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s 2024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 / 2023년 2024-05-18T16:24:59Z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2001345 2024-07-18T08:54:00Z 2024-04-21T09:51:33Z 동성애 옹호법안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동성애 옹호법안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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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이 공개됐다.

 

군동성애합법화반대국민연합·성매매합법화반대국민연합(공동대표 이용희)이 지난 2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군동성애 및 성매매 합법화 반대 기자회견'을 여는 등 군동성애 반대 등 동성애 허용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전국 학부모는 동성애,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와 함께 제19대 국회에서 '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에서 "전국 학부모는 내 아들 딸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울시청광장에서 벌거벗은 차림의 동성애자들이 축제를 열고 서울시 박원순 시장은 세금으로 경비를 보조하는 등 인간의 본성을 잃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동성애는 축제를 하며 권리를 요구할 사안이 아니"라며 "소수자 권익보호라는 미명아래 표를 모으겠다는 정치권이 동성애자들과 유착해 사회건강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발표한 동성애 옹호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1순위, 왼쪽부터 유성엽(전북 정읍), 은수미(비례대표), 장하나(비례대표), 전정희(전북 익산시(을)), 김광진(비례대표) 국회의원(사진 속 국회의원 전원 더불어민주당 소속,출처:사진 속 국회의원 SNS).

19대 국회에서 동성애 옹호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 명단 공개와 관련해선, ▲군형법개정안 - 권성동 의원등 13인 (의안번호 3678, 발의일자 2013.2.12) ▲군형법 - 김광진 의원등 10인 (의안번호 3269, 발의일자 2013.1.9) ▲군형법 - 남인순 의원등 17인 (의안번호 3390, 발의일자 2013.1.23) ▲군형법 - 진선미 의원등 10인 (의안번호 9746, 발의일자 2014.3.17) ▲차별금지법 - 김재연 의원등 10인 (의안번호 2463, 발의일자 2012.11.6) ▲차별금지법 - 김한길 의원등 51인 (의안번호 3693, 발의일자 2013.2.12) ▲차별금지법 - 최원식 의원등 12인 (의안번호 3793, 발의일자 2013.2.20) 등을 동성애 옹호 법안으로 간주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군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군대 내에서의 동성간 성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으로 명백히 동성애 옹호를 위한 개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안'도 성적지향(동성애) 차별금지조항을 포함시킴으로써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언급한 동성애 옹호 법안 7개중 두 개 이상을 발의한 의원 명단만 발표하며, 명단을 선정시 정당과 지역은 고려하지 않고 법안 발의 숫자를 기준하였음을 밝힌다"고 설명했다.

명단이 공개에서 1순위로 지목된 김광진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전남 순천·곡성에, 진선미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서울 강동갑에, 장하나 비례대표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서울 노원갑에 출마 예정이다.

이와 관련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니스트)은 한 언론 매체에 기고한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이게 말이 되니'라는 제하의 칼럼을 통해, 동성애 관련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을 강력 비판했다.

특히, 박 소장은 김광진·진선미·장하나 비례대표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이라며 관련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공개했다.

김광진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진선미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장하나 의원의 동성애 옹호 행적, 박철성 소장(다우경제연구소) 칼럼 캡처.

칼럼에서 박 소장은 "김광진 의원은 인터넷 방송 매체 KHTV와 인터뷰에서 '동성애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반대할 하등의 근거가 없으므로 동성 간의 결혼에 동의한다.
며느리가 남자인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또, 진선미 의원에 대해선 "1997년 당시 변호사였던 진선미 의원은 동성애자인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과 함께 '동성애자 인권연대'를 창립했다"이라며 "진 의원은 교과서에서 동성애의 문제점과 실태를 알렸던 내용을 전부 수정, 삭제하고 동성애 옹호운동을 만든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장하나 의원은 <군형법> 제92조의6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며 "장 의원은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인데 꼭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동성 간의 결혼은 당연히 합법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끝으로 박 소장은 "제19대 비례대표 중에서 정의당과 녹색당, 노동당에는 '동성애자 위원회'가 있을 정도다.
이들 정당도 동성애를 옹호, 주장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의원 거의 대다수는 동성애 편을 들고 있다.
이들이 4.13총선에 대거 출마를 선언했다.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과잉 해석? 서울시청 담당 주무관도 “교회 폐쇄 가능”
‘교회’라는 말 없다는 이유로 괜찮다는 건 설명 안 돼.
실제로 교회 유독 탄압해 왔으니, 우려 제기할 수밖에.
죄형법정주의· 평등원칙· 과잉금지원칙 등 위배돼 위헌

▲박성제 변호사. ⓒ크투 DB

최근 교계에서 소위 ‘교회폐쇄법’이 논란이 되고 있다.
몇몇 교계 인사들이 개정된 감염병예방법의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교회폐쇄법’이라고 비판하자, 평화나무(이사장 김용민)가 이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본지는 기독 법률가로서 교회 수호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박성제 변호사(법무법인 추양 가을햇살)를 만나 교회폐쇄법 논란에 대해 팩트체크했다. 다음은 박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교회폐쇄법’은 존재하는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약칭 ‘감염병예방법’이 이미 국회에서 통과돼 12월 30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다음 49조이다.

제49조(감염병의 예방 조치)
① 질병관리청장,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모든 조치를 하거나 그에 필요한 일부 조치를 하여야 하며, 보건복지부장관은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제2호, 제2호의2부터 제2호의4까지 및 제12호의2에 해당하는 조치를 할 수 있다.

2. 흥행, 집회, 제례 또는 그 밖의 여러 사람의 집합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
2의2. 감염병 전파의 위험성이 있는 장소 또는 시설의 관리자·운영자 및 이용자 등에 대하여 출입자 명단 작성, 마스크 착용 등 방역지침의 준수를 명하는 것

③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제1항제2호의2의 조치를 따르지 아니한 관리자·운영자에게 해당 장소나 시설의 폐쇄를 명하거나 3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운영의 중단을 명할 수 있다. 다만, 운영중단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운영중단기간 중에 운영을 계속한 경우에는 해당 장소나 시설의 폐쇄를 명하여야 한다. <신설 2020. 9. 29.>

④ 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제3항에 따른 폐쇄 명령에도 불구하고 관리자·운영자가 그 운영을 계속하는 경우에는 관계 공무원에게 해당 장소나 시설을 폐쇄하기 위한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하게 할 수 있다. <신설 2020. 9. 29.>
1. 해당 장소나 시설의 간판이나 그 밖의 표지판의 제거
2. 해당 장소나 시설이 제3항에 따라 폐쇄된 장소나 시설임을 알리는 게시물 등의 부착.

목사님들이 이 내용에서 ‘해당 장소나 시설’을 ‘교회’로 대체해서 읽어 이해하면, ‘교회 폐쇄’라고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스님 입장에서는 사찰폐쇄법, 신부님 입장에서는 성당폐쇄법이라 할 수도 있는 부분이고, 일반 상업시설들도 마찬가지다. 저도 혹시 제가 과잉 해석을 하는가 싶어 서울시청 담당 주무관과 통화했는데, 그 역시 (해당 법을 위반하면) 당연히 교회도 폐쇄될 수 있다고 답변하더라.

지금 법에 따라서 시행되면 가장 크게 부딪힐 문제가 바로 현장 예배가 될 것이다.
현장 예배를 드렸을 때 출입자 명부 작성을 잘못한다든지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으면, 또 설교자가 마스크 쓰지 않아도 방역지침 위반이 돼 교회가 폐쇄되고 교회 간판과 십자가가 철거될 수도 있다.
이 법이 만들어질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서 12월 30일 시행만 앞두고 있다.”

- 그러면 기존에 있던던 교회 폐쇄 사건들의 경우, 법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인가?

“기존의 감염병예방법에도 근거는 있다.
그러나 명확하게 확진자가 발생한 경우에만 가능했고, 민원 제기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확진자 없이 교회를 폐쇄했다면 그것은 법을 굉장히 잘못 적용한 것이고, 나중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라도 다 배상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신설된 규정들에 따라 언제든지 지방자치단체장이 교회를 폐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 열려 있는 상황이다.”

-평화나무의 반박 취지는
‘첫째로 해당 법안은 교회나 예배를 특정한 법안이 아니고,
둘째로 방역을 방해할 정도의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하는 것은 교회 탄압이라 보기 어렵고,
셋째로 방역지침만 잘 따르면 교회라서 불이익당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지 교회라는 말이 없어서 괜찮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원래 법을 만들 때 특별법을 제외하고는 특정 단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기존에도 ‘시설’ 혹은 ‘장소’에 대한 법률을 근거로 교회까지 제재했었다.
교회만 탄압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시설을 폐쇄·중단시킬 수 있고 이용자나 관리자, 그리고 소유자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지금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왜 유독 교회에 대해서 탄압한다고 말하느냐면, 실제로 탄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예배를 금지시켰으니, 이 법이 적용되면 결국 또 교회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서울시의 최근 방역지침을 봐도 공용으로 된 성경책이나 찬송가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굳이 특정 종교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단어들을 채택한 것이 너무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느냐.
그런 것만 봐도 교회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조항을 빌미로 평화나무가 지난 총선 때처럼 목사님들의 설교를 모니터링해서 고발할 수도 있다.”

지금 교회만큼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예배부터 중단하는 것은 정부 시책을,. 예배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예배도 못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현하기만 해도 사람들한테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북한과 뭐가 다른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을 해줘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 위헌 소지는 없는가?

“형벌적 기능이 들어가려면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돼야 하는데,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예측 가능성, 즉 구성요건이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감염병예방법상의 집합제한, 집합금지 등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다 보니 내가 언제 어떻게 이 구성요건을 어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이 위헌적 요소가 제일 크다고 보고 있다.

또 하나는 평등원칙 위반이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렇게 통제하는 방식, 그리고 각 대상들마다 적용을 너무나도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평등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끔 하는 법안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이 정도 처벌은 고위험 병원체 불법 반입 등과 거의 동급이다. 과연 이게 평등원칙과 과잉금지원칙에 합당한가 따져 봐야 한다.”


교회 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악한 이름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그에 대한 항의가 많아지자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심하다.
다음에 명단을 기억했다가
표를 안 주었으면 한다.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에 꼭 탈락시키자!
 
1. 김성주   02-784-5031
2. 이상헌   02-784-8630
3. 홍성국  02-784-2820
4. 조승래  02-784-2648
5. 강선우  02-6788-6031
6. 이용빈  02-784-4291
7. 신영대  02-784-1524
8. 서동용 .............
9. 임호선  02-784-1730
10. 최종윤 02-784-6201
11. 윤준병 02-784-1860
12. 이탄희 02-784-8940
13. 허종식 02-784-8870
14. 정춘숙 02-784-3740
15.  이학영 02-784-8051
16. 송재호  ............
17. 이형석 02-784-1307
18. 오영관 02-788-6766
19. 전용기 02-784-2843
20. 김민철 02-784-5031
21. 이재정 02-784-2677
22. 고영인 02-784-5490
23. 서영석 02-784-9671
24. 홍정민 ...........
25. 이해식 02-784-2171
26. 이규민 02-784-3770
27. 박영순 02-784-2066
28. 윤후덕 02-788-2587
29. 전용기 02-784-2843
30. 한준호 02-784-9160
31. 김남국 02-784-2455
32. 이원욱 02-784-6471
33. 임오경 02-784-6396
34. 정청래 ..............
35. 최종윤 02-784-6201
36. 박용진 02-784-9721
37. 고영인 02-784-5490
38. 신용대 02-784-1524
39. 김윤덕 ..................
40. 강준현 02-784-6950
41. 민형배 02-6788-6426
42. 한병도 02-784-5891
43. 이장섭 02-784-4441
44. 서삼석 02-784-9501
45. 김성주 02-784-7380
46. 설   훈 02-784-8570
47. 오영환 02-788-6766
48. 김민철 02-784-5031
49. 김종민 02-784-5920
50. 이수진 ................
51. 이성만 02-784-6090
52. 윤재갑 02-784-1460
53. 박홍근 02-784-8370

공산주의자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교회이다.
그래서 좌경이념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한다.
 
 
<긴급알림>
 
●  43인의 민족 반역자
🔴  주한미군 철수에 서명한 우리 민족의 반역자 43인 전격 공개  
     이놈들이 주한미군 철수에 서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금번 주한미군 철수 요구에 서명한 43인 국회의원 명단을 입수해 공개
 ● 서명한 국회의원 명단
 
# 민주당~~~
강병원, 강훈식, 기동민, 김민기, 김병욱, 김상희, 김영호, 김철민, 김한정, 노웅래, 민병두, 박경미,
박    정, 박재호, 박홍근, 서삼석, 서영교, 소병훈, 송옥주, 송영길, 신창현, 심기준, 안호영, 어기구, 우원식, 위성곤, 유동수, 유승희, 윤일규, 윤준호, 이개호, 이석현, 이후삼, 임종성, 전재수, 정재호, 제윤경, 조승래
 
# 정의당~~~
김종대, 추혜선
 
# 평화당~~~
정동영
 
# 대안신당~~~
박지원, 천정배
 
모두 47명이라는데,
3명은 숨어있는 프락치들
 
1949년 한국전쟁 직전에 국회부의장 김약수라는 자와 남로당 프락치들은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으며,
미군은 고문관 500명 미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이어서 1950년 1월 20일 애치슨 미국무 장관은 한반도는 미방위선 밖이라고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미 스탈린의 내락을 받은 김일성은 탱크와 중포를 은밀하게 38선 일대에 포진시키면서 6.25 새벽 4시를 기하여 일제히 남침하였다.
그 전에도 남한 정부는 낌새를 알아 차리고 미국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남에서 북침 가능성이 있다고 거부하였다.
 
실상 신성모 국방부 장관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국회답변에서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아침은 해주에서 떼우고, 점심은 평양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질탕하게 먹는다.” 고 호기롭게 큰소리를 쳤다.
 
막상 6.25 전날은 전 장병의 1/3이 농번기 휴가를 보냈으며,
2주일 전에는 전후방 사단장의 인사이동에 이어 육군장교회관 낙성식이라는 미명 아래, 밤새도록 댄스파티와 여흥을 즐겼다.
 
전쟁이 터지자 하루 만에 옹진반도와 개성, 의정부까지 실함되고, 이에 망연자실한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대전으로 돌아 왔다. 
28일 당시의 유일한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 가면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가, 맥아더 장군의 지원이 있다고 하자 허겁지겁 시흥으로 되돌아 왔다.
 
이 대통령은 수원 비행장에 도착하는 맥아더 원수를 마치 구세주 마중하듯이 대전에서 올라와 극진히 영접하였으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아예 맥아더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였다.
비참하지만 그것이 그당시 우리의 생생한 역사였다.
 
실상 국군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총기와 실탄은 물론 모든 보급품과 식량, 군복 등도 모두 미군이 주는 걸 감지덕지 받아서 지탱하였다.
 
정부예산은 모두 군사원조와 더불어 민간원조의 달러를 공매해 대충자금이란 항목이 절대비중을 차지하면서 원조물자로 국민을 기아상태로부터 살려낸 상황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이제 좀 먹고 살만 하니까...  ‘갈테면 가라!  양키 고 홈!’을 외쳐만 대는 주사파 종북 빨갱이들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아무리 트럼프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만 한다.
 
마치 부모가 소팔고, 논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놓은 후, 출세한 자식놈이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부모 형제에게 쥐꼬리만한 용돈을 쥐어주면서 생색만 내어 가는 호로자식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미군정이 1945년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그들은 편의상,
 
전라도를 하와이,
경상도를 플로리다,
평안도를 텍사스,
함경도를 알래스카 라고 호칭하였다.
 
그 중 하와이에 대하여만 별칭으로 남았으며, 호남인들은 하와이 라고 언급하면,
그들은 그만 경기를 일으킨다.
하와이든 알래스카든 그 곳이 좋다면, 거기가서 살면 될 일이다.

제21대 국회, 신자 의원 78명 당선

제21대 국회를 구성할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모두 78명(4월 21일 현재)으로 확인됐다.

본지가 4·15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253명과 비례대표 47명의 당선자를 확인한 결과다. 직전 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선자 중 본지가 확인한 천주교 신자가 77명이었던 것에 비해 1명이 증가한 수치다.

정당별로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52명으로 가장 많은 신자 당선자를 냈고, 야당인 미래통합당은 14명의 신자 당선자를 냈다. 이 밖에 미래한국당 4명, 더불어시민당 4명, 정의당 3명, 국민의당 1명이 각각 신자 당선자다. 신자 당선자 78명 가운데 남성은 62명, 여성은 16명이었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신자 당선자 78명은 전체 300명 중 26%에 해당하는 비율이어서 총인구 대비 한국교회 신자 비율(2018년 11.1%)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4·15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63석, 더불어민주당이 비례대표 선거를 위해 만든 더불어시민당이 17석을 얻어 지역구에서 84석을 얻은 미래통합당과 비례대표 19석을 얻은 미래한국당을 압도했다.

한국교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형제 폐지나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 보호와 빈부 격차 해소 등에 더불어민주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번 선거 결과와 신자 당선자 현황은 한국교회에 희망적이라 볼 수도 있다.

당선자 중 초선 신자들은 각오가 남달랐다. 조오섭(요셉·52·광주 문흥동본당) 더불어민주당 광주 북구갑 당선자는 “이제 싸우는 국회를 멈추고,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힘쓰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김승원(바오로·50·수원 정자동주교좌본당)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시갑 당선자는 “성경 말씀과 사회교리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데에 일조하고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의정활동을 펴고 싶다”고 향후 정치 활동에 대한 소신을 드러냈다. 김은혜(로사리아·49·수원교구 성남 서판교본당) 미래통합당 경기 성남 분당구갑 당선자는 “품격 있는 보수, 대안을 제시하는 보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보수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국민의 염원을 읽었다”고 겸손한 모습을 강조했다.

중진 신자 당선자도 무거운 책임감을 보였다. 서울 용산구에 출마해 4선 의원이 된 미래통합당 권영세(스테파노·61·서울 이태원본당) 당선자는 “선택해 주신 용산구민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용산의 발전과 대한민국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소사댁’으로 불리며 역시 4선에 성공한 김상희(크레센시아·65·인천교구 부천 소사본3동본당) 더불어민주당 경기 부천시병 당선자도 “‘잘 해서’ 뽑아 주신 것이 아니라,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생각하고 이번 선거 결과에 자만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 교회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
 
●절대잊지 말아야 하는 악한 이름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그에 대한 항의가 많아지자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심하다. 다음에 명단을 기억했다가
표를 안 주었으면 한다.
 
교회여~~~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에
꼭 탈락시키자!! ●
 
김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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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02-784-8630
홍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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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래,
02-784-2648
강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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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빈
02-784-4291
신영대
02-784-1524
서동용    
.............
임호선
02-784-1730
최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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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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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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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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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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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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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호   
............
이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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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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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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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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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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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민  
...........
이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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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근
02-784-8370
공산주의자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교회이다.
그래서 좌경이념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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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30244 2024-05-12T05:41:00Z 2024-05-18T16:24:59Z 이호승목사 설교 자료

성령을 주신 목적 05-19-2024
요한복음14:16-17/ (참고)요한복음 14:26-27
찬송가 427장 (내가 매일 기쁘게)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대해서 병 고침을 위해서,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믿음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오늘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1. 우리에게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남’이란 사람이 다시 어머님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의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감히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신 제일 큰 목적은 바로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중생의 체험은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또한 거듭남의 특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진 보배로도 절대로 살 수 없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가 바라고 믿기로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체험을 경험하고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줄로
믿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에 아직까지 중생의 체험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고서 거듭남의 비밀을 깨우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던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것을 보고서 칼을 들고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다혈질적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매우 다열적인 성격에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변화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기록된 것처럼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이제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베드로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매를 보고서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성령을 보내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열매,
희락과 화평의 열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날마다 주렁주렁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3. 복음 전파로 사명 감당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처럼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사명 감당 하라고
성령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사명은 너무나 귀중한 사명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내는 선교에 참으로 열심인 한 교회가
있는데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보내는 선교란, 나 자신은 선교지로 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그곳으로 다른 사람을 보내어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물질로
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빌립보 4장 15-16절은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라고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보내는 선교를 잘 감당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서 비록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지로 후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복음을 증거하다가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싸움도
벌어졌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입어서 병자를 고치고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대결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오늘날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곳은 복음의 능력으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체험을 경험케 하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마지막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날로 날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이때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귀한 사명들을 더욱 더 충실히
감당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를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소서 또환 하나님의 뜻 성령 목적을 이루게 하사
우리가 거듬나는 삶을 살게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이루게 하옵기를 바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이름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05-12-2024
하나님의 보호받기 위하여
요한복음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바로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전쟁의 위험이 있고 질병의 위험이 있고 그의 예기치 않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적 부담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위험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만 할까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따르는 자가 누군가가 중요한 것아닌 불쌍히 여기시며 위험으로부터 돌아보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한 첫 조건이 함께 즉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말은 다시말해서 관계가 좋다 아니다로 결정됩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분을 영접했다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 했듯이 장소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롯 유다 예수님과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형식적인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과 동행 한다는 것이 주님으로 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 마음 가운데 즉 우리의 모든 것에 중심이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성도가 세상의 위험에서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7에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이 말씀과 시편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여 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에 그늘이 없도록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말과 행동을 할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2. 주님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항상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어느 분은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 같은지 큰게 외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8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구 요청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필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있을때 구하라고 야보고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내, 의심없이, 믿음으로 구하라(요청)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4: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 의미는 욕심, 욕망이, 악이 가득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치 안니한 것을 구할 때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로 약속한 것은 끝까지 인내로 구하여야 합니다.
에스겔 36:37 말씀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즉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고 약속 했을 지라도 너희들 내게 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난의 때에나, 육신이 병들었을 때에나,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께 요청을 하지만 평상시에도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8:20 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진정 주님의 보호를 받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과 항상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는 돕는다는 약속은 먼저가 해야할 일를 너희들이 했을 때 나는 ‘이 모든을 너희에게 더하하겠다’은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너희들이 해야할일를 먼저 한 뒤 나에게 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7,18 말씀에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은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이행함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나의 구원로 믿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의 보호가 필요 없는 성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이고 죄인된 자라면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순간순간 마다 필요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해야 하고, 주님께 적극적으로 보호를 기도로 요청해야 합니다.
또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감을 열심히 잘 감당함으로 주님이 보살펴 주시기에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8:1.2에 말씀 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 길 소망합니다. 아멘




04-28-2024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4-5)
찬송 / 491(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가 두 주전에 말씀 드렸던 것을 기억 하시는지요?
우리가 평강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바로 하나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관계’ 두 번째 말씀으로 “내 안에 거하라”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거하시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가 좋다라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증명 하실 수 있나요?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살면서 성도의 삶을 대부분 이렇게 말씀 하실겁니다.
1. 교회 출석 잘하고
2. 헌금 잘하고
3. 성경 열심히 읽고
4.교회 봉사 잘하고
5. 기도 잘(열심히) 하고 등… 있겠지요.
이것이 전부 일까요? 아니요 이러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하라’는 히브리어로 메노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핵심적인 단어로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 간에 연결되는 생명(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 바로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새 생명을 얻은 생명체임을 잊고 살아가면 안됩니다.
오늘도 ‘내안에 거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1. 거한다는 정의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거하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머무는 것은 믿음 이상의 것이 되지만, 머무는 것은 결코 진정한 믿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제거된 가지조차도 “그 안에” 있다고 말하며 최소한의 표면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통해 구원과 죄 사함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이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겠죠.
예수님과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진정한 믿음은 가지를 포도나무에 고정시는 것이고,우리는 그가 말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7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과 우리 안에 거하는 그분의 말씀을
연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킴으로써 예수님과 계속 관계를 유지합니다. 또한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 요한 1서 2:24에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참고로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딤후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유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한다는 것과,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0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31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은 유대인 무리에게“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계속해서 교제하며 충성을 다한다는 비유라말할 수 있으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는 것을 강조하고있습니다.
또한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계속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계속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결은 지속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물리적으로 함께 계셨지만 제자들로 부터 떠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떠나더라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
요한복음 14:15~17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4:23에서도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한다는 정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할 때 항상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우리안에 거하는 겁니다.

2. 포도나무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덧붙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연결하는 포도나무라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힘과 영양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수액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거한다의 증거가 바로 우리의 열매로 증거됩니다.
믿는자들 중에도 열매가 있고, 없고에 따라 비교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한다는 증거는 열매인데 “열매”가 성령의 열매 또는 의로운 삶(갈라디아서 5:22 ) 또는 복음을 나누는 결과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열매를 하나의 특정한 이해에만 국한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가 “열매”를 신자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과 성령의 모든 명백한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열매도 포함될 것이고, 삶에 맺히는 성령의 열매도 포함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열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에서 예수께서는 이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목적과 최종 목표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또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되돌리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명백해집니다.
모든 삶이 구원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십니다.
그의 통치와 그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계획에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고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할 때, 그분의 구속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두 번째는 또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신도들의 삶 속에서 경건한 성품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본질적으로 삶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포도나무에 거함으로써 변화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만이 하나님 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좋은 열매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는 증거임을 기억하고, 행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아멘








04-07-2024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우리에게 평강이(요한복음 20:19.  빌립보서 4:7)
 
요한복음 20:1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4:7
4.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께서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주는 평강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평강에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무엇일가요? 어느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평강은 관계다. 관계가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에 그 관계 속에 평강이 있고 없고 한다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믿음 생활하시면서
성경을 읽으면 여러분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아담 관계에 있어서는 에덴 동산에 분명히 평강이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로 인하여 평강은
다시말해 관계가 무너지므로 평강역시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며 근심 걱정 없이 평강이 마음 속에 항상 있던가요? 우리는 솔직한 마음으로 살고있나요?
아니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안에서는 갈등하고 자신과 싸우며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기본 심리 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근심, 걱정, 불안, 우울증, 공항장애, 욕심, 욕망 등 없을까요?
우리는 욕심이 있습니다. 좀더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하고, 내 자식을 좀더 좋은 것으로 키우길 원하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를 원하고, 좋은 학군에서 공부하길 원하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신의 중심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마음과 생각인지. 우리는 대부분 자가자신을 위함이 더 많았을 겁니다.
빌립보서 4:6-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평강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염려없이 기도와 간구로 기도가
되던가요?
저 역시 사역자로 들어 서기전 저 자신과 3~4년을 생각하고, 미국에와서 12년 후에 결정했습니다. 신학원 생활
1년차되던해 전도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면서 항상 걱정이 앞서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어린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있을까?하멱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니 그들에게서 배우고 나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역자길로 들어서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쓴 소리 보다는 단
소리만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이을 먹다보니 이제는 잘못된 부분을 알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잘못된 한 부분이 굳어졌기 때문이죠.
우리의 신앙도 같은 것 같습니다. 첫 만만이 잘못되니 자신의 신앙 생활만이 고집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것이 안되듯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가질 만한 사람이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강 할 수 있을까요?

1.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두려워 한 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 닥칠 상황에 위압감에 어찌해야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찾아 오셔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듣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바로 평강은 어둠에서 빛을 만날 때와 갇이 두렵고, 고통 속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쁨 가운데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회개한 후 평강이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공통점이 바로 누군가에 혹은 자기 스스로 잘못했을 때가 아닐까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행복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할 그곳 항상 하나님의 평강만이 있어야 할 곳에서 왜
두려워 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에
평강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고통, 두려움, 고난, 불안 등 속에서 살아졌습니다. 그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고,우린 예수님을 통해 회개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우리에게는 평강이 회복됩니다.
3.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평강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누군가와 함께 할때 더 힘이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가 생각을
지켜지나요?
또한 그 속에 평강이 있던가요? 아니요 어느 정도 정상이되면 각자 마음과 생각이 달라짐이, 배신과
경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을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우리는 예수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항상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부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으로 항상 평강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죄사함 받게 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평강이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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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예레미야 31:31-34)

예레미야 31:31-34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산봉우리 중 하나에서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새 언약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며 예레미야의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증하며 또한 이 말씀을 준수할 때 약속된 축복이 있다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렇게 귀한 언약 율법이 파기되었으며 주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언급하고 있는 새언약이 옛 언약이 지켜오던 율법과 별개의 것이 아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나 형식적에서 옛 언약의 차이점이 없으며, 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다른 점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구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과 죄 많은 인간과 맺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만 삶과 은혜가 성취됨을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옛 언약의 조건에 따라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으로 인해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따라 생활하신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문제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31장의 문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고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31: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친히 새 언약 아래 구원자를 마련하심으로 이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죄 없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약속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이 구절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새 언약은 문자 그대로 새 언약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고린도전서 11:25; 고린도후서 3:6ff; 히브리서 8:8-9:28; 10: 16; 로마서 11:25-26).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이 이제 제정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구원 계획을 설명합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순종할 수 있도록 내적 본성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속사람의 “원하는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33절). 그분은 그들 안에,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율법”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의지를 지배할 것입니다. 모세의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출애굽기 31:18; 34:28-29; 신명기 4:13; 5:22). 필요한 것은 타락하고 죄 많은 사람의 안팎의 변화였습니다. 인간의 죄 많고 변질 된 본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모세의 언약이다(출애굽기 19:1-24:11).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주권자 하나님이시니라. 언약의 조건은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순종하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은 징벌을 가져올 것입니다.

2. 이스라엘과 맺은 새 계약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 곧 유대 민족 전체와 맺은 것입니다(31절).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1장).

이 구절들은 나라 전체가 메시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소수만이 아닌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회복을 봅니다(이사야 5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 31:33 ;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백성을 포용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강조합니다. 구원받을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일시적으로 굳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영원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500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34절에서는 각 사람이 “여호와를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안다라는 단어는 관찰을 통해 직접적으로 정확한 개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간접 지식이 아니라 야훼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이는 마음, 감정 및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서로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얻는 지식을 나타냅니다.

3. 모든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는 언약입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마지막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예루살렘 감옥 너머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의 날까지 보았습니다. 보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적 감각이 있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레미야 31:33-34은 참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약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중생하여 성령 안에서 교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급격한 변화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이 신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즉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고 걷고 존재합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고 정착하시며 자신을 집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새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 율법의 요구를 남김없이 다 충족시켰더라면 규정된 대로 복을 얻고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신명기28:1-14) 그 누구도 구약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었으며, 결국 엣 언약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구원 얻을 수 없는,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에서 이루지 못했던 죄인의 구원을 예수의 피로 완성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을 전하여 새 언약이 죄인을 구원하는 새 언약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8장 6-7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흠이 없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만일 그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두번째 잘못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율법 주의적인 법과 규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임재를 적용함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에 다음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거리가 있다는 척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의 죄악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것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걷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그분과의 교제를 유지할 때 우리는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1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아름다운 특권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새 언약은 각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을 통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지식은 도덕적 더러움을 버림으로써 얻게 됨이요, 그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될 것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새 언약의 적용을 받아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분 자신을 계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이 실제로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너무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가가서 만날 수 있을 때가 있습니까? 그분께서 알려진 모든 죄를 마음에서 깨끗이 하시고 당신이 그분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 그분은 당신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그분 자신을 당신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언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 언약에 참예한 우리 성도들을 우리 안에 게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표하시길 바랍니다. 





02-25-2024


https://www.youtube.com/watch?v=rdW9N1rHD2A

약속과 의심 가운데 확신하고 굳게 서기. 02-25-2024

로마서 4:20–21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 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4:20-21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삶을 보이시나요? 나와 여러분의 삶에서 진실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느끼시나요?

아브라함에 대해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야기 내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전체 요약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 졌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에 이르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문 1.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까?

질문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우리의구원은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내용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행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화해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일회성 신뢰가 아니라 그로부터 점점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입니다.

로마서 4:20-21은 믿음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 삶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신앙(믿음 없는) 삶으로부터 지켜주소서.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약속과 의심 가운데에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굳게 서게 도와주세요. 또한 우리가 하나님 영의 지도력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방식과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어둠 가운데, 슬픔 가운데, 그의 슬픔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불가능을 생각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고려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39;하나님의 친구&#39;라는 칭호를 얻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낙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기


낙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약속하신 것의 성실성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상황을 볼때에만 옵니다.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질 때 어떠한 고백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은 훌륭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당신이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과 같이 우리가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녀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셔서 그들이 낙담에 면역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며 우리는 때때로 끈질긴 기도로 그 분께로 향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완성 자 이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라 생각합니다. 더더욱 2 절 말씀처럼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증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 생활할 수 있고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증거,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전당이다. 나열된 각 사람은 전투기였습니다. 그들은 낙담이 그들의 믿음을 훔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힘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 힘으로 우리 상황을 바뀌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 안에 누가 계신가요?

우리는 각자 영혼의 미래를 놓고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지자. 하나님을 찾고, 기도로 새 힘을 얻고, 다시는 낙담의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우리가 때론 무너지고, 의심할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어떤 한 젊은 변호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서 칼과 면도칼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우울증 기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는 우울증 회복하여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확신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준 것이라 믿고 확신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실 것임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게해주시기를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서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오늘 능히 이루실 수 있음을 확신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는 기초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반석이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대한 우리의 신뢰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친숙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숙하지 아니한데 어찌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낙심치 않고, 믿음을 견고케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2-04-2024
주를 찾나이다(마가복음 1:36-37)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레미아 29:13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전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진심으로, 진실로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찾는다는 말씀은 같으나 의미는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아에 찾는다는 의미는 너희들이 나를 만나고자 하면 진심, 전심 아무 조건 없는 만남을 원하는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 만나겠다는 의미이고 오늘 본문의 찾다 의미는 분명히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병이 낳기 위함이고 예수님의 이적 기적을 보기 위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찾을 때 마다 조건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오늘은 마가복음 1장 36-37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이 스쳐지나 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묵상하시면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나는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나 스스로 질문을 해봅니다.

1. 무엇을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가?
2. 예수님을 찾았나, 아니면 아직도 찾고 있나?
3. 나는 무엇을 찾고 있나?
4. 난 무엇을 얻었나?
5.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무엇을 했나?

오늘 저도, 여러분도 오늘 말씀 중심에 자신을 세워 보시고 답을 함께 찾아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1장 전체 내용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뒤에 오시는 예수를 예비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이후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이 성령이 입재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이후 광야에서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시험을 받은 이후 갈릴리에 돌아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고로 복음 전도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변을 지나시면 제자를 부르시는데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고 잠시 더가시여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4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안식일에 회당을 가셔서 복음 전하는 말씀에는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과 다르다고 기록합니다.
21-34까지 예수님의 기적,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이 순종하고, 귀신이 떠나고, 열병에 붙잡혀 있던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는 이적이 사실로 온 동네에 펴져서 알려졌을 때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느 부흥회서 병이 낳고,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시각으로 부흥 강사는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 분의 부흥회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고마는 경우를 나는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찾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찾는 방법이 잘 못되어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하면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찾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36절에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이 절을 보면 제자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떠나기 싫은 모습이 보이고, 제자들의 행동과 생각이 현명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보시기에 부정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를 따르다’는 의미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의 표현을 적대적인 인물을 따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 병이 낳고 하는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보기를 원하여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주를 찾나이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표현은 개인 적인 욕구가 폭함 된 것입니다.
마가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요한복음 6: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른 생각 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리며 빨리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혹시 우리 마음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거나,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찾으라 하시는 말씀 의미를 우리는 잘 못 알고 주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
저는 오늘도 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예수를 무엇 때문에 찾을까?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마태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 7:-8“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신앙인으로 무엇을 구하였고, 무엇을 찾았으며, 어디를 두드렸을까요?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공허했으며, 때로는 우리는 기쁨이 없었으며, 찾기보다는 구하는 것을 많이 했으며 두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 그러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깊은 암흑 가운데에서 길을 못 찾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의 기도 가운데 나를 찾아 주세요! 하며 하나님께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은 지금도 끝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으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나를 부르고 계실까요?

얼마전 한 뉴스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넓은 옥수수 밭에서 일어나
아이의 실종 사건이었습니다.
옥수수 밭에 들어간 아이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점점 불안해가기 시작했고 그 넓은 옥수수 밭에서 지쳐 울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했고 많은 사람들과 경찰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아이를 찾지 못하고 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포기할 때쯤 드론에 적외선 카메라를 장착하여 수색을 시작할 때 적외선 카메라에 물체가 잡혀 그곳으로 달려가 그 아이를 찾았다 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 생활을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빛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만족이 없고 무기력하고, 나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못 찾는다면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쁨과 기도 그리고 감사가 끝임없이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서 성경 말씀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진정과 신실 하므로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 시길 주님의 소망합니다.

성만찬 예식 성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01-14-2024(주일)

“나를 좇으라”(요한복음 1:43)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자의 성육신 (1:1-18)

2. 성자 예수의 표적과 선언(1:19-12:50)

3. 성자 예수의 교훈(13:1-17:26)

4. 성자 예수의 고난과 부활 (18:1-21:25)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신약 성경 중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젊은 신도들에게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기록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서 자신이 누구 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요,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요, 부활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참 포도나무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성이셨고 그것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 누구의 아들을 고치셨으며, 다리 저는 사람을 고치셨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고, 물 위를 걸으시고, 맹인을 보게 하시고,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넷째 날. 이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손끝에 힘을 갖고 계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그의 창조물 사이를 거닐며 그의 창조물을 도우셨고, 슬프게도 그 당시와 오늘날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피곤 하셨고, 그분의 영혼은 우리를 향하여 안타까워하셨으며, 그분은 영으로 신음하셨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밝힙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것 무엇을 혹은 누구를 따르셨고, 좇으셨나요? 신앙인으로서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며, 우리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따르라는 요청을 받거나 명령을 받았을 때, 이는 우리가 따르도록 요청 받았다면 바람직한 경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다음 목표를 달성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가고 있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이 멈춤이 쉬울 수도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이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레미콘안에 콘크리트가 굳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리고 공사장까지 신속하게 도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작업이 끝나서 물로 레미콘 안에 있는 시멘트를 물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보게 뵙니다. 새로운 시멘트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로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달성하기 가장 쉬운 모습은 아닙니다. 예) 지하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기차는 철길을 따라 달리 수는 있어도 자동차처럼 돌리는 가나 자유롭게 유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약간의 전환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물론 기차는 역방향으로 느린 속도로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만 이는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가끔 뒤로 걸어보세요. 우리가 천천히 발을 섞고 직선적이고 장애물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전할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면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좇는 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길로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셋 번째, 일단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때 사탄이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위해 길에 놓아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문은 좁고 길이 넓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예수님을 좇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성경의 이 부분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 달, 다음 주, 내일, 심지어 한 시간 정도 후에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측을 해보고 그것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부분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너희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1 그들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니라. 신문에 광고를 내고 배와 고기잡이 사업을 먼저 팔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고 대신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읽습니다. 사도행전 8장과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에 26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남쪽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이것은 사막 길이다.) 27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이 주님의 명령을 맡은 천사를 따르는 데 지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팔로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시작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4~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 부르시고 말씀하길 어리다는 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스스로 같은 변명을 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사역의 기회를 놓친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길, 즉 거룩함과 의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우리가 오랫동안 걸어온 알려진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보다 익숙한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더 쉬워졌습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시작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느낌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에 반대되는 향하는 것에 중독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정말 어려운 단계가 됩니다. 우리 삶에서 중독을 제거했을 때, 우리는 채워야 할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 공허함을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우지 못하면 사탄이 와서 다른 것으로 채울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돌아서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전환점을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을 읽습니다(3-6절). 3. 그가 여행하는 중에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더라. 4. 그가 땅에 엎드러지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니 5.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런 다음 10-20절로 넘어가서 사울이 안나니아를 만나고 그로 인해 시력을 되찾게 된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손에 의한 기적적인 변화입니다. 이전 삶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는 행위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 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어 있는 영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영원히 안식을 누리며 예배할

영혼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기대할 것이 거의 없거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서 가장 큰 보물을 발밑에 놓이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은 사람에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전 생활 방식에서 등을 돌린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부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나쁜 일을 그만두고 좋은 일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을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믿음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와 다른 믿음의 소유자들과 한번 그리스도를 선택했다고 그것은 영원히 확정하고 일단 고백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계속 죄를 짓고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믿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째 편지 5장 20 읽습니다.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니 이 원칙을 편견 없이 지키고 아무 일에든지 차별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멈추고 돌아서면 이제 진행할 시간이 됩니다. 이제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볼 수 있고 여행하기 훨씬 더 쉬워 보이는 길을 설정하십니다. 그 길에는 작은 보상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길에서만 마지막 상, 즉 천국에서의 영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길에 많은 출구를 마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선택한 새로운 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제 그 출구, 지름길처럼 보이는 우회로는 파멸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다, 따른다는 의미는 헬라어로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어로 1. 따르다 2. 본받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새벽 예배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예수님을 무엇을 본받는 삶 속에 어떠한 그리스도인 될 것인가를 매일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12-17-2023(주일)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세 번째 촛불의 의미인 기쁨(Rejoyce) 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로 정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앞으로 한 주로 다가오니 기쁘십니까?
아마도 지금 어쩌면 누군가는 택배로 선물을 보내신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택배를 기다리고 계실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척 힘들고 고심 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렘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까지 며칠 남았는지에 대한 업데이트가 매일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노래에 우리는 신나서 한 동안 마음이 설레 이겠지요?
우리는 매년 돌아오는 이 날이 기다려지고 매순간 들 떠있는 마음으로 시즌을 보냅니다.
크리스마스는 들 떠있는 마음이 아닌 차분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말씀의 중심을 보면 “항상 기뻐하되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므로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기다림 대해 생각할 때 항상 기쁨이 함께하십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하나는 정말 기뻐하는 모습과 또 하나는 불안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 한가요?
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해동안을 잘 준비한 사람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불안 사람은 준비가 안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아침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대림절 준비에 기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앞으로 다가올 며칠과 몇 주가 어떻게 스트레스가 아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에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영원에 초점을 맞춘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후에 여러분이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바울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들에 대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짧은 편지 전반에 걸쳐 지속되는 주제입니다.
여기 4장에서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전히 사물에 대해 즐겁고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위한 몇 가지 장기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상황이 그들에게 정말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한번 말 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생에서 기쁨을 누리는 관점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걱정할 이유와 기뻐할 이유를 모두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 든 우려되는 그들의 죄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주님은 분명히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오실 구주를 가리켰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설교하는 동안 요한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요한은 오실 구주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의 불을 가져오실 것과 그분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셔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 기뻐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동기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에게 많은 세부적인 지시를 줍니다.
그분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고 시작하십니다.
관용이라는 단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관용이란?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 성격의 친절 성 등을 의합니다.
또한 관용은 기쁨의 원인이며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다르지만 포용함”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인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혹은 실제로는 그 어떤 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면, 한 걸음 물러서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온유함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가?
아니면 나는 성급한 성격인가?
나의 인내심 부족인가? 내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무능력인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화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내 자녀, 배우자, 부모,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 더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그 모임에서 말하는 방식이나 내가 길을 운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가게의 점원이나 선출된 대표자, 교회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갑자기 내가 온화하지 못한 모습이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나는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화를 내거나 조급함이나 이기심을 다시 품게 되었습니다.
나는 온화하고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나의 기쁨이 내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너는 용서받았어.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온유함을 우선시하여 그 용서를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쁨은 만족으로 인한 자신감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항상 훌륭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거나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직면하기 힘든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부족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은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멈추어 있는 것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훨씬 더 생산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간구에 의한 바울의 표현은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갑니다.
즐거운 삶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마음에는 더 힘들고 더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매우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특별한 경우들을 인정합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 씨름할 때, 매우 구체적인 요청을 하나님께 가져오십시오.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인도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위해 기도하고, 온유할 수 있는 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가장 어려운 일들을 그분께 가져갈 때,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가 불타고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삶의 다른 부분은 아마도 좋아지고 있거나 적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식량이 어디서 나오는지 항상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이 삶이 지금 우리에게 거대한 용광로의 불길일지라도,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이자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거나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실 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여전히 재림절 준비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렵다고 느끼셨나요?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은 죄의 본성을 갖고 이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더 자주, 나는 온화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내가 아내, 자녀, 회중, 친구, 지역 사회에 대한 나의 실패에 대해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았듯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 안에서 찾으시 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편지의 이 짧은 부분을 결론짓는 방식이며, 사실 바울이 우리 회중에게 대부분의 설교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아마도 이 단어의 의미에 약간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감각해지지 마십시오.
신선한 눈으로 보고, 신선한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 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창조주와 전쟁이 아니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를 위해 죄와 사망과 지옥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옵니다.
이 평화는 괴로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평안은 우리가 시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안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살고 죽으셨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현실이며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삶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혼자 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때와 괴로운 때를 거치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 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삶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그분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설명한 모든 이유로 인해 무서운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섭지 않은 수많은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구세주를 통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12-03-2023(주일)

“소망”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 절기의 색상은 보라색과 청색이나 대부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보라색은 따뜻하면서 침착함 가지며 희망과 동경의 색입니다.
절기동안 사용하는 보라색은 왕의 존엄, 참회, 금식을 상징합니다.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의 다섯개의 촛불이 있는데 첫째 주의 촛불은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냅니다.
세상에 어둠 속에 살아가 자들에게 빛으로 소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주일 촛불은 회개의 촛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복음의 전파에 방해되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의 의미의 촛불입니다.
이 주간에는 특별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셋째 주일 촛불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도시는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만 그 뒤에 감춰진 상처받고, 배고프고, 외로움에 쓸쓸히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고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들입니다.

넷째 주일 촛불은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과 만남과 화해를 의미로 촛불을 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했으며,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촛불의 의미를 되새기며 복음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개의 촛불 중 가운데 촛불은 25일 아기 예수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는 의미로 촛불을 켜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것으로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며 새롭게 출발합니다.

오늘 저는 대림절 첫 째를 맞이하여 소망이라는 주제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며 대림절 첫 주일을 맞이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중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제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조금 전에 대림절 촛불 의미인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소망의 촛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로마서 5장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소망의 중요성을 깨닫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소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함께 자세히 나누길 원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에도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과 소망을 사랑과 함께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소망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한때 믿음을 어둠 속의 도약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을 부정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저 위에 우리를 잡아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며 심연 속으로 필사적으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이 “실체”라고 말합니다.
실체인 어떤 것이 곧 어떤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ὑπόστασις )는 기초 또는 기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기초 위에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고전 3:11).
이 기초는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유대인들이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닙니다.
요한은 사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말합니다(요일 1:1).
이것이 바로 대림절이 크리스마스가 아닌 이유이다.
우리는 구유에 누울 아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기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 마음에 소망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사시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시며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40일 동안 많은 증인에게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40일 만에 아버지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분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을 보고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이 사건들의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눈먼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말할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무엇을 드릴지 물어볼 수 있는 인간 증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느 정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완전히 눈먼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것을 바울처럼 인정합니다”(고전 13:12).
그러나 소망은 우리가 지금 희미하게 보는 것을 대면하여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어두운 밤의 등불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또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아침에 해가 떠오를 것과 같음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어둠 속의 도약이지만 맹목적인 도약은 아닙니다.

(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 한다면 어떻게 생각 할까요?
“나는 믿음의 도약을 하고 미시시피 강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이 말은 모두가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 너머로 더 멀리 갈 수 있을까요?
그 넓은 강을 어떻게 뛸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은 그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소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완전한 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소리 질러 그분의 대답을 듣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분의 완전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행글라이더가 행글라이딩 복장을 입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 사람은 높은 곳에서 점프하여 반대편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글라이더와 바람,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단순히 뛰어내리는 것이고 성공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날개이자 과업을 위한 지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인 능력에 관해서 본인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와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그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반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르라 고 손짓하십니다.
물이 깊고 이 세상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날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름 아닌 예수의 피와 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맹목적인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이 어둠 속에 빛이 비치었음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 1:5)
어둠은 이 빛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날, 그분의 재림의 날까지 소망이 우리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서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이 낮에는 얼마나 희미하게 보이는가!
보이지 않았던 믿음의 면이 보일 것입니다.
믿음은 신실함이 될 것이며 신실함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림절에 우리는 “복된 소망”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소망은 가라앉는 모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과학자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영적으로 눈먼 과학자들에게 있습니다.
과학의 빛은 순수한 어둠이다.
하나님이 과학의 창조자인 한 과학은 참이지만, 과학자들이 과연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모든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사실은 창조자의 목적에 의해 다른 모든 사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는가? 그러므로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맹목적인  희망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림절의 약속을 가져올 수 없다면 정치인들이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철학자와 현자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전 1:20)고 말합니다.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소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인류는 자신들이 견고한 기반 위에 있으며 별까지 바벨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류가 이미 탁한 강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에서 어둠 속으로 도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는 일에 동참하도록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마태 5:14)
우리는 사람들이 맹목적인 희망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희망은 어둠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은 언젠가 새로운 현실의 빛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입니다.


11 - 12 - 2023(주일)
예배의 있어 필요한 것들(히브리서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배에 출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지는 안는지?
코로나 이후 코로나 전염되듯 나는 예배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갖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여러가지 방법 중 한 가지 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안는지?

토저(A.Tozer)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네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나?
“예배의 가장 깊은 수준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련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유혹이 있을 때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멀어 보일 때에도 그분 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무엇을 얻기를 소망합니까?
우리 얻기 위한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회복을 하기를 원함, 은혜가 충만하기를 원 함이고,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들을 성취하기위해서는 우리 예배에 성경적 패턴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예배에 필요한 몇 가지를 함께 하려합니다.

1. 강력한 기도.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3. 십일조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5. 개인적인 간증.

1. 강력한 기도.

구약의 성전에서는 기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새 성전을 봉헌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성전을 당신의 영광으로 채우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과 백성에게 말씀하여 이르시 길 역대하 7:15-16 “15.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이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 노라 내 눈과 내 마음은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신약에 와서는 교회 란? 예배의 집, 설교의 집, 친교의 집, 봉사의 집, 찬양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를 통해 누구를
만나야 하나? 바로 주님을 만나고 성령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1990년대 후반 영국 왓퍼드(Watford)곳에 Matthew Redma (곡을 쓰고, 찬양을 리더)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는 수준 높은 찬양 밴드와 예배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회중이 예배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일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Matthew에게 하나님께 헌금으로 무엇을 가져오시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Matthew Redman은 그 질문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진심 어린 기도와 감동의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Matt(매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찬양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벗겨진체 단순히 마음을 축복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가져오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나는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관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만든 일로 인해 죄송합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음악에 대한 최초의 성서적 언급은 창세기 4장 2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멕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아다의 아들 유발은 수금과 피리를 연주하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해 읽습니다.
요한계시록 15:2-4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형태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남성, 여성, 어린이의 예를 봅니다.
성령과 음악.
사도 바울은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사이를 직접 연결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편, 찬송가, 신령한 노래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드리는 예배 음악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음악과 노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그분께 노래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역대상 16:2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 할찌어다.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요한은 구속받은 자만이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예배에서의 음악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계, 헌신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감사, 찬양,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3. 십일조

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영어를 보면 worth(가치) + ship(운반하다) = Worship(경배, 예배)
가치라는 단어와 운반하는 단어가 합쳐 만든 단어입니다.
즉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리는 것 중 하나님은 헌물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십일조 말씀입니다.
우리가 꼭 축복 받기위한 수단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소중한 것 중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 100%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시편 50:10-12 말씀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 말라기 3:8–11에서 말씀합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예수님 역시 십일조를 권장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특권입니다.
고린도후서 9:6-8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위에 말씀을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1. 우리는 우리가 드린 만큼 축복을 받습니다.
2. 우리는 억지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받아먹어야 할까요?
예레미야 15:16에서 답을 알려쥡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앞으로 우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먹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에는 항상 성경이 포함되었습니다.
느헤미야 8:5-6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설교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하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면하라.
그들이 건전한 교훈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영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14 “이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의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복음 4:18NKJV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배에는 항상 경전을 가르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많은 교회들이 제자도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설교를 듣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얻어먹어 야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행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개인적인 간증

지금까지 믿음 생활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주변 이웃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살아가고 있나요?
이제껏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은혜의 간증이 있나요?
우리가 은혜가 없고, 간증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슬픔 믿음 생활을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요한계시록 12:11에 “또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말씀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간증은 회중 참여의 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간증이 없다면 교회 예배에 형식적 의식으로 생각하고 영혼이 없는 하나의 의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그런 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간증은 예배의 귀중한 부분이며 믿음을 키워 줍니다. 교회의 모든 일과 우리의 삶이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자가 세워지고 충성된 주님의 자녀로서, 충성된 제자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간증하며 믿음 생활하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10-22-2023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행위(살로니가전서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 갔는
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 최고의 교회에 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사도들을 본받고 무엇보다도 주 예수를 본받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지역의 모든 믿는 이들의 모델이 되는 모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내 이웃의 모범이 되어갔는지, 되고 있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 모든 믿는 자의 모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받고 싶은 칭찬 아닐까요?

어떻게 이런 소문을 듣고 살아갈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느니라”(살전 1:9, 10).
이것은 매우 평범한 설교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둘째,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셋째,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라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서로 상반된 것입니다.
우상은 죽었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상은 거짓이고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우상은 많고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우상은 눈에 보입니다.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돌아와서는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우상 숭배는 신과 여신들의 만신을 숭배하는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공통 종교였으며, 그들의 최고의 신 제우스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올림푸스 산에서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그들의 사회 구조에 있었지만, 그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러분이 가족의 종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이 그들과 그들의 사회와 전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믿으며 부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교회에 속한 많은 헬라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우상을 거부하는 그들의 급진적인 개종은 빠르게 전파될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 우상들은 얼마나 강력한가? 선교사들은 우상이 원시 민족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부족의 전통 우상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 뒤에 숨어 있는 영들을 불쾌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으며, 영이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 이방인뿐만 아니라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도 역시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 외에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며, 사람을 그 지배하에 가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희곡에 등장하는 사람을 자신의 창조주를 숭배하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이를 좀 더 깔끔하게 표현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완전히 미신적인 것이든 현대의 세련된 우상이든 어떤 우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영광스럽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의 경험을 활용했습니다. 그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했고 그의 청중 중 일부는 마음속에 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들이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의미의 믿음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 즉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으로” 믿었습니다(행 17:3-4).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몇 가지 사실(종교 역사의 몇가지 날짜와 사건)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훈련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과정을 설명할 때 그들이 돌이켰다 라는 행위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우상의 마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깨졌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우월한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바울 자신도 목숨을 걸고 재판을 받을 때 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판사에게 자신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를 하나님께로”(사도행전 26:18) 경험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종에는 충성의 급진적인 이전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과 능력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은 실제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버리고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섬겨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사랑, 애정, 경의로 잘못되어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회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바울은 봉사하다 라는 다른 행동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닌,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들의 삶은 이제 다른 주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모르게 사탄을 섬겼지만 이제는 우회전하여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그의 위대한 교리 부분을 마친 후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면서 요약을 시작했습니다.

1. 이것이 귀하의 합리적인 서비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기대되는 표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려라!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제일 좋은 것을 추구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할까요? 우리 모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일가요? 아니면 자신이 쓰다 남은 재물일까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봉사에 있어 천박함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서비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 재능, 소유물 등을 그분의 청지기로서 사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섬김이 “산 제사” 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나, 그 때에도 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다스려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서비스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각자의 은사와 재능, 자원에 따라 수행해야 할 다양한 작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아시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봉사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종이었지만 복음을 통해 두 번째 해방, 즉 완전한 자유인 하나님을 섬기는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찬송 중 조지 매더슨(George Matheson)이 쓴 곡에 “Make me a captive, Lord” (나를 포로로 삼아 주시면)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 시길 바랍니다.


기다려라

세 번째 전환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당시 이교도는 자신이 죽은 후 스틱스 강을 건너 자신의 선함과 신의 은총에 따라 좋은 미래를 누릴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지만 확실성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확실하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일의 교리인 종말론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서 그들이 확실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 거하다, 머무르다, 기다리 다라는 단어의 강화된 형태이며 “미래의 사건에 관해 기대하면서 제자리 또는 상태에 머무르다 “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내와 신뢰의 개념을 추가하여 올 것이 알려지거나 예견된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아닌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자라. 그는 하늘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분은 다가올 진노의 위험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을 겁니다.

사도가 분명히 활동적인 “섬김”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과 연결시키는 것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개종자들에게 이 둘이 함께 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더라도,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보다 더 나은 세상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구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자주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통치의 최종 승리를 확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세상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한가롭게 기다릴 권리가 있을까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동안 일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낮에 오시는지 밤에 오시는지 그 누구도 모르며,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의 의미는 경고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언제 올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생애에 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달력에서 다음으로 큰 사건은 큰 영광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개종자들에게 깨닫도록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준비 속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삶의 가치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두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동일한 삶의 헌신하는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살자.


2.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분별하며 믿음 생활하자.
이 두 가지 우리의 믿음에 있어 본이 되는 모범적 그리스도인 되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0-01-2023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7:4-7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7장의 중심 내용은
1.르비딤에서 일어난 일
2.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오늘은 17장 전반부에 나오는 르비딤에서 일어난일 중 모세가 행한 일과 반석에 흐르는 물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물은 인간에게 없어는 안되는 필요한 물질입니다.
인간의 몸은 약 60-70%가 물입니다.
인체 구성은 산소가 25%, 탄소가 9.5%, 수소가 6.3%, 질소가 1.4%, 칼슘이 0.2%, 인이 0.2%, 칼륨이 0.07%로 총 42.67%구성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중요하듯 모세가 광야 생활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배고프 다하여 만나로 메추라기 로 다 해결해주니 이제는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리고 모세를 향하여 목이 마르니 물 달라고 겁박까지 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행한 행동과 말을 잘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거의 이성을 잃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닌 동물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좋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의 우리에게 도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의 물질적 필요와 주님의 물질적 축복을 살펴보고 그에 근거하여 판단하려는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이 보기에 성공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성경적 경건의 성격에 전적으로 반대된다는 점을 여러분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가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또한 물질적 축복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구원주요, 영적 축복자로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이들에게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의 번영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 때문이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올 때까지 그들은 꽤 오랫동안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을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공급을 통해 광야 생활을 함께하셨습니다. 그들의 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처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 그들이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자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번 시련은 음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없는 중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걸어본 적이 있다면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르비딤에 물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다시 하나님을 의심하고 모세를 불신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쟁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모세야, 당신은 우리를 돌보는 임무에 실패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신을 고소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저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저 또한 리더에게 불만을 표출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생각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고 리더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모세는 리더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달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그들의 불평은 더욱 악했습 다.
“이것이 너희가 우리를 목말라 죽게 하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것이냐?”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세상적인 위로를 즉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계신 주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그들을 보호해 주시거나, 적어도 빨리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통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 우리가 하늘에서만 누리게 될 영광을 요구하는 것이며, 또 다른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신 태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은 고난의 삶이지만 천국에서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인적인 고통을 피하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발생한 문제를 이해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발생한 이유 보다는 먼저 결과를 놓고 분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대하신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불평에 실제로 무엇이 달려 있는지를 인식했을 때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왜 나에게 불평합니까? 왜 주님을 시험합니까?”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은 모세를 통 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리더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일종의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장로들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성경 말씀을 사랑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가 개입하여 그들을 비난한다면 말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읽는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까지 자기 백성을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혹시 예전에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해본적이 있을까요?
모세는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모세는 한 행동을 보면 문제 해결책은 기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 4절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문제 이해 방법은 바로 기도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모세는 그의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고난을 당했고, 그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의심스러울 때 기도로 그분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의심한 죄를 고백하고 그 약속이 새롭게 여러분에게 스며들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가운데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붙드시며 기도 생활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로운 해결책을 찾자.
5절과 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말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하라고 하신 일은 그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분은 이 화난 군중에게서 숨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에게 쏠릴 것임을 하나님은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세에게 향한 마음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모세에게 장로들 중 몇몇이 그와 동행해야 하라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공정한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가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일강을 강타한 그 지팡이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지팡이는 또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면서 지팡이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심판의 지팡이로 기억해 야합니다.
이 본문에서 백성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쳐서 심판하라고 말씀하실 것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백성들 옆을 지나가야 합니다.
심판은 그들을 지나쳐 버립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서 너희 앞에 서리라”(6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의 중심이므로 이야기에 매우 중요합니다(라틴어 십자가에서 유래).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22:23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 야곱의 모든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를 경외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분명히 자신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반역적인 백성에게 실제로 어떻게 물을 공급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이 서 계신 반석을 치면 거기서 물이 나와서 백성의 목마름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심판하시던 바로 그 지팡이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앞에 서 계신 반석을 치고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서셨습니다.
심판의 형벌은 그의 백성이 아니라 그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정죄를 담당하십니다!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을 신명기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광스러운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르비딤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마련하실 것이다”와 같은 이름으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시험한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므리바는 ‘비난하다’라는 뜻으로 ‘다툼’을 의미합니다.
즉 “시험하고” “다투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즉 그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자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음식과 음료보다 훨씬 더 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게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망각할 때 우리 일상의 모습이 일생은 맛사와 므리바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반석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속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은 고전 10:4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백성이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의 물을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
호렙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서 있는 반석을 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육신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의 범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듯이, 이사야 53:5에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호렙에서는 사람들이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9:28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수를 공급하시기 위해 목마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아닌가?”라는 질문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교회와 우리 삶에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형벌을 받아야 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이는 우리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하나님께 매를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의심스러울 때 디도서 2:13에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생에서 사막을 통과할 때,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09-10-2023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하나?” 마태복음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회중으로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오늘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했나? 여러분은 어떠세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해보신 분 있나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으로 확신을 같기 위한 오늘의 말씀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가요? 그러나 때로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일하느라

바빴다면 예수님이 그토록 가까이 계시는 것이 그리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 자신이 불안하다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편리한 하나님, 우리의 의제와 우선순위를 승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가 하나님을 통제하려 고하고, 우리는 가끔은 기적을 맡기어 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할 때도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이 깊다 하시는 분들이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 보다 못한 신앙인의 모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 하신 가요?

우리가 주일 예배 모임, 친교 시간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돈을 어떻게 쓸지, 누구를 환영할지 결정할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둘러보며 말해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고민할 때,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으로 더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일상적인 삶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항상 선하고 친절하며 사랑이 많고 누구도 험담하거나 소문을 퍼뜨리거나 어떤 것에 동의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입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순진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위원회에서 봉사하거나 교회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로 구성된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고대 세계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우리는 대립, 불일치, 상호 책임을 다루는 데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 공정하고 건설적으로 싸우는 방법, 건강한 공동체에서 함께 지내는 방법을 계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우리의 죄와 그 결과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지침을 제공합니다. David Lose 목사가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는데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공동체는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고 우리가 관련되면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즉, 상대방의 뒤에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성숙한 어른처럼 직접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저는 이 방법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추천합니다.

경전의 지혜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고함, 중상, 험담, 서로 모욕을 통해 갈등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해결과 화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 뜻대로 고집하여 부활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일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그 사람을 파문하거나 추방하거나 피하라는 지시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상식처럼 보이거나, 혹은 잠시 동안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세리, 창녀, 기타 외부인들과 자주 교류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신실하게 해석하는데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멀리 하기는 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대할 때 사랑으로 손을 내밀기를 결코 멈추지 말고, 깨어진 것을 회복시켜 줄 은혜를 갈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문맥이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이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홉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므로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 구절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올바르게 들었는지 확인합니다. “주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진정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이고 때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 살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친교와 임재를 실제로 경험할 때 지상 천국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어려울 때라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통해 형성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성공회 사제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유에서도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두 개의 머리가 하나보다 낫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서로가 필요하며, 그들이 한 가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키기 위해 필요합니다.”

“가족이 올바르게 일할 때 가족은 공유하는 방법, 함께 일하는 방법, 서로 돌보는 방법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마치 항아리 속의 돌멩이를 굴리듯이 우리를 서로 비비게 함으로써 우리의 거친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원하는 것 중 일부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주고받는 것을 배우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제 우리 중 일부는 가족 내에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건강한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람보다 규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 중 일부는 좋은 말을 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배우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배우겠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공동체에서 그 누군가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혼자만 간직해야 한다고 배울 수 있지만, 저는 그 누군가와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조화, 심지어 조화의 환상조차도 가장 중요한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조화입니다. 갈등과 상처받은 감정을 다루는 이러한 건강에 해롭고 불경스러운 방법의 문제는, 우리가 이를 해결하고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결국 상처받은 감정과 원한을 모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을 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대해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인 것 같아요.

C.S.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이혼에서 지옥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그림을 그립니다.

지옥은 바깥 가장자리에만 사람이 살고 있고 중앙에 빈 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대한 회색 도시와 같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한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웃과 다투고 이사하고 다투었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새로운 이웃과 함께 다시 이사를 했고, 텅 빈 거리에는 텅 빈 집들이 가득했다.

루이스는 지옥이 그렇게 커진 이유가 중앙이 비어 있고 변두리에만 사람이 거주하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싸움의 해결책으로 대결 대신 거리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사람을 정면에서 정면으로 마주보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의 길, 사랑의 길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기 기독교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화해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오늘 복음 교훈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 화해를 위해 노력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옳은 것을 원하는가? 내가 화해하기 전에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고 관계가 규칙보다 더 중요하고

화해가 보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허리케인, 지진, 화재, 증오의 표현, 불의 등 우리를 괴롭히고 도전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함께 살 때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서로를 묶고 푸는 방법을 세상에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갈등을 통해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힘으로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이 악보다 강하고,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 마음과 모습을 닮아가는 귀한 제자들이 되어 항상 하나님과 통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8-20-23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마가복음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광고 중에 얼마 동안은 얼마를 내시고 그 이후에는 얼마를 내시면 됩니다라는 광고를 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주 작은 글씨에는 우리가 생각한 조건과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면에 큰 글씨와는 다르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를 따르면 이러한 것이 따른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안에는 세상의 딜콤한 광고같은 글귀가 아닌 우리를 예수님을 따를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중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신앙인들이 마음에는 모두가 잘되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있는 우리가 만상형통 중에 뒤 따른는 것이 바로 힘듬입니다.
세상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수 많은 노력, 수 많은 고통, 고민 속에 많은 것이 얻어지는 것 같이 예수님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것을 버리자라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이 무었인가를 예수님께 여쭈어 본 후 근심하여 떠난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위해서 희생 했을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희생 해야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 청년의 모습의 신앙인은 아닌가요?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의 소유를 다 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두 부자를 만나는데 오늘의 주인공 부자청년과 세리 삭개오 만남니다.
삭개오와 부자의 청년의 차이 점은 무엇인가요?

부자청년은 근심하였고,
누가복음 19:1-11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를 절반을 나누어주고, 본인이 토색한 자들에게는 사 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께 말했을때 예수님의 삭개오의 마음 보시고, 집에 구원이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하지만 혹시 우리 스스로 위안을 갖기위한 생각은 아난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지 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일에 대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참 제자가 되기위한 조건은우리 삶에 일순위가 하나님,예수님이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분보다 다른 목적이나 사람이나 소유물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유을 더 소중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이 소유를 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올바른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증명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소유가 내것이 아니라는 사실알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내것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것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예배를 드리며 수요 성경공부에 참여 한다고 참 제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 생각, 말씀에 맞추어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주제처럼 “우리가 예수를 따르면” 무엇을 얻으며, 무엇이 더해지는질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이생에서 배가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가 되는 축복을 받으셨나요?
앞으로 받을 준비가 되셨나요?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볼때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신도들은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나의 주변을 정리한다” 이 말씀에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백 배의 축복은 좋아하겠지요?
왜? 우리는 광고와 같이 보고 싶은 것과 읽고 싶은 것 그리고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읽듯 성경의 말씀도 주일의 설교 말씀도 이와같이 하지는 않는지요?
또한 우리가 버려야 할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수 백번 아니면 수 만번 계산기로 계산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 즉 영생 을 얻기위한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는 돈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9절을 읽은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때론 집, 가족, 사업체, 농장 또는 직장을 떠나야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때 예수의 복음에 집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 예수로 복음 만을 집중할 때 이생에서 주신다는 약속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때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또한 그분을 따르면 큰 유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예수님을 따를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소속된다는 점 즉 “가족의 일원”이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족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히 예수님을 따르는 축복 중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분명히 있는데 바로 핍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에 대해 말씀한 후 예수님은 “핍박을 겸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얻는 것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써 우리의 삶에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0-12에서 핍박 받는 자에 관한 말씀이 ‘복이 있고, 천국이 있고, 상이 크다’라고 말씀입니다.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중 일부가 기념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영광스러운”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관심을 가지거나 논쟁에 합하면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핍박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나의 복음을 위한 일를 할때 핍박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선교사의 삶)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복음에 집중하는 삶에서 핍박 받고 있지않다면 “왜일까?”를 생각해야합니다.
몇가지 질문을 생각 해보았습니다.

1. 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까?
2. 우리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도록 멀리 피해있는 않는가?
3. 혹시 진정으로 따르고 있는가?
4. 나는 십자가의 군인가? 아니면 어린 양의 추종인가?
5. 모든 질문에 잘 적응하는 신도인가?
3.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를 따름으로서 얻게 되는 세 번째는 “내세에 영생”입니다.
내세는 마지막 때이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날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기대할 수 있는 단연코 가장 큰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우리가 다른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큰 상” 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찾고, 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앞부분에서 부자 청년 관원이 찾고 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습니다.
그는 지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뭔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영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은 당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듯이 인생의 길이 자체가 그렇게 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삶의 영원한 질, 곧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분의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소서.”
영생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6:11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의 “면전”에서 영원히 행복해집니다.
주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영원한 즐거움”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영생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기 연습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가 아니 남은 올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깊은 상고와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 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7-30-2023(주일)
성령의 중보가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로마서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주 전에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하고 있을 때 한 인도 사람이 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당신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또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자신만만하게 네! 잘 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대답에 충격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삶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꾸준히 계속 기도가 끝어지않게 기도를 해야 하는 삶입니다. 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떠나고 저는 그의 말에 얼마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 흡족할만한 기도의 양을 하지 않고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저를 보고 기도를 더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를 말할때 그 시람은 나의 모습을 보고 알고 있다는있는 사실에 정작 알아야하는 나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에 황당해 하며 회개하며 다시 엎드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은 기도해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닐지라도 기도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8장 전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경이로움과 축복, 특히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을 닮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 새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며 우리를 축복하고, 강화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8장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심을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되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기도의 영이 있어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때론 기도의 행사가 이루어지는데 특권 중 하나임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필요에 대해 말하고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돕고 우리를 돕기위해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말씀하시길 우리를 위해 돕우시는 몇가지를 함께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 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기도의 영역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에서 발전할 수 없으며 결코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땅의 육신의으로 살고 있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여전히 거하는 이 육신을 통해 우리의 새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을 때까지 이 타락한 육신에서 해방되고 썩지 아니할 새 부활의 몸을 받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부패한 사실과 함께 우리는 현생에서 여전히 땅에 묶여 있기 때문에 불투명한 우리를 통해서만 영적인 것을 볼 뿐이며 여전히 인간의 지혜와 이해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숙할 때, 은혜의 수단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새 사람이 양육되고 새 사람 안에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영적인 영역을 더 완벽하게 보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연약함을 알기에 특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영역에서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거나 기도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고 기도로 분투하는 우리의 행동이 필요하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나 하루 중 여러 시간에 기도할 때 영이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은 그러한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한다면,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기뻐하시고 항상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항상 우리의 최상의 복지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기도의 절반을 이룬 것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가치 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결코 아끼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기억할 때에 그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영이 이 생각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구절에서 우리에게 계시한 것처럼 성령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세번째 성령의 도우시는 기도 입니다

이 도움은 어떻게 표현하고 사용될까요?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에 대한 말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너무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러한 부족함 속에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갈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로 무엇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곁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시며 거기에 있는 영적인 갈등과 갈망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에 갈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고 올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이 모든 미약한 기도의 노력을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해석하신 다음 올바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하나님께 표현하십니다.

한 출판사에서 좋은 책을 만들어 출간하듯 올바른 교정과 아름다운 편집 후 책을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책을 출간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 불쾌감을 주거나 역효과를 낳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메신저로서 그는 기본 메시지나 요청을 받은 다음 우리가 수용할 수 있고 잘 넣을 수 있도록 그것을 다시 표현합니다.
성령의 중보란 이런 것입니다.

네번째는 이 성령의 중보 기도 결과 입니다.

이 중보기도의 효과는 27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바울의 추가 설명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등과 갈망하고 추구하는 죄와 불완전함 너머를 보십니다.
그는 새로 거듭난 우리의 진정한 갈망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 마음의 핵심을 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 마음이 갈망하는 그의 해석을 읽으시지만, 그는 변화된 것을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중보기도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개혁하고 청소하십니다.
영은 약간의 수정과 재작성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영원한 구원의 계획에서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해석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수정하여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십니다.
이 복된 성령의 사역을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할 때 힘을 얻고 기도할 때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 사역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기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무가치하다고 느낄지라도 성령의 이 사역으로 인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적으로 사탄과 싸우고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기도할 때 우리 곁에 계심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영을 알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합당하게 되고,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합심 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우리를 위해 항상 중보하는 성령님을 의지하시며 기도하시길 소망합니다.










07-09-2023

내 안에서의 투쟁(로마서 7:15-20)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서 벌어지는 큰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외부 적들과 맞서 싸움은 마귀와 대면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있는 불변의 상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죄성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신 사이의 끈질긴 싸움에 우리는 포함 되어있습니다.
이 두 라이벌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서로 적대적입니다.
이 싸움은 모든 신자의 영혼 안에 전쟁터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두 세력 사이에 합의된 휴전은 결코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어느 쪽도 백기는 결코 없습니다.
또한 휴전은 절대 없습니다. 전투는 계속 되며, 진행형입니다.
여러분이 이 내적 갈등의 강도를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우리 안에서 내적 싸움이 계속됩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신자 안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다른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는 내부 줄다리기를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로마서 7장 15-20절의 이 구절은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새 본성과 죄 있는 육체 사이의 싸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고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 이 말씀을 썼을겁니다.
바울 자신의 삶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죄 많은 육체와의 싸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바울 처럼 거룩함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싸움은 실제이고, 강렬하며, 지속적이고, 내적이며, 영적이며, 모든 참된 신자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 구절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보는 것과 같지 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 완벽하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나쁜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신자가 직면하는 죄와의 진정한 투쟁을 발견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7:15-20에서 우리는 바울이 계속해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도 그의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과 모든 신자에게서
발견되는 일곱 가지 죄의 실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는 당혹스러운 신비이다(7:15).

15절 전반부에서 우리는 죄가 곤혹스러운 신비입니다.
바울은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15절)라고 합니다.
바울이 “내가 하는 일”이라고 쓸 때 그는 자신이 죄에 가담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로 의를 구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리새인이었을 때의 삶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 시제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바울에게 그토록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당혹스럽습니다.
그가 경건과 거룩함을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큰 좌절의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진행되는 지점에서 죄에 빠짐을 발견했을 때 바울은 자신에 대한 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이 처럼 바울이 당혹스러운 모습에 신자인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느껴야 할 당혹감의 메아리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는 완전한 모순이다(7:15).

15절 후반 부에 바울은 죄와의 투쟁을 거룩함으로 창조된 그의 새로운 본성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하나니”(15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가 싫어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반전되었습니다.
그는 하기 싫은 일을 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에는 딜레마가 있는데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바울은 태만죄와 범행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는 태만의 죄는 그가 행하지 않았지만 행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행죄는 그가 행한 것이지만 행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는 내가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불명예스럽게 하는 죄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증인을 타협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전까지는 결코 영적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완전히 정직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도록 돕기 위해 바울의 사적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현실은 신자로서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아닐런지요? 생각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죄는 법적 범죄입니다(7:16).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법적인 범죄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을 좇는 것이요 율법을 좋은 것이라고 시인하나니”(16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자도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진정한 신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놀라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와 싸우지 않고 영광을 향해 질주할 수 있었다면 신약성경 열세 권의 책을 저술한 바로 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일지라도 바울은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죄 많은 육신과의 전쟁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는 성숙한 신자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신약성경은 “모든 죄는 불법”(요일 3:4)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확증합니다.
모든 죄는 율법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왕의 통치 법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늘과 땅의 주권자에 대한 도전적인 반역이라 말씀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자신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작은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대적인 반역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법치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에 대한 지독한 범죄입니다.

네 번째 죄는 내재하는 힘이다(7:17).

죄는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내재의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제”는 그가 현재로 말하고 있음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바울이 자신이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므로 잠재적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느님께 종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분리라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한 거짓된 계략 아래서는 어떤 죄도 그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몸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그 안에 새로운 본성이 있음을 인식합니다.
바울의 새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어느 날 천국에 갈 때 그의 새로운 본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죄 있는 육체의 구속받지 못한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계속해서 바울 안에 거합니다.
그의 죄의 근원은 그가 된 새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그의 안에 남아 있는 옛 타락입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더 이상 그 안에서 왕 노릇하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거”합니다.
그것은 그에게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꿈을 꿉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깨어납니다.
여전히 그와 함께 일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여행합니다.
매일 매 순간 그의 죄의 본성이 그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 있거나 피상적으로 우리 삶의 표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깊숙이 거합니다. 죄는 내재하는 힘입니다.
내재한 죄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 뿐이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죄는 상반 되는 힘이다(7:18)

죄는 신자의 새 본성과 반대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체는 멍에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중간 지점은 없으며, 그들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반대되는 힘입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나니”(18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된 새 사람은 분명히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주일에 교회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새 사람도 성령의 권능과 당신을 도우시는 그분의 능력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새 본성과 새 마음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일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립과 자족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역동적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의 반대되는 힘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죄는 경쟁하는 악 이다. (7:19).

죄는 경쟁하는 악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 방식에서 새로운 욕구, 새로운 애정,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악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악(kakos)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악한, 파괴적인 의미하는 강한 단어입니다.
악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성품과 완전히 반대되는 강력한 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속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이 악은 그 안에 있는 지배적이고 지배적인 세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는 강력한 힘이다.
더 이상 운전석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차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와 함께 타고 있는 뒷좌석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쳐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일곱 번째 죄는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7:20).

우리는 죄가 모든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실재임을 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7절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여 그가 죄를 짓고 있지만 진짜 바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 그가 회심한 것은 참된 바울이 아닙니다.
참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입니다.
죄가 그 안에 “거한다”는 것, “거한다”(oikeo)는 마치 다른 사람과 동거하고 집을 점유하는 것처럼 함께 살다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죄가 그 안에 집을 세우고 그 안에 거하고 있음을 재확인합니다. 그
것은 바울과 함께 집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고 결코 떠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항상 그의 어깨 너머로 보고 그의 귀에 속삭이는 영구적인 손님이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는 그 안에 사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와 죄에 대한 승리에 관한 우리의 큰 소망을 강조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의사 방문은 우리의 괴로운 진단을 보여줌과 같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에게 건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처방을 줄 것입니다.
올바른 진단이 치료의 절반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올바른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여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의 현실, 즉 정확한 진단을 상기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잘못된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이 구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질병에 대한 처방은
로마서 7장 끝에서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했을 때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인해 우리는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죄에 대한 점점 더 큰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더욱 발전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29).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성숙한 신자에게도 계속되는 죄의 문제를 봅니다.
그러나 앞에 놓인 구절에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하나임을 믿음으며, 우리 악과 마지막 그날까지 외적과 내적 분쟁을 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06-18-2023

하나님 사랑이 칭의입니다.





로마서5:6-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칭의(일컬을 칭, 옳을 의)란 한자 그대로 표현한다면 옳은 것을 일컷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의롭지 못한 죄인을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세상에서 도 부끄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것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왔슴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한 구절에 멈추었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나 자신을 한번 생각 해보았습니다.
이 구절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하는 말씀이라 생각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이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주제이며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고 있었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에 대해 신선하고 강력하게 선포되는 말씀이며 다시 들어도 믿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자에게 귀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연약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상태입니다.(6절)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고, 계명도 그와 같으니 우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가끔 영적 무력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무력감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이 아닌 악한 영이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매일 악한 영에 시험당하고, 위협 당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도록 약한 영에 지배되어 끔찍한 일을 버리고 살아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많은 사랑의 혜자이지만 그분에 대해 생각하거나 숭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죄를 고백하는 시간 보다는 우리는 세상을
즐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차가워 질때 주님은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은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지만 주께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완전히 변화시키려면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필요한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분은 본인을 사랑하면 본인을 의심하는 모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을 사랑하며 확신하면 그 또한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접촉하게 되든 – 따뜻한 방법이든 우리에 대한 적대적인 분노의 방법이든 간에 – 그 사람은 우리의 이웃이 되며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
우리는 꾸준히, 충실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은 우리가 무력(연약)하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에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6절).

하나님이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를 화나게 한 방식에 대한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세상과 평화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모든 면에서 완전히 선하고, 자신의 말을 충실히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시간과 행동의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분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일부 남자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리이까?”
그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거룩하고 죄를 미워합니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표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그분께 고백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모든 행동을 반대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그에게 올 수 없다는 말을 귀기우려야 합니다.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음으로 그를 원수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8절).

바울은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 위에 넓은 틈이 10미터 너비의 틈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그 틈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들과 노인들과 병든 사람들은 2미터나 3미터를 뛰지만 보통은 6에서 8미터를 뛸 수 있지만 운동 선수가 아니면 9미터 이상을 뛸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운동 선수의 기준이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의 표준은 그분의 영광, 그분의 빛나는 완전성, 그분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며 비열함이나 조급함이나 편협함이나 이기심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친절이 풍부하십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그는 그의 도덕적 완전성이 풍부합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인데 우리는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녁을 놓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의해 하나씩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 중 어떤 것에는 80%의 순종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목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고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저주에서 그분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오용함으로써 우리의 말을 긴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그분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힘을 구합니다.
우리는 특히 늙고 연약할 때 사랑으로 섬기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 음행, 도둑질, 거짓말,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삶을 위해 설정하신 목표이며, 우리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 걱정과 그심과 불만이 가득 차있는 우리 모습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이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그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를 미워하고 죽기를 원했던 사람.
그분은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영원히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광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 생각 해보면 우리 역시 죄인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으며 또한 오늘 말씀과 같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여 예수를 재물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증거로 칭의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졌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무서운 웅덩이와 수렁에서 홀로 올라와 우리의 모든 진흙을 씻어내고 우리를 위하여 새 마음을 만들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또 넘어졌어.
나쁜 짓을 하다가 ‘당연히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고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럴 때 도움이 필요할때, 그럴 때 우리의 도움은 우리의 구원이 기초를 두고 있음을 기억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누구였습니까? 예수 였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럼 우리가 낙담하거나 그가 지금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완전히 죄인이었을 때, 힘도 없고 하나님께 바칠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끔찍한 악당을 위해 누가 죽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 죽는 자, “그를 없애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글쎄, 적이 누구였는지?
혹은 우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를 거닐며 그의 시냇물을 오염시키고 대초원을 먼지 그릇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얼굴에 내 주먹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항상 그를 숭배하지 않는 수많은 변명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바울이 &quot;적절한 때&quot;(6절)라고 부르는 때, 즉 우리가 구원받을 적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이웃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에게 적합하고 적절한 시간, 우리의 무력함과 죄의 시간, 그런 다음 우리가 극한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동정녀의 태와 목수로 잔인한 수치의 십자가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일어나셨고,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는 희망!
이제는 넘어져도 예수님의 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력할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뻤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토하고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때맞추어 영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어떤방식 으로 반응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을 때” “다 끝났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넘어짐에 절망에 다끝났다라고 반응하면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등이 삶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 보다는 옳은 선택해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행동은 우리의 죄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을 열 배 더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한 우리의 용서를 점점 더 깨닫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전에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하물며 그의 아들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셨으니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칭의의 축복으로 기쁘고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는지 하나님께 감사며, 충성하며, 헌신하며 매일 고백하며 살아 가시길 죽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서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연약(771) 아스데네마(asthĕnēma)  ἀσθένημα, ατος, τό 

1. 약함,  2. 연약,  3. 신앙의 약함에서 기인한 양심의 가책
발음 [ asthĕnēma ]
어원 / 7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약한 자(롬 15:1)
신약 성경 / 1회 사용

기약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은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한 순교자로 뿌려지는 복음 05-07-2023
사도행전 7:55-60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은 부활절 시즌에 많이 읽혀지며 기독교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에 대해 배움을 줍니다.
우리는 오월 마지막 주일이 오순절로 맞이하며 벅찬 가슴으로 예수님께 감사하며 오순절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대해 나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울에서 바울로 가는 과정인 사울의 회심에 대해 알게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 안에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많은 믿는 사람들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음식이 분배되지 않았고 과부들은 일부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 앞서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택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단어는 메신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토로스(Apostolo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제자라 부르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들은 메신저로 파송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 이들에게 사도로 기도하고 안수했다고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백성 중에 행한 자로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과 변론하려
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지혜와 성령을 능히 당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고발하기 위해 그를 의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평의회에서 매우 긴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7:51-53 의 마지막 말로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말씀으로 스데반 집사은 유대인을 자극 하게 되고 이 자극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자극으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54절 이후로 전개 됩니다.
저는 오늘 55절 이후의 말씀으로 스데반의 대답 같은 순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믿음 생활를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순교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고 요즘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교사 들이 전하는 현지의 상황으로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상상을 합니다.
그곳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이고, 부족한 환경인가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끔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목숨 잃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정말 아주 가끔 뉴스를 전하여 듣곤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누군가 모르는 곳에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를 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곳 자곳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시며, 순교자로 살아가기를 헌신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의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곳에서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은 거짓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사드락,메삭,아벳느고에 관한 다니엘의 책에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출석하며 세 청년의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이들의 젊었을 때 시험이 있었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타지 아니한 세 사람, 그들은 살아날 줄 몰랐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하웰(James Howell)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이야기에서 이 불의한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일하시지만 원인은 아니십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며, 소망은 이 땅의 삶을 넘어선 것입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삶의 비결은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이유를 찾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1965년 Martin Luther King, Jr.가 셀마에서 행진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옳은 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면 살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마도 그가 큰 연설을 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부분은 그것 때문에 복음의 진보가 퍼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 중 한 명 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동의한 사울. 사울은 나가서 믿음 때문에 남녀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울은 여전히 그가 다메섹 도상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야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님, 저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의 공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나니야가 알지 못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나니야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고 사울의 마음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독교 개종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누군가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긴장했거나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어느 선교사를 통해서 돌 같은 마음을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를 확인해 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계속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수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면서도 때때로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성령을 믿는다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의심하겠습니까?
우리가 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순교자(Martyr)는마루투스(μάρτυς)
증인 μάρτυς;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자체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유사합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주님께 간청한다는 점에서 단어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은 오래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에는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45년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독일 출신의 39세의 루터교 신학자였습니다.
Bonhoeffer의 첫 번째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세상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quot;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우리 동족과 나누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quot;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갔고 나치가 항복하기 불과 며칠 전에 그의 처형이 명령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작품과 글은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유산은 지성과 영적으로 뛰어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의 그의 삶이 그가 설교한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스카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의 용감한 사제였습니다.
그는 정권이 반대자들을 살해하던 시기에 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로서 그는 그들에게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군인들이 와서 그를 조금 거칠게 대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것이 그의 다가오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메로는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대부분의 엘살바도르 사람들처럼 그 병사들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니 일부 병사들도  &quot; 당신도.&quot;
그의 추종자들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폭력의 현장이 자비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의 무기는 전쟁의 무기보다 강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전파한다면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죽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기도 해봅니다.
“나의 삶이 천국의 완성이 아니라, 앞서 간 성도들과 선교사들를 뒤따를 성도들과 함께 십자가의 구원에 동참하는 삶이 되게하옵소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hbuhr)의 말을 옮기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미래는 우리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전적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을, 그리고 교회의 씨와 복음 전파의 일 동참하길 다짐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증인(證人)(마르투스. martüs )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1. 증거
발음 / 마르투스(martü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증인(마 18:16, 막 14:63, 눅 24:48)
신약 성경 / 35회 사용


04-165-2023
이호승목사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19-23



03-05-2023
이호승목사



제목 / 거듭난 자의 삶
성경 / 요한복음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You should not be surprised at my saying, 'You must be born again.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는 거듭났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거듭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거듭난 자의 삶에 관한 비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거듭남이란?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겐네데 아노텐’의미는 하늘로부터 태어나다.
또는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 의미는 육적인 출생이 아닌,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개인들이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함 받고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 새롭게 거듭난 영혼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영혼으로 분별되며, 사모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거듭남 이란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왜 거듭나야 할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율법 학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한다고, 사실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도덕적으로 모범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모범인 니고데모에게 왜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까요?
말씀의 의미는 도덕적 으로 모범적인 사람도 중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육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적이 아닌 영적 중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갱생은 중생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갱생은 마음를 새롭게하며, 몸 가짐을 바꾸는 행실이지만, 중생,거듭나는 것은 심적, 영적, 행실를 모두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5절)
첫 번째 거듭남을 물 세례이고,
두 번째 거듭남은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를 시작하면 학습세례를 받은 후 물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 세례를 받는다고 우리가 바뀌었나요?
바뀌었다면 무엇이 바뀌었나요?
세례에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자신 구원자로 영접 할 뿐 자신이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 모든 일에 자신이 다 했다고 생각 할때 다시 전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질 수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성령의 힘은 무 한계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셔서 직접 역사 할때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어가는 영과 육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거듭났다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즉 너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아니라,
거듭남은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삶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거듭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믿음 생활 하면서 거듭남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거듭남에 대하여 생각도 못했고, 경험도 없다면 우리의 과거의 믿음의 삶이 니고데모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듭난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우리의 자세 즉 믿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첫 번째 예배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두 번째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세 번째 기도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네 번째 타인을 대하는 자세, 즉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위에 다섯 가지가 달라짐으로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거듭남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 충성돤 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2-12-2023
이호승목사




제목 / 순간의 선택
성경 / 신명기 30:15

오늘 함께 하실 말씀의 주제는 ‘순간의 선택’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삶의 중요한 선택에 관한 것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택에 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선택을 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 가지가 다 포함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보기를 주시고 그중 너희가 선택하라는 예제를 주셨습니다.
확실히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갈림길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때 그분이 우리를
어디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 해야합니다.

신명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 세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모세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 동쪽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새 땅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상기시켰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신앙여정의 다음 주요 단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전체가 이 특별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는 신명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 앞에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제 그의 삶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서서 고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선과 악,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사이의 선택권을 준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삶을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섬기십시오.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분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분께 충실하면 약속의 땅에서 잘될 것입니다.
그에게 불순종하면 문제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택이 거의 40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여졌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 새 땅,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의 부모를 어떻게 구해 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 곧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곧 지키게 될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지휘봉을 여호수아에게 넘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그 새로운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길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이 새로운 경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모세는 염려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그들을 다시 완전히 노예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세력의 올무에 걸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하는 선택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무엇이 위험 있을까?
모든 것. 이것은 아이스 라떼 와 핫 라떼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Fish sandwich에 Tartar sauce 와 마이오네즈 캡찹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과의 관계에 다시 헌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할례로 상징되었습니다.
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에 빠졌을 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자적 의미에서나 영적 의미에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포로를 상징했습니다.
이집트는 속박과 노예 제도를 상징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새 땅으로 이주했을 때 그들이 애굽에서 육체적 노예였던 것처럼 영적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많은 유혹에 직면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강력한 세력이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백성들이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모세는 영적 노예 상태를 피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생명과 평안, 즉 풍성하고 놀랍고 즐거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절망과 고통,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냉혹하고 설득력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에 가까워졌습니다.
긴 지체 끝에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판돈은 매우 높았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오늘 아침 우리의 본문은 결정에 관한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관해서는 &quot;선택&quot;이라는 개념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 그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의 수단, 즉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길이나 세상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루터의 교리문답에서 사도신경의 세 번째 항목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이성과 힘으로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거나 그분께 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복음으로 나를 [선택]하셨고, 그의 은사로 나를 비추어 주셨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참된 믿음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느 날 새 땅의 문턱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과 그분의 길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표류했다면 어떻게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거룩한 성사를 통해 그분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분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다른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것, 즉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에 대해
&quot;아니오&quot;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최우선에 두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심지어 이 지상
생활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보다 앞서 있기도 합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분을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분은
구원과 영생의 문을 열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경험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능력으로 우리는 이제 그분을 위해
삽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은 핵심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오늘 말씀 통해서 우리 모두가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 삶을 책임지어 주시는 성부,성자,성령을 나는 귀한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1-22-2023
이호승목사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oAQbN9hLW30


교회의 지침서 I
고린도전서 1:10-18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한글개역 개정

세상에는 가족, 학교, 단체, 회사, 교회등 각기 다른 공동체있고 각기 지침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침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공통점이 사랑과 나눔입니다.
이것이 화합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지침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라고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성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강조하며, 10절에서는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첫번째 “분쟁 없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왜 이러한 지침을 가져야할까요?
9절에서 바울이 말씀했뜻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기독교인들이 구별되어야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받았지만, 세상의 다른 단체는 각기 단체장과 단체원들이 필요에 의해 부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부름 받았기에, 교회의 큰 일치는 회중들 한마음과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평강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힘써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합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제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가질때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보다 못한 것은 결코 진정한 통합을 가져올 수 없으며, 비록 교회가 아무리 온화하고 평화적일지라도 항상 분쟁과 분열 있다면 하나님을 섭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지라도 이모습은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지침은 아닐겁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지침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두번째 잘 못된 섬김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있는 고린도의 종교인들 모습은 어떤가요?
그들은 로마인과 유대인으로 나누이고, 종파를 나누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모습은 고린도 교인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이면, 그들은 논쟁과 분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네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12이는 다름이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나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당시 교린도 교회 회중들의 모습은 종이가 찢어지듯 갈라질 위기에 처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를 위함일까요?
무엇을 위함 일까요?
이들은 어느 목사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어리석은 모습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중요한가요?
분명한 것은 누구를 지도로 따를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런한 일들이 발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논쟁과 분쟁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기적인 생각과 주장이 아닐 생각합니다.
논쟁과 분쟁에 중심이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계셔야함에 인간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 연합하지 못하는 것 중심에 누가있습니까?
교회의 리더 그 리더가 하나님의 중심 생각이 아닌 자신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 일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교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만 따른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논쟁과 분쟁을 만들어 교회를 쪼개는 그들를 함께 비꼬듯이 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무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 들과 마찬가지로 틀렸고 교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그리스도, 아볼로와 그의 동료들을 위한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조차 이미 예수를 따르는 자세가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정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 안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리더나 성도들이 있지않을까요?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약하고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지도자의 이름으로 세례 받지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의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하나요?
목사도 장로도 아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믿음 생활하시면서 누구에게 충성을 다하셨나요?
우리는 사람을 것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신뢰 해야할겁니다.

세 번째 참된 지혜와 유일하게 참된 연합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보내신 것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설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 십자가 아래 모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연합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삶, 죽음, 부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결정적이고 분별적인 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아래에 있는 우리의 위치, 즉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열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고 하나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스스도인으로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으므로 우리 예수와 하나가된것 아닌가요.
또한 우리가 하나 될 수있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을 갖기 위해 항상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예배와 봉사에서 우리를 연합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대륙에 남녀노소, 인종을 뛰어넘고,세대를 넘어 그분의 사랑하는 교회로우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첫번째 교회의 지침은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하나가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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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2106362 2024-04-27T17:59:54Z 2024-04-28T11:07:14Z 주보


• 04-28-2024 / 부활 후 제 5 주

* 신앙고백
* 찬양 인도 / 황선민목사
* 설교 / 이호승목사
* 제목 / 내 안에 거하라
* 성경 /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기도 /
* 찬송 491 장(귀하신 친구내게 계시니)
* 축도 / 이호승목사
* 교제 / 기도 황선민목사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자
영국의 설교자 스펄젼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 ~ 1892. 1. 31)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은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때로는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간증(干證)이 마치 굉장한 믿음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려면 인간의 감각과 경험과 눈으로 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베드로는 아주 노련한 어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6). 성경을 육신의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 읽는 방법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라고 합니다.
이번 주부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한일서를 만나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 요한일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소개하는 주제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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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25148 2024-04-21T07:04:00Z 2024-04-27T07:53:29Z 이승혁목사 설교 자료(2023. 2024.

5월 12일 
어버이주일

효를 행하라(디모데전서 5:3-4)



효(孝) : 효도 효

부수 / (아들자, 3획)
모양자 / 子(아들 자) + 耂(늙을 로. 엄 로 노)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노인 노. 늙을 노(老)

부수 / (늙을 노 6획 [耂]
모양자 / 耂(늙을로엄 로(노)) + 匕(비수 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시야(Josiah)라는 랍비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참으로 복을 받은 자로다.
이제 백정 네네스 옆에 서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깨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위치가 백정 옆이라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백정은 매우 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왔는데 백정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공부를 그만두고 기도도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위합니다. 그러다 문득 백정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만나 보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백정 네네스는 유명한 랍비가 찾아 온 것에 너무도 황송하여 문 앞까지 나와 영접하고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셨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무슨 선한 일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 옆에 서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게". 네네스는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또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변명합니다. "나이 많은 어머님을 모시느라 저는 회당에도 잘 나가지 못했으며, 좋은 일도 많이 하지 못했으니 용서해달라" 는 것입니다. 랍비가 그의 어머니 계시는 곳에 가보았더니,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기동을 전혀 못하시고 대소변도 못 가립니다. 네네스가 늘 어머니 옆을 지키며 대소변을 가려내고,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랍비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야 저의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백정 네네스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행위인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2백년 전에 선교사들이 중국에 선교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교문화에 깊이 젖어있는 중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모여 궁리합니다. 기독교가 효의 종교인 것을 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전도지에 효에 관한 성경 말씀을 삽입키로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의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장 17절의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는 말씀들입니다. 옳습니다. 기독교처럼 효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효도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살 자격도 없으며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도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고 강조합니다. 자녀나 손자들의 앞에서 부모님께 효를 행하여 그들로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효를 행하다' 는 말은 '유세베오' 라는 단어로서 '존경하다, 경배하다' 는 뜻입니다. 즉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를 존경하며 효를 행하여 본이 되어야 합니다. '효를 행하라' 는 것은,


첫째, 힘을 다해 순종하라

어느 마을에 화목하기로 소문난 집이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마다 그 집을 부러워합니다. 한번은 화목치 못한 집의 노인이 화목한 집에 방문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집의 노인은, "우리 집이 왜 화목한지 보여주겠다" 며 큰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내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불러라." 나이가 40이 넘은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을 부릅니다. "뒷마당에 가서 감을 따오너라" 하고 명하였습니다. 감 열매가 겨우 맺히기 시작하는 철인데 둘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감 열매를 따왔습니다. 셋째 아들을 불러 "막내야, 외양간에 있는 소를 지붕에 몰고 올라가라" 하십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은 소를 몰고 지붕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야단법석을 하더랍니다. 그때 노인은 말합니다. "우리 집안의 화목은 자녀들의 순종에 있다네."

'순종하다' 는 '휘파쿠오' 란 단어입니다. '밑에서' 라는 '휘포' 와 '듣는다' 의 '아쿠오' 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말로서 '아래서 듣는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진지하게 진솔하게 듣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선택해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 순종하십니까? 힘을 다하여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님께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전심으로 공경하라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아이가 돌아와 무엇인가를 열심히 외웁니다. 부모가 잘 들어보니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제5계명을 외우는데, "네 부모를 공격하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어." 그러자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아빠, 공경하고 공격하고 뭐가 달라요. 똑같은 것 아니에요." 그 아이는 공경이라는 말이 어려워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공경이라는 말의 뜻은 바로 공격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은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 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귀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무식해도, 얼굴이 못생겼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일이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말의 원어인 '티마오' 는‘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친밀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부모를 존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순종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의미한다면 공경은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은 엄중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 공경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다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부모 공경은 그보다 우선입니다. 부모 공경은 기본 윤리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부모 공경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부모 없는 자식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 공경이 가정의 기초 윤리임을 깨달아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정성으로 보답하라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Garfield)가 대통령 취임하는 날, 시간이 다 되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 후 대통령이 한 노인을 부축하며 식장에 들어섭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가필드는 늙은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안 가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제가 이렇게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라며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며 말하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날 복잡한 장터에 홀로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그냥 말없이 울며 서 있습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선생님, 왜 그렇게 서 있습니까?"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50년 전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헌 책장사를 하셨다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불편하니 네가 하루만 이 자리에서 일해다오. 약속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니 그 분에게 이 책을 드려라' 고 하셨는데 나는 '아버지가 헌책 장사하는 것도 창피한데 내가 왜 그 일을 해요' 하면서 거절을 했다네. 그러자 아버님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시며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그 날 일하셨네. 그런데 그 일이 무리가 되었던지 그 날 이후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시다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은 부모님의 은혜에 얼마나 보답하며 사십니까? 혹시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하여 울고 서 있는 양심은 아닙니까?

본문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여기의 '보답하다' 라는 말은 '보상을 갚는다' 란 말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되돌려 드린다는 뜻입니다. 즉 효란 부모께로부터 받은 것을 자식이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부모님의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곧 효를 행하는 것을 자녀들로 손자들로 배우게 하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내가 주체이지만 '배우게 하라' 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손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먼저 부모에게 보답하는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효자 집에 효자 난다' 고 말합니다. 효자인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 자식이 배워 효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을 부모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녀들이 어찌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겠습니까?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효도 실천 십계명'을 가르칩니다. 첫째, 부모에게 신앙을 갖도록 해드려라. 둘째,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라. 셋째, 표정을 밝게 하고 웃음을 잃지 말라. 넷째, 궁금증을 풀어드려라. 다섯째, 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려라. 여섯째, 향토적인 음식을 해 드려라. 일곱째,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려라. 여덟째, 일거리를 드려라. 아홉째,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드려라. 열째, 등을 긁어드리고 손발톱을 자주 깎아드려라.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효를 행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돌보아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 생전에 효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효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구원받게 하는 일임을 더욱 명심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효를 행하여 자녀와 자손들이 본 받을 수 있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힘을 다해 순종하며, 전심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해 보답하며 사는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월 21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397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공동번역)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NIV. 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세상(2889) 코스모스(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1. 장식.   2. 세상.  3. 고전 4:9.
발음 [ kŏsmŏs ]
어원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천하(마 4:8, 막 8:36, 눅 9:25), 세상(마 5:14, 고전 1:27, 계 11:15), 천지(행 17:24), 세속(약 1:27), 세계(약 3:6),
단장(벧전 3:3).

요한일서 2:15-16 /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5:19 / 악한 자 안에 처한 곳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NIV)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

에베소서 2:2-3 /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이와 같은 세상에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라고 하겠습니다.
(건 행 성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를 한마디로 "건행성(健幸成)"이라고 하겠습니다.
<굳셀 건, 다행 행, 이룰 성>
'건행성'이란 "건강(健康. health)"과 "행복(幸福. happiness)"과 "성공(成功. success)"이라는 세 단어의 첫 글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카드 하나를 받았습니다.
카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께
매일 저는 목사님을 영상으로 뵙고 항상 좋은 메세지로 예쁜 카드로 기쁘게 해주시는데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3개월 넘게 한꺼번에 일이 겹쳐(이사, 몸도 많이 아프고, 손님 또 힘들게 도와줘야 할 일 등) 너무 무리를 해서인지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견디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지요.
건강 유의하시고 가족 모두 편안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Georgia에서 Mrs 유 드림

카드를 받고 즉시 카톡으로 사진을 찍은 후에 짧은 글과 함께 사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그 편지가 작년에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를 확인하였더니 우체국 직인이 18 AUG 2023 PM 9
작년 8월 18일에 발송한 카드가 4월 11일 2024년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무려 8개월 후에 카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8개월 후에 응답될 수도 있겠구나!
한번 발송한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겠구나!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를 바라보자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All flesh is not the same: Men have one kind of flesh, animals have another, birds another and fish another.

육체(4561)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뜻풀이부

1. 육체.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 1:24.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 1:24.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 2:23.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 1:1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누가복음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 시체(소마) 4983.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18:13).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Spiritual Body

고린도전서 15:44.  46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The spiritual did not come first, but the natural, and after that the spiritual.



소마 프뉴마티코스(4983.  4152)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 18:13).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에 관한, 영적.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 6:1.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마음의 평강 등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패학을 통한 교훈 쌓기, 리더십 훈련, 영향력 증대, 효과적인 조직 관리, 갈등 관리, 재테크, 각종 영업 전략 세우기,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성장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질적 성장이나 성숙보다는 양적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면 건물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고민도 하게 되고, 또 더 큰 예배당을 확보하여 축제와 같은 예배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성공'이나 '행복' 또는 '물질적인 축복', '건강의 축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인에게만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악인에게도 똑 같은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물질적으로 풍부했던 부자는 진정한 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던 사람임을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풍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시면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12절에서는 세상을 이긴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일서 2:15-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16절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으로 번역한 '코스몬'의 원형 '코스모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의 활동 공간 및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사상과 기치관 등을 의미합니다(롬 12:2 ; 엡 2:1-2).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훈 목사님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자녀들에게로 가시게 되었다고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10년 동안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내 심장병이 나았습니다.”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수해 준 적이 없어서 “언제 제가 안수해 드렸습니까?” 물었더니 그 할머니 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목사님을 만나 손을 잡을 때마다 한손은 자기 가슴에 얹었답니다. 
자기는 그것이 10년 동안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은 것으로 믿었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심장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음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요한일서 5:5-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물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물세례
* 피 - 육체로 오신 예수님

예수의 피 즉 예수의 보혈(寶血)

1. 겟세마네의 보혈(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2. 가시 면류관의 보혈(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마태복음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요한복음 19:2. 5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3. 채찍질의 보혈(마태복음 27:26)


* 이사야 53:5


4. 십자가의 보혈(마태복음 27:35)


* 요한복음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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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의 피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지난 3월 31일 부활주일 예배 때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자!" 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체(屍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푸쉬케"라고 합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조에"라고 합니다.

'조에'라는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합시다.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코스모스


둘째, 요한일서 2:15-16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속


셋째, 요한일서 5:19

마귀가 지배하는 곳


넷째, 에베소서 2:2-3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예수는 누구이신가?


요한일서 5:5-7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령으로 증거


물 - 물 세례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피 - 육체로 임하심

성령 -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 죄 사함의 능력(구속의 능력)     

세상을 이긴 자가 얻을 것(요한계시록 2장, 3장)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나의 적용(適用) 


내가 갖고 있는 문제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으로 물든 도덕적 체계나 사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성도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들과 벗삼게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약 2:4).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이러한 세상의 악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싸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 이기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4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절)
5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 세상

무엇으로 :  믿음으로

​성경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했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물과 피와 진리이신 성령이 증거하였습니다.
물로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포하면서 증거한 것을 말합니다.
피로 증거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징조들을 통해 증거하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만을 증거하시는 분으로서, 그 분의 증거는 참된 증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세상에 임하신 분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분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셋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둘 이상의 증인들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일치되는 한 가지 증언을 지속적으로 하듯이 성령과 피와 물은 완전히 일치되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 되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모든 악과 죄에 관하여 한 증인이 아닌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사건을 확정하라고 하였다.
물과 피와 성령, 세 사람의 증언이 있으니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증언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직접 증거해 주셨습니다(9절).
사람들의 증언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게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선포하셨으며, 변화산에서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2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심을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1-6, 마가복음 9:2-13, 누가복음 9:28-36을 살펴보면 변화산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질 때,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다양한 말로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거짓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세상의 어떤 것들일까요?

​'세상'을 좁은 의미로 보면,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겨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대인관계 기술, 처세술, 속이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 남을 헐뜯는 말, 비방하는 말, 형제를 대적하여 이길려고 하는 마음, 물질만능주의,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 교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이단들의 미혹을 이겨내어야 합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인 유혹도 이겨 내어야 합니다.

​핍박을 이기는 것보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핍박은 공격할 시점과 방법들이 이미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만 있으면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접근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생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할 수 있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생명,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생이 있는 자는 육신적 사망 이후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고 하였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얻게 됩니다.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러한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나아가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런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신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혼돈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믿음 외에 또 다른 영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동체 내에서 확신이 부족한 자들에게 또 다른 영적 지식(영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속에만 승리가 있고 영생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주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승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도록 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장차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육체의 연약함과 병듦과 장애를 갖고 살아갈지라도 그 날에는 천사와 같은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날의 영광된 삶을 생각하며 날마다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기뻐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 생명의 면류관은 다음 설교 자료




생명의 면류관(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lessed is the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because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the crown of life that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Do not be afraid of what you are about to suffer. I tell you, the devil will put some of you in prison to test you, and you will suffer persecution for ten days.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and I will give you the crown of life.

신약 성경에서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용어가 2번 사용되었습니다(야고보서 1:12, 요한계시록 2:10)

부활주일 설교 때에 사람의 몸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 자연인
둘째는 시체(屍體) - 영적인 몸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 신령한 몸

부활 신앙이란 육체를 소유한 자연인이 신령한 몸이 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단계를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 영원한 삶을 시작할 때 얻게 되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강도가 오른편과 왼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 중에서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봉사도 하지 않았고 헌금도 하지 않았던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면 일생동안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도들의 신앙과 비교할 때 똑같은 구원을 받는다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과 환난에서 인내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이기는 자가 받을 영생의 복이다(약 1:12, 계 2:10~11, 딛 1:2).
마귀와 싸워 이기는 자가 받게 되는 12가지 복 중 하나이다(계 2~3장).



구원이란 단계에서
따라서 부활 신앙이란 "생명의 면류관"을 기대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 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요한계시록 2:10






주제2: [서머나 교회]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Johnson, Moffatt)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 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본 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역경, 고난, 환난, 박해를 의미합니다.
2절의 ‘시험’, 3절의 ‘시련’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금속이 어떤 검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귀금속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진품으로 인정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디면 진짜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영생을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구원행로입니다.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시험을 참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고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시험도 참고 견디어냅니다. 복 받기 위해서는, 인정받기 위해서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시험의 길’을 반드시 넘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길은 결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시험이 닥치면 묵묵히 참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인내하며 견디기만 하면, 복이 있고, 인정을 받고,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오직 정도(正道)뿐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참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복의 개념은 수고와 노력과 죽음을 초월한 인내로부터 오는 삶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초월한 인내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한마디로 “신앙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고난을 인내로써 승리하여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기쁨인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센 믿음과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굳게 서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한마디로 팔복은 세상적 가치를 초월한 자,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만을 인정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시련을 견디어 복 받을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시편 1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와 같이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고 견딘 자를 인정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어 통과해야 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딘 복 있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큰 상급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구원의 때에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한정된 생명이 아니라 무한정한 끝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전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면류관’은 최후의 승리자에게만 주었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생의 시험과 시련을 다 견디고 극복하여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아 승리자로 인정받아서 면류관을 승리의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반드시 이 상급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즉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시련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에게는 생명 대신에 죽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썩어져가는 세상의 것을 사랑하다가 사막의 풀 같은 신세가 되지 말고, 오직위의 것을 사모하여 모든 시험과 시련을 견디어서 복 있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서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게 되시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아울러 이 땅에서도 복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한 강도 이야기가 남긴 교훈(누가복음 23:39-43)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가 되신다 

이사야 63:1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시기 에 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여러분들은 이 회개한 강도가 처했던 상태보다 더 절망적인 상태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 니까? 그는 행악자인 강도였으며, 율법을 범한 대가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죽어야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의 목숨은 시간 문제였고, 그의 죽음은 한걸음밖에 남지 않았으 며, 그의 영혼은 지옥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어가던 강도는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다시 말하면 그의 영혼을 돌봐주기를, 그의 죄악이 사하여지기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 으로 옮겨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 문은 닫혔고 자비와 은총이 멈춘 상태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받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아직도 무니 열려있고 자 비와 은총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직접 대답으로 확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 성경 속에서 구원받은 영혼들 중에 이 회개한 강 도처럼 자신의 구원의 확증을 직접 예수님께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217.

예수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지옥의 문 앞에서 끌어올려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을 완벽하게 증거 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장 연약하게 보인 때에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주 님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 한 죄인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7:25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를 온전 히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던 이 죄인이 불속에서 타다 남은 나무 토막처럼 불속에서 끄집어내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기도로서 당신 앞에 나온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며 어떠한 죄인 이라도 회개하면 영접해 주십니다.

이 강도는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만찬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도 않았으며 헌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강도의 믿음은 하루도 못된 단 몇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그리스 도에게 인정되었으며 그를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해 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많다할지라도, 우리들의 나쁜 습관이 날이 갈수록 고질화 되어 간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고칠 수 있으며 끌어올릴 수가 있으십니다.

천국이 우리들에게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 다. 바로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이는 구원을 받는데 다른 어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강도는 다 같이 그리스도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자기를 죽이려는 무리들을 우하여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참혹하게 고통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회개할 때 다른 한 사람은 마음이 강팍한 채로 있었으며, 한 사람이 기도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한 사람이 낙원으로 인도될 때에 다른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강도는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동일한 입장 이였고, 동일한 기회를 가졌고, 동일한 사건을 보았습니다만 두 사람 다가 아니라 한 사람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사건은 두 사람 중 기회를 선용한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방임하고 있는 많은 이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 아직은, 좀 더 있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마치 회개한 강도처럼 죽음 일보직전에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강도만을 생각했지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좌지우지 할 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218.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빛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빛의 자녀 가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동시대의 사람 이였고, 동일한 지위를 누렸으며, 동일한 선지자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구원을 받았고 사울은 버 림을 받았습니다.

부부가 같은 예배에 참석하여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나 남편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부인은 전혀 무감각한 채로 교회당을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 가운데 머물면서 여러분의 원하는 때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물론 우리 앞에 문은 항상 열려있으며 우리의 생명이 지속 되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생명을 오늘 밤에라도 하나 님께서 취하신다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에 소금기둥이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 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예뻐하심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를 놓친 회개는 거의 가 진실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회개한 강도의 구원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 라 구원받지 못한 다른 강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강도의 신앙

여러분들은 회개한 강도가 남긴 신앙의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왕국 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께 가하여진 모든 형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께 기 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언제 있었습니까? 어디에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모모든 백성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칠 때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 인들이 신성 모독죄로 사형판결을 내렸을 때에, 주님의 제자들 마져도 도망쳤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 흘리시며 저주받은 자로 죽어가던 때에, 바로 그때에 십자가상에서 그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으며 그에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세계가 창조된 이후에 이어ㅣ 같이 놀라운 믿음의 모 범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강도의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가련하고 불쌍하고 경멸당하고 멸시받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발견하여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연 찾아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처음 으로 고백한 위대한 신앙입니다.

또한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순전하고 무구함을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변증가입 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은 표적과 이적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지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뛰어 가고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가 정상인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제자 중 몇 사람은 변화 산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으며 장차 되어 질 언약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제자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219.

그들의 신앙은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들의 신앙은 거 짓말 이였던가요?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아 온데 뉘게 가오리까? 의 대답은 허공중의 메아리 이였던가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주님의 모습밖에 보 지 못 했습니다. 그 강도는 어떤 능력이나 영광이나 왕관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천국을 믿었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고서 자기의 영혼 을 그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죄악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 았으며 그 강도는 자기 죄를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한 강도의 신앙, 그의 기도, 그의 겸손은 그가 입으로만 회개한 자 가 아니라 행위와 진리에 있어서도 회개한 자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넷째, 죽은 후에는 낙원으로 간다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 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기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오늘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카토릭이 말하는 “연옥 설”처럼 죽음과 천국에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정화되는 변화과정을 거친 후에야

천국에 적합 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에 간다고 말 씀 하셨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의 분리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이 결합하여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애통하며 장례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영혼은 낙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즐 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20:3절에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했습 니다. 욥기3:7절에는 낙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태라면 여러분 들은 지금 지옥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천국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의 모범을 교훈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 이였으며, 전연 찾아 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고백한 신앙 이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외 친 신앙 이였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해야 된다 는 것을 다시한번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죽음 저편에는 낙원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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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부활주일 설교
부활의 주만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 예수만 바라보자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주 - 죽음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권능의 주 - 사탄의 권세 즉 사망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말씀의 주 - 말씀으로 창조,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심

"위기를 기회"라고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위기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선교에 성공한 나라"
둘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

그런데 현재 한국의 현실은 두 가지 성공한 사례에 대해서 계속 발전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두 가지 이념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좌경화인가?
우경화인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회 절기에서 회복의 기회를 찾는다면 세 가지 절기를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세 가지 절기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핵심에서 찾는다면 "창조신앙(무<無>에서 유<有>)" "부활신앙(죽음<死>에서 생명<生>)" "재림신앙(거짓<僞>에서 진실<眞>)"

오늘은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신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신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오직 성경으로,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사람의 몸(肉體)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둘째는 영체(靈體)
셋째는 부활의 몸(부활체. 復活體)

부활의 몸과 영체가 다른 이유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가?
영체는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죽은 조상의 영이 제사상에 와서 먹고 가라고 합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아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영체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제사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든 문을 굳게 닫고 모여 있을 때 그 가운데 오셔서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체가 되는 부활신앙은 무엇일까요?
 
부활의 신앙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만을 바라보자"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면 신앙생활을 일생동안 계속한다면 부활에 관한 설교는 40번 50번 60번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활주일 설교중에서 마음에 새겨진 것이 교리적인 것 뿐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리적인 것보다는 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부활 주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 생명의 주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생명의 주가 되려면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부활의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히브리서 2:14) / 권능의 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려면 생명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 말씀의 주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우주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은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존재의 근원이 되는 태초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설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어떤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가 우리에게 나타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지라도 그가 또 다시 죽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믿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 어느 지역에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참여하고 그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셨고 은퇴하셨던 어느 장로님이 임종이 가까왔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이 장로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에게 영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장로님, 그동안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장로님의 수고와 정성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둘 것입니다.
장로님의 그 믿음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텐데 죽은 후에는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실 줄 믿으시지요?"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그것은 내가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세우는 개척 공신일지라고 그 아들이 서울 장안에서 잘 알려진 목사가 되었을지라도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한 신앙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장로님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목사님이 이 말씀을 읽기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나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는지 죽아봐야 알겠느니라."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성경이 어디 그렇게 기록되었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지요!
그때 목사님께서 장로님의 손을 꼭 잡고 정말 성경말씀 그대로 믿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봐야 알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후에 목사님은 아들되는 목사님에게 연락하고 장로님에게 분명한 깨우침을 전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4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활동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지상사역을 마친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천상사역"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둘째는 예수를 바라보라(12:2)

지난 3월 10일 주일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개의 단어로 소개했습니다.
"집중" "확산" "지속"
깊이 생각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집중력을 갖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먼저 영적인 촛점을 맞춘 후에 그 촛점을 세상에 내밀면 반드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한 힘을 삶의 도처로 확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대한 산불의 시발점은 아주 작은 불꽃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을 지켜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은혜에 도취되었다가 거친 세상으로 나가면 쉽게 무너지고 꺼져버리는 불쏘시개가 아니라 무너질 수 없고 꺼질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이적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 중에서 7가지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관점에서 쓰여 졌다는 것과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표시로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이적은 창조주로서의 기사
네 번째 이적은 재-출애굽의 의미를
마지막 일곱 번째는 다시 살아남의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표지로 이적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 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4. 5,000명을 먹이심(6:1-14)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5. 물 위를 걸으심(6:16-21)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 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나고, 넷째 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러내 에덴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6. 소경을 고치심(9:1-7)

​소경을 보게 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 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7,9)

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1,14~15)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도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라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1,5) 

“나는 ~이다” 라는 선어는 7번 이상 나오며(4:26,8:58) 특정한 표현을 빌어 선언한 경우 7번이다.

“나는 ~이다”란 선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장 확실하고 대답하게 단정하는 것으로 출애굽 3:14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체를 지탱시키는 음식에 자신을 비유하신 것이다. “신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 예수께서 하고 자 하심 말씀이다.

초막절이 언급되는 문맥 가운데, 어쩌면 성전의 찬란한 촛대에 불을 붙었을 무렵,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고 말씀하셨다. 양과 목자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10:9), 나는 선한 목자라 고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은유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것이 하나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은 못되지만 죽기는 싫다고 말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진퇴양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라고 선언하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배타적 선언을 하셨다.

아마도 황금빛의 포도나무 장식을 해놓은 성전을 지나실 때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나는 포도나무”(15:5)라고 말씀하셨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믿는 자들은 예수 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도입 이야기)

첫 목회지에서 만났던 성도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 중에 황규선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당시 고려아연이란 공장에서 황산부장직을 맡고 계셨는데 황산부장은 차기 공장장이 될 수 있는 아주 유력하고 실력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성결교 신학대학 신대원에 입학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여유를 가질만한 자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당시 공장의 직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예수가 좋으면 그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포기한 것이 있었습니까?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배우자를 포기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집을 포기했습니다.

아직도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예수님때문에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서를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 하늘에 계신 천상사역에 관한 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합니다.
전반부는 1장부터 10까지를 말하며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은 신분의 우월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을 때 구약의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계열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유다지파 다윗의 계열에 속합니다.
마치 멜기세덱과 같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던 족보도 없는 제사장과 같은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신분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전반부에서 강조하는 신분의 우월성 때문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후반부는 11장부터 13장까지를 말하며 믿음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합니다.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우월성은 갖추셨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2024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려는 설교 주제입니다.

찬송가 509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CCM악보 [B. B. McKinney 작사, B. B. McKinney 작곡]

1.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2.  네가 어둠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주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3. 네가 부활의 주 따라 가려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네가 주 안에서 길이 살리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4. 너의 죄악의 짐 무거울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마음 문 열고서 주를 모셔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부활

ἔγερ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454
1. 부활
2. 마 27:53.
발음 [ ĕgĕrsis ]
어원 /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부활, 마27:53.


ἐξανάστα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815
1. 부활
2. 빌 3:11.
발음 [ ĕxanasta- sis ]
어원 / 1817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부활, 빌 3:11.



ἔγερσις, εως, ἡ 1454 [ĕgĕrsis]

  • 부활, 마27:5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부활, 빌3: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 2.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1: 22, 2:31, 4:33, 17:18, 롬1:4, 6:5, 빌3:10, 히11:35, 벧전1:3, 3:21.
  • 3.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14:14, 20:35,36, 요11:24, 23:6,8, 24:15, 고전15:12이하, 히6:2, 계20:15이하.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상징적으로]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고후5:2.
  • 2. 거주, 주거
  • 3. [문자적으로, 천사에 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명.
  • 3.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 κατανοήσατε τὸν Ἀπόστολον καὶ Ἀρχιερέα τῆς ὁμολογίας ἡμῶν Ἰησοῦν,(Nestle 1904)

1절의 구조를 분해해 봅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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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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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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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오늘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 압제로부터 독립을 외첬던 3,1절 101주년 되는 날입니다. 삼일절 하면 생각나는 분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교한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신자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 인해 일찍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의해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파견소로 몰려가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습니다. 17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머리에 콜타르를 발라 가발 벗기듯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고, 벤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았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상자 안에 3일간 감금하고, 입과 호수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고, 달군 쇠로 몸을 지지고,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합니다. 상체를 벗겨 공중에 매달고 밤낮없이 채찍으로 후려칠 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에 개 줄을 묶은 채 네발로 기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헝겊을 얼굴에 덮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전기고문은 물론 관에 넣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도 하였답니다. 결국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앙의 사람 도마 안중근 의사도 그 모지 고문 앞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분들은 이땅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 경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1절 말씀을 보면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바라보는 결승점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누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구시는 신천지가 거짓으로 교인 수를 알렸다고 고발했습니다. 신천지는 이긴자, 보혜사라는 그들의 교주 이만희에게 초점이 맞추고 보혜사 이만희를 보라고 합니다. 이만희가 말씀의 약속을 대언하는 대언자라를 것입니다. 이만희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실상으로서의 유일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만희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희는 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나에게 못 해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늘 변하는 세상의 철학과 사건을 바라보면 믿음의 경주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운동선수가 승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승점을 향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에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입니다. 주(아르케곤)라는 말은 "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다. "온전케(텔레이오텐)"라는 말은 "완전한 자,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라는 말은 "주목하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분사입니다. 믿음의 창조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익이 될 수도 있고, 편리가 될 수도 있고,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나 명예, 권력,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목표가 되면 신앙생활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송창식씨가 노래하지 않아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고래사냥을 해보아도 남는 것은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알려 주고 있지 않아요.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지 않아요. 고기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펑 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끝자락엔 공허와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하비콕스(Harvey Cox)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var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렸습니다. 세계적 명문대학의 자리에 올랐지만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이 온갖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에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고 하비콕스가 강의하였습니다. 그때 강의 하였던 내용이 바로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 없는 하버드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니 다시 예수를 좇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합니다. 기름 없는 차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괴롭고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사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자신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의기소침하고 욕심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바라보며 허무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 만족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강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질되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폭풍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폭풍을 바라보았을 때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결국 두려워하고 우리가 고정한 것의 노예가 되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못질하면서 망치로 손을 치는 사람은 못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리는데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리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무거운 것(오그콘)"은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외부적 요인으로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 경주를 방해하는 옷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외적인 장애물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핍박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적인 장애물은 광명의 천사로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신앙의 경주를 실패하게 합니다. 핍박은 달리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유혹은 잘 달릴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같은데 방향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죄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말은 "쉽게 얽어매는", "달라붙는"이라는 말입니다. 경주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죄는 우리를 쉽게 얽어맵니다. 단단히 밀착하여 옭아맵니다. 죄는 믿음의 경주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쉽게 달라붙어 옭아매는 것입니다. 죄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 쉽게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마다 빠지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성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쉬게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는 생각, 성질, 행동, 습관 등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젊은이에게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년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노년에게는 돈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달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신앙경주의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이번 코로나 19를 확산시키는데 매개체 역할을 한 사람들은 신천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며 포교하는 것입니다. 포교를 위하여 거짓말을 밥을 먹듯 하면 그것을 모략이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8단계 섭외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 사람이 속을 수밖에 없도록 포교를 합니다. 먼저 포교 대상을 정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이름, 나이, 주소, 직업, 전화번호, 전공, 군대, 환경, 경제, 건강, 학습능력, 인성, 신신, 신앙, 관심사 등 그 사람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합니다. 2단계는 섭외 활동입니다. 우연을 가장하여 만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열매를 선별합니다. 그들에게 이용거리가 되지 않는 고령자, 환자, 저소득자 등은 제외시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인간적 신뢰를 형성합니다.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접근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유형별 상태를 진단합니다. 신천지 신도 3-7명이 대상자를 분석한 후 전략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신앙우위 선점입니다. 중보기도를 해주고, 꿈 이야기로 영적 우위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유형별 맞춤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때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가짜 선교사, 가짜 교수, 가짜 전문가, 가짜 목사 등을 투입니다. 여덟 번째 단계로 복음방에 등록을 시킵니다. 이 과정이 다 포교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로 치밀하게 짜서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속여 포교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명 속이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너무나 자신에게 잘 해주며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을 속이면 대부분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방에서 성경공부를 시키며 성경공부를 누설하면 마귀가 틈탄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합니다. 같이 온 사람들은 100% 신천지인데 본인만 모릅니다. 사실 바보가 된 것입니다. 복음방 교육이 끝나면 센터에서 월 화 목 금 일주일에 4회씩 초중고급반 6-8개월 교육을 시킵니다. 학원구조로 큰 칠판을 가져다 놓고 비유풀이, 배도, 멸망, 구원, 세례요한 교리를 공부시킵니다. 결국, 교주 이만희가 구원자라를 것입니다. 이때 운동권 아이들이 이념교육을 시켜 세뇌를 시키듯 교리 세뇌교육을 시켜 교리 중독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험을 치루게 하여 합격한 사람을 유월을 시켜 신천지 신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철저할 패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던지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증인들이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3-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신앙의 경주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예수님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경주하기는 경주하되 무엇으로 경주하라고 말씀합니까?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통해, 인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완주의 필수요소입니다.

이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오랫동안 믿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광이 같은 네로가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그 때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고난을 감수(10:34)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자(12:4) 교회 내의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불신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3:12)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의 초보에 머물렀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전반적으로 신앙이 침체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끝까지 완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참으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은 한 번 참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제1 완료 분사로 죄인들에 의한 지속적인 적대 행위를 계속 참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참았습니까?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입니다. "거역한 일(안틸로기안)"이란 반박하고, 논쟁하고, 적의를 가지고 적대행위를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미쳤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해도, 조금만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원수 시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자존심이 뭉개지고, 옷을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인들 앞에서 조롱을 당했는데도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주하였습니다. 채찍을 통해 주어진 가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참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에 창이 찍히는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끝까지 참고 구속사를 완주하였습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이 당한 일을 비교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참으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쁨 대신에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했다는 말씀입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 입니다. 낙심에 감염되면 풀이 눕는 것처럼 희망을 잃어 버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친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자 낙심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배교하는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피곤하게 하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낙심시키고 지치게 만듭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사람을 보고 낙심시킵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 직원으로 지치고 낙심을 시키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전략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쉽게 지쳐 낙심하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핍박과 고난도 참고 견디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야 하겠습니다.

"1. 구주를 생간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모세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 17년을 인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주민 90%이상이 예수님을 믿는 섬이 있습니다. 천사의 섬이라 불리워지는 전남에 있는 증도입니다. 현재 22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지만 11개의 교회가 세워져있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김준곤 목사, 정태기 목사, 이만신 목사, 이성봉 목사 등 10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답니다. 그 씨앗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님이라고 합니다. 17살 나이 결혼했지만 남편은 신혼초부터 집을 나가 소실을 얻어 딴 살림을 차렸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며 모진 고난을 다 참고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 전했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일제의 강점기 때도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얼마나 전도를 했는지 고무신이 1년 동안 무려 아홉켤레나 닳아 없어졌답니다. 만 40세에 성경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무려 11개 교회를 세워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유모로, 때로는 우편배달부로 교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고 심부름 하는 역할을 도맡았답니다. 6.25 때 문 전도사님은 공산당에 채포되었답니다.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었답니다. 전도사님은 순교의 현장에서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고 59세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영광 염산교회는 6.25때 공산당에 의해 77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65명이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변절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습니다. 공산당들이 예배당에 불을 질러도 새끼줄로 온 몸을 꽁꽁 묶고, 돌맹이를 목에 메달아 교회 앞에 있는 바닷가로 밀어 넣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격려하며 변절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전교인 65명이 수장되거나 몰매를 맞고 대창에 찔려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며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내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화입니다. 영원한 승리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자리를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3.1절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땅 영적 전쟁터에는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패배자, 배신자,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 있다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도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면 넉넉히 인내의 강을 건너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부활 이야기

    ▶톨스토이의 부활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귀족 청년 '네풀류도프'는 '나타샤'라는 그의 하녀를 유혹하여 임신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녀는 그 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눈물나는 고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해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게 했던 그 남자 '네풀류도프'는 그 동안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그가 그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때 불장난하여 그렇게 만든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돕게 되었습니다. 차마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면하여 주는 대신에 시베리아 먼 땅으로 유형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며 그녀를 따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한 여인숙 방에서 밤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젊은 날의 방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머지 생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부활의 개념을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는 개념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이제 우리는 죽어도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집니다. 이날은 학생들이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당에 모여 학교측이 초청한 유명인사로부터 강의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해인가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박사가 강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된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여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한 노인이 일어나 말하기를 '틸리히 박사님!'하고 부르고는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과를 베어먹기 시작하더니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하고는 또 사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사과를 잡수시는지 이 노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목하자, 다시 노인은 '니이버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하더니 또 다시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방금 다 먹은 사과의 꼭지를 높이 쳐들고서는 '박사님! 방금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가요, 단가요?'하고 물었습니다. 몹시 당황한 틸리히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 보지 못했기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노인은 그 남은 사과 꼭지를 가방 속으로 던지면서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천 여 명이 사람들이 까르르 웃고 손뼉을 쳐대는 통에 강단은 삽시간에 유쾌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틸리히 박사는 조용히 강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대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큰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아서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는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어했던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의 작은 구유가 되어 나귀가 핥아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 한 그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께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만선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답니다.





    2024년 주일 설교 계획
    성도들이 즐겨 암송하는 간단한 성구를 중심으로 설교를 계획한다.

    사순절 제4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생각하라(2657) 카타노에오(katanŏĕō)  κατανοέω     

    1. 주목해보다.  2. 보다.  3. 생각하다
    발음 [ katanŏĕ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주목해보다, 자세히 보다, 마 7:3, 눅 6:41, 행 27:39.
    2. 보다, 생각해 보다, 약 1:23, 24, 눅 12:27, 행 27:39.
    3. [영적인 의미에서] 생각하다, 주목하다, 눅 12:24, 히 3:1, 10:24.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에게만 집중(集中)하라!

    * 집중(集中) : 모을 집, 가운데 중

    1. (어떤 일ㆍ현상(現象)ㆍ대상(對象) 등(等)이) 한 곳이나 한 대상(對象)에 또는 한정(限定)된 짧은 시간(時間)에 몰리거나 쏠리게 함.
    2. (어떤 일에 정신(精神)을) 바짝 차리고 쏠리게 함.
    3. (어떤 대상(對象)에 시선ㆍ이목 등(等)을) 향(向)하여 미치게 함.

    집중이란 촛점을 맞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야기) 사무엘이 어려서 에덴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 원장님이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특별 부탁으로 일찍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준비물에 "검은 먹지 1장" "볼록렌즈 1개" 라는 것을 준비시켜 유치원 가방에 넣거 그 다음날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유치원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이 화를 내며 먹지와 볼록렌즈가 가짜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먹지가 타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무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후에 볼록렌즈를 햇빛에 촛점을 맞추고 먹지 위에 올려놓았더니 먹지가 연기를 피어오르며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 불평이 일어났을까요?
    볼록렌즈와 햇빛과 촛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태양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가 되는 내가 촛점을 맞추지 못하므로 검은 세상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촛점을 맞출 수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라면 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거나 나를 세우려는 것은 아직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의 삶을 확산시켜라!

    확산(擴散) : 넓힐 확, 흩을 산
    - 퍼져 흩어짐

    목회자들의 삶의 반경은 매우 좁습니다.
    만나는 대상이 거의 목회자 또는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환경에서 예수를 확산시킬 기회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목회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이중직을 갖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력(集中力)을 가져야 합니다.

    집중력(集中力, attentional control)은 무엇을 집중할지, 무엇을 무시할지를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확산력(擴散力)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향기가 되어 확산력을 퍼쳐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응집력(凝集力)을 갖는 것입니다.

    응집력(凝集力) : 엉길 응(凝), 모을 집(集), 힘 력(力)
    - 어떤 단체(團體)나 조직(組織)에 속하는 구성원(構成員)들을 통합(統合)하는 힘.

    (예) 모래 속에 자성이 강한 지남철을 넣고 흔들면 자석에 작은 쇳조각들이 달라 붙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의 철을 모래밭에 넣고 흔들면 아무 것도 달라 붙지 않습니다.
    자석에는 자성이 있기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력(持續力)을 가져야 합니다.
    - 가질 지, 이을 속, 힘 력
    이어갈 힘, 견딜 힘, 유지하여 오래 지속하는 힘.

    예수로 살아가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흥분현상입니다.
    정말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로 인하여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시련과 고통과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의 집중이 되어야 할 예수님은 누구인가?

    첫째는 사도가 되신 예수님
    둘째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사환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예수님은 그 집의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가톨릭 성경)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 신앙 고백의 사도이며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공동번역)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성도 여러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 8:5; 9:23;11:16; 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 19:6; 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 10:40; 눅 10:16; 요 4:34; 5:23, 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 Ned.35b; 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사도(652) 아포스톨로스(apŏstŏlŏs)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apŏstŏlŏs ]
    어원  / 649에서 유래





    2. '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 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Hewitt).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성경 전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꺼?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에서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본문을 정리하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믿는 도리의 사도 즉 신앙의 사도가 됩니다.
    신앙의 사도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마다 사도신조를 암송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예수는 대제사장입니다.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속죄소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죽으심으로 더 이상 다른 속죄제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신앙의 표준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우화를 기억하시나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도저히 서로 융화하지 못하고 교리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처음에는 개와 고양이가 서로 자기 영역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개와 고양이와 돼지를 한 울타리 안에 넣고 어떻게 지내는가 지켜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서로 자기 영역을 유지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 하며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 거주하게 했는데 이들은 서로 융화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리가 신앙의 기준이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가 되신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깊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상속받은 후에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이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한 후에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품군으로 맞아드린 것이 아니라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고 하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 즉 신앙의 도리가 되는 기준입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감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는가를 보게 된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나오면 또 한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신가,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성소 (holy of holies)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하며, 분리되어 휘장이 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자기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공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 피를 뿌리는데 하나님께서 그 피를 받아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1년 동안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년에 또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와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답게 살라(대제사장의 예복)

    금방울은 '믿음의 말'을 상징하고
    석류는 '향내나는 삶'을 상징한다.
    결국 대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금방울과 석류를 단 것은
    대제사장은 늘 믿음의 말을 하고
    향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다만 우림은 '빛'의 복수로 '강한 빛'을 의미하고
    둠밈은 '완전함'을 의미하기에 아마 하나님의 판결은
    가장 정확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밝은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준다.
    경망스럽지 않은 밝은 표정을 하는 것과
    크게 웃지는 않아도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는 것은
    피로한 현대인에게 최고의 부조가 된다.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벧전2:9)
    그 말씀은 특권의식을 조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남이 아닌 자신부터 더욱 성결하고 책임적인 삶을 살라는
    주체의식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어떤 건축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
    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의 중심이 있다. <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된다.
    일본 사람이 집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한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이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한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
    불 꺼진 제단이 무엇을 하는가?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교회에 와서 예배 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미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이며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홀로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가정의 중심은 제단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론의 제사장직과 의복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우리를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완전에 연결시킨 그리스도의 역할을 상징하였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 κατανοήσατε τὸν Ἀπόστολον καὶ Ἀρχιερέα τῆς ὁμολογίας ἡμῶν Ἰησοῦν,(Nestle 1904)

    1절의 구조를 분해해 봅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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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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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시편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열왕기하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7장:7-9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요 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백성을 둘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의 나라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유는 오로지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선교사의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과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속자이며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곧, 세상에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03-31-2024(부활주일)
    하나되게 하소서
    에스겔 37:15-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지금은 한국교회와 한인이민교회는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권을 잡았고 김정일이 죽은 후에 또 그의 아들 김정은이 대를 이어 통치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3대 세습이라는 통치가 과연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스겔 37:17. 19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

    동독의 라이프찌히(Leipzig)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오랜 세월 성 토마스교회 악장으로 활동했던 음악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20세기에 이르러 라이프찌히는 독일의 통일에 기여한 니콜라이교회로 인하여 다시 세계인의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성 니콜라이는 상공인과 중소 실업인의 성자로 그 이름의 뜻은 ‘약자들을 돌보는 방패’입니다. 라이프찌히 도시의 설립과 같은 때에 지어진 이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교회는 도시의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처럼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의 역할을 했습니다.

    1981년 동독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운동’이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동독의 러시아 미사일 설치와 서독의 나토(NATO) 핵무기 설치 문제로 두 독일이 대립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15-22세)이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고, 그 모임은 매주 모이는 ‘평화를 위한 월요기도 모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여 이 기도회를 3-4년간 인도하였는데, 점차 300-400명이 매주 참석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큰 기도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도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회 참석인원은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작은 방으로 기도실을 옮겨야 했고 결국 기도운동을 중단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감독자가 나서서, 기도모임을 절대 폐지하지도 말고 더욱이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며 저들을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3-4명이 모여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동독인들의 월요 평화기도모임에 함께 하셨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저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1961년에 세워진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인들에게 통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명의 젊은이들과 기성세대들이 마음을 합한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을 동서독 통일의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Now is the time to pray).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실망하지 말고 기도할 때입니다. 이민교회와 조국교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입니다. 우리 당대에 38선의 철조망이 걷히고 독일처럼 한반도에도 통일이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통일한국이 마지막 때에 선교를 위하여 쓰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미주 전역에 기성세대와 다음세대에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부흥의 불쏘시개, 통일의 불쏘시개,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불쏘시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의 불쏘시개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나태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속 기도의 줄을 잡으세요.

    동독인들이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스교회에 모여서 기도했듯이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다음세대들이 통일한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주역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독일통일의 역사에서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를 맨 앞에 놓는다.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와 성도들은 1981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평화기도회를 드렸다.
    1989년 10월 9일 평화기도회 후 7만 명의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펼쳤다.
    1개월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매주 통일기도를 드리고 있다.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서울목요기도모임이 5월 5일 900회를 맞는다.






    루마니아, 토케스 목사

    칼 바르트(K Barth)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루마니아는 1947년 공산인민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 차우세스크(N Ceausescu,1918~1989)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1965년 집권, 독재자가 되어 무자비하게 통치했다. 1989년 12월 25일 그의 부부는 총살형을 받고 27일 집행되었다. 그의 변호사마저 변호를 거부했다. 1980년대 초, 독재 권력의 인권 탄압이 한참일 때 차별 받는 동족들을 보살피기 위해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가 루마니아의 조그마한 마을 티미소아라(Timisoara) 교회에 부임했다. 전임(前任) 목사는 공산주의 정부를 지지했다. 이와는 달리 토케스 목사는 정부의 불의와 인권 탄압을 비난하며 저항했다. 주일마다 예배당 안에 교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임 당시 40명이었던 교인이 5천 명으로 늘어났다. 토케스 목사는 정보 요원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경찰관들이 체포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수 백 명의 교인들이 목사의 사택(舍宅)을 에워쌌다. 촛불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체포하러 들어갔다. 시위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찰서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군중의 숫자가 2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군 병력이 동원되어 진압하려고 발포(發砲)를 했다. 1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불구하고 군중들은 해산하기를 거부했다. 토케스 목사가 연단에 올랐다. “기도합시다.” 수많은 시민들은 무릎을 꿇었다. ‘주기도문’을 드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단합된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었다. 저항의 함성(喊聲)은 수도 부쿠레슈티로 옮겨갔다. 얼마 뒤 루마니아를 철권(鐵拳)으로 통치하던 차우세스크 폭압 정부가 와해, 붕괴되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폴란드 공산 정권은 고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저항 운동이 시작되어 공산 정권을 무너뜨렸다. 폴란드 자유 노조가 항거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동독은 1982년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칼을 쳐서 쟁기로’ 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바흐(Bach)가 감동적인 연주를 했던 적이 있는 역사적인 교회였다. 1만, 9만…,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참가했다. 베를린에 이르자 5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철의 장막을 상징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통일을 이루어 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르크스의 동상들은 한때 신(神)처럼 떠받들어졌지만 지금은 공터에 흉물로 버려져 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사 11:4)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기도, 찬양은 악의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다.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 '기도의 혁명'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루마니아의 공산주의자는 천명이 채 안되었다. 그들 중 구두만드는 직공이었던 니콜 차우세스큐란 젊은이는 전쟁 중에 줄곧 교도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석방되어 공산청년동맹의 비서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소련을 등에 업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정권을 쥔 그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통치술에 감명을 받고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나서 루마니아를 북한체제처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국민들을 거미줄 같은 조직의 틀 속에 묶어 체제를 유지했고, 4가정 중 한 명은 비밀경찰이었다. 수백만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이 투옥돼 죽어갔다. 국민들이 톱밥 섞인 빵을 사기 위하여 줄을 서 있는 동안 정부는 대부분의 식량을 수출했고,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당 간부들은 비만으로 고민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정부의 방침에 동조해 예배 참석자의 명단을 정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반석 같이 견고했던 그의 권력기반이 198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갑자기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그의 독재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허물어졌을까? 그 시작은 티미소아라시에 있던 50명 남짓한 작은 개혁교회로부터 시작됐다.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란 젊은 목사를 어수룩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신심이 깊었고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다.

    그는 저녁시간에 작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엔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만 참석했지만 점점 기도가 절실해지고 나라와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기도회가 폭탄이 되어 차우세스큐 정권을 쓰러뜨릴 줄은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은 이렇게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부터 점화되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①

    루마니아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1918∼1989) 공산 정권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버금가는 독재정권이었다. 실제로 차우세스쿠와 김일성은 둘이 다 살아 있었을 때에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하였다. 독재하는 수법을 서로가 배우며 일인 지배의 살벌한 지배 체제를 구축한 그들이었다. 그런데 차우세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17일에 갑자기 허물어졌다. 마냥 순종하기만 하던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글은 루마니아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북한에서도 이런 날이 오게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루마니아를 가로 질러 흐르는 베가 강이 있다. 베가 강 옆에 티미소아라(Timisoara)란 도시가 있다. 티미소아라 시(市) 한가운데에 긴 광장이 있다. 그 광장 가까이에 볼품사나운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1층의 반은 안경점이고 반은 한 개혁교회가 차지하고 있다. 그 교회 벽에 4개 국어로 다음 같이 쓴 팻말이 붙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한 독재자를 쓰러뜨린 위대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곳은 루마니아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다. 1989년 12월 17일에 일어났던 혁명이다. 백년 이백년이고 계속되어 질 것만 같았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이 어이없이 허물어진 민중혁명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1940년 7월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였을 당시에 루마니아에는 불과 750명의 공산당원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루마니아를 공산 국가로 만들어 가게 하는 데에 수백만의 국민들을 학살하며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차우세스쿠였다. 그는 제화공(製靴工) 출신으로 공산당 당원이 되어 2차 대전 중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한 추진력이 인정을 받아 그가 공산당청년연맹의 총비서로 임명 받게 되면서 루마니아의 비극은 시작 되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③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 전 그 교회를 시무하던 목사는 공산당 정부의 대변인과 같은 목사였다. 무엇이든 차우세스쿠 공산당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목사였다. 그런데 그 목사는 어느날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 이에 젊은 토케스 목사가 후임목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무신론 정권이 몰고 온 세속주의가 민족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낸 것에 대하여 늘 마음 아파하던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치유할 수 있는 개혁에의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평소에 믿고 있었다. 1989년 그가 부임하던 날에 첫 설교에서 그는 다음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

    그가 힘차게 목회를 시작하여 주민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자 50명으로까지 줄었던 교인들이 2년 내에 5,000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로 모여들게 되자 공산당 정부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비밀경찰과 기성교회 목사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어 그런 볼온한 교회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여겨 토케스 목사와 교회에 경고하였다. 국가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토케스 목사는 한 방송국 프로에 출연하여 차우세스쿠 독재를 비판하였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와 같은 경우를 다루어 본 경험이 풍부하였다. 협박과 탄압으로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늘 그렇게 하여 성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젊은 목사는 달랐다. 탄압할수록 더 강력한 반독재의 설교는 하였고, 그럴수록 교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드디어 예배드리는 시간이면 비밀경찰단이 기관총을 메고 교회당 앞에 서서 교회 들어가는 교인들을 감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토케스 목사와 가족에게 식량배급이 중단되고 교인들에게 목사 추방운동에 가담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한 교인은 이에 불복하였다가 며칠 뒤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느 날 복면을 한 4명의 괴한이 토케스 목사 집에 침입하여 그를 헤치려 하였으나 목사를 지키려 와 있던 교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목사 얼굴에 상처만 내었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죽이면 그를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 뿐임을 인식하고는 그를 죽이는 대신에 1989년 12월15일까지 교회와 집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혁명이 일어나게된 2일 전이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④

    12월 15일까지 교회와 사택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정부로부터 받은 라슬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는 12월 10일 주일날에 교인들 앞에서 다음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퇴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에 불응할 것이고,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강제로 추방당할 것입니다. 저들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시키려 합니다. 저들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금요일에 여러분이 이곳에 오셔서 그날 일어날 일의 목격자가 되어 주십시오. 평안하십시오. 하지만 그날에는 꼭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5일 후인 12월 17일에 비밀경찰이 토케스 목사를 강제 퇴거시키려고 출동하였다. 그들은 트럭을 몰고 왔지만 자기들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신도들이 인간 방패를 만들어 교회당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소문을 들은 시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몰려들었다. 시민들과 신도들은 춥고 배고팠지만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가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서서 견디었다. 토케스 목사가 밤 1시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집 주위에 수백개의 촛불이 둘러싸서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촛불 시위는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군중 속에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하였다.
     
    “자유! 해방!”
     
    이어서 금지되고 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여, 깨어나라”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면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우세스쿠와 공산주의를 타도하자!!”
     
    12월 17일 새벽녘에 비밀경찰이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인 군중을 힘으로 밀어부치고는 교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성경을 들고 서 있는 토케스 목사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는 목사 부부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군중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티미소아라 시 광장으로 소리 없이 이동하였다. 혁명이라는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침묵 속에서 군중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청년을 남편으로 맞았으나 북한 정권에 의해 사랑할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55년을 그리움으로 지켜온 루마니아 여인이 있다.
    소설가 권현숙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루마니아의 연인’에 등장하는 ‘제오르제따 미르초이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남유럽의 진주’로 불리는 루마니아는 이 지역에서 우리나라와 유일하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이다.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을 예방하며 찾은 ‘코트로체니 대통령궁’은 루마니아의 마지막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영빈관으로 사용한 곳이다.
    그가 가장 존경한 이는 바로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주체사상에 감화를 받아 이를 모방한 철권통치를 했다.
    전국적으로 도청 장치를 설치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했으며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차우셰스쿠식 독재의 절정은 ‘김일성 주석궁’을 본뜬 ‘인민궁전’ 건설이었다.
    12층 건물에 1,100개의 방으로 이뤄진 인민궁전은 미국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로 축구장 면적의 47배에 달한다.
    한편으로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지하 비밀 터널, 천장이 열리는 실내 헬기장, 그리고 독살을 방지하기 위한 환풍시설 등이 설계돼 있어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는 독재자의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루마니아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이 투입된 인민궁전 건설은 한때 ‘유럽의 빵 공장’으로 불리던 루마니아에 극심한 식량난을 야기했다.
    1984년부터 이어진 공사로 루마니아 국민들은 5년간 굶주림에 시달렸다.
    성난 민심은 공산 독재체제에 종지부를 찍는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인민궁전의 완공도 보지 못한 채 부인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초호화 천연 대리석과 수정 샹들리에로 치장된 인민궁전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매년 수㎝씩 가라앉고 있다고 하니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흐름은 되풀이된다(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rhymes)”고 했다.

    루마니아의 지나온 역사는 오늘날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89년 시민혁명으로 독재 청산과 체제 전환에 성공한 루마니아는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으로 역내 평화와 안정에 적극 기여하고 있으며 연 5%대의 고도 성장으로 EU 회원국 중 가장 역동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고 굶주리고 피폐했던 루마니아 국민들은 이제 당당한 EU 회원국 시민으로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북한은 주민들의 생활고와 인권을 무시한 채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집착하며 지난 한 해에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려 26차례나 위반했다. 최근에는 국제법적으로 절대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해 지도자의 형인 김정남마저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규탄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은 이제라도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역사의 흐름은 되풀이된다는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02-018-2024(사순절 첫 번째 주일)
    예수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7

    지난 1월 7일 신년주일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자!" 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혹시 본문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본문으로 소개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장 12절을 기억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것은 계속 채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된 권세는 내가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내가 생각하고 결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 집안에 태어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자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다워야 합니다.

    자녀답다는 것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너는 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렸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까?
    그렇다면 훗날 나의 부모님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어른이 저를 보시더니 “아버지가 집에 계시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 아버지가 집에 계십니다.” 하고 집으로 함께 가서 아버지 누가 찾아오셨어요.“ 하고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뛰어 나오면서 ”아이구, 형님“ 하고 반갑게 맞이하시더니 제게 ”너희 큰아버님이시다!“ 하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확신했습니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구나!

    왜냐하면 나를 처음 보셨던 큰아버지가 나를 본 후에 곧 아버지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아버지가 보이고 아버지를 보면 내가 보인다는 것은 곧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설교 제목은 “예수의 흔적”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는 열성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전적으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일에 앞장서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빛에 의해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에게 예수님은 제자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안수하라고 합니다.

    아나니아는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가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까?

    아마 이때 찬란한 빛에 의해서 어떤 신학자는 바울에게 안질이란 질병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몸에 무슨 질병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도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에 가졌던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을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몸에 “육체의 가시”를 가졌다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와 같은 고통스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를 그의 몸에서 제거하여 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바울이 교만할 수 없도록 바울을 통제하는 영적 비밀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응답받고 해결 받습니다.
    만일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것도 바울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강력한 신호등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손가락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 때문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손가락은 여전히 내게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생명의 빛이 되는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빛이란 곧 주의 말씀입니다(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나의 빛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빛은 생명입니다.
    그 빛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행하자!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부지휘자에게 지휘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남편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오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예수님의 흔적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몸에 남아 있는 어떤 흔적이 아니라 그 흔적 까닭에 예배를 포기할 수 없고 그 흔적 까닭에 신앙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지키려면 반드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흔적을 헬라어 성경에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가축 또는 노예의 몸에 주인의 표시를 위하여 새겨 넣는 불도장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시뻘겋게 달궈진 불도장을 찍는다면 그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예수님의 흔적은 이렇게 심각한 고통을 경험한 후에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박태준박사님이 사랑하는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그 말이 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애절한 울림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딸의 애원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 분명한 것을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24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예수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녀야 할까요?

    말씀의 흔적을 새기자
    말씀과 설교는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 설교를 말씀으로 착각합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새기지 않으면 육체의 생명은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나의 구원을 확증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증거는 내가 무슨 행위를 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대원 시절 종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는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어느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그의 아내와 딸이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 그림이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영상으로 그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 그림 위에 얼굴 윤곽과 눈에 표시를 한 후에 그림을 보여주며 이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하고 물었더니 정확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깨우친 후에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성경 암송카드를 갖고 다녔기 때문에 그 카드를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 카드를 주며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딸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래,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을 찾았다!” 이렇게 대답한 후에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구원을 얻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해야 한다.”며 말씀 카드를 꺼내어 말씀을 소개하라고 전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믿고 확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흔적(스티그마. stigma)  στίγμα
    스트롱번호 4742

    1. 표.  2. 흔적. 3. 낙인
    발음 [ stigma ]
    어원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표, 흔적, 낙인, 갈 6:17.

    구원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의 확신(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도 응답의 확신(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승리의 확신(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죄의 확신(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인도의 확신(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고 살리시기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부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나시고 성령 하나님은 빨간 불로 임하시므로 두 분 하나님의 얼굴의 이미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미지는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주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람들은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주님의 옷자락을 보았고 또 어떤 분들은 지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주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똑똑하게 보았다고 하는 분들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나마도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거의 환상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개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여 그린 그림과 사진을 모았습니다.
    마침 천국에서 온 많은 천사들이 엘리야 선교사님 곁에 와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검증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안수를 받았던 분인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또 그의 곁에 있는 천사들의 견해를 들을 수 있어서 절호의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그리고 주 예수님의 400개 사진은 구글 사이트에서 찾아낸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사진들을 모은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이나 수많은 작가들이 그렸거나 전해 내려온 사진들입니다.
    이 중에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런 이미지나 사진은 어떤 것일까요?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http://spiritlessons.com/Documents/Jesus_Pictures/Jesus_Christ_Pictures.htm
     
    예수님의 400개 사진
    http://spiritlessons.com/PICS/index.htm

    <출 처> WWW.MessianicBible.com
     
                                  
                               


                                                                            

    천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의 제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신장이 2m 수준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장은 2m 20cm였다고 합니다.
    훤칠한 키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확실하여 시원하고 매우 자상한 모습이며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흠잡을 곳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씀을 묵상할 때,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마음에 그리며 기도한다면 훨씬 더 실감 있고 우리 주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일이 있을 때 바로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주님의 얼굴인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우리는 이 얼굴 모습을 떠올리며 금방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현재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는 김선교사님의 고백
    성경에는 이미 수많은 증거들이 계시되었다.
    그러멩도 불구하고 자꾸 나에게 무슨 이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을 바르게 믿지 못하는 증거라고 한다.

    한국 사람으로 우리 선교회의 엘리야 선교사님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주 예수님을 만나 안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오후 5시경 그가 그의 방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책상 바로 앞에 주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크게 놀라서 주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가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못 자국이 난 양손과 양발목을 엘리야 선교사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얼떨결에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주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다. 놀라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그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안수하는 것이 목사들이 안수하는 것보다 더 낫겠지”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는 매우 감격스러워 하면서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습니다.
    주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기름 부음을 받은 엘리야 선교사님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그때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상하고 따뜻한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양치는 마을에 사는 두 젊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 규율이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힌 사람에게는 불에 달군 쇠로 'ST'라는 문자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낙인이 찍히자 이런 벌칙을 알지 못하는 동네로 도망을 쳐서 그의 남의 생을 이곳저곳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나 이마에 찍힌 낙인 때문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 낯선 사람의 이마에는 'ST'라는 낙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러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는 그 수치를 당하므로 그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생애를 추방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은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가 양을 훔친 것 때문에 당한 수치를 보상했습니다.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내 인격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들 과 이웃을 돌보며 자기 자신을, 이웃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헌신과 봉사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낯모를 사람이 그 마을에 와서 이 노인의 이마에 찍힌 'ST'라는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어느 중년 신사는 "글쎄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분의 이마에 표시되어 있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ST'란 글자는 성인 'Saint'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 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양을 훔친 벌로 머리에 찍힌 낙인을 성인의 약자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희랍의 전설 가운데도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애통은 확실히 가치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7
    이 後(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痕迹(흔적)을 가졌노라


    이사야 44: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에스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류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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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2093211 2024-02-27T23:39:32Z 2024-02-28T00:03:17Z 주여 삼창의 의미



    왜 한국교회는 통성 기도를 시작하며 주여 삼창을 외치는가?

    언제부터일까?
    누가 처음 시작하였을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상당수가 ‘통성기도’를 시작하기 직전에, 먼저 ‘주여 삼창’ 곧 ‘주여! 주여! 주여!를 3번 연창한 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용어사전」에서 ‘주여 삼창’이란 용어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그 근거가 없는 표현이므로 삼가야 한다고 했다. 

    또 「교회용어 바로쓰기」 책에서도, ‘주여 삼창’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며 성경적 근거가 없는 용어라고 했다.

    그리고 「예장대신총회법규집」에도 공예배 시에 ‘주여 삼창’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이처럼 공신력 있는 여러 개신교 관련 책들과 유관기관에서도, ‘주여 삼창’은 반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행되고 있다.

    또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 고질병은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한 번 맛들이면 중독되는 마약처럼, 치료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 개신교에서 ‘주여 삼창’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그중에 하나는 다니엘 9장 19절에 나오는 ‘주여’라는 단어들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향해, ‘주여 삼창’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먼저 이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고,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다니엘 9:17-19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한글개역개정성경)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해, 다니엘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즉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된 후 70년 만에 포로생활이 끝나 자유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수치스러운 포로 생활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죄악이 해결되어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사죄와 선민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여! 주여! 주여!”를 세 번 외치는 것을 ‘주여 삼창’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문(단 9:19)에서, 다니엘은 ‘주여’라고 세 번 연호하지 않았다.

    본문 19절에서 ‘주여 들으소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니다.
    이것은 17절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또 19절의 ‘주여 용서하소서’라는 것도 기도 내용이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그리고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와 같이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만 세 번 나타나 있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향해 ‘주여 삼창’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개신교 신자들은 기도할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부르면서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성령이여! 성령이여!’라고 하면서,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성경 어디에도 신자들이 ‘성령께’ 기도한 사례는 없다. 로마서에서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이라고 했다(롬 8:26).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또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요 16:23).”고 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을 가리켜서 ‘주님’이나 ‘주 성령’이라고 부른 예는 없다. 그러므로 ‘주여 삼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 외에도 ‘주여 삼창’의 유래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견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알아보자.

    1) 먼저, 하나님께 ‘주여 삼창’을 크게 외치며 기도해야 효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주여’하며 크게 부르며 기도한 내용이다. 또 마태복음 9장 27절에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두 맹인이 ‘소리 지르며 말했다’고 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크게 소리 지를 때’에, 스스로 결단하는 마음을 심어주면서 다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다.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사람들의 목소리 크기의 정도에 비례해서 기도 응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벙어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다.

    2) 다음으로, ‘주여 삼창’을 외침으로써,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나처시로다.”라고 했다. 이처럼 피난처되신 하나님 앞에 나와 마음을 토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신자들을 위로하시고 참 평안을 주신다고 했다(요14:26). 이는 ‘주여 삼창’을 부르짖는 감정의 발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로이므로 넋두리와 신세한탄과 같은 인위적인 행위는 삼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고대해야 한다.

    3) ‘주여 삼창’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8장 27-28절에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고 했다. 이 말씀처럼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받기 위해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신들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바알 선지지들처럼 큰 소리가 아닌, 평소와 같이 기도하며 ‘응답하옵소서’라고 했다(왕상18:37). 이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과 언행을 알고 계시므로, 바알 선지자들처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유별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신자들은 엘리야처럼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 이제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 책들을 살펴보자.

    (사례 1) : 「교회용어사전」의 ‘주여 삼창’에 대한 견해

    기도할 때, 예배 진행자의 제안으로 “주여, 주여, 주여.”하며 고성으로 ‘주여!’를 ‘3창’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왜 기도를 시작할 때 이렇게 3회 연속으로 소리 지르고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아마 기도하는 사람의 종교적 열심을 나타내기 위함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함께 합심해서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름으로 기도에 서툰 성도도 기도에 담력을 얻게 하기 위함일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를 통해 집회의 감성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주여 3창’은 성경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한 마디로 성경에서, ‘주여 3창’은 없다. ‘창(唱)’이란 인격적 존재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노래나 구호나 함성을 외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는 ‘창’이란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 또 ‘주여 3창’은 기도하는 사람의 열정을 드러내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각성시키기 위한 무력 시위 같은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중략). 그러므로 ‘주여 3창’과 같은 잘못된 신앙 습관을 배격해야 한다.

    (사례 2) : 「교회용어 바로쓰기」 책의 ‘주여 삼창’에 대한 견해

    한국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주여 3창’은 다분히 무속적이며 미신적인 의미가 있다. 무속과 미신은 계시종교에서 절대자의 계시의존과 계시근거에서 신앙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힘을 가진 신을 찾기 위해서 강신(降神)을 위해 부르짖고 절규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로 올바른 영성적 행위는 아니다. 또 ‘주여 3창’이 기도의 담력이나 기도의 대중적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도 맞지 않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맞추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영적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기도의 조건으로서 간절성과 호소력이 필요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조건이 응답의 필수조건이다. ‘주여 3창’이 기도자의 의지의 표현이거나 어떤 언어의 반복 사용과 누적이 공적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기도의 과잉열정이나 통성의 고조 등을 통한 집회 분위기를 흥분시키는 인위적 유도행위는 언약과 계시의존적 신앙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여 3창’은 기도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환호적이고 구호적인 연창이므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 위의 사례들에서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임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서나 요란하면서도 울부짖는듯한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성기도 시에 집회를 주관하는 대부분의 목사는 ‘주여 삼창’을 세 번 연창할 것을 교인들에게 요청한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이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한국 개신교가 개발하고 창안한 놀라운 영적 유산으로 여기며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한국 개신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어떤 목사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도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한국에 있을 때처럼 외국에서도 그대로 실행해 왔다.

    그래서 외국의 개신교인들 중에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식 통성기도를 영어로 ‘Korean prayer’라 칭하기도 했다.
    이제는 외국에서도 한인교회를 통하여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외국인들도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모방하여 시행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한인교회 목사들의 공로는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20년 이후로는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그 왕성했던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예전처럼 듣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개신교회 내에서 코로나 19의 집단 감염이 많이 발생함으로 인하여, 국가에서 코로나 19의 감염의 큰 원인이 되는 ‘통성기도(주여 삼창)’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성경 학자들은 개신교 집회 때마다, ‘통성기도’와 함께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며 집단으로 기도하는 행태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한국 개신교 목사들은 코로나 19 전염병은 차치하고라도,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한국식 ‘주여 삼창(통성기도)’에 대해 진지하게 성경적으로 성찰한 후, 이것들을 영구히 폐지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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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는 기도의 표본적인 문체는 ‘주기도문’ 외에는 인간이 본문대로 표본을 삼을 근거는 없다. 그리고 3이라는 수적 개념이 어떤 완성적 또는 완전의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기도의 첫 머리에 도입할 이유는 없다. 부르짖음의 회차의 누적이 기도의 절실성이나 간절성을 반영하는 것이 되고 기도의 공적 요소가 된다면 기도와 신앙의 외형주의가 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위대하신 중보적 공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주여 3창’이라고 할 때 다분히 무속적, 미신적인 의미가 있다. 무속과 미신은 계시종교에서 절대자의 계시의존과 계시근거에서 신앙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라서 어떤 힘을 가진 신을 찾기 위해서 강신 또는 초신을 위해서 부르짖고 절규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로 종교 심성적인 열광적 표현과 유사한 것이니 바른 영성적 행위는 아니다. 또한 '주여 3창'이 기도의 담력이나 기도의 대중적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의 강조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당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맞추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그의 선한 뜻을 신앙으로 확인하는 영적 행위인 것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기준은 인간의 요구기준과 일치하지 않는다. 기도의 조건으로 간절성, 호소력이 필요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조건이 응답의 필수조건이다. 기도의 과잉열정, 통성의 고조 등을 통한 집회 분위기를 흥분케 하기 위한 인위적 유도행위는 언약과 계시의존적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런고로 ‘주여 3창’은 기도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환호적이고 구호적인 연창이므로 기도의 어체가 될 수 없어 반드시 갱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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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의 유래

    1. "주여" 삼창의 유래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하여 "주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미사 후에 "엄마" 삼창을 하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2. "주여!" 삼창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1) 같은 말을 되풀이함으로 강조(强調)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겔 21:1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단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2) 크게 부르짖음으로 강청(强請)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마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3) 크게 소리 지를 때에 결단(決斷)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다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하는 최면(催眠) 효과가 있습니다.

      
    3.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이라는 입장에서

    1) 성경에서 가리키는 '주'(主, lord)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 '주여'라는 호칭이 구약에 100회, 신약에 107회로 207회 나옵니다. 

    그것을 분류하면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삿13:8)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창 18:32; 출 15:17)대신 사용한 경칭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할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여, ' 아도나이'(나의 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아도나이 를 '퀴리오스'(Kyrios)로, 라틴어로는 '도미누스'로 번역되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마 16:16; 막 8:29; 눅 13:26; 요 11:27; 행22:8)를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여호와)을 가리키던 '주'(퀴리오스)를 예수님과 관련시켰습니다.

    (3) 주인. 소유자. 상급자를 가리킵니다(창23:15,44:7;삿4:18).

      
    2) "주여!" 삼창에서 가리키는 '주'(主, lord)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주'라 칭호하면 대부분 '하나님'을 가리키나,  신약시대에는 대부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호칭하고, '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 6;9; 눅 11:2).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여!' 라고 호칭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막 14:36; 눅 10:21; 요 12:27). 

    그렇다면 "주여!" 삼창은 기도의 대상을 잘못 정한 부르짖음입니다.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욥 35:13) 

    3) 하나님께 유기(遺棄)된 자에게 반복된 "주여 주여"를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 "주여"라는 호칭이 반복 된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용의 경우를 살펴보면 '주님'으로부터 유기된 경우였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마6:7)는 말씀과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눅 6: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8: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4) "주여" 삼창의 성경 근거가 잘못 해석되었습니다.

    "주여!" 삼창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성경말씀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단 9:19)는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주여"의 반복이 아니라 

    ①  주여 들으소서.
    ② 주여 용서하소서.
    ③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의 세 가지 기도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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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으로 시작하는 기도 / 성경적 근거

    우리들은 간절히 기도할때 “주여” 삼창을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O Lord, listen! O Lord, forgive! O Lord, hear and act! For your sake, O my God, do not delay, because your city and your people bear your Name.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들으시고 행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황폐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자기의 기도를 들어 달아고 간청할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강청하는 “주여”입니다.

    두번째 “주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세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속히 행동으로 옮겨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아무런 생각없이 “주여”라고 삼창을 부르짖기 보다는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행하시 옵소서”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면 은혜가 더 충만할 것이며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겠습니다.

    자료 사용 / 11-27-200(주일) 파트리스교회 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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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과 엄마 삼창, 글 김문수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항상 엄숙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다들 마음 뿐만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모양, 바른 자세는 기본이었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슬리퍼, 초미니스커트, 민소매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음악을 위해서는 피아노와 오르간만 쓸 수 있었고, 드럼, 기타, 신디싸이저 등은 쓸 수 없었습니다.
    회중들이 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는 것이나 옆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새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그 분과 학생회 수련회에 가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목소리를 높여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항상
    "주여! 주여! 주여~" 라고 주를 크게 세 번 부르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기도할 때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를 못했고,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선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답변이라는 게
    대부분 "크게 외쳐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는 정도였으니까요.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그 분의 사도들이 혹은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하기 전에,
    "주여 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
    "주여 삼창"이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창(唱)이란 "노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우 삼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연호(連呼): 구호를 연이어 외침"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용어 그대로 "주여 삼창"이라고 쓰겠습니다.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다니엘 9장 19절을 근거로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단 9:19, 킹흠정)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또한 "주여 삼창"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렘 33:3),
    크게 외쳐서 우리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기도할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불러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자,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여~ 성령이여~" 하고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16:14). 성경 어디에도 성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한 사례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롬 8:26, 킹흠정)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요 15:16, 킹흠정)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게 하려 함이라.
    (요 16:23, 킹흠정)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다니엘 9:19을 그 앞에 나오는 17, 18절과 같이 비교해 보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니엘은 "주여"를
    세 번 연호한 적이 없습니다.
    (단 9:17-19, 킹흠정) [17]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8]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19]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다니엘 9:19에 나오는 "오 주여, 들으소서"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닙니다.
    이는 9:17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것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긍휼로 인하여 간구하오니 그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2. "주여 삼창"의 기원
    "주여 삼창"을 외치는 의식은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는 동양의 제사의식과 무속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여 삼창"의 모태가 되는 것은 "만세 삼창"인데, 이 만세 삼창은 중국에서 한무제가 숭산에서 제사를 지낼때
    신하와 백성들이 만세를 삼창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은혜에 감사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시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이라는 시 중 일부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이란 죽은 이의 혼령(넋)을 불러들이는 의식인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망자(亡者)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동양 문화의 산물이며, 동양의 제사의식, 황제 숭배,
    초혼의식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여 삼창"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기도를 들으시는가?
    (렘 33:3, 개역)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킹흠정)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KJV)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개역은 "부르짖으라"라고 번역했지만, 킹제임스성경에 나오는 call 이라는 단어는 목청 터지게 외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사 59:1, 킹흠정)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주의 공로를 힘입어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 크기가 기도 응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2) "주여 삼창"으로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가?
    피난처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필요합니다.
    (시 62:8, 킹흠정)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닙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여"라는
    구호를 세 번 크게 외쳐서 얻는 감정의 발산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크신 위로입니다.
    (요 14:26, 킹흠정)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3)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주께서 내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 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주여"를 외칠 필요가 있을까요?

    (시 139:1-4, 킹흠정)
    [1]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손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자고 있다면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시기 바랍니다.

    (왕상 18:27-28, 킹흠정) [27] 정오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이므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 하매 [28]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
    바알 숭배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쳐 부른 것이 아니라 보통 때와 같이
    주께 말했습니다. 왕상 18:36에는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거나, 제단 주변에서 날뛰거나 하면서 주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주께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4) "주여, 주여" 연호한 사례

    성경에는 "주여, 주여"라고 주를 연이어 부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연이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구절들은 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에 의하면, 주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주여, 주여"하고 외칩니다.
    (마 7:21, 킹흠정)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킹흠정)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 킹흠정)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눅 6:46, 킹흠정)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 글의 취지는, 기도할 때 주님께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주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런 분들을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거도 알 수 없는 "주여 삼창"이라는 종교 의식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교회 예배에 들어와 있고, 또 그 의미도 모른 채 목회자들이 가르치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의미없는 외침이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성경적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이 통성기도 시작할 때마다 습관을 따라 혹은 기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주여 삼창"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부르짖음이 될 뿐입니다.
    이제는 주여 삼창이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주여 삼창"이라는
    문화를 전파하여 외국에서도 "주여 삼창"을 외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3784

    참고로,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마리아에게 "엄마 삼창"을 바친다고 합니다.
    천주교 미사의 마리아에게 바치는 "엄마 삼창" (아래 링크 클릭)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6549829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GEXw&articleno=6307813&_bloghome_menu=recenttext#ajax_history_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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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삼창(三唱)?

    말씀을 바르게 알고 , 바르게 믿고 , 바르게 행하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때론 알지 못하여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삼창(三唱?)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없다'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주여!“ 삼창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고 간절

    히 기도한다면 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래의 

    글을 올려봅니다..



    주여 삼창의 배경은 

    성경 다니엘서 9장 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

    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

    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라는 말씀에서


    1. 주여 들으소서 

    2. 주여 용서하소서 

    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기도한다는 

    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 위마다 지

    칭하여 부른다’는 설과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

    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援用) 하여 "주

    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

    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

    다. 




    다음은 우주현 목사의 한국인의 기도!(KOREAN 

    PRAYER!)에 대한 글인데 많은 공감이 되어 올려봅니

    다.


    KOREAN PRAYER!

    -우주현 목사- 

    제발! 주여~주여~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

    오. 이는 무당들이 귀신 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

    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

    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 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

    오.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

    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

    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

    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

    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

    신학’ 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교수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시의 교회성장의 한 모델

    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

    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

    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 와그너 교수

    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 라는 이름으

    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

    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 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

    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

    말 그대로 ‘주여!’ 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

    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 가 아니라 한국말

    로 ’주여를 세 번 큰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

    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

    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

    상품으로 ‘KOREAN PRAYER’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

    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의 눈

    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

    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

    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 이라고 생각되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

    터 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 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

    다. ‘KOREAN PRAYER’ 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

    고 판단한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

    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

    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

    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 보

    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때 - 유독 큰 소리로 기도

    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

    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

    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

    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

    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라 말씀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습니

    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전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I will 

    answer...',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

    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부르짖다’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

    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

    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

    리에게 다시 보여 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

    를, 그의 인격을 부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

    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

    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

    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

    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

    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

    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

    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

    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

    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

    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

    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

    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

    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

    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

    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핀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

    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

    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

    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

    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

    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

    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

    다. 오리혀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

    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

    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

    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

    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

    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

    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

    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

    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

    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

    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

    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

    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

    서 문가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

    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

    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

    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

    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

    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

    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

    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

    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

    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

    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

    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

    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

    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

    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

    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

    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

    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

    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

    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

    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

    레스를 푸는- 기도일 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

    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

    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

    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

    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묵

    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

    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

    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

    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

    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

    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






    ]]>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44488 2024-02-23T07:50:00Z 2024-03-09T14:14:57Z 사순절(Lent) - 고난주간 / 요시다 코조 목사(서울일본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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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四旬節) Lent

    사순 시기(四旬時期) 

    헬라어 Σαρακοστή(사라코페) 
    라틴어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
    영어 Lent(렌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일자를 확정하며 확인한 절기이다.

    사순절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40을 의미하는 '테사라코스티'(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다.

    사순절 주간별 주제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집니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불렀다(라틴어 명칭).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뜻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첫째 주 -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합니다.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둘째 주 -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합니다.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셋째 주 -  회개로의 요청을 생각합니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는 뜻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다섯째 주 -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 불리기도 하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주 - 치유와 회심을 생각합니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m sunday. 팔맘 선데이), 또는 고난 주일(Dominica Passionis. 도미니카 파시오니스)이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여섯째 주일 -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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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Lent.  四旬節)


    사순절(四旬節, Lent) : 영어의 'Lent'는 '봄'(lencten)이란 말과 '길다'(lang)는 고대 영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라틴어로 번역하면 '사순절'(四旬節)이다.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에서는 '대제절'(大祭節)이라고도 부른다. 약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뒤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며 보낸 기간을 기념해 생긴 관습이다.


    사순절은 부활절 46일 전, 재(ash)의 수요일에서 시작해 성토요일(부활절 전날)에 끝난다. 부활주일을 앞둔 성회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46일간의 기간(그중에서 1주~6주의 주일은 6일이 있고, 평일은 40일임)을 특별한 절기로 정한다.


    부활제 준비는 기도와 단식 때문에 행하여졌는데, 예수님이 금식하신 일에 따라서 40일간 행한다. 로마의 가장 오래된 관습에서 사순절은 부활제의 6주일 전의 주일(일요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주일에 단식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서, 주일은 계산하지 않고 정확하게 40일이 되도록 거슬러 올라가서, 사순절 첫 주일 전주(前週)의 성회(聖灰) 수요일 또는 성회례일(聖灰禮日) 즉 옷에 재를 뿌리는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는데, 부활절 전 목요일의 세족일(洗足日)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화해의 길을 모두 함께 걷는다는 공동체(共同體) 의식을 굳힌 의미를 지닌다.


    III.고난 주간(Passion Week, 苦難 週間)


    고난 주간(Passion Week, 苦難 週間): 예수님이 로마군에 붙잡혀 빌라도의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기까지 지상에서 겪은 고난을 기념하는 한 주간, 수난주간(受難週間)이라고도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나 영국 성공회(聖公會)에서는 부활절 전 40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四旬節) 기간 중 주간마다 특색 있는 행사하지만,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보통 종려주일(棕櫚主日: 부활주일 바로 전 주일)부터 고난 주간을 지키고, 그 1주간을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겪은 죽음을 앞둔 번민(겟세마네의 기도 등)과 온갖 수모,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시는 행적에 따라 그 고통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행사를 한다.


    IV.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성회(聖灰) 수요일, 성회례일(聖灰禮日):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는 첫날. 가톨릭 등에서 지키는 절일의 하나로 수요일에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날을 로마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참회하는 날로 정하고 옷에다 재를 뿌렸다. 이날은 부활절 전 목요일의 세족일(洗足日)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화해의 길을 모두 함께 걷는다는 공동체(共同體) 의식을 굳힌 의미를 지닌다.


    V.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라틴어로서 '슬픔의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빌라도 법정(안토니오 병영)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확정된 길의 14지점으로, 800m 길과 갈보리 언덕을 말한다. 14곳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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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의 길은 안토니오 요새에서 심판의 문을 거처 골고다까지이다.

     

    고난의 길에서의 예수님 행적 14곳


    1. 예수님 재판 받으신 곳(막15:15) * 선교교회

    2.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신 곳(막15:16-20; 요19:2, 3) * 채찍교회

    3. 예수님 첫 번째 넘어지신 곳

    4.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신 곳 (눅2:34)

    5.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진 곳(막15:21; 눅23:26) *

    6. 베로니카(Saint Veronica, 성경에는 기록이 없음)가 예수님의 땀을 닦아드린 곳(민6:25)

    7. 예수님이 두 번째 넘어지신 곳(사63:9)

    8.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신 곳(눅23:28)

    9. 예수님 세 번째 넘어지신 곳(마26:39)

    10.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요19:23)

    11.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마27:35; 막15:24; 눅23:33; 요19:18)

    12. 예수님 십자가에서 운명(殞命)하신 곳(마27:50; 막15:37; 눅23:46; 요19:30)

    13. 예수님 십자가에서 내려 염한 곳(마27:59; 막15:46; 눅23:53)

    14. 묻히시고 부활하신 곳(마27:60; 막15:16; 요19:41, 42) * 성묘교회


    고난주간 성경구절

    https://sermons.faithlife.com/sermons/384621





    VI. 부활절(Easter, 復活節)


    부활절(Easter, 復活節):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달걀에 서로의 소망을 담은 정성스러운 그림을 그려 서로 교환하는 의식을 행한다.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된 절기로 역사적인 기원을 분명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리스어나 프랑스어의 호칭은 히브리어 유월절인 페샤(Pes?h)에 기초하고 있고 영어의 이스터(Easter)와 독일어의 오스테른(Ostern)은 튜턴족(族)의 봄 여신인 에오스트레(Eostre)에서 파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유월절에 따라 유대력(曆) 니산월(태양력의 3, 4월) 14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축하하는 교회와 그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는 교회도 있었다. 서기 325년의 니케아공의회에서 부활절 날짜를 춘분(春分) 다음에 오는 최초의 만월(滿月) 직후의 일요일로 정하고, 춘분은 3월 21일, 만월은 19 년법(年法)에 따른다고 정하였다.


    VII. 호산나(Hosanna)


    호산나(Hosanna): 어원이 그리스어로 “구(求)하옵나니, 이제 구원(救援)하소서(Save us)” (시118:25) 라는 짧은 기도문이며, 때로 찬양으로도 쓰인다. 구약 시대에는 초막절에 제단 주위를 돌면서 환호성과 함께 “호산나”를 외쳤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길가에 섰던 군중이 외친 함성중에 나온다. 이는 메시아의 구원을 간구하는 동시에 그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21:9-15; 막11:8,10; 요12:13).


    시 118:25 여호와여 구 하옵나니 이제 구원 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 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Ps118:25 O LORD, save us; O LORD, grant us success.


    VIII.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리 이해


    갈릴리,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 영역과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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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은 남북으로 종으로 4개 지형으로 나누어진다. 서쪽에 평야 지대, 그다음 지역이 서부 산지이고 동쪽으로 요단강을 중심으로 하여 요단 계곡이 형성되어있다. 이 지역을 알라바라고도 한다. 넷째 요단 동쪽의 고원지대가 있다. 이 좁은 땅에 다양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행정 지역은 북쪽에 갈릴리지역이 있고 제일 남쪽에 유대 지역이 있고 중간에 사마리아지역이 있다.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는 갈릴리 지방인데,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고 고난 주간에는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경유하셔서 유대로 오셨다. 예수님 고난 역사는 유대 지방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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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도를 참조하여 지역이동이나 예수님 활동 상황을 이해하기 바란다. 당시 도로는 왕의 대로와 해안도로가 있었고 팔레스타인은 도로가 계곡에 많이 열려있어서 이를 이해하고 산지에는 족장의 도로가 열려 있었다.




    2023 고난주간 말씀으로 살펴본 예수님의 일정




    고난주간 예수님의 1주일 행적

    ● 고난주간 (HOLY WEEK OR PASSION WEEK)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 또는 수난주간이라 하며, 이 주간은 수난절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주간임을 말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 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마21:1-11,막11:1-10, 눅19:28-40, 요12:12-19)이며, 고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주간에는 더욱 뜻 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합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여섯 번째 주일이 됩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주일이 종려주일과 관련되기 이전에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 주일” 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하여 행하는 지원자들의 준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 지원자들은 이 주일에 처음으로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를 배웠고 그것을 비밀로서 간직하였습니다.
    이날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며 또한 예수님의 고난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일요일 – 개선의 날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2. 무리의 반응과 예수님 우심
    * 관련 성경본문 : 눅19:28-40 , 눅19:41-44

    월요일 – 권위의 날

    1.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
    2. 두 번째 성전을 깨끗이 하심

    * 관련 성경본문 : 마21:18-19, 막11:12-14 ,마21:12-17, 눅19:45-48

    화요일 – 변론의 날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 경고의 세 가지 비유 (두 아들, 악한농부, 혼인잔치)
    3. 지도자들과 논쟁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
    5. 유다의 반역

    * 관련 성경본문 : 마21:23-27, 눅20:1-8 , 마21:28-32, 마21:33-46, 마22:1-14 , 마22:41, 눅20:41-44
    마24:25, 막13장, 눅21:5-38 , 마26:14-16, 막14:10-11

    수요일 – 음모의 날

    1.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
    * 관련 성경본문 : 마26:3-5, 막14:1-2, 눅22:1-2

    목요일 – 준비의 날

    1. 유월절 식사
    2. 최후의 성만찬
    3.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중보기도

    * 관련 성경본문 : 마26:17-25, 요13:1-7 , 마26:26-29, 막14:22-25 , 요17장, 요13:31-35


    목요일 저녁 유월절 만찬                       

    유월절 만찬(히 סדך 쎄데르)                        
    유월절 만찬 “쎄데르”는 “순서”라는 뜻

    I. 유월절 만찬의 기본 메뉴

    유월절 만찬 메뉴는 다음과 같다.

    * 무교병(無酵餠)은 히브리어로 ‘마짜’(מצא)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이다.

    * 어린양은 유월 절 날 잡아서 그 피는 문 입구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다.

    * 쓴 나물은 히브리어로 “마로르”(מךןך)로서 이집트에서 쓰디쓴 노예생활을 기념한다.

    * 소스는 히브리어로 “하로셋”(חךוסח)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기타 견과류를 섞어서 만든다.
    단맛이 나는 하로셋은 진흙 색을 띠는데 이는 이집트에서 진흙으로 벽돌 굽기를 한 쓰디쓴 노예생활을 기념한다.

    * 달걀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다.

    *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으로, 탈출하여 자유와 해방을 맞는 기쁨을 상징한다. 

     II. 최후의 만찬 순서

     1. 포도주 첫째 잔 : 전식(前食)

    포도주 첫잔은 전식의 시작이다.
    포도주 첫잔을 따르고 축복 문을 낭송하면서 유월절 만찬을 시작한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 것이다(요 13:4, 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정결의식을 한 다음에 쓴 나물을 소금에 찍어 먹고, 3개의 마짜(무교병)를 포개어서 가운데를 자른 후 접시에 올려놓는다.
    여기까지가 유월절 만찬의 전식이다.

    인도자는 자른 마짜 가운데 제일 큰 것(아람어로 “아피꼬만” 후식이란 뜻)을 숨겨둔다. 나중에 어린아이들이 보물찾기를 하여 찾은 아이에게 상을 주고 마짜 조각은 후식으로 나누어 먹는다.

    2. 포도주 두 번째 잔 : 과거를 기억하며

    포도주 두 번째 잔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기억하는 잔이다.

    만찬에 참석한 가장 어린 사람이 다음 4가지 질문을 한다.

    1) 왜 이 밤에는 마짜(무교병)를 먹는가?

    2) 왜 이 밤에는 쓴 나물을 먹는가?

    3) 왜 이 밤에는 쓴 나물을 소금물에 두 번 찍어서 먹는가?

    4) 왜 이 밤에는 비스듬히 누워서 먹는가?

    인도자는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출애굽 사건을 자세히 일러 주어야 한다.

    두 번째 포도주 잔이 준비되고 10가지 재앙이 낭송될 때 마다 입에 먹음은 포도주를 조금씩 접시에 뱉는다.
    이일이 끝나고 잔에 남아있는 포도주를 마신다.

    3. 포도주 세 번째 잔 : 현재를 축복하면서

    성경 /  마 26:26; 요 13:21, 26; 마 26:27, 28

    포도주 셋째 잔은 현재의 삶을 축복한다.
    예수님은 이때 성만찬의 핵심이 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라 하셨다.
    유월절 마짜를 먹기 위하여 축복 문이 낭송된다.
    예수님은 이때 마짜를 떼어 축복 문을 낭송하시면서 이 떡이 자신의 몸이라고 비유하셨다(마 26:26).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 후 쓴 나물을 마짜 사이에 넣은 “힐렐 샌드위치”를 만들어 하로셋 소스에 찍어서 먹는다.
    이때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서 소스에 찍어서 주신다.
    그리고 유다는 이 만찬장소를 벗어나 나갔을 것이다.(요 13:21, 26).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그 후에 유월절 메인 메뉴인 어린 양을 먹기 위한 축복 문이 낭송되고 식사가 진행된다.

    이 식사가 끝난 후 유대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감추어둔 “아피꼬만”을 찾고 찾은 아이에게는 돈을 상으로 준다. “아피꼬만”을 잘게 나누어 모든 사람이 한 조각씩 먹는다.

    그 다음 드디어 세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실 때가 온 것이다. 이 세 번째 잔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유대인은 이를 “구원의 잔”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 잔을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7, 28).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4. 포도주 네 번째 잔 : 미래를 바라보며

    성경 / 말 4:5; 마 11:10

    유월절 식사가 끝난 후 방문을 열어 놓고 “엘리야의 잔” 으로 불리는 네 번째 잔을 가득 채운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출현할 엘리야를 위한 잔이다(말 4:5, 6).
    예수님은 이 엘리야를 세례 요한이라 하셨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마 11: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유월절 만찬을 마치는 시간은 늦은 시간이 된다. 만찬을 마친 사람들은 저마다 지붕 위(이스라엘의 가옥은 지붕이 스라브 slab 형태로 되어있다.)에 올라가서 감사의 찬송 시편 113-118편(할렐 송)을 부른다. 예루살렘 온 성에서 이렇게 부르기 때문에 성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예수님은 만찬을 마치시고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 가셨다.   

     

    금요일 – 수난의 날

    1. 배반당하고 잡히신 예수님
    2. 공회앞에 서신 예수님
    3.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심
    4. 십자가의 죽으심

    * 관련 성경본문 : 마 26:30 36-56, 막14:26 32-52 ,마26:57-58, 눅22:54-55 ,마27:21-31, 눅23:1-25
    마27:31-50, 막15:20-46, 눅23:26-54

    토요일 – 예비의 날

    1. 로마병정 예수님의 무덤을 지킴
    * 관련 성경본문 : 마27:62-66


    ● 가상칠언이란?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님

     

        성경: 마27:57-60; 막15:42-47; 눅23:50-55; 요19:38-42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였다.:아리마대 요셉은 평소 예수님과 접촉이 있었으나 나타내지 아니하고 지내 왔으나 예수님의 죽음을 당하여 빌라도에게 시체 인도를 요구 하고 허락을 받아서 자기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다. 이 자리에는 지금도 성묘교회(聖廟敎會)가 세워져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몰약(沒藥)과 침향 섞은 것 100근(약35kg)을 가져왔다(요3:1-15; 7:50-52; 19:39). 이 두 사람은 숨어서 예수를 따른 사람인데 장례를 위하여 나섰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서 이 현장에 없었다. 이날 해가 지면 안식일이 된다. 그러면 장례를 치룰 수가 없다.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두고 로마 병사들이 지키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묵상: 1. 숨어서 예수님을 따르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용기 있는 행동을 생각하자!

    .       2.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왜 무덤을 경계 할 수밖에 없었을까? 

     

         7) 고난주간 제7일 토요일

     

          2019년 4월 20일 묵상 자료

     

        오늘의 찬송: 154장(통일 139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

     

         (28) 예수님의 안식

     

        성경: 마27:62-66

     

    무덤을 지킨 경비병들:혹시 있을 시체 도난사건을 예방하기 위하여 무덤에 큰 돌로 입구를 막고 로마 경비병이 무덤을 지켰다. 부활예언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무덤을 3일간 철저히 지켜 달라고 요구한다. 입구 돌을 인봉(印封)하고 군인들이 무덤을 지켰다.

     

    묵상: 1. 안식일에 무덤에 계셨던 예수님을 생각하자!

    .       2. 예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창조섭리와 어떤 점에서 맥을 같이 하는 것일까?

     

         (29) 천지 창조: 일곱째 날; 안식

     

        성경: 창2:1-3

     

    하나님이 육일 간의 창조 역사를 마치시고 이렛날 안식을 취하셨다. 이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쉬시게 하셨다. 이것이 안식일의 제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인간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며 형식적으로 지키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묵상: 1. 종려주일부터 예수님 돌아가신 금요일까지는 6일간이다. 제7일에 안식하셨으니

    창조일정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안식일 쉼은 창조 섭리와 맥을 같이 한다. 예수님의 안식을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자!

     

    . 창2: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Gen2: 1 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completed in all their vast array.

     

    . 창2: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Gen2: 2 By the seventh day God had finished the work he had been doing;

               so on the seventh day he rested from all his work.


    토요일(유월절 6일전) :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드 향유를 부음 – 요12:1은 ‘유월절 6일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이르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 만찬 때, 마리아가 악성피부병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값비싼 나드 향유를 부었다. 이날을 고난주간 직전의 토요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기서 토요일이 유월절 6일전이라면 유월절(무교절 안식일)은 당연히 금요일(목요일 일몰 후부터 금요일 일몰 전까지)이다.

     한편,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날이 유월절 6일전이라고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를 유월절 만찬 직전에 기록했다. 이는 요한복음은 시간 순으로 정확히 기록했으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여인이 행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 직전에 이 여인에 관한 기사를 삽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일이 유월절 만찬 직전에 있었던 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면 고난주간의 날짜들을 가장 정확히 구분해서 기록한 요한복음의 그 구절들을 상대적으로 간과하게 된다.

     한편,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 ‘유월절 예비일’, 곧 ‘유월절 하루 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날(6일전)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예비일)이 5일 차이라고 한다. 이를 요일별로 세어보면 이와 같다. 6일전=토요일, 5일전=주일, 4일전=월요일, 3일전=화요일, 2일전=수요일, 1일전(예비일)=목요일.

     한편, 무교절은 일주일 동안이고, 그 첫날과 마지막날은 안식일이다. 그리고 이 무교절 첫날 안식일이 시작되는 밤을 유월절이라고 부른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유월절 예비일(1일전)이 목요일 낮이라면, 무교절 첫날 안식일은 ‘목요일 일몰 후부터 금요일 일몰 전까지’이고 유월절은 ‘목요일 밤’이다.


    주일

    예수는 아직 아무도 태워본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믿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하며 그를 영접한다. 그러나 예수는 장차 심판으로 무너질 성전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마21:1-11, 요12:12-19)

    I. 주일

    ** 예루살렘에서의 승리의 입성(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주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함께 시작된다.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해온 어린양을 타고 감람산 쪽에서 들어 오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의 교훈을 듣고 도움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 먹었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호산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표시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호위하고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외치었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예수님의 입성으로 진동하였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에 있는 말씀대로 왕으로 그의 도성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군중이 원하는 왕과 예수님의 왕되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군중들은 제한된 한 민족의 왕, 육체의 왕로마의 압제에서 해방과 빵문제를 해결으로 생각하 였으나 예수님의 왕되심은 우주의 왕이요,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주일(유월절 5일전) : 예루살렘 호산나 입성 – 요12:12은 이날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이튿날이라고 한다. 이날을 고난주간 첫날 주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예수님은 이날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이때 수많은 무리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했다. 또한 어떤 헬라인들이 사도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했다(요12:20~22).

     한편,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유월절 5일전(유월절 6일전의 이튿날)’이라고 기록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은 ‘유월절 예비일’이라고 부른다(요19:42). 즉,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호산나 입성을 하신 후 4일 뒤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예루살렘 입성이 주일이라면 그 4일 후는 목요일이다.

     한편, 율법에 의하면 이날은 유월절 양을 골라서 간직해두는 날이다(출12: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로 이 유월절 양을 구별해 선택하는 날에 예루살렘 성전에 호산나 입성을 하신 것이다. 즉, 모든 영혼에게 자신을 모든 영혼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로서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예수님은 이날에 모두에게 그리스도, 곧 유월절 어린 양으로 드러나시도록 호산나 입성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이날은 무교절 안식일의 5일 전이어야 한다(출12:3). 바로 이 점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주일)과 무교절 안식일(금요일)이 5일 차이, 즉 예수님께서 목요일에 십자가에 죽으셔야 함에 대한 성경적 근거이다.


     
    월요일
     
    예수님은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아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 모의하기 시작한다. (마 21:12-13.눅 19:45-46)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 21:18-20,막11:12-14,20,21)

    성밖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을 쉬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었다.

    도중에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을 때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으로 가셨다

    그러나 잎만 무성했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 성전을 정결케 하시다(마 21:12,13,막11:15-17,눅19:45,46)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그 길로 곧 성전에 가시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짐승을 파느라고 소란한 것을 보셨다

    채찍을 들지 않을수 없으셨다. 짐승을 내몰고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쫒았다.

    돈 바꾸는 상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책망을 듣는 자들의 눈길은 회개의 빛대신에 시기와 원망의 눈으로 가득 채워져

    “어디 두고 보자식의 노기였다

    예수님은 해가 저물어 전과 같이 쉬시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가셨다.

    월요일(유월절 4일전)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2차 성전 정화 – 마21:17~18, 막11:12은 이날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호산나 입성을 하신 이튿날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날 성전으로 가시는 길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막11:12~14),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을 깨끗케 하셨다(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화,수요일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서기관과 대제사장,바리새인들의 간교한 질문들에 답변하시며 성전의 파괴와 대환란,종말의 징조들,제자들의 박해받을 일과 재림등을 예언하시며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신다. 가룟유다가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한다. (마26:1-5, 막14:1-11)


    화요일

    *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하시다 (막 11:20)

    그 이튿날 제자들은 성으로 들어오는 도중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어제 예수님께로 저주를 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었다.

    성급한 베드로는 놀라운 얼굴로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면

    그 말하는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믿음의 교훈을 해 주시었다

    * 성전 안에서 힐란을 받으시다(마21:23-27,막 11:27-33,눅20:1-8)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어제의 그 성전으로 가시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힐란한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시기에 찬 질문이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에 찬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여러가지 비유로 저들을 깨우치려 말씀하셨다.

    말 안 듣는 맏아들의 비유(마 21:28-32),

    사악한 농부의 비유(마 21:33-41,마12:1-9,눅20:9-16),

    왕자의 잔치를 거절한 악한 사람들의 소(행22:1-14)등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불가하니이까”

    “부활때 일곱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로 답변하시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수님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마24,막13장, 눅21장)과

    주의 재림의 때에 되어질 일들(마25)을 교훈하여 주시었다.

    화요일(유월절 3일전) : 마른 무화과나무의 교훈, 많은 논쟁과 서기관들에 대한 책망, 종말론 설교, 마지막 수난예고 - 막11:19~20은 이날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이라고 한다. 이날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시비를 걸었고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 ‘천국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마21:23~22:14, 막11:27~12:12, 눅20:1~19). 또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사이에 ‘세금 납부, 부활, 율법의 첫째 계명, 메시야의 신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마22:15~46, 막12:13~37, 눅20:20~44). 이 논쟁에 이어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고 한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칭찬하셨다(마23:1~39, 막12:38~44, 눅20:45~21:4).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와 올리브 산으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종말론 설교와 비유들(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을 말씀하셨다(마24:1~25:46, 막13:1~37, 눅21:5~36).

     그리고 예수님은 이 종말론 설교와 비유들을 말씀하신 후 마지막 수난예고를 하셨는데(마26:1), 이때 예수님은 ‘이틀 후 유월절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마26:2). 이 화요일 낮은 분명히 ‘유월절 3일전’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겐 일몰이 되면 새 날이 시작되기 때문에 화요일 저녁은 ‘유월절 2일전’이 된다. 즉,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신 이 ‘화요일 밤’은 ‘유월절 밤(목요일 밤)의 이틀 전’이었다.



    수요일

    * 유다가 배반하다(마26:14-16,막14:41-45,눅22:1-6,요18:1-11)

    예수님은 아직 성밖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실 때

    한편 성안 가야바 대제사장 아문에서는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중 하나인 가룟유다는 제자들 사애에서 빠져 나와 대제사장의 회의장으로 달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협상한다

    제사장들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은 30을 달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노리고 있게 된다.

    수요일(유월절 2일전) : 성만찬과 세족식, 예수님의 새 계명과 성령님에 대한 약속,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겟세마네의 기도와 체포되심,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 베드로의 부인 – 이날 밤은 율법대로 따지면 ‘유월절 만찬을 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은 바로 이날 저녁에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는 당시 합법적인 관례였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 주민들은 유월절 밤에 유월절 만찬을 했고, 예루살렘 주민이 아닌 순례객들은 주민들의 집을 빌려 그 하루 전날에 유월절 만찬을 했다. 이는 유월절 양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잡아야 하는데 하루 동안 이 일을 다 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예루살렘 주민과 순례객으로 나누어서 이틀 동안 유월절 양을 잡고 만찬을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하루 전날에 당시 관례대로 율법에 어긋남 없이, 즉 합법적으로 유월절 만찬을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이날을 요13:1은 ‘유월절 명절 전’이라고 했고, 눅22:7은 ‘(유대인들의 날짜계산법으로는 유월절 만찬의 하루 전날에 속하는) 무교절의 유월절 양을 잡아야만 하는 날’이라고 했다. 이 두 복음서의 기록은 정확하다. 그러나 마26:17은 ‘무교절의 첫째 날’이라고 했고, 막14:12은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째 날’이라고 했다. 이 두 복음서의 구절들은 구약 율법대로 따지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월절 관례대로 유월절 만찬을 하셔야만 하는 날에 만찬을 하셨다’라는 의미로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즉,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명절 일정 중 만찬을 하셔야만 하는 날’을 간단히 ‘명절 일정의 첫날’, 곧 ‘무교절의 첫째 날’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누가복음(무교절 하루 전날인 유월절 양을 잡는 날)과 마태복음(명절 일정의 첫날)의 절충으로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째 날’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후 사복음서는 모두 이 다음날을 다시 본래대로 정확하게 ‘유월절 예비일(1일전)’이라고 부른다(마27:62, 막15:42, 눅23:54, 요19:42).

     예수님은 이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요13:1~20), 가룟 유다의 배신과(마26:20~25, 막14:17~21, 눅22:21~23, 요13:21~30)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셨고(마26:30~35, 막14:26~31, 눅22:31~34, 요13:36~38), ‘천국 처소, 기도 응답,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세 가지 약속과 ‘참 포도나무의 비유’ 등을 말씀하시고(요14~16장), 하나님께 대제사장이자 그리스도로서 기도하셨다(요17장). 한편, 이때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다퉜다(눅22:24~30).

     이어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고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이곳에서 체포되셨다(마26:36~56, 막14:32~52, 눅22:39~53, 요18:1~11). 그리고 밤새도록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연이어 심문과 폭행, 희롱을 당하셨다(마26:57~68, 막14:53~65, 눅22:63~71, 요18:12~24). 이때 베드로가 새벽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마26:69~75, 막14:66~72, 눅22:54~62, 요18:25~27).


     
    목요일 

    유월절 저녁이다. 예수는 어느 가정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다. 서로 누가 터 크냐는 논쟁을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서로 섬겨야 할 것을 친히 보여주셨고 배반자 유다를 지적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번 예수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잔을 받으신다. 유다가 무리와 함께 올라와 예수를 체포, 대제사장에게 넘긴다. (마26:47-56, 요18:3-13)

    목요일

    * 제자들의 발의 씻기다(요13:1-17)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을 제자들이 미리 준비한 성내의 한 여성도의 집 이층 다락방으로 가시 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누룩없는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셧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시어 그 물로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기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베드로의 차례가 왔을때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답하시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겸손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었다.

    * 반역자를 지목하시다(마26:21-25,막14:18-21,눅22:21-23,요13:21-30)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심히 민망한 표정으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누구오니이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며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셨다

    이 말을 들은 가룟유다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가 버렸다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나간 것이다.

    이제 사단은 완전히 유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 마지막 만찬이 베풀어지다(마26:26-29,막14:22-25,눅22:19)

    이와같은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저희 가운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다 이것을 마시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첫번 성만찬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라고 제자들 을 위로하시었다.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마26:36-46,막14:32-42,눅22:39-46,요18:1)

    모든 말씀을 마치신 에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셨다

    이 산 서쪽 기슭 아래에는 겟세마네라는 동산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최후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돌던질만한 거리로 나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와 같은 땀이 떨어졌다.

    목요일(유월절 예비일) : 빌라도의 재판, 십자가 죽음, 장례 – 막15:42은 이날이 ‘(유월절)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라고 했고, 눅23:54은 ‘(유월절) 예비일’이라고 했고, 요19:42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예비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27:62은 이날의 다음날을 ‘(유월절)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목요일 밤이 유월절이면, ‘수요일 일몰 후부터 목요일 일몰 전까지’가 ‘유월절 예비일’이다. 즉, 목요일 밤이 유월절이면, 목요일 낮은 유월절 예비일이다.

     예수님은 이날 새벽 6시 무렵 빌라도의 관저로 끌려가 빌라도의 재판과 헤롯의 심문을 받으시고 심한 채찍질을 당하셨다(마27:1~2, 마27:11~31, 막15:1~20, 눅23:1~25, 요18:28~19:16). 한편, 가룟 유다가 이런 일들을 보고 자살했다(마27:3~10).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길에 로마군이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다(마27:32, 막15:21, 눅23:26). 예수님께서 울며 뒤따르는 여인들에게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다(눅23:28).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예수님께서 진통제를 거절하셨다(마27:34, 막15:23).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발가벗겨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눠 갖고 제비뽑았다(마27:35, 막15:24, 요19:23~24). 대제사장들과 군병들과 구경하는 모든 무리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동한 죄수 하나가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받았다(눅23:39~43).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셨다(요19:26~27).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죽으셨다(마27:32~56, 막15:21~41, 눅23:26~49, 요19:17~37). 이때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마27:45, 막15:33, 눅23:44). 예수님이 죽으실 때 지성소의 휘장(가림막)이 둘로 찢어졌고, 지진이 일어나며 많은 성도들이 무덤에서 깨어났다(마27:51~52, 막15:38, 눅23:45). 이 일들을 보며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마27:54, 막15:39, 눅23:47). 예수님의 몸을 창으로 찌르자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요19:34).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일몰 전에 서둘러 아리마대 요셉이 소유한 새 무덤에 장사했다(마27:57~66, 막15:42~47, 눅23:50~56, 요19:38~42).


     
    금요일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유대인들의 요구로 바라바는 놓임을 받고 대신 예수는 사형선고를 받아 그날로 십자가에 달려 장사되신다. (마27:1-2, 요18:28-38)

    금요일

    * 예수님이 잡히시다.(마26:4,7,56,막14:43-52,눅22:47-53,요18:3-13)

    예수님은 기도중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때가 온 것을 환기시키고 있을때

    무리들은 몽치와 검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서더니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추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한 군호의 간사한 입맞춤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악당들에게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 심문을 받으시다(마26:57,27:26,30,막14:53,15:15,눅22:54,23:24,요18:13,19:16)

    예수님을 잡아 결박한 유대인의 하속들은 먼저 예수님을 안나스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고 갔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있을 때

    저들은 분을 내며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나 재판권이 없는 저들은 당시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저들은 여러 말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으나 역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저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고 석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저들의 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소서

    저들은 너무도 무지하

    금요일, 토요일 : 무덤에 장사되어 계심 – 금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큰 안식일이고, 토요일은 매주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다. 이렇게 안식일이 이틀간이었음을 사복음서의 고난주간 날짜를 비교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마태복음은 마28:1에서 ‘안식일들이 다하고 주간의 첫날이 밝아오고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안식일들을 분명하게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 성경들은 이를 단수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안식일을 단수로 기록한 구절도 있다. 막16:1은 ‘안식일이 지나자, 여인들이 향품들을 사두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막16:9는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셨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마28:1과 조화롭게 해석해야 한다. 즉, 마가복음의 기록들은 안식일들이 하루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몰이 되어 토요일 안식일이 끝나자, 여인들이 바로 그 저녁에 향품을 사두었다’, ‘예수님께서 주일 새벽, 즉 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 바로 그 새벽에 살아나셨다’는 의미이다.
     
    주일

    새벽, 부활하시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또 갈릴리 바다 등에서 여러 제자에게 나타나 예언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이시고 증인의 사명을 주신후 승천하신다. (마28:1-7, 요22:11-17)

    주일 : 예수님의 부활 – 예수님은 목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3일 후인 주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 이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세 낮과 세 밤 동안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땅속에 세 낮과 세 밤 동안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마12:40의 말씀에 부합한다. 마12:40의 헬라어 본문은 이처럼 ‘세 낮과 세 밤’이라고 한다.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째 날?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날이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째 날’이란 마가복음의 구절은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율법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유월절 양은 무교절 첫째 날의 전날에 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날이 ‘유월절 양을 잡는 날(= 본래 만찬일의 하루 전날)’, ‘유월절 명절 전’이었다고 정확히 기록했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신 날을 각각 ‘무교절의 첫째 날’,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째 날’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그 다음날은 다시 ‘(유월절 양을 잡는) 유월절의 예비일’이라고 정확히 기록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이 모든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예비일에 죽으셨지만 그 전날 밤에 합법적으로 유월절 만찬을 하셨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명절 일정 중 첫째 날에 만찬을 하셨다’고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유월절 예비일에 죽으셨다’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정확한 기록들은 무시한다. 그래서 사복음서 간에 예수님의 죽으신 날에 대한 불일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월절 양을 잡는 + 무교절의 첫째 날’이란 표현은 ‘예수님께서 본래 만찬일의 하루 전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속한 밤에 만찬을 하셨다’라는 의미와 ‘당시의 관례대로 행한 이것이 본래는 무교절 명절의 첫날에 행해야할 행사’라는 의미로 이렇게 기록한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 ‘유월절의 예비일’이었다고 정확히 기록하면서도 만찬하신 날에 대해서는 이런 부정확한 표현을 쓴 것을 이처럼 조화롭게 읽고 해석하는 것이 상식적인 태도이다. 그럼에도 두 복음서의 정확한 기록들은 도리어 무시하고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째 날’이란 한 구절만 떼어놓고서 사복음서 간에 고난주간 날짜에 대한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고 완악한 태도이다.

     성경은 성경이 무오한 성령님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증거한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그 무오함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무오하게 해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혹 모순되게, 혹 도덕없이, 혹 완악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일진대, 인생에게 그분의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읽는 이것이 곧 지혜이다.



    고난주간 묵상


    주일    묵상할 말씀 : 스가랴 9:9

    1) 사건 : 예루살렘 성전의 입성(누가 19:28-44)
    2) 기도 :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 주님 앞에 모든 죄 된것을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됨의 권세를 지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옛옷을 벗어서 주님의 가시는 길바닥에 펴게 하시고 새옷으로 입히셔서 정결한 삶으로 인도하소서.-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3) 기도제목 : 고난주간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함께 하지 못하는 가족을 위하여 

    월요일   묵상할 말씀 : 고후 4:6-18

    1) 사건 : 무화과 나무의 저주(마가 11:12-14)  성전청결(마가 11:15-29)
    2) 기도 : 세상이 주는 행복은 유한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행복은 영원함을 믿습니다.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제하여 주시고 나의 질그릇 안에 보물이신 주님을 품게 하시여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게 하소서
    3) 기도제목 : 나로인한 십자가임을 자복, 자신의 성결하지 못한 부분, 십자가위에 세워진 가정이 되기 위해 

    화요일    묵상할 말씀 : 창 18:25

    1) 사건 :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함(마태 23:37-39)  가롯유다의 흥정(마가 14:10-11)
    2) 기도 : 사람의 도덕은 땅에 떨어져 살인, 마약, 인신매매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살아 갑니다.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를 생각하면서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기도제목 :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회개, 무너진 가치관들의 회복, 이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수요일    묵상할 말씀 : 요한 21:3-8

    1) 사건 : 예수님에 대한 음모(누가 22:1-6)  한 여자의 준비 (마가 14:1-11)
    2) 기도 : 하나님의 교회에서 참된 복음이 선포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과 몸으로 위로하게 하소서.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교회에서 체험하게 하 소서
    3) 기도제목 :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회개,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의 용기를 간구
      바른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교회를 위하여 

    목요일    묵상할 말씀 : 마 7:7-8

    1) 사건 : 성만찬과 기도(누가 22:7-53)  겟세마네의 기도(마가 14:32-46)
    2) 기도 : 내 이웃의 외침이 내귀에 생생합니다. 나태함과 게으른 모습에서 일어나 이웃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하소서.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소서.
    3) 기도제목: 순종하지 못했던 삶을 회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항상 기억하면서 살기 위하여,  나누는 우리의 삶을 위하여 

    금요일    묵상할 말씀 : 이사야 53:2-12

    1) 사건 : 빌라도의 심문(누가 23:1-5)  십자가의 죽음(마가 15:16-41)
    2) 기도 :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믿나니 새롭게 거듭나는 영혼들을 하늘나라의 생명록에 기록하소서. 구원의 구조선이 되어 뭇영혼들에게 찾아가는 뜨거운 심령을 주옵소서.
    3) 기도제목 : 부인하는 나의 죄를 회개, 믿지 아니하는 영혼(구원의 대상)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감사 

    토요일    묵상할 말씀 : 베드로 전서 2:19-24

    1) 사건 : 무덤에 계심(마가 15:42-47)
    2) 기도 : 아무죄도 없으신 주님은 억울하게 운명하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구원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믿음을 실족한 영혼들은 주님의 고통이 헛되이지 않도록 기다리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3) 기도제목 : 남아 있는 나의 욕심을 회개, 죽음의 상태에서 부활의 소망으로 살기 위해




    부활주일 묵상

    오늘의 찬송: 165장(통일 155장; 주님께 영광)

    1. 살아나신 예수님

    성경 : 마 28:1-10; 막 16:1-8; 눅 24:1, 2; 요 20:1-10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은 예언하신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날은 유대력으로 초실절이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안식일 다음날이다. 예수님은 초실절에 부활하셨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 부활하신 소식을 천사가 전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이들에게 보이셨다. 공관복음에서 이 부활의 새벽 상황을 전하는 것과 요한이 전하는 것은 다소 상이하다. 이를 재구성해 보면 무덤에 처음 간 것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알패오의 아내), 예수의 이모 살로메이며 그들이 빈 무덤을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보고했고 다른 여인들이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와서 빈 무덤을 확인한 것 같다.

     

    묵상: 1. 초실절에 부활하신 의미를 생각해보자!

    .       2.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

    .       3. 베드로와 요한은 왜 빈 무덤을 확인 하러 갔을까?

     


    ▲ 부활의 아침

     

          (2)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신 예수님

     

        성경: 막16:9-11; 요20:11-18

     

    부활하신 첫 새벽의 무덤을 방문한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 사람들은 4복음서에서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 단락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기사는 요한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의 보는 입장, 기록하는 입장에 따라서 달라졌을 것으로 본다. 이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이 무덤을 찾았고 천사가 예수님 부활하신 소식을 이들에게 전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고 되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는 여인들(마28:9)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있다. 정황으로 보면 막달라 마리아 뿐 아니라 이들 여인에게 보이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하였다. 예수님 생전에 4번에 걸쳐 예언해 주셨는데 제대로 믿지 않았던 것 같다.

     

    묵상: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누구였을까?

    .       2.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왜 반신반의 했을까?

     

         (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성경: 마28:16-20; 막16:14-18; 눅24:36-49; 요20:19-23; 행1:6-8

     

    예수님은 부활하신 새벽에 여인들에게 보이셨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증을 보여주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요20:21에서“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명령하신다. 이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예수 죽으신 후 사실 제자들은 지리멸렬이었다. 모두 흩어져서 자기 갈 길로 가고 당혹감과 자괴감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이 식사자리에 나타나심은 더 확신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선교사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지 않았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명하셨다. 모든 민족을 가르쳐 제자를 삼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을 가르치며 나아가 지켜 행하게 하라는 분부이시었다.

     

    묵상: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무엇인가?

    .       2. 예수님 오신 후에는 부활의 승리를 기념하는 주일을 지킨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니 까 주일은 창조의 첫날이 된다. 첫날은 하나님이 빛을 만드신 날이다. 흑암의 세계 가 물러나고 광명의 날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부활은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것이 다. 제자들은 빛에 대해 증언할 책임이 있지 않을까?

             3. 나 자신이 빛에 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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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미신이라고 하는데 진짜인가요?"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40일간의 시간을 말합니다.
    지난 2월 26일은 사순절 첫째주일이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사순절에 대한 안내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절제하는 삶을 살자고 권면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사순절은 미신적인 것이니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사순절을 지키지 말 것을 결의한 교단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순절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인간적인 기념일이고,
    둘째,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인 행사이기에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했으며,
    셋째, 말씀 중심의 신앙을 훼손할 우려가 크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날짜를 확정하면서 함께 정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인 니케아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 이전부터 이미 많은 교회가 사순절을 의미 있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절기로 지킵니다.

    그러면 뭐가 맞는 것일까요?

    먼저, 성경에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잘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이단들은 토요일 안식일에 예배하면서 일요일에 예배하는 교회들을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 내용의 의미와 그 흐름을 복음적으로 이해한다면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하는 것은 성경적이고 합당한 일입니다.

    사순절 기간은 역사적으로 세례지원자들이 준비하는 기간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 새벽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준비하는 지원자들이 사순절에 예수님을 묵상하고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함께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차 교회들은 세례준비기간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명을 준비하며 금식했던 40일에 맞추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성경에서 지정한 진리의 문제는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지킬 수도 있고 안 지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믿음으로 지키면 신앙의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자인 칼뱅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인 행사이기에 사순절을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이 사순절을 미신적이라고 한 것은, 과도한 금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과 행위를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칼뱅은 사순절 자체가 미신적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순절을 대하고 지키는 사람들의 믿음과 행위가 미신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미신적인 믿음과 행위를 막기 위해 사순절을 반대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죠.
    그러나 올바른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미신적으로 숭배하거나 부적처럼 사용한다면 십자가는 얼마든지 미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다닌 대학교 채플 예배 때, 사물놀이팀이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떤 학생은 일어나서 '무당이 굿할 때 쓰는 악기'를 어떻게 예배 때 연주할 수 있느냐면서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국악찬양도 많아지고 국악기로 찬양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사물놀이 악기가 미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악기를 다루는 사람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죠.
    사물놀이 악기도 올바른 믿음으로 사용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도구가 됩니다.
    반대로 미신적인 태도로 대하면 십자가마저도 미신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반대하는 분들은,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력을 준수하는 것이 말씀중심의 신앙을 훼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교회력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1년을 묵상하도록 해놓은 은혜의 도구입니다.

    예배신학자인 로버트 웨버는 그의 책 '예배의 역사와 신학'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력 전체를 폐지함으로써 득과 실을 동시에 맛보았다'고 말합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본질을 지나서 인간적이고 비성경적인 날들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비성경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날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그 안에 담겨 있던 오래 된 교회력의 소중한 유산들까지도 제거하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 뿐만 아니라 부활절이나, 성탄절도 여러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들은 신학자들이 고민할 내용들입니다.
    사순절을 미신이라고 생각해서 금하는 교단의 주장도 한편으로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단에 속한 교회들도 사순절을 건강하게 지키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구와 논의는 신학자들이 하고, '어떤 신학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과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은 교단이 결정하고, 교회는 그 결정을 따릅니다.
    그렇기에 일반 성도님들이나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분들은, 신학적 논쟁의 내용에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속한 교회 목회자의 지도를 잘 받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가 속한 교단의 신학을 이해하시면 더 좋습니다.
    그러지 않고 인터넷이나 유튜브의 내용들을 분별없이 접하면 신앙의 혼란을 가져올 뿐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본인 요시다 코죠 목사, 일제 강제동원 배상의 해법 밝혀

    정부가 일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의 해법으로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한 가운데, 40년 가까이 한국에서 목회하며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참회와 배상을 촉구해 온 요시다 코조 목사(서울일본인교회)가 "한국의 아픈 역사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7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피해의 배상만으로 범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며, "나는 일본인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사죄가 되지 않았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설령 가해자가 배상금을 지불해도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사죄는 성립하지 않죠. 가해자의 참회도 배상도 없는 문제 해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시다 목사는 진정한 화해를 위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들의 인정, 참회, 배상이라는 절차를 거칠 것'을 제안했다. "과거사를 아는 일본인 대부분은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라고 말한 그는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절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용서 역시 회개를 전제로 한다"는 목회자로서의 소신을 밝히며,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던 것은 그 만큼 회개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겠다"며, "양국의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일본 학생들의 한국 스터디 투어를 도와 온 요시다 목사는 참회를 이끌어 내기 위한 장기적 방법으로 '양국 과거사에 대한 배움의 기회 제공'을 꼽았다.
    '사실을 몰라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많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평소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것처럼 일본교회는 참회운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는 "이번 한국 정부의 결정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범죄 인식을 어렵게 하는 도구로 오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전하며, 한국교회들의 기도와 관심을 요청했다.





    고난주간(苦難週間)

    고난 주간에 임하는 성도의 자세
    •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빌 4:14)
    • 자신의 죄를 깨달음(욥 36:8-9)
    • 겸손하게 회개함(벧전 5:5)
    • 자신의 고난을 인내함(살전 3:3)
    • 절제하는 생활을 함(고전 9:25)
    • 말씀을 깊이 묵상함(시 1:1-2)
    • 경건한 생활이 되도록 힘씀(딤전 4:7)
    성찬의 의미
    • 예수님과의 일치된 관계를 나타냄(누가복음 24:30)
    •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짐(누가복음 22:19-20)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함(고린도전서 11:26)
    •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함(마태복음 26:29)



    주께서 3년간의 공생애 끝에 이제 스스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시고 군중들의 환호속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식 선언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로부터 주님이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부활 주일 직전까지를 절기로 삼아 주의 수난의 노고와 은혜를 경건히 기리는 한 주간의 절기가 바로 고난 주간이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 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요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막히게 전개 되었다. 이에 성도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 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각각 기억하여 한 주간을 내내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고난 주간'(Passion week) 또는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등으로 불리는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 속에 언급되어 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대주간이라고 불렀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 주간의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한다. 이러한 '대주간'이라는 명치은 12세기에 이미 보편화되어 각종 기독교 전례 문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했다. 그리하여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법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Love)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끝없는 사랑으로 죄를 지은 인간 자체에게는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까지 주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이셨던 것이다.
     
      한편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the Cross)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고로 우리는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the Crucifixion)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창 3:15사 53:1-12).
     
    1.  시     기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에 해당하는 고난 주간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종려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 주일 전까지의 기간 즉, 주일에서부터 토요일까지를 말하다.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심을 기리는 사순절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장사당하신, 성자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절정기인 고난 주간내에는 종려 주일, 세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희랍정교에서는 종려 주일 다음날인 월요일부터를 고난 주간으로 지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서로마 교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종려 주일부터를 고난 주간에 포함시켜 기념하고 있다.
     
    2.  유     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있을 성만찬과 세례식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으로 교회 성립 초기부터 행해졌었다. 고난 주간은 이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롬 6:3-5, 고전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그 밖에 고난 주간과 관련된 오래된 자료로는 에게리아(Egeria)가 집필한 순례집이 있다. 이는 385년 경의 자료로 다양한 절기와 그 전례의식을 수록하고 있으며, 수난절 기간에 포함된 절기로서의 고난 주간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고난 주간을 대주간(大主間)이란 명칭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동로마 교회의 하나임 에루살렘 교회에서는 부활 주일 전인 고난 주간 기간에 종려 주일 행진과 같은 엄숙한 경축 행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이 집필될 당시인 4세기까지 어러한 동로마 교회의 풍습은 서로마 교회에는 생소한 것이었으나, 5세기 이후에 서방 교회에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고난 주간의 금식은 동,서방 교회에서 모두 행해졌는데, 고난 주간의 금식은 다른 절기 때의 금식보다 더 엄격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사순절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듯이 금식 기간과 정도는 교회마다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금식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4일이나 3일 혹은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 2일만 금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밖에도 고난 주간에는 철야 기도회, 세족식과 성만찬등 많은 기념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또한 인간적 유희를 목적으로 한 모든 오락이 금지되었다.
     
      중세에 있어 고난 주간의 금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들은 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이러한 의식들은 형식화되어 그 본래의 의미에 대해서는 소홀해졌다. 이러한 연유로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 후 많은 형식적인 종교 행사들이 폐지되었는데, 이때 고난 주간의 많은 행사들도 축소, 혹은 폐지되었다. 이는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 몸담고 있을 당시 깨달은 교회 의식과 관련된 많은 악영향을 근절하기 위한 조처의 하나였다. 이러한 의식의 축소화, 또는 폐지로 인해 루터가 살았던 비텐베르그에서는 일찍부터 고난 주간과 관련된 풍습이 사라졌었다. 그러나 예식에 대한 단호한 폐지와 축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 후 20여년간은 고난 주간 행사가 통일되지 않은 여러 형태로 계속 지켜졌다.
     
      한편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난 주간 절기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고난 주간 의식은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 단지 몇몇 교파에서 성 금요일에 특별 예배 등을 드리고 있을 뿐이다.
     
    3.  고난주간 각 요일의 특기 사항
     
    (1) 종려 주일(Paim Sunday)
     
    (2) 월요일부터 수요일
      고난 주간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은 특별 집회의 형식으로 모였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고난 주간 화요일에 철야 집회를 갖는데, 이때 주교는 감람산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마 24:4이하의 성경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요일에는 마 26:14-16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부분의 말씀이 낭독되었으며, 이때 회중은 큰소리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앞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엄숙한 미사를 드렸다.
     
    (3)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의 Maundy는 율법을 뜻하는 라틴어 Mandatum에서 말로, 수난을 당하기 전 목요일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심을 기념하는 데서 유래하였다(요 13:24). 또한 세족 목요일은 '성 목요일'(Holy Thursday) 또는 '녹 목요일'(Green Thursday)이라고도 불린다. 녹 목요일이란 명칭은 독일에서 불리워지는 것인데 그 유래가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 목요일에 병마를 막기 위해 먹었던 녹색의 약초나 이날 미사때 사용되었던 파라먼트(parament)의 색을 지칭하던 데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날에는 과거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성만찬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처럼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행하는 것은 회중이 회개한 자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로, 이 관습 역시 동로마 교회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또한 이날 밤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며 다음날 있게 될 십자가 지심을 대비했던 것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밖에도 중세 교회에서는 이날 성유(聖油)의 축성의식 등이 거행되었다.
     
    (4) 성 금요일(Holy Friday)
      성 금요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인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을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에서 이날을 Good Friday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날은 역시 모든 성도들에게 슬픈 날임에 틀림없다. 즉 성 금요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까지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또 이날에는 가장 엄격한 금식과 철야가 행하여 졌으며, 교회의 집회도 가능한 한 제한 되었다.
      3세기 중엽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 금식이 행해졌고, 7세기 스페인의 일부 지방에서는 성 금요일에 아예 교회 문을 열지 않았으며, 성도들은 이날 철저히 기도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이날 성경 낭독, 중보 기도, 십자가의 베일 벗기기, 찬양 등의 내용으로 간소화된 예배 형식의 애도 예식을 거행했다. 또한 중세에는 이날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5) 성 토요일(Holy Saturday)
      대 안식일, 즉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머무셨던 동안인 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보다도 더 엄숙한 날로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경건한 분위기 아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기념되었다. 따라서 이날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엄격한 금식의 날이기도 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날 새로운 불, 부활절 촛불, 물 등을 성별하는 의식과 참회와 애도의 미사가 드려졌다.
     
    4.  풍     습
     
    고난 주간은 사순절 기간 중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과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머물러 계신 기간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엄숙한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에는 금식과 기도가 행해졌으며, 일정한 규울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제하여 난잡한 행동과 현란한 옷차림을 삼가하였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세속적인 연극, 음악회 등의 공개적인 오락 행사들이 금지되었고, 공공 기관도 휴무하였다. 또한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억하며 죄인들을 방면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노예들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대우를 받았으며 특별히 해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종교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고난 주간 행사를 가졌으며 풍습이 행해졌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고난 주간과 관련한 행사들이 폐지 또는 간소화되면서 그 풍습들도 많이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기로 한다.
     
    (1) 고난 주간 철야제
      고난 주간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는 특별 예배의 한 형태로 철야제가 거행됐다. 이때는 제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화(史話)등이 낭독되었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한편 바로 자신이 죄인임을 큰소리로 자복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러한 의식은 희랍 정교회에서 아직까지도  고난 주간의 주요 행사로 행해지고 있다.
     
    (2) 성만찬 의식
      성만찬 의식 때 사용되는 떡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의식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성도의 깨끗케 됨을 의미한다. 이에 교회에서는 거룩함을 입은 자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을 예비하는 성 목요일에 성찬식을 행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심을 기념하여 성 목요일에 성찬식을 행하는 풍습은 동로마 교회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5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3) 세족 의식
      이 풍습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동로마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이 의식은 봉사와 화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성당과 대수도원 교회에서 먼저 행하여졌으나, 후에 로마 교황 피우스12세에 의해 모든 교회에 추천되어졌다. 로마 교회의 세족의식은 미사 집행자가 그에게로 인도된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상징하는 12명의 발을 씻기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중세 교회처럼 엄숙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세족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섬기는 종으로 오심을 기념하는 교회가 많이 있다.
     
    5.  관련 성경 자료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묘사
     
    (2)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
    •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함(롬 5:1-21)
    • 죄사함으로 새 피조물이 되게 함(마 26:28)
    • 구속받은 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벧전 3:18)
    •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함(빌 3:10)
    • 완전한 상태에서 영생하게 함(계 21:3,4)
     
    (3)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
    • 출생부터 죽음까지 전생애의 수난(마 27:46)
    • 영육간의 전인적 수난(히 5:7)
    • 사단의 시험으로 인한 수난(마 4:1-3)
    • 신적 계획에 의한 수난(창 3:19)
    • 신적 진노에 의한 수난(롬 5:8)
    • 수치와 저주로 인한 수난(갈 3:13)
    • 인간을 대신하여 받은 수난(롬 4:25)
     
    (4)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5) 고난 주간 동안의 예수의 행적
     
    (6) 성찬의 의미
    • 예수님과의 일치된 관계를 나타냄(누가복음 24:30)
    •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짐(누가복음 22:19-20)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함(고린도전서 11:26)
    •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함(마태복음 26:29)
     
    (7)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의 특징
    • 마음의 짐을 토로하심(마 26:38)
    •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심(마 26:39)
    •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으심(마 26:39)
    • 확신을 위해 거듭 기도하심(마 26:39-44)
    •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구하심(마 26:42)
    • 자신을 낮추며 겸손히 구하심(막 14:35)
    •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심(막 14:36)
    • 혼자 외로이 기도하심(눅 22:41)
    • 힘써 간절히 기도하심(눅 22:44)
    • 하나님께 기도 응답받으심(눅 22:43)
     
    (8) 예수의 재판 순서
    • 안나스의 예비 심문(요 18:12-14)
    •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비공식 재판(마 26:57-68)
    •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공식 재판(마 27:1,2)
    • 빌라도의 1차 심문(마 27:11-14)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눅 23:8-12)
    • 빌라도의 2차 심문 및 최종 판결(마 27:15-26)
     
    (9) 그리스도의 가상 칠언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다 이루었다(요 19:30)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10)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후의 사건들
     
    (11)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 대속의 죽으심(롬 4:25)
    • 옛사람을 멸함(롬 6:6)
    • 사단의 권세를 이기심(히 2:14,15)
    •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은 죽음(갈 6:14)
    •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만든 죽음(히 10:19,20)
    • 많은 생명을 낳기 위한 죽음(요 12:24,25)
    • 성도들의 옛사람을 못박은 죽음(갈 2:20)
     
    (12)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
    •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마 1:21)
    •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기 위함(마 3:11,12)
    •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함(마 5:17)
    •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마 9:10-13)
    •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마 11:27)
    •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과 심판을 알리시기 위함(마 12:18)
    •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마 16:18)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마 20:28)
    • 새 언약을 세우시기 위함(마 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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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2084772 2024-02-04T12:26:28Z 2024-02-11T10:39:19Z 2024년 사순절 출애굽기 묵상 기도(2월 14일 재의 수요일)


    2024년 사순절 119 기도회 

    2월 14일(수) 재의 수요일

    성경 : 출애굽기 1장
    주제 : 십브라와 부아의 신앙을 본받자!











    2024년 사순절 출애굽기 묵상 기도(2월 14일 재의 수요일)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신념이다.
    누구든지 무엇을 주장하려면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해야 하고 누구든지 무슨 이의를 제기하려면 성경에 근거해서 제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 목회 전반, 목사의 설교나 지교회 혹은 전체 교회의 모든 활동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우리는 성경을 제쳐놓고 무슨 활동을 계획하거나 수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묵상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성경 명칭은 본서의 맨 처음의 두 단어인 웨엘레 쉐모스 (“그리고 이것들이 ~의 이름들이다”)이다.
    출애굽기(Exodus)는 헬라어 70인역에 따른 명칭이다.
    본서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은 그것보다 먼저 기록된 책인 창세기와 한 묶음인 것을 암시한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한 묶음이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쓴 책이다.
    그것은 정통 유대교가 증거하는 바요 신약성경이 확증하는 바이다.

    출애굽기의 주요 내용은 애굽에 거주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사건과,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건립한 일들에 관한 것이다.

    1-19장 /  출애굽 사건
    20-24장 / 율법을 받은 것
    25-40장 /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와 그 지시대로 건립한 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가 온 천하에 유일한 참 신(神)이심과 그의 구속(救贖)의 사랑과 능력을 증거하셨고, 또 그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어떻게 신실하게 행하신 것을 증거하셨다.
    또 그는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여러 가지 율법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지를 알리셨고 또 이로써 인간의 죄악됨을 깨우치기를 원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막제도를 통해 장차 오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증거하셨고 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교훈하셨고 또 그가 친히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심을 증거하셨다.

    감찰(7200) 출앱굽기 4:31. 5:21

    라아(
    râʼâh)  רָאָה 스트롱번호7200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râʼâh ]
    구약 성경  /  1299회 사용




    강퍅(2388) 하자크(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2388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3.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발음 [ châzaq ]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출애굽기 4:21, 7:3, 13, 22, 8:19, 9:12, 35, 10:20, 27, 11:10, 13:15, 14:4, 8, 17


    ​출애굽기 각 장별 주제

    1장 : 이스라엘의 번창과 고난 / 히브리 산파들의 신앙 - 하나님을 경외(1: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장 : 모세를 준비시키심 /

    3장 : 모세를 부르심

    4장 : 모세를 보내심

    5장 : 바로의 첫 반응

    6장 : 하나님의 동일한 명령

    7장 : 피 재앙

    8장 : 개구리, 이, 파리 재앙들

    9장 : 악질, 독종, 우박 재앙들

    10장 : 메뚜기 재앙과 흑암 재앙

    11장 : 장자 재앙

    12장 : 유월절과 출애굽

    13장 : 하나님의 인도하심

    14장 : 홍해의 기적

    15장 : 모세의 노래

    16장 : 만나와 메추라기

    17장 : 르비딤 사건들

    18장 : 이드로의 방문

    19장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심

    20장 : 십계명

    21장 : 공의의 보응 / 종, 살인

    22장 : 도둑질, 음행

    23장 : 공정함, 절기 등의 법

    24장 : 언약서

    25장 : 성막 건립 지시 / 법궤, 떡상, 등대

    26장 : 성막, 띠, 휘장

    27장 : 번제단, 성막뜰, 등불

    28장 : 대제장의 옷

    29장 : 제사장의 임직

    30장 : 분향단, 물두멍

    31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심

    32장 : 금송아지 사건

    33장 : 단장품을 제함

    34장 : 두 번째 40일

    35장 : 자원하는 예물을 드림

    36장 : 성막을 만듦

    37장 : 법궤, 떡상, 등대, 향단을 만듦

    38장 : 번제단, 물두멍, 성막뜰을 만듦

    39장 : 제사장의 옷을 만듦

    40장 : 성막을 세움


    2월 14일(수) 오후 7시
    출애굽기 1장

    개역 개정 판 / 1: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은혜를 베푸시니라

    - '잘해 주셨다'(deal well), '선대하셨다'(욥 24:21)란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백성을 선대한 자는 하나님께서 선대하신다(룻 1:8).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 와야아스 라헴 바팀)

    - 여기서 '왕성케하다'란 뜻의 '아사'(*)는 '일으키다', '만들다', '제공하다'는 뜻이다(삼하 7:11).
    그러므로 위의 구절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집들을 만드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집을 만들다' 또는 '집을 세우다'(*, 바나 바이트)라는 말은 '가정을 이룬다'는 의미를 지닌다(창 30:30; 시 127:1).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산파들의 가정을 측복하셔서 가업을 번영케 하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가정은 흥왕할 수밖에 없다(삼하 7:11).






    2장 부르짖는 소리(23절)
    2:1-25


    3장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3:1-22


    4장 하나님의 지팡이(20절)
    4:1-31






    30장 거룩한 관유

    거룩한 관유 (2-1) 관유의 재료들-네 가지 향품과 감람기름

    성경 : 출애굽기 30:22-33, 시편 133:2, 요한일서 2:20, 27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30장 22-33절에 있는 거룩한 관유와 관련된 세목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관유의 재료들

    네 가지 향품

    거룩한 관유의 재료들은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으며, 가지 수로는 다섯 가지이다. 첫째 범주는 네 가지 향품-몰약, 육계, 창포, 계피-이다. 두 번째 범주는 한 항목-기름-으로 되어 있다.

    액체 몰약

    향기롭지만 맛은 쓴 액체 몰약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죽음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몰약은 주로 장사지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약은 죽음과 연관된다. 요한복음 19장에 따르면, 니고데모와 다른 이들은 주 예수님의 몸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준비할 때, 몰약을 사용했다.

    몰약은 향료 나무에서 나온다. 이 나무는 잘려지거나 저절로 갈라지거나 베어질 때 즙을 낸다. 옛날에 이 즙은 죽음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고통을 덜어주는 몰약 탄 포도주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마시기를 거부하셨다. 물론 출애굽기 30장의 몰약은 주님의 죽음을 상징한다. 몰약의 향즙은 고통을 덜어줄 뿐 아니라 몸에서 나쁜 분비물이 나올 때, 몸을 치료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몰약은 사람의 몸의 이러한 상태를 고칠 수 있다. 우리의 인간생활에는 많은 나쁜 분비물이 있으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문제를 고친다.

    향기로운 육계

    향기로운 육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달콤함과 효능을 의미한다. 육계는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심장을 자극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육계는 약한 심장을 자극하는 데 처방된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죽음을 의미하고, 육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감소시킬 것이며, 나쁜 분비물들을 고쳐 줄 것이며, 결국에는 우리를 자극시켜서 우리를 행복하고 기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나의 체험에서부터 간증할 수 있다. 나의 환경의 소극적인 것들이 나를 침체시킬 때가 많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죽음을 적용할 때, 나는 교정되고 조정되며 자극받고 움직이게 된다.

    향기로운 창포

    출애굽기 30장의 창포는 갈대이다. 몰약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 뜻은 흐른다는 것을 의미하고 창포의 원 뜻은 일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창포는 늪이나 진흙땅에서 자란다. 그러나 그것은 늪에서 자라지만 공중으로 일어설 수 있다. 향품의 배열에 따르면, 이 창포는 죽음의 곳에서부터 일어나신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 주님은 늪, 즉 죽음의 상황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으셨으나, 부활 안에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창포는 그리스도의 귀중한 부활을 의미한다.

    계피

    네 번째 향품인 계피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의미한다. 계피와 육계는 같은 종에 속한다. 육계는 껍질의 속부분에서 나온 것이고, 계피는 껍질의 겉부분에서 나온 것이다. 육계와 계피는 모두 달고 향기롭다. 게다가 그것들에서 파생된 식물들은 다른 식물들이 살 수 없는 곳에서도 종종 살고 자란다.

    옛날에 계피는 곤충이나 뱀을 쫓는 방충제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계피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효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환경도 저지할 수 있으며, 그분의 부활은 물론 방충제이다. 그것은 모든 악한 곤충들을 퇴치하며 특히 옛 뱀 마귀를 퇴치한다.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는 모두 향품의 범주이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범주의 한 항목인 감람기름에 이른다.

    감람기름

    성경에서 감람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한다. 감람기름은 감람열매를 눌러짜서 산출된다. 감람기름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압력을 통과하여 흘러나온 하나님의 영을 의미한다.

    감람기름이 관유의 기초이다. 그것은 향품들이 복합되는 근본 성분이다. 네 가지 향품들은 관유가 되기 위하여 감람기름 안으로 배합되었다. 이것은 감람기름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영이 단지 기름만이 아니라, 지금은 어떤 성분들이 복합된 기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복음 7장 39절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이 영화롭게 되시기 전에는 복합적인 영이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야 복합적인 영이 완성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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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79692 2023-05-25T07:58:15Z 2024-05-01T10:23:18Z 이야기 철학(예화 자료) 05-25-2023(목) -







    기둥 위의 성자 시므온 스틸라이트 (St. Simeon the stylite, 389-459)

    터어키의 가파도기아
    가파도기아의 특이한 돌 기둥을 볼 수 있습니다.
    저 기둥이 유명한 기둥 위의 성자 시므온이 앉아 있었던 기둥이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상성자(柱上聖者) 시메온(St. Simeon the stylite, 389-459)

    5세기의 사막교부(Desert Fathers)들은 사막으로 들어가 금욕과 고행을 하면서 영성의 삶을 살려 애를 쓴 사람들이었다. 사막교부들 중에는 특이한 행적 때문에 유명한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시리아의 수행자인 주상성자(柱上聖者)라고 불리우는 시메온이다. (기둥 성자 또는 주상 성자라고도 부르고 시므온 또는 시메온이라고도 부른다.)

    시메온(St. Simeon the stylite, 389-459)은 389년에 시리아(Syria)와 킬리키아(Cilicia) 변방의 한 마을인 시스(Si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양치기였는데 한 설교자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본문에 대한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다. 회심 후 어떻게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자주 "더 깊게 파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10년이 지난 후 그는 수도사들을 떠나 은둔자가 되어 자기 발을 체인으로 묶고 수행하였다. 그러나 안디옥의 감독이 그런 방법을 인위적인 고행으로서 옳지 않은 신앙이라고 보고 풀라고 명령하자 족쇄를 풀었다.

    시메온의 수행이 소문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기도를 요청하며 몰려들었고 자신의 수행이 그들에게서 방해받기를 원치 않았던 그는 사람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1미터 80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기둥 위에서의 생활은 37년간 계속되었다 (AD 423-459). 기둥의 높이는 점차로 높아져 3, 6, 11, 20 미터의 높이로 발전해갔다. 기둥 꼭대기의 공간은 지름이 3피트 정도로 누울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높은 기둥 꼭대기에는 겨우 앉을 만한 좁은 마루가 깔려 있었고 그 주위에 떨어지지 않게 난간이 있었다. 그는 이 곳에서 밤낮 비바람과 햇볕에 노출된 채 생활하였다. 그는 사순절 기간동안 내내 금식하고 평상시에는 오직 주일에만 식사를 했다.

    그는 평생동안 40일간의 금식기도를 26회나 하였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목에는 쇠사슬을 걸치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머리털은 발끝까지 닿았다. 시메온은 하루종일 서서 기도했으며 구경꾼들은 시메온이 기둥 꼭대기에서 하나님께 절하는 것을 1,244번까지 세었다고 한다.

    시메온을 따르는 사람들은 1,000명이 넘었는데 제자들은 다른 주상 수행자들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메온의 기둥 옆에 거주하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스승의 먹거리를 공급했으며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도 기둥 위에서 받았다.

    고행의 삶을 살았던 그의 기둥 옆에는 언제나 구경꾼들로 메워졌다. 시메온은 둘러선 그들을 향해 하루에 두 번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했으며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설교에 아랍,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온 수천명의 이방인들이 회심하였고 심지어 찾아온 왕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그는 459년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 페르시아의 데오도시우스 2세, 레오, 마르시안 등이 그의 축복과 상담을 간청하기도 했다.
    동방교회 수도사들 중에는 다니엘(Daniel : AD.490년 사망) 시몬(Symeon the Younger:AD.592년 사망)등이 이렇게 기둥에 올라갔고 이 전통은 5세기에서 7세기까지 유행했으며 10세기와 11세기에도 이어졌다.
    서방교회에서는 단 한명이 있었지만 감독의 명령으로 내려와 근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가파도기아 수도원 운동에 시므온의 영향이 크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시므온의 이야기가 생겨난 곳은 저 기둥들은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가파도기아의 기둥들은 알려진 바와 같은 만든 기둥이 아니었고 자연 기둥이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시므온이 기둥을 올린 곳은 이 터어키의 가파도기아가 아니라 지금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칼라트 사마안에서 세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가파도기아의 기둥이야기는 훗날의 설화에 가까웠습니다.



    192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1844-1924)의 작품 중에 '무희 타이스'라는 소설.
    4세기 무렵 수도승 파피뉴스가 타이스를 여 수도원에 보내고 나서 자기 마음을 이기기 위하여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높은 돌기둥 위에 올라가서 수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야기 철학(예화 자료) 05-25-2023(목)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사랑의 열매

    2. 희락의 열매

    3. 화평의 열매


    4. 오래참음의 열매


    5. 자비의 열매


    6. 양선의 열매


    7. 충성의 열매


    8. 온유의 열매

    언어의 온유함
    - 만득이라는 푸줏간의 주인에게 소고기를 주문하는 양반들
    첫째 양반, 야 만득아 쇠고기 한근만 주게
    둘째 양반, 이보게 박성방 여기 쇠고기 한근만 주시게
    분명히 양은 똑같은 한근이건만 첫번째 양반의 양은 두번째 양반의 고기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자 첫번째 양반이 화를 내며 왜 같은 한근이 이렇게 다른가?
    예, 첫번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입니다.
    두번째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입니다.

     


    9, 절제의 열매







    동영상 자료

    중국을 보여주신 예수님 - 명위목사님 중국예언ㅣ중국지하교회간증ㅣ계시ㅣ예언



    2030년 중국의 기독교인 2억 3천만 명으로 예상
    시진핑의 기독교인의 수를 제로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해마다 기독교인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심지어 2억 5천만에서 3억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기독교 영화 I 팬데믹 _ 사랑의 도전




    기독교 영화 <멍에를 벗다>성경을 지키면 천국 갈 수 있을까요?




    기독교 영화 <하나님을 믿다: 교회가 무너진 후>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Procrustes Bed Syndrome)

    Procrustes(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다.
    아테네 교외에 살던 그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고약한 놀이를 즐겼다.
    그 놀이는 Procrustes(프로크루스테스)는 행인을 집에 있는 침대에 눕히고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키를 늘렸고, 침대보다 클 경우에는 신체의 일부를 잘라냈다.
    기구한 사연이 있어 침대에 딱 맞는 사람을 찾는거라면 동정이라도 하고 싶지만, 사실 침대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어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맞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심리학 용어 중 Procrustes' Bed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그리스 신화 속 Procrustes(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남을 바꾸려 하는 행위가 심한 사람이나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지금 그 침대 위에 올라가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고, 나답게 해석하자면 긴 팔과 다리를 침대의 길이에 알맞게 잘라내고 있는 중이다.

    사회인이라면 침대에 올라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실은 Procrustes(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는 어느 누구도 키가 딱 맞을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침대를 바라보고 더 알맞는 길이를 조절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것일 뿐, 그 침대에 올라가는 게 아니다.
    수 많은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나를 감싸는 수요일 새벽.
    나는 오늘 Procrustes(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이 순간을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나에겐 아직 침대에서 내려올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Procrustes(프로크루스테스)의 집에서 뛰어나올 용기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 : 눈에 띄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이 있으면 타인과 함께 성장하기보다 비판적인 태도로 삶을 대하므로 성장의 기회가 사라진다.
    과연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주변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자기 계발과 동기 부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타인과 끝없이 비교하다 보면 삶이 마치 고문이 될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 환자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집으로 들이고 잠자리까지 제공했지만 자기의 침대보다 키가 크면 사지를 절단해 버렸다.
    즉,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눈에 띄는 사람을 싫어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어릴 때 형제자매가 모든 관심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은 애정과 친밀한 관계 형성이 부족했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잠재적인 경쟁자가 될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 환자의 특징

    물론 살다 보면 타인을 부러워하거나 질투심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은 이러한 감정을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특징이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습관적으로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동료가 좋은 해결 방안을 제시해도 아이디어가 적절하지 않거나 새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상대방의 체면을 떨어뜨리기 위해 작은 구실이라도 찾으려고 한다.
    • 갈등을 조장하거나 타인을 학대한다.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에 나서지 않고 매너가 좋지 않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자주성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 좌절에 대한 내성이 낮다. 남들이 자기보다 더 좋거나 올바른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잠재적인 위협 인물의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 타인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가 쉽지 않다.
    • 융통성이 없으므로, 변화에 적응하거나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할 줄 모르고 자기만의 진리에 빠져서 산다.


    원인과 결과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싫어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낮은 자존감과 관련이 있다.

    불안감이 심한 편이면 어둠 속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실제로 이러한 감정은 직장, 연애, 가정생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은 대인 관계를 방해한다. 타인과 진정한 유대 관계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공유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고 한다.

    또한 항상 경계하는 삶을 살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머릿속이 분노와 비관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은 특히 업무 환경에 큰 지장을 준다. 만약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 환자가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 환자에게 권장하는 대처 방법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을 극복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실천해 보자.

    •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자. 모든 것이 자신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그럴 때마다 타인의 말을 부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 합의를 보자. 프로젝트 작업에 두 사람이 함께 참여했다면 발표 순간에 두 사람의 공을 똑같이 나눌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의 존재감에 자신이 묻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자신의 강점을 확인하고 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는 법을 배우자. 직장 생활이든 연애 관계든,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있다. 따라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파악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다른 사람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배워 보자.


    타인을 보살필수록 더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이 있으면 타인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로 대할 뿐 아니라, 자신의 앞길에도 방해가 된다.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고 약점을 보완하기보다 성장이 없는 제한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오로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그를 곤란하게 하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면 눈과 귀를 닫고 주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마치 자신에게만 정답이 있는 것처럼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오만으로 큰 실수를 하게 될 수 있다.



    ▣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 Capgras delusion)은 망상적 동일시(Delusional misidentification syndrome)의 하나로써 자신의 친구나 배우자 또는 주변인들이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분장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 되었다고 믿는 증상이다.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었거나 전혀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믿는 경우도 보고된 바 있으며 심지어 과거의 자기 자신조차 자신과 닮은 다른 누군가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카그라스 증후군은 뇌손상이나 치매등에서 유발되는 경우도 있으나 조현증(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당뇨병이나 갑상선 저하증 환자들에게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며 단일 사례이긴 하지만 건강한 사람이 케타민주사를 맞고 일시적으로 발병한 경우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발병비율은 대략 3:2 정도다.

    카그라스 증후군이라는 이름은 이 증상을 1923년 르블-라쇼(Reboul-Lachaux)와의 공동 논문인 꼭 닮은 것에 대한 환상(l'illusion des sosies)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프랑스인 정신과의사 조셉 카그라스(Joseph Capgras)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이 논문에서 카그라스는 자신의 남편과 주변사람들이 꼭 닮은 누군가와 바꿔치기되었다고 호소하던 한 노파를 예로들어 증상에 대하여 설명한다.

    “왜 로봇이 아버지를 흉내내고 있는 거지?”
    남자는 의붓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얼마 후 그는 확신에 차 로봇, 아니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다.
    남자는 다름 아닌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 환자였던 것이다.

    카그라스 증후군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가짜라고 믿는 희귀병이다.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아내를 보면서 저 사람은 아내를 닮은 가짜라고 확신하는 남편, 교통사고 이후 부모님을 보면서 가짜라고 생각하여 진짜 부모님을 찾아나선 아들 등 다양한 사례가 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카그라스 증후군은 측두엽의 손상에 의해 얼굴과 사물을 인식한 정보가 감정을 인식하는 부분에 전달되지 않아 생기는 증상이라고 한다.
    그들은 대상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상대를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카그라스 증후군에 걸린 유대인

    성경에서도 카그라스 증후군에 걸린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도 집단으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 하나님을 목숨보다 사랑했던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장차 당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할 것인지를 미리 예언해놓으셨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이사야 9:6~7)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입장, 즉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다윗의 위’에 앉을 것이라는 확실한 힌트까지 주셨다.
    그로부터 약 700년 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 나타나셨다.
    성경의 예언 그대로 다윗의 위에 앉아서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누가복음 1:31~3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11~33)

    유대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 곧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어떤 사랑과 경외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영적 카그라스 증후군에 걸린 그들은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가짜, 거짓 메시아”라고 비방하며 배척했다.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마태복음 27:22~26).

    카그라스 증후군에 걸린 기독교인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두 번째 이 땅에 나타나신다고 기록했다.
    영적으로는 항상 인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시겠다’고 하신 것은 첫 번째와 동일하게 육체를 입고 오시겠다는 의미다.

    기독교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이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인가를 성경 속에 자세히 기록해두셨다.
    무화과나무 비유, 생명과의 진리, 새 언약 제도의 회복 등 성경의 비밀들을 개봉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는 목사들과 장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예언에 따라 등장하신 재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있다.
    마치 이천 년 전 영적 카그라스 증후군에 걸린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행동으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만남(遭遇)

    세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선같은 만남
    생선을 만지면 만질수록 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냄새가 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꽃같은 만남
    꽃은 만지면 만질수록 향기가 납니다.
    그런데 그 꽃은 오래가지 않아 곧 시들어버립니다.
    몇 번 만나면 좋은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들어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손수건같은 만남
    손수건은 땀이 흐를 때 닦아줄 수 있고, 눈물이 흐를 때 닦아줄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나의 땀과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 사람은 곧 예수님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이전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바울을 만난 후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추수하던 들판에서 룻은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 있던 감옥에서 요셉은 두 관원을 만났습니다.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한 후에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후 요셉은 애급의 왕 앞에 나가 왕의 꿈을 해석해주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애급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모시기 전까지는 마음에 평강이 없다.


    * 예화 사용 / 05-25-2023(목) 해석은 하나님께(창세기 40:8)

    거장의 손이 닿을 때 (The touch of the Master's Hand)

    미국의 오랜 글에 ‘거장의 손이 닿을 때 (The touch of the Master's Hand)’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경매장에 경매물품으로 나온 낡은 바이올린이 있었다.
    3달러까지 부르는 사림이 있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마치 보물을 다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을 닦았다.
    그리고 현들을 조여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 아름다운 음률은 천사의 음악 같이 청중을 황홀하여 하였다.
    한 곡을 끝내고 노인은 감회 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 만에 너를 만져보는구나.” 하고는 다시 연주를 시작하였다.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어 결국 이 바이올린은 3천 달러에 낙찰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하나의 신앙을 담은 글이다.
    누더기가 된 인간, 죄와 허물로 값없는 인간 하지만 나 같은 죄인도 거장(Master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새로운 가치가 부여 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네 개의 C로 결정한다.
    캐럿(Carat), 컷(Cut), 컬러(Color), 클래리티(Clarity)이다.

    이것은 사람을 평가 하는데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캐럿은 크기이기에 사람도 주머니의 크기와 가진 것의 크기로 평가한다.
    은 모양이기에 그 사람의 생김새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이다.
    컬러는 색깔이기에 피부색으로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한다.
    클래리티는 순결도이기에 얼마나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냐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면에서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평점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눈에는 광선에 의해 드러나는 먼지처럼 인간의 전부를 볼 때 걸작품은 하나도 없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섯 번째 C (Christ)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는 일.
    만신창이가 된 나를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이시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맡겨 용서를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길 만이 나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남기는 길이다. 

    * 예화 사용 / 05-26-2023(금) 하나님이 하실 일(창세기 41:25)

    ▣ 다섯 가지 왕국

    세상에는 다섯 종류의 왕국이 있다.

    광물의 왕국, 그곳엔 생명이 없다.
    - 은, 금, 다이아몬드

    식물의 왕국, 그곳은 생명은 있으나 자유가 없다.
    - 걸어다니는 나무, 기더다니는 꽃을 보았는가?

    동물의 왕국, 그곳은 생명, 본능, 자유가 있다.
    - 신앙이 있는 개와 사자와 호랑이와 코끼리를 보았는가?

    인간의 왕국, 생명, 감성, 이성, 의지, 자유가 있다.
    - 영원한 생명과 삶이 있는가?

    하늘의 왕국, 영원한 생명의 삶이 있다.  
    - 영원한 생명과 삶

    광물은 자기 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자기가 극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인간의 세계가 있다.
    인간도 인간 이상 없다고 한다.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인간은 위로부터 압력을 느낀다. 소망, 꿈, 사랑, 기대, 영적 갈망을 느낀다.
    생명의 근원이 생명을 부른다.
    거룩한 분이 거룩하지 않은 자를 부르고 계시다.
    그 분이 새 삶의 중심이 되신다. 새로운 소원, 새로운 목적, 새로운 언어를 주신다.

    영원한 생명의 삶을 위한 지름길을 회개라고 합니다.

    심판이란 하나님이 판단하는 것
    비판이란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는 것
    회개는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 예화 사용 / 05-27-2023(토) 너희는 정탐들이라(창세기 42:9)

    어느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자가 반가워서 뜯어 보았더니 "사람,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 이라고 사람이라는 말만 5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석하려고 하여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 예화 사용 / 05-29-2023(월) 요셉의 앞에 서니라(창세기 43:15)


    ▣ 말의 마법 

    옛날에 박만득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양반이 그에게 고기를 사러 왔다.
    그 중 한 양반은 습관대로 "야, 만득아! 고기 한 근 다오"라고 말했다. 만득은 "네"하며 고기를 한 근 내 주었다.
    다른 양반은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게"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고기는 언뜻 봐도 먼저 산 양반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똑같이 한 근이라고 말했는데 차이가 많이 나자 앞의 양반이 화가 나 따졌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이 양반의 것은 많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적으냐?"
    그러자 만득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손님 것은 만득이가 자른 것이고, 저 손님 것은 박서방이 자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때로는 한 마디 말이 그 어떤 치료약보다 효험을 발휘해 생명을 구하고, 또 때로는 비수가 돼 남의 마음을 도려내기도 합니다.
    "졸라, 짱나" 등 비속어를 쓴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에 앞서 어른들부터 말을 가려 써야되지 않을까요?


    * 예화 사용 / 05-30-2023(화)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창세기 44:16)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 예화 사용 / 06-02-2023(금) 고센 땅(창세기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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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 종류의 왕국이 등장한다.
    첫째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
    둘째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셋째는 하늘 왕국(heavenly kingdom)

    이 세 왕국은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그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자

    1.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

    하늘의 왕국은 마태복음에서만 나온다.

    마태복음 3:2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늘의 왕국(개역 : 천국)은 그리스도인이 죽어서 가는 낙원이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늘의 왕국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 왕국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5장의 하늘의 왕국과 10장에 나오는 하늘의 왕국의 복음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마태복음 10:5-7

    5.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6.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7. 너희는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라.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을 보면, 땅에 속한 왕국임을 알 수 있다.
    이 왕국은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되는 왕국이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다루는 부분은 “예표”로 등장하지만, 그리스도의 통치와 왕국을 다루는 부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성경 전체의 주제는 신정통치의 왕국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하늘의 왕국”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 아니라 실제적인 왕국이다.
    눈에 보일 수 있게 이 땅에 세워질 정치적인 왕국이다.
    이 왕국은 유대인들을 위해 계획된 왕국이다.
    이 왕국을 완성하시는 분은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맞아 들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하늘의 왕국은 눈에 보이고, 정치적이고, 땅에 속한 왕국이요,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다.
    땅에 속한 왕국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지만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이 왕국은 유대인 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왕국이다.
    이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요한복음 3:3, 5에 있다,

    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만 하면 된다.
    이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며, 영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왕국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만 이 왕국에 속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태어나서 들어가는 나라는 하늘의 왕국이 아니다.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다른 개념이다.
    이 두 왕국은 같은 부분도 있지만, 왕국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상황속에서 언급되었다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 다른 것은 하늘과 하나님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가 날아 다니고, 구름과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창조물이 아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의 왕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었을지라도 서로 다른 것이다.
    이 두 왕국이 서로 다르게 기술된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3. 하늘 왕국(heavenly kingdom)

    하늘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처럼 다시 태어나야 들어갈 수 있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왕국이지만, 하늘 왕국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하늘에 있는 왕국이다.
    하늘왕국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사도 바울에 의해 낙원으로 불리웠던 곳이다.
    고린도후서 12:4
    “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간다는 말이 이 왕국을 의미한다.
    이 나라는 결코 하늘의 왕국이 아니다.
    하늘의 왕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늘 왕국은 세째 하늘에 있으며, 하늘의 왕국은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다.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자신의 하늘 왕국에 이르기까지 보존하시리니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천국이란 용어가 익숙해져 있다.
    성경적으로는 분명히 틀린 말이다




    ▣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우렌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 먹고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
    "저요 ?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같은 형제들일지라도 요셉과 같은 인물이 있고 전혀 다른 기질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셉입니까?
    가룟 유다입니까?
    욥과 같은 사람입니까?
    오늘의 삶이 나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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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N. 버그는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믿음에 불확실함을 느끼고 존재론적 의심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의심하고 싶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그곳에 휘말려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의심 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여러 조언들을 통해 기회로 삼는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바라에 소재한 웨스트 몬트 칼리지의 철학 교수로 재직했고 원래 생명윤리 분야에서 지명도가 높고 이 분야에 관한 책을 많이 저술 했다고 한다.

    이 책은 전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부록 1, 2가 추가 되어 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의심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영혼의 밤 한 가운데 있는, 믿음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 졌고 장마다 의문의 질문이 두세 개씩 달려 있다.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갈등의 질문들이 끝나는 장마다 두고 있다.

    소위 그 문제들은 존재론적 의심을 나타내고 있는데도 무조건 아멘으로 받고 믿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한다든지, 가슴으로 받아들이라든지. 기도해 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이 금과옥조같이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는 항상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우리의 정체성,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과거, 현재의 중요한 부분의 성찰을 도와주는 상호 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의심을 가진 신앙인들은 거의 인사이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재에 관한 의심도 영적 어두움의 차원에서 그들은 귀를 기울이고 듣길 마다하지 않는다. 종교는 일종의 음식이다. 먹어 보지도 않고 음식의 향과 맛을 논하기 어렵듯이 의심에 빠진 신앙인이 믿음의 능력과 매력을 맛보지 못해 영적 갈증을 느끼며 생수의 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유명인들의 예화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마더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 블레이즈 파스칼, G.K. 체스터턴, 미겔 데 오나무노, 시몬느 베이유, C.S. 루이스, 마르틴 마티와 같은 사람들의 지혜와 통찰들이 인용할 가치가 있어 담겨 놓고 있다.

    존재론적 의심이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가벼운 의심이나 순간적인 의문이 아닌 실제적인 것이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내 믿음이 진리라는 확신 속에 사라져 해결 되지 않은 채로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다.

    그 분이 멀리 계시면 우리의 마음은 겨울이 된다. 이것이 존재론적 의심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실을 놓고 고민하는 상태다. 이것을 믿음으로 덮고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명이 달린 진리의 문제를 어떻게 피해 간다는 말인가. 관심이 없다면 몰라도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질문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심을 인정하되 의심에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에 고통당할 필요는 없다. 줄다리기를 한다는 것은 씨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이 씨름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존재의 의심이라면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거장을 찾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 문제에 부딪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더 테레사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믿음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는 사랑 안에 거하는 섬김이 있기 때문이다.

    C.S 루이스의 영적 건조기의 설명에 의하면 언젠가는 영적 침체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의 굴곡의 법칙에서 하나님께서는 봉우리의 삶보다 골짜기의 삶을 통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빗어 가신다는 것이다.

    영적 골짜기, 영적인 어두움, 영혼의 밤, 영적 암흑기, 하나님의 물러나심 등의 시기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시나브로 늘 찾아온다. 평소 영적 교만 같은 것들도 신앙의 고수들에게 영혼의 밤과 함께 필요악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영혼의 밤을 맞아야 이런 교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망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하다. 불확실하게 전개되고 있는 어떤 상황들을 뛰어 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함께 가지고 있으며 축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습관적 의무감, 가족의 화평을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에게는 영적 의미가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심도 없이 참석한다면 그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아웃사이드에 머문 사람이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의문을 품고 계속 참석하는 사람이면 인사이드의 사람으로 앞으로 희망이 있다. 왜냐면 신앙 공동체 안에서 계속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생각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자체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믿음이 멈춰서는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좋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더 좋아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조지 매치슨의 기도문을 보면 “제가 갈망하는 것은 당신의 선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

    믿음의 여정 속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의 힘이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바꾸기 위함 일지도 모르지만 테니슨의 말대로 “기도는 이 세상이 꿈꾸는 것 이상의 기적을 행한다.” 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다음으로 ‘감사’다. 감사는 선물을 주는 자와 받는 자를 연결한다. 감사가 없다면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도 깨진다. 기도와 찬양과 감사의 표현을 그치지 말라. 하나님의 임재가 가슴에 나타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가 믿는 종교는 강력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라는 것을 당연하게 주장 할 수 있다.

    그러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불신자 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면 다 그리스도인인가? 그렇지 않다.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꾸준히 자기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로워져야 한다. 도덕적 행위는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감사의 행위이다. 도덕적 행위는 결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감정, 성품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사랑을 닮아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169p)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서 모든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뿐인 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믿어야 하는 이유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아니더라도 존재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단서 같은 거 말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 세상은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존재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핑계대기에 충분할 만큼 어둡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계절을 영성에 비유하면 영적 여름은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다스리시며 영혼이 고조되는 때이다. 그러나 영적 겨울은 다르다. 영적 겨울을 맞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신실한 모습으로 감동을 주는 삶을 살 수 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특별한 방식의 경건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마르틴 마티의 표현을 빌리면 “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다. 들을 기미도 보이지 않고 들을 존재도 없다면 왜 부르짖겠는가? 이 부르짖음 속에 구체적인 소망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부르짖음은 이미 하나님을 암시 한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경외하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감정을 구하고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그 분께 존경을 표했으며 그렇게 예배를 드린 것 자체를 특별한 은혜로 여겨야 한다. 다시 말해 영적 혹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려 몸부림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혼의 밤을 지날 때에도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붙잡는다는 것은 신실하고 끈기 있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쉽게 놓아 버려 그분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야곱의 씨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엉덩이뼈를 다쳐도, 하나님을 붙잡았던 그 옛날의 야곱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야곱처럼 끈질기게 하나님을 원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다. 의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궁금해 하는 것은, 곧 그들의 믿음에 부응하는 신적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창조자이며 유지자인 하나님이라는 존재만이 우리가 씨름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으로 갈등하는 사람들의 씨름은 정당하다.

    평생 의심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생활에서 특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관계에서도 삶에서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하고 자신에게 물을 때도 있고, 왜 나만 겪는 고통이냐고 아우성 칠 때도 있다.
    이런 제반 실존적 의문들은 기도해 보라는 뻔한 대답으로는 부족하다.

    성령으로 조명되는 부분은 이 책에서는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타나는 의문들은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서 답을 알아가게 한다. 영혼의 밤에도 성령이 우리 속에서 탄식하고 의심하는 가운데 고통 받는 마음을 위로해 가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앞세우지만 때로는 불신자 보다 못한 경우가 요즘 대세가 아닌가?
    드러내지 못하는 실존적 의심을 모르쇠 하는 경우가 많아 살천스럽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책은 하나님과 씨름 하게 만든다. 그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회개는 내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며,
    거기에 대해서 유감을 가지고,
    대속에 근거하여 내가 이전과 반대로 되는 것이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쓰
    20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성령없는 종교, 회개없는 용서, 중생없는 구원, 지옥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

    쟌 헨리 행킨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찔림을 주시는 것은 죄로부터의 회개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6:8-9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  100만명에 한 명인 사람(민수기 13:21-33)

    어느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자가 반가워서 뜯어 보았더니 "사람,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 이라고 사람이라는 말만 5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석하려고 하여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200만 명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할 때였습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 정탐을 위하여 보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탐꾼을 파송할 때에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탐꾼을 보내어 모든 정보를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여론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팽배하였습니다.
    이런 여론에 모세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려고 하느냐?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분명히 저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무가내로 정탐꾼을 꼭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최종 결정은 하나님께 물어 보고하겠다고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모세야!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자고 하는데 너도 동의하느냐"
    모세가 "하나님! 나는 하나님께서 저 땅을 주신다고 하셨기에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탐꾼을 보내지 않아도 하나님은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대답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보내라." 그래서 12지파에서 한 명씩을 선택하였습니다. 레위 지파만은 정탐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 지파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40일간 정탐한 정탐꾼들은 BC 2449년 아브월 8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12명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이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 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100만 명에 한 명인 사람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
    두 명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1. 꿈을 보았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같이 떠나 같이 다니며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같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0명은 가지 말자고 하였고, 2명은 가자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정반대의 말을 하게 하였을까요?
    다름 아닌 꿈의 차이였습니다.
    10명은 꿈이 없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서 노예로 살던가, 광야에서 살던가였습니다.
    노예가 무슨 꿈이 있습니까?
    광야에서 무슨 꿈이 있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7 거민들은 강한 사람들입니다.
    전쟁하면 질 것 같은 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가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명은 달랐습니다.
    성이 견고하였습니다. 아낙 자손이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10명과 다른 점은 꿈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새롭게 민족을 형성할 땅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실 땅이었습니다. 과거 430년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으나 이제 해방되어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꿈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분명한 꿈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이었습니다(창 15:12-16).
    아브라함이 되기 전에 아브람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 정말 이방의 객이 되었습니다.
    2. 400년만에 풀려 나왔습니다.
    3.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을 징치하셨습니다.
    4. 큰 재물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5. 아브람이 평안히 조상에게 돌아가 장사 지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예언 하나는 '이 땅으로 돌아 오리라'는 말씀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다섯 가지가 이루어졌고 한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한가지를 믿을 수 없겠습니까?
    그래서 두명은 그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꿈을 향하여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일을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꿈 때문에 가자고 외쳤습니다.
    200만명 중에 두 명이었습니다.
    100만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토마스 에드워드는 영국 청교도 혁명기 때에 성직자로서 큰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1627년 날카로운 비판으로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3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꼬박 기도하였습니다.
    "제게 뉴잉글랜드를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강대상에 올라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들은 그가 말도 하기 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꿈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큰 축복속에 살았습니다.
    실로 남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동행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10명의 보고를 듣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울며 통곡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냥 외친 것이 아니라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민14:6-9). 두 명이 가자고 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못 할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계시는 데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100만 명의 한 사람이 된 비결이 있습니다.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리빙스턴이 선교사로 떠날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 선교사가 찾아와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대답하였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도 좋다" 리빙스턴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100만명 중에 한 사람이 됩니다.

    3. 미래를 보았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은 어제를 본 것이 아니라 내일을 보았습니다. 애굽을 본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땅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았습니다. 지금 200만 명이 다 광야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을 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메시야를 보내 주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게 됩니다.

    오늘은 고생스러워도 내일을 건설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자고 하였습니다. 10명 말을 들으면 지금은 편하고 후손은 애굽으로 돌아가면 다시 노예이고 광야에서 생활하면 유목민이 됩니다. 그러나 두 명의 말을 듣고 가나안으로 가면 1세들은 고통이지만 자손들이 축복 속에 살게 됩니다. 편안한 오늘보다 고생스러운 내일을 택하는 이가 미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100만 명에 한 명이 되려면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합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자력에 이용하는 핵원료인 라듐의 모체가 되는 우라늄에 대하여 1945년에 쓴 영어 사전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희고 무거운 금속"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우라늄이야 말로 원자핵 분열을 일으키는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원료이며 이 우라늄의 발견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발견이라고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미래는 바뀝니다. 달라집니다. 그 날 좋도록 오늘 고생스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100만 명 중에 한 명이 됩니다.

    어미 원숭이가 두 마리의 새끼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편애하였습니다.
    한 마리는 늘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른 새끼는 제대로 돌보지 않고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원숭이는 혼자서 다니면서 먹이를 자급자족하였고,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새끼는 늘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에 겨워 어머니 품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느날 다른 지역의 원숭이들이 급습하였습니다.
    어미 원숭이는 사랑하는 새끼 원숭이를 안고 이 나무 저 나무로 돌아 다녔습니다.
    나중에 보니 새끼 원숭이는 숨막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혼자 살던 원숭이는 자기 할 일 자기가 알아서 하면서 숨어 있다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과보호는 비극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 고생스럽게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100만 명 중에 하나가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200만 명 중에 두 명입니다.
    100만 명 중에 한 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꿈이 달랐습니다.

    ▣ 파란 안경 쓰면 파랗게 보입니다(민수기 14:4~9)

    똑같은 풍경이라도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색깔은 다르게 보입니다.

    “배우는 이의 7가지 법칙”의 저자 부르스 윌킨스는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답니다.
    8학급 중 자신은 1~3반을 가르치게 되었답니다.
    그 중 2반이 우수반이었답니다.
    그러자 선배 교수가 와서 투덜거렸답니다.
    “왜 신임 교수인 자네에게 우수반을 맡기냐?”는 것이었답니다.
    그는 열심히 가르쳤고 예상했던 대로 2반은 탁월한 성적을 내었답니다.
    학기 말이 되어 학과장에게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답니다.
    그러나 그 해에는 우열반 편성을 안했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그 교수의 마음이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중요합니다.
    이런 결과는 동물 실험에도 나타났답니다.
    평범한 쥐를 천재 쥐, 보통 쥐, 바보 쥐로 나누어 세 조의 학생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같은 조건하에서 두 달 동안 훈련을 시키게 하였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답니다.
    천재라고 소개한 쥐들은 진짜 천재처럼 우수한 행동을 보여 주었고, 보통이라고 소개한 쥐는 보통의 성과를 올렸고, 바보라고 소개한 쥐들은 형편없이 바보 같은 짓만 한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마음은 단순한 추상적인 에너지가 아닙니다.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12명의 정탐꾼은 똑같은 지형 똑같은 사람을 40일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마음으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갈렙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자신들은 과소평가합니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백성들의 태도를 보고 자기들의 옷을 찢습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하며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말합니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비관하며 밤새도록 울며 통곡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라고 말하여 낙관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마음은 적극으로, 적극은 낙관으로 이어집니다.



    톨스토이에 대한 예화모음


    톨스토이의 우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한번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해 하면서 늙은 물고기를 찾아가 물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늙은 물고기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은 결국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온 몸이 언제나 그 물에 적셔 있으며 날마다 그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인간이 날마다 호흡을 하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모를 때가 많음을 깨우치는 우화입니다.


    어디서 삶의 참 평안을 찾기를 원 하십니까?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 작가로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삶의 참 평안이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공포로 불안한 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스러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삶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때부터 톨스토이는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에게 하늘의 기픔과 평강을 주십니다.
    어려움 많고 사고, 질병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힘입는 사람들이 평강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강의 복이 임합니다.
    말씀의 정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평강의 복이 임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처자식을 거느린 양화공이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아내의 새 외투를 만들 양가죽을 사기 위하여 시장에 갔다.
    가는 길에 외상값도 받을 양으로 몇 곳을 들렸으나 돈도 받지 못하고 이미 깔려있는 외상 때문에 가죽도 구하지 못한채 술 한잔에 언 몸을 녹이며 집으로 몸을 돌이켰다.

    주인공 세몬이 집으로 가는 길에 교회 벽에 기대어 앉은 알몸의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는 자기의 누더기를 벗어 젊은이에게 입힌 채 집으로 돌아 왔다. 아내는 사오라는 외투는 없이 낯모르는 손님을 데리고 온 남편을 질타하다가 남편 세몬이 데려온 이 젊은이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세몬의 온갖 질문에 아무 말을 하지 않던 이 젊은이가 싱끗 웃었다. 얼마 후 건장한 사람이 와서 가죽 한더미를 내 놓더니 멋진 장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하였다. 젊은이 미하일은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장화대신 슬리퍼를 만들었다. 세몬은 몹시 노했으나 잠시 후 건장한 사람과 함께 왔던 사람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 이제 장화는 필요 없게 되었소 대신 죽은 자를 위한 슬리퍼를 만들어 주시오라고 부탁하는 말에 깜짝 놀랐다.
    세몬은 미하일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자네는 별로 말이 없었다. 단지 몇 번 입가에 웃음을 보인 일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
    미하일은 세몬에게 대답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명을 어겨 벌을 받은 천사입니다. 나를 인간세계에 보내신 하나님이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오라고 분부하셨지요. 저는 그 대답을 알게 되어 너무 기뻐서 웃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아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 빵을 줄 때 나는 인간의 마음 속에 사랑과 자비가 있음을 알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건장한 사람이 와서 1년 신어도 끄떡없는 장화를 만들라 했지만 죽음의 천사가 그의 뒤에 있어서 자신이 오늘 밤 안에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무럭 무럭 잘 자라는 것을 통해서 미하일은 인간이 사는 것은 '사랑'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세몬에게 고백하였다.
    사랑은 인간에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자비는 인간에게 평안을 준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 [부활]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카츄사라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일생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카츄사는 귀족 네흘류도프의 집에 하녀로 있으면서, 네흘류도프의 의하여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유형 수가되어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 들판에서 부활절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찾아온 네흘류도프와 함께 복음서가 말해 주는 진리의 부활의 길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 작품의 내용입니다.
    "주는 실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죄의 얽매였던 카츄사의 영혼이 부활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하여 이런 동양의 우화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맹수를 피하여 도망치던 그 나그네는 살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한 우물이 있어서 우물 구덩이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가 살려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우물 밑바닥을 보았을 때 큰 용이 나그네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질겁을 했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맹수가 자기를 집어삼킬 듯 노리고 있고 밑은 큰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아슬아슬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나그네가 '이제 나는 죽었다.' 하고 체념하려는 순간 눈을 들어 옆을 보니까 마침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가지가 우물 있는 데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그네는 나무 가지를 든든히 붙들었습니다. 그는 나무 가지를 의지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힘은 자꾸만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쥐가 나무 밑둥을 갉아먹는 소리였는데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 가지가 끊어지면 용의 밥이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쥐들이 나무 밑둥을 갉아먹는 날 나는 떨어져 죽는다.' 이런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서 눈을 들고 나뭇잎을 봤을 때 벌이 꿀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도 잊은채 꿀을 혀로 핥아먹고 있었습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계속해서 나무 밑둥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단 꿀만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우화를 인용하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어리석은 것, 나도 어리석었지 이 세상 향락에 취하고, 이 세상 욕심에 취하고, 죽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노라."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모름지기 문둥병 환자 같은 그런 분이 말입니다 마주 서서 적선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뭘 좀 도와 달라고……. 그 때에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 푼의 돈도 없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형제여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있으면 꼭 도와줄 마음이 있는데 사실로 제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미안하다고.
    그 거지는 만족한 얼굴을 가지고 "아니올시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준 건 없지만은 당신이 나를 지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서 갑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그것이 선행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고 참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가운데서 그가 얻은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은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라고 깊이 깨닫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경건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말년에 불후의 명작 "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쓰게 됩니다.


    부활이라는 작품을 쓴 「톨스토이」는 ‘그대 영혼의 빈자리에’라는 작품에서 “사람이 외부적인 세계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지극히 거칠고 확실하지 못한 오관에 의하는 인식이 있다. 그 인식의 방법에 의해 우리 내부에 형성되는 것은 우리들의 앎이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로 다른 감각을 주는 혼돈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자신을 알고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그것을 아는 것, 즉 자기 이외의 삶들, 동물, 식물, 그리고 돌에 이르기까지 조차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인식의 방법에 의하면 온 세계의 내부로부터 알게 되고, 우리들의 앎에 의하여 세계는 아름답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파괴된 것의 재건이요, 모든 존재 결합의 부활이다. 즉 자기로부터 나와서 다른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신과 화합하고 만물과 화합될 수 있는 자이다.



    1828년 러시아에 아주 못생긴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작은 회색 눈, 큰 팔과 다리를 보면서 몹시 비관하였습니다. 어느 부분을 보아도 남들과 비슷한 부분도 없었습니다. 그는 "나는 너무 못 생겨서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자라면서 자신의 약점을 다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생은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생활을 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지냈습니다. 이 승화된 사랑을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부활"이고 그가 바로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소서. 외모를 아름답게 변화시켜주시면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
    소년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장성하면서 문학에 대한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외모 컴플렉스'를 단숨에 해결하는 해답을 얻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깨끗한 인격이 모여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이 소년이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다. 그를 `못생긴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만년에 그의 사상과 행복론을 요약하여 쓴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의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현인의 대답은 첫째는 현재요, 둘째는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셋째는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중한 ‘현재’를,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아름다운 삶! 그것이 나의 삶, 그것이 마카리오스를 노래할 수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톨스토이의 우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한번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해 하면서 늙은 물고기를 찾아가 물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늙은 물고기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은 결국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온 몸이 언제나 그 물에 적셔 있으며 날마다 그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인간이 날마다 호흡을 하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모를 때가 많음을 깨우치는 우화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레오 N. 톨스토이(1828~1910)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행복을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이기심과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모든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뉴욕 과학 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크레시 모리슨의 간증기 속엔 알래스카의 연어 한 마리가 등장한다.

    바다에서 수년을 보낸 성숙한 연어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태어난 강물로 되돌아가는 귀향 여행이자, 산란 여행이며, 죽음의 여행인, 기적의 여행을 시작한다.
    사실상 그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강물의 지류를 도무지 기억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어들은 정확히 그 지류를 찾아 강물을 역류해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짓궂은 인간이 그 성숙한 연어를 다른 지류로 옮겨 놓는다 해도 그 연어는 즉시 자신이 길을 벗어났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리고는 강물 밑으로 부단히 헤엄쳐 다시금 본래의 지류로 되돌아온다.
    비늘과 부레가 난폭한 물결의 압력을 받는 이 처절한 역류 여행을 통해 연어는 마침내 아무도 가르쳐 준 적 없는 자신의 탄생지,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최후의 알을 낳고 그리고 숨을 거둔다.

    이 연어의 여행이야말로 완전한 귀향, 완전한 안식, 숙명적 귀향, 숙명적 안식인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곧 신의 뜻과 방랑하는 인간 속의 역사이다. 18세 때 동전을 버리듯 주님을 버린 톨스토이는 주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35년의 세월을 탕진해야만 했다.
    50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마치 한 마리의 연어처럼 주님을 찾아 귀한 참회 여행을 시작한다.
    그를 감싸고 있던 모든 세속적 명예를 가로질러 그는 고독과 참회의 비늘을 단 채 주님을 향해 역류해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보 이반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소박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생활의 거울과도 같다.

    옛날 부유한 농부가 살았는데 그에겐 아들 셋이 있었다.그들의 이름은 세미욘, 타라스 그리고 이반이었다.그 외에 마리니야라는 청각장애인 딸이 하나 있었다.세미욘은 군인으로 성공을 했고 타라스도 돈을 벌어 출세를 했는데 이반은 장애인인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후 세미욘은 귀족의 딸과 결혼을 했고 타라스 역시 그 부유함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그러나 이반은 형들처럼 돈도 명예도 없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순박하게 살았다.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이반을 바보라고 불렀다.그래서 톨스토이는 그 소설의 제목을 ꡐ바보 이반ꡑ이라 붙인 것이다.

    이 소설은 오늘의 세태를 그대로 말해준다.모두가 다 지배하고 주장하려고 한다.또 남을 짓밟고 돈에만 눈이 어둡다.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ꡐ이반식ꡑ의 삶.비록 바보 같지만 남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그리워진다.



    불행한 가정 생활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와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불행한 가정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허물을 깨닫고 자기가 남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그 자식들 앞에서 자인하고 자기의 행한 일들이 미친 사람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비통하게 고백하였다. 또 아브라함 링컨은 난폭하고 무례한 자기 부인에게 어쩔 수가 없어서 가정을 점점 멀리하고 여관에서 외박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생활을 계속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톨스토이와 거지

    우리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를 잘 안다. 톨스토이는 어느 날 정거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만났다. 그 거지는 톨스토이에게 무엇 얻기를 바라서 구걸하나 때마침 톨스토이에겐 돈 한 푼 없어서 주지 못하게 되자 너무 민망하여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 거지는 돈을 받은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 한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사랑의 힘이다.

    자의식

    육체에 대한 자의식은, 발열이나 신경과민, 피로, 권태감 등을 느끼지 않을 때에 느끼는 것처럼,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시대 전체의 정신적인 건강상태도 지나치게 관능적이거나 그 밖에 흥분성이 있는 것, 기이한 것을 혐오할 때에 찾아볼 수 있다.
    다눈치오, 프로벨, 메텔링, 그리고 톨스토이도, 아니 그 밖에 「친화력」이나 「빌헬름 마이너터」를 쓴 괴에테까지도 장시간 접촉하고 있으면 온전히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유익하다고 볼 수는 없다.(법률가, 의사, 칼 힐티)



    게으름이란 죄악

    6세기 말에 그레고리 교황은 사람이 범하는 죄를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교만, 분노, 시기, 질투, 음란, 탐욕 그리고 게으름이다.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는 부지런함을 가장 좋은 덕목으로 꼽았으며, 독일의 문호 괴테는 부지런함만이 인생을 영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은 한결같이 게으름과 거리가 멀다.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리 속은 악마가 집을 짓기에 알맞은 장소”라고 했으며, 영국의 종교가 테일러는 “게으른 자는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라고 게으른 사람을 꾸짖었다.


    최후의 날의 경고

    러시아 최후의 날이 어떠한지 아는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문학이나 언어나 의식이나 러시아의 토기나 건물이나 교육 가운데 기독교인의 것이 아닌 게 없었다. 그런데 코카사스의 기병대가 모스크바를 향해서 쳐들어 오고 있을 때에 사제들은 모여서, 축도를 할 때 손가락을 어떻게 펼 것이며, 성직자의 가운의 색깔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싸움을 했다.
    어느 대장이 인솔을 하여 후퇴를 하게 되었다. 금은 보화를 마차에다 싣고 처녀들과 사제들과 부녀들과 귀족들과 부자들과 예술가 등 125만 명이 후퇴를 했다. 날씨는 영하 35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였다. 먹을 것이 없고 춥고 병들어 거의 다 죽었다. 어느 부인이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게 되었다. 한참 있다가 소리가 없어 보니까 아기가 반쯤 나오다가 산모도 죽고 아기도 죽었다. 어느 사제 한사람이 ‘오 하나님이여,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라고 하면서 죽어갔다고 한다. 이 비참한 러시아 최후의 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경고를 했는가? 우리 한국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이다. 우리는 6.25를 잘 알고 있다. 묶여 끌려가다가 죽고 애절 단장(哀絶斷腸)의 눈물을 흘렸다.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잊어서는 안된다.



    아버지의 마음

    「그리스도와 반(反)그리스도」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에 의해 기독교적인 신비주의의 입장에서 현대 정신의 위상에 의문을 던진 러시아의 작가 메레제고프스키(1865-1941)가 아직 소년 시절에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로 유명한 대작가 도스토예프스키(1821-81) 앞에서 자작시를 읽은 적이 있었다. 끝까지 참고 들은 그는 가엾은 듯이 소년을 향해 말했다. “미숙하구나. 앞으로 좋은 작품을 많이 쓰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한단다”라고 말했다. 소년의 옆에서 함께 이 말을 들은 메레제고프스키의 아버지는 기가 죽은 아들에게 “얘야. 말도 안된다. 좋은 작품을 쓰지 않아도 좋으니 고생 같은 건 절대로 하지 말라”고 위로했다.(교수, 김성호)


    톨스토이의 규칙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손수 만들어 위반했을 경우에는 그 날의 일기에 그것을 정직하게 기입하여 반성했다. 그 규칙 속에는 점을 쳐서는 안된다거나,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이 있었는데 그가 그 규칙 중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웠던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다.

    규칙 위반

    얼마 전 나는 우연히 브로비스키 케이트(모스크바에 있는)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문 앞에 한 늙고 지친 거지가 머리를 누더기 조각으로 감싼 채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돈을 좀 주려고 지갑을 꺼냈다. 그러나 그 순간 명주로 된 제복을 입은 깔끔하고 붉으레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크렘린쪽으로부터 뛰어 내려왔다. 거지는 그를 보자 놀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절룩거리며 알렉산더 공원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청년은 그를 쫓았으나 끝내 잡지 못하고 멈춰 서서 문 앞에 앉는 것은 규칙 위반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기다렸고 그가 오자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그럼 성경을 읽어 보셨습니까?” “예.”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내용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리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 …. ” 나는 이 말을 인용하였다. 그는 이 말을 알고 있었고, 나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당황해하는 것을 알았다.
    길가던 두 행인이 멈춰 서서 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확실히 그 젊은이는 명령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내 말을 듣는 것을 어렵게 느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하기 시작했으며 분명 어떤 변명을 찾고 있었다. 젊은이의 영리한 검은 눈동자에서 빛이 나고, 그는 돌아갈 듯이 나에게서 돌아서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군법을 읽어 보셨습니까?”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당신은 입을 다무시오”라고 대답하고는 승리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모피 코트를 두르고 자랑스럽게 성큼성큼 걸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내가 여지껏 만나본 사람 중에, 냉철한 논리로써 우리 앞에 놓인, 그리고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부르는 모든 사람들 앞에 놓인 영원한 의문을 해결한 유일한 사람이었다.(작가, 톨스토이)


    어리석은 자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헙수룩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의 원고를 책으로 내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출판사 주인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 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 비용을 다 부담한다 해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헙수룩한 사람은 원고 뭉치를 품에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데요. "

    이상스러운 말에 놀란 출판사 주인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라고 묻자 그는 "내 이름은 톨스토이 입니다. "라고 했다. 이 말에 기절할 듯이 의자에서 뛰어 일어 난 주인은 급히 사과를 하며 원고를 부탁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냥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볼품 없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세 가지 의문

    세기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에 “세 가지 의문“이라는 단편이 있다.

    줄거리는 한 임금이 인생에서 풀지 못한 세 가지 의문의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째 의문은 모든 일에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일까? 둘째 의문은 어떤 인물이 가장 중요한 존재일까? 세째 의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왕은 국사를 행할 때 항상 이 세 가지 일로 결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과 신하들이 별의별 해답을 제시하였으나 임금의 마음을 흡족케 할 대답은 없었다. 급기야 임금은 성인으로 잘 알려진 산골의 은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은자는 아무 대답없이 밭만 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숲속에서 한 청년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달려 나왔다. 임금은 자기의 옷을 찢어서 청년의 상처를 싸매주고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다. 알고보니 그 청년은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젊은 신하였다. 비로소 그 청년은 임금의 간호에 감격하여 원한의 감정을 풀고 더 충성스런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임금은 은자에게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은자는 해답은 이미 나왔다고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람이 지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존재는 자신이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잊어서는 안될 죄(罪)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인 ‘돌과 두 여인’이란 책을 보면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일수록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깊은 죄악의 자리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두 여인이 노인인 스승 앞에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왔다.
    이때에 노인은 두 연이게 말하기를 현재 마음 속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죄의 문제가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더니, 한 여인은 대답하기를 자기가 젊었을 때 남편을 한 번 바꾼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큰 죄로 생각되어 지금도 마음이 괴로와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또 한 여자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지금가지 도덕적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아무 죄도 벌한 일이 없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노인은 처음 여인에게 말했다.
    “신의 뜻을 따라 지시하는 것이니 너는 지금 당장 밖에 나가 큰 돌 하나를 가져오되 가능한 한 네가 들 수 있는 큰 것으로 가져 오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번 여자에게는 “너는 가능한 한 작은 돌들을 가져오되 네가 들 수 있을 만큼 가지고 오라.”고 하고는 자루 하나를 주었다.
    두 여인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즉시 밖으로 나가서는 큰 돌과 작은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에 노인은 다시 말하기를 이번에는 그 돌들을 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고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큰 돌을 갖고 온 여인은 있던 자리를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그 돌을 제 자리에 갔다 놓을 수 있었으나 작은 돌을 한 자루 담아온 여인은 그대로 그 돌들을 제 자리에 갔다 놓을 수가 없어 그대로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노인은 말했다.

    “죄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란다. 큰 죄는 언제나 기억이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가 있지만 작은 죄는 속히 잊어 버리기에 자기는 죄가 없는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기 때문에 더 큰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교훈하는 내용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진정한 행복

    세계의 많은 명화 중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19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 하겠다. 한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황혼이 될 무렵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노동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성스러운 면은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정도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한다. 인간이 노동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 보존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노동은 고역스러울 뿐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쎄실 존 로즈’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거부가 되었던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600만 파운두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영국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구세군의 2대 대장이었던 부드 장군과 기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담화하던 중, 부드 대장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묻자 로즈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행복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드 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슬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인생일기’란 책에도 보면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 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했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바라고 따르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흐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샅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맏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약속은 지킴으로 고귀하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하룻밤 숙박 예정으로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시골길을 지나다가 7-8세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 아이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톨스토이가 가지고 있는 백합꽃 수가 놓인 린넬 가방을 보자, 그것이 부러워 어머니에게 졸라대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그 아이가 졸라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대로 지나텨 버렸다가 되돌아와서는 소녀에게 약속을 했다. “내일만 지나면 이 가방이 필요없게 되므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틀림없이 너에게 줄 터이니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린넬 가방은 친지의 유품인 소중한 기념품이었으나 툴스토이는 소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약속을 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저녁 어김없이 그 시골길로 돌아와 소녀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 소녀는 불행하게도 톨스토이와 헤어진 후 급한 병으로 죽게 되어 조금 전에 장례식을 끝낸 뒤였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모친에게 부탁하여 소녀의 묘지까지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린넬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소녀의 모친은 눌물을 닦으면서 톨스토이게게 말하기를 “이제 아이는 죽었으니 이 가방은 가지고 가라.”고 미안한 듯이 말하자, 톨스토이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으나 소녀와의 약속은 나의 망음에 아직 죽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습니다.”하고는 머리를 숙였다는 것이다. “하잘 것 없는 약속이라도 정확하게 지키면 신용은 물론이고 인기가 올라갈 것이니 힘에 미치지 못하는 약속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빈병 이야기(희생, 사랑)

    영국의 대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의 설교집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스펄젼 목사 일행은 어느 날 전도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마차를 타고 ‘바라로’에서 ‘리버’로 가는 길이었다.
    날씨는 쾌청하였으나 몹시 더웠으므로 마실 것으로는 라무네 쥬스를 몇 병 가지고 떠났는데 스펄젼 목사는 마차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쥬스를 마셨다.
    빈 병은 필요없었으므로 창가에 앉은 친구에게 버리도록 건네주었는데, 이 친구는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라 빈 병을 그냥 버리도록 건네주었는데, 이 친구는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라 빈 병을 그냥 버리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마침 큰 광주리를 등에 지고 마차 옆을 지나는 두 시골 부인에게 던졌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병이 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 병은 광주리에 떨어지지 않고 불행하게도 부인의 이마에 맞았다.
    순간 그 부인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길가에 넘어졌고 당황한 스펄젼 목사 일행은 마차를 세우고 부인을 병원으로 데려가서는 응급 치료를 시키고 치료비조로 많은 돈까지 주었다.
    그랬더니 정신을 차린 부인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많은 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 머리가 10번이라도 상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이란 책을 보면 “남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일 외에 참된 사랑은 없는 것이며,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것은 오직 자아희생 뿐인데 이런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다.”고 말했고, 로미오와 쥴리엣의 작가인 세익스피어는 “참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32:39)

    죽음을 부른 소유의 욕심 / 사람에게는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가 즐겨하던 이야기 중에 어떤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왕에게 엄청난 제안을 받았습니다.
    “네가 하루 동안 밟고 걸어 다니는 땅은 모두 다 네 것으로 주겠다.”
    이 농부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좀더 많은 땅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밤늦게까지 전력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땅을 차지하고 나서 자신이 시작했던 출발점에 도달했을 때, 모든 힘을 다 쏟아 버린 나머지 쓰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이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리석거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6: 9


    톨스토이의 인생론

    삶을 운명에 맡기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제정 러시아의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중년에 접어들면서 번민과 죄의 절망에 깊이 빠졌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몸부림 쳤으나 해답을 얻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을 찾아 의논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귀족들이 멸시하는 투박스럽고 빈궁한 농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가진 것 없지만 소탈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도 기쁨에 찬 삶을 누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톨스토이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냈다.
    어려운 운명을 뚫고 나가는 그들의 힘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에서 왔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도 운명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연초엔 더욱 그러하고 어수선할 때일수록 그렇다.
    어떤 위기에서도 바른 인생관으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위대한 힘이 필요하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어느 제화공인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늘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했다.
    어느 날 꿈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 내일 네 집에 가겠다고 하셨다.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음식을 차려놓고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한번은 거지가 오고 또 한번은 청소부 영감이 오고 저녁 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구두방 할아버지는 불쌍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 준비했던 음식을 그들에게 먹였다.
    그 날 밤 꿈 속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가서 세 번 다 잘 대접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톨스토이 - 러시아의 작가

    인간은 좋은 생활을 할 수록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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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탄 도둑의 회개

    어느 집사님의 간증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 연탄을 피 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너무 추워 나가 보았더니 그토록 잘 피던 연탄이 없어졌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분명 세든 사람의 소행이라 생각 했지만 교회 다니는 집사가 싸울 수도 없고 하여 참았다. 다음날 저녁 잠을 자는 척하고 나가보니 건넌방 부인이 연탄을 빼가는 것이 보였다. 뛰어나가 잡을까 했으나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간신히 참았다. 이런 일이 두 주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어느 날 부인 이 찾아와 "제가 연탄을 가져간 줄
    알고 계셨죠?" 하며 사실 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점쟁이 한테 물었더니 누구와 실 컷 싸우면 액운
    이 물러가고 행운이 온다고 하여 싸움을 하려 고 연탄을 가져 갔는데도 도저히 싸움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녀에게 점쟁이의 잘못됨을 깨우쳐 주고 전도하여 그의 가정이 모두 구
    원을 받았단다.
    콘란트: 젊은 시절에 인생에 대한 희망. 사랑. 그리고 믿음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을 것이다.
    조지 맥도날드: 사랑받는 것보다 신뢰받는 것이 더 위대한 일이다
    레오 톨스토이: 믿음 있는 곳에 사랑이. 사랑이 있는 곳에 평화가. 평화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부족함이 없다.

    여권은 예수님의 피로 날인된 여권이다.



    화장은 지워진다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자기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마마 자국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다. 서커스단의 도화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상대방과 싸울 때 붉은 색을 진하게 내는 것처럼 말이다.
    화장을 하는 경우들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다져보면 남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집약된다. 화장을 잘 하면 얼굴의 결점도 감춰지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
    화장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남자 여자 가리 것 없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장을 한다. 학벌, 가문, 지역, 돈 명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화장 도구들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자기의 본성을 가리고 남 앞에서 멋진 사람으로 내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지워진 자국에서 차츰 드러나는 본래의 얼굴이 곱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화장을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화장은 언젠가 지워지게 마련이고 이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해도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다. 위조 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늘 나라에서는 거짓이나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나마 참 모습으로 살 수 없을까!


    톨스토이와 거지

    우리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를 잘 안다. 톨스토이는 어느 날 정거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만났다. 그 거지는 톨스토이에게 무엇 얻기를 바라서 구걸하나 때마침 톨스토이에겐 돈 한 푼 없어서 주지 못하게 되자 너무 민망하여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 거지는 돈을 받은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 한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사랑의 힘이다.


    게으름이란 죄악

    6세기 말에 그레고리 교황은 사람이 범하는 죄를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교만, 분노, 시기, 질투, 음란, 탐욕 그리고 게으름이다.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는 부지런함을 가장 좋은 덕목으로 꼽았으며, 독일의 문호 괴테는 부지런함만이 인생을 영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은 한결같이 게으름과 거리가 멀다.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리 속은 악마가 집을 짓기에 알맞은 장소”라고 했으며, 영국의 종교가 테일러는 “게으른 자는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라고 게으른 사람을 꾸짖었다.



    세계 이해의 두 방법

    사람이 외부적인 세계를 이해하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지극히 거칠고 피할수 없는, 오관에 의하는 인식이 있다. 그 인식의 방법에 의해 우리 내부에 형성되는 것은 우리들의 앎이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여러가지로 다른 감각을 주는 혼돈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자신을 알고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그것을 아는 것, 즉 자기 이외의 삶들, 동물, 식물, 그리고 돌에 이르기까지 조차도 사색을 옮겨 놓는 일이다. 이 인식의 방법에 의하면 온 세계의 내부로부터 아는 것이고, 우리들의 앎에 의하여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파괴된 것의 재건이요, 모든 존재 결합의 부활이다. 자기로부터 나와서 다른 것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만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신과 화합하고 만물과 화합될 수 있는 자이다.


    성공적인 삶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중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사는 길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오직 뉘우친 행동을 완전히 고쳤을 때 회개는 비로소 실천되는 것이다. - 톨스토이


    이 세상에서 서로 화평하게 지낼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용서이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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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니트, 니트족
    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무직 상태이면서 취업을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도, 혹은 그 외 학문을 공부하고 있지도 않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다시 말해 백수 중에도 취업 의사가 전혀 없는 경우다.
    마찬가지 이유로 실업 인구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기존의 구직단념자, 비구직자, 취업포기자, 순수비경제인구 등과 유사한 용어다.

    근로능력 있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쉬는 행동을 니트족이라고 부른다.
    근로능력 없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쉬는 것은 비경제인구에 속하지만 니트족이 아니다.

    2. 유래 및 역사

    원래는 영국 정부 사회 캠페인에서 나온 단어다. 99년 블레어 내각 당시, 수상직속 사회이탈 방지국(Social Exclusion Unit)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진학이나 취직을 하지 않으면서도 직업훈련을 받고 있지도 않은 의무교육 이후의 하이틴을 뜻하는 것이었다.
    단어 자체도 teen(십대)을 거꾸로 한 것이다.
    사실 당시엔 정권의 노동정책 실패를 사회에 전가하려는 면피용 단어라고 노동계에서 공격받았고 때문에 블레어 정권 퇴진 이후 그대로 사어가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신조어 업어오기로는 세계제일인 일본 언론에게 발견되어 넷 등지에서 남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미묘하게 변질되었다. 미국, 유럽에서는 '니트'를 일본인 무직자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 역시 생각없이 일본에서 단어를 업어오는 바람에 왜곡된 의미가 사용되고 있다. 영문 위키에서는 일본, 한국, 중국을 3대 사용지로 꼽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 단어가 들어오기 이전인 2000년 초에 이미 캥거루족(아무것도 하지 않는 20~30대를 어미 뱃속에서 보호받는 캥거루 새끼에 빗대어 이르는 말)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시사사회용어로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고착되지 못했기에 여전히 신문에서나 볼 수 있고 일상에서는 그냥 '백수'로 통칭됐다. 게다가 캥거루족은 니트족보다 범위가 넓기 때문에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점도 있다.

    좀 더 세세한 기준으로 니트를 나누기도 하는데, 기존 니트족을 구직 니트[1][2]와 비구직 니트[3][4] 등으로 분류해서 사용하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구직 니트를 실업자로 분류하는 듯하다. 하지만 비구직 니트도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비구직 니트는 구직 니트에 비해 2배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기준으로 비구직 니트는 99만6000명, 구직 니트는 34만9000명이라고 한다. 비구직 니트는 증가추세이며 구직 니트는 감소추세라고 한다.#

    최근에는 국내 정부 연구자료 등지에서도 가끔씩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인터넷 신조어가 아닌 원래 단어 그대로의 뜻으로 '확실한 일자리와 안정적인 수입 없이 비정규 인생을 사는 사람들 모두'를 뜻하므로 아르바이터, 일용직, 프리라이터 등 고정직이 아닌 사람들까지 포괄한다. 요는 백수고 고시생이고 뭐고 간에 죄다 니트.

    한국노동연구원 남재량 박사는 니트족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15~34세 인구 중 1주간 정규 교육기관이나 입시학원 또는 취업을 위한 학원·기관에 다니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가사나 육아를 주로 하지도 않고, 배우자가 없는 사람.

    현재는 일본 정부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데 일본 정부에서 문서적으로 정의한 뜻은 '가사와 통학을 하지 않는 비노동 인구 중 나이 15〜34세까지의 계층'으로 규정하고 있다.

    3. 백수와의 차이점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백수와 니트는 비슷하지만 집안의 경제력 이상의 사치를 포기한 상태라는 점에서 과거의 백수건달과 다르다. 직업이 없는 이를 통칭하는 의미에서의 백수와 비교해도 일할 의욕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백수와 차이가 있다. 금전적 수입이 없더라도 취업에 대한 열의가 있는 고시생, 취업 준비생, 혹은 전업 주부 같은 사람들은 이 개념에서 제외된다.

    백수는 돈을 벌지 않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로, 니트족은 그 하위 범주에 속할 것이다.

    4. 히키코모리와의 차이점

    취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히키코모리와 비슷하지만 니트족은 취업은 포기했어도 친구나 지인 등 주변사람을 만나거나 모임에 참석하는 등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반면, 히키코모리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과 사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워한다.

    5. 비사회성 인간과의 차이점

    니트족은 취업의지만 없을 뿐 정상인이지만, 비사회성 인간은 애시당초에 사회생활을 할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즉, 구직 의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나 지인도 없으며, 사회생활 및 인간관계를 맺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관심 조차 없는 것이다. 니트족에서 악화되면 이렇게 된다고 한다.[5]

    다만, 돈 문제와 같은 결정적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에 히키코모리와는 명확히 다르다.

    간혹 사회적 의사소통장애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쪽은 사회생활 자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비사회성 인간은 완벽한 정상인이면서도 스스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다.

    6. 현황

    일각에서는 집에서 쫓아내는 등 막다른 길목에 몰리면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할 것이라며 일갈하기도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실제로 내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근로의욕이 없는 이들이므로 목적 달성은 커녕 오히려 더 극단적인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빚을 지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등 상황이 더 나빠질 위험이 크다. 실제로 니트족 자녀를 강제로 교정하려고 시도했다가 오히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 # 일본에서도 '인터넷을 해지시켰다'는 이유로 부모와 조카 등을 살해한 백수건달 가족 살인사건이 벌어져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불경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 다른 식구들의 금전적 부양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인간은 가계에 심각한 부담이 되며 부모에게도 정신적인 고통를 안겨줄 수 밖에 없다. 이때문에 법원에서도 니트족 자녀로 인해 고통받은 부모가 니트족 자녀에게 상해를 입혀도 참작하여 집행유예 처분을 내린다.*

    7. 평생 니트족?

    기초연금 기준인 1억원 미만의 재산을 가지면서 니트족에 해당되는 사람을 니트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흔히들 부자는 부자라고 부르지 다른 건 따지지 않는다. 니트족은 돈도 없으면서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1억원의 재산을 가졌다면 제법 긴 기간 동안 니트족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재산이 거의 없을 경우에는 1~10년 정도 살 수 있다.

    즉, 니트족도 돈을 모두 소진하면 일단 니트족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범죄를 저지르던지, 구직활동을 하던지, 일을 하던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던지간에 최소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길고 긴 니트족의 여정은 막을 내릴 것이다.

    8. 니트족 현상을 줄이는 방법은?

    사실 니트족이 생기는 이유를 보면, 경제가 좋지 않거나, 일자리가 없거나, 일자리는 있는데 기업의 평판이 안좋은 경우가 많다. 니트족의 비중에서 어느정도 도전을 해본 사람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니트족을 줄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국가의 경제가 살아나고, 일자리의 질을 높여서 근무 환경 개선이 우선이다. 2020년대엔 RPA를 비롯한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대안으로 청년연금이나 기본소득제를 시행하는 것이 있다.

    평균 수명이 낮은 선진국이라면 위에 있는 해법은 그리 어렵진 않다. 한국의 경우는 평균 수명이 너무 높고 기성세대의 인구가 많은 탓에, 초고령사회로 진입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이로 인한 기초연금 및 복지급여 등이 많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위에 있는 해법을 쓰기에 재원적인 여유가 부족하여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6]

    보건복지부에서는 명절 스트레스 취약자이자 방탕하게 생활하는 니트족을 포함 20-30대 MZ계층에 속한 직장피부양자, 지역세대원에서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걸린 사람들이 흔해져서 일반건강검진대상을 2019년부터 만 20세 이상으로 완전히 확대했다.

    9. 국가별 니트족

    9.1. 일본

    일본에서는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하류화 또는 "하류지향" 이라고 부른다.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유명해진 2000년대 일본의 신조어로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아 소득이 없어지고 그로 인해 자신의 생활 수준 및 사회경제적 지위(SES)가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그런 하류화를 선택한 일본의 젊은이들 역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필요한 생활필수품이나 취미활동에만 조금씩 투자하는 것으로 소비패턴이 바뀌어가고 있다. 동시에 집과 자동차를 포기한 젊은이, 내집마련을 포기한 청년이라는 의미를 가진 사토리 세대가 일본의 대중매체에 수시로 등장하는 실정이다. 1990년 이후의 일본의 경제사정 악화로 잃어버린 10년이 진행되는 동안 집은 커녕 자동차를 살 능력도, 여력도 없는 청년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태다.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으로, 1987년에는 이미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하는 인간을 정의하는 단어 프리터족이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시기에는 굳이 직장에 취직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였고, 버블이 꺼진 이후에는 취업난이 매우 심해지면서 프리터가 늘어났다. 2010년 이후에는 일부 니트족 자녀가 취직이고 결혼이고 뭐고, 영원히 못 할 것에 대비해서 따로 대책을 세워놓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 니트라는 표현이 유행어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본에 니트족이 많은 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의외로 OECD 국가 중에서는 니트족 비율이 적은 편(4.6%)이다. 한국(15.6%)의 1/3 수준. 









    ▣  헨리 블랙커비(Henry T. Blackaby)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저자 헨리 블랙커비(Henry T. Blackaby)는 선교사로, 목사로 하나님을 전하고 경험하는 일에 헌신해 왔다.

    백악관과 미국 국방부, 유엔(UN)을 비롯해 지금까지 114개국에서 강연을 했으며, 블랙커비 미니스트리즈 인터내셔널(Blackaby Ministries Iinternational)을 설립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도록 다방면으로 돕고 있다.

    공저자 리처드 블랙커비Richard Blackaby)는 헨리 블랙커비의 다섯 자녀 중 장남이며, 블랙커비 미니스트리즈 인터내셔널의 회장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영적 리더십과 크리스천의 삶에 대해 강연을 한다.

    《제한 받지 않는 하나님》을 비롯해 28권의 책을 썼으며(공저 포함), 캐나다 남침례신학대학교에서 13년간 총장을 역임했다.

    이 책의 주제는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양극단을 저자는 설명한다.

    한쪽 극단에는, 성경을 하나님이 사람들과 의사소통하시는 유일한 통로로 보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날마다 깊이 개입하시며 다양한 통로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않는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에 있고, 하나님은 그 진리를 우리 스스로 적용할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반대쪽 극단에는 성경의 확인이 거의 혹은 전혀 없이 개인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오늘 자기가 들은 하나님 말씀이 성경 말씀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사사로운 해석 쪽으로 심하게 치우치고, 경험을 좇으며 감정에 지배 당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빌미로 남들을 조정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조로, 교리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과 꾸준히 대화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분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반박하고, 하나님의 인격적 인도 가능성을 싸잡아 거부하면서 생명 없는 교리 체계를 선택한다. 그들은 하나님은 꾸준히 시간을 내서 보통 사람들과 일상사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차원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은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과 교제하는 존재로 지으셨다(요한복음 17:3. 요한일서1:1-4).
    그분은 우리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원한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관계에 커뮤니케이션은 필수다.” 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알아듣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이미 성경에 계시된 내용과 상충되는 새로운 자기 계시를 주시지는 않는다.

    그보다 하나님은 당신 삶의 구체적 상황에 성경을 적용시키려고 말씀하신다.
    당신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경책을 새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말씀하신 바를 당신 삶에 적용하시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법, 하나님의 음성과 세상의 음성들과 분별하는 방법과 하나님 음성에 더 집중하고 반응하는 법 등에 대하여 성경에 근거하여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교회사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례도 인용하고, 저자 둘의 구체적인 사례들도 포함시켰다.

    또한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에 관한 질문들(Q&A), 예를 들면“내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껴지는 부분에 우리 교회가 응답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말씀을 선뜻 행할 교회를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남아 있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아니면 설사 그들이 잘못됐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내 의무인가?”,

    “나는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일을 알지만 배우자와 자녀들은 순종할 뜻이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족들과 헤어져 나 혼자 가야 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나님께도 ‘제2안’이라는 것이 있는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제1안’을 놓친 것 같아 두렵다.”등에 대한 대답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영생의 소망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 "영생이 뭔데?"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영생이 있음을 압니다.
    기독교의 복음에서 영생에 대한 소망은 기독교신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삶이 결코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백신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고 내일보다 모래가 더 좋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으로 영생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만 하는 데서 그치시는 지요? 아니면 그 사실을 누리면서 사시는지요?

    하해룡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의 장모가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그 때의 일만 생각하면 장모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온 장모가 심한 각혈을 하여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 진찰을 한 결과 다발상폐암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의사는 3개월 이상을 견디기가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믿음과 인내로 일년을 견뎌내고 그 고통 중에서도 회갑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시골에 내려가서 장모님의 회갑예배를 참여하고 올라온 어느 수요일 밤 설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1시에 벌떡 일어나 장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화기를 통해서 "하목사인가, 나는 지금 숨을 모두어 쉬는 중일세. 지금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일세, 목사일 잘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만나세"라고 말하는 장모의 숨찬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머님 기도드리겠습니다. 수화기를 꼭 잡으십시요"라고 부탁드린 후 "하나님 아버지 어머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서실 때까지 십자가를 놓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그녀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녀의 신앙고백을 과연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영생의 소망을 주는 종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등의 여러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요일2:25)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 저편에 있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삽니다. 우리가 그리던 주님을 모시고 기쁘게 찬송 부르며 살 것이요, 세상에서 헤어졌던 성도들을 만나 기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관하여 도움을 주는 새 과학 이야기가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사회안전보장"에서 제안한 것으로 냉동방법이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지금은 의학이 그 병을 고칠 수 없고 노인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없지만 과학이 좀더 발달하게 되면 그런 병을 고치고 노인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니 그때까지 냉동시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관이식인데 이미 실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연구가는 사고당하여 죽는 사람의 건강한 부분을 잘라서 그것을 기관은행에 잘 보존해 놓았다가 그 부분이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의 연구책임자 다드리지 코올은 앞으로는 인간의 머리까지도 완전히 부속품 바꾸듯 교환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부인과 아이들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이미 죽은 남편의 유전자를 알 수 있으므로 소급해서 남편을 만들 수 있다고까지 말하며, 예일 대학의 아더 W.갈스턴 박사는 부유한 사람의 세포를 영구적 개발 실험실에서 생성해 낼 수 있으므로 그 부지와 꼭 같은 복사 인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이론이 가능하다 해도 인간의 생명을 영원히 연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생하는 길을 열어주셨고 그의 표본을 그리스도로 하여금 부활로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영생할 소망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가 보증이십니다.

    부활을 통해서 영생의 소망을 주신 주님, 그 소망 중에 살다가 주와 더불어 영생하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6:12)



    ▣  소망의 의미

    소망은 고난이 없음을 가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망은 그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의 상처 역시 곧 치유되어 마침내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내리라는 것을 믿는 마음이다. 우리를 어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빛으로 인도해 내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 믿음은 바로 우리의 힘의 원천이며 동시에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다. 믿음은 곧 고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그 고난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며 마음의 상처 역시 곧 회복되리라는 것을 믿는 마음이다. 소망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는 소망을 잃었노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소망의 불꽃은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주안에서 소망을 품는 자들에게 주님은 복을 주신다. 소망을 되찾을 수 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뜻을 다시 한 곳에 모아, 주를 섬기면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소망 없는 끝을 바라볼 뿐이지만, 크리스천은 끝없는 소망 가운데 기뻐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뒤엉켜 있는 우리 삶의 실타래를 풀어내실 수 있다. 이 뒤엉킨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그대로 내버려두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며 기쁨인가! 소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하루살이의 소망

    가끔 병원에 가보면 언제 그 병상을 떨치고 일어날지 모르는 지병을 안고 외롭게 투병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내가 만난 28세의 청년도 그러했습니다. 암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모르핀을 맞으며 병상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은 처음에 그 형제에게 암이라는 것을 숨겼습니다.
    가슴에 잇는 혹을 떼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제 아물면 퇴원한다는 말로 3개월을 속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는 그 사실을 알고 거의 매일같이 그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생기고 똑똑한 그 청년은 도무지 마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이제 퇴원하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니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고려해 보겠어요.
    의사 말로는 혹을 떼냈으니까 한 달만 지나면 퇴원할 수 있대요."

    그의 포부를 듣는 그 순간에 나는 얼마나 깊은 인생의 비애와 고통을 느껴야 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활보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음의 운명을 안고 사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죽음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이 지극히 약한 존재란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소망의 빛

    독일의 나치수용소에 수감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1892∼1983) 여사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차가 캄캄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거나 기차에서 뛰어내려선 안 됩니다. 조용히 앉아 기관사를 믿고 기다리면 잠시 후 터널 밖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공포와 절망이 나를 둘러싼다고 해도 인생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빛’이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엔 고통과 죽음이 깃들어 있지만 즐거움과 평강도 있습니다. 이것은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빛이 없으면 흑암(黑暗)이지만 빛이 있으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영원한 빛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시편 27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수많은 원수에 둘러싸여 주변이 어둡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계시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길이 캄캄하게 보일 때라도 빛만 있으면 길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소망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그 빛을 세상에 전하는 강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힘

    프레드릭 왓츠(G. Frederic Watts)의 명화, ‘소망(Hope)’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둥그런 지구 위에 약하게 보이는 눈을 수건으로 싸맨 소녀가 남루한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소녀의 손에는 낡은 하프가 들려져 있는데 여섯 줄은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소녀의 뒤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별 하나가 희미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남북전쟁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소망(所望)이라는 말은 사전에서 “어떤 일을 바람. 또는 그 바라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집니다. 소망은 “긴장감과 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태도,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이 가능케 될 것임을 믿는 태도, 인내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기다리면서 바라는 태도, 무언가를 바라며 기다리는 태도”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태도와 누군가를 향한 신뢰의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삶에 대한 소망적인 태도는 타인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1년 동안 엄마가 아이에게 보여 주는 행동을 통해 아이는 소망에 대해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안락한 잠자리, 따뜻한 음식 등 신뢰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면 아이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자신은 신뢰를 받을 만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고 신뢰감을 통해 아이의 마음속에 소망이 깃들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삶의 기본 덕목인 소망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며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이고,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소망의 힘에 대하여 1950년 대 중반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쥐를 대상으로 실험하였습니다. 연구 책임자였던 커트 리히터 교수는 긴 유리 그릇에 실험용 쥐를 넣고 그 안에 물을 천천히 부었습니다. 쥐가 물속에서 얼마 동안 생존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실험 결과, 물의 온도와는 상관없이 물을 붓고 15분 정도가 지나자 헤엄치는 것을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는 쥐가 생겼습니다. 어떤 쥐는 무려 81시간을 버티기도 하였습니다. 쥐의 수염과 얼굴에 있는 털을 제거하고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실험보다 쥐의 생존 시간이 현격히 줄었고 여전히 40-60시간 정도 버티는 쥐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실험은 실험용 쥐가 아니라 덫에 걸린 야생 쥐를 잡아 실험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예외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죽었습니다. 네 번째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쥐들이 헤엄을 치며 안간힘을 쓸 때 밖으로 살짝 빼 잠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런 절차를 반복했더니 놀랍게도 쥐들은 평균 60시간을 버텨 냈다고 합니다. 어떤 쥐도 15분 만에 포기하지 않았답니다. 리히터 박사의 설명은 쥐의 수염을 자르고 얼굴에 있는 털을 제거하자 쥐의 생명 연장의 꿈이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야생쥐의 경우는 덫에 걸린데다 수염과 얼굴이 있는 털까지 잘리고 여기에다 꼼짝달싹을 못하게 되었기에 쉽게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쥐들은 절망에 찌든 상태 즉 피할 길도 도망치거나 싸울 가능성도 찾지 못하는 지독한 절망에 빠지게 될 때 포기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잠깐 자유를 주어 소망을 불어 주었을 때 포기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살기 위해 열심히 헤엄을 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은 “소망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신분석학자 빅톨 플랭클(Victor Frankle)는 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나치 치하의 수용소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마음에 분명한 희망을 가진 사람,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돌아가서 자신이 꼭 이룩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오직 희망으로 산다. 오직 기다림으로 산다"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로 희망에 대하여 체계화를 시도한 미국 캔자스 대학의 심리학자였던 릭 스나이더(Rick Snyder)는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희망의 크기와 그 전의 수능(SAT) 점수, 그리고 대학생활에서의 학점, 졸업 후 성취 정도 등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학생들이 대학 생활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잘 적응하는지를 예측하는 것은 수능 점수보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크기였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 학점이 높은 사람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졸업 후 더 많이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희망의 크기가 목표 설정과 성취, 노력에 중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성공의 비결은 소망을 잃지 않는데 있다"고 했고, 헬렌켈러는 "참된 소망은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71:5)”



    헨리 리차드(Henry Richard) 선교사 이야기

    아프리카로 파송된 선교사 헨리 리차드(Henry Richard)는 선교사역의 하나로 원주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먼저 누가복음을 택하여 매일 일정한 분량씩 원주민들의 말로 번역하여 읽어주고 그 뜻을 풀이해 주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누가복음 6장 30절 말씀을 가르치게 되었다.

    "무릇 네게 구히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이에 선교사의 생각에 이 말씀을 가르쳤다가는 원주민들이 자기 것을 모두 달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선교사는 슬쩍 그 부분을 뛰어 넘고 말았다.
    이후 며칠동안 선교사는 자기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흘히 한데 대한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6장 30절 말씀으로 돌아와 그 말씀을 가르쳤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 선교사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원주민들이 그를 괴롭힐 요량으로 선교사의 집으로 물려와 그의 모든 것을 달라 하였다.
    이에 선교사는 흔쾌히 자신의 생활용품과 옷가지 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선교사의 물건을 가져간 원주민들은 그날 저녁으로 되돌아와 물건을 모두 돌려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말로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따라 가겠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것을 아끼지 않은 결과, 원주민들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뿐아니라 뭇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복을 받았다.
    주기는  싫어하고  받기만하려고 하고,  내것은 아깝고,  남에게 베풀거나 희생 봉사 정신이 약한 우리의 처지를 반성해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없는 세 가지(호세아 4:1)

    이스라엘 민족은 일찍이 열방 가운데에서 여호와가 선택한 백성으로서 여호와와 시내 산에서 율법 언약을 맺음으로써 이것을 보다 분명히 했다. (출 20-24장). 그러나 그들은 거듭거듭 언약의 조건인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죄 함으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계약의 주체이시며 공의로우신 여호와의 책망과 징계를 당하곤 하였다. 본문에서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과의 언약을 저버린 사실에 대해 추궁하고 계신다. 본문에서 ‘쟁변하다’(리브) 는 말은 ‘싸우다’, ‘경쟁하다’ 는 뜻으로 일차적으로 개인이나 (출 21:18) , 혹은 집단 사이의 물리적 싸움(신 33:7)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말로써 다투거나 논쟁하는 것을 뜻하며(신 19:17) 법정에 첨예하게 대립되어 송사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대하 19:10).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바 이것은 여호와께서 인간을 법정에 세워 송사하시듯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과 쟁변하신다는 말은 그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낱낱이 드러내어 추궁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처럼 추궁 당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로 칭함을 받은 우리에게는 이와 동일한 죄악이 없을까?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진실(眞實)이 없다.

    여호와께서 추궁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먼저 ‘진실이 없다’ 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진실’(에매드) 는 ‘확실하다’(시 93:5), ‘견고하다’(삼상 2:35), ‘〜를 믿다’(사 7:9)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닌 동사 ‘아만’에서 유래한 명사로 ‘견고함’‘(사 39;8), ’성실‘(사 59:14), ’진실함‘(찬 42;20)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결혼으로 부부가 된 남녀가 서로에게 진실하고 성실해야 하듯 기본적인 신실함을 의미하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 되었다. 여호와는 선민 이스라엘을 자신의 영적 신부로 삼아 항상 성실과 진실함으로 대하셨다. 여호와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적으로 신랑이 되시는 여호와께 대한 진실과 성실하심이 늘 결여되어 있었다.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지만 그들은 그 언약을 저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에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쟁변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에게 진실이 없은을 책망하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죄악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불러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께 대하여 신실하심을 보이고 있는가?


    2. 인애(仁愛)가 없다.

    두 번째로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인애’ 가 없었다. 여기에서 ‘인애’(헤세드)는 ‘친절하다’, ‘자비를 보이다’(삼하 22:26) 는 뜻의 동사 ‘하사드’에서 유래한 단어로 ‘인자’(시 89:2), ‘자비’(대상 16:41), ‘은혜’(창 20;13)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특히 이것은 그 의미상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호의나 사랑을 가리키는데, 여호와는 바로 이러한 사랑을 선민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 마땅히 서로 간에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히려 ‘인애’ 를 버리고 ‘저주’와 ‘살인’과 ‘강포’ 로 서로를 대했다. (2절). 이것은 실로 여호와께서 은혜롭게 베푸는 사랑을 업신여기고 도리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을 더하는 작태였으니 이에 여호와는 이를 간과하시지 않고 책망하신 것이다. 한편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는 오늘도 변함없이 성도 만민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며 우리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여호와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신다.(요일 4:7-12).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런 여호와의 뜻을 준행해야 한다.


    3. 여호와를 아는 지식(智識)이 없다.

    마지막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 이 없음을 책망하셨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디아트 엘로힘)에서 ‘지식’(다아트) 이란 말은 ‘알다’(창 4:9), ‘익숙하다’(창 25:27), ‘깨닫다’(창 19:33) 라는 뜻의 동사 ‘아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한 몸 된 부부가 서로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알듯 경험적으로 체득하는 지식을 의미한다.(창 4;1, 민 31:17, 삿 11;39). 부부가 서로를 아는 깊은 지식은 서로 간에 인격적인 교제, 둘 사이에 허물이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 도 바로 이런 것으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운데(사 11;2, 렘 22;16) 여호와와 올바른 영적 관계를 맺고 여호와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아 그것을 준행하는 실천까지도 포함하는 지식을 말한다. (렘 25:15-16). 여호와는 정녕 우리 모두가 당신을 바로 아는 것을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호 6:6).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여호와에게만 마음을 집중하여 여호와를 바로 알고 바로 신앙하는 자들이 되어야 여호와보다 다른 무엇에 더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 자손에게 없는 것은 ‘인애’, ‘진실’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 이 세 가지였다. 그러면 만일 지금 이 순간 여호와께서 우리와 쟁변하신다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 수효는 과연 몇 가지나 될까? 이제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봄으로써 여호와가 원하시는 것 가운데 무엇에든 부족함이 보이거든 속히 채우도록 하자. 우리는 부족한 기름을 사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신랑이 이르러서 낭패를 본 다섯 처녀(마 25:1-13) 와 같은 낭패를 당해서는 안 된다.

    * 자료출처 /  그랜드종합주석 호세아 4장 pp291-292 에서 옮김


    여호와가 부르신 악신(惡神)(사무엘상 18:10)

    본문에는 ‘여호와가 부리신 악신’ 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악신’(惡神) 은 곧 인간을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약하게 만드는 사단의 악한 영(evil sprit) 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통해 어떻게 이런 사악한 영을 여호와가 부리실 수 있는가? 또 만일 여호와가 이런 사악한 영을 부리신다고 하면 여호와도 곧 사악하신 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과 타락한 인간의 범죄의 책임도 전적으로 여호와께 있지 않는가?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절대 선하시고 자비하신 여호와는 너무 대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연속된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모순된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여호와의 주권 아래에 있는 사단

    본문은 여호와가 직접 악한 목적을 위하여 악신을 이용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악신조차도 여호와의 주권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단은 타락한 천사로서 여호와께로부터 천상에서 내어 쫓김을 당하였다.(계12:9).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여호와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며, 인간을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사단은 여호와의 피조물이며, 여호와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이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할지라도 결코 여호와의 허락 없이는 그 목적을 성취 시킬 수 없다.


    2. 사단의 활동과 여호와의 묵인

    이렇게 볼 때에 본문에서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린 것도 여호와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이렇듯 사단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당신의 주권적 섭리아래에서 사단을 유기하신 결과로 우리는 이것을 여호와의 묵인(黙認)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어떤 경우에 사단의 활동을 묵인하여 주시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크게 두 가지의 졍우를 보여 주고 있다.


       가. 타락한 인간이 그 마음에 여호와 두기를 싫어할 때 여호와는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다.(롬 1:28). 이럴 때에 인간은 자신의 죄악 된 본성에 따라 모든 불의를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사악한 영이 그에게 강하게 역사하여 그가 속히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지도록 한다. 사울의 경우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와의 교제가 끊어진 사울이 다윗에 대한 극도의 시기심에 불타 있을 때 악신이 그에게 강하게 역사하여 다윗이 실해하도록 강한 살인 의지를 심어준 것이다.


       나. 여호와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미성숙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을 연단하실 목적으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기의 욕심에 따라 인구 조사를 한 다윗이나(삼하 24장), 욥(욥 1:6-12)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들이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보여 주시고 스스로 그 시험에 빠지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따른 선한 길로 나아올 수 있게 하신다.(고전 10:13). 그리고 설령 시험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곧 회개를 통하여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연단을 위하여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시기는 하였으나 끝까지 지켜보시고 영원히 멸망 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3. 결론

    본문의 말씀은 결국 여호와와 관계가 끊어지게 될 때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떨어지게 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 사단의 권세 아래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랜드종합주석 사무엘상 18장 pp287-289 에서 옮김



    접신녀와 초혼술(사무엘상 28:12-19)

    본문을 읽어보면 우리는 사울이 정말로 사무엘의 영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울 앞에 나타난 것은 정말 사무엘의 혼령인가? 아니면 사단인가? 등의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접신녀와 초혼술의 정체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접신녀의 정의

    ‘접신녀’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두 단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바아라드 오브’, 이것은 ‘접신을 다스리는 자’ 라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쇼엘 오브’ 는 ‘귀신에게 묻는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접신녀란 귀신을 불러 미래의 일을 묻는 자, 도는 기도나 주문으로 자신에게 신이 내리게 한 후 즉 강신(降神)하게 한 후 그 신과 인간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는 영매자(靈媒者) 라고 할 수 있다.


    2. 초혼술의 정의

    여기에서 ‘초혼술’(招魂術) 이란 접신녀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접신녀를 가리켜 ‘초혼자’(Necromancer) 라고도 한다. (신 18:11).그런데 사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에서 볼 때 전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지상 세계를 완전히 떠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고, 지상 세계와는 교통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라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접신녀에 의해 나타나는 귀신의 모습이 특별히 죽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접신녀가 귀신을 부를 때에 특정한 망자(亡者) 의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11절). 그러나 사실상 접신녀에 의해 불러 올리워진 혼ㄹ형은 어떤 망자의 영혼이 아니라 그 영혼으로 가장한 사단이나 귀신인 것이다.


    3. 결론

    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접신녀나 초혼술을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로서 여호와께는 지극히 가증한 일이며, 여호와의 백성들은 이것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경고하고 있다.(신 18:10-13, 레 19:31, 20:27). 이로 볼 때 본문에서 접신녀를 통해 불러 올리워진 것은 사무엘의 영혼이 아니라 사울의 모습을 가장한 사단이나 귀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혹자는 어떻게 귀신이 사울에게 여호와의 심판을 전할 수 있느냐 (16-19절) 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강권적인 역사로서 거짓 선지자 발람을 통해서도 여호와의 메시지를 잔달하셨다. (민 23:11-12절). 따라서 여기에서도 여호와는 사단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역사하셨을 것이다.(Calvin 이 주장함 ). 실로 여호와는 만유의 주권자로서 귀신들까지도 복종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 자료출처 /  그랜드종합주석 사무엘상 28장 pp433-434 에서 옮김


    귀신(鬼神)이 하는 일(마가복음 9:18-22)

    ‘귀신’(프뉴마) 는 ‘숨 쉬다’, 바람이 불다‘,(계 7:1) 는 뜻의 ’프네오‘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 인격의 일부로 ’영‘(고후 7:1), 여호와의 ’성령‘(눅 2:27), 여호와가 아닌 악한 ’영물‘(행 5:16) 등을 가리키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 되었으나 ,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방해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영‘ 을 말한다. 성경은 많은 종류의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귀신은 오늘날도 여호와의 사역을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귀신에 의해 사로잡힌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귀신의 활동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성도들의 대응책을 강구해 보고자 한다.


    1. 귀신은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사람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서서히 얼굴이나 몸이 파리해져 간다. 그래서 우리는 환자를 볼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창백한 얼굴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파리하여’(크세라이노) 는 뿌리가 좋지 않은 식물이‘시들어 버리다’(계 14:15), 가뭄으로 나무가 ‘말라 죽다’(벧전 1;24), 어떤 사고를 통해 ‘부상을 입히다’ 는 뜻으로 기본의 뜻은 ‘건조시키다’ 이다.(마 13:6). 이것은 가뭄이 들면 나무가 물을 못 빨아들임으로 서서히 시들어 가는 것처럼 사람 역시 마땅히 공급 받아야 할 바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 혈색을 잃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귀신에 사로잡혀 파리해져 가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본 절에 나오는 소년은 이 귀신들에 의해 귀가 멀고 벙어리가 되었다. 이렇듯 귀신은 사람의 건강을 악화 시키고 해친다.


    2. 귀신은 사람이 창피를 당하게 만든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의 이상한 행동은 친척과 친구, 이웃과의 사이를 단절시킨다. 본문의 ‘엎드러져’(핍토)는 ‘떨어지다’(계 2:5), ‘박살나다’(히 11:30). ‘무능해지다’(고전 13:8) 라는 뜻으로 기본 의미는 ‘내리다’ 이다. 또 ‘굴며’(퀼리오오)는 ‘물결’(행 27:41), ‘파도’(마 8:24), 라는 뜻의 ‘퀴마’에서 유래한 말로 ‘구르다’(막 :920), ‘탐닉하다’, ‘∼에 빠지다’ 라는 뜻이며, 기본 의미는 ‘딩굴다’ 이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이 소년은 갑자기 귀신의 활동으로 인해 땅에 앞드러져 깊은 바다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큰 고통에 빠져 이리저리 몸을 딩굴며 입에는 거품을 무는 것을 말한다. 꼭 간질병 환자가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면서 거품을 무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쯤 되면 부모님 외에는 누구도 평상시에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대신 환란을 당한 욥을 찾아온 친구 (욥 2:11-13)들처럼 손가락질을 할 뿐이다. 이렇듯 창피를 당한 결과 이 사람은 사회성을 상실하고 이웃과는 단절되고 마는 것이다.


    3. 귀신은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22절)

    악한 마귀들의 마지막 계획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소년을 ‘불과 물에 던졌다’ 여기에서 ‘던졌나이다’(발로) 는 머리의 먼지를 ‘날린다’(계 18:19), 뛰어 내리다‘(마 4:6), ’내어 쫓기다‘(요일 4:8) 로도 번역되며, 그 기본 의미는 난폭하거나 격렬한 행위로 ’내던져지다‘(마 18:8-9) 이다. 또 ’죽이려고‘ (아폴뤼미) 는 완전하게 한 인격 존재를 ’파괴시키다’ (롬 14;15), ‘상하다’(눅 21:18), ‘사라지다’(약 1:11) 로 기본 의미는 ‘멸망하다’(요 3:16) 이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잃다’(레 26:38), '파멸되다‘(렘 1:10), ’죽게되다‘(욥 31:19) 이라는 뜻의 ’아바드‘ 가 이단어의 대용어로 사용 되었다. 이것은 완전하게 한 인격 존재를 상하게 하고 파멸시켜 죽이기 위해 온갖 불행이나 재난 속으로 난폭하게 집어던지는 것을 의한다. 이처럼 도저히 자기 자신을 제어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이러한 일을 겪게 될 때 사람들은 영과 육간의 파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귀신은 사람의 건강을 헤치고, 간질병과 같이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행동을 하게하고, 급기야는 죽음에까지 이를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함으로 여기에 휘말린 자는 멸망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는 속담과 같이 우리도 정신을 차리면 얼마든지 귀신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귀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요, 귀신의 공격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이다.(29절).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처럼 성도들도 예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를 파멸로 빠드리려 하는 귀신의 세력에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그랜드종합주석 마가복음 9장 pp935-936 에서 옮김


    재림(再臨)의 시기(時期)(마가복음 13:28-37)

    오늘날 세계적으로 세상 종말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시리라는 의식이 매우 크게 자라나고 있다. 이것은 시대가 점점 악하여 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재림 때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바가 오늘날 현실 속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1999년 10월 10일 24시‘, ’1999년‘ 등등 운운하여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과 직장을 저버리도록 유혹하는 때 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재림의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재림의 시기를 알아보도록 한다. 

     

    1. 재림의 시기는 반드시 온다.

    예수님은 본문 31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경고하신 바 있는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며,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한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모두 불로 태워지고 현재와는 완전히 체질이 다른 천국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벧후 3:10). 그리고 그 때에, 이 세상에서 소망을 두었고 이 세상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들도 이 세상과 함께 불로 심판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음을 명심하며 살아가야 한다. 

     

    2. 정확한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은 본문 32절에서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고 말씀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은 필연적이지만, 그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가 철저히 비밀에 가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신가?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물론 재림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재림의 당사자이신 예수님이 그 시기를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재림의 시기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의 시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잘 못된 일이다. 또하 재림의 시기를 안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여호와가 그 시기를 비밀로 하신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잇는 것인데, 그것을 알려고 애쓰는 것은 여호와를 거슬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가 비밀로 하시는 것을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 때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에 따라서 그 징조를 보고 재림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항상 재림의 때가 임박한 줄 깨닫고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가 바람직함을 교훈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오는 것을 너희가 볼 자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릏 하셨으므로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하였던 것이다. 

     

    3. 재림의시기는 급박하게 온다.

    예수님은 본뭉 35절에서 ‘깨어 있으라’ 고 하셨다.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곧 오시리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지라’( 벧후 3:8). 곧 오신다 하지만 그 기간을 인간의 눈이나 생각으로 보기에는 더딘 것처럼 느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일까? 그것은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재림의 시기가 급박하게 올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러할 때만 우리들의 삶이 올바르게 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의 심판을 생각하게 됨으로(고후 5:30), 최선을 다하여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34-36절). 그럴 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재람하시든지 명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 그리고 그 시기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그 날에 예수님은 분명히 심판하시는 주인으로서 모든 인류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재림을 대비하여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랜드종합주석 마가복음 13장 pp1030-1031 에서 옮김



    축사(逐邪-귀신을 쫓아내는 일)의 이해

    (주요주제해설)


    마가복음 9장 14-29절

    4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 곧 축사(逐邪)의 기적을 행하신 사건들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축사에 대한 기적에 대하여 혹자들은 마치 이방인들 종교의 무당들의 축사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오해를 하여 예수님이 귀신의 왕, 즉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하였다.(마 12:71).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개신교 가운데에서도 축사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교파들이 있다.

    이에 예수님의 축사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축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도록 하자.


    1. 축사(逐邪)의 정의

    ‘축사‘(Exorcism) 에 해당하는 ’엑소르 코시스’ 는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와 ‘맹세’ 라는 뜻의 ‘호르코스‘ 가 합성 된 것으로, ’밖으로 불러내어 맹세함‘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근동지역에서 축사 행위를 맹세나 저주 행위와 깊이 연관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 축사 행위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며, 보다 강한 다른 귀신이나 영적 존재의 힘을 덧입어서만 가능 함으르 암시한다.


    2. 축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점술이나 접신, 혹은 초혼술 등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구약에는 축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단지 사울이 악신에 들렸을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여 악신을 잠시 떠나게 한 사실만이 언급되어 있다. (삼상 16;14-23).

    축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기 시작 한 것은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인 동안이며, 외경이나 쿰란 공동체와 같은 단체들의 글들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한편 구약 성경과는 대조적으로 신약 성경, 특히 공관 복음에는 많은 축사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마 8:16, 막 1:21-28, 눅 4:31-37,등). 그 중의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인데, 본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마 12:27).

    한편 오순절날 성령 강림 이후 12사도들도 종종 축사의 기적을 행하였다.(행 19:12).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어떤 유대인의 마술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다가 실패한 사실도 있었다.(행 19:13-16).


    3. 예수님의 축사 기적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축사(逐邪 Exorcism) 기적들이 다음과 같은 크게 두 가지의 듯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가. 치유 기적으로서의 축사

    예수님께서 처음 행하신 기적 가운데에는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유하신 것도 많으나,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귀신들린 거라시 광인을 고치신 기적이다.(막 5:1-20). 귀신의 하는 일은 대게 인간에게 악영향을 주는 일로서 때로는 미치게 하거나. 병을 일으키는 일도 한다. 예수님게서는 이럴 때에 축사의 기적으로서 귀신이 일으킨 병을 치유하셨다.


        나. 메시야 사역으로서의 축사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신 목적이 단순히 이들에 대한 동정의 표현만은 아니라 영계(靈界)와 그 모든 영적 존재의 주인이시며, 또한 그와 같은 권세를 행하실 수 있는 주인이시며, 또 그와 같은 권세를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귀신을 향하여 예수께서 큰 권세로 ‘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고 명령하신 부분에서 확인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축사의 기적은 이 땅에 여호와의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로서 이제 악한 세력들을 축출시키고 여호와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하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각 고을에 파견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축사의 능력을 주셨는데 (마 10:1), 이 역시 제자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온 백성 앞에서 증거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권세의 근원이기 때문에 귀신에게 직접 명하여 능히 쫓아 낼 수 있었으나, 12 제자들은 오직 예수로부터 받은 권세로 축사를 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자들의 축사에 있어서는 일차적으로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요청되었던 것이다.(막 9:19).


    4. 축사(逐邪 Exorcism) 의 의의

    축사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가 받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 할 때(고전 12:7-11) 축사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도 바울 자신도 귀신을 쫓아냈다. (행 19:12). 그러나 축사를 일반 성도들의 은사로 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메시야 사역의 한 장표로서 축사의 기적은 예수 시대로 끝나고 그 이후는 단지 질병을 고치는 수단으로서만 축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의 은사 중에서 병고치는 은사((고전 12:9)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 축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상의 사실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 서 행해지는 축사는 주로 귀신으로 발생하는 병을 고치는 수단으로 행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에 의해서만, 그리고 성도의 믿음이 동반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축사의 행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경우에만 합당한 것이며, 이방 종교의 무당처럼 행하거나 또는 믿음이 없이 거짓으로 핼 할 때에 그것은 참 성경적인 축사(逐邪)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랜드종합주석 마가복음 9장 pp918-920 에서 옮김





    성도의 2중 생활(여호수아 16:1-3)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L. B. Stevenson) 의 「 저킬 박사와 하이드씨」 를 알고 있는가?
    의사인 지킬 박사는 어느 날 자기 속의 악(惡)을 분리하고 확대시키는 약을 스스로 조제해서 먹고 극악한 하이드로 변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이 실험이 반복되자 면역성이 생겨 다시는 지킬 박사로 돌아 올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인간 안의 선과 악의 대조와 균형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의 삶이 꼭 이와 비슷하다.
    우리 안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있다(갈 5:17).
    그래서 우리는 중생한 이후에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때도 있고,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는 경우도 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지명(地名)의 의미는 이러한 이중적인 삶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1. 여호와의 집에서의 삶

    ‘벧엘’ 은 ‘집’ 을 뜻하는 ‘바이트’ 와 ‘여호와를 가리키는 ’엘‘ 의 합성된 지명이다. 그래서 그 의미는 ’ 여호와의 집‘ 이다. 여호와게서는 이곳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창 12:7-8), 야곱을 만나셔서 복을 주셨다. (창 35:9-15). 그래서 야곱은 이 벧엘에 단을 세웠다. 벧엘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이 만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벧엘에 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의 벧엘은 어디인가?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그것이 곧 벧엘,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이다. 또한 야곱이 단을 쌓은 것처럼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벧엘에 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생활을 할 때, 여호와께서는 더욱 큰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2. 세상 집에서의 삶

    우리가 사는 또 다른 집은 ‘세상의 집’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본문의 ‘벧호른’ (3절) 역시 ‘집’ 을 뜻하는 말로서 ‘바이트’ 와 ‘호르’ 의 합성명사이다. ‘호르’ 는 ‘’둟다‘ 라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는 뱀들이 서식하는 ’갈라진 틈‘ , ’구멍‘ 따위를 의미하며, 때로는 큰 ’동굴‘ 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벧호른‘ 은 ’동굴의 집‘ 을 의미하는데, 상징적으로 ’공허의 집‘, ’진노의 집‘ 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성도에 있어서의 ’벧호른‘ 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 을 가리킨다. 이런 삶은 그 의미 그대로의 함정과 같다. 거기에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다. 세상의 삶은 공허하며, 절망만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세상적인 삶을 추구한다. 성도들은 여기에서 떠나야 한다. 롯의 사위들은 그 사악한 도시를 떠나려 하지 않다가 함께 심판을 받았다.(창 19:14).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창 19:26). 그러므로 우리는 즉시, 미련 없이 벧호른을 떠나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여호와의 집인가? 아니면 세상의 집인가> 여호와의 집에는 은혜와 복과 사랑이 있다. 세상의 집에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아도 사실은 빈 집이다. 거기에는 절망과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세상 집에 머물러 있다면 즉시 떠나자. 그리고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는 여호와의 집으로 지금 돌아오자. (눅 15:11-32). 그러면 여호와께서 기쁘게 맞으시며 영원한 사랑과 복을 베푸실 것이다. 자 지금 일어나자! 지금 여호와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 자료출처 /  그랜드종합주석 여호수아 16장 p299 에서 옮김





    갈렙 - 담대하고 정직한 가나안 정탐꾼


    1. 인적사항

      가. 가나안 12 정탐꾼 중의 한 사람(민 32;12)

      나. 갈렙은 ‘개’, 공격자‘ 라는 뜻임.

      다.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민 13:6).

      라. 갈렙(갈렘) 족속의 선조(삼상 25:3).

      마. 악사라는 말을 들음. 사사 웃니엘의 장인(삿 1;12-13).

      바. 자손으로는 이루와 엘라와 나암과 엘라의 자손과 그나스가 있음.

             (대상 4:15).


    2. 시대적 배경

    갈렙이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과 시내와 가나안 정복 시대이다. 즉 갈렙은 출애굽 2년 B.C.1445년경 가나안 정탐을 위해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 그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을 뿐아니라, 그때의 공로로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제1세대 중에서 유일하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가나안 땅 분배 이후 기업을 확보하기 위한 가나안 정복 정착 전쟁에 있어서도 85세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최선봉에 서서 활약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로써 갈렙은 출애굽 시대로부터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다.


    3. 주요 생애

    가나안 정복 이전

    출 생

    1세, B.C. 1485년

    민 13:6

    출애굽

    39세, B.C. 1446년

    출 12;37, 41

    가나안 정탐꾼으로 선발됨

    40세, B.C. 1445년

    민 13;1-8

    정탐 후 긍정적인 보고로

    생명의 위협을 받음

    민 14:10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얻음

    민 14;24, 30

    39년의 가나안 생활

    B.C. 1445년 -

    1406년

    민 32; 12-13

    가나안 정복 이후

    가나안 땅의 분활 작업을

     도움

    85세, B.C.1400년

    민 34;17, 19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음

    수 14:6-15

    드빌을 점령함

    ----

    삿 1:11-12

    딸 악사를 웃니엘에게 시집

    보냄

    ---

    삿 1:13-15

    죽 음

    ---

    삿 2“10


    4. 성품

     가. 가나안 정탐 후 다른 10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모든 사태를 긍정적으로

          보고 반드시 그 땅을 정복하리라고 말한 담대하고 긍정적인 성품.

           (민 14;6-9).


     나. 유다 지파를 대표하여 가나안을 탐지하고, 또 가나안 땅의 분할 작업을

           도울 자로 선발된 만큼 충직하고 의로운 자(민 13:6, 34:19).


     다. 지난날 가데스 바네아 때의 정탐을 회고하며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오늘날까지 번함 없음을 고백하는 성결된 모습과 깊은 신앙심의

            소유자(수 14:6-8).

     라.  8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헤브론 성읍의 탈환에 앞장설 정도로

            진취적인 성품(수 14;10-15).

     마. 자신의 힘과 재산을 아끼지 않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강한 책임감의

            소유자(수 15:13-19).


    5. 구속사적 지위

       가. 가나안 정탐꾼의 일원이었던 갈렙은 먼저 자신의 사명을 충직하게

              감당하였고, 또한 그 결과를 믿음에 따라 담대하게 보고하는 확신 있는

             용사였다.(민 14:6-8). 이것은 오늘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참으로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믿음 대문에

            갈렙은 담대하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담대함으로 떳떳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행 9:27, 29, 엡 3:12).

      나. 갈렙은 불평하고 저주하는 주위의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호와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며, 무리를 회개하도록 하였다.(민 14:9).

             이러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와의 놀라운 복을 받을 수 있었다.(민 14;24).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약속된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자만이 그 약속의 기업을

             부여 받게 됨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나에게 약속해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그 말씀을 믿고 전진하는 행동을 하고 있

             는가? 실로 여호와의 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고후 5:7).

      다. 갈렙은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 성읍의 탈환을 지휘할 만큼

             진취적이었다. (수 14:10-15). 이것은 예수님의 일에 진취적이며

             뚜렷한 신앙적 목적이 있는 자는 노년이 되어도 곤비치 않고 매사에

             진취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이는 나이를 핑계로 결코

             예수님의 일을 등한시 하거나 나약해져서는 안 됨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소망의 확신과 신실한 봉사로서 끝까지 예수님의 일에 매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사 40:29-31, 갈 6:9).


    7. 핵심 성구

          “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들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그랜드종합주석 여호수아 15장 pp280-282 에서 옮김


    ▣ 리스트의 제자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내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음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마는 것이 됩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백배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자모님들을 초청하여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고 설문을 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가 자라나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
    나누어 드린 종이에 그것을 써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를테면 기술자, 학자,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자모님들은 모두가 한 가지씩 바라는 인물상을 밝혀 주었다.
    그런데 한 어머니는 좀 색다른 대답을 했더라고 한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에는 이 어머니가 가장 큰 인물을 소원한 것 같다.
    큰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든가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 못 들어갑니다 !

    오스트리아의 서울 비엔나에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소중하게 소장되어 있다.
    참으로 특별한 그림이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 하는데 주교가 문을 딱 막아선 채 "못 들어갑니다 !" 하고 저지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소재가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A.D. 390년,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진압한다고 데살로니가 시민을 1,500명이나 학살하고 말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교회는 로마 황제를 엄히 정죄했다.
    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했다.
    당시 밀라노의 사교(司敎)는 저 유명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였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분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분한테 걸려든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정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황제를 단호히 가로막았다.
    "못 들어갑니다 ! "
    서슬이 시퍼렇게 선언한다.
    목숨을 건 암브로시우스의 이러한 태도 앞에서 황제는 얼결에 대꾸한다.
    "성경에 보면 다윗 왕도 죄인이 아닙니까 ?"
    그러니 자기에게도 이렇게까지 냉혹하게 대할 것은 없지 않느냐 하는 뜻의 변명인 셈이다.
    "다윗의 죄를 모방하시렵니까 ?" 하고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렇다면 다윗의 참회도 모방하셨야지요. 다윗처럼 회개를 하십시오 !"
    황제는 기가 질려서 땅바닥에 엎디고 만다.
    이것이 그림의 내용이다.

    ▣ 당신의 죄가 가리워져서

    옛 켈트 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자, 천사가 한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나라로 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 영혼은 천사를 따라가면서 못내 걱정을 한다. "이렇게 함께 가자고 하시니 따라가기는 합니다만 나같이 죄많은 영혼이 감히 그 거룩한 나라에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 저는 워낙 더럽고 죄가 많은 놈입니다." 그는 죄가 많은데, 죄가 많은데 하고 되뇌면서 어느덧 천국문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것 보라. 천국문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송구스러워하던 영혼이 자신을 보니 아주 깨끗해져 있는 것이다. 아무 허물도 없더라는 말이다. 그 영혼이 묻는다. "내가 죄많은 사람인데 어이 이처럼 깨끗하게 되었지요 ?" 천사가 대답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로 다 덮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죄가 가리워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마침내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 금식의 날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년 4월 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의 날로 정하자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고 한다. 그의 청원서 내용을 살펴보자.
    '그것(금식)은 하나님의 힘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국가적 의무입니다.
    바야흐로 우리 국토를 황폐화하고 있는 이 남북전쟁의 무서운 재앙은 우리 선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 전국민에게 필요한 개혁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릅니다.
    끊일 줄 모르는 성공으로 자만하느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죄 탓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은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할 때인 줄로 압니다.'

    매년 5월 첫째 목요일에 열리는 미국의 '국가 기도의 날'
    미국 전역의 크리스천들이 미국과 미국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한국의 국가를 위한 기도의 날 / 매년 5월 31일

    이윤영 의원의 대표기도(일동 기립하여)

    - 제헌국회 의원 198명 참석 -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 꺼내 보임)하신 것으로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 자료 출처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속기록

    정시(呈示. 꺼내 보임)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


    ▣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로 주후 4-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날 때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말하였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
    --- 그는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 겨우 이것이 전부냐?

    로마의 케사르(Caesar, Gaius Julius)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로마의 전성기, 온 세계를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황제는 군중들의 환호성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립니다. 이 때, 그는 번쩍거리는 면류관을 벗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겨우 이것이 전부냐? 도대체 이게 무엇인데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생명을 바친다는 말이냐?" 이것이 전부냐--여러분, 끝을 알고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별것도 아닙니다.

    ▣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 먹고 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
    "저요 ?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 예배당과 도서관이 가지런히 있다는 것?

    제가 1963년 프린스턴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오리엔테이션 맨 첫 시간에 큰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예배 때에 총장님이 설교하신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 보시면 아십니다만 거기 큰 예배당에 촛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오랜 파이프 오르간은 국보급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잘 지은 큰 단층 돌집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총장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예배당과 도서관이 가지런히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오. 교회는 우리 마음의 고향입니다. 도서관은 우리 지성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교회당보다 도서관을 높일 수가 없어서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 한 층을 지하로 넣고 한 층을 지상으로 해서 예배당보다 낮게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라도 도서관을 채플보다 낮춰 지었다는 그 의미를 아시오. 이것이 프린스턴의 정신이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서관과 채플은 가지런히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도서관보다 교회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인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 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 "예,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 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 내 아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미국의 한 부흥사가 하루는 버스를 탔는데, 뚱뚱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개구장이 어린아이 다섯을 데리고 올라탔다. 억지를 부리는 놈, 떼를 쓰는 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놈에다 버스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를 피우는 놈 해서 버스 안이 이 어린아이들로 난장판이 되었다. 뚱뚱한 아주머니는 이런 아이들을 때리고 욕하고 저주하고 팔짝팔짝 뛴다. 피곤해서 쉬고 싶었던 그 부흥사는 도무지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짜증을 부릴 지경이다. 그런데 문득 마음속에 감동이 온다. 범사에 감사하라 --- "그래, 감사해야지, 하나님이시여, 저 여자가 내 아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그는 기도했다.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할 줄 아는 자기 나름의 비법을 찾아내야 한다.

    ▣ 수천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는데도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에 총장으로 있던 워터폰박사가 어느날 교회에 갔더니 한 장로님이 "박사님, 감사합시다." 그러더란다. "박사님, 제가 지금 한 2마일 밖에 있는 저 마을에 살지 않습니까 ? 그래서 여기까지 올 때에는 마차를 타고 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나오다가 언덕으로 내려오는데 말이 그만 무슨 소리에 놀라서 냅다 뛰는 바람에 마차 바퀴가 빠지고 몇 바퀴 뒹굴었습니다. 아이쿠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 보니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가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언덕을 수천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는데도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내가 더 감사하지요."

    ▣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신학자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서 고백한 말이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멋대로 드리는 기도를 받아주셨으면 나는 거만하고 인정이 없고 밉살스러운 인간이 됐었을 것입니다. 아, 실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죄다 물리치시고 나의 원하시는 것을 파괴하십니다. 당신은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나를 이끌어 가시사 나로 하여금 구하지 않는 길로 가게 하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이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라는 귀한 갓를 만들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한다. "목사님, 만일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 뉴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선택의 절대적 필요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이다.

    ▣ 나침반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대학교 졸업식에서 노교수 한 분이 사회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이제 위험한 바다에 배를 띄워 항해를 떠난다는 것을 자네들은 알겠나 ?" 라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학생들은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학생 하나가 그 교수님 가까이로 가서 말합니다. "위험한 바다를 향해서 출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성경책을 꺼내더니 "위험한 바다에 막연하게 떠나는 것 같으나 나침반이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직한 학생이 아닙니까 ?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 새벽 기도를 시작하셨겠구나

    6.25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앙심 깊은 어느 부모가 아들을 최전선으로 보내며 당부했습니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어느 곳에 있든지 새벽 5시가 되면 우리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전쟁터는 험한 곳입니다. 많은 시험이 있고 유혹이 있고, 잘못될 길이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 기도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죄의 길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지켜 경건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새벽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의 부모님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마고 약속한 시간 아닙니까 ? '지금쯤 어머니 아버지께서 새벽 기도를 시작하셨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젊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그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마음이 생겼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머리 위로 "타-앙 !" 하고 총알이 날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서 있었다면 그는 영락없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세요

    루마니아의 공산당원들이 어느 목사 한 사람을 끌어다 놓고 심한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하라고, 신앙을 부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독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자, 공산당원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목사의 14세된 외아들을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고문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자, 아버지는 참다못해 외쳤습니다. "멈추시오 ! 내가 예수님을 부인하겠소 !" 그때 목사의 아들이 죽어 가면서 말하기를 "아버지, 방금 말씀하신 것 취소하세요.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세요. 저는 예수님 이름을 저주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했다는 것입니다.

    ▣ 거기에서 남은 이윤으로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왕세자비가 될 자부(子婦)를 얻기 위하여 온 나라 곳곳에 방을 붙이고, 귀한 집안의 규수들을 모아서 일일이 심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제 마지막 후보로 열 처녀가 발탁되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될 임금님은 이 열 처녀들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쌀을 담은 밥그릇을 제각기 하나씩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열흘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했습니다. 어떤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또 어떤 처녀는 열 등분으로 나누어서 조금씩 조금씩 열흘 동안 아껴 먹었습니다. 열흘 후, 처녀들은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 비실비실합니다. 아예 어떤 처녀는 쓰러져서 업혀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히 한 처녀는 아주 얼굴이 환하고 예뻐졌을 뿐아니라, 떡을 한 시루 머리에 이고 궁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임금님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너는 그 한 그릇의 적은 쌀로 열흘 동안 먹고, 또 떡까지 해가지고 왔느냐?" 그랬더니 이 처녀가 말하기를 "그 쌀로 떡을 만들어 가지고 나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고 해서 저도 먹고 집안사람들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임금님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처녀가 왕세자비로 간택되었다는 것입니다.

    ▣ 절대로 시계를 보지 말게

    토머스 에디슨은 평생 많은 발명을 하여 발명왕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또한 2,000여 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에디슨에게 부탁했습니다. "자네가 일평생을 살고 느끼면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 가지를 내 아들에게 이야기해주게. 내 아들은 지금 사회를 향해서 첫 출발을 하려 하네." 그랬더니 에디슨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시계를 보지 말게"--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그저 열심히 일을 하고, 시계를 보지 말아라, 또한 보수라든가, 일함으로써 생기는 그 다음 결과라든가, 칭찬이라든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라, 일하는 동안에는 오직 그 일만 열심히 하라.라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또, 팔순이 넘은 그의 생일 축하파티에 친구들이 다 모였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어떠한가?" 에디슨은 대답합니다. "나는 매일 다섯 시간 쉬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실에서 일하네. 나는 장례식 3일 전까지 이렇게 일할걸세." 실제로 에디슨은 그가 미리 얘기한 그대로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자, 에디슨이 팔순이 넘도록 일할 때, 무슨 다른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보수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칭찬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성공이나 명예를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한 것 뿐이요, 일을 즐겼을 뿐이요, 일에 도취된 것 뿐입니다. 이것이 부지런입니다.

    ▣ 정직함을 25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밖에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자기 언니들에게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25전 짜리 돈을 들고, "나 이거 오늘 벌었다."고, 돈을 벌었다고 신바람 나서 자랑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 했더니, "내가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운전대 옆에 있는 그 돈 넣는 함이 있는데, 거기다 넣으려고 하니까 키가 작아서 발버둥을 하고 넣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밀어버렸어요. 그만 뒤로 밀려나서 그대로 저쪽으로 나와 버렸어." 하는 거예요. "나 오늘 공짜로 버스를 타고 돈 벌었다!"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이 놈아, 너는 우리 윌리엄스 가문의 가장 높은 자랑인 명예, 즉 정직함을 25전에 팔아먹은 놈이다!"고 하면서 통곡하며 울었답니다.

    ▣ 손님은 항상 옳다

    백화점으로 세계적으로 성공한 큰 백화점 왕이 있는데, 그의 성공 기록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의 사훈(社訓)이 오직 하나입니다.

    <커스텀 이즈 올웨이즈 라이트(Custom is always right)><손님은 항상 옳다> 이런 말입니다.

    ▣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

    재미 사업가인 백영중이라고 하는 분은, 현재 미국의 '강철왕'이라고 별명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쓴 책이 10월 7일자로 며칠 전에 나온 것입니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라고 하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원제목은 <노우 머니 노우 잉글리쉬(No Money No English)>입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패코스틱이라고 하는 큰 회사의 회장인데, 아이빔(I-beam)을 생산 판매해서 연 매출액이 2억 불입니다. 경량철골 관계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60%를 차지하고 있는 큰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 백 회장은 선천에서 났고, 홀홀단신 혼자서 월남을 해 가지고 남한에서 살아보려고 하다가 잘 안 돼서 그는 미국으로 갑니다. 가서 수고 많이 해서 자수성가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어서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그는 너무 고달프고 어려울 때, 식당에서 일을 할 때, 그 어려운 가운데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북에서 쫓겨나 남에서 못 살고 미국에 왔는데, 이 이상 더 물러설 수 없다.' 오직 성실과 진실로 대합니다. 노 머니 노 잉글리시(No Money No English),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해요. 그런데 회장이 되었어요.

    ▣ 성실, 성실, 진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소중히 여기는 바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라이프찌히의 조그마한 토마스 교회라는 예배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합니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했습니다. 그 곡이 출판된 일도 없고, 발표회 한 일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나 매일같이 성실하게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해 나갑니다.

    결과로 265개의 오르간 곡과 263개 합창곡, 162개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유명해 졌어요. 악성이라고 할만큼 높은 이름을 가지게 될 때 그 옛날에 작곡해 놓은 것들이 전부 높은 값에 팔리게 되고,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유명해 져서 작곡한 게 아니에요. 오로지 성실했던 것입니다. 무명의 오르가니스트로 그저 성실, 성실, 진실, 이것이 마침내 바하를 만든 것이에요.

    우리가 존경하는 안창호 선생님은 학벌이 중학교 2학년 중퇴입니다. 그의 이력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이력서에 거침없이 '중학 중퇴', 그리고 특기는 '배 노 젓는 일과 청소하는 것' 이것입니다. 특기를 '청소하는 것'이라고 써 놓고 담대하게, 정직하게 산 안창호 선생님입니다.

    곽선희목사 설교집 예화

    ▣ 조금 더 가지면

    세계적인 재벌가 록펠러에게 "사람이 얼마만큼 돈을 가져야 행복한가 ?" 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가지면 행복하다" 고 지혜롭게 대답했다.

    ▣ 물 위로 배가 지나가게 하랴

    중국의 유명한 부흥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리 라는 분이 있다. 그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20대에 중한 병을 얻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죽음을 앞에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환상 중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난데없이 큰 바위에 부딪혔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답답해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위를 치워 주랴, 물이 불어나서 물 위로 배가 지나가게 하랴' 물으셨다. 워치만 리는 바위는 그대로 두고 물이 불어나 그 위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원해서 그렇게 지나갔단다. 이 환상을 본 다음에 그는 특별히 은혜를 받아서 평생토록 귀한 일을 하는 주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 여기가 바로 천국

    인도의 선교사 선다 싱은 네팔에서 선교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살인강도들과 한 감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 흉악범들에게 전도를 했다. 예수 믿고 중생하면 몸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마음은 천국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더니 그들이 변하여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간수가 들어와 보니, 살인강도들이 기쁨에 넘쳐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 그래서 천국이 따로 없고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 쥐 생각밖에는 없었느니까요

    구우즈라고 하는 어느 어머니가 모처럼의 특권을 얻어서 평생 바라던 영국 여왕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생 중 처음이자 마지막 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는 여왕을 뵈러 가면서 사랑하는 고양이를 데리고 갔답니다. 고양이는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쥐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 고양이는 쥐 잡느라고 돌아다녔습니다. 고양이에게는 쥐 생각밖에는 없었느니까요. 고양이는 한 번도 여왕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궁전을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 한 가지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한 상습적인 탈영병이 있었다. 그는 용감하고 늠름한 청년이었다. 다만 웬일인지 규칙적이고 조직적인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탈영을 하는 것이다. 그는 붙잡히면 또 탈영을 하고 또 붙잡히면 다시 기회를 노려 탈영하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형량이 점점 늘어나서 드디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처음에 그가 저지른 죄목은 탈영한 것뿐인데 사형까지 받게 되니 재판장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 그래서 사형을 언도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 청년이 사형을 받게 되기까지의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들은 이 사람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교육을 시켰으며 매질도 했고 고생도 시켰으며 심지어는 간곡히 사정도 해 보았습니다만 그는 기어이 좋은 군인이 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침통해하며 말했다. 그때 탈영병의 친구 한 사람이 일어 서서 "재판장님, 그동안 이 친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을 잘 압니다만 한 가지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용서를 한 적이 없었다.

    ▣ 당신의 정치 이념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어느 날 해군 참모총장에게 "당신의 정치 이념은 어떻소 ?"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배를 몰고 나갈 때에 파도가 높이 올라가면 사자처럼 용감하게 파도를 향하여 도전합니다. 그러나 파도가 점점 더 높아지면 잠깐 기다리면서 배 안에 쥐가 있지 않나 하고 살핍니다. 쥐가 구멍을 뚫으면 큰일이므로 조용히 쥐를 잡습니다. 그리고도 파도가 멈추지 않고 더 거세게 높이 올라 속수무책이 되면, 즉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게 되면 결단을 하고 정의의 편을 택합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수년 전에 미국의 대통령 후보였던 카터가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할 때에 그에 대한 기사가 여러 가지로 났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로, 그는 주일이면 선거 운동의 바쁜 일정을 멈추고 고향 조지아 주에 있는 자기네 교회로 돌아와서 주일학교 교사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가 23년 동안 가르쳐 오던 교회학교 교사직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기왕이면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큰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선거 운동도 겸해서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차분하게 자기 교회로 돌아와서 20여명 되는 작은 반의 교사직에 충실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그가 20여명을 앉혀 놓고 성경을 가르칠 때, 취재 기자들은 70여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그는 조용히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나서 기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여러분이 이 교회를 나왔습니다만 다음 주일부터는 각자 자기네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조용히 명상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다.

    ▣ 불이 꺼진 지도 모른 채

    헬라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칠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 등불이 안보인다는 말이요?"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꺼진 등불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직접 한번 만져보시오." 장님이 등을 만져보니 정말 싸늘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에 불이 꺼진 지도 모른 채 그대로 등불을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 어른들은 왜 전쟁을 시작하나요 ?

    한 어린 소년이 아버지께 질문을 했다. "아빠, 전쟁은 무서운데 어른들은 왜 전쟁을 시작하나요 ?" 아버지는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얘야, 네가 알아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한가지 예를 들면, 1914년에 일어났던 세계전쟁은 독일이 벨지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단다"라고 설명을 시작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여보,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진실되게 바로 알려야죠. 그 전쟁은 처음에 누군가가 살해되어 복수하고 또 복수하다가 시작된 거죠"하며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다. 화가 난 남편은 아이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내는 반대하여,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아내가 먼저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 이 광경을 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쟁이 왜 시작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이다.

    ▣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1943년 2차대전 때에 연합군 군함 3천척과 군인 8만 명이 지중해 말타 항구를 떠나 시실로 섬으로 쳐들어 갈 때의 이야기이다. 그 많은 장비와 군인들이 일시에 떠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차렷자세로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참모들도 모두 함께 경례를 했다. 이어서 장군은 하나님께 "하나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기술과 노력을 다 동원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지금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영국의 코벤트리라는 도시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2차대전 때 다 타 버리고 교회 한쪽 벽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그 벽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라는 큰 팻말이 붙어 있다.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이 현장을 그대로 보게 하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에 박물관을 짓고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여 후세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대단히 큰 카이제르 기념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 역시 모두 불타서 종탑만 우뚝 서 있다. 후에 교회를 다시 지을 때에도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옆에다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6.25 흔적은 어디로 갔는가 ? 유감스럽게도 아픔을 볼 수 있는 산 증거가 없다. 그래서, 그 많은 경험과 아픔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 증거 없이 아무리 전한들 설득력이 없다. 아니,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져 정신이 해이해져 가고 있다.

    ▣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다

    미국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법천지인 그 때에는 총을 난사하는 등 많은 살인이 저질러져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 덕망 있고, 선량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는 아주 온순한 한 청년이 술집에서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됨이를 익히 아는지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해서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서명을 하고 탄원한 끝에, 드디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들고 감방에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미 그 전의 온순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포악해졌는지, 주지사를 향해서 폭언을 하고 거칠고 난폭한 행복을 했습니다. 뉘우치는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지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청년은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습니다. 자기를 구하려는 동리사람들의 은혜를 저버린 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이냐?

    페르시아의 왕이 세 사람의 현자(賢者)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늙어서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가난해도 상관없지만, 늙어서 가난해지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주어질 때에 그것에 한계를 느끼고 제일 괴로운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무 선행도 없이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제야 왕은 "네 말이 맞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잘살고 못살고가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선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 후회와 뉘우침밖에 없는 그 시간에 임종을 맞게 된다면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진리일 것입니다.

    ▣ 고대 기도문

    옛부터 전해지는 고대 기도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진리를 피하려고 하는 비겁함으로부터, 진리를 반쯤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으름으로부터, 모든 진리를 안다고 하는 오만함으로부터, 오!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 이발사의 아들 하나를 끌어다 놓고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불가능은 없다고 호기를 부리던 영웅 나폴레옹이 한창 득세하고 있던 때이다. 어떤 기회에 병사 하나가 나폴레옹에게 질문을 했다. "장군께는 어느 때가 가장 무서운 때입니까 ?" 그러자 나폴레옹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발사를 불러다 면도를 할 때가 제일 무섭다네. 이놈의 면도칼이 목줄기를 훑을 때는 으스스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부하를 시켜 이발사의 아들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 아이의 목을 잡고 있게 한다네. 이발사가 내 목을 베는 날에는 그 아들녀석도 목졸려 죽는 거지 뭐."

    ▣ 사랑의 마음을 알고

    바로 며칠 전에 어느 기업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근로자들의 파업 농성으로 작업이 중단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장은 무던히 애를 썼다. 회장이 이러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되었나 ?" "대단히 강경합니다." "어떻게 할 참인가 ?" "양보하지 않겠습니다. 주동자들을 전부 책벌하겠습니다." "아하, 그러면 안 되네. 회사의 사정이 실제로 어렵지 않은가. 그 어려운 사정을 알아듣게 설명해 주어야지. 그리고 사정이 나아지면 월급을 올려 주겠다고 할 일이 아닌가. 회사가 어디 우리들만의 것인가. 모든 종업원들의 것임을 납득시켜서 합의를 봐야지, 책벌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게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전화 교환수가 엿듣고 파업 주동자를 찾아가 귀뜀을 했다. 회장의 이 사랑의 마음을 알고 감동한 나머지 근로자들은 그날로 파업을 풀었다는 이야기이다.

    ▣ 의가 있는 나라는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라의 한 마을에 가난한 여자가 하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웃 제(齊)나라에서 노나라를 정복하려고 이 마을에도 쳐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한 아기를 안고 한 아기는 손목을 잡은 채 이끌고 난리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적은 점점 가까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느라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잡혔구나 싶었을 때, 여자는 부득불 한 아기를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얼른 내려놓고, 손목을 잡고 있던 아기만 데리고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차라리 손목잡고 있던 아기를 버리고 안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가야 빨리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적의 장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금전에 아기를 버리는 그녀를 보았던 장군은 이상하다는듯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내려놓고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도망을 쳤느냐?" 여자는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내가 품에 안고 가던 아기는 내 아이요, 손목을 잡고 가던 아기는 내 형님의 아이입니다. 난 내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적인 사랑을 택하여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내 자식을 구원한다면 나는 좋겠지요. 허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 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제나라 장군은 크게 감동하여 "의를 아는 여자가 있는 도성은 쳐들어갈 수 없다. 의가 있는 나라는 공격하지 못하는 법이다"라며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곽선희목사 설교집 예화

    ▣ 어머니를 대신하여

    옛날에 어머니에게 효성이 아주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나라도 잘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법을 반드시 지키도록 형벌을 엄하게 했습니다.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40대씩 매를 쳤습니다. 이른바 태형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질서가 제대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공교롭게도 왕의 어머니가 범죄를 저질러서 왕 앞에 붙들려왔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근심스러운 얼굴로 '저 효성이 지극한 왕이 이제 자기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에 어머니라고 봐준다면 모처럼 세운 이 나라의 공의와 질서는 와르르 무너져버릴텐데..... 어찌될 것인고?'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재판장 자리에 앉은 왕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야 무겁게 입을 열어 명령했습니다. "저 여자를 기둥에 묶으라! 그리고 법대로 40대를 매우 치라!"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니 안칠 수가 없었습니다. 막 치려는 순간, 갑자기 왕이 달려들어 자기 옷을 다 벗고 어머니를 꽉 껴안았습니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40대의 매를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왕의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이 나라의 공의를 드높이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 지금봐, 어서. 지금 보라고

    여러분, 사랑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좋아서 사랑합니까? 우스운 아야기지만 제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기에 그 집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갓결혼한 신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못생겨보입디다. 마침 신부가 잠깐 부엌으로 나간 사이에 "자네, 저 얼굴을 평생 보고 살 텐데 괜찮은가?"하고 친구를 떠보았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 "가만히 있어. 조금 있다가 보면 알아"하고 대답합니다. 이윽고 신부가 들어와 차를 따라주고 다시 방을 나가는데 친구가 저를 툭툭 치며 신부를 가리킵니다. "지금봐, 어서. 지금 보라고." 눈을 들어보니 그것 참, 뒷모습이 예뻐요. 그래서 결혼했다고 하는 사연입니다. 사실 어디 한 군데, 아주 아름답고 마음에 딱들면 결혼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 따지고나면 누가 결혼을 합니까?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그 삶의 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사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가 87세 때, 알렉산더 메즈어라고 하는 분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가 아니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이 아니면 원하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전도자를 내게 백 명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지옥의 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백 명만 있으면 이 나라를 구원하겠다 함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말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사람 칠백 명만 주십시오." 칠백 명만 있으면 그 넓은 미국은 산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 그 몇 사람에 의해서 나라도 민족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 형제의 선물

    이번 달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선물가게를 하는 다나 패트슨이라고 하는 주부가 쓴 글입니다. '어 브라더스 기프트(A brother's gift)', '형제의 선물'이라고 하는 글이 잡지에 실렸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그대로 적어서 실은 것입니다. 그녀는 전남편에게서 낳은 21살 된 아들 제임스가 있습니다. 지금 재혼해서 사는 남편 사이에서 낳은 12살 된 러키라고 하는 딸이 있고, 또 그 뒤에 지금 4살 된 아이가 있습니다. 이 4살 된 꼬마가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4살 짜리가 간에 악성 바이러스가 침투하여서 제 기능을 못하게 막아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12시간 내에 간을 이식 받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시간에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살아있는 간 기증자를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신장 기증자가 종종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신장이 둘입니다. 그거 하나 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뿐인 간을 그 절반을 잘라서 주어야 됩니다. 그런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이식 받아야만 산다고 하는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이러한 기증자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초조하고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전남편의 아들인 제임스가 이복형제입니다. 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는 같습니다. 그 이복형제 제임스가 자기 동생을 위해서 간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원하게 될 때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수술 결과도 보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사해 본 결과 다행히 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데도 어느 정도 체질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수술을 받게 됩니다. 간이식 수술을 하는 순간 수술실 밖에서 어머니는 딸의 손목을 잡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4살 난 꼬마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지마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잘못되면 아들 둘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절박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여, 저 두 자녀를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마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자기 생명 같은 간을 동생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나선 제임스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이렇게 전부 이기적이고 이 세상이 사악한데, 어떻게 자기의 친동생도 아닌 이복동생에게 간을 나누어주겠다고 그렇게 수술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면서 고맙기 그지없어요. 그래서 말입니다. 이편으로 생각하면 지금 살아날 수 있을까 초조하고 불안하고 걱정 근심이 있습니다마는, 제임스가 동생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을 생각할 때, 그 형제애를 생각할 때는, 형제가 형제에게 나누어주는 선물, 어 브라더스 기프트(A brother's gift), 이것을 생각할 때는 감사 감격합니다. 우리 집안에, 제 자녀 중에 이렇게 거룩한 사랑을 지닌 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고 한편으로는 감사요. 이 같은 거룩한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감사 감격했습니다. 수술은 잘 되어서 두 사람의 생명을 다 건졌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다고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착한 이발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신부가 찾아와서 이발을 했어요. 이발사의 마음에 '이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주의 종을 이발을 내가 해 드렸으니 오늘은 요금을 받지 않겠다' 생각해서 그저 "그냥 가십시오.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랬어요. 신부가 그냥 집으로 갔어요. 그러나 너무 고마워서 그 다음 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문 몇 권을 우편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배달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은 또 순경이 머리를 깎으러 왔어요. 이발을 해 주고 또 그는 말합니다. "저도 좀 지역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냥 가시지요." 돈 내겠다고 하다가 "그러시지요." 그러고 갔어도 또 너무 고마워서, 참 착한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편지 한 장하고 도너스 몇 개를 봉투에 넣어서 그 문 앞에 놓고 갔어요. 그 다음날은 국회의원이 왔어요. 역시 이발을 해 드린 다음에, 돈을 내겠다고 하니까 "아, 내지 마십시오. 저도 국가를 위해서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그러고 갔어요. 그 다음날 이발소 앞에 국회의원들이 줄을 섰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는데, 국회의원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다고 착각했어요. 이게 바로 문제예요.

    ▣ 나는 한국에 있는 모 은행의 은행장이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호화스러운 요트 한 척이 침몰되었습니다. 침몰 직전, 해안 구조대에 SOS신호가 왔습니다. 구조대 통신원이 회신을 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가겠다. 현재 당신의 위치를 알려라." 이 때에 대답이 왔습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모 은행의 은행장이다." 그리고 회신이 뚝 끊어졌습니다. 결국 이 배는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What is your position?"--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탓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은행장이라는 지위가 중요한 것입니까?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명예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재산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 구조가 필요합니다. 여기는 어디입니다---바로 이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넌센스지만 이것은 정말로 기막힌 사건이었습니다.

    ▣ 나는 나폴레옹이다

    어느 정신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라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러니까 뒤에 있던 정신병자가 "네가 왜 나폴레옹이냐?"라며 따집니다. 또 다른 정신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전부 다 잘난 것입니다.

    ▣ 딱 한 마디만 써주세요

    어떤 목사님이 우체국에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전보문을 쓰지 못하고 울며 손을 떨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내가 손이 떨려서 쓸 수가 없습니다. 좀 대신 써 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내 딸이 나와 의견이 충돌된다고 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1년 동안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딸이 있는 곳의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전보를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뭐라고 쓸까요?" "딱 한 마디만 써주세요.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 어머니."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없습니다. 그냥 돌아오라,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 발자국만 따라가면

    어떤 사람이 넓은 사막을 정처없이 방황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물이 다 떨어져가고 있는 것을 알고 걱정과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오아시스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이젠 살았다"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발자국만 따라가면 분명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계속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야 그는 자기 발자국을 자기가 되밟아가면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윽고 저녁 노을과 함께 북극성이 반짝였습니다. 별을 보고 그는 제대로 방향을 찾아서 바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똑같은 길을, 내가 내 발자국을 쫓아가며 거기에 길이 있는 것처럼 한평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서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 비로소 내 생의 궤도가 바른 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 25번 외우면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상을 떠날 때에 오직 한 절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 이 말씀을 25번 외우면서 이 말씀에 의지하고, 승리로 세상을 끝냈습니다.

    ▣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강아지를 보고 "아이 헤이트 유(I hate you)" -- "나는 네가 밉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쓰다듬어 주면 좋다고 꼬리를 친다. 그러나 "아이 러브 유(I love you !)" 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콱 물어 버린다. 무슨 이야기인가 ? 사랑한다고 말했느냐 미워한다고 말했느냐가 문제되지 않는다.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어떤 교육도 어떤 비판도 어떤 훈계도,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만 틀림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 10분 동안의 묵상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까 ?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맞받아 욕을 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 쪽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란스럽던 청중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중을 뜨겁게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소리가 우뢰처럼 터져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습니다.

    ▣ 꼭 돌아가서

    한 이스라엘 청년이 약혼을 하고 장사를 떠나면서 그 약혼녀에게 말했습니다. '한바퀴 두루 돌아서 올 테니까 돌아온 다음에 결혼식을 올립시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신혼생활을 꿈꾸면서 기다리라고, 기다리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장사를 떠난 지 얼마 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꼭 돌아가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겠노라고 다짐하는 사연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무엇이 좀 잘못되어서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이 10년만에 돌아와 보니 약혼자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반가워서 청년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10년 동안이나 나를 기다릴 수 있었소 ?" 그러니까 이 약혼녀가 10년 전에 받았던 낡아빠진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이면서 여기에 '꼭 돌아가서' 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이 말을 믿고 위로를 받으며 기다렸노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엄숙한 부르심

    윌리엄 로우는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에서 말합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 고맙다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미시간 호는 바다처럼 큰 호수입니다. 오래전, 이곳에서 큰 배 한척이 뒤집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 배에 젊은 수영 선수 한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내걸고 헤엄쳐 23명이나 구출해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청년의 이름은 물론 신문지상에 커다란 토픽감으로 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기억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레이 신부님이 얼마전 로스엔젤리스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그 옛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미시간 호수에서 이러저러한 사고가 났을 때 23명의 목숨을 건져 준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고 설교하면서 내려다보니, 그 때의 바로 그 청년이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마친 토레이 신부님이 그 노인한테 물었습니다. "그때의 일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그랬더니 노인의 대답 좀 들어 보십시오. "그 23명 가운데 내게 찾아와 고맙다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억납니다."

    곽선희목사 설교집 예화

    ▣ 굳이 그러하시다면

    우리나라의 옛날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금님이 난을 만나서 신하들과 더불어 서민 복장을 한 채 피란길을 나섰습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이르러 한 농부의 집을 찾아 며칠 유하자고 청했습니다. 고맙게도 그 농부는 이 일행이 누구들인지도 모르면서 기꺼이 맞아들여 한동안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고 합니다. 임금님은 이 농부가 여간 고맙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정세가 회복되어 환궁하게 되자 임금님은 여전히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농부 보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소, 내가 이 은혜를 갚아야 되겠으니, 소원이 있으면 한 가지 말해보시오. 들어주리다." 농부는 대답했습니다. "제게 무슨 별다른 소원이 있겠습니까 ? 보시다시피 먹을 것도 넉넉하고 몸도 건강합니다.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기어이 소원을 말해보라고 거듭거듭 청했습니다. "굳이 그러하시다면" 하고 농부는 마지못해 말합니다. "며칠 있으면 제 환갑입니다. 아이들이 정성을 모아서 잔치를 해준다고 하니 제가 초청을 하거든 왕림해주십시오." 임금님은 내심 착하고 욕심 없는 농부의 사람됨에 탄복하면서 "알겠소" 하고 돌아갔습니다. 며칠 지나 환갑날, 농부네 집에 난데 없이 임금님의 대행차가 이르렀습니다. 그 환갑잔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 농부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예삿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사방에서 예물이 바리바리 들어왔습니다. 명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농부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집에 임금님이 다녀갔다고 해서 기념비까지 세웠다 합니다.

    ▣ 바보 예수

    일본 화가가 그린 <바보 예수>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보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다. 이 그림에 대해 전문가이신 이 연호 목사님의 해설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에 나타난 예수님의 눈은, 사람들을 너무 불쌍히 여겨서 눈물에 찌들려 한쪽 눈이 찌그러졌고 입술은 메말라 터져 있으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사랑한 나머지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그린 것이다.

    ▣ 원수를 사랑하라

    어떤 사람에게 조우라는 충성된 노예가 있었다. 주인은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에게 많은 일을 맡기고 있었다. 어느 날 주인은 조우와 함께 또다른 노예를 사기 위해 노예 시장에 갔다. 많은 노예들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유달리 늙고 힘없는 한 노예가 끼어 있었다. 주인은 힘이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는데 조우가 병든 노예를 사자고 주장해서 주인은 조우의 말대로 그 노예를 사 왔다. 병든 노예는 집에 와서도 별로 일을 하지 못했지만 조우는 그를 열심히 간호하고 잘 돌보아 주었다. 주인은 조우에게 일도 못하는 그 노예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극진히 돌보는가고 물었다. 조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 노예는 나의 원수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팔아 지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분이 세상 떠날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 자네 누군가 ?

    물리학자 아이잭 뉴턴은 세상을 떠날 때에 그만 건망증이 생겨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나이도 생일도 잊어버렸습니다.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천재가 일생을 통해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한테조차 "자네 누군가 ?" 하고 물었다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 한번은 누가 하도 답답해서 뉴턴에게 물었답니다. "선생님,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두 가지가 있어요" 하고 뉴턴이 대답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 이 두 가지는 기억하고 있어요".

    ▣ 세 가지 고생

    미국의 설교가 비처(Beecher)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 고생을 한다. 일 하기 전에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고생이요, 일 하면서 수고하느라 고생이요, 일 끝나고 결과를 걱정하느라 고생이다."

    ▣ 지금 교회학교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2차대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주 젊은 청년 하나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군목이 말을 합니다. "이제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 대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드리지요. 무엇이라고 쓸까요?" 청년은 "어머니께는 제가 기쁘게 죽었다고 쓸까요?" 청년은 "어머니께는 제가 기쁘게 죽었다고 그렇게 써주세요."라고 대답합니다.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교회학교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준 분이지요. 그 분께는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고 써주세요."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군목은 그대로 청년의 어머니에게,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으로부터 회답이 왔습니다. "편지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사실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별로 열매가 없고 지겨워서 한 달 전에 사표를 냈는데 오늘 이 편지를 받아보고 내가 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에 다시 교회학교 선생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에 철없이 들었던 한 마디가 마음 속에 심기워져서 전쟁터에서 죽은 청년의 생명을 인도했습니다.

    ▣ 나도 바빠서

    어떤 사람이 한평생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더랍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이로운지 해로운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생각할 겨를 없이 무작정 바쁘게 일에 쫓겨서 살다가 그도 별수없이 죽었어요. 그런데 천국 문앞에는 베드로가 오른손에 생명책을 들고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당신 이름은 이 생명책에 없소"라며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압니까? 당신이 그것을 모르니까 이러는 것일까요. 잘 찾아보시오. 분명히 생명책에 내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나도 바빠서 당신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지 못했소."

    ▣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어빙이라고 하는 학자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도서관에는 역사적인 석학들의 초상화가 주욱 걸려있었습니다. 잠깐 잠이 든 그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썼는데, 초상화에서 보았던 역사적인 석학들이 와서는 그의 몸에 걸쳤던 화려한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내 것이요"하며 면류관을 빼앗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지를, 또 어떤 사람은 팬티마저 가져갑니다. 저마다 자기 것이라며 빼앗는 바람에 그는 그만 알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꿈에서 깼습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맞다, 내 지식이라는 게 내 것이 아니로구나, 이것은 이 사람에게, 저것은 저 사람에게 다 빌려오는 것이었구나. 이제껏 남의 것을 입고 마치 내가 대단한 것인 양 자랑했는데,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여러분이 잘 아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제2차대전 때, 헤럴드 레셀이라고 하는 청년이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폭탄에 맞아서 두 팔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구가 된 그는 참으로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망의 기도를 하는 그의 귀에 분명히 들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지 않느냐."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아직 생명이 잃고,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습니다. 정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생각을 바꾼 그는 의사에게 부탁해서 의수를 만들었습니다. 또 열심히 타이프 치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내온 생활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었습니다. 더우기 그 영화에서는 자기가 직접 주연과 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는 정말로 크게 성공했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우리 생애 최고의 해]입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결연히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로부터 받은 것,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잃은 것의 열매를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그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간증입니다.

    ▣ 환경에 의해서

    월남전쟁 때, 월맹의 포로 되었던 미군들이 포로교환으로 돌아와 기자 회견을 한 적이 있다. 미군들은 포로 생활 당시를 회고하면서 배가 너무 고파 쥐까지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한 병사는, 너무 학대가 심하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들어 공산당을 미워하고 증오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대답하더란다. 악한 조건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환경에 의해서 약해졌다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 다른 계획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예수님을 만나 여쭈어 보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예수께서 하신 일이 너무 제한된 지역에서 되어진 일이라 만백성을 구원하기에는 미흡한 것 같은데,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 정말 다 이루어진 것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전히 다 이루었다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가브리엘은 걱정스러워 "천사들을 보내어서 만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면 어떨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다 부탁해 놓았다고 말씀하셨다. 가브리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통치 않으니 다른 길이 없겠느냐고 다시 재촉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있다. 나는 그들을 믿고 있으니 다른 계획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 속을 썩이더라도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어려움을 당한 어느 가정을 심방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의 외아들이 어쩌다 불량소년들과 사귀더니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 그 가정은 일시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줄곧 울기만 합니다. 기도하고 위로하고 성경으로 권면도 하고 심방을 마치고 나왔지만 모두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행했던 여집사님 한 분이 뜻밖에도 너무나 담담해 보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여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가출한 아들로 해서 울고 있는 저분들이 저는 오히려 부럽습니다. 저는 속을 썩이더라도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여러분, 이 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 바로 얼마 전에 그 여집사님의 아들은 차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불량한 자식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젠가라도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자기 운명

    인도에 외교관으로 가 있던 우리 교회 교인이 겪은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미리 세워둔 차를 뒤로 후진시켰는데 그 자리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그만 한 아이가 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이 분이 아이를 들고 그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이가 차 뒤에서 노는 것을 못보고 차를 후진시키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어머니는 태연하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좀 보상이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예요. 아이들은 많은 데요, 뭐." 또 그것이 아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그렇게 태어났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대답합니다.

    ▣ 여비서가 본 인간 케네디

    미국의 청년 정치가였던 존 케네디(Kennedy, John F.)는 참 짧은 일생을 살았습니다마는 그가 미국 역사, 혹은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압니다. 바로 그의 비서로 11년 동안을 일했었던 이블린 링컨은 [여비서가 본 인간 케네디]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일약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Look at me, I am the great'--'나를 보라, 나는 위대한 케네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상원의원이었을 때에도 겸손했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더 겸손했습니다. 그와 일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잠깐만 만나보아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가 위대한 사람이요, 그가 대통령이요.....이런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케네디는 사람들을 순수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위해 11년 동안을 일했습니다."

    ▣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프랑스 종교개혁가인 칼뱅은 그의 저서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다'--'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나에 대한 지식이 나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본다고 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고야 나를 보고, 하나님을 알고야 나를 압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발견하기까지는 자기 가치, 자기 존재, 자기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무디선생이 삼천 명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그날따라 더욱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마이크가 없던 때에 삼천 명이니까 그것만도 굉장한 숫자이지요. 무디 선생은 열변을 토하듯 힘써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어느 저명한 대학교수 한 분이 무디 선생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선생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몰라서 그러셨겠지만 영문법적으로 틀린 말을 열여섯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무디선생은 껄껄 웃으면서 "잘못 세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많이 했을 텐데요. 저는 이렇게 무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답니다.

    ▣ 한쪽은 천사요, 한쪽은 악마였다

    로마제국 말기에 아주 대조적으로 유명한 두 여인이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립피나가 그들이다.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13년 동안이나 눈물로 기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회개시켜 성자로 탄생케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이라든가 <신의 도성>과 같은 저서는 여러분도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최대의 사상가로, 우리 기독교의 체계는 그의 신학 사상에서 틀이 잡힌 것이다. 그는 모범적인 신학자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그처럼 위대한 신학자, 그처럼 위대한 책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면 으레 어머니 모니카도 함께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립피나 역시 아들을 무척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아들을 하루 빨리 황제로 세우기 위해 남편을 암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드디어 아들을 황제 위에 앉혔지만 그로 해서 무슨 일이 생겼는가 ? 네로는 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만다. 아그립피나가 자식을 사랑한 결과는 폭군의 탄생이요 파멸이었다. 보라. 자식을 사라하는 마음은 모니카나 아그립피나 똑같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사랑한 모니카는 아들을 성자로 만들었고, 야심적으로 사랑한 아그립피나는 자식도 망치고 자신도 망했다. 같은 어머니이지만 한쪽은 천사요, 한쪽은 악마였다 하겠다.

    ▣ 오늘은 말고 내일부터 하자고

    어느 날, 마귀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주제는 '어떻게 하여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수 있을까 ?' 하는 것이었다. 한 마귀가 제안했다. "모조리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입시다 !" 그러자 의장 마귀가 반대했다.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되오.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오. 그러니 그건 안되고, 누구 또 다른 의견 없소 ?" 다른 마귀가 말했다. "잡아다가 매질을 합시다 !" 의장 마귀는 또 반대를 한다. "한 대 때리면 똑같은 사람이 열 사람쯤으로 늘어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요" "그렇다면 감옥에 처넣읍시다 !" "감옥 안에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더 좋아라 할 텐데, 그거 되겠소 ?" 좀처럼 그럴싸한 의견이 나오지 않자, 나이많은 노련한 마귀 하나가 말했다. "인간들 스스로 죄를 짓게 합시다" 그제야 의장 마귀도 흡족해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오 ?" 의장 마귀가 물었다. 늙은 마귀는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하면 기도하게 하고, 봉사하겠다고 하면 봉사하게 하고, 사랑도, 희생도, 좋은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게 합시다. 그렇게 하되 한 가지 조건을 붙이는 것입니다. 오늘은 말고 내일부터 하자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귀들은 만장일치로 희의를 끝냈다는 이야기이다.

    ▣ 안 된다. 불을 질러라

    노(魯)나라의 복부제라고 하는 사람이 신부라고 하는 마을에 원님으로 있었다. 어느 해 가을 추수 때가 되었을 때에 제(齊)나라 군사가 이 마을에 쳐들어왔다.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있었다. "저 아까운 곡식을 전부 원수한테 뺏기게 되었구나" 하고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이 쳐들어 오기 전에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아무나 가서 빨리 거둬 오는게 좋겠다". 그러나 원님은 말렸다. '안 된다. 불을 질러라" 하고 원님은 말했다. "전쟁 때이건 평화 시절이건 간에 백성에게 남의 것 공짜로 가지는 버릇을 들여 놓으면 나중에 이것을 고치는 데는 10년으로도 어렵다". 옳은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경우에는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느니, 저런 경우에는 남을 속여도 괜찮다느니 하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합리화하려고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에 있는 돌판에는 작자미상의 시(詩) 한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제목의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부르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 부르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750년 영국 런던에 아주 큰 지진이 한번 일어났었습니다. 그 때에 요한 웨슬리 목사가 한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더 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막을 수 있었으며....." 그때, 지진으로 부상을 입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라운 헨리라는 의사가 그 삶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러자 그 삶은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요, 죽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은데 죽은 다음에 있을 일이 무섭습니다." 솔직한 말로 표현하자면, 죽는것 자체는 무섭지 않은데 지옥이 무섭다는 얘기입니다.

    ▣ 노란 손수건을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빙고라고 하는 한 남자가 플로리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여러 시간동안 그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침울하고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친절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굳게 닫혔던 입을 열고 자기 마음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나는 죄를 짓고 4년 동안 뉴욕 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지금 형량 만기로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기에 4년 전에 아내에게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아내로부터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감일이 가까워지고 딱히 갈 데도 마땅치 않은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내 집은 브로크릴이라고 하는 마을에 있는데 그 곳은 차가 지나다니는 길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큰 참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이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만일에 당신이 나를 영접해준다면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매달아놓으라고, 그것이 나를 영접해주는 표시인 줄 알고 집에 들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손수건이 없으면 이미 당신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줄로 알고 그저 지나쳐서 내 갈 곳으로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살던 집에 거의 다 왔는데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같이 초조해졌습니다. 모두들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참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차 안에서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 큰 참나무가 온통 노랗게 꽃피어 있는 것입니다. 손수건 하나만 묶으면 혹시 남편이 못보고 지나 갈까봐 아내가 그 나무에 온통 노란 손수건을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초조하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있는 무엇을 생각하며 걱정하는 것입니까?

    ▣ 하나의 약속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 오는 바람에 맥아더 장군은 할수없이 비율빈이라는 곳에서 후퇴를 합니다. 그 때에 그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비율빈사람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전세가 호전되어서 2년 후에 그는 비율빈의 레이트만 해안에 상륙을 합니다. 그 때에 처음으로 한 말이 이것입니다. "약속한 대로 나는 다시 왔습니다." 여러분, 인자가 오리라 하신 것은 확실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많은 혼선도 있고, 시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이 하나의 약속, '내가 다시 오리라'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 그게 문제군요

    어떤 한 젊은이가 경건한 마음을 가진 노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꼭 죽는가보지요?" "그럼." "그럼 죽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럼." "그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되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옆에 있던 강도가 죽기 몇 분 전에 딱 한마디 말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렇게 시간 많이 안걸려. 죽음 준비하는 것은 그저 몇 분이면 돼." "간단하군요. 그러면 더 좀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믿으면 되겠군요." 노교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자네, 언제 죽을 줄 아나?" "그게 문제군요." 여러분,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날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수도 있고, 오늘이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어려운 일이 네 가지 있더라

    중국 명대의 유학자요 정치가인 왕양명이 지혜로운 말을 남겼습니다. '살아보니 나의 인생에 어려운 일이 네 가지 있더라' 했습니다. '첫째로 어려운 것은 고생스러운 것이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고생스럽더라.' 기본적인 것입니다. 배고픈 것, 헐벗는 것, 참으로 견디어내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남에게 냉대받은 것이 고통스럽더라.' 집안에서든 직장에서든 친구들에게서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친구로부터 냉대받는 것, 인간 관계가 그렇게 될 때 참으로 괴롭더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고민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고민이 있어서 이 실존적인 고뇌와 더불어 싸울 때의 고독과 고뇌,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시 이 세 가지의 어려움보다도 가장 더 괴로운 것은 '한가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 가장 효과적인 약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로 가서 일생을 그곳 원주민들을 보살피는 의사로 헌신한 분입니다. 고귀한 인생을 산 사람의 귀감입니다. 그는 구십오 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병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약은 그가 할일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할일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병을 고칠 약은 없다는 것입니다.

    ▣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솔맨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가수로, 그녀는 지금 임신중입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 천금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병은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이분은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해서 수백만 장이나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3개월이 어딥니까 ? 하루가 어딥니까 ? 한 달란트가 어디냐 그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독교사에서 널리 알려진 마틴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특히 수도원 사업에 큰 공헌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기병대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교도였지만, 나이 열 살 때에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추위에 벌벌 떠는 불쌍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무척 돕고 싶었지만 군복을 벗어줄 수가 없어 망설이다가 군복 절반을 찢어서 이것으로라도 추위를 면해 보라고 덮어 주었다. 그날 밤에 마틴은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찢어진 군복 자락을 걸치고 계셨다. 그뿐 아니라 천사에게 말하기를 마틴이 헐벗은 나를 이 옷으로 덮어 주었다고 칭찬을 하셨다는 것이다. 꿈 속에서 받은 그 은혜와 충격을 가지고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오늘날 교회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된 것이다.

    ▣ 아픔이 내게 전달되어야 형제이다

    탈무드 중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여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머리가 두 개이고 몸은 하나이며 팔다리는 각각 두 개씩인 기형아였다. 문제는 몸은 하나이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두 개씩이므로 이 아이가 하나인지 둘인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랍비가 지혜로운 대답을 했다. 만일에 이쪽 머리를 때렸을 경우 저쪽 아이도 울면 하나이고, 전혀 반응이 없으면 둘이라는 것이다. 이쪽 머리가 기뻐할 때에 저쪽 머리도 기뻐해야 하나이지 이쪽은 기쁜데 저쪽은 슬퍼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아픔이 내게 전달되어야 형제이다.

    ▣ 나는 도둑놈이 되기보다는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아주 불쌍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 옷을 제 주인에게 돌려 주자. 우리가 입은 옷은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빌려 입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옷을 벗어 주려고 했다. 그때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옷을 입지 못하고 다니면 일에 지장이 있습니다"하며 만류했다. 프란체스코는 "나는 도둑놈이 되기보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라고 대단히 중요한 말을 했다.

    ▣ 탈무드를 아십니까

    다시 탈무드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 랍비가 그 지방에 새로 부임하고 보니 회당이 많이 낡아서 수리하기 위해 기부금을 걷으려 했다. 그 곳에는 대단히 인색한 한 갑부가 있었는데, 뒤로는 나쁜 일을 많이 하는 악한 사람이었다. 랍비가 그 갑부에게 기부금을 부탁하려고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가봐야 소용없다고 만류했다. 그래도 랍비는 찾아가서 부탁을 했더니 과연 소문대로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다. 그 때 랍비는 "탈무드를 아십니까" 하며 갈릴리 바다와 사해에 대해 설명을 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을 자꾸 흘려 보내기 때문에 썩지 않아 맑은 물이고, 사해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흘려 보내지를 않아 썩은 물이 되었으니 당신 재산도 자꾸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갑부는 "제가 아주 비밀리에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랍비는 "참 이상하군요. 당신이 비밀리에 하는 나쁜 일은 다 소문이 나는데 어째서 비밀리에 하는 선한 일은 소문이 안 납니까 ?"라고 꼬집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 처칠인지 개떡인지 내가 알게 뭐람

    윈스턴 처칠이 어느날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를 방송하기 위해 BBC 방송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가 택시를 잡아타고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 했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인즉슨 이제 한 시간 뒤에 위대한 정치가 처칠 경이 중요한 방송을 할 터인데 자기가 BBC 까지 가다보면 그 방송을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칠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1파운드를 내놓으면서 "그러지 말고 좀 갑시다" 하고 짐짓 애원조로 부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기사 아저씨, "에라 모르겠다" 하더니 중얼거립니다. "타세요 ! 처칠인지 개떡인지 내가 알게 뭐람. 돈이나 벌어야지".

    ▣ 안식일이 유대아를 지켰다

    유대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전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많은 인류로 하여금 번창케 하신 후에, 사방에 흩어져서 지방에 따라 민족을 이루게 됐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아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어느 한 민족을 선택을 해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 민족을 통해서 모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모든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시려고, 특별한 선민을 하나 선택해야겠다, 그런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계명을 만들어서, 이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을 터인데 이것을 가지고 시험해서 선민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먼저 불란서 사람에게 가서 "너희가 이 계명을 받겠느뇨?" 했더니, "우리는 남녀 관계가 복잡해서, 그 칠 계명 때문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지킬 수가 없으니까 우리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요. 독일 사람에게 가서 "이 계명을 받으라." 했더니, "안식일 지키라는 법이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일을 많이 해야 되겠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쉬어 가지고는 안 되니까 우리 그거 못 받겠습니다." 아랍 사람들에게 가서 "이 계명을 받으라." 했더니,"우리는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보따리를 털어 가며 사는데,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하고 거절했답니다.

    그래 유대 사람들에게 가서 십계명을 내놓고 "너희가 이것을 받겠느냐?" 했더니, "그거 얼맙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공짜라고 그러니까, "그러면 받지요!" 그래서 유대 사람들이 십계명을 받았답니다. 그래 가지고 선민이 되고, 복을 받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설입니다 마는, 상당히 풍자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유대 사람들은 안식일을 엄수합니다.

    주전 170년에 있었던 사건은 유대 역사에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헬라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온 세계를 점령하고, 온 세계를 전부 헬라 문화로 문화적으로도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헬라 문화로 들어오게 이렇게 정치를 세웠을 때, 유대 사람만은 예외입니다. 끝내 고집스럽게 자기 문화를 지키겠다는 겁니다. 이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아주 지혜롭게 유대 사람을 헬라 문화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두 가지 정책을 세웠는데, 하나는 유대 사람들이 율법 속에서 살면서 먹는 것에 대해서 타부가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뭔 먹고 뭔 먹지 말고. 그런데 돼지고기를 갖다 놓고, 이것을 먹는 자는 살려 주고 이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죽는다 이거예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절하다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들은 돼지고기를 절대로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다가 제우스신의 신상을 세워놓고, 이것을 섬기라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죽이고 안식일을 거부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대로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산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깊은 산 속에 도망가서 거기서 안식일을 지키며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가 아주 교활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알고 안식일날 쳐들어갔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기 때문에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다 붙들려서 섬멸되었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키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입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집대성한 구전 법 모음인 <미시나>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신구약 성경보다 더 큽니다. 이 <미시나>라고 하는 책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진 율법에 대한 것을 모아놓은 큰 책입니다. 이 책에 안식일에 대한 조항이 39조항이 있습니다. 이런 것 이런 것은 하지 말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39항만이 아니라, 다시 거기에다가 부칙을 만들었습니다. 원칙에다가 부칙을 만들어서 무려 219조항이나 됩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면, 씨 뿌리는 일, 수확하는 일, 곡식단을 묶는 일, 타작하는 일, 키질하는 일, 곡식 고르는 일, 맷돌질하는 일, 또 반죽을 하는 일, 빵을 만드는 일, 양털을 깎는 일, 혹은 끈을 매는 일, 혹은 바느질하는 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다 금하는데, 이것뿐만 아니라, 다시 부칙으로 나온 것들을 들어봅시다. 여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안식일날 아이를 안아주는 것은 좋다. 그러나 책을 들고 있는 아이를 안으면 책을 드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 된다 이거예요. 바느질하다가 실수해서 옷에 바늘 하나가 꽂혀 있어요. 이걸 모르고 길을 걷게 되면은 바늘을 운반했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된다는 거예요. 뭐 이런 얘기들입니다. 계속, 불을 켰느냐 끄지 마라. 꺼진 불은 안식일에 켜지 마라. 옷고름을 맸으면 풀지 마라. 풀어놓은 옷고름은 매지 마라. 이런 식입니다. 복잡하게 만들어서 안식일을 엄하게 지켰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렇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말합니다. 안식일이 유대 사람을 지켰느냐,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지켰느냐. 결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아를 지켰다고 말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2000년, 3000년 동안 각 나라에 흩어져 있지마는 안식일을 지킨, 엄격하게 목숨을 걸고 지킨 사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민족혼과 신앙을 지켜갈 수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 성공하려면 3P가 있어야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성공하려면 3 P 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P 자로 시작되는 세 가지 --- 페이션스(patience), 프랙티스(practice), 피스(peace) 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인내가, 둘째는 실천력이, 그리고 셋째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와 실천력이 있어도 평화가 없으면 헛일입니다.

    ▣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언젠가 밀림 지대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 연대장이 썬다 싱을 잡아다 때리고 욕보이다가 마지막에는 밀림 속에 돼지우리 같은 것을 만들어 발가벗겨서 그곳에서 지내도록 했다. 까닭인즉 밤에 지독한 모기에게 뜯겨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썬다 싱은 밤새도록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라는 찬송을 기쁘게 불렀다. 이것을 본 연대장은 감동하여, 예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런 고통 중에서도 저가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느 신문사에서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라는 여론 조사를 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다. 어떤 이는 안구 은행에 가서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밀린 일들을 모두 정리해서 일을 마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유산을 분배해서 남은 가족들의 장래에 보탬이 되겠다고도 했다. 물론 이 밖에도 여행을 하겠다든지, 심지어는 원수를 갚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모아놓고 "예수를 잘 믿으라.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구주이시다. 나는 지금 주님 앞에 간다"라는 유언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

    어느 장군의 아홉 살 난 귀여운 딸이 밖에 나가 놀다가 낯선 손님으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아들고 자기 아버지 앞에 가서 자랑을 했습니다. 그 선물은 보석 상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고 이 아이에게 그 보석 상자를 내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울먹이면서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내게 주어 봤느냐고, 이걸 왜 버리라고 하느냐고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 또 그것을 믿을 수 있지 ?" "그래요" "그렇다면 내 말대로 내다 버려라" 아버지의 권고를 듣고 이 아이는 결국 이 상자를 밖에 내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그 상자가 꽝하고 터지는 폭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은 그 장군을 살해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의 손에 들려 들여보낸 시한 폭탄이었습니다.

    ▣ 오직 예수님뿐이다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중생한 후 어느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한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하더란다.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란다"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 오직 예수님뿐이다.

    ▣ 의심하고 먹어야 한다면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예순이 넘었어도 여행할 때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딜 가서나 음식을 먹을 때 먼저 강아지에게 먹여서 이상이 없어야 먹었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누가 독약을 넣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고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

    ▣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 ?

    미국의 39대 카터 대통령은 도덕 정치를 내세웠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느날 그는 이란 인질 문제로 기자 회견을 했었는데, 한 기자가 대뜸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으로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 ?"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제 기억으로는 고의적으로 알면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권이나 국가적인 이익을 위하여 잠시 거짓말을 했다가는 그 후에 이 거짓말을 밝혀내기까지의 손실이 더 많은 것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정말 훌륭한 대답을 했다. 사실이다.

    ▣ 아버지는 보험에 들었단다

    다음 이야기는 좀 심한 예화이지만, 현대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말한다. 어느 한 가정이 해수욕장에 놀러갔다. 어린 아들은 수영하는 재미에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불안한 어머니는 심하게 꾸중을 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만이 가득해서, 왜 아버지는 깊이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자기만 야단하느냐고 투덜댔다. 그 때 어머니가 "아버지는 보험에 들었단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황금 만능주의 시대를 잘 대변해 주는 내용이다.

    ▣ 여러분 중에 어느 한 분이 이 수레에 올라타십시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지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이에가라 폭포가 있다. 어느 짖궂은 재주꾼이 이 폭포 위의 양쪽 벼랑에 가느다란 쇠줄을 걸어 놓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줄을 타는 묘기를 몇 번이나 보여 주었다. 강가에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번에는 외바퀴 수레를 줄 위에 놓고 붙들고 왔다갔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지막에 그는 군중들에게 묻기를 "제가 다시 한번 더 이 줄 위를 가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여 주었기 때문에 다들 가능하다고 박수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재주꾼은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느 한 분이 이 수레에 올라타십시오"라고 말하며 구경꾼들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누구 한 사람도 그의 재주를 믿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제가 올라가겠습니다"하고 자신있게 나왔다. 그는 성큼 올라앉아 신나는듯이 줄을 타는 것이 아닌가 ? 구경꾼들은 대단히 놀랐지만 알고보니 그 아이는 재주꾼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 수술은 사람이 하되

    진 케일이라고 하는 의사는 항상 "수술은 사람이 하되 하나님이 고치신다"고 하는 신앙으로 살고 그렇게 책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는 가정에 태어났지마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예수 안믿었고, 의사가 되어가지고도 간간이 교회에 그저 구경삼아 나갔을 뿐,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차사고를 당했습니다. 다들 휴가 가고 없어서 부득불 어머니를 손수 수술하게 됩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집도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세요. 저는 힘이 없습니다." 눈물로 기도를 하고 수술을 해서 효험을 보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수술은 내가 하되,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941년 어느 날, 발명왕 에디슨이 66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가 오랜 세월 몸담고 연구해 오던 연구실이 화재를 만나 잿더미로 변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미완의 연구 업적들도 고스란히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가슴이 아파 말문이 막힌 아내에게 에디슨은 말했다. "이 잿더미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나의 모든 실수와 잘못을 깨끗이 불태워 버리고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큰 기적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은 신천 장터의 이름난 깡패였다. 그런 그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목사되고 부흥사 되고, 그리고 신천 서북교회에 시무하시면서 많은 능력을 드러냈다. 많은 기적을 보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굉장하다고 찬탄했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님은 "뭐니뭐니해도 진짜 기적은 내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이오. 지옥갈 사람이 천당가는 것 만큼 큰 기적이 어디 있겠소 ?" 하고 말했다.

    ▣ 어떻게 알았지 ?

    어느 농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는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바친다. 주를 위해서는 어떤 충성도 다할 것이다"하고 장담을 했다. 이때 친구는 물었다. "그럼, 자네에게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두 필은 하나님께 바치겠는가 ?" "아무렴, 십일조를 못바치겠는가 ? 말 스무 필이 있다면 당연히 두 필은 바쳐야지. 그런데, 나는 말이 없다네." "그럼, 소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 "아니, 십일조를 안 바칠 수 있겠는가 ? 열 마리 모두라도 바쳐야지. 그러나 나에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잖은가." "그럼, 돼지 열 마리가 있다면 한 마리는 바치겠는가 ?" 이때 그 농부는 버럭 역정을 내며 "내가 돼지 열 마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하고 나오더라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 세 가지 신조

    어느 청교도 교인이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와서 지혜를 배우기도 했다. 한 젊은이가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당신은 큰 부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 그는 자기의 세 가지 신조를 젊은이에게 말해 주었다. 첫째는, 술마시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만 믿고 만사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생활 철학이라는 것이다.

    젊은이는 "당신이 말한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모릅니까 ?" 하고 뭐 좀 특별난 대답이 없느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그 때에 부자는 정중하게 "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지요"하고 말했다. 사실이다. 알고 있을 뿐이지 실천하지를 않는다. 지성인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이것이 인생이다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우화에 대해서는 아마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우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갔다고 사자에게 쫓겨서 도망치게 됩니다. 도망치다가 실족해서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순간,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절벽에 널려 있는 덩굴을 붙잡게 됩니다. 이래서 구사일생으로 추락사는 면했습니다. 그러나 쳐다보니 사자는 지금도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내려다보니 밑에는 무서운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덩굴을 잡은 손에서는 점점 더 힘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달콤한 냄새가 나기에 쳐다보았더니 마침 절벽에 꿀벌이 집을 지어놓고 있어서 꿀이 졸졸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꿀을 한 손으로 찍어서 입에다 대보니 꿀맛이 괜찮았습니다. 또 이상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았더니 덩굴 위에서 검은 쥐와 흰 쥐가 돌아가며 덩굴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해놓고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뜻깊은 성탄 연극

    몇년 전 <가이드포스트> 지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윌리라는 소년이 크리스마스 연극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능이 조금 떨어져 4학년에 다녀야 할 나이에 2학년에 다니는 아이입니다. 키도 크고 마땅한 배역이 없어 여관집 주인 역을 맡았습니다. 문앞에 턱 버티고 섰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오면 "방 없어요" 하고 들어가버리는 역입니다. 한 달이나 연습한 끝에 성탄절이 되어 공연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왔습니다. "주인님, 방 하나만 주세요.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무 데서도 안 받아줍니다. 부탁합니다". 윌리는 퉁명스럽게 "빈 방 없어요. 딴 데나 가 봐요 !" 하고 맡은 역을 잘 소화해냈습니다. 연극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안으로 퇴장해야 할 윌리가 처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요셉과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각본에도 없는 대사를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님, 마리아님, 가지 마세요. 사실은 우리 안방이 비어 있어요. 그 방을 쓰시란 말이에요 !" 순간, 관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처럼 뜻깊은 성탄 연극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유명한 강철의 왕 카네기의 사무실 한가운데 벽에는 낡은 커다란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동안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거나 골동품의 가치가 있는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 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으로, 무척 절망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보이는 그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사람이 카네기에게 어째서 이 그림을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세일즈맨으로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며 물건을 팔았는데, 어느 노인댁에서 이 그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그림이 썩 인상적이었고, 특히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라는 글귀는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8세 되던 해에 기어코 그 노인을 찾아가 용기를 내어 청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이 그림을 자기에게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 노인은 그의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이 그림을 일생동안 소중하게 보관했고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라는 말을 그의 생활 신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 소망을 가진 사람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 대한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포기하지 말라

    영국의 처어칠 경이 노년에 자기 모교인 고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후배들은 2차 대전의 영웅인 선배를 자랑스럽게 맞이하고자 부산을 떨었고 그의 명강의를 들으려고 노트를 준비하여 전교생이 강당에 모였습니다. 처어칠은 옛날 자기가 공부하던 자리를 둘러보고, 그리고 강단으로 올라가더니 잔뜩 긴장하고 모인 후배들에게 단 세 마디를 남기고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라 (Never Give up !), 포기하지 말라 !, 포기하지 말라 !"

    ▣ 더 빠르게 더 빠르게

    자동차의 왕 포드가 자동차를 만든 동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하여 급하게 말을 타고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갔습니다. 말을 최대한으로 몰았지만 그의 마음이 급한 만큼 말의 속도는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서둘러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집에 오니 어머니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습니다. 그 때 이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좀더 빨리 달리는 방법은 없을까 ? '더 빠르게 더 빠르게' 하는 생각과 환상이 늘 그의 뇌리에서 맴돌다가 결국 그 꿈이 이루어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이런 꿈이 있고 환상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안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주십사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안은 마지막으로 물 한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미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안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인디안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다. 방향 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안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안이 바로 얼마전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안이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신사에게 인디안이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얼마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오래 전의 미국의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이천 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에게는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바턴씨는 웬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이천 불을 주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다. 이 일이 있은지 10년이 지났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 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했다.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그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 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 영국이 낳은 유명한 정치가

    영국 웨일즈 지방의 아주 깊은 산골에 사는 한 한 소년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 소년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기에 그 어머니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 부근에는 병원도 없었다. 걱정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5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빗속을 뚫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붙들고 사정했다. 의사는 괴로웠다. 의사된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돈만 보고 의사 노릇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빗속을 달려가 그 아이를 치료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치료에 큰 효험이 있었다. 그 후 의사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로이드 존 경이라는 영국이 낳은 유명한 정치가가 재무상으로 등단하여 축하를 받게 되었다. 축하연이 벌어진 자리에 그 의사도 참석을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재무상은 그 옛날 자기가 치료해 주었던 바로 그 소년이 아니겠는가 ? 의사는 정말 놀랐다. 그 당시 억지로 치료해 준 그 선한 일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나타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 우리의 작은 선행이 뜻밖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다.

    ▣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성 마카리우스라는 분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 그는 대답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까 ?" "공동묘지에 가서 '이 나쁜 놈들아 !' 라고 욕을 해보아라." 제자들이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훌륭한 분들이여' 라고 칭찬을 해보아라" 또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답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모진 비난을 받아도, 극진한 칭찬을 들어도 말이 없다, 죄인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

    ▣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1830년, 조지 윌슨이라는 사람이 우편물을 훔친 죄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정상을 참작하여 그에게 사면장을 내렸습니다마는, 그는 정중히 그것을 거절합니다. 석방할 수도 없고 처벌할 수도 없고 하여 당국에서는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존 마샬이라고 하는 대법원 판사에게 결정권을 맡깁니다. 이리하여 마샬 판사가 판결을 내립니다. "사면장이란 한낱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를 사형에 처하라." 여러분, 용서한다는 말을 감사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 물건을 사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어디 가서 물건을 사게 되면 "이것이 제일 비싼 것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이 제일 튼튼합니까?"라고 묻고, 불란서사람들은 "이것이 최신형입니까?"라고 묻는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물을 것 같습니까? "이것, 진짜입니까?"라고 한답니다. 진짜 가짜가 흔들리면 만사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신뢰감에 문제가 있습니다.

    ▣ 돌아가는 길은 없다!

    헤르만 크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페인 사람입니다. 이 장군이 멕시코를 점령하러 와서 바야흐로 싸움을 걸려고 하는데 보아하니 멕시코 군인은 많고 자기네 군대는 적고, 정세가 불리해요. 그러자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그는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기네가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외쳤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래놓고 진군을 명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이겼습니다. 중국 속담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넘는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엄청난 위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 나에게 용서를 빈 일이 있느냐 ?

    하나님을 잘 섬기는 어느 성도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며 하늘나라에 갔는데, 먼저 사단이, "하나님, 여기 천당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어 천당으로 오게 하시면서, 나는 한 번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 하고 묻더란다. 하나님은 "사단아, 네가 언제 나에게 용서를 빈 일이 있느냐 ?" 하고 회개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단다.

    ▣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 중에 <아끼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산다"는 뜻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품 후보로 들어갔다가 상을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25년 동안이나 시청에 근무하던 어떤 사람, 아주 몸이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위암입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6개월 산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합니다.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물론 직장에도 가고 싶지 않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누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떤 꽃 파는 불쌍한 어린애하고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말동무가 됩니다.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는 슬픈 얘기를 합니다. 이 철없는 어린애의 대답이 "그래도 6개월은 있잖아요" 합니다. 아, 그 말이 맞단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립니다. "6개월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어 가지고 6개월 동안 "내가 뭘 할까" 하며 그는 가능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귀중한 일을 하게 됩니다.

    ▣ 십자가를 지셨는데

    1946년, 지슬로 카돌로스키라는 사람이 독일의 한 농가에 물건을 약탈하러 들어갔다가 강도로 돌변해 일가족 열 명을 향하여 총을 난사했다. 그 결과, 가장인 하멜만씨만 살아 남고, 가족 아홉 명이 그대로 사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인 카돌로스키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고, 드디어 석방날이 왔다. 그러나 그를 맞이할 가족이나 후견인이 없어 석방을 보류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멜만씨는 자기가 그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그를 석방시켰으며,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엄청난 일에 놀라며 감탄했고 신문 기자들은 "당신 가족을 다 죽인 원수 같은 그를 어떻게 식구로 영접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예수님은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그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오히려 되물었다고 한다.

    ▣ 그래, 너를 용서한다

    뉴욕의 복잡한 밤거리에 한 젊은 청년이 병들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죄와 병고에 시달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경찰관이 살펴보니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중얼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경찰은 그를 부축하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당시 뉴욕의 저명한 재벌이었다. 경찰은 곧 그의 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지금 당신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알렸다. 아버지는 옛날에 그런 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고 아들을 거부했다. 평생을 괴롭힌 아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 아버지와 아들을 전화로 연결시켜, 아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도록 도와 주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그래, 너를 용서한다. 좀더 빨리 회개했으면 그때에 용서할 터인데 왜 이제야 회개하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아들 역시 더 일찍 돌아오지 못했음을 뉘우치면서 용서를 받고나서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이다. 용서받지 못하고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다. 용서란 사람을 자유케 하며 소망을 준다.

    ▣ 최후의 만찬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위시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나가다 가룟 유다를 그릴 때에는, 자기를 일생동안 괴롭힌 원수같은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마귀 같은 느낌이 들어,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 친구를 모델로 그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겠는데 좀처럼 영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몇 달, 몇 해를 두고 고심해도 예수님의 얼굴은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사를 만나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수도사는 대번에 "자네를 괴롭히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을 걸세"하며 충고했다는 것이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스스로 회개했으며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열려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 아버지, 우산 !

    일본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몇 달을 두고 비가 오지 않자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우제를 지낸다 굿을 한다 하고 난리였습니다. 어느날 아침 우찌무라 간조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 기도를 올리는데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오늘 꼭 비를 주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국민학교 6학년인 큰 아이는 아무 소리 없는데 3학년인 작은아이가 난데없이 우산을 찾습니다. "아버지, 우산 !" "맑은 하늘에 우산은 왜 찾느냐 ?" 우찌무라 간조가 어리둥절해집니다. 그런데 이 작은아이 하는 소리 좀 보십시오. "아버지, 아까 기도하실 때에 오늘 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지요 !" 우찌무라 간조는 속으로 아차 하고 크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나의 믿음은 전부 거짓이다. 저 아이의 믿음이야말로 참믿음이다' 그 아이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

    정신위생에 대하여 세계적인 석학이요 전문가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을 써서 많은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고있습니다.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정신적 안정입니다. 우리는 때로 정치적 안정, 경제적 안정, 사회적 안정을 논하지만, 그 모든 것의 근본은 한 사람, 그 사람이 가지는 정신적 안정이 우선입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도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으면 자기 실력을 다할 수 없고, 사업을 하는 분도 또 과학을 하는 분들까지도 정신적 안정이 없으면 창의력이 작용하지를 못합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것이 정신적 안정이라고 그렇게 일반적으로 말하고있고, 또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일을 말합니다. 워크(work). 그 다음엔 놀이, 플레이(play)를 말합니다. 셋째는 사랑, 러브(love)를 말합니다. 넷째가 예배, 워쉽(worship). 그래서 약자로 'WPLW'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도 아니요 성직자도 아닙니다마는, 하나의 의사요 학자입니다마는, 예배를 이렇게 중요하게 모든 것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지적해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안정하기 위해서는 예배가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올시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이 바른 관계가 있지 않고는 그 누구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모습이라는 것이올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계속 읽어 왔고 경험해 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 그런 데가 있다면 내가 가겠다

    중국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세 사람이 불려갔습니다. 염라대왕이 생명록을 보니까 이 세 사람은 아직 죽을 사람들이 아닌데 저승사자가 잘못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세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 "자네들은 되돌아가서 몇 년 더 살다 와야겠네. 우리가 실수해서 잘못 데려온 값으로 자네들에게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주겠네. 각자 소원을 말해보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돈 많이 가져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염라대왕은 그에게 돈을 듬뿍 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돈이란 권세와 함께 오는 법이니 저에게는 권세를 주십시오" 해서 권세를 받았고,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도 권세도 필요없습니다. 경치좋은 곳에 아름다운 집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했는데 이 소원에 대해서는 염라대왕이 "에끼놈 !"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 데가 있다면 내가 가겠다."

    ▣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우리가 잘 아는 성자 프란체스코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으로 천국을 구경했다고 한다. 그곳에 크고 작은 보좌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서 유달리 크고 화려한 한 보좌가 눈에 띄었다. 그는 궁금하여 천사에게 이 보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천사는 대답하기를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란체스코가 앉을 보좌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제자는 자기 스승이지만 너무 높아지는 것에 시샘이 나서, 어느 날 조용히 프란체스코에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일게. 가장 큰 죄인이야"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제자는 "선생님,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성자로 일컬어지는 선생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 그것은 정말 잘못된 거짓말입니다"하고 반박을 했다. 이때 성 프란체스코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다. "자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걸세.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만일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일세." --- 이런 간증을 했다는 것이다.

    ▣ 세상의 빛

    성화 중에 홀맨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 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성화이다. 그 그림에는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것으로 보이는 문 밖에 서 있다. 그 문 주변에는 덩굴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어서 그 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그 문은 바깥에서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없다. 그러니까 이 집에 등불을 들고 들어가려 하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정말 마음의 문을 열지 아니하면 방법이 없다.



    믿음의 전도

    베이징에서 사랑의 쉼터를 통해 조선족 지원 사업을 하며 선교를 하고 있는 서 베드로 원장님은 사역 초기에 전도에 대한 고민이 매우 많았습니다.

    베이징에서는 개인 전도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현지 교인들이 전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관심도 없을 정도로 전도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장님 뿐 아니라 당시 베이징에서 선교를 하던 모든 사역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서 원장님은 모범을 보여서 전도에 성공하는 한 교회가 있어야 다른 교회도 금방 성장할 것으로 생각한 뒤, 사랑의 쉼터를 바로 그런 곳으로 만들기로 결심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을 통해 30명이 되는 성도들에게 3개월 후 300명이 오는 교회로 만들자고 말을 꺼냈습니다. 교인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서 원장님은 특별새벽기도회와 전도 훈련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쳤고 또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목표로 했던 기간에 참석한 성도의 수를 세어보니 280여명이나 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신자들이 3개월 만에 10배의 열매를 맺는 일이 전도를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전도의 실패를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닙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를 비롯한 모든 성도의 사명이자 기쁨임을 잊지 마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믿음의 유산이 꽃 핀 마을

    1896년 목포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나룻배를 타고 해남의 초두 마을로 건너왔습니다.

    선교사들은 초송교회를 세우고 마을 주민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지금 초두마을의 110 명의 주민들은 모두 100%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이 마을로 이주를 오는 사람이나 외부에서 시집을 온 사위, 며느리들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마을 회의나 나들이 같은 행사에 앞서서는 반드시 기도로 시작합니다. 잔칫날에도 술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보통 시골 잔치 풍경에서는 술이 많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오랜 세월 술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담배도 거의 피지 않아 군 보건소가 이 마을을 건강실천 마을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처음 선교사들이 세운 초송교회와 후에 개척된 산이제일교회 두 곳으로 나눠 다니지만 이로 인한 싸움이나 다툼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는 김경호 안수집사님은 5년간 이장을 하는 동안 주민끼리 다투거나 서로 흠을 잡는 불상사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초두 마을을 자랑했습니다.

    110년이 넘게 자란 믿음의 뿌리가 한 마을을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린 믿음의 뿌리가 나중에 어떤 결실을 맺을지 모릅니다. 한 영혼을 전도하는 것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 믿음으로 영혼을 위한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믿음의 씨앗을 매일 뿌리는 성도가 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두려움이냐, 믿음이냐?

    두려움이란 감정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정서적인 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염려하는 죄를 범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든 우리는 곧바로 하나님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에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 등이 찾아와 마음과 몸을 괴롭히면서 일을 아주 크게 벌여놓습니다. 염려는 건설적인 사고(思考)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평안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괴롭힐 두려움의 틀을 일찌감치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그 틀은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생활을 몸에 익힘으로써 깰 수 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29-32)

    0 내일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이미 거기에도 계신다.

    기도: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주님, 저희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찾아올 때, 저희 마음을 깨끗케 하사 환경을 바라보지 말게 하옵시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화포커스

    어린 아이의 믿음

    스미스라는 목사님이 아직 믿음이 없는 한 아이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의 죄와 예수님의 희생, 그리고 구원받은 삶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을 들은 아이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이가 다시 교회로 스미스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왔니?”

    “오늘은 어머니를 모셔왔어요. 저희 어머니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어요. 저에게 어제 했던 말을 어머니에게도 다시 해주세요.”

    목사님은 조금 놀랐지만 아이의 어머니를 모시고 똑같은 복음을 전했고, 어머니도 그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이는 다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오늘은 저희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어요. 할아버지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세요.”

    그리고 그날 할아버지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순수한 믿음의 전도가 온 집안을 믿게 했습니다.

    전도를 할 때에 생각이 많아지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의심 없이 복음을 전하고 또 결실을 맺으십시오.

    주님! 복음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을 갖게 하소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환경을 바꾸는 믿음

    미국의 마리온 라이스 하트 여사는 경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경비행기로 그것도 여자가, 84세의 나이로 대서양을 횡단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트 여사가 비행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2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행을 시작한 이유도 ‘혼자 시간을 때우기에 아주 좋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단순히 비행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많아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규모 있게 보내려다보니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이후로 하트 여사는 ‘나는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세계의 여러 곳을 작은 경비행기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사가 도착하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영을 했고 그 때마다 여사는 ‘기진맥진하지만 매우 행복하다’는 소감과 함께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했습니다.

    하트 여사의 도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이루고 비전을 실천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근거를 선행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모든 환경까지 조장하여주실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주님!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방향을 바라보는 소망에 믿음을 더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

    배가 큰 파도에 넘어질 듯하다가 다시 세워져 앞을 향해 가는 것을 ‘복원력’이라 합니다.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질 듯하다 다시 일어나는 게 복원력입니다. 인생에선 수많은 복원력이 필요합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삶이란 우리의 바람대로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선 우리를 가장 낮은 곳에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처참한 상태 같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엎어져 보지 않았던 사람은 땅 바닥에 쓰인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습니다. 자빠져 벌렁 누워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쓰인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슴과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 위기, 아픔, 고통의 순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넘어질듯 해도 곧 균형을 잡고 다시 일어납니다. 마지막 바닥을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일어날 때를 생각해 나를 보호해야 합니다. 훗날을 생각해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진정한 승리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믿음으로 이루는 복원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겨자씨/국민일보>

    믿음과 용기

    수많은 관광객들이 미국의 나이애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엄한 폭포를 바라보며 탄성을 발했다. "굉장하다. 과연 누가 저 거대한 폭포를 창조했을까. 만약 저 폭포의 주인이 있다면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텐데.." 그때 한 청년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관광객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저 폭포는 제 아버지의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 주인의 아들입니다." 관광객들은 모두 부러운 눈빛으로 의기양양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한 노인이 청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자네 아버지가 누구신가?" 그러자 청년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제 아버지의 이름은 하나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그분이 바로 저의 아버지이지요"

    관광객들은 청년의 믿음에 감동해 박수를 보냈다. 이 청년은 로버트 슐러이다. 미국 수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세계적인 목사의 이름이다. 청년 시절의 용기와 강한 믿음이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꿈을 가진 청년은 아름답다.

    한태완 목사 <예화포커스>








    행복이 과연 무엇일까요?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을 지낸 레이건은 퇴임 후 5년이 지난 1994년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옛 친구들과 자녀들의 얼굴 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레이건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몇 시간 동안 갈퀴로 수영장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긁어모아 깨끗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낸시 여사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아내를 아주 많이 사랑 했던 레이건은 젊은 시절 아내를 도와 집안 청소를 해주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낸시는 그 때를 생각하며 젊은 시절에 남편이 집안 청소를 해주면서 행복해 하던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에 낸시 여사는 경호원들과 함께 남편이 담아 버린 낙엽을 다시 가져다가 수영장에 몰래 깔았습니다. 
    그런 다음 날 낸시 여사는 남편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여보, 수영장에 낙엽이 가득 쌓였어요. 이걸 어떻게 청소해야 하나요?'' 

    낸시가 걱정을 하자 레이건이 낙엽을 치워 주겠다면서 일어나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낮이면 레이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낙엽을 쓸어 담고, 밤이면 부인 낸시는 다시 낙엽을 깔고, 그렇게 낸시는 남편의 행복했던 기억을 되돌려 놓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헌신적인 사랑의 힘 때문이었던지, 레이건은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을 잃었지만 아내 낸시만은 확실하게 알아보았습니다.

    레이건은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당신이 불행해지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자 낸시는 레이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당신이 있다면 좋아요. 당신이 없는 행복보다 당신이 있는 불행을 택하겠어요. 부디 이대로라도 좋으니 10년만 더 내 곁에 있어 주세요.''

    가슴이 찡해지는 말입니다. 
    레이건은 낸시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낸시의 소원대로 10년을 더 살다가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복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행복이고 사랑이 아닐까요?
    코로나 19에 조심하고 건강하세요.
    오늘도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겸손(謙遜)                        

    프랑스 제9대 "아르망 팔리에르(Armand Fallières. 1841-1931)" 대통령"이 어느날 자신의 쏠버대학의 재학시 은사였던 "라비스'"박사의 교육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축하객이 자리에 앉았고 '라비스' 박사는 답사를 하기위해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비스'박사가 놀란 표정으로 객석으로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지난 날 자신의 제자였지만 지금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제자가 내빈석도 아닌 학생석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놀란 '라비스'박사가 대통령을 단상으로 모시려하자 대통령은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선생님이 십니다.
    저는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로서 선생님을 축하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선생님이 계시는 단상에 오르다니요?
    저는 선생님의 영광에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비스' 박사는 할 수 없이 그대로 단상으로 올라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훌륭하고 겸손하신 대통령이 나의 제자라니 꿈만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저런 대통령을 모셨으니 우리나라는 더욱 부강해질 것입니다."  

    순간 자리를 매운 수많은 관중들은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후 대통령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 

    보통의 행사나 집회를 보면 이런저런 자리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순서에 자기 이름이 없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겸손 없이 위대함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겸손을 스스로 배우지 않으면 신은 모욕과 굴욕을 안김으로써 그것을 가르친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미국 최초 여성장관으로 겸손과 희생을 주장한 "프랜시스 퍼킨스"는 말했습니다.

    겸손은 고개를 숙이는게 아니고 마음을 숙이는 것입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역지사지 마음으로 진솔하게 이해하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비꼬고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교만하게 거들먹 거리면 모든 인연은 끊어집니다.

    법률회사 덴턴스 회장 "조 앤드루"는 리더의 자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더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한 단어가 있다면 겸손이다.
    리더는 겸손해야 한다.
    직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리더가 할 일은 직원들이 편하게 아이디어를 나누고 어떤 ‘미친’ 생각이라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겸손해지고
    남에게는 칭찬해 보는 그런 하루였으면 합니다.

    ♡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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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한국장로신문
    https://jangro.kr/2021/03/02/%EB%A7%88%EC%9D%8C%EC%9D%98%EC%89%BC%ED%84%B0-%EA%B2%B8%EC%86%90%ED%95%9C-%EC%82%AC%EB%9E%8C%EC%9D%B4-%EB%B0%9B%EB%8A%94-%EB%8C%80%EC%A0%91/

    20세기 초반에 프랑스의 쏠버 대학 강당에서 당시의 석학인 라비스 박사가 근속 50주년 축하연을 하게 되었다.
    식순에 따라 답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라비스 박사는 축하객 중에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대통령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급히 그에게로 향했다.
    미처 그의 참석을 알지 못했던 그는 대통령을 내빈석으로 안내하려 했으나,
    “선생님,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대통령이 아닌, 선생님 제자로서 축하하기 위해서 왔기에 이 졸업생 자리로 만족합니다”라며 사양했다.

    이에 단상에 오른 라비스 박사는 “저렇게 훌륭하고 겸손하신 대통령이 나의 제자라니 꿈만 같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저런 대통령을 모셨으니 프랑스는 더욱 부강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해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리가 흔히 어떤 모임에 가면 돋보이는 자리에 앉으려 하거나 축사라도 하려고 넌지시 선을 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가 오히려 모욕을 당하는 경우를 목도하기도 한다. 겸손함이 없이 위대함이나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모르기에 일어나는 무지함이라 여길 수 있겠다.

    겸손은 단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을 숙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인정하는 것이 겸손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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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이화여대 명예교수)

    살면서 중요한 말은
    "Here & Now" 이다.

    나는 의대교수였다.
    79세의 노인이다.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15만명의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퇴직 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당뇨병,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관상동맥협착, 담석 등
    일곱 가지 중병과 고달픈 스트레스를 벗삼아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다.

    한쪽 눈으로도 아침이면 해를 볼수 있고, 밤이 되면 별을 볼수 있다.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에 햇살을 느낄 수 있고,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품을 수 있다.
    남의 아픔을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원망할 시간이 없다.
    지팡이 짚고 가끔 집밖으로  산책을 했다.
    한쪽 눈이지만 보이는 것만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지금은 다리에 힘이 없어 산책이 어렵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보이는 앞산 수풀 색깔이 아름답다.

    감사하다.
    인생이란 바로 '여기(here)'와 지금(now)' 이다.

    행복을 느낄 시간과 공간과 사람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한번이라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내가  바로 즐거움이다.

    살아보니까 그렇다.
    뇌 속에서 행복을 만드는 물질은 엔돌핀이다,
    엔돌핀은 과거의 행복한 추억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즐거워야 엔돌핀이 형성된다. 

    사람이 어떻게 늘 행복하기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제 죽은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했던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오늘에 살고 있다.

    괴롭고 슬퍼도 한가닥 희망을 만들어 보자.
    살아 있음이 즐겁고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자.

    지나간 세월은 어렵게 살았더라도 다 행복했던 거라고 나이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짜릿하게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
    사람은 그 추억으로 사는 것 같다.
    괴로움을 겪어 봐야 행복 할 줄 안다.

    인생살이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가 제일 중요하다라는 말이 맞는 말 같다.

    아내 없이 살아 보니까 있을 땐 몰랐는데
    젓가락 한 쪽이 없어진거야... !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장인이 하신 말씀인데~
    "나에게 주어진대로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면 다 보여"

    행복의 답은 "바로 지금(Now) 여기(Here) 내가슴" 에 담겨 있다.
    고개 들어  저 멀리 하늘을 한번 보자.

    회갑잔치와 육갑잔치

    회갑잔치가 기억이 안나서
    육갑잔치 잘 치루셨어요?

    돼지고기 삼형제와 아기돼지 삼형제

    * 애기 할머니가 교보문고에 가서 손주에게 사다 줄 책을 한참 찾는데~

    안내 직원이 와서

    "무슨 책 찿으세요" 했더니
    "<돼지고기 삼형제> 있나요~
    직원이 "아~네, 혹시 <아기돼지 삼형제> 찾으시는거 아니에요?"


    설레임과 망설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서 <설레임>이 기억이 안나서
    <망설임> 주세요~


    달패이관과 나팔관

    어지럼증으로 이비인후과에 간 여성환자가 의사에게 
    <나팔관>에 이상이 있어 어지러운가 봐요" 하니까

    의사 선생님께서
    <달팽이관> 말씀하시는거죠?

    재발급과 재개발

    은행에 통장 <재발급> 받으러 가서
    이거 <재개발> 해주세요...

    이바지 음식과 씨받이 음식

    사돈댁에 보낼 <이바지 음식> 주문을 하려고 전화를 해서~
    "여보세요 <씨받이 음식> 주문하려는데요..."

    한 살 차이와 연년생

    울 부모님은 한살 차이신데요'라고 해야 하는 것을 
    울 부모님은 <연년생>이세요~?!!


    콘 프레이크와 포크레인

    친구집에 갔는데 그 어머님이 "<포크레인> 먹어라~ 하셨다.
    알고보니 <콘 프레이크> 였다...


    소보루 아저씨 곰보빵 주세요

    소보루 빵을 사러 빵집을 갔는데
    주인아저씨 얼굴이 심한 곰보인걸 보고 갑자기 당황하여
    <소보루> 아저씨, <곰보빵>주세요

    식물인간과 야채인가

    식물인간이 된 지인의 아들 병문안을 가서 위로의 말씀을 하는데
    "아드님이 <야채인간>이 되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식물인간>이란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아메리카노와 아프리카노

    커피 전문점에서 당당하게 커피를 시킵니다.
    <아프리카노> 한잔요...



     * 누구랑 전화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며...


    “나 핸드폰 없어졌다~!!!

    좀있다 통화 하자"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ㅎㅎㅎ




    코로나 위기로

    우울한 뉴스뿐이지만

    배꼽 빠지게 한번 웃어 보십시오 ... 

    ㅎㅎㅎㅎㅎ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며칠 전 급한 볼 일이 있어서 외출을 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출발 전부터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동네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 카페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그 커피 전문점에는 발달장애인 청년 한 명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카페라테를 테이크 아웃해서 들고 나오다가 유리문에 살짝 부딪혔다.
    그 순간 종이컵 뚜껑이 제대로 안 닫혔는지 커피가 반쯤 흘러 나왔다.

    나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뚜껑 하나 제대로 못 닫아 커피를 반이나 쏟게 하느냐”하고 화를 냈다.

    종이컵 뚜껑을 잘못 닫은 그 청년 직원은 어눌한 발음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커피 나왔다는 신호의 진동벨이 앞 좌석에서 울렸다.
    앞 좌석의 아주머니가 커피를 받아서 내게 내밀었다.

    “카페라테예요. 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서 늘 남겨요. 그거 제가 마실께요. 우리 바꿔 마셔요.”

    난 그 아주머니가 손에 쥐여준 그분 몫의 카페라테를 들고 도망치듯 나왔다.

    너무 부끄러웠다.
    커피집에 들를 때마다 문득 문득 그때 커피 전문점에서의 상황이 마음속에 늘 그늘로 남아있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가끔 들르는 커피집에 낯선 청년이 새로 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행동이 느리고 말이 어눌했다.
    순간 그 청년을 채용해 준 회사가 몹시 고마웠다.
    그건 단순히 취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에 눈부신 날개를 달아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시선을 빼앗은 또 한 사람.
    40대 아주머니 한 분이 구석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 아주머니는 오직 한 사람만 보고 있었다.
    아주 애틋하고 절절한 눈빛으로.....
    청년의 어머니라는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발달장애인인 아들의  첫 직장에서 그 아들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까?
    초조하고 불안하고 흐뭇하고 감사하고 참으로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눈물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순간 나는 그 아주머니를 안심시켜 주고싶었다.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여기 단골인데요 아무 걱정 마세요.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 다 착하고 좋아요.  아드님도 잘할 거예요.”

    그 아주머니의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보고 나도 울컥했다.

    삶이 아름다운 건 서로 어깨를 내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문의 사람 인(人) 자처럼.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몫인 온전한 카페라테를 내어준 아주머니.

    코로나19로 인해 몇 개월간 집에 못 들어가서 보고 싶은 어린 딸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도 울지 않는 간호사.
    화재 현장에서 부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소방관 아저씨.
    장사 안 되는 동네 입구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살 때 제일 볼품 없는 것만 골라 넣는 퇴근 길의 영이 아버지.
    마스크를 서너 개씩 여분으로 가방에 넣고 다니며 마스크를 안 쓴 사람에게 말없이 내미는 준호 할머니.

    이렇듯 참으로 많은 보통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희망찬 신축년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10달이  남아있는 신축년 새해, 감사하며 베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올 한 해 나는 얼마나 자주 내 어깨를 내어줄 수 있을까?

    사금갑(射琴匣)                      

    정월 대보름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 중에 사금갑(射琴匣)이 있습니다.
    원전은 삼국유사 기이 제 1편 소지왕 이야기입니다.

    신라 시대, 임금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시끄럽게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옵소서."

    그러자 임금은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신하가 까마귀를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어느 연못에 다다랐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는 돼지 싸움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습니다.
    잠시 후에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서 신하에게 편지 봉투를 주고는
    "그 봉투 안의 글을 읽으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읽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신하는 궁에 돌아와 임금에게 편지 봉투를 주면서 연못의 노인이 한 말을 전했습니다.

    임금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편지를 읽지 않으려 했는데
    옆에 있던 일관이 말하였습니다.

    "전하, 두 사람이라 함은 보통 사람을 말하고, 한 사람이라 함은 전하를 말하는 것이니, 편지의 글을 읽으시옵소서."

    일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임금은 편지를 꺼내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시오)"

    임금은 곧 거문고 갑을 활로 쏜 다음 열어 보니 두 사람이 활에 맞아 숨져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왕비와 어떤 중이었는데,
    중이 왕비와 간통을 하고 한통속이 되어 임금을 죽이려고 거문고 갑에 숨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뒤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후 이 찰밥이 발전해 약밥이 되었습니다.

    왜 까마귀만 챙기냐면 쥐,
    돼지는 십이지신에 들어가서 따로 기리는 일이 있었으나 까마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5일 전 연휴로 존재하는 설날과 달리 휴일이 아니기에 인지하지 못하지만,
    정월 대보름만큼 전통 풍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명절은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보름 전날 밤에는 아이들이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또한 이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믿었기 때문에 잠을 참으며 날을 샜습니다.

    잠을 참지 못하고 자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몰래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서 놀려주었습다.

    아침이 되면 부럼깨기 및 귀밝이술 마시기를 시작하며,
    새벽에 '용물뜨기'를 하거나 첫 우물을 떠서 거기에 찰밥을 띄우는 '복물뜨기'를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여러 지방 단체 주최 행사들이 연이어 열립니다.
    자정에 이르러서는 달집 태우기 및 쥐불놀이를 이어하며,
    풍년을 비는 행사를 끝으로 대보름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나에게는 정월대보름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찰밥입니다

    어렸을 적에 기억에는 동네의 모든 집에서,
    이 날만큼은 가난한 사람들도 오곡밥을
    배부르게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했습니다.

    달을 보며 개인의 소원을 빌기도 하고
    농사일을 기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달맞이(望月)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깡통 속에 짚이나 나무 가지를 넣고
    불을 붙여 돌리는 놀이를 했는데
    이것을 "망우리 돌리기"라고 했습니다
    "망우리"는 "망월"이 변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른 저녁에 오곡밥을 먹고 망우리 돌리는
    놀이가 파하면 본격적인 찰밥(오곡밥)
    동냥(?)에 나섭니다

    커다란 양푼을 두드리면서 밥 좀 달라고 하면
    어느 집이든지 찰밥(오곡밥)을 내어주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열 집만 돌아도
    커다란 양푼에 찰밥이 가득 담깁니다.

    놀다가 꺼진 배를 일차로 채우고
    다시 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도 하고
    밤늦도록 놀다가 이차로
    동냥한 찰밥을 배부르게 먹는데,
    걸신이 들려서인지 그 많던 밥들이 다
    없어지곤 했습니다

    정월대보름은 일 년 중에서 가장 밥을
    많이 먹는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거지들도 찰밥을 엄청나게
    많이 얻어먹을 수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정월대보름은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
    심지어는 골짜기의 움막에서 거적을 치고 살던
    거지패들까지도 배부르고 행복한날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남긴 편지에 적혀 있다는
    샘 레벤슨의 ‘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중 일부입니다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의 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리라."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은 누구나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나눔은 작은 행복감을 줍니다
    그 작은 행복감이 조금씩 쌓여가고 퍼져나가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코로나로 인하여 가난한자는
    더 가난해졌다고 합니다
    힘겹게 이어가던 사업장을 폐업하였다는
    소상공인들의 하소연이 오늘도 줄지어
    들려 오고 있습니다.

    정월 대보름에 전승되어온 찰밥(오곡밥)의
    나눔으로 누구나 배부르고 행복한 날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이웃들이 다 함께 기쁨으로 보내는
    2021 년 대보름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정월 대보름은 우리 모두에게 나눔으로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는 그런 날이 아닐까요.


    살다가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탓하지 말거라.
    이미 생긴 일이거늘 어찌하겠느냐.   
     
    살다가 울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원망 말고 실컷 울어보렴
    울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않겠니
     
    살다가 이별할 일이 생기거든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인연은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란다.   
     
    살다가 사랑할 일이 생기거든
    밀고 당기는 시간을 줄이거라.
    사랑의 실타래가 항상 질기지 않으니
    적당히 밀고 당기려무나
     
    살다가 행복한 일이 생기거든
    너무 잡으려 애쓰지 말거라.
    무엇이든 잡으려 하면 달아나고
    꽉 쥐고 있는다고 내 것이 아니잖아  
     
    하루 빨리 코로나가 물러가길
    간절히 바라며
    오늘 하루
    힘들어도 웃으며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5만 가지 생각이 다난다"는  말의 의미

    사람들이 어떤 일이 닥치면 수많은 잡생각을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하루에 5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5만 가지 생각 중 많은 사람들이 4만 9천가지 이상의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평하는 마음,

    만족하는 마음보다는
    불만족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보다는
    무시 시기 질투하는 마음,

    신뢰하는 마음보다는
    불신하고 의심하는 마음,

    기쁜 마음보다는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

    남을 칭찬하는 마음보다는
    헐뜯고 흉보는 마음,

    이외에도 원망, 짜증, 불평, 불안, 초조 등등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맡는 것,
    입으로 먹는 것,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따지고,
    간섭하고,
    쓸데없는 곳에 마음의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니 이것이 바로 '마음의 과소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우리의 피는 나빠지고,
    음식 맛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미움의 감정보다는 사랑의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나 뿐만아니라,
    내 주변도 행복하게 해주는 기분 좋은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10년 동안 65세 이상 노인의 걸음수와 운동효과를 측정한 결과
    - 이명우 박사(제일병원 원장)

    하루에
    4,000보를 걸은 사람은 우울증이 없어졌고
    5,000보를 걸은 사람은 치매, 심장질환, 뇌졸증을 예방하고
    7,000보를 걸은 사람은 골다골증, 암을 예방하고
    8,000보를 걸은 사람은 고혈압, 당뇨를 예방하고
    10,000보를 걸은 사람은 대사증후군을 예방할 수 있다는 조사 결과
    - 이명우 박사(제일병원 원장)

    1. 걷기는 '뇌'를 자극한다.
    2. 걷기는 '건망증'을 극복한다.
    3. 걷기는 '의욕'을 북돋운다.
    4. 걸으면 '밥맛'이 좋아진다.
    5. 걷기는 '비만' 치료제이다.
    6. 걷기는 '요통' 치료에 효과가 있다.
    7. 걸으면 '고혈압'도 치료된다.
    8. 걷기는 '금연' 치료제이다.
    9. 걷는 사람은 '뇌'가 젊어진다.
    10. 스트레스가 쌓이면 일단 걸어라.
    11. 자신감을 잃었다면 일단 걸어라
    12. '몸'이 찌뿌드하면 일단 걸어라.
    13. 마음이 울적하면 일단 걸어라.
    14.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일단 걸어라.
    15. 분노가 일면, 일단 걸어라.
    16. 인간 관계로 얽히는 날, 일단 걸어라.
    17. 할일 없는 날, 일단 걸어라.

    화이자 前부사장 마이클 이던(Micnael Yeadon)박사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 불임 등 치명적 부작용 있다"
    인세영 승인 2021. 02. 19.

    화이자사의 전 사장인 마이클 이던(Micnael Yeadon) 박사

    최근 코로나 백신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의사들이 속속 나오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화이자와 모더나사의 백신에서는 아스트라제네카의 부작용 보다 더 위험한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을 제조하고 있는 화이자사의 전 사장인 마이클 이던(Micnael Yeadon) 박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 백신은 극히 취약계층 아니면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혀 필요없다."고 밝혔다.
    백만 명 중 한명 죽을까 말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을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마이클 이던 박사는 영상에서 각국의 정부가 백신을 강제로 맞히려는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백신 때문에 개인이 여행하고 쇼핑하는 자유를 박탈 당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백신을 접종하는 것 자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면서 뭔가 '냄새가 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들고 있는 화이자의 전 임원이 자사의 백신 자체를 위험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또한 각국에서 강제적으로 백신을 접종하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화이자의 전 사장의 입을 통해 나온 이 발언은 전세계 코로나 백신 접종을 앞둔 국가들의 의료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크게 논란이 될 전망이다.

    최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뿐 아니라 의사와 바이오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속속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화이자의 전직 임원의 입에서 나온 이 발언은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마이클 이던 박사는 화이자사에서 개발한 코로나 백신이 불임을 포함한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줄곧 경고해 왔다.  

    실제로 마이클 이던 박사와 유럽 보건의원회 의장 출신인 볼프강 보다르크 박사는 지난해 12월, 유럽의 약제 승인을 담당하는 유럽의약청 (EMA)에 화이자 등 코로나19  백신의 임상 실험 중단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공개된 청원서에는 백신 접종에 의해 형성되는 항체가 코로나19의 스파이크 단백질에 대해 작용하게 되는데, 스파이크 단백질이 신시틴 유형의 단백질을 지니고 있어서 개발중인 백신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태반 형성에 방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불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의 BNT162b 백신에 존재하는 폴리에틸렌글리콜 때문에 백신을 맞은 사람 중 70%가 항체가 형성되면서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화이자와 모더나는 과거에 한번도 승인된 적이 없는 합성 mRNA 방식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식의 백신이기 때문에 부작용의 우려가 더욱 크다는 것이다.

    이에 국내 의사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이달 초, 국내 의사 20명 이상은 실명을 공개하면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효과가 부정적이므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무접종 법안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고 백신 접종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들 의사들은 성명서에서 "코로나19 백신은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으며, 노령자와 기저질환자에 대한 실험 데이터가 부족하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 FDA에서는 코로나19 백신의 심각한 부작용을 예측하여 백신 승인을 해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또한 "백신 제조업체가 백신의 부작용에 대한 면책을 요구하고 있는 등 이번 코로나 백신은 정상적인 백신으로 볼 수 없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의사들은 송무호 신우섭 오순영 이왕재 정윤섭 주연상 최동환 김동오 송현곤 서진열 강태규 기현숙 김상수 박우희 신윤상 이현수 정경진 최윤복 홍성민 등을 수 십명이다.  

    한편 서울대병원(감염내과 오명돈ㆍ박완범 교수)과 서울대(생화학교실 김상일ㆍ정준호 교수, 전기정보공학부 노진성ㆍ권성훈 교수) 공동 연구팀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은 정상인도 대다수 코로나19 환자가 공유하고 있는 바이러스 무력화 항체를 생성하는 면역세포를 이미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사이언스 트랜스래셔널 메디슨(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 최근호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은 정상인도 코로나 중화항체를 생성하는 면역세포를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대다수  정상인은 이미 코로나 감염 초기부터 코로나 바이러스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현재와 같은 극도의 공포감은 갖을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아스트라제네카를 못믿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화이자와 모더나사의 백신의 경우에는 불임 등 오히려 더욱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의사들의 경고가 나오면서, 백신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국내 의료진들에게 우선적으로 백신을 접종한다는 정부의 계획은 "강제로 의료진을 먼저 접종하게 하면 일을 그만두겠다." 라는 의료진 마저 나오면서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지하철에서는 지난 1년간 단 1건의 코로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수백만명이 1년 넘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는데, 전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았으며,
    요양원에 기저질환 있는 노인들 말고는 죽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게 무슨 전염병이냐? "라는 주장과 함께 "백신 맞으라고 호들갑을 떠는 정부 때문에라도 더더욱 맞기 싫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에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영상 자료가 올라오면 누군가 황급히 삭제한다.
    본능적으로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지렁이 이야기 #. 1

    옛날에 가난한 선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앞을 못보는 선비의 노모(老母)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선비가 과거 시험을 보려고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노모는 맛있는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못합니다.
    선비가 있을 때는 그래도 산에 가서 고기를 잡았으나 며느리는 사냥을 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 지렁이(土龍湯)를 잘 말려서 고기처럼 드렸다고 합니다.

    드디어 과거에 합격한 선비가 집으로 돌아와 부인의 정성에 감동되었는데 노모가 아들의 소식을 듣고 눈이 번쩍 떠서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지렁이 이야기 #. 2

    후백제 태조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있다.
    견훤의 어머니가 자주 만나던 남성을 통해 임신을 하자, 그녀의 아버지의 계책으로 그 남자의 옷에 실 하나를 꿰었다.
    다음날 아침에 실을 따라가보니 땅 속에서 거대한 지렁이가 나왔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견훤이란 설화이다.
    이것은 원래 용이었던 설화를 격하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화에서 견훤은 전투 후에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힘을 완전히 회복해 다시 쌩쌩하게 전투를 치렀는데,
    이는 몸이 촉촉히 젖어 있어야 하는 지렁이의 후손이라는 이유이다.

    고려군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강물에 소금을 풀었고, 이를 모르고 회복하려 강물에 들어간 견훤은 온몸이 따가워서 마구 뒹굴었고, 힘을 회복하지 못해 결국 고려군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이 이야기를 들은 왕건이 고창 전투에서 견훤과 싸우기 전에 소금을 뿌리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산법에 따르면 지렁이는 가축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지렁이를 기르는 시설은 돼지, 소 등을 기르는 시설과 마찬가지로 축사로 분류된다.
    (지렁이를 키워 낚시용 지렁이를 판매하거나 농사용으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사회의 책임을 전가하고 남의 탓으로 하는
    정치인.법조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미국 마이애미 롱비치 법정에서
    있었던 실화 한토막이 생각났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 미국 여성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들 형제가 동네 한구석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지역의 유력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
    아들 형제의 죽창이 저명인사가
    타고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말과 저명인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을 사람도 문제인데
    그 말의 가격도 작으마치 천만불이 넘는 세계에 몇마리 밖에 없는
    엄청 비싼 말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판사가 형제 둘에게 누구의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렸는냐고 묻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쏜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청합니다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
    형제 우애(友愛)가 남달은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기도가 끝난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前妻)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고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판사님, 옳을 말씀입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내가 숙연해 지고 재판정이
    쥐 죽은듯 고요속에 묻혀 있을 때
    방청객들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받은 판사가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 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사회를 아름답게 선도 할
    모범적 가족이라고 판단한 판사는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합니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그러기에 오늘날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과오와 실수를 범하지만,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미국의 원동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두 아들의 아름답고 기특한 정신,
    또 숭고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전처의 아들과 친자식을 함께 키우며
    두 아들이 서로가 자기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게끔 한 엄마의 인성교육과 가정교육과 인간성을 바로 세우도록 교육한 그 어머니의 숭고한 모습이
    오늘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변하고 있는듯 합니다.


    삶 자체가 스펙
    이관순소설가

    어느 한 사람이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이
    대부분 노인이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살아봤자 몇 년인데, 이참에 다들 가시면
    고령화도 막고, 부양을 책임져야 할
    젊은 세대의 짐도 덜지 않겠느냐고요
     
    웃자는 소리겠지만
    사람들은 곧잘 불온한 생각을 합니다

    말대로 세상에 노인들이 한순간 다 사라지면
    사회가 젊어지고, 활력이 넘쳐 삶의 질이
    크게 향상 될까요 ?
     
    마오쩌둥 시절, 중국 전역에 나붙은
    포스터가 생각납니다

    소년이 새총으로 참새를 겨냥하고 있는
    그 유명한 참새 포스터입니다.

    1950년대 후반, 농촌 순시를 마치고 온
    마오쩌둥이 인민의 식량인 곡식을 대량
    축내는 참새를 박멸하라는 지시를 내렸지요

    그 결과 한 해 동안 2억 마리의 참새가
    사라졌습니다. 박멸 작전은 성공해 보이는데
    기다린 풍년이 왔을까요 ?

    참새가 사라진 자리엔 생각지 못한
    메뚜기 떼와 해충들이 들끓어
    풍년은 커녕 심한 흉년을 겪습니다
     
    계속된 흉년으로 1958년부터 3년간
    2,500만 명이 굶어 죽는 비참하고
    끔찍한 대참사를 내고 말았지요.

    다급해진 정부가 소련에서
    참새 수십만 마리를 긴급 수입도
    해보지만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도 쥐떼의
    창궐로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지요

    그러자 쥐 섬멸을 목표로
    나라가 나섰습니다

    쥐꼬리를 가져오면 포상하는
    시책을 폈다고 합니다
    문제는 포상금은 늘어나는데
    쥐가 줄지 않는 것입니다
     
    꼬리 만 자르고 쥐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죠
    쥐를 번식시켜서 더 많은 꼬리를
    얻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 제도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요

    세상엔 거저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 이유가 다 있으니까요
     
    남녀노소, 유익균과 유해균, 익조와 해조가
    필요에 의해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존재합니다

    자연 질서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게
    먹이 사슬입니다.

    그것이 밸런스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생명권의 안녕과 재앙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지쳐 희망을 접었다는 학생이
    연구실로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해 왔는데
    부족한 성적 때문에 기업의 해외 연수생
    모집에 응시를 못한다고 눈시울을 붉힙니다.
     
    정말 잠 안 자고 안 먹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지금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고
    했어요. 교수는 그 학생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 스승은 학생에게 무슨 말로
    위로와 격려를 전할까 생각 하다가
    스승은 제자에게 말합니다

    “네가 살아온 삶이 네 스펙이다.”

    접수부터 하라고 권했습니다

    “학점이 'all B' 이상여야 하는데
      C가 하나 있어요.”

    스승이 제자의 등을 두드리며

    “학점이 다가 아니다. 너만의 스펙이
      있잖니? 추천서는 내가 써주마”★

    라고 말했어요.
     
    결국 학생은 선발되었고, 1년 연수를 성실
    하게 마치자 곧바로 그 회사에 스카우트됩니다.
    그리고 런던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내가 살아온 것이 내 스펙’이라고
    알려준 스승의 한 마디가 절망의
    어둠 속 인생을 부활시킨 겁니다.
     
    스승의 그 한 마디에 열등을 치유하고
    온전한 자유를 찾은 제자는 런던에 부임한
    첫날 밤, 비 오는 테임즈 강가에서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둠은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
     희망, 꿈, 환상, 미래까지 다 덮어요.
     그러나 칠흑의 어둠도 한 줄기 빛에 날아갑니다."

    영화 ‘미션’ 첫 장면에 성경 구절을
    인용한 자막이 떠요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
     
    인생에는 수많은 고통과 역경이 따라붙지만
    그 불행을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어딘가에 열려 있다고 하죠

    인생이 매력적인 것은

    ‘고난을 거듭할수록 지혜는 쌓이고
     나를 강하게 만든다’ 는 것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바로 앞에 두고 쓰러진다고 해요

    터널 끝을 눈앞에 두고. . .

    시련의 순간을 좀만 더 견뎌냈더라면
    승리할텐데. . .

    이 고통의 법칙은 우리가 사는
    지상의 언어요 약속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나를 존중해 줄까요?

    나는 나다운 멋이 있고
    재능을 지닌 존재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거나
    비하하고 있을 뿐이죠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가
    역경에서 이깁니다
     
    올 한 해 주눅 들지 말고
    어깨를 쫙 펴고 계속 걸어요
     
    때가 되면 자신이 바로
    비장의 무기랍니다

    가장 완벽한 정보는
    내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한 것과
    아슬아슬하게 패한 것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 자신 입니다
    터널은 끝이 있고,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기다립니다.

    서울대 이왕재 명예교수의 양심선언

    ㅡ백신으로 집단면역이나 코로나 예방 불가능

     2021.01.16.

    이교수는 건강정보 잡지 '건강과 생명' 1월호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과 관련된 불편한 진실'이란 글에서 그런 주장으로 백신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경종을 울렸다. 15일 이 교수를 직접 만났다. '불편한 진실'을 말한 대가로 비난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학자적 양심은 포기할 수 없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다음달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나

    "이론적으로 예방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백신이라고 하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호흡기 바이러스는 백신 가지고 안 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혈액을 타고 다니면서 질병을 일으키는 경우는 백신이 100% 유효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상기도(코점막, 인후두 점막)에 감염되는 것인데 백신으로 인한 혈중 항체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방할 길이 없다."

    -코로나19는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감기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하겠다. 감기는 내과 책에 뭐라고 돼 있냐면 일주일 정도 지속되는 self limiting disease(자기제한질병)라고 돼 있다. 상기도에 감염돼서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에 끝이 나는 질환, 이렇게 돼 있다. 그리고 치사율은 없다. 항체는 빨라야 감염 3일 지나야 나온다. 3일 이전엔 항체가 절대 안 나온다. 흔히 면역 그러면 항체를 일반인들이 생각한다. 3일 이전에 어떻게 막느냐, 3일 이전에 막는 면역시스템을 우리는 선천면역이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감기 바이러스와 똑같다. 다만 차이가 뭐냐면 상기도 점막에 딱 붙는다. 붙는 능력이 100배 이상 강해졌다는 거다. 아시다시피 아무 세포나 붙는 게 아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상기도 점막에만 붙는다. 붙는 힘이 변종이 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100배 이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계속 감염이 되는 거다. 원래는 3~4일로 끝이 나는 병이다. 항체가 만들어질 틈도 없다. 상처가 아무는 데 3~4일 걸려서 일주일이면 끝나는 병이다."

    -일반 감기 바이러스보다 증상이 심한가

    "일반감기보다 심하지만 독감보다 약하다고 돼 있다. 왜 그러냐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에 있다. 공생하는 바이러스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공생하는 바이러스와 5~10%가 염기서열이 다른 것이다. 박쥐 것이 감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원래 종간에 서로 왔다갔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이거는 박쥐 것, 사스는 사향고양이, 메르스는 낙타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된 것이다. 종간의 벽이 무너지는 일이 21세기에 생긴 것이다."

    -코로나19 항체가 생기기 어려운 이유는 뭔가

    "코로나19는 원래 몸에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5~10%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몸엔 생소한 것이다. 생소한 놈이 들어오면 반응이 심하게 일어난다. 없던 놈이지만 실제는 90~95%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다. 항체가 그래서 잘 안 만들어진다. 정은경 청장이 발표했다. 한국인 1440명을 임의로 뽑아 코로나19에 대한 항체를 검사했더니 1명 나왔다고 했다. 항체가 거의 안 생기는 거다. 내가 몸에 가지고 있는 것은 항체를 안 만드는데 코로나19가 90~95%가 똑같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내 몸에 없어요. 감염되는 거다. 그건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이 항체를 금방 만든다. 인플루엔자는 항체가 잘 생긴다. 그러나 호흡기바이러스의 경우는 공기 중에 있다가 콧속에 붙는데, 인플루엔자 항체는 혈중에 있다. 피를 타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호흡기 점막 상피세포에 혈관이 없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예방효과는 0%이다. 그런데 왜 맞느냐, 노인들은 독감의 합병증이 생기면 폐렴이 돼서 죽는다. 폐렴이 된다는 얘기는 상기도에 있던 놈이 혈액을 타고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혈액을 타고 돌아다닐 경우에는 항체가 작용한다. 죽지 않게 할 수 있다.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람이 1%도 안 된다는 말이다. 100명 중 1명도 안 되는 사람을 위해서 백신을 맞을 필요가 있냐는 거다."

    -그렇다면 코로나19 백신도 그런 효과는 있겠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은 많은 경우 뇌에 있는 혈관이 막히고, 콩팥도 망가지고, 폐도 망가지고, 간도 망가지고 이래서 죽더라는 거다. 만일 코로나19에 항체가 만들어졌다고 하면 그런 건 막을 수 있다. 그런 게 무서워서 백신을 맞겠다면 나름 의미가 있다. 백신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예방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염자 99%가 그냥 넘어간다. 1~2%에서 문제가 되는 건데, 그 사람들은 백신을 맞아서 항체가 생겨있다고 하면 혈중으로 들어가서 생기는 문제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독감은 거의 100% 항체가 생기지만 코로나19는 우리 몸에 상존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90~95%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5~10%를 우리 면역세포가 찾아야한다. 그걸 찾아서 항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 백신 그 자체의 위험은 없나

    분명한 건 뭐냐면 화이자나 모더나에서 하는 게 mRNA백신이다. mRNA백신을 인류최초로 하는 거다. 굉장히 위험하다. 원래 mRNA가 찔러서 넣어준다고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들어가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최초의 시도라면 안전성에 대해서 10년 이상 봐야 한다. 과학자로서 정확하게 팩트만 얘기하는 것이다. 안전성에 검증이 안 됐다는 건 확실하다. 메이저언론에서는 백신확보에 대한 얘기만 나오지 문제점에 대한 얘기는 없다. 그러면 안 되죠. 메이저언론이 많은 국민들이 보는데 문제점이 있을 수 있는 걸 지적하는 게 언론의 기능인데 이건 지금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아무튼 mRNA 백신 안전성 검증을 안 했다는 것이다."

    - 집단면역 형성시킨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는

    "집단면역은 만들어지 않는다. 감기가 인류와 역사를 같이 한 질환인데 왜 집단면역이 안 생기나. 절대 안 된다. 집단면역이란 불가능하다. 항체가 잘 생기지도 않는 데다가 항체가 생긴다 하더라도 계속 걸릴 수밖에 없다. 집단면역이라는 건 항체가 바이러스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게 전제가 될 때다. 예를 들면 간염은 백신이 완벽하게 듣는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항체가 바이러스와 만날 수가 없다.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주사제나 먹는 걸로는 치료제가 나올 수가 없다. 항체가 감염되는 세포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거기로 안 가니 무슨 재주로 막냐. 그러니까 계속 실패하는 거다."

    - 백신 맞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시키는 걸 막아주나

    백신 맞았다고 마스크 벗지 마라, 그 얘기가 나온 것은 화이자 등이 조심스럽게 백신의 취약성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말이 되냐. 백신을 맞고 항체 생겼다면 왜 마스크를 써야 하냐. 나는 감염도 안 되고 감염도 못시키는데. 들어오는 바이러스가 항체에 의해서 다 죽었기 때문에. 혈액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그 말이 맞는 거다. 그런데 백신 기껏 만들어 놓고는 백신 맞았다고 마스크 벗지마라,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한 말이 맞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개런티하고 있는 것이다."

    예일대 하비 리쉬 박사도 최근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코로나19백신이 자신을 예방하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남에게 감염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 코로나19를 감기·독감수준으로 생각해도 된다면 사망이 많은 이유는

    "죽어나간다고 보도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가 매년 독감으로 1000명 가까이 죽는다. 그거 죽을 때마다 보도해봐라. 온 국민이 공포에 떤다. 우리가 13개월 동안 1200여 명 죽었다. 독감은 5월부터 10월까지 없고, 11월부터 그 다음해 3~4월까지 5~6개월 동안 1500명이 죽은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거는 14개월 동안에 1100명이 죽은 거다.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 교수님이 정책결정자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사실 (거리두기를) 푸나 안 푸나 크게 차이 안 난다. 대신 퍼지는 것이 걱정이라면 마스크 쓰는 것만 철저하게 하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대신 병원, 요양원 이런 데는 훨씬 강화해야 한다. 실제로 거기 근무하시는 분들은 지금보다 10배 강화해서 진짜로 의심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들어가게 해야 한다. 노약자, 기저질환자 보호를 철저하게 해서 죽는 사람이 안 나오면 되는 거다. 집합금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감염이 덜 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얻는 게 없다. 죽는 사람은 어차피 기저질환자들이다. 70%가 감염되더라도 요양원이나 병원 관리를 완벽하게 해서 노약자, 기저질환자들에게 균이 갈 수 없게끔 차단하면 한 명도 안 죽는다."

    - 가족과 같이 사는 취약자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

    "그게 사실은 가장 구멍이다. 요양원에 가실 정도는 아닌 노인들이 있다. 젊은 애들은 무증상감염자가 너무 많다. 할아버지 감염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게 문제다. 그런 부분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코로나시대 이후에 생길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변화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60대 이하의 부부하고 자녀들 정도면 문제없이 사시면 되는데, 80이 넘은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주의해야 한다."

    - 유럽은 백신 거부율이 굉장히 높더라

    "백신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화이자나 모더나가 예방률 95%라고 한 것은 전혀 믿을 수가 없다. 흔히 하는 RT-PCR로 하면 진짜백신 접종자는 모두 양성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으니, 증상완화를 기준으로 했다는 궁색한 설명을 들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27일 프랑스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됐으나 1월 7일까지 접종률은 0.03%에 불과하다. 접종 거부율은 60%에 달한다. 당국 최고 책임자인 백신접종전략위원회 알랭 피셰 위원장은 백신 접종에 앞서 백신에 대한 과학적 자료를 볼 수 없으며, 효능이 2~3개월에 그치고, 기저질환자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접종자가 남한테 옮기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지금 당국이 확진자 숫자 발표하는 게 의미가 있나

    "아무 의미가 없다. 주말엔 검사가 적어서 확진자가 적게 나온다. 많이 검사하면 많이 나오고, 적게 하면 적게 나오는데 그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 감기환자 몇 명이라고 발표하나. 정부가 국민들 공연히 겁주는 행위다. 아예 발표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검사숫자 대비 확진자를 비교해 확진율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발표하는 확진자 숫자가 0이 되어야 이 사태가 끝날 판인데 그날이 오겠나

    "절대 안 온다. 0이 될 수가 없다. 인간 공생 바이러스다. 변종이 끊임없이 생긴다.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0이 될 수 있나. 어제 뉴스에도 나오더라 백신을 만든 모더나 CEO가 코로나19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풍토병이 될 것이고 인류를 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그렇게 인정하면서 백신은 왜 만들고 맞으라고 하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이 사람들이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 거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계속 변종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백신은 무용지물이란 말이다."

    - 백신접종을 앞두고 있는데, 전문가로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변종이 나오면 백신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또 나오게 돼 있다. 변종이 나오면 순식간에 다 퍼진다. 변종 출현은 불 보듯 뻔한 얘기다. 변종이 생기면 어떡하냐, 지금 그 백신 다 쓰레기가 될 것이다. 백신에 의지하지 말아라. 죽는 것 때문에 우리가 무서워하는 건데, 면역기능이 어떠한 이유로 낮아진 경우에 불행하게 혈액을 타고 바이러스가 돌아다니는 불행한 일이 생겨서 그 중에 일부가 죽는 일이 생기는 거니까 자기의 면역기능을 지키는 게 제일 확실한 거다. 면역기능만 좋으면 변종도 상관없다. 변종일수록 더 활발하게 작용한다. 백신은 변종이 나오는 순간 무력해지만 우리 몸의 면역기능은 변종에 대해서 면역반응을 더 확실하게 한다. 자기면역기능을 키우는 게 최고다. 그거의 대표적인 것이 비타민C를 먹는 것이다. 감염 자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마스크는 어떤가

    "마스크는 코로나19에 걸리기 싫다 하면 쓰는 것이다. 마스크 쓰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마스크는 써야 한다. 유럽에 더 많이 감염되는 이유는 마스크를 안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거리두기를 할 때는 경제적인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거리두기 하면 덜 감염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교회 못 가고, 당구장 막고, 커피집 막고. 안 막아도 되는 감염을 막겠다며 오히려 경제적으로 다 죽는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거다. 마스크 쓰고, 자기면역 지키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 마스크는 언제 벗나.

    "마스크는 저절로 벗게 돼 있다. 코로나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감기,독감 수준이라는 것을 깨우치면 자연스럽게 벗게 될 거다. 의료계로서는 아주 우울한 얘긴데, 마스크 쓰면서부터 개원가가 많이 황폐화됐다. 결핵도 훨씬 많이 줄어들고, 독감도 없다고 한다. 환자가 줄었단 얘기다. 현재 상황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예수님의 기적

    19세기 옥스퍼드 대학에서 종교학 과목 시험시간에 출제된 주관식 문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 였습니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자 일제히 답안지에 펜촉 닿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지만 유독 한 학생만은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감독관이 다가가 주의를 주었지만 학생은 시험에 하나도 관심 없어 보였습니다.
    시험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학생의 멍때리기는 계속됐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감독 교수가 다가가 백지 제출은 당연히 영점처리고 학사경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뭐든 써 넣어야 한다고 최후통첩 했습니다.
    이 말에 딴청을 피우던 학생의 시선이 돌연시험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정말 단 한 줄만 써놓고 고사장을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달랑 한 줄 답안지는 이 대학 신학과 창립이후 전설이 된 만점 답안지이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영국의 3대 낭만파 시인 중 한 사람인 "조지 고든 바이런"

    대학의 모든 신학교수들을 감동시켜 올하트 받은 바이런의 촌철살인 답안은 이랬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神의 물방울)

    음식 이름에 얽힌 우스개 이야기

    안녕하세요.
    프랑스 교포 3세 입니다.
    저 한국에 온 지 몇 년 됐어요.
    저 처음에 한국 왔을 때,
    한국은 간식도 너무 무서운 거 같았어요.

    저 점심먹고 왔더니
    과장님이 "입가심으로 개피사탕 먹을래?" 라고 했어요.

    저 한국사람들 소피 국 먹는거 알았지만(선지국) 개 피까지 사탕으로 먹을 줄은 몰랐어요.
    저 드라큐라도 아니고 무슨 개 피로 입가심 하냐고 싫다고 했더니

    "그럼 눈깔 사탕은 어때?" 하셨어요.
    저 너무 놀라서
    "그거 누구꺼냐고?" 했더니

    과장님 씨익 웃으면서
    "내가 사장꺼 몰래 빼왔어." 했어요.
    저, 기절했어요.

    눈 떠 보니 과장님 저 보면서
    "기력 많이 약해졌다. 몸보신 해야 한다. 내 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저 너무 불안해서 "무슨 보신이냐?" 했더니
    과장님 제 어깨를 툭 치시며
    "가자, 가서 우리 마누라 내장탕 먹자." 했어요.
    저 3일간 못 깨어났어요.

    집에 가는 길에서
    식당 간판보고 더 놀랐어요.
    '할머니 뼈따구 해장국! '
    미칠뻔 했어요.

    근데 이거 보고 완전 돌아버렸어요.
    '할머니 산채 비빔밥!'

    연륜(年輪)과 경륜(徑輪)

     "고려장이 없어진 유래,,

    고려장은 고려인이 효도심이 없어서 있었던 일인가?
    고려장 풍습이 있던 고구려 때 박정승은 노모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눈물로 절을 올리자 노모는 '네가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두었다'고 말합니다.

    박정승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는 노모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몰래 국법을 어기고 노모를 모셔와 봉양을 합니다.

    그 무렵 중국 수(隋)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 마리를 끌고 와 어느 쪽이 어미이고 어느 쪽이 새끼인지를 알아 내라는 문제를 냅니다.
    못 맞히면 조공을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박정승에게 노모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말을 굶긴 다음 여물을 주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란다."

    고구려가 이 문제를 풀자 중국은 또 다시 두 번째 문제를 냈는데

    그건 네모난 나무토막의 위아래를 가려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노모는
    "나무란 물을 밑에서부터 빨아올린다. 그러므로 물에 뜨는 쪽이 위쪽이란다."
    고구려가 기어이 이 문제를 풀자 약이 오를때로 오른 수나라는 또 어려운 문제를 제시했는데

    그건 재(灰)로 새끼를 한다발 꼬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라에서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는데 박정승의 노모가 하는 말이
    "얘야, 그것두 모르느냐? 새끼 한다발을 꼬아 불에 태우면 그게 재로 꼬아 만든 새끼가 아니냐?"

    중국에서는 모두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자
    “동방의 지혜있는 민족이다.” 라며 다시는 깔보지 않았다 합니다.

    그리고 당시 수나라 황제 수 문제(文帝)는
    “이 나라(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도 이 말을 어기고 아들인 수 양제(煬帝)가 두 번이나 침범해와 113만 명이 넘는 대군(大軍)으로도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에게
    대패하고는 나라가 망해 버립니다.

    그 다음에 들어선 나라가 당(唐)나라인데 또 정신을 못차리고 고구려를 침범하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깨지고 당시 황제인 당태종(太宗)은 화살에 눈이 맞아애꾸가 된채로 죽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모의 현명함이 세 번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왕을 감동시켜 이후 고려장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리스의 격언에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가정과 마찬가지로 국가나 사회에도 지혜로운 노인이 필요합니다.

    물론 노인이 되면 기억력도 떨어지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대신 나이는 기억력을 빼앗은 자리에 통찰력이 자리 잡습니다.

     노인의 지혜와 경험을 활용하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웃어른을 공경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합시다 .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천재가 경륜(徑輪)을 이기지 못하고 경륜이 연륜(年輪)을 이기지 못한다."


    요즘  한국사회의 책임을 전가하고 남의 탓으로 하는 정치인.법조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미국 마이애미 롱비치 법정에서 있었던 실화 한토막이 생각났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 미국 여성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들 형제가 동네 한구석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지역의 유력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 아들 형제의 죽창이 저명 인사가 타고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말과 저명인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을 사람도 문제인데 그 말의 가격도 작으마치 천만불이 넘는 세계에 몇마리 밖에 없는 엄청 비싼 말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판사가 형제 둘에게 누구의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렸는냐고 묻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쏜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청합니다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형제 우애(友愛)가 남달은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기도가 끝난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前妻)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고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판사님, 옳을 말씀입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내가 숙연해 지고 재판정이 쥐 죽은듯 고요속에 묻혀 있을 때
    방청객들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받은 판사가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 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사회를 아름답게 선도 할 모범적 가족이라고 판단한 판사는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합니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그러기에 오늘날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과오와 실수를 범하지만,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미국의 원동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두 아들의 아름답고 기특한 정신,
    또 숭고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전처의 아들과 친자식을 함께 키우며
    두 아들이 서로가 자기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게끔 한 엄마의 인성교육과 가정교육과 인간성을 바로 세우도록 교육한
    그 어머니의 숭고한 모습이 오늘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변하고 있는듯 합니다.
             
    은혜의 힘
    (담배를 즐기던 어느 여학생들)

    어느 가난한 목사님이 학교에 가까운 지하실에 월 세를 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하 예배당 입구 계단에 아침, 저녁으로 침이 하얗게 깔려있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상하다 싶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이웃에 있는 여자 중, 고등학교의 이탈학생인 어린 담배꾼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교회 계단 밑 후미진 곳에서 등교 전후, 점심 때, 하교 때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게 떼거리로 몰려와서 담배를 피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야단 칠 생각을 하다가
    여학생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궁리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햇볕정책으로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여학생들 몰래 담배꽁초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일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뱉어놓은 침을 닦는 일이었습니다.
    “뱉어도 이렇게 많은 침을 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바닥이 하얗게 침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래! 이 애들을 교회에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모님에게 귤 한 박스를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담임목사는 귤을 예쁜 접시에 담아 내놓고 옆에다 재떨이 대용품으로 커다란 스텐리스 그릇에 물을 잔잔하게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침 뱉을 두루마리 휴지와 큰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고 이런 글을 써 붙였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 계단에 온 분들은 이미 우리교회 식구들입니다.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이 귤도 여러분 것입니다.
    먹고 남는 것은 가져가셔서 친구들과 나눠드세요.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계속 먹을 것을 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모님은 가난한 지하 교회가 무슨 돈이 있느냐고, 그리고 그것을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워낙 목사님이 간곡히 부탁하니 거절 할 수가 없어 계속 공급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매일 매일 과일이나 사탕 등을 계단에 놓아두고
    정성스럽게 글도 바꾸어 써서 붙였습니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죠?
    시험 잘 보세요!
    ‘고생 끝에 낙!’”
    “오늘은 무척 춥죠?
    교회 문 열어놓았으니 커피나 컵 라면은 가스렌지를 사용해서 마음껏,,,
    ”“부활절 선물로 계란”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와 선물”
    “친구에게도 전달, 같이 먹기,,”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은
    “담배 끊어라.”
    “침 뱉지 마라.”
    “교회 나와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짧은 메시지와 끝말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들!”
    “기말 시험에 좋은 성적 내시기를,,,” 식의 격려 메모만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겨울까지 1년 동안, 특히 졸업 때에는 예쁜 꽃다발을 선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학생들도 그 때마다
    “목사님 감사”,
    “목사님 짱~!”,
     “열심히 공부할게요.” 등을 써 놓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이 담배를 재떨이에, 침은 휴지에 싸서 휴지통에 넣고, 계단도 담임목사가 치우는 것보다 더 깨끗이 치우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여학생들은
    목사님과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습니다.

    졸업 직전에 여학생들이 교회에 18억 원의 큰돈을 헌금했습니다.
    여학생들이 목사님이 너무 고마워서 이가난한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며 한 날을 정해 모두 복권을 사고 복권에 당첨되면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봉투에 여덟 명의 이름을 써서 당첨된 줄로 믿고 약정헌금을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교회에 헌금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복권이 당첨되어 18억 원을 탔기 때문입니다.

    졸업하기 전에 여학생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왔는데,
    항공사, 백화점 등의 취업과 진학 등 자기 신상을 일일이 다 알려주고 인사하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몇년 후에 알아보니 모두 가까운 교회를 나가 주님의 일꾼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법이나 원칙보다
    은혜에 감동될 때 변화됩니다.

    소리친다고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끊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은혜의 힘이 훨씬 더 큽니다.




    카카오톡을 만든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재산 절반 이상(5조원)을 기부하겠다고 엊그제 발표해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김 의장이 기부 결심을 하게된 배경의 하나로 그가  좋아한다는 시(詩)가 거론되어 눈길이 갔습니다.

    김의장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고  항상 읽는다는  시


     미국 사상가 겸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 라는 시를  (영어 윈문/우리말  번역문)  공유합니다


    《What is Success? 》
    - Ralph Waldo Emerson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무엇이 성공인가?》
    ~랠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를 정년 퇴임하고 광주과기원 특별초빙교수로 재직중인 성원용 교수가 신안 등 서남해안 풍력에 대해 분석한 글입니다.

    신안앞바다 풍력발전 8GW (8 기가와트) 얼마나 황당한 계획인가?
     
    - 남산타워 높이의 풍력발전기 2000대를 세워야 한다
    - 발전기 지탱을 위해 땅속 수십미터의 콘크리트 기초공사를 해야 한다
    - 그 전기 수도권으로 가져오려면 바다와 육지를 가로지르는 고압선 철탑 세워야 한다.
    - 바람이 안 불 때를 대비해서 비슷한 용량의 가스발전소 병행해서 운전해야 한다.

    며칠전에 문대통령도 참석하여 신안앞바다에 2030년까지 풍력발전시설 8GW 공사를 선포하였다. 돈이 48조원이 든다. 국민들은 정말로 이 것이 얼마나 황당한 계획인가를 사람들이 몰라서 내가 다시 설명한다.

    풍력발전기 한대가 요즘은 대충 4MW(메가와트)의 발전 용량을 가진다. 따라서 8GW 시설용량을 가지려면 풍력발전기 2,000대를 설치해야 한다.  (참고로 1GW는 1000MW이고, 1MW는 1000KW이다.) 그러면 풍력발전기 한대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 (대관령의 것은 옛날의 작은 용량 풍력발전기이다.) 잘 보이는 남산 타워 (방송용 안테나 포함)를 생각하면 비슷한 크기이다. 대표적인 유니슨의  4MW 모델을 찾아보니 날개의 직경이 140미터이다. 그러니 지표 또는 수면에서부터 날개끝 까지의 높이는 200 미터 정도가 된다. 참고로 남산 타워의 아래 건물과 타워, 안테나의 총 높이가 240미터이다. 따라서 타워 건물을 뺀 타워와 안테나 높이와 풍력발전기의 길이가 비슷하다.

    그 뿐이 아니라,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센 바람에도 끄떡없이 있으려면 땅속 깊이 제대로 기초공사를 해야 한다. 지금 독일에는 20년전에 설치한 1MW 이하의 비교적 소용량 풍력발전소 2만개를 수명이 다 되어서 철거해야 하는데, 땅속 30미터 깊이 까지 박은 철근 콘크리트 기초는 그냥 겉에만 제거하고 묻어두는 실정이다. 그리고 강화화이버 재질의 날개는 재활용할 길이 없어서 (길이가 보잉 비행기 길이이다) 처치곤란으로 골치를 썩히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풍력발전기 20년 쓰고 나면 모두 그런 운명이다.
    어민들이 빼곡하게 어업하는 서해안 앞 바다에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을 2,000개를 세우는데 모두 환경훼손이 없다고 믿는다. 집단 최면이고 사기이다. 세우고나면 그 동네 사람들이 제일 먼저 속았다고 아우성 칠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산위에 측량용으로 5미터짜리 철근 막대기 박은 것도 민족정기 훼손이니 뭐니 온갖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서해안에 이렇게 큰 기둥을 2000개나 세우는데 이 것을 환경친화라 우긴다. 더구나 풍력발전기 때문에 새가 많이 죽는다.  그리고 풍력발전기의 날개 끝의 속도는 시속 수백Km이다. 비행기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그 지역은 연안어업이 활발한데 어찌 어민 피해가 없겠는가.

    이렇게 대규모로 세워도 얻어지는 전력은 짓다가 중단중인 신한울 원전 3,, 4호기 정도에 해당한다. 신한울 원전이 불과 1 제곱킬로미터도 안되는 면적을 차지한다면, 이 풍력발전은 거의 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심각한 환경영향을 미친다. 신한울 원전 중단없이 세우는 것이 훨씬 더 관리도 용이하고, 경제적이고, 후손들에게 쓰레기 덜 남기는 것은 따지고 계산할 필요도 없다.  

    미신이 따로 없다. 이 황당한 신재생 미신을 깨우쳐야 한다. 쏟아붓는 48조원을 결혼하는 48만쌍의 젊은이에게 1억원씩 선물하면 저출산과 빈부격차도 해결되고 미래에 쓰레기도 덜 남긴다. 참으로 무지무지 답답한 심정이다.


    노후의 친구(親舊)란?

    공자는 인생을 단계별로 정리해놓았습니다.
    20세를 뜻하는 약관(弱冠),
    30은 이립(而立),
    40은 불혹(不惑),
    50은 지천명(知天命),
    60은 이순(耳順)
    70은 종심(從心) 이라고 합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에서 나온 말이 고희(古稀)입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에야 '고희'라는 말이 무색해졌지만 옛날에는 고희를 넘기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고희라는 언덕에 와보니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福) 중에서 가장 으뜸은 단연 "만남의 축복"입니다.

    "만남"이란 한자어는 "조우(遭遇)"라고 합니다.

    배우자와의 만남과 친구 간의 만남은 단연 으뜸이겠지요.

    잘 만나면 인생 최선의 행복이요, 잘못 만나면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평생의 동반자이고
    친구는 인생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노년이 되면 인생을 함께 걸어갈 친구가 매우 중요합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동행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은 부모 형제와 동행을 하면서 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도 더 친밀해 지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상담할 수 있는 친구,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는 일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
    마음이 아플 때 의지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실하고 강한 우정을 쌓은 사람들이 오래 살고,
    행복하며, 활기찬 인생을 산다는 연구발표가 있습니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힌두 속담에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라는 말이 있고,

    공자는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위 환경이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향기가 진한 꽃 주위에 있으면 나에게도 향기가 나고,
    악취가 나는 곳에  있으면 내 몸에서도 악취가 납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한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친구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어진 삶을 멋지게 엮어가는 위대한 지혜는 우정(情)입니다.

    영국의 시인 월리엄 블레이크는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사람에겐 우정이 있다." 는 말을 남겼습니다.

    신은 인간이 혼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칭찬하고, 자신도 이웃과 친구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야 人生이 아름답고, 幸福해 집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운명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선택일 뿐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癩건강 하시고 행복하세요.


    (하트) 잘 보관하시고
              평생 동안 참고로 하세요.

    https://m.cafe.daum.net/6dong26/qfNy/184?svc=cafeapp&sns=etc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은
    구약시대의
    찬송가이자 기도서입니다.

    종교개혁자 죤 칼빈은
    시편을 일컬어
    "영혼의 해부학" 이라고 하였습니다.

    150편의 "시"들 속에
    인간사의 슬픔과 기쁨,
    탄식과 감격,
    감사와 찬양이
    골고루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예수께서
    가장 애송하셨던 책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읊조리셨던
    구절들도 모두가
    시편의 구절들이었습니다.

    시편 중에
    대표적인 시가 23편입니다.

    이 시는
    다윗 왕이 재야 시절
    사울 왕에게 쫓기며
    각박한 세월을 보내던 시절에
    지은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편 23편은
    문학적으로도 완벽한
    내용이려니와
    내용에 담긴 영적 깊이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인민군에 쫓겨 정부가
    진해로 옮겨 갔습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한국 정부를 일본으로 옮기라고
    권유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진해 바다에
    빠져 죽을지 언정
    이 땅을 떠나지 않겠노라" 하며
    진해를 지켰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민군들이 쏘는 포소리를
    지척에서 들으며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정부가
    진해로 옮겨간 후
    첫 예배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연세대 교수였던 나운영 교수가
    성가대 지휘자였습니다.

    나운영 교수는
    피난 정부에서 드리는
    첫 예배에 찬양을
    무슨 곡으로 선택할까를 고심하다
    시편 23편을 친히 작곡하여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밤을 새우고 작곡을 하여
    첫 예배 찬양으로 불렀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드리기 전에
    나운영 지휘자는 신도들 앞에 나가
    시편 23편을 작곡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성가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찬양을 들으며
    대통령 부부도 울고,
    성가대 대원들도 울고,
    예배에 참여하였던 신도들도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의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찬양대의 성가가 끝난 후
    여호와께서 이 나라를
    공산화의 위협에서
    구하여 주실 것을
    울며 기도드렸습니다.

    그런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어
    오늘의 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선배님들의 눈물의 기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시편 23편을 읊조리며
    이 겨레의
    목자 되신 예수께서
    이 나라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되살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샬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 23편)
    나운영곡 / 인천시립합창



    소금 이야기

    사람의 심장을 염통(소금통)이라고 합니다.
    심장암은 없습니다.
    아마 소금 덕인 것 같습니다.  


    * 정확히 자세히 모르면 말하지 말라.

    소금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암염 또는 정제염>과
    우리나라와 같은 갯벌에서 만드는 <천일염> 이다.  

    미국에는 천일염이 없고,
    모두가 암염이나 정제염뿐이다.

    암염이나 정제염은 미네랄이 없는 순수 염화나트륨(Nacl)이다.  이 암염이나 정제염은 미네랄이 없다.
     
    소금을 많이 먹지 말라는 이론은 바로 이 암염과 정제염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속에 필요한 것은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이다.

    당연히 미국 의사들의 이론은 소금을 먹지 말라고 하게 되어있다.

    한국의 의사들이 미국 의학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소금을 먹지 말라는 이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의 섭리에 의하면 이 천일염을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인체는 70%가 물이다.  그냥 물이 아니라, 0.85%의 소금물이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꽂아주는 주사가 바로 닝겔이란 사람이 발견했다 해서 이름 붙여진 닝겔이다.

    이 닝겔이 0.9%의 소금물인 것이다.  이 0.9%의 식염수가 혈관속으로 바로 들어가면 우선 사람이 깨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환자에게 소금물을 혈관에
    직접 주사하는 것은 괜찮고,
    먹으면 안되는 근거가 있는가?  없다..
     
    미국 의사 월렉이 쓴책
     ‘죽은 의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는 책을 보면 소금을 먹였더니 환자들이 약을 끊었다는 임상실험을 설명하기도 한다.
     
    정부의 무지한 관료들은
    천일염은 비위생적이므로 천일염 농장인 염전을 폐쇄하고 위락시설로 바꾸라고 정부지원금까지 지불하며 권장하는 실정이다.

    심지어는 대량식품업체나 학교나 공장의 대량급식업체에서는 천일염을 사용할 수 없다는 법령까지 만들어 시행하는 실정이니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 소금의 역할은 방부제이다.

    인체 속에 염도가 부족하면 몸이 썩는다.
    즉 부패한다.
    부패하는 현상은 어떤 것인가?
    바로 각종 염증, 아토피, 무좀 등의 세균번식이다.
    대부분의 병은 세균성이다.

    의사들의 지시에 의해 모든 국민들은 소금을 먹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먹는 소금이 천일염이 아니라 맛소금, 꽃소금 등 정제염이다.  많은 사람들의 몸이 부패해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소아 아토피로부터 시작하여 성인들도 아토피라는 병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주변에 아토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본적이 있는가?

    심하면 문둥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온 몸이 흉해지고, 진물이 나는 등 고통을 견디다 못해 성격이 민감해지거나
    포악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몸속에 염도가 부족하여 사람의 몸이 부패하고 있는 것이다.
     
    부패방지 물질 세 가지 일반적으로 부패를 방지하는 물질이
    소금과 설탕과 알콜 이다.

    인간의 몸은 이 세가지 중에서 소금으로 몸을 절여 부패하지 않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소금 금지령 때문에 소금을 먹지 못하니까 몸은 자신의 부패방지를 위해 무엇인가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현대인들은 설탕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특징이 바로 설탕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소금으로 부패를 방지 하는 것이지, 설탕으로 부패를 방지 하는것이 아니다.

    그나마 이 설탕도 미네랄이 풍부한 원당이면 영양면 에서라도 좋을 수 있을 텐데 모두가 정제과정을 통해 미네랄을 모두 제거한 순수한 당분일 뿐이다.
     
    ▶ 알콜중독
    알콜중독도 같은 이치이다.
    염도가 부족한 사람이 알콜을 마시기 시작하면 몸은 알콜을 부패방지용으로 착각하고 소금이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알콜을 찾게 되지만 몸은 만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많은 양의 술을 먹어보지만 주량만 늘 뿐 소용이 없다.

    결국 몸은 망가지고 각종 성인병과 수족을 벌벌 떠는 신체의 마비증상인 수전증까지 오게된다.

    이 알콜 중독자에게 천일염을 섭취시키면 신기하게도 알콜중독에서 벗어나 평정을 되찾게 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각종 질병과 천일염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불면증, 우울증, 정신착란증, 온 전신의 뼈마디마디가 쑤시는 고통스런 질병인
    신경성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들에게 천일염을 먹이면 수일 내에 증상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모두가 현대인들이 누군가가 잘 못 전해준 정보에 의해 소금 섭취를 하지 못한 심각한 현실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구약 성경에 모든 제물들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레위2:13)고 했던 말씀과,

    신약성경에 너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참으로 자연의 이치이며, 영적인 이치이다.
    이제 우리는 소금을 먹지 말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이상 인간의 병을 책임지지 않는 병원의 지시를 무조건 따를 수 없다.

    입원환자에게 나오는 식사를 몇 개월만 먹으면 건강한 사람도 병이 들 수밖에 없이 싱겁다.

    게다가 하얀 쌀밥은 더더욱
    환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밥상이다.
     
    암세포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 햇빛과 물과 소금과 섬유소, 비타민C 등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단백질(고기)를 비롯하여 암세포가 좋아하는 것들만 먹는다고 봐야 한다.
    그 중 소금과 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혹자는 소금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걱정한다.
    미안하지만 걱정 안 해도 될 것은 소금은 과식이란게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많이 넣으면 짠 것이 아니라, 써써 먹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도 써서 못 먹을 만큼 소금을 많이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이 먹으면 몸이 물을 달라고 보채기 때문에 이때 물을 마시면 된다.
    양질의 생수를 말이다.
     
    그래서 우리몸은 일정의 염도를 유지하게 된다.

    생수만 많이 마셔도 사람의 성격이 차분해진다는 연구, 실험 발표가 있다.

    물과 소금... 건강의 필수요건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모든 병이 심혈관계 질병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혈액이 문제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피가 탁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은 피가 탁하다는 말 이전에 피가 묽은 것이다.

    그러니까 핏속에 까지 오염이 되고 노폐물이 침전되어 뻑뻑한 오염물질로 변해 혈액순환이 안 되는 것이다.
     
    청량음료가 아닌 순수 생수와 천일염을 충분히 섭취하면 건강한 혈액, 즉 맑고 깨끗한 피가 되어 당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줄 것이다.

    나의 몸이 0.85%의 염도를 유지하게 되면 어떤 병균이 내 몸속에 들어와도 이길 수 있다
     
    더 없이 좋은 식품... 음료...,
    차라리 약이라고 해야한다.
    우리가 겨울에 동치미 심심하게 한 잔 쭉 마시는 것 생각하면 된다.

    실제 동치미 국물 겨우 내내 먹어두면 이보다 더 좋은 민간요법 없다.

    여름엔 물김치로 만들어 시원하게 간간하게 음료수처럼 수시로 마시는 것도 역시 최고다.
    누구든지 할 수만 있다면 필수 식생활로 실천하면 이게 보약이다.
     
    소금에 절인 배추나 음식은 상하지 않는다.  몸에 염증이 많다는 것은 곧 부패했다는 뜻이다.

    한글로 곰팡이...
    영어로 바이러스...
    더 쉬운 말로 썩어가고 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


    조우(遭遇)라는 한자는 "만남"이란 뜻이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독일의 문학자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많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을 통해서 결정됩니다

    여자는
    좋은 남편은 만나야 행복하고
    남자는
    좋은 아내를 만나야 행복합니다.

    학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실력이 생기고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만나야
    가르치는 보람을 누리게 됩니다.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잘 만나야 합니다.

    씨앗은
    땅을 잘 만나야 하고
    땅은
    씨앗을 잘 만나야 합니다.

    백성은
    왕을 잘 만나야 하고
    왕은
    백성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우연한 만남이든
    섭리적 만남이든
    만남은 중요합니다.

    인생의 변화는
    만남을 통해 시작됩니다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만남에 대한 생각을 하는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힘
     (담배를 즐기던 어느 여학생들)

    어느 가난한 목사님이 학교에 가까운 지하실에 월 세를 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하 예배당 입구 계단에 아침, 저녁으로 침이 하얗게 깔려있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상하다 싶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이웃에 있는 여자 중, 고등학교의 이탈학생인 어린 담배꾼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교회 계단 밑 후미진 곳에서 등교 전후, 점심 때, 하교 때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게 떼거리로 몰려와서 담배를 피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야단 칠 생각을 하다가
    여학생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궁리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햇볕정책으로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여학생들 몰래 담배꽁초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일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뱉어놓은 침을 닦는 일이었습니다.
    “뱉어도 이렇게 많은 침을 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바닥이 하얗게 침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래! 이 애들을 교회에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모님에게 귤 한 박스를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담임목사는 귤을 예쁜 접시에 담아 내놓고 옆에다 재떨이 대용품으로 커다란 스텐리스 그릇에 물을 잔잔하게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침 뱉을 두루마리 휴지와 큰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고 이런 글을 써 붙였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 계단에 온 분들은 이미 우리교회 식구들입니다.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이 귤도 여러분 것입니다.
    먹고 남는 것은 가져가셔서 친구들과 나눠드세요.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계속 먹을 것을 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모님은 가난한 지하 교회가 무슨 돈이 있느냐고, 그리고 그것을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워낙 목사님이 간곡히 부탁하니 거절 할 수가 없어 계속 공급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매일 매일 과일이나 사탕 등을 계단에 놓아두고
    정성스럽게 글도 바꾸어 써서 붙였습니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죠?
    시험 잘 보세요!
    ‘고생 끝에 낙!’”
    “오늘은 무척 춥죠?
    교회 문 열어놓았으니 커피나 컵 라면은 가스렌지를 사용해서 마음껏,,,
    ”“부활절 선물로 계란”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와 선물”
    “친구에게도 전달, 같이 먹기,,”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은
    “담배 끊어라.”
    “침 뱉지 마라.”
    “교회 나와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짧은 메시지와 끝말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들!”
    “기말 시험에 좋은 성적 내시기를,,,” 식의 격려 메모만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겨울까지 1년 동안, 특히 졸업 때에는 예쁜 꽃다발을 선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학생들도 그 때마다
    “목사님 감사”,
    “목사님 짱~!”,
     “열심히 공부할게요.” 등을 써 놓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이 담배를 재떨이에, 침은 휴지에 싸서 휴지통에 넣고, 계단도 담임목사가 치우는 것보다 더 깨끗이 치우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여학생들은
    목사님과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습니다.

    졸업 직전에 여학생들이 교회에 18억 원의 큰돈을 헌금했습니다.
    여학생들이 목사님이 너무 고마워서 이가난한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며 한 날을 정해 모두 복권을 사고 복권에 당첨되면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봉투에 여덟 명의 이름을 써서 당첨된 줄로 믿고 약정헌금을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교회에 헌금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복권이 당첨되어 18억 원을 탔기 때문입니다.

    졸업하기 전에 여학생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왔는데,
    항공사, 백화점 등의 취업과 진학 등 자기 신상을 일일이 다 알려주고 인사하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몇년 후에 알아보니 모두 가까운 교회를 나가 주님의 일꾼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법이나 원칙보다
    은혜에 감동될 때 변화됩니다.

    소리친다고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끊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은혜의 힘이 훨씬 더 큽니다.

     -지인이 준 글에서-

    고슴도치 딜레마( Hedgehog's dilemma)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와의 일체감이라는 두가지 욕망에 의한 딜레마이다.
    추운 날씨에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 서로를 따뜻하게 하고 싶어하지만 서로의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심리학의 용어이다.

    쇼펜하우어와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이러한 상황을 사회에서 각각의 인간이 서로에게 어떠한 느낌을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인간의 관계가 비록 좋은 취지에서 출발하지만, 인간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면 결국 발생할 수 없고, 그로인해 발생한 관계는 서로에게 신중하고 약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고슴도치 딜레마에서는, 상호가 서로의 이기심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에게 절도를 지키는 것을 권장한다.
    고슴도치 딜레마는 내향성과 고립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또한 실제의 고슴도치들은 바늘이 없는 머리를 맞대고 체온을 유지하거나 수면을 취하고 있다.


    돈 이란! 잘보세요..신기합니다.
         <어느 산골의 외상값>

    관광객으로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여행객 한 사람이 와서 민박집에 방을 잡았고, 20만원의 숙박료를 지불했다.

    민박집 주인은 정육점으로 달려가서 고기값 20만원을 갚았다.

    정육점 주인은 세탁소로 달려가서 세탁비 20만원을 갚았다.

    세탁소 주인은 맥주집으로 달려가서 맥주값 20만원을 갚았다.

    맥주집 주인은 민박집으로 달려가서 숙박비 20만원을 갚았다.

    돈이 순식간에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민박집 주인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여행객이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20만원을 돌려받아 떠나 버렸다.

    돈을 번 사람도 없고, 돈을 쓴 사람도 없다. 그러나 마을에는 이제 빚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돈은 돌아야 돈이고, 사람은 사랑해야 사람이다~


    ㅡ上善若水(상선약수)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 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이 세상(世上)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어 이르던 말

    어느날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습니까?''

    스승은 때가 아니라며  대답을  미루었다

    몇년뒤
    스승은 제자를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고통에서 벗어
    나는 방법을  가르쳐 줄테니
    따라 오너라''

    스승은  말을 마치자  
    숲속을 살피기  시작하더니
    아름드리 나무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이놈의 나무야,
    날 놔라!  사람살려!''

    영문을 알 수 없는 제자는 나무에 달라붙은 스승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썻다
    그렇지만 스승은  계속 살려달라고   소리칠 뿐
    나무에서 떨어 지지 않았다

    참다 못한  제자가  큰소리로 말했다

    ''나무가 스승님을  붙잡은게 아니라
    스승님이  나무를  부여안으신거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나무한데
    놓으라고  하시다니요,
    나무를 잡은 손을 놓으면 해결 되지 않습니까?''

    그제야  스승은  나무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말했다

    ''지금 네가 말한  것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 나는 길이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번민은 욕심으로 부터 오는 것이라네
    물질과 명예,
    사람이 나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붙잡고 놓지 못해서  괴로운  것임을 늘
    명심하도록 하여라

    비로소  제자는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참고
    ('도덕경' 8장의 上善若水(상선약수) ) 노자의 도덕경은 전체 81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오늘의  할 일
    1웃자
    2또 웃자
    3그리고 또 웃자




     재미있는 유머

    부부가 외출을 했는데, 앞서가던 남편이 무단 횡단을 했다. 
    깜짝 놀란 트럭 운전사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 멍청이, 얼간 머저리, 쪼다야!  길 좀 똑바로 건너 "

    이말을 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아는 사람이에요?"

    "아~아니."

    "그런데 당신에 대해 어쩜 그렇게 잘 알아요?"


    가슴이 아주 작은 아내가 브래지어를 하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가슴도 작은데 뭐 브래지어까지 할 필요있어?"  
    그러자 아내가 조용히 대꾸했다.

    "내가 언제 당신 팬티 입는 거 보고
    뭐라고 합디까?"


    웃고 있는 시체

    시체실에 3구의 시체가 들어왔다.
    그런데 시체 모두 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검시관이 물었다.

    "아니 시체들이 왜 모두 웃는 거요?"

    "네, 이 첫번째 시체는 일억원 짜리 복권에 당첨 되어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고요.

    그리고 두번째도 심장마비 인데 자기 자식이 일등했다고 충격 받아 죽은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

    *검시관이 또 물었다.*

    "이 세번째 사람은요?"

    그러자,  "이 세번째 사람은 벼락을 맞았습니다."

    "벼락을 맞았는데 왜 웃고 있어요?"

    그러자 시체실 관리 직원이 하는 말..
    "사진 찍는 줄 알고 그랬답니다."


    ㅅㅂㄴ

    딸이 어쩌다 엄마의 휴대폰 통화 목록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통화 목록 중에 'ㅅㅂㄴ' 이라고 뜨는 것이 있어서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엄마 한테 휴대폰을 들이대며 말했다.

    딸 : "엄마! 이거 'ㅅㅂㄴ' 이 누구야?"
    엄마 :  "응~ 네 아빠지 누구니"

    딸 : "엄마~!  도대체 어떻게 아빠를 "시발놈" 이라고 할 수 있어?"

    엄마 : 아냐, 시발놈이라니? 서방님이야! 서방님!"

    교통경찰과  미소 아줌마

    과속 운전 차량이 오니까 교통경찰이 차를 정지시키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당신과 같이 과속을 하는 차량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전한 아줌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당신이 기다릴 것 같아서 빨리 오느라고 과속이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교통경찰은 아줌마의 미소가 고마워 벌금 고지서는 끊지 않고 음주운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음주측정기를 대며 말하였다.

    “여기에다 입으로 불어 보세요.”

    미소 아줌마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요염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가 이때까지 빨아보라는 남자는 많이 만났으나 불어보라는 남자는 처음이네요.”

    교통경찰이 박장대소를 하며 말하였다.  

    “내가 교통경찰 5년에 아줌마같은 미소와 유머 잘하는 분은 처음이네요. 봐주겠으니 그냥 가세요.”

    미소와 유머가 교통경찰을 이긴 셈이다.


    미소

    석가모니가 제자와 길을 가다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건달들이 못된 욕을 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노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묻습니다.
    "스승님, 그런 욕을 듣고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이보게,  자네가 나에게 금덩어리를 준다고 하세. 그것을 내가 받으면 내 것이 되지만, 안 받으면 누구 것이 되겠나?"
    "원래 임자의 것이 되겠지요."
    "바로 그걸세.  
    상대방이 내게 욕을 했으나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 욕은 원래 말한 자에게 돌아간 것일세.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말의 재치

    휴일이라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켰는데 짜장면에서 바둑알이 나왔어요.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중국집에 전화해서 사장 바꾸라고 소리치고 짜장에서 바둑알 나왔다고 따지니 가만히 듣고 있던 중국집 사장님 왈.
    "네, 축하드립니다. 탕수육에 당첨되셨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하는데‥)


    애꾸(윙크)의 고백

    신랑이 애꾸라는 사실을 신부는 신혼 첫날 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신부 : 당신이 애꾸라는 사실을 내게 숨겼군요.
    신랑 : 예전에 내가 당신에게 편지로 고백하지 않았소?
    신부는 신랑에게서 받았던 연애 편지들을 당장 찾아 보다가 이윽고 그 편지를 찾아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눈에 반했소'

    일본의 오사카 고등법원의 형사부 총괄 판사였던 '오카모도 겐'은 36년동안 재직했던 판사직에서 몇년 전 퇴임했습니다.

    큰 사건들을 맡아 처리해 오던 유명한 판사였던 그가 정년퇴임까지 5년이 더 남았는데도 일을 그만두자, 사람들은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엉뚱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요리학원이었습니다.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음식점을 내겠다는 각오로 60살 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요리학원을 나갔습니다.
    그는 손자뻘 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칼 쓰는 법과 양념을 만드는 법, 야채를 써는 방법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년 만에 그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내더니 자신이 일하던 법원 앞에 두 평 남짓한 간이음식점을 내었습니다.
    유명한 판사였던 그를 알아보는 손님들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판사직을 그만 두고 음식점을 낸 것을 궁금해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재판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언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 일을 36년이나 해 왔던 것이죠.
    재판관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식당 주방장이 되더라도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남에게 죄를 정하고 벌을 주는 일이 싫어서 남은 여생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작은 음식점 이름은 ‘친구’입니다.
    그 이름 속에는,
    그의 음식점을 찾는 사람들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그의 오랜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친구를 많이 두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허물없는 친구 두 셋을 두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여진 스웨덴의 명총리 "타게 엘란데르(Tage Erlander)" 이야기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군지 물어보면 대답이 한결같습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그에게 사인 받은 책을 보여주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1946년부터 23년간 총리를 지낸 타게 엘란데르. 
    재임 중 11번의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마지막 선거에서는 스웨덴 선거 사상 처음으로 과반을 넘는 득표율로 재집권한 후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떠납니다. 
    정말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깁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20여 년의 장기집권이 가능하도록 스웨덴 국민들이 신뢰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1. 대화와 타협

    타게 엘란데르는 청년시절 급진주의 활동을 한 좌파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왕과 국민들은 많은 걱정을 했고 특히 노사분규로 힘들어 하던 경영자들의 거부감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취임 후 그의 행보는 전혀 달랐습니다.  
    야당인사를 내각에 참여시키고 경영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화를 한 후 노조대표와 함께 3자회의로 노사문제를 해결합니다. 
    대화정치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목요회의입니다.
    매주 목요일 스톡홀름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총리별장에 정·재계, 노조 인사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국회의원, 지방의원, 경총, 노총 대표 등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목요회의가 성공한 것은 보여주기식 대화가 아닌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진정성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국민을 행복하게 만든 복지제도도 대화정치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2. 검소한 삶

    스톡홀름 남쪽 린셰핑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타게 엘란데르의 아들부부가 삽니다.
    아들은 대학총장을 역임한 후 아버지가 살아온 길을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부부가 들려주는 부모님의 이야기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감동의 연속입니다. 
    엘란데르는 최고 권력자이지만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총리시절에도 이십 년이 넘은 외투를 입고 신발도 구두밑창을 갈아가며 오래도록 신었습니다.
    검소함은 부인도 똑같습니다.
    집권 23년 동안 국회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던 옷은 단 한 벌.
    아들부부는 부모님이 국민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다며 검소함은 두 분의 삶의 전부라고 자랑스러워합니다.

    3. 특권 없는 삶

    “부모님은 총리시절에도 관저 대신 임대주택에서 월세를 내고 살았습니다.
    출퇴근도 관용차 대신 어머니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이용했습니다.” 

    임대주택은 자신의 재임시절 서민을 위해 지은 아파트입니다.
    그는 특권을 버리고 국민의 삶속으로 들어와 친구처럼, 다정한 이웃처럼 지냈습니다.

    1968년 국민들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랍니다.
    타게 엘란데르가 총리를 그만둔 후 거처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원들이 급히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합니다.
    스톡홀름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봄메쉬빅, 한적한 시골마을입니다.
    부부는 마을 호수가 옆 작은 주택에서 16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총리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지자보다 반대편에 섰던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진심이 통한 겁니다.

    4. 정직한 삶

    아들부부가 또다른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머니 아이나 안데르손 이야깁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총리시절에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엘란데르가 퇴임한 후 어느 날, 부인이 정부 부처 장관을 찾아갑니다.
    그녀의 손에는 한 뭉치의 볼펜자루가 들려 있었습니다.
    장관이 반갑게 인사하며 방문 이유를 묻자 볼펜자루를 건냅니다. 
    볼펜에는 ‘정부부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남편이 총리시절 쓰던 볼펜인데 총리를 그만두었으니 이제는 정부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주던 노부부가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부모님의 삶은 겸손, 그 자체입니다.
    당신을 이해합니다.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을 위해 돕기를 원합니다.
    이런 부모님과 함께 했다는 것이 너무나 감동스럽습니다.”

    타게 엘란데르는 떠났지만 23년동안 국민을 위한 그의 헌신은 스웨덴 정치의 교과서로 자리잡았고 세계 최고의 행복한 나라로 만든 원동력이 됐습니다.

    "Why me?" 
    "Why not?"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책상에는'만화 액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
    조 바이든은 29세(1972년)의 젊은 나이에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그 해 크리스마스 때 교통사고로 아내 닐리아와 장녀 나오미를 잃고, 
    두 아들마저 크게 다쳐 '신'을 원망하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 때 그의 아버지 '조셉 바이든 시니어(1915-2002)'가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건넨 것이 그 액자입니다. 

    액자 속의 만화제목은 '공포의 해이가르'로서 미국의 유명 작가 '딕 브라운(1917-1989)'이 그린 작품입니다. 
    거칠지만 가정적인 성격의 바이킹 해이가르는 어느 날, 자신이 탄 배가 폭풍우 속에서 벼락에 맞아 좌초되자, '신'을 원망하면서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Why me?)" 
    그러자 신이 그에게 되묻습니다. 
    "왜, 넌 안되지?(Why not?)" 

    조 바이든은 "이 만화를 통해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스스로가 일어나야 한다."면서  "이 만화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고 말해 왔습니다. |
    그리고 바이든은 "아버지는 보일러 청소일을 하셨는데, 나에게 항상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얼마나 자주 쓰러졌는지를 볼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빨리 일어나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합니다.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우리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괴로워하면 
    나를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그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일에 너무 낙담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이치를 알면, 나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마음으로부터 극복하고, 더 좋은 날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다시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지만 

    우리 모두 극복하고 
    추운 날씨에도 활기차게 기분 좋음으로 시작하시고 
    행복으로 채워 가시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21. 01. 23. 토. 아침

    지혜와 유머의 만남
    - '완결과 끝장'

    비슷한 뜻을 가진 Complete와 Finished의 차이점은? 
    - 최근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이 모인 한 언어학 컨퍼런스(런던)에서 가이아나의 발고빈(Samsundar Balgobin)이란 학자가 그 차이를 절묘하게 설명하여, 참석자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 컨퍼런스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이 나왔다. 
    "사람들은 COMPLETE와 FINISHED의 의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두 단어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옳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면 완결(COMPLETE)이고. 
    옳지 않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면 끝장(FINISHED)이지요. 
    그리고, 옳지 않은 여자와 지내다가 옳은 여자에게 들키면 완전끝장(COMPLETELY FINISHED)!"

    - 그의 답변에 크게 공감한 참석자들은 5분이 넘도록 기립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플라톤의 행복론(
    幸福論)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다는 다섯 가지 행복의 조건이 요즘 카톡에 떠돌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財産)"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容貌)"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名譽)"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體力)" 
    다섯째,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일상의 욕구 중에서 뭔가 2%가 부족한 상태를 유지해야 행복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차고 넘치면 오히려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북 유럽사람들의 행복론과도 일맥 상통한다.

    옛 우리 조상의 삶의 지혜 중에도 비슷한 행복론이 등장한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일부러 자기 집 지붕의 기와 한 장을 엇비슷하게 놓아두고 “저 기와를 바로 놓아야 할 텐데‘하면서 걱정거리를 만들어 둔다는 것이다.
    사소한 걱정거리라도 일부러 만들어 두고 걱정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지혜라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삶에도 남들에 비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음에도 굳이 없는 것을 꼬집어 나는 ’남보다 돈이 없어 불행하다‘거나 ’나는 왜 눈이 침침할까‘ 등으로 남들보다 튼튼한 사지육신은 제쳐두고 2% 부족한 것들 때문에 불행하다고 애써 생각하는 못난이가 되어 걱정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생각의 틀을 바꾸자.
    ’나에게는 남에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오늘도 행복한 날 되시길요.

    아스피린의 효능 / 제이콥박사

    코로나가 끝날때까지 아스피린을 2-3 일에 한 알씩 복용하세요.
    이태리에서 코로나 치료제로 아스피린이 제일 효과적이라는 논문이 발표 되었다.
    이유는 코로나로 죽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혈액의 응고로 숨졌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병원에서 중증환자에게 아스피린을 투여한 결과 약 1000 명의 환자가 죽지 않고 퇴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2021.01.16.
    서울대 이왕재 명예교수의 양심선언 

    ㅡ 백신으로 집단면역이나 코로나 예방 불가능 /  

    이교수는 건강정보 잡지 '건강과 생명' 1월호에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과 관련된 불편한 진실'이란 글에서 그런 주장으로 백신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경종을 울렸다.
    15일 이 교수를 직접 만났다.
    '불편한 진실'을 말한 대가로 비난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학자적 양심은 포기할 수 없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 다음달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나 

    "이론적으로 예방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백신이라고 하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호흡기 바이러스는 백신 가지고 안 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바이러스가 혈액을 타고 다니면서 질병을 일으키는 경우는 백신이 100% 유효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상기도(코점막, 인후두 점막)에 감염되는 것인데 백신으로 인한 혈중 항체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방할 길이 없다." 

    - 코로나19는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감기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하겠다.
    감기는 내과 책에 뭐라고 돼 있냐면 일주일 정도 지속되는 self limiting disease(자기제한질병)라고 돼 있다.
    상기도에 감염돼서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에 끝이 나는 질환, 이렇게 돼 있다.
    그리고 치사율은 없다.
    항체는 빨라야 감염 3일 지나야 나온다.
    3일 이전엔 항체가 절대 안 나온다.
    흔히 면역 그러면 항체를 일반인들이 생각한다.
    3일 이전에 어떻게 막느냐, 3일 이전에 막는 면역시스템을 우리는 선천면역이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감기 바이러스와 똑같다.
    다만 차이가 뭐냐면 상기도 점막에 딱 붙는다.
    붙는 능력이 100배 이상 강해졌다는 거다.
    아시다시피 아무 세포나 붙는 게 아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상기도 점막에만 붙는다.
    붙는 힘이 변종이 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100배 이상이라는 거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계속 감염이 되는 거다.
    원래는 3~4일로 끝이 나는 병이다.
    항체가 만들어질 틈도 없다.
    상처가 아무는 데 3~4일 걸려서 일주일이면 끝나는 병이다." 

    - 일반 감기 바이러스보다 증상이 심한가 

    "일반감기보다 심하지만 독감보다 약하다고 돼 있다.
    왜 그러냐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에 있다. 공생하는 바이러스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공생하는 바이러스와 5~10%가 염기서열이 다른 것이다.
    박쥐 것이 감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원래 종간에 서로 왔다갔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이거는 박쥐 것, 사스는 사향고양이, 메르스는 낙타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된 것이다.
    종간의 벽이 무너지는 일이 21세기에 생긴 것이다." 

    - 코로나19 항체가 생기기 어려운 이유는 뭔가 

    "코로나19는 원래 몸에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5~10%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몸엔 생소한 것이다.
    생소한 놈이 들어오면 반응이 심하게 일어난다.
    없던 놈이지만 실제는 90~95%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다.
    항체가 그래서 잘 안 만들어진다.
    정은경 청장이 발표했다.
    한국인 1440명을 임의로 뽑아 코로나19에 대한 항체를 검사했더니 1명 나왔다고 했다.
    항체가 거의 안 생기는 거다.
    내가 몸에 가지고 있는 것은 항체를 안 만드는데 코로나19가 90~95%가 똑같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내 몸에 없어요.
    감염되는 거다.
    그건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이 항체를 금방 만든다.
    인플루엔자는 항체가 잘 생긴다.
    그러나 호흡기바이러스의 경우는 공기 중에 있다가 콧속에 붙는데, 인플루엔자 항체는 혈중에 있다.
    피를 타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호흡기 점막 상피세포에 혈관이 없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예방효과는 0%이다.
    그런데 왜 맞느냐, 노인들은 독감의 합병증이 생기면 폐렴이 돼서 죽는다.
    폐렴이 된다는 얘기는 상기도에 있던 놈이 혈액을 타고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혈액을 타고 돌아다닐 경우에는 항체가 작용한다.
    죽지 않게 할 수 있다.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람이 1%도 안 된다는 말이다.
    100명 중 1명도 안 되는 사람을 위해서 백신을 맞을 필요가 있냐는 거다." 

    - 그렇다면 코로나19 백신도 그런 효과는 있겠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죽은 사람은 많은 경우 뇌에 있는 혈관이 막히고, 콩팥도 망가지고, 폐도 망가지고, 간도 망가지고 이래서 죽더라는 거다. 만일 코로나19에 항체가 만들어졌다고 하면 그런 건 막을 수 있다. 그런 게 무서워서 백신을 맞겠다면 나름 의미가 있다. 백신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게 아니다. 예방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염자 99%가 그냥 넘어간다. 1~2%에서 문제가 되는 건데, 그 사람들은 백신을 맞아서 항체가 생겨있다고 하면 혈중으로 들어가서 생기는 문제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독감은 거의 100% 항체가 생기지만 코로나19는 우리 몸에 상존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90~95%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5~10%를 우리 면역세포가 찾아야한다. 그걸 찾아서 항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 백신 그 자체의 위험은 없나 

    분명한 건 뭐냐면 화이자나 모더나에서 하는 게 mRNA백신이다. mRNA백신을 인류최초로 하는 거다. 굉장히 위험하다. 원래 mRNA가 찔러서 넣어준다고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들어가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최초의 시도라면 안전성에 대해서 10년 이상 봐야 한다. 과학자로서 정확하게 팩트만 얘기하는 것이다. 안전성에 검증이 안 됐다는 건 확실하다. 메이저언론에서는 백신확보에 대한 얘기만 나오지 문제점에 대한 얘기는 없다. 그러면 안 되죠. 메이저언론이 많은 국민들이 보는데 문제점이 있을 수 있는 걸 지적하는 게 언론의 기능인데 이건 지금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아무튼 mRNA 백신 안전성 검증을 안 했다는 것이다." 

    - 집단면역 형성시킨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는 

    "집단면역은 만들어지 않는다. 감기가 인류와 역사를 같이 한 질환인데 왜 집단면역이 안 생기나. 절대 안 된다. 집단면역이란 불가능하다. 항체가 잘 생기지도 않는 데다가 항체가 생긴다 하더라도 계속 걸릴 수밖에 없다. 집단면역이라는 건 항체가 바이러스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게 전제가 될 때다. 예를 들면 간염은 백신이 완벽하게 듣는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항체가 바이러스와 만날 수가 없다.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주사제나 먹는 걸로는 치료제가 나올 수가 없다. 항체가 감염되는 세포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거기로 안 가니 무슨 재주로 막냐. 그러니까 계속 실패하는 거다." 

    - 백신 맞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시키는 걸 막아주나 

    백신 맞았다고 마스크 벗지 마라, 그 얘기가 나온 것은 화이자 등이 조심스럽게 백신의 취약성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말이 되냐.
    백신을 맞고 항체 생겼다면 왜 마스크를 써야 하냐.
    나는 감염도 안 되고 감염도 못시키는데.
    들어오는 바이러스가 항체에 의해서 다 죽었기 때문에.
    혈액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그 말이 맞는 거다.
    그런데 백신 기껏 만들어 놓고는 백신 맞았다고 마스크 벗지마라,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한 말이 맞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개런티하고 있는 것이다." 

    예일대 하비 리쉬 박사도 최근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코로나19백신이 자신을 예방하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남에게 감염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 코로나19를 감기·독감수준으로 생각해도 된다면 사망이 많은 이유는 

    "죽어나간다고 보도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가 매년 독감으로 1000명 가까이 죽는다.
    그거 죽을 때마다 보도해봐라.
    온 국민이 공포에 떤다.
    우리가 13개월 동안 1200여 명 죽었다.
    독감은 5월부터 10월까지 없고, 11월부터 그 다음해 3~4월까지 5~6개월 동안 1500명이 죽은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거는 14개월 동안에 1100명이 죽은 거다.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 교수님이 정책결정자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사실 (거리두기를) 푸나 안 푸나 크게 차이 안 난다.
    대신 퍼지는 것이 걱정이라면 마스크 쓰는 것만 철저하게 하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대신 병원, 요양원 이런 데는 훨씬 강화해야 한다.
    실제로 거기 근무하시는 분들은 지금보다 10배 강화해서 진짜로 의심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들어가게 해야 한다.
    노약자, 기저질환자 보호를 철저하게 해서 죽는 사람이 안 나오면 되는 거다.
    집합금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감염이 덜 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얻는 게 없다.
    죽는 사람은 어차피 기저질환자들이다.
    70%가 감염되더라도 요양원이나 병원 관리를 완벽하게 해서 노약자, 기저질환자들에게 균이 갈 수 없게끔 차단하면 한 명도 안 죽는다." 

    - 가족과 같이 사는 취약자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나 

    "그게 사실은 가장 구멍이다.
    요양원에 가실 정도는 아닌 노인들이 있다.
    젊은 애들은 무증상감염자가 너무 많다.
    할아버지 감염시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게 문제다.
    그런 부분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코로나시대 이후에 생길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변화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60대 이하의 부부하고 자녀들 정도면 문제없이 사시면 되는데, 80이 넘은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든지 그럴 경우에는 주의해야 한다." 

    - 유럽은 백신 거부율이 굉장히 높더라 

    "백신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화이자나 모더나가 예방률 95%라고 한 것은 전혀 믿을 수가 없다.
    흔히 하는 RT-PCR로 하면 진짜백신 접종자는 모두 양성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으니, 증상완화를 기준으로 했다는 궁색한 설명을 들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27일 프랑스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됐으나 1월 7일까지 접종률은 0.03%에 불과하다.
    접종 거부율은 60%에 달한다.
    당국 최고 책임자인 백신접종전략위원회 알랭 피셰 위원장은 백신 접종에 앞서 백신에 대한 과학적 자료를 볼 수 없으며, 효능이 2~3개월에 그치고, 기저질환자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접종자가 남한테 옮기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 지금 당국이 확진자 숫자 발표하는 게 의미가 있나 

    "아무 의미가 없다.
    주말엔 검사가 적어서 확진자가 적게 나온다.
    많이 검사하면 많이 나오고, 적게 하면 적게 나오는데 그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
    감기환자 몇 명이라고 발표하나.
    정부가 국민들 공연히 겁주는 행위다.
    아예 발표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검사숫자 대비 확진자를 비교해 확진율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 발표하는 확진자 숫자가 0이 되어야 이 사태가 끝날 판인데 그날이 오겠나 

    "절대 안 온다.
    0이 될 수가 없다.
    인간 공생 바이러스다.
    변종이 끊임없이 생긴다.
    공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0이 될 수 있나.
    어제 뉴스에도 나오더라 백신을 만든 모더나 CEO가 코로나19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풍토병이 될 것이고 인류를 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그렇게 인정하면서 백신은 왜 만들고 맞으라고 하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이 사람들이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 거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계속 변종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백신은 무용지물이란 말이다." 

    - 백신접종을 앞두고 있는데, 전문가로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변종이 나오면 백신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또 나오게 돼 있다. z
    변종이 나오면 순식간에 다 퍼진다.
    변종 출현은 불 보듯 뻔한 얘기다.
    변종이 생기면 어떡하냐, 지금 그 백신 다 쓰레기가 될 것이다.
    백신에 의지하지 말아라.
    죽는 것 때문에 우리가 무서워하는 건데, 면역기능이 어떠한 이유로 낮아진 경우에 불행하게 혈액을 타고 바이러스가 돌아다니는 불행한 일이 생겨서 그 중에 일부가 죽는 일이 생기는 거니까 자기의 면역기능을 지키는 게 제일 확실한 거다.
    면역기능만 좋으면 변종도 상관없다.
    변종일수록 더 활발하게 작용한다.
    백신은 변종이 나오는 순간 무력해지만 우리 몸의 면역기능은 변종에 대해서 면역반응을 더 확실하게 한다.
    자기면역기능을 키우는 게 최고다.
    그거의 대표적인 것이 비타민C를 먹는 것이다. 감염 자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 마스크는 어떤가?

    "마스크는 코로나19에 걸리기 싫다 하면 쓰는 것이다.
    마스크 쓰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마스크는 써야 한다.
    유럽에 더 많이 감염되는 이유는 마스크를 안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거리두기를 할 때는 경제적인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거리두기 하면 덜 감염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교회 못 가고, 당구장 막고, 커피집 막고. 안 막아도 되는 감염을 막겠다며 오히려 경제적으로 다 죽는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거다.
    마스크 쓰고, 자기면역 지키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  마스크는 언제 벗나?

    "마스크는 저절로 벗게 돼 있다.
    코로나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감기,독감 수준이라는 것을 깨우치면 자연스럽게 벗게 될 거다.
    의료계로서는 아주 우울한 얘긴데, 마스크 쓰면서부터 개원가가 많이 황폐화됐다.
    결핵도 훨씬 많이 줄어들고, 독감도 없다고 한다.
    환자가 줄었단 얘기다.
    현재 상황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UPI뉴스 / 정리=권라영


    카이퍼와 트럼프 /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그저께 KBS뉴스 시간에는 <미국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미국이 보이지 않는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자유가 없어지고, 민주주의도 없어졌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바이든이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부정선거의 사례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행정관료, 미국의 하원의원, 상원의원, 검사들, 연방 판사들, 주판사들 FBI, CIA, 모든 TV 방송들, 신문들, 빅텍들이 부정선거에 침묵하고 진실과 여론을 깔아뭉겠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이 정상적으로 치루어진 11•3선거를 트럼프 대통령이 딴지를 걸고, 미국시민들을 충동질 했다고 합심해서 선전했었다. 

    이번에 트럼프가 문제재기 한데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조, 언론 등이 하나같이 기득권 사수를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대한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돈과 권력을 움켜쥐고 누리는 공룡집단이 되었다.
    기득권 자들은 딮스테이트를 만들었고, 워싱턴 D•C의 더러운 늪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사는 파충류들이 되었다.
    그러니 미국은 민주주의 곧 일반 백성이 주인이 아니고, 권력과 돈에 환장한 부도덕한 인간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귀족들이 되어서 대를 이어 천년 만년 살려고 작당들을 해왔다.
    미국은 지금 돈이면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를 상관하지 않고, 권력을 잡고, 불법과 불의를 식은죽 먹기 식으로 생각하는 관료집단, 국회의원들, 판검사들, 언론사들이 이번에 한 몫을 챙기었다.
    과거의 미국 민주주의는 없어졌다.

    사실 우리로서는 끝까지 숨죽이고, 트럼프의 승리를 염원하고 응원했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문제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트럼프 대통령은 거대한 공룡집단을 해체하지 못하고 대통령직을 끝내었다.
    우리는 부정과 불의가 승리하는 꼴을 봐 줄 수가 없었다.
    실제 지금부터 4년 전에 그 누구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없었다.
    트럼프는 한 번도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을 해 본일도 없고, 더구나 주지사를 해본 일도 없었다.
    그는 워싱턴 D•C의 이방인이 되었다.
    그는 부동산 사업가이다.
    말하자면 트럼프는 장사꾼이었다.
    그런데 공화당의 쟁쟁한 상원의원, 하원의원, 주지사들이 나온 후보들에 어울리지 않는 사업가가 공화당에 대통령 후보가 된 것도 기적이고,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100%장담하던 선거에서 트럼프가 역전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민권의 승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우선 주의를 앞세워서 경제를 부흥시키고, 노동자들과 일반 소시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책으로 미국을 살려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의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공화당도 4년 내내 트럼프를 탄핵해서 몰아내는 운동을 했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법조와 언론이 철저히 짜고, 트럼프를 몰아내는데 올인 했었다.
    그 거대한 음모가 4년 동안 진행되어왔고, 11•3선거에 중국 공산당들과 무더기 표 도둑질을 해서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약 두 달 동안 우리는 트럼프가 악의 뿌리를 뽑고, 부정선거를 처단하고, 더러운 워싱턴의 늪을 청소하기를 기대했으나, 빅텍이 트럼프의 입도, 글도 틀어 막고 모든 언론이 합동해서 거짓 선동 질을 해서 결국은 트럼프의 미완의 혁명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바이든의 취임을 하고, 우리 정부는 안도의 숨을 쉬고 발 빠르게 거기에 편승했었다.
    앞으로 미국 정계와 사회가 어찌 돌아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바이든은 미국과 민주주의를 살리겠다고 했지만, 올림픽 경기 금메달리스트도 후에 약물복용이 인정되면 금메달이 박탈된다.
    지금의 미국정치는 부정을 덮고 가는 것이 민주주의로 둔갑되었다.

    나는 그간의 트럼프의 외로운 투쟁을 보면서 갑자기 100년전의 화란의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박사가 생각난다.
    카이퍼가 정치에 입문하던 때의 유럽과 화란의 정치지형을 살펴보자.
    당시는 불란서 혁명의 불길로 유럽전체가 좌파가 되었다.
    좌파들의 생각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기 위해서 주인도 없고(No Master), 하나님도 없애고(No God)를 외치며 사회주의, 인본주의, 합리주의, 세속주의 사상이 창궐했다.
    더구나 당시에 국회는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트룰스트라(Mr. Troelstra)가 권력을 잡고 좌충우돌하던 시기였다.
    대학교는 모두 인본주의적, 무신론적, 진화론들을 가르치고, 대학교육 자체가 좌파 운동의 본산이었다.

    바로 그때 아브라함 카이퍼는 목사로서 스승 흐룬 봔 프린스터에게 물려받은 꼬마정당의 당수가 되어, 이 거대하고 타락한 정부와 의회에 도전했다.
    카이퍼는 먼저 대학을 세워 참된 성경적 세계관, 신본주의 세계관, 칼빈주의 세계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3분의 기적

    - 하루 3분의 말씀 묵상을 통해 당신의 삶에 기적을 체험하세요! 

    은혜의 수도꼭지를 틀어주세요
    고린도후서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너무 바빠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 있었던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쁜데 언제 기도하고, 언제 성경을 읽지?' 
    그는 너무 바쁜 일상 속에서 죄책감으로 늘 괴로워하였습니다. 

    어느 겨울 날, 날씨가 추워지자 아파트 관리소에서 방송이 나왔습니다.
    수도관이 얼 수 있으니 수도물을 조금만 틀어 놓으라는 방송이었습니다. 
    그는 수돗물을 아주 조금 틀어 놓았고 밤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확인해보니 화장실과 부엌 싱크대 수도꼭지가 용케 안 얼고 물이 잘 나왔습니다. 
    몇 년전 물을 틀어놓지 않아 수도가 얼어서 끔찍한 고생을 했던 추억을 생각하며, 그저 몇 방울 똑똑 떨어지게 수도의 숨만 트여 놓았을 뿐인데도 잘 견뎌준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을 하는데 똑똑 떨어지던 어젯밤 자장가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마치 은혜의 물방울 소리 같았습니다.

    ‘너의 영혼이 얼어붙지 않도록 은혜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말고 아주 조금이라도 계속 똑똑 떨어지게 틀어 놓으라!’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성경을 하루에 많이 읽지 못해도, 기도를 몇 시간동안 하지 못해도, 매일매일 새벽기도 예배 시간에 참석하지 못해도 하루하루 조금씩 말씀 한 구절, 차 안에서 듣는 찬양 한 곡, 카톡으로 받는 묵상글이라도 열심히 읽으며 한 방울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수도가 얼어붙듯, 우리의 영혼도 우리의 신앙도 얼어붙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영혼, 심령이 얼어붙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말고,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계속 똑똑 떨어지게 틀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소통이 막히지 않도록 열어놓아야 합니다.
    운전할 때는 차와의 안전거리가 필요하고, 요즘 같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 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은혜가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붙어있을 때 더 안전하고 더 평안합니다.

    기도, 말씀, 묵상은 은혜의 수도꼭지입니다.
    댐에 아무리 물이 많아도 막히거나 수도 꼭지가 얼면 물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댐의 물이 수도를 통하여 가정에 공급되듯 기도, 말씀묵상, 찬양을 통하여 하늘의 기름지고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지면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고아처럼 버려진 삶을 스스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곳에는 좌절·불안·염려·불평·갈등만 더할 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한방울이라고 매일 조금씩 틀어 놓으세요.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는 것입니다.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가 지속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의 소통과 거리가 얼어붙지 않도록 은혜의 수도꼭지를 틀어 놓으시길 기도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나 어찌 살리요
    은혜가 아니면 나 어찌 서리요

    은혜 아니면 나 어찌 가리요

    은혜가 아니면 나 어찌 말하리


    은혜가 아니면 나 어찌 살리요

    은혜가 아니면 나 어찌 서리요

    은혜 아니면 나 어찌 가리요

    은혜가 아니면 나 어찌 말하리


    내 주님의 십자가

    나의 허물과 실수

    나의 모든 죄 깨끗이 씻기며

    배신과 독선에 상처입은 사랑을

    주님의 피로 온전케 하시네 



    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어붙지 않도록 늘 은혜의 수도꼭지를 열어놓게 하옵소서.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묵상으로 매일 조금씩 이라도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옵소서.


    항상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매일매일 무시로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께 사랑과 감사와 기쁨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벼락이 미소로 변하니

    교회에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부인이 한 명 그 교회에 있었다.
    그 남편과 자녀들은 결코 교회에 오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목사가 그 가정을 방문하여 남편과 단둘이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었다.
    목사는 그 남편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생활을 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목사님, 저의 아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불같은 고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번만 화를 냈다 하면 아이들과 저는 숨어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올바른 교회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지를 않습니다."

    목사는 곧 이 남자의 부인을 만나서 목사가 들은 말을 사실대로 다 이야기 했다.
    그 말을 듣고 부인은 진실히 뉘우치며 앞으로는 잘해 보겠다고 했다.
    부인은 목사 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헤어졌다.

    이 일이 있은지 바로 며칠 후였다.
    남편이 낚시대를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 오다가 실수를 했다.
    새로 사다 놓은지 며칠 밖에 안되는 전등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린 것이었다.
    당황한 남편은 아내의 불과 같은 성질의 벼락이 떨어질 것을 알고 멈칫 서서기다렸으나 벼락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 대신 빗자루를 들고 와서 깨어진 조각을 쓸어 담는 아내가 미소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괜찮아요."

    그 다음 주일 아침예배에 그 남편은 아내와 나란히 교회에 나왔으며 몇주일 후에는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따질 것 없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일하던 농부가 호도나무 밑 그늘에 앉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농부가 쉬면서 우연히 눈이 가서 바라보게 된 것은 호박넝쿨에 매어달린 큼직한 한 개의 호박이었다.

    농부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이 약한 넝쿨에 매어달리게 만드셨담?
    넝쿨은 약하고, 호박은 무거우니, 딱할 정도로 거의 땅에 닿을 듯이 매어 달려있지 아니한가?"

    그러면서 머리 위의 호도나무를 바라보니, 더욱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왜
    냐하면 이번에는 그 크고 든든한 호도나무 가지들에 겨우 작은 호두들이 매어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혀를 "쯧쯧"차면서 농부는 그늘에 잠시 눕자 곧 단잠 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에 "딱!"하고 호두가 하나 떨어지면서 농부의 머리를 때렸다.
    깜짝놀란 농부는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픈 머리를 얼른 어루만지며 크게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이쿠! 만약 저 큰 호박이 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면 나는 정말 큰일날뻔 했구나!
    하나님, 저 호박 넝쿨에 큰 호박을 매어다신 일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큰 호도나무에 작은 열매들을 매어다신 일도 정말 감사합니다!"

    힘껏 최선을 다하니

    개구리 한 마리가 길에 파여진 꽤 깊은 구멍에 빠졌다.
    친구 개구리들이 도와주며 아무리 꺼내어 나오게 하려해도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친구 개구리들은 포기하고 다 가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튿날이었다.
    친구 개구리들이 보니 어제 구멍에 빠졌던 그 개구리가 신나게 깡충거리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친구 개구리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 구멍에서 나왔는가고 물어보았더니 그 개구리가 다음 과 같이 대답을 했다.
    "글쎄 말이야, 자네들이 다 가버리고 내가 구멍에 빠진 채로 있는데 저 앞에서 큰 트럭이 한 대 이 길로 오고 있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그 구멍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거든!"

    성공적인 가정생활

    첫째, 성공적이고 행복한 가정일수록 가족들 간에 감사하는 마음이나 말이 아주 풍부하다는 것이다.
    불평이나 원망의 조건이 전혀 없는 가정이나 환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감사하는 마음과 말로 덮어 버리고 밝은 면을 보는 가족들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둘째,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많이 갖는 가정들이 성공적인 가정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함께 수고를 하고 함께 즐겁게 놀고 함께 음식을 먹는 가족들은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에게도 아름다운 추억과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남겨 준다는 것이다.

    셋째, 가족끼리 서로 대화를 많이 갖는 가정이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의 가정들은 여기에서 뜻하는 좋은 대화 보다는 잔소리와 불평의 대화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좋은 대화를 갖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넷째, 신앙을 갖는 가정들이 아주 결정적으로 행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조사와 연구는 40년 동안에 실시된 것인데, 그 기간 동안에 신앙을 가진 가정이라는 이 조건은 가정의 성공에 가장 크게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계속 꼽혀 왔다는 것이다.

    다섯째, 가정에 어려움이 올 때에 그것을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처리하는 가정들이다.
    이런 가정은 역경이 닥쳐와도 희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이 들어도 앞을 바라보고 서로 웃는 부부요, 어려움에 빠진 자녀들을 희망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부모였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뛰었나

    옛날에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개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개가 특별히 자랑하는 것은, 자기가 아주 잘 달리는 선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개가 토끼 한마리를 쫓아 갔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대망신이었습니다.
    다른 개들이 마구 놀렸습니다.
    그러자 그 개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토끼는 목숨을 위해서 뛰었고, 나는 그냥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서 뛰었다는 점일세!"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어떤 아랍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가지고 있던 식량이 다 떨어졌다.
    이틀간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다.
    그는 마침내 사막 가운데의 한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거기에 이르렀다.
    급히 물을 마시고 보니 얼마 전에 거기에 천막을 쳤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혹시 천막을 치고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무런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어떤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다.
    얼른 그것을 만져보니 손에 떡처럼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그 사람은 미친듯이 주머니를 헤쳐서 열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속에 있는 것을 한움큼 움켜서 꺼내 보니까 그것들은 아주 좋고 큰 진주알이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사방에 던져 뿌리며 외쳤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 아랍 사람은 사막에 누워서 죽어 갔다.

    내가 주님 편에 있는가

    아브라함 링컨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서 양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때의 일이다.
    교회의 대표자로 링컨에게 보내어진 사람이 링컨에게 격려의 말을 했다.
    "링컨씨,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네, 나의 진실된 관심사는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 입니다."

    남북전쟁 중 링컨의 고백

    에이브라함 링컨이 남북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니 만큼 의미가 큰 것입니다마는 어쨌든 서로 싸우고,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양쪽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양쪽이 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전쟁을 합니다.
    또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7년으로 길어져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링컨은 대답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건가?
    나는 하나님께서 내편에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정녕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그것 뿐이네.”

    해석이 중요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하나 서있다.
    그 동상이 서 있는 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고 합의를 하고 동상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이 동상으로 말미암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뻔하였다.
    그 동상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칠레의 한 사람이 지적하기를 그 동상의 예수님은 칠레에다 등을 돌리고 계시다고 했다.
    즉 동상의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뒤는 칠레쪽을 향하게 된 것이었다.
    이 일은 칠레 사람들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하고 자극시켰다.
    이렇게 동상을 세우는 일은 칠레를 무시한 처사라고 했다.
    칠레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지고 그것은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한 기자가 신문에 실은 글 때문에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그 신문의 글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서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예수님의 감시,감독을 더 필요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신문의 글은 전체 칠레 사람들의 감정을 즉시 무마시키고 무서운 마찰을 피하게 했던 것이다.

    이 멋있는 해석!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꿈보다 해몽



    교인의 종류

    * 감투 교인 - 교회 감투를 안주면 교회에 안나오는 교인

    * 인력거 교인 - 심방을 가서 끌어내야만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

    * 핑계 교인 - 이렇게 저렇게 항상 핑계하며 잘 빠지는 교인

    * 오락 교인 - 친목회, 운동경기, 야유회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교인

    * 벙어리 교인 - 신자 생활을 오래 해도 기도생활을 전혀 안해서 기도 인도를
    못하는 교인

    * 시험 채점관 교인 - 설교 비평과 남의 험잡기에 우수한 교인


    * 유람선 교인 -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 광고 교인 - 사업적으로 무슨 실속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교인

    * 묵상 교인 - 예배를 시작하면 조는 교인

    * 국회의원 교인 - 한 가정에서 대표로 혼자 나오는 교인

    * 가시 교인 - 교회의 가시 노릇이나 하는 파괴적인 교인

    * 장례위원 교인 - 부모의 장례식 예비를 위해서 나오는 교인


    주님을 묻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을.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을.

    공의로우시며 선하신 그가 누구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을.

    없는 자는 있게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그가 누구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당신을.

    지혜로운 자를 위하여 어리석어 졌으며

    명철한 자를 위하여 우둔하여진 이가 누구냐고.

    또 묻습니다. 또 묻습니다.

    찾고 찾으면 진정 주님이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가를.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밤이나 낮이 없네.
    감사를 받아 주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는
    밤이나 장소도 없네.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니 알지 못하시는
    밤이나 낮이 없네.
    사랑을 받아 주의 긍휼을 간구하지 못하는
    밤이나 장소도 없네.

    그 모습(기도문)

    오 그대는 아시는가 주님의 말씀을.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며
    외치고 외치시었던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듣게 하소서.
    울부짖었던 그 말씀을.
    귀로만이 아니라 영혼과 온 마음을 합쳐서 듣게 하소서.
    영광과 수치를 가리지 않으시며
    울부짖었던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진리이신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어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조상이 사랑하시던 성경 책 속에
    거기 거기에 있네
    예수님과 말씀이.

    아픔(기도문)

    그 얼마나 아프셨을까.
    가시면류관 쓰실 때

    그 얼마나 상하셨을까.
    우리 주님의 마음이

    그 얼마나 아프셨을까.
    양손에 못 박히실 때

    그 얼마나 생각하셨을까.
    우리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 얼마나 아프셨을까.
    허리에 창이 끼어졌을 때

    그 얼마나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그 얼마나 상하셨을까.
    피와 물 흘리실 때

    그 얼마나 생각하셨을까.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기도문

    행복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슬플 때
    주님 앞에 소망 갖게 하옵소서

    외로울 때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며

    쓸쓸할 때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게 하옵소서

    기쁠 때
    주님 앞에서 소리내어 찬송하게 하옵소서

    두려울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하옵소서

    시련과 고난이 있을 때
    주님 생각하며 인내하게 하옵소서

    미움과 분이 있을 때
    주님 사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활과 주님의 주신 도구로서
    이웃에게 늘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와 사랑(기도문)

    주님은 우리의 머리칼 한 가닥 한 가닥을 세신다고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또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사람들은 말하면서
    부정을 행합니다.

    참으로 어지시고 선하신 주님
    우리를 구원하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든지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기다립니다.

    진실로 진실로 선하신 주님
    우리가 당신의 눈을 피하려고 하면
    주님은 보지 않으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거짓을 진실인 양 주님을 대하면
    주님은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 주십니다.

    참으로 선하시며 좋으신 주님
    그 누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속죄(기도문)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 주님을 부릅니다.
    씻고 씻고 또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우리의 죄
    붉고 붉은 당신의 피로
    우리를 씻으시옵소서 씻어주옵소서.

    사랑의 주
    은혜의 주
    정의의 주시여

    죄인을 외면 마옵소서
    붙들어 주옵소서
    구원하시옵소서.
    소망을 주옵소서.

    주님의 오묘한 말씀
    은혜의 말씀 자비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하셨던 그 율법을
    우리 어찌 잊으오리까
    주님의 말씀을

    허나 주님의 율법을 범한 죄인에게
    정한수를 뿌리사 또다시 기름을 부으소서.
    또 다시 흘리는 우리의 눈물 받으시옵소서.

    주님의 소리

    목이 메이시고 또 목이 메이시던
    우리의 주님의 소리여
    그 소리 그 소리
    오- 그 소리
    듣게 듣게 하옵소서.

    영광의 길 가기보다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십자가 지시고 가시면서
    보여 주시었던 그 소리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시었던 그 소리
    오- 우리는 진정
    그 소리를 듣는가 보는가 알고 있는가. 

    복이란 

    동양인의 복의 개념은 한자를 풀이하면 그 뜻이 잘 나타나 있다.
    곧 복 복(福)자를 보니 옷 의(衣) 한 일(一) 입 구(口) 밭 전(田)이 합친 것이다.
    이는 옷 잘 입고 등 따시고 하나 뿐인 입에 풀칠할 전답이 있으면 족하다는 뜻이다.

    서양인들의 복의 개념도 비슷하다.
    하루의 행복은 이발소에 가는 것이고
    일주일의 행복은 결혼하는 것이고
    한 달 행복은 말 타는 것이고
    일 년 행복은 새집 짓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 받은 자가 행복자라고 했고
    또 남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도 받았고 생명 자녀 물자도 다 주께로 부터 받았다.
    요즘 양심 있는 기업가들이 사회서 번 돈을 사회로 돌린다면서 선한 사업에 희사하는 자들이 간혹 있다.
    우리도 복음을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는 행복자가 되자.

    석두 에디슨

    발명왕 에디슨은 소학교 1학년 1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퇴학을 당했다. 이유는
    1+1=2란 것을 인정하면서도 때로는 1이 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선생님이 에디슨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오게 하고는 흥분한 어조로
    "당신 아들은 석두이니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습니다. 데려 가십시요!"라고 했다.
    "아니,얘가 똑똑한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반문했더니 선생님이 에디슨
    을 불러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1+1은 얼마가 되지?" "예, 둘이지만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고 함으로 선생님이 "보시요. 언제나 이렇게 말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 교육에 막대한 지장이 있습니다. 데리고 가십시요"라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데리고 나왔다.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엄마, 1+1이 1이 되는 것 보여 줄까?"하고는 진흙을 이겨
    양손에 가져 와서 "엄마, 잘 봐야 돼, 자 합치니 하나가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었
    다.

    이렇게 그는 어일때부터 1+1이 2지만 때로는 1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 전기가 합하면 하나의 전등이 켜지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1+1=2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때로는 1+1=1이 된다는 것도 틀림이 없는
    진리임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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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알지만 모릅니다

    이씨조선 세조때 이조판서 이승소는 판서벼슬에 있으면서도 겨우 초가삼간에
    살았다. 임금이 불러 공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이던 이모가 입궐하였
    다. 병조판서는 이조판서와 앞뒷집에 사는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이승소는 병조판서를 보고도 모르는체 했다. 세조왕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조판
    서는 병조판서를 모르는가?"라고 물었다. 이때의 이조판서 이승소의 대답은 유명
    하다. "알지만 모릅니다!"

    조정에 판서라고는 6명이니 모를 리가 없다. 왜 모른다고 했을까? 병조판서가
    어느날 누각같이 큰 호화주택을 짓는지라 이조판서인 이승소가 높은 벼슬에 있으면
    서 주택사치를 한다는 건 그만큼 벼슬을 모독하고 백성의 원성을 일으키니 삼가하
    라고 충고를 했다. 그런데 병조판서는 선비로서의 정신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그 집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이조판서 이승소는 만백성에게 욕먹는다고 충고를 한
    것을 어기는 병조판서를 사귈만한 선비가 못되며 소인으로 간주하고 알고도 모른체
    한 것이다. 이 사연을 알고난 세조는 알면서도 모른다는 말을 씀으로 선비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바로 잡는데 힘썼다고 한다.

    소중한 것

    우산만 들고 나갔다 하면 잃어버리고 오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부슬비가 오는 어느날 장사꾼의 아내는 우산을 건네면서 단단히 일렀습니다.
    "제발 오늘만은 우산을 잃지 말아요." "알았어! 알았어!"
    마음 단단히 먹고 나간 장사꾼은 돌아 오는 버스 안에서 우산을 단단히 잡고 있다가
    그만 피곤하여 깜박 졸았습니다.
    내릴 때쯤하여 깜짝 놀라서 깨어난 장사꾼은 우산대를 확인하고 좋아라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집에 이르러 보니 그날 장사하여 번 돈을 몽땅 넣어둔 가방이 손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오늘도 지엽적인 것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경우는

    추운 겨울날,눈오는 거리에서 한 소녀가 얇은 옷을 입은 채,밥 한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 당장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왜 이런 일을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무슨 대책이든 대책을 세워 주셔야지요."
    한동안 하나님께서는 말이 없으시더니 그 날 밤에 아주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대책을 세웠노라. 나는 너를 만들었으며 그곳에 너를 두었지 않았느냐?"

    당신은 비판만 하는 사람은 아닌지요?
    정작 당신이야말로 그 비판하는 일에 하나님의 대책인 것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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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잘못된 해석

    한 과학자가 벼룩의 특성을 살피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벼룩을 관찰하고 있었다. 벼룩의 한다리를 끊어 내면서 "뛰어!"하고 명령을 했다. 그 벼룩은 즉시 펄쩍하고 뛰었다. 한 다리를 더 끊어 내며 다시 "뛰어!"하고 명령을 했다. 벼룩은 또 뛰었다. 이 과학자는 이같은 명령을 계속하며 여섯번째인 마지막 다리만 남겨 놓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벼룩이 뛰기가 좀 힘들어졌다. 하지만 뛰어보려고 애를 쓴다. 과학자는 드디어 마지막 다리까지 잘라버리고 또 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벼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과학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명령을 했다. "뛰어!" 여전히 벼룩은 반응이 없었다. 세번째로 과학자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다. "뛰어!" 그러나 불쌍한 벼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의 결론을 내렸다. "벼룩의 다리를 모두 제거 해버리면 벼룩은 청각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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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주예수보다 귀한 것

    그는 어렸을때 예수님을 믿고 주

    일학교에 열심히 나갔지만,출세를 하고 돈을 벌면서 주님을 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방송국의 연출자였으며 인기절정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고 출세를 하였지만 마음은 허무했고 마음 속의 불안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어렸을때 믿었던 예수님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쩌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후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예수님께 자신의 전 삶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시 전속 계약을 체결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보장했지만 그는 거절 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전화를 너무 늦게 걸으셨습니다. 앞으로 나의 목소리와 재능 모든 것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나의 주인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멜로디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늘 기도하신 어머니가 친구 밀러 여사에게서 가져왔던 성시에 맞춰 작곡을 시작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분이 바로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동역하신 죠지 베브리 쉐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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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참된 순종

    리이튼 포드라는 지금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 "사귀는 전도,나누는 전도"에서 공개를 합니다. 그가 서부 아프리카 다카 공항에서 비행기에 기름을 넣기 위하여 잠시 기다리는 동안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찾아와 교제를 나누었답니다. 그 선교사가 자신은 모슬렘 지역에서 10년 동안을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하자,리이튼 포드 목사의 일행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심자가 있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두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십년 선교활동 중에 2명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다시 일행중 한사람이 불쑥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곳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매우 놀란듯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답니다. "이곳에 왜 있느냐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리이튼 포드 목사는 공항에서의 그 경험을 자신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사역의 열매가 단 2명밖에 없었지만,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두셨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고,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그 선교사의 대답에 이 목사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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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초콜렛 사건

    열심히 뭔가를 먹고 있는 조카를 불러보니 내가 냉장고에 넣어둔 초콜릿을 야금 야금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오랜만에 놀러온 그의

    모습에 정말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고모한테 한 입만 줄래"했더니 "안돼"하는 것이다. "야,한번만" "없어" 처음에는 장난이었는데 은근히 심술이 났다. 그건 내 것인데... "한 입만 주면 고모가 슈퍼에서 많이 사줄께." 나는 치사하게 유도작전을 폈다. 머뭇거리는 조카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모든 것을 갖고 계시지만,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 고자 그것을 감추시고 나에게 있는 최고의 달콤한 것을 요구하신다. 그때 과연 나는 내 손에 있는 그것을 미련없이 하나님께 드린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 최고인 양 아까워하고 주님께서 채워주심을 잊어버린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처음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단어는 순종이다. 당신은 그 순종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시 당신의 생각이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순종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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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자기발전을 위한 10가지 충고


    1. 오늘의 자기에 만족하지 말라.
    2. 자신이 원하는 일을 확실하게 알라.
    3. 그 일을 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라.
    4. 일을 못하는 핑계나 변명을 늘어 놓지 말라.
    5. 게으른 자신과 타협하지 말라.
    6. 한두번의 실패로 포기하지 말라.
    7. 그 일에 대한 전문지식을 습득하라.
    8. 자기의 실수나 잘못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9. 노력없이 지름길을 찾지 말라.
    10. 목표를 이루려는 욕망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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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외톨이가 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자신의 관심사만 계속 말하라.
    2. 상대는 업신여기고 자신만 자랑하라.
    3. 남의 험담만 주로 말하라.
    4. 남의 의견을 듣지 말고 내 의견만 고집하라.
    5. 남의 비위나 적당히 맞추라.
    6. 상대가 말할 때는 관심없이 들어라.
    7. 상대의 말에 무조건 반대하라.
    8. 상대를 깔보듯 대하라.
    9. 이야기는 늘 농담이나 코메디로 메꿔가라.
    10. 입이 가볍고 뜬 소문만 전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당신은 틀림없이 외톨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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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하루종일 자신의 단점만을 생각하라.
    2.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만을 생각하라.
    3. 단점과 어려움 앞에서는 늘 비관하라.
    4. 사람들은 나를 주시하고 비판한다고 확신하라.
    5. 아무런 취미나 일을 갖지 말라.
    6. 타인의 관심과 동정을 기대하면서 남을 의지하려고만 하라.
    7. 운명이라고 체념하라.
    8. 이 세상에 나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9. 여러 친구를 사귀려고 하지 말고 한 친구하고만 지내라.
    10. 자신감을 갖지 말고 두려워하라.
    ...그럼 당신은 평생 내성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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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해서 안되는 말을 위한 10가지 충고



    1. "잘 해봐라"는 비꼬는 말
    2. "난 모르겠다"는 책임없는 말
    3. "그건 해도 안된다"는 소극적인 말
    4. "네가 뭘 아느냐"는 무시하는 말
    5. "바빠서 못한다"는 핑계의 말
    6. "잘 되어가고 있는데 뭐 할려고 바꾸느냐"는 안일한 말
    7. "이 정도면 괜찮다"는 타협의 말
    8. "다음에 하자"고 미루는 말
    9. "해보나 마나 똑같다"고 포기하는 말
    10. "이제 그만 두자"는 의지를 꺾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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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40
    31-'과거의 나'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대화에서 '나는...'이란 말을 쓰지말라. (나는 소심해. 나는 솜씨가 없어)
    2. '나는 ...'이란 말을 안쓰겠다고 선언하라.
    (친구에게 주의를 달라고 부탁하고 스스로도 기록해보라)
    3. 이제까지 했던 행동과 반대로 해 보라.
    (소극적이었다면 나서서 자신을 소개해 보라)
    4. 지금까지 도피했던 일과 부딪쳐보라.
    5. 일에 실패했을때 과거의 경험과 연결시키지 말라.
    (오늘부터 새로운 '나'로 변화되고 있음을 잊지 말라)
    6. 타고난 성격이라는 것은 없음을 알라.
    7. 어떤 일을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것임을 알라.
    8. 미래의 내 모습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라.
    9. 매일 매일 나의 행동의 변화를 점검해 보라.
    (변화된 행동과 변화되어야 할 행동)
    10. 모험과 노력을 두려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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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불행한 가정이 되기 위한 10가지 주책

    1. 항상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

    2.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든 가정에 와서 아내에게 풀 것

    3. 돈은 쓰라고 있는 것. 실컷 쓰고나 죽자고 마음을 먹을 것

    4. 지금이 항상 최악의 상태라는 강박관념 속에 한숨만 쉬고 있을 것

    5. 교회에 다닐 시간이 있거든 잠이나 푹 잘 것

    6. 여자란 팽이처럼 때려야 잘 돈다는 생각으로 사흘에 한번씩 괴롭힐 것

    7. 미래는 공상으로 즐기고 과거 속에 자신을 파묻고 살 것

    8. 남의 눈치 볼 것 있나? 나만 위해 모두를 희생시킬 것

    9. 집안 일은 아내의 몫이니 손하나 까딱하지 말 것

    10. "우리는 애시당초 잘못된 만남"이었다고 자꾸 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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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친밀한 사귐을 위한 10가지 충고


    1. 만나면 무슨 말이든 명랑하게 먼저 말을 건네라.

    2. 그리고 웃어라.

    3. 그 상대방의 이름을 어떤 식으로든지 불러라.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자기의 이름이다.

    4.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

    5.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라.

    6. 상대방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라. 싫어할 사람이 없다.

    7.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칭찬하는 사람이 되라.

    8. 상대방의 감정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

    9. 내가 할 수 있는 서비스를 늘 신속히 하라.

    10. 이 모든 것에 유머와 겸손을 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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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성공을 위한 10가지 충고


    1. 시간의 가치 = 낭비하지 말라.

    2. 인내력의 가치 = 포기하지 말라.

    3. 열심히 일하는 즐거움 = 나태하지 말라.

    4. 단순원리의 존엄성 = 복잡하지 않게 하라.

    5. 인격의 가치 = 반드시 정직하라.

    6. 친화력 = 무관심하지 말라.

    7.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

    8. 경제생활의 지혜 = 낭비하지 말라.

    9. 참을성의 미덕 = 조급하지 말라.

    10. 기술개발 = 연습을 쉬지 말라.


    돈, 건강, 교육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당신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1. 돈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꼭 필요하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돈이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까?

    2. 건강

    돈이 아무리 많다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돈많은 자라도 건강을 잃으면 다 귀찮아 지는 법입니다.
    이 세상에선 건강한 것이 무엇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건강에 좋은 것이라면 외국까지라도 가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으며, 별의별 일이 다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3. 교육

    지금은 지식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돈많고 건강한 바보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습겠지요?
    그래서 각종 불법과외, 부정입학, 고3병, 자살 등 교육열에 대한 부작용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육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돈과 건강과 교육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지 않으며, 이미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믿으시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한복음 10:9),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 하리라"(요한복음 6:3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이 큰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큰 고난을 받아 주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시사 당신을 대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고아의 아버지

    오늘날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저 말씀은 나를 보고하는 말씀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럴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섶을 태우는 불같고 바위를 치는 쇠방망이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성도는 말씀을 읽을때 깨달음을 얻어 길을 찾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평소에 무심코 지나던 말씀이 어느날 갑자기 뜨거워지며 깨달아져 인생의 다른 길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는 독일 사람으로,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공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뮬러 목사는 평소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는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68:5)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뮬러 목사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뮬러 목사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뮬러목사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라면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총무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고아를 돌보는 사명을 주셨으니 길도 열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 고아원을 세우는 길을 얻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면 항상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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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영혼의 양식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학교에서 정규 과목을 공부하며 지혜와 지식을 터득합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이 인간을 복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등불이요,나침반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볼때 성경을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살고자 했던 민족은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저버린 민족은 영혼도 구원받지 못하고 범사에 저주를 받았으며 허약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지식이요,총명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언제나 사랑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편 119:97-100)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육체와 생활과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성경을 사랑한다는 것은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성도는 성경을 읽되 무작정 읽을 것이 아니라 매일의 계획을 세워 단계적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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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하나님을 경외하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 하시리라"(전도12:13,14)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을 통해서 들려주신 위의 말씀을 얼마나 인정하고 삶에 적용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만일 당신이 위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서 살아간다면,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 말씀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의 말을 무시하였기에 그러합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길을 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람의 본분에서 이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안에서 하는 모든 일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뿌리에서 나오지 않은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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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만큼 잘 알려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작 행동으로 옮기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까닭은 바로 이 구절에 "범사"라는 말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몇가지 비결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영적인 원리들 입니다.

    1. 살아있음을 감사해보라.

    큰 사고를 당했거나 난치병으로 사경을 헤맸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고. 오늘 나의 생명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기본이 닦여진 사람입니다.

    2. 문제가 있는 것을 감사해보라.


    이 세상에서 문제가 없는 곳은 오직 한군데. 무덤뿐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3. 감사할 일이 생겼을때 즉시 감사해보라.

    시간이 지나면 감사의 마음도 희미해집니다. 우리가 감사를 그때 그때 즉시 표현하는 훈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사소한 일과 작은 일부터 감사해보라.

    우리는 큰일,굉장한 일을 감사하려다 보니 어려움을 당합니다. 작은 일,사소한 일을 감사할 줄 모른다면 범사에 감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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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를 정의한다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어떤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하고 그 시간만큼의 댓가를 받으면 그걸 임금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경쟁 상대와 실력을 겨뤄 이겨 상을 받으면 그것을 우승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봉사를 했거나 귀한 일을 성취한 것이 정당하게 인정되어 받는 것을 이라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벌 능력도 상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그런 선물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아무 공로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영적 성숙함의 특징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잘못 진단을 한다면 결국 스스로에게 속고 맙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으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왔습니까?


    아래 3가지 질문은 어쩌면 가장 정확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를 공개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당신은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이 있는가?
    (2)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3) 당신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1. 나는 절대로 당신을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2. 나는 당신의 단점을 남에게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3. 내가 비록 화나는 일이 있어도 예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4. 어떤 자리에서도 그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5.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이 예절 교육임을 알고 기도하며 실천하겠습니다

    6.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말과 행실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7.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항상 존대말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드높히겠습니다.

    8. 지위가 낮고 가난한 사람도 업신여기는 태도를 취하지 않겠습니다.

    9. 부부간에도 늘 예의를 지키면서 살기로 노력하고 실천하겠습니다.

    10.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예의를 지켜 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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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미련한 부모와 지혜로운 부모


    1. 미련한 부모는 자녀를 서로 비교합니다. 자녀를 비교하면 불건전한 심리상태를 유발하여 인격을 파괴합니다.

    2. 미련한 부모는 자녀의 약점을 놀리거나 비웃습니다. 약점을 비웃으면 자신감을 읽게 됩니다.

    3. 미련한 부모는 뇌물이나 보상을 자녀에게 사용합니다. 뇌물은 현재의 눌린 문제를 해결해 줄지 모르나 후에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4. 미련한 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 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널 사랑하지 않을테다..."라는 표현은 어떤 행위를 싫어하는

    것인데 사람자체까지 싫어하게 만듭니다.

    5. 미련한 부모는 안돼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랑하기에 "안돼"라는 말을 못하겠다는 것은 "나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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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한 비결


    1. 혀에다 사슬을 달아두라. 생각하는 것보다 늘 적게 말하며 유쾌하고 설득력 있는 음성을 가꾸어 나가라.

    2. 약속은 삼가서 하고 한 약속은 충실하게 지키라.

    3. 누구에겐가 친절한 말을 할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말라.

    4. 다른 사람에게 순수하게 관심을 가지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라.

    5. 즐거워 하라.

    6. 논쟁할 의도로 던지는 모든 질문에 열린 마음으로 대응하라.

    7. 남의 험담하는데에 끼어들지 말라.

    8.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라.

    9.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말을 끊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

    10.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나 친절한 행위를 되돌려 받는 것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말라. 남을 도움으로 얻는 만족감 자체가 벌써 그 행위에 대한 보답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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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실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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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경청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야고보서의 이 말씀은 아마 교회 뜰 앞에서 예배처소를 떠나며 인사를 나누는예배자들을 향해서 한 말씀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주일 아침 회중석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한다. "휴우 설교가 끝났구나." 다른 사람이 대꾸한다. "자,이제 시작이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은총을 받는 경청은 주의하고 앞뒤를 살핀다는 의미의 경청이다. 그러나 준행없는 경청은 아무것도 아니다. 옛 격언은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들어서 잊어버리고,보아서 기억하며,행하여 깨닫는다." 이 격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까지는 속속들이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깨닫고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실때 나오는 바로 그런 종류의 깨달음이다. 참된 의미에서 순종은 성경이 말씀하는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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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비전이란 무엇인가?


    째즈 음악가이며 작곡가이고 잘 알려진 밴드 리더였던 듀크 앨링톤은 누군가가 리듬의 정의를 물었을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고,리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정의도 도움이 안될 거요."

    비전이란 무엇인가? 엘링톤의 말을 인용해 보면 "만일 당신이 비전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교회 지도자는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그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또 어느 지도자는 '비전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라고 말했으며, 어떤 목회자는 "거룩한 꿈"이라 표현했다.

    좀 더 충실하고 자세한 정의를 내려보자. 사역에 대한 비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종에게 보여 주시는 것으로서 현재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며,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신은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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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의 좌우명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지미 카터는 본래 해군장교로서 해군사관학교 출신입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하는 자리에서 사령관은 그의 신고를 받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카터 소위 귀관은 사관학교 시절에 몇등이나 했는가?"라고.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던 그는 "750명 중에 57등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사령관은 "귀관은 어찌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어찌하여 57등밖에 못했는가? 라고 꾸짖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지미 카터는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라는 사령관의 말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성실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신실이라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어느날 우리는 후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오늘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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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회전의자
    거실에 있는 회전의자가 돌아갈 때면 삐그덕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회전할 때도 부드럽지 못하고 뻑뻑하게 돌았다. 그래서 접촉되는 부분에 기름을 칠하니 소리가 나지않고 부드럽게 돌았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과 기도로써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시간들이 내 생활속에서 소홀히 되면 어느새 내 입에서는 불평과 짜증 섞인 말들이 오르내린다. 상대방이 듣기에 신경쓰이고 정말 듣기 싫은 소리일 것 이다.

    그리고 늘상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생활이 별로 달라진게 없음에도 여느때보다 더 힘이 들고 생활이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 많이 든다. 하나님과 나의 접촉점인 말씀과 기도가 생활 속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다시금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할 때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생활이 부드러

    워짐을 내 자신부터 먼저 느끼게 된다. 입술에 오르내리는 말 또한 편안하고 남이 듣기에도 좋은 부드러운 말로 바뀌게 된다. 머물지 않고 성화되어 지는 생활이 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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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0
    51-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모하라.


    오늘날 성령 강림과 성도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나는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러므로 나는 진리 안에 확고히 서 있어 만점 신앙인이다.

    다른 것은 필요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신앙인은 지적 신앙인이요,독선적인 신앙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보혜사 성령님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성숙하고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 밑에서 직접 말씀을 듣고 함께 행동했던 제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점 신앙인'이었습니까? 한 순간에 그들은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보혜사 성령님을 체험하자마자 위대한 용사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은 지적인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성숙해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으며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크리스천은 스스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적인 독선에 사로잡혀 오만해 하다가 신앙적으로 퇴보하기 쉽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지적인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이'안다'고 하는 것은 '올무'가 됩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을 배제하고 단순히 많이 알았다고 해서 깊은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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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갈등

    언젠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한 부형님이 내게 찾아와 "목사님,저는 수년동안 교회에 다녔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새벽 예배도 다니고 휴가 때는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를 하기도 했는데 성경 말씀대로 의롭게 살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 살다 보니까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군요. 이제 신앙 생활하는 것을 좀 연기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니,신앙 생활을 연기하다니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 분은 "네,환갑이 지난 후 노년기에,사회 생활하지 않는 그 때에 다시 교회에 나오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형님의 갈등은 바로 신앙 생활하는 성도의 갈등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누구나 이런 갈등을 겪습니다. 성도가 단번에 천사처럼 성결해지고 세상에 대해 초월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이런 갈등을 겪으며 점점 의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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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베푸는 삶

    오래 전 나는 외국 사람들의 생활 풍습에 대해 잘 몰랐을 때 외국 선교사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크게 실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국에서 그 선교사를 크게
    대접한 일이 있었기에 기대를 가지고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식탁에 가서 앉아 보니 닭다리 하나로 된 요리가 고작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 사람의 대접과 외국 사람의 대접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접
    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인만큼 하나님 앞에서 복받을 자질을 갖춘 셈입니다. 이러므
    로 우리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복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크게
    부강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데 존재 근본을 두신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주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주면서 살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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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성경을 가까이 하라

    나는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 꽤 알려진 지식인의 임종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가 건강할때 전도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내 전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
    니다. 그러나 암으로 죽어가자 내 손을 붙들고 울며 "제가 그 동안 배운 지식이나
    이룩한 학문이 모두 물거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인간의 지식을 통해 인간
    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고 했습니다. 이제 이런
    추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사님,제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성경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를 받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처절한 운명의 벽에 부딪치고 나서 무엇이 참진리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았습
    니다. 그는 그렇게 신봉하던 세상지식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
    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근본이요,지식의 근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인생이라는 것과 가치있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해 줍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의 가르침대
    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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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좋은 씨앗

    어느 성도가 이런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 내용인 즉 매일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는 것이 겁난다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고 가슴이 죄어든다고 했습니다. 이 성도는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대형사고,
    끊을 줄 모르는 폭력,시위,부정,인신매매,부동산값 상승,인플레등... 정말 충격의
    연속입니다. 왜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
    에 이처럼 어려운 고비에 처하게 되었을까요?"라고 편지를 통해서 절규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즉 과거에 우리가 이과 같은 것으로 심었기에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 우주의 질서
    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의 지도층이나 백성들이 정치나 사회에 억압과 독재에 비리
    와 부도덕과 부조리와 부패와 반목을 심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비극을 거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좋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나쁜 씨앗을 이 사회에 심는다면 지금
    보다 더 큰 불행을 거두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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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하나님 나라의 사진첩


    최근 어떤 모임에 갔더니 자꾸 사진을 찍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 후래
    쉬와 조명 때문에 눈이 나빠졌습니다."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니까 한 분이 "목사
    님,그래도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에 계시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세상의 것은 다 사라져도 남는 것은
    주님의 일에 헌신한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진첩에 남는 것은 복음을
    위해 헌신한 장면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진을 많이 남겨놓았는지
    그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시간드려,물질드려,몸드려,정성드려 헌신했는지 생각해
    보고 이런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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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가장 안전한 곳

    영국의 어떤 가정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 처녀는 어두워지면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는 공포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공포증이 점점 깊어져 이 처녀는 나중에 불을
    켜고 잠을 자야 하는 심한 노이로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가 부흥 성회에 참석했다가 목사님으로부터 "성령님께서는 평안과
    기쁨과 자유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 모든 공포와 절망을 극복하고 영광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람과 같으신 인격자로서 어디에나 계시며
    부모처럼 형제처럼 여러분을 도와 주십니다." 라는 말씀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
    고 이 깨달음을 통해 성령 충만을 받아 공포증과 노이로제를 극복했습니다.


    불과 몇시간 만에 이 처녀는 놀라운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 이 처녀는 불을
    끄고 평안히 잠을 잤습니다. 이 사실을 안 부모가 다음 날 아침 원인을 묻자 처녀
    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제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신 걸요. 저는 이제 무섭지 않
    아요. 성령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시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보혜사로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증거할 때 귀신이 소리치며 떠나
    가고 병든 자가 낫고,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으며 가난한 자가 복을 받고 진리에
    눈먼 자가 눈을 뜨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님께서는 구만리 장천에 계시
    지 않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늘 기도함으로 성령을 소멸치 않
    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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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그리스도인의 사명



    오늘날 한국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성령 충만의 체험입니다. 찬송
    가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라고 탄식하는 가사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많고 성직자도 많건마는 성령의 생수가 말랐기 때문에 1천만이라는 성도의
    수를 가지고도 사분 오열된 교회는 사회와 국가에 '빛과 소금'으로서 아무런 영향
    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성령을 받고 권능을 얻어 에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전도자들이 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좇아서 성령
    충만한 전도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계는 현재 죄악으로 인해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처절
    하게 파멸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그리스도인들의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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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성취와 상급

    새 질서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성취와 상급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
    다. 옛 질서 속에 사는 사람들은 부귀와 영화와 공명이 성취 대상이요,최상의 상급
    으로 알고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나는 최근 공산주의를 위해 일하다가 구속되었던
    형제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편지에서 "목사님,저는 목사님을 테러하
    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북에서 영웅칭호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영웅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그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변화를 받은 지금,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변화받은
    지금 저는 명예와 부귀를 추구하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라고 했습니다.

    새 질서 속에 들어온 사람은 세상의 성취와 상급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당'인데 세상에서 오래 살고 잘 살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새 질서 속에 들어와서도 세상 성취와 상급에 연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앙


    성숙이 덜된 사람입니다. 새 질서 속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급
    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상급은 신령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상급에 연연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해의 영광,달의 영광,별의 영광을 원합
    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왜냐하면
    세상 상급의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나라 상급의 기쁨은 영원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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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절대주권

    한 가정의 머리는 남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인 남편이 주권을 발휘해서 가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잘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인이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자녀들에게도 순종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가정은 질서
    를 잃고 늘 분쟁이 끊이지 않는 불행한 가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저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취해 우주를 다스리겠다고 하면 이 우주는 질서를 잃고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적하는 인간은 반드시
    인생의 질서를 잃고 파멸하고 말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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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70
    61-하나님의 특명

    최근 나는 한 자매님의 헌신을 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자매님은 혼자
    사는 분인데 집 한 채를 유일한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아침
    잠에서 금방 깨어났는데 하나님께서 "교회에 천만 원을 헌금하라."고 말씀하시더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그날 "하나님,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집 한 채 뿐인데
    어떻게 천만 원씩이나 헌금합니까?"라고 하면서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속 강권적으로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끝내 "하나님,집을 팔아 주시면 헌금을 내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내놨는데 신기하게도 금방 팔렸습니다. 이 분은 헌금을 교회에 드린 후 내게
    "목사님,하나님께서 얼마나 강권적으로 말씀하시는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특명을 받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특명을 내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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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마귀의 속삭임을 물리치라


    얼마 전 나는 마귀의 부정적인 생각을 허용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이 기도하다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심방하러 가는데 가는
    도중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힘없이 축 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귀가 내게
    "너,쉬 피로하고 무기력해질 때가 많지? 당뇨병에다 암이다. 또 앉았다가 일어나려
    면 핑 돌지? 고혈압이란 증거야. 휴식없이 무리하게 해외 선교를 다녀 얻은 병이
    다."라고 속삭였습니다. 나는 그 속삭임에 긍정했습니다. 그러자 이 생각이
    확대 되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러다가 내 자신이 입원해야 할 것
    같은 암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라.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즉시로 깨닫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나는 주 안에서 건강하다."고 시인을 했습니다. 또한 부활의 새 생명을
    받은 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불안과 의심이 사라지고 활기가 넘쳐났습니
    다. 만일 마귀의 생각을 좀 더 허용했다면 그날 심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마귀의 생각을 극복하고 은혜 중에
    심방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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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인내
    나는 최근 한 자매님의

    편지를 받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자매님은 예수님
    을 믿고 난 후 그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가족들에게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다음
    "하나님,우리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
    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2년이 지나고,3년이 지나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기도한
    지 9년째 접어들자 그만 낙심이 생겼습니다. '9년을 하루같이 기도했건만 하나님
    께서는 왜 응답을 안해 주실까?' 자매님은 이런 생각이 자꾸 들어 기도의 힘을 잃
    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부흥 성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부흥강사가 설교 중에 "나는 우
    리 가족의 구원을 위해 23년 간을 기도했고 그 결과 응답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 다시 줄기차게 기도하게 되었고 그 결과 10년만에 응답을
    받아 모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되 불퇴진의 기도를 해야합니다. 기도해
    서 당장 응답이 없다고 기도를 포기하는 성도는 어리석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하나
    님께서 가장 알맞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줄 믿고 인내하며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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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예수님의 이름
    나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귀신을 예수
    님의 이름으로 수없이 쫓아냈습니다. 나는 귀신이 쫓겨남으로 더러운 인격을 가졌
    던 사람이 고결한 인격을 갖추고,심령과 육체에 병들었던 사람이 자유함을 얻게 된
    사례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어디에 가나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
    으로 명하면 귀신이 떠나간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치료를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치료하기 원하신다는 사실
    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일의 체험자가 되고 증언자가 되기를 원하십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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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신유의 표적

    언젠가 나는 제주도에서 교사를 하는 분으로부터 감격적인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아내가 자궁 근육암으로 대소변을 못보고 큰 고통에 처해 있었
    는데 이 분이 신유에 관한 성경을 계속 읽어 주고 내 설교 테이프를 계속 들려주며
    강력하게 기도했더니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아내가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
    다. 그 분은 아내를 암이라고 진단했던 의사가 "어떻게 당신 아내가 나았느냐?
    당신의 아내는 분명히 암 환자였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 수 있느냐?"
    라고 말했다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다고 간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
    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께서 역사하시면 인간이 의아해 하고 감복할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위대한 표적을 나타낼 수 있습니
    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
    님의 치료가 임하며 주를 믿는 자들에게는 신유의 표적이 따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고 믿음의 행진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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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예수 놀라운 이름

    가족들이 번갈아 병원에 드나들어서 아예 집을 병원 옆으로 옮긴 분이 있었습니
    다. 남편이 병원에서 퇴원하면 아내가 입원하고 아내가 퇴원하면 아이들이 입원하
    곤 했습니다.어느날 부인이 방광염에 요도 결석까지 얻어 또 입원했는데 병원 창문
    을 통해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저를 고쳐 주시면 저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 하나님
    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후 수술을 받고 병이 치료된 후 그 부인
    은 그 기도를 새까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분은 척추 결핵에 걸려 고통당하다가 비로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생각하고 교회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 한 달 동안 "주님
    이시여,당신의 역사로 고쳐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이 분은 척추
    결핵을 깨끗하게 고침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에는
    치료의 역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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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예수님을 의지할 때

    나는 일전에 대만 성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역사로 질병을 고침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성회에 중풍에 걸린 한 노인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가지
    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선언했

    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힘을 쓰며 일어났
    습니다. 나는 다시 주님을 의지해서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벌
    떡 일어났습니다.

    이 분은 일어나서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힘차게 걸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
    할 때 질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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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천국잔치에의 초대

    어렸을때 나는 아낙네들이 미꾸라지 국을 끓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낙네들은
    미꾸라지를 잡아 호박잎 뒷면 까칠까칠한 부분에다 마구 문지릅니다. 그런 후 바구
    니에 넣고 소금을 뿌립니다. 그러면 미꾸라지들이 따가와서 마구 뜁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미꾸라지들이 얼마나 아플까?'하는 생각을 했었습니

    다. 그런데 주님
    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서 겪는 고통은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입
    니다. 그 세계에는 죽음이 없는 형극만 있습니다. 그 처참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의 부름에 외면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형벌을 받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 작정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찬란한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벌뿐입
    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천국의 세계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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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구원의 승리를 안고 온 챔피언


    제24회 서울 올림픽은 여러가지 신화를 남긴 올림픽이었습니다. 특히 내 개인적
    으로는 신앙의 깊은 계시를 받는 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88올림픽은 정치적으로
    동.서가 서로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어 하나로 화합한 획기적인 화해의 장이 되었고
    기록면에 있어서도 풍성한 올림픽 신기록 및 세계 신기록이 나온 값진 대회였습니
    다.

    게다가 우리나라가 세계 4위를 차지하여 체육강국으로 부상,국민들의 사기와
    자부심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선전할 때마다 국민들은 열광했고
    선수들이 메달을 획득할 때는 마치 자신들이 획득한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실상
    우리 선수들이 획득한 메달은 국민이 획득한 메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므로
    '88올림픽에서 우리 선수와 국민은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안타까움을 함께 나누는
    '일체'였습니다.

    나는 선수와 국민의 일체감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에 대하여 깊은 깨달
    음을 얻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처한 인류를 구원
    하기 위한 '챔피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구원의 승리와
    이에 대한 기쁨을 온 인류에게 전해 주기 위해 오신 '선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승리는 곧 우리
    의 승리가 되며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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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습관에 대하여

    펄벅여사의 소설 <대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 왕융이 장가를 들어
    부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복숭아를 씹어 먹는 왕융이 신나게
    맛있게 먹고서 속의 씨를 길가에 버립니다. 아무런 생각 이나 조건없이 복숭아를
    먹었으니 그 씨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결혼하기까지 어떤 부잣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였습니다. 하녀
    생활을 통해서 주인이 버리는 것에서 새로운 생산적인 것으로 돌리는 지혜를 길러
    왔었습니다. 새신랑 왕융이 복숭아를 다 먹고는 무심코 씨를 버리는 것을 보고
    부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혼자 말합니다. "이걸 심으면,또 복숭아가 열릴
    텐데..." 그러고는 그 씨를 감추어 가지고 와서 자기 집안에다 심었습니다. 물론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복숭아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동양의 여인들이 얼마나 지혜로우며 얼마나 생산적이냐 하는
    찬사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대목에서 습관적인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년,또는 민족적인 것은 수천년간의
    생활 속에서 고정되어 굳어버리는 생의 형태를 일컬어 습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습관에서 생산성이 있는 씨알들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쓰레기
    로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랬다는 식의 생활 태도
    는 소위 만네리즘에 빠져서 신선한 맛이 없고 쾌감을 느끼는 순간도 없이 질펀한
    대지에 아지랑이 끼어들고 있듯이 아무러한 상념이나 의식이 없이 소가 걸어가듯이
    어슬렁 어슬렁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권태와 낭비만이 깔리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까뮈의 작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스>가 태양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쏘아 살인을 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있을 법한 그러한 생의 과정을 걸어
    가는 습관적인 삶을 우리는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습관은 바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다만 비생산적이고 고루한 생의 형태는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언입니다. 말하자면 생의 유신을 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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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80
    71-전쟁의 유물

    격렬했던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해서 온 세계가 불바다로 뒤끓던 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한토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세대에 태어난 한 불행한
    미국인의 이야기가 가슴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겪는 동안 한 미국 군인
    은 그만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병원으로 후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배에는 남편의 전사 전지를 받았던 전쟁 미망인이 늙은 사람을 새 남편으로 맞이
    해서 신혼여행을 하느라고 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우연히 같은 배안에서 전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까무라칩니다.

    그러나 기억상실증의 군인은 그 여인의 경악의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는 전 남편을 만나 과거의 말을 하면서 내가 바로 당신의
    아내였다고 하니까 전혀 당신을 모르겠다고 부인하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으로 건너다 보았습니다. 이러한 비극의 이야기는 전쟁의 유물중의 하나입니
    다.

    그 군인이 노도광풍에 요동하는 배안에서 잠든 아가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나고
    깨어나듯이 기억을 되찾아 자기의 아내가 지금 신혼여행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만
    아무도 몰래 투신 자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인은 한없이 울며 선창에 몸부림쳤으
    나 바다는 파도만 출렁일 뿐 한 인간의 비극을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쟁은 슬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쟁은 비인간적인 비극의 불씨입니
    다. 전쟁을 말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자의 슬픈 종말을 다시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전쟁이 없는 세대를 살고 싶은 것입니다. 군복이 없고 총칼이 없고 평화와 사랑이
    충일하자는 회에서 맘껏 우주의 주인공,만물의 영장답게 살고픈 것입니다.

    하나님! 이 조국의 얼굴을 평화와 행복의 하늘로 덮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날의 역사가 덮이는 순간의 기도를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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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태풍 속의 버스

    E - 태풍,비바람소리,나무가 꺽어지는 소리등 - IN -
    E - 버스가 달리고 있는 소리
    E - 버스속의 소란,급커브를 돌때의 으악하는 경악의 소리
    그냥 달릴때는 오히려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공포
    태풍소리,버스차창을 때리는 비바람소리,바람소리
    소리 A
    (낙심조로) 태풍은 더욱 심해지고,길은 험한데
    소리 B
    그러기에요,이 산중은 길도 험해요
    E - 와직끈하는 태풍에 나무가 부러져 버스에 가지가 부딛는 소리,
    그래도 그냥 달리는 소리
    여 - 아이 무서워, 이러다가 사고나 난다면 어떻게요!
    소리 - 거 방정맞은 소리 작작하쇼!
    소리 - 아이의 코고는 소리, 태풍소리 약간 낮아진다
    여 - 아니 얘는 누군가? 이런 공포속에서 넌 잠만 자니?
    얘! 얘! 넌 어디까지 가니? 남들은 모두들 기겁을 하는데 이 태풍속에서
    잠만 자느냐?
    아이 - 음~ 잘잤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난 종점까지 가요.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버스가 달려가도 난 염려없어요. 저 운전사가 우리 아버지에요.
    아버지도 내가 여기 타고 있는걸 아시거든요.
    모두들 - 뭐야! (놀라서) 그래?

    ** 아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이 세계를 운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평화와 사랑의 안전을 누리는 행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이같은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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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직업관념

    우리는 오늘 저녁 난로가에 앉아서 네 사람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네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로가 다 직업이 다른 친구들이었습니다.


    외과의사,육군장교, 신문기자,교회를 담임한 목사 이렇게 네 사람이 서로 자기네
    직업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세상에 제일 불쌍한건,의사들일꺼요! 매일 남의 고름이나 짜주고 밥을
    먹어야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군인은 '거 무슨 소리요,군인같이 사람구실 못하는 것이 어디있오! 가정을 알고
    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겠오?'하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다들 그만 두쇼! 사회의 상처마다 찾아 돌아다니는 우리들이 무슨 무관
    의 제왕이라,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요, 세상에 기자를 사람으로 칩디까? 어서 고만
    둬야할텐데...'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도 무지도 미신도 다 내쫓아야 하고 비극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마는 '직업관념'이 없거나 잘못된 것이 후진 사회조성의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극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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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운명같은 건 없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로렌스가 아카바를 공격하기 위해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하는데 그 부하 중에
    <가실>이란 아랍인이 자갈깔린 마른 땅을 건너기가 어려워 도중에서 몰래 탈주하여
    빈 낙타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로렌스는 자기 낙타를 되돌려 탈주병을 찾으려 합니다. 그때
    모든 일행이 가로막고 두시간이 못되어 태양이 뜨면 곧 죽어버릴 운명이라고 하여
    말립니다. 탈주병 하나를 찾느라 되돌아 선다면 아카바 점령의 목적도 로렌스의
    생명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렌스는 묵묵히 출발하여 혹사의 태양열 속에서 <가실>을 구하여 돌아오는 장면
    이 있습니다. 그때 로렌스는 말리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이란 건
    없다. 위대한 인간은 자기 운명을 개척할 뿐이다'라고. 환희의 축하가 벌어졌고
    <가실>은 충성을 결심하고 일행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아카바 공격을 진행하여
    성공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동료의식이 강렬하고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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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처녀의 죽음

    도이취의 극작가 쉴러의 명작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영.불
    100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여걸 잔느.다크의 순직까지의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은
    한 여성의 애국 충정을 유감없이 그렸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국의 사명을 위임받았다고 스스로 믿고 쟌느는 기적적인 승리
    를 계속해 나가다가 영국군 대장 라이오너를 보고는 여성의 정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남성의 매력에 이끌려 자신과 자신의 부대가 포위당해 방황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쉴러는 이 대목에서 잔느.다크의 영웅적인 면모를 저해하지 않았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면에서 잔느.다크가 인간미 풍기는 완전한 여성으
    로서 그녀가 부각되었다고 했으며 거기에 아주 함몰해서 패망하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곧 자신의 불찰을 인식하고 구국의 사명을 다시 뼈저리게 의식하고
    는 용기를 내어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최후의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장엄하게 순직하게 됩니다.

    한 시골처녀의 죽음이 주는 영향은 단순한 한 여인의 죽음이상이었습니다. 그것
    은 실상 그녀가 지녔던 신앙이 아니었다면 그 위대한 정신력이 어디서 솟아났겠느
    냐 할 때 잔느.다크의 승리나 기적이나 죽음은 정신적인 대지주의 역할을 능히 할
    수 있었던 신앙이 작용했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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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나이 타령

    영국 속담에 '남자 나이는 기분에 따르고 여자 나이는 얼굴에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를 연도별로 구분하고 있고 또 잉태기까지 가산해
    서 셈하고 있지요.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벌써 한살을 두살이라고 말해야 하고 섣달 그믐날 태어
    난 갓난 아이가 하루가 지난 다음해 초하루에는 일약 두살의 나이로 계산하고 있습
    니다.

    요즘 어떤 여성단체에서 나이를 '만'으로 쓰자고 캠패인을 벌인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시행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나이란 중요한 것이요 나이
    가 그 사람의 살아있는 이력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이 감각에는
    남자들보다도 여자가 더욱 예민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외국 만화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
    다. 고인의 한 친구가 나와서 추도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젊은 미망인이 검은
    상복을 입고 검은 베일을 쓰고 관 옆에 서있었습니다. "오호라 슬픈 일이로다.
    친구여, 그대는 나이 30의 애처를 남기고 가다니...'하고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미망인은 이때 돌연히 한 발자욱 나서면서 '아니에요, 저는 아직 29세 인 걸요'
    라고 했습니다.

    29세와 30세는 한살 차이인데 뭘 그러느냐 할지 몰라도 29세는 엄연히 20대요
    30세는 30대이므로 이것은 세대가 달라진다는 말이지만 여인의 경우는 이토록 나이
    에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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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7-한 낮의 악마

    프랑스의 작가 부르제의 작품 '한낮의 악마'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윤리와
    종교사이의 샌드위치가 되고마는 인간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즉 천주교 신자인 사비니앙교수는 상처한 후에 결혼전에 사랑하던 여인과 재혼을
    하는데 그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되지만 그 아들은 자살하고 맙니다.

    부모의 재혼이 가져다 준 자녀들의 반응은 여러가지 반응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
    지만 이처럼 비극을 초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주인공은 마음 속으로
    방황하게 되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고독과 상실의 엇갈림이 생기고 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선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일이 타인의 눈에
    비칠 때는 악하고 좋지 않다는 평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독선적인 인물이 되고 위선자의 낙인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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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멕베드의 최후
    세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 상연 시간이 제일 짧으면서,템포가 빠르고 구성이
    완벽에 가까운 희곡이 바로 맥베드입니다.

    이 희곡은 살인 장면의 묘사가 너무 예리하게 묘사되었고 또 사건의 대부분이
    살해와 죽음이 주는 이메지로 꽉차 있어서 좀 살벌한 의식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
    입니다.

    그러나 이 맥베드를 읽거나 공연을 보면 다음에 두가지 커다란 확신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모함과 살해의 동기가 자기 출세의 방법이 될 때 더 할 수 없이 잔인
    하고 비참하게 진행되는 것이며 그 댓가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 온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다음으로 인간이란 어떤 일에든지 자신의 운명과 인간적인 한계를 꼭 알아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는 맥베드가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
    게 되지만 맥더프 장군이 이끄는 적군에 의하여 파멸되고 전사하고 맙니다.

    바로 그 맥더프장군이 동료 뱅코우의 유복자가 자란 것임을 알게 되지만 자기의
    운명이 다하는 것을 어찌할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맥베드는 버넘의 숲을 쳐들어 행군하여 오는 맥더프 장군에게 살해되고 짧은 그
    인간의 역사가 닫혀집니다.

    순리대로 살아야지 억지로 올라서려고 바둥거리면 오히려 분수에 맞지 않은 결말
    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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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첫 사랑의 재회

    인간은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 대한 향기로운 회상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운 추억은 녹쓸고 병들지 아니한 찬란한 감정의 순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오는 것이라면 적막한 고독이나 가슴이 아리는

    슬픔이나 뼈를 녹이는 아픔이라 할지라도 달갑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사랑의 재회를 기다리는 가슴입니다.
    재회의 문전에서는 억만가지의 허물과 죄도 봄눈같이 녹고 마는 용서와 이해와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입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죠지 엘리올>의 출세작품이었던 <아담.비드>가 있습니다.
    가난한 마을 헤이스로프에서 목공으로 있는 주인공 <아담.비드>는 시골 아가씨인
    <헤티.소렐>을 사랑하게 되었는데,그 여인은 지주의 아들 <아서>에 유혹되어 희롱
    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의 <아담.비드>는 가슴이 아픈 상처를 안고 번민의 검은 장막에 눕게 되지만
    첫사랑의 그 여인에게 장래와 미래를 축복하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헤티.소렐>
    은 <아서>의 아기를 낳게 되고 버림을 받게 되는데 그 여인은 산아를 죽였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받게 됩니다.

    그때 번민하던 <아담.비드>는 동생 <세쓰>의 활동으로 그 여인과 재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상처와 절망에 빠진 첫사랑의 여인을 <아담.비드>는 관용과 이해를
    가지고 맞이 하여 행복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입니다.

    사랑에는 약하고 한없이 착하여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참된 인간성이 아닐런지요
    사랑에는 계산서를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사랑의 향기 짙은 것으로
    많은 작품들이 묘사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랑과 결혼에도 계산서가 따르는 현실을 당면할때 사랑의 순수
    한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딱지가 덜
    떨어지고 세상을 모르는 유치원의 학습으로 보아야 성숙한 현대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갑자기 사랑의 영토를 상실하고 조건과 계산서의 식민지에 잡혀있는 쓸쓸한
    인간으로 되는 것같습니다.

    <아담.비드>의 순수한 사랑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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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사소한 일

    미국 콜로라도의 <롱의 봉우리>에는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400여년이 넘은 그 나무는 14번이나 벼락을 맞고도 이겨냈고,수많은 눈사태와 폭풍
    우를 이겨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이 이 나무에 기어들어 나무의 속을 갉아먹고 나무의
    거대한 체구를 지탱할만한 힘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나무는 거대한 사건과는 투쟁하여 장장 400년이 넘도록 이겨 왔지만 딱정벌레들
    의 습격에는 당하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사소한 일 때문에 패망하는 경우를,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소한 일 즉 대수롭지 못한 일 때문에 커다란 목적을 상실한 것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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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90
    81-당신의 변화를 위한 10가지 충고


    1. 남과 경쟁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경쟁하라.

    2. 자기 자신을 깔보지 말고 격려하라.

    3. 당신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음을 알라.
    - 단점은 인정하고 고쳐 나가라

    4. 과거의 잘못은 관대히 용서하라.

    5. 자신의 외모,가정,성격 등을 포용하도록 노력하라.
    - 그것을 탓하거나 구실로 삼지 말라

    6. 자신을 끊임없이 개선시켜라.

    7. 당신은 지금 매우 중대한 어떤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 그 책임의식은 당신을 변화시킨다

    8. 당신은 꼭 성공한다고 믿으라.


    9. 끊임없이 정직하라.

    10. 주위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도록 하라.
    - 자신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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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일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긴장한 나머지 나혼자만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라.


    2. 일을 좋아하도록 하라. 그러면 고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된다. 마음을
    바꾸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한다.

    3. 계획을 세우라. 계획이 없으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느낌만을 갖게된다

    4.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 쪼개서 하나씩 처리하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올바른 자세를 가지라.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면 당신 자신이 그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된다. 일을 쉽다고 생각하라. 그러면 그 일은 훨씬 더
    쉽게 될 것이다.

    6. 긴장을

    풀고 여유있는 태도를 먼저 가지라.

    7. 일을 미루지 말라. 미루어 두면 일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8. 사물을 바르고 정확히 보는 눈을 가지라.

    9. 당신의 일에 대해 기도하라. 대단히 효과적이다.

    10.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를 동반자로 삼으라. 하나님의 도움이 당신의 일을
    쉽게 풀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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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꿈을 이루기 위한 10가지 충고


    1. 계획을 사각화하라.
    - 계획표를 눈에 띄는 곳에 붙이라

    2. 세운 계획을 세분화하라.
    - 분기별,월별,주간별,일별

    3. 망설이는 시간에 시도하라.


    4. 당신이 세운 그 계획을 고정시키라.
    - 결코 남과 당신이 같아질 필요는 없다

    5. 실패를 너무 의식하지 말라.
    - 세상 모든 것이 실패를 통해 이루어졌다

    6. 매일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라.

    7. 자신과 결코 타협하지 말라.
    - 그것은 실패의 시작이다

    8. 장애물을 미리 겁내지 말라.


    - 닥치면 해결의 길은 항상 있다

    9.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

    10. 나는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라.
    - 늘 그렇게 격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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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비판앞에 상처받지 않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소리를 지르거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말라.

    2.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중도에서 가로채지 말라.

    3.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을 삼가라.

    4. 비판앞에 스스로 비관하지 말라.
    - "그래 난 그런 인간이야", "난 별 수 없어"등

    5. 비판하고 있을 때 그 말을 못들은 척 화제를 바꾸지 말라.

    6. 잘못했을 때는 그

    것을 인정하고 서슴없이 사과하라.

    7. 그 비판이 맞든지 틀리든지 그 말을 이해했음을 알리라.
    - "이러이러한 말씀이군요"하며 반복하라

    8. '자신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를 정중하게 배운다는 기분으로 물어보라.

    9. 농담이나 익살로써 넘기려 하지 말라.
    -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게 된다

    10. 상대방의 비판을 나름대로 과장해서 듣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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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우정을 키우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네 친구는 네 친구 자신이 되도록 하라.
    - 그의 개성과 결점을 받아들이고,나와 같지 않음을 탓하지 말라

    2. 그에게 그의 자리를 주라.
    - 사람의 내면을 침해하면 안된다

    3. 주고 받기를 즐기라.


    4. 건설적으로 충고하라.
    - 그가 말하고 싶어할 때 말을 끊지 말라

    5. 충실은 신뢰로 이어짐을 알라.
    - 그가 없을 때에도 비난하지 말라

    6. 칭찬과 격려를 하라.
    - 그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말하라

    7. 정직하라.
    - 모든 면에서

    8. 친구에 차별을 두지 말라.

    9. 친구를 신뢰하라.
    - 누가 무엇이라 하든

    10. 모험을 꺼리지 말라.
    - 거절당할까 염려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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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망설임을 해결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지체하지 말고 과감히 시작하라.

    2. 성취되었을때 얻어질 이익과 망설임으로 인하여 겪게 될 손실을 생각하라.

    3. 긴장과 긴박감을 가지고 밀고 나가라.
    - 세월은 자꾸 흘러간다

    4. 계획표를 작성하라.

    5. 기초를 튼튼히 하라.

    6. 시도를 위한 자극의 정도를 높이라.

    7. 시작을 도와달라고 청하라.
    - 친구나 아는 사람

    8.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

    9. 적극적인 자극이 주어질 때는 주저하지 말고 거기에 따르라.

    10. 당신을 방해하는 장벽을 부수어라.
    - 한번에 한개씩 잘게 쪼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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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좋은 감정을 갖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작은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으라.
    - 꽃잎 하나에서도...

    2. 좋은 감정은 몸에 보약보다 더 효과가 있음을 잊지 말라.

    3. 늘 좋은 기분임을 먼저 시인하고 그렇게 살라.

    4. 친절과 명랑함이 습관이 되게 하라.

    5. 어떤 일을 불평하기 전에 감사할 조건을 먼저 찾으라.

    6. 미결상태로 어떤 일을 넘기지 말고 해결하라.
    - 해결되지 않은 일은 나를 우울하게 한다

    7. 지금 이 순간을 보람있게 살라.

    8. 사람들을 좋아하라.
    - 소외감,우울증,열등감이 사라진다

    9. 바쁘게 살라.
    - 바쁜 벌은 근심할 여유가 없다

    10. 당신의 일생은 감정에 의해 좌우됨을 알고 좋은 감정을 갖고 계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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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일어난 사건을 현실로 받아들이라.

    2.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라.
    - 울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라

    3. 새로운 것만 생각하라.
    - 지난 생각은 낡은 사람을 만든다

    4. 남아있는 것만을 생각하라.
    - 잃은 것을 생각치 말라

    5.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6.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라.

    7. 이제 '왜'라는 의문을 내던져버리라.
    - 의문은 비극을 불러 들인다

    8. 활동하라.
    - 육체적인 일을 하되 가치있는 것에 열중하라

    9. 슬픔에 긍정적으로 반응해 보라.
    - 부정적인 면으로만 생각하지 말라


    10.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라
    - 이 처방은 대단한 효과가 있다

    ==========
    89-당신의 경우는?(1)

    농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농부는 날마다 가파른 비탈 저 아래로부터 양동
    이 로 물을 퍼올려 계단식으로 된 자기 밭의 메마른 농작물에 물을 대었습니다.

    또 한 농부는 바로 그 밭 아래 또 다른 계단식 밭을 내고는 밭두렁에 구멍을
    내어 위의 밭의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위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싸우러 가는 길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전처럼 계속 물을 끌어 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아래
    농부는 여전히 물꼬를 빼돌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위의 농부는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단계를
    일러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아래 밭에 물을 먼저 대어 준 다음 자기 밭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으나 두 농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삼일이 지났을때 아래 농부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이 죽으면 모두 사는데,오늘도 당신이 살려다가 모두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90-머리보다 마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


    1. 이기적인 사람보다 봉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2. 상업적인 관계보다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3. 계산으로 살지 않고 뜨거움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4.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이기 위해서입니다.

    5. 지식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6. 조건적이 아니라 헌신적이기 위해서입니다.

    7. 악마적인 삶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8. 기계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감정이기 위해서입니다.

    9.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이기 위해서입니다.

    ====================================================================================
    91-100
    91-당신의 경우는(2)


    60년대초 미국의 닉슨씨가 방한하였습니다. 전직 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신 뒤라 철저한 야인
    의 상태였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와 한국의 외무부 장관이 박대통령에게 그의 전력을 감안,만찬을
    베풀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대통령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극히 제한된
    시간동안 제한된 면담만 허락해 주었습니다.

    보다 못한 브라운 대사가 미국 대사관에서 닉슨씨를 위한 만찬회를 개최,한국의
    각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 박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각료를 위한
    만찬을 개최,외무부 장관만 닉슨의 만찬에 참가했습니다. 닉슨씨가 불쾌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968년에 닉슨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닉슨 독트린을 선언,주한미군
    철수를 공표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박대통령은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원했
    으나 번번히 거절 당하였습니다. 끈질긴 요구에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휴가중 휴가
    지인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트로 오라고 마침내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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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당신의 경우는(3)

    스승과 제자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스승 : 밤의 어두움이 지나고 새날이 밝아 온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제자 : 동창이 밝아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승 : 아니니라.

    제자 : 창문을 열어 모든 사물의 형체를 구별할 수 있으면 새날이 밝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스승 : 그것도 아니니라.

    제자 :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스승 : 네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때,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너의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밝은 것이니라.




    "당신이 아무리 이웃 사랑을 소리높이 외쳐도 당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을 형제로
    여기지 못한다면 당신의 그 사랑은 당신의 이기심을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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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올바른 가치관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치관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려면,

    (1) 무엇을 하느냐 보다 무엇이 되느냐가 더 중요함을 알아야겠습니다. 좋은
    나무가 먼저 되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Doing 보다 Being
    이 먼저요, 더 중요합니다.

    (2) 얼마나 소유했느냐 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쓰는 법을 바로
    알지 못하면 소유가 클수록 더 불행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소유했느냐를
    계산하지 않고 썼느냐를 계산하십니다.

    (3) 섬김을 받는 것 보다 섬기는 생활이 더 값진 것입니다. 칼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참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려 왔고 생명까지 주려고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막 10:45)

    (4) 육신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육신은 잠깐이요 영혼은 영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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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부부의 일곱가지 원칙

    1. 서로 존경과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품는다는 말은 소중히 간직한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사랑은 헤어져 있을때
    비참함을 느끼고 같이 있을때 무한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말과 행동에 따라서 자라거나 깊어질 수 있습니다.


    2. 서로의 부족과 약점을 인정하십시오.

    세상에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려자의 약점과
    부족을 불쌍히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3. 병고,사업실패,고민 그리고 어떤 슬픔이 와도 서로 끝까지 위로하십시오.

    결혼생활은 우리를 매우 현실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서로의 위로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4. 서로를 위해서,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부부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돈 사용에는 의견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고 돈 사용법의 바람직한 방법도 잘 배워두십시요.


    5. 하나님 앞에 항상 무릎꿇는 부부가 되십시요.

    결혼하면 당신은 반려자의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무릎의 사역은 위대한 기적을 이루어 놓습니다.


    6. 부부간의 침묵은 서로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기가 쉽습니다.

    용감하게 정직하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부부만이 행복한 결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7. 타인들을 탐내지 말고 오직 당신의 반려자만을 사랑하십시요.

    서로의 사랑을 위해서 서로가 늘 보살피십시요. 타인을 탐내는 것은 수치요,
    엄밀히 말하여 무서운 죄인 것을 항상 잊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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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비판하지 말라

    David H.Frank 박사에 의하면 신경과민증에 걸린 사람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
    해 본 결과 대부분이 남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아닙니다.

    미국 어느 법정에 수건으로 눈을 가리우고 저울질하는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잘못 판단하기 쉽습니다. 내가 보기엔 틀려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도
    있고, 현재는 틀려보이지만 나중에 옳은 것이 판명되기도 하고, 겉으로 좋아보여도
    속으로 나쁠 수도 있습니다. 또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를 빼라고
    하기도 쉽습니다.

    겸손히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또 비판하는 만큼 자기도 비판을 받게되고 남에게
    너그러우면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 많이 아는 사람은
    남을 날카롭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남을 가리키면 세개는 나를 지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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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복된 두려움

    모든 병의 70% 이상이 두려움과 근심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해로운
    것이지만 복된 두려움, 꼭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분을 두려워 하면
    다른 모든 두려움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은 권고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잠13:13, 사66:2). 말씀을 멸시하면 멸망합니다. 모든 이단이 말씀을 두려
    워 하지 않는데서 생깁니다.

    3. 죄의 결과를 두려워 해야 합니다. 한시간의 죄악의 쾌락을 즐기다가 일평생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도 됩니다. 살아 생전 죄의 문제를 해결 못하면 내세에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만 믿으면
    죄를 사함받고 영생,천국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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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죽는 것이 사는 길

    어떤 사람이 깊은 산중에서 산불을 만나 타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궁리한
    끝에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다음에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갔더니 불의 피해를 막고 살아 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가 사는 길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남도
    살고 자기도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34)고 하신대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수십배 수백배로
    사는 길입니다.

    모든 죄악의 열매가 자기(Self)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자신도 부활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항복
    (Self surrender)시키는 것이 참으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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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팻 로벗슨 목사는 예일대 법학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버지니아주 상원의원
    이며 은행통화위원장이었다.

    목사는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날 퇴근시간에 한잔 하러 가자는 친구의 요청을
    뿌리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여보, 나 구원받았소"하고 외쳤다.

    "당신 미쳤군요"하는 아내의 소리에, "난 미치지 않았소. 난 구원을 받았단 말이
    오." 그리고 그는 취침시간쯤에 아무 말도 없이 찬장문을 열고 거기 있던 위스키
    병을 내려놓고 하나씩 마개를 열고 하수도에 쏟아버리기 시작하였다.

    콸...콸...콸.... "당신 왜 이래요? 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하면서 아내가
    달려와 마지막 술병을 움켜 쥐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빼앗아 다 쏟아 버렸다.

    구원의 기쁨은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예수를 믿고 무엇을 버렸는가?
    또 지금은 무엇을 버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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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그리스도인과 정신병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종종 종교적인 문제에 몰두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
    은 기독교가 정신병을 만들어내는 주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오하이오주에 있는 한
    정신병원의 감독인 리챠드슨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앙의 문제와 관련되어 정신이상을 일으킨 환자
    가 우리 병원에는 단 두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들의 사례연구에서 그들이 어떤
    다른 문제에 대하여 정신혼란을 겪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만일
    여러분이 오하이오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의해 정신병을 겪지 않게 되었


    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다수의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훌륭한 격려, 찬란
    한 소망,풍성한 위안,규칙적인 습관 그리고 구원의 기쁜 노래들은 정신적인 혼란의
    원인을 제거해 주는 해독제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보호받아
    왔지요. 기독교의 유익한 영향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신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우리 병원의 수용력을 배로 늘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현대의 불안과 좌절 속에 있는 마음들을 지켜주는데 있어서
    놀라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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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지붕없는 집

    고용주가 자기의 고용인에게 방까지 제공하는 시대에 살았던 어떤 경건한 스코틀
    랜드의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지 못한 농부를 위해 일하러 갔다. 그 농부가 자기를
    돕는데 대한 댓가를 후하게 지불해 주는데도 불

    구하고 그 그리스도인은 그와 함께
    오랫동안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이웃 사람이 그 믿는 자에게 왜 그렇게 일찍 떠나느냐고 묻자 그는 "그 집엔
    지붕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자기의 이상한 대답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옛 격언을 인용했다.

    "하나님께 규칙적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 집은 마치 지붕이 없는 집과 같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평안과 위로 그리고 안전함을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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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10
    101-귀중한 보석들

    다이아몬드 세공으로 유명한 암스텔담을 방문하고 나서, 한 여행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값비싼 보석이 처음 발견될 때는 보통 돌맹이처럼 거칠고 검다. 우선 그것을
    쪼개어서 모양을 만든 다음 광을 내기 위해서 몇시간 동안 힘든 작업을 한다. 그것
    을 커다란 회전식 바퀴 비슷한 기계에 넣어 갈고 닦기 위해 다이아몬드 가루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광채를 내게 하는데 있어서 이것 이상
    단단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 작업을 완성하는데는 수개월이 걸릴 때도
    있다. 만일 그 보석이 왕이나 다른 고관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보다 더 많은 시가놔 노력이 들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주의 왕관에 합당한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덕과 아름다움을 지닌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는 우리가
    그의 영광의 빛을 반사하는 광채를 내도록 우리를 내려치는 고통을 허라하시는
    것이다. 죄와 악의 습관들이 시간이라는 신성한 바퀴에 의해 갈려질 때에야 비로소
    주의 거룩함의 광채는 더욱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금생(今生)에 있어서 "잘 갈려서 윤이 나는" 상태로 된다면 하나님
    의 "귀한 보배들" 중의 하나로서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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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행복해 지는 법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구세주의 본을 따르지 못한다면, 그는 틀림
    없이 불행한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은 "비참해 지는 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암시를 하고 있다.


    "오직 당신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이야기할 때는 가능한한 "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라.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라. 사람
    들이 당신에 대하여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항상 칭찬받을 것을 기대하라. 언제나
    좋은 시간을 갖기를 바라며 기회있을 때마다 당신의 의무를 회피하라. 다른 사람들
    을 될 수 있는 한 조금만 사랑하고 당신 자신을 가장 사랑하라." 이것은 백퍼센트
    의 오류가 없는 보장된 비결이다.

    당신이 겸손히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면, 참된 축복이 당신의 삶에 가득 찰 것이며, 풍성한 평안과 기쁨이 당신의 영혼
    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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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영적 청개구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않다가 고난을 겪은 후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청개구리는 평상시에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꼭 반대로 하였다.
    살아 생전에 한번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죽은 후에야 자신의 불효를 후회하였다.

    아직 우리 주변에는 영적 청개구리들이 많이 있다. 영적 청개구리는 완전히 거듭
    나지 못한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단 0.001% 도 반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행하심을 관찰해 보면, '말씀 - 순종 - 기적'이라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말씀 - 순종 - 기적'의 원리에 순응하고 있는가? 나는 아직 영적 청개
    구리인가? 내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마디의 불평과 변명과
    불순종 때문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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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빛나는 얼굴들

    다음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기쁨으로 빛나는 표정을 지니게 된 어떤
    여공에 대하여 캄벨 몰간이 들려준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플랫포옴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 곁에
    앉아 있던 매우 교양있는 한 숙녀가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깊은 인상을 받고서
    그녀에게 "저 실례지만, 아가씨는 무엇 때문에 그처럼 행복한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제가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고 있었어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제가 그 이유를 말하게 된 것이 기쁘군요." 그리고서 그녀는 구원의
    경이와 그것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기쁨에 대하여 그 여자에게 증거하였다. 그녀의
    풍부한 간증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그녀의 구세주로 영접하도록
    만들었다.


    신자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할때 그들의 얼굴은 자연히 그들의 영혼 속에 있는
    기뿜을 반영해 준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왔을때 자기의 얼굴 꺼풀이 거룩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얼굴이 빛났다. 스데반이 초대교회 역사에서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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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부지런히 일함

    1879년 10월 18일 토마스 에디슨이라는 젊은 발명가가 그의 연구실에 앉아있었다
    그는 전압에 견디는 필라멘트를 연구해 내는 일에 13개월이나 거듭 실패함으로
    인해서 지쳐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던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거절하고 나섰다.

    온갖 재료를 실험해 보아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에디슨은 자신의 낭패를 인정하였
    다. 그는 우연히 그을은 램프 조각을 줍게 되어 그것을 타르와 함께 섞어서 돌돌
    말아 가느다란 줄로 만들었다. 갑자기 그는 탄화된 면 섬유로 실험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5시간 동안 제 일 필라멘트에 대하여 연구하였
    으나 그가 그 틀을 제거하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두 개의 실감개를 사용해 보았
    으나 역시 실패였다.

    마침내 완전한 줄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유리관 속에 놓아두려 할 때면 없
    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에디슨은 기권하지 않았다. 그는 이틀 이상을 자지도 않고
    계속 작업하였다. 결국 그는 탄화된 천연 그대로의 실을 진공으로 밀폐된 전구
    속으로 삽입시켜 보았다.

    "우리가 전류를 통하게 하였을 때"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처럼 오랫
    동안 보기 원하였던 광경을 보게 되었어요!" 가장 깊은 낙심속에서의 그의 인내는
    세상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곧 전기불을 내놓았던 것이다.

    당신은 내일 일터에 나갈때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에디슨의 경우와 전도서 9장
    10절의 말씀을 명심하라.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잘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106- 기 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하여서도 겁을 내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고통에 처하여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인생과 싸워서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근심스러운 공포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자유를 내가 싸워서 이길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겁장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내가 기쁘고 성공할때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플때 하나님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
    107-가장 어리석은 자

    Thomas Paine 이란 사람은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란 책을 써서 기독
    교를 한껏 조롱하며 "이 책은 성경을 말살하게 된다"고 장담하면서 "100년 안에
    성경은 다 없어지고 박물관이나 고서점 한 구석에서 먼지 앉은 책으로 찾아볼 수
    있으리라"했습니다.

    1794년 london에서 그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는 그 책 때문에 비참하고고독해졌 습니다.
    그는 '"이성의 시대"가 쓰여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그 책을 다 회수할
    수 있다면 세상에 있는 것을 다 줄텐데'라고 후회했습니다. Paine은 1809년 죽는
    날까지 침대에 누워만 있는 무익한 인간이 되었고 친구도 없이 고독하게 지냈습니
    다.

    성경은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습니다. "시편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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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신비의 책

    성경은 일곱가지 면에서 신비의 책입니다.


    1. 형성과정에서 - 4,000년동안 걸려서 형성된 신비의 책이며

    2. 일치의 면에서 - 66권이나 되는 책이 주제와 사상이 일치하고 통일된 하나의
    책이며

    3. 세계적인 면에서 - 가장 오래된 책이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책이며

    4. 판매면에서 - 어느 시대에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이 팔리는 세계 베스트
    셀러이며

    5. 흥미와 관심에서 - 각계 각층의 모든 종류의 사람이 읽는 책이며


    6. 언어의 면에서 - 가장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된 책이면서
    문학적으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7. 보존적 의미에서 - 가장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아오면서도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히 4:12,13), 영원한 생명의 말씀
    (벧전 2:13)이기 때문입니다.

    ==========
    109-습관과 인생
    그 사람이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행 불행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그 나쁜 습관 한가지만 없으면 임금님 진지 그릇
    같이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 악습때문에 강아지 밥그릇 밖에 못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술,도박,담배,음란,부부싸움,거짓말등 어느 것에도 해당될 수가 있습니다. 처음
    에는 실수로 죄를 짓지만, 그 다음에는 고의로 죄를 범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습관이 되어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고 말씀하신대로 새해에
    새사람이 되고 새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새사람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를 받고 영접할때 시작됩니다.

    ==========


    110-존재의 목적

    목적론적으로 말할때 모든 것은 다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 볼펜도 전화기도
    시계도 다 저 혼자 보기 좋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졌고 또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존재의 목적은 물건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 물건을 만든 사람의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계는 자기 혼자 뱅글뱅글 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인간도 먹고 자고 일하고 자식낳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때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목적에서 어긋날때 혹은 알지 못할때 아무리 명예와 재산을 다 소유했다고
    해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치고 자기에게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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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120
    111- 무능력한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살아라.

    2. '난 틀렸다'고 늘 넋두리를 하라.

    3. 모든 일에 변명만 하라.

    4. 무슨 일이든 행동하지 않고 공상으로만 그쳐라.

    5. 좁게 생각하고 좁게 활동하라.

    6. 지난 날만 생각하라.

    7. 사소한 일에 시간과 마음을 쓰라.

    8. 자기 자신을 늘 비난하라.

    9.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쉽게 포기하라.

    10. 한번 실패하면 이젠 끝장이다고 믿으라.

    ... 그러면 당신은 무능력한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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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못된 자녀로 키우는 10가지 비결


    1.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어하는 것을 무엇이든 다 주라.
    - 자신이 최고인 줄 알 것이다

    2. 나쁜 말을 해도 웃으라.
    - 더욱 악한 말과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3. 교육과 훈련을 시키지 말고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라.

    4. 잘못된 품행을 책망하지 말라.

    5. 아이가 치우지 않은 침대,옷,신발 등을 모두 정리해 주라.

    - 자기 책임을 미루는 사람이 될 것이다

    6. TV 나 책을 마음대로 보고 읽게 놔두라.
    - 그 마음은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7. 아이 앞에서 부부싸움을 자주하라.

    8. 달라고 하는대로 용돈을 주라.

    9.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것 좋다는 것을 다 해주라.
    - 한번이라도 거절당하면 낭패한 사람이 될 것이다


    10. 아이가 이웃과 선생님과 대립할때 언제나 아이편이 되어라.
    - 사회는 아이의 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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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난 한 개인으로서 이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라.
    - 내 한 표가 대통령도 결정한다

    2. 자기 감정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친구를 두라.

    3. 자신의 결점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라.

    4.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배우라.

    5. 뜻대로 안될 때 감상에 빠지지 말라.

    6. 감정을 통제하라.
    -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7. 꾸준히 노력하라.

    8. 모든 일을 확실히 준비하라.

    9. 몸이 건강해야 한다.

    10. 실수를 실수로 끝내지 말고 역이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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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매력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날마다 계획을 세워 살라.
    - 무기력해지지 않는다

    2. 외모를 단정히 하라.

    3. 날마다 남에게 기쁨을 줄 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라.

    4. 하루에 한가지씩 집안일을 도우라.

    5. 망설였던 일을 자신을 갖고 시도해 보라.

    6. 매일 양서를 20분만 읽으라.

    7. 제일 미운 사람이 잘 되길 기도하라.

    8. 남과 대화할때는 눈을 바라보고 잘 들어라.

    9. 실수는 남에게는 사과할 줄 알고 자신에게는 웃는 여유를 가지라.

    10. 자신을 잊어버리라.
    - 다른 일에 몰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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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자기 이미지를 새롭게 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외모와 표정을 바꾸어 보라라
    2. 지금까지 가진 불건전한 자기상을 당장 버리라.

    3. 먼저 웃고 칭찬하고 친절하라.

    4. 성공한 이들의 자서전을 읽으라.

    5. 보상을 받지 않는 봉사를 시작하라.

    6. 인생을 즐겁게 사는 사람과 사귀라.

    7. 자기 장점을 주위 사람에게 물어 보라.

    8. 외설물을 단호히 거절하라.

    9. 실패 속에서 오히려 배우라.

    10.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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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생활의 변화를 위한 10가지 충고


    1. 마음에 가득 채우라.


    - 용서하는 마음과 격려하는 마음을

    2. 자기만의 특성을 살리라.

    3.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라.
    - 그래야 마음도 건강해진다

    4. 자신이 하고 싶은 한가지 일을 찾아서 시작해 보라.

    5. 믿음의 사람이 되라.


    6. 이제는 듣는 입장이 되어 보라.

    7. 역경 앞에 태연해지라.

    8. 탐험가처럼 삶에 호기심을 가지라.

    9. 자신에게 투자하라.
    - 시간과 물질과 정열

    10. 당신은 아직 늙지 않았음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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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패배자가 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생각할 여유나 이유가 없이 그저 살아라.

    2.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고 시간만 보내라.

    3. 남이 당신에게 하는 말만 신경쓰라.

    4. 날마다 없는 것과 부족한 것만 찾고 불평하라.

    5. 어렵거나 힘들면 포기해 버리라.

    6.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하려 하지 말라.

    7.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하다고 확신하라.

    8. 나에게 기회란 지나갔다고 말하라.

    9.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

    10. 당신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이들과 사귀라.

    ... 그럼 당신은 정확

    하게 패배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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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한번 만난 상대방이라도 이름은 정확히 알고 있으라.

    2. 상대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라.

    3.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

    4.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을 포근함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라.

    5. 당신을 만나면 늘 무언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 되라.

    6. 오해를 하지 않도록 또 풀 수 있도록 하라.

    7. 사람들을 좋아하라.

    8. 축하의 말과 위로의 말을 놓치지 말라.

    9. 친구들이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라.

    10. 늘 섬기는 마음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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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 피로감을 느끼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무사안일주의로 살아라.

    2. 절대로 땀을 흘릴 정도로 움직이지 말라.

    3. 신경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만 찾아서 하라.

    4. 시간이 나는대로 의심하고 질투만 하라.

    5. 핑계거리를 찾으며 할 일을 미루라.

    6. '나는 틀렸다'라고 꿈을 포기하라.

    7. 은밀한 잘못은 계속 감추라.

    8. 소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

    9. 늘 자신만 생각하라.

    10. 보람을 느낄 일은 생각도 말라.

    ... 그럼 당신은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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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대화를 위한 10가지 충고


    1. 자세를 상대방을 향하여 듣고 있음을 나타내라.
    - 고개를 끄덕이라

    2. 간혹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라.
    -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무슨 뜻이지요? 등

    3. 상대방의 말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라.

    4. 같은 느낌으로 그의 말을 되풀이하라.

    5.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들어보라.

    6. 이야기의 맥을 끊지 말고 조용히 들으라.


    7. 논쟁하지 말라.
    - 이겨도 손해다

    8. 말을 들을땐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말라.
    - 헛 듣다가 상대를 화나게 한다

    9. 중요한 말은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라.
    - 충실히 듣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다

    10. 이야기를 들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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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30
    121-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느날 장자(莊子)가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갑자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것을 사냥하리라 마음먹은 장자는 까치를 노려보며 조심조심 다가갔습
    니다.

    활을 당기려고 보니까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눈길이
    닿는 곳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장자는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자기를 내리치려고 했기 때문
    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까치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었던 장자가 남의 밭으로 들어
    가 쑥밭을 만들어 놓았던 탓이었습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당신의 목전에 놓여있는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않는 한 당신은 살았어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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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깨어짐의 원리

    계란의 껍질이 깨어지지 않고는 병아리의 새생명이 태어날 수 없고 딱딱한 밀알
    이 땅에 떨어져 물렁물렁해지고 껍질이 깨어지지 않고는 새생명으로 나타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옥합의 딱딱한 껍질이 깨어진 후에도 향기가 온 방에 진동했고 예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절름발이 되도록 환도뼈가 부러진 후에
    (위골) (이스라엘)이란 축복을 받았습니다.

    계란의 껍질과 같고 옥합과 같은 육에 속한 사람의 고집과 교만과 아집이 깨어지
    지 않고는 새생명,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고 진정한 의미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때때로 실패나 질병의 방망이로 건강의 환도뼈, 사업의 환도뼈,
    자식의 환도뼈, 물질의 환도뼈를 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헛된 소망을 버리
    고 하나님과 만나고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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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머리칼을 잡아 끄집어내 살려주었더니 다른 사람은
    메달을 달아주며 칭찬하는데 살아난 사람은 그때 머리칼이 아파서 혼이 났다고
    두고 두고 원망하더랍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대로
    은혜를 잊기가 쉽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Springfield에 있는 위튼벌그 대학에서는 34년 전에 200달러를
    갚지 못했던 학생한테서 백만불을 기부받은 일이 있는데 그 분은 대 Power회사의
    사장인 Dr.Stanley Hanley입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 감사를 잊지 않는
    성품때문일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로새4:2)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제일 가르
    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라는 서양격언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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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구세주냐 심판주냐?

    어떤 판사가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건져주었는데 몇년 후에
    그 사람이 큰 죄를 범하고 바로 그 판사 앞에 서서 전에 살려준 것같이 살려달라고
    했으나 "전에는 살려주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네 죄를 재판하는 사람이다"라고
    냉정히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어주시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주셨으나(요한3:16) "저를 믿는 자는 심판
    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
    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7절)고 말씀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고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지금 예수를 믿으면 구세주가 되시고 아니면,심판주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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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약한 종이 한장은 새끼손가락 가지고도 찢어지지만 철판이나 나무판을 의지하고
    있으면 주먹으로 쳐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죄사함받고 구원받을 뿐 아니라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어떤 고난과 고통이라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이사야41:10"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
    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예수를 말미암치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
    갈 수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벅차고 고달픈 인생길,미칠 것만 같은 고통을 받는
    인생들이여! 예수님께 나아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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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은혜받은 자의 자족

    크로스비(Fanny J.Crosby)라는 여자는 앞 못보는 소경으로서 9,000여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등
    은혜로운 찬송시를 많이 쓴 사람으로서 식모의 부찰로 소경이 되었으나 어려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기도하는 중에 신령한
    노래를 많이 썼습니다.

    그는 아홉살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터인데,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
    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은 불평,원망 대신에 감사와 자족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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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무너진 유토피아

    20세기의 금신상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이후 인간은
    하나님없이도 인간의 이성과 자유와 과학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인본주의가 오늘날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로
    인해 절망과 공포와 고통만이 이 땅에 만연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핵무기는 전 인류를 몇 십 번씩이나 말살할 수 있는 공포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지진과 기근과 재난이 곳곳에서
    일어나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림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잃고 무섭게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라는
    금신상을 섬기는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참으로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려면 인본주의를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본주의에 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찾는 생활을 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힘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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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바람이 지나간 흔적

    어느날 우리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데 막내가 내게

    "아빠,제가 믿는 하나님
    을 볼 수 없을까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텐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막내에게 "자,고개를 들고 심호흡을 해라. 그리고
    뿜어 내라."고 말했습니다. 막내가 그대로 했습니다. "너 숨쉴 때 뭐가 들어갔니?"
    "바람이요." "숨을 내쉴 때 뭐가 나왔니?" "바람이요."

    막내의 대답을 듣고난 다음 나는 "너 바람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어떻게 아니?
    그 바람을 보았니?"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막내는 "에이 아빠,바람이 눈에 보이
    나요? 그러나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말했 습니다.
    "바로 그거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지."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영적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영체이시지만
    귀신도 영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복된 길로 이끄시지만
    귀신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길로 유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악한 귀신,더러운 귀신,사특한 귀신,점

    치는 귀신,미혹케 하는 귀신,병들게
    하는 귀신,영원한 멸망으로 이끄는 귀신과 대적하여 싸워 승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129-율법이라는 거울

    나는 일전에 한 자매님과 신앙 상담을 했는데 이 자매님이 상담을 하면서 얼마나
    울던지 얼굴의 화장이 지워질 정도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 자매님은 콤팩트를 꺼내
    들고 화장을 고쳤습니다. 울고 고치고,울고 고치고,울고 고치고... 이 자매님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 몇번이나 화장을 고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제 기도가
    끝난 다음 마지막으로 얼굴을 깨끗하게 손질하고 밝은 미소를 띠며 인사한 후 내
    집무실을 떠났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하,성도가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이와
    같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잘못된 부분을 고칩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 성도는 끊임없이
    죄를 짓고 살며,그때마다 율법의 거울을 통해 회개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고칩니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을 떠날 때까지 회개하고 고치면서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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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사랑의 실천

    슈바이처 박사는 나이 30이 되기까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음악도 했습니다.
    문학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느닷없이 멀리 아프리카의 흑인들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로 달려가 90평생 흑인들의


    고름주머니를 만져 주면서 인도주의적인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미개한 흑인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게 유익이 있을 때뿐 아니라 내게 아무런 보상이 따라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실천할때,진실한 삶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창조적인 삶은 사랑의 실천 속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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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140
    131-사랑의 양식

    1981년 정초에 미국의 해리스라는 사람은 미국 사람들에게 "새해에 당신들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여론 조사 결과 응답자 중 96%가
    행복한 가정 생활을 원한다는 통계가 나왔고, 거기에 비해서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다는 사람들은 1.8%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전인류가 바라 는 소망인 것 같습니다.

    삼중고(三重苦)의 인생을 살았던 헬렌 켈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인생
    에게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눈을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볼 줄 모르
    고 귀를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들을 줄 모르며 입을 가지고 있으되 제대로 말할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정이 있으되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줄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사랑의 양식을 먹고 자라난 아이들은 좋은 성격으로 훌륭
    한 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애정과 형제간의 사랑을 주고 받을 줄
    모르고 자란 자녀들은 불건전한 인격자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 있다면,그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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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한알의 밀

    미국 어느 지방의 철도 연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느날 한 소년이 철길을 따라 학교에 가다가 간밤에 내린 폭우로 철도가 끊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기차
    가 지나갈 시간이었기 때문 입니다. 소년은 기차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수백 명이
    희생당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멈추게 할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지나갈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자기의 셔츠를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책가방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넙적다리를 찔렀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피로 흰 셔츠를 물들였습니다. 소년은 피를
    흘리면서,피로 빨갛게 물든 셔츠를 흔들며 기차가 달려오

    는 쪽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스톱!" "스톱!" "스톱!"

    기관사가 붉은 깃발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차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기차는
    다행히 소년 앞에서 멈출 수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뛰어내려와 보니 철도는 끊어져
    있었습니다. 기관사는,기차를 세우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린 소년을 부축해 보았지만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갑자기 정지하자 '무슨 일인가?'하고 기차에서 내려왔던 승객들은 사실을
    알고는 기관사와 함께 그 소년을 부둥켜 안고 '소년의 피로 우리가 살았구나!'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그 기차 속에는 미국의 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소년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가지고 다니던 책가방에는 신약성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성서의 말씀인 '한 알의 밀'의 삶을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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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기쁨을 잃어버린 시대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이 한번은 텔레비젼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자유를 보장받을 때 과연 기쁨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기쁨을 잃어
    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진실한 기쁨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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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하늘나라의 상속자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당신 자신이 평화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
    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선한 일도 악으로 만들
    며 쉽사리 악한 일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선하고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은
    모든 일을 선하게 합니다.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운 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나쁘게
    생각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불만이 많고 걱정을 가진 사람은 많은
    의혹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안정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정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종종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나,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에 대해서 참견하기 전에 당신 스스로 열심을
    내어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이웃에 대해서도 적합한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또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에 평화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인내하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크나큰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이고,세계를 정복한 주인입니다. 그리고 그리
    스도의 친구요,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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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관용의 마음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빈치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가롯 유다를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가롯 유다를 삼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자기가 미워하여
    가롯 유다로 그린 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서 그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내가 실상은 당신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렸는데,나머지 그림이 그려지지를 않아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왔소."
    그러면서 친구에게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할 때는 위대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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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겸손을 통한 평화

    어느 나라에 정원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풀,꽃 하나 하나를 정성으로 가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왕이 아침에 정원을 나가 보니 모든 나무들이 시들어 있는 것이
    었습니다. 왕은 문 옆에 서 있는 떡갈나무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떡갈나무야, 무슨 일이 있었니? 도대체 왜 다들 시들어 있지?"
    "나무들이 서로 자기가 다른 나무보다 못하다고 실망하고 있어요. 소나무는
    자신이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포도나무는 복숭아나무처럼

    똑바로 서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낙담하고 있습니다. 또 제라니움은 라일락
    처럼 날씬하지도 못하고,향기도 없다고 불평입니다."

    그런데 모두 시들어 있는 중에도 유독 생기있고 아름다운 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꽃은 바로 팬지(Heart-peace)였습니다. 왕은 그 꽃에게 물었습니다.
    "팬지(마음의 평화)야, 다들 슬픔속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데 너는 작은 꽃이
    지만 꿋꿋하게 자라는 것을 보니 짐의 마음이 매우 기쁘구나!"
    "네,고맙습니다. 저는 원래 볼품이 없는 꽃이잖아요, 하지만 왕께서 떡갈나무
    나 소나무나 복숭아나무 혹은 라일락을 원하셨다면 저를 뽑아 버리고 그들을
    심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왕께서 저를 심으신 것은 저를 보시면서 마음
    에 평화를 느끼기 위함이란 것도 알지요. 그래서 저는 왕께서 저를 보시면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시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왕은 이후로 더욱 팬지꽃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이 우화의 교훈처럼 겸손한 사람은 어떤 외부적

    인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
    의 평화를 지켜갑니다. 또 이웃에게 평화의 마음을 전해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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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성공을 위한 태도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성공의 요인으로 첫째는 지능이 높아야 하며, 둘째는 지식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기술이 좋아야 하며, 넷째는 태도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성공적인 삶에 대하여 적어도 93%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간 수로보니게 여

    인은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지혜로운 대답으로 결국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태도가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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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포기하지 마라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않고 옛날 자신이
    다니던 작은 교회 옆에 있는 묘지에 묻혔습니다.

    1943년 전시 내각을 수립하고 독일 비행기가 하루에 1천여 대씩 런던을 폭격할
    때,그는 하루에 18시간씩 근무를 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쟁중
    에 B

    BC 방송을 통해서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땀과 피와
    눈물밖에 바칠 것이 없다.'라고 전영국군에게 호소하자,그 방송을 들은 영국군은
    3일밖에 먹을 수 없었던 양식을 가지고 보름이나 견디면서 싸워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처칠 경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영문학에 낙제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쓰고 나서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가 은퇴한 후에 한번은 그의 모교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칠 경은
    지팡이를 짚고서 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대선
    배이신 처칠 경이 말씀하실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받아 쓰라."고 했습니
    다.

    처칠 경은 지팡이를 짚고 강단에 서서 두꺼운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한참 동안
    응시하더니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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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앞을 바라보라

    토마스 칼라일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그의 방대한 원고를 끝냈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 원고를 존 스튜어트 밀에게 읽어보라고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창백한 얼굴로 칼라일의 집에 찾아온 밀은 하녀가 그 원고를
    그만 불쏘시개로 사용했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칼라일은 그 소리를 듣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2년
    동안의 노고가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원고를 다시 써야겠다는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방대한 원고를 다시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날 칼라일은 거리를 걷다가 석공이 길고 높은 벽을 쌓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작업 관경을 지켜 보던 칼라일에게는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석공은 한번에 한 장씩 돌을 쌓아 갔습니다. 그는 그 때의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들이며 결심했습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써 가자.
    내일은 다음 페이지를,모레는 그 다음 페이지를... 좋다! 그렇게 하자."

    그는 천천히, 조금씩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굉장히 지루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계속했고,마침내 그 원고를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완성된 원고는 첫번째의 것보다 더욱 훌륭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쁜 기억이나 불행한 사건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동차 백밀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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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목표가 있는 삶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디트로이트
    로 가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회사의 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점점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한번은 에디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하겠
    다고 했습니다.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디슨
    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자동차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3년이 지났으나 실패했습니다. 다시 5년,6년이 지났으나 또
    실패했습니다. 7년,8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13년만에
    헨리 포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실패의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
    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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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150
    141-중단없는 전진

    실패의 연속이 결국은 성공으로 바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832년에 그는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1833년에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836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도 그 해에 신경성 질환


    으로 고생했습니다. 1844년에는 국회 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1849년에
    토지 등기소 직원으로 취직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856년에는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습니다. 또 부통령 지명전에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860년,
    그는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시민전쟁으로 북군에게 배척받고 남군에게는 원망을 사는 가운데 대통령직
    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모든 결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무실에
    따로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직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는 자객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미국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성공적인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보장받을 수 없는 광야의 행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
    해야 합니다. 약속의 소망을 따라 게으르지 말고,포기하지 말고,끝없이,중단없는
    전진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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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정상에 이르는 인내

    남극 탐험대에 캡틴 스카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영하 50-60도의 추위에서
    남극에 같이 갔던 동료 탐험가들이 낙심하자,"전진하자!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자"
    고 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드디어 성공적인 탐험으로 공적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
    습니다.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향해 항해할 때에 선원들은 모두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둥글고 신대륙이 어떻고 하는 콜룸부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실망하
    고 낙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항해하라고 용기있게 끝까지 밀고 나간
    콜룸부스는 마침내 미대륙을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소망의 정상에 도달하게 도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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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하루에 한줄씩

    리키만 그리브스의 일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잭슨 부인은 뜨개질을 퍽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시력이 무척 나빠 뜨개질을 시작하기만 하면 눈이 쑤시고 아파서 뜨개질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입고 있는 거의 모든
    옷을 그녀가 손수 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하루에 한줄씩 짜지요. 제가 실컷 짜 보았자 한 줄이랍니다.
    하지만 하루에 한줄씩 짜도 1년이면 옷을 한벌 지을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일은 너무 하찮아서 전혀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혹 시작했다 하더라도 곧 단념해 버립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잭슨 부인처럼 끈질기게 참는다면 언젠
    가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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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참고 나아가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간호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원래 이태리 사람입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 문화적인 교육을 받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는 그 딸에게
    좋은 가정을 갖도록 행복한 결혼을 권유했지만, 나이팅게일은 다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31세때 허무감에 젖어 일기를 썼는데 '살아갈 의욕이 없다. 텅 빈 공허감...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공허 속에서 31세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간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
    다.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 젊은 여인은 전쟁터를 찾아갔습니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전상자들을 붕대로 싸매 주고 닦아 주고 사랑하면서 3년 동안 그들을
    도왔습니다. 외로운 군인들은 나이팅게일만 지나가게 되면 마치 예수님이 지나가시
    는 것처럼 인사하고 경배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희생을 거쳐서 그는 현대 간호학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그 후 병원마다
    간호원이 없어서는 안되도록 제도화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시체를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에겐
    그런 자격이 없으니 자기의 가족 묘지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31세
    때 더 나아갈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였지만 새로운 가능성과
    전진의 의미를 찾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어 나갈 때에 결국은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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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원수를 향한 관용

    미국의 남북전쟁때 에드윈 스탠톤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
    령의 정적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향해서 고릴라 같은 사람,원숭이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했습
    니다. 그는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 "고릴라를 대통령으로 세워 놓으려면 아
    프리카에 가서 고릴라를 잡아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링컨 대통령을 정면으
    로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후일 링컨 대통령은 자기를 고릴라라고 비웃고 욕하던 정적 스탠톤을 데려다가
    자기의 비서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관용을 베풀어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링컨이 죽은 다음 스탠톤은 링컨 대통령을 가리켜 "세계에서 다시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배했던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에게까지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

    주는 자의 멋


    이상재 선생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상재 선생님께서 늦도록 책을 읽는데,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은 이 방 저 방 다니며 물건을 훔쳐 한 보따리 싸들고 드디어 선생님이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이 때에 깜짝 놀란 도둑에게 이상재 선생님은 여유있게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안절부절 못하는 도둑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염려말고 가져 가라고 하셨습니다.

    도둑은 얼떨결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그만 순경에게 붙들렸습니다.
    순경은 도둑을 끌고 다시 선생님 댁으로 와서 도둑을 잡았으니 물건을 도로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가라고 주었는데 어찌 그가 도둑이오?
    우리 집에 온 손님이오."라고 태연히 말씀하셨다는 일화입니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은 확실히 다릅니다.
    언제나 주는 자는 멋이 있습니다.
    안 주겠다고 움켜 쥐는 자에게는 빼앗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자가 곁에 있기에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자비의 열매

    일제 시대 때 황해도 운률에 이찬영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큰 부자로 일년 농사를 지으면,특별히 마련한 십일조를 창고에 가득 넣어 두고 교회 살림을 하며 또 학교를 도와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집안에 잔칫날이 되면 먼저 큰 잔치를 베푸는데,그 잔치는 황해도 거지들을 다 초청하여 여는 잔치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뿐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거지들까지 몰려와 잔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은 "가난한 장사꾼의 물건값은 절대로 깎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항상 당부할 만큼 선한 분이었습니다.
    그곳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과수원도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내일이면 과수원이 공산당에게 넘어가는 그 전날에도 하루 종일 과수원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수고를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내일이면 남의 과수원이 될텐데 무엇하러 그렇게 수고하십니까?"하고 물으니까?
    이찬영 장로님은 "누구인들 이 과실들을 먹을게 아니요?
    나는 오늘 이 과수들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148-용서의 삶

    김구 선생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때에 일본인 헌병이 한국 청년을 매수해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붙잡
    혔고,사람들은 청년을 처형하기 직전에 김구 선생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을 암살하려던 청년을 붙잡았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김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이 청년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을 붙들고서 "내
    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니 실로 감격스럽다."고 했
    습니다.

    자기를 암살하려고 권총을 들었던 그 청년을 부둥켜안고서 기뻐하자 이 청년은
    이러한 김구 선생의 인품에 감동이 되어 독립군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하며 헌신했
    습니다.

    오늘 우리는 남에게 관용을 베풀면 관용을 베푼 만큼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관용은 완악한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
    다.
    ==========
    149-사랑을 통한 축복

    인도의 성자인 선다싱이라는 분이 있는데,그 분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
    다.

    눈이 잔뜩 덮힌 히말라야 산 건너편에 있는 사원에 가기 위하여 어느 나그네가
    추운 겨울날 눈보라를 헤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눈 속에 쓰러
    져 동사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어물어물하다가는 자기도 얼어 죽겠다
    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후 그 길을 또 한 사람의 나그네가 가다가 거의 얼어 죽게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내가 구해야 되겠구나.'하고 생각하고는 그를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 너머 사원까지 갔습니다. 그 사람은 힘이 들어 땀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가면서
    지나쳤던 사람이 얼어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지나쳐 간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업고 가던 사람은 그를 업었던
    탓으로 힘을 쏟아 그 자신의 체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등에 업힌 사람까지 살려
    내어 결국 두 사람의 주고 받은 체온 덕택에 둘 다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것이 기독교 사랑의 실천윤리입니다.

    ==========
    150-주어라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나누어 줄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남에게 줄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풍요한 사람입니다.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담임선생님이 "가난한 어린이에게 인형을 나누어 줄테니
    집에서 인형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이가 집에 와서 자기 인형들을 눕혀
    놓고 유치원에 가져 갈 인형을 골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낡은 인형은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인형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의 옷을 갈아
    입히고 벽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재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어린이는 섭섭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너 왜 우느냐?"고 물었
    습니다. 이 아이는 제일 좋은 인형을 남에게 주려고 하니까 섭섭해서 운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괜찮아.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거야."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인형을 갖다가 가난한 어린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는 시중에서 제일 좋은
    인형을 사다가 그 어린 이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 나누어 주는 우리가 될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축
    복이 되는 것이며,오늘의 이 결단이 내일의 축복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
    151-160
    151-약속된 기도시간

    미국 하워드 장군은 신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가 서부 해안 지구 사령
    관을

    맡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수요일 저녁에 그의 영전을 축하하는 환송 만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초대장을 보냈고 대통령까지 축하 전문을 보내
    왔습니다.

    그들은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모든 준비를 다 끝내 놓고 맨 마지막에 그
    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난 후 그들은 장군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선약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사실은 수요일 밤에 다른 약속을 미리 해두었네."
    "하지만 이 사람아, 이 날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할테니 다른
    약속을 취소하게."
    "나는 기독교인이며 교회 신도중 한 사람이네. 내가 교회와 일체가 되었을때
    수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는 꼭 주님을 만나겠다고 약속했다네. 세상에서 이만큼
    중요한 약속을 깨뜨리게 할 자는 없네."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은 만찬회를 하루 연기하여 목요일 밤에 개최했습니다. 그런
    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장군을 존경하였습니다. 하나
    님 앞에서 신실한 그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기도의
    비밀을 알았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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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이해와 용서

    나폴레옹은 온유한 면을 지녔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불란서의 유명한 장군으로, 구라파를 점령하고는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
    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막을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한 보초막에 갔
    더니 사병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총을 보초막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그 사병을 깨워 징계하지 않았습니
    다. 나폴레옹이 손수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

    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고 용서
    를 구하게 될 때에 나폴레옹은 "그래,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지. 내가 대신 보초
    를 서 줄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용납합시다. 그리고 이해합시다. 성령과 함께 하시는 온유한 자로
    진실한 이해와 용서를 삶 속에서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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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온유의 능력

    옛날 국민학교 교과서에 이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바람과 해가 어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바람이
    나섰습니다. 그가 아무리 센 바람을 불게 했어도 바람은 그 사람의 외투를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이 세차면 세찰수록 그 사람은 더욱 외투를 여몄습니다. 그


    다음에는 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해는 구름을 벗기고 따뜻한 햇볕을 내리쬐었습
    니다. 외투를 입고 가던 사람은 "웬 날씨가 이리 변덕이야."하며 외투를 벗고 말았
    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유의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정복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
    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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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위대한 승리

    10월 22일 미국 뉴욕은 "마라톤 일요일"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온 거리가 술렁
    이는 마라톤 대회가 벌어졌습니다. 이튿날 ABC 방송은 뉴욕 마라톤에 참가한 한 여
    성과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냈습니다.



    가정주부이며 아기 엄마인 이 여성은 26마일의 코스를 쉬지 않고 끝까지 달렸습
    니다. 등수나 기록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랑과 영광은 마라톤
    코스를 끝까지 달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날은 나에게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이긴다는 것은 꼭 남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린다는 뜻의 어휘는 아닙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이 가정주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긴 것입니다. 그녀는 고통과
    목마름을 참으며 경기를 중단하고 싶은 유혹을 끝까지 견뎌냈습니다. 경쟁심을
    이겨내고 아이들의 조롱을 견디었습니다. 자기의 결심을 관철하고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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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안식일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 많은 사람이 금을 캐기 위하여 캘리포니아로 몰려 들었습
    니다. 그들은 더 많은 금을 빨리 캐기 위해서 휴식도 없이 서부로 달렸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에 말들이 지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도 점차 병이 들어 전진속도가 줄어들면서 결국은 목적지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
    다.

    그 후 청교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데 주일이 되면 푹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쉬면서 나아갔기에 끝내 개척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일도 없이 일만 하면 되는 줄로 알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은 무거
    운 짐을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거룩한 성일을
    지킬 줄 알아야 하며, 진리에 순종할때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은 달려가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쉬어야 할 때 쉴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제도중 가장 완벽한 것은 안식


    일 제도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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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불확실한 내일

    어떤 역사가가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가져온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는 군사혁명을 일으켜 16년 동안 장기집권을 한 것이요, 둘째로는 군인
    출신의 통치자로서 경제적 발전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요, 셋째로는 집권중에 최고
    집권자 내외가 나라 안에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것인데 그러한 일은 역사에
    보기 드문 경우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을때 박 대통령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박 대통령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카터 대통령의 친구
    가 박 대통령에게 목사를 보내서 신앙 상담을 하도록 계획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간에 박 대통령이 서거하는 비극

    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누가 그 분이 그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아침 안개와 같지 아니하냐?" 우리는 인간 역사의 현장
    에서 이러한 엄숙한 사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지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
    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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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포치아는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
    고 동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내던 어느날 카포치아에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
    습니다. 하루는 조각을 위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채석장

    에 갔습니다. 그런데
    인부가 부족하여 카포치아 자신이 직접 채석장에 나가 작업을 지휘하고 인부들과
    함께 돌을 나르며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커다란 돌이 카프치아의 오른손 위로
    떨어진 것입니다.

    겨우 돌을 들어내고 그를 꺼냈지만 이미 그의 오른손은 완전히 문드러져 버렸습
    니다. 유명한 의사들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조각가
    로서의 그의 인생은 끝이 난 것입니다. 카포치아뿐 아니라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
    의 실망은 여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현실을 원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른팔을 포기하고 왼팔
    로 조각하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번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땀을 흘리며 운명과 싸웠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작품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른
    팔로 하던 조각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민들은 그 작품을
    마을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작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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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고난뒤의 새로움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어느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
    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
    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
    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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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끈질긴 기도

    유명했던 권투선수인 조 프레이저는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당시 준결승에서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 부러졌습니다. 그는 호텔에 돌아와
    부러진 손가락을 붙잡고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아픈 손에 글러브를 끼고 열심히 싸워 상대방을 뉘어 KO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금메달을 딴


    것은 내 목표를 세워 놓고 끈질기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는 은퇴하고 훌륭한 전도사가 되어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
    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어렵고 힘든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같은 상황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끈질긴 기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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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합심기도

    여러 해 전 달나라를 향하여 아폴로 13호를 쏘아 올릴 때에 미국의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아폴로 13호는 현대 과학의 걸작품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완벽합니다. 이것이 고장날 확률은 백만분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확신 속에 아폴로 13호는 달나라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2만 마일을 벗어나지 못한 지역에서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산소통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돌아올 방법도 막막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국 텍사스 휴스톤에 있는
    우주 지휘소에 비상연락을 취하고 회신을 기다릴 수 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휴스톤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2만 마일이나 떨어진 우주선으
    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주 지휘소에서는 다만 북극성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서
    돌아오라고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우주의 미아
    가 될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에 미국의 대통령은 전국민에게 함께 아침 9시에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군인도, 어린이도, 온 국민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폴로 13호가 무사히 태평양에 떨어진 것입니다. 구조된
    우주 비행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
    니다.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그 주간 타임지 표지로 크게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우주 비행사 중의 한 사람인 스위저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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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170
    161-고통스러운 기도

    화가 알베르트와 그의 친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화가 지망생들이었지만 너무나 가난하여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
    다. 알베르트와 그의 친구는 오랫동안 궁리한 끝에 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
    이 먼저 그림 공부를 하고, 그동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벌어서 그림 공부를 하는
    친구를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알베르트가 먼저 그림 공부를 하기로 하고, 친구는 잠시 그림을 뒤로 하고 일터
    로 나갔습니다. 한 친구는 열심히 일을 해서 알베르트의 학비를 도왔고,알베르트는
    열심히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알베르트는 이름있는 화가로 성장했습니다. 이제
    알베르트의 친구가 공부해야 할 차례입니다. "이제 자네 차례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내 그림이 이제는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으니 돈 걱정은 말고 그림 공부
    에 전념하게."
    친구는 기쁜 마음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실망과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일만 해왔
    기 때문에 손이 굳어져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이제 쓸모없이 되어버린 것입니
    다. 그는 실망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친구도 원망하였지만, 결국 그는 신앙으
    로 슬픔을 이기고 하나님께 오히려 그의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알베르트는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친구의 화실에 들어가
    려 할 때, 화실 안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흐느끼면서
    자신의 현실을 안타깝게 하나님께 호소하며,그러나 알베르

    트를 용서하고 오히려 알
    베르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알베르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문 틈으로 보이던 친구의 거친 손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
    니다. 그 그림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알베르트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 기도하는 손의 주인공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162-아이디어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지대에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인 나이애가라 폭포가 있습니
    다. 1856년에 그 폭포 위로 거대한 다리를 놓을 계획을 세우고 폭포 옆에 높은 탑
    을 쌓았는데,그 사이를 지나는 굵은 쇠줄을 이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건축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근방에 사는 많은 소년을 모아서 연날리기 시합을 벌였습니다. 그
    소년들 중에 11세 난 호머 윌스라는 아이가 날린 연이 마침내 저 건너편 캐나다의
    언덕에 떨어졌습니다. 그 소년은 1등을 한 덕분에 상금 10불을 탔습니다. 그때에


    건축기사들은 가느다란 연줄에 좀 더 굵은 줄을 연결시켜서 옮겼습니다. 그 다음에
    는 더 굵은 밧줄을 연결시켰고, 그 다음에는 쇠줄을 연결했습니다. 그 쇠줄을 기반
    으로 해서 다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연을 가지고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뒤에 샌프란시스코 항에 바다를 가로 지르는 금문교
    라는 다리를 건설할때도 연을 날리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샌프란
    시스코의 명물인 금문교를 지나가노라면 길가에 11세 난 소년 호머 윌스가 연을
    들고 서 있는 기념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하늘의 지혜를
    소유할때 가능합니다.
    ==========
    163-훈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와 같이 훈련시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벼랑에 집을 짓고 새끼를 깝니다. 새끼가 날아다니려고 할 때쯤


    되면 어미는 둥지를 다 흩어버립니다. 그리고 새끼 독수리가 낭떠러지 밑으로 푸드
    득거리며 날려고 할때에 어미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새끼가 벼랑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쏜살같이 내려가 새끼를 어깨 위에 얹고서 다시 벼랑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곤 또다시 새끼를 내던져서 날게 하고, 떨어지려 하면 어깨에 얹고 올라옵니
    다. 이렇게 반복해서 시련을 당하게 하고 난관을 극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작
    은 독수리가 날짐승의 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독수리가 된다는 것은 결
    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부단한 훈련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
    164-작은 문제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옛날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장수가 지휘하는 큰 군대가 적에
    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적보다 훌륭한 지휘관과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싸움에
    패한 원인이 무엇인가 살펴보았더니,그 군대를 지휘하던 장수의 말 편자의 못이
    하나 빠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작은 일은 무시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무관심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큰 실패를 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한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기록으로 우승을 하였는데,당신이 달리는 동안 가장 아려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신발 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였습니다."

    우리의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는 많은 요인들도 단순하고 작은 이유들입니다.
    우리가 작은 문제에 소홀히해서는 행복을 쉽게 잃어버리게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165-순종하는 마음

    어린이들에게는 순종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는 순수성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순결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배운
    대로 실천합니다.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게 된 어느 소년이 수술대에 누워서 주먹을 움켜쥐고 땀을
    흘리며 참아서 그 수술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담당한 의사가 너무
    기특해서 "너 참 용감하

    구나."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 소년의 꽉 움켜쥔 손에는 조그만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
    다. 그 종이에는 "보이스카웃은 용감하다"라는 글이 써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보이스카웃이었고, 그 쪽지를 움켜 쥐고 대수술을 용감하게 참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겸손과 신뢰와 순종의 태도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순수하고 결백한 마음을 배울 때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66-진리를 간구하는 삶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순례의 길을 걸오온 한 젊은이가 수도자를 만났습니
    다. 젊은이는 수도자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
    니다. 수도자는 젊은이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더니 갑자기 물 속으로 밀어 넣

    는 것
    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에서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도자는 계속 이 젊은이를 물 속
    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젊은이가 허우적 거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수도자는 그를 끌어내놓고 물었습니다.

    "물 속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숨 쉬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진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갈급하게 노력해 보았는가? 진리는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자만이 얻게 되는 것이라네."
    ==========
    167-기회

    영국의 에

    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 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버럭 화를 내며 "식사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 하며 소
    리를 쳤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었어요."
    ==========
    168-신앙의 진리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은 일년 내내 세계의 피서객들이 모여서 해수욕을 하는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그런데 하와이 해변가에서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하면서 수영을 즐기다 보면
    모래밭에 귀중품들을 떨어뜨려 잃어 버리곤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난 다음에 금속 탐지기를 가지고 그 모래 사장 위를 왔다
    갔다하면 그 속에 감춰졌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발견되고 롤렉스 시계가 발견이 됩
    니다. 그건 찾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주인이 없습니다.



    신앙도 보화와 같이 찾는 자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도 구하는
    자만 얻지 우연히 잠을 자다 보니까 찾아지거나 솟아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구하고 찾을 때 발견됩니다.
    ==========
    169-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
    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그
    릇을 가져 오라고 했고 그 빈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

    170- 윤리적인 인간과 기독교적인 인간


    레온 사울이라는 정신과의사는 <정서적 성숙>이라는 책에서 성숙한 인간의 8가지
    조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독립적이며 책임질줄 아는 사람,
    둘째로 남에게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
    셋째로 협력할줄 아는 사회적 성품을 가진 사람,
    넷째로 자기 양심과 조화하며 느낌과 행동을 조정할줄 아는 사람,
    다섯째로 성(性)을 건실하게 생각하며 잘 조화할 수 있는 사람,
    여섯째로 분노와 적개심을 잘 조정할 줄 아는 사람,
    일곱째로 현실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융통성과 적응성이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외에 한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통하여 8가지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적 인간과 성숙한 기독교적 인간과의 차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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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180
    171-생각의 힘

    한 청년이 알프스 산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준비해간 물이 떨어져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알프스 계곡 사이에 있는 맑고 깨끗한 호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단숨에 물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몹시 시원한 물이었습니다.

    물을 실컷 마시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그는 "포이즌(poison)"이라고 쓴 경고판을
    보았습니다. 이 물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 청년의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그는 심한 구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떨
    리고 얼굴은 창백해졌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계시판을 잘못 보았군요
    그것은 '포이즌(poison)'이라고 쓴 것이 아니고 '포이존(poissun): 낚시금지)'이라
    고 쓴 것입니다.

    이 청년은 '포이존'을 '포이즌'으로 잘못보고 야단법석을 떤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청년은 열이 내리고 구토도 멈추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생각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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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마음의 만족

    텍사스 휴스톤의 알렌 박사는 마음에 만족을 가져오는 다섯 단계를 이렇게 이야
    기 했습니다.


    첫째로,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는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
    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탐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적은 소득이라도 조금씩 저축해 가며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축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꿈과 모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만족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최선을 다하면 항상

    길이 열리는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면 거기에 길이 열릴 뿐만 아니라
    시련과 역경이 도리어 축복으로 변해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렌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족이라는 것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자세에 따라서 만족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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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감사의 조건

    미국의 어떤 부흥사가 집회 장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어느 뚱뚱한 흑인
    여자가 아이를 다섯이나 데리고 옆에 앉더랍니다.

    이 흑인 여자가 아이들과 함께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자기는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이럴 경우는 무슨


    감사를 드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잠시후 그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고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옆의 이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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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시간절약

    미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거물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필라델피아에서 책가게를
    경영하고 있었을때, 어떤 젊은 사람이 책을 사러 들어와 그 값을 물었습니다.
    프랭클린이 얼마라고 말하였더니,좀 깎을 수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프랭클린이
    얼마라고 말하였더니,좀 깎을 수가 없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런 법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님은 계속 졸랐습니다. 그랬더니 프랭클린은 그 책값을
    낮추지 않고 오히려 올렸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손님에게 당신이 내 귀한 시간을
    자꾸만 뺏어가니 불가불 책값을 올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며,더 끌면 더 올리
    겠다고 하므로 그 손님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프랭클린이 부르는 값을 그대로
    주고 그 책을 사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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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의 댓가

    어느 부자가 섣달 그믐날에 종들을 불러놓고 볏짚 한 단씩 주며 새끼를 꼬라고 했습니다.
    새끼를 꼬되 새끼 손가락보다 가늘게 꼬라고 했습니다.
    종들은 투덜거렸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주인이지만 섣달 그믐날까지 이렇게 새끼를 꼬라고 할게 뭐람?
    그것도 굵은 새끼가 아니라 손가락보다도 더 가늘게 꼬라고 하니 밤새도록 꼬아도 이 볏짚을 어떻게 다 꼴 수 있담?"

    어느 종은 새끼를 꼬다 말다 하는가 하면, 어느 종은 손가락의 몇배나 굵게 꼬아서 빨리 볏짚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 충성스러운 종은 아무 불평없이 주인이 꼬라는 대로 가느다랗게 그리고 보기좋게 꼬았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이 요리 조리 요령을 부려 일찍 끝내고 자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혼자서 밤새도록 새끼 를 꼬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커다란 주머니를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모두들 들어라. 작년 한 해는 다 나를 위하여 너무나 수고가 많았다.
    이제 너희들이 꼰 새끼줄로 이 엽전을 마음껏 끼워 가져 가거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 가도록 하라.
    단 새끼줄에 끼워 가는 것에 한한다."

    이 말을 들은 종들은 당황했습니다.
    자기들이 꼰 새끼로는 돈을 끼워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후회가 막급하였으나 이제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하라는 대로 충직하게 밤새도록 가느다랗게 새끼를 꼰 종은 그가 충성스럽게 한만큼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 있어서 마침내 종살이를 면했다고 합니
    다.


    닮아가는 생활

    소크라테스에게는 다정한 친구 게알리스바디아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소크라테스만 만나면 "나는 너를 싫어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를 만나기만 하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거울 앞에서 처럼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주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소크라테스의 인격 앞에 드러남으로 부끄러워했지만,
    이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삶을 살아갈때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그와 함께 하려는 노력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시간절약을 위한 10가지 충고(1)

    1. 무가치한 일에는 거절할 용기를 가져라(거절하는 이유를 말하라)
    2. 시간에 우선 순위를 정하여 사용하라.
    3. 가장 중요한 사항에 총집중하라.
    4. 자신의 어떤 행동과 습관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지 살펴보라.
    5. 능률이 오르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휴식하라.
    6. 자신의 물건을 활용하기 좋게 구별 정리하라.
    7.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두고 그 성취도를 확인해 가라.
    8.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간단한 책을 읽으라 (문고판, 가벼운 책)
    9. 사소한 일은 모아서 처리하든지 미루라.
    10. 24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1주일만 자세히 기록해 보라 (30분 단위로)


    최고급 인생을 위한 10가지 충고(2)


    1. 최고급 법칙 - 황금률
    2. 최고급 교육 - 자각
    3. 최고급 철학 - 만족한 마음
    4. 최고급 음악 - 아이의 웃음
    5. 최고급 약 - 명랑성과 절제
    6. 최고급 전쟁 - 자기 약점과의 싸움
    7. 최고급 과학 - 구름이 낀 날 햇빛을 찾아내는 것
    8. 최고급 전기 - 우울한 가슴에 햇빛을 비춰주는 것
    9. 최고급 전신술 - 가장 긴 편지들 속에 담겨있는 사랑이야기
    10. 최고급 음식 - 배고픔

     
    새로운 삶을 위한 십계명(10가지 방법)

    1.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
    2. 자신의 입술을 조심하라.
    3. 행동은 최선의 동기에 따르라.
    4. 적게 말하고 듣는 입장에 서라.
    5.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
    6.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
    7. 타인을 판단하지 말라.
    8. 한시간 이상 독서시간을 가지라.
    9.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10. 맡겨진 것에는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어느 신학교 학년말 시험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철야 기도만 하는 신학도에게 교수가 공부 좀 하라고 타일렀더니 교수의 말은 듣지 않고 기도만 했다고 한다.
    그 신학도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10)는 말씀만 철석같이 믿고 밤새 기도하고 난 다음 그 다음날 드디어 시험에 임했다.

    앞에 놓여진 시험 문제의 답을 모르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단 한 문장만 써놓고 유유히 교실을 빠져 나갔다고 한다.
    시험지를 보고 기가 막힌 담당 교수는 그 답안지에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학생은 다 모르니 0점"이라 채점하여 그 학생은 결국 낙제를 하였다고 한다.

    요즈음도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면서 사는 게으른 교인들이 많이 있다.
    게을러 가난하면서도 하나님은 부자라 하여 만족해 하거나 또 인색하여 헌금은 안하면서도 하나님은 내 사정을 잘 아신다고 하며 위로를 받거나 또 세상일에 골몰해서 주일을 잘 지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내 바쁜 형편을 다 아실 것이라는 터무니 없이 왜곡된 사고로 편리하게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오늘 그의 생각을 고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내가 노력안하는 것 까지도 정말 하나님은 다 아신다."

    누가 더 잘 알고 있을까요?

    젊은 자동차 정비사가 헌차를 한대 싸게 샀다. 거의 굴러가지 않을 정도의 고물차를 열심히 수리해서 타고 달리니 기분도 좋았고 자기의 기술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루는 그 차를 운전하여 약간의 장거리를 여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중에 엔진 이 털털 거리더니 딱 멎어 버렸다. 젊은이는 차에서 내려서 엔진의 뚜껑을 열고 고장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지나던 차 한대가 옆에 대고 정차하더니 노인 한 사람이 내려와 젊은 정비사의 곁에 와서 엔진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청년 정비사는 그 노인을 바라보고 "문제 없습니다. 그냥 가세요. 나는 정비사 이니까요."라고 하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기 저기를 찾아 만져 보았다.
    그러나 고장을 고치지 못하고 발동은 여전히 안 걸렸다.
    그때까지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주지."
    그러면서 손가락 한개로 엔진의 한 부분을 톡, 친후 "자, 발동을 걸어 보시요." 라고 했다.
    의심쩍은 얼굴로 청년이 발동을 걸어보니 엔진이 붕,붕 하며 잘 돌아간다.
    기가 막혀진 정비사 청년은 그 노인을 향하여 의아스러운 눈으로 물어보았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대답했다.
    "네. 나는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입니다."

    새에게 주신 날개

    유대인의 창조 설화로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이 처음 새나 짐승을 만들었을 때에 새에게는 아직 날개가 없었다.
    하루는 새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무기가 없다고 호소하였다.

    "뱀은 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자에게는 이빨이 있고, 말에게는 말굽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지키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은 새의 호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새에게 깃털과 날개를 달아주셨다.
    그런 뒤에 얼마 있다가 또다시 새가 찾아와 호소를 하였다.
    "하나님, 날개란 오히려 짐이 될 뿐입니다.
    날개를 몸에 달고 있기 때문에 그전처럼 빨리 달릴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리석은 새여, 너의 몸에 달려있는 날개를 사용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라. 너에게 두개의 날개를 준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을 지고
    걷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날개를 써서 하늘을 높이 날아가 적으로부터 피하라고
    달아준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주가 인간에게 주신 것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머리의 뇌세포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자기
    뇌의 1/10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격적인 사귐과 대화

    하나님은 대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언어를 주셨다. 대화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또 우리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누구나 말만 하고 싶어하는데 있다.
    들을 때에도 그가 말한 것을 반박하려고 듣는다. 그리고 말할 때에도 자기의 느낀
    것을 남이 느낀 것으로 말하려는 것 때문에 대화는 있되 진정한 사귐이 없는 불신
    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주님이 그 본을
    보여주고 있으시다. 그래서 우리도 들어야 한다. 듣는 데도 인격적인 자세가 있어
    야 한다.

    1. 귀로 들어야 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이다.

    2. 눈으로 들어야 한다. 눈으로 안들으면 그 사람의 본의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하는 표정과 눈짓, 얼굴의 근육을 보아야 한다.

    3. 머리로 들어야 한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또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가면서 들어야 한다.

    4. 입으로 들어야 한다. 어떻게 입으로 듣는가? 그것은 들으면서 대답해 주는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 그래서 말하는 자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서 입으로 들어야 한다.

    5. 마지막으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귀로만, 눈으로만, 머리로만 들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의 느낌을 이해해야 한다. 그 말 속에 들어있는 숨어있는
    감정을 들어야 한다. 즉 그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서 들어야 한다. 그럴때
    그 사람은 진짜로 알아 들은 것이다.

    말하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입으로 말만하고 또
    귀로만 듣고 다시 입으로만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 가지 의문

    톨스토이의 작품에 "세가지 의문"이라는 단편이 있다.

    줄거리는 한 임금이 인생에서 풀지 못한 세가지 의문의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째 의문은 모든 일에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일까?
    둘째 의문은 어떤 인물이 가장 중요한 존재일까?
    셋째 의문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왕은 국사를 행할때 항상 이 세 가지 일로 결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과 신하들이 별의별 해답을 제시하였으나 임금의 마음을 흡족케 할 대답은 없었다.
    급기야 임금은 성인으로 잘 알려진 산골의 은자를 찾아 갔다.
    그러나 은자는 아무 대답없이 밭만 갈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숲속에서 한 청년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달려 나왔다.
    임금은 자기의 옷을 찢어서 청년의 상처를 싸매주고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다.
    알고보니 그 청년은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젊은 신하였다.
    비로소 그 청년은 임금의 간호에 감격하여 원한의 감정을 풀고 더 충성스런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임금은 은자에게 세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은자는 해답은 이미 나왔다고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람이 지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존재는 자신이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18세기 말에 이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한 사건이 미 동부의 벌티모어시에서 있었다.

    벌티모어에서 가장 큰 여관의 지배인이 한 농부의 옷차림을 한 손님의 숙박을 거절하였다.
    이유는 만약 그런 누추한 옷차림의 손님을 받으면 그 여관의 명성에 흠이 갈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거절당한 그 손님은 다른 여관을 찾아서 나갔고
    얼마 후에 그 여관의 지배인은 그 거절 당했던 손님이 바로 토마스 제퍼슨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배인은 그 유명한 제퍼슨씨에게 즉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여관에 돌아와 무료로 유숙하기를 간청하였다.

    제퍼슨씨는 심부름을 온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 주시오.
    호의는 매우 감사하지만 나는 이미 방을 얻었으니 그대로 여기 묵겠소.
    지배인이 누추한 옷차림의 미국 농부에게 방을 내줄 마음이 없다면 그들이 선출한 미국 부통령에게도 방을 내줄 마음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미국의 농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거하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연약하고 소외당하고 우리가 보기에 누추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친절을 보일 수 없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 관심과 친절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건강을 주는 삶

    어느 목사님이 몸이 좋지않아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정밀한 진찰을 한 후 의사는 그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
    "목사님의 목숨을 단축시키는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는 목회를 그만두고 편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를 더 살 수 있느냐는 그가 얼마만큼 안정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의사의 충고를 들은 목사님은 "만일 내가 당신의 충고대로 한다면 얼마를 더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의사는 "약 6년"이라고 대답을 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질문하기를 "만일 계속해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대답은 "길어야 3년입니다"였다.

    목사는 잠깐동안 생각한 후에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6년동안 앓으면서 사는 것 보다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3년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병원을 나와 열심히 일하면서 12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종말이 온다면

    23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성자 알로이시온에 관한 일화이다.

    알로이시오가 학생으로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날 휴식 시간의 일이었다.
    모두들 즐겁게 놀다가 잠시 스승과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이때 스승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혹시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을 당하게 된다면 자네들은 각자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하겠는가?"하는 물음이었다.

    첫째 학생은 빨리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어 둘째 학생은 집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함께 종말을 준비하겠다고 대답을 하였다.
    세째 학생은 어제 대화하다가 마음 상한 친구를 찾아가서 화해하겠다고 대답을 하였다.
    알로이시오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주저하지 않고 "지금은 휴식시간이니까,이대로 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때에 할 일을 제때에 다 했기 때문에 종말이 지금 와도 조금도 두렵지 않는 성실한 삶의 자세에 대한 교훈이다.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나는 국회로 가겠소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유세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에는 미국에도 공공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개 선거 유세는 큰 교회에서 했다고 한다.
    링컨이 상대방 경쟁자와 함께 합동연설을 하기로 했는데 먼저 다른 당 입후보자가 연설을 하게 되었다.
    마침 날씨가 덥고 해서 연설을 하다 보니까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고, 입후보자의 연설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상대방 입후보자는 화가 났고 그래서 그는 청중들과 호흡을 맞추고 공감을 사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는 연설 도중 참석자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연설의 테마를 바꾸었고 그리고 청중을 향하여 물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은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라고 했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조느라고 몇명 밖에 손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입후보자는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 그러면 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 분은 손들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청중이 모두가 손을 들었는데 링컨만을 손을 들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입후보자는 '잘 되었다. 이제야 링컨을 곤경에 처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링컨씨, 그럼 당신은 천국은 안가고 어디를 가고 싶단 말이오.
    당신은 신자가 아니구료"하고 힐책을 하였을때 링컨은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은 내일 천국으로 가시오. 나는 국회로 가겠소."
     
    위선적인 종교인

    시골에 사는 한 장사꾼이 행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친 몸을 잠깐 쉬어갈 양으로 양지바른 산 중턱 큰 바윗돌 옆에 짐을 풀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 서 바윗돌에 기대어 있다가 우연히 호랑이 꼬리를 발견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호랑이가 큰 바윗돌이 갈라진 틈에 앉아 있는데,
    그 행상은 도망가나 그대로 있으나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윗돌 틈새로 나와 있는 호랑이의 꼬리를 움켜쥐고 두 발을 바위돌에 버티어 있는 힘을 다하여 잡아 당기고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는데 마침 그 길을 지나는 스님이 있음을 보고 반가워 하며 장사꾼은 스님에게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큰 돌을 집어 호랑 이 머리를 쳐서 죽여 달라고 부탁을 하자 스님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장사꾼을 쳐다 보다가 하는 말이 "나는 불도를 닦는 사람인지라 살생할 수가 없소" 하고는 그냥 가는 것이었다.

    장사꾼이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난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기에 다시 스님을 불러서 "그러면 이 호랑이 꼬리를 놓으면 호랑이가 나와서 나와 스님을 물어 죽일 것이 뻔한데 그렇게 되면 되겠소?" 라고 말하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스님이 반문했다.

    장사꾼은 "내가 호랑이를 죽일테니 스님이 이 꼬리를 잡고 있으면 우리 둘이 살 수 있소"라고 말하자 스님은 장사꾼의 말대로 호랑이 꼬리를 붙들었다.

    임무를 교대한 장사꾼은 여유가 생겼다.
    땀을 씻고 털썩 주저 앉더니 서산에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보따리를 챙겼다.
    이를 보고 스님이 빨리 호랑이를 죽이라고 소리를 치니까.
    그 장사꾼이 하는 말이 "스님의 말씀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감동되는 바가 있어 이제부터 나도 불제자가 되고 싶습니다"하고 스님께 합장을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미래의 그림은?


    어떤 부인이 남편과 아들 삼형제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남편의 직업은 선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바다에서 폭풍우에 휘말려 배와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비보가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 나서 세월은 흘렀다.
    미망인이 그렇게 말렸건만 큰 아들도 남편의 뒤를 이어 배를 탔다가 목숨을 읽고 말았다.
    또한 둘째 아들도 한사코 말리는 어머니 몰래 선원이 되었다가 그도 역시 얼마 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막내 아들조차 장래 선원이 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와 모든 친척들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네 사람이 바다에 미친 까닭을 몰라 이 부인은 이웃에 사는 목사님께 그 원인을 알아 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한참 집안을 살펴보던 목사님은 방에 걸려 있는 그림과 사진을 당장 떼어내고 대신 다른 것을 걸도록 권하였다.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 정도로 시원한 바다 그림과 선장 차림의 멋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아들들의 마음을 바다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부인은 바다 그림 대신 산과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었다.
    얼마 후 막내 아들은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대신 농부가 되어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말씀의 울타리

    어느 도시에 있는 국민학교의 운동장이 번잡한 길과 연결되어 위험했기 때문에 교사들은 항상 학생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시켰고, 또한 학생들도 운동장에서 놀다가 자칫 공이 길거리에 굴러 나가도 곧 바로 쫓아 나가지 못하는 것은 혹시 달려오는 차에 치어 큰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당국에서 그 국민학교 운동장에 담을 쌓아 복잡한 길거리와 분리시켜 놓았다.
    그 담이 완공되자 학교 교사들은 안심하게 되었고 특히 학생들은 이제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뛰어 놀며 안전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학생들은 운동장을 둘러싼 담장안에 갇혀 부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자유와 안정감을 찾게 된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담장이 없을 때에는 억압을 받지 않아 자유스러운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울타리 밖에서 사는 생활은 항상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자유스럽고 평안하며 안전하고 복된 생활이 되는 것이다. 


    주시는 왕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한 가난한 여인이 영국왕실의 온실문 앞에서 탐스럽게 매달린 포도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병든 아들을 위하여 그토록 찾고 있던 것이었다.
    겨울철이라서 시중에서는 아들이 원하는 포도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그녀의 침대시트를 벗겨서 저당 잡혀 5실링을 받아들고 왕실의 온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돈을 온실 관리인에게 주면서 그 포도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인은 손을 저으면서 나가라고 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그 여인이 아끼던 베틀을 팔아서 반프랑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온실로 간 그녀는 온실 관리인에게 그 반프 랑을 주면서 포도를 달라고 애걸하였다.
    이번에는 관리인은 화를 벌컥내면서 그녀를 다시 쫓아 내었다.
    그때 왕실의 공주가 온실로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공주는 화를 내고 있는 관리인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을 보고는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난 공주는 말하기를
    "가엾은 여인이여. 그대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장사꾼이 아니라 왕이십니다.
    그는 파는 일을 하는게 아니라 주는 일을 하십니다"하고 포도송이를 따서 그녀의 치마에 담아 주었다.


    그냥 믿기만 하라

    어떤 사람이 그의 동생과 함께 캐나다 국경의 장엄한 나이아가라 폭포 밑을 흐르는 위험스러운 급류를 향해 배를 타고 건너가고 있었다.
    물결이 너무나도 보트를 흔들기 때문에 그의 동생은 잔뜩 겁이 났다.
    그것을 바라본 형은 배의 노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지금까지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이곳을 횡단하였습니까?"
    "지금까지 12년 동안 줄곧 이 일을 계속 했지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럼 한번이라도 사고가 난 적이 있었습니까?"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뒤집혔거나 인명의 피해가 전혀 없었단 말입니까?"
    "선생님, 그런 일은 한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서워하고 있는 동생을 보고 말하기를
    "저 사공의 말하는 것을 들었지? 네가 저 사공보다 노를 더 잘 저을 수 없다면 나처럼 조용히 앉아서 저 사공을 믿고 이 여행을 즐겨라"라고 지혜롭게 안심시켜 주었다.


    나 하나쯤은

    옛날 어느 임금이 온 국민을 불러 놓고 대연회를 열기로 했다.
    음식은 왕이 마련하고 참석자는 그저 포도주 한병씩만 가져 오도록 했다.
    잔칫날이 왔다.
    사람들이 가져온 술들은 모두 큰 동이에 모아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그 포도주를 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술맛은 맹물이었다.
    그 이유는 남들은 포도주를 가져올 것이니까
    나 한사람 쯤은 술 대신 물을 가져와도 모르겠거니 했던 것이다.

    끝없는 욕망

    양을 치는 목동이 눈 내리는 어느 겨울밤 한무리의 양떼를 몰고 눈을 피해 한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침 그 동굴 속에는 야생의 살찐 양들이 한떼 들어와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이 목동은 의외의 사태에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동굴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살찐 야생의 양들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목동은 자기의 양을 버려두고 야생의 양떼들에게 열심으로 건초를 먹였다.
    눈이 날리던 겨울이 지나고 눈이 멎자 건초를 실컷 얻어먹고 기운이 팔팔해진 야생의 양떼들은 건초를 얻어 먹은데 대한 인사말 한마디도 없이 쏜살같이 동굴을 빠져나가 들과 숲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야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았던 목동으로서는 이만 저만한 손해가 아니었고 실망도 컸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추위에 떨며 동굴 속에서 야생의 양들 때문에 건초 조차 제대로 얻어 먹지 못한 다른 양들이 모두 굶어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같이 가는길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진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산장사와 짚신장수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아들로 가진 어머니가 있었다.
    이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의 장사를 걱정하고 또 반대로 날씨가 좋을 땐 우산장수 아들의 우산이 안 팔릴 것을 염려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어머니는 그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리겠다고 생각하며 좋아하고, 날씨가 좋으면 짚신이 잘 팔리겠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싱글벙글 기뻐하는 즐거운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위로 올라 가야만 산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친구되는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산간지방에서 자라났고 그 지역의 산에 대하여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
    미국의 산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산에서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쉬운 것을 잘 아는 그 사람은 당황하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중에 마침 다행스럽게도 산속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살아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노인이 남겨준 다음과 같은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보통으로 사람들이 얼른 내려가서 동리나 길을 찾아야 겠다고 산 밑으로 내려가는데 그것이 죽는 길이라오.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 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위로 올라가서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어떤 쪽에 마을이 있는지 분명히 방향을 확인하고 내려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언제나 마태복음 6장 33절의 원칙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올 때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봉사를 저버리고 세상으로 조급히 내려갈 것이 아니라, 더욱 위를 사모하며 주님께 가까이 가며 문제와 역경이 전능자의 손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ref / 히말라야 고산족들의 산양을 거래하는 방법

    산양을 사고 팔 때 먼저 양을 마음대로 활동하도록 풀어놓습니다.
    그 다음에는 양들을 산 위로 올라가는 상향성 양과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성으로 구분합니다.
    히말라야와 같은 높은 산은 올라가면 갈수록 산양들이 먹을 수 있는 풀이 없지만 내려가면 갈수록 푸른 초장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위로 가려는 산양의 가격은 가격이 떨어지고 아래고 내려가려는 산양의 가격은 더 올라갑니다.

    사람은 위를 바로보는 존재로 만드셨지만 동물은 땅을 바라보는 생명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가치 기준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앙의 절개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자 미국의 좋은 관리의 자리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사양하고 목사의 길을 택하여 갔다.
    루이스 감독이 그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는가고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었었을때에 중국의 내륙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동리에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마적떼 같은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절간으로 왔습니다.
    위협하는 군인들은 크리스찬들로 하여금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신앙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크리스찬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갈때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 온 163명의 신자들은 절을 하기는 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그 우상의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의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굴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절만 한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크리스찬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163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어렸을 때였지만,
    그 사건은 나의 일생을 새롭게 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똑바로 가르쳐 준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

    우리가 먹는 소금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음식의 맛을 내고 방부제도 되고
    우리가 먹지 않으면 죽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소금이 극히 나쁜 독소 두가지로 구성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소금은 소디움과 크로라이드라는 두가지 원소가 합하여 된 것이다.
    사람이 이 소디움과 크로라이드를 각각 따로 먹으면 죽게 되는 것이다.

    물도 참으로 이상하다.
    물은 수소와 산소 이 두가지가 합하여 된 것이다.
    산소는 불이 붙어도 아주 뜨겁게 타는 물질(산소용접)이다.
    수소도 불에 탈 수 있는 물질인데 이 두가지가 합하면 정반대의 물이 된다.

    자석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영구자석인 알리코 자석은,
    자석에 붙지도 않는 세 가지의 쇠붙이 즉 알미늄, 니켈, 코발트를 합해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천하에는 이상스럽고 놀라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가장 놀랍고 이상한 일은, 예수의 보혈은 어떠한 죄라도 깨끗이 씻을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가장 쉽게 망치는 방법

    아름다운 화단을 망쳐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꽃밭에 불을 지르면 될 것이다.
    물속에 잠기도록 물을 퍼부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를 하지 않고도 쉽게 망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를 하지 않고도 쉽게 망칠 수 있는 길이 있다.
    화단을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잡초가 무성해지고 저절로 망쳐진다.

    어떻게 하면 친구간의 우정을 망쳐 버릴 수 있을까?

    돌아 다니면서 그 친구를 마구 헐뜯고 다니면 될 것이다.
    그 친구의 우정을 크게 배반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것 없다.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두라.
    저절로 망쳐질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망칠 수 있을까?

    교회에 돌을 던지고 건물을 부수어 버리고 예배를 방해하고 중상 모략을 하고 다니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것 없다.
    교회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교회에 가지도 말고 봉사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
    교회는 저절로 망쳐질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쳐버릴 수 있을까?

    방탕하고 법을 어기고 타락해 버리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대로 나를 그냥 편하게 두면 나는 저절로 망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을 망쳐서 멸망에 떨어지게 할까?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될 것이다.
    물질과 육욕만을 위해서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내 영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내버려두고 살면 될 것이다.
     
    고난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조개속으로 모래알이 한개 들어간다.
    그 부드러운 조개의 살 속에 거칠은 모래알이 들어왔으니 조개는 얼마나 아프고 쓰리겠는가?

    고통스러운 조개는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견디며 고통을 참는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또 가고 하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이다.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당신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인 것이다.
    참고 견디며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3월의 강한 바람

    식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겨울이 지난 후

    3월의 강한 바람이 불어 올때 나무가지가 마구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에는 애처로울지언정,
    그 강한 바람은 나무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초봄의 강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림으로서 새잎을 내는데 필요한 영양이 위로 잘 올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뿌리로부터의 영양공급이 겨우내 활동 안한 나무 줄기를 통하여 새싹 부분까지 원활히 잘 올라 가자면 바람에 흔들리는 운동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편한 생활만을 행복이라고 알고 지낸 사람의 일생에 인간으로서의 위대성이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인생길에 거센 바람을 안 맞아 보는 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당신의 신앙과 의지가 그 바람을 어떻게 해석하고 처리하는가이다.
    범사에 감사하시라.
    주님을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히 당면하시라.

    두려움

    어떤 사람이 처음 가는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는데 양쪽은 모두가 높은 절벽이었
    다. 발을 잘못 딛은 실수로 떨어지던 그는 간신히 나무 뿌리를 잡고 메달리게 되었
    다.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그가 소리를 치며 구원해 달라고 했으나 듣는 사람
    이 아무도 없었다.

    손목과 팔의 힘은 점점 빠져갔다. 이제는 도저히 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떨어
    져서 죽는 일만이 남았다. 드디어 그는 악! 소리를 치며 나무 뿌리를 놓쳤으나
    이게 웬일인가? 수 십미터의 낭떠러지인줄로 알았던 것이 겨우 털석!하고 발이
    땅에 닿는 약 1미터의 높이였던 것이다.

    손만 놓으면 떨어져 죽는줄 알고 겨우 1미터 높이의 곳에서 밤새도록 나무뿌리를
    잡고 두려워 떨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그것을 놓으면 죽기라도 하는
    줄 알고 결사적으로 세상 것에 메달려 있는 사람이 그 얼마나 많은가?

    실패없는 성공은 기대치 말아야


    미국의 야구역사상 베이브 루스라고 할 것 같으면 너무나 유명한 홈런 왕이다.
    그는 714개의 홈런을 때려서 1976년 까지도 세계의 최고 기록을 유지했던 사람이다
    1927년에 양키즈 팀이 필라델피아 팀과 대전했을때, 그가 날린 장타의 유명한 결정
    타는 야구 역사상 잊혀질 수 없는 홈런이었다.

    그런데 베이브 루스가 홈런 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그가 아직도 스트
    라이크 아웃을 당한 세계 기록의 보유자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없다. 그는 자그만치
    1330번이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 아마 야구 역사상 이
    기록을 깨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베이브 루스에게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쓰라린 체험이 없었던들 그는
    홈런 왕이 결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입의 말은...

    작은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를 하여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즉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물러가고 다시는 제단앞에 오지마!" 이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주의의 대지도자인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역시 성찬용 포도주 그릇
    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곧 이해와 동정이 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
    히 속삭여 주었다. "응, 네가 앞으로 신부가 되겠구나." 이 소년은 자라나서 유명
    한 대주교 훌톤 쉰이 된 것이다.


    티토 소년은 그 말대로 제단 앞에서 물러가 하나님을 비웃는 공산주의의 지도자
    가 되었고, 쉰 소년은 그 말대로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내 입에서는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을까? 그것은 축복과 믿음의 긍정적인 말들일까,아니면
    의심과 저주의 부정적인 말들일까?
     
    오해

    학교를 갓 졸업한 딱다구리 새가 나무에 착 달라 붙어 학교에서 그동안 배운대로
    나무를 쪼기 시작했다. 목에다 힘을 주고 겨냥을 잘해서 한번 탁!쪼았다. 신기하게
    도 나무가 조금 떨어져 나갔다. 이번에는 두번째로 더 힘을 주고 쪼아댔다. 나무
    조각이 조금 더 많이 튀어 나왔다.

    이제 세번째로는 더욱 목에 힘을 주고 겨냥을 해서 쪼아 대는데 마침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그 나무를 때렸다. 깜짝 놀라 나무에서 떨어진 딱다구리가 중간


    토막이 부러져 쓰러진 큰 나무를 보고 하는 말이, "하참! 내가 힘을 내어 세번째
    콱! 찍었더니, 과연!" 신출내기 딱다구리 학교 졸업생께서는, 그 나무가 중간이
    부러져 쓰러진 것이 자기가 세번 찍어서 넘어간 것으로 아셨던 것!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 중에는 이 딱다구리 처럼, 하나님의 손길의 처리를 받고도 제가 수고하고,
    잘하고 힘이 있고, 지혜로워서 일이 된 줄로 오해하는 딱다구리 신자가 하나도
    없을진저!

    가장 위험한 때

    바다의 항해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질문은
    "혼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할 경우 가장 위험한 때는 언제입니까?" 라는 것이었다.
    조금도 주저함없이 모든 사람들이 대답한 말은
    "폭풍우의 때입니다"였다.

    그러자 그 전문가는 고개를 흔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혼자서 배를 타고 항해할 경우 가장 위험한 때는 폭풍우의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 환경과 싸우기 때문에 정말로 목숨을 잃을 때가 드뭅니다.
    그러나 제일 위험한 때는 바람도 잔잔하고 날씨도 쾌청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아무런 긴장이나 조심이 없이 갑판을 걷다가
    가장 잘 떨어져 물에 빠지는 때가 이러한 경우인 것입니다."

    평탄할 때에 당신의 신앙을 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기적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는 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을 했다.
    "성경에 있는 기적은 진짜로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백성들을 끌고 홍해바다를 건너 갔을 바다의 깊이가 6인치밖에 안 되는 갈대밭을 건너간 것이지 어떤 기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거든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뒤에 앉은 학생 한명이 "기적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했다.
    좀 기분이 좋지 않은 선생님은,
    "무슨 기적이란 말이에요?" 라고 묻자
    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오던 애굽의 큰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물에 빠져 죽게 했는데 6인치 깊이의 물에다 애굽의 그 많은 대군을 다 빠뜨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진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말고 살아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구해주실만한 귀중한 사람인 것을 잊지 말라.

    성공의 비결

    쎄인트 루이스의 유명한 구두(신발)사업의 성공자인 부라운씨를 방문한 어떤 목사가, 어떻게 이처럼 대성공을 하였는지 그 사업비결이라도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라운씨는 목사를 자기 사무실로 인도하고 들어가 벽에 부쳐놓은 표어를 보여주었다.
    그 표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세째는 구두!"

    이것이 제화 및 판매의 대성공자 부라운의 성공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말씀은 진실하신 것이다.
     
    죄에 오래 묻혀사는 위험

    카나다의 케이프 브레톤 섬에 있는 시드니라는 도시에는 석탄을 캐내는 탄광이 있다.
    이 탄광은 바다 밑으로 수 마일을 뻗어가서 석탄을 캐내는 엄청난 탄광이다.
    탄광속에서는 작업을 위해서 말들을 여러 마리 쓴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들을 깊고 어두운 탄광에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시키면 다시는 탄광밖으로 끌고 나오지를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말들이 탄광밖으로 나오는 순간 곧 눈을 못보는 소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탄광속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는 말은 그 말이 늙거나 병들어서 일을 못 할때까지 계속 바다밑 어두운 땅속에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못된 취미나 습관, 죄의 행습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 순간 즉시 나와, 다시는 그곳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팀

    새앙쥐 한마리와 큰 코끼리가 함께 한 팀이 되어 길동무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가다 보니 큰 다리를 건너 가게 되었다. 두 길동무는 한 팀이 되어서 다리를 건넜
    다. 다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다 건너와서 새앙쥐가 뒤를 돌아보고 하는 말이었
    다.

    "아휴! 우리가 저 육중한 다리를 거의 흔들어 놓았단 말이야!" 새앙쥐 자신으
    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한 팀으로 '우리'가 되었을
    때에는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러
    나 그들은 전능하시고 크시며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한 팀이 되었을때 그러한 일을
    능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돈은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지언정 깊은 잠은 못 살 것입니다.
    비싼 책은 얼마든지 사도 명석한 두뇌는 돈으로 못 살 것입니다.
    음식은 마음대로 사겠으나 입맛은 못 삽니다.
    아름다운 옷과 장식은 사서 걸치겠으나 참된 미는 못 사지요.
    좋은 집은 사겠으나 행복한 가정은 못 삽니다.
    약은 살 수 있으나 건강은 못 삽니다.
    사치는 마련되겠으나 교양은 돈으로 못 삽니다.
    향락은 사겠으나 행복은 못 삽니다.
    돈주고 종교는 구하고 인정은 받겠으나 돈주고 천국의 영생은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 믿는 신앙보다 돈을 더 높이 평가하고 사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틀림없이 어리석은 사람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철저한 긍정

    옛날에 동양의 어떤 임금이 꿈을 하나 꾸었다.
    그 꿈은 자기의 이빨이 하나 하나 다 빠져버리는 꿈이었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해몽자를 불러다 꿈을 해석하게 하였다.

    해몽자는 꿈을 풀어 해석하기를 임금님의 친척들이 한 사람씩 죽어서 맨 마지막에는 임금님만 남게 된다고 해몽을 했다.
    기분이 언짢은 임금은 그 해몽자를 죽였다.

    임금은 계속해서 다른 해몽자를 구해 오라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해몽자가 임금에게 불려왔다.
    그는 임금님의 꿈 얘기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다.
    "임금께서는 집안의 모든 친척들 보다도 가장 장수를 해서 오래 오래 사신다는 꿈입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해몽자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똑 같은 사실을 똑 같이 해석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부정적이었느냐 아니면 긍정적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을 전혀 달리했던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어떤 종류의 언어인지 생각해 봅시다.


    알라스카주

    북미대륙의 서북쪽에 붙어 있는 넓은 알라스카 주는 원래 구 소련의 땅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이 알라스카를 별로 가치가 없는 땅으로 인정하여 1867년에 미국에 720만 달라의 값을 받고 팔아 넘겼다.
    그런데 미국이 720만 달라를 주고 알라스카를 산지 13년 만에 알라스카에서는 무려 3억 달라 상당의 금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 소련이 그 가치를 모르고 720만 불에 팔아 넘기는 순간에도 그 땅 밑에는 곧 발견될 3억 불어치의 황금이 묻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오늘 날에는 금 못지않게 귀중한 석유가 그 땅 밑에 아주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인 것이다.

    사막의 피터 펌프

    미국의 아마고사 사막을 통과하는 작은 소로 길이 있다.
    먼 사막의 길을 이 소로로 가자면 중간 쯤 물 펌프가 하나 서있다.
    뜨거운 햇빛에 이 사막을 말을 타거나 걸어서 통과하던 행인은 물 펌프를 보고는 침을 삼키며 뛰어간다.
    펌프에 도착해보니 펌프의 손잡이에 끈으로 깡통이 하나 매어 달려 있고 그 깡통 속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담겨져 있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 펌프 질만 하면 물은 틀림없이 나옵니다.
    이 땅 밑의 샘에는 언제나 물이 있습니다.
    이 펌프 옆의 흰 바위 밑에는 큰 병에 물이 가득히 담겨져 모래에 파묻혀 있습니다.
    햇볕에 증발치 않도록 마개를 잘 막았지요.
    그 병을 꺼내서 펌프에 부으십시오.
    만약에 그 물을 먼저 마시면 물이 모자랍니다.
    그 물을 펌프에 다 붓고 펌프 질을 하십시오.
    제 말을 믿으세요. 틀림없이 물은 얼마든지 나와서 당신이 필요한 대로 충분히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물을 다 쓴 후에는 그 병에 물을 가득히 채워서 마개를 꼭 막아 처음 있던 대로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오.
    당신 다음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추신 : 병의 물을 먼저 마셔 버리면 안됩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별것도 아닌 걸

    한 농부가 밭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를 늘 피해서 농사를 지어왔다.
    그런데 이 바위로 인하여 벌써 쟁기 두 개가 망가지고 괭이 등 여러 연장들을 부러뜨렸다.
    뿐만 아니라 바위가 땅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절감한 농부는 큰 결심을 했다.
    "무슨 수고와 무슨 대가가 들더라도 내가 저 바위를 캐어내리라!"
    화도 나고 큰 작정을 한 농부는 바위 밑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바위가 늘 생각했던 것처럼 큰 바위가 아니라 두께가 겨우 한 자도 안되는 바위였던 것이다.
    농부는 그 바위를 쉽사리 움직여 마차에 싣고 내어다 버리며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바위로 알고 피해서 농사를 짓고 손해 본 그동안이 참 아까운 일이었구나!"

    당신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던 그 일, 항상 부담스럽던 그 일을 착수해 보시라 별 것이 아닐 것이다.


    어리석은 자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허수룩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의 원고를 책으로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출판사 주인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 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 비용을 다 부담한다 해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하수룩한 사람은 원고 뭉치를 품에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데요."
    이상스러운 말에 놀란 출판사 주인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 라고 묻자 그는 "내 이름은 톨스토이 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기절할 듯이 의자에서 뛰어 일어난 주인은 급히 사과를 하며 원고를 부탁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냥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볼품없다고 거절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올더 오더 아미시는 농사법, 의상, 교통수단 등에서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급진적 종교 개혁가들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모형을 그대로 현재까지 이루어 나가는 아미시 사람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들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후 1525년에 유럽에서 급진적인 재세례파라는 기독교 운동이 일어난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받았음에도 어른이 되어 다시 받는다며 '세례를 다시 받은 자'를 뜻한다.
    지금도 미국과 캐나다와 유럽 등지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며 자생하고 있는 이들 단체는 500년이 된 지금에도 마차를 이용하며 옛것을 즐기고 있다.
    전화라든가 꼭 필요한 것만 현대 문명 일부를 이용하고 가급적 옛날 모습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 공동체이다.

    이런 곳에서 한 사건이 발생한다.
    2006년 10월 2일 월요일 아침 10시 30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학교에 찰스 칼 로버츠 4세가 총기를 들고 여자 어린이 다섯 명을 죽이고, 여자 어린이 다섯 명을 크게 다치게 한 후 자살해 버린 것이다.

    아미시는 가족과 신앙과 문화라는 강한 끈으로 엮여 있는 긴밀한 공동체다.
    사람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고 원수를 용서하라 하신 말씀에 더 순종하여 이 살인자를 용서한다.
    그리고 살인자의 가족에게 은총을 베푼다.

    이 사건의 기사가 전 세계에 퍼져 나갈 때 많은 사람들은 아미시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알게 되고 나중에는 관광 명소가 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라서 이 책을 쓴 작가 3명이 이곳에 들어가 아미시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비탄에 젖은 아미시 가족들을 돌보는 구성원들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른다.
    아미시 사람들은 살인자 로버츠의 가족들도 희생자라고 재빨리 깨닫는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할까.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용서를 실천하고 있었다.
    아무 원한도 없고 그저 용서만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도우셨으니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합니다"고 말한다.
    죽은 아이의 시신을 보고 울며 슬퍼하면서도 오직 용서만이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 가족들이 죄의식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일을 한다. 아미시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며 치유가 되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하여 대책을 세우고 실행한다. 원수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조율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쏙 빼닮은 듯하다. 이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현대적 초대교회 사람이며 이런 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증오가 언제나 틀린 것이 아니고 용서가 언제나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자녀가 살해되었음에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사회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슬프게 울부짖기보다는 선한 싸움을 택하고 싶어 한다. 용서가 습관이 된 것이다.

    용서의 뿌리는 제자도에 있으며 주기도문과 산상수훈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마태복음 18장 21과 22절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용서의 근거를 삼고 있다. 용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사랑과 자비를 스스로 잘라 내려 하는 사람이다.

    '힘없음의 힘'으로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아미시 사람들은 자기 방어를 단념하고 있다. 복수도 정당화도 노리지 않는다. 악은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만, 인간은 그 까닭을 결코 알 수 없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허용하실 뿐'이라는 섭리라고 생각하면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8~19)"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최근 어떤 S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상을 떠들석하게 화제가 되고 있다.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간의 폭력 사태와 여의도의 어떤교회에서도 폭력사건이 있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소문난 교회들이다. 이 문제는 검찰에서 조사하는 중에 있으며 끝까지 가는 중에 있다. 아무도 '용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문제의 발단은 돈이다.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깨끗해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한마디로 부끄럽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영성의 결여자들이 행하는 목회는 양들을 죽이는 파렴치한 일들이다. 요즈음은 양들도 삯꾼의 목자를 닮아 폭행을 한다. 한국의 교회는 저마다 안고 있는 아픔을 위해 죽는 사람이 없다, 모두들 제각기 목을 치켜들고 큰소리로 외친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을 미워하는 죄악들을 짊어지고 주님이 주신 마음의 평화를 마음 밭에서 몰아내며 받은 은혜는 가시밭에 버린 지 오래된 것 같다. 모두 다 분노의 마음으로 자기를 이끌어 가고 있고 악의 씨를 키워 고집을 앞세워 못 먹는 밥에 재 뿌리는 격이 되어 기독교를 병들게 한다.

    누룩 한 조각 조그마한 것이 조국 교회를 해칠까 두렵다. 교계 뉴스를 보면 별의별 사건을 접한다. 이웃 교회에서도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린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워 옴을 느끼지만 그나마 마음에 평화를 얻고자 하는 진실한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탄식에 고개를 숙이고 조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길 바란다.

    나는 <아미시 그레이스>를 읽고 예수님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신 것이 헛되지 않도록 세상을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야 하는 이유와 우리 모두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미시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이 땅에 믿는 자들 모두에게 신앙심으로 자리매김할 때 온 세계는 평화라는 새로운 나무가 심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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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30267 2023-01-18T08:53:31Z 2024-04-15T07:48:10Z 황선민목사 설교 자료


    04-14-2024(주일)



    https://youtu.be/Q4jTOJqhBbo?si=xcu21Gbf_n5dG7Di

    Knowing You – All I Once Held Dear   (빌3:7-14)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막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바울 사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내어 부활의 말씀 전달.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7-1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4-6)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므로,

    (고전15:31)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후11:22-27)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길 곳곳에 장애물과 방해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치우지 않고 함께 갈 수는 없.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그 장애물들과 방해물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장애물이고 방해물이기 때문에 분연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그것들이 나를 만족시키고 유익하게 할 것이라 믿고 있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땅에 있는 지체들이라.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골3:5,6,8)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부활,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믿었던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반드시 부활 휴거.

     

    부활휴거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과는 상관 없.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01-21-2024(주현 후 제3주)

    누가 들을 수 있는가?
    can anyone hear me?
    요한복음 5ㅣ21-25



    영화 Titanic 마지막 2-3분 장면.

    Rescue Rescuing boatman whistling & shouting : Can anyone hear me? xxxx………..

    Rose : Whistling – Come back, come back

     

    구조 보트의 구조 외침 소리 들은 유일 생존자Rose

    구조 보트의 구조 외침 소리 Can anyone hear me? 들었기 때문에 구조 받아.

     

    무엇을 듣고 들은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생사화복 결정.

    세상에는 살리는 소리와 죽이는 소리.

    소망의 소리 절망의 소리, 살아나게 하는 소리, 포기케 하는 소리,…

     

    그렇기에 예수님 말씀.

    너희 산 자들은 나를 따르고,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끼리 죽은 자들과 죽을 자들 장사케 하라.

    (마8:22)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let the dead bury their own dead

     

    들어야 할 살리는 소리들 중,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 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신 말씀.

    그 듣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듣는 것.

    그 음성 들으면 살아나되 죽은 자들일지라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셔.

     

    죽은 자들은 무덤 속 어둠에 있는 자들이고, 산 자들은 광명한 빛 가운데 있는 자들.

    (요11:9,10)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의 빛 – 생명과 밤의 어둠 –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듣는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그 음성 들은 자는 살아나리라.

    (요5:24,25)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이 생명이라신 말씀 들으면 죽은 자들이 생명 말씀으로 다시 살아.

    (요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 보다 보이는 육에 집착하고 추구.

    바울 사도 일갈.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만 구원 하신다셨.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모든 사람 아무나, 누구나 다 구원하지 않으셔.

    구원해 주실 대상의 기준을 세워 놓으셨고, 그 기준에 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만 구원.

     

    예수께서 살리기 원하시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은 누구?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세상에 흩어져 세상의 소리 듣느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느라 주님의 음성 듣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

     

    주일 예배 한 번으로 일 주일, 한 달, 일 년을 연명하면서 살고 있.

    하나님의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에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

     

    야고보 선지자,

    (약1:1)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 문안 편지

    (약1:16,17) 세상과 사람에게 속지 말라셨.

    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2.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주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 세상의 속임수와 거짓과 유혹에 속지 말라셔.

    세상은 죄와 죽음이 있는 곳이고, 죄는 죽음의 삯이라신 세상은 거대한 죽음의 무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

    그런데 성경은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셨.

    (요5: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들은 자는 살아난다셨.

     

    죽은 자들은 죽어서 갓 무덤에 묻힌 자를 포함해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는 모든 육적 주검들, 시체들.

    성경은 몸이 죽어 무덤에 묻힌 자들만 죽은 자라 한정하지 않.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 영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는 누구라도 움직이고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배설하고 생식하면서 육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으로 죽은 자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영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이 말씀 하신 것.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요한복음에만 있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말씀.

     

    이 말씀 듣고 있는 자들 모두 살아는 있지만 죽은 자라시는 말씀.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들어야 하고, 그 음성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동물과 다름 없.

     

    (전3:18-21)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19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짐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적 목숨으로만 사는 생명체.

    ‘인생’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생명의 삶을 살고 있는 참 생명의 생명체.

     

    짐승은 죽어 땅에 묻히면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지만,

    인생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벌어질 진짜가 있.

     

    그렇기 때문에 살아는 있으나 죽어 있는 자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려면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고 영적 생명을 얻어야 한다셔.

     

    하나님께서는 개나 고양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 짐승의 삶 살기를 고집하고 추구한다면 그들의 원하는 대로 구원을 유기시켜 버리신다셨.

    (롬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 (행13:46-48)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2.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3.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1. (계22:11.12)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 자기가 살리기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이유는 무언가.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셔서 부활의 때에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셔서 어린 양이 신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시고, 어린 양의 신부 되게 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 받은 우리 무엇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엡5:10,11)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취이시리라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N)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K)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하나님 아들의 음성’ 들으면서 날마다 살고 있는 우리, 

    머잖아 필연코 부활되어질 우리, 부활되기 전, 살아있는 동안 잘 죽는 삶을 살아 놓아야.

     

    부활되어져 올려가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열려져 있을 것이기 때문.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영생과 영벌의 심판 권한을 갖고 계신 분, 예수 그리스도.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5:27)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심판의 권한 위임 받으신 예수님, 심판하실 때 자기가 살리고자 원하는 자들만 선별적으로 한정적으로 살리신다 선언.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 살리기를 원하는 자들만 살리신다셨.

    근거,

    (요5: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대 앞에 선 자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마19:28)에 보이는데, 이 심판을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되 개별 심판은 예수님 양 옆에 앉은 12사도들에게 맡기셨.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2사도와 함께 혼인만찬에 들어갈 자와 지옥에 가게 될 자를 심판하게 하신다셔.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님이 공중에서 심판하시는 그곳에 12 사도들 함께.

    (마19:28)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을 공중의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선 기독교인들을 심판하는 심판관으로 임명해 주셨.

    12 제자의 심판 기준은 그들이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해 놓은 신약성경 말씀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가 기준.

    마태복음에서 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의 삶이 심판의 기준.

     

    바울 사도는 사도들을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는 중매 억할.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For I am jealous over you with godly jealousy: for I have espoused you to one husband, that I may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Wherefore we labour, that, whether present or absent, we may be accepted of him.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very one may receive the things done in his body, according to that he hath done, whether it be good or bad.

     

    하나님 말씀하신 선악을 교회에서는 혼인준비 하는 삶이 선이고, 혼인준비에 게으른 것을 악이라.

     

    그러므로 혼인준비 하면서 사는 신부들이 어떤 

    1. (계2:26-28) 이기는 자(the one conquering)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the one keeping until finish the acts of me)에게(이기는 자 곧 끝까지 내 일들을 주목하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3.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천년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는 권세인데 이 권세를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셔.

    이기는 자는 누군가면 끝까지 예수님 일들을 지키는 자(the on keeping until finish(consummation) the acts of me).

     

    예수님은 2천년 전에 베들레헴에 오셔서, 30세에 성령으로 세례 받으시고, 3년 반 동안 선지자로서 사역하시다가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피 흘려 죽으셨.

    그리고 무교절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

    그리고 오순절에 셋째 하늘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내려 주셨.

     

    이 모든 예수님 하신 Acts, 업적들을 지켜봐 온 우리, 앞으로도 예수님의 하실 일들, Acts,업적들도 지켜 볼 것.

     

    이제 남은 것은 세 절기, 나팔절과 대속죄일인 속죄절과 장막절.

    마지막 나팔이 불리면 (고전15:51,52)에서 마지막 나팔이 울리면 죽은 자도 영의 몸으로 변하고 살아 있는 우리도 영의 몸으로 변해져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거기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장막절의 혼인 만찬에 들어갈 사람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이 갈라지게 돼.

     

    그 갈라지는 곳이 그리스도 심판대의 심판대이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직후를 나타내는 장면이 (계15:2; 18:21) 

    거기서 혼인 만찬에 들어간 사람은 (계15:2,3), 지옥에 들어가게 된 자는 (계 18:21)

    (계15:2,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나님께서 하신 최대 마지막 업적이 어린 양의 혼인

    (계15:3)에서는 ‘업적erga : acts’, (계19:9)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만찬 deipnon : dinner / supper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Let us be glad and rejoice, and give honour to him: for the marriage of the Lamb is come, and his wife hath made herself ready. And to her was granted that she should be arrayed in fine linen, clean and white: for the fine linen is the righteousness of saints. And he saith unto me, Write, Blessed are they which are called un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이 어린 양의 혼인 만찬에 청함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에 반해 심판 받아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18: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혼인 만찬은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들)에(만찬에) 들어가고 (그) 문은 닫힌지라

     

    그들 – 기름 떨어진 자들, 성령 소멸된 자들, 기독교인이지만 새끼 염소 된 자들, 중매쟁이 말을 듣지 않은 자들

     

    그리하여 (계19장) 여기에 바로 신부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하게 나타내 주고 있.

     

    1. (계19:6하-9)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2.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3. 그(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4.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그)어린 양의 혼인(가머스) 잔치(만찬:데이프논)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이 땅에서 잘 살고 못 살고,부유하게 살고 가난하게 살고의 문제 아니.

    그리스도 심판대에서의 판결이 사람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그리스도의 심판대 사건은 누구에게든 반드시 일어나.

     

    살아 있을 동안 살아 있게 하신 그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또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까지 보다 더 피 흘리기까지 싸워 기름 준비에 실패하지 않은 이기는 자 되어져 가야.

    그렇게 나팔 소리 울리기 전에 혼인 준비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충성한 신부의 세마포 드레스 준비 마쳐야.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성탄절이 즐겁고 기쁜 것은,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사람들마다 자기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인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함 받게 하시고 죄 없이 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탄생하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교회마다 기뻐하는 사람들 즐거워하는 사람들 함께 하는 이유.
    하지만 크리스마스 성탄절은 부활절과 추수감사절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로 명명되거나 언급되어지지 않은 세상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축제일 중 하나
    되어져 있.
    부활절과 추수감사절도 그렇지만, 크리스마스도 세속의 인본주의와 결합된 세상 세속적 인본적 종교적
    축제 행사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절기로 자리잡고 있.
    하나님의 성호만 높임 받으시고 경배와 찬양 받으셔야 할 교회에 우상화 되어 계승되어져 오는 기독교
    문화, 제도, 절차, 의식,… 많아.
    마치,
    모세 때 놋뱀 – 700년 – 히스기야 때 느후스단 (왕하18:1-8)
    엘리 아들 홉니 비느하스 - 블레셋 전쟁에서 법궤 빼앗겨 블레셋이 다곤 신상 앞 – 아비나답 – 웃사 아효
    (대상13:10) – 가드 사람 오벳에돔 집에 석달 (삼하6:10; 대상13:14)
    오늘 교회에 하나님 이름과 예수님 이름으로 전통을 따르고 지키면서 성경적이지 않은 이벤트성 행사들 중
    대표적인 것들,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 예배.
    성탄절, 온 교회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생일날로 잔치 벌이는 크리스마스 데이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니라 태양신 바알을 섬기면서 축제 벌이는 바알 축제일에서 시작.
    이방인들이 지키던 태양신 축제일이 교회 안으로 들여와져서 예수 탄생일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로 되어져서는
    카톨릭을 비롯해 개신교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해 놓고 구주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성탄
    미사와 예배를 드리고 있.
    그런데 문제는, 12월 25일에 성탄 예배를 위해 모여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자기들의 예배 행위가 저 옛날 태양신 바알을 향해 제사 하던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하나님 앞에 행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짜여지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고 행사.
    이방의 태양신 숭배 행위를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드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성탄 예배는 하나님께 우상 숭배 행위를 보여드리는 것.
    이방의 태양신 숭배 제사의 음란죄를 하나님의 집에서 범하고 있는 것.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황을 하나님의 대적자 또는 짐승과 음녀로 묘사.
    그런 카톨릭에서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유월절을 폐지한 후에 이어서 바로 생겨난 것이 태양신
    바알의 숭배일인 크리스마스.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겔8: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25명 여인들이 성전 안에 모여 동쪽 태양을 향해 예배 행위 하고 있는 모습.
    에스겔 때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신을 섬기는 극도의 음란한 우상 숭배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
    하나님 전에서 태양신이 경배 받고 영광 받도록 한 사탄의 적그리스도 행위.
    하지만 교회는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신일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전부터 지켜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성탄절로 지킴으로써 교인들에게도 즐거움 주고,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함께 가장
    많은 헌금이 성탄 헌금 명목으로 교회 재정에 충당되는 대목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 부인하지 못하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요인이기도.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으며, 사도들은 기념하지도 않았고, 초기 교회에서마저 이교도 취급을 받던
    크리스마스는 어느덧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탄생일로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1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날이자, 가장 많은 찬송이 불러지는 날 되었.
    심지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사업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1년 중 가장 많은
    헌금이 모이는 때가 언제인가면, 크리스마스.
    교회가 세상의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그렇게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고착화 돼 있는 관습적 전통에 끌려가고 있.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세상 전통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예배를 받으실까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
    교회가 세상의 관습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고착화 돼 있는 관습적 전통에
    끌려가고 있.
    현재 일요일을 예배일로 정한 것 역시 태양신의 예배일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침이었던 것을 알지
    않으면 안돼.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말씀에 따라 왜곡되어 있거나 변질돼 있는 것들을 바로 잡아 원래의 것으로 고쳐가는 연습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
    하나님께서는 세상 전통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예배를 받으실까는 성경의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
    아담 때 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다는 것을 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최초의 제사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보았.
    그 후로도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진실되지 않은 제사를 멸시하시고 외면하셨.
    (사1:12,13)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1:14) 내 마음이 너희의…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말2:3)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계22: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출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고, 성경에 있지 않은 절기를 세상에서 차용해 와 하나님 전에서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불법 행위.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 행위를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우상 숭배 행위를
    재연하고 있는 것.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행위를 할 때 눈을 감고 귀를 막으시겠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받지 않는 예배 행위는 인본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다 짐승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
    (계13:8)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사람들이 무엇을 통해 짐승들을 경배하게 되는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그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인 성탄절.
    그리고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도 아니.
    크리스마스는 다신교 로마인들이 섬기는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동짓날 1주일 축제에서 유래..
    313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면서 로마인들의 대표적
    축일인 태양신 탄생 축일 축제가 그리스도교 공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들어와 지켜지다가 태양신의
    탄생일로 여기던 날이 예수의 탄생일로 바뀌어진 것.
    그렇게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는 세계로 뻗어 나갔고, 이와 함께 크리스마스도 세계에 알려졌.
    크리스마스가 없었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오늘의 교회들과 같이 12월 25일에 성탄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때의 바울 사도께서는 미리 경고.
    (갈1:8)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와 같은 것들로 사람에게서 난 것들.
    우리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한 믿음만이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이고 기준.
    나는 열심히 믿고 있다 하지만 나의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그 믿음은 믿음 아닌 종교
    행위.
    최종 판단자, 심판자는 하나님.
    (행5:38)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행5: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이 말씀들을 근거로 오늘 교회가 지키고 있는 대림절과 성탄절이 하나님께로 난 것인가를 보면 세상과
    교회가 모두 예수님의 탄생일 로 지키는 12월 25일은 하나님께로서 난 예수님 태어나신 날 아니.
    성경에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짜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역의 기후나 환경 등을
    통해서 그 시기가 언제쯤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말씀 중 하나가 오늘 본문 중에,
    (눅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 말씀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목자들이 밤에 베들레헴 밖의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던 장면.
    팔레스타인 지역도 한국이나 미국과 같이 12월 25일은 계절적으로 겨울.
    그렇기 때문에 12월 25일을 전후로 밤 뿐 아니라 낮에도 양을 방목할 수 없.
    그래서 10월 중순부터는 양을 들판에서 방목하지 않.
    예수님 오신 때는 겨울이 아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간대는 밤.
    (눅2:8,15)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또 다른 근거로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의 호적령에 따리 각 지역 각
    지방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호적을 하기 위해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던 요셉도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고 있던 중에, 요셉과
    마리아처럼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여행 왔을 이 때는 겨울이 아니었.,
    이스라엘의 기후는 雨期와 乾期로 나누어지는 기후 형태.
    雨期는 겨울에 시작되기 때문에 들판과 밭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양 치기에 겨울 우기는 적합하지 않.
    밭은 밀 농사가 끝난 후 휴지기에 들어 쉬고 있는 밭.
    또한 이란 북동부의 파르티아 지역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타고 서너
    달은 족히 걸렸을 거리를 겨울 우기에 추위와 비를 맞으며 순례하는 것과 추위 속에 비를 맞으면서 호적
    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지에서 몇 날 며칠을 여행해야 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이 오신
    때는 겨울이 아닌 가을.
    2027년 전 예수께서 이 땅 인간 세상에 오셨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신 것.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니.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때가 찼을 때.
    ‘그 때가 차매’는, 예수님이 오셨어야 할 그 때가 되어서 오셨다는 말씀 하시면서 율법 아래에서 율법에
    따라 오셨다는 말씀.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는 것에서부터 사역 하시고 죽으시는 모든 것을 율법 안에서 완전하셨.
    (레23장)에는 일곱 여호와의 절기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셨.
    이 절기들은,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모든 절기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예수님이 사역 동안 행동으로 완성되어져.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등의 절기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절기들.
    (요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매(장막 치셨으니)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자세히 보았더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때를 설명하신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사도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계셨던 적이 있었다는.
    우리말 번역에는 ‘장막 치셨다’는 표현이 없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만 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에는
    ‘장막 치셨다’는 단어를 사용하셨.
    장막절 말씀 레위기 23장에,
    (레23:34,47)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새 날은 장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너희는 이레 동안 장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장막에 거주할지니
    음력을 사용하는 이스라엘은 우리 음력보다 약 1달이 빨라.
    장막 짓는 날은 7월 15일로 우리 달력으로는 8월 15일, 추석 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추석 때가 되면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장막을 쳐 놓고는 거기서 기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장막 생활 하는 절기.
    그러므로 장막 쳤다는 것은 예수님이 秋夕 시기에 오셨다는 것을 성경 용어로 표현한 것.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장막 치셨다는 표현을 근거로,
    장막은 장막절에만 치기 때문에 7월 15일, 우리 날짜로 8월 15일 무렵의 장막절 기간에 예수님 탄생.
    그리고 장막절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의 기간이었던 것도 증명 가능.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신 그 날이 장막절 날일 것.
    성경에는 그에 대한 날짜 말씀이 없지만 율법에 의하면 30세 되는 날부터 사역을 시작해야 하므로 그 날이
    되기를 기다리셨다가 장막절 그 날이 되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3년 반 동안 사역을 시작하신 것.
    예수님 사역하시면서 맞은 첫 번째 절기는 유월절.
    유월절 날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희생 되셔야 하기 때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네 번째 지키는 날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알게 해 주시는데,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얼마 동안 사역했는가를 알게 해 주는 근거이기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이 왜 3년 반인가는,
    장막절 날 7월 15일 사역을 시작해서 장막절 부터 유월절 1월 14일까지는 6개월 기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
    네 번째 유월절이 그 이전의 장막절 3년에서 6개월을 합하면 3년 6개월.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은 기름이 준비되어 혼인 만찬에 들어가져서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쳐 주시는 장막을 입어야 하는데 그 모습이,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계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예수님 오신 날도 육신으로 오셔서 사도들과 함께 장막을 치셨는데 이제 마지막에,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에 가서는 그 때 이기는 자들, 이기는 성도는 기름을 준비해서 혼인 만찬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막을 쳐 주신다는.
    이 장막은, (계19장) 한 세마포 옷 입은 성도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2천년 전으로 돌아가서 예수님 오신 날 천사들이 베들레헴에서 양 치는 목자들에게만 나타나 주신 메세지.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우리말 번역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이지만 정확한 번역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에
    맞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다’는.
    하나님의 의지이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합한 사람들.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나팔절에 공중으로 휴거 되어서 속죄절에 심판을 받을 때 거기서 장막절 혼인 만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성령의 기름 준비가 마쳐져 있어야.
    우리의 생이 마쳐지는 그 순간까지 성령의 충만을 유지해야 혼인 만찬에 들어가질 수 있.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前無後無 환난 후에 예수님 오신다셨.
    그 前無後無 환난을 맞고 이겨낼 수 있는 방도와 도구와 수단은 세상에 없.
    오직 성령 충만 되어진 사람들만 도우시고 이기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이겨낼 수 있고, 그
    이긴 자들만이 최후 혼인 만찬에 들어가는 기름 준비한 신부들.
    이전에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있지 않을 그 환난이 온 다음 예수님 오신다셨.
    그러기에 우리 어떤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계12:12) 그러므로 하늘(들)과 그(들) 가운데에 거하는(장막 칠) 자들은 즐거워하라
    세상에 소망 두지 말고 공중에 올라가서 장막 칠 날을 소망하며 바라보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서
    이기는 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 되어야 그 장막 쳐진 사람들의 기쁨을 누릴 수.
    이 세상에 소망 둔 사람들은 소망 둔 세상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
    하지만 2천년 전에 장막절에 오셔서 사도들에게 장막을 치셨던 예수님은 훗날 마지막 장막절에 기름 준비
    마친 이기는 자들 위에 그 장막 쳐 주실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기다리면서 기뻐하고 경배해야 할 분은 “너희가 본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대로 다시 오시되 심판주로 오실 재림 예수를 기다려야.
    이것이 ‘再臨의 待臨’.
    再臨하시는 주님 기다리는 마음은 연습 없는 1라운드만의 게임.
    2라운드의 second chance는 이제 없.
    (122423 Patris)p 再臨 待臨 눅2:8-12 (1-20) 125 천사들의 노래가
    우리 인생의 나머지 1라운드 게임에서 이기는 자 되어 이기는 자들에게 쳐 주실 장막 안에서 신랑의 손에
    이끌리어 천년 왕국 혼인 잔치 만찬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즐거움에 참예하는
    그러기에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공중에 올라가서 장막 칠 것에 두어야.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캐롤 따라 부르면서 즐거워 했던 우리, 언제까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아기 예수 탄생
    노래를 고장난 레코드 처럼 반복하고만 있을 수 없.
    우리가 기다려야 할 분은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 예수.
    그분을 기다리는 준비된 신부로서 기름 떨어뜨리지 않고 등불 꺼지지 않도록 신실하고 진실하게 온 맘과
    정성 다해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 맞을 준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준비된 신부로 남은 날을 살다가 그날에
    공중에 올라가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영원한 장막 칠 준비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다해
    충성하는 순종의 예배자, 기름 준비된 신부로서 삶의 대단원 마무리.

    (111923 Patris) 聽音 행 12:12-16. 219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행12:11-16)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야고보 사도 목베임 죽임 당한 이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사도들이 모여 있는 마가 요한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집 안에 함께 있던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들었기 때문.
    여자 아이가 아니었어도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만 탈옥수를 찾아 뒤쫒아 올지도 모를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않은 베드로는 누군가
    열어 준 문으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것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되 중요하거나 긴박한 상황이 대부분.
    성경에는 오늘 본문 말씀 외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그와 함께 들려오는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가 문 열 수 있는 민감성과 순발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영생의 문제가
    달라지게 되는 말씀이,
    (계3:19,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이 문 밖에 오셔서 문 두드리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가 그것.
    영생의 떡 들고 문 두드리시며 우리 이름 부르시는 주님 음성 듣지 못하면 정말 낭패.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구분할 줄 알고, 그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없고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주어지게 될 것이기에.
    성경은 羊은 주님의 음성을 아는 동물로 의인화 시켰고, 주님의 음성을 모르는 동물로
    염소를 들고 있.
    1. (요10:1-5)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10:7-9)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과 염소 구분 기준은 복음 – 오른편과 왼편
    (마25:33,46)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46그들 염소는 영벌에, 의인
    양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말씀의 꼴로 장성하도록 양육된 양은 오른편의 영생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은 염소는
    왼편에 놓여져서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셨.
    그 염소들의 행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는 상관 없이 다른 복음을 받고 용납하면서
    처음에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성령 소멸된 육체로 마치는 자들.
    (고후11:4)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갈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주님의 말씀의 꼴로 장성된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렇지 않은 염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져서
    (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결말을 맞게 될 것.

    예수님께서 (계3:20) 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함께 만찬을 잡수시겠다신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함께 두 주인을 섬기다나 주님께 징계 말씀 들은
    교회이면서 영적 빈혈 상태에 있는 교회라고 진단하셨.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주님이 보시기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머리로 익힌 지식이 많은 것일 뿐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아가페 사랑이 없는 교회.

    말씀에 대해 知的同意는 되어 있는 수준일 뿐, 말씀이 믿음으로 성장 성숙되어지지 못했.
    知的 同意는 믿음 아니고, 知的 同意로는 구원받지 못.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의 실상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교회.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여유로워졌고 부족함 없이 안락하지만,
    비지니스가 잘 돼서 돈 잘 벌고 좋은 집에서 여유로운 누리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가난하여 영양실조 상태.
    육과 영의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 멈과
    벌거벗음이 영적 허영심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일곱 교회의 실태가 오늘 우리의 실태
    한 두루마리의 편지에 일곱 교회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각 교회가 자신의 모습과 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타산지석 반면교사 삼으라고
    사데 교회의 죽음은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 죽은 신앙, 죽은 믿음,
    영적 죽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내용.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리실 처방을 생각해 보아야
    (계3:18,19) 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하라셔.
    무엇을 회개하라시는가.
    회개는 지금의 생각, 행동, 삶 일체를 바꾸라시는.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스스로 속이지도 속지도 말라 말씀.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러시면서 이제 주께 불로 연단한 금으로 부요케 되어 흰 옷 사 입고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 사서 발라 고쳐진 눈으로 너의 지금 상태를, 너의 가난하고 헐벗고 수치스러운
    정체를 바로 깨달아 보고 회개하라 말씀.

    그동안 너 자신이 너를 속였고, 너는 스스로 속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
    부자라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너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먼 소경이고 벌거벗은 자라는 것.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인의 전형적 인물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 얻는 방법을 여쭙는 장면이,
    (마19:20-23)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막10:20-23)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눅18:21-25)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빌3:6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성경이 큰 부자라 인정 한 이 젊은 부자 청년은 자기의 富와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知的
    同意로는 자기를 구원받게 하지 못했.
    청년 :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善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청년 : 그 청년, 그 사람이 큰 부자로서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슬픈
    기색을 띠고 가니라
    예수님 : 재물이 있는 자,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심히
    어렵도다

    이 청년 관원은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았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았었다면 예수님께 나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질문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정녕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면 네가 아직도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 너에게 있는 것들,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신
    말씀이 청천벽력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말씀에 근심하는 마음으로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뒤돌아 갈 수 없었을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그리고 난 후에 와서 나를 따라 하늘에 있는 보화를
    침노하러 가자신 말씀 따라 예수님 제자 될 수 있었을 것.
    하지만 이 사람은 자기 의가 자기 눈을 가리고 있었고, 자기 귀를 막고 있었.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보지 못했고, 하늘에 있는 보화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마지막 남은 이 땅에서의 성취 목표인 영생을 얻으러 나온 그
    자리에서 그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말씀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
    이 젊은 부자 청년 관원은 예수님이 그의 보는 앞, 듣는 앞에서 그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들었어도 온전히 깨우쳐 알아듣지 못했.
    聽音의 귀, 들을 귀는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고, 볼 눈 있었지만 보지 못했.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살지 않은 사람.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 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로 끝나지 않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주님을 따라야 한다시는 말씀으로 그 청년과의 대화가
    마무리 되었.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하늘에 보화가 있는 자들.
    청년과 대화 중이신 예수님 주위에 12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그 외에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
    제자들 모두 자기들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는 자들
    (마19:29; 막10:28;눅18:28)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마19:28,29;막10:29,30;눅18:29,30)

    (막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
    주님을 따르는 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인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필경 주님을
    버리고 돈을 섬기고 재물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내 소유, 나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주님과 복음을 따르는 길에는 마태, 누가 복음에는
    없는 말씀이 마가복음에는 있는데,
    집이나 형제 자매나 부모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 백 배를 받을 뿐
    아니라 내세에 영생을 받을 것이지만 현세에서 박해를 겸하여 받게 될 것이라 했.
    주님과 복음 위해 따른 길에는 반드시 고난과 박해가 있다시는 말씀.
    이 말씀을 바울 사도도 디모데에게,
    (딤후2:3,4)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잠19:17,11:24,25)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마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눅16:9)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반면 하나님께서 빚 갚지 않은 자는 추심 하신다셨.
    (겔3:17-21)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이 말씀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면,
    (계3:19,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하면,
    (계3:21,2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은 교회들의 문을 계속 두드리면서 교회들이 문 열고 나와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셔.
    그리고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영접해 모셔들이는 교회들을 ‘이기는 그’라 하시면서
    ‘이기는 그’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셔.
    ‘문을 열라’신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주님께서 문 두드리실 때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나와 문 열어줄 교회가 없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
    마치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베드로도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옥문을 열고 나오게 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집 문 두드릴 때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듣고 기뻐하여 베드로에게 문 열어 준
    로데라는 여자 아이와 같이,
    문을 두드리시는데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것이 아니.
    문 두드리는 소리는 그 소리로 누구인가를 주의하거나 경계하게 하는 단계이고, 문을
    열게 하는 것은 문 두드리는 사람의 음성.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을 열게 하는 주체는 주님의 음성.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음성을 알아보고 열어드리는 것.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가 주님께 문 열어드리고 맞아들이게 돼.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알아.
    (요10:27) 내 羊은 내 音聲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羊은 내 音聲을 알아 듣는다셔.
    주님은 주님의 音聲을 알아듣는 양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시는가면,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계3:20,21) 누구든지 내 音聲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수요 성경 탐구 - 적그리스도 (115823)


    수요 성경 탐구 - 제 3 성전 (110823)


    수요 성경 탐구 - 예루살렘과 성전 (110123)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102923 Patris) 고도Godot를 기다리며 마25:1-2 162 신랑 되신 예수께서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셨는데,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을 침노한 사람이 얼마나.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을 기다리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천국은 오지 않을 사람들 많아.
    어쩌면 생이 다하도록 기다리지만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천국 기다리다가 생이 마쳐질 사람들 역시.
    누구에게든 침노하면 침노 당한다신 그 천국을 우리는 지금 침노해 가고 있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셨다 하여 아무나 침노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아무나 침노를 시도한다 하여
    침노 당하는 곳도 아니.
    그러면 천국은 누가 침노할 수 있고 누구에게 천국은 침노 당하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 예수님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은 삶의 천국의 삶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예수님 제자들에게 말씀,
    너희가 기다리는 인자의 날들 중에 하나님 나라의 임하는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눅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천국을 볼 수 있는 사람, 천국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예수님께서 복음서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말씀.
    천국은, 하나님께서 절대적 사랑이신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말씀.
    하나님 나라 천국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셨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침노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 안에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 임할 수 없다셨.
    (요일2:14)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를 아는 너희는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흉악한 자를 이긴 너희는,
    (요일2:15-16) 너희 마음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셔.
    그런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뭔가면,
    (요일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
    그러시면서,
    (요일2:20)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는 너희가
    (요일2:21-22)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안다고 한다면
    너희는 거짓말 하는 자이며,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냐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라.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침노하여 소유하고 누리는 자인가.
    지금까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던 내 마음이 비워지고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있는 사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죽는
    것.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던 것을 내려놓고 죽는 것이, 그동안 내가 굴복당하면서 살았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른 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자기 몸을 위하고, 자기 이름과 명예를 드러내고, 세상에서 힘과 권력과 재물과 이름과 명예로 자랑스러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이유.
    그렇지만 이와같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
    예수님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살아나 구원 받고 자기가
    미워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영원토록 보전하게 될 것이라.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목숨을 잃는가면 ‘나를 위하여’
    – 예수님을 위하여.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사역 첫 해에도 제자들에게 하셨고, 죽으시기 며칠 전에도 하셨.
    자기 목숨의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의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우리가 각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라면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은 잃어버린 생명인 반면, 세상 사는 동안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미워하는 내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시켜 주시겠다 말씀.
    나는 나의 생명을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
    우리 중 누구도 내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없고, 미워하는 사람 없어.
    오직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위하여만 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이고 자기 목숨의 혼을 부인하고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말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을 위해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 지고 내 목숨을 버리는 자라야 구원 받을 것이고 다시 살리셔서 다시
    살려주신 생명이 영원토록 보전되리라 말씀을 알고 또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
    내가 부인되어지지 않고, 자기 십자가 져지지 않고, 자기 목숨 버리고 잃는 것이 안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의 한계.
    예수님을 위해 나의 혼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 땅의 것으로 영원의 것을 산다는 것.
    90살, 100살짜리 육의 목숨 중에서도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육의 혼과 세세태록 영원한 생명의 맞바꿔
    주시는 수지 맞는 육과 영의 교환 작업.
    따라서
    죽음은 오히려 살리심 받아 구원 받아져서 살리우심 받고 그 생명이 영원토록 보전되리라신 말씀이
    시작되는 순간이고, 죽음은 새 생명, 새 삶, 새 인생, 영원한 새 인생의 시작.
    이 말씀을 근거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위해 날마다 죽고 있어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 사도는 죽는 것을 단언하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셔.
    날마다 죽노라고.
    죽되 세상에 대하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고도가 왜 와야 하고, 무엇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도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오늘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은 올 것이고, 내일도 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확실한 희망 속에 인간은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심도 있는 삶의 진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우리는 어떤 ‘고도’를 기다리면서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으며 또 내일을 살고 있는가.
    그 ‘고도’, 우리가 날마다 매일 기다리고 있는 그 ‘고도’는 오기는 할까, 그 ‘고도’를 기어이 만날 수 있기는
    할까.
    사람마다 ‘자기의 기다리는 고도’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도’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인생.
    성경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고도’, 천국을 가장 쉽게 설명해 주신 말씀이 열 처녀 비유.
    1. (마25:1,2)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그러므로 천국 생활은 등을 들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 천국 생활.
    燈은 (잠언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The lamp of the LORD
    searches the spirit of a man ; it searches out his inmost being.
    성령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는 여호와의 등불이라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육신으로 모태에서 태어나지만 그 속에 있는 영은 죽어 있는 상태.
    그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을 거듭나는 것이고 거듭난 사람들이 깊은 곳까지 성령께서 살피셔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셔.
    그런데 이 열 처녀가 燈을 들고 거듭나서 예수님을 기다리며 졸다가 열 명 모두 잠들었.
    (마25:3-5)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25:6,7)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셨고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모든 기독교인.
    모든 기독교인들이 잘 믿었건 못 믿었건 성령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다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야.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기름을 준비해서 등을 다시 켤 수 있느냐 기름이 떨어졌는가를 심판하신다는 말씀.
    기름은 성령.
    기름이 준비된 자들만 혼인 만찬에.
    (마25:10)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오시면 영의 몸을 입고 공중에 올라가지는 거기서 기름이 준비된 성령 충만한
    자들만 천년왕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옥 불에.
    세상의 기독교인들 모두 공중에 올라가져서 혼인 만찬에 들어갈 수 있는 수는 많지 않다시는 말씀.
    (눅13:23-24)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님 오셨을 때 등불 들고 기다렸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마25:15)에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서셔 공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미리 신약에서 미리 말씀.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기 하루 전에 하신 설교, 천국은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같다셨.
    열 처녀는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
    이 열 처녀 모두 믿음 좋은 예수님을 신랑이라 믿는 믿음 좋은 신부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열 처녀를 가인과 아벨 구별하듯 구별하셨.
    예배의 등불을 켰지만 이 등불이 꺼져버릴 사람과 끝까지 꺼지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셨.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마찬가지로 주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구별하실 것.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등잔의 불은 그 날까지 타오르는 불꽃인가 그렇지 않으면 기름이 떨어져 심지까지도
    새까맣게 타 버린 불 꺼진 등잔인가.
    성경은, 천국은 처음부터 준비된 자만 들어갈 수 있다셨.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이 주님이 아담과 가인으로부터
    내려온 생명이라면 바뀌어져야만 하는 생명.
    거듭나서 바뀌어진 생명만 천국에 들어갈 수.
    사람이 거듭나지고 바뀌어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이 문은 생명의 길, 복음의 길로 들어서는 좁은 문, 좁은 길.
    좁은 길로 난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좁고 협착한 길.
    어렵고 힘들어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이 길이 어떻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는 이 생명의 길, 복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른다셨.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딤후1:8)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은 예수 믿기만 하면,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
    (롬10: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열 처녀 모두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다리고 있었.
    열 처녀 모두 구원의 확신이 있었던 믿는 사람들.
    신랑이신 예수님이 데리러 오실 것을 믿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이들을 구별하신 주님은 이들 중 다섯에게
    (마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주님은 기름 떨어뜨린 다섯 처녀의 행동과 내용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셔.
    단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말씀.
    주님은 자기 소유만을 아셔.
    지금 예배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생명이 결정돼.
    우리의 진짜 생명이 달린 문제.
    (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생명은 자기 혼.
    자기 생명인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셨.
    자기 생명인 자기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시겠다셔.
    1. (딤후3:1-7)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071623 Patris) 독립기념일은 지키면서 7:22,23
    구원의 복음은 어른과 어린이에 차이 없.
    어른용 복음 따로 있지 않고 어린이용 복음 따로 있지 않.
    (딤후2:22)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님의 뜻 아닌 내 뜻대로 살아온 생명은 헛된 것.
    (전11:10-12:1,8)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한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자기 혼을 미워하는 것이 자기 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회개.
    자기 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기 혼을 미워하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셨.
    자기 혼을 미워하는 것,
    (눅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 될 수 없다셔.
    자기 혼,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을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할 뿐 아니라 나아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라 말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육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사람
    육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치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
    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
    다섯은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자기 혼을 사랑하는 자, 육으로 마치는 사람
    다른 다섯은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자기 혼을 버리는 사람, 성령으로 마치는 사람

    수요 성경 탐구 - 보응과 복 (102523)



    수요 성경 탐구 - 다툼 (101123)





    수요 성경 탐구 - 언약 그리고 성취 (101823)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13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 명하시면서 지키라 주신 절기가 7개, 7대 절기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신 까닭은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영원히 거하시며 영생의 복 주실 것을 말씀 주셨(시132:13-14,
    133:3).
    여기 시온은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이 세웠던 시온성이 아니라, 영적 다윗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우실 영적 시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영적 시온이 어딘가면,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33:20-24)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 시온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절기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 사함의 복이 있는 구원의 장소라셨.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6:23) 죄 사함을 받으면 사망이 없어져 영생할 수 있게 하시는 곳 시온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셨(시87:5, 102:16).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안식일과 모든 절기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등 절기를
    세우심으로 시온을 건설하시고, 죄 사함과 영생을 약속하셨(눅4:16, 마26:17-28; 요7:2, 14).
    (눅4:16-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절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마다 지켜야 하는 3차의 절기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신16:16-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일년 3차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반드시 지킬 것을 명하셨(대하8:13).
    (대하8:12-13)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13모세의
    명령을 따라 매일의 일과대로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그 중에 칠칠절을 맥추절,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출23:14-17, 34:18-23).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레 23장)에서 일곱 가지의 절기를 계절과 시기로 구분했을 때 대표되는 절기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3차의 7대 절기’라.
    1차 절기: 유월절(逾越節), 무교절(無酵節)
    2차 절기: 초실절(初實節), 칠칠절(七七節)
    3차 절기: 나팔절(喇叭節), 속죄일(贖罪日), 초막절(草幕節)
    하나님께서 절기를 제정하실 때 모세가 출애굽 할 당시부터 성막을 세우기까지의 행적을 따라
    제정하셨.
    과거 역사일 뿐만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실 일들에 대한 예언.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 ” (신18:18-19)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모세)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때)를
    가리켜 말했느니라” (행3:22-24)
    예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까닭은 모세가 했던 일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각 절기에 나타난 모세의 행적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
    (요5:46) (너희가)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유월절 -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무교절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
    초실절 -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오심
    나팔절 – 그리스도 초림
    대속죄일 –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하심
    초막절 – 심판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초막절은 여호와를 구속자, 창조자로 경축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적 절기로 지난 9/29 금
    부터 엊그제 10/6 금까지 일주일간 지켜졌던 절기(레 23장).
    마지막 추수를 기념하면서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않고 기념하며 감사
    찬양하는 절기로 정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 복 주실 것이지만,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재앙 내리심의 벌을 받을 것이라 말씀.
    그러시면서 종말의 그 날에 열방의 남은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왕으로 송축하며 그를 한 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 예언의 말씀도.
    그 말씀이 (슥14:16-19),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열방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를 만왕의 왕으로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인데, 애굽 족속을 비롯하여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재앙을 내려 벌이 임하도록 하실
    것이라셨.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겠다신
    것은,
    실제로 초막절 절기 다음부터 우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가을 추수를 마친 상태에서 봄 수확을
    위해 파종해야 하는 시기에 알맞은 비가 내리는 것은 봄 수확에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초막 절기에는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번제를 드릴 때에 전제처럼
    제단 밑에 길어온 물을 붓는 의식을 행했.
    탈무드는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이런 행사가 바벨론 포로 이전에도 있었다고 기록.
    (사12:3)은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의식에 두가지 중요한 의미.
    1. 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에 있는 장막절에 물을 긷는 일은 앞으로의 비에 대한 강한 염원이 담겨
    있으며 백성에게 복 주시리라는 상징적 의미. 그러므로 장막절에 성전에 올라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스가랴서에서 하신 의미도 내포.
    2. 광야의 므리바 반석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나와 백성이 그 물을 마신 사건을 기념하기도.
    영적으로 그들은 성령이 강같이 흘러나온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이곳을 ‘물 긷는 집’이라 한 것은 (사12:3)에서의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성령을 긷는다는 의미.
    이와 같은 행위는 추수에 대한 감사와 함께 미래의 곡식을 위해 비를 요청하는 기도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점차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실 것을 비는 기우의 행위로 변질.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장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 올라가셔서 물 축제 사람들에게 설교하신 까닭.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7-38).
    이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은,
    (고전10:4)에서”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말함으로써 실로암
    연못에서 물 긷는 사람의 행위를 우상숭배 행위라 경고하기도.
    (고전10:1-7)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이것이 장막절의 주님 메시지.
    주님은 장막절 마지막 날에 가셔서 물 축제에 가서 이 설교를 하셨.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죽은 물 떠 오는 죽은 행실 하지 말고.
    (요4:13-15)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다른 것으로 목말랐고, 목마른 나, 주님의 생명수로 목말라야.
    다른 것 보다 주님의 것을 원해야.
    그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강 좌우에 달마다 열두가지 다양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가 있게 하는 생명수의 강이라 하셨.
    이 생명나무는 십자가.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생명,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포도나무.
    이것이 바로 마지막에 거기서 생명수를 공급해 주는 장면.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 영과 신부가 말하기를 당신은 오시옵소서 하는도다 듣는 자도 당신은 오시옵소서 할 것이요
    목마른 자가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명령문.
    첫째, 복음을 들은 사람은 ‘주님 오시옵소서’ 하라셔.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우리 일상에서 ‘주여 오시옵소서’ 말하지 않아.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의 마지막 명령의 말씀이 이것.
    ‘주님 오시옵소서’ 안에는 ‘나는 오시는 주님 맞아 모셔들일 준비돼 있습니다’.
    우리 아무 때고 오시는 주님 맞을 준비돼 있어야 한다시는.
    두 번째, ‘목마른 자가 오라’
    오되 목마른 자로 오라셔.
    주님께는 목마르지 않은 상태로 오지 말라셔.
    세상에 취하고 세상의 것을 채워져서 주님께 올 수 없다시는.
    세상의 것들은 형식적 가짜.
    세 번째, 원하는 자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리라.
    원하지 않으면 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마실 수 있다셔.
    이 말씀이,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상이신 하나님의 명절.

    (100823 Patris) 나의 절기 신16:12-15 409 목마른 내 영혼
    그러므로 내 신앙 인생의 모든 절기들,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어져 가는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으며,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유월절에서 오순절로 나아가기 원하고 나팔절에서 속죄일을 지나 장막절로 완성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내 신앙의 모든 절기들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지는 그 날까지
    이기는 자의 믿음의 삶.





    수요 성경 탐구 - 장막절 (초막절 / 수장절 / Sukkot / The Feast of Tabernacle) (100423)


    수요 성경 탐구 - 대 속죄일 / 욤 키푸르 (092723)


    수요 성경 탐구 - 로쉬 하샤나 신년 나팔절 (092023)



    https://www.youtube.com/watch?v=6D-UaedqOjk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 하나님 나라 – 하늘에 있다시는데, 아직은 우리 손에 쥐어진 것 아니.
    우리가 거기에 가서 받아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만약 정한 기한이 지나도록 수취해 가지 않으면 말소되고 폐기되어져.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시민권 수취 통지 받은 우리 모두, 정해진 기한에 시민권 수취 확인 명부에 기명날인
    하고 시민권을 받아야.
    정한 기한은 우리 삶이 남아 있는 동안이고, 그 동안의 삶의 내용이 무언가는, 믿음의 결국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내용.
    베드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결국인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
    (벧전1: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1:13-15) 그러므로(너희가 할 것은 없고 오직)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리고는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믿음의 결국 – 영혼의 구원, 즉 ‘혼의 구원’인데, 이 ‘혼의 구원’은 대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항상 복종해야만 하는데,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면서 사명 감당해야 얻을 수 있다 말씀.
    무엇을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는가면 (벧전1:17) 너희가 이 땅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 행하는 모든 행위를
    두렵고 떨림으로 행하라셔.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에 세 가지 나라.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세상 나라, 우리 주의 나라 하나님 나라, 앞으로 올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 왕국
    세상나라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왕 마귀 사탄이 왕 노릇 하는 나라.
    사탄 마귀가 왕 노릇 한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부터 세상 나라 시작되었.
    마귀가 결박되어서 무저갱에 들어갈 때까지는 세상 나라.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세상 나라에 거주하고 있.
    그리고 주님 재림하실 때 마귀가 결박되므로 주님이 재림하실 그 때까지 세상나라는 존재하게 돼.
    그러는 중간 도중에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개입.
    이 나라를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성령 세례 받으시고 성령을 힘입어 사역하시는 순간부터 천국,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이 하나님 나라는 백보좌 심판까지 계속.
    그러므로 (계11:15) 말씀을 근거로 세상 나라만 있었다가 예수님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신 성령을 입고
    사역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나중 예수께서 재림하신 때부터는 하나님 나라 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시작.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세상 나라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 장악된 자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그들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으로 남아 여전히 죄악된 세상의 삶을 살고 있는 중.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엡2:2)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져 간 것인데,
    이 과정에서 세상 나라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우리 누구도 하나님 나라 가는 비행기 타기 위해
    여권에 입국 비자를 받았는가면,
    우리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비자를 받은 기억 없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 비자를 받았.
    그 근거 말씀이,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물로 세례 받았고 성령으로 세례 받은 우리 모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회개한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 입국 비자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
    우리가 성령 세례 받은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증거 말씀이,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들이 요구하고 있는 조건들이 우리 매일의 삶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를 수 있는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격을 성령께서 주셨.
    (고전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들을 근거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진, 자격 있는 하나님의 나라 입국 비자 받은 삶을 살고
    있는 중.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비자에 찍혀 있는 기한 동안 비자 받은 목적의 삶을 내용으로 살기만 하면 돼.
    비자 기한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시간 만큼인데, 그 남은 비자 기한 동안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에 대한
    유종의 미를 잘 마무리 해야.
    구원에는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 두 가지.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영과 혼의 구원이 함께 완성되어져야만.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적 죽은 상태여서 그대로 자라 살다 죽으면 지옥 멸망으로 끝나는
    인생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있어야만.
    그 예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통해 보여주셨.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로 그리고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로 난 것은 어머니 뱃속의 양수에서 나온 것이 물로 난 것.
    이것은 육의 어머니 뱃속 양수에서 육적 세상 나라로 들어온 것.
    그러면서 영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영이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될 수
    있게 하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신 말씀.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왜 영으로 태어나야 하는가면, 육으로 태어나 육으로 살고
    있는 누구도 영으로 살아 있는 자 아니고 영적으로는 죽어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기
    때문에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입어야만 한다신 것.
    (요6:63;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아담 이후로 영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죽어 있었.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영이 죽어 있는 누구라도 죽어 있는 영이 살아나게 해야만 하는데,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시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죽은 영이 살아나게 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지만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충만케 거하시는 살아계신 영이시기 때문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언제라도 소멸되시고 떠나시는 영이신 것을 알아야.
    그렇기 때문에 늘, 언제나, 항상 성령께서 나에게 내주 교통하시도 충만하시도록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안.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영이시고 생명이신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 위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령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그러면 혼은 어찌 되는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혼은 육적 생명을 의미.
    혼의 삶(생명)의원리는 육체적인 죽음의 시간에 없어지는 사람의 육과 정신과 생각과 마음을 이성적이고
    정신적으로 연결시켜 다스린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 존재.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혼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마다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사람 전체로 표현.
    혼과 영은 연결 되어 있지만, 동시에 분리되어 있.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러므로 영은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한 면이고,
    혼은 인간의 본질이며, 혼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 내면 정서.
    따라서, 영의 구원은 살리는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에 의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 거듭 나지는 것이고,
    혼의 구원은 나의 생각과 의지가 죽고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 되어지는 것.
    이 과정에서 나의 육과 생명에 관계된 내 안의 자아와 정서와 가치와 성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것들과 한 가지로 통일되는 것이 성경에서 혼의 구원.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내게 지워져 있는 나의 십자가가 하나 될 수밖에 없.
    예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고자 하신 뜻의 초보적인 장면을 보여주신 곳이 있는데,
    천국이 아이들과 같은 자의 것이라 축복하신 예수님에 대해 복음서는 부자와 천국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겨 주셨.
    (막10:17-27)은 부자 청년 관원 이야기.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청년을,
    마태는 청년(마19:20, 22), 누가는 관원(눅 18:18)이라 했고, 세 저자 모두 재물이 많은 부자로 묘사.
    예수께서는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말씀에,
    재물을 사랑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뒤돌아 예수를 떠나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평소에 그의
    우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율법의 제 1 계명을 위반하며 살아온 것.
    영생을 위해 찾아온 부자 관원 청년에게 주신 예수님의 권유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영생의 주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마 10:37-).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돼.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 관원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했.
    재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실은 재물을 신으로 믿었던 것.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친구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마 6:24) 재물을 선택한 결과 구원의 주님, 영생의 주님 앞에서 하늘의
    시민권을 파기당하고 소실
    간절히 원했던 영생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가는 비자를 끝내 받지 못했.
    안타까운 것은 주님 예수께서는 이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셨었.
    (막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 나와 영생 얻을 방법을 찾고 물은 부자 청년 관원이 영의 구원을 얻었을까의 의문도 있지만,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혼의 구원은 더더욱 전무했.
    재물이 많되 많은 재물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 하늘 보화 천국 영생보다 귀했기 때문.
    구원은 영생의 주님, 구원의 주님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만으로 완성되어지는 것 아니.
    가룟 유다가 그 증인이고, 예수를 따르며 호산나 외쳤던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못박으라 외쳤던 폭도의
    모습이 진짜 모습이었던 것을 보았던 우리는 알 수 있.
    물과 영으로 거듭난 것에서 머물면 안돼.
    혼이 거듭나서, 혼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구원의 완성이 성취되어진다는 것 알아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져서 살고 있.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살고 있는 중.
    문제는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있다 하여 그것으로 구원이 완료된 것 아니.
    우리에게는 기필코 들어가야 할 나라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 왕국.
    거기에 들어가서야 ‘믿음의 결국인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 구원이 완료된 것이기 때문.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달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계셨을 때부터 이미 있었.
    (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신 말씀의 너희가 누구인가면 바리새인들.
    (눅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말씀.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계실 때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또 다시 말씀하신 곳이,
    (마12장)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쫒아낼 수 없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
    분사의 계속적 용법으로 임하였다 말씀.
    (마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일 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
    (요18장) 예수님 빌라도 법정에서 하시는 말씀.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시면서,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가 내 종들,
    천사들을 동원해 세상의 유대인들을 무찌르게 하셔서 지금처럼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셨을
    것이라시면서,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러므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두 번 반복 말씀.
    이 말씀 하신 예수님께서는
    (눅22:30)에서 사도들에게 말씀.
    너희가 앞으로 내 나라에 있게 될텐데 거기 내 나라의 내 상에서 먹고 마실 뿐 아니라 보좌에 앉아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리라 말씀.
    그 나라, 장차 있게 될 내 나라는 언제 임하게 되는가를 (계11:15) 에서 확인시켜 주셨.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나팔을 부는 순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데 그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되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이라 말씀.
    세세토록은 천년 왕국의 기간.
    성경에 ‘천년 왕국’의 단어적 표현은 없지만 (계20:4,6)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말씀하셨.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누구인가면,
    살아 있을 때 예수를 증언한 사람들, 살아 있을 때 하나님 말씀 때문에 목베임 순교 당한 사람들, 살아 있을
    때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둘째 사망도 다스리지 못하고 해 끼치지 못할 사람들이라셨.
    (계20:4,5)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6-8)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눅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천 년 왕국은 분명히 있.
    그렇기 때문에, 이 천 년 왕국 들어가는 ‘천 년 왕국 입국 비자’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 오늘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지상 최대 사명.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완성적 의미.
    구원은 한 마디로 ‘천 년 왕국’에 입국하는 것.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에 와 있으니까 우리는 천국 가는 여권, ‘영의 구원’은 받은 자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구원이 ‘혼의 구원’.
    (벧전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셔.
    그렇게 구원 얻기 위해 남아져 있는 것들이 이루어진 끝에 얻어지는 것이 구원이라시면서, 그러면 그
    구원이 무슨 구원인가면,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이라 한글 번역.
    영어 – (KJV/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영혼’이 아니라 ‘혼들’, 복수 명사 사용.
    그러면 이 ‘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베드로 사도 가르쳐 주셔.
    (벧전1:6-9)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091723 Patris) 하늘의 시민권 빌 3-20; 벧전 1-9 313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어 – (KJV/NIV) for you are receiving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이 과정들을 거쳐서야 비로소 ‘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셔.
    그런데 이 ‘혼의 구원’은 무엇의 결국인가면 ‘믿음의 결국-the goal of your faith’.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적이게도 ‘혼의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의 결국’까지 갈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해.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함량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소망 있게 하셔서 우리를 위해 간직해 놓으신 유업을 잇게 하시는 예비하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 받게 하셔서는 그 믿음으로 기필코 결국 ‘혼의 구원’을 받게 하신다신
    말씀이,
    (벧전1: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세에 너희에게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 ‘혼의 구원’이고, 이 ‘혼의 구원’을 받은 자라야 ‘천 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
    이것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 확인시켜 주신 ‘혼의 구원’
    한글 성경에서는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사용.
    대부분의 곳에 ‘영혼’이라 돼 있지만,
    영어 성경은 반드시 ‘영’은 ‘spirit’, ‘혼’은 ‘soul’로 명확히 구분 사용.
    당연히 헬라어 신약 원문에도 구분되어져 있 - ‘프뉴마, 영’, ‘프쉬케, 혼’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
    그런데 우리에게는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점검할 것이 있는 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야.
    그리고 살았을 때 주님 오시면 그 때 공중으로 올라가져서 ‘공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어야.
    그러면 그 때부터 시작되는 나라가 ‘천 년 왕국’, 그리스도의 나라.
    우리 모두 그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지금 천국,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지만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훗날에 반드시 가야 하는
    나라가 있.
    살아 있는 동안도 가질 수 있는 그 나라, 죽었다면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서 가야만 하는 그 나라, 살아서도
    뒤따라 올라가야 하는 나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혼인 잔치가 있는 그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천 년 왕국.
    (마25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
    열 처녀 모두 등을 들고 있었.
    등을 들었다는 것은 영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믿는 자들. 신자들.
    그러나 이들 중 다섯은 ‘천 년 왕국’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다른 다섯은 바깥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다가 결국은 (계18장) 깊은 바다에 연자 맷돌이 바다에 던져져서 다시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바다에 빠져
    천 년 동안 있다가 (계20장)의 백보좌 심판 때 나와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그 때 그것을 확인
    받아야 해.
    어차피 떠나야 하고 반드시 떠나야 하는 여행
    준비 철저히 해서
    영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혼의 구원을 이루어야 주님 오시는 날 천 년 왕국에 들어갈 수 있.
    그것은 천 년 왕국의 입국 비자이기 때문.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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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27-2023(주일) 설교 원고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we are God&#39;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예수를 믿는 이유, 목적 – 다시 오시는 예수님 맞는 것.
    (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성경의 결론 (계22장)에서 예수님 말씀.
    “7내가 오리라 12내가 오리라 20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은 오실 때 신부를 맞아들이는 신랑으로 오실 것.
    그러면 신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하는 우리는 언제라도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준비된 신부 되어 있어야.
    그런 면에서 우리 누구도 지금 당장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셨을 때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가.
    성경은 우리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셨는데, 우리 모두 흰 세마포 드레스
    준비돼 있는가.
    언제라도 입고 혼례식장 입장할 수 있는 세마포 드레스 준비돼 있는가.
    세마포
    주님은 흰 세마포를
    ‘빛나고 깨끗한 흰 세마포’라시면서 성도들이 보여야 하는 옳은 행실이라 가르쳐 주셨.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 – (K) the righteousness of saints (N)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
    성도의 옳은 행실 행위는......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는 것.
    (요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계 20:12-13)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마25:34-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 자들 돕고 보살피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이 임하게 하신다셨.
    이것이 은혜 입은 자, 빚 진 자의 겸손과 순종의 모습이고,
    은혜를 알고, 빚 진 자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
    받았을 때 겸손과 순종으로 초청장 받아들고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오라 청함 받았지만 밭일
    하러 가야 하고, 사업차 출장 가야 하고, 시집 가고 장가 가야 한다며 하나님의 천국
    혼인잔치 초청을 외면하고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간 것
    같이 세상의 자기 일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따르는 것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보여주시면서 이 사람들이 애당초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기는 했어도 실상은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라 하셨.
    그 사람들이 (마22장)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 받았던 사람들.
    (마22:2-5)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청함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합당치 않다 하나님 말씀.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평소에는 신실해 보이고, 열심과 열정으로 헌신과 봉사도 하지만 정작 혼인잔치에
    참석할 것을 청함 받았을 때는 고작 잔치국수 한 그릇 때문에 세상의 일들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마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
    하니
    그러므로 사거리에 나가 길에서 만나는 대로, 악한 자이든 선한 자이든 만나는 대로
    아무나 모두 데리고 오라고. 그랬더니,
    (마22:9-10)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
    (행13:42-45)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마땅히 청함 받기에 합당해 보이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만 정작 청함 받았을 때는 응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비방하고 있는 청함 받았지만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바울 사도의 말씀,
    (행13:46-49)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복음에 초청받았지만 청함 받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배척하며
    위해를 가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청함은 합당치 않은 청함이었음이 드러났고, 이에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복음 전해 들은 모든 이방인들은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다음 안식일에도 또 말씀 전해 줄 것을 요청하는 현장의
    사람들이 청함을 받아 청함에 순종하여 말씀 안에 들어온 사람들.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런가 하면,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신 주님 앞에 수많은 또다른
    청하심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마7:21)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예수 믿기에 열심이고 예배 참석에 열성이고 봉사활동에도 열정적이던 틀림없이 거듭난
    사람들임에 의심의 여지없는 사람들 모두 청함 받은 사람들이었.
    예수 이름으로 목회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낫고 귀신이 쫒겨 나가고 악한
    영이 도망치는 능력도 행하던 자들 모두가 청함 받은 자들이었.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이들을 모른다셨을 뿐 아니라 이들이 예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행위를 불법이라시면서 불법 행하는 자들은 주님 앞에서 떠나가라셨.
    (마27:22)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확신도 하고 있다만,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행하는 자라야만 한다고 말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요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성도의
    착한 행실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입는 것.
    오늘 믿음의 현장마다 믿음의 행위와 믿음의 삶에서 직무를 유기하면서 신앙하는
    사람들.
    직무유기자들.
    세상에서도 직무유기자들은 강제 퇴직당하고 연금도 박탈당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직무유기자들이 들어설 자리 없.
    (마22:11-13)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지금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는 직무유기
    신앙인들, 예복 입지 않은 예비 신부들, 성도들이 마땅히 보여야 할 옳은 행실, 착한
    행실의 세마포 입지 않은 혼인잔치에 청함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 모두
    직무유기자들.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손발이 묶이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져 유기당해질 자들.
    신부에게 가장 옳은 행실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
    신랑 맞을 기쁨으로 신부 단장하고 예비 마친 신부에게라야 세마포 허락되어져.
    직무유기자 아닌 직무완수자.

    (082723 Patris) 직무유기자 엡 2:10 374 나 맡은 본분은

    직무 완수자로서 우리에게 ‘성도의 옳고 착한 행실’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사는 것.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사는 우리의 삶으로
    세상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증인 되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보이고 알게 하는 것이 소금과 빛의 삶.
    그렇게 소금과 빛의 성도의 옳고 착한 세마포 잆은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는 세상에 속해 세상의 통치를 받고 사는 세상의 사람들이
    스가랴 8장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그것이 우리의 착한 행실.
    (슥8:22,23)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수요 성경 탐구 - 유대인 (081623)


    수요 성경 탐구 - 알리야 (080923)


    알리야 (עֲלִיָּה ,Aliyah)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유대인의 땅인 에레프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말은 예리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 바깥에 살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지금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알리야란?


    원어 : 올라가다(Going Up, Ascent)

    의미 : 이스라엘로 이주하다

    에스겔 39:28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

    19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던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서 2000년 동안 흩어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주권과 국토가 회복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하고 있습니다. 

    건국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약 70만 명이 었지만 현재는 알리야를 통해 약 700만 명으로 10배나 가까이 되는 인구로 증가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셨지만, 다시 이스 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넓게는 약 700구절, 구체 적으로 명시한 말씀은 약 161구절이 기록되어있으며, 마지막 때 하나님 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

    이사야 49:22-23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이스라엘

    AD 70년 2차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 민족은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라 없이 온 열방에 흩어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이사야 66:8) 라는 말씀처럼 2000년 동안 없었던 나라가 1948년 5월 14일 건국 되었습니다.

    나라의 회복과 더불어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언어, 절기 등이 회복 되고 있으며 예수님 당시의 모습을 지금 보는 것과 같이 말씀과 언약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지난 2천여 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핍박 (십자군 전쟁,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육적 회복을 위하여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실질적으로도 도와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1:25-26)

    이스라엘로부터 복음이 이방에게로 흘러왔고, 이제 회복되므로 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이때 이스라엘이 온전한 구원을 얻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3:39)의 말씀을 외치기 위하여 한국 교회가 함께 협력하여 달려나가야 할 것 입니다. 


    왜 교회가 알리야를 도와야하는가요?

    이스라엘의 회복은 정치적인 관점이나 종교적인 관점이 아닌, 성경 말씀의 회복에 관한 관점에서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1)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서 하신 예언이 다 이루어질 때 만물이 온전히 회복되며 주님이 오신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가운데 선지자들이 성경에서 전체적으로 약 700번, 구체적으로 161번이나 강조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로 흩어졌다가 때가 되면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방들이며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0)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등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함께 이 일에 손과 발이 되어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왔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열방가운데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나를 사용하소서!" 고백하여 쓰임받은 마리아처럼 한국 교회도 열방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한국 교회가, 제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소서"



    알리야를 돕기 위한 성경적 방법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고토로 데려오겠다는 구절이 700개 이상 된다.
    그리고 188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 특히 서구교회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해왔다. 

    특히 알리야 담당 장관에 에티오피아계 유대인 프니나 타마나가 새로 임명되면서 그동안 미뤄져 왔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이 승인돼 올해 말까지 2천 명이 알리야 하게 됐다. 

    (기사 참조: http://krmnews.tv/2020/08/20/aliyah-2)

    전 세계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담당하는 기구는 쥬이시 에이전시(Jewish Agency)이다.

    1897년 테오도르 허츨이 세계 시오니스트 의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를 피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구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1929년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던 땅이 대영제국의 통치 하에 있을 때 세계 시오니스트 의회의 정치적인 운영을 맡기 위해 쥬이시 에이전시가 설립되었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에는 정치적 역할을 내려놓고 전 세계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정부를 연결하는 플랫폼 기구로 변화되었다. 

    1929년 부터 지금까지 3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고토로 알리야시킨 쥬이시 에이전시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알리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고, 2016년에 800여 명의 이스라엘 직원과 450여 명의 전 세계 사절단을 두고 알리야를 돕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로 알리야한 사람들의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에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을 경험하도록 데려와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쥬이시 에이전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유대교 종파들을 포용하기 위해 “다원주의에 대한 헌신의 일환으로 쥬이시 에이전시는 이스라엘의 개혁(Reformed), 보수(Conservative) 및 현대 유대교(Modern Judaism) 흐름을 지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치관을 이스라엘 내에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한 정체성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개혁, 보수 현대 유대교에서는 진보적인 해석으로 LGBT와 페미니즘을 수용하고 있고, 신을 믿는 어떤 이들이라도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인정해 준다. 

    바로 이런 부분이 이스라엘 내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정통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적인 유대교, 양측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인은 더이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팔라쉬 무라)과 스파르딤 유대인(아누심)의 알리야 승인이 논란이 많은 이유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이라 치부하기 때문에 알리야를 했던 사람도 나중에 발각되어 시민권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올 연말까지 알리야하게 될 팔라쉬 무라 유대인들도 이스라엘 입국과 함께 2년 간 유대교 개종 과정을 거치게 된다.
    2년 동안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인임이 밝혀진다면, 시민권이 박탈되고 추방될 수 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웠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있다.
    기도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많은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하고 있으며,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다.
    쥬이시 에이전시는 알리야의 관문을 지키고 담당하는 자들로서 흩어져 있는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까지 중요한 사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런 사명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쥬이시 에이전시가 이스라엘 정부와 함께 성경적 가치관이 아닌 진보적인 세속주의 하에 운영 되며, 예수님을 믿는 혈통적 유대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2020년, 전 세계 유대인 중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의 수가 제일 많은 이 때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의 이끄심을 구하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수십 년 동안 기독교 단체들은 쥬이시 에이전시와 함께 알리야의 사명을 감당해 왔다. 바라는 것은 이 때가 전 세계 기독교 단체들의 영향력으로 쥬이시 에이전시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길 기도한다.


    [이스라엘] 알리야(עֲלִיָּה ,Aliyah)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말까지 해외에 흩어져 있는 9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열방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알리야(עֲלִיָּה ,Aliyah)’라고 한다. 히브리어 원어로 알리야는 ‘올라가다’로 ‘하나님께 올라가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4)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으셨지만,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넓게는 약 700구절, 구체적으로 명시한 말씀은 약 161구절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유대인들의 알리야를 위하여 기도하자.

    출애굽기 19장 4~6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말씀하신 하나님,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주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순조롭게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게 해주시고 참 구원과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리다

    예리다(ירידה yerida , "혈통")는 이스라엘 국가 (종교 문서에서는 이스라엘 땅 )에서 이주한 이스라엘 유대인 입니다.
    예리다는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의미하는 알리야( עליה , 직역 : "상승") 의 반대입니다 .
    시온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예리다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 이며 이 용어는 다소 경멸적입니다.
    [1] 비유대인 이스라엘인의 이주는 "예리다"라는 용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민의 일반적인 이유는 높은 생활비,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폭력아랍-이스라엘 갈등 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 학문적 또는 직업적 야망,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환멸 등입니다. [2]

    이스라엘에서 온 이민자를 요르딤 ("[이스라엘에서] 내려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olim
    ("[이스라엘으로] 올라가는 자들")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히브리어 "Yored"("하강"을 의미)의 사용은 Torah에서 가져온 용어의 현대 적인 갱신 입니다 . ,
    그리고 내가 또한 너를 다시 끌어올리겠다" 창세기 46:4, " ויהי רעב בארץ; וירד אברם מצרימה לגור שם כי-כבד ץרע에 אבה לגור שם כי-כבד ץרע ") 기근이 심하므로 거기에서 살게 하셨느니라." 창세기 12:10), 그리고 미슈나 에서 : "", 그리고 탈무드 에서 " ארץ ישראל גבוה מכל הארצות "(이스라엘 땅은 [다른] 모든 땅보다 높음).

    성경에서 최초의 1 은 아브라함이었고, 후에 요셉과 야곱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에서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3] 랍비 학자들은 나중에 이 원리를 yerida letsorech aliyah 로 해석 했는데, 이는 "상승하기 위해 가라앉는다"("바닥을 치다"라는 현대적 표현과 유사한 개념)로 번역됩니다. [4]

    유태인 법 또는 Halakha 는 이스라엘에서 이민에 대한 특정 제한을 정의합니다.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Moses Maimonides ) 에 따르면 굶주림 이 심할 경우에만 해외로 이민과 재정착이 허용됩니다 . Joseph Trani 는 기근이 없는 경우를 포함하여 결혼을 위해 이스라엘에서 이주하거나 토라를 공부하거나 자신을 부양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결정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에서 이주하거나 일시적으로 떠나는 것조차 정교회나 전통적인 유대교에서는 남성에게 합당한 행위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5]

    시온주의 운동 의 시작 과 이스라엘 건국 사이에 오스만 제국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수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 [ 인용 필요 ] 첫 번째 알리야와 두 번째 알리야함께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자들이 처음 정착한 기간 동안 이민의 범위 는 전체 이민자의 약 40%( Joshua Kaniel 이 추정)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80~90%. [ 인용 필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이 기간 동안 많은 유럽계 유대인 이민자들이 몇 개월 만에 포기하고 떠났으며 종종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6] 4차 알리야 의 후반부인 1926-1928년 동안 의무 당국은 17,972명의 유대인 이민자를 기록했으며, 유대인 기구 는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약 1,100명을 더 세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당국은 14,607명의 유대인 이민자를 기록했습니다. [7]전체적으로 1923년에서 1948년 사이에 강제 팔레스타인에서 약 60,000명의 유태인이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온주의 프로젝트 시작부터 국가 수립까지 이주한 유태인의 총 수는 약 90,000명 정도였다. [8]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창47:7-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모래시계 : 위쪽 공간 아래쪽 공간으로 나뉘어, 사이의 좁은 구멍으로 중력에 의해 모래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
    30초, 1분, 2분, 3분, 5분, 10분, 30분, 1시간, 1일, …
    모래시계에 다른 일반 시계에서 볼 수 없는 인생의 흥망성쇠의 과정.
    위쪽 모래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아래 유리 공간에 무언가 이루어지고 쌓아지는 단순
    모래 이동 아니.
    물리학에서 이 모래의 이동을 모래의 유출이라.
    인생을 모래시계에 적용, 모래의 유출을 인생의 시간 유출에 비유할 수.
    한 번 아래쪽 공간으로 유출된 모래는 다시는 위쪽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기도,
    계속 유출되어져 쌓여 가는 현재이기도, 모래시계 전체를 뒤집어 놓아서 새로운 시계
    되어 모래를 다시 유출시킬 수 있는 미래 되기도.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그 인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단절되거나 고립돼 있는 것 아니.
    모든 인생은 어제의 오늘인 과거와 내일의 오늘인 미래가 오늘이라는 접촉점과
    교접점에서 시작되는 역사의 시작.
    따라서 각자의 인생 역사는 그동안 살았던 현재가 축적된 과거의 집합이고 연속.
    사람의 幸不幸은 누구와 어떻게 사귀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의해 판가름 나게 돼.
    시간은 시간의 주인에게 報答을 하기도, 報復을 하기도.
    나폴레옹 :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報復이다”
    인생의 시간을 浪費한 죄 – 빠삐용
    모래시계 같이 짧은 인생 살고 있는 우리,
    한 뼘 길이 그림자 같은 인생 살고 있는 우리,
    여름 아침 햇살에 사라져버릴 안개 같은 우리,
    강건해야 80이면서 한 줌 흙인 우리,
    태어나 배꼽으로 쉬던 숨 입으로 가쁜 숨 서너 차례면 멎어질 호흡 머잖은 우리에게 바울
    사도를 통해 당부하시는 하나님 말씀,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악해져만 가고, 불확실한 미래 대비하는 삶에 대한 가르침 –
    세월을 아끼라
    성경에 이 말씀대로 세월을 아끼면서 악한 때를 경쟁적이고 투쟁적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의 후손 야곱.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속이는 자, 발꿈치 잡은 자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하나님의 전사’, ‘이스라엘’
    되기까지 입체적인 인물 된 야곱은 그 인생 고비마다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삶이었던 것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복받은 민족의 시조 될 것이 계시되었던
    인물.
    (창35:1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과 에서에게 예정해 놓으신 그대로 야곱이
    야곱 되게 하셨.
    (말1:2-3)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롬9:13,15)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창28:13-14)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창47:7-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후로 요셉과 17년을 더 살다가 147세에 삶을 마친 야곱과 애굽의 왕 바로와 나눈
    대화의 한 부분.
    한글 성경에 야곱의 생을 ‘나그네’라, 영어 성경 pilgrimage 순례자의 삶이라.
    야곱의 생애는 단순 나그네가 아니라 순례자였.
    하나님의 뜻과 계획 담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생의 길 갔던 순례자.
    나그네는 정처없이 지나쳐가는 길 위의 이름 모를 사람일 뿐.
    순례자는 그곳에 거하거나 언제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때가 있.
    야곱이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고 하나님의 사명 받은 자들 모두 그랬.
    전에 지나왔던 자기들 삶이 단지 지나가고 흘러가 잊혀진 과거가 아니기 때문.
    그러기에 순례자의 삶은 어제와 오늘,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삶.
    오늘 우리의 삶,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들이 모여서 되어진 결정체.
    모래시계의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쌓아지는 것 같이.
    그것이 나의 과거이고 나의 역사.
    지금도 대화 중에 있는 과거와 오늘을 살고 있는 각자 새로운 역사를 써 가고 있는 중.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 반복 말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잊지 말라시는.
    (신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신6:12,13)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과거를 잊을까 기억케 하시고 잊지 않게 하셔.
    (신24: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암5:4,6)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을 이끌어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신 불뱀과 아말렉과
    블레셋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 살리라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 말씀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만나서
    과거와 대화하면서 과거의 잘못과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고 온전케 하라는 말씀.
    오늘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과거끼리의 대화가 있어야 하고 현재끼리의 대화도
    있어야.
    대화에는 질문과 답이 있게 마련.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역사에도 질문과 답이 있어야.
    ‘내 신앙의 역사는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리 신앙 안에서 나와야.
    우리 신앙에도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이 있.
    이 역사책은 우리에게도 있지만 우리 신앙의 기록 보관소 하나님 보좌 앞 책들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져 있.
    사람마다 반드시 있을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의 두께와 내용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사람은 그 분량과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같이 대하소설을 쓰고도 남을 정도이기도
    할 반면 어떤 사람은 달랑 A4 용지 한 장 분량밖에 되지 않을 사람도 있.
    사람들마다 신앙의 역사책, 믿음의 역사책 내용이 무언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기초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삶,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다가갔던 형제 사랑, …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보시고자 하신 이 모습들이 우리 믿음의 역사책에서 얼마나
    많이 보여지는가.
    이들 중 얼마나 많은 분량의 것들이 내 믿음의 역사책 chapter 되어져 있는가.
    훗날 하나님 보좌 앞에 이것이 하나님 보좌 앞의 책에 기록되어져 있는 내용들.
    때때로 내 신앙의 역사책인 일기장과 생활기록부를 되읽어 보아야.
    (080623 Patris) 모래시계 창 47:7-9 42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거기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기록되어져 있.
    만족스러운 것들이 있는가 하면 보완해야 할 모습도 함께 있.
    ‘온고지신’ 말씀과 같이 과거의 경험과 지식과 시행착오를 거쳐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이
    건설되어지기 때문.
    하지만 과거를 잊으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세상도 교회도 과거에 붙잡혀서는 안 돼.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들 많.
    과거를 기념하면서 과거를 찬양.
    과거에 묶이지 않고 죄로 죽었어야 할 우리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리라
    모래시계 인생인 우리의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아직 얼마나 남아 있는가
    세상의 모래시계는 언제든 아무 때든 뒤집어 놓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지만,
    우리 인생의 모래시계는 그럴 수 없.
    어떤 방법으로도 뒤집어서 다시 시작되게 할 길 없.
    오직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부활로 부활되어질 것인가에 따라 생명의 부활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되거나 사망의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될 수 있을 뿐.
    그러기 위해 우리 아직 남겨져 있는 모래시계 인생을 무슨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명의 부활 모래시계로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기름 떨어뜨리지 않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삶을 아직 내 인생의 모래시계에 모래가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을 동안 내 신앙의 과거와 대화하면서 내 신앙 인생의 내일을 등잔불 꺼뜨리지 않고
    기름 떨어뜨리지 않는 현숙하고 지혜로운 신부의 삶을 살아내야.






    수요 성경 탐구 - 바다 (080223)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2623)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1923)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 같이
    에베소서 5:15-18
    찬송 / 복음송 -  하나님을 위하여

    (엡5:15-18)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늘 7월 16일.
    엊그제 새해맞이 했었는데 절반 여섯 달이 훌쩍 지나버렸고, 7월도 16일째.
    엊그제 새해맞이였다면, 내일 모레면 크리스마스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
    준비해야 할 것.
    인생의 시간을 낭비한 죄로 살인 누명 쓰고 평생을 프랑스 영 아프리카 키니아
    감옥에 – 빠삐용
    영화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꿈 이야기가 영화 중반에 들어온 까닭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시간 낭비가 얼마나 중한 범죄인가를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죄인 살인죄에 비견시켜 고발하는 장면.
    빠삐용 자신도 꿈에서 자신의 방탕하면서 낭비했던 젊은 날의 시간들을 스스로
    유죄 평결 내리면서 뒤돌아 가서는 이후로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생이 마감되는
    것을 원치 않았.
    동서고금으로 인생의 시간을 터무니없이 허비하고 소비하고 낭비하면서 인생을
    마친 사람들 많고도 많.
    어떤 사람은 다음의 24시간을 맞으면서 당겨쓰면서 인생을 선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사람은 분초를 다투면서 밀려오는 시간에 떠밀려 수세적으로
    방어적으로 살고 있.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밀물같이 밀려오는 시간들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쌓아져 남아 도는 시간들 부패되고 곰팡이 슬어 버려진 음식물 처럼
    쓰레기 차에 실려 College Point 쓰레기 처리장에 쏟아져버리고 마는 시간들 많.
    그렇게 버려지는 시간들이 사용되었던 용처를 보면,
    나 자신, 자기 개인이 우상의 우두머리 되어서, 내 목숨 위하고, 내 배 즐겁게 하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한 것들이 우상의 우두머리 되어져 있는 것들.
    (마6:25)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들.
    (빌3:19) 저희의 신인 배를 위하고, 자기의 일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위한 땅의 일들.
    이 우상의 우두머리를 즐겁게 해 주는 부차적 수단과 도구들이 우상의
    나뭇가지들.
    쾌락, 기호식품, 음란,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 유튜브, 돈, 마약,.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는 엡 5:15-18 하나님을 위하여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애니미즘(animism) 등 토속 신앙(土
    俗信仰)을 비롯해서 연예, 스포츠, SNS 분야 등 각 분야에서 대중적 명성을 가신
    사람들, 고급 승용차, 핸드백, 의류 등 명품 브랜드 물건들, 학위, 자녀, 스펙(spec),
    건강, 취미 등을 위한 시간은 오히려 부족해서 오늘 우리들의 우상들을 위해
    사용하려면 하루 시간 24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모순된 인생살이를 살고 있.
    그래서 성경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인생들에게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선지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을
    통해 인간이 주어진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똑같은 말씀으로
    주셨.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세상으로 내보내신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시간, 나에게 주신 건강, 나에게 주신 재물, 나에게 주신 지식, 나에게
    주신 명예,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지식과 명예를
    사용하라셨.
    찬양 인도자가 선곡했고 선창하고 있기 때문에 라디오에서 이미자씨나 조용필씨
    노래 흘러나올 때 따라 부르듯 부르는 노래여서는 안 돼.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위해 사노라 찬양 한 것은 내가 그 삶
    살겠노라 서원하면서 기도 한 것.
    왜냐면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 까닭은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께 끝 다함
    없는 빚진 자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도 주를 위해 살아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지 못한 것.
    (엡5:15-18)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날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께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사는 것도 주를 위해
    살다가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17절) 말씀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그릇에 한정적으로 담아 주신 세월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범죄케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행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지혜 있는 자의 가장 우선인 삶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
    말씀하신 까닭.

    (071623 Patris) 지혜 있는 자는 엡 5:15-18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있.
    일찍이 모세 선지자도 이 말씀과 똑같이
    (시90:9,10,12)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지나보낸 날들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삶의 내용들뿐이라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분노케 하면서 살던 일생이 그마저도 일식간에 다해버리기를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고.
    우리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의 성적표가 작성되기 때문.
    그렇게 작성된 우리 각자 인생의 성적표는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에
    기록되어져.
    마치 중고등학생 때 생활기록부에 나의 학교 생활 모든 것이 결론적으로
    기록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선생님께 보여진 나의 모든 것, 나의 성적, 행동 사항, 장래 희망, 선생님의 생각과
    의견,…
    문제는 그렇게 쏜살같이 일식간에 다해버리고 난 하나님을 분노케 하기만 했던
    삶의 내용들은 우리 주어진 인생의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의 ‘인생 성적표’로
    작성되어져서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하나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는 책들에 기록되어져.
    (계20:12-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2:11,12)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하나님을 위하여





    수요 성경 탐구 - 우상( 偶像, idol) (071223)


    수요 성경 탐구 - 상 (賞) (070523)


    수요 성경 탐구 - 복음 (062823)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부활하신 예수님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으셨.
    복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에게만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도 세 번만 나타나셨.
    (요21:13,14)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가 11사도와 함께 군중 앞에서 설교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대다수는 보지 못했
    (고전15:3-8)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6)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지만 그 후로 불과 10여일이 지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120여 명.
    (행1:11-15)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15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고전15:6)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죽었으며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 있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고, 승천하시는 주님 보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믿음에 불이익 아니지만
    기도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 현장에 임한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은 영적 자산 손실.
    그렇게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더 많은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구우신 생선구이도 함께 했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말씀의 현장에도 있었.
    말씀이신 주님이, 말씀으로 현현하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만나주셨고 말씀 나눠주고 계시기
    때문.
    그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온 중심 다해 읽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고 있.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가능했.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 승천하시면서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 말씀.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며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분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함께 있는 것보다
    유익하다시는.
    (요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예수님이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있게 될 유익이 무엇인가면, 예수님이 가셔서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시는 것
    (요16:7)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보혜사를 보내 주시면, 그 보혜사가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하실
    일이,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혜사가 오셔서 세상에 만연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책망하실 것이라시면서, 죄와 의와 책망이 무엇인가를 이어 설명 말씀.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요16:9-1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병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앉은뱅이 일어서게 하고, 장님 보게 하고, 귀머거리 듣게
    하시려고 오신 것 아니.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quot;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quot; 되시기 위해 오셨.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믿지 않는 것이 죄.
    제물되어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피 흘리셔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바로 그 자체.
    의에 대하여
    온 인류의 죄와 나의 죄를 위해 어린양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단번에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의.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임금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지옥은 사탄과 그 무리들을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죄를 용서받지 못한 인간들이
    그들과 포함되어 죽임을 당할 그것이 심판.
    이 세 가지, 죄가 무엇이고 의는 무엇이며 심판은 무엇인지를 알도록 가르치시고 깨우쳐 주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
    그러므로,
    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의, 십자가에서 세상 죄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순종하는
    것이 의이며,
    심판, 죄를 회개치 않고 세상의 임금 따르는 자들 세상 임금 마귀가 받는 심판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말 하게.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직후에 유대인들을 두려워 숨어 지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 “성령을 받으라”
    직접 성령받게 하셨고, 그렇게 예수님께 직접 성령 받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에 대해서도 말씀.
    (요20:21-23)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승천하시는 예수님 앞에 모여든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러므로 승천하시는 감람원이라는 산에 모인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신 말씀대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게 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 시작.
    (요21:18)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한 마디 예수님 말씀이 성령받기 이전과 이후의 베드로 모습.
    비단 베드로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 아니.
    예수님 12 제자 모두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 곳곳에
    그곳이 예루살렘이든, 유대든, 사마리아이든, 땅끝이든 주님의 이름과 복음 들고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신 말씀에 순종했던 모든 사람에게 하셨던 말씀.
    성령의 강림과 임재하심의 은혜의 권능을 받게 되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서 팔을 버려 남이 띠워준 띠에 이끌려 원하지 아니하는 곳일지라도 가게 될 거라셨.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은 그곳이 어딜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게 하신 어느 곳이든.

    (062523 Patris)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요 14:16-17. 173 불길같은 성신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는 또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같은 이유의 말씀.
    (요16:12-14)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은 가르쳐 이르시고 당부하실 것이 여전히 많지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성령
    보혜사를 보내셔서 보혜사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우리에게 있게 하심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에 있게 하실
    것인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알게 하실 것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은,
    (요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지금까지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와 세상에 오셨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가시고자 승천하신 이유를 말씀.
    성령 받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이미부터 알고 있는 우리,
    그러므로 성령충만되어야.
    성령의 인도하심 도우심으로라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지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사명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셨기
    때문.
    그 사명은 사명의 종합체인 복음 전파.
    (마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사명 감당케 하셔서 우리로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사명을 마무리하고 완수케 하셔서 생명의 부활로 부활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떠나셨고, 떠나셔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시되 충만케 하셨.
    성령 받지 못해서 성령의 도우심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믿음 없.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을 들을 영의 귀가 없기 때문이고, 깨우쳐 받아들일 영의 마음이 없기 때문.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나게 하고, 그 믿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이라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셨던 이 모든 믿음과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방법과 방식, 나의 의지와 노력과 지식과 경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
    우리에게 좋은 것 주셔서 유익하게 하시고자 우리 곁을 떠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신 것 아니.
    그분의 영, 진리의 영, 자유케 하는 영, 보혜사 성령님 보내주셔서 언제나 항상 내주 교통하시면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권능과 지혜의 삶 살게 하시면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수요 성경 탐구 - 기도 (061423)

    누가복음 6:12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앵무새 죽이기(롬7:22-23)
    06-11-2023(주일)



    수요 성경 탐구 - 구원 (060723)

    수요 성경 탐구 - 엘리야와 세례 요한 (051723)


    부활의 주님 승천하시기 전에 누가 24:49



    수요 성경 탐구 - 비아 돌로로사 (051023)


    수요 성경 탐구 - 사도와 제자 (050323)


    수요 성경 탐구 - 사도와 제자 (042623)


    본 믿음 들은 믿음(요한복음 20:29) (04-23- 2023)

    https://www.youtube.com/watch?v=fVq3WDKhG_o




    수요 성경 탐구 - 아벨의 피 사가랴의 피 (041923)


    수요 성경 탐구 - 부활절 (041223)

    로마서 8:34
    "......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수요 성경 탐구 - 고난주간 예수님 행적 (040523)


    (040223 Patris) 복음의 급박성 막 1:1,15. 357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마가복음은 말씀의 내용이 박진감 있게 전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유년기와 성장기를 다루지 않고 곧바로 복음 사역 현장으로
    시작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복음의 시작 선언 동시 광야의 세례 요한의 주님 오실 길 준비케 하시는 장면
    주의 오실 길을 곧게 준비케 하신 일이 세례 요한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케 하신 것
    (막1:3-5)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 베푼 장면은
    (막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혀갈 즈음부터 세례 베푸시는 사역과 함께 공생애 시작하신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과 그
    내용과 형식이 같아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가까이 온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우선이 회개하는 것이라 말씀
    (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서둘러 회개해야 하지만,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오히려 급작한 상황에서 어쩌면 회개할 시간이나 기회가 아예 없거나 제한적일
    수 있다는 말씀
    또는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말씀이기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긴박한 위기의 순간인 ‘천국 도래’의 심판의 시간이 빠른 속도로 가까와 오고 있는 그
    마지막 순간을 대비해서 해야 할 것이 ‘회개’ 하는 것이라셨
    예수께서 골고다 십자가 죽으심 며칠 전 하신 말씀 중에,
    (눅17:32-33)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3년차 죽기 바로 앞 시점에서
    이제 곧 예루살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시간이 가까운 때에 왜
    예수님은 그 죽기 며칠 전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 말씀하시는가
    소돔 고모라 때의 사건은 머잖아 이 땅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생생한 기억의 기록으로
    가르침 말씀 주시려는 것
    머잖아 이 땅에 소돔 멸망의 상황이 다시 일어나면 롯의 처가 당한 상황과 똑같은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기 때문
    (눅19: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은,
    (마24:37-40; 눅17:26-30)
    (마24, 막13, 눅21장)
    (벧후3:9-16)
    노아 때도, 아브라함과 롯 때도 멸망의 심판이 임박해 있는 급박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롯의
    사위들 처럼 농담으로 여기고만 있었.
    롯의 복음을 농담으로 여긴 것이 롯의 사위들만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롯에게 직접 말씀
    소알 성에 당도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계속 가라
    소알 성에 안전하게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며 소돔에 대한 멸망을 지체시킬 것이라
    (040223 Patris) 복음의 급박성 막 1:1,15. 357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안도와 평안 주시는 말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의 구주로 오셔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오신 분.
    오셔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죄인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셨.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눅4:18,19)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셔
    보내신 이의 뜻이 무언가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다시 살리시고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기다리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셨
    그리고 이 구원은 소돔 고모라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우리는 역사의 끄트머리 성경의 말씀하신 마지막 때인
    주님이 다시 오시마고 떠나신 후, 다시 오실 그 때와 날에 매우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주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면서 살아야
    그런데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담아 놓고만 있다면 의미가 없
    이 말씀들이 급박하고 긴장감 있는 운동성 있는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까닭은
    왜냐면 그 날은 도적같이 올 것이기 때문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도둑같이 오리라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주님은 행동하라신
    것이,
    ‘회개 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는 행동, 복음을 믿는 행동
    지난 주 마가복음,
    (막10:17-30)까지 부자 청년 말씀도 그 마음에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 채워진 사람은 그래서 자기 소유
    물질이 주인 되어 있는 사람은 회개가 되지 않고, 회개 되지 않은 마음은 구원의 순간에 근심하면서 뒤돌아
    가는 청년이
    주께 나와 물음
    (막10:17)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청년이 얻고자 하는 영생의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생하고자 마음의 發露가 아니
    가진 것 많은 부자로 살고 있는 것이 만족스러워 이 풍진 세상에서 가진 것들로 즐기면서 영원토록
    즐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그 방법을 찾아 주께 나왔
    하지만 주님은 청년에게 주인을 바꾸라 말씀하셨
    (막10:21)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신 말씀은 네 소유한 것들이 너의 주인 되어져 있는
    너의 주종 관계를 바로 하라신 말씀
    그리고 (막10:21) 그런 연후에 와서 나를 좇으라”신 말씀은 (막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을 하신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 회개하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 복음을 믿으라’
    하지만 청년의 마음은 많은 재물 때문에 절대로 회개되지 않는 마음



    3월 29일 수요 성경 탐구 - 발람 (032923)


    3월 22일 수요 성경 탐구 - 아사셀을 위한 염소 (032223)


    3월 15일 수요 성경 탐구 - 피(031523)


    3월 8일 수요 성경 탐구 - 사순절 (030823)

    3월 1일 수요 성경 탐구
    사순절

    요한복음 1:9, 11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2월 22일 수요 성경 탐구
    재의 수요일


    2월 19일(주일)

    제목 / 내가 와서
    성경 / 출애굽기 20:24



    오늘 제목 ‘내가 와서…’는 말씀 구절의 영어 표현을 옮긴 것.
    ‘I will come to you - 내가 가서’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영어 표현 I will come to you는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으로 ‘내가 네게 임하여’, 개역 한글 : 강림하여,
    공동번역 : 찾아가서, 새 번역, 현대인 : 내가 가서. - ‘내가 가서’
    영어는 받는 사람의 편에서 구사되는 표현이 많.
    우리말로는 ‘내가 가서’이지만, 영어로는 I will come to you, 거기에 있는 너희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주님이
    오시는 것.
    그런 의미로, 본문에서 주님이 어디에 임하시고 어디에 오신다시는가면, 주님의 이름이 높임 받고
    기념되는 모든 곳에 오신다셨.
    우리말로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로 되어 있는 이 부분은 영어 표현과 미묘한 차이가 있.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내가 내 이름을 높임 받도록 한 곳은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내가 갈 것이고, 가서 복을 주리라’신 말씀.
    I cause : 시작과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오늘도 열방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사람들이 모이기는 해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실 곳에만 임하셔서, 내가 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셔.
    (출20:24)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하나님의 성호가 높임 받고 하나님께서 경배 받으시는 사람들과 장소 조차도 하나님께서 cause,일으켜
    주셔서 높임 받으시고 경배 받으시면서 복을 주시겠다시는.
    그리고,
    (출20:20)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시험하셔서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유를 말씀.
    God has come to test you, so that the fear of God will be with you to keep you from sinning.&quot;
    그렇게 오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하여금 죄에서 멀리 하게 하셔서
    죄를 짓지 않게 하시겠다셔.
    이 모든 것, 하나님을 기념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되게 하셔서 되어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 말씀.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로 선물의 믿음 주셔서 믿게 하시고 믿어져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시간 안에서 되어지게 하신 대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되어져 왔던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 주셔서 되어진 것.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되어진 어느 것도 내 계획과 의도대로 되어진 것 없.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되게 하신 결과대로 오늘까지 우리는 살아져 왔던 것.
    (출20:24) 말씀을 근거로, 이 말씀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 아무 곳, 아무나에게서나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짐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께 예배는 아무나가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행하는 예배 모두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배 드리게 하신 곳에서 예배 드리게 하심 받은 자들이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예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에서 허락 받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곳에 오셔서 예배
    받으시고 복 주신다시는.

    (021923 Patris) 내가 와서… 출 20:24 334 아버지여 이 죄인을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오늘 우리 모인 이 곳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소이고, 여기에 모인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아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고 기념하게 하신 순종의 예배자인 것을 확신하기.
    그리고 우리의 그 확신이 그릇된 확신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일을 기다리면서 사는 한 주간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가 그래서 중요한 것.
    경건의 흔적조차 없이 세상과 세상의 것 좇으면서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세상적으로 거룩한 질서 없이 살던
    삶이 예배당에 와서야 잠깐 중단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들이 본문 말씀에 합당한 사람들인가는 두려운
    마음으로 비춰 보아야.
    이 사람들처럼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가는 날이기 때문에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 부르며 예수님
    찬양한다는 것만으로 거기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모든 것에 가셔서 복 주시겠다신
    곳 되고, 복 받는 사람들 되게 하시겠는가도 본문 말씀에 냉혹하게 비춰 보아야.
    팬데믹 이후로 줌Zoom Church가 많아졌고, Zoom 예배가 일상적 되어져 있지만, Zoom 예배는 예배를 이름
    한 자기 편의주의적 종교 행위이고,
    Zoom속에서 듣는 설교는 지적인 동의 이상 아니.
    교회는 사람들에게 회개가 일어나게 하는 세상에서의 유일한 곳.
    세상 어디에도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변화시킬 수 있는 곳 없.
    하나님께서 찾으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임 받게 하신 곳에 친히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경배하는 자들이 모인 예배 현장에서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
    우리가 그 예배자들 되어서, 우리가 모인 이 예배당에서 회개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개의 현장
    되어져야.
    우리 교회에 회개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는 교회를 몇 년 다니고 있으며, 그동안 우리에게 회개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교회 다닌 연수가 오래일수록 믿는 사람끼리만 만나는 경향.
    그러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없게 돼.
    지난 수요일 말씀,
    산 위에서는 복음 사역 할 곳 없고 하나님 일을 할 곳도 없
    세상으로 내려가야.
    거기 죄인과 앉은뱅이와 절름발이와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장님들이 넘쳐나도록 많은 곳 죽은 자들을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 필요한 세상으로 내려가야.
    죄인은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죄인.
    이들 ‘죄인들’에게 소금의 복음 빛의 지리를 전하는 교회 현장이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이어야.
    그들을 찾아서 소금 나누고 빛 나누는 삶이 소금의 삶, 빛의 삶.
    오늘 거의 대다수 믿는 사람들이 ‘나홀로 신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
    나 혼자 믿고 나만 구원 받으면 되는, 교회의 본질이 상실 당한 채 살고 있.
    교회마다 예배당에서 보여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양이고, 잃어버린 드라크마 동전이며, 여전히 집
    나간 둘째 아들의 모습인 채로 교회당에서 보여지는 사람들 많을 것.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있게 하시고 하게 하시고 되게 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일으키셔서 그곳에서
    새 창조의 거듭남의 사건이 있게 하신다시는 말씀.
    그래서 새 창조를 위한 거듭남의 결과인 구원의 핵심은 죽어야 한다는 것.
    아버지를 떠나 돌아온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 ‘스스로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
    회개의 전형적 모형.
    회개는 내가 스스로 돌이키고 돌아서야 되어지는 것.
    내 결단과 의지로가 아니.
    분명히 하자면,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여건과 형편과 환경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제공해 주신 것.

    (021923 Patris) 내가 와서… 출 20:24 334 아버지여 이 죄인을

    작은 아들이 자기 의지로 아버지 집을 떠나가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고자 작은 아들의 형편과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셨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自由意志에 순응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회개에 이르게 됐던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신 은혜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것도 회개케 하시는 은혜의 선물.
    (창1장) 창조물들에게 ‘-있으라, -돼라, -하라’ 말씀으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셨.
    그럼에도 인간 역사 대부분 사람은 자기 삶의 행적과 기록 어떤 것 하나 인간의 유익과 만족에 따라
    선별적으로 선택되어져 오지 않은 것 없.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가 세우고 있는 자기의 나라가 있고, 자기가 오르고 있는 산이 있으며, 자기가 쌓고
    있는 탑이 있.
    더 높고 더 넓고 더 많고 더 풍요한 것으로 채우고 높이기 위해 날마다 분주하기만.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에의 자유의지일 뿐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방종이고 거역이고 범죄.
    다시 한 번, 자유의지는 하나님께 향한, 하나님께 대한 순종적 방향성이어야.
    하나님께 역행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화와 멸망과 사망만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셨.
    방주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순응하여 방주를 만든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
    복음의 말씀을 따라 방주 만들기에 함께 했던 오직 8명만.
    노아와 노아 가족을 통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들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자유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거절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며 반항하던 모든 사람들은 물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
    물 심판으로 멸망 당한 그들 중에는 노아의 형제 조카들, 친척들, 사돈의 팔촌들,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서
    구경하곤 했을 것.
    그러면서 노아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또 들었을 것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해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복 주신다시는 말씀.
    회개한 마음으로 복음을 믿어 천국이 가까운 사람들, 천국을 침노한 사람들이라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으시는 하나님.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2월 15일 수요 성경 탐구

    수요 성경 탐구 - 산 (山) (021523) 아라랏산

    아라라트 산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표고 5137m의 산 입니다.
    주봉우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표고 3896m의 봉우리를 소아라라트 산이라고 부르고 5137m의 주봉우리는 대아라라트 산이라고 부릅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뒤에 이 곳에서 표류했다고 여겨지며 12세기 경에 유럽인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아라라트 산은 옛부터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거주해온 지역의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기에는 아라라트 산기슭에 쿠르드인이나 터키인과 수백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했으나 오스만 제국 말기(1차 세계 대전 중)의 강제 이주로 터키 영내의 아르메니아인은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당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여지나 터키 정부는 현재까지도 학살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이 맺어져 오스만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게 되자 구러시아 제국령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은 아라라트 산기슭까지 영토에 포함시켜 아르메니아 국가를 독립시키는 운동에 나섰지만 이 때 획득한 영토는 터키 혁명군에 의해 다시 빼앗겼고 아르메니아인이 살던 구러시아 제국령도 적군의 침입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편입됩니다.

    이후 아라라트 산은 터키령이 되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과거에 터키와 소련에 의해 성립된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도 아르메니아 국장의 중앙 부분에는 아라라트 산이 그려져 있으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와 함께 터키와의 주요한 분쟁꺼리로 남아있습니다.

    (좌측 봉우리는 小아라라트 산, 중앙 봉우리는 大아라라트 산)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8686704&qb=7JWE6528656P7IKw&enc=utf8§ion=kin&rank=4&search_sort=0&spq=0)


    아라라트산은 터키 동부, 이란 북부, 아르메니아 중서부 국경에 위치한 산이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떠내려가다 이곳에서 멈추었고, 그 배 조각이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산이다.
    산 정상의 30% 정도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해발 5,137m의 대아라라트(Greater Ararat) 산과 해발 3,896m의 소아라라트(Lesser Ararat) 산으로 구분되며, 산세가 높고 험준한 지형의 휴화산이다.
    산 전체가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암과 화산 조각들로 덮여 있다.
    주변은 완만한 경사의 평원을 이룬 고원지대로 초원이 많으며, 유목민들이 목축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아라라트산의 형성 시기는 지질학상으로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화산 폭발 시점에 근거해 볼 때 신제삼기(新第3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노아방주가 떠내려가다 멈춘 곳으로 유명하다.

    지명유래에 관해서는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경 창세기 8장 4절에서 산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 아라(Ara) 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 아르메니아의 아리라트(Ayrarat) 지방을 아라라트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전자(前者)가 가장 유력하다.

    바사인들은 노아의 산을 뜻하는 ‘구이누’로, 터키인들은 험한 산을 뜻하는 ‘아리다기’ 산이라고 부른다.
    원래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앗수르식 이름은 ‘우라르투(Urartu)’이다.

    아라라트산이 정확히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에 관한 주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경 속에서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아라라트산은 특정 산을 지칭한다기보다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인 아라라트 지역에 있는 산악지대라는 주장이 있다.
    또 시리아와 이슬람 코란에서는 아라라트산이 오늘날 이란에 위치한 주디 산(Mount Judi)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와 서구 중세 유럽의 기독교에서는 역사학자 요세프스가 AD 1세기에 쓴 책에 근거해 현재 터키의 아라라트산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신화에서는 아라랏 산이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며, 1991년에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및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와 민족통일주의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지정되었다.

    또 이곳은 "노아방주"에 대한 관심으로 고고학, 성서고고학 분야, 종교계 등에서 끊임없는 탐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아방주가 있었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여러 탐사들이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인 흔적은 찾지 못했다.

    아라랏 산으로 가는 방법에는 주로 터키의 호수도시 (Van) 시(市)를 통해 가거나,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Yerevan)을 통해 가는 법, 이란 북부를 경유해 가는 법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라라트산 (두산백과)

    노아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한 뒤 방주가 머물렀던 산(창 8:4).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의 중간 지대인 아르메니아의 고원에 위치한 아라랏 산맥의 한 봉우리로 추정(현재 아라랏 산으로 불리는 사화산의 높이는 해발 약 5,144m). 이곳은 고원으로 여기서부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아라스(아라크세스) 및 코룩 강이 흐른다. 성경에는 노아 방주 사건 외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두 아들이 부친을 살해하고 이곳에 도망한 기사(왕하 19:37; 사 37:38)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 중 바벨론을 멸망시킬 도구로 사용될 열국 중에 아라랏이 언급된다(렘 51:27-28).

    [네이버 지식백과] 아라랏 [Ararat]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란과 아르메니아와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사화산이다.
    이 산이 유명한 것은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아라랏 산은 지난 수백 년간 ‘노아의 방주’ 목격설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노아의 방주와 그 유물을 찾기 위해 탐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세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는 아라랏 산에 노아의 방주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탐험가들은 아라랏 산에서 발견한 나무, 그 밖의 자재들을 노아 방주의 일부분으로 주장하고 있고, 미국·러시아 비행사들이 찍은 항공사진을 근거로 아라랏 산 노아 방주의 존재를 최근까지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도 노아의 방주에 대한 구체적인 여러 증언이 나오고 있다.

    성경에서도 여러 번 이 지역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창세기의 홍수 사건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해 악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를 구원해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홍수 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산이 바로 아라랏 산이다.

    “그리하여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 위에 내려앉았다”(창세기 8:4).
    성경은 노아가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됐다고 한다.
    “농부인 노아는 포도밭을 가꾸는 첫 사람이 되었다”(창세기 9:20).
    노아의 방주가 내려앉았다는 아라랏 산의 주변 지역은 포도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니네베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이 산헤립을 죽이고 이 지방으로 도망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르에체르가 그를 칼로 쳐 죽이고는 아라랏 땅으로 도망쳤다. 그의 아들 에사르 하똔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열왕기하 19:37).
    이 이야기는 토빗기(토빗 1,21)나 이사야 예언서(이사 37,38)에도 잘 기록돼 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바빌론에 관해 예언할 때에도 이 지역의 언급이 나온다.
    “그 땅에 깃발을 세우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팔을 불어라. 바빌론을 칠 민족들을 동원하고 그를 칠 왕국들 곧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크나즈를 불러들여라. 그를 칠 사령관을 임명하고 날개를 곤두세운 메뚜기 떼 같은 군마를 몰고 와라”(예레 51,27).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는 탐험가들의 아라랏 산에 대한 발견과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아라랏 산이 오늘의 지명 아라랏 산과 일치하고 있느냐는 논쟁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라랏 산의 정확한 위치뿐 아니라 노아와 홍수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구원과 사랑이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2월 8일 수요 성경 탐구
    창세기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월 1일 수요 성경 탐구 바벨탑과 언어

    창세기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바벨탑 사건

    성과 대를 쌓아
    - 여기서 '성'(이르)은 '도시', '성읍'을 의미하며 '대'(믹달)는 '탑'을 의미한다.
    이는 곧 대제국 건설과 이를 기념하는 탑을 건설하려 한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건축 공사를 실행한 주체는 니므롯 왕조(10:8, 9, 10, 11, 1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 14:13)고 한 사단의 자만과도 같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경고 하셨다 (마 11:23)

    우리 이름을 내고
    -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 동기로 무실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준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이로니칼하게도 자신을 드러냄 없이 주를 위해 겸허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빛나고 있다(히 11:4-40).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바벨탑 건축의 두번째 동기로 가인의 후예들이 가인이 받은 땅에서의 유리 방황하는 저주(4:12)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번성하여 땅에 널리 퍼지고 충만하는 것이었지 결코 각 개체들의 자주권이 억압당하는 세계적 단일 제국 형성에 있지아니 하였다(1:28; 9:1).

    1월 29일 주일 설교문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막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물고기 잡이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는 고기잡이에서 천국 보화 진주잡이, 진주 발견한 진주 장수 된 것과
    같은 사람들.
    고기잡이 하고 고기 잡이 위해 그물 깁는 바쁜 중에 나타나신 예수께 서 ‘나를 따르라 ‘ 부르시자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 나선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는 이후로 ‘사람 낚는 천국 보화
    진주 장수’의 삶으로 변화된 사람들.
    바닷가 고기잡이 어부에게 배와 그물은 그가 가진 소유의 중요한 전부.
    이 전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결정은,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른 것과,
    밭의 보화를 사기 위해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이 장삿꾼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들을 산 것은 한 가지로 같은 믿음의 행위.
    (창12:1) 아브라함에게’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셨을 때 (창12:4)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막10: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마12:48,50; 막3:33,35)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아버지와 형제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를 떠나고, 보화 감춰진 밭과 좋은 진주 사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모든 소유를 다 파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신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나를 따르라’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갔던 사람들의 결국은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 되어졌고 천국 진주 문을 열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
    더 결정적 상황에서의 (마19장) 부자 청년 이야기는 이와 반대적 말씀
    (마19:2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셨지만, 부자 청년은 날마다 눈에 보이는 자기 소유의 보화에
    가려벼 보이지 않는 천국 보화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
    본문 바로 앞 구절 말씀
    (마4:16,1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선포하며 전파하고 다니셨.
    (막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 말씀
    (막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마3:6-10)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복음을 믿으라시면서 복음을 믿기에 앞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
    성경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를 많은 곳에서 보여주셔.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7:14 ; 눅13:23,2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벧전3:20)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애굽에서 나온 603,550명 장정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수는 단 2명
    (눅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
    광야라는 교회에서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깨닫지 못.
    오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고 들어가게 될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 말씀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적되 매우 적다고 주님께서
    혼인 잔치 비유에서 말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그러나 택함 입은 자는 적을 것이라셨.
    얼마나 적은가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장정만 60만이 청함을 받아서 광야로 나지만 그러나 그 장정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 숫자는 단 둘 뿐이었.
    그러면 우리가 그 60만 가운데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60만 명 교인 광야 교회에서 가나안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두 명이 전부였는데,
    이 시대 교회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단순 비교는 성립되지도 않고 위험한 논리일지라도,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하나님께서 직접 보이시는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던 60만 교인 교회에서 두
    명이라면, 지금 10000명 교회에서는, 3천 명 교회에서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기독교인은 많아졌지만 기독교인라 하여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는 것 아니.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실제는 종교인의 활동일 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아니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 끝에 천국을 들어가지를 못하고 마는 기독교인이 적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해 주셨.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이스라엘은 억울할 것.
    자기들은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광야로 나왔고 광야 생활 하는 것도 믿음으로 했었다고 믿기 때문.
    하지만 요즘 출애굽기를 다시 면밀히 읽고 있는 동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순서에 따라 진행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피해 홍해를 건넌 감격과 기쁨으로 모세와 미리암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던 사흘 길 후
    마라에서부터 이스라엘은 불만과 불평과 원성의 연속이었음에서 벌써 알 수 있.
    애굽에서는 고기가마 곁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마실 것도 걱정 없었는데 이 광야에 데리고 나와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
    (히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러나 믿지 않았던 것이 결론.
    3500년 전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
    그러므로 믿음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면 정말 믿음이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012923 Patris) 생선 장수와 진주 장수 마 4:18-22 31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왜냐면,
    (살후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셨기 때문.
    이 말씀을 근거로, 예배 드리고 성경 보고 기도 하고 찬양 부르는 행위가 내 믿음의 굳건함의 증표라
    단정하지 마시기.
    어쩌면 그것은 믿는 것과 상관 없는 종교적 행위인 것이고,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시대 많고도 많.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
    이 시대 사람들도 종교적인 행위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
    유기성 목사님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한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한들 그것이 모슨 소용.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은 것이 층층이 쌓아져 성경 지식이 바벨탑 우상 되어져 있을 뿐, 그렇다 하여
    행동의 변화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면서.
    예배가 시간표적 행사 되지 않도록 해야.
    자칫 찬양도, 기도도, 십일조도 행위이고 내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행위일 수.
    그렇다면 그 행사적 행위들이 믿음일 수는 없.
    믿음은 마음 안에서 생성되고 자라서 작동되어야 그것이 삶의 내용으로 드러나지는 것.
    마음으로 믿는 것과 행위로 예배 드리고 기도 하고 찬양 하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은 것이 입으로 시인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구원에 이르느니라셨.
    천국은 청함을 받은 자의 것이 아니.
    천국은 택함 입은 믿음 있는 자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는 곳.
    종교인이나 종교 행위자들이 들어가는 곳 아니.
    오직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그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땅의 보화를 사고 진주를 살 수.
    그 보화에 대한 믿음과 진주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바꿀 수 있는 것이 믿음 있는
    믿음의 사람의 행위.
    믿음 없는 부자 젊은 청년은 바로 앞에 있는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자기 소유를 놓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의 문 앞에서 뒤돌아 가고 말았던 슬프고 안타까운 증인.
    (시19: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시편은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 내 소유라 했는데,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더 좋은 보화 발견한 바울 사도은 지금까지의 보화였던 세상의 것들은 배설물 같이 여기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보니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부귀영화들, 의롭고 선하게 산 모든 것을
    해로 여겨지고,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말씀.
    그러므로 나에게 바울 사도가 배설물로 여긴 것들이 많을수록 천국은 그만큼 멀어.
    나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천국은 그만큼 멀어.
    세상의 무거운 짐 지고는 천국까지 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세상 무거운 짐 짊어지고 갈 길 먼
    우리에게 그래서 예수님 말씀.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지만 이 말씀 따르지 않고 세상 등짐 내려놓지 않고 계속 가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전도서는 그 세상
    등짐이 누구 것 될 것인지를 알려 주었.
    (전6:1,2)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2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2023년 1월 25일(수)

    수요 성경 탐구 - 하나님의 이름과 십자가 성취 (012523)



    2023년 1월 18일(수)

    수요 성경 탐구 - 하나님의 이름 (011823)


    2023년 1월 11일(수)

    수요 성경 탐구 - 산상수훈 (팔복) (011123)


    2023년 1월 8일 주일 설교 황선민목사
    주현 후 제1주

    동영상 자료 / https://youtu.be/AQLOMcMo6kI

    내 나무의 열매 (사 5:1, 2, 7; 눅 13:6-9; 요 15:1-10; 사 5:1-10)

    찬송 / 308장(넓은 들에 익은 곡식)

    동영상 자료 / https://youtu.be/AQLOMcMo6kI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심히 기름진 땅을 노래하며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파고 돌을 거두어 낸 심히 기름진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되 무엇을 더할 것이 없도록 최고 최상의 포도원을 만들어주셨다고 말씀하지만 이 말씀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2절 후미에서 극상품 포도나무들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고 계셨지만, 극상품 포도나무들이 맺은 포도는 먹지 못할 들포도였음을 보시고는 너희가 나 하나님과 내가 지극정성으로 만들놓은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셔.
    그래서 본문의 주변 말씀은 심판의 말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계속 있을 무서운 심판.
    본문 말씀에 어느 정도의 마음 흔들림이 있는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지만, 아무 감각 없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그 이유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서라기 보다 우리 마음에 말씀에 대한 타성으로 굳어진 굳은 살들이 박혀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많.
    오늘도 당장 부담스런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는 뽑혀지고 잘라져서 불살라져 버리느냐 그대로 있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말씀에 담긴 무거운 짓누름이 있기 보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있는 편안한 말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空手來空手去 이상 아닐 수도 있.
    오늘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심히 기름진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어 주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고 기다리시는 좋은 포도를 얼마나 맺었고 지금도 맺으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무슨 생각을 얼마나 어떻게 하면서 하루를 사는가 날마다 나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 보면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다림줄에 달아 보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진리와 참된 것에 나를 비교하면서 살고 있으면, 얼마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나를 연결시키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시간 동안 얼마나 거룩하고 성결한 삶의 내용으로 내가 채워지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얼마나 구원 받은 확신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면서 수고하는가
    내 속에나 내 주변에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엔가 무엇인가 있는가
    새벽예배 참여하고, 수요예배, 주일예배 참여하는 것이 그 증거인가
    매일 양식의 말씀 읽는 것이 그 증거인가
    지금 얘기되어진 내용들이 피상적인 것 같지만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거룩해지는 것에 관심 두지 않
    말씀을 알고 하나님 믿는 나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우기면서 주장한다면 그 증거를 무엇으로 보일 수 있는가도 염두에 두어야
    나 사는 삶의 내용에 대해 두려워해야.
    내 사는 삶의 내용에 따라 두렵고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
    그래서 그 삶에 삶의 열매가 없고, 신앙의 열매가 없다면, 나에게 열매 없는 것에 두려움 느껴야.
    (사5장; 요15장; 눅13장)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나무이신 그리스도에 접목된 자들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포도원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인 신자들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시는 말씀.
    그러면서
    너희가 진정 포도원 안에서 농부 아버지의 말씀을 거름으로 받아 그리스도이신 나무에 붙어 있어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속해 있다면 그 증거는 참 포도 열매로 맺어져 나타나 보여지게 될 것이라 말씀.
    왜 우리가 지금 이 말을 강조하면서 나누고 있는가는 머잖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었던 삶의 내용이
    열매로 맺혀진 결과를 주님께 검사 받아야 하는 날을 맞게 될 것이기 떼문.
    그리고 열매 검수 결과에 의해 우리의 죽음 이후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물어보고 답해야.

    만일 내 가지에 맺혀져 있는 열매가 없다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을 다시 새겨야.
    (사5:5,6)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우리 모두 포도원의 나무라셨고, (요15장)에서는 포도나무 가지라셨는데, 포도 송이는 포도 나무 가지에
    달리는데, 열매가 달려야 하는 가지인 나에게 열매가 맺혀 달려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가지인 나에게 맺혀 있는 열매가 없다면 그 날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게 되는가.
    (사5.1-10) 5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열매가 없는 사람, 열매를 맺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이고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버려져 마른 나무조각 되어져서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잘라져 땅에 버려져 짓밟히다가 불에 타 사라져버린다셨.
    예수님 말씀하셨.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두려워 할 것은 우리 영과 혼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언젠가 내가 죽으면 그 날에 내 몸을 죽이셨을 뿐 아니라 우리 영(과 혼)을 천국에 데려가시거나, 지옥 불에
    던져버리실 분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두려워할 분이라신 말씀.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이와 방탕에 안주하고 있을 때 지옥 심판을 피해가지 못할 수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성경이 말씀하신 진리.
    다른 모든 교회에 있는 지옥 심판이 우리 교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
    다른 모든 가정에 있는 지옥 심판이 내 가정에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
    교회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가정마다 회심되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두려워해야.
    교회마다 가정마다 젊은 자녀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신실함 없고 경건치 못한 부모 아래서 신앙적으로
    방치되어져 성장되는 것도 위험하고 두려운 일.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세상의 집과 일터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덩달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면서 사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곳에 함께 손 잡고 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하면서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면 또 종교적 가면을 쓰고 교회에 나와서 거룩해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사람들.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포도원에 포도이기는 하지만 먹지 못할 들포도라고
    하신 것.
    (사5:4,5)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사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그런데 더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고 이제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시고 계시지만,
    맺은 것이 들포도인 사람들에게 뭐라시는가.
    (사5: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이라셔.
    가옥에 가옥 이으면서 큰 집 짓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 없도록 장사 크게 하면서,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 자기 왕국에서 자기가 하나님인 사람들이 들포도 맺는 사람들이라셔.
    이런 들포도 맺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
    이들에게 禍가 있게 하셔서,
    (사5:9,10)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내 나무의 열매 (사5:1,2,7; 눅13:6-9; 요15:1-10; 사 5:1-10) 308 넓은 들에 익은 곡식
    가옥에 가옥을 이으면서 지어 놓은 크고 아름다운 집에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라셔.
    열훌 갈이 포도원에서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고, 그 큰 논과 밭의 사업장에서 고작 한 에바의 수익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
    극상품으로 만들어 주신 극상품 포도나무가 하나님께 들포도 맺어 드린 결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시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고 경험케 하시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아름다운 화음과 화합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일이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
    우리 각 개인의 삶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 놀랍기만.
    아들 성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 가르침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가르침이 삶이 현장 곳곳에 적용되어 열매 맺어지게 하도록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일을
    함께 하셔.
    이 말씀이 (갈5:22,23)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항상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셨.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참으로 난해한 문제는 삼위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번번이 죄에
    넘어지고 죄에 패배하곤 한다는 것.
    내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는가는 내 안에 죄를 더
    좋아하고 죄가 주는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기 때문.
    그래서 (약2:15-16)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죄의 열매들, 땅의 지체들을 사랑하지 말라신 것.
    그것들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고만 있다면, 죄와 타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도 그 사람을 모른다 하시는 사람.
    내 안에 세상과 사람의 우상들이 가득한 사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이기고자 struggle with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신 일을 마무리
    하실 것.
    그리고 그 마무리는 노력하고 애쓰는 자들에게 사망의 심판에 이르게 하는 죄에 승리하게 하시는 것.
    죄에 대해 이겨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과 쾌감을 우리는 알아.
    똑같은 죄에 대하여 졌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이겨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기쁨을 아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하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 맺는 나무, 열매 맺힌 가지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기름 부으셨는데,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나에게서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이 보이겠는가, 내 주위에, 나한테서 하늘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지고, 그리스도의 흔적 있는 말과 행동이 보여지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때, 나의 행위를 볼 때,
    내가 영원한 것을 보고 확신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통해 영원한 것을 보고 만질
    수 있는가
    내가 성경적인 방식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도 나의 성경적 삶의 방식에 영향 받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접하고 대하는 동안 영적이든 세상적이든 도움 받고, 믿음으로의 진행성이 있으며,
    열매 풍성히 맺혀진 나무이고 가지 되어지는가
    나의 삶의 어느 것으로라도 그 열매를 보여 줄 수 있는가
    내가 무슨 열매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아무 열매도 보여줄 것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맺혀진 열매 없는 가지는 죽은 가지, 부러진 가지, 꺾여진 가지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한 번도 푸르러 본 적 없는 신앙
    가지인 것 같이 있으면서 한 번도 열매 맺어보지 못한 가지
    그리스도인은 가지여야 하고, 가지라면, 가지이기 위해서는 열매가 맺혀져 있어야 한다셨는데.
    어떤 가지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
    믿음이 아무리 좋은 신앙인이라도 신앙의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없다는.

    신앙인에게 믿음의 열매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인 실험적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이
    과정에서 맺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삶 자체인 성령의 열매 맺게 하시는 생명 주심의 결과물.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우리에게 맺혀지되 9가지나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의지와 노력과 성품으로 맺어질 수 있는 것 없어.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어떤 열매도 성령의 함께 하시고 도우심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참으면서 화평케 할 수 없으며, 자비와
    양선과 온유할 수는 더욱 없고, 충성도 절제도 할 수 없.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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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25136 2023-01-05T07:03:38Z 2023-01-05T07:29:42Z 건너야 할 홍해(紅海, Red Sea)와 요단(Jordan river)


    홍해와 요단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믿음의 순례길에는 반드시 건너야 할 두 가지 강이 있습니다.

    첫째는 홍해란 강(바다),
    둘째는 요단강

    홍해는 자기 힘으로 건널 수 없고 오직 은혜의 기적으로 건널 수 있는 강(바다)입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자력이 아니라 은혜의 타력, 즉 하나님의 기적과 사랑을 통해 구원 얻음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바다를,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십자가란 길을 통해서 건널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구세주, Jesus is my Savior!)

    이것은 영적 순례의 시작입니다.
    가나안이란 목적지에 이르려고 하면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것은 요단강입니다.
    이 강은 홍해처럼 기적으로 건너는 강이 아니라, 언약궤(말씀)을 앞세움으로 건너는 강입니다.
    언약궤(말씀, 십계명)을 앞세우며 건넌다는 의미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태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패스포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능력이라고 합니다(Jesus is my Power!)


    요단은 가나안 땅을 경계짓는 중요한 강으로 물을 공급하는 핵심적인 강이다.

    JordanRiverpng

    북쪽으로는 네개의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서 남쪽을 향해 흐른다.
    수원지 중 유명한 것이 헐몬산이다.

    시편 133:3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중간에 갈릴리 호수를 거친 뒤 사해에서 끝마쳐진다.
    보통 이스라엘 영토 전체를 가리킬때, 관용어로 단에서 브엘세바라고 하는데, 여기서 단(지명)이 요단강이 시작되는 곳이며,
    이스라엘 영토의 남쪽 끝이 브엘세바이다.

    요단강은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 산악 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까지 320㎞를 흐릅니다.
    서쪽에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지방이 있고 동쪽에는 지금의 요르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은 아브람이 롯과 각자 거주지를 정할 때 처음 언급됩니다(창세기 13장).
    신약성경은 요단강을 그리스어로 ‘이오르다네스(Ἰορδάνης)’라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곳입니다(마가복음 1:5)

    Ἰορδάνης, ου, ὁ  2446

    1. 팔레스타인의 주요 강 ‘요단’

    발음 / 이오르다네스(Iŏrdanēs)
    어원 / 히브리어 33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요단(마 3:5, 4:15, 19:1, 막 1:5, 10:1, 눅 4:1, 요 1:28, 3:26, 10:40).
    신약 성경 / 15회 사용


    영어에서는 이오르다네스조르단(Jordan)으로 씁니다.
    나라 이름 요르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정관사(the)를 함께 쓰면 요단강을 뜻합니다.
    사람 이름이나 성씨로도 씁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광야 생활 마지막에 요단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섬기면 사망과 저주가 임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8~19, 새번역)

    모세는 이 명령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신명기 30:14)

    홍해를 건넜다고 해도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아직은 광야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간다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가나안 정복의 삶을 경험하려면 말씀의 다스림에 순복하는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므리바에서 물 사건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기 뜻대로 바위를 지팡이로 여러 번 내리쳤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는 모세의 한 번의 실수를 엄벌하는 의미가 아니라, 가나안 땅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야 했던 것처럼,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도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영적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의미, 즉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홍해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신 십자가라면, 요단강은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홍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요단강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영적 요단강을 건너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히브리어로 홍해는 무슨 의미일까요?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뜻으로는 "갈대 바다"이다. 그것은 처음에 수에즈 만 위쪽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호수와 습지의 연쇄 지역을 가리켰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출 13장에 기록된 출애굽의 사건 현장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이름은 후에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을 다 포함하는 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

    아카바 만*과 수에즈 만 및 오늘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북부 호수 지역을 포함하는 (또 아라비아 바다와 인도양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바다를 가리킨다.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구약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세계 창조의 과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창조를 하나님이 바다*를 정복한 사건으로 상징적인 언어로 찬양하기 때문이다(사51:9-10 참조).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이다. 이 장은 역사의 한 위대한 절정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 홍해를 건넌 지점에 대한 최근의 주장이 있다. “떨기나무”의 저자 김승학씨는 그 지점이 느웨이바 해안이라고 하며, 이곳을 건너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 적힌 대로 “아라비아의 시내산”에 다다랐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비하히롯과 느웨이바를 통해 12마일의 아카바만을 통과하여 아라비아의 바알스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솔로몬 성전의 법궤를 찾아냈다고 하는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Ron Wyatt)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론 와이어트는 느웨이바 해안과 아라비아로 향한 바다 속에서 수많은 병거바퀴와 마구, 산호초에 둘러싸인 사람의 뼈와 말의 뼈를 발견하여 촬영하였다. 강력한 동풍으로 물러난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마른 땅으로 건너갔다면, 이는 얼마나 놀라운 행진인가?  

       이 놀라운 사건은 깊고도 풍성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바다 속으로 길을 내신다는 점이다. 사람의 상식으로 보면 바다는 건널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멸망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강력한 동풍으로 이곳에 바닷길을 내시는 분이시다. 이는 해저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다.  

       둘째는 이 길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집트의 심판이 교차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선민에게는 구원이지만, 대적하는 세력에게는 심판이다. 이 바닷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완전히 탈출하여 구원을 받는다.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을 추격하여 바다로 들어오지만, 병거바퀴가 빠지고 벗겨지며 물에서 심판을 받는다.  

       셋째는 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신다. 모세와 백성의 찬양이 터져 나오고 미리암의 찬송이 울려 퍼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는 중에 높임을 받으신다. 약하여 스스로 이집트에 저항할 수도 없는 이 백성을 노예상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찬양을 받아 마땅하다.

       넷째는 이 기적을 통하여 고대의 두려움의 대상인 혼돈의 바다와 그 속에 노는 흑암의 세력이 심판을 받는다. 이사야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라합”이라는 용을 심판하는 사건으로 그린다.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9).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인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신다.

       다섯째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그려진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제 뒤로 돌이킬 수 없다.

    히브리어로 요단은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어로 요단은 야라드 (ירד)에서 파생한 야르덴 (ירדן)으로 표기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지게 된 근거는 골란고원에서부터 시작된 강줄기가 가파른 협곡을 지나 사해까지 이르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비록 자연현상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긴 했지만, 요단은 더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단”이라는 의미는 “내려가다” 혹은 “급하게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빠르게 흐르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밝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앃여 서리라.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에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야만 했다. 가나안 정복의 첫 과제는 인간이 쌓아올린 성벽이 아니라 요단강이라는 자연 장벽이었다. 가나안 정복 자체가 그러했듯이 요단강 문제도 여호와 전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앞서 전쟁을 수행하시는 하나님과 믿음으로 그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순종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레위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고이천 큐빗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언약궤를 뒤따라갔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잠기자 물은 북쪽 약 25km 떨어진 아담 성읍 주변에서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수 3:15-16). 그렇게 물 흐름이 끊어지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다. 여기에서 '강물이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는 것은, 지진활동으로 인하여 요단강 양쪽 언덕(고르지역)이 강 주변(조르지역)으로 무너져 내려 자연적인 댐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요단강 계곡 지역은 지금도 지진활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교훈을 가르쳐주셨다.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갖게 하신 것(수 4:24)과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수 3:7; 4:14).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넌 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다른 족속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여호와의 손이 얼마나 크고 강한 가를 목격한 주변의 모든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 내리고 정신마저 잃어버릴 정도였다(수 4:24; 5:1).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과 관련하여 성경은 후손들을 위한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명을 선택하여 마른 땅이 된 요단강 안에서 각각 하나씩 열두 개의 돌을 가져오게 하였다(수 4:2-3). 그리고 그 돌을 길갈에 기념비로 세웠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승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가르치는 더 큰 목적의 기념비였다. 후일에 후손들이 그 돌들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가르치라는 것이다(수 4:2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요단강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져 아름다운 신앙 유산이 되었다. 교육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재생산하는 거룩한 통로이다.

    요단강 사건은 가나안 입국과 출애굽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는, 홍해와 요단강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넌 것이다.

    두 사건 모두는 물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그 장벽을 기적으로 해결해주셨다(수 4:22-23).

    둘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력이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와 동등한 지도자임을 확증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고(수 3:7),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어 모세처럼 백성들이 두려워해야할 지도자가 되게 하셨다(수 4:14).

    셋째는, 두 사건은 교육적 기능의 강조가 있다.

    출애굽에서는 유월절을 통한 교육이 관련되어 있으여(출 12:26-27), 가나안 입국에서는 길갈의 돌기둥들이 교육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수 4:21-22).

    여호수아서는 왜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의 유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일까?
    출애굽이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시작이라면, 가나안 입국은 그 구원을 완결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가나안 입국에 실패하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새로운 영도력과 그를 따르는 순종의 신앙으로 가나안 정복을 이루는 주역이 되었다.
    여호수아서는 그런 반전의 역사를 두 사건의 대비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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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21757 2022-12-28T08:01:43Z 2024-05-18T14:32:30Z 동행하는 이야기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이번주부터 목회서신(牧會書信. The Pastoral Letters)을 읽게 됩니다.
    목회서신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세 권을 말합니다.
    목회서신이란 용어는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세 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며 본문을 살펴보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새롭게 발견한 진리는 무엇인가?
    3.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4. 내가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인가?
    5. 내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6. 내가 간구해야 할 약속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한 후 새벽 묵상과 기도의 시간에 소개되는 내용을 종합하므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주일 기도문
    05-12-2024(주일)

    어버이날 / 노천명

    온 땅 위의 어머니들이
    꽃다발을 받는 날
    생전의 불효를 뉘우쳐
    어머니 무덤에 눈물로 드린
    안나 자아비드의 한 송이 카네이션이
    오늘 천 송이 만 송이 몇 억 송이로
    피었어라.
    어머니를 가진 이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
    어머니날을 찬양하자
    앞산의 진달래도 뒷산의 녹음도
    눈 주어볼 겨를 없이
    한국의 어머니는 흑인노예 모양 일을 하고
    아무 찬양도 즐거움도 받은 적이 없어라
    이 땅의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싹을 내거니
    청춘도 행복도 자녀 위해 용감히 희생하는
    이땅의 어머니는 장하신 어머니
    미친 비바람 속에서도 어머니는 굳세었다.
    5월의 비취빛 하늘 아래 오늘 우리들의
    꽃다발을 받으시라.
    대지와 함께 오래 사시어
    이 강산에 우리가 피우는 꽃을 보시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게 하소서
    성 어거스틴의 기도

    오 하나님,
    이제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참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지배하에 거하고자 합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소서.
    그러나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치료하여 열어주소서.
    주님의 손짓을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치료하여 뜨게 하소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바로 식별할 수 있도록
    나에게서 망상을 쫓아내주소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말씀해주소서.
    주님이 명하시는 모든 것을 나는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몸 안의 독소를 키우는 것은 화(火)

    정신의학자 "엘미게이스"가 감정 분석 실험 중 새롭게 발견한 이론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결을 시험관에 넣고 냉각하면 색이 있는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전물은 감정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화를 내고 있으면 밤색, 고통과 슬픔을 느낄 때는 회색, 후회의 말을 내뱉을 때는 복숭아색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색으로 변한 침전물을 모아 실험용 흰쥐에게 주사하면 짧은 시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화를 낼 때 우리 몸 내부에서 엄청난 독소를 뿜어내고 이 독소는 의학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무서운 독극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분노는 상당히 격렬한 감정이라서 화를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에 독소가 쌓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독소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 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
    - 로버트 그린


    어버이를 위한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부모를 모르는 인간을 속물과 같고 쓰레기 같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놀라고 있습니다
    나를 창조 하신 하늘의 아버지와
    나를 낳으신 눈에 보이는 아버지와 믿음으로
    양육해 주시는 어버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르다 보니 위선과 거짓 경견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부모를 잘 모르다 보니 함부로 대하고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부모가 어떤 분인줄 모르다 보니 아버지에게 공손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경건한 척 하였고 잘 믿는 척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하자 마시고 보혈의 사랑으로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똑바로 잘 알지 못하다보니
    우리 아버지를 깊은 속도 모르고 어머님의 절절한 사랑도
    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내 방식대로 효도 하려 하였습니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부모를 대하려 하였습니다
    효도하려고 유교식으로 제사를 잘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효도하려고 불교 식으로 49재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효도 하려고 납골당으로 흙으로 가벼린 묘지를 찿기에 바빳습니다
    차라리 살아계실때 얼굴 한번 찿아 뵐껄 후회하고 있습니다
    한번 더 인사 드리고 대접해 드릴걸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때늦은 후회만 하고 있는 저희를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비틀 비틀 교회가시는 어머니를 차량으로
    모셔 드리지 못할망정 시도 때 도 없이 교회 간다고
    짜증을 내어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릴적도 있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에게 넘어 지면 어쩌시려고 말하면서
    생각해 드리는 척하면서 야단치며 구박 하였습니다
    자녀위해 기도 하시는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도
    해아리지 못하였으며 후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넓으신 배려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속좁은 저희를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갈라진 목소리로 찬송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스마트 폰을 도와 드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예배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더 잘 예배하도록
    첨단 기능으로 도와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새벽기도를 좋아하셔서 새벽기도 가시는 어머니를
    차량으로 모셔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헌금 드리기 좋아 하는 어머니 손에 한금을 쥐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혹여 이런 저런 이유로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닌지
    혹시 이런 저런 핑계로 어머님의 마음에 슬픔을 남긴 것은 아닌지
    마음을 가다듬어 하늘 아버지께 우리의 불효를 자백드립니다







    05-05-2024(어린이 주일)

    맥아더 장군
    자녀를 위한 기도(아버지의 기도) (1952년 5월)

    A Father Prayer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May 1952)

    내게 이런 자녀를 주시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시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 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않는 자녀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아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날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A Father Prayer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May 1952)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es will not take the place of deeds;
    a son who will know Thee ?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04-28-2024(부활 후 제5주)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자

    영국의 설교자 스펄젼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 ~ 1892. 1. 31)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외쳤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은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때로는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간증(干證)이 마치 굉장한 믿음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려면  인간의 감각과 경험과 눈으로 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잘 알려진 어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6)

    성경을 육신의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 읽는 방법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라고 합니다.
    이번 주부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한일서를 만나려고 합니다. 


      




    04-14-2024(부활 후 제3주)

    복음(福音)이란?

    복음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혹은 넓은 의미로 ‘복음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 대한 죄인들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장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갈 1:7; 빌 1:27)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명령은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은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은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눅 2:11). 복음과 예수님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1:4).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나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동전의 안팎과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느냐고 물으면 복음의 정의에 따라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단순히 ‘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면 ‘예스’ 대답이 나오고, 복음의 정의를 ‘예수를 믿는 것+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면 ‘노’가 될 것입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대답이고, 후자는 믿음+행위라야 구원이라는 대답입니다. 이 두 갈래의 엇갈린 주장들은 지금도 신학계와 교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04-07-2024(부활 후 제2주)

    복음(福音)이란?

    "복음"이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복음적이란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복음적일 수 있습니다.
    비복음적인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과 또는 성도로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했습니다(빌 1:27).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삶을 요구하는 시대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의 현장이 부활의 진리를 목격할 수 있는 복음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성공해야 하겠습니다.






    03-31-2024(부활주일)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피천득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02-11-2024(주현 후 마지막 주. 흰색 변화주일)

    2024년 사순절 절기가 2월 14일부터 시작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성도들은 이마에 지난해에 사용했던 종료나무 가지를 태워 재가 된 것으로 이마에 성호(십자가)를 긋고 온종일 죄인된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생명을 얻고 살아간다는 고백을 합니다. 또는 거룩한 기름으로 이마에 성호를 긋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오후 9시) 출애굽기를 하루에 한 장씩 읽고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할 기도 제목들을 알려주시면 사순절 기간 동안 함께 기도하며 초대교회 때부터 역사하셨던 성령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동참하기를 기대합니다.

    2024년 119기도회(하루에 한 번 9시)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것인가를 직접 체험하고 그 은혜를 부활주일에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한계시록 2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요한계시록 3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2-3-2023(성령강림 후 제27주)
    주와 동행 365 #. 49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갈망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그 마음을 헤아리며 이번 주간에는 요한계시록 2:1-5을 암송합니다.

    요한계시록 2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11-26-2023(성령강림 후 제26주)
    주와 동행 365 #. 48

    주와 동행 365 #. 48
    이번 주간은 요한계시록 1:1∼20을 암송한 것을 복습합니다.
    인도의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 한 마리를 관찰하다가 쥐가 고양이 앞에서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관찰하던 마술사의 마음에 쥐가 불쌍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는 마술을 부려서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변신한 고양이가 또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개를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더 불쌍하게 느낀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고양이는 개가 되자마자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또 다시 마술을 부려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변신하자마자 호랑이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호랑이를 보면서 마술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해보았자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그래서 다시 원래 모습인 쥐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은 사탄입니다.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진리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1-19-2023(성령강림 후 제25주) 추수감사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7

    어느 조류학자가 독수리 새끼를 닭장 안에 넣고 길렀는데 독수리 새끼가 병아리처럼 활동했다고 합니다.
    독수리 새끼는 주위에 병아리밖에 없기 때문에 병아리처럼 걷고 병아리처럼 소리합니다.
    세월이 흘러 새끼들은 많이 자랐습니다.
    조류학자는 독수리가 완전히 퇴화했는지 살펴보려고 독수리를 마당에 갖다 놓고 날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날지 못하고 푸득거렸고 병아리 소리를 내기만 하더랍니다.
    조류학자는 독수리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산 높은 곳에서 푸른 숲을 보여주고 날아가도록 했습니다.
    그 순간 다른 독수리 한 마리가 세차게 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이 독수리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독수리는 더 이상 병아리가 아니라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좌절하고 주저앉아 낙심한다면 날지 못하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장부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간 암송할 말씀(요한계시록 1:16∼20)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1-12-2023(성령강림 후 제24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6

    어떤 심리학자가 여러 마리 벼룩을 대상으로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나 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모든 벼룩들이 20cm는 충분히 다 뛸 수 있고, 어떤 벼룩은 무려 30cm를 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높이뛰기에 실력을 가진 벼룩들만 모아서 7-8cm 높이의 유리컵에 놓고 그 위에다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래도 벼룩들은 유리컵 안에서 계속 뛰었습니다.
    그러나 유리컵의 한계 때문에 더 높이 뛰지 못하고 유리벽에 자꾸만 부딪쳤습니다.
    한 두 시간이 지난 후 심리학자는 벼룩이 들어있던 유리컵의 뚜껑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상을 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룩들은 ‘이제 나는 그 이상 뛸 수가 없다.
    이 7-8cm인 유리컵의 한계가 내 한계다’라는 생각에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한계를 너무 낮게 낮추어 버리고 인생의 어떤 난제 앞에서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점을 낮추지 말고 암송하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번 주간 암송할 요한계시록 말씀 1:11-15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1-05-2023(성령강림 후 제2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5

    지난 주간에 암송할 요한계시록(1:1-5)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번 주간에 암송할 요한계시록의 말씀(1:6-10)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0-29-2023(성령강림 후 제2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4

    2006년 발간된 얼스터대학의 리처드 린 교수와 핀란드 탐페레대학의 타투 바나넨 박사의 공저인 ''IQ와 세계불평등''이란 저서에서
    미국인의 IQ는 100, 싱가폴, 홍콩인의 IQ는 108, 한국인의 IQ는 106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IQ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속한다.
    이제부터 탁월한 한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요한계시록을 암송하는 것으로 그 우수성을 보여주자!
    말씀을 암송하려면 세 가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집중(Concentration)
    둘째는 반복(Repeat)
    셋째는 인내(Patience)

    이번 주간에 암송할 요한계시록의 말씀(1:1-5)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0-22-2023(성령강림 후 제21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3

    ‘톨레레게(tolle lege)’는 라틴어로 성경을 “집어서 읽어라”라는 뜻으로 초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기록한 <고백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청년 시절 마니교에 깊이 심취하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를 원하지만, 정욕과 세상 염려에 매여 번민합니다.
    그런데 그의 집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울며 기도하던 중에 이웃집 아이들의 노랫소리 같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 로마서 13:13~14을 펴 읽고서는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아우수스티누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계 업 그레이드하여 이제는 "암송하여 읽어라(레시타 엣 레게, recita et lege)"는 교훈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여러 차례 의사를 면담하려고 담당 의사의 진료실을 찾을 때마다 어르신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어른들의 표정은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멋지게 나이가 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뇌를 자극하고 훈련하는 좋은 방법은 성경말씀을 통채로 암기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암송하려고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함께 동참하여 노후의 삶에 활력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북미장로교 선교사 권세열의 평전(評傳)
    한국에서 성경 말씀과 씨름하며 반세기를 산 그의 사역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랜시스 킨슬러(한국명 권세열) 선교사는 일제강점기에 평양 숭실대학에서 교수로 사역하며 성경구락부운동(Korea Bible Club Movement)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대다수 아동들은 아동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매일 길거리에서 빈둥거리며 지냈습니다.
    그 때 킨슬러 선교사는 미취학 빈곤층 아동들에게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기독교 전인교육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하는 ‘개척구락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킨슬러 선교사는 1930년 2월 추운 겨울날 평양의 한 서점의 따뜻한 방에서 여섯 명의 길거리 걸식 소년들을 데려다가 함께 첫날밤을 보냈었는데, 그날 이후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성경 한 구절에서 성경구락부를 아우르는 교육 원리와 실천 방법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경 본문이 누가복음 2장 52절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하시더라.”

    킨슬러 선교사는 이 성경 말씀을 기독교교육의 실천 모델로 삼고, 소년 예수님이 자라면서 네 가지 생활 영역에서 조화와 균형을 보여준 것처럼 한국의 아동들을 원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무지와 가난 때문에 사회 참여와 봉사에 무관심하였던 한국 사회의 빈곤층 아동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다윗이 노년에 기록한 시편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유진 피터슨이 다윗의 영성에 대해서 묵상한 책을 ‘집어서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의 깊은 은혜의 경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은혜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다윗은 촌부 이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지만,
    청년 시절부터 일생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골리앗처럼, 그를 죽이려고 달려오는 숱한 적군들이 있었고,
    사울왕과 밧세바처럼, 그가 뛰어넘어야 할 무수한 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수없이 많은 인생의 담들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험난하였던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며
    바로 그 비결을 ‘주를 의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0-15-2023(성령강림 후 제20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2

    하나님은 사랑입니다(God is Love).
    헬라어로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θεος αγαπη εστιν)"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선제적 사랑, 둘째는 인격적 사랑, 셋째는 선택적 사랑
    선제적 사랑이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으로 사랑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십니다.
    인격적 사랑이란 사랑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선택적 사랑이란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이와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 두렵게 하는 것들은 "가난, 비판, 육체적 고통, 사랑의 상실, 자유의 상실, 늙어가는 것,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절대적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용서(容恕), 둘째는 희생(犧牲), 셋째는 영생(永生)

    용서를 위한 가르침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2)
    희생을 위한 가르침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b)
    영생을 위한 가르침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잡한 세상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소망과 기쁨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08-2023(성령강림 후 제19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1

    한글날 577돌을 맞아 "예수님의 언어"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는 ‘아람어’를 사용하셨고,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을 때는 '히브리어'로 읽으셨습니다.

    아람어는 기원전 10세기 전후 유프라테스 상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페르시아만, 시리아, 이란, 팔레스티나, 지중해 연안까지 근동 아시아 모든 지역에서 사용하던 공용어이었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람 민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면서 언어도 그 지역 말과 섞여 히브리말로 고착됐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바벨론 유배 때까지 유대인의 언어는 히브리어이었으나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후 아람어의 다른 방언들에 눌리어 히브리어는 서서히 변화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회당에서 히브리어와 글을 지키려고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유대 지방의 히브리어로 성경을 필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하면서 페르시아 왕들은 아람어를 행정 공용어로 채택해 유포시켰고, 이스라엘도 그 영향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아람어는 이스라엘의 사제와 귀족 등 상류층의 언어가 되었고 히브리어는 일반 민중의 언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을 정복한 후 헬라어가 아람어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지방 사람들은 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탈리타 쿰” 이라고 하셨던 것(막 5:41),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신 것은 아람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사용된 죄패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적었습니다(요 9:19-20).

    예수님의 언어는 사람을 죽이려는 말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던 것처럼 "용서의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든지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용서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10-01-2023(성령강림 후 제18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0

    교만한 인간들이 노아 홍수 후에 다시는 흩어지지 않으려고
    시날 평지에서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없게 하므로 인간들이 쌓는 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민족들이 그들의 나라를 세우고
    그들의 언어와 글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언어와 글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심지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불어, 독일어, 일어와 같은
    언어와 글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글의 우수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한글은 무슨 소리든지 문자로 표현이 가능하고 심지어 문자 그대로 발음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언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을 한글만이 갖고 있기 때문에 한민족은 장차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글을 사용하는 민족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 이념의 혼돈으로 어지럽고 미래가 불투명한 것 같지만 반드시 한글의 뛰어난 발음과 표현력 때문에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신실한 믿음으로 그 기초를 더욱
    든든하게 다듬어 갑시다.

    09-24-2023(성령강림 후 제17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39
    “복기(復碁. Post Mortem)”라는 용어는 바둑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은 바둑 한 판에 사용하는 바둑돌의
    수가 대략 400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국을 마치면 반드시
    바둑을 두었던 것처럼 재현하는데 정확하게 바둑알이 놓였던 자리에 상대방의 바둑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회복할 復, 바둑 碁).
    신앙생활에도 이와 같은 복기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회개를 위한 복기(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둘째는 설교를 위한 복기(잠언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선제적(先制的) 사랑(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
    요한일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인격적(人格的) 사랑(누가복음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09-17-2023(성령강림 후 제1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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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을 헐어버리자!

    새벽마다 환상의 선지자가 전한 '에스겔'을 읽고 묵상합니다.
    지난 토요일(9월 16일) 에스겔서 8장을 읽고 함께 나누었던 묵상의 주제를 생각해 봅니다
    "담을 헐라(Dig in to the Wall)"
    "담"이 사용되는 주목적은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목적으로 세워야 할 '담'을 잘못된 목적을 감추려고 쌓아가는 인간의 탐욕스런 모습이 도처에서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점점 더 높게 쌓아가는 어둠의 세상을 밝은 빛으로 이끌기 위하여 담을 헐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여!
    오늘의 시대가 쌓은 담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죄의 담
    둘째는 형제와 형제 사이를 분리시키는 '미움과 다툼의 담'
    셋째는 민족과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휴전선의 담'
    넷째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좌파의 담'

    이 모든 담을 무너트리려면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죄의 특징은 나누고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베르린 장벽이 무너질 때 온 세상이 열광하던 감격과 기쁨의 역사적인 순간을 회상하며 이제는 우리의 감격과 기쁨으로 끌어 안기 위하여 죄의 담을 무너트려야 하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읊조려 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09-10-2023(성령강림 후 제15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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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문이 열리다

    조선으로 향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입니다. 서상륜은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이고, 그의 동생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 땅 소래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그 당시 두 형제가 세운 교회당은 ‘초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이후 1895년 한옥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토착민들의 헌금으로 건축했던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잊혀진 구약성경 최초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은공 기린다’

    잊혀진 한국 교회의 은인,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인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Alexander Albert Pieters.1871-1958)목사의 한국 교회를 위한 공헌이 재 조명 된다.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기념 사업회(회장 박준서, 연세대 구약학 명예교수)와 풀러신학교 코리안센터(원장 김창환 교수)는 오는 12월 1일(토) 오전 11시 LA 패서디나인근 알타디나(Altadena)에 있는 피터스 목사 묘역에 그의 은공을 담은 기념 동판 제막식을 갖는다.

    기념 동판은 한글과 영어로 1895년 한국에 온 피터스 목사가 최초로 ’시편촬요’출간(1898년)과 구약전서 번역과 개역 구약성경 완역(1938년)에 주도적 역할을 한 내용등이 기록된다.

    패서디나 인근 알타디나에 있는 피터스 목사 묘소를 손수락 기자가 직접 살펴보고 있다.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가 기록되어 있다. [사진 KernChe Lu]


    피터스 목사의 묘소는 2017년 패서디나의 풀러신학교 연구 교수로 와 있던 박준서 교수에 의해 알타디나의 마운틴 뷰 묘역에 잡초와 흙으로 덮인 채 방치되어 있음이 확인됐다.


    묘소의 석판에는 구약성경의 최초 한글 번역자임을 알리는 공적은 없이 이름과 출생,사망 년도만 기록 되어 있었다. 이에 박 교수는 한국교회가 공덕을 잊고 있는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 이를 추진하여 묘역에 기념 동판을 제막하게 됐다.

    기념 사업회는 또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여사와 에바 필드 여사 묘역에도 피터스 목사의 공덕비 건립과 피터스 목사 기념 강좌도 개최할 계획이다.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있는 알타디나 마운틴 뷰 묘지 정문앞에선 박준서 교수(2017) [사진 기념사업회]


    1898년 ‘시편 촬요’ 출간

    사후 60년만에 한국 교회를 위한 헌신을 재 조명 받게 된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가정에서 태어났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현재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이삭 프롬킨(Itzhak Frumkin) 이다. 그는 유대교 회당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심해 러시아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미국인 선교사 알버트 피터슨 (Albertus Pieters) 목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세례를 준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피터스로 개명했다.

    그는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의 권고에 따라 1895년 권서(勸書.colporteur)의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그는 2년간 한국 전역을 누비며 한국어를 습득했다. 불과 2년만에 한국어를 마스터한 피터스 목사는 평소 애송하던 시편 두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1898년 ‘시편촬요’를 출간했다.

    시편촬요는 역사상 최초로 구약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며 이로써 한국인들은 구약성경을 한국어로 읽을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의 가사는 그가 시편 67편과 121편을 번역한 것으로 찬송가 가사로 운율화 한것이다.

    피터스 목사가 1898년 한국어로 최초 번역한 ‘시편촬요’표지와 시편 23편.[사진 기념사업회]


    한국서 46년간 봉사, 1941년 패서디나 이주

    이후 1900년 피터스 목사는 미국으로 와서 맥코믹(mccormick)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은후 미국 북장로교회 목사로 안사를 받았다.


    1904년 한국으로 나와 당시 공인 성경 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 구약성경 번역,1910년 최초의 한국어 구약성경이 완성되었다. 이후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1938년 ‘개역 구약성경’을 완성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1938년 피터스 목사의 주도로 완성 된 ‘개역구약성경’을 표준 맞춤법에 따라 일부 개정작업을 한것이다.

    1941년 70세가 된 피터스 목사는 46년 봉사했던 한국을 떠나 패서디나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준서 교수는 “피터스 목사를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헌신과 공헌을 기념하는 일은 한국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일”이라면서 기념 사업에 많은 동참을 부탁했다.

    알렉산터 피터스 목사 기념동판 제막식.

    ▲일시: 2018년 12월 1일(토) 오전11시.
    ▲장소: Mountain View Mausoleum.
    2300 Marengo Ave.Altadena.CA 91101.
    ▲문의 :Fuller Korean Studies Center.
    박준서 교수:parkjs@yonsei.ac.kr.


    알렉산더 피터스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년 12월 30일 ~ 1958년 6월 29일, 한국명 피득)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1] 한국에서 구약성경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한 개신교 목사이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 150편 중 62편을 골라 우리말로 번역하여 '시편촬요'[2]를 출간한 것이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카운티 알타데나(Altadena) 소재 마운틴 뷰에 묻혔다.

    생애[편집]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교(Orthodox Jew)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Reuben Frumkin이고 어머니는 Rebecca Kaidanovsky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가 자라났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해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단했다.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난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우여곡절 끝에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세례받고 기독교인으로 중생하여 한국의 선교사가 되었다.[3]

    한국선교[편집]

    1891년 ABS 루미스(Loomis, Henry) 일본 총무에 의하여 권서(Colporteur)로 채용되어 1895년 5월 16일 내한했다. 1895년 9월부터 1898년 6월까지 3년 간 ABS 권서 겸 한국 부총무로 활동하면서 빠른 시일에 한국어를 익혔다. 서울 근교와 호남과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성서도 판매했다. 1897년부터 시편 번역에 착수하여 1898년에 12월 6일, 62편의 시편을 번역하여《시편 촬요》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구약성서를 발행했다.[4] 그 후에 구약성경번역(1911)을 번역했고 <개역구약성경>(1938)의 완역에 헌신하였다.

    각주[편집]

    1.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978886 박용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 1895-1911, 神學指南 2008年 봄호(통권 제294호), 2008.3, p.106-155
    2. 1898년 광무2년(고종35년) 크기는 17.8×10.5㎝
    3. 잊혀진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크리스챤투데이, 2017.12.18
    4. 알렉산더 A. 피터스(Pieters, Alexander Albert, 彼得, 1871~1958) 선교사


    최초로 구약 성서를 한국말로 번역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은인이요 영원히 잊지못할 선교사이다. 대부분 신약 성서를 한글로 번역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 존 로스 목사(John Ross, 1842~1915)는 많이 알려졌지만 피터스 목사에 대해서는 무슨일을 했는지를 잘 모르는분이 많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12월 30일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그가 자라났던 19세기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했다. 결국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 1895년 4월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된다. 유대인 본명을 버리고,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Pieters)라고 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피터스’로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당시 피터스 청년이 189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피터스는 그 일을 감당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그는 구약성경 개역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개역 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 성경전서’가 출판 되었다. (1956년에는 한글 맞춤법에 맞추고, 문장구조를 손질해서 수정한 ‘개역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은 성경번역 위원회를 만들고, 피터스를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피터스는 미국 매코믹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치고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04년 9월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신학교에서 같이 신학 수업을 받던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아내 캠벨 여사는 서울 생활이 얼마 되지를 않아 폐결핵에 걸려, 결혼생활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 젊은 나이에 별세 했다.

    부인의 죽음이후 피터스 목사는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운동을 전개하며 가난한 나라의 폐결핵 환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썼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의료 선교사였던 의사 에바 필드 여사와 재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필드 여사 역시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세브란스 병원서 별세했다. 피터스는 이방 땅에서 아픔과 상처를 한몸에 품고 안고 성경번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찬송가 383장과 75장 가사도 작사했다. 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은퇴할 나이가 되어 성경 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사역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LA근교 선교사 주거 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지는 목사 직함도, 공적도 없이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만 있었다.

    피터스 목사의 구약 성서 번역은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 식민지 세력 밑에서 압제 당하는 한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게 해 주었다. 구약성경 번역은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잊혀가는 피터스 선교사 삶을 보면서 자기의 동족도 아닌 이방땅 한국에 와서 일평생을 바친 헌신과 열정과 애국은 영원히 기념이 될것이다.(참고문헌 : 박용규의 소논문 ‘알렉산더 피터스’/크리스천 투데이, 한국복음주의 역사학회 ‘양화진 선교사의 삶’)







    08-27-2023(성령강림 후 제1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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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 1 선교사보다 먼저 찾아온 복음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선교의 놀라운 특징은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866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셔먼호 선장이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해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죽기 직전 성경이 들어있는 작은 보따리를 '박춘권'이란 졸병에게 건네게 됩니다.
    1899년,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지 33년이 지난 이 때 마펫 선교사 앞에서 한 남자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한 권의 성경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조선의 문이 열리다

    조선으로 향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입니다. 서상륜은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이고, 그의 동생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 땅 소래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그 당시 두 형제가 세운 교회당은 ‘초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이후 1895년 한옥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토착민들의 헌금으로 건축했던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리더를 심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 두 사람이 1885년에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이뤄지게 됩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로서, 의료선교사인 부인과 함께 고아원과 고아학교인 구세학당을 설립했고,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아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직접 영한사전, 한영사전, 그리고 한국어문법서 등을 만들고 출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울의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매진했고, 1887년 조선 첫 개신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복음 전파에도 힘썼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 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1885년 4월 9일, 제물포에 입국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드린 기돕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고, 근대교육에도 열정을 쏟았습니다. 배재학당을 세워 산수, 과학, 천문학, 지리, 그리고 야구와 축구, 정구 등 새로운 교육을 통해 서양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펼쳐 나갔습니다. 특히 일제치하의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 서재필 등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고자 군산으로 향하던 중 배가 침몰했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다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 조선 땅을 찾은 여성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남성 위주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안타까워하며 여성 교육 기관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는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것이 후에 7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명성황후는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 세워졌습니다.

    의학 민족의 마음을 싸매다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은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고종을 설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합니다. 이로써 의료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광혜원은 후에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자 병원으로 현재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됩니다. 제중원을 시작으로,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기독교병원이 세워졌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치유하게 됩니다. 알렌의 동역자였던 스크랜튼은 1885년 정동에 민간의료기관으로 ‘시병원’을 열어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시병원은 부녀자들과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습니다.

    문서선교의 출범

    초기 문서선교는 한글보급과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교 초기에 성경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한글을 택한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에 복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한글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1900년경 북감리회 선교사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서들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책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얽매고 있는 무지와 문맹의 사슬을 끊도록 지속적으로 영감을 불어넣는 자들이다. 현재 나의 목회를 받고 있는 1500명의 개종자들 가운데서, 글을 읽지 못하나 부분적으로나마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는 1900년경의 신자들 사이에 한글 보급률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성서공회에 의해 1906년 최초의 공인역 ‘신약전서’가 출간되고, 1911년 구약전서가 출간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커져갔고, 한글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을 품은 선교사

    초기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자력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의 세 가지 원리를 세우고 교회의 조직과 운영 면에서 큰 선교열매를 거둡니다. 특별히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부터 시작된 사경회는 ‘전국적인 교회지도자 양성’의 열망으로 이어져 많은 신앙 인재들을 양성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협정을 세웠는데요. 이는 한국 선교에 있어 불필요한 중첩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울은 공동지역으로 정하고, 경기와 충북, 경북, 황해, 평남, 그리고 평북지역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충남, 전북, 전남, 제주 지역은 남장로교 선교회가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함남과 함북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감당했으며, 경기와 충북, 강원, 황해, 평남, 평북지역은 북감리교 선교회가, 평북, 경기, 강원, 함남 지역은 남감리교 선교회가, 마지막으로 함남과 함북 지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분할해 선교에 힘썼습니다. 이런 지역 분할로 인해 교단별로 더욱 활발한 선교가 이뤄지게 됩니다.

    1903년 완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 선교사가 자기 안에 있던 그릇된 민족적 우월감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술과 능력을 의지한 교만함을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성령의 불길이 한반도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불길이 1907년 1월평양장대현교회로 이어지면서, 대대적인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다 함께 기도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온 세계에 한국식 기도로 알려진 통성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한반도를 뒤덮게 되면서, 차츰 교회가 조직화 되었습니다. 1907년 9월, 평양장대현교회 예배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는데요, 당시 독노회에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이 목사로 장립하는 안수식이 거행됐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당시 참석 총대는 목사 33명, 장로 36명, 선교사 38명이었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부흥의 역사는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참회와 회개의 영적대각성이 민족가운데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백만인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합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중심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나 김익두 목사처럼 복음의 열정에 불타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고 또 구령의 열정으로 전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한국교회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 운동은 후대에 민족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았던 놀라운 움직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관순, 주기철, 손양원

    초기 한국 선교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하는 선교였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며, 복음의 능력으로 그 모든 고난을 견디게 만든 것이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소녀, 이화학당을 다니던 유관순은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일제의 잔혹한 총칼 앞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아우내에서 시작한 그녀의 독립운동은 그녀의 가슴 속에 가득했던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신앙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곁에서 유관순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녀의 조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흘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녀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던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생애를 조국을 위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나고 자랐으며, 교회에서 배웠고, 교회에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예배로 마지막 삶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행복할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이 남긴 마지막 기도가 마음을 울립니다.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이 말은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온 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주님 품에 안긴 순교자입니다. 6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일제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온갖 회유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런 기도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약한 사람이 고문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저의 마음이 변치 않게 기도해 주십시오. 남은 기족들을 부탁합니다.” 고통 중에 있던 그는, 감옥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동참할 때, 주님께서 쓰러져 있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너마저 날 버리겠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고통 가운데 이 말씀을 남기시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줄 알았는데,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지고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손양원 목사님입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뤘고,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는 두 아들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고 맙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의 죽음에 가담한 청년을 살려주고, 또 용서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사랑의 원자폭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온전히 인정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9가지 감사기도문은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고, 또 겸손하게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순교자인 손양원 목사님은 6.25 때 공산군의 총에 맞아 48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늘 사랑하고, 늘 감사했던 그를 우리는 이 땅이 낳은 ‘성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 한국의 교회사

      1911년 기독교 각파 조선포교 구역도이다.

      한국의 교회사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역사, 즉 교회사를 말한다. 한국교회사라고도 한다.[1]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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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가톨릭교회조선시대에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모든 기독교 교파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유입되었다.

      정교회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정교회입니다.

      1900년에 흐리산프 쉐트코프스키 신부로부터 정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개신교회

      루터교회

      1834년 조선에서 약 25일간 머물렀던 독일 루터교카를 귀츨라프가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인 개신교 선교사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방문이었으며 루터교 교단 차원의 선교는 1958년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시작되었다.

      감리교회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

      1884년 6월 8일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를 하던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요코하마시를 출발하여 23일 인천에 도착하고, 24일 한양 미국공사관에 머물며 감리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김옥균이 일본에 유람할 대 맥클레 박사와 친분을 맺었는데, 맥클레가 한양에 도착한 당시 김옥균이 승정원 승지로 외무아문 사무를 보던 때라 맥클레 박사가 조선에 당도한 목적을 고종에게 아뢰었는데, 김옥균은 일본에서 감리교 선교부가 하던 복지사업들을 근거로 고종에게 감리교의 정주를 상소한다. 고종은 학교나 병원의 설립을 승인하겠다고 하교하였는데 이를 당시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에게도 전달하여 미국에도 보도된다.[2]

      미국 감리회에서는 이제 헨리 아펜젤러윌리엄 스크랜턴, 메리 스크랜튼도 파송한다. 이들은 이화학당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여러 병원도 세운다.[2]

      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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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의주군에 살고 있던 인삼 장수 서상륜은 만주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존 로스 선교사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1882년, 존 로스는 서상륜을 비롯한 의주 청년들의 도움으로 복음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다.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이듬해인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대구면 송천리에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3] 즉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후 1885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등 여러 교단의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1907년 한국 최초의 노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창설되었으며,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결성하면서부터 독립된 교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 문제로 조선총독부와 마찰을 보이다가, 제27차 총회(1938년)에서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일본 장로교 산하로 통합되며 해산한 이후, 1945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통합 기독교 교단에 흡수되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장로교회 재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 이래,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남측의 장로교 교인들만으로 1947년 총회를 다시 시작하였고,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1952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저항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제명당한 것을 계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이 출범하였고,[4]1953년에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장로교 계열이 한국기독교장로회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조직하여 분열해 나갔다. 1959년 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갈라졌다. 이후 1961년 김치선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 분립했고, 1974년 제24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에서 신자간에 일반 법원에서의 고소가 가능하다고 가결한데서 빚어진 교리의 신학적인 변질과 교회행정 문제에 항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측 총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반고소 고려파가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총회를 세워 나간 뒤로 대한민국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은 170여 개[5]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의 역사적 계승을 선언한 한국예수교장로회가 새로이 2012년 1월에 출범했다. 이러한 장로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복음주의 신학자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는 그 자신이 장로교 성직자임에도 한국장로교의 분열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독선에 따른 일이며, 이제라도 한국장로교회는 교제와 협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6]

      성공회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성공회입니다.

      1890년 잉글랜드 성공회찰스 존 코프(한국이름 고요한) 주교가 3대주교가 될 마크 트롤로프(조마가)사제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의사로서 현재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터에 성 루가교회(낙선시 병원, 선을 베푸는 병원)을 지어 의료선교를 한 랜디스(한국이름 남득시)와 함께 부산항으로 입국하였다. 대한성공회 선교 130주년을 기억하는 《성공회신문》2020년 9월 28일자 1면에 의하면, 1889년 11월에 주교서품을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받은 고요한 주교는 "임금이 없으므로 내핍생활을 해야 하며, 다른 성직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선교사 모집공고를 내었지만, 지원자가 없자 직접 지원자를 찾았다. 이에 호응한 이들이 조마가 주교와 남득시 선생이었다. 그날 존 코프 주교는 영국 세관원의 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7]첫 성공회 성당은 현재 인천 중구 내동 3번지 언덕에 있는 성공회 내동성당이며[8],서울 정동 1번지에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로 활동하는 교회를 세우며[9] 성공회는 한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성공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7년째인 1897년에 김희준(마가,?-1946년)과 김군명(요한)이 성공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10]

      존 코프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존 코프 주교는 1890년 조선에 입국하기전부터, 조선사람들이 빈곤질병으로 고통함을 알고는, 숙련된 의사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보도록 하는 의료선교를 생각하였다. 조선선교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순방 당시 많은 교우들이 자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미국인 랜디스(한국이름 남득시)가 존 코프 주교의 뜻을 존중하여, 성공회 내동교회에서 의료선교를 했다. 가마, 온돌을 사용하는 등 한국사람들의 전통을 존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영향으로 대한성공회는 1993년 관구 설정이 이뤄질때까지 잉글랜드 성공회 산하 교구로 활동하였고, 1965년 이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 조선교구로 활동하였다.

      각주


    2. “한국기독교회사(韓國基督敎會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4월 26일에 확인함.

    3. 양주삼 (1934년 6월 19일). “監理敎會宣敎五十週年 監理敎會가朝鮮에 宣敎를 시작한이야기”. 동아일보.

    4. “황해도 소래교회 -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 2012년 4월 26일. 2023년 1월 1일에 확인함.

    5. 이 교단은 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결합하였으나 신학적인 견해 차이 및 신학교 통폐합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1963년 환원하였다.

    6. 이중에는 개신교계에서 이단으로 판정되어 소속 교단에서 제명된 교회가 자체적으로 만든 비성경적인 장로교단도 포함된다.

    7. 뉴스 앤 조이 2006년 3월 31일자,김명혁 목사, “화해, 균형, 조화를 추구하며"

    8. 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성공회의 역사》. 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9. 천주교 답동성당, 내리감리교회와 같은 지역에 있어, 한국 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10. 1890년에 축성했을 때에는 한옥성당이었는데, 1926년에 지금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건축하여 축성함. 고딕양식을 생각했지만, 건축가 아서 딕슨의 도움말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11. 성공회의 역사/성공회 선교교육원 p.113


    한국기독교사 개관

    한국교회사는 로마 가톨릭을 포함할 경우 1784년부터를 다루지만 개신교를 중심으로 할 때는 알렌이 입국한 1884년부터를 기준으로 한다.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에서 무디 부흥운동을 통해 해외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스피어, 피어슨, 심슨, 고든, 무디로 대변되는 영향력 있는 부흥운동가들은 해외선교를 시대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었다.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서 해외선교 붐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에서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873년부터 만주우장에서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하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를 통해 1882년부터 한글성경이 번역(출판)되기 시작했다. 1882년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을 통해서 일본에서 한글성경번역이 진행되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이 성경을 가지고 입국했다. 이미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한글로 성경번역이 이루어졌다.

    탁월한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정책

    1884년 호러스 알렌이 입국한 후 한국에서는 세계선교의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했고, 이어 탁월한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선교는 1898년까지 미국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 캐나다선교회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하고, 미감리교선교회가 1885년, 그리고 1896년 남감리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이어 성공회,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착수하여 한국에는 짧은 동안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선교를 착수하여 개신교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 한국장로교선교회는 나라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교단이 달랐지만 하나의 장로교선교회를 한국에 시작했고, 1907년 독노회를 결성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그것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의 신학교 설립 목적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독자적으로 선교하지 않고 연합과 협력을 통해서 선교를 진행했다. 이들이 채택한 선교정책은 첫째, 의료 및 교육선교, 둘째, 문서 및 성경번역, 셋째, 선교지 분할정책, 넷째, 연합운동, 다섯째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수많은 학교들과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세브란스 병원, 상동병원 등 많은 병원들이 전국에 설립되었고 세브란스의전,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경신학당 등 수많은 학교들이 전국에 설립되었다. 기독교 학교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학생들로 받아들였다. 기독교 학교를 통해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었다. 사장된 언어 한글을 민중의 언어로 끌어 올린 것도 기독교였다. 춘향전 구운몽 등 한국의 고전을 영역하여 소개하였고 천로역정을 비롯한 많은 서양의 고전들을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였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성경중심의 기독교를 형성하고 문자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성경과 기독교 문서선교를 통해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기독교는 근대 한국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중심 틀을 제공하였고, 서양의 사상은 한국인들의 의식을 대단히 높여주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청교도 정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이어서 술과 담배를 금했고, 삶이 깨끗하였으며,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국을 다니며 순회선교를 했고, 사경회운동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감당했으며, 문선선교, 학교설립, 병원설립을 통해 치료하는 사역, 복음의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학습과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른 삶을 요구했고, 가정을 복음화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며, 결혼관계를 깨끗하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먼저 삶의 모범을 보였고, 복음전도를 실천했으며, 한국어를 잘 습득하여 한국인들을 교육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이상은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대부흥

    20세기 초 우리 민족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부흥이 한반도에 임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그것이다. 이 놀라운 부흥운동의 시발은 1903년 화이트와 맥컬리의 기도와 하디의 회심에서 시작되었다. 부흥의 불은 1904년과 1905년에도 계속 타올랐다. 이 부흥의 영향으로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가 결성되었다. 1906년 신년부흥운동, 그해 8월 평양선교사사경회, 9월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의 서울선교회사경회, 10월 목포부흥운동, 그리고 그해 가을 계속된 성령의 놀라운 부으심을 사모하는 정오기도회는 부흥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이런 가운데 1907년 1월 14일 15일 놀라운 대부흥운동이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임했고 이 부흥의 불은 장대현교회에서 계속 타올랐고 이어 평양전역으로, 그리고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2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 임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아마 사도 시대 이후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매큔 선교사는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라고 고백하였다. 이길함 선교사는 1907년 1월 15일 어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일어난 어떤 부흥보다도 강력한 부흥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블레어는 그날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온갖 죄악들이 그날 밤 토로되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재연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대부흥운동은 한국인들만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 이 놀라운 부흥의 불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해외선교열을 고취하고 놀라운 성장을 가져다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사회각성으로 이어졌다. 대부흥을 경험한 후 기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사회와 민족을 선도한 한국교회

    이 놀라운 부흥운동은 1910년부터 진행된 일제강점기를 준비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1910년대 민족운동이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나 1919년 삼일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1920년 김익두 부흥이 일어나 다시 한국교회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 수많은 병든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이 희망을 가졌으며, 불신 영혼들이 중생을 체험하고 세례를 받았다. 물산장려운동, 농어촌운동, YMCA, YWCA, 주일학교운동, 엡웻청년운동, 청년면려회, 금연금주운동 등 한국교회는 사회계몽운동을 통해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일을 감당했다.

    하지만 무서운 자유주의 도전과 신사참배 도전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만났다. 일련의 자유주의 도전이 진행되면서 1930년대 한국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학조류들이 등장했다. 1930년대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부흥운동이 그것이다. 1935-1945년으로 대변되는 10년 동안 한국은 신사참배 강요로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일제의 용의주도한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다. 1936년 한국천주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고, 1937년 감리교회가, 그리고 1938년 장로교회가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한국교회는 배도했지만 선교사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한국교회는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신사참배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가지고 생명으로 맞선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옥중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생명을 내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안이숙, 박영창, 이기선, 한상동 등 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사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그것은 반쪽만의 해방이었다. 해방 후 남과 북은 극단적인 대립의 연속이었다. 북한교회는 김일성 공산정권에 의해 다시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고, 남한교회는 미군정의 지원과 선교사들의 귀환으로 급속하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았다.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너무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 극심한 피해 속에서 한국교회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남한 교회는 북한에서 피난 온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놀라운 회개운동이 한국전쟁기에 일어났고 그런 강력한 부흥의 불이 남한교회를 다시 갱신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60년 4.19와 5.16으로 대변되는 혁명의 시대 한국교회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경제발전이 강하게 진행되는 동안 한국교회는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대별되었다. 한쪽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체제를 인정하고 경제발전과 교회성장에 매진하였다. 예장합동은 1959년 통합과 분립된 후 만교회운동을 전개하며 교세 발전에 매진하였고, 신학교를 재건하였으며, 민족복음화운동에 동참했다. 1970년대부터 진행된 민족복음화운동과 대중전도운동에 예장합동은 중요한 일익을 감당하였다. 교세가 놀랍게 진행되었고, 놀라운 교회성장과 함께 해외선교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예장합동은 한국에서 가장 놀라운 선교의 모델이 되며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교회는 전에 없는 성장기를 맞았다. 거의 모든 교단들이 배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들이 여럿 등장하였다. 이런 놀라운 한국교회 성장은 개교회 성장을 통해 교회를 건축하고 묘지를 구입하고 기도원을 구입하는 등 물량적인 확장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교세는 성장했지만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인가 신학교가 대거 설립되어 무자격 목회자들을 대거 양산하고 말았다. 기복신앙, 한국교회의 세속화, 세습, 물량주의, 금권주의, 성적 타락, 금권선거, 이단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말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성령운동이 한국교회를 주도하였으나 기복신앙을 비롯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신비주의운동, 은사주의운동이 등장하였고, 극단적인 광신이 한국교회 안에 일어났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제자운동이 한국교회에 강하게 일어났다. 한국교회에 새로운 갱신운동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고, 그 같은 움직임이 20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 강력한 부흥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WCC 부산대회 유치, 한기총의 변천, 이단의 급증, 목회자들의 리더십의 부재로 한국교회는 다시 위기를 만나고 있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2009년에 그리고 다시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해 2017년에 맞은 한국교회는 진정한 부흥, 참된 개혁이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









    08-20-2023(성령강림 후 제1



    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4
    /

    스가랴 (Zechariah)

    스가랴서는 제1스가랴서(1-8장)와 제2스가랴서(9-14장)로 구분합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백성에게 스가랴는 조상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회개하라는 경고로 메시지를 시작합니다(슥 1:3).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것이 폐허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나 성전 재건축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스가랴와 동시대 선지자 학개는 이들을 격려하여 성전공사를 재개합니다. 스가랴는 그들을 격려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장래,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전함으로 백성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합니다(슥 9:9).

    시대 상황
    BC 586 : 유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
    BC 538 :  바사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거 유다 백성 귀향 허용
    BC 536 : 유다 백성 귀향 후 성전 재건 시작
    BC 535 : 위협과 법적인 고소로 성전 건축 중단
    BC 520 : 학개의 책망의 메시지로 건축 재개
    BC 516 : 성전 재건 완료(스룹바벨 성전)

    참조 /
    BC 564 : 석가모니 출생
    BC 551 : 공자 출생





    08-13-2023(성령강림 후 제11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3
    /


    광복절은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로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되었다.
    매년 8월 15일 경축행사를 개최하고 광복을 기념한다.

    1절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작사가 정인보(1893∼1950)는 서울 출생으로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박은식,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이화전문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실학을 기초로 한 국학의 개념을 정립하였고 민족사관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저서로 『조선사 연구』,『담원 시조집』 등이 있다.

    작곡가 윤용하(1922∼1965)는 황해도 은율 출생으로 박태현, 이흥렬 등과 함께 음악가협회를 통하여 음악운동을 전개하였고 가곡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 등을 작곡하였다.





    08-06-2023(성령강림 후 제10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2
    / 8월의 시

                             그날이 오면                                       
    심훈(沈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07-23-2023(성령강림 후 제8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3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 세상이란 헬라어는 “땅(게스. γης)”라고 한다. 따라서 헬라어 성경에 의한 번역은 “너희는 그 땅의 그 소금”이라고 하겠다.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헬라어로 소금을 “할라스(halas. ἅλας)”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할라스’는 세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소금, 조미료나 비료, 제자들의 영적인 자질).
    소금은 짠맛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밖에 버릴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지붕의 흙에 뿌려 흙을 단단하게 다듬는 것에 사용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 때 먼저 팔복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팔복의 내용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신령한 영적인 복을 강조하셨다.
    따라서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은 세상에서 영적인 자질을 갖춘 신앙생활을 하라는 교훈이라고 하겠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뜻(데레마)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게스)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영적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07-16-2023(성령강림 후 제7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29

    제헌절(制憲節. Constitution Day)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국경일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지정하는 법정 국경일 가운데 유일하게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이기도 하다.





    07-09-2023(성령강림 후 제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28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고 있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이름을 지어주려면 우선 하나님보다 먼저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그 배경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돌보고 있을 때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광경이란 가시나무에 불이 타올랐으나 나무는 타지 않는 진기한 상황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란 애급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모세는 갑작스런 상황에 대해서 만일 히브리 사람들이 누가 너를 보냈느냐? 하며 당신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누가 나를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라는 모세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들었던 모세의 기록에 따라 히브리 알파벳 4개의 문자로 이름을 표현했지만 י (요드), ה (헤이), ו (바브), ה (헤이) 유대인들이 그 문자를 읽을 때는 "야훼(יהוה)" "여호와(YHWH")" "아도나이(אדני)" "하쉠(השם )" 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여호와' '야훼'는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07-02-2023(성령강림 후 제5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27
    북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물질적으로 가장 풍성한 삶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풍성하면 이전 보다 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할 텐데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들에게 감사하며 타락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백성들의 타락한 삶을 지켜보던 선지자 호세아는 이 백성들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 가지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세 가지란 “진실(眞實. 에메트. אֶמֶת)”과 “인애(仁愛. 헤세드. חֵסֵד)”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 다아트. דַּעַת)”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를 “음란한 마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란한 아음’은 곧 “음란한 영(루아흐 제누님. רוּחַ זְנוּנִים)”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려면 먼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예배하는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증인의 삶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귀를 기우리는 경건의 삶이 회복될 때 비로써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2023년 전반기를 마감하고 하반기의 삶을 시작하는 7월의 첫 주일을 맞이하여 전반기에 실현하지 못한 것을 하반기에 성취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성령의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로 도와갑시다. 그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송년주일을 기대해 봅시다. 



    06-11-2023(성령강림 후 제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5

    한국전쟁 / 6. 25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 한국교회 성명서

    대한민국은 격변의 20세기 일제의 침탈 가운데 발아하여, 야만적 태평양 전쟁과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성장했다.
    이념으로 갈린 동족상잔의 6.25는 서로 무고한 생명을 살육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초토화한 슬픈 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며, 전쟁 후 70년간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숭고한 참전 용사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6.25 전쟁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기념 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복음적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교회는 평화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 행동하며 기도할 것이다.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복음으로 이념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이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국민통합으로 남남갈등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문대로 평화적 통일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작금의 지나치게 적대적인 남남갈등의 해소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과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국민과 함께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06-11-2023(성령강림 후 제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4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마가 4:12).
    진리가 무엇일까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얻기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진리가 살아서 행동하지 못하고 기억에서만 춤을 추게 될 뿐입니다.
    믿음이 행동하는 삶이 될 때 진리는 내안에서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가 자유하게 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점점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깨닫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내려주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도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영의 사람이 됩시다.
    살리는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시간이 갈수록 약하고 병들고 시들기 때문입니다. 



    06-04-2023(성령강림 후 제1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3

    이번 주 수요일부터 마가복음을 읽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 복음서는 4권 입니다(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은 마가복음입니다.
    각 복음서는 상징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사자복음(왕의 복음)으로 유대인을 향한 말씀
    마가복음은 송아지 또는 황소복음(종의 복음)으로 로마인을 향한 말씀
    누가복음은 인자(人子)복음(사람의 복음)으로 헬라인을 향한 말씀
    요한복음은 독수리복음(사람의 아들 예수)으로 모든 인류를 향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죽음, 부활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며, 대체로 구주의 권능 있는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러 행적 중에 으뜸은 속죄이며, 마가는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속죄를 강조합니다.
    구주께서 속죄라는 사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다룬 마가의 기록과 간증을 읽으면서 복음으로 더 깊이 개종하게 되고 구주를 따를 용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05-28-2023(성령강림절)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2

    제헌국회 개회 기도문 /1948년 5월 31일 오후 2시 - 이윤영의원(감리교회 목사)

    이윤영 의원의 대표기도(일동 기립하여)  - 제헌국회 의원 198명 참석 -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 꺼내 보임)하신 것으로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자료 출처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속기록
    미국 국가를 위한 기도의 날 / 매년 5월 첫째 목요일



    05-21-2023(부활절 제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1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급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출애굽기 3:1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은 “순종(順從)”입니다.

    누구에게 순종하였는가를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창 12:1)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습니다(창 22:10)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말에 순종했습니다(창 27:8-10)


    성경은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믿음은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생각하고 그 말씀 따라 생활하므로
    진리가 자유케 하는 기쁨을 누려 봅시다





    05-14-2023(부활절 제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0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변한다"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계속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세상의 역사 즉 일반역사는 세속사로 사람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구원사 또는 구속사는 하나님의 중심입니다.
    구속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속사를 사용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인간들의 비합리적인 사건과 요소들을 사용하여 목적을 실현하시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20년 동안 수고했던 품삯을 결정할 때 마치 주술적인 방법으로 양과 염소가 새끼를 갖게 하므로 우성의 양과 염소를 외삼촌 라반의 몫으로 열성의 양과 염소는 야곱의 몫으로 약속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몫을 더 강하고 튼튼한 것으로 증가시켜 야곱으로 하여금 부를 이루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과정은 세속사의 방법을 사용할지라도 그 목적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05-07-2023(부활절 제5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19

    창세기 12장부터 24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브라함의 신관(神觀)에서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 고백을 네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8, 19, 20, 22)
    - 창세기 14장에서만 4회 사용(축약형 엘룐, 민 24:16, 신 32:8)(축약형 엘룐 시편에서 22회)

    둘째는 엘 솨다이(전능하신하나님)(창 17:1)

    셋째는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창 21:33)

    넷째는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창 24:3, 7)

    하늘의 하나님(엘로힘 솨마임) 땅의 하나님(엘로힘 에레츠)을 사자성어로 축약하면 "천지주재(天地主宰)"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천지주재라고 고백할 때는 그의 나이가 140세가 되었을 무렵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임종하므로 140의 나이는 노년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고령화 사회가 되는 때에 나이가 많다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신앙의 극치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하여 자녀와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고령화 사회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비생산적인 고령화 사회는 문제를 야기 시키겠지만 생산적 고령화 사회는 모두에게 유익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을 검색한 결과

    하늘의 하나님 : 17회(구절)
    창세기 24:3, 7. 에스라 6:9, 10, 7:12, 21, 23.  느헤미야 1:4, 5, 2:4, 20. 시편 136:26.  다니엘 2:44.  요나 1:9
    요한계시록 11:13, 16:11

    땅의 하나님 : 1회(구절)

    창세기 24:3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 1회(구절)

    창세기 24:3
    내가 너로 하늘하나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 : 모든 것을 아시는 주
    땅의 하나님 :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

    천지주재(天地主宰)
    하늘 천, 땅 지, 임금 주, 재상 재  -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주인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설명은 24장 이삭의 신부를 선택하고 찾는 내용입니다.
    24장을 끝으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의 이야기가 나오고, 죽었다는 보고가 될 뿐이지 아브라함의 행적을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며느리를 구하기위해서 집의 일을 맡아보던 종과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 지는 그 아브라함의 원숙한 믿음의 경지는 정말 ‘도통한 경지 사통발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부르던 그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8, 19, 20, 22)
    - 창세기 14장에서만 4회 사용(축약형 엘룐, 민 24:16, 신 32:8)(축약형 엘룐 시편에서 22회)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2. 아브람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을 들어 맹세하노니



    둘째는 엘 솨다이(전능하신하나님)(창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셋째는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창 21:33)

    아브라함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넷째는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창 24:3, 7)

    3. 내가 너로 하늘하나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7. 하늘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찌니라.


    04-23-2023(부활절 제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17

    창세기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제1부분은(1-11장) 서론에 해당하며 "원역사(原歷史. Primeval‎ history)"라고 합니다.
    primeval = 최초의(prime) + 시대(ave. age)
    원역사란 인류의 시작에 관한 것으로 천지창조와 아담과 하와의 타락
    그리고 노아 시대의 대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제2부분은(12-50장) 본론에 해당하며 "족장의 역사(族長史, 聖祖史. the history of the patriachs) "라고 합니다.
    족장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여호와(야웨. Yehôvâh. יְהֹוָה)
    여호와(야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실 때는 "언약(言約. 베리트. berîyth. בְּרִית)"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둘째는 하나님(엘로힘. ’ĕlôhîym. אֱלֹהִים)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실 때는 "신적 권능(神的 權能)"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엘로힘)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매일 아침 창세기를 읽어가며 나는 어떤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있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의 삶에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도 삶의 변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아직 생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신앙생활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에 붙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면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4-16-2023(부활절 제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16

    모세 오경이란 다섯 권의 두루마리는 율법서(토라)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가장 먼저 “레위기”를 가르칩니다.
    ‘레위기’는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Harrison).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선택(12:1∼2)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구원(3:10)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성화(거룩)(11:44∼45)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연단(21:8)
    ‘신명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쉐마)(6:4∼5)
    요즈음 매일 아침 창세기를 읽고 있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창세기의 주제를 정리해 봅시다.
    1장은 태초에(레베쉬드)
    2장은 안식(솨바트)
    3장은 뱀(나하쉬)
    4장은 죄를 다스리라(하타트. 죄)
    5장은 하나님의 형상(데무트)
    6장은 하나님의 아들들(벤 엘로힘)
    매일 아침 말씀을 읽고 듣고 나누면서 그 말씀이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거짓을 물리치고 진리가 다스리는 거룩한 땅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04-09-2023(부활주일) 주보 칼럼

    부활과 소생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부활(復活)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후에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하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의 증거가 되는 유일한 존재는 예수님입니다. 
    소생(蘇生)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후에 잠시 세상에 머물렀다가 다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죽었던 나사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졌던 유두고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불교의 내세관은 윤회(輪廻) 사상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애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내세관은 인간의 삶은 수태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모태에 수태되어 영원한 내세의 삶을 살기까지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첫 단계는 모태에서의 삶
    두 번째 단계는 현세에서의 삶
    세 번째 단계는 무덤에서의 삶(Barzakh)
    네 번째 단계는 내세(천국 혹은 지옥)에서의 삶
    이슬람 내세관에서 일반 종교와 다른 점은 “무덤에서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에서의 삶은 현세의 삶을 마치고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 날까지 무덤에서 임시적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가족, 부, 업적" 이 세 가지가 무덤까지 따라간다고 합니다.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업적이며 그 업적 때문에 자살특공대와 같은 조직이 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 알라 앞에서 오직 자신의 업적(믿음의 척도)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정의는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부활이란 그림속에 있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지만 현실에서는 부활의 씨앗으로 심어져야 합니다.
    부활의 씨앗이란 "신실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04-02-2023(고난주일) 주보 칼럼


    2023년 고난주간을 맞이하며(4월 2일 -8일)
    주와 동행 365 #.14

    고난주간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으로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화,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들이 전개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각 요일마다 그 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억하며 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습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언급되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대주간”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 했으므로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창세기 3:15, 이사야 53:1∼12).

    고난주간의 유래

    고난 주간은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로마서 6:3-5, 고린도전서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03-26-2023(주일) 주보 칼럼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자!

    유대인들은 성경을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란 "토라(율법서)"와 "선지서(느비임)" 그리고 "성문서(케투빔)"의 첫 문자를 합성하면 "TNK"가 됩니다.
    'TNK'를 발음하기 위하여 모음 "A"를 넣어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에서 '율법서(토라)'에 해당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권의 목적을 알고 있습니까?

    창세기는 선택(12:1-2)
    출애굽기는 구원(3:10)
    레위기는 성화(11:44-45)
    민수기는 연단(21:8)
    신명기는 경고(6:4-5)

    새벽마다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제사법 : 1-10장
    정결법 : 11-16장
    성결법 : 17-27장

    이제부터는 레위기서를 율법 또는 제사라는 규례로 읽을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속죄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레위기서에서 예수 복음을 깨닫는 지혜와 믿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03-19-2023(주일) 주보 칼럼

    시대를 분별하자!
    "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태 16:3)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대를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쥐고 흔들려는 세력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세상을 장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사회를 흔들고 있는 문제는 대통령으로 출마했던 사람이 법질서를 철저하게 위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조롱하는 소식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바르게 보도하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과 같은 문제들을 들추어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JMS(정명석 교주) 사건을 드러내어 보수 정통 교회를 흔들려고 합니다.
    최근에는 전직 대통령의 손자가 폭로하는 자기 집안의 범죄 형태가 마치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도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심밖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세상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여론이 이미 검은 세력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확한 소식을 볼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심지어 한국의 전통 보수교단의 총회장들의 목회서신을 통하여 종전협정과 평화협정이란 그럴듯한 언어 장난에 동조하도록 모든 노회와 교회가 서명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합니다.

    공산주의는 언어의 유희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정신을 차리고 영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바로 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2023년은 3.1 운동 104주년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1919년 3. 1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ㅡ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년간의 구금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일제의 폭정에 굴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3·1운동에 깃든 기독교 정신 … 부활, 순교, 비폭력 평화주의


     

    오늘은 3·1절(삼일절)이다.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뜻 깊은 날이다.
    그런데 3·1절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3·1절을 ‘삼점일’로 읽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현 교육정책이 낳은 안타까운 결과다.

    삼일절은 1919년 3월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평화적인 시위를 벌인 날이다.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 선조들의 공헌이 그만큼 컸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계 인사가 16명이나 된다. 불교계 2명, 천도교계 15명이다. 3·1운동의 역사와 의의, 기독교 선조들의 공헌을 살펴봤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삼일절 노래’의 첫 구절이다. 노래 가사처럼 3·1운동은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정오에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1년 가까이 지속된 대규모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한다.
    구한말 조선은 진퇴양난이었다. 왕실의 무능과 집권계층인 사대부의 부정부패에 농민과 하층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폈다.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이 시기 일본은 미국 페리 함대의 협박으로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했다. 그리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그렇게 근대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지정부는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조세를 개혁하고, 징병제를 실시했다.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다. 국력이 강해진 일본은 19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한일수호통상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강요로 맺게 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로부터 30년도 되지 않아 조선은 일본에게 완전히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권마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 사건이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실상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이 공포함으로써 한국 식민지화를 완성했다. 이 사건이 경술국치(庚戌國恥)다.

     

    3·1운동, 서막이 오르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혹했다. 일제 군대와 경찰들은 악랄한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토자조사사업을 벌여 농토도 강탈했다. 한민족 말살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이에 민중들의 저항과 독립의식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고종의 서거와 ‘2·8독립선언’은 3·1운동이 일어나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서거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하루 숨겼다가 다음날인 22일,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비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일제와 친일파에게 고종은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고종 독살설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고종에 대한 애도는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를 뜻함)을 기해 전국에서 수많은 유림들과 유력인사들이 대거 상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쿄에서 재일조선인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투쟁 의지를 천명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2·8독립선언이 귀국한 유학생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됐다. 그렇게 3·1운동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던 당시 사회에서 대규모 거사를 모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계의 한용운을 중심으로 단일조직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각 학교, YMCA청년 대표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거사를 도모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에도 만전을 기했다. 비밀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1000장이 서울, 평양, 임실, 용강, 해주, 원산, 의주 등지로 철도편으로 전달됐다. 그렇게 3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독립선언서가 배달됐고, 곳곳에 격문이 붙었다.
    3월 1일 정오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음식점)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늦게 도착했거나 중국으로 피신한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만세 시위는 서울을 시작으로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서울, 평양,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에서 폭발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222개 부(府), 군(郡)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중국 동부,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국, 일본 등 이역만리의 재외동포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짧은 시간 안에 한반도는 물론 해외 각지로 3·1운동 소식이 전파된 데에는 인쇄된 독립선언서 전파가 큰 역할을 했다. 시위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사람들의 입소문,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 귀향한 사람들이나 서울 유학생들의 귀향 보고 등도 시위 확산과 지속에 일조했다. 오산, 숭실, 신성, 양실학교 등 종교계 학교를 비롯한 200여 학교의 동맹휴학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은 일제의 강제진압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3·1운동 정신은 이후 여러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계승됐다. 4월 11일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3·1운동에 기초해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독립투쟁과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체가 되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3·1운동에는 기독교정신이 발현되어 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딛은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앞장섰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부산진일신여학교, 정신여학당, 계성학당, 신명여학교,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등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당시 소외된 어린 여학생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반상의 차별도 없앴다.
    복음과 더불어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3·1운동 전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확인됐다.
    3·1만세 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는 증거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교회 여전도회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인 예다. 3·1운동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교회와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을 봐도 기독교정신이 깃들어 있다.

    첫째, 부활정신이 나타나 있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에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만세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의 칼날과 총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 모진 고문 앞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에,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순교자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 순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기독교는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종교다. 순교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경 앞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용기는 순교자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이었다.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지만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주요 수단은 무장봉기를 해 적군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폭력을 동원한 무장봉기가 아니었다. 일제의 살인적인 진압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3·1운동의 방법이었다. 이는 강포와 무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정신의 발현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지만(마 26:53),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비폭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교회가 정착한지 불과 30여 년. 기독교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교회폐쇄, 성도 수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이웃으로 십자가 정신을 발휘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이었다.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기독교가 중심이 된 3·1운동이 끝난 후 교회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제암리학살사건이다. 3·1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얼마 뒤 발안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은 4월15일 제암리교회 30여명의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학살했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한 ‘우발적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명단을 파악해 교회로 소집시킨 점과 주변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했다. 철저히 계획된 만행이었다.
    기독교가 입은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교회당의 손해가 41동이었다. 1919년 6월 30일 투옥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조선의 전 인구가 1700만 명이었는데 기독교인의 수는 2%도 채 되지 않는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년 동안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수감된 자는 약 9000여 명, 이 중 기독교인이 22.4%로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조들은 멈추지 않았다.

     

    3·1운동의 얼, 유관순 열사

    유관순. 신사임당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여성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95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순히 어린 소녀의 몸으로 독립을 외쳤다는 것? 그녀는 단순히 만세운동의 주역뿐만아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실천가 중 하나였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가 옆에 매봉교회가 있다. 매봉교회는 천안지역 3·1운동 당시 중심역할을 한 지령리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다. 지령리에 기독교가 전파되자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유관순 집안도 아버지를 제외하고 예수를 믿었다. 지령리교회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천안 만세운동의 주도자였던 조인원과 유중무(숙부), 유우석(오빠)도 지령리교인이었다.
    그녀는 공주 영명학교를 1년 정도 다니다 1915년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학업에 임했다. 일요일에는 담 하나 사이에 있는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이화학당의 학생들도 같이 참여하려고 했으나 당시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교문을 막았다. 유관순과 이화학생들은 학교 담을 넘어 시위에 동참했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졌다.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변에 알리고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기해 거사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3월 1일이어서 서울에서 시작한 3·1독립운동의 뜻을 살리기에 좋은 날이었다.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의 시위운동을 위해 수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연락하며 시위운동을 조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4월 1일 당일, 아우내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에 놀란 일본군은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날 시위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가 현장에서 일본군에 의해 죽고, 유관순과 오빠 유우석, 유중무는 체포됐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공판에서 유관순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형량이 최고 3년이었던 것을 볼 때, 유관순이 시위운동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고, 일본 검사와 판사에 굴하지 않고 얼마나 당당하게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에 항소한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1921년 1월 2일 출옥 판정)을 확정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그러나 체포될 당시 입은 부상과 갖은 고문과 열악한 형무소 생활에 출옥을 몇 달 앞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만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꽃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일제에 분연히 일어나 항거한 용기와 모진 고문과 부당한 판결 앞에서도 의연했던 그녀는 그 어느 성인보다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가치를 우리는 가슴에 기억해야 한다.

     

    03-12-2023(주일) 주보 칼럼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교회는 세상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침묵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정교분리라는 거짓 교훈을 주장하며 교회를 흔드는 법이 우후죽순처럼 제정되는 현실입니다.
    서구의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속임수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정교분리의 이해가 더 복잡해졌습니다.
    왜냐하면다변화와 다양화, 다민족과 다인종, 그리고 이민 커뮤니티의 형성과 확장, 다양한 종교들이 한 국가에서의 공존으로 인하여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적 원리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며 오늘의 교회가 시대를 향한 바람직한 자세를 독립선언서의 공약에서 살펴봅니다.

    첫째, 부활정신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에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만세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의 칼날과 총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 모진 고문 앞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에,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순교자적 정신
    순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기독교는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종교다. 순교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경 앞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용기는 순교자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지만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주요 수단은 무장봉기를 해 적군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폭력을 동원한 무장봉기가 아니었다. 일제의 살인적인 진압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3·1운동의 방법이었다. 이는 강포와 무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정신의 발현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지만(마 26:53),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비폭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교회가 정착한지 불과 30여 년. 기독교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교회폐쇄, 성도 수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이웃으로 십자가 정신을 발휘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이었다.

    03-05-2023(주일) 주보 칼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3·1운동에는 기독교정신이 발현되어 있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딛은 후에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워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심혈을 기우렸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부산진일신여학교, 정신여학당, 계성학당, 신명여학교,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등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당시 소외된 어린 여학생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양반과 상놈의 차별도 없앴다.
    복음과 더불어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3·1운동 전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확인됐다. 
    3·1만세 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는 증거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교회 여전도회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3·1운동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교회와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위하여........






    02-26-2023(주일) 주보 칼럼

    3·1 정신을 기억하자

    약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해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인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3·1운동에 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오히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8·15해방만큼 3·1운동은 중요하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3·1정신’이라는 말은 있으나 8·15정신이라는 말은 없는 것처럼, 3·1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단순히 역사책 속의 한 줄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희생 덕에 지금 우리는 평화와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3·1운동 때 외쳐진 ‘자유’를 먹고 산다.
    3·1운동은 우리 현대사의 기본을 만들고 기반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3·1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해야 하는 이유다.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삼 장

    一.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02-19-2023(주일) 주보 칼럼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지대한 관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3.1운동, 학교, 병원, 복지시설, 조국 근대화 발전 등 그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열릴 때도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4대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론" 이었습니다.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했고,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했으며, 군대에 군종제도를 도입해 병사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를 도입해 옥중의 죄수들에게도 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정부 요직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권장했습니다.
    기독교 신문사 및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W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 그리고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기간과 그 후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기독교 단체 등을 통해 배분토록 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가는 곳마다 목사를 만나고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와 정치는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02-12-2023(주일) 주보 칼럼

    ‘정치적 올바름’은 경계해야 할 프레임


    세실과 모리스가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다.
    세실이 물었다.
    “모리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모리스가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목사님께 한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세실이 먼저 목사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목사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

    세실로부터 목사님의 답을 들은 모리스가 말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보겠네.”
    이번에는 모리스가 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목사님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이나 한국 사회에 때 아닌 프레임 전쟁이 일고 있다.
    상황을 바라보는 눈들이야 제각각이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크게 두개의 세력으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프레임의 원리, 그렇다면 작금의 시대에 광풍과 같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프레임 전쟁에서 과연 크리스천들은 어떤 시각으로 프레임을 이해해야 할까요?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탈성경적 프레임에 현옥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절대적 진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02-05-2023(주일) 주보 칼럼

    팬데믹과 남은 자 신앙(미가 2:12-13)

    야곱
    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떼 같이 하며 초장의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코로나 19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 미국내 한인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대략 20%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은 자 신앙"을 강조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미국 내 한인교회들의 수가 최근 2년 사이 658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남은 자 즉 렘넌트(Remnant) 신앙을 강조합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힘을 모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이러한 믿음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와서 보라!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새 일을 이루었노라고!
    이와 같은 믿음을 위하여 마음을 추스립시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중보기도자로 무장합시다.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소돔과 그 성을 엎으실 때에 롯과 두 딸을 그 성에서 불러내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코로나 팬데믹에 갇혀버린 사람을 불러내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러내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하여 열매를 얻기까지 중보기도로 헌신하는 즐거움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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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금기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딘지 설득력이 부족한 구실 찾기처럼 들리기도 한다.교회에서 세상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므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분명히 있다. 성도들의 종교적 성향에 대한 마찰을 피하므로 논쟁의 소지를 처음부터 없애고 될 수 있는한 교회에 더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국가에서 무슨 정책을 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넋을 놓고 있다가는 정작 기독교에 반하는 정책이나 악법이 시행될 경우 그 피해는 분명히 교회가 고스란히 받게 된다. 그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의 말처럼 “교회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목사가 왜 정치적 발언을 하느냐고 비판하지만, 예언자적 사명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디까지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어디쯤에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이 명제를 들춰보기 이전에 이번 달에는 ‘정교분리’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야 과연 교회나 목사나 혹은 성도들이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설 것이다.

     

    미국의 정교분리 출발은 미국헌법 제정시 ‘국교’ 부인


    엘정책연구원(Eternal Liberty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대표 이정훈 교수는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청교도 회중교회만이 진짜 교회야, 다른 거 하지마~” 식의 청교도 교회 외의 다른 종파, 즉 침례교도라든지 감리교도 등을 박해나 차별하지 말라는 원리, 다시 말해 ‘자유의 원리’라는 핵심가치가 ‘정교분리’의 근본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장로교 교인이 되던 침례교에 출석하든 국가권력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강요가 아닌, 개인의 자유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종파나 종교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핵심은 국가권력이 교회를 위한답시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교단만 국교로 정해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다 인정하지 않는 차별을 막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즉 정교분리의 출발은 자유입니다.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헌법에 탑재시킨 것을 미국인들은 위대한 실험이라고 표현했고, 미국헌법에서 가장 멋진 것이 바로 ‘정교분리’ 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가치는 ‘자유의지’이며, 이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을 인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교분리’라고 말한다.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이 쓴 <성경에 따른 정치(Politics according to the Bible)>의 내용을 인용해 “인간은 속박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고, 원하는 대로 말하고,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의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해야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정부에 속한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정부의 가장 큰 책임이다. 따라서 세상 정부는 인간의 행복을 극대화 해줄 수 있는 정부가 바람직한 정부다. 이런 정부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정부가 작아야 한다. 정부의 기능이 작을수록 국민의 자율성이 크다. 그러나 반대로 전체주의 독제주의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라는 큰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정부는 국민의 모든 것을 규제하고 간섭하려 든다. 잘못된 정교분리에 대한 상식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정교분리의 해석을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신학자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 연구위원)는 ‘정교분리의 복잡한 역사’란 논문에서 “기독교와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서양은 근대사회에 진입한 이후 각자의 고유한 경험을 토대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법적·현실적으로 재구성했지만,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가 국교로 기능했던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생각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며 한국사회의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의 편차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정교유착 혹은 정교갈등의 명분으로 사용되어 왔던 혼란스런 역사의 부정적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교분리를 교회의 정치참여 금지로 이해하는 사람들, 국가의 종교 간섭을 배제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혹은 양자 간의 월권행위 금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배 박사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정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단서조항이 삽입되어 있어 한국사회에서의 정교분리가 상대적 개념을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에벤에셀교회 이충근 목사의 경우는 정교분리와 관련해 대한민국은 기독교를 따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엘정책연구원 이정훈 교수는 정교분리를 현대적 시각에서 해석할 때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실행함에 있어 어떤 특정 종교집단과 유착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차별을 하는지의 유무로 보아야할 것을 지적한다.

    “정부는 특정 종교집단에 예산을 밀어준다든지 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특정 종교를 차별하고 괴롭히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정교분리의 핵심입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교회가 ‘다원주의와 타협 합시다’란 말에 침묵하고, 카이퍼적인 신학과 신앙을 하면 정치적인 것이라 안 되고, 무신론과 타협하고, 공교육에서 무신론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더라도 크리스천들이 침묵하고, 크리스천 선생님이 학생이 배가 아프다고 해서 기도해줬더니 교육청이 징계를 해도 모르는 척 하는 것 등, 다른 것이 정치화가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 정치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상황이 이러함에도 교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정교분리의 뜻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가령 ‘A가 옳다. B가 옳다’에서 크리스천에게 확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즉, 상대가 다원주의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나는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계속 얘기하고, 너도 계속 얘기해! 그러니까 - 내가 저 사람 입을 막아, 또는 저 사람은 내 입을 막아 - 이런 거 하지 말고, 말해! 괜찮아! 이겁니다.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선포할 수 있으면 우리가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기독교의 입을 막아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게임(정교분리)이 아니기 때문에 그 법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프레임이란 무엇인가?

    프레임은 한마디로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지(認知, Cognition)된 상황은 프레임을 통해 인식(認識, Perception)으로 도출되고, 인식은 행동을 유발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지를 전인식, 행동을 후인식이라고도 합니다.
    하나의 사건을 보고 각기 달리 판단하기도 하는 이유는 바로 각자가 가진 프레임이 다른데서 온다고 볼 수 있는데, 프레임이 “누구에게 프레임을 씌웠다”라고 할 때 ‘누명’이라는 뜻의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수가 동일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현상을 빚게 되면 그 프레임은 사회적 프레임을 이룹니다.
    그래서 정당, 정치인 등 사회적 영향력을 얻고자 하는 조직이나 개인은 프레임을 제시하게 되는데, 제시된 프레임이 널리 받아들여지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이 프레임으로 사회의 제반 현상을 인식하게 되어 정당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인은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에는 다양한 조직과 개인이 존재하며 서로 이익이 상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상대에겐 불리한 프레임이나 역프레임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 제시된 프레임이 견해의 차이인 ‘다름’을 벗어나 옳지 않거나 불의 또는 거짓인 ‘틀림’이 되면 개인의 경우 누명이 되고, 사회의 경우 병들어 혼란스러운 사회로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방향의 프레임이 바람직 한가?

    앞에서 말 한대로 프레임은 판단의 기작(機作, mechanism)이 되기 때문에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프레임은 개인이나 사회를 거의 지배한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인류 최초로 우주에 다녀온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 나가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했지만, 미국 우주인은 “우주에서 보는 지구와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레임이 다르니 같은 것을 보고도 정반대로 인식하게 되는거죠.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지향점과 방식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삶에 무엇이 좋고 싫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평등이고, 공정이고, 정의인지, 삶을 재미찾기(fun seeking)로 살아야 하는지 의미찾기(meaning seeking)로 살아야 하는지 등 다시 말해 폭넓은 의미에서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이런 것들이 개인들마다 그동안 쌓여온 프레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을 정의할까요?
    외모, 지위, 소유, 관계 등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생각 즉 사고방식을 이루는 프레임이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를 규정하려면 그 사회가 가진 프레임을 종합해보면 됩니다.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프레임이고 문화도 여러 프레임으로 이루어집니다.
    또 시대마다 풍미하는 프레임이 있기도 합니다. 일종의 사조(思潮)라고 말하죠.
    그래서 제시된 프레임이 건강해야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프레임은 패배와 절망에 허우적이던 한국사회를 신명과 희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그 결과를 기적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상황은 잘못된 퇴행적 프레임으로 인한 좌절과 분노가 사회 곳곳에 가득차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대표적인 프레임 사례가 있다면.

    프레임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정치란 프레임 설정이고 설정된 프레임을 국민에게 설득시켜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프레임 예로는 ‘맥카시 선풍(McCarthy 旋風)’을 들 수 있습니다.
    맥카시선풍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었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맥카시가 미국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대부분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던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직업을 잃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정부였던 미국이 공산주의 영향을 크게 두려워 한 풍조를 이용한 프레임이었습니다.
    1953년 공화당이 집권하며 매카시즘에 대한 매력을 상실해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니 일종의 집권 프레임이었던 셈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트럼프가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프레임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미국사회는 아직 비교적 건전해서 근거 없는 프레임에 휩쓸리는 경우가 적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라 불리는 PC(Political Correctness)는 지도자나 기독교인이 경계해야 할 프레임 중 하나입니다.
    언뜻 옳게 들리는 이 프레임의 결과는 그름을 그르다고 명확히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옳음조차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즉 매력적으로 들리는 ‘인권’이나 ‘평화’나 ‘포용’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개인의 ‘자유’나 ‘권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권 즉 ‘개인의 존엄’이 묵인되거나 말살되는 역차별을 가져오는 “정치적 위선 완장질”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용어는 이미지를 주입하고, 주입된 이미지는 프레임을 구성합니다.
    프레임은 대상의 평판을 만들고, 평판은 대중의 선택이라는 행동을 유도하게 합니다. 

    일례로 적법하지 않게 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을 공화당은 ‘불법외국인(Illegal Alien)’으로 부르지만 민주당은 ‘서류미비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라고 부릅니다.
    공화당이 나쁘게 보이고 민주당이 좋게 여겨지게 합니다.
    또 서류미비 이민자라는 말은 불법체류자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립니다.
    그만큼 용어는 프레임 설정에 핵심적 역할을 합니다.
    불법체류자의 자녀를 꿈꾸는 사람 즉 ‘드리머(Dreamer)’로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불법체류자의 자녀만 꿈꾸는 게 아닙니다.

    또 하나 짚을 것은 ‘소수자 인권’ 프레임입니다.
    소수자 인권! 좋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온 것이 ‘동성애 프레임’입니다.
    동성애 옹호는 앞서 말한 PC와 결부되어 이미 미국 사회에 많이 받아들여져 있고, 또 많은 분들이 말하고 있으니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크리스천들이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PC와 소수자 인권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탈성경적, 탈중심적, 탈이성적, 다원적 사고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절대 주권자, 절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기독교의 정신과는 전혀 상반된 것으로 허울 좋게 포장된 프레임에 현옥되지 않도록 근신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 프레임은 아무리 착하고 좋게 들려도 인본주의일 뿐”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타고르는 해고해야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딸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한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하지만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달리 해야 한다. 질문이 달라지면 답 또한 달라진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이나 한국 사회에 때 아닌 프레임 전쟁이 일고 있다. 상황을 바라보는 눈들이야 제각각이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크게 두개의 세력으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프레임의 원리, 그렇다면 작금의 시대에 광풍과 같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프레임 전쟁에서 과연 크리스천들은 어떤 시각으로 프레임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지난호에 이어 후편을 토브포럼(Tov Forum) 대표 스테반 오 박사를 통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최근 한국에서의 프레임으로 인해 발생한 대표적 사례가 있다면.

    한국은 프레임 전쟁이 첨예할 전형적인 환경을 갖춘 나라입니다. 건국 역사가 짧은 것도 그렇고 건국 전부터 지금까지 좌우가 대립하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해방과 건국 이후 6.25, 4.19, 5.16을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사례로는 친일파 프레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분노를 이용해 대한민국을 일군 우파세력을 친일로 매도하고, 좌파를 항일세력으로 미화하는 프레임은 억지가 많습니다. 얼마 전 조국 임명 국회청문회 때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대한민국은 연좌제를 폐지했으니 조국 일가가 저지른 불법은 조국 후보자와 상관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요.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식민 당시의 매국 친일파는 다 죽고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일인명사전도 매우 급진적인 좌파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는 ‘세상을 뒤집자’는 포스터가 붙어있었습니다. 당연히 공정성에 문제가 되었었지요. 위안부, 배상문제, 일제의 잔혹행위 등에도 프레임에 의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행히 최근 이영훈 교수가 앞장서 집필한 <반일종족주의>가 출판되어 이 부분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사 청산’이란 이름으로 제주 4.3사건, 5.18 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프레임 전쟁의 일환이고 효순·미선 사건, 광우병 파동도 다 ‘반미프레임’의 일환입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도 프레임입니다. 좌파가 스스로를 ‘진보’로 우파를 ‘보수’로 지칭하며 정착되었는데 용어가 주는 ‘이미지의 선호도’를 이용한 프레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우파와 좌파라는 잘 정의된 용어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상황을 배태(胚胎)한 최근 사례로는 ‘탄핵 프레임’을 들 수 있습니다. 권력은 권위에서 나옵니다. 권위 없는 공권력은 상상할 수 없지요. 탄핵프레임은 대통령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거짓보도를 기점으로 대통령이 독신여성인 점을 이용해 많은 추문이 나돌았습니다. 주입된 이미지가 프레임을 구성하며 권위가 무너져 선택의 우위를 차지할 조건이 마련되자 태블릿PC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조작된 프레임에 속은 국민은 탄핵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국민이 탄핵프레임에 속지는 않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프레임의 예를 찾아볼 수 있나.

    성경이 창세기 처음과 계시록 끝 몇 장을 빼놓고 갈등(Conflict)으로 가득차 있듯이, 성경은 또한 프레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구속사 자체를 큰 의미에서 하나님이 설정하신 하나의 위대한 프레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과 롯이 땅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둘은 같은 것을 보았지만 롯은 풍요를 인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비전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른 인식으로 이끈 프레임 차이의 결과는 창세기 19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프레임 전쟁이라는 제목을 보아 아마 의도는 ‘누명’ 이나 ‘혹세무민(惑世誣民)’ 측면에서의 프레임을 염두에 두신 듯합니다.
    이런 종류의 프레임도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이 재산증식을 위해 외삼촌 라반을 속이는 프레임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씌운 프레임도 있고, 요셉이 양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누명 씌우는 프레임도 있습니다.

    반면 정치인이 아니라 일반인이 만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프레임도 있지요.
    이 프레임에 의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울 때 다윗의 무예를 시기한 블레셋 지도자들은 다윗에 프레임을 씌워 함께 싸우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다윗이 동족의 피를 흘리지 않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성경에 나오는 프레임 중 압권은 십자가의 구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민심이 예수에게 쏠리자 질투한 당시 지배층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신성모독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프레임’을 씌워 예수를 처형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이기심과 공포라는 죄성에서 비롯된 각종 프레임의 결과를 엮어 ‘구속사’를 만들어내십니다.

    크리스천 입장에서 다양한 사회적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고 세상을 선도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방법과 크리스천의 마음가짐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씀해 달라.

    현대문명은 과학적 사고인 헬레니즘(Hellenism)과 기독교 사상인 헤브라이즘(Hebraism)의 양대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기 때문에 역사,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에서 성경을 모르고는 그 심층까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문화가 아니지만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는 세속문화 따라가기에 바빠 대응할 뿐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레임은 맥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별사안에 매몰되다 보면 맥락을 놓치고 그만 상대방이 제시하는 프레임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명상’은 마음을 비워 세속을 떠나게 하지만, ‘묵상’은 말씀으로 마음을 채워 세상으로 뛰어들게 한다”고 합니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 프레임은 아무리 착하고 좋게 들려도 인본주의일 뿐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공하는 여러 프레임을 정서가 아닌 이성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뇌는 감정적, 이성보다 정서를 자극하라”는 근거 없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입니다. 정서가 이끄는 판단은 속기가 매우 쉽습니다. 앞에서 ‘탄핵 프레임’에 속은 사람과 속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요. 아침 저녁으로 바뀌는 정서에는 책임도 없습니다. 또한 ‘분노’는 자기감정만 해결할 뿐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는 프레임에 이성적으로 대응하고, 기독교적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서는 그런 프레임을 제시하는 기술이 되겠습니다.

     

    세상을 선도하려면 자연히 불이익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요즘 교계는 누리기만 할 뿐 희생에는 부족한 듯합니다. 불이익을 줄이려면 세상이 교계에 기대하는 그런 청결함을 갖추어야 하는데 교계는 이런 쪽에도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희생을 두려워하면 사명을 맡기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견해를 키워드로 요약하자면 맥락, 말씀, 공의, 이성, 희생이 되겠습니다.

     

    2018년 9월 8일 허가되지 않았던 인천 퀴어축제 강행 시 반대 입장을 외치던 지역교회 목사가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다. 주요 언론에는 거의 보도된 바 없지만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각종 SNS를 타고 퍼진 소식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특히 교계는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한국기독교연합과 한국교회언론회 등은 성명서를 내고 “불법적인 집회를 강행하는 동성애자들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호한 채, 양심과 도덕과 윤리의 정신에 따라 반대하는 목회자를 현장에서 수갑을 채워 체포하는 경찰은 도대체 어느 나라 경찰인가. 이는 공권력(公權力)이 아니라, 공포의 권력을 가진 공권력(恐權力)”이라며 현 정부와 경찰을 성토했다.

    울산대 법학과 이정훈 교수(엘정책연구원 대표)는 “역사 속에서 헌법이 종교, 모임, 거주이전, 자유 등을 보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보호하면서부터다. 미국에서 강조되는 정교분리의 원칙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특정 종교나 종파가 국가권력과 연합해 다른 이들을 차별해 온 유럽의 경우를 반면의 교사로 삼아 ‘국교부인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교회에서 절대 정치를 얘기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정치를 생각하고 기독교의 믿음에 부합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국가권력이 종교인이 갖는 예배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작금의 한국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유럽이나 캐나다의 경우처럼 기독교인이 표현의 자유에 기반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고소당하고 제지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선거에서 투표로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리스천은 올바른 투표를 해야 한다.
    무조건 사람이나 출신 지역, 정당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올바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선거에서 뽑아야 한다.
    동성애 반대, 낙태 반대, 진화론 반대, 사회주의 반대, 무상복지 반대, 종북 반대, 친북 반대 등과 기업의 자유, 가난한 사람 배려, 의로운 자 등의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와 좌익, 좌파주의자는 물과 기름과 같다 교회도 나라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전체 건물이라고 가정해 보라.
    사회가 붕괴하면 교회도 무너진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앞으로 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교회 안의 좌익 목사들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친중, 종북, 반미를 외치는 자들이 외치는 평화, 인권, 정의라는 구호에 더 이상 선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된다.
    기독교인은 말씀만 전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말은 하나님의 사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교회를 허무는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기독교 모임인 다니엘기도회가 전신인 트루스포럼(Truth Forum)은 서울대학교에서 시작해 현재 전국 30여개 대학에서 활동 중이다.
    서울대 법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있는 트루스포럼 김은구 대표 역시 투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국민이 대표를 잘못 뽑으면 국가가 망가지고 교회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독교인 후보가 나오면 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의 질문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후보가 정말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살펴야 한다.
    건전한 기독교적 사고에서 나온 국방, 경제 등의 탄탄한 정책을 보고 찍어야 한다.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다하더라도 바른 기독교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면 반기독교적이거나 기독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정책은 펴지 않을 것이다.
    이 진리만이 분열된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고, 앞으로 나가게 할 것이다”고 역설한다. 

    크리스천포스트 객원 칼럼니스트이자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를 지낸 프랭크 터렉 박사(크로스이그재민드 대표)는 한 대학의 강의에서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정치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혹자는 크리스천은 정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 아니니 정치에 너무 깊이 몰두해 완전히 빠져서는 안된다. 또는 정치는 우리와 상관없으니 크리스천이라면 딴 얘기 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법이 실제로 우리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즉 자유, 교회, 자녀, 가족, 건강, 돈, 사업, 재산, 학교, 안전, 가난한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복음 등등.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무신론자나 크리스천이나 모두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예는 대한민국과 북한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을 보면 남쪽은 빛이 밝고 생산도 넘치지만 북한은 암흑이다. 전기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한 마디로 정치다. 남한은 자유가 있고, 북한은 자유가 없다. 남한은 복음이 퍼져 있으며, 적어도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은 아닐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화한 나라들 중 하나인 반면 북한은 강제 노동 수용소가 있다. 당신이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정치다. 그렇지 않고 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수 없고, 모임을 가질 때 지하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터렉 박사는 “다만 우리는 신실하게 행동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정치적인 논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우리는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깊이 관여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벤에셀교회 이충근 목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회는 친북, 종북 좌파 세력들과 동성애, 이슬람, 반기독교 악법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며, 잘못된 법을 지적하고, 잘못된 정치와 목숨 걸고 싸워서 다음세대를 위해 목숨을 건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 진짜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를 이용해, 법을 이용해 기독교의 가치를 말살하려는 시도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외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이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살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이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진짜 기독교인은 교양있게 신앙생활하며 정치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요. 그것이 진짜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자의 삶이 아닙니다.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진정 기독교인이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기도로 세워진 나라가 끝까지 예수님을 찬양하고 끝까지 예배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목숨을 거는 자일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03년 28살 당시 ‘두 가지 편벽됨’ 이란 글에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을 남겼다. <전문>을 소개한다. 

    “내 일신이나 돌아보며, 세상 시비에 상관하지 말며, 믿음으로써 영원한 복이나 구하리라 하여, 전국 동포가 다 죽을 고초를 당하였다 하여도 조금도 동심치 아니하며, 일국강토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여도 들은 체 아니하며, 다만 기도하는 바는 나의 몸을 구제하소서, 나의 집안과 부모 처자와 친척 친구를 복 많이 주소서 일뿐이라...이 어찌 예수의 본이며 하나님의 기쁘게 드리시는바라 하리요. 이는 이른바 교회의 편벽되기를 주의함이라.”

     




    01-29-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5

    1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강조한 역사적인 배경은 일제 강압 시대에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에게 자유독립 운동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려고 의도한 것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신앙을 근거로 출발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 시장으로 정치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도시에 적용시켰습니다.

    ‘정교분리’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당시 세 가지 중요한 원칙에서 출발했습니다.
    첫째는 세상 정부는 교회를 탄압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둘째는 세상 정부는 교회에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셋째는 대통령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세상 정치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정치적 발언을 금하는 주장을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곳이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에서 정치적 이야기를 하면 서로 얼굴 붉히게 되니 될 수 있는대로 하지 않는게 좋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은 잘못된 것은 바로 깨우쳐야 합니다.

    01-22-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4

    22일은 설날입니다(음력 1월 1일)
    설날은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로, ‘설’은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 ‘삼가다’ 등의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였고 본래의 설날을 구정(舊正)이라고 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화력(和曆)을 양력으로 바꿀 때 음력 설을 구정(旧正)이라고 부르면서 만든 말이다.

    음력설은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시절 설날을 쇠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졌다.
    을미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1896년부터 공식적인 새해 첫날의 기능은 양력 1월 1일(양력설)에 내주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40여년간 음력설은 명절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양력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이유로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하였고,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일부 가정에서는 양력설을 쇠는 풍토가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 가정에서는 여전히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음력설도 공휴일로 지정하여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정부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민속의 날이라고 하여 음력 1월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6월 항쟁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민족 고유의 설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받아들여 1989년 음력설을 설날로 하고, 섣달 그믐(음력 12월 말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3일 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01-15-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3

    주와 동행하려면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말씀은 기록된 성경을 마음판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시험을 받아셨던 예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암송하였던 말씀들을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1월에 암송할 말씀은 산상복음 중에서 '팔복'에 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1월의 암송 구절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01-08-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

    신앙을 색갈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색 중에서 나는 "흰색"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흰색'은 "순수함"과 "정결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純白).
    그런데 흰색에 다른 색이 떨어지면 다른 색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교단"과 "교리"는 흰색 위에 다른 색을 떨어트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본질은 흰색이지만 그 위에 어떤 색을 떨어트리느냐에 따라 독특한 색이 나타납니다.
    선교라는 색을 떨어트리면 선교를 강조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봉사라는 색을 떨어트리면 봉사를 강조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색을 떨어트리면 교육을 강조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원리가 목회자와 교회에 적용하면 흰색은 다른 깃발로 휘날리게 됩니다.
    이민교회는 어떤 색을 떨어트려야 할까요?
    어느 색갈을 취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한인이민교회는 이민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민 1세대들과 함께하는 목회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막을 내려야 하는 때에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도록 서로 섬기며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형통하다(7919) 사칼(sâkal) שָׂכַל

    1. 바라보다,  2. 신중하다,  3. 피엘형 : 창 48:14(어긋맞기다)
    Bible verse / 지혜롭다(삼상 18:30, 잠 1:3, 시 94:8), 어긋맞기다(창 48:14), 선포하다(시 64:9), 깨닫다(시 106:7, 사 44:18, 단 9:25), 명철하다(시 119:99), 알다(느 8:13), 가르치다(느 9:20, 시 32:8), 지키다(신 29:9, 수 1:8), 형통하다(왕상 2:3, 왕하 18:7, 사 52:13), 완전하다(시 101:2), 슬기롭다(잠 16:23, 19:14), 능숙하다(대하 30:22, 단 1:4), 지혜있다(단 12:3,10), 주의하다(잠 16:20), 감찰하다(잠21:12), 노련한(렘 50:9).
    [명] 지혜자(암 5:13), 지혜(욥 34:35, 시 36:3, 47:7), 명철(잠 21:16, 렘 3:15), 총명(단 9:22)

    01-01-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주와 동행 365” 2023년 교회 표어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구약 잠언 13장 20절에서 그 비결을 찾고자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동행이란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깊은 교감 속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Delitzsch).

    동행이란 히브리 단어는 “할라크(hâlak. הָלַךְ)” 라고 합니다.

    ‘할라크’는 “삶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주와 동행하려면 먼저 주님의 삶의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삶의 방식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행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나와 함께 신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혼자서만
    가는 것보다 두 세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전도서 4:12)


    주님과 동행하려면 내 안에 예배 처소가 세워져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모이는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예배는 내 마음의 예배 처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를 예배의 자리로 만들고 삶의 선교지라 생각하고 2023년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로
    헌신의 삶을 결단하고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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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이 무엇인가요?

    성경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
    다른 하나는 "새 사람"

    옛 사람은 하나님 없는 삶을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 '옛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방식(God's Way)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가는 길이 그 목적을 벗어나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인데, 우리가 가는 길이 살다가 썩어 없어질 길이라면? 이 둘은 결코 동행할 수 없죠.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따라오셔야 할까요?
    다른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쉬울까요? 어떤 것이 편안할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간단한 답이 나옵니다. 우리의 욕망이 움직이는 데로 사는 것이 편안하고 쉬운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옛사람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놓자마자 다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의 본성이 늘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긴장”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45:2-8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요셉

    4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45. Now therefore be not grieved, nor angry with yourselves, that ye sold me hither: for God did send me before you to preserve like.


    사람은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동행" 이란 말은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과 동행하면 좋은 인격자가 되고, 거친 사람들과 동행하면 어느 순간 나쁜 행동이 물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시1: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주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집사님 남편이 퇴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신경질부터 내고 거침없이 욕을 퍼붓고, 아이들과도 마주치면 야단부터 치고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늘 부정적이어서, 설교를 늘 불평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서 아내 집사는 늘 기도제목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가 갑자기 남편이 변하기 시작하였답니다.

    갑자기 아이들을 안아주고 대화를 하고 격려하고 축복기도를 해주고 아내에게 꽃도 사다 주고 “여보! 사랑해”라는 말도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어찌된 건가 하고 물었더니 근래 새로운 거래처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 분은 좀 실수가 있어도 용서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힘내라고 격려해 주며 긍정적으로 살라고 용기를 주더랍니다.

    하루는 그분이 지난 삶을 이야기 하는데 손대는 것마다 다 잘 풀리고 많은 복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장로님이더랍니다.

    그 장로님을 만난 후 인생관이 달라져서. 그 후 당당하게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신앙으로 사업을 일궈나가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인격을 갖춘 사람,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야 믿음이 성숙해 지고, 인격이 변화되고, 바른 가치관이 세워집니다.

    사람은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과 자주 만납니까?

    긍정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비젼을 갖고 희망을 꿈꾸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늘 불평불만하고 남을 험담하고, 세상 적이고 혐오스런 사람들을
    만나면 본인도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가고, 또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어도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과 동행하므로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고, 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동행한 요셉을 통하여 함께 은혜나누길 원합니다.

    먼저: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3~4절)

    야곱이는 자녀들을 편애하여 요셉을 유난히 사랑했습니다.
    요셉만 채색 옷을 입힐 정도로 편애하며 그만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형제들의 심한 시기. 질투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음모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있을때 만난 사람을 통해 황제의 꿈 해몽으로 총리에 발탁되어 장차 닥쳐올 흉년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노예 신분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야곱이 사는 땅에 극심한 흉년이 찾아왔고,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사기위해 애굽을 찾아갔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아우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힙니다.

    요셉의 말에 형들은 기겁을 했습니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동생 요셉이 총리가 되어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모두 다 용서했고 오히려 사랑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도 마소서,
    (창45:5)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도 오년 동안 흉년이 되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다고 했습니다. (6절)

    지금도 생생한 2008년 12월 8일 F18기가 훈련도중 샌디에고 한국인
    윤도균씨 집에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아내와 두 자녀와 산후조리 때문에 오셨던 장모까지 4명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런데 원망스럽게도 그 비행기 조종사는 살아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겪고 있었지만 장례식을 마치고 그는 조종사를 용서했습니다.

    또한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참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하면 평생 먹고 살 만큼 보상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국 주요언론은 그의 눈물의 인터뷰를 전국에 생중계 했습니다.

    그 조종사는 아마도 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어 그는 "나는 미국을 사랑 합니다.
    미국은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미국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고 인터뷰 하며 절규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각 지에서 위로성금이 도착했는데 그 것마저 기독교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소수민족 한국인의 가슴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성경에 스데반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어 죽어 가면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침 밷고, 채찍으로 때리고 수많은 고초를 겪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분노와 참을 수 없는 미움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인격이
    지배하면 문제가 풀어지고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립니다.

    둘째: 요셉은 문제를 하나님의 섭리로 알았습니다.(5절)

    요셉은 형들에게 근심하지도 말고, 한탄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도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그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나로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고, 그 온 집에 주를 삼으시며, 애굽의 온 땅을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8절)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근심과 불안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동산 한쪽에 숨었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를 감추고 살다가 죄가 드러날 때 후회하는 것입니다.

    다윗역시 죄를 지은 후 나단선지의 책망을 듣고 매일 밤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팔은 형들을 용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인간의 감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해석하고 깨닫고 믿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에 아주 훌륭하신‘사랑의 원자탄’의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순천 반란 사건때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빨갱이 전재선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그를 용서하고 전재선이를 양아들 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과 용서와 화해정신은 지금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기독인들 가슴에 새겨야 할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문제의 답이 보입니다.

    세상에 절대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인간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그 손에 뽑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으로 개인뿐 아니라 가정과 민족 세계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낙심하고 절망할 시간에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열왕기 서에 이스라엘이 고난당하는 것이나, 법궤를 빼앗긴 것도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고 아말렉이 괴롭힌 것도 하나님이 채찍의 몽둥이로 사용해서 돌이키게 하는 섭리였습니다.

    반대로 나라가 평안하고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오고 번성한 것도 우연히
    아니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까지 아시고 길을 섭리하고 인도하십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이곳까지 인도 하셨고,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시고 인도하십니다.

    젊은 선교사지망생이 선교지에 떠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 마지막 준비를 위해 시장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순간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치료가 다 된 후에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였습니다.

    지역에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식인종들이 몰려와서 그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잡아먹으려고 했답니다.

    선교사는 순간 무릎 꿇고 기도한 후 자기 한쪽 의족을 빼서 식인족 추장에게 던져 주었답니다, 식인종들은 의족을 먹으려고 입에 넣는 순간, 고무다리에 놀라 “아! 신이다" 고 하며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서야 선교사는 자신의 한쪽다리를 잃게 하신 뜻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환경에서도 전화위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좌절하고 절망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손 데시면 음지도 양지가 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에서 좌절하고 낙심했어도, 광명한 새날이 밝을 줄
    믿습니다.

    셋째: 요셉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8절)

    요셉의 고백에 철저히 하나님 주권을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8절)

    요셉은 철저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종살이를 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서도 원망하거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이 꿈을 잊지 않고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왕도 요셉에게 하나님이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패망한 나라에서 온 종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바로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인정함은 그의 정직함과 진실함이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이루도록 능력도 주셨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요셉처럼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능력과 환경에 상관없이 꿈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뜻을 깨닫고, 온갖 수치와 고난속에서도 우리들천국으로 인도하시고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낀 사람은 삶을 다르게 삽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다릅니다.

    우리는 오로지 천국을 바라보며 성령충만한 영성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깨닫고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도바울이 그랬고,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았습니다.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는 물질을 아까워하지 아니했습니다.
    비단장수 루디아도 복음이 전파되고 성전을 세우는데 자기 집을 내 놓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우리 선교사님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인간사에 느끼는 행복 따윈 생각지 않고 아버지의 원하는 뜻을 이루어 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보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 꿈이 달라야 합니다.

    하늘에 뜻을 두고 기도하며 하늘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므로 성령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고,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으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 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인생이 막힘없이 형통합니다.
    안될 것 같은 일도 나중에 보면 더 잘되어 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성도로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되시길 축복합니다.







    언젠가 제가 결혼 주례를 하는 커플과 식사를 하면서 제가 신혼 때의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제 아내는 날씬한 편에 속합니다. 그 반면에 저는 조금 비만인 편에 속하죠. 농담처럼 한 이야기지만, 결혼하면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살찌는 사람은 한 사람이면 족하니 당신은 50kg을 넘는 일이 없도록….
    사실 부부는 가장 편한 사이지만, 서로 관리하지 못하면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상대방을 위해 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병이나 연약함으로 어찌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 긴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보면 에녹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녹 하면 생각나는 것이 “동행”입니다.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동행했을까요? 아마도 그 이전에는 그렇게 신실한 삶을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창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 의미가 ‘죽음 뒤에는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에녹이 아들을 낳은 후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죠.
    심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평가를 받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한 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심판 아닐까요? 오늘 죽음 앞에서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일까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세계적인 대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호텔에 배달된 신문기사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에는 “알프레드 노벨, 사망”이란 기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 이름을 잘못 기록한 오보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종일 호텔에 머물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계적인 발명가라는 명예와 엄청난 재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명예와 엄청난 재물이 죽음 앞에서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인간 역사에 큰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인간을 마구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은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바로 그 기금으로 노벨상(Nobel Prize)이 만들어졌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신문의 오보가, 노벨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되겠느냐는 물음이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만들었습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동행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동행은 일치입니다. 무엇과의 일치입니까?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합창단이 멋지고 훌륭한 합창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단원이 일제히 악보와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서 노래해야만 합니다. 악보와 지휘자에게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내 뜻이나 욕심 등의 것들을 일제히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면서 왜 그토록 사랑스러워합니까? 자녀가 부모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타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밥값을 내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고향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맞춘다는 것, 하나님과 공통분모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누구와 동행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이며, 무슨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입니까?


    “동행” 그 점진적 거룩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이나 건강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점진적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살지 않는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야망이 바뀝니다. 주로 환경적인 요인에 따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적이 같습니다. 그 목표는 “새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름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시작하지만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하나님도 인정하실 수 있을까? 이 기준은 늘 “진리” 앞에서 판가름납니다. 우리 나름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역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뜻을 유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심을 핑계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떤 행위들도 허용하지 마십시오. 거룩은 당신의 발걸음이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고, 당신의 혀로 더러운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머리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사를 거치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늘 정당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잠깐 타협을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타협이 목적이 되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는 그 어떤 것을 떠난 것도 우리 삶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만나 교회를 시작하면서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꿈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여야 하고, 모인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흩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고 나니까, 흩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순간 모여진 교인들도 목적은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목회자인 저도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보면서 참 도전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목회자들이 은퇴할 때가 되면 일을 벌이지 않으려 합니다. 편안하게 은퇴하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하게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따라!” 끝까지 의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없는가?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주님의 삶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절정에 이르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그곳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핍박받는다는 이유로 어떤 마을들을 급하게 지나지 않으셨고, 그분이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어떤 마을에 오래 머물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감사나 배은망덕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뜻을 한 치라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구습을 벗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을 입어야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옛사람 그대로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해도 하나님이 떠나고 같이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려면 주님과 성격이 같도록 하려면 우리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늘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설교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더러워집니다. 매일 같이 세수하지 않아요. 옷도 정기적으로 빨아 입지 않아요. 방도 매일같이 청소하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 방 청소는 내 담당인데 우리 형제간이 아홉이기 때문에 언제나 방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애들이 다 일어나서 그냥 옷도 이 구석 저 구석 던져 놓고 요강에 오줌도 넘치도록 해서 방바닥에 오줌이 흥건하고 뭐 쓰레기가 매일 많습니다.
    항상 아버님께서 저에게 청소를 하라고 해서 하루는 청소를 하다가 하도 화가 나서 빗자루를 땅에 확 던지면서 “이놈의 소제 밤낮 해도 무슨 소용이냐?” 해놔도 또 더러워지고 또 더러워진다.
    아버님께서 “용기야 이리 오너라!” 가니까
    “너 여기 앉아라.”
    “뭐라고 그랬냐?”
    “아무리 청소해도 자꾸 더러워지기 때문에 청소하지 말고 그대로 살자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인생은 밤낮 청소하는 것이다. 밤낮 더러워지면 밤낮 청소하고 밤낮 더러워지기 때문에 때를 또 씻고 목욕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옷을 빨래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얼굴을 씻고 밤낮 양치질을 하는 것은 늘 더러워지기 때문에 씻어야 하느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산다는 것
    우리가 이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의와 진리를 따라 살 때 가능한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기꺼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의와 진리의 길임을 굳게 믿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의 저자 케이티 데이비드는 그의 사역의 현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내가 알기로 그중에 안전하게 살라는 명령은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안전한 삶으로 부르신 적이 없다. 대신, 위험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손안만큼 안전하고 좋은 곳은 없다.
    우리는 흔히 의와 진리를 따라 사는 일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힘든 것은 “결단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결단하고 나면 그 길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케이티의 고백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역자가 같은 고백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친구들과의 삶 속으로, 새로운 문화의 한복판으로 한참 들어간 뒤에야 하나님이 나를 둘러싼 패러독스들을 통해 내 시각을 바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내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은 뒤집어진 내 세상을 똑바로 세우고 계셨다. 미국에서는 100달러로 신발 한 켤레밖에 살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100달러면 굶주린 가족이 몇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전에는 바쁜 하루를 보낸 뒤에는 소파에 쓰러져 청춘 드라마를 보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간다에서는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서 예수님께 새로운 힘을 달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지친 몸과 마음을 풀 데가 없다.

    의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사실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장소’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멋진 말이죠.
    “주님은 모두를 돌보지 않아도 좋으니 ‘딱 한 명만’을 위해 가던 발걸음을 멈추라고 말씀하신다.”
    참 희한한 일이죠?
    우리는 너무 거창한 일을 꿈꾸며 사소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동행”은 우리 삶의 작은 혁신을 의미합니다.
    실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실천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혁신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결단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즘 경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innovation’이라는 말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 신상품을 내놓는 것이나 사업 모델 혁신이라고 하죠.
    미국 네브래스카대학의 석좌교수인 이상문 씨는 ‘이노베이션 3.0’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노베이션 1.0시대는 내부 자원만을 가지고 활용하는 폐쇄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2.0시대에는 일부 분야에서 기업들이 아웃소싱이나 제휴 등을 통한 경영을 했고, 3.0시대에는 외부에서 자원과 아이디어를 갖다 쓰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자원을 외부에 제공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P&G는 전체 제품의 52%를 외부 아이디어에서 얻고 있다고 하죠. 기저귀 같은 경우 기저귀를 사용하는 아기 엄마들보다 기저귀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라고,
    미국 통신회사 AT&T도 새로운 서비스 개발을 위해 아이디어를 공모하면 3만 개씩 몰리기도 합니다.
    일라이릴리(Eli Lilly)라는 제약 회사는 연구개발 과정에서 18만 명의 과학자 네트워크를 활용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외부에서 자문하고 채택된 아이디어에 대해선 보상도 합니다.
    개그 콘서트라는 코미디프로에서도 소재를 외부에서 얻습니다.
    ‘애정남’이나 ‘꺾기도’ 같은 프로그램의 소재가 고갈되자 시청자들이 참여해 아이디어를 내고 채택된 것으로 개그를 만드는 것이죠.

    이제 일반 사회에서도 잘 아는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참 혼자 노력했던 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동행”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혁신은 최고이신 그분과 동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는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런 상황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에 그대로 해당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안 되고 동의할 수 없으면 결국 떠납니다. 더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흉내를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믿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떠나게 됩니다. 그 제자가 모두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말씀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부도덕하거나 비상식적으로 운영되어서, 또는 따뜻한 사귐이 없어서 거기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는 것은 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지만, 그들이 복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부단히 영적으로 도전을 해야 합니다.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충실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하게 해야 합니다.

    동행은 시작입니다.
    조건을 딱 맞추고 동행을 시작하려는 것은 어쩌면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을지 모릅니다.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많은 미혼자가 남성의 경우엔 경제적 사회적 준비가 덜 갖추어졌다는 이유로, 여성은 과중한 직장생활과 육아 등 가정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경험자로서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준비나 자신감이 확실해지는 시점이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이다.
    회사에 할 일이 잔뜩 밀려 있는데 친구들이 여행일정을 잡으면 무척 부담스럽다. 이번에는 빠졌으면 좋겠는데, “같이 안 가면 죽음!”이라는 친구들의 협박에 출발 직전까지 무리를 거듭해서 겨우 함께 떠난다. 어떻게든 출발해서 차창 밖으로 흔들리는 풍경을 볼 때, 그제야 ‘그래도 떠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이 그런 것 같다. 준비도 자신도 없지만 일단 함께 출발하고 나면,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께서, 누군가 결혼을 주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애 낳는 것 연습해보고 시집가는 여자 없다”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마음먹었거든, 실행하라.

    그렇죠?
    의와 진리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죠.
    동행의 시작입니다.
    동행의 paradox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가기에는 버거운 그 길에 주시는 힘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죠.
    동행은 “능력을 받아” 가는 길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길입니다.
    동행의 끝에는 진리가 기다리고 있고, 그 길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동행은 결단입니다.
    결단이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결단입니다.
    이 세상에 주여, 주여 하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동행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023년 나와 동행할 믿음의 친구를 찾아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나와 동행할 믿음의 친구
    나와 동행할 믿음의 동반자
    나와 동행할 믿음의 사람을 찾아 봅시다.



    본문: 창세기 5:21-24

    서론: 어떤 여자 성도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고 보니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서 남편을 믿게 해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데 하루는 남편을 잘 설득해서 함께 교회에 가기로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기뻤어요. 그런데 주일 예배 시간이 다가올수록 염려가 됩니다. 모처럼 교회에 출석하는 남편에게 교회가 어떤 인상을 줄 것인지, 그리고 오늘 예배에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특히 오늘 목사님 설교에 남편이 마음의 문을 열 것인지,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 남편이 목사님의 설교에 고꾸라지게 해 주세요”하고 말이죠. 그런데 주보를 받고 보니 이만저만 실망이 아닙니다. 그날 성경 본문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5장이었거든요. 아무리 읽어봐도 누가 죽고 누가 죽고 이야기 밖에 없어요. 이런 말씀에 신앙 없는 우리 남편이 은혜 받을 것 같지 않아서 낙심이 되고, 은근히 목사님이 원망스러워요. “아, 그래,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런 본문을 택하셨을까?” 어쨌든 목사님의 설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슬쩍슬쩍 남편 표정만 살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이 열심히 듣고, 또 때로는 고개도 끄덕끄덕 거리는 거예요.

    집으로 돌아왔어요.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래, 오늘 예배 어땠어요?”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남편이 “나, 지금부터 교회 다니기로 했소!”하는 겁니다. 이것 참 반가운 소리인데 조금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또 물어보았어요. “오늘 도대체 무엇에 은혜를 받았어요? 내가 보기에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별로 신통치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에요?”

    그랬더니 남편이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거예요. “오늘 성경책을 보니까 누구는 몇 살에 죽고 누구는 몇 살에 죽고, 이렇게 죽고 죽고를 쭉 읽어 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래요. ”너도 죽는다.“ 지금까지는 죽음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만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내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절실히 와 닿더래요. 그리고 ”나도 이렇게 죽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노라고 말하더랍니다.

    맞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옵니다. 아담이 낳은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은 의로운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십니다. 셋의 자손이 노아와 그 자녀들 세대까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오래 살았으나 결국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5절,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8절, 셋은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11절, 에노스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14절, 게난은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17절, 마할랄렐은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20절, 야렛은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27절,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31절, 라멕은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장수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100세를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천 살까지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마 꾸며낸 이야기일거야? 그러나 이때는 인간이 타락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원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유전인자가 그리 많이 변질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연도 오염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이니까 대기층에는 물막이 형성되어 있어서 태양빛 중에서 피부에 노쇠를 가져오는 해로운 자외선도 차단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기후도 아주 온화하게 감싸주는 대기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노아홍수를 맞이하여 급격한 생태계의 파괴로 사람들의 수명이 120세로 단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거의 천 살을 살던 그들도 결국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오래 살았지만, 어쩌면 왜 이리 빨리 안 죽나 하고 지긋 지긋했을지도 몰라요. 인간이 일찍 죽는 것도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 있어요.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 같은 사람들이 천 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모두 다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느냐? 예, 놀랍게도 있었습니다. 에녹만은 예외였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에녹은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는 창세기 5장, 아담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우리가 에녹의 삶을 주목하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에녹에 관한 구절이 아주 짧게 나오지만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의 삶이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라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죽고, 죽고, 또 죽고 하는데 에녹만이 예외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하늘나라도 데려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라고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6:23에서는“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9:27에서는“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이기 때문에 이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죽음과 심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 이 땅에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하셨고, 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과 심판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에녹은 이 죽음이라는 과정도 겪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아마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은 죽을 때에 고통 없이, 밤에 잠을 자다가 ‘깨어 보니 천국이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에녹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천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에녹이이런 복을 누릴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는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에녹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창 5:22-24)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동행의 본래 의미는 ‘산책한다’, ‘교제하며 걷는다‘는 뜻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풀어보면 ’하나님과 함께 친교하며 걷는다‘입니다. 구약성경의 어떤 사본에는 ’기쁘게 한다‘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로 받아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서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어떤 요구 조건을 걸지 않으시며 현재 이 모습 이대로 기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를 향해 못마땅하여 뚱한 표정을 짓거나 성난 표정으로 마지못해 하시는 것 아닙니다. 우리를 보고 즐거워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또한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분과 함께 인생길을 가는 것이 즐겁습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마치 무거운 형벌을 받고 사는 것쯤으로 인상을 주고 사는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습니까? 그 원인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 대신에 인간의 종교 활동으로 메우려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교의 의무를 다하고, 계명을 지키고, 종교 의식에 빠지지 않고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종교의 엄숙함과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종교주의가 교회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예화) 목사님, 담배 피우세요?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심령의 안정과 평안이 있습니다. 삶과 마음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에녹 말고 또 나오는데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악을 행하였지만 노아만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해 줍니다.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창세기 17장에도 아브라함이 구십구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창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이 말씀은 동행한다는 말입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노아, 아브라함은 아주 특별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과 특별한 계시, 그리고 특별한 사건의 중심에 선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던 분들입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짓어 홍수로부터 건짐을 받아 구원의 표상이 된 노아,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쳐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이에 비하면 에녹은 아주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에녹이 300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의 업적을 적어놨는데 자녀를 낳았다는 것 밖에 없어요. 22절 “무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지극히 평범하게 가정중심의 삶을 살았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맞습니다. 노아나 엘리야처럼 극적인 삶을 살기 어렵겠지만 에녹처럼 사는 것이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 평범한 날들을 가장 위대한 날들로 바꾸는데 성공한 사람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어 올림을 받았기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다. 물론 승천한 사건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위대한 점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점입니다. 왜 이것이 위대합니까?

    그 당시에는 모두 900년 이상씩 살았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으로 전제로 할 때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생각이 더 많아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더 넓어지며 돌보아야 할 사람도 많아집니다. 이 말은 그만큼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나쁜 영향도 끼칠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녹은 4장에 등장하는 가인의 후손 라멕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입니다. 라멕은 살인죄를 짓고서 죄인으로서 다소곳하게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범죄를 뽐내면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로다“고 큰 소리치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니까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900년을 살 정도니까 몸이 얼마나 건강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잘 먹었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부족함이 없이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에너지와 힘과 지혜를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했습니다. 죄악이 밤이 점점 깊어갑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300년 동안에 자식을 낳으면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에녹아, 너만 하나님을 믿니? 너만 그렇게 잘났냐? 왜 그리 특출하게 구냐?“ 이런 식으로 300년 동안 비웃음과 조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왜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의 믿음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300년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평범한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날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에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평범한 날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찮고 시시한 일이라고 해서 무시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가인처럼 성을 쌓지도, 라멕과 그의 자녀들처럼 탁월하게 업적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무너무 평범해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무엇을 했느냐,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를 권하면 “애들 다 키워 놓은 후에 하겠다.”고 말합니다. 혹은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잡은 후에 하겠다.” “은퇴한 후에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상 애들 다 크고, 은퇴한 다음에 늙어서 병들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은퇴한 다음이나 애들 모두 키워 놓은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몸이 병들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 동기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본문 21절과 22절을 잘 살펴보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을 낳고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안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므두셀라의 출생이 어떤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입니다.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줄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다음과 같은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에녹을 불렀습니다. “에녹아! 이 세상이 너무 악해졌구나. 나의 거룩성과 의로움은 더 이상 세상의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심판해야겠다. 이 세상에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한 징표를 네게 주마. 너는 장차 아들을 낳거든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짓거라. 그 이름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이다.” 드디어 에녹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그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저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하셨는데’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게 된 계기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내년 이맘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면 지금처럼 살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삶에 어떤 변화가 분명히 옵니다. 평생 지은 죄과를 낱낱이 밝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감히 또 죄 지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라도 말씀대로 살고자 애쓸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글에 어떤 집사님의 간증을 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무척 놀랐고 낙심되었으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빚을 다 갚고 유서까지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시한부로 선고한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몸이 말짱했습니다. 확인 차 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해 보았더니 암이라는 진단은 오진이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주변에서는 죽을 것으로 예상하고 모아 놓은 재산을 거의 다 써 버린 데 대해서 아까워서 어쩌냐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는 말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시한부 인생으로 산 때처럼 인생을 진지하고 보람 있게 산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에녹의 삶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근거가 신약성경에 있습니다. 유다서 14절, 15절 말씀을 보면 에녹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유 1:14-15)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에녹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믿었고, 또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그분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불의는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불의한 언어와 불의한 행동을 낱낱이 감찰하시며 모든 죄를 아십니다. 그분이 인생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에녹도 아들 므두셀라의 죽음이 모든 인생을 심판하는 시작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결론: 다음과 같은 에녹에 대한 동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가 뜨면 에녹의 집에 와서 “에녹아 내가 왔다. 나가자”하고 대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러면 에녹은 반갑게 나가 맞이하며 하나님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나갔다가 해가 지면 하나님이 에녹을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답니다. 그것이 삼백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너무나 좋은 날, 에녹과 하나님이 함께 길을 떠났는데 너무 멀리 가서 해가 져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은 그냥 우리 집에 가자”고 하셔서 하나님의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도 에녹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동화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살다가 어느 날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 가서 영원히 함께 살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집으로 이사하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 여러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과 같은 목적을 갖게 되고 목적이 같아야 같은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101 하이웨이를 타도 북쪽 방향으로 가면 샌프란시스코가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로스앤젤레스가 나옵니다. 샌프란시스코로 갈 사람이 남쪽으로 달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계획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도 가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함께 동행하려면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은 친구와 여행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남의 입장을 고려할 줄 모르는 무례한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과 함께 길을 가보십시오. 이런 사람과 먼 길을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행길은 고통일 것입니다. 즐거운 여행길이 되려면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어줄 줄 알고, 이해해 주고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알아야 거기에 맞출 것 아닙니까?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이 쓴 씨 중에 “나에게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된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나에게도 주소서
    주께서 좋아하시는 것 나도 좋아하도록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나도 싫어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심령을 나에게도 주소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 나도 기뻐하도록
    주님이 슬퍼하시는 것 나도 슬퍼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에게도 주소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도 사랑하도록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 나도 미워하게 하소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만을 좇아 평생 살게 하소서
    좌로나 우러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만을 닮게 하소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내게서 거룩한 향기가 나게 하소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마음이 통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부담스럽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질러 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뒤쳐져서도 안돼요. 함께 보조를 맞춰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꾀를 내어서 약삭빠르게 행동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면서도 미적미적 되면서 게으름을 피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최고의 복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것은 저주와 사망의 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까지만 가고 그 이상은 넘어서지 말자.’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평범한 일, 하찮은 일, 시시해 보이는 일, 귀찮은 일부터 피하려 들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아이를 키우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행하십시오.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 나라로 옮겨 주실 것입니다.




    동행에 대한 예화 모음

     

    130년 간의 동행 

    1981년 흑인 가운데 가장 장수한 찰리 스미스가 13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130년의 세월은 고통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고통 속에서 살았다. 미국의 남부와 서부를 헤매며 매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어 죽을 고비를 스무 번도 넘게 경험했다. 한때는 서부 최고의 총잡이 제시 제임스의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130년 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스미스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자신을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나게 했음에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도 감사합니다. 130년 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스티븐스 목사는 이 기도를 들으며 "이런 신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라고 말했다.

     

    같이 가는 길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 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진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같이 타고서도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문학가 안데르센(1805-1875)의 청년 시절의 일화이다. 그는 스웨덴의 여류 소설가 브레멘을 만나볼 계획으로 여객선을 탔다. 선장과 대화를 하다가 자기의 여행 목적을 이야기했더니 선장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브레멘 여사는 지금 외국 여행중이라는 신문 기사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모처럼의 방문 여행인데 헛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은 몹시 낙심하였다. 그러나 한 시간 후 선장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안데르센씨, 기적입니다. 당신이 만나려는 브레멘 여사가 바로 이 배에 타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

    성경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변역하기 어려운 것이 '보혜사'라는 단어다.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保惠師)'인데, 이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하다. 즉 '안위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훈계한다', '권고한다', '격려한다', '도와 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시다.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에서 생명의 말씀에서 안위를 찾으며 죄와 세상 염려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영혼과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한다. 근심에 쌓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로운 혼란으로 사방에 흐트러진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 밑에 두신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여러 가지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정신요법적 마술로 우리 생각을 잊어버리라고 함으로써 걱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생각을 통제하는 것 즉 꽉 동여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리는 화평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

    엘리자벳 빌타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2층 침실에서 일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잠깐 쉬는데 빨랫줄에 아름다운 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찬란한 햇빛을 받고 있는 파랑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얼마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다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 그 파랑새가 또 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 파랑새가 앉아 있나 밖을 내다보다 이번에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처럼 아름답던 파랑새가 누런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해가 구름 속에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은 빛과 이토록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빛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더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특히 인간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여 빛을 발하지 않는 이상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미는 마치 어둠 속에 있는 한 송이의 장미와 다를 바 없듯이 그리스도 없는 삶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돈과 명예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 없는 지식은 교만해지고 그리스도가 없는 과학은 결국 불행한 오점을 찍을 뿐이라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 

    이탈리아 제노바(Genoa)에 있는 예수 상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동상인데 높은 언덕에 세우지 않고 이 항구도시의 가장 낮은 장소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름을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라고 붙였다. 제 2차 대전 때 제노바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군함이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들을 회상하며 부모들이 헌금하여 예수 상을 봉헌한 것이다. 이 예수 상은 예수님이 높은 곳에 우뚝 선 예수가 아니라 깊은 곳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어느 젊은이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모래밭에는 발자국이 두개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내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내가 직접

    민규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 산은 처음 가보는 산인데다가 친구 중 그 누구도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 헤매다 보니 날이 점점 어두워 왔습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자그마한 산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산장엔 턱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할아버지, 저희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산 아래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죠?" 민규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너의 힘만으로는 이 산을 내려 갈 수가 없어. 이 산은 키 높은 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길도 험하여 너희들에게는 지도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민규와 친구들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내가 직접 마을로 데려가 주지. 나와 같이 간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거야." 민규와 친구들은 그 날 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는데는 그 산에서 평생을 산 그 할아버지와 동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돌봐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의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다가는 나만 바보 소리들을 텐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때로는 손해도 보고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하늘나라의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보다 더 확실한 삶의 길은 없습니다.

     

    너와 함께 하리라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죽음의 나찌 포로 수용소에서의 일이다. 한 특별한 수용소는 일을 하기 위한 수용소였는데 포로들이 일을 하는 한 그들은 가스실에서 구제될 수 있었다. 솔로몬 로젠버그 가족 중에는 연로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80살이 가까운 할아버지는 비인간적인 조건 하에서의 장시간의 노동과 영양분의 결핍과 불결한 위생시설로 인해 곧 쓰러지게 되었고 이내 가스실로 옮겨지고 말았다. 솔로몬은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스실로 끌려갈 사람은 제일 어린 아들 데이빗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작업량이 점점 더 줄어들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가족들은 각자 다른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수용소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아버지 솔로몬은 혹시 막내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과 전율로 몸을 떨어야 했다. 매일 밤 막사에 돌아오면 솔로몬은 재빨리 데이빗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큰아들 야곱과 아내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침내 솔로몬이 두려워하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일터에서 돌아와보니 가족 중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사랑스런 가족의 얼굴을 찾았다. 드디어 큰아들 야곱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와 어린 데이빗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야곱에게 다그쳐 물었다. "얘야 내게 말해다오. 데이빗이 오늘 끌려갔단 말이냐?" "네, 아빠. 오늘 그들이 와서 데이빗을 데려갔어요. 데이빗은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네 엄마는 어디 있느냐? 네 엄마는 아직 건강하지 않느냐? 그들이 엄마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겠지?" 야곱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사람들이 처음에 데이빗을 데리러 왔을 때 데이빗은 몹시 겁을 냈어요. 그리곤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 때 엄마가 말했어요. 울지 마라, 데이빗. 내가 함께 가서 너를 꼭 붙들어주마. 그리고 엄마는 데이빗이랑 같이 가스실로 가신 거예요. 데이빗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너의 심장 속에 내가 있다 

    시에나의 성녀 캐더린(Catherine of Siena)에 대한 신비한 전설들이 많다. 캐더린 수녀는 몹시 고통스러운 어느 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던 주님께서 내 심장이 찢어질 만큼 괴로운 이 때에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지금 너의 심장 속에 있다."

     

    눈길의 발자국

    옛날 북서 아메리카에 한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추장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방문객을 오두막집에서 나오게 한 후 물었다. "당신은 지난밤에 이 오두막집을 통과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방문객은 눈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추장에게 "한 사람밖에 지나간 적이 없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추장은 그에게 그 날 밤 그 오두막집을 수백 명의 인디언들이 다시 말해서 한 부족 전체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추장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추장이 제일 선두에 걷고, 나머지 모든 부족이 일렬로 그를 따라가면서 추장이 밟았던 발자국을 정확히 밟고 지나감으로써 하나의 발자국만을 남깁니다. 따라서 수백 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지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계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부족의 적들은 그들이 간 길을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장이시다. 그는 생명의 길을 따라 제일 먼저가시면서 우리에게 그의 발자국 즉 그의 모범을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주님이 남겨 놓으신 이 발자국을 따라야만 한다.

     

    동업자

    최고로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알라후에라시 외곽에 있는 구릉지대를 걸으면서 나는 양쪽에 있는 커피농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름칠을 한 듯 반질거리는 검푸른 잎새들이 아열대의 태양을 반사하였습니다. 길을 따라 지은 작은 집들의 현관과 잔디밭에는 가지각색의 꽃과 관목이 가득했고, 화려한 붉은 꽃이 피는 굵은 덩굴이 담벽과 현관지붕을 큰 무늬로 뒤덮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소박한 주택에 붙여서 지은 작은 목공소를 못 볼 뻔 했습니다. 목공소 한쪽이 열려있길래 나는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업장은 아주 소박하게도 작았습니다. 침대 제작소였습니다. 뒤쪽에는 양쪽에 굵은 나무껍질이 붙은 채로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로부터 목수는 아름답고 멋진 침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침대는 각기 튼튼하고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변했습니다. 목수가 공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그의 작업을 칭찬했습니다. "여기 일하는 사람이 모두 몇 명입니까?"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둘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있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손끝을 하늘로 가리켰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여기서 일하지요. 하나님은 나무를 만드시고, 나는 침대를 만들어요."

     

    막대기와 지팡이가 위안이 되는 이유

    캐시는 여러 해 동안 막대기와 지팡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라는 속담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엄한 수련 방법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을 읽다가 의혹을 품게 되었다. 그 책에 보면 막대기는 양들을 때리는 도구가 아니라 목자가 단순히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있음으로써 양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고 올바른 곳으로 가도록 부드럽게 인도한 것이라고 하였다. 캐시는 기뻐서 소리치고 싶었다. 예수께서는 그 분의 제자들을 양떼나 어린양으로 비유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결코 매로써 억지로 복종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올바른 방향으로 부드럽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큰 위안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멍에를 같이 한 자

    일찍이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빙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니다. 양쪽 소를 번갈아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이며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 4:3에서 표현한 참으로 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며 균형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준다

    나이지리아 칼라브르의 위대한 선교사 슬레서는 8년 동안 떠나있다가 다시 역경의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도착은 대단한 흥분을 자아냈으며, 그녀의 체류기간은 그야말로 오랜 리셉션과 같았다. 하루종일 선교사관은 시장 같았다. 가까운 데서는 물론이고 아주 먼 데서도 사람들이 술레서 선교사에게 인사하러 일부러 찾아왔다. 그녀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시시각각 몰려들었다. 평소 그녀는 이렇게 말해왔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당신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 당신에게 빵을 주실 것이고 물을 주실 것입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함께 끝내야 합니다."(G. C. Britton)

     

    본문은 기억하지 못하나

    한 가난한 여자가 어느 날 교회에서 부정직에 관한 설교를 듣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그 날 설교의 본문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자 그 여자는 잊어 버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내가 집에 돌아와 한 부셀짜리 되를 태워 버렸다는 것은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설교를 더 많이 하고 계신다.(J. Berrey)

     

    사자의 꾀임에 빠진 네 마리 황소 

    친한 네 마리 황소가 있었다. 이 황소는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맛있는 풀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떤 위험이 닥쳐오면 네 마리가 힘을 합쳐 위험을 물리쳤다. 이 네 마리의 황소를 노리는 사자가 있었다. 이 사자는 한 마리씩 사냥하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힘을 합한 네 마리의 방어에는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이다가 하루는 꾀를 내어 약간 뒤에 처져있는 황소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 마리의 황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네 친구들은 서로 불신하였고, 크게 싸우다가 마침내 각기 흩어져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분열을 노린 사자는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마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마틴 루터가 크게 낙심하고 있자 어느 날 그의 아내는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누가 죽었소?"라고 그가 묻자 "하나님이 죽었습니다"라고 아내가 답변하였다. "괜한 소리 그만 두시오. 하나님은 영원 불멸하시는 분이시오. 지금까지도 살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오"라고 루터가 소리쳤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요?"라고 그의 아내가 되물었다. 그때야 루터는 아내의 뜻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의심이 구름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손자를 위한 기도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스마트 박사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사고로 눈꺼풀이 크게 찢어진 어린 딸을 아버지가 안고 황급히 응급실로 들어왔다. 스마트 박사는 그 소녀의 상태를 살핀 후 소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찢어진 곳을 몇 바늘 꿰매야 하는데 따님은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스마트 박사는 소녀에게 "내가 바늘로 상처를 꿰맬 때 참고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이때 소녀는 "아빠가 내 손을 붙들어주면 뛰쳐나가지 않을래요." 하고 대답했다. 이 소녀는 아빠가 잡아주는 손에 매달려 상처를 꿰매는 동안 아픔을 참으며 한 번도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그 딸에게 어떤 힘을 준 것일까. 아버지가 손을 잡음으로 상처를 꿰매는 횟수가 줄어들거나 아픔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손을 잡아줌으로 용기를 얻게 되고 참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환난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역경으로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세상을 이기신 능력 있는 주님이 오늘 나와 함께 계신다.

     

    술 취한 친구 

    루터가 하루는 이런 예화를 든 적이 있다. "술 취한 친구를 말에 태워 집에 보내기는 아주 어렵다. 이쪽에서 올리면 저쪽으로 떨어지고 저쪽에서 말에 올리면 이쪽으로 떨어진다. 방법은 친구 하나가 함께 안장에 앉아 가는 것이다."

     

    엄마가 소개한 친구

    어떤 고아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엄마가 없으니 고민 거리가 생길 때 어떻게 하니?"그러자 그 고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나한테 예수님께 가라고 하셨어. 그는 우리 엄마의 친구고 또 내 친구셔."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니. 그는 너한테 신경 쓰기 위해 모든 일을 멈추진 않으실 거야." 친구의 반박에 고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가 들어 주실 거라는 거야. 내겐 그걸로 충분해." 우리에게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에피소드

    오래 전에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편집인, 즉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고미술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신기한 도자기 하나가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꼭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힘과 노력을 들이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에피소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그 귀한 보화를 사서 자기 집의 광속에 두고는 그 보화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 얼마나 어처구니없습니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스의 산문 

    지난 15일 롱아일랜드에서의 화재로 인해 6명의 아이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중 아홉 살 난 엘리스(Allis Shedrick) 양이 죽기 이틀 전에 학교 숙제로 쓴 <나의 가장 좋은 친구>란 산문이 <데일리 뉴스>지에 소개되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하나님이다.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말상대가 되어 주신다. 무엇인가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누구든지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은 우선 하나님과 의논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나는 언젠가 하나님의 큰집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영혼의 파이프가 잘 연결되었나

     미국의 한 신문사가 어떤 병원의 소방시설에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문에 그 기사를 실었다. 35년 간이나 화재로부터 안전하였던 그 병원의 소방시설이 도시의 주요 수도시설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병원의 소방시설의 수도 파이프가 지하로 4피트 정도 뻗어 나가더니 거기서 끊겼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병원 측에서는 곧바로 예산을 세워서 시의 수도 파이프에 병원의 소방수도 파이프를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기사를 보고서 매우 불안해한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나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던 일꾼들도 아니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의하여 생명수의 물줄기까지 자신들의 영혼의 파이프가 잘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중간에 끊겨 있지나 않는지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오직 우리의 생명수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Pilgrim)

     

    예수님과 동석한 자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한 자들을 천국에서 천사들이 예수님 앞에 아뢴다. "이 사람은 인류생활에 편리한 필수품을 연구 발명한 문명의 혜택을 끼친 발명가입니다." "수고 많았다. 천사장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사물의 근본원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 학문을 가르친 철학자입니다." "수고가 많았다. 그 사람을 이성의 천사 라파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국가 수호를 위해 칼 들어 적군을 물리치고 전승의 유공자 군사입니다." "수고 많았다. 무사천사 미가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작사 작곡하여 많은 교회에서 찬양에 수고한 음악가입니다." "수고가 많았다. 기쁜 소식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죄인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시킨 전도인입니다." 천군 천사 모두 환영함과 예수님 친히 기립 영접하여 함께 앉았다. 예수님과 동석한 자는 전도자였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예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사랑이가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는 아무리 아파도 수술은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사랑이를 억지로 병원에 데려가서 수술을 받게 한 아버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수술이 다 끝나고 아버지가 사랑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수술을 받는 동안 무섭지 않았니?" 사랑이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뇨.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수술하는 게 겁이 난다던 네가 안 무서웠단 말이니?"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처음에는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수술실에 예수님 그림이 걸려 있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의사 선생님들이 수술을 하고 있고 또 예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사랑이의 대답에 아버지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이가 수술을 받으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마음의 근심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려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또한 사랑이가 안심하고 수술을 받게 된 다른 이유는 수술을 할 의사 선생님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이러한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행동을 바르게 해야 될 것입니다.

     

    이 더하기 이는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은 경제학자입니다. 그 분은 경제학 박사이며 대학에서 수학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루는 제가 설교를 하다 말고, 그 장로님께 "이 더하기 이가 뭐지요?" 하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바라보시며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문제가 너무 쉽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저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신 얼굴에 잔득 힘을 주고는 뭔가 심오한 것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의 표정도 심각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분은 머리 속으로 2라는 숫자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온갖 방정식을 다 떠올리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모든 회중들이 조용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잠시 후 그 장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줄에 어떤 꼬마가 앉아 있길래 저는 그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이 더하기 이가 뭐지?" "넷이요." 그 꼬마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질문은 경제학박사님이 대답하시기에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그토록 쉬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라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너무 간단했기 때문에 그 분은 제 질문 속에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눈을 뜨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그 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과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분과 함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삶이라는 것은 대단히 쉬워집니다.

     

    인간의 기술과 하나님의 손길

    어떤 유명한 외과의사가 복잡한 수술을 하는 것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정성을 다해 수술 준비를 마친 그의 표정에서 자신감과 함께 조금은 긴장된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하고 로버트가 묻자 "거의 다 됐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잠시 동안 멈추어 서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긴장을 푼 평온한 모습으로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수술하는 동안 그의 손길은 결코 주저함 없이 능숙하게 움직여나갔다. 수술이 끝난 후 로버트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수술에 임하기 전에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의사들은 자기의 기술에만 의지한다고 생각 했었거든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의사도 인간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기적을 만들 수는 없지요. 저는 인간보다 훨씬 탁월한 어떤 힘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학이 오늘날의 수준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의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맺는 것이었다. "저는 수술을 할 때문 언제나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것이 나의 기술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손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임재하심의 체험

    플라벨이라는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는 칼빈주의자였으며 평신도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말을 타고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감당할 수없는 힘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힘이 점점 강하게 밀려들기 때문에 급기야는 말을 타고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잠잠하니까 말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플라벨이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말을 몰지 않으니까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여기저기 나무에 찔려 플라벨의 얼굴이 찢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내려와서 얼굴을 씻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그 때의 느낌을 플라벨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내가 말등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젖어있던 그 순간이 천국이 아니었다면 설혹 다른 데에 천국이 있다고 해도 내가 체험한 그것만큼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은혜스러운 날 저녁에 플라벨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임재에 사로잡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그가 기록하기를 "나는 어느 날 밤보다도 그곳에서 잔 그 날 밤만큼 푹 쉰 날이 없었다. 그전에는 생전 알지 못하였던 것들을 내 영혼이 믿음으로 보고들은 밤이었다."라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런 것이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자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추운 겨울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몸을 떨며 말을 잘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추위를 탔으나 다른 한 사람은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한 사람은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제대로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찬바람같이 불어대는 마귀와 눈을 뿌리는 구름같이 떠 있는 유혹 속에서 부족한 인간은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경계하여 머리에는 소망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진실의 띠를 묶고, 발에는 평화의 신을 신고, 손에는 성령의 검을 잡고, 앞에는 믿음의 방패를 세우고, 하늘에는 기도로 무전선을 놓고, 항상 굳게 서서 모든 원수를 다 이기며 하늘을 향해 나아가다가 만일 기진맥진한 경우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무전을 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혜사라는 대장을 속히 파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적군을 무찌르리니 걱정할 것이 없다. 마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에게는 추운 날이 없는 것과 같다.(홍승한)

     

    조지 뮐러의 일기

     5월 7일 내가 매일 해야 할 일 중 으뜸가는 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많이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가가 아니고. 나의 내적 자아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영적인 영양 공급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북돋아줄 수 있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도 있고, 또한 나 자신의 다른 면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주 안에서 기뻐하지 않고 나날이 나의 내적 자아가 영적인 영양 공급과 힘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역을 그릇된 정신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해야 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때로는 경고와 채찍질도 받게 되는 것이다. 대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기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집중이 안 될 때는 흔히 15분에서 1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곤 했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이런 문제는 없다. 나는 가끔씩 신앙생활의 초창기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에 대해 놀라곤 했다. 외적인 자아가 먹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내적 자아 또한 그렇다. 물이 수도관을 통과하듯이 우리 마음 속을 통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읽는 성경구절을 묵상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어떤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먼저 달려갑니다. 그런데 앞에서 큰 개를 발견합니다. 개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손을 잡고 뒤로 돌아 미소를 지으면서 개를 봅니다. 그러나 개는 여전히 큰 개입니다. 그리고 개는 여전히 사납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안전합니다. 아버지 손을 잡았을 때 평안을 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평안은 한 인격자와의 관계에서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장소에서 삽니다. 한 장소는 제한된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몸과 같이 유한한 곳입니다. 그러나 또 한 곳은 무한한 곳입니다. 하나님만큼 무한한 세계입니다. 한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이며 또한 세계는 신령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똑같이 실제적인 두개의 세계인 것입니다. 환난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실제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세상에서 있게 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셨던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승리의 기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왕이 당신을 종종 방문을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나는 몇 번 여왕의 심방을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심방한 일이 있습니까?" 하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심방을 받지 않습니다. 그 분과 항상 같이 삽니다. 그 분이 여기서 나와 같이 삽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과 같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의사

    어느 큰 병원의 유명한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놀라운 의술과 수술에 대한 꼭 필요한 침착성은 많은 젊은 의사들로 하여금 이 외과 의사의 성공적인 수술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련의가 용기를 내어 그 외과 의사에게 이 사실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 외과 의사는 "그렇다네. 이 두 가지 사이엔 분명한 관계가 있다네. 내가 아주 까다로운 수술을 집도 할 때도 많고, 수술 후에도 환자의 상태가 예상 못할 지경에 빠질 때도 수없이 많은데 이럴 때 나는 어찌해야 될지를 모른다네. 그렇지만 나는 곧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게 되며 주님께서는 내게 수술을 성공하도록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네. 나는 먼저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수술 칼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주님과 함께 수술하는 의사"라는 말이 이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생명의 귀중함을 아시고, 겸손한 의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환자를 치료할 때 먼저 주님께 도움을 구한 다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환자를 돌보는 헌신적인 분들에게 감사를 해야 됩니다.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지원병 중에서 독일에 보낼 스파이를 많이 뽑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독일식 음식, 군복, 언어, 이름, 생활풍습에 대하여 매일 맹훈련을 받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독일 군인일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마저도 독일화되어 독일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인정될 때 비로소 스파이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한스이고, 고향은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아니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바꿔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완전히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훈련 마지막 단계에서 수십 리나 되는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행군을 합니다.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사이에 새벽 두세 시경 갑자기 낯선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곤히 잠든 훈련병을 깨우면서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제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실격입니다. 그는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 한스입니다."라고 엉겁결에라도 독일말로 대답할 수 있을 때 정식 스파이가 된다고 합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나는 독일 군인이라는 것이 잠재의식에도 깊이 박혔을 때 스파이로서의 교육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어 어디에서 보아도 크리스천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모든 생각이 집중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정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은 유태인이 방랑하는 외국생활에서 그들의 신앙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딸들에게 철저하게 신앙을 통한 가정 교육을 시키며 말한다. "너희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는 것이나, 숄(shawl)을 걸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그것은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전통적인 표시이다. 우리를 지켜 주신 하나님을 떠나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캐셔 속의 못 

    런던 시 템플 교회에 70세가 가까워 오는 에밀 메틀러(Emil Mettler)씨가 있다. 그는 알버트 슈바이처 협회(의료 구호 사업)의 간부이다. 그는 40년 동안 작은 식당을 경영해 왔다. 손님들은 요금을 지불할 때 메틀러 씨의 캐셔(현금 보관함) 속에 들어 있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놀란다. 6인치의 큰 못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오는 손님은 질문을 한다. "캐셔 속에 못은 왜 넣어두었습니까?" 메틀러 씨는 심각한 얼굴로 설명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못을 집의 책상 서랍 속에 둘 수도 있으나 캐셔 속에 둔 것은 직업과 내 생활 속에 예수님이 계심을 자주 상기하기 위해서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중국 선교에 온 정성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1832~1905) 선교사가 전도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몹시 지쳐 있었다. 그는 말씀을 읽다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는 구절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후에 이 때를 떠올리며 "내가 정신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나는 마치 주님이 나를 떠나신 줄 알고 불신 속에서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신 이상 나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간증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16세기의 카르멜회 수사였던 브라더 로렌스는 오랜 세월 동안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고 지속적인 사랑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임재하심을 실생활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번철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하다 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무슨 일에나 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할 때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좀 더 쉽고 직접적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는 데는 복잡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정직하고 단순하게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브라더 로렌스의 본을 통해 특별히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된 것이 사색적인 많은 책들을 읽거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자기의 일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이라면 직장보다 더 좋은 훈련장은 없습니다. 까다로운 상사, 패배감과 부족감, 직장 일에 따르는 큰 압력 등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도구로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압력 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를 성격상의 결점들을 다루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극단적인 별난 데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할 때 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손은 보호를 의미한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녹스는 적들의 사악한 음모로부터 무수히 도피하였다. 그는 그의 집의 식탁머리에 있는 창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왠지 그는 그의 지정석에 앉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을 앉게 하지고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에 그를 죽일 계획으로 창문을 통해서 총알이 날아왔다. 그 총알은 그가 늘 앉았던 의자를 스쳐 지나가 등잔의 밑동에 구멍을 냈다.

     

    하나님의 약속 

    리빙스턴이 16년 간 아프리카 정글의 고독과 싸우다가 고국에 돌아와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데 한 학생이 물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 간을 살 수 있었습니까?"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 대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맡기는 것

    중국 오지에 간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로서는 거의 견딜 수 없는 믿음의 시련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 경우마다 한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로 인해 신뢰와 평화가 회복되었다. "내 영혼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친구가 보내온 편지가 우리와 예수가 일치되어 있다는 진실을 나에게 계시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편지 내용을 요약한다면 믿음이란 것은 더 많은 믿음을 가져보겠다고 내 힘으로 애쓰는 데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는 데서 강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읽는 동안 디모데후서 2:1의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십니다."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바라보며 혼자 말했다. "나는 애타지 않으련다. 그가 친히 약속하신 것을 어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1960년 딘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말기의 고통을 겪을 때 찬양이 그의 삶에서 새로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겠지만 이 땅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에도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딘은 그의 병실을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달 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의 가까운 어느 친구는 "그의 병실은 지성소 같았고, 그가 누웠던 침대는 설교단상 같았으며, 그에게 병문안 왔던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찬양을 했다고 해서 그의 암이 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믿음을 통하여 딘은 고통스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새로운 기쁨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축복 가운데 있을 때나 고난 가운데 있을 때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임재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대적들은 꼼짝 못하고 사탄의 세력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과 영광과 기쁨과 능력 가운데 살게 됩니다. 사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임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풍성함을 여러 면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찬양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허드슨 테일러 목사는 임종을 몇 달 앞두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그의 절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게, 나는 지금 몸이 너무 쇠약해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고 심지어 기도도 못하고 있네. 단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누워 있는 것이라네. 그리고 그 어린 아이가 하나님을 믿듯이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을 뿐이라네."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길을 걸었던 위대한 테일러 목사가 지금은 육체적 고통과 쇠약함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조용히 누워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태도다. 그 분은 당신이 곤경에 빠져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더 강해지려고 애쓰지 말아라. 단지 그냥 그대로 너의 믿음을 지키고 있어라."(제임스 H. 매콘케이)

     

    할머니 교우의 설교 

    랠프 턴불 목사는 <하나뿐인 교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말한다. 양로원에서 심한 신경통으로 오래 누워 있는 할머니 교우를 심방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하고 문안하자 노인은 손을 보이며 말했다. "이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은 평안합니다." 또 노인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머리에 가시가 박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노인은 다시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옆구리는 창에 찔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심방 갔던 턴불 목사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

     

    할인판매

    어떤 것을 살 때는 지불한 금액에 상당하는 것만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 교훈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할인 판매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은 돈이 많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문에 실린 백화점의 바겐 세일 광고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나는 싼 김에 원래 계획보다 많은 물건을 헐값에 사서 쓰지 못하고 버리곤 합니다. 반면 어떤 것들은 결정을 참 잘했던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 집 가구는 대부분이 화재로 모든 것들이 불에 타고나서 마련한 것들로 22년이나 묵었습니다. 나는 우리 식탁을 사던 때를 기억합니다. 건장하게 생긴 외판원이 덧판을 펼쳐 보이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제품의 질은 참으로 뛰어났습니다. 쉽게 닳지를 않아 식사 중에 생긴 자국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네 아이들이 수많은 흠집을 내놓고 자국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식탁은 지금도 여전히 튼튼합니다. 비싼 만큼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헌신에 있어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싸구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헌신의 질은 그 치르는 값으로 나타납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함께 하고 있는데도

    한 남자가 여러 달에 걸쳐 몇 차례고 거듭 사랑하는 여자에게 구애를 했건만 번번이 매몰차게 퇴짜만 맞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 여인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만나러 오라며. 그 때 그 곳에서 그 남자는 마침내 애인 곁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한 무더기 꺼내 놓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썼던 열렬한 연서들로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사랑과 결합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불타는 욕망을 고백하는 내용들이었다. 연인은 그것을 애인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가건만 여전히 그는 읽고 읽고 또 읽고만 있는 것이었다. 결국 여자가 말했다. "별 바보 같은 남자 다 보겠네. 이 편지는 그러니까 모두가 당신이 절 갈망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 아녜요. 그런데 보세요. 여기 당신 곁에 제가 앉았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줄곧 그 멍청한 편지나 읽고 있으니 대체 어찌 된 거냐 말예요." 열렬한 신봉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 여기 네 곁에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는 줄곧 머리로 나에 관하여 궁리나 하고, 혀로 나에 관하여 얘기나 하며, 책으로 나에 관하여 읽기나 하는구나. 언제면 고요해져 나를 맛보려느냐."

     

    함께 하는 사랑 

    신학자 바르트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다 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아야 한다. 나는 그를 보는데 그는 딴 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짝사랑이다. 무릇 사랑이란 마주보고 자신의 마음을 주고,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마주보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만 가지고는 온전할 수 없다. 함께 일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일해야 한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에수님의 영혼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본받고 따라야 한다. 요즘 부부들을 보면 이혼하는 쌍도 늘고, 부부간에 크고 작은 갈등으로 여간 시끄럽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함께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함께 사역해야 한다. 함께 하는 사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녀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 아이가 생겨야 하는데 공동 작품인 아이가 없으면 서로 사랑이 식어지기도 한다. 함께 노력함으로 만든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소위 신세대 부부들의 이혼율이 늘어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일하게 되어있는 사회구조가 그것을 부채질한다. 우리네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남편이 들에 나가서 일하면 아내는 점심을 싸 가지고 들로 나간다. 또 남편이 당을 일구어 놓으면 아내는 그곳에 씨앗을 뿌린다. 타작할 때도 아내는 타작기에 벼를 집어넣고 벼이삭을 모으면 남편은 그것을 가마니에 담아 창고에 들이거나 건조시킬 수 있는 마땅한 장소로 이동시킨다. 이렇게 평생을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에 가끔 부부가 작은 봉고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야채나 과일이나 생선을 팔러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아름다워 보인다. 한 사람은 "수박 사세유" 하고 한 사람은 밖에서 "어서 오세유" 하면서 하루종일 함께 하니 그 사랑이 식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요즘 많은 부부들은 함께 하는 일이 없다. 모두들 제각기 이다. 어떤 남편은 자기 아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그런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만큼의 월급을 받는지조차도 모르는 아내도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 서로 다르고 이루는 것도 각자가 스스로 이루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함께 누리는 보람이 없는 것이다. 함께 하고 함께 모으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주께서 마 12: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함께 하는 고난

    우리 동네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곳으로 중산층에 어울리는 좋은 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부근에 오래된 낡은 집이 하나 있는데 방이 열 개나 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최근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제 청소년들을 위한 갱생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곳에 수용된 청소년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는 살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약 중독자가 있는가 하면, 전과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갱생원은 지역보호를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네 주민들은 집 값이 하락하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동네 한가운데 문제의 수용소가 생기면 집 값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을 가진 부모들은 더욱더 걱정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었고, 어떤 아주머니들은 과민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정부에 진정서를 보냈습니다. 이들을 동네에서 쫓아내고 자신들의 재산과 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주민들은 거의 다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기 자식도 그런 암흑 속을 헤맬 수도 있음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온 탕자들이 다시 하나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온 탕자를 다시 쫓아내는 일에 서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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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898439 2022-11-30T17:11:00Z 2023-04-21T08:27:46Z 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01. 01.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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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설교 자료 / 12-25-2022 성탄주일 설교
    이승혁목사

    성탄의 의미(마태복음 1:21)

    동영상 자료 /

    성탄(聖誕)이란 한자의 파자(破字)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탄(誕)'이란 한자의 의미
    "말을 널리 늘이는 것"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


    성탄(聖誕)이란 한문자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요한 1:14) 크게 듣고 크게 말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하기 위한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언령신앙(言靈信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언어가 갖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화분에 꽃을 심고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하나의 화분은 아침마다 물을 주며 지난 밤에 잘 잤니? 오늘은 더 아름답구나! 이렇게 긍정적인 인사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화분은 물을 주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라든지 말든지 이렇게 무관심한 자세로 대하면 얼마 후에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유리병에 물을 담아놓고 하나의 물병을 향해서 너는 참 좋은 물이야!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다른 물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긍정적인 반응으로 대하는 물병의 물은 육각수 형태의 좋은 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대한 물병의 물은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어(言語)는 존재(存在)의 집

    불란서의 회의론을 창시한 철학자 데칼트(Renatus Cartesiu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이런 사람은 비서라고 합니다.

    똑똑똑, "통화중!"
    이런 사람은 전화교환원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이런 사람은 백화점과 호텔의 엘리베이커 걸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오라이"
    이런 사람은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똑똑똑, "믿습니까?"

    호모 로쿠엔스(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말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오늘의 시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부활절에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추수감사절에는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크리스마스에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말을 하면 거부반을을 나타내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최근에는 뉴욕주에서 마리화나(대마초)를 시중에서 판매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머지않아 거리마다 대마초에 취하여 정신이 몽롱한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닐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佛敎)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극락(極樂)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으므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생전에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였어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시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죽은 사람의 몸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수 많은 물고기, 짐승, 동물의 죽은 몸둥아리는 가격에 따라 팔려갑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몸을 어느 누구도 돈을 주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단을 위한 제안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먼저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야 애급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단계를 말합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을 건너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확신한 후에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권세와 능력의 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카바 만*과 수에즈 만 및 오늘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북부 호수 지역을 포함하는 (또 아라비아 바다와 인도양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바다를 가리킨다.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구약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세계 창조의 과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창조를 하나님이 바다*를 정복한 사건으로 상징적인 언어로 찬양하기 때문이다(사51:9-10 참조).

    * “요단”이라는 의미는 “내려가다” 혹은 “급하게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빠르게 흐르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요단은 야라드 (ירד)에서 파생한 야르덴 (ירדן)으로 표기됩니다. 이 단어 뜻은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기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년 표어 : 주와 동행 365
                성구 :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Enoch walked with God; then he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 away.

    2023년은 주일(일요일)로 시작하는 "계묘년(癸卯年)" 즉 "검은 토끼의 해" 입니다.

    2023년은 설교자 협동목회를 시작한 목회자가 교대로 주일마다 설교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호승목사, 황선민목사, 이승혁목사
    이렇게 주 마다 교대로 설교하며 2023년을 "주와 동행 365" 라는 신앙의 목표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2023년 교회력 및 국가 기념주일(전반기 1월∼6월)

    교회력

    기념주일

    설교자

    비고

    1

    1

    주현절(6일)

    신년주일

    이호승

     

    8

    주님의 수세주일

     

    황선민

     

    15

    미국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16일)

     

    이승혁

     

    22

     

     

    이호승

     

    29

     

     

    황선민

     

    2

    5

     

     

    이승혁

     

    12

     

     

    이호승

     

    19

    산상변모주일, 재의 수요일(22일)

    미국 대통령의 날(20일)

    황선민

     

    26

     

     

    이승혁

     

    3

    5

     

    3.1절 기념주일

    이호승

     

    12

     

     

    황선민

     

    19

     

     

    이승혁

     

    26

     

     

    이호승

     

    4

    2

    종려주일(고난주일), 성 금요일(7)

    고난주간(3-8일)

    황선민

     

    9

    부활주일

     

    이승혁

     

    16

     

     

    이호승

     

    23

     

     

    황선민

     

    30

     

     

    이승혁

     

    5

    7

    어린이주일

     

    이호승

     

    14

    어버이주일, 주님승천일(18)

     

    황선민

     

    21

     

     

    이승혁

     

    28

    오순절, 성령강림주일

    미국 종전 기념일(29일)

    이호승

     

    6

    4

    삼위일체주일

     

    황선민

     

    11

     

     

    이승혁

     

    18

     

     

    이호승

     

    25

     

    6. 25 기념주일

    황선민

     

    * 매월 첫째 주일 : 성찬예식


                2023년 교회력 및 국가 기념주일(후반기 7월∼12월)

    교회력

    기념주일

    설교자

    비고

    7

    2

     

    미국 독립기념일(4일)

    이승혁

     

    9

     

     

    이호승

     

    16

     

    제헌절 기념주일

    황선민

     

    23

     

     

    이승혁

     

    30

     

     

    이호승

     

    8

    6

     

     

    황선민

     

    13

     

    광복절 기념주일

    이승혁

     

    20

     

     

    이호승

     

    27

     

     

    황선민

     

    9

    3

     

    미국 노동의 날(4일)

    이승혁

     

    10

     

     

    이호승

     

    17

     

     

    황선민

     

    24

     

     

    이승혁

     

    10

    1

     

    개천절 기념주일

    이호승

     

    8

    미국 컬럼버스의 날(9일)

    한글날 기념주일

    황선민

     

    15

     

     

    이승혁

     

    22

     

     

    이호승

     

    29

    종교개혁기념주일

     

    황선민

     

    11

    5

     

     

    이승혁

     

    12

     

    미국 재향군인의 날(11일)

    이호승

     

    19

     

     

    황선민

     

    26

    추수감사주일

     

    이승혁

     

    12

    3

    대림절 첫 주일

     

    이호승

     

    10

     

     

    황선민

     

    17

     

     

    이승혁

     

    24

    성탄주일

     

    이호승

     

    31

     

     

    황선민

     

    * 매월 첫째 주일 : 성찬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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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자료를 자유롭게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없습니다.

    완성된 자료가 아니라 기초 자료를 제공하여 설교자의 기도와 경험과 은혜를 첨가하여 완성된 주일 강단의 외침으로 무너지는 자유대한 민국의 질서와 선교한국을 향한 믿음을 함께 세워나가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뉴욕에서 이승혁목사(Pastor Victor S Lee)

    이메일 주소 / victor@nykcn.org

    카카오톡 ID / victorka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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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He who walks with wise men will be wise, But the companion of fools will suffer harm.

    동행(同行) : 한가지 동(同). 다닐 행(行)

    1.  문장(文章)에 있어서 글자의 같은 줄. 동일(同一)한 행(行).
    2. 그 행(行). 이 행.
    3. 길을 같이 감. 또는 그 사람. 동도(同道).
    4. 부역(賦役)에 함께 감. 반행(伴行).
    5. 불교(佛敎)의 수행(修行)이 같음. 또는 같은 수행(修行)을 하는 사람.

    accompany, go with

    I accompanied him on his European tour.
    나는 그의 유럽 만유(漫遊)를 동행(同行)하였다.


    동행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할라크" 라고 합니다.

    할라크(1980) הָלַךְ

    1. 가다,  2. ㉠ 창 7:18. ㉡ 대하26:8. ㉢ 수 16:8. ㉣ 느 6:17. 3. אֶל

    발음  / 할라크(hâlak)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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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파스칼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제아무리 유식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 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기만 하는 사람

    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 입니다. 하나님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읍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하는 사람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위대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 1, 2 )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증거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창세기 5:24, 22, 6:9)

    "에녹
    (순종하는 자, 시작한다, 바친다, 가르친다)"
    "므두셀라
    (대확장, 창을 던지는 사람)"
    "노아
    (위로)"

    에녹(Enoch)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셋의 계보 아담의 7대손에 해당.
    므두셀라의 아버지(창 5:18-24).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4).
    죽지 않고 승천했다(히 11:5).


    에녹이란 분은 최초의 사람이셨던 아담의 7대 손으로 야렛의 아드님이십니다.
    그 이름은 '순종하는 자, 시작한다, 바친다, 가르친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생애를 살아가신 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분들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된 사람은 에녹과 노아와 므두살레라 입니다.

    창세기 5:21-24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 육십 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6:9-10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리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입니다.

    열왕기하 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이렇듯 에녹이란 분은 65세부터 시작하여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분입니다.
    삼백 육십 오 세를 사시는 동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고 사셨던 분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임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란 분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삼백 육십 오 세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고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라고 하면 우선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이 죄 많은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령하려면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出家), 즉 가족을 비롯한 맺어진 인연의 줄을 끊고 홀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도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님들처럼 수도원으로 가든지, 비록 세상에 살아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소위 믿음 좋다고 평을 듣는 일부 개신교의 성도님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믿음이 좋다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남다른 은혜를 받고, 색다른 영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신령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사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 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령하게 살고 영적인 사명을 감당한다면서 가정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신령한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방을 따로 써야 한다고 고집하게 됩니다.
    툭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기도원으로 올라가거나, 은혜가 역사 한다는 소문을 따라 이곳 저곳을 쏘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하는 증거를 얻고 살아가신 에녹이란 분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면서도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주어진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에녹이란 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문제를 피하여 도피하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문제 많은 세상에 살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들 속에 살면서 괴롬과 죄를 이겨나가는 것이 바른 성도의 자세입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서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쓰던 찬송가는 가사가 달랐습니다.

    '괴롬과 죄가 많은 곳 나 어이 여기 살리까...'라고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가를 새롭게 개편하면서 왜 이 가사를 바꾸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괴롬과 죄가 많은 세상, 괴롬과 죄가 많은 가정, 괴롬과 죄가 많은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구원받은 성도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괴롬과 죄가 많은 세상, 괴롬과 죄가 많은 가정 속에서 괴롭과 죄가 많은 그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그 사람에게서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란 증거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에녹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의 사람들 한 분 한 분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 중에 에녹이란 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죽임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려 올라가신 분으로 소개하면서, 그 분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첫째,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상(賞)을 주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실 성도가 믿노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 볼 때의 행동과 혼자 있을 때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전혀 딴판일 수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사실 말이지 우리의 헌금 생활이나 봉사 생활이 자원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억지 춘향이 식으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에녹이라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생활이 한결 같았습니다.
    틈만 나면 육신의 편함을 좇고 쾌락을 좇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힘쓰고, 이를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녹이란 분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쓰는 만큼 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만큼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 바된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기억하시고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에 신바람이 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란 분에 비해서 과연 성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시간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넘치십니까? 상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에 신명이 나고 신바람이 나십니까?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65세부터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림을 받을 때인 삼백 육십 오 세가 될 때까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다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들림을 받은 분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에녹이란 분하고 나하고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기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이 에녹과 같은 분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요? 에녹이란 분이 65세 이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몇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든지 간에 그때부터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 구원받은 성도는 에녹이란 분처럼 죽음으로 생애를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모두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5:51-52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는 에녹이란 분처럼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17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므두셀라(Methuselah)

    창세기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므두셀라(Methuselah) : 창 던지는 사람, 대확장
    므두셀라는 대확장이라는 뜻과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므두셀라는 에녹의 아들이며 노아의 조부였다.
    그는 9백69세를 살아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가 되었다.

    이 당시에 9백세 이상 생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창조과학회나 고고학을 연구한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식생활이 채식이었고 궁창에
    물층이 있어서 자외선의 피해를 막아 장수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조건이 변형되었고 인간의 생존이 힘들어졌으며 허약해졌다. 하나님은 이를 대비하여 홍수후에 육식을 허락하셨으나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므두셀라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은 노아나 에녹같이 종교적인 사명이나 사역에 대한 훌륭한 생애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9백69세로 장수하였는데도 그의 약력을 보면 1백87세에 라멕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8백2년동안 자녀를 낳다가 죽었다는 기록으로 끝나고 있다. 그의 공로나 업적이나 인격의 감화나 모범적인 신앙등 아무런 언급이 없는 쓸쓸한 인생의 이력을 보게 된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보다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므두셀라는 많은 세월을 낭비하고 의미없이 세상을 산 것같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의 길이 있고 자기가 하고 갈일이 있으며 자기의 사명이 있다.

    교훈과적용

    첫째,내용이 없는 장수는 부끄러운 일이다. 반드시 자기 인생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둘째,자기의 생존과 생애를 하나님과 관련을 짓자.신앙적인 삶이 아니면 생존의 가치가 없다.


    노아(Noah)

    창세기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아담의 8대손

    라멕이 182세에 낳고 노아라 이름하니 뜻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우리가 수고 하는 것을 이 아들이 위로한다 하는 뜻인데 그것은그리스도의 오실 표적이다 (창 5:28).

    시대가 악하여(눅 17:27) 홍수로 진멸하시고자 하실 때 오직 노아만이의로운 고로 방주를 만들고 피하라고 미리 지시하셨다.120년간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간 후 40일동안 비가 내려 창수가 나서 지상의모든 산을 넘쳐 방주밖에 있는 생물은 다 죽어 버렸다. 5개월 후부터물이 줄기 시작하여 7개월만에 완전히 물이 빠지니 꼭 1년 10일을 방주에서 살았다. 방주가 머문 산은 5,185미터의 아라랏 산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기로 약속하시고 그 표로 무지개를 주셨다.노아는 홍수 뒤에 350년을 더 살아있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950 세에 세상을 떠났다. 홍수 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 부부, 아들 셋, 며느리 셋 도합 8명이었다(창 9장)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으로 라멕의 아들이었습니다(창5:28-29).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세의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 6:9-10).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실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백 20년 동안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과 소돔,고모라의 불 심판은 세상 끝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시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한 사회와 국가를 심판하실 때 끝까지 권고하고 최종적으로 심판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선용 해야 합니다.

    첫째, 노아는 당세의 의인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윤리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완전했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볼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 노아는 순종의 시범자

    1백20년을 하루같이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노아는 신앙의 시범자

    일시적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온 세상이 타락할때 자기 가족만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주변 사람이나 당시의 상황이나 여건이 노아의 신앙을 흔들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신앙이었 습니다.
    더우기 1백20년동안이나.......

    기독학자들은 지구상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각종 화석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입증한다.
    다지층나무화석이 그 한 예다.
    다지층나무화석은 커다란 나무가 몇개의 지층에 걸쳐 화석상태로 발견된 것으로 미국 테네스주에서 발견된 래피도덴드리드나무도 그중 하나다.
    이 나무는 6m의 길이로 여러 퇴적암층을 관통해 뻗어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몇개의 지층이 형성되려면 엄청난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 화석은 그 세월을 무시한채 세로로 세워져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일시적인 지각의 변동으로 나무가 지층을 뚫고 화석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변동이란 홍수를 뜻한다고 한다.
    북부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는 약 5백 만마리의 맘모스 시체가 매장돼 있다고 한다.
    이들 맘모스가 짧은 순간에 파묻혔다는 증거가 많이 있으나 특히 위와 입속에서 채 소화가 안된 녹색식물, 야생콩등이 발견된 점이 이를 증명 한다고 한다.

    일부 진화론자들은 이를 두고 먹이를 취하려다 강이나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고도 하지만 5백만마리가 한꺼번에 추락해싸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결국 맘모스의 떼가 대홍수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됐다고 생각하면 의문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미국 남다코라주 블랙힐즈에 있는 불가사리와 똑같다는 점에서 창조론을 뒷받침한다고 이야기 되어진다.
    즉 전혀 진화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홍수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창조가 입증되면 홍수도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학자들은 이를 자료로 사용한다.
    네브래스카의 화석지층에서 발견된 코뿔소 낙타 멧돼지등 9천여마리 동물들의 뼈 화석은 석회암 언덕에 길게 뻗쳐있어 분명히 물로 인해 묻히게 됐음을 입증한다고 한다.

    텍사스의 파룩시강에선 껍질을 닫은 상태인 조개와 보통의 경우 화석이 되기 힘든 벌게들의 화석이 발견됐다.
    어떻게 이런 생물들이 화석으로 됐을까?
    이것도 대홍수사건을 인정해야만 의문은 풀리게 될 것이란 주장을 기독학자들은 펼친다.
    대규모 홍수에 휩쓸린 침전물들이 덮쳐 급격히 화석화 됐다는 것이다.


    노아(창세기 9:1-29)

    전인류의 역사를 심판이란 기준에서 보면, 노아홍수를 중간으로, 창조에서 노아홍수까지, 그리고 노아홍수에서 세계 종말까지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만큼 노아홍수는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노아시대 이전까지의 죄악은 홍수로 심판하셨다면, 홍수 이후 시대의 죄악에 대해서는 최종 불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예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창조 세계는 죄악의 오염으로 인해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인의 후예들과는 달리 여호와 신앙을 보존, 확산하는 사명을 맡았던 셋 가계는 처음에는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성을 잃지 않고 계속 번성해 갔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셋 가계 내에서도 세속의 가치관에 동조하며, 죄악된 문명에 친숙해가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러한 불경건함이 셋의 후예들에게도 깊숙이 침투하여 마침내 그들마저 완전 동화되고 말았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하여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지적하였다(6:3).
    육체적 욕망과 가치관의 혼란에 젖은 인간들은 또한 절제의 능력을 지니지 못한 채 죄악을 가속화시켰으며, 끝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다.

    홍수 전의 세상을 성경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라고 묘사하였다(6:11).
    ‘패괴’라는 말은 썩었다는 뜻으로, 거역, 불순종, 방종 등 온갖 악으로 인해 악취가 나는 상태를 가리킨다.
    ‘강포’는 해치다, 빼앗다의 뜻으로, 살인, 약탈, 강간 등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도무지 진실과 정의가 발붙일 틈이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환경에 물들지 않은 고독한 의인 한 명을 발견하셨다. 그가 바로 노아였다.

    노아는 신앙적 측면에서는 ‘의인’이며, 인격에 있어서는 ‘당세에 완전한 자’였고, 그 생애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서 그 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인물이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기’(6:8)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아는 홍수에 의해 영적으로 정결케 된 땅에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어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노아의 행적을 통해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고, 교훈을 얻자.

    1. 죄악된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않은 의로운 성품

    의인이요 완전한 자
    - 당시대의 극심한 타락 상황 가운데서도 특별히 노아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경건했고, 도덕적 측면에서 순결했다는 의미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았다는 의미

    특이한 것은, 5장의 족보와 비교해 볼 때, 유달리 자녀를 낳은 나이가 늦다.
    보통 100세 전후인데 노아는 500세 된 후에 셈,함,야벳을 낳는다.
    -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노아의 경건생활이 당시의 풍조와 달리 늦은 결혼과 늦은 자녀출산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누가복음 7:26-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뿐만아니라, 방주 바깥으로 나온 노아가 먼저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세에는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교훈해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나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고, 정말 혼탁한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들림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2. 하나님의 방주 건조 명령에 순응한 순종의 성품 

    노아의 방주 건조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아직 비가 안오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에 따라 방탕하게 살아갈 때에도 오직 말씀에 따라 방주를 건조한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경험과 계산과 판단을 아무리 동원해도,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의 이해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한마디도 반항하거나 대꾸하지 않는다.

    (6:22)을 보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도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생각하여 하나님 말씀에 신실히 순종하여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3. 100년에 걸쳐 방주를 건조한 인내의 성품

    노아는 길이 약150m, 너비 25m, 높이 15m 가량의 거대한 배를 100년에 걸쳐 건조한다.
    말이 100년이지,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난을 감수했겠는가?
    얼마나 괴로운 순간이 많았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낙심하거나 의심없이 끈기있게 방주를 건조한다.

    100년을 방주를 만든 인내의 사람이니, 홍수가 났을 때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40일 동안의 집중적인 폭우, 해일, 범람, 노아 일가족이 방주 생활을 시작한 때로부터 정확히 370일이 지난 때에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었고, 그로부터 다시 57일이 지난 다음에야 땅을 밟게 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성숙한 기독교인은 잘 참아야 한다.
    끝까지 참아야 한다.
    나는 얼마나 잘 참고 견디는가?
    노아와 같은 인내의 사람이 되자.

    4. 포도주를 마시고 술취하여 벌거벗는 실수를 하는 인간적 허점을 가진 자 

    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산기슭을 개척하여 포도밭을 일군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 즉 셈, 함, 야벳이 있었다.
    어느날 함이 장막 안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벌거벗고 있었다.

    “눈꼴사납구만. 아니, 노인네가 망령이 났지. 술에 취했으면 취한거지 왜 옷은 다 벗고 저렇게 누워 있담.”

    밖으로 나온 함은 셈과 야벳에게 빈정거리며 아버지 흉을 보았다. “형제들, 아버지가 이젠 갈 데까지 간 것 같구만. 술주정에 옷가지 모두 벗고..... 동네 창피해서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

    노아는 자식들에게 술에 취해 추한 모습을 적잖게 보여준 것 같다. 작은 아들 함이 아버지를 조롱하고 비웃은 것을 감안하면, 노아는 자주 술주정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 뒷걸음쳐 들어가 옷을 입혀 드렸다. 사실 두 아들의 심정도 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함은 겉으로 흉을 보았고, 다른 둘은 마음 속에 묻어둔 것뿐이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한 술 더 떠 큰 실수를 저지른다. 자기를 흉보았던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리고 셈과 야벳은 축복한다.

    “아버지가 일하다가 한 잔 하고 실수 좀 했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녀? 네 형과 동생 발 뒤꿈치라도 닮아라. 이런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사실 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고통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술에 취해 자주 행패를 부리게 되면 가족 관계는 미움과 불신이 생겨 비뚤어지기 마련이다.
    술주정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노아처럼 벌거벗은 몸을 자식들에게 보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의인으로 칭송받은 노아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과거의 의연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비웃음을 사는 술주정뱅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 노망이 들었단 말인가?

    우리도 노아도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노아가 긴장감이 풀렸다고 생각도 되고, 혹시 시간이 흐르면서 교만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죄와 잘못을 저지르고 살지만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의인인 노아도 늘 한결같을 수는 없었다.
    인간이기에 때로는 흐트러지고 망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화도 불같이 내고 욕설도 서슴지 않는, 그런 보통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노아를 더 친근하게 느낀다.

    어떤 사람도 완전한 존재는 없다.
    완전을 향해 때로는 성공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가치판단은 다르다.
    부족한 면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노아. 그러나 믿음을 가졌던 노아.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보통사람’이었다.

    노아는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으나 노년에는 포도주를 먹고 술취함으로 벌거벗고 눕는 추태를 보였다.
    이것은 아무리 의로운 자라 할지라도 인간이기에 실수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깨어 근신하고 주의함으로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에녹의 삶은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다.


    에녹(Enoch) / 뜻 : 바친다

    셋의 계보 아담의 7대손에 해당.
    므두셀라의 아버지(창 5:18-24).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4).
    죽지 않고 승천했다(히 1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5:21-24에 짧게 기록된 에녹의 삶의 행적에서 동행의 비결과 내용을 헤아려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 많은 힌트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행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사할라크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무려 1,562번이나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뜻은 ‘걷다, 가다’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에는 ‘동행’이라는 특별한 의미나 개념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든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걷기’를 의미한다.
    뜻이 단순할수록 쓰임새는 오히려 다양하다.
    ‘할라크’라는 동사도 함께 쓰이는 동사나 목적어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1. 짐승과 피조 세계의 움직임

    가장 일반적인 의미가 사람의 걸어감(출 14:29 - “바다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을 뜻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짐승의 움직임, 물의 흐름과 소리의 확대를 포함하여 폭넓게 사용되었다. 

    뱀의 기어다님(창 3:14 - “배로 다니고”)
    여우들의 노님(애 5:18 -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배의 항해(창 7:18 - “방주가 물 위에 떠다녔으며”)
    물의 흐름(창 2:14 -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나팔소리의 커져감(출 19:19 -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이상의 몇 가지 대표적인 용례만 살펴봐도 ‘할라크’라는 동사는 사람의 걷는 동작뿐 아니라 짐승과 사물의 모든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운행되는 것까지 포함한다.

    뱀이나 여우가 움직이고 배가 물 위에 떠다니며 물이 흐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시 78:39)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호 6:4), 비가 내리고 “그치는”(아 2:11) 것들도 모두 동사 ‘할라크’가 쓰였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처음 창조한 창조의 모습대로 움직이며 동행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심으로 동행하길 원하는 대상은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이다.

    2. 하나님의 ‘오심’과 사람의 ‘패역’

    ‘할라크’라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찾아오시는 것을 나타내는 경우에 많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삼하 7:23)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시 80: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출 33:14)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출 13:21)
    “내가 네 앞서 가서”(사 45:2).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바람을 뿌리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릇된 길로 가고 말았다.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달려나가 맞이하는 동행의 삶을 살지 않은 것이다.
    거짓 신들을 좇아갔고(렘 5:23 -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대로 행하였다(렘 7:24 -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렘 11:8 -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사 9:2)이라 표현하였다.
    모두 ‘할라크’라는 동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패역한 삶의 행적을 묘사하고 있다.

    3.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

    패역한 세상, 하나님의 ‘오심’을 뿌리치고 제 갈길로 갔던 사람들 틈에 에녹과 노아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창 5:24, 6:9).
    에녹과 노아의 ‘동행’은 히브리어 ‘할라크’의 재귀동사(히트파엘형) 이트할레크가 쓰였다.

    1,562회의 ‘할라크’ 동사의 쓰임 중 재귀동사인 히트파엘형으로 쓰인 것은 60회인데, 이 중에서 ‘동행’으로 번역된 것은 에녹과 노아의 경우(창 5:22, 24, 6:9) 단 세 번뿐이다.

    나머지는 ‘할라크’ 동사의 기본 의미인 ‘걷다, 가다’와 연관된 의미들이다.

    “거니시는”(창 3:8)
    “행하다”(창 13:17, 신 23:15, 17:1, 레 26:12, 삼상 2:30, 2:35)
    “섬기는”(창 24:40, 48:15)
    “두루 다니며”(수 18:4, 8, 대상 21:4, 슥 1:11)
    “출입하느니라”(삼상 12:2)
    “왕래하다”(삼상 30:31, 에 2:11)
    “거닐다가”(삼하 11:2)
    “유리하였도다”(시 105:13)
    “횡행하는도다”(시 12:9)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2:2)
    “급히 흐르는”(시 58:8)

    이처럼 ‘할라크’ 동사는 함께 쓰인 동사나 대상에 따라 ‘동행’의 의미를 갖게 된다.
    에녹과 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반드시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동반자인 부부가 동행하기로 작정한 것도 마음이 맞아서다.
    그런 부부일지라도 마음이 틀어지면 결국 갈라져서 동행의 삶이 끝나게 된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동행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순종하려 애쓰는 삶이다.
    하나님 또한 에녹과 노아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그들의 삶에 지팡이가 되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4. 마음을 나누는 동행

    예수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 11:17) 세대를 한탄하며 책망하셨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한 질책이었다.
    이 비유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동행의 삶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남의 기쁨을 질시하고, 남의 슬픔을 조롱하거나 비웃는 경향이 많다.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며 축하해 줄 때 상대방은 나를 진정한 동반자로 여기게 마련이다.
    남의 슬픔을 같이 슬퍼하며 애통해 할 때 상대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인생을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겪는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공유했다.
    하나님 또한 여느 피조물보다 사람과 함께 동행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할라크’) 완전하라”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에 쓰인 ‘할라크’ 동사를 에녹과 노아의 경우에 대입하면 “너는 나와 동행하여 완전한 삶을 살아라”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에녹과 노아처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동행’하기를 원하셨고, 명령하신 것이다.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축복을 받았듯, 오늘 우리 또한 이들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구원의 축복에 동참하는 역사가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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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매주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자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앙과 은혜를 더하여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제1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1일 - 7일)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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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2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주와 동행 365
    성경 /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도입 이야기
    오래 전 울산 목사회 총무로 섬길 때 어느 여름에 목회자 하계 수양회로 모였습니다.
    울산지역을 벗어나 경남 마산 지역에 돝섬이란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행 중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식사 때가 되면 밥만 먹고 잘 때가 되면 잠만 자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저 사람과 다니면 재미가 없어, 같이 다니면 말도 하고 웃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해야지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행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재미가 있습니까?
    어떤 재미를 즐기고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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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 1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새로운 피조물
    성경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2022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게 지내왔습니다.
    감사합니까?
    감사를 표현하셨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표현할 줄 아는 것으로 증거합니다.
    이전에는 감사하다는 것을 돈이 필요 없는 립 서비스(Lip Service)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감사를 물질로 표현합니다.
    2023년 매주일 예배 때마다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앙생활의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제 경우를 소개합니다.
    저는 매주일 감사예물을 20불씩 합니다.
    이 감사는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를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명목으로 감사예물을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변화
    둘째는 물질의 변화
    셋째는 습관의 변화

    첫째, 언어의 변화(言語의 變化) Change of Language

    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원래 언어는 오직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그러나 죄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할 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므로 의사소통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1:6-7,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화점과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걸은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사용합니다.
    이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무를 볼 때 누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 "올라갑니다" 또는 "내려갑니다" 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통화중"이라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볼 때 누가 그 문을 두드리면 무엇이라고 반응할까요?
    예, '통화중' 이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주위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
    둘째는 시위를 떠난 화살
    셋째는 입에서 나온 언어(말)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세상이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한 말과 언어의 남발, 아첨과 중상모략,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들로도 점차 오염되고 병들고 있다.
    매스컴과 같은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지는 언어의 왜곡과 조작이 병리학적인 인간화를 조장한다.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노출시킨다.
    먼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하려는 사람의 인격과 대인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언젠가 말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훈련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말과 행실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인정과 포용의 말, 희망과 용기의 말, 지혜의 말, 친절과 동정의 말, 감사의 말, 격려와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믿음의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며 나의 인격과 같다.
    따라서 성경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성경적 언어는 성경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다.

    둘째, 물질의 변화(物質의 變化) Change in Money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이유는 도적이 있기 때문이며, 종이 돈은 좀이 먹고 구리돈은 동록이 쓸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랍비와 신부와 목사가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헌금을 어떻게 하는가?
    랍비는 돈을 모두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의 것은 하늘로 올라가고 내 것은 땅으로 쏟아지라고 합답니다.
    그러자 신부는 땅에 금을 긋고 그곳으로 돈을 던지면서 저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몫 이쪽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원을 그리고 그곳으로 돈을 던진 후에 원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몫 원밖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드린다는 믿음입니다.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바쳐서 감사해야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바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살펴봅니다.

    대인관계의 원리(마 6:2-4) : 구제
    대신관계의 원리(마 6:5-15) : 기도
    대아관계의 원리(마 6:16-18) : 금식
    대물관계의 원리(마 6:19-32) : 보물(물질)

    결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물질관의 대표적인 인물을 욥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4천 년 전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생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해서 양이 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급작스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들 딸, 열 명이 맏이 집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도떼가 급습해서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종들을 죽이고 모든 가축을 강탈해 갔습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로 욥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연자실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여러분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은 욥과 같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부자로 등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적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파탄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재산을 다 잃었으니 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잃은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자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사람들과 욥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무이자로 돈을 천만 원 빌려주어서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빌린 돈을 돌려주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까요?
    돌려주는 것이 아까울까요?
    좀 아쉽기는 해도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욥은 그가 살던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재산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 때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명예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상속 재산을 분배하는 일로 분쟁이 생기면 랍비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랍비처럼 생각하고 찾아왔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속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갖고 적게 갖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사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잠든 부자는 이튿날 아침,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2:21).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심지어 그는 자기가 생명의 주관자라도 되는 양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부자처럼 많은 재물이 자기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줄 알고 돈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언젠가 이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욥과 같이 생명과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습관의 변화(習慣의 變化) Change in Habits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이란 자주 반복된 삶의 행동이 굳게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사랑한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부분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닮습니다.
    말하는 것, 입는 것, 분위기까지 닮아갑니다.
    예수님의 습관을 닮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빛나게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자녀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길들여진 버릇 하나, 습관 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선배들의 경우 하나님을 향한 자신만의 거룩한 습관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했고, 고비가 많았지만
    그만큼 그의 찬양도 시편을 가득 매울 만큼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그는 복음 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도, 이방민족의 위협 앞에서도, 모진 고문과 굶주림 속에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편지로 작성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습관은 새벽 미명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외진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는 모습 등 각각의 습관들을 통해 우리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바로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2023년 신년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경적인 생각으로 다듬어서 이전보다 보람있는 인생,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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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자료 / 10-03-2022(월) 오늘의 묵상을 중심으로 새벽 기도회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냐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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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월 8일(주일) 주님의 수세주일   

    2023년 제2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8일 - 14일)

    창세기 20장 - 창세기 35장          
    마태복음 6:19 - 10:1-20

    제목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성경 /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교회력에 따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구원을 위한 성결 예식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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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 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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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고 자료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인침입니다.
    이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 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몇 가지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1.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의 출발을 다짐하고 공표하는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회개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죄에 대한 씻음으로 물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을 상징하며 그 보혈로 죄 씻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3.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의 역사로서 변화된 새로운 생을 출발하게 됨을 의미 합니다.

    4. 세례에 임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하나 되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가지며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수행에 책임이 부여 됩니다.

    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변환기적이며 소개적인 세례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세례 기준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세례에서 찾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마 28;19-20).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나. 세례의 방법 

    침례회가 침례를 주장하는 근거는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하게 물속에 잠기는 것과 물속에서 나오는 것의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합니다(마 3:16, 행 8:38-39)

    레위기 11: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죽음이 병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 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레위기 15:13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로마서 6:3-5 골로새서 2:11-12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지 세례의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 침례를 강조한 내용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정결 의식은 뿌리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레 14:4-7, 16, 49-53, 16:19, 민 8:5-7, 19:18-19)

    고린도전서 10:1-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니엘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민수기 19: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 질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 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너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침수(침례) 라고 주장하기보다 뿌리는 세례를 뜻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도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사도행전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 니라.

    성경의 세례 방법은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리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과 성결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 언약을 후손 대대에 지킬 하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에 참여한 사람 : 아브람, 이스마엘, 집에서 난자, 돈으로 사온 이방인, 아브람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친자, 서자, 남의 자식은 관계가 없음)

    할례의 시기 : 칭의의 후입니다.
    바울은 이 순서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로마서 4:9-11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 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단 홍해바다 도강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 도당이 출애굽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례가 구원보다 앞 설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 씻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요한의 세례 

    “칼 헨리” 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적인 것에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요건에 관련된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성은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조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마태복음 3:13-15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도행전 18:25
    그가(아볼로)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누가복음 7: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마 3:5),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이 세례를 통하여 인가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4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하여 해석하셨을 뿐 아니라 승인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마가복음 16:15-16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들의 세례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린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말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행 2:37-38)
    성령의 은사가 동반된 회개의 세례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린도전서 1:14-17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니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유아 세례

    세례는 신앙고백을 통한 확증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말도 잘 못하는 유아들이 어떻게 신앙할 고백할 수 있으며 믿음의 확증을 알 길이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찬반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면서 난지 8일만에 행한 것은 언약적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확실한 명령이 없으며 또 유아세레를 시행한 사례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할레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에 대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교제이고 축복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창세기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할례는 신앙에 의한 표시이며 그 신앙의 확증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등하게 적용되며 할례와 세례는 언약관계 외에 성결과 확증으로 효력과 입회의 조건도 동등할 것입니다. 할례를 유아에게도 주어졌다면 세례도 유아에게 적용되어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하고자하더니

    누가복음 2: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에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눅 18;16).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유아세례의 대상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표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자격과 조건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유아의 계약관계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되 한편 부모만 믿어도 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문답할 때 유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자녀의 하나님도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되도록 부모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서약이요 하나님께 유아를 바치는 봉헌이며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임하는 언약과 구원적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의 효력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유아세례의 효력도 성인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성령의 중생함에 의하여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됨을 표시하므로 유아세례는 장년세례와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Long Island 연합감리교회 자료 제공

    성경 The Bible

    1. 성경은 모두 몇 권으로 되어 있습니까?
    How many books does the Bible have?
    A: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Old Testament has 39 books and New Testament has 27.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A: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하는 가르침이란 것을 의미합니다.It means that we must learn and follow the instructions of the Bible in our life.

    3.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What does the Bible teach us?
    A: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죄, 구원, 삶의 원리, 그리고 영생과 죽음 등을 가르칩니다.
    It teaches: God, Jesus Christ, human being, sin, salvation, principle of life, and life after death.

    4. 복음의 중심내용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major theme of the Gospel?
    A: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It is the love of God toward humankind which is revealed through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5. 십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ten commandments (Ex 20: 1-17; Deut 5: 6-21).
    A: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First,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말든지 말며, 그것들에 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Second,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below.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셋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Third,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
    Fourth,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Fifth,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여섯째, 살인하지 말지니라.
    Sixth, You shall not murder.

    일곱째, 간음하지 말지니라.
    Seventh,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Eighth, You shall not steal.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Ninth,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Tenth,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6. 가장 큰 두 계명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Matthew 22: 37-40)
    A: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라.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Fir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Seco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7. 주기도문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Lord’s Prayer (Matthew 6: 9-13).

    A: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
    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Our Father, Who are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8. 성경을 매일 읽습니까? 하루에 몇 장을 읽습니까?
    Do you read the Bible everyday? How many chapters do you read daily?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most favorite words in the Bible.
    A:

    9.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까?
    Will you try to learn and follow the teachings of the Bible in your life?
    A: 예, 노력하겠습니다. Yes, I will.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1. 성경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Who does the Bible say Jesus is? (Matt 16: 16; Phil 2: 6)
    A: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He is not only the Son of the living God but also the eternal God manifested in a human body.

    2.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How was Jesus born? (Matt 1: 18, 25)
    A: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He was born in a virgin’s body,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3.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Why did Jesus come into this world? (Matt 1: 21)
    A: 죄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He came into this world to save people from their sin.

    4.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What did Jesus do to save humankind?
    A: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He died on the cross bearing all the sins of humans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What happens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om 4: 255:10)
    A: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됨으로써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All humans can be forgiven and righteous through thei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ey can have the fellowship with the holy and almighty God.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당신과 관계가 있습니까?
    Is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elated to you?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How is it related to you?
    A: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자비 속에서 사는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Jesus Christ died for my sins and he was raised for my new life
    in the merciful God.

    7.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Who is Jesus to you?
    A: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He is my savior and my Lord.

    8. 부활 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What happened to Jesus Christ after his resurrection?
    (1 Cor 15: 5-8; Luke 24:51)
    A: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 가셨습니다.
    He has appeared to his disciples for forty days and was taken up
    to the right hand of God in heavens.

    9.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What is Jesus Christ doing now? (1 John 2: 1)
    A: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He prays for all his believers and works among them through the Holy Spirit.

    10.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Jesus Christ will come again on the last day? (Matt 24: 29-31; John 5: 27-29; 1 Thess 4: 16-7)
    A: 모든 죄와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완성하실 겁니다.
    By judging the sin and evil, Jesus Christ will accomplish the whole redemptive plan of God toward all humans.

    구원 Salvation

    1.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alvation?
    A: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변화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This means the whole process of transformation in which we are freed from sin and our relationship with God is recovered and we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2. 죄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in?
    A: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This is that we disobey the words of God by placing not God but ourselves in the center of our life.

    3. 죄로부터의 자유는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Why is our freedom from the sin so important?
    A: 가장 복되고 의미있는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는데, 이 올바른 관계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most blessed and meaningful life depends on our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at we place God in the middle of our life and obey the words of God.

    4.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How can we be freed from the sin?
    A: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란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We can be freed from the sin by confessing that we are sinners and believing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5.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we believe,”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John 1: 12; II Cor 5: 14-19)
    A: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영원히 용서를 받았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It indicates that we receive the truth that all our sins are forgiven forever by means of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and we are new creations that Jesus Christ rules and leads.

    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How can you explain the new life in Jesus Christ?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죄를 극복하고 매일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Through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believers overcome sins and are daily recreated to b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7.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어가는 구원의 과정을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process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성화라고 합니다. Sanctification.

    8.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단계를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final phase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finally becom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영화라고 합니다. Glorification.

    9. 이 전 구원의 과정이 완성하는데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the most to accomplish their salvation?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0.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What can you do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A: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을 통해 가능합니다.
    I can pray and read the Bible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들을 하시겠습니까?
    Will you pray and read the Bible to walk in the deep fellowhip with God? A: 예. Yes, I will.

    교회 Church

    1. 교회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urch? (1Cor 12:27; Eph 1: 23)
    A: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성도들은 이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believers who serve Jesus Christ as the Lord. In the Bible, this community is also described as the body of Christ, where Jesus Christ is its head and his believers are its parts.

    2.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urch?
    A: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The Church participates in the divine work that God saves people from sin and evil.

    3.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하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important things that the Church must do in order to accomplish its purpose?
    (Rom 12: 1-2; Matt 28: 18-20; Act 1: 8; Act 2: 44-47; 1 Pet 4: 7-11; 1 John 1:3-4)
    A: 예배, 교육, 선교, 교제, 그리고 봉사입니다.
    Worship, Education, Mission, Fellowship, and Service.

    4. 예배란 무엇입니까? (Ps 29: 1-2, 66: 1-4, 145:1-2)
    What are the worship?
    A: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It is praising, honoring, and exalting God.

    5.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 (성례)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sacraments that Jesus Christ commanded the Church to do? (Matt 28:19; Luke 22: 14-20)
    A: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6. 세례는 무엇입니까?
    What is the Baptism? (Rom 6: 3-5; 1Cor 12: 13; Gal 3: 26-28)
    A: 세례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새 삶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Baptism is a ceremony that represents the death of our old self
    and the birth of our new life.

    7.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 the bread and the wine represent? (Luke 22: 19-20)
    A: 떡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찟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고 포도주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The bread represents Christ’s body which was broken, and the wine symbolizes Christ’s blood which was shed for the forgiveness of our sins.

    8. 성찬식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됩니까?
    What is required of partaking worthily of the Lord’s supper? (1Cor 11: 27-29)
    A: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세례 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가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순종에
    관해 자신들을 살펴야 합니다.
    Before partaking of the Lord’s supper, The baptized believers are
    required to examine themselves of their faith and knowledge to
    discern the Lord’s body,
    and of their repentance, love and obedience.

    9. 기도는 무엇입니까?
    What is prayer? (John 15:16)
    A: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청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Prayer is a conversation with God by which believers listen to His word
    and offer their own desires unto Him in the name of Jesus Christ.

    10.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What day is the Lord’s day (Sunday)? (Acts 20:7)
    A: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This is the day when believers gather and worship God in a church through celebrating the resurrection of Christ because Jesus Christ was raised on Sunday.

    11. 헌금(십일조)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importance of offering(Tithe)?
    A: 헌금(십일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로서, 드려진 헌금(십일조)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는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The offering is our confession that everything which we have originally belongs to God, not us. And through offering churches can do many good works to reveal
    the mercy and glory of God.

    그리스도인의 삶 The Christian Life

    1.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A: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praise and enjoy God forever.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How may we glorify God? (Matt 5: 13-16)
    A: 우리 안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한 행위들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We glorify God by demonstrating our good deeds which God creates in us.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야 하는 선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good deeds that Christians must demonstrate to the world?
    A: 두 가지 계명, 곧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Theses deeds mean that Christians perform the two commandments:
    (1)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2)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 예수님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재차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How did Jesus explain about the two commandments? (John 13: 34-35)
    A: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5. 남편과 아내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결혼의 경우)
    What does the Bible teach to you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a husband and a wife? (If married) (Eph 5:22-33)
    A: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들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모든 것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Husbands ought to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Wives ought to submit to their husbands in everything.

    6. 부모와 자녀들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Eph 6: 1-4)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과 기도 속에서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Parents must not exasperate their children but bring them up in the instruction of the Lord and prayer. Children must obey their parents in the Lord.

    7.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with their country? (Rom 13: 1-7; 1Peter 2: 13-16)
    A: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들을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은 주님께 달려 있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Christians must do all of their duties to the country in the Lord,
    and pray for it because its prosperity depends on God.

    8.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think of their job?
    (2 Thes 3: 8-12; 1 Tim 4: 4-5)
    A: 직업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They should consider it as holy and work sincerely to reveal the glory of God.

    9. 성경은 물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money? (Deut 8: 11-20; Acts 4: 32-35)
    A: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물질을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물질을 버는 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물질을 관리해야 합니다.
    Believers must remember that they do not get money by themselves but with the help of God. Unless God is with them, they cannot do anything including earning money by themselves. And they must remind themselves that they are stewards to God, Therefore, they must manage money according to the good will of God who is the real lord over money.

    10. 세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do for the world?
    (John 17: 22-26; Eph 1: 22-23)
    A: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으로써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세상에 평화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By showing the divine love, they should make an effort that the world is united in Christ Jesus and peace is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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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는가?
    신명기 3:23-27

    출애굽기 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민수기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Take the staff, and you and your brother Aaron gather the assembly together. Speak to that rock before their eyes and it will pour out its water. You will bring water out of the rock for the community so they and their livestock can drink."

    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and drank the same spiritual drink; for they drank from the spiritual rock that accompanied them, and that rock was Christ.

    그동안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첫째는 모세의 혈기 때문(민수기 20:12)

    반석을 두 번 쳤다.

    둘째는 율법의 대표(요한복음 1:17)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율법은 모세


    셋째는 모세의 희생의 기도(출애굽기 32:32)

    내 이름을 주의 책에서 지워버려 주옵소서.

    제가 소개하려는 것은 반석의 의미에서 찾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치라는 히브리 단어는 "나카(nâkâh. נָכָה)"라고 합니다.

    נָכָה 5221

    1. 치다,  2. 니팔형 : 매맞은 3. 피엘형 :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관련 성경 / 맞아 죽다(삼하 11:15), 상하다(창 37:21, 출 9:31), 치다(창3 2:8, 대상 18:9, 말 4:6), 죽이다(창 34:30, 신 19:6), 때리다(민22:28, 신 25:3), 쳐죽이다(민 35:16), 찔러 넣다(삼상2:14), 살육하다(수 10:20, 삼상 14:14), 맞다(왕하 8:29, 대하 22:6), 패하다(렘 46:2), 공격을 받다(렘49:28), 멸하다(창8:21), 쳐부수다(창14:17),채찍질하다(민22:23,25), 녹이다(삿20:31), 취하다(렘40:14), 격파하다(수11:8), 죽임을 당하다(민25:14, 삼상4:2), 이기다(삼상17:50), 박다(삼상18:11, 19:10), 찔리다(삼상24:5, 26:8), 찌르다(삼하2:23, 4:6), 자책하다(삼하24:10), 쏘다(왕하9:24, 대하18:33), 박수하다(왕하11:12), 쬐다(욘4:8), 살인하다(민35:11,15, 사66:3), 암살하다(신27:24), (실수로)죽이다(수20:3), 함락되다(겔33:21, 40 : 1),내어주다(렘18:21). [명] 죽임(창4:15), 태형(신25:2), 상처(슥13:6).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나카는 "살해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반석을 친다는 것은 "반석을 죽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반석을 신령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반석을 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사건을 이루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의 사건은 단 일회적인 사건으로 충분합니다.
    반석을 명하라고 하신 것은 이제부터는 구원은 선포해야 할 명령입니다.

    민수기 20장 8절에서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명령이란 히브리 단어는 "다바르( dâbar. דָּבַר)" 라고 합니다.

    דָּבַר  1696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관련 성경 / 말씀하다(대상 17:17, 시 51:4, 사 1:2), 명령하다(삿1:20), 이르다(창16:13, 신5:31, 겔37:21), 안위하다(에10:3), 명하다(욘3:2), 말하다(욥33:2, 미7:3), 진술하다(창24:33). 허락하다(창28:15, 출12:25), 고하다(신20:2, 겔2:7), 기도하다(민 21:7), 선포하다(신1:1, 렘35:17,36:31), 강론하다(신 6:7, 11:19), 언약하다(신 23:23), 확언하다(신 26:18), 대답하다(왕상 2:30, 창34:13), 전하다(왕하 1:17, 20:19), 고발하다(에 7:9), 아뢰다(삼하 22:1), 베풀다(렘 1:16), 선언하다(렘11:17, 22:1, 25:13), 비방하다(민12:8), 여쭙다(삼하14:15), 구하다(왕하4:13, 삿8:8), 이야기하다(출 33:11, 욥 41:3), 공포하다(레 23:44), 담화하다(삼상 9:25), 쟁론하다(왕상 3:22), 위로하다(대하 30:22), 질문하다(렘 12:1), 권하다(대하 33:18), 복종하게 하다(시 18:47, 47:3). [명] 말(민 27:7, 삼하 13:36, 사 65:24), 말씀(민 36:5, 수 24:27, 욥 11:5), 명령(창 44:2).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일회적인 구원의 사건을 다시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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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15-2023 / 주현 후 제 2주(녹색)
    설교자 : 이승혁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라(요한복음 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3.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without him nothing was made that has been made.


    지난 12월 30일 어느 목회자로부터 카톡을 받았습니다.

    술주정뱅이는 예배방해자이므로 성전안에서 내보냈습니다. 이건 문제가 되는가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를 내쫒으라. 도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제가 이렇게 회신을 했습니다.

    내쫓는 은혜 보다
    그 사람이 교회로 들어왔으니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더 큰 은혜는 어떨까요?

    주와 동행 365를 실현하려면
    말씀으로 동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술주정배이를 교회에서 내쫓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불러 이방인의 전도자로 세우셨던 주님의 가르침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말씀으로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래 전에 처음 목회지에서 교회 바로 앞에 거주하는 김씨가(김장엽) 예배 시간에 술에 취하여 쌀을 한자루 들고 들어와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목사 양반 우리 아들 취직 좀 시켜 주소!
    마침 설교를 시작한 때인지라 뒤에서 안내를 하던 남자 집사님께서 그 분을 조용히 모시고 나가셨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 집을 방문하여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취직을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고 일러주고 정말 아들을 취직 시키려면 아버지가 먼저 올바른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도입 이야기 /
    희랍의 설화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
    '내가 막아버렸지.........'

    어느 마을에 평생토록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내가 막어버렸지!"
    "내가 막아버렸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그 나라의 어진 왕이 그 가게 앞을 지나다가 할아버지가 웅얼거리는 말을 듣고 "왜 매일 '내가 막아버렸지!' 이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임금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임금님은 그날 저녁 신하를 불러 할아버지에게 궁궐에서 만든 맛 있는 빵을 접시에 담아 보내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궁궐에서 임금님이 먹는 빵을 받은 할아버지가 그 빵의 숫자를 살펴보더니 이 정도의 빵으로는 한끼 분량밖에 안 되는구나 하며 얼른 빵집으로 달려가서 "오늘 저녁 임금님께서 이 빵을 보냈는데 우리 식구 수가 많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빵을 드릴테니 빵을 얼마나 주시겠소!"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빵집 주인은 도대체 임금님은 궁궐에서 빵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아 밀가루 포대 만드는 할아버지에게 하루 치 분량의 빵을 주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얼른 임금님이 보낸 빵을 주고 모든 가족들이 하루동안 배 부르게 먹을 빵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며 매우 흐뭇해 했습니다.
    며칠 후 포대를 만드는 가게 앞을 지나게 된 임금님은 할아버지가 여전히 '내가 막아버렸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참 이상하구나! 지난 번 보낸 빵으로 부족한가?' 하며 이번에는 궁궐에서 임금님이 즐겨 먹는 칠면조 한 마리를 요리하여 보냈습니다.
    포대 만드는 할아버지는 궁궐에서 보낸 칠면조를 받은 후에 고기도 매일 먹던 사람이 먹어야 소화가 잘 되는데 차라리 이 칠면조를 고기 집에 가서 다른 것과 바꾸기로 하고 칠면조 요리를 주고 거의 일주일을 먹을 수 있는 빵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은 빵을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며 아주 좋아했습니다.
    얼마 후 임금님이 그 할아버지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아직도 똑같은 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어진 임금님은 이번에는 신하에게 날이 어두워 질 무렵 포대 만드는 사람이 집으로 돌이가려면 반드시 작은 다리를 건너가야 하므로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할아버지가 건너가는 다리 위에 놓아두라고 분부했습니다.
    드디어 포대 만드는 할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다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수 십년 동안 이 다리를 건너다녔는데 오늘은 아예 눈을 감고 건너보자 하며 두 눈을 꼭 감고 다리를 건너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신하는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들고 임금님에게 자초지종을 다 아뢰었습니다.
    신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임금님은 하는 수 없구나!
    그 사람은 평생을 어렵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야 하며 안타까워 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꿈을 꾸었는데 어느 넓고 넓은 들판에 수 많은 샘물이 솟아나는데 샘물마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샘물에서는 물이 솟구치도록 솟아나고 어떤 샘물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자기 샘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솟구치지 못하고 졸졸 흐르고 있기에 주위를 살펴보니 긴 장대가 있어 그 장대를 갖고 샘물 구멍에 넣고는 마구 휘저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흙탕물 같은 물이 솟구치더니 잠시 후에는 그나마 물이 나오는지 마는지 물기만 있는 샘이 되었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참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보냈던 빵과 칠면조 요리와 금화자루를 모두 포대 만드는 사람이 막아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포대만드는 사람은 평생토록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중얼거리며 지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떤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놀라운 경험을 하며 인생의 역전 드라마와 같은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행복하게 즐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떤 교인은 늘 듣는 그 말씀에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2023년 주와 동행 365라는 표어에 따라 능력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갖도록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 나만이 갖는 기쁨과 은총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은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1년 52주에 최소한 52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10년이면 520번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많은 설교 중에서 나를 감동시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암송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초식 동물들 중에 되새김질을 하는 대표적인 가축은 '소'라고 하겠습니다.
    낮 동안에 들판에 소를 풀어 놓으면 하루 종일 소는 풀을 뜯어 먹습니다.
    해가 질 무렵 외양간에 소를 데려오면 그때부터 소는 되새김질을 시작합니다.
    소는 위가 4개라고 합니다.

      4

    첫번째 위 : 혹위(양)                

    양 또는 양곱창이라고 하며, 소의 위 중에서 꽤 비싼 부위 중 하나이며,                
    소가 음식물을 먹으면 제일 먼저 음식물이 저장되는 공간이란다.                
    되새김질 할때 여기서 음식물을 가져와 되세김질 하며 4개의 위중 가장 크다.

    두번째 위 : 벌집위(그물위)               

    순대처럼 기다란 모양인데 곱창집에서 흔히 볼 수 없으며,               
    내장탕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세번째 위 : 겹주름위               

    세번째 위로서 흔히 처녑이라고 한다.        
    기능은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역할을 수행한다.               
    기름에 찍어 생으로도 먹는다.

    네번째 위 : 주름위               

    막창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막창하면 왠지 소장 또는 대장 쯤으로 연상하기 쉬우나,               
    소의 마지막 위(4개중 4번째니깐 마지막이죠) 여서 막창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바로 위산이 분비되며 소화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위 위를 사람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앞의 2개는 위의 기능이라기 보다는 저장공간이며
    뒤의 2개가 사람의 위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묵상(메디켈루스, Medikelus) 默想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그 안에 있는 빛으로 인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실까요?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옛적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경험했습니다.
    어떤 이는 불로, 어떤 이는 바람과 지진으로, 또 어떤 이는 술취함으로 경험했습니다.
    또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바 되었습니다(요일 1:1).

    이제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경험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와서 말씀을 증거하시며, 경험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이 직접 우리의 영과 육체와 인격과 삶에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경험되어야 할까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요한복음 19:4~6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e Man, Ecce Homo)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상황을 목격하더라도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듣고, 보고, 느끼고,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입니다.
    이런 심리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머리에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총독 관정 발코니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이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 “Ecce Homo!”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화가가 “Ecce Homo”를 주제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중에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가 그린 “Ecce Homo”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똑같은 그림을 두 장을 그렸는데 하나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훗날 많은 사람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정신병이 들어 바젤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Ecce Homo”를 주제로 자서전을 썼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듣는 순간에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처럼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똑같이 보고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왕관 대신 가시나무로 만든 가시관을 쓰시고, 그 가시에 찔려 얼굴에 피가 흐르는 모습에서 첫째는 우리 죄를 위해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신 예수님, 둘째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모진 고난 앞에서도 잠잠하신 예수님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묵묵히 고난의 잔을 마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빌라도(요 19:1~5)

    첫째,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대제사장 가야바는 새벽에 예수님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총독 관정으로 끌고 가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특별 사면해 주는 관례를 따라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보다 강도인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외쳤습니다(요 18:38하~40). 이에 빌라도가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도록 하였습니다(요 19:1)

    로마 시대의 채찍은 여섯 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는데 끈 하나하나에 납덩이나 뼈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채찍질할 때는 옷을 벗기고 사람을 틀 위에 묶어 놓고 건장하고 억센 군인이 등에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 채찍질이 너무 아프고 포악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채찍질은 사람을 죽이는 시해 행위다”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십자가형과 채찍질을 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로마인에게는 채찍 40대, 유대인에게는 특별히 채찍 120대를 때리도록 했습니다.

    로마 군인은 예수님에게 채찍으로 120대를 때렸습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예수님의 등을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등에는 깊은 상처가 패이고 피가 온 등을 적셔 흘러내렸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무지막스럽게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에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리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렸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고(마 27:30), 마가복음에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했다고 했습니다(막 15:19).

    로마는 힘으로 전 세계를 평정했습니다. 그런데 힘없고 나약한 예수님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가, 조롱하고 침 뱉고 멸시한 것입니다. 시편은 조롱받는 예수님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부자가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주님과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무엇이 되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힘으로 세계를 제패한 로마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조롱과 침 뱉음과 멸시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겸손이 교만을 이기고, 순종이 힘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함과 겸손과 순종으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 관저에서 예수님을 왕의 모습으로 분장시킨 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러면 왕관을 써야지?”하면서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이라면 왕의 옷을 입어야지?”하면서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이라면 이것을 들어야지?”하면서 갈대를 손에 쥐어 주며, “야, 이렇게 차리니 정말 왕 같은데? 유대인의 왕 만세!”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모욕하고 심문했지만 아무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총독 관저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나는 그를 아무리 심문해도 죄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너희에게 알리고자 밖으로 그를 끌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빌라도에게 끌려 나온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었고, 자색 옷이 입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눈을 감고 조용히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예수님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하였고, 자색 옷이 입혀 있는 모습으로 모욕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을 한번 바라봅시다.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얼굴에 피가 흐르며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영국의 프란시스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독일 유학 중에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그림을 보는 순간에 크게 은혜를 받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 찬송가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내 너를 위하여”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새찬송가 311장)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 또한 19세 때 뷔르츠부르크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그림을 보는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감동했습니다.

    그는 그림 앞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씨가 보였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글씨와 음성에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을 위해 어떤 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주님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고향 독일 드레스덴(Dresden)으로 돌아가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성경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백작으로서 일생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Moravian Brethren)를 만들어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세기 초 교회는 세계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안 형제회는 1732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0년 동안에 세계 14개국에 3,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잠자던 선교를 깨웠습니다. 한국의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도 모라비안 형제회 출신입니다. 그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 1832년 7월 25일에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황해도와 충청남도 서산 보령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고 최초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을 시도했고, 감자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뮐러(Georg Muller)를 회심시켜 영국으로 보낸 것도 모라비안 형제회였고,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회심에 영향을 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1729년, 미국 선교를 위해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평화롭게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웨슬리는 그들에게서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고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로 회심한 하버갈과 진젠도로프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고, 자색 옷이 입혀진 예수님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시고 빌라도의 공관 발코니에 서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으셨다. 예수님이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예수님이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예수님이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조롱받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시고 갈대를 쥐고 계시지만, 이제 장차 우리는 조롱의 자색 옷 대신 빛나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 가시로 만든 관 대신에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 갈대 지팡이 대신에 우주를 통치하실 홀을 들고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침묵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호사를 앞세워 무죄를 주장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자 변명합니다. 파렴치한 죄를 범한 사람일수록 살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변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로마 군인들의 수치와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말씀만 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진리는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온갖 수치과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두 가지인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기도 제목, 하나님께 청구하는 청구서가 잘못되었다는 응답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기다리라는 응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여 당신이 언제까지 침묵하고 계십니까?”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하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십니까? 왜 보고만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침묵하고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용서입니다.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준 빌라도(요 19:6~16)

    빌라도는 고문으로 죽음 상태에 이르게 된 예수님을 보여줌으로 유대인들의 동정을 사서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그의 아랫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요 19:6)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애를 믿고 유대인들과 타협하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너희가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의 법에 예수는 당연히 죽을 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합니다. 발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는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부터냐?”고 심문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을 해야 만이 대답이 아닙니다. 침묵은 무서운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내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데 왜 자기에게 호소하지 않는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했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물고 ‘당신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습니다’(요 19:12,15)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가이사에게 수없이 반역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이사의 충신인 양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내면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면 군중심리에 이끌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흔들리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없이 떠돌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을 내려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빌라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진리를 알지만, 진리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유대인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과 현실의 유익을 잃지 않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는 판결을 마친 후에 손을 씻으며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마 27:24).
    그럼에도 역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현실의 유익과 자신을 잃지 않고자 진리를 행치 않고 현실과 타협합니다.
    예수님을 믿다가도 조금 핍박을 받거나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미련 없이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좀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를 것 같으면 예수님과 교회를 등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버리고 현실의 유익을 좇아 사는 빌라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진리 편에 서서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현실의 유익을 좇을 때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용서와 기다림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 우리 삶의 장바구니

    “제 삶의 장바구니엔 하나님 나라가 부재했습니다.” … 이 말은 지난주일 ‘채찍질하더라 2’는 제목의 설교 가운데 제가 나눴던 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말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바구니’라는 실재의 개념 속에 실현되고 구체화됩니다.

    사복음서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예수님의 이적이 ‘오병이어’(마 14, 막 6, 눅 9, 요 6)입니다. 그런데, 그 이적이 굳이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도시락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도시락이야 말로 어린 아이에게 실재하는 장바구니요,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자기권리를 내려놓고, 자기 것을 나누는 그 속에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미가 자리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기편의 만을 추구하는 제국의 시스템 하에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오병이어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지자체와 정부의 재난지원금을 생각해 볼 때, 단순히 얼마만큼의 공돈을 받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이의 고백처럼, 이전에는 좀 더 싸고, 가성비 좋은 것을 찾아 다니다 보니, 물건값과 물건만 눈에 들어왔다면, 동네에서 재난지원금을 쓰다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이 보인다는 겁니다.

    경제적인 부분 뿐 아니라, 환경과 기후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채찍을 휘두름으로써 우리 또는 인간의 이익을 계속 극대화 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모두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더 늦기 전, 지금이라도 우리는 주변의 이웃들과 공존의 방향을 모색하고, 공생의 방법을 연습해 가야 합니다.


    지난주 월요일이었습니다. 매주 설교를 나누는 ‘설교와 목회’ 멤버들이 동기형이 목회하는 교회(합정동 다운교회 석정일 목사)에 모였습니다. 여러 나눈 이야기들도 유익했지만, 그 교회를 들어가면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습니다. 그 교회 현관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에 조그마한 유리냉장고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 냉장고 안에는 시원한 음료수들이 들어있고, 앞 면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택배기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더운 날씨에 편하게 꺼내드세요”



    2. 보라, 이 사람이로다


    오늘 본문으로 갑니다.

    흥분해 있던 유대인 무리를 진정시키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단순히 채찍질만 한 것이 아니라, 가시관을 만들어 머리 위에 눌러 씌웠습니다. 자색옷을 입혀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조롱하고 모멸했습니다. 한편으론 예수님을 구명하려는 듯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철저하게 정치적 계산에 의해 행동하는 빌라도는 영락없는 세속 정치인의 전형이었습니다.


    4절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고난을 가한 뒤 관정 밖에서 소리치는 유대인 무리에게로 다시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채찍질에 이미 온 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살점이 뜯겨져 간 예수님은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서는 것조차 버거운 예수님을 빌라도는 제사장 무리 앞에 세웠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말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던 빌라도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5절 후반절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매를 맞아 홀로 설 힘조차 없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은 한마디로 볼품없는 몰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외친 말이 “보라, 이 사람이로다”였습니다. 그 말 속엔 이런 의미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디 한번 보시오! 당신들이 말하는 이 사회를 전복시킬 자의 모습이 이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반역할 힘이 있습니까? 사람을 좀 보고 소리치시오!”



    3. 렘브란트의 Ecce Homo


    작년 사순절 기간에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했습니다. 39일째 되던 날 바로 오늘 본문인 요 19:5과 더불어 렘브란트의 그림 Ecce Homo를 나누었습니다.


    라틴어 Ecce Homo는 "이사람을 보라”는 빌라도의 말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내용을 작품화하면서 판화 기법(etching)으로 만들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1655년 처음 제1판을 시작으로, 1665년 제8판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타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작가의 삶의 여정과 잇닿아 있습니다. 아내에 이어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고, 가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생의 끝자락에서 렘브란트는 그렇게 볼품없는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렘브란트는 빌라도의 법정 위에 초라한 인간 예수님과 더불어 자신을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생의 실패같은 몰락과 더불어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초라한 Ecce Homo의 예수님 속에서 렘브란트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렘브란트가 <Ecce Homo>의 6번째 판부터 뚜렷하게 고친 곳이 바로 법정 하단 부분입니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유태인 군중들을 제거하고 법정 하단 전면부에 두개의 큰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해골의 눈 같기도 한 두 구멍 사이에 머리카락을 풀어해친 한 사람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그리스 신화 속 죽음의 강과 지하의 신 하데스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것이다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개신교인이었던 렘브란트가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했다기 보다는 처절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육체적 고통, 제자들의 배신,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것들의 형상화입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 후 지옥에 있는 이들을 위해 그곳까지 내려가실 것에 대한 예시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인지 예수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나이들어 보이고 서글퍼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렘브란트의 <Ecce Homo>를 ‘가장 슬픈 왕의 초상’이라고 하기도 하며, ‘우리의 원죄가 해결받는 순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을 확대해 살펴보니 그 눈빛이 군중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을 쳐다보는 우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물끄러미 그림을 보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4. 이 시대가 잃어버린 것


    누군가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것의 하나가 ‘초월적 형이상학의 바탕’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말인 것 같은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신)을 상실한 채 세속적인 물욕만 추구한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대에서 근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부정되는 시대 속에서도 스며드는 선명한 빛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렘브란트의 판화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비방과 모멸이 난무한 빌라도 법정에서 말없이 서 있는 예수님은 이해보다는 오해 받았고, 경외보다는 시기되었으며, 칭송보다는 비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분의 진실은 신성모독이라 오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의 사랑이 아니라, 눈빛과 온몸에 배어 있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모함하며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결국은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랑,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인해 죽어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랑은 그처럼 강하지도, 순전하지도 않습니다. 허약한 체력을 드러내며 베드로처럼 칼이라는 손 쉬운 방법을 꺼내 듭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불법과 부정이 조작되고 자행됩니다. 변종이 본래의 것보다 훨씬 본질다워 보이고 강해 보이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눈멀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잃어버린 채 변종적 사랑의 MSG에 길들여 살고 있습니다.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속의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원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할지 보여주는 좌표가 됩니다.


    이 땅, 그 누구도 기대치 못했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영접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검정물감을 뿌려놓은 듯 검게 보이는 빌라도의 재판장 위에 서 계십니다. 점점 밀려오는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분은 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듯이 서 계십니다. 렘브란트의 <Ecce Homo> 이 작품 속에서 2천 전 부당하게 판결내렸던 빌라도의 법정을 봅니다. 그리고 오염된 신앙으로 정의를 억압하던 렘브란트의 시대를 그려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대신한 종교권력과 권력의 부나방이 되어 기획화된 수사와 판결을 하는 굽어진 우리시대의 법정을 봅니다.


    빌라도의 법정 위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과 시선을 맞추다 보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저 법정 어딘가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5. Ecce Homo와 진젠도르프, J. 웨슬리, F.R 해버갈


    1) 진젠도르프(1700년-1760년, 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도미니크 페티의 <Ecce Homo>

    렘브란트 이외에도 <Ecce Homo>라는 제목의 작품을 남긴 화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 1589-1623)입니다.
    그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것과는 전혀 다른 초상화 타입입니다.
    빌라도가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라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입니다.

    페티의 그림에 대중이 주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 그림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페티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년이 지난 1719년 5월 어느 날, 이 그림 앞에 서 있던 열아홉 살 청년 진젠도르프였습니다.
    그는 개신교적 신앙 때문에 독일에서 망명한 오스트리아 귀족 집안의 후예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림의 맨 아래에 적혀 있는 "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라는 라틴어 문구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자기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을 얻기 위해 주님께서 어떤 값을 치러야 하셨는지를 자문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 예수께 자신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생태적 백작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안온하고 호화로운 삶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자기 소유의 저택도 예배와 모임의 장소로 내어놓았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체코에서 이동한 모라비안 교도들(체코의 개혁자 존 후스를 따르는 루터 이전의 개신교도들)을 자신의 영지인 헤른후트로 피신하게 해 그곳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모라비안 운동이 할레대학과 함께 근대 선교의 불을 일으켰고 1832년 7월,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를 조선의 서해안으로 보낸 시초가 되었습니다.

    ​2) 웨슬리(John Wesley, 1703년-1791년)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이들보다 훨씬 더 헌신적이었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은 당시 개신교 신자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옥스퍼드 출신의 존 웨슬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1729년,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행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난 뒤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평화로운 그들의 모습에 웨슬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말을 듣고 웨슬리는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습니다. 그것이 영국신앙의 본격적인 갱신운동의 시발점이었고,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3) 해버갈(Francis Ridley Havergal, 1836-1879)

    그로부터 다시 100여년이 훨씬 지난 1858년, 영국의 시인이요 찬송가 작사자인 프란시스 해버갈이 독일 유학 중 친구를 따라 뒤셀도르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 옛날 진젠도르프가 보았던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 <에케호모>와 문구를 보았습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해버갈은 온몸의 힘을 잃은 듯 그림 앞에 주저앉았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무는 듯 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머리 속에 흐르듯 떠오르는 찬송시를 종이에 써 내려갔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I Gave My Life For Thee)입니다.
    그 첫 소절의 가사가 이러합니다.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6. Ecce Homo와 성령강림주일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고 빌라도가 외칠 때, 그 앞에 서 있던 나사렛 청년 예수는 초라했고, 볼품없었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서 있던 그의 몰골 그 어디에도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중세의 가을’이라고 일걷는 14세기-16세기의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과 그를 이은 18세기의 계몽주의 (Enlightenment)의 영향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나아가 이성과 과학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신의 부재의 시대엔 볼품없는 나사렛 예수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빌라도의 법정 위에 선 그 나사렛 예수로 인해 삶이 바뀌고, 생이 달라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초라했던 그 예수가 자신들의 전 생애를 맡길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들로 인해 시대의 어두움이 밝혀졌고, 그 사회가 정화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계몽주의 시절 한 사람, 도메니코 페티의 손 끝을 통해 Ecce Homo의 예수님을 화폭에 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진젠도르프를 불러 경건주의 운동의 기수로 쓰셨습니다.
    이어 그 뿌리에서 또다시 존 웨슬리를 불러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사람의 생각과 계획 덕분일까요? …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치 앞 자신의 운명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수백년, 수천년의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 굴곡진 그 시대마다 사람의 속에 역사하셨던 성령 하나님 덕분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숨 쉬게 하셨고, 힘있게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의 부재의 시대, 더군다나 전염병의 시기에 어느 누가 우리의 행위를 아름답게 보겠습니까? 날씨도 더운데 마스크 착용하고 이렇게 예배드리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인생낭비로 보이겠습니까? … 하지만, 이 초라함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믿는 사람들 속에 임재하신 날을 기념하는 오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재하셨던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기를 구합니다. 불의 혀와 같은 모양으로 임하셔서 사람의 언어를 바꾸시고, 사람과 사람을 소통하게 하셨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바뀌시고,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교통케 하시기를 구합니다.

    ​칼 라너와 더불어 20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 손 꼽히는 한스 큉에 의하면, 고대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영(Geist)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붙잡힐 듯 하나 붙잡히지 않고, 볼 수 없으나 강력하며, 사람들이 숨쉬는 공기와 같이 삶에 필수적이며, 바람과 폭풍처럼 힘찬 것이 성령이다.’

    성령님의 이러한 역사가 창조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역사하셔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지길 구합니다.
    모세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사사들을 비롯하여 왕들과 예언자들을 감동시키시고, 사도들과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셨던 것처럼 우리 속에도 침투해 들어오시기를 구합니다. 

    꺾이고 초라해진 삶을 거쳐 마침내 생의 기쁨을 새로이 발견한 어떤 이의 고백은 이러했습니다.
    ‘살리는 영(고전 15:45)으로 우리 속에서 오신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살리는 교회, 살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단 한번이라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른후트(Herrnhut)에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진젠도르프(Zinzendorf·1700∼1760) 백작 무덤을 갔을 때였다.
    헤른후트는 독일과 체코,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인구 1200여명의 마을.
    이곳의 영주였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체코 서부 보헤미아의 경건한 복음주의자들로 18세기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에 정착한 모라비안 교도들과 형제단을 만들어 근대 독일의 영적 각성을 이끌었다.
    헤른후트 ‘하나님의 피난처’ 또는 ‘하나님의 오두막’이란 뜻.

    헤른후트 마을 내 ‘하나님의 영지(Gottesacker)’라 불리는 모라비안 교회 묘역에 있는 진젠도르프 무덤까지 올라가는 도중 두 갈래로 길이 갈라져 있었다.
    오른쪽이 진젠도르프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로 가야’ 진젠도르프 무덤에 도달한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19세에 뒤셀도르프에서 이탈리아의 화가 도메니코 페티의 작품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에 묘사된 예수 수난 장면의 그림을 보고 평생 주님의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총독 빌라도는 가시면류관을 쓴 채 자신 앞에 끌려 온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했다.
    채찍에 맞아 살점이 찢겨 나온 처연한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 있었다.
    군중들은 빌라도의 말에 답한다.
    “십자가에 다시오!”

    진젠도르프도메니코 페티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내면의 음성이 들렸다.

    “내 너를 위해 이 일을 했건만, 넌 날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

    그 음성이 한 청년의 인생을 과격하게 변화시켰다.
    그가 한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에 선교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에케 호모”란 절체절명의 말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빌라도 당시 군중들은 그 말을 통해 살인의 충동을 느꼈다.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오!”
    그때 이래로 이 땅 사람들은 ‘살인의 추억’ 속에 살아가야 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예수를 다룬 자신의 책 제목을 ‘에케 호모’라고 지었다.
    그것은 지독한 경멸의 언사였다.
    물론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젠도르프와 같이, 또 한 사람 프랜시스 하버갈과 같이 에케 호모에 응답해 새 길을 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영국인 하버갈은 페티의 그림을 보고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를 작사했다.
    어찌 그들뿐인가.
    윌리엄 캐리가, C T 스터드가, 짐 엘리어트가, 길선주 장로가, 주기철 목사가, 구름 같이 둘러싼 믿음의 선진들이 ‘에케 호모’에 응답해 자신의 길을 버리고 그분의 길을 따랐다.

    무수한 사람들이 페티의 작품 앞에 섰지만 누구나 진젠도르프와 같이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온 천지에 풍긴 벚꽃 향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빛 자욱이 선명한 시즌이다.
    “에케 호모!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을 보라.”
    이 소리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21세기를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말하신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을 주느냐?”


    예수님이 끌려나오셨다. 그 분의 몸은 단단한 밧줄에 매여있다. 얼마 전까지 자유의 몸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의 손은 포박을 당했다. 문둥병자를 만져주고 아픈 자를 고쳐주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던 그 손이 밧줄에 묶여 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온 양같이 잠잠히 계실 뿐 아니라 외로이 서 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를 보호해줄 사람도 없다. 그토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셨건만 온데 간데 없다. 예수님은 굶주린 야수들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야수들이 으르렁대며 달려들 태세다. 무자비한 야수들은 송곳같은 이빨을 내놓으며 난폭한 본성을 노출한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호위병들은 예수님을 마구 구타하였다. 전쟁터에서 싸웠던 강인한 손과 팔로 예수님을 가격하였다. 구세주의 뺨을 때렸고 가슴을 걷어찼다. 땅에 엎어진 예수께서는 멍든 눈으로 그들을 올려 보았다.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침을 뱉었고 시종일관 놀림을 받았다. 못된 병사들은 폭력을 재미삼아 휘두른다. 그들은 살인에 이력이 나 있고 피에 굶주려 있다. 누구든 그들에게 붙잡혀오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수모와 고문을 받는다.

    이번에는 구타당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튼튼한 나무기둥에 묶는다. 채찍을 가하기 위해서다. 그 채찍은 아홉 줄의 가죽끈에다 작은 철고리들을 달았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채찍을 맞고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살인적인 가죽끈이 예수님의 발가벗긴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억센 채찍이 몸에 감기면서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핏방울들이 바닥에 튄다. 피부가 벗겨지고 하얀 뼈가 드러난다. 한번 채찍이 있을 때마다 고통이 몰려온다. 그 고통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눈물의 강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소리내지 않으신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눈물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예수의 눈가가 흐려진다. 아무도 그 분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가 없다. 육체적 고통, 제자들의 배신, 버림받은 고독이 예수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이처럼 괴롭고 외로울 때가 없었다.

    빌라도가 죄수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자 잔인한 호위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광장으로 나왔다. 가장 슬픈 왕의 초상이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외친다. 그러자 증오심에 불타는 군중이 주먹 쥔 팔을 뻗으며 외친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예수님의 피와 상처, 깨어진 마음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빌라도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이만하면 되었을 텐데.. 어쩌지? 내 손에 피를 뭍히는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잖아" 빌라도의 우물쭈물하는 심경을 간파한 대제사장이 결정적인 말을 내뱉는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시저의 충신이 아니지요."

    위협적인 말이다. 협박이나 다름없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진다. 빌라도는 선택의 막판에 서게 되었다. 예수를 놓아주었다는 사실이 로마에까지 알려진다면 정치적 생명이 끝날 것은 뻔한 일이다. "예수를 놓아주어 민란의 원인을 제공해서도 안될 말이지.. 내가 얼마나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힘썼는데..." 잔인하지만 영악했던 빌라도는 재빨리 앞날을 그려본다.

    그도 젊었을 때는 지금같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쯤은 가릴 줄 알았다. 그러나 야심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면서 인생궤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조금 더 인기를 얻고 자리를 유지하려면 은밀한 거래를 해야 했고 기생충같은 자들과 공모해야 했고 그런 일을 하면서 그의 순수성은 점차 퇴색해갔다. 예전의 고상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란 타협과 편의, 개인적 야심 따위이다.
    빌라도는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하기로 하는 순간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로 재판을 뒤바꿀 용기가 없었다. 그는 현실에 굴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추악한 자신의 정욕에 굴종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대야를 찾았다. 손을 씻는다고 그의 죄가 용서될 리 없었다. 그의 죄는 육신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양심을 판 죄요 진리를 외면한 죄악이었기 때문에 손을 아무리 깨끗이 씻는다 한들 소용이 없다. 죄없는 예수를 놓아주라는 아내의 진심어린 이야기를 듣는 대신 군중이 질러대는 광란의 요구를 듣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그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그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오셨다. 자기백성들에게 오셨지만 그를 영접한 사람은 없었다. 재판정과 사람들은 검정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시꺼멓게 보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고 간고를 겪는다.(사 53:3)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를 피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악을 뒤집어쓰셨다. 이런 환란을 받을 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맞이하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사 53:7)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예수님이 깊이 사랑하셨던 자들에게 받으셨던 고통을 생각한다.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주님이 치르셔야 했던 아픔을 생각한다. 나도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저들처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친 죄인이었다.

    나는 그 분에게 상처를 주었으나 그 분은 내게도 손을 내미셨다. 나의 허물과 죄악을 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감싸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세상 염려 때문에 천국생활에 대한 모든 열망을 사장시킨 나를 회복시켜주셨다. 이 세상을 마치 영원한 안식처로 생각하고 내 힘으로 지은 깨지기 쉬운 보금자리를 안전한 곳으로 생각한 나를 바로 잡아주셨다. 영원에 대한 체험만이 이 세상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을 경멸하거나 멸시하지 않으면서 참되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다. 하나님의 증거들로 말미암아 미래에 있을 더 좋은 영광을 갈망하게 길을 열어주셨다.

    그런 예수님을 나의 가장 귀한 친구요 구원자로 섬기리라. 사랑의 선물을 주신 그 분을 찬송하리라.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도대체 다른 책들을 더 이상은 견뎌낼 수 없게 된다.
    내 책보다 더 긍지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더 세련된 종류의 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독자의 모습을 내 머리 속에 그려보면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이 되고 만다.
    게다가 그는 탄력 있으면서도 꾀가 많은 신중한 자이며, 타고난 모험가이자 발견자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만 말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것보다 더 표현을 잘할 수는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누구에게만 자기의 수수께끼를 던지는가?
    너희, 대담한 탐험가, 모험가들. 그리고 언젠가 영민함의 돛을 달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 적이 있는 자들에게, 너희, 수수께끼에 취해 있는 자들, 불투명함을 즐기는 자들, 피리 소리로도 온갖 미궁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런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그것은 너희가 겁먹은 손으로 한 가닥 실을 찾아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추측할 수 있는 곳에서는 추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니체전집 15 『이 사람을 보라』(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옮김, 책세상, 2002, 321-388)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에서-

    ‘어떻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전적 고백록이자 마지막 저작인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보여주는 그의 놀라운 자신감을 보십시오.
    루터교 목사의 아들답게 제목도 성경의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빌려왔습니다.
    채찍을 때린 후 가시관과 자색 옷을 입힌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내보이면서 ‘정말 이 사람을 죽이라는 말이오?’ 라는 빌라도의 속내가 담긴 말이 "보시오, 이 사람이오." 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When Jesus came out wearing the crown of thorns and the purple robe, Pilate said to them, "Here is the man!")

    이 책을 쓸 당시 44세의 니체 역시 자신이 사랑한 철학에 배신당한 상처로 스위스의 산골에서 쫒기 듯 글을 썼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처럼, 평생을 철학의 전투장에서 싸우다 병 들었지만 철학사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긍지를 갖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쓴 책이라고 합니다.

    니체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이면서 손에 들게 되는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니체전집13, 2014)입니다.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다음의 제5복음서이자 미래세대를 위한 새로운 성경이라고까지 언급할 정도로 니체에게 있어 이 책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감히?”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만큼 니체에게는 자기 사상의 결정판인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독일어 명칭으로, 당시 기독교에 도전한 이단인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입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단의 이름을 빌려 예수 정신을 왜곡한 당시의 잘못된 기독교 사상을 전복시키려 했다고 해석합니다.
    「반시대적 고찰」과 「안티크리스트」 역시 예수를 이용한 당시 종교 장사치들과 잘못된 기독교 정신에 대항한 니체의 전면전으로 보았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재미난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1부에서 4부까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가 나중에 합본이 되었습니다.
    총 4부의 구성에 각 부마다 10개에서 20개 정도의 주제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담았습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1-3부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읽되, 3부까지 읽은 후에 4부를 읽어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1부에는 세 변화에 대하여, 배후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 라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보입니다.

    2부에는 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잡것에 대하여, 자기극복에 대하여, 고매하다는 자에 대하여, 세상살이를 위한 책략에 대하여 라는 질문이 있고,

    3부에는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감람산에서, 배신자에 대하여,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란 질문이, 마지막 4부에는 실직, 더없이 추악한 자,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 최후의 만찬, 과학에 대하여 란 질문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니체에 푹 빠져있는 몇 주간, 새롭게 알게 된 음악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곡입니다.
    독일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체의 장대한 철학 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8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해 교향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 곡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철학의 음악화’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네이버에서 1분씩 잘라놓은 네 편의 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동명의 곡을 함께 듣는다면 특별한 경험이 되실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가지 변화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아니 세 가지 단계로 질적인 변신을 하라고 우리를 도전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 사상이자 니체의 첫 독자와 열혈 독자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주제입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제일 낮은 단계의 인간의 정신을 ‘낙타적 정신’이라 칭합니다.

    이윤호 교수님은 낙타가 주인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해본 적이 없고, 자주 무릎을 꿇는 예의바르고 착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자존심은 높이 세우지만, 자신의 자존심에는 크고 많은 상처를 입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낙타는 공경과 공포심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살아가는 인간을 비유합니다.
    자신의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어 희생하고 체념하며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사람, 무엇보다 당위의 정신인 “You should!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형식주의와 노예도덕의 의무에 묶여 살아가는 인간을 통칭합니다.

    두 번째 단계의 인간은 ‘사자’입니다.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드디어 낙타적 인간은 의무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분연히 일어섭니다.
    사자처럼 남의 말을 안 듣는 동물이 없고, 사자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목숨부터 내놓아야 한다고 이윤호 교수님은 말합니다.
    그에게 무언가를 시키려고 하면 으르렁거리기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자에겐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사자의 정신은 “아니오”를 분명히 표현하며, “I will,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정신입니다.
    그렇지만 용과의 두려운 일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비늘 짐승인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정신이 가는 길을 금빛도 찬란하게 가로막는다.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들 비늘에는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치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용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그 용은 “모든 사물의 가치는 내게서 찬란하게 빛난다고 거들먹거린다.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어 있다.
    창조된 일체의 가치, 내가 바로 그것이다.
    진정 ‘나는 하고자 한다는 요구는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다.”

    “용이 하는 말이다.
    형제들이여, 무엇 때문에 정신에게 사자가 필요한가?
    짐을 질 수 있는 짐승, 체념하는 마음 그리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짐승이 되는 것만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경건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용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사자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슬프게도 사자는 용과 격렬하게 싸우다 지쳐갑니다.
    사자는 낙타처럼 삶을 사막으로 만들진 않지만, 그의 삶 역시 웃고 즐길 만한 것은 아닙니다.
    사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에 내몰린 병사와 같습니다.
    사자는 용에게 의무에 대해 싫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많이 알지 못합니다.

    용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왔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릅니다.
    여전히 법과 제도, 시스템과 도덕, 종교적 명령이라는 천년 정신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지만, 안타깝게도 분노와 비판으로 으르렁대기만 하는 냉소주의에 머물고 맙니다.

    마지막 단계의 인간 정신인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노라.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죄의식이나 편견 없이 자유롭고, 잘 잊을 줄 알아 늘 새롭게 관계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규칙을 스스로 창조하며 놀이하듯 살되 혼자서도 즐기며, 어떤 어려움도 반길 줄 아는 긍정의 에너지를 가졌습니다. “I am,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야!”라며 놀이하는 정신입니다.

    어린아이는 도덕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도덕을 갖고 있지도 않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용이 나타난다면 용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됩니다. 설령 의무를 강요하는 용을 만난다고 해도 으르렁대지 않고 웃음으로 응대합니다. 진정 용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사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 독일어로는 ‘위버멘쉬’(übermensch), 인간을 넘어선 인간인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인간의 정신 중에 어느 단계에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도대체 무엇이고,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게는 도덕과 종교적인 명령들이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제 속의 당위성이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걸 니체를 통해서도 다시금 발견합니다.

    그리고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매순간 묻고 답하는 중입니다.
    낙타로 머물지 않고 사자의 포효하는 단계로, 어린아이의 놀이하는 삶으로 올 한해 꾸준히 발전해가기를 소망합니다.

    <니체의 책 읽기 길라잡이>

    *백승영 교수님은 니체를 읽기 위해 우선적으로 읽을 필수적인 세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먼저, 니체의 철학적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
    두 번째는 니체 자신이 “요약된 내 철학”이라고 말한 니체철학의 정수인 『우상의 황혼』
    세 번째는 『도덕의 계보』 로, 『선악의 저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소개한 사상을 논문형식으로 니체의 사유들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술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바그너의 경우』」를, 종교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안티크리스트』를, 그리고 좋은 니체 개론서를 찾아 읽기를 권합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한 권의 책으로 니체를 읽으려는 분들께 고명섭 기자의 『니체극장』(고명섭, 김영사, 2012)을 초강추합니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니체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며 써내려간 니체 평전의 결정판이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두께지만, 니체의 중심사상을 이해하기 원하신다면,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 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EBS <인문학 특강>으로 방영된 내용이 토대인 이진우 교수님의 『니체의 인생강의』(Humanist, 2015)도 좋습니다.

    *단행본 원작을 읽을 분이라면, 민음사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장희창 옮김)도 번역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니체에 푹 빠져 살고 싶은 분이라면, 책세상 출판사가 내놓은 「니체 전집」 21권도 훌륭합니다. 니체관련 저작출판의 결정판으로, 니체정본으로 평가받는 독일 발터 데 그루이터사가 펴낸 '니체비평전집'을 완역한 데다 그동안 번역된 적이 없던 니체의 유고집이 12권이나 포함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대표작은 재번역까지 했다고 합니다.








    첫째, 비로 경험하라

    신명기 32: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신명기 32:1-3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은 내 입의 말을 들을찌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위에 가는 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찌어다.



    비는 씻어주고, 성장하여 자라게 하며, 생명을 공급합니다.
    비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열매가 있으며, 풍성함이 있습니다.

    시편 65: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단비는 곧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의 단비로 경험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신명기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찬송 / 성령의 단비를 내려 새 생명 주옵소서

    둘째, 불로 경험하라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불은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성, 독성, 죄악성을 태워줍니다.
    또한 불은 능력을 줍니다.
    불은 폭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불로 경험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불은 올라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로 경험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
    땅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이 천성을 향해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방망이로 경험하라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방망이는 깨어 부수는 것입니다.
    내 이론, 내 주장, 내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 부서져야 합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부서질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생깁니다.
    또한 방망이는 부드럽게 만듭니다.
    온유한 사람을 만들고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줍니다.
    방망이는 구겨진 것을 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패로 구겨지고, 절망으로 구겨진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와 방망이처럼 두드리게 될 때, 실패가 성공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넷째, 등불로 경험하라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를 줍니다.
    성공은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서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로 경험한다면, 그 빛으로 인해 우리는 형통할 것입니다.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길로 다니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다섯째,  꿀송이로 경험하라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9: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신앙생활이 꿀처럼 달아야 합니다.
    삶도 꿀처럼 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 만족하는 역사, 기쁨이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잠언 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사도행전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여섯째, 치료하는 광선으로 경험하라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영적인 치유, 육적인 치유, 언어의 치유, 생각의 치유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굽어진 생각과 부정적인 말들이 치유되고, 모든 육체의 질병이 치유되며, 죄와 허물로 죽어진 영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일곱째, 검으로 경험하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수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와 인격과 삶이 말씀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여 그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모든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나고 고쳐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수술하는 검으로 우리 육체와 인격과 삶에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지혜로 경험하라

    시편 119: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편 119:99-100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로 경험했기 때문에, 동방에 최고로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로 다가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철로 다가와서 우리 인생을 승리하게 하고, 형통하게 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말씀이 경험되고 소유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말씀을 소유한 자는 어디를 가나 형통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능히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비로, 불과 방망이로, 등불과 빛으로, 꿀송이와 치료하는 광선으로 경험되어 2023년 한 해를 주와 동행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승리하는 은총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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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아 쿨파(mea culpa) 내 잘못/ 그래 내 탓이라고 하자!

    원어민들이 라틴어 관용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고상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중국의 고사 성어나 특이한 외국어를 끌어오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에서 많이 쓰이고 색다르고 격식 있는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은 라틴어 관용구를 살펴보자. 

    유행어처럼 많이 쓰이는 라틴어 관용구는 단연 per se다. per se는 부사로 by itself, by definition이라는 의미이고 그 자체로,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정도로 해석된다.
    한국어 번역에서 ‘그 자체로’를 빼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듯이 영어에서도 per se는 큰 의미가 없다.
    문장을 강조하고 대화의 묘미를 더하기 위해 쓰는 표현이다. The drug is not harmful per se, but is dangerous when taken with alcohol. 그 약이 그 자체로 해롭지는 않지만 술과 함께 먹으면 위험하다.

    carpe diem은 seize the day라는 뜻으로 현재를 즐겨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라틴 표현이다. 로마의 시인 호레이스(Horace)의 시에서 나온 문구로 미국에서는 1989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대사로 나오면서 유행어처럼 퍼져 나갔고 이제는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라틴어 표현이 됐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 Enjoy yourself while you have the chance.”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mea culpa는 내 탓   이야, 내 잘못이야(my fault/my bad)라는 뜻이고 주로 농담조로 사용한다. 라틴어 mea=by me, culpa=fault에서 나온 표현이다. 잘잘못을 따지다가 “그래! 내 탓이라고 해두자”라는 뉘앙스(nuance)로 “mea culpa!”라고 말하는 식이다. 명사로 쓰이면 언론 기사의 정정, 고침을 뜻한다.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기도 문구에서 기원한 표현이다. 

    persona non grata도 재미있는 표현인데 원래는 외교 용어로 타국에서 물의를 일으켜 추방 명령을 받은 외교관, 외국인을 칭했지만 지금은 이상하고 용납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 특정 장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person not welcomed) 또는 인기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verbatim도 자주 사용하는데 말한 그대로, 원본 글자 그대로라는 뜻으로 비즈니스 용어로 많이 쓴다. 명사처럼 보이지만 부사/형용사로 쓰인다.  타인의 말을 인용할 때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대로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면 적절한 단어다. I can remember lines from movies verbatim. 나는 영화의 대사를 한자 한자 그대로 기억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라틴어 표현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장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의 vice versa, 사실상이라는 의미의 de facto, 현재 상황이라는 의미의 status quo, 즉석의 의미의 ad hoc 등이 있다. 출신 학교는 alma marta라고 표현하는데 alma marta의 원뜻인 인자한 어머니(nourishing mother)와 한국어 모교(母校)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 etc는 et cetera의 줄임말로 ~등등이라는 뜻이고 circa는 줄여서 c.라고 많이 쓰는데 시간을 나타날 때 약, ~경이라는 뜻이다. c. 1960=1960년 경. 진실한, 진짜(real)라는 의미의 bona fide와 무료의, 공익을 위해라는 의미의 pro bono도 많이 사용하는 라틴어 단어다. He acted bona fide. 그는 진실되게 행동했다. pro bono lawyers 공익을 위해 무료로 봉사하는 변호사. 

    라틴어 문구들은 모두 소문자로 쓰고 하이픈(hyphen -)이나 별도의 문장 부호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에서도 고사성어를 남발하면 어색하고 잘난척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라틴어 관용구도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문장의 맛을 살리기 위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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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900677 2022-11-08T03:21:49Z 2023-06-29T22:05:12Z 2023년 성경 일독을 위한 자료(매일 성경 읽기) 분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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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875823 2022-09-03T18:42:10Z 2022-09-03T18:42:10Z 과학자가 고백한 사후세계의 증거 아홉 가지



    * https://www.youtube.com/watch?v=UwxOREUGItw 

    과학자가 고백한 사후세계의 증거 아홉 가지
    임사체험 사례들을 바탕으로 의학적 죽음의 상태에서의 명확한 의식 활동 연구자료

    1. 명료하고 선명한 의식(Crystal Clear Consciousness) - 맑은 의식
    76%가 육신으로 있을 때보다 더 명료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2. 현실적인 유체 이탈 경험(Realistic out of body experience)
    75.4%가 유체 이탈을 경험.

    3. 고양된 감각들(Heightened senses)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나타난다.

    4. 전신마취 중에 의식 활동(Consciousness during anesthesia)

    5. 완벽한 삶의 회고(Perfect playback)
    95.5%가 임사체험은 완벽한 것이었다.

    6. 죽은 가족과의 만남(Family reunions)
    태어나기 전의 가족들도 만났다.

    7. 어린아이들의 경험(Children's experience)
    임사체험의 경험을 갖기에는 아주 어린 나이(죽음....)

    8. 전 세계적인 일관성(Wold wide consistency)
    체험자의 지역과 종교에 관계없이 일관성을 갖는다.

    9. 깨어난 뒤 삶의 변화(Aftereffects)
    사후 영향력이 강력하게 나타난다(마약중독, 알콜중독.....)
    사후 세계를 믿고 죽음 이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삶의 목적이 있음을 깨닫는다.

    * 의식이 신체적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임사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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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750343 2021-10-21T14:16:42Z 2022-11-03T16:11:28Z 노인



    1. 고독의 문제(외로움)
    [Loneliness;The most horrible disease.]

    1) 부모님을 인정하라.
    [Acknowledge your parents.(Trust)]

    2) 종교(신앙)를 가지시도록 권장하라.(내세관이 생긴다)
    [Advice them to have Religious Belief.(Christian faith)]

    3) 적당한 일거리를 드려라.(아기 보는 일은 제외)
    [Give them a proper job to do.(Except baby sitting)]

    4) 대화할 기회를 드려라.(치매 예방)
    [Provide opportunities to talk.(dialogue)]

    2. 건강의 문제.
    [Physical Weaknes.]

    1) 부모님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라.(장수한다)
    [Pay attention to your parents physical condition.]

    2) 적당한 운동을 계속하시게 하라.(건강해진다)
    [Help them have proper physical exercise.]

    3) 취미활동을 하시게 하라.(생이 즐거워진다)
    [Have them keep or develop their own hobbies.]

    4) 목욕을 자주 하실 수 있도록 하라.(혈액순환에 좋다)
    [Help them bathe regularly.]

    3. 경제적문제.
    [Economic Insecurity.]

    1) 용돈을 드려라.(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Provide spending money on a regular basis.]

    2)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려라.(예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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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739706 2021-09-24T01:11:41Z 2024-02-04T13:19:54Z 영혼육(靈魂肉)



    영(靈), 혼(魂), 육(肉)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15 -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라고 한다.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20 -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28 -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22~23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40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장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함)

     

    사무엘상 1장 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장 15절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영: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혼: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몸: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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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733951 2021-09-10T01:06:08Z 2022-11-08T02:15:57Z 영광(榮光)


    영광(카보드 כָּבוֹד)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보드 כָּבוֹד>이다.
    이 단어는 동사 어근 <카베드 כבד>에서 파생한 명사다.
    형용사 <카베드 כבד>도 동사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동사와 그 파생어는 도합 386회나 언급된다.
    어근 <카베드>의 뜻은 ‘무겁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문자의 뜻 그대로 무게를 나타내어 사용된 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그 의기가 확장되어 비유법으로 사용된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제사장 엘리의 비둔함을 표현하는 경우(삼상4:18)
    압살롬의 머리카락도 무성하여 그 무게가 매우 무거웠음을 묘사하는 경우(삼하14:26)에 문자의 뜻 그대로 사용되었다.

    형용사 <카베드>는 상황 파악이 둔하여 고집을 부리는 파라오를 가리켜 일곱 군데에서 사용되었다(출 7:14; 8:15[힙11], 32[28]; 9:7, 34; 10:1; 삼상 6:6).

    이와 마찬가지로 잘 듣지 못하는 귀(사 6:10; 59:1; 슥 7:11)와 말을 잘 못하는 혀(출 4:10),
    잘 보지 못하는 눈(창 48:10)과 일에 지친 손(출 17:12)을 가리키기도 한다.

    노역이 과중하여 힘든 상황(출 5:9)이나 전쟁 상황(삿 20:34)이나 흉년이 극심한 상황(창 41:31)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난은 주의 손이 무겁게 내리 누르는 상황이다(삼상 5:6, 11; 시 32:4).
    어떤 사람이 손으로 타인을 억압할 때도 이 동사가 쓰인다(삿 1:35; 욥 33:7).
    고의는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도 <카베드>란 단어로 묘사한다(삼하 13:25; 대하 10:10, 14; 25:19; 느5:15).

    고난을 ‘무거운<카베드> 멍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왕상 12:4; 대하 10:4, 11).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가볍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무겁다(창 18:20; 참. 사 24:20; 시 38:4[힙5]; 욥 6:3, 등).
    죄짐을 진 사람은 힘겹게 산다(사 1:4; 잠 27:3).
    아브라함이 매우 무겁다고 표현할 경우에는 그의 재산이 많아졌음을 나타냈다(창 13:2).
    야곱의 재산도 많아지자 <카보드>란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재산이 많이 불어났음을 표현한다(창 31:1).

    이 동사가 니팔이나 피엘의 형태로 사용되면 ‘명예롭다 / 존경하다 / 영광스럽다’란 뜻으로 확장이 된다(민 22:15).
    부유하거나 장수하는 것은 의롭게 살아온 삶의 보상이다(대상 29:28, 등).
    인품의 중후함이 없이 영광을 받는 것은 오히려 재앙을 초래한다(잠 21:21; 22:4; 26:1, 등).
    중요한 지위에 있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출 20:12; 말 1:6).
    사회에서 중요한 신분의 사람은 무거운 사람으로서 존경받는 어른이 된다.
    다윗의 삼십인 용사와 같이 용맹스럽고 의리 있는 인물들을 존경받을 만하다(왕상 11:21).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명예롭다(창 49:6; 시 108:1[힙2]; 렘 2:11).
    이 단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가장 중요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의롭고 신실하신 분이며 공정한 심판자이며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의 이름은 모든 피조물의 예배를 받으며 만유에게서 영광을 받는다(시 66:2; 79:9; 사 40:5).
    야훼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시다(시 24:7~10).
    그러기에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옷은 너무나 아름답고 영광스럽다(출 28:2, 40).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위대한 나라는 레바논의 송백처럼 명예롭다(사 8:7; 10:18).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출 16:7, 10; 40:34; 민 14:10; 사 6:3; 겔 9:3; 스 10:10).
    ‘야훼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은 민 14:10; 16:19에서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표상하기도 한다(참조. 민 14:21, 22).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을 체험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나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꼈는데 성서 저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카보드>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광야의 성막을 완공했을 때 야훼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났다.
    야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므로 가장 비중이 크신 분이시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카보드>를 감히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떠한 피조물도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크고 중요하신 분이시다.

    인간은 죄 속에 빠져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이기주의에 빠져 살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서 중요했던 그 비중을 잃어 버리고 하잖은 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받지 못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미물로 전락한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워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 보혈로 죄의 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은총을 받고 창세기 1장 28절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금 만물의 영장의 지위를 회복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지위의 존재로 격상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신학은 기필코 영광의 신학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광야를 걸어가서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과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
    -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열 십(十)
    - 사람이 무슨 일을 잘 감당하여 모두에게 덕을 세웠을 때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솝 이야기) 영리한 개구리와 독수리의 대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나의 아이디어!
     그 결과 영리한 개구리는 하늘 위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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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ctor(勝赫) Lee(李)
    tag:917posthaven.posthaven.com,2013:Post/1639346 2021-01-12T22:15:44Z 2022-12-16T16:51:21Z 신년주일 설교 원고(2021년, 2023년
    2021년 1월 3일 신년주일 설교

    2021년 신앙생활의 목표는 "그 말씀 그 찬송"
    성구는 시편 106편 12절입니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Then they believed his promises and sang his praise.

    종교개혁자 칼빈은 시편을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시편 106편할렐루야 시에 해당합니다.
    할렐루야 시의 특징은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시편 106:1,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 160:48,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편 중에서 할렐루야 시11편입니다(106, 111, 112, 113, 117, 135, 146, 147, 148, 149, 150 ).
    시편 106편105편의 속편이라고 하며, 이스라엘의 민족적 찬송시라고 합니다.

    시편 105편과 같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회고하면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이스라엘의 불충성이 얼마나 상습적이며,
    그들의 죄의 결과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출애굽에서 광야 생활 그리고 사사 시대에 걸친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시는 길이가 다른 연(聯) 사이를 오가면서,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구원과 형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사이에 있는 사상의 장단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시는 찬송과 기도로 시작하고 마친다.

    그 말씀(his promises) : 그의 약속들(하나님의 약속)
    시편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말씀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기고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대에 주님을 찬송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전개를 위한 이야기 / 조지 아틀레이(George Atley) 순교 이야기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조지 아틀레이(George Atley) 선교사는 어느 날 시냇물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적대적인 원주민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시체를 살펴보니 장전된 10연발 윈체스터 라이플이라는 총을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나운 맹수를 물리치려고 갖고 다니던 것입니다.
    자신이 위태할 때 얼마든지 그 총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는 몽둥이로 맞고 창에 찔려죽으면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곳에 들어온 내가 살기 위해서 총으로 저들을 쏜다면 생명을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총을 사용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총을 가졌으면서도 아무런 저항 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 아틀레이 선교사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영혼을 잃을 것에 대한 부담감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의 마음에서 지고한 희생을 택했다.
    사도 바울의 고백(빌 1:20)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월그 말씀요한복음 12장 24절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ἐὰν μὴ ὁ κόκκος τοῦ σίτου πεσὼν εἰς τὴν γῆν ἀποθάνῃ, αὐτὸς μόνος μένει· ἐὰν δὲ ἀποθάνῃ, πολὺν καρπὸν φέρει.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레고 후민)" 라고 강조하셨는데 이때 진실로에 해당하는 헬라단어는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초는 "아멘" 즉 "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실한 마음, 진실한 신앙

    요한복음 12장은 죽은 나사로가 살던 동네 베다니를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가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그 집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 하고 비난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돈 궤를 맡고 그곳에서 돈을 훔쳐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머지 않아 죽으실 것을 예고하시며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평생을 인도에서 선교를 하며 수십만 명을 회심시킨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에게는 다음의 일곱 가지 선교원칙이 있었습니다.

    1. 백 프로 솔직할 것.

    2. 어느 누구의 종교도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현지인에게 확신시킬 것.

    3.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대화를 마친 뒤에는 상대방이 질문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줄 것.

    4. 집회가 열리는 도시의 비기독교인 지도자나 정치인을 집회의장으로 세울 것.

    5. 기독교는 그리스도로 정의되어야 함을 잊지 말 것.

    6. 그리스도는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경험에 의해 해석되어 져야 한다는 걸 잊지 말 것.

    7. 그리스도는 반드시 인도(현지)의 방식으로 현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개되어야 할 것.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의 문화와 환경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 심지어 종교가 다른 사람까지도 포용하는 관용의 자세가 오히려 믿지 않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끌어들이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분명한 복음을 전하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나부터 시작하는 신앙
    "한 알의 밀이"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생각하면 300데나리온의 상당한 가치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심지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실천한 것입니다.

    지난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선물은 무엇일까?
    매월 북한어 성경 6권을 보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성탄을 맞이하여 좀 더 많은 북한어 성경을 지하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제안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100권 정도 보내면 좋겠다고 했는데 지난 년말에 160권에 해당하는 $2,400을 모퉁이돌 선교회 담당자에게 송금할 수 있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란 가장 작은 단위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겸손한 신앙
    땅에 떨어져(πεσὼν) : πίπτω / 4098, piptó. to fall

    사람의 본능은 누구나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지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어 성경을 보내는 과정에 어느 노 권사님께서 10권에 해당하는 헌금을 한국에서 송금하시면서 본인의 이름을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탁을 받으면서 생활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나이가 많은 권사님께서 은행에 직접 찾아가셔서 미국으로 생전 처음 송금을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금 과정을 마친 후에 카톡 문자로 "목사님, 송금 완료했습니다. 3-4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겸손이란 귀찮은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셨다는 것을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겸손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겸손함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생과 헌신의 신앙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으면(ἀποθάνῃ) : ἀποθνῄσκω / 599, apothnéskó.  to die

    지금부터 대략 120여 년 전 미국 선교부로부터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던 프랑크 윌리엄스(Frank Williams) 부부가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07년 인천에서 첫아들을 낳았는데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우광복(禹光復, George Z. Williams, 1907~1994)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후 프랑크 선교사는 1908년 올리브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1909년 2월경 논산지방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상여 집에서 비를 피해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하였기 때문에 프랭크 선교사는 즉시 감염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프랑크 선교사 부인은 과부가 되어 고향 미국 콜로라도 덴버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공주로 돌아와서 교회를 세우며 47년 간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딸인 올리브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1908~1919)는 11살에 죽어서 영명동산에 묻혔다.

    우광복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 조부모가 살고 있는 콜로로다 주 덴버에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 책임자로 한국을 다스릴  1945년경이었습니다.
    하지 장군은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이 하지 장군의 참모가 되어 정부수립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 장군이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하므로 우광복은 어머니와 이 일을 상의하였고, 우광복의 어머니는 이 일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면서 50명 중 48명의 명단을 작성하였다고 합니다.

    그 명단을 받아 든 하지 장군은 미군 정부 요소요소에 그들을 임명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부서에 들어가서 자유대한민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교부 장관은 미신 타파를 시작했습니다.
    또 국방부장관은 군선교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들 중에도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전체의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1% 도 안 되는 때 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스 사모가 추천해준 48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20년 만에 5백만 성도가 되고, 30년 만에 1천만 성도를 헤아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미군정 시절 우광복 Geroge Williams이 추천한 48명으부터 시작했다. 우광복의 48명을 누가 추천했는가?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윌리엄스 사모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고 (Frank Williams)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Oliver Williams)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된 사모 때문이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의 일기로 소천했는데, 마지막으로 유언하기를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데, 내 동생 올리브 옆에 나를 묻어 달라."고 했다. 공주 영명학교는 영원한 광명(eternal light)이란 뜻이며,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가 1906년에 세운 학교이다. 이 학교의 모태는 명선학당인데, 그 설립자는 엘리스 하몬드이며, 이 학당에서 유관순이 1913년부터 공부했다. 엘리스 선교사 밑에서 배웠던 것이다. 우광복이 이렇게 유언한 것은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앨리스의 묘 옆에 나란히 있다.

    2021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이 좌경화 국가로 전락할 것인가?
    미 합중국이 부정 선거에 의해서 자유 평등 박애를 흔드는 비기독교 정신과 사상이 지배하는 나라로 전락할 것인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1월의 찬송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1904년 마틴 목사 부부는 아홉 살 난 아들과 함께 뉴욕의 성경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성경학교 교장인 존 데이비스와 공동으로 찬송가를 편집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목사 부인인 시발라가 몹시 몸이 아팠지만, 중요한 일이라 이 방문을 취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장 사택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시발라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마틴 목사가 병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간호하고 있을 때, 뉴욕의 레스터셔에 있는 어느 교회서 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요청해 왔습니다.
    마틴 목사는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아내 시발라의 병간호 때문에 이 설교를 수락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거절전화를 막 걸려고 할 때, 어린 아들이 마틴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밤 해야 할 설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아빠가 계시지 않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엄마를 지켜 주시지 않나요?”

    이 말에 마틴 목사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들을 통해 자기를 꾸중하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저녁설교를 하러 집을 나섰습니다.

    아들의 말에 감동을 받은 것은 마틴 목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던 시발라도 남편과 아이 대화에 말할 수 없이 뜨거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근심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데!”

    시발라는 영감을 얻어 병상에 누운 채, 은혜로운 찬송시를 거침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낙망 말아라. 하나님이 돌보시리니. 필요한 모든 것 그가 마련하시며 하나님이 또한 우리를 돌보시네…”

    마틴 목사의 저녁설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결신자를 낸 은혜로운 집회였습니다.
    마틴 목사는 기쁨과 감사로 예배를 마치고 황급히 아내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쁨에 찬 마틴 목사를 병상에서 맞는 시발라도 환희에 차 있었습니다.

    시발라는 남편에게 손을 내밀며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쪽지를 받아든 마틴 목사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곧 뜨거운 감격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는 바로 빌혼 올갠(접어서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4옥타브짜리 올갠) 앞에 앉아 단숨에 음표를 오선지에 적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단 30분 만에 곡조를 완성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찬송의 탄생 순간이었습니다.

    악보가 완성되자 때 아닌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두 사람과 마틴 목사 부부, 그리고 9살 난 아들과 같이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찬송가 382장)의 최초 공연이 열린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만들어낸 찬송가

    시발라 여사는 1868년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 졸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향의 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1906년 첫 시집을 발표하는 등 많은 시를 발표했습니다.

    시발라 여사의 남편이며 이 찬송가의 작곡자인 월터 스틸먼 마틴 목사는 1862년 매사추세츠 주의 이섹스에 있는 로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바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침례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경회 강사로, 부흥사로 전도집회를 인도하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찬송가는 1905년에 존 데이비스와 공동으로 펴낸 ‘구원과 찬양의 노래집’(Songs of Redemption and Praise)에 실려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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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월 2일 신년주일 설교

    2022년 신앙생활의 목표는 "기도에 힘쓰자"
    성구는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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