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교회는 통성 기도를 시작하며 주여 삼창을 외치는가?
누가 처음 시작하였을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상당수가 ‘통성기도’를 시작하기 직전에, 먼저 ‘주여 삼창’ 곧 ‘주여! 주여! 주여!를 3번 연창한 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용어사전」에서 ‘주여 삼창’이란 용어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그 근거가 없는 표현이므로 삼가야 한다고 했다.
또 「교회용어 바로쓰기」 책에서도, ‘주여 삼창’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며 성경적 근거가 없는 용어라고 했다.
그리고 「예장대신총회법규집」에도 공예배 시에 ‘주여 삼창’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이처럼 공신력 있는 여러 개신교 관련 책들과 유관기관에서도, ‘주여 삼창’은 반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행되고 있다.
또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 고질병은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한 번 맛들이면 중독되는 마약처럼, 치료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 개신교에서 ‘주여 삼창’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그중에 하나는 다니엘 9장 19절에
나오는 ‘주여’라는 단어들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향해,
‘주여 삼창’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먼저 이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고,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다니엘 9:17-19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한글개역개정성경)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위해, 다니엘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즉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된 후 70년 만에 포로생활이 끝나 자유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수치스러운 포로 생활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죄악이 해결되어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사죄와 선민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여! 주여! 주여!”를 세 번 외치는 것을 ‘주여 삼창’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문(단 9:19)에서, 다니엘은 ‘주여’라고 세 번 연호하지 않았다.
본문 19절에서 ‘주여 들으소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니다.
이것은 17절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또 19절의 ‘주여 용서하소서’라는 것도 기도 내용이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그리고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와 같이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만 세 번 나타나 있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향해 ‘주여 삼창’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개신교 신자들은 기도할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부르면서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성령이여! 성령이여!’라고 하면서,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성경 어디에도 신자들이 ‘성령께’ 기도한 사례는 없다. 로마서에서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이라고 했다(롬 8:26).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또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요 16:23).”고 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을 가리켜서 ‘주님’이나 ‘주
성령’이라고 부른 예는 없다. 그러므로 ‘주여 삼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 외에도 ‘주여 삼창’의 유래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견해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알아보자.
1) 먼저, 하나님께 ‘주여 삼창’을 크게 외치며 기도해야 효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주여’하며 크게 부르며 기도한 내용이다. 또 마태복음 9장 27절에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두 맹인이 ‘소리 지르며 말했다’고 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크게 소리 지를 때’에, 스스로 결단하는 마음을 심어주면서 다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다.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사람들의 목소리 크기의 정도에 비례해서 기도 응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벙어리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다.
2) 다음으로, ‘주여 삼창’을 외침으로써,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나처시로다.”라고 했다. 이처럼 피난처되신 하나님 앞에 나와 마음을 토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신자들을 위로하시고 참 평안을 주신다고 했다(요14:26). 이는 ‘주여 삼창’을 부르짖는 감정의 발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로이므로 넋두리와 신세한탄과 같은 인위적인 행위는 삼가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고대해야 한다.
3) ‘주여 삼창’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8장 27-28절에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고 했다. 이 말씀처럼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받기 위해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신들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바알 선지지들처럼 큰 소리가 아닌, 평소와 같이 기도하며 ‘응답하옵소서’라고 했다(왕상18:37). 이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과 언행을 알고 계시므로, 바알 선지자들처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유별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신자들은 엘리야처럼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 이제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 책들을 살펴보자.
(사례 1) : 「교회용어사전」의 ‘주여 삼창’에 대한 견해
기도할 때, 예배 진행자의 제안으로 “주여, 주여, 주여.”하며 고성으로 ‘주여!’를 ‘3창’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왜 기도를 시작할 때 이렇게 3회 연속으로 소리 지르고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아마 기도하는 사람의 종교적 열심을 나타내기 위함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함께 합심해서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름으로 기도에 서툰 성도도 기도에 담력을 얻게 하기 위함일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를 통해 집회의 감성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주여 3창’은 성경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한 마디로 성경에서, ‘주여 3창’은 없다. ‘창(唱)’이란 인격적 존재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노래나 구호나 함성을 외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는 ‘창’이란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 또 ‘주여 3창’은 기도하는 사람의 열정을 드러내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각성시키기 위한 무력 시위 같은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중략). 그러므로 ‘주여 3창’과 같은 잘못된 신앙 습관을 배격해야 한다.
(사례 2) : 「교회용어 바로쓰기」 책의 ‘주여 삼창’에 대한 견해
한국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주여 3창’은 다분히 무속적이며 미신적인 의미가 있다. 무속과 미신은 계시종교에서 절대자의 계시의존과 계시근거에서 신앙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힘을 가진 신을 찾기 위해서 강신(降神)을 위해 부르짖고 절규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로 올바른 영성적 행위는 아니다. 또 ‘주여 3창’이 기도의 담력이나 기도의 대중적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도 맞지 않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맞추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영적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기도의 조건으로서 간절성과 호소력이 필요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조건이 응답의 필수조건이다. ‘주여 3창’이 기도자의 의지의 표현이거나 어떤 언어의 반복 사용과 누적이 공적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기도의 과잉열정이나 통성의 고조 등을 통한 집회 분위기를 흥분시키는 인위적 유도행위는 언약과 계시의존적 신앙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여 3창’은 기도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환호적이고 구호적인 연창이므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 위의 사례들에서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임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서나 요란하면서도 울부짖는듯한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성기도 시에 집회를 주관하는 대부분의 목사는 ‘주여 삼창’을 세 번 연창할 것을 교인들에게 요청한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이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한국 개신교가 개발하고 창안한 놀라운 영적 유산으로 여기며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한국 개신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어떤 목사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도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한국에 있을 때처럼 외국에서도 그대로 실행해 왔다.
그래서 외국의 개신교인들 중에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식
통성기도를 영어로 ‘Korean prayer’라 칭하기도 했다.
이제는 외국에서도 한인교회를 통하여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외국인들도 한국식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모방하여 시행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한인교회
목사들의 공로는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20년 이후로는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그 왕성했던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을
예전처럼 듣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개신교회 내에서 코로나 19의 집단 감염이 많이 발생함으로 인하여, 국가에서 코로나 19의
감염의 큰 원인이 되는 ‘통성기도(주여 삼창)’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성경 학자들은 개신교 집회 때마다,
‘통성기도’와 함께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며 집단으로 기도하는 행태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한국 개신교 목사들은 코로나 19 전염병은 차치하고라도,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한국식 ‘주여
삼창(통성기도)’에 대해 진지하게 성경적으로 성찰한 후, 이것들을 영구히 폐지시켜야 할 것이다.
‘주여 3창’이라고 할 때 다분히 무속적, 미신적인 의미가 있다. 무속과 미신은 계시종교에서 절대자의 계시의존과 계시근거에서 신앙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라서 어떤 힘을 가진 신을 찾기 위해서 강신 또는 초신을 위해서 부르짖고 절규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행위로 종교 심성적인 열광적 표현과 유사한 것이니 바른 영성적 행위는 아니다. 또한 '주여 3창'이 기도의 담력이나 기도의 대중적 분위기 조성이나 호소력의 강조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부당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소원에 맞추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코자 하는 그의 선한 뜻을 신앙으로 확인하는 영적 행위인 것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기준은 인간의 요구기준과 일치하지 않는다. 기도의 조건으로 간절성, 호소력이 필요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조건이 응답의 필수조건이다. 기도의 과잉열정, 통성의 고조 등을 통한 집회 분위기를 흥분케 하기 위한 인위적 유도행위는 언약과 계시의존적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런고로 ‘주여 3창’은 기도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환호적이고 구호적인 연창이므로 기도의 어체가 될 수 없어 반드시 갱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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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삼창의 유래
1. "주여" 삼창의 유래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하여 "주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서 미사 후에 "엄마" 삼창을 하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2. "주여!" 삼창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1) 같은 말을 되풀이함으로 강조(强調)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겔 21:1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단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2) 크게 부르짖음으로 강청(强請)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마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3) 크게 소리 지를 때에 결단(決斷)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다른 생각이 틈타지 못하게 하는 최면(催眠) 효과가 있습니다.
3. "주여!" 삼창이 비성경적이라는 입장에서
1) 성경에서 가리키는 '주'(主, lord)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 '주여'라는 호칭이 구약에 100회, 신약에 107회로 207회 나옵니다.
그것을 분류하면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삿13:8)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창 18:32; 출 15:17)대신 사용한 경칭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할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여, ' 아도나이'(나의 주님)라는 명칭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아도나이 를 '퀴리오스'(Kyrios)로, 라틴어로는 '도미누스'로 번역되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마 16:16; 막 8:29; 눅 13:26; 요 11:27; 행22:8)를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여호와)을 가리키던 '주'(퀴리오스)를 예수님과 관련시켰습니다.
(3) 주인. 소유자. 상급자를 가리킵니다(창23:15,44:7;삿4:18).
2) "주여!" 삼창에서 가리키는 '주'(主, lord)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주'라 칭호하면 대부분 '하나님'을 가리키나, 신약시대에는 대부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호칭하고, '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 6;9; 눅 11:2).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여!' 라고 호칭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막 14:36; 눅 10:21; 요 12:27).
그렇다면 "주여!" 삼창은 기도의 대상을 잘못 정한 부르짖음입니다.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욥 35:13)
3) 하나님께 유기(遺棄)된 자에게 반복된 "주여 주여"를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 "주여"라는 호칭이 반복 된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용의 경우를 살펴보면 '주님'으로부터 유기된 경우였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마6:7)는 말씀과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눅 6: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8: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4) "주여" 삼창의 성경 근거가 잘못 해석되었습니다.
"주여!" 삼창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성경말씀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단 9:19)는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주여"의 반복이 아니라
① 주여 들으소서.
② 주여 용서하소서.
③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의 세 가지 기도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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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삼창으로 시작하는 기도 / 성경적 근거
우리들은 간절히 기도할때 “주여” 삼창을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O Lord, listen! O Lord, forgive! O Lord, hear and
act! For your sake, O my God, do not delay, because your city and your
people bear your Name.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들으시고 행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황폐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자기의 기도를 들어 달아고 간청할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강청하는 “주여”입니다.
두번째 “주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세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속히 행동으로 옮겨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아무런 생각없이 “주여”라고 삼창을 부르짖기 보다는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행하시 옵소서”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면 은혜가 더 충만할 것이며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겠습니다.
자료 사용 / 11-27-200(주일) 파트리스교회 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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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삼창과 엄마 삼창, 글 김문수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항상 엄숙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다들 마음 뿐만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모양, 바른 자세는 기본이었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슬리퍼, 초미니스커트, 민소매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음악을 위해서는 피아노와 오르간만 쓸 수 있었고, 드럼, 기타, 신디싸이저 등은 쓸 수 없었습니다.
회중들이 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는 것이나 옆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높여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목소리를 높여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항상
"주여! 주여! 주여~" 라고 주를 크게 세 번 부르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선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답변이라는 게
대부분 "크게 외쳐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는 정도였으니까요.
"주여 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
창(唱)이란 "노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우 삼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연호(連呼): 구호를 연이어 외침"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용어 그대로 "주여 삼창"이라고 쓰겠습니다.
둘째는, 다니엘 9장 19절을 근거로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크게 외쳐서 우리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16:14). 성경 어디에도 성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한 사례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요 15:16, 킹흠정)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다니엘 9:19을 그 앞에 나오는 17, 18절과 같이 비교해 보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니엘은 "주여"를
세 번 연호한 적이 없습니다.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8]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19]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이는 9:17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것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긍휼로 인하여 간구하오니 그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2. "주여 삼창"의 기원
이는 동양의 제사의식과 무속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하와 백성들이 만세를 삼창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은혜에 감사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망자(亡者)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고 합니다.
초혼의식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여 삼창"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렘 33:3, 킹흠정)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KJV)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못하는 것도 아니라.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 크기가 기도 응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닙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여"라는
구호를 세 번 크게 외쳐서 얻는 감정의 발산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크신 위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3)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1]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손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자고 있다면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 하매 [28]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쳐 부른 것이 아니라 보통 때와 같이
주께 말했습니다. 왕상 18:36에는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거나, 제단 주변에서 날뛰거나 하면서 주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주께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4) "주여, 주여" 연호한 사례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구절들은 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에 의하면, 주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주여, 주여"하고 외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글의 취지는, 기도할 때 주님께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주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런 분들을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예배에 들어와 있고, 또 그 의미도 모른 채 목회자들이 가르치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의미없는 외침이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주여 삼창"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부르짖음이 될 뿐입니다.
문화를 전파하여 외국에서도 "주여 삼창"을 외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3784
참고로,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마리아에게 "엄마 삼창"을 바친다고 합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6549829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GEXw&articleno=6307813&_bloghome_menu=recenttext#ajax_history_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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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바르게 알고 , 바르게 믿고 , 바르게 행하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때론 알지 못하여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삼창(三唱?)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없다'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주여!“ 삼창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고 간절
히 기도한다면 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래의
글을 올려봅니다..
주여 삼창의 배경은
성경 다니엘서 9장 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
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
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라는 말씀에서
1. 주여 들으소서
2. 주여 용서하소서
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기도한다는
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 위마다 지
칭하여 부른다’는 설과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
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援用) 하여 "주
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
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
다.
다음은 우주현 목사의 한국인의 기도!(KOREAN
PRAYER!)에 대한 글인데 많은 공감이 되어 올려봅니
다.
KOREAN PRAYER!
-우주현 목사-
제발! 주여~주여~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
오. 이는 무당들이 귀신 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
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
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 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
오.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
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
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
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
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
신학’ 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교수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시의 교회성장의 한 모델
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
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
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 와그너 교수
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 라는 이름으
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
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 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
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
말 그대로 ‘주여!’ 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
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 가 아니라 한국말
로 ’주여를 세 번 큰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
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
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
상품으로 ‘KOREAN PRAYER’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
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의 눈
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
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
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 이라고 생각되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
터 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 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
다. ‘KOREAN PRAYER’ 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
고 판단한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
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
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
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 보
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때 - 유독 큰 소리로 기도
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
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
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
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
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라 말씀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습니
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전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I will
answer...',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
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부르짖다’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
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
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
리에게 다시 보여 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
를, 그의 인격을 부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
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
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
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
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
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
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
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
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
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
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
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
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
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
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
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핀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
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
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
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
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
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
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
다. 오리혀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
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
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
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
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
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
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
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
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
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
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
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
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
서 문가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
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
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
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
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
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
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
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
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
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
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
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
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
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
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
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
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
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
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
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
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
레스를 푸는- 기도일 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
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
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
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
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묵
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
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
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
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
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
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