가 나왔습니다. 그가 인도한 집회에서 반지, 비녀 등 귀금속을 비롯하여 당시 헌금액수로 1억8천5백만원이 모금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938년 9월9일, 제27회 장로교 “홍택기” 총회장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선국민의 의무”라는 이유로 총회가 결의한 이 내용은 기독교 사상 가장 천박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양 장대현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5차례의 구속과 7년간의 옥중 고난 가운데 1944년 4월21일,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최봉석과 박관준 목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1938년 당시, 당시, 김익두 목사는 서울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로 8년간 시무중이었습니다. 종로경찰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강사인 김익두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협박하며 회유를 동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자신이 읽었던 성경에서 신사참배가 하나님 앞에서 위배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하였고, 종로경찰서는 김익두 목사를 강제 연행하여 체포, 구금하였습니다. 회유책에 실패한 일본경찰은 몽둥이와 극심한 고문으로 1개월동안 압박하였고 결국 빈사상태가 된 김익두 목사가 반응이 없자 가족들에게 데려가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종교적 아무런 권한이 없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김익두 목사를 파면하고, 승동교회에서의 설교를 금하였으며, 경성에서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1938년 12월28일, 김익두 목사는 승동교회에서 파면당한채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직전리 피아골이라는 첩첩산중으로 정배(지정된 장소로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오랜 고문으로 김익두 목사는 피폐해져 있었고 3개월이라는 회복기가 필요하였습니다. 1939년 3월, 김익두 목사는 사과나무 600주를 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언덕바위에 자리를 정하고 매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는 신유의 부흥강사로 김익두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라도 교만을 하였을까요?첩첩산중 사람 한명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보내어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의 몸은 기도와 함께 조금씩 치유되었고 그의 영혼은 평강을 찾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경찰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 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교인 몇사람도 함께 연행되었습니다. 신의주 신사당앞에서 일본형사들은 김익두의 머리를 휘어잡고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하며 “최경례”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처절한 반항으로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로 복귀한 일본경찰들은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였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의 보고서를 들고 장로회 총회를 찾아간 종로경찰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의주 신사당에서 참배를 하였다고 거짓 증언하고 이러한 유언비어를 급속하게 유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되었고 평양신학교 대강당에서 장로교 총회차원의 대각성회개와 부흥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전직 총회장이며 부흥강사 자격으로 부흥집회의 개회설교를 맡았습니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광복으로 출옥한 “채정민” 목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김익두 목사를 제지하며 신사참배를 한 자가 이곳에 서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채정민 목사의 고문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1개월간 모진 고문을 이겨야 했고, 지금은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조국광복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장로교는 친일행적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가 잘하였고 나는 여기 서 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할 때라는 진실이 있음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1945년 9월, 김익두 목사는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전과 같은 신유의 은사나 능력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목사인 자신을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직전리 교회의 담임으로 새롭게 부임을 하였습니다. 그후 재령 해창교회로 이동하였고, 다시 신천서부교회로 이동하여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제국이 아니라 공산주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이후 정치적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경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지역은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였고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있었습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하던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40만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들은 모두 경계대상이었습니다.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를 모두 궤멸시켜야만 했습니다. 감언이설과 공갈협박의 양날개로 기독교를 급박하였지만 신앙의 힘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대항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외조부이며 목사 출신인 “강량욱”을 내세워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조직에 곽희정, 신영철, 나시산, 이웅, 심익현, 김치근, 황기황 등이 가담하고 조직적인 기독교 탄압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장로교 산하 5도연합노회가 이미 조직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정상적인 공교회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김진수 회장 목사를 비롯하여 김화식, 강문구, 이유택, 김길수, 허천기, 이기혁 목사위원 등 신앙에 헌신적인 분들이 생명을 각오하고 공산주의에 저항하였습니다. 1946년 11월3일, 주일 1차 대의원선거를 주일에 개최하였으나 기독교가 전면 반대하여 불참하고 선거 자체가 실패하자 공산주의자들은 5도연합노회 임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구금하여 교회의 지도체계를 사실상 와해 시켰습니다. 이 기간을 틈타 기독교도연맹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를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조직 자체를 알지 못하였으며 총회장을 수락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량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만난 사실이 있고, 강량욱으로부터 명의만 빌려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돌아온 강량욱은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직을 승낙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강량욱과 기독교도연맹 임원들은 김익두 목사의 이름을 이용해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가입을 강요하였으며, 가입을 거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검거하거나 추방하는 등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중요하고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목사와 교인들은 김익두 목사가 변절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맹 비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장남 김용식은 서울에서 김익두 목사의 월남을 간청하였습니다.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신천서부교회 500명 성도들의 생명과 신앙을 버려두고 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76세의 노인이 이제 얼마나 더 살까 하면서 이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9년 5월1일, 노동절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여기는 명절이었습니다. 노동절 행사에 김일성 장군은 특별하게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큰 성경을 가지고 입장하였고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익두 목사는 “들으라, 부한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고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 밭을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하는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옳은 사람을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치 아니 하였느니라”(야고보서5:1~6) 그러나 북한은 또다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조작하고 김일성 장군을 찬양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1949년 10월, 정치보위부에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다른 교회에서는 모두 스탈린 수상 사진과 김일성 장군의 사진을 게시하였으니 김익두 목사의 교회에도 게시를 강요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 목을 칼로 자르라. 교회 강단에 예수님의 사진도 걸지 않는데 누구의 사진을 건다는 것인가?” 하며 강력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현장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월남한 후 서울 천호동 광성교회 장로로 봉직한 한태선 집사의 증언으로 증명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6.25전쟁이후 UN의 참전으로 조기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이 장기화하고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까지 UN군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10월13일 국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달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감격한 나머지10월14일 새벽종을 울리며 새벽기도회 시간에 육군 입성을 광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20명의 사람들이 남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을때였습니다. 당시 패퇴하던 북한군 병사가 김익두 목사의 광고를 들은 후 교회안으로 습격해 김익두 목사 등 6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총경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0월19일, 육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11월29일, 김익두 목사의 장례는 향년 76세로 마감하였습니다.
안악산 호랑이, 주먹깡패왕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성이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한 번 삐둘어지기 시작한 인생으로 김익두는 젊은날을 술과 계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터에서 우연하게 만난 여선교사의 전도지 한 장은 김익두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김익두는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내려 놓았을때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를 멈추었을땐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질병을 치유하고, 2백만명이 넘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한 훌륭한 한국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오해와 누명의 옷을 입어야 했고, 그것으로부터 평생토록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월남하여 남한땅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수 있었지만 신천 서부교회의 500명 어린양들을 버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참된 목자였으며 이로서 억울함과 누명을 증명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 그가 깡패로 살았던 시간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가 목사로 살았던 시간은 50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김익두 하면 목사를 먼저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먹왕을 먼저 생각합니다. 진실보다 거짓을 더 신뢰하고 변화의 삶보다 그 이전의 삶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김익두는 그렇게 변절자이고 주먹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1920년대 한국은 부흥의 절정기를 맞이하였고 수많은 고통의 사람들을 온전케 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익두, 한잔 하러 가세!'
'아니야, 요사이 내가 약을 먹고 있어서 술 못 마시겠네.'
'약..., 무슨 약?'
'술, 담배를 끊는 '신약과 구약'일세.'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다
김익두목사의 예수 믿기 전에 별명은 "안악산 호랑이" "깡패" 라고 하였다.
776번의 부흥집회 인도, 2만 8000회의 설교를 했던 대부흥사 김익두 목사. 굴곡진역사 속에서 그가 증거 한 것은 오직 성령의 은혜, 불같은 믿음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1874년, 황해도 안악군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족한 것 없는 가정에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올곧은 성품을 지닌 부모님 슬하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아버지의 바람으로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깨우쳤던 어린 김익두. 그는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길에 오르는데,그의 오랜 노력의 답은 불합격이었다.
낙방한 김익두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시련은 아버지의 죽음.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환점이 된다. 이생의 번뇌로 그는 영원한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되는데, 아버지의 무덤을 찾는 일은 어느새 그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김익두의 행패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자 도저히 마음 놓고 살 수가 없다는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해지는데, 급기야 경찰이 나서게 된다.
한국 초대 교회 유명한 목사님 중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의 교회로 가는데, 너무 너무 더워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그만 웃옷을 다 벗고 나무 그늘에서 평안히 쉬게 되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이 건아 하게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올라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김익두 목사께 오더니, 시비를 거는 것이다. "왜 당신이 여기 먼저 올라 왔느냐?" 말 같지 않은 소리로써 자꾸 시비를 거는 것이다. 말대꾸를 안 하니까 이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장작 패듯이 그냥 패는 것이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은 한마디 말없이 다 맞았다. 힘이 없어서 맞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주먹이 있는 사람이 말없이 맞는다는것이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얼마동안 때리더니, 이 사람이 그 때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 때 목사님이 묻기를 "형님 다 때렸소? “그랬더니, 이 사람이 "다 때렸다 왜?" 하고, 또 때리려고 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요."그랬더니 이 사람이 김익두라는 말을 듣더니, 얼굴 안색이 변하여 그냥 초죽음이 되는 것이었다.
이때 김익두 목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당신 오늘 장례식 날이라고,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당신이 오늘 산 줄을 알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그냥 머리를 땅에다 대고 "형님, 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 " 그래서 자기 부흥회 하는데 데리고 가서 자리에 앉쳤다고 한다. 이 사람 나중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길선주 목사께서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과 성령의 은혜를 주도한 한국의 바울이라면, 김익두는 이적과 치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그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다.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 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인 박태후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순 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며 신앙에 심취했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삼일 간 금식을 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화끈거리는 체험을 하였고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는 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깨달았고 하염없이 울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그의 사역에서는 특히 치병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임택권 목사는 '이적증명회'를 만들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 현장에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증명했는데 약 일만 명 가량 치병자를 추측하고 있다.
그의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25일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였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 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 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그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 되었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 되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동아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김익두목사의 신유의 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간구가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순결한 삶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이 1년 남짓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목사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의 간절한 회개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또 안악군 동문면에 최석황이라는 자는 30년이나 고생하던 종기를 치료받았는데 후에 타락하여 병이 재발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응한 사건이었다.
그는 또한 철저히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믿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적의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런 믿음의 그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팔천번, 결신자 28만명, 치병자 일만여명이였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김재준 등 한국교회사에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했고,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광복 후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한국동란 때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공산당에 의해 교인들과 함께 살해당하여 순교의 길을 간다. 그 날이 1950년 10월 14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므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고통 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이 땅에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순교사에서 발췌-
김익두목사의 일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의 청풍 김씨 응선씨와 전익선씨 사이에서 1874년 11월 3일 새벽에 독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안악골은 양산대의 산준령이 대원면 평촌리 마을을 마치 비둘기 날개 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었으며 수려한 산새와 빽빽히 들어선 소나무 숲이 마을을 병풍 처럼 두르고 있어서 자연 환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김익두의 삶의 여정의 걸음마
김익두는 안악골 기름진 땅의 제일가는 부자집에 태어나 부모와 일가 친척들의 귀염둥이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다.
김익두의 영적인 삶의 힘
그는 전국 방방곡곡 안가보지 못한 곳이 없으며 일본ㆍ만주ㆍ러시아 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했다. 옥합을 깨뜨려 온몸으로 헌신한 김익두에게 하나님이 생활을 보증하섰다.
재령읍교회를 담임하다
당시 재령읍교회는 남자교인 1명과 여자교인 10명이 전부였다. 김익도 전도사가 재령읍교회에 시무하자마자 곧 행사를 가졌는데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한 것이다. 강사 김익도전도사의 설교에 어린아이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울고 회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마치 재령읍내의 아이들이 다 모여든 것 처럼 아이들의 홍수 속에 눈물 바다를 이루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엉엉 소리를 내어 큰 소리를 내어 울기까지 했고 회개하는 기도로 은혜의 시간을 이루었다.
재령읍교회에서의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에서의 신앙 부흥
한국교회 100년사에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에서 어린이들이 통곡하고 회개했다는 역사는 들어 본적이 없다. 지금도 매년 여름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여름성경학교를 실시하지만 죄를 회개하고 깨우치는 그런 일은 결코 볼 수가 없다. 즐거운 오락과 재미있는 프로그램과 맛있는 간식으로 집회시간을 메꿔 나갈 뿐이다.
그러나 김익도 전도사는 어린이는 물론하고 학생부 수련회나 부흥회에서도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며 집회때마다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김익두 전도사가 집회하는 곳마다 경이롭기만 한 회개 운동이 폭발했다.
신천읍 교회 시대를 열다.
소안론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신천읍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이 지역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교회당을 세웠으나 도무지 부흥되지 않아 고심하던 중 소안론 선교사는 김익두전도사를 신천읍교회로 파송하여 신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의 동역 전도사로 부임시키기로 결정하고 김익두 전도사에게 간곡히 신천읍교회로 부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익두 전도사는 수일간을 기도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소안론 선교사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재령읍 교회를 떠나 신천읍교로 부임하게 된다.
신천읍 교회에서의 사역
김익두 전도사는 선교사의 동역 교역자로 두 사람이 신천 서부교회를 위하여 사역하게 되었다. 신천에는 명색만 교회이지 성도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무인 교회였다. 신천읍교회로 부임한 김익두전도사는 막상 현지에서 현황을 살펴보니 한심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기도에의 사역으로 들어가다.
김익두 전도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날마다 산에 올라가 철야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교회당은 텅텅비어 아무도 출석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익두 전도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원근각처를 두루 다니면서 전도할동을 계속했고 끈질기게 하나님께 메달려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없이 6개월이 지나갔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 오다.
그러던 중 어느날 이윽고 한 여인이 교회로 찾아왔다. 다리를 절룩꺼리며 초라한 형색으로 인사를 하는데 반신불수와 같은 병자였다. 6개월만에 찾아온 사람이 병자라 한심한 생각이 들어 낙심되었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께 감사 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성도 한사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감사한 생각이 드니까 친철한 마음도 생겼다. 반신불수의 여인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김익두전도사와 선교사는 이 여자 한 사람 앉혀놓고 6개월만에 등록된 첫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또 한영혼이 주님께로 돌아 오다.
겨우 한 사람의 성도를 얻은채 또 6개월의 세월이 지나갔다. 김익두전도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주여! 한 사람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하오나 한 삶 데리고 어찌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더 보내 주시옵소서!”
어느 날 또 한사람이 찾아 왔다.
“저는 각설이 올시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밥이나 좀 주시요” “네 그러지요” 김익두전도사는 어른 밥 한 그릇을 가져다 먹였다. 그는 또 한번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ㆍㆍㆍㆍ 하필 온다는 사람이 거지 각설이라니ㆍㆍㆍ거지도 사람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김익두전도사는 곧 뉘우치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주여! 이 죄인이 또 범죄하였나이다. 거지라고 업신여겼사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육신은 거지라 하더라도 그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줄 알고 진실로 보내 주신 은혜 감사드리옵나이다."
김익두 전도사는 그 거지를 천사 같이 대접했다.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했던 생각이 나서 친절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이로써 겨우 1년만에 겨우 2사람의 성도를 얻게 되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두사람의 성도를 허락하셨사오니 또 한사람 보내 주소서"
하나님께 성도를 더 보내 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네 사람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다시 6개월 만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1년 6개월만에 3사람의 성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김익두 전도사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확연히 깨닳아 알 수 있었다.
"주여!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과연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가 이렇게 힘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김익두 목사가 후일에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성도를 그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였는데 그 동기는 이때에 성도의 귀중성을 깨닳았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부흥의 물결은 계속되고
어렵게 금식하며 기도하며 1년 6개월만에 얻은 3사람의 교인이 들어온 후부터는 신기하게도 매주 10명 안팎, 혹은 20여명, 때로는 30여명씩 떼를 지어 입교하였고 교회가 갑짝스럽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만 2년 남짓한 햇수로는 3년만에 무려 300여명의 큰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부흥이 인위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만이 가능케 된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 진 것이다.
“주여! 감사하옵나이다. 이 일이 대체 어찌된 일이 옵니까? 가슴이 벅차 큰 물결이 밀려 오느듯 합니다. 못난 종이 그렇게 투덜댔사온데 어찌 이다지도 무한 하신 은총을 베푸시나이까? 주여! 이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 믿지 못했던 종을 용서해 주옵소서.!”
감격한 김익두 전도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과 어려웠던 때마다 낙심햇던 부족한 믿음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신천읍교회의 부흥의 역사
300여명의 신자가 주일날이면 구름같이 모여 들었으므로 가건물을 지어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마저 곧 성도들로 가득 찼다. 한국의 기독교사의 초기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그 시절에 황무지 같은 신천읍에 300여명의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역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분명했다. 3년만에 대교회로 성장한 김익두전도사의 일과는 교회의 급격한 부흥으로 말미암아 매우 분주해 졌다.
김익두 목사의 경건의 뿌리
이른 새벽에 일으나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였고 신ㆍ구약 성경을 꼭 하루에 한 장씩 규칙적으로 정독했으며 하루 꼭 3번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던지 혼자서 길을 걸을 때에도 말씀을 암송하였고 자나깨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성경을 읽으며 길을 걷다가 담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많았다. 가끔은 읽는데 너무 열중하다가 그만 길을 지나쳐 “아이쿠,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나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김익두전도사가 길을 걸을 때에는 성경을 보거나 기도를 할 때가 많아서 길거리에서 인사하는 사람을 보지 못할 때가 빈번하여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김익두 전도사 신학교에 가다.
신천읍교회에서는 신실하고 능력있는 종 김익두 전도사를 신학교에 보내어 훌륭한 목사로 양성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회를 열어 의논 끝에 김익두 전도사를 평양신학교에 입학시키기로 의결하고 학비 일체를 신천읍교회에서 지급키로 했다. 1906년에 드디어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3개월 동안 평양에 가서 수업을 받고 다시 돌아와 교회일을 돌보다가 다시 3개월은 평양에 가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6년 동안 공부하고 나면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능력을 받기 위한 몸부림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바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깯닫고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할 것을 작정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성령의 충만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에 몰입하여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방울 두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요동치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 기도하고 있어서 온몸이 비에 흠씬 젖었지만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 빗방울이 흙과 범벅이되어 튀어오르는 바람에 전신이 흙탕물로 뒤집어 쓴 것처럼 함박 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그의 열화같은 기도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새벽이 되자 망월같이 크고 둥근 성령의 불이 그의 가슴에 들어왔다. 그는 전신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 지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김익두 목사는 산에서 내려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학우들이 그를 보고 기겁을 했다. 온몸이 흙탕물에 젖어 기괴한 모습을 하고 불쑥 들어왔으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놀란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학우들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고 말했다. 언제나 그에게는 명성을 얻을만한 곡절과 일화가 따라 다녔다.
김익두 전도사 신학교 졸업하다.
1911년 평양 신학교 제 3회 졸업생으로 27명의 학우들과 함께 신학교를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김익두 전도사 목사 안수를 받다.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12년 12월 5일에 그 당시 독노회였던 황해노회 제3회 정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익두목사의 안수식은 신천교회의 청빙서에 의해 성도들의 기도와 축복속에서 거행되었다. 안수 위원 목사들은 무릎을 꿇고 앉은 김익두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고 임직식을 주관하던 노회장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주여 오순절의 불과 같이 이 조선에도 성령의 불을 붙혀 주옵소서!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을 입혀 주셨듯이 이 하나님의 종에게도 갑절의 영감을 부어 주옵소서! 삼천리 강산을 복음으로 가득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갖은 인생의 신고 끝에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은 김익두목사는 감격과 충만한 사명감으로 온몸이 떨려 왔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셨고 그의 심령은 성령으로 충만 했다.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침내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그의 두눈에서 비오듯 흘려내렸다.
신천교회당 신축하다.
김익두목사가 시무하는 신천교회는 해를 더할수록 부흥하여 교인의 수가 700명을 넘게 되었고 그 시대로서는 엄청난 부흥이였다. 그 동안 예배당으로 사용해 오던 가건물이 이제는 예배 인원을 모두 받아 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수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예배당은 인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비 좁아서 뒤쪽에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 혹은 문턱에 앉거나 아예 밖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안수 밭은 후 첫 번째 사업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온 교회가 합심하여 뜨겁게 기도했으며 밤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일에는 모든 교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700명 이상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김익두 목사는 특별히 산상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산으로 올라 갔다. 3일 간 금식하며 기도했고 밤에는 철야로 기도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그는 늘 “인간의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앞지러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겸손히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 기도는 그가 평생토록 일관한 유일한 기도의 제목이었다고 한다. 김익두 목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3일동안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3일이 지나자 김익두목사의 마음에 강한 확신이 왔다. 기도 중에 큰 목조 예배당이 흡사 노아의 방주와도 같이 웅장하게 김익두목사의 눈에 비쳤다. 비몽사몽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환상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되었고 “아! 저 예배당!”김익두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나즈막하게 외쳤다. 이 환상으로 그는 응답의 확신을 갖게 된 동시에 “평안할 찌어다”라고 하시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두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려내렸다.
예배당 건축을 위한 몸부림
김익두 목사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주일 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에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모든 성도에게 광고하고 건축헌금을 책정하게 되었다. 건축비 기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 다투어 모금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예배당이 세워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작정된 헌금액은 계획된 건축비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였다. 김익두 목사는 당대에 동양 제일의 교회당을 건축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생각 끝에 신천 지역 유지들을 한사람 한 사람 방문하여 그뜻을 전달하기로 결심하고 부유층 지역 유지들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었다. “주여! 저들이 비록 주님을 믿지는 않사오나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감동하사 주님의 전을 지을 건축비를 헌금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허락하여 주옵 소서!”
김익두 목사는 그들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기도를 계속했다. “주여!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옵소서!” 김익두 목사가 그들을 방문하여 교회당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찌된 일인지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였다.
“김목사님 이렇게 신천읍을 위해 애쓰시는데 어찌 모른체 할 수 있겠습니까? 신천을 위하여 회당을 지으신다는데 제가 도울 수 있는데 까지 돕겠습니다.”
가는 곳 마다 협조적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건축예산이 모두 확보 되었다. 드디어 신천 서부 교회당의 건축이 시작 되었고 위치는 신천읍 척서리에 자리한 송화목 고개 언덕이였다. 그곳에서 내려다 보면 신천읍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고 경관이 수려하여 예배당 위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였다. 착공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700여명의 교인들이 모두 공사에 잠여하여 돌을 나르고 땅을 파고 물을 길어 오는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공사를 진척시켜 나갔다. 김익두목사의 지도하에 일치 단결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당을 건축함으로써 공사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1913년 신천 교회당은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이 일은 김익두 목사가 안수 받은지 1년만의 일이였다. 목사와 성도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렸다. 새로 지은 예배당 건물을 보기 위하여 도처에서 많은 사람이 구경을 왔다. 원근 각처의 교회와 교인들도 찾아와 기뻐하며 구경하고 돌아갔다.
병고침의 은사가 나타나다.
성경 사도행전 3장 6절에 기록된 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김익두 목사는 이 성구를 읽고 또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베드로는 누구이며 김익두는 누구인가?”
김익두 목사의 성격에는 이러한 도전적인 일면이 있었다. 양자택일의 결단력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용단을 내리는 남달리 강한 성격이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음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이렇게 담대한 성품을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황해도 신천읍에는 안중근 의사가 살던 두라면에 저수지로 가는 길목에 척서리 개울이라고 하는 냇가가 있었다. 이 냇물을 “척사재개”라고도 불렀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신천의 명소였다. 이 맑은 물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구월산 계곡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였다. 이 척서리 개울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 옆에는 언제나 앉은뱅이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가는 이 오는 이들이 앉은뱅이 거지를 불쌍히 여겨 동냥을 해 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도 그 자리를 지날 때 마다 잊지 않고 꼭 얼마의 돈을 쥐어주고 지나갔다. 때때로 김익두 목사는 '나도 베드로처럼 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근사할텐데.......하고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가랑비가 내리는 한적한 오후에 김익두 목사가 그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인적이 드문 시간이어서 매우 조용한 때였다.
“한푼 적선 합쇼!”
김익두 목사를 보고 앉은뱅이가 손을 내밀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느라고 골똘해 있던 그가 움칫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인적도 뜸하고 마침 보는 사람도 없으니 이럴 때 한번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에 다시 한번 주위를 빙 둘러다보니 마침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행여나 사람이 보는데 시도하였다가 만일 실패하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일까 싶어 아무도 없을 때 한번 시도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때가 마침 좋았고 기회가 적중하다고 생각되어 그 앉은뱅이에게 다가가서 손뼉을 딱 치면서 불렀다
“날 똑똑히 보시오!”
“예? 나요?”
앉은뱅이는 갑자기 상기된 김익두 목사의 얼굴을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의 손을 꽉 움켜잡고 그를 주목하면서 큰 소리로 명령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외치면서 그를 힘껏 잡아 일으켰다. 원래 힘이 장사인 김익두 목사인지라 앉은뱅이는 그의 힘에 의해 번쩍 들려졌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랬더니 잠시 들려졌던 그 몸체가 그만 땅바닥에 털썩 떨어지면서 엉덩이가 땅에 부딪히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본래 불편한 육신이라 통증을 못이겨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이쿠 나 죽네! 사람 살려요! 그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사람 죽여요 ! 아이구 아이구...........”
김익두 목사가 살펴보니 앉은뱅이가 전혀 일어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 부끄럽고 무안한 마음이 생겼다. 순간 번쩍 뇌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왜 내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는가? 이런 연약한 믿음으로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키겠다고 나섰는가? 참 한심한 노릇이다....”
아무리 성경을 다시 상고해봐도 베드로가 한바퀴 빙 둘러보고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이 없었기에 생각하수록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는 그만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와 그 길로 예배당으로 뛰어 갔다. 강단 아래 무릎을 꿇고 깊이 탄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종이 심히 믿음 없음을 회개하나이다. 이 연약하고 어리석은 종이 주의 영광을 훼손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김익두 목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탄식하며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회개했다. 이러한 상태로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가를 깨닫고 7일을 금식하며 철야로 기도했다. 물 한모급 입에 대지 않고 완전히 식음을 전폐한채, 깊은 기도에 몰입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마음 깊이 깨달으며 기도에 열중했다. “주여! 하잘 것 없는 개나 돼지도 발이 있고 소, 닭도 다리가 있어 걸어 다니고 있는데 저 불쌍한 인생은 무슨 죄가 많아서 저렇게 걷지도 못하고 앉아서 평생 저 고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김익두 목사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남달리 인정이 많은 그였다 .더우기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남을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생겨 애통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눈물로 흘러 내린 것다. ‘앉은뱅이를 고쳐 한번 명성을 얻어 보리라'고 생각했던 허망한 명예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랑과 긍휼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렸다. 이렇게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하다가 6일째 되는날 척서리 냇가로 다시 내려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엿새를 굶어서 다리가 휘청거리고 기운이 진하였지만 힘을 내어 간신히 다리까지 걸어갔다. 다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동냥을 청하던 앉은뱅이는 멀리서 김익두 목사가 자리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오지마시오! 적선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오지 마시오”
앉은뱅이는 손을 휘저으며 김익두 목사가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또 한번 혼이 날까봐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호소했다.
“지난번 일은 용서하시오.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금식하고 철야하며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렷소이다. 오늘밤이 기도 작성한 마지막 날인데 나와 함께 가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말하는 김익두 목사의 태도에 그는 마음이 움직여 함게 가기로 동의했다.
김익두 목사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다
엿새동안을 꼬박 굶어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 있는 힘을 다해 교회당으로 걸어갔다. 강단 밑에 엎드린 김익두 목사와 앉은뱅이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지 전신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고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주여! 이 불구자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주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주께서 이 사람을 일으키사 걷게 하여 주옵소서! 걷지 못하는 다리에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밤이 새도록 두 사람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목이 쉬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다. 어느덧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이 되었을 때 갑자기 앉은뱅이가 다리에 힘을 얻더니 벌떡 일어섰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기더니 급기야는 예배당 안을 껑충껑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두 손을 들고 “만세! 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껑충껑충 뛰어 예배당 안을 계속 돌아 다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익두의 하나님이시여! 고맙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익두 목사도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의 뛰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다리는 곧게 뻗어 있고 성한 사람의 발과 조금도 다름없이 뛰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기적 가운데서도 결코 자랑하지 않았다. 헌당식을 마친 직후에 이러한 이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일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예배당 안을 앉은뱅이는 마구 뛰어다녔다. 그는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랐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최초로 나타난 이적이 이처럼 신천 서부교회 에배당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신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척서리 냇가의 앉은뱅이가 갑자기 일어나 자기 발로 걷고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양과 서울까지 퍼지고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김익두 목사가 주위를 한바퀴 휘 둘러보고 기도했을 때는 실패했으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할때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 기독교사에 이적의 첫 봉화가 올랐으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김익두 목사는 30여년 동안 부지기수의 병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는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고 전국을 놀라게 하는 복음의 종이 되어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병고침의 이적이 때때로 나타나고 있으나 앉은뱅이가 일어나거나 병자가 완쾌되는 뚜렷한 증거를 목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한 신유의 이적이 빈번히 일어나기는 하지만 육체의 내부에 있는 질병들이 대부분이어서 참으로 병고침을 받은 것인지 일시적인 진정상태였는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를 통해 나타난 병고침의 이적은 매우 분명하여 그 병고침의 결과가 뚜렷이 증거되었다. 전신불수 환자가 완치되고 앉은뱅이가 걸어다니고 소경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표적과 기사와 이적의 종
김익두목사가 땀과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그가 주위를 돌아 보며 명예욕에 사로잡혀 행할 때는 실패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불신앙을 눈물로 회개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행할 때는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의심할 때는 실패했고 믿고 기도했을 때는 앉은뱅이가 벌떡 일으나서 걸어가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성경 읽기
신천 서부교회의 성도들은 성경 읽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다. 김익두 목사의 성경읽는 습관을 본받아 철저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읽기는 성도들의 생활 중에 가장 비중있는 일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신ㆍ구약 성경 66권을 거의 외우다 시피 통달한 사람이었다. 평생에 신약은 1,000번을 정독했고 구약은 100독을 독파했는데 평상시 암송하는 구절은 100구절 정도 늘 외우고 있었다. 신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언제나 그의 머릿속에 충만하여 수시로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 나왔고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책이 들리워져 있었으며 무슨 대화에 임하든지 반드시 성경책을 펴 놓고 말했다.
계속되는 예배
1946년부터 1950년에 이르는 5년여 동안 김익두 목사는 산천서부 교회에서 매일 저녁 집회를 했는데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하겠다는 의지로 매일 밤마다 모임을 가졌다. 어김없이 저녁 7시가 되면 (여름은 8시) 예배를 드렸다. 5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를 계속했는데 그동안에 신약성경을 처음부터 차례차례 읽어 나가면서 강해했다. 평일 집회에서는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신앙생활에 필요한 성경지식을 문답식으로 가르쳤으므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병자를 위한 애타는 마음
“자기 교회의 성도가 병들어 고통 중에 있을 때 7일 이상 금식기도 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한 분 있으면 손들어 보시오!”
치병 때문에 모함을 받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망
“나는 앉은뱅이가 어찌나 불쌍하던지 작심하고 7일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결코 내가 고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을 위하여 하루 금식도 못하는 목사가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렇게 말들을 많이 합니까?”
기도의 비결을 터득하다.
김익두 목사가 회심한 직후의 일이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열달동안 신약성경 100독 이상을 읽으며 기도와 경건 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온 정신을 통일하여 하나의 기도 제목을 놓고 집중적인 기도를 해야지, 이것 저것 중언부언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금식 기도도 목적을 여러 가지 나열하지 말고 오직 한가지 목적을 두고 간절히 기도하라.”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
“내가 아는 것이 없지 않느냐? 나는 별로 학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만 죽어라고 읽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만 잘 알고 있다. 내가 성경만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총애하시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 없도록 전국 방방곡곡 구경시켜 주셨다. 만주,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다 구경하지 않았느냐? 뿐만 아니라, 나는 빨아놓은 이불에서 자 본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평생토록 새 이불에서 잠재워 주시더라.”
호랑이 부흥사
김익두목사가 가는 곳마다 신유의 이적과 말씀, 통회의 역사(役事)가 일어남으로 그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전국 도처의 교회에서 부흘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요청이 쇄도했다. 김익두 목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가 넘쳤다. 교회마다 다투어 그를 청함으로 인해 때로는 본 교회에 사정이 있어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은 따라 나서야 할 때가 많았다. 그 당시 부흥집회는 집회기간에 주일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집회에 나가면 의례히 주일예배도 현지 교회에서 드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곳에서 집회를 마치면 곧장 본교회로 돌아올 겨를도 없이 이웃교회로 또 다시 이웃교회로 초청을 받아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한번 나가면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기차역이 신천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쉽게 초청에 응할 수 있도록 복음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출발할 수 있는 교통상의 편의까지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 같았다. 그 당시 김익두 목사의 초청 부흥 성회는 3년 전에 미리 부탁해야만 성사가 될 정도로 바쁜 일정으로 꽉 짜여 있었다. 이처럼 교회와 가족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가족들과의 연락은 편지나 인편으로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를 그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때였다.
삼천리 방방고고에 있는 교회들이 김익두목사의 집회를 원했기 때문에 그가 다녀 보지 못한 곳은 그의 없었다. 심지어는 만주, 일본, 러시아에서 조차도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했다. 심할 경우에는 1년에 집에서 3-4일 밖에 머물지 못할 때도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사역이였다. 1910-1940에 이르기까지 약 30여년간은 그를 통하여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부흥의 역사가 타오르는 불꽃 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집회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들
집회때마다 나타나는 특징은
첫째-회개의 역사로서 통회 자복하는 사람들로 눈물 골짜기를 이루었고
둘째-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침으로 은혜가 충만했으며
셋째-놀라운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 난 것이였다.
김익두 목사가 강단에 서면 성도들은 눈물로 회개했고 은혜가 충만하여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갔다. 1세기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세기적인 부흥사라고 해도 결코 과찬이 랄 수 없는 믿음의 영웅이였다. 언제나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를 붙들고 사용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를 통하여 교회들의 부흥이 일어나다.
김익두 목사의 집회 통하여 부흥이 일어난 수 많은 교회들 중에서 신축한 교회당이 약 150여개처이고 증축한 교회당이 약 150여개처이다. 어린이 선교원은 무려 300여개처를 신축 또는 증축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것만큼 어린이 선교원을 세우는 일에 적극적이였으니 실로 페스탈로치에 버금가는 교육적 선견지명이 있었던 같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어린이 선교원을 부설 운영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들은 당시 김익두 목사의 어린이 복음 전도에 대한 남다른 열심히 밑걸음이 되었고 또한 그와 같은 이들의 헌신적인 믿음의 결과일 것이다.
그의 위상과 집회를 통한 역사
그의 소문은 전국 교회에 널리 알리워져 있었으므로 수 많은 성도들이 그를 손꼽아 기다렸다. 심지어 불신자들 조차도 김익두 목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당시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가 설교하는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가는 곳마다 예배당이 가득차게 되어 언제나 몰려오는 인원을 수용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예배당이 비좁을 때는 학교를 빌리기도 하고 때로는 넓은 뜰에 멍석을 깔아 앉히기도 했다. 어느 집회에서는 각 가정에서 가마니를 한 장씩 가져오게 하여 집회를 갖기도 했다.
부흥회의 인도한 역사
이렇게 많은 이적과 기사와 잊을 수 없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며 그는 일생을 통해 779회나 되는 부흥회를 인도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결신자의 수가 약 300여만명에 달했고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목사로 헌신한 사람이 200여명에 달했고 그의 직접적인 권유로 목사가 된 사람은 100여명이였다. 김익두 목사 직접 자비로 신학 공부를 시켜 목사가 된 사람이 8명이나 된다.
세계적인 부흥사
이웃 일본에서도 호랑이 부흥사가 조선 반도에 나타났다고 경탄하며 김익두 목사를 존경했으며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를 세기적인 부흥사로 높이 평가하였다. 죄에 대하여 추상같이 책망하는 호랑이 부흥사 앞에서 떨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불의한 죄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납함이 없이 준엄한 그에게 호랑이 부흥사란 별명이 붙혀졌고 당시의 모든 이들에게 불리워졌던 이러한 별명은 그가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요 목회자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적 증명회
김익두 목사는 1912년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부터 신유의 은사를 나타내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과을 드러낸 복음의 종이였다. 그는 척사재 냇가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한 이적으로부터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일경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뒤 황해도 직전리로 은퇴할 때까지의 목회 사역을 통해 회개와 표적과 기사로 수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전국을 놀라게 했던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을 간과할 수 없어 황해 노회에서는 이적증명회라는 기관을 조직하여 김익두 목사의 병고침과 이적, 기사의 현장을 증거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선 예수교 이적명증집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적명증회에서 선발된 사람들은 김익두 목사를 수행하면서 이적이 나타날 때마다 이적 전과 후의 사진을 찍고 당사자의 진술을 받아 출간했다. 1권부터 3권까지 계속 출판 되었다.
이적명증회의 발기 취지문
“옛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3년간 전도하실 때에 기적, 이사를 많이 행하심은 당시 인민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천국의 오묘한 진리를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특별히 나타내사 병을 고치시며 사귀를 내어 쫓으시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과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며 또 떡을 먹이시는 일들 기사를 행하사 패역한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하고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 후 사도시대에 이르러서도 동일한 기적이 여러번 나타난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중략)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 반도의 민족을 권고하심으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한지 이미 37년! 교회의 왕성함과 신도의 전짐함은 실로 상위의 은혜이므로 감사할 따름이어니와 본도 신천 읍내 교회 목사 김익두씨는 이미 주님의 사명을 받아 사역한지 수십년에 종종 영적을 나타내 권능 목사라는 아름다운 이름까지 얻었더니 특별히 금춘부터 경상남북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안수 기도함으로 현대약으로 치료 못할 자를 완쾌시킨 자가 그의 수백명에 달한다. 그중에 특이한 경우를 말하면 곧 앉은뱅이가 걸으며 벙어리가 말하며 소경이 보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꼽추가 펴지며 반신불수가 완전해지며 17년 된 혈루병자가 낫는 등 일일이 매거(枚擧)키 어려운 지라 (중략)
진리의 말씀을 세상 학설로 몰아 붙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가운데 의심하던 자여 주님의 때가 가까웠으니 참회하고 주님을 진실히 믿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약소한 우리 조선에 이러한 이적을 주신 것은 당신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심이니
첫째-조선은 미신적이라고 오해하는 자의 생각을 깨트리시고자 함이요
둘째-모범적으로 신령한 신앙됨을 세계에 표창케 하려 하심이라.
그런고로 우리는 이에 한회를 조직하여 자못 김목사에게로 말미암아 나타난 이적 뿐만 아니라 30여년간 조선 교회에 많이 나타난 이적을 일일이 수집하여 하나님의 권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을 증명하고 또한 후세 교회가 조선 내에서 성령의 이적을 믿지 않는 자들로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우리 조선 교회내에 역사적 광휘를 표창케 하기 위하여 본회를 발기하고 취지를 공포함“
구주 탄생 1920년 7월
막대거지 박수진 병고침을 받다(현풍집회)
1919년 12월 5일 현풍읍내의 현풍교회에서 집회하다. 박수진이라는 거지행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십여년전 돌연한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병자가 되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막대로 집 대문을 두드리며 동냥해 먹고 살았다. 그가 대문을 뚜드릴 때 막대로 뚜드리기에 막대거지로 불리웠는데 이 사람도 김익두 목사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눈에 박수진이란 사람이 눈에 띄어 김익두 목사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며 불쌍한 생각이 들어 눈물울 걸썽이며 민망해 했다. 그를 위해 기도하여 보낸 후 김익두 목사는 불쌍한 막대 거지를 위해 집회기간 동안 7일간의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그날부터 하나님께 메달려 불붙는 듯한 기도를 시작했다. 새벽, 낮, 밤의 연속 집회로 육신이 매우 피곤할 것이건만 김익두 목사는 계속 금식하면서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더욱 힘이 넘치는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마침내 부흥회 마지막날 새벽집회 때 박수진의 턱이 놀랍게도 감쪽같이 들어붙어 원상회복이 되었다. 신경과 근육이 회복되었고 완전히 정상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박수진은 너무 감격해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하고 소리 질렸는데 말이 제대로 나왔다. 그는 얼마나 기뻤던지 소리를 지르며 온 동네를 띄어 다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온 교회가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미하였다. 현풍읍민이면 누구나가 다 아는 막대거지 박수진이 병고침을 받은 것을 보고 누구나 놀랐고 그로 인해 전도의 효과가 지대했다.
김성준이의 정신이상을 고치다.
동래군 상면 삼원리 김채권씨의 아들 성준(25세)가 정신이 상을 일으켜 부모들의 속을 태웠다. 그는 황소뿔을 잡고 황소와 싸우기도 했고 남의 집 돼지굴에 들어가 놀기도 했고 논과 밭의 곡식을 상하게 하기 일수 였다. 김익두 목사님이 부산에서 부흥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붙들어 억지로 예배당에 들어 왔다. 예배당안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성준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고 큰 소란이 일으났다. 김익두 목사가 성준이의 미친 모습을 매우 측은히 생각하여 눈물울 흘리며 하나님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도록 소란하던 성준이가 갑자기 다소곳해지며 정신 이상 증세가 사라져 전혀 딴 사람 처럼 멀쩡한 청년으로 되돌아 왔다. 집회에 참석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목전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이적을 보고 저 마다 탄성을 올리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전신마비 환자의 재생
봉산군 금인면 명유리 오택순씨의 딸 진익(4세)은 원인불명의 질환으로 3개월전부터 전신마비가 와서 자리에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어린 딸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한숨과 눈물로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사리원 교회의 김익두 목사 부흥집회 소식을 듣고 병든 딸을 등에 업고 김익두 목사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딸을 부디 살려주세요.”
진익의 어머니는 목이 메인 음성으로 눈물을 쏟으며 그의 앞에 어린 딸 진익을 눕혔다. 전신마비로 움직이지 못하는 측은한 진익의 모습을 바라보는 김익두 목사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진익이 얼마나 가엾었던지 기도하는 김익두 목사의 음성이 울먹였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마자 아기가 손발을 움직이며 전신에 새힘을 얻어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어서 눈으로 목격하고도 믿기 어려운 성령의 능력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없는 복음의 도구였다.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기도하기를 “내 열심히 아버지의 뜻을 앞지르지 않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했으며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자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 것처럼 내세워 자랑한 일이 없습니다. 때문인지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 주님의 영광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평범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고백에 의하면 “나는 어저께 앉은뱅이가 병고침을 받고 벌떡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또한, 오늘 만난 반신불수 환자의 측은한 모급을 보노라면 과연 이 지경의 중풍병자를 고칠 수가 있을까? 하고 의심한다. 그러면 나는 어저께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오늘 중풍병자를 못고치시겠는가?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꾸 기도하면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왔으며 그 확신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이적을 일으키셨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주여!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주소서!하고 기도할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환상이 나타나면 반드시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그 환상이 보이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진실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으며 믿음대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증거했다.
신천읍교회에서의 이적
1921년 8월 21일부터 29일까지 신천서부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김익두 목사가 시무하던 본 교회를 1919년에 떠나 서울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신천서부교회로서는 김익두 목사와 헤어져있는 동안에 모든 성도가 무척 그리워하던 터여서 이번 집회에의 기대가 매우 컸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햇볕이 무척 따가운 때였다. 그러나 그가 3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부흥집회를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황해도 일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앞다투어 모여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신천읍교회는 초만원이 되고 말았다. 각처에서 모여든 불구자, 병자들도 수없이 모여들어 신천시내가 소란했다. 부흥회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며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날마다 구원얻는 사람의 수가 늘어갔다. 인파가 넘쳐 한사람씩 안수기도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단에 서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면, 병자들이 김익두 목사 앞을 차례로 지나갔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단 앞을 지나간 많은 병자들이 병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고 온 신천읍이 소동하였다.
신문기사로 보도된 이적사건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신문 보도기사를 몇 가지만 소개해본다.
경기 기독신문 제 259호 중에서
“과학을 초월한 현대의 기적 김익두 목사는 아이들까지도 탄복한다. 비행기가 나타나고 606호가 발명된 현세에 20세기 이전에 예수때 일어났던 기적이 일어났다. 아득한 2000년후 오늘 한국에 이 진리는 거듭 증거되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신천읍교회 김익두 목사가 수년내 경상도, 평안도 전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는 중 벙어리가 말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혈루증이 나았던 현저한 실적이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신천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신천여관에 묵으면서 ‘김목사 보셨소?’ ‘오늘도 못보았습니다’가 인사가 되었다. 마치 부모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처럼 실망한다. 그러므로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분량과 미스비어스 화산의 뜨거운 분량과 김익두 목사의 헤아릴 수 없는 기도의 능력은 세계3대 불가사의이다.”
동아일보 제 58호 기사 중에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걸어 다니고, 황해도 신천읍교회 김익두 목사는 1920년 5월 17일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진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 안수기도를 하여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으니 두수이다. 두수는 부산진 좌전동 446번지 김낙언의 아들로 난지 8개월만에 우연히 앉은뱅이가 되었다가 8년만에 김익두 목사의 안수를 받았다. 안수받은 두수는 일어나 걷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이적이다. 밀양읍교회의 18세 여자 벙어리가 말을 하고 있고 경남지방 22명의 불구자가 완전 완쾌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로 말미암아 조선천지가 떠들썩 하였고 세계 매스컴에 타전되었다.
기독신보 제 257호
1920년 11월 10일, 만명의 큰 무리가 김익두 목사 부흥회로 목욕을 하였다. 경성 숭동교회에서 지난 10월 2일부터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하였다. 타락자가 나와 회개하고 교만한 자가 겸손해지고 굽은 손이 펴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나았다. 헌금이 천여원에 달했다. 이적! 만명의 무리가 밤을 새우며 회개하여 철야로 눈물을 쏟고 서울 장안이 성령의 큰 은혜로 단비를 맞았다.
신사참배 거부와 그 믿음의 투쟁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족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신사에 대해 일제히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특히 조선 기독교인들 모두에 대해 신사참배를 요구했고 교회 지도들에 대해서는 온갖 유혹과 탄압정책을 펴며 그들의 우상에 대한 참배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김익두 목사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을 당하다.
김익두 목사가 64세이던 해 1938년 어느 날 종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 한명이 숭동교회 사택으로 찾아와 그를 신사 참배할 것을 권유했다. 고등계형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김익두 목사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음인지 매우 분명한 어조로 반대하는 답변을 했다. 그러자 일본 형사는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닳았음인지 매우 불쾌한 기색을 띠고 본서로 되돌아 가버렸다. 형사가 되돌아간 다음 주일에도 김익두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결코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수일이 지난 후 종로 경찰서의 고등계형사가 다시 찾아와 “목사님 서장님이 한번 뵙자고 하시는데 바쁘시더라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김익두 목사는 마음 속으로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가족들에게 간략한 부탁의 말을 남기고 그를 따라 종로 경찰서로 갔다. 종로 경찰서는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악명 높은 곳이였다. 이곳에 연행되어온 김익두 목사는 무쇠도 녹아 나간다는 악명 높은 고문실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다. 잔인한 고문과 악형으로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육신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결코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일경들의 고문 방법은 매우 잔인하고 가혹했다. 김익두 목사는 고통을 못 이겨 수 차례나 혼절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경들은 바게츠에다 찬물을 가득 담아와 그의 얼굴에 퍼부어 정신을 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들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고통 때문에 실언할까 두렵사오니 종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그는 자신의 육체가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보다 육체의 고통을 못이겨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절개를 굽혀 하나님께 범죄할까 염려 했다. 이경들의 잔인한 고문은 거의 매일 같이 계속되었다.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의 일선에서 헌신한 그에게 이러한 육체의 고난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는 믿음돠 소망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내했다. 종로 경찰서장은 한달 가까이 가혹한 고문을 계속했으므로 천하의 김익두 목사도 별수 없이 굴복하리라 믿고 득의 만만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김익두 목사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또한 단호한 거부의사로 마침내 서장은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닳았다. 도저히 육체적인 고통만으로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목사가 아니외다. 그러므로 당신은 결코 숭동교회에서 설교해서는 않되오! 라고 했다. 김익두 목사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항거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그의 말은 아무 효력도 나타낼 수 없었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목사직을 빼앗기고 숭동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도 않되는 사유와 탄압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하던 현실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였다.
고문으로 거의 죽음의 직전에 까지 간 김익두 목사
김익두 목사가 고등계 형사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경찰서에 들어간 후 그의 가족들과 숭동교회 성도들의 불안과 초초감은 어떻했겠는가?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그의 행방을 알려 해도 알길이 없는 지라 모두가 안절 부절 했다. 매일깥이 철야로 기도하고 뜬눈으로 밤을 세워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처음으로 종로 경찰서에 근무하는 조선인을 통해 불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탄식하기도 하고 슬픔을 못이겨 울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를 수일이 지니서야 종로경찰서로부터 김익두 목사를 데려 가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부인과 성도들이 종로경찰서로 숨가쁘게 달려가 김익두 목사의 신병을 인수하고 보니 이미 그의 몸은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들어보았으나 겨우 희미한 호흡을 하고 있을 뿐이고 맥박마져 고르지 않았다. 장남 성식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경찰서로 나와 그의 몸을 달구지에 눞였다. 가족들과 성도들이 그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슬픔을 참지 못했고 청년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어쩔줄 몰랐다. 김익두 목사를 실은 달구지가 숭동교회 정문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슬픔과 분노를 못이겨 눈물을 흘렸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기고 보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이 온 몸이 피멍이 들어 시퍼렇게 되어 있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안정을 시키기 위해 다뜻한 방에 눞히고 정성껏 치료 했다. 5일이 지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고 13일이 되어서야 겨우 말을 했다. 그러나 몸을 자유롭게 웁직이지는 못했다. 김익두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것은 장차 그가 해야할 복음의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신도가 된 김익두 목사
1938년 12월 28일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한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정든 숭동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않되었다. 일경들의 감시와 압력으로 더 이상 숭동교회에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5년 7월 8일에 숭동교회 8대 당회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3년 6개월 동안 오직 복음에의 사명을 위해 신명을 바쳤던 그는 동지섣달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강요에 의해 본의 아니게 숭동교회 사택을 떠나 황해도 은율군 장안면 직전리의 외딴 촌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날은 몹씨 추웠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서 길도 미끄러웠다. 머나먼 길을 떠나야 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숭동교회의 수 많은 성도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것을 뒤로하고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슬픔을 달래며 떠나야만 했다.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아니한 불편한 몸을 수레에 싣고 마치 귀양 가듯 외로운 길을 떠나 머나먼 황해도로 걸음을 재촉했다. 신앙의 본분을 지키다가 추방당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쫓는 거룩한 길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휴직생활
황해도 은율군의 직전리 마을은 황해도 북쪽 해변에 위치한 자그마한 어촌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있는 반도 형태의 마을이며 북단에는 바다 건너 진남포가 마주 보이는 곳으로 풍경이 아주 수려한 마을이였다. 엄동의 12월말에 머나먼 길을 따라 이곳 직전리 마을에 도착한 김익두 목사와 가족들은 어촌마을의 소박한 초가집에 짐을 풀었다. 자그만 방이 세칸이 있고 마루가 하나 있는 전현적인 시골집이였다. 김익두 목사는 한 겨울 동안 건강회복을 위해 기도와 몸조리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봄이 되어 그는 뒷 동산에 사과나무 묘목 600그루를 사다가 심었다. 땀을 흘리며 땅을 파고 한그루 한그루 정성껏 나무를 심었다. 그의 여생을 사과나무를 가꾸며 보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초봄부터 열심히 사과나무를 가꾸고 집앞 밭에는 채소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사과 나무밭 뒷편에는 초목이 우거진 산이 있엇고 그곳 후미진 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높다란 곳에 팽팽하게 다듬어진 보기에 좋은 바위여서 김익두 목사는 이 바위를 기도의 처소로 삼고 하루도 걸르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다.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했는데 새벽, 낮, 밤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1938년-1945년간 7년동안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였는지 때로는 비를 맞으면서도 기도를 계속하여 옷이 흠뻑젖는 것 조차도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해 여름에는 기도하는 그의 주변을 큰 뱀이 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를 헤치지 않았다. 딸이 아버지를 뵈러왔다가 기급하여 뱀이라고 소리쳐도 그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여전히 기도를 계속했다.
신의주 사건과 신사참배의 진상
일경으로부터 일체의 목회활동과 여행을 금지 당한 김익두 목사였기 때문에 직전리 마을 사는 동안 먼 곳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일경들은 그가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감시 대상에 오려놓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때때로 그들의 감시를 피해 부흥회를 인도하러 나가기도하고 설교를 맡기도 했다. 1941년 김익두목사가 신의주교회 집회를 마치고 막 나오는데 대기하고 있던 왜경들이 덤벼들어 그를 연행했다. 그리고는 우격다짐으로 그들의 신사로 끌고 갔다. 그를 염려한 목사들과 많은 성도들이 신사까지 따라왔다. 왜경들이 신사 앞에서 김익두 목사의 머리를 완력으로 눌러 숙이게 하려고 힘을 썼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가 완강히 거부하자 왜경 두사람이 양쪽에서 팔을 잡고 강제로 머리를 눌렀다. 김익두 목사는 한사코 몸을 젖히며 거부를 했다. 왜경들이 한참동안을 실랑이를 벌렸으나 끝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욕을 퍼붓고 협박을 하고는 그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참배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왜경들이 친일파 목사들을 통해 고의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다시 목회를 시작하다.
1945년 8월 15일 김익두 목사는 해방의 감격과 더불어 오래도록 쉬고 있는 목회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살고 있눈 짖전리 교회에서 다시 설교 강단을 맡아 복음을 전하며 목회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이다. 진실로 김익두 목사는 감사했다. 이제 그의 나이 71세 였다. 다시금 강단에 설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마치 부활을 맛보는 것 처럼 그는 생동하는 기쁨으로 복음 전도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비록 노령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그는 참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부지런히 심방하고 한마디의 말씀이라도 더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준비를 했다. 비록 성도의 수가 많지는 않는 시골교회였지만 그는 동네마다 열심히 다니며 전도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을 돌보기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25년만에 다시 부임한 신천 서부교회
노령의 김익두 목사가 직전리교회에서 복음에의 활동을 재개하고 목회생활을 전념하고 있을 때 그가 1903년에 처음으로 개척하여 세운 신천 서부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공석 중이여서 후임자를 청빙하기 위해 의논이 분분했다. 당시에 담임목사인 김현준 목사가 공산당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대상에 올라가자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남한으로 탈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신천 서부교회는 김현준 목사 후임으로 누구를 청빙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여러날 심사숙고한 끝에 만장일치로 김익두 목사를 다시 청빙하기로 가결했다. 모든 성도들은 그가 비록 72세의 고령이긴 하지만 그의 일생의 업적과 능력 그리고 그가 개척하고 친히 세운 신천 서부교회로 다시 돌아와 필생의 복음 사역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김익두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1913년 당시에 건축했던 현재의 교회당 건물이 벌써 33년이 지났음으로 다시 건축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기왕이면 처음 지은이가 헐고 다시 새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로 신천 서부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되자 여러날 기도하고 생각 끝에 결국 25년 만에 다시 신천서부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1047년에 신천서부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의 위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고 1948년에는 김익두 목사의 성역(聖域) 40주년을 기념하여 황해노회 주최의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신천서부교회에서의 하루 하루의 일과는 잠시도 쉴틈이 없는 스케줄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였다. 공적인 업무 이외에 잠간의 시간이라도 나면 교회에서 개인기도로 그 시간을 채웠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에 관한 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만을 따라 행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렸던 사람이였다.
기독교 연맹 위원장 사건과 진상
해방이후 북한 땅에는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고 철권통치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강양욱이 주축이 되어 기독교 연맹이란 유명무실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임의대로 기독교 연맹위원장에 김익두 목사를 세우고 이를 남북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마치 김익두 목사가 김일성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사실 김익두 목사는 기독교 연맹이 무슨 단체인지 조차 알지 못했고 서명 날인 한 장 한일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가 김일성정권의 꼭두각시처럼 알려진 것은 그 진상을 잘 알지 못하는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날조 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익두 목사는 그의 명예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신천서부교회에서 강양욱이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설교 중에 “우리 정부는 김익두 목사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김익두 목사님을 우리 기독교 연맹의 위원장으로 모시기로 한 것입니다. ” 그는 그의 설교 중에 아닌 밤 중에 홍두깨 내밀 듯이 김익두 목사를 기독교연맹 위원장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수 많은 성도들이 영문을 몰라 옆사람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 둥절했다. 사전에 단 한마디도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없었기에 모두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양욱은 회중들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한 우리 정부는 김익두 목사님을 중앙 대의원(국회의원)에 임명하여 나라를 위해 수고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전혀 뜻밖의 일이였다. 김익두 묵사의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일이였다. 이는 강양욱이 의도적으로 폭탄 선언을 해버리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위한 책략이였다. 결국 이 사건은 강양욱이 자기 임의 대로 김익두 목사가 기독교 연명위원장이며 북조선의 중앙대의원이다! 하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 사건이였다. 강양욱은 설교를 마치고 묻는 김익두 목사에게 말한디 하지 않고 강양욱은 얼렁뚱땅 바쁘다는 핑계로 부리나케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버렸다. 그러나 이후 북한 전역은 물론이고 대남방송을 통해서도 김익두 목사가 기독교연맹위원장이며 북한의 중앙대의원이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고 강연회때마다 선전 자료를 삼아 떠들고 다녔다. 이런 정치적인 음모는 공산당이 원래 즐겨 쓰는 비열한 수법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를 해명하기 위한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가 없었다. 그들의 정권하에서 신문에 해명광고를 낼 수도 없고 더욱 방송을 통해 진상을 통해 밝힌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는 “내가 아니면 그만이지 강양욱이 저 혼자 떠들고 다닌 것을 구태어 변명할 필요가 있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 하면서 누가 뭐라든 전혀 이 문제를 개의치 않았다.
덴마크 교회 이야기 / 그룬트비목사
그룬트비 목사님은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는 1783년 9월 8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이런 운동은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덴마크는 현재의 독일인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가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국민은 좌절과 실의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국민의식의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덴마크 최초의 성인기술교육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하자, 이웃 사랑하자, 땅 사랑하자’라는 3애(三愛)정신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덴마크 국민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는 낙농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목사들을 먼저 설득하였습니다.
목사들이 나서서 낙농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교회는 낙농기술을 가르치는 주민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라”고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그는 목회자요, 시인이요, 교육가요,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도 덴마크에서는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에게 나라를 위한 일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었습니다.
덴마크의 그룬드비에 대한 믿음
덴마크는 전쟁으로 패배하고 난 다음 부녀자들은 매춘부가 되는 이가 많고 남자들은 술주정이나 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룬드비는 국가에다 건설자금을 요청하지 않고 정신적 건설운동이 필요한 것을 알고 믿음을 가지고 바른 생활을 할 것을 역설한 결과 덴마크는 퇴폐적인 구습을 버리고 건설하는 믿음의 생활을 하여 지상 낙원을 이루게 하였다.
예수를 믿지 않던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 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과 오래동안 사귀었던 친구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무엇이 새롭게 되었느냐?
먹던 음식도 여전히 같은 먹거리
다니던 직장도 여전히 같은 일자리
가족들도 여전히 같은 가족들
도대체 무엇이 새롭다고 하느냐?
새로운 피조물(새로운 창조물)이란 신앙의 안목이 형성된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에 속한 안목을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살펴봅니다.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현대인의 성경)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한글성경)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 떠벌리기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심는다는 것은 본능대로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영원을 심는다.
영원을 심는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 사람도 지나갑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지나갑니다.
제사장은그리스도인입니다.
레위 사람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교회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내가 맡은 임무가 저 사람을 도와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에 지나가야 한다.
레위인은 내가 오늘 당번이기에 얼른 가서 당번의 일을 해야 한다며 지나갑니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
구경가야 할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구역하러 가는 것보다 우선 상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여장을 풀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물을 마시게 한 후에 근처 여인숙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여비 중에서 얼마를 내주며 이 사람을 잘 살펴주라고 하며 만일 비용이 더 많이 소요되면 내가 돌아올 때 반드시 청산할 것이라고 부탁합니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많이 들었고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부조리 때문
여러차례 속았기 때문에 구걸하는 행위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기 합리화 때문
물론 주일의 예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길에 걸인이 누워서 구걸을 합니다.
그 앞을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걸인에게 동전을 놓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걸인에게 동전을 주는 사람은 세상의 것이 풍족하여 동전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도 동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 동전이 필요한 사람이 길에 누워있기 때문에 동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만일 동전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마귀는 세상을 성도에게 심는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옛 사람의 본능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육신의 정욕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본능은 “두려움 피하기”와 “욕심 추구”로 이루어져 있다.
본능으로 사는 사람은 동물 수준이다.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 가능하다. “
두려움 회피”와 “욕심 추구”가 그것이다.
반대의 삶이 “말씀대로의 삶”이다.
본능을 이기는 삶이다. 방향이 있는 푯대를 향한 삶이다.
“안목의 정욕“은 본능을 키우는 행위이다.
자꾸 욕구가 많아지게 만든다. 욕구가 지배하게 만든다.
”견물생심“이라 한다. 볼수록 욕심이 생긴다는 말이다.
안목의 정욕은 ”학습된 욕심“이다. ”자극된 욕심“이다.
없던 욕심도 자꾸 자극해서 더 많이 생기게 만드는 것이다.
과도한 욕구로 몰입하지 말라.
세상은 계속해서 더 센 자극, 더 지나친 욕망 주머니를 던진다.
마지막에는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그게 안목의 정욕이다.
“이생의 자랑”은 영향이 밖으로 까지 미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목적이다. 보란 듯이 산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웃을 분노케 하고, 이웃을 절망하게 만든다.
이생의 자랑은 주변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결국 자랑하는 것을 빼앗기게 된다.
히스기야의 자랑질이 그 정확한 예증이다.
자랑하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
마귀는 “이생의 자랑”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시기, 질투로 사람들을 파괴시킨다.
알콜 중독, 도박 중독에 빠졌던 분이 계신다.
결심, 결의로 끊지 못한 것을 끊었다.
바로 “예수 중독”이다.
중독은 더 강한 중독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다.
이 분 표현으로는 그것이 “예수 중독”이라는 것이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산다. 성령이 모든 삶을 지배하신다.
더 이상 중독은 힘을 펼 수 없게 된다.
세상도 사라지고, 정욕도 사라지고, 푯대와 사명만 남게 되었다.
본능을 말씀으로 깨라. 그게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길이다.
모든 시선을 주께 돌리라. 학습된 본능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게 안목의 정욕을 이기는 길이다. 자랑을 보면, 그가 누군지 알게 된다.
오직 예수와 그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주변을 살리는 힘이 될 것이다.
이게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길이다.
길지 않은 인생, 헛된 발버둥치며 영광이 아닌 일에 낭비하며 살지 말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육정 안정 이자) 요한일서 2:15-17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요일 2:15-16)
자연과 피조물들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죄가 없다.
단지, 그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정욕과 자랑의 대상으로 사랑할 때 문제이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정욕의 대상, 자랑의 대상으로 삼고 사랑할 때,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도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약 4:4)
세상과 벗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하도록 인간을 만드셨는데, 인간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고, 간음한 여인들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과 잡신들을 사랑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렘 3:8, 14)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탐하여 사랑하는 간음 행위이다.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엡 5:5)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 라고 하였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이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면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탐심이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도 탐심으로 사랑하면 우상 숭배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만을 탐하고 사랑하고 쫓아가는 것은 간음행위이고 우상숭배이기에 하나님 사랑을 버린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범한 것이고 저주와 재앙이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일시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징계의 채찍이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재앙과 징계가 내려오지 않으니까, 담대하게 그 죄를 지속하는 데,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벌은 결코 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시지만, 벌은 면제하지 않는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7)
죽을 때 쯤 회개하고 천국 가겠다는 사람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못할 짓으로 죽였을 때,
그 죄를 회개하니 용서하여 죽이지 아니하였으나,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그가 행한 대로, 암논은 다말을 범하고,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압살롬은, 백주에 아비 다윗의 여인들을 범했고, 반역하던 중 칼로 죽임을 당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고,
자기 자신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자기를 탐할 정도로 사랑하는 자기 사랑도 탐심이요 우상 숭배일 뿐이다.
육신의 정욕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정욕이다.
자기 감정과 정서가 이끄는 대로, 자기 육체와 자아가 이끄는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
다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이다.
또한 육신의 정욕은 떡으로만 살고 말씀으로는 살지 않는 정욕이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고 주렸을 때 마귀가 처음 시험하는 것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육신의 정욕 시험.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심으로 이 시험을 이기셨다.
마귀는 처음에는 단순한 육신의 정욕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면
육신의 정욕에 다 지게 되어 있다.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방법도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사는 것이다.
안목의 정욕은 눈이 이끄는 정욕이다.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이 차면 이제 안목의 정욕에 이끌림을 받는다.
유행에 민감하고, 명품들에 끌리고, 겉으로 꾸미는 외식에 사로잡히고,
외모 지상주의로 모든 것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안목의 정욕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줄 모르고,
본다고 하나 보지 못하는 맹인들도 안목의 정욕의 노예들이다.
예수님에게 두 번째로 시험한 것이 ‘거룩한 성으로 데뎌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 하였다’ 였다.
주님이 이 시험을 이긴 방법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였다. 안목의 정욕 시험.
안목의 정욕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이생의 자랑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학력 경력, 명예, 소유와 재산을 남들보다 더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 이생의 자랑이다.
평수 넓은 아파트, 좋은 차 가졌다고 자랑하고 못 가진 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이생의 자랑이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 번째 시험으로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고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였다. 이생의 자랑 시험.
주님은 ‘사탄이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말씀하심으로
이 시험을 이기셨다.
천하 만국도, 그 영광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때 주시는 축복과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고
그것들은 없어질 영광 썩어질 영광에 지나지 않다.
2.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는 것이다.
“이는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요일2:16-17)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고 마는 것들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 하셨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대한 정욕으로 자랑으로 살다가,
영원한 것을 놓치고, 보지 못하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비참한 종말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불못, 곧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고, 고통과 회한 가운데 영원한 벌에 처해지고 만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아담과 하와가 그 좋은 환경 에덴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먹음직’한 것은 육신의 정욕이다. ‘보암직’한 것은 안목의 정욕이다.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은 이생의 자랑이다.
우리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지고만 세 가지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사는 길, 시험을 이기는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이기게 하셨다.
육신의 정욕도 안목의 정욕도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마는 일시적인 것들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도 다 불에 타 없어지고 마는 것들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주신 것이니라 ---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7,10,12-13)
우리가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할 것은 있다가도 잠시 후에는 없어질 것들이 아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이지만 사랑할 대상은 못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과 영생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다시 깨닫고,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3)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3.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사는 자는 지옥 불못에서 영원히 거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행할려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할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대 이 세상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럴려면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에 물들어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의 보고요 성령의 서재’인 성경, 곧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있다.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오직 사람의 지혜만, 철학과 헛된 속임수만을 알 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아야, 성령의 가르치신 것을 알 수 있고,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받고,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 곧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고 또한 행할 수 있다.
이 길은 협착한 길이고 문도 좁아서 찾는 이도 적지만, 유일한 생명의 길이요, 영원한 문이다.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들이라 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하는 물음에, 주님은 대답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3-24).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좁은 문, 좁은 길과는 인연도 없고, 거리도 먼 사람들이다.
떡으로만 사는 사람들, 내 왕국과 내 의를 따라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영원히 거할려면, 순전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순전한 해석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럴려면, 개혁자들의 경건서적, 청교도들의 경건서적을 읽어야 한다.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유일한 책들이다.
19세기 말에 쓰나미가 몰려와서 이 고귀한 유산들을 다 떠나보내 버렸다.
20세기 중반에서야 이 책들이 다시 출판되기 시작하였고 극히 일부만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다.
유명 교단 유명 신학교 유명 교회들 유명 목사들은 이 유산을 멀리하고
시대사상과 지혜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다. 순전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의 시대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개혁자들의 책으로, 청교도들의 책으로, 다시 공부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을 뜻을 알고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천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려야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게 하는 아버지 스승들이 바로 개혁자들이고 청교도들이다.
에덴 동산에 처음 사람은 아담과 하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금지한 나무의 열매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의 유혹이 다가왔습니다.
너희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들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던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정말 그 열매를 볼 때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마큼 탐스러운 열매로 보였습니다.
나무의 열매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담과 하와의 안목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아니야 저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야 하며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이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들이 하난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밭의 곡식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가인은 왜 아벨의 제물은 기뻐하시고 나의 제물은 기뻐하지 않으시나? 하며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
가인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신앙이란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란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을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외치셨습니다.
이 외침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을 위한 외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외침이 나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고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서 나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Elisha said, "Go around and ask all your neighbors for empty jars. Don't ask for just a few.
엘리사는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두 아들이 빚진 것 때문에 종으로 팔려갈 것을 걱정하며 찾아와서 하소연합니다.
그때 엘리사는 선지자 생도의 아내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하며 가능하면 많은 그릇을 빌리라고 합니다.
빈 그릇에 기름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라면 그릇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릇을 만들어서 기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채웠습니다.
기름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릇을 빌리는 것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돌을 옮겨놓으라!(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Take away the stone," he said. "But, Lord," said Martha, the sister of the dead man, "by this time there is a bad odor, for he has been there four days."
신약의 말씀은 나사로가 죽으 후 돌무덤에 안장되고 사일이 지났습니다.
에수께서 그 돌무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실 예수의 능력이라면 그까짓 돌문을 옮기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은 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41절부터 44절을 읽겠습니다.
41절에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 하려면 먼저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첫째는 그릇을 빌려오는 기도
그릇이란 곧 사람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내 마음이 청결케 되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는 돌문을 옮기는 기도
돌문 안에는 죽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송장이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내 안에 죄로 말미암아 죄가 썩는 냄새를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죄를 회개하고 내 안을 정결하게 다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에는 교회에 나오라고 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결단이 샘물이 솟구치듯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어떻게 외쳤습니까?
사도행전 2:36-39을 읽겠습니다.

한국에서 설교 비평으로 유명한 정용섭 박사는 『목사 구원』이라는 책에서 자신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책 가운데 하나가 『월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월든은 보스턴 근교 콩코드라는 도시에 있는 호수입니다.
월든 호숫가에서 소로는 1845년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서 2년 2개월 2일을 살았는데, 이때 경험한 내용을 쓴 책이 바로 『월든』입니다.
소로는 의도적으로 월든 호수에서 홀로 살아가는 삶을 실험한 것입니다.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지은 오두막은 아주 소박합니다.
소로가 직접 지은 오두막은 작고, 살림살이는 단출합니다.
오두막 안에 들여 놓은 의자에 하나는 고독, 다른 하나는 우정, 나머지 하나는 교제를 위한 것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월든』을 펼치기 전에는 의구심이 듭니다.
“숲속에서 2년간 살아간 경험이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 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왜 이 책이 사람들을 변화시킨 고전이 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보스톤 근교의 월든 호수를 찾아가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 번이라도 온전한 삶을 살아보았는가?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해도 인생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고, 죽을 때 내가 인생을 헛산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삶을 깊이 살고 싶었고, 삶의 정수를 죄다 흡수하고 싶었고, 스파르타인처럼 강인하게 살아서 삶이 아닌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싶었다.”
이것이 소로가 월든 호숫가로 간 이유입니다.
삶을 온전하게 살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버리고, 삶의 본질적인 의미에 집중해서 나중에 삶을 마칠 때 인생을 헛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온전하게 살아보는 실험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온전한 삶을 살아본 적이 있을까요?
항상 무언가에 끌려다니고, 무언가에 불안해하고,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고, 남이 규정해 준 길을 달려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소로는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 직면해 삶을 깊이 있게 살아보고, 삶이 아닌 것은 버리는 실험을 해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랄프 왈도 에머슨에게 월든 호수의 땅을 빌려서 그곳에 오두막을 지었습니다.
소로가 3개월 동안 직접 집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은 28달러 12센트였습니다.
1845년 당시 콩코드 지역의 집값이 800불 정도였으니, 상상할 수 없는 가격으로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소로가 하버드 대학교에 다닐 때 기숙사 비용으로 일년에 30달러를 냈습니다.
대학 1년 기숙사 비용으로 집을 지은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소로가 실험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삶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느라 삶의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소로는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를 외칩니다.
“거짓투성이의 인간 사회가 세속적인 위대함을 쫓아가느라, 천상의 온갖 안락을 허공에 흩어버리고 있다.”라고 한탄합니다.
“농부가 집을 마련하면 그 집 때문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이 농부의 주인 노릇을 하며 더 가난해진다.”라고 역설합니다.
집을 소유하지 말라거나,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에서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느라 삶을 한 번도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월든』이 수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하게 살아보라는 부탁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끊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감을 내려놓고, 남이 정해준 길로 달려가는 피곤함을 멈추고, 죽음의 순간에 “내가 진짜 삶을 살아왔노라”고백하며, 후회가 없도록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8에서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행복 명령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첫 명령은 행복 명령입니다.
소로의 『월든』이 감명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행복 명령을 들려 주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며, 불필요한 것을 넘어 삶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주의 건축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하루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색과 글쓰기와 책 읽기였습니다.
소로는 새벽에 일어나 호수에서 목욕을 한 후에 오두막의 문간에 앉아 정오까지 숲속의 기운에 싸여 사색하며 앉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때 마치 옥수수가 밤새 자라듯이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월든』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대목입니다.
숲속에서의 고독한 삶을 선택한 소로는 말합니다.
“너의 시선을 안으로 돌려라. 그러면 너의 마음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 고독 속에 머물러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 안에 있는 신비를 탐험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을까요?
인간의 불행은 단 한 순간도 고요히 앉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 것이라고 한 철학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불안해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거나, 고독의 최대 적인 셀폰을 들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우리의 모습 그대로 고독 속에 앉아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소로는 월든 호수의 오두막에서 삶의 실험을 하면서 고독 속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배웁니다.
빗소리를 비롯한 자연의 모든 소리와 풍경 속에서 무한하고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낍니다.
이 친밀감은 자연이 주는 생명의 기운이면서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된 친밀감입니다.
소로는 2년여의 실험을 통해 “때로 황량하고 음산하다고 말하는 곳에도 친근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월든』의 말미에 소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능하다면 우주의 건축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
2년여의 실험을 마치고, 또 다른 삶을 향해 떠나면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앞으로 소로는 우주의 건축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또 다른 삶을 실험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요함 속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삶에 친밀하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민낯으로 만나야 합니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소로가 월든 호숫가의 고독 속에서 무한한 친밀감을 느낀 것처럼, 우리도 때로 고요함 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삶에 친밀하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의미를 발견합니다.
2025년 부활주일 설교를 "회복"이란 주제로 준비합니다.
부활(復活)이란?
회복이다!
* 25년 부활의 정의 / 회복(回復), 회복(恢復)
회복(回復) - 돌아올 회(回), 회복할 복(復)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로 돌이키거나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를 되찾음.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로 돌이키거나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를 되찾음.
회(恢) / 1. 넓다. 2. 넓히다. 3. 갖추다. 4. 돌이키다. 5. 갖추어짐
복(復) / 1. 회복하다. 2. 다시. 3. 거듭. 4. 돌아가다. 5. 뒤집다
천망회회소이불루(天網恢恢疎而不漏) /
- 하늘에 있는 그물은 크고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
- 악행을 저지르면 언젠가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
회광(拻廣) / 사방으로 크게 넓힘
회공(恢公) / 1.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여러 사람의 의논에 붙임.
2. 과거나 도목정사를 치를 때 극히 공정하게 함
소회(紹恢) / 선대의 사업을 이어받아 더 크게 확대함
회홍(恢弘) / ‘회홍하다’의 어근
회굉(恢宏) / ‘회굉하다’의 어근
회확대도(恢廓大度) / 마음이나 도량이 넓고 큼.
25년 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피드 백(feed back) -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반응
- 본문을 읽고 질문에 대한 나의 고백을 정리합니다.
성경 / 요한복음 11:1-46
제목 /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묵상을 위한 질문 /
1. 부활의 정의? - 회복
2.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경우
* 마리아 - 신앙의 회복(향유 나드 한 옥합을 깨트린 것은 열정적인 신앙이었다.
그러나 오라비가 죽었을 때 왜 예수께서 빨리 오시지 않았나? 내가 향유 옥합을 깨트린 사람인데.....
신앙생활을 자기 만족을 위한 것에 기준을 두는 경우
신앙의 중심은 오직 예수를 위하여 <헌신, 재물, 희생,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마르다 - 말씀의 회복(평소에 말씀 중심의 삶을 자랑하였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알고 있다.
아니다,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말씀 중심은 말씀의 생활화 <말씀이 육신이 되셨던 것처럼 말씀대로 살았는가?...........>
* 나사로 - 완전히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났다.
영생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생각, 행동, 습관, 삶 전체의 변화............>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무엇을 가다듬어야 할까?
적용을 위한 질문
1. 나에게 필요한 것은?
2.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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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란 회복이라고 하겠습니다.
회복이란 한문자가 두 가지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회복(回復) - 돌아올 회(回), 회복할 복(復)
둘째는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사전에서는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설명됩니다.
"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음."
요한복음 11장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안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씻겨줄만큼 헌신적인 신앙으로 섬겼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에게 연락하여 나사로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며 발걸음을 오히려 늦추셨습니다.
그러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고 장례를 치루고 사일이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 베다니 지방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 마리아는 집안에 머물고 있었고 마르다는 급하게 뛰쳐나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선생님이 여기 계셨더먼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의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왜 집안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내가 그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그 비싼 향유를 붓고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아 드렸는데도 오라비가 병들었다고 속히 오셔서 나사로를 일으켜 달라고 간청했는데 오라비가 죽은 후에 오실 수 있는가?
과연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는가?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니을 위하여 희생적인 삶을 가졌던 그 신앙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마리아 자기 자신을 위한 과시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올바른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급하게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갔지만 예수님이 여기 계셔야만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을 때 지금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부활의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에게 내가 그 부활이며 그 생명이라고 하시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마르다는 말씀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사로는 죽은 후에 곧 바로 장례를 치루었고 지금은 돌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일어나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그까짓 돌문을 열 수 없어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을까요?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돌문과 같은 신앙생활에 나타난 장애물을 사람이 옮겨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죽어서 이제는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십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가장 귀중한 것을 예수님에게 바칠 수 있는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믿음으로 보였지만 막상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당장 오셔서 고쳐주셔야 만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뇌물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현재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장차 심판의 날에는 반드시 해결 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이란 현실과 거리가 먼 미래에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완성은 물론 마지막 날에 완전하게 드러나겠지만 지금도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부활의 소망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사로가 안장된 돌문을 옮겼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냄새가 진동하던 나사로의 썩은 몸이 얼굴은 세마포로 싸여 있었고 온 몸이 하얀 붕대로 감겨진채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몸을 감고 있었던 붕대를 풀어 자유롭게 다니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분명 죽음을 경험하였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부활이란 회복입니다.
마리아는 열정적이며 헌신적인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보여드리는 믿음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내가 행하는 것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고 나의 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면 속히 올바른 믿음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부활이란 회복입니다.
마르다는 말씀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기억하는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씀의 능력과 힘을 보여주지 못한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 말씀이 지금 이 시간 나에게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생명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이란 회복입니다.
나사로는 분명 죽었고 사일이 지났습니다.
사일이 지난 나사로 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오라고 하셨을 때 장례 때의 그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구원 받기 이전의 붕대가 우리들의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붕대를 완전히 제거한 후에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하려면 돌문을 먼저 옮겨야 합니다.
나를 가로 막고 있는 돌문이 무엇일까요?
그 돌문을 제거해야 합니다.
돌문을 제거한 후에야 비로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1. 석가모니의 '불치'와 예수님의 빈무덤
석가모니는 45년 동안 설법을 하다가, 80세가 되었을 때에 ‘쿠시나가라’에서 음식을 잘못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기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제자 ‘아난다’가 "이제 스승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시면 저희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석가는 “아난다야. 그 어느 누구도 의지하지 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나에게도 의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하고 나무 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기원전 543년 2월 15일이며 석가 80세 때이다.
그때
제자들은 석가모니를 다비(화장)하고 나니 송곳니 4개가 남았다고 한다.
오른쪽 송곳니는 범천(힌두교의 신)들이 가지고 올라갔고,
위 왼쪽 송곳니는 스리랑카의 왕이 가지고 갔다.
이들은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매년 8월이면 이
‘불치’를 주제로 스리랑카 최대의 축제 ‘페라헤라(Perahera· 佛齒祭)’가 열립니다.
불치를 가져 나와 거리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지금도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축제에 참여하고, 각종 민속공연도
함께 펼쳐진다.
이것을 위해서 불치 보호 장관도 임영 되어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몇 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외국의 침입과
약탈 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고 지금도 자랑하고 있다.
수많은 불자들이 부처의 송곳니를 모셔둔 그 스리랑카 성지에 불공을 드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한다.
이 스리랑카는 불교를 숭상하는 ‘싱할라족’의 왕조가 2,000년 이상 이어왔다.
부처님은 송곳이 4개를 남겼다.
공자는 후손들과 무덤을 남겼다.
그들은 선각자요. 위인들이나 다 죽었다. 그리고 흙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은
그들이 없는 신성(神性)이 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증거는 바로 지금도 비어 있는 무덤이다.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살아서 일도 다 모르는데 죽음 이후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했다.
석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에 고통하는 중생을 구출하려고 출가했으나
그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는 증거는 많다.
그러나 가장 강하고 분명한 증거는 부활이다.
완전히 죽으시고, 6시간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솥 드시고, 운명하신 가운데 삼일 만에 살아 나셨다.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다.
그는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으시고 살아 나셨다.
그를 믿는 우리도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동기이지 결론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2. 석가모니와 예수님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힌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다.
3. 부활절은 왜 유동적인가?
부활절은 매년 3월 22일부터 4월 25일에 온다. 이것은 춘분 다음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이다. 이렇게 지켜지는 이유는 그 유례가 있다.
초대교회 때 3세기 동안에는 해마다 부활절을 지켜야 할 일자에 대하여 계속 날카로운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을 음력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서방교회(로마교구를 중심으로 한 서쪽에 위치한 교회들)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주일(일요일) 부활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서방 성도들에게는 주중의 날이 중요하였고 동방교회(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 콘스탄틴 교구를 포함한 로마 동쪽에 위치한 교회들)의 성도에게는 달(月)월의 날이 중요하였다.
이런 의견의 해결은 니케야총회(325년)에서 결정했는데 결국 달과 주중의 날 둘 다 인정하여 부활절은 춘분 다음 첫 만월후 첫째 주일이 되도록 하였다.
지정의(知情意)의 사전적 의미
지정의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정의가 조금씩 달라보이지만, 결국은 지정의에 대한 고뇌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다.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여왔다.
지금도 인간 본질에 대한 고뇌와 성찰은 계속 되고 있다.
아마도 아래에 인용한 국어사전, 지식백과, 교회용어사전에 나와 있는 지정의의 정의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좋을 듯 하다.
[네이버 국어사전] 지정의 知情意
<심리>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아울러 이르는 말.
[네이버 지식백과] 지정의 知情意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지식, 도덕, 신체라는 구분으로 인간을 이해하던 1900년대의
지덕체(智德體)론은 1910년 이후 새로운 인식 체계인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받는다.
인간의 정신을 지(知,
Erkenntnis), 정(情, Gefühl), 의(意, Begehrung)의 세 가지 능력으로 구분한 지정의론은 이광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된다.
지정의라는 심리학적 삼분법을 동원하여 이광수가 역설한 것은 다름아닌
정(情)을 기초로 하여 성립하는 문학의 가치였다.
이광수는 지, 정, 의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 관계도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지나 의와 마찬가지로 정(情)도 그 자체의 만족에 대한 요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문학이란 바로 “인(人)의 정(情)을 만족케
하는 서적”이며 문학의 독립적이고 자율적 가치는 여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정(情)의 충족이란 미(美)의 추구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지정의라는
심리학적 구분은 그것의 충족이 목표로 하는 바에 따라 각각 진, 미, 선이 대응되기 때문이다. 이에 문학은 음악, 미술과 같은
다른 하위범주들과 함께 예술이라는 상위 범주에 포괄됨으로써 예술의 한 독립적인 갈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情)이란 또한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정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이나 보편이 아닌 솔직하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은 자기이며 자신의 순수 감정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인식의 근본틀을 형성했다.
그러나 고독을 토로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개인의 목소리는 균열을 거듭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지정의라는 기획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상적인
계몽의 힘이 정(情)을 갈구하는 개인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만 것도 이 때문이다.
- 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소명출판, 2000년
- 문학사와비평연구회, 『한국문학과 계몽담론』, 새미, 1999년
지정의 [ 知情意 , intellect , emotion and volition ]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정신 활동의 근본 기능)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아울러 이르는 말.
한 마디로 그 사람 자체 곧 ‘전인격'(全人格)이라 할 수 있다.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향유 귀한 한 옥합을 쏟아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주었다고 할 정도로 매우 감성이 풍성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후에 집안에 머물던 중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뛰쳐 나가 선생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매우 이지적인 믿음의 사람이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무덤에 안장되었던 지정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덤의 돌을 열고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선포하셨을 때 나사로는 온 몸에 베를 감고 있는 상태로 나왔다.
세 사람 중에서 누가 부활의 증인으로 나설만한 인물일까?
분명히 죽음을 경험하였고 다시 생명으로 일어난 나사로가 아닐까?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65세에 은퇴 후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나는 전통적인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만 성장하였고 목회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기독교인들과 교제하고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의 삶을 모르고 지냈구나!
어떻게 하면 남은 생애에 낮은 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교회를 섬길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매일 저녁 낮은 자들이 모이는 팝(선술집)에 가서 술 한잔을 주문하고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였다.
거의 3개월이 지날 무렵 한 사람이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기에 근처에 살고 있다며 은퇴 후 이렇게 지내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거의 일 년이 지날 무렵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루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서로 누구 장례를 치룰 목사를 알고 있는가?
이때 실은 내가 은퇴 목사인데 내가 장례를 맡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장례를 마쳤는데 모였던 사람들에게 우리끼리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자 모두 좋다고 하여 예배 장소를 정하고 모이기로 하였는데 무려 1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하여 기존 교회의 예배가 아니라 가장 평범하고 낮은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가 성공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시대에 필요한 교회는 기존 교회의 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예배를 찾아야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활주일 설교(04-20-2025)
부활의 증인(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19세기 기독교는 초월 신앙을 간과한 내재 신앙이 주를 이루었다.
20세기 들어 초월 신앙이 강조되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는 스위스의 ‘에밀 브루너’(1889-1966)이다.
부르너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에 있다고 하였다(<만남으로서의 진리>, 스탠리 그렌츠, <20세기 신학>에서 재인용).
부르너는 교리나 신학이나 심지어 사도들의 증거조차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교제를 위한 2차적 도구들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없는 교리, 신학, 성경까지도 ‘신학주의’(Theologismus)라는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상당히 과격한 주장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아는 영생에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신앙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
첫째는 신앙의 과거
둘째는 신앙의 현재
셋째는 신앙의 미래
2025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들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부활 신앙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이 무엇인가를 여러 차례 가르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죽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막을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분위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들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급하게 나사로의 집으로부터 예수님을 급하게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머물다가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가시면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맞이합니다.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세 가지 반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나가서 영접하는 신앙
마리아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신앙
나사로와 같이 이미 무덤에 묻혀 있는 신앙
여러분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신앙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신앙의 과거에 집착하는 유형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주님을 위하여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왜 좀 더 일찍 오셔서 오라비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을까 하고 그녀의 마음에 섭섭함과 원망과 안타까움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
마리아가 믿는 하나님은 가깝고도 먼 곳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 믿음이 마리아와 같은 믿음은 아닐까요?
날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도 죽음 앞에서는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죽지 않았을텐데.......하며 미련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믿음입니다.
마르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신앙의 현재에 집착하는 유형
마르다는 급하게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때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열심히 예수님을 찾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지막 부활 때에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에 문제의 해결을 경험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때에는 누구나 다 해결받습니다.
신앙은 현재가 중요합니다.
나사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미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장차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깨우치시면 십자가 사건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생명을 되찾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관심을 갖고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는 그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하여 빨리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하시며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지체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고 장례를 치룬 후에 마리아와 마르다는 왜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지 않으셨을까?
마리아는 실망했습니다.
낙심하여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도 집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며 아쉬워하면서도 막상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자 급하게 집안에서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을 때 마리아는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삐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짝사랑이었구나 하고 실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지벵서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선생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하고 원망한 듯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위로했습니다.
마르다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었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이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지 오시지 않았는지 아무런 반응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사로야 나오라 이렇게 외치셨을 때 나사로는 온 몸에 세마포를 두른 모습으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세 종류의 부활의 증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는 실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증인
마르다는 원망을 믿음으로 바꾸는 증인
나사로는 죽음을 생명을 바꾸는 증인
참된 부활의 증인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세 종류고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믿지 않는 사람(2:14)
14.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그것들이 허무맹랑한 일이고, 그것들을 알 수도 없어서입니다.
그것들은 ⁕영적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개역한글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공동번역 / 그러나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현대인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는 육적인 사람들(3:1)
1. 나로서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적인 사람들에게 하듯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육적인 사람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젖먹이들에게 하듯이 말했습니다.
새번역 /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공동번역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인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셋째는 영적인 사람(2:15)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공동번역 /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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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나사로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부활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부활의 증인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영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라는 단어는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생명을 말합니다.
육체적인 생명은(사르크스) 호흡이 멈추면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생명은(조에)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헬라어의 생명에 관한 세 개의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 영(靈), 영묘할 영. 혼(魂), 넋 혼. 육(肉) 고기 육
육체(肉體)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스트롱번호 4561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어원 / 5594에서 유래
관련 성경 /목숨(마2:20, 막8:35, 롬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어원 / 2198에서 유래
요한복음 11:1-44
부활주일을 일생동안 몇번 맞이하였습니까?
제 경우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무려 76번 부활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주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하고 되묻습니다.
부활주일 계란을 먹는 것,
이른 새벽에 부활주일 연합예배에 참여한 것,
여성들은 흰옷을 입고 모인 것,
과연 이러한 경험들이 부활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평소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급하게 예수님을 청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며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를 치루고 사일이 지난 후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고,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나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로의 집안 식구들로부터 부활에 대한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마르다 급하게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이하여 하소연 합니다.
셋째는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안장 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실망한 마리아를 생각합니다.
마르다에게서 시원섭섭한 마르다를 생각합니다.
나사로에게서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생각합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누구이었을까요?
저는 나사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실망이란 또 다른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실망할 수 있습니다.
시원섭섭함이란 언제든지 내 생각과 내 뜻과 다를 때는 또다시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죽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25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나는 부활에 대하여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실망 - 마리아
부활에 대한 아쉬움 - 마르다
부활에 대한 감격과 감사 - 나사로
왜 집에 앉아 있었을까?
예수님에 대한 실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며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는데 막상 오라비가 죽을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늦게 오셨다는 것에 대한 실망이라고 하겠습니다.
가깝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셨습니까?
가깝다는 말은 친밀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친밀하기 때문에 속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미랗기 마기 나는 쌉게ㄱ렇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활이란 헬라 단어
ἔγερσις, εως, ἡ
1454
[ĕgĕrsis]
-
부활, 마 27:5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부활, 빌 3: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 2.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1: 22, 2:31, 4:33, 17:18, 롬1:4, 6:5, 빌3:10, 히11:35, 벧전1:3, 3:21.
-
3.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14:14, 20:35,36, 요 11:24, 23:6, 8, 24:15, 고전15:12이하, 히6:2, 계20:15이하.
나는 부활이요(아나스타시스) 생명이니(조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상징적으로]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고후5:2.
- 2. 거주, 주거
- 3. [문자적으로, 천사에 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명.
- 3.[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성 경: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부활이란?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1. 종교적 의미의 부활
기독교에서의 부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 영생을 약속하셨다고 믿습니다.
- 성경의 기록: 신약성경(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부활절(Easter):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입니다.
불교에서의 부활 개념
불교에서는 기독교처럼 '부활' 개념이 강하지 않지만, **윤회(輪廻, Samsara)**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한 생이 끝나면 업(業, Karma)에 따라 새로운 생이 주어진다고 봅니다.
이슬람교에서의 부활
이슬람교에서도 부활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Qiyamah)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알라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2. 철학적·문학적 의미의 부활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나 재생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 철학적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사후 세계에 대한 논의에서 부활 개념이 등장합니다.
- 문학에서: 개인의 회복, 사회의 재탄생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예: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꿈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려 하지만 결국 좌절하는 과정)
3. 현대에서의 부활 개념
오늘날 '부활'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쓰입니다.
- 스포츠·정치에서: 한때 실패했지만 다시 성공하는 경우 "부활했다"라고 표현합니다.
- 문화·예술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인기를 얻는 작품이나 유행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합니다. (예: 레트로 열풍)
결론
부활은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 새로운 시작, 재탄생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 교리이며, 이슬람교와 불교에서도 각각의 방식으로 부활이나 재생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세가지 시제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시제는 세가지로 언급된다.
이미 얻은 구원(과거적 시제의 구원)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표현(현재적 시제의 구원)
궁극적으로 얻게되는 구원(미래적인 시제의 구원)
물론 구원의 개념이 세가지라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에 대하여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다만 성경에서는 구원의 시제적인 개념이 세가지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에베소서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구원의 과거형 시제(현재완료수동형)를 가르킨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에 함께 살리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현재완료수동형이다.
즉 믿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는 자의 믿지 않는 자의 이미 받은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롬5:9은 이미 얻은 의롭다함을 말하며, 골1:13-14는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사는 모두 과거형이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골3:9-10도 과거분사형이다. 즉 이미 옛사람을 벗었으며, 새사람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위에 기록한 성경구절보다 더 많은 성경구절들이 과거적인 시제로서 이미 받은 구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현재형의 구원을 함께 말하고 있다.
구원의 현재적인 면과 현재에도 계속되는 진행적인 구원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이루라”라는 단어는 work out의 의미로 현재동사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고전1:18도 구원의 현재적 시제를 가르킨다.
“구원을 얻는 우리”의 동사시제는 현재수동형 분사로 사용되었고 직역하면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라는 뜻이 되어지기 때문이다.(who are being saved)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성경은 이미 얻은 과거적인 구원의 개념뿐 아니라, 현재적인 시제를 갖는 구원의 개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은 장래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5:9)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특히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그 구원의 시제가 과거이든 현재이든, 장래이든, 인간의 구원의 수혜자이며,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심을 알아야만 한다.
즉 인간은 구원에서 피동적인 입장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무조건 내가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확증이어야만 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나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 순간 순간의 현재진행형의 구원에 대한 연속적인 확증이어야만 한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이어야만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것이 과거의 시제만을 생각하는 형태의 구원, 즉 현재시제의 구원을 전혀 무시하는 믿음의 확증이나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내가 과거에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지, 내가 과거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지는 구원의 확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오래전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과거적인 사실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이미 얻었던 것이며,
이 현재의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조건으로서 장래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확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인침과 보증이 될 수도 있으며, 아직 성령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얻은 구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최종적인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만 하는 책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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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16)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머리로 아는 경우 - 지식에 해당(지)
가슴으로 아는 경우 - 감정에 해당(정)
몸으로 아는 경우 - 삶의 경험에 해당(의)
성경적인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오래 전 어느 스님과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울주군 온산면 덕신이 625번지에 온산제일교회에서 시무할 때 가끔 스님이 마을을 찾아와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시주를 받으려고 합니다.
어느 날 저희 사택 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기에 "스님 제가 목사입니다" 라고 말했더니 두 손을 합장한 후에 뒤돌아서 가려고 하기에 아니 잠간 들아오셔서 냉수라도 마시고 가시라며 마루에 앉게 했습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드린 후 마침 사과가 있어서 사과를 드리고 사과를 깎기 위한 과도를 가지러 주방으로 가려는데 사과를 집어 들더니 스님의 옷자락에 쓱쓱 문지른 후에 사과를 먹는데 씨방이 있는 것까지 모두 먹었습니다.
제가 스님에게 "제가 무식한 목사가 되어 잘 모르겠는데 불교에서는 사과를 그렇게 먹습니까?"
그러자 스님의 대답은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스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다음에 마을을 방문할 때 다시 들리겠는데 그 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스님이 떠난 후에 과연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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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마태복음 5:14-16)
설교자가 왜 이런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가 하는 배경을 함께 가져야만 무엇을 강조하려는가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피드 백"이라고 합니다.
지난 2월 9일에 "땅의 소금"이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이제까지 들었던 소금의 의미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방부제
둘째는 조미료
셋째는 제사용(레위기 2:13 - 소제의 제물에 소금을 치라)
그런데 석회질이 많은 땅에 씨를 뿌리려면 먼저 석회질 땅(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 소금을 뿌린 후에 씨앗을 뿌려야 싹을 낼 수 있다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특이한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땅으로 비유하여 네 가지 마음 즉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길가와 같은 땅 - 악한 자가 와서 천국 복음을 빼앗는 것(천국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
둘째는 돌이 많은 땅 -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것(믿음의 연단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셋째는 가시떨기와 같은 땅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십일조를 왜 하는가? 헌금을 왜 하는가?)
이러한 땅에 뿌려진 씨앗은 싹을 낼 수 있으나 잘 성장하지 못하여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거두려면 반드시 좋은 땅 즉 옥토에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땅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가 오셨으나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으니 너희도 와서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고 깨우치라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땅에 소금에 이어서 세상의 빛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십니다(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태양계에서 빛을 비출 수 있는 행성은 태양입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기 때문에 달빛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물체를 비발광체라고 하며 태양은 발광체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빛이 되십니다.
죄인이 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빛이 되려면 너희 착한 행실을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이란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행하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리고 성으로 가던 어떤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있었습니다(누가복음 10:31-35)
* 누가복음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누가복음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누가복음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한문자 사자성어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합니다.
- 슬퍼할 측(側), 숨을 은(隱), 갈 지(之), 마음 심(心)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인생은 측은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합니다.
따라서 측은지심을 '성령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양심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겨우 죽어서야 다른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볼 것을 보고 느낄 것을 느끼고 말할 것을 주장합니다.
(예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이야기 중에 어느 노파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수호 천사가 그 노파의 행적을 살펴보던 중 단 한 번 어느 지나가던 배고픈 사람에게 양파를 한 뿌리 주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천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내려보내며 이 양파를 붙잡고 올라오라고 합니다.
노파는 그 양파를 붙잡고 위로 올라가려는데 지옥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노파를 붙잡았습니다.
노파의 생각에는 나 혼자서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인데 여러 사람이 붙잡기에 이 양파는 내 것이야 하며 너희들은 붙잡을 수 없다며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자 그 양파가 부러져서 노파도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에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양심을 되찾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양심을 잃어버린 다양한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판사, 검사, 경찰, 목사, 노동자........등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누가복음 16:19-31)
19.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자주색 옷과 고급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사치스럽게 즐겼어요.
20. 한편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나사로였어요. 그는 부자의 집 대문 입구에 팽개쳐져 있었어요. 부스럼투성이였어요.
21.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요. 그러나 개들마저 와서 그의 부스럼을 핥아 댔어요.
* (세상에서) 부자의 특징 - 자기 울타리 밖을 볼 줄 모른다!
- 탈무드 이야기 / 창문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양파 한 뿌리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도스토옙스키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양파 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는 할머니를 악마들이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22.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이 죽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
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어요. 그 부자도 죽어서 장례가 치러졌어요.
23. 그는 ⁕하데스에서 자기 눈을 들어,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아브라함이 저
멀리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의 품에는 나사로가 있었어요.
24. 부자가 소리쳐 말했어요. ‘아브라함 조상님!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
를 보내 주십시오. 그가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갔다가 저의 혀를 시원하게 해
주도록요. 제가 이 불꽃 가운데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옥, 하데스에서) 부자의 특징 - 자기 울타리 밖을 볼 수 있다!
25. 아브라함이 대답했어요. ‘얘야, 기억해 보아라. 너는 살았을 때 너의 좋은
것을 다 받았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는 나쁜 것을 다 받았다. 이제 여기서
그는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말이지, 심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26. 이 모든 것들에 더해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크게 벌어진 깊은 틈이 놓여
있다. 그래서 여기서 너희한테로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갈 수 없고, 거
기서 우리한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27. 그러자 부자가 말했어요. ‘그러면 부탁이 있습니다, 조상님! 나사로를 저의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제게는 형제가 다섯 명 있는데, 그들에게 똑똑히 증언하여, 고통받는 이곳
에 그들까지 오는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29.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다. 그들이 ⁕모세
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부자가 말했어요.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그들한테로 간다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그러나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했어요.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살아 일어난다 해도 그
들은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 관심(觀心) : 관계할 관(關), 마음 심(心)
어떤 것에 마음에 끌리어 주의를 기울이는 것
門(문 문) + 幺(작을 요) + 幺(작을 요 + 丱(쌍상투 관)
𠂈 (다할 진) + 丨(뚫을 곤) + 一 (한 일) + 丨(뚫을 곤)
상형문자로 곤(丨) 字가 부수
"띠끌 없이 통한다"
관심을 가지려면 ;
1. 함께 본다(see together)2. 함께 간다(go together)
3. 함께 나눈다(share together)
4. 함께 성취한다(achieve together)
땅의 소금 :
1. 방부제, 2. 조미료, 3. 제사용(레 2:13)
* 씨앗의 발아(發芽)를 위한 용도
* 땅 - 길가, 돌작밭, 가시떨기, 옥토(沃土)
세상의 빛 : 착한 행실(타 칼라 에르가. τα καλα εργα)
* 착한 / ①. 카로스(kalŏs) 흠이 없는, 아름다운, 유용한
②. 아가도스(agathŏs) 선한, 적합한, 완전한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누가복음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누가복음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누가복음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착한 행실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마음
- (제사장)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레위인)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어떤 사마리아인) 보고 불쌍히 여겨
* 측은지심(惻隱之心) - 성령의 마음
슬퍼할 측(側), 숨을 은(隱), 갈 지(之), 마음 심(心)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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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문화권에서는 땅의 소금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결과 소금의 용법으로 "방부제" "조미료" "제사용(소제. 레 2:13)" 등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땅의 소금이란 씨앗을 뿌릴 때 석회질이 많은 땅에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소금을 뿌린 후에 씨앗을 뿌려야 싹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땅의 소금이라고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땅은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길가, 돌작밭, 가시떨기, 옥토로 구분하여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옥토에 뿌려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땅의 소금이란 땅은 우리 주위에 다양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때 싹을 낼 수 있는 반응과 도저히 싹을 낼 수 없는 부정적인 반응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왜 저 모양이야!
저 사람이 장로래........ 저 사람이 무슨 교회 권사래..... 집사래......
이런 반응은 싹을 낼 수 없는 길가, 돌작밭, 가시떨기와 같은 땅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이미 믿음의 사람에 의해서 소금이 뿌려진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 한양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자주 만나는 카운터의 직원에게 설날을 맞이하여 상품권을 드렸습니다.
때로는 간단한 먹거리를 구입하여 전달했는데 이제는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구정을 맞아 상품권과 성경 구절 그리고 제가 목사라는 신분을 알려주는 자료를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셨구나! 하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가슴에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보고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불낙지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전도의 대상은 불신자, 낙심한 자(교인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 아직도 신앙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을 찾아야 하겠지요.
저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을 찾았고 그 두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오늘은 세상의 빛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빛에 대한 정의는 이미 예수님께서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이란 서로 비교해서 좀 더 착한 것이 아닙니다.
착한 행실을 가지려면 첫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자어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의 예) 누가복음 10장에 여리고로 향하던 어느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같은 현장을 목격했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착한 행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의 예) 누가복음 16장에 어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부자의 대문에 거지 나사로가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거지에게 따뜻한 음식을 한번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관심(關心)과 무관심(無關心)
관심은 눈여겨 보는 것입니다.
관심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관심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불평하고 원망할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출 17:6).
반석을 치라(Strike the rock)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반석에게 명하라(Speak to that rock)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Take the staff, and you and your brother Aaron gather the assembly together. Speak to that rock before their eyes and it will pour out its water. You will bring water out of the rock for the community so they and their livestock can drink."
지난 2월 23일 주일 예배 전에 황목사님께서 찬양을 인도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전도를 하려면 장로 때문에, 집사 때문에, 복음을 제시하기가 매우 난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이 때 빛에 대한 분명한 의미는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에 대한 이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도덕과 윤리에 어긋남이 없는 것
이러한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원칙입니다.
장로 때문에, 집사 때문에......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원칙보다 더 낮은 기준으로 행동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는데 이때 착하다는 헬라 단어를 "칼로스"라고 합니다.
헬라어에 착하다는 단어는 "아가도스"와 "칼로스"라고 합니다.
아가도스는 상대적으로 착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집 수리를 맡겼는데 그 수리를 맡은 기술자가 교회 장로님이었다고 함다면 장로님이 사용하는 재료가 다른 기술자보다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아가도스"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칼로스라는 것은 모든 재료 중에서 최고의 상품을 사용하므로 다른 어떤 재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재료를 말합니다.
채필근목사님이 지은 "이야기 철학"이라는 책에 어느 선교사와 어학 선생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조선말에 익숙하지 않아 어학선생을 모시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어학선생과 함께 사역을 하던 중 이제는 조선말에 능숙하게 되어 어학선생에게 마지막 부탁으로 가장 좋은 한옥 한채를 지어달라고 했답니다.
어학 선생의 입장에서 이제는 내 일 자리가 없어지겠구나 생각하고 집터를 구할 때 가장 좋은 터라고 말을 하고는 가장 나쁜 냇가 근처의 몹쓸 땅을 구입하고 가장 좋은 재료를 구한다고 하고는 가장 낮은 재료를 구하여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집이 완공되는 날 어학선생이 선교사에게 집을 완공했으니 가 봅시다 하고 선교사와 함께 한옥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어학선생에게 이 집은 내가 살 집이 아니라 그동안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어학선생님을 위하여 지은 집이니 이제부터 이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했지요.
그때부터 어학 선생은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불어나면 집이 떠내려갈까 걱정입니다.
바람이 불면 좋은 재료를 사용했으면 튼튼할 집이 흔들니는 것 같습니다.
최고의 목수를 고용하여 집을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합니다.
만일 이 집이 내 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착한 행실이란 칼로스는 절대적인 착함을 말합니다.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주일 설교 / 3월 9일 <사순절 제1주/ 보라색>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복음 5:14)
지난 2월 9일 주일에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이라고 가르치신 이유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지혜로운 농부는 먼저 석회질이 많은 땅에 소금을 뿌린 후에 씨앗을 뿌린다고 합니다.
만일 땅에 소금을 뿌리지 않으면 씨앗이 싹을 낼 수 없고 자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과 같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씨앗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소금이 뿌려지지 않은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같은 땅에서는 씨앗이 자라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에 나가서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어 생명의 씨앗과 같은 말씀이 뿌려질 때 그 씨앗이 자라날 수 있도록 자기를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스스로 빛을 비출 수 있는 물체를 "발광체(發光體)"라고 합니다.
하늘엣 유일하게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물체는 "태양" 뿐입니다.
저 태양을 하나님이라고 비유한다면 밤하늘에 빛을 발하는 별들과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비발광체(非發光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인이었던 우리들이 어떻게 빛을 반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빛을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6 (새한글성경)
이와 같이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일들을 보고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일 즉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도입 이야기) 탈무드의 이야기
어느 잔치 집에 많은 손님들이 초대를 받아 여흥을 즐기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서 손님들 중에 시각장애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손에 등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시각장애인은 버럭 화를 내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왜 등불을 들고 가라고 합니까?"
잔치집 주인은 "어두운 길에 저 앞에서 다른 사람이 올 때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보고 조심할 것이 아닙니까?"
그제야 시각장애인은 잔치집 주인의 배려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등불을 들고 잔치집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시각장애인이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앞서 오던 행인에게 소리치를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이 안 보이느냐?"
그러자 부딪친 행인은 "아니 꺼진 등불을 들고 오면 누가 보겠느냐?" 하고 오히려 반박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빛이 되려면 먼저 빛을 받아야만 빛을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3.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4.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세상의 빛
땅의 소금은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겸손, 낮은 마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빛은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빛은 높은 마음, 고귀한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1월 12일 주일에 "너희는 땅의 소금"이란 주제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란 주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탈무드에서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잔치 집에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 마침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필요한 것을 선물로 나눠주었는데 마침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등불을 들려주며 "이 등불을 들고 가세요!" 하고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이 꺼져버린 등이라면 어두운 세상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정말 세상의 빛이 되고 있습니까?
소금은 천하고 흔하여서 어디가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빛은 고고하고 높은 곳에 있어 묻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소금은 타협적이어서 어떤 물체에 들어가면 동화되어 자신이 없어지지만 빛은 심판적이어서 어두움과 함께 공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없고 어두움이 있으면 빛은 없습니다. 이렇게 빛은 힘의 대결로써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라고 하신 뜻은 그리스도인에게 양면의 신분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백성의 신분을 가지고 이 땅에 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너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높고 고귀한 신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서 녹아 그들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하고 자신은 흔적도 없이 흡수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성격을 조화 있고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빛이란 내 자신이 곧 빛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장에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가 빛의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빛은 자전하는 스스로의 빛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9:5에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빛이라"고 예수님은 친히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태양과 같고 우리는 달과 같아서 일차적인 태양의 빛을 받아 우리는 반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빛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요,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 빛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유대사람들이 가진 빛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의 교훈 미쉬나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의 빛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사람들의 종교가 온 이방사람, 즉 전 세계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유대사람들이 세계에서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 : 16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계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어두움 속에, 즉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차차 밝아져 온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후서 1 : 19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 세상이 다 어두운데 이제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라는 예언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문제는 어두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 상징이듯이 어두움도 역시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어두움이란 첫째, 무지함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중의 하나가 무지한 사람입니다. 알기만 하면 쉬운데 모르기 때문에 어렵고 두렵습니다. 알고 있을 때는 용감하게 행할 수 있지만 모르니까 움츠러지고 불가능하게만 생각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척에 있어도 모르면 멀고 깜깜하게 느껴집니다.
둘째로, 어두움은 양심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필자의 친구 한 사람은 열쇠꾸러미에 조그마한 나침반을 함께 끼워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열쇠를 꺼낼 때마다 손안에서 나침판을 보곤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열쇠를 꺼낼 때마다 "지금 나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모른다면 나의 모든 수고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양심의 방향, 도덕의 방향, 가치관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어리석음, 즉 무능함이나 무기력, 무질서 혼돈을 어두움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두움 가운데서는 힘이 소용이 없습니다. 힘의 장사 삼손도, 그가 설사 머리를 잘리우지 않았더라도 눈만 빼 놓으면 삼손인들 무슨 힘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눈 없는 사람, 즉 빛이 없는 사람의 몸이라면 아무리 센 힘을 가졌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빛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빛이 없다면 밝은 눈을 가졌다 해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빛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도마뱀들은 지나다니는 중에 굴속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그 굴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몇 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벌레를 잡아먹고 이럭저럭 사는데, 얼마 지나고 나면 그 도마뱀의 눈이 아주 멀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빛을 보지 못하면 눈은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빛이 없는 어두움이란 무기력,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 : 14-15),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빛의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경 위에 둔다'고 하는, 등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보통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창문은 대부분이 예루살렘 쪽으로 내어서 창문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이 창문은 아주 높이 달려 있어 해만 지면 집 안은 깜깜하여 이 때에 불을 켜서 높은 곳에 두어 온 방 안을 비추게 됨을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가옥에는 등경(등잔을 걸어놓는 기구)이 부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예수님은 좀더 극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기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자가 어디 있느냐, 즉 등불을 덮어두는 사람은 없고 어디나 높은 곳에 두어 모든 것을 비추게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분이 높임을 받는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어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명예 등은 신통치 않아도 의와 양심과 선에 대해서는 누구나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이어야 참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래야만 등불처럼 높이 둘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빛은 숨길 수가 없다라는 말은 대단히 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숨은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만 믿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리켜서 고백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백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합니다"라고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나는 교회는 안가지만 마음으로 믿는다. 또는 조용히 믿고 싶다"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신앙은 절대로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도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끔 비밀 사랑이니 짝사랑이니 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사랑은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고백하여 나타냄으로써 그 사랑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숨기는 존재가 되서는 안 됩니다. 흔히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순교자란 드러내 놓고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정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사 앞에 가서 꾸벅 절하더라도 속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겠지 하며 자기합리화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속으로가 아니라 드러내어 놓고 믿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으면 범사에 믿는 사람으로써 행위가 있어야 하므로 결코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일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합니다만 적어도 신앙에 대해서만은 감춰놓고 믿는다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나올 때 버젓이 성경 찬송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아직도 조그만 책을 일부러 사서, 핸드백 속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어디 가느냐"는 인사를 받으면 우물쭈물하며 "저기 간다"고 어물쩡하게 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믿지 않는 형제나 친지들에게 숨겨가면서 믿어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 슬쩍 넘어가면 전도하기는 더욱 요원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핍박이 오고 당장 어려움을 당해도 극복하면서 신앙을 나타내야만 누구에겐가 감동을 주게되고 구원의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숨기는 동안에는 자기도 구원 못하고 남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핍박이 있을 것이라면 있어야 하고 부러져야 할 것이면 부러져야 합니다. 신앙만은 항상 노출되어 등경 위에 높이 올려진 상태에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고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저런 사람이 믿는 자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비난까지도 듣습니다. 아니 자기 생각에도 나 정도의 윤리 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 욕을 돌리겠다 라는 제법 양심적(?)인 이유로 신앙을 숨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수준이 높거나 낮거나, 어떤 모양이라도 믿는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믿는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만은 시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순교가 오는 것입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순교적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유대인이 유대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를 유혹하기를 돼지고기를 먹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은 그 유혹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자 그것을 지켜보던 한 간수가 그를 살려주고 싶어 한 가지 지혜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소고기를 가져가서 말하기를 "여보시오. 이것은 소고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재판관들은 모두 돼지고기인줄 알고 있으니 빨리 이것을 먹고 풀려나시오"라고 유대인에게 먹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유대인이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소고기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돼지고기인줄 알고 있으므로 먹을 수가 없군요. 당신의 호의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죽기를 자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숨겨진 신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전혀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산 위에 있는 동네도 이 조그마한 불 하나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빛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좀더 다른 면으로 볼 때에 빛은 드러내야 될 뿐만 아니라,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기독교인이라고 특별한 표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많은 여성들은 십자가 목걸이를 좋아해서 걸고 다닙니다. 그분들 모두가 기독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남자들은 십자가 뺏지들을 붙이고 다니는데, 사실 이런 표식들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행동에 어려움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버스에서는 가리를 양보해야 하고, 사람들께 친절도 해야 하며, 물건을 살 때도 값을 깍기가 조심스러우며, 가야할 곳도 가려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뺏지는 없어도 어딘가에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얼굴만 보고도 어딘가 모르게 보통사람들과는 달라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골상학적으로 잘 생겨야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이(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주는 그 인상이 아예 그 사람됨이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버스 속에서 쓰리꾼들이 가방을 찢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방을 찢기는 친구만 계속해서 자주 찢겨서 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결론 내리기를 이것은 "관상 때문이다"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쓰리꾼들에게 그 친구의 관상이 아무래도 돈 있는 사람으로 보였기에 가방이 자주 찢겼으나 목사되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겠다고 농담까지 했습니다. 사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풍겨나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나 교인들이 무엇을 잘못하면 소문이 널리나고 말이 많아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면 섭섭해하고 듣기 싫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서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기에 이야기하고, 기독교인만은 적어도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에 조그마한 잘못에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아주 더러워진 옷에는 무엇이 묻었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만 깨끗한 옷에는 조금만 묻어도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드러나기 때문에 받는 비평을 마음 아프게 생각지 말고 당연하게 또는 고맙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는 지금까지보다 좀더 적극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을 비추라는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두움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리워지지만 빛이 나타나면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는 허물이 보이지 않지만 빛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흔히 고급 식당에 들어가면 좋은 등은 다 꺼 버리고 식탁마다 촛불을 켜 놓고 거기에다 또 갓을 씌워 어두운 채 식사를 하게 합니다. 필자는 미국의 어느 식당에서 짓궂게도 웨이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장난기로 물었는데 의외로 그 웨이터는 아주 중요한 철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아무리 어두워도 밥은 자기 입에 정확하게 가져가니 어두움이 문제될 리 없고 둘째로, 어두운 빛 앞에서는 미녀나 미남 아닌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대답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지나치게 밝으면 남의 얼굴에 있는 흉터나 주름살까지 다 보이고 화장이 잘못된 것까지 나타나니 미인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흐릿한 촛불 앞에서는 누구나 선남선녀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서는 무드를 낸다고 밝은 전등보다는 촛불을 여러 개 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 앞에서는 허물이 가려져 누구나 미인이며 웬만하면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 앞에서는 조그마한 흠도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거짓과 불의가 통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불의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비껴라도 가야한단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그리스도인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비추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는 세대이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여기에 선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비춰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영적인 지식을 비추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과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자기를 알고 자기의 운명을 알아보도록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빛이란 길을 보여 줍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길을 볼 수 없지만 빛이 있으면 환하게 길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길이 꽉 막혔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그 길이 열리고, 절망이었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소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빛은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잃었던 방향 감각을 되찾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방향이 분명하여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자기 방향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빛은 경고의 등(warning light)이기도 합니다.
등대는 망망한 대해에 홀로 서서 빛을 비추며 위험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위기를 알리고 함정을 알리며 죽음과 멸망에 대한 경고를 사전에 미리 해야 합니다.
일곱째, 빛을 비추라는 말은 힘을 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 힘이 없지만,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가치가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입고 있는 갖가지의 아름다운 옷의 색채들이 빛이 없으면 어떻게 그 색깔들을 알릴 수 있습니까? 빛이 없으면 모든 색들이 무효입니다. 오직 빛 앞에서만 색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도 있고 능력도 있고 재력도 있지만 만일 그에게 마음의 빛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무효입니다. 모든 재능과 지혜가 효과를 나타내려면 비춰주는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은 생명이요, 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적극적으로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복음을 들음으로써 알게 하시고, 또한 보는 것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계명을 통해 순종하는 길을 주셨고, 또한 먼저 믿는 사람을 통해서 어떤 가능성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진실하면 살 수 없고, 양보하면 손해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진실하고도 살 길이 있고, 양보하고도 편안하며, 주일을 지키고도 얼마든지 사업을 잘 하는 모범을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선한 일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효과적인 교육은 모방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니 따라 하자는 마음이 생기도록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곧은 나무 틈에 자라는 풀은 곧게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 속에서 주위의 사람들도 따라서 곧게 자랄 수 있도록 먼저 곧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존재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어야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입이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체온이 되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무나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서 누구에게나 그 사랑을 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시해야 합니다. 참 선과 거룩이 무엇인가를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참되게 사는 길입니다. 이런 빛을 비춤으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주안에서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무나 엄청난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신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빛과 소금이 되어 귀한 역사를 나타내어야만 합니다. 깜깜할 때는 작은 빛이나 잠깐 동안 비추는 빛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비록 작은 빛이나마 빛의 역할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삶이 되어지길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 빛(6구절)
주의 얼굴 빛이 비추이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될 때 그 빛에 의해서 구원 받을 사람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빛이 되느냐?
영원한 빛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체(發光體)라고 합니다.
달은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태양을 하나님으로 비유하면 달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편 89:15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다니엘 9: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도입 이야기) 탈무드의 신비한 보석상
어느 마을에 매우 지혜롭고 정직한 보석상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정당한 가격으로 보석을
판매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낯선 여행자가 나타나 희귀한 큰 보석을 가지고 와서 "거액과 교환하여 이
보석을 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보석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감별할 수 없는 매우 높은 품질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직함을 선택하고, 보석의 진짜 가치를 여행자에게 알려주며 올바른 금액으로 거래하였습니다.
몇 년 후, 보석상은 그 당시의 여행자가 실제로 마을의 상태를 시험하기 위해 온 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는 아브라함의 정직함에 감동하여 마을 전체에 축복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정직성과 진실함의 중요성입니다.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정직한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과 지역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비록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느껴지더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도입 이야기) 촛불을 들고 있는 이유
어떤
현자가 항상 낮에도 등불을 들고 있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궁금해하며 왜 낮에도 등불을 들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현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진실과 성실함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밝은 빛 속에서도 그것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간과되기 쉬운 진실과 미덕을 발견하기 위해 항상 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진실의 탐구 : 진실이나 성실함 찾기 위해서는 주변을 잘 관찰하고 의식적으로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일상 속의 미덕 : 일상생활에서 자주 간과되기 쉬운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
지속적인 노력 :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을 계속하는 것의 중요성.
이 이야기는 단순한 물리적 빛 이상의 상징적인 "빛"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진리와 가치를 찾으려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빛(light)
우리말
신약성서에 ‘빛’으로 번역된 말은 고대 그리스어 포스(빛, 빛을 내는 물건)입니다.
동사 파이노(빛을 내다, 빛나다,
나타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마 4:16) 불을 쬐고 있었다(막 14:54) 등불을 달라고 해서(행
16:29) 등에 쓰였습니다.
포스는 요한복음 23번, 사도행전 10번 등 신약 전체에 73번 나옵니다.
구약에서 빛이 생겨라(창 1:3) 빛을 보게 하시고(욥 3:20) 등에 나오는 빛은 히브리어 ‘오르’입니다.
빛(오르. ’ôwr) אוֹר
스트롱번호 216
어원 / 21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2회 사용
관련 성경 / ☞빛(창1:3, 욥22:28, 사2:5), 광명(출10:23, 욥3:9, 미7:9), 새벽(삿16:2, 삼하17:22, 느 8:3), 아침(삼상25:22), 광선(삼하23:4), 태양(욥31:26), 번개빛(욥37:15, 37:3), 햇살(잠 4:18), 일광(사18:4), 대낮(암8:9). [동] 나타내다(습3:5), 밝다(삿19:26, 삼상25:36, 욥 28:11), 동트다(삼상14:36), 비추다(시4:6), 넘치다(암8:8).
영어
성경은 포스를 라이트(light· 빛, 밝은, 옅은, 불을 켜다)로 번역했습니다.
포스는 소유격 ‘포토스’ 형태로 영어
포토그래피(photography· 사진 촬영) 포토신테시스(photosynthesis· 광합성)
포토포비아(photophobia· 광선공포증) 텔레포토(telephoto· 망원사진 전송사진)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1~5, 새번역)
오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를 밝게 비추십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포스'는 그리스어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어로 "Phos"라는 용어는 영어로 "빛"으로 번역됩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이 개념이
다양한 구절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진실, 신성한 존재에 대한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어 단어 Phos : 개요
Phos(φως)는 빛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며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문화에서 빛은
종종 순수함, 진실, 깨달음을 상징했습니다.
성경에서 Phos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조명을 넘어 영적 통찰력과 신성한 본성을
특징짓기도 합니다.
Phos의 가장 주목할 만한 속성 중 하나는 신의 현존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함과 의로움을 나타내며, 신성한
빛과 영적 어둠의 대조를 강조합니다.
Phos의 성경적 사용은 우리가 믿음, 구원, 도덕적 질서에 대한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약성서의 포스
요한 복음
요한 복음은 Phos라는 단어가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곳입니다.
요한은 그의 책을 세상에 생명과 빛을 가져다주는 말씀에 대한 심오한 진술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우리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모든 인류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
어둠이 그것을 이기지 못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여기서 포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와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이며 인류의
길을 밝혀준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은유와 응용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포스는 종종 신자들을 묘사하는 데 은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14에서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마을은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맥락에서 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선을 증진시키는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 은유는 또한 행동에 대한 부름을 암시합니다.
빛을 숨길 수 없듯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그들의 믿음을 밝게 빛나게 하도록 격려받습니다.
영적 전쟁과 빛과 어둠
Phos는 영적 전쟁을 논의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6:12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육과 싸우는 것이 아니요…이
세상 어둠의 통치자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Phos)과 어둠의 병치는 선과 악 사이의 지속적인 싸움을 강조합니다.
이 맥락에서 포스는 신의 진실, 정의, 도덕적 질서를 상징하는 반면, 어둠은 신에 대한 죄, 무지, 반항을 상징합니다.
이 이중성은 신자들에게 일상 생활에서 빛을 받아들이고 어둠을 거부하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적 이해에서 빛의 중요성
인도하는 빛
빛은 인도하고 지시합니다.
시편 119:105에서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두운 길을 비추는 빛처럼 인도와 명확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통해 지혜와 이해를 추구하도록 격려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화 속의 포스의 상징성
비유는 또한 빛이라는 주제를 활용합니다.
열처녀의 비유(마태복음 25:1-13)에서, 현명한 처녀들은 등잔을 위한 기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와 준비를 상징합니다.
그들의 등잔은 Phos를 상징하는데, 이는 영적으로
경계하고 활동할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빛('포스') 즉 영적인 준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신자의 삶에서 빛과 영적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더욱 강조합니다.
Phos :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다
빛으로서의 신의 본성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본성을 요약합니다.
Phos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언급될 때, 그것은 변함없는 그의 의로움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빛으로서의 신의 특성은 그가 우리와 세상에 대한 진실을 밝혀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빛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신의 개입 없이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빛의 변형력
포스를 만나는 것은 변화의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나중에 바울로 알려짐)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눈부신 빛을 경험했습니다. 이 만남은 그를 기독교 박해자에서 열렬한 사도로 바꾸었습니다.
이 순간은 신성한 빛에 노출되면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음을 나타내며, 포스(Phos)가 나타내는 계시와 변형의 힘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의 역할은 Phos의 반사체로서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것
믿는 자들은 종종 어둡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빛을 비추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추종자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변화와 희망의 대리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랑, 친절, 진실을 보여주는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도록 격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에 미치는 빛의 영향
사회에서 신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입니다. 작은 불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말은 그들의 지역 사회에 희망과 진실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포스를 반영하라는 이러한 소명은 세상에 대한 책임감 있고 참여적인 태도를 장려하며, 그리스도인이 선과 정의를 증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결론
이 어플리케이션에는 XNUMXµm 및 XNUMXµm 파장에서 최대 XNUMXW의 평균 출력을 제공하는 그리스어 단어 Phos 성경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희망, 인도, 변형, 신의 신성한 본성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포괄합니다. 이 단어의 깊이를 이해하면 우리의 믿음이 풍부해지고, 영적 여정에서 빛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신성한 빛을 반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진실과 목적을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의 길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Q. Phos의 그리스어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Phos는 영어로 문자 그대로 "빛"으로 번역됩니다.
Q. 요한복음에서 Phos는 어떻게 사용되나요?
A. 요한복음에서 포스는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인도하는 은유적 빛을 모두 나타냅니다.
Q. 믿는 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A.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반영하고 사회에서 선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Q. 성경적 용어로 빛과 어둠의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나요?
A. 빛은 진실과 정의를 상징하는 반면, 어둠은 죄, 혼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상징합니다.
질문. 요한일서 1장 1절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줍니까?
A. 그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말하며, 그분의 순수하고 거룩한 본성을 강조하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Q. Phos는 영적 지도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포스는 시편 119:105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 명확성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들의 길을 밝혀줍니다.
Q. 열처녀의 우화에서 포스에 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A. 이 비유는 빛을 갖는 것으로 표현되는 영적 준비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임을 가르쳐 줍니다.
Q.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빛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A. 신성한 빛과의 만남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방향과 목적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Q. 신자들이 지역 사회에서 빛을 반사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A. 빛을 반사하는 것은 희망과 진실을 증진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격려합니다.
Q. 포스는 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합니까?
A. 포스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본성과 믿는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빛 (5457, 포스) φῶς
빛 light, 광채, 광휘 brilliance , brightness .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포스(Homer 이래)는 근본 의미로 `빛, 광채(광휘)'이며, 햇빛, 횃불, 불빛, 시각, 새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적으로는 생명의 빛, 즉 생명 자체를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빛나는 어떤 것으로 구원, 행복, 승리와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들이다.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자도 포스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진리와 그 지식, 선(행)을 의미할 수도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80회 나오며, 대부분 오르(빛)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포스는 신약성경에서 72회, 그 중에 공관복음서에 14회, 요한의 기록에 33회, 바울서신에 13회, 사도행전에 10회 사용되었다.
(a) 포스는 원래의 의미에서 `빛'으로 사용되었다. 밤에 없는(요 11:10) 햇빛(계 22:5), 등불의 빛(눅 8:16; 눅 11:33; 눅 15:8; 행 16:29; 계 18:23; 계 22:5), 그리고 불에서 나오는 따뜻한 빛(막 14:54; 눅 22;56)을 나타낸다.
(b) 포스는 신현현의 표시로 나타난다. 마17:7의 예수님의 변모시에 빛이 나타났다: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하나님의 출현에는 반드시 광채가 동반한다. 여기서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다른 곳에서는 승천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지시한다(행 9:3; 행 22:6; 행 22:9; 행 22;11; 행 26:13).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자의 도래를 표시한다(행 12:7).
(c) 포스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표현한다.
요일 1:5에서 빛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딤전 6:16에서 빛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의 영광이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고후 4:6에서 빛의 창조자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참조: 창1:3).
약 1:17에서 빛은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심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d) 특히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스로 묘사한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시다. 요한은 이미 그의 복음의 서언에서 빛과 생명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즉, 본래 어둠에 처한 인간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제받을 수 있다.
요 8:12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신다.
세례(침례) 요한은 빛을 증거하는자로 불리워졌으나 그와 빛 자체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요 1:6이하; 요 5:35이하).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세상 속으로 오게 되었다(요 1:9). 예수님은 그의 유명한 말들 중의 한 구절, 즉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는 말에서도 그가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요 8:12; 참조: 요 9:5; 요 12:46). ``그 빛'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빛과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그가 곧 `빛'이다'
(e) 제자들은 세상의 빛으로서, 빛을 세상에 가져다 주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요12:35; 엡 5:8; 빌 2:15), 제자들은 그들이 받은 거룩한 빛을 전해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비밀히 들은 것을 `광명한데서' 혹은 `빛 가운데서' 즉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한다(마 10:27; 참조: 눅 12:3). 그들은 그리스도의 선교사로서 그들 자신의 빛이 아니라 천국의 참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
제자들, 또는 신자들은 "빛의 자녀들"이 되었으며, 이제 "주 안에서 빛"이 된 것이다(엡5:8; 참조: 살전 5:5; 눅 16:8).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엡5:9).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빛을 따라 걸어야 하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을 세상에 대한 선교적 책임을, 그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빌 2:15; 참조: 행 13:47; 사 49:6)로 생활함으로 오직 만날 수 있는 어떤 책임을 짊어진 이상 더욱 더 그렇게 행해야 한다. 그렇게하여 그들이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요 12:36에 보면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훈계는 필요하다. 인간은 오로지 최초의 빛의 창조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변모될 수 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참조: 창 1: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어둠이 지나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일지라도(요일2:8), 빛으로 나아온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형제애에 관한 계명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된다(요일 2:8이하). 왜냐하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만이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다(요일 2:10). 진리를 행하는데 선행조건-딴 곳에서 처럼 여기서도 빛의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세상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서 행하고, 형제를 위해 살며,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통해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요일 1:6이하).
우리는 그를 통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게 되었다(골 1:12).
(f) 벧전2:9에서 포스는 구원을 가리킨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13:12에서 포스는 의를 가리킨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고후 11:14-고후 11:15; 요일 2:9, 요일 2:10도 참고하라.
마 5:14; 마 5:16; 요 5:35에서 포스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가리킨다.
(g) 계 18:23에서 바벨론은 멸망할 때 "결코 다시 등불 빛이 그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리라"는 경고를 받는다.
반면에 계 21:24에서 천국성은 빛의 세계가 된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그 곳에는 빛으로 비취시기 때문에 등불과 햇빛이 필요치 않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W. E. Vine; H.-C. Hahn; H. Conzelmann).
칼로스와 아가도스 그리고 토브와 라아(선악이 아닌 좋음과 나쁨)
좋은(아가도스) 나무가 나쁜(포네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칼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관계를 조금만 더 살펴봅니다.
좋은(아가도스) 나무에서 아름다운(칼로스)의 열매가
맺힙니다.
여기서 아가도스는 칼로스의 근원이고 기둥입니다.
아가도스의 토대에서 칼로스가 드러납니다.
비유컨대 우리는
아가도스(좋은) 나무여야하고 거기서 맺히는 열매는 칼로스(아름다운)한 열매여야 합니다.
여기서 살펴보면 칼로스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타당합니다.
칼로스는 같은 말이라도 말을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적합한 말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칼로스 한 말이고 또
칼로스 한 열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컬어
칼로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과 교리, 그리고 율법과 옳고 그름은 상대의 상태나 형편과 상관없이 오로지 지식 그 자체만을 주장하고 드러내려 합니다. 이는 도리어 카코스합니다. 즉 말은 맞는 말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분명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칼로스 하지 않고 카코스 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사람은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어른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비록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지각을 사용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여기서 지각이라 함은 성숙한 센스요, 지성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칼로스의 바탕에는 아가도스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따라서 아가도스가 ‘좋음’이라고 한다면, 칼로스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 성서에는 아가도스도 칼로스도 good으로 번역하고 있고 그 의미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 뉘앙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토브와 라아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는 헬라어 아가도스가 그 상응어라 했는데, 그것은 제가 잠시 착각해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가도스가 아니라 칼로스로 바로 잡습니다. 70인역은 토브를 아가도스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칼로스(Good)로 라아는 카코스(Bad)가 아니라 포네로스(evil)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토브 베라아’는 好惡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好惡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건 조금 적절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이란, 나의 성향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걸 말하기보다는 생명의 관점에서 그것이 생명에 좋으냐 아니면 생명에 해로우냐(나쁘냐)입니다. ‘좋음과 나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도리어 선악이라는 말보다 원의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문맥에 따라서 토브와 라아는 선악으로 볼 수도 있고, 좋음과 나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은 선악과로 보기보다는 ‘좋음과 나쁨의 열매’로 보는 것이 창세기1장의 토브를 ‘좋았더라’라는 흐름에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신의 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읽힐 수밖에는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볼 것이냐는 독자의 예민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만, 저는 후자로 보여집니다. 토브와 라아를 선악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문맥에 따라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만, 성서의 전체를 천천히 살펴보고 탐색해봐야 할 과제로 남깁니다.
동시에 이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게 성서의 말법, 곧 문법입니다. 좋음과 나쁨은 양식으로 삼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창세기의 대선언이라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 나무에서 맺힌 열매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그냥 좋으냐 나쁘냐를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면 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정신의 자양분을 삼는 먹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러냐는 것이지요. 처음 사람은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지식의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고 살더라는 게 에덴의 이야기며 인생의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한 술 더 떠 사람들은 이를 선악으로 환원해서 열매로 먹습니다. 정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삶의 지표와 목적으로 삼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사람을 대하며 선악판단하려 합니다. 선악에 경도되는 것이지요. 좋음과 나쁨을 통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을 왜 좋음과 나쁨의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것인지, 인생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거기서 발생합니다. 지금도 동산 중앙에는 명증하게 이 두 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이기적인 처음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정보의 확충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시키려는 권력욕구가 합해져서 선악의 지식을 열매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지식이기 때문이고, 바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다는 것이지요. 하여 그곳에서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시시비비가 끊임없습니다. 좋음과 나쁨을 아는 나무도 동산 중앙에 있는 까닭은 그 열매를 먹으라는 뜻이 아니요, 분별하라는 뜻일 따름입니다. 분별하는 것과 먹는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도리어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게 성서의 논법입니다. 물론 동산의 각종 나물의 실과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어버이들은 이 관계를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생명의 열매를 먹으면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맑아지고 힘을 얻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분별해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잘 자라게 하는 데 사용할 뿐, 그걸 양식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육신의 양식조차도 몸에 좋은 것과 몸에 해로운 것을 분별해서 해로운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하는 데 사용될 뿐입니다.
그의 양식은 어린아이의 생명이 자라면서 맺히는 열매를 그 정신과 영혼의 풍성한 양식으로 삼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손녀를 바라보며 기쁨을 얻는 걸 보면, 그들의 양식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주들에게서 맺히는 생명의 과실들을 양식으로 삼으며 기쁨을 얻습니다. 어머니의 육아에 대한 수많은 지식은 아이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 가를 분별하기 위한 지식이고 정보일 따름이지, 아이에게 어머니의 권력을 행사하고 그 지식으로 우쭐하거나 아이를 지배하고 통솔하기 위해 소위 모권, 어머니의 권세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머니에게 있는 그 모든 권력과 권세는 오로지 자녀의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데 있는 것이지, 권력을 향유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휘두르며 즐거워하라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권력과 권세는 바로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권이 그 원형이 아닐까 합니다. 부권은 사냥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서부터 형성된 것인데, 어느 세대나 경제력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고 돌보기 위한 사랑의 권세에서 지배의 권세로 타락한 것은 좋음과 나쁨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고자 하는 정신의 타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소유와 이기주의의 발동 때문일 것입니다.
권세의 의미가 바로 그 같은 것에 있다는 점을 처음 사람은 모릅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는 삶에서는 결국 사망의 열매를 맺힐 수밖에 없다는 게 성서의 진단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양식으로 삼는 이들에 의해 이 같은 것이 드러나고 진단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고 생명의 열매를 먹거리로 살으라는 게 성서의 한결같은 메시지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해설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간단히 하면 여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의 딸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계보에 속한 자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사의 타락으로 보려는 견해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서엔 두 계보 이야기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들의 정체성)이 가인의 후손들의 딸을 보고 아름다움(토보트)을 느꼈다는 것에서부터 아담이 겪었던 에덴의 혼돈이 재발(?)한 것은 아닐런지요.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성은 육체(바살, 싸르크)가 되었다는 지적이니 즉,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인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던 그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시 말해 생명의 관점에서 토브 혹은 칼로스 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의 눈으로 아름다워보였다는 것, 거기서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결합한 것이고 홍수심판의 근인과 원인이 된 것은 아닐런지요. 이 이야기는 침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문장에서 토브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해설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대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혼합되고 결국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에 편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이야기의 대목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사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1. 제자들
2. 그리스도인들
3. 교회들
빛이 되라
1.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사람들
어떻게 빛이 되는가?
1. 착한 행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칼로스)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빛(the light) 5457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5457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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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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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자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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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반적인 용법] 마 17:2, 요 11:10, 고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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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환유법] 빛을 내는 물건, 불, 횃불, 초롱, 막14:54, 눅22:56, 행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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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빛의 조명을 받아 밝은 것] 엡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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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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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메시아의 구원, 복음따위를 빛으로 표현함, 마4:16, 행26:18, 엡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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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이런 종류의 빛을 지닌 사람, 마5:14, 행13:47, 롬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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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빛(마4:16, 눅8:16, 딤전6:16), 불(막14: 54), 불빛(눅22:56), 등불(요5:35, 행16:29), 광채 (행12:7), 광명(고후11:14).
착한 행실(good deeds) 2570. 2041
착한(2570)
κα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570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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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름다운, 눅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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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좋은 유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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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흠이 없는, 좋은, 귀한, 마13:48, 12:33, 눅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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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도덕적으로 선한, 고상한, 칭찬할 만한, 마5:16, 막14:6, 요10:32, 딤전5:10, 히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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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잡을 것 없는, 훌륭한, 눅6:38, 요10:11,14, 딤전6:19, 딤후1:14, 2:3, 히6:5, 약2:7, 벧전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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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ἐστιν과 결합될 경우] ~은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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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분 좋다, 바람직하다, 유익하다, 마17:4, 18:8,9, 막9:5, 눅9:33, 고전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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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도덕적으로] 선하다, 고후8:21, 히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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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좋은(마3:10, 막4:8, 요2:10), 아름다운(마7:19), 착한(마5:16), 마땅한(마15:26), 나은 (마18:8,9, 막9:45), 선한(요10:11, 고후8:21, 딤전1:8), 옳은(고전5:6), 잘하는(딤전3:13), 유익을 얻는(히13:9).
행실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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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행위,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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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식의 반대 개념] 히4:3,4,10, [말의 반대 개념] 눅24:19, 행7:22, ἐν λό γῳ ἤ ἐν ἔ.: 말과 행동으로, 롬15:18, 고후10:11, 골3:17, 살후2:17, 딛1:16, 요일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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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표시, 실제적인 증거, 롬2:15, 살전1:3, 살후1:11, 엡4:12, 약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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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한 일,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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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나님과 예수의 행위들[특히 기적에 대하여] 마11:2, 요5:20,36, 7:3, 21, 10:25,37이하, 14:10,11,12, 15: 24, 행13:41, 계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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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랑의 행위에 대하여, 요3:20이하, 7:7, 약3:13, 요일3:12, 계2:2,19, κατὰ τὰ ἔργα: 행위에 따라서, 롬2: 6, 딤후4:14, 계22:12. ἔ. ἀγαθόν, 롬2:7, 13:3, 고후9:8, 빌1:6, 골1:10. πλήρης ἔργων ἀγα- θῶν: 선행에 풍부한, 행9:36. τὰ ἑ. τοῦ Ἀβραάμ: 아브라함과 같은 행위, 요8:39. ἕργα πονηρά: 악한 행위, 요3:19, 7:7, 골1:21, 요일3:12, 요이 1:11. τὰ ἔ. τοῦ πατρὸς ὑμῶν: 너희 아버지와 같은 행위, 요8:41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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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일, 직업, 임무, 막13:34, 행14:26, 고전15:58, 16:10, 빌2:30, 사도들의 임무와 일에 대하여, 행13:2, 15:38, 빌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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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수동의 의미로] 공적, 작품, 롬14:20, 고전3:13-15, 9:1.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하여, 히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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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물건, 사건, 행5:38, 딤전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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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행실(마5:16, 딤전5:10, 벧후2:8), 행위(마11:2, 요3:19, 롬2:15), 일(마26:10, 눅24:19, 롬13:12), 사무(막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1:4), 지음(히1:10), 행함(롬2:6).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양파 한 뿌리
인간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 가 선과 악을 파헤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라고 평가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직시한 것은 선과 악으로 갈라진 인간 내면의 비극성, 인간의 고통, 유한성, 인류 보편의 운명인 죽음이었다. 그의 작품들의 공통된 화두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지옥
그에게 있어서 지옥은 특정 장소가 아닌 인간이 처한 상태였다. 그는 28살에 반체제 활동 혐의로 시베리아에 있는 악의 전시장인 감옥에서 10년간 유배형에 쳐해 졌다. 거기에는 강간범, 살인범, 사기꾼 등등 러시아 전역의 최악의 범죄자들 수배된 곳이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는 단순히 견뎌낸 것 만이 아닌 사람들을 깊이 관찰하며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인간 내면의 악을 발견하고 사색을 하고 기록하였고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우리말로 「」
러시아 원어로는 「죽어있는 집 dead house」을 기록했다. 그곳은
그렇다면 무엇이 그 시베리아의 감옥을 죽음의 집, 죽어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욕구, 동물적인 본능, 욕망이었다. 인간이 본능적인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모여 있는 공간 자체가 지옥이다.
죄수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양심, 성찰 없이 욕구만을 추구했다. 죽음의 집은 마치 단테의 신곡의 어두운 숲에서 만난 표범, 사자, 암늑대들이 있는 추악한 동물의 왕국이었다.
두 번째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것은 증오이다. 죄수들 사이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도스토옙스키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나를 죽일 듯이 증오했다. 나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기회만 있으면 나를 산 채로 잡아먹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죄수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죄수들의 악취, 음담패설, 욕설, 범죄의 추억들이 귀족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이 상호적인 증오에 대해 사색을 통해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상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할지 라도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자신이 이들을 증오하는 한, 인간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이후로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평생을 노력한다.
증오,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포함한 작품들의 화두로 승화시켰다.
양파 한 뿌리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양파 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는 할머니를 악마들이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어떤 특정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진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의미는 이야기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할머니를 가엾게 여긴 수호천사가 할머니가 했던 단 하나의 선행,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것을 기억해냈다.
-> 수호천사가 할머니를 도와준 이유는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이었다.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한 번도 선행을 하지 않은 게 죄악이라면) 지옥불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여기서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간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고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만 존재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 그녀에게 내밀고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게 했고 양파 한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천국으로 가게 하라고 했다.
->양파 한 뿌리는 천국행 보증수표가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과 신의 은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다.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는 이제 할머니의 행동, 결단으로 결정된다.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올라가는데 그때 다른 죄인들이 할머니를 붙잡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두 가지 실수를 한다. 양파가 은총이라는 것을 모르고 물질로 보았다. 애초에 양파가 물질이라면 할머니 한 사람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양파에 작동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두 번째 실수는 할머니의 계산적인 마음이었다. 양파 한 뿌리의 선행으로 신과 딜을 해서 싼값으로 천국행 티켓, 은총을 샀다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은총을 팔지 않는다. 신은 누구와 딜을 하지 않는다. 신은 은총을 부여할 뿐이다.
할머니는 말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나를 구해주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해주는 게 아니야.'
->할머니의 가장 심오한 죄악은 나와 너희들의 구분, 선을 긋는 단절이다. 나만 선택받았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단절, 교만을 통해 할머니의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죄악은 단절이다. 단절은 무서운 것이다. 강도 살인 등등 다른 모든 죄들의 원인은 단절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구원을 나눠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할머니의 단절된 행동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증오가 있다. 여기에 이야기 초반에 할머니가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타인과 단절되어 있었고 교만했고 이기적이었고 타인을 증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할머니를 지옥으로 가게 만든 이유였다.
그렇다면 단절의 대안은 무엇인가? 혼자 있는 것이 단절이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공동체일까? 혼자 있는 것이 고립, 공허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유대, 연대일까? 죽음의 집에서 여럿이 함께 있는 고통을 견뎌냈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에 있어서 '하나'와 '여럿'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전체도 반드시 대립되는 것도 아니다. 고립은 나쁜 것이고 여럿이 있으면 좋다 이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이라는 것을 하나로 엮어주는 어떤 것이 빠져있다면 하나가 있던 백 명이 있던 백만 명이 있던 어떤 집단이건 단체생활을 하던 협동생활을 하던 그것은 언제라도 지옥이 될 수 있다.
그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양파가 끊어졌고 모두가 다 지옥 불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공멸에 대한 생생한 묘사. 매달린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고 할머니는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잘못한 것을 보여준다. 매달린 사람들도 이건 내양파야 나만 구원받을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욕구 충족에 대한 열의, 증오로 가득 찾던 지옥의 사람들이었다. 개별적인 개인의 욕망 충족이 지옥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 전체가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흔히 한 사람을 이기주의라고 얘기 하지만 두 사람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었을 때 가족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집단도 집단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국가이기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향했던 것은 이런 식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언제나 집산주의를 반대했다. 타 집단에 대한 증오, 배제 토대로 만들어지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이것들은 절대 하나(혼자)에 대한 대안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나는 문득 마태복음 18장 19~20절 구절을 떠올렸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은 특정한 날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 이상 사람들(커뮤니티) 안에 사랑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거기에는 주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가르침 중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민족, 계급, 인종 혹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 안에 사랑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사랑론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역시 단절을 멀리하고 이웃과의 사랑(예수의 이름 안에서)을 해라라고 말한 것을 되새기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증오, 이기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즉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사랑이다. 나를 완전히 버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 나를 버리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 잃어버릴 뻔한 내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는 악뿐 아니라 신의 모습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 사랑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완덕(完德) 완전한 덕행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실천적 사랑은 결국 '나와 너'라는 한 개념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사람은 '나와 너'이고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진짜 사랑, 실천적 사랑이 존재한다면 나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고 내 속에 비친 너를 볼 수 있다. 이 모습들은 결점으로 가득 차 있고 죄도 많이 저질렀을 것이지만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용서한다는 것이다. 겸손하게 용서할 수 있을 때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것은 이해타산, 집단 이기주의 아니면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배제로 만들어진 '우리'의 개념 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로지 이때의 우리 나와 너 사이의 이 우리만이 이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힘이 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 당신이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속한 집단 존재하지 않게 된다. Dead House 죽음의 집, 죽어있는 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존재하게 만들고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줄 수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전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ἀγαθ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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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
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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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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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선(마5:45, 롬2:7), 물건(눅12:18,19), 선행(행9:36), 양심(행23:1). [형] 선한(마12:34, 19:16, 눅6:45, 골1:10), 좋은(마7:11, 눅1:53, 요7:12), 착한(마25:21, 고후9:8).
팔복으로 시작한 산상수훈은 13절에서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말씀하시고 난 후,
이제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빛은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기에,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이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제 14절 이하의 말씀을 중심으로 두
번째 비유로 드신 빛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자.
먼저 14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이 스스로
“빛”(φῶς)을 발하는 발광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빛 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그의 신분에 맞게 빛을
받아 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된 자들로,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사는 그의
백성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에서 이들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τὸν πατέρα ‘ὑμῶν’ τὸ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내는 자들인데, 그의 실생활과 말로써
드러내는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빛은 결코 감춰질 수 없다.
아니 감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4절 후반 절에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결코 감춰질 수가 없고, 또한 1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불을 켜면 등경 위에 두어 빛을 발하게 하여 집안 모든 사람에게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너희는”(Ὑμεῖς)이라고 할 때, 이는 한 개인을 말하는 동시에 교회를 말함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사
2:2; 갈 4:26; 히 12:22).
그래서 주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πόλις...ἐπάνω ὄρους
κειμένη)는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개인 또는 무리는 그의 삶이건 말이건
사실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빛을 발하는 사명자”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래서 16절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οὕτως λαμψάτω τὸ φῶς ὑμῶν ἔμπροσθεν τῶν ἀνθρώπων)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빛을 비추라고 하신 것인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빛이기에 우리를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답을 16절에서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한다.
그들이(ἴδωσιν)이 너희들의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τὸν πατέρα ‘ὑμῶν’) 그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나 말이, 항상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말이 복음 전하는 방편이 되어야 함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거짓된 행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막히고 말 것이며, 나아가 우리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리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산위에 있는 동네로서, 빛의 사명을 잘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 우리의 잘못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도록...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하는 이 두 비유는 앞서 비유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수차에 걸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쌍둥이 비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동시에 생각게 되고,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는 비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입장에서 주시는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과 믿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이방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인, 마이노리티(minority)입니다. 이러한 소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성의 문제, 그리고 책임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소금이다" "빛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극히 짧은 "소금이다"하는 이 간단한 말씀 속에서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어떤 것인가 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심으로 우리에게는 또한 이 세상을 향한 빛의 책임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빛이라 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로 생각을 전개해 보면 빛에는 햇빛, 달빛, 별빛 등의 본래 주어진 자연적인 빛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빛을 눈으로 보며 그 빛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어두움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라 하며, 그 빛 뒤에 있는 그늘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공적인 빛입니다. 그것은 바로 촛불이나 등잔불은 물론 전등 빛이며, 요즈음에 와서는 놀라우리만큼 발전된 여러 가지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적인 빛으로 밤을 낮처럼 밝히며 불편 없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오늘 우리가 생각할 빛 곧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만이 빛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신령한 빛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는 빛은 보이지 않는 빛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그 영적인 빛을 생각할 때마다 이 보이는 빛을 보면서 거기로부터 그 보이지 않는 신령한 빛의 뜻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깜깜한 데를 갔다가 불빛 하나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그렇게도 반갑고, 이 빛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작은 빛 한 줄기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빛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캄캄한 흑암의 재앙이 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에 보면 흑암이 임하는 사흘 동안 애굽인의 영내에는 빛이 전혀 없이 낮이 밤처럼 캄캄하게 되었으며 사람이 서로 볼 수도 없는 가운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어나 보았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일어나서는 무엇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누워서 뭉개는 수 밖에요. 이처럼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알고 보면 빛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영적인 빛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빛을 보면서, 이것을 상징으로 하여 영적인 빛을 생각하라는 것으로 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바로 받은 사람은 크고 작은 어떤 빛을 보든지 간에 "너희는 빛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영적인 빛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자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빛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빛이라는 것은 양심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며, 선의의 빛이요, 혹은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씀! 바로 이것이 빛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없이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반대가 어두움일진대 이 어두움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이 어두움은 곧 무지와 무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손치더라도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힘이 있고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어두우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힘센 장수가 칼을 뽑았다 하더라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그만 머리털이 밀리우고 힘이 빠진 후 블레셋 사람에 의해 눈이 뽑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삿 16:21). 그러다가
나중에는 머리털이 자라나면서 다시 힘이 생겨지는 모습이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는 힘이야 있든지 없든지 간에 삼손이
아무리 장사라 하더라도 그에게 눈이 없다면 그 힘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더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어두움은 무능이요, 모든 능력은 빛에 근거합니다. 또한 이 어두움은 혼돈을 말합니다. 어두우면 무질서해져서 마치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는 세상이 너무 어둡다며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녔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종교적인 암흑은 우상이요,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정초 때 보는 토정비결에서부터 사주, 궁합, 신수 등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에 지금도 매여들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아직도 우리 나라에는 정식으로 등록하고 세금을 내는 무당과 점쟁이만도 자그마치 16만 8천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외에도 얼마든지 많은 무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인데 곧 그만큼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소위 지성인이라는 양반들이 이름 있다는 점쟁이들에게 혹해서는 많은 복채를 놓고 그 앞에다 운명을 맡긴답니다. 심지어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도 그 여부를 점쟁이에게 물어 보고, 사업을 하면서도 무꾸리를 한다니 한 마디로 말해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너무도 어두워요, 무지하기 때문에 총명이 흐려졌어요, 그 때문에 이 엄청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교 1학년 학생 중 40%가 부적을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지만 여기에는 박사도 대학 졸업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처지이기에 저 유명하다는 이화여대 앞에 점쟁이가 제일 많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두움에서 오는 무지와 혼돈이 아무 것이나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허무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이 어두워질 때면 "그만 죽고 싶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어디 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이 목숨이더냐 말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해도 좋지만 죽고 싶다는 말만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이라도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푹 쉬면서 "제가 그만 죽고 싶어요"라고 했다면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이전에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 앞에야 어떻게 그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죽을 때 죽더라도 죽겠다는 말만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때로는 한숨을 쉴 수도 있고, 절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슬픔이 있다고 하여 쉽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은 철저히 삼가 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허무주의의 소산입니다. 저주와 슬픔, 미움과 불화, 죄와 공포, 이 모두가 다 어두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두우면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우면 허무해지며 마지막에는 정말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눈이 있어 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밝은 눈을 가졌어도 빛이 없으면 못 본다는 점입니다. 내 이 눈이 눈의 구실을 하려면은 빛이 있어야 하고 내 힘이 유효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빛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힘이 있다고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귀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된 용기는 만용일 뿐 결코 용기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용기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의"라고 하는 빛이 있을 때에, 그 가운데서 활동되어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를 못하고 의와는 상관이 없는 용기라면 그것은 깡패의 용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만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마음의 빛, 보이지 않는 이 영적인 빛이 없고서는 지혜도, 능력도, 돈도, 힘도, 지식도, 그 모두가 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빛의 역할이란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보면, 우리의 "빛됨"이라는 것은 빛의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이 빛이시오, 예수가 빛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빛이심을 여러 곳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요 1:4, 9, 3:19, 8:12, 9:5, 12:35, 36) 영어 성경에는 아이엠 더 라잇(I am the light)으로 빛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 빛, 곧 하나밖에 없는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관사를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의 강조를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그 빛이다"라며 유일한 빛이심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진실로 주님은 생명의 빛이시오, 빛 자체가 되십니다.
이 빛은 동시에 심판적 의미가 있습니다. 어떠한 곳에서든 빛이 비취는 곳에서는 더럽고 추한 잘못의 전부가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에서 멀리 떨어져서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살고 있지만 빛에 가까이 가서 보면 부끄럽고 추한 그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도덕적인 암흑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음을 얻었습니다. 종교적인 미신과 우매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인류 문화사를 한번 보세요. 문화사가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것은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밝아지고 인간 역사가 밝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미신이 물러갔고 자연과학이 발전되었습니다. 적어도 문화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는 않아도 오늘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아도 아직 기독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나라, 또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나라들의 미개함은 20세기의 오늘에도 놀라울 정도가 아닙니까? 미개함의 뿌리는 종교 문제에 있습니다. 종교가 잘못 되면 도덕이 잘못 되고, 도덕이 잘못 되면 가치관이 잘못 되며, 가치관이 잘못 되면 사회생활 전체가 다 잘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도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는 한 집에 평균 13명의 어린이가 있고 15명이 넘는 가정도 많다고 합니다. 한번은 우리 교인 한 분이 밤에 차를 몰다가 후진을 하던 중 그만 실수를 하여 어린이 한 명을 치어 숨지게 했답니다. 이에 너무도 죄송해서 어떻게라도 보상을 할 마음으로 그 어머니를 찾아가서는 보상을 해드리겠다고 하니까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여기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애 하나 없어도 괜찮으니 그냥 가세요"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 그들의 종교가 이렇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무지하게 되는대로 낳고서는 죽으면 죽는 대로 괜찮고, 굶으면 굶는 대로 어쩔 수 없는 우매함이 다름 아닌 종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주는 우매함이란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얼마나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 많았습니까? 이러한 인간 역사에 있어서 예수는 세상의 빛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심지어는 과학적으로도 예수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저 태양은 적어도 지구를 중심으로한 태양계에 있어서는 빛의 근원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달빛의 빛은 자신의 빛이 아닙니다. 오로지 태양의 빛을 받아 그것을 반사할 뿐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그 달빛만 가지고도 길을 갈 수 있을 만큼 제법 밝습니다마는 달은 결코 자체의 빛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빛"이라는 것도 자기의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마치 만월과 같이 정면으로 충분한 빛을 받아야만 반사의 빛도 충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은 햇빛을 받는 만큼만 우리에게 되비춰 줍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받은 보름달도 있고, 초생달, 반달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빛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정면으로 받는 만남의 관계를 가지며 사는 사람은 그 생활 전체가 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어떤 이는 50%만 받거나 극히 부분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초생달이나 반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조금밖에는 예수 믿는 냄새가 나지를 않아요. 빛이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교회에 왔을 대는 빛을 받은 것 같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느 사이에 다 꺼지고 말아요. 그러자니 천사가 되었다가 악마가 되었다가 빛이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것도 오래 사귀어야 합니다. 마치 마술처럼 하루아침에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로써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난 시내산의 40일 이후에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입니다. 하나님과 40일 간이나 직접으로 깊게 사귄 모세는 그 얼굴에 광채가 너무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조차 두려워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만나는 깊은 사귐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사귄다는 말은 만난다는 것이요, 사랑한다는 것이요, 계속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항상 자기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앞에 자기를 보이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이고 마음을 보이고 얼굴을 보입니다. 그리함으로 그 빛을 받게 되고 계속 사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직장 그 어디에든지 예수의 냄새가 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빛은 그늘이 있게 합니다. 이쪽이 밝으면 저쪽은 어둡습니다. 내가 태양을 향해 섰을 때는 그늘이 없는 밝음뿐입니다 마는, 같은 자리에서라도 빛을 등지고 돌아서기만 하면 그늘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바르게 서서 사는 사람은 어두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바로 내 등뒤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지만 그 그늘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반대로 빛은 못 보고 어두움만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은 곧장 하는 말이 "망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는 사람에 의해서 세상이 흥하고 망했더냐는 말씀입니다. 인간 역사의 흥망 성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그런 걱정은 할 것이 아닙니다. 빛을 향해서 사는 사람은 그늘을 보지 못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정인 빛 앞에는 그늘진 곳이 없어요. 아무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어요. 그 때문에 다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수술실의 불빛처럼 사실 그대로, 깨끗하게 사방에 일시에 비춰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절대로 숨기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일은 노출이 잘되어 하찮은 조그만 일인데도 당장 소문이 나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밝음 가운데 있다 보니 조그만 것인데도 지체없이 확 드러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가운데서는 큰 죄악이 있어도 보이지를 않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이고 좀 잘못했다며 시비를 걸어오거든 아예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를 마십시오. 그것은 그만큼 밝다는 뜻이요. 기대도 컸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더욱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말이라는 것은 곡식 같은 것의 양을 헤아리기 위한 하나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등불을 켜서는 이 말 아래에다 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전구를 높이 달듯이 등불은 높이 등경 위에 두어서 밝히는 것이지 말로 덮어 두는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을 마가 복음 4장 21절에서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평상 아래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 평상은 요즈음 말로 침대를 두고 하는 말
D똕TXT 입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켜서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등불이라면 당연히 등경 위에 두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희들도 그와 같이 높이 들려져서 밝히는 빛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말과 평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정확한 기계식 저울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양과 부피를 재는데 있어서 마치 저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 말은 사고 팔며 장사하는 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도구이며 따라서 장사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서에 보면 말과 그리고 저울추를 속이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속에 장삿속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장사하는 것이야 어디까지나 돈을 벌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익만을 추구하며 돈을 벌고자만 하다가는 그 소중한 빛을 가리운단 말입니다. 언제나 돈벌 생각이 앞서고 보면 공의를 무너뜨리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빛됨을 묻어버리게 되고 덮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더 버느냐?"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8절 말씀에 보면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 의가 먼저인데 그와는 반대로 이기주의와 실리주의에 급급한 나머지 이득을 앞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평상 아래"란 것인데, 이 평상, 곧 침대는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안일주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일해야 되겠는데 자꾸만 쉬고 싶고, 뿐만 아니라 매사를 쉽게 처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는 한탕주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 일도 아주 쉽게 별로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수고할 것도 없이 적당히 계산해서 하려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
D똕TXT年나님의 일을 땀흘림과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어떻게 쉽게만 하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때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이라면 몸된 교회의 일을 위해서는 때때로 크나큰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고 안일주의에서 안주하려고만 할 때에 교회의 빛을 가리우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빛이 된다는 것은 "희생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희생과 수고가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생없는 안일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빛이 가리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다름 아닌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침대 아래 두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는 말 아래나 침대 아래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높이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빛을 우선적으로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빛과 소금을 비교해 보십시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실체가 내적으로 용해되고 침투되어 일으키는 내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빛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위에서 내려 아래로 비춥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소금이 개인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면 빛은 사회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의 기능은 똑같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사명이 그만큼 크고 중요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죄인들이 부끄러워할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빛의 사람인 그리스도인 앞에서 감히 협잡을 한다거나 하는 불의한 일은 할 수 없어야 합니다. 찬란히 밝은 빛 앞에서는 어두움이 용납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두움이 짙기 때문에 빛이 약한 것이 아니라, 빛이 없고 빛이 약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어두움이 설 자리가 없게 하는 그러한 빛의 생활을 하D똕TXT途라는 말씀이십니다. 나아가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 빛 안에 있음으로 지혜가 지혜되고 능력이 능력으로 그 힘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에 가서 보면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모든 것의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금이나 빛은 말이 없습니다. 이들 둘은 적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소금은 조용히 녹아 없어지고 빛은 계속 타오르며 비춰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곧 이러한 것입니다. 무엇을 한답시고 나팔을 불며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며 크고 작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묵묵한 행함의 행동만이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숨기어지지 않는답니다. 왜냐 하면 이는 산 위에 있는 동네도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타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일은 알리고 또 알리고 게다가 문서화까지 합니다마는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소문내어 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뒤늦게 알려져서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있었느냐?"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참으로 조용하여야 합니다. 빛처럼 말이 없는 행함! 바로 그것이 진정한 선행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희생이 있고 동시에 그로 인한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구원에 이르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으며, 빛과 사귀는 가운데 충분한 빛이 되어 어디를 향해서나 밝게 비추이는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빛을 말하는 그 무엇을 볼 때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이 어두운 세대의 빛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가도스(ἀ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
'착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 단어의 대표적인 두 가지는 '아가도스'와 '칼로스' 입니다.
서로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넓고 깊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0:10
나는 선한(칼로스)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아가도스)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두 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라고 합니다.
칼로스는 선과 악 구조의 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 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금과 빛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절벽에 평소에 나를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이 술에 취하여 곧 떨어질 것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나를 헐뜯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끌어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는 것을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처럼 잘 됐다! 이 참에 떨어져 죽으면 좋겠다고 하고 지나갈 확율이 높다고 합니다.
이웃 집의 소가 늪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 집이 평소에 친절하고 늘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소라면 당장 늪에서 꺼내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사람을 괴롭히고 없는 것도 마치 있는 것처럼 지어내는 말을 하던 이웃의 소라면 구태여 힘들게 그 소를 구해 줄 이유가 없다며 지나쳐버릴 것입니다.
착한 행실이란 이런 때에도 그 소를 늪에서 꺼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칼로스와 아가토스
-
Kalos 신체적, 미학적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나 선함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장면이나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을 칼로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인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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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토스반면에 는 선함이나 미덕을 나타내지만 종종 행동 및 도덕적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가토스가 윤리적 성격을 포괄하는 반면, 유게네스는 삶의 선택을 통해 형성되는 상속된 고귀함과 도덕적 나침반에 중점을 둡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경 본문에서 칭찬받는 인물의 자질이 다면적이며, 유진은 단순한 미학이나 좋은 행동을 넘어 고귀함을 독특하게 포착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선함>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아가도스-ά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입니다.
두
단어가 혼용하여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아가도스-άγαθός>는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선>의 개념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올바른, 유익한”의 뜻입니다.
<칼로스-καλός>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합니다.
<아가도스-άγαθός>가 윤리, 도덕적인 <선>을 의미한다면,
<칼로스-καλός>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아름다움은 <아가도스>와 <칼로스>에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내면의 깊은
아름다움과 성품, 인격이 흘러 넘칩니다.
<아가도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마음을 드리는 인생이
<칼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영혼은 <아가도스-ά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착한 그리스도인(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
친구들이
“우리 아빠도 너의 아빠 같으면 좋겠다."라고 할 땐, 잠깐 우쭐했다가도 금세 분노가 북받쳐 오릅니다.
어딜 가나 ‘사람
좋다’는 평을 듣는 아빠는,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추울까 봐 이불을 가져다주는 가하면, 보증 서 준 지인이 집을 날렸을 때도
“사정이 있겠지”하면서 그를 두둔하기 바빴습니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쏟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빠 같은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저는 돈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전적인 도움을
청하는 손길은 가차 없이 거절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눈물 흘리는 엄마의 모습이 깊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가까운 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저축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인은 보란 듯이 잠수를 탔습니다.
주변에서는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 공부 한 셈 치라"라고 위로했으나, 제 속에서는 천불이 났습니다.
‘원망해봐야 소용없다’며 너털웃음 짓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 속없는 모습이 어쩌면 ‘슬픔을 밀어낼 유일한 방법’이었을까요?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휴대전화 1번을 꾹
눌렀습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이게 얼마 만이야?”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용한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박다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착한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 손해를 보더라도 착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칼로스(καλός)와 '아가도스(αγαθός)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에서 8복의 말씀 다음에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8복을 말씀하신 후에 갑자기 빛과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8복의 말씀이 복된 자들의 심령이 상태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빛과 소금의 비유는 복된 자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빛을 비추는 삶의 태도를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①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태도는 '착한 행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냐는 질문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②눅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착하게 살라고 하시면서 정작 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착하다는 말과 선하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는 순우리말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어입니다.
즉 '착할 선'입니다.
마태복음 5:16
16이와 같이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일들을 보고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9
19⁕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를 왜 선하다고 하시나요?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16절에서는 '착한'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선한'이라고 번역했을까요?
그 이유는 원어
성경에는 서로 다른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착한'이라는 말에는 '칼로스(καλός)'를, '선한'이라는 말에는
'아가도스(αγαθός)'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과 영어 성경 모두 칼로스와 아가도스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는 단어가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착한 행실/good deed'로
행위의 개념을 넣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원어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헬라어 원어 '칼로스'와
'아가도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오늘 설교의 주제인 '착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로스'와
'아가도스' 모두 선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로스'가 윤리, 도덕적인 선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아가도스'는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품, 즉 선함(goodness)과 친절(kindness)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선(칼로스)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아가도스)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삶이 아니라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여 비추듯이 빛 되신 주님을 본받아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선(칼로스)은 주로 '좋은 열매'의 의미로 나타납니다.
③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④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아름다운 열매', 즉 인간의 착한 모습과 태도는 '좋은 씨',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씨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씨가 싹을 틔워 열매를 맺도록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와 교회에 속한 저와 여러분들이 할 일인 것입니다(⑤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것이 영적인 원리에서도 동일합니다.
⑥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동안 무엇을 심으셨습니까? 육신을 위해 심으신 분은 당연히 육신을 통해 거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위해 심지 않으면 아무리 육신의 영광을 얻는다 하더라도 영의 영광은 없는 것입니다. 영이 잘 되면 육이 잘 되지만, 육이 잘 된다고 영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육의 일과 영의 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⑦롬 8:5-7,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의 영이 잘 됨으로써 여러분의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기를 원합니다(⑧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다시
예화로 돌아가겠습니다.
예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좋은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엄마나 딸의 입장에서는 나쁜 아빠이지만, 그에게 도움을
받았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소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착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속의 아버지는 착한 사람일 수도 나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가 그의 삶에서 무엇을 심었냐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가장으로서 심어야 할 것을 심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생계와 행복을
위해 심어야 하는데, 자신의 체면을 앞세웠습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착한 사람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것은 쉽게 말하면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버리는
증상입니다.
꼭 말을 잘 듣는다는 생각보다도 '착한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으로는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고분고분해서 내면과 외면의 모순이 일어나는 경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경우 아이는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제어하게 되는 데, 이러한 아이는 자라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사소한 부도덕한 행동까지 지나치게 간섭하게 되는데, 심한 경우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본인은 '그 나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증후군은 동양권 문화에서 잘 나타나는 데 그 이유는 유교의 영향입니다. 가부장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과 효도를 강조하다 보니 착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가정과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자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목회자의 자녀는 대부분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해 나가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잘못된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는 제가 착하다고 착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착한 사람 증후군'의 하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좋은 부모와 화목한 가정,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났기에 착한 아이
증후군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니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세계, 한국 위인 전집을 두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저의 내면에
각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하버드 대 마이크 샌델 교수는 아이들을 양육할 때 위인전을 읽히지 말고 누구를 닮으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복하고 부모가 잘 양육하며, 유대인 교육처럼 영재 교육을 받은 자들(빌 게이츠, 마크 저크버그와
같은 자들)은 권력과 부를 얻어도 언제나 공정한데, 그 이유는 저들은 위인전에서 그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부모와 가정을 통해서
배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다른 환경에서 혼자 독버섯처럼 자란 아이는 자라서 권력을 잡으면 독주하게 되는데, 그래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자라온 환경이 유복하지도, 영재도 아니라면 주어진 삶의 한계 안에서 그냥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⑨잠 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받는 여자가 시집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제가 어려서 위인전을 읽지 않고 성경을 읽었더라면 착한 사람 증후군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늦게나마 진정한 칼로스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바로는 교회 안에도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목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는 '바리새인 증후군'이 '착한 사람 증후군'으로 변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정의하기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착한사람 증후군은 사회 가운데 나를 보지 못하고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하면서도 마치 위인전을 읽듯이
자신의 칼로스를 대입하기에 바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의 주인공뿐 아니라 그 주인공의 관계와 그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 나아가 하나님의 뜻(아가도스)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한 것처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이듯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나의 삶의 영역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즉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먼저 생각하는 가운데 나의 칼로스와의 '갭 gap'을 고민해야 합니다.
⑩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 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더 이상 착한 사람 증후군에서 벗어나십시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리새인 증후군에서 벗어나십시오. 믿음이 있는 척, 착한 척하면서 힘들게 살지 마십시오. 어줍잖은 의로운 행세를 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착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게 믿음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는 아버지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따르는 것이 자식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의 아가도스를 쫓지 않는 자가 어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쫒는 자는 굳이 자신의 의를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신실한 한 사람의 당연한 행동이 믿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연함이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 즉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닮은 착한 행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당연함'이 있습니까?
1. 아가도스 / 선함, 선하다.
희랍어로 형용사 αγαθος아가도스로 읽힙니다. ‘좋은’, ‘선한’, 정도의 뜻이 가장 자주 사용되며, 친절한, 충실한, 덕이 있는, 정도의 뜻이 발전된 뜻으로 읽힙니다.
αγαθος아가도스란 단어를 중심으로 파생된 유사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사 αγαθωσυνη아가도쉬네는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유래되어 선함, 착함, 올바름이란 뜻을 갖습니다. 또한 αγαθοποιεω아가도포이에오란 동사는 αγαθος아가도스와 동사 ποιεω포이에오의 합성어로 사용되어 선을 행하다, 유익을 끼치다. 올바르게 잘하다 정도의 뜻을 갖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αγαθος아가도스는 선하다, 선함 정도의 뜻을 가지며, 이를 바탕으로 연결되는 유사어로서 좋은, 착함, 올바름 정도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주로 인용되는 선함,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선하다는 뜻이 갖고 있는 본질은 보다 종합적인 전망을 요구합니다. 물론 모든 성서 구절이 종합적인 전망으로 이해될 순 없겠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종합적인 전망으로서의 선함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하다’는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높은 덕성, 윤리 도덕적인 기준에서 본 ‘선함’만으로 성서의미가 전부 갈음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상태에서의 행동반경, 양식, 생각, 선택, 등등이 선함의 궁극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동일하게 ‘선함’으로 사용되지만, 희랍어에서 선함, 좋은 이란 뜻은 아가도스 이외에 καλος칼로스란 단어가 한 개 더 사용됩니다. 두 낱말간의 차이가 있다면 아가도스의 선함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 삶에서 펼쳐지는 행위 속에서 발견되는 비중이 더 크다면, ‘καλος칼로스’로서의 선함은 선함의 궁극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발견체 그 자체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의미비중이 조금 더 할애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희랍어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종종 사용되는 명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문장 사용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을 말하는 ‘선함’의 단어를 καλος칼로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유추가 가능하다고 보겠습니다.
주요 성구 펼침
다른 씨는 비옥한(좋은NIV역) 땅에 떨어져서, 풍작을 이루었다.
눅 8:8 (The Message)
펼침: 공관복음에 공히 나타난 좋은 땅 비유에서 아가도스가 ‘좋은’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땅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태의 상징이라면 이 상태가 ‘좋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있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현상은 열매를 맺는 상징으로 발전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과 그 과정에서 사람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상징적 잉태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용감히 싸우고, 그대의 믿음과 그대 자신을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착한 양심을 가지라 NIV역) 모두가 하나되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딤전 1:19 (The Message)
펼침: 기록자는 믿음과의 동의어로 착한 양심을 언급하는데, 이때 착한이 바로 ‘아가도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양심의 성서적 의미가 믿음과 함께 연결되면 이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지향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양심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율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법을 총칭합니다. 이 법의 기반이 되는 것이 양심인데, 이 양심이 착하다는 것은 곧 믿음과 연결되어 믿음을 향하는 사람의 본래적인 마음의 기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은 곧 믿음의 파선을 뜻하기에 기록자가 다음과 같이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 분께서 하시는 일, 곧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선한 일,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엡 2:10 (The Message)
펼침: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 선한 일은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착한 일, 덕을 세우는 일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원하는 선한 일의 범주가 중요합니다. 요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질료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 질료가 산출될 수 있는 태반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생명 만남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접점을 뜻합니다. 이 생명의 접점 안에서 추구되는 선한 일의 독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 선한 일에 집중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르는, 말씀 안에 머무르는 그 상태의 지속 자체에서 선한 일이 태동된다는 사실의 주목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 선함 추구는 현상의 실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궁극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명 발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생명 발견 행위 자체가 예배요, 기도요, 선한 일이란 사실의 긍정,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뿌리로 했을 때, 현실 양심에 근거한 봉사, 헌신이 긍정적인 생명의 실천으로서 선순환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곤란합니다.
세례 받을 때의 물이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 물은 여러분의 살갗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깨끗해진 양심(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 NIV역)을 갖게 된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물입니다.
벧전 3:21 (The Message)
펼침: 앞서 살펴보았던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도 언급되었듯이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선 선한 양심의 속성에 대해 보다 더 명확히 밝혀준다고 보입니다. 말씀을 상징하는 ‘물’이 그리스도의 영적 세례를 가리킨다고 언급한 대목에서 기록자는 선한 양심을 언급하면서 이 양심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은 본래 인간 삶의 상식, 보편적 인성을 뜻함인데, 이 양심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세례, 곧 그 분의 말씀으로 인해 선함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한 양심이 되는 것이며,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인간 삶에서의 보편적 인성, 보편적 봉사에서조차 초월적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전인적 선함의 총체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 조문 자체는 하나님께서 상식으로 여기시는 것으로서, 각 명령은 모두 건전하고 거룩한 권고(의로우며 선하도다. NIV역)입니다.
롬 7:12 (The Message)
펼침: 기록자가 율법의 속성에 대해 설명할 때, ‘선하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습니다. 의로우며 선한 이 율법은 분명 하나님을 밝혀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째서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생명을 가로막고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선함’을 이해하는 인식변환의 첫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 본성을 통해서, 그렇게 주어진 활동성을 통해 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달게 해주는 인식도구로서 기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을 통해서, 또는 율법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곧 진정한 선함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기록자가 주장한 ‘의인 없음’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선함’을 일으키는 행동 주체는 율법에 있는데, 그 율법의 근원은 하나님의 생명에 있으며, 그 생명은 우리가 행위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주어진 생명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함을 선함답게 인식할 수 있는 인식변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바른 길을 따라서 산 사람(선한 일을 행한 자는 NIV역)은 부활 생명으로 들어가고, 그릇된 길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부활 심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요 5:29 (The Message)
펼침: 이 선한 일이 만약 불교나 모슬렘들이 말하는 민족정의, 대민봉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상 종교 다원주의가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언급한 선한 일의 기준은 우리가 설정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 기준에서 주어진 보편적 양심의 틀에서 규정한 선함과 악함의 기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밝힌 선한 일은 총체적인 활동으로 집약되는데, 인간에게 총체적 활동이란 인간 행위 안에서 그 근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근원이 나타난다는 이 진리를 긍정하고 발견하는 활동이 곧 우리 인간 측면에서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의 유일성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을 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긍정하는 과정, 이 과정이 바로 선한 일이며, 이 선한 일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칼로스 / 선함, 선하다
4:17(우리는 누구에게 열심이며 그 열망이 향한 곳은 누구인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Ζηλουσιν ὺ̀μας ού́ καλως, ά́λλα έ́κκλεισιν ὺ̀μας θελουσιν, ὶ̀να αύ́τους ζηλουτε.
직역 :
그들이 너희에게 선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열심을 내니, 그것은 오히려 너희를 이간하려는 의도이며, 이는 너희가 그들을 열망하게 하려 함이라.
해석 :
열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보여지고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종교심에 기인합니다. 쉽게 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약2:17절의 기록을 곡해함으로써 자신의 행동하는 신앙심을 표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보는 자가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러한 자들로부터 듣는 생명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열심에서 나오는 반복적인 성경말씀의 되뇌임에 다름이 아닌 것이며 벗겨지지 않은 율법 그대로의 말씀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감성이 인성을 지배하기에 나타나는 헛된 열심에 다름 아닙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감성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 열심도 한계가 있어 그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비로소 이성으로서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데 그렇게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각 개인의 때가 차게 되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된 후에는 다시금 이성과 더불어 거듭난 마음으로서의 감성으로서 하나님이 일에 관하여 동참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이 순서를 잡지 못하고 감성으로 시작하였다가 감성으로 끝마친다거나, 감성을 넘어 이성으로까지 하나님을 향하던 모습에서 또 이성으로만 마치게 된다면 이는 또한 영지주의라는 결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미혹에 빠진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성과 이성을 모두 허락하신 분이십니다. 해서 감성이 배제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고하게 되며, 반대로 이성이 배제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감성으로만 이해하려고 드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해서 감성과 이성, 그리고 뜻(의지)을 다하여 모나지 않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구절은 율법의 충실한 자기 역할의 수행함입니다. 이렇듯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현 상태에 눌러 앉아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기능이 있음입니다. 율법의 그러한 기능은 인간이 스스로 부여한 것으로서 인간이 왕이 되어 있는 상태가 벗어나야(벗겨져야) 할 율법을 더욱 율법으로 기능하게(감싸지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는 하나님 뜻의 전부인 것인데(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 상태로 풀어주심으로) 풀어지지 않은 율법 자체로는 인간을 종삼아 주인으로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לנם임마누엘로서 ם임(~와 함께)과 נ마누(우리와)와 ל(하나님)엘이 합성된 것이며, 헬라어로는 Έ́μμανουηλ임마누엘로서 각각의 뜻은 공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임마누엘하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함께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이 세뇌당한 결과로서의 반복된 관념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확신으로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그리 기록되어 있으니 그냥 그렇다고 믿기만 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여 읽고 암기했다 하여 지식적으로 외우고 알아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그의 안에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 말씀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가 말씀에 인도되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달려 죽음으로써 임재하시게 되는 실체의 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땅, 새로운 하늘, 즉 새하늘새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그, 곧 그리스도와 동일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를 시인(ὸ̀μολογεω호몰로게오 - 선언, 언명, 공포, 진술, 동일한 것을 말하다, 고백하다, 솔직히 말하다)이라고 합니다. 그저 어떠한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그와(그리스도와) 동일한 말을 함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시인이 말입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원문으로 읽으면 우선 사람이라는 인칭명사가 없고 현재 마음으로 믿어져(수동) 의에 이르고(의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입으로 그와 동일한 말을 하게 됨으로써(수동)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면 이제부터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떠한 일을 향하여 열심을 내느냔 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 안팎의 이웃에게 내가 받은 생명인 복음, 임마누엘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을 나눔으로써(증거함으로써, 전함으로써) 그 복음(되어 진 증거)을 듣는 존재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 세우심으로 그 존재 또한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게(부활하게) 되는 일을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부단히도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차적으로 가견적 교회를 일컬어 언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등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말씀의 의보다 자신들의 의를 더 내세우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그 존재의 신실성에서 발출된 일들임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의 바른 뜻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코자 주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있어야 하는) 것 단 하나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달아졌다면 이제까지 해오던 그런 행위들에서 멈출 것입니다.
‘Ζηλουσιν ὺ̀μας ού́ καλως젤루신 휘마스 우 칼로스 - 그들이 너희에게 선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열심을 내니’, Ζηλουσιν젤루신은 ‘열렬, 열화, 열심, 열정, 시기, 질투’라는 ζηλοω젤로오에서 유래된 동사로서 ‘열심히 힘쓰다, ~에게 몰두하다, 노력하다’등의 뜻입니다. 이는 그들, 즉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자들의 행태를 말하고 있음인데 다름 아닌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열심을 내며 율법으로 돌아설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가 참 복음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의 이런 자들에 의하여 미혹함에 빠지기가 십상인 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인 것인데 이러한 상태로 있는 그들은 참 복음(참 생명) 안에서 하나로 있을 수 없는 뿌리가 다른 헤테로스 차원의 다름들로 존재하고 있는 자들이며 이러한 자들로 인해 누구나 삶을 지나면서 체험되고 터득된 것들에 익숙해져 있기에 다시금 그들이 그 옛 일들을 들려주게 되면 그게 옳은 것이라며 동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최소한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세워진 존재는 그나마 예외지만, 그러할지라도 주의를 해야 할 것이지만) 자신이 현상적으로 경험한 바(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하여)가 진짜인 것으로 확신함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러한 경험은 하지 못했을지라도(오감을 통한 경험) 많은 이들의 논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고한 주장에 되고 있는 것을 자신은 경험하지도 않았지만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추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다른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자들의 말들로 인하여 듣는 자 또한 그것이 사실인양 믿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한 잘못된 것을 전달함으로써 전달하는 자들 자신들의 의를 더욱 데 공고히 함은 물론이며 듣는 자들까지 그 잘못 될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전달하는 자는 그 자신의 의를 더 높이 세우기 위하여 더욱 더 그러한 잘못된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ού́ καλως우 칼로스’는 ‘좋은, 선한, 옳은, 바른’등의 뜻인 καλως칼로스에 ‘~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라는 부정하는 부사 ου우가 쓰여 ‘좋은 것이 아닌’의 뜻이어서 ‘그들이 너희에게 좋은 일이 아닌것으로 열심을 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언급되고 있는 καλως칼로스와 더불어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αγαθος아가도스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면,
선함, 선하다(αγαθος, 아가도스) http://blog.daum.net/innovator-bay/ 인용
희랍어로 형용사 αγαθος아가도스로 읽힙니다. ‘좋은’, ‘선한’, 정도의 뜻이 가장 자주 사용되며, 친절한, 충실한, 덕이 있는, 정도의 뜻이 발전된 뜻으로 읽힙니다.
αγαθος아가도스란 단어를 중심으로 파생된 유사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사 αγαθωσυνη아가도쉬네는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유래되어 선함, 착함, 올바름이란 뜻을 갖습니다. 또한 αγαθοποιεω아가도포이에오란 동사는 αγαθος아가도스와 동사 ποιεω포이에오의 합성어로 사용되어 선을 행하다, 유익을 끼치다. 올바르게 잘하다 정도의 뜻을 갖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αγαθος아가도스는 선하다, 선함 정도의 뜻을 가지며, 이를 바탕으로 연결되는 유사어로서 좋은, 착함, 올바름 정도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주로 인용되는 선함,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선하다는 뜻이 갖고 있는 본질은 보다 종합적인 전망을 요구합니다. 물론 모든 성서 구절이 종합적인 전망으로 이해될 순 없겠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종합적인 전망으로서의 선함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하다’는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높은 덕성, 윤리 도덕적인 기준에서 본 ‘선함’만으로 성서의미가 전부 갈음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상태에서의 행동반경, 양식, 생각, 선택, 등등이 선함의 궁극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동일하게 ‘선함’으로 사용되지만, 희랍어에서 선함, 좋은 이란 뜻은 아가도스 이외에 καλος칼로스란 단어가 한 개 더 사용됩니다. 두 낱말간의 차이가 있다면 아가도스의 선함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 삶에서 펼쳐지는 행위 속에서 발견되는 비중이 더 크다면, ‘καλος칼로스’로서의 선함은 선함의 궁극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발견체 그 자체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의미비중이 조금 더 할애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희랍어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종종 사용되는 명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문장 사용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을 말하는 ‘선함’의 단어를 καλος칼로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유추가 가능하다고 보겠습니다.
눅8:8
다른 씨는 비옥한(좋은NIV역) 땅에 떨어져서, 풍작을 이루었다.
공관복음에 공히 나타난 좋은 땅 비유에서 아가도스가 ‘좋은’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땅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태의 상징이라면 이 상태가 ‘좋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있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현상은 열매를 맺는 상징으로 발전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과 그 과정에서 사람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상징적 잉태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딤전1:19
그대가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용감히 싸우고, 그대의 믿음과 그대 자신을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착한 양심을 가지라 NIV역) 모두가 하나되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기록자는 믿음과의 동의어로 착한 양심을 언급하는데, 이때 착한이 바로 ‘아가도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양심의 성서적 의미가 믿음과 함께 연결되면 이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지향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양심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율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법을 총칭합니다.
이 법의 기반이 되는 것이 양심인데,
이 양심이 착하다는 것은 곧 믿음과 연결되어 믿음을 향하는 사람의 본래적인 마음의 기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은 곧 믿음의 파선을 뜻하기에 기록자가 다음과 같이 밝힌 것입니다.
엡2:10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 분께서 하시는 일, 곧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선한 일,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 선한 일은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착한 일,
덕을 세우는 일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원하는
선한 일의 범주가 중요합니다.
요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질료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 질료가 산출될 수 있는 태반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생명 만남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접점을 뜻합니다.
이 생명의 접점 안에서 추구되는 선한 일의 독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 선한 일에 집중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르는,
말씀 안에 머무르는 그 상태의 지속 자체에서 선한 일이 태동된다는
사실의 주목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 선함 추구는 현상의 실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궁극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명 발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생명 발견 행위 자체가
예배요, 기도요, 선한 일이란 사실의 긍정,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뿌리로 했을 때, 현실 양심에 근거한 봉사, 헌신이 긍정적인 생명의 실천으로서 선순환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곤란합니다.
벧전3:21
세례 받을 때의 물이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 물은 여러분의 살갗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깨끗해진 양심(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 NIV역)을 갖게 된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물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디모데전서 1:19절에도 언급되었듯이 베드로전서 3:21절에선 선한 양심의 속성에 대해 보다 더 명확히 밝혀준다고 보입니다. 말씀을 상징하는 ‘물’이 그리스도의 영적 세례를 가리킨다고 언급한 대목에서 기록자는 선한 양심을 언급하면서 이 양심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은 본래 인간 삶의 상식, 보편적 인성을 뜻함인데, 이 양심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세례, 곧 그 분의 말씀으로 인해 선함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한 양심이 되는 것이며,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인간 삶에서의 보편적 인성, 보편적 봉사에서조차 초월적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전인적 선함의 총체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롬7:12
그러나 율법 조문 자체는 하나님께서 상식으로 여기시는 것으로서, 각 명령은 모두 건전하고 거룩한 권고(의로우며 선하도다. NIV역)입니다.
기록자가 율법의 속성에 대해 설명할 때, ‘선하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습니다. 의로우며 선한 이 율법은 분명 하나님을 밝혀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째서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생명을 가로막고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선함’을 이해하는 인식변환의 첫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 본성을 통해서, 그렇게 주어진 활동성을 통해 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달게 해주는 인식도구로서 기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을 통해서, 또는 율법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곧 진정한 선함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기록자가 주장한 ‘의인 없음’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선함’을 일으키는 행동 주체는 율법에 있는데, 그 율법의 근원은 하나님의 생명에 있으며, 그 생명은 우리가 행위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주어진 생명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함을 선함답게 인식할 수 있는 인식변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요5:29
바른 길을 따라서 산 사람(선한 일을 행한 자는 NIV역)은 부활 생명으로 들어가고, 그릇된 길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부활 심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선한 일이 만약 불교나 모슬렘들이 말하는 민족정의, 대민봉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상 종교 다원주의가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언급한 선한 일의 기준은 우리가 설정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 기준에서 주어진 보편적 양심의 틀에서 규정한 선함과 악함의 기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밝힌 선한 일은 총체적인 활동으로 집약되는데, 인간에게 총체적 활동이란 인간 행위 안에서 그 근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근원이 나타난다는 이 진리를 긍정하고 발견하는 활동이 곧 우리 인간 측면에서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의 유일성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을 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긍정하는 과정, 이 과정이 바로 선한 일이며, 이 선한 일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ά́λλα έ́κκλεισιν ὺ̀μας θελουσιν알라 엑클레이신 휘마스 델루신 - 그것은 오히려 너희를 이간시키려는 의도이며’, ά́λλα알라는 반대의미를 나타내는 불변사로서 ‘그와 반대로, 도리어’ 정도의 뜻을 갖고 있는데 지금은 동일한 의미이나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부작용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오히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일이랍시고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선함에 거꾸로 가게하기 때문입니다. έ́κκλεισιν엑클레이신은 ‘έ́κ에크 - 방출, 제거, 이동, 분리’와 ‘κλειω클레이오 - 잠그다, 감금하다, 마음 문을 닫다’의 합성어인 έ́κκλειω에클레이오가 원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다, 배제하다, 차단하다, 불가능케 하다, 이간하다, 격리시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θελουσιν델루신이란 θελω델로가 기본동사로 ‘생각하다, 바라다, 원하다, 하고 싶어하다, 의도하다’라는 뜻이어서 묶어서 읽으면 ‘오히려 그들이 너희를 이간하려는 의도이며’라는 것입니다. 이간이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존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게 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꾀는 것,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참 복음을 차단하는 일입니다.
‘ὶ̀να αύ́τους ζηλουτε히나 아우투스 젤루테 - 이는 너희가 그들을 열망하게 하려 함이라’, ὶ̀να히나는 목적, 한정, 결과를 나타내는 기본접속사로서 ‘~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αύ́τους아우투스는 ‘자신, 그 , 그것, 스스로’를 가리키는 강조형 복수로서 ‘그들을’ 일컫고 있습니다. ζηλουτε젤루테이는 ‘열렬, 열화, 열심, 열정, 시기, 질투’라는 ζηλοω젤로오에서 유래된 동사로서 ‘열심히 힘쓰다, ~에게 몰두하다, 노력하다’등의 뜻으로 ‘너희가 그들을 열망(동일어군 ζξλευω젤류오 - 열망을 가지다)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열심’이라는 단어로 쓰임 가운데 열심당원이라는 열심당에 속한 구성원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예로 설명하자면 독립협회, 독립꾼들로서 나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열심을 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던 자들이었습니다. 독립투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방향으로서의 묵상은 영생이라는 참된 생명의 장을 풀어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방향을 잘못 설정한 것입니다. 애국심이라는 감성이 격하게 반응하여 현상적으로 보이는 이 땅의 국가의 독립을 위한 것이지 하늘에 이르는 참된 영의 생명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로부터 참된 복음을 들은 ‘나, 지금의 기록으로는 너희(아직은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회들, 즉 거짓된 나, 우리)’라는 존재가 참된 복음과 하나가 되고자함을 내 안의 ‘또 다른 나’들이(이방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의 기록으로는 그들이) 이 나(아직은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즉 거짓된 나)를 감성을 내세운 복음, 즉 다시금 율법을 지키던 종교인으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신들인 것입니다. 물론 자신 이전에 외부로부터의 들려옴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복음이라는 미명을 띤 소리라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 있는 자라면 그 존재에게는 그 다른 복음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상관할 것이 없을 것인데 이처럼 다른 복음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그 다른 복음에 나라는 존재가 동조하고 있음인 것(예수의 믿음이 아닌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믿음이었기에)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생명, 즉 나의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다른 존재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인도 결과도 책임이 있어 책임이 지워주는 몫을 감당해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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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개역 성경에서 "소금"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22구절
구약에서 17구절
신약에서 5구절
1.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4.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5. 신명기 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6. 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7. 열왕기하 2: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8. 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9.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10. 에스라 4:14
우리가 이제 궁의 소금을 먹는고로 왕의 수치 당함을 참아 보지못하여 보내어 왕에게 고하오니.
11.에스라 6:9
또 그 수용물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소청대로 영락 없이 날마다 주어.
12. 에스라 7:22
은은 일백 달란트까지, 밀은 일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일백 밧까지, 기름도 일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수 없이 하라.
13. 욥기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14. 에스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15.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16. 에스겔 47: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7. 스바냐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18.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9.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20.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21. 누가복음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22.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오늘 설교를 하게 된 동기를 소개합니다.
최근 한국사회에 나타난 사회 현상을 지켜보며 국회의원, 판사, 검사, 군인들의 발언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하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1970년 80년 대에 한국교회가 급성장 할 때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왜 교회는 성장하는데 가톨릭교회는 성장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논 후에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 가톨릭교회는 철저한 근본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얻은 결론은 성장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본 교육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하였듯이 한국사회에 나타난 현상을 보며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설교가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성경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선경에서는 "너희는 땅(게)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 라고 정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자주 들었던 내용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금에 대한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소금은 조미료
둘째는 소금은 방부제
셋째는 소금은 언약을 위한 것(불변)
오늘 제가 소개하려는 소금은 네번째 내용으로 성서지리학 또는성서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소금의 용도를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금은 씨앗을 뿌릴 땅에 뿌리는 농부들의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은 석회질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뿌리면 땅이 굳어져서 씨앗이 자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농부는 먼저 석회질의 땅에 소금을 뿌려서 땅을 부드럽게한 후 그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에 산상복음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먼저 팔복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에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로운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전에 먼저 석회질과 같은 땅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제자들이 굳어진 땅에 소금이 되어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 베드로<시몬 , 게바>
최후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음.
후에 시체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지하로 옮겨짐
2. 안드레 : 터키 에데사
그리스 아가야(파트레스)에서 이교도에 의하여 X형의 십자가에 달려 순교함.
X형의 십자가를 안드레 십자가로 부름.
3.야고보<보아너게(우뢰의 아들)>
예루살렘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의 칼에 목베어 죽음(행 12:2)
4. 요한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 송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 곳에서 기름이 끓는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었음.
그러나 기적 적으로 피해 달아나는데 성공함.
도미티안 황제가 밧모섬으로 추방함.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 사람임. 에베소에서 순사(자연사. 95세)함
5. 빌립
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에서 로마의 핍박으로 기둥에 매여 돌에 맞아 순교
6. 마태 <레위>
AD 60년 에티오피아 도시 나라바에서 이교도의 핍박으로 미늘창으로 살해당함
(미늘창 : 도끼, 창, 갈고리를 하나로 묶어놓은 무기 )
7. 시몬<셀롯>
AD 74년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
혹은 페르시아에서 폭도들에 의해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나는 형으로 죽음.
8. 도마 <디두모>
인도 코르만델에서 이교도에 의하여 창으로 몸이 관통 되어 순교.
9. 바돌로매 <나다나엘>
아르메니아에서 우상숭배자에 의하여 산채로 살가죽 벗기는 참수형으로 순교.
10. 다대오
앗수르와 바사(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전도하다 페르시아 지역에서 화살에 의해 순교함.
11. 작은 야고보
94세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 돌, 몽둥이 톱(목 찔림)순교함.
높은 성전 탑에서 던져도 죽지 않아 나무망치로 머리를 맞고 순교하였음.
12. 맛디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 돌매질 당했으나 죽지 않아 참수형으로 순교.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이라는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를 뿌릴 때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씨앗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수용하여 열매를 맺도록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사회에 나타난 현상을 지켜보며 만일 국회의원들 중에서, 검사와 판사들 중에서, 군인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들이 땅의 소금이 되는 그 이유를 바르게 깨달았다면 결코 오늘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소금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땅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금"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보면 구약에서 17구절, 신약에서 5구절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소금이란 단어가 있는 구절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라(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바울은 본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의 언어 습관에 대해 권면한다.
본절에서 ‘너희 말’은 골로새 교인들의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선포를 포함한다.
골로새 교인들이 일상적인 대화나 복음 선포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1. ‘은혜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은혜 가운데서’로 번역된 헬라어 ‘엔카리티’ (*) 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감사함으로’를 의미한다(3:16).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를 의미한다(엡 2:5).
셋째, ‘은혜롭게’를 의미한다(눅 4:22).
세 가지 중 마지막 의미가 본질의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린다(Lighrfoor Martin, O'Brien).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대화의 내용이나 방법이 매우 중요함을 시사한다(벧전 3:15,16).
2.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해야한다.
헬라인들에게 ‘소금’은 ‘재치’나 ‘기지’를 의미한다(Bruce, Vaughan),
또한 랍비 문헌에서도 ‘소금’은 지혜를 의미한다(O'Brien).
따라서 본절은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속에서 은혜롭고 지혜로우며 재치있는 말을 함으로써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둘째는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화목하기 위한 비결은 4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 18:19) 3)
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2025년 2월 9일(주현 후 제5주. 녹색)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마태복음 5:13)
(개역한글성경)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새한글성경)
바로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슨 수로 짠맛을 되찾겠어요?
아무 데도 더는 쓸모가 없어서 오직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마구 밟힐 뿐입니다.
땅과 세상의 의미
땅 /
1. 명사
강이나 바다와 같이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지구의 겉면.
2. 명사
영토(領土) 또는 영지(領地).
3. 명사
그 지방. 또는 그곳.
세상(世上) /
1.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또는 그 기간의 삶.
3.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나 공간.
헬라어
땅(게. gē)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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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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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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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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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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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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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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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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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땅(마2:6, 막2:10, 행1:8), 세상(마5:13, 9:6, 막9:3), 흙(마13:5, 막4:5), 뭍(막6:47), 육지 (마4:1, 눅5:3, 요21:8), 지구(눅21:35), 지면 (계20:9), 천하(계16:14).
세상(코스모스. 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2889
발음 [ kŏsmŏs ]
κομίζω 스트롱번호 2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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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동] 가져오다, 눅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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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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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련하다, 획득하다, 얻다, 받다, 고후5:10, 엡6:8, 골3:25, 히10:36, 11:19,39, 벧전5:4, 벧후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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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회수하다, 다시 받다, 마25:27, 히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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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가지다(눅7:37), 받다(고후5:10, 골3:25, 히10:36), 얻다(벧전5:4), 당하다(벧후2:13).
2. 세상, 우주, 마24:21, 눅11:50, 롬1:20, 히4:3.
3. [동물 이상의 모든 존재 총칭] 세상, 고전4:9.
4. [사람이 사는] 땅, 세상, 마4:8, 막16:15, 요16:21, 롬1:8, 고전5:10, 14:10, 골1:6. [하늘과 대조되는] 땅, 세계, 요6:14, 9:39, 11:27, 딤전1:15, 히10:5.
6. 지상적 기쁨, 소유, 근심, 고난의 무대로서의 세상, 마16:26, 막8:36, 눅9:25, 고전7:33.
8. 전체, 총체, 약 3:6.
관련 성경 / 천하(마4:8, 막8:36, 눅9:25), 세상(마5:14, 고전1:27, 계11:15), 천지(행17:24), 세속(약1:27), 세계(약3:6), 단장(벧전3:3).
이제까지 우리가 읽고 듣던 말씀을 수정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글개역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는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소금, 세상의 빛
설교 주제도 땅의 소금이 되라고 정했습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아니라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에서 소금이 될 수 없다면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땅에서 소금이 되었다면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땅과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땅은 지금 내가 있는 자리 그 장소를 말합니다.
땅이란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 즉 삶의 자리(Sitz im Leben) 또는 삶의 현장(Szene des Lebens)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세상보다는 아주 작습니다.
가장 작은 자리에서 소금이 될 수 없다면 더 넓고 큰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땅에서 소금이 된다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
소금과 빛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금을 땅에 뿌리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땅의 토양이 석회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농부들은 먼저 땅에 소금을 뿌렸다고 합니다.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소금 맛을 잃게 되면 무슨 수로 그대들이 소금 맛을 되살려 내겠어요?
그대들 자신 안에 소금을 지니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린도후서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라(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성경적 방법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
1. 벌거벗은 노아(창 9:22)
-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 영심의 가책을 받은 군중들(9절)
-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
맛 잃은 소금에 대해 말씀하시다
누가복음 14:34-35
34“그러므로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도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슨 수로 그 맛을 되살려 내겠어요?
35그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알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깥에 버립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을 그 순서를 바꿔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된 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 때 "세상"이란 헬라어는 '세상'이 아니라 "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세상이란 헬라어는 "코스모스"라고 합니다.
땅이란 헬라어는 "게"라고 합니다.
새한글성경에서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번역합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은 땅의 소금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소금이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이제까지 소금의 용도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소금은 조미료(맛)
소금은 방부제(부패하는 것을 잠시 방지)
소금은 언약(변함이 없는 말씀에 대한 약속)
예수님 당시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기 전에 땅에 소금을 뿌려서 땅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석회질이 많은 땅은 비가 오면 땅이 굳어져서 씨앗을 뿌려고 싹을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먼저 땅에 소금을 뿌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든 후에 씨앗을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져야 할 땅을 씨앗이 싹을 낼 수 있는 땅으로 바꾼 후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이란 땅은 씨를 뿌려고 싹을 낼 수 없으므로 소금을 뿌려야 하는데 소금은 곧 성도들이 땅에 뿌려질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땅으로 흩어져서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까요?
한글 개역성경에서 소금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라!
둘째는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서로 화목하라!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마태복음 5:13)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주문하십니다.
요즘이면 이런 가르침을 주실까요?
요즘 소금은 인간역사에 들어온 이래 개인의 건강,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 주범(主犯)처럼 경계의 대상입니다.
소금은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은 녹아지고 형체도 없이 희생했더니, 인간들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보통 푸대접이 아닙니다.
소금은 식염(食鹽)으로 화학명은 염화나트륨입니다.
사람에게 소금은 생리적으로 없어서는 안 됩니다.
혈액 속에는 0.9%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부족하면 소화액 분비가 감소하여 식욕이 떨어지고 땀을 많이 흘려 체내에 염기가 모자라면 현기증, 무욕, 의식혼탁, 탈력…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능이 상실되고 목숨도 잃습니다.
그래서 보통 성인들은 하루 12∼13g의 소금을 섭취해야 합니다.
소금이 없던 시대에는 조수(鳥獸)나 물고기를 잡아먹음으로 동물몸속에 있는 염분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인간들이 점점 짜게 먹다보니 고혈압의 원인이 되고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되었다고 얼마나 구박하는지 소금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소금이 없으면 고기 맛도 국물 맛도… 김치 맛도 없다던 인간들이 소금 때문에 몸이 망가진다고 야단이니 소금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소금이 되라! 하신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가르침의 대상이 일반청중이 아닙니다.
믿음을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그래? 그러면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소금 용도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식용, 부패방지용, 약용…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세상의 악을 방지하라, 부패를 막아라, 맛을 내는 조미료가 되라… 정도로 이해하고 설교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뜬구름을 잡는 관념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석회질이 많습니다.
물에도 석회가 많아서 식수도 그만큼 귀합니다.
땅이 석회암이고 석회질이다 보니 토질이 거칩니다.
석회질이 많은 땅에 비가 오면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씨앗을 뿌리기 전에 땅을 부드럽게 하려고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으로 땅이 부드럽고 싹이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석회가 엷어진 좋은 땅이 되는 것이지요!
씨앗은 예수님, 혹은 예수님 말씀, 땅은 청중입니다.
그 청중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굳은 석회 땅입니다.
그 땅은 나중에 13장에 나오지만 마음 밭들이 길가 밭, 돌짝밭, 가시덤불 밭입니다.
이들이 청중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수용하지 못하고 대리석 같은 밭이고 돌이 많아서 씨앗이 떨어지지만 싹이 나오다가 맙니다.
이런 심령의 땅에 제자들은 소금이 되어 석회질의 굳은 것을 없애 옥토(沃土)로 만드는 소금이 되라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의 어떤 성경은, 땅의 소금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은 땅에 들어가는 소금이 되어 씨앗이 나오도록 땅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모르면 세상의 소금이 되라… 너무 관념적입니다.
설교하기는 쉽고 기도할 때의 문구로 사용하기에는 좋은데 정작 그 세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금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허한 구호로 끝나고 맙니다.
너는 땅의 소금이다!
그 땅이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내 주변의 누구입니까?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고… 상종하기 싫은 그 불편한 사람… 사람은 좋은데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하고 투박할 수가 없는… 바로 그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땅, 그 마음, 그 사람입니다! 너는 바로 그 굳은 사람에게 소금이 되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생각해 보세요!
누가 내게는 땅에 해당됩니까?
대리석 같은 사람, 석회질이 많은 사람… 주님에 대해 신뢰의 싹이 나지 않을 사람… 그 사람에게 소금이 되고 그 땅의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 이후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약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알고 잘 해석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성경대로 산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심은 많은데 생활이 없으니까 소금은 맛을 잃었고 교회는 가치를 잃은 소금창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인성교육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실력은 늘고 똑똑한데 도덕이 없고 버릇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 성공, 출세를 위해 너무 지식, 성적위주의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인성교육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알아요? 빠삭하잖아요? 설교자들이 참 힘들어요! 그러면 아는 만큼 살고 있나요? 설교를 그만큼 들었으면 성자(聖者) 소리 들어야 하지 않나요? 성자 소리는 그냥 듣나요?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녹이기 힘든 사람들… 그들까지 녹이려는 애씀이 있어야 성화(聖化)가 나오고 성자(聖者)가 됩니다. 땅의 소금은 생활신앙, 생활기독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땅의 소금이 되라!
해외선교 명령이 아닙니다.
국내선교, 관계전도에 해당됩니다.
왜 시내 큰 교회를 선호합니까?
시설이 좋고 시스템이 좋고 설교도 좋지만 동네에서 교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거예요. 왜 숨겨요?
자신이 없거나 믿음대로 살기 귀찮은 거예요!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세상의 소금까지는 안 되어도 좋으니 옆 주변 땅에 소금이 되라는 거예요!
땅은 친구이고 동네이고 사무실입니다. 주변에서 본이 되고 사랑을 보이고 친절하고 정직해서… 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 언론에 교인들 욕하는 보도가 나와도 교인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기독교 변호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점차 마음 땅이 부드러워서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전도요 인격전도요 땅의 소금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땅의 소금이 되라고 합니다. 소금은 1400가지 용도가 있다네요! 굉장합니다. 소금이 그냥 있으면 1400개의 용도가 나오나요? 아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소금의 특징이 녹아짐입니다. 심심한 물맛에 소금 맛이 나는 것은 소금이 녹아내렸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녹아내리는 것만큼 음식 맛이 납니다.
소금은 자기 성질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음식을 맛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자기는 완전히 녹아 형체도 모양도 없어지면서도 음식에 배어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의 역할! 자기모양, 자기역할은 묻힘을 통해, 자기 부인을 통해, 내려놓음을 통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땅의 소금이니… 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 가운데서 녹아내릴 것을 명령합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자기희생이 없으면 굳은 마음을 녹일 수 없습니다.
남을 녹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녹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주변이 예수님의 씨앗을 틔울 옥토가 됩니다.
생활에서 녹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게 8복의 내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청결하게 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믿음을 위해 박해를 자처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내 주변의 석회질의 땅과 같은 사람들을 변화되고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격전도입니다.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만 예배하고 잘 지내고 나가서는 까칠한 사람…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면 어떻게 세상의 땅이 변하고 복음의 씨! 예수님의 정신이 돋아나겠어요? 오히려 나 때문에 세상은 더 굳어지고 마음들이 석회질, 석회암이 됩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 지방의 소금은 암염, 돌소금입니다.
원래 소금은 귀해서 물물교환에서는 최고의 가치였고 화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월급을 소금으로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급료(salary)나 병사(soldier)가 라틴어로 소금(salt)을 가리키는 ‘sal’에 어원을 둔 까닭입니다.
소금은 금(金)의 가치에 비견해서 ‘하얀 금’ ‘작은 금’이라 불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는 말씀은 너희는 엄청 귀한 존재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귀한 존재이기에 높은 자존감으로 가치 있게,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의 삶입니다.
유대인은 스스로를 소금처럼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처합니다.
왜? 선민이니까! 그들이 얼마나 자존감이 높은가?
하나님께서 세계에 10개의 아름다움을 주셨는데 9개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주셨다고 합니다. 인
류에게 주신 10개의 보석 중에서 아홉 개는 유대인들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입니까?
그래서 유대인은 자기들은 부(富)와 재물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유지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부와 재물을 항상 주시는가?
자선을 베풀기 위한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소금으로 인식하는 유대인은 구제에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에게 최고로 가치 있는 의인은 누구인가? 구제를 하는 유대인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신하에게 세 친구가 있습니다.
잘 나갈 때는 모두 좋은 친구였습니다.
왕이 신하에게 입궁(入宮)을 명했습니다.
느낌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에게 동행을 청했습니다.
한 친구는 아예 손사래를 쳤고, 한 친구는 왕궁 문 앞까지만 동행한 후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친구는 임금 앞에까지 가서 이 친구는 결코 그런 친구가 아니다, 해명하고 좋은 선행을 많이 했다, 보증해 주었습니다.
세 친구가 누구인가?
돈과 배우자와 선행입니다.
죽음이라는 호출이 왔을 때 돈은 한 푼도 동행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는 무덤 앞까지는 동행합니다.
하나님 앞에까지 동행하는 친구는 누구인가? 선행입니다.
최고의 선행이 구제입니다.
하나님이 너 어떻게 살았나? 하면 구제가 변호해 줍니다.
이 사람은 이런저런 좋은 일, 선행, 구제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제-자선을 최고의 가치, 최고의 종교선행으로 알았습니다.
구제 중에서도 최고의 자선은 동족들에게… 동족 중에서도 고아들과 홀로된 여인들에게… 다음에는 나그네들에게… 이런 순서로 구제를 한 것을 최고로 알았습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식을 세상에 보이라는 촉구입니다. 땅에서 선행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맛을 잃어버리고 쓸모없는 신자, 형식적인 신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고대인이 사용하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에서 추출되어 불순물이 많이 섞였습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에 용해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나면 나머지는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짠맛을 잃은 소금은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집니다.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습니다.
역청 역할을 합니다.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 장소도 되기에 소금은 사람에게 밟힙니다.
이런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면 아무 맛이 없어지고 효용성이 없는데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맛을 잃으면 세상은 어디에서 경건의 맛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맛을 잃으면 세상은 어디에서 은혜의 맛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려면 녹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몇 달 전에, <아름다운재단>이 전국 성인남녀 1,029명을 일대일 면접 조사한 결과, 기독교인들의 기부(헌금·경조사비 제외) 및 자원봉사 참여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천주교 68%, 기독교 61%입니다. 선교헌금… 액수를 생각하면 우리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구제를 통해 로마가톨릭은 교세증가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소금이 녹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부와 구제를 지나치게 개교회 전도로 목적하고 삶에서 인격에서는 맛을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많이 하되 땅의 소금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극복해야 하고 우리교회가 극복해야 제대로 된 땅의 소금이 됩니다.
유대인은 배교했다가 돌아오면 회당 입구에 눕습니다.
사람들은 회당으로 들어가며 사정없이 배교자를 밟았습니다.
배교자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수모와 고통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회서 제적된 자가 다시 자격을 얻으려면 교회 문에 누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심정으로 교회를 출입할 때 우리 교회의 문이 한층 맛있는 소금으로, 능력 있는 예수의 소금교인으로 만들어 내고 우리교회와 내가, 한국교회가 더욱 가치 있게 쓰임 받는 땅의 소금이 될 줄 믿습니다.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라!(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13)
1. 세상(κόσμος, k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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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 헬라어 κόσμος는 일반적으로 “우주,” “세계,” 또는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세속적이고 타락한 인간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창조 세계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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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해석 : 예수님은 제자들이 단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에게만 국한된 사명이 아니라,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칠 사명을 가졌음을 강조하십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제자들의 사역이 전 지구적이고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는 보편성을 나타냅니다.
2. 소금(ἅλας, halas)
- 의미 : ἅλας는 헬라어로 소금을 뜻하며, 음식의 맛을 내거나 보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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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배경 :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1) 맛을 내는 역할, (2) 부패를 방지하는 보존의 역할, (3) 언약의 상징, (4) 토양의 변화
- 맛 : 음식의 본질을 끌어내어 맛을 풍부하게 만듦.
- 보존 : 음식이 썩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
- 언약 : 소금은 구약에서 변하지 않는 언약의 상징으로 쓰였음(레위기 2:13, 민수기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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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양의변화 : 팔레스타인의 땅은 석회질이 너무 많아 물을 마실 수 없었으며 씨를 뿌려도 싹을 낼 수 없었다.
비가 오면 석회질이 많은 땅은 더 굳어진다.
따라서 농부가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에 소금을 뿌려 땅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
- 의미 : 이 단어는 “어리석어지다” 또는 “무미건조하게 되다”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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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해석 : 소금이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유익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빛과 진리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다는 경고입니다.
2. 구약 성경에서의 소금의 맥락
1) 소금의 언약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재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과의 소금 언약을 네 소재에 빼지 못할지니...”
소금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계를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으로 불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을 대표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낼 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소금 언약으로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것이 되리라.”
여기서 소금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하나님의 언약을 연결시키는 사명을 맡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2) 소금의 정화와 보존의 역할
열왕기하 2:20-22: 엘리사가 소금을 사용하여 물을 정화하는 장면.
소금은 정화의 상징으로,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부르심받았음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16:4: “네가 태어난 날에 네 몸에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으며...”
신생아에게 소금을 뿌리는 관습은 정화와 보존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도덕적·영적 순결을 유지하고 세상을 정화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3. 신약 성경에서의 소금의 의미
1) 소금과 제자의 정체성
-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제자의 삶 속에서 진리와 화평을 상징하며, 세상 속에서 화목을 이루는 역할을 나타냅니다.
2) 소금과 언어
- 골로새서 4:6: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소금은 말과 행실 속에서 은혜롭고 진리를 담은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속에서 은혜를 나누고,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4. 정경신학적 해석: 소금과 세상의 관계
1) 소금과 세상의 긴장 관계
세상(kosmos)은 종종 죄와 타락의 장소로 묘사되며, 소금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유지하는 상징적 역할을 합니다. 제자는 세상의 타락 속에서도 그 본질과 사명을 지키며 세상을 정화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2)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 소금은 세상에 침투하여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을 통해 세상 곳곳에 퍼지고,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에서 소금의 사명이 이루어집니다.
3) 소금의 본질을 유지하는 중요성
-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제자가 정체성을 잃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는 구약의 언약과 연결되며, 제자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함을 증거하지 못할 때, 그의 사명도 무의미해진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5. 현대적 적용
1) 세상의 부패를 막는 그리스도인
- 현대 사회는 도덕적 혼란과 영적 타락이 만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지키는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정의와 윤리를 실천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는 삶
-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영해야 합니다. 소금이 언약의 상징이듯, 우리의 말과 행동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야 합니다.
3) 맛을 내는 복음의 삶
- 소금이 음식에 맛을 더하듯,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음의 기쁨과 생명을 더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직장, 가정,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4) 정화와 화평의 도구
- 그리스도인은 엘리사의 소금처럼 세상을 정화하고 화평을 이루는 사명을 가집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속에서 죄와 부패를 정화하며, 하나님의 화평을 이루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기
마태복음 5장 13절의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구약의 맥락과 신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며, 세상을
보존하고 정화하며 맛을 더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그 속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참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소금의 본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길 소망합니다.
성경 속 소금 상징과 의미
1. 소금의 일반적 개요
소금은 화학적으로 염화나트륨(NaCl)이라고 부릅니다.
염화나트륨은 나트륨인데 염소와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위키백과에 보면 '소금의 주성분이다'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소금에는 염화나트륨만 있는 것이 아닐겁니다. 그건 후에 좀더 다루기로 하고, 염화나트륨을 조금만 살펴봅시다. 염화 나트륨은 나트륨 이온(Na+)과 염화 이온(Cl-)이 결합한 상태입니다. 물에 잘 녹으며 수용성입니다. 물에 잘 녹는다는 말은 말과 염화나트륨이 섞일 경우 서로 전자 분해와 결합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서로 친하다는 말입니다.
물과 기름이라는 뜻은 서로 잘 섞어지 않는다고 하죠. 이말은 서로 이온을 나주지 않고 독립적이란 뜻입니다. 염화이론과 나트륨 이온에 수소와 산소 원자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서로 잘 섞입니다. 염화 이온과 나트륨 이온도 잘 섞이고, 물도 수소가 있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염화나트륨은 음전자와 양전자가 쉽게 물에 해리되기 때문에 전해질 물질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설탕의 경우 물에는 잘 녹지만 쉽게 해리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2. 소금의 종류
성경 속의 소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금의 종류를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제염과 천일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에서 추출한 것인지 바위소금 즉 산에서 채취한 암염(巖鹽)인지를 구분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두 가지 형태의 소금이 모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소금의 맛’은 암염을 뜻하는 것이고, 구약의 성막 제사에서 사용된 소금은 천일염으로 보입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하여튼 소금 본연의 성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세밀하게 구분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바닷물을 말려 얻은 소금을 그냥 천일염이라고 말하고, 땅에서 캔 소금을 암염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천일염(Solar Salt)
천일염은 바닷물에서 수분을 제거하여 만든 소금을 말합니다. 순수한 염화나트륨이 아닌 바닷물 속의 다양한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건강에 유익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해안 지역에 많은 염전이 있습니다. 특히 신안은 소금의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전이 등장하지 않지만 지중해는 중심으로 염전이 존재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염전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해안과 같은 평평한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해 곧 염해(鹽海)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소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암염은 바닷물이 아닌 암석과 흙속에서 캐내는 것이기 때문에 천일염에 비해 불순물이 훨씬 많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짜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해 남쪽에 소금산이 있어 그것을 채취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는 암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해에서 채취하는 암염은 천일염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천일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염분이 빠져 나가도 돌같은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소금이 사용된 예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2. 식품의 방부제 역할
3. 나쁜 물을 고치는 약제(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4. 제사에서 사용(레위기 2:13. 역대하 13:5. 에스겔 43:24)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5. 정결의식의 소금(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 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6. 언약으로서의 소금 상징(민수기 18:19. 역대하 13: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7. 저주로서의 소금(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스바냐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마가복음 9장 49절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8.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소금
신약에서의 소금은 구약의 다양한 상징을 아우른다.
포괄적 의미로서 상당히 은유적으로 소금을 사용하고 있다.
땅의 소금이란 의미를 신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어떤 맛을 내야 할까요?
네 가지 맛을 생각합니다.
살 맛과 죽을 맛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첫째는 정직(Honesty)
둘째는 근면(Diligence)
셋째는 절제(Moderation)
넷째는 절약(Frugality)
성경속 소금은 '거룩함'의 상징으로 사용
욥기 6장 6절의 ‘Can flavorless food be eaten without salt’라는 말씀처럼 간이 안된 음식을 먹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지닌 미각의 4원미(原味) 중 하나가 바로 짠맛이기 때문이다.
염화나트륨이 주성분인 소금은 짠맛을 내는 흰 결정체로 인간이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물질이었기 때문에 선사시대에 이미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이나 염호, 암염이 있는 장소를 따라 문명이 발달되어 왔고 그 교역이 이루어졌다.
소금을 만드는 집이라는 뜻인 독일어의 할레(Halle)나 할슈타트(Hallstatt), 영어의 -wich가 붙은 Droitwich, Nantwich, 또는 Salt Lake City 등은 모두 소금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로마에서는 소금이 관리나 군인에게 봉급으로 지불되기도 하였는데 봉급을 뜻하는 영어의 salary는 현물급여를 뜻하는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소금물로 사체를 처리하였고 6,7세기까지 작은 어촌이었던 베네치아는 지중해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에 소금을 팔아 번성한 대표적인 도시이다.
소금은 성결과 거룩함의 상징이 되었는데 하나님께 드릴 훈향을 만들 때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 그리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다.
엘리사는 소금으로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골로새서 4장 6절에서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하라’고 하셨다.
소금은 또한 언약을 상징하기도 하였는데 민수기 18장 19절에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또 역대하 13장 5절에는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금은 인체 내의 생리작용을 위한 필수 불가결의 식품이다. 그 이유는 소금이 체내, 특히 체액에 존재하며 삼투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의 피 속에는 0.9%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 중 나트륨은 체내에서 탄산과 결합하여 중탄산염이 되고 혈액이나 체액의 알칼리성을 유지하게 된다.
또 인산과 결합하여 체액의 산. 알칼리의 평형을 유지하는 완충제 역할을 하게된다. 음식에 섞여서 몸 속으로 들어 온 소금은 위액의 염산이 되거나 알칼리성 소화액의 성분이 되어 살균, 소화작용을 돕는다.
따라서 소금의 섭취가 부족하면 소화액의 분비가 줄고 식욕이 떨어지며 장기간 소금의 섭취가 부족하게 되면 전신이 무기력해지고 권태감, 피로 및 정신적 불안과 더불어 철분 부족으로 적혈구가 생성되지 않아 빈혈이 생기게 된다.
또 땀을 많이 흘려 급격히 소금을 상실하면 현기증, 의식혼탁, 탈력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뚜렷한 기능 상실이 일어난다. 반면에 적당한 소금의 섭취는 심장과 신장의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며 새로운 세포를 생성시키는 작용을 도와준다.
그러나 과잉 섭취하면 잘 아는 것처럼 고혈압이나 위암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칼슘의 배설을 촉진시켜 골다공증의 위험이 높아지므로 보통 성인의 경우 하루 6g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비싸지도 귀하지도 않은 소금, 그러나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한 식품인 소금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부탁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의 성경적 의미와 미네랄 소금의 유용성
옛날에는 소금이 귀하였고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봉급’을 영어로 샐러리(salary)라고 한다. 이는 라틴 말 살라리움(salarium)에서 온 용어인데, 그 첫 음절인 살(sal)은 라틴 말에서 ’소금’을 뜻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관리나 군인에게 봉급을 소금으로 지불하던 때가 있었는데, 나중에 그 소금 값으로 주던 급여를 살라리움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금을 주고 노예를 사기도 하였다. 이렇게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한 소금은 지방이나 나라 사이의 주요 교역 물품이기도 하였다. 동양에서도 소금을 작은 금(小金)으로 칭하리만큼 소중하고 필수적인 물질로 이해했다. 이스라엘 땅에는 다행히 "소금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소금 성읍"과 "소금 골짜기"가 있었다. 이는 가나안 땅에서 일찍부터 "소금 바다"를 중심으로 소금을 채취하거나 제조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소금을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섭취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빵을 만들 때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흔히 따로 먹기도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소금 없는 식사는 식사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내려오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소금이 들지 않은 곡식제물(소제, grain offering)은 바칠 수 없었다. 소금은 제물을 보존하고, 소금과 함께 먹음으로써 언약을 확증한다(언약의 소금, the salt of covenant, 레위기 2:13). 또한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burnt offering)" 위에도 소금을 뿌려야 했다(에스겔 43:24).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피워 올리는 향료도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했다(출애굽기 30:35).
이렇게 희생제사(sacrificial offerings)에 쓰이는 소금의 양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성전 안뜰 북쪽에는 소금을 저장해 두는 방도 따로 있었다.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생명을 지속시키고 강화하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먹음은 유대감, 그리고 상호 성실성을 뜻한다(에스라 4:14). "소금 언약"(민수기 18:19, 역대하 13:5).
"소금"은 언약(계약)으로 성립된 관계의 지속성과 변치 않는 충실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소금 계약"은 영원한 계약을 의미한다. 레위기 2장 13절에 나오는 "언약의 소금"은, 제물에 소금을 치면서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상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대의 어떤 전통에 따르면, 성전에서 쓰이는 소금은 옛 소돔 부근에서 추출한 것으로 특별히 짠 사해(死海) 소금만을 쓰게 되어있었다. 유대인들의 재정(財政)이 어려웠을 때에, 당시 유다 땅을 식민지로 다스리던 페르시아 다리오왕과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성전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자를 대어주었는데, 거기에는 소금도 들어있었다(에스라 6:9, 7:22). 소금은 음식의 간을 맞추고 음식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정화((淨化)하는 기능도 가진다. 엘리사가 물을 ’고쳤으니(healed)’도 소금의 정화와 치료 효과를 나타낸다(열왕기하 2:21). 한편 소금에는 양면성(이중성)도 있다. 소금은 위험성과 악성(惡性)도 지니고 있어서, 소금이 과하면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소금은 한쪽으로는 생명의 유지와 강화를 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량과 황폐와 폐허, 불모와 죽음, 그리고 저주를 가리키게 된다(신명기 29:22, 23. 스바냐 2:9). 아비멜렉이 세겜을 함락한 다음에 그곳을 파괴하고 소금을 뿌린 것은 그 지역이 열매도 맺지 않고 사람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될 것을 상징하는 행위의 부정적 의미를 드러낸다 (사사기 9:45).
이러한 소금의 이중성은 새 성전과 새 땅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에도 잘 드러난다.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나와 점차 큰 강을 이루고서는, 사해로 흘러 들어가서 사해의 물을 되살려서(restore), 온갖 동식물들이 생겨나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사해의 "진펄과 개펄(늪과 웅덩이 물)"은 소금 땅이 된다(에스겔 47:1-12). 소금의 이러한 의미들을 담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누가복음 14:34~35).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이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존재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며 경종을 준다.
이렇듯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소금을 적절하게 적정한 곳에 사용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의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네랄 소금의 효능 10가지☆
1. 심혈관 보호
2. 소화 촉진
3. 면역력 강화
4. 탈수 현상 해소
5. 근육통 완화
6. 뼈 성장
7. 해독 살균작용
8. 숙면유도
9. 노화방지
8. 신장기운 강화
9. 집중력 강화
10. 신체 알카리화
깨끗한 해양심층수를 초정밀 필터로 한 번 더 거른 후 ●순간공중결정제염기술로 순간적으로 수분만을 제거하여 눈처럼 모든 ●미네랄이 내려 쌓이게 하는 기술로 미네랄 눈소금을 제조하여 바다의 모든 미네랄을 고스란히 자연 그대로 담은 미네랄 눈소금 섭취가 유용하다. 500ml 생수병에 티스푼(3g)의 미네랄 눈소금을 넣어 아침과 저녁으로 한 병씩 먹어 86가지 정도의 순수 미네랄을 섭취하면 건강에 좋을 것이다.
소금의 언약
인터넷 다국어 성경에서 검색창에 "소금"이란 단어를 입력한 후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 17구절, 신약에서 5구절이라고 합니다.
‘소금 언약’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 3번 나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salt of covenant)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의 언약(covenant of salt)이니라 (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의 언약(covenant of salt)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대하 13:5)’
여호와께 드려지는 헌물엔 소금을 쳐야 했습니다(레 2:13). 아랍 속어에는 ‘우리 사이에 소금이 있다’ 혹은 ‘그가 내 소금을 먹었다’ 등이 있는데 서로에 대한 호의와 우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살균에 의한 방부제 역할을 해서 변치 않는 하나님 언약을 상징하는 데 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소금의 언약’이란 표현은 2번 쓰이는데 레위직과 그 후손(민 18:19), 그리고 다윗의 왕좌와 그 자손(대하 13:5)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구약에 30번(숫자 3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오는 ‘소금’과 달리 신약에 6번(사람의 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오는 소금은 모두 사람, 특히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 9:49절: 영어 킹제임스로를 직역하면 “이는 사람마다 불로 소금 쳐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소금 쳐질 것이기 때문이라”로 되어 있습니다)’ ***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막 9:50)’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 14:34)’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 4:6)’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소금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 3:12)’
구약에서 하나님이 ‘소금의 언약’을 ‘레위직과 다윗 왕국’에 맺으셨었고 신약에선 ‘소금’이란 단어가 주로 제자들에게 쓰였으며 신약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제사장’, ‘하나님의 나라(왕국)’로 일컫는다는 게 참 흥미롭기만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 6: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Kingdom:왕국)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 6)’
이처럼 하나님의 소금 언약은 변치 않고 이어져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과 권능과 왕국(나라)으로 임하실 때까지 이어질 것입니다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새한글)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고, 소금 간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각 사람 하나하나에게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소금이란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항상 은혜로운 말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아들을 사고 잃어버린 교인을 찾아갔을 때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품에 안겼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주님의 위로를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에 막상 어느 날 갑자기 내 아들이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님의 위로를 받으라고 하면 그 마음에서 불같이 솟구치는 원망은 니 자식이 죽어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하고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프린스톤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이상현박사가 그의 아들을 사고로 잃었을 때 한인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찾아와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한 후에 모두 떠났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찬송을 불렀는지 무슨 성경을 읽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료 미국인 교수가 찾아와서 나는 저 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을테니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하고는 매일 저녁 응접실에 와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더랍니다.
처음에는 저 친구가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일까? 하고 의아심을 갖게 되었는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그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참된 심방이 무엇인지도........
한국교회 성도들은 말을 많이 하려고 한다.
그러나 참된 위로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아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라는 것을 ......
땅에서 크게 보였던 빌딩과 도로, 산, 넓은 들도 하늘에서 보면 참으로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별로 높은 곳에서 보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몹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창문 밖을 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 5:8-9)
땅의 생각과 하늘의 생각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연약함’에 대한 오해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연약함을 부정하고 변호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연약함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자기 연민에도 빠집니다. 누가 자기 약점을 아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을 숨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다보니 강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그들을 향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시기나 분노를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의 약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이 가장 강한 근육인 환도뼈 근육을 다친 후 평생 다리를 절게 됨으로 그 연약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대군과 싸우게 하셨을 때, 가장 작은 지파의 가장 약한 집에서 제일 작은 자, 기드온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실패가 아니라 그 연약함으로 다른 사람을 더욱 격려할 수 있는 사명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자’라고 생각했던 사울이 세상의 큰 것들을 다 버리고 ‘작은 자’ 바울로 변화된 후,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는 사도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제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오히려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 강해짐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약한 것들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연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은총의 수단이었습니다. 바울의 비밀은 남과 비교했을 때 강해 보이는 그의 학식이나 가문의 힘이 아니라 그의 약함으로 함께 하신 주님의 성령이었습니다.
연약함은 죄가 아닙니다. 나의 재능의 한계, 기질과 성격의 약점, 어린 시절의 아직 아물지 않은 고통의 상처 등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면 연약함은 오히려 주님 능력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함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을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나의 장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점에 대해서 솔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여러 약함에도 불구하고 위를 바라보며 변치 않는 하나님의 원칙 안에서 승리의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땅, 육지, 세상
성경의 세계관에 따르면 세상 the world 이란 우주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사람이 사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헬라어 게(ge)는 원래 하늘(→ Heaven)과 바다(→ 물 water)로부터 '땅' land과 '토양' soil을 구별시키는 데에 사용한 말인데 특히 사람이 살고 일하는 지역이나, 이 지역의 부분으로서의 '지방' country을 가리키는 말로 잘 사용되었다.
정치적인 의미보다 이 단어가 지닌 지리적인 의미가 강조될 경우에는 헤오이쿠메네(he oikoumene)가 더욱 흔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한 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지역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상기한 두 단어는 모두 명백하게 구체적인 의미로 적용이 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코스모스(kosmos: 세계 world)라는 단어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부대적 의미를 띤다.
종종 영어 관용어적인 용법에 따라서 모두 '세상 world'으로 번역해야 할 경우가 있음에 유의하라.
gh', 1093(ge: 게). 땅 earth, 세상 world.
ejpivgeio", 1919(epigeios 에피게이오스). 땅의 earthly.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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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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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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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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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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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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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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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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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땅(마2:6, 막2:10, 행1:8), 세상(마5:13, 9:6, 막9:3), 흙(마13:5, 막4:5), 뭍(막6:47), 육지 (마4:1, 눅5:3, 요21:8), 지구(눅21:35), 지면 (계20:9), 천하(계16:14).
ἐπίγειος, ον 스트롱번호 1919
어원 / 1909와 1093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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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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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용사] 땅에 속한, 고전15:40, 몸에 대하여, 고후5:1, 약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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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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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τὰ ἐ. : 세상적인 것, 요3:12, 빌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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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οἱ ἐ. : 땅에 있는 사람들, 빌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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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땅의, 땅에 속한(요3:12, 고전15:40, 빌3:19), 땅 위의(약3:15).
1. 고전 헬라어 문헌
1. 게(ge:)는 '지구' earth나 '세상' world을 가리키며; '물' water과 대조되는 '땅' land을 가리키며; 또한 지구의 한 부분, 육지의 한 부분, 개간 가능한 토양을 가진 들을 가리킨다. 단일국가에 의해서 지배되는 지역이라는 의미의 '영토' land라는 말은 상기한 자연적인 의미와 병행해서 유추되어진 것이다.
2.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의하면 게(ge:)와 우라노스(ouranos: 하늘 sky)는 가장 오래된 신들 중에 포함된 것들이었다.
이 신들은 호머(Homer)의 서사시에 나오는 신들처럼 상상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게(ge:)는 여성으로서 몸의 반은 지면으로부터 솟아나와 있었다.
씨와 비를 흡수하는 그녀는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근원적인 모태이었다.
구약성경
70인 역본에서 게(ge:)를 2,000회 이상 사용하였다.
70인 역본에서나 신약에서는 이 단어에 신성 divinity을 뜻하는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땅은 그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했다(참조: 창 1:1 이하).
히브리어 에레츠('erets)도 상기한 고전 헬라어 문헌 1번의 경우와 매우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그것이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언제나 강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용법은 구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것이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는 게(ge:)가 도합 248회 사용되었으며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계시록에 흔히 나타난다.
먼저 이 단어는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토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 마 13:5).
또한 사람이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흙을 가리킨다(막 8:6).
이것은 물과 대조되는 대상이다(“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마 14:24).
모든 육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남방 여왕이 …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 마 12:42;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은 “땅 끝까지[헤오스 에스카투 테스 게스, heo:s eschatou te:s ge:s] 가야만 한다”, 행 1:8).
심판하는 천사들이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통제하고 있다(계 7:1; 참조: 마 24:31). 요나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땅속(마 12:40)에 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땅속(마 12:40)에 있게 될 것이다. 땅밑(카타크도니오스[katachthonios], 빌 2:10; 참조: 출 20:4)에도 역시 생명의 영역이 있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땅은 피조된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들은 결코 고대세계의 관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1. 이 단어가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마다 역사적인 의미를 띠는 용례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유다의 땅(마 2:6), 이스라엘의 땅(마 2:20), 미디안과 애굽의 땅(행 7:29; 행 7:36) 등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p.1-547*) 흔히 판단하기 어려운 사례는 어느 특정한 문구가 특정한 나라, 특히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이 사는 땅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oikoumene:). 현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대단히 특이한 방법으로 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파사이 하이 휠라이 테스 게스(pasai hai phylai te:s ge:s, 마 24:30; 계 1:7)라는 구절은 슥 12:10-14과 같은 배경하에서는 “땅의 모든 족속들”(all the tribes of the land)을 뜻하게된다. 한편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막 13:27)라는 특기할 만한 표현은 땅 전체를 뜻하는 말이며 구약성경에 있는 두 개의 문장, 즉 시 19:6(7)과 신 13:7을 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참조: 신 30:4; 렘 12:12). 고전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땅의 끝과 하늘의 끝은 일치하게 된다.
2. 땅과 → 하늘은 둘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마 5:18; 마 24:35). 그러나 그같이 사라지므로써 그것들은 “새하늘과 새 땅” (계 21:1; 벧후 3:13)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은 현재의 죄악에 찬 세계 질서가 사라짐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겪음으로써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물리적인 영역에 가장 먼 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약속이며(마 5:5) 이 지상의 왕국은 하늘의 왕국, 다가오는 세대의 세계의 왕국, 다가오는 구원된 피조물의 왕국과 같을 것이다(참조: 롬 8:21).
특별히 종말론적인 내용의 구절들에서, 하늘과 땅은 함께 창조주의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사 66:1, 마 5:34이하, 그리고 행 7:49 등과 같이 구약적인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핵심구절들에 근거해서 양자 사이에도 구별이 되어지고 있다. 즉 땅은 불완전한 것(히 8:4이하), 죄(막 2:10; 계 17:5), 그리고 죽음(고전 15:47)의 장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것에 자신들의 마음을 두어야만 한다(골 3:2). 또한 그들은 '땅에있는 지체'(골 3:5)를 죽여야만 한다(골 3:5 RV).
3. 에피게이오스(epigeios)는 신약성경에서 7회 사용되었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땅 위에'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으로 구분시키는 이중성(dualism)과도 연관이 되어 “이 세상의, 땅을” 뜻하기도 한다(고전 15:40; 고후 5:1; 빌 3:19). - R. Morgenthaler.
oijkoumevnh, 3625
oijkoumevnh, 3625(oikoumene: 오이쿠메네). 땅, 지구 earth.
1. 고전 헬라어 문헌.
오이쿠메네(oikoumene:)는 상기한 명사 게(ge:)를 의미상 포함하고 있으며 오이케오(oikeo:: 거주하다 inhabit)의 현재분사 수동태형이다.이 단어의 의미는 사람이 살고 있는 (땅) the inhabited (earth)이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B. C. 4세기) 이후로는 헬라인들이 살던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이는 야만인들(barbarians)이 거주하던 땅과 대조되는 개념이었다.
(b)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 C. 4세기) 이후로는 소위 야만인들이 거주하던 지역까지 포함하는 거주지역 전체를 가리켰는데 이는 불안정한 지역이 아닌 정착한 곳이라는 의미였다.
(c) 로마시대(B. C. 2세기 동방 정벌 이후)에는 로마치하의 땅(imperium Romanum)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환언하면, 원래 지리 문화적 개념이었던 것이 로마시대에 와서 정치적인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네로(Nero) 황제는 오이쿠메네(oikoumene:)의 유에르게테스(euerge:tes: 은인 benefactor)와 소테르(so:te:r: 구원자 saviour)라는 칭호로 불렸다(→ 구원 Salvation, art. so:zo:).
2. 구약성경.
70인 역본은 이 단어를 도합 46회 사용하였는데 특히 시편(15회 사용되었음. 그러나 코스모스[kosmos]는 전혀 사용되지 않음)과 이사야서(15회)에 자주 나타난다. 시편에서는 명백히 고백문적인 형식의 표현에서 종종 발견된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시 9:8; 시 67:4 [5]; 시 96:13; 시 98:9);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4 [5]; 시 72:8);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시 24:1; 시 98:7; 참조: 사 34:1); “세계의 모든 거민은 …”(시 33:8; 시 49:2 [1]; 참조: 애 4:12). (p.1-548*) 이사야서에서는 특히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 중에서 나타나는데 13, 14, 23장 등에서 볼 수 있다(사 10:14; 사 10:23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요컨대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the inhabited world이다(상기한 고전 헬라어 문헌의 (b)를 보라). 이러한 개념은 출 16:35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들이 방랑하는 광야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땅, 즉 정착 가능한 땅으로 다시 들어온다. 사 62:4의 70인 역본은 히브리어 본문과 다르다: “네 땅이 거처하는 곳으로 불리리라”(Your land shall be called Inhabited[오이쿠메네]).
3. 신약성경.
오이쿠메네(oikoumene:)는 신약성경에서 총 15회 발견되었는데 주로 누가복음(8회)과 요한계시록(3회)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헬라어 상용어법의 경우처럼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inhabited world라는 의미로 쓰이는가(O. Michel TDNTV 157 이하)아니면 정치?제국적인 의미의 용례가 지배적인가(M. Paeslack, Theologia Viatorum 2, 1950, 33 이하)? 눅 2:1에서는 명백히 후자가 주가 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는 전체 오이쿠메네(oikoumene:), 즉 그가 통치하는 전체 영토의 인구조사를 명했다고 한다. 또한 계 3:10; 계 12:9; 계 16:14에서도 이 단어는 정치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오이쿠메네(oikoumene:)는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이유, 그러나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악마의 세력 아래서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가진 거주지역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유혹에 관한 기사에서 마찬가지의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눅 4:5에서 코스모스(kosmos) 대신 오이쿠메네(oikoumene:)를 사용한 것은 - 비록 '세상의 왕국'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로마제국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 강한 정치적인 색조를 시사해 준다. 눅 21:26; 행 11:28, 그리고 계 3:10 등에서는 이 말이 계시적인 예언 속에서 사용되었다. 행 17:6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가 '천하(오이쿠메네: oikoumene:)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황제를 대항하여 행하여지는 정치적인 범죄라고 공격 당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행 19:17; 행 24:5에서도 바울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자라고 불렸다는 기사가 있다. 행 24:5에서는 바울이 로마의 총독 앞에서 고소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히 1:6에서는 이 단어가 상용 헬라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히 2:5에서는 도래하는 세계 미래의 오이쿠메네(oikoumene:)로 묘사하고 있다. 마 24:14에 사용된 오이쿠메네 역시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바울이 롬 10:18을 제외한 곳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동절에서 바울은 70인 역본의 시 18:5(시 19:4)을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여전히 국가를 누가복음이나 계시록보다 호의적으로 보고 있어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을 피했던 것일까? 우리는 패슬라크(M. Paeslack)의 결론에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오이쿠메네(oikoumene:)는 '기독교인들의 교제' the fellowship of Christians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엑클레시아<ekkle:sia>가 이 같은 의미를 나타낼 것이다. → 교회 church) '어둠의세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던 그리이스 로마제국이라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Op. cit., 4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이쿠메네(oikoumene:)가 교회가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오이쿠메네(oikoumene:)는 교회가 상주하는 지역이며 교회가 주님을 구하는 지역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주님은 오이쿠메네(oikoumene:)에 '장자' firstborn로서 오셨으며 따라서 그것의 합법적인 지배자가 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내성적이며 동시에 보편적 ecumenical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용어상으로도 모순이다(W. A. Visser't Hooft, The Meaning of “Ecumenical”, 12). - O. Flender.
ajgrov", 68
ajgrov", 68(agros 아그로스). 들 field.
a[grio", 66(agrios 아그리오스). 들의 of the field, 야생의, 거친 wild.
1. 고전 헬라어 문헌
일반 헬라어의 정상적인 용법에 의하면 아그로스(agros)는'경작된 땅의 한 부분' a piece of cultivated land을 뜻한다. (p.1-549*) 그러나 시(市)와 대조되는 '시골' countryside을 지칭할 수도 있다. 형용사 아그리오스(agrios)도 명사와 같이 이중적인 의미를가진다. 때로는 들에서 발견되는 짐승이나 나무, 혹은 농작물 등을 수식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더욱 흔한 의미로는 '야생의, 거친 wild'으로서, 인간이 거주하는 구역을 벗어난 지역이나 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 후자의 의미로 쓰일 때에는 흔히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사람(야만적인 savage, 난폭한 fierce)이나 사물, 그리고 환경(잔인한 cruel, 거친 harsh)에 적용된다.
2. 구약성경
상기한 용법 중의 대부분은 70인 역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이 소유하였든지(창 23:9; 왕상 2:26) 혹은 공동체가 소유하였든지 간에(레 25:34; 룻 1:1-2) 어떠한 땅이라도 경작 중이면 아그로스(agros, 예: 출 8:13; 민 12:22; 룻 2:2)라고 불려졌었다. 동시에 아그로스는 마을의 경계 바깥에 위치한 경작되지 않은 공활지(예: 신 22:27; 삼상 30:11)를 가리키기도 했는데 이런 곳에서 여행자들은 곰이나 사자, 암사슴(호 13:8; 렘 14:5)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런 짐승들은 자연히 아그리오스(agrios), 즉 '사나왔다' wild(욥 6:5; 시 79:14). 70인 역본이나 다른 유대 문헌에서 형용사가 비유적인 의미로 쓰여 사람을 수식하는 용례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악한' malignant 종기(레 21:20; 신 28:27)라든지 '난폭한' wild, 물결(지혜서 14:1) 같은 표현은 찾아볼 수 있다.
3. 신약성경
아그로스(agros)는 복음서에만 30회 나타나며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오직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용례들 중 18번은 경작 중이거나 경작할 땅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예: 마 13:24; 눅 14:18; 행 4:37). 아그로이(agroi)는 농사가 있는 시골을 뜻할 수 있다(눅 9:12). 형용사 아그리오스(agrios)는 막 1:6과 그 병행 구절에서 “개방된 들에서 발견되는”(found in the open field)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유 1:13에서는 '거친' wild 바다 물결을 나타내는데 쓰였다.
cou'", 5529
cou'", 5529(chous 쿠스). 토양, 땅 soil, 흙, 먼지 dust.
*****(choikos 코이코스). 흙으로 만든 made of soil.
1. 고전 헬라어 문헌
명사 구스(chous: 케오[cheo:]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인데 케오는 액체를 붓다 pour, 또는 [흙을] 던져 올리다 throw up [earth]라는 의미의 동사이다)는 고전시대 역사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나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파헤쳐지거나 쌓아 올려진 흙을 묘사하는데 쓰인 말이다. 형용사 코이코스(choikos)는 필로(Philo)의 시대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2. 구약성경
쿠스(chous)는 70인 역본에서 '진흙' dirt, '먼지' dust라는 의미를 가지고 히브리어 아파르('apar)의 역어로서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적으로는 종종 작고 가치 없는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예: 시 34:5; 사 17:13; 참조: 스 4:10). 패배한 적들은 굴욕스럽게도 쿠스(chous)를 빨아야 했다. 또한 회개하는 자나 상(喪)을 당한 자는 슬픔에 잠겨 쿠스를 그들의 머리 위에 붓곤 했다(수 7:6; 애 2:10). 하나님께서 쿠스(chous)로써 인간을 만드셨다는 기사는 의미 깊은 보도이다(창 2:7; 시 102:14). 또한 인간이 죽어 들어갈 곳도 쿠스(chous)인 것이다(전 3:20; 전 12:7). 형용사코이코스(choikos)는 70인 역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로(Philo)가 코니스(konis: 먼지 dust)라는 말과 함께 이 단어를 한번 사용하였다.
3. 신약성경
쿠스(chous)는 신약성경에 2회 나타나는데 한번은 길의 '먼지' dust(막 6:11)를 가리켰고 나머지 한번은 슬픔의 표시로서 머리에 뿌려진 '흙' dirt(계 18:19)을 가리켰다. 코이코스(choikos)는 고전 15:47-49에서만 4회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바울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참조: 창 2:7)과 예수를 구별하고 있다. 두 번째 사람 the second man인 예수의 근원은 하늘에 있지 땅에 있는 earthly 것이 아니다. 참조: Philo, Op. Mund. 134이하, All. 1, 31이하; TDNT Ⅸ 474이하.
- D. H. Field. (p.1-550*)
kovsmo", 2889
kovsmo", 2889(kosmos 코스모스). 질서 order(고전 헬라어에서), 꾸밈, 장식 adornment, 세계(세상) world.
kosmevw, 2885(kosmeo: 코스메오). 배열하다 arrange, 정리하다, 질서 있게 두다 put in order, 꾸미다 adorn.
kovsmio", 2887(kosmios 코스미오스). 존경할만한 respectable, 명예로운, 고상한 honorable.
kosmikov", 2886(kosmikos 코스미코스). 땅의, 세상의, 세속적인 earthly, worldly.
1. 고전 헬라어 문헌
1. 명사 코스모스(kosmos)는 호머(Homer) 이후로 그 용례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원래는 '건설, 건축' building, construction을 뜻하는 말이었다(예: Homer, Od., 8, 492; Hdt., 3, 2). 그러나 더 특징적인 용법은 '질서' order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일반적인 의미의 질서(예를 들면 호머의 일리아드와 카타 코스몬[kata kosmon: 정연하게, 바르게]라는 구절)와 구체적인 의미의 질서(예: 노 젓는 이들이 앉는 위치 Od., 13, 76이하; 전투 태세를 위한 정열, Ⅱ., 12, 225; 후에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삶의 규정, 제도, Plato, Leg., 8, 846d), 또는 종종 장식 ornament. Adornment을 뜻하기도 하였다(특히 여인들의; 예: Hom. Ⅱ., 14, 187; Hes., Works 76; Hdt., 5, 92).
헬라 철학(아래의 2를 참조)에서 코스모스(kosmos)는 근본적인 용어로 등장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세계 질서 world-order, 세계의 체계 world-system, 이러한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사물의 총체,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세계' the world, '우주' the cosmos(universe), '땅' the earth과 그 거민들(코이네 헬라어에서), 인류 → oikoumene:.
동사 코스메오(kosmeo:)는 '질서' order라고 하는 코스모스(kosmos)의 근본적인 의미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서 전문용어로 사용되었고 다음과 같은 뜻을나타낸다: 군대를 지휘하다, 전투대형을 갖추다(Homer, Ⅱ., 2, 554; Xen. Cyr., 2, 1, 26), '조직하다' organize, '정렬시키다' put in order. 또한 매우 드물게는 '장식하다' adorn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예: Hesiod, Works, 72).
2. 헬라 철학의 코스모스 개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배경 위에서 고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개별적인 사물들이 상호 충돌?모순(하늘과 땅; 하나님, 인간과 생명체들) 되면서도 어떻게 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가?이에 대한 답변은 이 전체 사물들이 전포괄적 질서(참조: Anaximander, Frag. 9)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세계 질서' world-order가 코스모스(kosmos)라는 말로 표현되며 이것은 더 나아가 공간적인 의미의 '세계' the world를 가리키기도 한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소우주' microcosm(Frag. 34)이다. 이 원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질서를 인식하게 만들며 그것의 아름다움과(Heracl., Frag. 124) 천체의 형태와 그 원형 운동의 완전성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a) 플라톤(Plato)은, 우주의 기원이 데미우르게 Demiurge(→ 창조 Creation, art. de:miourgos)에 근거한다고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었다. Demiurge(조물주)란 완전히 생물체의 개념에 따라서 세상을 형성했다는 자를 말한다(TDNT Ⅲ 875; 참조: Tim., 28이하). 플라톤의 생각에 의하면 우주는 생명체인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신의 현현이었다. 우주란 피조물이나 창조물이 아니라 모사 copy라는 것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거의 2,000년 동안이나 서구를 풍미했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세계는 원형의 땅덩어리이며, 원형의 우주 한가운데에 붙박혀 있는 다양한 층을 가진 천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Cael., 2, 2p. 285a, 32). 우주 cosmos란 공간과 시간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의 총체이다. 우주 너머에는 하나님의 투명한 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않으며 불변의, 따라서 완전한 생명을 지속시키는 곳이다. 신이 세상을 조성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만을 명상하는 순수 → 이성 Reason(누스<nous>)이다. 신은 모든 것을 움직이지만 자신은 부동(不動)이며 세사(世事)에 간섭하지 않는다.
(c) 스토아 학파는 자신들의 우주관을 영원회귀동일 eternally returning sameness 사상과 연결시켰다. 이 사상은동방의 점성술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p.1-551*) 즉, 우주의 기원은 새로운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것의 회복(apokatastasis, → 화해 Reconciliation)이다. 전우주가 타서 없어지는 것이 그 끝이 아니다. 우주적 재생 cosmic rebirth 속에서 새롭게 소생하는 것이다(→ 출생 Birth, art. palingenesia).
(d) 신 플라톤주의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이원론이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예지계(the intelligible world: 코스모스 에케이노스[kosmos ekeinos: 저 세계 that world])와 형상계(the world of appearances: 코스모스 후토스[kosmos houtos: 이 세계 this world])는 서로 상반된다. 경험세계가 악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플로티누스(Plotinus)는 그 세계의 크기와 질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현세계의 원형인 참된 우주는 얼마나 더 칭송할만 하겠는가(Enneads, 5, 1, 4: 5, 8; 3, 2, 2이하; 참조: H. Sasse, TDNT Ⅲ 879).
헬레니즘 시대에는 동방의 우주론들이 그리이스 문화권에 흡수되었는데 이때는 우주가 마치 외국처럼 여겨졌다. 우주는 더 이상 조화로운 단일체가 아니었고 두 개의 영역: 즉, 낮은 지상의 세계와 별들의 세계로 구분지어진 것이다. 땅 위에 일어나는 일은 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좌우되었다. 인간들의 노력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우주관에는 어느 정도 상충하는 이론들이 있다. 하나님과 세계관의 구별은 절대적이 되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악마적인 힘이 빛 원소 light-elements의 도움을 받아 어둠의 혼돈으로부터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빛의 세계의 구성(構成)을 흉내 낸 것이다. 하나님은 비세상적이며 우주는 신성의 모든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우주는 순전히 물질적이며 육적인 즉, 악의 → 충만 Fullness(ple:ro:ma)인 것이다(Corp. Herm., 6, 4). 따라서 우주는 외지(外地)일뿐 아니라 선재하는 pre-existent 인간의 영혼이 자유를 갈망하는 감옥이기도 하다. 이 자유를 위해서는 하늘에서 온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신다. 그러나 코스모스(kosmos) 역시 신화적인 상징일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Corp. Herm., 8, 5). 또한 코스모스는 생명력이 있는 유기체라고까지 여겨진다. 이때의 코스모스는 하나님의 영상 image이며 인간이 코스모스의 영상이 된다(Corp. Herm., 10, 11).
2. 구약성경
1. 70인 역본에서 나타나는 이 단어의 용례는 다음과 같은 분포를 갖는다: 히브리어 아디('adi: 장식 ornaments)의 역어로서 7회(예: 렘 2:32; 렘 4:30) 사용되었고 켈리(keli: 장식 ornaments, 보석 jewellery)의 역어로서 1회(사 61:10), 티페렛(tip'eret: 장식 ornament. decoration)의 역어로서 2회(잠 20:29; 사 3:18), 또한 차바(tsaba': 천체군 the hosts of heaven and earth, 별)의 역어로서 5회(참조: 창 2:1; 신 4:19). '세계' world라는 의미의 코스모스(kosmos)는 70인 역본의 후기 역서들 가운데에서만 발견될 뿐이다(지혜서에 19회, 마카베오 이서에 5회, 마카베오 사서에 4회). 아마도 유대?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있는 헬라어의 어법으로부터 이 같은 의미가 채용되었을 것이다.
2. 구약성경에서는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와 부합되는 세계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우주를 하늘과 땅 heaven and earth이라고 부르며 후기의 문서에서만 학콜(hakko:l: 문자적인 의미는 전부?모든 것 the all), 즉 우주 the universe라고 부르고 있다(렘 10:16; 시 103:19; 관사 없이[ko:l] 사용된 구절로는 사 44:24; 시 8:7). 구약성경에는 상기한 대로 문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헬라적인 개념마저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세계 the world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항상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 있는 것이다(→ 창조 Creation). 창 1:1-2:4a의 창조기사는 깊음 the deep과 물(태초의 홍수와 어둠을 뜻함), 궁창, 하늘의 태양과 별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론 cosmology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진술이 뜻하는 유일한 목적은 혼돈 chaos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다. 또한 창 2:4b-25의 진술에서 주안점이 되고 있는 인간의 창조가 그 명백한 목적이다. 인간의 소명은 세상에서 행하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께 근거해 있음을 인식하고 또한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다(1:26, 28; 2:15, 19; 참조: 시 18). 첫 번째 기사는(두 번째 기사만큼) 내재하는 세계질서를 묘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다. (p.1-552*) 오히려 인간과 세계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표현하고자 한다.
성경기자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기록함으로써 찬양하고자 한 대상은 그와 같이 만들어진 세계 the world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시고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인 것이다(참조: 시 33:65; 시 136:148; 암 4:13; 암 5:8; 암 9:5이하).
3. 구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세계의 상(像)이 여타의 다른 세계상들과 공통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의 세계상은 동시대의 동방사상을 재료나 뼈대 framework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수용하여 그 자신의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선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 하늘 Heaven의 궁창(raqia')은 아래에 있는 물과 위에 있는 물을 구분시킨다(창 1:6이하). 이 궁창을 '기둥' pillars이 받치고 있고(욥 26:11; 참조: 시 104:3), 별들은 발광체로서 그 속에 붙박혀 있다(창 1:14이하; 창 1:17).
지구는 때로 원반으로 묘사되었고 그 중심점에 중앙 성전(삿 9:37; 겔 38:12; 참조: 에녹서 26:1)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원반형의 지구 역시 기둥 pillars에 의지하고 있거나(욥 9:6; 참조: 시 104:5; 삼상 2:8) 혹은 허공에 달려있다(욥 26:7)고 믿어졌다. 그것의 아래와 위에 있는 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었다(창 1:7; 창 7:11; 창 49:25; 출 20:4; 신 33:13; 잠 8:27이하).
구약성경의 신학적 언명(言明)들은 이 흔한 상(像)을 사용한다. 하늘 - 겔 1:22이하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나타나 있다 - 과 물(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Tiamat처럼)은 짐승들이 거하는 곳이다(욥 3:8의 리워 야단 Leviathan; 시 74:14; 사 27:1; 시 89:10의 라합; 암 9:3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 밑에 두신 뱀).
지하세계인 세올(she'ol: → 지옥 Hell)은 죽은 자들의 왕국이며 그곳으로부터는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욥 10:21). 현대의 종교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은 이러한 지하세계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 사변적인 윤색을 거부한다.
자연과 우주의 여러 실체들, 그리고 요소들 elements은 독립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되어진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신화적인 우주론적 요소를 절대 자유와 융합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 요소를 신학적?신비적인 진술에 연합?복종시킴으로써 비신화화 시킨다.
4. 필로(Philo)는 코스모스(kosmos)라는 단어를구약성경에서 보다 훨씬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다만 그는 상호 모순되는 진술들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코스모스 노에토스(kosmos noe:tos)와 코스모스 아이스테토스(kosmos aisthe:tos)를 구별하고 있는데, 전자는 마음 the mind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며, 후자는 감각 the senses으로 파악되는 세계를 말한다(Op. Mund., 25). 또한 필로는 후자의 세계를 '이 세계' this world(Rer. Div. Her., 75), 또는 '보이는 세계' visible world(Op. Mund. 16)라고도 불렀다. 동시에 그는 오직 하나의 코스모스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필로는 코스모스를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코스모스의 아버지라는 신관에서 출발하여(Vit. Mos., 2, 134) 그는 코스모스를 휘오스 데우(hyios theou: 하나님의 아들?아이 son or child of God)라고까지 불렀다(Ebr., 30; Deus. Imm, 31). 이러한 사상들은 이집트의 헬레니즘 영지주의에 의해서 수용되고 발견되었다.
5. 헬레니즘 유대교 Hel. Judaism(헬레니즘의 영향을 입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 원래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되던 히브리어 올람('olam: 시대 age, 참조: 아람어 'alema'; 긴 long, 먼 far off; → 시간 Time, art. aio:n)이 코스모스(kosmos)가 지닌 공간적인 의미를 취득하게 되어 '세계' world, '우주' universe, '인간세계' world of men, 오이쿠메네(oikoumene:)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4 Esd. 시대 이후). 올람('olam)은 사해 두루마리 사본에서 여전히 시간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만 랍비 문서에서는 '세계' world라는 공간적인 의미가 점점 더 흔하게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세상의 주' Lord of the world, 또는 '세상의 왕' king of the world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명칭 중 가장 애용하는 것들이다. (p.1-553*)
이 같은 의미의 변화는 특히 성숙한 유대교에 영향을 끼쳤으며, 두 시대 Two Ages에 관한 유대 계시적 교의(→ 시간 Time, art. aio:n)와 더불어 세계관을 개선시켰다. 이 세계 the world는 이 세대 this age와 마찬가지로 랍비 문서에서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사탄과 죄, 그리고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것으로 묘사되었다(참조: SB Ⅳ 847이하).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즉각적으로 현존하는 코스모스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절하를 몰고 온다. 그러나 유대교가 창조에 관한 신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채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3. 신약성경
1. (a) 신약성경에서도 일반 헬라어나 헬레니즘 유대교에서와 같이 명사 코스모스(kosmos)가 뜻하는 바는 세계 the world이다. 유일한 예외가 벧전 3:3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장식?꾸밈' adornment을 뜻하고 있다. 이 단어는 총 185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78회는 요한복음에서, 24회는 요한의 서신들 중에서, 47회는 바울서신에서, 14회는 공관복음서에서 쓰였으며 22회는 신약성경의 나머지 문헌들 중에서 사용되었다. 이같이 자주 사용된 사실로 미루어서 이 단어의 신학적인 중요성과 그 상충 confrontation되는 영역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서가 헬라의 사상과 접촉할 때마다 코스모스(kosmos)의 개념이 해명될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b) 형용사들은 드물게 발견되는데 그것도 신약성경의 후기 문서들에서만 발견된다. 코스미오스(kosmios)는 '명예로운' honourable, '고결한' virtuous, '존경할만한' respectable이라는 뜻을 가지며 딤전 2:9; 딤전 3:2에서만 볼 수 있다. 코스미코스(kosmikos)는 '현세의?세속적인' earthly?worldly이라는 뜻을 가지며 딛 2:12; 히 9:1에서만 볼 수 있다.
동사 코스메오(kosmeo:)는 총 10회 사용되었고 '정돈하다' put in order(마 25:7, '깎아 다듬다' trim라는 의미이다), '장식하다' decorate, adorn(예: 마 12:44; 단 2:10)라는 뜻을 지닌다. 이 동사의 의미는 '장식' adornment, 더 중요한 의미로는 질서 order라는 코스모스(kosmos)의 기본적인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2. '세계' world라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명사 코스모스(kosmos)가 갖는 용법을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뉘앙스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a) 그것은 우주 the universe를 가리킬 수 있다(예: 행 17:24; 참조: 타 판타[ta panta: 모든 것, 만물 everything, all things]라는 구절도 피조물의 전체인 세계를 뜻한다, 참조: 요 13).
(b) 그것은 또한 인간들이 사는 장소나 영역으로서의 세계, 지구 the earth, 오이쿠메네(oikoumene:)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로 쓰인 것은 공관복음서에도 전례가 있다. 즉 막 8:36의 “온 천하 the whole world를 얻고도 …”라는 표현이나 마 4:8의 천하만국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이라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참조: 눅 4:5에 나오는 '오이쿠메네의 모든 왕국들', 한글개역에는 '천하 만국'이라고 번역되었다).
'세상에 오다' come into the world(요 1:9; 요 3:19 등), '세상에 있다' be in the world(요 1:10; 고후 1:12 등), 그리고 '세상에서 나가다' go out of the world(고전 5:10)라는 표현들도 이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c) 마지막으로 이 명사는 인류 humanity, 인간의 세상(참조: 요 3:19; 고후 5:19)을 가리키며, 특히 바울과 요한은하나님의 구원행위가 베풀어지는 장소, 그 구원행위의 대상으로 묘사하였다.
3. 벌써 바울 당시에 코스모스(kosmos)라는 용어에는 전형적으로 인류학적이며 역사적인 각인이 새겨졌다.
(a) 세계의 진리는 → 사람 Man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인간의 → 타락 Fall으로 말미암아 → 죽음 Death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롬 5:12이하). '온 세상' the whole world(즉, 인간의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롬 3:19). 피조된 세계(롬 8:20-22, 문자적으로는 창조물의 전체 the whole of creation)마저도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고 그래서 해방을 갈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코스모스(kosmos)는 또한 무익한데 굴복한 모든 피조물(→ 창조 Creation)이다. 원래 이러한 세계 이해가 말로 표현된 곳은 바울이 이 시대(호 아이온 후토스[hoaio:n houtos], 참조: 고전 3:19; 고전 5:10; 엡 2:2)에 대한 유추적인 표현으로서 이 세상(호 코스모스 후토스[ho kosmos houtos])에 대해 진술했던 대목에서이다. (p.1-554*) 하나님의 → 심판 Judgment은 현 시대(→ 시간 Time, art. aio:n)에 속해 있는 이 코스모스(롬 3:6)에 떨어진다. 무익과 결핍의 위협을 받는 현 세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코스모스(kosmos)라는 단어가 어느 정도 공헌하는가 하는 것은, 미래의 구원 받은 세계가 결코 코스모스(kosmos)라고 불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왕국 Kingdom)' kingdom of God, 혹은 '새 하늘과 새 땅' a new heaven and a new earth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다가올' 코스모스, '미래의' 코스모스, 혹은 '저' 코스모스 등과 같이 '이 코스모스' this cosmos(호 코스모스 후토스[ho kosmos houtos])에 해당되는 구절은 없다. 하나님과 코스모스(kosmos)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b)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곳은 이 세상, 다름 아닌 바로 → 죄 Sin와 → 멸망 Destruction의 구렁으로 빠져 버린 이 세상인 것이다(고후 5:19이하) 그리고 그 형적(→ 모양 Form)이 지나가버린 이 코스모스에서(고전 7:31) 그리스도의 → 교회 Church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표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몸 Body).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결정된다. 그것은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요 무조건적인 굴복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코스모스 안에서 사는 만큼(고전 5:10; 빌 2:15) 세상과의 관계는 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세상과 하등의 관련이 없는 듯해야 하는 것이다(고전 7:29이하). 교회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 속해 있으나, (“…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그들 자신은 코스모스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전 3:21이하). 따라서 세계는 이제 복종과 신앙의 지속을 위한 도장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에 대해 자신이 담당해야 할 모든 책임과 세상과의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자유 속에 여전히 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과 세상의 규정들에서도 자유하기 때문이다(고전 7:20이하; 참조: 마 17:24이하).
(c) 골로새인들은 초기의 기독교가 코스모스(kosmos)라는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정사와 권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패배당했다(골 2:15). 그러므로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어떠한 요소도 의식적인 축하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2:8, 20a). 그리스도를 통하여 코스모스의 요소들에 대해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코스모스 안에” 살지 않고(2:20b), 코스모스의 법칙과 압박에 대한 굴복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4. 요한: 불트만(R. Bultmann)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은 다음과 같은 영지주의의 개념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세계 내의 미아라는 인간의 피상실성, 빛과 어둠?하나님과 세계라는 이원론, 하늘로부터의 예수의 강림과 진리 속에 있는 자들의 응답(The Gospel of John, 1971, 7이하). 그는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세계간의 관계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영지주의와는 달리 세계와 인간의 상실에 대한 우주론적인 결속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 - 세계라는 이원론은 코스모스에 내재하고 있는 질(質)로서의 코스모스의 악성(惡性)에까지 소급하지는 않는다.다만 인간의 잘못이 야기시킨 결과로만 인정될 뿐이다. 인간은 세계와 불가분의 존재여서 요한이 기록한 코스모스(kosmos)는 거의 언제나 인간의 세계를 뜻한다. 물론 요한이 기록한 코스모스(kosmos)가 다른 측면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머지 피조물(→ 창조 Creation)과 구분되는 인간의 세계가 그러하다(주체로서 요 1:10; 요 15:19; 하나님의 행위의 대상으로서 요 3:16이하; 요 4:42). 전 피조물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 인간의 세계인데, 이러한 사실은 세상으로 보낸다든지 세상으로들어온다고 하는 기사가 기록된 대목에서 특히 두드러진다(요 3:17,19; 요 9:39; 참조: Bultmann, Op. cit., 55이하, 요 1:10).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전혀 비헬라적인 생각!)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요 3:16) 심판하려 하시지 아니하고 구원하신다(요 3:17; 요 12:47).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지셨다(요 1:29; 참조: 요일 2:2). 그러나 구원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동시에 세상의 심판이 되신다(요 3:19). 왜냐하면 세상이 눈멀어 그를 몰랐기 때문이다(요 1:10). (인간의 세계로서의) 코스모스(kosmos)는, 적의로써 하나님을 반대하는 일정한 주체를 구성하여 아들의 구속 사업을 저지시키고, 그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그를 미워한다(요 7:7; 요 15:18 이하). (p.1-555*) 세상은 이 코스모스의 왕자, 즉 악한 자 the Evil one(요일 5:18)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세상을 이긴 자로 남는다(16:33). 이것은 코스모스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코스모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요 1:12이하)과 성령(요 3:5; → 영 Spirit)으로 태어나는 인간을 창조하시는 세계의 구속자에게 이르게 한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고난을 견디며 세상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요 16:33).
비록 신자들이 이제 더 이상 코스모스에 의해서 좌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세상에서 이탈된 것은 아니다(요 17:15). 그러나(흔히 반복되어 말해지는 표현처럼) 그들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즉, 아들 the Son) 속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에 대한 새로운 계명의 실천과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가 세상을대항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주의를 들을 때에(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우리가 관여하는 세상이란 바로 무상한 코스모스(17절), 즉 호 코스모스 후토스(ho kosmos houtos: 이 세상 this world)이다(참조: 요 12:31; 요 16:11). 교회는 스스로를 세상의 유혹하는 세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 즉 자신을 세상에 맡기는 자는 자신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런 자는 주께서 명하신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인간 세상에 보내심으로 헌신적인 사랑을 보이셨듯이 그리스도의공동체도 그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보내어 진 것이다(요 14:15, 요 14:23). - J. Guhrt.. (p.1-556*)
→ 시작 Beginning, → 창조 Creation, → 하늘Heaven, → 왕국 Kingdom, → 시간 Time, → 물 Water.
(a) . Arndt, 13, 156, 44-48; 563이하, 892; A. Auer, “World,” EBT Ⅲ 1001-6; G. Bornkamm, “Christ and the World in the Early Christian Message,” Early Christian Experience, 1969, 14-28; R. Bultmann, “The Understanding of Man and the World in the New Testament and in the Greek World,” Essays, 1955, 67-89; and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Ⅰ, 1952, 254-59; Ⅱ, 1955, 15-32; W. D. Davies, The Gospel and the Land: Early Christianity and Jewish Territorial Doctrine, 1974; W.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Ⅱ, 1967, 93-117; G. Johnston, “Oikoumene: and kosmos in the New Testament,” NTS 10, 1963-64, 352이하; O. Michel, oikoumene:, TDNT Ⅴ 157이하;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h, Ⅰ, 1962, 296-305; Ⅱ, 1965(see index); J. M. Robinson, “World in Modern Theology and in New Testament Theology,” in Soli Deo Gloria, Festschrift for W. C. Robinson, 1968, 88이하; H. Sasse, kosmeo, kosmos etc., TDNT Ⅲ 867-98; H. Schlier, Principalities and Powers, 1961; W. A. Visser t' Hooft, The Meaning of Ecumenical (The Burge Memorial Lecture, 1953), 1953; and “The Word' Ecumenical' its History and Use,” in R. Rouse and S. C. Neill,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19672; 735-44; E. Schweizer, choikos, TDNT Ⅸ 472-9.(See also Addenda, p. 822).
(b) . G. Gloege, “Welt,” RGG3 Ⅳ 1595이하; G. Harbsmeier, “Welt,” EKL Ⅲ 1756이하; G. Hierzenberger, Weltbewertung bei Paulus nach! Kor. 7, 29-31. Eine exegetisch-kerygmatische Studie, 1967; E. Jenni, “Das Wort olam in Alten Testament,” ZAW 64, 1952, 197이하; 65, 1953, 1 이하; E. J?ngel, “Die Welt als M?glichkei
땅(게. γῆ)의 소금(하라스. ἅλας)
세상(코스모스. κόσμος)의 빛(포스. φῶς)
세상의 소금(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누가복음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주로 소금을 이야기 할 때 "맛"에 촛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 결과 맛이 없는 소금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소금(할라스)에 대해서 맛(므네이아)을 말씀하실 때 맛을 잃어버린(모라이노. 3471) 소금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모라이노)의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미각(味覺)에서 느낄 수 있었던 용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단어의 맛이란 "모라이노"를 기억해야 합니다.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지구(눅 21:35), 지면(계 20:9), 천하(계 16:14).
μωραίνω 스트롱번호 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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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리석게 만들다, 어리석은 것이 드러 나다, 고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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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동태] 어리석게 되다, 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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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의미하게 만들다, 마 5:13, 눅 14:34.
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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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어리석게 되다(롬 1:22), 미련하게 하다(고전 1:20), 맛을 잃다(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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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리석음, 우둔함, 고전 1:18, 21, 23, 2:14, 3:19.
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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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미련하게 보임(고전 1:18, 2:14,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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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어리석은, 마 5:22, 막 7:13, 고전 3:18, 딤후 2:23.
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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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미련한(마5:22), 어리석은(고전1:25, 4:10, 딤후2:23, 딛3:9). [명] 어리석은 맹인 (마23:17), 미련한 자(마25:3), 어리석은 자 (고전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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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 비밀 의례, 비밀 교훈,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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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13:11, 막4:11, 눅8:10.
b. 비밀, 신비, 롬11:25, 고전15:51, 골2:2. -
c. [계시록에서] 계1:20, 1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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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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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비밀(마13:11, 눅8:10, 살후2:7).
(성경의 예)
나발(사무엘상 25: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롯의 아내(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민수기 14:38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에안 데 토 할라스 모란데 엔 티니 할리스데세타이 에이스 우덴 이스퀴에이 에티 에이 메 블레덴 엨소 카타파테이스다이 휘포 톤 안드로폰.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μωρανθη εν τινι αλισθησεται εις ουδεν ισχυει ετι ει μη βληθηναι εξω και καταπατεισθαι υπο των ανθρωπων
개역개정,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새번역,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리말성경,13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이 짓밟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영어NI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영어NASB,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s become tastel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by men.
영어MSG,13 "Let me tell you why you are here. You're here to be salt-seasoning that brings out the God-flavors of this earth. If you lose your saltiness, how will people taste godliness? You've lost your usefulness and will end up in the garbage.
영어NRS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can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but is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μωρανθη εν τινι αλισθησεται εις ουδεν ισχυει ετι ει μη βληθηναι εξω και καταπατεισθαι υπο των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13 vos estis sal terrae quod si sal evanuerit in quo sallietur ad nihilum valet ultra nisi ut mittatur foras et conculcetur ab hominibus
히브리어Modern,13 אתם מלח הארץ ואם המלח היה תפל במה ימלח הן לא יצלח עוד לכל כי אם להשליך חוצה והיה מרמס לבני אדם׃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할라스. 217)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ἅλας,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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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금
-
a. [문자적으로] 조미료나 비료로 쓰는 소금, 마5:13, 막9:50, 눅14:34.
-
b. [상징적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자질, 마5:13, 골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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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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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소금(마 5:13, 골 4:6).
1.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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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형] 소금, 막9:49.
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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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소금(막 9:49).
* 맛(3417) μ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417
어원 / 3415 또는 3403에서 유래
1. 기억, 살전 3:6, 딤후 1:3.
2. 언급, 관설, 롬 1:9, 엡 1:16, 빌 1:3.
말(롬 1:9), 기억(엡 1:16, 살전 1:2), 생각(빌 1:3, 살전 3:6, 딤후 1:3).
* 3415
* 3403
어리석게 행동하다, 어리석다
μωραίνω 스트롱번호 3471
1. 어리석게 만들다. 2. 어리석게 되다. 3. 무의미하게 만들다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μώραν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μωράνθην, 3472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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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리석게 만들다, 어리석은 것이 드러 나다, 고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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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동태] 어리석게 되다, 롬 1:22.
-
3. 무의미하게 만들다, 마 5:13, 눅 14:3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어리석게 되다(롬1:22), 미련하게 하다 (고전1:20), 맛을 잃다(마5:13).
어원 / 3474에서 유래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 어리석은, 마 5:22, 막 7:13, 고전 3:18, 딤후 2:23.
[명] 어리석은 맹인(마 23:17), 미련한 자(마 25:3), 어리석은 자(고전 3:18).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3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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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 비밀 의례, 비밀 교훈,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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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13:11, 막4:11, 눅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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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비밀, 신비, 롬11:25, 고전15:51, 골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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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계시록에서] 계1:20, 1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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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비밀(마13:11, 눅8:10, 살후2:7).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직영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 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이란 헬라 단어는 "게"라고 하는데 '게'라는 단어의 의미는 "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는 번역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맛을 잃으면 이라는 헬라 단어는 "모라이노(mōrainō. μωραίνω)" 라고 합니다.
'모라이노'의 의미는 "어리석게 만들다." "어리석게 되다" "무의미하게 만들다" 라고 합니다.
따라서 맛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어릭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μωραίνω 스트롱번호 3471
1. 어리석게 만들다. 2. 어리석게 되다. 3. 무의미하게 만들다
소금은 언약을 상징(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소금 언약(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신생아의 성결(에스겔 16:4)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과 빛이 되라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때 세상이란 "게(1093)"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게(gē) γῆ, γῆς, ἡ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게[ gē ]
관련 성경 / 땅(마 2:6, 막 2:10, 행 1:8), 세상(마 5:13, 9:6, 막 9:3), 흙(마 13:5, 막 4:5), 뭍(막 6:47), 육지 (마 4:1, 눅 5:3, 요 21:8), 지구(눅21:35), 지면(계 20:9), 천하(계 16:14)
신약 성경 / 250회 사용
사람을 만든 재료가 흙입니다.
그러므로 흙의 성분은 사람의 육체의 화학적 성분과 같다고 합니다.
근자에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좋은 땅에서 재배된 채소와 과일이 사람의 건강을 지켜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흙에 다양한 비료와 화학물질이 첨가되면서 사람의 건강에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 즉 영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땅의 소금이 되려면 먼저 영의 생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들은 땅의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축소해서 말한다면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교인들의 영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땅을 생명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땅의 소금이 되려면 먼저 영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영이 회복한 후에는 소금의 기능을 되살려야 합니다.
소금이 주방에서 어떻게 사용됩니까?
- '소금'(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일반적으로 흙에 비료로 소금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농사와 관련해서 뿌렸다면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메마른 땅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소금을 뿌린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실제 흙에 소금을 두면 아침저녁의 이슬을 흡수해서 땅의 건조를 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소금 비유는 짠 맛을 내는 조미료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의 특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중화시키기 위한 소금의 역할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여기서의 땅은 우리의 선교의 대상인 사람과 사람의 활동 영역인 이 세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비옥하게 가꾸는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 맛을 잃으면 가치가 없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13절).
성도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소금 같은 존재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라고 하시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맛을 잃다’(모라이노)는 ‘어리석게 되다, 오염되다, 쓸모없게 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리석다는 것이고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순전한 소금 결정체는 그 자체로 맛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대체할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타락한 세상에 오염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잘못된 세상 논리와 법에 물들어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다. 소금의 진정한 맛을 드러내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13절).
그러면 예수님 말씀의 의도인 소금이 진정한 맛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소금’으로 쓰인 ‘할라스’는 ‘조미료나 비료로써의 소금’도 되지만 ‘지혜나 분별력’을 나타낼 때도 쓰입니다. 여기서는 소금을 지혜 있는 사람에 비유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며 내세를 준비하는 자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마7:24참조). 시편 14편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라고 하였습니다(시14:1).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기적이고 탐심으로 가득 찬 부자 비유를 들면서 내세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 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눅12:20).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순종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시19:7).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이웃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내세를 준비하는 존귀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라. 맛을 드러내는 사람이 존귀하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절).
본문은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쓸 데 있지만 그 맛을 드러내지 못하면 아무 쓸모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여기서 ‘쓸모 있다’(익수오)는 ‘힘이 세다, 유용하다,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자녀답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고, 그렇지 못하면 가치도 없고 쓰임 받지도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치 없는 소금은 밖으로 내버려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버려지다’(발로)는 분사형이고 수동태로 쓰여 자녀의 사명을 잃어버리면 쓰임 받지 못하는 인생으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밟히다’(카타파테오) 역시 수동태인데 ‘발로 짓밟히다, 거절당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예를 들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5:30). 이 땅에서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인생의 종말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녀들은 이 세상에 좋은 열매를 나타내는 소금 같은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윤택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소금 같이 지혜로운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성도들 대부분은 아마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안으로 들어가 깨끗하고 청결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이러한 말씀들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둘째,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행실이 여전히 남아있어도 그것을 죄악시하지 않았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세상 속에서 죄짓도 살아도 여전히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무슨 의미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 "소금"이라는 단어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소금이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 / 방부제(防腐劑)
둘째, 소금은 소독하는 기능 / 소독제(消毒劑)
셋째, 소금은 땅을 단단하게 기능 / 강화제(强化劑)
넷째, 소금은 맛을 내는 기능 / 조미료(調味料)
다섯째, 소금은 변치 않는 맹세와 서약에 사용 / 서원용(誓願用)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은 대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네번째의 의미다.
그러나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첫째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성도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정화하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소금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맛의 기능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음식에 소금을 넣지 아니하면 아무런 맛이 없듯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체로는 아무런 맛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우리도 부패한 냄새만 풍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 모든 영역에서 맛을 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살아가는데 어디에 있든지 맛을 내는 것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이 맛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금 대신에 다른 것에 맛이 있다고 속이고 있다. 자기도 속이고 남도 그렇게 속이고 있다.
"담배를 피워봐, 맛이 있을거야! 10년된 보드카를 마셔봐, 맛이 있을거야! 여러 여자를 건드려봐, 맛이 있을 거야! 마약을 해 봐, 맛이 있을거야! 인기를 끌어봐, 맛이 있을거야! 취미생활을 즐겨봐, 맛이 있을거야" 등등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사람이 가진 영원한 갈증을 해결할 수 없으며, 만족을 대신할 수가 없다.
껍데기뿐인 우리의 인생에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단체, 어떤 지역, 어떤 계층, 어떤 사람에게든지 그곳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바꾸어놓기 시작한다.
모든 것에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들이 빛일 모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자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그분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해내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어떤 단체에 들어가면 아무것이 없는 형편에서도 새로운 일을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해도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해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우리의 속죄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주어 우리를 살려주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용서가 있고 따뜻한 사랑이 있다.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분의 생명의 속성이
우리 안에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지혜와 용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갖 지혜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으로 인하여 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회사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것이고 기술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빛에는 여러가지 역할들이 있다.
어둠을 밝혀주는 기능,
칙칙하고 습한 것들을 마르게 하는 기능,
온도를 높여 따뜻하게 데워주는 기능,
식물에게는 광합성을 하게 하여 식물을 성장하게 하는 기능,
소독해주는 기능
치료하는 기능 등이 있다.
그렇다면 주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기 때문에, 결코 숨긴다고 해도 숨겨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듯이 우리가 숨겨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숨겨질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빛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온 우주는 사실 온통 어두움 뿐이었는데, 우리 안에 인격체로 오신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결코 숨겨질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행여나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발각된다면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 하여 그만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그렇게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다 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만 있어봤기 때문에 다 아는 것이다. 작아도 어둠 가운데 빛나는 불빛은 보지 못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었으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감출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감추면서 살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그분의 어떠함도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며, 설령 죄를 짓고 살아도 구원받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가르치다 보니, 죄짓고 사는 자신을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더러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부조리가 발각되기라고 하는 날이면,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는 "니네도 우리도 다 똑같이 더러운 놈들이로구나"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분이 누군지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첫째는 아무 쓸 데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한 자는 아무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둘째, 다만 밖에 버려진다고 하셨다. 우리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버림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버림받음의 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깥 어둔데요,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셋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계신 분이 정확히 누군지를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군지를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 채, 머리 속으로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전도는 전도받는 대상자를 변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주입하며 교회에 데려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숫자만 채워질 천국가는 백성이 그토록 작았던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90%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 종종 들린다.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다보니,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성도들은 이 말씀을 사실 되게 곡해하여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우리의 선한 행실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게 하기 위함이며, 그리고 하늘들 안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빛은 우리 주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떤 장소나 단체이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것이 들어가기만 하면 좌절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포기가 변화하여 소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부러워하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아가도스(good. 착한, 선한)"라는 단어가 아니라 "칼로스(beautiful, wonderful, great,
exllent, attractiv)"라는 단어로서, "멋진, 아름다운, 뛰어난, 매력적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의 입에서 "너에게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느껴. 네가 믿는 하나님을 진짜 살아계신 분인가봐.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나도 좀 경험해봤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선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힌 자들에게는 놀라운 지혜가 될 수도 있고, 더이상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있는 자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끈기가 될 수도 있고,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는 상황인데도 그것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탁월한 능력이 될 수도 있으며,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낙망하지 않는 용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아니라 그분이 나의 능력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 세상 끝날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의 지혜가 되어주시고, 나의 능력이 되어주시고, 나의 용기가 되어주시고, 나의 희망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회사는 결코 망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간 곳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어야 회사가 잘 되고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그들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이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진짜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전도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동경하고 사모하게 하는 것이 참된 전도인 것이다.
그럼 그들은 제대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야,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지도 아니할 뿐더러 심판 때에 주님으로부터 버려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금장수 이야기
"길례"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 했는가 하면...
동구밖에 서 있는 천하 대장군 장승이 나들이 나선 그녀의 작태에 홀려 곁눈질을 치다가 짝쿵인 지하 여 장군 에게 혼 지겁을 당했다는 정도 이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정치가 "체스터 필드"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남성의 기지와 마찬가지로 소유자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길례"의 미모가 여기 저기서 한창 소문이 날때 동네 명문가 부잣집 아들이 반해서 인연을 맺으려고 온갖 애를 썼지만...
그 인연은 맺어지기가 순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길례"의 아버지는 백정(白丁)에다 천하의 상(常)것으로 취급받는 소금 장수에다 한푼 없는 가난뱅이 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당시엔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너무나 엄격해서 위계질서를 무너 뜨리는 혼사를 국법으로 막던 시대 였던지라 상사병을 앓는 아들을 차마 몰라라 할수 없어서 국법을 몰래 어기고 막상 결혼을 시키긴 했지만 시부모들이 며누리 보는 눈과 대하는 태도는 얼음장 처럼 차가웠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들은 과거 준비 핑계로 사랑방에 독선생 붙혀 가두다 싶이 해 놓고 미운털 밖힌 며느리는 안채에서 감시하기 쉬운 행랑에 처 박아 두고는 종(奴)부리듯 혹독한 시집 살이를 시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도 길례는 참고 견뎠습니다.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한 이상 당연히 감수해야 할 시집 살이라 여기고 온갖 시달림을 달게 받아 들었습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신랑의 변함없는 사랑 이었습니다.
가끔 독선생의 삼업한 눈길을 피해 사랑채를 빠져나온 남편은 몰라보게 야윈 길례의 볼을 떨리는 손길로 어루 만지며 반드시 과거에 급제해서 한양에서 편히 살게 해 주겠노라 굳게 다짐 했습니다.
그럴때 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용솟음 쳐 올라 왔지만 "길례"는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그 슬픔을 꾸욱 눌러 참은채
"아무 걱정 마시고 공부에만 전념 하세요"하고 오히려 남편을 다독여 사랑채로 되돌려 보내곤 했습니다.
길례가 시부모로 부터 고된 시집 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성밖 친정에 까지 전해 졌다.
이런 소식을 들은 친정 부모는 애지 중지 키운 무남독녀 외동딸을 부잣집 양반 댁으로 시집 보낸뒤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궁리 끝에 우리가 가난하게 산다고 하지만 사돈댁 내외 분을 우리 집으로 한번 초대해 바같 사돈이 좋아하는 홍주로 식사 한번 대접해 봅시다.
소금장수의 말을 들은 아내가 심란한 표정으로 남편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무슨 대접을 얼마나 해야 길례의 시집 살이가 달라 질까요?
공연히 사돈댁에 비웃음이나 사지 않을까 걱정 되네요.
그러자 남편이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을 다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지않소.
되든 안되든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이렇게 해 봅시다.
소금장수가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아내는 환한 미소로 피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서둘러 준비를 할테니 사돈 댁에 기별을 보내도록 하세요.
이튼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준비를 시작 했습니다.
-.흑산도 홍어회
-.목포 세발 낙지
-.영광 굴비에
-.화순 쇠고기
-.해남 참게젓
-.영암 전복 대합 등등
호남 각 고을의 "산해 진미(山海眞味)"를 힘 닿는데 까지 구해 잔칫상을 마련 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거들이 날 지경 이었지만 딸 아이의 장래를 위한 투자인지라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는 사돈 댁으로 소금장수가 직접 찾아갔다.
소금장수가 직접 예를 갖추어 찾아가자 거절을 못하고 동부인으로 초대에 응했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소금장수는 진도에서 구해온 홍주를 한잔 따라 올렸고 평소 술 좋아하는 바깥 사돈이 구하기 어려운 명주 한잔을 쭉 들이키고는 푸짐하게 차려진 안주 한점을 입에 넣었는데.....
심심한게 영 제 맛이나질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고 즐비하게 차려진 안주 모두가 맹간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독한 홍주만 몇잔 연거푸 들이키던 바깥 사돈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 놓았고 안사돈도 밥 숟갈을 내려 놓고는 어서 집에 가자는 듯이 힐끔 힐끔 남편을 바라 보는 것이 었습니다.
사돈 어른 왜 수저를 놓으십니까?
많이 드시지 않으시고....
그러자 음식이 간이 맞지를 않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노라고 실토를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소금장수가 정색(情色)을 하고 입을 열었 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말 입니다만 이세상에 소금이 없으면 우리가 어찌 한끼 식사인들 제대로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소금을 바닷가에서 날라다 내륙 깊숙히 이 고을 저 고을 공급해 주는 저같은 소금장수가 없다면 우리의 식 생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왕에 사돈지간으로 소중한 인연을 맺은 사이니 소금장수 라고 업신 여기지 마시고 설렁 우리 딸 아이에게 허물이 있더라도 가르쳐 고쳐주시고 귀엽게 봐 주시면 그 은혜 있지 않겠습니다.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말을듣고 있던 바깥사돈은 벌떡 일어 나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돈 어른의 말씀은 과연 지당하시요.
내가 아무리 만석군 부자이고 양반이라 할지라도 소금이 없으면 한끼의 식사라도 제대로 먹을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부부의 생각이 짧아 며늘 아이를 고생 시키고 사돈 두 분께 커다란 심려를 끼쳤으니 그 죄가 실로 크다고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차후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도록 하겠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요.
황급히 바깥사돈의 팔을 잡아 일으켜 자리에 앉힌 소금장수는 아내에게 새로 음식에 간을 맞춰 내 오도록 이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양 사돈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누었다.
소금은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살맛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는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암굴에서 잉태된 서기의 아버지 찾기
조선 중기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있었는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주인은 이해심이 넓어 이 사내의 종살이를 풀어주었고 사내는 소금장수가 되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공주에 들어와 고개
하나를 넘어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한 여인이 논에서 새를 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여인은 동네의 한 대감댁의 여종이었다.
갑자기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곧 큰비가 되어 쏟아질 것 같았다.
소금장수는 소금 가마니를 지고서 냇물의
징검다리도 건너고 이리 저리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가다 보니 큰 바위굴이 있어 급히 굴속으로 들어갔다.
소금 가마니를 내려놓고 한숨 돌리려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굴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소금장수는 깜짝 놀라 살펴보니 새를 쫓던
여인이었다.
‘아까 그 여인이구나.’ 생각하고 놀란 마음이 적잖이 누그러졌다.
소금장수와 여인은 그렇게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소금장수와 여인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헤어지게 되었다.
우연한 만남 이후로
여인은 아기를 잉태하게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기가 고청 서기였다.
서기가 태어나고 3년 동안 계룡산에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서기가 계룡산의 정기를 다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서기는 자신의 성씨도 모르고 자랐다.
청년이 되자
어머니에게 “어머니. 제 성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옛일을 대략 이야기해 주자 서기는
공암굴 옆에 머물면서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공암굴을 지나던 한 소금장수가 굴 앞에 멈춰 지난 일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서기가 그 이유를 물으니 소금장수가 “여기서 한 여인과의 추억이 있네.”라며 자신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서기는 아버지임을
확신하고 소금장수에게 “제가 당신의 아들입니다.”했다.
이들은 서로를 확인하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서기는
낮은 신분으로 출생하였지만 장성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큰 학자가 되었다.
소금장수의 아들, 뛰어난 학자
서기
이야기는 낮은 신분과 뛰어난 능력이 대비되는 구조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성도 모르고 자라온 낮은 신분의 인물이 아버지를 찾고
결국에는 큰 학자가 된다는 이야기로, 신분이라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나 소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된다.
하지만 큰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에 나와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어서 신분적인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한편 공암굴에는
최근까지도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곤 한다.
굴속의 바위 틈새는 여성의 음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지역의 사람들이 오래도록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 생산과 풍요를 비는 곳으로 추측된다.
성경에서 사용된 소금 상징과 의미
1. 소금의 일반적 개요
소금은 화학적으로 염화나트륨(NaCl)이라고 부릅니다.
염화나트륨은 나트륨인데 염소와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위키백과에 보면 '소금의 주성분이다'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소금에는 염화나트륨만 있는 것이 아닐겁니다.
그건 후에 좀더 다루기로 하고, 염화나트륨을 조금만 살펴봅시다.
염화 나트륨은 나트륨 이온(Na+)과 염화 이온(Cl-)이 결합한 상태입니다.
물에 잘 녹으며 수용성입니다.
물에 잘 녹는다는 말은 말과 염화나트륨이 섞일 경우 서로 전자 분해와 결합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서로 친하다는 말입니다.

[소금의 구조 사진출처 ]
물과 기름이라는 뜻은 서로 잘 섞어지 않는다고 하죠. 이말은 서로 이온을 나주지 않고 독립적이란 뜻입니다. 염화이론과 나트륨 이온에 수소와 산소 원자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서로 잘 섞입니다. 염화 이온과 나트륨 이온도 잘 섞이고, 물도 수소가 있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염화나트륨은 음전자와 양전자가 쉽게 물에 해리되기 때문에 전해질 물질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설탕의 경우 물에는 잘 녹지만 쉽게 해리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2. 소금의 종류
성경 속의 소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금의 종류를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제염과 천일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에서 추출한 것인지 바위소금 즉 산에서 채취한 암염(巖鹽)인지를 구분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두 가지 형태의 소금이 모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소금의 맛’은 암염을 뜻하는 것이고, 구약의 성막 제사에서 사용된 소금은 천일염으로 보입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하여튼 소금 본연의 성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세밀하게 구분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바닷물을 말려 얻은 소금을 그냥 천일염이라고 말하고, 땅에서 캔 소금을 암염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천일염(Solar Salt)
천일염은 바닷물에서 수분을 제거하여 만든 소금을 말합니다.
순수한 염화나트륨이 아닌 바닷물 속의 다양한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건강에 유익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해안 지역에 많은 염전이 있습니다.
특히 신안은 소금의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전이 등장하지 않지만 지중해는 중심으로 염전이 존재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염전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해안과 같은 평평한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해 곧 염해(鹽海)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소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암염(Rock Salt)
암염은 바닷물이 아닌 암석과 흙속에서 캐내는 것이기 때문에 천일염에 비해 불순물이 훨씬 많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짜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해 남쪽에 소금산이 있어 그것을 채취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는 암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해에서 채취하는 암염은 천일염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천일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염분이 빠져 나가도 돌같은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 소금이 사용된 예들
1.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
욥기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2. 식품의 방부제 역할
3. 나쁜 물을 고치는 약제
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4. 제사에서 사용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5. 정결의식의 소금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6. 언약으로서의 소금 상징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7. 저주로서의 소금
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스바냐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8.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소금
신약에서의 소금은 구약의 다양한 상징을 아우른다.
포괄적 의미로서 상당히 은유적으로 소금을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때 세상이란 "코스모스(2889)"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빛 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 "그(호, 3588)"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아니라 그 빛으로 읽어야 합니다.
코스모스( 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발음 / 코스모스[ kŏsmŏs ]
관련 성경 / 천하(마 4:8, 막 8:36, 눅 9:25), 세상(마 5:14, 고전 1:27, 계 11:15), 천지(행 17:24), 세속(약 1:27), 세계(약 3:6), 단장(벧전3:3)신약 성경 / 186회 사용
* 2865. 코미조(kŏmizō) κομίζω
발음 / 코미조[ kŏm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κόμισα, 제1부정과거 중간태 ἐκομισάμην, 미래중간태 κομίσομαι, κομέω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지다(눅 7:37), 받다(고후 5:10, 골 3:25, 히 10:36), 얻다(벧전 5:4), 당하다(벧후 2:13)
신약 성경 / 10회 사용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그 좋은 예가 성경에서는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온누리 출판사에서 빛과 소금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는 축도할 때에 성경의 본문대로 기도하지 않고 여러 수식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것도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시작된 것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빛을 먼저 말씀하시지 않고 소금을 먼저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지 않고 그냥 우리식으로 읽고 우리 식으로 해석하고 우리 식으로 믿고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먼저 소금이 되어야 그 때 비로소 빛이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우리의 큰 실수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니까 세상을 정의롭게 하고, 썩지 않게 하려고, 또 죄를 짓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땅에 소금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지금 세상에 빛이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땅은 흙이고 흙은 만물을 살리는 바탕으로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서 흙 위에서 삶을 구가하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흙을 떠나서는 살수 없고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것이 흙에서 삶을 영위한다.
흙이란 암석에서 떨어져 나간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 그리고 결합수가 작은 입자로 모여 80여종 이상의 원소로 이뤄졌으며 이중에서도 규소가 전체의 50%이상을 차지하며 규소는 사람으로 치면 등뼈 같은 성분으로 탄소와 같이 손이 네 개로 두 손으로 서로 붙잡고 있으며 나머지 두 손으로는 모든 것을 잘 붙잡는다.
모든 생물이 흙에서 태어난 것은 주성분인 규소가 탄소로 변했기 때문이며 탄소가 없었다면 모든 동식물이 생겨나지 못 했을 것이다.
만약에 규소가 탄소로 바뀌지 않고 규소가 생명의 근간이 되었다면 인간의 수명은 지금보다 수배 아니 수십 배까지도 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구약성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흙을 빚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를 만들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했다고 기록되었다.
아무튼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말씀은 과학적으로 진리며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 이 한부분만은 성경과 과학이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인간이 창조 되었건 진화 되었든지 흙이라는 점에는 공동점이 있으며 인간은 흙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믿는다.
땅은 영원하다
자연계의 현상은 얼핏 보면 아주 복잡하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 속에는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물주는 땅에서 사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모두가 함께 살아 갈수 있는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주었다.
식물은 탄소를 이용해 광합성에 의해 당을 만들고 질소는 동화작용에 의해 아미노산으로 생합성 하여 밤에 뿌리에 저장하였다가 일부를 미생물에게 되돌려 주며 미생물은 다시생리활성 물질을 내 보내 준다.
미생물에게도 탄소와 질소가 필요하다 질소로 몸을 만들고 탄소는 활동하는 에너지로 사용한다.
인간은 단백질을 만드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동식물을 섭취하여 그 단백질을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만든다.
생태계에서 인간과 동물은 소비자라고 할 수 있으며 식물은 생산자 미생물은 분해자 즉 조절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각자 분업에 의해 생태계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에 의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집약된다 할 수 있다.
생명이란 이렇게 자연의 균형과 조화에 의해 탄생하고 유지되며 진화한다.
모든 생명은 흙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으며.
땅은 태산을 받치고 바다를 품고 있어 영원하기에 우리가 땅이 꺼질 것을 근심하며 사는 생명은 없다
흙은 소우주이다.
흙속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넓은 세계 즉 소우주를 발견 하게 된다
땅속에서는 수많은 곤충과 미생물들의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다.
곤충과 곤충. 미생물과 미생물 그리고 곤충과 미생물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이들의 세계는 정지된 세상 같지만 이렇게 서로 전쟁을 펼치는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미생물은 미생물군과 또 다른 미생물군 간의 끊임없이 경쟁하며 선충은 주사기 같은 입으로 곰팡이를 잡아먹지만 역으로 곰팡이도 진즉진즉한 고리를 만들어 선충을 죽여 이렇게 서로 간의 견제하는 적절한 조화 즉 서로간의 길항관계 때문에 생태계는 유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땅위에서도 모든 동물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처절한 약육강식이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존재관계가 성립하며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속담 중에 "흙은 풀을 길러내고, 풀은 가축을 기르고, 가축은 인간을 기른다"라는 말이 있다.
풀, 가축, 인간은 각각 독자적으로 영양을 흡수하지만 결코 독립되어 있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영양소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버리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는 흙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계를 순환한다.
흙도 안식을 원한다.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만물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중심의 생각이다.
과학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은 가히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풍요를 가져 왔지만 그러나 그 역풍도 심각하다.
농업이란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을 길들이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과학의 힘을 빌려 점차 자연을 벗어나 한정적이고 획일화 된 조건 하에서 땅을 휴식 없이 같은 작물을 같은 장소에 계속 심을 때에는 화학비료와 화학합성농약을 피할 방법이 없다.
화학농약은 미생물에게는 핵폭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토양 내에서 이화학성의 변화를 초래하여 유익균보다는 해로운 균만 증가하여 미생물상의 변화가 일어나 뿌리섞음병 등 토양병해가 발생하며 또한 잦은 화학비료의 살포는 토양 내 비료성분의 과다한 집적과 토양의 산성화를 초래해 연작피해가 발생한다.
그래서 좋은 농사꾼은 밭을 바꾸어 씨를 뿌리거나, 밭으로 하여금 휴식년을 주어 묵힌다. 미국의 밀 생산지에서는 넓은 면적을 나눠 밀을 심은 곳과 심지 않은 곳이 반반씩 있다. 이것은 대량생산으로 인한 곡물가격 폭락을 막는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땅심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흙은 어머니다.
흙은 모든 생명들을 감싸고 있는 어머니로 수많은 생명을 품은 자궁이라 할 수 있다.
건강한 흙 한줌에는 수억의 생명을 품고 있으며 100만종이 넘는 곤충의 95%가 흙속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알을 낳고 부화하여 번식을 하며 생활도 하지만 이 속에서는 사냥도 하는 드라마틱한 약육강식의 전쟁이 쉬지 않고 일어나 서로 먹고 먹히면서 흙에게는 양분을 공급할 뿐 아니라 흙을 숨 쉬게 하며 모든 생명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흙은 식물과의 상호관계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통해 하나의 씨앗을 품으면 수십 배로 돌려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땅은 태초에 하늘에 의해 수태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늘이 아버지라면 땅은 어머니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물을 양과 음으로 나누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흙은 95% 이상을 전기적으로 음성(-)의 성질을 갖고 있어 과학적으로도 흙은 여성이다.
까닭에 남성적 하늘에 대한 배우자로서의 흙은 여성적 대지가 되기도 하다. 내가 디디고 사는 땅은 만고에 듬직하여 아버지와 같고 영원히 인자한 어머니와 같아 항상 포근하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물은 동물과 식물로 나누며 이들은 서로 대조적인 존재지만 생활에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으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위에 동물과 식물로 구분되고 있다.
흙 위에서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동식물의 외견상 가장 큰 차이는 동물은 좋은 환경을 구하여 살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며 인간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을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식물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 할 수밖에 없다.
식물의 경우 맥이 일부 끊기거나 상하더라도 많은 종의 나무는 자신의 뿌리나 줄기로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의 '클론'을 생산할 수 있어 삽목이나 분주 등 자기 복제를 통해 영생을 누리지만 동물은 중요 장기가 상하거나 끊어지면 죽음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인간도 머지않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앞으로 3-4십년 후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속에 수십억 개의 미세한 나노 로봇이 들어가 노화를 막으며 또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가 나와 인간과 결합하는‘사이보그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새로운 진화를 통해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동식물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 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흙으로 돌아간다.
땅은 절대적 힘을 가진 수호신이다
하늘은 신앙적으로 절대적 힘으로 군림하고 지배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땅은 모두에게 생활의 터전을 주어 포용하며 무조건 베푸는 풍요로움으로 친화감을 느끼게 하는 은혜로운 안식처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정신적인 의미가 있다.
땅은 기복(祈福)의 대상으로 시골에서 자랄 때 흙을 밖으로 쓸어버리면 복이 나간다고 여겨 마당을 쓸 때면 집 안쪽으로 쓸어야 했으며, 땅을 일구어 먹거리를 장만하며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살아온 땅은 태어난 곳이자 되돌아 갈 곳이기에 이를 밟고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탈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설령 홍수와 가뭄 등 하늘의 횡포로 때로는 고통을 주어도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이기에 참된 마음으로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모든 삶의 아픔을 흙에 의지하며 살아 왔다.
이러한 생각들이 절실한 삶 속에 승화되어 한 치의 땅을 더 얻는다는 것은 곧 재물과 복을 얻는 일이며 한 치의 땅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 즉 생명의 한쪽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였다.
그래서 좋은 땅에 대한 욕심은 현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까지도 연장하려는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어 땅은 신앙의 대상으로 수호신이라 할 수 있다.
땅에는 소위 땅의 기란 것이 있다.
땅은 만물을 생성하는 기가 있으며 이 생기가 땅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 땅의 기운이 인물을 낳고 길흉화복을 좌우한다고 하는 이 독특한 자연관 때문에 동양에서는 풍수지리학이 발전했다.
산 사람은 땅 위에서 살고 죽은 뒤에도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산 사람이 사는 곳을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음택이라 하고 땅속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생각하여 땅속에서 혼백이 올라온다고 믿어 생전의 업보로 인해 지옥(지하의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물과 바람이 직접 범하지 않는 곳을 택해서 집을 짓고 묘를 만들었으므로 풍수지리라 하였으며 여기에서도 땅의 살아있는 생명력과 기운이 만물을 지배하고 산자나 죽은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한데서 풍수학이 천년이 넘는 세월을 우리 삶과 같이 했다고 하겠다.
오행(五行)에서는 생각하는 것이 ‘土’에 속하여, 생각 ‘思’의 한자는 밭 ‘田’ 밑에 마음 ‘心’을 붙인 것으로 마음의 밭을 갈아 다스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흙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甘)며 독이 없다. 설사와 이질을 치료하고 각종 식중독에 좋다. 지표에서 석자까지를 분(糞)이라하고 그 아래 있는 것을 흙 이라한다. 약용으로 쓰이는 것은 물이 스며들지 않는 참흙을 말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흙이 간섭하고 있는 영역은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아주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몸이 서고. 앉고. 누운 자리가 모두 땅이다
나는 흙냄새를 좋아한다. 몇 달이고 바다 위에서 생활하다 육지로 돌아오는 선원은 먼 곳에서부터 흙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삼복더위에 더위를 식히려고 마당에 물을 뿌리면 순간적으로 토양미생물인 방선균으로 인해 흙냄새를 맡게 된다. 그러나 요즘의 모든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주거방식도 아파트로 점차 고층화되어 땅에서 멀어져 우리는 흙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순의 언덕에 첫 발을 내 디딘 요즈음 나는 일이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는 반려견인 코코와 수를 데리고 아파트 산책로와 연결된 등산로를 따라 무년산에 올라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히 지나가는 새나 움직임이 없는 돌이랑 나무들을 볼 때마다 항상 새롭게 느껴지며 이들과 교감하는 삶을 체험하다보면 나도 자연의 일부로 존재함을 느낀다.
요즈음 나는 한 걸음 물러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 많은 심경의 변화와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내가 못한 일은 무엇이고 더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인가?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보고 배운 것도 각자 달라 생각도 서로 다르겠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일의 진가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설령 잘못 선택한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늘 이 일을 만족하고 내일을 위해서라면 오늘의 팍팍한 삶쯤은 어떻게 해서라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솔개가 바위에 낡은 부리를 쪼아 없애고 새부리를 나게 하어 그 새부리로 낡은 발톱과 헌 깃털을 뽑고 나서 다시 새 삶을 살듯이 이순에 접어 든 나는 흙냄새에 대한 그리움이 도시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삶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 나는 요즈음 부쩍 흙냄새가 좋다.
우리가 언제나 듬직하고 가장 믿음직한 땅에서 태어나 믿음을 잊고 사는 인간이어서는 어찌 참다운 인간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흙 위에서 사는 동안 흙의 믿음을 닮아 살기를 원한다.
땅은 왜 ‘갈색’일까?
‘라이브사이언스 닷컴’ 보도
그렇지만 세계 어디서든 땅이 갈색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막은 모래처럼 새하얗고, 철분이 많은 곳은 붉은색을 띤다.
갈색 땅도 깊이 파 들어가면 다른 색깔들이 나타난다.
앨리슨은 “땅속 탄소 성분이 적으면 흙은 노랑이나 빨강, 회색을 띠게 된다.
이들은 함유하고 있는 금속의 종류에 따라 다른 색을 띤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자 자기의 신앙의 행동을 바르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렇게 하니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바로 소금이 되었고 빛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속이 다른데 겉이 빛으로 살면 이는 어두움의 빛이요. 맛이 없는 소금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금이 되었습니다.
빛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산상 수훈의 팔복이 자기에게 모아져 나온 결정체가 바로 소금인 것입니다.
빛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이 무엇인가 모르고 하는 소금과 빛은 자기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팔복이 자기에게 이루어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이제 땅에서 소금이 되고 코스모스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라
소금은 맛이 짭니다.
소금은 자신의 맛이 다른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눈에 보이지만 녹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입 맛으로 소금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소금을 먹지 않으면 각기병을 앓아 각종병으로 수명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소금은 몸에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소금은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맛을 내야 합니다.
부패를 방지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패를 방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금이 쓰이는 곳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세상’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분명히 세상이라고 하지 않고 “게에(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번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에 속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땅과 소금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그 땅은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맛을 내기 때문에 그 땅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땅이 있으면 그 땅에서 소금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필요한 곳에 녹아서 자신의 존재가 없어집니다.
자신이 없어지지만 또 따른 생명이 땅에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선 사업을 하고 구제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너희는 먼저 땅의 소금이 되어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녹아 자신의 모습이 없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재료가 땅입니다.
이 과정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고린도전서 15:47-50)
성경은 땅(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보고 혈과 육이라고 합니다.
또 그 몸은 썩을 몸이라고 합니다.
썩을 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 영생을 하려면 썩지 않게 하는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왜 땅으로 만들어진 몸이 썩어지는 모습으로 변화되어갈까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육체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골로새서 2:22)
바로 사람의 명과 가르침, 즉 선악의 가르침입니다.
선이란 이름을 넣고 결과는 욕심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몸은 썩어가기 때문에 바로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썩어가는 것을 막아주고 각종 부패를 막아주는 생명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하여 썩을 몸에서 생명의 몸이 되어 그 속에 소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때가 되면 썩어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 율법 아래, 초등 학문 아래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가서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속에서 녹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 소금의 일을 감당합니다.
육신으로 구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들이 주의 품으로 돌아오는 새로운 몸으로 변화 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롯의 처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영원한 소금 기둥이 되지 말고 소금이 녹아서 또 다른 맛을 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몸이 먼저 썩어짐에서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바다물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결정체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훈련을 받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 버리고 온전히 녹아지는 몸이 되어진 과정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이란?
도덕과 윤리적인 선이 아니라 믿음의 선을 의미한다.
악한 일이란?
도덕과 윤리적은 악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것 그것을 악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면 남을 도와주고 선을 베푸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 기독교에서 가장 많은 자선을 베풉니다.
그러나 산 위의 세상에서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산 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산 아래 동네와 산 위의 동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세상은 산 위에 있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산 아래의 세상은 예루살렘 도시입니다. 그곳은 율법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이미 형성되진 예배가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질서, 정돈이란 뜻입니다. 세상이 정돈 되지 않으면 질서가 없고 우왕좌왕하며 힘이 지배하는 양육강식의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 질서가 필요하고 정돈이 필요합니다.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법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다스리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를 가든지 법이 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세상은 혼돈이 됩니다.
우리 말에 악법도 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은 질서가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의 질서와 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에게는 종교의 법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법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질서가 유지 됩니다. 안식일 날 다른 일을 하면 그 법에 의해서 죄가 성립되어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법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율법의 세상은 외적으로 비춰지는 빛입니다. 이 빛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빛을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바로 가르침을 통해 질서를 만들어가고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외형적인 빛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 빛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빛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리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어두운데서 빛이 비추라”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과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빛을 비추었습니다. 자기 안에 계신 아버지를 증거하셨습니다. 어두움의 질서 속에 사는 세상에 있는 제자들을 불러내시어 생명의 질서로 생명의 세상으로 창조해 가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된 자들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은 놔두고 비 본질에 매여 삽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 된 자들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5-16)
서로 빛을 비춘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치장하고 있는 형식적인 질서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 모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15-21)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우리의 모임입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이것은 썩을 몸들을 썩지 않는 몸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것은 어두움의 질서로 사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세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상 수훈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과 피가 되어서 나와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17)
유대 민족에게는 큰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암흑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고 이 때를 가리켜 중간사라고 부릅니다.
유대 민족은 독립적인 국가를 가지려고 했으나 다시 로마의 침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외침 소리가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암흑입니다.
율법 책이 있어도 외치는 자의 소리가 없으면 소경이요, 귀머리인 것과 같습니다.
400여년 동안 고요한 어두움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춥니다.
바로 세례요한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지금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그 뿌리가 잘려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는 엄청난 외침입니다.
‘너희들의 죄를 자복하고 물세례를 받아라’ 하면서 당시 종교의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의식을 외쳤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물 세례를 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분노의 소리였으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빛이요, 희망의 등불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하자 수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런데 또 다른 똑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바로 주님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이 시대 미디어와 책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결 같이 천국에 관한 것이며,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의 소리와 주님의 소리가 있지만 성도들의 마음은 텅 비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관에 대한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나라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듯이 말씀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도 주님께서 외쳤던 말씀을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천국에 가서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어찌 믿든 예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선민이기 때문에 행위가 나쁘든 좋든 조상이 머무는 곳에 간다는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에게만 별도로 천국에 가는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먼저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 이 말씀은 먼저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이 자기 것이 되고 난 후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받는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천국이 자기 것이 되어 있지도 않고,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마음의 평화와 육신의 복만 받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도 육신의 복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숨이 끊어진 후에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7:21).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나이까?” 질문을 합니다(눅 17:20). “임하나이까”의 "에르케타이()"는 ‘오다, 가다, 나타나다’는 뜻입니다. 한글 성경의 ‘임하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오고 있습니까’? 라고 현재 오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자기들에게 오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질문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않고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7:21). 천국을 사모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안에 있는 천국을 보지 못했듯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을 보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가까이 왔느니라”는 지금 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의 "엥귀켄()"은 현재 완료형으로 ‘이미 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하늘들의 나라가 이미 와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회개하라’ 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는데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또 부흥회 때마다 지난 죄를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그 때는 마음에 심령 천국이 이뤄진 것 같은데 지나면 다시 예전의 신앙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는 천국을 얻기 위한 회개입니다.
율법적인 죄사함에서 돌아서서 주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천국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외쳤던 회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 죄 사함 받아 죽었던 자가 살아나 임마누엘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회개인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한 회개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회개는 천국이 그 안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말씀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사망의 죄에서 늘 이기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생명의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요 14:21).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자들의 신앙은 현재 종말론적 신앙에서 미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재의 자신의 삶이 곧 미래의 자신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온전히 회개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바로 이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을 무수히 받아도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종말을 의식하지 못한 미래의 종말론적 신앙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재의 신앙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다음에 열심히 하면 되지!’ 하면서 퇴보의 신앙을 걷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기보다 현재 육신의 것에 신앙의 비중을 더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2천 년 전에 천국은 이미 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눈과 마음이 할례를 받지 못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천국은 이미 와 있습니다(눅 17:21)
예수 이름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구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이미 와 있는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앞으로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관심을 갖고 믿음생활을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에게 와 있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앞으로 영원한 천국을 보장 받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생에 살면서 자기 육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은 자신의 몸을 위해 사는 것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하다 하면서 어린 아이 신앙도 여기에 속합니다(고전1:10-13.고전 3:19).
천국에 대하여
‘천국(천국)’은 한문으로 기록된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늘들의 나라()" 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막 1:14)로 나옵니다.
‘천국’은 죄가 없고 생명나무의 열매들이 풍성하고,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희락이 있는 곳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천국은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밭은 세상을 비유하고(마 13:38), 말씀을 받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고전 3:9). 선한 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밭에 씨를 뿌리는 분은 사람(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천국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을 천국이라고 소개했을까요?
이는 자신 속에 천국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8:29).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곧 천국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토라를 연구하고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어 시간 나는 대로 성경을 필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전수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여야 하는데 자신의 권세만 드러내기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천국’이라 하셨고,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원하는 하늘 백성들을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천국에서 살도록, 또 주님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 몸 된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과 주님이 그 속에 거하게 하는 생명이 있었습니다(마 12:28)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영과 생명으로써(요6:63),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생명이신 주님을 씨로 제자들 속에 심기운 것입니다. 이 과정이 천국이 임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이 천국의 씨는 아무에게나 떨어진다고 해서 다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마 13:11-15).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마 5:3. 눅 6:20),
여기에 나오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과 주님이 한 몸 되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씨인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보고,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마 13:16).
이 과정이 회개하는 것이며 천국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이 말씀은 주님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씀의 씨가 자라 온전한 열매가 된 자들은 육신의 몸을 벗을 때 영원한 천국이 보장된다는 미래의 약속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미래 천국에 대한 약속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기 안에 있는 천국을 보면서 ‘의’를 위하여 핍박 받지 않는 삶을 산다면, 미래의 천국은 신기루에 불과 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하나님과 주님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3년 이상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과 주님에 대해서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 씨가 그 속에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천국이 너희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이 자기에게 있다 할지라도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서 성령을 주어 받게 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고 담대히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확산되자 그들에게 죽음이란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담해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말씀이신 하나님과 주의 영이 있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육신을 벗을 때 영원한 나라에 안식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미 천국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주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0:8).
그리고 육신을 벗을 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4:6-8).
이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의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가서 생명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을 받을 준비를 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으면 간다는 막연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육신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또 다시 오셔서 외칠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내 주 하심을 믿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그 분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해 보십시오.
내면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세미한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을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말씀의 인도하심을 맛보며 살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변화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미래적 종말을 소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내 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언제든지 나무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다고, 나이가 젊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심판대는 항상 문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이 시대 우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외치는 소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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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5일 신년주일 / 될 사람과 안 될 사람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학의 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이유는 모든 만물의 근원(아르케)이 무엇인가라는 과제에서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찾는 학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답은 "죽음" 앞에서 무너져 버립니다.
반면에 신학에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신학이란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헬라어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는 "위(ἀνά)"와 "얼굴(πρόσωπον)"의 합성어 입니다.
사람(인간)이란 누구인가?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존재"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존재”
따라서 인간이란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허물만 입었을 뿐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누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놀라서 그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쳐다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제자가 유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느 네가 오늘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모두 예수님 앞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될 사람이 되었으나 유다는 안 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급히 뚜껑을 닫았을 때, 상자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란 "희망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희망의 경구로 자주 쓰이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는 ‘나는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는 뜻입니다.
철학자 키케로도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라고 말했습니다.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는 뜻입니다.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어떤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은 있다는 교훈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있고 그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희망을 주노니 너는 희망하라.”
죄악으로 인한 고난이든 훈련으로 인한 고난이든,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길 원하십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이기는 절망은 없다.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따라서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안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땅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땅만 바라보는 인생과 위를 바라보는 인생은 그 결과가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땅만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던 어떤 사람의 결말
(이야기 자료) 박윤선목사 시편 주석 p. 144
어느 청년이 길을 가다가 2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길을 걸을 때마다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하여 40년 동안 그는 29,516개의 단추와 54,172개의 핀과 7페니를 주워 모았다.
햇볕의 따스함, 친구들의 미소, 새들의 노래, 꽃과 나무와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은 볼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잘못된 방향과 목적은 비참한 결과에 이를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얼굴을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생동안 땅만 바라보던 육체는 목과 허리가 굽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은 근시가 되고 마음은 여유가 없는 사막화가 되며 성질은 고약하고 인색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자료) 이비커스의 학
주전 약 5세기에 희랍에 "이비커스"라는 유명한 시인이 고린도에 가까운 촌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없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린도의 노천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 몇 마리가 공중에 날아와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어떤 사람에게 거의 머리에 닿게 날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았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아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하로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알아보니 그 사람이 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될 사람은 이러한 삶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소개됩니다.
가룟 유다는 사탄이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 넣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분명하게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사랑을 고백하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하늘을 보는 사람과 땅을 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은 그의 잘못을 알고 스스로 뉘우쳐 회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몇 단계의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생각나서 -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실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2:61)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35절)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절) 완전히 성취되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베드로는 더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닫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에로 무겁고도 어렵게 내리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회개로 인해 그는 서서히 참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몇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막 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다(행 :2:14). 한편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사실 이같은 전설을 빌지 않더라도 베드로의 비통(悲痛)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을 것이다.
통곡(wept bitterly) 2799 크라이오( klaiō) κλαίω-
1. 울다, 막 14:72, 눅 7:38, 요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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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슬퍼하다, 비탄하다, 마 2:18, 계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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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슬퍼하다(마 2:18), 울다(마 26:75, 막 16:10, 계 18:19), 통곡하다(눅 22:62), 곡하다(요 11:31, 16:20),
눈물 흘리다(빌 3:18).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회개(悔改)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스트롱번호 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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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심, 회개, 돌아섬, 마3:8, 눅3:8, 행26:20, 고후7:9, 히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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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회개(마3:8, 눅3:8, 행20:21, 고후7:9, 딤후2:25, 벧후3:9), 후회(고후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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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3:2, 막1:15, 눅10:13, 행2:38, 8:22, 고후12:21,계2:21,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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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회개하다(마 3:2, 눅 10:13, 계 2:5).
그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질렸습니까?
남이 다 가만있는데 학이 머리 위를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대면하게 했습니다.
넷째는 성령을 받는 단계(사도행전 2:1-4)
-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안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요?
될 사람 베드로는 교회를 세우는 희망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네 가지로 가르쳤습니다(딤전 2:1).
간구(request), 기도(prayer), 도고(intercession), 감사(thanksgiving),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I urge, then, first of all, that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be made for everyone--
성경 / 잠언 1:7
제목 / 될 사람과 안 될 사람(Will be Christian & Won't be Christian)
이르아트 아도나이 레쉬트 다아트 호크마 우무사르 에윌림 바주
경외하는 것이 여호와를 근본이어늘 지식의 지혜와 훈계를 미련한 자는 멸시하느니라
3374 3068 7225 1847 2451 4148 191 936
יִרְאַת יְהוָה רֵאשִׁית דָּעַת חָכְמָה וּמוּסָר אֱוִילִים בָּזוּ׃ ף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 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2:21
ㅂ이를 爲(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爲(위)하여 苦難(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ㅅ本(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에이스 투토 가르 에클레데테 호티 카이 크리스토스 에파덴 휘페르 휘몬 휘민 휘폴림파논 휘포그람몬
히나 에파콜루데세테 토이스 이크네신 아우투.
εις τουτο γαρ εκληθητε οτι και χριστος επαθεν υπερ ημων ημιν υπολιμπανων υπογραμμον
ινα επακολουθησητε τοις ιχνεσιν αυτου.
고난(3958) 파스코(paschō) πάσχω
-
I. 경험하다, 겪다, 당하다.
-
1. 잘못 살다, 비참한 상태에 있다, 마17:15.
-
2. 고난당하다, 겪다, 견디다.
-
a. 고난당하다, 마17:12, 눅22:15, 행1:3, 고전12:26, 빌1:29.
-
b. 견디다, 당하다, 행28:5, 고후1:6, 히5:8.
-
-
-
문법설명[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관련 성경고난받다(마16:21, 살전2:14, 벧전4:1), 고생하다(마17:15), 괴로움을 받다(막5:26, 갈3:4), 애쓰다(마27:19), 해 받다(눅13:2, 행1:3, 9:16), 상하다(행28:5), 고통받다(고전12:26), 환난 당하다(고후1:6), 고난당하다(히2:18).
본(5261) ὑπογραμμός( hüpŏgram- mŏs ), οῦ, ὁ
- 어원 / 5259와 1125의 합성어에서 유래
-
1. 원본, 본, 원형, 견본, 모범, 귀감, 벧전2:21.
-
관련 성경 / 본(벧전 2:21).
자취(2487) 이크노스(ichnŏs) ἴχνος, ους, τό
어원 / ἰκνέομαι에서 유래
-
1. 발자취, 롬 4:12, 고후 12:18, 벧전 2:21.
-
관련 성경 / 자취(롬 4:12, 벧전 2:21), 보조(고후 12:18).
ㅂ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ㅅ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0이란 숫자의 의미
‘10’이란 수는 어떤 것의 ‘fullness(충만, 완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엔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란 문구가 10번 나옵니다(1:3, 6, 9, 11, 14, 20, 22, 24, 26, 29).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God said:하나님이 말씀하시다’란
문구가 창조 사역 개요를 담고 있는 1장에 10번 나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치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이 히브리어 7단어, 영어 10단어로 구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7이 하나님, 특히
영의 완전수라면 10은 충만함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모두 각각의 알파벳에 고유의 수가 정해져 있어 숫자로도
환산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처럼 말씀과 숫자를 공부하다 보면, 성경은 결코 사람이 쓸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게 확연해집니다.
‘10’에 대한 이런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곳곳에서도 보이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각 손과 발에 5개의 손(발)가락이
있고 두 손(발)에 10개의 손(발)가락으로 완전합니다.
숫자는 0-10까지 한 세트를 이루고 10이 되었을 때 다시 1부터
돌아가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끝(충만함)이 이르고 심판이 이르렀던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10개의 재앙이 심판의 충만함을 나타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5계명씩 두 판에 나뉘어 십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도 10개의 휘장, 10개의 기둥, 10개의 받침(sockets)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출
26, 27장).
민수기 14장 22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를 10번이나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10은 시험, 불순종, 반역의 충만함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은 꽉 찬 ‘10’번 나옵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사람이 쓴 성경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하나님이 쓰신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킨 내용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출애굽 할 때(출 12장),
2. 광야에서(민 9장),
3.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수 5장),
4. 히스기야 때(대하 30장),
5. 요시아 때(대하
35장),
6.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여러 방해와 어려움 끝에 성전 짓기를 마쳤을 때(스 6장),
7. 예수님이 12살이셨을
때(눅 2장),
8. 4복음서에 기록된 3번의(요 2장, 요 6장, 마 26장) 다른 유월절에 대한 기록.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유월절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마치셨음을 드러내는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니산월 14일이 되는 유월절에 쓰일 어린양을 취하는 날은 그달 1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 12:3).
예리한 분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도 베드로와 바울에 연관돼서 유월절 절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오순절’로 되어 있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힐 때는 ‘무교절’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과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 핀잔을 줄 땐
‘성만찬(communion)’이란 단어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유월절’을 지켰다고 나온 기록은 4복음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에 10번으로 끝납니다.
이처럼 왕국에 대한 것도-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든 세상의 왕국이든-그 온전함(충만함)을 나타내는데 10이란 수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창조 원리이기에 세상에서도 모든 나라와 민족을 뜻할 때 ‘열국’, ‘열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왕국은
1. 다니엘서에 10개의 발가락과(단 2장)
2. 10개의 뿔로 표현되는데(단 7장)
3. 요한계시록에서도 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용)의 뿔 10개로 표현됩니다(계 12, 13, 17장).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설명하시는데 총
10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마 13, 22, 25장).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던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서도 비록 5명만 들어갔다 해도 10명의 처녀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은 1개를 찾는 여자의 10드라크마나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이 10명의 종에게 나눠주는 은 10 므나에 대한 비유도(눅15, 19장) 마찬가지 개념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10가지 종류의 불의한 자들이 나옵니다.
1. 음행하는
자,
2. 우상숭배 하는 자,
3. 간음하는 자,
4. 탐색하는 자,
5. 남색 하는 자,
6. 도적,
7. 탐욕을 부리는 자,
8. 술 취하는 자,
9. 모욕하는 자,
10.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 경우엔 불의의 충만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마서 8장 38-39절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끊을 수 없는 10가지의 권세나 능력이 등장합니다.
1. 사망,
2. 생명,
3. 천사,
4. 권세자들,
5. 현재 일,
6. 장래
일,
7. 능력,
8. 높음,
9. 깊음,
10. 다른 어떤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열거된 10개의 권세가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려면 먼저 될 사람으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셀라 단어는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치사 "에크(ἐκ. 1537)"와 동사 "칼레오(καλέω. 2564)"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에크'라는 전치사의 의미는 "....으로부터(from)"이며, 동사 '칼레오'는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머물고 있는 사람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 다음에는 죄 가운데서 살던 사람을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죄 사함의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말씀을 배우며 확신한 일에 거하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이 바로 에클레시아의 본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조카 롯을 불러냈을까요?
창세기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So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he remembered Abraham, and he brought Lot out of the catastrophe that overthrew the cities where Lot had lived.
생각하사(2142) 자카르(zâkar) זָכַר
구약 성경 / 222회 사용
[명] 소문(사 19:17), 사관(삼하 8:16, 왕상 4:3, 대상 18:15), 서기관(대하 34:8).
- 비록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긴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간구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 중에서도 자신의 자비(16절)와 롯의 최소한의 믿음(1-8절; 벧 2:7.8), 그리고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 기도(18:23-320에 의거하여, 롯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데(약 5:16),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위해 드리는 도고(禱告)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주신다(딤전 2:1-3).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된 사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사용했던 사람이며 또한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란 젊은이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에 응답한 후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될 사람
될 사람은 하나님의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
예를 들면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는데 공교롭게도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급하게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은 이전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잘못된 일을 행하였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으니 이제부터는 종이라고 하지 말고 동역자로 함께 섬기라고 부탁합니다.
세번째는 안 될 사람
안 될 사람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비뚤어진 사람
유월절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겨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넣는 순간 그 생각을 실천하는 일에 집중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안 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점검하고 확인한 후에 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된 사람과 될 사람의 신앙적 특징을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근본이란 히브리 단어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브레쉬트)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근본이란 곧 시작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문호 궤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처음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수 없다"
출발이 잘못되면 그 결과는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의 출발 즉 신앙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경외라는 단어의 뜻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두렵다는 것보다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두렵다'는 단어에는 "공포심"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두려움에는 공포심이 아니라 존경심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대한철학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최명관이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불란서 철학 특히 데칼트를 전공하셨는데 3학년 1학기 때 전공필수과목으로 '데칼트'라는 과목을 강의하셨습니다.
학기말 시험이 되어 학생들이 이번 기말 시험을 어떻게 줄제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렇게 성경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드디어 기말 시험을 치루는 시간에 칠판에 독일어로 여러 문장을 적어 놓으신 후에 주어진 시간에 도서관을 가든지 대학원생을 찾아가든지 답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시험을 치루는 강의실 밖으로 시험문제를 들고 나갔습니다.
제가 아무리 문장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문장을 읽으면서 답을 적을 수 없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습니다.
다음 학기에 재수강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정확한 답을 적어야 할텐데 도무지 답을 몰라서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마친 후에 어떤 학생은 애국가 가사를 정성껏 적었다고 합니다.
다른 학생들은 나름대로 답을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적표를 받았는데 아무 것도 적지 못한 나는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문제는 열심히 답을 적었던 학생들의 성적은 과낙을 면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학생들이 왜 성적이 이렇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의 대답은 "나도 모르는 것을 너희들이 알겠느냐?"
철학이란 시험에 응하면 기본 점수는 받는다.
그리고 정확한 답을 적어야 점수가 오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란 여호와를 거룩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12월에 새벽 묵상을 위한 말씀을 소개할 때 요한복음 13장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였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은 주님이 보실 때에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 므로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될 사람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될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즉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될 사람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려면 반드시 회심(悔心)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회심을 다른 말로 "회개(悔改)"라고 합니다.
2025년 신년주일을 맞이하며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예수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소개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근자에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는 교회 분위기와 사람들 때문에 모여 있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이미 이민교회를 시작할 때 목표는 "불낙지교회"라고 선포했습니다.
불신자를 찾아 돌아오게 하는 교회
낙심한 자를 찾아오는 교회
지체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자를 찾아오는 교회
그런데 아직도 주님이 원하는 교회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5년 마음을 모아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회개하고 주님의 도움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대부분의 교회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불신자가 주님 앞으로 나오는 교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불신자가 있습니까?
불신자를 찾아서 만남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낙심자가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교회
지체(遲滯) / 더딜 지(遲), 막힐 체(滯)
어물 어물하여 시간이 늦어짐.
기한(期限)에 뒤짐.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지체자)을 주님 앞으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세상 삶에 도취하여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머뭇머뭇하는 사람을 결단하게 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지체(肢體) / 팔다리 지(肢), 몸 체(體)
팔다리와 몸을 통틀어 이르는 말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대학 시절 데칼트를 전공하셨던 최명관교수님으로부터 데칼트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에 3학점으로 전공 필수 과목이므로 매우 중요한 과목입니다.
기말 시험을 치루는데 칠판에 여러 문장을 적은 후에 강의실 밖으로 나가든지 도서관에 가든지 대학원생을 만나든지 시간 안에 답을 적어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교수님은 아주 독특한 철학자이셨습니다.
학생들이 이번 시험 어떻게 출제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항상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런 성경구절을 소개합니다.
아무리 문장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동안 시험지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그 아래에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학기에 재수강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애국가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적었다고 합니다.
성적을 받았는데 저는 A학점입니다.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D학점을 받았습니다.
제가 당시 과대표로 있었기에 교수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자 나도 모르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서 철학이란 살아서 시험에 응하면 기본 점수 60점은 받기 때문에 무슨 답을 적든지 기본은 받지만 솔직하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이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재수강을 결심한 줄 아세요?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기 때문에 엉터리 답을 적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둘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희생 할 수 있는 것
믿음은 맡길 수 있는 것
어떻게 맡길 수 있나요?
맡깁니다! 맡겼습니다!
이런 언어의 유희가 아닙니다.
온전히 맡기려면 밤을 새워 기도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맡긴다는 히브리 단어 "야라"
יָרָה
스트롱번호3384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서 다윗는 자신을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W. a. Vangemeren).
네 짐(*, 예하브카) - 이는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하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너의 몫'(Rawlinson). 혹은 '네게 주어진 것'(Hupfeld)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짓누르던 '염려' 혹은 '근심'을 가리킨다(Calvin, C. B. Moll, NIV).
너를 붙드시고 - 여기서 '붙드시고'(*, 쿨)는 원래 '기르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뜻(창 47:12;50:21)으로서,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근본(7225) 레쉬트(rêʼshîyth) רֵאשִׁית
- 구약 성경 / 5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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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처음, 시작, 창1:1, 10:10, 렘28:1
2. 명사, 여성 이전의 상태, 욥42:12, 이전의 때, 사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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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사, 여성 처음 것, 첫 열매.
[시간의 견지에서] 첫 열매, 창49:3,레2:12, 23:10, 신18:4, 26:10, 33:21, 잠8:22.
[위엄의 견지에서] 첫째의, 주요한, 암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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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태초(창1:1), 시작(창49:3, 욥8:7, 전7:8), 처음(출23:19, 느10:38, 겔48:14), 첫(레23:10, 겔20:40), 으뜸(민24:20, 욥40:19, 렘49:35),장자(신21:17), 맏물(신26:2,10), 가장(삼상2:29, 15:21), 근본(시111:10, 잠1:7, 미1:13), 제일(잠4: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 3374)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경외(3374) 이르아() יִרְאָה 스트롱번호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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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여성 두려워함, 무서워함, 신4:10, 5:26, 6:24, 10:12, 14:23, 삼하3:11, 느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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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사, 여성 두려움, 무서움, 공포, 신2:25, 욥4:6,시55:6(5), 사7:25, 욘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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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사, 여성 존경, 경외, 경배, 욥28:28, 시2:11,5:8(7), 19:10(9), 34:12(11), 111:10,잠1:7, 사11:2.
- 문법설명 / 3373의 여성형
‘된 사람’의 근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 절은 잠언
전체의 주제성구로 종종 인용됩니다.
여기 ‘근본’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창조기사에서 ‘태초’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의 용례를 두루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경외는 인간
지성활동의 요체, 알파와 오메가”라는 식의 해석보다, 배움과 성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평이한 이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말씀에는 ‘인식론의 전제로서의 지식’ 같은 건조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없는 포괄적이고도 역동적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잠언에서 지식은 정보가 아니라 슬기로운 판단과 삶의 태도를 아우르는 인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인격은 지속적인 성찰과 훈련을 통해 빚어지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 사람’이지만 인격자는 ‘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된 사람’이 갖춘 ‘됨’의 상태가 잠언이 말하는 지식-분별-지혜의 인성을 표현하다면, 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그 과정의 출발점에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놓인다는 것이 여호와 신앙, 구약 신앙의 핵심입니다.
잠언이 지혜의 책이라는 말은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가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지혜를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구별하는 근본적 변별성이 바로 ‘하나님 경외’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반응으로, 우리 내면의 태도와 더불어 일상의 선택을 통해 표현하는 신앙적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은 잠언 1:7에 담긴 신앙선언문이 잠언 9:10에 변주되어 1~9장의 프레임을 이루며(“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마지막 장인 31장에서도 이상적인 여인상의 결론이자 잠언 전체를 마무리하는
핵심표현으로 ‘여호와 경외’가 등장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 시문은 주로 평행(병치)되는 두 시행을 함께 살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1:7 상반절의 하나님 경외가 하반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과 대비되는 데 주목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어 ‘에빌’인데,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를 가리키는 세 단어 중 가장
불량한 사람을 가리켜 쓰입니다.
즉 지력이 떨어지거나 지식이 없어서 실수하는 사람이 1단계, 반복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2단계라면, 아집과 교만에 빠져 가르침을 비웃는 상태에 있는 3단계 바보가 에빌입니다.
시편 1:1에도 복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행동들이 나오는데, 동일한 방식으로 악인→죄인→오만한 자로 점점 더 악화되는 인간군상 중 최종단계가 바로
'비웃는자' 레쯔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한 인격으로 발현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된 인생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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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잠언 14:26-27)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두 가지가 바뀐다.
하나는 가치관이고 다른 하나는 우선순위이다.
가치관이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우선순위란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하고 덜 중요하고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중에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가치관이 분명하면서도 우선순위가 잘못된 경우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그것을 먼저 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말한 것과 행동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결과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고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아야 좋은 것을 얻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전에 따라가던 것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전에 먼저 하던 일을 이제는 나중에 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빌립보서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여도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는 패역하게 행한다”라고 하는 것이 뜻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잘났든지 못났든지, 의로워 보이든지 악해 보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패역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외(敬畏)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따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시편 139:1-8)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시편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쓴다.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둘째,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생각하는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누구를 먼저 찾아가는가? 하나님이 자녀라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내가 하나님께 피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
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가?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되기 때문이다. 시편 62: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 시편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래서 믿고 의지했다가 실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해도 복을 주신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2:1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셋째,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쓰는 신앙이다.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과 은혜를 풍성히 부어 주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주시는 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넷째,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기에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옳고 선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룩하고 선한 소원을 주실 때에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패역한 사람은 이와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라. 내 뜻과 소원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지 말라. 내 소원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거나 고집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는 복을 네 가지를 말씀한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견고한 의뢰 즉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로 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신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면 아무도 넘어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산성이요 피할 바위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뜨리려면 하나님을 넘어뜨려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도 복을 주신다.
“26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으로 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편 11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이 믿음을 심어주라.
셋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생명의 샘물처럼 계속 주어진다.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 어떤 경우라도 그 생명이 살게 해주시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사사기 15장에 삼손이 블레셋 족속과 싸워 이긴 후에 너무 힘들고 지쳤는데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워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마른 땅에서 샘물을 내주셨다. 사사기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라도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셔서 얼마든지 먹고 마시고 소생하게 해주신다.
넷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27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사망의 그물’이란 나를 얽어매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문제를 말한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어떤 사탄의 공격이나 환난이 와도 건져주신다. 꼼짝할 수 없는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사탄의 공격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시편 124: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이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잘해도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열려 있지 않고 분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다가 중단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일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일 때문에 기도를 중단하지 말라.
오히려 더 기도에 힘쓰라.
그러면 일하는데 지혜가 솟아나고 힘이 솟아나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교회에서의 일은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그 사람의 믿음이 깊어지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의 성취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믿음에 손해가 가게 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일이 좀 늦어지더라도, 일이 원하는 대로 잘 안되더라고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37이하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일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
빌립보서 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이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의 다섯 가지 특징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진실로 정직해져야 할 시간입니다.”
1.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 : 메타인지 / metacognition / meta認知
1970년 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 γνῶθι σεαυτόν) 소크라테스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 논어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다.
EBS
실험을 통해 드러났듯이 수능 모의고사 상위 0.1% 아이들은 평균의 성적을 가진 아이들보다 기억력이 더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분야는 ‘메타인지’.
메타인지란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 즉 자기 객관화를 뜻한다.
메타인지가
높을 때 자신의 장점과 단점, 상황과 처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 훌륭한
‘전략’을 세울 가능성이 커진다.
수험생이라면 더 훌륭한 공부법으로, 대학생이라면 더 탁월한 대학생활로, 취업준비생이라면 더
효과적인 취업전략으로, 비즈니스맨이라면 더 확률 높은 비즈니스 전략을 세우고 실천할 수 있다.
미국에서 라이프 매니지먼트와 자기계발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필 맥그로 박사는 <베스트 셀프>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당신이 진실로 정직해져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베스트 셀프> 저자는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베스트 셀프>의 약 10%는 무언가를 쓰도록 하는데
그중 반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라이프 코치답게 독자로 하여금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매우 다각적이고 심도
있게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을 할 때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세울 수 있다.
2. 끊임없이 학습한다
<베스트
셀프> 저자인 마이크 베이어는 대학시절 극심한 마약 중독을 극복했고 이후 큰 성공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코치
마이크가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약 중독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베스트 셀프>는 최고의 자아가 되기 위해
일곱 가지 영역 고루 살펴보게 하는데 그중 ‘교육’ 파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정신 건강과 관련된 직종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이후로 학습, 즉 배우는 것을 중단한 적이 없다.
피터
센게 교수는 “학습은 많은 정보를 획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운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학습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능력을 배양하는 행위이다.
코치 마이크는 원래 학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처럼 절망과 고통의 삶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명을 찾은 후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뭘 해도 잘 되는 사람은 ‘학습하는 인간’이다.
독서하고 수업을 듣고 글을 쓰며 토론이 일상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나이와 처지에 상관없이 학습을 게을리하지 말자.
3. 미친 듯한 실행력이 있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들은 입만 나불대지 않는다.
실행하고 또 실행하고 실행한다.
<베스트 셀프>의 저자인 마이크 베이어는
라이프 코칭을 통해 많은 사람의 삶을 고쳤고 그 명성이 필 맥그로 박사에게까지 들려 필 박사가 주도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초청되었다.
자신의 분야의 ‘빅 리그’에 진출하게 된 마이크는 긴장도 했지만 방송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고 필 박사는 코치
마이크를 방송에 계속 초청하게 된다.
그런데
방송 세 번째 출연 후에 필 맥그로 박사는 코치 마이크에게 ‘최고의 자아’로 성장하는 책을 꼭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이크의 대답이 대박이다.
‘바로’ 시작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베스트 셀프>가 나왔고 <베스트 셀프>는
뉴욕 타임즈와 아마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다. 특히 아마존에서는 종합 6위를 차지하며 대성공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이크의 자세이다.
마이크의 직업은 라이프 코치이다.
그의 특기는 ‘커뮤니케이션’이지 ‘글쓰기’가 아니다.
나도 작가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마이크에게는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음에 한다고 하지 않았다. 필요했기에 힘들더라도 ‘바로’ 시작했다.
실행할 때에만 무언가가 벌어진다.
4. 멘탈갑이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들은 웬만해선 멘탈이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멘탈이 무너지는 것을 절망, 좌절, 무기력 등 상황이 안
좋은 경우만 연결 지어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 반대 방향도 실상은 멘탈이 약한 것이다. 조금만 잘 돼도 자만, 교만,
승자효과에 빠져 있는 것도 정신이 망가지고 있는 증거다.그런 의미에서 코치 마이크는 멘탈갑의 ‘교본’이 뭔지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현 상황과 정반대 상황을 모색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추구해왔다.
이런 이분법적 추구 덕분에 분수를 지키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멘탈이 강한 사람들은 항상 반대의 상황을 모색한다. 절망이 있을 때는 기대, 극복, 희망을 승리와 함께 할 때는 부족했던 과거의 모습,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인식, 패자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
<베스트 셀프> 저자는 마약 중독을 극복한 이후에 정신적으로, 학업적으로, 금전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 마인드로 자신의 비전을 향해 나아갔다. 반대로 제니퍼 로페즈 등 세계적인 스타의 라이프 코칭을 맡게 되었을 때는 방송에서 일반인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더 나아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세계 빈민촌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고의 자아를 만들기 위한 7가지 영역 중에 ‘영성의 개발’이 있다. 한마디로 멘탈 훈련이다. 성숙한 방어기제, 정서적 안정성을 갖추고 있는 자는 뭘 해도 잘 안되기가 힘들 것이다.
5. 팀적 사고를 갖고 있다.
<베스트 셀프>에서는 최고의 자아로 균형 있게 성장하기 위한 7가지 영역을 다룬 후에 책을 끝내지 않는다. ‘최고의 팀’을 꾸리라고 말한다.
산업화
이전에는 세상을 바꾸는 개인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이끄는 거의 모든 혁신은 개인이 아니라 ‘팀’이 이끈다.
1의
능력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시너지를 내면 3의 능력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
1+1이 2가 아니라 11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들은 혼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메타인지가 높은 탓이다.
그래서 자신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들과 일을 도모한다.
1+1=11 !
<베스트
셀프> 저자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자신’이 되기 위해서, 그것을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팀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팀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성숙하고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볼 수 있고 학습을 멈추지 않으며 미친 듯한 실행력과 튼튼한 멘탈로 시너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
무조건 함께 하고 싶지 않을까?
<베스트 셀프>의 저자 마이크 베이어가 지금 그토록 잘 나가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