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동성애합법화반대국민연합·성매매합법화반대국민연합(공동대표
이용희)이 지난 2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군동성애 및 성매매 합법화 반대 기자회견'을 여는 등 군동성애 반대 등 동성애 허용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전국 학부모는 동성애,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와 함께 제19대 국회에서 '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에서 "전국 학부모는 내 아들 딸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울시청광장에서 벌거벗은 차림의 동성애자들이 축제를 열고 서울시 박원순 시장은 세금으로 경비를 보조하는 등
인간의 본성을 잃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동성애는 축제를 하며 권리를 요구할 사안이 아니"라며 "소수자 권익보호라는 미명아래 표를 모으겠다는 정치권이 동성애자들과 유착해 사회건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발표한 동성애 옹호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1순위, 왼쪽부터 유성엽(전북 정읍), 은수미(비례대표),
장하나(비례대표), 전정희(전북 익산시(을)), 김광진(비례대표) 국회의원(사진 속 국회의원 전원 더불어민주당 소속,출처:사진 속
국회의원 SNS).
그러면서
"'군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군대 내에서의 동성간 성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으로 명백히 동성애 옹호를 위한
개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안'도 성적지향(동성애) 차별금지조항을 포함시킴으로써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언급한 동성애 옹호 법안 7개중 두 개 이상을 발의한 의원 명단만 발표하며, 명단을 선정시 정당과 지역은 고려하지 않고
법안 발의 숫자를 기준하였음을 밝힌다"고 설명했다.
명단이 공개에서 1순위로 지목된 김광진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전남 순천·곡성에, 진선미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서울 강동갑에, 장하나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서울 노원갑에 출마 예정이다.
이와 관련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니스트)은 한 언론 매체에 기고한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이게 말이 되니'라는 제하의 칼럼을 통해, 동성애 관련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을 강력 비판했다.
특히, 박 소장은 김광진·진선미·장하나 비례대표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이라며 관련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공개했다.
김광진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진선미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장하나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칼럼에서
박 소장은 "김광진 의원은 인터넷 방송 매체 KHTV와 인터뷰에서 '동성애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반대할
하등의 근거가 없으므로 동성 간의 결혼에 동의한다. 며느리가 남자인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또,
진선미 의원에 대해선 "1997년 당시 변호사였던 진선미 의원은 동성애자인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과 함께 '동성애자 인권연대'를
창립했다"이라며 "진 의원은 교과서에서 동성애의 문제점과 실태를 알렸던 내용을 전부 수정, 삭제하고 동성애 옹호운동을 만든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장하나 의원은 <군형법> 제92조의6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며 "장
의원은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인데 꼭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동성 간의 결혼은
당연히 합법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끝으로 박 소장은 "제19대 비례대표 중에서 정의당과 녹색당,
노동당에는 '동성애자 위원회'가 있을 정도다. 이들 정당도 동성애를 옹호, 주장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의원 거의
대다수는 동성애 편을 들고 있다. 이들이 4.13총선에 대거 출마를 선언했다.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과잉 해석? 서울시청 담당 주무관도 “교회 폐쇄 가능” ‘교회’라는 말 없다는 이유로 괜찮다는 건 설명 안 돼. 실제로 교회 유독 탄압해 왔으니, 우려 제기할 수밖에. 죄형법정주의· 평등원칙· 과잉금지원칙 등 위배돼 위헌
▲박성제 변호사. ⓒ크투 DB
최근 교계에서 소위 ‘교회폐쇄법’이 논란이 되고 있다. 몇몇 교계 인사들이 개정된 감염병예방법의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교회폐쇄법’이라고 비판하자, 평화나무(이사장 김용민)가 이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본지는 기독 법률가로서 교회
수호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박성제 변호사(법무법인 추양 가을햇살)를 만나 교회폐쇄법 논란에 대해 팩트체크했다. 다음은 박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약칭 ‘감염병예방법’이 이미 국회에서 통과돼 12월 30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다음 49조이다.
제49조(감염병의 예방 조치) ① 질병관리청장,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모든 조치를 하거나 그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하여야 하며, 보건복지부장관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제2호,
제2호의2부터 제2호의4까지 및 제12호의2에 해당하는 조치를 할 수 있다.
2. 흥행, 집회, 제례 또는 그 밖의 여러 사람의 집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 2의2. 감염병 전파의 위험성이 있는 장소 또는 시설의 관리자·운영자 및 이용자 등에 대하여 출입자 명단 작성, 마스크 착용 등 방역지침의 준수를 명하는 것
③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제1항제2호의2의 조치를 따르지 아니한 관리자·운영자에게 해당 장소나 시설의 폐쇄를
명하거나 3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운영의 중단을 명할 수 있다. 다만, 운영중단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운영중단기간 중에 운영을
계속한 경우에는 해당 장소나 시설의 폐쇄를 명하여야 한다. <신설 2020. 9. 29.>
④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제3항에 따른 폐쇄 명령에도 불구하고 관리자·운영자가 그 운영을 계속하는 경우에는 관계 공무원에게 해당
장소나 시설을 폐쇄하기 위한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하게 할 수 있다. <신설 2020. 9. 29.> 1. 해당 장소나 시설의 간판이나 그 밖의 표지판의 제거 2. 해당 장소나 시설이 제3항에 따라 폐쇄된 장소나 시설임을 알리는 게시물 등의 부착.
목사님들이 이 내용에서 ‘해당 장소나 시설’을 ‘교회’로 대체해서 읽어 이해하면, ‘교회 폐쇄’라고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스님 입장에서는 사찰폐쇄법, 신부님 입장에서는 성당폐쇄법이라 할 수도 있는 부분이고, 일반 상업시설들도 마찬가지다. 저도 혹시
제가 과잉 해석을 하는가 싶어 서울시청 담당 주무관과 통화했는데, 그 역시 (해당 법을 위반하면) 당연히 교회도 폐쇄될 수 있다고
답변하더라.
지금 법에 따라서 시행되면 가장 크게 부딪힐 문제가 바로 현장 예배가 될 것이다. 현장 예배를 드렸을 때 출입자 명부 작성을
잘못한다든지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또 설교자가 마스크 쓰지 않아도 방역지침 위반이 돼 교회가 폐쇄되고 교회 간판과
십자가가 철거될 수도 있다. 이 법이 만들어질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서 12월 30일 시행만 앞두고
있다.”
- 그러면 기존에 있던던 교회 폐쇄 사건들의 경우, 법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인가?
“기존의 감염병예방법에도 근거는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확진자가 발생한 경우에만 가능했고, 민원 제기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확진자 없이 교회를 폐쇄했다면 그것은 법을 굉장히 잘못 적용한 것이고, 나중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라도 다 배상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신설된 규정들에 따라 언제든지 지방자치단체장이 교회를 폐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 열려
있는 상황이다.”
-평화나무의 반박 취지는 ‘첫째로 해당 법안은 교회나 예배를 특정한 법안이 아니고, 둘째로 방역을 방해할 정도의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하는 것은 교회 탄압이라 보기 어렵고, 셋째로 방역지침만 잘 따르면 교회라서 불이익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지 교회라는 말이 없어서 괜찮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원래 법을 만들 때 특별법을 제외하고는 특정 단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기존에도 ‘시설’ 혹은 ‘장소’에 대한 법률을 근거로 교회까지 제재했었다. 교회만 탄압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시설을 폐쇄·중단시킬 수 있고 이용자나 관리자, 그리고 소유자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지금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왜 유독 교회에 대해서 탄압한다고 말하느냐면, 실제로 탄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예배를
금지시켰으니, 이 법이 적용되면 결국 또 교회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서울시의 최근
방역지침을 봐도 공용으로 된 성경책이나 찬송가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굳이 특정 종교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단어들을
채택한 것이 너무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느냐. 그런 것만 봐도 교회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조항을 빌미로 평화나무가 지난 총선 때처럼 목사님들의 설교를 모니터링해서 고발할 수도 있다.”
지금 교회만큼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예배부터 중단하는 것은 정부 시책을,. 예배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예배도 못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현하기만 해도 사람들한테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북한과 뭐가 다른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을 해줘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 위헌 소지는 없는가?
“형벌적 기능이 들어가려면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돼야 하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예측 가능성, 즉 구성요건이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감염병예방법상의 집합제한, 집합금지 등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다 보니 내가 언제 어떻게 이 구성요건을
어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이 위헌적 요소가 제일 크다고 보고 있다.
또 하나는 평등원칙 위반이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렇게 통제하는 방식, 그리고 각 대상들마다 적용을 너무나도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평등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끔 하는 법안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이 정도
처벌은 고위험 병원체 불법 반입 등과 거의 동급이다. 과연 이게 평등원칙과 과잉금지원칙에 합당한가 따져 봐야 한다.”
교회 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악한 이름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그에 대한 항의가 많아지자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심하다. 다음에 명단을 기억했다가 표를 안 주었으면 한다.
1949년 한국전쟁 직전에 국회부의장 김약수라는 자와 남로당 프락치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으며, 미군은 고문관 500명 미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이어서 1950년 1월 20일 애치슨 미국무 장관은 한반도는 미방위선 밖이라고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미 스탈린의 내락을 받은 김일성은 탱크와 중포를 은밀하게 38선 일대에 포진시키면서 6.25 새벽 4시를 기하여 일제히 남침하였다. 그 전에도 남한 정부는 낌새를 알아 차리고 미국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남에서 북침 가능성이 있다고 거부하였다.
실상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국회답변에서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아침은 해주에서 떼우고, 점심은 평양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질탕하게 먹는다.” 고 호기롭게 큰소리를 쳤다.
막상 6.25 전날은 전 장병의 1/3이 농번기 휴가를 보냈으며, 2주일 전에는 전후방 사단장의 인사이동에 이어 육군장교회관 낙성식이라는 미명 아래, 밤새도록 댄스파티와 여흥을 즐겼다.
전쟁이 터지자 하루 만에 옹진반도와 개성, 의정부까지 실함되고, 이에 망연자실한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대전으로 돌아 왔다. 28일 당시의 유일한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 가면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가, 맥아더 장군의 지원이 있다고 하자 허겁지겁 시흥으로 되돌아 왔다.
이 대통령은 수원 비행장에 도착하는 맥아더 원수를 마치 구세주 마중하듯이 대전에서 올라와 극진히 영접하였으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아예 맥아더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였다. 비참하지만 그것이 그당시 우리의 생생한 역사였다.
실상 국군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총기와 실탄은 물론 모든 보급품과 식량, 군복 등도 모두 미군이 주는 걸 감지덕지 받아서 지탱하였다.
정부예산은 모두 군사원조와 더불어 민간원조의 달러를 공매해 대충자금이란 항목이 절대비중을 차지하면서 원조물자로 국민을 기아상태로부터 살려낸 상황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 좀 먹고 살만 하니까... ‘갈테면 가라! 양키 고 홈!’을 외쳐만 대는 주사파 종북 빨갱이들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아무리 트럼프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만 한다.
마치 부모가 소팔고, 논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놓은 후, 출세한 자식놈이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부모 형제에게 쥐꼬리만한 용돈을 쥐어주면서 생색만 내어 가는 호로자식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미군정이 1945년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그들은 편의상,
전라도를 하와이, 경상도를 플로리다, 평안도를 텍사스, 함경도를 알래스카 라고 호칭하였다.
그 중 하와이에 대하여만 별칭으로 남았으며, 호남인들은 하와이 라고 언급하면, 그들은 그만 경기를 일으킨다. 하와이든 알래스카든 그 곳이 좋다면, 거기가서 살면 될 일이다.
제21대 국회, 신자 의원 78명 당선
제21대 국회를 구성할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모두 78명(4월 21일 현재)으로 확인됐다.
본지가 4·15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253명과 비례대표 47명의 당선자를 확인한 결과다. 직전 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선자 중 본지가 확인한 천주교 신자가 77명이었던 것에 비해 1명이 증가한 수치다.
정당별로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52명으로 가장 많은 신자 당선자를 냈고, 야당인 미래통합당은 14명의 신자 당선자를 냈다. 이
밖에 미래한국당 4명, 더불어시민당 4명, 정의당 3명, 국민의당 1명이 각각 신자 당선자다. 신자 당선자 78명 가운데 남성은
62명, 여성은 16명이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신자 당선자 78명은 전체 300명 중 26%에 해당하는 비율이어서 총인구 대비 한국교회 신자 비율(2018년 11.1%)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4·15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63석, 더불어민주당이 비례대표 선거를 위해 만든 더불어시민당이 17석을 얻어 지역구에서 84석을 얻은 미래통합당과 비례대표 19석을 얻은 미래한국당을 압도했다.
한국교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형제 폐지나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 보호와 빈부 격차 해소 등에 더불어민주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번 선거 결과와 신자 당선자 현황은 한국교회에 희망적이라 볼 수도 있다.
당선자 중 초선 신자들은 각오가 남달랐다. 조오섭(요셉·52·광주 문흥동본당) 더불어민주당 광주 북구갑 당선자는 “이제 싸우는
국회를 멈추고,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힘쓰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김승원(바오로·50·수원 정자동주교좌본당)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시갑 당선자는 “성경 말씀과 사회교리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데에 일조하고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의정활동을 펴고 싶다”고 향후 정치 활동에 대한 소신을 드러냈다.
김은혜(로사리아·49·수원교구 성남 서판교본당) 미래통합당 경기 성남 분당구갑 당선자는 “품격 있는 보수, 대안을 제시하는 보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보수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국민의 염원을 읽었다”고 겸손한 모습을 강조했다.
중진 신자 당선자도 무거운 책임감을 보였다. 서울 용산구에 출마해 4선 의원이 된 미래통합당 권영세(스테파노·61·서울
이태원본당) 당선자는 “선택해 주신 용산구민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용산의 발전과 대한민국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소사댁’으로 불리며 역시 4선에 성공한 김상희(크레센시아·65·인천교구 부천 소사본3동본당) 더불어민주당
경기 부천시병 당선자도 “‘잘 해서’ 뽑아 주신 것이 아니라,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생각하고 이번 선거 결과에 자만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 교회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
●절대잊지 말아야 하는 악한 이름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그에 대한 항의가 많아지자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심하다. 다음에 명단을 기억했다가 표를 안 주었으면 한다.
교회여~~~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에 꼭 탈락시키자!! ●
김성주 02-784-5031 이상헌 02-784-8630 홍성국 02-784-2820 조승래, 02-784-2648 강선우 02-6788-6031 이용빈 02-784-4291 신영대 02-784-1524 서동용 ............. 임호선 02-784-1730 최종윤 02-784-6201 윤준병 02-784-1860 이탄희 02-784-8940 허종식 02-784-8870 정춘숙 02-784-3740 이학영 02-784-8051 송재호 ............ 이형석 02-784-1307 오영관 02-788-6766 전용기 02-784-2843 김민철 02-784-5031 이재정 02-784-2677 고영인 02-784-5490 서영석 02-784-9671 홍정민 ........... 이해식 02-784-2171 이규민 02-784-3770 박영순 02-784-2066 윤후덕 02-788-2587 전용기 02-784-2843 한준호 02-784-9160 김남국 02-784-2455 이원욱 02-784-6471 임오경 02-784-6396 정청래 .............. 최종윤 02-784-6201 박용진 02-784-9721 고영인 02-784-5490 신용대 02-784-1524 김윤덕 .................. 강준현 02-784-6950 민형배 02-6788-6426 한병도 02-784-5891 이장섭 02-784-4441 서삼석 02-784-9501 김성주 02-784-7380 설 훈 02-784-8570 오영환 02-788-6766 김민철 02-784-5031 김종민 02-784-5920 이수진 ................ 이성만 02-784-6090 윤재갑 02-784-1460 박홍근 02-784-8370 공산주의자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교회이다. 그래서 좌경이념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한다.
(101624 수요) 하나님의 영광 / 사람의 영광 (고전 10:31, 빌 3:18,19)
(100924 수요) 하나님의 재물 / 사람의 재물
(100224 수요) 하나님의 형상 / 모양 (창 1:27; 5:1,2)
(092524 수요) 두 예배 (요 4: 23,24)
(091824 수요)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 (마 1:16,18-19)
(091124 수요) 아담과 하와의 신앙
(090424 수요) 午餐 ἄριστον과 晩餐 δεῖπνον (마 25:10)
(082824 수요) 예수의 믿음, 나의 믿음 (갈 2:16)
(082824 수요) 예수의 믿음 나의 믿음
(082124 수요) 원망의 불뱀, 회개의 놋뱀 (쳐다본 자 / 쳐다보지 않은 자)
(081424 수요) 빼앗긴 복수, 빼앗긴 용서
(080724 수요) 간절한 자, 간절함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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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성경 탐구 8 (072424) - 그 길 가는 자 가지 않는 자2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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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성경 탐구 7 (071724) - 그 길 가는 자 가지 않는 자 (고전 1:18)
수요 성경 탐구 6 (071024) - 그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막 4:11,12)
수요 성경인물 탐구 5 (070324) - 모형과 실상 (롬 5:14)
인자 / 요한복음 5:22. 27 06-26-2024(수)
두 사람 / 창세기 1:27, 2:7 06-19-2024(수)
사도와 제자
06-12-2024(수)
06-05-2024(수)
04-14-2024(주일)
https://youtu.be/Q4jTOJqhBbo?si=xcu21Gbf_n5dG7Di
Knowing You – All I Once Held Dear (빌3:7-14)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막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바울 사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내어 부활의 말씀 전달.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7-1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4-6)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므로,
(고전15: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후11:22-27)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길 곳곳에 장애물과 방해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치우지 않고 함께 갈 수는 없.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그 장애물들과 방해물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장애물이고 방해물이기 때문에 분연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그것들이 나를 만족시키고 유익하게 할 것이라 믿고 있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땅에 있는 지체들이라.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골3:5,6,8)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부활,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믿었던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반드시 부활 휴거.
부활휴거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과는 상관 없.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조 보트의 구조 외침 소리 Can anyone hear me? 들었기 때문에 구조 받아.
무엇을 듣고 들은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생사화복 결정.
세상에는 살리는 소리와 죽이는 소리.
소망의 소리 절망의 소리, 살아나게 하는 소리, 포기케 하는 소리,…
그렇기에 예수님 말씀.
너희 산 자들은 나를 따르고,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끼리 죽은 자들과 죽을 자들 장사케 하라.
(마8:22)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let the dead bury their own dead
들어야 할 살리는 소리들 중,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 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신 말씀.
그 듣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듣는 것.
그 음성 들으면 살아나되 죽은 자들일지라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셔.
죽은 자들은 무덤 속 어둠에 있는 자들이고, 산 자들은 광명한 빛 가운데 있는 자들.
(요11:9,10)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의 빛 – 생명과 밤의 어둠 –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듣는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그 음성 들은 자는 살아나리라.
(요5:24,25)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이 생명이라신 말씀 들으면 죽은 자들이 생명 말씀으로 다시 살아.
(요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 보다 보이는 육에 집착하고 추구.
바울 사도 일갈.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만 구원 하신다셨.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모든 사람 아무나, 누구나 다 구원하지 않으셔.
구원해 주실 대상의 기준을 세워 놓으셨고, 그 기준에 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만 구원.
예수께서 살리기 원하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은 누구?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세상에 흩어져 세상의 소리 듣느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느라 주님의 음성 듣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
주일 예배 한 번으로 일 주일, 한 달, 일 년을 연명하면서 살고 있.
하나님의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에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
야고보 선지자,
(약1:1)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 문안 편지
(약1:16,17) 세상과 사람에게 속지 말라셨.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주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 세상의 속임수와 거짓과 유혹에 속지 말라셔.
세상은 죄와 죽음이 있는 곳이고, 죄는 죽음의 삯이라신 세상은 거대한 죽음의 무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
그런데 성경은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셨.
(요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들은 자는 살아난다셨.
죽은 자들은 죽어서 갓 무덤에 묻힌 자를 포함해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는 모든 육적 주검들, 시체들.
성경은 몸이 죽어 무덤에 묻힌 자들만 죽은 자라 한정하지 않.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 영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는 누구라도 움직이고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배설하고 생식하면서 육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으로 죽은 자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영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이 말씀 하신 것.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요한복음에만 있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말씀.
이 말씀 듣고 있는 자들 모두 살아는 있지만 죽은 자라시는 말씀.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들어야 하고, 그 음성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동물과 다름 없.
(전3:18-21)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짐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적 목숨으로만 사는 생명체.
‘인생’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생명의 삶을 살고 있는 참 생명의 생명체.
짐승은 죽어 땅에 묻히면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지만,
인생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벌어질 진짜가 있.
그렇기 때문에 살아는 있으나 죽어 있는 자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려면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고 영적 생명을 얻어야 한다셔.
하나님께서는 개나 고양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 짐승의 삶 살기를 고집하고 추구한다면 그들의 원하는 대로 구원을 유기시켜 버리신다셨.
(롬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행13:46-48)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계22:11.12)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 자기가 살리기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이유는 무언가.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셔서 부활의 때에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셔서 어린 양이 신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시고, 어린 양의 신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 받은 우리 무엇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엡5:10,11)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취이시리라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N)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K)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하나님 아들의 음성’ 들으면서 날마다 살고 있는 우리,
머잖아 필연코 부활되어질 우리, 부활되기 전, 살아있는 동안 잘 죽는 삶을 살아 놓아야.
부활되어져 올려가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열려져 있을 것이기 때문.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영생과 영벌의 심판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예수 그리스도.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5:27)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심판의 권한 위임 받으신 예수님, 심판하실 때 자기가 살리고자 원하는 자들만 선별적으로 한정적으로 살리신다 선언.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 살리기를 원하는 자들만 살리신다셨.
근거,
(요5: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대 앞에 선 자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마19:28)에 보이는데, 이 심판을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되 개별 심판은 예수님 양 옆에 앉은 12사도들에게 맡기셨.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2사도와 함께 혼인만찬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가게 될 자를 심판하게 하신다셔.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님이 공중에서 심판하시는 그곳에 12 사도들 함께.
(마19:28)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을 공중의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선 기독교인들을 심판하는 심판관으로 임명해 주셨.
12 제자의 심판 기준은 그들이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해 놓은 신약성경 말씀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가 기준.
마태복음에서 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의 삶이 심판의 기준.
바울 사도는 사도들을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는 중매 억할.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For I
am jealous over you with godly jealousy: for I have espoused you to one
husband, that I may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Wherefore we labour, that,
whether present or absent, we may be accepted of him.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very one may receive
the things done in his body, according to that he hath done, whether it
be good or bad.
하나님 말씀하신 선악을 교회에서는 혼인준비 하는 삶이 선이고, 혼인준비에 게으른 것을 악이라.
그러므로 혼인준비 하면서 사는 신부들이 어떤
(계2:26-28) 이기는
자(the one conquering)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the one keeping until finish the
acts of me)에게(이기는 자 곧 끝까지 내 일들을 주목하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천년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권세인데 이 권세를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셔.
이기는 자는 누군가면 끝까지 예수님 일들을 지키는 자(the on keeping until finish(consummation) the acts of me).
예수님은 2천년 전에 베들레헴에 오셔서, 30세에 성령으로 세례 받으시고, 3년 반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하시다가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피 흘려 죽으셨.
그리고 무교절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
그리고 오순절에 셋째 하늘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내려 주셨.
이 모든 예수님 하신 Acts, 업적들을 지켜봐 온 우리, 앞으로도 예수님의 하실 일들, Acts,업적들도 지켜 볼 것.
이제 남은 것은 세 절기, 나팔절과 대속죄일인 속죄절과 장막절.
마지막 나팔이 불리면 (고전15:51,52)에서
마지막 나팔이 울리면 죽은 자도 영의 몸으로 변하고 살아 있는 우리도 영의 몸으로 변해져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거기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장막절의 혼인 만찬에 들어갈 사람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 갈라지게 돼.
그 갈라지는 곳이 그리스도 심판대의 심판대이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직후를 나타내는 장면이 (계15:2; 18:21)
거기서 혼인 만찬에 들어간 사람은 (계15:2,3), 지옥에 들어가게 된 자는 (계 18:21)
(계15:2,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나님께서 하신 최대 마지막 업적이 어린 양의 혼인
(계15:3)에서는 ‘업적erga : acts’, (계19:9)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만찬 deipnon : dinner / supper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Let us be glad and rejoice, and give honour
to him: for the marriage of the Lamb is come, and his wife hath made
herself ready. And to her was granted that she should be arrayed in fine
linen, clean and white: for the fine linen is the righteousness of
saints. And he saith unto me, Write, Blessed are they which are called
un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이 어린 양의 혼인 만찬에 청함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에 반해 심판 받아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18: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혼인 만찬은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들)에(만찬에) 들어가고 (그) 문은 닫힌지라
그들 – 기름 떨어진 자들, 성령 소멸된 자들, 기독교인이지만 새끼 염소 된 자들, 중매쟁이 말을 듣지 않은 자들
그리하여 (계19장) 여기에 바로 신부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하게 나타내 주고 있.
(계19:6하-9)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그)어린 양의 혼인(가머스) 잔치(만찬:데이프논)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이 땅에서 잘 살고 못 살고,부유하게 살고 가난하게 살고의 문제 아니.
그리스도 심판대에서의 판결이 사람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그리스도의 심판대 사건은 누구에게든 반드시 일어나.
살아 있을 동안 살아 있게 하신 그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또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까지 보다 더 피 흘리기까지 싸워 기름 준비에 실패하지 않은 이기는 자 되어져 가야.
그렇게 나팔 소리 울리기 전에 혼인 준비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충성한 신부의 세마포 드레스 준비 마쳐야.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성탄절이 즐겁고 기쁜 것은,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사람들마다 자기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인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함 받게 하시고 죄 없이 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탄생하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교회마다 기뻐하는 사람들 즐거워하는 사람들 함께 하는 이유. 하지만 크리스마스 성탄절은 부활절과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로 명명되거나 언급되어지지 않은 세상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축제일 중 하나 되어져 있. 부활절과 추수감사절도 그렇지만, 크리스마스도 세속의 인본주의와 결합된 세상 세속적 인본적 종교적 축제 행사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절기로 자리잡고 있. 하나님의 성호만 높임 받으시고 경배와 찬양 받으셔야 할 교회에 우상화 되어 계승되어져 오는 기독교 문화, 제도, 절차, 의식,… 많아. 마치, 모세 때 놋뱀 – 700년 – 히스기야 때 느후스단 (왕하18:1-8) 엘리 아들 홉니 비느하스 - 블레셋 전쟁에서 법궤 빼앗겨 블레셋이 다곤 신상 앞 – 아비나답 – 웃사 아효 (대상13:10) – 가드 사람 오벳에돔 집에 석달 (삼하6:10; 대상13:14) 오늘 교회에 하나님 이름과 예수님 이름으로 전통을 따르고 지키면서 성경적이지 않은 이벤트성 행사들 중 대표적인 것들,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 예배. 성탄절, 온 교회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생일날로 잔치 벌이는 크리스마스 데이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니라 태양신 바알을 섬기면서 축제 벌이는 바알 축제일에서 시작. 이방인들이 지키던 태양신 축제일이 교회 안으로 들여와져서 예수 탄생일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로 되어져서는 카톨릭을 비롯해 개신교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해 놓고 구주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성탄 미사와 예배를 드리고 있. 그런데 문제는, 12월 25일에 성탄 예배를 위해 모여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자기들의 예배 행위가 저 옛날 태양신 바알을 향해 제사 하던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하나님 앞에 행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짜여지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고 행사. 이방의 태양신 숭배 행위를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드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성탄 예배는 하나님께 우상 숭배 행위를 보여드리는 것. 이방의 태양신 숭배 제사의 음란죄를 하나님의 집에서 범하고 있는 것.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황을 하나님의 대적자 또는 짐승과 음녀로 묘사. 그런 카톨릭에서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유월절을 폐지한 후에 이어서 바로 생겨난 것이 태양신 바알의 숭배일인 크리스마스.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겔8: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25명 여인들이 성전 안에 모여 동쪽 태양을 향해 예배 행위 하고 있는 모습. 에스겔 때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신을 섬기는 극도의 음란한 우상 숭배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 하나님 전에서 태양신이 경배 받고 영광 받도록 한 사탄의 적그리스도 행위. 하지만 교회는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신일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전부터 지켜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성탄절로 지킴으로써 교인들에게도 즐거움 주고,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함께 가장 많은 헌금이 성탄 헌금 명목으로 교회 재정에 충당되는 대목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 부인하지 못하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요인이기도.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으며, 사도들은 기념하지도 않았고, 초기 교회에서마저 이교도 취급을 받던 크리스마스는 어느덧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탄생일로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1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날이자, 가장 많은 찬송이 불러지는 날 되었. 심지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사업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1년 중 가장 많은 헌금이 모이는 때가 언제인가면, 크리스마스. 교회가 세상의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그렇게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고착화 돼 있는 관습적 전통에 끌려가고 있.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세상 전통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예배를 받으실까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 교회가 세상의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고착화 돼 있는 관습적 전통에 끌려가고 있. 현재 일요일을 예배일로 정한 것 역시 태양신의 예배일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침이었던 것을 알지 않으면 안돼.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말씀에 따라 왜곡되어 있거나 변질돼 있는 것들을 바로 잡아 원래의 것으로 고쳐가는 연습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 하나님께서는 세상 전통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예배를 받으실까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 아담 때 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다는 것을 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최초의 제사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보았. 그 후로도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진실되지 않은 제사를 멸시하시고 외면하셨. (사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말2:3)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계22: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출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고, 성경에 있지 않은 절기를 세상에서 차용해 와 하나님 전에서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불법 행위.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 행위를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우상 숭배 행위를 재연하고 있는 것.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행위를 할 때 눈을 감고 귀를 막으시겠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받지 않는 예배 행위는 인본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다 짐승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 (계13:8)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 짐승들을 경배하게 되는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그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인 성탄절. 그리고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도 아니. 크리스마스는 다신교 로마인들이 섬기는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동짓날 1주일 축제에서 유래.. 313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면서 로마인들의 대표적 축일인 태양신 탄생 축일 축제가 그리스도교 공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들어와 지켜지다가 태양신의 탄생일로 여기던 날이 예수의 탄생일로 바뀌어진 것. 그렇게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고, 이와 함께 크리스마스도 세계에 알려졌. 크리스마스가 없었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오늘의 교회들과 같이 12월 25일에 성탄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때의 바울 사도께서는 미리 경고. (갈1:8)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와 같은 것들로 사람에게서 난 것들. 우리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한 믿음만이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이고 기준. 나는 열심히 믿고 있다 하지만 나의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그 믿음은 믿음 아닌 종교 행위. 최종 판단자, 심판자는 하나님. (행5:38)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행5: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이 말씀들을 근거로 오늘 교회가 지키고 있는 대림절과 성탄절이 하나님께로 난 것인가를 보면 세상과 교회가 모두 예수님의 탄생일 로 지키는 12월 25일은 하나님께로서 난 예수님 태어나신 날 아니. 성경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짜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역의 기후나 환경 등을 통해서 그 시기가 언제쯤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말씀 중 하나가 오늘 본문 중에, (눅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 말씀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목자들이 밤에 베들레헴 밖의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던 장면. 팔레스타인 지역도 한국이나 미국과 같이 12월 25일은 계절적으로 겨울. 그렇기 때문에 12월 25일을 전후로 밤 뿐 아니라 낮에도 양을 방목할 수 없. 그래서 10월 중순부터는 양을 들판에서 방목하지 않. 예수님 오신 때는 겨울이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간대는 밤. (눅2:8,15)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또 다른 근거로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의 호적령에 따리 각 지역 각 지방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호적을 하기 위해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던 요셉도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고 있던 중에, 요셉과 마리아처럼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여행 왔을 이 때는 겨울이 아니었., 이스라엘의 기후는 雨期와 乾期로 나누어지는 기후 형태. 雨期는 겨울에 시작되기 때문에 들판과 밭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양 치기에 겨울 우기는 적합하지 않. 밭은 밀 농사가 끝난 후 휴지기에 들어 쉬고 있는 밭. 또한 이란 북동부의 파르티아 지역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타고 서너 달은 족히 걸렸을 거리를 겨울 우기에 추위와 비를 맞으며 순례하는 것과 추위 속에 비를 맞으면서 호적 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지에서 몇 날 며칠을 여행해야 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이 오신 때는 겨울이 아닌 가을. 2027년 전 예수께서 이 땅 인간 세상에 오셨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신 것.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때가 찼을 때. ‘그 때가 차매’는, 예수님이 오셨어야 할 그 때가 되어서 오셨다는 말씀 하시면서 율법 아래에서 율법에 따라 오셨다는 말씀.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는 것에서부터 사역 하시고 죽으시는 모든 것을 율법 안에서 완전하셨. (레23장)에는 일곱 여호와의 절기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셨. 이 절기들은,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모든 절기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예수님이 사역 동안 행동으로 완성되어져.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등의 절기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절기들. (요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매(장막 치셨으니)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자세히 보았더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때를 설명하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사도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계셨던 적이 있었다는. 우리말 번역에는 ‘장막 치셨다’는 표현이 없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만 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에는 ‘장막 치셨다’는 단어를 사용하셨. 장막절 말씀 레위기 23장에, (레23:34,47)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새 날은 장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너희는 이레 동안 장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장막에 거주할지니 음력을 사용하는 이스라엘은 우리 음력보다 약 1달이 빨라. 장막 짓는 날은 7월 15일로 우리 달력으로는 8월 15일, 추석 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추석 때가 되면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장막을 쳐 놓고는 거기서 기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장막 생활 하는 절기. 그러므로 장막 쳤다는 것은 예수님이 秋夕 시기에 오셨다는 것을 성경 용어로 표현한 것.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장막 치셨다는 표현을 근거로, 장막은 장막절에만 치기 때문에 7월 15일, 우리 날짜로 8월 15일 무렵의 장막절 기간에 예수님 탄생. 그리고 장막절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의 기간이었던 것도 증명 가능.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신 그 날이 장막절 날일 것. 성경에는 그에 대한 날짜 말씀이 없지만 율법에 의하면 30세 되는 날부터 사역을 시작해야 하므로 그 날이 되기를 기다리셨다가 장막절 그 날이 되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3년 반 동안 사역을 시작하신 것. 예수님 사역하시면서 맞은 첫 번째 절기는 유월절. 유월절 날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희생 되셔야 하기 때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네 번째 지키는 날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알게 해 주시는데,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얼마 동안 사역했는가를 알게 해 주는 근거이기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이 왜 3년 반인가는, 장막절 날 7월 15일 사역을 시작해서 장막절 부터 유월절 1월 14일까지는 6개월 기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 네 번째 유월절이 그 이전의 장막절 3년에서 6개월을 합하면 3년 6개월.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은 기름이 준비되어 혼인 만찬에 들어가져서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쳐 주시는 장막을 입어야 하는데 그 모습이,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계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예수님 오신 날도 육신으로 오셔서 사도들과 함께 장막을 치셨는데 이제 마지막에,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에 가서는 그 때 이기는 자들, 이기는 성도는 기름을 준비해서 혼인 만찬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신다는. 이 장막은, (계19장) 한 세마포 옷 입은 성도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2천년 전으로 돌아가서 예수님 오신 날 천사들이 베들레헴에서 양 치는 목자들에게만 나타나 주신 메세지.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우리말 번역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이지만 정확한 번역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에 맞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다’는. 하나님의 의지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합한 사람들.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나팔절에 공중으로 휴거 되어서 속죄절에 심판을 받을 때 거기서 장막절 혼인 만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성령의 기름 준비가 마쳐져 있어야. 우리의 생이 마쳐지는 그 순간까지 성령의 충만을 유지해야 혼인 만찬에 들어가질 수 있.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前無後無 환난 후에 예수님 오신다셨. 그 前無後無 환난을 맞고 이겨낼 수 있는 방도와 도구와 수단은 세상에 없. 오직 성령 충만 되어진 사람들만 도우시고 이기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이겨낼 수 있고, 그 이긴 자들만이 최후 혼인 만찬에 들어가는 기름 준비한 신부들. 이전에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있지 않을 그 환난이 온 다음 예수님 오신다셨. 그러기에 우리 어떤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계12:12) 그러므로 하늘(들)과 그(들) 가운데에 거하는(장막 칠) 자들은 즐거워하라 세상에 소망 두지 말고 공중에 올라가서 장막 칠 날을 소망하며 바라보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이기는 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 되어야 그 장막 쳐진 사람들의 기쁨을 누릴 수. 이 세상에 소망 둔 사람들은 소망 둔 세상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 하지만 2천년 전에 장막절에 오셔서 사도들에게 장막을 치셨던 예수님은 훗날 마지막 장막절에 기름 준비 마친 이기는 자들 위에 그 장막 쳐 주실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기다리면서 기뻐하고 경배해야 할 분은 “너희가 본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대로 다시 오시되 심판주로 오실 재림 예수를 기다려야. 이것이 ‘再臨의 待臨’. 再臨하시는 주님 기다리는 마음은 연습 없는 1라운드만의 게임. 2라운드의 second chance는 이제 없.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우리 인생의 나머지 1라운드 게임에서 이기는 자 되어 이기는 자들에게 쳐 주실 장막 안에서 신랑의 손에 이끌리어 천년 왕국 혼인 잔치 만찬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즐거움에 참예하는 그러기에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공중에 올라가서 장막 칠 것에 두어야.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캐롤 따라 부르면서 즐거워 했던 우리, 언제까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아기 예수 탄생 노래를 고장난 레코드 처럼 반복하고만 있을 수 없. 우리가 기다려야 할 분은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 예수. 그분을 기다리는 준비된 신부로서 기름 떨어뜨리지 않고 등불 꺼지지 않도록 신실하고 진실하게 온 맘과 정성 다해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준비된 신부로 남은 날을 살다가 그날에 공중에 올라가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영원한 장막 칠 준비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충성하는 순종의 예배자, 기름 준비된 신부로서 삶의 대단원 마무리.
(111923 Patris) 聽音 행 12:12-16. 219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행12:11-16)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야고보 사도 목베임 죽임 당한 이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사도들이 모여 있는 마가 요한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집 안에 함께 있던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들었기 때문. 여자 아이가 아니었어도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만 탈옥수를 찾아 뒤쫒아 올지도 모를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않은 베드로는 누군가 열어 준 문으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되 중요하거나 긴박한 상황이 대부분. 성경에는 오늘 본문 말씀 외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그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가 문 열 수 있는 민감성과 순발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영생의 문제가 달라지게 되는 말씀이, (계3:19,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문 밖에 오셔서 문 두드리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가 그것. 영생의 떡 들고 문 두드리시며 우리 이름 부르시는 주님 음성 듣지 못하면 정말 낭패.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구분할 줄 알고, 그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없고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주어지게 될 것이기에. 성경은 羊은 주님의 음성을 아는 동물로 의인화 시켰고, 주님의 음성을 모르는 동물로 염소를 들고 있. 1. (요10:1-5)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7-9)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과 염소 구분 기준은 복음 – 오른편과 왼편 (마25:33,46)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46그들 염소는 영벌에, 의인 양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말씀의 꼴로 장성하도록 양육된 양은 오른편의 영생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염소는 왼편에 놓여져서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셨. 그 염소들의 행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는 상관 없이 다른 복음을 받고 용납하면서 처음에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성령 소멸된 육체로 마치는 자들. (고후11:4)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갈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주님의 말씀의 꼴로 장성된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렇지 않은 염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져서 (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결말을 맞게 될 것.
예수님께서 (계3:20) 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함께 만찬을 잡수시겠다신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함께 두 주인을 섬기다나 주님께 징계 말씀 들은 교회이면서 영적 빈혈 상태에 있는 교회라고 진단하셨.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주님이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머리로 익힌 지식이 많은 것일 뿐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아가페 사랑이 없는 교회.
말씀에 대해 知的同意는 되어 있는 수준일 뿐, 말씀이 믿음으로 성장 성숙되어지지 못했. 知的 同意는 믿음 아니고, 知的 同意로는 구원받지 못.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의 실상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교회.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여유로워졌고 부족함 없이 안락하지만, 비지니스가 잘 돼서 돈 잘 벌고 좋은 집에서 여유로운 누리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가난하여 영양실조 상태. 육과 영의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 멈과 벌거벗음이 영적 허영심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일곱 교회의 실태가 오늘 우리의 실태 한 두루마리의 편지에 일곱 교회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각 교회가 자신의 모습과 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타산지석 반면교사 삼으라고 사데 교회의 죽음은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 죽은 신앙, 죽은 믿음, 영적 죽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내용.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리실 처방을 생각해 보아야 (계3:18,19) 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하라셔. 무엇을 회개하라시는가. 회개는 지금의 생각, 행동, 삶 일체를 바꾸라시는.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스스로 속이지도 속지도 말라 말씀.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러시면서 이제 주께 불로 연단한 금으로 부요케 되어 흰 옷 사 입고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 사서 발라 고쳐진 눈으로 너의 지금 상태를, 너의 가난하고 헐벗고 수치스러운 정체를 바로 깨달아 보고 회개하라 말씀.
그동안 너 자신이 너를 속였고, 너는 스스로 속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 부자라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너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먼 소경이고 벌거벗은 자라는 것.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인의 전형적 인물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 얻는 방법을 여쭙는 장면이, (마19:20-23)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막10:20-23)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눅18:21-25)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빌3:6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성경이 큰 부자라 인정 한 이 젊은 부자 청년은 자기의 富와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知的 同意로는 자기를 구원받게 하지 못했. 청년 :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善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청년 : 그 청년, 그 사람이 큰 부자로서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가니라 예수님 : 재물이 있는 자,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심히 어렵도다
이 청년 관원은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았었다면 예수님께 나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질문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정녕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면 네가 아직도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 너에게 있는 것들,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신 말씀이 청천벽력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말씀에 근심하는 마음으로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뒤돌아 갈 수 없었을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그리고 난 후에 와서 나를 따라 하늘에 있는 보화를 침노하러 가자신 말씀 따라 예수님 제자 될 수 있었을 것. 하지만 이 사람은 자기 의가 자기 눈을 가리고 있었고, 자기 귀를 막고 있었.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보지 못했고, 하늘에 있는 보화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마지막 남은 이 땅에서의 성취 목표인 영생을 얻으러 나온 그 자리에서 그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말씀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 이 젊은 부자 청년 관원은 예수님이 그의 보는 앞, 듣는 앞에서 그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들었어도 온전히 깨우쳐 알아듣지 못했. 聽音의 귀, 들을 귀는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고, 볼 눈 있었지만 보지 못했.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살지 않은 사람.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로 끝나지 않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주님을 따라야 한다시는 말씀으로 그 청년과의 대화가 마무리 되었.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하늘에 보화가 있는 자들. 청년과 대화 중이신 예수님 주위에 12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그 외에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 제자들 모두 자기들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는 자들 (마19:29; 막10:28;눅18:28)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마19:28,29;막10:29,30;눅18:29,30)
(막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인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필경 주님을 버리고 돈을 섬기고 재물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내 소유, 나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주님과 복음을 따르는 길에는 마태, 누가 복음에는 없는 말씀이 마가복음에는 있는데, 집이나 형제 자매나 부모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 백 배를 받을 뿐 아니라 내세에 영생을 받을 것이지만 현세에서 박해를 겸하여 받게 될 것이라 했. 주님과 복음 위해 따른 길에는 반드시 고난과 박해가 있다시는 말씀. 이 말씀을 바울 사도도 디모데에게, (딤후2:3,4)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잠19:17,11:24,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마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반면 하나님께서 빚 갚지 않은 자는 추심 하신다셨. (겔3:17-21)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 말씀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면, (계3:19,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하면, (계3:21,2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은 교회들의 문을 계속 두드리면서 교회들이 문 열고 나와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셔. 그리고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영접해 모셔들이는 교회들을 ‘이기는 그’라 하시면서 ‘이기는 그’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셔. ‘문을 열라’신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주님께서 문 두드리실 때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나와 문 열어줄 교회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 마치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베드로도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옥문을 열고 나오게 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집 문 두드릴 때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듣고 기뻐하여 베드로에게 문 열어 준 로데라는 여자 아이와 같이, 문을 두드리시는데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것이 아니. 문 두드리는 소리는 그 소리로 누구인가를 주의하거나 경계하게 하는 단계이고, 문을 열게 하는 것은 문 두드리는 사람의 음성.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을 열게 하는 주체는 주님의 음성.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을 알아보고 열어드리는 것.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가 주님께 문 열어드리고 맞아들이게 돼.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알아. (요10:27) 내 羊은 내 音聲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羊은 내 音聲을 알아 듣는다셔. 주님은 주님의 音聲을 알아듣는 양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시는가면,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계3:20,21) 누구든지 내 音聲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수요 성경 탐구 - 적그리스도 (11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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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102923 Patris) 고도Godot를 기다리며 마25:1-2 162 신랑 되신 예수께서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셨는데,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을 침노한 사람이 얼마나.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을 기다리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천국은 오지 않을 사람들 많아. 어쩌면 생이 다하도록 기다리지만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천국 기다리다가 생이 마쳐질 사람들 역시. 누구에게든 침노하면 침노 당한다신 그 천국을 우리는 지금 침노해 가고 있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셨다 하여 아무나 침노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아무나 침노를 시도한다 하여 침노 당하는 곳도 아니. 그러면 천국은 누가 침노할 수 있고 누구에게 천국은 침노 당하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예수님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은 삶의 천국의 삶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예수님 제자들에게 말씀, 너희가 기다리는 인자의 날들 중에 하나님 나라의 임하는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눅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천국을 볼 수 있는 사람, 천국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예수님께서 복음서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말씀. 천국은, 하나님께서 절대적 사랑이신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말씀. 하나님 나라 천국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셨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침노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 안에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할 수 없다셨. (요일2:14)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를 아는 너희는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흉악한 자를 이긴 너희는, (요일2:15-16) 너희 마음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셔. 그런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뭔가면, (요일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 그러시면서, (요일2:20)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는 너희가 (요일2:21-22)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안다고 한다면 너희는 거짓말 하는 자이며,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라.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침노하여 소유하고 누리는 자인가. 지금까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던 내 마음이 비워지고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있는 사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죽는 것.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고 죽는 것이, 그동안 내가 굴복당하면서 살았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른 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자기 몸을 위하고, 자기 이름과 명예를 드러내고, 세상에서 힘과 권력과 재물과 이름과 명예로 자랑스러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이유. 그렇지만 이와같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 예수님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살아나 구원 받고 자기가 미워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영원토록 보전하게 될 것이라.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목숨을 잃는가면 ‘나를 위하여’ – 예수님을 위하여.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사역 첫 해에도 제자들에게 하셨고, 죽으시기 며칠 전에도 하셨. 자기 목숨의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의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우리가 각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면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은 잃어버린 생명인 반면, 세상 사는 동안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미워하는 내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시켜 주시겠다 말씀. 나는 나의 생명을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 우리 중 누구도 내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없고, 미워하는 사람 없어. 오직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위하여만 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이고 자기 목숨의 혼을 부인하고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말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을 위해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 지고 내 목숨을 버리는 자라야 구원 받을 것이고 다시 살리셔서 다시 살려주신 생명이 영원토록 보전되리라 말씀을 알고 또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 내가 부인되어지지 않고, 자기 십자가 져지지 않고, 자기 목숨 버리고 잃는 것이 안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의 한계. 예수님을 위해 나의 혼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 땅의 것으로 영원의 것을 산다는 것. 90살, 100살짜리 육의 목숨 중에서도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육의 혼과 세세태록 영원한 생명의 맞바꿔 주시는 수지 맞는 육과 영의 교환 작업. 따라서 죽음은 오히려 살리심 받아 구원 받아져서 살리우심 받고 그 생명이 영원토록 보전되리라신 말씀이 시작되는 순간이고, 죽음은 새 생명, 새 삶, 새 인생, 영원한 새 인생의 시작. 이 말씀을 근거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위해 날마다 죽고 있어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 사도는 죽는 것을 단언하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셔. 날마다 죽노라고. 죽되 세상에 대하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고도가 왜 와야 하고, 무엇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도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오늘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은 올 것이고, 내일도 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확실한 희망 속에 인간은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심도 있는 삶의 진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우리는 어떤 ‘고도’를 기다리면서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으며 또 내일을 살고 있는가. 그 ‘고도’, 우리가 날마다 매일 기다리고 있는 그 ‘고도’는 오기는 할까, 그 ‘고도’를 기어이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사람마다 ‘자기의 기다리는 고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도’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인생. 성경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 천국을 가장 쉽게 설명해 주신 말씀이 열 처녀 비유. 1. (마25:1,2)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그러므로 천국 생활은 등을 들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 천국 생활. 燈은 (잠언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The lamp of the LORD searches the spirit of a man ; it searches out his inmost being. 성령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는 여호와의 등불이라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육신으로 모태에서 태어나지만 그 속에 있는 영은 죽어 있는 상태. 그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을 거듭나는 것이고 거듭난 사람들이 깊은 곳까지 성령께서 살피셔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셔. 그런데 이 열 처녀가 燈을 들고 거듭나서 예수님을 기다리며 졸다가 열 명 모두 잠들었. (마25:3-5)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25:6,7)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셨고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모든 기독교인. 모든 기독교인들이 잘 믿었건 못 믿었건 성령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다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기름을 준비해서 등을 다시 켤 수 있느냐 기름이 떨어졌는가를 심판하신다는 말씀. 기름은 성령. 기름이 준비된 자들만 혼인 만찬에. (마25:10)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오시면 영의 몸을 입고 공중에 올라가지는 거기서 기름이 준비된 성령 충만한 자들만 천년왕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옥 불에. 세상의 기독교인들 모두 공중에 올라가져서 혼인 만찬에 들어갈 수 있는 수는 많지 않다시는 말씀. (눅13:23-24)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 오셨을 때 등불 들고 기다렸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마25:15)에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서셔 공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미리 신약에서 미리 말씀.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기 하루 전에 하신 설교, 천국은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같다셨. 열 처녀는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 이 열 처녀 모두 믿음 좋은 예수님을 신랑이라 믿는 믿음 좋은 신부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열 처녀를 가인과 아벨 구별하듯 구별하셨. 예배의 등불을 켰지만 이 등불이 꺼져버릴 사람과 끝까지 꺼지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셨.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마찬가지로 주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구별하실 것.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등잔의 불은 그 날까지 타오르는 불꽃인가 그렇지 않으면 기름이 떨어져 심지까지도 새까맣게 타 버린 불 꺼진 등잔인가. 성경은, 천국은 처음부터 준비된 자만 들어갈 수 있다셨.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이 주님이 아담과 가인으로부터 내려온 생명이라면 바뀌어져야만 하는 생명. 거듭나서 바뀌어진 생명만 천국에 들어갈 수. 사람이 거듭나지고 바뀌어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이 문은 생명의 길, 복음의 길로 들어서는 좁은 문, 좁은 길. 좁은 길로 난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좁고 협착한 길. 어렵고 힘들어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이 길이 어떻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는 이 생명의 길, 복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른다셨.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딤후1:8)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은 예수 믿기만 하면,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 (롬10: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열 처녀 모두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다리고 있었. 열 처녀 모두 구원의 확신이 있었던 믿는 사람들. 신랑이신 예수님이 데리러 오실 것을 믿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이들을 구별하신 주님은 이들 중 다섯에게 (마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주님은 기름 떨어뜨린 다섯 처녀의 행동과 내용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셔. 단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말씀. 주님은 자기 소유만을 아셔. 지금 예배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결정돼. 우리의 진짜 생명이 달린 문제.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생명은 자기 혼. 자기 생명인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셨. 자기 생명인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시겠다셔. 1. (딤후3:1-7)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구원의 복음은 어른과 어린이에 차이 없. 어른용 복음 따로 있지 않고 어린이용 복음 따로 있지 않. (딤후2:22)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님의 뜻 아닌 내 뜻대로 살아온 생명은 헛된 것. (전11:10-12:1,8)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한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자기 혼을 미워하는 것이 자기 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회개. 자기 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기 혼을 미워하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셨. 자기 혼을 미워하는 것, (눅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 될 수 없다셔. 자기 혼,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을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할 뿐 아니라 나아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라 말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육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사람 육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 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 다섯은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 육으로 마치는 사람 다른 다섯은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자기 혼을 버리는 사람,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수요 성경 탐구 - 보응과 복 (102523)
수요 성경 탐구 - 다툼 (101123)
수요 성경 탐구 - 언약 그리고 성취 (101823)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 명하시면서 지키라 주신 절기가 7개, 7대 절기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신 까닭은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영원히 거하시며 영생의 복 주실 것을 말씀 주셨(시132:13-14, 133:3). 여기 시온은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이 세웠던 시온성이 아니라, 영적 다윗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우실 영적 시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영적 시온이 어딘가면,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33:20-24)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 시온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절기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 사함의 복이 있는 구원의 장소라셨.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6:23) 죄 사함을 받으면 사망이 없어져 영생할 수 있게 하시는 곳 시온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셨(시87:5, 102:16).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안식일과 모든 절기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등 절기를 세우심으로 시온을 건설하시고,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눅4:16, 마26:17-28; 요7:2, 14). (눅4:16-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절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마다 지켜야 하는 3차의 절기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신16:16-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일년 3차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반드시 지킬 것을 명하셨(대하8:13). (대하8:12-13)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13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그 중에 칠칠절을 맥추절,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출23:14-17, 34:18-23).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레 23장)에서 일곱 가지의 절기를 계절과 시기로 구분했을 때 대표되는 절기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3차의 7대 절기’라. 1차 절기: 유월절(逾越節), 무교절(無酵節) 2차 절기: 초실절(初實節), 칠칠절(七七節) 3차 절기: 나팔절(喇叭節), 속죄일(贖罪日), 초막절(草幕節) 하나님께서 절기를 제정하실 때 모세가 출애굽 할 당시부터 성막을 세우기까지의 행적을 따라 제정하셨. 과거 역사일 뿐만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실 일들에 대한 예언.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 ” (신18:18-19)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모세)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때)를 가리켜 말했느니라” (행3:22-24)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까닭은 모세가 했던 일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각 절기에 나타난 모세의 행적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 (요5:46) (너희가)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유월절 -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무교절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 초실절 -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오심 나팔절 – 그리스도 초림 대속죄일 –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하심 초막절 – 심판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초막절은 여호와를 구속자, 창조자로 경축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적 절기로 지난 9/29 금 부터 엊그제 10/6 금까지 일주일간 지켜졌던 절기(레 23장). 마지막 추수를 기념하면서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않고 기념하며 감사 찬양하는 절기로 정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 복 주실 것이지만,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재앙 내리심의 벌을 받을 것이라 말씀. 그러시면서 종말의 그 날에 열방의 남은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왕으로 송축하며 그를 한 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 예언의 말씀도. 그 말씀이 (슥14:16-19),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열방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를 만왕의 왕으로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인데, 애굽 족속을 비롯하여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재앙을 내려 벌이 임하도록 하실 것이라셨.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겠다신 것은, 실제로 초막절 절기 다음부터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가을 추수를 마친 상태에서 봄 수확을 위해 파종해야 하는 시기에 알맞은 비가 내리는 것은 봄 수확에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초막 절기에는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번제를 드릴 때에 전제처럼 제단 밑에 길어온 물을 붓는 의식을 행했. 탈무드는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이런 행사가 바벨론 포로 이전에도 있었다고 기록. (사12:3)은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의식에 두가지 중요한 의미. 1. 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에 있는 장막절에 물을 긷는 일은 앞으로의 비에 대한 강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백성에게 복 주시리라는 상징적 의미. 그러므로 장막절에 성전에 올라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스가랴서에서 하신 의미도 내포. 2. 광야의 므리바 반석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나와 백성이 그 물을 마신 사건을 기념하기도. 영적으로 그들은 성령이 강같이 흘러나온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이곳을 ‘물 긷는 집’이라 한 것은 (사12:3)에서의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성령을 긷는다는 의미. 이와 같은 행위는 추수에 대한 감사와 함께 미래의 곡식을 위해 비를 요청하는 기도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점차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실 것을 비는 기우의 행위로 변질.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장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 올라가셔서 물 축제 사람들에게 설교하신 까닭.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7-38). 이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은, (고전10:4)에서”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말함으로써 실로암 연못에서 물 긷는 사람의 행위를 우상숭배 행위라 경고하기도. (고전10:1-7)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이것이 장막절의 주님 메시지. 주님은 장막절 마지막 날에 가셔서 물 축제에 가서 이 설교를 하셨.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죽은 물 떠 오는 죽은 행실 하지 말고. (요4:13-15)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다른 것으로 목말랐고, 목마른 나, 주님의 생명수로 목말라야. 다른 것 보다 주님의 것을 원해야. 그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강 좌우에 달마다 열두가지 다양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가 있게 하는 생명수의 강이라 하셨. 이 생명나무는 십자가.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생명,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포도나무. 이것이 바로 마지막에 거기서 생명수를 공급해 주는 장면.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 영과 신부가 말하기를 당신은 오시옵소서 하는도다 듣는 자도 당신은 오시옵소서 할 것이요 목마른 자가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명령문. 첫째, 복음을 들은 사람은 ‘주님 오시옵소서’ 하라셔.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우리 일상에서 ‘주여 오시옵소서’ 말하지 않아.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의 마지막 명령의 말씀이 이것. ‘주님 오시옵소서’ 안에는 ‘나는 오시는 주님 맞아 모셔들일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 아무 때고 오시는 주님 맞을 준비돼 있어야 한다시는. 두 번째, ‘목마른 자가 오라’ 오되 목마른 자로 오라셔. 주님께는 목마르지 않은 상태로 오지 말라셔. 세상에 취하고 세상의 것을 채워져서 주님께 올 수 없다시는. 세상의 것들은 형식적 가짜. 세 번째, 원하는 자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리라. 원하지 않으면 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마실 수 있다셔. 이 말씀이,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상이신 하나님의 명절.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그러므로 내 신앙 인생의 모든 절기들,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어져 가는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으며,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유월절에서 오순절로 나아가기 원하고 나팔절에서 속죄일을 지나 장막절로 완성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내 신앙의 모든 절기들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지는 그 날까지 이기는 자의 믿음의 삶.
수요 성경 탐구 - 장막절 (초막절 / 수장절 / Sukkot / The Feast of Tabernacle) (100423)
수요 성경 탐구 - 대 속죄일 / 욤 키푸르 (092723)
수요 성경 탐구 - 로쉬 하샤나 신년 나팔절 (092023)
https://www.youtube.com/watch?v=6D-UaedqOjk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 하나님 나라 – 하늘에 있다시는데, 아직은 우리 손에 쥐어진 것 아니. 우리가 거기에 가서 받아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만약 정한 기한이 지나도록 수취해 가지 않으면 말소되고 폐기되어져.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시민권 수취 통지 받은 우리 모두, 정해진 기한에 시민권 수취 확인 명부에 기명날인 하고 시민권을 받아야. 정한 기한은 우리 삶이 남아 있는 동안이고, 그 동안의 삶의 내용이 무언가는, 믿음의 결국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내용. 베드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결국인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 (벧전1: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1:13-15) 그러므로(너희가 할 것은 없고 오직)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리고는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믿음의 결국 – 영혼의 구원, 즉 ‘혼의 구원’인데, 이 ‘혼의 구원’은 대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항상 복종해야만 하는데,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면서 사명 감당해야 얻을 수 있다 말씀. 무엇을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는가면 (벧전1:17) 너희가 이 땅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 행하는 모든 행위를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라셔.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에 세 가지 나라.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세상 나라, 우리 주의 나라 하나님 나라, 앞으로 올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 왕국 세상나라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왕 마귀 사탄이 왕 노릇 하는 나라. 사탄 마귀가 왕 노릇 한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부터 세상 나라 시작되었. 마귀가 결박되어서 무저갱에 들어갈 때까지는 세상 나라.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세상 나라에 거주하고 있. 그리고 주님 재림하실 때 마귀가 결박되므로 주님이 재림하실 그 때까지 세상나라는 존재하게 돼. 그러는 중간 도중에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개입. 이 나라를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성령 세례 받으시고 성령을 힘입어 사역하시는 순간부터 천국,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이 하나님 나라는 백보좌 심판까지 계속. 그러므로 (계11:15) 말씀을 근거로 세상 나라만 있었다가 예수님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신 성령을 입고 사역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나중 예수께서 재림하신 때부터는 하나님 나라 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시작.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세상 나라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 장악된 자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그들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으로 남아 여전히 죄악된 세상의 삶을 살고 있는 중.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엡2:2)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져 간 것인데, 이 과정에서 세상 나라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우리 누구도 하나님 나라 가는 비행기 타기 위해 여권에 입국 비자를 받았는가면, 우리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비자를 받은 기억 없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비자를 받았. 그 근거 말씀이,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물로 세례 받았고 성령으로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회개한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 입국 비자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 우리가 성령 세례 받은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증거 말씀이,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들이 요구하고 있는 조건들이 우리 매일의 삶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를 수 있는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격을 성령께서 주셨. (고전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들을 근거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진, 자격 있는 하나님의 나라 입국 비자 받은 삶을 살고 있는 중.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비자에 찍혀 있는 기한 동안 비자 받은 목적의 삶을 내용으로 살기만 하면 돼. 비자 기한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시간 만큼인데, 그 남은 비자 기한 동안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에 대한 유종의 미를 잘 마무리 해야. 구원에는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 두 가지.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영과 혼의 구원이 함께 완성되어져야만.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적 죽은 상태여서 그대로 자라 살다 죽으면 지옥 멸망으로 끝나는 인생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있어야만. 그 예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통해 보여주셨.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로 그리고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로 난 것은 어머니 뱃속의 양수에서 나온 것이 물로 난 것. 이것은 육의 어머니 뱃속 양수에서 육적 세상 나라로 들어온 것. 그러면서 영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영이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될 수 있게 하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신 말씀.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왜 영으로 태어나야 하는가면, 육으로 태어나 육으로 살고 있는 누구도 영으로 살아 있는 자 아니고 영적으로는 죽어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기 때문에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입어야만 한다신 것. (요6:63;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아담 이후로 영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죽어 있었.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영이 죽어 있는 누구라도 죽어 있는 영이 살아나게 해야만 하는데,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시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죽은 영이 살아나게 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지만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충만케 거하시는 살아계신 영이시기 때문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언제라도 소멸되시고 떠나시는 영이신 것을 알아야. 그렇기 때문에 늘, 언제나, 항상 성령께서 나에게 내주 교통하시도 충만하시도록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안.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영이시고 생명이신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 위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령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그러면 혼은 어찌 되는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혼은 육적 생명을 의미. 혼의 삶(생명)의원리는 육체적인 죽음의 시간에 없어지는 사람의 육과 정신과 생각과 마음을 이성적이고 정신적으로 연결시켜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 존재.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혼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마다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사람 전체로 표현. 혼과 영은 연결 되어 있지만, 동시에 분리되어 있.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러므로 영은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한 면이고, 혼은 인간의 본질이며, 혼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 내면 정서. 따라서, 영의 구원은 살리는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에 의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 거듭 나지는 것이고, 혼의 구원은 나의 생각과 의지가 죽고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 되어지는 것. 이 과정에서 나의 육과 생명에 관계된 내 안의 자아와 정서와 가치와 성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것들과 한 가지로 통일되는 것이 성경에서 혼의 구원.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게 지워져 있는 나의 십자가가 하나 될 수밖에 없. 예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고자 하신 뜻의 초보적인 장면을 보여주신 곳이 있는데, 천국이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 축복하신 예수님에 대해 복음서는 부자와 천국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겨 주셨. (막10:17-27)은 부자 청년 관원 이야기.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청년을, 마태는 청년(마19:20, 22), 누가는 관원(눅 18:18)이라 했고, 세 저자 모두 재물이 많은 부자로 묘사. 예수께서는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말씀에, 재물을 사랑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뒤돌아 예수를 떠나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평소에 그의 우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율법의 제 1 계명을 위반하며 살아온 것. 영생을 위해 찾아온 부자 관원 청년에게 주신 예수님의 권유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영생의 주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마 10:37-).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 관원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했. 재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실은 재물을 신으로 믿었던 것.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친구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마 6:24) 재물을 선택한 결과 구원의 주님, 영생의 주님 앞에서 하늘의 시민권을 파기당하고 소실 간절히 원했던 영생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가는 비자를 끝내 받지 못했. 안타까운 것은 주님 예수께서는 이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었. (막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 나와 영생 얻을 방법을 찾고 물은 부자 청년 관원이 영의 구원을 얻었을까의 의문도 있지만,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혼의 구원은 더더욱 전무했. 재물이 많되 많은 재물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 하늘 보화 천국 영생보다 귀했기 때문. 구원은 영생의 주님, 구원의 주님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만으로 완성되어지는 것 아니. 가룟 유다가 그 증인이고, 예수를 따르며 호산나 외쳤던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못박으라 외쳤던 폭도의 모습이 진짜 모습이었던 것을 보았던 우리는 알 수 있. 물과 영으로 거듭난 것에서 머물면 안돼. 혼이 거듭나서, 혼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구원의 완성이 성취되어진다는 것 알아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져서 살고 있.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살고 있는 중. 문제는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있다 하여 그것으로 구원이 완료된 것 아니. 우리에게는 기필코 들어가야 할 나라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 왕국. 거기에 들어가서야 ‘믿음의 결국인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 구원이 완료된 것이기 때문.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달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계셨을 때부터 이미 있었. (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신 말씀의 너희가 누구인가면 바리새인들. (눅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말씀.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계실 때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또 다시 말씀하신 곳이, (마12장)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쫒아낼 수 없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 분사의 계속적 용법으로 임하였다 말씀. (마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일 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 (요18장) 예수님 빌라도 법정에서 하시는 말씀.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시면서,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가 내 종들, 천사들을 동원해 세상의 유대인들을 무찌르게 하셔서 지금처럼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셨을 것이라시면서,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러므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두 번 반복 말씀. 이 말씀 하신 예수님께서는 (눅22:30)에서 사도들에게 말씀. 너희가 앞으로 내 나라에 있게 될텐데 거기 내 나라의 내 상에서 먹고 마실 뿐 아니라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리라 말씀. 그 나라, 장차 있게 될 내 나라는 언제 임하게 되는가를 (계11:15) 에서 확인시켜 주셨.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나팔을 부는 순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데 그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되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이라 말씀. 세세토록은 천년 왕국의 기간. 성경에 ‘천년 왕국’의 단어적 표현은 없지만 (계20:4,6)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말씀하셨.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누구인가면, 살아 있을 때 예수를 증언한 사람들, 살아 있을 때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베임 순교 당한 사람들, 살아 있을 때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둘째 사망도 다스리지 못하고 해 끼치지 못할 사람들이라셨. (계20:4,5)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6-8)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눅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천 년 왕국은 분명히 있. 그렇기 때문에, 이 천 년 왕국 들어가는 ‘천 년 왕국 입국 비자’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 오늘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지상 최대 사명.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완성적 의미. 구원은 한 마디로 ‘천 년 왕국’에 입국하는 것.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에 와 있으니까 우리는 천국 가는 여권, ‘영의 구원’은 받은 자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구원이 ‘혼의 구원’. (벧전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셔. 그렇게 구원 얻기 위해 남아져 있는 것들이 이루어진 끝에 얻어지는 것이 구원이라시면서, 그러면 그 구원이 무슨 구원인가면,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이라 한글 번역. 영어 – (KJV/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영혼’이 아니라 ‘혼들’, 복수 명사 사용. 그러면 이 ‘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베드로 사도 가르쳐 주셔. (벧전1:6-9)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어 – (KJV/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이 과정들을 거쳐서야 비로소 ‘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셔. 그런데 이 ‘혼의 구원’은 무엇의 결국인가면 ‘믿음의 결국-the goal of your faith’.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적이게도 ‘혼의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의 결국’까지 갈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해.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함량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소망 있게 하셔서 우리를 위해 간직해 놓으신 유업을 잇게 하시는 예비하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 받게 하셔서는 그 믿음으로 기필코 결국 ‘혼의 구원’을 받게 하신다신 말씀이, (벧전1: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세에 너희에게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 ‘혼의 구원’이고, 이 ‘혼의 구원’을 받은 자라야 ‘천 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 이것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 확인시켜 주신 ‘혼의 구원’ 한글 성경에서는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사용. 대부분의 곳에 ‘영혼’이라 돼 있지만, 영어 성경은 반드시 ‘영’은 ‘spirit’, ‘혼’은 ‘soul’로 명확히 구분 사용. 당연히 헬라어 신약 원문에도 구분되어져 있 - ‘프뉴마, 영’, ‘프쉬케, 혼’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 그런데 우리에게는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점검할 것이 있는 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야. 그리고 살았을 때 주님 오시면 그 때 공중으로 올라가져서 ‘공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어야. 그러면 그 때부터 시작되는 나라가 ‘천 년 왕국’, 그리스도의 나라. 우리 모두 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지금 천국,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지만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훗날에 반드시 가야 하는 나라가 있. 살아 있는 동안도 가질 수 있는 그 나라, 죽었다면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서 가야만 하는 그 나라, 살아서도 뒤따라 올라가야 하는 나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혼인 잔치가 있는 그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천 년 왕국. (마25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 열 처녀 모두 등을 들고 있었. 등을 들었다는 것은 영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믿는 자들. 신자들. 그러나 이들 중 다섯은 ‘천 년 왕국’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다른 다섯은 바깥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다가 결국은 (계18장) 깊은 바다에 연자 맷돌이 바다에 던져져서 다시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바다에 빠져 천 년 동안 있다가 (계20장)의 백보좌 심판 때 나와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그 때 그것을 확인 받아야 해. 어차피 떠나야 하고 반드시 떠나야 하는 여행 준비 철저히 해서 영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혼의 구원을 이루어야 주님 오시는 날 천 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 그것은 천 년 왕국의 입국 비자이기 때문.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수요 성경 탐구 - 다시 선교지 유럽 (091323)
수요 성경 탐구 - 팔려가는 교회들 (090623)
수요 성경 탐구 - 미국의 유대인 (083023)
08-27-2023(주일) 설교 원고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we are God'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예수를 믿는 이유, 목적 – 다시 오시는 예수님 맞는 것. (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성경의 결론 (계22장)에서 예수님 말씀. “7내가 오리라 12내가 오리라 20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은 오실 때 신부를 맞아들이는 신랑으로 오실 것. 그러면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하는 우리는 언제라도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준비된 신부 되어 있어야. 그런 면에서 우리 누구도 지금 당장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셨을 때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가. 성경은 우리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셨는데, 우리 모두 흰 세마포 드레스 준비돼 있는가. 언제라도 입고 혼례식장 입장할 수 있는 세마포 드레스 준비돼 있는가. 세마포 주님은 흰 세마포를 ‘빛나고 깨끗한 흰 세마포’라시면서 성도들이 보여야 하는 옳은 행실이라 가르쳐 주셨.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 – (K) the righteousness of saints (N)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 성도의 옳은 행실 행위는......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는 것. (요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계 20:12-13)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마25:34-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들 돕고 보살피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이 임하게 하신다셨. 이것이 은혜 입은 자, 빚 진 자의 겸손과 순종의 모습이고, 은혜를 알고, 빚 진 자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 받았을 때 겸손과 순종으로 초청장 받아들고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오라 청함 받았지만 밭일 하러 가야 하고, 사업차 출장 가야 하고, 시집 가고 장가 가야 한다며 하나님의 천국 혼인잔치 초청을 외면하고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간 것 같이 세상의 자기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따르는 것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보여주시면서 이 사람들이 애당초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기는 했어도 실상은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라 하셨. 그 사람들이 (마22장)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 받았던 사람들. (마22:2-5)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청함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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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신실해 보이고, 열심과 열정으로 헌신과 봉사도 하지만 정작 혼인잔치에 참석할 것을 청함 받았을 때는 고작 잔치국수 한 그릇 때문에 세상의 일들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마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 하니 그러므로 사거리에 나가 길에서 만나는 대로,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만나는 대로 아무나 모두 데리고 오라고. 그랬더니, (마22:9-10)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 (행13:42-45)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마땅히 청함 받기에 합당해 보이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만 정작 청함 받았을 때는 응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비방하고 있는 청함 받았지만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바울 사도의 말씀, (행13:46-49)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복음에 초청받았지만 청함 받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배척하며 위해를 가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청함은 합당치 않은 청함이었음이 드러났고, 이에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복음 전해 들은 모든 이방인들은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다음 안식일에도 또 말씀 전해 줄 것을 요청하는 현장의 사람들이 청함을 받아 청함에 순종하여 말씀 안에 들어온 사람들.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런가 하면,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신 주님 앞에 수많은 또다른 청하심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마7:21)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예수 믿기에 열심이고 예배 참석에 열성이고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이던 틀림없이 거듭난 사람들임에 의심의 여지없는 사람들 모두 청함 받은 사람들이었. 예수 이름으로 목회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낫고 귀신이 쫒겨 나가고 악한 영이 도망치는 능력도 행하던 자들 모두가 청함 받은 자들이었.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이들을 모른다셨을 뿐 아니라 이들이 예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행위를 불법이라시면서 불법 행하는 자들은 주님 앞에서 떠나가라셨. (마27:22)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확신도 하고 있다만,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행하는 자라야만 한다고 말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요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성도의 착한 행실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입는 것. 오늘 믿음의 현장마다 믿음의 행위와 믿음의 삶에서 직무를 유기하면서 신앙하는 사람들. 직무유기자들. 세상에서도 직무유기자들은 강제 퇴직당하고 연금도 박탈당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직무유기자들이 들어설 자리 없.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지금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는 직무유기 신앙인들, 예복 입지 않은 예비 신부들, 성도들이 마땅히 보여야 할 옳은 행실, 착한 행실의 세마포 입지 않은 혼인잔치에 청함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 모두 직무유기자들.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손발이 묶이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져 유기당해질 자들. 신부에게 가장 옳은 행실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 신랑 맞을 기쁨으로 신부 단장하고 예비 마친 신부에게라야 세마포 허락되어져. 직무유기자 아닌 직무완수자.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직무 완수자로서 우리에게 ‘성도의 옳고 착한 행실’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사는 것.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사는 우리의 삶으로 세상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증인 되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보이고 알게 하는 것이 소금과 빛의 삶. 그렇게 소금과 빛의 성도의 옳고 착한 세마포 잆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는 세상에 속해 세상의 통치를 받고 사는 세상의 사람들이 스가랴 8장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그것이 우리의 착한 행실. (슥8:22,23)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수요 성경 탐구 - 유대인 (081623)
수요 성경 탐구 - 알리야 (080923)
알리야 (עֲלִיָּה ,Aliyah)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유대인의 땅인 에레프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말은 예리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 바깥에 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지금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알리야란?
원어 : 올라가다(Going Up, Ascent)
의미 : 이스라엘로 이주하다
에스겔 39:28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
19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던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서 2000년 동안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주권과 국토가 회복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하고 있습니다.
건국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약 70만 명이 었지만 현재는 알리야를 통해 약 700만 명으로 10배나 가까이 되는 인구로 증가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셨지만, 다시 이스 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넓게는 약 700구절, 구체 적으로 명시한 말씀은 약 161구절이 기록되어있으며, 마지막 때 하나님 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
이사야 49:22-23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이스라엘
AD 70년 2차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 민족은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라 없이 온 열방에 흩어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이사야 66:8) 라는 말씀처럼 2000년 동안 없었던 나라가 1948년 5월 14일 건국 되었습니다.
나라의 회복과 더불어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언어, 절기 등이 회복 되고 있으며 예수님 당시의 모습을 지금 보는 것과 같이 말씀과 언약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지난 2천여 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핍박 (십자군 전쟁,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육적 회복을 위하여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실질적으로도 도와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1:25-26)
이스라엘로부터 복음이 이방에게로 흘러왔고, 이제 회복되므로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이때 이스라엘이 온전한 구원을 얻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3:39)의 말씀을 외치기 위하여 한국 교회가 함께 협력하여 달려나가야 할 것 입니다.
왜 교회가 알리야를 도와야하는가요?
이스라엘의 회복은 정치적인 관점이나 종교적인 관점이 아닌, 성경 말씀의 회복에 관한 관점에서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1)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서 하신 예언이 다 이루어질 때 만물이 온전히 회복되며 주님이 오신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가운데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전체적으로 약 700번, 구체적으로 161번이나 강조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로 흩어졌다가 때가 되면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방들이며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0)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등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함께 이 일에 손과 발이 되어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왔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열방가운데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나를 사용하소서!" 고백하여 쓰임받은 마리아처럼 한국 교회도 열방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한국 교회가, 제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소서"
알리야를 돕기 위한 성경적 방법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고토로 데려오겠다는 구절이 700개 이상 된다. 그리고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 특히 서구교회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해왔다.
특히 알리야 담당 장관에 에티오피아계 유대인 프니나 타마나가 새로 임명되면서 그동안 미뤄져 왔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이 승인돼 올해 말까지 2천 명이 알리야 하게 됐다.
전 세계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담당하는 기구는 쥬이시 에이전시(Jewish Agency)이다.
1897년
테오도르 허츨이 세계 시오니스트 의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를 피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구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1929년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던 땅이 대영제국의 통치 하에 있을 때 세계
시오니스트 의회의 정치적인 운영을 맡기 위해 쥬이시 에이전시가 설립되었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에는 정치적 역할을
내려놓고 전 세계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정부를 연결하는 플랫폼 기구로 변화되었다.
1929년
부터 지금까지 3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고토로 알리야시킨 쥬이시 에이전시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알리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고, 2016년에 800여 명의 이스라엘 직원과 450여 명의 전 세계 사절단을 두고 알리야를 돕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로
알리야한 사람들의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에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을 경험하도록 데려와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쥬이시
에이전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유대교 종파들을 포용하기 위해 “다원주의에 대한 헌신의 일환으로 쥬이시 에이전시는
이스라엘의 개혁(Reformed), 보수(Conservative) 및 현대 유대교(Modern Judaism) 흐름을 지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치관을 이스라엘 내에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한 정체성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개혁, 보수
현대 유대교에서는 진보적인 해석으로 LGBT와 페미니즘을 수용하고 있고, 신을 믿는 어떤 이들이라도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인정해 준다.
바로
이런 부분이 이스라엘 내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정통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적인 유대교, 양측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인은 더이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팔라쉬 무라)과 스파르딤 유대인(아누심)의 알리야 승인이 논란이 많은 이유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이라 치부하기 때문에 알리야를 했던 사람도 나중에 발각되어
시민권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올 연말까지 알리야하게 될 팔라쉬 무라 유대인들도 이스라엘 입국과 함께 2년 간 유대교 개종 과정을 거치게 된다. 2년 동안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임이 밝혀진다면, 시민권이 박탈되고 추방될 수 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웠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있다. 기도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많은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고 있으며,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다. 쥬이시 에이전시는 알리야의 관문을 지키고 담당하는 자들로서 흩어져 있는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까지 중요한 사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런 사명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쥬이시 에이전시가 이스라엘 정부와 함께 성경적 가치관이 아닌 진보적인 세속주의 하에 운영 되며, 예수님을 믿는 혈통적 유대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2020년,
전 세계 유대인 중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의 수가 제일 많은 이 때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의 이끄심을
구하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수십 년 동안 기독교 단체들은 쥬이시 에이전시와 함께 알리야의 사명을 감당해 왔다. 바라는 것은 이
때가 전 세계 기독교 단체들의 영향력으로 쥬이시 에이전시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길 기도한다.
[이스라엘] 알리야(עֲלִיָּה ,Aliyah)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말까지 해외에 흩어져 있는 9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열방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알리야(עֲלִיָּה ,Aliyah)’라고 한다. 히브리어 원어로
알리야는 ‘올라가다’로 ‘하나님께 올라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4)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셨지만,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넓게는 약 700구절, 구체적으로 명시한 말씀은 약 161구절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위하여 기도하자.
출애굽기 19장 4~6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말씀하신 하나님,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주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순조롭게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게 해주시고 참 구원과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리다
예리다(ירידה yerida , "혈통")는 이스라엘 국가 (종교 문서에서는 이스라엘 땅 )에서 이주한 이스라엘 유대인 입니다. 예리다는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의미하는 알리야( עליה , 직역 : "상승") 의 반대입니다 . 시온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예리다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 이며 이 용어는 다소 경멸적입니다. [1] 비유대인 이스라엘인의 이주는 "예리다"라는 용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민의 일반적인 이유는 높은 생활비,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폭력 과 아랍-이스라엘 갈등 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 학문적 또는 직업적 야망,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환멸 등입니다. [2]
이스라엘에서 온 이민자를 요르딤 ("[이스라엘에서] 내려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olim ("[이스라엘으로] 올라가는 자들")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히브리어 "Yored"("하강"을 의미)의 사용은 Torah에서 가져온 용어의 현대 적인 갱신 입니다 . , 그리고 내가 또한 너를 다시 끌어올리겠다" 창세기 46:4, " ויהי רעב בארץ; וירד אברם מצרימה לגור שם כי-כבד ץרע에 אבה לגור שם כי-כבד ץרע ") 기근이 심하므로 거기에서 살게 하셨느니라." 창세기 12:10), 그리고 미슈나 에서 : "", 그리고 탈무드 에서 " ארץ ישראל גבוה מכל הארצות "(이스라엘 땅은 [다른] 모든 땅보다 높음).
성경에서 최초의 1 년 은 아브라함이었고, 후에 요셉과 야곱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에서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3] 랍비 학자들은 나중에 이 원리를 yerida letsorech aliyah 로 해석 했는데, 이는 "상승하기 위해 가라앉는다"("바닥을 치다"라는 현대적 표현과 유사한 개념)로 번역됩니다. [4]
유태인 법 또는 Halakha 는 이스라엘에서 이민에 대한 특정 제한을 정의합니다.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 ) 에 따르면 굶주림 이 심할 경우에만 해외로 이민과 재정착이 허용됩니다 . Joseph Trani 는 기근이 없는 경우를 포함하여 결혼을 위해 이스라엘에서 이주하거나 토라를 공부하거나 자신을 부양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결정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에서 이주하거나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조차 정교회나 전통적인 유대교에서는 남성에게 합당한 행위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5]
시온주의 운동 의 시작 과 이스라엘 건국 사이에 오스만 제국 과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수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 [ 인용 필요 ] 첫 번째 알리야와 두 번째 알리야 와 함께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자들이 처음 정착한 기간 동안 이민의 범위 는 전체 이민자의 약 40%( Joshua Kaniel 이 추정)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80~90%. [ 인용 필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이 기간 동안 많은 유럽계 유대인 이민자들이 몇 개월 만에 포기하고 떠났으며 종종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6] 4차 알리야 의 후반부인 1926-1928년 동안 의무 당국은 17,972명의 유대인 이민자를 기록했으며, 유대인 기구 는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약 1,100명을 더 세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당국은 14,607명의 유대인 이민자를 기록했습니다. [7]전체적으로 1923년에서 1948년 사이에 강제 팔레스타인에서 약 60,000명의 유태인이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온주의 프로젝트 시작부터 국가 수립까지 이주한 유태인의 총 수는 약 90,000명 정도였다. [8]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창47:7-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모래시계 : 위쪽 공간 아래쪽 공간으로 나뉘어, 사이의 좁은 구멍으로 중력에 의해 모래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 30초, 1분, 2분, 3분, 5분, 10분, 30분, 1시간, 1일, … 모래시계에 다른 일반 시계에서 볼 수 없는 인생의 흥망성쇠의 과정. 위쪽 모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아래 유리 공간에 무언가 이루어지고 쌓아지는 단순 모래 이동 아니. 물리학에서 이 모래의 이동을 모래의 유출이라. 인생을 모래시계에 적용, 모래의 유출을 인생의 시간 유출에 비유할 수. 한 번 아래쪽 공간으로 유출된 모래는 다시는 위쪽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기도, 계속 유출되어져 쌓여 가는 현재이기도, 모래시계 전체를 뒤집어 놓아서 새로운 시계 되어 모래를 다시 유출시킬 수 있는 미래 되기도.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그 인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단절되거나 고립돼 있는 것 아니. 모든 인생은 어제의 오늘인 과거와 내일의 오늘인 미래가 오늘이라는 접촉점과 교접점에서 시작되는 역사의 시작. 따라서 각자의 인생 역사는 그동안 살았던 현재가 축적된 과거의 집합이고 연속. 사람의 幸不幸은 누구와 어떻게 사귀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의해 판가름 나게 돼. 시간은 시간의 주인에게 報答을 하기도, 報復을 하기도. 나폴레옹 :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報復이다” 인생의 시간을 浪費한 죄 – 빠삐용 모래시계 같이 짧은 인생 살고 있는 우리, 한 뼘 길이 그림자 같은 인생 살고 있는 우리, 여름 아침 햇살에 사라져버릴 안개 같은 우리, 강건해야 80이면서 한 줌 흙인 우리, 태어나 배꼽으로 쉬던 숨 입으로 가쁜 숨 서너 차례면 멎어질 호흡 머잖은 우리에게 바울 사도를 통해 당부하시는 하나님 말씀,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악해져만 가고, 불확실한 미래 대비하는 삶에 대한 가르침 – 세월을 아끼라 성경에 이 말씀대로 세월을 아끼면서 악한 때를 경쟁적이고 투쟁적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의 후손 야곱.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속이는 자, 발꿈치 잡은 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하나님의 전사’, ‘이스라엘’ 되기까지 입체적인 인물 된 야곱은 그 인생 고비마다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삶이었던 것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복받은 민족의 시조 될 것이 계시되었던 인물. (창35:1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과 에서에게 예정해 놓으신 그대로 야곱이 야곱 되게 하셨. (말1:2-3)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롬9:13,15)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창28:13-14)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47:7-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후로 요셉과 17년을 더 살다가 147세에 삶을 마친 야곱과 애굽의 왕 바로와 나눈 대화의 한 부분. 한글 성경에 야곱의 생을 ‘나그네’라, 영어 성경 pilgrimage 순례자의 삶이라. 야곱의 생애는 단순 나그네가 아니라 순례자였. 하나님의 뜻과 계획 담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생의 길 갔던 순례자.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나쳐가는 길 위의 이름 모를 사람일 뿐. 순례자는 그곳에 거하거나 언제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때가 있. 야곱이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고 하나님의 사명 받은 자들 모두 그랬. 전에 지나왔던 자기들 삶이 단지 지나가고 흘러가 잊혀진 과거가 아니기 때문. 그러기에 순례자의 삶은 어제와 오늘,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삶. 오늘 우리의 삶,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들이 모여서 되어진 결정체. 모래시계의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쌓아지는 것 같이. 그것이 나의 과거이고 나의 역사. 지금도 대화 중에 있는 과거와 오늘을 살고 있는 각자 새로운 역사를 써 가고 있는 중.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 반복 말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잊지 말라시는. (신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신6:12,13)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과거를 잊을까 기억케 하시고 잊지 않게 하셔. (신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암5:4,6)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을 이끌어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신 불뱀과 아말렉과 블레셋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 살리라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 말씀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만나서 과거와 대화하면서 과거의 잘못과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고 온전케 하라는 말씀.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과거끼리의 대화가 있어야 하고 현재끼리의 대화도 있어야. 대화에는 질문과 답이 있게 마련.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역사에도 질문과 답이 있어야. ‘내 신앙의 역사는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리 신앙 안에서 나와야. 우리 신앙에도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이 있. 이 역사책은 우리에게도 있지만 우리 신앙의 기록 보관소 하나님 보좌 앞 책들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져 있. 사람마다 반드시 있을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의 두께와 내용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사람은 그 분량과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같이 대하소설을 쓰고도 남을 정도이기도 할 반면 어떤 사람은 달랑 A4 용지 한 장 분량밖에 되지 않을 사람도 있. 사람들마다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 내용이 무언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기초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삶,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다가갔던 형제 사랑, …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보시고자 하신 이 모습들이 우리 믿음의 역사책에서 얼마나 많이 보여지는가. 이들 중 얼마나 많은 분량의 것들이 내 믿음의 역사책 chapter 되어져 있는가. 훗날 하나님 보좌 앞에 이것이 하나님 보좌 앞의 책에 기록되어져 있는 내용들. 때때로 내 신앙의 역사책인 일기장과 생활기록부를 되읽어 보아야.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거기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기록되어져 있. 만족스러운 것들이 있는가 하면 보완해야 할 모습도 함께 있. ‘온고지신’ 말씀과 같이 과거의 경험과 지식과 시행착오를 거쳐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이 건설되어지기 때문. 하지만 과거를 잊으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세상도 교회도 과거에 붙잡혀서는 안 돼.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들 많. 과거를 기념하면서 과거를 찬양. 과거에 묶이지 않고 죄로 죽었어야 할 우리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리라 모래시계 인생인 우리의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아직 얼마나 남아 있는가 세상의 모래시계는 언제든 아무 때든 뒤집어 놓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지만, 우리 인생의 모래시계는 그럴 수 없. 어떤 방법으로도 뒤집어서 다시 시작되게 할 길 없. 오직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부활로 부활되어질 것인가에 따라 생명의 부활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되거나 사망의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될 수 있을 뿐. 그러기 위해 우리 아직 남겨져 있는 모래시계 인생을 무슨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명의 부활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기름 떨어뜨리지 않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삶을 아직 내 인생의 모래시계에 모래가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을 동안 내 신앙의 과거와 대화하면서 내 신앙 인생의 내일을 등잔불 꺼뜨리지 않고 기름 떨어뜨리지 않는 현숙하고 지혜로운 신부의 삶을 살아내야.
수요 성경 탐구 - 바다 (080223)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2623)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1923)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 같이 에베소서 5:15-18 찬송 / 복음송 - 하나님을 위하여
(엡5:15-18)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늘 7월 16일. 엊그제 새해맞이 했었는데 절반 여섯 달이 훌쩍 지나버렸고, 7월도 16일째. 엊그제 새해맞이였다면, 내일 모레면 크리스마스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 준비해야 할 것. 인생의 시간을 낭비한 죄로 살인 누명 쓰고 평생을 프랑스 영 아프리카 키니아 감옥에 – 빠삐용 영화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꿈 이야기가 영화 중반에 들어온 까닭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시간 낭비가 얼마나 중한 범죄인가를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죄인 살인죄에 비견시켜 고발하는 장면. 빠삐용 자신도 꿈에서 자신의 방탕하면서 낭비했던 젊은 날의 시간들을 스스로 유죄 평결 내리면서 뒤돌아 가서는 이후로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생이 마감되는 것을 원치 않았. 동서고금으로 인생의 시간을 터무니없이 허비하고 소비하고 낭비하면서 인생을 마친 사람들 많고도 많. 어떤 사람은 다음의 24시간을 맞으면서 당겨쓰면서 인생을 선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은 분초를 다투면서 밀려오는 시간에 떠밀려 수세적으로 방어적으로 살고 있.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밀물같이 밀려오는 시간들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쌓아져 남아 도는 시간들 부패되고 곰팡이 슬어 버려진 음식물 처럼 쓰레기 차에 실려 College Point 쓰레기 처리장에 쏟아져버리고 마는 시간들 많. 그렇게 버려지는 시간들이 사용되었던 용처를 보면, 나 자신, 자기 개인이 우상의 우두머리 되어서, 내 목숨 위하고, 내 배 즐겁게 하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것들이 우상의 우두머리 되어져 있는 것들. (마6:25)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들. (빌3:19) 저희의 신인 배를 위하고, 자기의 일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위한 땅의 일들. 이 우상의 우두머리를 즐겁게 해 주는 부차적 수단과 도구들이 우상의 나뭇가지들. 쾌락, 기호식품, 음란,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 유튜브, 돈, 마약,.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는 엡 5:15-18 하나님을 위하여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애니미즘(animism) 등 토속 신앙(土 俗信仰)을 비롯해서 연예, 스포츠, SNS 분야 등 각 분야에서 대중적 명성을 가신 사람들, 고급 승용차, 핸드백, 의류 등 명품 브랜드 물건들, 학위, 자녀, 스펙(spec), 건강, 취미 등을 위한 시간은 오히려 부족해서 오늘 우리들의 우상들을 위해 사용하려면 하루 시간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모순된 인생살이를 살고 있. 그래서 성경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인생들에게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선지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을 통해 인간이 주어진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똑같은 말씀으로 주셨.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세상으로 내보내신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시간, 나에게 주신 건강, 나에게 주신 재물, 나에게 주신 지식, 나에게 주신 명예,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지식과 명예를 사용하라셨. 찬양 인도자가 선곡했고 선창하고 있기 때문에 라디오에서 이미자씨나 조용필씨 노래 흘러나올 때 따라 부르듯 부르는 노래여서는 안 돼.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위해 사노라 찬양 한 것은 내가 그 삶 살겠노라 서원하면서 기도 한 것. 왜냐면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 까닭은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께 끝 다함 없는 빚진 자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주를 위해 살아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지 못한 것.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날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께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는 것도 주를 위해 살다가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17절) 말씀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그릇에 한정적으로 담아 주신 세월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범죄케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행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지혜 있는 자의 가장 우선인 삶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 말씀하신 까닭.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는 엡 5:15-18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있. 일찍이 모세 선지자도 이 말씀과 똑같이 (시90:9,10,12)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지나보낸 날들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삶의 내용들뿐이라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분노케 하면서 살던 일생이 그마저도 일식간에 다해버리기를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고. 우리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의 성적표가 작성되기 때문. 그렇게 작성된 우리 각자 인생의 성적표는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에 기록되어져. 마치 중고등학생 때 생활기록부에 나의 학교 생활 모든 것이 결론적으로 기록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선생님께 보여진 나의 모든 것, 나의 성적, 행동 사항, 장래 희망, 선생님의 생각과 의견,… 문제는 그렇게 쏜살같이 일식간에 다해버리고 난 하나님을 분노케 하기만 했던 삶의 내용들은 우리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의 ‘인생 성적표’로 작성되어져서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에 기록되어져. (계20:12-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2:11,12)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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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성경 탐구 - 상 (賞) (070523)
수요 성경 탐구 - 복음 (062823)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부활하신 예수님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으셨. 복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에게만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도 세 번만 나타나셨. (요21:13,14)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가 11사도와 함께 군중 앞에서 설교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대다수는 보지 못했 (고전15:3-8)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6)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그 후로 불과 10여일이 지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120여 명. (행1:11-15)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고전15:6)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죽었으며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 있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고, 승천하시는 주님 보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믿음에 불이익 아니지만 기도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 현장에 임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은 영적 자산 손실. 그렇게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더 많은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구우신 생선구이도 함께 했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말씀의 현장에도 있었. 말씀이신 주님이, 말씀으로 현현하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만나주셨고 말씀 나눠주고 계시기 때문.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온 중심 다해 읽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고 있.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가능했.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 승천하시면서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 말씀.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며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분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함께 있는 것보다 유익하다시는. (요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예수님이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있게 될 유익이 무엇인가면, 예수님이 가셔서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시는 것 (요16:7)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보혜사를 보내 주시면, 그 보혜사가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하실 일이,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혜사가 오셔서 세상에 만연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책망하실 것이라시면서, 죄와 의와 책망이 무엇인가를 이어 설명 말씀.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요16:9-1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병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앉은뱅이 일어서게 하고, 장님 보게 하고, 귀머거리 듣게 하시려고 오신 것 아니.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 되시기 위해 오셨.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믿지 않는 것이 죄. 제물되어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피 흘리셔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바로 그 자체. 의에 대하여 온 인류의 죄와 나의 죄를 위해 어린양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단번에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의.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임금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지옥은 사탄과 그 무리들을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죄를 용서받지 못한 인간들이 그들과 포함되어 죽임을 당할 그것이 심판. 이 세 가지, 죄가 무엇이고 의는 무엇이며 심판은 무엇인지를 알도록 가르치시고 깨우쳐 주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 그러므로, 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의, 십자가에서 세상 죄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순종하는 것이 의이며, 심판, 죄를 회개치 않고 세상의 임금 따르는 자들 세상 임금 마귀가 받는 심판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말 하게.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직후에 유대인들을 두려워 숨어 지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 “성령을 받으라” 직접 성령받게 하셨고, 그렇게 예수님께 직접 성령 받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도 말씀. (요20:21-23)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승천하시는 예수님 앞에 모여든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러므로 승천하시는 감람원이라는 산에 모인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신 말씀대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게 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 시작. (요21:18)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한 마디 예수님 말씀이 성령받기 이전과 이후의 베드로 모습. 비단 베드로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 아니. 예수님 12 제자 모두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 곳곳에 그곳이 예루살렘이든, 유대든, 사마리아이든, 땅끝이든 주님의 이름과 복음 들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신 말씀에 순종했던 모든 사람에게 하셨던 말씀. 성령의 강림과 임재하심의 은혜의 권능을 받게 되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서 팔을 버려 남이 띠워준 띠에 이끌려 원하지 아니하는 곳일지라도 가게 될 거라셨.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은 그곳이 어딜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게 하신 어느 곳이든.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는 또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같은 이유의 말씀. (요16:12-14)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은 가르쳐 이르시고 당부하실 것이 여전히 많지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성령 보혜사를 보내셔서 보혜사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우리에게 있게 하심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에 있게 하실 것인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알게 하실 것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은, (요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지금까지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와 세상에 오셨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가시고자 승천하신 이유를 말씀. 성령 받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이미부터 알고 있는 우리, 그러므로 성령충만되어야. 성령의 인도하심 도우심으로라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지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사명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셨기 때문. 그 사명은 사명의 종합체인 복음 전파. (마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사명 감당케 하셔서 우리로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사명을 마무리하고 완수케 하셔서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떠나셨고, 떠나셔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시되 충만케 하셨. 성령 받지 못해서 성령의 도우심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믿음 없.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을 들을 영의 귀가 없기 때문이고, 깨우쳐 받아들일 영의 마음이 없기 때문.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나게 하고, 그 믿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이라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셨던 이 모든 믿음과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방법과 방식, 나의 의지와 노력과 지식과 경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 우리에게 좋은 것 주셔서 유익하게 하시고자 우리 곁을 떠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신 것 아니. 그분의 영, 진리의 영, 자유케 하는 영, 보혜사 성령님 보내주셔서 언제나 항상 내주 교통하시면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권능과 지혜의 삶 살게 하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수요 성경 탐구 - 기도 (061423)
누가복음 6:12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앵무새 죽이기(롬7:22-23) 06-11-2023(주일)
수요 성경 탐구 - 구원 (060723)
수요 성경 탐구 - 엘리야와 세례 요한 (051723)
부활의 주님 승천하시기 전에 누가 24:49
수요 성경 탐구 - 비아 돌로로사 (051023)
수요 성경 탐구 - 사도와 제자 (050323)
수요 성경 탐구 - 사도와 제자 (042623)
본 믿음 들은 믿음(요한복음 20:29) (04-23- 2023)
https://www.youtube.com/watch?v=fVq3WDKhG_o
수요 성경 탐구 - 아벨의 피 사가랴의 피 (041923)
수요 성경 탐구 - 부활절 (041223)
로마서 8:34 "......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수요 성경 탐구 - 고난주간 예수님 행적 (040523)
(040223 Patris) 복음의 급박성 막 1:1,15. 357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마가복음은 말씀의 내용이 박진감 있게 전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유년기와 성장기를 다루지 않고 곧바로 복음 사역 현장으로 시작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의 시작 선언 동시 광야의 세례 요한의 주님 오실 길 준비케 하시는 장면 주의 오실 길을 곧게 준비케 하신 일이 세례 요한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케 하신 것 (막1:3-5)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 베푼 장면은 (막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혀갈 즈음부터 세례 베푸시는 사역과 함께 공생애 시작하신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과 그 내용과 형식이 같아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가까이 온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우선이 회개하는 것이라 말씀 (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서둘러 회개해야 하지만,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오히려 급작한 상황에서 어쩌면 회개할 시간이나 기회가 아예 없거나 제한적일 수 있다는 말씀 또는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말씀이기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긴박한 위기의 순간인 ‘천국 도래’의 심판의 시간이 빠른 속도로 가까와 오고 있는 그 마지막 순간을 대비해서 해야 할 것이 ‘회개’ 하는 것이라셨 예수께서 골고다 십자가 죽으심 며칠 전 하신 말씀 중에, (눅17:32-33)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3년차 죽기 바로 앞 시점에서 이제 곧 예루살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시간이 가까운 때에 왜 예수님은 그 죽기 며칠 전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 말씀하시는가 소돔 고모라 때의 사건은 머잖아 이 땅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생생한 기억의 기록으로 가르침 말씀 주시려는 것 머잖아 이 땅에 소돔 멸망의 상황이 다시 일어나면 롯의 처가 당한 상황과 똑같은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기 때문 (눅19: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은, (마24:37-40; 눅17:26-30) (마24, 막13, 눅21장) (벧후3:9-16) 노아 때도, 아브라함과 롯 때도 멸망의 심판이 임박해 있는 급박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롯의 사위들 처럼 농담으로 여기고만 있었. 롯의 복음을 농담으로 여긴 것이 롯의 사위들만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롯에게 직접 말씀 소알 성에 당도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계속 가라 소알 성에 안전하게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며 소돔에 대한 멸망을 지체시킬 것이라
(040223 Patris) 복음의 급박성 막 1:1,15. 357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안도와 평안 주시는 말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구주로 오셔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오신 분. 오셔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죄인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셨.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눅4:18,19)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셔 보내신 이의 뜻이 무언가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다시 살리시고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기다리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셨 그리고 이 구원은 소돔 고모라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우리는 역사의 끄트머리 성경의 말씀하신 마지막 때인 주님이 다시 오시마고 떠나신 후, 다시 오실 그 때와 날에 매우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주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면서 살아야 그런데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담아 놓고만 있다면 의미가 없 이 말씀들이 급박하고 긴장감 있는 운동성 있는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까닭은 왜냐면 그 날은 도적같이 올 것이기 때문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도둑같이 오리라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주님은 행동하라신 것이, ‘회개 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는 행동, 복음을 믿는 행동 지난 주 마가복음, (막10:17-30)까지 부자 청년 말씀도 그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 채워진 사람은 그래서 자기 소유 물질이 주인 되어 있는 사람은 회개가 되지 않고, 회개 되지 않은 마음은 구원의 순간에 근심하면서 뒤돌아 가는 청년이 주께 나와 물음 (막10:17)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이 얻고자 하는 영생의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생하고자 마음의 發露가 아니 가진 것 많은 부자로 살고 있는 것이 만족스러워 이 풍진 세상에서 가진 것들로 즐기면서 영원토록 즐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그 방법을 찾아 주께 나왔 하지만 주님은 청년에게 주인을 바꾸라 말씀하셨 (막10:21)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신 말씀은 네 소유한 것들이 너의 주인 되어져 있는 너의 주종 관계를 바로 하라신 말씀 그리고 (막10:21) 그런 연후에 와서 나를 좇으라”신 말씀은 (막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을 하신 것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 회개하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 복음을 믿으라’ 하지만 청년의 마음은 많은 재물 때문에 절대로 회개되지 않는 마음
3월 29일 수요 성경 탐구 - 발람 (032923)
3월 22일 수요 성경 탐구 - 아사셀을 위한 염소 (032223)
3월 15일 수요 성경 탐구 - 피(031523)
3월 8일 수요 성경 탐구 - 사순절 (030823)
3월 1일 수요 성경 탐구 사순절
요한복음 1:9, 11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2월 22일 수요 성경 탐구 재의 수요일
2월 19일(주일)
제목 / 내가 와서 성경 / 출애굽기 20:24
오늘 제목 ‘내가 와서…’는 말씀 구절의 영어 표현을 옮긴 것. ‘I will come to you - 내가 가서’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영어 표현 I will come to you는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으로 ‘내가 네게 임하여’, 개역 한글 : 강림하여, 공동번역 : 찾아가서, 새 번역, 현대인 : 내가 가서. - ‘내가 가서’ 영어는 받는 사람의 편에서 구사되는 표현이 많. 우리말로는 ‘내가 가서’이지만, 영어로는 I will come to you, 거기에 있는 너희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 그런 의미로, 본문에서 주님이 어디에 임하시고 어디에 오신다시는가면,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고 기념되는 모든 곳에 오신다셨. 우리말로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로 되어 있는 이 부분은 영어 표현과 미묘한 차이가 있.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내가 내 이름을 높임 받도록 한 곳은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내가 갈 것이고, 가서 복을 주리라’신 말씀. I cause : 시작과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오늘도 열방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사람들이 모이기는 해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실 곳에만 임하셔서, 내가 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셔. (출20:24)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하나님의 성호가 높임 받고 하나님께서 경배 받으시는 사람들과 장소 조차도 하나님께서 cause,일으켜 주셔서 높임 받으시고 경배 받으시면서 복을 주시겠다시는. 그리고, (출20:20)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시험하셔서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유를 말씀. God has come to test you, so that the fear of God will be with you to keep you from sinning." 그렇게 오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하여금 죄에서 멀리 하게 하셔서 죄를 짓지 않게 하시겠다셔. 이 모든 것, 하나님을 기념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되게 하셔서 되어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 말씀.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로 선물의 믿음 주셔서 믿게 하시고 믿어져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시간 안에서 되어지게 하신 대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되어져 왔던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 주셔서 되어진 것.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되어진 어느 것도 내 계획과 의도대로 되어진 것 없.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되게 하신 결과대로 오늘까지 우리는 살아져 왔던 것. (출20:24) 말씀을 근거로, 이 말씀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 아무 곳, 아무나에게서나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짐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께 예배는 아무나가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행하는 예배 모두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배 드리게 하신 곳에서 예배 드리게 하심 받은 자들이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예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에서 허락 받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곳에 오셔서 예배 받으시고 복 주신다시는.
(021923 Patris) 내가 와서… 출 20:24 334 아버지여 이 죄인을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오늘 우리 모인 이 곳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소이고, 여기에 모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아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고 기념하게 하신 순종의 예배자인 것을 확신하기. 그리고 우리의 그 확신이 그릇된 확신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일을 기다리면서 사는 한 주간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가 그래서 중요한 것. 경건의 흔적조차 없이 세상과 세상의 것 좇으면서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세상적으로 거룩한 질서 없이 살던 삶이 예배당에 와서야 잠깐 중단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이 본문 말씀에 합당한 사람들인가는 두려운 마음으로 비춰 보아야. 이 사람들처럼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가는 날이기 때문에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 부르며 예수님 찬양한다는 것만으로 거기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모든 것에 가셔서 복 주시겠다신 곳 되고, 복 받는 사람들 되게 하시겠는가도 본문 말씀에 냉혹하게 비춰 보아야. 팬데믹 이후로 줌Zoom Church가 많아졌고, Zoom 예배가 일상적 되어져 있지만, Zoom 예배는 예배를 이름 한 자기 편의주의적 종교 행위이고, Zoom속에서 듣는 설교는 지적인 동의 이상 아니. 교회는 사람들에게 회개가 일어나게 하는 세상에서의 유일한 곳. 세상 어디에도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변화시킬 수 있는 곳 없. 하나님께서 찾으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임 받게 하신 곳에 친히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경배하는 자들이 모인 예배 현장에서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 우리가 그 예배자들 되어서, 우리가 모인 이 예배당에서 회개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개의 현장 되어져야. 우리 교회에 회개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는 교회를 몇 년 다니고 있으며, 그동안 우리에게 회개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교회 다닌 연수가 오래일수록 믿는 사람끼리만 만나는 경향. 그러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없게 돼. 지난 수요일 말씀, 산 위에서는 복음 사역 할 곳 없고 하나님 일을 할 곳도 없 세상으로 내려가야. 거기 죄인과 앉은뱅이와 절름발이와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장님들이 넘쳐나도록 많은 곳 죽은 자들을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 필요한 세상으로 내려가야. 죄인은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죄인. 이들 ‘죄인들’에게 소금의 복음 빛의 지리를 전하는 교회 현장이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이어야. 그들을 찾아서 소금 나누고 빛 나누는 삶이 소금의 삶, 빛의 삶. 오늘 거의 대다수 믿는 사람들이 ‘나홀로 신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 나 혼자 믿고 나만 구원 받으면 되는, 교회의 본질이 상실 당한 채 살고 있. 교회마다 예배당에서 보여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양이고,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이며, 여전히 집 나간 둘째 아들의 모습인 채로 교회당에서 보여지는 사람들 많을 것.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있게 하시고 하게 하시고 되게 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일으키셔서 그곳에서 새 창조의 거듭남의 사건이 있게 하신다시는 말씀. 그래서 새 창조를 위한 거듭남의 결과인 구원의 핵심은 죽어야 한다는 것. 아버지를 떠나 돌아온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 ‘스스로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 회개의 전형적 모형. 회개는 내가 스스로 돌이키고 돌아서야 되어지는 것. 내 결단과 의지로가 아니. 분명히 하자면,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여건과 형편과 환경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제공해 주신 것.
(021923 Patris) 내가 와서… 출 20:24 334 아버지여 이 죄인을
작은 아들이 자기 의지로 아버지 집을 떠나가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고자 작은 아들의 형편과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셨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自由意志에 순응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회개에 이르게 됐던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신 은혜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것도 회개케 하시는 은혜의 선물. (창1장) 창조물들에게 ‘-있으라, -돼라, -하라’ 말씀으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셨. 그럼에도 인간 역사 대부분 사람은 자기 삶의 행적과 기록 어떤 것 하나 인간의 유익과 만족에 따라 선별적으로 선택되어져 오지 않은 것 없.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가 세우고 있는 자기의 나라가 있고, 자기가 오르고 있는 산이 있으며, 자기가 쌓고 있는 탑이 있. 더 높고 더 넓고 더 많고 더 풍요한 것으로 채우고 높이기 위해 날마다 분주하기만.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에의 자유의지일 뿐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방종이고 거역이고 범죄. 다시 한 번,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향한,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방향성이어야. 하나님께 역행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화와 멸망과 사망만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셨. 방주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응하여 방주를 만든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 복음의 말씀을 따라 방주 만들기에 함께 했던 오직 8명만. 노아와 노아 가족을 통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들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자유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거절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며 반항하던 모든 사람들은 물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 물 심판으로 멸망 당한 그들 중에는 노아의 형제 조카들, 친척들, 사돈의 팔촌들,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서 구경하곤 했을 것. 그러면서 노아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을 것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해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복 주신다시는 말씀. 회개한 마음으로 복음을 믿어 천국이 가까운 사람들, 천국을 침노한 사람들이라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으시는 하나님.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2월 15일 수요 성경 탐구
수요 성경 탐구 - 산 (山) (021523) 아라랏산
아라라트 산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표고 5137m의 산 입니다. 주봉우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표고 3896m의 봉우리를 소아라라트 산이라고 부르고 5137m의 주봉우리는 대아라라트 산이라고 부릅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뒤에 이 곳에서 표류했다고 여겨지며 12세기 경에 유럽인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아라라트 산은 옛부터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거주해온 지역의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기에는 아라라트 산기슭에 쿠르드인이나 터키인과 수백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했으나 오스만 제국 말기(1차 세계 대전 중)의 강제 이주로 터키 영내의 아르메니아인은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당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여지나 터키 정부는 현재까지도 학살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이 맺어져 오스만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게 되자 구러시아 제국령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은 아라라트 산기슭까지
영토에 포함시켜 아르메니아 국가를 독립시키는 운동에 나섰지만 이 때 획득한 영토는 터키 혁명군에 의해 다시 빼앗겼고 아르메니아인이
살던 구러시아 제국령도 적군의 침입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편입됩니다.
이후 아라라트 산은 터키령이 되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과거에 터키와 소련에 의해 성립된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도 아르메니아 국장의 중앙 부분에는 아라라트 산이 그려져 있으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와 함께 터키와의 주요한 분쟁꺼리로 남아있습니다.
아라라트산은 터키 동부, 이란 북부, 아르메니아 중서부 국경에 위치한 산이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떠내려가다 이곳에서 멈추었고, 그 배 조각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산이다. 산 정상의 30% 정도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해발 5,137m의 대아라라트(Greater Ararat) 산과 해발 3,896m의 소아라라트(Lesser Ararat) 산으로 구분되며, 산세가 높고 험준한 지형의 휴화산이다.
산 전체가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암과 화산 조각들로 덮여 있다. 주변은 완만한 경사의 평원을 이룬 고원지대로 초원이
많으며, 유목민들이 목축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아라라트산의 형성 시기는 지질학상으로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화산 폭발 시점에
근거해 볼 때 신제삼기(新第3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노아방주가 떠내려가다 멈춘 곳으로 유명하다.
지명유래에 관해서는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경 창세기 8장 4절에서 산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 아라(Ara) 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 아르메니아의 아리라트(Ayrarat) 지방을 아라라트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전자(前者)가 가장 유력하다.
바사인들은 노아의 산을 뜻하는 ‘구이누’로, 터키인들은 험한 산을 뜻하는 ‘아리다기’ 산이라고 부른다. 원래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앗수르식 이름은 ‘우라르투(Urartu)’이다.
아라라트산이 정확히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에 관한 주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경 속에서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아라라트산은 특정 산을 지칭한다기보다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인 아라라트 지역에 있는 산악지대라는 주장이 있다. 또 시리아와 이슬람 코란에서는 아라라트산이 오늘날 이란에 위치한 주디 산(Mount Judi)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와 서구 중세 유럽의 기독교에서는 역사학자 요세프스가 AD 1세기에 쓴 책에 근거해 현재 터키의 아라라트산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신화에서는 아라랏 산이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며, 1991년에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및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와 민족통일주의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지정되었다.
또 이곳은 "노아방주"에 대한 관심으로 고고학, 성서고고학 분야, 종교계 등에서 끊임없는 탐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아방주가 있었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여러 탐사들이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인 흔적은 찾지 못했다.
아라랏 산으로 가는 방법에는 주로 터키의 호수도시 반(Van) 시(市)를 통해 가거나,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Yerevan)을 통해 가는 법, 이란 북부를 경유해 가는 법이 있다.
노아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한 뒤 방주가 머물렀던 산(창 8:4).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의 중간 지대인 아르메니아의 고원에 위치한 아라랏 산맥의 한 봉우리로 추정(현재 아라랏 산으로 불리는 사화산의 높이는 해발 약 5,144m). 이곳은 고원으로 여기서부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아라스(아라크세스) 및 코룩 강이 흐른다. 성경에는 노아 방주 사건 외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두 아들이 부친을 살해하고 이곳에 도망한 기사(왕하 19:37; 사 37:38)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 중 바벨론을 멸망시킬 도구로 사용될 열국 중에 아라랏이 언급된다(렘 51:27-28).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란과 아르메니아와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사화산이다. 이 산이 유명한 것은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아라랏 산은 지난 수백 년간 ‘노아의 방주’ 목격설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노아의 방주와 그 유물을 찾기 위해 탐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세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는 아라랏 산에 노아의 방주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탐험가들은 아라랏 산에서 발견한 나무, 그 밖의 자재들을 노아 방주의 일부분으로
주장하고 있고, 미국·러시아 비행사들이 찍은 항공사진을 근거로 아라랏 산 노아 방주의 존재를 최근까지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도
노아의 방주에 대한 구체적인 여러 증언이 나오고 있다.
성경에서도
여러 번 이 지역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창세기의 홍수 사건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해 악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를 구원해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홍수 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산이 바로 아라랏 산이다.
“그리하여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 위에 내려앉았다”(창세기 8:4). 성경은 노아가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됐다고 한다.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다”(창세기 9:20). 노아의 방주가 내려앉았다는 아라랏 산의 주변
지역은 포도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니네베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이 산헤립을 죽이고 이 지방으로 도망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르에체르가 그를 칼로 쳐 죽이고는 아라랏 땅으로 도망쳤다.
그의 아들 에사르 하똔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열왕기하 19:37). 이 이야기는 토빗기(토빗 1,21)나 이사야
예언서(이사 37,38)에도 잘 기록돼 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바빌론에 관해 예언할 때에도 이 지역의 언급이 나온다. “그 땅에 깃발을 세우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팔을 불어라.
바빌론을 칠 민족들을 동원하고 그를 칠 왕국들 곧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크나즈를 불러들여라. 그를 칠 사령관을 임명하고 날개를
곤두세운 메뚜기 떼 같은 군마를 몰고 와라”(예레 51,27).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는 탐험가들의 아라랏 산에 대한 발견과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아라랏 산이 오늘의 지명 아라랏
산과 일치하고 있느냐는 논쟁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라랏 산의 정확한 위치뿐 아니라 노아와 홍수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구원과 사랑이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2월 8일 수요 성경 탐구 창세기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월 1일 수요 성경 탐구 바벨탑과 언어
창세기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바벨탑 사건
성과 대를 쌓아 - 여기서 '성'(이르)은 '도시', '성읍'을 의미하며 '대'(믹달)는 '탑'을 의미한다.
이는 곧 대제국 건설과 이를 기념하는 탑을 건설하려 한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건축 공사를 실행한 주체는 니므롯 왕조(10:8,
9, 10, 11, 1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 14:13)고 한 사단의 자만과도
같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경고 하셨다 (마
11:23)
우리 이름을 내고 -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 동기로 무실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준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이로니칼하게도
자신을 드러냄 없이 주를 위해 겸허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빛나고 있다(히 11:4-40).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바벨탑 건축의 두번째 동기로 가인의 후예들이 가인이 받은 땅에서의 유리 방황하는
저주(4:12)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번성하여 땅에
널리 퍼지고 충만하는 것이었지 결코 각 개체들의 자주권이 억압당하는 세계적 단일 제국 형성에 있지아니 하였다(1:28; 9:1).
1월 29일 주일 설교문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막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물고기 잡이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는 고기잡이에서 천국 보화 진주잡이, 진주 발견한 진주 장수 된 것과 같은 사람들. 고기잡이 하고 고기 잡이 위해 그물 깁는 바쁜 중에 나타나신 예수께 서 ‘나를 따르라 ‘ 부르시자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 나선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는 이후로 ‘사람 낚는 천국 보화 진주 장수’의 삶으로 변화된 사람들. 바닷가 고기잡이 어부에게 배와 그물은 그가 가진 소유의 중요한 전부. 이 전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결정은,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른 것과, 밭의 보화를 사기 위해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이 장삿꾼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들을 산 것은 한 가지로 같은 믿음의 행위. (창12:1) 아브라함에게’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셨을 때 (창12:4)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막10: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마12:48,50; 막3:33,35)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아버지와 형제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를 떠나고, 보화 감춰진 밭과 좋은 진주 사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모든 소유를 다 파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신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나를 따르라’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갔던 사람들의 결국은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 되어졌고 천국 진주 문을 열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 더 결정적 상황에서의 (마19장) 부자 청년 이야기는 이와 반대적 말씀 (마19:2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셨지만, 부자 청년은 날마다 눈에 보이는 자기 소유의 보화에 가려벼 보이지 않는 천국 보화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 본문 바로 앞 구절 말씀 (마4:16,1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선포하며 전파하고 다니셨. (막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 말씀 (막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마3:6-10)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믿으라시면서 복음을 믿기에 앞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 성경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를 많은 곳에서 보여주셔.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7:14 ; 눅13:23,2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벧전3:20)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애굽에서 나온 603,550명 장정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수는 단 2명 (눅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 광야라는 교회에서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깨닫지 못. 오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고 들어가게 될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 말씀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적되 매우 적다고 주님께서 혼인 잔치 비유에서 말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그러나 택함 입은 자는 적을 것이라셨. 얼마나 적은가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장정만 60만이 청함을 받아서 광야로 나지만 그러나 그 장정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 숫자는 단 둘 뿐이었. 그러면 우리가 그 60만 가운데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60만 명 교인 광야 교회에서 가나안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두 명이 전부였는데, 이 시대 교회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단순 비교는 성립되지도 않고 위험한 논리일지라도,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하나님께서 직접 보이시는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던 60만 교인 교회에서 두 명이라면, 지금 10000명 교회에서는, 3천 명 교회에서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기독교인은 많아졌지만 기독교인라 하여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는 것 아니.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실제는 종교인의 활동일 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아니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 끝에 천국을 들어가지를 못하고 마는 기독교인이 적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해 주셨.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이스라엘은 억울할 것. 자기들은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광야로 나왔고 광야 생활 하는 것도 믿음으로 했었다고 믿기 때문. 하지만 요즘 출애굽기를 다시 면밀히 읽고 있는 동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순서에 따라 진행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피해 홍해를 건넌 감격과 기쁨으로 모세와 미리암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사흘 길 후 마라에서부터 이스라엘은 불만과 불평과 원성의 연속이었음에서 벌써 알 수 있. 애굽에서는 고기가마 곁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마실 것도 걱정 없었는데 이 광야에 데리고 나와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러나 믿지 않았던 것이 결론. 3500년 전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 그러므로 믿음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면 정말 믿음이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왜냐면, (살후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셨기 때문. 이 말씀을 근거로, 예배 드리고 성경 보고 기도 하고 찬양 부르는 행위가 내 믿음의 굳건함의 증표라 단정하지 마시기. 어쩌면 그것은 믿는 것과 상관 없는 종교적 행위인 것이고,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시대 많고도 많.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 이 시대 사람들도 종교적인 행위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 유기성 목사님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한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한들 그것이 모슨 소용.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은 것이 층층이 쌓아져 성경 지식이 바벨탑 우상 되어져 있을 뿐, 그렇다 하여 행동의 변화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면서. 예배가 시간표적 행사 되지 않도록 해야. 자칫 찬양도, 기도도, 십일조도 행위이고 내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행위일 수. 그렇다면 그 행사적 행위들이 믿음일 수는 없. 믿음은 마음 안에서 생성되고 자라서 작동되어야 그것이 삶의 내용으로 드러나지는 것. 마음으로 믿는 것과 행위로 예배 드리고 기도 하고 찬양 하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은 것이 입으로 시인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구원에 이르느니라셨. 천국은 청함을 받은 자의 것이 아니. 천국은 택함 입은 믿음 있는 자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는 곳. 종교인이나 종교 행위자들이 들어가는 곳 아니. 오직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그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땅의 보화를 사고 진주를 살 수. 그 보화에 대한 믿음과 진주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바꿀 수 있는 것이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의 행위. 믿음 없는 부자 젊은 청년은 바로 앞에 있는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자기 소유를 놓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의 문 앞에서 뒤돌아 가고 말았던 슬프고 안타까운 증인. (시19: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시편은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 내 소유라 했는데,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더 좋은 보화 발견한 바울 사도은 지금까지의 보화였던 세상의 것들은 배설물 같이 여기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보니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부귀영화들, 의롭고 선하게 산 모든 것을 해로 여겨지고,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말씀. 그러므로 나에게 바울 사도가 배설물로 여긴 것들이 많을수록 천국은 그만큼 멀어. 나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천국은 그만큼 멀어. 세상의 무거운 짐 지고는 천국까지 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세상 무거운 짐 짊어지고 갈 길 먼 우리에게 그래서 예수님 말씀.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지만 이 말씀 따르지 않고 세상 등짐 내려놓지 않고 계속 가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전도서는 그 세상 등짐이 누구 것 될 것인지를 알려 주었. (전6:1,2)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2023년 1월 25일(수)
수요 성경 탐구 - 하나님의 이름과 십자가 성취 (012523)
2023년 1월 18일(수)
수요 성경 탐구 - 하나님의 이름 (011823)
2023년 1월 11일(수)
수요 성경 탐구 - 산상수훈 (팔복) (011123)
2023년 1월 8일 주일 설교 황선민목사 주현 후 제1주
동영상 자료 / https://youtu.be/AQLOMcMo6kI
내 나무의 열매 (사 5:1, 2, 7; 눅 13:6-9; 요 15:1-10; 사 5:1-10)
찬송 / 308장(넓은 들에 익은 곡식)
동영상 자료 / https://youtu.be/AQLOMcMo6kI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심히 기름진 땅을 노래하며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파고 돌을 거두어 낸 심히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되 무엇을 더할 것이 없도록 최고 최상의 포도원을 만들어주셨다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2절 후미에서 극상품 포도나무들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고 계셨지만, 극상품 포도나무들이 맺은 포도는 먹지 못할
들포도였음을 보시고는 너희가 나 하나님과 내가 지극정성으로 만들놓은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셔. 그래서 본문의 주변 말씀은 심판의 말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계속 있을 무서운 심판. 본문 말씀에 어느 정도의 마음 흔들림이 있는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지만, 아무 감각 없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그 이유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서라기 보다 우리 마음에 말씀에 대한 타성으로 굳어진 굳은 살들이 박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많. 오늘도
당장 부담스런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는 뽑혀지고 잘라져서 불살라져 버리느냐 그대로 있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말씀에
담긴 무거운 짓누름이 있기 보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있는 편안한 말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空手來空手去
이상 아닐 수도 있. 오늘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심히 기름진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어 주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고 기다리시는 좋은 포도를 얼마나 맺었고 지금도 맺으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무슨 생각을
얼마나 어떻게 하면서 하루를 사는가 날마다 나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보면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다림줄에 달아 보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진리와 참된 것에 나를 비교하면서 살고 있으면, 얼마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나를 연결시키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시간 동안 얼마나 거룩하고 성결한 삶의 내용으로 내가 채워지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얼마나 구원 받은 확신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면서 수고하는가 내 속에나 내 주변에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엔가 무엇인가 있는가 새벽예배 참여하고, 수요예배, 주일예배 참여하는 것이 그 증거인가 매일 양식의 말씀 읽는 것이 그 증거인가 지금 얘기되어진 내용들이 피상적인 것 같지만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거룩해지는 것에 관심 두지 않 말씀을 알고 하나님 믿는 나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우기면서 주장한다면 그 증거를 무엇으로 보일 수 있는가도 염두에 두어야 나 사는 삶의 내용에 대해 두려워해야. 내 사는 삶의 내용에 따라 두렵고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 그래서 그 삶에 삶의 열매가 없고, 신앙의 열매가 없다면, 나에게 열매 없는 것에 두려움 느껴야. (사5장; 요15장; 눅13장)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나무이신 그리스도에 접목된 자들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포도원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인 신자들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시는 말씀. 그러면서 너희가 진정 포도원 안에서 농부 아버지의 말씀을 거름으로 받아 그리스도이신 나무에 붙어 있어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속해 있다면 그 증거는 참 포도 열매로 맺어져 나타나 보여지게 될 것이라 말씀. 왜 우리가 지금 이 말을 강조하면서 나누고 있는가는 머잖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었던 삶의 내용이 열매로 맺혀진 결과를 주님께 검사 받아야 하는 날을 맞게 될 것이기 떼문. 그리고 열매 검수 결과에 의해 우리의 죽음 이후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물어보고 답해야.
만일 내 가지에 맺혀져 있는 열매가 없다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을 다시 새겨야. (사5:5,6)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우리 모두 포도원의 나무라셨고, (요15장)에서는 포도나무 가지라셨는데, 포도 송이는 포도 나무 가지에 달리는데, 열매가 달려야 하는 가지인 나에게 열매가 맺혀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가지인 나에게 맺혀 있는 열매가 없다면 그 날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게 되는가. (사5.1-10) 5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열매가 없는 사람, 열매를 맺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이고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버려져 마른 나무조각 되어져서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잘라져 땅에 버려져 짓밟히다가 불에 타 사라져버린다셨. 예수님 말씀하셨.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두려워 할 것은 우리 영과 혼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언젠가 내가 죽으면 그 날에 내 몸을 죽이셨을 뿐 아니라 우리 영(과 혼)을 천국에 데려가시거나, 지옥 불에 던져버리실 분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두려워할 분이라신 말씀.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이와 방탕에 안주하고 있을 때 지옥 심판을 피해가지 못할 수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성경이 말씀하신 진리. 다른 모든 교회에 있는 지옥 심판이 우리 교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 다른 모든 가정에 있는 지옥 심판이 내 가정에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 교회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가정마다 회심되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두려워해야. 교회마다 가정마다 젊은 자녀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신실함 없고 경건치 못한 부모 아래서 신앙적으로 방치되어져 성장되는 것도 위험하고 두려운 일.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세상의 집과 일터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덩달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면서 사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곳에 함께 손 잡고 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하면서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면 또 종교적 가면을 쓰고 교회에 나와서 거룩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사람들.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포도원에 포도이기는 하지만 먹지 못할 들포도라고 하신 것. (사5:4,5)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사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그런데 더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고 이제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시고 계시지만, 맺은 것이 들포도인 사람들에게 뭐라시는가. (사5: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이라셔. 가옥에 가옥 이으면서 큰 집 짓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 없도록 장사 크게 하면서,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 자기 왕국에서 자기가 하나님인 사람들이 들포도 맺는 사람들이라셔. 이런 들포도 맺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 이들에게 禍가 있게 하셔서, (사5:9,10)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내 나무의 열매 (사5:1,2,7; 눅13:6-9; 요15:1-10; 사 5:1-10) 308 넓은 들에 익은 곡식 가옥에 가옥을 이으면서 지어 놓은 크고 아름다운 집에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라셔. 열훌 갈이 포도원에서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고, 그 큰 논과 밭의 사업장에서 고작 한 에바의 수익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 극상품으로 만들어 주신 극상품 포도나무가 하나님께 들포도 맺어 드린 결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시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고 경험케 하시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아름다운 화음과 화합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일이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 우리 각 개인의 삶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 놀랍기만. 아들 성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 가르침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가르침이 삶이 현장 곳곳에 적용되어 열매 맺어지게 하도록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일을 함께 하셔. 이 말씀이 (갈5:22,23)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항상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셨.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참으로 난해한 문제는 삼위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번번이 죄에 넘어지고 죄에 패배하곤 한다는 것. 내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는가는 내 안에 죄를 더 좋아하고 죄가 주는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기 때문. 그래서 (약2:15-16)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죄의 열매들, 땅의 지체들을 사랑하지 말라신 것. 그것들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고만 있다면, 죄와 타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도 그 사람을 모른다 하시는 사람. 내 안에 세상과 사람의 우상들이 가득한 사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이기고자 struggle with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신 일을 마무리 하실 것. 그리고 그 마무리는 노력하고 애쓰는 자들에게 사망의 심판에 이르게 하는 죄에 승리하게 하시는 것. 죄에 대해 이겨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과 쾌감을 우리는 알아. 똑같은 죄에 대하여 졌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이겨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아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하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 맺는 나무, 열매 맺힌 가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기름 부으셨는데,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나에게서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이 보이겠는가, 내 주위에, 나한테서 하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지고, 그리스도의 흔적 있는 말과 행동이 보여지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때, 나의 행위를 볼 때, 내가 영원한 것을 보고 확신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영원한 것을 보고 만질 수 있는가 내가 성경적인 방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도 나의 성경적 삶의 방식에 영향 받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접하고 대하는 동안 영적이든 세상적이든 도움 받고, 믿음으로의 진행성이 있으며, 열매 풍성히 맺혀진 나무이고 가지 되어지는가 나의 삶의 어느 것으로라도 그 열매를 보여 줄 수 있는가 내가 무슨 열매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아무 열매도 보여줄 것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맺혀진 열매 없는 가지는 죽은 가지, 부러진 가지, 꺾여진 가지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한 번도 푸르러 본 적 없는 신앙 가지인 것 같이 있으면서 한 번도 열매 맺어보지 못한 가지 그리스도인은 가지여야 하고, 가지라면, 가지이기 위해서는 열매가 맺혀져 있어야 한다셨는데. 어떤 가지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 믿음이 아무리 좋은 신앙인이라도 신앙의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없다는.
신앙인에게 믿음의 열매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인 실험적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이 과정에서 맺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삶 자체인 성령의 열매 맺게 하시는 생명 주심의 결과물.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우리에게 맺혀지되 9가지나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의지와 노력과 성품으로 맺어질 수 있는 것 없어.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어떤 열매도 성령의 함께 하시고 도우심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참으면서 화평케 할 수 없으며, 자비와 양선과 온유할 수는 더욱 없고, 충성도 절제도 할 수 없.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어느 날, 한 사람이 탄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갱 입구로 들어설 때 온통 석탄가루로 뒤덮인 그곳에 아름답고 흰 꽃이 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시커먼 광산에서 어떻게 이렇게 순결하고 깨끗한 꽃이 필 수 있지요?”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한번 땅에 있는 석탄 가루를 집어 그 꽃에 뿌려보세요.” 그 말대로 하자 그가 뿌린 검정색 석탄가루가 흰 꽃잎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꽃은 여전히 깨끗하고 흰 모습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꽃의 표면이 너무 부드러워 검정색 석탄가루가 달라붙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이 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죄악 많은 세상이지만 예배하는 삶과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 시대에서도 그랬고 지금 세상도 성도를 무섭게 배척합니다. 마귀는 교회와 성도의 나쁜 점을 들추고 선전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성도의 삶은 어때야 할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물론 선을 행해도 항상 좋은 일만 있지 않고 때로는 어려움도 당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악마의 먹기가 됩니다. 특히 선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영적 게으름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누나와 동생이 예배를 드리는데 동생이 예배 중에 자꾸 딴 짓을 했습니다. 결국 누나가 말했습니다. “야! 예배 좀 잘 드려라.” 동생이 말했습니다. “누나! 너무 지루해!” 그러자 누나가 동생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원래 교회가 지루한 곳이잖아. 조금만 더 참아!” 지금 이 처럼 예배를 지루해하고 전도와 선교에 무관심한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더욱 예배와 기도와 선행에 대한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인은 행위에 관심이 없고 자신만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내 행위를 지켜보는 사람의 구원에도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주님을 인식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합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심하게 욕하고 저주하며 싸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교회의 한 청년은 그 모습에 크게 실망했습니다.이 처럼 성도는 항상 교회 안에서의 말과 교회 밖에서의 행동이 일치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이야기) 2.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베드로는 이제 곧 있을 박해를 염두에 두고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여기고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켜 마귀에게 당하게 만듭니다. 미국에 블랙 바트(Black Bart)는 유명한 도둑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 미국을 벌벌 떨게
했습니다. 그는 1875년부터 1883년까지 29번이나 역마차를 털었지만 한번도 총을 쏘지 않은 상태에서 역마차를 털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가 나중에 붙잡혔을 때, 누군가 그에게 “어떻게 총 한번 쏘지 않고 역마차를 털었느냐?”고 묻자 그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도둑질을 할 때 항상 두건을 썼습니다. 그리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무서운 말을 해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결국 그가 나타나서 말 몇 마디만 해도 가장 용감한 역마차 경호원들까지 벌벌 떨었기에 마음껏 역마차를 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블랙 바트처럼 성도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힘든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은 변해도 주님(Master)은 변하지 않고, 말씀(Message)도 변하지 않고, 사명(Mission)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감리교 목사 중에 윌리암 생스터(William Sangster)란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근육 무력증으로 죽을 것이란 진단을 받고 곧 4가지 결심을 했다고합니다. 첫째, “나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I will never complain).” 둘째, “나는 가정을 밝게 만들겠다(I will keep the home bright).” 셋째, “나는 축복을 세며 살겠다(I will count my blessings).” 넷째, “나는 고통을 유익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겠다(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살다보면 때로 두려운 일도 생기지만 그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때 미소를 잃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내일의 축복을 생각하며 더 감사하십시오. 두려움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포영화를 보면 그 전까지는 없었던 공포감이 생깁니다. 즉 공포란 생각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공포감을 가지면 공포는 진짜처럼 내 삶을 위협하지만 공포감을 버리면 공포는 곧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3.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성도가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궁금해서 물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그때 전도하려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성도는 항상 전도에 최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이발사가 부흥집회에서 전도의 사명을 도전받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는 매일 저녁 교회 전도교실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2주 동안 열심히 강의를 듣고, 전도와 관련된 성경구절과 질문도 익혀 마침내 모든 과정을 끝낸 패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이발소 벽에 그 패를 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 문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손님을 전도하게 하소서.” 바로 그때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빡빡 깎은 건장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손님에게 전도하려고 했지만 전도와 관련된 로마서 말씀과 질문이 입에서만 맴돌았습니다. 만약 그 손님에게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죽을 준비가 됐습니까?”라고 말하면 꼭 맞아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이발을 다 마칠 때까지 전도하지 못하고 그 손님은 이발소를 나갔습니다. 그날 오후까지 그는 아무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 따라 이상하게 손님도 없었습니다. 오후 5시쯤 되자 그는 마음이 상해서 울먹이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정말 이번에는 전도를 잘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깔끔한 한 신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신사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는 손님의 몸에 천을 덮으며 전도교실에서 배운 성경구절과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이발하는 내내 잘 기억나지 않았고, 이발 후 면도를 하려고 신사의 얼굴에 면도용 크림을 바를 때까지도 여전히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초조해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는 면도하려고 면도날을 혁지에 갈면서도 성경구절과 질문을 떠올렸지만 여전히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신사의 얼굴에 막 면도날을 대며 생각나는 대로 신사에게 소리쳤습니다. “ARE YOU PREPARED TO DIE?(당신! 죽을 준비 됐어?)” 요즘 전도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도방법이 개발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전도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졌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따라 살면 전도는 자연적으로 됩니다. 전도는 라이프스타일이지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관심을 프로젝트에 두지 말고 사람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처럼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사랑을 베풀면 전도는 이루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하라고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를 치료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디매오를 하찮은 거지로 봤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도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이 처럼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시간을 내고 관심을 주십시오. 전도는 관심입니다. 전도는 경작과 같습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씨를 뿌리고, 매일 물을 주고, 이틀에 한번씩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전도는 어려운 일이지만 성도는 전도라는 최대 사명에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다 걸어야 합니다. 4.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 구절에서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잘 길들여진 것’을 뜻하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마음’을 뜻합니다. 즉 전도를 잘하려면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강한 자, 꾀가 많은 자, 변화무쌍한 자가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온유한 자가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진짜 강한 것은 온유한 것이고,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딤전 1:15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고, 약 5:17에서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새 예수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괴한 신앙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고 따라가는 것은 환난과 시험을 부르고 점차 헐벗게 되는 길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설교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소리입니다. 성도는 성도 이전에 사람부터 되고, 거만한 모습으로 설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직설적으로 위협하듯이 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슈퍼스타나 세일즈맨으로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이루어가는 신실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와 겸손한 자는 속마음 안에는 선한 양심이 있기에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비방하는 자을 부끄러움을 가져가 줄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 사람들은 잘못된 편견을 깨고 우리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보고 주님 앞에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윌리엄 윌리먼(William Willimon)이란 사람이 고등학교 때 겪었던 일입니다. 그는 거의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데이트를 하러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어머니가 문 앞에서 잘 갔다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꼭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너는 네가 누구인지 항상 잊지 말아라.”
엄마의 말은 아들의 기억력이 나쁘니까 이름과 집 주소를 잘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데이트를 할 때, 혹은 파티 중에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잊고 잘못된 행동을 할 것을 염려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입니다. “김 집사야! 이 집사야!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 항상 그 음성을 기억하며 성도답게 주님의 빛을 드러내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먹어야 할 생명의 떡 08-11-2024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밥으로 육신을 관리 할수 있지만 영혼 관리는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관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 4:4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밥만 먹고 만족하십니까? 마 4:4 말씀은 보면 사람은 밥으로만 살수 없다, 영적인 양식이 공급되어야 한다라는 말도 포함되어 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죠. 육적인 무너짐은 영적 무너짐과는 다르다. 육적 무너짐은 휴식을 취하거나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되지만 영적인 회복은 다름을 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 스럽다는 걸… 우리는생명의 떡(양식)을 먹어야 한다.
1. 생명의 떡이란 무엇인가?
빵은 전 세계 많은 문화권에서 필수적인 음식 중 하나입니다. 많은 식단의 주식이며, 수세기 동안 모든 부와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빵 유대인들에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데, 사막에서 그들의 백성을 살려준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하는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구원과 주님과의 관계는 달콤한 간식과 같지 않습니다. 만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즐겁습니다. 고기와 같지 않습니다. 고기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많은 상황에서 균형 잡힌 식단에서 중요합니다. 구원은 인간 존재에 필수적이며 영생에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자신이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양을 공급하셨듯이, 그분은 죄로 인해 그분과 분리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예고하심으로써 자신이 이 구원의 길이심을 강조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이 없다면 세상의 죄는 갚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인류는 율법 아래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8:3-4 설명하듯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사건의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그분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실 때까지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고, 약속된 구원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과 구원의 관계는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을 기록합니다. 그는 40일 동안 금식하셨고, 사탄이 세 가지 시험을 가지고 그에게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육체적 배고픔을 표적으로 삼아, 주님께 돌을 빵으로 바꾸어 배고픔을 달래라고 유혹 할 때 예수님은 유혹에 마 4:4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군중에게 말씀하셨듯이, 세상의 음식은 일시적인 배고픔 상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죄와 영적 어둠의 영원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더 큰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은유적 표현으로 누룩이 들어간 빵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에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문화권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만난 후, 마태복음 16:6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이전에 은유적으로 빵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분이 문자 그대로의 빵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바로잡으시고, 그들은 누룩이 두 그룹의 거짓된 가르침을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빵이 의미하는예수의 구원하는 본성이라는 상징의 정점은마태복음 26:26 최후의 만찬에서 찾아본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여기서 주님은 다가올 십자가 처형의 본질과 영원토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의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밝히신다. 주님의 몸이 찢기고 십자가에서 피가 흘려짐으로써 인간의 죄에 대한 빚이 갚아졌고, 하늘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유월절 식사에서 먹은 빵은 몇 시간 동안만 배고픔을 달래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그들을 영원히 지탱해 줄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어떻게 생명의 빵이신가?
요한복음의 주제 중 하나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지,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설명으로 그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6장에서 그는 주님의 기적 중 하나와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춥니다. 주님이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권위 있게 성경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때때로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에서 주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셨습니다. 그날 밤, 그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다음 날, 그 수천 명이 다시 모여서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일시적인 양식이 아닌 구원, 즉 영원한 영양을 제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26-27,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의 기적을 오프닝 행위로 제시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류는 일시적으로만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을 위해 수고하고 노동해야 하며, 결국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음식을 증식시킬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믿는다면, 그들은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를 떠난 후 광야에서 아버지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만나를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 살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떡을 통한 영생에 대한 이 제안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불평하고, 심지어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수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살아있는 물, 그리고 길로 밝히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의 근원으로 제시하지 않고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분 없이, 생명의 떡 없이는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용서의 근원으로 밝히심으로써 회개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는
길을 모든 사람이 간단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추가적인 희생이나 행위는 필요없습니다. 로마서 10:9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개혁한글) “네가 네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KJV). 생명의 떡은 물질적인 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원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쇄신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배고픔을 인지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마세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며, 주 예수 앞에 나오는 자와 십자가를 지키는 자들이 되어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8-04-2024
내재하는 죄를 경계하라 사무엘 하 11:26-27
26.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조심하고 경계 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은 조심하지만 마음 속의 죄,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죄는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형통하고 평안할 때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죄 이기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 십계명 중 제 마지막 계명을 거역하는 죄를 짓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이 말씀은 이웃의 모든 소유을 말한다. 다윗은 죄는 평온한 삶속에 본인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가 목욕하는 모습에 마음에 숨겼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간음을 하였으며,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본인의 권력으로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다윗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죄성을 경계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에서 얻어지는 교훈을 함께 나누길 소망합니다. 1. 다윗은 한 가정을 파괴한 죄입니 다. 다윗의 내면의 삶 즉 숨어있던 순간적으로 나타난 정욕 때문에 한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간음하여 한 평온한 가정을 파괴 했습니다. 가정은 태초 우리에 주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신성한 제도를 그 누구도 파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 행위 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이라는 권력을 앞세워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전쟁터를 오가는 부하의 아내를 부끄럼없이 취하여 그 소중하고 신성한 한 가정을 혼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완강하게 침묵했습니다. 시편 32:3과 시편 32:9를 보면 그는 자신의 범죄를 사람들에게 숨기려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의 불의"를 자신에게 인정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기를 침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백하려는 충동이 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온 힘을 다해 그것에 맞섰습니다. 지금 오늘날도 이와 같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 간통죄가 폐지되고 전에는 숨어서 했는데, 지금은 부끄럼도없시 일어나고 있다고합니다. 유부남 유부녀들이 애인 하나쯤은 있어야하는 현재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의 본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마음 속에 음욕을 품는 것도 범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이 내재하는 죄까지도 항상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2. 자기 기만적인 교활한 죄를 은폐하기 위한 더 큰 죄를 만듭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교활한 마음이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양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양심에 정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려는 데 있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더 날카로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서로 비난하고 변명하는 갈등에서 오는 갈등이 증가합니다. 철학자 헹스텐베르크는 "죄에 빠진 직후에 나타나는 이 교활함의 뿌리는 교만, 신에 대한 신뢰 부족, 죄에 대한 사랑이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죄에대한 교활함은 죄를 은폐하려는 마음이있고 그 마음은 더 큰 죄를 만들어 냅니다. 다윗은 음란한 욕심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 받친 우리아 장군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더 큰 죄를 행했습니다. 순진한 우리아는 11절에 기록 되있든 다윗에게 고하는데,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이후에 우리아가 자기 집에 가지아니하자, 다윗은 전쟁터에서 홀로 맨 앞에 두어 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시키기 위해 의로운 사람을 죽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그 얼마나 무서운 죄악입니까? 하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다윗은 자신의 잘 못이 들어날까 두려워 자신의 신하를 전쟁터로 몰아가 간접 살인 죄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직접이 아닌 간접적으로 타인을 곤경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사소한 죄라도 양심에 꺼리김 없는 행동을 하시면 항상 내재하는 죄를 경계해야 겠습니다. 3.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 입니다.(고통) 우리는 죄로 인해서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를 짓누르는 짐, 비밀의 짐, 위선적 모습, 내면의 타락에 대한 지식,등 주변 사람들에게는 눈처럼 깨끗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51:3에서 고백 했듯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가라앉힐 수 없는 양심의 후회, 신의 불쾌감, 다가오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편 51:11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끊임없이 계속되며, 생명력을 소모하고 육체적 힘을 고갈시킵니다.시편 38: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50:21에서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리라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죄 이후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 됩니다. 비록 한동안 감춰져 있었지만, 때가 되면 드러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6). "죄의 열매가 먼저 드러나고(27절), 완고해진 죄인이 자신의 범죄를 부인하거나 숨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양심을 고문으로 깨지지 않은 그의 마음을 깨뜨리시고, 선지자의 책망을 느끼도록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은 다윗에게 찾아왔을 때 다윗이 자신의 죄의 성격에 대해 완전히 눈멀고 살았다면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의 무게로 눈 뜨게 했으며, 그가 한때 기쁨의 충만함으로 말씀하셨던 그 임재의 무게로, 폭풍우 전의 공기와 같은 이러한 억압과 함께 모든 습기와 삶의 신선함이 말라붙고 열병의 타는 듯한 열기가 왔을 때 선지자 나단이 이 모든 것을 그의 의식에 가져왔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정해진 시간에 그에게 분명한 말로, 생생한 예를 통해, 그가 몇 달 동안 마음속에서 중얼거림을 들었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의와 자비의 하나님이, 한 마리의 어린 양과 함께 있는 불쌍한 사람 우리아를 돌보셨고, 불의하고 무자비한 행위에 대해 왕인 그를 부르신다고 말했습니다. 나단은 그가 빛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고, 그 빛이 선하고, 무섭고 증오스러운 것은 어둠이라고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가 빛으로 돌아서서 빛이 다시 한번 그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침투하여 그를 차지하기를 갈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행한 일은 여호와를 불쾌하게 했습니다(역대기상 21:7). 이것은 성스러운 역사가가 다윗의 행동에 대해 한 유일한 언급입니다. 그것은 햇살처럼 그 진정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도덕적 결정을 담고 있으며, 마치 이 죄로 인해 다윗과 그의 집에 내린 신의 심판에 대한 초안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은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으로 부터 벗어나 하나님 말씀만을 따르는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윗은 범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린 행동이며, 그 죄를 은폐하려고 또 다른 죄를 범하였으며, 이 두 범죄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마음 속에 죄가 있다면 속히 하나님 앞에 회개를 통하여 용서를 구하시길 바라며, 빛으로 나아가 빛의 자녀로 우리는 내재하는 죄를 엄히 경계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07-28-2024 에베소서 3:14-15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이 서신에는 두 가지 큰 기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울은 복음이 너무도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사람이 그 영광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영원토록 하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그의 숭고한 설명 이후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여, 그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그 소망을 알게 하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알려면 영적인 조명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무릎을 꿇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이 그 이름을 받았습니다." 1절과 14절은 같은 세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바울이 2장에서 이방인들이 본성적으로 어떠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무엇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이 빈곤과 죽음에서 부와 영광으로 놀랍게 상승한 것은 바울이 그들이 항상 그들의 고귀한 지위를 실질적으로 즐기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큰 신비입니다. 저는 기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작동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I.기도가 효과적이려면 웅변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바울의 기도가 짧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두 기도 모두 짧습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기도는 매우 짧습니다.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면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위대한 기도는 단 세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32,33장)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 맞서 홀로 하나님을 위해 갈멜산 꼭대기에 서서 한 구절 길이의 위대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느헤미야의 위대한 기도는 단 일곱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짧은 기도는 시몬 베드로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마태복음 14:30). 그는 갈릴리 바다의 파도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이 기도를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여, 그것은 기도였고 즉시 응답되었습니다. 기도는 간결하고 요점을 잡아야 합니다.
II. 기도는 항상 우리에게 가능하다.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1절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묘사합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에베소 사람들을 방문할 수 없었고, 그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감옥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병원 침대에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집에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항상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은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당신에게서 기도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다른 신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슴을알 수 있다.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내 기도에 때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 1:3-4). •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 •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말함은"(살전 1:2). 우리가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수익성이 없는 많은 일에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아닌가요?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까? III. 기도는 항상 교육 만큼이나 필요하다. 1.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바울도 탐을 내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 •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0-32). •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살후 3:1) 2.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 기독교 신앙을 설득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설득하여 믿게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1:17-18말씀에 있듯이 성령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일할 때만 그들은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IV. 기도는 형식주의로 부터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의 자세에 대한 전체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바울은 기도에 필요한 자세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참된 기도에 필요한 특정한 자세가 없다는 것을 알 수입니다. •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재했을 때, 그는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창세기 18:22). •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때 그는 “여호와 앞에 와서 앉았더라”(대상 17:16). •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신당하실 때 기도하실 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니라"(마태복음 26:39).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릎을 꿇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강렬한 감정의 시간에 기도하는 자연스러운 자세입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나니"(행 20:36-38).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진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V. 기도는 언제나 경건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자신이 자신보다 지위, 존엄성, 권위가 훨씬 높은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을 "우리 구원의 반석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큰 하나님이시요 큰 왕이시요" 온 땅의 창조주로 선포한 후에, "오라, 우리가 경배하고 엎드려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합니다 (시편 95:1-6). 바울은 하나님과 마주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경건한 가운데 하나님과 만남으로 가져가는 통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신에 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사6:5).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땅에 쓰러졌습니다(계 1:17).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살짝 엿볼 수만 있다면,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마주하는 것에 떨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바울은 3:12에서 "우리는 그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라고 썼습니다. 이 구절이 "나는 무릎을 꿇습니다"와 그 안에 결합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다. 담대함이 뻔뻔스러움을 의미하지 않고, 확신이 쉬운 친숙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2:28-2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았다면, 그것은 바로 이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또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경건함과 경건한 두려움"을 동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도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마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이 그 이름을 받으신 분"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하늘에 있는" 사람들과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개혁 한글) 한분의 하나님,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니"(4:6 KJV) "하나님의 권속(개역 한글), 하나님의 가족"(2:19 KJV) 바울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이런 표현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며, 그들은 이 표현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위대한 가족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잊혀졌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무도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는 우리를 주시하고 계시다는 사실 기억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았던 위대한 성도만큼이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5가지 주제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고 깨닫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안식 주신 고독한 예수 07-21-2024 마가복음 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우리가 살면서 무엇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나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삶 자체가 피곤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라고 질무하면 생각하게 될 것리다. 그러면서 무엇이 나를 피곤하게 하며,나의 삶은 얼마 남았을까? 이것 저것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현대인들에게 주는 피곤함은 반복되는 변화가 없는 삶이라 말씀할 수 있습니다. 아침 읽찍 일어나서 직장 갈 준비하고 시간이 모자라 아침도 거르고 빵 쪼가리에 커피 한잔 들고 혹은 요구르트 한 병 마시거나 하죠. 출근해서 많은 업무와 직장 상사의 잔소리에 시달리다 보면 하루 일과가 끝나 지친 몸으로 퇴근하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소파에 팽개치듯 털썩 주저앉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을 내리깔고 잠시 자는듯 조는 듯 상태가 됩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지쳐있습니다! 우리는 침대에 몸을 쏟고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짧은 밤을 보냅니다. 육체적 피로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상이며, 이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휴식입니다. 하지만 휴식은 항상 막연하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딘가에 있지만 아마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휴식이 없으면 다음 단계에 있어 능룰과 집중력이 떨어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기때문에 우리는 느리고, 짜증나고, 일에서 최고가 안됩니다. 적절한 휴식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지내면 통계적으로 심장병, 당뇨병, 고혈압 등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합니다. 육체적 피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피로는 어떻습니까? 혹시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나요? 행복과 성취를 추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 여러분은 삶이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머피의 법칙의 불가피성을 증거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언제입니까? 과거의 죄책감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편안한 평화를 앗아가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우리를 지치게 하고, 짓누르고, 희망을 잃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면 오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나 예수님의 모습을 뵙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안식 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들이 회개, 즉 죄에서 돌이켜 구주를 신뢰하도록 전파하기 위해 둘씩 둘씩 전도 여행을 보내신 후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록합니다. 사도들이 예수 주위에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경험을 예수님께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말씀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자 오고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먹을 겨를도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런 하루를 보낸 적이 있나요?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안식에 대한 초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구석구석까지 전하는 일로 바빴습니다. 그들은 설교하고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이는 힘든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곤했지만 아마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6장을 펴서 이 직전의 구절들을 보면 왜 제자들에게 휴식과 수련회가 필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를 전파한 세례 요한은 처형당했습니다. 술 취한 왕주 때문에 참수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똑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그의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에게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면 제자들은 무슨 일이 생길까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친 제자들은 안식을 주시는 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부드러운 초대를 들었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하신 일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일시적이고 헛된 추구인 세상의 일들로부터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하지만 알지도 못했던 것, 즉 그분의 안식을 우리에게 값없이 완전하게 주십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낮잠을 자며 함께 보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 것 같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인간에게 가치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모든 수업과 시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을 파악하셨나요? 목자의 모습, 그리고 양들의 궁극적이고 위대한 목자이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시고 초대하실 때, 그분은 그것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복음 약속이 성취된 푸른 초장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에게 마실 생수를 주시고,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그분의 말씀을 통해 행하십니다. 복음의 약속은 위대하지만 그것은 나중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다며 나는 시편 23편을 읽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그러나 그가 나의 미래를 보장할 만큼 충분한 녹색 달러 지폐를 가지고 있는 푸른 초원에 나를 눕힐 수만 있다면 나는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나 나는 아직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고통, 거절, 고난을 결코 경험할 필요가 없는 조용한 물가로 인도해 주기만 한다면 우린 정말로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나 나는 아직도 원합니다. 내 이름과 명성을 위해 나를 성공과 성장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면! 천성적으로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평화와 안전, 안식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할 힘이 없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그렇게' 조정하고 이를 최대화하고 최소화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둘 수 있다면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구세주를 만들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괴롭힘을 당하고 무력해지고, 길을 잃고 홀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휴식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모든 마을에서 도보로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가 배에 오르는 것을 보고 건너편으로 달려가서 예수와 함께 있으려고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고 쉬게 하려고 한동안 제자들을 따로 따로 데리고 가셨는데, 사람들이 계속 왔습니다! 쉬는 날 회사 전화를 받을 때나, 한밤중에 누군가가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 어떤가요?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반응하시는 방식을 지켜보고 놀라십시오. 그들의 마음과 뜻을 다 아시면서도 “집에 가세요,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라고 군중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공짜 식사만을 바라거나 기적을 조금이라도 바라는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 그분을 찾고 있으며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죄인들의 무리를 지켜보았고 혐오감을 느끼며 돌아설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십니다. 약속하신 안식을 제공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바쁜 일정이나 재정적 부족이 아닌 가장 큰 문제인 우리의 죄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그를 너무나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 죄의 짐을 짊어지고 말았습니다. 평화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그를 너무나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우리의 몫인 죽음에 자신을 삼키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죄가 정복되고, 사탄이 정죄받고, 죽음이 무너지고, 천국이 보장된다는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안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안식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쉬십시오.
조직화된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 삶이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관계가 긴장될 때, 일정이 빡빡할 때, 아무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안식이 가득한 마음으로 죄로 지친 세상과 그 안식을 나눌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종류를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종류를 아는 사람. 모든 죄에 대한 용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약속, 한계가 없고 끝이 없는 사랑,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바쁜 하루와 빡빡한 일정의 삶에서, 세상과 죄로 지친 삶 속에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고 오직 개인만을 위해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2. 고독 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매일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의 주요 요소 중 하나, 그분을 특별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를 우리는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 어머님는 음식 만들는 것을 참 좋아헤셨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음식 몇가지 중에 가지찜과 함경도식 가재미 식혜를 참 좋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알려준 레시피로 만들어 먹어 보았지만 그 맛이 아닐때 나는 그 맛이 주는 행복함으로 살아왔는데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 문제가 간단한 것 같지만 문제의 해답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있다면, 그것을 느낌으로 만들려고 할 수도 있고, 만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함경도식 가재미 식혜의 같은 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주 가끔 만들어 먹어보지만 그 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예수님의 삶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여기는... 고독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혼자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보내심으로써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마 4:1-11). 열둘을 택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밤새도록 광야 언덕에서 혼자 지내셨습니다(눅 6:12). 그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가셨다”(마 14:13). 기적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혼자 산에 올라가사…”(마태복음 14:23). 긴 밤의 일을 하신 후, “새벽이 되기 훨씬 전,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가시니라…”(막 1:35). 열두 제자가 설교와 치유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라”(막 6:31)고 지시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광야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누가복음 5:16). 이제 요점을 알 것 같을까요? 하지만 제 질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셨다면 우리는 왜 안 됩니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혼자 남겨져 겁을 먹은 적이 있습니까? 나는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에도 뭔가를 듣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 기억합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혼자라는 생각, 즉 고독 속에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혼자 있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혼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불안하고 지루해지며 무엇가를 시간을 차지할 것을 찾습니다. 기도를 못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5분 정도 지나면 우리는 자신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우선,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정당한 이유 없이는 누구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독을 삶의 일부로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침묵과 고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분명하게 듣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자주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결코 조용하고 혼자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외로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알게 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 때 "외로움"을 두려워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곳 그렇다면 어떻게 고독을 삶의 일부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미 가지고 있는 작은 고독의 순간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아이들이 깨어나기 전의 순간입니다. 인생이 너무 바빠지기 전의 순간. 일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커피 한잔. 그러면 하루 종일 모든 것을 멈추고 그냥 있을 수 있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을 정해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반나절 정도 금식과 같은 것 하나님 앞에서 몇 시간 동안을 침묵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캠핑을 다니다 보면 고요한 밤에 모닷불 앞에서 사방이 고요할 때 나는 모든 소리가 들립니다. 새 우는 소리, 풀 벌레 우는 소리, 늑대 우는 소리, 주변에 물 흐리는 소리가 낮 보다는 고요한 밤에 더 세밀하게 드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침묵속에서 우리는 고독도 느끼지만 또한 하나님이 우리 향해 말씀 하시는 음성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의 고독한 시간 속에 늘 하나님을 만나고, 듣는 모습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침묵과 고독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처럼 "우리는 따로 조용한 곳에 가서 잠시 쉬자..." 이것이 우리를 위한 여러분들에 기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우리는 택함 받아 복 받은 자 07-14- 2024 에베소서 1:3-6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울은 자신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이 영적 축복이 "하늘의 장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의 장소에서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선택된 영혼에게 영적 축복을 쏟아붓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에베소서 2:5-6을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의 장소까지 높여져서 영적으로 승천한 자로서 신성한 목적 이셨다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성한 축복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축복으로 이 "하늘의 장소"로 가서 그러한 유리한 입장에서 신성한 계획이 어떻게 보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시는 사랑으로 복 받은자로 살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I.축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3절)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모든 것의 머리에 두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에서 모든 영적 축복이 나옵니다. 은혜의 분배는 아버지에 의해 가려집니다. 가정의 사랑의 근원이 부모의 마음에서 자녀를 향한 모든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에게 다양한 성공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사랑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희미하지만 실제적이며, 우리는 유추의 확고한 발판을 통해 인간 경험에서 신성한 사랑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마치 지상의 아버지들이 자녀를 위해 온갖 축복을 계획하고 특정한 이해에 따라 그들에게 주는 것처럼, 위에 계신 무한하신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II. 아버지는 창세 전에 우리는 택함 받은 자로 축복을 계획하셨다.(4절) 모든 축복의 규칙은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하며, 다음으로 우리가 그의 입양된 자녀로 축복이 영원부터 의도적으로 계획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의 사랑이 택함 받은 자녀가 필요 사항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으로 반영될 때, 우리는 그를 영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그가 지상의 아버지와 같이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하신 아버지가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고 가장 사소한 세부 사항을 명확하게 모든 것을 정돈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정돈에 실수가 없으신 분이기도 하시고, 여지를 남기시지 안습니다. 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그럴까? 그러므로 예정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전능하신 아버지가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고 그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허약한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그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장 확고하게 믿는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는 많은 고급 수학 문제가 있고,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에게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과학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둘 중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극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신성한 예정과 피조물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 해결책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상적 계산을 넘어선다. 우리는 둘 다 사실로 믿고, 미래에 화해를 가져온다. 그리고 영이 우리를 날아오르게 도와주는 천상의 장소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신성한 계획에 대한 생각에 기뻐한다. III. 축복의 규칙은 그의 계획에 대한 좋은 기쁨이었습니다.(5절)
이제 우리가 영으로 하늘의 장소로 올라갈 때, 우리는 이 계획의 진실과 적절성을 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세상은 그 주민들이 모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좋은 기쁨에 동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의 뜻에 대한 기쁨이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는 데 만족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규칙과 법으로 받아들이면서 영원한 축복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도달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지 깨닫고 그의 뜻에 대한 좋은 기쁨에 즉시 동의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선하셔서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가 그의 피조물 중 누구에게나 복수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복수가 처벌을 받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너무나 반대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이 그런 계획에 즉흥적으로 동의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의 선한 기쁨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조금만 올라가서 그가 얼마나 선하신지 보면, 우리는 그의 기쁨을 항상 선한 것으로 기꺼이 감사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IV. 개인을 택하신 것은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함과 흠 없는 품성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4절)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나님의 택하시는 사랑에서 목표로 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이 없이는 어떤 영혼도 구원에 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죄와 거룩함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택하심은 거룩함을 위한 것입니다. 영혼이 죄를 사랑하고 거룩함을 미워하는 한, 그는 어떤 택하심도 확언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는 나중에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그 안에 있는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고 거룩함을 미워하는 영혼은 이 택하심의 교리를 건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그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거룩하다고 여겨져서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로 구별받을 자격이 있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종심이나 개인적 순수성 때문에 거룩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V.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성한 가족으로 입양되고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됩니다.(5, 6절) 우리는 무한하신 아버지가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신성한 가족 안에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두셨습니다. 영원한 아버지는 영원한 아들을 두셨고, 그들은 영원한 영을 통해 영원부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 아들은 사랑받는 자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8:29말씀 처럼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7말씀에 그의 이름이 찬송받으시기를, 그는 자신의 유업에서 자신과 함께 "공동 상속자"를 두는 것에 만족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것과 형제가 많은 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를 입양하기 시작하셨고, 그 지위나 보상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을 매혹적인 범위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입양아는 그가 형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게 됩니다. 강력한 가족의 맏아들인 예수는 아버지께 너무나 사랑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위해 그의 가족으로 입양된 탕자의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입양될 대한 이유가 없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입양된 것은 단순히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제시된 계획에는 자랑할 근거가 없습니다. 선택과 입양은 모두 하나님의 뜻의 선한 기쁨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주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몇가지를 생각 해야 합니다. 1. 왜 우리가 택함 받았나?
2.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나? 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가 되었나? 우리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며 우리가 택함 받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목동 왕 다윗 07-07-2024 사무엘하 5: 5,10, 12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5절을 보면 수도는 전국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국가 생활의 심장과 두뇌가 될 수 있는 필요한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습니다. 왕국의 신성한 보물을 침해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요새화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특징이 예루살렘에 섞여 있었고, 다윗의 신의 인도에 따른 판단에 맡겼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사울과 크게 달랐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도시인 기브아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기브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곳이었고, 흉악한 범죄의 현장이었으며, 그 악명은 지워질 수 없었습니다.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다면 나머지 이스라엘의 질투를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그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은 너무 낮은 요점을 쳤을 것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국경에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할 만한 곳은 없었고, 세 면이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한 면인 북쪽은 강력하게 요새화되어 있었습니다. 목동 이었던 다윗는 왕이되어 삼십 삼 년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목자의 직업이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첫 번째 경우입니다. 창세기로 부터49:24; 창세기 48:15" 라반의 양 떼를 먹인" 야곱은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민수기 27:7이후에 "이드로의 양 떼를 지킨" 모세는 여호와께서 "회중 위에 한 사람을 세워" 그의 후계자로 삼아 그들이 "목자가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먹이던" 다윗에게 왕의 목적지에 관해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라아: ‘준비하다’, '돌보다', '목자 역할을 하다'와 동등]"고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사무엘하 7: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시 78:70-72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예레미야 23장: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 예레미야 5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미가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떼에게 먹여서) 스가랴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목자의 일은 모든 양떼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양떼인 인류를 다스리도록 정해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왕의 직분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래서 왕은 백성의 목자라고 불리는데, 꾸지람이 아니라 가장 특별하고 탁월한 영예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 떼의 주인이 아니라 먹이고 다스리는 직책입니다. 왕은 더 이상 재산권자도 아니고 백성의 주인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했듯이 '열방'은 '그의 상속 재산'입니다. 그러나 왕의 직책은 백성을 다스리고,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첫 번째 왕인 다윗이 목자에서 옮겨졌다는 것은 신비롭다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한 말은 그가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모든 왕, 통치자, 행정관, 주인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세운 왕 사울을 통해서 보았고, 지금 세상의 몇몇 대통령 또한 나라와 민족를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 권력, 용망,등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있지않습니까? 그 모습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개인 역시 특히 그리스도인 이라면 나 보다는 가족을 이웃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목숨 같이 지키고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 왕의 직책는 신성이며 권위와 권능이 있는 직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인데, 백성의 소유자, 통치자, 대 목자이십니다. 스스로 된것도 아니고 혈통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하위 목자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시편 101편)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방어하고, 회복시키고, 일반적으로 근면, 사려 깊음, 부드러움, 인내, 자기 부정, 자기 희생으로 그들의 복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카파도키아의 목동들이 양 떼를 너무나 사랑해서 때로는 함께 3일 동안 양 떼를 따라가다가 눈에 덮쳐도 견뎌낸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리디아에서는 양 떼와 함께 황무지와 뜨거운 태양 속에서 한 달 동안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 썼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사람들의 목동들에게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신의 면전에서 그 용도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이 양들이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사무엘하 24:17). "왕은 지상의 필멸의 신이며, 살아 계신 신이 큰 영예로 자신의 이름을 허락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처럼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만해져서 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본성도 부여했다고 자만했습니다." II. 그의 번영의 신성한 근원. "다윗은 시온의 요새를 정복한 후 계속 나아가 성장했습니다"(6-10절). 그는 대장으로서, 사무엘하 7:9"백성의 지도자와 사령관"(또한 그들의 목자)으로서, 권세와 명예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사무엘상 1:3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의 목자로서, 시편 23:1, 사무엘하 22:35-37. 대장으로서 성경에 기록합니다. 그가 자신의 부름에 헌신한 방식을 인정합니다. 충실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필요 조건이며, 그것은 항상 마음과 양심에서 증거되며, 종종 외적인 사건으로 드러납니다(창세기 39:2, 21). 그가 부름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도록 돕고, 그를 강화하고, 옹호하고, 지시하고, 보호합니다. 그의 사명에서 그의 노력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과 어떤 기술이나 노력도, 신성한 협력 없이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자의 수고가 헛 되며…" . 사무엘상 10:11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동안 사울은 번영했습니다. 혼자 남겨졌을 때 그는 왕국과 생명을 잃었습니다. II. 그의 직책에서 그의 승격과 확립의 신성한 목적. "다윗은" 히람의 친절한 도움으로 그의 궁전이 건립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2절).
이 말씀은 시온 요새를 점령하고, 그 주변에 건물을 더 세우고, 특히 다윗을 위해 왕궁을 짓는다는 서술 이후에 소개됩니다. 그것은 왕국 전체를 위한 대도시를 세운 것이었고, 사물의 안정된 상태를 입증하고 촉진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다윗의 생각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승영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인식된 사실이 여호와의 작용 입니다. 여호와는 다윗을 왕좌에 올려 세우고 그 위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단계에서 신의 손이 분명했습니다. 특히 그 손은 모든 단계, 그 연결과 결과가 고려될 때 더욱 분명했습니다. 두번째는 신성한 목적입니다. 모든 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유하고 사치스럽고 명예롭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지파들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고 통합되어 자유롭고, 안정되고, 안전하고, 번영하고, 영광스럽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덕적, 종교적 삶에서 고양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출된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고,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예배를 유지하고, 그분의 진리를 보존하고, 그분의 찬양을 나타내고, 세상에서 그분의 왕국을 증진하는 데 더 적합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에게서 구세주와 구원이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아들도 자신을 위해서만 고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하나로 모으고" 요한복음 11:52 말씀 처럼 그리고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고, 고양시키고, 영원히 구원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1:22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전서 3:21-23 사람에게 부여된 모든 권세, 지위, 권위 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어지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속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주어집니다.우리는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축복을 받고 인류에게 축복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III. 이러한 사실에 대한 데이비드의 인식입니다. 그는 자신이 영위하는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교만을 억제하고 겸손과 감사를 낳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위한 삶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야망을 억제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한 진심 어린 헌신을 낳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대행과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깊은 인상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 능력, 지위 또는 소유물, 시간적이든 영적이든 그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야 하며, 모든 것이 단순히 또는 주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 특히 그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번영하고, 연합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인류를 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신성한 목적이며,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우리는 하나님과 지적인 협력자가 되고, 우리의 삶은 의미, 존엄성, 가치로 가득 차고,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꺼이,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세상에 적합한 준비가 될 것이고 그러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21.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오늘 5장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거라사인 지방과 저편 하면 건너편 이겠죠 이편 바다가 사람과 저편 바다가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분리했지만 도덕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양쪽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었고, 그의 권능의 일들이 보였지만 그 결과는 얼마나 다른 지 성경에서 보여주는데 현재의 우리와 같이 기질과 성향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변덕스럽고, 어떤 때는 상냥했다가 우리는 이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 많은 사람들의 성향은 갈릴리 호수와 같습니다 때로는 폭풍우에 휘몰아치고, 때로는 미소 띤 하늘 아래 고요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에게는 그런 가변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올리브 산에서 종려나무 가지가 흔들릴 때 쾌활하지 않았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라사에서 한 가지가 아니고 가버나움에서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곳을 살펴봐야 하며, 그 원인은 성격과 운명이 매우 크게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오늘 날 같은 교회에 공간에 앉아 있는 두 모습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다양한 측면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했습니다. 우리는 성격의 한 측면에서 위대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모든 측면에서 위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거부와 수용을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
1. 그는 교사로 오셨습니다. 회당에서, 해변에서, 군중 속에서 그는 신성한 진리를 전했고, 그의 청중들에게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기대했다. 그는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 옛 경륜의 의미, 삶의 현상, 다가올 미래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떤 주장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엇이고 무엇인지에 근거하여 그의 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받아들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권위 있는 자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 그리스도를 교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추상적인 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 유대인 경제에 대한 견해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대중의 죄를 몰아낼 원칙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의 계시를 받아들여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2. 그는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생각과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롭게 섞였으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섞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교사는 그들의 몸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정화하는 자였다. 이 복잡한 일은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고,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셨으며, 나병환자에게 건강을 회복시키셨는데, 이는 그가 사람들을 위해 이루신 일의 표징이었습니다. “죄있는, 병든자, 가난한 자 다 내게로 와서 편히 쉬어어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로 안내자 이시자 우리의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3. 그는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는 가버나움과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베드로의 집에서 병을 고치고, 다른 집에서 아이들을 축복하고, 가나에서 축제를 나누고, 베다니에서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이 우정을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그 친구의 임재가 폭풍 속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그는 각 사람의 마음에 나타나, 등 말씀하시길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말씀은 무슨의미 일까요? “너희는 나를 기다리게 하지마” 이러한 예수의 모습과 행동들이 사람들에게 미친 것과 같고 서로 다른 효과로 보이는 것은, 이는 제자들의 행동과 치유된 귀신 들린 사람의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거라사인 사람들의 상태와 가버나움 사람들의 상태를 대조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주셨으면, 우리를 친구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교할 것은 거라사인 사람과 가버나움 사람을 비교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의 신앙인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1. 거라사인 지방은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도 소유물을 더 소중히 여기고 순수함과 사랑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에게 베푸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돼지를 잃은 것은 처음에는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아첨과 고집이 뒤섞인 채 "그에게 그들의 지경에서 떠나라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소원에 굴복했고, 우리가 아는 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나사렛(누가복음 4:29)과 예루살렘(마태복음 23:37)에서도 거부당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건에서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두려워했던 것보다 거룩하신 분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돼지를 파괴하는 자에 대항하여 무장했습니다. 그들은 형제를 구출하는 것보다 돼지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재산은 개인의 권리보다 더 탐욕스럽게 방어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양보다 낫다는 원칙을 세우셨고, 그는 거라사에서 행한 행동에서 그 원칙을 표현하셨습니다. 소유물과 지위가 우리 주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순종보다 더 선호되어,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여전히 거부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2.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포용 했습니다. 호수 건너편에서 왕족의 환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의 힘으로 집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았고, 그의 지혜와 사랑의 말씀을 간절히 경청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을 구원하고 위로하기 위해 온 그리스도가 없는 것처럼 일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떠나자, 그들은 작은 배가 다시 바다를 건너오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배의 돛이 처음 보이자 그 소식은 재빨리 멀리 퍼졌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동료들을 부르러 달려가서 "예수님이 오신다!"고 말했다. 늙은이들은 예수가 오시기 때문에 비틀거리며 바다로 내려갔어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도하던 여인들은 그의 동정심에 감사와 사랑으로 생각했어을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시장에서 노는 것을 그만두고 그의 미소에 기뻐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여전히 진지한 말씀으로, 신성한 노래로, 거룩하고 거룩한 생각으로, 엄숙한 추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보물을 쏟아내고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라고 외치며 날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뻐하세요, 날마다 감사하세요, 그리고 날마다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6-23-2024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 보인 모습 사무엘 상 15:35 – 16:2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15장을 전체를 보면 1-10절은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사람의 왕과 양과 소 그리고 기름진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가치 없는 것으 진멸합니다. 이모습에 바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길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말씀하삽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가? 불순종하는가?로 결정을 합니다. 11-20절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순종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아각을 끌어 왔다고 변론합니다. 21-23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와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제사가 여호와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든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라고 말하니 사울이 바로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또 자기의 범죄하게 된 것을 백성에게 돌림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매달리지만 사무엘이 돌아서니 사울은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다 찢어진니라 오늘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고 당신 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다 라고 말하고 사울에게 저주와 같은 말씀을 남기고 사울을 떠나며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고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바로 이스라엘 왕으로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 붓기를 명하십니다. 여기까지가 15장과 16절 초반부 입니다. 우리는 15장을 앍어보면 왜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게 되었는가와 16장에서는 왜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기름을 붓기를 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정하여 놓은 구원의 자질(자격)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자질를 어떻게 판단하지요? 나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정합니다. 그러면 나쁜 사람의 기준과 나쁜 사람의 기준은 어떻게 정하지요? 이러한 방식은 인간의 방식이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디릅니다. 순종 자와 불순종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자질은 바로 이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사무엘서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미개한 오지로 선교사를 모집했을 일입니다. 신청자를 대상으로 겨울 어느 추은 날 새벽 세 시경에 시험이 시작된다고 공고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이 왔으나 시험을 실행하기 위해서 다시 오전 여덟 시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험 문제는 ‘2X2=?” 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도 대답 할 수 있는 문제를 통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가? 다섯 시간을 기다는 인내심이 있는가?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가지에 합격을 해야 만이 선교사로써 선교지에 열악한 환경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교사를 뽑음에 있어서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사람을 뽑을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데 있어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자질”이 있다 없다를 어떻게 판단 할까요? 우리는 보통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구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악한 사람의 기준는 무엇이고, 선한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 이러한 것부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판단 할 수 있는 것이아닙니다. 오늘 말씀 35절를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라고 합니다. 사울이 처음 부터 악한 사람이었을 까요?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셨다” 사울은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은 슬퍼하고, 여호와는 후회 했을까요?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 즉 선택받은 자는 전혀 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울은 악한자가 거짓된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실수 한것이 있는데 바로 여호와의 음성에 청종하지 아니하고,순종하지 않았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사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위심할 여지 없이 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근원이 있는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애정을 가졌습니다. 사울은 많은 "구속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특성들은 그를 대단히 인기 있게 만들기 위해 계산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좋아할 만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사무엘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그의 성격에 대해 전혀 착각하지 않고도 나쁜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앞에 있는 경우처럼 그가 바로 신의 정죄를 선언한 사람임에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불러일으켰다는 단순한 사실로 위험하다고 여겨야 할 사람들의 실제 성격에 대해 그릇된 길로 인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고, 거룩한 사무엘이 그가 왕국을 잃었을 때 그를 몹시 슬퍼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우리는 사울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틀렸을 것입니다. 사울과의 개인적 교류가 중단된 것은 또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과 교제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구속적 특성"이 그의 성격의 예외적인 점 대신 주요 특징을 구성할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 합리적인 희망이 있는 한, 초기 교제에서 눈에 띄지 않게 행사된 영향력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한, 우리가 그의 중대한 잘못을 인식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교류는 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자마자, 이러한 희망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면, 존경심이 여전히 남아 있더라도 친밀한 교제는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례에는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 특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이롭지 않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사악한 소통은 좋은 매너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리 작거나 눈에 띄지 않게라도 서로 바뀌지 않고는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복음의 교훈에 명백하고 과시적으로 반대하는 경우, 우리가 평소보다 더 종교적이고 확고하지 않다면 우리의 끊임없는 교제는 좋은 효과를 낼 가능성이 없습니다. 사무엘은 늙은이요, 선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자요, 사울에 대한 강한 애정을 지닌 그에게도 "더 이상 그를 보지 않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낀 때가 왔을 때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실 준비가 되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승진시키실 준비가 되셨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더 높은 곳으로 들어올리실 준비가 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충성스럽고 헌신적이며 당면한 일에 헌신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윗의 모습이 하찮고 부족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것을 취하여 더 크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위가 아무리 낮더라도 신뢰할 수 있고, 헌신적이며, 충실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과 신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는 이유는, 무리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으로 여겨졌던 사람, 다윗을 가장 약하고, 연약하고, 보잘것없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형제들이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내려놓는 사람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신이 그들을 들어올릴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뒤로 밀어내는 사람에 대해 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신이 그들을 앞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으니까요. 신은 우리가 가장 적게 여기는 사람들을 승진시키고, 높이고, 일으키는 방법을 아는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네가 사울을 위하여 언제까지 애통하겠느냐 내가 그를 버려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분은 네 뿔에 기름을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보내리니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을 예비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느냐?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암소 한 마리를 데리고 가서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리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여라. 내가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 주겠다. 내가 네게 이름 붙인 자에게 기름을 부어라. 라고 3절은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기름 부을 사람을 찾을 때 다윗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왕을 찾을 때 양치기 다윗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사람은 재능, 능력, 선물, 역량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품성을 중시한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잠언 18장 16절에서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를 위대하고 강력한 사람들 앞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선물은 당신을 위대한 사람들 앞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당신이 그곳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은 당신의 성격입니다. 요셉의 선물은 그를 파라오 앞으로 인도했지만,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만든 것은 그의 선물이 아닌 그의 성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본질적으로 내가 이새의 아들들을 주시하고, 그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들 중 한 명을 선택하여 나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거인을 죽였을 때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위대함은 큰 방식으로 한 가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작은 일을 위대한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윗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단지 목동으로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그에게서 목적과 약속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과 사울, 자신과 사무엘, 자신과 다윗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나는 구원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말씀을 얼마나 청종하면 순종하고 있는가? 이 시간이 여러분의 믿음 삶의 길을 올바른 길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 06-16-2024 고린도후서5:9
찬송가 344 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삶에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 처럼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두 가지를 해야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에 목표 중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1. 우리가 삶의 목표로는 "받아들여지는 것"과 "기쁘게 여겨지는 것" 입니다 그저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얼굴에 미소를 가져다주고, 그분의 마음에 우리에 대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마음에 품길 소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각의 완전한 자극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현재 관계에 대한 매우 놀라운 개념을 함축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군대에 간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분이 우리가 바라는 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을 보실 때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것은 거룩함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놓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동기입니다. 이러한 동기는 사람들이 때때로 선하게 살라고 권고받고, 모든 일에 낮은 이유보다 얼마나 더 축복받은 것일까요? 우리가 이것은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하면 더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와 "그분이 우리가 그것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의 차이는 얼마나 큰지요. 의무를 감사로 바꾸고 의무와 자기 호소 앞에 그리스도를 두신다면, 순종의 모든 어려움과 짐이 쉬워지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 하나의 목표는 크든 작든 모든 다양한 형태로 모든 삶을 통해 수행될 수 있습니다. 작은 것과 큰 것,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모두 하나의 동기의 부여를 받아 하나의 끝까지 협력할 때 우리의 존재 전체에 축복받은 통일이 주어집니다. 그 하나의 확고한 목표를 철봉처럼 여러분의 삶에 밀어 넣으면, 그것은 삶에 강인함과 일관성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유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기에 의해 헌신하기에 너무 작은 것은 없습니다. 그 힘을 소유하기에 너무 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나 항상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유일한 것은 그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의식적인 동기로 참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도 그렇게 확실히 줄 수 없는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빠른 분별력을 줄 것입니다. 2. 목표에 필요한 집중된 노력은 "노동"으로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명예를 좋아하거나 명예에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전환되어 명예와 관련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야망을 기르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깊은 곳에서 칭찬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기에 두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등을 두드리고 "잘했어!"라고 말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로움에 대한 다른 엄숙한 동기에 더하여 우리를 길로 인도할 이 가장 높은 야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약간의 기르기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칭찬을 받기 위해 우리의 행로를 형성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모든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른 사람이 자신 외에 하는 말을 건전하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라케다이몬(Lacedaem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라코니아의 왕이자 제우스와 플레이아데스 타위게테의 아들이었다. 그는 에우로타스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이기도 한 스파르타와의 사이에서 아미클라스와 에우리디케를 낳았다. 에우로타스 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인 라케다이몬에게 왕국을 넘겨주었고, 라케다이몬은 나라의 이름을 왕비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로 바꾸었다.
* 라케다이몬(Lacedaem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라코니아의 왕이며 제우스와 플레이아데스 타위게테 의 아들이었다. 그는 에우로타스 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이기도 한 스파르타와의 사이에서 아미틀라와 에우리디케를 낳았다. 에우로타스 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인 라케다이몬에게 왕국을 넘겨주었고, 라케다이몬은 나라의 이름을 왕비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로 바꾸었다.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스파르타에서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할까?"라는 생각으로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습니다. 어떤 영국 식민지의 총독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우닝가에 보고하고,((Downing Street)는 영국 잉글랜드 런던의 거리로, 영국 내각의 최고 수석장관 두 명이 공식 거주하는 저택이 300년 넘게 자리해 있는 거리기도 하다. 그 두 장관은 제1재무상과 제2재무상으로, 전자는 영국 총리를 일컫는 말이며 후자는 영국 재무장관이 맡는 자리다.)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무부의 의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경를 많이 써서 누군가에게 보고합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주변에 있는 동료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에게 가장 큰 보상은 우리을 향한 하나님의 미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미소를 성취하기 위해 최대한의 에너지로 노력하십시오. 바울이 받아들일 만한 봉사에 대한 개념은 사람이 많은 것을 억누르고 많은 것을 극복하여 가져오는 봉사였습니다. 그의 은유를 보십시오. 전쟁, 경주, 투쟁, 어떤 위대한 성전 구조물의 건설 등 모두 인내심 있고, 끈기가 있고, 계속적인 수고의 개념을 암시하며, 대부분은 또한 내부나 외부에서 적대적인 세력과 어려움과의 투쟁의 개념을 암시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어깨를 수레바퀴에 대고, 등을 일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보다 더 깊고 깊은, 그리고 그것의 근원이자 생명보다 더 깊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이 들어오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그 존재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오래된 숙련공이 용광로 옆에 앉아 녹은 금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순수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분 자신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영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영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의 분량에 따라 그분 안에서 형성한 것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3. 이 목표가 모든 외부적 요소를 얼마나 무의미하게 만드는지. "존재하든 부재하든!"에 어떤 조건의 차이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이 문구 안에 생사의 차이가 있고, 무엇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혹 우리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외롭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든, 젊든 늙었든 상관없다면? 하나의 목표가 우리 앞에 떠오르고, 그 위대한 문제의 빛을 눈 속에 비추는 자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부 주의 하다면?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는 믿음, 영적 삶과 구원을 얻는데 아무소용 없는 것에 시간과 열정을 소모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이 동일한 목표와 동일한 결과가 여기나 저곳에서 동등하게 추구되고 달성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지상에서, 죽음에서, 영원을 통해 그러한 삶은 동질적이고, 어느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목표가 잊혀지고 보이지 않을 때에도 이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저곳에서 각자의 성취된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멘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목표를 무엇에 두고 신앙 생활하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인 아닌지, 혹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의식주, 명예, 권력을 누리고자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06-02- 2024 고린도 후서 12:8-9 찬송가(347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진정한 삶에있어 어떤 개념과 필요성은 무엇인가? 단순이 사람이 움직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근육과 뼈입니다. 그러나 더 세부적으로 본다면, 인체의 내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 근육과 뼈라는 사실입니다. 즉 신체가 건강해야 모든 다양한 행동에 있어서 통일성, 단순성, 효과를 부여하는 삶에 대한 단순한 개념이 있다. 삶이 그 감싸고 있는 개념을 즉시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정도는 실제로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삶의 존엄성, 아름다움, 유용성은 그것에 달려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개념과 이 개념에 대한 필요성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특별한 생명에 그리고 개념에 주목 하시길바랍니다. 인간의 생명은 필요한 모든 것을 풍부하게 공급받아야 하지만, 이 모든 풍부함은 저절로 얻어지거나 그 자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 자체가 신성한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개념은 두 가지는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 인간에게는 충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자신의 충분함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지요! 자존감 떨어지고 낙담한 사람들은 "인간의 삶은 예정된 실패이며, . 공급이 없는 욕구로 가득 차 있고, 답이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감 있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인간은 자신 안에서 만족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하기만 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모든 질문에 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아니, 둘 다 틀렸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만, 본인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충분 하다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충분ㅚㄹ까요?"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이 질문의 초점이 세상 쪽인가 아니면 하나님 쪽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질문하시길 “너는 나의 은혜가 충만한가? 말씀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다. 그 대답이 “예”라고 했을때 과연 본인 중심의 대답인지? 하나님 중심의 대답인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공급을 받고 살아가야하는 존재입니다. 그 공급은 하나님, 예수님이요, 성령님으로 부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분이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믿는 그 신에게 무엇을 공급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끊임없는 증거인 것은 내가 어떻게 살고있으며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고 있을때 그 공급이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끊임 없는 공급으로 인해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때 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고 삶을 살아가 사람과 한계를 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달려가는 자가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항상 아버지의 삶의 광대함을 스스로 주장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의 영역 주위에 선을 긋는다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이 당신이 알 수 있는 한계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사랑스러움에 한계를 정할 수 있을까요? 가장 인간적인 야망으로 성격을 추구하는 사람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그게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에 모든 패턴 넘어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는 진정한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한한 존재는 자신이 속한 무한한 존재의 음성을 듣고, 항상 그 음성에 응답하며, 곧바로 끝없는 여정에 안주하며 만족 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인간은 영원히 무신론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이나 사람이 무신론자가될 수도 있지만, A라는 아이가 B라는 아버지를 친 아버지라 부인하거나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아이인 인간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낌과 자신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항상 그를 가장 두려움과 외롭다는 생각에 어두운 곳에서 방황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곳에서 자유함을 얻고자 유일한 음성을 듣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꼭 사도 바울 처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IV. 그리고 이제, 만약 인간의 영혼이 쉬어야 할 곳이 여기라면, 인간의 영혼이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쉼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은혜의 충분함 위에 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삶의 비밀과 힘이라면, 그 쉼은 인간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서 존재하는 영원한 요소여야 하며, 특별한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가끔씩 부르는 조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나의 누구를 항해 충만함 얻는가? 나는 지금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마치 하나님이 옆집에 있는 사람, 필요할 때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만약 여러분이 기도할 때 그 음성을 들었다면 분명한 것은 하나님 은혜가 나에게 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을 대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쳤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알았기에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찬양으로 고백과 기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찬양 중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들으며 가슴이 벅찹니다. 이 찬양은 내가 숨차게 힘들 때 그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난뒤 돌아보면 내가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얼마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에 사기를 당했는데 사기꾼을 고소 했는데 변호사는 3년 넘게 해결 못하다 결론의 답변이 사기가 성립 않되어 고소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호사는 병에 걸려 누워있다고 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겁니다. 하는데 하나님은 정말 계신가요? 하시며 말씀을 들었을때 내 얼굴이 화근하더군요. 목사인 나로써 어떻게 할 말이 없다라고 하더군요. 나의 대답은 이렇게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0 년 넘도록 본인이 어렵게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지금 그 문제로 환경이 바뀌었습니까? 사기 당하기 전이나 후나 또같이 살고 계시고 본인 항상 하나님을 찾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런지요.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지금 눈에 보이게 해결 되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해답은 성경말씀에서 우리는 잘 배우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마태복음 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있는데 바로 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벌하는데 때가 있으니 그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를 기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런지요. 우리가 구할 것이 악한자가 벌받아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시는 걸까요?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라 골짜기의 장면은 항상 기억 할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영원합니다. 골리앗은 교만하고 힘이 무척 강하여 그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는 힘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돌팔매와 돌밖에 없는 연약한 유다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힘 외에는 힘이 없었고, 입술에 기도만 있으며 아무것도 없이 이긴 투쟁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위대한
근육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지 모르지만, 그 힘은 그에게 완전한 힘이라는 생각에 자랑하고, 자신의 힘만 믿고 합니다. 다윗의 힘은 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 뒤에 있으며, 돌을 던지는 돌팔매를 비틀기 위해 그의 손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흘러내립니다. 이 말씀의 결론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가? 입니다. 이 은혜의 충만은 예수님으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를 닮아야한다, 예수의 마음을 본 받아야한다.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항상 아버지의 삶과 연합하여 사는 것처럼 대했고, 아버지의 삶에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어린아이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삶을 열어두어 아버지의 삶이 그 안을 흐르도록 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시여, 나의 아버지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이 십자가의 고뇌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그분의 사람이 되도록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의 성격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힘을 키운 후, 당신이 밤새도록 지키고, 먹이고, 힘을 주고, 피로에서 구해 주고, 자존심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면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던 것이 우리에게 분명해집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에 가깝게 움직여 앞으로 그분의 일부가 되게 하신다면, 그 결합이 가장 완전해지기 위해 그분과 우리 사이에 있는 분리가 될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삶과 우리 주님의 삶 사이에 있던 벽이 무너지는 것은, 그 무너짐을 통해 앞으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삶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된다면 그것 역시 우리에겐 그 얼마 큰 은혜가 될까요? 앞으로 우리는 생각하며 믿음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 생활를 얼마를 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를 질문하면서 내안에 예수님이 있다면 나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를 질문하며 충성된 예수님의 올바른 제자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5-26-2024(성령강림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우리를 위한 삼위일체(이사야 6:7-8)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찬송가 277장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나는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로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휴대전화가 많은 일을 하지만 몇 가지만 사용해도 저는 행복 합니다. 비행기가 무슨 과정으로 만들어 지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비행기가 얼마나 편리함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중력을 공부 했기에 높은 곳을 올 가기 위해 사다리를 사용해서 위에 올라가면 떠어지지 않기위해 붙잡는다 사실. 오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이러한 비슷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어떻게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각 위격이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실 수 있습니까? 삼위일체는 우리가 설명할 때 하나님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매 주일 예배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입니다. 또한 우리가 삼위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는 우리를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나 삼위일체 중 한 분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매우 다양한 대답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손자, 녀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푸시는 친절한 할아버지 같은 인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아들 예수는 세상에서 길 잃은 양을 위해 이곳 저곳 다니시면 복음을 전하셨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신 분으로 표현 할 것이고 성령를 설명하긴 좀 어려운가요? 지난 주에 우리가 들었던 성령이 우리에게 강림하여 주신 목적을 떠올리고 또한 예수님의 세례의 비둘기나 불의 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일체를 우리가 상상하고 설명과 이사야가 본 모습을 비교해 보시며 오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사야서 6장 1절 표현을 잠시 보면 그림이 나오죠? “나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여기에 그분의 모든 위엄과 영광을 지닌 하나님이 계십니다. 연약한 어린 아기나 온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을 통치하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그 옷이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이 깨끗한 양털 같고 그분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 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2절에서 하나님의 보좌 옆에 서 있는 천사들인 스랍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흔히 묘사되는 귀엽고 작은 그룹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설명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2.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더라.” 천사는 완벽한 창조물입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얼굴과 발을 가리고 그들의 거룩함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거룩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들은 샌달을 신은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에게 분명한 것은 그가 있는 곳은 아무 상관이 없고 분명히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속한 불경건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보호되어야 하며,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독했다고 확신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사람이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중 누구도 이사야와 자리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하나님을 볼 것을 알고 그날을 소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우리의 차이점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해 거룩하게되었지만 우리가 죽으면 거룩하게 될지? 안될지 모르는 가운데 소망 가운데 지금도 우리는 열심히 사명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압도적인 거룩함을 직면하기 위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부름을 받길을 원하는 성도도 있지만, 부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고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섬기는 교회들에게 말씀 들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눈을 피할 수도 없고 어둠 속에서 그분에게서 숨을 수도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계시고 있는지 확인도 않되지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만, “본인과 본인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이웃”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죄성”과 같은 거룩하지 않은 삼위일체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죄가 많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가운데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는 분이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스랍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떨어야 합니다. 너무나 거룩하셔서 천사들도 그분의 거룩하심을 기리기 위해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많은 우려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실망하고 화를 내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세례를 받고 선택받은 자로서 그분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그를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규례를 정하시면 그 규례를 우리가 바꿀수는 없으나, 그분은 하실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그분과 함께 먹은 장로들은 죽지 않았고, 이사야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6. “그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입에 손을 대며 말했습니다.
7.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보라, 이것이 이사야 입술에 닿았습니다. 네 죄가 제하여졌고 네 죄가 속하여졌느니라.
8. ” 이사야는 천사가 이사야의 죄와 부정함을 정결케 하기 위해 희생 제단에서 숯을 가져오는 것을 지켜봅니다. 죄가 용서받고 죄가 없어짐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모세, 다니엘, 요한, 바울은 경험한 후에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하시고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분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보고 싶나요? 우리는 그분께서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빈 무덤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본인의 살과 피로 우리을 만지시고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우리의 죄가 속죄된 곳이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제단에 불태워진 분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만지시고 여러분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분이 우리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셨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셨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영원하신 성령을 보내사 너희를 믿음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느니라. 말씀하시것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우리는 천사들의 노래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분의 영광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속죄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움츠러들기보다는 찬양 하십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거룩함을 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제쳐두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아들의 거룩함이 우리를 완전히 덮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참으로 거룩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성령께서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거듭거듭 전해 주셔서 우리가 죽음과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셨나요? 성경은 우리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충분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시고 우리가 천국의 노래로 모든 천군과 합류할 때까지 그 믿음 안에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느니라. 아멘
성령을 주신 목적 05-19-2024
요한복음14:16-17/ (참고)요한복음 14:26-27 찬송가 427장 (내가 매일 기쁘게)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대해서 병 고침을 위해서,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믿음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오늘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1. 우리에게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남’이란 사람이 다시 어머님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의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감히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신 제일 큰 목적은 바로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중생의 체험은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또한 거듭남의 특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진 보배로도 절대로 살 수 없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가 바라고 믿기로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체험을 경험하고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줄로 믿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에 아직까지 중생의 체험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고서 거듭남의 비밀을 깨우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던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것을 보고서 칼을 들고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다혈질적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매우 다열적인 성격에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변화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기록된 것처럼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이제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베드로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매를 보고서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성령을 보내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열매, 희락과 화평의 열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날마다 주렁주렁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3. 복음 전파로 사명 감당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처럼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사명 감당 하라고 성령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사명은 너무나 귀중한 사명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내는 선교에 참으로 열심인 한 교회가 있는데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보내는 선교란, 나 자신은 선교지로 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그곳으로 다른 사람을 보내어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물질로 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빌립보 4장 15-16절은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라고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보내는 선교를 잘 감당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서 비록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지로 후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복음을 증거하다가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싸움도 벌어졌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입어서 병자를 고치고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대결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오늘날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곳은 복음의 능력으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체험을 경험케 하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마지막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날로 날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이때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귀한 사명들을 더욱 더 충실히 감당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를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소서 또환 하나님의 뜻 성령 목적을 이루게 하사 우리가 거듬나는 삶을 살게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이루게 하옵기를 바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이름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05-12-2024
하나님의 보호받기 위하여 요한복음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바로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전쟁의 위험이 있고 질병의 위험이 있고 그의 예기치 않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적 부담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위험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만 할까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따르는 자가 누군가가 중요한 것아닌 불쌍히 여기시며 위험으로부터 돌아보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한 첫 조건이 함께 즉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말은 다시말해서 관계가 좋다 아니다로 결정됩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분을 영접했다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 했듯이 장소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롯 유다 예수님과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형식적인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과 동행 한다는 것이 주님으로 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 마음 가운데 즉 우리의 모든 것에 중심이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성도가 세상의 위험에서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7에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이 말씀과 시편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여 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에 그늘이 없도록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말과 행동을 할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2. 주님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항상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어느 분은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 같은지 큰게 외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8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구 요청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필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있을때 구하라고 야보고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내, 의심없이, 믿음으로 구하라(요청)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4: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 의미는 욕심, 욕망이, 악이 가득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치 안니한 것을 구할 때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로 약속한 것은 끝까지 인내로 구하여야 합니다. 에스겔 36:37 말씀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즉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고 약속 했을 지라도 너희들 내게 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난의 때에나, 육신이 병들었을 때에나,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께 요청을 하지만 평상시에도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8:20 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진정 주님의 보호를 받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과 항상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는 돕는다는 약속은 먼저가 해야할 일를 너희들이 했을 때 나는 ‘이 모든을 너희에게 더하하겠다’은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너희들이 해야할일를 먼저 한 뒤 나에게 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7,18 말씀에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은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이행함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나의 구원로 믿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의 보호가 필요 없는 성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이고 죄인된 자라면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순간순간 마다 필요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해야 하고, 주님께 적극적으로 보호를 기도로 요청해야 합니다. 또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감을 열심히 잘 감당함으로 주님이 보살펴 주시기에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8:1.2에 말씀 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 길 소망합니다. 아멘
04-28-2024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4-5) 찬송 / 491(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가 두 주전에 말씀 드렸던 것을 기억 하시는지요? 우리가 평강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바로 하나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관계’ 두 번째 말씀으로 “내 안에 거하라”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거하시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가 좋다라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증명 하실 수 있나요?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살면서 성도의 삶을 대부분 이렇게 말씀 하실겁니다. 1. 교회 출석 잘하고 2. 헌금 잘하고 3. 성경 열심히 읽고 4.교회 봉사 잘하고 5. 기도 잘(열심히) 하고 등… 있겠지요. 이것이 전부 일까요? 아니요 이러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하라’는 히브리어로 메노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핵심적인 단어로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 간에 연결되는 생명(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 바로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새 생명을 얻은 생명체임을 잊고 살아가면 안됩니다. 오늘도 ‘내안에 거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1. 거한다는 정의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거하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머무는 것은 믿음 이상의 것이 되지만, 머무는 것은 결코 진정한 믿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제거된 가지조차도 “그 안에” 있다고 말하며 최소한의 표면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통해 구원과 죄 사함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이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겠죠. 예수님과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진정한 믿음은 가지를 포도나무에 고정시는 것이고,우리는 그가 말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7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과 우리 안에 거하는 그분의 말씀을 연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킴으로써 예수님과 계속 관계를 유지합니다. 또한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 요한 1서 2:24에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참고로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딤후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유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한다는 것과,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0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31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은 유대인 무리에게“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계속해서 교제하며 충성을 다한다는 비유라말할 수 있으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는 것을 강조하고있습니다. 또한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계속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계속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결은 지속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물리적으로 함께 계셨지만 제자들로 부터 떠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떠나더라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 요한복음 14:15~17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4:23에서도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한다는 정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할 때 항상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우리안에 거하는 겁니다.
2. 포도나무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덧붙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연결하는 포도나무라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힘과 영양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수액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거한다의 증거가 바로 우리의 열매로 증거됩니다. 믿는자들 중에도 열매가 있고, 없고에 따라 비교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한다는 증거는 열매인데 “열매”가 성령의 열매 또는 의로운 삶(갈라디아서 5:22 ) 또는 복음을 나누는 결과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열매를 하나의 특정한 이해에만 국한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가 “열매”를 신자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과 성령의 모든 명백한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열매도 포함될 것이고, 삶에 맺히는 성령의 열매도 포함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열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에서 예수께서는 이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목적과 최종 목표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또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되돌리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명백해집니다. 모든 삶이 구원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십니다. 그의 통치와 그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계획에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고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할 때, 그분의 구속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두 번째는 또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신도들의 삶 속에서 경건한 성품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본질적으로 삶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포도나무에 거함으로써 변화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만이 하나님 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좋은 열매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는 증거임을 기억하고, 행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아멘
04-07-2024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우리에게 평강이(요한복음 20:19. 빌립보서 4:7)
요한복음 20:1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4:7 4.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께서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주는 평강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평강에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무엇일가요? 어느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평강은 관계다. 관계가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에 그 관계 속에 평강이 있고 없고 한다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믿음 생활하시면서 성경을 읽으면 여러분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아담 관계에 있어서는 에덴 동산에 분명히 평강이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로 인하여 평강은 다시말해 관계가 무너지므로 평강역시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며 근심 걱정 없이 평강이 마음 속에 항상 있던가요? 우리는 솔직한 마음으로 살고있나요? 아니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안에서는 갈등하고 자신과 싸우며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기본 심리 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근심, 걱정, 불안, 우울증, 공항장애, 욕심, 욕망 등 없을까요? 우리는 욕심이 있습니다. 좀더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하고, 내 자식을 좀더 좋은 것으로 키우길 원하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를 원하고, 좋은 학군에서 공부하길 원하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신의 중심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마음과 생각인지. 우리는 대부분 자가자신을 위함이 더 많았을 겁니다. 빌립보서 4:6-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평강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염려없이 기도와 간구로 기도가 되던가요? 저 역시 사역자로 들어 서기전 저 자신과 3~4년을 생각하고, 미국에와서 12년 후에 결정했습니다. 신학원 생활 1년차되던해 전도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면서 항상 걱정이 앞서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어린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있을까?하멱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니 그들에게서 배우고 나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역자길로 들어서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쓴 소리 보다는 단 소리만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이을 먹다보니 이제는 잘못된 부분을 알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잘못된 한 부분이 굳어졌기 때문이죠. 우리의 신앙도 같은 것 같습니다. 첫 만만이 잘못되니 자신의 신앙 생활만이 고집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것이 안되듯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가질 만한 사람이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강 할 수 있을까요?
1.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두려워 한 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 닥칠 상황에 위압감에 어찌해야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찾아 오셔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듣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바로 평강은 어둠에서 빛을 만날 때와 갇이 두렵고, 고통 속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쁨 가운데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회개한 후 평강이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공통점이 바로 누군가에 혹은 자기 스스로 잘못했을 때가 아닐까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행복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할 그곳 항상 하나님의 평강만이 있어야 할 곳에서 왜 두려워 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에 평강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고통, 두려움, 고난, 불안 등 속에서 살아졌습니다. 그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고,우린 예수님을 통해 회개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우리에게는 평강이 회복됩니다. 3.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평강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누군가와 함께 할때 더 힘이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가 생각을 지켜지나요? 또한 그 속에 평강이 있던가요? 아니요 어느 정도 정상이되면 각자 마음과 생각이 달라짐이, 배신과 경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을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우리는 예수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항상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부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으로 항상 평강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죄사함 받게 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평강이 우리에게
예레미야 31:31-34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산봉우리 중 하나에서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새 언약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며 예레미야의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증하며 또한 이 말씀을 준수할 때 약속된 축복이 있다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렇게 귀한 언약 율법이 파기되었으며 주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언급하고 있는 새언약이 옛 언약이 지켜오던 율법과 별개의 것이 아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나 형식적에서 옛 언약의 차이점이 없으며, 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다른 점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구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과 죄 많은 인간과 맺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만 삶과 은혜가 성취됨을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옛 언약의 조건에 따라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으로 인해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따라 생활하신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문제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31장의 문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고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31: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친히 새 언약 아래 구원자를 마련하심으로 이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죄 없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약속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이 구절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새 언약은 문자 그대로 새 언약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고린도전서 11:25; 고린도후서 3:6ff; 히브리서 8:8-9:28; 10: 16; 로마서 11:25-26).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이 이제 제정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구원 계획을 설명합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순종할 수 있도록 내적 본성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속사람의 “원하는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33절). 그분은 그들 안에,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율법”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의지를 지배할 것입니다. 모세의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출애굽기 31:18; 34:28-29; 신명기 4:13; 5:22). 필요한 것은 타락하고 죄 많은 사람의 안팎의 변화였습니다. 인간의 죄 많고 변질 된 본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모세의 언약이다(출애굽기 19:1-24:11).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주권자 하나님이시니라. 언약의 조건은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순종하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은 징벌을 가져올 것입니다.
2. 이스라엘과 맺은 새 계약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 곧 유대 민족 전체와 맺은 것입니다(31절).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1장).
이 구절들은 나라 전체가 메시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소수만이 아닌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회복을 봅니다(이사야 5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 31:33 ;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백성을 포용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강조합니다. 구원받을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일시적으로 굳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영원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500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34절에서는 각 사람이 “여호와를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안다라는 단어는 관찰을 통해 직접적으로 정확한 개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간접 지식이 아니라 야훼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이는 마음, 감정 및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서로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얻는 지식을 나타냅니다.
3. 모든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는 언약입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마지막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예루살렘 감옥 너머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의 날까지 보았습니다. 보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적 감각이 있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레미야 31:33-34은 참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약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중생하여 성령 안에서 교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급격한 변화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이 신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즉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고 걷고 존재합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고 정착하시며 자신을 집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새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 율법의 요구를 남김없이 다 충족시켰더라면 규정된 대로 복을 얻고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신명기28:1-14) 그 누구도 구약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었으며, 결국 엣 언약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구원 얻을 수 없는,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에서 이루지 못했던 죄인의 구원을 예수의 피로 완성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을 전하여 새 언약이 죄인을 구원하는 새 언약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8장 6-7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흠이 없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만일 그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두번째 잘못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율법 주의적인 법과 규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임재를 적용함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에 다음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거리가 있다는 척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의 죄악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것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걷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그분과의 교제를 유지할 때 우리는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1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아름다운 특권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새 언약은 각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을 통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지식은 도덕적 더러움을 버림으로써 얻게 됨이요, 그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될 것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새 언약의 적용을 받아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분 자신을 계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이 실제로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너무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가가서 만날 수 있을 때가 있습니까? 그분께서 알려진 모든 죄를 마음에서 깨끗이 하시고 당신이 그분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 그분은 당신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그분 자신을 당신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언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 언약에 참예한 우리 성도들을 우리 안에 게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표하시길 바랍니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 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4:20-21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삶을 보이시나요? 나와 여러분의 삶에서 진실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느끼시나요?
아브라함에 대해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야기 내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전체 요약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 졌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에 이르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문 1.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까?
질문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우리의구원은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내용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행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화해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일회성 신뢰가 아니라 그로부터 점점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입니다.
로마서 4:20-21은 믿음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 삶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신앙(믿음 없는) 삶으로부터 지켜주소서.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약속과 의심 가운데에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굳게 서게 도와주세요. 또한 우리가 하나님 영의 지도력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방식과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어둠 가운데, 슬픔 가운데, 그의 슬픔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불가능을 생각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고려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낙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기
낙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약속하신 것의 성실성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상황을 볼때에만 옵니다.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질 때 어떠한 고백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은 훌륭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당신이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과 같이 우리가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녀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셔서 그들이 낙담에 면역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며 우리는 때때로 끈질긴 기도로 그 분께로 향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완성 자 이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라 생각합니다. 더더욱 2 절 말씀처럼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증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 생활할 수 있고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증거,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전당이다. 나열된 각 사람은 전투기였습니다. 그들은 낙담이 그들의 믿음을 훔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힘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 힘으로 우리 상황을 바뀌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 안에 누가 계신가요?
우리는 각자 영혼의 미래를 놓고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지자. 하나님을 찾고, 기도로 새 힘을 얻고, 다시는 낙담의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우리가 때론 무너지고, 의심할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어떤 한 젊은 변호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서 칼과 면도칼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우울증 기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는 우울증 회복하여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확신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준 것이라 믿고 확신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실 것임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게해주시기를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서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오늘 능히 이루실 수 있음을 확신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는 기초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반석이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대한 우리의 신뢰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친숙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숙하지 아니한데 어찌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낙심치 않고, 믿음을 견고케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2-04-2024
주를 찾나이다(마가복음 1:36-37)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레미아 29:13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전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진심으로, 진실로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찾는다는 말씀은 같으나 의미는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아에 찾는다는 의미는 너희들이 나를 만나고자 하면 진심, 전심 아무 조건 없는 만남을 원하는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 만나겠다는 의미이고 오늘 본문의 찾다 의미는 분명히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병이 낳기 위함이고 예수님의 이적 기적을 보기 위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찾을 때 마다 조건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오늘은 마가복음 1장 36-37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이 스쳐지나 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묵상하시면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나는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나 스스로 질문을 해봅니다.
1. 무엇을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가? 2. 예수님을 찾았나, 아니면 아직도 찾고 있나? 3. 나는 무엇을 찾고 있나? 4. 난 무엇을 얻었나? 5.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무엇을 했나?
오늘 저도, 여러분도 오늘 말씀 중심에 자신을 세워 보시고 답을 함께 찾아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1장 전체 내용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뒤에 오시는 예수를 예비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이후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이 성령이 입재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이후 광야에서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시험을 받은 이후 갈릴리에 돌아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고로 복음 전도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변을 지나시면 제자를 부르시는데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고 잠시 더가시여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4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안식일에 회당을 가셔서 복음 전하는 말씀에는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과 다르다고 기록합니다. 21-34까지 예수님의 기적,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이 순종하고, 귀신이 떠나고, 열병에 붙잡혀 있던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는 이적이 사실로 온 동네에 펴져서 알려졌을 때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느 부흥회서 병이 낳고,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시각으로 부흥 강사는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 분의 부흥회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고마는 경우를 나는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찾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찾는 방법이 잘 못되어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하면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찾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36절에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이 절을 보면 제자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떠나기 싫은 모습이 보이고, 제자들의 행동과 생각이 현명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보시기에 부정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를 따르다’는 의미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의 표현을 적대적인 인물을 따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 병이 낳고 하는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보기를 원하여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주를 찾나이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표현은 개인 적인 욕구가 폭함 된 것입니다. 마가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요한복음 6: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른 생각 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리며 빨리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혹시 우리 마음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거나,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찾으라 하시는 말씀 의미를 우리는 잘 못 알고 주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 저는 오늘도 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예수를 무엇 때문에 찾을까?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마태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 7:-8“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신앙인으로 무엇을 구하였고, 무엇을 찾았으며, 어디를 두드렸을까요?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공허했으며, 때로는 우리는 기쁨이 없었으며, 찾기보다는 구하는 것을 많이 했으며 두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 그러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깊은 암흑 가운데에서 길을 못 찾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의 기도 가운데 나를 찾아 주세요! 하며 하나님께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은 지금도 끝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으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나를 부르고 계실까요?
얼마전 한 뉴스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넓은 옥수수 밭에서 일어나 아이의 실종 사건이었습니다. 옥수수 밭에 들어간 아이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점점 불안해가기 시작했고 그 넓은 옥수수 밭에서 지쳐 울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했고 많은 사람들과 경찰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아이를 찾지 못하고 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포기할 때쯤 드론에 적외선 카메라를 장착하여 수색을 시작할 때 적외선 카메라에 물체가 잡혀 그곳으로 달려가 그 아이를 찾았다 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 생활을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빛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만족이 없고 무기력하고, 나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못 찾는다면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쁨과 기도 그리고 감사가 끝임없이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서 성경 말씀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진정과 신실 하므로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 시길 주님의 소망합니다.
성만찬 예식 성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01-14-2024(주일)
“나를 좇으라”(요한복음 1:43)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자의 성육신 (1:1-18)
2. 성자 예수의 표적과 선언(1:19-12:50)
3. 성자 예수의 교훈(13:1-17:26)
4. 성자 예수의 고난과 부활 (18:1-21:25)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신약 성경 중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젊은 신도들에게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기록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서 자신이 누구 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요,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요, 부활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참 포도나무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성이셨고 그것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 누구의 아들을 고치셨으며, 다리 저는 사람을 고치셨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고, 물 위를 걸으시고, 맹인을 보게 하시고,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넷째 날. 이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손끝에 힘을 갖고 계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그의 창조물 사이를 거닐며 그의 창조물을 도우셨고, 슬프게도 그 당시와 오늘날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피곤 하셨고, 그분의 영혼은 우리를 향하여 안타까워하셨으며, 그분은 영으로 신음하셨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밝힙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것 무엇을 혹은 누구를 따르셨고, 좇으셨나요? 신앙인으로서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며, 우리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따르라는 요청을 받거나 명령을 받았을 때, 이는 우리가 따르도록 요청 받았다면 바람직한 경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다음 목표를 달성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가고 있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이 멈춤이 쉬울 수도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이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레미콘안에 콘크리트가 굳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리고 공사장까지 신속하게 도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작업이 끝나서 물로 레미콘 안에 있는 시멘트를 물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보게 뵙니다. 새로운 시멘트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로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달성하기 가장 쉬운 모습은 아닙니다. 예) 지하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기차는 철길을 따라 달리 수는 있어도 자동차처럼 돌리는 가나 자유롭게 유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약간의 전환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물론 기차는 역방향으로 느린 속도로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만 이는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가끔 뒤로 걸어보세요. 우리가 천천히 발을 섞고 직선적이고 장애물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전할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면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좇는 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길로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셋 번째, 일단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때 사탄이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위해 길에 놓아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문은 좁고 길이 넓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예수님을 좇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성경의 이 부분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 달, 다음 주, 내일, 심지어 한 시간 정도 후에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측을 해보고 그것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부분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너희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1 그들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니라. 신문에 광고를 내고 배와 고기잡이 사업을 먼저 팔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고 대신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읽습니다. 사도행전 8장과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에 26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남쪽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이것은 사막 길이다.) 27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이 주님의 명령을 맡은 천사를 따르는 데 지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팔로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시작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4~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 부르시고 말씀하길 어리다는 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스스로 같은 변명을 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사역의 기회를 놓친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길, 즉 거룩함과 의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우리가 오랫동안 걸어온 알려진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보다 익숙한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더 쉬워졌습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시작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느낌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에 반대되는 향하는 것에 중독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정말 어려운 단계가 됩니다. 우리 삶에서 중독을 제거했을 때, 우리는 채워야 할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 공허함을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우지 못하면 사탄이 와서 다른 것으로 채울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돌아서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전환점을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을 읽습니다(3-6절). 3. 그가 여행하는 중에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더라. 4. 그가 땅에 엎드러지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니 5.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런 다음 10-20절로 넘어가서 사울이 안나니아를 만나고 그로 인해 시력을 되찾게 된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손에 의한 기적적인 변화입니다. 이전 삶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는 행위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 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어 있는 영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영원히 안식을 누리며 예배할
영혼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기대할 것이 거의 없거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서 가장 큰 보물을 발밑에 놓이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은 사람에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전 생활 방식에서 등을 돌린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부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나쁜 일을 그만두고 좋은 일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을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믿음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와 다른 믿음의 소유자들과 한번 그리스도를 선택했다고 그것은 영원히 확정하고 일단 고백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계속 죄를 짓고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믿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째 편지 5장 20 읽습니다.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니 이 원칙을 편견 없이 지키고 아무 일에든지 차별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멈추고 돌아서면 이제 진행할 시간이 됩니다. 이제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볼 수 있고 여행하기 훨씬 더 쉬워 보이는 길을 설정하십니다. 그 길에는 작은 보상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길에서만 마지막 상, 즉 천국에서의 영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길에 많은 출구를 마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선택한 새로운 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제 그 출구, 지름길처럼 보이는 우회로는 파멸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다, 따른다는 의미는 헬라어로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어로 1. 따르다 2. 본받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새벽 예배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예수님을 무엇을 본받는 삶 속에 어떠한 그리스도인 될 것인가를 매일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12-17-2023(주일)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세 번째 촛불의 의미인 기쁨(Rejoyce) 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로 정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앞으로 한 주로 다가오니 기쁘십니까? 아마도 지금 어쩌면 누군가는 택배로 선물을 보내신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택배를 기다리고 계실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척 힘들고 고심 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렘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까지 며칠 남았는지에 대한 업데이트가 매일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노래에 우리는 신나서 한 동안 마음이 설레 이겠지요? 우리는 매년 돌아오는 이 날이 기다려지고 매순간 들 떠있는 마음으로 시즌을 보냅니다. 크리스마스는 들 떠있는 마음이 아닌 차분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말씀의 중심을 보면 “항상 기뻐하되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므로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기다림 대해 생각할 때 항상 기쁨이 함께하십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하나는 정말 기뻐하는 모습과 또 하나는 불안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 한가요? 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해동안을 잘 준비한 사람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불안 사람은 준비가 안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아침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대림절 준비에 기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앞으로 다가올 며칠과 몇 주가 어떻게 스트레스가 아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에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영원에 초점을 맞춘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후에 여러분이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바울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들에 대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짧은 편지 전반에 걸쳐 지속되는 주제입니다. 여기 4장에서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전히 사물에 대해 즐겁고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위한 몇 가지 장기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상황이 그들에게 정말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한번 말 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생에서 기쁨을 누리는 관점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걱정할 이유와 기뻐할 이유를 모두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 든 우려되는 그들의 죄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주님은 분명히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오실 구주를 가리켰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설교하는 동안 요한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요한은 오실 구주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의 불을 가져오실 것과 그분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셔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 기뻐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동기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에게 많은 세부적인 지시를 줍니다. 그분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고 시작하십니다. 관용이라는 단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관용이란?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 성격의 친절 성 등을 의합니다. 또한 관용은 기쁨의 원인이며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다르지만 포용함”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인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혹은 실제로는 그 어떤 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면, 한 걸음 물러서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온유함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가? 아니면 나는 성급한 성격인가? 나의 인내심 부족인가? 내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무능력인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화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내 자녀, 배우자, 부모,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 더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그 모임에서 말하는 방식이나 내가 길을 운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가게의 점원이나 선출된 대표자, 교회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갑자기 내가 온화하지 못한 모습이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나는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화를 내거나 조급함이나 이기심을 다시 품게 되었습니다. 나는 온화하고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나의 기쁨이 내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너는 용서받았어.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온유함을 우선시하여 그 용서를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쁨은 만족으로 인한 자신감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항상 훌륭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거나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직면하기 힘든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부족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은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멈추어 있는 것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훨씬 더 생산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간구에 의한 바울의 표현은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갑니다. 즐거운 삶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마음에는 더 힘들고 더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매우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특별한 경우들을 인정합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 씨름할 때, 매우 구체적인 요청을 하나님께 가져오십시오.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인도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위해 기도하고, 온유할 수 있는 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가장 어려운 일들을 그분께 가져갈 때,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가 불타고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삶의 다른 부분은 아마도 좋아지고 있거나 적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식량이 어디서 나오는지 항상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이 삶이 지금 우리에게 거대한 용광로의 불길일지라도,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이자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거나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실 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여전히 재림절 준비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렵다고 느끼셨나요?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은 죄의 본성을 갖고 이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더 자주, 나는 온화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내가 아내, 자녀, 회중, 친구, 지역 사회에 대한 나의 실패에 대해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았듯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 안에서 찾으시 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편지의 이 짧은 부분을 결론짓는 방식이며, 사실 바울이 우리 회중에게 대부분의 설교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아마도 이 단어의 의미에 약간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감각해지지 마십시오. 신선한 눈으로 보고, 신선한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 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창조주와 전쟁이 아니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를 위해 죄와 사망과 지옥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옵니다. 이 평화는 괴로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평안은 우리가 시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안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살고 죽으셨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현실이며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삶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혼자 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때와 괴로운 때를 거치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 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삶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그분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설명한 모든 이유로 인해 무서운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섭지 않은 수많은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구세주를 통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12-03-2023(주일)
“소망”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 절기의 색상은 보라색과 청색이나 대부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보라색은 따뜻하면서 침착함 가지며 희망과 동경의 색입니다. 절기동안 사용하는 보라색은 왕의 존엄, 참회, 금식을 상징합니다.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의 다섯개의 촛불이 있는데 첫째 주의 촛불은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냅니다. 세상에 어둠 속에 살아가 자들에게 빛으로 소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주일 촛불은 회개의 촛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복음의 전파에 방해되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의 의미의 촛불입니다. 이 주간에는 특별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셋째 주일 촛불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도시는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만 그 뒤에 감춰진 상처받고, 배고프고, 외로움에 쓸쓸히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고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들입니다.
넷째 주일 촛불은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과 만남과 화해를 의미로 촛불을 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했으며,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촛불의 의미를 되새기며 복음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개의 촛불 중 가운데 촛불은 25일 아기 예수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는 의미로 촛불을 켜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것으로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며 새롭게 출발합니다.
오늘 저는 대림절 첫 째를 맞이하여 소망이라는 주제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며 대림절 첫 주일을 맞이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중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제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조금 전에 대림절 촛불 의미인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소망의 촛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로마서 5장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소망의 중요성을 깨닫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소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함께 자세히 나누길 원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에도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과 소망을 사랑과 함께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소망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한때 믿음을 어둠 속의 도약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을 부정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저 위에 우리를 잡아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며 심연 속으로 필사적으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이 “실체”라고 말합니다. 실체인 어떤 것이 곧 어떤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ὑπόστασις )는 기초 또는 기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기초 위에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고전 3:11). 이 기초는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유대인들이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닙니다. 요한은 사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말합니다(요일 1:1). 이것이 바로 대림절이 크리스마스가 아닌 이유이다. 우리는 구유에 누울 아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기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 마음에 소망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사시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시며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40일 동안 많은 증인에게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40일 만에 아버지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분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을 보고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이 사건들의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눈먼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말할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무엇을 드릴지 물어볼 수 있는 인간 증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느 정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완전히 눈먼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것을 바울처럼 인정합니다”(고전 13:12). 그러나 소망은 우리가 지금 희미하게 보는 것을 대면하여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어두운 밤의 등불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또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아침에 해가 떠오를 것과 같음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어둠 속의 도약이지만 맹목적인 도약은 아닙니다.
(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 한다면 어떻게 생각 할까요? “나는 믿음의 도약을 하고 미시시피 강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이 말은 모두가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 너머로 더 멀리 갈 수 있을까요? 그 넓은 강을 어떻게 뛸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은 그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소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완전한 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소리 질러 그분의 대답을 듣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분의 완전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행글라이더가 행글라이딩 복장을 입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 사람은 높은 곳에서 점프하여 반대편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글라이더와 바람,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단순히 뛰어내리는 것이고 성공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날개이자 과업을 위한 지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인 능력에 관해서 본인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와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그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반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르라 고 손짓하십니다. 물이 깊고 이 세상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날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름 아닌 예수의 피와 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맹목적인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이 어둠 속에 빛이 비치었음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 1:5) 어둠은 이 빛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날, 그분의 재림의 날까지 소망이 우리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서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이 낮에는 얼마나 희미하게 보이는가! 보이지 않았던 믿음의 면이 보일 것입니다. 믿음은 신실함이 될 것이며 신실함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림절에 우리는 “복된 소망”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소망은 가라앉는 모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과학자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영적으로 눈먼 과학자들에게 있습니다. 과학의 빛은 순수한 어둠이다. 하나님이 과학의 창조자인 한 과학은 참이지만, 과학자들이 과연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모든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사실은 창조자의 목적에 의해 다른 모든 사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는가? 그러므로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맹목적인 희망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림절의 약속을 가져올 수 없다면 정치인들이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철학자와 현자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전 1:20)고 말합니다.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소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인류는 자신들이 견고한 기반 위에 있으며 별까지 바벨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류가 이미 탁한 강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에서 어둠 속으로 도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는 일에 동참하도록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마태 5:14) 우리는 사람들이 맹목적인 희망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희망은 어둠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은 언젠가 새로운 현실의 빛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입니다.
11 - 12 - 2023(주일) 예배의 있어 필요한 것들(히브리서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배에 출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지는 안는지? 코로나 이후 코로나 전염되듯 나는 예배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갖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여러가지 방법 중 한 가지 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안는지?
토저(A.Tozer)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네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나? “예배의 가장 깊은 수준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련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유혹이 있을 때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멀어 보일 때에도 그분 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무엇을 얻기를 소망합니까? 우리 얻기 위한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회복을 하기를 원함, 은혜가 충만하기를 원 함이고,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들을 성취하기위해서는 우리 예배에 성경적 패턴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예배에 필요한 몇 가지를 함께 하려합니다.
1. 강력한 기도.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3. 십일조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5. 개인적인 간증.
1. 강력한 기도.
구약의 성전에서는 기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새 성전을 봉헌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성전을 당신의 영광으로 채우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과 백성에게 말씀하여 이르시 길 역대하 7:15-16 “15.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이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 노라 내 눈과 내 마음은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신약에 와서는 교회 란? 예배의 집, 설교의 집, 친교의 집, 봉사의 집, 찬양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를 통해 누구를 만나야 하나? 바로 주님을 만나고 성령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1990년대 후반 영국 왓퍼드(Watford)곳에 Matthew Redma (곡을 쓰고, 찬양을 리더)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는 수준 높은 찬양 밴드와 예배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회중이 예배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일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Matthew에게 하나님께 헌금으로 무엇을 가져오시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Matthew Redman은 그 질문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진심 어린 기도와 감동의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Matt(매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찬양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벗겨진체 단순히 마음을 축복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가져오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나는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관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만든 일로 인해 죄송합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음악에 대한 최초의 성서적 언급은 창세기 4장 2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멕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아다의 아들 유발은 수금과 피리를 연주하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해 읽습니다. 요한계시록 15:2-4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형태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남성, 여성, 어린이의 예를 봅니다. 성령과 음악. 사도 바울은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사이를 직접 연결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편, 찬송가, 신령한 노래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드리는 예배 음악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음악과 노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그분께 노래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역대상 16:2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 할찌어다.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요한은 구속받은 자만이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예배에서의 음악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계, 헌신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감사, 찬양,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3. 십일조
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영어를 보면 worth(가치) + ship(운반하다) = Worship(경배, 예배) 가치라는 단어와 운반하는 단어가 합쳐 만든 단어입니다. 즉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리는 것 중 하나님은 헌물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십일조 말씀입니다. 우리가 꼭 축복 받기위한 수단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소중한 것 중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 100%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시편 50:10-12 말씀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 말라기 3:8–11에서 말씀합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예수님 역시 십일조를 권장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특권입니다. 고린도후서 9:6-8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위에 말씀을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1. 우리는 우리가 드린 만큼 축복을 받습니다. 2. 우리는 억지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받아먹어야 할까요? 예레미야 15:16에서 답을 알려쥡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앞으로 우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먹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에는 항상 성경이 포함되었습니다. 느헤미야 8:5-6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설교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하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면하라. 그들이 건전한 교훈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영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14 “이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의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복음 4:18NKJV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배에는 항상 경전을 가르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많은 교회들이 제자도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설교를 듣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얻어먹어 야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행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개인적인 간증
지금까지 믿음 생활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주변 이웃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살아가고 있나요? 이제껏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은혜의 간증이 있나요? 우리가 은혜가 없고, 간증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슬픔 믿음 생활을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요한계시록 12:11에 “또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말씀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간증은 회중 참여의 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간증이 없다면 교회 예배에 형식적 의식으로 생각하고 영혼이 없는 하나의 의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그런 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간증은 예배의 귀중한 부분이며 믿음을 키워 줍니다. 교회의 모든 일과 우리의 삶이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자가 세워지고 충성된 주님의 자녀로서, 충성된 제자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간증하며 믿음 생활하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10-22-2023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행위(살로니가전서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 갔는 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 최고의 교회에 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사도들을 본받고 무엇보다도 주 예수를 본받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지역의 모든 믿는 이들의 모델이 되는 모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내 이웃의 모범이 되어갔는지, 되고 있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 모든 믿는 자의 모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받고 싶은 칭찬 아닐까요?
어떻게 이런 소문을 듣고 살아갈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느니라”(살전 1:9, 10). 이것은 매우 평범한 설교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둘째,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셋째,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라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서로 상반된 것입니다. 우상은 죽었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상은 거짓이고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우상은 많고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우상은 눈에 보입니다.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돌아와서는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우상 숭배는 신과 여신들의 만신을 숭배하는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공통 종교였으며, 그들의 최고의 신 제우스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올림푸스 산에서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그들의 사회 구조에 있었지만, 그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러분이 가족의 종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이 그들과 그들의 사회와 전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믿으며 부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교회에 속한 많은 헬라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우상을 거부하는 그들의 급진적인 개종은 빠르게 전파될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 우상들은 얼마나 강력한가? 선교사들은 우상이 원시 민족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부족의 전통 우상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 뒤에 숨어 있는 영들을 불쾌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으며, 영이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 이방인뿐만 아니라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도 역시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 외에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며, 사람을 그 지배하에 가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희곡에 등장하는 사람을 자신의 창조주를 숭배하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이를 좀 더 깔끔하게 표현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완전히 미신적인 것이든 현대의 세련된 우상이든 어떤 우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영광스럽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의 경험을 활용했습니다. 그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했고 그의 청중 중 일부는 마음속에 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들이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의미의 믿음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 즉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으로” 믿었습니다(행 17:3-4).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몇 가지 사실(종교 역사의 몇가지 날짜와 사건)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훈련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과정을 설명할 때 그들이 돌이켰다 라는 행위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우상의 마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깨졌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우월한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바울 자신도 목숨을 걸고 재판을 받을 때 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판사에게 자신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를 하나님께로”(사도행전 26:18) 경험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종에는 충성의 급진적인 이전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과 능력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은 실제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버리고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섬겨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사랑, 애정, 경의로 잘못되어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회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바울은 봉사하다 라는 다른 행동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닌,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들의 삶은 이제 다른 주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모르게 사탄을 섬겼지만 이제는 우회전하여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그의 위대한 교리 부분을 마친 후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면서 요약을 시작했습니다.
1. 이것이 귀하의 합리적인 서비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기대되는 표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려라!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제일 좋은 것을 추구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할까요? 우리 모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일가요? 아니면 자신이 쓰다 남은 재물일까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봉사에 있어 천박함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서비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 재능, 소유물 등을 그분의 청지기로서 사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섬김이 “산 제사” 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나, 그 때에도 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다스려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서비스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각자의 은사와 재능, 자원에 따라 수행해야 할 다양한 작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아시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봉사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종이었지만 복음을 통해 두 번째 해방, 즉 완전한 자유인 하나님을 섬기는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찬송 중 조지 매더슨(George Matheson)이 쓴 곡에 “Make me a captive, Lord” (나를 포로로 삼아 주시면)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 시길 바랍니다.
기다려라
세 번째 전환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당시 이교도는 자신이 죽은 후 스틱스 강을 건너 자신의 선함과 신의 은총에 따라 좋은 미래를 누릴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지만 확실성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확실하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일의 교리인 종말론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서 그들이 확실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 거하다, 머무르다, 기다리 다라는 단어의 강화된 형태이며 “미래의 사건에 관해 기대하면서 제자리 또는 상태에 머무르다 “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내와 신뢰의 개념을 추가하여 올 것이 알려지거나 예견된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아닌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자라. 그는 하늘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분은 다가올 진노의 위험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을 겁니다.
사도가 분명히 활동적인 “섬김”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과 연결시키는 것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개종자들에게 이 둘이 함께 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더라도,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보다 더 나은 세상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구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자주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통치의 최종 승리를 확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세상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한가롭게 기다릴 권리가 있을까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동안 일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낮에 오시는지 밤에 오시는지 그 누구도 모르며,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의 의미는 경고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언제 올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생애에 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달력에서 다음으로 큰 사건은 큰 영광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개종자들에게 깨닫도록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준비 속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삶의 가치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두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동일한 삶의 헌신하는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살자.
2.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분별하며 믿음 생활하자. 이 두 가지 우리의 믿음에 있어 본이 되는 모범적 그리스도인 되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0-01-2023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7:4-7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7장의 중심 내용은 1.르비딤에서 일어난 일 2.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오늘은 17장 전반부에 나오는 르비딤에서 일어난일 중 모세가 행한 일과 반석에 흐르는 물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물은 인간에게 없어는 안되는 필요한 물질입니다. 인간의 몸은 약 60-70%가 물입니다. 인체 구성은 산소가 25%, 탄소가 9.5%, 수소가 6.3%, 질소가 1.4%, 칼슘이 0.2%, 인이 0.2%, 칼륨이 0.07%로 총 42.67%구성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중요하듯 모세가 광야 생활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배고프 다하여 만나로 메추라기 로 다 해결해주니 이제는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리고 모세를 향하여 목이 마르니 물 달라고 겁박까지 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행한 행동과 말을 잘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거의 이성을 잃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닌 동물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좋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의 우리에게 도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의 물질적 필요와 주님의 물질적 축복을 살펴보고 그에 근거하여 판단하려는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이 보기에 성공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성경적 경건의 성격에 전적으로 반대된다는 점을 여러분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가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또한 물질적 축복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구원주요, 영적 축복자로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이들에게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의 번영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 때문이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올 때까지 그들은 꽤 오랫동안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을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공급을 통해 광야 생활을 함께하셨습니다. 그들의 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처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 그들이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자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번 시련은 음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없는 중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걸어본 적이 있다면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르비딤에 물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다시 하나님을 의심하고 모세를 불신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쟁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모세야, 당신은 우리를 돌보는 임무에 실패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신을 고소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저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저 또한 리더에게 불만을 표출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생각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고 리더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모세는 리더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달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그들의 불평은 더욱 악했습 다. “이것이 너희가 우리를 목말라 죽게 하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것이냐?”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세상적인 위로를 즉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계신 주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그들을 보호해 주시거나, 적어도 빨리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통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 우리가 하늘에서만 누리게 될 영광을 요구하는 것이며, 또 다른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신 태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은 고난의 삶이지만 천국에서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인적인 고통을 피하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발생한 문제를 이해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발생한 이유 보다는 먼저 결과를 놓고 분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대하신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불평에 실제로 무엇이 달려 있는지를 인식했을 때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왜 나에게 불평합니까? 왜 주님을 시험합니까?”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은 모세를 통 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리더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일종의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장로들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성경 말씀을 사랑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가 개입하여 그들을 비난한다면 말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읽는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까지 자기 백성을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혹시 예전에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해본적이 있을까요? 모세는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모세는 한 행동을 보면 문제 해결책은 기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 4절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문제 이해 방법은 바로 기도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모세는 그의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고난을 당했고, 그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의심스러울 때 기도로 그분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의심한 죄를 고백하고 그 약속이 새롭게 여러분에게 스며들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가운데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붙드시며 기도 생활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로운 해결책을 찾자. 5절과 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말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하라고 하신 일은 그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분은 이 화난 군중에게서 숨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에게 쏠릴 것임을 하나님은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세에게 향한 마음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모세에게 장로들 중 몇몇이 그와 동행해야 하라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공정한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가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일강을 강타한 그 지팡이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지팡이는 또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면서 지팡이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심판의 지팡이로 기억해 야합니다. 이 본문에서 백성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쳐서 심판하라고 말씀하실 것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백성들 옆을 지나가야 합니다. 심판은 그들을 지나쳐 버립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서 너희 앞에 서리라”(6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의 중심이므로 이야기에 매우 중요합니다(라틴어 십자가에서 유래).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22:23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 야곱의 모든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를 경외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분명히 자신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반역적인 백성에게 실제로 어떻게 물을 공급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이 서 계신 반석을 치면 거기서 물이 나와서 백성의 목마름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심판하시던 바로 그 지팡이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앞에 서 계신 반석을 치고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서셨습니다. 심판의 형벌은 그의 백성이 아니라 그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정죄를 담당하십니다!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을 신명기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광스러운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르비딤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마련하실 것이다”와 같은 이름으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시험한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므리바는 ‘비난하다’라는 뜻으로 ‘다툼’을 의미합니다. 즉 “시험하고” “다투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즉 그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자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음식과 음료보다 훨씬 더 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게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망각할 때 우리 일상의 모습이 일생은 맛사와 므리바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반석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속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은 고전 10:4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백성이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의 물을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 호렙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서 있는 반석을 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육신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의 범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듯이, 이사야 53:5에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호렙에서는 사람들이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9:28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수를 공급하시기 위해 목마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아닌가?”라는 질문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교회와 우리 삶에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형벌을 받아야 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이는 우리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하나님께 매를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의심스러울 때 디도서 2:13에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생에서 사막을 통과할 때,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09-10-2023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하나?” 마태복음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회중으로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오늘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했나? 여러분은 어떠세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해보신 분 있나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으로 확신을 같기 위한 오늘의 말씀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가요? 그러나 때로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일하느라
바빴다면 예수님이 그토록 가까이 계시는 것이 그리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 자신이 불안하다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편리한 하나님, 우리의 의제와 우선순위를 승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가 하나님을 통제하려 고하고, 우리는 가끔은 기적을 맡기어 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할 때도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이 깊다 하시는 분들이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 보다 못한 신앙인의 모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 하신 가요?
우리가 주일 예배 모임, 친교 시간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돈을 어떻게 쓸지, 누구를 환영할지 결정할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둘러보며 말해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고민할 때,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으로 더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일상적인 삶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항상 선하고 친절하며 사랑이 많고 누구도 험담하거나 소문을 퍼뜨리거나 어떤 것에 동의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입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순진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위원회에서 봉사하거나 교회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로 구성된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고대 세계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우리는 대립, 불일치, 상호 책임을 다루는 데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 공정하고 건설적으로 싸우는 방법, 건강한 공동체에서 함께 지내는 방법을 계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우리의 죄와 그 결과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지침을 제공합니다. David Lose 목사가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는데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공동체는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고 우리가 관련되면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즉, 상대방의 뒤에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성숙한 어른처럼 직접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저는 이 방법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추천합니다.
경전의 지혜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고함, 중상, 험담, 서로 모욕을 통해 갈등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해결과 화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 뜻대로 고집하여 부활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일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그 사람을 파문하거나 추방하거나 피하라는 지시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상식처럼 보이거나, 혹은 잠시 동안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세리, 창녀, 기타 외부인들과 자주 교류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신실하게 해석하는데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멀리 하기는 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대할 때 사랑으로 손을 내밀기를 결코 멈추지 말고, 깨어진 것을 회복시켜 줄 은혜를 갈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문맥이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이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홉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므로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 구절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올바르게 들었는지 확인합니다. “주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진정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이고 때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 살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친교와 임재를 실제로 경험할 때 지상 천국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어려울 때라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통해 형성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성공회 사제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유에서도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두 개의 머리가 하나보다 낫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서로가 필요하며, 그들이 한 가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키기 위해 필요합니다.”
“가족이 올바르게 일할 때 가족은 공유하는 방법, 함께 일하는 방법, 서로 돌보는 방법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마치 항아리 속의 돌멩이를 굴리듯이 우리를 서로 비비게 함으로써 우리의 거친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원하는 것 중 일부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주고받는 것을 배우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제 우리 중 일부는 가족 내에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건강한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람보다 규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 중 일부는 좋은 말을 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배우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배우겠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공동체에서 그 누군가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혼자만 간직해야 한다고 배울 수 있지만, 저는 그 누군가와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조화, 심지어 조화의 환상조차도 가장 중요한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조화입니다. 갈등과 상처받은 감정을 다루는 이러한 건강에 해롭고 불경스러운 방법의 문제는, 우리가 이를 해결하고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결국 상처받은 감정과 원한을 모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을 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대해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인 것 같아요.
C.S.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이혼에서 지옥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그림을 그립니다.
지옥은 바깥 가장자리에만 사람이 살고 있고 중앙에 빈 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대한 회색 도시와 같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한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웃과 다투고 이사하고 다투었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새로운 이웃과 함께 다시 이사를 했고, 텅 빈 거리에는 텅 빈 집들이 가득했다.
루이스는 지옥이 그렇게 커진 이유가 중앙이 비어 있고 변두리에만 사람이 거주하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싸움의 해결책으로 대결 대신 거리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사람을 정면에서 정면으로 마주보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의 길, 사랑의 길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기 기독교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화해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오늘 복음 교훈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 화해를 위해 노력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옳은 것을 원하는가? 내가 화해하기 전에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고 관계가 규칙보다 더 중요하고
화해가 보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허리케인, 지진, 화재, 증오의 표현, 불의 등 우리를 괴롭히고 도전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함께 살 때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서로를 묶고 푸는 방법을 세상에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갈등을 통해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힘으로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이 악보다 강하고,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 마음과 모습을 닮아가는 귀한 제자들이 되어 항상 하나님과 통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8-20-23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마가복음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광고 중에 얼마 동안은 얼마를 내시고 그 이후에는 얼마를 내시면 됩니다라는 광고를 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주 작은 글씨에는 우리가 생각한 조건과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면에 큰 글씨와는 다르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를 따르면 이러한 것이 따른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안에는 세상의 딜콤한 광고같은 글귀가 아닌 우리를 예수님을 따를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중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신앙인들이 마음에는 모두가 잘되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있는 우리가 만상형통 중에 뒤 따른는 것이 바로 힘듬입니다. 세상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수 많은 노력, 수 많은 고통, 고민 속에 많은 것이 얻어지는 것 같이 예수님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것을 버리자라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이 무었인가를 예수님께 여쭈어 본 후 근심하여 떠난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위해서 희생 했을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희생 해야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 청년의 모습의 신앙인은 아닌가요?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의 소유를 다 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두 부자를 만나는데 오늘의 주인공 부자청년과 세리 삭개오 만남니다. 삭개오와 부자의 청년의 차이 점은 무엇인가요?
부자청년은 근심하였고, 누가복음 19:1-11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를 절반을 나누어주고, 본인이 토색한 자들에게는 사 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께 말했을때 예수님의 삭개오의 마음 보시고, 집에 구원이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하지만 혹시 우리 스스로 위안을 갖기위한 생각은 아난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지 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일에 대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참 제자가 되기위한 조건은우리 삶에 일순위가 하나님,예수님이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분보다 다른 목적이나 사람이나 소유물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유을 더 소중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이 소유를 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올바른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증명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소유가 내것이 아니라는 사실알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내것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것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예배를 드리며 수요 성경공부에 참여 한다고 참 제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 생각, 말씀에 맞추어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주제처럼 “우리가 예수를 따르면” 무엇을 얻으며, 무엇이 더해지는질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이생에서 배가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가 되는 축복을 받으셨나요? 앞으로 받을 준비가 되셨나요?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볼때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신도들은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나의 주변을 정리한다” 이 말씀에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백 배의 축복은 좋아하겠지요? 왜? 우리는 광고와 같이 보고 싶은 것과 읽고 싶은 것 그리고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읽듯 성경의 말씀도 주일의 설교 말씀도 이와같이 하지는 않는지요? 또한 우리가 버려야 할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수 백번 아니면 수 만번 계산기로 계산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 즉 영생 을 얻기위한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는 돈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9절을 읽은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때론 집, 가족, 사업체, 농장 또는 직장을 떠나야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때 예수의 복음에 집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 예수로 복음 만을 집중할 때 이생에서 주신다는 약속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때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또한 그분을 따르면 큰 유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예수님을 따를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소속된다는 점 즉 “가족의 일원”이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족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히 예수님을 따르는 축복 중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분명히 있는데 바로 핍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에 대해 말씀한 후 예수님은 “핍박을 겸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얻는 것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써 우리의 삶에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0-12에서 핍박 받는 자에 관한 말씀이 ‘복이 있고, 천국이 있고, 상이 크다’라고 말씀입니다.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중 일부가 기념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영광스러운”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관심을 가지거나 논쟁에 합하면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핍박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나의 복음을 위한 일를 할때 핍박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선교사의 삶)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복음에 집중하는 삶에서 핍박 받고 있지않다면 “왜일까?”를 생각해야합니다. 몇가지 질문을 생각 해보았습니다.
1. 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까? 2. 우리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도록 멀리 피해있는 않는가? 3. 혹시 진정으로 따르고 있는가? 4. 나는 십자가의 군인가? 아니면 어린 양의 추종인가? 5. 모든 질문에 잘 적응하는 신도인가? 3.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를 따름으로서 얻게 되는 세 번째는 “내세에 영생”입니다. 내세는 마지막 때이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날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기대할 수 있는 단연코 가장 큰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우리가 다른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큰 상” 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찾고, 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앞부분에서 부자 청년 관원이 찾고 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습니다. 그는 지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뭔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영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은 당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듯이 인생의 길이 자체가 그렇게 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삶의 영원한 질, 곧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분의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소서.” 영생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6:11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의 “면전”에서 영원히 행복해집니다. 주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영원한 즐거움”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영생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기 연습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가 아니 남은 올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깊은 상고와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 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7-30-2023(주일) 성령의 중보가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로마서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주 전에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하고 있을 때 한 인도 사람이 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당신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또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자신만만하게 네! 잘 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대답에 충격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삶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꾸준히 계속 기도가 끝어지않게 기도를 해야 하는 삶입니다. 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떠나고 저는 그의 말에 얼마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 흡족할만한 기도의 양을 하지 않고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저를 보고 기도를 더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를 말할때 그 시람은 나의 모습을 보고 알고 있다는있는 사실에 정작 알아야하는 나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에 황당해 하며 회개하며 다시 엎드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은 기도해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닐지라도 기도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8장 전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경이로움과 축복, 특히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을 닮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 새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며 우리를 축복하고, 강화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8장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심을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되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기도의 영이 있어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때론 기도의 행사가 이루어지는데 특권 중 하나임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필요에 대해 말하고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돕고 우리를 돕기위해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말씀하시길 우리를 위해 돕우시는 몇가지를 함께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 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기도의 영역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에서 발전할 수 없으며 결코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땅의 육신의으로 살고 있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여전히 거하는 이 육신을 통해 우리의 새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을 때까지 이 타락한 육신에서 해방되고 썩지 아니할 새 부활의 몸을 받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부패한 사실과 함께 우리는 현생에서 여전히 땅에 묶여 있기 때문에 불투명한 우리를 통해서만 영적인 것을 볼 뿐이며 여전히 인간의 지혜와 이해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숙할 때, 은혜의 수단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새 사람이 양육되고 새 사람 안에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영적인 영역을 더 완벽하게 보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연약함을 알기에 특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영역에서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거나 기도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고 기도로 분투하는 우리의 행동이 필요하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나 하루 중 여러 시간에 기도할 때 영이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은 그러한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한다면,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기뻐하시고 항상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항상 우리의 최상의 복지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기도의 절반을 이룬 것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가치 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결코 아끼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기억할 때에 그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영이 이 생각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구절에서 우리에게 계시한 것처럼 성령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세번째 성령의 도우시는 기도 입니다
이 도움은 어떻게 표현하고 사용될까요?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에 대한 말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너무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러한 부족함 속에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갈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로 무엇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곁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시며 거기에 있는 영적인 갈등과 갈망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에 갈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고 올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이 모든 미약한 기도의 노력을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해석하신 다음 올바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하나님께 표현하십니다.
한 출판사에서 좋은 책을 만들어 출간하듯 올바른 교정과 아름다운 편집 후 책을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책을 출간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 불쾌감을 주거나 역효과를 낳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메신저로서 그는 기본 메시지나 요청을 받은 다음 우리가 수용할 수 있고 잘 넣을 수 있도록 그것을 다시 표현합니다. 성령의 중보란 이런 것입니다.
네번째는 이 성령의 중보 기도 결과 입니다.
이 중보기도의 효과는 27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바울의 추가 설명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등과 갈망하고 추구하는 죄와 불완전함 너머를 보십니다. 그는 새로 거듭난 우리의 진정한 갈망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 마음의 핵심을 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 마음이 갈망하는 그의 해석을 읽으시지만, 그는 변화된 것을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중보기도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개혁하고 청소하십니다. 영은 약간의 수정과 재작성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영원한 구원의 계획에서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해석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수정하여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십니다. 이 복된 성령의 사역을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할 때 힘을 얻고 기도할 때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 사역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기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무가치하다고 느낄지라도 성령의 이 사역으로 인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적으로 사탄과 싸우고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기도할 때 우리 곁에 계심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영을 알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합당하게 되고,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합심 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우리를 위해 항상 중보하는 성령님을 의지하시며 기도하시길 소망합니다.
07-09-2023
내 안에서의 투쟁(로마서 7:15-20)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서 벌어지는 큰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외부 적들과 맞서 싸움은 마귀와 대면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있는 불변의 상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죄성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신 사이의 끈질긴 싸움에 우리는 포함 되어있습니다. 이 두 라이벌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서로 적대적입니다. 이 싸움은 모든 신자의 영혼 안에 전쟁터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두 세력 사이에 합의된 휴전은 결코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어느 쪽도 백기는 결코 없습니다. 또한 휴전은 절대 없습니다. 전투는 계속 되며, 진행형입니다. 여러분이 이 내적 갈등의 강도를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우리 안에서 내적 싸움이 계속됩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신자 안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다른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는 내부 줄다리기를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로마서 7장 15-20절의 이 구절은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새 본성과 죄 있는 육체 사이의 싸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고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 이 말씀을 썼을겁니다. 바울 자신의 삶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죄 많은 육체와의 싸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바울 처럼 거룩함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싸움은 실제이고, 강렬하며, 지속적이고, 내적이며, 영적이며, 모든 참된 신자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 구절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보는 것과 같지 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 완벽하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나쁜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신자가 직면하는 죄와의 진정한 투쟁을 발견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7:15-20에서 우리는 바울이 계속해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도 그의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과 모든 신자에게서 발견되는 일곱 가지 죄의 실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는 당혹스러운 신비이다(7:15).
15절 전반부에서 우리는 죄가 곤혹스러운 신비입니다. 바울은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15절)라고 합니다. 바울이 “내가 하는 일”이라고 쓸 때 그는 자신이 죄에 가담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로 의를 구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리새인이었을 때의 삶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 시제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바울에게 그토록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당혹스럽습니다. 그가 경건과 거룩함을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큰 좌절의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진행되는 지점에서 죄에 빠짐을 발견했을 때 바울은 자신에 대한 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이 처럼 바울이 당혹스러운 모습에 신자인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느껴야 할 당혹감의 메아리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는 완전한 모순이다(7:15).
15절 후반 부에 바울은 죄와의 투쟁을 거룩함으로 창조된 그의 새로운 본성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하나니”(15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가 싫어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반전되었습니다. 그는 하기 싫은 일을 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에는 딜레마가 있는데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바울은 태만죄와 범행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는 태만의 죄는 그가 행하지 않았지만 행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행죄는 그가 행한 것이지만 행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는 내가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불명예스럽게 하는 죄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증인을 타협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전까지는 결코 영적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완전히 정직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도록 돕기 위해 바울의 사적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현실은 신자로서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아닐런지요? 생각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죄는 법적 범죄입니다(7:16).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법적인 범죄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을 좇는 것이요 율법을 좋은 것이라고 시인하나니”(16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자도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진정한 신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놀라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와 싸우지 않고 영광을 향해 질주할 수 있었다면 신약성경 열세 권의 책을 저술한 바로 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일지라도 바울은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죄 많은 육신과의 전쟁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는 성숙한 신자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신약성경은 “모든 죄는 불법”(요일 3:4)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확증합니다. 모든 죄는 율법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왕의 통치 법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늘과 땅의 주권자에 대한 도전적인 반역이라 말씀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자신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작은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대적인 반역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법치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에 대한 지독한 범죄입니다.
네 번째 죄는 내재하는 힘이다(7:17).
죄는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내재의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제”는 그가 현재로 말하고 있음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바울이 자신이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므로 잠재적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느님께 종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분리라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한 거짓된 계략 아래서는 어떤 죄도 그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몸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그 안에 새로운 본성이 있음을 인식합니다. 바울의 새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어느 날 천국에 갈 때 그의 새로운 본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죄 있는 육체의 구속받지 못한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계속해서 바울 안에 거합니다. 그의 죄의 근원은 그가 된 새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그의 안에 남아 있는 옛 타락입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더 이상 그 안에서 왕 노릇하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거”합니다. 그것은 그에게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꿈을 꿉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깨어납니다. 여전히 그와 함께 일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여행합니다. 매일 매 순간 그의 죄의 본성이 그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 있거나 피상적으로 우리 삶의 표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깊숙이 거합니다. 죄는 내재하는 힘입니다. 내재한 죄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 뿐이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죄는 상반 되는 힘이다(7:18)
죄는 신자의 새 본성과 반대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체는 멍에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중간 지점은 없으며, 그들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반대되는 힘입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나니”(18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된 새 사람은 분명히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주일에 교회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새 사람도 성령의 권능과 당신을 도우시는 그분의 능력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새 본성과 새 마음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일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립과 자족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역동적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의 반대되는 힘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죄는 경쟁하는 악 이다. (7:19).
죄는 경쟁하는 악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 방식에서 새로운 욕구, 새로운 애정,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악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악(kakos)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악한, 파괴적인 의미하는 강한 단어입니다. 악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성품과 완전히 반대되는 강력한 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속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이 악은 그 안에 있는 지배적이고 지배적인 세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는 강력한 힘이다. 더 이상 운전석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차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와 함께 타고 있는 뒷좌석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쳐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일곱 번째 죄는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7:20).
우리는 죄가 모든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실재임을 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7절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여 그가 죄를 짓고 있지만 진짜 바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 그가 회심한 것은 참된 바울이 아닙니다. 참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입니다. 죄가 그 안에 “거한다”는 것, “거한다”(oikeo)는 마치 다른 사람과 동거하고 집을 점유하는 것처럼 함께 살다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죄가 그 안에 집을 세우고 그 안에 거하고 있음을 재확인합니다. 그 것은 바울과 함께 집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고 결코 떠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항상 그의 어깨 너머로 보고 그의 귀에 속삭이는 영구적인 손님이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는 그 안에 사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와 죄에 대한 승리에 관한 우리의 큰 소망을 강조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의사 방문은 우리의 괴로운 진단을 보여줌과 같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에게 건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처방을 줄 것입니다. 올바른 진단이 치료의 절반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올바른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여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의 현실, 즉 정확한 진단을 상기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잘못된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이 구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질병에 대한 처방은 로마서 7장 끝에서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했을 때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인해 우리는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죄에 대한 점점 더 큰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더욱 발전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29).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성숙한 신자에게도 계속되는 죄의 문제를 봅니다. 그러나 앞에 놓인 구절에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하나임을 믿음으며, 우리 악과 마지막 그날까지 외적과 내적 분쟁을 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06-18-2023
하나님 사랑이 칭의입니다.
로마서5:6-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칭의(일컬을 칭, 옳을 의)란 한자 그대로 표현한다면 옳은 것을 일컷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의롭지 못한 죄인을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세상에서 도 부끄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것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왔슴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한 구절에 멈추었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나 자신을 한번 생각 해보았습니다. 이 구절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하는 말씀이라 생각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이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주제이며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고 있었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에 대해 신선하고 강력하게 선포되는 말씀이며 다시 들어도 믿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자에게 귀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연약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상태입니다.(6절)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고, 계명도 그와 같으니 우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가끔 영적 무력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무력감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이 아닌 악한 영이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매일 악한 영에 시험당하고, 위협 당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도록 약한 영에 지배되어 끔찍한 일을 버리고 살아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많은 사랑의 혜자이지만 그분에 대해 생각하거나 숭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죄를 고백하는 시간 보다는 우리는 세상을 즐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차가워 질때 주님은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은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지만 주께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완전히 변화시키려면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필요한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분은 본인을 사랑하면 본인을 의심하는 모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을 사랑하며 확신하면 그 또한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접촉하게 되든 – 따뜻한 방법이든 우리에 대한 적대적인 분노의 방법이든 간에 – 그 사람은 우리의 이웃이 되며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 우리는 꾸준히, 충실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은 우리가 무력(연약)하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에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6절).
하나님이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를 화나게 한 방식에 대한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세상과 평화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모든 면에서 완전히 선하고, 자신의 말을 충실히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시간과 행동의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분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일부 남자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리이까?” 그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거룩하고 죄를 미워합니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표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그분께 고백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모든 행동을 반대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그에게 올 수 없다는 말을 귀기우려야 합니다.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음으로 그를 원수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8절).
바울은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 위에 넓은 틈이 10미터 너비의 틈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그 틈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들과 노인들과 병든 사람들은 2미터나 3미터를 뛰지만 보통은 6에서 8미터를 뛸 수 있지만 운동 선수가 아니면 9미터 이상을 뛸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운동 선수의 기준이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의 표준은 그분의 영광, 그분의 빛나는 완전성, 그분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며 비열함이나 조급함이나 편협함이나 이기심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친절이 풍부하십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그는 그의 도덕적 완전성이 풍부합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인데 우리는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녁을 놓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의해 하나씩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 중 어떤 것에는 80%의 순종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목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고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저주에서 그분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오용함으로써 우리의 말을 긴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그분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힘을 구합니다. 우리는 특히 늙고 연약할 때 사랑으로 섬기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 음행, 도둑질, 거짓말,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삶을 위해 설정하신 목표이며, 우리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 걱정과 그심과 불만이 가득 차있는 우리 모습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이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그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를 미워하고 죽기를 원했던 사람. 그분은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영원히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광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 생각 해보면 우리 역시 죄인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으며 또한 오늘 말씀과 같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여 예수를 재물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증거로 칭의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졌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무서운 웅덩이와 수렁에서 홀로 올라와 우리의 모든 진흙을 씻어내고 우리를 위하여 새 마음을 만들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또 넘어졌어. 나쁜 짓을 하다가 ‘당연히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고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럴 때 도움이 필요할때, 그럴 때 우리의 도움은 우리의 구원이 기초를 두고 있음을 기억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누구였습니까? 예수 였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럼 우리가 낙담하거나 그가 지금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완전히 죄인이었을 때, 힘도 없고 하나님께 바칠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끔찍한 악당을 위해 누가 죽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 죽는 자, “그를 없애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글쎄, 적이 누구였는지? 혹은 우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를 거닐며 그의 시냇물을 오염시키고 대초원을 먼지 그릇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얼굴에 내 주먹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항상 그를 숭배하지 않는 수많은 변명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바울이 "적절한 때"(6절)라고 부르는 때, 즉 우리가 구원받을 적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이웃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에게 적합하고 적절한 시간, 우리의 무력함과 죄의 시간, 그런 다음 우리가 극한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동정녀의 태와 목수로 잔인한 수치의 십자가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일어나셨고,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는 희망! 이제는 넘어져도 예수님의 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력할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뻤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토하고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때맞추어 영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어떤방식 으로 반응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을 때” “다 끝났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넘어짐에 절망에 다끝났다라고 반응하면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등이 삶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 보다는 옳은 선택해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행동은 우리의 죄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을 열 배 더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한 우리의 용서를 점점 더 깨닫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전에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하물며 그의 아들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셨으니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칭의의 축복으로 기쁘고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는지 하나님께 감사며, 충성하며, 헌신하며 매일 고백하며 살아 가시길 죽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서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연약(771) 아스데네마(asthĕnēma) ἀσθένημα, ατος, τό
1. 약함, 2. 연약, 3. 신앙의 약함에서 기인한 양심의 가책
발음
[ asthĕnēma ] 어원 / 7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약한 자(롬 15:1) 신약 성경 / 1회 사용
기약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은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한 순교자로 뿌려지는 복음 05-07-2023 사도행전 7:55-60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은 부활절 시즌에 많이 읽혀지며 기독교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에 대해 배움을 줍니다. 우리는 오월 마지막 주일이 오순절로 맞이하며 벅찬 가슴으로 예수님께 감사하며 오순절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대해 나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울에서 바울로 가는 과정인 사울의 회심에 대해 알게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 안에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많은 믿는 사람들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음식이 분배되지 않았고 과부들은 일부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 앞서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택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단어는 메신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토로스(Apostolo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제자라 부르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들은 메신저로 파송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 이들에게 사도로 기도하고 안수했다고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백성 중에 행한 자로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과 변론하려 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지혜와 성령을 능히 당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고발하기 위해 그를 의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평의회에서 매우 긴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7:51-53 의 마지막 말로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말씀으로 스데반 집사은 유대인을 자극 하게 되고 이 자극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자극으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54절 이후로 전개 됩니다. 저는 오늘 55절 이후의 말씀으로 스데반의 대답 같은 순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믿음 생활를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순교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고 요즘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교사 들이 전하는 현지의 상황으로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상상을 합니다. 그곳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이고, 부족한 환경인가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끔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목숨 잃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정말 아주 가끔 뉴스를 전하여 듣곤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누군가 모르는 곳에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를 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곳 자곳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시며, 순교자로 살아가기를 헌신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의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곳에서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은 거짓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사드락,메삭,아벳느고에 관한 다니엘의 책에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출석하며 세 청년의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이들의 젊었을 때 시험이 있었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타지 아니한 세 사람, 그들은 살아날 줄 몰랐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하웰(James Howell)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이야기에서 이 불의한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일하시지만 원인은 아니십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며, 소망은 이 땅의 삶을 넘어선 것입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삶의 비결은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이유를 찾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1965년 Martin Luther King, Jr.가 셀마에서 행진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옳은 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면 살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마도 그가 큰 연설을 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부분은 그것 때문에 복음의 진보가 퍼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 중 한 명 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동의한 사울. 사울은 나가서 믿음 때문에 남녀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울은 여전히 그가 다메섹 도상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야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님, 저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의 공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나니야가 알지 못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나니야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고 사울의 마음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독교 개종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누군가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긴장했거나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어느 선교사를 통해서 돌 같은 마음을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를 확인해 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계속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수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면서도 때때로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성령을 믿는다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의심하겠습니까? 우리가 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순교자(Martyr)는마루투스(μάρτυς) 증인 μάρτυς;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자체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유사합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주님께 간청한다는 점에서 단어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은 오래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에는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45년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독일 출신의 39세의 루터교 신학자였습니다. Bonhoeffer의 첫 번째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세상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우리 동족과 나누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갔고 나치가 항복하기 불과 며칠 전에 그의 처형이 명령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작품과 글은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유산은 지성과 영적으로 뛰어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의 그의 삶이 그가 설교한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스카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의 용감한 사제였습니다. 그는 정권이 반대자들을 살해하던 시기에 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로서 그는 그들에게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군인들이 와서 그를 조금 거칠게 대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것이 그의 다가오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메로는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대부분의 엘살바도르 사람들처럼 그 병사들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니 일부 병사들도 " 당신도." 그의 추종자들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폭력의 현장이 자비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의 무기는 전쟁의 무기보다 강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전파한다면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죽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기도 해봅니다. “나의 삶이 천국의 완성이 아니라, 앞서 간 성도들과 선교사들를 뒤따를 성도들과 함께 십자가의 구원에 동참하는 삶이 되게하옵소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hbuhr)의 말을 옮기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미래는 우리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전적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을, 그리고 교회의 씨와 복음 전파의 일 동참하길 다짐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증인(證人)(마르투스. martüs )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1. 증거 발음
/ 마르투스(martü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증인(마 18:16, 막 14:63, 눅 24:48) 신약 성경 / 35회 사용
04-165-2023 이호승목사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19-23
03-05-2023 이호승목사
제목 / 거듭난 자의 삶 성경 / 요한복음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You should not be surprised at my saying, 'You must be born again.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는 거듭났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거듭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거듭난 자의 삶에 관한 비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거듭남이란?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겐네데 아노텐’의미는 하늘로부터 태어나다. 또는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 의미는 육적인 출생이 아닌,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개인들이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함 받고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 새롭게 거듭난 영혼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영혼으로 분별되며, 사모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거듭남 이란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왜 거듭나야 할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율법 학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한다고, 사실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도덕적으로 모범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모범인 니고데모에게 왜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까요? 말씀의 의미는 도덕적 으로 모범적인 사람도 중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육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적이 아닌 영적 중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갱생은 중생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갱생은 마음를 새롭게하며, 몸 가짐을 바꾸는 행실이지만, 중생,거듭나는 것은 심적, 영적, 행실를 모두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5절) 첫 번째 거듭남을 물 세례이고, 두 번째 거듭남은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를 시작하면 학습세례를 받은 후 물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 세례를 받는다고 우리가 바뀌었나요? 바뀌었다면 무엇이 바뀌었나요? 세례에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자신 구원자로 영접 할 뿐 자신이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 모든 일에 자신이 다 했다고 생각 할때 다시 전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질 수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성령의 힘은 무 한계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셔서 직접 역사 할때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어가는 영과 육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거듭났다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즉 너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아니라, 거듭남은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삶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거듭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믿음 생활 하면서 거듭남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거듭남에 대하여 생각도 못했고, 경험도 없다면 우리의 과거의 믿음의 삶이 니고데모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듭난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우리의 자세 즉 믿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첫 번째 예배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두 번째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세 번째 기도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네 번째 타인을 대하는 자세, 즉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위에 다섯 가지가 달라짐으로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거듭남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 충성돤 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2-12-2023 이호승목사
제목 / 순간의 선택 성경 / 신명기 30:15
오늘 함께 하실 말씀의 주제는 ‘순간의 선택’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삶의 중요한 선택에 관한 것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택에 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선택을 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 가지가 다 포함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보기를 주시고 그중 너희가 선택하라는 예제를 주셨습니다. 확실히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갈림길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때 그분이 우리를 어디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 해야합니다.
신명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 세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모세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 동쪽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새 땅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상기시켰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신앙여정의 다음 주요 단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전체가 이 특별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는 신명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 앞에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제 그의 삶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서서 고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선과 악,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사이의 선택권을 준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삶을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섬기십시오.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분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분께 충실하면 약속의 땅에서 잘될 것입니다. 그에게 불순종하면 문제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택이 거의 40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여졌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 새 땅,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의 부모를 어떻게 구해 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 곧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곧 지키게 될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지휘봉을 여호수아에게 넘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그 새로운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길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이 새로운 경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모세는 염려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그들을 다시 완전히 노예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세력의 올무에 걸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하는 선택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무엇이 위험 있을까? 모든 것. 이것은 아이스 라떼 와 핫 라떼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Fish sandwich에 Tartar sauce 와 마이오네즈 캡찹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과의 관계에 다시 헌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할례로 상징되었습니다. 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에 빠졌을 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자적 의미에서나 영적 의미에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포로를 상징했습니다. 이집트는 속박과 노예 제도를 상징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새 땅으로 이주했을 때 그들이 애굽에서 육체적 노예였던 것처럼 영적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많은 유혹에 직면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강력한 세력이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백성들이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모세는 영적 노예 상태를 피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생명과 평안, 즉 풍성하고 놀랍고 즐거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절망과 고통,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냉혹하고 설득력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에 가까워졌습니다. 긴 지체 끝에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판돈은 매우 높았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오늘 아침 우리의 본문은 결정에 관한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관해서는 "선택"이라는 개념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 그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의 수단, 즉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길이나 세상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루터의 교리문답에서 사도신경의 세 번째 항목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이성과 힘으로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거나 그분께 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복음으로 나를 [선택]하셨고, 그의 은사로 나를 비추어 주셨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참된 믿음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느 날 새 땅의 문턱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과 그분의 길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표류했다면 어떻게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거룩한 성사를 통해 그분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분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다른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것, 즉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최우선에 두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심지어 이 지상 생활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보다 앞서 있기도 합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분을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분은 구원과 영생의 문을 열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경험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능력으로 우리는 이제 그분을 위해 삽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은 핵심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오늘 말씀 통해서 우리 모두가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 삶을 책임지어 주시는 성부,성자,성령을 나는 귀한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1-22-2023 이호승목사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oAQbN9hLW30
교회의 지침서 I 고린도전서 1:10-18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한글개역 개정
세상에는 가족, 학교, 단체, 회사, 교회등 각기 다른 공동체있고 각기 지침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침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공통점이 사랑과 나눔입니다. 이것이 화합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지침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라고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성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강조하며, 10절에서는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첫번째 “분쟁 없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왜 이러한 지침을 가져야할까요? 9절에서 바울이 말씀했뜻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기독교인들이 구별되어야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받았지만, 세상의 다른 단체는 각기 단체장과 단체원들이 필요에 의해 부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부름 받았기에, 교회의 큰 일치는 회중들 한마음과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평강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힘써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합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제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가질때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보다 못한 것은 결코 진정한 통합을 가져올 수 없으며, 비록 교회가 아무리 온화하고 평화적일지라도 항상 분쟁과 분열 있다면 하나님을 섭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지라도 이모습은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지침은 아닐겁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지침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두번째 잘 못된 섬김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있는 고린도의 종교인들 모습은 어떤가요? 그들은 로마인과 유대인으로 나누이고, 종파를 나누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모습은 고린도 교인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이면, 그들은 논쟁과 분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네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12이는 다름이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나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당시 교린도 교회 회중들의 모습은 종이가 찢어지듯 갈라질 위기에 처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를 위함일까요? 무엇을 위함 일까요? 이들은 어느 목사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어리석은 모습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중요한가요? 분명한 것은 누구를 지도로 따를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런한 일들이 발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논쟁과 분쟁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기적인 생각과 주장이 아닐 생각합니다. 논쟁과 분쟁에 중심이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계셔야함에 인간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 연합하지 못하는 것 중심에 누가있습니까? 교회의 리더 그 리더가 하나님의 중심 생각이 아닌 자신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 일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교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만 따른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논쟁과 분쟁을 만들어 교회를 쪼개는 그들를 함께 비꼬듯이 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무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 들과 마찬가지로 틀렸고 교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그리스도, 아볼로와 그의 동료들을 위한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조차 이미 예수를 따르는 자세가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정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 안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리더나 성도들이 있지않을까요?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약하고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지도자의 이름으로 세례 받지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의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하나요? 목사도 장로도 아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믿음 생활하시면서 누구에게 충성을 다하셨나요? 우리는 사람을 것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신뢰 해야할겁니다.
세 번째 참된 지혜와 유일하게 참된 연합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보내신 것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설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 십자가 아래 모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연합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삶, 죽음, 부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결정적이고 분별적인 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아래에 있는 우리의 위치, 즉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열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고 하나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스스도인으로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으므로 우리 예수와 하나가된것 아닌가요. 또한 우리가 하나 될 수있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을 갖기 위해 항상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예배와 봉사에서 우리를 연합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대륙에 남녀노소, 인종을 뛰어넘고,세대를 넘어 그분의 사랑하는 교회로우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 신앙고백 * 찬양 인도 / 황선민목사 * 설교 / 이호승목사 * 제목 / 내 안에 거하라 * 성경 /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기도 / * 찬송 491 장(귀하신 친구내게 계시니) * 축도 / 이호승목사 * 교제 / 기도 황선민목사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자 영국의 설교자 스펄젼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 ~ 1892. 1. 31)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은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때로는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간증(干證)이 마치 굉장한 믿음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려면 인간의 감각과 경험과 눈으로 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베드로는 아주 노련한 어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6). 성경을 육신의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 읽는 방법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라고 합니다. 이번 주부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한일서를 만나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 요한일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소개하는 주제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노인 노. 늙을 노(老)
부수 / (늙을 노 6획 [耂]
모양자 / 耂(늙을로엄 로(노))
+
匕(비수 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시야(Josiah)라는 랍비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참으로 복을 받은 자로다.
이제 백정 네네스 옆에 서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깨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위치가 백정 옆이라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백정은 매우 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왔는데 백정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공부를 그만두고 기도도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위합니다. 그러다 문득 백정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만나 보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백정 네네스는 유명한 랍비가 찾아 온 것에 너무도 황송하여 문 앞까지 나와 영접하고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셨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무슨 선한 일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 옆에 서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게". 네네스는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또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변명합니다. "나이 많은 어머님을 모시느라 저는 회당에도 잘 나가지 못했으며, 좋은 일도 많이 하지
못했으니 용서해달라" 는 것입니다. 랍비가 그의 어머니 계시는 곳에 가보았더니,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기동을 전혀 못하시고
대소변도 못 가립니다. 네네스가 늘 어머니 옆을 지키며 대소변을 가려내고,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랍비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야 저의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백정 네네스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행위인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2백년 전에 선교사들이 중국에 선교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교문화에 깊이 젖어있는 중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모여 궁리합니다. 기독교가 효의 종교인 것을 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전도지에 효에 관한 성경 말씀을 삽입키로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의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장 17절의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는 말씀들입니다. 옳습니다. 기독교처럼 효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효도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살 자격도 없으며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도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고 강조합니다. 자녀나 손자들의 앞에서 부모님께 효를 행하여 그들로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효를 행하다' 는 말은 '유세베오' 라는 단어로서 '존경하다, 경배하다' 는 뜻입니다. 즉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를 존경하며 효를 행하여 본이 되어야 합니다. '효를 행하라' 는 것은,
첫째, 힘을 다해 순종하라
어느 마을에 화목하기로 소문난 집이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마다 그 집을 부러워합니다. 한번은 화목치 못한 집의 노인이 화목한 집에
방문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집의 노인은, "우리 집이 왜 화목한지 보여주겠다" 며 큰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내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불러라." 나이가 40이 넘은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을 부릅니다. "뒷마당에 가서 감을 따오너라" 하고 명하였습니다. 감 열매가 겨우 맺히기 시작하는 철인데 둘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감 열매를 따왔습니다. 셋째 아들을 불러 "막내야, 외양간에 있는 소를 지붕에 몰고 올라가라" 하십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은 소를 몰고 지붕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야단법석을 하더랍니다. 그때 노인은 말합니다. "우리 집안의 화목은 자녀들의
순종에 있다네."
'순종하다' 는 '휘파쿠오' 란 단어입니다. '밑에서' 라는 '휘포' 와 '듣는다' 의 '아쿠오' 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말로서
'아래서 듣는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진지하게 진솔하게 듣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선택해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 순종하십니까? 힘을 다하여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님께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전심으로 공경하라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아이가 돌아와 무엇인가를 열심히 외웁니다. 부모가 잘 들어보니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제5계명을
외우는데, "네 부모를 공격하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어." 그러자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아빠, 공경하고 공격하고 뭐가 달라요. 똑같은 것 아니에요." 그 아이는 공경이라는
말이 어려워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공경이라는 말의 뜻은 바로 공격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은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 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귀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무식해도, 얼굴이 못생겼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일이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말의 원어인 '티마오' 는‘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친밀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부모를 존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순종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의미한다면 공경은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은 엄중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 공경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다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부모 공경은 그보다
우선입니다. 부모 공경은 기본 윤리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부모 공경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부모 없는 자식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 공경이 가정의 기초 윤리임을 깨달아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정성으로 보답하라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Garfield)가 대통령 취임하는 날, 시간이 다 되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 후
대통령이 한 노인을 부축하며 식장에 들어섭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가필드는 늙은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안 가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제가 이렇게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라며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며 말하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날 복잡한 장터에 홀로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그냥
말없이 울며 서 있습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선생님, 왜 그렇게 서 있습니까?"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50년 전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헌 책장사를 하셨다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불편하니 네가 하루만 이 자리에서 일해다오. 약속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니 그 분에게 이 책을 드려라' 고 하셨는데 나는 '아버지가 헌책 장사하는 것도 창피한데 내가 왜 그 일을 해요' 하면서
거절을 했다네. 그러자 아버님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시며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그 날 일하셨네. 그런데 그 일이 무리가
되었던지 그 날 이후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시다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은 부모님의 은혜에 얼마나 보답하며 사십니까? 혹시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하여 울고 서 있는 양심은 아닙니까?
본문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여기의 '보답하다' 라는 말은 '보상을 갚는다' 란 말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되돌려 드린다는 뜻입니다. 즉 효란 부모께로부터 받은 것을 자식이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부모님의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곧 효를 행하는 것을 자녀들로 손자들로 배우게 하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내가 주체이지만 '배우게 하라' 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손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먼저 부모에게 보답하는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효자 집에 효자 난다' 고 말합니다. 효자인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 자식이 배워 효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을 부모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녀들이
어찌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겠습니까?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효도 실천 십계명'을 가르칩니다. 첫째,
부모에게 신앙을 갖도록 해드려라. 둘째,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라. 셋째, 표정을 밝게 하고 웃음을 잃지 말라. 넷째,
궁금증을 풀어드려라. 다섯째, 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려라. 여섯째, 향토적인 음식을 해 드려라. 일곱째,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려라. 여덟째, 일거리를 드려라. 아홉째,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드려라. 열째, 등을 긁어드리고 손발톱을
자주 깎아드려라.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효를 행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돌보아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 생전에 효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효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구원받게 하는 일임을
더욱 명심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효를 행하여 자녀와 자손들이 본 받을 수 있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힘을 다해 순종하며, 전심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해 보답하며 사는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월 21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397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공동번역)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NIV. 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세상(2889) 코스모스(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1. 장식. 2. 세상. 3. 고전 4:9.
발음
[ kŏsmŏs ] 어원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천하(마 4:8, 막 8:36, 눅 9:25), 세상(마 5:14, 고전 1:27, 계 11:15), 천지(행 17:24), 세속(약 1:27), 세계(약 3:6), 단장(벧전 3:3).
요한일서 2:15-16 /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5:19 / 악한 자 안에 처한 곳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NIV)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
에베소서 2:2-3 /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이와 같은 세상에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라고 하겠습니다. (건 행 성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를 한마디로 "건행성(健幸成)"이라고 하겠습니다. <굳셀 건, 다행 행, 이룰 성> '건행성'이란 "건강(健康. health)"과 "행복(幸福. happiness)"과 "성공(成功. success)"이라는 세 단어의 첫 글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카드 하나를 받았습니다. 카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께 매일 저는 목사님을 영상으로 뵙고 항상 좋은 메세지로 예쁜 카드로 기쁘게 해주시는데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3개월 넘게 한꺼번에 일이 겹쳐(이사, 몸도 많이 아프고, 손님 또 힘들게 도와줘야 할 일 등) 너무 무리를 해서인지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견디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지요. 건강 유의하시고 가족 모두 편안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Georgia에서 Mrs 유 드림
카드를 받고 즉시 카톡으로 사진을 찍은 후에 짧은 글과 함께 사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그 편지가 작년에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를 확인하였더니 우체국 직인이 18 AUG 2023 PM 9 작년 8월 18일에 발송한 카드가 4월 11일 2024년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무려 8개월 후에 카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8개월 후에 응답될 수도 있겠구나! 한번 발송한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겠구나!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를 바라보자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All flesh is not the same: Men have one kind of flesh, animals have another, birds another and fish another.
육체(4561)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뜻풀이부
1. 육체.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 1:24.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 1:24.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 2:23.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 1:13.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누가복음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고린도전서 15:44. 46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The spiritual did not come first, but the natural, and after that the spiritual.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 18:13).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에 관한, 영적.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 6:1.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마음의 평강 등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패학을 통한 교훈 쌓기, 리더십 훈련, 영향력 증대, 효과적인 조직 관리, 갈등 관리, 재테크, 각종 영업 전략 세우기,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성장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질적 성장이나 성숙보다는 양적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면
건물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고민도 하게 되고, 또 더 큰 예배당을 확보하여 축제와 같은 예배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성공'이나 '행복' 또는 '물질적인 축복', '건강의 축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인에게만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악인에게도 똑 같은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물질적으로 풍부했던 부자는 진정한 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던 사람임을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풍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시면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12절에서는 세상을 이긴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일서 2:15-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16절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으로 번역한 '코스몬'의 원형 '코스모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의 활동 공간 및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사상과 기치관 등을 의미합니다(롬 12:2 ; 엡 2:1-2).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훈 목사님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자녀들에게로 가시게 되었다고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10년 동안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내 심장병이 나았습니다.”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수해 준 적이 없어서 “언제 제가 안수해 드렸습니까?” 물었더니 그 할머니 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목사님을 만나 손을 잡을 때마다 한손은 자기 가슴에 얹었답니다. 자기는 그것이 10년 동안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은 것으로 믿었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심장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음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요한일서 5:5-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물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물세례 * 피 - 육체로 오신 예수님
예수의 피 즉 예수의 보혈(寶血)
1. 겟세마네의 보혈(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2. 가시 면류관의 보혈(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마태복음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요한복음 19:2. 5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3. 채찍질의 보혈(마태복음 27:26)
* 이사야 53:5
4. 십자가의 보혈(마태복음 27:35)
* 요한복음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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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의 피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지난 3월 31일 부활주일 예배 때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자!" 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체(屍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푸쉬케"라고 합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조에"라고 합니다.
'조에'라는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합시다.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코스모스
둘째, 요한일서 2:15-16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속
셋째, 요한일서 5:19 마귀가 지배하는 곳
넷째, 에베소서 2:2-3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예수는 누구이신가?
요한일서 5:5-7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령으로 증거
물 - 물 세례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피 - 육체로 임하신 성령 -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 죄 사함의 능력(구속의 능력)
세상을 이긴 자가 얻을 것(요한계시록 2장, 3장)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나의 적용(適用) 내가 갖고 있는 문제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으로 물든 도덕적 체계나 사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성도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들과 벗삼게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약 2:4).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이러한 세상의 악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싸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 이기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4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절) 5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 세상
무엇으로 : 믿음으로
성경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했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물과 피와 진리이신 성령이 증거하였습니다. 물로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포하면서 증거한 것을 말합니다. 피로 증거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징조들을 통해 증거하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만을 증거하시는 분으로서, 그 분의 증거는 참된 증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세상에 임하신 분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분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셋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둘 이상의 증인들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일치되는 한 가지 증언을 지속적으로 하듯이 성령과 피와 물은 완전히 일치되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 되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모든 악과 죄에 관하여 한 증인이 아닌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사건을 확정하라고 하였다. 물과 피와 성령, 세 사람의 증언이 있으니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증언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직접 증거해 주셨습니다(9절). 사람들의 증언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게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선포하셨으며, 변화산에서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2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심을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1-6, 마가복음 9:2-13, 누가복음 9:28-36을 살펴보면 변화산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질 때,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다양한 말로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거짓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세상의 어떤 것들일까요?
'세상'을
좁은 의미로 보면,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겨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대인관계 기술, 처세술, 속이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 남을 헐뜯는 말, 비방하는 말, 형제를 대적하여 이길려고 하는 마음, 물질만능주의,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 교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이단들의 미혹을 이겨내어야 합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인 유혹도 이겨 내어야 합니다.
핍박을 이기는 것보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핍박은 공격할 시점과 방법들이 이미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만 있으면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접근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생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할 수 있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생명,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생이 있는 자는 육신적 사망 이후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고 하였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얻게 됩니다.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러한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나아가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런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신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혼돈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믿음 외에 또 다른 영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동체 내에서 확신이 부족한 자들에게 또 다른 영적 지식(영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속에만 승리가 있고 영생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주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승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도록 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장차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육체의 연약함과 병듦과 장애를 갖고 살아갈지라도 그 날에는 천사와 같은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날의 영광된 삶을 생각하며 날마다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기뻐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 생명의 면류관은 다음 설교 자료
생명의 면류관(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lessed is the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because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the crown of life that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Do not be afraid of what you are about to suffer. I tell
you, the devil will put some of you in prison to test you, and you will
suffer persecution for ten days.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and I will give you the crown of life.
신약 성경에서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용어가 2번 사용되었습니다(야고보서 1:12, 요한계시록 2:10)
부활주일 설교 때에 사람의 몸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 자연인 둘째는 시체(屍體) - 영적인 몸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 신령한 몸
부활 신앙이란 육체를 소유한 자연인이 신령한 몸이 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단계를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 영원한 삶을 시작할 때 얻게 되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강도가 오른편과 왼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 중에서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봉사도 하지 않았고 헌금도 하지 않았던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면 일생동안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도들의 신앙과 비교할 때 똑같은 구원을 받는다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 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요한계시록 2:10
주제2: [서머나 교회]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Johnson, Moffatt)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 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본 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역경, 고난, 환난, 박해를 의미합니다. 2절의 ‘시험’, 3절의 ‘시련’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금속이 어떤 검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귀금속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진품으로 인정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디면 진짜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영생을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구원행로입니다.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시험을 참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고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시험도 참고 견디어냅니다. 복 받기 위해서는, 인정받기 위해서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시험의
길’을 반드시 넘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길은 결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시험이 닥치면 묵묵히 참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인내하며 견디기만 하면, 복이 있고,
인정을 받고,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오직 정도(正道)뿐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참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복의 개념은 수고와 노력과 죽음을
초월한 인내로부터 오는 삶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초월한 인내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한마디로 “신앙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고난을 인내로써 승리하여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기쁨인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센 믿음과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굳게 서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한마디로 팔복은 세상적 가치를 초월한 자,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만을 인정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시련을 견디어 복 받을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시편 1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와 같이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고 견딘 자를 인정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어 통과해야 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딘 복 있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큰 상급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구원의 때에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한정된 생명이 아니라 무한정한 끝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전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면류관’은 최후의 승리자에게만 주었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생의 시험과 시련을 다 견디고 극복하여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아 승리자로 인정받아서
면류관을 승리의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반드시 이 상급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즉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시련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에게는 생명 대신에 죽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썩어져가는 세상의 것을 사랑하다가 사막의 풀 같은 신세가 되지 말고, 오직위의 것을 사모하여
모든 시험과 시련을 견디어서 복 있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서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게 되시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아울러 이 땅에서도 복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한 강도 이야기가 남긴 교훈(누가복음 23:39-43)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가 되신다
이사야 63:1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시기 에 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여러분들은 이 회개한 강도가 처했던 상태보다 더 절망적인 상태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 니까? 그는 행악자인
강도였으며, 율법을 범한 대가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죽어야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의 목숨은 시간 문제였고, 그의
죽음은 한걸음밖에 남지 않았으 며, 그의 영혼은 지옥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어가던 강도는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다시 말하면 그의 영혼을 돌봐주기를, 그의 죄악이 사하여지기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 으로 옮겨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 문은 닫혔고 자비와 은총이 멈춘 상태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받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아직도 무니 열려있고 자 비와 은총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직접 대답으로 확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 성경 속에서 구원받은 영혼들 중에 이 회개한 강 도처럼 자신의 구원의 확증을 직접 예수님께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217.
예수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지옥의 문 앞에서 끌어올려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을 완벽하게 증거 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장 연약하게 보인 때에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주 님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 한 죄인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7:25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를 온전 히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던 이 죄인이 불속에서 타다 남은 나무 토막처럼 불속에서 끄집어내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기도로서 당신 앞에 나온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며 어떠한 죄인 이라도 회개하면 영접해 주십니다.
이 강도는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만찬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도 않았으며 헌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강도의 믿음은 하루도 못된 단 몇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그리스 도에게 인정되었으며 그를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해 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많다할지라도, 우리들의 나쁜 습관이 날이 갈수록 고질화 되어 간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고칠 수 있으며 끌어올릴 수가 있으십니다.
천국이 우리들에게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 다. 바로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이는 구원을 받는데 다른 어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강도는 다 같이 그리스도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자기를 죽이려는 무리들을 우하여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참혹하게 고통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회개할 때 다른 한 사람은 마음이 강팍한 채로 있었으며, 한 사람이 기도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한 사람이 낙원으로 인도될 때에 다른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강도는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동일한 입장 이였고, 동일한 기회를 가졌고, 동일한 사건을 보았습니다만 두 사람 다가 아니라 한 사람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사건은 두 사람 중 기회를 선용한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방임하고 있는 많은 이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 아직은, 좀 더 있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마치 회개한 강도처럼 죽음 일보직전에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강도만을 생각했지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좌지우지 할 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218.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빛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빛의 자녀 가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동시대의 사람 이였고, 동일한 지위를 누렸으며, 동일한 선지자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구원을 받았고 사울은 버 림을 받았습니다.
부부가 같은 예배에 참석하여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나 남편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부인은 전혀 무감각한 채로 교회당을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 가운데 머물면서 여러분의 원하는 때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물론 우리 앞에 문은 항상 열려있으며 우리의 생명이 지속 되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생명을
오늘 밤에라도 하나 님께서 취하신다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에 소금기둥이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 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예뻐하심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를 놓친 회개는
거의 가 진실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회개한 강도의 구원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 라 구원받지 못한 다른
강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강도의 신앙
여러분들은 회개한 강도가 남긴 신앙의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왕국 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께 가하여진 모든 형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께 기 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언제 있었습니까? 어디에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모모든 백성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칠 때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 인들이 신성 모독죄로
사형판결을 내렸을 때에, 주님의 제자들 마져도 도망쳤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 흘리시며 저주받은 자로
죽어가던 때에, 바로 그때에 십자가상에서 그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으며 그에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세계가 창조된 이후에 이어ㅣ 같이 놀라운 믿음의 모 범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강도의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가련하고 불쌍하고 경멸당하고 멸시받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발견하여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연 찾아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처음 으로 고백한 위대한 신앙입니다.
또한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순전하고 무구함을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변증가입 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은 표적과 이적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지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뛰어 가고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가 정상인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제자 중 몇 사람은 변화 산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으며 장차 되어 질 언약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제자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219.
그들의 신앙은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들의 신앙은 거 짓말 이였던가요?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아 온데 뉘게 가오리까? 의 대답은 허공중의 메아리 이였던가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주님의 모습밖에 보 지 못 했습니다. 그 강도는
어떤 능력이나 영광이나 왕관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천국을 믿었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고서 자기의 영혼 을 그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죄악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 았으며 그
강도는 자기 죄를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한 강도의 신앙, 그의 기도, 그의 겸손은 그가 입으로만 회개한 자 가 아니라 행위와 진리에 있어서도 회개한 자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넷째, 죽은 후에는 낙원으로 간다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 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기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오늘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카토릭이 말하는 “연옥 설”처럼 죽음과 천국에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정화되는 변화과정을 거친 후에야
천국에 적합 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에 간다고 말 씀 하셨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의 분리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이 결합하여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애통하며 장례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영혼은 낙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즐 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20:3절에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했습 니다. 욥기3:7절에는 낙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태라면 여러분 들은 지금 지옥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천국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의 모범을 교훈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 이였으며, 전연 찾아 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고백한 신앙 이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외 친 신앙 이였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해야 된다 는 것을 다시한번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죽음 저편에는 낙원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으십시오.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주 - 죽음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권능의 주 - 사탄의 권세 즉 사망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말씀의 주 - 말씀으로 창조,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심
"위기를 기회"라고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위기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선교에 성공한 나라" 둘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
그런데 현재 한국의 현실은 두 가지 성공한 사례에 대해서 계속 발전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두 가지 이념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좌경화인가? 우경화인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회 절기에서 회복의 기회를 찾는다면 세 가지 절기를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세 가지 절기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핵심에서 찾는다면 "창조신앙(무<無>에서 유<有>)" "부활신앙(죽음<死>에서 생명<生>)" "재림신앙(거짓<僞>에서 진실<眞>)"
오늘은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신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신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오직 성경으로,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사람의 몸(肉體)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둘째는 영체(靈體) 셋째는 부활의 몸(부활체. 復活體)
부활의 몸과 영체가 다른 이유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가? 영체는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죽은 조상의 영이 제사상에 와서 먹고 가라고 합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아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영체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제사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든 문을 굳게 닫고 모여 있을 때 그 가운데 오셔서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체가 되는 부활신앙은 무엇일까요?
부활의 신앙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만을 바라보자"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면 신앙생활을 일생동안 계속한다면 부활에 관한 설교는 40번 50번 60번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활주일 설교중에서 마음에 새겨진 것이 교리적인 것 뿐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리적인 것보다는 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부활 주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 생명의 주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생명의 주가 되려면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부활의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히브리서 2:14) / 권능의 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려면 생명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 말씀의 주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우주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은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존재의 근원이 되는 태초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설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어떤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가 우리에게 나타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지라도 그가 또 다시 죽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믿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 어느 지역에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참여하고 그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셨고 은퇴하셨던 어느 장로님이 임종이 가까왔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이 장로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에게 영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장로님, 그동안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장로님의 수고와 정성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둘 것입니다. 장로님의 그 믿음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텐데 죽은 후에는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실 줄 믿으시지요?"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그것은 내가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세우는 개척 공신일지라고 그 아들이 서울 장안에서 잘 알려진 목사가 되었을지라도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한 신앙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장로님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목사님이 이 말씀을 읽기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나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는지 죽아봐야 알겠느니라."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성경이 어디 그렇게 기록되었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지요! 그때 목사님께서 장로님의 손을 꼭 잡고 정말 성경말씀 그대로 믿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봐야 알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후에 목사님은 아들되는 목사님에게 연락하고 장로님에게 분명한 깨우침을 전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4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활동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지상사역을 마친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천상사역"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둘째는 예수를 바라보라(12:2)
지난 3월 10일 주일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개의 단어로 소개했습니다. "집중" "확산" "지속" 깊이 생각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집중력을 갖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먼저 영적인 촛점을 맞춘 후에 그 촛점을 세상에 내밀면 반드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한 힘을 삶의 도처로 확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대한 산불의 시발점은 아주 작은 불꽃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을 지켜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은혜에 도취되었다가 거친 세상으로 나가면 쉽게 무너지고 꺼져버리는 불쏘시개가 아니라 무너질 수 없고 꺼질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이적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 중에서 7가지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관점에서 쓰여 졌다는 것과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표시로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이적은 창조주로서의 기사 네 번째 이적은 재-출애굽의 의미를 마지막 일곱 번째는 다시 살아남의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표지로 이적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 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4. 5,000명을 먹이심(6:1-14)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5. 물 위를 걸으심(6:16-21)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
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나고, 넷째 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러내 에덴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6. 소경을 고치심(9:1-7)
소경을
보게 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 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7,9)
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1,14~15)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도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라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1,5)
“나는 ~이다”
라는 선어는 7번
이상 나오며(4:26,8:58) 특정한 표현을 빌어 선언한 경우 7번이다.
“나는 ~이다”란 선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장 확실하고 대답하게 단정하는
것으로 출애굽 3:14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체를
지탱시키는 음식에 자신을 비유하신 것이다.
“신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 예수께서 하고 자 하심 말씀이다.
초막절이 언급되는 문맥 가운데, 어쩌면
성전의 찬란한 촛대에 불을 붙었을 무렵,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고 말씀하셨다. 양과
목자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10:9), 나는 선한 목자라
고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은유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것이 하나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은 못되지만 죽기는 싫다고 말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진퇴양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라고 선언하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배타적 선언을 하셨다.
아마도
황금빛의 포도나무 장식을 해놓은 성전을 지나실 때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나는
포도나무”(15:5)라고 말씀하셨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믿는 자들은 예수 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도입 이야기)
첫 목회지에서 만났던 성도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 중에 황규선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당시 고려아연이란 공장에서 황산부장직을 맡고 계셨는데 황산부장은 차기 공장장이 될 수 있는 아주 유력하고 실력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성결교 신학대학 신대원에 입학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여유를 가질만한 자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당시 공장의 직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예수가 좋으면 그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포기한 것이 있었습니까?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배우자를 포기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집을 포기했습니다.
아직도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예수님때문에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서를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 하늘에 계신 천상사역에 관한 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합니다. 전반부는 1장부터 10까지를 말하며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은 신분의 우월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을 때 구약의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계열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유다지파 다윗의 계열에 속합니다. 마치 멜기세덱과 같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던 족보도 없는 제사장과 같은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신분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전반부에서 강조하는 신분의 우월성 때문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후반부는 11장부터 13장까지를 말하며 믿음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합니다.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우월성은 갖추셨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2024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려는 설교 주제입니다.
찬송가 509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CCM악보 [B. B. McKinney 작사, B. B. McKinney 작곡]
1.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2. 네가 어둠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주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3. 네가 부활의 주 따라 가려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네가 주 안에서 길이 살리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4. 너의 죄악의 짐 무거울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마음 문 열고서 주를 모셔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1.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2. 생명.
3.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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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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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 압제로부터 독립을 외첬던 3,1절 101주년 되는 날입니다. 삼일절 하면 생각나는
분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교한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신자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 인해
일찍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의해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파견소로 몰려가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습니다. 17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머리에 콜타르를 발라 가발 벗기듯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고, 벤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았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상자 안에 3일간 감금하고, 입과 호수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고, 달군 쇠로 몸을 지지고,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합니다. 상체를 벗겨 공중에 매달고 밤낮없이 채찍으로 후려칠 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에 개 줄을 묶은 채 네발로 기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헝겊을 얼굴에 덮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전기고문은 물론 관에
넣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도 하였답니다. 결국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앙의 사람 도마 안중근 의사도 그 모지 고문 앞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분들은 이땅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 경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1절 말씀을 보면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바라보는 결승점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누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구시는 신천지가 거짓으로 교인
수를 알렸다고 고발했습니다. 신천지는 이긴자, 보혜사라는 그들의 교주 이만희에게 초점이 맞추고 보혜사 이만희를 보라고 합니다.
이만희가 말씀의 약속을 대언하는 대언자라를 것입니다. 이만희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실상으로서의 유일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만희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희는 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나에게 못 해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늘 변하는 세상의 철학과 사건을 바라보면 믿음의 경주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운동선수가 승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승점을 향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에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입니다. 주(아르케곤)라는 말은 "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다. "온전케(텔레이오텐)"라는 말은 "완전한 자,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라는 말은 "주목하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분사입니다. 믿음의 창조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익이 될 수도 있고, 편리가 될 수도 있고,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나 명예, 권력,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목표가 되면 신앙생활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송창식씨가 노래하지 않아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고래사냥을 해보아도 남는 것은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알려 주고 있지 않아요.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지 않아요. 고기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펑 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끝자락엔 공허와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하비콕스(Harvey Cox)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var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렸습니다. 세계적
명문대학의 자리에 올랐지만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이 온갖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에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고 하비콕스가 강의하였습니다. 그때 강의 하였던 내용이 바로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 없는 하버드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니 다시 예수를 좇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합니다. 기름 없는 차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괴롭고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사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자신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의기소침하고 욕심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바라보며 허무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 만족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강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질되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폭풍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폭풍을 바라보았을 때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결국 두려워하고 우리가 고정한 것의 노예가 되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못질하면서 망치로 손을 치는 사람은 못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경주에서 이기려면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무거운 것(오그콘)"은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외부적 요인으로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 경주를 방해하는 옷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외적인 장애물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핍박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적인 장애물은 광명의 천사로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신앙의 경주를 실패하게 합니다. 핍박은 달리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유혹은 잘 달릴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같은데 방향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죄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말은 "쉽게 얽어매는", "달라붙는"이라는
말입니다. 경주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죄는 우리를 쉽게 얽어맵니다. 단단히 밀착하여 옭아맵니다. 죄는 믿음의 경주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쉽게 달라붙어 옭아매는 것입니다. 죄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 쉽게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마다 빠지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성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쉬게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는 생각, 성질, 행동, 습관
등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젊은이에게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년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노년에게는 돈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달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신앙경주의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이번 코로나 19를 확산시키는데 매개체 역할을 한 사람들은 신천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며
포교하는 것입니다. 포교를 위하여 거짓말을 밥을 먹듯 하면 그것을 모략이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8단계 섭외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 사람이 속을 수밖에 없도록 포교를 합니다. 먼저 포교 대상을 정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이름, 나이, 주소,
직업, 전화번호, 전공, 군대, 환경, 경제, 건강, 학습능력, 인성, 신신, 신앙, 관심사 등 그 사람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합니다. 2단계는 섭외 활동입니다. 우연을 가장하여 만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열매를 선별합니다. 그들에게
이용거리가 되지 않는 고령자, 환자, 저소득자 등은 제외시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인간적 신뢰를 형성합니다.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접근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유형별 상태를 진단합니다. 신천지 신도 3-7명이 대상자를 분석한 후 전략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신앙우위 선점입니다. 중보기도를 해주고, 꿈 이야기로 영적 우위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유형별 맞춤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때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가짜 선교사, 가짜 교수, 가짜 전문가, 가짜 목사 등을
투입니다. 여덟 번째 단계로 복음방에 등록을 시킵니다. 이 과정이 다 포교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로 치밀하게 짜서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속여 포교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명 속이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너무나 자신에게 잘 해주며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을 속이면 대부분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방에서 성경공부를 시키며 성경공부를 누설하면 마귀가
틈탄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합니다. 같이 온 사람들은 100% 신천지인데 본인만 모릅니다. 사실 바보가 된
것입니다. 복음방 교육이 끝나면 센터에서 월 화 목 금 일주일에 4회씩 초중고급반 6-8개월 교육을 시킵니다. 학원구조로 큰
칠판을 가져다 놓고 비유풀이, 배도, 멸망, 구원, 세례요한 교리를 공부시킵니다. 결국, 교주 이만희가 구원자라를 것입니다. 이때
운동권 아이들이 이념교육을 시켜 세뇌를 시키듯 교리 세뇌교육을 시켜 교리 중독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험을 치루게 하여
합격한 사람을 유월을 시켜 신천지 신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철저할 패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던지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증인들이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3-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신앙의 경주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예수님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경주하기는 경주하되 무엇으로 경주하라고 말씀합니까?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통해, 인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완주의 필수요소입니다.
이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오랫동안 믿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광이 같은 네로가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그 때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고난을
감수(10:34)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자(12:4) 교회 내의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불신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3:12)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의 초보에 머물렀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전반적으로 신앙이
침체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끝까지 완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참으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은 한 번 참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제1 완료 분사로 죄인들에 의한 지속적인 적대 행위를 계속 참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참았습니까?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입니다. "거역한 일(안틸로기안)"이란 반박하고, 논쟁하고, 적의를 가지고 적대행위를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미쳤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해도, 조금만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원수 시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자존심이 뭉개지고, 옷을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인들 앞에서 조롱을 당했는데도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주하였습니다. 채찍을 통해 주어진 가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참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에 창이 찍히는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끝까지 참고 구속사를 완주하였습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이 당한 일을 비교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참으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쁨 대신에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했다는 말씀입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 입니다. 낙심에 감염되면 풀이 눕는 것처럼 희망을 잃어 버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친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자 낙심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배교하는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피곤하게 하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낙심시키고 지치게 만듭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사람을 보고 낙심시킵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 직원으로 지치고 낙심을 시키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전략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쉽게 지쳐 낙심하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핍박과 고난도 참고 견디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야 하겠습니다.
"1. 구주를 생간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모세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 17년을 인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주민 90%이상이 예수님을 믿는 섬이 있습니다. 천사의 섬이라 불리워지는 전남에 있는 증도입니다. 현재 22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지만 11개의 교회가 세워져있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김준곤 목사, 정태기 목사, 이만신 목사, 이성봉 목사 등
10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답니다. 그 씨앗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님이라고 합니다. 17살 나이 결혼했지만 남편은 신혼초부터
집을 나가 소실을 얻어 딴 살림을 차렸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며 모진 고난을 다 참고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 전했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일제의 강점기 때도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얼마나 전도를 했는지 고무신이 1년 동안 무려 아홉켤레나 닳아 없어졌답니다. 만
40세에 성경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무려 11개 교회를 세워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유모로, 때로는 우편배달부로 교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고 심부름 하는 역할을
도맡았답니다. 6.25 때 문 전도사님은 공산당에 채포되었답니다.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었답니다. 전도사님은 순교의
현장에서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고
59세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영광 염산교회는 6.25때 공산당에 의해 77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65명이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변절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습니다. 공산당들이
예배당에 불을 질러도 새끼줄로 온 몸을 꽁꽁 묶고, 돌맹이를 목에 메달아 교회 앞에 있는 바닷가로 밀어 넣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격려하며 변절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전교인 65명이 수장되거나 몰매를 맞고 대창에 찔려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며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내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화입니다. 영원한 승리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자리를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3.1절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땅 영적 전쟁터에는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패배자, 배신자,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 있다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도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면 넉넉히 인내의 강을 건너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부활 이야기
▶톨스토이의 부활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귀족 청년 '네풀류도프'는 '나타샤'라는 그의 하녀를 유혹하여 임신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녀는 그 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눈물나는 고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해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게 했던 그 남자 '네풀류도프'는 그 동안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그가 그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때 불장난하여 그렇게 만든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돕게 되었습니다. 차마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면하여 주는 대신에 시베리아 먼 땅으로 유형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며 그녀를 따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한 여인숙 방에서 밤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젊은 날의 방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머지 생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부활의 개념을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는 개념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이제 우리는 죽어도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집니다. 이날은 학생들이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당에 모여 학교측이 초청한 유명인사로부터 강의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해인가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박사가 강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된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여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한 노인이 일어나 말하기를 '틸리히 박사님!'하고 부르고는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과를 베어먹기 시작하더니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하고는 또 사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사과를 잡수시는지 이 노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목하자, 다시 노인은 '니이버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하더니 또 다시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방금 다 먹은 사과의 꼭지를 높이 쳐들고서는 '박사님! 방금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가요, 단가요?'하고 물었습니다. 몹시 당황한 틸리히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 보지 못했기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노인은 그 남은 사과 꼭지를 가방 속으로 던지면서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천 여 명이 사람들이 까르르 웃고 손뼉을 쳐대는 통에 강단은 삽시간에 유쾌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틸리히 박사는 조용히 강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대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큰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아서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는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어했던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의 작은 구유가 되어 나귀가 핥아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 한 그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께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만선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답니다.
2024년 주일 설교 계획
성도들이 즐겨 암송하는 간단한 성구를 중심으로 설교를 계획한다.
사순절 제4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 (어떤 일ㆍ현상(現象)ㆍ대상(對象) 등(等)이) 한 곳이나 한 대상(對象)에 또는 한정(限定)된 짧은 시간(時間)에 몰리거나 쏠리게 함. 2. (어떤 일에 정신(精神)을) 바짝 차리고 쏠리게 함. 3. (어떤 대상(對象)에 시선ㆍ이목 등(等)을) 향(向)하여 미치게 함.
집중이란 촛점을 맞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야기) 사무엘이 어려서 에덴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 원장님이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특별 부탁으로 일찍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준비물에 "검은 먹지 1장" "볼록렌즈 1개" 라는 것을 준비시켜 유치원 가방에 넣거 그 다음날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유치원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이 화를 내며 먹지와 볼록렌즈가 가짜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먹지가 타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무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후에 볼록렌즈를 햇빛에 촛점을 맞추고 먹지 위에 올려놓았더니 먹지가 연기를 피어오르며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 불평이 일어났을까요? 볼록렌즈와 햇빛과 촛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태양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가 되는 내가 촛점을 맞추지 못하므로 검은 세상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촛점을 맞출 수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라면 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거나 나를 세우려는 것은 아직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의 삶을 확산시켜라!
확산(擴散) : 넓힐 확, 흩을 산 - 퍼져 흩어짐
목회자들의 삶의 반경은 매우 좁습니다. 만나는 대상이 거의 목회자 또는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환경에서 예수를 확산시킬 기회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목회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이중직을 갖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력(集中力)을 가져야 합니다.
집중력(集中力, attentional control)은 무엇을 집중할지, 무엇을 무시할지를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확산력(擴散力)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향기가 되어 확산력을 퍼쳐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응집력(凝集力)을 갖는 것입니다.
응집력(凝集力) : 엉길 응(凝), 모을 집(集), 힘 력(力) - 어떤 단체(團體)나 조직(組織)에 속하는 구성원(構成員)들을 통합(統合)하는 힘.
(예) 모래 속에 자성이 강한 지남철을 넣고 흔들면 자석에 작은 쇳조각들이 달라 붙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의 철을 모래밭에 넣고 흔들면 아무 것도 달라 붙지 않습니다. 자석에는 자성이 있기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력(持續力)을 가져야 합니다. - 가질 지, 이을 속, 힘 력 이어갈 힘, 견딜 힘, 유지하여 오래 지속하는 힘.
예수로 살아가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흥분현상입니다. 정말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로 인하여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시련과 고통과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의 집중이 되어야 할 예수님은 누구인가?
첫째는 사도가 되신 예수님 둘째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사환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예수님은 그 집의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가톨릭 성경)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 신앙 고백의 사도이며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공동번역)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성도 여러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 8:5; 9:23;11:16; 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 19:6; 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 10:40; 눅 10:16; 요 4:34; 5:23, 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 Ned.35b; 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사도(652) 아포스톨로스(apŏstŏlŏs)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apŏstŏlŏs ] 어원 / 649에서 유래
2. '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 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Hewitt).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성경 전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꺼?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에서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본문을 정리하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믿는 도리의 사도 즉 신앙의 사도가 됩니다. 신앙의 사도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마다 사도신조를 암송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예수는 대제사장입니다.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속죄소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죽으심으로 더 이상 다른 속죄제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신앙의 표준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우화를 기억하시나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도저히 서로 융화하지 못하고 교리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처음에는 개와 고양이가 서로 자기 영역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개와 고양이와 돼지를 한 울타리 안에 넣고 어떻게 지내는가 지켜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서로 자기 영역을 유지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 하며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 거주하게 했는데 이들은 서로 융화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리가 신앙의 기준이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가 되신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깊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상속받은 후에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이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한 후에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품군으로 맞아드린 것이 아니라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고 하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 즉 신앙의 도리가 되는 기준입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감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는가를 보게 된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나오면 또 한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신가,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성소 (holy of holies)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하며, 분리되어 휘장이 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자기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공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 피를 뿌리는데 하나님께서 그 피를 받아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1년 동안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년에 또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와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답게 살라(대제사장의 예복)
금방울은 '믿음의 말'을 상징하고 석류는 '향내나는 삶'을 상징한다. 결국 대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금방울과 석류를 단 것은 대제사장은 늘 믿음의 말을 하고 향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다만 우림은 '빛'의 복수로 '강한 빛'을 의미하고 둠밈은 '완전함'을 의미하기에 아마 하나님의 판결은 가장 정확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밝은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준다. 경망스럽지 않은 밝은 표정을 하는 것과 크게 웃지는 않아도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는 것은 피로한 현대인에게 최고의 부조가 된다.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벧전2:9) 그 말씀은 특권의식을 조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남이 아닌 자신부터 더욱 성결하고 책임적인 삶을 살라는 주체의식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어떤 건축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 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의 중심이 있다. <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된다. 일본
사람이 집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한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이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한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 불 꺼진 제단이 무엇을 하는가?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교회에 와서 예배 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미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이며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홀로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가정의 중심은 제단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론의 제사장직과 의복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우리를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완전에 연결시킨 그리스도의 역할을 상징하였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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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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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시편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열왕기하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7장:7-9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요 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백성을 둘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의 나라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유는 오로지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선교사의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과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속자이며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곧, 세상에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03-31-2024(부활주일)
하나되게 하소서 에스겔 37:15-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지금은 한국교회와 한인이민교회는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권을 잡았고 김정일이 죽은 후에 또 그의 아들 김정은이 대를 이어 통치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3대 세습이라는 통치가 과연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스겔 37:17. 19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
동독의 라이프찌히(Leipzig)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오랜 세월 성 토마스교회
악장으로 활동했던 음악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20세기에 이르러 라이프찌히는 독일의 통일에 기여한 니콜라이교회로 인하여 다시
세계인의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성 니콜라이는 상공인과 중소 실업인의 성자로 그 이름의 뜻은 ‘약자들을 돌보는 방패’입니다.
라이프찌히 도시의 설립과 같은 때에 지어진 이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교회는 도시의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처럼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의 역할을 했습니다.
1981년 동독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운동’이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동독의 러시아 미사일 설치와 서독의 나토(NATO) 핵무기 설치 문제로 두 독일이 대립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15-22세)이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고, 그 모임은 매주 모이는 ‘평화를 위한 월요기도 모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여 이 기도회를 3-4년간 인도하였는데, 점차 300-400명이 매주 참석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큰 기도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도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회 참석인원은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작은 방으로 기도실을 옮겨야 했고 결국 기도운동을 중단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감독자가 나서서, 기도모임을 절대 폐지하지도 말고 더욱이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며 저들을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3-4명이 모여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동독인들의 월요 평화기도모임에
함께 하셨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저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1961년에 세워진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인들에게 통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명의 젊은이들과 기성세대들이 마음을 합한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을
동서독 통일의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Now is the time to pray).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실망하지 말고 기도할 때입니다. 이민교회와 조국교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입니다. 우리 당대에 38선의 철조망이 걷히고 독일처럼 한반도에도 통일이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통일한국이 마지막
때에 선교를 위하여 쓰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미주 전역에 기성세대와 다음세대에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부흥의 불쏘시개, 통일의 불쏘시개,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불쏘시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의
불쏘시개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나태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속 기도의 줄을 잡으세요.
동독인들이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스교회에 모여서 기도했듯이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다음세대들이 통일한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주역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독일통일의 역사에서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를 맨 앞에 놓는다.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와 성도들은 1981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평화기도회를 드렸다. 1989년 10월 9일 평화기도회 후 7만 명의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펼쳤다. 1개월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매주 통일기도를 드리고 있다.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서울목요기도모임이 5월 5일 900회를 맞는다.
루마니아, 토케스 목사
칼 바르트(K Barth)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루마니아는 1947년 공산인민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 차우세스크(N Ceausescu,1918~1989)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1965년 집권, 독재자가 되어 무자비하게 통치했다. 1989년 12월 25일 그의 부부는 총살형을 받고
27일 집행되었다. 그의 변호사마저 변호를 거부했다. 1980년대 초, 독재 권력의 인권 탄압이 한참일 때 차별 받는 동족들을
보살피기 위해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가 루마니아의 조그마한 마을 티미소아라(Timisoara) 교회에
부임했다. 전임(前任) 목사는 공산주의 정부를 지지했다. 이와는 달리 토케스 목사는 정부의 불의와 인권 탄압을 비난하며 저항했다.
주일마다 예배당 안에 교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임 당시 40명이었던 교인이 5천 명으로 늘어났다. 토케스 목사는
정보 요원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경찰관들이 체포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수 백 명의 교인들이 목사의 사택(舍宅)을 에워쌌다. 촛불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체포하러
들어갔다. 시위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찰서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군중의 숫자가 2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군 병력이 동원되어
진압하려고 발포(發砲)를 했다. 1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불구하고 군중들은 해산하기를 거부했다. 토케스 목사가
연단에 올랐다. “기도합시다.” 수많은 시민들은 무릎을 꿇었다. ‘주기도문’을 드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단합된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었다. 저항의 함성(喊聲)은 수도 부쿠레슈티로 옮겨갔다. 얼마 뒤 루마니아를 철권(鐵拳)으로 통치하던 차우세스크 폭압 정부가
와해, 붕괴되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폴란드 공산 정권은 고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저항 운동이 시작되어 공산 정권을 무너뜨렸다.
폴란드 자유 노조가 항거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동독은 1982년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칼을 쳐서 쟁기로’ 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바흐(Bach)가 감동적인 연주를 했던 적이 있는 역사적인 교회였다. 1만, 9만…,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참가했다. 베를린에 이르자 5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철의 장막을 상징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통일을 이루어 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르크스의 동상들은 한때 신(神)처럼 떠받들어졌지만 지금은 공터에 흉물로 버려져
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사 11:4)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기도, 찬양은 악의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다.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 '기도의 혁명'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루마니아의 공산주의자는 천명이 채 안되었다. 그들 중 구두만드는 직공이었던 니콜
차우세스큐란 젊은이는 전쟁 중에 줄곧 교도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석방되어 공산청년동맹의 비서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소련을 등에 업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정권을 쥔 그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통치술에 감명을 받고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나서 루마니아를 북한체제처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국민들을 거미줄 같은
조직의 틀 속에 묶어 체제를 유지했고, 4가정 중 한 명은 비밀경찰이었다. 수백만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이 투옥돼 죽어갔다.
국민들이 톱밥 섞인 빵을 사기 위하여 줄을 서 있는 동안 정부는 대부분의 식량을 수출했고,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당
간부들은 비만으로 고민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정부의 방침에 동조해 예배 참석자의 명단을 정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반석
같이 견고했던 그의 권력기반이 198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갑자기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그의 독재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허물어졌을까? 그 시작은 티미소아라시에 있던 50명 남짓한 작은
개혁교회로부터 시작됐다.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란 젊은 목사를 어수룩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신심이 깊었고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다.
그는
저녁시간에 작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엔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만 참석했지만 점점 기도가 절실해지고 나라와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기도회가 폭탄이 되어 차우세스큐 정권을
쓰러뜨릴 줄은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은 이렇게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부터 점화되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①
루마니아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1918∼1989) 공산 정권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버금가는 독재정권이었다.
실제로 차우세스쿠와 김일성은 둘이 다 살아 있었을 때에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하였다. 독재하는 수법을 서로가 배우며
일인 지배의 살벌한 지배 체제를 구축한 그들이었다. 그런데 차우세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17일에 갑자기 허물어졌다. 마냥
순종하기만 하던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글은 루마니아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북한에서도 이런 날이 오게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루마니아를 가로 질러 흐르는 베가 강이 있다. 베가 강 옆에 티미소아라(Timisoara)란 도시가 있다. 티미소아라
시(市) 한가운데에 긴 광장이 있다. 그 광장 가까이에 볼품사나운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1층의 반은 안경점이고 반은 한
개혁교회가 차지하고 있다. 그 교회 벽에 4개 국어로 다음 같이 쓴 팻말이 붙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한 독재자를 쓰러뜨린 위대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곳은 루마니아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다. 1989년 12월 17일에 일어났던 혁명이다. 백년 이백년이고 계속되어 질 것만 같았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이 어이없이 허물어진 민중혁명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1940년 7월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였을 당시에 루마니아에는 불과 750명의 공산당원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루마니아를 공산 국가로 만들어 가게 하는 데에 수백만의 국민들을 학살하며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차우세스쿠였다. 그는 제화공(製靴工) 출신으로 공산당 당원이 되어 2차 대전 중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한 추진력이 인정을 받아 그가 공산당청년연맹의 총비서로 임명 받게 되면서 루마니아의 비극은 시작 되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③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 전 그 교회를 시무하던 목사는 공산당 정부의 대변인과 같은 목사였다.
무엇이든 차우세스쿠 공산당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목사였다. 그런데 그 목사는 어느날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 이에
젊은 토케스 목사가 후임목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무신론 정권이 몰고 온 세속주의가 민족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낸 것에 대하여 늘 마음 아파하던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치유할 수 있는 개혁에의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평소에 믿고 있었다. 1989년 그가 부임하던 날에 첫 설교에서 그는 다음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
그가 힘차게 목회를 시작하여 주민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자 50명으로까지 줄었던 교인들이 2년 내에 5,000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로 모여들게 되자 공산당 정부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비밀경찰과 기성교회 목사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어 그런 볼온한 교회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여겨 토케스 목사와 교회에 경고하였다. 국가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토케스 목사는 한 방송국 프로에 출연하여
차우세스쿠 독재를 비판하였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와 같은 경우를 다루어 본 경험이 풍부하였다. 협박과 탄압으로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늘 그렇게 하여
성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젊은 목사는 달랐다. 탄압할수록 더 강력한 반독재의 설교는 하였고, 그럴수록 교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드디어 예배드리는 시간이면
비밀경찰단이 기관총을 메고 교회당 앞에 서서 교회 들어가는 교인들을 감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토케스 목사와 가족에게 식량배급이 중단되고
교인들에게 목사 추방운동에 가담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한 교인은 이에 불복하였다가 며칠 뒤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느 날 복면을 한 4명의 괴한이 토케스 목사 집에 침입하여 그를 헤치려
하였으나 목사를 지키려 와 있던 교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목사 얼굴에 상처만 내었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죽이면 그를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 뿐임을 인식하고는 그를 죽이는 대신에 1989년 12월15일까지 교회와 집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혁명이 일어나게된 2일 전이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④
12월 15일까지 교회와 사택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정부로부터 받은 라슬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는 12월 10일 주일날에 교인들 앞에서 다음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퇴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에 불응할 것이고,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강제로 추방당할 것입니다. 저들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시키려 합니다. 저들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금요일에 여러분이 이곳에 오셔서 그날 일어날 일의 목격자가 되어
주십시오. 평안하십시오. 하지만 그날에는 꼭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5일 후인 12월 17일에 비밀경찰이 토케스 목사를
강제 퇴거시키려고 출동하였다. 그들은 트럭을 몰고 왔지만 자기들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신도들이 인간 방패를 만들어 교회당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소문을 들은 시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몰려들었다. 시민들과 신도들은 춥고 배고팠지만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가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서서 견디었다. 토케스 목사가 밤 1시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집 주위에
수백개의 촛불이 둘러싸서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촛불
시위는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군중 속에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하였다.
“자유! 해방!”
이어서 금지되고 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여,
깨어나라”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면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우세스쿠와 공산주의를
타도하자!!”
12월 17일 새벽녘에 비밀경찰이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인 군중을 힘으로 밀어부치고는 교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성경을 들고 서 있는 토케스 목사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는 목사 부부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군중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티미소아라 시 광장으로 소리 없이 이동하였다. 혁명이라는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침묵 속에서 군중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청년을 남편으로 맞았으나 북한 정권에 의해 사랑할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55년을 그리움으로 지켜온 루마니아 여인이
있다. 소설가 권현숙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루마니아의 연인’에 등장하는 ‘제오르제따 미르초이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남유럽의 진주’로 불리는 루마니아는 이 지역에서 우리나라와 유일하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이다.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을 예방하며 찾은 ‘코트로체니 대통령궁’은 루마니아의 마지막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영빈관으로 사용한 곳이다. 그가 가장 존경한 이는 바로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주체사상에 감화를 받아 이를 모방한 철권통치를 했다. 전국적으로 도청 장치를 설치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했으며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차우셰스쿠식
독재의 절정은 ‘김일성 주석궁’을 본뜬 ‘인민궁전’ 건설이었다. 12층 건물에 1,100개의 방으로 이뤄진 인민궁전은 미국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로 축구장 면적의 47배에 달한다. 한편으로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지하 비밀 터널, 천장이
열리는 실내 헬기장, 그리고 독살을 방지하기 위한 환풍시설 등이 설계돼 있어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는 독재자의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루마니아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이 투입된 인민궁전 건설은 한때 ‘유럽의 빵 공장’으로
불리던 루마니아에 극심한 식량난을 야기했다. 1984년부터 이어진 공사로 루마니아 국민들은 5년간 굶주림에 시달렸다. 성난
민심은 공산 독재체제에 종지부를 찍는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인민궁전의 완공도 보지 못한 채 부인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초호화 천연 대리석과 수정 샹들리에로 치장된
인민궁전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매년 수㎝씩 가라앉고 있다고 하니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흐름은 되풀이된다(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rhymes)”고 했다.
루마니아의
지나온 역사는 오늘날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89년 시민혁명으로 독재 청산과 체제 전환에 성공한 루마니아는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으로 역내 평화와 안정에 적극 기여하고 있으며 연 5%대의 고도
성장으로 EU 회원국 중 가장 역동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고 굶주리고 피폐했던 루마니아
국민들은 이제 당당한 EU 회원국 시민으로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북한은 주민들의 생활고와 인권을 무시한 채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집착하며 지난 한 해에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려 26차례나 위반했다. 최근에는 국제법적으로 절대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해 지도자의 형인 김정남마저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규탄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은 이제라도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역사의 흐름은 되풀이된다는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02-018-2024(사순절 첫 번째 주일) 예수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7
지난 1월 7일 신년주일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자!" 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혹시 본문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본문으로 소개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장 12절을 기억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것은 계속 채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된 권세는 내가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내가 생각하고 결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 집안에 태어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자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다워야 합니다.
자녀답다는 것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너는 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렸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까? 그렇다면 훗날 나의 부모님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어른이 저를 보시더니 “아버지가 집에 계시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 아버지가 집에 계십니다.” 하고 집으로 함께 가서 아버지 누가 찾아오셨어요.“ 하고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뛰어 나오면서 ”아이구, 형님“ 하고 반갑게 맞이하시더니 제게 ”너희 큰아버님이시다!“ 하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확신했습니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구나!
왜냐하면 나를 처음 보셨던 큰아버지가 나를 본 후에 곧 아버지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아버지가 보이고 아버지를 보면 내가 보인다는 것은 곧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설교 제목은 “예수의 흔적”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는 열성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전적으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일에 앞장서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빛에 의해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에게 예수님은 제자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안수하라고 합니다.
아나니아는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가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까?
아마 이때 찬란한 빛에 의해서 어떤 신학자는 바울에게 안질이란 질병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몸에 무슨 질병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도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에 가졌던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을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몸에 “육체의 가시”를 가졌다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와 같은 고통스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를 그의 몸에서 제거하여 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바울이 교만할 수 없도록 바울을 통제하는 영적 비밀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응답받고 해결 받습니다. 만일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것도 바울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강력한 신호등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손가락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 때문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손가락은 여전히 내게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생명의 빛이 되는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빛이란 곧 주의 말씀입니다(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나의 빛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빛은 생명입니다. 그 빛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행하자!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부지휘자에게 지휘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남편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오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예수님의 흔적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몸에 남아 있는 어떤 흔적이 아니라 그 흔적 까닭에 예배를 포기할 수 없고 그 흔적 까닭에 신앙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지키려면 반드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흔적을 헬라어 성경에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가축 또는 노예의 몸에 주인의 표시를 위하여 새겨 넣는 불도장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시뻘겋게 달궈진 불도장을 찍는다면 그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예수님의 흔적은 이렇게 심각한 고통을 경험한 후에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박태준박사님이 사랑하는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그 말이 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애절한 울림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딸의 애원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 분명한 것을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24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예수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녀야 할까요?
말씀의 흔적을 새기자 말씀과 설교는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 설교를 말씀으로 착각합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새기지 않으면 육체의 생명은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나의 구원을 확증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증거는 내가 무슨 행위를 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대원 시절 종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는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어느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그의 아내와 딸이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 그림이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영상으로 그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 그림 위에 얼굴 윤곽과 눈에 표시를 한 후에 그림을 보여주며 이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하고 물었더니 정확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깨우친 후에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성경 암송카드를 갖고 다녔기 때문에 그 카드를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 카드를 주며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딸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래,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을 찾았다!” 이렇게 대답한 후에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구원을 얻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해야 한다.”며 말씀 카드를 꺼내어 말씀을 소개하라고 전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믿고 확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흔적(스티그마. stigma) στίγμα
스트롱번호 4742
1. 표. 2. 흔적. 3. 낙인
발음
[ stigma ]
어원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표, 흔적, 낙인, 갈 6:17.
구원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의 확신(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도 응답의 확신(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승리의 확신(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죄의 확신(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인도의 확신(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고 살리시기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부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나시고 성령 하나님은 빨간 불로 임하시므로 두 분 하나님의 얼굴의 이미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미지는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주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람들은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주님의 옷자락을 보았고 또 어떤 분들은 지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주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똑똑하게 보았다고 하는 분들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나마도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거의 환상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개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여 그린 그림과 사진을
모았습니다. 마침 천국에서 온 많은 천사들이 엘리야 선교사님 곁에 와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검증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안수를 받았던 분인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또 그의 곁에 있는 천사들의 견해를 들을 수 있어서 절호의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그리고 주 예수님의 400개 사진은 구글 사이트에서 찾아낸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사진들을 모은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이나 수많은 작가들이 그렸거나 전해 내려온 사진들입니다. 이 중에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런 이미지나 사진은 어떤 것일까요?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천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의 제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신장이 2m 수준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장은 2m
20cm였다고 합니다. 훤칠한 키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확실하여 시원하고 매우 자상한 모습이며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흠잡을 곳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씀을 묵상할 때,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마음에 그리며 기도한다면 훨씬 더
실감 있고 우리 주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일이 있을 때 바로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주님의 얼굴인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우리는 이 얼굴 모습을 떠올리며 금방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현재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는 김선교사님의 고백 성경에는 이미 수많은 증거들이 계시되었다. 그러멩도 불구하고 자꾸 나에게 무슨 이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을 바르게 믿지 못하는 증거라고 한다.
한국 사람으로 우리 선교회의 엘리야 선교사님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주 예수님을 만나 안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오후 5시경 그가 그의 방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책상 바로 앞에 주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크게 놀라서 주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가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못 자국이 난 양손과 양발목을 엘리야 선교사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얼떨결에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주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다. 놀라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그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안수하는 것이 목사들이 안수하는 것보다 더 낫겠지”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는 매우 감격스러워 하면서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습니다. 주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기름 부음을 받은
엘리야 선교사님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그때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상하고 따뜻한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양치는 마을에 사는 두 젊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 규율이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힌 사람에게는 불에 달군 쇠로 'ST'라는 문자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낙인이 찍히자 이런 벌칙을 알지 못하는 동네로 도망을 쳐서 그의 남의 생을 이곳저곳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나 이마에 찍힌 낙인 때문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 낯선 사람의 이마에는 'ST'라는
낙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러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는 그 수치를 당하므로 그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생애를 추방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은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가 양을 훔친 것 때문에 당한 수치를 보상했습니다.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내 인격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들
과 이웃을 돌보며 자기 자신을, 이웃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헌신과 봉사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낯모를 사람이 그 마을에 와서 이 노인의 이마에 찍힌 'ST'라는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어느 중년 신사는 "글쎄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분의 이마에 표시되어 있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ST'란 글자는 성인 'Saint'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
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양을 훔친 벌로 머리에 찍힌 낙인을 성인의 약자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희랍의 전설 가운데도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애통은 확실히 가치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