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설교 자료(신년주일, 2월 9일, 3월 9일, 4월 20일 부활주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활주일 설교(04-20-2025)

부활의 증인(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19세기 기독교는 초월 신앙을 간과한 내재 신앙이 주를 이루었다.
20세기 들어 초월 신앙이 강조되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는 스위스의 ‘에밀 브루너’(1889-1966)이다.
부르너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에 있다고 하였다(<만남으로서의 진리>, 스탠리 그렌츠, <20세기 신학>에서 재인용).

부르너는 교리나 신학이나 심지어 사도들의 증거조차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교제를 위한 2차적 도구들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가 없는 교리, 신학, 성경까지도 ‘신학주의’(Theologismus)라는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상당히 과격한 주장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아는 영생에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신앙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
첫째는 신앙의 과거
둘째는 신앙의 현재
셋째는 신앙의 미래


2025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들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부활 신앙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이 무엇인가를 여러 차례 가르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죽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막을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분위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들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급하게 나사로의 집으로부터 예수님을 급하게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머물다가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가시면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맞이합니다.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세 가지 반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같이 나가서 영접하는 신앙
마리아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신앙
나사로와 같이 이미 무덤에 묻혀 있는 신앙
여러분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신앙인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신앙의 과거에 집착하는 유형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주님을 위하여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왜 좀 더 일찍 오셔서 오라비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을까 하고 그녀의 마음에 섭섭함과 원망과 안타까움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

마리아가 믿는 하나님은 가깝고도 먼 곳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내 믿음이 마리아와 같은 믿음은 아닐까요?
날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도 죽음 앞에서는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죽지 않았을텐데.......하며 미련과 아쉬움을 토로하는 믿음입니다.

마르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신앙의 현재에 집착하는 유형

마르다는 급하게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때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열심히 예수님을 찾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지막 부활 때에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에 문제의 해결을 경험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때에는 누구나 다 해결받습니다.
신앙은 현재가 중요합니다. 

나사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미 죽어서 나흘이 지나 무덤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장차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깨우치시면 십자가 사건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생명을 되찾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마리아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관심을 갖고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는 그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연락하여 빨리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하시며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지체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고 장례를 치룬 후에 마리아와 마르다는 왜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지 않으셨을까?

마리아는 실망했습니다.
낙심하여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도 집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며 아쉬워하면서도 막상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자 급하게 집안에서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을 때 마리아는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삐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짝사랑이었구나 하고 실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지벵서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선생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하고 원망한 듯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위로했습니다.
마르다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었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이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지 오시지 않았는지 아무런 반응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사로야 나오라  이렇게 외치셨을 때 나사로는 온 몸에 세마포를 두른 모습으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세 종류의 부활의 증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는 실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증인
마르다는 원망을 믿음으로 바꾸는 증인
나사로는 죽음을 생명을 바꾸는 증인

참된 부활의 증인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세 종류고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믿지 않는 사람(2:14)

14.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그것들이 허무맹랑한 일이고, 그것들을 알 수도 없어서입니다.
그것들은 ⁕영적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개역한글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공동번역 / 그러나 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적인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현대인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는 육적인 사람들(3:1)

1. 나로서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적인 사람들에게 하듯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육적인 사람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젖먹이들에게 하듯이 말했습니다.

새번역 /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공동번역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인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셋째는 영적인 사람(2:15)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공동번역 / 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현대인 / 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나사로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부활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부활의 증인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영적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라는 단어는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생명을 말합니다.
육체적인 생명은(사르크스) 호흡이 멈추면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생명은(조에)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헬라어의 생명에 관한 세 개의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 영(靈), 영묘할 영. 혼(魂), 넋 혼.  육(肉) 고기 육

육체(肉體)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스트롱번호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관련 성경 /목숨(마2:20, 막8:35, 롬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생명(마7:14), 이 세상의 삶(고전15:19), 생기(계11:11).



  • 요한복음 11:1-44

    부활주일을 일생동안 몇번 맞이하였습니까?
    제 경우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무려 76번 부활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주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하고 되묻습니다.
    부활주일 계란을 먹는 것,
    이른 새벽에 부활주일 연합예배에 참여한 것,
    여성들은 흰옷을 입고 모인 것,
    과연 이러한 경험들이 부활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평소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급하게 예수님을 청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며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를 치루고 사일이 지난 후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고,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나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로의 집안 식구들로부터 부활에 대한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마르다 급하게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이하여 하소연 합니다.
    셋째는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안장 되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실망한 마리아를 생각합니다.
    마르다에게서 시원섭섭한 마르다를 생각합니다.
    나사로에게서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생각합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누구이었을까요?
    저는 나사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실망이란 또 다른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실망할 수 있습니다.
    시원섭섭함이란 언제든지 내 생각과 내 뜻과 다를 때는 또다시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죽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2025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나는 부활에 대하여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실망 - 마리아

    부활에 대한 아쉬움 - 마르다

    부활에 대한 감격과 감사 - 나사로


    왜 집에 앉아 있었을까?
    예수님에 대한 실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며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는데 막상 오라비가 죽을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늦게 오셨다는 것에 대한 실망이라고 하겠습니다.

    가깝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셨습니까?
    가깝다는 말은 친밀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친밀하기 때문에 속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미랗기 마기 나는 쌉게ㄱ렇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활이란 헬라 단어



    ἔγερσις, εως, ἡ 1454 [ĕgĕrsis]

    • 부활, 마 27:5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부활, 빌 3: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 2.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1: 22, 2:31, 4:33, 17:18, 롬1:4, 6:5, 빌3:10, 히11:35, 벧전1:3, 3:21.
    • 3.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14:14, 20:35,36, 요 11:24, 23:6, 8, 24:15, 고전15:12이하, 히6:2, 계20:15이하.

    요한복음 11:25
    나는 부활이요(아나스타시스)  생명이니(조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상징적으로]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고후5:2.
    • 2. 거주, 주거
    • 3. [문자적으로, 천사에 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명.
    • 3.[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성 경: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Chat GPT에 질문한 결과

    부활이란?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1. 종교적 의미의 부활

    기독교에서의 부활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죄를 구원하고 영생을 약속하셨다고 믿습니다.

    • 성경의 기록: 신약성경(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부활절(Easter):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입니다.

    불교에서의 부활 개념

    불교에서는 기독교처럼 '부활' 개념이 강하지 않지만, **윤회(輪廻, Samsara)**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한 생이 끝나면 업(業, Karma)에 따라 새로운 생이 주어진다고 봅니다.

    이슬람교에서의 부활

    이슬람교에서도 부활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Qiyamah)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알라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2. 철학적·문학적 의미의 부활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나 재생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 철학적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사후 세계에 대한 논의에서 부활 개념이 등장합니다.
    • 문학에서: 개인의 회복, 사회의 재탄생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예: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꿈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려 하지만 결국 좌절하는 과정)

    3. 현대에서의 부활 개념

    오늘날 '부활'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서 쓰입니다.

    • 스포츠·정치에서: 한때 실패했지만 다시 성공하는 경우 "부활했다"라고 표현합니다.
    • 문화·예술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인기를 얻는 작품이나 유행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합니다. (예: 레트로 열풍)

    결론

    부활은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측면에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 새로운 시작, 재탄생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 교리이며, 이슬람교와 불교에서도 각각의 방식으로 부활이나 재생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세가지 시제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시제는 세가지로 언급된다.

    이미 얻은 구원(과거적 시제의 구원)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표현(현재적 시제의 구원)
    궁극적으로 얻게되는 구원(미래적인 시제의 구원)

    물론 구원의 개념이 세가지라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에 대하여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다만 성경에서는 구원의 시제적인 개념이 세가지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에베소서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구원의 과거형 시제(현재완료수동형)를 가르킨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에 함께 살리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현재완료수동형이다.
    즉 믿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는 자의 믿지 않는 자의 이미 받은 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롬5:9은 이미 얻은 의롭다함을 말하며, 골1:13-14는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사는 모두 과거형이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골3:9-10도 과거분사형이다. 즉 이미 옛사람을 벗었으며, 새사람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위에 기록한 성경구절보다 더 많은 성경구절들이 과거적인 시제로서 이미 받은 구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현재형의 구원을 함께 말하고 있다.

    구원의 현재적인 면과 현재에도 계속되는 진행적인 구원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이루라”라는 단어는 work out의 의미로 현재동사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고전1:18도 구원의 현재적 시제를 가르킨다.

    “구원을 얻는 우리”의 동사시제는 현재수동형 분사로 사용되었고 직역하면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라는 뜻이 되어지기 때문이다.(who are being saved)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성경은 이미 얻은 과거적인 구원의 개념뿐 아니라, 현재적인 시제를 갖는 구원의 개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은 장래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5:9)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특히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그 구원의 시제가 과거이든 현재이든, 장래이든, 인간의 구원의 수혜자이며,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심을 알아야만 한다.

    즉 인간은 구원에서 피동적인 입장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무조건 내가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확증이어야만 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나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 순간 순간의 현재진행형의 구원에 대한 연속적인 확증이어야만 한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이어야만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것이 과거의 시제만을 생각하는 형태의 구원, 즉 현재시제의 구원을 전혀 무시하는 믿음의 확증이나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내가 과거에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지, 내가 과거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지는 구원의 확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오래전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과거적인 사실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이미 얻었던 것이며,
    이 현재의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조건으로서 장래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확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인침과 보증이 될 수도 있으며, 아직 성령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얻은 구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최종적인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만 하는 책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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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16)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머리로 아는 경우 - 지식에 해당(지)
    가슴으로 아는 경우 - 감정에 해당(정)
    몸으로 아는 경우 - 삶의 경험에 해당(의)

    성경적인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오래 전 어느 스님과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울주군 온산면 덕신이 625번지에 온산제일교회에서 시무할 때 가끔 스님이 마을을 찾아와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시주를 받으려고 합니다.
    어느 날 저희 사택 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기에 "스님 제가 목사입니다" 라고 말했더니 두 손을 합장한 후에 뒤돌아서 가려고 하기에 아니 잠간 들아오셔서 냉수라도 마시고 가시라며 마루에 앉게 했습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드린 후 마침 사과가 있어서 사과를 드리고 사과를 깎기 위한 과도를 가지러 주방으로 가려는데 사과를 집어 들더니 스님의 옷자락에 쓱쓱 문지른 후에 사과를 먹는데 씨방이 있는 것까지 모두 먹었습니다.
    제가 스님에게 "제가 무식한 목사가 되어 잘 모르겠는데 불교에서는 사과를 그렇게 먹습니까?"
    그러자 스님의 대답은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스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다음에 마을을 방문할 때 다시 들리겠는데 그 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스님이 떠난 후에 과연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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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빛(마태복음 5:14-16)


    설교자가 왜 이런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가 하는 배경을 함께 가져야만 무엇을 강조하려는가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피드 백"이라고 합니다.

    지난 2월 9일에 "땅의 소금"이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이제까지 들었던 소금의 의미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방부제
    둘째는 조미료
    셋째는 제사용(레위기 2:13 - 소제의 제물에 소금을 치라)
    그런데 석회질이 많은 땅에 씨를 뿌리려면 먼저 석회질 땅(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 소금을 뿌린 후에 씨앗을 뿌려야 싹을 낼 수 있다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특이한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땅으로 비유하여 네 가지 마음 즉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길가와 같은 땅 - 악한 자가 와서 천국 복음을 빼앗는 것(천국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
    둘째는 돌이 많은 땅 -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오면 넘어지는 것(믿음의 연단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
    셋째는 가시떨기와 같은 땅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십일조를 왜 하는가? 헌금을 왜 하는가?)
    이러한 땅에 뿌려진 씨앗은 싹을 낼 수 있으나 잘 성장하지 못하여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거두려면 반드시 좋은 땅 즉 옥토에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땅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가 오셨으나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으니 너희도 와서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고 깨우치라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땅에 소금에 이어서 세상의 빛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십니다(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태양계에서 빛을 비출 수 있는 행성은 태양입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기 때문에 달빛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물체를 비발광체라고 하며 태양은 발광체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빛이 되십니다.
    죄인이 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빛이 되려면 너희 착한 행실을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이란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행하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리고 성으로 가던 어떤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있었습니다(누가복음 10:31-35)

    * 누가복음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누가복음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누가복음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한문자 사자성어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합니다.
    - 슬퍼할 측(側), 숨을 은(隱), 갈 지(之), 마음 심(心)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인생은 측은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합니다.
    따라서 측은지심을 '성령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양심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겨우 죽어서야 다른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볼 것을 보고 느낄 것을 느끼고 말할 것을 주장합니다.

    (예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이야기 중에 어느 노파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수호 천사가 그 노파의 행적을 살펴보던 중 단 한 번 어느 지나가던 배고픈 사람에게 양파를 한 뿌리 주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천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내려보내며 이 양파를 붙잡고 올라오라고 합니다.
    노파는 그 양파를 붙잡고 위로 올라가려는데 지옥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노파를 붙잡았습니다.
    노파의 생각에는 나 혼자서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인데 여러 사람이 붙잡기에 이 양파는 내 것이야 하며 너희들은 붙잡을 수 없다며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자 그 양파가 부러져서 노파도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죽어서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에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양심을 되찾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양심을 잃어버린 다양한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판사, 검사, 경찰, 목사, 노동자........등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누가복음 16:19-31)

    19.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자주색 옷과 고급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사치스럽게 즐겼어요.
    20. 한편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나사로였어요. 그는 부자의 집 대문 입구에 팽개쳐져 있었어요. 부스럼투성이였어요.
    21.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요. 그러나 개들마저 와서 그의 부스럼을 핥아 댔어요.

    * (세상에서) 부자의 특징 - 자기 울타리 밖을 볼 줄 모른다!
      - 탈무드 이야기 / 창문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양파 한 뿌리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도스토옙스키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양파 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는 할머니를 악마들이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22.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이 죽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천사들이 그를 ⁕아
         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어요. 그 부자도 죽어서 장례가 치러졌어요.
    23. 그는 ⁕하데스에서 자기 눈을 들어,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아브라함이 저
        멀리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의 품에는 나사로가 있었어요.
    24. 부자가 소리쳐 말했어요. ‘아브라함 조상님!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
        를 보내 주십시오. 그가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갔다가 저의 혀를 시원하게 해
        주도록요. 제가 이 불꽃 가운데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옥, 하데스에서) 부자의 특징 - 자기 울타리 밖을 볼 수 있다!

     

    25. 아브라함이 대답했어요. ‘얘야, 기억해 보아라. 너는 살았을 때 너의 좋은
        것을 다 받았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는 나쁜 것을 다 받았다. 이제 여기서
        그는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말이지, 심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26. 이 모든 것들에 더해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크게 벌어진 깊은 틈이 놓여
        있다. 그래서 여기서 너희한테로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갈 수 없고, 거
        기서 우리한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27. 그러자 부자가 말했어요. ‘그러면 부탁이 있습니다, 조상님! 나사로를 저의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제게는 형제가 다섯 명 있는데, 그들에게 똑똑히 증언하여, 고통받는 이곳
        에 그들까지 오는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29.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다. 그들이 ⁕모세
        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부자가 말했어요.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그들한테로 간다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그러나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했어요.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살아 일어난다 해도 그
        들은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 관심(觀心) : 관계할 관(關), 마음 심(心)
      어떤 것에 마음에 끌리어 주의를 기울이는 것


      門(문 문) + 幺(작을 요) + 幺(작을 요 + 丱(쌍상투 관)

      𠂈 (다할 진) + 丨(뚫을 곤) + 一 (한 일) + 丨(뚫을 곤)

      상형문자로 곤(丨) 字가 부수

       "띠끌 없이 통한다"

     

     관심을 가지려면 ;

        1. 함께 본다(see together)
        2. 함께 간다(go together)
        3. 함께 나눈다(share together)
        4. 함께 성취한다(achieve together)





    땅의 소금 :
      1. 방부제,  2. 조미료,  3. 제사용(레 2:13)
      * 씨앗의 발아(發芽)를 위한 용도
      * 땅 - 길가, 돌작밭, 가시떨기, 옥토(沃土)   

    세상의 빛 : 착한 행실(타 칼라 에르가. τα καλα εργα)   
    * 착한 / ①. 카로스(kalŏs) 흠이 없는, 아름다운, 유용한  
               ②. 아가도스(agathŏs) 선한, 적합한, 완전한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누가복음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누가복음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누가복음 10: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착한 행실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마음
     - (제사장)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레위인)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어떤 사마리아인) 보고 불쌍히 여겨  


    * 측은지심(惻隱之心) - 성령의 마음
        슬퍼할 측(側), 숨을 은(隱), 갈 지(之), 마음 심(心)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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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문화권에서는 땅의 소금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 결과 소금의 용법으로 "방부제" "조미료" "제사용(소제. 레 2:13)" 등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땅의 소금이란 씨앗을 뿌릴 때 석회질이 많은 땅에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소금을 뿌린 후에 씨앗을 뿌려야 싹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땅의 소금이라고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땅은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길가, 돌작밭, 가시떨기, 옥토로 구분하여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옥토에 뿌려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땅의 소금이란 땅은 우리 주위에 다양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때 싹을 낼 수 있는 반응과 도저히 싹을 낼 수 없는 부정적인 반응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왜 저 모양이야!
    저 사람이 장로래........ 저 사람이 무슨 교회 권사래..... 집사래......
    이런 반응은 싹을 낼 수 없는 길가, 돌작밭, 가시떨기와 같은 땅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이미 믿음의 사람에 의해서 소금이 뿌려진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 한양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자주 만나는 카운터의 직원에게 설날을 맞이하여 상품권을 드렸습니다.
    때로는 간단한 먹거리를 구입하여 전달했는데 이제는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구정을 맞아 상품권과 성경 구절 그리고 제가 목사라는 신분을 알려주는 자료를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셨구나! 하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가슴에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보고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불낙지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전도의 대상은 불신자, 낙심한 자(교인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 아직도 신앙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을 찾아야 하겠지요.

    저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을 찾았고 그 두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오늘은 세상의 빛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빛에 대한 정의는 이미 예수님께서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이란 서로 비교해서 좀 더 착한 것이 아닙니다.
    착한 행실을 가지려면 첫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자어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의 예) 누가복음 10장에 여리고로 향하던 어느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같은 현장을 목격했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착한 행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의 예) 누가복음 16장에 어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부자의 대문에 거지 나사로가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거지에게 따뜻한 음식을 한번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관심(關心)과 무관심(無關心)

    관심은 눈여겨 보는 것입니다.
    관심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관심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불평하고 원망할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출 17:6).

    반석을 치라(Strike the rock)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반석에게 명하라(Speak to that rock)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Take the staff, and you and your brother Aaron gather the assembly together. Speak to that rock before their eyes and it will pour out its water. You will bring water out of the rock for the community so they and their livestock can drink."

    지난 2월 23일 주일 예배 전에 황목사님께서 찬양을 인도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전도를 하려면 장로 때문에, 집사 때문에, 복음을 제시하기가 매우 난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이 때 빛에 대한 분명한 의미는 "착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에 대한 이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도덕과 윤리에 어긋남이 없는 것
    이러한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원칙입니다.

    장로 때문에, 집사 때문에......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의 원칙보다 더 낮은 기준으로 행동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는데 이때 착하다는 헬라 단어를 "칼로스"라고 합니다.
    헬라어에 착하다는 단어는 "아가도스"와 "칼로스"라고 합니다.
    아가도스는 상대적으로 착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집 수리를 맡겼는데 그 수리를 맡은 기술자가 교회 장로님이었다고 함다면 장로님이 사용하는 재료가 다른 기술자보다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아가도스"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칼로스라는 것은 모든 재료 중에서 최고의 상품을 사용하므로 다른 어떤 재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재료를 말합니다.

    채필근목사님이 지은 "이야기 철학"이라는 책에 어느 선교사와 어학 선생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조선말에 익숙하지 않아 어학선생을 모시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어학선생과 함께 사역을 하던 중 이제는 조선말에 능숙하게 되어 어학선생에게 마지막 부탁으로 가장 좋은 한옥 한채를 지어달라고 했답니다.
    어학 선생의 입장에서 이제는 내 일 자리가 없어지겠구나 생각하고 집터를 구할 때 가장 좋은 터라고 말을 하고는 가장 나쁜 냇가 근처의 몹쓸 땅을 구입하고 가장 좋은 재료를 구한다고 하고는 가장 낮은 재료를 구하여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집이 완공되는 날 어학선생이 선교사에게 집을 완공했으니 가 봅시다 하고 선교사와 함께 한옥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어학선생에게 이 집은 내가 살 집이 아니라 그동안 나를 위하여 수고하신 어학선생님을 위하여 지은 집이니 이제부터 이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했지요.
    그때부터 어학 선생은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불어나면 집이 떠내려갈까 걱정입니다.
    바람이 불면 좋은 재료를 사용했으면 튼튼할 집이 흔들니는 것 같습니다.
    최고의 목수를 고용하여 집을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합니다.
    만일 이 집이 내 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착한 행실이란 칼로스는 절대적인 착함을 말합니다.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주일 설교 / 3월 9일 <사순절 제1주/ 보라색>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복음 5:14)

    지난 2월 9일 주일에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이라고 가르치신 이유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지혜로운 농부는 먼저 석회질이 많은 땅에 소금을 뿌린 후에 씨앗을 뿌린다고 합니다.
    만일 땅에 소금을 뿌리지 않으면 씨앗이 싹을 낼 수 없고 자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과 같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씨앗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소금이 뿌려지지 않은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같은 땅에서는 씨앗이 자라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에 나가서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어 생명의 씨앗과 같은 말씀이 뿌려질 때 그 씨앗이 자라날 수 있도록 자기를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스스로 빛을 비출 수 있는 물체를 "발광체(發光體)"라고 합니다.
    하늘엣 유일하게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물체는 "태양" 뿐입니다.
    저 태양을 하나님이라고 비유한다면 밤하늘에 빛을 발하는 별들과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비발광체(非發光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인이었던 우리들이 어떻게 빛을 반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빛을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6 (새한글성경)
    이와 같이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일들을 보고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일 즉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빛은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도입 이야기) 탈무드의 이야기

    어느 잔치 집에 많은 손님들이 초대를 받아 여흥을 즐기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서 손님들 중에 시각장애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손에 등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시각장애인은 버럭 화를 내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왜 등불을 들고 가라고 합니까?"
    잔치집 주인은 "어두운 길에 저 앞에서 다른 사람이 올 때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보고 조심할 것이 아닙니까?"
    그제야 시각장애인은 잔치집 주인의 배려 깊은 마음을 헤아리며 등불을 들고 잔치집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시각장애인이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앞서 오던 행인에게 소리치를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이 안 보이느냐?"
    그러자 부딪친 행인은 "아니 꺼진 등불을 들고 오면 누가 보겠느냐?" 하고 오히려 반박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빛이 되려면 먼저 빛을 받아야만 빛을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3.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4.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세상의 빛

    땅의 소금은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겸손, 낮은 마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빛은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빛은 높은 마음, 고귀한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1월 12일 주일에 "너희는 땅의 소금"이란 주제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란 주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탈무드에서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잔치 집에서 모든 행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 마침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필요한 것을 선물로 나눠주었는데 마침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등불을 들려주며 "이 등불을 들고 가세요!" 하고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이 꺼져버린 등이라면 어두운 세상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정말 세상의 빛이 되고 있습니까?

    소금은 천하고 흔하여서 어디가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빛은 고고하고 높은 곳에 있어 묻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소금은 타협적이어서 어떤 물체에 들어가면 동화되어 자신이 없어지지만 빛은 심판적이어서 어두움과 함께 공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없고 어두움이 있으면 빛은 없습니다. 이렇게 빛은 힘의 대결로써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라고 하신 뜻은 그리스도인에게 양면의 신분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백성의 신분을 가지고 이 땅에 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너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높고 고귀한 신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서 녹아 그들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하고 자신은 흔적도 없이 흡수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성격을 조화 있고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빛이란 내 자신이 곧 빛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장에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가 빛의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빛은 자전하는 스스로의 빛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9:5에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빛이라"고 예수님은 친히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태양과 같고 우리는 달과 같아서 일차적인 태양의 빛을 받아 우리는 반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빛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요,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 빛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유대사람들이 가진 빛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의 교훈 미쉬나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의 빛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사람들의 종교가 온 이방사람, 즉 전 세계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유대사람들이 세계에서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 : 16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계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어두움 속에, 즉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차차 밝아져 온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후서 1 : 19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 세상이 다 어두운데 이제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라는 예언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문제는 어두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 상징이듯이 어두움도 역시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어두움이란 첫째, 무지함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중의 하나가 무지한 사람입니다. 알기만 하면 쉬운데 모르기 때문에 어렵고 두렵습니다. 알고 있을 때는 용감하게 행할 수 있지만 모르니까 움츠러지고 불가능하게만 생각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척에 있어도 모르면 멀고 깜깜하게 느껴집니다.

    둘째로, 어두움은 양심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필자의 친구 한 사람은 열쇠꾸러미에 조그마한 나침반을 함께 끼워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열쇠를 꺼낼 때마다 손안에서 나침판을 보곤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열쇠를 꺼낼 때마다 "지금 나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모른다면 나의 모든 수고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양심의 방향, 도덕의 방향, 가치관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어리석음, 즉 무능함이나 무기력, 무질서 혼돈을 어두움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두움 가운데서는 힘이 소용이 없습니다. 힘의 장사 삼손도, 그가 설사 머리를 잘리우지 않았더라도 눈만 빼 놓으면 삼손인들 무슨 힘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눈 없는 사람, 즉 빛이 없는 사람의 몸이라면 아무리 센 힘을 가졌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빛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빛이 없다면 밝은 눈을 가졌다 해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빛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도마뱀들은 지나다니는 중에 굴속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그 굴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몇 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벌레를 잡아먹고 이럭저럭 사는데, 얼마 지나고 나면 그 도마뱀의 눈이 아주 멀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빛을 보지 못하면 눈은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빛이 없는 어두움이란 무기력,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 : 14-15),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빛의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경 위에 둔다'고 하는, 등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보통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창문은 대부분이 예루살렘 쪽으로 내어서 창문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이 창문은 아주 높이 달려 있어 해만 지면 집 안은 깜깜하여 이 때에 불을 켜서 높은 곳에 두어 온 방 안을 비추게 됨을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가옥에는 등경(등잔을 걸어놓는 기구)이 부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예수님은 좀더 극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기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자가 어디 있느냐, 즉 등불을 덮어두는 사람은 없고 어디나 높은 곳에 두어 모든 것을 비추게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분이 높임을 받는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어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명예 등은 신통치 않아도 의와 양심과 선에 대해서는 누구나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이어야 참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래야만 등불처럼 높이 둘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빛은 숨길 수가 없다라는 말은 대단히 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숨은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만 믿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리켜서 고백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백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합니다"라고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나는 교회는 안가지만 마음으로 믿는다. 또는 조용히 믿고 싶다"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신앙은 절대로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도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끔 비밀 사랑이니 짝사랑이니 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사랑은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고백하여 나타냄으로써 그 사랑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숨기는 존재가 되서는 안 됩니다. 흔히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순교자란 드러내 놓고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정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사 앞에 가서 꾸벅 절하더라도 속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겠지 하며 자기합리화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속으로가 아니라 드러내어 놓고 믿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으면 범사에 믿는 사람으로써 행위가 있어야 하므로 결코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일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합니다만 적어도 신앙에 대해서만은 감춰놓고 믿는다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나올 때 버젓이 성경 찬송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아직도 조그만 책을 일부러 사서, 핸드백 속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어디 가느냐"는 인사를 받으면 우물쭈물하며 "저기 간다"고 어물쩡하게 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믿지 않는 형제나 친지들에게 숨겨가면서 믿어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 슬쩍 넘어가면 전도하기는 더욱 요원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핍박이 오고 당장 어려움을 당해도 극복하면서 신앙을 나타내야만 누구에겐가 감동을 주게되고 구원의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숨기는 동안에는 자기도 구원 못하고 남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핍박이 있을 것이라면 있어야 하고 부러져야 할 것이면 부러져야 합니다. 신앙만은 항상 노출되어 등경 위에 높이 올려진 상태에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고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저런 사람이 믿는 자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비난까지도 듣습니다. 아니 자기 생각에도 나 정도의 윤리 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 욕을 돌리겠다 라는 제법 양심적(?)인 이유로 신앙을 숨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수준이 높거나 낮거나, 어떤 모양이라도 믿는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믿는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만은 시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순교가 오는 것입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순교적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유대인이 유대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를 유혹하기를 돼지고기를 먹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은 그 유혹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자 그것을 지켜보던 한 간수가 그를 살려주고 싶어 한 가지 지혜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소고기를 가져가서 말하기를 "여보시오. 이것은 소고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재판관들은 모두 돼지고기인줄 알고 있으니 빨리 이것을 먹고 풀려나시오"라고 유대인에게 먹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유대인이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소고기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돼지고기인줄 알고 있으므로 먹을 수가 없군요. 당신의 호의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죽기를 자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숨겨진 신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전혀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산 위에 있는 동네도 이 조그마한 불 하나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빛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좀더 다른 면으로 볼 때에 빛은 드러내야 될 뿐만 아니라,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기독교인이라고 특별한 표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많은 여성들은 십자가 목걸이를 좋아해서 걸고 다닙니다. 그분들 모두가 기독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남자들은 십자가 뺏지들을 붙이고 다니는데, 사실 이런 표식들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행동에 어려움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버스에서는 가리를 양보해야 하고, 사람들께 친절도 해야 하며, 물건을 살 때도 값을 깍기가 조심스러우며, 가야할 곳도 가려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뺏지는 없어도 어딘가에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얼굴만 보고도 어딘가 모르게 보통사람들과는 달라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골상학적으로 잘 생겨야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이(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주는 그 인상이 아예 그 사람됨이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버스 속에서 쓰리꾼들이 가방을 찢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방을 찢기는 친구만 계속해서 자주 찢겨서 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결론 내리기를 이것은 "관상 때문이다"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쓰리꾼들에게 그 친구의 관상이 아무래도 돈 있는 사람으로 보였기에 가방이 자주 찢겼으나 목사되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겠다고 농담까지 했습니다. 사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풍겨나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나 교인들이 무엇을 잘못하면 소문이 널리나고 말이 많아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면 섭섭해하고 듣기 싫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서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기에 이야기하고, 기독교인만은 적어도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에 조그마한 잘못에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아주 더러워진 옷에는 무엇이 묻었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만 깨끗한 옷에는 조금만 묻어도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드러나기 때문에 받는 비평을 마음 아프게 생각지 말고 당연하게 또는 고맙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는 지금까지보다 좀더 적극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을 비추라는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두움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리워지지만 빛이 나타나면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는 허물이 보이지 않지만 빛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흔히 고급 식당에 들어가면 좋은 등은 다 꺼 버리고 식탁마다 촛불을 켜 놓고 거기에다 또 갓을 씌워 어두운 채 식사를 하게 합니다. 필자는 미국의 어느 식당에서 짓궂게도 웨이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장난기로 물었는데 의외로 그 웨이터는 아주 중요한 철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아무리 어두워도 밥은 자기 입에 정확하게 가져가니 어두움이 문제될 리 없고 둘째로, 어두운 빛 앞에서는 미녀나 미남 아닌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대답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지나치게 밝으면 남의 얼굴에 있는 흉터나 주름살까지 다 보이고 화장이 잘못된 것까지 나타나니 미인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흐릿한 촛불 앞에서는 누구나 선남선녀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서는 무드를 낸다고 밝은 전등보다는 촛불을 여러 개 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 앞에서는 허물이 가려져 누구나 미인이며 웬만하면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 앞에서는 조그마한 흠도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거짓과 불의가 통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불의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비껴라도 가야한단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그리스도인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비추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는 세대이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여기에 선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비춰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영적인 지식을 비추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과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자기를 알고 자기의 운명을 알아보도록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빛이란 길을 보여 줍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길을 볼 수 없지만 빛이 있으면 환하게 길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길이 꽉 막혔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그 길이 열리고, 절망이었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소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빛은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잃었던 방향 감각을 되찾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방향이 분명하여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자기 방향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빛은 경고의 등(warning light)이기도 합니다.

    등대는 망망한 대해에 홀로 서서 빛을 비추며 위험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위기를 알리고 함정을 알리며 죽음과 멸망에 대한 경고를 사전에 미리 해야 합니다.

    일곱째, 빛을 비추라는 말은 힘을 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 힘이 없지만,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가치가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입고 있는 갖가지의 아름다운 옷의 색채들이 빛이 없으면 어떻게 그 색깔들을 알릴 수 있습니까? 빛이 없으면 모든 색들이 무효입니다. 오직 빛 앞에서만 색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도 있고 능력도 있고 재력도 있지만 만일 그에게 마음의 빛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무효입니다. 모든 재능과 지혜가 효과를 나타내려면 비춰주는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은 생명이요, 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적극적으로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복음을 들음으로써 알게 하시고, 또한 보는 것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계명을 통해 순종하는 길을 주셨고, 또한 먼저 믿는 사람을 통해서 어떤 가능성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진실하면 살 수 없고, 양보하면 손해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진실하고도 살 길이 있고, 양보하고도 편안하며, 주일을 지키고도 얼마든지 사업을 잘 하는 모범을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선한 일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효과적인 교육은 모방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니 따라 하자는 마음이 생기도록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곧은 나무 틈에 자라는 풀은 곧게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 속에서 주위의 사람들도 따라서 곧게 자랄 수 있도록 먼저 곧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존재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어야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입이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체온이 되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무나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서 누구에게나 그 사랑을 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시해야 합니다. 참 선과 거룩이 무엇인가를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참되게 사는 길입니다. 이런 빛을 비춤으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주안에서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무나 엄청난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신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빛과 소금이 되어 귀한 역사를 나타내어야만 합니다. 깜깜할 때는 작은 빛이나 잠깐 동안 비추는 빛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비록 작은 빛이나마 빛의 역할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삶이 되어지길 축원합니다. 


    주의 얼굴 빛(6구절)

    주의 얼굴 빛이 비추이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될 때 그 빛에 의해서 구원 받을 사람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빛이 되느냐?
    영원한 빛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체(發光體)라고 합니다.
    달은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태양을 하나님으로 비유하면 달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편 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편 89:15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다니엘 9: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도입 이야기) 탈무드의 신비한 보석상

    어느 마을에 매우 지혜롭고 정직한 보석상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정당한 가격으로 보석을 판매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낯선 여행자가 나타나 희귀한 큰 보석을 가지고 와서 "거액과 교환하여 이 보석을 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보석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감별할 수 없는 매우 높은 품질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직함을 선택하고, 보석의 진짜 가치를 여행자에게 알려주며 올바른 금액으로 거래하였습니다.

    몇 년 후, 보석상은 그 당시의 여행자가 실제로 마을의 상태를 시험하기 위해 온 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는 아브라함의 정직함에 감동하여 마을 전체에 축복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정직성과 진실함의 중요성입니다.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정직한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과 지역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비록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느껴지더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도입 이야기) 촛불을 들고 있는 이유

    어떤 현자가 항상 낮에도 등불을 들고 있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궁금해하며 왜 낮에도 등불을 들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현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진실과 성실함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밝은 빛 속에서도 그것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간과되기 쉬운 진실과 미덕을 발견하기 위해 항상 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진실의 탐구 : 진실이나 성실함 찾기 위해서는 주변을 잘 관찰하고 의식적으로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일상 속의 미덕 : 일상생활에서 자주 간과되기 쉬운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
    지속적인 노력 :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을 계속하는 것의 중요성.
    이 이야기는 단순한 물리적 빛 이상의 상징적인 "빛"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진리와 가치를 찾으려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빛(light)

    우리말 신약성서에 ‘빛’으로 번역된 말은 고대 그리스어 포스(빛, 빛을 내는 물건)입니다.
    동사 파이노(빛을 내다, 빛나다, 나타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마 4:16) 불을 쬐고 있었다(막 14:54) 등불을 달라고 해서(행 16:29) 등에 쓰였습니다.

    포스는 요한복음 23번, 사도행전 10번 등 신약 전체에 73번 나옵니다.
    구약에서 빛이 생겨라(창 1:3) 빛을 보게 하시고(욥 3:20) 등에 나오는 빛은 히브리어 ‘오르’입니다.


    빛(오르. ’ôwr) אוֹר 스트롱번호  216

    1. 빛.  2. 아침빛.  3. 태양빛 혹은 태양 자체
    발음 [ ’ôwr ]
    어원  / 21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2회 사용

    관련 성경  /  ☞빛(창1:3, 욥22:28, 사2:5), 광명(출10:23, 욥3:9, 미7:9), 새벽(삿16:2, 삼하17:22, 느 8:3), 아침(삼상25:22), 광선(삼하23:4), 태양(욥31:26), 번개빛(욥37:15, 37:3), 햇살(잠 4:18), 일광(사18:4), 대낮(암8:9). [동] 나타내다(습3:5), 밝다(삿19:26, 삼상25:36, 욥 28:11), 동트다(삼상14:36), 비추다(시4:6), 넘치다(암8:8).

    영어 성경은 포스를 라이트(light· 빛, 밝은, 옅은, 불을 켜다)로 번역했습니다.
    포스는 소유격 ‘포토스’ 형태로 영어 포토그래피(photography· 사진 촬영) 포토신테시스(photosynthesis· 광합성) 포토포비아(photophobia· 광선공포증) 텔레포토(telephoto· 망원사진 전송사진)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1~5, 새번역)

    오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를 밝게 비추십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포스'는 그리스어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어로 "Phos"라는 용어는 영어로 "빛"으로 번역됩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이 개념이 다양한 구절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진실, 신성한 존재에 대한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어 단어 Phos : 개요

    Phos(φως)는 빛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며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문화에서 빛은 종종 순수함, 진실, 깨달음을 상징했습니다.
    성경에서 Phos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조명을 넘어 영적 통찰력과 신성한 본성을 특징짓기도 합니다.

    Phos의 가장 주목할 만한 속성 중 하나는 신의 현존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함과 의로움을 나타내며, 신성한 빛과 영적 어둠의 대조를 강조합니다.
    Phos의 성경적 사용은 우리가 믿음, 구원, 도덕적 질서에 대한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약성서의 포스

    요한 복음

    요한 복음은 Phos라는 단어가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곳입니다.
    요한은 그의 책을 세상에 생명과 빛을 가져다주는 말씀에 대한 심오한 진술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우리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모든 인류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 어둠이 그것을 이기지 못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여기서 포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와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이며 인류의 길을 밝혀준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은유와 응용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포스는 종종 신자들을 묘사하는 데 은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14에서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마을은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맥락에서 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선을 증진시키는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 은유는 또한 행동에 대한 부름을 암시합니다.
    빛을 숨길 수 없듯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그들의 믿음을 밝게 빛나게 하도록 격려받습니다.

    영적 전쟁과 빛과 어둠

    Phos는 영적 전쟁을 논의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6:12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육과 싸우는 것이 아니요…이 세상 어둠의 통치자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Phos)과 어둠의 병치는 선과 악 사이의 지속적인 싸움을 강조합니다.

    이 맥락에서 포스는 신의 진실, 정의, 도덕적 질서를 상징하는 반면, 어둠은 신에 대한 죄, 무지, 반항을 상징합니다.
    이 이중성은 신자들에게 일상 생활에서 빛을 받아들이고 어둠을 거부하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적 이해에서 빛의 중요성

    인도하는 빛

    빛은 인도하고 지시합니다.
    시편 119:105에서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두운 길을 비추는 빛처럼 인도와 명확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통해 지혜와 이해를 추구하도록 격려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화 속의 포스의 상징성

    비유는 또한 빛이라는 주제를 활용합니다.
    열처녀의 비유(마태복음 25:1-13)에서, 현명한 처녀들은 등잔을 위한 기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와 준비를 상징합니다.
    그들의 등잔은 Phos를 상징하는데, 이는 영적으로 경계하고 활동할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빛('포스') 즉 영적인 준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신자의 삶에서 빛과 영적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더욱 강조합니다.

    Phos :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다

    빛으로서의 신의 본성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본성을 요약합니다.
    Phos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언급될 때, 그것은 변함없는 그의 의로움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빛으로서의 신의 특성은 그가 우리와 세상에 대한 진실을 밝혀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빛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신의 개입 없이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빛의 변형력

    포스를 만나는 것은 변화의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나중에 바울로 알려짐)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눈부신 빛을 경험했습니다. 이 만남은 그를 기독교 박해자에서 열렬한 사도로 바꾸었습니다.

    이 순간은 신성한 빛에 노출되면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음을 나타내며, 포스(Phos)가 나타내는 계시와 변형의 힘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의 역할은 Phos의 반사체로서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것

    믿는 자들은 종종 어둡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빛을 비추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추종자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변화와 희망의 대리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랑, 친절, 진실을 보여주는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도록 격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에 미치는 빛의 영향

    사회에서 신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입니다. 작은 불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말은 그들의 지역 사회에 희망과 진실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포스를 반영하라는 이러한 소명은 세상에 대한 책임감 있고 참여적인 태도를 장려하며, 그리스도인이 선과 정의를 증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합니다.

    결론

    이 어플리케이션에는 XNUMXµm 및 XNUMXµm 파장에서 최대 XNUMXW의 평균 출력을 제공하는 그리스어 단어 Phos 성경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희망, 인도, 변형, 신의 신성한 본성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포괄합니다. 이 단어의 깊이를 이해하면 우리의 믿음이 풍부해지고, 영적 여정에서 빛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신성한 빛을 반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진실과 목적을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의 길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Q. Phos의 그리스어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Phos는 영어로 문자 그대로 "빛"으로 번역됩니다.

    Q. 요한복음에서 Phos는 어떻게 사용되나요?
    A. 요한복음에서 포스는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인도하는 은유적 빛을 모두 나타냅니다.

    Q. 믿는 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A.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반영하고 사회에서 선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Q. 성경적 용어로 빛과 어둠의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나요?
    A. 빛은 진실과 정의를 상징하는 반면, 어둠은 죄, 혼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상징합니다.

    질문. 요한일서 1장 1절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줍니까?
    A. 그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말하며, 그분의 순수하고 거룩한 본성을 강조하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Q. Phos는 영적 지도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포스는 시편 119:105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 명확성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들의 길을 밝혀줍니다.

    Q. 열처녀의 우화에서 포스에 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A. 이 비유는 빛을 갖는 것으로 표현되는 영적 준비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임을 가르쳐 줍니다.

    Q.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빛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A. 신성한 빛과의 만남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방향과 목적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Q. 신자들이 지역 사회에서 빛을 반사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A. 빛을 반사하는 것은 희망과 진실을 증진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격려합니다.

    Q. 포스는 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합니까?
    A. 포스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본성과 믿는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빛 (5457, 포스) φῶς

    빛 light, 광채, 광휘 brilliance , brightness .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포스(Homer 이래)는 근본 의미로 `빛, 광채(광휘)'이며, 햇빛, 횃불, 불빛, 시각, 새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적으로는 생명의 빛, 즉 생명 자체를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빛나는 어떤 것으로 구원, 행복, 승리와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들이다.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자도 포스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진리와 그 지식, 선(행)을 의미할 수도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80회 나오며, 대부분 오르(빛)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포스는 신약성경에서 72회, 그 중에 공관복음서에 14회, 요한의 기록에 33회, 바울서신에 13회, 사도행전에 10회 사용되었다.

    (a) 포스는 원래의 의미에서 `빛'으로 사용되었다. 밤에 없는(11:10) 햇빛(22:5), 등불의 빛(8:16; 11:33; 15:8; 16:29; 18:23; 22:5), 그리고 불에서 나오는 따뜻한 빛(14:54; 눅 22;56)을 나타낸다.

    (b) 포스는 신현현의 표시로 나타난다. 17:7의 예수님의 변모시에 빛이 나타났다: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하나님의 출현에는 반드시 광채가 동반한다. 여기서 빛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다른 곳에서는 승천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지시한다(9:3; 22:6; 22:9; 행 22;11; 26:13).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자의 도래를 표시한다(12:7).

    (c) 포스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표현한다.

    요일 1:5에서 빛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딤전 6:16에서 빛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의 영광이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고후 4:6에서 빛의 창조자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참조: 창1:3).

    1:17에서 빛은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심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d) 특히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스로 묘사한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시다. 요한은 이미 그의 복음의 서언에서 빛과 생명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즉, 본래 어둠에 처한 인간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제받을 수 있다.

    8:12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신다.

    세례(침례) 요한은 빛을 증거하는자로 불리워졌으나 그와 빛 자체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1:6이하; 5:35이하).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세상 속으로 오게 되었다(1:9). 예수님은 그의 유명한 말들 중의 한 구절, 즉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는 말에서도 그가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8:12; 참조: 9:5; 12:46). ``그 빛'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빛과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그가 곧 `빛'이다'

    (e) 제자들은 세상의 빛으로서, 빛을 세상에 가져다 주는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참조: 요12:35; 5:8; 2:15), 제자들은 그들이 받은 거룩한 빛을 전해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비밀히 들은 것을 `광명한데서' 혹은 `빛 가운데서' 즉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한다(10:27; 참조: 12:3). 그들은 그리스도의 선교사로서 그들 자신의 빛이 아니라 천국의 참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

    제자들, 또는 신자들은 "빛의 자녀들"이 되었으며, 이제 "주 안에서 빛"이 된 것이다(5:8; 참조: 살전 5:5; 16:8).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5:9).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빛을 따라 걸어야 하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을 세상에 대한 선교적 책임을, 그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2:15; 참조: 13:47; 49:6)로 생활함으로 오직 만날 수 있는 어떤 책임을 짊어진 이상 더욱 더 그렇게 행해야 한다. 그렇게하여 그들이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2:36에 보면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훈계는 필요하다. 인간은 오로지 최초의 빛의 창조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변모될 수 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참조: 1: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어둠이 지나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일지라도(요일2:8), 빛으로 나아온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형제애에 관한 계명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된다(요일 2:8이하). 왜냐하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만이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다(요일 2:10). 진리를 행하는데 선행조건-딴 곳에서 처럼 여기서도 빛의 개념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세상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서 행하고, 형제를 위해 살며,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통해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요일 1:6이하).

    우리는 그를 통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게 되었다(1:12).

    (f) 벧전2:9에서 포스는 구원을 가리킨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3:12에서 포스는 의를 가리킨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고후 11:14-고후 11:15; 요일 2:9, 요일 2:10도 참고하라.

    5:14; 5:16; 5:35에서 포스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가리킨다.

    (g) 18:23에서 바벨론은 멸망할 때 "결코 다시 등불 빛이 그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리라"는 경고를 받는다.

    반면에 21:24에서 천국성은 빛의 세계가 된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그 곳에는 빛으로 비취시기 때문에 등불과 햇빛이 필요치 않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2:5).

    (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W. E. Vine; H.-C. Hahn; H. Conzelmann).



    칼로스와 아가도스 그리고 토브와 라아(선악이 아닌 좋음과 나쁨)


    좋은(아가도스) 나무가 나쁜(포네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칼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관계를 조금만 더 살펴봅니다.
    좋은(아가도스) 나무에서 아름다운(칼로스)의 열매가 맺힙니다.
    여기서 아가도스는 칼로스의 근원이고 기둥입니다.
    아가도스의 토대에서 칼로스가 드러납니다.
    비유컨대 우리는 아가도스(좋은) 나무여야하고 거기서 맺히는 열매는 칼로스(아름다운)한 열매여야 합니다.

    여기서 살펴보면 칼로스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타당합니다.
    칼로스는 같은 말이라도 말을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적합한 말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칼로스 한 말이고 또 칼로스 한 열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컬어 칼로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과 교리, 그리고 율법과 옳고 그름은 상대의 상태나 형편과 상관없이 오로지 지식 그 자체만을 주장하고 드러내려 합니다. 이는 도리어 카코스합니다. 즉 말은 맞는 말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분명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칼로스 하지 않고 카코스 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사람은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어른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비록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지각을 사용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여기서 지각이라 함은 성숙한 센스요, 지성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칼로스의 바탕에는 아가도스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따라서 아가도스가 ‘좋음’이라고 한다면, 칼로스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 성서에는 아가도스도 칼로스도 good으로 번역하고 있고 그 의미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 뉘앙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토브와 라아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는 헬라어 아가도스가 그 상응어라 했는데, 그것은 제가 잠시 착각해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가도스가 아니라 칼로스로 바로 잡습니다. 70인역은 토브를 아가도스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칼로스(Good)로 라아는 카코스(Bad)가 아니라 포네로스(evil)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토브 베라아’는 好惡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好惡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건 조금 적절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이란, 나의 성향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걸 말하기보다는 생명의 관점에서 그것이 생명에 좋으냐 아니면 생명에 해로우냐(나쁘냐)입니다. ‘좋음과 나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도리어 선악이라는 말보다 원의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문맥에 따라서 토브와 라아는 선악으로 볼 수도 있고, 좋음과 나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은 선악과로 보기보다는 ‘좋음과 나쁨의 열매’로 보는 것이 창세기1장의 토브를 ‘좋았더라’라는 흐름에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신의 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읽힐 수밖에는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볼 것이냐는 독자의 예민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만, 저는 후자로 보여집니다. 토브와 라아를 선악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문맥에 따라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만, 성서의 전체를 천천히 살펴보고 탐색해봐야 할 과제로 남깁니다.

    동시에 이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게 성서의 말법, 곧 문법입니다. 좋음과 나쁨은 양식으로 삼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창세기의 대선언이라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 나무에서 맺힌 열매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그냥 좋으냐 나쁘냐를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면 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정신의 자양분을 삼는 먹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러냐는 것이지요. 처음 사람은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지식의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고 살더라는 게 에덴의 이야기며 인생의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한 술 더 떠 사람들은 이를 선악으로 환원해서 열매로 먹습니다. 정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삶의 지표와 목적으로 삼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사람을 대하며 선악판단하려 합니다. 선악에 경도되는 것이지요. 좋음과 나쁨을 통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을 왜 좋음과 나쁨의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것인지, 인생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거기서 발생합니다. 지금도 동산 중앙에는 명증하게 이 두 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이기적인 처음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정보의 확충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시키려는 권력욕구가 합해져서 선악의 지식을 열매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지식이기 때문이고, 바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다는 것이지요. 하여 그곳에서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시시비비가 끊임없습니다. 좋음과 나쁨을 아는 나무도 동산 중앙에 있는 까닭은 그 열매를 먹으라는 뜻이 아니요, 분별하라는 뜻일 따름입니다. 분별하는 것과 먹는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도리어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게 성서의 논법입니다. 물론 동산의 각종 나물의 실과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어버이들은 이 관계를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생명의 열매를 먹으면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맑아지고 힘을 얻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분별해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잘 자라게 하는 데 사용할 뿐, 그걸 양식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육신의 양식조차도 몸에 좋은 것과 몸에 해로운 것을 분별해서 해로운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하는 데 사용될 뿐입니다.

    그의 양식은 어린아이의 생명이 자라면서 맺히는 열매를 그 정신과 영혼의 풍성한 양식으로 삼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손녀를 바라보며 기쁨을 얻는 걸 보면, 그들의 양식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주들에게서 맺히는 생명의 과실들을 양식으로 삼으며 기쁨을 얻습니다. 어머니의 육아에 대한 수많은 지식은 아이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 가를 분별하기 위한 지식이고 정보일 따름이지, 아이에게 어머니의 권력을 행사하고 그 지식으로 우쭐하거나 아이를 지배하고 통솔하기 위해 소위 모권, 어머니의 권세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머니에게 있는 그 모든 권력과 권세는 오로지 자녀의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데 있는 것이지, 권력을 향유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휘두르며 즐거워하라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권력과 권세는 바로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권이 그 원형이 아닐까 합니다. 부권은 사냥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서부터 형성된 것인데, 어느 세대나 경제력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고 돌보기 위한 사랑의 권세에서 지배의 권세로 타락한 것은 좋음과 나쁨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고자 하는 정신의 타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소유와 이기주의의 발동 때문일 것입니다.

    권세의 의미가 바로 그 같은 것에 있다는 점을 처음 사람은 모릅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는 삶에서는 결국 사망의 열매를 맺힐 수밖에 없다는 게 성서의 진단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양식으로 삼는 이들에 의해 이 같은 것이 드러나고 진단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고 생명의 열매를 먹거리로 살으라는 게 성서의 한결같은 메시지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해설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간단히 하면 여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의 딸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계보에 속한 자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사의 타락으로 보려는 견해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서엔 두 계보 이야기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들의 정체성)이 가인의 후손들의 딸을 보고 아름다움(토보트)을 느꼈다는 것에서부터 아담이 겪었던 에덴의 혼돈이 재발(?)한 것은 아닐런지요.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성은 육체(바살, 싸르크)가 되었다는 지적이니 즉,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인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던 그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시 말해 생명의 관점에서 토브 혹은 칼로스 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의 눈으로 아름다워보였다는 것, 거기서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결합한 것이고 홍수심판의 근인과 원인이 된 것은 아닐런지요. 이 이야기는 침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문장에서 토브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해설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대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혼합되고 결국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에 편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이야기의 대목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사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1. 제자들
    2. 그리스도인들
    3. 교회들

    빛이 되라
    1.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은 사람들

    어떻게 빛이 되는가?
    1. 착한 행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칼로스)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빛(the light) 5457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5457

    1. 빛.  2. 마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phōs ]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 I. 빛.
      • 1. [문자적으로]
        • a. [일반적인 용법] 마 17:2, 요 11:10, 고후 4:6.
        • b. [환유법] 빛을 내는 물건, 불, 횃불, 초롱, 막14:54, 눅22:56, 행16:29.
        • c. [빛의 조명을 받아 밝은 것] 엡5:14.
      • 2. [비유적으로]
        • a. 메시아의 구원, 복음따위를 빛으로 표현함, 마4:16, 행26:18, 엡5:13.
        • b. 이런 종류의 빛을 지닌 사람, 마5:14, 행13:47, 롬2:19.
    • 관련 성경  /  빛(마4:16, 눅8:16, 딤전6:16), 불(막14: 54), 불빛(눅22:56), 등불(요5:35, 행16:29), 광채 (행12:7), 광명(고후11:14).



    착한 행실(good deeds) 2570.  2041

    착한(2570)

    κα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kal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아름다운, 눅 21:5.
    • 2. 좋은 유용한.
      • a.  흠이 없는, 좋은, 귀한, 마13:48, 12:33, 눅6:43.
      • b. 도덕적으로 선한, 고상한, 칭찬할 만한, 마5:16, 막14:6, 요10:32, 딤전5:10, 히10:24.
      • c. 잡을 것 없는, 훌륭한, 눅6:38, 요10:11,14, 딤전6:19, 딤후1:14, 2:3, 히6:5, 약2:7, 벧전4:10.
    • 3. [ἐστιν과 결합될 경우] ~은 좋은.
      • a. 기분 좋다, 바람직하다, 유익하다, 마17:4, 18:8,9, 막9:5, 눅9:33, 고전7:26.
      • b. [도덕적으로] 선하다, 고후8:21, 히13:9.
    • 관련 성경  /  좋은(마3:10, 막4:8, 요2:10), 아름다운(마7:19), 착한(마5:16), 마땅한(마15:26), 나은 (마18:8,9, 막9:45), 선한(요10:11, 고후8:21, 딤전1:8), 옳은(고전5:6), 잘하는(딤전3:13), 유익을 얻는(히13:9).


    행실 (2041)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2041
    1. 행위.  2. 히 4:3, 4, 10.  3. 표시
    발음 [ ĕrgŏn ]
    • I.  행위, 행동.
      • 1.  [휴식의 반대 개념] 히4:3,4,10, [말의 반대 개념] 눅24:19, 행7:22, ἐν λό γῳ ἤ ἐν ἔ.: 말과 행동으로, 롬15:18, 고후10:11, 골3:17, 살후2:17, 딛1:16, 요일3:18.
      • 2.  표시, 실제적인 증거, 롬2:15, 살전1:3, 살후1:11, 엡4:12, 약1:4.
      • 3. 행한 일, 공적.
        • a.  하나님과 예수의 행위들[특히 기적에 대하여] 마11:2, 요5:20,36, 7:3, 21, 10:25,37이하, 14:10,11,12, 15: 24, 행13:41, 계15:3.
        • b. 사랑의 행위에 대하여, 요3:20이하, 7:7, 약3:13, 요일3:12, 계2:2,19, κατὰ τὰ ἔργα: 행위에 따라서, 롬2: 6, 딤후4:14, 계22:12. ἔ. ἀγαθόν, 롬2:7, 13:3, 고후9:8, 빌1:6, 골1:10. πλήρης ἔργων ἀγα- θῶν: 선행에 풍부한, 행9:36. τὰ ἑ. τοῦ Ἀβραάμ: 아브라함과 같은 행위, 요8:39. ἕργα πονηρά: 악한 행위, 요3:19, 7:7, 골1:21, 요일3:12, 요이 1:11. τὰ ἔ. τοῦ πατρὸς ὑμῶν: 너희 아버지와 같은 행위, 요8:41 등.
    • II. 일, 직업, 임무, 막13:34, 행14:26, 고전15:58, 16:10, 빌2:30, 사도들의 임무와 일에 대하여, 행13:2, 15:38, 빌1:22.
    • III.  [수동의 의미로] 공적, 작품, 롬14:20, 고전3:13-15, 9:1.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하여, 히1:10.
    • IV. 물건, 사건, 행5:38, 딤전3:1.
    • 관련 성경  /  행실(마5:16, 딤전5:10, 벧후2:8), 행위(마11:2, 요3:19, 롬2:15), 일(마26:10, 눅24:19, 롬13:12), 사무(막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1:4), 지음(히1:10), 행함(롬2:6).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양파 한 뿌리

    인간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 가 선과 악을 파헤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라고 평가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직시한 것은 선과 악으로 갈라진 인간 내면의 비극성, 인간의 고통, 유한성, 인류 보편의 운명인 죽음이었다. 그의 작품들의 공통된 화두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지옥

    그에게 있어서 지옥은 특정 장소가 아닌 인간이 처한 상태였다. 그는 28살에 반체제 활동 혐의로 시베리아에 있는 악의 전시장인 감옥에서 10년간 유배형에 쳐해 졌다. 거기에는 강간범, 살인범, 사기꾼 등등 러시아 전역의 최악의 범죄자들 수배된 곳이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는 단순히 견뎌낸 것 만이 아닌 사람들을 깊이 관찰하며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인간 내면의 악을 발견하고 사색을 하고 기록하였고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우리말로 「」

    러시아 원어로는 죽어있는 집 dead house」을 기록했다. 그곳은 
    그렇다면 무엇이 그 시베리아의 감옥을 죽음의 집, 죽어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욕구, 동물적인 본능, 욕망이었다. 인간이 본능적인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모여 있는 공간 자체가 지옥이다.
    죄수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양심, 성찰 없이 욕구만을 추구했다. 죽음의 집은 마치 단테의 신곡의 어두운 숲에서 만난 표범, 사자, 암늑대들이 있는 추악한 동물의 왕국이었다.

    두 번째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것은 증오이다. 죄수들 사이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도스토옙스키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나를 죽일 듯이 증오했다. 나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기회만 있으면 나를 산 채로 잡아먹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죄수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죄수들의 악취, 음담패설, 욕설, 범죄의 추억들이 귀족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이 상호적인 증오에 대해 사색을 통해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상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할지 라도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자신이 이들을 증오하는 한, 인간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이후로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평생을 노력한다.
    증오,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포함한 작품들의 화두로 승화시켰다.

    양파 한 뿌리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양파 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는 할머니를 악마들이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어떤 특정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진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의미는 이야기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할머니를 가엾게 여긴 수호천사가 할머니가 했던 단 하나의 선행,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것을 기억해냈다.
    -> 수호천사가 할머니를 도와준 이유는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이었다.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한 번도 선행을 하지 않은 게 죄악이라면) 지옥불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여기서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간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고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만 존재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 그녀에게 내밀고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게 했고 양파 한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천국으로 가게 하라고 했다.
    ->양파 한 뿌리는 천국행 보증수표가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과 신의 은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다.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는 이제 할머니의 행동, 결단으로 결정된다.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올라가는데 그때 다른 죄인들이 할머니를 붙잡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두 가지 실수를 한다. 양파가 은총이라는 것을 모르고 물질로 보았다. 애초에 양파가 물질이라면 할머니 한 사람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양파에 작동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두 번째 실수는 할머니의 계산적인 마음이었다. 양파 한 뿌리의 선행으로 신과 딜을 해서 싼값으로 천국행 티켓, 은총을 샀다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은총을 팔지 않는다. 신은 누구와 딜을 하지 않는다. 신은 은총을 부여할 뿐이다.

    할머니는 말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나를 구해주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해주는 게 아니야.'
    ->할머니의 가장 심오한 죄악은 나와 너희들의 구분, 선을 긋는 단절이다. 나만 선택받았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단절, 교만을 통해 할머니의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죄악은 단절이다. 단절은 무서운 것이다. 강도 살인 등등 다른 모든 죄들의 원인은 단절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구원을 나눠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할머니의 단절된 행동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증오가 있다. 여기에 이야기 초반에 할머니가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타인과 단절되어 있었고 교만했고 이기적이었고 타인을 증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할머니를 지옥으로 가게 만든 이유였다. 

    그렇다면 단절의 대안은 무엇인가? 혼자 있는 것이 단절이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공동체일까? 혼자 있는 것이 고립, 공허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유대, 연대일까? 죽음의 집에서 여럿이 함께 있는 고통을 견뎌냈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에 있어서 '하나'와 '여럿'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전체도 반드시 대립되는 것도 아니다. 고립은 나쁜 것이고 여럿이 있으면 좋다 이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이라는 것을 하나로 엮어주는 어떤 것이 빠져있다면 하나가 있던 백 명이 있던 백만 명이 있던 어떤 집단이건 단체생활을 하던 협동생활을 하던 그것은 언제라도 지옥이 될 수 있다.

    그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양파가 끊어졌고 모두가 다 지옥 불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공멸에 대한 생생한 묘사. 매달린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고 할머니는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잘못한 것을 보여준다. 매달린 사람들도 이건 내양파야 나만 구원받을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욕구 충족에 대한 열의, 증오로 가득 찾던 지옥의 사람들이었다. 개별적인 개인의 욕망 충족이 지옥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 전체가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흔히 한 사람을 이기주의라고 얘기 하지만 두 사람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었을 때 가족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집단도 집단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국가이기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향했던 것은 이런 식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언제나 집산주의를 반대했다. 타 집단에 대한 증오, 배제 토대로 만들어지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이것들은 절대 하나(혼자)에 대한 대안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나는 문득 마태복음 18장 19~20절 구절을 떠올렸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은 특정한 날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 이상 사람들(커뮤니티) 안에 사랑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거기에는 주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가르침 중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민족, 계급, 인종 혹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 안에 사랑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사랑론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역시 단절을 멀리하고 이웃과의 사랑(예수의 이름 안에서)을 해라라고 말한 것을 되새기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증오, 이기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즉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사랑이다. 나를 완전히 버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 나를 버리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 잃어버릴 뻔한 내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는 악뿐 아니라 신의 모습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 사랑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완덕(完德) 완전한 덕행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실천적 사랑은 결국 '나와 너'라는 한 개념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사람은 '나와 너'이고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진짜 사랑, 실천적 사랑이 존재한다면 나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고 내 속에 비친 너를 볼 수 있다. 이 모습들은 결점으로 가득 차 있고 죄도 많이 저질렀을 것이지만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용서한다는 것이다. 겸손하게 용서할 수 있을 때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것은 이해타산, 집단 이기주의 아니면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배제로 만들어진 '우리'의 개념 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로지 이때의 우리 나와 너 사이의 이 우리만이 이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힘이 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 당신이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속한 집단 존재하지 않게 된다. Dead House 죽음의 집, 죽어있는 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존재하게 만들고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줄 수 있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전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ἀγαθ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18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agathŏs ]
    • 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 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 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2:18.
    • 관련 성경  /   선(마5:45, 롬2:7), 물건(눅12:18,19), 선행(행9:36), 양심(행23:1). [형] 선한(마12:34, 19:16, 눅6:45, 골1:10), 좋은(마7:11, 눅1:53, 요7:12), 착한(마25:21, 고후9:8).

    팔복으로 시작한 산상수훈은 13절에서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말씀하시고 난 후,
    이제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빛은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기에,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이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제 14절 이하의 말씀을 중심으로 두 번째 비유로 드신 빛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자.

    먼저 14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이 스스로 “빛”(φῶς)을 발하는 발광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빛 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그의 신분에 맞게 빛을 받아 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된 자들로,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사는 그의 백성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16절에서 이들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τὸν πατέρα ‘ὑμῶν’ τὸ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내는 자들인데, 그의 실생활과 말로써 드러내는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빛은 결코 감춰질 수 없다.
    아니 감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4절 후반 절에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결코 감춰질 수가 없고, 또한 15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불을 켜면 등경 위에 두어 빛을 발하게 하여 집안 모든 사람에게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너희는”(Ὑμεῖς)이라고 할 때, 이는 한 개인을 말하는 동시에 교회를 말함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사 2:2; 갈 4:26; 히 12:22).
    그래서 주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πόλις...ἐπάνω ὄρους κειμένη)는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개인 또는 무리는 그의 삶이건 말이건 사실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빛을 발하는 사명자”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래서 16절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οὕτως λαμψάτω τὸ φῶς ὑμῶν ἔμπροσθεν τῶν ἀνθρώπων)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빛을 비추라고 하신 것인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빛이기에 우리를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답을 16절에서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한다.
    그들이(ἴδωσιν)이 너희들의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τὸν πατέρα ‘ὑμῶν’) 그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나 말이, 항상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말이 복음 전하는 방편이 되어야 함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거짓된 행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막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막히고 말 것이며, 나아가 우리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리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슬프게도 지금,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산위에 있는 동네로서, 빛의 사명을 잘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 우리의 잘못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도록...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하는 이 두 비유는 앞서 비유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수차에 걸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쌍둥이 비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동시에 생각게 되고,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는 비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입장에서 주시는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과 믿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이방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인, 마이노리티(minority)입니다. 이러한 소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성의 문제, 그리고 책임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소금이다" "빛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극히 짧은 "소금이다"하는 이 간단한 말씀 속에서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어떤 것인가 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심으로 우리에게는 또한 이 세상을 향한 빛의 책임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빛이라 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로 생각을 전개해 보면 빛에는 햇빛, 달빛, 별빛 등의 본래 주어진 자연적인 빛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빛을 눈으로 보며 그 빛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어두움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라 하며, 그 빛 뒤에 있는 그늘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공적인 빛입니다. 그것은 바로 촛불이나 등잔불은 물론 전등 빛이며, 요즈음에 와서는 놀라우리만큼 발전된 여러 가지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적인 빛으로 밤을 낮처럼 밝히며 불편 없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오늘 우리가 생각할 빛 곧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만이 빛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신령한 빛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는 빛은 보이지 않는 빛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그 영적인 빛을 생각할 때마다 이 보이는 빛을 보면서 거기로부터 그 보이지 않는 신령한 빛의 뜻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깜깜한 데를 갔다가 불빛 하나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그렇게도 반갑고, 이 빛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작은 빛 한 줄기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빛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캄캄한 흑암의 재앙이 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에 보면 흑암이 임하는 사흘 동안 애굽인의 영내에는 빛이 전혀 없이 낮이 밤처럼 캄캄하게 되었으며 사람이 서로 볼 수도 없는 가운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어나 보았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일어나서는 무엇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누워서 뭉개는 수 밖에요. 이처럼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알고 보면 빛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영적인 빛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빛을 보면서, 이것을 상징으로 하여 영적인 빛을 생각하라는 것으로 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바로 받은 사람은 크고 작은 어떤 빛을 보든지 간에 "너희는 빛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영적인 빛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자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빛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빛이라는 것은 양심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며, 선의의 빛이요, 혹은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씀! 바로 이것이 빛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없이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반대가 어두움일진대 이 어두움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이 어두움은 곧 무지와 무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손치더라도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힘이 있고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어두우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힘센 장수가 칼을 뽑았다 하더라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그만 머리털이 밀리우고 힘이 빠진 후 블레셋 사람에 의해 눈이 뽑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삿 16:21). 그러다가 나중에는 머리털이 자라나면서 다시 힘이 생겨지는 모습이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는 힘이야 있든지 없든지 간에 삼손이 아무리 장사라 하더라도 그에게 눈이 없다면 그 힘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더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어두움은 무능이요, 모든 능력은 빛에 근거합니다. 또한 이 어두움은 혼돈을 말합니다. 어두우면 무질서해져서 마치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는 세상이 너무 어둡다며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녔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종교적인 암흑은 우상이요,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정초 때 보는 토정비결에서부터 사주, 궁합, 신수 등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에 지금도 매여들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아직도 우리 나라에는 정식으로 등록하고 세금을 내는 무당과 점쟁이만도 자그마치 16만 8천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외에도 얼마든지 많은 무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인데 곧 그만큼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소위 지성인이라는 양반들이 이름 있다는 점쟁이들에게 혹해서는 많은 복채를 놓고 그 앞에다 운명을 맡긴답니다. 심지어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도 그 여부를 점쟁이에게 물어 보고, 사업을 하면서도 무꾸리를 한다니 한 마디로 말해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너무도 어두워요, 무지하기 때문에 총명이 흐려졌어요, 그 때문에 이 엄청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교 1학년 학생 중 40%가 부적을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지만 여기에는 박사도 대학 졸업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처지이기에 저 유명하다는 이화여대 앞에 점쟁이가 제일 많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두움에서 오는 무지와 혼돈이 아무 것이나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허무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이 어두워질 때면 "그만 죽고 싶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어디 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이 목숨이더냐 말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해도 좋지만 죽고 싶다는 말만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이라도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푹 쉬면서 "제가 그만 죽고 싶어요"라고 했다면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이전에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 앞에야 어떻게 그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죽을 때 죽더라도 죽겠다는 말만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때로는 한숨을 쉴 수도 있고, 절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슬픔이 있다고 하여 쉽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은 철저히 삼가 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허무주의의 소산입니다. 저주와 슬픔, 미움과 불화, 죄와 공포, 이 모두가 다 어두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두우면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우면 허무해지며 마지막에는 정말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눈이 있어 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밝은 눈을 가졌어도 빛이 없으면 못 본다는 점입니다. 내 이 눈이 눈의 구실을 하려면은 빛이 있어야 하고 내 힘이 유효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빛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힘이 있다고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귀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된 용기는 만용일 뿐 결코 용기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용기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의"라고 하는 빛이 있을 때에, 그 가운데서 활동되어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를 못하고 의와는 상관이 없는 용기라면 그것은 깡패의 용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만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마음의 빛, 보이지 않는 이 영적인 빛이 없고서는 지혜도, 능력도, 돈도, 힘도, 지식도, 그 모두가 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빛의 역할이란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보면, 우리의 "빛됨"이라는 것은 빛의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이 빛이시오, 예수가 빛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빛이심을 여러 곳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요 1:4, 9, 3:19, 8:12, 9:5, 12:35, 36) 영어 성경에는 아이엠 더 라잇(I am the light)으로 빛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 빛, 곧 하나밖에 없는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관사를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의 강조를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그 빛이다"라며 유일한 빛이심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진실로 주님은 생명의 빛이시오, 빛 자체가 되십니다.

    이 빛은 동시에 심판적 의미가 있습니다. 어떠한 곳에서든 빛이 비취는 곳에서는 더럽고 추한 잘못의 전부가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에서 멀리 떨어져서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살고 있지만 빛에 가까이 가서 보면 부끄럽고 추한 그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도덕적인 암흑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음을 얻었습니다. 종교적인 미신과 우매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인류 문화사를 한번 보세요. 문화사가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것은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밝아지고 인간 역사가 밝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미신이 물러갔고 자연과학이 발전되었습니다. 적어도 문화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는 않아도 오늘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아도 아직 기독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나라, 또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나라들의 미개함은 20세기의 오늘에도 놀라울 정도가 아닙니까? 미개함의 뿌리는 종교 문제에 있습니다. 종교가 잘못 되면 도덕이 잘못 되고, 도덕이 잘못 되면 가치관이 잘못 되며, 가치관이 잘못 되면 사회생활 전체가 다 잘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도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는 한 집에 평균 13명의 어린이가 있고 15명이 넘는 가정도 많다고 합니다. 한번은 우리 교인 한 분이 밤에 차를 몰다가 후진을 하던 중 그만 실수를 하여 어린이 한 명을 치어 숨지게 했답니다. 이에 너무도 죄송해서 어떻게라도 보상을 할 마음으로 그 어머니를 찾아가서는 보상을 해드리겠다고 하니까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여기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애 하나 없어도 괜찮으니 그냥 가세요"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 그들의 종교가 이렇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무지하게 되는대로 낳고서는 죽으면 죽는 대로 괜찮고, 굶으면 굶는 대로 어쩔 수 없는 우매함이 다름 아닌 종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주는 우매함이란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얼마나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 많았습니까? 이러한 인간 역사에 있어서 예수는 세상의 빛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심지어는 과학적으로도 예수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저 태양은 적어도 지구를 중심으로한 태양계에 있어서는 빛의 근원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달빛의 빛은 자신의 빛이 아닙니다. 오로지 태양의 빛을 받아 그것을 반사할 뿐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그 달빛만 가지고도 길을 갈 수 있을 만큼 제법 밝습니다마는 달은 결코 자체의 빛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빛"이라는 것도 자기의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마치 만월과 같이 정면으로 충분한 빛을 받아야만 반사의 빛도 충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은 햇빛을 받는 만큼만 우리에게 되비춰 줍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받은 보름달도 있고, 초생달, 반달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빛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정면으로 받는 만남의 관계를 가지며 사는 사람은 그 생활 전체가 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어떤 이는 50%만 받거나 극히 부분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초생달이나 반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조금밖에는 예수 믿는 냄새가 나지를 않아요. 빛이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교회에 왔을 대는 빛을 받은 것 같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느 사이에 다 꺼지고 말아요. 그러자니 천사가 되었다가 악마가 되었다가 빛이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것도 오래 사귀어야 합니다. 마치 마술처럼 하루아침에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로써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난 시내산의 40일 이후에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입니다. 하나님과 40일 간이나 직접으로 깊게 사귄 모세는 그 얼굴에 광채가 너무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조차 두려워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만나는 깊은 사귐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사귄다는 말은 만난다는 것이요, 사랑한다는 것이요, 계속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항상 자기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앞에 자기를 보이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이고 마음을 보이고 얼굴을 보입니다. 그리함으로 그 빛을 받게 되고 계속 사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직장 그 어디에든지 예수의 냄새가 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빛은 그늘이 있게 합니다. 이쪽이 밝으면 저쪽은 어둡습니다. 내가 태양을 향해 섰을 때는 그늘이 없는 밝음뿐입니다 마는, 같은 자리에서라도 빛을 등지고 돌아서기만 하면 그늘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바르게 서서 사는 사람은 어두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바로 내 등뒤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지만 그 그늘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반대로 빛은 못 보고 어두움만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은 곧장 하는 말이 "망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는 사람에 의해서 세상이 흥하고 망했더냐는 말씀입니다. 인간 역사의 흥망 성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그런 걱정은 할 것이 아닙니다. 빛을 향해서 사는 사람은 그늘을 보지 못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정인 빛 앞에는 그늘진 곳이 없어요. 아무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어요. 그 때문에 다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수술실의 불빛처럼 사실 그대로, 깨끗하게 사방에 일시에 비춰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절대로 숨기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일은 노출이 잘되어 하찮은 조그만 일인데도 당장 소문이 나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밝음 가운데 있다 보니 조그만 것인데도 지체없이 확 드러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가운데서는 큰 죄악이 있어도 보이지를 않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이고 좀 잘못했다며 시비를 걸어오거든 아예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를 마십시오. 그것은 그만큼 밝다는 뜻이요. 기대도 컸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더욱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말이라는 것은 곡식 같은 것의 양을 헤아리기 위한 하나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등불을 켜서는 이 말 아래에다 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전구를 높이 달듯이 등불은 높이 등경 위에 두어서 밝히는 것이지 말로 덮어 두는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을 마가 복음 4장 21절에서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평상 아래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 평상은 요즈음 말로 침대를 두고 하는 말

    D똕TXT 입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켜서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등불이라면 당연히 등경 위에 두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희들도 그와 같이 높이 들려져서 밝히는 빛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말과 평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정확한 기계식 저울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양과 부피를 재는데 있어서 마치 저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 말은 사고 팔며 장사하는 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도구이며 따라서 장사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서에 보면 말과 그리고 저울추를 속이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속에 장삿속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장사하는 것이야 어디까지나 돈을 벌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익만을 추구하며 돈을 벌고자만 하다가는 그 소중한 빛을 가리운단 말입니다. 언제나 돈벌 생각이 앞서고 보면 공의를 무너뜨리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빛됨을 묻어버리게 되고 덮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더 버느냐?"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8절 말씀에 보면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 의가 먼저인데 그와는 반대로 이기주의와 실리주의에 급급한 나머지 이득을 앞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평상 아래"란 것인데, 이 평상, 곧 침대는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안일주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일해야 되겠는데 자꾸만 쉬고 싶고, 뿐만 아니라 매사를 쉽게 처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는 한탕주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 일도 아주 쉽게 별로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수고할 것도 없이 적당히 계산해서 하려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

    D똕TXT年나님의 일을 땀흘림과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어떻게 쉽게만 하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때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이라면 몸된 교회의 일을 위해서는 때때로 크나큰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고 안일주의에서 안주하려고만 할 때에 교회의 빛을 가리우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빛이 된다는 것은 "희생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희생과 수고가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생없는 안일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빛이 가리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다름 아닌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침대 아래 두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는 말 아래나 침대 아래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높이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빛을 우선적으로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빛과 소금을 비교해 보십시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실체가 내적으로 용해되고 침투되어 일으키는 내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빛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위에서 내려 아래로 비춥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소금이 개인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면 빛은 사회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의 기능은 똑같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사명이 그만큼 크고 중요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죄인들이 부끄러워할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빛의 사람인 그리스도인 앞에서 감히 협잡을 한다거나 하는 불의한 일은 할 수 없어야 합니다. 찬란히 밝은 빛 앞에서는 어두움이 용납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두움이 짙기 때문에 빛이 약한 것이 아니라, 빛이 없고 빛이 약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어두움이 설 자리가 없게 하는 그러한 빛의 생활을 하D똕TXT途라는 말씀이십니다. 나아가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 빛 안에 있음으로 지혜가 지혜되고 능력이 능력으로 그 힘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에 가서 보면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모든 것의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금이나 빛은 말이 없습니다. 이들 둘은 적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소금은 조용히 녹아 없어지고 빛은 계속 타오르며 비춰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곧 이러한 것입니다. 무엇을 한답시고 나팔을 불며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며 크고 작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묵묵한 행함의 행동만이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숨기어지지 않는답니다. 왜냐 하면 이는 산 위에 있는 동네도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타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일은 알리고 또 알리고 게다가 문서화까지 합니다마는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소문내어 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뒤늦게 알려져서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있었느냐?"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참으로 조용하여야 합니다. 빛처럼 말이 없는 행함! 바로 그것이 진정한 선행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희생이 있고 동시에 그로 인한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구원에 이르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으며, 빛과 사귀는 가운데 충분한 빛이 되어 어디를 향해서나 밝게 비추이는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빛을 말하는 그 무엇을 볼 때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이 어두운 세대의 빛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가도스(ἀ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

    '착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 단어의 대표적인 두 가지는 '아가도스'와 '칼로스' 입니다.
    서로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넓고 깊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0:10
    나는 선한(칼로스)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아가도스)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두 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라고 합니다.






    칼로스는 선과 악 구조의 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 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금과 빛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절벽에 평소에 나를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이 술에 취하여 곧 떨어질 것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평소에 나를 헐뜯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끌어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는 것을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처럼 잘 됐다! 이 참에 떨어져 죽으면 좋겠다고 하고 지나갈 확율이 높다고 합니다.

    이웃 집의 소가 늪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 집이 평소에 친절하고 늘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소라면 당장 늪에서 꺼내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사람을 괴롭히고 없는 것도 마치 있는 것처럼 지어내는 말을 하던 이웃의 소라면 구태여 힘들게 그 소를 구해 줄 이유가 없다며 지나쳐버릴 것입니다.
    착한 행실이란 이런 때에도 그 소를 늪에서 꺼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칼로스와 아가토스

    • Kalos 신체적, 미학적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나 선함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장면이나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을 칼로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인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아가토스반면에 는 선함이나 미덕을 나타내지만 종종 행동 및 도덕적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가토스가 윤리적 성격을 포괄하는 반면, 유게네스는 삶의 선택을 통해 형성되는 상속된 고귀함과 도덕적 나침반에 중점을 둡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경 본문에서 칭찬받는 인물의 자질이 다면적이며, 유진은 단순한 미학이나 좋은 행동을 넘어 고귀함을 독특하게 포착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칼로스와 아가도스는 헬라어로 "선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가치 있는 일을 말하며, "아가도스"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성도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선함>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아가도스-ά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입니다.
    두 단어가 혼용하여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아가도스-άγαθός>는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선>의 개념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올바른, 유익한”의 뜻입니다.

    <칼로스-καλός>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합니다.
    <아가도스-άγαθός>가 윤리, 도덕적인 <선>을 의미한다면,
    <칼로스-καλός>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아름다움은 <아가도스>와 <칼로스>에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내면의 깊은 아름다움과 성품, 인격이 흘러 넘칩니다.
    <아가도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마음을 드리는 인생이 <칼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칼로스>의 삶, 그 착한 행실이 모든 사람에게 <아가도스>가 되어서 나타나는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흘러 넘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영혼은 <아가도스-ά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착한 그리스도인(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

    친구들이 “우리 아빠도 너의 아빠 같으면 좋겠다."라고 할 땐, 잠깐 우쭐했다가도 금세 분노가 북받쳐 오릅니다.
    어딜 가나 ‘사람 좋다’는 평을 듣는 아빠는,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추울까 봐 이불을 가져다주는 가하면, 보증 서 준 지인이 집을 날렸을 때도 “사정이 있겠지”하면서 그를 두둔하기 바빴습니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쏟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빠 같은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저는 돈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전적인 도움을 청하는 손길은 가차 없이 거절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눈물 흘리는 엄마의 모습이 깊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가까운 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저축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인은 보란 듯이 잠수를 탔습니다.
    주변에서는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 공부 한 셈 치라"라고 위로했으나, 제 속에서는 천불이 났습니다.
    ‘원망해봐야 소용없다’며 너털웃음 짓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 속없는 모습이 어쩌면 ‘슬픔을 밀어낼 유일한 방법’이었을까요?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휴대전화 1번을 꾹 눌렀습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이게 얼마 만이야?”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용한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박다윤)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착한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 손해를 보더라도 착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칼로스(καλός)와 '아가도스(αγαθός)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에서 8복의 말씀 다음에 계속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8복을 말씀하신 후에 갑자기 빛과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8복의 말씀이 복된 자들의 심령이 상태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빛과 소금의 비유는 복된 자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빛을 비추는 삶의 태도를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①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태도는 '착한 행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냐는 질문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②눅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착하게 살라고 하시면서 정작 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착하다는 말과 선하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는 순우리말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어입니다.
    즉 '착할 선'입니다.

    마태복음 5:16
    16이와 같이 여러분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일들을 보고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9
    19⁕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를 왜 선하다고 하시나요?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 마태복음 5:16절에서는 '착한'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선한'이라고 번역했을까요?
    그 이유는 원어 성경에는 서로 다른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착한'이라는 말에는 '칼로스(καλός)'를, '선한'이라는 말에는 '아가도스(αγαθός)'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과 영어 성경 모두 칼로스와 아가도스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는 단어가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착한 행실/good deed'로 행위의 개념을 넣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원어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헬라어 원어 '칼로스'와 '아가도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오늘 설교의 주제인 '착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로스'와 '아가도스' 모두 선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로스'가 윤리, 도덕적인 선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아가도스'는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품, 즉 선함(goodness)과 친절(kindness)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선(칼로스)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아가도스)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삶이 아니라 달이 태양빛을 반사하여 비추듯이 빛 되신 주님을 본받아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선(칼로스)은 주로 '좋은 열매'의 의미로 나타납니다.

    ③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④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아름다운 열매', 즉 인간의 착한 모습과 태도는 '좋은 씨',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씨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씨가 싹을 틔워 열매를 맺도록 잡초를 뽑고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와 교회에 속한 저와 여러분들이 할 일인 것입니다(⑤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것이 영적인 원리에서도 동일합니다.

    ⑥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동안 무엇을 심으셨습니까? 육신을 위해 심으신 분은 당연히 육신을 통해 거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위해 심지 않으면 아무리 육신의 영광을 얻는다 하더라도 영의 영광은 없는 것입니다. 영이 잘 되면 육이 잘 되지만, 육이 잘 된다고 영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육의 일과 영의 일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⑦롬 8:5-7,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저는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의 영이 잘 됨으로써 여러분의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기를 원합니다(⑧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다시 예화로 돌아가겠습니다.
    예화에 나오는 아버지는 좋은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엄마나 딸의 입장에서는 나쁜 아빠이지만, 그에게 도움을 받았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소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착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나쁜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속의 아버지는 착한 사람일 수도 나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가 그의 삶에서 무엇을 심었냐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가장으로서 심어야 할 것을 심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생계와 행복을 위해 심어야 하는데, 자신의 체면을 앞세웠습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착한 사람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것은 쉽게 말하면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버리는 증상입니다.
    꼭 말을 잘 듣는다는 생각보다도 '착한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으로는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고분고분해서 내면과 외면의 모순이 일어나는 경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경우 아이는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제어하게 되는 데, 이러한 아이는 자라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사소한 부도덕한 행동까지 지나치게 간섭하게 되는데, 심한 경우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본인은 '그 나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증후군은 동양권 문화에서 잘 나타나는 데 그 이유는 유교의 영향입니다. 가부장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과 효도를 강조하다 보니 착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가정과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자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목회자의 자녀는 대부분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해 나가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잘못된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는 제가 착하다고 착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착한 사람 증후군'의 하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좋은 부모와 화목한 가정,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났기에 착한 아이 증후군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니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세계, 한국 위인 전집을 두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저의 내면에 각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하버드 대 마이크 샌델 교수는 아이들을 양육할 때 위인전을 읽히지 말고 누구를 닮으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복하고 부모가 잘 양육하며, 유대인 교육처럼 영재 교육을 받은 자들(빌 게이츠, 마크 저크버그와 같은 자들)은 권력과 부를 얻어도 언제나 공정한데, 그 이유는 저들은 위인전에서 그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부모와 가정을 통해서 배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다른 환경에서 혼자 독버섯처럼 자란 아이는 자라서 권력을 잡으면 독주하게 되는데, 그래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자라온 환경이 유복하지도, 영재도 아니라면 주어진 삶의 한계 안에서 그냥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⑨잠 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받는 여자가 시집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제가 어려서 위인전을 읽지 않고 성경을 읽었더라면 착한 사람 증후군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늦게나마 진정한 칼로스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바로는 교회 안에도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목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는 '바리새인 증후군'이 '착한 사람 증후군'으로 변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정의하기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착한사람 증후군은 사회 가운데 나를 보지 못하고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하면서도 마치 위인전을 읽듯이 자신의 칼로스를 대입하기에 바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의 주인공뿐 아니라 그 주인공의 관계와 그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 나아가 하나님의 뜻(아가도스)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한 것처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이듯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나의 삶의 영역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즉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먼저 생각하는 가운데 나의 칼로스와의 '갭 gap'을 고민해야 합니다. ​

    ​⑩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 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더 이상 착한 사람 증후군에서 벗어나십시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리새인 증후군에서 벗어나십시오. 믿음이 있는 척, 착한 척하면서 힘들게 살지 마십시오. 어줍잖은 의로운 행세를 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착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게 믿음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는 아버지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따르는 것이 자식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의 아가도스를 쫓지 않는 자가 어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쫒는 자는 굳이 자신의 의를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신실한 한 사람의 당연한 행동이 믿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연함이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 즉 하나님의 아가도스를 닮은 착한 행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당연함'이 있습니까?



    1. 아가도스 / 선함, 선하다.

    희랍어로 형용사 αγαθος아가도스로 읽힙니다. ‘좋은’, ‘선한’, 정도의 뜻이 가장 자주 사용되며, 친절한, 충실한, 덕이 있는, 정도의 뜻이 발전된 뜻으로 읽힙니다.

    αγαθος아가도스란 단어를 중심으로 파생된 유사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사 αγαθωσυνη아가도쉬네는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유래되어 선함, 착함, 올바름이란 뜻을 갖습니다. 또한 αγαθοποιεω아가도포이에오란 동사는 αγαθος아가도스와 동사 ποιεω포이에오의 합성어로 사용되어 선을 행하다, 유익을 끼치다. 올바르게 잘하다 정도의 뜻을 갖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αγαθος아가도스는 선하다, 선함 정도의 뜻을 가지며, 이를 바탕으로 연결되는 유사어로서 좋은, 착함, 올바름 정도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주로 인용되는 선함,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선하다는 뜻이 갖고 있는 본질은 보다 종합적인 전망을 요구합니다. 물론 모든 성서 구절이 종합적인 전망으로 이해될 순 없겠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종합적인 전망으로서의 선함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하다’는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높은 덕성, 윤리 도덕적인 기준에서 본 ‘선함’만으로 성서의미가 전부 갈음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상태에서의 행동반경, 양식, 생각, 선택, 등등이 선함의 궁극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동일하게 ‘선함’으로 사용되지만, 희랍어에서 선함, 좋은 이란 뜻은 아가도스 이외에 καλος칼로스란 단어가 한 개 더 사용됩니다. 두 낱말간의 차이가 있다면 아가도스의 선함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 삶에서 펼쳐지는 행위 속에서 발견되는 비중이 더 크다면, ‘καλος칼로스’로서의 선함은 선함의 궁극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발견체 그 자체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의미비중이 조금 더 할애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희랍어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종종 사용되는 명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문장 사용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을 말하는 ‘선함’의 단어를 καλος칼로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유추가 가능하다고 보겠습니다.

    주요 성구 펼침

    다른 씨는 비옥한(좋은NIV역) 땅에 떨어져서, 풍작을 이루었다.

    눅 8:8 (The Message)

    펼침: 공관복음에 공히 나타난 좋은 땅 비유에서 아가도스가 ‘좋은’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땅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태의 상징이라면 이 상태가 ‘좋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있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현상은 열매를 맺는 상징으로 발전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과 그 과정에서 사람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상징적 잉태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용감히 싸우고, 그대의 믿음과 그대 자신을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착한 양심을 가지라 NIV역) 모두가 하나되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딤전 1:19 (The Message)

    펼침: 기록자는 믿음과의 동의어로 착한 양심을 언급하는데, 이때 착한이 바로 ‘아가도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양심의 성서적 의미가 믿음과 함께 연결되면 이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지향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양심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율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법을 총칭합니다. 이 법의 기반이 되는 것이 양심인데, 이 양심이 착하다는 것은 곧 믿음과 연결되어 믿음을 향하는 사람의 본래적인 마음의 기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은 곧 믿음의 파선을 뜻하기에 기록자가 다음과 같이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 분께서 하시는 일, 곧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선한 일,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엡 2:10 (The Message)

    펼침: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 선한 일은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착한 일, 덕을 세우는 일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원하는 선한 일의 범주가 중요합니다. 요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질료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 질료가 산출될 수 있는 태반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생명 만남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접점을 뜻합니다. 이 생명의 접점 안에서 추구되는 선한 일의 독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 선한 일에 집중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르는, 말씀 안에 머무르는 그 상태의 지속 자체에서 선한 일이 태동된다는 사실의 주목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 선함 추구는 현상의 실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궁극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명 발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생명 발견 행위 자체가 예배요, 기도요, 선한 일이란 사실의 긍정,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뿌리로 했을 때, 현실 양심에 근거한 봉사, 헌신이 긍정적인 생명의 실천으로서 선순환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곤란합니다.

    세례 받을 때의 물이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 물은 여러분의 살갗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깨끗해진 양심(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 NIV역)을 갖게 된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물입니다.

    벧전 3:21 (The Message)

    펼침: 앞서 살펴보았던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도 언급되었듯이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선 선한 양심의 속성에 대해 보다 더 명확히 밝혀준다고 보입니다. 말씀을 상징하는 ‘물’이 그리스도의 영적 세례를 가리킨다고 언급한 대목에서 기록자는 선한 양심을 언급하면서 이 양심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은 본래 인간 삶의 상식, 보편적 인성을 뜻함인데, 이 양심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세례, 곧 그 분의 말씀으로 인해 선함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한 양심이 되는 것이며,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인간 삶에서의 보편적 인성, 보편적 봉사에서조차 초월적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전인적 선함의 총체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 조문 자체는 하나님께서 상식으로 여기시는 것으로서, 각 명령은 모두 건전하고 거룩한 권고(의로우며 선하도다. NIV역)입니다.

    롬 7:12 (The Message)

    펼침: 기록자가 율법의 속성에 대해 설명할 때, ‘선하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습니다. 의로우며 선한 이 율법은 분명 하나님을 밝혀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째서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생명을 가로막고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선함’을 이해하는 인식변환의 첫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 본성을 통해서, 그렇게 주어진 활동성을 통해 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달게 해주는 인식도구로서 기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을 통해서, 또는 율법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곧 진정한 선함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기록자가 주장한 ‘의인 없음’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선함’을 일으키는 행동 주체는 율법에 있는데, 그 율법의 근원은 하나님의 생명에 있으며, 그 생명은 우리가 행위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주어진 생명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함을 선함답게 인식할 수 있는 인식변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바른 길을 따라서 산 사람(선한 일을 행한 자는 NIV역)은 부활 생명으로 들어가고, 그릇된 길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부활 심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요 5:29 (The Message)

    펼침: 이 선한 일이 만약 불교나 모슬렘들이 말하는 민족정의, 대민봉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상 종교 다원주의가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언급한 선한 일의 기준은 우리가 설정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 기준에서 주어진 보편적 양심의 틀에서 규정한 선함과 악함의 기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밝힌 선한 일은 총체적인 활동으로 집약되는데, 인간에게 총체적 활동이란 인간 행위 안에서 그 근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근원이 나타난다는 이 진리를 긍정하고 발견하는 활동이 곧 우리 인간 측면에서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의 유일성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을 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긍정하는 과정, 이 과정이 바로 선한 일이며, 이 선한 일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칼로스 / 선함, 선하다

    4:17(우리는 누구에게 열심이며 그 열망이 향한 곳은 누구인가)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Ζηλουσιν ὺ̀μας ού́ καλως, ά́λλα έ́κκλεισιν ὺ̀μας θελουσιν, ὶ̀να αύ́τους ζηλουτε.

    직역 :

    그들이 너희에게 선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열심을 내니, 그것은 오히려 너희를 이간하려는 의도이며, 이는 너희가 그들을 열망하게 하려 함이라.

    해석 :

    열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보여지고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종교심에 기인합니다. 쉽게 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약2:17절의 기록을 곡해함으로써 자신의 행동하는 신앙심을 표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보는 자가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러한 자들로부터 듣는 생명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열심에서 나오는 반복적인 성경말씀의 되뇌임에 다름이 아닌 것이며 벗겨지지 않은 율법 그대로의 말씀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감성이 인성을 지배하기에 나타나는 헛된 열심에 다름 아닙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감성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 열심도 한계가 있어 그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비로소 이성으로서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데 그렇게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각 개인의 때가 차게 되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된 후에는 다시금 이성과 더불어 거듭난 마음으로서의 감성으로서 하나님이 일에 관하여 동참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이 순서를 잡지 못하고 감성으로 시작하였다가 감성으로 끝마친다거나, 감성을 넘어 이성으로까지 하나님을 향하던 모습에서 또 이성으로만 마치게 된다면 이는 또한 영지주의라는 결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미혹에 빠진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성과 이성을 모두 허락하신 분이십니다. 해서 감성이 배제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고하게 되며, 반대로 이성이 배제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감성으로만 이해하려고 드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해서 감성과 이성, 그리고 뜻(의지)을 다하여 모나지 않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구절은 율법의 충실한 자기 역할의 수행함입니다. 이렇듯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현 상태에 눌러 앉아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기능이 있음입니다. 율법의 그러한 기능은 인간이 스스로 부여한 것으로서 인간이 왕이 되어 있는 상태가 벗어나야(벗겨져야) 할 율법을 더욱 율법으로 기능하게(감싸지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는 하나님 뜻의 전부인 것인데(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 상태로 풀어주심으로) 풀어지지 않은 율법 자체로는 인간을 종삼아 주인으로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ל󰔞󰕸נ󰗪ם󰘟임마누엘로서 ם󰘟임(~와 함께)과 󰕸נ󰗪마누(우리와)와 ל󰔞(하나님)엘이 합성된 것이며, 헬라어로는 Έ́μμανουηλ임마누엘로서 각각의 뜻은 공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임마누엘하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함께 계신다 라고 하는 것이 세뇌당한 결과로서의 반복된 관념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확신으로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그리 기록되어 있으니 그냥 그렇다고 믿기만 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여 읽고 암기했다 하여 지식적으로 외우고 알아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그의 안에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 말씀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가 말씀에 인도되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달려 죽음으로써 임재하시게 되는 실체의 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땅, 새로운 하늘, 즉 새하늘새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그, 곧 그리스도와 동일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를 시인(ὸ̀μολογεω호몰로게오 - 선언, 언명, 공포, 진술, 동일한 것을 말하다, 고백하다, 솔직히 말하다)이라고 합니다. 그저 어떠한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그와(그리스도와) 동일한 말을 함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시인이 말입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원문으로 읽으면 우선 사람이라는 인칭명사가 없고 현재 마음으로 믿어져(수동) 의에 이르고(의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입으로 그와 동일한 말을 하게 됨으로써(수동)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면 이제부터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떠한 일을 향하여 열심을 내느냔 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 안팎의 이웃에게 내가 받은 생명인 복음, 임마누엘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을 나눔으로써(증거함으로써, 전함으로써) 그 복음(되어 진 증거)을 듣는 존재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 세우심으로 그 존재 또한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게(부활하게) 되는 일을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부단히도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차적으로 가견적 교회를 일컬어 언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등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말씀의 의보다 자신들의 의를 더 내세우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그 존재의 신실성에서 발출된 일들임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의 바른 뜻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코자 주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있어야 하는) 것 단 하나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달아졌다면 이제까지 해오던 그런 행위들에서 멈출 것입니다.

    ‘Ζηλουσιν ὺ̀μας ού́ καλως젤루신 휘마스 우 칼로스 - 그들이 너희에게 선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열심을 내니’, Ζηλουσιν젤루신은 ‘열렬, 열화, 열심, 열정, 시기, 질투’라는 ζηλοω젤로오에서 유래된 동사로서 ‘열심히 힘쓰다, ~에게 몰두하다, 노력하다’등의 뜻입니다. 이는 그들, 즉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자들의 행태를 말하고 있음인데 다름 아닌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열심을 내며 율법으로 돌아설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가 참 복음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의 이런 자들에 의하여 미혹함에 빠지기가 십상인 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인 것인데 이러한 상태로 있는 그들은 참 복음(참 생명) 안에서 하나로 있을 수 없는 뿌리가 다른 헤테로스 차원의 다름들로 존재하고 있는 자들이며 이러한 자들로 인해 누구나 삶을 지나면서 체험되고 터득된 것들에 익숙해져 있기에 다시금 그들이 그 옛 일들을 들려주게 되면 그게 옳은 것이라며 동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최소한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세워진 존재는 그나마 예외지만, 그러할지라도 주의를 해야 할 것이지만) 자신이 현상적으로 경험한 바(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하여)가 진짜인 것으로 확신함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러한 경험은 하지 못했을지라도(오감을 통한 경험) 많은 이들의 논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고한 주장에 되고 있는 것을 자신은 경험하지도 않았지만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추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다른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자들의 말들로 인하여 듣는 자 또한 그것이 사실인양 믿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한 잘못된 것을 전달함으로써 전달하는 자들 자신들의 의를 더욱 데 공고히 함은 물론이며 듣는 자들까지 그 잘못 될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전달하는 자는 그 자신의 의를 더 높이 세우기 위하여 더욱 더 그러한 잘못된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ού́ καλως우 칼로스’는 ‘좋은, 선한, 옳은, 바른’등의 뜻인 καλως칼로스에 ‘~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라는 부정하는 부사 ου우가 쓰여 ‘좋은 것이 아닌’의 뜻이어서 ‘그들이 너희에게 좋은 일이 아닌것으로 열심을 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언급되고 있는 καλως칼로스와 더불어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αγαθος아가도스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면,

    선함, 선하다(αγαθος, 아가도스) http://blog.daum.net/innovator-bay/ 인용

    희랍어로 형용사 αγαθος아가도스로 읽힙니다. ‘좋은’, ‘선한’, 정도의 뜻이 가장 자주 사용되며, 친절한, 충실한, 덕이 있는, 정도의 뜻이 발전된 뜻으로 읽힙니다.

    αγαθος아가도스란 단어를 중심으로 파생된 유사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사 αγαθωσυνη아가도쉬네는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유래되어 선함, 착함, 올바름이란 뜻을 갖습니다. 또한 αγαθοποιεω아가도포이에오란 동사는 αγαθος아가도스와 동사 ποιεω포이에오의 합성어로 사용되어 선을 행하다, 유익을 끼치다. 올바르게 잘하다 정도의 뜻을 갖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αγαθος아가도스는 선하다, 선함 정도의 뜻을 가지며, 이를 바탕으로 연결되는 유사어로서 좋은, 착함, 올바름 정도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주로 인용되는 선함, αγαθος아가도스에서 선하다는 뜻이 갖고 있는 본질은 보다 종합적인 전망을 요구합니다. 물론 모든 성서 구절이 종합적인 전망으로 이해될 순 없겠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종합적인 전망으로서의 선함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선하다’는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높은 덕성, 윤리 도덕적인 기준에서 본 ‘선함’만으로 성서의미가 전부 갈음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상태에서의 행동반경, 양식, 생각, 선택, 등등이 선함의 궁극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동일하게 ‘선함’으로 사용되지만, 희랍어에서 선함, 좋은 이란 뜻은 아가도스 이외에 καλος칼로스란 단어가 한 개 더 사용됩니다. 두 낱말간의 차이가 있다면 아가도스의 선함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 삶에서 펼쳐지는 행위 속에서 발견되는 비중이 더 크다면, ‘καλος칼로스’로서의 선함은 선함의 궁극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발견체 그 자체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의미비중이 조금 더 할애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희랍어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종종 사용되는 명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문장 사용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을 말하는 ‘선함’의 단어를 καλος칼로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유추가 가능하다고 보겠습니다.

    눅8:8

    다른 씨는 비옥한(좋은NIV역) 땅에 떨어져서, 풍작을 이루었다.

    공관복음에 공히 나타난 좋은 땅 비유에서 아가도스가 ‘좋은’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땅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태의 상징이라면 이 상태가 ‘좋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있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현상은 열매를 맺는 상징으로 발전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과 그 과정에서 사람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상징적 잉태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딤전1:19

    그대가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용감히 싸우고, 그대의 믿음과 그대 자신을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착한 양심을 가지라 NIV역) 모두가 하나되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기록자는 믿음과의 동의어로 착한 양심을 언급하는데, 이때 착한이 바로 ‘아가도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양심의 성서적 의미가 믿음과 함께 연결되면 이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지향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양심은 로마서에서

    인간의 율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의 율법은

    유대교 율법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지켜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법을 총칭합니다.

    이 법의 기반이 되는 것이 양심인데,

    이 양심이 착하다는 것은 곧 믿음과 연결되어 믿음을 향하는 사람의 본래적인 마음의 기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양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은 곧 믿음의 파선을 뜻하기에 기록자가 다음과 같이 밝힌 것입니다.

    엡2:10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 분께서 하시는 일, 곧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선한 일, 우리가 해야 할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 선한 일은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 착한 일,

    덕을 세우는 일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원하는

    선한 일의 범주가 중요합니다.

    요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질료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 질료가 산출될 수 있는 태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생명 만남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접점을 뜻합니다.

    이 생명의 접점 안에서 추구되는 선한 일의 독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 선한 일에 집중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무르는,

    말씀 안에 머무르는 그 상태의 지속 자체에서 선한 일이 태동된다는

    사실의 주목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 선함 추구는 현상의 실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궁극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명 발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생명 발견 행위 자체가

    예배요, 기도요, 선한 일이란 사실의 긍정,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뿌리로 했을 때, 현실 양심에 근거한 봉사, 헌신이 긍정적인 생명의 실천으로서 선순환할 수 있다는 걸 잊어선 곤란합니다.

    벧전3:21

    세례 받을 때의 물이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 물은 여러분의 살갗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깨끗해진 양심(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 NIV역)을 갖게 된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물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디모데전서 1:19절에도 언급되었듯이 베드로전서 3:21절에선 선한 양심의 속성에 대해 보다 더 명확히 밝혀준다고 보입니다. 말씀을 상징하는 ‘물’이 그리스도의 영적 세례를 가리킨다고 언급한 대목에서 기록자는 선한 양심을 언급하면서 이 양심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심은 본래 인간 삶의 상식, 보편적 인성을 뜻함인데, 이 양심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세례, 곧 그 분의 말씀으로 인해 선함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한 양심이 되는 것이며, 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인간 삶에서의 보편적 인성, 보편적 봉사에서조차 초월적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전인적 선함의 총체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롬7:12

    그러나 율법 조문 자체는 하나님께서 상식으로 여기시는 것으로서, 각 명령은 모두 건전하고 거룩한 권고(의로우며 선하도다. NIV역)입니다.

    기록자가 율법의 속성에 대해 설명할 때, ‘선하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습니다. 의로우며 선한 이 율법은 분명 하나님을 밝혀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째서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생명을 가로막고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선함’을 이해하는 인식변환의 첫 열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 본성을 통해서, 그렇게 주어진 활동성을 통해 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달게 해주는 인식도구로서 기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을 통해서, 또는 율법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곧 진정한 선함을 가로막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기록자가 주장한 ‘의인 없음’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선함’을 일으키는 행동 주체는 율법에 있는데, 그 율법의 근원은 하나님의 생명에 있으며, 그 생명은 우리가 행위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주어진 생명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함을 선함답게 인식할 수 있는 인식변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요5:29

    바른 길을 따라서 산 사람(선한 일을 행한 자는 NIV역)은 부활 생명으로 들어가고, 그릇된 길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부활 심판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선한 일이 만약 불교나 모슬렘들이 말하는 민족정의, 대민봉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상 종교 다원주의가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성서가 언급한 선한 일의 기준은 우리가 설정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 기준에서 주어진 보편적 양심의 틀에서 규정한 선함과 악함의 기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밝힌 선한 일은 총체적인 활동으로 집약되는데, 인간에게 총체적 활동이란 인간 행위 안에서 그 근원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근원이 나타난다는 이 진리를 긍정하고 발견하는 활동이 곧 우리 인간 측면에서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의 유일성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을 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긍정하는 과정, 이 과정이 바로 선한 일이며, 이 선한 일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ά́λλα έ́κκλεισιν ὺ̀μας θελουσιν알라 엑클레이신 휘마스 델루신 - 그것은 오히려 너희를 이간시키려는 의도이며’, ά́λλα알라는 반대의미를 나타내는 불변사로서 ‘그와 반대로, 도리어’ 정도의 뜻을 갖고 있는데 지금은 동일한 의미이나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부작용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오히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일이랍시고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선함에 거꾸로 가게하기 때문입니다. έ́κκλεισιν엑클레이신은 ‘έ́κ에크 - 방출, 제거, 이동, 분리’와 ‘κλειω클레이오 - 잠그다, 감금하다, 마음 문을 닫다’의 합성어인 έ́κκλειω에클레이오가 원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다, 배제하다, 차단하다, 불가능케 하다, 이간하다, 격리시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θελουσιν델루신이란 θελω델로가 기본동사로 ‘생각하다, 바라다, 원하다, 하고 싶어하다, 의도하다’라는 뜻이어서 묶어서 읽으면 ‘오히려 그들이 너희를 이간하려는 의도이며’라는 것입니다. 이간이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존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게 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꾀는 것,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참 복음을 차단하는 일입니다.

    ‘ὶ̀να αύ́τους ζηλουτε히나 아우투스 젤루테 - 이는 너희가 그들을 열망하게 하려 함이라’, ὶ̀να히나는 목적, 한정, 결과를 나타내는 기본접속사로서 ‘~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αύ́τους아우투스는 ‘자신, 그 , 그것, 스스로’를 가리키는 강조형 복수로서 ‘그들을’ 일컫고 있습니다. ζηλουτε젤루테이는 ‘열렬, 열화, 열심, 열정, 시기, 질투’라는 ζηλοω젤로오에서 유래된 동사로서 ‘열심히 힘쓰다, ~에게 몰두하다, 노력하다’등의 뜻으로 ‘너희가 그들을 열망(동일어군 ζξλευω젤류오 - 열망을 가지다)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열심’이라는 단어로 쓰임 가운데 열심당원이라는 열심당에 속한 구성원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예로 설명하자면 독립협회, 독립꾼들로서 나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열심을 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던 자들이었습니다. 독립투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누가 비난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방향으로서의 묵상은 영생이라는 참된 생명의 장을 풀어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방향을 잘못 설정한 것입니다. 애국심이라는 감성이 격하게 반응하여 현상적으로 보이는 이 땅의 국가의 독립을 위한 것이지 하늘에 이르는 참된 영의 생명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로부터 참된 복음을 들은 ‘나, 지금의 기록으로는 너희(아직은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회들, 즉 거짓된 나, 우리)’라는 존재가 참된 복음과 하나가 되고자함을 내 안의 ‘또 다른 나’들이(이방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의 기록으로는 그들이) 이 나(아직은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즉 거짓된 나)를 감성을 내세운 복음, 즉 다시금 율법을 지키던 종교인으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신들인 것입니다. 물론 자신 이전에 외부로부터의 들려옴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부로부터의 그 어떤 복음이라는 미명을 띤 소리라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 있는 자라면 그 존재에게는 그 다른 복음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상관할 것이 없을 것인데 이처럼 다른 복음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그 다른 복음에 나라는 존재가 동조하고 있음인 것(예수의 믿음이 아닌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믿음이었기에)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생명, 즉 나의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다른 존재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인도 결과도 책임이 있어 책임이 지워주는 몫을 감당해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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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개역 성경에서 "소금"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22구절
    구약에서 17구절
    신약에서 5구절

    1.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4.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5. 신명기 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6. 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7. 열왕기하 2: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8. 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9.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10. 에스라 4:14
    우리가 이제 궁의 소금을 먹는고로 왕의 수치 당함을 참아 보지못하여 보내어 왕에게 고하오니.

    11.에스라 6:9
    또 그 수용물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소청대로 영락 없이 날마다 주어.

    12. 에스라 7:22
    은은 일백 달란트까지, 밀은 일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일백 밧까지, 기름도 일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수 없이 하라.

    13. 욥기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14. 에스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15.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16. 에스겔 47: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7. 스바냐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18.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9.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20.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21. 누가복음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22.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오늘 설교를 하게 된 동기를 소개합니다.
    최근 한국사회에 나타난 사회 현상을 지켜보며 국회의원, 판사, 검사, 군인들의 발언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저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하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1970년 80년 대에 한국교회가 급성장 할 때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의논하기를 "왜 교회는 성장하는데 가톨릭교회는 성장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의논 후에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 가톨릭교회는 철저한 근본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장을 위해서 얻은 결론은 성장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본 교육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하였듯이 한국사회에 나타난 현상을 보며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설교가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성경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선경에서는 "너희는 땅(게)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 라고 정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자주 들었던 내용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금에 대한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소금은 조미료
    둘째는 소금은 방부제
    셋째는 소금은 언약을 위한 것(불변)

    오늘 제가 소개하려는 소금은 네번째 내용으로 성서지리학 또는성서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소금의 용도를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금은 씨앗을 뿌릴 땅에 뿌리는 농부들의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은 석회질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뿌리면 땅이 굳어져서 씨앗이 자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농부는 먼저 석회질의 땅에 소금을 뿌려서 땅을 부드럽게한 후 그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에 산상복음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먼저 팔복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에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로운 농부가 씨앗을 뿌리기 전에 먼저 석회질과 같은 땅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제자들이 굳어진 땅에 소금이 되어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 베드로<시몬 , 게바> 
    최후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음.
    후에 시체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지하로 옮겨짐

    2. 안드레 : 터키 에데사
    그리스 아가야(파트레스)에서 이교도에 의하여 X형의 십자가에 달려 순교함.    
    X형의 십자가를 안드레 십자가로 부름.

    3.야고보<보아너게(우뢰의 아들)>
    예루살렘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의 칼에 목베어 죽음(행 12:2)

    4. 요한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 송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 곳에서 기름이 끓는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었음.  
    그러나 기적 적으로 피해 달아나는데 성공함.
    도미티안 황제가 밧모섬으로 추방함.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 사람임. 에베소에서 순사(자연사. 95세)함

    ​5. 빌립 
    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에서 로마의 핍박으로 기둥에 매여 돌에 맞아 순교 

    ​6. 마태 <레위>
    AD 60년 에티오피아 도시 나라바에서 이교도의 핍박으로 미늘창으로 살해당함
    (미늘창 : 도끼, 창, 갈고리를 하나로 묶어놓은 무기 )

    ​7. 시몬<셀롯>
    AD 74년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
    혹은 페르시아에서 폭도들에 의해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나는 형으로 죽음.

    ​8. 도마 <디두모>
    인도 코르만델에서 이교도에 의하여 창으로 몸이 관통 되어 순교.

    ​9. 바돌로매 <나다나엘>
    아르메니아에서 우상숭배자에 의하여 산채로 살가죽 벗기는 참수형으로 순교. 

    ​10. 다대오
    앗수르와 바사(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전도하다 페르시아 지역에서 화살에 의해  순교함.

    ​11. 작은 야고보
    94세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 돌, 몽둥이 톱(목 찔림)순교함.
    높은 성전 탑에서 던져도 죽지 않아 나무망치로 머리를 맞고 순교하였음.

    ​12. 맛디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 돌매질 당했으나 죽지 않아 참수형으로 순교.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이라는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를 뿌릴 때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씨앗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서 소금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수용하여 열매를 맺도록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사회에 나타난 현상을 지켜보며 만일 국회의원들 중에서, 검사와 판사들 중에서, 군인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들이 땅의 소금이 되는 그 이유를 바르게 깨달았다면 결코 오늘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소금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땅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금"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보면 구약에서 17구절, 신약에서 5구절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소금이란 단어가 있는 구절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라(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바울은 본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의 언어 습관에 대해 권면한다.
    본절에서 ‘너희 말’은 골로새 교인들의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선포를 포함한다.
    골로새 교인들이 일상적인 대화나 복음 선포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1. ‘은혜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은혜 가운데서’로 번역된 헬라어 ‘엔카리티’ (*) 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감사함으로’를 의미한다(3:16).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를 의미한다(엡 2:5).
    셋째, ‘은혜롭게’를 의미한다(눅 4:22).
    세 가지 중 마지막 의미가 본질의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린다(Lighrfoor Martin, O'Brien).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대화의 내용이나 방법이 매우 중요함을 시사한다(벧전 3:15,16).

    2.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해야한다.
    헬라인들에게 ‘소금’은 ‘재치’나 ‘기지’를 의미한다(Bruce, Vaughan),
    또한 랍비 문헌에서도 ‘소금’은 지혜를 의미한다(O'Brien).
    따라서 본절은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속에서 은혜롭고 지혜로우며 재치있는 말을 함으로써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둘째는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화목하기 위한 비결은 4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 18:19) 3)
    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2025년 2월 9일(주현 후 제5주. 녹색)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마태복음 5:13)

    (개역한글성경)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새한글성경)
    바로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슨 수로 짠맛을 되찾겠어요?
    아무 데도 더는 쓸모가 없어서 오직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마구 밟힐 뿐입니다.

    땅과 세상의 의미

    땅 / 
    1. 명사 강이나 바다와 같이 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지구의 겉면.
    2. 명사 영토(領土) 또는 영지(領地).
    3. 명사 그 지방. 또는 그곳.

    세상(世上) /
    1.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또는 그 기간의 삶.
    3.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나 공간.

    헬라어

    땅(게. gē)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gē ]
    • I.  땅.
      • 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 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 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 4. 지구.
        • 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 b.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 관련 성경  /  땅(마2:6, 막2:10, 행1:8), 세상(마5:13, 9:6, 막9:3), 흙(마13:5, 막4:5), 뭍(막6:47), 육지 (마4:1, 눅5:3, 요21:8), 지구(눅21:35), 지면 (계20:9), 천하(계16:14).



    세상(코스모스. 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2889

    1. 장식.   2. 세상.  3. 고전 4:9(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발음 [ kŏsmŏs ]
    어원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κομίζω 스트롱번호 2865
    1. 가져오다.   2. 마련하다. 3. 회수하다
    발음 [ kŏm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κόμισα, 제1부정과거 중간태 ἐκομισάμην, 미래중간태 κομίσομαι, κομέω에서 유래
    • 1.  [능동] 가져오다, 눅 7:37.
    • 2.  [중간태]
      • a. 마련하다, 획득하다, 얻다, 받다, 고후5:10, 엡6:8, 골3:25, 히10:36, 11:19,39, 벧전5:4, 벧후2:13.
      • b. 회수하다, 다시 받다, 마25:27, 히11:19.
    • 관련 성경  /  가지다(눅7:37), 받다(고후5:10, 골3:25, 히10:36), 얻다(벧전5:4), 당하다(벧후2:13).

    1. 장식, 치장, 단장, 벧전3:3.
    2. 세상, 우주, 마24:21, 눅11:50, 롬1:20, 히4:3.
    3. [동물 이상의 모든 존재 총칭] 세상, 고전4:9.
    4. [사람이 사는] 땅, 세상, 마4:8, 막16:15, 요16:21, 롬1:8, 고전5:10, 14:10, 골1:6. [하늘과 대조되는] 땅, 세계, 요6:14, 9:39, 11:27, 딤전1:15, 히10:5.
    5. [인류를 가리켜서] 세상, 마18:7, 요8:12, 롬5:13, 고전1:27.
    6. 지상적 기쁨, 소유, 근심, 고난의 무대로서의 세상, 마16:26, 막8:36, 눅9:25, 고전7:33.
    7.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으로서의 세상, 요8:23, 12:25, 고전3:19, 엡2:2.

    8.  전체, 총체, 약 3:6.
    관련 성경  / 천하(마4:8, 막8:36, 눅9:25), 세상(마5:14, 고전1:27, 계11:15), 천지(행17:24), 세속(약1:27), 세계(약3:6), 단장(벧전3:3).


    이제까지 우리가 읽고 듣던 말씀을 수정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글개역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는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소금, 세상의 빛


    설교 주제도 땅의 소금이 되라고 정했습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아니라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땅에서 소금이 될 수 없다면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땅에서 소금이 되었다면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땅과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땅은 지금 내가 있는 자리 그 장소를 말합니다.
    땅이란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 즉 삶의 자리(Sitz im Leben) 또는 삶의 현장(Szene des Lebens)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세상보다는 아주 작습니다.
    가장 작은 자리에서 소금이 될 수 없다면 더 넓고 큰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땅에서 소금이 된다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

    소금과 빛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금을 땅에 뿌리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땅의 토양이 석회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농부들은 먼저 땅에 소금을 뿌렸다고 합니다.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소금 맛을 잃게 되면 무슨 수로 그대들이 소금 맛을 되살려 내겠어요?
    그대들 자신 안에 소금을 지니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린도후서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라(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성경적 방법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

    1. 벌거벗은 노아(창 9:22)
    - 가나안의 아비 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 영심의 가책을 받은 군중들(9절)
    -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

    맛 잃은 소금에 대해 말씀하시다
    누가복음 14:34-35
    34“그러므로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도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슨 수로 그 맛을 되살려 내겠어요?
    35그것은 땅에도 거름에도 알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깥에 버립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을 그 순서를 바꿔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된 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 때 "세상"이란 헬라어는 '세상'이 아니라 "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세상이란 헬라어는 "코스모스"라고 합니다.
    땅이란 헬라어는 "게"라고 합니다.
    새한글성경에서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번역합니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은 땅의 소금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소금이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이제까지 소금의 용도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소금은 조미료(맛)
    소금은 방부제(부패하는 것을 잠시 방지)
    소금은 언약(변함이 없는 말씀에 대한 약속)

    예수님 당시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기 전에 땅에 소금을 뿌려서 땅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석회질이 많은 땅은 비가 오면 땅이 굳어져서 씨앗을 뿌려고 싹을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먼저 땅에 소금을 뿌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든 후에 씨앗을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져야 할 땅을 씨앗이 싹을 낼 수 있는 땅으로 바꾼 후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이란 땅은 씨를 뿌려고 싹을 낼 수 없으므로 소금을 뿌려야 하는데 소금은 곧 성도들이 땅에 뿌려질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땅으로 흩어져서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까요?
    한글 개역성경에서 소금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라!

    둘째는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서로 화목하라!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라!(마태복음 5:13)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주문하십니다.
    요즘이면 이런 가르침을 주실까요?
    요즘 소금은 인간역사에 들어온 이래 개인의 건강,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 주범(主犯)처럼 경계의 대상입니다.
    소금은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은 녹아지고 형체도 없이 희생했더니, 인간들이 그 음식을 먹으면서 보통 푸대접이 아닙니다.

    소금은 식염(食鹽)으로 화학명은 염화나트륨입니다. 
    사람에게 소금은 생리적으로 없어서는 안 됩니다.
    혈액 속에는 0.9%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부족하면 소화액 분비가 감소하여 식욕이 떨어지고 땀을 많이 흘려 체내에 염기가 모자라면 현기증, 무욕, 의식혼탁, 탈력…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능이 상실되고 목숨도 잃습니다. 
    그래서 보통 성인들은 하루 12∼13g의 소금을 섭취해야 합니다.
    소금이 없던 시대에는 조수(鳥獸)나 물고기를 잡아먹음으로 동물몸속에 있는 염분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인간들이 점점 짜게 먹다보니 고혈압의 원인이 되고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되었다고 얼마나 구박하는지 소금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소금이 없으면 고기 맛도 국물 맛도… 김치 맛도 없다던 인간들이 소금 때문에 몸이 망가진다고 야단이니 소금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소금이 되라! 하신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가르침의 대상이 일반청중이 아닙니다.
    믿음을 위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그래? 그러면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소금 용도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식용, 부패방지용, 약용…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세상의 악을 방지하라, 부패를 막아라, 맛을 내는 조미료가 되라… 정도로 이해하고 설교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뜬구름을 잡는 관념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석회질이 많습니다. 
    물에도 석회가 많아서 식수도 그만큼 귀합니다.
    땅이 석회암이고 석회질이다 보니 토질이 거칩니다.
    석회질이 많은 땅에 비가 오면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씨앗을 뿌리기 전에 땅을 부드럽게 하려고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으로 땅이 부드럽고 싹이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석회가 엷어진 좋은 땅이 되는 것이지요!

    씨앗은 예수님, 혹은 예수님 말씀, 땅은 청중입니다. 
    그 청중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굳은 석회 땅입니다.
    그 땅은 나중에 13장에 나오지만 마음 밭들이 길가 밭, 돌짝밭, 가시덤불 밭입니다. 
    이들이 청중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수용하지 못하고 대리석 같은 밭이고 돌이 많아서 씨앗이 떨어지지만 싹이 나오다가 맙니다.

    이런 심령의 땅에 제자들은 소금이 되어 석회질의 굳은 것을 없애 옥토(沃土)로 만드는 소금이 되라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의 어떤 성경은, 땅의 소금이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은 땅에 들어가는 소금이 되어 씨앗이 나오도록 땅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모르면 세상의 소금이 되라… 너무 관념적입니다.
    설교하기는 쉽고 기도할 때의 문구로 사용하기에는 좋은데 정작 그 세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금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허한 구호로 끝나고 맙니다.

    너는 땅의 소금이다!
    그 땅이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내 주변의 누구입니까?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고… 상종하기 싫은 그 불편한 사람… 사람은 좋은데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하고 투박할 수가 없는… 바로 그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땅, 그 마음, 그 사람입니다! 너는 바로 그 굳은 사람에게 소금이 되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생각해 보세요! 
    누가 내게는 땅에 해당됩니까?
    대리석 같은 사람, 석회질이 많은 사람… 주님에 대해 신뢰의 싹이 나지 않을 사람… 그 사람에게 소금이 되고 그 땅의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 이후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약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지식으로 알고 잘 해석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성경대로 산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심은 많은데 생활이 없으니까 소금은 맛을 잃었고 교회는 가치를 잃은 소금창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인성교육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실력은 늘고 똑똑한데 도덕이 없고 버릇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 성공, 출세를 위해 너무 지식, 성적위주의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인성교육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알아요? 빠삭하잖아요? 설교자들이 참 힘들어요! 그러면 아는 만큼 살고 있나요? 설교를 그만큼 들었으면 성자(聖者) 소리 들어야 하지 않나요? 성자 소리는 그냥 듣나요?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녹이기 힘든 사람들… 그들까지 녹이려는 애씀이 있어야 성화(聖化)가 나오고 성자(聖者)가 됩니다. 땅의 소금은 생활신앙, 생활기독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땅의 소금이 되라! 
    해외선교 명령이 아닙니다. 
    국내선교, 관계전도에 해당됩니다. 
    왜 시내 큰 교회를 선호합니까? 
    시설이 좋고 시스템이 좋고 설교도 좋지만 동네에서 교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거예요. 왜 숨겨요? 
    자신이 없거나 믿음대로 살기 귀찮은 거예요!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세상의 소금까지는 안 되어도 좋으니 옆 주변 땅에 소금이 되라는 거예요!

    땅은 친구이고 동네이고 사무실입니다. 주변에서 본이 되고 사랑을 보이고 친절하고 정직해서… 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 언론에 교인들 욕하는 보도가 나와도 교인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기독교 변호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점차 마음 땅이 부드러워서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전도요 인격전도요 땅의 소금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땅의 소금이 되라고 합니다. 소금은 1400가지 용도가 있다네요! 굉장합니다. 소금이 그냥 있으면 1400개의 용도가 나오나요? 아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소금의 특징이 녹아짐입니다. 심심한 물맛에 소금 맛이 나는 것은 소금이 녹아내렸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녹아내리는 것만큼 음식 맛이 납니다. 

    소금은 자기 성질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음식을 맛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습니다. 자기는 완전히 녹아 형체도 모양도 없어지면서도 음식에 배어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의 역할! 자기모양, 자기역할은 묻힘을 통해, 자기 부인을 통해, 내려놓음을 통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땅의 소금이니… 라고 하실 때는 사람들 가운데서 녹아내릴 것을 명령합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자기희생이 없으면 굳은 마음을 녹일 수 없습니다. 
    남을 녹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녹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주변이 예수님의 씨앗을 틔울 옥토가 됩니다.

    생활에서 녹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게 8복의 내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청결하게 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 믿음을 위해 박해를 자처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내 주변의 석회질의 땅과 같은 사람들을 변화되고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격전도입니다.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만 예배하고 잘 지내고 나가서는 까칠한 사람…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면 어떻게 세상의 땅이 변하고 복음의 씨! 예수님의 정신이 돋아나겠어요? 오히려 나 때문에 세상은 더 굳어지고 마음들이 석회질, 석회암이 됩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 지방의 소금은 암염, 돌소금입니다. 
    원래 소금은 귀해서 물물교환에서는 최고의 가치였고 화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월급을 소금으로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급료(salary)나 병사(soldier)가 라틴어로 소금(salt)을 가리키는 ‘sal’에 어원을 둔 까닭입니다. 
    소금은 금(金)의 가치에 비견해서 ‘하얀 금’ ‘작은 금’이라 불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는 말씀은 너희는 엄청 귀한 존재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귀한 존재이기에 높은 자존감으로 가치 있게,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의 삶입니다.

    유대인은 스스로를 소금처럼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처합니다.
    왜? 선민이니까! 그들이 얼마나 자존감이 높은가?
    하나님께서 세계에 10개의 아름다움을 주셨는데 9개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주셨다고 합니다. 인
    류에게 주신 10개의 보석 중에서 아홉 개는 유대인들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입니까?

    그래서 유대인은 자기들은 부(富)와 재물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유지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부와 재물을 항상 주시는가? 
    자선을 베풀기 위한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소금으로 인식하는 유대인은 구제에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에게 최고로 가치 있는 의인은 누구인가? 구제를 하는 유대인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신하에게 세 친구가 있습니다.
    잘 나갈 때는 모두 좋은 친구였습니다.
    왕이 신하에게 입궁(入宮)을 명했습니다.
    느낌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에게 동행을 청했습니다.
    한 친구는 아예 손사래를 쳤고, 한 친구는 왕궁 문 앞까지만 동행한 후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친구는 임금 앞에까지 가서 이 친구는 결코 그런 친구가 아니다, 해명하고 좋은 선행을 많이 했다, 보증해 주었습니다.

    세 친구가 누구인가? 
    돈과 배우자와 선행입니다.
    죽음이라는 호출이 왔을 때 돈은 한 푼도 동행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는 무덤 앞까지는 동행합니다. 
    하나님 앞에까지 동행하는 친구는 누구인가? 선행입니다. 
    최고의 선행이 구제입니다. 
    하나님이 너 어떻게 살았나? 하면 구제가 변호해 줍니다. 
    이 사람은 이런저런 좋은 일, 선행, 구제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제-자선을 최고의 가치, 최고의 종교선행으로 알았습니다.

    구제 중에서도 최고의 자선은 동족들에게… 동족 중에서도 고아들과 홀로된 여인들에게… 다음에는 나그네들에게… 이런 순서로 구제를 한 것을 최고로 알았습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식을 세상에 보이라는 촉구입니다. 땅에서 선행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맛을 잃어버리고 쓸모없는 신자, 형식적인 신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고대인이 사용하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에서 추출되어 불순물이 많이 섞였습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에 용해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나면 나머지는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짠맛을 잃은 소금은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집니다.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습니다.
    역청 역할을 합니다.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 장소도 되기에 소금은 사람에게 밟힙니다.

    이런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면 아무 맛이 없어지고 효용성이 없는데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맛을 잃으면 세상은 어디에서 경건의 맛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맛을 잃으면 세상은 어디에서 은혜의 맛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려면 녹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몇 달 전에, <아름다운재단>이 전국 성인남녀 1,029명을 일대일 면접 조사한 결과, 기독교인들의 기부(헌금·경조사비 제외) 및 자원봉사 참여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천주교 68%, 기독교 61%입니다. 선교헌금… 액수를 생각하면 우리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구제를 통해 로마가톨릭은 교세증가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소금이 녹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부와 구제를 지나치게 개교회 전도로 목적하고 삶에서 인격에서는 맛을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많이 하되 땅의 소금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극복해야 하고 우리교회가 극복해야 제대로 된 땅의 소금이 됩니다.   


    유대인은 배교했다가 돌아오면 회당 입구에 눕습니다. 
    사람들은 회당으로 들어가며 사정없이 배교자를 밟았습니다.
    배교자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수모와 고통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회서 제적된 자가 다시 자격을 얻으려면 교회 문에 누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심정으로 교회를 출입할 때 우리 교회의 문이 한층 맛있는 소금으로, 능력 있는 예수의 소금교인으로 만들어 내고 우리교회와 내가, 한국교회가 더욱 가치 있게 쓰임 받는 땅의 소금이 될 줄 믿습니다.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라!(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13)

    1. 세상(κόσμος, kosmos)

    • 의미 : 헬라어 κόσμος는 일반적으로 “우주,” “세계,” 또는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세속적이고 타락한 인간 사회를 포함하여 모든 창조 세계를 가리킵니다.

    • 신학적 해석 : 예수님은 제자들이 단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에게만 국한된 사명이 아니라,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칠 사명을 가졌음을 강조하십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제자들의 사역이 전 지구적이고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한다는 보편성을 나타냅니다.

    2. 소금(ἅλας, halas)

    • 의미 : ἅλας는 헬라어로 소금을 뜻하며, 음식의 맛을 내거나 보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 사용 배경 :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1) 맛을 내는 역할, (2) 부패를 방지하는 보존의 역할, (3) 언약의 상징, (4) 토양의 변화
       
      • : 음식의 본질을 끌어내어 맛을 풍부하게 만듦.
      • 보존 : 음식이 썩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
      • 언약 : 소금은 구약에서 변하지 않는 언약의 상징으로 쓰였음(레위기 2:13, 민수기 18:19).
      • 토양의변화 : 팔레스타인의 땅은 석회질이 너무 많아 물을 마실 수 없었으며 씨를 뿌려도 싹을 낼 수 없었다.
        비가 오면 석회질이  많은 땅은 더 굳어진다.
        따라서 농부가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에 소금을 뿌려 땅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
    3. 맛을 잃으면(μωρανθῇ, moranthē)

    • 의미 : 이 단어는 “어리석어지다” 또는 “무미건조하게 되다”를 의미합니다.
    • 신학적 해석 : 소금이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유익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빛과 진리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다는 경고입니다.

    2. 구약 성경에서의 소금의 맥락

    1) 소금의 언약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재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과의 소금 언약을 네 소재에 빼지 못할지니...”

    소금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계를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으로 불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을 대표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낼 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소금 언약으로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것이 되리라.”

    여기서 소금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하나님의 언약을 연결시키는 사명을 맡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2) 소금의 정화와 보존의 역할

    열왕기하 2:20-22: 엘리사가 소금을 사용하여 물을 정화하는 장면.

    소금은 정화의 상징으로,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부르심받았음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16:4: “네가 태어난 날에 네 몸에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으며...”

    신생아에게 소금을 뿌리는 관습은 정화와 보존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도덕적·영적 순결을 유지하고 세상을 정화하는 역할을 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3. 신약 성경에서의 소금의 의미

    1) 소금과 제자의 정체성

    •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제자의 삶 속에서 진리와 화평을 상징하며, 세상 속에서 화목을 이루는 역할을 나타냅니다.

    2) 소금과 언어

    • 골로새서 4:6: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소금은 말과 행실 속에서 은혜롭고 진리를 담은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속에서 은혜를 나누고,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4. 정경신학적 해석: 소금과 세상의 관계

    1) 소금과 세상의 긴장 관계

    세상(kosmos)은 종종 죄와 타락의 장소로 묘사되며, 소금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유지하는 상징적 역할을 합니다. 제자는 세상의 타락 속에서도 그 본질과 사명을 지키며 세상을 정화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2)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 소금은 세상에 침투하여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제자들을 통해 세상 곳곳에 퍼지고,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에서 소금의 사명이 이루어집니다.

    3) 소금의 본질을 유지하는 중요성

    •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제자가 정체성을 잃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는 구약의 언약과 연결되며, 제자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함을 증거하지 못할 때, 그의 사명도 무의미해진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5. 현대적 적용

    1) 세상의 부패를 막는 그리스도인

    • 현대 사회는 도덕적 혼란과 영적 타락이 만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지키는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정의와 윤리를 실천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는 삶

    •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영해야 합니다. 소금이 언약의 상징이듯, 우리의 말과 행동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야 합니다.

    3) 맛을 내는 복음의 삶

    • 소금이 음식에 맛을 더하듯,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음의 기쁨과 생명을 더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직장, 가정,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4) 정화와 화평의 도구

    • 그리스도인은 엘리사의 소금처럼 세상을 정화하고 화평을 이루는 사명을 가집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속에서 죄와 부패를 정화하며, 하나님의 화평을 이루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기

    마태복음 5장 13절의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구약의 맥락과 신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며, 세상을 보존하고 정화하며 맛을 더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그 속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참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소금의 본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길 소망합니다.



    성경 속 소금 상징과 의미

    1. 소금의 일반적 개요

    소금은 화학적으로 염화나트륨(NaCl)이라고 부릅니다. 
    염화나트륨은 나트륨인데 염소와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위키백과에 보면 '소금의 주성분이다'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소금에는 염화나트륨만 있는 것이 아닐겁니다. 그건 후에 좀더 다루기로 하고, 염화나트륨을 조금만 살펴봅시다. 염화 나트륨은 나트륨 이온(Na+)과 염화 이온(Cl-)이 결합한 상태입니다. 물에 잘 녹으며 수용성입니다. 물에 잘 녹는다는 말은 말과 염화나트륨이 섞일 경우 서로 전자 분해와 결합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서로 친하다는 말입니다. 

    물과 기름이라는 뜻은 서로 잘 섞어지 않는다고 하죠. 이말은 서로 이온을 나주지 않고 독립적이란 뜻입니다. 염화이론과 나트륨 이온에 수소와 산소 원자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서로 잘 섞입니다. 염화 이온과 나트륨 이온도 잘 섞이고, 물도 수소가 있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염화나트륨은 음전자와 양전자가 쉽게 물에 해리되기 때문에 전해질 물질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설탕의 경우 물에는 잘 녹지만 쉽게 해리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2. 소금의 종류


    성경 속의 소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금의 종류를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제염과 천일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에서 추출한 것인지 바위소금 즉 산에서 채취한 암염(巖鹽)인지를 구분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두 가지 형태의 소금이 모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소금의 맛’은 암염을 뜻하는 것이고, 구약의 성막 제사에서 사용된 소금은 천일염으로 보입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하여튼 소금 본연의 성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세밀하게 구분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바닷물을 말려 얻은 소금을 그냥 천일염이라고 말하고, 땅에서 캔 소금을 암염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천일염(Solar Salt)

    천일염은 바닷물에서 수분을 제거하여 만든 소금을 말합니다. 순수한 염화나트륨이 아닌 바닷물 속의 다양한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건강에 유익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해안 지역에 많은 염전이 있습니다. 특히 신안은 소금의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전이 등장하지 않지만 지중해는 중심으로 염전이 존재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염전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해안과 같은 평평한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해 곧 염해(鹽海)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소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암염(Rock Salt)

    암염은 바닷물이 아닌 암석과 흙속에서 캐내는 것이기 때문에 천일염에 비해 불순물이 훨씬 많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짜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해 남쪽에 소금산이 있어 그것을 채취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는 암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해에서 채취하는 암염은 천일염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천일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염분이 빠져 나가도 돌같은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소금이 사용된 예들

    1.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욥기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2. 식품의 방부제 역할

    3. 나쁜 물을 고치는 약제(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4. 제사에서 사용(레위기 2:13. 역대하 13:5. 에스겔 43:24)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5. 정결의식의 소금(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 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6. 언약으로서의 소금 상징(민수기 18:19. 역대하 13: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7. 저주로서의 소금(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스바냐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마가복음 9장 49절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사해 소금기둥

    8.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소금

    신약에서의 소금은 구약의 다양한 상징을 아우른다. 
    포괄적 의미로서 상당히 은유적으로 소금을 사용하고 있다.

    땅의 소금이란 의미를 신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어떤 맛을 내야 할까요?

    네 가지 맛을 생각합니다.
    살 맛과 죽을 맛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골로새서 4:6
    너희 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첫째는 정직(Honesty)
    둘째는 근면(Diligence)
    셋째는 절제(Moderation)
    넷째는 절약(Frugality)

    성경속 소금은 '거룩함'의 상징으로 사용

    욥기 6장 6절의 ‘Can flavorless food be eaten without salt’라는 말씀처럼 간이 안된 음식을 먹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지닌 미각의 4원미(原味) 중 하나가 바로 짠맛이기 때문이다.

    염화나트륨이 주성분인 소금은 짠맛을 내는 흰 결정체로 인간이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물질이었기 때문에 선사시대에 이미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이나 염호, 암염이 있는 장소를 따라 문명이 발달되어 왔고 그 교역이 이루어졌다.

    소금을 만드는 집이라는 뜻인 독일어의 할레(Halle)나 할슈타트(Hallstatt), 영어의 -wich가 붙은 Droitwich, Nantwich, 또는 Salt Lake City 등은 모두 소금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로마에서는 소금이 관리나 군인에게 봉급으로 지불되기도 하였는데 봉급을 뜻하는 영어의 salary는 현물급여를 뜻하는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소금물로 사체를 처리하였고 6,7세기까지 작은 어촌이었던 베네치아는 지중해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에 소금을 팔아 번성한 대표적인 도시이다.

    소금은 성결과 거룩함의 상징이 되었는데 하나님께 드릴 훈향을 만들 때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 그리고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다.

    엘리사는 소금으로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골로새서 4장 6절에서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하라’고 하셨다.

    소금은 또한 언약을 상징하기도 하였는데 민수기 18장 19절에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또 역대하 13장 5절에는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금은 인체 내의 생리작용을 위한 필수 불가결의 식품이다. 그 이유는 소금이 체내, 특히 체액에 존재하며 삼투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의 피 속에는 0.9%의 염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 중 나트륨은 체내에서 탄산과 결합하여 중탄산염이 되고 혈액이나 체액의 알칼리성을 유지하게 된다.

    또 인산과 결합하여 체액의 산. 알칼리의 평형을 유지하는 완충제 역할을 하게된다. 음식에 섞여서 몸 속으로 들어 온 소금은 위액의 염산이 되거나 알칼리성 소화액의 성분이 되어 살균, 소화작용을 돕는다.

    따라서 소금의 섭취가 부족하면 소화액의 분비가 줄고 식욕이 떨어지며 장기간 소금의 섭취가 부족하게 되면 전신이 무기력해지고 권태감, 피로 및 정신적 불안과 더불어 철분 부족으로 적혈구가 생성되지 않아 빈혈이 생기게 된다.

    또 땀을 많이 흘려 급격히 소금을 상실하면 현기증, 의식혼탁, 탈력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뚜렷한 기능 상실이 일어난다. 반면에 적당한 소금의 섭취는 심장과 신장의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며 새로운 세포를 생성시키는 작용을 도와준다.

    그러나 과잉 섭취하면 잘 아는 것처럼 고혈압이나 위암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칼슘의 배설을 촉진시켜 골다공증의 위험이 높아지므로 보통 성인의 경우 하루 6g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비싸지도 귀하지도 않은 소금, 그러나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한 식품인 소금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부탁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의 성경적 의미와 미네랄 소금의 유용성

    옛날에는 소금이 귀하였고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봉급’을 영어로 샐러리(salary)라고 한다. 이는 라틴 말 살라리움(salarium)에서 온 용어인데, 그 첫 음절인 살(sal)은 라틴 말에서 ’소금’을 뜻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관리나 군인에게 봉급을 소금으로 지불하던 때가 있었는데, 나중에 그 소금 값으로 주던 급여를 살라리움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금을 주고 노예를 사기도 하였다. 이렇게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한 소금은 지방이나 나라 사이의 주요 교역 물품이기도 하였다. 동양에서도 소금을 작은 금(小金)으로 칭하리만큼 소중하고 필수적인 물질로 이해했다. 이스라엘 땅에는 다행히 "소금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소금 성읍"과 "소금 골짜기"가 있었다. 이는 가나안 땅에서 일찍부터 "소금 바다"를 중심으로 소금을 채취하거나 제조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소금을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섭취할 수 있었다.

      시해바다와 소금

    이스라엘인들은 빵을 만들 때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흔히 따로 먹기도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소금 없는 식사는 식사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내려오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소금이 들지 않은 곡식제물(소제, grain offering)은 바칠 수 없었다. 소금은 제물을 보존하고, 소금과 함께 먹음으로써 언약을 확증한다(언약의 소금, the salt of covenant, 레위기 2:13). 또한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burnt offering)" 위에도 소금을 뿌려야 했다(에스겔 43:24).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피워 올리는 향료도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했다(출애굽기 30:35). 

    이렇게 희생제사(sacrificial offerings)에 쓰이는 소금의 양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성전 안뜰 북쪽에는 소금을 저장해 두는 방도 따로 있었다.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내며, 생명을 지속시키고 강화하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먹음은 유대감, 그리고 상호 성실성을 뜻한다(에스라 4:14). "소금 언약"(민수기 18:19, 역대하 13:5).

    "소금"은 언약(계약)으로 성립된 관계의 지속성과 변치 않는 충실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소금 계약"은 영원한 계약을 의미한다. 레위기 2장 13절에 나오는 "언약의 소금"은, 제물에 소금을 치면서 하나님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상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대의 어떤 전통에 따르면, 성전에서 쓰이는 소금은 옛 소돔 부근에서 추출한 것으로 특별히 짠 사해(死海) 소금만을 쓰게 되어있었다. 유대인들의 재정(財政)이 어려웠을 때에, 당시 유다 땅을 식민지로 다스리던 페르시아 다리오왕과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성전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자를 대어주었는데, 거기에는 소금도 들어있었다(에스라 6:9, 7:22). 소금은 음식의 간을 맞추고 음식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정화((淨化)하는 기능도 가진다. 엘리사가 물을 ’고쳤으니(healed)’도 소금의 정화와 치료 효과를 나타낸다(열왕기하 2:21). 한편 소금에는 양면성(이중성)도 있다. 소금은 위험성과 악성(惡性)도 지니고 있어서, 소금이 과하면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소금은 한쪽으로는 생명의 유지와 강화를 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량과 황폐와 폐허, 불모와 죽음, 그리고 저주를 가리키게 된다(신명기 29:22, 23. 스바냐 2:9). 아비멜렉이 세겜을 함락한 다음에 그곳을 파괴하고 소금을 뿌린 것은 그 지역이 열매도 맺지 않고 사람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될 것을 상징하는 행위의 부정적 의미를 드러낸다 (사사기 9:45).

    이러한 소금의 이중성은 새 성전과 새 땅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에도 잘 드러난다.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나와 점차 큰 강을 이루고서는, 사해로 흘러 들어가서 사해의 물을 되살려서(restore), 온갖 동식물들이 생겨나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사해의 "진펄과 개펄(늪과 웅덩이 물)"은 소금 땅이 된다(에스겔 47:1-12). 소금의 이러한 의미들을 담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누가복음 14:34~35).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이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존재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며 경종을 준다.

    이렇듯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소금을 적절하게 적정한 곳에 사용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의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미네랄 소금의 효능 10가지☆

    1. 심혈관 보호

    2. 소화 촉진

    3. 면역력 강화

    4. 탈수 현상 해소

    5. 근육통 완화

    6. 뼈 성장

    7. 해독 살균작용

    8. 숙면유도

    9. 노화방지

    8. 신장기운 강화

    9. 집중력 강화

    10. 신체 알카리화

    깨끗한 해양심층수를 초정밀 필터로 한 번 더 거른 후 ●순간공중결정제염기술로 순간적으로 수분만을 제거하여 눈처럼 모든 ●미네랄이 내려 쌓이게 하는 기술로 미네랄 눈소금을 제조하여 바다의 모든 미네랄을 고스란히 자연 그대로 담은 미네랄 눈소금 섭취가 유용하다. 500ml 생수병에 티스푼(3g)의 미네랄 눈소금을 넣어 아침과 저녁으로 한 병씩 먹어 86가지 정도의 순수 미네랄을 섭취하면 건강에 좋을 것이다.


    소금의 언약

    인터넷 다국어 성경에서 검색창에 "소금"이란 단어를 입력한 후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 17구절, 신약에서 5구절이라고 합니다.
    ‘소금 언약’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 3번 나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salt of covenant)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의 언약(covenant of salt)이니라 (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의 언약(covenant of salt)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대하 13:5)’

    여호와께 드려지는 헌물엔 소금을 쳐야 했습니다(레 2:13). 아랍 속어에는 ‘우리 사이에 소금이 있다’ 혹은 ‘그가 내 소금을 먹었다’ 등이 있는데 서로에 대한 호의와 우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살균에 의한 방부제 역할을 해서 변치 않는 하나님 언약을 상징하는 데 쓰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소금의 언약’이란 표현은 2번 쓰이는데 레위직과 그 후손(민 18:19), 그리고 다윗의 왕좌와 그 자손(대하 13:5)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구약에 30번(숫자 3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오는 ‘소금’과 달리 신약에 6번(사람의 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오는 소금은 모두 사람, 특히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 9:49절: 영어 킹제임스로를 직역하면 “이는 사람마다 불로 소금 쳐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소금 쳐질 것이기 때문이라”로 되어 있습니다)’ ***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막 9:50)’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 14:34)’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 4:6)’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소금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 3:12)’

    구약에서 하나님이 ‘소금의 언약’을 ‘레위직과 다윗 왕국’에 맺으셨었고 신약에선 ‘소금’이란 단어가 주로 제자들에게 쓰였으며 신약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제사장’, ‘하나님의 나라(왕국)’로 일컫는다는 게 참 흥미롭기만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 6: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Kingdom:왕국)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 6)’

    이처럼 하나님의 소금 언약은 변치 않고 이어져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과 권능과 왕국(나라)으로 임하실 때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골로새서 4:6
    너희 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새한글)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은혜롭고, 소금 간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각 사람 하나하나에게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소금이란 은혜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항상 은혜로운 말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아들을 사고 잃어버린 교인을 찾아갔을 때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품에 안겼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주님의 위로를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에 막상 어느 날 갑자기 내 아들이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님의 위로를 받으라고 하면 그 마음에서 불같이 솟구치는 원망은 니 자식이 죽어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하고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프린스톤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이상현박사가 그의 아들을 사고로 잃었을 때 한인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찾아와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한 후에 모두 떠났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찬송을 불렀는지 무슨 성경을 읽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료 미국인 교수가 찾아와서 나는 저 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을테니 자네는 자네 일을 하게..... 하고는 매일 저녁 응접실에 와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더랍니다.
    처음에는 저 친구가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일까? 하고 의아심을 갖게 되었는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그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참된 심방이 무엇인지도........
    한국교회 성도들은 말을 많이 하려고 한다.
    그러나 참된 위로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아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라는 것을 ......





    비행기를 탈 때마다 땅에서는 크게 보이는 것들이 하늘에서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은혜를 받습니다.
    땅에서 크게 보였던 빌딩과 도로, 산, 넓은 들도 하늘에서 보면 참으로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별로 높은 곳에서 보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몹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창문 밖을 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 5:8-9)

    땅의 생각과 하늘의 생각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연약함’에 대한 오해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연약함을 부정하고 변호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연약함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자기 연민에도 빠집니다. 누가 자기 약점을 아는 것을 싫어하여 그것을 숨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다보니 강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그들을 향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시기나 분노를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의 약한 것들을 일부러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이 가장 강한 근육인 환도뼈 근육을 다친 후 평생 다리를 절게 됨으로 그 연약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대군과 싸우게 하셨을 때, 가장 작은 지파의 가장 약한 집에서 제일 작은 자, 기드온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실패가 아니라 그 연약함으로 다른 사람을 더욱 격려할 수 있는 사명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자’라고 생각했던 사울이 세상의 큰 것들을 다 버리고 ‘작은 자’ 바울로 변화된 후,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는 사도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제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오히려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 강해짐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약한 것들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연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은총의 수단이었습니다. 바울의 비밀은 남과 비교했을 때 강해 보이는 그의 학식이나 가문의 힘이 아니라 그의 약함으로 함께 하신 주님의 성령이었습니다.

    연약함은 죄가 아닙니다. 나의 재능의 한계, 기질과 성격의 약점, 어린 시절의 아직 아물지 않은 고통의 상처 등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면 연약함은 오히려 주님 능력의 도구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함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들을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나의 장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점에 대해서 솔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여러 약함에도 불구하고 위를 바라보며 변치 않는 하나님의 원칙 안에서 승리의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




    땅, 육지, 세상

    성경의 세계관에 따르면 세상 the world 이란 우주의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사람이 사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헬라어 게(ge)는 원래 하늘(→ Heaven)과 바다(→ 물 water)로부터 '땅' land과 '토양' soil을 구별시키는 데에 사용한 말인데 특히 사람이 살고 일하는 지역이나, 이 지역의 부분으로서의 '지방' country을 가리키는 말로 잘 사용되었다.

    정치적인 의미보다 이 단어가 지닌 지리적인 의미가 강조될 경우에는 헤오이쿠메네(he oikoumene)가 더욱 흔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한 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지역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상기한 두 단어는 모두 명백하게 구체적인 의미로 적용이 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코스모스(kosmos: 세계 world)라는 단어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부대적 의미를 띤다.
    종종 영어 관용어적인 용법에 따라서 모두 '세상 world'으로 번역해야 할 경우가 있음에 유의하라.

     

     

    gh', 1093(ge: 게). 땅 earth, 세상 world.

    ejpivgeio", 1919(epigeios 에피게이오스). 땅의 earthly.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1093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gē ]
    • I.  땅.
      • 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 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 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 4. 지구.
        • 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 b.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 관련 성경 /  땅(마2:6, 막2:10, 행1:8), 세상(마5:13, 9:6, 막9:3), 흙(마13:5, 막4:5), 뭍(막6:47), 육지 (마4:1, 눅5:3, 요21:8), 지구(눅21:35), 지면 (계20:9), 천하(계16:14).

    ἐπίγειος, ον 스트롱번호 1919

    1. 세상적.  2. 땅에 속한.  3. τὰ ἐ. : 세상적인 것
    발음 [ ĕpigĕiŏs ]
    어원  / 1909와 1093에서 유래
    • I.  세상적.
      • 1. [형용사] 땅에 속한, 고전15:40, 몸에 대하여, 고후5:1, 약3:15.
      • 2. [명사]
        • a.  τὰ ἐ. : 세상적인 것, 요3:12, 빌3:19.
        • b. οἱ ἐ. : 땅에 있는 사람들, 빌2:10.
    • 관련 성경 /  땅의, 땅에 속한(요3:12, 고전15:40, 빌3:19), 땅 위의(약3:15).

    1. 고전 헬라어 문헌

     

    1. 게(ge:)는 '지구' earth나 '세상' world을 가리키며; '물' water과 대조되는 '땅' land을 가리키며; 또한 지구의 한 부분, 육지의 한 부분, 개간 가능한 토양을 가진 들을 가리킨다. 단일국가에 의해서 지배되는 지역이라는 의미의 '영토' land라는 말은 상기한 자연적인 의미와 병행해서 유추되어진 것이다.

    2.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의하면 게(ge:)와 우라노스(ouranos: 하늘 sky)는 가장 오래된 신들 중에 포함된 것들이었다.
    이 신들은 호머(Homer)의 서사시에 나오는 신들처럼 상상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게(ge:)는 여성으로서 몸의 반은 지면으로부터 솟아나와 있었다.
    씨와 비를 흡수하는 그녀는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근원적인 모태이었다.

    구약성경

    70인 역본에서 게(ge:)를 2,000회 이상 사용하였다.
    70인 역본에서나 신약에서는 이 단어에 신성 divinity을 뜻하는 개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땅은 그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했다(참조: 1:1 이하).
    히브리어 에레츠('erets)도 상기한 고전 헬라어 문헌 1번의 경우와 매우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그것이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언제나 강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용법은 구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것이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는 게(ge:)가 도합 248회 사용되었으며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계시록에 흔히 나타난다.
    먼저 이 단어는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토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 13:5).
    또한 사람이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흙을 가리킨다(8:6).
    이것은 물과 대조되는 대상이다(“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14:24).
    모든 육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남방 여왕이 …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 12:42;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은 “땅 끝까지[헤오스 에스카투 테스 게스, heo:s eschatou te:s ge:s] 가야만 한다”, 1:8).
    심판하는 천사들이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통제하고 있다(7:1; 참조: 24:31). 요나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땅속(12:40)에 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땅속(12:40)에 있게 될 것이다. 땅밑(카타크도니오스[katachthonios], 2:10; 참조: 20:4)에도 역시 생명의 영역이 있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땅은 피조된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들은 결코 고대세계의 관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1. 이 단어가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마다 역사적인 의미를 띠는 용례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유다의 땅(2:6), 이스라엘의 땅(2:20), 미디안과 애굽의 땅(7:29; 7:36) 등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p.1-547*) 흔히 판단하기 어려운 사례는 어느 특정한 문구가 특정한 나라, 특히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이 사는 땅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oikoumene:). 현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대단히 특이한 방법으로 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파사이 하이 휠라이 테스 게스(pasai hai phylai te:s ge:s, 24:30; 1:7)라는 구절은 12:10-14과 같은 배경하에서는 “땅의 모든 족속들”(all the tribes of the land)을 뜻하게된다. 한편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13:27)라는 특기할 만한 표현은 땅 전체를 뜻하는 말이며 구약성경에 있는 두 개의 문장, 즉 19:6(7)과 13:7을 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참조: 30:4; 12:12). 고전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땅의 끝과 하늘의 끝은 일치하게 된다.

     

    2. 땅과 → 하늘은 둘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5:18; 24:35). 그러나 그같이 사라지므로써 그것들은 “새하늘과 새 땅” (21:1; 벧후 3:13)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은 현재의 죄악에 찬 세계 질서가 사라짐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겪음으로써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물리적인 영역에 가장 먼 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약속이며(5:5) 이 지상의 왕국은 하늘의 왕국, 다가오는 세대의 세계의 왕국, 다가오는 구원된 피조물의 왕국과 같을 것이다(참조: 8:21).

    특별히 종말론적인 내용의 구절들에서, 하늘과 땅은 함께 창조주의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66:1, 5:34이하, 그리고 7:49 등과 같이 구약적인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핵심구절들에 근거해서 양자 사이에도 구별이 되어지고 있다. 즉 땅은 불완전한 것(8:4이하), 죄(2:10; 17:5), 그리고 죽음(고전 15:47)의 장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것에 자신들의 마음을 두어야만 한다(3:2). 또한 그들은 '땅에있는 지체'(3:5)를 죽여야만 한다(3:5 RV).

     

    3. 에피게이오스(epigeios)는 신약성경에서 7회 사용되었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땅 위에'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으로 구분시키는 이중성(dualism)과도 연관이 되어 “이 세상의, 땅을” 뜻하기도 한다(고전 15:40; 고후 5:1; 3:19). - R. Morgenthaler.

     

     

    oijkoumevnh, 3625

    oijkoumevnh, 3625(oikoumene: 오이쿠메네). 땅, 지구 earth.

     

    1. 고전 헬라어 문헌.

     

    오이쿠메네(oikoumene:)는 상기한 명사 게(ge:)를 의미상 포함하고 있으며 오이케오(oikeo:: 거주하다 inhabit)의 현재분사 수동태형이다.이 단어의 의미는 사람이 살고 있는 (땅) the inhabited (earth)이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B. C. 4세기) 이후로는 헬라인들이 살던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이는 야만인들(barbarians)이 거주하던 땅과 대조되는 개념이었다.

    (b)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 C. 4세기) 이후로는 소위 야만인들이 거주하던 지역까지 포함하는 거주지역 전체를 가리켰는데 이는 불안정한 지역이 아닌 정착한 곳이라는 의미였다.

    (c) 로마시대(B. C. 2세기 동방 정벌 이후)에는 로마치하의 땅(imperium Romanum)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환언하면, 원래 지리 문화적 개념이었던 것이 로마시대에 와서 정치적인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네로(Nero) 황제는 오이쿠메네(oikoumene:)의 유에르게테스(euerge:tes: 은인 benefactor)와 소테르(so:te:r: 구원자 saviour)라는 칭호로 불렸다(→ 구원 Salvation, art. so:zo:).

     

    2. 구약성경.

     

    70인 역본은 이 단어를 도합 46회 사용하였는데 특히 시편(15회 사용되었음. 그러나 코스모스[kosmos]는 전혀 사용되지 않음)과 이사야서(15회)에 자주 나타난다. 시편에서는 명백히 고백문적인 형식의 표현에서 종종 발견된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9:8; 67:4 [5]; 96:13; 98:9);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19:4 [5]; 72:8);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24:1; 98:7; 참조: 34:1); “세계의 모든 거민은 …”(33:8; 49:2 [1]; 참조: 4:12). (p.1-548*) 이사야서에서는 특히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 중에서 나타나는데 13, 14, 23장 등에서 볼 수 있다(10:14; 10:23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요컨대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the inhabited world이다(상기한 고전 헬라어 문헌의 (b)를 보라). 이러한 개념은 16:35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들이 방랑하는 광야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땅, 즉 정착 가능한 땅으로 다시 들어온다. 62:4의 70인 역본은 히브리어 본문과 다르다: “네 땅이 거처하는 곳으로 불리리라”(Your land shall be called Inhabited[오이쿠메네]).

     

    3. 신약성경.

     

    오이쿠메네(oikoumene:)는 신약성경에서 총 15회 발견되었는데 주로 누가복음(8회)과 요한계시록(3회)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헬라어 상용어법의 경우처럼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 inhabited world라는 의미로 쓰이는가(O. Michel TDNTV 157 이하)아니면 정치?제국적인 의미의 용례가 지배적인가(M. Paeslack, Theologia Viatorum 2, 1950, 33 이하)? 2:1에서는 명백히 후자가 주가 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는 전체 오이쿠메네(oikoumene:), 즉 그가 통치하는 전체 영토의 인구조사를 명했다고 한다. 또한 3:10; 12:9; 16:14에서도 이 단어는 정치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오이쿠메네(oikoumene:)는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이유, 그러나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악마의 세력 아래서 수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가진 거주지역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유혹에 관한 기사에서 마찬가지의 사례를 볼 수 있는데, 4:5에서 코스모스(kosmos) 대신 오이쿠메네(oikoumene:)를 사용한 것은 - 비록 '세상의 왕국'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로마제국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 강한 정치적인 색조를 시사해 준다. 21:26; 11:28, 그리고 3:10 등에서는 이 말이 계시적인 예언 속에서 사용되었다. 17:6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가 '천하(오이쿠메네: oikoumene:)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황제를 대항하여 행하여지는 정치적인 범죄라고 공격 당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19:17; 24:5에서도 바울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자라고 불렸다는 기사가 있다. 24:5에서는 바울이 로마의 총독 앞에서 고소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6에서는 이 단어가 상용 헬라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2:5에서는 도래하는 세계 미래의 오이쿠메네(oikoumene:)로 묘사하고 있다. 24:14에 사용된 오이쿠메네 역시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바울이 10:18을 제외한 곳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동절에서 바울은 70인 역본의 18:5(19:4)을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여전히 국가를 누가복음이나 계시록보다 호의적으로 보고 있어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을 피했던 것일까? 우리는 패슬라크(M. Paeslack)의 결론에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오이쿠메네(oikoumene:)는 '기독교인들의 교제' the fellowship of Christians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엑클레시아<ekkle:sia>가 이 같은 의미를 나타낼 것이다. → 교회 church) '어둠의세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던 그리이스 로마제국이라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Op. cit., 4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이쿠메네(oikoumene:)가 교회가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오이쿠메네(oikoumene:)는 교회가 상주하는 지역이며 교회가 주님을 구하는 지역이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주님은 오이쿠메네(oikoumene:)에 '장자' firstborn로서 오셨으며 따라서 그것의 합법적인 지배자가 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내성적이며 동시에 보편적 ecumenical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용어상으로도 모순이다(W. A. Visser't Hooft, The Meaning of “Ecumenical”, 12). - O. Flender.

     

     

    ajgrov", 68

    ajgrov", 68(agros 아그로스). 들 field.

    a[grio", 66(agrios 아그리오스). 들의 of the field, 야생의, 거친 wild.

     

    1. 고전 헬라어 문헌

     

    일반 헬라어의 정상적인 용법에 의하면 아그로스(agros)는'경작된 땅의 한 부분' a piece of cultivated land을 뜻한다. (p.1-549*) 그러나 시(市)와 대조되는 '시골' countryside을 지칭할 수도 있다. 형용사 아그리오스(agrios)도 명사와 같이 이중적인 의미를가진다. 때로는 들에서 발견되는 짐승이나 나무, 혹은 농작물 등을 수식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더욱 흔한 의미로는 '야생의, 거친 wild'으로서, 인간이 거주하는 구역을 벗어난 지역이나 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 후자의 의미로 쓰일 때에는 흔히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사람(야만적인 savage, 난폭한 fierce)이나 사물, 그리고 환경(잔인한 cruel, 거친 harsh)에 적용된다.

     

    2. 구약성경

     

    상기한 용법 중의 대부분은 70인 역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이 소유하였든지(23:9; 왕상 2:26) 혹은 공동체가 소유하였든지 간에(25:34; 1:1-2) 어떠한 땅이라도 경작 중이면 아그로스(agros, 예: 8:13; 민 12:22; 2:2)라고 불려졌었다. 동시에 아그로스는 마을의 경계 바깥에 위치한 경작되지 않은 공활지(예: 22:27; 삼상 30:11)를 가리키기도 했는데 이런 곳에서 여행자들은 곰이나 사자, 암사슴(13:8; 14:5)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런 짐승들은 자연히 아그리오스(agrios), 즉 '사나왔다' wild(6:5; 시 79:14). 70인 역본이나 다른 유대 문헌에서 형용사가 비유적인 의미로 쓰여 사람을 수식하는 용례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악한' malignant 종기(21:20; 28:27)라든지 '난폭한' wild, 물결(지혜서 14:1) 같은 표현은 찾아볼 수 있다.

     

    3. 신약성경

     

    아그로스(agros)는 복음서에만 30회 나타나며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오직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다. 용례들 중 18번은 경작 중이거나 경작할 땅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예: 13:24; 14:18; 4:37). 아그로이(agroi)는 농사가 있는 시골을 뜻할 수 있다(9:12). 형용사 아그리오스(agrios)는 1:6과 그 병행 구절에서 “개방된 들에서 발견되는”(found in the open field)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1:13에서는 '거친' wild 바다 물결을 나타내는데 쓰였다.

     

     

    cou'", 5529

    cou'", 5529(chous 쿠스). 토양, 땅 soil, 흙, 먼지 dust.

    *****(choikos 코이코스). 흙으로 만든 made of soil.

     

    1. 고전 헬라어 문헌

     

    명사 구스(chous: 케오[cheo:]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인데 케오는 액체를 붓다 pour, 또는 [흙을] 던져 올리다 throw up [earth]라는 의미의 동사이다)는 고전시대 역사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나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파헤쳐지거나 쌓아 올려진 흙을 묘사하는데 쓰인 말이다. 형용사 코이코스(choikos)는 필로(Philo)의 시대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2. 구약성경

     

    쿠스(chous)는 70인 역본에서 '진흙' dirt, '먼지' dust라는 의미를 가지고 히브리어 아파르('apar)의 역어로서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적으로는 종종 작고 가치 없는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예: 34:5; 17:13; 참조: 4:10). 패배한 적들은 굴욕스럽게도 쿠스(chous)를 빨아야 했다. 또한 회개하는 자나 상(喪)을 당한 자는 슬픔에 잠겨 쿠스를 그들의 머리 위에 붓곤 했다(7:6; 2:10). 하나님께서 쿠스(chous)로써 인간을 만드셨다는 기사는 의미 깊은 보도이다(2:7; 102:14). 또한 인간이 죽어 들어갈 곳도 쿠스(chous)인 것이다(3:20; 12:7). 형용사코이코스(choikos)는 70인 역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로(Philo)가 코니스(konis: 먼지 dust)라는 말과 함께 이 단어를 한번 사용하였다.

     

    3. 신약성경

     

    쿠스(chous)는 신약성경에 2회 나타나는데 한번은 길의 '먼지' dust(6:11)를 가리켰고 나머지 한번은 슬픔의 표시로서 머리에 뿌려진 '흙' dirt(18:19)을 가리켰다. 코이코스(choikos)는 고전 15:47-49에서만 4회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바울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참조: 2:7)과 예수를 구별하고 있다. 두 번째 사람 the second man인 예수의 근원은 하늘에 있지 땅에 있는 earthly 것이 아니다. 참조: Philo, Op. Mund. 134이하, All. 1, 31이하; TDNT Ⅸ 474이하.

    - D. H. Field. (p.1-550*)

     

     

    kovsmo", 2889

    kovsmo", 2889(kosmos 코스모스). 질서 order(고전 헬라어에서), 꾸밈, 장식 adornment, 세계(세상) world.

    kosmevw, 2885(kosmeo: 코스메오). 배열하다 arrange, 정리하다, 질서 있게 두다 put in order, 꾸미다 adorn.

    kovsmio", 2887(kosmios 코스미오스). 존경할만한 respectable, 명예로운, 고상한 honorable.

    kosmikov", 2886(kosmikos 코스미코스). 땅의, 세상의, 세속적인 earthly, worldly.

     

    1. 고전 헬라어 문헌

     

    1. 명사 코스모스(kosmos)는 호머(Homer) 이후로 그 용례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원래는 '건설, 건축' building, construction을 뜻하는 말이었다(예: Homer, Od., 8, 492; Hdt., 3, 2). 그러나 더 특징적인 용법은 '질서' order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일반적인 의미의 질서(예를 들면 호머의 일리아드와 카타 코스몬[kata kosmon: 정연하게, 바르게]라는 구절)와 구체적인 의미의 질서(예: 노 젓는 이들이 앉는 위치 Od., 13, 76이하; 전투 태세를 위한 정열, Ⅱ., 12, 225; 후에는 인간 사회에 있어서의 삶의 규정, 제도, Plato, Leg., 8, 846d), 또는 종종 장식 ornament. Adornment을 뜻하기도 하였다(특히 여인들의; 예: Hom. Ⅱ., 14, 187; Hes., Works 76; Hdt., 5, 92).

    헬라 철학(아래의 2를 참조)에서 코스모스(kosmos)는 근본적인 용어로 등장하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세계 질서 world-order, 세계의 체계 world-system, 이러한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사물의 총체,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세계' the world, '우주' the cosmos(universe), '땅' the earth과 그 거민들(코이네 헬라어에서), 인류 → oikoumene:.

    동사 코스메오(kosmeo:)는 '질서' order라고 하는 코스모스(kosmos)의 근본적인 의미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서 전문용어로 사용되었고 다음과 같은 뜻을나타낸다: 군대를 지휘하다, 전투대형을 갖추다(Homer, Ⅱ., 2, 554; Xen. Cyr., 2, 1, 26), '조직하다' organize, '정렬시키다' put in order. 또한 매우 드물게는 '장식하다' adorn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예: Hesiod, Works, 72).

     

    2. 헬라 철학의 코스모스 개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배경 위에서 고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개별적인 사물들이 상호 충돌?모순(하늘과 땅; 하나님, 인간과 생명체들) 되면서도 어떻게 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수 있는가?이에 대한 답변은 이 전체 사물들이 전포괄적 질서(참조: Anaximander, Frag. 9)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세계 질서' world-order가 코스모스(kosmos)라는 말로 표현되며 이것은 더 나아가 공간적인 의미의 '세계' the world를 가리키기도 한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소우주' microcosm(Frag. 34)이다. 이 원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질서를 인식하게 만들며 그것의 아름다움과(Heracl., Frag. 124) 천체의 형태와 그 원형 운동의 완전성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a) 플라톤(Plato)은, 우주의 기원이 데미우르게 Demiurge(→ 창조 Creation, art. de:miourgos)에 근거한다고 가르친 첫 번째 인물이었다. Demiurge(조물주)란 완전히 생물체의 개념에 따라서 세상을 형성했다는 자를 말한다(TDNT Ⅲ 875; 참조: Tim., 28이하). 플라톤의 생각에 의하면 우주는 생명체인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신의 현현이었다. 우주란 피조물이나 창조물이 아니라 모사 copy라는 것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거의 2,000년 동안이나 서구를 풍미했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세계는 원형의 땅덩어리이며, 원형의 우주 한가운데에 붙박혀 있는 다양한 층을 가진 천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Cael., 2, 2p. 285a, 32). 우주 cosmos란 공간과 시간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의 총체이다. 우주 너머에는 하나님의 투명한 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않으며 불변의, 따라서 완전한 생명을 지속시키는 곳이다. 신이 세상을 조성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만을 명상하는 순수 → 이성 Reason(누스<nous>)이다. 신은 모든 것을 움직이지만 자신은 부동(不動)이며 세사(世事)에 간섭하지 않는다.

    (c) 스토아 학파는 자신들의 우주관을 영원회귀동일 eternally returning sameness 사상과 연결시켰다. 이 사상은동방의 점성술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p.1-551*) 즉, 우주의 기원은 새로운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것의 회복(apokatastasis, → 화해 Reconciliation)이다. 전우주가 타서 없어지는 것이 그 끝이 아니다. 우주적 재생 cosmic rebirth 속에서 새롭게 소생하는 것이다(→ 출생 Birth, art. palingenesia).

    (d) 신 플라톤주의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이원론이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예지계(the intelligible world: 코스모스 에케이노스[kosmos ekeinos: 저 세계 that world])와 형상계(the world of appearances: 코스모스 후토스[kosmos houtos: 이 세계 this world])는 서로 상반된다. 경험세계가 악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플로티누스(Plotinus)는 그 세계의 크기와 질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현세계의 원형인 참된 우주는 얼마나 더 칭송할만 하겠는가(Enneads, 5, 1, 4: 5, 8; 3, 2, 2이하; 참조: H. Sasse, TDNT Ⅲ 879).

    헬레니즘 시대에는 동방의 우주론들이 그리이스 문화권에 흡수되었는데 이때는 우주가 마치 외국처럼 여겨졌다. 우주는 더 이상 조화로운 단일체가 아니었고 두 개의 영역: 즉, 낮은 지상의 세계와 별들의 세계로 구분지어진 것이다. 땅 위에 일어나는 일은 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좌우되었다. 인간들의 노력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우주관에는 어느 정도 상충하는 이론들이 있다. 하나님과 세계관의 구별은 절대적이 되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악마적인 힘이 빛 원소 light-elements의 도움을 받아 어둠의 혼돈으로부터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빛의 세계의 구성(構成)을 흉내 낸 것이다. 하나님은 비세상적이며 우주는 신성의 모든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우주는 순전히 물질적이며 육적인 즉, 악의 → 충만 Fullness(ple:ro:ma)인 것이다(Corp. Herm., 6, 4). 따라서 우주는 외지(外地)일뿐 아니라 선재하는 pre-existent 인간의 영혼이 자유를 갈망하는 감옥이기도 하다. 이 자유를 위해서는 하늘에서 온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신다. 그러나 코스모스(kosmos) 역시 신화적인 상징일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Corp. Herm., 8, 5). 또한 코스모스는 생명력이 있는 유기체라고까지 여겨진다. 이때의 코스모스는 하나님의 영상 image이며 인간이 코스모스의 영상이 된다(Corp. Herm., 10, 11).

     

    2. 구약성경

     

    1. 70인 역본에서 나타나는 이 단어의 용례는 다음과 같은 분포를 갖는다: 히브리어 아디('adi: 장식 ornaments)의 역어로서 7회(예: 2:32; 4:30) 사용되었고 켈리(keli: 장식 ornaments, 보석 jewellery)의 역어로서 1회(61:10), 티페렛(tip'eret: 장식 ornament. decoration)의 역어로서 2회(20:29; 3:18), 또한 차바(tsaba': 천체군 the hosts of heaven and earth, 별)의 역어로서 5회(참조: 2:1; 4:19). '세계' world라는 의미의 코스모스(kosmos)는 70인 역본의 후기 역서들 가운데에서만 발견될 뿐이다(지혜서에 19회, 마카베오 이서에 5회, 마카베오 사서에 4회). 아마도 유대?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있는 헬라어의 어법으로부터 이 같은 의미가 채용되었을 것이다.

     

    2. 구약성경에서는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와 부합되는 세계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우주를 하늘과 땅 heaven and earth이라고 부르며 후기의 문서에서만 학콜(hakko:l: 문자적인 의미는 전부?모든 것 the all), 즉 우주 the universe라고 부르고 있다(10:16; 103:19; 관사 없이[ko:l] 사용된 구절로는 44:24; 8:7). 구약성경에는 상기한 대로 문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헬라적인 개념마저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세계 the world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항상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 있는 것이다(→ 창조 Creation). 1:1-2:4a의 창조기사는 깊음 the deep과 물(태초의 홍수와 어둠을 뜻함), 궁창, 하늘의 태양과 별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론 cosmology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진술이 뜻하는 유일한 목적은 혼돈 chaos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다. 또한 2:4b-25의 진술에서 주안점이 되고 있는 인간의 창조가 그 명백한 목적이다. 인간의 소명은 세상에서 행하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께 근거해 있음을 인식하고 또한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다(1:26, 28; 2:15, 19; 참조: 시 18). 첫 번째 기사는(두 번째 기사만큼) 내재하는 세계질서를 묘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다. (p.1-552*) 오히려 인간과 세계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표현하고자 한다.

    성경기자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라고 기록함으로써 찬양하고자 한 대상은 그와 같이 만들어진 세계 the world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시고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인 것이다(참조: 시 33:65; 시 136:148; 4:13; 5:8; 9:5이하).

     

    3. 구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세계의 상(像)이 여타의 다른 세계상들과 공통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의 세계상은 동시대의 동방사상을 재료나 뼈대 framework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수용하여 그 자신의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선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 하늘 Heaven의 궁창(raqia')은 아래에 있는 물과 위에 있는 물을 구분시킨다(1:6이하). 이 궁창을 '기둥' pillars이 받치고 있고(26:11; 참조: 104:3), 별들은 발광체로서 그 속에 붙박혀 있다(1:14이하; 1:17).

    지구는 때로 원반으로 묘사되었고 그 중심점에 중앙 성전(9:37; 38:12; 참조: 에녹서 26:1)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원반형의 지구 역시 기둥 pillars에 의지하고 있거나(9:6; 참조: 104:5; 삼상 2:8) 혹은 허공에 달려있다(26:7)고 믿어졌다. 그것의 아래와 위에 있는 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었다(1:7; 7:11; 49:25; 20:4; 33:13; 8:27이하).

    구약성경의 신학적 언명(言明)들은 이 흔한 상(像)을 사용한다. 하늘 - 1:22이하에서는 야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나타나 있다 - 과 물(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Tiamat처럼)은 짐승들이 거하는 곳이다(3:8의 리워 야단 Leviathan; 74:14; 27:1; 89:10의 라합; 9:3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 밑에 두신 뱀).

    지하세계인 세올(she'ol: → 지옥 Hell)은 죽은 자들의 왕국이며 그곳으로부터는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10:21). 현대의 종교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은 이러한 지하세계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 사변적인 윤색을 거부한다.

    자연과 우주의 여러 실체들, 그리고 요소들 elements은 독립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되어진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신화적인 우주론적 요소를 절대 자유와 융합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 요소를 신학적?신비적인 진술에 연합?복종시킴으로써 비신화화 시킨다.

     

    4. 필로(Philo)는 코스모스(kosmos)라는 단어를구약성경에서 보다 훨씬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다만 그는 상호 모순되는 진술들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코스모스 노에토스(kosmos noe:tos)와 코스모스 아이스테토스(kosmos aisthe:tos)를 구별하고 있는데, 전자는 마음 the mind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며, 후자는 감각 the senses으로 파악되는 세계를 말한다(Op. Mund., 25). 또한 필로는 후자의 세계를 '이 세계' this world(Rer. Div. Her., 75), 또는 '보이는 세계' visible world(Op. Mund. 16)라고도 불렀다. 동시에 그는 오직 하나의 코스모스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필로는 코스모스를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코스모스의 아버지라는 신관에서 출발하여(Vit. Mos., 2, 134) 그는 코스모스를 휘오스 데우(hyios theou: 하나님의 아들?아이 son or child of God)라고까지 불렀다(Ebr., 30; Deus. Imm, 31). 이러한 사상들은 이집트의 헬레니즘 영지주의에 의해서 수용되고 발견되었다.

     

    5. 헬레니즘 유대교 Hel. Judaism(헬레니즘의 영향을 입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 원래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되던 히브리어 올람('olam: 시대 age, 참조: 아람어 'alema'; 긴 long, 먼 far off; → 시간 Time, art. aio:n)이 코스모스(kosmos)가 지닌 공간적인 의미를 취득하게 되어 '세계' world, '우주' universe, '인간세계' world of men, 오이쿠메네(oikoumene:)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4 Esd. 시대 이후). 올람('olam)은 사해 두루마리 사본에서 여전히 시간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만 랍비 문서에서는 '세계' world라는 공간적인 의미가 점점 더 흔하게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세상의 주' Lord of the world, 또는 '세상의 왕' king of the world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명칭 중 가장 애용하는 것들이다. (p.1-553*)

    이 같은 의미의 변화는 특히 성숙한 유대교에 영향을 끼쳤으며, 두 시대 Two Ages에 관한 유대 계시적 교의(→ 시간 Time, art. aio:n)와 더불어 세계관을 개선시켰다. 이 세계 the world는 이 세대 this age와 마찬가지로 랍비 문서에서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사탄과 죄, 그리고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것으로 묘사되었다(참조: SB Ⅳ 847이하).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즉각적으로 현존하는 코스모스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절하를 몰고 온다. 그러나 유대교가 창조에 관한 신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채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3. 신약성경

     

    1. (a) 신약성경에서도 일반 헬라어나 헬레니즘 유대교에서와 같이 명사 코스모스(kosmos)가 뜻하는 바는 세계 the world이다. 유일한 예외가 벧전 3:3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장식?꾸밈' adornment을 뜻하고 있다. 이 단어는 총 185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78회는 요한복음에서, 24회는 요한의 서신들 중에서, 47회는 바울서신에서, 14회는 공관복음서에서 쓰였으며 22회는 신약성경의 나머지 문헌들 중에서 사용되었다. 이같이 자주 사용된 사실로 미루어서 이 단어의 신학적인 중요성과 그 상충 confrontation되는 영역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서가 헬라의 사상과 접촉할 때마다 코스모스(kosmos)의 개념이 해명될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b) 형용사들은 드물게 발견되는데 그것도 신약성경의 후기 문서들에서만 발견된다. 코스미오스(kosmios)는 '명예로운' honourable, '고결한' virtuous, '존경할만한' respectable이라는 뜻을 가지며 딤전 2:9; 딤전 3:2에서만 볼 수 있다. 코스미코스(kosmikos)는 '현세의?세속적인' earthly?worldly이라는 뜻을 가지며 2:12; 9:1에서만 볼 수 있다.

    동사 코스메오(kosmeo:)는 총 10회 사용되었고 '정돈하다' put in order(25:7, '깎아 다듬다' trim라는 의미이다), '장식하다' decorate, adorn(예: 12:44; 2:10)라는 뜻을 지닌다. 이 동사의 의미는 '장식' adornment, 더 중요한 의미로는 질서 order라는 코스모스(kosmos)의 기본적인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2. '세계' world라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명사 코스모스(kosmos)가 갖는 용법을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뉘앙스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a) 그것은 우주 the universe를 가리킬 수 있다(예: 17:24; 참조: 타 판타[ta panta: 모든 것, 만물 everything, all things]라는 구절도 피조물의 전체인 세계를 뜻한다, 참조: 요 13).

    (b) 그것은 또한 인간들이 사는 장소나 영역으로서의 세계, 지구 the earth, 오이쿠메네(oikoumene:)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로 쓰인 것은 공관복음서에도 전례가 있다. 즉 8:36의 “온 천하 the whole world를 얻고도 …”라는 표현이나 4:8의 천하만국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이라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참조: 4:5에 나오는 '오이쿠메네의 모든 왕국들', 한글개역에는 '천하 만국'이라고 번역되었다).

    '세상에 오다' come into the world(1:9; 3:19 등), '세상에 있다' be in the world(1:10; 고후 1:12 등), 그리고 '세상에서 나가다' go out of the world(고전 5:10)라는 표현들도 이러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c) 마지막으로 이 명사는 인류 humanity, 인간의 세상(참조: 3:19; 고후 5:19)을 가리키며, 특히 바울과 요한은하나님의 구원행위가 베풀어지는 장소, 그 구원행위의 대상으로 묘사하였다.

     

    3. 벌써 바울 당시에 코스모스(kosmos)라는 용어에는 전형적으로 인류학적이며 역사적인 각인이 새겨졌다.

    (a) 세계의 진리는 → 사람 Man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인간의 → 타락 Fall으로 말미암아 → 죽음 Death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5:12이하). '온 세상' the whole world(즉, 인간의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3:19). 피조된 세계(8:20-22, 문자적으로는 창조물의 전체 the whole of creation)마저도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고 그래서 해방을 갈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코스모스(kosmos)는 또한 무익한데 굴복한 모든 피조물(→ 창조 Creation)이다. 원래 이러한 세계 이해가 말로 표현된 곳은 바울이 이 시대(호 아이온 후토스[hoaio:n houtos], 참조: 고전 3:19; 고전 5:10; 2:2)에 대한 유추적인 표현으로서 이 세상(호 코스모스 후토스[ho kosmos houtos])에 대해 진술했던 대목에서이다. (p.1-554*) 하나님의 → 심판 Judgment은 현 시대(→ 시간 Time, art. aio:n)에 속해 있는 이 코스모스(3:6)에 떨어진다. 무익과 결핍의 위협을 받는 현 세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코스모스(kosmos)라는 단어가 어느 정도 공헌하는가 하는 것은, 미래의 구원 받은 세계가 결코 코스모스(kosmos)라고 불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왕국 Kingdom)' kingdom of God, 혹은 '새 하늘과 새 땅' a new heaven and a new earth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라는 사실에서도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다가올' 코스모스, '미래의' 코스모스, 혹은 '저' 코스모스 등과 같이 '이 코스모스' this cosmos(호 코스모스 후토스[ho kosmos houtos])에 해당되는 구절은 없다. 하나님과 코스모스(kosmos)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b)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곳은 이 세상, 다름 아닌 바로 → 죄 Sin와 → 멸망 Destruction의 구렁으로 빠져 버린 이 세상인 것이다(고후 5:19이하) 그리고 그 형적(→ 모양 Form)이 지나가버린 이 코스모스에서(고전 7:31) 그리스도의 → 교회 Church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표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몸 Body).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결정된다. 그것은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요 무조건적인 굴복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코스모스 안에서 사는 만큼(고전 5:10; 2:15) 세상과의 관계는 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세상과 하등의 관련이 없는 듯해야 하는 것이다(고전 7:29이하). 교회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 속해 있으나, (“…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그들 자신은 코스모스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전 3:21이하). 따라서 세계는 이제 복종과 신앙의 지속을 위한 도장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에 대해 자신이 담당해야 할 모든 책임과 세상과의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자유 속에 여전히 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과 세상의 규정들에서도 자유하기 때문이다(고전 7:20이하; 참조: 17:24이하).

    (c) 골로새인들은 초기의 기독교가 코스모스(kosmos)라는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정사와 권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패배당했다(2:15). 그러므로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어떠한 요소도 의식적인 축하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2:8, 20a). 그리스도를 통하여 코스모스의 요소들에 대해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코스모스 안에” 살지 않고(2:20b), 코스모스의 법칙과 압박에 대한 굴복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4. 요한: 불트만(R. Bultmann)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은 다음과 같은 영지주의의 개념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세계 내의 미아라는 인간의 피상실성, 빛과 어둠?하나님과 세계라는 이원론, 하늘로부터의 예수의 강림과 진리 속에 있는 자들의 응답(The Gospel of John, 1971, 7이하). 그는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세계간의 관계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영지주의와는 달리 세계와 인간의 상실에 대한 우주론적인 결속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 - 세계라는 이원론은 코스모스에 내재하고 있는 질(質)로서의 코스모스의 악성(惡性)에까지 소급하지는 않는다.다만 인간의 잘못이 야기시킨 결과로만 인정될 뿐이다. 인간은 세계와 불가분의 존재여서 요한이 기록한 코스모스(kosmos)는 거의 언제나 인간의 세계를 뜻한다. 물론 요한이 기록한 코스모스(kosmos)가 다른 측면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머지 피조물(→ 창조 Creation)과 구분되는 인간의 세계가 그러하다(주체로서 1:10; 15:19; 하나님의 행위의 대상으로서 3:16이하; 4:42). 전 피조물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 인간의 세계인데, 이러한 사실은 세상으로 보낸다든지 세상으로들어온다고 하는 기사가 기록된 대목에서 특히 두드러진다(3:17,19; 9:39; 참조: Bultmann, Op. cit., 55이하, 1:10).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전혀 비헬라적인 생각!)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3:16) 심판하려 하시지 아니하고 구원하신다(3:17; 12:47).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지셨다(1:29; 참조: 요일 2:2). 그러나 구원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동시에 세상의 심판이 되신다(3:19). 왜냐하면 세상이 눈멀어 그를 몰랐기 때문이다(1:10). (인간의 세계로서의) 코스모스(kosmos)는, 적의로써 하나님을 반대하는 일정한 주체를 구성하여 아들의 구속 사업을 저지시키고, 그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그를 미워한다(7:7; 15:18 이하). (p.1-555*) 세상은 이 코스모스의 왕자, 즉 악한 자 the Evil one(요일 5:18)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세상을 이긴 자로 남는다(16:33). 이것은 코스모스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코스모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1:12이하)과 성령(3:5; → 영 Spirit)으로 태어나는 인간을 창조하시는 세계의 구속자에게 이르게 한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고난을 견디며 세상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16:33).

    비록 신자들이 이제 더 이상 코스모스에 의해서 좌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세상에서 이탈된 것은 아니다(17:15). 그러나(흔히 반복되어 말해지는 표현처럼) 그들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즉, 아들 the Son) 속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에 대한 새로운 계명의 실천과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가 세상을대항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주의를 들을 때에(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우리가 관여하는 세상이란 바로 무상한 코스모스(17절), 즉 호 코스모스 후토스(ho kosmos houtos: 이 세상 this world)이다(참조: 12:31; 16:11). 교회는 스스로를 세상의 유혹하는 세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 즉 자신을 세상에 맡기는 자는 자신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런 자는 주께서 명하신 사랑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인간 세상에 보내심으로 헌신적인 사랑을 보이셨듯이 그리스도의공동체도 그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보내어 진 것이다(14:15, 14:23). - J. Guhrt.. (p.1-556*)

    → 시작 Beginning, → 창조 Creation, → 하늘Heaven, → 왕국 Kingdom, → 시간 Time, → 물 Water.

     

    (a) . Arndt, 13, 156, 44-48; 563이하, 892; A. Auer, “World,” EBT Ⅲ 1001-6; G. Bornkamm, “Christ and the World in the Early Christian Message,” Early Christian Experience, 1969, 14-28; R. Bultmann, “The Understanding of Man and the World in the New Testament and in the Greek World,” Essays, 1955, 67-89; and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Ⅰ, 1952, 254-59; Ⅱ, 1955, 15-32; W. D. Davies, The Gospel and the Land: Early Christianity and Jewish Territorial Doctrine, 1974; W.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Ⅱ, 1967, 93-117; G. Johnston, “Oikoumene: and kosmos in the New Testament,” NTS 10, 1963-64, 352이하; O. Michel, oikoumene:, TDNT Ⅴ 157이하;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h, Ⅰ, 1962, 296-305; Ⅱ, 1965(see index); J. M. Robinson, “World in Modern Theology and in New Testament Theology,” in Soli Deo Gloria, Festschrift for W. C. Robinson, 1968, 88이하; H. Sasse, kosmeo, kosmos etc., TDNT Ⅲ 867-98; H. Schlier, Principalities and Powers, 1961; W. A. Visser t' Hooft, The Meaning of Ecumenical (The Burge Memorial Lecture, 1953), 1953; and “The Word' Ecumenical' its History and Use,” in R. Rouse and S. C. Neill,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19672; 735-44; E. Schweizer, choikos, TDNT Ⅸ 472-9.(See also Addenda, p. 822).

    (b) . G. Gloege, “Welt,” RGG3 Ⅳ 1595이하; G. Harbsmeier, “Welt,” EKL Ⅲ 1756이하; G. Hierzenberger, Weltbewertung bei Paulus nach! Kor. 7, 29-31. Eine exegetisch-kerygmatische Studie, 1967; E. Jenni, “Das Wort olam in Alten Testament,” ZAW 64, 1952, 197이하; 65, 1953, 1 이하; E. J?ngel, “Die Welt als M?glichkei


    땅(게. γῆ) 소금(하라스. ἅλας)
    세상(코스모스. κόσμος) 빛(포스. φῶς)


    세상의 소금(마태복음 5:13)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누가복음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주로 소금을 이야기 할 때 "맛"에 촛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 결과 맛이 없는 소금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소금(할라스)에 대해서 맛(므네이아)을 말씀하실 때 맛을 잃어버린(모라이노. 3471) 소금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모라이노)의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이제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미각(味覺)에서 느낄 수 있었던 용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단어의 맛이란 "모라이노"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1093)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gē ]
    관련 성경 / 땅(마 2:6, 막 2:10, 행 1:8), 세상(마 5:13, 9:6, 막 9:3), 흙(마 13:5, 막 4:5), 뭍(막 6:47), 육지 (마 4:1, 눅 5:3, 요 21:8),
    지구(눅 21:35), 지면(계 20:9), 천하(계 16:14).




    * 맛을 잃어버리다(모라이노) / 어리석게 행동하다, 어리석다

    μωραίνω 스트롱번호 3471

    1. 어리석게 만들다.  2. 어리석게 되다. 3. 무의미하게 만들다
    발음 [ mōrain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μώραν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μωράνθην, 3472에서 유래
    • 1. 어리석게 만들다, 어리석은 것이 드러 나다, 고전 1:20.

    • 2. [수동태] 어리석게 되다, 롬 1:22.
    • 3. 무의미하게 만들다, 마 5:13, 눅 14:3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어리석게 되다(롬 1:22), 미련하게 하다(고전 1:20), 맛을 잃다(마 5:13).
    μω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472

    1. 어리석음.   2. 우둔함. 3. 고전 1:18, 21, 23
    발음 [ mōria ]
    어원 / 3474에서 유래
    • 1. 어리석음, 우둔함, 고전 1:18, 21, 23, 2:14, 3:1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미련하게 보임(고전 1:18, 2:14, 3:19).
    μω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74

    1.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 어리석은.  2. 마 5:22. 3. 막 7:13
    발음 [ mōrŏs ]
    • 1.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어리석은, 마 5:22, 막 7:13, 고전 3:18, 딤후 2: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미련한(마5:22), 어리석은(고전1:25, 4:10, 딤후2:23, 딛3:9). [명] 어리석은 맹인 (마23:17), 미련한 자(마25:3), 어리석은 자 (고전3:18).
    3466.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3466

    1. 비밀.   2. 마 13:11. 3. 신비
    발음 [ müstēriŏn ]
    어원  /  μύω ‘입을 다물다’에서 유래
    • 1.  비밀, 비밀 의례, 비밀 교훈, 신비.
      • a. 마13:11, 막4:11, 눅8:10.
        b. 비밀, 신비, 롬11:25, 고전15:51, 골2:2.
      • c. [계시록에서] 계1:20, 10:7, 17:5,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비밀(마13:11, 눅8:10, 살후2:7).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란 양념용으로 또는 절임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소금의 맛이 아니라 영적 생활을 하면서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의 예)
    나발(사무엘상 25: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롯의 아내(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열 명의 정탐꾼들()
    민수기 14:38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기생 라함(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에안 데 토 할라스 모란데 엔 티니 할리스데세타이 에이스 우덴 이스퀴에이 에티 에이 메 블레덴 엨소 카타파테이스다이 휘포 톤 안드로폰.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μωρανθη εν τινι αλισθησεται εις ουδεν ισχυει ετι ει μη βληθηναι εξω και καταπατεισθαι υπο των ανθρωπων

    개역개정,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새번역,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리말성경,13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이 짓밟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영어NI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영어NASB,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s become tastel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by men.
    영어MSG,13  "Let me tell you why you are here. You're here to be salt-seasoning that brings out the God-flavors of this earth. If you lose your saltiness, how will people taste godliness? You've lost your usefulness and will end up in the garbage.
    영어NRS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can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but is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μωρανθη εν τινι αλισθησεται εις ουδεν ισχυει ετι ει μη βληθηναι εξω και καταπατεισθαι υπο των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13 vos estis sal terrae quod si sal evanuerit in quo sallietur ad nihilum valet ultra nisi ut mittatur foras et conculcetur ab hominibus
    히브리어Modern,13 אתם מלח הארץ ואם המלח היה תפל במה ימלח הן לא יצלח עוד לכל כי אם להשליך חוצה והיה מרמס לבני אדם׃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할라스. 217)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 소금(217)

    ἅλας,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217
    1. 소금.  2. 조미료나 비료로 쓰는 소금. 3. 제자들의 영적인 자질
    발음 [ halas ]
    어원 / 251에서 유래
    • 1. 소금
      • a. [문자적으로] 조미료나 비료로 쓰는 소금, 마5:13, 막9:50, 눅14:34.
      • b. [상징적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자질, 마5:13, 골4: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소금(마 5:13, 골 4:6).
    251.  ἅλς, ἁλός, ὁ 스트롱번호 251

    1. 소금
    2. 막 9:49.
    발음 [ hals ]
    • 1. [기본형] 소금, 막9:4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소금(막 9:49).




    * 맛(3417) μ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417

    1. 기억.  2. 언급
    발음 [ mnĕia ]
    어원  / 3415 또는 3403에서 유래

    1. 기억, 살전 3:6, 딤후 1:3.
    2. 언급, 관설, 롬 1:9, 엡 1:16, 빌 1:3.

    말(롬 1:9), 기억(엡 1:16, 살전 1:2), 생각(빌 1:3, 살전 3:6, 딤후 1:3).

    * 3415

    * 3403


    * 맛을 잃어버리다(모라이노)
    어리석게 행동하다, 어리석다

    μωραίνω 스트롱번호  3471

    1. 어리석게 만들다.  2. 어리석게 되다.  3. 무의미하게 만들다
    발음 [ mōrain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μώραν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μωράνθην, 3472에서 유래
    • 1. 어리석게 만들다, 어리석은 것이 드러 나다, 고전 1:20.
    • 2. [수동태] 어리석게 되다, 롬 1:22.
    • 3. 무의미하게 만들다, 마 5:13, 눅 14:3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어리석게 되다(롬1:22), 미련하게 하다 (고전1:20), 맛을 잃다(마5:13).
    μω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472

    1. 어리석음.  2. 우둔함.  3. 고전 1:18, 21, 23
    발음 [ mōria ]
    어원  / 3474에서 유래
    1.  어리석음, 우둔함, 고전 1:18, 21, 23, 2:14, 3:19.
    관련 성경 /  미련하게 보임(고전 1:18, 2:14, 3:19).

    μω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74

    1.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어리석은.  2. 마 5:22.  3. 막 7:13
    발음 [ mōrŏs ]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 어리석은, 마 5:22, 막 7:13, 고전 3:18, 딤후 2:23.
    관련 성경  /  미련한(마 5:22), 어리석은(고전 1:25, 4:10, 딤후 2:23, 딛 3:9).
                       [명] 어리석은 맹인(마 23:17), 미련한 자(마 25:3), 어리석은 자(고전 3:18).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3466

    1. 비밀.  2. 마 13:11. 3. 신비
    발음 [ müstēriŏn ]
    어원  / μύω ‘입을 다물다’에서 유래
    • 1. 비밀, 비밀 의례, 비밀 교훈, 신비.
      • a. 마13:11, 막4:11, 눅8:10.
      • b. 비밀, 신비, 롬11:25, 고전15:51, 골2:2.
      • c. [계시록에서] 계1:20, 10:7, 17:5,7.
    • 관련 성경 /   비밀(마13:11, 눅8:10, 살후2: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글개역 성경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직영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 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이란 헬라 단어는 "게"라고 하는데 '게'라는 단어의 의미는 "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는 번역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은 땅

    맛을 잃으면 이라는 헬라 단어는 "모라이노(mōrainō. μωραίνω)" 라고 합니다.
    '모라이노'의 의미는 "어리석게 만들다." "어리석게 되다" "무의미하게 만들다" 라고 합니다.
    따라서 맛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어릭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μωραίνω 스트롱번호  3471

    1. 어리석게 만들다.  2. 어리석게 되다.  3. 무의미하게 만들다
    발음 [ mōrainō ]


    소금은 성결케 하는 것(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소금은 언약을 상징(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소금 언약(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신생아의 성결(에스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과 빛이 되라


    마태복음 5:13-14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때 세상이란 "게(1093)"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게(gē)  γῆ, γῆς, ἡ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게[ gē ]
    관련 성경 / 땅(마 2:6, 막 2:10, 행 1:8), 세상(마 5:13, 9:6, 막 9:3), 흙(마 13:5, 막 4:5), 뭍(막 6:47), 육지 (마 4:1, 눅 5:3, 요 21:8), 지구(눅21:35), 지면(계 20:9), 천하(계 16:14)
    신약 성경 / 250회 사용

    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 즉 땅의 소금이라고 하셨을까?

    사람을 만든 재료가 흙입니다.
    그러므로 흙의 성분은 사람의 육체의 화학적 성분과 같다고 합니다.
    근자에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좋은 땅에서 재배된 채소와 과일이 사람의 건강을 지켜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흙에 다양한 비료와 화학물질이 첨가되면서 사람의 건강에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 즉 영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땅의 소금이 되려면 먼저 영의 생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들은 땅의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축소해서 말한다면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교인들의 영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땅을 생명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땅의 소금이 되려면 먼저 영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영이 회복한 후에는 소금의 기능을 되살려야 합니다.

    소금이 주방에서 어떻게 사용됩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세상’으로 의역한 ‘게스’는 원래 ‘땅, 흙’이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은 흙에 뿌려지는 소금을 비유로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의도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흙에 비료로 소금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농사와 관련해서 뿌렸다면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메마른 땅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소금을 뿌린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실제 흙에 소금을 두면 아침저녁의 이슬을 흡수해서 땅의 건조를 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소금 비유는 짠 맛을 내는 조미료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의 특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중화시키기 위한 소금의 역할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여기서의 땅은 우리의 선교의 대상인 사람과 사람의 활동 영역인 이 세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비옥하게 가꾸는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나. 맛을 잃으면 가치가 없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13절).

    성도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소금 같은 존재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라고 하시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맛을 잃다’(모라이노)는 ‘어리석게 되다, 오염되다, 쓸모없게 되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리석다는 것이고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순전한 소금 결정체는 그 자체로 맛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대체할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타락한 세상에 오염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잘못된 세상 논리와 법에 물들어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다. 소금의 진정한 맛을 드러내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13절).

    그러면 예수님 말씀의 의도인 소금이 진정한 맛을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소금’으로 쓰인 ‘할라스’는 ‘조미료나 비료로써의 소금’도 되지만 ‘지혜나 분별력’을 나타낼 때도 쓰입니다. 여기서는 소금을 지혜 있는 사람에 비유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며 내세를 준비하는 자를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마7:24참조). 시편 14편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라고 하였습니다(시14:1).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기적이고 탐심으로 가득 찬 부자 비유를 들면서 내세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 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눅12:20).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순종하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시19:7).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이웃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내세를 준비하는 존귀한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라. 맛을 드러내는 사람이 존귀하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절).

    본문은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쓸 데 있지만 그 맛을 드러내지 못하면 아무 쓸모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여기서 ‘쓸모 있다’(익수오)는 ‘힘이 세다, 유용하다,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자녀답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고, 그렇지 못하면 가치도 없고 쓰임 받지도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치 없는 소금은 밖으로 내버려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버려지다’(발로)는 분사형이고 수동태로 쓰여 자녀의 사명을 잃어버리면 쓰임 받지 못하는 인생으로 끝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밟히다’(카타파테오) 역시 수동태인데 ‘발로 짓밟히다, 거절당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예를 들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5:30). 이 땅에서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인생의 종말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녀들은 이 세상에 좋은 열매를 나타내는 소금 같은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윤택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소금 같이 지혜로운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성도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오늘날 성도들 대부분은 아마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안으로 들어가 깨끗하고 청결한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이러한 말씀들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둘째,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행실이 여전히 남아있어도 그것을 죄악시하지 않았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세상 속에서 죄짓도 살아도 여전히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무슨 의미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 "소금"이라는 단어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소금이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 / 방부제(防腐劑) 
    둘째, 소금은 소독하는 기능 / 소독제(消毒劑) 
    셋째, 소금은 땅을 단단하게 기능 / 강화제(强化劑)
    넷째, 소금은 맛을 내는 기능 / 조미료(調味料) 
    다섯째, 소금은 변치 않는 맹세와 서약에 사용 / 서원용(誓願用)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은 대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네번째의 의미다.

    그러나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첫째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성도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정화하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소금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맛의 기능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음식에 소금을 넣지 아니하면 아무런 맛이 없듯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체로는 아무런 맛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우리도 부패한 냄새만 풍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 모든 영역에서 맛을 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살아가는데 어디에 있든지 맛을 내는 것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이 맛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금 대신에 다른 것에 맛이 있다고 속이고 있다. 자기도 속이고 남도 그렇게 속이고 있다.

    "담배를 피워봐, 맛이 있을거야! 10년된 보드카를 마셔봐, 맛이 있을거야! 여러 여자를 건드려봐, 맛이 있을 거야! 마약을 해 봐, 맛이 있을거야! 인기를 끌어봐, 맛이 있을거야! 취미생활을 즐겨봐, 맛이 있을거야" 등등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사람이 가진 영원한 갈증을 해결할 수 없으며, 만족을 대신할 수가 없다.
    껍데기뿐인 우리의 인생에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단체, 어떤 지역, 어떤 계층, 어떤 사람에게든지 그곳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바꾸어놓기 시작한다.
    모든 것에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들이 빛일 모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자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그분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해내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어떤 단체에 들어가면 아무것이 없는 형편에서도 새로운 일을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해도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해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우리의 속죄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주어 우리를 살려주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곳에는 용서가 있고 따뜻한 사랑이 있다.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분의 생명의 속성이 우리 안에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지혜와 용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온갖 지혜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으로 인하여 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회사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것이고 기술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다.

    세상에 빛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빛에는 여러가지 역할들이 있다.
    어둠을 밝혀주는 기능,
    칙칙하고 습한 것들을 마르게 하는 기능,
    온도를 높여 따뜻하게 데워주는 기능,
    식물에게는 광합성을 하게 하여 식물을 성장하게 하는 기능,
    소독해주는 기능
    치료하는 기능 등이 있다.

    그렇다면 주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기 때문에, 결코 숨긴다고 해도 숨겨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듯이 우리가 숨겨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숨겨질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빛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온 우주는 사실 온통 어두움 뿐이었는데, 우리 안에 인격체로 오신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결코 숨겨질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행여나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발각된다면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 하여 그만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그렇게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다 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만 있어봤기 때문에 다 아는 것이다. 작아도 어둠 가운데 빛나는 불빛은 보지 못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었으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감출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감추면서 살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그분의 어떠함도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며, 설령 죄를 짓고 살아도 구원받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가르치다 보니, 죄짓고 사는 자신을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더러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부조리가 발각되기라고 하는 날이면,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는 "니네도 우리도 다 똑같이 더러운 놈들이로구나"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분이 누군지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첫째는 아무 쓸 데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한 자는 아무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둘째, 다만 밖에 버려진다고 하셨다. 우리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버림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버림받음의 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깥 어둔데요,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셋째,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했다. 이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계신 분이 정확히 누군지를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군지를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 채, 머리 속으로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전도는 전도받는 대상자를 변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주입하며 교회에 데려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숫자만 채워질 천국가는 백성이 그토록 작았던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90%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 종종 들린다.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다보니,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성도들은 이 말씀을 사실 되게 곡해하여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우리의 선한 행실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게 하기 위함이며, 그리고 하늘들 안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빛은 우리 주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떤 장소나 단체이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것이 들어가기만 하면 좌절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포기가 변화하여 소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한 행실"이란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부러워하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아가도스(good. 착한, 선한)"라는 단어가 아니라 "칼로스(beautiful, wonderful, great, exllent, attractiv)"라는 단어로서, "멋진, 아름다운, 뛰어난, 매력적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의 입에서 "너에게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느껴. 네가 믿는 하나님을 진짜 살아계신 분인가봐.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나도 좀 경험해봤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선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힌 자들에게는 놀라운 지혜가 될 수도 있고, 더이상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있는 자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끈기가 될 수도 있고, 더이상 앞으로 나갈 수는 상황인데도 그것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탁월한 능력이 될 수도 있으며,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낙망하지 않는 용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믿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이가 누군지를 알았어야 했다.
    그분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아니라 그분이 나의 능력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 세상 끝날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의 지혜가 되어주시고, 나의 능력이 되어주시고, 나의 용기가 되어주시고, 나의 희망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회사는 결코 망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간 곳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있어야 회사가 잘 되고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그들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이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진짜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전도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동경하고 사모하게 하는 것이 참된 전도인 것이다.
    그럼 그들은 제대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야,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지도 아니할 뿐더러 심판 때에 주님으로부터 버려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금장수 이야기

    옛날 전라도 전주 땅에 "길례"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가난한 소금장수 집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었는데 미모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길례"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 했는가 하면...
    동구밖에 서 있는 천하 대장군 장승이 나들이 나선 그녀의 작태에 홀려 곁눈질을 치다가 짝쿵인 지하 여 장군 에게 혼 지겁을 당했다는 정도 이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정치가 "체스터 필드"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남성의 기지와 마찬가지로 소유자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길례"의 미모가 여기 저기서 한창 소문이 날때 동네 명문가 부잣집 아들이 반해서 인연을 맺으려고 온갖 애를 썼지만...
    그 인연은 맺어지기가 순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길례"의 아버지는 백정(白丁)에다 천하의 상(常)것으로 취급받는 소금 장수에다 한푼 없는 가난뱅이 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당시엔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너무나 엄격해서 위계질서를 무너 뜨리는 혼사를 국법으로 막던 시대 였던지라  상사병을 앓는 아들을 차마 몰라라 할수 없어서 국법을 몰래 어기고 막상 결혼을 시키긴 했지만 시부모들이 며누리 보는 눈과 대하는 태도는 얼음장 처럼 차가웠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들은 과거 준비 핑계로 사랑방에 독선생 붙혀 가두다 싶이 해 놓고 미운털 밖힌 며느리는 안채에서 감시하기 쉬운 행랑에 처 박아 두고는 종(奴)부리듯 혹독한 시집 살이를 시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도 길례는 참고 견뎠습니다.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한 이상 당연히 감수해야 할 시집 살이라 여기고 온갖 시달림을 달게 받아 들었습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신랑의 변함없는 사랑 이었습니다.

    가끔 독선생의 삼업한 눈길을 피해 사랑채를 빠져나온 남편은 몰라보게 야윈 길례의 볼을 떨리는 손길로 어루 만지며 반드시 과거에 급제해서 한양에서 편히 살게 해 주겠노라 굳게 다짐 했습니다.

    그럴때 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용솟음 쳐 올라 왔지만 "길례"는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그 슬픔을 꾸욱 눌러 참은채
    "아무 걱정 마시고 공부에만 전념 하세요"하고 오히려 남편을 다독여 사랑채로 되돌려 보내곤 했습니다.

    길례가 시부모로 부터 고된 시집 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성밖 친정에 까지 전해 졌다.
    이런 소식을 들은 친정 부모는 애지 중지 키운 무남독녀 외동딸을 부잣집 양반 댁으로 시집 보낸뒤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궁리 끝에  우리가 가난하게 산다고 하지만 사돈댁 내외 분을 우리 집으로 한번 초대해 바같 사돈이 좋아하는 홍주로 식사 한번 대접해 봅시다.
    소금장수의 말을 들은 아내가 심란한 표정으로 남편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무슨 대접을 얼마나 해야 길례의 시집 살이가 달라 질까요?
    공연히 사돈댁에 비웃음이나 사지 않을까 걱정 되네요.
    그러자 남편이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을 다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지않소.
    되든 안되든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이렇게 해 봅시다.

    소금장수가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아내는 환한 미소로 피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서둘러 준비를 할테니 사돈 댁에 기별을 보내도록 하세요.
    이튼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준비를 시작 했습니다.
    -.흑산도 홍어회
    -.목포 세발 낙지
    -.영광 굴비에
    -.화순 쇠고기
    -.해남 참게젓
    -.영암 전복 대합 등등
    호남 각 고을의 "산해 진미(山海眞味)"를 힘 닿는데 까지 구해 잔칫상을 마련 했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거들이 날 지경 이었지만 딸 아이의 장래를 위한 투자인지라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는 사돈 댁으로 소금장수가 직접 찾아갔다.
    소금장수가 직접 예를 갖추어 찾아가자 거절을 못하고 동부인으로 초대에 응했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소금장수는 진도에서 구해온 홍주를 한잔 따라 올렸고 평소 술 좋아하는 바깥 사돈이 구하기 어려운 명주 한잔을 쭉 들이키고는 푸짐하게 차려진 안주 한점을 입에 넣었는데.....
    심심한게 영 제 맛이나질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고  즐비하게 차려진 안주 모두가 맹간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독한 홍주만 몇잔 연거푸 들이키던 바깥 사돈은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 놓았고 안사돈도 밥 숟갈을 내려 놓고는 어서 집에 가자는 듯이 힐끔 힐끔 남편을 바라 보는 것이 었습니다.

    사돈 어른 왜 수저를 놓으십니까?
    많이 드시지 않으시고....

    그러자 음식이 간이 맞지를 않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노라고 실토를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소금장수가 정색(情色)을 하고 입을 열었 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말 입니다만 이세상에 소금이 없으면 우리가 어찌 한끼 식사인들 제대로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소금을 바닷가에서 날라다 내륙 깊숙히 이 고을 저 고을 공급해 주는 저같은 소금장수가 없다면 우리의 식 생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왕에 사돈지간으로 소중한 인연을 맺은 사이니 소금장수 라고 업신 여기지 마시고 설렁 우리 딸 아이에게 허물이 있더라도 가르쳐 고쳐주시고 귀엽게 봐 주시면 그 은혜 있지 않겠습니다.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말을듣고 있던 바깥사돈은 벌떡 일어 나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돈 어른의 말씀은 과연 지당하시요.

    내가 아무리 만석군 부자이고 양반이라 할지라도 소금이 없으면 한끼의 식사라도 제대로 먹을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부부의 생각이 짧아 며늘 아이를 고생 시키고 사돈 두 분께 커다란 심려를 끼쳤으니 그 죄가 실로 크다고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차후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도록  하겠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요.

    황급히 바깥사돈의 팔을 잡아 일으켜 자리에 앉힌 소금장수는 아내에게 새로 음식에 간을 맞춰 내 오도록 이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양 사돈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누었다.

    소금은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살맛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는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암굴에서 잉태된 서기의 아버지 찾기 

    조선 중기 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있었는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주인은 이해심이 넓어 이 사내의 종살이를 풀어주었고 사내는 소금장수가 되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공주에 들어와 고개 하나를 넘어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한 여인이 논에서 새를 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여인은 동네의 한 대감댁의 여종이었다.
    갑자기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곧 큰비가 되어 쏟아질 것 같았다.
    소금장수는 소금 가마니를 지고서 냇물의 징검다리도 건너고 이리 저리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가다 보니 큰 바위굴이 있어 급히 굴속으로 들어갔다.
    소금 가마니를 내려놓고 한숨 돌리려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굴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소금장수는 깜짝 놀라 살펴보니 새를 쫓던 여인이었다.
    ‘아까 그 여인이구나.’ 생각하고 놀란 마음이 적잖이 누그러졌다.
    소금장수와 여인은 그렇게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소금장수와 여인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헤어지게 되었다. 

    우연한 만남 이후로 여인은 아기를 잉태하게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기가 고청 서기였다.
    서기가 태어나고 3년 동안 계룡산에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서기가 계룡산의 정기를 다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서기는 자신의 성씨도 모르고 자랐다.
    청년이 되자 어머니에게 “어머니. 제 성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옛일을 대략 이야기해 주자 서기는 공암굴 옆에 머물면서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공암굴을 지나던 한 소금장수가 굴 앞에 멈춰 지난 일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서기가 그 이유를 물으니 소금장수가 “여기서 한 여인과의 추억이 있네.”라며 자신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서기는 아버지임을 확신하고 소금장수에게 “제가 당신의 아들입니다.”했다.
    이들은 서로를 확인하고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서기는 낮은 신분으로 출생하였지만 장성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큰 학자가 되었다.


    소금장수의 아들, 뛰어난 학자

    서기 이야기는 낮은 신분뛰어난 능력이 대비되는 구조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성도 모르고 자라온 낮은 신분의 인물이 아버지를 찾고 결국에는 큰 학자가 된다는 이야기로, 신분이라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나 소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된다.
    하지만 큰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에 나와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어서 신분적인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한편 공암굴에는 최근까지도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곤 한다.
    굴속의 바위 틈새는 여성의 음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지역의 사람들이 오래도록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 생산과 풍요를 비는 곳으로 추측된다.



    성경에서 사용된 소금 상징과 의미

    1. 소금의 일반적 개요

    소금은 화학적으로 염화나트륨(NaCl)이라고 부릅니다. 
    염화나트륨은 나트륨인데 염소와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위키백과에 보면 '소금의 주성분이다'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소금에는 염화나트륨만 있는 것이 아닐겁니다. 
    그건 후에 좀더 다루기로 하고, 염화나트륨을 조금만 살펴봅시다. 
    염화 나트륨은 나트륨 이온(Na+)과 염화 이온(Cl-)이 결합한 상태입니다. 
    물에 잘 녹으며 수용성입니다. 
    물에 잘 녹는다는 말은 말과 염화나트륨이 섞일 경우 서로 전자 분해와 결합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서로 친하다는 말입니다. 

    소금의 구조

    [소금의 구조 사진출처 ]

    물과 기름이라는 뜻은 서로 잘 섞어지 않는다고 하죠. 이말은 서로 이온을 나주지 않고 독립적이란 뜻입니다. 염화이론과 나트륨 이온에 수소와 산소 원자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서로 잘 섞입니다. 염화 이온과 나트륨 이온도 잘 섞이고, 물도 수소가 있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염화나트륨은 음전자와 양전자가 쉽게 물에 해리되기 때문에 전해질 물질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설탕의 경우 물에는 잘 녹지만 쉽게 해리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2. 소금의 종류

    성경 속의 소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금의 종류를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제염과 천일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에서 추출한 것인지 바위소금 즉 산에서 채취한 암염(巖鹽)인지를 구분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두 가지 형태의 소금이 모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소금의 맛’은 암염을 뜻하는 것이고, 구약의 성막 제사에서 사용된 소금은 천일염으로 보입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하여튼 소금 본연의 성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세밀하게 구분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바닷물을 말려 얻은 소금을 그냥 천일염이라고 말하고, 땅에서 캔 소금을 암염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천일염(Solar Salt)

    천일염은 바닷물에서 수분을 제거하여 만든 소금을 말합니다. 
    순수한 염화나트륨이 아닌 바닷물 속의 다양한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건강에 유익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해안 지역에 많은 염전이 있습니다. 
    특히 신안은 소금의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전이 등장하지 않지만 지중해는 중심으로 염전이 존재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염전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해안과 같은 평평한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해 곧 염해(鹽海)가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소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암염(Rock Salt)

    암염은 바닷물이 아닌 암석과 흙속에서 캐내는 것이기 때문에 천일염에 비해 불순물이 훨씬 많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짜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해 남쪽에 소금산이 있어 그것을 채취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는 암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해에서 채취하는 암염은 천일염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럼에도 천일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염분이 빠져 나가도 돌같은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 소금이 사용된 예들

    1.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

    욥기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2. 식품의 방부제 역할

    3. 나쁜 물을 고치는 약제

    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4. 제사에서 사용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에스겔 43: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5. 정결의식의 소금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6. 언약으로서의 소금 상징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7. 저주로서의 소금

    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스바냐 2:9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마가복음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 사해 소금기둥


    8.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소금

    신약에서의 소금은 구약의 다양한 상징을 아우른다. 
    포괄적 의미로서 상당히 은유적으로 소금을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때 세상이란 "코스모스(2889)"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빛 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 "그(호, 3588)"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아니라 그 빛으로 읽어야 합니다.

    코스모스( kŏsmŏsκόσμος, ου, ὁ

    1. 장식.  2. 세상.  3. 고린도전서 4:9
    발음 / 코스모스[ kŏsmŏs ]
    어원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천하(마 4:8, 막 8:36, 눅 9:25), 세상(마 5:14, 고전 1:27, 계 11:15), 천지(행 17:24), 세속(약 1:27), 세계(약 3:6), 단장(벧전3:3)신약 성경 / 186회 사용

    * 2865. 코미조(kŏmizō)  κομίζω

    1. 가져오다.  2. 마련하다.  3. 회수하다
    발음 / 코미조[ kŏm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κόμισα, 제1부정과거 중간태 ἐκομισάμην, 미래중간태 κομίσομαι, κομέω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지다(눅 7:37), 받다(고후 5:10, 골 3:25, 히 10:36), 얻다(벧전 5:4), 당하다(벧후 2:13)
    신약 성경 / 10회 사용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교회에서 사용하는 요어가 때로는 성경적이지 못한 경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성경에서는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온누리 출판사에서 빛과 소금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는 축도할 때에 성경의 본문대로 기도하지 않고 여러 수식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것도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 시작된 것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빛을 먼저 말씀하시지 않고 소금을 먼저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지 않고 그냥 우리식으로 읽고 우리 식으로 해석하고 우리 식으로 믿고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먼저 소금이 되어야 그 때 비로소 빛이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우리의 큰 실수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니까 세상을 정의롭게 하고, 썩지 않게 하려고, 또  죄를 짓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땅에 소금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지금 세상에 빛이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흙은 생명의 기원(基源)이다

    땅은 흙이고 흙은 만물을 살리는 바탕으로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서 흙 위에서 삶을 구가하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흙을 떠나서는 살수 없고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것이 흙에서 삶을 영위한다.

    흙이란 암석에서 떨어져 나간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 그리고 결합수가 작은 입자로 모여 80여종 이상의 원소로 이뤄졌으며 이중에서도 규소가 전체의 50%이상을 차지하며 규소는 사람으로 치면 등뼈 같은 성분으로 탄소와 같이 손이 네 개로 두 손으로 서로 붙잡고 있으며 나머지 두 손으로는 모든 것을 잘 붙잡는다.

    모든 생물이 흙에서 태어난 것은 주성분인 규소가 탄소로 변했기 때문이며 탄소가 없었다면 모든 동식물이 생겨나지 못 했을 것이다.
    만약에 규소가 탄소로 바뀌지 않고 규소가 생명의 근간이 되었다면 인간의 수명은 지금보다 수배 아니 수십 배까지도 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구약성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흙을 빚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를 만들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했다고 기록되었다.
    아무튼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말씀은 과학적으로 진리며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 이 한부분만은 성경과 과학이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인간이 창조 되었건 진화 되었든지 흙이라는 점에는 공동점이 있으며 인간은 흙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믿는다.

    땅은 영원하다

    자연계의 현상은 얼핏 보면 아주 복잡하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 속에는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물주는 땅에서 사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모두가 함께 살아 갈수 있는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주었다.

    식물은 탄소를 이용해 광합성에 의해 당을 만들고 질소는 동화작용에 의해 아미노산으로 생합성 하여 밤에 뿌리에 저장하였다가 일부를 미생물에게 되돌려 주며 미생물은 다시생리활성 물질을 내 보내 준다.
    미생물에게도 탄소와 질소가 필요하다 질소로 몸을 만들고 탄소는 활동하는 에너지로 사용한다.

    인간은 단백질을 만드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동식물을 섭취하여 그 단백질을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만든다.
    생태계에서 인간과 동물은 소비자라고 할 수 있으며 식물은 생산자 미생물은 분해자 즉 조절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각자 분업에 의해 생태계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에 의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집약된다 할 수 있다.

    생명이란 이렇게 자연의 균형과 조화에 의해 탄생하고 유지되며 진화한다.
    모든 생명은 흙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으며.
    땅은 태산을 받치고 바다를 품고 있어 영원하기에 우리가 땅이 꺼질 것을 근심하며 사는 생명은 없다

    흙은 소우주이다.

    흙속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넓은 세계 즉 소우주를 발견 하게 된다
    땅속에서는 수많은 곤충과 미생물들의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다.

    곤충과 곤충. 미생물과 미생물 그리고 곤충과 미생물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이들의 세계는 정지된 세상 같지만 이렇게 서로 전쟁을 펼치는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미생물은 미생물군과 또 다른 미생물군 간의 끊임없이 경쟁하며 선충은 주사기 같은 입으로 곰팡이를 잡아먹지만 역으로 곰팡이도 진즉진즉한 고리를 만들어 선충을 죽여 이렇게 서로 간의 견제하는 적절한 조화 즉 서로간의 길항관계 때문에 생태계는 유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땅위에서도 모든 동물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처절한 약육강식이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존재관계가 성립하며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속담 중에 "흙은 풀을 길러내고, 풀은 가축을 기르고, 가축은 인간을 기른다"라는 말이 있다.
    풀, 가축, 인간은 각각 독자적으로 영양을 흡수하지만 결코 독립되어 있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영양소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버리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는 흙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계를 순환한다.

    흙도 안식을 원한다.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만물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중심의 생각이다.

    과학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은 가히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풍요를 가져 왔지만 그러나 그 역풍도 심각하다.

    농업이란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을 길들이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과학의 힘을 빌려 점차 자연을 벗어나 한정적이고 획일화 된 조건 하에서 땅을 휴식 없이 같은 작물을 같은 장소에 계속 심을 때에는 화학비료와 화학합성농약을 피할 방법이 없다.

    화학농약은 미생물에게는 핵폭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토양 내에서 이화학성의 변화를 초래하여 유익균보다는 해로운 균만 증가하여 미생물상의 변화가 일어나 뿌리섞음병 등 토양병해가 발생하며 또한 잦은 화학비료의 살포는 토양 내 비료성분의 과다한 집적과 토양의 산성화를 초래해 연작피해가 발생한다.

    그래서 좋은 농사꾼은 밭을 바꾸어 씨를 뿌리거나, 밭으로 하여금 휴식년을 주어 묵힌다. 미국의 밀 생산지에서는 넓은 면적을 나눠 밀을 심은 곳과 심지 않은 곳이 반반씩 있다. 이것은 대량생산으로 인한 곡물가격 폭락을 막는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땅심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흙은 어머니다.

    흙은 모든 생명들을 감싸고 있는 어머니로 수많은 생명을 품은 자궁이라 할 수 있다.

    건강한 흙 한줌에는 수억의 생명을 품고 있으며 100만종이 넘는 곤충의 95%가 흙속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알을 낳고 부화하여 번식을 하며 생활도 하지만 이 속에서는 사냥도 하는 드라마틱한 약육강식의 전쟁이 쉬지 않고 일어나 서로 먹고 먹히면서 흙에게는 양분을 공급할 뿐 아니라 흙을 숨 쉬게 하며 모든 생명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흙은 식물과의 상호관계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통해 하나의 씨앗을 품으면 수십 배로 돌려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땅은 태초에 하늘에 의해 수태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늘이 아버지라면 땅은 어머니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물을 양과 음으로 나누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흙은 95% 이상을 전기적으로 음성(-)의 성질을 갖고 있어 과학적으로도 흙은 여성이다.

    까닭에 남성적 하늘에 대한 배우자로서의 흙은 여성적 대지가 되기도 하다. 내가 디디고 사는 땅은 만고에 듬직하여 아버지와 같고 영원히 인자한 어머니와 같아 항상 포근하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물은 동물과 식물로 나누며 이들은 서로 대조적인 존재지만 생활에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으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위에 동물과 식물로 구분되고 있다.

    흙 위에서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동식물의 외견상 가장 큰 차이는 동물은 좋은 환경을 구하여 살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며 인간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을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식물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 할 수밖에 없다.

    식물의 경우 맥이 일부 끊기거나 상하더라도 많은 종의 나무는 자신의 뿌리나 줄기로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의 '클론'을 생산할 수 있어 삽목이나 분주 등 자기 복제를 통해 영생을 누리지만 동물은 중요 장기가 상하거나 끊어지면 죽음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인간도 머지않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앞으로 3-4십년 후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속에 수십억 개의 미세한 나노 로봇이 들어가 노화를 막으며 또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가 나와 인간과 결합하는‘사이보그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새로운 진화를 통해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동식물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 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흙으로 돌아간다.
    땅은 절대적 힘을 가진 수호신이다

    하늘은 신앙적으로 절대적 힘으로 군림하고 지배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땅은 모두에게 생활의 터전을 주어 포용하며 무조건 베푸는 풍요로움으로 친화감을 느끼게 하는 은혜로운 안식처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정신적인 의미가 있다.

    땅은 기복(祈福)의 대상으로 시골에서 자랄 때 흙을 밖으로 쓸어버리면 복이 나간다고 여겨 마당을 쓸 때면 집 안쪽으로 쓸어야 했으며, 땅을 일구어 먹거리를 장만하며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살아온 땅은 태어난 곳이자 되돌아 갈 곳이기에 이를 밟고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탈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설령 홍수와 가뭄 등 하늘의 횡포로 때로는 고통을 주어도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이기에 참된 마음으로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모든 삶의 아픔을 흙에 의지하며 살아 왔다.

    이러한 생각들이 절실한 삶 속에 승화되어 한 치의 땅을 더 얻는다는 것은 곧 재물과 복을 얻는 일이며 한 치의 땅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 즉 생명의 한쪽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였다.

    그래서 좋은 땅에 대한 욕심은 현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까지도 연장하려는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어 땅은 신앙의 대상으로 수호신이라 할 수 있다.


    땅에는 소위 땅의 기란 것이 있다.

    땅은 만물을 생성하는 기가 있으며 이 생기가 땅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 땅의 기운이 인물을 낳고 길흉화복을 좌우한다고 하는 이 독특한 자연관 때문에 동양에서는 풍수지리학이 발전했다.

    산 사람은 땅 위에서 살고 죽은 뒤에도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산 사람이 사는 곳을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음택이라 하고 땅속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생각하여 땅속에서 혼백이 올라온다고 믿어 생전의 업보로 인해 지옥(지하의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물과 바람이 직접 범하지 않는 곳을 택해서 집을 짓고 묘를 만들었으므로 풍수지리라 하였으며 여기에서도 땅의 살아있는 생명력과 기운이 만물을 지배하고 산자나 죽은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한데서 풍수학이 천년이 넘는 세월을 우리 삶과 같이 했다고 하겠다.

    오행(五行)에서는 생각하는 것이 ‘土’에 속하여, 생각 ‘思’의 한자는 밭 ‘田’ 밑에 마음 ‘心’을 붙인 것으로 마음의 밭을 갈아 다스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흙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甘)며 독이 없다. 설사와 이질을 치료하고 각종 식중독에 좋다. 지표에서 석자까지를 분(糞)이라하고 그 아래 있는 것을 흙 이라한다. 약용으로 쓰이는 것은 물이 스며들지 않는 참흙을 말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흙이 간섭하고 있는 영역은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아주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몸이 서고. 앉고. 누운 자리가 모두 땅이다

    나는 흙냄새를 좋아한다. 몇 달이고 바다 위에서 생활하다 육지로 돌아오는 선원은 먼 곳에서부터 흙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삼복더위에 더위를 식히려고 마당에 물을 뿌리면 순간적으로 토양미생물인 방선균으로 인해 흙냄새를 맡게 된다. 그러나 요즘의 모든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주거방식도 아파트로 점차 고층화되어 땅에서 멀어져 우리는 흙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순의 언덕에 첫 발을 내 디딘 요즈음 나는 일이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는 반려견인 코코와 수를 데리고 아파트 산책로와 연결된 등산로를 따라 무년산에 올라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히 지나가는 새나 움직임이 없는 돌이랑 나무들을 볼 때마다 항상 새롭게 느껴지며 이들과 교감하는 삶을 체험하다보면 나도 자연의 일부로 존재함을 느낀다.

    요즈음 나는 한 걸음 물러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 많은 심경의 변화와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내가 못한 일은 무엇이고 더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인가?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보고 배운 것도 각자 달라 생각도 서로 다르겠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일의 진가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설령 잘못 선택한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늘 이 일을 만족하고 내일을 위해서라면 오늘의 팍팍한 삶쯤은 어떻게 해서라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솔개가 바위에 낡은 부리를 쪼아 없애고 새부리를 나게 하어 그 새부리로 낡은 발톱과 헌 깃털을 뽑고 나서 다시 새 삶을 살듯이 이순에 접어 든 나는 흙냄새에 대한 그리움이 도시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삶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 나는 요즈음 부쩍 흙냄새가 좋다.

    우리가 언제나 듬직하고 가장 믿음직한 땅에서 태어나 믿음을 잊고 사는 인간이어서는 어찌 참다운 인간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흙 위에서 사는 동안 흙의 믿음을 닮아 살기를 원한다.


    땅은 왜 ‘갈색’일까?

    죽은 식물에서 나온 탄소 때문
    ‘라이브사이언스 닷컴’ 보도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파랑과 초록으로 보이지만 막상 발밑 땅을 내려다보면 갈색으로 보인다.

    과학 웹사이트 〈라이브사이언스 닷컴〉은 10일 땅이 갈색으로 보이는 것은 녹색 식물 때문이라는 미국 학자의 연구를 보도했다.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스티븐 앨리슨은 “식물이 시들어 죽고 잎과 줄기가 땅에 떨어진 뒤 식물 내부에 저장됐던 탄소가 땅속에서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남아 오랫동안 쌓이면서 갈색을 내게 된다”고 밝혔다.

    흙속의 미생물은 원래 먹잇감인 식물의 화학성분을 잘게 분해해 먹어치우고 일부 원소를 자신의 세포로 합성하지만 탄소를 100% 분해하지는 못해 남은 ‘부식물질’이 땅속에서 수천, 수만년 쌓이게 된다.

    이렇게 땅속에 남은 탄소는 햇빛 스펙트럼의 색깔을 거의 다 흡수하고 갈색만을 반사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계 어디서든 땅이 갈색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막은 모래처럼 새하얗고, 철분이 많은 곳은 붉은색을 띤다.
    갈색 땅도 깊이 파 들어가면 다른 색깔들이 나타난다.
    앨리슨은 “땅속 탄소 성분이 적으면 흙은 노랑이나 빨강, 회색을 띠게 된다.
    이들은 함유하고 있는 금속의 종류에 따라 다른 색을 띤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자 자기의 신앙의 행동을 바르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렇게 하니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바로 소금이 되었고 빛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속이 다른데 겉이 빛으로 살면 이는 어두움의 빛이요. 맛이 없는 소금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금이 되었습니다.
    빛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산상 수훈의 팔복이 자기에게 모아져 나온 결정체가 바로 소금인 것입니다.
    빛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이 무엇인가 모르고 하는 소금과 빛은 자기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팔복이 자기에게 이루어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이제 땅에서 소금이 되고 코스모스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라

    소금은 맛이 짭니다.
    소금은 자신의 맛이 다른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눈에 보이지만 녹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입 맛으로 소금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소금을 먹지 않으면 각기병을 앓아 각종병으로 수명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소금은 몸에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소금은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맛을 내야 합니다.
    부패를 방지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패를 방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금이 쓰이는 곳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세상’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분명히 세상이라고 하지 않고 “게에(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번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에 속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땅과 소금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그 땅은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맛을 내기 때문에 그 땅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땅이 있으면 그 땅에서 소금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필요한 곳에 녹아서 자신의 존재가 없어집니다.
    자신이 없어지지만 또 따른 생명이 땅에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선 사업을 하고 구제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너희는 먼저 땅의 소금이 되어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녹아 자신의 모습이 없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재료가 땅입니다.
    이 과정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고린도전서 15:47-50)

    성경은 땅(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보고 혈과 육이라고 합니다.
    또 그 몸은 썩을 몸이라고 합니다.
    썩을 몸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 영생을 하려면 썩지 않게 하는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왜 땅으로 만들어진 몸이 썩어지는 모습으로 변화되어갈까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육체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골로새서  2:22)

    바로 사람의 명과 가르침, 즉 선악의 가르침입니다.
    선이란 이름을 넣고 결과는 욕심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몸은 썩어가기 때문에 바로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썩어가는 것을 막아주고 각종 부패를 막아주는 생명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하여 썩을 몸에서 생명의 몸이 되어 그 속에 소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때가 되면 썩어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 율법 아래, 초등 학문 아래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가서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속에서 녹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 소금의 일을 감당합니다.
    육신으로 구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들이 주의 품으로 돌아오는 새로운 몸으로 변화 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롯의 처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영원한 소금 기둥이 되지 말고 소금이 녹아서 또 다른 맛을 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몸이 먼저 썩어짐에서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바다물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결정체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훈련을 받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 버리고 온전히 녹아지는 몸이 되어진 과정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이란?
    도덕과 윤리적인 선이 아니라 믿음의 선을 의미한다.

    악한 일이란?
    도덕과 윤리적은 악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것 그것을 악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면 남을 도와주고 선을 베푸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 기독교에서 가장 많은 자선을 베풉니다.
    그러나 산 위의 세상에서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산 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산 아래 동네와 산 위의 동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세상은 산 위에 있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산 아래의 세상은 예루살렘 도시입니다. 그곳은 율법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이미 형성되진 예배가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질서, 정돈이란 뜻입니다. 세상이 정돈 되지 않으면 질서가 없고 우왕좌왕하며 힘이 지배하는 양육강식의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 질서가 필요하고 정돈이 필요합니다.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법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다스리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를 가든지 법이 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세상은 혼돈이 됩니다.

    우리 말에 악법도 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상은 질서가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의 질서와 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에게는 종교의 법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법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질서가 유지 됩니다. 안식일 날 다른 일을 하면 그 법에 의해서 죄가 성립되어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법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율법의 세상은 외적으로 비춰지는 빛입니다. 이 빛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빛을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바로 가르침을 통해 질서를 만들어가고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외형적인 빛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 빛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빛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리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어두운데서 빛이 비추라”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과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이 빛을 비추었습니다. 자기 안에 계신 아버지를 증거하셨습니다. 어두움의 질서 속에 사는 세상에 있는 제자들을 불러내시어 생명의 질서로 생명의 세상으로 창조해 가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된 자들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은 놔두고 비 본질에 매여 삽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 된 자들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5-16)

    서로 빛을 비춘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치장하고 있는 형식적인  질서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 모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15-21)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우리의 모임입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이것은 썩을 몸들을 썩지 않는 몸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것은 어두움의 질서로 사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세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상 수훈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과 피가 되어서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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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유대 민족에게는 큰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암흑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고 이 때를 가리켜 중간사라고 부릅니다.
    유대 민족은 독립적인 국가를 가지려고 했으나 다시 로마의 침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외침 소리가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암흑입니다.
    율법 책이 있어도 외치는 자의 소리가 없으면 소경이요, 귀머리인 것과 같습니다.
    400여년 동안 고요한 어두움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춥니다.
    바로 세례요한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지금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그 뿌리가 잘려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는 엄청난 외침입니다.

    ‘너희들의 죄를 자복하고 물세례를 받아라’ 하면서 당시 종교의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의식을 외쳤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물 세례를 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분노의 소리였으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빛이요, 희망의 등불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하자 수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런데 또 다른 똑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바로 주님이 외치는 소리입니다.

    이 시대 미디어와 책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결 같이 천국에 관한 것이며,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의 소리와 주님의 소리가 있지만 성도들의 마음은 텅 비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관에 대한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나라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듯이 말씀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도 주님께서 외쳤던 말씀을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천국에 가서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어찌 믿든 예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선민이기 때문에 행위가 나쁘든 좋든 조상이 머무는 곳에 간다는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에게만 별도로 천국에 가는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먼저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 이 말씀은 먼저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이 자기 것이 되고 난 후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받는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천국이 자기 것이 되어 있지도 않고,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마음의 평화와 육신의 복만 받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도 육신의 복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숨이 끊어진 후에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7:21).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나이까?” 질문을 합니다(눅 17:20). “임하나이까”의 "에르케타이()"는 ‘오다, 가다, 나타나다’는 뜻입니다. 한글 성경의 ‘임하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개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오고 있습니까’? 라고 현재 오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자기들에게 오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질문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않고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7:21). 천국을 사모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안에 있는 천국을 보지 못했듯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천국을 보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가까이 왔느니라”는 지금  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의 "엥귀켄()"은 현재 완료형으로 ‘이미 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하늘들의 나라가 이미 와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회개하라’ 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는데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또 부흥회 때마다 지난 죄를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그 때는 마음에 심령 천국이 이뤄진 것 같은데 지나면 다시 예전의 신앙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례 요한의 회개는 천국을 얻기 위한 회개입니다.
    율법적인 죄사함에서 돌아서서 주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천국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외쳤던 회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 죄 사함 받아 죽었던 자가 살아나 임마누엘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회개인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한 회개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회개는 천국이 그 안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말씀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사망의 죄에서 늘 이기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생명의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요 14:21).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자들의 신앙은 현재 종말론적 신앙에서 미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재의 자신의 삶이 곧 미래의 자신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온전히 회개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바로 이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을 무수히 받아도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종말을 의식하지 못한 미래의 종말론적 신앙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재의 신앙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다음에 열심히 하면 되지!’ 하면서 퇴보의 신앙을 걷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기보다 현재 육신의 것에 신앙의 비중을 더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2천 년 전에 천국은 이미 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눈과 마음이 할례를 받지 못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천국은 이미 와 있습니다(눅 17:21)
    예수 이름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구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이미 와 있는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앞으로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관심을 갖고 믿음생활을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에게 와 있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앞으로 영원한 천국을 보장 받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생에 살면서 자기 육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은 자신의 몸을 위해 사는 것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하다 하면서 어린 아이 신앙도 여기에 속합니다(고전1:10-13.고전 3:19).

    천국에 대하여

    ‘천국(천국)’은 한문으로 기록된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늘들의 나라()" 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막 1:14)로 나옵니다.

    ‘천국’은 죄가 없고 생명나무의 열매들이 풍성하고,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슬픔과 근심 대신에 기쁨과 희락이 있는 곳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천국은 씨를 뿌리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밭은 세상을 비유하고(마 13:38), 말씀을 받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고전 3:9). 선한 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밭에 씨를 뿌리는 분은 사람(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천국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을 천국이라고 소개했을까요?
    이는 자신 속에 천국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8:29).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곧 천국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토라를 연구하고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어 시간 나는 대로 성경을 필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전수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여야 하는데 자신의 권세만 드러내기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천국’이라 하셨고,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 원하는 하늘 백성들을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을 천국에서 살도록, 또 주님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한 몸 된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 주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과 주님이 그 속에 거하게 하는 생명이 있었습니다(마 12:28)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영과 생명으로써(요6:63),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생명이신 주님을 씨로 제자들 속에 심기운 것입니다. 이 과정이 천국이 임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이 천국의 씨는 아무에게나 떨어진다고 해서 다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마 13:11-15).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마 5:3. 눅 6:20),
    여기에 나오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과 주님이   한 몸 되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씨인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보고,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마 13:16).
    이 과정이 회개하는 것이며 천국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이 말씀은 주님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씀의 씨가 자라 온전한 열매가 된 자들은 육신의 몸을 벗을 때 영원한 천국이 보장된다는 미래의 약속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미래 천국에 대한 약속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기 안에 있는 천국을 보면서 ‘의’를 위하여 핍박 받지 않는 삶을 산다면, 미래의 천국은 신기루에 불과 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하나님과 주님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3년 이상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과 주님에 대해서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 씨가 그 속에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천국이 너희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이 자기에게 있다 할지라도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그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서 성령을 주어 받게 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고 담대히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확산되자 그들에게 죽음이란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담해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말씀이신 하나님과 주의 영이 있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벗을 때 영원한 나라에 안식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미 천국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주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0:8).
    그리고 육신을 벗을 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4:6-8).
    이것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의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가서 생명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을 받을 준비를 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으면 간다는 막연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육신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또 다시 오셔서 외칠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내 주 하심을 믿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그 분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해 보십시오.
    내면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세미한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을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말씀의 인도하심을 맛보며 살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이웃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변화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미래적 종말을 소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내 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언제든지 나무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다고, 나이가 젊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심판대는 항상 문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이 시대 우리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외치는 소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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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5일 신년주일 / 될 사람과 안 될 사람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학의 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이유는 모든 만물의 근원(아르케)이 무엇인가라는 과제에서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찾는 학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답은 "죽음" 앞에서 무너져 버립니다.

    반면에 신학에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신학이란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헬라어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는 "위(ἀνά)"와 "얼굴(πρόσωπον)"의 합성어 입니다.

    사람(인간)이란 누구인가?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존재"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존재”

    따라서 인간이란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허물만 입었을 뿐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던 사건을 소개합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누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놀라서 그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쳐다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제자가 유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느 네가 오늘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모두 예수님 앞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될 사람이 되었으나 유다는 안 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자 온갖 재앙과 질병 등이 나와 세상에 퍼졌습니다.
    황급히 뚜껑을 닫았을 때, 상자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란 "희망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희망의 경구로 자주 쓰이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는 ‘나는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는 뜻입니다.

    철학자 키케로도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라고 말했습니다.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는 뜻입니다.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어떤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은 있다는 교훈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있고 그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희망을 주노니 너는 희망하라.”

    죄악으로 인한 고난이든 훈련으로 인한 고난이든,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길 원하십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이기는 절망은 없다.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따라서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안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땅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땅만 바라보는 인생과 위를 바라보는 인생은 그 결과가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땅만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던 어떤 사람의 결말

    (이야기 자료) 박윤선목사 시편 주석  p. 144

    어느 청년이 길을 가다가 2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길을 걸을 때마다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하여 40년 동안 그는 29,516개의 단추 54,172개의 핀7페니를 주워 모았다.
    햇볕의 따스함, 친구들의 미소, 새들의 노래, 꽃과 나무와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은 볼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잘못된 방향과 목적은 비참한 결과에 이를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얼굴을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생동안 땅만 바라보던 육체는 목과 허리가 굽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은 근시가 되고 마음은 여유가 없는 사막화가 되며 성질은 고약하고 인색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자료) 이비커스의 학

    주전 약 5세기에 희랍에 "이비커스"라는 유명한 시인이 고린도에 가까운 촌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죽기 전에 크게 외치기를 마침 그 주위를 빙빙 떠돌고 있던 학을 보고 하는 말이『너 학은 내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내가 죽은 다음에도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강도가 다 들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없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린도의 노천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 몇 마리가 공중에 날아와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어떤 사람에게 거의 머리에 닿게 날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았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아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하로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알아보니 그 사람이 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될 사람은 이러한 삶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소개됩니다.
    가룟 유다는 사탄이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 넣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세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분명하게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사랑을 고백하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하늘을 보는 사람과 땅을 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은 그의 잘못을 알고 스스로 뉘우쳐 회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몇 단계의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고백 단계(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둘째는 통곡하는 단계(마태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생각나서 -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실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2:61)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35절)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절) 완전히 성취되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베드로는 더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닫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에로 무겁고도 어렵게 내리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회개로 인해 그는 서서히 참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몇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막 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다(행 :2:14). 한편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사실 이같은 전설을 빌지 않더라도 베드로의 비통(悲痛)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을 것이다.

    통곡(wept bitterly) 2799  크라이오( klaiō) κλαίω

    1. 울다.  2. 슬퍼하다
    발음 [ klaiō ]
    • 1. 울다, 막 14:72, 눅 7:38, 요 11:31.
    • 2. 슬퍼하다, 비탄하다, 마 2:18, 계 18:9.
    • 관련 성경  /  슬퍼하다(마 2:18), 울다(마 26:75, 막 16:10, 계 18:19), 통곡하다(눅 22:62), 곡하다(요 11:31, 16:20),
                          눈물 흘리다(빌 3:18).

    셋째는 사랑의 고백 단계(요한 21:15, 16, 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을 치라.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을 먹이라

    넷째는 회개의 단계(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悔改)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스트롱번호 3341

    1. 개심.   2. 회개.  3. 돌아섬
    발음 [ mĕtanŏia ]
    어원  / 3340에서 유래
    • 1.  개심, 회개, 돌아섬, 마3:8, 눅3:8, 행26:20, 고후7:9, 히12:17.
    • 관련 성경  /  회개(마3:8, 눅3:8, 행20:21, 고후7:9, 딤후2:25, 벧후3:9), 후회(고후7:10).

    μετανοέω 스트롱번호 3340

    1. 마음을 고치다.  2. 바꾸다. 3. 뉘우치다
    발음 [ mĕtanŏĕō ]
    • 1.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3:2, 막1:15, 눅10:13, 행2:38, 8:22, 고후12:21,계2:21,22, 16:11.
    • 관련 성경  /  회개하다(마 3:2, 눅 10:13, 계 2:5).

    그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질렸습니까?
    남이 다 가만있는데 학이 머리 위를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대면하게 했습니다.


    넷째는 성령을 받는 단계(사도행전 2:1-4)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안 될 사람이란 하나님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요?
    될 사람 베드로는 교회를 세우는 희망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네 가지로 가르쳤습니다(딤전 2:1).
    간구(request), 기도(prayer), 도고(intercession), 감사(thanksgiving),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I urge, then, first of all, that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be made for everyone--









    성경 / 잠언 1:7
    제목 / 될 사람과 안 될 사람(Will be Christian & Won't be Christian)

    이르아트           아도나이       레쉬트             다아트      호크마     우무사르    에윌림           바주
    경외하는 것이     여호와를      근본이어늘    지식의       지혜와     훈계를        미련한 자는    멸시하느니라
        3374                   3068            7225            1847          2451       4148          191                  936
    יִרְאַת   יְהוָה   רֵאשִׁית   דָּעַת   חָכְמָה   וּמוּסָר   אֱוִילִים   בָּזוּ׃ ף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 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2:21
    이를 爲(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爲(위)하여 苦難(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本(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에이스 투토 가르 에클레데테 호티 카이 크리스토스 에파덴 휘페르 휘몬 휘민 휘폴림파논      휘포그람몬
    히나 에파콜루데세테 토이스 이크네신 아우투.
    εις       τουτο γαρ εκληθητε   οτι       και      χριστος    επαθεν υπερ  ημων ημιν υπολιμπανων υπογραμμον 
    ινα     επακολουθησητε τοις   ιχνεσιν    αυτου.

    고난(3958) 파스코(paschō) πάσχω 

    1. 경험하다.  2. 잘못 살다. 3. 고난당하다
    발음 [ paschō ]
    • I. 경험하다, 겪다, 당하다.
      • 1.  잘못 살다, 비참한 상태에 있다, 마17:15.
      • 2.  고난당하다, 겪다, 견디다.
        • a.  고난당하다, 마17:12, 눅22:15, 행1:3, 고전12:26, 빌1:29.
        • b.  견디다, 당하다, 행28:5, 고후1:6, 히5:8.
    • 문법설명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관련 성경
      고난받다(마16:21, 살전2:14, 벧전4:1), 고생하다(마17:15), 괴로움을 받다(막5:26, 갈3:4), 애쓰다(마27:19), 해 받다(눅13:2, 행1:3, 9:16), 상하다(행28:5), 고통받다(고전12:26), 환난 당하다(고후1:6), 고난당하다(히2:18).


    본(5261)  ὑπογραμμός( hüpŏgram- mŏs ), οῦ, ὁ    

    1. 원본.   2. 본. 3. 원형
    발음 [ hüpŏgram- mŏs ]
    어원  / 5259와 1125의 합성어에서 유래
    • 1. 원본, 본, 원형, 견본, 모범, 귀감, 벧전2:21.
    • 관련 성경  /  본(벧전 2:21).


    자취(2487) 이크노스(
    ichnŏs) ἴχνος, ους, τό    

    1. 발자취.  2. 롬 4:12. 3. 고후 12:18
    발음 [ ichnŏs ]
    어원 / ἰκνέομαι에서 유래
    • 1.  발자취, 롬 4:12, 고후 12:18, 벧전 2:21.
    • 관련 성경  /  자취(롬 4:12, 벧전 2:21), 보조(고후 12:18).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설교 주제에 대한 설명

    "될 사람과 안 될 사람"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기독교인이 될 사람과 기독교인이 안 될 사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될 교회와 안 될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소개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이 가득찬 도시가 도어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심에 따라 아브라함은 그 성에 살고 있는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그 성에 의로운 사람 50명이 있다면, 45명이 있다면, 40명이 있다면, 30명이 있다면, 20명이 있다면, 10명이 있다면 이렇게 하나님이 찾는 의로운 사람의 수를 10명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왜 5명, 1명으로 줄일 수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롯의 가족은 4명(롯, 아내, 2명의 딸)
    롯의 딸이 결혼하여 2명의 사위와 사위의 부모 4명
    그러므로 10명이란 최소한의 가족들의 수를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는 10이란 "충만한 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10이란 숫자의 의미

    ‘10’이란 수는 어떤 것의 ‘fullness(충만, 완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고 있는 창세기 1장엔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란 문구가 10번 나옵니다(1:3, 6, 9, 11, 14, 20, 22, 24, 26, 29).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God said:하나님이 말씀하시다’란 문구가 창조 사역 개요를 담고 있는 1장에 10번 나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치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란 구절이 히브리어 7단어, 영어 10단어로 구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7이 하나님, 특히 영의 완전수라면 10은 충만함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모두 각각의 알파벳에 고유의 수가 정해져 있어 숫자로도 환산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처럼 말씀과 숫자를 공부하다 보면, 성경은 결코 사람이 쓸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게 확연해집니다.

    ‘10’에 대한 이런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곳곳에서도 보이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각 손과 발에 5개의 손(발)가락이 있고 두 손(발)에 10개의 손(발)가락으로 완전합니다.
    숫자는 0-10까지 한 세트를 이루고 10이 되었을 때 다시 1부터 돌아가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끝(충만함)이 이르고 심판이 이르렀던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진 10개의 재앙이 심판의 충만함을 나타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5계명씩 두 판에 나뉘어 십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도 10개의 휘장, 10개의 기둥, 10개의 받침(sockets)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출 26, 27장).
    민수기 14장 22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나를 10번이나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10은 시험, 불순종, 반역의 충만함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은 꽉 찬 ‘10’번 나옵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사람이 쓴 성경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하나님이 쓰신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킨 내용이 나오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출애굽 할 때(출 12장),
    2. 광야에서(민 9장),
    3.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수 5장),
    4. 히스기야 때(대하 30장),
    5. 요시아 때(대하 35장),
    6.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여러 방해와 어려움 끝에 성전 짓기를 마쳤을 때(스 6장),
    7. 예수님이 12살이셨을 때(눅 2장),
    8. 4복음서에 기록된 3번의(요 2장, 요 6장, 마 26장) 다른 유월절에 대한 기록.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유월절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마치셨음을 드러내는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니산월 14일이 되는 유월절에 쓰일 어린양을 취하는 날은 그달 10일째 되는 날입니다(출 12:3).

    예리한 분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도 베드로와 바울에 연관돼서 유월절 절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오순절’로 되어 있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힐 때는 ‘무교절’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과하게 떡과 잔을 나누어 핀잔을 줄 땐 ‘성만찬(communion)’이란 단어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유월절’을 지켰다고 나온 기록은 4복음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에 10번으로 끝납니다.

    이처럼 왕국에 대한 것도-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든 세상의 왕국이든-그 온전함(충만함)을 나타내는데 10이란 수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창조 원리이기에 세상에서도 모든 나라와 민족을 뜻할 때 ‘열국’, ‘열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왕국은
    1. 다니엘서에 10개의 발가락과(단 2장)
    2. 10개의 뿔로 표현되는데(단 7장)
    3. 요한계시록에서도 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용)의 뿔 10개로 표현됩니다(계 12, 13, 17장).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설명하시는데 총 10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마 13, 22, 25장).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던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서도 비록 5명만 들어갔다 해도 10명의 처녀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 잃어버린 은 1개를 찾는 여자의 10드라크마나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이 10명의 종에게 나눠주는 은 10 므나에 대한 비유도(눅15, 19장) 마찬가지 개념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10가지 종류의 불의한 자들이 나옵니다.
    1. 음행하는 자,
    2. 우상숭배 하는 자,
    3. 간음하는 자,
    4. 탐색하는 자,
    5. 남색 하는 자,
    6. 도적,
    7. 탐욕을 부리는 자,
    8. 술 취하는 자,
    9. 모욕하는 자,
    10.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 경우엔 불의의 충만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마서 8장 38-39절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끊을 수 없는 10가지의 권세나 능력이 등장합니다.

    1. 사망,
    2. 생명,
    3. 천사,
    4. 권세자들,
    5. 현재 일,
    6. 장래 일,
    7. 능력,
    8. 높음,
    9. 깊음,
    10. 다른 어떤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열거된 10개의 권세가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는 장치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려면 먼저 될 사람으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셀라 단어는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치사 "에크(ἐκ. 1537)"와 동사 "칼레오(καλέω. 2564)"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에크'라는 전치사의 의미는 "....으로부터(from)"이며, 동사 '칼레오'는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ἐκ 스트롱번호 1537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 2:15.  3. 요 15:19
    발음 [ ĕk ]

    καλέω 스트롱번호 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세상에 머물고 있는 사람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어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 다음에는 죄 가운데서 살던 사람을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죄 사함의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말씀을 배우며 확신한 일에 거하는 삶을 즐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이 바로 에클레시아의 본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조카 롯을 불러냈을까요?

    창세기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So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he remembered Abraham, and he brought Lot out of the catastrophe that overthrew the cities where Lot had lived.

    생각하사(2142) 자카르(zâkarזָכַר    

    1. 기억하다.  2. 잊지 않다. 3. 명심하다
    발음 [ zâkar ]
    구약 성경  / 222회 사용
    관련 성경  / 기억하다(창9:15, 시9:12, 겔21:23), 생각하다(창40:14, 겔23:19, 렘31:20), 기념하다(시136:23, 출13:3, 삼하18:18), 마음에 두다(사17:10), 선포하다(렘20:9), 부르다(사12:4),생각나게 하다(왕상17:18), 칭송하다(대상16:4), 전하다(렘4:16), 자랑하다(시20:7), 진하다(아1:4), 분향하다(사66:3).
    [명] 소문(사 19:17), 사관(삼하 8:16, 왕상 4:3, 대상 18:15), 서기관(대하 34:8).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 비록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긴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간구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 중에서도 자신의 자비(16절)와 롯의 최소한의 믿음(1-8절; 벧 2:7.8), 그리고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 기도(18:23-320에 의거하여, 롯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데(약 5:16),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위해 드리는 도고(禱告)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주신다(딤전 2:1-3).



    될 사람과 안 될 사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된 사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사용했던 사람이며 또한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란 젊은이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에 응답한 후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될 사람
    될 사람은 하나님의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

    예를 들면 빌레몬서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는데 공교롭게도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급하게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그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은 이전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 잘못된 일을 행하였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으니 이제부터는 종이라고 하지 말고 동역자로 함께 섬기라고 부탁합니다.

    세번째는 안 될 사람
    안 될 사람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비뚤어진 사람

    유월절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겨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넣는 순간 그 생각을 실천하는 일에 집중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안 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점검하고 확인한 후에 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된 사람과 될 사람의 신앙적 특징을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근본이란 히브리 단어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브레쉬트)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근본이란 곧 시작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문호 궤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처음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수 없다"

    출발이 잘못되면 그 결과는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의 출발 즉 신앙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경외라는 단어의 뜻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두렵다는 것보다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두렵다'는 단어에는 "공포심"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두려움에는 공포심이 아니라 존경심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대한철학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최명관이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불란서 철학 특히 데칼트를 전공하셨는데 3학년 1학기 때 전공필수과목으로 '데칼트'라는 과목을 강의하셨습니다.
    학기말 시험이 되어 학생들이 이번 기말 시험을 어떻게 줄제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렇게 성경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드디어 기말 시험을 치루는 시간에 칠판에 독일어로 여러 문장을 적어 놓으신 후에 주어진 시간에 도서관을 가든지 대학원생을 찾아가든지 답을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시험을 치루는 강의실 밖으로 시험문제를 들고 나갔습니다.
    제가 아무리 문장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문장을 읽으면서 답을 적을 수 없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습니다.
    다음 학기에 재수강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정확한 답을 적어야 할텐데 도무지 답을 몰라서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마친 후에 어떤 학생은 애국가 가사를 정성껏 적었다고 합니다.
    다른 학생들은 나름대로 답을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적표를 받았는데 아무 것도 적지 못한 나는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문제는 열심히 답을 적었던 학생들의 성적은 과낙을 면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학생들이 왜 성적이 이렇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의 대답은 "나도 모르는 것을 너희들이 알겠느냐?"
    철학이란 시험에 응하면 기본 점수는 받는다.
    그리고 정확한 답을 적어야 점수가 오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란 여호와를 거룩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12월에 새벽 묵상을 위한 말씀을 소개할 때 요한복음 13장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였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은 주님이 보실 때에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 므로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될 사람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될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즉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될 사람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려면 반드시 회심(悔心)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회심을 다른 말로 "회개(悔改)"라고 합니다.

    2025년 신년주일을 맞이하며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예수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소개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근자에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는 교회 분위기와 사람들 때문에 모여 있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이미 이민교회를 시작할 때 목표는 "불낙지교회"라고 선포했습니다.
    불신자를 찾아 돌아오게 하는 교회
    낙심한 자를 찾아오는 교회
    지체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자를 찾아오는 교회
    그런데 아직도 주님이 원하는 교회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5년 마음을 모아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회개하고 주님의 도움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대부분의 교회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불신자가 주님 앞으로 나오는 교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불신자가 있습니까?
    불신자를 찾아서 만남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낙심자가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교회

    지체(遲滯) / 더딜 지(遲), 막힐 체(滯)
    어물 어물하여 시간이 늦어짐.
    기한(期限)에 뒤짐.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지체자)을 주님 앞으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세상 삶에 도취하여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머뭇머뭇하는 사람을 결단하게 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지체(肢體) / 팔다리 지(), 몸 체()
    팔다리와 몸을 통틀어 이르는 말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대학 시절 데칼트를 전공하셨던 최명관교수님으로부터 데칼트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에 3학점으로 전공 필수 과목이므로 매우 중요한 과목입니다.
    기말 시험을 치루는데 칠판에 여러 문장을 적은 후에 강의실 밖으로 나가든지 도서관에 가든지 대학원생을 만나든지 시간 안에 답을 적어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교수님은 아주 독특한 철학자이셨습니다.
    학생들이 이번 시험 어떻게 출제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항상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런 성경구절을 소개합니다.

    아무리 문장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동안 시험지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 예수를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그 아래에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학기에 재수강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애국가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적었다고 합니다.
    성적을 받았는데 저는 A학점입니다.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D학점을 받았습니다.
    제가 당시 과대표로 있었기에 교수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자 나도 모르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서 철학이란 살아서 시험에 응하면 기본 점수 60점은 받기 때문에 무슨 답을 적든지 기본은 받지만 솔직하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대답이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재수강을 결심한 줄 아세요?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기 때문에 엉터리 답을 적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둘째,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희생 할 수 있는 것
    믿음은 맡길 수 있는 것
    어떻게 맡길 수 있나요?
    맡깁니다! 맡겼습니다!
    이런 언어의 유희가 아닙니다.
    온전히 맡기려면 밤을 새워 기도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맡긴다는 히브리 단어 "야라"

    יָרָה 스트롱번호3384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yârâh ]
    구약 성경  / 81회 사용
    1. 원형 던지다, 투표하다, 제비를 뽑다, 운명에 맡기다, 수18:6, 삼상20:36,37, 시11:2, 64:5(4), 민21:30.
    ☞ 던지다(출15:4, 욥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서 다윗는 자신을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W. a. Vangemeren).

    󰃨 네 짐(*, 예하브카) - 이는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하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너의 몫'(Rawlinson). 혹은 '네게 주어진 것'(Hupfeld)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짓누르던 '염려' 혹은 '근심'을 가리킨다(Calvin, C. B. Moll, NIV).

    󰃨 너를 붙드시고 - 여기서 '붙드시고'(*, 쿨)는 원래 '기르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뜻(창 47:12;50:21)으로서,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근본(7225) 레쉬트(rêʼshîyth) רֵאשִׁית   

    1. 처음.   2. 이전의 상태. 3. 처음 것
    발음 [ rêʼshîyth ]
    어원  / 7218과 동형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처음, 시작, 창1:1, 10:10, 렘28:1
      2. 명사, 여성 이전의 상태, 욥42:12, 이전의 때, 사46:10.
    • 3. 명사, 여성 처음 것, 첫 열매.
      [시간의 견지에서] 첫 열매, 창49:3,레2:12, 23:10, 신18:4, 26:10, 33:21, 잠8:22.
      [위엄의 견지에서] 첫째의, 주요한, 암6:1,6.

    • 관련 성경  /  태초(창1:1), 시작(창49:3, 욥8:7, 전7:8), 처음(출23:19, 느10:38, 겔48:14), 첫(레23:10, 겔20:40), 으뜸(민24:20, 욥40:19, 렘49:35),장자(신21:17), 맏물(신26:2,10), 가장(삼상2:29, 15:21), 근본(시111:10, 잠1:7, 미1:13), 제일(잠4: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 3374)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경외(3374) 이르아() יִרְאָה 스트롱번호3374

    1. 두려워함.  2. 두려움.  3. 존경
    발음 [ yirʼâh ]
    구약 성경  /  44회 사용
    • 1.  명사, 여성 두려워함, 무서워함, 신4:10, 5:26, 6:24, 10:12, 14:23, 삼하3:11, 느1:11
    • 2.  명사, 여성 두려움, 무서움, 공포, 신2:25, 욥4:6,시55:6(5), 사7:25, 욘1:10.
    • 3.  명사, 여성 존경, 경외, 경배, 욥28:28, 시2:11,5:8(7), 19:10(9), 34:12(11), 111:10,잠1:7, 사11:2.

    문법설명 / 3373의 여성형
    관련 성경  /  두려워함(창 20:11, 시 90:11, 욘 1:10), 경외함(출 20:20, 대하 19:9, 잠 16:6), 무서움(겔 1:18), 두려움(시 55:5, 겔 30:13).


    ‘된 사람’의 근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이 절은 잠언 전체의 주제성구로 종종 인용됩니다.
    여기 ‘근본’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창조기사에서 ‘태초’로 번역된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의 용례를 두루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경외는 인간 지성활동의 요체, 알파와 오메가”라는 식의 해석보다, 배움과 성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평이한 이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말씀에는 ‘인식론의 전제로서의 지식’ 같은 건조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없는 포괄적이고도 역동적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잠언에서 지식은 정보가 아니라 슬기로운 판단과 삶의 태도를 아우르는 인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인격은 지속적인 성찰과 훈련을 통해 빚어지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 사람’이지만 인격자는 ‘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된 사람’이 갖춘 ‘됨’의 상태가 잠언이 말하는 지식-분별-지혜의 인성을 표현하다면, 된 사람으로 되어 가는 그 과정의 출발점에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놓인다는 것이 여호와 신앙, 구약 신앙의 핵심입니다. 

    잠언이 지혜의 책이라는 말은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가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지혜를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구별하는 근본적 변별성이 바로 ‘하나님 경외’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할 반응으로, 우리 내면의 태도와 더불어 일상의 선택을 통해 표현하는 신앙적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은 잠언 1:7에 담긴 신앙선언문이 잠언 9:10에 변주되어 1~9장의 프레임을 이루며(“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마지막 장인 31장에서도 이상적인 여인상의 결론이자 잠언 전체를 마무리하는 핵심표현으로 ‘여호와 경외’가 등장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0).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히브리 시문은 주로 평행(병치)되는 두 시행을 함께 살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1:7 상반절의 하나님 경외가 하반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과 대비되는 데 주목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어 ‘에빌’인데,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를 가리키는 세 단어 중 가장 불량한 사람을 가리켜 쓰입니다.
    즉 지력이 떨어지거나 지식이 없어서 실수하는 사람이 1단계, 반복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2단계라면, 아집과 교만에 빠져 가르침을 비웃는 상태에 있는 3단계 바보가 에빌입니다.

    시편 1:1에도 복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행동들이 나오는데, 동일한 방식으로 악인→죄인→오만한 자로 점점 더 악화되는 인간군상 중 최종단계가 바로 '비웃는자' 레쯔입니다.
    참된 신앙은 겸손한 인격으로 발현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의 화신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인생은 반석 위에 세운 집, 불순종한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라 하셨습니다(마 7:24~2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된 인생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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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잠언 14:26-27)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두 가지가 바뀐다. 
    하나는 가치관이고 다른 하나는 우선순위이다. 

    가치관이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의해서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우선순위란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하고 덜 중요하고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중에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가치관이 분명하면서도 우선순위가 잘못된 경우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그것을 먼저 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말한 것과 행동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결과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그리고 올바른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아야 좋은 것을 얻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제일 먼저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 전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전에 따라가던 것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전에 먼저 하던 일을 이제는 나중에 하거나 하지 않게 된다. 
    빌립보서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오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여도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는 패역하게 행한다”라고 하는 것이 뜻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잘났든지 못났든지, 의로워 보이든지 악해 보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패역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경외(敬畏)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따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시편 139:1-8)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시편 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쓴다.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둘째,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생각하는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누구를 먼저 찾아가는가? 하나님이 자녀라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보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내가 하나님께 피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

    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가?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되기 때문이다. 시편 62: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 시편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그래서 믿고 의지했다가 실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해도 복을 주신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2:1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셋째,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쓰는 신앙이다. 

    삶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과 은혜를 풍성히 부어 주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주시는 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넷째,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기에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옳고 선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룩하고 선한 소원을 주실 때에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신다. 패역한 사람은 이와는 정반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라. 내 뜻과 소원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지 말라. 내 소원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거나 고집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는 복을 네 가지를 말씀한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견고한 의뢰 즉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로 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신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면 아무도 넘어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산성이요 피할 바위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뜨리려면 하나님을 넘어뜨려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도 복을 주신다. 

    “26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으로 살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편 11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이 믿음을 심어주라.

    셋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생명의 샘물처럼 계속 주어진다.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면 어떤 경우라도 그 생명이 살게 해주시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사사기 15장에 삼손이 블레셋 족속과 싸워 이긴 후에 너무 힘들고 지쳤는데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워 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마른 땅에서 샘물을 내주셨다. 사사기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리고 마른 땅에서라도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셔서 얼마든지 먹고 마시고 소생하게 해주신다.

    넷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27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사망의 그물’이란 나를 얽어매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죽게 만드는 문제를 말한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어떤 사탄의 공격이나 환난이 와도 건져주신다. 꼼짝할 수 없는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사탄의 공격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시편 124:7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면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이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잘해도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열려 있지 않고 분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다가 중단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일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일 때문에 기도를 중단하지 말라. 
    오히려 더 기도에 힘쓰라. 
    그러면 일하는데 지혜가 솟아나고 힘이 솟아나서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신앙생활에서는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교회에서의 일은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그 사람의 믿음이 깊어지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의 성취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믿음에 손해가 가게 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일이 좀 늦어지더라도, 일이 원하는 대로 잘 안되더라고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유지되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연히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37이하에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일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 

    빌립보서 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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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해도 잘되는 사람의 다섯 가지 특징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진실로 정직해져야 할 시간입니다.”

    1.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 : 메타인지 / metacognition / meta認知

    1970년 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 γνῶθι σεαυτόν) 소크라테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공자. 논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다.

    EBS 실험을 통해 드러났듯이 수능 모의고사 상위 0.1% 아이들은 평균의 성적을 가진 아이들보다 기억력이 더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분야는 ‘메타인지’.
    메타인지란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 즉 자기 객관화를 뜻한다.
    메타인지가 높을 때 자신의 장점과 단점, 상황과 처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 훌륭한 ‘전략’을 세울 가능성이 커진다.

    수험생이라면 더 훌륭한 공부법으로, 대학생이라면 더 탁월한 대학생활로, 취업준비생이라면 더 효과적인 취업전략으로, 비즈니스맨이라면 더 확률 높은 비즈니스 전략을 세우고 실천할 수 있다.

    미국에서 라이프 매니지먼트와 자기계발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필 맥그로 박사는 <베스트 셀프>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당신이 진실로 정직해져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베스트 셀프> 저자는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베스트 셀프>의 약 10%는 무언가를 쓰도록 하는데 그중 반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라이프 코치답게 독자로 하여금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매우 다각적이고 심도 있게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을 할 때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세울 수 있다.

    2. 끊임없이 학습한다

    <베스트 셀프> 저자인 마이크 베이어는 대학시절 극심한 마약 중독을 극복했고 이후 큰 성공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코치 마이크가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약 중독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베스트 셀프>는 최고의 자아가 되기 위해 일곱 가지 영역 고루 살펴보게 하는데 그중 ‘교육’ 파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정신 건강과 관련된 직종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이후로 학습, 즉 배우는 것을 중단한 적이 없다.

    피터 센게 교수는 “학습은 많은 정보를 획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운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학습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능력을 배양하는 행위이다.
    코치 마이크는 원래 학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처럼 절망과 고통의 삶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명을 찾은 후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뭘 해도 잘 되는 사람은 ‘학습하는 인간’이다.
    독서하고 수업을 듣고 글을 쓰며 토론이 일상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나이와 처지에 상관없이 학습을 게을리하지 말자.

    3. 미친 듯한 실행력이 있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들은 입만 나불대지 않는다.
    실행하고 또 실행하고 실행한다.
    <베스트 셀프>의 저자인 마이크 베이어는 라이프 코칭을 통해 많은 사람의 삶을 고쳤고 그 명성이 필 맥그로 박사에게까지 들려 필 박사가 주도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초청되었다.
    자신의 분야의 ‘빅 리그’에 진출하게 된 마이크는 긴장도 했지만 방송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고 필 박사는 코치 마이크를 방송에 계속 초청하게 된다.

    그런데 방송 세 번째 출연 후에 필 맥그로 박사는 코치 마이크에게 ‘최고의 자아’로 성장하는 책을 꼭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이크의 대답이 대박이다.
    ‘바로’ 시작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베스트 셀프>가 나왔고 <베스트 셀프>는 뉴욕 타임즈와 아마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다. 특히 아마존에서는 종합 6위를 차지하며 대성공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이크의 자세이다.
    마이크의 직업은 라이프 코치이다.
    그의 특기는 ‘커뮤니케이션’이지 ‘글쓰기’가 아니다.
    나도 작가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마이크에게는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음에 한다고 하지 않았다. 필요했기에 힘들더라도 ‘바로’ 시작했다. 

    실행할 때에만 무언가가 벌어진다. 

    4. 멘탈갑이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들은 웬만해선 멘탈이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멘탈이 무너지는 것을 절망, 좌절, 무기력 등 상황이 안 좋은 경우만 연결 지어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 반대 방향도 실상은 멘탈이 약한 것이다. 조금만 잘 돼도 자만, 교만, 승자효과에 빠져 있는 것도 정신이 망가지고 있는 증거다.그런 의미에서 코치 마이크는 멘탈갑의 ‘교본’이 뭔지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현 상황과 정반대 상황을 모색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추구해왔다.
    이런 이분법적 추구 덕분에 분수를 지키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멘탈이 강한 사람들은 항상 반대의 상황을 모색한다. 절망이 있을 때는 기대, 극복, 희망을 승리와 함께 할 때는 부족했던 과거의 모습,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인식, 패자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 

    <베스트 셀프> 저자는 마약 중독을 극복한 이후에 정신적으로, 학업적으로, 금전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 마인드로 자신의 비전을 향해 나아갔다. 반대로 제니퍼 로페즈 등 세계적인 스타의 라이프 코칭을 맡게 되었을 때는 방송에서 일반인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더 나아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세계 빈민촌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고의 자아를 만들기 위한 7가지 영역 중에 ‘영성의 개발’이 있다. 한마디로 멘탈 훈련이다. 성숙한 방어기제, 정서적 안정성을 갖추고 있는 자는 뭘 해도 잘 안되기가 힘들 것이다.

    5. 팀적 사고를 갖고 있다.

    <베스트 셀프>에서는 최고의 자아로 균형 있게 성장하기 위한 7가지 영역을 다룬 후에 책을 끝내지 않는다. ‘최고의 팀’을 꾸리라고 말한다. 

    산업화 이전에는 세상을 바꾸는 개인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이끄는 거의 모든 혁신은 개인이 아니라 ‘팀’이 이끈다.
    1의 능력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시너지를 내면 3의 능력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
    1+1이 2가 아니라 11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뭘 해도 잘되는 사람들은 혼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메타인지가 높은 탓이다.
    그래서 자신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들과 일을 도모한다.

     1+1=11 !

    <베스트 셀프> 저자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자신’이 되기 위해서, 그것을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팀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팀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성숙하고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볼 수 있고 학습을 멈추지 않으며 미친 듯한 실행력과 튼튼한 멘탈로 시너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

    무조건 함께 하고 싶지 않을까?

     <베스트 셀프>의 저자 마이크 베이어가 지금 그토록 잘 나가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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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장 자료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708. 492)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 카타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 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로 돌아가는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708. 492)

    󰃨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보고 불쌍히 여겨(3708. 4697)

    󰃨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9:52, 53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성경의 장 및 절수


    성경의 정확한 장, 절, 단어 수는 어떻게 되나요?

    1. 권수 : 총 66권
         -  구약 39권
         -  신약 27권

    2. 장수 : 총 1,189장
        - 구약 929장
        - 신약 260장

    3. 절수 : 총 31,102절
        - 구약 23,145절
        - 신약   7,957절

    4.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단어 수 :  788,258단어
        - 구약  609,247단어
        - 신약  179,011단어

    *우리말의 경우에는 조사도 한 단어로 취급하기 때문에 영어와 같이 단어 수를 세는 것이 용이하지 않으며 아직 통계가 없습니다.
    다음의 표에 제시된 성경의 장, 절, 단어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한글킹제임스성경> 역시 장, 절이 동일합니다.

    <구약>

      성경     장      절        단어

    창세기  50    1,533    38,262

    출애굽기/40-1,213-32,685

    레위기/27-859-24,541

    민수기/36-1,288-32,896

    신명기/34-959-28,352

    여호수아/24-658-18,854

    재판관기/21-618-18,966

    룻기/4-85-2,574

    사무엘상/31-810-25,048

    사무엘하/24-695-20,600

    열왕기상/22-816-24,513

    열왕기하/25-719-23,517

    역대기상/29-942-20,365

    역대기하/36-822-26,069

    에스라/10-280-7,440

    느헤미야/13-406-10,480

    에스더/10-167-5,633

    욥기/42-1,070-18,098

    시편/150-2,461-42,682

    잠언/31-915-15,038

    전도서/12-222-5,579

    솔로몬의노래/8-117-2,658

    이사야/66-1,292-37,036

    예레미야/52-1,364-42,654

    예레미야애가/5-154-3,411

    에스겔/48-1,273-39,401

    다니엘/12-357-11,602

    호세아/14-197-5,174

    요엘/3-73-2.033

    아모스/9 146-4,216

    오바댜/1-21-669

    요나/4-48-1,320

    미카/7-105-3,152

    나훔/3-47-1,284

    하박국/3-56-1,475

    스파냐/3-53-1,616

    학개/2-38-1,130

    스카랴/14-211-6,443

    말라키/4-55-1,781

    구약 합계/929장-23,145절-609,247단어

    <신약>

    성경이름/장-절-단어

    마태복음/28-1,071-23,343

    마가복음/16-678-- 14,949

    누가복음/24-1,151-25,640

    요한복음/21-879-18,658

    사도행전/28-1,007 24,229

    로마서/16-433-9,422

    고린도전서/16-437-9,462

    고린도후서/13-257-6,046

    갈라디아서/6-149-3,084

    에베소서/6-155-3,022

    빌립보서/4-104-2,183

    골로새서/4-95-1,979

    데살로니가전서/5-89-1,837

    데살로니가후서/3-47-1,022

    디모데전서/6-113-2,244

    디모데후서/4-83-1,666

    디도서/3-46-896

    빌레몬서/1-25- 430

    히브리서/13-303- 6,897

    야고보서/5-108- 2,304

    베드로전서/5-105- 2,476

    베드로후서/3-61 1,553

    요한일서/5-105- 2,517

    요한이서/1-13-298

    요한삼서/1-14-294

    유다서/1-25-608

    요한계시록/22-404-11,952


    신약  - 260장 - 7,957절 -179,011

    신구약 - 1,189장 - 31,102절 - 788,258단어




    메이데이 / 항공기 사고시 구조 요청(12-29-2024) 방콕 - 무안공항에서 181명 탑승 승무원 2명 꼬리 부분에서 구조



    긴급 조난신호 메이 데이(Mayday)의 뜻과 유래


    영화에서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비상착륙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조종사들이 무선으로 보내는 신호가 바로 '메이데이' 입니다.
    긴박하게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라고 외치는 장면은 다들 한번쯤을 보셨을 텐데요.
    왜 Mayday라는 단어가 긴급조난신호로 사용되게 된 것일까요?

    메이데이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띄어쓰기를 해서 May Day 라고 하면 5월 1일 노동절을 뜻하기도 하구요.
    긴급조난신호로 사용되는 메이데이는 이와 구분해 붙여쓰기를 해서 Mayday 라고 표기합니다.

    무선전신에서의 대표적인 긴급조난신호는 SOS이지만, 목소리가 전달되는 무선통신에서의 긴급조난신호는 바로 이 메이데이입니다. SOS가 아무런 뜻 없이 단순히 모스부호의 단순한 조합을 찾다가 만들어진 단어인 것 처럼 Mayday도 노동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꽤나 단순한 이유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메이데이는 1923년 런던의 크로이든 공항 항공 무선사였던 프레드릭 먹포드가 항공기나 선박들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신호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만들어낸 단어인데요.
    그 유래는 바로 불어의 Viens m'aider (나를 도와달라) 입니다.

    당시만해도 대부분의 항공기 운항이 영국 크로이든 공항과 프랑스 부르제 공항 사이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고, 지금과 비교해 프랑스어의 사용이 국제적으로도 아주 빈번하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어 Viens m'aider 에서 m'aider(메데)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영어단어를 선택하면 프랑스어와 영어사용자 모두 쉽게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m'aider와 비슷한 발음 가진 Mayday를 긴급 조난신호로 사용하게 된 것이죠.

    비와 비슷한 사례로 메이데이보다는 덜 긴급하지만 고장이나 응급환자 발생 같은 긴급상황이 발생했을때 송출하는 조난신호인 판판(Pan-Pan)이 있는데요.
    이 또한 고장, 작동불능을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Panne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메이데이가 발음의 유사성으로 긴급 조난신호로 선택되었다니 재미있는 사연이죠?
    그리고 Mayday는 다른 단어 뜻과 구분하기 위해 송출할 때 반드시 3번 반복하도록 되어 있는것이 원칙입니다.
    SOS의 모스부호가 같은 신호 3번 반복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또한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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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예화 자료


    1월 5일(주일)
    주제 / 될 사람과 안 될 사람
    성경 / 잠언 1:7. 베드로전서 2:21
    인물 / 요한복음 13장 - 베드로, 가룟 유다

    (이야기 자료) 박윤선목사 시편 주석  p. 144

    어느 청년이 길을 가다가 2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길을 걸을 때마다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하여 40년 동안 그는 29,516개의 단추와 54,172개의 핀과 7페니를 주워 모았다.
    햇볕의 따스함, 친구들의 미소, 새들의 노래, 꽃과 나무와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은 볼 수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잘못된 방향과 목적은 비참한 결과에 이를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얼굴을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생동안 땅만 바라보던 육체는 목과 허리가 굽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은 근시가 되고 마음은 여유가 없는 사막화가 되며 성질은 고약하고 인색해지고 말았습니다.

    (이야기 자료) 이비커스의 학

    주전 약 5세기에 희랍에 "이비커스"라는 유명한 시인이 고린도에 가까운 촌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죽기 전에 크게 외치기를 마침 그 주위를 빙빙 떠돌고 있던 학을 보고 하는 말이『너 학은 내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내가 죽은 다음에도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강도가 다 들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없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린도의 노천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 몇 마리가 공중에 날아와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어떤 사람에게 거의 머리에 닿게 날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았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아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하로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알아보니 그 사람이 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될 사람은 이러한 삶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자료 참조 / 2025년 설교 자료(신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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