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설교 자료 사랑 죄 회개 구원 믿음 성경 성령



1월 4일(신년주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 남긴다는 속담을 생각하면서 과연 나는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것인가?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성경공부와 설교를 했는데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태신앙으로 성장하면서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제 자신이 기억되는 설교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의 자녀 교육 방법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것처럼 성경을 읽는 방법을 전해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어떤 색의 필터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칠(7)이란 수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수 개념에 따라 일곱 가지 용어에 의한 성경을 읽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1. 사랑, 2. 죄, 3. 회개, 4. 구원, 5. 믿음, 6. 성경, 7. 성령
일곱 가지 필터를 사용하여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 저자에 의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베드로전서 4:8)
죄(로마서 6:23)
회개(마태복음 4:17)
구원(사도행전 16:31)
믿음(로마서 10:17)
성경(디모데후서 3:16-17)
성령(사도행전 1:8)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첫번째 설교를 소개합니다.
우선 사랑의 성경적 정의는 '덮어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을 덮어줄까요?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덮어줄까요?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기억하십니까?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덮어주는 것은 죄인을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자성어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역지사지 - 다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둘째는 개성존중 -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셋째는 신통지력 - 놀라운 힘과 능력을 갖고 있는 것 


하나님의 사랑 -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

1968년 새가정이란 월간지에 소개되었던 내용 중에 사형수 장왈복에 대한 간증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영치금이 없어 사형 후에 그의 시신을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판매한 후에 그 돈으로 감방에서 먹고 싶은 것을 구하여 먹고 있었는데 감방의 동료들이 먹는 것을 달라고 하면 쌍욕을 하여 야 이 새끼야 이것이 내 몸을 팔아서 먹는 것이야, 눈을 확 뽑아 버릴테다.
이렇게 잔인하 사형수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누님이 면회를 신청한 후 장왈복에게 성경책을 주며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영치금이지 복음이 아닌지라 그 이후부터는 누님의 면회신청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제일 먼저 누님이 처음으로 면회 신청을 하면 아예 그 신청을 무시하고 접견실에 나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한번은 간수가 장왈복에게 자네가 인간이라면 누님의 면회를 거절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왈복은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
간수가 당신 누님이 면회를 거절당하면 집으로 돌가지 않고 밤새도록 감옥의 담장을 붙들고 밤을 새워 기도한 후 면회시간이 되면 제일 먼저 면회 신청을 하는 것을 네가 알고 있느냐?
간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장왈복은 마음을 바꾸고 누님의 면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잔인한 사형수라고 외면하지만 누님은 그 동생의 영혼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감옥의 담벼락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며 그의 동생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 바꿀 역, 땅 지, 생각 사, 갈지

하나님의 사랑은 역지사지
처지(處地)를 바꾸어서 생각하여 봄


고난을 말할 때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가 고난입니다.

큰 집에서 거주하다 사업이 망하여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흩어져 살아가는 것이 고난이라고 생각하듯 하나님이 하늘 보좌를 떠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시는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왜 사람의 몸으로 고난 가운데 오셨습니까?
역지사지라고 하겠습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사건이라고 표현합니다.
한자어의 뜻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성육신'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이 신의 모든 성품을 그대로 지닌 채,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성경은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이 인간의 특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탄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지니신 채, 육신적으로도 흠이 없는 상태에서 탄생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칼케돈 회의(451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동정녀를 통하여 탄생하신 것에 대한 교리를 확실하게 정리하여 공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2항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요리문답 제22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참 몸과 이성적인 영혼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복중에서 잉태되어 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하와이 몰로카이 군도
당시 문둥병자들을 격리시킨 장소
다미앙(Pater Damiaan, 1840. 1. 3~1889.4. 15일)
벨기에가톨릭사제(신부)로, 흔히 다미앵 신부
본명은 요제프 데 뵈스터(Jozef De Veuster)
 

개성존중(個性尊重) - 낱 개, 성품 성, 높을 존, 무거울 중

개성(個性)을 존중(尊重)함.

현대인들은 개성을 개 같은 성질이라고 정의합니다.
성경에서 개 같은 성질을 소유한 여자사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은 거리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그 여자를 아내를 맞이하라고 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고멜은 신랑 호세아를 신혼방에 남겨두고 외출하여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고 돌아와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합니다. 

신통지력(神通之力) 귀신 신, 총할 통, 갈지, 힘력
헤아릴 수 없는 변화의 재주를 가진 힘.

 

나사로가 죽은 후 동굴 무덤에 안장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 무덤 앞에서 돌문을 옮기라고 하신 후에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던 나사로가 온 몸을 수의로 감은 상태로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것이 얼마나 신통지력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까?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르다와 미라아가 평소에 예수님과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죽음 후의 세계는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었지만 아직도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확실한 신앙이 없었다면 이 시간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던 신통지력의 힘과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송재천목사님의 아들 송문호군의 이야기
뇌 종양 수술 후 실명하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아들이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의 추한 것 더 이상 볼 수 없게 하시므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례

디모데후서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2026년 한 해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헌신하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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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예화) 장왈복형제를 사랑한 그의 누이
사형수로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흉악범
세상이 외면하고 심지어 그의 가족들도 외면한 상태에서 영치금이 없기 때문에 사형 후에 그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넘기기로 하고 필요한 장기는 미리 선불을 받고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구하여 먹고 즐기는 감옥에서도 악질로 소문났던 사형수
가난한 그의 누님이 면회를 신청했을 때 혹시나 하고 접견실로 나갔으나 그가 원하는 돈 영치금은 없고 오직 한 마디 이제라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고 접견실을 나가버렸습니다.
그 다음 날 면회 시간이 되면 그의 누님은 또다시 면회를 신청합니다.
그러면 재주 없다고 하며 접견실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매일 반복합니다.
한 번은 간수가 장왈복에게 자네 누님이 매일 밤 감옥 밖에서 밤을 새우고 면회를 신청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 누님의 정성을 생각해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동생이 면회를 거절하고 감방으로 돌아간 후에 그 누님은 감옥 밖에서 감옥의 담에 손을 대고 밤을 새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동생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날 장왈복은 누님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접견실에서 누님에게 울며 호소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이제라도 예수를 믿겠습니다.
오늘부터 집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주무시고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고향에 내 유산이 있다면 모두 교회에 바쳐주세요
그리고 사형장으로 끌려 갈 때에는 찬송을 부르며 회개한 죄인으로 형장으로 끌려 갔다고 합니다.


인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패-패(敗-敗)적인 사람인데 자기도 못되고 남도 못되게 하는 인간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너 죽고 나 죽자”,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패-승(敗-勝)적인 사람인데 남은 못되더라도 자신만 잘되면 된다는 유형입니다.
세상 사람의 상당수가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승-승(勝-勝)적인 사람으로, 자기도 잘되고 남도 잘되게 하는 인간형입니다. 비록 세상에 드물기는 하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바로 이들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들도 바로 이러한 승-승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도 복 받을 행동을 하고, 남들도 복 받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줍니다. 시온에 거하며 진리로 거듭난 우리들은 패-패적이거나 패-승적인 모습에서 결국은 승-승적인 모습으로 모두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진정한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패-패적 또는 패-승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나도 잘되고 형제도 잘되게 하는 승-승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장 5∼8절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거룩한 품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의좋은 형제”

전래되는 민담 가운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두 형제는 부모님께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에서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형제는 그 익은 곡식을 거두어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가 집에 돌아가 가만 생각해 보니 형은 이미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린 몸이고 자신은 홀몸인데 추수 때 거둔 곡식을 반으로 나눈 것은 아무래도 형에게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밤에 몰래 자기 곳간의 볏단을 지고 가서 형의 곳간에 쌓아 놓았습니다.

한편 형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은 이미 안정된 가정을 꾸렸지만 동생은 아직 홀몸이라 새로 살림을 장만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 곡식을 반반 나눈 것은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형도 밤에 살짝 자기 곳간의 볏단을 지고 가서 동생의 곳간에 쌓아 놓고 왔습니다.

해가 뜨고 다음날 형제는 자기의 곳간의 볏단 높이가 어제와 똑같은 데에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밤에 또 볏단을 지고 상대방의 곳간에 쌓아 놓습니다. 다음 날에도 물론 볏단의 높이는 같았습니다. 그날 밤에도, 그 다음 날 밤에도 형제는 볏단을 계속 나르다가 결국 길목에서 서로 마주칩니다. 서로의 진한 우애를 확인한 형제는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형제의 우애 있는 행동은 승-승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승-승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만약에 형제가 자신만 잘 되기를 바라는 패-승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형은 식구가 많은 자신과 똑같이 가져간 아우를 질책했을 것이고 아우는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않고 야단만 치는 형에게 반발하는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애는 깨어지고 화목하지 못한 불행한 형제가 되었겠지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 133편 1∼3절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아름답게 보시는 모습은 바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시온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시온에 거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형제의 이익을 더 먼저 챙겨준다면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서로 나눠주고 돌봐주며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형제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 양 아프게 느끼며, 자신의 어려움보다는 형제의 어려움을 더 먼저 걱정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겠습니까?

그런데 식구들의 입장과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기분과 감정에 치우쳐 형제에게 아픔을 준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승-승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형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그 즉시 “나는 높고 형제는 나보다 낮다”는 수직적인 관계가 성립되어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의좋은 형제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형의 입장이 되어 아우를 돌아보고, 아우의 입장이 되어 형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은 마귀가 절대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사랑을 실천하여야겠습니다.


사랑에는 화합과 승리가 내재되어 있다


6·25전쟁 당시의 일입니다. 강원도 철원 지역에 “피의 능선”이라고 불리는 고지가 있었습니다. 휴전 직전 조그만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남과 북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져 낮에는 태극기가 걸리고 밤이면 인공기가 걸리던 곳이었습니다.

한 국군 부대가 그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아 필사의 각오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 국군들이 밤낮없이 뜬눈으로 그곳을 지켰지만 매일 계속되는 전투 속에 보급로가 끊어져 물과 양식이 바닥나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총탄에 맞은 한 병사가 괴로움에 신음하며 애타게 물을 찾았습니다. 전우의 고통을 바라본 부대원들은 모두가 자신의 수통을 흔들어 보았지만 물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물을 아끼고 또 아껴 마신 한 병사가 몇 모금 남지 않은 물이 담긴 수통을 건네주었습니다.

수통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려던 부상병은 문득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들을 느꼈습니다. 목말라 있던 전 부대원들의 눈길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차마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꿀꺽꿀꺽” 마시는 시늉만 하고서 옆에 있던 소대장에게 수통을 건네 주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소대장도 부상병의 뜻을 알고서는 “꿀꺽꿀꺽” 마시는 소리를 내고서 옆의 병사에게 수통을 건넸습니다. “꿀꺽꿀꺽”, “꿀꺽꿀꺽” ….

모든 병사들이 한 모금씩 돌려가며 마시고 마지막으로 수통 주인이었던 병사에게 수통이 돌아왔을 때 수통의 물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모두가 마시는 척만 하였지만 신기하게도 갈증이 씻은 듯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았습니다. 그들은 사기 충천하여 끝까지 고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나만 마시고 나만 목을 축이겠다는 패-승적인 심성이었다면 고지는 빼앗기고 그들은 모두 전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이 그들 모두를 살렸습니다. 사랑은 이런 기적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사례가 어느 곳보다도 많이 나와야 하는 곳이 바로 우리 시온입니다. 승-승적인 심성을 가질 때 어려움은 기회로 전환됩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나 피의 능선에 얽힌 실화를 살펴볼 때에도 사랑이 있으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화합하고 승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화합과 승리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승-승적인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장 1∼4절





 대언자 · 중보자 · 보혜사 비교 표

구분  대언자 (Advocate) 중보자 (Mediator) 보혜사 (Paraclete)
기본 의미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두 관계 사이를 잇는 자        위로자, 돕는 자, 변호자
성경 원어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μεσίτης (메시테스)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주요 대상 하나님 앞에서 성도            하나님 ↔ 인간        성도
사역의 방향    위로 (하늘을 향함)     양방향 (하나님과 인간 사이)        내적 (성도 안에서)
주된 역할     죄인을 변호함          관계를 화목케 함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함
대표 성경          요일 2:1           딤전 2:5          요 14:16
담당 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사역 근거      십자가의 의        속죄와 언약         예수의 말씀
지속성         영원함     단회적·완전함         성도 안에 항상 거하심
신자의 경험   담대함, 용서의 확신      하나님과의 화평          위로, 인도, 능력

 핵심 차이 요약

  • 대언자 : 법정적 이미지
    →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내 피로 의롭다”고 말씀하심

  • 중보자 : 관계적·언약적 이미지
    → 끊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

  • 보혜사 : 목회적·내적 이미지
    → 성도 안에 거하시며 가르치고 위로하심 

한 문장 통합 정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자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땅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이시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며 변호하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표현.

1. 대언자(代言者)의 의미

  • 대언자는 말 그대로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중보자를 뜻합니다.

  • 헬라어 성경에서는 주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표현되며,
    변호인, 위로자, 중재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히브리서 7:25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3. 예수 그리스도는 왜 대언자이신가

  1. 완전한 의로우심
    → 죄 없으신 분만이 죄인을 변호할 수 있음

  2. 속죄의 근거를 가지심
    →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하심

  3. 하나님 우편에서 사역하심
    →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심

4. 구약의 중보와의 차이

  • 구약의 제사장: 반복적 제사, 불완전한 중보

  • 예수 그리스도:
    단번의 제사 + 영원한 대언자
    (히브리서 9:12)

5. 신앙적 의미

  • 우리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음

  •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함

  •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언에 근거함

  •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간구하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십니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죄 지은 인류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변호하고 중재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예수님의 중요한 역할을 의미하며, 특히 요한일서 2:1절에서 강조되듯,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화목하게 하시는 구원자이자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Advocate / Paraclete) :

 '파라클레토스(Paracletos)'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으며, '위로자', '돕는 자', '변호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변호하고 긍휼을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 죄 사함의 길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죄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구원자 :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 둘이 합쳐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즉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성경적 근거 :
  • 요한일서 2:1 (요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예수님의 가르침 : 요한복음 14:16, 26 등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보혜사 성령도 넓은 의미에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론적으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며,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십니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죄를 사하게 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는 주로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하며, '파라클레토스'(위로자, 변호자)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자이자 화목제물이 되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 및 변호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입니다.
  • 죄 사함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 성령과의 관계: '파라클레토스'(대언자/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오셨으며(요한일서 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가 대언자라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변호자'이자 '중보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주로 기독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음역하여 번역한 단어이며 '곁에 부름을 받아 돕는 자', 즉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승천 후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신자들 곁에 머물며 죄를 깨닫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주요 의미 및 역할
  • 어원: '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 부름 받은 자'를 의미하며, 고대 법정에서 변호사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
  • 성령님의 사역:
    • 죄와 의에 대해 세상과 사람을 책망하고 깨우치심 (요한복음 16:8-11).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심 (요한복음 14:26).
    • 연약함을 도우시고 친히 간구하심 (로마서 8:26).
    • 사단의 세력에 맞설 힘과 용기를 주심.
  • 번역어 논란: 한자어 '보혜사'(保護, 惠, 師)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스승'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원어적 의미와 성경적 맥락을 고려하면 '조력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에 더 중점을 둡니다. 

요약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신자들의 곁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돕는 인격적인 조력자입니다


1. 보혜사의 뜻

  • 헬라어 :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의미 :

    • 곁에서 돕는 자 
      위로자
      변호자
      중보자
      돕는 분(Helper)

👉 법정 용어로는 변호인, 삶의 현장에서는 동행하는 돕는 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약속

  •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

  • 요한복음 16:7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3. “또 다른 보혜사”의 의미

  • “또 다른” = 알로스(ἄλλος)
    본질과 성격이 동일한 또 다른 분

  •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첫 번째 보혜사

  • 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본질의 또 다른 보혜사

👉 그래서

  • 예수님: 하늘에서 대언자

  •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4. 보혜사의 사역

  1. 가르치심 – 진리로 인도 (요 14:26)

  2. 생각나게 하심 – 말씀을 기억나게 함

  3. 위로하심 – 환난 중에 동행

  4. 책망하심 – 죄·의·심판에 대해 깨닫게 함 (요 16:8)

  5. 증언하심 –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6. 능력 주심 – 증인의 삶을 살게 함 (행 1:8) 

5.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 성령(보혜사)
하늘에서 중보 우리 안에 내주
아버지 앞에서 대언 성도를 도우며 인도
단번의 속죄 그 구원을 적용 

한 문장 요약

보혜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지금도 성도와 함께 하시며,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변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Parakletos)
는 '곁에 부름받은 자'라는 뜻으로 위로자, 조력자, 변호사, 대언자 등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주로 성령님을 가리키고,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자'로 예언자를 뜻하지만, 넓게는 성령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보혜사의 역할 중 하나(대언)를 포함합니다. 즉, 보혜사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위로, 인도, 보호, 대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대언자는 그 사역 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에 초점을 둔 명칭입니다. 

보혜사 (Parakletos)
  • 그리스어 의미: 곁에 불러 도움을 주는 자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
  • 성경적 의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님을 지칭하며 신자들과 함께 거하며 인도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분.
  • 한자 의미: '보호할 보(保)', '은혜 혜(惠)'로 '은혜로 보호하고 돕는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 
대언자 (Prophetes, 예언자)
  • 의미: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맡아 대신 전하는 자.
  • 역할: 미래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역할. 
  • 포괄성: 보혜사는 성령님의 모든 사역을 담는 더 넓은 개념이고, 대언자는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여러 일 중 '말씀을 선포하는' 특정 사역에 집중된 명칭.
  • 일치: 보혜사 성령님이 바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시므로, 성령님을 대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결론: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며, 그 보혜사로서 '대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와 대언자의 차이

1. 공통점

  • 둘 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서 나온 말

  • 뜻: 변호자, 중보자, 돕는 자

  •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곁에 서서” 일하신다는 의미 

2. 차이점 핵심 정리

구분 대언자 보혜사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어디서 일하시는가 하나님 아버지 앞(하늘) 성도 안과 곁(땅)
주된 사역 죄에 대한 변호와 중보 삶 속에서의 도움과 인도
근거 십자가의 피와 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
초점 구원의 확보 구원의 적용

3. 성경 근거

  • 대언자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4. 한 문장 요약

대언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보혜사는 땅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5. 신앙적 적용

  • 실패했을 때 → 대언자는 “이미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고

  • 낙심했을 때 → 보혜사는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붙드십니다.




1월 3일(토)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3875)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s 상반절의 '하마르테테'('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빛의 성질 

빛은 직진, 반사, 굴절, 분산의 기본 성질을 가지며,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갖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빛이 똑바로 나아가는 직진
표면에서 튕기는 반사
다른 매질에서 꺾이는 굴절
파장에 따라 색이 나뉘는 분산이 대표적이며, 
이는 빛이 파동(전자기파)이면서 동시에 입자(광자)의 성질을 모두 갖기 때문입니다. 
빛의 기본 성질을 설명하는 이 영상은 빛의 직진, 반사, 굴절, 분산 현상에 대해 설명합니다:

주요 빛의 성질
  • 직진(Rectilinear Propagation) : 
    빛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으면 항상 곧게 나아가는 성질로,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가 이에 해당합니다.

  • 반사(Reflection) 
    빛이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현상으로, 거울에 상이 맺히는 이유입니다.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 굴절(Refraction)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물 등)의 경계면을 통과할 때 진행 방향이 꺾이는 현상으로, 물속의 물체가 실제보다 떠 보이는 이유입니다.

  • 분산(Dispersion) 
    굴절 시 빛의 파장(색깔)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달라져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현상으로, 프리즘을 통과하며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입니다.

  • 회절(Diffraction) : 파동인 빛이 장애물의 모서리나 좁은 틈을 지날 때 휘어 퍼져나가는 현상입니다.

  • 간섭(Interference) & 회절(Diffraction)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빛이 파동처럼 중첩되거나 휘어지는 현상입니다.

  • 산란(Scattering) 
    빛이 불규칙한 입자나 표면에 부딪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현상으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레일리 산란)입니다. 
빛의 이중성 (입자성 & 파동성)
  • 파동성 :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수직으로 진동하며 진행하는 '전자기파'임이 밝혀졌습니다. 굴절, 간섭, 회절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됩니다.

  • 입자성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자(photon)'라는 에너지 덩어리(입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광전효과와 같은 현상은 빛의 입자성을 보여주며, 반사 현상도 입자처럼 튕겨 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성질은 물리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이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파동성과 입자성 (이중성)

  • 빛은 파동처럼 간섭·회절 현상을 보이면서도

  • 동시에 **입자(광자)**처럼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 작용합니다.
    →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합니다. 

2. 직진성

  • 균일한 매질에서는 빛이 직선으로 진행합니다.

  •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반사

  • 빛이 물체 표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현상입니다.

  • 거울에서 “입사각 = 반사각”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4. 굴절

  •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 물 등)을 통과할 때 속도 변화로 방향이 꺾이는 현상입니다.

  • 렌즈, 안경, 현미경의 원리입니다. 

5. 분산

  • 빛은 파장에 따라 굴절 정도가 달라져 여러 색으로 나뉩니다.

  • 프리즘에서 무지개색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6. 간섭과 회절

  • 간섭: 두 빛이 겹칠 때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현상

  • 회절: 좁은 틈이나 가장자리를 지날 때 빛이 퍼지는 현상
    → 빛의 파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7. 편광

  • 빛의 진동 방향이 한쪽으로 정렬된 상태입니다.

  • 선글라스, LCD 화면에 활용됩니다. 

8. 속도

  • 진공에서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km로, 자연계에서 가장 빠릅니다.  

9. 에너지와 파장

  •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크고(자외선, X선),

  • 파장이 길수록 에너지가 작습니다(적외선, 라디오파).


빛의 3대 성질 

1. 굴절 : 렌즈, 간이 사진기
2. 반사 : 거울
3. 직진 : 그림자, 일식, 월식, 바늘구멍 사진기, 엑스선

-물체를 본다=빛을 감지한다=광원(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의 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거나, 광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눈에 들어옴.(망막에는 뒤집힌 형태로 상 맺히지만, 뇌는 똑바로 인식)

 

-달은 광원 X > 달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임.

-달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을 육지(대륙, 달의 바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운석구덩이가 많이 분포되어 있음.(달이 공기가 없어서 풍화작용, 기상작용 없고 운석 구덩이가 그대로 존재)
-수성도 대기 없어서 바람 안 불고, 온도차 크며 운석구덩이 있음.
-금성은 이산화탄소 대기로 뒤덮여서 더움.
-지구는 공기가 있어서 하늘이 파랗게 보임.(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멀리가지 못하지만 많이 산란됨.)

-태양과 물체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물체의 위치와 상관없이 그림자의 크기는 거의 변하지 않음.
-일식(태양-달-지구)은 달그림자가 생기는 좁은 범위에 있는 지역에서만 관찰되지만 월식(태양-지구-달)달이 뜨는 모든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음.

 

-속력이 느린 매질에서는 굴절각이 더 작음.(입사각, 반사각, 굴절각은 각각 수직선(법선)을 기준으로 함)
-빛을 통과시키면 투명하고,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흡수 또는 반사하면 불투명함.(불투명할 때 색깔은 반사된 빛의 색임)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빛이 모두 섞여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가 갖는 의미와 상징

1. 서론

빛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단계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는 단순히 물리적 빛의 창조를 넘어,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담고 있다. 

빛의 창조가 성경 전체에서 갖는 의미와 상징을 성경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과 실천적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2. 빛의 창조 : 성경적 배경과 맥락

1) 창조 이야기에서 빛의 첫 번째 위치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로 묘사된다. 
이는 빛이 혼돈과 흑암(창 1:2)을 물리치고 창조 질서를 확립하는 시작임을 보여준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기초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

2) 빛과 어둠의 구분

창세기 1:4는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빛과 어둠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한다. 
이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혼돈을 물리치고 조화와 구조를 부여하시는 창조적 능력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의 구분은 성경 전체에서 선과 악, 구속과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이어진다.

3. 빛의 신학적 의미

1)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함,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본질을 나타냄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드러낸다.

2) 생명과 소망의 상징

빛은 생명과 소망의 상징으로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1:4-5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빛을 강조한다. 
빛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생명을 제공하고, 죄로 인해 어둠에 갇힌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성경 전체에서 빛의 상징적 의미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빛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을 보여준다. 말씀은 성도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공한다.

2) 구속사적 빛 :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빛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며,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제공하신다. 이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연결하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사 9:2, 마 4:16).

3)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
빛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출애굽기 13:21에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이 빛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3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의 빛이 된다고 묘사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5. 빛과 인간의 역할

1) 성도의 빛된 삶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16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도들이 어둠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2) 복음 전파의 빛
사도행전 13:47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세웠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예언한다. 빛은 복음의 전달과 구원의 확장을 상징하며, 성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6. 빛과 어둠의 대조: 종말론적 의미

1) 심판과 구원의 상징
빛과 어둠은 종말론적 문맥에서도 중요한 대조를 이룬다. 데살로니가전서 5:5은 성도들을 “빛의 자녀”로 부르며, 심판 날에 구원받을 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반면, 어둠은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마 8:12).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때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빛
요한계시록 22:5에서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빛이 종말론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는 창조에서 시작된 빛의 의미가 종말에 완성됨을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한다.

7. 결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빛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생명과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상징으로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성도의 삶과 복음 전파에 있어서 빛의 역할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천적 도전을 제공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그리고 새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준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빛의 창조가 단순한 우주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 계획의 서막임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이 짧은 문장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자 시작이야.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고, ‘천지’는 공간과 모든 존재를 뜻해.
즉, 시간과 공간, 우주 전체가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된 거야. 

✨ 6일 동안의 창조 과정 요약

하나님은 총 6일 동안 창조 활동을 하시고, 7일째는 쉬셨어

☀️ 제1일 – 빛의 창조

“빛이 있으라!” - 오르 / 동사형 - 드러내다 

  • 혼돈과 흑암뿐이었던 세상에 빛이 생김
  • 빛과 어둠이 구분됨 → 낮과 밤의 개념 등장
  • 아직 해, 달, 별은 없음! 이건 ‘빛’ 그 자체야 (하나님의 임재나 질서의 상징)

📝 포인트: 빛은 모든 창조의 시작, 어둠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첫 걸음!

אוֹר Storng number 216

1. 빛.  2. 아침빛.  3. 태양빛 혹은 태양 자체  
Pronunciation [ ’ôwr ]  
Etymology  / 21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22회 사용 

🌊 제2일 – 하늘의 창조

  • 물을 나눔: 위의 물(구름, 하늘)과 아래의 물(바다, 지면의 물)로
  • 이 사이를 궁창(하늘)이라 부르심

📝 포인트: 공간 창조! 혼돈의 물에서 하늘을 분리해 내셨다는 점이 중요. 

🌱 제3일 – 땅과 식물의 창조

  • 바닷물을 한곳에 모으고, 육지와 바다 구분
  •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등장

📝 포인트: 땅이 처음 등장하고, 식물부터 자라기 시작해! 생명체의 시작! 

🌞 제4일 – 해, 달, 별의 창조 / 광명체 - 마오르

  • 낮을 주관할 해, 밤을 주관할 달, 계절과 시간 측정할 별 창조
  • “징조와 사시와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포인트: 빛 자체(1일)와 광명체(4일)는 다름!
시계와 달력이 생긴 날이기도 해.


מָאֹר Storng number 3974

1. 빛.  2. 등잔  
Pronunciation  [ mâʼôwr ]  
Etymology  / 복수אוֹר,מְאֹרֹות,מְאֹרִים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9회 사용 

🐟 제5일 – 물고기와 새 창조

  • 바다엔 물고기, 하늘엔 가 가득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처음 등장

📝 포인트: 바다와 하늘 생물이 드디어 생겨남. 축복의 첫 언급!  

🐘 제6일 – 동물과 사람 창조

  • 육지 동물 창조 (짐승, 기는 것들 등)
  • 가장 마지막에 사람 창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
  • 사람에게 식물 먹을 것을 주심

📝 포인트: 인간은 창조의 하이라이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능력의 상징  

🛏️ 제7일 – 안식

  •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심
  •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포인트: 안식일(Sabbath)의 기원이 이 날!
우리 삶에도 쉼과 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줘.  

📌 정리 요약표

 일     창조 내용                              포인트 요약

1일       빛           질서의 시작, 낮과 밤 구분
2일    궁창 (하늘)              위와 아래 공간 분리
3일  육지, 바다,  식물           생명이 뿌리내릴 공간
4일   해, 달, 별              계절과 시간의 질서
5일  물고기, 새             생물의 시작과 축복
6일  육지 동물, 인간     창조의 완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7일     안식            쉼과 거룩함, 균형의 시작 

 창세기 천지창조의 메시지

  • 혼돈 → 질서 :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함
  • 빈 곳 → 채움 : 공간을 만든 후, 그 공간에 생명을 채움
  • 축복과 안식 : 창조된 세계는 축복받았고,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가르침


1월 2일(금)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1세기 말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 가르침에 대응하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장 5절은 이 서신의 핵심 선언 중 하나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로 번역된 '호 테오스 포스 에스틴'(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로 번역된 '스코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우데미아'(σκοτία ἐν αὐτῷ οὐκ ἔστιν οὐδεμία)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중 부정('우크... 우데미아')의 사용으로, 이는 '전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질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떠한 형태의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순수성, 진실성,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명하시고, 그분 안에는 어떠한 속임이나 악도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4:7과 깊이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이 있으리로다."
 
스가랴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요한은 그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선언합니다. 
두 구절 모두 빛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영적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명확성이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진리"와 "나의 진리"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는 이러한 모호함이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으십니다.

현대 기독교 작가이자 신학자인 팀 켈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완전히 진실하시고, 완전히 선하시며, 완전히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 안에는 숨겨진 의제나 어두운 비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켈러의 이 통찰은 요한일서 1:5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빛 되심은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어두운 데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빛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현대적 예로,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활동가인 코넬 웨스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빛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웨스트는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그분 안에 어둠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에 맞서 담대히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과 활동은 요한일서 1:5의 진리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는 진리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진리 안에서 걷기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진실하게 살며, 어둠의 행위를 피합니다.

지속적인 정화 추구하기 :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지속적인 정화와 성화를 추구합니다.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시편 139:11-12는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어둠이 어둡지 아니하며 밤이 낮과 같이 밝으리니 어둠과 빛이 주에게는 같으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빛은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도전은 우리가 이 빛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성경(요한일서 1:5)의 선언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며 죄가 없으시고,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둠(악, 죄)과 대비되며, 믿는 자는 그 빛을 따라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빛을 경험하고 따르게 됩니다. 
주요 의미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 새빛교회 홈페이지
    • 거룩함과 완전함: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며, 이는 죄나 악이 없으심을 의미합니다.
    • 진리와 계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보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 생명의 근원: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12).
  • 믿는 자의 삶: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이는 진리를 이해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뜻합니다.
  • 죄와 어둠의 대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지으면 거짓말하는 것이며, 빛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 1:5-7). 

요약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 본성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며,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근원이심을 선포하는 성경의 핵심 진리입니다.




서론 │ Introduction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 
‘소통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범주화할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 본문과 개혁신학의 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1. 비소통 속성 │ Incommunicable Attributes

1.1 자존성 (Ase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עַצְמוּת’가 직접적 사용은 없으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에서 자존성이 드러남 (출애굽기 3:14)임.
  • 성경 배경: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심을 계시하심.
  • 개혁신학 정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CF) 제4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달리 지으신 이 없이 스스로 계시는 분임.”

1.2 불변성 (Immutabil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לֹא תִמּוֹט’(창조 이전부터 변함 없음) 개념이 잠언 10:29 등에서 간접 언급됨.
  • 성경 배경: 말라기 3:6 “내가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함”으로 확증됨.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질·지식·의지·언약에서 영원히 변함없음(WCF 제2장).

1.3 전지성 (Omniscience)

  • 원어 분석: 헬라어 ‘παντογνῶσις’(파롭시 사용 없으나 ‘πᾶν’(모든) + ‘γινώσκειν’(알다) 어근) 개념이 시편 139편에 나타남.
  • 성경 배경: 시편 139:1–4, “주의 알지 못하심이 없나이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과거·미래에 걸쳐 완전하고 즉각적으로 아심(WCF 제2장 해설).

1.4 전능성 (Omnipot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דַּי’(전능하신 자, Shaddai) 어원은 ‘산의 하나님’ 또는 ‘전능하신 분’ 의미가 논의됨.
  • 성경 배경: 창세기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 무한한 능력으로 제한받지 않음(WCF 제2장).

1.5 편재성 (어디에나 계심, Omnipres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מַיִם וּשְׁאוֹל’(시편 139:8) 언어에서 모든 공간에 함께 하심을 표현함.
  • 성경 배경: 시편 139:7–10, “주의 영이 가는 곳마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물리적·영적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만유에 충만하심(WCF 제2장 해설)

1.6 영원성 (Eternity)

  • 성경 근거: 시편 90:2, 이사야 57:15
  •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심.

2. 소통 속성 │ Communicable Attributes

2.1 거룩 (Holiness)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קֹדֶשׁ’(קָדַשׁ, ‘구별하다’) 
  • 성경 배경: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죄와 더럽힘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구별됨(WCF 제2장).

2.2 사랑 (Love)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γάπη’(아가페)와 히브리어 ‘אַהֲבָה’(아하바)에서 ‘호의’와 ‘헌신’의 의미가 결합됨.
  • 성경 배경: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성상 사랑이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심(WCF 제2장 해설).

2.3 은혜 (Grace)

  • 원어 분석: 헬라어 ‘χάρις’(카리스), ‘은총·호의’ 의미.
  • 성경 배경: 에베소서 2:8–9,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거룩과 정의에 반해 긍휼을 베푸시는 속성임(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호의).

2.4 긍휼 (Merc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רַחֲמִים’(라하밈), ‘자애·연민’ 강조.
  • 성경 배경: 출애굽기 34:6,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동정과 자비를 간절히 나타내심.

2.5 정의 (Justi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צֶדֶק’(쎄덱), ‘올바름·공정함’.
  • 성경 배경: 시편 89:14, “정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법에 따라 모든 피조물에게 올바른 보응을 행하심.

2.6 진리 (Truth)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감추어짐에서 벗어난 실재’.
  • 성경 배경: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말씀에 있어서 오류가 없으심.

2.7 지혜 (Wisdom)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חָכְמָה’(호크마), ‘분별·조화’.
  • 성경 배경: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풍성한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알맞은 방식을 아심.

2.8 주권 (Sovereignty)

  • 원어 분석: 특별한 단어 대신, ‘통치’(מַלְכוּת, 말쿠트) 개념으로 표현됨.
  • 성경 배경: 다니엘 4:35, “하늘의 군대를 다스리는 이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인이며, 그의 뜻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짐.

Conclusion

하나님의 속성은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뉘며, 각각 성경이 계시하는 바와 개혁신학의 정의가 일치함을 알 수 있음.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통해 깊이를 더했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신뢰할 수 있음.

Introduction 

The attributes of God can be broadly categorized into two groups: Incommunicable Attributes and Communicable Attributes. Each of these attributes is clearly revealed in Scripture and defined in depth by Reformed theology. In the following main section, we will organize these attributes systematically, providing their biblical backgrounds and etymological analysis in the original biblical languages (Hebrew and Greek).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눌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에서 명확히 계시되며, 개혁신학에서 깊이 있게 정의됨. 다음 본론에서는 이 속성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성경적 배경 및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함께 제시함.


1. Incommunicable Attributes │ 비소통 속성

1.1 Aseity (자존성)

  • Etymology: While the Hebrew word עַצְמוּת (self-existence) does not appear directly in Scripture, the concept is clearly revealed in Exodus 3:14: “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
  • Biblical Background: God declares His self-existence and independence from all created things.
  • Reformed Theolog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4 – God is not created but exists of Himself eternally and independently.

1.2 Immutability (불변성)

  • Etymology: Hebrew concept לֹא תִמּוֹט (not to be moved or changed) conveys the immutability of God's being, as in Proverbs 10:30.
  • Biblical Background: Malachi 3:6 – “For I the Lord do not change.”
  • Reformed Theology: God is eternally unchanging in His being, will, knowledge, and promises (WCF Chapter 2).

1.3 Omniscience (전지성)

  • Etymology: Greek term παντογνῶσις (pan–all + gnosis–knowledge) reflects God's infinite knowledge, although not used directly in Scriptu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1–4 – “You have searched me, Lord, and you know me…”
  • Reformed Theology: God perfectly and eternally knows all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1.4 Omnipotence (전능성)

  • Etymology: The Hebrew word שַׁדַּי (Shaddai) is commonly translated “Almighty,” possibly derived from “mountain” or “all-powerful.”
  • Biblical Background: Genesis 17:1 – “I am God Almighty…”
  • Reformed Theology: God is all-powerful and nothing can prevent Him from accomplishing His sovereign will.

1.5 Omnipresence (편재성)

  • Etymology: Expressions like שָׁמַיִם וּשְׁאוֹל (heaven and Sheol) in Psalm 139:8 convey that God is present everywhe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7–10 – “Where shall I flee from your presence?”
  • Reformed Theology: God is fully present in all place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2. Communicable Attributes │ 소통 속성

2.1 Holiness (거룩)

  • Etymology: Hebrew קֹדֶשׁ (qodesh) from root קָדַשׁ (qadash), meaning “to set apart.”
  • Biblical Background: Isaiah 6:3 – “Holy, holy, holy is the Lord of hosts…”
  • Reformed Theology: God is completely and absolutely separate from all sin and impurity.

2.2 Love (사랑)

  • Etymology: Greek ἀγάπη (agapē) and Hebrew אַהֲבָה (ahavah) both reflect deep, sacrificial, covenantal love.
  • Biblical Background: 1 John 4:8 – “God is love.”
  • Reformed Theology: God is by nature love and pours out this love particularly on His elect.

2.3 Grace (은혜)

  • Etymology: Greek χάρις (charis), meaning unmerited favor or kindness.
  • Biblical Background: Ephesians 2:8–9 –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Reformed Theology: God shows unearned favor to undeserving sinners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 Mercy (긍휼)

  • Etymology: Hebrew רַחֲמִים (rachamim), meaning compassion or tender affection.
  • Biblical Background: Exodus 34:6 – “A God merciful and gracious…”
  • Reformed Theology: God demonstrates pity and compassion especially toward the miserable and sinful.

2.5 Justice (정의)

  • Etymology: Hebrew צֶדֶק (tsedeq), meaning righteousness or fairness.
  • Biblical Background: Psalm 89:14 –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your throne…”
  • Reformed Theology: God rewards and punishes all in accordance with His holy law and perfect judgment.

2.6 Truth (진리)

  • Etymology: Greek ἀλήθεια (alētheia), meaning that which is unconcealed, real, or trustworthy.
  • Biblical Background: John 14:6 –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 Reformed Theology: God is utterly reliable in all His words and revelations—without error or deceit.

2.7 Wisdom (지혜)

  • Etymology: Hebrew חָכְמָה (chokhmah), meaning discernment and applied knowledge.
  • Biblical Background: Romans 11:33 – “Oh, the depth of the riches both of the wisdom and knowledge of God!”
  • Reformed Theology: God always chooses the best means to achieve His perfect ends.

2.8 Sovereignty (주권)

  • Etymology: Expressed biblically through concepts like מַלְכוּת (malkuth), meaning kingship or rule.
  • Biblical Background: Daniel 4:35 – “He does according to his will among the host of heaven…”
  • Reformed Theology: God governs all things according to His eternal decree, accomplishing His perfect will.

Conclusion │ 결론

God’s attributes are rightly categorized into incommunicable and communicable types, both of which are thoroughly rooted in Scripture and explained in Reformed theology. Through the study of biblical languages, deeper insight is gained into the nature of God. This study leads believers to deeper reverence, worship, and trust in the triune God.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에 나오는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1. 빛 = 하나님의 성품

성경에서 빛은 주로 다음을 의미합니다.

  • 거룩함 :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

  • 진리 : 거짓과 속임이 없으신 분

  • 순결과 의로움 : 도덕적·영적 완전성

  • 계시 :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는 분

그래서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 하나님 안에는 죄, 거짓, 불의, 혼합됨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라는 부르심

이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요구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일 1:7)

  •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드러남

  • 죄를 숨기는 삶 = 어둠

  •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진리 안에 사는 삶 = 빛 가운데 행함

3. 예수 그리스도와 빛

요한복음에서는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안에서 완전히 보여주심

  • 빛이 어둠 속에 오셨으나, 어둠이 이기지 못함 (요 1:5)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 나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는 어둠은 없는가

  • 진리보다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가

👉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드러내어 치유하시고 살리기 위해 빛을 비추십니다.


Front Cover
생명의 말씀사, May 15, 2004 - Religion - 279 pages
영어권에서만 100만 부 이상, 20여 개 언어로 출판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령 충만한 삶으로 인도한 장기 스테디셀러다.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본서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기질'이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각 기질에는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다. 이를 알고 성령 안에서 약점을 극복하여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

성령과 기질

팀 라헤이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네 가지 기질의 장단점

1. 다혈질의 장점

단점

2. 담즙질의 장점

단점

3. 우울질의 장점

단점

4. 점액질의 장점

단점

기질TEST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기질TEST

약점을 극복하려면

극복하여야 한다.

어떻게?

I.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타고난 기질만큼 묘한 것도 없다. 눈송이의 모양이 천태만상을 이루듯이 인간은 이 기질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고 그 사람 나름의 특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하는 근원으로서 잘 훈련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그의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인품까지 비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기질에는 강하고 약한 면이 있다. 누구나 강한 면만 생각하고 싶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강한 면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 기질(氣質:temperament) : 타고난 성품의 결합체, 유전학적으로 국민성, 인종, 성별, 그외 어떤 유전 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

• 성격(性格:character) : 앞에 말한 기질 + 어렸을 때의 훈련, 교육, 근본적 태도, 신앙, 원칙등이 가미되어 형성. 곧 닦이고 훈련된 기질

• 인격(人格:personality)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면에 나타나는 태도.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체내에 있는 네 가지 체액 - 혈액, 황색담즙, 흑색담즙, 가래 - 에 비유하여 네 가지 기질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기질이 어떤 형태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과 약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기질에 대해 발표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칫하면 위험한 공부가 된다. 친구들에 대해 분석적인 태도로 나아가려 하고 "그 아이는 어떤 타입의 아이지?" 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되겠다.

II. 네 가지 기질과 장단점

1. 다혈질

1) 장점

다혈질보다 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기 주위 사물에 대해서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항상 품고 있으며, 환경으로 인한 감정이 예민하여 불쾌했던 일도 환경이 바뀌면서 곧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기가 없거나 발랄하지 못할 때가 극히 드물며 웬만한 환경에선 항상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권태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먼 단어이고 권태를 느끼기 전에 그는 이미 재미있는 일로 돌아서곤 한다.

그는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려 과거에 골치 아프고 복잡했던 문제들을 머리 속에 남겨두는 법이 없다. 또한 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다가 올 곤경에 대해서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질 않는다. 그저 현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낙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희열을 느낀다. 그는 쉽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의 풍부한 정열은 때로 다른 사람까지도 그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곤 한다. 그는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동정심이 많은 것은 다혈질의 훌륭한 재산중의 한가지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혈질보다 더 순수하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쁜 기분을 함께 나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명령을 그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성품이다. 특히 의사인 경우 그는 훌륭한 태도로 환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혈질 사람의 엄숙한 태도는 가끔 타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다혈질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은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쾌활하고 반응이 빠른 사람들로 인해 재미있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훈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2) 약점

다혈질의 끝없는 활동은 사실 자세히 보면 휴식 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 실제적이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그의 감정은 쉽게 그를 흥분시켜서 일의 전체를 심각히 분석해보기도 전에 그릇된 방향으로 이미 일을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침착치 못한 성격 때문에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그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퍽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활동상태가 일생동안 계속될 때 그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때로 그의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끝내 열매 없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다혈질은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태도가 때론 그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가 약한 점과 세련된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은 곧잘 시작하면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 맺는 위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의 반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을 때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예"이다. 자신의 시간문제, 능력, 그 외의 여러가지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다. 자기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몇몇 사람의 앞잡이로 훌륭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그룹의 일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의 약속과 결실과 책임들을 쉽게 잊는다.

그에게서는 정확한 시간약속 이행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의 약한 의지가 가장 위험한 결과로 나타날 때는 그의 도덕관이 주위의 환경과 동료들에 의해 변할 때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결실하는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쾌활한 성격과 대인관계로 인해 동료들 가운데 일찍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앉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의 타고난 개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혼자 떠들게 되고, 남들도 모두 다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다가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일쑤다.

다혈질은 감정적 불안정성 때문에 쉽게 용기를 얻는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해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고 한번 폭발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다. 곧 사과도 잘한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는 자신은 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다혈질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 여러 번 후회하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보겠다. 다혈질처럼 육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 유혹에 더 많은 생각을 쏟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령께 간구해야 할 것은 "절제"와 "자제력"이다. 다른 세 가지 천성과 마찬가지로 다혈질도 가장 긴급하고 큰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2. 담즙질

1) 장점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며 투쟁력 이 강하다. 항상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계획은 다혈질의 계획과 달리 조직적이고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번 시도했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번엔 이 한가지 일만 해 봐야지"하는 식으로 일에 골몰한다. 복잡한 게획 대신 단순한 계획하에서 그는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의 성공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훌륭한 계획보다도 『결단력』 과 『일에 대한 집착력』때문이다.

담즙질의 기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물은 실리성(實利性)을 기준으로 다루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단체적인 일에 대해선 무척 호감을 갖고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무적인 일에서는 실증을 느낀다.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 순간 순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해 내는 능력도 있다. 담즙질의 소유자가 의사라면 특별히 긴급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직감에 의한 경우가 많다. 담즙질은 원래 "지도자적인 자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그의 의지는 그룹을 이끌기에 충분하고 모든 사람들의 훌륭한 판단자가 되며, 긴급 사태에는 빠르고 대담한 태도로 일을 처리한다. 지도자로 임명되면 곧 이를 수락하거니와 때로는 자진해서 일을 맡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으로 불리운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협조할 것이다.

담즙질 역시 천성적인 자기 신뢰로 인해 항상 『낙관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한 환경까지도 기꺼이 떠날 만큼『모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남보다 앞장 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앞서간다. 어떤 일의 상황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도중의 함정과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을 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에만 중점을 둔다.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못하고 그는 도리어 역경을 통해 그 일을 꼭 완수해야겠다는 욕망을 더욱 갖게 된다.

2) 단점

담즙질에게도 큰 약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그의 "딱딱함과 화를 잘 내는 것과 성급하고 오만"한 점이다. 담즙질은 감정적으로 너무 무딘 사람이다. 그는 동정심 같은 것에 대해 감상적인 쓸데없는 짓이라고 멸시하기도 하며, 그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다. 그는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곧잘 화를 내며, 한번 화를 낸 후에는 그가 불쾌하게 느꼈던 일에 대해『계속 원한을 품는』버릇이 있다. 심한 복수심 때문에 실제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다시 보복하기를 꺼리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분개하는 성질은 그의 생활을 편안치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육체적인 병으로는 40세 이전에 궤양으로 고생하게 되는 수가 많고, 영적인 병으로는 분노와 화를 내는 일로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 많다. 담즙질에는 묘한 "잔인성"이 있어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권리를 무단히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강한 도덕적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한 성공을 위해서는 법률을 어기거나 어떤 교활한 방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몰염치한 죄수들과 독재자들이 이 담즙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담즙질의 강한 결단력은 또한 너무 강렬할 때가 있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 또는 나중에 그가 후회할 과격한 문제에 그를 몰아 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장을 보고 만다. 그가 사과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 인정이 없고 퉁명스럽고 또 냉소적인 말을 냉정하게 내뱉는다. 남에게 동의하는 것도 그에겐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혼할 때 그의 배우자가 갖는 가장 큰 문제거리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기 아내를 때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룰 것이다.(폭력이 아닌)

담즙질의 강한 독립심과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거만한" 사람이 되게 한다. 어떤 일에 좀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매우 거만하고 그 일에 대해 세도를 부려 드디어는 불쾌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이러한 불쾌한 성품은 그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나쁜 행동보다도 성공 그 자체를 더 좋은 일로 보고 거기에만 중점을 둔다.

그는 어린 나이가 아니면 어른이 된 이후 신앙을 가지기 힘들며,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곧잘 그날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꽉 차고 그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해 보지 못하는 한 규칙적인 예배시간은 쓸데없고 시간낭비인 것처럼 생각 될 것이다.

3. 우울질

1) 장점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질에서보다 더 많이 그리고 깊숙이 감상하며, 또한 예술에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나 다혈질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우울질의 소유자는 창작적인 추리에도 능란하여 한창 상상력이 활발할 때는 가치 있고 건전한 창작물을 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완전주의자』로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훌륭함"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포용력은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과 결정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만약 기회가 새로이 주어진다면 좀더 훌륭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질의 "분석력"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인 성품과 합성되어 일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능력이 있게 하였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획이 제안되면 우울질은 그것을 즉시 분석하여 그들이 부딪치게 될 여러가지 숨은 문제들을 골라내곤 한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분석해서 나온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을 반대할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들이라는게 그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다.

그의 분석적인 능력과 태도로 보아 그에게는 수학, 이론과학, 의학, 건축학, 철학, 창작문학, 그 외 면밀한 것을 요하는 일이 적합하다. 다행스럽게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스러워지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그 기질 자체가 "충성스럽기"때문이다. 우울질은 다혈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려 들진 않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문자그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정도로 그 친구들을 포용한다. 어떤 일을 주어진 시간에 끝까지 이끌고 나가서 완성시켜 놓은 일에서는 그를 언제나 신임해도 좋다.

우울질은 앞에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지극히 희생적인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자기동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를 잘 알아서 자기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진해서 발표하려하지 않고 덮어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며, 다혈질처럼 함부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는 데에는 꽤 야무지다.

2) 단점

우울질은『자기중심적』이다. 할레스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어떤 타입의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기 중심적이다. 항상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하는 형인데 그의 이런 성품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정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과 자기의 정신적인 상황을 해부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을 한층 두층 계속 벗겨 마침내는 그의 생활에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오로지『영구한 자기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은 이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우울질은 병적인 정신상태에 빠져 들어갈 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접하는 문제마다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울질은 유난히 쉽게 우울증환자가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그의 예민한 성격과 합해져서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가끔 저지르게 한다. 그는 기분을 자주 변동하는 자로 문자 그대로 "감정을 항상 팔에 걸고 다닌다." 때로는 곧잘 남을 의심하여 좋지 못한 방면으로 계속 상상한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소근소근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는 대뜸 그들이 자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단정한다. 이런 생각은 심한 경우엔 남을 변태적으로 냉대하고 박대하는 컴플렉스를 나타낸다. 우울질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이고 분석적인 성품 때문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목적을 내다 보기도 하지만 도중에 생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관적이기 때문에 우울질은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면에선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다. 많은 완전주의자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9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파괴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그의 완전주의자라는 안경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는 "많은 좋은 점을 보는 대신에 나쁜 점을 과장해서 보게" 마련이다. 결혼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할 때가 있다.

멀리서 여자를 보고 이상화시켜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을지라도 역시 단점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바로 그 단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주저한다. 기분의 변화에 있어서도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고조된 감상에 빠져 있곤 한다.

또한 우울질의 변덕스러움은 때로 좋지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땐 그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우울질을 피하게 되고 우울질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우울하게된다. 이 한가지 사실은 능히 우울질의 전 일생을 망치고도 남음이 있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울하고 감정이 쉽게 변하는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위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기자신보다 남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좋은 목적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우울질의 특성을 들자면 그의 "보복심"이다. 그에겐 모욕을 용서해 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조용하고 평온해 뵈지만 마음속으로 격렬한 증오심과 불길같은 적의가 있다.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진 않겠지만 수년간을 이런 증오심과 보복감을 품은 채 지낸다. 이렇게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성품과 보복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때로 그의 훌륭한 자질을 지배하여 자질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편견에 근거를 둔 결정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우울질의 장. 단점을 모두 보아왔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즉 매우 훌륭한 장점과 잠재능력이 있는 천성에는 또한 가장 큰 단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평범한 우울질』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울질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료들보다 우수한 위치에 서던가, 그렇지 않으면 약점으로 인해 신경질과 수심에 뒤덮히고, 자신을 즐기지도 못하고 남을 즐겁게도 못하는 우울증환자가 되어 동료들보다 열등한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뛰어난 인물들이 심한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울질의 소유자들은 큰 위안을 받아야겠다. 그러나 성경의 그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애를 보낼 수 있게 한다.

4. 점액질

1) 장점

점액질의 거침없는 "유모어"는 그가 어떤 일을 신중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치미를 떼고 하는 그의 거칠은 듯한 유모어가 다른 사람들을 곧잘 웃기는 것을 보면 그는 유모어와 상상력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기질은 "카운셀러"가 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오랫동안 앉아 듣지 못하는 반면에 느리고 태평스러우면서 유연한 점액질의 태도는 그로 하여금 남의 얘기를 다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과 고민을 말하는 사람과 늘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는다. 그리고는 충고의 말을 불쑥 쏟아 내놓는 게 아니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눈다.

점액질의 경우, 그의 명랑하고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책임감과 시간적 계획을 잘 지키는 면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우울질처럼 이 사람은 퍽 충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에게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불충실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점액질도 역시 실제적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고하는 데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므로 그 결과 어떤 일의 상황을 잘 분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닌 반면에 적은 노력을 들여 일을 완수할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일을 잘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 할 환경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의 결과는 항상 훌륭하고 깨끗한 결과가 된다. 비록 완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꽤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니고 있다. 항상 바쁘고 크나큰 일을 하면서도 그의 책상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능동적이고 소란스런 성품의 사람들은 항상 놀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점액질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놓고 일하면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돈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단점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가끔『발을 질질 끄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며 가능한 한 느리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목적 없는 그의 생활은 "방관자"의 생활이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성품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고 있고 또 능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에겐 모든 일이 오로지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혈질의 불안정성과 담즙질의 활동은 그를 때로 괴롭힌다. 점액질은 그들이 그를 자극시켜 일을 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점액질은 또한 "이기심"이라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자기자신을 옹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어떤 일을 변경하려고 "심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그 일에 너무 휩쓸려 들어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에너지를 아끼는 면에서 보수적이기를 원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더욱 고집이 많아지지만 그의 태평스런 유모어로 자기의 완고한 점을 감출 수 있게 된다. 주위사람들의 계획과 활동에 가담하기를 강요받을 때마다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더욱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런 완고성은 결코 그를 "인색하고 이기적인"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얼마의 비용이 들까?" 혹은 "이것은 내게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점액질에 있어 정말 큰 문제 거리다.

점액질에겐 해가 갈수록 더 결단력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늘 동요한다. 그의 결단력 없는 태도는 곧 뿌리깊은 습관이 되어 그의 장점 즉 실용적인 태도를 능가해 버리기까지 한다. 그의 실제적인 관점과 조용하고 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어떤 일에 대한 더 좋은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지만, 그가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쯤에는 이미 다른 활동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그룹을 조직하여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점액질은 마음속에 자기계획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가담하려 한다.

5. 네 기질에 대한 정리

위의 네 가지 기질의 여러가지 변화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고 있다. 어느 것도 다른 성품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그것대로의 장점을 갖고있어 사회에 도움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각 기질이 지닌 장점은 그 기질을 매력적으로 만들며 우리도 모두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장점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지닌 약점도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분석 해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보완되어야 하고 개선되어야 한다.

III. 기질테스트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앞의 내용에서 우리는 각 기질의 장. 단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는 "나는 다혈질이야""나는 담즙질이군"라고 자신을 평가하곤 하는데, 사실상 우리는 100%다혈질, 혹은 100%우울질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기질은 이 네 가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혈질20% + 담즙질50% + 우울질10%+점액질20% 식으로 말이다. 자신의 기질상의 특성들을 잘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단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래의『기질테스트』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원한다. 이 단어 연상 테스트는 플로렌스 리타우어와 프레드 리타우어가 발전시켜 그들이 개최한 『인격플러스(Personality Plus)』세미나에 참가한 수많은 이들에게 시행한 바 있는 테스트이다.

2. 기질 테스트

1) 각 열의 네 단어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단어 하나 앞에 V표를 하라. 때로는 정확히 자신에게 들어맞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가장 근사한 단어 앞에 V표를 하도록 하라.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활발함,

( )의지강함,

( )복종적,

( )사려깊음,

( )새로운생각,

( )만족해함,

( )계획가,

( )자신에참,

( )질서정연,

( )친절함,

( )과감함,

( )괘활함,

( )이상적,

( )과시적,

( )중재자,

( )신중함,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완전주의자

( )활기참

( )모험적,

( )쾌활함,

( )자기희생적,

( )자기통제적,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인내심강함,

( )충독적,

( )자상함,

( )신실함,

( )유쾌함,

( )일관적,

( )독립적,

( )결단력,

( )음악적,

( )끈질김,

( )충직함,

( )우두머리

( )허용적,

( )과감함,

( )분석적,

( )설득력있음,

( )사교적,

( )경쟁력,

( )수줍어함,

( )자기신뢰,

( )적극적임,

( )계획적,

( )솔직함,

( )익살스러움,

( )싹싹함,

( )점잖음,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의견제안잘함,

( )말을많이함,

( )지도자타입,

( )도표잘그림,

( )생산적,

( )행동적,

( )융통성없음 .

( )조용함.

( )자기의지강함

( )설득력있음.

( )꽤많음

( )활발함

( )주동적

( )부끄러워함.

( )낙천적.

( )강력함.

( )세심함.

( )확신에참.

( )고무적.

( )심오함.

( )쉽게어울림

( )관용적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균형잡힘

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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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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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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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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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40

( )뻔뻔스러움.

( )절제못함,

( )마지못해함

( )까다로움,

( )참을성없음,

( )인기없음,

( )완고함,

( )평범함,

( )쉽게성냄,

( )순진함,

( )근심많음,

( )지나치게예민,

( )결단력약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느림,

( )고독즐김,

( )행동이느림

( )복수심이강함,

( )타협적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성잘냄,

( )두려움많음,

( )불안정,

( )끼어들기싫음,

( )되는대로의성격,

( )비관적,

( )목표없음,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무뚝뚝함,

( )무질서함,

( )편협함,

( )침울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 섬,

( )의심많음,

( )불안함,

( )비판적,

( )수줍음,

( )열정없음,

( )반항적,

( )잘잊음,

( )우유부단,

( )예상못하는성격,

( )즐겁게해주기힘듬

( )교만 힘든성격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소심함,

( )지배적,

( )비관용적,

( )불평잘함,

( )과시적,

( )게으름,

( )성미급함,

( )억지로함,

( )교활함,

( )맥없음

( )용서안함

( )장황함

( )솔직함

( )끼어들기잘함

( )사랑없음

( )주저함

( )허용적

( )외톨이

( )냉담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낙심잘함

( )무관심

( )남이용잘함

( )회의적

( )목소리큼

( )침착못함

( )신중치못함

( )변화무쌍

2) 이제, 위에 표시한 대로 아래의 페이지에 다시 표시하고, 장단점의 합계를 내어 보라.

◆ 장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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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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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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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

( )활발함,

( )쾌할함,

( )사교적,

( )설득력있음,

( )새로운생각,

( )활발함,

( )주동적

( )충동적,

( )낙천적,

( )익살스러움

( )유쾌함,

( )괘활함,

( )고무적,

( )과시적,

( )쉽게어울림

( )말많이함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활기참,

( )모험적,

( )설득력,

( )자기의지강함,

( )경쟁적임

( )꾀많음,

( )자기신뢰

( )적극적

( )자신감

( )솔직함,

( )강력함,

( )과감함,

( )확신에참

( )독립적,

( )결단력,

( )의견제안잘함,

( )끈질김,

( )지도자타입

( )우두머리

( )생산적,

( )과감함,

( )분석적,

( )의지강함,

( )자기희생적,

( )사려깊음,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계획가,

( )계획가,

( )질서정연,

( )신실함,

( )세심함,

( )점잖음,

( )애상주의적,

( )심오함,

( )음악적,

( )신중함,

( )충직함,

( )도표잘그림,

( )완전주의자,

( )행동적,

( )융통성

( )조용함.

( )복종적

( )자기통제적

( )수줍어함

( )만족해함

( )인내심많음

( )부끄러워함

( )자상함

( )친절함.

( )싹싹함.

( )일관적.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중재자

( )관용적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허용적

( )균형잡힘





◆ 단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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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뻔뻔스러움

( )무절제함

( )장황함

( )잘잊음

( )끼어들기

( )예측불허

( )되는대로성격

( )허용적

( )쉽게성냄

( )순진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무질서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과시적

( )목소리가큼

( )침착치못함

( )불안함

( )변화무쌍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반항적

( )솔직함

( )참을성없음

( )사랑없음

( )완고함

( )교만함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무뚝뚝함

( )지배적임

( )편협함

( )남이용잘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섬

( )성미급함

( )신중치못함

( )교활함

( )수줍어함

( )용서안함

( )성잘냄

( )까다로움

( )불안정

( )인기없음

( )즐겁게해주기힘듬

( )비관적

( )외톨이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지나치게예민

( )낙심잘함

( )비관용적

( )침울함

( )회의적

( )고독즐김

( )의심많음

( )복수심강함

( )비판적

( )맥없음

( )열정없음

( )마지못해함

( )두려워함

( )우유부단함

( )끼어들기

( )주저

( )평범함

( )목표없음

( )냉담함

( )근심많음

( )소심함

( )결단력약함

( )무관심

( )불평잘함

( )느림

( )게으름

( )행동느림

( )억지로함

( )타협적





전체 합계

장점합계

( )개

단점합계

( )개

다혈질

( )개

담즙질

( )개

우울질

( )개

점액질

( )개

IV. 결론

1. 약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질에 대해 공부하는 근본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함이다. 헨리 브란트 박사는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 있고,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수 년전, 혹은 수 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여전히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고집과 내키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이어서 어떤 장점과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점들은 개선되어져야 한다. 당신의 천성이 꼭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살아있는 채 당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신의 약점을 세심히 솔직하게 연구하면 자신의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쉽게 지적해 낼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의 계획하에 인간을 그의"영광을 위해"창조하셨다.(계4:11)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기질 전체를 뜯어 고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본래의 성품을 십분 활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리는 결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것인가?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약점을 죄로 여겨야 한다.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 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 이기심, 자만, 성급, 잔인,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 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약점의 근원: 이기심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의지의 박약

불안

자아중심

감정적 불안정

자기만족

성급함

잔인성

격한 성격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적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분 노



공 포












이 기 심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 증오, 폭동, 시기, 공격, 험담, 야유, 앙심, 비통, 악의, 불평, 질투, 후회, 편협, 비난, 원한

• 공포의 여러가지 표현 : 근심, 의심, 소심, 우유부단, 미신, 움추림, 고집, 시비, 걱정, 열등감, 비겁, 혐의, 주저, 실망, 교만, 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 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심령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 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이란 자기 본위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말한다. 이기심이란, 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 내게 있는 것을 잃게될까, 내가 손해보게될까, 내가 인정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이며 열등감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죄악이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고 적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것.. 이것이 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 하고 두렵게 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 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셨던 축복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 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적)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 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제안)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2)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귀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귀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하였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장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6: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께 간구만 하면 그의 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있고 또 인정해야 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한다. 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4)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 들일 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의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 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막13:11)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 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어떤 체험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충만』은 우리 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그리이스어를 보면 이 귀절은 "당신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 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 Lord)으로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되어 로보트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 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교통표지판이나 이정표를 따라 자동차 연료의 힘을 입어 우리가 성루로 간다고 해서 우리는 교통표지판이나 휘발유, 자동차의 노예인가? 교통법의 꼭두각시인가?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하는 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방법(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충만이란 우리 인생 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엡5:20)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 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 시기. 험담. 야유. 앙심. 비통. 불평. 질투. 후회. 비난/근심. 의심. 우유부단. 움츠림. 소심. 고집. 열등감. 비겁. 주저. 실망. 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 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 희락, 곧 기쁨(joy),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 화평(peace),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 오래참음(long suffering:인내), 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마음에서 나온 사려깊고 예의 바르고 젊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 충성(faith)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도, 신뢰성,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 온유(meekness),악을 악으로 갚지않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 절제(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 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삶의 한부분 한부분에 개입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 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

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 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버려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칙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나거라. 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 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이고 고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V. 결론

물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가도 또 여전히 옛 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실망하지 아니하고,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 습관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되돌아 보았을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울질과 다혈질이 혼합된, 극도의 소심함과 신경질적인 포악함의 사람이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심, 예민한 성격등으로 인해 언제나 소극적이고 박약한 모습으로 지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선 너무나 많은 부분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기질상의 약점 때문에 이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자학에 빠지곤 하는, 여전히 변함없는 우울질과 다혈질의 사람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몇 년 전과 비교만 해보아도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깍이고 다듬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 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 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원본 : 생명의 말씀사 / 팀 라헤이 “성령과 기질”, 기질TEST는 책과 무관.

요약 : 낮, 해, 밤, 달 의 발췌문을 재 편집하여 인용함.



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책은 원명은 [Act of Marriage] 
미국의 1976년과 1977년 종교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결혼 행위]또는 [부부의 사랑 행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나 우리에게는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 [아름다운 애정생활]로 했다. 
결혼 적령기에 미달되는 모든 미성년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성신 부부들과 내일의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는 분은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여러분의 인생을 즐겁게 해줄 것이며 더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팀 라하이 박사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그를 통해 파탄지경에 이른 많은 가정들이 다시 모여 행복을 찾았으며 불행을 되씹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아름다운 애정생활은 당신의 생활에 무한의 가능성을 안겨다 줄 것이다

저자소개

[행복한 결혼생활], [성경공부의 비결]등 수많은 저서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팀 라헤이 박사는 스콧드 메모리얼 침례고회의 목사님이며 미국 샌 디아고에 소재한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총장이다

"나는 모든 부부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과 알 필요가 있는 사실들을 저들로 하여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 아내 비벌리의 도움으로 본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아내로, 세미나의 강사로 그리고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사무주임인 아내의 광범위한 상담경험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많은 부부들과 상담한 결과 우리 둘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정해 주신 모든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많은 부부들이 저들의 성관계를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년 간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가지 교수원칙을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카운슬러와 목사님들의 요구를 받고, 이와 동일한 원칙을 책으로 발간하는 경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교회가 참 좋다 
혼인전 목사님께서 과제를 준다. 
하나는 화남금여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이었다. 
화남금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실제적인 애정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지만, 세속적인 책과 달리 통속적이지 않고 성경적 가치관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옛날에는 표현이 안되었지만 갈수록 성문제는 가정 행복과 부부행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20대에서 40대 부부들에 대한 갤럽 조사에 의하면 성적인 불만을 가진 부부가 74퍼센트에이르는 반면 부부생활에 만족하는 부부는 10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한다. "

더욱 심각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부부들 중에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 부부가 56퍼센트나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혼사유의 90퍼센트가 솔직하게 알고보면 성적 부조화와 불만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고 있다.

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 종족 보존
둘째, 사랑의 표현
셋째, 인생의 환희와 즐거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룰 때에 행복하게 살 수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기도시간 외에는 절대로 분방하지 말고 성생활을 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언  5장 15절에서 20절은 가정에서 부부간의 성적 즐거움의 샘물을 가정 밖으로 넘치게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구약의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메시지로 담고 있지만 성생활에 적극적인 테크닉도 가르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성공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우자와 성에 대한 자세와 실제 성생활을 위한 테크닉의 개발이 필요하다. 우선 부부생활에 대한 자세는 성경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몸을 자신이 주장하지 못하고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섹스를 요구할 때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적 자세다. 거절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성적으로 아내보다 더 충동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가급적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남편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내로부터 충족받기를 원하는 필수조건의 제1위는 '성적인 만족감'이라는 연구조사가 나와 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인욕구와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남편은 다른 방면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편의 성적 요구에 아내가 단호하게 거절할 때 남편들은 아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거절당했을 때의 남편들의 심정을 모아본 자료를 소개한다

"심한 모멸감을 맛보았다. 다시는 내가 요구하나봐라 하는 심정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미워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내가 보기 싫었고, 다른 여자를 사귀고 싶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두고보자라는 복수심이 불탔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의 성적 특성을 이해하여 아내가 만족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관계는 평등한 것이며 서로 보답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의 만족을 위하여 성교를 시도하며 애무하고 성행위에 참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 권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자를 백열전구에 여자는 전기다리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경우에는 충동보다도 분위기와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더 의지하고, 남자보다 더 여유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부부는 잠자리에서 열정적이고 적극적이 되도록 노력하고 변화를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다양한 기교와 테크닉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협력한다.

한국 교회가 성생활에 대한 언급을 터부시하고 있지만, 건전한 성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배우고 훈련받아 세속적인 성문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생활에 성공하라

관심있는 분은 팀 라하이 목사가 지은 <아름다운 애정생활>이라 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성생활의 성공은 행복한 부부의 아름다운 특징이다. 


팀 라헤이(Tim LaHaye, 1926년 4월 27일 ~ 2016년 7월 25일) 
기독교 목사, 소설가로, 제리 B. 젱킨스와 함께 쓴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알려져 있다.

종말론적 소설인 <레프트 비하인드>의 저자 팀 라헤이가 지난 7월 25일 별세했다(2016. 7. 25).
7월 25일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 목회자이자 저자, 라디오 진행자인 팀 라헤이가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가 설립한 사역 단체에서는 라헤이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며칠 후에 숨졌다고 발표했다.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는 1995년부터 16권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를 출간했다.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다루는 이 시리즈는 6천5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라헤이는 소설을 쓰기 전 목회자로 왕성히 활동했다. 그는 샌 디에고 크리스천 칼리지와 십여 개의 기독교 초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목회자들을 조직해 조지 W. 부시 등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보수 단체인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을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 비벌리와 함께 라디오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타임> 지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와 <레프트 비하인드>를 공동 저술한 젠킨스는 성명서를 통해 라헤이가 “영적 거인”이었다고 발표했다.
젠킨스 “내가 아는 팀 라헤이는 목회자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을 나누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나이와 성, 사회적 지위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염려를 함께 나눴다.”라고 말했다.


1월 1일(목)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 

투 로구 테스 조에스(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호 로고스 호 조에(ὁ λόγος ὁ ζωή)

설교 제목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핵심 본문 / 히브리서 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1️⃣ 서론 : 왜 어떤 말씀은 지나가고, 어떤 말씀은 나를 바꾸는가

  • 우리는 말씀을 자주 듣지만, 삶이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 말씀이 정보로 끝날 때 vs 살아 역사할 때의 차이

  • 질문: 오늘 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인가, ‘경험하는 사람’인가? 

2️⃣ 본론 ① 말씀이 살아 있다는 뜻

  •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글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 마음을 찌르고

    • 생각을 드러내며

    • 방향을 바꾼다

  • 👉 말씀이 우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다룬다 

3️⃣ 본론 ②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

  • 마음이 닫혀 있을 때

  •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말씀을 들을 때

  • 순종 없는 듣기만 반복할 때

  • 👉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 앞에 서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4️⃣ 본론 ③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일어나는 변화

  1. 생각이 변한다 –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 기준으로

  2. 마음이 깨어난다 – 무감각에서 회개와 소망으로

  3. 삶이 움직인다 – 결단과 순종이 생긴다

말씀은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결정을 낳는다

5️⃣ 결론 : 오늘 말씀이 역사하게 하라

  • 작은 순종 하나가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 “이 말씀을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붙잡자

  • 기도 :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 한 줄 정리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사람은 변하고 삶은 새로워진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그분!
말씀: 요한일서 1장 1절(맥체인 성경읽기, 12월 2일, 화)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거대한 신학 체계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경험을 말한다.

요한일서 1: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청각              시각                                                    촉각 

복음은 이렇게 감각의 언어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세 개의 동사로 압축해 낸다. 
듣다(청각), 보다(시각), 만지다(촉각)

사람의 다섯 감각 기관 : 청각(聽覺) 2%, 시각(視覺) 5%, 후각(嗅覺) 35%, 촉각(觸覺) 1%, 미각(味覺) 15%

들었다 :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 사건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선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 계시 사건이다. 
우리의 ‘들음’은 하나님의 먼저 말씀하셨다는 증거다. 
듣는 신앙은 '순종하는 귀'를 가진 신앙이다. 
여기서 듣기는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의 개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적 소환장이다.
오늘 우리는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진 시대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세상 소음에 대한 영적 저항이다. 
복음의 첫 문은 언제나 경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보았다 : 눈이 열릴 때 시작되는 신앙

요한은 두 개의 '보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적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관찰과 응시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을 넘어 계시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 행위이다.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외모가 빛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곧 사랑, 진리, 은혜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분의 키, 얼굴형, 피부색, 머리색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그 얼굴은 어느 특정 문화와 인종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그 길을 거부한다. 
보지 못함으로 진정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의 참된 얼굴은 종교적 초상이 아니라 갈보리의 사랑, 즉 자기 비움의 영광이다. 
보는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신앙이다. 
고난 속에서 열리는 인식, 눈물이 마른 자리에 드러나는 새로운 시각,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말하는 ‘보았다’의 세계다.

만졌다 : 촉각을 가능하게 한 성육신의 신비

‘만졌다’는 동사는 요한 신학의 정점이다. 
당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 Docetism). 
요한은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
촉각은 실재의 가장 강한 증거다. 
귀는 속고, 눈은 착시를 경험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물질 세계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선언이다. 
먹고 마시고 피곤해하며,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실제의 몸으로 오셨다는 증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외모에는 침묵하지만, 몸의 실재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현실적 영성’을 꿈꾸는 종교가 아니다. 
몸으로 오시고, 몸으로 사랑하시고, 몸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무엇보다 성찬은 이 ‘만짐의 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식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몸을 만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 그 자체가 깊은 신앙 행위다. 
사랑은 언제나 몸을 가지고 온다.

생명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다.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그분…" 그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는 정보의 종교가 아니라 관계의 종교, 데이터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요한은 선언한다.
“우리는 들었고, 우리는 보았고, 우리는 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동사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이 오늘도 가슴 벅찬 이유이다.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우리 눈을 밝히사 당신 몸의 흔적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손으로 당신을 만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 삶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옵소서. 아멘.


λόγος, ου, ὁ Storng number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Pronunciation [ lŏgŏs ]  
Etymology / 3004에서 유래


λέγω Storng number 3004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Pronunciation [ lĕgō ]

ζωή, ῆς, ἡ Storng number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Pronunciation [ zōē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ζάω Storng number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Pronunciation [ zaō ]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Ενσάρκωση) 

성육신(Incarnation) Incarnatio. Ενσάρκωση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고난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먼저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라는 /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요 1:1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 2:20)이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요3:36)인 것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는 창조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표현은 성육신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음을 말합니다. 그의 은혜와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성육신이야말로 그 영광의 최고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이고도 신비로운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은 성육신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7:14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인류 역사 속에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 즉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결합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성육신이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은혜의 표현이며,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세주로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의 목적과 의의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먼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정해진 시점에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지만, 그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며 그의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순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는 구절은 성육신의 구속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인간을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되었으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의 놀라운 표현입니다.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이 집약된 신비로운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5.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믄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6.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하사."

8. 요한일서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9.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0.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니라."

11.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2.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은혜로 주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 1:18-2:23과 눅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 막 9:2-8; 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 같이', '...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 9:38; 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 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 갈 3:26)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3:18; 5:18; 10:30; 17:5, 24)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 빌 2:6, 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 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 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 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유앙게리온. 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Pronunciation [ ĕuanggĕ- liŏn ]
Etymology  /  2095와 32에서 유래

εὖ Storng number2095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Pronunciation [ ĕu ]  
1. 잘, 좋게,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친절을 보이다, 막14:7, 잘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마25:21,23, 눅19:17, 엡6:3.

ἄγγελος, ου, ὁ Storng number 32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메시아의 예고자
Pronunciation [ anggĕlŏs ]
Etymology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1:20, 행5:19, 약2:25), 천사 (마13:39, 히1:4, 계1:1).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
둘째는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

생명이란 조에스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들은 바'(아케코아멘)와 '본 바'(헤오라카멘)는 문법적으로 완료시제라고 합니다.
완료시제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히 1:1,2).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

생명의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근거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려면 먼저 내가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증거를 가져야만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경험하였다고 고백합니다.

2026년 병오년을 출발하며 내가 만났던 예수님을 날마다 삶의 터전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속사람을 살립니다.



군주적 유일신론과 삼위일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반삼위일체론자들(Antrinitariers)은 이 교리를 비성경적, 비이성적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신앙의 최고 권위로 믿어져 온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결코 공교회의 정통교리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형이상학적 일신론과 논쟁하면서 성경적 신론을 확고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유일신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시인들의 노래와 희극을 통해 전달되는 신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당시 시인들의 노래나 연극에 등장하는 인간동형론적 다신 신론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자들의 기원 또는 궁극적 원리인 일자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안에서 신은 초시간적, 초역사적 실재인 유일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 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50-270)의 일자(一者, the One)개념이 그렇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 100-165 )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150-215)와 같은 고대 교회의 변증가들은 기독교적 유일신신앙을 다신론적 신화에 대항하는 철학적 단일신론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일신론은 양자론(또는 종속론)과 양태론이라는 기독교 삼위일체 신론의 가장 큰 두가지 이단들의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종속론적 또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narchianism)의 두가지 오류들

삼위일체 신론은 단일신성과 삼위의 개별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설명가능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다신론적 종교와 신화가 유행하던 이방세계에서 기독교는 그 본래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rnarchianism)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최고통치권자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권자는 오직 성부 한 분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성부만이 영원 불변한 신성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 능력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하는(Justin Martyr, First Apologia, 13) 이러한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은 그리스의 전제 군주적 유일신론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단일신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양자론(Adoptionism; 역동적 군주신론, Dynamic Mornarchianism)이라고 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만, 개별적 실체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양태론적 군주신론(Modalistic Mornarchianism)이라 합니다.
양자론과 양태론은 모두 신의 단일성 및 군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위의 다양성을 반대한 대표적인 삼위일체 이단사상들입니다.

【양자론(Adoptionism) 및 역동적 군주신론】(dynamic mornarchianism)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신론은 고대의 에비온파(Ebionites), 170년경 소아시아의 알로그파,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로마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Rome), 아리우스(Arius) 등에 의해 주장된 단일신론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론”이라고 부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알로그파(헬라어로 “정신없는 자들”)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로고스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복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투스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교한 일에 대해 변명하며 “나는 인간을 부인한 적은 있어도 하나님은 부인한 일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로마의 휘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170-235)에 의하면, 테오도투스는 하나님의 능력(듀나미스)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나타나기 전에는 그의 안에서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Refutation of All Heresies, 7, 23). 휘폴리투스는 그를 알로그파의 “부스러기”라고 비난합니다.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테오도투스를 위시한 양자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례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더욱 세련된 아리우스주의로 발전한 양자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피조물로 여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양태론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rnachianism)
고대의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사벨리우스(Sabellius) 등으로 대변되는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아버지와 구별된 개별적 실체성은 부정합니다.
노에투스는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양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으로 보지만, 노에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자론자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한 것과 달리, 노에투스는 성육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을 성자가 아닌 성부 자신의 성육신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는 성부와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현현 형태(modus)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성자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성부)께서 가시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고, 낳음을 받지 않으신 분이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낳음을 받으신 분이 되신 것이죠(Hy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9,5). 이런 이유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도 불립니다.
위와 같은 역동적 군주신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동방교회에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서방교회에서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개별성으로부터 신적 단일성을 사유하려 했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신의 단일성으로부터 개별성을 설명하려 하였기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양자론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더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가지 잘못된 삼위일체 이단사상의 배후에는 바로 그리스 군주적 단일신론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공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된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신론에 대한 성경적 신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년에 출간된 심리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근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진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심리학을 다루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제임스는 심리학을 단순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심리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심리학의 원리』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고, 제임스의 심리학이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1. 의식과 경험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윌리엄 제임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것이나 분리된 단위로 보지 않았으며,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이 흐름은 각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감각, 감정, 생각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제임스는 이를 통해 의식이 단순히 사건들의 집합이 아닌,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인간의 경험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임스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 고정된 개념이나 단일한 사고 패턴을 따르기보다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사고 흐름을 따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제임스의 주장입니다.

이 개념은 후일 문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제임스의 방식은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가 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2.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

제임스는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한 번에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정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처리합니다. 
주의는 우리의 의식이 특정 대상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임스는 주의가 단순한 감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주의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욕구, 필요, 목표에 따라 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나 목표에 따라 어떤 정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을 무시하는 선택적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주의의 이론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보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주의 집중 능력에 대한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택적 지각은 인지심리학, 학습 이론, 심리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감정 이론 (James-Lange 이론)

제임스는 심리학에서 중요한 기여 중 하나로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반응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 of Emot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자극에 대해 신체적으로 먼저 반응하고, 그 신체 반응을 인식한 후에 감정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반응을 경험하고, 그 신체적 변화를 인식한 후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는 "우리는 슬퍼서 울지 않고, 울기 때문에 슬프다"고 주장하며, 감정이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이론은 이후 감정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심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임스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체와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4. 습관(Habit)의 형성과 역할

제임스는 인간의 행동에 있어 습관(Habit)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습관이 삶의 전반적인 흐름을 결정하며, 의식적인 사고나 결정 없이도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주요 기제라고 보았습니다.습관은 행동을 자동화시키고,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인류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제임스는 특히 어린 시절의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습관이 한번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반복적인 습관의 총합"이라고 말할 정도로 습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대한 연구는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 행동이 단순히 외부 자극에 의한 반응뿐만 아니라, 습관이라는 내면적 기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후의 행동 심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라는 구절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William James / 1842. 1. 11-1910. 8. 26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습관의 형성과 역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So an action and you reap a habit
So a habit and and you reap a character
So a character and you reap a destiny.


5. 자아(self)와 정체성

제임스는 인간의 자아(self)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경험하는 자아(Subjective Self)로, 이는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는 객관적인 자아(Objective Self)로, 내가 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제임스는 이 두 가지 자아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자아를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아를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 사회적 자아(social self), 그리고 정신적 자아(spiritual self)로 나누었으며, 이 각각의 자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적 자아는 우리의 신체나 소유물, 
사회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 자아, 
정신적 자아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자아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제임스의 개념은 오늘날의 자아 심리학과 정체성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인간의 자아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6. 의지(Will)와 자유의지

제임스는 의지(will)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제임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는 반복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그는 "행동하지 않으면 의지가 약해지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지가 강해진다"고 말하며, 의지가 훈련을 통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임을 강조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지가 결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의 영향을 넘어서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심리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현대 심리학의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의식의 흐름, 감정 이론, 주의, 습관, 자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심리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가 강조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이후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임스는 철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그의 심리학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려는 심리학자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감정의 생리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주의 이론은 인지심리학 연구의 기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자아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에서도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결론 : 인간 심리의 복합성과 통찰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저작으로,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 습관, 자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대 심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1.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 [빌립보서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3.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025년 설교 자료(신년주일, 2월 9일, 3월 9일, 4월 20일 부활주일,



12월 17일(수) 로마서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선한데 지혜롭게(16: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Everyone has heard about your obedience, so I am full of joy over you; but I want you to be wise about what is good, and innocent about what is evil.

새한글 성경 / 여러분이 순종한다는 소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두고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되고, 악한 일에는 엮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선한 일과 악한 일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선한 일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되라!
악한 일에는 엮이지 말라!

그런데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 후에 그 배경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범죄자들의 공통점은 악한 일에 쉽게 엮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만 더 갖기 위하여 아니면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얻기 위하여 실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그릇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때 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앉아야 할 자리와 누워야 할 자리를 구분해야만 합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는 성경 구절(로마서 16:19)로,
좋은 일에는 분별력과 지혜를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행하고, 악한 일이나 유혹에는 어리석을 만큼 순진하고 미련해져서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선에는 똑똑하고 악에는 순진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삶을 살라는 권면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분쟁과 악한 자들에게 속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요 의미
  • 선한 데 지혜롭다 :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선한 일에 적극적이고 슬기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 악한 데 미련하다 : 나쁘고 해로운 일에 대해서는 속기 쉽고 어리석을 만큼 순진하여,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멀리해야 합니다.
  • 성경적 근거 :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로마서 16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 결론 : 악한 자들의 꾀임에 넘어가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순진한 마음으로 악한 일에 엮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옛날 그리스에 유명한 애꾸눈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죽기 전에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려낸 초상화를 보고 장군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화가는 애꾸눈을 그대로 그렸고, 또 어떤 화가는 장군의 심중을 짐작한 나머지 양쪽 눈이 모두 성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장군은 애꾸눈의 흉한 자기 초상화도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성한 모습으로 그렸던 것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초상화로 고민하고 있는 장군에게 나이도 어리고 이름도 없는 화가가 나타나서 자기가 장군의 초상화를 그려보겠다고 했습니다.

장군은 못 미더웠지만 마지못해 허락을 했습니다.

얼마 후 이 화가가 그림을 완성해서 장군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장군은 이 무명 화가의 초상화를 보고는 매우 만족스러워 하면서 많은 상금을 내리고 후한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그림이었기에 이 화가는 장군에게 많은 상금을 받았을까요?

이 화가는 장군의 성한 눈이 있는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장군의 성한 눈 쪽에 있는 얼굴에 가리워져서 애꾸 눈은 그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화가의 지혜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순종은 모든 사람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로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로마서16장19절, 새번역)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개역개정4판 성경)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새번역성경)

I want you to be wise about what is good, and innocent about what is evil(NIV성경)

θέλω δὲ ὑμᾶς σοφοὺς εἶναι εἰς τὸ ἀγαθόν, ἀκεραίους δὲ εἰς τὸ κακόν(헬라어 성경) 

원문대로 보면, 선한데(아가도스, ἀγαθόν)는 탁월하고 우수하고 좋은 일에는 지혜롭고(소포스, σοφοὺς), 즉 숙련되고 능숙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한데(카코스, κακόν)는 즉 나쁘고 쓸모없고 좋지 않은 일에는 '미련하라'는 것입니다.

'미련하다'는 원문이 “아케라이오스(ἀκεραίους)”인데 그 뜻이 실천할 줄 모르는, 즉 '거룩하고 순진한 바보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에는 숙달된 숙련공같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악한 일에는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든지 악한 그 일에 함께할 수는 있지만 할 줄 모르는 사람같이 행동하는 거룩하고 순진한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대로 선한 일에는 '모르쇠!'하고 악한 일에는 재빠르게 합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기 보다, 악한 일을 하는데 더 부지런합니다.

밤새워 고스톱을 쳤다는 사람은 많아도, 밤새워 기도하였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밤새워 술을 마쳤다는 사람은 많아도, 밤새워 말씀을 읽었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원수를 갚기 위하여 오래도록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사람은 있어도, 은혜 갚기 위하여 오래도록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는데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선한 일을 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죄를 짓는데 머리를 쓰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한 일을 하는데 머리를 써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까지는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조심스럽게 걱정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말에나 누구의 말에나 쉽게 믿고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선한 것을 따르는 데에는 '슬기롭고(지혜롭고)' 악에 이끌리는 데에는 '순진함(우둔함)'으로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길에는 능숙하고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좋은 진리, 좋은 임무, 좋은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할 때 선한 일을 할 때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서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은 혼자서 피난을 왔는데 그래도 한번도 그렇게 배고픈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 가나 좋은 분들을 만나서 일이 잘 되고 넉넉하게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고도 나고 못살기도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잘 될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 할아버지의 생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할아버지가 일 년에 몇 차례씩 거지 잔치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거지가 많았는데 할아버지가그 거지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천막을 쳐 놓고 잔치를 하면 일주일 동안 동네 사람들 못사는 거지들이 와글와글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86세 때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에 마지막 임종하실 때

  "나 오늘 갈 거다. 이리 모여라!"

다 앉혀 놓고 마지막 기도를 하고 유언을 하시기를

"내가 죽으면 창고를 열어서 일주일 동안 거지 잔치해라"

이렇게 유언을 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은 안하고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을 아는 고향사람들이 목사님을 만나면

"자네는 자네 어른들의 덕분에 잘 사는 것이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잘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고독해지고 자기 자신을 망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더 잘 살게 됩니다.
  선한 일들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와 달란트를 사용하여 선한 일을 하면 그 일을 통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이 잘 될 것입니다.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개역개정4판 성경)

'미련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 아케라이오스(ἀκεραίους) '는 고대 형용사로 '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미련하다'는 실천할 줄 모르는, 즉 '거룩하고 순진한 바보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의 복음 전파하러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은 단어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 마태복음 10장16절 -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는 말씀은 당시 유대인 사이의 격언으로 사용되는 문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미드라쉬(מדרש)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게 대해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만 이교도에 대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워라!'

즉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격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너희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러나 순결함을 잃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복음 전파의 승리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둘기 같이 거짓이 없고 순수와 순결함을 지키되 부패나 방탕함과 교활함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지혜로우나 교활하지 말고 순박함으로 말미암아 그 지혜가 아름답게 살아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다'에서 '순결하다'와 같은 단어로서 원래 순수하여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악한 일에 있어서는 미련할 정도로 순수하고 단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한 일이라고 하면 관심조차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줄 알면서도 거기 뭐 선한 것은 없을까 하고 머리를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식하게 무시하고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을 것 같고 많은 이익이 있을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선한 일이 아니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꾀는 그것이 자기를 올무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남을 죽이려고 파 논 함정에 자기가 빠지기 쉽고 남을 해치기 위해 만든 무기로 자신이 다치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12월 16일(화) 로마서 12-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Rather, clothe yourselves with the Lord Jesus Christ, and do not think about how to gratify 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은 성경 로마서 13장 14절에서 나온 구절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처럼 살아가며, 정욕과 육신의 일을 쫓기보다 사랑과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옷을 입듯 그리스도의 성품과 가치를 몸에 두르는 것으로, 죄를 멀리하고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을 실천하라는 권면입니다. 
의미 해석
  •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심: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예수님을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 정욕과 육신의 일 도모하지 않음: 방탕, 음란, 시기, 다툼과 같은 죄악된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 사랑의 옷을 입음: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 깨어 준비하는 삶: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부끄러운 모습이 아닌 깨끗한 옷을 입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영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결론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특히 사랑)을 따라 살며, 죄악된 본성을 벗어버리고 성화되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로마서 13:8~14
/ 이재훈 목사

오늘 본문은 전체 맥락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의 실천에 관한 교훈입니다. 전체 주제 말씀은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 몸을 영적 예배로 드리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모습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말씀의 주제는 로마서 1장 16~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 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주제는 12장 1절의 “영적 예배자로 드려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3장 전반부까지 말씀에 나오는 영적예배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선한 일에 힘쓰는 삶,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국가 일원으로서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영적 예배로 드려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삶’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4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게 복음적인 신앙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옷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담당하셨을 때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옷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옷을 입는다는 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특징입니다. 지구상 그 어떤 존재가 옷을 만들어 입습니까? 어떤 동물이 제작된 옷을 입습니까? 모든 생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인간만이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옷 아닙니까? 
성경이 타락한 인간과 회복된 인간을 옷과 관련해서 표현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의 수치심과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 있을 때 가장 먼저 제작한 것이 옷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옷이 필요했던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옷을 집어 던지고 나체주의로 살면 죄를 극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옷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그들에게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히신 것은 영구적으로 좋은 옷을 입히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죽이 생기려면 한 생명이 죽어야 합니다. “생명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야 내 앞에 합당하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옷이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예수 그리스도 의의 옷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표현할 때 “흰옷을 입은 큰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흰옷을 입은 이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으면 빨갛게 물들지 어떻게 흰색이 되느냐?”고 따지면 안 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 된 상태를 ‘흰옷을 입은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옷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옷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옷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반드시 옷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고, 어린 양의 보혈이고, 죽음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의의 옷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들이기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왕이 초대한 결혼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 초대한 결혼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시고 그 상황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왕이 결혼잔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결혼잔치를 포기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잔치에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냈다는 비유입니다. 왜 왕은 그 사람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아냈습니까? 이 비유는 당시 왕이 초대한 잔치에는 합당한 예복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을지라도 왕의 여는 잔치에서는 반드시 왕국이 정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의 옷을 벗고 이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으라”고 할 때 “내가 왜 옷을 벗어야 합니까? 나는 결코 벗을 수 없습니다”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초청한 모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옷을 입어야 한다면 그 옷을 입는 게 일종의 기쁨이요 축하입니다. 그것이 예입니다. 왕이 초대한 사람 중에 옷을 갈아입는 것 자체를 거부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반항이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실 때 단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의 옷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잎으로 만든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능력인지를 아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도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욕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 즐거움, 축복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으로 옷을 입고 살면서 새롭게 빚어지면 두 가지 성품이 나타납니다. 첫째,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8절). 
사랑을 갚아야 할 ‘빚’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 말씀에 비춰보면 “서로 빚을 갚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랑은 갚아야 할 빚이고,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결코 끝나는 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사랑할 만큼 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이상 사랑할 의무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는 할 만큼 다 했어. 더는 사랑이 없어. 더는 줄 사랑은 없어”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다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은 빚진 사람 같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또 못 줘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무감이 아니라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은 빚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십자가를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아무리 갚아도 깊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세상에서 가장 비쌉니다. 죄가 고귀하고 가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 대가가 예수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기에 죄가 가장 비쌉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대가를 스스로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었습니다. 죄를 범했다면 형벌을 내리고 끝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셔야 할 의무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건 우리입니다. 죽을 의무가 없는 분이 왜 죽으셨습니까? 빚진 마음입니다. 그 빚진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사랑하셔서 창조하셨는데 배신하고 불순종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무슨 빚을 지셨기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십니까? 빚진 마음입니다. 참된 사랑은 빚진 마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주고 또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강렬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으로 옷 입은 사람들은 늘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녀, 가까운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원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때로 예수님 믿는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원수는 안 보면 되고, 복수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용서에 대한 마음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힘듭니다. 용서해야 하는 사랑의 빚진 마음이 원수 앞에서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빚진 마음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으로 살아갑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b, 10b). 
왜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살아갈 때 율법을 완성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채웁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 모든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 가운데 다 요약돼 있습니다”(9절).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왜 해야 하고, 왜 하지 말아야 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왜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도둑질하지 말고, 왜 탐내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이 이웃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거짓을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할 리가 없습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율법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사랑의 빚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율법을 결코 어기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서 사랑의 빚진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고 삽니다”

  둘째, 그리스도 옷 입은 자들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옷을 입고 삽니다.  
“여러분이 이 시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벌써 잠에서 깨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11절). 
구원의 세 가지 시제 중에서 마지막 단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의롭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고,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와 연결이 되어 있고, 그것을 ‘낮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의 악함이 어둠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어둠의 일들을 행하는 것은 밝은 빛이 임할 때가 올 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쁜 짓을 불 꺼놓고 하고, 어둠 속에서 하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많은 은밀한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둠이 계속될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들을 계속하도록 잠들게 만든 것입니다. 
구약의 예를 보면 요나가 불순종해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키셨는데, 그 배 속에서 요나는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 잠은 정말 피곤해서 자는 잠이 아닙니다. 불순종한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를 무시할 때 드는 잠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잠자는 영혼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코로나19 팬데믹, 전쟁의 위협, 지진의 발생 등 여러 종말의 징조로 풍랑을 일으키셔서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시는데 잠자고 있습니다. 이 시대 악한 세력들이 사람들이 잠자게 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동합시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2~14절).
그냥 옷이 아닙니다. 갑옷입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냥 옷이 아니라 전투복입니다. 악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 군사들이 전투에 출정할 때처럼 무기를 챙기고,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쟁이 났는데 잠옷 입고 나가 싸우는 군사는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전투화가 너무 무겁습니다, 소총이 너무 무겁습니다, 전투복이 너무 무겁습니다”라고 불평하는 군사는 없습니다. 군사는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빛의 갑옷을 입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이 시대 엄청난 문화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빛의 갑옷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 원하시는 것만 보는 것이요, 듣기 원하시는 것만 듣는 것이요, 예수님이 말하기 원하시는 것만 말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생각하기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요청했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긴박하게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 도망했고, 엉뚱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말씀이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보면 노래가 반복되는데 그 내용은 ‘톨레 레게(들고 읽어라)’입니다. 저런 노래가 있었나 생각하다가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펴서 가장 처음 읽은 말씀이 로마서 13장 13~14절입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임해서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아구스티누스에게 임했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랑과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에 잠자는 성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옷이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랑의 옷을 입고, 거룩의 옷을 입고, 
마지막 때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월 15일(월) 로마서 10-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물이 주에게서(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새한글 성경 /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서, 하나님을 통해서 지탱되며,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아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성경 구절(로마서 11:36)
이는 모든 만물의 시작(창조), 운행,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지가 하나님(주)이심을 선언하는 구절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찬양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의미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From Him) :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근원이십니다.

  • 주로 말미암고 (Through Him) : 모든 존재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유지되고 다스려집니다.

  •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To Him) : 결국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이는 모든 것의 종착점이자 완성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핵심
  • 하나님의 주권 : 창조주로서 만물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과 통치권을 가지심을 강조합니다.
  • 창조와 구원 : 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을 넘어, 인간의 구원과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까지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 영광 찬양 : 이 구절 뒤에는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 이어져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로,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마지막임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이라" 

이 말씀은 앞의 문장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 자신의 선한 것을 결코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은, 우리 자 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무(無)에서 창조함
그리고 지금은 우 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밝히고 있다. 
그는 이같은 자실로 미루어서, 우리의 존재 목적 이 그의 영광을 지향 하는 것 이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한 보존해 수시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이외의 목적을가 지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모순되는 것 이겠는가! 
(에이스 아우 돈 ; 수 에게로) 이라는 어휘 가 때로는 (엔 아우토 ;주수 -안에 서 또는 두로_말미암아 )라는 뜻으로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인 '수에게로’가 본문의 문맥에 더 잘 어울리므로, 부정확한 용례를 따르는 것보다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낫다. 
본문의 말씀의 요지는, 만일 만물의 시작(창조자)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 서 또한 끝(완성자)이 아니시라고 하면 자연의 전체 질서가 뒤집힐 것이 라는 것이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수의 영광이 모든 곳에서 영구불변하게 납아 있어야 한다고 하는 명제가 확실하게 입증된 것으로 바 울은 아제 자신 있게 생각하고 있다. 본문의 문장은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 될 것 같으면 전의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본문의 경우는 문맥을 살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 문맥에 의하만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 하시는 것이 당연하며, 그리고 그의 영광, 이외 에는 아무것도 인류와 온 피조계가 옥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려고 하는 견해는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이고, 갑으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어 말할 수가 있다.

주에게서 나오고 - 거룩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돌아가고 - 거룩에게로 돌아가고

안식일 - 시간의 거룩
성막 - 공간의 거룩
예배는 시간에서 거룩의 장소로 옮겨가는 것
예배 후에는 공간의 거룩에서 시간의 거룩으로 돌아가는 것 

출애굽기 20장 - 창조주 하나님
신명기 5장 - 구속주 하나님

안식일은 얼마동안 지켜야 하는가?

소요리문답 
질문 59. 하나님께서 일곱 날 중 어느 날을 안식일 또는 주일로 정하셨습니까?

답변 : 세상의 시작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하나님께서는 일곱 날 중 일곱째 날을 안식일 또는 주일로 정하셨고(143), 
그 이후부터 세상 끝까지 일곱 날 중 첫째 날을 지키도록 정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144).

​143 창세기 2:2-3. 출애굽기 20:11.
144 마가복음 2:27-28. 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요한계시록 1:10.

질문 60. 안식일은 어떻게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까?

답변 : 안식일은 다른 날에는 합법적인 세상적인 일과 오락으로부터까지 쉬면서(145), 
그 날 하루 종일 거룩하게 쉬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비로운 일을 행하는 데 사용되는 시간을 제외하고(146), 
그 시간 전체를 공적이고 사적인 하나님의 예배 활동에 사용함으로써(147),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145 출애굽기 20:10. 느헤미야 13:15-22. 이사야 58:13-14.
146 마태복음 12:1-13. 
147 출애굽기 20:8. 레위기 23:3. 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20:7.

질문 61. 제4계명에서 금지된 것은 무엇입니까?

답변: 제4계명은 요구되는 의무의 누락이나 부주의한 이행, 그리고 게으름, 그 자체로 죄가 되는 행위, 또는 우리의 세상적인 고용이나 오락에 대한 불필요한 생각, 말, 행동으로 그 날(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을 금합니다(148).

​148 느헤미야 13:15-22. 이사야 58:13-14. 아모스 8:4-6.

질문 62. 제4계명에 덧붙여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 제4계명에 덧붙여진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주일 중 엿새를 우리의 일에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점(149), 일곱째 날에 대한 특별한 소유권을 주장하신다는 점, 그분 자신의 모범, 그리고 그분이 안식일을 복 주셨다는 점입니다(150).

​149 출애굽기 20:9. 출애굽기 31:15. 레위기 23:3.
150 창세기 2:2-3. 출애굽기 20:11. 출애굽기 31:17.










이삭,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약속의 자녀 | 생애, 사건, 상징적 의미

이삭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출생을 예고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사로 정하신 ‘약속의 자녀’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삭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표상하는 인물이자,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를 상징한다고 증거한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이삭의 생애와 주요 사건을 살펴보고, 각각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상징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이삭의 생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원래 아브라함은 나이 많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로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후사로 정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며 이름을 ‘이삭’으로 지어주시고 나아가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에도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 돌아올 것이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재차 약속하셨다(창 18:1~15).

그로부터 1년 뒤,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쁨이 되었다. 
형 이스마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으나,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냄으로써 아브라함의 독자(獨子)이자 유일한 후사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장성한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동생 나홀의 일가가 사는 밧단 아람으로 종을 보냈다.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데려왔다. 
당시 브엘 라해로이에 살던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이삭과 결혼하고 20년이 다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리브가의 태 안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며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강하고 큰 자(형)는 어린 자(동생)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 
이삭이 60세 되던 해에 쌍둥이가 태어났다. 
먼저 나온 아이는 ‘털이 많다’는 뜻의  '에서
나중에 나온 아이는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 이름했다(창 25:19~26).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에 든 흉년으로 인해 그랄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랄에 거했다. 
그 결과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산이 점점 늘어 큰 부자가 되었다.

이삭의 세력이 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견제하며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메우고 떠나라고 협박했다. 
이에 이삭은 그랄 골짜기, 르호봇, 브엘세바로 이동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디에서든지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심을 알게 된 블레셋 왕이 이삭에게 화해를 청했고, 이삭은 그들과 평화 약속을 맺고 브엘세바에 거했다.
1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됐다.


이삭 관련 주요 사건 / 번제로 드려질 뻔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린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든 채 산에 올랐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번제에 쓸 어린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답했다.

예정된 장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 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렀다. 
천사는 아브라함이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였다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해 수풀에 걸린 숫양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산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 터가 되었다(대하 3:1). 
이삭의 번제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대속물로 희생하실 것을 표상한다(요 3:16, 마 20:28).

야곱을 축복함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에서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장막에서 집안일을 도왔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해 그를 아꼈지만 아내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다.

나이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이삭은, 죽기 전에 장자를 축복하기 위해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음식을 만들어 이삭에게 가져가게 했다. 
야곱을 에서로 착각한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가 방성대곡하며 복을 간청했지만, 이삭으로서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창 25장 23절) 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삭의 상징적 의미 /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른다(눅 16:19~24). 
천국에서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므로, 아브라함이 아버지 하나님을 표상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요 8:54~56, 갈 3:16).

갈라디아서 3:16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제지하며 이삭 대신 어린양을 제물로 삼게 했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어린양의 실체인 예수님께서(요 1:29)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희생하시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짐승을 잡아 절기를 지킬 것을 예표한다.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약속 없이 태어난 이스마엘과 달리, 이삭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후사로 축복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삭을 가리켜 약속의 자녀라 칭했다(롬 9:7~9).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나 야곱처럼 출생 전에 하나님이 미리 예언으로 그 축복을 약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새 언약을 지키며, 미리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해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성도들 역시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후사 이삭은 하나님의 후사인 성도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갈 3:29).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으며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재림 예수님 / 새 언약을 회복하시다 

많은 기독교인이 하늘을 바라보며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나, 그는 이미 오셨다. 

약속의 자녀

약속의 자녀(약속의 자손, Children of promise)는 출생 전에 하나님이 예언으로 축복을 약속한 사람이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삭과 야곱을 대표적인 약속의 자녀로 꼽을 수 있다.[1] 
또한 구원받을 성도들이 약속의 자녀로서 신구약 성경에 연결적으로 예언되어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이 되어야 구원받을 교회가 된다.[2]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성경에는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삭과 야곱을 들어 약속의 자녀를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로마서 9:7-13

하나님께 씨로 여기심을 입는 자녀는 오직 약속의 자녀다. 약속의 자녀는 출생 전에 미리 예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약속 없이 태어난 자들은 육신의 자녀로서 약속의 자손과 대비된다.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영혼 구원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85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후사를 선정하는 일로 근심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후처로 주었고,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다.[3]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 없이 태어난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 창세기 17:18-19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 하나님이 사람되어 나타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는 다음 해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었다.

야곱과 에서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약 20년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어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하니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태중에서 서로 다투는 까닭에 리브가가 하나님께 괴로움을 호소하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에서]는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 창세기 25:23

두 민족은 야곱과 에서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 그 예언을 성취한 야곱이 바로 약속의 자녀다. 원칙적으로는 형인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 결국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삭의 상속권은 약속의 자녀인 야곱에게 돌아갔다.[4]

참 교회와 거짓 교회

교회도 약속의 자손과 육신의 자손이 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으면 약속의 자손이다. 현재 크게 번영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할 육신의 자손에 불과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동방에서 하나님의 모략을 이룰 한 선지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5] 선지자 말라기는 오늘날 이루어질 마지막 선지자와 마지막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 말라기 4:5-6

지중해 밧모섬에서 계시를 본 사도 요한해 돋는 곳(동방)에서 마지막 인 치는 천사가 올라올 것이라고 기록했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 7:2-3

이 시대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는 구약과 신약에 연결되어 있는 예언을 성취한 교회다. 말라기, 이사야,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따라 동방 해 돋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印)을 가지고 등장하며, 엘리야의 사명을 이룬다는 예언이 성취되어 있는 교회가 약속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약속의 자녀와 남은 자손

한편,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받을 '남은 자'에 대해 예언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 이사야 10:20-22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예언이라고 기록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 로마서 9:27-28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전 세계에 바다 모래 수와 같이 많지만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의 대상이 된다. 성경은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도 하고 남은 자손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약속의 자손이 곧 남은 자손이라는 뜻이다. 엘리야 시대에 우상 숭배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알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7000명을 남겨두셨다.[6]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7] '남은 자'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나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라는 같은 예언이다.

여자의 남은 자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 약속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를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말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요한계시록 12:17

용은 옛 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꾄 뱀으로 사단 마귀를 의미한다.[8] 마지막 때 여자의 남은 자손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 마귀와 결전을 치른다. 여자, 즉 남은 자손의 어머니에 대한 예언은 성경의 역사가 시작되는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서로의 후손끼리도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예수 초림 때 일차 성취되었지만, 마지막 때에 여자의 남은 자손을 통해 다시 성취된다. 종교암흑세기 이후 여자의 남은 자손이 용(옛 뱀)과 대적하게 된다고 요한계시록 12장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9] 창세기 3장의 여자는 아담의 아내인 하와를 가리킨다. 일곱째 날 안식 직전에 창조된 하와는 영원한 안식이 가까운 때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아내를 표상하므로 용과 대적할 여자의 남은 자손은 재림 그리스도의 아내인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라고도 예언했고,[10][11]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에게 하늘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어머니가 계심을 언급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갈라디아서 4:26-31


약속의 자녀는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다. 어느 때든지 미리 예언으로 약속하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의 사람이 약속의 자손이 되는 동시에 성령을 따라 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오늘날에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세워진 교회의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가 되고 약속의 자손이 된다. 성경의 모든 예언을 따라 엘리야의 사명을 성취하신 재림 그리스도와 어머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남은 자', 곧 성령 시대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다.

같이 보기

각주

  1. 로마서 9:7-13.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2. 안상홍, “제5장 약속의 자손과 남은 백성”, 《하나님의 비밀과 생명수의 샘》, 멜기세덱출판사, 2011
  3. 창세기 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4. 창세기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야곱)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5. 이사야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6. 열왕기상 19:18.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7. 로마서 11:3-5.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8.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9. 요한계시록 12:14-17.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10.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1. 요한계시록 21: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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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이제 곧 성탄절이 돌아온다. 
낮은 곳에 오셔서, 몸소 참된 신앙의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되새겨 본다.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에서, 모든 이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신 분. 
나그네 된 가족이, 묵을 숙소조차 없어서, 마구간에 잠시 머물 때 태어나신 예수. 말먹이 통에 누이신 예수. 
그 초라하고 궁색함이, 그 어떤 궁핍한 자들보다 덜하지 않았지. 가난하고 이름 없는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결국 강도—혹은 열혈당 투사들—두 명과 함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셨어. 왜 하필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었나.

빨간 배경 위에 별, 하트, 천사, 종 등 흰색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 

세상을 지배하던, 정치적, 종교적 권력 집단,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게, 개혁적이고 획기적인 그분이 일으키고 다니는 변화의 바람이, 달가웠을 리가 없었겠지.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일탈이나, 교리에 대한 불순종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겠지. 그걸 용납하는 순간, 그들의 존재 기반은 사라졌을 테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에게, 그들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임을 일깨우고 다녔잖아. 정결하다고, 선택받았다고, 잘난척하며 그 소외된 자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 취급하던 그들이,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종교적으로 완전한, 정결하고 고귀한 분을, 정치적인 죄목인 "유대인의 왕"이라고 낙인찍어 죽인 거지.

​지금은 어때? 뭐 그때와 크게 다른 게 있나? 아, 아니다 크게 다르긴 하지. 최근 몇 년간 "일부" 목사들 그리고 중들이 보여준, 믿기지 않는 행동들을 봤잖아. 목사들이나 중들이나, 돈과 욕정의 노예가 되어, 추하고 더러운 행동들을 서슴지 않더구먼. 일부라고 하지 말자. 그 "일부"를 못 막고, 못 없애는 "대부분"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뭔가 의미 있는 일 좀 하려고 해도, 어떤 사연이든, 너무도 답답해서 호소 좀 하려고 해도,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려고 해도, 평화와 화해를 말하려고 해도, 이 모두가 포퓰리즘이고, 종북이고, 좌파고, 이단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비난받잖아. 우리 사는 곳이 깨끗해지고, 정의로워지고, 공평해지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참 많은 것 같아. 아니 그런 이들의 힘이 정말 강한 건 아닐까?

​이런 때에, 예수의 정신을 심장에 품고, 온몸을 바쳐서 전파해야 할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그분이 했던 그 행동들을, 그저 따라 하면 될 텐데. 쓴잔은 다 엎어 버리고, 은혜, 축복, 영광, 부활, 영생의 달콤한 잔들만 달라고 아우성치잖아. 무슨 죄든 짓고 나서, 회개했다고 하면 그만인,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종교. 이타는 없고 배타와 독선만 가득한 막무가내 종교. 이런 신앙으로 물들여진 우리와 같은 이들을, 그래도 구원하려는 분의 마음은 어떤 심정일까.

​나 자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가 참 창피하고 두렵다. 
감당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워서, 아직 발도 못 내민, 그 "구원으로 가는 길"에 언제쯤이나 들어설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아마 끝내 나서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라. 구원은 받고 싶은데, 그에 상응하는 희생과 의무는 감당하기가 싫어, 솔직히. 좀 쉬운 방법이 없을까?
흐릿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는 이미지.

올해도 그 어리신 분이 다시 오신다.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든 구원해 보겠다고, 말먹이 통 마른풀 위에 초라하게 오셔서, 또 고초당하고, 또 처형당하고. 물과 같으신 분이 또 오신다. 
그 마음과 몸이 늘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분.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온 세상천지와 하늘과 바다를 아우르는 분. 눈, 비, 구름, 강물 등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분. 목마른 생명들을 살리는 분. 추위에 얼고, 강한 열기에 수증기가 되어 증발할지라도, 그의 존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분. 
그리고 맑고 투명하여, 나를 비추면 나는 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분. 온 세상 더럽고 추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분.

​마라나타, 예수여 오소서. 오셔서 구원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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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과의 전쟁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 금연 운동을 강조했습니다.

1895년 장로교회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되었습니다.  

금주 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또한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금주·  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미래적 비전을 갖고 금주 금연 운동을 정착시켰습니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 · 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언해야 할 시대적 사명은 기우러진 사상에 심취된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쳐서 진리의 말씀위에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월 13일(토) 로마서 8-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속의 자녀(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natural children who are God's children, but it is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regarded as Abraham's offspring.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원칙을 강조합니다.  

1. 정죄함 없음(8:1)
 – 새로운 자유의 시작
 
2. 성령 안에서의 삶(8:2)
 – 진정한 자유의 능력

3.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8:14)
 – 모든 것을 바꾸는 이름
 
4. 
구속된 고통(8:18)
 – 헛되지 않은 시련

5.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8:38-39)
 – 영원한 확신


로마서 6장
/ 죄와 육체의 관계
죄의 결과는 죽음(6:23)

로마서 7장 /
죄와 마음의 관계
죄의 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에 나는 곤고한 사람(7:25)

로마서 8장 /
죄와 성령의 관계
죄를 다스리는 비결은 생명의 성령의 법(8:2)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원칙
1. 정죄함 없음, 
2. 성령 안에서의 삶, 
3.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4.구속된 고통, 
5. 끊을 수 없는 사랑
을 중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는 C.S. 루이스의 통찰과 함께, 성경 구절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진리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 속에 적용하도록 인도하는 영적 성찰입니다.

1. 정죄함 없음 – 새로운 자유의 시작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이 말씀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책감의 사슬을 끊으셨다는 강력한 복음의 외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실수와 죄로 인해 정죄감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바울의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뿌리채 바꾸는 선언이며,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받았어야 할 형벌이 이미 사하여졌음을 말합니다. 
이제 죄책감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도전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믿지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은 우리에게 그 믿음으로 살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2. 성령 안에서의 삶 – 진정한 자유의 능력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2).

기독교인의 삶은 단지 죄를 피하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변화되는 삶입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의무감이 아닌 은혜의 흐름 속에서 열매가 맺히는 삶입니다.

C.S. 루이스는 "기독교는 단지 삶의 향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 모든 것을 바꾸는 이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죄 사함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정체성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겨내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재판장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는 평범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4. 구속된 고통 – 헛되지 않은 시련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고통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연단하고, 영혼을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이끕니다.

성령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이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메가폰”이라 했습니다. 
고통은 영적 눈을 뜨게 하고,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합니다.

5.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 – 영원한 확신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실패도, 두려움도, 죽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고, 변함 없고, 영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잘할 때만이 아니라, 연약할 때에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C.S. 루이스는는 하나님을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는 반석입니다.

결론 – 삶으로 살아내는 로마서 8장

로마서 8장은 단지 지적인 이해를 위한 장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정죄함 없음, 성령의 삶, 자녀의 정체성, 구속된 고통, 끊을 수 없는 사랑
이 다섯 가지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 걷습니다. 
고통도 헛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promise)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과 이방인 중에서도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라는 두 개념을 다루는 9장-11장의 서두 부분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애끓는 사랑의 마음(1절-3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자격(4절-5절), 참된 이스라엘: 이삭(6절-9절), 참된 이스라엘: 야곱(10-13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 사역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효력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계속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갈 것임을 역설합니다. 바울은 혈통적인 정통성과 약속 곧 믿음에 의한 자녀라는 새로운 도식을 통해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자손에 포함시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 24절 말씀이 특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는 구절이 더 그랬습니다.

바울은 자타가 인정하듯이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에 몰입하던 그는 오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혈통적 정통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의한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복락을 누리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약속의 자녀로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었습니다.

육신의 자녀는 혈통적인 자녀를 말한 반면,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과 계획안에서 태어난 자를 말합니다. 약속의 자녀는 단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정해진 구원의 계보를 따른 자녀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된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선포였습니다. 정통성을 주장하고 믿어왔던 이스라엘에게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새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10절-13절에서 보듯이 그것은 이스라엘이 불평하지 못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내세울 처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의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일어난 
감사였습니다.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제게 구속의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이 은혜는 이생과 내생에 두루 누리는 복중의 복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이 감사의 마음이 식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다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평생 감사하며 나아가자고 다짐해 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혈통이나 육신의 자랑은 결코 참다운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늘 본문은 일깨워주었습니다. 재력, 학벌, 직장, 외모, 가정 등 외적 조건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른 믿음만이 전부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을 외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럴진대, 감히 내가 누구를 평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마 7:1-2; 눅 6:37). 다른 성경에서 바울과 야고보도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롬 14:4; 약 4:11-12). 외적 조건이나 외적 상황을 두고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이웃들이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소개하고 이들을 약속의 세계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단단히 했습니다. 그동안 다소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도 더욱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약속의 자녀답게 믿음의 계보를 잘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 자신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참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자녀들도 내가 예수 믿기에 당연히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믿음을 통해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므로 자녀들이 믿음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이들을 잘 이끌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자녀가 되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겉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약속의 믿음 안에서 살게 하소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구원에 대한 깨달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Justification by Faith) 
오스왈드 챔버(Oswald Chambers)

 내가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구원 받았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단순한 표지일 뿐입니다. 
원인 대신에 결과를 강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나의 순종, 정진, 헌신으로 인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놀라운 대속의 구원이 곧바로 나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내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 은혜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놀랍고 찬란한 빛으로 내가 의롭게 되었음을 알게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알지 못해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베푸신 구원은 인간의 논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 대속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대속에 의해서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는 것은 회개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에 앞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 고후 5:17-19)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보장, 우리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보장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것들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하여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일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하신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지정의(知情意)

인간의 정신 활동을 지(知, 앎/지성), 정(情, 느낌/감성), 의(意, 의지) 
세 가지 요소로 나눈 개념으로, 인격의 삼요소로 불리며, 지식, 감정, 의지가 조화롭게 발달해야 완전한 인격이 된다고 봅니다. 
이 단어는 심리학,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특히 기독교에서는 '지정의적 신앙'처럼 믿음의 영역에서도 지식(이해), 감정(사랑), 의지(순종)의 통합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지정의(知情意)의 각 요소
  • 지(知: 앎/지성) : 지식, 지혜, 인식, 분별, 이해, 성찰 등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 정(情: 느낌/감성) : 감정, 사랑, 기쁨, 슬픔, 열정, 배려, 애착 등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 의(意: 의지) : 의지, 결단, 행동, 실천 등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주요 사용 맥락
  • 인격 형성 : 인격이 성숙하려면 지, 정, 의 세 가지가 모두 풍부해야 함.
  • 신앙/종교 : 성경적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지),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정), 그 뜻에 순종하는 의지(의)가 통합된 상태를 '지정의적 신앙'이라 함 

육신이란 무엇인가요?

존 녹스(1510-1572)는 스코틀랜드인 성직자, 종교 개혁의 지도자였으며 스코틀랜드 장로 교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녹스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의 화신이자 성경과 거룩한 삶의 진리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현대 신학자들의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성인 녹스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신도 개인적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 (로마서 5:12)과 싸운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녹스는 “나는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 아래서 벌어지는 육신과 영의 전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압니다. 그 싸움에는 세상적인 방어도 없고 당장의 죽음만 보입니다. 나는 육신이 마지못해하는 것과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압니다…”

녹스의 진술은 죄 본성과의 개인적인 고군분투를 공개적으로 시인한 사도 바울의 말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4-24).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쓴 서신에서 “나의 육신”이라 부르는 자기 몸의 “지체 안에” 무엇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크리스천 삶 속에 어려움을 낳고 크리스천을 죄에 갇힌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는 로마서 서문에서 바울이 “육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육신’을 나쁜 행실과 관련된 ‘육신’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 바울은 육체와 영혼, 사고, 그의 모든 능력을 포함한 전인적인 것에 대해 ‘육신’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육신을 좇아 열망하며 분투하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언급은 “육신”이 성적인 활동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께 반대되는 애착 및 갈망이라고 지적합니다. “육신”이라는 용어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그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또 정의는 무엇인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 속에서 그 말이 어떠한 의미를 나타내는지, 그것이 낳는 결과 및 그것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정의
신약성경의 “육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성경 속에서 종종 육체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사륵스입니다. 그러나, 신약과 그밖에 초기 기독교 문헌들의 헬라어 영어 사전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능하는 독립체로서의 육체. 특별히 바울의 견해에 따르면, 몸의 모든 부분은 육신으로 알려진 총체를 구성하며, 육신은 그것이 어디에 거하느냐 따라 그만큼 죄에 지배당한다. 육신에는 모든 형태의 죄가 거하며 아무 선한 것도 살지 않는다.”

성경은 인류가 이러한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는 인류가 원래 선하고 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결과는 본질적으로 그것의 원인을 나타내므로 [즉,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한 것만을 창조하실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태복음 7:18)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모두 죄 없이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본성은 타락했고, 후손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세기 5:3, 강조 추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죄의 본성에 대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불륜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모가 죄의 본성을 전해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때때로 인간 본성에 대한 “영혼 출생론” (Traducian, “가지로부터”를 의미하는 라틴어 용어에서 파생) 관점으로 불려집니다. 영혼 출생론 관점은 사람의 영혼이 그 부모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즉 잉태 과정 속에서 자녀가 부모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헬라 철학적 관점과 구별됩니다. 성경은 인류의 육체적 영적 본성이 본래는 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반해, 플라톤 (Plato)과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원론으로 이분하여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과적으로 몸 (육체적인 것)은 악한 것이고, 사람의 영은 선한 것이라는 이론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데미우르고스” (Demiurge)라고 불리는 반신반인이 실수로 물질계를 창조했다고 믿는 영지주의자들 (Gnostics)같은 무리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가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육체의 형태를 결코 취하실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에 반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이러한 유형의 가르침을 접하고, 이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1-3).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영만이 중요한 것이므로, 사람이 자기 몸에 무엇을 하든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은 1세기 때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그 이론은 금욕주의 아니면 방탕주의로 이끌었으며, 둘은 모두 성경이 정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23, 유다서 1:4). 성경은 그래서, 헬라 철학과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선했지만, 둘 다 죄에 의해 악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결과는 성경 속에서 종종 “육신”으로 언급되는 본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가 되는 희열을 찾는 그 무엇입니다. 마크 부벡 (Mark Bubek) 목사는 육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육신은 자연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섬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재된 실패의 법칙입니다. 이는 사람의 타락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제적이며 내적인 힘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에 반대하는 일반적이고도 구체적인 반항으로 나타납니다. 육신은 결코 새롭게 되거나, 개선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완전히 처형되고 교체되는 데 있습니다. ”

육신의 현현과 싸움
인간 존재 안에서 육신은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까요? 성경은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19-21).

세상에서 육신의 일이 드러나는 사례들은 명백합니다. 미국 내 음란물의 영향에 대한 최근 조사에서 밝혀진 안타까운 사실들을 살펴봅시다. 이 연구에 따르면, 매 1초마다 미국 내에서는,
• $3,075.64가 음란물에 소비되고 있으며,
• 28,258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음란물을 시청하고,
• 372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검색 엔진에 성인 검색어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39분 마다 미국에서 새로운 음란물 영상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사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이라고 슬퍼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진술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육신의 결과물
성경은 육신 안에서 살면 몇 가지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성경은 육신에 따라 살면서 자신들의 죄 된 행동을 결코 바꾸거나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이생과 다음 생에서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로마서 6:21)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3)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8)

게다가, 사람은 육신적 본성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이 노예 생활은 언제나 파괴적인 생활 방식과 악화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호세아 8:7)라고 말했습니다. 문제의 사실은 육신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도덕률을 깨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의미에서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깰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가 목에 망토를 두르고 중력의 법칙을 깨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지붕에서 뛰어내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날 수 없다는 것과 중력의 법칙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며 결과적으로 깨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도덕적 행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도덕률이 사실임을 증명하게 될 뿐입니다.

육신 극복하기
성경은 육신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악한 행동을 인정하는, 정직의 행보입니다. 이것은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 즉, 사람들은 죄인이고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이 세상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 130:3)
•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8, 10)

다음 단계는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며 육신의 욕망에 순종하지 않도록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것을 수반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새로운 삶의 행보는 성경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1)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7)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4)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마지막 단계는 죽음의 행보입니다. 즉 육신이 그 욕망하는 것에 굶주려 결국 죽게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거듭난다고 해도,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어 새로운 본성과 성령으로부터 오는 바람들과 싸우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크리스천은 의도적으로 옛 자아, 육신의 본성이 가진 욕구 채우기를 피하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 받는 새로운 행위를 연습해야 합니다.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죄된 행동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디모데전서 6:11)
•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디모데후서 2:22)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5)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0-24)

결론
위대한 설교가들이자 찬송가 작가들이었던 요한과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는 죄와 육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너의 사고력을 약화시키거나 너의 양심을 민감하지 못하게 손상시키거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감각을 모호하게 하거나 영적인 것들에 대한 너의 기쁨을 빼앗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요컨대 어떤 것이라도 성령보다 육신의 권한과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그 자체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에게 죄가 된단다.” 크리스천 삶의 목적 중 하나는 육신을 이기는 성령의 승리이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매우 현실적이겠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육신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마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거의 1,000번 정도 언급합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감정과 욕구가 거하는 영적인 부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계시므로, 또한 “마음”도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을 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도행전 13:22)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지도자들과 함께,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사무엘상 2:35, 예레미야 3:15).

사람의 마음은 천성적으로 악하고,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합니다.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욕구는 죄에 의해 부패되었습니다 – 게다가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비밀을 아[십니다]” (시편 44:21, 또한 고린도전서 14:25 참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고],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24-25).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므로 정당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타락 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로마서 10:10).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51:10, 에스겔 36:26).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겠다고]” (이사야 57:15)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 (시편 17:3, 신명기 8:2)하고,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개념, 새로운 지혜, 그리고 새로운 욕구를 채우시는 일 (느헤미야 7:5, 열왕기상 10:24, 고린도후서 8:16)을 수반합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부이며,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12월 12일(금) 로마서 6-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Thanks be to God--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I myself in my mind am a slave to God's law, but in the sinful nature a slave to the law of sin.

로마서 6장은 죄와 육체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6:23).
로마서 7장은 죄와 마음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를 이기지 못하는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7:24).
로마서 8장은 죄와 성령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를 다스실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것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8:28).


"마음은 원이로되"는 성경 구절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에서 나온 표현으로, 
마음은 ~하고 싶어 하지만 몸(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상황을 뜻하며,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약함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자세한 의미 :
  • 마음(Spirit/Will) : ~하기를 원하고 바라는 선한 의지, 영적인 소망.

  • 육신(Flesh) : 연약한 인간의 몸,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나약함, 현실적인 한계.

  • 전체 의미 : '좋은 뜻은 있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유혹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적 배경 :
  • 마가복음 14:38 (마태복음 26:41) :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적 활용 :
  • 다이어트나 금연처럼 의지는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혹은 신앙생활에서 결심은 했으나 실천이 어려울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 마음의 원함, 영혼의 갈망 

우리들도 우리 안에 주님이 심어주신 마음의 원함, 영혼의 갈망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비록 우리 자신이 그 갈망을 강하게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비록 아직도 세상에 대한 끌림이 더 현저하게 느낄지 몰라도, 여러분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육신의 연약함이 우리 안에 함께 있음을 자각하고, 우리도 스스로 깨어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잠들어 버린 제자들, 실패한 제자들 안에서 여전히 긍정의 요소를 인정하고 격려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자신의 실패한 모습만 기억하며 낙심한 성도가 있습니까? 주님은 여러분 안에 ‘마음의 간절한 원함’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우리 안의 마음의 원함이, 영혼의 갈망이 내 안에서 더 힘있게 역사할 수 있도록 스스로 돕는 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 내면의 영혼의 소리와 열망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 갈망에 더 자주 순종하기를 힘씁시다. 거스르는 육체의 소리와 본성에는 단호하게 처음부터 거절하기를 훈련합시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늘 주님께 기도로써 도움을 청합시다.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영적 진보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마가복음 14:38 말씀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한평생 마음에 새겨서, 주님이 우리 안에 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다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두 가지 마음이 무엇인가? 

바울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고 그와 함께 여전히 구원받기 이전에 나의 삶의 형식 즉 죄를 짓고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존재하고있다. 
그럼 누가 이기는가?

‘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항상 지체의 법 즉 육신의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이기고 마음의 법은 육체의 법에게 사로 잡히는 것을 보았다.  
율법은 선 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어 선한 율법인 줄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항상 죄의 법이 이긴다. 
아주 단호하다.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을 이긴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과는 늘 죄의 법에 따라 무릎 꿇고 있는 자신을 볼 뿐이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알아 날마다 말씀 안에서 살겠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노력하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나 자신을 발견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에 율법을 정해 놓고, 노력해서 그렇게 살면 교만해지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죄의식 속에 빠진다.
내 속의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그 판단으로 자신이 올무가 되어 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다. 
누구에게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존재하고 항상 선한 마음보다 악한 마음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탄식을 한다. 이 탄식은 비단 바울의 탄식이 아니라 나의 탄식이고 죄 아래 있는 우리 모두의 탄식이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결국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율법으로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알지만 우리는 선을 행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에 해결책은 율법의 선한 행동이 아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

내가 선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선한 마음이 나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 주실이, 나를 이 죽음의 죄에서 건져 주실 분, 나를 살리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 은혜일 뿐이다. 

여러분이 늘 묵상하는 분이든, 우연히 오늘의 묵상을 읽게 되었는 마음에 한 가지 약속하자!

나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선하지 못하다. 
오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평생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날마다 나 자신만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살겠다.  

본 묵상의 전개와 적용은 개인의 묵상과 적용이 아닌 묵상 가족을 위한 보편 묵상과 적용임을 알려 드립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기 바로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될 정도로 고민하시며 기도하실 때, 같이 올라갔던 가까운 제자 세 명이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조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악하다”(마 26:40)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데 종종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기독교인 친구는 술 먹을 때 이런 변명을 하곤 하여 주위를 웃기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하나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이러한 죄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오랜 세월 인 박힌 죄나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이런 말로 변명도 하고 위안도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가 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또 우리가 자주 원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롬 7:23,24). 우리는 이 구절도 인용하며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이런 약함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우리 같은 평신도가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느냐며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 변명이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일어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하지만,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정말 근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 인간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한 시도 깨어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크게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잘못을 대변해 주시는 것처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전에도 여러 번 “주님은 유대인에게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않으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8:38,39).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육체와 본성의 약함과 결점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계속 주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을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잘못을 크나큰 슬픔으로, 그리고 하루 빨리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육신의 약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불가피한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잡아야 할 상태에 대한 진단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페넬롱은 “십자가의 왕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약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압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약합니다. 
자신의 어떠함을 깨닫는 것은 매우 큰 유익입니다. 
하지만 약함이 인간의 본성과 분리될 수 없는 속성이라고 할지라도 약함을 과장하지 마십시오. 
참된 힘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오직 내면으로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비열한 것들을 담대히 경멸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참된 힘의 근원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았기에 로마서 7:25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말합니다. 또 주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과 함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약함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면이 바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밀접하고도 꾸준한 교제와 기도를 통하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과거의 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Clement Clarke Moore와 도시의 산타

많은 사람들이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1779-1863)가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구절을 통해 미국에서 산타 클로스의 대중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권리로 중요한 뉴요커였습니다. 무어는 1779 년 맨해튼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Desobry  CC Moore   1835   472942

번영 Desobry. 첼시의 CC Moore에 속한 부동산의지도. 1835. 뉴욕시 박물관. 47.294.2 번영 Desobry. 첼시의 CC Moore에 속한 부동산의지도. 1835. 뉴욕시 박물관. 47.294.2

무어는 그의 학문적 추구 외에도 헌신적 인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1813 년에 캐서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으며, 1830 명의 자녀가있었습니다. 캐서린은 15 년에 사망하여 XNUMX 살에서 XNUMX 살 사이의 아이들을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남겨 두었습니다. 그는 그의 딸 자선 엘리자베스 무어에게 쓴“세인트 니콜라스에서”를 포함하여 그의 자녀와 손자를 위해시를 쓰는 것을 즐겼습니다. 시는 박물관의 일부입니다 원고 수집.

     ca 1816-1830   543314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세인트 니콜라스에서. ca. 1816-1830. 뉴욕시 박물관. 54.331.4

23 년 1823 월 1837 일에 트로이 센티넬에서 익명으로 '성 니콜라스 방문'(현재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처음으로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1844 년까지 자신의 자녀를 촉구 할 때 출판 된시를 책에 포함시킬 때까지 자신의시를 지었다. 1844 년 무어는 트로이 센티넬 (Troy Sentinel) 출판사 인 N. 터틀 (N. Tuttle)에게이 논문이 출판 한시의 저자에 대해 물었다.

“처음 출판 당시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저자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는 [Orville L.] Holley 씨로부터이 도시의 상인이었던 Daniel Sackett 씨의 아내 인 Sackett 부인으로부터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두 번 출판되었다 트로이 센티넬; 어린 반 학생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고이 책의 다른쪽에있는 판화를 만들어 여러 판을 출판했습니다.”

Moore는 "Blixom"에서 "Blitzen"으로 순록 중 하나의 이름을 포함하여 Tuttle이 보낸시의 버전을 몇 가지 수정했습니다.

N Tuttle Clement Clarke Moore   1844   5433117b

N. Tuttle에서 Clement Clarke Moore에게 보낸 편지. 1844. 뉴욕시 박물관. 54.331.17b

N           5433117

N. 터틀. 세인트 니콜라스 또는 산타 클로스 방문 기록. 뉴욕시 박물관. 54.331.17

무어의 지연된 주장은“성 니콜라스 방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종종 논쟁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뉴요커 인 헨리 리빙스턴 소령의 조상은 20 대 초에 나왔다th 리빙스턴이 실제로 저자라고 주장하는 세기. 분쟁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 있습니다 LINK. 뉴욕시 박물관은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컬렉션에서 찾을 수있는 관련 자료를 제시합니다.

“성 니콜라스의 방문”은 우리가 읽는 법을 배운 이래로 크리스마스 이브에“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큰 소리로 읽은 형제와 저를 포함하여 여러 세대의 어린이들을 기쁘게했습니다. 집에서! 이번 휴가철에 방문객들이“From St. Nicholas”에 똑같이 매료되기를 바랍니다.

Emily Chapin은 박물관 원고 및 Ephemera 보유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감독합니다.





유혹(誘惑)을 물리치려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우리 모두는 새들이 나의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새들이 내 머리털 속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승의 자랑 등 세상의 온갖 유혹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일은 막아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죄성(罪性)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아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세상의 모든 유혹을 다 물리칠 수는 없다. 

이는 사도 바울(Apostle Paul)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2-24절)”라고 고백한 데에서 잘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시련과 유혹)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라고 하면서 우리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그 방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믿고 구함으로 그의 능력을 빌려 우리가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 내가 특히 세상의 유혹을 받기 쉬운 약한 곳들이 어디인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길만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실상은 이렇게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이후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나가는 것뿐이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렇게 세상의 온갖 유혹들을 물리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리더로서 나서서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실상은 여기서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히 다수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정치지도자를 하겠다고 나서서 설치고 다니니 말이다.

이것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국민들의 인륜도의(人倫道義)에 대한 의식수준을 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정신문화개혁운동이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현 대통령조차 이런 사명감이 전혀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이제는 양식 있는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님의 스토리 • 18시간 • 17분 읽음

  • [기독교 한국선교 140주년 부활절] 한국 개신교, 스무 번의 ‘역사적 순간’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올해는 기독교 한국 선교 140주년 되는 해. 한국 개신교계는 188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독교는 140년 동안 종교를 넘어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초석이 됐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모습을 정리했다.

1.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교육기관 설립

1885년 초기 배재학당 교사.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다. 동아일보DB

개신교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발을 디딘 미국 북장로회와 미국 북감리회는 선교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각 언더우드 학당과 배재학당을 설립했는데 뒤를 이어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 캐나다 장로회 등은 물론 성공회, 구세군 등 군소교파까지도 학교 설립을 선교의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에 문을 연 배재학당(남학교)은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가 됐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여학교인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은 당시 여성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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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미 북장로회가 주도한 교육사업 중 가장 큰 성과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의 설립. 1912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고 미국 독지가 스팀슨 등의 기부금으로 현재의 신촌 캠퍼스 부지를 마련했다. 1917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의전과의 통합을 거쳐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2.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의 산실

기독교가 이 땅의 여성 문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기본적 인권 회복에 끼친 영향은 실로 혁명적로, 한국 근대 여성운동은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평등사상은 기독교에 앞서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하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과 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개신교 선교와 함께였다. 복음이 전파된 뒤 감리교에서는 전득삼이, 장로교에서는 한씨 부인이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던 당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여성들은 예수 앞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갇혀 살던 규방 생활에서 나와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예배 참석은 여성 교육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3. 항일과 독립운동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

100여 년 전 이 땅에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6년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가 충남 공주에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 1914년 12세의 나이로 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2년여를 수학한 뒤 엘리스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1919년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은 유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된 거사다. 그 구심점은 동경의 조선 YMCA였고 이 때문에 선언 장소도 YMCA였다. 이후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계 학교와 학생들이 차지한 비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 등 기독교계 학생들은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과는 별개로 기독교 학교 학생연합체가 주도하는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서울 숭동교회를 회합 장소로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구체적인 단계까지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 계획을 알고 이에 합류하게 된다.

4. 개화의 산실이 된 기독교

1885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내에 처음 도착한 인천 제물포항 자리에 세워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동아일보DB

선교사들은 수백 년간 내려온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풍속을 개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선교를 위해 지방을 다니던 한 선교사는 “내가 시골 농가에 가서 보니 방 안에 더러운 흙만 붙이고 종이로 도배하지 아니하고, 또 방을 쓸지도 아니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농부의 집은 정결하게 하면 못 쓰는 게 풍속이다’라고 했다”라며 당시 농촌 실정을 지적했다. 또 “병이 들어 치료하고 약을 쓰는 데도 위생 등 이치는 상관하지 않고 자기 풍속만 지키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인식은 이 땅에서 미신, 아편 등을 몰아내고 허례허식에 물든 관혼상제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5. 술, 담배, 아편과의 전쟁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 장로교회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기도 했다. 

금주· 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의 금주· 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됐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6. 근대 의료기관의 확대

2019년 복원된 보구녀관 전경. 동아일보DB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교육과 의료 부문부터 시작됐다.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신의 치료에 힘쓰고 무지를 계몽해 새로운 세계를 밝혀주는 게 선교의 첩경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정부의 포교 금지 정책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설립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병원은 학교에 비해 남녀노소, 신분에 차이 없이 누구나 이용하고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교의 큰 수단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다. 1904년 9월 설립된 이 병원은 설립 기금 1만 달러를 헌금한 루이스 세브란스의 이름을 땄는데 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 인가를 받고, 194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했다.1887년 10월 문을 연 보구녀관(普救女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 기관이다. 보구녀관은 ‘모든 여성을 위한 병원’이란 뜻으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를 비롯한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진료에 나섰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으로 보구녀관은 진료 외에 의료 선교와 의학교육, 간호교육에도 매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 김마르다를 배출했다.

7. 우상과 미신의 타파

초기 선교사들에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미신과 우상 신봉 문화는 그 고유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바꿔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알렌은 ‘한국의 풍습, 무당’이란 글에서 당시 미신과 관련된 모습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울의 밤은 매우 조용한데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 중 하나가 무당이 내는 소리다. 무당의 말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사용하는 도구는 장구, 심벌, 구리 막대기, 징, 바구니, 우산, 부채, 인형 등이며 이 중 바구니는 콜레라에 걸린 사람의 몸에 쥐가 있다고 믿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긁는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무당은 사용하는 도구나 인형 등을 결정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의 일상이 돼 버린 우상과 미신을 보면서 이런 현실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런 일 역시 교육이나 의료 활동을 통해 점차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이의 타파를 계몽하고자 했다.

8. 노비와 백정의 해방

계급 타파와 평등의 이상 실현에서 교회의 백정(白丁) 해방운동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없다. 이들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가장 비천한 하층 구성원이었다. 비록 갑오경장(1894년)으로 제도상 신분적 평등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 관심을 보인 것은 1895년 4월이었는데 서울 곤당골 장로교회(승동교회) 무어 선교사(1860∼1906)는 조정에 보낸 진정서를 통해 백정들의 가련한 상태를 낱낱이 알리면서 비인도적인 천대를 막아달라고 건의했다. 이런 노력으로 같은 해 5월 전국에 백정에 대한 신분 해방과 갓 착용 허용을 알리는 방이 붙었고 승동교회에는 6명의 백정이 입교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백정이었던 사람이 양반 신자들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 장로교 선교활동으로 전국에서 입교한 교인이 200여 명에 불과하던 시절에 6명이나 되는 백정의 입교는 그 자체로 큰 진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회의록이나 문서 등에 이런 백정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식은 이후 실질적인 신분 타파 사회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됐다.

9. 한글의 보급과 재발견

선교사들은 한글을 보급하고 대중화시키는 데도 힘을 썼다. 교회에서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경을 보급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인 중에 한문으로 성경을 보는 이도 별로 없고, 더구나 국문으로 보는 이도 몇이 못 된다. 금년부터는 주일 오후마다 국문 공부를 착실히 한다 하니 성경의 뜻을 많이 깨닫고 영혼의 양식을 넉넉히 만들기에 유조할 뿐더러 문자상에도 유식한 사람들이 되겠더라’ (1902년 5월 경기 남방지역의 한 교회 통신 중)

교회의 성경을 통한 한글 보급은 결과적으로 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배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부녀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경 보급도 크게 늘었는데 1886년까지 1만5690권이던 성경 보급은 1887년 한 해에만 6600권이, 1892년까지는 57만8000권이 보급됐다. 이런 분위기는 1893년 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담당하는 기구인 대한성교서회 창설로 이어졌다.

10. 출판 문화의 보급1885년 한국지부를 설치한 대영 성서공회가 1936년까지 이 땅에서 출판한 성경은 무려 1807만9466권에 이른다. 전체 국민이 2000만 명 남짓하던 시대에 성경 출판 1800만 권이란 숫자는 기독교가 이 땅의 출판문화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선교에서 출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1885년 아펜젤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을 파견한 미 북감리교 선교부였다. 북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에서의 출판 사업을 위해 1887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 목사(1845∼1919)를 파견했다. 그는 영어, 한문, 한국어를 인쇄하는 삼문출판소를 설립하고 기독교문서협회도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됐다. 1892년 그가 월간지로 간행한 ‘Korean Repository(한국 지식·정보 보관소)’는 당시 한국 사정을 과학적·문헌적으로 제공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이기도 했다.

올링거 목사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서적 출판의 역사는 이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로 이어졌고, 이후 국내외 종교인들과 신자들이 각종 출판사를 설립하고 서적을 출간하며 기독교를 넘어 한국 출판문화로 성장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어려운 이와 함께 한 140년

11. 사회복지 사업의 초석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 전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지역과 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한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이다. 이런 활동은 개화기,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엘림복지타운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은 1984년 21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000여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줬다. 대상 국가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등으로 확대됐고 특히 지난해 7월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용사의 손자 테카렌 메릿 베주아엣(7세) 어린이를 포함해 5명의 어린이가 무사히 수술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 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은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 약 6만6000㎡(2만여 평)의 부지에서 500여 명의 불우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직업 교육을 제공하고 200여 명의 무의탁 노인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복지시설이었다. 1988년 경로원과 직업전문학교로 시작한 엘림복지타운은 1994년 선교원, 1997년 요양원을 개원했다.

12. 시민운동의 산실이 되다

2012년 2월 굿피플 지원으로 주택 70가구와 정화조 7개가 준공된 필리핀 마니바악 마을을 이영훈 목사(가운데)와 굿피플 관계자들이 걷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한국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는 일제강점기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선, 오래된 시민단체 중 하나.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시민단체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인 1903년 영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들여왔는데 당시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리며 개신교와 서양 문화 유입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단체를 통해 이 땅에 야구, 농구, 배구, 수영이 들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1910∼1912년 YMCA 간사로 재직하며 교회 설교, 성경연구반 인도, 전국적인 YMCA망 구축, 번역 사업 등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YMCA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정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부마민주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 자문을 맡기도 했다. YMCA가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시절에도 재야 운동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YMCA가 외국인 선교사와 사제들이 활동하는 국제단체라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백한 기독교 단체기에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흔히 덮어씌웠던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13. 새 나라의 기틀을 만들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첫 국회인 ‘제헌 국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개회됐다. 옛 중앙청 회의실에서 198명의 의원이 참석했는데 당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의 이 일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사인 이윤영 의원의 기도가 이어졌다.

우리나라 첫 헌법인 제헌헌법에 예수 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사상이 반영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4.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가 되다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애초부터 양립 불가능한 관계였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는 6·25전쟁 당시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60여 명의 전 교인이 신앙과 자유를 지키려다 인민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는 이런 역사의 산증인. 야월교회는 광주·목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 선교사(1868∼1925)가 1908년 설립한 곳으로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턴 선교사는 인요한(존 린턴)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조부이기도 하다. 인근 염산교회도 전쟁 당시 77명의 교인이 순교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염산교회를 이끈 김방호 목사는 교인들이 피란을 권했으나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를 두고 다른 곳에 가느냐”라며 남아 있다가 변을 당했다.

이런 사례는 전쟁 당시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이 벌어졌는데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라는 인민군의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념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15.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희망’을 일깨운 지도자들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은 한국 교회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전쟁 후 폐허가 된 극빈국 대한민국 국민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일으켜 세운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958년 서울의 변두리인 은평구 대조동 깨밭에서 천막 교회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2년에 이르러 성도 수 7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

조용기 목사는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나에게도 큰 힘이 됐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힘이 국민적 용기와 희망으로 승화해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고, 오늘 선진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지난해 7월 ‘제13회 인구의 날’ 기념식에서 저출생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이영훈 담임목사(오른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대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가 부임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희망의 목회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성도들에게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랑 실천과 봉사의 가치를 강조하는 성숙의 길로 나아갔다. 이 또한 갈등과 경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6.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202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해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진행한 ‘한국교회의 한국 사회 기여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해방 전은 ‘항일 민족 운동(85%)’, 해방 후는 ‘민주화운동(57%)’을 가장 큰 기여로 꼽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가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큰데 그 상징 중 하나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국기독교회관이다.

1970년 1월 문을 연 한국기독교회관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불리던 재야 운동 세력의 구심지. 1970년대 초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기독교학생총연합,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등의 단체들과 진보적 성향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곳에 입주해 민청학련사건 구속자들의 석방 운동과 목요기도회 등을 전개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 구국 선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가 투신자살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

17. 통일을 꿈꾸며 북한 지원에 나서다

2023년 11월 평화통일연대가 주최한 ‘한국교회 초청 화해와 평화, 평화통일을 위한 포럼’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북한 지원 규모는 국내 대북 민간 지원단체 지원 총액의 7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남북 평화 구축의 조성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평양 봉수교회에서 평양심장병원 착공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양 심장병원 건립 추진은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남북통일이라는 더 큰 꿈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걸음이다. 1984년부터 국내에서 심장병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온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의 심장병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2007년 12월 평양 중심부에 3만3000㎡ 규모의 심장병 치료 전문 종합병원을 착공했다.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이 병원은 안타깝게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공사도 중단된 상태. 남북한 민간 교류의 상징이었던 평양심장병원은 현재 7층 건물의 골조 공사만 끝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남북 관계가 회복돼 병원이 완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병원이 완공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와 함께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역할 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8.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와 교회 역사는 국가와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선 희생과 봉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이태원 참사, 지진과 산불 등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지원금을 보내고, 직접 사고 현장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10억 원의 긴급 구호헌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한 것은 그 작은 예 중 하나. 구호헌금은 경북 의성군, 안동시·청송군·영양군·영덕군을 비롯해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울주군 등 산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을 위해 사용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20년 코로나19 대구·경북 지역 확산 당시에도, 2023년 튀르키예 대지진과 이태원 참사 때도 각각 10억 원을 지원했다.

19.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한국 기독교계의 해외 선교와 봉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만든 국제구호 NGO ‘굿피플’이다.

대사회적 구제 사업을 더 전문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1999년 7월 설립된 ‘굿피플’은 2005년 파키스탄 지진, 2008년 미얀마 사이클론 재해, 2011년 일본 대지진, 2023년 시리아 강진 등이 발생했을 때마다 긴급 구호단을 파견해 재난 구조와 인명 구조, 의료봉사 등 사업을 전개해 왔다.

굿피플의 해외 지원 사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개됐는데 보건소 건축 및 운영, 보건의료 전문 인력 양성, 건강검진 및 의약품 지원 등 보건 분야에만 무려 156만700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아동센터 건립,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과 급식 지원, 전문교육 커리큘럼 구축을 통해서는 9만9800여 명이 도움을 받았고, 우물 등 정수 센터와 정수시설, 상수도, 화장실 설치 등으로 5만5400여 명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

20. 저출생 극복으로 미래를 세우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국가와 미래세대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는 활동은 ‘저출생 극복’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12년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매년 출산장려금 지원을 시작했다. 결혼격려금, 미혼모 자립 지원 등 지금까지 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지원한 금액은 800억 원이 넘는다. 정부 기관도 아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에 앞장서는 이유는 국민이 없으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 이영훈 목사는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2명대에서 1명대로 급격히 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국민이 사라져 국가가 소멸하는 날이 오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라며 “저출생 문제 해결은 국가는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법(율법, 토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전체로, 인간의 바른 삶과 행위를 인도하는 기준이며, 하나님 백성의 삶의 지침이자 창조 질서를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법칙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생명'에 관한 내용이며, 이를 통해 사람은 의롭게 되고 지혜를 얻으며 복을 받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주요 특징
  • 포괄적: 구약의 토라(Torah)에서부터 신약의 새 언약까지 포함하며,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룹니다.
  • 완전함: 인간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고, 의로움의 궁극적인 표준을 제시하는 완전한 법입니다.
  • 보호와 인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험한 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돕는 기준점이며, 영혼을 소성케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 상징: 안식일 규례처럼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이 되며,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완성되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법으로 주어졌습니다. 

중요성
  •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 생명과 구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지만, 따르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근거가 됩니다. 

요약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는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창조주가 주신 사랑과 생명의 선물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누리는 기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법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儀式法)과 재판법으로 구성되어 있다.95)
 
도덕법(moral laws)
 
도덕법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도덕법은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십계명의 구분에 대하여, 역사상 몇 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2을 제1계명으로,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2계명으로 보았다.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는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우리의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9계명으로, ‘네 이웃의 아내 등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10계명으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우리의 구분대로 구분한다.
 
십계명에 대한 간략한 해석
 
십계명의 해석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9문답에 잘 진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즉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보인다. ② 같은 종류의 죄들을 대표적으로 간결히 표현하였다. 십계명은 도덕법 전반의 요약이다. ③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금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④ 행위 뿐만 아니라, 또한 생각과 마음에도 적용된다. 율법은 영적이다(롬 7:14).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1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물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우상을 인정하는 모든 생각을 정죄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리아와 성인들과 천사들에게 기도하고 종교적 경의를 표하게 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정죄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형상화하는 것은 큰 오류요 죄악이다.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것도 비록 그것이 제2계명을 어기는 죄는 아닐지라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예배당 안 강단 뒷벽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3계명은 우리가 일상 생활이나 종교 의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망녕되이’라는 말은 ‘헛되이, 함부로, 무의미하게’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와 기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구절을 농담거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큰 죄이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제4계명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에 대해 명령한다. 구약시대에는 한 주간 가운데 제7일을 안식일로 성별하여 지키라고 명령되었다.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미리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야 했다(출 16:2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나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출 31:14, 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낼 때 안식일에 나무가지를 줍던 한 사람은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 계명이 문자 그대로 유효한가?’라는 문제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도덕법인가 의식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루터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을 도덕적 교훈을 가진 의식법으로 보았다.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儀式的) 부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식적 집회와 휴식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열심히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독교강요, 2. 8. 28, 31-34).
 
1618-19년 화란에서 열린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9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하여 “. . .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구별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도 시대에 이미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집회의 날이 되었다. 주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그 다음 주일에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27). 성령께서는 주일에 처음으로 제자들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2:1-4).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날은 주일이었다(계 1:10). 드로아의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떡을 떼며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 주일 정기적으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 2).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증거했다.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고 썼다(15). 익나시우스는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9). 순교자 저스틴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트리포와의 대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모범과 장로교회의 예배 모범대로 주일에 온 가족이 세속적 직업의 일들을 중단하고 매매(賣買)를 금하며 오락을 금해야 할 것이다(느 13:15-22; 사 58:13, 14). 신약 성도들은 복음적 자유를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구약 성도보다 못하게가 아니고 더 풍성한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친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물론, 또한 노인과 청년,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피고용인, 정부와 국민의 관계 등 연령적, 지위적 상하 관계에도 적용된다.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베드로전서 2: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6계명은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결투, 폭동,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의 모든 살인 행위를 금한다. 출애굽기 21:22- 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또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요일 3:15).
 
그러나 사형, 정당 방위, 정당한 전쟁, 동물의 살해 등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은 사람의 순결성 곧 정조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모든 성 행위는 간음이다. 또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으로 정죄된다(마 5:28). 또한 간음의 이유 외의 이혼와 중혼(마 5:32), 근친 상간, 동성애 등의 모든 부당한 성적 탈선 행위를 정죄한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은 사유 재산의 권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절도, 강도 뿐만 아니라, 또한 사기, 횡령, 과분한 빚, 땅이나 집 등의 계약 위반, 거짓된 저울과 되, 투기, 고리 대금 등의 부정당한 경제 활동을 금한다.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시편 15:5, “변리로 대금치[고리대금하지] 아니하며.”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거짓된 비난, 중상 모략, 위증, 불공정한 판결, 아첨, 과장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금한다. 출애굽기 23:1-3,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기타 소유물을 탐내지 말지니라.”
 
제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의 죄의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탐심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더 가지려는 욕심은 그 여러 죄들의 뿌리이다. 야고보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했다. 모든 불평과 불만, 색욕이나 부정한 욕망, 그리고 물질로 인한 지나친 근심 등도 탐심의 결과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말한다(골 3:5).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결국 물질이나 육신의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이다. 성도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 처지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도덕법의 목적
 
도덕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도덕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둘째, 도덕법은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준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도덕법은 마치 거울과 같다. 셋째, 도덕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παιδαgωgός, 교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도덕법의 영속성
 
도덕법은 영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았다. 성화의 목표는 의(義)와 거룩, 즉 죄 없는 성결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구원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유익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마태복음 5:17, 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5, 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법은 모든 사람들, 즉 다른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도, 영원히 그것을 순종할 의무 아래 두는데; 그것은 단지 그것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또한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해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이 의무를 해제하지 않으시고, 크게 강화하신다.
 
비록 참신자들이 행위언약으로서의 법 아래 있어서, 그것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활의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줌으로, 그들이 그에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며 속박하고; 또한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의 죄악된 부패성들을 드러냄으로, 그들이 그로 인해 자신들을 살펴 죄를 더 깨달으며, 죄 때문에 겸손해지며,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순종의 완전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중생한 자들이 그들의 부패성들을 제어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금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의 경고들은, 비록 그들이 법 안에 경고된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죄들도 마땅히 무엇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것들 때문에 어떤 고난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것의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그것을 행한 경우에, 비록 행위언약으로서의 법에 의해 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어떤 복들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법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그가 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다.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s)
 
둘째로, 의식법은 할례, 성막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십일조 등에 대한 법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의식법들의 한 부분은 예배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들을 예표한다. 예를 들어, 성막제도에서 번제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물두멍은 그의 성결함을, 떡상은 그가 생명의 떡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예표한다. 제사들에서 번제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사역을, 소제는 그가 자신을 즐거이 드리심을, 화목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심을,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의 속죄사역을 예표한다.
 
절기들에서 안식일은 그가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셨음을, 유월절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맥추절은 그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맺힘을, 나팔절은 그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파함을, 속죄일은 그의 십자가 단번 속죄의 사역을, 수장절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을, 안식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참안식을, 희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만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도덕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죄 씻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법은 또한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의식법들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소득의 십일조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헌금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을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특히 신약 히브리서는 의식법의 폐지, 더 정확히 말해, 율법제도의 폐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 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97)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10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들이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판법(judicial laws)
 
셋째로, 재판법은 신정(神政)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 생활에 관한 법들이다. 출애굽기 21:1의 ‘율례’라는 원어(미슈파팀)는 ‘판단들’이라는 뜻으로 재판법을 의미한다. 재판법의 한 예는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죽이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구약의 어떤 법이 도덕법에 속하는지, 재판법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구약의 어떤 법이 신약에서 인정되거나 혹은 그 이유가 영구적이면 신약에서도 유효한 도덕법이라고 보고 그 외에는 재판법으로 볼 수 있다(박형룡, 인간론, 312쪽).
 
구약의 재판법들은 신약 아래서 역시 폐지되었다. 신정 국가에서 사용되었던 법들은 오늘날 세속 사회들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4, “또한 한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재판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끝났고,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것들의 일반적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도덕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한다. 자범죄는 도덕법을 어긴 죄들이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그것들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죄, 하나님을 첫째로,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지 않은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사람을 죽이는 죄,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범죄들,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죄, 거짓말 하는 죄, 남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품는 죄 등이다.
 
성경에서 도덕적 죄들을 열거한 대표적 두 구절을 들어보자. 로마서 1:29-31, “곧 모든 불의, 음란(전통사본),98)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사본)99) 무자비한 자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100)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101)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의 법 

'죄의 법'은 주로 성경, 특히 바울 서신(로마서)에서 사용되는 용어
인간 내면에 있어 선을 행하려 해도 악을 행하게 만들고 결국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 또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과 대조되며, 율법 자체를 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율법을 통해 죄를 더욱 드러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주요 특징
  • 내면의 싸움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내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 사망의 권세 : 죄의 법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이어지며,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 율법과의 관계 : 율법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그 죄의 실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때 '죄의 법'처럼 작용합니다.

  • 생명의 성령의 법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생명의 법을 따르도록 이끄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주어집니다. 
요약

'죄의 법'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죄의 세력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원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이 법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 롬 7:23 야누스의 두 얼굴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을 상징하는 두개의 얼굴

야누스는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는 두 얼굴이나 머리가 있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가 많다. 거짓과 진실 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을 지칭할 때,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녔다고 우리는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정확한 의미는 없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내 안에 선한 “나”이고 또 하나는 악한 “나”입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합니다. 페르소나는 영어의 퍼슨(person), 즉 사람입니다. 사람은 가면을 쓴 동물입니다. 왜냐하면 지성과 감성을 가진 인성으로서  영장류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된 타고난 배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변신하고 저렇게도 변신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 방어 그리고 쟁취를 하고자 하는 이 세대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persona의 어원을 성경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7)라고 하여 인간의 이미지를 말합니다.하나님의 의도적이고 특별한 계획에 의해 "헬라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  히브리어로 "쩰렘 엘로힘"(צלם אלהים)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시작하여, 생육하라는 명령, 그리고 인간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시며 구원과 재림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또한 이 말은 어원적으로는 가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두 얼굴,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그 얼굴이며, 다른 또 하나의 내 안에 악한 나는 세상적으로 찌들고 휩싸이고 갖은 추악한 내면을 가진 나의 또 다른 변신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나중에 참고하기 바랍니다. 참고로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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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인간.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낮에는 보험국 관리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소설가의 삶을 살았다.

 

변신의 작가 카프카는  "프라하와 자신의 답답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했건만 결국 떠나지 못한 사람, 세 번이나 약혼했으나 평생 독신이었다가 마흔한 살 생일을 앞두고 결핵으로 죽은 사람, 문학에 유례없을 만큼 모든 것을 걸었으면서도 작품을 불사르게 하고 나머지도 없애라고 유언을 하고 간 작가, 또한 그 작품에 대하여 무수한 해설서가 있어도 불가해하기만 한 작가"라고 정의했다.

'변신'은 1915년에 출간됐다. 카프카가 32세였을 때다. 길지 않은 글인데도 읽는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는,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물음표와 느낌표가 무수히 떠다녔다.

참고로 이 책은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학생들에게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에 선정된 소설이며 이후 많은 작가들의 테마 주제로 인용된 글이다. 

돈 못 벌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세상
 내용 자체는 단순하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 떠 보니 자신이 흉측하고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이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출근하지 않자, 직장에서 매니저가 집으로 찾아온다. 매니저와 가족들은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발견한다. 놀란 매니저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가 버리고,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한동안 가족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슬퍼하며 그레고르의 방도 청소해주고, 먹을 것도 챙겨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심지어 훼방을 놓기까지 하는 그를 그저 성가신 존재로 여긴다.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거나 이 집을 나가버렸으면 하고 은근히 바란다. 그 사실을 알아챈 그레고르는 어느 날 먼지와 쓰레기들로 가득한 자신의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가족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며 소설은 끝이 난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의 문장과 행간 속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 그는 무엇을 의미할까. 일할 능력을 잃은 사람, 가족에게 물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을 굳이 벌레로 그린 건, 물질 만능 사회 속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말하려는 의도 아니었을까. 

 

'이 얼마나 고요한 생활을 식구들은 영위하고 있는가' 하고 말하며 그레고르는 자기 앞의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스스로가 부모와 누이에게 그러한 삶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데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이 졸지에 충격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떨까? (33쪽)

그러니 이제 어쩌면,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힘이 들 만큼 호흡이 가빠져서 하루 건너 열린 창가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는, 천식으로 고생하는, 늙은 어머니가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열일곱 살에다 아직 어린아이이고 지금까지의 사는 방식이라곤 예쁘장하게 옷 입고, 실컷 자고, 살림을 조금 돕고, 몇 가지 소박한 오락이 끼이고, 무엇보다 바이올린이나 켜는 것이 고작이었던 누이동생이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이야기가 이 돈을 벌어야 할 필연성에 미치면, 우선 언제나 그레고르는 문을 떠나 문 곁에 놓인 서늘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41쪽)


아빠는 왜 새우처럼 자야만 했을까
예전에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레고르의 아버지, 그리고 그레고르에게 느꼈던 감정은 조소에 가까웠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돈 벌어다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양 식구들을 자기 아랫사람 대하듯 무시하는 소설 속 두 인물의 모습이 이 시대의 아버지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시 읽은 지금은 그들에게 조소보다 연민을 더 크게 느낀다. 느닷없이 아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당황스럽게도 코끝이 찡해지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아빠는 평생 몸 쓰는 일만 해왔다.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 늘 거뭇거뭇했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땀을 뻘뻘 흘렸다. 수십 년을 그렇게 일했다.

그렇게 고되게 일하고도 밤에는 편히 누워 자는 법이 없었다. 항상 무슨 고민을 하는 자세로,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높이 받쳐 들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편하게 누워 자라고 몸을 흔들면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 깨서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이내 같은 자세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는 새벽같이 일어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집을 나서곤 했다.
 아버지는 완전히 옷을 차려입은 채 자기 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마치 언제나 일할 태세가 되어 있고 여기서도 상사의 명을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그리하여 처음부터 새 옷 티가 안 나던 제복이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온갖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청결함을 잃어, 그레고르는 자주 저녁 내내, 온 사방에 얼룩이 지고 언제나 닦여진 금단추로 빛나는 옷, 그 옷에 감싸여 늙은 잠자 씨가 지극히 불편하게 그러면서도 고요히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57쪽)


무엇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밤에 편히 잠들지도 못하게 하는가. 아빠는 무슨 걱정과 고민이 그리 많았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편히 자지도 못하고 잠결에도 한숨을 쉬었을까.
본인의 몸과 영혼을 갈아 넣어 처자식을 먹여 살린 아빠는 어쩌면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아빠는 정말 처자식만 보고 그 힘든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가슴속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희망 같은 걸 품고 있었을까.

그레고르가 결국 먼지와 쓰레기로 가득한 방에서 쓸쓸히 죽어버린 뒤, 가족들은 새집으로 이사한다. 다소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다. 그리고 부모의 눈에는 아들이 떠나고 하나 남은 자식인 딸이 보인다. 어느새 훌쩍 자라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가 되어버린 딸의 모습이. 나는 이제 슬프게도 그녀의 미래에서 희망 같은 것을 볼 수가 없다.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은 점차 생기를 띠어가는 딸을 보고 거의 동시에 딸이,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로 꽃 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어지며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초리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내외는 이제 딸을 위해 착실한 남자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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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싸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어떻게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우리 속에서 싸우는 두 개의 “나” 때문에 가책과 고통과 무기력속에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해서 우리의 삶이 반드시 승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영원한 화두(명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될 수 있음을 기도하고 확신하여 믿는 믿음 위에서 승리하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2.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자기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지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말해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안 것입니다. 2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롬7:23,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개의 “나”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죄의 법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법입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잘 맞지 않아 항상 투닥 투닥 서로 싸웁니다.

 

그중에서도 죄의 법이 더 강해서 내 마음의 선한 법을 자주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죄“를 “법”이란 말로 바꿔 쓰고 있습니다.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때 법은 별 것이 아닌데 일단 법을 어기면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은 power를 말하고 지배를 말합니다. 롬7:1절에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여 꼼짝 못하게 하는 power입니다. 힘입니다. 지배력입니다. 그래서 “법”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20절입니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샤칸”,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오는 방문객이 아닙니다. 아예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안 나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과거에 박해자였고 폭행자였는 데, 지금도 죄인중의 괴수다“. 디모데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주후 약 63-4년에 디모데서를 썼습니다.

 

내일 모레 순교할 바울, 그는 그때 거의 성자였습니다.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자신이 지금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나마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었지만 지금도 죄인이다. 죄인중의 괴수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주 안에서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일컬어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이 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장차 성도들도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3. 우리는 의인이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그럴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구름 밑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선과 함께 악이 있고 우리 속에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것이 reality,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는 이미 거룩해졌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합니다.

 

그냥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문제는 죄가 우리속에 거할 뿐 우리가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속에 죄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영어 NIV 번역으로 보면 ”It is sin living in me“. ”내안에 사는 죄“입니다. 죄가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는 아닙니다. 죄는 내 안에 살고 있지만 나는 죄를 가진 존재일 뿐 내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은혜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롬7장에 내 안에 죄가 있다고 3번 말했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이란 말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는 자는 ”현실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본성적 나“가 또 있습니다. 그 ”나“는 죄와 상관없습니다. 17절 봅니다. 롬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죄속에 거하는 “나”와 죄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나”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나는 죄를 짓기 원치 않습니다.

 

19절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현실적인 나는 죄와 함께 삽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나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합니다. 현실적인 내가 죄를 짓는다고 본래적인 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나를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본래적인 나를 성경은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옛사람, 곧 죄가 거하는 우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이 생겼는 데 그것이 본질적인 “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이 롬7장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려는 “나”입니다. 본래 죄의 지배를 받던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께끗해지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롬5:19을 보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아담 이래 우리를 지배했던 옛 본성이 죽고 새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고전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죄를 다 없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들이고 죄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속에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은 맞지만 로마서 어디에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는 단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롬3:21절 이전입니다. 롬3:2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이후” 로마서는 한번도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죄인과 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우리안에 죄가 거하여 우리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일 뿐입니다.

 

롬3:21절 이후 성경은 예수믿고 달라진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 데 그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 수가 무려 63번이나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입니다. 할렐루야

 

 

결론 : 그리스도만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두 개의 내가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절입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와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이지만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잘못입니다. 다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더 사랑합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세 마디 말을 합니다.

 

첫 번째가 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21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아들이라 불러 달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19절,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시고 종이라 부르소서”. 아들이 아니니 이제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죄를 지었다는 아들에게 옷을 입힙니다. 아들이 아니라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줍니다. 종이라 불러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줍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의 잘못보다 아버지의 자비가 더 컷습니다. 아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아들의 잘못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옷을 입힙니다. 옷은 사람을 입습니다. 사람에게 옷이 필요하지만 옷이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잘못도 덮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맞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로운 본성의 사람과 매일 죄를 짓고 사는 현실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싸워 자주 죄의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괜찮아. 너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이야. 너의 본성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의로워졌고 너는 이미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어. 지금 짓는 죄는 죄의 패잔병이야. 곧 모두 사라질거야. 힘내”. 또 말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서 롬8:1-9절 말씀이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5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말씀이 주는 주님의 질문과 해답은 모두 성경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만나인은 하나님의 법만 가슴에 안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갑니다.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새기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살전 5:16-18 그리고 22절입니다.









죄의 법, 하나님의 법, 은혜의 법(요한복음 21:15-18)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상처입은 영혼

우리의 영적인 존재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가? 
죄로 인해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바울만의 고백이겠는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원죄(原罪.  Original Sin)라고 말한다. 
법이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법 아래 있는 사람은 그 명령에 따른다. 인간은 죄의 법 아래 있어, 그 명령을 따른다. 누구나 죄인이다.
심지어 믿음을 가진 신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들어와 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갈등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 갈등 속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아는가? 
그리고 급기야 ‘죄의 법’에 사로잡혀 사망에 이끌리는 것을 경험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딜레마를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다윗이 궁중 옥상을 거닐며,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에 불일 듯 일어난 정욕으로 인해 갈등하지 않았겠는가?

죄는 우리를 포박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이 있다.

1. 현혹(眩惑) 유혹(誘惑)

우리의 생각을 현혹하고 기만하며 속인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뱀은 하와를 꾀일 때, 동산 중앙의 실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실과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시험을 당할 때 우리의 감정은 온통 그것만 보도록 만든다. 정말 그게 절대적으로 좋아 보인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부끄럽고 후회한다.

2. 합리화(合理化)

현실적인 의무나 상황을 빌미로 삼도록 유도한다. 대신에 본질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유도한다. 잠시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은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다 하는데,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급기야, 죄짓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이 들고,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된다.

3. 끈질김 

생각을 미혹하고 끈질기게 유혹한다. 서운하고 속상한 일은 자꾸 떠오르고, 아니다 하면서도 섭섭하다. 별것도 아닌데, 자꾸 베베 꼬인 생각이 들고 견디지 못한다. 중독은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면서, 그 쾌감을 느끼던 때가 순식간에 떠올라 참고 참다가 결국 다시 그것을 하게 만든다. 쾌락을 멀리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그 암시를 넌지시 던짐으로써, 유혹하고 또다시 범죄하게 한다.

 4. 꼼수 

죄는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은밀히 말이다. 그래서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대적함’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갈등할 때, 우리 속에 나타난다. 히스기야가 죽음의 문턱에 있던 병상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회복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때, 그 안도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졌다.

 

 

죄 때문에 우리가 겪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실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자유한 마음이 없었다. 
가인은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악한 일을 계획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해야 하는 이에게는 은총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불행을 겪는 것이다.

2. 선한 양심의 격동

양심의 가책은 우리를 짓누른다. 
죄악된 행위에 짓눌린 고통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편 32:3-4)

3. 죄책감의 무게

경미한 죄들 때문에 일어나는 영적인 상태가 있다. 
세상의 것을 쟁취해놓고서도 만족함을 모르고 기쁨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게 모르게 짓는 작은 죄들이 자기를 두르고 덮을 때, 영혼과 심령을 무디고 메마르게 만든다. 솔로몬을 보라. 그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가장 화려한 번영을 누렸던 왕 중 하나다. 열왕기상11:3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이미 만족함을 모르게 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만큼 공허한 사람이 없다. 솔로몬의 것으로 전해지는 표제어가 붙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보았으랴?”(전2:25), 이 말의 결론에 붙은 말이 이것이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2:26)

4.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그 세계가 어디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죄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무지하고 부인하고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돈만을 좋아하고, 세상 것만 탐하며, 주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다. 부자가 음부에 들어갔다.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거지였던 나사로에게 손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그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거절되자, 그렇다면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리게 해달라고 한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들이, 설령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현세의 탐심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율법의 역할, 은혜의 법 역할

이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 역할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죄를 깨닫게 되고, 마음으로 그 법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 있는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무력화시킨다. 
왜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 못할까? 
이상하지 않은가? 
당연히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모든 역사와 교회사를 봐도, 하나님이 법이 죄의 법을 이긴 역사가 없다. 
구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울은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는 하나님의 법으로 죄의 법을 이기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의 법을 영영히 이길 수 없는 것인가?

기억하라. 
그 역할은 거기까지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데까지다. 딱 거기까지다. 율법으로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거기까지인 율법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붙들려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다. 
은혜의 법이 있다. 
하나님 사랑의 법이다. 
은혜의 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직도 죄의 법 아래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 오늘 이 복음의 소식을 들으시기 바란다. 복음을 경험하라. 확실하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당하고, 번번이 실패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시켜준다.

 

성령충만해야 한다. 
믿음충만해야 한다. 
은혜충만해야 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0) 

성령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라. 
은혜의 법에 복종하고 순종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기쁨과 평화를 느낀다. 
이 시간 그 주님을 영접하라. 
지금 여기에 찾아와 계시다. 
여러분 심령 가운데 모셔들이기를 원하신다. 믿음으로 영접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만약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그는 평생을 배신자요, 비겁자로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일을 평생 자기 상처로 안고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너 왜 그랬니? 다시는 안그럴꺼니?” 묻지 않으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지, 물으셨다. 
전자는 ‘또다시 죄를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후자는 은혜의 법에 복종하느냐의 문제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해서 찾아오셨고, 평생 그 고통 속에 내버려둘 수 없어 찾아오셔서, 회복시켜주셨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복되기를 원하신다. 
은혜주시기를 원하신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했으니, 믿음으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 믿음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동일한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게 회복과 치유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부터라도 주변에서 도와, 심신과 영혼이 건강하길 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가 했던 경험을 동일하게 하길 원하신다. 
용서받는 경험, 죄가 사해지는 경험, 주님을 사랑하며 회복되는 경험 말이다. 
죄에서 자유하며,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목적을 분리시킨다. 
무슨 말인가? 
죄를 지어도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선에 대한 노력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암시다. 
은혜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거룩해지고 성결하고,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이것을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바울은 거듭난 자였다
그런데 고민이 있었다. 
거듭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칭의를 얻어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달라지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검토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서 4개의 법칙들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 '내 마음의 법',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들이 상호 어떤 관련을 맺으며 돌아가는지를 정리한다. 
그래서 이것들이 모두가 다 항상 동일한 값을 나타낸다고는 것을 착안하고는 이 네 가지 법을 정리한 후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죄를 짓지 아니하고 죄된 본성에서 해방되며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사람이 4가지 법들 중에 최고 상위의 법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할 때 과연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4가지 법을 살펴보고 이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왜 또다시 죄를 지으며,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또다시 죄를 짓고 죄된 본성을 따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의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면, 죄의 법이 이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보다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가 더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를 따라가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사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한 채 악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칭의라는 것이 사람을 온전히 바꾸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일은 외적인 신분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일 뿐 아직 내면은 변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달라진 삶을 살려면 외적인 신분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속 성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성분의 변화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적인 성분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2가지 법칙을 제안하였다. 하나는 여김의 법칙이다. 내가 칭의를 받았으나 아직 내면의 변화는 겪지 않았으니, 자신의 내면에 속한 영역의 하나인 혼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채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혼이 죽어버린다면 결코 화를 낼 수도 없고 음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펴보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 몸도 함께 죽은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이후 자아 곧 자기의 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여길 때에 비로소 자아가 죽음에 넘겨지게 되어 더 이상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드림의 법칙이다. 이제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따르는 자아가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자신의 몸인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 받을 지위와 신분 그리고 상을 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드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이 비록 자아가 죽었지만 여전히 죄된 본성에 빠져 헤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여김의 법칙과 드림의 법칙만으로는 사람이 죄된 본성을 이기기가 어렵고,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마음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게 해주는 어떤 또 다른 것이 필욯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4가지 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4가지 법칙은 무엇인가? 여기서 '법칙'이라 함은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연적인 불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항상 답이 일정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법칙이라는 뜻은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살아보면 그렇게 결론이 남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네 가지 법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자신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또한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자기의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작동하면, 자신의 마음이 그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죄의 법'을 따라가 버린다는 것
이다. 

이는 '죄의 법'이 사람의 '마음의 법'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데 사람 속에는 또 하나의 법이 더 존재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는 최고의 법으로서 아무리 강한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한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언제 어디서나 죄와 사망의 법을 항상 이기게 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죄의 법'이라 함은 사람의 육체 속에 는 영적인 존재들 곧 뱀들과 귀신들이 주장하는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서 한 번 죄의 법이 작동하면 사람은 반드시 죄를 짓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죄의 법을 이기려면 더 강력한 상위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죄와 사망을 이기기 때문이다. 이것의 예표가 바로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부활생명이 사망을 항상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4가지 법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였다.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나를 주장하면 나도 그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법이 나를 주장할 때에는 즉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면 죄와 사망이라도 성령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죄와 사망을 인격화시키면 그것은 곧 귀신들과 뱀들이다. 그러므로 죄의 법으로 역사하고 있는 뱀들과 귀신들이 아무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가려고 한다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버리면 죄와 사망을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기는 원하나 악을 행하고 있는 '내 속 내 육신 속에 있는 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게 되는가? 그것은 선을 행하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자 선의 법인 율법을 성취하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기를 원했어도 결국 악을 행하고 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분명 왜 자신은 선을 행하지 못한 채 악을 행하게 되는지를 깊이 묵상한 후,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속 곧 자신의 육신의 속에 거주하는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롬7:17,18~20). 그러므로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육신 속에 거주하는 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와 예수님의 말씀을 합쳤을 때에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람 속에 거주하는 죄를 가리켜 '자기의 육신 속에 거주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거주하는'는 단어를 먼저 보면 이 단어는 '오이케오'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오이코스'에서 온 말이다. '오이코스'는 '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이케오'라는 단어는 그 뜻이 '집으로 삼다. 집에 살다. 집에 거주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사람의 육체를 자기의 집으로 삼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특수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귀신의 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영)'이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죄란 자기의 집으로 삼고 있는 어떤 공간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사람의 육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사항을 합치면 사람의 육체는 곧 죄가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럼 누가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은 '더러운 영들'이다. 그러므로 죄(Sin)란 결국 '더러운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들 그러므로 죄를 지어 더럽혀진 영적 존재들의 뱀들과 귀신들이 곧 죄의 실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있는가?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한 방법들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될 때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육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에 두는 것이다(롬 8:6). 
왜냐하면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는 즉시 자신의 영을 작동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고, 또한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게 되면 즉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성령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의 온 영과 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된 본성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항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려고 할 때 그래서 죄된 본성이 자신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즉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6. 나오며

  오늘날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는 원리를 모르는 분들이 아주 많다. 자기의 영 안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주는 영이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분들이 많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 한 번 작동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분이 많지 않다. 그러면 그대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칭의인이 되었지만 실상은 죄를 짓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칭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를 죽음에 넘기고 있는 자라고 반드시 알아야 할 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기 때문이다.그러면 영이 우리 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채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이 더이상 죄된 육체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지체들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언제든지 생각을 영에 두고 영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영을 따라 가지 못하고 오히려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를 따라 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최종적인 성화의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은 자신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악한 영들인 뱀들과 귀신들을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 몸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회개할 때에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오고, 예수님의 피가 자기의 몸 속에 들어오면, 그 피가 더러운 영들을 밖으로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더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인데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직책입니다. 
선지자(先知者)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직책입니다. 
왕(王)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책입니다.

○ 예수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에게 사죄의 대속, 칭의의 대속, 화친의 대속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과 또 사죄자, 칭의자, 화친자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셨습니다.

1.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생명의 길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어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길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죽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서 생명이 된 것은 이 세상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며, 또한 사망의 길을 걸어서 사망이 된 것도 이 세상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데 주력하고 중심하고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 당면되고 있는 이 일이 자기가 아닌 그 누구의 일이라면 혹 몰라도 이 일은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해당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줄 알고 삽니다. 이렇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쫓아서 영원한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죄의 사망의 법을 쫓아서 영원한 사망이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생명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충만을 자기가 받아서 그 충만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춤만이 전해주는 것이 생명입니다.

이래서 창1:22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셨고

또 엡1:23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셨습니다.

○ 사망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죽고 망하므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이래서 출12:30에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셨고

또 '계20:14에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하셨습니다.

이 생명과 사망을 한 말로 말한다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 가는 것이며,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불태워짐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은 성령의 감화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도록 하는데 곧 바로 이것이 생명이 되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 죄와 사망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사는 것이 죄인데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사는 이것이 곧 바로 사망이 되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대속역사, 예수님의 영으로는 구속역사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율법

'율법'은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을 지킨 그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인도하는 법이 율법입니다.

○ 육신

우리의 '육신'은 원죄와 본죄가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이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는 법칙의 요구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이 율법의 요구인데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으로서 우리가 지킬 계명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 그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예수님을 보내어 '그 육신으로는' 사죄의 대속, 칭의의 대속, 화친의 대속역사를 하셨습니다.

○ 그의 영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의 영으로는'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영'은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으니, '그의 영'은 '예수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곧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대속역사를 하셨고, 예수님의 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서 구속역사를 하셨습니다.

3.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로마서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을 쫓는 자

육신은 마음과 몸이 육신입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또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가 육신을 쫓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들이 똘똘 뭉쳐진 것이 세상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 한 덩어리 된 큰 성 바벨론 바벨탑입니다.

○ 영을 좇는 자

영은 성령을 말하는데 곧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을 쫓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는 자가 영을 쫓는 자이며, 또 예수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죄 없는 자, 의로운 자, 하나님과 화친 된 자로 사는 자가 영을 쫓는 자입니다.

4.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의 생각은 사망

육신의 생각 곧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과 몸으로 된 그 어떤 것이라도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떠나서 이루어진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요? 돈, 권세, 지위. 명예, 배경, 도덕, 사상, 등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으로 산 것의 그 결말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계14:8에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하셨고 또 계18:21에는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하셨습니다.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영의 생각 곧 성령의 감화감동의 인도대로 산 것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으로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또 '평안'은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므로 그에 침해를 받지 않는 것이 평안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마귀의 미혹을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면 그 평안을 침해할 자는 없습니다 또 침해할 권세도 없습니다.

結論

우리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있는 줄 알고 분별하여 조심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의 일과 영의 생각 곧 성령의 감화감동 대로 살아서 생명과 평안에 거하고, 육신의 생각 곧 악한 영 마귀의 미혹대로 살아서 죄를 지어 죄의 삯인 사망에 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떻게 해야 사망의 길을 피하고 어떻게 해야 생명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지를 몰라서 어두운 캄캄한 길을 갈 지(之) 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런 이종교 저런 이종교를 만들었고, 또 이런 사상 저런 주의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쫓아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피와 성령과 진리로 구속받은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두 길을 밝히 알려주셨으니 감사히 받아서 성령의 감화감동의 인도대로 꼭 살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하셨으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의 법칙이며 사망의 길이며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의 법칙이며 생명과 평안의 길이며 생명과 평안입니다. 즉 육신의 생각은 죽는 길이며 영의 생각은 사는 길입니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즐거워하나니(274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 기노스코 - 육적인 앎을 강조
* 에이도 -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 


로마서 5:2
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카우카오마이. kauchaŏmai)  καυχάομαι Storng number 2744

1. 자랑하다.  2. 자랑삼아 말하다.  
Pronunciation [ kauchaŏmai ]  
Etymology  /  디포넌트. 미래 καυχήσο- μαι, 제1부정과거 ἐκαυχησάμην, 완료 κεκαύχημαι, 폐어가 된 어떤 어간과 2172에서 유래
  • 1. [자동사] 자랑하다, 뽐내다, 고전1:31, 4:7, 13:3, 고후10:17.
  • 2.
    [타동사] 자랑하다, 자랑삼아 말하다, 고후10:8, 11:16,30.
  • 관련 성경  /  자랑하다(롬 2:17, 고전 1:31, 약 1:9), 즐거워하다(롬 5:2, 3, 11), 칭찬받다(고후 12:11).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 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작사 : Horatio G. Spafford (호라티오 G. 스패포드, 1828–1888)
작곡 : Philip P. Bliss (필립 P. 블리스, 1838–1876)

이 찬송가는 비극적인 배경에서 탄생한 곡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라티오 스패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재산을 모두 잃고, 얼마 후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보내던 중 배가 침몰해 네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아내만 생존해 “혼자 살아남았다”는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그는 배를 타고 아내에게 가는 길에서 이 찬송의 가사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작곡가 필립 블리스는 스패포드의 시를 곡으로 붙여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찬송가로 만들었습니다. 
이 찬송은 고난 중에서도 잃지 않는 믿음과 하나님의 평강을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찬송가 해설

‘내 평생에 가는 길’은 인생 여정이 평탄할 때나 풍랑 가운데 있을 때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쉼을 얻는다는 고백입니다.
2절은 영적 싸움에서 주님이 우리의 대장이심을 선언하며, 3절은 죄 사함의 은혜를, 4절은 마지막 심판날에도 두려움 없는 평안을 노래합니다.
이 찬송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평안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곡입니다.

관련 성경구절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빌립보서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은혜로운 묵상

이 찬송의 감동은 단순히 ‘평안하다’는 고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 그리고 눈물 속에서 오히려 솟아나는 믿음의 평안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때로는 큰 풍파가 몰아치고,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대장이 되어 끝까지 함께 싸우십니다. 
설령 마지막 날이 온다 해도, 그분의 보혈로 씻음 받은 우리의 영혼은 두려움 없이 찬양할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垂直的 關係)
내적(內的)

수평적 관계(水平的 關係)
외적(外的)


편안함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평안은 정신적이고 마음적인 상태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편안하다고 해서 마음으로나 영적으로 평안함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육체적으로 편안한 곳은 어쩌면 정신적으로 엄청 힘들 수 있다. 
편안함이 평안함을 가져다준다고 보장할 수 없다. 육체적인 편안함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어 마음에 평안함을 앗아간다. 그리고 주거지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곳이라면 생활이 너무 편하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이 정말 평안함을 줄 수 있을까? 
넓은 주거지에서 값비싼 침대에 자면 육체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숙면(熟眠)을 통한 평안을 담보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한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함이 있으며 단잠을 잘 수 있고, 육체적인 쉼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W. Target이 쓴 ‘’이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이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 말기 환자의 상황이 훨씬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 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그의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밖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언제나 기뻐하기로 마음먹고 아름다운 호수를 상상하면서 기뻐하며 살았다.

그렇다. 편안함과 평안함의 차이가 무엇일까? 
‘편안’은 몸과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의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편안함은 주어지는 것이고, 평안함은 내가 취하는 것이다. 
환경이 편안하다고 마음까지 평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평안하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편안할 수 있다. 
생활이 편안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생활이 편안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쉬운 삶이 아니라 ‘땀 흘리며 수고’하는 근면을 요구하면서 참 평안(샬롬)을 누리며 살 것을 강조한다. 
이 평화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죄는 평화를 깨는 주범이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과 깊은 관계가 더할수록 평안함은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환경을 탓하거나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만끽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기원한다.


현대 교회에 편안한 교인들은 많은데 평안한 제자들은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예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되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해야할 일을 하지만 혹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종을 해야할 상황이 되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돌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명령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라.” 이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무엇 때문에 보시려고 하나는 생각으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는 한 말씀으로 살리셨다면 무덤의 돌도 말씀으로 옮기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돌을 옮기는 게 더 쉬웠을텐데 굳이 마르다가 돌을 옮기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편안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함이 내 삶에 있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의 돌을 옮겨 놓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노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옮겨야할 돌입니다.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이렇게 불편하지만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일은 예수님께 맡기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돌을 옮겨놓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더 이상 핑계대지 마시고, 더 이상 피하지 마시고,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고, 그 불편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알수도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편안과 평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은 불편한 것보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와 선지자는 일순간의 안일과 편안함보다는 역경과 고난 뒤에 도래될 참된 ‘평안’을 내다보고 그것을 준비했다.

‘편안’과 ‘평안’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나 실상 그 의미가 다르다. ‘편안’은 외부환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상태지만,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푹신한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면 결단코 평안한 상태가 될 수 없다. 반면 힘든 노동이나 직장일로 몸은 고되지만 그 사람에게 뚜렷한 꿈과 소망이 있어 마음만은 평안하다면,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알려주신 인사법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누가복음 10:5)

세상에는 여러 인사말이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실례합니다” 등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여러 인사말들 가운데 최고의 인사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바로 이웃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평안을 누리도록 깨우치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21)

우리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명예, 지위, 부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며 하나님과의 유대를 중요시 여겼다(로마서 8:5~6).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우리의 생명을 위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해놓으신 것이 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4~15, 19~20)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이날의 만찬은 평소의 만찬과 다른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은 만찬에 놓인 떡을 “나의 살”이라고 하셨고, 만찬에 놓인 포도주를 “나의 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의해 찢기고 흘리실 당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인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이 예식을 성경은 ‘새 언약 유월절’이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이 새 언약 유월절을 선포한 이날은 예수님의 유언의 자리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행한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것은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새 언약 유월절 지키기를 바라셨을까? 성경 『마태복음』, 『로마서』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인류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마태복음 26:28, 로마서 6:23). 인류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 평안과 화목을 위해 세우신 이 절기의 의미를 깨달았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에도 새 언약을 지켰다(고린도전서 5:7~8, 11:23~26).

사람들은 흔히 돈 많은 부자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마음엔 천석꾼, 만석꾼처럼 걱정이 가득하다면 과연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근본 영혼의 평안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한시적인 삶으로 막을 내린다면 그것은 잘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고 해서 슬퍼하고만 있지 말고, 유월절을 기억하여 지켜서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편안과 평안, 어느 것이 진짜 축복인가?

사탄은 속이기 위해서 아주 비슷한 복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유혹한다. 편안과 평안, 어느 것이 진짜 복이고, 어느 것이 가짜 복이겠는가?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 배달해주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살을 빼기 위해서 약도 먹고 수영도 한다, 헬스다, 등산이다 여러 가지 운동을 한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우유배달 같은 힘든 일을 권하고 싶다. 신문배달도 좋겠다. 돈도 벌고, 비만도 해결하고, 잠도 잘 오지 않겠는가?

나는 1986년부터 자가용을 탔다. 10년쯤 타다보니 편리해진 대신 나빠진 것이 많았다. 이전에 걸어서 심방할 때는 다리와 허리가 튼튼해서 등산을 하면 언제나 일등이었다. 그런데 십년 후에는 조금만 심하게 걸어도 다리가 아팠다.

등산을 하면 제일 뒤쳐지게 되었다. 갑자기 체중이 늘고 지방간이 생긴 것이다.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 왔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 불편해질 것이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고,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돈 때문에 평안을 잃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편안함이지, 결코 평안함은 아니다.

필자는 중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중국인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이제 중국에도 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별 것 아닙디다. 담쌓고 철조망 칩디다.” 맞다. 부자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담쌓고, 철조망 치는 일이다.

조금 편안해졌지만, 많이 불안해진 까닭이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요14:27> 다윗도 평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나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무엇보다도 양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이 왜 이렇게 틀리게 말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누워서 잠을 자는 동물이 몇 있기는 하지만, 양은 절대로 눕지를 않는 동물이다. 사자가 누워서 잔다.

그리고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가 누워서 잔다. 그러나 야성을 가진 고양이나 개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 장난하면서 딩굴 수는 있겠지만, 누워서 잠을 자진 않는다. 사자가 누워서 자도 되는 것은 건드릴 짐승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짐승들은 깊은 잠 한 번 자지 못한다. 잠결에 바스락 소리만 나도 우선 뛰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 신다”고 말한 것일까? 그것을 모르고 한 것인가? 아니다. 다윗이 모를 리가 없다. 결코 누울 수 없는 양, 불안해서 깊은 잠 한 번 자지 못하는 양일지라도,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평안하게 누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도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이러한 평안을 줄 수가 있다. 세상은 평안을 줄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다윗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편27:3> 다윗은 사울 왕의 3000의 정예군대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에워 쌓고 있는데도 굴속에서 평안히 잠을 잤다. 한 부하가 ‘어찌 잠이 오느냐’고 묻자, “여호와가 나를 붙드심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평안, 평강, 평화 - Peace (요 14:27)

사전의 의미를 살펴보면 평안平安은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을 말하고 평강平康도 이와 같이 걱정이나 탈이 없음을 말하며 평화平和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평화의 주라는 말은 혼용될 수 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혼용해 사용한다. 원문에서 크게 차이가 없거나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고 100여년이 지난 요사이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평안 보다는 평화일 것이다.

평화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Peace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 (שָׁלוֹם, shalom)’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 eirene)’이며 라틴어로는 ‘팍스 (Pax)’로 사용되었고 각기 사용된 시기나 장소가 다르므로 다른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전에 불리던 복음성가에 내게 강같은 평화(Peace like a river)와 같은 곡이 있었고 뉴스도 연일 평화 회담(peace talk)이 보도된다.

평화란 '고요함의 상태'를 뜻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 파괴와 혼돈이 가득한 상태로 그 한 예로는 전쟁이 있다. 개인 간의 평화는 화합harmony과 일치accord의 상태를 말하며 이것이 개인의 상태에서는 tranquility 즉 평온이나 평정平靜의 상태를 말한다.

평화의 상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평화는 화합과 일치를 만들고 이는 우리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 구약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인사로 삼아 ‘샬롬’을 말해왔고 신약 시대에는 평안히 가라(Go in peace)는 인사를 더하기도 했다. 예수님도 부활 후 이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구약의 전통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바울은 서신서들 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이란 문구로 인사를 하는 것을 쉽게 볼수 있다.

우리에게 근심이 가득한 동안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머물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는 동안에도 평화는 함께하기 힘들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자신의 성공과 부요를 염려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 오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소유하고 있거나 성공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염려가 있는 동안에는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장소에 가더라도 평화가 없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로부터 나오며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주는 평화 수여자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두려움이나 근심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또한 예수의 평화는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평화를 줄수 있는 분으로 먼저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 대개는 앞선 걱정이고 앞선 근심이다. 오늘 누리는 은혜에 감사하고 집중하는 것이 내일 있을 걱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늘에 집중하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예수께서는 믿는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것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를 평화의 수여자로 믿으면 오늘 염려보다 내일 걱정보다 진정한 평화를 얻을수 있다. 당신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가?


"평안"과 "편안"  

다윗은 시편 16편 2절에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다. 
복은 주 안에만 있다는 말이다.

사탄은 우리가 주 안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아 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가짜로 복을  만들어 우리를 속인다. 
그런데 사탄이 얼마나 교묘한지 그 가짜 복이 꼭 진짜 같아 나는 그것을  유사 복이라고도 부른다.

평안과 편안. 둘 중에 하나는 진짜 복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복이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이 진짜 복이고 어떤 것이 가짜 복인 것처럼 보이시는가? 
맞다. 평안이 진짜 복이고 편안은 가짜 복 즉 유사 복이다. 
편안이 나쁜 것은 아니다. 
편안이 축복은 아니다. 
편안함만으로는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과 물질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과 물질은 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돈과 물질은 우리에게 편안은 줄 수 있으나 평안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에서 요즘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담 쌓고 철망을 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돈  때문에 좀 편히 살 수는 있게 되었지만 돈 때문에 오히려 불안해져서 담을 쌓고  철망을 치는 것이다. 
돈으로 편안을 살 수는 있어도 평안을 살 수는 없다.

평안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평안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는  절대로 불안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어도 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불편한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데 불안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것'은 편안을 말씀 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평안인 것이다.

평안하기를 빌라(마태복음 10:11-13)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에피그노시스의 힘
The Power Of “Epignosis”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귀한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떤 종류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식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에피그노시스(Epignosis)”로, 전문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관계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뜻합니다. 지식의 대상이나 알려진 것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을 지적으로 알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충만하고, 깊고, 정확한 지식입니다. 축구 선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 일부는 놀라운 솜씨로 공을 다룰 수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공과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공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공은 더 이상 가죽 조각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둥근 가죽 공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공의 재료, 크기, 구조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공의 디자인에 숨겨진 과학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공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공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숙련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에피그노시스”는 우리를 숙련자로 만드는 지식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을 하나로 만듭니다. 이는 말씀 묵상을 통해 옵니다. 말씀이 당신에게 개인적인 것이 되고 이론에서 관계로 바뀔 때 옵니다. 말씀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삶에서 은혜와 평강이 배가되게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십시오. 말씀이 정보 그 이상이 되게 하십시오. 말씀이 살아있는 실재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삶은 꽃을 피울 것이고, 당신은 세상에 경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말씀을 통해 나를 하나님을 아는 더 깊고 친밀한 지식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배가된 은혜와 평강 가운데 행하며, 말씀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으로 기능합니다. 내 영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으로 세워지고, 강건해지고, 조정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작성일자 2017-07-14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The “Epignosis” Of The Truth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헬라어: 에피그노시스epignosis)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심판을 피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아 그 진리와 교제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2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는 당신이 말씀으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육체로 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은 말씀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28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당신은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패배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같은 부류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이 계시를 이해한다면 실패나 가난과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기본 진리들입니다.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이 초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 3:7)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의 유업과 정체성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결코 진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공과 승리와 형통과 영광스러운 삶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들어감으로써, 다시 말해 그 진리와 하나 됨으로써, 맴돌기만 하는 삶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부류에 속한 자라는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The “Epignosis” Of The Truth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헬라어:에피그노시스 epignosis)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심판을 피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아 그 진리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뜻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패배당할 수 없다는 뜻 이 계시를 이해한다면 실패나 가난과 같은 것들은 없다.

우리에게 계시된 기본 진리들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이 초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될 것.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 3: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유업과 정체성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 그 결과, 그들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결코 진보하지 못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공과 승리와 형통과 영광스러운 삶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들어감으로써, 그 진리와 하나 됨으로써,
맴돌기만 하는 삶을 깨뜨릴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부류에 속한 자라는 진리의 지식(에피그노시스)에 이르러야 한다.










12월 11일(목) 로마서 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평안(平安)과 편안(便安)  - Peace & Comfort

평안 / 

  • 1. 평평하다
  • 2. 나누다
  • 3. 바르게 하다
  • 4. 평정하다
  • 5. 고르다
획수 5획 부수 干(방패간, 3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편안하다
  • 2. 편안하게 하다
  • 3. 즐기다
  • 4. 안으로
  • 5. 값이 싸다
획수 6획 부수 宀(갓머리, 3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편안 / 편할 편, 편안할 안

  • 1. 편하다
  • 2. 똥오줌
  • 3. 분뇨(糞尿)
  • 4. 편의
  • 5. 익히다
획수 9획 부수 亻(사람인변, 2획) 난이도 읽기 7급, 쓰기 6급

평안과 편안 
Ειρήνη και άνεση

εἰρήνη Storng number1515
1.

평화.

2.

눅11:21

3.

평화

Pronunciation [ ĕirēnē ]
  • 1.
    평화.
    • a.
      [πόλεμος의 반대말] 눅11:21, 14: 32, 행12:20, 24:2, 계6:4.
    • b.
      [비유적으로] 평화, 조화, 어우러짐, 마10:34, 눅12: 51, 행7:26, 엡4:3, 히7:2. ㉠ 평화의 길, 롬3:17. ㉡ 평안하게, 히11:31. ㉢ 평화하라, 엡2:15. ㉣ 화평하게 하는 자들, 약3:18. ㉤ 평화를 구하다, 갈5:22, 딤후2:22.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히12:14. ㉦ 평안을 추구하다, 롬14:19, 벧전3:11. ㉧ 평화에 관한 것, 눅19:42.
    • c.
      질서,《반》ἀκαταστασία, 고전14: 33, [참조] 고전7:15.
  • 2.
    [히브리어 샬롬과 일치된 뜻으로] 안녕, 복지, 건강, 마10:13, 막5:34, 눅 7:50, 8:48, 10:5, 24:36, 요20:19, 20:26, 행15:33, 16:36, 고전16:11, 약2:16. [주] 새롭고 특징적인 발전으로 헬라의 편지 서두의 인사말인 ‘은혜’가 바울서신 등에서 ‘은혜와 평강’ 이란 인사형식으로 결합된 것이 있다, 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엡1:2, 골1:2, 살전1:1, 딤후1:2, 딛1:4, 몬3, 계1:4.
  • 3.
    [선지자들에 따르면 평화는 메시아 왕국의 본질적 특성이다. 따라서 기독교 사상은 흔히 평화를 메시아적 구원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요14:27, 16:33, 행10:36, 롬5:1, 10:15, 15:33, 16:20, 고후13:11, 엡2:17, 6:15, 빌4:7,9, 골3:15, 살전5:23, 살후3:16, 히13:20. [기타] 눅2:14, 29, 롬8:6, 14:17, 15: 33, 벧후3:14.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평안(마10:13, 눅2:29, 행9:31), 화평(마10: 34, 눅12:51, 행10:36), 평강(눅1:79, 요20:19, 롬1:7), 평화(눅2:14, 19:42), 안전(눅11:21), 화친(눅14:32), 화해(행7:26), 태평(행24:3).





나는 참 평안합니다. 
나는 정말 편안합니다. 
I am very peaceful. 
I am truly comfortable.


편안과 평안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Comfort and Peace

편안과 평안의 차이

“우리는 편안함을 좋아한다. 편안한 사람,편안한 공간,편안한 시간… 편안하다는 것은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다(중략). 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이란 뜻이다(중략).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김소연 저(著) 《마음 사전》 (마음산책, 61-6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을 좀 더 편안하게 사는 데 있다고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행복은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 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잠언을 통해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편안’은 몸과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들이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부족함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고백을 할까요.

주님이 주시는 평안 때문입니다.

편안함은 물질로 해결할 수 있지만 평안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안은 주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하늘이 축복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27-2

강남 비전교회

한재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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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tn(뤼튼)을 사용했습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Comfort and Peace

"We like comfort. A comfortable person, a comfortable space, a comfortable time… Being comfortable means being convenient and safe (excerpt). Being peaceful means being peaceful and stable (excerpt). Comfort may come at the expense of someone else's discomfort, but my peace can become a shared value with others."

This passage is from Kim So-yeon's "Dictionary of the Heart" (Mind Walk, pages 61-62).

Many people believe that the happiness of life lies in living more comfortably.

To some extent, this is correct.

However, the true happiness of life lies not in 'comfort' but in 'peace'.

God speaks this truth through Proverbs.

"Better is a dry morsel, and quietness therewith, than a house full of sacrifices with strife." (Proverbs 17:1)

'Comfort' pertains to the body and environment, while 'peace' emanates from within the heart.

If we look at the Bible, the saints often use the expression "lacking nothing."

Considering how much is lacking, why would they make such a confession?

It is because of the peace that the Lord gives.

Comfort can be solved with material things, but peace cannot.

Peace is a heavenly blessing that the Lord gives to the saints.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 Let not your hearts be troubled, neither let them be afraid." (John 14:27)


편안함과 평안함의 차이


유대인의 인사말은 “샬롬”입니다.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입니다. 한국인의 인사말은 “안녕하세요”입니다. 안녕이란 단어는 편안할 안(安)과 평안할 녕(寧)이란 한자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편안한지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샬롬”이나 “안녕하세요”의 인사말은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편안함”과 “평안함”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라고 축복하시면서 제자들이 진정 추구해야할 것은 평안함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돈을 열심히 버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직장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성공을 해야 평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도 공부를 잘해도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도 마음은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불안 속에서 더 많이 소유하고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얼마큼 돈을 벌어야, 그 평안함을 얻을 수 있게될까’라는 질문을 하게됩니다.
예수님은 “평안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있는 “편안함”을 “평안함”으로 착각하며 살기에 몸은 편안할 수 있지만 마음은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면 평안함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서 자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조롱을 다하고, 무시를 당하는 속에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인생의 실패자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아가야 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편안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다 이루었다”라는 고백을 통해 그의 삶의 목적이 아름답게 이루어졌기에 그 마음에 큰 평안이 있으심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현대 교회에 편안한 교인들은 많은데 평안한 제자들은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예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되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해야할 일을 하지만 혹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종을 해야할 상황이 되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돌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명령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라.” 이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무엇 때문에 보시려고 하나는 생각으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는 한 말씀으로 살리셨다면 무덤의 돌도 말씀으로 옮기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돌을 옮기는 게 더 쉬웠을텐데 굳이 마르다가 돌을 옮기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편안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함이 내 삶에 있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의 돌을 옮겨 놓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노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옮겨야할 돌입니다.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이렇게 불편하지만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일은 예수님께 맡기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돌을 옮겨놓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더 이상 핑계대지 마시고, 더 이상 피하지 마시고,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고, 그 불편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알수도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샬롬!










로마서 5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수 있게 된 것이 축복의 근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 결과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라틴 십자가의 모양(十)에서 화평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첫번째 관계의 화평은 위로 올라가는 하나님과의 화평
두번째 관계의 화평은 아래로 내려가는 세상과의 화평 
세번째 관계의 화평은 좌우로 뻗은 이웃들과의 화평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즐거워하는 자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근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워하는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와 많은 여러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온갖 문제와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장차 영원하도록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요 내용 :
더 깊이 이해하기 :
  • 연속성 : 이 구절은 로마서 3-4장에서 설명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의 결론이자, 뒤이어 이어지는 5-8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 환난 속에서의 소망,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됩니다.

  • 누리는 복 :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은혜로 나아가는 특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포함합니다. 
간단히 말해, 로마서 5:1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약 2천 년 전에 이 로마서가 기록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약 300년 동안 그 당시에 크리스찬들은 무서운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로 로마제국과 그 주변에서 살던 크리스찬들을 향해서 일어났던  로마 황제들의 무서운 박해는 약 열 번 이나 있었습니다. 

첫번째 박해는 네로(AD 64년) 의 박해

어떤 학자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로마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짐승의 가죽에 매여 투기장에 끌려나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개에게 물어 뜯기고, 맹수에게 던져지고, 온 몸에 역청을 뒤집어 쓰고 네로의 정원에 있는 기둥에 묶여서 그들의 몸은 밤에 네로의 정원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었다. 네로황제는 수레를 타고 다니며 벌거벗고서 한밤에 술에 도취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치는 모습을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 때에 바울과 베드로도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둘째 박해는 도미시안 박해(AD 96년) 

수천 명의 크리스찬들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셋째 박해는 트라얀 박해 (AD 98-117년)

넷째 박해는 하드리안 박해(AD 117-138년)

다섯째 박해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박해(AD 138-161년) 

폴리갑이 살해당했습니다.

여섯번째 박해는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박해(AD 161-180년) 

순교자 저스틴과 많은 크리스찬들이 목이 잘리고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박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박해(AD 193-211)  

여덟 번째 박해는 막시민 박해(AD 235-238 년)  

아홉 번째 박해는 발레리안 박해(AD 235-260년)  

열번 째 박해는 디오클레시안 박해(AD 284-305년)   

이것은 황제들의 박해 중에서 마지막 박해로 가장 심하고 전국적이었습니다. 
10년 동안 동굴이나 숲 속에서 크리스찬들을 찾아내어 화형시키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모든 잔인한 방법을 다 사용하여 기독교의 이름을 없애려고 그들을 박해였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은 이런 무서운 박해를 당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온갖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주의 일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온갖 문제와 고난 중에서도 범사에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

우리는 오늘, 그리고 매일 매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앞에서 주어진 가르침에 대한 결론이자, 이후의 가르침을 위한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음을 가진다면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한 결론을 내면서 이 의롭다하심, 곧 칭의와 구원의 은혜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설명이고, 내일은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것입니다. 
즉 오늘 다룰 5:1~11은 이후에 이어질 6~8장의 내용과, 5:12~21은 9~11장의 내용과 상응한다고 보면 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제사와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성전)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화목제) 것이 성전과 제물이 없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바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울은 이방인들이 굳이 성전에 들어가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에 세워져 있던 성전은 그저 유대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 뿐,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고,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영적인 유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얻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인내, 연단,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믿는 자들의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의롭게 되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법적인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로, 여기서 바울이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진정하게 믿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안전하게 연결시켜주는 첫 번째 고리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벌이는 가장 중요한 공격은 그들이 얻은 구원의 실제와 보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파괴적인 생각을 조장함으로써, 한 개인의 구원의 보존은 전적으로 믿는 이의 성실함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구원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반하는 이러한 오도된 해석에 대응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4장에서 구원은 오로지 인간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고 적었습니다. 창세기 15:6 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로마서 4:3).

누군가가 실제로는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선한 행실이 한 사람의 구원을 보존받는 조건이 되는지를 의문시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5:1-11 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있다고 강조하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3; 히브리서 10:23). 우리를 구세주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 중의 하나가 오늘 구절에서 읽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나님께 대적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고, 하나님도 그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7; 에베소서 5:6).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각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7:25) 이러한 평화는 영구하고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베소서 2:14). 그 사실은 우리 구원의 보장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사탄의 공격을 굳건히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선함과 장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39).

[ 기도 ]

주님, 저희를 구원해 주시고 당신과 저희 사이에 평화를 이루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을 더욱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저희를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5–6 minutes

로마서 5 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말씀 요약 >

     오늘 본문 5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롬 1~4장),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이신칭의 교리)에 관하여 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된다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추구해 보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롬 3:23),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20).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아무리 해보아도, 우리에게는 의가 없고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다 충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이 의를 얻을 수 없었을 때에, 율법 외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하셨습니다(롬 1:17; 3:21). 이 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3: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5:1-2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그 결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된 것은 무엇인지를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가장 먼저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1절). 

     이 화평은 관계적, 객관적 화평이다

     먼저 우리는 이 화평(peace)이 어떤 화평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화평은 주관적인 마음의 평안이나 행복감, 또는 일시적인 마음의 평정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담이나 최면술, 약물이나 음식, 좋은 음악이나 자연 경치, 많은 재물이나 친구들, 금욕적인 생활이나 고요한 명상, 또는 극도의 방탕과 육체적 쾌락 같은 것들을 통한 행복감과 만족감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과 평강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객관적 화평이요, 관계적 화평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화목과 화친과 화해에 따르는 평화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샬롬(평화, 평강)”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움의 객관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의롭다 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실제적이고도 치명적인 적대감과 원수된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화해된 것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화목은 언제나 한 쌍입니다. 칭의 안에는 화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롭다 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과의 불목의 요소가 제거되어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신자가 구원과 관련하여 받아가지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이 화평(peace)도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공로로 획득할 수 있는 평화와 평강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평강을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사 9:6).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엡 2:1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이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을 전해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가리켜서 평안의 복음, 화평의 복음이라고 하셨습니다(엡 6:15; 사 52:7; 나 1:15 참조).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중에 으뜸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화평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교제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목한 가운데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적대적인 관계로 살고 있는 자이므로,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요 큰 위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악인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며(시 7:11), 또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우리 편에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우리에게 그 의를 마련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의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의와 화평을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부자라도 거지요, 아무리 학자라도 무지한 자요, 아무리 권세자라도 비천한 자요, 파산한 자요, 불행한 자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칭의로부터 받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기를 원하셨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 20:19,21,26 참조). 

     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누린다는 뜻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된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나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의 전능의 능력으로 나를 돌보시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요 14:27). 

     특별히 이 화평은 양심의 평안을 가리킵니다(칼빈, 루터, 로이드존스, 존 머레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은 우리의 양심을 평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화평이라는 말은 양심의 평온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생긴다”(로마서 주석). 호라티우스 보나르도 “십자가의 평강은... 바로 양심의 평강입니다.”라고 했습니다([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173). 

     하나님과의 이 화평 안에는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쁨은 비참하고 가련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모든 부요함 가운데 다시 살게 된 큰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은 자들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공통된 경험이었습니다(행 16:34 참조).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에서부터 오는 큰 기쁨입니다. 이러한 화평의 큰 기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화평의 떡과 잔을 받으라

     여러분은 어디에서 평화를 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평안합니까? 기쁨이 충만합니까? 어디에서 양심의 평안을 얻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참된 평화와 평강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참된 평강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은 우리에게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은 평화의 떡이고 성찬의 잔도 평강의 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요일 4:10 참조). 성찬의 떡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17 참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우리 것으로 삼고 날마다 이것을 누리고 확신하며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의롭다 인정받은 다음에 평화, 구원,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은혜

1-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3장 후반-4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말했습니다.

5-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의롭다 인정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구원을 누리자(1-11)

2. 의롭게 하심의 은혜로 노릇하며 영생을 누리자(12-21)

1. 의롭다 인정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구원을 누리자(1-11절)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바로 앞쪽 4장을 한 번 더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평화)을 누리자.” 의롭게 되는 것에서 화평으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12절의 “들어옴”과 비슷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떠나 좋은 관계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다음에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누립니다(10절). 2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3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구원, 평화는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화목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공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은 것도 예수님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이유는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생명을 향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다음에, 이제는 죄와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계속 이깁니다.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하니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

4절의 “이룬다”는 일하여 이루어낸다는 뜻입니다. 3-5절, 환난 가운데 인내로써 일하여 만들어냅니다. 인내 가운데 단련됨을 이루고, 단련됨이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소망은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칭의와 화목됨으로 시작합니다. 은혜로 이 화목됨이라는 문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구원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문으로 들어온 다음에 더 나가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겨서 고난 가운데서 영광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이 복은 엄청난 복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나에게 죄가 발견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는 매 순간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 용서받습니다. 나를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환난이 영광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기 바랍니다.

“의롭게 인정됨”(1절)과 “평화를 누림”을 9절에서 표현을 다르게 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의롭게 여겨짐”과 “구원”은 “의롭게 인정됨”과 “평화를 누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결과로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히브리말로 “승리”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 의로움까지 포함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의로움의 다음 단계 삶을 말합니다. 평화와 구원은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의롭게 됨을 화목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화목을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의롭게 된 것을 화목이라고 하고, 평화를 누리는 것도 화목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화목을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죄인 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하게 된 자는 더 나아가 더욱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여기서 화목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과거형입니다. 화목을 얻게 하신 일이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나 교회는 율법적 의만 말하고, 화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 봉사를 많이 하는 배경에 구원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위한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봉사가 공로가 되어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기가 노력하여 눈에 보이는 선행을 많이 할 때는 “구원받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행이 부족해 보이면 구원에 대해 의심합니다. 신앙의 확신이 없고 양심에 불안이 항상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들도 은혜로 화목하게 됨을 확신합니다.

어떤 교회와 성도는 죄 용서받았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그 다음 단계로 구원과 화평, 평화, 생명, 승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 이야기하고 거룩한 삶이 빈약합니다.

죄 용서와 평화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방향을 잡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2. 의롭게 하심의 은혜로 왕 노릇하며 영생을 누리자(12-21절)

12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생명이 왕 노릇 한다고 강조합니다. 앞에서 “화평”, “구원”을 말하고, 여기서는 “왕 노릇 함”을 말합니다. 구원과 평화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합니다. 14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은 하나의 타입입니다. 진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2절,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14절, 죄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 했습니다. 그런데 15절,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에 대한 정죄가 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다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정죄를 받는 대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의롭게 된 우리에게는 사망 대신 생명이 왕 노릇 합니다. 17절,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아래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 하는 것”이 5장 후반부터 6장 후반까지 중요한 단어입니다. 21절,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죄가 사망을 통해서 왕 노릇 합니다. 은혜는 의를 통해서 왕 노릇 합니다. 그 결과 영생으로 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는 우리를 의롭다 함에서 시작해서 생명의 왕 노릇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누리게 합니다.

10절 “그(그리스도)의 살아나심으로(생명 안에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을 17절이 반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구원은 실제적 새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의와 생명이 우리 삶에 가득합니다.

믿고 복종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은 죄 용서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 것도 포함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미 영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용서의 은혜를 매일매일 경험하십시오. 죄 용서의 은혜 위에서 화평을 누립시다. 고난 가운데 승리합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누립시다.

우리가 죄와 싸워서 넘어지더라도 완전히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죄와 싸워서 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진 것을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니까 이긴 것만 계속 쌓아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어떠한 작은 유혹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세력들, 절망과 고통, 자연적으로는 힘든 상황이 생길 때 자연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연적인 감정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올 때마다 믿음으로 이깁니다.

우울감이 오고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마귀와 싸워 이기고 죄와 싸워 이기고 생명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은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이 생명을 받고 나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왕 되심 안에서 우리도 승리하는 왕으로 살아갑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하나님과”(프로스, 1) = ‘하나님을 향하여’ = 12, “들어감” (프로스-아고게)

“하나님과”(프로스, 1절)는 하나님을 ‘향하여’입니다.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12절, “들어감”(프로스-아고게)과 비슷합니다. 같은 전치사를 통해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참고> 3-4장에서 말하는자랑이라는 주제가 5장으로 이어짐

앞서 3-4장은 의로움과 자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기에,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3:27).

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후손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자손과 땅의 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의롭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4:1).

3,4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5장도 자랑에 대해 말합니다. “즐거워한다”(3,11절)는 직역하면 ‘자랑한다’입니다. 5장은 의롭게 된 이후의 삶에서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편안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평화, 구원의 능력, 생명을 누리는 축복을 가르칩니다. 이 자랑은 고난 가운데서 누리는 자랑입니다.










 







구속, 구원, 원죄, 복음, 다른 종교들

1. 구속(救贖) 혹은 대속(代贖) 혹은 속량(贖良)

구속의 뜻

1)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제하여 은총속에 하느님과 재(再)일치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 혹은 ‘대가를 치르고(돈을 주고) 소유권을 회복하거나 자유와 석방을 얻어내는 것’, 혹은 ‘잃어버린 생명을 건지는 것’.

2) 죄악으로부터의 구제라는 측면과 하느님과의 재일치라는 측면이 있다.

구속의 과정

1) 죄는 우리를 하느님과 분리한다.

a) 성경은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원죄의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인간은 원죄로 저주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하느님의 사랑에 도전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원죄는 인류 전체인 아담의 모든 후손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숨겨져 있다.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악하고 이기적인 열정을 포옹하는 경향을 만드는 것은 원죄이다. 원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을 두는데, 원죄의 결과는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누구도 그 자신의 의지로 원죄에 내재된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다.

b) 성 바오로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23)라고 말한다. 원죄와 본죄는 인간과 하느님을 분리한다. 하느님은 거룩하고 공의롭고 선한 모든 것의 완전이시기 때문에, 충만한 임재 안에서 죄 많은 인류를 용납하실 수 없다.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틈을 두는데, 이 틈은 인간의 종교, 은혜 없는 선행,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시도들로는 극복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어떤 피조물인 인간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죄라는 틈을 연결할 수 없다.

2) 하느님은 유다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약속하셨다: 우리는 사랑 많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갖게 되어 매우 행운아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틈을 넘어갈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사실,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타락한 후, 하느님께서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신성한 계획을 시작하셨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아브라함의 자녀인 유다 민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 사랑, 희망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새로운 민족 유다인의 조상으로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들은 예언자들로부터 주님의 예언과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희망을 얻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죄의 구속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유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12).

3) ‘고난받는 종’은 유다의 율법을 이행하신다: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유다 민족의 옛 계약을 새 계약에서 완전할 정도로 완벽하게 이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율법에 새로운 완전성을 가져오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두 계명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으로 율법의 새로운 정신을 전파하고 지키셨다. 그는 유다인의 옛 계약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행하고,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인의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유다인의 할례는 결국 은혜에 인해 세례로 넘어갔고, 동물의 희생은 미사라는 제사에서의 완전한 제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파스카 어린 양인 자신의 궁극적인 희생을 통해 파스카 잔치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라고 하시면서, 예식 정화에 관한 유다의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셨다. 죄에 관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맥락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규칙과 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신적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에 따라 완벽하게 설명하고, 성취하며 살 수 있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속을 위해 고난받고 죽으셨다.

a)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고 죄의 용서를 완전히 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3-15)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마르 10:45), 목숨을 바치셨다. 실제로,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 최고 의회와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분을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다인들 사이에 불화를 선동하고,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라고 신성 모독적인 말씀을 한 것처럼 보이는 거짓 혐의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언하시고,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라고 증언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인간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b)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신성한, 인간의 제물로 봉사했다. 그의 율법의 완전한 성취, 수난의 고통,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모든 죄값을 단 한 번에 지불했다. 예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하느님의 공의는 죄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갚을 수 없는 속죄를 요구했다. 오직 하느님의 아들의 완전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은 희생만이 죄를 속죄하고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교회 교리서 615).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의롭고 참으로 인간적이셨기 때문에,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순수한 사랑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죄로 죽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은총의 새 생명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어설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c. 구속의 선물

1) 구속은 우리에게 죄의 죄책감, 비난과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2) 구속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유를 준다.

3) 구속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승인과 수용을 구하는 자유를 준다.

4) 구속은 우리에게 두려움, 걱정,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5) 구속은 우리에게 적대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박해자들을 축복할 자유를 준다.

6) 구속은 우리에게 실패의 자유를 주지만, 여전히 우리가 깊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7) 구속은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준다.

2. 구원(救援, salvation)

a. 구속과 구원의 차이

1)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고 영원한 정죄의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속의 행위이다. 구속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삶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속은 하느님의 영광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제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3) 구속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까지 경주를 달려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b. 구원의 측면 내지 요소

1) 죄(sin)

a) 원죄(original sin): * 간단히 말하면, 아담의 죄의 결과로 하느님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

b) 십계명: 각종 미신행위(점, 굿, 부적 등), 독성죄(모고해, 모령성체; 1코린 11:27-32), 파공관면, 간음, 살인, 낙태, 도둑질, 사기 등. * cf. 지역에 따라서는 주일에 쉬는 꿀벌도 발견됩니다.

c) 기타: 심각한 미움과 분노, 철저한 이기심, 무절제한 애착, 거듭되는 범죄행위, 싸움, 험담, 폭음과 술주정, 심각한 교만, 저주하는 마음들 등(1코린 5:11; 6:9-10; 갈라 5:19-21; 에페 4:25─5:20 등). (로마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d) 삼구(三仇): 악마, 세속, 육신

e) 칠죄종(seven deadly sins)

(1) 자기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여 생기는 칠죄종: 교만 pride; 인색 greed; 음욕 lust; 탐욕(탐식) gluttony

(2) 자기의 불편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데서 생기는 칠죄종: 분노 anger, wrath; 질투(시기) envy; 나태 sloth

f) 신칠죄종(2008):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 세포연구, 마약 거래,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財), 낙태, 소아 성애

2) 고통(라 dolor; 영 suffering)

a) 구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통: 전쟁, 포로, 가난, 착취, 살인, 낙태, 간음, 부정부패, 폭력, 조롱 등의 고난, 사망, 죄 등

b) 불교에서의 팔고

(1) 생고(生苦): 이 세상에 태어나는 괴로움.

(2) 노고(老苦): 늙어 가는 괴로움.

(3) 병고(病苦): 병으로 겪는 괴로움.

(4) 사고(死苦): 죽어야 하는 괴로움.

(5)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6)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살아야 하는 괴로움.

(7)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8) 오성음고(五盛陰苦; 오온성고, 五蘊盛苦): 심신의 구성요소 색•수•상•행•식의 오음(五陰)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여 발생하는 고통을 말함.

(a) ‘색(色, form)’: 물질요소, 즉 물질적인 형태로서의 육체

(b) ‘수(受, sensation or feeling)’: ‘색’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단순한 반응.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작용

(c) ‘상(想, perception)’: ‘수’에 대한 인식 혹은 해석.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 작용으로서 표상•개념 등의 작용

(d) ‘행(行, mental formation or activity)’: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

(e) ‘식(識, consciousness)’: 간단히 말해서, ‘색’에서 ‘행’까지에 대한 인식.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

c) 고통의 일반적인 유형

(1) 육체적 고통: 질병, 산고, 고문, 죽음 등

(2) 정신적 고통: 걱정, 두려움, 분노, 실의에 빠지는 것, 좌절감 등

(3) 영적(靈的) 고통: 인생의 궁극문제와 관련하여 느끼는 것 등

d)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고통의 유형

(1) 타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고통

(2) 개인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로서의 고통

(3)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지옥에서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

(4)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뢰와 순종을 높이려고 하느님의 사랑의 손에 의해, 본의 아니게 겪게 겪는 고통

(5)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겪는 고통

e)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고통의 의미

(1) 5가지 고난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서로 관련되어 있다.

(2) 모든 고통은 주님의 구원사업 안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져야 하며, 또한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더라도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허락하신다.

(3) 그렇다면, 내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성찰해 보아야만 한다.

(a) 정직의 결핍은 아닌지

(b) 겸손의 결핍은 아닌지

(4)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고통의 의미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절망(despair)

a)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갖는 모든 희망을 자발적이고 완전하게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는다든가, 유혹을 이길 만한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실하심을 불신하여, 자포자기함으로써 회개하지 않고 더욱 잘못에 떨어지게 한다. 가까운 말들로서는 낙망, 체념, 낙담, 비관, 좌절, 실망 등이 있다. * (1사무 4:7; 27:1; 1역대 29:15; 2마카 3:29; 9:18; 욥 7:6; 9:23; 14:19; 17:15; 19:10; 27:8; 지혜 3:18; 집회 27:21; 에제 37:11; 즈카 9:5; 사도 16:19; 27:20 등)

b) 일반적으로는 미래에의 희망을 잃은 정신적 상태,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거나, 끊어버린 상태, 혹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4) 죽음(라 mors; 영 death): 육신의 죽음

(요한 8: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히브 2:14-15)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c. 구원의 내용상의 차이

1) 구약 시대의 구원

a) 구약 시대 초기에 ‘구원’은 민족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어떠한 위험이나 악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즉, 전쟁, 포로, 가난. 착취, 살인, 낙태, 간음, 부정부패, 폭력, 조롱 등의 고통, 사망, 죄 등으로부터의 구출이다. 이 구원 행위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이집트에서의 탈출이다.

b) 하지만 왕국 시대로 오면서 점차 예언자들에 의해 구원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에 포함되었다(1열왕 8:41-43; 이사 52:10).

c) 개인 차원에서의 구원도 점점 증가되었다. 곧, 구원은 집단적으로 민족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 곧 의인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d) 더욱이 구약시대 후반부로 오면서 메시아사상이 발전하여 구원은 점점 ‘죄로부터의 구원’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으로 발전함. 곧 구원자 메시아는 죄와 그 결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는 분이라는 사상이 강하게 나타남(이사 52:13─53:12). * 세상적 의미의 구원 → 영원한 생명으로(시편 133:3; 다니 12:2; 2마카 7:9.36)

2) 신약 시대의 구원

a) 신약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에페 2:13-18). 즉, 신약에서의 구원은 죄를 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셔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성혈을 쏟게 하심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다(로마 5:9).

b) 그 결과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됨.

(사도 13:39)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집회 13:14) “네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너를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여라.”

c) 하지만 이 구원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육화론적)이지만, 동시에 세상 마지막 날 신자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것이다.

d.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

1) 하느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첫 번째 계명이자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고, 하느님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정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

2) 이웃 사랑: 우리의 이웃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 가족, 친구,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존경과 연민 그리고 용서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그분의 자녀처럼 사랑하신다.

3) 의로운 생활: 성경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의 좋은 원천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한 평화를 경험하기를 원하시고,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방식대로 살 때만 성취될 수 있다.

4) 회개: 죄의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고립되고, 평화의 부족과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이전의 은총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회개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로 진정으로 결심하는 것이다.

5) 기도

a)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혼의 대화 혹은 호흡이다.

b)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10% 정도이고, 90% 정도는 성경, 책들, 다른 사람, 매스컴 등을 통해 주어진다고 한다.

3. 원죄

a. 교회는 첫 사람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가르친다. 첫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은 초성은혜와 과성은혜를 거두어 버렸고 그 결과 사람은 죽음과 고통의 그늘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결과를 원죄라 한다. 이런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출생으로서 후손에게 계속 전달된다.

b. 원죄라는 용어는 4세기말 성 아우구스티노가 처음 사용한 이래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과 연관되어 이해된다. 사실 죄는 죄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비추어 보아야 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서, 죄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원죄는 모방으로서가 아니라 출생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c. 만일 하느님께서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첫 사람의 죄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지,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유죄로 판단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d.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갓난 아기도 원죄가 있는가? 그렇다. 원죄는 출생으로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갓난 아기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직 본죄를 짓지 않은 아기에게 아담의 불순명의 결과가 미치는 이유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이다. 즉 인류는 공동 운명을 가진 연대적인 인격체로 보는 성경의 사상, 특별히 로마 5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세례의 필요성과 죄사함의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의 성격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는 유아도 예외가 없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일찍부터 유아세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아들은 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는 것뿐이다.

e. 원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원죄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원죄는 이마에 찍힌 도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원죄에 물들어 태어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부모가 은총 지위에 있는 신자라 하여 거기서 태어나는 자녀가 자동으로 은총 지위에 있는 신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부모에게는 원죄가 없어졌는데도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기에게 원죄가 있다는 교리는 부모가 단순한 인간성만 아기에게 전해줄 뿐,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는 전할 수 없음을 깨우쳐 준다. 원죄 교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f. 그런데 만일 유아세례를 부정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교리도 필요 없게 되고, 원죄 교리를 부정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은총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원죄 교리, 유아세례 전통,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은총, 이 세 가지는 서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가 원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죄악의 보편성에 맞서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g.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원죄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89항)라고 설명한다.

4. 복음(라 Evangelium; 영 Gospel)

a. 복음이란?

1) ‘기쁜 소식’을 말한다. 로마 시민들에게 복음이란, ‘로마의 황제와 그 행적 그리고 그 법과 이방의 무법한 왕국에의 승리 및 정복, 로마 왕국에 의한 통치, 그리고 로마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2) 이 용어가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천국으로 대체된다. 로마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부의 아들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부활·가르침으로 문을 여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 즉 하느님 나라 및 그 통치를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차용되면서 현재와 같은 복음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3) 구약의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의 나라 및 그 통치이고, 메시아는 그 나라의 임금이시다. 예수는 메시아이시고 임금이시며, 교회는 그 나라의 정복 현장이다. 이처럼, 복음이란, 인간 구원과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 또는 예수에 의한 인간 구원의 길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죄인인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부활하셨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은총 등 구원을 가져다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요한 3:16; 14:16; 로마 3:25; 콜로 1:20).

4) 좁은 의미의 복음은, 신약성경의 ‘4 복음서’를 말한다.

b. 복음의 성격

1)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로마 1:2)이요,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힘(로마 1:16-17)이며, 새 계약(예레 31:31-34; 히브 10:9)이다.

2)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에페 2:4-10). 그래서 ‘하느님의 복음’(로마 1:1; 1테살 2:2),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로마 15:19; 16:25 등), ‘예수님에 관한 복음’(사도 8:35), ‘주 예수님의 복음’(사도 11:20; 2테살 1:8), ‘그분 아드님의 복음(로마 1:9), ‘하느님 은총의 복음’(사도 20:24), ‘구원의 복음’(에페 1:13), ‘하늘 나라의 복음’(마태 4:23), ‘하느님 나라의 복음’(루카 16:16), ‘복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복음’(1티모 1:11),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2코린 4:4), ‘평화의 복음’(사도 10:36; 에페 6:15), ‘영원한 복음’(묵시 14:6) 등으로 표현됨.

5. 다른 종교들

a. 불교

1)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Buddha: 깨달으신 분, 覺者, 佛)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의 기본 요소는 삼보(三寶), 즉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 Samgha).

2) 중요 특징: 타종교들과 비교해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b)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c)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나 원한을 가지지 않음.

d)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e)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f)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g)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혹은 解脫)을 이상의 경지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하고, 교의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b. 유다교(유다이즘): 일반적으로 헬레니즘(Hellenism) 세계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이, 주변 사람들과 차별을 두고 지칭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2마카 2:21; 갈라 1:13). 유다교의 기초는 모세가 다져 놓았지만, 그 기원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 유다교의 근본은 토라에 있는데, 24권으로 된 구약으로 인간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을 망라한 가르침이다. 이는 3세기에 집대성된 미쉬나(Mishnah: 공식 주해서)와 6~7세기에 완성된 탈무드(Talmud: 미쉬나의 주해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c.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불린다. 무하마드(570~632)가 40세부터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를 수록한 코란(Koran)을 경전으로 하고 있다. 코란은 가브리엘 천사가 무하마드에게 전달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들의 주요 신조는 알라(Allah), 즉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자이다. 114장으로 된 믿음과 사상의 중심인 코란은 6신(信) 5행(行)으로 표현된다. 즉 알라, 천사, 예언자(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하마드), 성경, 심판, 천명(天命)을 믿으며(六信), 신앙 고백, 예배, 종교세(稅), 단식, 순례 등을 실천해야 한다(五行).





구속과 구원의 차이

1.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고 영원한 정죄의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속의 행위
구속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삶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속은 하느님의 영광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제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3. 구속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까지 경주를 달려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구속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로마서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Not only so, but we ourselves, who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eagerly for our adoption as sons,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구원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로마서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로마서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로마서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로마서 15: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12월 10일(수) 로마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속(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한글개역 성경에서 구속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84구절
구원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530구절이라고 합니다.
* 자료 출처  -  다국어 성경 인터넷 검색

구속과 구원이란 용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그 의미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속(救贖)을 영어로 리뎀션(redemption)
구원(救援)을 영어로 샐베이션(salvation)

ἀπολύτρω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629

1. 풀어 놓음.  2.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나 제한에서 해방됨.  3. 구속 
Pronunciation [ apŏlütrō- sis ]
 Etymology  / 575와 3083의 합성어에서 유래 [원래 노예나 포로를 다시 사거나 혹은 속물을 받고 자유를 줌]
  • 1.  [문자적으로] 풀어 놓음, 해방, 히11:35.
  • 2.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나 제한에서 해방됨.
    • a.  구속(救贖), 구속받은 상태, 눅21: 28, 롬3:24, 8:23, 엡1:7, 4:30, 골1:14, 히9:15.
    • b.  구속(救贖)자[그리스도], 고전1:30.
  • 관련 성경  /  속량(눅 21:28, 롬 3:24, 엡 1:7, 14, 히 9:15), 구원함(고전 1:30), 풀려남(히 11:35).


구속


τήρησις, εως, ἡ 5084 [tērēsis]

  • 1.

    감금, 구속.

  • 2.

    감옥, 행4:3, 5:18.

  • 3.

    준행, 준수, 고전7:1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구속, 속량, 해방, 눅1:68, 2:38, 히9:12.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올가미, 차꼬, 속박, 구속, 막7:35, 눅13:16. [복수] 눅8:29, 행16:26, 22:30, 23:29, 26:29,31, 빌1:7,13,14,17, 골4:18, 딤후2:9, 몬1:10, 13, 유1:6.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구속(救贖), 구속받은 상태, 눅21: 28, 롬3:24, 8:23, 엡1:7, 4:30, 골1:14, 히9:15.

  • 2.

    구속(救贖)자[그리스도], 고전1:30.

  • 3.

    [문자적으로] 풀어 놓음, 해방, 히11:3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λυτρόω 3084 [lütrŏō]
  • 1.

    속전을 내고 놓아 주다, 구속하다, 속량하다, 벧전1:18.

  • 2.

    놓아주다, 구출하다, 구원하다, 눅24: 21, 딛2:14.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ἐξαγοράζω 1805 [ĕxagŏrazō]
  • 1.

    사다, 구속하다, 속량하다, 구하여 내다, 갈4:5.

  • 2.

    [중간태] 엡5:16, 골4: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φρουρέω 5432 [phrŏurĕō]
  • 1.

    감금하다, 가두다, 구속하다, 갈3:23.

  • 2.

    망보다, 수호하다, 고후11:32.

  • 3.

    보호하다, 지키다, 빌4:7, 벧전1: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διά 1223 [dia]
  • 1.

    ὁ ἐλθὼν δι᾿ ὔδατος καὶ αἵματος: 요일5:6 - 이는 세례 받으실 때 물을 통과하시고, 죽으실 때 피를 통과하셨다는 뜻이나 세례의 물과 구속의 피를 갖고 오셨다는 뜻도...

  • 2.

    ~을 통하여.

  • 3.

    [속격지배]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συγκλείω 4788 [süngklĕiō]
  • 1.

    [상징적으로] 구속하다, 감금하다, 옥에 가두다, 롬11:32, 갈3:22,23.

  • 2.

    함께 닫아 버리다, 둘러막다, 둘러싸다.

  • 3.

    [문자적으로] 눅5:6.


σωτηρία, ας, ἡ Storng number4991
1.

구원

2.

눅1:71

3.

눅1:69,77

Pronunciation [ sōtēria ]
  • 1.
    구원, 구출, 보존.
    • a.
      [위함이나 임박한 죽음에서의 구출] 눅1:71, 행7:25, 히11:7.
    • b.
      구원, 눅1:69,77, 행13:26, 롬1:16, 10:1,10, 고후7:10, 빌1:28, 2:12, 살전5: 8,9, 히5:9.

Reference

Grammar Explanation

4990의 파생어의 여성형

Related Words

  • 문법설명
    4990의 파생어의 여성형
    관련 성경
    구원(눅1:69, 롬1:16, 히2:3), 구원하여 주시는 것(눅1:71, 행7:25, 히11:7).



구원

σωτηρία, ας, ἡ 4991 [sōtēria]

  • 1.

    구원, 구출, 보존.

  • 2.

    구원, 눅1:69,77, 행13:26, 롬1:16, 10:1,10, 고후7:10, 빌1:28, 2:12, 살전5: 8,9, 히5:9.

  • 3.

    [위함이나 임박한 죽음에서의 구출] 눅1:71, 행7:25, 히11:7.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보호, 보전, 구원, 히10:39.

  • 2.

    얻는 것, 살전5:9, 살후2:14.

  • 3.

    소유, 재산, 엡1:14, 벧전2: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휴식, 구원, 풀림, 쉼, 안심, 고후2:13, 7:5, 8:13, 살후1:7.

  • 2.

    늦춤, 풀림.

  • 3.

    [문자적으로] 감금에서 풀림, 행24:23.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1.

    구원, 갈3:18, 엡1:14, 5:5, 골3:24, 히9:15, 벧전1:4.

  • 2.

    기업, 유산, 상속물, 마21:38, 막12:7, 눅20:14.

  • 3.

    소유, 재산, 행7:5, 히11:8.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σώζώ 4982 [sōzō]
  •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 2.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 3.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διασώζω 1295 [diasōzō]
  • 1.

    안전하게 살려내다, 구원하다, 구출하다, 행23:24, 27:43, 28:4, 벧전3:20.

  • 2.

    [수동] 치료되다, 마14:36. [능동] 눅 7:3.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σωτήριος, ον 4992 [sōtēriŏn]
  • 4991과 동일어의 중성: 구원하는, 구출하는, 구원을 가져오는, 눅3:6.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ῥύομαι 4506 [rhüŏmai]
  • 구원하다, 구출하다, 건져내다, 보존 하다, 마6:13, 27:43, 눅1:74, 11:4, 롬7:24, 11:26, 벧후2:9, 딤후4:18.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συντηρέω 4933 [süntērĕō]
  • 1.

    [수동] 구원을 받다, 보전되다, 마9:17, 눅5:38.

  • 2.

    보호하다, 방어하다, 막6:20.

  • 3.

    간직하다, 눅2:19.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λυτρόω 3084 [lütrŏō]
  • 1.

    놓아주다, 구출하다, 구원하다, 눅24: 21, 딛2:14.

  • 2.

    속전을 내고 놓아 주다, 구속하다, 속량하다, 벧전1:18.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 구원하다

    Gattaca | 2022-05-08
오픈사전
εἰ 1487 [ĕi]
  • 1.

    의문불변사 1) [직접의문문과 함께] ~옳으니이까?, 마12:10, 19:3, 막10:2, 행21:37, 22: 25.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 눅13:23, 22:49, 행1:6, 7:1, 19:2.

  • 2.

    [현재직설법과 함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26:63, 저를 구원하는지, 마27:49, 막15:36, [참조] 눅14:31, 고후13:5, 요일4:1. [미래직설법과 함께]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막3:2, 눅6:7. 남편을 구원할는지, ...

  • 3.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 ~이라면.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ἔχω 2192 [ĕchō]
  • 1.

    [내적인 관계에 대하여] τὰ ἐχό- μενα σωτηρίας: 구원에 관한 것들, 히6:9.

  • 2.

    [능동태, 타동사]

  • 3.

    가지다, 소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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ἐγείρω 1453 [ĕgĕirō]
  • 1.

    세우다, 일으키다, 다시 세우다. ㉠ [성전을] 요2:19,20. ㉡ [구원의 뿔을] 눅1:69.

  • 2.

    [능동]

  • 3.

    [타동사] 깨우다,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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ἡμέρα, ας, ἡ 2250 [hēmĕra]
  • 1.

    [단수로] ἐν τ. ἡμέρᾳ τ. πονηρᾷ: 악한 날에, 엡6:13, ἐν ἡμ. σωτηρίας: 구원의 때에, 고후6:2, 이집트로부터 구출되던 때, 히8:9.

  • 2.

    날.

  • 3.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자연적인] 날.



예를 들면 어느 노예가 노예시장에 팔려나왔습니다.
그 노예를 불쌍하게 생각한 어느 사람이 노예를 값을 지불한 후에 노예에게 당신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노예가 나는 자유인이다 라고 외치며 자유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속이란 값을 지불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Salvation)과 구속(Redemption)의 관계 : 성경적 분석

1. 구원과 구속의 관계 및 성경적 차이점

'구원'과 '구속'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지만, 성경은 그 역할과 초점을 달리하여 제시함.

  • 구속은 구원의 수단이자 근거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 구원을 얻음) 

    • 구속(Redemption)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적이고 기초적인 행위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구속)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됨.
    • 히브리서 9:12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redemption)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피로 인한 속죄(구속)가 구원의 근거가 됨을 분명히 함.
    • 골로새서 1:13-14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여, 속량(redemption)을 통해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구원의 한 측면)을 받았음을 보여줌.

  • 구원은 구속의 결과:
    • 구원(Salvation)은 구속을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상태와 모든 유익을 의미함. 
      1) 죄 사함, 2) 의롭다 함, 3) 하나님과의 화목, 4) 성화, 5)영생, 6) 장차 올 영광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임.

    • 로마서 5:9-10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salvation)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salvation)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구속의 근거)을 통해 화목하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됨을 설명함.
  • 구속은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값 지불' 행위 또는 '해방의 대가'이며,
  • 구원은 그 '값 지불'을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자유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임
  • 마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주인이 값을 지불하는 행위가 '구속(redemption)'이고, 그 결과로 노예가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구원(salvation)'인 것과 같음. 성경은 이 두 개념을 동시에 사용하면서도, 구속은 구원의 필수적인 토대와 방법임을 분명히 드러냄.

구속(救贖. redemption)과 구원(救援. salvation) 

구속(Redemptio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죄의 빚을 갚아 우리를 마귀의 속박에서 사내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법적, 근원적 행위를 말합니다.

구원(Salvation)은 이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생을 얻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응답'이자 '결과'를 의미하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 (Redemption, 救贖)
  • 의미 : '값을 치르고 사서 되찾는다'는 뜻으로, 노예 상태의 사람을 값을 주고 해방시키는 행위.
  • 성경적 의미 :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죄의 종 된 인류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행위.
  • 특징 :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법리적인 측면을 강조 (예: 죄의 빚 청산). 
구원 (Salvation, 救援)
  • 의미 : 죄와 사망, 고난으로부터 보호받고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 것.
  • 성경적 의미 :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 (죄 사함, 칭의, 화목, 성화, 영화 포함).
  • 특징 :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응답)이 필요하며, 유기적인(살아있는) 측면을 강조. 
구속과 구원의 관계
  • 하나님의 선물 : 구속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선물이며, 구원은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결과.
  • 분리될 수 없는 과정 : 구속이 없이는 구원이 없고, 구속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
  • 결론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구속)으로 구원의 길은 열렸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시 구절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믿음으로 얻는 구원


구속 (拘束, Bondage/Restraint)
  • 일반적 의미: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하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물리적인 구속(감금, 포박)뿐만 아니라, 법적인 제약, 사회적 관습, 심리적 압박, 경제적 빈곤 등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 종교적 의미: 인간이 죄, 악업(惡業), 무지, 욕망 또는 죽음과 같은 영적 한계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속박으로 간주됩니다. 
구원 (救援, Salvation/Redemption)
  • 일반적 의미: 위험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출하거나 구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난 구호, 위기 탈출 등을 포함합니다.
  • 종교적 의미: 구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영원한 생명, 깨달음, 또는 신과의 화합에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영생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계 및 대조
이 두 개념은 문제점과 해결책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구속이 인간이 처한 비극적이고 제한적인 상태를 나타낸다면, 구원은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적인 해방을 제시합니다.
요약하자면, 구속은 묶여 있는 상태이고, 구원은 그 묶임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구속(Redemption)과 구원(Salvation)

구속(Redemption)구원(Salvation)은 성경과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와 초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개념의 같은 점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은혜로운 사역

  • 구속과 구원 모두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역을 나타낸다.
  • 인간의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과 구원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3:16, 로마서 3:24)

죄와의 관련성

  • 두 개념 모두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 구속은 죄로부터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해방을 의미하고, 구원은 죄와 그 결과인 심판으로부터의 전반적 구조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성됨

  • 구속은 예수님이 피로 값을 치르심으로 이루어졌고(에베소서 1:7), 구원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전해졌다. (로마서 10:9-10)

인간의 삶에 변화를 가져옴

  • 구속과 구원은 모두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며, 죄와 심판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한다.
  •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을 갖게 한다. (고린도후서 5:17)

차이점

의미와 초점

구속 : 구속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치러진 대가를 강조한다.
헬라어로는 "뤼트로시스(λύτρωσις)"로, 본래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구속의 초점은 예수님의 희생(속죄)과 그 대가이다. (마태복음 20:28)

구원 :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구출되는 상태를 강조하며,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전반적인 구조와 회복을 의미한다. 
구원의 초점은 결과적 상태, 즉 영생, 하나님과의 화목, 죄와 심판에서의 자유이다. (에베소서 2:8-9)

시간적 관점

구속 : 구속은 과거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된 사역이다.
(골로새서 1:14)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구원: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받았고(칭의),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며(성화),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기대한다(영화). (빌립보서 2:12)

적용의 범위

  • 구속: 구속은 하나님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이루신 보편적인 사역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값을 치렀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적용된다. (요한일서 2:2)
  • 구원: 구원은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결과이다. (에베소서 2:8)

행위와 목적의 관계

  • 구속은 죄값을 치르는 행위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 구원은 구속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생을 의미한다.

구속의 제한성과 구원의 포괄성

  • 구속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로 한정되지만, 구원은 죄뿐만 아니라 심판, 사망, 멸망으로부터의 총체적인 구조를 포함한다.

요약

  •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을 말하며,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구원은 구속을 통해 죄와 그 결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총체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 구속은 구원의 기초이며, 구원은 구속의 결과이다.
  • 두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연결되어 있으며, 믿음을 통해 개인의 삶에 적용된다.

따라서 구속과 구원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안에서 긴밀히 연결된 필수적인 두 측면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두 개념을 묵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와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

성경에 구속이라는 단어가 약 80회 나오고, 구원이란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두 단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구원과 구속의 차이점을 알아야 성경이 해석된다.모르면 신앙생활 하는데 큰 혼란과 혼선이 빚어진다.

많은 교인들이 잘못 알고있는 구속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정확히 깨닫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교인들이 구속을 구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그 결과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와 교인들이 타락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 받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구속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를 회개할 때 예수 피로 죄를 씻는 것이 구속받는 것이다.

구속된 자가 죄를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옵니다.하나님이 그의 삶을 일일 체크하고 주관하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인들이 천국을 향해 가는 과정이 구속된 삶인 것이다.

한 번 구속을 받은 사람이 계속 불순종하고, 징계해도 회개치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구원받는 자가 없다.

성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고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잘 믿다가 타락하면 그의 구속받음은 무효다.

그러나 회개하면 죄사함이 회복된다. 그의 구속받음은 다시 유효해진다.
질병 치료는 육체의 구원이지 영혼 구원이 아니다.
 
순종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 때 그는 구원의 길을 정확히 가는 것이다.

구원의 길을 끝까지 갔을 때 그의 구원이 이뤄지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중간에 회개의 삶을 포기해 버리면 지옥가는 것이다.

구속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다는 뜻이다.

구속받은 자는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죄를 지을 때 주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한다.
이런 주님을 체험하고도 욕심 때문에 계속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을 때,
징계는 심해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버림받는 것이다.
 
한 번 구속은 절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죄에서 구속된 자가 회개의 삶을 끝짜지 살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죄에서 구속받는 순간, 그때부터 구원받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성경을 통해 모두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면 아무런 공로없이 죄를 용서받는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놓여진다.이것이 구속이다.
금과 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그는 천국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받은 삶이다.
 
세상 철학이나, 어떤 종교가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가야할 길을 제정하시고,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가 하신다.

그 창조주가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천하에 다른 구원자 없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 피로 구속받고 천국 길을 가는 것을 세상일에 비유한다면,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국가가 제정한 교정생활이 시작된다.
국가는 먼저 그를 세상과 분리시킨다.
피해 가족이 너무 분노하여 그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가 구약시대 도피성 제도이다.
둘이 나무하다 도끼 자루가 빠져 앞에 있는 사람을 쳐서 죽였을 때, 신속히 도피성으로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 가족들에게 죽는 것이다.
 
교도소에 교정생활 있다.
죄수들에게 무조건 밥만 먹이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형기을 마치고 세상에 복귀했을 때, 그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그를 지도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순응하는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계속 사고치고 말썽부리면, 그는 특별 공간에 가두어진다.
 
이런 교도소 행정이 예수믿고 구속받은 자의 삶과 유사성이 있다.
물론 전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일부 유사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항상 훈련받는데,
이것이 죄수들의 훈련에 비유된다.

주님은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를 주님을 닮도록 훈련시킵니다.
남을 용서하는 훈련, 이웃과 화목해지는 훈련, 선하게 사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계속 가르칩니다. 주님 뜻에 순응하면 천국에 들어간다.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으면, 징계받는다, 징계받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고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계속되는 극한의 징계에도 변화되지 못하면 결국 버림받는 것이다.
이런 자가 누구인가? 평생 신앙생활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다.

예수 피로 죄를 구속받는 것은 결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 구원받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베드로후서 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예수님 피로 구속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고, 예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뭔가? 육신의 정욕과 교만과 자기 자랑이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예수피로 구속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거룩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거룩해지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예수 마음을 닮기 위해 평생 동안 받는다.
세상에 완벽한 자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교인은 예수님 밖에 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얼마 후에 원가지에서 잘리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다시 붙어야 된다.
훈련이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라,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이 끈을 놓치면 교회 안에서 낙오자 되는 것이다,
평생 교회만 다니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9-10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실족이 무엇인가? 길가다 넘어지는 것이다.옛 죄를 깨끗게 해주신 것을 잊는다. 구속해 주신 것을 잊는 것이다.
예수믿으며 세상을 더 사랑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해주신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세게 해야한다.

구원의 길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이 순종과 회개이다.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예수 피의 구속을 무효화시킨다.

죄에서 한 번 구속으로 천국에 못들어간다.가다가 이탈하면 불신자와 같다.
 
구속과 구원을 혼돈하지 말라.
회개의 삶을 중지하면 구원의 길에서 실족하는 것이다.교회만 다니고, 순종을 버리는 것이 지옥가는 길이다.

한 번의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 아니다.
항상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구속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예수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 가기 원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선을 추구하라, 자기의 부족함을 매일 회개하라.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다.
사탄이 순종을 방해한다, 끝까지 사탄 방해를 이겨야 한다.

예수피로 죄를 씻은 자,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확실하게 천국 길을 가라.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구원을 얻을 때까지 회개의 삶을 살라.
 
항상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라. 이는 회개하는 방법밖에 없다.
거짓된 사랑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라.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인간 자신은 이렇게 할 능력이 없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한 번 회개하고 구속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구속받은 자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
그 결과가 구원이다.

구속받은 자는 천국을 향해 가는 자이다. 가다가 그치면 천국 길에서 탈락한다.하나님의 은사와 능력과 예언은 구속받고 구원받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은사 능력 행하고 교만해지면, 그것 때문에 더 빨리 지옥에 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1-2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구원은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피로 구속받은자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때, 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시간을 두고 점점 자라는 것이다.

계속 순종할 때 구원이 자란다. 이는 자신이 천국 문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이뤄졌다는 표현이 없다.
육체 구원, 치료는 세상에서 이뤄질 때 많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항상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세상을 떠날 때 영혼 구원을 받기 때이다.
 
예수피로 구속받은 자는 영혼 구원에 이르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


악하고 독한 말을 하지 말라.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을 속이지 말라.
자존심 상한다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갓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죄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신령한 젖을 반드시 사모해야 한다.

신령한 젖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애쓰는 것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다.
 
구원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곧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예수님으로 오신 것을 믿는다, 성령이 예수님의 영인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이고,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창조주를 믿는 자는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가 신령한 젖을 먹고 믿음이 자란다.
천국 들어갈 때까지 믿음이 자라야 한다.
 
사랑 실천과 관계없는 교리는 헛된 것이다.많은 자들이 인간이 만든 교리를 사모하고 따라간다.
오염된 젖을 먹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영혼이 썩어버린다.

인간 교리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피로 한 번만 구속받으면 천국에 간다고 인간 교리가 주장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 맥락에 전혀 맞지 않다.
 
나기 전에 선택받아서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사탄이 만든 것이다.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누구든지 예수믿고 회개하고 순종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신령한 젖이다.
머리로만 알지 말고, 주님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수록 천국 길이 열리고 선명해진다.
 

욥기 19:25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이 극한 훈련을 받고 깨달았다.
구약 때의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 때에 구속자 예수님으로 오신다는 것을 그가 알게되었다. 물론 주님이 그를 통해 계시하신 것이다.
구약 때는 양의 피를 통해서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셨다.
그러나 신약 때는 예수님의 피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의 피 외에는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없다.

구속받은 자들의 삶이 어떠 해야 된다는 것을 명백히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한다,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을 때,
주님이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부정한 돼지 피로 제사드렸다고 주님이 호통하셨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 불순종하고 회개없이 예배를 드리면,
예수피를 헛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피를 짓밟고 헛되게 만들었다” 하신 것입니다.
 

시편 78편 40-42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갔다, 애굽 백성들을 치시매,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그들이 하나님을 수없이 시험하고 말씀에 거역했습니다.
불순종하면서 죄를 회개할 줄 몰랐다.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너무나 격노케 만들었다.
주님이 견딜 수 없어 대부분을 멸망시켰습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입니다.
그런데 구속받으면 천국에 간다니 성경에 맞지 않는다.
 
애굽의 압제에서 구속하신 은혜를 잊어버렸다.사탄의 압제에서 구속하신 것을 잊은 것이다.

너희가 이런 짓을 한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생각해 보라!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주님이 멸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런데도, 한 번 구속되면 무조건 천국에 가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천국으로 전진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멸망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 74편 1-2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주여, 옛적부터 구속하사 주님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주님이 지금까지 치시던 양을 버리시나이까?
주님의 기업으로 삼으신 이 백성을 버리지 마옵소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므로 주님께 버려질 때입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번 구속받으면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회개치 않으면 다 버려진다.
패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다윗이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한 번 구속이 이런 기도 필요 없다.
“저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주님은 결국 모두를 천국에 보낼 것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하고 말았을 것입니다.주님이여 그동한 함께 거하셨던 시온산을 기억하소서
그 시온산은 예루살렘을 상징했고, 그 예루살렘은 오늘날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타락하여 목사가 길을 잃고 헤매면 모두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다윗이 깨어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 전체가 멸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야 547-8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 교리따라 살던 자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이 크게 긍휼을 베푸십니다.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징계받는다.
그러나 돌아오면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회개할 때 예수의 피가 그의 죄를 씻고 다시 인도하십니다.이런 인도하심이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거역할 때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십니다.그러나 회개할 때는 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이것이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4: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죄악이 빼빽한 구름처럼 가리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의심의 구름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진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천국 길이 선명해진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해주셨기 때문에 이런 생명 길이 열리는 것이다.
구속하심을 받았을지라도, 다시 죄악에 빠지고 회개없이 살 때,
의심이 들어오고 천국 소망이 사라진다.

교회는 다니지만 주님이 멀어지고 천국이 멀어진다.
 
구속받은 자가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저주와 멸망의 늪에 다시 빠진다.유일한 해결책은 다시 순종하는 것 밖에 없다.

답답하다고 예언자 은사자 찾으면, 더욱 미궁에 빠진다.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징계가 왔다.

풀기 위해서는 다시 회개하고 순종해야 한다.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안 된다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라.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다.십계명을 기준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악한 생활을 버려라.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남의 가슴을 도려내는 독한 말을 금지하라.

음란한 생각을 버려라. 불의의 소득을 탐하지 말라.주님 뜻을 거역하면서 교회만 열심히 다니는 것은 구속받은 자의 길이 아니다. 주님의 저주가 더 심해진다.
고통과 저주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요엘 2장 12-13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고통 속에 있을 때 이제라도 금식하며 애통하며 회개하라.
남 보라고 옷을찟지 말고, 너의 완악해진 마음을 찢어라.

형식적인 신앙생활 버려라.
구속받은 자들이 순종할 때, 주님의 재앙이 그치리라.
한 번의 구속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기 때문에 타락이 오고, 타락하기 때문에 멸망이 오는 것이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너무나 크십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동안에 회개하는 자를 다 받아주십니다.

죄를 지었을 때 때렸지만 회개할 때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자들이 왜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가?
재앙이 쏟아지는데도 왜 인간 교리를 버리지 못하는가?
 

말라기 3장 7-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주님이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더니,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돌아가오리까?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도다. 그것이 십일조와 헌물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극도로 가난한 자들은 헌금 드릴 여유가 없다. 이런 사람은 생활비를 교회서 지원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 전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주님 주신 축복으로 자기 배만 불리면 저주와 고통이 온다.

아직 재산이 많을지라도 그의 심신의 피곤함과 닫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말라기 3장 13-15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예수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잘 사니까 이렇게 말한다.

완악한 말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것은 헛된 것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고생스선 것이지, 즐거운 것이 아니다. 자기 죄를 슬프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인간 교리에 빠진자들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신경쓰는 자들이다.

이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십니까? 거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탄이 그들을 지배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창성해 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칼빈주의자들이고. 천주교 교리고, 이단 종교들이다.
회개할 기간이 끝나면 즉시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다.
 

스가랴 1장 3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조상들의 타락한 삶을 본받지 말라. 악한 행실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
주님이 이렇게 외치시지만 주님께 돌아오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외치시는 말씀인가? 예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거짓된 교리를 만들었다.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 순순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오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악한 행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행동입니다.주님께 구속받은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효과가 언제 나타나는가?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순종할 때이다.

구속받은 자가 순종할 때 평강 가운데 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레미야 24장 7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은 항상 성경을 읽지만 그러나 항상 헛된 교리를 만들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구속받고 교회만 다니고,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자이다.

한 번 죄에서 구속받았다고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죽는 날까지 회개하며 순종하기를 힘쓰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사야 1장 27-28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시온은 예루살렘이고,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공평함으로 구속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귀정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가 누구인가?

의롭게 살기 위해서, 예수 피로 구속받는 자들이다.그러나 교회에 돌아와서 패역하는 자, 다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는 패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 구속받는 것이다.이 구속은 구원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평과 의를 이루며 살 때, 그 결과가 구원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해 주신 이유는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패역한 삶을 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결국 버림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14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서, 그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밖으로 나가면 우리의 구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밖으로 나갔다는 뜻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이다.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헛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사랑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조금이라도 사랑의 질서를 깨뜨렸을 때, 즉시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탄이 그 틈을 타서 그의 천국 길을 망가뜨린다.
그의 욕심을 더 강하게 하여 주님을 떠나게 만든다.

교회 직분을 가지고, 더 욕심부리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간음을 한다.
이런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사탄의 놀이터로 변한 것이다.
 

이사야 51:10바다를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들고 건너게 하신 분이 어찌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겠는가? 이스라엘을 사탄의 손에서 구출하시고 구속해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에 나와서 주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항상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주님의 보호가 그들을 떠났고, 고통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적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다급해진 모세가 손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이 그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위기가 올 때 먼저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구속된 자들이 회개와 순종을 중단할 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때 회개치 않으면 멸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양의 피로 구속받고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 때 모세가 결사적인 기도를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았다.

한 번의 구속은 결코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항상 구속받은 자 답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장 2-5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짐승의 피를 통해서 구속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구속과 은혜를 받았던 자들이 타락하기 때문에 멸망되었다.
 
오늘날도 예수 피로 구속받고, 죽을병에서 치료받고, 많은 문제해결을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되는 것이다.

어떻게 몇 번 죄에서 구속받은 것이 구원받은 것이 되는가?
구속은 세상에 살면서 회개할 때 받는 것이고,
영원한 구원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 받는 것이다.
 
몇 번 죄에서 구속받은 경험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렇게 착각하는 자들이 칼빈주의자들이다.

처음 교회 나오는 순간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혀 성경에 맞지 않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어떻게 순종하려고 노력하겠는가?
하나님의 일을 귀찮게 여기고, 오직 세상 것을 얻기위해 달려갈 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6-7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구속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의 거울됩니다.
거울은 사람이 행동하는 그 대로를 나타나게 합니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구속받은 교인들이 불순종하고 멸망하는 장면을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우상숭배하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오늘날도 우상숭배하면 지옥가는 것이다.돌부처 섬기는 것만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는가?아니다성경은 탐심가지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교회 다니면서 돌부처 앞에 절하는 자가 어디있는가?그러나 세상 것을 탐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다.

하나님보다 세상 쾌락과 명예와 돈을 더 사랑하는가? 자존심 버리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지는 죄이다.
 

고린도전서 10장 7-8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구속받은 자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삼천명이 죽었다.

우리도 간음하지 말자. 신약에서는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 행위다.
동성애는 남녀간의 간음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교회가 너무 타락하니, 동성애를 두둔한다..
 

마태복음 5: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tv, 인터넷에 음란물이 넘친다.
오래 보면 저절로 간음자가 된다. 저절로 음욕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세대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관리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음란의 홍수에 떠내려간다.

모든 교인들이 그렇기 때문에 나도 괜찮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지 말라.
회개치 않는 자는 모두가 심판을 받는다.

노아의 때를 생각해 보라, 세계에 수억의 인구가 살았지만 오직 8명, 회개하는 노아의 가족들만 물에서 구원을 받았다.
 
남이 지옥에 간다고 나도 가는가?
이런 자는 너무나 어리석은 자다.
지옥은 견딜만한 곳이 아니다.


어떤 권사님은 지옥 불이 던져졌는데,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기 눈알을 뽑아버렸다. 눈을 뽚는다고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 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9-10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양의 피로 구속받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자들이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려죽었다.

예수피로 죄를 씻음 받은 자는 구속받은 자이다. 그러나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면 영적인 뱀인 귀신들에게 죽는 것이다.

천국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행활하면서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을 탓하는 것은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멸망을 보면서 우리는 멸망하지 않아야 된다.

인간 설교는 교회에 헌금만 많이 하고, 주일만 잘 지키면 천국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구속받은 후에 멸망했던 것을 잊지 말라.이 말씀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한 사건을 기록하였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저들의 멸망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죄에서 한 번 구속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순종하라.

구속받은 자는 끝까지 순종하고 회개해야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2-13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만하면 됬다 하는 순간에 그는 넘어진 것이다.온전해진 자는 하나도 없다. 항상 부복한 가운데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자신이 완벽하다고 하는가? 거짓말하기 때문에 사탄이 합법적 들어올 통로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훈련받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주님이 허락하십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징계하실 때, 원망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라.
훈련받기 싫어하고, 회개하기 싫어하는 자는 버림받는다.
 

고린도전서 10장 20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하나님 백성이 죽은 조상을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아니고 귀신이 받는 예배이다.
부모가 천국에 갔던 지옥에 갔던 제삿날 올 수 없다.

죽은 자를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은 모두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 된다.
효도는 부모가 살았을 때 하라. 죽은 후에 하는 것은 가짜다.
 

시편 106편 10-12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죽이려고 무장군대가 추격하였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그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셨다.군인들이 뒤 따라오다가 홍해에 수장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하나님이 원수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그러나 구속받은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시편 106편 13-15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미구에,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망각했다.
그들이 욕심부렸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애굽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설마 내가 불순종한다고 주님이 나를 버리겠는가? ”

구속받은 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세상 욕심을 이루며 살았다.

지금 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들은 불종하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만 주님께 달라고 요구했다.
주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파리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 열심히 기도하여, 물질 축복받고, 병고치고, 은사 능력받고, 예언하는 자들의 실상이 어떤가?

세상 것들을 풍성히 받지만,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기쁨과 평안이 없고, 천국 소망이 없고, 우울해지고, 그 영혼이 파리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 축복에 목마르지 말고, 천국 길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 106편 16-18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




자기 명예와 욕심 때문에 간부들이 모세를 질투하고 대적했다.
그 때 불이 나타나 그들을 살라버렸습니다.

이들도 애굽에서 나올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홍해를 건널 때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여 주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구속받은 후에 불순종하니까 멸망당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2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불순종하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결렬되게 만들었다.
모든 약속은 쌍방이 지키는 것이다. 한 쪽이 지키지 않으면 그 약속은 자동 결렬되는 것이다.

약속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 모세가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한 번만 저들을 용서해주세요.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에, 주님이 노를 멈쳤습니다. 한 두 번은 주님의 종이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진노를 멈추십니다. 그러나 계속 거역한다면 주님은 심판을 멈추지 않습니다.
 

시편 106편 24-27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스라엘이 낙토를 멸시했다, 낙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을 갖지않고 장막 안에서 원망했다.

오늘날 천국의 소망을 갖지 않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원망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맹세하기를 너희는 광야에서 엎드러지리라.

광야 길 가면서 멸망하는 것은 신앙생활하면서 멸망하는 것이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왜 이렇게 멸망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고, 남을 미워하며 ,자기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 주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교인들이 많다.
구속함을 받은 자가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다 멸망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29-29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오늘날 교회서 가장 큰 문제는 죽은자를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는 것이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죽은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얻어먹고 죽었다.
주님이 그들에게 노를 폭발하셨습니다.

재앙이 쏟아지고 극한 유행병이 온 백성에게 돌았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도 죽은 조상을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고 제사지낸 음식들을 나눠먹는가?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 깨닫고 순종해야 한다.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이 별개인가? 
김세윤 박사의 구원론에 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가 택자의 죄를 위해 ‘단 한 번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그의 원죄(original sin, 原罪)’ 그리고 ‘그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자범죄(actual sin, 自犯罪)’를 다 구속(救贖)했으며, 그 결과 그가 구원(救援)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구속(redemption, 救贖)’과 ‘구원(salvation, 救援)’을 연속선상에 두지 않고, 전혀 별개로 구분지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다고 절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구속을 받아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속받은 자’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그가 삶을 다 산 후에라야 결정된다고 한다.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ism)’을 비롯해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 Church)’ 등이 그렇게 가르친다(한국의 김세윤 박사 역시 이들의 견해를 추종하는 듯하다).

안식교 창시자 ‘엘렌 지 화잇(Ellen G. White)’의 ‘조사 심판론(調査審判論)’은 이들의 주장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의 배경엔 두 가지 논거가 있다.

◈ ‘구속’과 ‘구원’을 별개로 봄

그들은 ‘구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이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인 동시에 인간의 영역’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 ‘구속’을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속’도 ‘구원’도 다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또 그리스도가 택자를 ‘구속’만 해놓고 ‘구원’은 인간에게 떠넘기질 않으며, 구속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신다고 한다. 다음 구절은 ‘구속’은 물론 ‘구원’도 ‘사람의 일’이 아닌 ‘그리스도의 일’로 규정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구속, 엡 1:7)’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0-10).”

성경이 하나님을 ‘구속자(救贖者)’인 동시에 ‘구원자(救援者)’로 일컫는 것 역시 ‘구속’과 ‘구원’을 동일시 한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사 60:16).”

실제로 성경은 어휘상 ‘구속’과 ‘구원’을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영어번역에서도 구속(redemption, 救贖)을 구원(salvation, 救援)으로, ‘구원(salvation, 救援)을 구속(redemption, 救贖)으로 서로 혼용한다.

물론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에선 논리상 ‘구속’이 앞에 위치하고 ‘구원’이 마지막에 존치되지만, 실제로 둘은 동일선상 위에 있으며 ‘시간차(時間差)’가 없다. 이는 ‘구속’의 효과가 최종의 ‘구원’에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값으로 사서 소유한다’는 ‘구속(救贖)’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구원’개념이 함의 돼 있다.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는 그의 절대적인 주권과 보호아래 있어 그의 구원이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딤후 4:18).”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함

그들은 ‘구원의 확신(confidence of salvation)’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한다. 그에 대한 그들의 논거는 ‘구원’은 인생 최후에 결정되는데, ‘구속’만 받아놓고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구원'을 미리 예단할 순 없다는 것이다.

설사 누가 이제껏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만큼 완전한 삶을 살았더라도, 아직 그에겐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남아 있으며, 그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예컨대 그가 어떤 심대한 도덕적인 타락을 할지 혹은 배교하고 하나님을 떠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가변적인 미증유(未曾有)의 미래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이렇게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그것들이 마치 단절된 불연속선(Iine of discontinuity, 不連續線)상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그들의 논거가 비과학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시간이란 그렇게 무우 자르듯 토막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계 초침이 ‘째깍’하는 순간 ‘현재’는 이미 ‘과거’로 넘겨지고, 과거로 넘겨진 ‘현재의 공석(空席)’에 ‘미래’가 곧 바로 들어와 또아리를 튼다.

이런 점에서 ‘현재 없는 미래만의 미래, 미래 없는 현재만의 현재는 없다’고 함이 옳으며,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토막내 그의 신앙을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지성적이고 위험하다.

그가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곧바로 현재로 유입될 미래에도 그를 믿을 것을 예단할 수 있다. 아니 ‘구속의 효력(the effect of redemption)’이 그로 하여금 계속 믿음을 견지토록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설사 그에게 일시적인 ‘도덕적 타락과 배교’가 있을지라도 그가 받은 구속과 그의 믿음은 무효화되지 않고 ‘회개와 새 출발’을 가능케 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여전히 견지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한 영원 속에서 성취됐다’는 사실에서 ‘구원의 확신’은 더 ‘설득의 근거’를 갖는다. 자기가 기여한 것이 없는 ‘자신의 원죄’를 소급해 속(贖)할 수 있다면, 아직 맞닥뜨리지 않는 ‘미래의 자범죄’를 앞당겨 속(贖)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오직 자기(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효력이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뜻과 함께 ‘택자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다 속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도 ‘구원’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동시에 다 포함시켰다. “하나님이 그처럼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며 또 건져 주시리라 믿습니다(고후 1:10).”

이는 다만 ‘현세의 환난에서의 구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속사적(救贖事的)인 구원’까지 다 함의한다. 호크마(Chokmah) 주석은 이 구절을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횟수에 제한 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고 해석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원성’에 대한 다음의 한 신학자의 말 역시 적절해 보인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속죄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 뿐이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시간을 느끼고 사는 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이다. 영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영단번에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창세기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 

1. 축복의 원천인 은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물질적이고 영적인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귀한 은혜를 거저 주십니다. 
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의해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이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로 표현됩니다. 
따져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이 땅에 사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빛과 공기와 물 등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실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생명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단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용된 은혜라는 의미의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은총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약 250회나 사용된 ‘헤세드’는 ‘인자하심’이요 ‘은총과 은혜’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70인 역은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긴급히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실 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욥이 심히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셨다고 할 때 ‘친절’의 단어가 곧 ‘헤세드’이고 
또 다윗이 대적에 의해 가난하고 궁핍하고 금식으로 인하여 육체가 수척하실 때 하나님이 ‘헤세드’(인자)를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헨’이 있는데(약 65회 사용) 이는 ‘매력’, 또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그 주된 의미는 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내려주는 ’은총‘으로서 이 은총의 행위를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헤브’가 있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족장들이나 이스라엘의 믿는 자들, 특히 야곱이나 솔로몬 등 개인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로서 학자들은 이 단어를 두고 구속용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5:10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텍함 받은 주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헤브’입니다.

라함’이라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심판을 유보하실 때(신 13:7, 왕하 13:23),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실 때(사 55:7), 이스라엘을 자기 땅으로 회복하실 때(신 30:3, 왕하 13:23)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은혜’ 즉, ‘카리스’라는 단어가 약 155회 정도 등장하는데 생명과 구원 모두가 하나님의 한없는 선하심과 은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모두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쌍히 여기시고 무조건적인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카리스’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버려진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이나 자비로운 인자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로마서 5:17)

무엇보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출현 자체가 가장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이 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임을 시사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그렇다면 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에 관한 은혜입니다. 
지옥에 갈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은혜는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순간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한 끼의 식사 대접이 아닙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한 것은 구원의 밧줄입니다. 
모든 위기에 처한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에게 쓸데없이 적합하지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조롱이요 놀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를 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 즉 당장 위험에서 구출하는 일입니다. 그만큼 사망에 처한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고 망가진 존재로 전락했는지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범죄 한 결과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가야 하는 곳은 지옥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유일한 살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입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감사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하나님의 은혜를 구속의 능력과 동일시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궁극적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자연 만물을 운행하시고 통치하시고 구속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다시 말해,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고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솟아나고 바닷물결이 출렁거리는 것이 죄인의 눈에는 그저 생기는 것 같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소리 같지만 아침에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것도 우리 구원을 위한 은혜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은혜(이사야 63:7 ~ 14)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헤세드)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사 이제 어디 계시냐.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히브리서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 특별은혜가 왜 특별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자면 두 가지 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인간의 안에는 양심이라고 부르는 도덕법을 심어두셨고, 
인간 밖에는 자연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도록 조치했습니다. 
이것을 일반은혜라 부릅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즉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곧바로 거부하거나 왜곡하고(롬 1:18, 21~23, 28)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필요와 지식을 모두 상실한 채 영적인 어둠에 갇혀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는데 이것을 우리는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이 명백히 증언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특별은혜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들을 알아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구원하는 은혜가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존재들에 대해 동일한 은혜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보편구원론자인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같은 이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이전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아담, 에녹, 노아 등)은 오직 일반은혜만을 소유했고 일반계시의 빛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이도 자연의 빛과 그들의 문화 속에 심겨진 모든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와 에녹과 노아 등이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았음을 증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가죽옷의 보호’(창 3:21)를 받았습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뒤에 승천하였고(창 5:24), 
노아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창 6:8). 

이 모든 사례들이 범죄한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증언합니다.

이에 오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 왜 특별한 은혜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별은혜가 왜 특별한가를 알아봅니다.

첫째, 특별은혜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나, 헨, 아헤브, 라함 그리고 헬라어 카리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을 뜻합니다. 
죄인이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거듭나지 않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과 관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사도 바울은 ‘큰 사랑’(아가페)라고 표현했습니다.

“긍휼(엘레오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아가페)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 (파피루스로 된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125년경의 P52가 있고, 현존하는 98개 파피루스 필사본 중 2세기경의 것으로 P90, P98 등이 있고 나머지는 3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았기에 오래된 것은 낡아지고 사본 간에도 차이가 나고 불일치가 나면서 원본과 같은 내용을 복원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성경의 ( )안의 내용은 사본 간의 이런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크레스토테스)으로써 그 은혜(카리스)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7)

둘째, 특별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심으로 특별합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어 구원을 받은 백성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겐 구원을 획득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의지가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숨 쉬며 기동하고 생존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즐기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더 기막힌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업만 쌓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일이 우리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회사를 위한 일이었다면 누가 그를 잘했다고 인정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무자격자에게 은혜를 주시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셋째, 특별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카리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며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넷째, 특별은혜는 구속받은 사람 안에서 특별한 능력으로 나타나기에 특별합니다.

특별은혜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인생을 180도로 바뀌게 합니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 안에 함께 내주하면서 이 인생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죄와 마귀를 섬기던 옛날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조금씩 거룩한 삶의 자리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킵니다. 정말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난 얼굴, 짜증 내던 습관, 고함치고 불친절한 말투와 태도가 바뀌어 집니다. 전에는 조금만 지적하고 찔러도 금새 얼굴이 벌개지고 경직되고 불편해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모든 공격과 반대와 조롱과 지적에도 굴하지 않고 다만 평화롭게, 여유롭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능력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려 애를 씁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2. 두 개의 은혜

신학적으로 이 구원의 은혜는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일반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은혜입니다.

무엇이 ‘일반은혜’입니까?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자연의 변화를 유지하십니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이용하시어 과학 문명을 창달케 하시어 우리가 문명의 생활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노래를 즐겨하고 시를 짓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반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일반은혜가 없다면 이 지구상에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노예가 된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죄인에 대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어 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순종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도록 돕습니다. 
이것을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원죄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 본성은 물려받은 원죄로 인해 부패되고 타락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능력을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로 올 능력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통해 은혜를 얻을 수 없고, 다만 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Admonition and Grace/ 훈계와 은혜). 

그는 이 은혜가 ‘특별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새로운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특별은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역사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2)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신자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심어 주어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사망의 감옥에서 죄인을 자유롭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은혜의 감격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허공에 떠도는 빈말일 뿐일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아무리 강조하고 설명해도 아이는 눈만 껌벅거린 채 무슨 영문인지 모를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우이독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정말로 은혜이고 선물인지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은혜의 몇 가지 특징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은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이 행한 덕있는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따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둘째, 은혜는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로 특정한 사람들을 창세 전에 택하여 두셨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대로 기울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 은혜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옵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이 패역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갈 때 오직 의인 노아만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창세전에 택하시어 그를 통해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8)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은밀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늠하지 못합니다. 시련을 거친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행함이 하나님에 비해 얼마나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무능력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을 누가 놓았느냐”(욥 38:2~6)

그런데 이 엄청난 역사하심이 인간에게는 비밀하게 임하고 알려지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토라지고, 자신의 한 일을 부풀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은 내가 한 일이다’고 소리치며 자랑하는 것이 속성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우주 역사를 창조하시고도 전혀 내색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이러한 은혜의 역사하심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도하는(preventing) 은혜’와 ‘따르는(subsequent) 은혜’, ‘시작하는(operating) 은혜’, ‘협력하는(cooperating) 은혜’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1) 인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심령을 성령으로 변화시키심으로 죄인의 필요를 자비롭게 미리 만족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영적으로 치유하고 새 생명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시59:10)

2) 따르는 은혜란,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죄의 오염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촉진하는 은혜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6)

3) 시작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거듭나지 않은 자의 영혼에 그들의 협조 없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4) 협력하는 은혜란 성령께서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율에 따라 뜻하고 행동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3)

4. 결어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인간 본성의 능력에 대한 유명론과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의 낙관론에 날카롭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불신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며 그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를 배격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감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 이외 가진 것이 없다”고 갈파했습니다.

불신자의 의지는 오직 죄를 짓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성취하고 이룬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3~!4)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하고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에 인간의 선의나 공로 따위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징계를 행할 자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하고 놀랍고 비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숨 쉬고 살고 기동하고 생동하며 희로애락을 가지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은혜는 정말로 부질없는 이 인생, 나무토막 같은 이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인 인생을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구속하심과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심과 영생 복락의 축복하심의 은혜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평생토록 가슴에 담아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액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다섯째, 특별은혜는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므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진짜 은혜는 지옥에 가는 길을 멈추고 천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차량을 안전한 길로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고 했고 구원받은 상태를 “너희가 법 아래(히포 노몬)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히포 카린)에 있음이니라”(롬 6;14)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거하도록 하였습니다(벧전 5: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거대한 담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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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1. 책 제목
헬라어 본문에는 ‘프로스 로마이우스’(προς Ρωμαιους: 로마에 있는)라는 표제어로 되어 있다. 이 책은 바울서신으로 수신자가 로마교인들이었으므로 한글성경에서는 바울서신의 일반적인 제목에 따라 ‘로마서’로 불린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서 저술 당시부터 거의 의심된 바 없다. 본서의 초두에서 기록자 자신이 바울임을 밝힌 것이나(1:1) 초대 교부들의 증언(이레네우스,이그나티우스,로마의 클레멘트 등), 본서에서 사용된 문체나 내용 그리고 성격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유사함을 보아서도 본서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본서의 끝부분의 두 장 곧 15, 16장이 바울의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약 300여 개에 이르는 로마서 사본 등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이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후에 삽입되었다는 중거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약시 바울의 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서는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더디오에 의해 대필되었다(16:22).
한편 기록자 바울은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평원에 위치한 다소에서 출생한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매우 엄격한 바리새파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더 명료하게 설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 특히 로마서는 그러한 바울의 역량이 잘 드러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2) 기록연대
본서의 기록 연대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5:19을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A.D.53-57)을 거의 끝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중 한 곳에서 본서를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울은 여러 번 로마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히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하였는데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로마로 가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곧바로 가지 못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함 연보를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15:22-29). 이 사실의 배경이 되고있는 고후 9장에 기록된 연보 기사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본서는 고린도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마게도냐에서의 바울의 사역과 이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계획이 기록된 행 20장의 기사와 또한 이러한 배경이 반영된 롬 15:22-29를 비교해 볼 때 본서는 바울의 제 5차 예루살렘 방문(A.D.58년) 직전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고린도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겨울을 맞아 항해를 재개하는 이듬해 봄까지 3개월을 기다려야 했으므로(행 20:3) 이 기간 동안 본서를 집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의 기록 시기는 대략 A.D.57년 후반기가 될 것이다.

3) 배경
본서의 일차적인 수신자들이 살았던 당시의 로마에는 사도들에 의해 직접 세워진 교회가 없었다. 단지 전쟁 포로 또는 상업 등의 이유로 로마에 머물게 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들이 모여 자체적으로 교회를 이루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로마는 영국에서 아라비아까지 뻗어있는 대제국의 수도로서 교외 지역의 주민까지 포함해서 약 80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매우 거대한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는 매우 부요했으며 세계적인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으며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잡다한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대내외적인 문제점들에 봉착하기가 쉬웠다.)
먼저 내적인 문제들을 살펴보면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함께 섞여 있었던 그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마찰이다. 여기서 첫째로 유대인 성도들에 문제가 있었다. 즉 유대인 성도들은 비록 예수를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여 보내주신 메시야로 믿긴 했으나 여전히 구약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야만 구원을 얻으며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유대교 육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구원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릇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하게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그릇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과는 반대로 이방인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참 자유가 아닌 방종에 이르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그들은 비록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방 풍습과 생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구원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적용 문제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단히 힘써야 할 것과 속히 썩어질 구습에서 벗어남으로써 성화에 이를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로마 교회는 로마 정부의 세속 권력에 대한 순종 문제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A.D.41-54년) 황제 때에 로마에서 추방되는 박해까지도 겪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 현실적 관심사였다. 이에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윤리적 의무들에 대해 설파함으로써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각각의 삶의 현장 속에서도 성실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훈하였다.

3. 기록 목적
1) 로마 방문을 위한 준비
당시 로마 제국 도처에서 이방 선교 사역에 몰두하던 바울은 자신이 친히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시급한 문제로 인해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로마 교회에 알리며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로마 성도들에게 참 구원의 원리를 미리 편지로 설명함으로써 전에 그들이 들었던 복음에 대한 오해, 곧 구원이 인간의 선생이나 공적 또는 율법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인 양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시정하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구원받음을 설파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했다.

2) 로마 교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바울은 로마 교회가 당면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등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이를 해결함으로써 로마 교회 내의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목하게 하는 것이었다.

4. 주제
1) 복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택된 사도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1:1).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신 복음(1:2)이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1:1; 15:16).
둘째, 복음은 선지자로 말미암아 미리 약속되었다(1:2).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복음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
셋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된 것이다(1:2). 성경에 기록된 복음 약속의 대상,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넷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복음은 말과 글, 사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다.
다섯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이다(1: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이고, 이 의(義)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3:22).
여섯째, 복음은 심판에 관하여 말한다(2:16).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2) 하나님의 의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의’라고 밝힌다(1:17). 하나님의 의란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신자들에게 선물로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결코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이방인은 율법을 받지 못했으나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2:14-15). 그러나 이방인 중에서 양심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9).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를 얻을 수 있다(3:22-24).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만이 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다(10:9).

3) 의에 합당한 삶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얻었다고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6:1-2).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으니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6:11). 그런데 죄를 짓지 않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8:3-4).
아울러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다양한 삶(하나님, 교회, 사회, 세상권세, 이웃) 속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12:1-2).

5. 특징
1)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 드러냄
로마서는은 로마서가 서신(書信)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와 윤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문 같은 인상을 주며,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죄, 진노, 사망, 율법, 의, 칭의, 신앙, 생명, 소망, 할례, 이스라엘 등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2) 가장 길고 자세한 서신
서신의 분량 자체도 가장 길뿐만 아니라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자세히 언급되고 있는 점도 그의 다른 서신과 구별된다. 아울러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함으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6. 구조
1) 도입 : 인사와 간구(1:1-17)
2) 하나님의 의(1:18-11:36)
3) 의인의 삶(12:1-15:14)
4) 종결 : 방문 계획과 문안 인사(15:4-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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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VOKuOYzYtCc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 피터 브뤼겔 1세



사순절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겪은 고난을 감사해하며, 금식과 속죄를 하는 40일을 이야기한다.
재의 수요일에서 부활절까지의 기간이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금식을 하느라, 하루에 한끼 정도를 육류를 제외한 채소 중심으로 먹었고, 13세기 이후에는 생선과 계란정도까지 허용이 되었다고 한다.
사육제는 사순절을 지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가 되겠다.
금식을 하며 속죄를 하며 지내기 전에 먹고 마시는 축제를 하는 셈이지만, 사육제는 기독교 시대 이전부터 있던 봄 축제를 기독교 전통으로 편입시킨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이 그림은 플랑드르 사람들이 사순절과 사육제 기간동안 먹고, 마시고, 행하는 풍습을 대결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양쪽 합쳐 거의 2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일단 그림은 저지대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을 그려놓았다.
왼쪽은 술집과 식당이 있는 여인숙을, 오른쪽은 교회가 그려져 있다.
축제와 사순절의 상징이다.
양쪽에서 축제의 행렬과 경건, 속죄, 자선, 금식의 행렬이 나와 그림 앞 가운데에서 마주치고 있다.
사육제를 의인화한 인물과 사순절을 의인화한 인물이 각자의 탈것을 타고 마치 중세의 마상창술시합을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들고 있는 것은 창이 아니다.
우선 왼쪽의 사육제는 뚱뚱한 푸주한으로 허리춤에 칼을차고, 머리에는 파이를 쓰고, 술통위에 앉아있다.
그가 창처럼 들고 있는 것은 돼지머리와 소시지, 닭들이 꽂혀있는 고기꼬치이다.
반면 가운데 오른쪽의 사순절은 빼빼 마른 여인이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데 이를 신부와 수녀가 힘들게 끌고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빵을 구울때 쓰는 나무주걱인데, 생선 두마리가 얹어져 있다.
그녀의 의자곁에는 사순절동안 먹는 프레첼이나, 생선, 홍합, 양파등이 실려있다.
그뒤를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린 아이들과 불구자, 거지들이 따르고 있고, 음식 등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뒤를 따르고 있다.
반면 왼쪽의 여인숙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시는 사람, 연극과 춤을 공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뒤쪽으로는 더 많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겨울과 봄동안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하는 것들이고, 왼쪽은 축제, 오른쪽은 교회에서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왼쪽 건물의 지붕위로 보이는 나무가지에는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는데 반해, 오른쪽 교회 옆의 나무는 잎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사육제 시기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겨울의 풍습을 상징하며, 사순절 기간은 봄의 모습을 그렸다는 뜻이라고 한다. 워낙 많은 것이 그려져 있어서 하나씩 찾아서 설명하려면 책 한권이 필요할 것 같다.

​아래는 돈주머니와 금고의 싸움이라는 동판화이다.
브루겔의 그림을 바탕으로 피터 반 데르 하이덴이 동판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림에는 돈주머니, 돼지저금통, 동전항아리, 돈궤들이 칼과, 단검, 장창등을 들고 혼란스럽게 싸우고 있는 다소 괴기한 그림이다.
싸움이라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서 위의 그림과 함께 올려보았다.
아래 써져 있는 명문으로 보면 "이 모든 다툼과 싸움이 돈과 재물 때문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 모든 싸움과 전쟁이 벌어진다는 알레고리적 표현인 듯하다.

​브뤼겔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볼수록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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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24 수요) 하나님의 형상 / 모양 (창 1:27; 5:1,2)


(092524 수요) 두 예배 (요 4: 23,24)


(091824 수요)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 (마 1:16,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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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24 수요) 午餐 ἄριστον과 晩餐 δεῖπνον (마 25:10)



(082824 수요) 예수의 믿음, 나의 믿음 (갈 2:16)


(082824 수요) 예수의 믿음 나의 믿음


(082124 수요) 원망의 불뱀, 회개의 놋뱀 (쳐다본 자 / 쳐다보지 않은 자)

(081424 수요) 빼앗긴 복수, 빼앗긴 용서


(080724 수요) 간절한 자, 간절함 없는 자


수요 성경 탐구 9 (072424) - 말씀으로 바벨탑 쌓는 자와 무너뜨리는 자 (창 11:4)


수요 성경 탐구 8 (072424) - 그 길 가는 자 가지 않는 자2 (마 7:13,14)




0:05 / 24:32

수요 성경 탐구 7 (071724) - 그 길 가는 자 가지 않는 자 (고전 1:18)


수요 성경 탐구 6 (071024) - 그 비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막 4:11,12)


수요 성경인물 탐구 5 (070324) - 모형과 실상 (롬 5:14)


인자 / 요한복음 5:22. 27
06-26-2024(수)




두 사람 / 창세기 1:27, 2:7
06-19-2024(수)

사도와 제자
06-12-2024(수)





06-05-2024(수)





04-14-2024(주일)



https://youtu.be/Q4jTOJqhBbo?si=xcu21Gbf_n5dG7Di

Knowing You – All I Once Held Dear   (빌3:7-14)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막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바울 사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내어 부활의 말씀 전달.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7-1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4-6)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므로,

(고전15: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후11:22-27)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길 곳곳에 장애물과 방해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치우지 않고 함께 갈 수는 없.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그 장애물들과 방해물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장애물이고 방해물이기 때문에 분연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그것들이 나를 만족시키고 유익하게 할 것이라 믿고 있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땅에 있는 지체들이라.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골3:5,6,8)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부활,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믿었던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반드시 부활 휴거.

 

부활휴거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과는 상관 없.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01-21-2024(주현 후 제3주)

누가 들을 수 있는가?
can anyone hear me?
요한복음 5ㅣ21-25



영화 Titanic 마지막 2-3분 장면.

Rescue Rescuing boatman whistling & shouting : Can anyone hear me? xxxx………..

Rose : Whistling – Come back, come back

 

구조 보트의 구조 외침 소리 들은 유일 생존자Rose

구조 보트의 구조 외침 소리 Can anyone hear me? 들었기 때문에 구조 받아.

 

무엇을 듣고 들은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생사화복 결정.

세상에는 살리는 소리와 죽이는 소리.

소망의 소리 절망의 소리, 살아나게 하는 소리, 포기케 하는 소리,…

 

그렇기에 예수님 말씀.

너희 산 자들은 나를 따르고,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끼리 죽은 자들과 죽을 자들 장사케 하라.

(마8:22)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let the dead bury their own dead

 

들어야 할 살리는 소리들 중,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 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신 말씀.

그 듣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듣는 것.

그 음성 들으면 살아나되 죽은 자들일지라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셔.

 

죽은 자들은 무덤 속 어둠에 있는 자들이고, 산 자들은 광명한 빛 가운데 있는 자들.

(요11:9,10)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의 빛 – 생명과 밤의 어둠 –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듣는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그 음성 들은 자는 살아나리라.

(요5:24,25)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이 생명이라신 말씀 들으면 죽은 자들이 생명 말씀으로 다시 살아.

(요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 보다 보이는 육에 집착하고 추구.

바울 사도 일갈.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만 구원 하신다셨.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모든 사람 아무나, 누구나 다 구원하지 않으셔.

구원해 주실 대상의 기준을 세워 놓으셨고, 그 기준에 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만 구원.

 

예수께서 살리기 원하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은 누구?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세상에 흩어져 세상의 소리 듣느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느라 주님의 음성 듣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

 

주일 예배 한 번으로 일 주일, 한 달, 일 년을 연명하면서 살고 있.

하나님의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에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

 

야고보 선지자,

(약1:1)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 문안 편지

(약1:16,17) 세상과 사람에게 속지 말라셨.

  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2.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주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 세상의 속임수와 거짓과 유혹에 속지 말라셔.

세상은 죄와 죽음이 있는 곳이고, 죄는 죽음의 삯이라신 세상은 거대한 죽음의 무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

그런데 성경은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셨.

(요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들은 자는 살아난다셨.

 

죽은 자들은 죽어서 갓 무덤에 묻힌 자를 포함해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는 모든 육적 주검들, 시체들.

성경은 몸이 죽어 무덤에 묻힌 자들만 죽은 자라 한정하지 않.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 영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는 누구라도 움직이고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배설하고 생식하면서 육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으로 죽은 자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영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이 말씀 하신 것.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요한복음에만 있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말씀.

 

이 말씀 듣고 있는 자들 모두 살아는 있지만 죽은 자라시는 말씀.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들어야 하고, 그 음성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동물과 다름 없.

 

(전3:18-21)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짐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적 목숨으로만 사는 생명체.

‘인생’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생명의 삶을 살고 있는 참 생명의 생명체.

 

짐승은 죽어 땅에 묻히면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지만,

인생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벌어질 진짜가 있.

 

그렇기 때문에 살아는 있으나 죽어 있는 자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려면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고 영적 생명을 얻어야 한다셔.

 

하나님께서는 개나 고양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 짐승의 삶 살기를 고집하고 추구한다면 그들의 원하는 대로 구원을 유기시켜 버리신다셨.

(롬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 (행13:46-48)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2.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3.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1. (계22:11.12)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 자기가 살리기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이유는 무언가.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셔서 부활의 때에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셔서 어린 양이 신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시고, 어린 양의 신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 받은 우리 무엇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엡5:10,11)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취이시리라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N)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K)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하나님 아들의 음성’ 들으면서 날마다 살고 있는 우리, 

머잖아 필연코 부활되어질 우리, 부활되기 전, 살아있는 동안 잘 죽는 삶을 살아 놓아야.

 

부활되어져 올려가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열려져 있을 것이기 때문.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영생과 영벌의 심판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예수 그리스도.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5:27)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심판의 권한 위임 받으신 예수님, 심판하실 때 자기가 살리고자 원하는 자들만 선별적으로 한정적으로 살리신다 선언.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 살리기를 원하는 자들만 살리신다셨.

근거,

(요5: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대 앞에 선 자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마19:28)에 보이는데, 이 심판을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되 개별 심판은 예수님 양 옆에 앉은 12사도들에게 맡기셨.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2사도와 함께 혼인만찬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가게 될 자를 심판하게 하신다셔.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님이 공중에서 심판하시는 그곳에 12 사도들 함께.

(마19:28)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을 공중의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선 기독교인들을 심판하는 심판관으로 임명해 주셨.

12 제자의 심판 기준은 그들이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해 놓은 신약성경 말씀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가 기준.

마태복음에서 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의 삶이 심판의 기준.

 

바울 사도는 사도들을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는 중매 억할.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For I am jealous over you with godly jealousy: for I have espoused you to one husband, that I may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Wherefore we labour, that, whether present or absent, we may be accepted of him.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very one may receive the things done in his body, according to that he hath done, whether it be good or bad.

 

하나님 말씀하신 선악을 교회에서는 혼인준비 하는 삶이 선이고, 혼인준비에 게으른 것을 악이라.

 

그러므로 혼인준비 하면서 사는 신부들이 어떤 

  1. (계2:26-28) 이기는 자(the one conquering)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the one keeping until finish the acts of me)에게(이기는 자 곧 끝까지 내 일들을 주목하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3.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천년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권세인데 이 권세를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셔.

이기는 자는 누군가면 끝까지 예수님 일들을 지키는 자(the on keeping until finish(consummation) the acts of me).

 

예수님은 2천년 전에 베들레헴에 오셔서, 30세에 성령으로 세례 받으시고, 3년 반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하시다가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피 흘려 죽으셨.

그리고 무교절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

그리고 오순절에 셋째 하늘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내려 주셨.

 

이 모든 예수님 하신 Acts, 업적들을 지켜봐 온 우리, 앞으로도 예수님의 하실 일들, Acts,업적들도 지켜 볼 것.

 

이제 남은 것은 세 절기, 나팔절과 대속죄일인 속죄절과 장막절.

마지막 나팔이 불리면 (고전15:51,52)에서 마지막 나팔이 울리면 죽은 자도 영의 몸으로 변하고 살아 있는 우리도 영의 몸으로 변해져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거기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장막절의 혼인 만찬에 들어갈 사람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 갈라지게 돼.

 

그 갈라지는 곳이 그리스도 심판대의 심판대이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직후를 나타내는 장면이 (계15:2; 18:21) 

거기서 혼인 만찬에 들어간 사람은 (계15:2,3), 지옥에 들어가게 된 자는 (계 18:21)

(계15:2,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나님께서 하신 최대 마지막 업적이 어린 양의 혼인

(계15:3)에서는 ‘업적erga : acts’, (계19:9)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만찬 deipnon : dinner / supper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Let us be glad and rejoice, and give honour to him: for the marriage of the Lamb is come, and his wife hath made herself ready. And to her was granted that she should be arrayed in fine linen, clean and white: for the fine linen is the righteousness of saints. And he saith unto me, Write, Blessed are they which are called un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이 어린 양의 혼인 만찬에 청함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에 반해 심판 받아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18: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혼인 만찬은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들)에(만찬에) 들어가고 (그) 문은 닫힌지라

 

그들 – 기름 떨어진 자들, 성령 소멸된 자들, 기독교인이지만 새끼 염소 된 자들, 중매쟁이 말을 듣지 않은 자들

 

그리하여 (계19장) 여기에 바로 신부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하게 나타내 주고 있.

 

  1. (계19:6하-9)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2.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3. 그(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4.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그)어린 양의 혼인(가머스) 잔치(만찬:데이프논)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이 땅에서 잘 살고 못 살고,부유하게 살고 가난하게 살고의 문제 아니.

그리스도 심판대에서의 판결이 사람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그리스도의 심판대 사건은 누구에게든 반드시 일어나.

 

살아 있을 동안 살아 있게 하신 그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또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까지 보다 더 피 흘리기까지 싸워 기름 준비에 실패하지 않은 이기는 자 되어져 가야.

그렇게 나팔 소리 울리기 전에 혼인 준비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충성한 신부의 세마포 드레스 준비 마쳐야.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성탄절이 즐겁고 기쁜 것은,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사람들마다 자기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인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함 받게 하시고 죄 없이 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탄생하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교회마다 기뻐하는 사람들 즐거워하는 사람들 함께 하는 이유.
하지만 크리스마스 성탄절은 부활절과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로 명명되거나 언급되어지지 않은 세상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축제일 중 하나
되어져 있.
부활절과 추수감사절도 그렇지만, 크리스마스도 세속의 인본주의와 결합된 세상 세속적 인본적 종교적
축제 행사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절기로 자리잡고 있.
하나님의 성호만 높임 받으시고 경배와 찬양 받으셔야 할 교회에 우상화 되어 계승되어져 오는 기독교
문화, 제도, 절차, 의식,… 많아.
마치,
모세 때 놋뱀 – 700년 – 히스기야 때 느후스단 (왕하18:1-8)
엘리 아들 홉니 비느하스 - 블레셋 전쟁에서 법궤 빼앗겨 블레셋이 다곤 신상 앞 – 아비나답 – 웃사 아효
(대상13:10) – 가드 사람 오벳에돔 집에 석달 (삼하6:10; 대상13:14)
오늘 교회에 하나님 이름과 예수님 이름으로 전통을 따르고 지키면서 성경적이지 않은 이벤트성 행사들 중
대표적인 것들,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 예배.
성탄절, 온 교회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생일날로 잔치 벌이는 크리스마스 데이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니라 태양신 바알을 섬기면서 축제 벌이는 바알 축제일에서 시작.
이방인들이 지키던 태양신 축제일이 교회 안으로 들여와져서 예수 탄생일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로 되어져서는
카톨릭을 비롯해 개신교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해 놓고 구주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성탄
미사와 예배를 드리고 있.
그런데 문제는, 12월 25일에 성탄 예배를 위해 모여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자기들의 예배 행위가 저 옛날 태양신 바알을 향해 제사 하던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하나님 앞에 행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짜여지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고 행사.
이방의 태양신 숭배 행위를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드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성탄 예배는 하나님께 우상 숭배 행위를 보여드리는 것.
이방의 태양신 숭배 제사의 음란죄를 하나님의 집에서 범하고 있는 것.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황을 하나님의 대적자 또는 짐승과 음녀로 묘사.
그런 카톨릭에서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유월절을 폐지한 후에 이어서 바로 생겨난 것이 태양신
바알의 숭배일인 크리스마스.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겔8: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25명 여인들이 성전 안에 모여 동쪽 태양을 향해 예배 행위 하고 있는 모습.
에스겔 때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신을 섬기는 극도의 음란한 우상 숭배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
하나님 전에서 태양신이 경배 받고 영광 받도록 한 사탄의 적그리스도 행위.
하지만 교회는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신일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전부터 지켜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성탄절로 지킴으로써 교인들에게도 즐거움 주고,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함께 가장
많은 헌금이 성탄 헌금 명목으로 교회 재정에 충당되는 대목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 부인하지 못하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요인이기도.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으며, 사도들은 기념하지도 않았고, 초기 교회에서마저 이교도 취급을 받던
크리스마스는 어느덧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탄생일로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1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날이자, 가장 많은 찬송이 불러지는 날 되었.
심지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사업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1년 중 가장 많은
헌금이 모이는 때가 언제인가면, 크리스마스.
교회가 세상의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그렇게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고착화 돼 있는 관습적 전통에 끌려가고 있.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세상 전통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예배를 받으실까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
교회가 세상의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고착화 돼 있는 관습적 전통에
끌려가고 있.
현재 일요일을 예배일로 정한 것 역시 태양신의 예배일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침이었던 것을 알지
않으면 안돼.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말씀에 따라 왜곡되어 있거나 변질돼 있는 것들을 바로 잡아 원래의 것으로 고쳐가는 연습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
하나님께서는 세상 전통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예배를 받으실까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
아담 때 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다는 것을 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최초의 제사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보았.
그 후로도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진실되지 않은 제사를 멸시하시고 외면하셨.
(사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말2:3)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계22: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출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고, 성경에 있지 않은 절기를 세상에서 차용해 와 하나님 전에서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불법 행위.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 행위를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우상 숭배 행위를
재연하고 있는 것.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행위를 할 때 눈을 감고 귀를 막으시겠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받지 않는 예배 행위는 인본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다 짐승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
(계13:8)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 짐승들을 경배하게 되는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그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인 성탄절.
그리고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도 아니.
크리스마스는 다신교 로마인들이 섬기는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동짓날 1주일 축제에서 유래..
313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면서 로마인들의 대표적
축일인 태양신 탄생 축일 축제가 그리스도교 공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들어와 지켜지다가 태양신의
탄생일로 여기던 날이 예수의 탄생일로 바뀌어진 것.
그렇게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고, 이와 함께 크리스마스도 세계에 알려졌.
크리스마스가 없었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오늘의 교회들과 같이 12월 25일에 성탄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때의 바울 사도께서는 미리 경고.
(갈1:8)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와 같은 것들로 사람에게서 난 것들.
우리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한 믿음만이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이고 기준.
나는 열심히 믿고 있다 하지만 나의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그 믿음은 믿음 아닌 종교
행위.
최종 판단자, 심판자는 하나님.
(행5:38)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행5: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이 말씀들을 근거로 오늘 교회가 지키고 있는 대림절과 성탄절이 하나님께로 난 것인가를 보면 세상과
교회가 모두 예수님의 탄생일 로 지키는 12월 25일은 하나님께로서 난 예수님 태어나신 날 아니.
성경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짜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역의 기후나 환경 등을
통해서 그 시기가 언제쯤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말씀 중 하나가 오늘 본문 중에,
(눅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 말씀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목자들이 밤에 베들레헴 밖의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던 장면.
팔레스타인 지역도 한국이나 미국과 같이 12월 25일은 계절적으로 겨울.
그렇기 때문에 12월 25일을 전후로 밤 뿐 아니라 낮에도 양을 방목할 수 없.
그래서 10월 중순부터는 양을 들판에서 방목하지 않.
예수님 오신 때는 겨울이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간대는 밤.
(눅2:8,15)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또 다른 근거로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의 호적령에 따리 각 지역 각
지방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호적을 하기 위해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던 요셉도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고 있던 중에, 요셉과
마리아처럼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여행 왔을 이 때는 겨울이 아니었.,
이스라엘의 기후는 雨期와 乾期로 나누어지는 기후 형태.
雨期는 겨울에 시작되기 때문에 들판과 밭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양 치기에 겨울 우기는 적합하지 않.
밭은 밀 농사가 끝난 후 휴지기에 들어 쉬고 있는 밭.
또한 이란 북동부의 파르티아 지역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타고 서너
달은 족히 걸렸을 거리를 겨울 우기에 추위와 비를 맞으며 순례하는 것과 추위 속에 비를 맞으면서 호적
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지에서 몇 날 며칠을 여행해야 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이 오신
때는 겨울이 아닌 가을.
2027년 전 예수께서 이 땅 인간 세상에 오셨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신 것.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때가 찼을 때.
‘그 때가 차매’는, 예수님이 오셨어야 할 그 때가 되어서 오셨다는 말씀 하시면서 율법 아래에서 율법에
따라 오셨다는 말씀.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는 것에서부터 사역 하시고 죽으시는 모든 것을 율법 안에서 완전하셨.
(레23장)에는 일곱 여호와의 절기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셨.
이 절기들은,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모든 절기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예수님이 사역 동안 행동으로 완성되어져.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등의 절기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절기들.
(요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매(장막 치셨으니)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자세히 보았더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때를 설명하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사도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계셨던 적이 있었다는.
우리말 번역에는 ‘장막 치셨다’는 표현이 없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만 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에는
‘장막 치셨다’는 단어를 사용하셨.
장막절 말씀 레위기 23장에,
(레23:34,47)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새 날은 장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너희는 이레 동안 장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장막에 거주할지니
음력을 사용하는 이스라엘은 우리 음력보다 약 1달이 빨라.
장막 짓는 날은 7월 15일로 우리 달력으로는 8월 15일, 추석 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추석 때가 되면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장막을 쳐 놓고는 거기서 기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장막 생활 하는 절기.
그러므로 장막 쳤다는 것은 예수님이 秋夕 시기에 오셨다는 것을 성경 용어로 표현한 것.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장막 치셨다는 표현을 근거로,
장막은 장막절에만 치기 때문에 7월 15일, 우리 날짜로 8월 15일 무렵의 장막절 기간에 예수님 탄생.
그리고 장막절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의 기간이었던 것도 증명 가능.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신 그 날이 장막절 날일 것.
성경에는 그에 대한 날짜 말씀이 없지만 율법에 의하면 30세 되는 날부터 사역을 시작해야 하므로 그 날이
되기를 기다리셨다가 장막절 그 날이 되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3년 반 동안 사역을 시작하신 것.
예수님 사역하시면서 맞은 첫 번째 절기는 유월절.
유월절 날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희생 되셔야 하기 때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네 번째 지키는 날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알게 해 주시는데,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얼마 동안 사역했는가를 알게 해 주는 근거이기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이 왜 3년 반인가는,
장막절 날 7월 15일 사역을 시작해서 장막절 부터 유월절 1월 14일까지는 6개월 기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
네 번째 유월절이 그 이전의 장막절 3년에서 6개월을 합하면 3년 6개월.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은 기름이 준비되어 혼인 만찬에 들어가져서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쳐 주시는 장막을 입어야 하는데 그 모습이,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계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예수님 오신 날도 육신으로 오셔서 사도들과 함께 장막을 치셨는데 이제 마지막에,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에 가서는 그 때 이기는 자들, 이기는 성도는 기름을 준비해서 혼인 만찬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신다는.
이 장막은, (계19장) 한 세마포 옷 입은 성도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2천년 전으로 돌아가서 예수님 오신 날 천사들이 베들레헴에서 양 치는 목자들에게만 나타나 주신 메세지.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우리말 번역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이지만 정확한 번역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에
맞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다’는.
하나님의 의지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합한 사람들.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나팔절에 공중으로 휴거 되어서 속죄절에 심판을 받을 때 거기서 장막절 혼인 만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성령의 기름 준비가 마쳐져 있어야.
우리의 생이 마쳐지는 그 순간까지 성령의 충만을 유지해야 혼인 만찬에 들어가질 수 있.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前無後無 환난 후에 예수님 오신다셨.
그 前無後無 환난을 맞고 이겨낼 수 있는 방도와 도구와 수단은 세상에 없.
오직 성령 충만 되어진 사람들만 도우시고 이기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이겨낼 수 있고, 그
이긴 자들만이 최후 혼인 만찬에 들어가는 기름 준비한 신부들.
이전에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있지 않을 그 환난이 온 다음 예수님 오신다셨.
그러기에 우리 어떤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계12:12) 그러므로 하늘(들)과 그(들) 가운데에 거하는(장막 칠) 자들은 즐거워하라
세상에 소망 두지 말고 공중에 올라가서 장막 칠 날을 소망하며 바라보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이기는 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 되어야 그 장막 쳐진 사람들의 기쁨을 누릴 수.
이 세상에 소망 둔 사람들은 소망 둔 세상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
하지만 2천년 전에 장막절에 오셔서 사도들에게 장막을 치셨던 예수님은 훗날 마지막 장막절에 기름 준비
마친 이기는 자들 위에 그 장막 쳐 주실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기다리면서 기뻐하고 경배해야 할 분은 “너희가 본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대로 다시 오시되 심판주로 오실 재림 예수를 기다려야.
이것이 ‘再臨의 待臨’.
再臨하시는 주님 기다리는 마음은 연습 없는 1라운드만의 게임.
2라운드의 second chance는 이제 없.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우리 인생의 나머지 1라운드 게임에서 이기는 자 되어 이기는 자들에게 쳐 주실 장막 안에서 신랑의 손에
이끌리어 천년 왕국 혼인 잔치 만찬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즐거움에 참예하는
그러기에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공중에 올라가서 장막 칠 것에 두어야.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캐롤 따라 부르면서 즐거워 했던 우리, 언제까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아기 예수 탄생
노래를 고장난 레코드 처럼 반복하고만 있을 수 없.
우리가 기다려야 할 분은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 예수.
그분을 기다리는 준비된 신부로서 기름 떨어뜨리지 않고 등불 꺼지지 않도록 신실하고 진실하게 온 맘과
정성 다해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준비된 신부로 남은 날을 살다가 그날에
공중에 올라가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영원한 장막 칠 준비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충성하는 순종의 예배자, 기름 준비된 신부로서 삶의 대단원 마무리.

(111923 Patris) 聽音 행 12:12-16. 219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행12:11-16)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야고보 사도 목베임 죽임 당한 이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사도들이 모여 있는 마가 요한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집 안에 함께 있던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들었기 때문.
여자 아이가 아니었어도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만 탈옥수를 찾아 뒤쫒아 올지도 모를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않은 베드로는 누군가
열어 준 문으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되 중요하거나 긴박한 상황이 대부분.
성경에는 오늘 본문 말씀 외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그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가 문 열 수 있는 민감성과 순발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영생의 문제가
달라지게 되는 말씀이,
(계3:19,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문 밖에 오셔서 문 두드리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가 그것.
영생의 떡 들고 문 두드리시며 우리 이름 부르시는 주님 음성 듣지 못하면 정말 낭패.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구분할 줄 알고, 그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없고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주어지게 될 것이기에.
성경은 羊은 주님의 음성을 아는 동물로 의인화 시켰고, 주님의 음성을 모르는 동물로
염소를 들고 있.
1. (요10:1-5)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7-9)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과 염소 구분 기준은 복음 – 오른편과 왼편
(마25:33,46)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46그들 염소는 영벌에, 의인
양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말씀의 꼴로 장성하도록 양육된 양은 오른편의 영생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염소는
왼편에 놓여져서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셨.
그 염소들의 행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는 상관 없이 다른 복음을 받고 용납하면서
처음에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성령 소멸된 육체로 마치는 자들.
(고후11:4)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갈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주님의 말씀의 꼴로 장성된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렇지 않은 염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져서
(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결말을 맞게 될 것.

예수님께서 (계3:20) 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함께 만찬을 잡수시겠다신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함께 두 주인을 섬기다나 주님께 징계 말씀 들은
교회이면서 영적 빈혈 상태에 있는 교회라고 진단하셨.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주님이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머리로 익힌 지식이 많은 것일 뿐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아가페 사랑이 없는 교회.

말씀에 대해 知的同意는 되어 있는 수준일 뿐, 말씀이 믿음으로 성장 성숙되어지지 못했.
知的 同意는 믿음 아니고, 知的 同意로는 구원받지 못.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의 실상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교회.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여유로워졌고 부족함 없이 안락하지만,
비지니스가 잘 돼서 돈 잘 벌고 좋은 집에서 여유로운 누리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가난하여 영양실조 상태.
육과 영의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 멈과
벌거벗음이 영적 허영심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일곱 교회의 실태가 오늘 우리의 실태
한 두루마리의 편지에 일곱 교회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각 교회가 자신의 모습과 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타산지석 반면교사 삼으라고
사데 교회의 죽음은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 죽은 신앙, 죽은 믿음,
영적 죽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내용.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리실 처방을 생각해 보아야
(계3:18,19) 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하라셔.
무엇을 회개하라시는가.
회개는 지금의 생각, 행동, 삶 일체를 바꾸라시는.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스스로 속이지도 속지도 말라 말씀.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러시면서 이제 주께 불로 연단한 금으로 부요케 되어 흰 옷 사 입고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 사서 발라 고쳐진 눈으로 너의 지금 상태를, 너의 가난하고 헐벗고 수치스러운
정체를 바로 깨달아 보고 회개하라 말씀.

그동안 너 자신이 너를 속였고, 너는 스스로 속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
부자라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너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먼 소경이고 벌거벗은 자라는 것.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인의 전형적 인물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 얻는 방법을 여쭙는 장면이,
(마19:20-23)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막10:20-23)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눅18:21-25)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빌3:6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성경이 큰 부자라 인정 한 이 젊은 부자 청년은 자기의 富와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知的
同意로는 자기를 구원받게 하지 못했.
청년 :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善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청년 : 그 청년, 그 사람이 큰 부자로서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가니라
예수님 : 재물이 있는 자,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심히
어렵도다

이 청년 관원은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았었다면 예수님께 나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질문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정녕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면 네가 아직도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 너에게 있는 것들,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신
말씀이 청천벽력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말씀에 근심하는 마음으로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뒤돌아 갈 수 없었을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그리고 난 후에 와서 나를 따라 하늘에 있는 보화를
침노하러 가자신 말씀 따라 예수님 제자 될 수 있었을 것.
하지만 이 사람은 자기 의가 자기 눈을 가리고 있었고, 자기 귀를 막고 있었.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보지 못했고, 하늘에 있는 보화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마지막 남은 이 땅에서의 성취 목표인 영생을 얻으러 나온 그
자리에서 그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말씀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
이 젊은 부자 청년 관원은 예수님이 그의 보는 앞, 듣는 앞에서 그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들었어도 온전히 깨우쳐 알아듣지 못했.
聽音의 귀, 들을 귀는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고, 볼 눈 있었지만 보지 못했.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살지 않은 사람.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로 끝나지 않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주님을 따라야 한다시는 말씀으로 그 청년과의 대화가
마무리 되었.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하늘에 보화가 있는 자들.
청년과 대화 중이신 예수님 주위에 12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그 외에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
제자들 모두 자기들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는 자들
(마19:29; 막10:28;눅18:28)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마19:28,29;막10:29,30;눅18:29,30)

(막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인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필경 주님을
버리고 돈을 섬기고 재물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내 소유, 나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주님과 복음을 따르는 길에는 마태, 누가 복음에는
없는 말씀이 마가복음에는 있는데,
집이나 형제 자매나 부모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 백 배를 받을 뿐
아니라 내세에 영생을 받을 것이지만 현세에서 박해를 겸하여 받게 될 것이라 했.
주님과 복음 위해 따른 길에는 반드시 고난과 박해가 있다시는 말씀.
이 말씀을 바울 사도도 디모데에게,
(딤후2:3,4)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잠19:17,11:24,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마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반면 하나님께서 빚 갚지 않은 자는 추심 하신다셨.
(겔3:17-21)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 말씀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면,
(계3:19,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하면,
(계3:21,2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은 교회들의 문을 계속 두드리면서 교회들이 문 열고 나와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셔.
그리고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영접해 모셔들이는 교회들을 ‘이기는 그’라 하시면서
‘이기는 그’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셔.
‘문을 열라’신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주님께서 문 두드리실 때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나와 문 열어줄 교회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
마치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베드로도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옥문을 열고 나오게 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집 문 두드릴 때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듣고 기뻐하여 베드로에게 문 열어 준
로데라는 여자 아이와 같이,
문을 두드리시는데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것이 아니.
문 두드리는 소리는 그 소리로 누구인가를 주의하거나 경계하게 하는 단계이고, 문을
열게 하는 것은 문 두드리는 사람의 음성.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을 열게 하는 주체는 주님의 음성.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을 알아보고 열어드리는 것.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가 주님께 문 열어드리고 맞아들이게 돼.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알아.
(요10:27) 내 羊은 내 音聲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羊은 내 音聲을 알아 듣는다셔.
주님은 주님의 音聲을 알아듣는 양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시는가면,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계3:20,21) 누구든지 내 音聲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수요 성경 탐구 - 적그리스도 (115823)


수요 성경 탐구 - 제 3 성전 (110823)


수요 성경 탐구 - 예루살렘과 성전 (110123)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102923 Patris) 고도Godot를 기다리며 마25:1-2 162 신랑 되신 예수께서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셨는데,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을 침노한 사람이 얼마나.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을 기다리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천국은 오지 않을 사람들 많아.
어쩌면 생이 다하도록 기다리지만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천국 기다리다가 생이 마쳐질 사람들 역시.
누구에게든 침노하면 침노 당한다신 그 천국을 우리는 지금 침노해 가고 있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셨다 하여 아무나 침노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아무나 침노를 시도한다 하여
침노 당하는 곳도 아니.
그러면 천국은 누가 침노할 수 있고 누구에게 천국은 침노 당하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예수님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은 삶의 천국의 삶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예수님 제자들에게 말씀,
너희가 기다리는 인자의 날들 중에 하나님 나라의 임하는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눅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천국을 볼 수 있는 사람, 천국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예수님께서 복음서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말씀.
천국은, 하나님께서 절대적 사랑이신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말씀.
하나님 나라 천국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셨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침노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 안에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할 수 없다셨.
(요일2:14)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를 아는 너희는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흉악한 자를 이긴 너희는,
(요일2:15-16) 너희 마음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셔.
그런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뭔가면,
(요일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
그러시면서,
(요일2:20)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는 너희가
(요일2:21-22)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안다고 한다면
너희는 거짓말 하는 자이며,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라.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침노하여 소유하고 누리는 자인가.
지금까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던 내 마음이 비워지고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있는 사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죽는
것.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고 죽는 것이, 그동안 내가 굴복당하면서 살았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른 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자기 몸을 위하고, 자기 이름과 명예를 드러내고, 세상에서 힘과 권력과 재물과 이름과 명예로 자랑스러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이유.
그렇지만 이와같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
예수님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살아나 구원 받고 자기가
미워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영원토록 보전하게 될 것이라.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목숨을 잃는가면 ‘나를 위하여’
– 예수님을 위하여.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사역 첫 해에도 제자들에게 하셨고, 죽으시기 며칠 전에도 하셨.
자기 목숨의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의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우리가 각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면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은 잃어버린 생명인 반면, 세상 사는 동안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미워하는 내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시켜 주시겠다 말씀.
나는 나의 생명을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
우리 중 누구도 내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없고, 미워하는 사람 없어.
오직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위하여만 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이고 자기 목숨의 혼을 부인하고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말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을 위해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 지고 내 목숨을 버리는 자라야 구원 받을 것이고 다시 살리셔서 다시
살려주신 생명이 영원토록 보전되리라 말씀을 알고 또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
내가 부인되어지지 않고, 자기 십자가 져지지 않고, 자기 목숨 버리고 잃는 것이 안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의 한계.
예수님을 위해 나의 혼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 땅의 것으로 영원의 것을 산다는 것.
90살, 100살짜리 육의 목숨 중에서도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육의 혼과 세세태록 영원한 생명의 맞바꿔
주시는 수지 맞는 육과 영의 교환 작업.
따라서
죽음은 오히려 살리심 받아 구원 받아져서 살리우심 받고 그 생명이 영원토록 보전되리라신 말씀이
시작되는 순간이고, 죽음은 새 생명, 새 삶, 새 인생, 영원한 새 인생의 시작.
이 말씀을 근거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위해 날마다 죽고 있어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 사도는 죽는 것을 단언하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셔.
날마다 죽노라고.
죽되 세상에 대하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고도가 왜 와야 하고, 무엇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도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오늘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은 올 것이고, 내일도 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확실한 희망 속에 인간은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심도 있는 삶의 진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우리는 어떤 ‘고도’를 기다리면서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으며 또 내일을 살고 있는가.
그 ‘고도’, 우리가 날마다 매일 기다리고 있는 그 ‘고도’는 오기는 할까, 그 ‘고도’를 기어이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사람마다 ‘자기의 기다리는 고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도’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인생.
성경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 천국을 가장 쉽게 설명해 주신 말씀이 열 처녀 비유.
1. (마25:1,2)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그러므로 천국 생활은 등을 들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 천국 생활.
燈은 (잠언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The lamp of the LORD
searches the spirit of a man ; it searches out his inmost being.
성령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는 여호와의 등불이라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육신으로 모태에서 태어나지만 그 속에 있는 영은 죽어 있는 상태.
그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을 거듭나는 것이고 거듭난 사람들이 깊은 곳까지 성령께서 살피셔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셔.
그런데 이 열 처녀가 燈을 들고 거듭나서 예수님을 기다리며 졸다가 열 명 모두 잠들었.
(마25:3-5)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25:6,7)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셨고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모든 기독교인.
모든 기독교인들이 잘 믿었건 못 믿었건 성령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다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기름을 준비해서 등을 다시 켤 수 있느냐 기름이 떨어졌는가를 심판하신다는 말씀.
기름은 성령.
기름이 준비된 자들만 혼인 만찬에.
(마25:10)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오시면 영의 몸을 입고 공중에 올라가지는 거기서 기름이 준비된 성령 충만한
자들만 천년왕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옥 불에.
세상의 기독교인들 모두 공중에 올라가져서 혼인 만찬에 들어갈 수 있는 수는 많지 않다시는 말씀.
(눅13:23-24)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 오셨을 때 등불 들고 기다렸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마25:15)에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서셔 공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미리 신약에서 미리 말씀.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기 하루 전에 하신 설교, 천국은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같다셨.
열 처녀는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
이 열 처녀 모두 믿음 좋은 예수님을 신랑이라 믿는 믿음 좋은 신부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열 처녀를 가인과 아벨 구별하듯 구별하셨.
예배의 등불을 켰지만 이 등불이 꺼져버릴 사람과 끝까지 꺼지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셨.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마찬가지로 주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구별하실 것.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등잔의 불은 그 날까지 타오르는 불꽃인가 그렇지 않으면 기름이 떨어져 심지까지도
새까맣게 타 버린 불 꺼진 등잔인가.
성경은, 천국은 처음부터 준비된 자만 들어갈 수 있다셨.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이 주님이 아담과 가인으로부터
내려온 생명이라면 바뀌어져야만 하는 생명.
거듭나서 바뀌어진 생명만 천국에 들어갈 수.
사람이 거듭나지고 바뀌어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이 문은 생명의 길, 복음의 길로 들어서는 좁은 문, 좁은 길.
좁은 길로 난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좁고 협착한 길.
어렵고 힘들어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이 길이 어떻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는 이 생명의 길, 복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른다셨.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딤후1:8)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은 예수 믿기만 하면,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
(롬10: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열 처녀 모두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다리고 있었.
열 처녀 모두 구원의 확신이 있었던 믿는 사람들.
신랑이신 예수님이 데리러 오실 것을 믿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이들을 구별하신 주님은 이들 중 다섯에게
(마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주님은 기름 떨어뜨린 다섯 처녀의 행동과 내용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셔.
단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말씀.
주님은 자기 소유만을 아셔.
지금 예배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결정돼.
우리의 진짜 생명이 달린 문제.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생명은 자기 혼.
자기 생명인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셨.
자기 생명인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시겠다셔.
1. (딤후3:1-7)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구원의 복음은 어른과 어린이에 차이 없.
어른용 복음 따로 있지 않고 어린이용 복음 따로 있지 않.
(딤후2:22)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님의 뜻 아닌 내 뜻대로 살아온 생명은 헛된 것.
(전11:10-12:1,8)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한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자기 혼을 미워하는 것이 자기 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회개.
자기 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기 혼을 미워하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셨.
자기 혼을 미워하는 것,
(눅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 될 수 없다셔.
자기 혼,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을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할 뿐 아니라 나아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라 말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육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사람
육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
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
다섯은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 육으로 마치는 사람
다른 다섯은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자기 혼을 버리는 사람,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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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 명하시면서 지키라 주신 절기가 7개, 7대 절기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신 까닭은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영원히 거하시며 영생의 복 주실 것을 말씀 주셨(시132:13-14,
133:3).
여기 시온은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이 세웠던 시온성이 아니라, 영적 다윗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우실 영적 시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영적 시온이 어딘가면,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33:20-24)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 시온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절기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 사함의 복이 있는 구원의 장소라셨.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6:23) 죄 사함을 받으면 사망이 없어져 영생할 수 있게 하시는 곳 시온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셨(시87:5, 102:16).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안식일과 모든 절기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등 절기를
세우심으로 시온을 건설하시고,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눅4:16, 마26:17-28; 요7:2, 14).
(눅4:16-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절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마다 지켜야 하는 3차의 절기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신16:16-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일년 3차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반드시 지킬 것을 명하셨(대하8:13).
(대하8:12-13)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13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그 중에 칠칠절을 맥추절,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출23:14-17, 34:18-23).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레 23장)에서 일곱 가지의 절기를 계절과 시기로 구분했을 때 대표되는 절기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3차의 7대 절기’라.
1차 절기: 유월절(逾越節), 무교절(無酵節)
2차 절기: 초실절(初實節), 칠칠절(七七節)
3차 절기: 나팔절(喇叭節), 속죄일(贖罪日), 초막절(草幕節)
하나님께서 절기를 제정하실 때 모세가 출애굽 할 당시부터 성막을 세우기까지의 행적을 따라
제정하셨.
과거 역사일 뿐만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실 일들에 대한 예언.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 ” (신18:18-19)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모세)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때)를
가리켜 말했느니라” (행3:22-24)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까닭은 모세가 했던 일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각 절기에 나타난 모세의 행적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
(요5:46) (너희가)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유월절 -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무교절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
초실절 -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오심
나팔절 – 그리스도 초림
대속죄일 –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하심
초막절 – 심판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초막절은 여호와를 구속자, 창조자로 경축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적 절기로 지난 9/29 금
부터 엊그제 10/6 금까지 일주일간 지켜졌던 절기(레 23장).
마지막 추수를 기념하면서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않고 기념하며 감사
찬양하는 절기로 정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 복 주실 것이지만,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재앙 내리심의 벌을 받을 것이라 말씀.
그러시면서 종말의 그 날에 열방의 남은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왕으로 송축하며 그를 한 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 예언의 말씀도.
그 말씀이 (슥14:16-19),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열방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를 만왕의 왕으로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인데, 애굽 족속을 비롯하여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재앙을 내려 벌이 임하도록 하실
것이라셨.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겠다신
것은,
실제로 초막절 절기 다음부터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가을 추수를 마친 상태에서 봄 수확을
위해 파종해야 하는 시기에 알맞은 비가 내리는 것은 봄 수확에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초막 절기에는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번제를 드릴 때에 전제처럼
제단 밑에 길어온 물을 붓는 의식을 행했.
탈무드는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이런 행사가 바벨론 포로 이전에도 있었다고 기록.
(사12:3)은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의식에 두가지 중요한 의미.
1. 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에 있는 장막절에 물을 긷는 일은 앞으로의 비에 대한 강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백성에게 복 주시리라는 상징적 의미. 그러므로 장막절에 성전에 올라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스가랴서에서 하신 의미도 내포.
2. 광야의 므리바 반석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나와 백성이 그 물을 마신 사건을 기념하기도.
영적으로 그들은 성령이 강같이 흘러나온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이곳을 ‘물 긷는 집’이라 한 것은 (사12:3)에서의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성령을 긷는다는 의미.
이와 같은 행위는 추수에 대한 감사와 함께 미래의 곡식을 위해 비를 요청하는 기도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점차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실 것을 비는 기우의 행위로 변질.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장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 올라가셔서 물 축제 사람들에게 설교하신 까닭.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7-38).
이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은,
(고전10:4)에서”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말함으로써 실로암
연못에서 물 긷는 사람의 행위를 우상숭배 행위라 경고하기도.
(고전10:1-7)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이것이 장막절의 주님 메시지.
주님은 장막절 마지막 날에 가셔서 물 축제에 가서 이 설교를 하셨.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죽은 물 떠 오는 죽은 행실 하지 말고.
(요4:13-15)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다른 것으로 목말랐고, 목마른 나, 주님의 생명수로 목말라야.
다른 것 보다 주님의 것을 원해야.
그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강 좌우에 달마다 열두가지 다양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가 있게 하는 생명수의 강이라 하셨.
이 생명나무는 십자가.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생명,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포도나무.
이것이 바로 마지막에 거기서 생명수를 공급해 주는 장면.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 영과 신부가 말하기를 당신은 오시옵소서 하는도다 듣는 자도 당신은 오시옵소서 할 것이요
목마른 자가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명령문.
첫째, 복음을 들은 사람은 ‘주님 오시옵소서’ 하라셔.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우리 일상에서 ‘주여 오시옵소서’ 말하지 않아.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의 마지막 명령의 말씀이 이것.
‘주님 오시옵소서’ 안에는 ‘나는 오시는 주님 맞아 모셔들일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 아무 때고 오시는 주님 맞을 준비돼 있어야 한다시는.
두 번째, ‘목마른 자가 오라’
오되 목마른 자로 오라셔.
주님께는 목마르지 않은 상태로 오지 말라셔.
세상에 취하고 세상의 것을 채워져서 주님께 올 수 없다시는.
세상의 것들은 형식적 가짜.
세 번째, 원하는 자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리라.
원하지 않으면 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마실 수 있다셔.
이 말씀이,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상이신 하나님의 명절.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그러므로 내 신앙 인생의 모든 절기들,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어져 가는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으며,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유월절에서 오순절로 나아가기 원하고 나팔절에서 속죄일을 지나 장막절로 완성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내 신앙의 모든 절기들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지는 그 날까지
이기는 자의 믿음의 삶.





수요 성경 탐구 - 장막절 (초막절 / 수장절 / Sukkot / The Feast of Tabernacle) (100423)


수요 성경 탐구 - 대 속죄일 / 욤 키푸르 (092723)


수요 성경 탐구 - 로쉬 하샤나 신년 나팔절 (092023)



https://www.youtube.com/watch?v=6D-UaedqOjk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 하나님 나라 – 하늘에 있다시는데, 아직은 우리 손에 쥐어진 것 아니.
우리가 거기에 가서 받아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만약 정한 기한이 지나도록 수취해 가지 않으면 말소되고 폐기되어져.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시민권 수취 통지 받은 우리 모두, 정해진 기한에 시민권 수취 확인 명부에 기명날인
하고 시민권을 받아야.
정한 기한은 우리 삶이 남아 있는 동안이고, 그 동안의 삶의 내용이 무언가는, 믿음의 결국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내용.
베드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결국인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
(벧전1: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1:13-15) 그러므로(너희가 할 것은 없고 오직)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리고는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믿음의 결국 – 영혼의 구원, 즉 ‘혼의 구원’인데, 이 ‘혼의 구원’은 대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항상 복종해야만 하는데,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면서 사명 감당해야 얻을 수 있다 말씀.
무엇을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는가면 (벧전1:17) 너희가 이 땅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 행하는 모든 행위를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라셔.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에 세 가지 나라.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세상 나라, 우리 주의 나라 하나님 나라, 앞으로 올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 왕국
세상나라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왕 마귀 사탄이 왕 노릇 하는 나라.
사탄 마귀가 왕 노릇 한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부터 세상 나라 시작되었.
마귀가 결박되어서 무저갱에 들어갈 때까지는 세상 나라.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세상 나라에 거주하고 있.
그리고 주님 재림하실 때 마귀가 결박되므로 주님이 재림하실 그 때까지 세상나라는 존재하게 돼.
그러는 중간 도중에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개입.
이 나라를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성령 세례 받으시고 성령을 힘입어 사역하시는 순간부터 천국,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이 하나님 나라는 백보좌 심판까지 계속.
그러므로 (계11:15) 말씀을 근거로 세상 나라만 있었다가 예수님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신 성령을 입고
사역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나중 예수께서 재림하신 때부터는 하나님 나라 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시작.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세상 나라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 장악된 자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그들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으로 남아 여전히 죄악된 세상의 삶을 살고 있는 중.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엡2:2)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져 간 것인데,
이 과정에서 세상 나라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우리 누구도 하나님 나라 가는 비행기 타기 위해
여권에 입국 비자를 받았는가면,
우리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비자를 받은 기억 없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비자를 받았.
그 근거 말씀이,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물로 세례 받았고 성령으로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회개한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 입국 비자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
우리가 성령 세례 받은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증거 말씀이,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들이 요구하고 있는 조건들이 우리 매일의 삶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를 수 있는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격을 성령께서 주셨.
(고전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들을 근거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진, 자격 있는 하나님의 나라 입국 비자 받은 삶을 살고
있는 중.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비자에 찍혀 있는 기한 동안 비자 받은 목적의 삶을 내용으로 살기만 하면 돼.
비자 기한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시간 만큼인데, 그 남은 비자 기한 동안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에 대한
유종의 미를 잘 마무리 해야.
구원에는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 두 가지.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영과 혼의 구원이 함께 완성되어져야만.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적 죽은 상태여서 그대로 자라 살다 죽으면 지옥 멸망으로 끝나는
인생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있어야만.
그 예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통해 보여주셨.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로 그리고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로 난 것은 어머니 뱃속의 양수에서 나온 것이 물로 난 것.
이것은 육의 어머니 뱃속 양수에서 육적 세상 나라로 들어온 것.
그러면서 영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영이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될 수
있게 하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신 말씀.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왜 영으로 태어나야 하는가면, 육으로 태어나 육으로 살고
있는 누구도 영으로 살아 있는 자 아니고 영적으로는 죽어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기
때문에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입어야만 한다신 것.
(요6:63;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아담 이후로 영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죽어 있었.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영이 죽어 있는 누구라도 죽어 있는 영이 살아나게 해야만 하는데,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시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죽은 영이 살아나게 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지만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충만케 거하시는 살아계신 영이시기 때문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언제라도 소멸되시고 떠나시는 영이신 것을 알아야.
그렇기 때문에 늘, 언제나, 항상 성령께서 나에게 내주 교통하시도 충만하시도록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안.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영이시고 생명이신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 위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령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그러면 혼은 어찌 되는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혼은 육적 생명을 의미.
혼의 삶(생명)의원리는 육체적인 죽음의 시간에 없어지는 사람의 육과 정신과 생각과 마음을 이성적이고
정신적으로 연결시켜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 존재.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혼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마다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사람 전체로 표현.
혼과 영은 연결 되어 있지만, 동시에 분리되어 있.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러므로 영은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한 면이고,
혼은 인간의 본질이며, 혼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 내면 정서.
따라서, 영의 구원은 살리는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에 의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 거듭 나지는 것이고,
혼의 구원은 나의 생각과 의지가 죽고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 되어지는 것.
이 과정에서 나의 육과 생명에 관계된 내 안의 자아와 정서와 가치와 성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것들과 한 가지로 통일되는 것이 성경에서 혼의 구원.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게 지워져 있는 나의 십자가가 하나 될 수밖에 없.
예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고자 하신 뜻의 초보적인 장면을 보여주신 곳이 있는데,
천국이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 축복하신 예수님에 대해 복음서는 부자와 천국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겨 주셨.
(막10:17-27)은 부자 청년 관원 이야기.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청년을,
마태는 청년(마19:20, 22), 누가는 관원(눅 18:18)이라 했고, 세 저자 모두 재물이 많은 부자로 묘사.
예수께서는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말씀에,
재물을 사랑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뒤돌아 예수를 떠나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평소에 그의
우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율법의 제 1 계명을 위반하며 살아온 것.
영생을 위해 찾아온 부자 관원 청년에게 주신 예수님의 권유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영생의 주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마 10:37-).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 관원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했.
재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실은 재물을 신으로 믿었던 것.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친구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마 6:24) 재물을 선택한 결과 구원의 주님, 영생의 주님 앞에서 하늘의
시민권을 파기당하고 소실
간절히 원했던 영생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가는 비자를 끝내 받지 못했.
안타까운 것은 주님 예수께서는 이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었.
(막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 나와 영생 얻을 방법을 찾고 물은 부자 청년 관원이 영의 구원을 얻었을까의 의문도 있지만,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혼의 구원은 더더욱 전무했.
재물이 많되 많은 재물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 하늘 보화 천국 영생보다 귀했기 때문.
구원은 영생의 주님, 구원의 주님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만으로 완성되어지는 것 아니.
가룟 유다가 그 증인이고, 예수를 따르며 호산나 외쳤던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못박으라 외쳤던 폭도의
모습이 진짜 모습이었던 것을 보았던 우리는 알 수 있.
물과 영으로 거듭난 것에서 머물면 안돼.
혼이 거듭나서, 혼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구원의 완성이 성취되어진다는 것 알아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져서 살고 있.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살고 있는 중.
문제는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있다 하여 그것으로 구원이 완료된 것 아니.
우리에게는 기필코 들어가야 할 나라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 왕국.
거기에 들어가서야 ‘믿음의 결국인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 구원이 완료된 것이기 때문.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달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계셨을 때부터 이미 있었.
(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신 말씀의 너희가 누구인가면 바리새인들.
(눅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말씀.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계실 때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또 다시 말씀하신 곳이,
(마12장)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쫒아낼 수 없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
분사의 계속적 용법으로 임하였다 말씀.
(마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일 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
(요18장) 예수님 빌라도 법정에서 하시는 말씀.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시면서,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가 내 종들,
천사들을 동원해 세상의 유대인들을 무찌르게 하셔서 지금처럼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셨을
것이라시면서,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러므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두 번 반복 말씀.
이 말씀 하신 예수님께서는
(눅22:30)에서 사도들에게 말씀.
너희가 앞으로 내 나라에 있게 될텐데 거기 내 나라의 내 상에서 먹고 마실 뿐 아니라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리라 말씀.
그 나라, 장차 있게 될 내 나라는 언제 임하게 되는가를 (계11:15) 에서 확인시켜 주셨.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나팔을 부는 순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데 그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되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이라 말씀.
세세토록은 천년 왕국의 기간.
성경에 ‘천년 왕국’의 단어적 표현은 없지만 (계20:4,6)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말씀하셨.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누구인가면,
살아 있을 때 예수를 증언한 사람들, 살아 있을 때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베임 순교 당한 사람들, 살아 있을
때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둘째 사망도 다스리지 못하고 해 끼치지 못할 사람들이라셨.
(계20:4,5)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6-8)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눅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천 년 왕국은 분명히 있.
그렇기 때문에, 이 천 년 왕국 들어가는 ‘천 년 왕국 입국 비자’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 오늘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지상 최대 사명.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완성적 의미.
구원은 한 마디로 ‘천 년 왕국’에 입국하는 것.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에 와 있으니까 우리는 천국 가는 여권, ‘영의 구원’은 받은 자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구원이 ‘혼의 구원’.
(벧전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셔.
그렇게 구원 얻기 위해 남아져 있는 것들이 이루어진 끝에 얻어지는 것이 구원이라시면서, 그러면 그
구원이 무슨 구원인가면,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이라 한글 번역.
영어 – (KJV/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영혼’이 아니라 ‘혼들’, 복수 명사 사용.
그러면 이 ‘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베드로 사도 가르쳐 주셔.
(벧전1:6-9)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어 – (KJV/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이 과정들을 거쳐서야 비로소 ‘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셔.
그런데 이 ‘혼의 구원’은 무엇의 결국인가면 ‘믿음의 결국-the goal of your faith’.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적이게도 ‘혼의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의 결국’까지 갈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해.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함량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소망 있게 하셔서 우리를 위해 간직해 놓으신 유업을 잇게 하시는 예비하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 받게 하셔서는 그 믿음으로 기필코 결국 ‘혼의 구원’을 받게 하신다신
말씀이,
(벧전1: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세에 너희에게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 ‘혼의 구원’이고, 이 ‘혼의 구원’을 받은 자라야 ‘천 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
이것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 확인시켜 주신 ‘혼의 구원’
한글 성경에서는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사용.
대부분의 곳에 ‘영혼’이라 돼 있지만,
영어 성경은 반드시 ‘영’은 ‘spirit’, ‘혼’은 ‘soul’로 명확히 구분 사용.
당연히 헬라어 신약 원문에도 구분되어져 있 - ‘프뉴마, 영’, ‘프쉬케, 혼’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
그런데 우리에게는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점검할 것이 있는 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야.
그리고 살았을 때 주님 오시면 그 때 공중으로 올라가져서 ‘공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어야.
그러면 그 때부터 시작되는 나라가 ‘천 년 왕국’, 그리스도의 나라.
우리 모두 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지금 천국,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지만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훗날에 반드시 가야 하는
나라가 있.
살아 있는 동안도 가질 수 있는 그 나라, 죽었다면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서 가야만 하는 그 나라, 살아서도
뒤따라 올라가야 하는 나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혼인 잔치가 있는 그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천 년 왕국.
(마25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
열 처녀 모두 등을 들고 있었.
등을 들었다는 것은 영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믿는 자들. 신자들.
그러나 이들 중 다섯은 ‘천 년 왕국’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다른 다섯은 바깥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다가 결국은 (계18장) 깊은 바다에 연자 맷돌이 바다에 던져져서 다시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바다에 빠져
천 년 동안 있다가 (계20장)의 백보좌 심판 때 나와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그 때 그것을 확인
받아야 해.
어차피 떠나야 하고 반드시 떠나야 하는 여행
준비 철저히 해서
영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혼의 구원을 이루어야 주님 오시는 날 천 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
그것은 천 년 왕국의 입국 비자이기 때문.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수요 성경 탐구 - 다시 선교지 유럽 (091323)


수요 성경 탐구 - 팔려가는 교회들 (090623)


수요 성경 탐구 - 미국의 유대인 (083023)






08-27-2023(주일) 설교 원고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we are God&#39;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예수를 믿는 이유, 목적 – 다시 오시는 예수님 맞는 것.
(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성경의 결론 (계22장)에서 예수님 말씀.
“7내가 오리라 12내가 오리라 20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은 오실 때 신부를 맞아들이는 신랑으로 오실 것.
그러면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하는 우리는 언제라도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준비된 신부 되어 있어야.
그런 면에서 우리 누구도 지금 당장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셨을 때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가.
성경은 우리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셨는데, 우리 모두 흰 세마포 드레스
준비돼 있는가.
언제라도 입고 혼례식장 입장할 수 있는 세마포 드레스 준비돼 있는가.
세마포
주님은 흰 세마포를
‘빛나고 깨끗한 흰 세마포’라시면서 성도들이 보여야 하는 옳은 행실이라 가르쳐 주셨.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 – (K) the righteousness of saints (N)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
성도의 옳은 행실 행위는......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는 것.
(요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계 20:12-13)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마25:34-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들 돕고 보살피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이 임하게 하신다셨.
이것이 은혜 입은 자, 빚 진 자의 겸손과 순종의 모습이고,
은혜를 알고, 빚 진 자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
받았을 때 겸손과 순종으로 초청장 받아들고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오라 청함 받았지만 밭일
하러 가야 하고, 사업차 출장 가야 하고, 시집 가고 장가 가야 한다며 하나님의 천국
혼인잔치 초청을 외면하고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간 것
같이 세상의 자기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따르는 것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보여주시면서 이 사람들이 애당초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기는 했어도 실상은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라 하셨.
그 사람들이 (마22장)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 받았던 사람들.
(마22:2-5)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청함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 말씀.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평소에는 신실해 보이고, 열심과 열정으로 헌신과 봉사도 하지만 정작 혼인잔치에
참석할 것을 청함 받았을 때는 고작 잔치국수 한 그릇 때문에 세상의 일들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마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
하니
그러므로 사거리에 나가 길에서 만나는 대로,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만나는 대로
아무나 모두 데리고 오라고. 그랬더니,
(마22:9-10)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
(행13:42-45)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마땅히 청함 받기에 합당해 보이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만 정작 청함 받았을 때는 응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비방하고 있는 청함 받았지만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바울 사도의 말씀,
(행13:46-49)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복음에 초청받았지만 청함 받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배척하며
위해를 가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청함은 합당치 않은 청함이었음이 드러났고, 이에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복음 전해 들은 모든 이방인들은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다음 안식일에도 또 말씀 전해 줄 것을 요청하는 현장의
사람들이 청함을 받아 청함에 순종하여 말씀 안에 들어온 사람들.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런가 하면,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신 주님 앞에 수많은 또다른
청하심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마7:21)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예수 믿기에 열심이고 예배 참석에 열성이고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이던 틀림없이 거듭난
사람들임에 의심의 여지없는 사람들 모두 청함 받은 사람들이었.
예수 이름으로 목회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낫고 귀신이 쫒겨 나가고 악한
영이 도망치는 능력도 행하던 자들 모두가 청함 받은 자들이었.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이들을 모른다셨을 뿐 아니라 이들이 예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행위를 불법이라시면서 불법 행하는 자들은 주님 앞에서 떠나가라셨.
(마27:22)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확신도 하고 있다만,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행하는 자라야만 한다고 말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요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성도의
착한 행실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입는 것.
오늘 믿음의 현장마다 믿음의 행위와 믿음의 삶에서 직무를 유기하면서 신앙하는
사람들.
직무유기자들.
세상에서도 직무유기자들은 강제 퇴직당하고 연금도 박탈당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직무유기자들이 들어설 자리 없.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지금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는 직무유기
신앙인들, 예복 입지 않은 예비 신부들, 성도들이 마땅히 보여야 할 옳은 행실, 착한
행실의 세마포 입지 않은 혼인잔치에 청함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 모두
직무유기자들.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손발이 묶이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져 유기당해질 자들.
신부에게 가장 옳은 행실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
신랑 맞을 기쁨으로 신부 단장하고 예비 마친 신부에게라야 세마포 허락되어져.
직무유기자 아닌 직무완수자.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직무 완수자로서 우리에게 ‘성도의 옳고 착한 행실’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사는 것.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사는 우리의 삶으로
세상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증인 되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보이고 알게 하는 것이 소금과 빛의 삶.
그렇게 소금과 빛의 성도의 옳고 착한 세마포 잆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는 세상에 속해 세상의 통치를 받고 사는 세상의 사람들이
스가랴 8장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그것이 우리의 착한 행실.
(슥8:22,23)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수요 성경 탐구 - 유대인 (081623)


수요 성경 탐구 - 알리야 (080923)


알리야 (עֲלִיָּה ,Aliyah)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유대인의 땅인 에레프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말은 예리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 바깥에 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지금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알리야란?


원어 : 올라가다(Going Up, Ascent)

의미 : 이스라엘로 이주하다

에스겔 39:28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

19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던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서 2000년 동안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주권과 국토가 회복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하고 있습니다. 

건국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약 70만 명이 었지만 현재는 알리야를 통해 약 700만 명으로 10배나 가까이 되는 인구로 증가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셨지만, 다시 이스 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넓게는 약 700구절, 구체 적으로 명시한 말씀은 약 161구절이 기록되어있으며, 마지막 때 하나님 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

이사야 49:22-23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이스라엘

AD 70년 2차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 민족은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라 없이 온 열방에 흩어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이사야 66:8) 라는 말씀처럼 2000년 동안 없었던 나라가 1948년 5월 14일 건국 되었습니다.

나라의 회복과 더불어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언어, 절기 등이 회복 되고 있으며 예수님 당시의 모습을 지금 보는 것과 같이 말씀과 언약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지난 2천여 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핍박 (십자군 전쟁,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육적 회복을 위하여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실질적으로도 도와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1:25-26)

이스라엘로부터 복음이 이방에게로 흘러왔고, 이제 회복되므로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이때 이스라엘이 온전한 구원을 얻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3:39)의 말씀을 외치기 위하여 한국 교회가 함께 협력하여 달려나가야 할 것 입니다. 


왜 교회가 알리야를 도와야하는가요?

이스라엘의 회복은 정치적인 관점이나 종교적인 관점이 아닌, 성경 말씀의 회복에 관한 관점에서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1)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서 하신 예언이 다 이루어질 때 만물이 온전히 회복되며 주님이 오신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가운데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전체적으로 약 700번, 구체적으로 161번이나 강조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로 흩어졌다가 때가 되면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방들이며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0)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등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함께 이 일에 손과 발이 되어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왔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열방가운데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나를 사용하소서!" 고백하여 쓰임받은 마리아처럼 한국 교회도 열방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한국 교회가, 제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소서"



알리야를 돕기 위한 성경적 방법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고토로 데려오겠다는 구절이 700개 이상 된다.
그리고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 특히 서구교회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해왔다. 

특히 알리야 담당 장관에 에티오피아계 유대인 프니나 타마나가 새로 임명되면서 그동안 미뤄져 왔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이 승인돼 올해 말까지 2천 명이 알리야 하게 됐다. 

(기사 참조: http://krmnews.tv/2020/08/20/aliyah-2)

전 세계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담당하는 기구는 쥬이시 에이전시(Jewish Agency)이다.

1897년 테오도르 허츨이 세계 시오니스트 의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를 피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구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1929년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던 땅이 대영제국의 통치 하에 있을 때 세계 시오니스트 의회의 정치적인 운영을 맡기 위해 쥬이시 에이전시가 설립되었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에는 정치적 역할을 내려놓고 전 세계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정부를 연결하는 플랫폼 기구로 변화되었다. 

1929년 부터 지금까지 3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고토로 알리야시킨 쥬이시 에이전시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알리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고, 2016년에 800여 명의 이스라엘 직원과 450여 명의 전 세계 사절단을 두고 알리야를 돕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로 알리야한 사람들의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에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을 경험하도록 데려와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쥬이시 에이전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유대교 종파들을 포용하기 위해 “다원주의에 대한 헌신의 일환으로 쥬이시 에이전시는 이스라엘의 개혁(Reformed), 보수(Conservative) 및 현대 유대교(Modern Judaism) 흐름을 지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치관을 이스라엘 내에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한 정체성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개혁, 보수 현대 유대교에서는 진보적인 해석으로 LGBT와 페미니즘을 수용하고 있고, 신을 믿는 어떤 이들이라도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인정해 준다. 

바로 이런 부분이 이스라엘 내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정통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적인 유대교, 양측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인은 더이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팔라쉬 무라)과 스파르딤 유대인(아누심)의 알리야 승인이 논란이 많은 이유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이라 치부하기 때문에 알리야를 했던 사람도 나중에 발각되어 시민권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올 연말까지 알리야하게 될 팔라쉬 무라 유대인들도 이스라엘 입국과 함께 2년 간 유대교 개종 과정을 거치게 된다.
2년 동안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임이 밝혀진다면, 시민권이 박탈되고 추방될 수 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웠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있다.
기도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많은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고 있으며,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다.
쥬이시 에이전시는 알리야의 관문을 지키고 담당하는 자들로서 흩어져 있는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까지 중요한 사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런 사명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쥬이시 에이전시가 이스라엘 정부와 함께 성경적 가치관이 아닌 진보적인 세속주의 하에 운영 되며, 예수님을 믿는 혈통적 유대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2020년, 전 세계 유대인 중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의 수가 제일 많은 이 때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의 이끄심을 구하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수십 년 동안 기독교 단체들은 쥬이시 에이전시와 함께 알리야의 사명을 감당해 왔다. 바라는 것은 이 때가 전 세계 기독교 단체들의 영향력으로 쥬이시 에이전시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길 기도한다.


[이스라엘] 알리야(עֲלִיָּה ,Aliyah)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말까지 해외에 흩어져 있는 9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열방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알리야(עֲלִיָּה ,Aliyah)’라고 한다. 히브리어 원어로 알리야는 ‘올라가다’로 ‘하나님께 올라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4)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셨지만,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넓게는 약 700구절, 구체적으로 명시한 말씀은 약 161구절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위하여 기도하자.

출애굽기 19장 4~6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말씀하신 하나님,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주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순조롭게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게 해주시고 참 구원과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리다

예리다(ירידה yerida , "혈통")는 이스라엘 국가 (종교 문서에서는 이스라엘 땅 )에서 이주한 이스라엘 유대인 입니다.
예리다는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의미하는 알리야( עליה , 직역 : "상승") 의 반대입니다 .
시온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예리다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 이며 이 용어는 다소 경멸적입니다.
[1] 비유대인 이스라엘인의 이주는 "예리다"라는 용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민의 일반적인 이유는 높은 생활비,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폭력아랍-이스라엘 갈등 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 학문적 또는 직업적 야망,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환멸 등입니다. [2]

이스라엘에서 온 이민자를 요르딤 ("[이스라엘에서] 내려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olim
("[이스라엘으로] 올라가는 자들")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히브리어 "Yored"("하강"을 의미)의 사용은 Torah에서 가져온 용어의 현대 적인 갱신 입니다 . ,
그리고 내가 또한 너를 다시 끌어올리겠다" 창세기 46:4, " ויהי רעב בארץ; וירד אברם מצרימה לגור שם כי-כבד ץרע에 אבה לגור שם כי-כבד ץרע ") 기근이 심하므로 거기에서 살게 하셨느니라." 창세기 12:10), 그리고 미슈나 에서 : "", 그리고 탈무드 에서 " ארץ ישראל גבוה מכל הארצות "(이스라엘 땅은 [다른] 모든 땅보다 높음).

성경에서 최초의 1 은 아브라함이었고, 후에 요셉과 야곱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에서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3] 랍비 학자들은 나중에 이 원리를 yerida letsorech aliyah 로 해석 했는데, 이는 "상승하기 위해 가라앉는다"("바닥을 치다"라는 현대적 표현과 유사한 개념)로 번역됩니다. [4]

유태인 법 또는 Halakha 는 이스라엘에서 이민에 대한 특정 제한을 정의합니다.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 ) 에 따르면 굶주림 이 심할 경우에만 해외로 이민과 재정착이 허용됩니다 . Joseph Trani 는 기근이 없는 경우를 포함하여 결혼을 위해 이스라엘에서 이주하거나 토라를 공부하거나 자신을 부양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결정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에서 이주하거나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조차 정교회나 전통적인 유대교에서는 남성에게 합당한 행위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5]

시온주의 운동 의 시작 과 이스라엘 건국 사이에 오스만 제국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수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 [ 인용 필요 ] 첫 번째 알리야와 두 번째 알리야함께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자들이 처음 정착한 기간 동안 이민의 범위 는 전체 이민자의 약 40%( Joshua Kaniel 이 추정)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80~90%. [ 인용 필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이 기간 동안 많은 유럽계 유대인 이민자들이 몇 개월 만에 포기하고 떠났으며 종종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6] 4차 알리야 의 후반부인 1926-1928년 동안 의무 당국은 17,972명의 유대인 이민자를 기록했으며, 유대인 기구 는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약 1,100명을 더 세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당국은 14,607명의 유대인 이민자를 기록했습니다. [7]전체적으로 1923년에서 1948년 사이에 강제 팔레스타인에서 약 60,000명의 유태인이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온주의 프로젝트 시작부터 국가 수립까지 이주한 유태인의 총 수는 약 90,000명 정도였다. [8]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창47:7-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모래시계 : 위쪽 공간 아래쪽 공간으로 나뉘어, 사이의 좁은 구멍으로 중력에 의해 모래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
30초, 1분, 2분, 3분, 5분, 10분, 30분, 1시간, 1일, …
모래시계에 다른 일반 시계에서 볼 수 없는 인생의 흥망성쇠의 과정.
위쪽 모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아래 유리 공간에 무언가 이루어지고 쌓아지는 단순
모래 이동 아니.
물리학에서 이 모래의 이동을 모래의 유출이라.
인생을 모래시계에 적용, 모래의 유출을 인생의 시간 유출에 비유할 수.
한 번 아래쪽 공간으로 유출된 모래는 다시는 위쪽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기도,
계속 유출되어져 쌓여 가는 현재이기도, 모래시계 전체를 뒤집어 놓아서 새로운 시계
되어 모래를 다시 유출시킬 수 있는 미래 되기도.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그 인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단절되거나 고립돼 있는 것 아니.
모든 인생은 어제의 오늘인 과거와 내일의 오늘인 미래가 오늘이라는 접촉점과
교접점에서 시작되는 역사의 시작.
따라서 각자의 인생 역사는 그동안 살았던 현재가 축적된 과거의 집합이고 연속.
사람의 幸不幸은 누구와 어떻게 사귀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의해 판가름 나게 돼.
시간은 시간의 주인에게 報答을 하기도, 報復을 하기도.
나폴레옹 :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報復이다”
인생의 시간을 浪費한 죄 – 빠삐용
모래시계 같이 짧은 인생 살고 있는 우리,
한 뼘 길이 그림자 같은 인생 살고 있는 우리,
여름 아침 햇살에 사라져버릴 안개 같은 우리,
강건해야 80이면서 한 줌 흙인 우리,
태어나 배꼽으로 쉬던 숨 입으로 가쁜 숨 서너 차례면 멎어질 호흡 머잖은 우리에게 바울
사도를 통해 당부하시는 하나님 말씀,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악해져만 가고, 불확실한 미래 대비하는 삶에 대한 가르침 –
세월을 아끼라
성경에 이 말씀대로 세월을 아끼면서 악한 때를 경쟁적이고 투쟁적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의 후손 야곱.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속이는 자, 발꿈치 잡은 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하나님의 전사’, ‘이스라엘’
되기까지 입체적인 인물 된 야곱은 그 인생 고비마다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삶이었던 것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복받은 민족의 시조 될 것이 계시되었던
인물.
(창35:1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과 에서에게 예정해 놓으신 그대로 야곱이
야곱 되게 하셨.
(말1:2-3)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롬9:13,15)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창28:13-14)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47:7-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후로 요셉과 17년을 더 살다가 147세에 삶을 마친 야곱과 애굽의 왕 바로와 나눈
대화의 한 부분.
한글 성경에 야곱의 생을 ‘나그네’라, 영어 성경 pilgrimage 순례자의 삶이라.
야곱의 생애는 단순 나그네가 아니라 순례자였.
하나님의 뜻과 계획 담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생의 길 갔던 순례자.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나쳐가는 길 위의 이름 모를 사람일 뿐.
순례자는 그곳에 거하거나 언제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때가 있.
야곱이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고 하나님의 사명 받은 자들 모두 그랬.
전에 지나왔던 자기들 삶이 단지 지나가고 흘러가 잊혀진 과거가 아니기 때문.
그러기에 순례자의 삶은 어제와 오늘,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삶.
오늘 우리의 삶,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들이 모여서 되어진 결정체.
모래시계의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쌓아지는 것 같이.
그것이 나의 과거이고 나의 역사.
지금도 대화 중에 있는 과거와 오늘을 살고 있는 각자 새로운 역사를 써 가고 있는 중.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 반복 말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잊지 말라시는.
(신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신6:12,13)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과거를 잊을까 기억케 하시고 잊지 않게 하셔.
(신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암5:4,6)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을 이끌어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신 불뱀과 아말렉과
블레셋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 살리라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 말씀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만나서
과거와 대화하면서 과거의 잘못과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고 온전케 하라는 말씀.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과거끼리의 대화가 있어야 하고 현재끼리의 대화도
있어야.
대화에는 질문과 답이 있게 마련.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역사에도 질문과 답이 있어야.
‘내 신앙의 역사는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리 신앙 안에서 나와야.
우리 신앙에도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이 있.
이 역사책은 우리에게도 있지만 우리 신앙의 기록 보관소 하나님 보좌 앞 책들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져 있.
사람마다 반드시 있을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의 두께와 내용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사람은 그 분량과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같이 대하소설을 쓰고도 남을 정도이기도
할 반면 어떤 사람은 달랑 A4 용지 한 장 분량밖에 되지 않을 사람도 있.
사람들마다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 내용이 무언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기초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삶,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다가갔던 형제 사랑, …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보시고자 하신 이 모습들이 우리 믿음의 역사책에서 얼마나
많이 보여지는가.
이들 중 얼마나 많은 분량의 것들이 내 믿음의 역사책 chapter 되어져 있는가.
훗날 하나님 보좌 앞에 이것이 하나님 보좌 앞의 책에 기록되어져 있는 내용들.
때때로 내 신앙의 역사책인 일기장과 생활기록부를 되읽어 보아야.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거기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기록되어져 있.
만족스러운 것들이 있는가 하면 보완해야 할 모습도 함께 있.
‘온고지신’ 말씀과 같이 과거의 경험과 지식과 시행착오를 거쳐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이
건설되어지기 때문.
하지만 과거를 잊으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세상도 교회도 과거에 붙잡혀서는 안 돼.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들 많.
과거를 기념하면서 과거를 찬양.
과거에 묶이지 않고 죄로 죽었어야 할 우리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리라
모래시계 인생인 우리의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아직 얼마나 남아 있는가
세상의 모래시계는 언제든 아무 때든 뒤집어 놓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지만,
우리 인생의 모래시계는 그럴 수 없.
어떤 방법으로도 뒤집어서 다시 시작되게 할 길 없.
오직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부활로 부활되어질 것인가에 따라 생명의 부활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되거나 사망의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될 수 있을 뿐.
그러기 위해 우리 아직 남겨져 있는 모래시계 인생을 무슨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명의 부활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기름 떨어뜨리지 않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삶을 아직 내 인생의 모래시계에 모래가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을 동안 내 신앙의 과거와 대화하면서 내 신앙 인생의 내일을 등잔불 꺼뜨리지 않고
기름 떨어뜨리지 않는 현숙하고 지혜로운 신부의 삶을 살아내야.






수요 성경 탐구 - 바다 (080223)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2623)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1923)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 같이
에베소서 5:15-18
찬송 / 복음송 -  하나님을 위하여

(엡5:15-18)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늘 7월 16일.
엊그제 새해맞이 했었는데 절반 여섯 달이 훌쩍 지나버렸고, 7월도 16일째.
엊그제 새해맞이였다면, 내일 모레면 크리스마스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
준비해야 할 것.
인생의 시간을 낭비한 죄로 살인 누명 쓰고 평생을 프랑스 영 아프리카 키니아
감옥에 – 빠삐용
영화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꿈 이야기가 영화 중반에 들어온 까닭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시간 낭비가 얼마나 중한 범죄인가를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죄인 살인죄에 비견시켜 고발하는 장면.
빠삐용 자신도 꿈에서 자신의 방탕하면서 낭비했던 젊은 날의 시간들을 스스로
유죄 평결 내리면서 뒤돌아 가서는 이후로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생이 마감되는
것을 원치 않았.
동서고금으로 인생의 시간을 터무니없이 허비하고 소비하고 낭비하면서 인생을
마친 사람들 많고도 많.
어떤 사람은 다음의 24시간을 맞으면서 당겨쓰면서 인생을 선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은 분초를 다투면서 밀려오는 시간에 떠밀려 수세적으로
방어적으로 살고 있.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밀물같이 밀려오는 시간들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쌓아져 남아 도는 시간들 부패되고 곰팡이 슬어 버려진 음식물 처럼
쓰레기 차에 실려 College Point 쓰레기 처리장에 쏟아져버리고 마는 시간들 많.
그렇게 버려지는 시간들이 사용되었던 용처를 보면,
나 자신, 자기 개인이 우상의 우두머리 되어서, 내 목숨 위하고, 내 배 즐겁게 하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것들이 우상의 우두머리 되어져 있는 것들.
(마6:25)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들.
(빌3:19) 저희의 신인 배를 위하고, 자기의 일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위한 땅의 일들.
이 우상의 우두머리를 즐겁게 해 주는 부차적 수단과 도구들이 우상의
나뭇가지들.
쾌락, 기호식품, 음란,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 유튜브, 돈, 마약,.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는 엡 5:15-18 하나님을 위하여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애니미즘(animism) 등 토속 신앙(土
俗信仰)을 비롯해서 연예, 스포츠, SNS 분야 등 각 분야에서 대중적 명성을 가신
사람들, 고급 승용차, 핸드백, 의류 등 명품 브랜드 물건들, 학위, 자녀, 스펙(spec),
건강, 취미 등을 위한 시간은 오히려 부족해서 오늘 우리들의 우상들을 위해
사용하려면 하루 시간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모순된 인생살이를 살고 있.
그래서 성경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인생들에게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선지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을
통해 인간이 주어진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똑같은 말씀으로
주셨.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세상으로 내보내신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시간, 나에게 주신 건강, 나에게 주신 재물, 나에게 주신 지식, 나에게
주신 명예,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지식과 명예를
사용하라셨.
찬양 인도자가 선곡했고 선창하고 있기 때문에 라디오에서 이미자씨나 조용필씨
노래 흘러나올 때 따라 부르듯 부르는 노래여서는 안 돼.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위해 사노라 찬양 한 것은 내가 그 삶
살겠노라 서원하면서 기도 한 것.
왜냐면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 까닭은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께 끝 다함
없는 빚진 자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주를 위해 살아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지 못한 것.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날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께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는 것도 주를 위해
살다가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17절) 말씀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그릇에 한정적으로 담아 주신 세월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범죄케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행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지혜 있는 자의 가장 우선인 삶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
말씀하신 까닭.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는 엡 5:15-18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있.
일찍이 모세 선지자도 이 말씀과 똑같이
(시90:9,10,12)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지나보낸 날들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삶의 내용들뿐이라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분노케 하면서 살던 일생이 그마저도 일식간에 다해버리기를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고.
우리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의 성적표가 작성되기 때문.
그렇게 작성된 우리 각자 인생의 성적표는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에
기록되어져.
마치 중고등학생 때 생활기록부에 나의 학교 생활 모든 것이 결론적으로
기록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선생님께 보여진 나의 모든 것, 나의 성적, 행동 사항, 장래 희망, 선생님의 생각과
의견,…
문제는 그렇게 쏜살같이 일식간에 다해버리고 난 하나님을 분노케 하기만 했던
삶의 내용들은 우리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의 ‘인생 성적표’로
작성되어져서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에 기록되어져.
(계20:12-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2:11,12)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하나님을 위하여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1223)


수요 성경 탐구 - 상 (賞) (070523)


수요 성경 탐구 - 복음 (062823)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부활하신 예수님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으셨.
복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에게만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도 세 번만 나타나셨.
(요21:13,14)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가 11사도와 함께 군중 앞에서 설교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대다수는 보지 못했
(고전15:3-8)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6)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그 후로 불과 10여일이 지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120여 명.
(행1:11-15)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고전15:6)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죽었으며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 있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고, 승천하시는 주님 보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믿음에 불이익 아니지만
기도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 현장에 임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은 영적 자산 손실.
그렇게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더 많은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구우신 생선구이도 함께 했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말씀의 현장에도 있었.
말씀이신 주님이, 말씀으로 현현하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만나주셨고 말씀 나눠주고 계시기
때문.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온 중심 다해 읽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고 있.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가능했.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 승천하시면서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 말씀.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며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분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함께 있는 것보다
유익하다시는.
(요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예수님이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있게 될 유익이 무엇인가면, 예수님이 가셔서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시는 것
(요16:7)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보혜사를 보내 주시면, 그 보혜사가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하실
일이,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혜사가 오셔서 세상에 만연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책망하실 것이라시면서, 죄와 의와 책망이 무엇인가를 이어 설명 말씀.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요16:9-1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병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앉은뱅이 일어서게 하고, 장님 보게 하고, 귀머거리 듣게
하시려고 오신 것 아니.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quot;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quot; 되시기 위해 오셨.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믿지 않는 것이 죄.
제물되어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피 흘리셔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바로 그 자체.
의에 대하여
온 인류의 죄와 나의 죄를 위해 어린양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단번에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의.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임금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지옥은 사탄과 그 무리들을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죄를 용서받지 못한 인간들이
그들과 포함되어 죽임을 당할 그것이 심판.
이 세 가지, 죄가 무엇이고 의는 무엇이며 심판은 무엇인지를 알도록 가르치시고 깨우쳐 주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
그러므로,
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의, 십자가에서 세상 죄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순종하는
것이 의이며,
심판, 죄를 회개치 않고 세상의 임금 따르는 자들 세상 임금 마귀가 받는 심판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말 하게.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직후에 유대인들을 두려워 숨어 지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 “성령을 받으라”
직접 성령받게 하셨고, 그렇게 예수님께 직접 성령 받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도 말씀.
(요20:21-23)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승천하시는 예수님 앞에 모여든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러므로 승천하시는 감람원이라는 산에 모인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신 말씀대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게 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 시작.
(요21:18)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한 마디 예수님 말씀이 성령받기 이전과 이후의 베드로 모습.
비단 베드로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 아니.
예수님 12 제자 모두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 곳곳에
그곳이 예루살렘이든, 유대든, 사마리아이든, 땅끝이든 주님의 이름과 복음 들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신 말씀에 순종했던 모든 사람에게 하셨던 말씀.
성령의 강림과 임재하심의 은혜의 권능을 받게 되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서 팔을 버려 남이 띠워준 띠에 이끌려 원하지 아니하는 곳일지라도 가게 될 거라셨.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은 그곳이 어딜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게 하신 어느 곳이든.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는 또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같은 이유의 말씀.
(요16:12-14)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은 가르쳐 이르시고 당부하실 것이 여전히 많지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성령
보혜사를 보내셔서 보혜사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우리에게 있게 하심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에 있게 하실
것인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알게 하실 것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은,
(요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지금까지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와 세상에 오셨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가시고자 승천하신 이유를 말씀.
성령 받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이미부터 알고 있는 우리,
그러므로 성령충만되어야.
성령의 인도하심 도우심으로라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지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사명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셨기
때문.
그 사명은 사명의 종합체인 복음 전파.
(마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사명 감당케 하셔서 우리로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사명을 마무리하고 완수케 하셔서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떠나셨고, 떠나셔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시되 충만케 하셨.
성령 받지 못해서 성령의 도우심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믿음 없.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을 들을 영의 귀가 없기 때문이고, 깨우쳐 받아들일 영의 마음이 없기 때문.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나게 하고, 그 믿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이라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셨던 이 모든 믿음과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방법과 방식, 나의 의지와 노력과 지식과 경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
우리에게 좋은 것 주셔서 유익하게 하시고자 우리 곁을 떠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신 것 아니.
그분의 영, 진리의 영, 자유케 하는 영, 보혜사 성령님 보내주셔서 언제나 항상 내주 교통하시면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권능과 지혜의 삶 살게 하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수요 성경 탐구 - 기도 (061423)

누가복음 6:12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앵무새 죽이기(롬7:22-23)
06-11-2023(주일)



수요 성경 탐구 - 구원 (060723)

수요 성경 탐구 - 엘리야와 세례 요한 (051723)


부활의 주님 승천하시기 전에 누가 24:49



수요 성경 탐구 - 비아 돌로로사 (051023)


수요 성경 탐구 - 사도와 제자 (050323)


수요 성경 탐구 - 사도와 제자 (042623)


본 믿음 들은 믿음(요한복음 20:29) (04-23- 2023)

https://www.youtube.com/watch?v=fVq3WDKhG_o




수요 성경 탐구 - 아벨의 피 사가랴의 피 (041923)


수요 성경 탐구 - 부활절 (041223)

로마서 8:34
"......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수요 성경 탐구 - 고난주간 예수님 행적 (040523)


(040223 Patris) 복음의 급박성 막 1:1,15. 357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마가복음은 말씀의 내용이 박진감 있게 전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유년기와 성장기를 다루지 않고 곧바로 복음 사역 현장으로
시작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의 시작 선언 동시 광야의 세례 요한의 주님 오실 길 준비케 하시는 장면
주의 오실 길을 곧게 준비케 하신 일이 세례 요한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케 하신 것
(막1:3-5)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 베푼 장면은
(막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혀갈 즈음부터 세례 베푸시는 사역과 함께 공생애 시작하신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과 그
내용과 형식이 같아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가까이 온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우선이 회개하는 것이라 말씀
(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서둘러 회개해야 하지만,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오히려 급작한 상황에서 어쩌면 회개할 시간이나 기회가 아예 없거나 제한적일
수 있다는 말씀
또는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말씀이기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긴박한 위기의 순간인 ‘천국 도래’의 심판의 시간이 빠른 속도로 가까와 오고 있는 그
마지막 순간을 대비해서 해야 할 것이 ‘회개’ 하는 것이라셨
예수께서 골고다 십자가 죽으심 며칠 전 하신 말씀 중에,
(눅17:32-33)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3년차 죽기 바로 앞 시점에서
이제 곧 예루살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시간이 가까운 때에 왜
예수님은 그 죽기 며칠 전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 말씀하시는가
소돔 고모라 때의 사건은 머잖아 이 땅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생생한 기억의 기록으로
가르침 말씀 주시려는 것
머잖아 이 땅에 소돔 멸망의 상황이 다시 일어나면 롯의 처가 당한 상황과 똑같은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기 때문
(눅19: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은,
(마24:37-40; 눅17:26-30)
(마24, 막13, 눅21장)
(벧후3:9-16)
노아 때도, 아브라함과 롯 때도 멸망의 심판이 임박해 있는 급박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롯의
사위들 처럼 농담으로 여기고만 있었.
롯의 복음을 농담으로 여긴 것이 롯의 사위들만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롯에게 직접 말씀
소알 성에 당도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계속 가라
소알 성에 안전하게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며 소돔에 대한 멸망을 지체시킬 것이라
(040223 Patris) 복음의 급박성 막 1:1,15. 357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안도와 평안 주시는 말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구주로 오셔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오신 분.
오셔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죄인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셨.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눅4:18,19)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셔
보내신 이의 뜻이 무언가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다시 살리시고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기다리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셨
그리고 이 구원은 소돔 고모라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우리는 역사의 끄트머리 성경의 말씀하신 마지막 때인
주님이 다시 오시마고 떠나신 후, 다시 오실 그 때와 날에 매우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주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면서 살아야
그런데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담아 놓고만 있다면 의미가 없
이 말씀들이 급박하고 긴장감 있는 운동성 있는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까닭은
왜냐면 그 날은 도적같이 올 것이기 때문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도둑같이 오리라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주님은 행동하라신
것이,
‘회개 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는 행동, 복음을 믿는 행동
지난 주 마가복음,
(막10:17-30)까지 부자 청년 말씀도 그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 채워진 사람은 그래서 자기 소유
물질이 주인 되어 있는 사람은 회개가 되지 않고, 회개 되지 않은 마음은 구원의 순간에 근심하면서 뒤돌아
가는 청년이
주께 나와 물음
(막10:17)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이 얻고자 하는 영생의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생하고자 마음의 發露가 아니
가진 것 많은 부자로 살고 있는 것이 만족스러워 이 풍진 세상에서 가진 것들로 즐기면서 영원토록
즐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그 방법을 찾아 주께 나왔
하지만 주님은 청년에게 주인을 바꾸라 말씀하셨
(막10:21)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신 말씀은 네 소유한 것들이 너의 주인 되어져 있는
너의 주종 관계를 바로 하라신 말씀
그리고 (막10:21) 그런 연후에 와서 나를 좇으라”신 말씀은 (막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을 하신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 회개하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 복음을 믿으라’
하지만 청년의 마음은 많은 재물 때문에 절대로 회개되지 않는 마음



3월 29일 수요 성경 탐구 - 발람 (032923)


3월 22일 수요 성경 탐구 - 아사셀을 위한 염소 (032223)


3월 15일 수요 성경 탐구 - 피(031523)


3월 8일 수요 성경 탐구 - 사순절 (030823)

3월 1일 수요 성경 탐구
사순절

요한복음 1:9, 11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2월 22일 수요 성경 탐구
재의 수요일


2월 19일(주일)

제목 / 내가 와서
성경 / 출애굽기 20:24



오늘 제목 ‘내가 와서…’는 말씀 구절의 영어 표현을 옮긴 것.
‘I will come to you - 내가 가서’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영어 표현 I will come to you는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으로 ‘내가 네게 임하여’, 개역 한글 : 강림하여,
공동번역 : 찾아가서, 새 번역, 현대인 : 내가 가서. - ‘내가 가서’
영어는 받는 사람의 편에서 구사되는 표현이 많.
우리말로는 ‘내가 가서’이지만, 영어로는 I will come to you, 거기에 있는 너희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
그런 의미로, 본문에서 주님이 어디에 임하시고 어디에 오신다시는가면,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고
기념되는 모든 곳에 오신다셨.
우리말로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로 되어 있는 이 부분은 영어 표현과 미묘한 차이가 있.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내가 내 이름을 높임 받도록 한 곳은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내가 갈 것이고, 가서 복을 주리라’신 말씀.
I cause : 시작과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오늘도 열방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사람들이 모이기는 해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실 곳에만 임하셔서, 내가 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셔.
(출20:24)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하나님의 성호가 높임 받고 하나님께서 경배 받으시는 사람들과 장소 조차도 하나님께서 cause,일으켜
주셔서 높임 받으시고 경배 받으시면서 복을 주시겠다시는.
그리고,
(출20:20)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시험하셔서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유를 말씀.
God has come to test you, so that the fear of God will be with you to keep you from sinning.&quot;
그렇게 오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하여금 죄에서 멀리 하게 하셔서
죄를 짓지 않게 하시겠다셔.
이 모든 것, 하나님을 기념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되게 하셔서 되어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 말씀.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로 선물의 믿음 주셔서 믿게 하시고 믿어져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시간 안에서 되어지게 하신 대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되어져 왔던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 주셔서 되어진 것.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되어진 어느 것도 내 계획과 의도대로 되어진 것 없.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되게 하신 결과대로 오늘까지 우리는 살아져 왔던 것.
(출20:24) 말씀을 근거로, 이 말씀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 아무 곳, 아무나에게서나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짐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께 예배는 아무나가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행하는 예배 모두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배 드리게 하신 곳에서 예배 드리게 하심 받은 자들이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예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에서 허락 받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곳에 오셔서 예배
받으시고 복 주신다시는.

(021923 Patris) 내가 와서… 출 20:24 334 아버지여 이 죄인을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오늘 우리 모인 이 곳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소이고, 여기에 모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아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고 기념하게 하신 순종의 예배자인 것을 확신하기.
그리고 우리의 그 확신이 그릇된 확신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일을 기다리면서 사는 한 주간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가 그래서 중요한 것.
경건의 흔적조차 없이 세상과 세상의 것 좇으면서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세상적으로 거룩한 질서 없이 살던
삶이 예배당에 와서야 잠깐 중단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이 본문 말씀에 합당한 사람들인가는 두려운
마음으로 비춰 보아야.
이 사람들처럼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가는 날이기 때문에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 부르며 예수님
찬양한다는 것만으로 거기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모든 것에 가셔서 복 주시겠다신
곳 되고, 복 받는 사람들 되게 하시겠는가도 본문 말씀에 냉혹하게 비춰 보아야.
팬데믹 이후로 줌Zoom Church가 많아졌고, Zoom 예배가 일상적 되어져 있지만, Zoom 예배는 예배를 이름
한 자기 편의주의적 종교 행위이고,
Zoom속에서 듣는 설교는 지적인 동의 이상 아니.
교회는 사람들에게 회개가 일어나게 하는 세상에서의 유일한 곳.
세상 어디에도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변화시킬 수 있는 곳 없.
하나님께서 찾으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임 받게 하신 곳에 친히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경배하는 자들이 모인 예배 현장에서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
우리가 그 예배자들 되어서, 우리가 모인 이 예배당에서 회개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개의 현장
되어져야.
우리 교회에 회개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는 교회를 몇 년 다니고 있으며, 그동안 우리에게 회개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교회 다닌 연수가 오래일수록 믿는 사람끼리만 만나는 경향.
그러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없게 돼.
지난 수요일 말씀,
산 위에서는 복음 사역 할 곳 없고 하나님 일을 할 곳도 없
세상으로 내려가야.
거기 죄인과 앉은뱅이와 절름발이와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장님들이 넘쳐나도록 많은 곳 죽은 자들을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 필요한 세상으로 내려가야.
죄인은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죄인.
이들 ‘죄인들’에게 소금의 복음 빛의 지리를 전하는 교회 현장이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이어야.
그들을 찾아서 소금 나누고 빛 나누는 삶이 소금의 삶, 빛의 삶.
오늘 거의 대다수 믿는 사람들이 ‘나홀로 신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
나 혼자 믿고 나만 구원 받으면 되는, 교회의 본질이 상실 당한 채 살고 있.
교회마다 예배당에서 보여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양이고,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이며, 여전히 집
나간 둘째 아들의 모습인 채로 교회당에서 보여지는 사람들 많을 것.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있게 하시고 하게 하시고 되게 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일으키셔서 그곳에서
새 창조의 거듭남의 사건이 있게 하신다시는 말씀.
그래서 새 창조를 위한 거듭남의 결과인 구원의 핵심은 죽어야 한다는 것.
아버지를 떠나 돌아온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 ‘스스로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
회개의 전형적 모형.
회개는 내가 스스로 돌이키고 돌아서야 되어지는 것.
내 결단과 의지로가 아니.
분명히 하자면,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여건과 형편과 환경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제공해 주신 것.

(021923 Patris) 내가 와서… 출 20:24 334 아버지여 이 죄인을

작은 아들이 자기 의지로 아버지 집을 떠나가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고자 작은 아들의 형편과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셨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自由意志에 순응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회개에 이르게 됐던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신 은혜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것도 회개케 하시는 은혜의 선물.
(창1장) 창조물들에게 ‘-있으라, -돼라, -하라’ 말씀으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셨.
그럼에도 인간 역사 대부분 사람은 자기 삶의 행적과 기록 어떤 것 하나 인간의 유익과 만족에 따라
선별적으로 선택되어져 오지 않은 것 없.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가 세우고 있는 자기의 나라가 있고, 자기가 오르고 있는 산이 있으며, 자기가 쌓고
있는 탑이 있.
더 높고 더 넓고 더 많고 더 풍요한 것으로 채우고 높이기 위해 날마다 분주하기만.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에의 자유의지일 뿐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방종이고 거역이고 범죄.
다시 한 번,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향한,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방향성이어야.
하나님께 역행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화와 멸망과 사망만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셨.
방주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응하여 방주를 만든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
복음의 말씀을 따라 방주 만들기에 함께 했던 오직 8명만.
노아와 노아 가족을 통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들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자유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거절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며 반항하던 모든 사람들은 물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
물 심판으로 멸망 당한 그들 중에는 노아의 형제 조카들, 친척들, 사돈의 팔촌들,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서
구경하곤 했을 것.
그러면서 노아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을 것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해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복 주신다시는 말씀.
회개한 마음으로 복음을 믿어 천국이 가까운 사람들, 천국을 침노한 사람들이라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으시는 하나님.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2월 15일 수요 성경 탐구

수요 성경 탐구 - 산 (山) (021523) 아라랏산

아라라트 산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표고 5137m의 산 입니다.
주봉우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표고 3896m의 봉우리를 소아라라트 산이라고 부르고 5137m의 주봉우리는 대아라라트 산이라고 부릅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뒤에 이 곳에서 표류했다고 여겨지며 12세기 경에 유럽인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아라라트 산은 옛부터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거주해온 지역의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기에는 아라라트 산기슭에 쿠르드인이나 터키인과 수백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했으나 오스만 제국 말기(1차 세계 대전 중)의 강제 이주로 터키 영내의 아르메니아인은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당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여지나 터키 정부는 현재까지도 학살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이 맺어져 오스만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게 되자 구러시아 제국령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은 아라라트 산기슭까지 영토에 포함시켜 아르메니아 국가를 독립시키는 운동에 나섰지만 이 때 획득한 영토는 터키 혁명군에 의해 다시 빼앗겼고 아르메니아인이 살던 구러시아 제국령도 적군의 침입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편입됩니다.

이후 아라라트 산은 터키령이 되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과거에 터키와 소련에 의해 성립된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도 아르메니아 국장의 중앙 부분에는 아라라트 산이 그려져 있으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와 함께 터키와의 주요한 분쟁꺼리로 남아있습니다.

(좌측 봉우리는 小아라라트 산, 중앙 봉우리는 大아라라트 산)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8686704&qb=7JWE6528656P7IKw&enc=utf8§ion=kin&rank=4&search_sort=0&spq=0)


아라라트산은 터키 동부, 이란 북부, 아르메니아 중서부 국경에 위치한 산이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떠내려가다 이곳에서 멈추었고, 그 배 조각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산이다.
산 정상의 30% 정도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해발 5,137m의 대아라라트(Greater Ararat) 산과 해발 3,896m의 소아라라트(Lesser Ararat) 산으로 구분되며, 산세가 높고 험준한 지형의 휴화산이다.
산 전체가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암과 화산 조각들로 덮여 있다.
주변은 완만한 경사의 평원을 이룬 고원지대로 초원이 많으며, 유목민들이 목축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아라라트산의 형성 시기는 지질학상으로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화산 폭발 시점에 근거해 볼 때 신제삼기(新第3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노아방주가 떠내려가다 멈춘 곳으로 유명하다.

지명유래에 관해서는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경 창세기 8장 4절에서 산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 아라(Ara) 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 아르메니아의 아리라트(Ayrarat) 지방을 아라라트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전자(前者)가 가장 유력하다.

바사인들은 노아의 산을 뜻하는 ‘구이누’로, 터키인들은 험한 산을 뜻하는 ‘아리다기’ 산이라고 부른다.
원래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앗수르식 이름은 ‘우라르투(Urartu)’이다.

아라라트산이 정확히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에 관한 주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경 속에서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아라라트산은 특정 산을 지칭한다기보다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인 아라라트 지역에 있는 산악지대라는 주장이 있다.
또 시리아와 이슬람 코란에서는 아라라트산이 오늘날 이란에 위치한 주디 산(Mount Judi)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와 서구 중세 유럽의 기독교에서는 역사학자 요세프스가 AD 1세기에 쓴 책에 근거해 현재 터키의 아라라트산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신화에서는 아라랏 산이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며, 1991년에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및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와 민족통일주의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지정되었다.

또 이곳은 "노아방주"에 대한 관심으로 고고학, 성서고고학 분야, 종교계 등에서 끊임없는 탐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아방주가 있었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여러 탐사들이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인 흔적은 찾지 못했다.

아라랏 산으로 가는 방법에는 주로 터키의 호수도시 (Van) 시(市)를 통해 가거나,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Yerevan)을 통해 가는 법, 이란 북부를 경유해 가는 법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라라트산 (두산백과)

노아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한 뒤 방주가 머물렀던 산(창 8:4).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의 중간 지대인 아르메니아의 고원에 위치한 아라랏 산맥의 한 봉우리로 추정(현재 아라랏 산으로 불리는 사화산의 높이는 해발 약 5,144m). 이곳은 고원으로 여기서부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아라스(아라크세스) 및 코룩 강이 흐른다. 성경에는 노아 방주 사건 외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두 아들이 부친을 살해하고 이곳에 도망한 기사(왕하 19:37; 사 37:38)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 중 바벨론을 멸망시킬 도구로 사용될 열국 중에 아라랏이 언급된다(렘 51:27-28).

[네이버 지식백과] 아라랏 [Ararat]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란과 아르메니아와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사화산이다.
이 산이 유명한 것은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아라랏 산은 지난 수백 년간 ‘노아의 방주’ 목격설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노아의 방주와 그 유물을 찾기 위해 탐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세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는 아라랏 산에 노아의 방주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탐험가들은 아라랏 산에서 발견한 나무, 그 밖의 자재들을 노아 방주의 일부분으로 주장하고 있고, 미국·러시아 비행사들이 찍은 항공사진을 근거로 아라랏 산 노아 방주의 존재를 최근까지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도 노아의 방주에 대한 구체적인 여러 증언이 나오고 있다.

성경에서도 여러 번 이 지역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창세기의 홍수 사건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해 악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를 구원해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홍수 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산이 바로 아라랏 산이다.

“그리하여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 위에 내려앉았다”(창세기 8:4).
성경은 노아가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됐다고 한다.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다”(창세기 9:20).
노아의 방주가 내려앉았다는 아라랏 산의 주변 지역은 포도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니네베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이 산헤립을 죽이고 이 지방으로 도망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르에체르가 그를 칼로 쳐 죽이고는 아라랏 땅으로 도망쳤다. 그의 아들 에사르 하똔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열왕기하 19:37).
이 이야기는 토빗기(토빗 1,21)나 이사야 예언서(이사 37,38)에도 잘 기록돼 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바빌론에 관해 예언할 때에도 이 지역의 언급이 나온다.
“그 땅에 깃발을 세우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팔을 불어라. 바빌론을 칠 민족들을 동원하고 그를 칠 왕국들 곧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크나즈를 불러들여라. 그를 칠 사령관을 임명하고 날개를 곤두세운 메뚜기 떼 같은 군마를 몰고 와라”(예레 51,27).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는 탐험가들의 아라랏 산에 대한 발견과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아라랏 산이 오늘의 지명 아라랏 산과 일치하고 있느냐는 논쟁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라랏 산의 정확한 위치뿐 아니라 노아와 홍수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구원과 사랑이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2월 8일 수요 성경 탐구
창세기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월 1일 수요 성경 탐구 바벨탑과 언어

창세기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바벨탑 사건

성과 대를 쌓아
- 여기서 '성'(이르)은 '도시', '성읍'을 의미하며 '대'(믹달)는 '탑'을 의미한다.
이는 곧 대제국 건설과 이를 기념하는 탑을 건설하려 한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건축 공사를 실행한 주체는 니므롯 왕조(10:8, 9, 10, 11, 1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 14:13)고 한 사단의 자만과도 같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경고 하셨다 (마 11:23)

우리 이름을 내고
-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 동기로 무실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준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이로니칼하게도 자신을 드러냄 없이 주를 위해 겸허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빛나고 있다(히 11:4-40).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바벨탑 건축의 두번째 동기로 가인의 후예들이 가인이 받은 땅에서의 유리 방황하는 저주(4:12)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번성하여 땅에 널리 퍼지고 충만하는 것이었지 결코 각 개체들의 자주권이 억압당하는 세계적 단일 제국 형성에 있지아니 하였다(1:28; 9:1).

1월 29일 주일 설교문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막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물고기 잡이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는 고기잡이에서 천국 보화 진주잡이, 진주 발견한 진주 장수 된 것과
같은 사람들.
고기잡이 하고 고기 잡이 위해 그물 깁는 바쁜 중에 나타나신 예수께 서 ‘나를 따르라 ‘ 부르시자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 나선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는 이후로 ‘사람 낚는 천국 보화
진주 장수’의 삶으로 변화된 사람들.
바닷가 고기잡이 어부에게 배와 그물은 그가 가진 소유의 중요한 전부.
이 전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결정은,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른 것과,
밭의 보화를 사기 위해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이 장삿꾼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들을 산 것은 한 가지로 같은 믿음의 행위.
(창12:1) 아브라함에게’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셨을 때 (창12:4)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막10: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마12:48,50; 막3:33,35)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아버지와 형제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를 떠나고, 보화 감춰진 밭과 좋은 진주 사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모든 소유를 다 파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신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나를 따르라’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갔던 사람들의 결국은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 되어졌고 천국 진주 문을 열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
더 결정적 상황에서의 (마19장) 부자 청년 이야기는 이와 반대적 말씀
(마19:2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셨지만, 부자 청년은 날마다 눈에 보이는 자기 소유의 보화에
가려벼 보이지 않는 천국 보화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
본문 바로 앞 구절 말씀
(마4:16,1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선포하며 전파하고 다니셨.
(막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 말씀
(막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마3:6-10)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믿으라시면서 복음을 믿기에 앞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
성경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를 많은 곳에서 보여주셔.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7:14 ; 눅13:23,2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벧전3:20)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애굽에서 나온 603,550명 장정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수는 단 2명
(눅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
광야라는 교회에서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깨닫지 못.
오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고 들어가게 될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 말씀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적되 매우 적다고 주님께서
혼인 잔치 비유에서 말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그러나 택함 입은 자는 적을 것이라셨.
얼마나 적은가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장정만 60만이 청함을 받아서 광야로 나지만 그러나 그 장정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 숫자는 단 둘 뿐이었.
그러면 우리가 그 60만 가운데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60만 명 교인 광야 교회에서 가나안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두 명이 전부였는데,
이 시대 교회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단순 비교는 성립되지도 않고 위험한 논리일지라도,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하나님께서 직접 보이시는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던 60만 교인 교회에서 두
명이라면, 지금 10000명 교회에서는, 3천 명 교회에서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기독교인은 많아졌지만 기독교인라 하여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는 것 아니.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실제는 종교인의 활동일 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아니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 끝에 천국을 들어가지를 못하고 마는 기독교인이 적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해 주셨.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이스라엘은 억울할 것.
자기들은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광야로 나왔고 광야 생활 하는 것도 믿음으로 했었다고 믿기 때문.
하지만 요즘 출애굽기를 다시 면밀히 읽고 있는 동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순서에 따라 진행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피해 홍해를 건넌 감격과 기쁨으로 모세와 미리암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사흘 길 후
마라에서부터 이스라엘은 불만과 불평과 원성의 연속이었음에서 벌써 알 수 있.
애굽에서는 고기가마 곁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마실 것도 걱정 없었는데 이 광야에 데리고 나와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러나 믿지 않았던 것이 결론.
3500년 전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
그러므로 믿음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면 정말 믿음이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왜냐면,
(살후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셨기 때문.
이 말씀을 근거로, 예배 드리고 성경 보고 기도 하고 찬양 부르는 행위가 내 믿음의 굳건함의 증표라
단정하지 마시기.
어쩌면 그것은 믿는 것과 상관 없는 종교적 행위인 것이고,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시대 많고도 많.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
이 시대 사람들도 종교적인 행위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
유기성 목사님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한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한들 그것이 모슨 소용.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은 것이 층층이 쌓아져 성경 지식이 바벨탑 우상 되어져 있을 뿐, 그렇다 하여
행동의 변화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면서.
예배가 시간표적 행사 되지 않도록 해야.
자칫 찬양도, 기도도, 십일조도 행위이고 내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행위일 수.
그렇다면 그 행사적 행위들이 믿음일 수는 없.
믿음은 마음 안에서 생성되고 자라서 작동되어야 그것이 삶의 내용으로 드러나지는 것.
마음으로 믿는 것과 행위로 예배 드리고 기도 하고 찬양 하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은 것이 입으로 시인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구원에 이르느니라셨.
천국은 청함을 받은 자의 것이 아니.
천국은 택함 입은 믿음 있는 자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는 곳.
종교인이나 종교 행위자들이 들어가는 곳 아니.
오직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그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땅의 보화를 사고 진주를 살 수.
그 보화에 대한 믿음과 진주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바꿀 수 있는 것이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의 행위.
믿음 없는 부자 젊은 청년은 바로 앞에 있는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자기 소유를 놓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의 문 앞에서 뒤돌아 가고 말았던 슬프고 안타까운 증인.
(시19: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시편은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 내 소유라 했는데,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더 좋은 보화 발견한 바울 사도은 지금까지의 보화였던 세상의 것들은 배설물 같이 여기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보니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부귀영화들, 의롭고 선하게 산 모든 것을
해로 여겨지고,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말씀.
그러므로 나에게 바울 사도가 배설물로 여긴 것들이 많을수록 천국은 그만큼 멀어.
나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천국은 그만큼 멀어.
세상의 무거운 짐 지고는 천국까지 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세상 무거운 짐 짊어지고 갈 길 먼
우리에게 그래서 예수님 말씀.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지만 이 말씀 따르지 않고 세상 등짐 내려놓지 않고 계속 가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전도서는 그 세상
등짐이 누구 것 될 것인지를 알려 주었.
(전6:1,2)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2023년 1월 25일(수)

수요 성경 탐구 - 하나님의 이름과 십자가 성취 (012523)



2023년 1월 18일(수)

수요 성경 탐구 - 하나님의 이름 (011823)


2023년 1월 11일(수)

수요 성경 탐구 - 산상수훈 (팔복) (011123)


2023년 1월 8일 주일 설교 황선민목사
주현 후 제1주

동영상 자료 / https://youtu.be/AQLOMcMo6kI

내 나무의 열매 (사 5:1, 2, 7; 눅 13:6-9; 요 15:1-10; 사 5:1-10)

찬송 / 308장(넓은 들에 익은 곡식)

동영상 자료 / https://youtu.be/AQLOMcMo6kI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심히 기름진 땅을 노래하며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파고 돌을 거두어 낸 심히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되 무엇을 더할 것이 없도록 최고 최상의 포도원을 만들어주셨다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2절 후미에서 극상품 포도나무들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고 계셨지만, 극상품 포도나무들이 맺은 포도는 먹지 못할 들포도였음을 보시고는 너희가 나 하나님과 내가 지극정성으로 만들놓은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셔.
그래서 본문의 주변 말씀은 심판의 말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계속 있을 무서운 심판.
본문 말씀에 어느 정도의 마음 흔들림이 있는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지만, 아무 감각 없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그 이유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서라기 보다 우리 마음에 말씀에 대한 타성으로 굳어진 굳은 살들이 박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많.
오늘도 당장 부담스런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는 뽑혀지고 잘라져서 불살라져 버리느냐 그대로 있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말씀에 담긴 무거운 짓누름이 있기 보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있는 편안한 말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空手來空手去 이상 아닐 수도 있.
오늘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심히 기름진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어 주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고 기다리시는 좋은 포도를 얼마나 맺었고 지금도 맺으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무슨 생각을 얼마나 어떻게 하면서 하루를 사는가 날마다 나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보면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다림줄에 달아 보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진리와 참된 것에 나를 비교하면서 살고 있으면, 얼마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나를 연결시키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시간 동안 얼마나 거룩하고 성결한 삶의 내용으로 내가 채워지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얼마나 구원 받은 확신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면서 수고하는가
내 속에나 내 주변에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엔가 무엇인가 있는가
새벽예배 참여하고, 수요예배, 주일예배 참여하는 것이 그 증거인가
매일 양식의 말씀 읽는 것이 그 증거인가
지금 얘기되어진 내용들이 피상적인 것 같지만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거룩해지는 것에 관심 두지 않
말씀을 알고 하나님 믿는 나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우기면서 주장한다면 그 증거를 무엇으로 보일 수 있는가도 염두에 두어야
나 사는 삶의 내용에 대해 두려워해야.
내 사는 삶의 내용에 따라 두렵고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
그래서 그 삶에 삶의 열매가 없고, 신앙의 열매가 없다면, 나에게 열매 없는 것에 두려움 느껴야.
(사5장; 요15장; 눅13장)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나무이신 그리스도에 접목된 자들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포도원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인 신자들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시는 말씀.
그러면서
너희가 진정 포도원 안에서 농부 아버지의 말씀을 거름으로 받아 그리스도이신 나무에 붙어 있어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속해 있다면 그 증거는 참 포도 열매로 맺어져 나타나 보여지게 될 것이라 말씀.
왜 우리가 지금 이 말을 강조하면서 나누고 있는가는 머잖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었던 삶의 내용이
열매로 맺혀진 결과를 주님께 검사 받아야 하는 날을 맞게 될 것이기 떼문.
그리고 열매 검수 결과에 의해 우리의 죽음 이후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물어보고 답해야.

만일 내 가지에 맺혀져 있는 열매가 없다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을 다시 새겨야.
(사5:5,6)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우리 모두 포도원의 나무라셨고, (요15장)에서는 포도나무 가지라셨는데, 포도 송이는 포도 나무 가지에
달리는데, 열매가 달려야 하는 가지인 나에게 열매가 맺혀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가지인 나에게 맺혀 있는 열매가 없다면 그 날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게 되는가.
(사5.1-10) 5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열매가 없는 사람, 열매를 맺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이고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버려져 마른 나무조각 되어져서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잘라져 땅에 버려져 짓밟히다가 불에 타 사라져버린다셨.
예수님 말씀하셨.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두려워 할 것은 우리 영과 혼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언젠가 내가 죽으면 그 날에 내 몸을 죽이셨을 뿐 아니라 우리 영(과 혼)을 천국에 데려가시거나, 지옥 불에
던져버리실 분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두려워할 분이라신 말씀.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이와 방탕에 안주하고 있을 때 지옥 심판을 피해가지 못할 수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성경이 말씀하신 진리.
다른 모든 교회에 있는 지옥 심판이 우리 교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
다른 모든 가정에 있는 지옥 심판이 내 가정에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
교회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가정마다 회심되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두려워해야.
교회마다 가정마다 젊은 자녀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신실함 없고 경건치 못한 부모 아래서 신앙적으로
방치되어져 성장되는 것도 위험하고 두려운 일.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세상의 집과 일터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덩달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면서 사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곳에 함께 손 잡고 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하면서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면 또 종교적 가면을 쓰고 교회에 나와서 거룩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사람들.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포도원에 포도이기는 하지만 먹지 못할 들포도라고
하신 것.
(사5:4,5)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사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그런데 더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고 이제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시고 계시지만,
맺은 것이 들포도인 사람들에게 뭐라시는가.
(사5: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이라셔.
가옥에 가옥 이으면서 큰 집 짓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 없도록 장사 크게 하면서,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 자기 왕국에서 자기가 하나님인 사람들이 들포도 맺는 사람들이라셔.
이런 들포도 맺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
이들에게 禍가 있게 하셔서,
(사5:9,10)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내 나무의 열매 (사5:1,2,7; 눅13:6-9; 요15:1-10; 사 5:1-10) 308 넓은 들에 익은 곡식
가옥에 가옥을 이으면서 지어 놓은 크고 아름다운 집에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라셔.
열훌 갈이 포도원에서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고, 그 큰 논과 밭의 사업장에서 고작 한 에바의 수익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
극상품으로 만들어 주신 극상품 포도나무가 하나님께 들포도 맺어 드린 결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시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고 경험케 하시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아름다운 화음과 화합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일이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
우리 각 개인의 삶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 놀랍기만.
아들 성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 가르침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가르침이 삶이 현장 곳곳에 적용되어 열매 맺어지게 하도록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일을
함께 하셔.
이 말씀이 (갈5:22,23)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항상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셨.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참으로 난해한 문제는 삼위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번번이 죄에
넘어지고 죄에 패배하곤 한다는 것.
내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는가는 내 안에 죄를 더
좋아하고 죄가 주는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기 때문.
그래서 (약2:15-16)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죄의 열매들, 땅의 지체들을 사랑하지 말라신 것.
그것들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고만 있다면, 죄와 타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도 그 사람을 모른다 하시는 사람.
내 안에 세상과 사람의 우상들이 가득한 사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이기고자 struggle with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신 일을 마무리
하실 것.
그리고 그 마무리는 노력하고 애쓰는 자들에게 사망의 심판에 이르게 하는 죄에 승리하게 하시는 것.
죄에 대해 이겨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과 쾌감을 우리는 알아.
똑같은 죄에 대하여 졌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이겨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아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하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 맺는 나무, 열매 맺힌 가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기름 부으셨는데,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나에게서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이 보이겠는가, 내 주위에, 나한테서 하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지고, 그리스도의 흔적 있는 말과 행동이 보여지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때, 나의 행위를 볼 때,
내가 영원한 것을 보고 확신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영원한 것을 보고 만질
수 있는가
내가 성경적인 방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도 나의 성경적 삶의 방식에 영향 받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접하고 대하는 동안 영적이든 세상적이든 도움 받고, 믿음으로의 진행성이 있으며,
열매 풍성히 맺혀진 나무이고 가지 되어지는가
나의 삶의 어느 것으로라도 그 열매를 보여 줄 수 있는가
내가 무슨 열매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아무 열매도 보여줄 것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맺혀진 열매 없는 가지는 죽은 가지, 부러진 가지, 꺾여진 가지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한 번도 푸르러 본 적 없는 신앙
가지인 것 같이 있으면서 한 번도 열매 맺어보지 못한 가지
그리스도인은 가지여야 하고, 가지라면, 가지이기 위해서는 열매가 맺혀져 있어야 한다셨는데.
어떤 가지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
믿음이 아무리 좋은 신앙인이라도 신앙의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없다는.

신앙인에게 믿음의 열매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인 실험적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이
과정에서 맺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삶 자체인 성령의 열매 맺게 하시는 생명 주심의 결과물.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우리에게 맺혀지되 9가지나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의지와 노력과 성품으로 맺어질 수 있는 것 없어.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어떤 열매도 성령의 함께 하시고 도우심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참으면서 화평케 할 수 없으며, 자비와
양선과 온유할 수는 더욱 없고, 충성도 절제도 할 수 없.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영광(榮光)


영광(카보드 כָּבוֹד)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보드 כָּבוֹד>이다.
이 단어는 동사 어근 <카베드 כבד>에서 파생한 명사다.
형용사 <카베드 כבד>도 동사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동사와 그 파생어는 도합 386회나 언급된다.
어근 <카베드>의 뜻은 ‘무겁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문자의 뜻 그대로 무게를 나타내어 사용된 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그 의기가 확장되어 비유법으로 사용된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제사장 엘리의 비둔함을 표현하는 경우(삼상4:18)
압살롬의 머리카락도 무성하여 그 무게가 매우 무거웠음을 묘사하는 경우(삼하14:26)에 문자의 뜻 그대로 사용되었다.

형용사 <카베드>는 상황 파악이 둔하여 고집을 부리는 파라오를 가리켜 일곱 군데에서 사용되었다(출 7:14; 8:15[힙11], 32[28]; 9:7, 34; 10:1; 삼상 6:6).

이와 마찬가지로 잘 듣지 못하는 귀(사 6:10; 59:1; 슥 7:11)와 말을 잘 못하는 혀(출 4:10),
잘 보지 못하는 눈(창 48:10)과 일에 지친 손(출 17:12)을 가리키기도 한다.

노역이 과중하여 힘든 상황(출 5:9)이나 전쟁 상황(삿 20:34)이나 흉년이 극심한 상황(창 41:31)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난은 주의 손이 무겁게 내리 누르는 상황이다(삼상 5:6, 11; 시 32:4).
어떤 사람이 손으로 타인을 억압할 때도 이 동사가 쓰인다(삿 1:35; 욥 33:7).
고의는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도 <카베드>란 단어로 묘사한다(삼하 13:25; 대하 10:10, 14; 25:19; 느5:15).

고난을 ‘무거운<카베드> 멍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왕상 12:4; 대하 10:4, 11).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가볍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무겁다(창 18:20; 참. 사 24:20; 시 38:4[힙5]; 욥 6:3, 등).
죄짐을 진 사람은 힘겹게 산다(사 1:4; 잠 27:3).
아브라함이 매우 무겁다고 표현할 경우에는 그의 재산이 많아졌음을 나타냈다(창 13:2).
야곱의 재산도 많아지자 <카보드>란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재산이 많이 불어났음을 표현한다(창 31:1).

이 동사가 니팔이나 피엘의 형태로 사용되면 ‘명예롭다 / 존경하다 / 영광스럽다’란 뜻으로 확장이 된다(민 22:15).
부유하거나 장수하는 것은 의롭게 살아온 삶의 보상이다(대상 29:28, 등).
인품의 중후함이 없이 영광을 받는 것은 오히려 재앙을 초래한다(잠 21:21; 22:4; 26:1, 등).
중요한 지위에 있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출 20:12; 말 1:6).
사회에서 중요한 신분의 사람은 무거운 사람으로서 존경받는 어른이 된다.
다윗의 삼십인 용사와 같이 용맹스럽고 의리 있는 인물들을 존경받을 만하다(왕상 11:21).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명예롭다(창 49:6; 시 108:1[힙2]; 렘 2:11).
이 단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가장 중요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의롭고 신실하신 분이며 공정한 심판자이며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의 이름은 모든 피조물의 예배를 받으며 만유에게서 영광을 받는다(시 66:2; 79:9; 사 40:5).
야훼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시다(시 24:7~10).
그러기에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옷은 너무나 아름답고 영광스럽다(출 28:2, 40).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위대한 나라는 레바논의 송백처럼 명예롭다(사 8:7; 10:18).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출 16:7, 10; 40:34; 민 14:10; 사 6:3; 겔 9:3; 스 10:10).
‘야훼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은 민 14:10; 16:19에서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표상하기도 한다(참조. 민 14:21, 22).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을 체험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나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꼈는데 성서 저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카보드>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광야의 성막을 완공했을 때 야훼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났다.
야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므로 가장 비중이 크신 분이시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카보드>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떠한 피조물도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크고 중요하신 분이시다.

인간은 죄 속에 빠져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이기주의에 빠져 살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서 중요했던 그 비중을 잃어 버리고 하잖은 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받지 못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미물로 전락한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워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 보혈로 죄의 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은총을 받고 창세기 1장 28절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금 만물의 영장의 지위를 회복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지위의 존재로 격상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신학은 기필코 영광의 신학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광야를 걸어가서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과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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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
-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열 십(十)
- 사람이 무슨 일을 잘 감당하여 모두에게 덕을 세웠을 때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솝 이야기) 영리한 개구리와 독수리의 대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나의 아이디어!
 그 결과 영리한 개구리는 하늘 위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장 자료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708. 492)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 카타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 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로 돌아가는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708. 492)

󰃨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보고 불쌍히 여겨(3708. 4697)

󰃨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9:52, 53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