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옹호법안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동성애 옹호법안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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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이 공개됐다.

 

군동성애합법화반대국민연합·성매매합법화반대국민연합(공동대표 이용희)이 지난 2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군동성애 및 성매매 합법화 반대 기자회견'을 여는 등 군동성애 반대 등 동성애 허용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전국 학부모는 동성애,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와 함께 제19대 국회에서 '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에서 "전국 학부모는 내 아들 딸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울시청광장에서 벌거벗은 차림의 동성애자들이 축제를 열고 서울시 박원순 시장은 세금으로 경비를 보조하는 등 인간의 본성을 잃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동성애는 축제를 하며 권리를 요구할 사안이 아니"라며 "소수자 권익보호라는 미명아래 표를 모으겠다는 정치권이 동성애자들과 유착해 사회건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발표한 동성애 옹호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1순위, 왼쪽부터 유성엽(전북 정읍), 은수미(비례대표), 장하나(비례대표), 전정희(전북 익산시(을)), 김광진(비례대표) 국회의원(사진 속 국회의원 전원 더불어민주당 소속,출처:사진 속 국회의원 SNS).

19대 국회에서 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공개와 관련해선, ▲군형법개정안 - 권성동 의원등 13인 (의안번호 3678, 발의일자 2013.2.12) ▲군형법 - 김광진 의원등 10인 (의안번호 3269, 발의일자 2013.1.9) ▲군형법 - 남인순 의원등 17인 (의안번호 3390, 발의일자 2013.1.23) ▲군형법 - 진선미 의원등 10인 (의안번호 9746, 발의일자 2014.3.17) ▲차별금지법 - 김재연 의원등 10인 (의안번호 2463, 발의일자 2012.11.6) ▲차별금지법 - 김한길 의원등 51인 (의안번호 3693, 발의일자 2013.2.12) ▲차별금지법 - 최원식 의원등 12인 (의안번호 3793, 발의일자 2013.2.20) 등을 동성애 옹호 법안으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군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군대 내에서의 동성간 성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으로 명백히 동성애 옹호를 위한 개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안'도 성적지향(동성애) 차별금지조항을 포함시킴으로써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언급한 동성애 옹호 법안 7개중 두 개 이상을 발의한 의원 명단만 발표하며, 명단을 선정시 정당과 지역은 고려하지 않고 법안 발의 숫자를 기준하였음을 밝힌다"고 설명했다.

명단이 공개에서 1순위로 지목된 김광진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전남 순천·곡성에, 진선미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서울 강동갑에, 장하나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서울 노원갑에 출마 예정이다.

이와 관련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니스트)은 한 언론 매체에 기고한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이게 말이 되니'라는 제하의 칼럼을 통해, 동성애 관련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을 강력 비판했다.

특히, 박 소장은 김광진·진선미·장하나 비례대표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이라며 관련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공개했다.

김광진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진선미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장하나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칼럼에서 박 소장은 "김광진 의원은 인터넷 방송 매체 KHTV와 인터뷰에서 '동성애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반대할 하등의 근거가 없으므로 동성 간의 결혼에 동의한다.
며느리가 남자인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또, 진선미 의원에 대해선 "1997년 당시 변호사였던 진선미 의원은 동성애자인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과 함께 '동성애자 인권연대'를 창립했다"이라며 "진 의원은 교과서에서 동성애의 문제점과 실태를 알렸던 내용을 전부 수정, 삭제하고 동성애 옹호운동을 만든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장하나 의원은 <군형법> 제92조의6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며 "장 의원은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인데 꼭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동성 간의 결혼은 당연히 합법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끝으로 박 소장은 "제19대 비례대표 중에서 정의당과 녹색당, 노동당에는 '동성애자 위원회'가 있을 정도다.
이들 정당도 동성애를 옹호, 주장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의원 거의 대다수는 동성애 편을 들고 있다.
이들이 4.13총선에 대거 출마를 선언했다.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과잉 해석? 서울시청 담당 주무관도 “교회 폐쇄 가능”
‘교회’라는 말 없다는 이유로 괜찮다는 건 설명 안 돼.
실제로 교회 유독 탄압해 왔으니, 우려 제기할 수밖에.
죄형법정주의· 평등원칙· 과잉금지원칙 등 위배돼 위헌

▲박성제 변호사. ⓒ크투 DB

최근 교계에서 소위 ‘교회폐쇄법’이 논란이 되고 있다.
몇몇 교계 인사들이 개정된 감염병예방법의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교회폐쇄법’이라고 비판하자, 평화나무(이사장 김용민)가 이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본지는 기독 법률가로서 교회 수호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박성제 변호사(법무법인 추양 가을햇살)를 만나 교회폐쇄법 논란에 대해 팩트체크했다. 다음은 박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약칭 ‘감염병예방법’이 이미 국회에서 통과돼 12월 30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다음 49조이다.

제49조(감염병의 예방 조치)
① 질병관리청장,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모든 조치를 하거나 그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하여야 하며, 보건복지부장관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제2호, 제2호의2부터 제2호의4까지 및 제12호의2에 해당하는 조치를 할 수 있다.

2. 흥행, 집회, 제례 또는 그 밖의 여러 사람의 집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
2의2. 감염병 전파의 위험성이 있는 장소 또는 시설의 관리자·운영자 및 이용자 등에 대하여 출입자 명단 작성, 마스크 착용 등 방역지침의 준수를 명하는 것

③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제1항제2호의2의 조치를 따르지 아니한 관리자·운영자에게 해당 장소나 시설의 폐쇄를 명하거나 3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운영의 중단을 명할 수 있다. 다만, 운영중단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운영중단기간 중에 운영을 계속한 경우에는 해당 장소나 시설의 폐쇄를 명하여야 한다. <신설 2020. 9. 29.>

④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제3항에 따른 폐쇄 명령에도 불구하고 관리자·운영자가 그 운영을 계속하는 경우에는 관계 공무원에게 해당 장소나 시설을 폐쇄하기 위한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하게 할 수 있다. <신설 2020. 9. 29.>
1. 해당 장소나 시설의 간판이나 그 밖의 표지판의 제거
2. 해당 장소나 시설이 제3항에 따라 폐쇄된 장소나 시설임을 알리는 게시물 등의 부착.

목사님들이 이 내용에서 ‘해당 장소나 시설’을 ‘교회’로 대체해서 읽어 이해하면, ‘교회 폐쇄’라고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스님 입장에서는 사찰폐쇄법, 신부님 입장에서는 성당폐쇄법이라 할 수도 있는 부분이고, 일반 상업시설들도 마찬가지다. 저도 혹시 제가 과잉 해석을 하는가 싶어 서울시청 담당 주무관과 통화했는데, 그 역시 (해당 법을 위반하면) 당연히 교회도 폐쇄될 수 있다고 답변하더라.

지금 법에 따라서 시행되면 가장 크게 부딪힐 문제가 바로 현장 예배가 될 것이다.
현장 예배를 드렸을 때 출입자 명부 작성을 잘못한다든지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또 설교자가 마스크 쓰지 않아도 방역지침 위반이 돼 교회가 폐쇄되고 교회 간판과 십자가가 철거될 수도 있다.
이 법이 만들어질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서 12월 30일 시행만 앞두고 있다.”

- 그러면 기존에 있던던 교회 폐쇄 사건들의 경우, 법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인가?

“기존의 감염병예방법에도 근거는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확진자가 발생한 경우에만 가능했고, 민원 제기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확진자 없이 교회를 폐쇄했다면 그것은 법을 굉장히 잘못 적용한 것이고, 나중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라도 다 배상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신설된 규정들에 따라 언제든지 지방자치단체장이 교회를 폐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 열려 있는 상황이다.”

-평화나무의 반박 취지는
‘첫째로 해당 법안은 교회나 예배를 특정한 법안이 아니고,
둘째로 방역을 방해할 정도의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하는 것은 교회 탄압이라 보기 어렵고,
셋째로 방역지침만 잘 따르면 교회라서 불이익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지 교회라는 말이 없어서 괜찮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원래 법을 만들 때 특별법을 제외하고는 특정 단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기존에도 ‘시설’ 혹은 ‘장소’에 대한 법률을 근거로 교회까지 제재했었다.
교회만 탄압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시설을 폐쇄·중단시킬 수 있고 이용자나 관리자, 그리고 소유자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지금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왜 유독 교회에 대해서 탄압한다고 말하느냐면, 실제로 탄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예배를 금지시켰으니, 이 법이 적용되면 결국 또 교회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서울시의 최근 방역지침을 봐도 공용으로 된 성경책이나 찬송가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굳이 특정 종교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단어들을 채택한 것이 너무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느냐.
그런 것만 봐도 교회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조항을 빌미로 평화나무가 지난 총선 때처럼 목사님들의 설교를 모니터링해서 고발할 수도 있다.”

지금 교회만큼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예배부터 중단하는 것은 정부 시책을,. 예배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예배도 못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현하기만 해도 사람들한테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북한과 뭐가 다른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을 해줘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 위헌 소지는 없는가?

“형벌적 기능이 들어가려면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돼야 하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예측 가능성, 즉 구성요건이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감염병예방법상의 집합제한, 집합금지 등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다 보니 내가 언제 어떻게 이 구성요건을 어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이 위헌적 요소가 제일 크다고 보고 있다.

또 하나는 평등원칙 위반이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렇게 통제하는 방식, 그리고 각 대상들마다 적용을 너무나도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평등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끔 하는 법안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이 정도 처벌은 고위험 병원체 불법 반입 등과 거의 동급이다. 과연 이게 평등원칙과 과잉금지원칙에 합당한가 따져 봐야 한다.”


교회 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악한 이름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그에 대한 항의가 많아지자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심하다.
다음에 명단을 기억했다가
표를 안 주었으면 한다.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에 꼭 탈락시키자!
 
1. 김성주   02-784-5031
2. 이상헌   02-784-8630
3. 홍성국  02-784-2820
4. 조승래  02-784-2648
5. 강선우  02-6788-6031
6. 이용빈  02-784-4291
7. 신영대  02-784-1524
8. 서동용 .............
9. 임호선  02-784-1730
10. 최종윤 02-784-6201
11. 윤준병 02-784-1860
12. 이탄희 02-784-8940
13. 허종식 02-784-8870
14. 정춘숙 02-784-3740
15.  이학영 02-784-8051
16. 송재호  ............
17. 이형석 02-784-1307
18. 오영관 02-788-6766
19. 전용기 02-784-2843
20. 김민철 02-784-5031
21. 이재정 02-784-2677
22. 고영인 02-784-5490
23. 서영석 02-784-9671
24. 홍정민 ...........
25. 이해식 02-784-2171
26. 이규민 02-784-3770
27. 박영순 02-784-2066
28. 윤후덕 02-788-2587
29. 전용기 02-784-2843
30. 한준호 02-784-9160
31. 김남국 02-784-2455
32. 이원욱 02-784-6471
33. 임오경 02-784-6396
34. 정청래 ..............
35. 최종윤 02-784-6201
36. 박용진 02-784-9721
37. 고영인 02-784-5490
38. 신용대 02-784-1524
39. 김윤덕 ..................
40. 강준현 02-784-6950
41. 민형배 02-6788-6426
42. 한병도 02-784-5891
43. 이장섭 02-784-4441
44. 서삼석 02-784-9501
45. 김성주 02-784-7380
46. 설   훈 02-784-8570
47. 오영환 02-788-6766
48. 김민철 02-784-5031
49. 김종민 02-784-5920
50. 이수진 ................
51. 이성만 02-784-6090
52. 윤재갑 02-784-1460
53. 박홍근 02-784-8370

공산주의자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교회이다.
그래서 좌경이념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한다.
 
 
<긴급알림>
 
●  43인의 민족 반역자
🔴  주한미군 철수에 서명한 우리 민족의 반역자 43인 전격 공개  
     이놈들이 주한미군 철수에 서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금번 주한미군 철수 요구에 서명한 43인 국회의원 명단을 입수해 공개
 ● 서명한 국회의원 명단
 
# 민주당~~~
강병원, 강훈식, 기동민, 김민기, 김병욱, 김상희, 김영호, 김철민, 김한정, 노웅래, 민병두, 박경미,
박    정, 박재호, 박홍근, 서삼석, 서영교, 소병훈, 송옥주, 송영길, 신창현, 심기준, 안호영, 어기구, 우원식, 위성곤, 유동수, 유승희, 윤일규, 윤준호, 이개호, 이석현, 이후삼, 임종성, 전재수, 정재호, 제윤경, 조승래
 
# 정의당~~~
김종대, 추혜선
 
# 평화당~~~
정동영
 
# 대안신당~~~
박지원, 천정배
 
모두 47명이라는데,
3명은 숨어있는 프락치들
 
1949년 한국전쟁 직전에 국회부의장 김약수라는 자와 남로당 프락치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으며,
미군은 고문관 500명 미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이어서 1950년 1월 20일 애치슨 미국무 장관은 한반도는 미방위선 밖이라고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미 스탈린의 내락을 받은 김일성은 탱크와 중포를 은밀하게 38선 일대에 포진시키면서 6.25 새벽 4시를 기하여 일제히 남침하였다.
그 전에도 남한 정부는 낌새를 알아 차리고 미국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남에서 북침 가능성이 있다고 거부하였다.
 
실상 신성모 국방부 장관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국회답변에서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아침은 해주에서 떼우고, 점심은 평양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질탕하게 먹는다.” 고 호기롭게 큰소리를 쳤다.
 
막상 6.25 전날은 전 장병의 1/3이 농번기 휴가를 보냈으며,
2주일 전에는 전후방 사단장의 인사이동에 이어 육군장교회관 낙성식이라는 미명 아래, 밤새도록 댄스파티와 여흥을 즐겼다.
 
전쟁이 터지자 하루 만에 옹진반도와 개성, 의정부까지 실함되고, 이에 망연자실한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대전으로 돌아 왔다. 
28일 당시의 유일한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 가면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가, 맥아더 장군의 지원이 있다고 하자 허겁지겁 시흥으로 되돌아 왔다.
 
이 대통령은 수원 비행장에 도착하는 맥아더 원수를 마치 구세주 마중하듯이 대전에서 올라와 극진히 영접하였으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아예 맥아더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였다.
비참하지만 그것이 그당시 우리의 생생한 역사였다.
 
실상 국군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총기와 실탄은 물론 모든 보급품과 식량, 군복 등도 모두 미군이 주는 걸 감지덕지 받아서 지탱하였다.
 
정부예산은 모두 군사원조와 더불어 민간원조의 달러를 공매해 대충자금이란 항목이 절대비중을 차지하면서 원조물자로 국민을 기아상태로부터 살려낸 상황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 좀 먹고 살만 하니까...  ‘갈테면 가라!  양키 고 홈!’을 외쳐만 대는 주사파 종북 빨갱이들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아무리 트럼프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만 한다.
 
마치 부모가 소팔고, 논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놓은 후, 출세한 자식놈이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부모 형제에게 쥐꼬리만한 용돈을 쥐어주면서 생색만 내어 가는 호로자식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미군정이 1945년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그들은 편의상,
 
전라도를 하와이,
경상도를 플로리다,
평안도를 텍사스,
함경도를 알래스카 라고 호칭하였다.
 
그 중 하와이에 대하여만 별칭으로 남았으며, 호남인들은 하와이 라고 언급하면,
그들은 그만 경기를 일으킨다.
하와이든 알래스카든 그 곳이 좋다면, 거기가서 살면 될 일이다.

제21대 국회, 신자 의원 78명 당선

제21대 국회를 구성할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모두 78명(4월 21일 현재)으로 확인됐다.

본지가 4·15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253명과 비례대표 47명의 당선자를 확인한 결과다. 직전 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선자 중 본지가 확인한 천주교 신자가 77명이었던 것에 비해 1명이 증가한 수치다.

정당별로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52명으로 가장 많은 신자 당선자를 냈고, 야당인 미래통합당은 14명의 신자 당선자를 냈다. 이 밖에 미래한국당 4명, 더불어시민당 4명, 정의당 3명, 국민의당 1명이 각각 신자 당선자다. 신자 당선자 78명 가운데 남성은 62명, 여성은 16명이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신자 당선자 78명은 전체 300명 중 26%에 해당하는 비율이어서 총인구 대비 한국교회 신자 비율(2018년 11.1%)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4·15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63석, 더불어민주당이 비례대표 선거를 위해 만든 더불어시민당이 17석을 얻어 지역구에서 84석을 얻은 미래통합당과 비례대표 19석을 얻은 미래한국당을 압도했다.

한국교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형제 폐지나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 보호와 빈부 격차 해소 등에 더불어민주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번 선거 결과와 신자 당선자 현황은 한국교회에 희망적이라 볼 수도 있다.

당선자 중 초선 신자들은 각오가 남달랐다. 조오섭(요셉·52·광주 문흥동본당) 더불어민주당 광주 북구갑 당선자는 “이제 싸우는 국회를 멈추고,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힘쓰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김승원(바오로·50·수원 정자동주교좌본당)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시갑 당선자는 “성경 말씀과 사회교리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데에 일조하고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의정활동을 펴고 싶다”고 향후 정치 활동에 대한 소신을 드러냈다. 김은혜(로사리아·49·수원교구 성남 서판교본당) 미래통합당 경기 성남 분당구갑 당선자는 “품격 있는 보수, 대안을 제시하는 보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보수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국민의 염원을 읽었다”고 겸손한 모습을 강조했다.

중진 신자 당선자도 무거운 책임감을 보였다. 서울 용산구에 출마해 4선 의원이 된 미래통합당 권영세(스테파노·61·서울 이태원본당) 당선자는 “선택해 주신 용산구민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용산의 발전과 대한민국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소사댁’으로 불리며 역시 4선에 성공한 김상희(크레센시아·65·인천교구 부천 소사본3동본당) 더불어민주당 경기 부천시병 당선자도 “‘잘 해서’ 뽑아 주신 것이 아니라,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생각하고 이번 선거 결과에 자만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 교회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
 
●절대잊지 말아야 하는 악한 이름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그에 대한 항의가 많아지자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심하다. 다음에 명단을 기억했다가
표를 안 주었으면 한다.
 
교회여~~~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에
꼭 탈락시키자!! ●
 
김성주   
02-784-5031
이상헌
02-784-8630
홍성국
02-784-2820
조승래,
02-784-2648
강선우
02-6788-6031
이용빈
02-784-4291
신영대
02-784-1524
서동용    
.............
임호선
02-784-1730
최종윤
02-784-6201
윤준병
02-784-1860
이탄희
02-784-8940
허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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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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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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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호   
............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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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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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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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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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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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민  
...........
이해식
02-784-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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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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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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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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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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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대
02-784-1524
김윤덕  
..................
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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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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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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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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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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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갑
02-784-1460
박홍근
02-784-8370
공산주의자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교회이다.
그래서 좌경이념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한다.
 
 



이호승목사 설교 자료


성령을 주신 목적 05-19-2024
요한복음14:16-17/ (참고)요한복음 14:26-27
찬송가 427장 (내가 매일 기쁘게)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대해서 병 고침을 위해서,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믿음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오늘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1. 우리에게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남’이란 사람이 다시 어머님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의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감히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신 제일 큰 목적은 바로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중생의 체험은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또한 거듭남의 특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진 보배로도 절대로 살 수 없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가 바라고 믿기로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체험을 경험하고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줄로
믿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에 아직까지 중생의 체험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고서 거듭남의 비밀을 깨우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던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것을 보고서 칼을 들고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다혈질적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매우 다열적인 성격에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변화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기록된 것처럼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이제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베드로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매를 보고서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성령을 보내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열매,
희락과 화평의 열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날마다 주렁주렁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3. 복음 전파로 사명 감당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처럼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사명 감당 하라고
성령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사명은 너무나 귀중한 사명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내는 선교에 참으로 열심인 한 교회가
있는데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보내는 선교란, 나 자신은 선교지로 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그곳으로 다른 사람을 보내어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물질로
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빌립보 4장 15-16절은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라고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보내는 선교를 잘 감당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서 비록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지로 후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복음을 증거하다가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싸움도
벌어졌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입어서 병자를 고치고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대결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오늘날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곳은 복음의 능력으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체험을 경험케 하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마지막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날로 날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이때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귀한 사명들을 더욱 더 충실히
감당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를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소서 또환 하나님의 뜻 성령 목적을 이루게 하사
우리가 거듬나는 삶을 살게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이루게 하옵기를 바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이름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05-12-2024
하나님의 보호받기 위하여
요한복음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바로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전쟁의 위험이 있고 질병의 위험이 있고 그의 예기치 않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적 부담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위험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만 할까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따르는 자가 누군가가 중요한 것아닌 불쌍히 여기시며 위험으로부터 돌아보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한 첫 조건이 함께 즉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말은 다시말해서 관계가 좋다 아니다로 결정됩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분을 영접했다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 했듯이 장소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롯 유다 예수님과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형식적인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과 동행 한다는 것이 주님으로 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 마음 가운데 즉 우리의 모든 것에 중심이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성도가 세상의 위험에서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7에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이 말씀과 시편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여 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에 그늘이 없도록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말과 행동을 할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2. 주님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항상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어느 분은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 같은지 큰게 외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8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구 요청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필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있을때 구하라고 야보고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내, 의심없이, 믿음으로 구하라(요청)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4: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 의미는 욕심, 욕망이, 악이 가득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치 안니한 것을 구할 때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로 약속한 것은 끝까지 인내로 구하여야 합니다.
에스겔 36:37 말씀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즉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고 약속 했을 지라도 너희들 내게 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난의 때에나, 육신이 병들었을 때에나,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께 요청을 하지만 평상시에도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8:20 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진정 주님의 보호를 받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과 항상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는 돕는다는 약속은 먼저가 해야할 일를 너희들이 했을 때 나는 ‘이 모든을 너희에게 더하하겠다’은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너희들이 해야할일를 먼저 한 뒤 나에게 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7,18 말씀에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은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이행함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나의 구원로 믿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의 보호가 필요 없는 성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이고 죄인된 자라면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순간순간 마다 필요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해야 하고, 주님께 적극적으로 보호를 기도로 요청해야 합니다.
또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감을 열심히 잘 감당함으로 주님이 보살펴 주시기에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8:1.2에 말씀 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 길 소망합니다. 아멘




04-28-2024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4-5)
찬송 / 491(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가 두 주전에 말씀 드렸던 것을 기억 하시는지요?
우리가 평강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바로 하나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관계’ 두 번째 말씀으로 “내 안에 거하라”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거하시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가 좋다라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증명 하실 수 있나요?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살면서 성도의 삶을 대부분 이렇게 말씀 하실겁니다.
1. 교회 출석 잘하고
2. 헌금 잘하고
3. 성경 열심히 읽고
4.교회 봉사 잘하고
5. 기도 잘(열심히) 하고 등… 있겠지요.
이것이 전부 일까요? 아니요 이러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하라’는 히브리어로 메노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핵심적인 단어로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 간에 연결되는 생명(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 바로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새 생명을 얻은 생명체임을 잊고 살아가면 안됩니다.
오늘도 ‘내안에 거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1. 거한다는 정의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거하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머무는 것은 믿음 이상의 것이 되지만, 머무는 것은 결코 진정한 믿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제거된 가지조차도 “그 안에” 있다고 말하며 최소한의 표면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통해 구원과 죄 사함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이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겠죠.
예수님과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진정한 믿음은 가지를 포도나무에 고정시는 것이고,우리는 그가 말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7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과 우리 안에 거하는 그분의 말씀을
연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킴으로써 예수님과 계속 관계를 유지합니다. 또한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 요한 1서 2:24에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참고로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딤후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유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한다는 것과,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0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31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은 유대인 무리에게“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계속해서 교제하며 충성을 다한다는 비유라말할 수 있으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는 것을 강조하고있습니다.
또한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계속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계속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결은 지속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물리적으로 함께 계셨지만 제자들로 부터 떠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떠나더라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
요한복음 14:15~17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4:23에서도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한다는 정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할 때 항상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우리안에 거하는 겁니다.

2. 포도나무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덧붙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연결하는 포도나무라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힘과 영양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수액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거한다의 증거가 바로 우리의 열매로 증거됩니다.
믿는자들 중에도 열매가 있고, 없고에 따라 비교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한다는 증거는 열매인데 “열매”가 성령의 열매 또는 의로운 삶(갈라디아서 5:22 ) 또는 복음을 나누는 결과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열매를 하나의 특정한 이해에만 국한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가 “열매”를 신자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과 성령의 모든 명백한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열매도 포함될 것이고, 삶에 맺히는 성령의 열매도 포함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열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에서 예수께서는 이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목적과 최종 목표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또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되돌리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명백해집니다.
모든 삶이 구원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십니다.
그의 통치와 그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계획에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고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할 때, 그분의 구속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두 번째는 또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신도들의 삶 속에서 경건한 성품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본질적으로 삶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포도나무에 거함으로써 변화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만이 하나님 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좋은 열매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는 증거임을 기억하고, 행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아멘








04-07-2024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우리에게 평강이(요한복음 20:19.  빌립보서 4:7)
 
요한복음 20:1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4:7
4.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께서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주는 평강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평강에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무엇일가요? 어느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평강은 관계다. 관계가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에 그 관계 속에 평강이 있고 없고 한다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믿음 생활하시면서
성경을 읽으면 여러분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아담 관계에 있어서는 에덴 동산에 분명히 평강이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로 인하여 평강은
다시말해 관계가 무너지므로 평강역시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며 근심 걱정 없이 평강이 마음 속에 항상 있던가요? 우리는 솔직한 마음으로 살고있나요?
아니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안에서는 갈등하고 자신과 싸우며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기본 심리 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근심, 걱정, 불안, 우울증, 공항장애, 욕심, 욕망 등 없을까요?
우리는 욕심이 있습니다. 좀더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하고, 내 자식을 좀더 좋은 것으로 키우길 원하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를 원하고, 좋은 학군에서 공부하길 원하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신의 중심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마음과 생각인지. 우리는 대부분 자가자신을 위함이 더 많았을 겁니다.
빌립보서 4:6-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평강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염려없이 기도와 간구로 기도가
되던가요?
저 역시 사역자로 들어 서기전 저 자신과 3~4년을 생각하고, 미국에와서 12년 후에 결정했습니다. 신학원 생활
1년차되던해 전도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면서 항상 걱정이 앞서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어린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있을까?하멱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니 그들에게서 배우고 나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역자길로 들어서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쓴 소리 보다는 단
소리만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이을 먹다보니 이제는 잘못된 부분을 알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잘못된 한 부분이 굳어졌기 때문이죠.
우리의 신앙도 같은 것 같습니다. 첫 만만이 잘못되니 자신의 신앙 생활만이 고집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것이 안되듯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가질 만한 사람이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강 할 수 있을까요?

1.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두려워 한 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 닥칠 상황에 위압감에 어찌해야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찾아 오셔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듣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바로 평강은 어둠에서 빛을 만날 때와 갇이 두렵고, 고통 속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쁨 가운데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회개한 후 평강이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공통점이 바로 누군가에 혹은 자기 스스로 잘못했을 때가 아닐까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행복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할 그곳 항상 하나님의 평강만이 있어야 할 곳에서 왜
두려워 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에
평강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고통, 두려움, 고난, 불안 등 속에서 살아졌습니다. 그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고,우린 예수님을 통해 회개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우리에게는 평강이 회복됩니다.
3.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평강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누군가와 함께 할때 더 힘이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가 생각을
지켜지나요?
또한 그 속에 평강이 있던가요? 아니요 어느 정도 정상이되면 각자 마음과 생각이 달라짐이, 배신과
경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을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우리는 예수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항상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부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으로 항상 평강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죄사함 받게 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평강이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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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예레미야 31:31-34)

예레미야 31:31-34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산봉우리 중 하나에서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새 언약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며 예레미야의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증하며 또한 이 말씀을 준수할 때 약속된 축복이 있다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렇게 귀한 언약 율법이 파기되었으며 주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언급하고 있는 새언약이 옛 언약이 지켜오던 율법과 별개의 것이 아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나 형식적에서 옛 언약의 차이점이 없으며, 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다른 점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구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과 죄 많은 인간과 맺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만 삶과 은혜가 성취됨을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옛 언약의 조건에 따라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으로 인해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따라 생활하신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문제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31장의 문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고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31: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친히 새 언약 아래 구원자를 마련하심으로 이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죄 없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약속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이 구절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새 언약은 문자 그대로 새 언약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고린도전서 11:25; 고린도후서 3:6ff; 히브리서 8:8-9:28; 10: 16; 로마서 11:25-26).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이 이제 제정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구원 계획을 설명합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순종할 수 있도록 내적 본성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속사람의 “원하는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33절). 그분은 그들 안에,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율법”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의지를 지배할 것입니다. 모세의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출애굽기 31:18; 34:28-29; 신명기 4:13; 5:22). 필요한 것은 타락하고 죄 많은 사람의 안팎의 변화였습니다. 인간의 죄 많고 변질 된 본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모세의 언약이다(출애굽기 19:1-24:11).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주권자 하나님이시니라. 언약의 조건은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순종하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은 징벌을 가져올 것입니다.

2. 이스라엘과 맺은 새 계약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 곧 유대 민족 전체와 맺은 것입니다(31절).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1장).

이 구절들은 나라 전체가 메시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소수만이 아닌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회복을 봅니다(이사야 5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 31:33 ;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백성을 포용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강조합니다. 구원받을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일시적으로 굳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영원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500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34절에서는 각 사람이 “여호와를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안다라는 단어는 관찰을 통해 직접적으로 정확한 개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간접 지식이 아니라 야훼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이는 마음, 감정 및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서로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얻는 지식을 나타냅니다.

3. 모든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는 언약입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마지막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예루살렘 감옥 너머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의 날까지 보았습니다. 보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적 감각이 있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레미야 31:33-34은 참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약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중생하여 성령 안에서 교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급격한 변화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이 신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즉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고 걷고 존재합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고 정착하시며 자신을 집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새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 율법의 요구를 남김없이 다 충족시켰더라면 규정된 대로 복을 얻고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신명기28:1-14) 그 누구도 구약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었으며, 결국 엣 언약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구원 얻을 수 없는,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에서 이루지 못했던 죄인의 구원을 예수의 피로 완성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을 전하여 새 언약이 죄인을 구원하는 새 언약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8장 6-7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흠이 없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만일 그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두번째 잘못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율법 주의적인 법과 규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임재를 적용함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에 다음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거리가 있다는 척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의 죄악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것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걷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그분과의 교제를 유지할 때 우리는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1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아름다운 특권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새 언약은 각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을 통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지식은 도덕적 더러움을 버림으로써 얻게 됨이요, 그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될 것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새 언약의 적용을 받아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분 자신을 계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이 실제로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너무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가가서 만날 수 있을 때가 있습니까? 그분께서 알려진 모든 죄를 마음에서 깨끗이 하시고 당신이 그분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 그분은 당신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그분 자신을 당신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언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 언약에 참예한 우리 성도들을 우리 안에 게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표하시길 바랍니다. 





02-25-2024



약속과 의심 가운데 확신하고 굳게 서기. 02-25-2024

로마서 4:20–21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 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4:20-21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삶을 보이시나요? 나와 여러분의 삶에서 진실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느끼시나요?

아브라함에 대해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야기 내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전체 요약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 졌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에 이르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문 1.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까?

질문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우리의구원은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내용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행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화해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일회성 신뢰가 아니라 그로부터 점점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입니다.

로마서 4:20-21은 믿음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 삶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신앙(믿음 없는) 삶으로부터 지켜주소서.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약속과 의심 가운데에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굳게 서게 도와주세요. 또한 우리가 하나님 영의 지도력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방식과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어둠 가운데, 슬픔 가운데, 그의 슬픔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불가능을 생각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고려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39;하나님의 친구&#39;라는 칭호를 얻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낙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기


낙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약속하신 것의 성실성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상황을 볼때에만 옵니다.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질 때 어떠한 고백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은 훌륭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당신이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과 같이 우리가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녀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셔서 그들이 낙담에 면역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며 우리는 때때로 끈질긴 기도로 그 분께로 향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완성 자 이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라 생각합니다. 더더욱 2 절 말씀처럼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증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 생활할 수 있고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증거,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전당이다. 나열된 각 사람은 전투기였습니다. 그들은 낙담이 그들의 믿음을 훔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힘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 힘으로 우리 상황을 바뀌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 안에 누가 계신가요?

우리는 각자 영혼의 미래를 놓고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지자. 하나님을 찾고, 기도로 새 힘을 얻고, 다시는 낙담의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우리가 때론 무너지고, 의심할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어떤 한 젊은 변호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서 칼과 면도칼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우울증 기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는 우울증 회복하여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확신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준 것이라 믿고 확신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실 것임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게해주시기를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서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오늘 능히 이루실 수 있음을 확신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는 기초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반석이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대한 우리의 신뢰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친숙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숙하지 아니한데 어찌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낙심치 않고, 믿음을 견고케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2-04-2024
주를 찾나이다(마가복음 1:36-37)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레미아 29:13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전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진심으로, 진실로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찾는다는 말씀은 같으나 의미는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아에 찾는다는 의미는 너희들이 나를 만나고자 하면 진심, 전심 아무 조건 없는 만남을 원하는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 만나겠다는 의미이고 오늘 본문의 찾다 의미는 분명히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병이 낳기 위함이고 예수님의 이적 기적을 보기 위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찾을 때 마다 조건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오늘은 마가복음 1장 36-37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이 스쳐지나 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묵상하시면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나는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나 스스로 질문을 해봅니다.

1. 무엇을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가?
2. 예수님을 찾았나, 아니면 아직도 찾고 있나?
3. 나는 무엇을 찾고 있나?
4. 난 무엇을 얻었나?
5.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무엇을 했나?

오늘 저도, 여러분도 오늘 말씀 중심에 자신을 세워 보시고 답을 함께 찾아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1장 전체 내용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뒤에 오시는 예수를 예비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이후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이 성령이 입재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이후 광야에서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시험을 받은 이후 갈릴리에 돌아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고로 복음 전도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변을 지나시면 제자를 부르시는데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고 잠시 더가시여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4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안식일에 회당을 가셔서 복음 전하는 말씀에는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과 다르다고 기록합니다.
21-34까지 예수님의 기적,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이 순종하고, 귀신이 떠나고, 열병에 붙잡혀 있던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는 이적이 사실로 온 동네에 펴져서 알려졌을 때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느 부흥회서 병이 낳고,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시각으로 부흥 강사는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 분의 부흥회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고마는 경우를 나는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찾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찾는 방법이 잘 못되어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하면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찾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36절에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이 절을 보면 제자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떠나기 싫은 모습이 보이고, 제자들의 행동과 생각이 현명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보시기에 부정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를 따르다’는 의미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의 표현을 적대적인 인물을 따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 병이 낳고 하는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보기를 원하여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주를 찾나이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표현은 개인 적인 욕구가 폭함 된 것입니다.
마가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요한복음 6: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른 생각 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리며 빨리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혹시 우리 마음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거나,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찾으라 하시는 말씀 의미를 우리는 잘 못 알고 주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
저는 오늘도 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예수를 무엇 때문에 찾을까?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마태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 7:-8“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신앙인으로 무엇을 구하였고, 무엇을 찾았으며, 어디를 두드렸을까요?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공허했으며, 때로는 우리는 기쁨이 없었으며, 찾기보다는 구하는 것을 많이 했으며 두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 그러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깊은 암흑 가운데에서 길을 못 찾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의 기도 가운데 나를 찾아 주세요! 하며 하나님께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은 지금도 끝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으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나를 부르고 계실까요?

얼마전 한 뉴스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넓은 옥수수 밭에서 일어나
아이의 실종 사건이었습니다.
옥수수 밭에 들어간 아이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점점 불안해가기 시작했고 그 넓은 옥수수 밭에서 지쳐 울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했고 많은 사람들과 경찰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아이를 찾지 못하고 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포기할 때쯤 드론에 적외선 카메라를 장착하여 수색을 시작할 때 적외선 카메라에 물체가 잡혀 그곳으로 달려가 그 아이를 찾았다 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 생활을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빛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만족이 없고 무기력하고, 나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못 찾는다면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쁨과 기도 그리고 감사가 끝임없이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서 성경 말씀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진정과 신실 하므로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 시길 주님의 소망합니다.

성만찬 예식 성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01-14-2024(주일)

“나를 좇으라”(요한복음 1:43)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자의 성육신 (1:1-18)

2. 성자 예수의 표적과 선언(1:19-12:50)

3. 성자 예수의 교훈(13:1-17:26)

4. 성자 예수의 고난과 부활 (18:1-21:25)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신약 성경 중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젊은 신도들에게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기록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서 자신이 누구 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요,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요, 부활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참 포도나무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성이셨고 그것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 누구의 아들을 고치셨으며, 다리 저는 사람을 고치셨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고, 물 위를 걸으시고, 맹인을 보게 하시고,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넷째 날. 이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손끝에 힘을 갖고 계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그의 창조물 사이를 거닐며 그의 창조물을 도우셨고, 슬프게도 그 당시와 오늘날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피곤 하셨고, 그분의 영혼은 우리를 향하여 안타까워하셨으며, 그분은 영으로 신음하셨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밝힙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것 무엇을 혹은 누구를 따르셨고, 좇으셨나요? 신앙인으로서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며, 우리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따르라는 요청을 받거나 명령을 받았을 때, 이는 우리가 따르도록 요청 받았다면 바람직한 경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다음 목표를 달성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가고 있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이 멈춤이 쉬울 수도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이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레미콘안에 콘크리트가 굳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리고 공사장까지 신속하게 도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작업이 끝나서 물로 레미콘 안에 있는 시멘트를 물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보게 뵙니다. 새로운 시멘트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로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달성하기 가장 쉬운 모습은 아닙니다. 예) 지하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기차는 철길을 따라 달리 수는 있어도 자동차처럼 돌리는 가나 자유롭게 유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약간의 전환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물론 기차는 역방향으로 느린 속도로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만 이는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가끔 뒤로 걸어보세요. 우리가 천천히 발을 섞고 직선적이고 장애물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전할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면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좇는 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길로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셋 번째, 일단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때 사탄이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위해 길에 놓아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문은 좁고 길이 넓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예수님을 좇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성경의 이 부분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 달, 다음 주, 내일, 심지어 한 시간 정도 후에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측을 해보고 그것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부분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너희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1 그들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니라. 신문에 광고를 내고 배와 고기잡이 사업을 먼저 팔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고 대신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읽습니다. 사도행전 8장과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에 26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남쪽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이것은 사막 길이다.) 27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이 주님의 명령을 맡은 천사를 따르는 데 지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팔로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시작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4~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 부르시고 말씀하길 어리다는 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스스로 같은 변명을 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사역의 기회를 놓친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길, 즉 거룩함과 의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우리가 오랫동안 걸어온 알려진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보다 익숙한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더 쉬워졌습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시작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느낌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에 반대되는 향하는 것에 중독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정말 어려운 단계가 됩니다. 우리 삶에서 중독을 제거했을 때, 우리는 채워야 할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 공허함을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우지 못하면 사탄이 와서 다른 것으로 채울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돌아서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전환점을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을 읽습니다(3-6절). 3. 그가 여행하는 중에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더라. 4. 그가 땅에 엎드러지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니 5.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런 다음 10-20절로 넘어가서 사울이 안나니아를 만나고 그로 인해 시력을 되찾게 된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손에 의한 기적적인 변화입니다. 이전 삶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는 행위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 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어 있는 영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영원히 안식을 누리며 예배할

영혼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기대할 것이 거의 없거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서 가장 큰 보물을 발밑에 놓이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은 사람에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전 생활 방식에서 등을 돌린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부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나쁜 일을 그만두고 좋은 일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을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믿음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와 다른 믿음의 소유자들과 한번 그리스도를 선택했다고 그것은 영원히 확정하고 일단 고백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계속 죄를 짓고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믿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째 편지 5장 20 읽습니다.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니 이 원칙을 편견 없이 지키고 아무 일에든지 차별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멈추고 돌아서면 이제 진행할 시간이 됩니다. 이제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볼 수 있고 여행하기 훨씬 더 쉬워 보이는 길을 설정하십니다. 그 길에는 작은 보상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길에서만 마지막 상, 즉 천국에서의 영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길에 많은 출구를 마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선택한 새로운 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제 그 출구, 지름길처럼 보이는 우회로는 파멸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다, 따른다는 의미는 헬라어로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어로 1. 따르다 2. 본받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새벽 예배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예수님을 무엇을 본받는 삶 속에 어떠한 그리스도인 될 것인가를 매일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12-17-2023(주일)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세 번째 촛불의 의미인 기쁨(Rejoyce) 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로 정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앞으로 한 주로 다가오니 기쁘십니까?
아마도 지금 어쩌면 누군가는 택배로 선물을 보내신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택배를 기다리고 계실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척 힘들고 고심 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렘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까지 며칠 남았는지에 대한 업데이트가 매일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노래에 우리는 신나서 한 동안 마음이 설레 이겠지요?
우리는 매년 돌아오는 이 날이 기다려지고 매순간 들 떠있는 마음으로 시즌을 보냅니다.
크리스마스는 들 떠있는 마음이 아닌 차분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말씀의 중심을 보면 “항상 기뻐하되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므로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기다림 대해 생각할 때 항상 기쁨이 함께하십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하나는 정말 기뻐하는 모습과 또 하나는 불안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 한가요?
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해동안을 잘 준비한 사람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불안 사람은 준비가 안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아침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대림절 준비에 기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앞으로 다가올 며칠과 몇 주가 어떻게 스트레스가 아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에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영원에 초점을 맞춘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후에 여러분이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바울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들에 대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짧은 편지 전반에 걸쳐 지속되는 주제입니다.
여기 4장에서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전히 사물에 대해 즐겁고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위한 몇 가지 장기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상황이 그들에게 정말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한번 말 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생에서 기쁨을 누리는 관점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걱정할 이유와 기뻐할 이유를 모두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 든 우려되는 그들의 죄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주님은 분명히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오실 구주를 가리켰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설교하는 동안 요한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요한은 오실 구주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의 불을 가져오실 것과 그분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셔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 기뻐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동기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에게 많은 세부적인 지시를 줍니다.
그분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고 시작하십니다.
관용이라는 단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관용이란?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 성격의 친절 성 등을 의합니다.
또한 관용은 기쁨의 원인이며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다르지만 포용함”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인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혹은 실제로는 그 어떤 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면, 한 걸음 물러서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온유함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가?
아니면 나는 성급한 성격인가?
나의 인내심 부족인가? 내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무능력인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화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내 자녀, 배우자, 부모,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 더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그 모임에서 말하는 방식이나 내가 길을 운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가게의 점원이나 선출된 대표자, 교회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갑자기 내가 온화하지 못한 모습이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나는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화를 내거나 조급함이나 이기심을 다시 품게 되었습니다.
나는 온화하고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나의 기쁨이 내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너는 용서받았어.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온유함을 우선시하여 그 용서를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쁨은 만족으로 인한 자신감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항상 훌륭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거나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직면하기 힘든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부족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은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멈추어 있는 것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훨씬 더 생산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간구에 의한 바울의 표현은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갑니다.
즐거운 삶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마음에는 더 힘들고 더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매우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특별한 경우들을 인정합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 씨름할 때, 매우 구체적인 요청을 하나님께 가져오십시오.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인도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위해 기도하고, 온유할 수 있는 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가장 어려운 일들을 그분께 가져갈 때,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가 불타고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삶의 다른 부분은 아마도 좋아지고 있거나 적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식량이 어디서 나오는지 항상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이 삶이 지금 우리에게 거대한 용광로의 불길일지라도,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이자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거나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실 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여전히 재림절 준비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렵다고 느끼셨나요?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은 죄의 본성을 갖고 이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더 자주, 나는 온화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내가 아내, 자녀, 회중, 친구, 지역 사회에 대한 나의 실패에 대해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았듯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 안에서 찾으시 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편지의 이 짧은 부분을 결론짓는 방식이며, 사실 바울이 우리 회중에게 대부분의 설교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아마도 이 단어의 의미에 약간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감각해지지 마십시오.
신선한 눈으로 보고, 신선한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 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창조주와 전쟁이 아니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를 위해 죄와 사망과 지옥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옵니다.
이 평화는 괴로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평안은 우리가 시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안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살고 죽으셨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현실이며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삶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혼자 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때와 괴로운 때를 거치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 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삶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그분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설명한 모든 이유로 인해 무서운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섭지 않은 수많은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구세주를 통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12-03-2023(주일)

“소망”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 절기의 색상은 보라색과 청색이나 대부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보라색은 따뜻하면서 침착함 가지며 희망과 동경의 색입니다.
절기동안 사용하는 보라색은 왕의 존엄, 참회, 금식을 상징합니다.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의 다섯개의 촛불이 있는데 첫째 주의 촛불은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냅니다.
세상에 어둠 속에 살아가 자들에게 빛으로 소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주일 촛불은 회개의 촛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복음의 전파에 방해되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의 의미의 촛불입니다.
이 주간에는 특별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셋째 주일 촛불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도시는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만 그 뒤에 감춰진 상처받고, 배고프고, 외로움에 쓸쓸히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고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들입니다.

넷째 주일 촛불은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과 만남과 화해를 의미로 촛불을 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했으며,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촛불의 의미를 되새기며 복음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개의 촛불 중 가운데 촛불은 25일 아기 예수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는 의미로 촛불을 켜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것으로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며 새롭게 출발합니다.

오늘 저는 대림절 첫 째를 맞이하여 소망이라는 주제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며 대림절 첫 주일을 맞이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중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제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조금 전에 대림절 촛불 의미인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소망의 촛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로마서 5장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소망의 중요성을 깨닫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소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함께 자세히 나누길 원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에도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과 소망을 사랑과 함께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소망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한때 믿음을 어둠 속의 도약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을 부정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저 위에 우리를 잡아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며 심연 속으로 필사적으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이 “실체”라고 말합니다.
실체인 어떤 것이 곧 어떤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ὑπόστασις )는 기초 또는 기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기초 위에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고전 3:11).
이 기초는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유대인들이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닙니다.
요한은 사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말합니다(요일 1:1).
이것이 바로 대림절이 크리스마스가 아닌 이유이다.
우리는 구유에 누울 아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기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 마음에 소망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사시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시며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40일 동안 많은 증인에게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40일 만에 아버지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분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을 보고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이 사건들의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눈먼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말할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무엇을 드릴지 물어볼 수 있는 인간 증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느 정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완전히 눈먼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것을 바울처럼 인정합니다”(고전 13:12).
그러나 소망은 우리가 지금 희미하게 보는 것을 대면하여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어두운 밤의 등불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또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아침에 해가 떠오를 것과 같음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어둠 속의 도약이지만 맹목적인 도약은 아닙니다.

(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 한다면 어떻게 생각 할까요?
“나는 믿음의 도약을 하고 미시시피 강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이 말은 모두가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 너머로 더 멀리 갈 수 있을까요?
그 넓은 강을 어떻게 뛸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은 그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소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완전한 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소리 질러 그분의 대답을 듣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분의 완전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행글라이더가 행글라이딩 복장을 입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 사람은 높은 곳에서 점프하여 반대편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글라이더와 바람,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단순히 뛰어내리는 것이고 성공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날개이자 과업을 위한 지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인 능력에 관해서 본인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와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그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반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르라 고 손짓하십니다.
물이 깊고 이 세상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날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름 아닌 예수의 피와 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맹목적인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이 어둠 속에 빛이 비치었음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 1:5)
어둠은 이 빛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날, 그분의 재림의 날까지 소망이 우리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서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이 낮에는 얼마나 희미하게 보이는가!
보이지 않았던 믿음의 면이 보일 것입니다.
믿음은 신실함이 될 것이며 신실함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림절에 우리는 “복된 소망”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소망은 가라앉는 모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과학자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영적으로 눈먼 과학자들에게 있습니다.
과학의 빛은 순수한 어둠이다.
하나님이 과학의 창조자인 한 과학은 참이지만, 과학자들이 과연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모든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사실은 창조자의 목적에 의해 다른 모든 사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는가? 그러므로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맹목적인  희망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림절의 약속을 가져올 수 없다면 정치인들이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철학자와 현자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전 1:20)고 말합니다.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소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인류는 자신들이 견고한 기반 위에 있으며 별까지 바벨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류가 이미 탁한 강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에서 어둠 속으로 도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는 일에 동참하도록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마태 5:14)
우리는 사람들이 맹목적인 희망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희망은 어둠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은 언젠가 새로운 현실의 빛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입니다.


11 - 12 - 2023(주일)
예배의 있어 필요한 것들(히브리서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배에 출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지는 안는지?
코로나 이후 코로나 전염되듯 나는 예배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갖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여러가지 방법 중 한 가지 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안는지?

토저(A.Tozer)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네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나?
“예배의 가장 깊은 수준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련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유혹이 있을 때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멀어 보일 때에도 그분 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무엇을 얻기를 소망합니까?
우리 얻기 위한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회복을 하기를 원함, 은혜가 충만하기를 원 함이고,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들을 성취하기위해서는 우리 예배에 성경적 패턴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예배에 필요한 몇 가지를 함께 하려합니다.

1. 강력한 기도.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3. 십일조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5. 개인적인 간증.

1. 강력한 기도.

구약의 성전에서는 기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새 성전을 봉헌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성전을 당신의 영광으로 채우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과 백성에게 말씀하여 이르시 길 역대하 7:15-16 “15.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이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 노라 내 눈과 내 마음은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신약에 와서는 교회 란? 예배의 집, 설교의 집, 친교의 집, 봉사의 집, 찬양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를 통해 누구를
만나야 하나? 바로 주님을 만나고 성령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1990년대 후반 영국 왓퍼드(Watford)곳에 Matthew Redma (곡을 쓰고, 찬양을 리더)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는 수준 높은 찬양 밴드와 예배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회중이 예배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일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Matthew에게 하나님께 헌금으로 무엇을 가져오시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Matthew Redman은 그 질문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진심 어린 기도와 감동의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Matt(매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찬양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벗겨진체 단순히 마음을 축복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가져오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나는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관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만든 일로 인해 죄송합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음악에 대한 최초의 성서적 언급은 창세기 4장 2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멕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아다의 아들 유발은 수금과 피리를 연주하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해 읽습니다.
요한계시록 15:2-4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형태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남성, 여성, 어린이의 예를 봅니다.
성령과 음악.
사도 바울은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사이를 직접 연결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편, 찬송가, 신령한 노래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드리는 예배 음악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음악과 노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그분께 노래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역대상 16:2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 할찌어다.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요한은 구속받은 자만이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예배에서의 음악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계, 헌신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감사, 찬양,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3. 십일조

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영어를 보면 worth(가치) + ship(운반하다) = Worship(경배, 예배)
가치라는 단어와 운반하는 단어가 합쳐 만든 단어입니다.
즉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리는 것 중 하나님은 헌물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십일조 말씀입니다.
우리가 꼭 축복 받기위한 수단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소중한 것 중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 100%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시편 50:10-12 말씀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 말라기 3:8–11에서 말씀합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예수님 역시 십일조를 권장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특권입니다.
고린도후서 9:6-8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위에 말씀을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1. 우리는 우리가 드린 만큼 축복을 받습니다.
2. 우리는 억지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받아먹어야 할까요?
예레미야 15:16에서 답을 알려쥡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앞으로 우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먹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에는 항상 성경이 포함되었습니다.
느헤미야 8:5-6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설교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하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면하라.
그들이 건전한 교훈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영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14 “이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의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복음 4:18NKJV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배에는 항상 경전을 가르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많은 교회들이 제자도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설교를 듣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얻어먹어 야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행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개인적인 간증

지금까지 믿음 생활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주변 이웃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살아가고 있나요?
이제껏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은혜의 간증이 있나요?
우리가 은혜가 없고, 간증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슬픔 믿음 생활을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요한계시록 12:11에 “또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말씀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간증은 회중 참여의 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간증이 없다면 교회 예배에 형식적 의식으로 생각하고 영혼이 없는 하나의 의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그런 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간증은 예배의 귀중한 부분이며 믿음을 키워 줍니다. 교회의 모든 일과 우리의 삶이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자가 세워지고 충성된 주님의 자녀로서, 충성된 제자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간증하며 믿음 생활하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10-22-2023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행위(살로니가전서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 갔는
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 최고의 교회에 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사도들을 본받고 무엇보다도 주 예수를 본받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지역의 모든 믿는 이들의 모델이 되는 모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내 이웃의 모범이 되어갔는지, 되고 있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 모든 믿는 자의 모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받고 싶은 칭찬 아닐까요?

어떻게 이런 소문을 듣고 살아갈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느니라”(살전 1:9, 10).
이것은 매우 평범한 설교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둘째,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셋째,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라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서로 상반된 것입니다.
우상은 죽었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상은 거짓이고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우상은 많고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우상은 눈에 보입니다.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돌아와서는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우상 숭배는 신과 여신들의 만신을 숭배하는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공통 종교였으며, 그들의 최고의 신 제우스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올림푸스 산에서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그들의 사회 구조에 있었지만, 그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러분이 가족의 종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이 그들과 그들의 사회와 전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믿으며 부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교회에 속한 많은 헬라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우상을 거부하는 그들의 급진적인 개종은 빠르게 전파될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 우상들은 얼마나 강력한가? 선교사들은 우상이 원시 민족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부족의 전통 우상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 뒤에 숨어 있는 영들을 불쾌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으며, 영이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 이방인뿐만 아니라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도 역시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 외에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며, 사람을 그 지배하에 가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희곡에 등장하는 사람을 자신의 창조주를 숭배하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이를 좀 더 깔끔하게 표현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완전히 미신적인 것이든 현대의 세련된 우상이든 어떤 우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영광스럽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의 경험을 활용했습니다. 그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했고 그의 청중 중 일부는 마음속에 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들이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의미의 믿음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 즉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으로” 믿었습니다(행 17:3-4).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몇 가지 사실(종교 역사의 몇가지 날짜와 사건)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훈련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과정을 설명할 때 그들이 돌이켰다 라는 행위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우상의 마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깨졌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우월한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바울 자신도 목숨을 걸고 재판을 받을 때 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판사에게 자신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를 하나님께로”(사도행전 26:18) 경험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종에는 충성의 급진적인 이전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과 능력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은 실제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버리고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섬겨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사랑, 애정, 경의로 잘못되어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회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바울은 봉사하다 라는 다른 행동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닌,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들의 삶은 이제 다른 주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모르게 사탄을 섬겼지만 이제는 우회전하여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그의 위대한 교리 부분을 마친 후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면서 요약을 시작했습니다.

1. 이것이 귀하의 합리적인 서비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기대되는 표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려라!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제일 좋은 것을 추구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할까요? 우리 모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일가요? 아니면 자신이 쓰다 남은 재물일까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봉사에 있어 천박함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서비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 재능, 소유물 등을 그분의 청지기로서 사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섬김이 “산 제사” 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나, 그 때에도 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다스려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서비스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각자의 은사와 재능, 자원에 따라 수행해야 할 다양한 작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아시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봉사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종이었지만 복음을 통해 두 번째 해방, 즉 완전한 자유인 하나님을 섬기는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찬송 중 조지 매더슨(George Matheson)이 쓴 곡에 “Make me a captive, Lord” (나를 포로로 삼아 주시면)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 시길 바랍니다.


기다려라

세 번째 전환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당시 이교도는 자신이 죽은 후 스틱스 강을 건너 자신의 선함과 신의 은총에 따라 좋은 미래를 누릴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지만 확실성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확실하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일의 교리인 종말론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서 그들이 확실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 거하다, 머무르다, 기다리 다라는 단어의 강화된 형태이며 “미래의 사건에 관해 기대하면서 제자리 또는 상태에 머무르다 “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내와 신뢰의 개념을 추가하여 올 것이 알려지거나 예견된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아닌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자라. 그는 하늘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분은 다가올 진노의 위험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을 겁니다.

사도가 분명히 활동적인 “섬김”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과 연결시키는 것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개종자들에게 이 둘이 함께 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더라도,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보다 더 나은 세상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구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자주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통치의 최종 승리를 확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세상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한가롭게 기다릴 권리가 있을까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동안 일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낮에 오시는지 밤에 오시는지 그 누구도 모르며,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의 의미는 경고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언제 올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생애에 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달력에서 다음으로 큰 사건은 큰 영광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개종자들에게 깨닫도록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준비 속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삶의 가치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두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동일한 삶의 헌신하는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살자.


2.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분별하며 믿음 생활하자.
이 두 가지 우리의 믿음에 있어 본이 되는 모범적 그리스도인 되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0-01-2023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7:4-7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7장의 중심 내용은
1.르비딤에서 일어난 일
2.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오늘은 17장 전반부에 나오는 르비딤에서 일어난일 중 모세가 행한 일과 반석에 흐르는 물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물은 인간에게 없어는 안되는 필요한 물질입니다.
인간의 몸은 약 60-70%가 물입니다.
인체 구성은 산소가 25%, 탄소가 9.5%, 수소가 6.3%, 질소가 1.4%, 칼슘이 0.2%, 인이 0.2%, 칼륨이 0.07%로 총 42.67%구성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중요하듯 모세가 광야 생활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배고프 다하여 만나로 메추라기 로 다 해결해주니 이제는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리고 모세를 향하여 목이 마르니 물 달라고 겁박까지 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행한 행동과 말을 잘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거의 이성을 잃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닌 동물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좋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의 우리에게 도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의 물질적 필요와 주님의 물질적 축복을 살펴보고 그에 근거하여 판단하려는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이 보기에 성공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성경적 경건의 성격에 전적으로 반대된다는 점을 여러분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가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또한 물질적 축복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구원주요, 영적 축복자로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이들에게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의 번영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 때문이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올 때까지 그들은 꽤 오랫동안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을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공급을 통해 광야 생활을 함께하셨습니다. 그들의 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처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 그들이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자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번 시련은 음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없는 중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걸어본 적이 있다면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르비딤에 물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다시 하나님을 의심하고 모세를 불신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쟁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모세야, 당신은 우리를 돌보는 임무에 실패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신을 고소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저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저 또한 리더에게 불만을 표출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생각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고 리더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모세는 리더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달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그들의 불평은 더욱 악했습 다.
“이것이 너희가 우리를 목말라 죽게 하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것이냐?”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세상적인 위로를 즉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계신 주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그들을 보호해 주시거나, 적어도 빨리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통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 우리가 하늘에서만 누리게 될 영광을 요구하는 것이며, 또 다른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신 태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은 고난의 삶이지만 천국에서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인적인 고통을 피하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발생한 문제를 이해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발생한 이유 보다는 먼저 결과를 놓고 분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대하신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불평에 실제로 무엇이 달려 있는지를 인식했을 때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왜 나에게 불평합니까? 왜 주님을 시험합니까?”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은 모세를 통 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리더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일종의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장로들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성경 말씀을 사랑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가 개입하여 그들을 비난한다면 말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읽는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까지 자기 백성을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혹시 예전에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해본적이 있을까요?
모세는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모세는 한 행동을 보면 문제 해결책은 기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 4절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문제 이해 방법은 바로 기도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모세는 그의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고난을 당했고, 그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의심스러울 때 기도로 그분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의심한 죄를 고백하고 그 약속이 새롭게 여러분에게 스며들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가운데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붙드시며 기도 생활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로운 해결책을 찾자.
5절과 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말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하라고 하신 일은 그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분은 이 화난 군중에게서 숨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에게 쏠릴 것임을 하나님은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세에게 향한 마음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모세에게 장로들 중 몇몇이 그와 동행해야 하라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공정한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가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일강을 강타한 그 지팡이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지팡이는 또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면서 지팡이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심판의 지팡이로 기억해 야합니다.
이 본문에서 백성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쳐서 심판하라고 말씀하실 것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백성들 옆을 지나가야 합니다.
심판은 그들을 지나쳐 버립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서 너희 앞에 서리라”(6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의 중심이므로 이야기에 매우 중요합니다(라틴어 십자가에서 유래).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22:23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 야곱의 모든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를 경외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분명히 자신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반역적인 백성에게 실제로 어떻게 물을 공급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이 서 계신 반석을 치면 거기서 물이 나와서 백성의 목마름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심판하시던 바로 그 지팡이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앞에 서 계신 반석을 치고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서셨습니다.
심판의 형벌은 그의 백성이 아니라 그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정죄를 담당하십니다!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을 신명기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광스러운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르비딤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마련하실 것이다”와 같은 이름으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시험한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므리바는 ‘비난하다’라는 뜻으로 ‘다툼’을 의미합니다.
즉 “시험하고” “다투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즉 그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자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음식과 음료보다 훨씬 더 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게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망각할 때 우리 일상의 모습이 일생은 맛사와 므리바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반석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속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은 고전 10:4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백성이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의 물을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
호렙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서 있는 반석을 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육신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의 범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듯이, 이사야 53:5에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호렙에서는 사람들이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9:28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수를 공급하시기 위해 목마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아닌가?”라는 질문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교회와 우리 삶에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형벌을 받아야 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이는 우리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하나님께 매를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의심스러울 때 디도서 2:13에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생에서 사막을 통과할 때,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09-10-2023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하나?” 마태복음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회중으로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오늘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했나? 여러분은 어떠세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해보신 분 있나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으로 확신을 같기 위한 오늘의 말씀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가요? 그러나 때로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일하느라

바빴다면 예수님이 그토록 가까이 계시는 것이 그리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 자신이 불안하다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편리한 하나님, 우리의 의제와 우선순위를 승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가 하나님을 통제하려 고하고, 우리는 가끔은 기적을 맡기어 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할 때도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이 깊다 하시는 분들이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 보다 못한 신앙인의 모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 하신 가요?

우리가 주일 예배 모임, 친교 시간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돈을 어떻게 쓸지, 누구를 환영할지 결정할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둘러보며 말해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고민할 때,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으로 더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일상적인 삶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항상 선하고 친절하며 사랑이 많고 누구도 험담하거나 소문을 퍼뜨리거나 어떤 것에 동의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입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순진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위원회에서 봉사하거나 교회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로 구성된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고대 세계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우리는 대립, 불일치, 상호 책임을 다루는 데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 공정하고 건설적으로 싸우는 방법, 건강한 공동체에서 함께 지내는 방법을 계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우리의 죄와 그 결과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지침을 제공합니다. David Lose 목사가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는데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공동체는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고 우리가 관련되면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즉, 상대방의 뒤에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성숙한 어른처럼 직접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저는 이 방법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추천합니다.

경전의 지혜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고함, 중상, 험담, 서로 모욕을 통해 갈등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해결과 화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 뜻대로 고집하여 부활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일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그 사람을 파문하거나 추방하거나 피하라는 지시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상식처럼 보이거나, 혹은 잠시 동안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세리, 창녀, 기타 외부인들과 자주 교류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신실하게 해석하는데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멀리 하기는 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대할 때 사랑으로 손을 내밀기를 결코 멈추지 말고, 깨어진 것을 회복시켜 줄 은혜를 갈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문맥이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이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홉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므로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 구절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올바르게 들었는지 확인합니다. “주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진정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이고 때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 살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친교와 임재를 실제로 경험할 때 지상 천국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어려울 때라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통해 형성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성공회 사제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유에서도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두 개의 머리가 하나보다 낫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서로가 필요하며, 그들이 한 가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키기 위해 필요합니다.”

“가족이 올바르게 일할 때 가족은 공유하는 방법, 함께 일하는 방법, 서로 돌보는 방법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마치 항아리 속의 돌멩이를 굴리듯이 우리를 서로 비비게 함으로써 우리의 거친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원하는 것 중 일부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주고받는 것을 배우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제 우리 중 일부는 가족 내에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건강한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람보다 규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 중 일부는 좋은 말을 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배우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배우겠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공동체에서 그 누군가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혼자만 간직해야 한다고 배울 수 있지만, 저는 그 누군가와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조화, 심지어 조화의 환상조차도 가장 중요한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조화입니다. 갈등과 상처받은 감정을 다루는 이러한 건강에 해롭고 불경스러운 방법의 문제는, 우리가 이를 해결하고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결국 상처받은 감정과 원한을 모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을 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대해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인 것 같아요.

C.S.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이혼에서 지옥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그림을 그립니다.

지옥은 바깥 가장자리에만 사람이 살고 있고 중앙에 빈 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대한 회색 도시와 같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한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웃과 다투고 이사하고 다투었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새로운 이웃과 함께 다시 이사를 했고, 텅 빈 거리에는 텅 빈 집들이 가득했다.

루이스는 지옥이 그렇게 커진 이유가 중앙이 비어 있고 변두리에만 사람이 거주하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싸움의 해결책으로 대결 대신 거리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사람을 정면에서 정면으로 마주보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의 길, 사랑의 길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기 기독교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화해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오늘 복음 교훈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 화해를 위해 노력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옳은 것을 원하는가? 내가 화해하기 전에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고 관계가 규칙보다 더 중요하고

화해가 보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허리케인, 지진, 화재, 증오의 표현, 불의 등 우리를 괴롭히고 도전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함께 살 때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서로를 묶고 푸는 방법을 세상에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갈등을 통해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힘으로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이 악보다 강하고,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 마음과 모습을 닮아가는 귀한 제자들이 되어 항상 하나님과 통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8-20-23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마가복음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광고 중에 얼마 동안은 얼마를 내시고 그 이후에는 얼마를 내시면 됩니다라는 광고를 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주 작은 글씨에는 우리가 생각한 조건과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면에 큰 글씨와는 다르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를 따르면 이러한 것이 따른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안에는 세상의 딜콤한 광고같은 글귀가 아닌 우리를 예수님을 따를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중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신앙인들이 마음에는 모두가 잘되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있는 우리가 만상형통 중에 뒤 따른는 것이 바로 힘듬입니다.
세상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수 많은 노력, 수 많은 고통, 고민 속에 많은 것이 얻어지는 것 같이 예수님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것을 버리자라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이 무었인가를 예수님께 여쭈어 본 후 근심하여 떠난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위해서 희생 했을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희생 해야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 청년의 모습의 신앙인은 아닌가요?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의 소유를 다 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두 부자를 만나는데 오늘의 주인공 부자청년과 세리 삭개오 만남니다.
삭개오와 부자의 청년의 차이 점은 무엇인가요?

부자청년은 근심하였고,
누가복음 19:1-11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를 절반을 나누어주고, 본인이 토색한 자들에게는 사 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께 말했을때 예수님의 삭개오의 마음 보시고, 집에 구원이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하지만 혹시 우리 스스로 위안을 갖기위한 생각은 아난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지 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일에 대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참 제자가 되기위한 조건은우리 삶에 일순위가 하나님,예수님이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분보다 다른 목적이나 사람이나 소유물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유을 더 소중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이 소유를 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올바른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증명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소유가 내것이 아니라는 사실알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내것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것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예배를 드리며 수요 성경공부에 참여 한다고 참 제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 생각, 말씀에 맞추어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주제처럼 “우리가 예수를 따르면” 무엇을 얻으며, 무엇이 더해지는질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이생에서 배가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가 되는 축복을 받으셨나요?
앞으로 받을 준비가 되셨나요?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볼때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신도들은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나의 주변을 정리한다” 이 말씀에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백 배의 축복은 좋아하겠지요?
왜? 우리는 광고와 같이 보고 싶은 것과 읽고 싶은 것 그리고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읽듯 성경의 말씀도 주일의 설교 말씀도 이와같이 하지는 않는지요?
또한 우리가 버려야 할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수 백번 아니면 수 만번 계산기로 계산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 즉 영생 을 얻기위한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는 돈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9절을 읽은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때론 집, 가족, 사업체, 농장 또는 직장을 떠나야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때 예수의 복음에 집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 예수로 복음 만을 집중할 때 이생에서 주신다는 약속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때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또한 그분을 따르면 큰 유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예수님을 따를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소속된다는 점 즉 “가족의 일원”이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족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히 예수님을 따르는 축복 중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분명히 있는데 바로 핍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에 대해 말씀한 후 예수님은 “핍박을 겸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얻는 것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써 우리의 삶에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0-12에서 핍박 받는 자에 관한 말씀이 ‘복이 있고, 천국이 있고, 상이 크다’라고 말씀입니다.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중 일부가 기념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영광스러운”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관심을 가지거나 논쟁에 합하면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핍박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나의 복음을 위한 일를 할때 핍박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선교사의 삶)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복음에 집중하는 삶에서 핍박 받고 있지않다면 “왜일까?”를 생각해야합니다.
몇가지 질문을 생각 해보았습니다.

1. 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까?
2. 우리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도록 멀리 피해있는 않는가?
3. 혹시 진정으로 따르고 있는가?
4. 나는 십자가의 군인가? 아니면 어린 양의 추종인가?
5. 모든 질문에 잘 적응하는 신도인가?
3.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를 따름으로서 얻게 되는 세 번째는 “내세에 영생”입니다.
내세는 마지막 때이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날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기대할 수 있는 단연코 가장 큰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우리가 다른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큰 상” 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찾고, 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앞부분에서 부자 청년 관원이 찾고 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습니다.
그는 지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뭔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영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은 당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듯이 인생의 길이 자체가 그렇게 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삶의 영원한 질, 곧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분의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소서.”
영생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6:11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의 “면전”에서 영원히 행복해집니다.
주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영원한 즐거움”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영생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기 연습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가 아니 남은 올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깊은 상고와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 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7-30-2023(주일)
성령의 중보가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로마서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주 전에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하고 있을 때 한 인도 사람이 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당신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또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자신만만하게 네! 잘 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대답에 충격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삶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꾸준히 계속 기도가 끝어지않게 기도를 해야 하는 삶입니다. 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떠나고 저는 그의 말에 얼마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 흡족할만한 기도의 양을 하지 않고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저를 보고 기도를 더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를 말할때 그 시람은 나의 모습을 보고 알고 있다는있는 사실에 정작 알아야하는 나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에 황당해 하며 회개하며 다시 엎드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은 기도해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닐지라도 기도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8장 전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경이로움과 축복, 특히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을 닮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 새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며 우리를 축복하고, 강화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8장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심을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되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기도의 영이 있어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때론 기도의 행사가 이루어지는데 특권 중 하나임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필요에 대해 말하고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돕고 우리를 돕기위해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말씀하시길 우리를 위해 돕우시는 몇가지를 함께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 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기도의 영역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에서 발전할 수 없으며 결코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땅의 육신의으로 살고 있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여전히 거하는 이 육신을 통해 우리의 새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을 때까지 이 타락한 육신에서 해방되고 썩지 아니할 새 부활의 몸을 받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부패한 사실과 함께 우리는 현생에서 여전히 땅에 묶여 있기 때문에 불투명한 우리를 통해서만 영적인 것을 볼 뿐이며 여전히 인간의 지혜와 이해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숙할 때, 은혜의 수단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새 사람이 양육되고 새 사람 안에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영적인 영역을 더 완벽하게 보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연약함을 알기에 특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영역에서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거나 기도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고 기도로 분투하는 우리의 행동이 필요하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나 하루 중 여러 시간에 기도할 때 영이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은 그러한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한다면,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기뻐하시고 항상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항상 우리의 최상의 복지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기도의 절반을 이룬 것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가치 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결코 아끼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기억할 때에 그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영이 이 생각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구절에서 우리에게 계시한 것처럼 성령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세번째 성령의 도우시는 기도 입니다

이 도움은 어떻게 표현하고 사용될까요?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에 대한 말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너무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러한 부족함 속에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갈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로 무엇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곁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시며 거기에 있는 영적인 갈등과 갈망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에 갈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고 올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이 모든 미약한 기도의 노력을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해석하신 다음 올바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하나님께 표현하십니다.

한 출판사에서 좋은 책을 만들어 출간하듯 올바른 교정과 아름다운 편집 후 책을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책을 출간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 불쾌감을 주거나 역효과를 낳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메신저로서 그는 기본 메시지나 요청을 받은 다음 우리가 수용할 수 있고 잘 넣을 수 있도록 그것을 다시 표현합니다.
성령의 중보란 이런 것입니다.

네번째는 이 성령의 중보 기도 결과 입니다.

이 중보기도의 효과는 27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바울의 추가 설명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등과 갈망하고 추구하는 죄와 불완전함 너머를 보십니다.
그는 새로 거듭난 우리의 진정한 갈망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 마음의 핵심을 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 마음이 갈망하는 그의 해석을 읽으시지만, 그는 변화된 것을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중보기도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개혁하고 청소하십니다.
영은 약간의 수정과 재작성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영원한 구원의 계획에서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해석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수정하여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십니다.
이 복된 성령의 사역을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할 때 힘을 얻고 기도할 때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 사역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기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무가치하다고 느낄지라도 성령의 이 사역으로 인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적으로 사탄과 싸우고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기도할 때 우리 곁에 계심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영을 알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합당하게 되고,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합심 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우리를 위해 항상 중보하는 성령님을 의지하시며 기도하시길 소망합니다.










07-09-2023

내 안에서의 투쟁(로마서 7:15-20)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서 벌어지는 큰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외부 적들과 맞서 싸움은 마귀와 대면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있는 불변의 상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죄성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신 사이의 끈질긴 싸움에 우리는 포함 되어있습니다.
이 두 라이벌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서로 적대적입니다.
이 싸움은 모든 신자의 영혼 안에 전쟁터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두 세력 사이에 합의된 휴전은 결코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어느 쪽도 백기는 결코 없습니다.
또한 휴전은 절대 없습니다. 전투는 계속 되며, 진행형입니다.
여러분이 이 내적 갈등의 강도를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우리 안에서 내적 싸움이 계속됩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신자 안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다른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는 내부 줄다리기를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로마서 7장 15-20절의 이 구절은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새 본성과 죄 있는 육체 사이의 싸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고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 이 말씀을 썼을겁니다.
바울 자신의 삶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죄 많은 육체와의 싸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바울 처럼 거룩함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싸움은 실제이고, 강렬하며, 지속적이고, 내적이며, 영적이며, 모든 참된 신자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 구절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보는 것과 같지 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 완벽하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나쁜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신자가 직면하는 죄와의 진정한 투쟁을 발견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7:15-20에서 우리는 바울이 계속해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도 그의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과 모든 신자에게서
발견되는 일곱 가지 죄의 실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는 당혹스러운 신비이다(7:15).

15절 전반부에서 우리는 죄가 곤혹스러운 신비입니다.
바울은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15절)라고 합니다.
바울이 “내가 하는 일”이라고 쓸 때 그는 자신이 죄에 가담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로 의를 구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리새인이었을 때의 삶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 시제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바울에게 그토록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당혹스럽습니다.
그가 경건과 거룩함을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큰 좌절의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진행되는 지점에서 죄에 빠짐을 발견했을 때 바울은 자신에 대한 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이 처럼 바울이 당혹스러운 모습에 신자인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느껴야 할 당혹감의 메아리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는 완전한 모순이다(7:15).

15절 후반 부에 바울은 죄와의 투쟁을 거룩함으로 창조된 그의 새로운 본성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하나니”(15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가 싫어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반전되었습니다.
그는 하기 싫은 일을 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에는 딜레마가 있는데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바울은 태만죄와 범행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는 태만의 죄는 그가 행하지 않았지만 행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행죄는 그가 행한 것이지만 행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는 내가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불명예스럽게 하는 죄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증인을 타협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전까지는 결코 영적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완전히 정직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도록 돕기 위해 바울의 사적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현실은 신자로서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아닐런지요? 생각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죄는 법적 범죄입니다(7:16).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법적인 범죄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을 좇는 것이요 율법을 좋은 것이라고 시인하나니”(16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자도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진정한 신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놀라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와 싸우지 않고 영광을 향해 질주할 수 있었다면 신약성경 열세 권의 책을 저술한 바로 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일지라도 바울은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죄 많은 육신과의 전쟁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는 성숙한 신자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신약성경은 “모든 죄는 불법”(요일 3:4)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확증합니다.
모든 죄는 율법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왕의 통치 법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늘과 땅의 주권자에 대한 도전적인 반역이라 말씀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자신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작은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대적인 반역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법치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에 대한 지독한 범죄입니다.

네 번째 죄는 내재하는 힘이다(7:17).

죄는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내재의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제”는 그가 현재로 말하고 있음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바울이 자신이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므로 잠재적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느님께 종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분리라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한 거짓된 계략 아래서는 어떤 죄도 그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몸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그 안에 새로운 본성이 있음을 인식합니다.
바울의 새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어느 날 천국에 갈 때 그의 새로운 본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죄 있는 육체의 구속받지 못한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계속해서 바울 안에 거합니다.
그의 죄의 근원은 그가 된 새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그의 안에 남아 있는 옛 타락입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더 이상 그 안에서 왕 노릇하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거”합니다.
그것은 그에게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꿈을 꿉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깨어납니다.
여전히 그와 함께 일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여행합니다.
매일 매 순간 그의 죄의 본성이 그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 있거나 피상적으로 우리 삶의 표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깊숙이 거합니다. 죄는 내재하는 힘입니다.
내재한 죄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 뿐이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죄는 상반 되는 힘이다(7:18)

죄는 신자의 새 본성과 반대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체는 멍에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중간 지점은 없으며, 그들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반대되는 힘입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나니”(18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된 새 사람은 분명히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주일에 교회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새 사람도 성령의 권능과 당신을 도우시는 그분의 능력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새 본성과 새 마음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일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립과 자족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역동적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의 반대되는 힘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죄는 경쟁하는 악 이다. (7:19).

죄는 경쟁하는 악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 방식에서 새로운 욕구, 새로운 애정,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악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악(kakos)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악한, 파괴적인 의미하는 강한 단어입니다.
악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성품과 완전히 반대되는 강력한 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속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이 악은 그 안에 있는 지배적이고 지배적인 세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는 강력한 힘이다.
더 이상 운전석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차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와 함께 타고 있는 뒷좌석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쳐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일곱 번째 죄는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7:20).

우리는 죄가 모든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실재임을 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7절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여 그가 죄를 짓고 있지만 진짜 바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 그가 회심한 것은 참된 바울이 아닙니다.
참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입니다.
죄가 그 안에 “거한다”는 것, “거한다”(oikeo)는 마치 다른 사람과 동거하고 집을 점유하는 것처럼 함께 살다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죄가 그 안에 집을 세우고 그 안에 거하고 있음을 재확인합니다. 그
것은 바울과 함께 집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고 결코 떠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항상 그의 어깨 너머로 보고 그의 귀에 속삭이는 영구적인 손님이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는 그 안에 사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와 죄에 대한 승리에 관한 우리의 큰 소망을 강조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의사 방문은 우리의 괴로운 진단을 보여줌과 같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에게 건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처방을 줄 것입니다.
올바른 진단이 치료의 절반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올바른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여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의 현실, 즉 정확한 진단을 상기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잘못된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이 구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질병에 대한 처방은
로마서 7장 끝에서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했을 때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인해 우리는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죄에 대한 점점 더 큰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더욱 발전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29).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성숙한 신자에게도 계속되는 죄의 문제를 봅니다.
그러나 앞에 놓인 구절에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하나임을 믿음으며, 우리 악과 마지막 그날까지 외적과 내적 분쟁을 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06-18-2023

하나님 사랑이 칭의입니다.





로마서5:6-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칭의(일컬을 칭, 옳을 의)란 한자 그대로 표현한다면 옳은 것을 일컷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의롭지 못한 죄인을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세상에서 도 부끄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것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왔슴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한 구절에 멈추었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나 자신을 한번 생각 해보았습니다.
이 구절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하는 말씀이라 생각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이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주제이며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고 있었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에 대해 신선하고 강력하게 선포되는 말씀이며 다시 들어도 믿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자에게 귀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연약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상태입니다.(6절)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고, 계명도 그와 같으니 우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가끔 영적 무력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무력감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이 아닌 악한 영이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매일 악한 영에 시험당하고, 위협 당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도록 약한 영에 지배되어 끔찍한 일을 버리고 살아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많은 사랑의 혜자이지만 그분에 대해 생각하거나 숭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죄를 고백하는 시간 보다는 우리는 세상을
즐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차가워 질때 주님은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은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지만 주께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완전히 변화시키려면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필요한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분은 본인을 사랑하면 본인을 의심하는 모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을 사랑하며 확신하면 그 또한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접촉하게 되든 – 따뜻한 방법이든 우리에 대한 적대적인 분노의 방법이든 간에 – 그 사람은 우리의 이웃이 되며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
우리는 꾸준히, 충실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은 우리가 무력(연약)하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에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6절).

하나님이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를 화나게 한 방식에 대한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세상과 평화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모든 면에서 완전히 선하고, 자신의 말을 충실히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시간과 행동의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분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일부 남자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리이까?”
그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거룩하고 죄를 미워합니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표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그분께 고백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모든 행동을 반대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그에게 올 수 없다는 말을 귀기우려야 합니다.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음으로 그를 원수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8절).

바울은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 위에 넓은 틈이 10미터 너비의 틈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그 틈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들과 노인들과 병든 사람들은 2미터나 3미터를 뛰지만 보통은 6에서 8미터를 뛸 수 있지만 운동 선수가 아니면 9미터 이상을 뛸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운동 선수의 기준이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의 표준은 그분의 영광, 그분의 빛나는 완전성, 그분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며 비열함이나 조급함이나 편협함이나 이기심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친절이 풍부하십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그는 그의 도덕적 완전성이 풍부합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인데 우리는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녁을 놓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의해 하나씩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 중 어떤 것에는 80%의 순종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목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고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저주에서 그분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오용함으로써 우리의 말을 긴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그분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힘을 구합니다.
우리는 특히 늙고 연약할 때 사랑으로 섬기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 음행, 도둑질, 거짓말,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삶을 위해 설정하신 목표이며, 우리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 걱정과 그심과 불만이 가득 차있는 우리 모습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이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그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를 미워하고 죽기를 원했던 사람.
그분은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영원히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광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 생각 해보면 우리 역시 죄인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으며 또한 오늘 말씀과 같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여 예수를 재물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증거로 칭의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졌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무서운 웅덩이와 수렁에서 홀로 올라와 우리의 모든 진흙을 씻어내고 우리를 위하여 새 마음을 만들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또 넘어졌어.
나쁜 짓을 하다가 ‘당연히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고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럴 때 도움이 필요할때, 그럴 때 우리의 도움은 우리의 구원이 기초를 두고 있음을 기억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누구였습니까? 예수 였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럼 우리가 낙담하거나 그가 지금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완전히 죄인이었을 때, 힘도 없고 하나님께 바칠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끔찍한 악당을 위해 누가 죽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 죽는 자, “그를 없애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글쎄, 적이 누구였는지?
혹은 우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를 거닐며 그의 시냇물을 오염시키고 대초원을 먼지 그릇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얼굴에 내 주먹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항상 그를 숭배하지 않는 수많은 변명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바울이 &quot;적절한 때&quot;(6절)라고 부르는 때, 즉 우리가 구원받을 적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이웃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에게 적합하고 적절한 시간, 우리의 무력함과 죄의 시간, 그런 다음 우리가 극한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동정녀의 태와 목수로 잔인한 수치의 십자가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일어나셨고,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는 희망!
이제는 넘어져도 예수님의 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력할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뻤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토하고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때맞추어 영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어떤방식 으로 반응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을 때” “다 끝났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넘어짐에 절망에 다끝났다라고 반응하면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등이 삶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 보다는 옳은 선택해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행동은 우리의 죄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을 열 배 더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한 우리의 용서를 점점 더 깨닫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전에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하물며 그의 아들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셨으니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칭의의 축복으로 기쁘고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는지 하나님께 감사며, 충성하며, 헌신하며 매일 고백하며 살아 가시길 죽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서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연약(771) 아스데네마(asthĕnēma)  ἀσθένημα, ατος, τό 

1. 약함,  2. 연약,  3. 신앙의 약함에서 기인한 양심의 가책
발음 [ asthĕnēma ]
어원 / 7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약한 자(롬 15:1)
신약 성경 / 1회 사용

기약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은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한 순교자로 뿌려지는 복음 05-07-2023
사도행전 7:55-60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은 부활절 시즌에 많이 읽혀지며 기독교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에 대해 배움을 줍니다.
우리는 오월 마지막 주일이 오순절로 맞이하며 벅찬 가슴으로 예수님께 감사하며 오순절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대해 나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울에서 바울로 가는 과정인 사울의 회심에 대해 알게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 안에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많은 믿는 사람들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음식이 분배되지 않았고 과부들은 일부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 앞서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택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단어는 메신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토로스(Apostolo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제자라 부르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들은 메신저로 파송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 이들에게 사도로 기도하고 안수했다고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백성 중에 행한 자로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과 변론하려
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지혜와 성령을 능히 당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고발하기 위해 그를 의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평의회에서 매우 긴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7:51-53 의 마지막 말로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말씀으로 스데반 집사은 유대인을 자극 하게 되고 이 자극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자극으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54절 이후로 전개 됩니다.
저는 오늘 55절 이후의 말씀으로 스데반의 대답 같은 순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믿음 생활를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순교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고 요즘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교사 들이 전하는 현지의 상황으로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상상을 합니다.
그곳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이고, 부족한 환경인가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끔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목숨 잃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정말 아주 가끔 뉴스를 전하여 듣곤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누군가 모르는 곳에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를 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곳 자곳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시며, 순교자로 살아가기를 헌신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의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곳에서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은 거짓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사드락,메삭,아벳느고에 관한 다니엘의 책에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출석하며 세 청년의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이들의 젊었을 때 시험이 있었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타지 아니한 세 사람, 그들은 살아날 줄 몰랐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하웰(James Howell)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이야기에서 이 불의한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일하시지만 원인은 아니십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며, 소망은 이 땅의 삶을 넘어선 것입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삶의 비결은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이유를 찾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1965년 Martin Luther King, Jr.가 셀마에서 행진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옳은 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면 살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마도 그가 큰 연설을 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부분은 그것 때문에 복음의 진보가 퍼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 중 한 명 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동의한 사울. 사울은 나가서 믿음 때문에 남녀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울은 여전히 그가 다메섹 도상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야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님, 저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의 공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나니야가 알지 못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나니야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고 사울의 마음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독교 개종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누군가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긴장했거나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어느 선교사를 통해서 돌 같은 마음을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를 확인해 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계속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수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면서도 때때로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성령을 믿는다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의심하겠습니까?
우리가 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순교자(Martyr)는마루투스(μάρτυς)
증인 μάρτυς;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자체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유사합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주님께 간청한다는 점에서 단어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은 오래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에는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45년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독일 출신의 39세의 루터교 신학자였습니다.
Bonhoeffer의 첫 번째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세상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quot;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우리 동족과 나누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quot;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갔고 나치가 항복하기 불과 며칠 전에 그의 처형이 명령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작품과 글은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유산은 지성과 영적으로 뛰어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의 그의 삶이 그가 설교한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스카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의 용감한 사제였습니다.
그는 정권이 반대자들을 살해하던 시기에 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로서 그는 그들에게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군인들이 와서 그를 조금 거칠게 대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것이 그의 다가오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메로는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대부분의 엘살바도르 사람들처럼 그 병사들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니 일부 병사들도  &quot; 당신도.&quot;
그의 추종자들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폭력의 현장이 자비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의 무기는 전쟁의 무기보다 강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전파한다면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죽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기도 해봅니다.
“나의 삶이 천국의 완성이 아니라, 앞서 간 성도들과 선교사들를 뒤따를 성도들과 함께 십자가의 구원에 동참하는 삶이 되게하옵소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hbuhr)의 말을 옮기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미래는 우리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전적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을, 그리고 교회의 씨와 복음 전파의 일 동참하길 다짐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증인(證人)(마르투스. martüs )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1. 증거
발음 / 마르투스(martü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증인(마 18:16, 막 14:63, 눅 24:48)
신약 성경 / 35회 사용


04-165-2023
이호승목사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19-23



03-05-2023
이호승목사



제목 / 거듭난 자의 삶
성경 / 요한복음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You should not be surprised at my saying, 'You must be born again.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는 거듭났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거듭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거듭난 자의 삶에 관한 비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거듭남이란?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겐네데 아노텐’의미는 하늘로부터 태어나다.
또는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 의미는 육적인 출생이 아닌,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개인들이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함 받고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 새롭게 거듭난 영혼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영혼으로 분별되며, 사모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거듭남 이란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왜 거듭나야 할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율법 학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한다고, 사실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도덕적으로 모범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모범인 니고데모에게 왜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까요?
말씀의 의미는 도덕적 으로 모범적인 사람도 중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육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적이 아닌 영적 중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갱생은 중생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갱생은 마음를 새롭게하며, 몸 가짐을 바꾸는 행실이지만, 중생,거듭나는 것은 심적, 영적, 행실를 모두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5절)
첫 번째 거듭남을 물 세례이고,
두 번째 거듭남은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를 시작하면 학습세례를 받은 후 물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 세례를 받는다고 우리가 바뀌었나요?
바뀌었다면 무엇이 바뀌었나요?
세례에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자신 구원자로 영접 할 뿐 자신이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 모든 일에 자신이 다 했다고 생각 할때 다시 전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질 수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성령의 힘은 무 한계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셔서 직접 역사 할때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어가는 영과 육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거듭났다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즉 너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아니라,
거듭남은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삶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거듭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믿음 생활 하면서 거듭남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거듭남에 대하여 생각도 못했고, 경험도 없다면 우리의 과거의 믿음의 삶이 니고데모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듭난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우리의 자세 즉 믿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첫 번째 예배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두 번째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세 번째 기도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네 번째 타인을 대하는 자세, 즉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위에 다섯 가지가 달라짐으로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거듭남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 충성돤 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2-12-2023
이호승목사




제목 / 순간의 선택
성경 / 신명기 30:15

오늘 함께 하실 말씀의 주제는 ‘순간의 선택’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삶의 중요한 선택에 관한 것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택에 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선택을 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 가지가 다 포함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보기를 주시고 그중 너희가 선택하라는 예제를 주셨습니다.
확실히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갈림길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때 그분이 우리를
어디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 해야합니다.

신명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 세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모세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 동쪽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새 땅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상기시켰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신앙여정의 다음 주요 단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전체가 이 특별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는 신명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 앞에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제 그의 삶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서서 고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선과 악,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사이의 선택권을 준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삶을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섬기십시오.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분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분께 충실하면 약속의 땅에서 잘될 것입니다.
그에게 불순종하면 문제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택이 거의 40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여졌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 새 땅,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의 부모를 어떻게 구해 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 곧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곧 지키게 될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지휘봉을 여호수아에게 넘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그 새로운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길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이 새로운 경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모세는 염려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그들을 다시 완전히 노예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세력의 올무에 걸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하는 선택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무엇이 위험 있을까?
모든 것. 이것은 아이스 라떼 와 핫 라떼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Fish sandwich에 Tartar sauce 와 마이오네즈 캡찹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과의 관계에 다시 헌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할례로 상징되었습니다.
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에 빠졌을 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자적 의미에서나 영적 의미에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포로를 상징했습니다.
이집트는 속박과 노예 제도를 상징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새 땅으로 이주했을 때 그들이 애굽에서 육체적 노예였던 것처럼 영적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많은 유혹에 직면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강력한 세력이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백성들이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모세는 영적 노예 상태를 피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생명과 평안, 즉 풍성하고 놀랍고 즐거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절망과 고통,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냉혹하고 설득력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에 가까워졌습니다.
긴 지체 끝에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판돈은 매우 높았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오늘 아침 우리의 본문은 결정에 관한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관해서는 &quot;선택&quot;이라는 개념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 그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의 수단, 즉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길이나 세상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루터의 교리문답에서 사도신경의 세 번째 항목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이성과 힘으로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거나 그분께 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복음으로 나를 [선택]하셨고, 그의 은사로 나를 비추어 주셨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참된 믿음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느 날 새 땅의 문턱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과 그분의 길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표류했다면 어떻게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거룩한 성사를 통해 그분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분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다른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것, 즉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에 대해
&quot;아니오&quot;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최우선에 두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심지어 이 지상
생활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보다 앞서 있기도 합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분을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분은
구원과 영생의 문을 열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경험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능력으로 우리는 이제 그분을 위해
삽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은 핵심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오늘 말씀 통해서 우리 모두가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 삶을 책임지어 주시는 성부,성자,성령을 나는 귀한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1-22-2023
이호승목사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oAQbN9hLW30


교회의 지침서 I
고린도전서 1:10-18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한글개역 개정

세상에는 가족, 학교, 단체, 회사, 교회등 각기 다른 공동체있고 각기 지침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침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공통점이 사랑과 나눔입니다.
이것이 화합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지침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라고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성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강조하며, 10절에서는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첫번째 “분쟁 없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왜 이러한 지침을 가져야할까요?
9절에서 바울이 말씀했뜻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기독교인들이 구별되어야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받았지만, 세상의 다른 단체는 각기 단체장과 단체원들이 필요에 의해 부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부름 받았기에, 교회의 큰 일치는 회중들 한마음과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평강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힘써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합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제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가질때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보다 못한 것은 결코 진정한 통합을 가져올 수 없으며, 비록 교회가 아무리 온화하고 평화적일지라도 항상 분쟁과 분열 있다면 하나님을 섭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지라도 이모습은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지침은 아닐겁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지침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두번째 잘 못된 섬김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있는 고린도의 종교인들 모습은 어떤가요?
그들은 로마인과 유대인으로 나누이고, 종파를 나누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모습은 고린도 교인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이면, 그들은 논쟁과 분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네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12이는 다름이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나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당시 교린도 교회 회중들의 모습은 종이가 찢어지듯 갈라질 위기에 처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를 위함일까요?
무엇을 위함 일까요?
이들은 어느 목사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어리석은 모습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중요한가요?
분명한 것은 누구를 지도로 따를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런한 일들이 발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논쟁과 분쟁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기적인 생각과 주장이 아닐 생각합니다.
논쟁과 분쟁에 중심이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계셔야함에 인간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 연합하지 못하는 것 중심에 누가있습니까?
교회의 리더 그 리더가 하나님의 중심 생각이 아닌 자신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 일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교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만 따른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논쟁과 분쟁을 만들어 교회를 쪼개는 그들를 함께 비꼬듯이 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무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 들과 마찬가지로 틀렸고 교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그리스도, 아볼로와 그의 동료들을 위한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조차 이미 예수를 따르는 자세가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정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 안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리더나 성도들이 있지않을까요?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약하고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지도자의 이름으로 세례 받지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의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하나요?
목사도 장로도 아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믿음 생활하시면서 누구에게 충성을 다하셨나요?
우리는 사람을 것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신뢰 해야할겁니다.

세 번째 참된 지혜와 유일하게 참된 연합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보내신 것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설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 십자가 아래 모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연합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삶, 죽음, 부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결정적이고 분별적인 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아래에 있는 우리의 위치, 즉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열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고 하나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스스도인으로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으므로 우리 예수와 하나가된것 아닌가요.
또한 우리가 하나 될 수있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을 갖기 위해 항상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예배와 봉사에서 우리를 연합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대륙에 남녀노소, 인종을 뛰어넘고,세대를 넘어 그분의 사랑하는 교회로우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첫번째 교회의 지침은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하나가되는 것입니다.




















주보


• 04-28-2024 / 부활 후 제 5 주

* 신앙고백
* 찬양 인도 / 황선민목사
* 설교 / 이호승목사
* 제목 / 내 안에 거하라
* 성경 /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기도 /
* 찬송 491 장(귀하신 친구내게 계시니)
* 축도 / 이호승목사
* 교제 / 기도 황선민목사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자
영국의 설교자 스펄젼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 ~ 1892. 1. 31)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은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때로는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간증(干證)이 마치 굉장한 믿음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려면 인간의 감각과 경험과 눈으로 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베드로는 아주 노련한 어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6). 성경을 육신의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 읽는 방법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라고 합니다.
이번 주부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한일서를 만나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 요한일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소개하는 주제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승혁목사 설교 자료(2023. 2024.


5월 12일 
어버이주일

효를 행하라(디모데전서 5:3-4)



효(孝) : 효도 효

부수 / (아들자, 3획)
모양자 / 子(아들 자) + 耂(늙을 로. 엄 로 노)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노인 노. 늙을 노(老)

부수 / (늙을 노 6획 [耂]
모양자 / 耂(늙을로엄 로(노)) + 匕(비수 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시야(Josiah)라는 랍비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참으로 복을 받은 자로다.
이제 백정 네네스 옆에 서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깨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위치가 백정 옆이라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백정은 매우 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왔는데 백정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공부를 그만두고 기도도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위합니다. 그러다 문득 백정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만나 보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백정 네네스는 유명한 랍비가 찾아 온 것에 너무도 황송하여 문 앞까지 나와 영접하고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셨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무슨 선한 일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 옆에 서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게". 네네스는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또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변명합니다. "나이 많은 어머님을 모시느라 저는 회당에도 잘 나가지 못했으며, 좋은 일도 많이 하지 못했으니 용서해달라" 는 것입니다. 랍비가 그의 어머니 계시는 곳에 가보았더니,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기동을 전혀 못하시고 대소변도 못 가립니다. 네네스가 늘 어머니 옆을 지키며 대소변을 가려내고,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랍비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야 저의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백정 네네스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행위인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2백년 전에 선교사들이 중국에 선교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교문화에 깊이 젖어있는 중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모여 궁리합니다. 기독교가 효의 종교인 것을 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전도지에 효에 관한 성경 말씀을 삽입키로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의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장 17절의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는 말씀들입니다. 옳습니다. 기독교처럼 효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효도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살 자격도 없으며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도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고 강조합니다. 자녀나 손자들의 앞에서 부모님께 효를 행하여 그들로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효를 행하다' 는 말은 '유세베오' 라는 단어로서 '존경하다, 경배하다' 는 뜻입니다. 즉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를 존경하며 효를 행하여 본이 되어야 합니다. '효를 행하라' 는 것은,


첫째, 힘을 다해 순종하라

어느 마을에 화목하기로 소문난 집이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마다 그 집을 부러워합니다. 한번은 화목치 못한 집의 노인이 화목한 집에 방문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집의 노인은, "우리 집이 왜 화목한지 보여주겠다" 며 큰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내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불러라." 나이가 40이 넘은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을 부릅니다. "뒷마당에 가서 감을 따오너라" 하고 명하였습니다. 감 열매가 겨우 맺히기 시작하는 철인데 둘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감 열매를 따왔습니다. 셋째 아들을 불러 "막내야, 외양간에 있는 소를 지붕에 몰고 올라가라" 하십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은 소를 몰고 지붕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야단법석을 하더랍니다. 그때 노인은 말합니다. "우리 집안의 화목은 자녀들의 순종에 있다네."

'순종하다' 는 '휘파쿠오' 란 단어입니다. '밑에서' 라는 '휘포' 와 '듣는다' 의 '아쿠오' 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말로서 '아래서 듣는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진지하게 진솔하게 듣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선택해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 순종하십니까? 힘을 다하여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님께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전심으로 공경하라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아이가 돌아와 무엇인가를 열심히 외웁니다. 부모가 잘 들어보니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제5계명을 외우는데, "네 부모를 공격하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어." 그러자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아빠, 공경하고 공격하고 뭐가 달라요. 똑같은 것 아니에요." 그 아이는 공경이라는 말이 어려워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공경이라는 말의 뜻은 바로 공격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은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 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귀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무식해도, 얼굴이 못생겼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일이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말의 원어인 '티마오' 는‘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친밀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부모를 존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순종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의미한다면 공경은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은 엄중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 공경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다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부모 공경은 그보다 우선입니다. 부모 공경은 기본 윤리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부모 공경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부모 없는 자식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 공경이 가정의 기초 윤리임을 깨달아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정성으로 보답하라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Garfield)가 대통령 취임하는 날, 시간이 다 되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 후 대통령이 한 노인을 부축하며 식장에 들어섭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가필드는 늙은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안 가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제가 이렇게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라며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며 말하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날 복잡한 장터에 홀로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그냥 말없이 울며 서 있습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선생님, 왜 그렇게 서 있습니까?"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50년 전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헌 책장사를 하셨다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불편하니 네가 하루만 이 자리에서 일해다오. 약속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니 그 분에게 이 책을 드려라' 고 하셨는데 나는 '아버지가 헌책 장사하는 것도 창피한데 내가 왜 그 일을 해요' 하면서 거절을 했다네. 그러자 아버님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시며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그 날 일하셨네. 그런데 그 일이 무리가 되었던지 그 날 이후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시다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은 부모님의 은혜에 얼마나 보답하며 사십니까? 혹시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하여 울고 서 있는 양심은 아닙니까?

본문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여기의 '보답하다' 라는 말은 '보상을 갚는다' 란 말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되돌려 드린다는 뜻입니다. 즉 효란 부모께로부터 받은 것을 자식이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부모님의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곧 효를 행하는 것을 자녀들로 손자들로 배우게 하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내가 주체이지만 '배우게 하라' 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손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먼저 부모에게 보답하는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효자 집에 효자 난다' 고 말합니다. 효자인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 자식이 배워 효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을 부모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녀들이 어찌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겠습니까?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효도 실천 십계명'을 가르칩니다. 첫째, 부모에게 신앙을 갖도록 해드려라. 둘째,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라. 셋째, 표정을 밝게 하고 웃음을 잃지 말라. 넷째, 궁금증을 풀어드려라. 다섯째, 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려라. 여섯째, 향토적인 음식을 해 드려라. 일곱째,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려라. 여덟째, 일거리를 드려라. 아홉째,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드려라. 열째, 등을 긁어드리고 손발톱을 자주 깎아드려라.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효를 행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돌보아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 생전에 효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효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구원받게 하는 일임을 더욱 명심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효를 행하여 자녀와 자손들이 본 받을 수 있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힘을 다해 순종하며, 전심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해 보답하며 사는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월 21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397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공동번역)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NIV. 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세상(2889) 코스모스(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1. 장식.   2. 세상.  3. 고전 4:9.
발음 [ kŏsmŏs ]
어원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천하(마 4:8, 막 8:36, 눅 9:25), 세상(마 5:14, 고전 1:27, 계 11:15), 천지(행 17:24), 세속(약 1:27), 세계(약 3:6),
단장(벧전 3:3).

요한일서 2:15-16 /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5:19 / 악한 자 안에 처한 곳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NIV)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

에베소서 2:2-3 /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이와 같은 세상에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라고 하겠습니다.
(건 행 성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를 한마디로 "건행성(健幸成)"이라고 하겠습니다.
<굳셀 건, 다행 행, 이룰 성>
'건행성'이란 "건강(健康. health)"과 "행복(幸福. happiness)"과 "성공(成功. success)"이라는 세 단어의 첫 글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카드 하나를 받았습니다.
카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께
매일 저는 목사님을 영상으로 뵙고 항상 좋은 메세지로 예쁜 카드로 기쁘게 해주시는데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3개월 넘게 한꺼번에 일이 겹쳐(이사, 몸도 많이 아프고, 손님 또 힘들게 도와줘야 할 일 등) 너무 무리를 해서인지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견디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지요.
건강 유의하시고 가족 모두 편안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Georgia에서 Mrs 유 드림

카드를 받고 즉시 카톡으로 사진을 찍은 후에 짧은 글과 함께 사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그 편지가 작년에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를 확인하였더니 우체국 직인이 18 AUG 2023 PM 9
작년 8월 18일에 발송한 카드가 4월 11일 2024년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무려 8개월 후에 카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8개월 후에 응답될 수도 있겠구나!
한번 발송한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겠구나!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를 바라보자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All flesh is not the same: Men have one kind of flesh, animals have another, birds another and fish another.

육체(4561)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뜻풀이부

1. 육체.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 1:24.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 1:24.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 2:23.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 1:1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누가복음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 시체(소마) 4983.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18:13).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Spiritual Body

고린도전서 15:44.  46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The spiritual did not come first, but the natural, and after that the spiritual.



소마 프뉴마티코스(4983.  4152)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 18:13).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에 관한, 영적.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 6:1.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마음의 평강 등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패학을 통한 교훈 쌓기, 리더십 훈련, 영향력 증대, 효과적인 조직 관리, 갈등 관리, 재테크, 각종 영업 전략 세우기,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성장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질적 성장이나 성숙보다는 양적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면 건물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고민도 하게 되고, 또 더 큰 예배당을 확보하여 축제와 같은 예배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성공'이나 '행복' 또는 '물질적인 축복', '건강의 축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인에게만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악인에게도 똑 같은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물질적으로 풍부했던 부자는 진정한 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던 사람임을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풍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시면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12절에서는 세상을 이긴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일서 2:15-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16절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으로 번역한 '코스몬'의 원형 '코스모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의 활동 공간 및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사상과 기치관 등을 의미합니다(롬 12:2 ; 엡 2:1-2).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훈 목사님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자녀들에게로 가시게 되었다고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10년 동안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내 심장병이 나았습니다.”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수해 준 적이 없어서 “언제 제가 안수해 드렸습니까?” 물었더니 그 할머니 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목사님을 만나 손을 잡을 때마다 한손은 자기 가슴에 얹었답니다. 
자기는 그것이 10년 동안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은 것으로 믿었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심장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음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요한일서 5:5-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물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물세례
* 피 - 육체로 오신 예수님

예수의 피 즉 예수의 보혈(寶血)

1. 겟세마네의 보혈(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2. 가시 면류관의 보혈(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마태복음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요한복음 19:2. 5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3. 채찍질의 보혈(마태복음 27:26)


* 이사야 53:5


4. 십자가의 보혈(마태복음 27:35)


* 요한복음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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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의 피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지난 3월 31일 부활주일 예배 때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자!" 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체(屍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푸쉬케"라고 합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조에"라고 합니다.

'조에'라는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합시다.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코스모스


둘째, 요한일서 2:15-16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속


셋째, 요한일서 5:19

마귀가 지배하는 곳


넷째, 에베소서 2:2-3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예수는 누구이신가?


요한일서 5:5-7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령으로 증거


물 - 물 세례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피 - 육체로 임하심

성령 -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 죄 사함의 능력(구속의 능력)     

세상을 이긴 자가 얻을 것(요한계시록 2장, 3장)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나의 적용(適用) 


내가 갖고 있는 문제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으로 물든 도덕적 체계나 사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성도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들과 벗삼게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약 2:4).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이러한 세상의 악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싸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 이기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4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절)
5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 세상

무엇으로 :  믿음으로

​성경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했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물과 피와 진리이신 성령이 증거하였습니다.
물로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포하면서 증거한 것을 말합니다.
피로 증거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징조들을 통해 증거하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만을 증거하시는 분으로서, 그 분의 증거는 참된 증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세상에 임하신 분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분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셋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둘 이상의 증인들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일치되는 한 가지 증언을 지속적으로 하듯이 성령과 피와 물은 완전히 일치되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 되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모든 악과 죄에 관하여 한 증인이 아닌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사건을 확정하라고 하였다.
물과 피와 성령, 세 사람의 증언이 있으니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증언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직접 증거해 주셨습니다(9절).
사람들의 증언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게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선포하셨으며, 변화산에서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2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심을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1-6, 마가복음 9:2-13, 누가복음 9:28-36을 살펴보면 변화산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질 때,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다양한 말로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거짓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세상의 어떤 것들일까요?

​'세상'을 좁은 의미로 보면,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겨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대인관계 기술, 처세술, 속이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 남을 헐뜯는 말, 비방하는 말, 형제를 대적하여 이길려고 하는 마음, 물질만능주의,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 교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이단들의 미혹을 이겨내어야 합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인 유혹도 이겨 내어야 합니다.

​핍박을 이기는 것보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핍박은 공격할 시점과 방법들이 이미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만 있으면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접근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생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할 수 있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생명,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생이 있는 자는 육신적 사망 이후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고 하였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얻게 됩니다.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러한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나아가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런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신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혼돈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믿음 외에 또 다른 영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동체 내에서 확신이 부족한 자들에게 또 다른 영적 지식(영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속에만 승리가 있고 영생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주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승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도록 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장차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육체의 연약함과 병듦과 장애를 갖고 살아갈지라도 그 날에는 천사와 같은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날의 영광된 삶을 생각하며 날마다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기뻐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 생명의 면류관은 다음 설교 자료




생명의 면류관(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lessed is the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because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the crown of life that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Do not be afraid of what you are about to suffer. I tell you, the devil will put some of you in prison to test you, and you will suffer persecution for ten days.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and I will give you the crown of life.

신약 성경에서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용어가 2번 사용되었습니다(야고보서 1:12, 요한계시록 2:10)

부활주일 설교 때에 사람의 몸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 자연인
둘째는 시체(屍體) - 영적인 몸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 신령한 몸

부활 신앙이란 육체를 소유한 자연인이 신령한 몸이 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단계를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 영원한 삶을 시작할 때 얻게 되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강도가 오른편과 왼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 중에서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봉사도 하지 않았고 헌금도 하지 않았던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면 일생동안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도들의 신앙과 비교할 때 똑같은 구원을 받는다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과 환난에서 인내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이기는 자가 받을 영생의 복이다(약 1:12, 계 2:10~11, 딛 1:2).
마귀와 싸워 이기는 자가 받게 되는 12가지 복 중 하나이다(계 2~3장).



구원이란 단계에서
따라서 부활 신앙이란 "생명의 면류관"을 기대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 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요한계시록 2:10






주제2: [서머나 교회]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Johnson, Moffatt)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 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본 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역경, 고난, 환난, 박해를 의미합니다.
2절의 ‘시험’, 3절의 ‘시련’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금속이 어떤 검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귀금속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진품으로 인정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디면 진짜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영생을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구원행로입니다.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시험을 참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고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시험도 참고 견디어냅니다. 복 받기 위해서는, 인정받기 위해서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시험의 길’을 반드시 넘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길은 결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시험이 닥치면 묵묵히 참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인내하며 견디기만 하면, 복이 있고, 인정을 받고,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오직 정도(正道)뿐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참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복의 개념은 수고와 노력과 죽음을 초월한 인내로부터 오는 삶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초월한 인내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한마디로 “신앙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고난을 인내로써 승리하여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기쁨인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센 믿음과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굳게 서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한마디로 팔복은 세상적 가치를 초월한 자,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만을 인정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시련을 견디어 복 받을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시편 1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와 같이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고 견딘 자를 인정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어 통과해야 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딘 복 있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큰 상급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구원의 때에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한정된 생명이 아니라 무한정한 끝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전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면류관’은 최후의 승리자에게만 주었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생의 시험과 시련을 다 견디고 극복하여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아 승리자로 인정받아서 면류관을 승리의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반드시 이 상급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즉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시련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에게는 생명 대신에 죽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썩어져가는 세상의 것을 사랑하다가 사막의 풀 같은 신세가 되지 말고, 오직위의 것을 사모하여 모든 시험과 시련을 견디어서 복 있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서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게 되시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아울러 이 땅에서도 복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한 강도 이야기가 남긴 교훈(누가복음 23:39-43)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가 되신다 

이사야 63:1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시기 에 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여러분들은 이 회개한 강도가 처했던 상태보다 더 절망적인 상태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 니까? 그는 행악자인 강도였으며, 율법을 범한 대가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죽어야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의 목숨은 시간 문제였고, 그의 죽음은 한걸음밖에 남지 않았으 며, 그의 영혼은 지옥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어가던 강도는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다시 말하면 그의 영혼을 돌봐주기를, 그의 죄악이 사하여지기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 으로 옮겨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 문은 닫혔고 자비와 은총이 멈춘 상태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받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아직도 무니 열려있고 자 비와 은총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직접 대답으로 확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 성경 속에서 구원받은 영혼들 중에 이 회개한 강 도처럼 자신의 구원의 확증을 직접 예수님께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217.

예수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지옥의 문 앞에서 끌어올려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을 완벽하게 증거 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장 연약하게 보인 때에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주 님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 한 죄인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7:25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를 온전 히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던 이 죄인이 불속에서 타다 남은 나무 토막처럼 불속에서 끄집어내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기도로서 당신 앞에 나온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며 어떠한 죄인 이라도 회개하면 영접해 주십니다.

이 강도는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만찬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도 않았으며 헌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강도의 믿음은 하루도 못된 단 몇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그리스 도에게 인정되었으며 그를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해 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많다할지라도, 우리들의 나쁜 습관이 날이 갈수록 고질화 되어 간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고칠 수 있으며 끌어올릴 수가 있으십니다.

천국이 우리들에게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 다. 바로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이는 구원을 받는데 다른 어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강도는 다 같이 그리스도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자기를 죽이려는 무리들을 우하여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참혹하게 고통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회개할 때 다른 한 사람은 마음이 강팍한 채로 있었으며, 한 사람이 기도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한 사람이 낙원으로 인도될 때에 다른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강도는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동일한 입장 이였고, 동일한 기회를 가졌고, 동일한 사건을 보았습니다만 두 사람 다가 아니라 한 사람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사건은 두 사람 중 기회를 선용한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방임하고 있는 많은 이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 아직은, 좀 더 있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마치 회개한 강도처럼 죽음 일보직전에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강도만을 생각했지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좌지우지 할 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218.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빛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빛의 자녀 가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동시대의 사람 이였고, 동일한 지위를 누렸으며, 동일한 선지자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구원을 받았고 사울은 버 림을 받았습니다.

부부가 같은 예배에 참석하여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나 남편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부인은 전혀 무감각한 채로 교회당을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 가운데 머물면서 여러분의 원하는 때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물론 우리 앞에 문은 항상 열려있으며 우리의 생명이 지속 되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생명을 오늘 밤에라도 하나 님께서 취하신다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에 소금기둥이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 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예뻐하심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를 놓친 회개는 거의 가 진실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회개한 강도의 구원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 라 구원받지 못한 다른 강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강도의 신앙

여러분들은 회개한 강도가 남긴 신앙의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왕국 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께 가하여진 모든 형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께 기 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언제 있었습니까? 어디에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모모든 백성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칠 때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 인들이 신성 모독죄로 사형판결을 내렸을 때에, 주님의 제자들 마져도 도망쳤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 흘리시며 저주받은 자로 죽어가던 때에, 바로 그때에 십자가상에서 그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으며 그에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세계가 창조된 이후에 이어ㅣ 같이 놀라운 믿음의 모 범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강도의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가련하고 불쌍하고 경멸당하고 멸시받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발견하여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연 찾아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처음 으로 고백한 위대한 신앙입니다.

또한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순전하고 무구함을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변증가입 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은 표적과 이적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지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뛰어 가고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가 정상인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제자 중 몇 사람은 변화 산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으며 장차 되어 질 언약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제자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219.

그들의 신앙은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들의 신앙은 거 짓말 이였던가요?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아 온데 뉘게 가오리까? 의 대답은 허공중의 메아리 이였던가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주님의 모습밖에 보 지 못 했습니다. 그 강도는 어떤 능력이나 영광이나 왕관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천국을 믿었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고서 자기의 영혼 을 그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죄악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 았으며 그 강도는 자기 죄를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한 강도의 신앙, 그의 기도, 그의 겸손은 그가 입으로만 회개한 자 가 아니라 행위와 진리에 있어서도 회개한 자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넷째, 죽은 후에는 낙원으로 간다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 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기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오늘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카토릭이 말하는 “연옥 설”처럼 죽음과 천국에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정화되는 변화과정을 거친 후에야

천국에 적합 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에 간다고 말 씀 하셨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의 분리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이 결합하여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애통하며 장례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영혼은 낙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즐 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20:3절에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했습 니다. 욥기3:7절에는 낙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태라면 여러분 들은 지금 지옥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천국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의 모범을 교훈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 이였으며, 전연 찾아 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고백한 신앙 이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외 친 신앙 이였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해야 된다 는 것을 다시한번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죽음 저편에는 낙원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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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부활주일 설교
부활의 주만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 예수만 바라보자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주 - 죽음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권능의 주 - 사탄의 권세 즉 사망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말씀의 주 - 말씀으로 창조,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심

"위기를 기회"라고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위기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선교에 성공한 나라"
둘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

그런데 현재 한국의 현실은 두 가지 성공한 사례에 대해서 계속 발전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두 가지 이념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좌경화인가?
우경화인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회 절기에서 회복의 기회를 찾는다면 세 가지 절기를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세 가지 절기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핵심에서 찾는다면 "창조신앙(무<無>에서 유<有>)" "부활신앙(죽음<死>에서 생명<生>)" "재림신앙(거짓<僞>에서 진실<眞>)"

오늘은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신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신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오직 성경으로,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사람의 몸(肉體)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둘째는 영체(靈體)
셋째는 부활의 몸(부활체. 復活體)

부활의 몸과 영체가 다른 이유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가?
영체는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죽은 조상의 영이 제사상에 와서 먹고 가라고 합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아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영체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제사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든 문을 굳게 닫고 모여 있을 때 그 가운데 오셔서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체가 되는 부활신앙은 무엇일까요?
 
부활의 신앙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만을 바라보자"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면 신앙생활을 일생동안 계속한다면 부활에 관한 설교는 40번 50번 60번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활주일 설교중에서 마음에 새겨진 것이 교리적인 것 뿐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리적인 것보다는 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부활 주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 생명의 주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생명의 주가 되려면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부활의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히브리서 2:14) / 권능의 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려면 생명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 말씀의 주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우주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은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존재의 근원이 되는 태초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설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어떤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가 우리에게 나타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지라도 그가 또 다시 죽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믿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 어느 지역에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참여하고 그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셨고 은퇴하셨던 어느 장로님이 임종이 가까왔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이 장로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에게 영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장로님, 그동안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장로님의 수고와 정성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둘 것입니다.
장로님의 그 믿음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텐데 죽은 후에는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실 줄 믿으시지요?"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그것은 내가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세우는 개척 공신일지라고 그 아들이 서울 장안에서 잘 알려진 목사가 되었을지라도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한 신앙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장로님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목사님이 이 말씀을 읽기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나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는지 죽아봐야 알겠느니라."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성경이 어디 그렇게 기록되었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지요!
그때 목사님께서 장로님의 손을 꼭 잡고 정말 성경말씀 그대로 믿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봐야 알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후에 목사님은 아들되는 목사님에게 연락하고 장로님에게 분명한 깨우침을 전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4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활동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지상사역을 마친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천상사역"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둘째는 예수를 바라보라(12:2)

지난 3월 10일 주일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개의 단어로 소개했습니다.
"집중" "확산" "지속"
깊이 생각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집중력을 갖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먼저 영적인 촛점을 맞춘 후에 그 촛점을 세상에 내밀면 반드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한 힘을 삶의 도처로 확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대한 산불의 시발점은 아주 작은 불꽃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을 지켜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은혜에 도취되었다가 거친 세상으로 나가면 쉽게 무너지고 꺼져버리는 불쏘시개가 아니라 무너질 수 없고 꺼질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이적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 중에서 7가지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관점에서 쓰여 졌다는 것과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표시로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이적은 창조주로서의 기사
네 번째 이적은 재-출애굽의 의미를
마지막 일곱 번째는 다시 살아남의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표지로 이적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 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4. 5,000명을 먹이심(6:1-14)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5. 물 위를 걸으심(6:16-21)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 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나고, 넷째 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러내 에덴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6. 소경을 고치심(9:1-7)

​소경을 보게 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 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7,9)

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1,14~15)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도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라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1,5) 

“나는 ~이다” 라는 선어는 7번 이상 나오며(4:26,8:58) 특정한 표현을 빌어 선언한 경우 7번이다.

“나는 ~이다”란 선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장 확실하고 대답하게 단정하는 것으로 출애굽 3:14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체를 지탱시키는 음식에 자신을 비유하신 것이다. “신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 예수께서 하고 자 하심 말씀이다.

초막절이 언급되는 문맥 가운데, 어쩌면 성전의 찬란한 촛대에 불을 붙었을 무렵,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고 말씀하셨다. 양과 목자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10:9), 나는 선한 목자라 고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은유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것이 하나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은 못되지만 죽기는 싫다고 말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진퇴양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라고 선언하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배타적 선언을 하셨다.

아마도 황금빛의 포도나무 장식을 해놓은 성전을 지나실 때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나는 포도나무”(15:5)라고 말씀하셨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믿는 자들은 예수 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도입 이야기)

첫 목회지에서 만났던 성도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 중에 황규선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당시 고려아연이란 공장에서 황산부장직을 맡고 계셨는데 황산부장은 차기 공장장이 될 수 있는 아주 유력하고 실력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성결교 신학대학 신대원에 입학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여유를 가질만한 자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당시 공장의 직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예수가 좋으면 그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포기한 것이 있었습니까?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배우자를 포기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집을 포기했습니다.

아직도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예수님때문에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서를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 하늘에 계신 천상사역에 관한 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합니다.
전반부는 1장부터 10까지를 말하며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은 신분의 우월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을 때 구약의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계열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유다지파 다윗의 계열에 속합니다.
마치 멜기세덱과 같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던 족보도 없는 제사장과 같은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신분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전반부에서 강조하는 신분의 우월성 때문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후반부는 11장부터 13장까지를 말하며 믿음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합니다.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우월성은 갖추셨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2024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려는 설교 주제입니다.

찬송가 509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CCM악보 [B. B. McKinney 작사, B. B. McKinney 작곡]

1.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2.  네가 어둠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주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3. 네가 부활의 주 따라 가려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네가 주 안에서 길이 살리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4. 너의 죄악의 짐 무거울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마음 문 열고서 주를 모셔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부활

ἔγερ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454
1. 부활
2. 마 27:53.
발음 [ ĕgĕrsis ]
어원 /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부활, 마27:53.


ἐξανάστα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815
1. 부활
2. 빌 3:11.
발음 [ ĕxanasta- sis ]
어원 / 1817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부활, 빌 3:11.



ἔγερσις, εως, ἡ 1454 [ĕgĕrsis]

  • 부활, 마27:5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부활, 빌3: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 2.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1: 22, 2:31, 4:33, 17:18, 롬1:4, 6:5, 빌3:10, 히11:35, 벧전1:3, 3:21.
  • 3.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14:14, 20:35,36, 요11:24, 23:6,8, 24:15, 고전15:12이하, 히6:2, 계20:15이하.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상징적으로]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고후5:2.
  • 2. 거주, 주거
  • 3. [문자적으로, 천사에 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명.
  • 3.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 κατανοήσατε τὸν Ἀπόστολον καὶ Ἀρχιερέα τῆς ὁμολογίας ἡμῶν Ἰησοῦν,(Nestle 1904)

1절의 구조를 분해해 봅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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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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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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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오늘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 압제로부터 독립을 외첬던 3,1절 101주년 되는 날입니다. 삼일절 하면 생각나는 분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교한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신자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 인해 일찍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의해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파견소로 몰려가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습니다. 17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머리에 콜타르를 발라 가발 벗기듯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고, 벤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았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상자 안에 3일간 감금하고, 입과 호수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고, 달군 쇠로 몸을 지지고,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합니다. 상체를 벗겨 공중에 매달고 밤낮없이 채찍으로 후려칠 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에 개 줄을 묶은 채 네발로 기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헝겊을 얼굴에 덮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전기고문은 물론 관에 넣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도 하였답니다. 결국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앙의 사람 도마 안중근 의사도 그 모지 고문 앞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분들은 이땅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 경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1절 말씀을 보면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바라보는 결승점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누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구시는 신천지가 거짓으로 교인 수를 알렸다고 고발했습니다. 신천지는 이긴자, 보혜사라는 그들의 교주 이만희에게 초점이 맞추고 보혜사 이만희를 보라고 합니다. 이만희가 말씀의 약속을 대언하는 대언자라를 것입니다. 이만희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실상으로서의 유일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만희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희는 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나에게 못 해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늘 변하는 세상의 철학과 사건을 바라보면 믿음의 경주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운동선수가 승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승점을 향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에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입니다. 주(아르케곤)라는 말은 "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다. "온전케(텔레이오텐)"라는 말은 "완전한 자,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라는 말은 "주목하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분사입니다. 믿음의 창조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익이 될 수도 있고, 편리가 될 수도 있고,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나 명예, 권력,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목표가 되면 신앙생활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송창식씨가 노래하지 않아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고래사냥을 해보아도 남는 것은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알려 주고 있지 않아요.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지 않아요. 고기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펑 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끝자락엔 공허와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하비콕스(Harvey Cox)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var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렸습니다. 세계적 명문대학의 자리에 올랐지만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이 온갖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에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고 하비콕스가 강의하였습니다. 그때 강의 하였던 내용이 바로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 없는 하버드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니 다시 예수를 좇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합니다. 기름 없는 차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괴롭고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사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자신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의기소침하고 욕심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바라보며 허무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 만족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강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질되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폭풍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폭풍을 바라보았을 때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결국 두려워하고 우리가 고정한 것의 노예가 되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못질하면서 망치로 손을 치는 사람은 못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리는데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리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무거운 것(오그콘)"은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외부적 요인으로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 경주를 방해하는 옷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외적인 장애물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핍박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적인 장애물은 광명의 천사로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신앙의 경주를 실패하게 합니다. 핍박은 달리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유혹은 잘 달릴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같은데 방향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죄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말은 "쉽게 얽어매는", "달라붙는"이라는 말입니다. 경주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죄는 우리를 쉽게 얽어맵니다. 단단히 밀착하여 옭아맵니다. 죄는 믿음의 경주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쉽게 달라붙어 옭아매는 것입니다. 죄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 쉽게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마다 빠지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성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쉬게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는 생각, 성질, 행동, 습관 등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젊은이에게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년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노년에게는 돈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달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신앙경주의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이번 코로나 19를 확산시키는데 매개체 역할을 한 사람들은 신천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며 포교하는 것입니다. 포교를 위하여 거짓말을 밥을 먹듯 하면 그것을 모략이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8단계 섭외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 사람이 속을 수밖에 없도록 포교를 합니다. 먼저 포교 대상을 정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이름, 나이, 주소, 직업, 전화번호, 전공, 군대, 환경, 경제, 건강, 학습능력, 인성, 신신, 신앙, 관심사 등 그 사람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합니다. 2단계는 섭외 활동입니다. 우연을 가장하여 만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열매를 선별합니다. 그들에게 이용거리가 되지 않는 고령자, 환자, 저소득자 등은 제외시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인간적 신뢰를 형성합니다.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접근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유형별 상태를 진단합니다. 신천지 신도 3-7명이 대상자를 분석한 후 전략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신앙우위 선점입니다. 중보기도를 해주고, 꿈 이야기로 영적 우위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유형별 맞춤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때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가짜 선교사, 가짜 교수, 가짜 전문가, 가짜 목사 등을 투입니다. 여덟 번째 단계로 복음방에 등록을 시킵니다. 이 과정이 다 포교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로 치밀하게 짜서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속여 포교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명 속이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너무나 자신에게 잘 해주며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을 속이면 대부분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방에서 성경공부를 시키며 성경공부를 누설하면 마귀가 틈탄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합니다. 같이 온 사람들은 100% 신천지인데 본인만 모릅니다. 사실 바보가 된 것입니다. 복음방 교육이 끝나면 센터에서 월 화 목 금 일주일에 4회씩 초중고급반 6-8개월 교육을 시킵니다. 학원구조로 큰 칠판을 가져다 놓고 비유풀이, 배도, 멸망, 구원, 세례요한 교리를 공부시킵니다. 결국, 교주 이만희가 구원자라를 것입니다. 이때 운동권 아이들이 이념교육을 시켜 세뇌를 시키듯 교리 세뇌교육을 시켜 교리 중독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험을 치루게 하여 합격한 사람을 유월을 시켜 신천지 신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철저할 패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던지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증인들이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3-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신앙의 경주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예수님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경주하기는 경주하되 무엇으로 경주하라고 말씀합니까?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통해, 인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완주의 필수요소입니다.

이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오랫동안 믿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광이 같은 네로가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그 때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고난을 감수(10:34)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자(12:4) 교회 내의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불신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3:12)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의 초보에 머물렀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전반적으로 신앙이 침체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끝까지 완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참으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은 한 번 참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제1 완료 분사로 죄인들에 의한 지속적인 적대 행위를 계속 참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참았습니까?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입니다. "거역한 일(안틸로기안)"이란 반박하고, 논쟁하고, 적의를 가지고 적대행위를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미쳤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해도, 조금만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원수 시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자존심이 뭉개지고, 옷을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인들 앞에서 조롱을 당했는데도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주하였습니다. 채찍을 통해 주어진 가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참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에 창이 찍히는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끝까지 참고 구속사를 완주하였습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이 당한 일을 비교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참으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쁨 대신에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했다는 말씀입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 입니다. 낙심에 감염되면 풀이 눕는 것처럼 희망을 잃어 버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친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자 낙심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배교하는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피곤하게 하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낙심시키고 지치게 만듭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사람을 보고 낙심시킵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 직원으로 지치고 낙심을 시키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전략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쉽게 지쳐 낙심하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핍박과 고난도 참고 견디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야 하겠습니다.

"1. 구주를 생간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모세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 17년을 인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주민 90%이상이 예수님을 믿는 섬이 있습니다. 천사의 섬이라 불리워지는 전남에 있는 증도입니다. 현재 22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지만 11개의 교회가 세워져있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김준곤 목사, 정태기 목사, 이만신 목사, 이성봉 목사 등 10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답니다. 그 씨앗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님이라고 합니다. 17살 나이 결혼했지만 남편은 신혼초부터 집을 나가 소실을 얻어 딴 살림을 차렸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며 모진 고난을 다 참고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 전했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일제의 강점기 때도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얼마나 전도를 했는지 고무신이 1년 동안 무려 아홉켤레나 닳아 없어졌답니다. 만 40세에 성경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무려 11개 교회를 세워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유모로, 때로는 우편배달부로 교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고 심부름 하는 역할을 도맡았답니다. 6.25 때 문 전도사님은 공산당에 채포되었답니다.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었답니다. 전도사님은 순교의 현장에서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고 59세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영광 염산교회는 6.25때 공산당에 의해 77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65명이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변절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습니다. 공산당들이 예배당에 불을 질러도 새끼줄로 온 몸을 꽁꽁 묶고, 돌맹이를 목에 메달아 교회 앞에 있는 바닷가로 밀어 넣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격려하며 변절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전교인 65명이 수장되거나 몰매를 맞고 대창에 찔려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며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내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화입니다. 영원한 승리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자리를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3.1절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땅 영적 전쟁터에는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패배자, 배신자,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 있다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도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면 넉넉히 인내의 강을 건너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부활 이야기

    ▶톨스토이의 부활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귀족 청년 '네풀류도프'는 '나타샤'라는 그의 하녀를 유혹하여 임신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녀는 그 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눈물나는 고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해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게 했던 그 남자 '네풀류도프'는 그 동안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그가 그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때 불장난하여 그렇게 만든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돕게 되었습니다. 차마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면하여 주는 대신에 시베리아 먼 땅으로 유형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며 그녀를 따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한 여인숙 방에서 밤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젊은 날의 방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머지 생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부활의 개념을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는 개념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이제 우리는 죽어도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집니다. 이날은 학생들이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당에 모여 학교측이 초청한 유명인사로부터 강의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해인가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박사가 강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된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여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한 노인이 일어나 말하기를 '틸리히 박사님!'하고 부르고는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과를 베어먹기 시작하더니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하고는 또 사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사과를 잡수시는지 이 노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목하자, 다시 노인은 '니이버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하더니 또 다시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방금 다 먹은 사과의 꼭지를 높이 쳐들고서는 '박사님! 방금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가요, 단가요?'하고 물었습니다. 몹시 당황한 틸리히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 보지 못했기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노인은 그 남은 사과 꼭지를 가방 속으로 던지면서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천 여 명이 사람들이 까르르 웃고 손뼉을 쳐대는 통에 강단은 삽시간에 유쾌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틸리히 박사는 조용히 강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대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큰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아서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는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어했던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의 작은 구유가 되어 나귀가 핥아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 한 그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께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만선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답니다.





    2024년 주일 설교 계획
    성도들이 즐겨 암송하는 간단한 성구를 중심으로 설교를 계획한다.

    사순절 제4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생각하라(2657) 카타노에오(katanŏĕō)  κατανοέω     

    1. 주목해보다.  2. 보다.  3. 생각하다
    발음 [ katanŏĕ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주목해보다, 자세히 보다, 마 7:3, 눅 6:41, 행 27:39.
    2. 보다, 생각해 보다, 약 1:23, 24, 눅 12:27, 행 27:39.
    3. [영적인 의미에서] 생각하다, 주목하다, 눅 12:24, 히 3:1, 10:24.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에게만 집중(集中)하라!

    * 집중(集中) : 모을 집, 가운데 중

    1. (어떤 일ㆍ현상(現象)ㆍ대상(對象) 등(等)이) 한 곳이나 한 대상(對象)에 또는 한정(限定)된 짧은 시간(時間)에 몰리거나 쏠리게 함.
    2. (어떤 일에 정신(精神)을) 바짝 차리고 쏠리게 함.
    3. (어떤 대상(對象)에 시선ㆍ이목 등(等)을) 향(向)하여 미치게 함.

    집중이란 촛점을 맞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야기) 사무엘이 어려서 에덴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 원장님이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특별 부탁으로 일찍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준비물에 "검은 먹지 1장" "볼록렌즈 1개" 라는 것을 준비시켜 유치원 가방에 넣거 그 다음날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유치원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이 화를 내며 먹지와 볼록렌즈가 가짜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먹지가 타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무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후에 볼록렌즈를 햇빛에 촛점을 맞추고 먹지 위에 올려놓았더니 먹지가 연기를 피어오르며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 불평이 일어났을까요?
    볼록렌즈와 햇빛과 촛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태양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가 되는 내가 촛점을 맞추지 못하므로 검은 세상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촛점을 맞출 수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라면 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거나 나를 세우려는 것은 아직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의 삶을 확산시켜라!

    확산(擴散) : 넓힐 확, 흩을 산
    - 퍼져 흩어짐

    목회자들의 삶의 반경은 매우 좁습니다.
    만나는 대상이 거의 목회자 또는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환경에서 예수를 확산시킬 기회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목회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이중직을 갖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력(集中力)을 가져야 합니다.

    집중력(集中力, attentional control)은 무엇을 집중할지, 무엇을 무시할지를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확산력(擴散力)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향기가 되어 확산력을 퍼쳐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응집력(凝集力)을 갖는 것입니다.

    응집력(凝集力) : 엉길 응(凝), 모을 집(集), 힘 력(力)
    - 어떤 단체(團體)나 조직(組織)에 속하는 구성원(構成員)들을 통합(統合)하는 힘.

    (예) 모래 속에 자성이 강한 지남철을 넣고 흔들면 자석에 작은 쇳조각들이 달라 붙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의 철을 모래밭에 넣고 흔들면 아무 것도 달라 붙지 않습니다.
    자석에는 자성이 있기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력(持續力)을 가져야 합니다.
    - 가질 지, 이을 속, 힘 력
    이어갈 힘, 견딜 힘, 유지하여 오래 지속하는 힘.

    예수로 살아가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흥분현상입니다.
    정말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로 인하여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시련과 고통과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의 집중이 되어야 할 예수님은 누구인가?

    첫째는 사도가 되신 예수님
    둘째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사환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예수님은 그 집의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가톨릭 성경)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 신앙 고백의 사도이며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공동번역)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성도 여러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 8:5; 9:23;11:16; 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 19:6; 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 10:40; 눅 10:16; 요 4:34; 5:23, 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 Ned.35b; 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사도(652) 아포스톨로스(apŏstŏlŏs)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apŏstŏlŏs ]
    어원  / 649에서 유래





    2. '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 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Hewitt).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성경 전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꺼?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에서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본문을 정리하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믿는 도리의 사도 즉 신앙의 사도가 됩니다.
    신앙의 사도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마다 사도신조를 암송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예수는 대제사장입니다.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속죄소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죽으심으로 더 이상 다른 속죄제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신앙의 표준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우화를 기억하시나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도저히 서로 융화하지 못하고 교리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처음에는 개와 고양이가 서로 자기 영역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개와 고양이와 돼지를 한 울타리 안에 넣고 어떻게 지내는가 지켜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서로 자기 영역을 유지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 하며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 거주하게 했는데 이들은 서로 융화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리가 신앙의 기준이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가 되신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깊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상속받은 후에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이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한 후에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품군으로 맞아드린 것이 아니라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고 하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 즉 신앙의 도리가 되는 기준입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감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는가를 보게 된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나오면 또 한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신가,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성소 (holy of holies)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하며, 분리되어 휘장이 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자기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공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 피를 뿌리는데 하나님께서 그 피를 받아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1년 동안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년에 또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와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답게 살라(대제사장의 예복)

    금방울은 '믿음의 말'을 상징하고
    석류는 '향내나는 삶'을 상징한다.
    결국 대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금방울과 석류를 단 것은
    대제사장은 늘 믿음의 말을 하고
    향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다만 우림은 '빛'의 복수로 '강한 빛'을 의미하고
    둠밈은 '완전함'을 의미하기에 아마 하나님의 판결은
    가장 정확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밝은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준다.
    경망스럽지 않은 밝은 표정을 하는 것과
    크게 웃지는 않아도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는 것은
    피로한 현대인에게 최고의 부조가 된다.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벧전2:9)
    그 말씀은 특권의식을 조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남이 아닌 자신부터 더욱 성결하고 책임적인 삶을 살라는
    주체의식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어떤 건축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
    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의 중심이 있다. <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된다.
    일본 사람이 집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한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이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한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
    불 꺼진 제단이 무엇을 하는가?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교회에 와서 예배 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미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이며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홀로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가정의 중심은 제단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론의 제사장직과 의복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우리를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완전에 연결시킨 그리스도의 역할을 상징하였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 κατανοήσατε τὸν Ἀπόστολον καὶ Ἀρχιερέα τῆς ὁμολογίας ἡμῶν Ἰησοῦν,(Nestle 1904)

    1절의 구조를 분해해 봅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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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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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시편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열왕기하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7장:7-9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요 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백성을 둘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의 나라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유는 오로지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선교사의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과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속자이며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곧, 세상에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03-31-2024(부활주일)
    하나되게 하소서
    에스겔 37:15-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지금은 한국교회와 한인이민교회는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권을 잡았고 김정일이 죽은 후에 또 그의 아들 김정은이 대를 이어 통치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3대 세습이라는 통치가 과연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스겔 37:17. 19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

    동독의 라이프찌히(Leipzig)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오랜 세월 성 토마스교회 악장으로 활동했던 음악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20세기에 이르러 라이프찌히는 독일의 통일에 기여한 니콜라이교회로 인하여 다시 세계인의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성 니콜라이는 상공인과 중소 실업인의 성자로 그 이름의 뜻은 ‘약자들을 돌보는 방패’입니다. 라이프찌히 도시의 설립과 같은 때에 지어진 이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교회는 도시의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처럼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의 역할을 했습니다.

    1981년 동독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운동’이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동독의 러시아 미사일 설치와 서독의 나토(NATO) 핵무기 설치 문제로 두 독일이 대립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15-22세)이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고, 그 모임은 매주 모이는 ‘평화를 위한 월요기도 모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여 이 기도회를 3-4년간 인도하였는데, 점차 300-400명이 매주 참석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큰 기도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도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회 참석인원은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작은 방으로 기도실을 옮겨야 했고 결국 기도운동을 중단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감독자가 나서서, 기도모임을 절대 폐지하지도 말고 더욱이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며 저들을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3-4명이 모여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동독인들의 월요 평화기도모임에 함께 하셨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저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1961년에 세워진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인들에게 통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명의 젊은이들과 기성세대들이 마음을 합한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을 동서독 통일의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Now is the time to pray).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실망하지 말고 기도할 때입니다. 이민교회와 조국교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입니다. 우리 당대에 38선의 철조망이 걷히고 독일처럼 한반도에도 통일이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통일한국이 마지막 때에 선교를 위하여 쓰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미주 전역에 기성세대와 다음세대에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부흥의 불쏘시개, 통일의 불쏘시개,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불쏘시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의 불쏘시개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나태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속 기도의 줄을 잡으세요.

    동독인들이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스교회에 모여서 기도했듯이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다음세대들이 통일한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주역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독일통일의 역사에서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를 맨 앞에 놓는다.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와 성도들은 1981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평화기도회를 드렸다.
    1989년 10월 9일 평화기도회 후 7만 명의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펼쳤다.
    1개월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매주 통일기도를 드리고 있다.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서울목요기도모임이 5월 5일 900회를 맞는다.






    루마니아, 토케스 목사

    칼 바르트(K Barth)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루마니아는 1947년 공산인민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 차우세스크(N Ceausescu,1918~1989)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1965년 집권, 독재자가 되어 무자비하게 통치했다. 1989년 12월 25일 그의 부부는 총살형을 받고 27일 집행되었다. 그의 변호사마저 변호를 거부했다. 1980년대 초, 독재 권력의 인권 탄압이 한참일 때 차별 받는 동족들을 보살피기 위해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가 루마니아의 조그마한 마을 티미소아라(Timisoara) 교회에 부임했다. 전임(前任) 목사는 공산주의 정부를 지지했다. 이와는 달리 토케스 목사는 정부의 불의와 인권 탄압을 비난하며 저항했다. 주일마다 예배당 안에 교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임 당시 40명이었던 교인이 5천 명으로 늘어났다. 토케스 목사는 정보 요원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경찰관들이 체포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수 백 명의 교인들이 목사의 사택(舍宅)을 에워쌌다. 촛불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체포하러 들어갔다. 시위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찰서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군중의 숫자가 2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군 병력이 동원되어 진압하려고 발포(發砲)를 했다. 1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불구하고 군중들은 해산하기를 거부했다. 토케스 목사가 연단에 올랐다. “기도합시다.” 수많은 시민들은 무릎을 꿇었다. ‘주기도문’을 드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단합된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었다. 저항의 함성(喊聲)은 수도 부쿠레슈티로 옮겨갔다. 얼마 뒤 루마니아를 철권(鐵拳)으로 통치하던 차우세스크 폭압 정부가 와해, 붕괴되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폴란드 공산 정권은 고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저항 운동이 시작되어 공산 정권을 무너뜨렸다. 폴란드 자유 노조가 항거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동독은 1982년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칼을 쳐서 쟁기로’ 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바흐(Bach)가 감동적인 연주를 했던 적이 있는 역사적인 교회였다. 1만, 9만…,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참가했다. 베를린에 이르자 5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철의 장막을 상징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통일을 이루어 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르크스의 동상들은 한때 신(神)처럼 떠받들어졌지만 지금은 공터에 흉물로 버려져 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사 11:4)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기도, 찬양은 악의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다.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 '기도의 혁명'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루마니아의 공산주의자는 천명이 채 안되었다. 그들 중 구두만드는 직공이었던 니콜 차우세스큐란 젊은이는 전쟁 중에 줄곧 교도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석방되어 공산청년동맹의 비서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소련을 등에 업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정권을 쥔 그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통치술에 감명을 받고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나서 루마니아를 북한체제처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국민들을 거미줄 같은 조직의 틀 속에 묶어 체제를 유지했고, 4가정 중 한 명은 비밀경찰이었다. 수백만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이 투옥돼 죽어갔다. 국민들이 톱밥 섞인 빵을 사기 위하여 줄을 서 있는 동안 정부는 대부분의 식량을 수출했고,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당 간부들은 비만으로 고민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정부의 방침에 동조해 예배 참석자의 명단을 정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반석 같이 견고했던 그의 권력기반이 198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갑자기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그의 독재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허물어졌을까? 그 시작은 티미소아라시에 있던 50명 남짓한 작은 개혁교회로부터 시작됐다.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란 젊은 목사를 어수룩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신심이 깊었고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다.

    그는 저녁시간에 작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엔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만 참석했지만 점점 기도가 절실해지고 나라와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기도회가 폭탄이 되어 차우세스큐 정권을 쓰러뜨릴 줄은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은 이렇게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부터 점화되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①

    루마니아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1918∼1989) 공산 정권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버금가는 독재정권이었다. 실제로 차우세스쿠와 김일성은 둘이 다 살아 있었을 때에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하였다. 독재하는 수법을 서로가 배우며 일인 지배의 살벌한 지배 체제를 구축한 그들이었다. 그런데 차우세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17일에 갑자기 허물어졌다. 마냥 순종하기만 하던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글은 루마니아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북한에서도 이런 날이 오게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루마니아를 가로 질러 흐르는 베가 강이 있다. 베가 강 옆에 티미소아라(Timisoara)란 도시가 있다. 티미소아라 시(市) 한가운데에 긴 광장이 있다. 그 광장 가까이에 볼품사나운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1층의 반은 안경점이고 반은 한 개혁교회가 차지하고 있다. 그 교회 벽에 4개 국어로 다음 같이 쓴 팻말이 붙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한 독재자를 쓰러뜨린 위대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곳은 루마니아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다. 1989년 12월 17일에 일어났던 혁명이다. 백년 이백년이고 계속되어 질 것만 같았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이 어이없이 허물어진 민중혁명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1940년 7월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였을 당시에 루마니아에는 불과 750명의 공산당원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루마니아를 공산 국가로 만들어 가게 하는 데에 수백만의 국민들을 학살하며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차우세스쿠였다. 그는 제화공(製靴工) 출신으로 공산당 당원이 되어 2차 대전 중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한 추진력이 인정을 받아 그가 공산당청년연맹의 총비서로 임명 받게 되면서 루마니아의 비극은 시작 되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③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 전 그 교회를 시무하던 목사는 공산당 정부의 대변인과 같은 목사였다. 무엇이든 차우세스쿠 공산당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목사였다. 그런데 그 목사는 어느날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 이에 젊은 토케스 목사가 후임목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무신론 정권이 몰고 온 세속주의가 민족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낸 것에 대하여 늘 마음 아파하던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치유할 수 있는 개혁에의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평소에 믿고 있었다. 1989년 그가 부임하던 날에 첫 설교에서 그는 다음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

    그가 힘차게 목회를 시작하여 주민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자 50명으로까지 줄었던 교인들이 2년 내에 5,000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로 모여들게 되자 공산당 정부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비밀경찰과 기성교회 목사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어 그런 볼온한 교회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여겨 토케스 목사와 교회에 경고하였다. 국가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토케스 목사는 한 방송국 프로에 출연하여 차우세스쿠 독재를 비판하였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와 같은 경우를 다루어 본 경험이 풍부하였다. 협박과 탄압으로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늘 그렇게 하여 성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젊은 목사는 달랐다. 탄압할수록 더 강력한 반독재의 설교는 하였고, 그럴수록 교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드디어 예배드리는 시간이면 비밀경찰단이 기관총을 메고 교회당 앞에 서서 교회 들어가는 교인들을 감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토케스 목사와 가족에게 식량배급이 중단되고 교인들에게 목사 추방운동에 가담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한 교인은 이에 불복하였다가 며칠 뒤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느 날 복면을 한 4명의 괴한이 토케스 목사 집에 침입하여 그를 헤치려 하였으나 목사를 지키려 와 있던 교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목사 얼굴에 상처만 내었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죽이면 그를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 뿐임을 인식하고는 그를 죽이는 대신에 1989년 12월15일까지 교회와 집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혁명이 일어나게된 2일 전이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④

    12월 15일까지 교회와 사택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정부로부터 받은 라슬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는 12월 10일 주일날에 교인들 앞에서 다음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퇴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에 불응할 것이고,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강제로 추방당할 것입니다. 저들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시키려 합니다. 저들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금요일에 여러분이 이곳에 오셔서 그날 일어날 일의 목격자가 되어 주십시오. 평안하십시오. 하지만 그날에는 꼭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5일 후인 12월 17일에 비밀경찰이 토케스 목사를 강제 퇴거시키려고 출동하였다. 그들은 트럭을 몰고 왔지만 자기들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신도들이 인간 방패를 만들어 교회당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소문을 들은 시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몰려들었다. 시민들과 신도들은 춥고 배고팠지만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가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서서 견디었다. 토케스 목사가 밤 1시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집 주위에 수백개의 촛불이 둘러싸서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촛불 시위는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군중 속에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하였다.
     
    “자유! 해방!”
     
    이어서 금지되고 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여, 깨어나라”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면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우세스쿠와 공산주의를 타도하자!!”
     
    12월 17일 새벽녘에 비밀경찰이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인 군중을 힘으로 밀어부치고는 교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성경을 들고 서 있는 토케스 목사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는 목사 부부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군중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티미소아라 시 광장으로 소리 없이 이동하였다. 혁명이라는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침묵 속에서 군중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청년을 남편으로 맞았으나 북한 정권에 의해 사랑할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55년을 그리움으로 지켜온 루마니아 여인이 있다.
    소설가 권현숙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루마니아의 연인’에 등장하는 ‘제오르제따 미르초이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남유럽의 진주’로 불리는 루마니아는 이 지역에서 우리나라와 유일하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이다.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을 예방하며 찾은 ‘코트로체니 대통령궁’은 루마니아의 마지막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영빈관으로 사용한 곳이다.
    그가 가장 존경한 이는 바로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주체사상에 감화를 받아 이를 모방한 철권통치를 했다.
    전국적으로 도청 장치를 설치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했으며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차우셰스쿠식 독재의 절정은 ‘김일성 주석궁’을 본뜬 ‘인민궁전’ 건설이었다.
    12층 건물에 1,100개의 방으로 이뤄진 인민궁전은 미국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로 축구장 면적의 47배에 달한다.
    한편으로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지하 비밀 터널, 천장이 열리는 실내 헬기장, 그리고 독살을 방지하기 위한 환풍시설 등이 설계돼 있어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는 독재자의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루마니아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이 투입된 인민궁전 건설은 한때 ‘유럽의 빵 공장’으로 불리던 루마니아에 극심한 식량난을 야기했다.
    1984년부터 이어진 공사로 루마니아 국민들은 5년간 굶주림에 시달렸다.
    성난 민심은 공산 독재체제에 종지부를 찍는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인민궁전의 완공도 보지 못한 채 부인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초호화 천연 대리석과 수정 샹들리에로 치장된 인민궁전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매년 수㎝씩 가라앉고 있다고 하니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흐름은 되풀이된다(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rhymes)”고 했다.

    루마니아의 지나온 역사는 오늘날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89년 시민혁명으로 독재 청산과 체제 전환에 성공한 루마니아는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으로 역내 평화와 안정에 적극 기여하고 있으며 연 5%대의 고도 성장으로 EU 회원국 중 가장 역동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고 굶주리고 피폐했던 루마니아 국민들은 이제 당당한 EU 회원국 시민으로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북한은 주민들의 생활고와 인권을 무시한 채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집착하며 지난 한 해에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려 26차례나 위반했다. 최근에는 국제법적으로 절대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해 지도자의 형인 김정남마저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규탄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은 이제라도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역사의 흐름은 되풀이된다는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02-018-2024(사순절 첫 번째 주일)
    예수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7

    지난 1월 7일 신년주일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자!" 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혹시 본문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본문으로 소개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장 12절을 기억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것은 계속 채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된 권세는 내가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내가 생각하고 결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 집안에 태어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자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다워야 합니다.

    자녀답다는 것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너는 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렸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까?
    그렇다면 훗날 나의 부모님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어른이 저를 보시더니 “아버지가 집에 계시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 아버지가 집에 계십니다.” 하고 집으로 함께 가서 아버지 누가 찾아오셨어요.“ 하고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뛰어 나오면서 ”아이구, 형님“ 하고 반갑게 맞이하시더니 제게 ”너희 큰아버님이시다!“ 하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확신했습니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구나!

    왜냐하면 나를 처음 보셨던 큰아버지가 나를 본 후에 곧 아버지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아버지가 보이고 아버지를 보면 내가 보인다는 것은 곧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설교 제목은 “예수의 흔적”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는 열성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전적으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일에 앞장서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빛에 의해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에게 예수님은 제자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안수하라고 합니다.

    아나니아는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가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까?

    아마 이때 찬란한 빛에 의해서 어떤 신학자는 바울에게 안질이란 질병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몸에 무슨 질병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도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에 가졌던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을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몸에 “육체의 가시”를 가졌다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와 같은 고통스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를 그의 몸에서 제거하여 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바울이 교만할 수 없도록 바울을 통제하는 영적 비밀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응답받고 해결 받습니다.
    만일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것도 바울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강력한 신호등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손가락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 때문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손가락은 여전히 내게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생명의 빛이 되는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빛이란 곧 주의 말씀입니다(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나의 빛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빛은 생명입니다.
    그 빛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행하자!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부지휘자에게 지휘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남편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오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예수님의 흔적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몸에 남아 있는 어떤 흔적이 아니라 그 흔적 까닭에 예배를 포기할 수 없고 그 흔적 까닭에 신앙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지키려면 반드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흔적을 헬라어 성경에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가축 또는 노예의 몸에 주인의 표시를 위하여 새겨 넣는 불도장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시뻘겋게 달궈진 불도장을 찍는다면 그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예수님의 흔적은 이렇게 심각한 고통을 경험한 후에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박태준박사님이 사랑하는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그 말이 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애절한 울림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딸의 애원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 분명한 것을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24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예수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녀야 할까요?

    말씀의 흔적을 새기자
    말씀과 설교는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 설교를 말씀으로 착각합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새기지 않으면 육체의 생명은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나의 구원을 확증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증거는 내가 무슨 행위를 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대원 시절 종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는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어느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그의 아내와 딸이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 그림이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영상으로 그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 그림 위에 얼굴 윤곽과 눈에 표시를 한 후에 그림을 보여주며 이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하고 물었더니 정확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깨우친 후에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성경 암송카드를 갖고 다녔기 때문에 그 카드를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 카드를 주며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딸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래,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을 찾았다!” 이렇게 대답한 후에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구원을 얻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해야 한다.”며 말씀 카드를 꺼내어 말씀을 소개하라고 전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믿고 확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흔적(스티그마. stigma)  στίγμα
    스트롱번호 4742

    1. 표.  2. 흔적. 3. 낙인
    발음 [ stigma ]
    어원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표, 흔적, 낙인, 갈 6:17.

    구원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의 확신(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도 응답의 확신(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승리의 확신(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죄의 확신(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인도의 확신(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고 살리시기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부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나시고 성령 하나님은 빨간 불로 임하시므로 두 분 하나님의 얼굴의 이미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미지는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주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람들은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주님의 옷자락을 보았고 또 어떤 분들은 지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주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똑똑하게 보았다고 하는 분들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나마도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거의 환상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개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여 그린 그림과 사진을 모았습니다.
    마침 천국에서 온 많은 천사들이 엘리야 선교사님 곁에 와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검증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안수를 받았던 분인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또 그의 곁에 있는 천사들의 견해를 들을 수 있어서 절호의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그리고 주 예수님의 400개 사진은 구글 사이트에서 찾아낸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사진들을 모은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이나 수많은 작가들이 그렸거나 전해 내려온 사진들입니다.
    이 중에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런 이미지나 사진은 어떤 것일까요?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http://spiritlessons.com/Documents/Jesus_Pictures/Jesus_Christ_Pictures.htm
     
    예수님의 400개 사진
    http://spiritlessons.com/PICS/index.htm

    <출 처> WWW.MessianicBible.com
     
                                  
                               


                                                                            

    천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의 제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신장이 2m 수준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장은 2m 20cm였다고 합니다.
    훤칠한 키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확실하여 시원하고 매우 자상한 모습이며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흠잡을 곳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씀을 묵상할 때,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마음에 그리며 기도한다면 훨씬 더 실감 있고 우리 주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일이 있을 때 바로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주님의 얼굴인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우리는 이 얼굴 모습을 떠올리며 금방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현재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는 김선교사님의 고백
    성경에는 이미 수많은 증거들이 계시되었다.
    그러멩도 불구하고 자꾸 나에게 무슨 이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을 바르게 믿지 못하는 증거라고 한다.

    한국 사람으로 우리 선교회의 엘리야 선교사님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주 예수님을 만나 안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오후 5시경 그가 그의 방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책상 바로 앞에 주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크게 놀라서 주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가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못 자국이 난 양손과 양발목을 엘리야 선교사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얼떨결에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주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다. 놀라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그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안수하는 것이 목사들이 안수하는 것보다 더 낫겠지”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는 매우 감격스러워 하면서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습니다.
    주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기름 부음을 받은 엘리야 선교사님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그때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상하고 따뜻한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양치는 마을에 사는 두 젊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 규율이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힌 사람에게는 불에 달군 쇠로 'ST'라는 문자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낙인이 찍히자 이런 벌칙을 알지 못하는 동네로 도망을 쳐서 그의 남의 생을 이곳저곳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나 이마에 찍힌 낙인 때문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 낯선 사람의 이마에는 'ST'라는 낙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러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는 그 수치를 당하므로 그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생애를 추방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은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가 양을 훔친 것 때문에 당한 수치를 보상했습니다.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내 인격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들 과 이웃을 돌보며 자기 자신을, 이웃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헌신과 봉사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낯모를 사람이 그 마을에 와서 이 노인의 이마에 찍힌 'ST'라는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어느 중년 신사는 "글쎄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분의 이마에 표시되어 있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ST'란 글자는 성인 'Saint'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 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양을 훔친 벌로 머리에 찍힌 낙인을 성인의 약자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희랍의 전설 가운데도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애통은 확실히 가치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이사야 44: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에스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류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주여 삼창의 의미



    왜 한국교회는 통성 기도를 시작하며 주여 삼창을 외치는가?

    언제부터일까?
    누가 처음 시작하였을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상당수가 ‘통성기도’를 시작하기 직전에, 먼저 ‘주여 삼창’ 곧 ‘주여! 주여! 주여!를 3번 연창한 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용어사전」에서 ‘주여 삼창’이란 용어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그 근거가 없는 표현이므로 삼가야 한다고 했다. 

    또 「교회용어 바로쓰기」 책에서도, ‘주여 삼창’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며 성경적 근거가 없는 용어라고 했다.

    그리고 「예장대신총회법규집」에도 공예배 시에 ‘주여 삼창’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이처럼 공신력 있는 여러 개신교 관련 책들과 유관기관에서도, ‘주여 삼창’은 반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행되고 있다.

    또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 고질병은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한 번 맛들이면 중독되는 마약처럼, 치료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 개신교에서 ‘주여 삼창’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그중에 하나는 다니엘 9장 19절에 나오는 ‘주여’라는 단어들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향해, ‘주여 삼창’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먼저 이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고,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다니엘 9:17-19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한글개역개정성경)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해, 다니엘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즉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된 후 70년 만에 포로생활이 끝나 자유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수치스러운 포로 생활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죄악이 해결되어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사죄와 선민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여! 주여! 주여!”를 세 번 외치는 것을 ‘주여 삼창’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문(단 9:19)에서, 다니엘은 ‘주여’라고 세 번 연호하지 않았다.

    본문 19절에서 ‘주여 들으소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니다.
    이것은 17절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또 19절의 ‘주여 용서하소서’라는 것도 기도 내용이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그리고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와 같이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만 세 번 나타나 있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향해 ‘주여 삼창’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개신교 신자들은 기도할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부르면서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성령이여! 성령이여!’라고 하면서,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성경 어디에도 신자들이 ‘성령께’ 기도한 사례는 없다. 로마서에서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이라고 했다(롬 8:26).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또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요 16:23).”고 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을 가리켜서 ‘주님’이나 ‘주 성령’이라고 부른 예는 없다. 그러므로 ‘주여 삼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 외에도 ‘주여 삼창’의 유래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견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알아보자.

    1) 먼저, 하나님께 ‘주여 삼창’을 크게 외치며 기도해야 효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주여’하며 크게 부르며 기도한 내용이다. 또 마태복음 9장 27절에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두 맹인이 ‘소리 지르며 말했다’고 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크게 소리 지를 때’에, 스스로 결단하는 마음을 심어주면서 다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다.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사람들의 목소리 크기의 정도에 비례해서 기도 응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벙어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다.

    2) 다음으로, ‘주여 삼창’을 외침으로써,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나처시로다.”라고 했다. 이처럼 피난처되신 하나님 앞에 나와 마음을 토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신자들을 위로하시고 참 평안을 주신다고 했다(요14:26). 이는 ‘주여 삼창’을 부르짖는 감정의 발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로이므로 넋두리와 신세한탄과 같은 인위적인 행위는 삼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고대해야 한다.

    3) ‘주여 삼창’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8장 27-28절에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고 했다. 이 말씀처럼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받기 위해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신들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바알 선지지들처럼 큰 소리가 아닌, 평소와 같이 기도하며 ‘응답하옵소서’라고 했다(왕상18:37). 이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과 언행을 알고 계시므로, 바알 선지자들처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유별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신자들은 엘리야처럼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 이제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 책들을 살펴보자.

    (사례 1) : 「교회용어사전」의 ‘주여 삼창’에 대한 견해

    기도할 때, 예배 진행자의 제안으로 “주여, 주여, 주여.”하며 고성으로 ‘주여!’를 ‘3창’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왜 기도를 시작할 때 이렇게 3회 연속으로 소리 지르고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아마 기도하는 사람의 종교적 열심을 나타내기 위함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함께 합심해서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름으로 기도에 서툰 성도도 기도에 담력을 얻게 하기 위함일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를 통해 집회의 감성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주여 3창’은 성경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한 마디로 성경에서, ‘주여 3창’은 없다. ‘창(唱)’이란 인격적 존재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노래나 구호나 함성을 외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는 ‘창’이란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 또 ‘주여 3창’은 기도하는 사람의 열정을 드러내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각성시키기 위한 무력 시위 같은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중략). 그러므로 ‘주여 3창’과 같은 잘못된 신앙 습관을 배격해야 한다.

    (사례 2) : 「교회용어 바로쓰기」 책의 ‘주여 삼창’에 대한 견해

    한국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주여 3창’은 다분히 무속적이며 미신적인 의미가 있다. 무속과 미신은 계시종교에서 절대자의 계시의존과 계시근거에서 신앙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힘을 가진 신을 찾기 위해서 강신(降神)을 위해 부르짖고 절규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로 올바른 영성적 행위는 아니다. 또 ‘주여 3창’이 기도의 담력이나 기도의 대중적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도 맞지 않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맞추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영적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기도의 조건으로서 간절성과 호소력이 필요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조건이 응답의 필수조건이다. ‘주여 3창’이 기도자의 의지의 표현이거나 어떤 언어의 반복 사용과 누적이 공적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기도의 과잉열정이나 통성의 고조 등을 통한 집회 분위기를 흥분시키는 인위적 유도행위는 언약과 계시의존적 신앙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여 3창’은 기도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환호적이고 구호적인 연창이므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 위의 사례들에서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임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서나 요란하면서도 울부짖는듯한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성기도 시에 집회를 주관하는 대부분의 목사는 ‘주여 삼창’을 세 번 연창할 것을 교인들에게 요청한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이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한국 개신교가 개발하고 창안한 놀라운 영적 유산으로 여기며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한국 개신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어떤 목사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도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한국에 있을 때처럼 외국에서도 그대로 실행해 왔다.

    그래서 외국의 개신교인들 중에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식 통성기도를 영어로 ‘Korean prayer’라 칭하기도 했다.
    이제는 외국에서도 한인교회를 통하여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외국인들도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모방하여 시행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한인교회 목사들의 공로는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20년 이후로는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그 왕성했던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예전처럼 듣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개신교회 내에서 코로나 19의 집단 감염이 많이 발생함으로 인하여, 국가에서 코로나 19의 감염의 큰 원인이 되는 ‘통성기도(주여 삼창)’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성경 학자들은 개신교 집회 때마다, ‘통성기도’와 함께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며 집단으로 기도하는 행태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한국 개신교 목사들은 코로나 19 전염병은 차치하고라도,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한국식 ‘주여 삼창(통성기도)’에 대해 진지하게 성경적으로 성찰한 후, 이것들을 영구히 폐지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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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는 기도의 표본적인 문체는 ‘주기도문’ 외에는 인간이 본문대로 표본을 삼을 근거는 없다. 그리고 3이라는 수적 개념이 어떤 완성적 또는 완전의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기도의 첫 머리에 도입할 이유는 없다. 부르짖음의 회차의 누적이 기도의 절실성이나 간절성을 반영하는 것이 되고 기도의 공적 요소가 된다면 기도와 신앙의 외형주의가 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위대하신 중보적 공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여 3창’이라고 할 때 다분히 무속적, 미신적인 의미가 있다. 무속과 미신은 계시종교에서 절대자의 계시의존과 계시근거에서 신앙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라서 어떤 힘을 가진 신을 찾기 위해서 강신 또는 초신을 위해서 부르짖고 절규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로 종교 심성적인 열광적 표현과 유사한 것이니 바른 영성적 행위는 아니다. 또한 '주여 3창'이 기도의 담력이나 기도의 대중적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의 강조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당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맞추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그의 선한 뜻을 신앙으로 확인하는 영적 행위인 것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기준은 인간의 요구기준과 일치하지 않는다. 기도의 조건으로 간절성, 호소력이 필요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조건이 응답의 필수조건이다. 기도의 과잉열정, 통성의 고조 등을 통한 집회 분위기를 흥분케 하기 위한 인위적 유도행위는 언약과 계시의존적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런고로 ‘주여 3창’은 기도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환호적이고 구호적인 연창이므로 기도의 어체가 될 수 없어 반드시 갱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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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의 유래

    1. "주여" 삼창의 유래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하여 "주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미사 후에 "엄마" 삼창을 하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2. "주여!" 삼창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1) 같은 말을 되풀이함으로 강조(强調)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겔 21:1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단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2) 크게 부르짖음으로 강청(强請)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마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3) 크게 소리 지를 때에 결단(決斷)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다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하는 최면(催眠) 효과가 있습니다.

      
    3.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이라는 입장에서

    1) 성경에서 가리키는 '주'(主, lord)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 '주여'라는 호칭이 구약에 100회, 신약에 107회로 207회 나옵니다. 

    그것을 분류하면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삿13:8)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창 18:32; 출 15:17)대신 사용한 경칭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할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여, ' 아도나이'(나의 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아도나이 를 '퀴리오스'(Kyrios)로, 라틴어로는 '도미누스'로 번역되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마 16:16; 막 8:29; 눅 13:26; 요 11:27; 행22:8)를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여호와)을 가리키던 '주'(퀴리오스)를 예수님과 관련시켰습니다.

    (3) 주인. 소유자. 상급자를 가리킵니다(창23:15,44:7;삿4:18).

      
    2) "주여!" 삼창에서 가리키는 '주'(主, lord)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주'라 칭호하면 대부분 '하나님'을 가리키나,  신약시대에는 대부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호칭하고, '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 6;9; 눅 11:2).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여!' 라고 호칭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막 14:36; 눅 10:21; 요 12:27). 

    그렇다면 "주여!" 삼창은 기도의 대상을 잘못 정한 부르짖음입니다.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욥 35:13) 

    3) 하나님께 유기(遺棄)된 자에게 반복된 "주여 주여"를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 "주여"라는 호칭이 반복 된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용의 경우를 살펴보면 '주님'으로부터 유기된 경우였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마6:7)는 말씀과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눅 6: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8: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4) "주여" 삼창의 성경 근거가 잘못 해석되었습니다.

    "주여!" 삼창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성경말씀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단 9:19)는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주여"의 반복이 아니라 

    ①  주여 들으소서.
    ② 주여 용서하소서.
    ③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의 세 가지 기도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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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으로 시작하는 기도 / 성경적 근거

    우리들은 간절히 기도할때 “주여” 삼창을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O Lord, listen! O Lord, forgive! O Lord, hear and act! For your sake, O my God, do not delay, because your city and your people bear your Name.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들으시고 행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황폐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자기의 기도를 들어 달아고 간청할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강청하는 “주여”입니다.

    두번째 “주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세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속히 행동으로 옮겨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아무런 생각없이 “주여”라고 삼창을 부르짖기 보다는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행하시 옵소서”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면 은혜가 더 충만할 것이며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겠습니다.

    자료 사용 / 11-27-200(주일) 파트리스교회 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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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과 엄마 삼창, 글 김문수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항상 엄숙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다들 마음 뿐만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모양, 바른 자세는 기본이었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슬리퍼, 초미니스커트, 민소매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음악을 위해서는 피아노와 오르간만 쓸 수 있었고, 드럼, 기타, 신디싸이저 등은 쓸 수 없었습니다.
    회중들이 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는 것이나 옆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새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그 분과 학생회 수련회에 가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목소리를 높여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항상
    "주여! 주여! 주여~" 라고 주를 크게 세 번 부르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기도할 때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를 못했고,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선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답변이라는 게
    대부분 "크게 외쳐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는 정도였으니까요.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그 분의 사도들이 혹은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하기 전에,
    "주여 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
    "주여 삼창"이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창(唱)이란 "노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우 삼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연호(連呼): 구호를 연이어 외침"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용어 그대로 "주여 삼창"이라고 쓰겠습니다.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다니엘 9장 19절을 근거로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단 9:19, 킹흠정)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또한 "주여 삼창"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렘 33:3),
    크게 외쳐서 우리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기도할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불러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자,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여~ 성령이여~" 하고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16:14). 성경 어디에도 성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한 사례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롬 8:26, 킹흠정)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요 15:16, 킹흠정)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게 하려 함이라.
    (요 16:23, 킹흠정)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다니엘 9:19을 그 앞에 나오는 17, 18절과 같이 비교해 보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니엘은 "주여"를
    세 번 연호한 적이 없습니다.
    (단 9:17-19, 킹흠정) [17]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8]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19]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다니엘 9:19에 나오는 "오 주여, 들으소서"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닙니다.
    이는 9:17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것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긍휼로 인하여 간구하오니 그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2. "주여 삼창"의 기원
    "주여 삼창"을 외치는 의식은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는 동양의 제사의식과 무속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여 삼창"의 모태가 되는 것은 "만세 삼창"인데, 이 만세 삼창은 중국에서 한무제가 숭산에서 제사를 지낼때
    신하와 백성들이 만세를 삼창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은혜에 감사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시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이라는 시 중 일부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이란 죽은 이의 혼령(넋)을 불러들이는 의식인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망자(亡者)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동양 문화의 산물이며, 동양의 제사의식, 황제 숭배,
    초혼의식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여 삼창"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기도를 들으시는가?
    (렘 33:3, 개역)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킹흠정)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KJV)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개역은 "부르짖으라"라고 번역했지만, 킹제임스성경에 나오는 call 이라는 단어는 목청 터지게 외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사 59:1, 킹흠정)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주의 공로를 힘입어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 크기가 기도 응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2) "주여 삼창"으로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가?
    피난처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필요합니다.
    (시 62:8, 킹흠정)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닙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여"라는
    구호를 세 번 크게 외쳐서 얻는 감정의 발산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크신 위로입니다.
    (요 14:26, 킹흠정)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3)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주께서 내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 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주여"를 외칠 필요가 있을까요?

    (시 139:1-4, 킹흠정)
    [1]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손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자고 있다면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시기 바랍니다.

    (왕상 18:27-28, 킹흠정) [27] 정오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이므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 하매 [28]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
    바알 숭배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쳐 부른 것이 아니라 보통 때와 같이
    주께 말했습니다. 왕상 18:36에는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거나, 제단 주변에서 날뛰거나 하면서 주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주께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4) "주여, 주여" 연호한 사례

    성경에는 "주여, 주여"라고 주를 연이어 부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연이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구절들은 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에 의하면, 주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주여, 주여"하고 외칩니다.
    (마 7:21, 킹흠정)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킹흠정)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 킹흠정)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눅 6:46, 킹흠정)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 글의 취지는, 기도할 때 주님께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주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런 분들을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거도 알 수 없는 "주여 삼창"이라는 종교 의식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교회 예배에 들어와 있고, 또 그 의미도 모른 채 목회자들이 가르치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의미없는 외침이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성경적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이 통성기도 시작할 때마다 습관을 따라 혹은 기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주여 삼창"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부르짖음이 될 뿐입니다.
    이제는 주여 삼창이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주여 삼창"이라는
    문화를 전파하여 외국에서도 "주여 삼창"을 외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3784

    참고로,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마리아에게 "엄마 삼창"을 바친다고 합니다.
    천주교 미사의 마리아에게 바치는 "엄마 삼창" (아래 링크 클릭)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6549829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GEXw&articleno=6307813&_bloghome_menu=recenttext#ajax_history_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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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三唱)?

    말씀을 바르게 알고 , 바르게 믿고 , 바르게 행하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때론 알지 못하여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삼창(三唱?)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없다'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주여!“ 삼창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고 간절

    히 기도한다면 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래의 

    글을 올려봅니다..



    주여 삼창의 배경은 

    성경 다니엘서 9장 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

    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

    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라는 말씀에서


    1. 주여 들으소서 

    2. 주여 용서하소서 

    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기도한다는 

    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 위마다 지

    칭하여 부른다’는 설과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

    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援用) 하여 "주

    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

    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

    다. 




    다음은 우주현 목사의 한국인의 기도!(KOREAN 

    PRAYER!)에 대한 글인데 많은 공감이 되어 올려봅니

    다.


    KOREAN PRAYER!

    -우주현 목사- 

    제발! 주여~주여~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

    오. 이는 무당들이 귀신 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

    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

    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 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

    오.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

    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

    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

    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

    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

    신학’ 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교수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시의 교회성장의 한 모델

    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

    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

    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 와그너 교수

    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 라는 이름으

    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

    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 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

    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

    말 그대로 ‘주여!’ 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

    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 가 아니라 한국말

    로 ’주여를 세 번 큰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

    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

    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

    상품으로 ‘KOREAN PRAYER’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

    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의 눈

    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

    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

    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 이라고 생각되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

    터 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 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

    다. ‘KOREAN PRAYER’ 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

    고 판단한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

    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

    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

    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 보

    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때 - 유독 큰 소리로 기도

    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

    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

    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

    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

    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라 말씀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습니

    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전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I will 

    answer...',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

    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부르짖다’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

    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

    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

    리에게 다시 보여 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

    를, 그의 인격을 부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

    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

    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

    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

    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

    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

    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

    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

    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

    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

    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

    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

    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

    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

    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

    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핀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

    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

    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

    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

    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

    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

    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

    다. 오리혀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

    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

    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

    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

    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

    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

    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

    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

    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

    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

    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

    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

    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

    서 문가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

    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

    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

    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

    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

    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

    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

    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

    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

    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

    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

    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

    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

    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

    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

    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

    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

    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

    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

    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

    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

    레스를 푸는- 기도일 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

    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

    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

    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

    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묵

    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

    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

    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

    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

    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

    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