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장 자료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708. 492)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 카타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 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로 돌아가는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708. 492)

󰃨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보고 불쌍히 여겨(3708. 4697)

󰃨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9:52, 53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