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혁목사 설교 자료(2023. 2024.


5월 12일 
어버이주일

효를 행하라(디모데전서 5:3-4)


효(孝) : 효도 효

부수 / (아들자, 3획)
모양자 / 子(아들 자) + 耂(늙을 로. 엄 로 노)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노인 노. 늙을 노(老)

부수 / (늙을 노 6획 [耂]
모양자 / 耂(늙을로엄 로(노)) + 匕(비수 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시야(Josiah)라는 랍비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참으로 복을 받은 자로다.
이제 백정 네네스 옆에 서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깨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위치가 백정 옆이라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백정은 매우 천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왔는데 백정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공부를 그만두고 기도도 게을리 하면서 하나님 앞에 시위합니다. 그러다 문득 백정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만나 보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백정 네네스는 유명한 랍비가 찾아 온 것에 너무도 황송하여 문 앞까지 나와 영접하고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셨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당신이 도대체 무슨 선한 일을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 옆에 서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게". 네네스는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또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변명합니다. "나이 많은 어머님을 모시느라 저는 회당에도 잘 나가지 못했으며, 좋은 일도 많이 하지 못했으니 용서해달라" 는 것입니다. 랍비가 그의 어머니 계시는 곳에 가보았더니, 어머니는 나이가 많아 기동을 전혀 못하시고 대소변도 못 가립니다. 네네스가 늘 어머니 옆을 지키며 대소변을 가려내고,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랍비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야 저의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백정 네네스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행위인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2백년 전에 선교사들이 중국에 선교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교문화에 깊이 젖어있는 중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모여 궁리합니다. 기독교가 효의 종교인 것을 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전도지에 효에 관한 성경 말씀을 삽입키로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의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장 17절의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는 말씀들입니다. 옳습니다. 기독교처럼 효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효도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살 자격도 없으며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도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고 강조합니다. 자녀나 손자들의 앞에서 부모님께 효를 행하여 그들로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효를 행하다' 는 말은 '유세베오' 라는 단어로서 '존경하다, 경배하다' 는 뜻입니다. 즉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를 존경하며 효를 행하여 본이 되어야 합니다. '효를 행하라' 는 것은,


첫째, 힘을 다해 순종하라

어느 마을에 화목하기로 소문난 집이 있었습니다. 동네사람마다 그 집을 부러워합니다. 한번은 화목치 못한 집의 노인이 화목한 집에 방문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집의 노인은, "우리 집이 왜 화목한지 보여주겠다" 며 큰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내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불러라." 나이가 40이 넘은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을 부릅니다. "뒷마당에 가서 감을 따오너라" 하고 명하였습니다. 감 열매가 겨우 맺히기 시작하는 철인데 둘째는 이유도 묻지 않고 감 열매를 따왔습니다. 셋째 아들을 불러 "막내야, 외양간에 있는 소를 지붕에 몰고 올라가라" 하십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은 소를 몰고 지붕에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야단법석을 하더랍니다. 그때 노인은 말합니다. "우리 집안의 화목은 자녀들의 순종에 있다네."

'순종하다' 는 '휘파쿠오' 란 단어입니다. '밑에서' 라는 '휘포' 와 '듣는다' 의 '아쿠오' 라는 말이 합쳐져 생긴 말로서 '아래서 듣는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진지하게 진솔하게 듣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선택해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 순종하십니까? 힘을 다하여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님께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전심으로 공경하라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아이가 돌아와 무엇인가를 열심히 외웁니다. 부모가 잘 들어보니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제5계명을 외우는데, "네 부모를 공격하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어." 그러자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아빠, 공경하고 공격하고 뭐가 달라요. 똑같은 것 아니에요." 그 아이는 공경이라는 말이 어려워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공경이라는 말의 뜻은 바로 공격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공경의 대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은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 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귀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무식해도, 얼굴이 못생겼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일이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말의 원어인 '티마오' 는‘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친밀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부모를 존중히 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순종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의미한다면 공경은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은 엄중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 공경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다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부모 공경은 그보다 우선입니다. 부모 공경은 기본 윤리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해도 부모 공경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부모 없는 자식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 공경이 가정의 기초 윤리임을 깨달아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정성으로 보답하라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Garfield)가 대통령 취임하는 날, 시간이 다 되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참 후 대통령이 한 노인을 부축하며 식장에 들어섭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가필드는 늙은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안 가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설득하여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제가 이렇게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다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라며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며 말하자 참석한 많은 이들이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날 복잡한 장터에 홀로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그냥 말없이 울며 서 있습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선생님, 왜 그렇게 서 있습니까?"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50년 전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헌 책장사를 하셨다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불편하니 네가 하루만 이 자리에서 일해다오. 약속한 사람이 찾아올 것이니 그 분에게 이 책을 드려라' 고 하셨는데 나는 '아버지가 헌책 장사하는 것도 창피한데 내가 왜 그 일을 해요' 하면서 거절을 했다네. 그러자 아버님은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시며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그 날 일하셨네. 그런데 그 일이 무리가 되었던지 그 날 이후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시다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은 부모님의 은혜에 얼마나 보답하며 사십니까? 혹시 살아 계실 때 섬기지 못하여 울고 서 있는 양심은 아닙니까?

본문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여기의 '보답하다' 라는 말은 '보상을 갚는다' 란 말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되돌려 드린다는 뜻입니다. 즉 효란 부모께로부터 받은 것을 자식이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부모님의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곧 효를 행하는 것을 자녀들로 손자들로 배우게 하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내가 주체이지만 '배우게 하라' 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손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먼저 부모에게 보답하는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효자 집에 효자 난다' 고 말합니다. 효자인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 자식이 배워 효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을 부모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녀들이 어찌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겠습니까?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효도 실천 십계명'을 가르칩니다. 첫째, 부모에게 신앙을 갖도록 해드려라. 둘째,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라. 셋째, 표정을 밝게 하고 웃음을 잃지 말라. 넷째, 궁금증을 풀어드려라. 다섯째, 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려라. 여섯째, 향토적인 음식을 해 드려라. 일곱째,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려라. 여덟째, 일거리를 드려라. 아홉째,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드려라. 열째, 등을 긁어드리고 손발톱을 자주 깎아드려라.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효를 행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의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돌보아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 생전에 효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효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구원받게 하는 일임을 더욱 명심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은 효를 행하여 자녀와 자손들이 본 받을 수 있는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힘을 다해 순종하며, 전심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해 보답하며 사는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월 21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397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공동번역)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NIV. 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세상(2889) 코스모스(kŏsmŏs)  κόσμος, ου, ὁ

1. 장식.   2. 세상.  3. 고전 4:9.
발음 [ kŏsmŏs ]
어원  / 2865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천하(마 4:8, 막 8:36, 눅 9:25), 세상(마 5:14, 고전 1:27, 계 11:15), 천지(행 17:24), 세속(약 1:27), 세계(약 3:6),
단장(벧전 3:3).

요한일서 2:15-16 /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5:19 / 악한 자 안에 처한 곳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NIV)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

에베소서 2:2-3 /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이와 같은 세상에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라고 하겠습니다.
(건 행 성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를 한마디로 "건행성(健幸成)"이라고 하겠습니다.
<굳셀 건, 다행 행, 이룰 성>
'건행성'이란 "건강(健康. health)"과 "행복(幸福. happiness)"과 "성공(成功. success)"이라는 세 단어의 첫 글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카드 하나를 받았습니다.
카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께
매일 저는 목사님을 영상으로 뵙고 항상 좋은 메세지로 예쁜 카드로 기쁘게 해주시는데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3개월 넘게 한꺼번에 일이 겹쳐(이사, 몸도 많이 아프고, 손님 또 힘들게 도와줘야 할 일 등) 너무 무리를 해서인지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견디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지요.
건강 유의하시고 가족 모두 편안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Georgia에서 Mrs 유 드림

카드를 받고 즉시 카톡으로 사진을 찍은 후에 짧은 글과 함께 사진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그 편지가 작년에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봉투를 확인하였더니 우체국 직인이 18 AUG 2023 PM 9
작년 8월 18일에 발송한 카드가 4월 11일 2024년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무려 8개월 후에 카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8개월 후에 응답될 수도 있겠구나!
한번 발송한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겠구나!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를 바라보자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All flesh is not the same: Men have one kind of flesh, animals have another, birds another and fish another.

육체(4561) 사르크스(sarx)  σάρξ, σαρκός, ἡ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뜻풀이부

1. 육체.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 1:24.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 1:24.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 2:23.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 1:1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누가복음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 시체(소마) 4983.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18:13).

σῶμα, ατος, τό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Spiritual Body

고린도전서 15:44.  46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The spiritual did not come first, but the natural, and after that the spiritual.



소마 프뉴마티코스(4983.  4152)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 18:13).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발음 [ pnĕumati-kŏs ]
어원 / 4151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에 관한, 영적.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 6:1.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자녀의 축복, 마음의 평강 등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패학을 통한 교훈 쌓기, 리더십 훈련, 영향력 증대, 효과적인 조직 관리, 갈등 관리, 재테크, 각종 영업 전략 세우기,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성장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질적 성장이나 성숙보다는 양적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면 건물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고민도 하게 되고, 또 더 큰 예배당을 확보하여 축제와 같은 예배 드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성공'이나 '행복' 또는 '물질적인 축복', '건강의 축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인에게만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악인에게도 똑 같은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듯이 물질적으로 풍부했던 부자는 진정한 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던 사람임을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풍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시면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12절에서는 세상을 이긴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일서 2:15-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16절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으로 번역한 '코스몬'의 원형 '코스모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의 활동 공간 및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사상과 기치관 등을 의미합니다(롬 12:2 ; 엡 2:1-2).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훈 목사님 간증입니다. 
어느 주일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데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자녀들에게로 가시게 되었다고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10년 동안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내 심장병이 나았습니다.”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수해 준 적이 없어서 “언제 제가 안수해 드렸습니까?” 물었더니 그 할머니 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목사님을 만나 손을 잡을 때마다 한손은 자기 가슴에 얹었답니다. 
자기는 그것이 10년 동안 목사님한테 안수기도 받은 것으로 믿었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심장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음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요한일서 5:5-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물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물세례
* 피 - 육체로 오신 예수님

예수의 피 즉 예수의 보혈(寶血)

1. 겟세마네의 보혈(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2. 가시 면류관의 보혈(마가복음 15: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마태복음 27: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요한복음 19:2. 5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3. 채찍질의 보혈(마태복음 27:26)


* 이사야 53:5


4. 십자가의 보혈(마태복음 27:35)


* 요한복음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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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4)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의 피에 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지난 3월 31일 부활주일 예배 때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자!" 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비오스"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체(屍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푸쉬케"라고 합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생명을 헬라어로 "조에"라고 합니다.

'조에'라는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합시다.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코스모스

둘째, 요한일서 2:15-16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속

셋째, 요한일서 5:19
마귀가 지배하는 곳

넷째, 에베소서 2:2-3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

예수는 누구이신가?

요한일서 5:5-7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령으로 증거

   물 - 물 세례 / 하나님의 말씀(상징적 해석)
   피 - 육체로 임하신
   성령 -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 죄 사함의 능력(구속의 능력)     

세상을 이긴 자가 얻을 것(요한계시록 2장, 3장)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나의 적용(適用) 
내가 갖고 있는 문제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으로 물든 도덕적 체계나 사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성도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들과 벗삼게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약 2:4).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이러한 세상의 악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싸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 이기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4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절)
5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 세상

무엇으로 :  믿음으로

​성경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요한일서 5: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했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물과 피와 진리이신 성령이 증거하였습니다.
물로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포하면서 증거한 것을 말합니다.
피로 증거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징조들을 통해 증거하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만을 증거하시는 분으로서, 그 분의 증거는 참된 증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세상에 임하신 분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는 분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현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셋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둘 이상의 증인들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일치되는 한 가지 증언을 지속적으로 하듯이 성령과 피와 물은 완전히 일치되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 되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모든 악과 죄에 관하여 한 증인이 아닌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사건을 확정하라고 하였다.
물과 피와 성령, 세 사람의 증언이 있으니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증언이 있으면 충분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고 직접 증거해 주셨습니다(9절).
사람들의 증언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게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선포하셨으며, 변화산에서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2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심을 직접 증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1-6, 마가복음 9:2-13, 누가복음 9:28-36을 살펴보면 변화산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질 때,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다양한 말로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거짓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세상의 어떤 것들일까요?

​'세상'을 좁은 의미로 보면,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그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겨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대인관계 기술, 처세술, 속이는 것, 형제를 미워하는 것, 남을 헐뜯는 말, 비방하는 말, 형제를 대적하여 이길려고 하는 마음, 물질만능주의,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 교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이단들의 미혹을 이겨내어야 합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인 유혹도 이겨 내어야 합니다.

​핍박을 이기는 것보다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핍박은 공격할 시점과 방법들이 이미 공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만 있으면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접근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끝까지 지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생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할 수 있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생명,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생이 있는 자는 육신적 사망 이후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계 2:7), 생명의 면류관(계 2:10), 만나와 흰 돌(계 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계 2:26,28), 흰 옷(계 3:5), 하나님 성전의 기둥(계 3:12),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신다(계 3:21)고 하였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얻게 됩니다.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러한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나아가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런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 가운데 구원에 대한 확신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혼돈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믿음 외에 또 다른 영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혹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동체 내에서 확신이 부족한 자들에게 또 다른 영적 지식(영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속에만 승리가 있고 영생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주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승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도록 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장차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육체의 연약함과 병듦과 장애를 갖고 살아갈지라도 그 날에는 천사와 같은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그 날의 영광된 삶을 생각하며 날마다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기뻐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 생명의 면류관은 다음 설교 자료




생명의 면류관(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lessed is the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because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the crown of life that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Do not be afraid of what you are about to suffer. I tell you, the devil will put some of you in prison to test you, and you will suffer persecution for ten days.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and I will give you the crown of life.

신약 성경에서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용어가 2번 사용되었습니다(야고보서 1:12, 요한계시록 2:10)

부활주일 설교 때에 사람의 몸에 대한 세 가지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 자연인
둘째는 시체(屍體) - 영적인 몸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 신령한 몸

부활 신앙이란 육체를 소유한 자연인이 신령한 몸이 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단계를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 영원한 삶을 시작할 때 얻게 되는 것이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강도가 오른편과 왼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 중에서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봉사도 하지 않았고 헌금도 하지 않았던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면 일생동안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도들의 신앙과 비교할 때 똑같은 구원을 받는다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과 환난에서 인내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이기는 자가 받을 영생의 복이다(약 1:12, 계 2:10~11, 딛 1:2).
마귀와 싸워 이기는 자가 받게 되는 12가지 복 중 하나이다(계 2~3장).



구원이란 단계에서
따라서 부활 신앙이란 "생명의 면류관"을 기대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본절이 2-11절과 연결된 것이며 13절 이하의 '시험'(temptation)과는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Ropes).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32:1;잠 8:32,34;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Burdick).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 본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 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Ropes, tasker).




요한계시록 2:10






주제2: [서머나 교회]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Johnson, Moffatt)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 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본 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외부로부터 오는 역경, 고난, 환난, 박해를 의미합니다.
2절의 ‘시험’, 3절의 ‘시련’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귀금속이 어떤 검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의 대상이 되었던 귀금속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진품으로 인정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디면 진짜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영생을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구원행로입니다.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역경에 직면해서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시험을 참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고 절망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시험도 참고 견디어냅니다. 복 받기 위해서는, 인정받기 위해서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시험의 길’을 반드시 넘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길은 결코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시험이 닥치면 묵묵히 참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인내하며 견디기만 하면, 복이 있고, 인정을 받고,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오직 정도(正道)뿐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참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복의 개념은 수고와 노력과 죽음을 초월한 인내로부터 오는 삶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초월한 인내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한마디로 “신앙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고난을 인내로써 승리하여 얻을 수 있는 신앙의 기쁨인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센 믿음과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굳게 서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한마디로 팔복은 세상적 가치를 초월한 자,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만을 인정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시련을 견디어 복 받을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시편 1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와 같이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사람은 어떤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참고 견딘 자를 인정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시험을 참고 견디어 통과해야 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딘 복 있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큰 상급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구원의 때에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한정된 생명이 아니라 무한정한 끝없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전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면류관’은 최후의 승리자에게만 주었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생의 시험과 시련을 다 견디고 극복하여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아 승리자로 인정받아서 면류관을 승리의 상급으로 받게 됩니다. 반드시 이 상급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즉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시련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에게는 생명 대신에 죽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썩어져가는 세상의 것을 사랑하다가 사막의 풀 같은 신세가 되지 말고, 오직위의 것을 사모하여 모든 시험과 시련을 견디어서 복 있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서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게 되시는 승리자가 되십시다. 아울러 이 땅에서도 복 받아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한 강도 이야기가 남긴 교훈(누가복음 23:39-43)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가 되신다 

이사야 63:1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시기 에 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해줍니다.

여러분들은 이 회개한 강도가 처했던 상태보다 더 절망적인 상태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 니까? 그는 행악자인 강도였으며, 율법을 범한 대가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죽어야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의 목숨은 시간 문제였고, 그의 죽음은 한걸음밖에 남지 않았으 며, 그의 영혼은 지옥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어가던 강도는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다시 말하면 그의 영혼을 돌봐주기를, 그의 죄악이 사하여지기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 으로 옮겨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늦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구원받기에는 너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 문은 닫혔고 자비와 은총이 멈춘 상태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받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아직도 무니 열려있고 자 비와 은총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직접 대답으로 확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 성경 속에서 구원받은 영혼들 중에 이 회개한 강 도처럼 자신의 구원의 확증을 직접 예수님께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217.

예수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지옥의 문 앞에서 끌어올려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을 완벽하게 증거 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장 연약하게 보인 때에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주 님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 한 죄인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7:25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자를 온전 히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받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던 이 죄인이 불속에서 타다 남은 나무 토막처럼 불속에서 끄집어내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기도로서 당신 앞에 나온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며 어떠한 죄인 이라도 회개하면 영접해 주십니다.

이 강도는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만찬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지도 않았으며 헌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강도의 믿음은 하루도 못된 단 몇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그리스 도에게 인정되었으며 그를 지옥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해 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많다할지라도, 우리들의 나쁜 습관이 날이 갈수록 고질화 되어 간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고칠 수 있으며 끌어올릴 수가 있으십니다.

천국이 우리들에게 문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 다. 바로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이는 구원을 받는데 다른 어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강도는 다 같이 그리스도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자기를 죽이려는 무리들을 우하여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참혹하게 고통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회개할 때 다른 한 사람은 마음이 강팍한 채로 있었으며, 한 사람이 기도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한 사람이 낙원으로 인도될 때에 다른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두 강도는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동일한 입장 이였고, 동일한 기회를 가졌고, 동일한 사건을 보았습니다만 두 사람 다가 아니라 한 사람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사건은 두 사람 중 기회를 선용한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방임하고 있는 많은 이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도 아직은, 좀 더 있다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마치 회개한 강도처럼 죽음 일보직전에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강도만을 생각했지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좌지우지 할 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218.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빛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빛의 자녀 가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동시대의 사람 이였고, 동일한 지위를 누렸으며, 동일한 선지자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구원을 받았고 사울은 버 림을 받았습니다.

부부가 같은 예배에 참석하여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나 남편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부인은 전혀 무감각한 채로 교회당을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 가운데 머물면서 여러분의 원하는 때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물론 우리 앞에 문은 항상 열려있으며 우리의 생명이 지속 되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생명을 오늘 밤에라도 하나 님께서 취하신다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순간에 소금기둥이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 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예뻐하심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를 놓친 회개는 거의 가 진실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회개한 강도의 구원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 라 구원받지 못한 다른 강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강도의 신앙

여러분들은 회개한 강도가 남긴 신앙의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왕국 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께 가하여진 모든 형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께 기 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언제 있었습니까? 어디에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모모든 백성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칠 때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 인들이 신성 모독죄로 사형판결을 내렸을 때에, 주님의 제자들 마져도 도망쳤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 흘리시며 저주받은 자로 죽어가던 때에, 바로 그때에 십자가상에서 그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으며 그에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세계가 창조된 이후에 이어ㅣ 같이 놀라운 믿음의 모 범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강도의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가련하고 불쌍하고 경멸당하고 멸시받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발견하여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연 찾아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처음 으로 고백한 위대한 신앙입니다.

또한 그 강도는 그리스도의 순전하고 무구함을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변증가입 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은 표적과 이적을 보았습니다.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지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뛰어 가고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가 정상인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제자 중 몇 사람은 변화 산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으며 장차 되어 질 언약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제자들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219.

그들의 신앙은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그들의 신앙은 거 짓말 이였던가요?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아 온데 뉘게 가오리까? 의 대답은 허공중의 메아리 이였던가요?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주님의 모습밖에 보 지 못 했습니다. 그 강도는 어떤 능력이나 영광이나 왕관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천국을 믿었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고서 자기의 영혼 을 그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죄악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 았으며 그 강도는 자기 죄를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한 강도의 신앙, 그의 기도, 그의 겸손은 그가 입으로만 회개한 자 가 아니라 행위와 진리에 있어서도 회개한 자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넷째, 죽은 후에는 낙원으로 간다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 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기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오늘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카토릭이 말하는 “연옥 설”처럼 죽음과 천국에 간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정화되는 변화과정을 거친 후에야

천국에 적합 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죽으면 바로 낙원에 간다고 말 씀 하셨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의 분리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영과 육이 결합하여 다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 죽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애통하며 장례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영혼은 낙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쁨과 즐 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20:3절에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했습 니다. 욥기3:7절에는 낙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태라면 여러분 들은 지금 지옥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천국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의 모범을 교훈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 이였으며, 전연 찾아 볼 수 없을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고백한 신앙 이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외 친 신앙 이였습니다.
회개한 강도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이 어떠해야 된다 는 것을 다시한번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죽음 저편에는 낙원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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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부활주일 설교
부활의 주만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 예수만 바라보자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세 가지로 요약해 봅니다.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주 - 죽음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권능의 주 - 사탄의 권세 즉 사망을 이기심
부활의 주님은 말씀의 주 - 말씀으로 창조,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심

"위기를 기회"라고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위기가 무엇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선교에 성공한 나라"
둘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에 성공한 나라"

그런데 현재 한국의 현실은 두 가지 성공한 사례에 대해서 계속 발전하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두 가지 이념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좌경화인가?
우경화인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회 절기에서 회복의 기회를 찾는다면 세 가지 절기를 바르게 지켜야 합니다.
세 가지 절기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핵심에서 찾는다면 "창조신앙(무<無>에서 유<有>)" "부활신앙(죽음<死>에서 생명<生>)" "재림신앙(거짓<僞>에서 진실<眞>)"

오늘은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신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신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오직 성경으로,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사람의 몸(肉體)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둘째는 영체(靈體)
셋째는 부활의 몸(부활체. 復活體)

부활의 몸과 영체가 다른 이유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가?
영체는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죽은 조상의 영이 제사상에 와서 먹고 가라고 합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아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영체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제사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부활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든 문을 굳게 닫고 모여 있을 때 그 가운데 오셔서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체가 되는 부활신앙은 무엇일까요?
 
부활의 신앙을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만을 바라보자"는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매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면 신앙생활을 일생동안 계속한다면 부활에 관한 설교는 40번 50번 60번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활주일 설교중에서 마음에 새겨진 것이 교리적인 것 뿐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리적인 것보다는 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부활 주님은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 생명의 주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생명의 주가 되려면 사망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부활의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히브리서 2:14) / 권능의 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려면 생명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 말씀의 주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3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우주 만물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은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존재의 근원이 되는 태초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설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어떤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나사로가 우리에게 나타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지라도 그가 또 다시 죽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믿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 어느 지역에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참여하고 그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셨고 은퇴하셨던 어느 장로님이 임종이 가까왔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이 장로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에게 영생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려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장로님, 그동안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장로님의 수고와 정성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둘 것입니다.
장로님의 그 믿음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텐데 죽은 후에는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실 줄 믿으시지요?"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그것은 내가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세우는 개척 공신일지라고 그 아들이 서울 장안에서 잘 알려진 목사가 되었을지라도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한 신앙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목사님이 성경을 펼쳤다고 합니다.

장로님 요한복음 5장 24절을 찾아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목사님이 이 말씀을 읽기 시작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나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는지 죽아봐야 알겠느니라."

그러자 그 장로님께서 목사님 성경이 어디 그렇게 기록되었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지요!
그때 목사님께서 장로님의 손을 꼭 잡고 정말 성경말씀 그대로 믿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봐야 알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후에 목사님은 아들되는 목사님에게 연락하고 장로님에게 분명한 깨우침을 전하라고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서를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4복음서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활동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지상사역을 마친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천상사역"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제5복음서"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둘째는 예수를 바라보라(12:2)

지난 3월 10일 주일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개의 단어로 소개했습니다.
"집중" "확산" "지속"
깊이 생각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집중력을 갖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먼저 영적인 촛점을 맞춘 후에 그 촛점을 세상에 내밀면 반드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한 힘을 삶의 도처로 확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대한 산불의 시발점은 아주 작은 불꽃에 의해서 시작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을 지켜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은혜에 도취되었다가 거친 세상으로 나가면 쉽게 무너지고 꺼져버리는 불쏘시개가 아니라 무너질 수 없고 꺼질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이적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 중에서 7가지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관점에서 쓰여 졌다는 것과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표시로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이적은 창조주로서의 기사
네 번째 이적은 재-출애굽의 의미를
마지막 일곱 번째는 다시 살아남의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표지로 이적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 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4. 5,000명을 먹이심(6:1-14)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5. 물 위를 걸으심(6:16-21)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 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나고, 넷째 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러내 에덴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6. 소경을 고치심(9:1-7)

​소경을 보게 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 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7,9)

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1,14~15)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도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14:6)

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라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1,5) 

“나는 ~이다” 라는 선어는 7번 이상 나오며(4:26,8:58) 특정한 표현을 빌어 선언한 경우 7번이다.

“나는 ~이다”란 선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장 확실하고 대답하게 단정하는 것으로 출애굽 3:14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체를 지탱시키는 음식에 자신을 비유하신 것이다. “신체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 예수께서 하고 자 하심 말씀이다.

초막절이 언급되는 문맥 가운데, 어쩌면 성전의 찬란한 촛대에 불을 붙었을 무렵,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고 말씀하셨다. 양과 목자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10:9), 나는 선한 목자라 고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은유를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것이 하나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은 못되지만 죽기는 싫다고 말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진퇴양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라고 선언하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배타적 선언을 하셨다.

아마도 황금빛의 포도나무 장식을 해놓은 성전을 지나실 때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나는 포도나무”(15:5)라고 말씀하셨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믿는 자들은 예수 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 





생명의 주(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사망의 세력을 받은 마귀(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도입 이야기)

첫 목회지에서 만났던 성도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 중에 황규선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당시 고려아연이란 공장에서 황산부장직을 맡고 계셨는데 황산부장은 차기 공장장이 될 수 있는 아주 유력하고 실력 있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성결교 신학대학 신대원에 입학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여유를 가질만한 자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당시 공장의 직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예수가 좋으면 그 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포기한 것이 있었습니까?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배우자를 포기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좋은 집을 포기했습니다.

아직도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예수님때문에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히브리서를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지상사역에 관한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 하늘에 계신 천상사역에 관한 것을 말씀하기 때문에 제5복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합니다.
전반부는 1장부터 10까지를 말하며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은 신분의 우월성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을 때 구약의 대제사장은 레위 지파 아론의 계열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유다지파 다윗의 계열에 속합니다.
마치 멜기세덱과 같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던 족보도 없는 제사장과 같은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신분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전반부에서 강조하는 신분의 우월성 때문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후반부는 11장부터 13장까지를 말하며 믿음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합니다.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우월성은 갖추셨기 때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2024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려는 설교 주제입니다.

찬송가 509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CCM악보 [B. B. McKinney 작사, B. B. McKinney 작곡]

1.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2.  네가 어둠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주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3. 네가 부활의 주 따라 가려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네가 주 안에서 길이 살리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4. 너의 죄악의 짐 무거울 때에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마음 문 열고서 주를 모셔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후렴>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부활

ἔγερ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454
1. 부활
2. 마 27:53.
발음 [ ĕgĕrsis ]
어원 /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부활, 마27:53.


ἐξανάστα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815
1. 부활
2. 빌 3:11.
발음 [ ĕxanasta- sis ]
어원 / 1817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부활, 빌 3:11.



ἔγερσις, εως, ἡ 1454 [ĕgĕrsis]

  • 부활, 마27:5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부활, 빌3:11.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 2.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1: 22, 2:31, 4:33, 17:18, 롬1:4, 6:5, 빌3:10, 히11:35, 벧전1:3, 3:21.
  • 3.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14:14, 20:35,36, 요11:24, 23:6,8, 24:15, 고전15:12이하, 히6:2, 계20:15이하.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상징적으로]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고후5:2.
  • 2. 거주, 주거
  • 3. [문자적으로, 천사에 관하여]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1.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명.
  • 3.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 κατανοήσατε τὸν Ἀπόστολον καὶ Ἀρχιερέα τῆς ὁμολογίας ἡμῶν Ἰησοῦν,(Nestle 1904)

1절의 구조를 분해해 봅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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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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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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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오늘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 압제로부터 독립을 외첬던 3,1절 101주년 되는 날입니다. 삼일절 하면 생각나는 분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교한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신자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 인해 일찍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하였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의해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파견소로 몰려가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습니다. 17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머리에 콜타르를 발라 가발 벗기듯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고, 벤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았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상자 안에 3일간 감금하고, 입과 호수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고, 달군 쇠로 몸을 지지고,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합니다. 상체를 벗겨 공중에 매달고 밤낮없이 채찍으로 후려칠 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에 개 줄을 묶은 채 네발로 기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헝겊을 얼굴에 덮고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전기고문은 물론 관에 넣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도 하였답니다. 결국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신앙의 사람 도마 안중근 의사도 그 모지 고문 앞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분들은 이땅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인생 경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오늘 성경 1절 말씀을 보면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경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바라보는 결승점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누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구시는 신천지가 거짓으로 교인 수를 알렸다고 고발했습니다. 신천지는 이긴자, 보혜사라는 그들의 교주 이만희에게 초점이 맞추고 보혜사 이만희를 보라고 합니다. 이만희가 말씀의 약속을 대언하는 대언자라를 것입니다. 이만희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실상으로서의 유일한 이긴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만희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희는 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나에게 못 해주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늘 변하는 세상의 철학과 사건을 바라보면 믿음의 경주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운동선수가 승리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승점을 향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에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입니다. 주(아르케곤)라는 말은 "시작자, 근원자,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입니다. "온전케(텔레이오텐)"라는 말은 "완전한 자, 성취자"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보자(아포론테스)"라는 말은 "주목하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현재분사입니다. 믿음의 창조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최대 전략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익이 될 수도 있고, 편리가 될 수도 있고,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나 명예, 권력,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목표가 되면 신앙생활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송창식씨가 노래하지 않아요.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고래사냥을 해보아도 남는 것은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알려 주고 있지 않아요.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지 않아요. 고기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허무만 남는 것입니다.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펑 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끝자락엔 공허와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하비콕스(Harvey Cox)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var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벗어버렸습니다. 세계적 명문대학의 자리에 올랐지만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이 온갖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부터 하버드 대학에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고 하비콕스가 강의하였습니다. 그때 강의 하였던 내용이 바로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 없는 하버드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니 다시 예수를 좇아가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합니다. 기름 없는 차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괴롭고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사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자신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하면 의기소침하고 욕심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바라보며 허무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 만족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연약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강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질되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나를 바라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폭풍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폭풍을 바라보았을 때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결국 두려워하고 우리가 고정한 것의 노예가 되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합니다. 못질하면서 망치로 손을 치는 사람은 못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리는데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리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벗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무거운 것(오그콘)"은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외부적 요인으로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 보따리, 경주를 방해하는 옷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외적인 장애물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핍박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적인 장애물은 광명의 천사로 다가오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신앙의 경주를 실패하게 합니다. 핍박은 달리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유혹은 잘 달릴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같은데 방향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죄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얽매이기 쉬운"이라는 말은 "쉽게 얽어매는", "달라붙는"이라는 말입니다. 경주를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죄는 우리를 쉽게 얽어맵니다. 단단히 밀착하여 옭아맵니다. 죄는 믿음의 경주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쉽게 달라붙어 옭아매는 것입니다. 죄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 쉽게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개인마다 빠지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성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쉬게 저지르는 죄가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는 생각, 성질, 행동, 습관 등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젊은이에게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년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노년에게는 돈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경주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달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신앙경주의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이번 코로나 19를 확산시키는데 매개체 역할을 한 사람들은 신천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며 포교하는 것입니다. 포교를 위하여 거짓말을 밥을 먹듯 하면 그것을 모략이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8단계 섭외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 사람이 속을 수밖에 없도록 포교를 합니다. 먼저 포교 대상을 정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합니다. 이름, 나이, 주소, 직업, 전화번호, 전공, 군대, 환경, 경제, 건강, 학습능력, 인성, 신신, 신앙, 관심사 등 그 사람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합니다. 2단계는 섭외 활동입니다. 우연을 가장하여 만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열매를 선별합니다. 그들에게 이용거리가 되지 않는 고령자, 환자, 저소득자 등은 제외시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인간적 신뢰를 형성합니다.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접근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유형별 상태를 진단합니다. 신천지 신도 3-7명이 대상자를 분석한 후 전략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신앙우위 선점입니다. 중보기도를 해주고, 꿈 이야기로 영적 우위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유형별 맞춤 전략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때 그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가짜 선교사, 가짜 교수, 가짜 전문가, 가짜 목사 등을 투입니다. 여덟 번째 단계로 복음방에 등록을 시킵니다. 이 과정이 다 포교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로 치밀하게 짜서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속여 포교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명 속이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너무나 자신에게 잘 해주며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을 속이면 대부분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방에서 성경공부를 시키며 성경공부를 누설하면 마귀가 틈탄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막음을 합니다. 같이 온 사람들은 100% 신천지인데 본인만 모릅니다. 사실 바보가 된 것입니다. 복음방 교육이 끝나면 센터에서 월 화 목 금 일주일에 4회씩 초중고급반 6-8개월 교육을 시킵니다. 학원구조로 큰 칠판을 가져다 놓고 비유풀이, 배도, 멸망, 구원, 세례요한 교리를 공부시킵니다. 결국, 교주 이만희가 구원자라를 것입니다. 이때 운동권 아이들이 이념교육을 시켜 세뇌를 시키듯 교리 세뇌교육을 시켜 교리 중독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험을 치루게 하여 합격한 사람을 유월을 시켜 신천지 신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철저할 패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이 무것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던지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증인들이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3-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신앙의 경주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예수님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경주하기는 경주하되 무엇으로 경주하라고 말씀합니까?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통해, 인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완주의 필수요소입니다.

이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심각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오랫동안 믿었던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광이 같은 네로가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고문을 당했습니다. 사자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10:33-34; 11:36-38).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히10:32-34) 그 때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고난을 감수(10:34)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자(12:4) 교회 내의 신앙인들이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불신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3:12)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말씀의 초보에 머물렀습니다(5:12). 공적 예배에 잘 모이지 않았습니다(10:25).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12:12). 불건전한 교리에 현혹되었습니다(13:9) 전반적으로 신앙이 침체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끝까지 완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참으신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참는 것"은 한 번 참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 제1 완료 분사로 죄인들에 의한 지속적인 적대 행위를 계속 참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참았습니까?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입니다. "거역한 일(안틸로기안)"이란 반박하고, 논쟁하고, 적의를 가지고 적대행위를 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보라고 조롱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미쳤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수없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해도, 조금만 좋지 않은 말을 들어도 원수 시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나버리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자존심이 뭉개지고, 옷을 벗김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 만인들 앞에서 조롱을 당했는데도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주하였습니다. 채찍을 통해 주어진 가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참았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에 창이 찍히는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을 참았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끝까지 참고 구속사를 완주하였습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이 당한 일을 비교하며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참으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쁨 대신에 하늘에서 얻을 더 큰 기쁨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수치를 개의치 않고 인내했다는 말씀입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말은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낙심의 의미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진다" 입니다. 낙심에 감염되면 풀이 눕는 것처럼 희망을 잃어 버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친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자 낙심하고 중간에 포기하고 배교하는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피곤하게 하는 것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끝까지 가지 못하게 낙심시키고 지치게 만듭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사람을 보고 낙심시킵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사장으로, 직원으로 지치고 낙심을 시키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전략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쉽게 지쳐 낙심하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핍박과 고난도 참고 견디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여야 하겠습니다.

"1. 구주를 생간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모세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다윗 17년을 인내하였습니다. 아브라함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주민 90%이상이 예수님을 믿는 섬이 있습니다. 천사의 섬이라 불리워지는 전남에 있는 증도입니다. 현재 22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이지만 11개의 교회가 세워져있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김준곤 목사, 정태기 목사, 이만신 목사, 이성봉 목사 등 10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답니다. 그 씨앗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님이라고 합니다. 17살 나이 결혼했지만 남편은 신혼초부터 집을 나가 소실을 얻어 딴 살림을 차렸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며 모진 고난을 다 참고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예수님 전했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일제의 강점기 때도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답니다. 얼마나 전도를 했는지 고무신이 1년 동안 무려 아홉켤레나 닳아 없어졌답니다. 만 40세에 성경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무려 11개 교회를 세워 오늘까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간호사로,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유모로, 때로는 우편배달부로 교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봉사하고 심부름 하는 역할을 도맡았답니다. 6.25 때 문 전도사님은 공산당에 채포되었답니다.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었답니다. 전도사님은 순교의 현장에서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고 59세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영광 염산교회는 6.25때 공산당에 의해 77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65명이 순교당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변절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였습니다. 공산당들이 예배당에 불을 질러도 새끼줄로 온 몸을 꽁꽁 묶고, 돌맹이를 목에 메달아 교회 앞에 있는 바닷가로 밀어 넣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격려하며 변절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전교인 65명이 수장되거나 몰매를 맞고 대창에 찔려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이들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주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며 찬송을 부르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내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화입니다. 영원한 승리입니다. 영원한 영광을 차지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순교의 자리를 걸어가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3.1절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땅 영적 전쟁터에는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패배자, 배신자,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은 믿음의 경주에서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이 있다하여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도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면 넉넉히 인내의 강을 건너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부활 이야기

    ▶톨스토이의 부활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귀족 청년 '네풀류도프'는 '나타샤'라는 그의 하녀를 유혹하여 임신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녀는 그 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눈물나는 고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해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게 했던 그 남자 '네풀류도프'는 그 동안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그가 그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때 불장난하여 그렇게 만든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돕게 되었습니다. 차마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면하여 주는 대신에 시베리아 먼 땅으로 유형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며 그녀를 따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한 여인숙 방에서 밤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젊은 날의 방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머지 생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부활의 개념을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는 개념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이제 우리는 죽어도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집니다. 이날은 학생들이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당에 모여 학교측이 초청한 유명인사로부터 강의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해인가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박사가 강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된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여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한 노인이 일어나 말하기를 '틸리히 박사님!'하고 부르고는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과를 베어먹기 시작하더니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하고는 또 사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사과를 잡수시는지 이 노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목하자, 다시 노인은 '니이버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하더니 또 다시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방금 다 먹은 사과의 꼭지를 높이 쳐들고서는 '박사님! 방금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가요, 단가요?'하고 물었습니다. 몹시 당황한 틸리히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 보지 못했기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노인은 그 남은 사과 꼭지를 가방 속으로 던지면서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천 여 명이 사람들이 까르르 웃고 손뼉을 쳐대는 통에 강단은 삽시간에 유쾌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틸리히 박사는 조용히 강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대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큰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아서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는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어했던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의 작은 구유가 되어 나귀가 핥아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 한 그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께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만선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답니다.





    2024년 주일 설교 계획
    성도들이 즐겨 암송하는 간단한 성구를 중심으로 설교를 계획한다.

    사순절 제4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깊이 생각하라(2657) 카타노에오(katanŏĕō)  κατανοέω     

    1. 주목해보다.  2. 보다.  3. 생각하다
    발음 [ katanŏĕ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주목해보다, 자세히 보다, 마 7:3, 눅 6:41, 행 27:39.
    2. 보다, 생각해 보다, 약 1:23, 24, 눅 12:27, 행 27:39.
    3. [영적인 의미에서] 생각하다, 주목하다, 눅 12:24, 히 3:1, 10:24.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에게만 집중(集中)하라!

    * 집중(集中) : 모을 집, 가운데 중

    1. (어떤 일ㆍ현상(現象)ㆍ대상(對象) 등(等)이) 한 곳이나 한 대상(對象)에 또는 한정(限定)된 짧은 시간(時間)에 몰리거나 쏠리게 함.
    2. (어떤 일에 정신(精神)을) 바짝 차리고 쏠리게 함.
    3. (어떤 대상(對象)에 시선ㆍ이목 등(等)을) 향(向)하여 미치게 함.

    집중이란 촛점을 맞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야기) 사무엘이 어려서 에덴 유치원에 다닐 때 유치원 원장님이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특별 부탁으로 일찍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준비물에 "검은 먹지 1장" "볼록렌즈 1개" 라는 것을 준비시켜 유치원 가방에 넣거 그 다음날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유치원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이 화를 내며 먹지와 볼록렌즈가 가짜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먹지가 타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무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후에 볼록렌즈를 햇빛에 촛점을 맞추고 먹지 위에 올려놓았더니 먹지가 연기를 피어오르며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런 불평이 일어났을까요?
    볼록렌즈와 햇빛과 촛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태양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가 되는 내가 촛점을 맞추지 못하므로 검은 세상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촛점을 맞출 수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라면 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거나 나를 세우려는 것은 아직 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님의 삶을 확산시켜라!

    확산(擴散) : 넓힐 확, 흩을 산
    - 퍼져 흩어짐

    목회자들의 삶의 반경은 매우 좁습니다.
    만나는 대상이 거의 목회자 또는 성도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환경에서 예수를 확산시킬 기회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목회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이중직을 갖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집중력(集中力)을 가져야 합니다.

    집중력(集中力, attentional control)은 무엇을 집중할지, 무엇을 무시할지를 결정하는 개인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확산력(擴散力)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향기가 되어 확산력을 퍼쳐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응집력(凝集力)을 갖는 것입니다.

    응집력(凝集力) : 엉길 응(凝), 모을 집(集), 힘 력(力)
    - 어떤 단체(團體)나 조직(組織)에 속하는 구성원(構成員)들을 통합(統合)하는 힘.

    (예) 모래 속에 자성이 강한 지남철을 넣고 흔들면 자석에 작은 쇳조각들이 달라 붙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의 철을 모래밭에 넣고 흔들면 아무 것도 달라 붙지 않습니다.
    자석에는 자성이 있기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력(持續力)을 가져야 합니다.
    - 가질 지, 이을 속, 힘 력
    이어갈 힘, 견딜 힘, 유지하여 오래 지속하는 힘.

    예수로 살아가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흥분현상입니다.
    정말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로 인하여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에서 당하는 온갖 시련과 고통과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의 집중이 되어야 할 예수님은 누구인가?

    첫째는 사도가 되신 예수님
    둘째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까?
    물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모세는 사환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예수님은 그 집의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가톨릭 성경)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 신앙 고백의 사도이며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공동번역)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성도 여러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신앙의 대사제이신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 8:5; 9:23;11:16; 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 19:6; 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 10:40; 눅 10:16; 요 4:34; 5:23, 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 Ned.35b; 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사도(652) 아포스톨로스(apŏstŏlŏs)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apŏstŏlŏs ]
    어원  / 649에서 유래





    2. '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 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Hewitt).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성경 전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꺼?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에서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본문을 정리하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믿는 도리의 사도 즉 신앙의 사도가 됩니다.
    신앙의 사도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마다 사도신조를 암송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예수는 대제사장입니다.
    율법에서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속죄소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죽으심으로 더 이상 다른 속죄제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신앙의 표준이 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우화를 기억하시나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도저히 서로 융화하지 못하고 교리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였을 때 처음에는 개와 고양이가 서로 자기 영역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개와 고양이와 돼지를 한 울타리 안에 넣고 어떻게 지내는가 지켜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서로 자기 영역을 유지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 하며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울타리 안에 거주하게 했는데 이들은 서로 융화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리가 신앙의 기준이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가 되신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깊은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상속받은 후에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이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한 후에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품군으로 맞아드린 것이 아니라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고 하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사도 즉 신앙의 도리가 되는 기준입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감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는가를 보게 된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나오면 또 한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신가,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성소 (holy of holies)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하며, 분리되어 휘장이 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자기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공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 피를 뿌리는데 하나님께서 그 피를 받아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1년 동안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년에 또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와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도답게 살라(대제사장의 예복)

    금방울은 '믿음의 말'을 상징하고
    석류는 '향내나는 삶'을 상징한다.
    결국 대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금방울과 석류를 단 것은
    대제사장은 늘 믿음의 말을 하고
    향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다만 우림은 '빛'의 복수로 '강한 빛'을 의미하고
    둠밈은 '완전함'을 의미하기에 아마 하나님의 판결은
    가장 정확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밝은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준다.
    경망스럽지 않은 밝은 표정을 하는 것과
    크게 웃지는 않아도 넉넉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는 것은
    피로한 현대인에게 최고의 부조가 된다.


    성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벧전2:9)
    그 말씀은 특권의식을 조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남이 아닌 자신부터 더욱 성결하고 책임적인 삶을 살라는
    주체의식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어떤 건축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
    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의 중심이 있다. <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된다.
    일본 사람이 집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한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이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한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
    불 꺼진 제단이 무엇을 하는가?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교회에 와서 예배 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미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이며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홀로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가정의 중심은 제단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론의 제사장직과 의복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우리를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완전에 연결시킨 그리스도의 역할을 상징하였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절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600만에서 1,000만 명 가까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시대입니다.

    배교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 히브리서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라마나욧 1년 1독 성경 읽기 본문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였는데, 히브리서를 읽으며 어렵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고 있는 것같이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제사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서신서 중 저자도 명확지 않고 형식도 파격적인 성경입니다. 저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바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바나바, 아볼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어떤 분은 바울의 생각을 대필해 누가가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내용적으로 바울서신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대개 서신서들은 누가 누구에게 어디서 쓴다는 내용과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1장 1절부터 바로 본론적인 이야기로 진행되어, 이런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배신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발생했습니다. 배교의 이유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믿던 믿음과 예수를 믿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율법과 성전 제사, 천사의 가르침 등에 익숙했고 그런 것들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증표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배교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추정합니다.

    천사, 모세, 대제사장 그리고 예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종으로 생각하는 '천사'와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과 싸우기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천사는 구원받을 구속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섬기는 영일 뿐이며, 예수님은 그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보냄받은 종이 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더욱 귀하다는 것을 강변합니다.

    또 모세가 큰 역사를 이룬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을 아들이니 모세보다 중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고 속죄소에 들어야 죄를 고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할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강변합니다.

    더구나 옛날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지만, 예수님은 아론의 자손이 아니라 아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경배를 받았던 멜기세덱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은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왕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손으로 지은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크고 온전한 장막에 거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자와 같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 그렇게 배교하지 않고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현대인들에게 히브리서는 동일하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량해 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2장 17절은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고 고함으로 죄 사함을 돕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 같이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짐승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따라 온갖 속죄 행사를 행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한 처벌이나 죽음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고 완전한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것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죄의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마음에 절망과 고통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그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나아가던 보좌, 지성소에 이제 우리 스스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하고, 우리의 필요를 고하고, 우리의 아픔을 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 자입니다.

    2장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인간이 가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고민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받았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고문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급기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감내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은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경험한 이유가 시험받은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 시험의 고난에서 누군가 건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 스스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겪으시고 바로 그 경험을 가지고 우리를 실질적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5~6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받는 위로도 크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이십니다(히 4:15). 마땅히 받을 죄를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고난은 순결한 샘이 되어 우리의 고난을 씻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문 밖에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되 성문 밖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4장 11~12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필요한 것들은 성전의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버렸고(레 1:6), 나머지 가죽과, 고기, 똥 등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밖 지정한 장소에서 불사르고 그곳에 재를 버렸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드려진 제물을 진영 밖에서 불태워 버린 이유는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어 부정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재조차도 사람들이 있는 진영 안에 버리지 못하고 진영 밖에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재물이 되사 번제로 드려지고, 그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고 버려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분, 천사보다, 모세보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래서 사실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담당하여 제물이 되시고, 자기 자신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이르게 되는 결론은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버려지는 치욕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 그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런 저런 기적과 표적을 바라거나,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따르고 그의 삶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진영 밖에서 태워져 버려진 제물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저 여느 가게를 열듯이 장소를 정하고 내용물을 준비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살고, 그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 아닙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단순하게, 작게, 더불어 함께'라는 가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만, 목사만 지켜 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교회 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공동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공동체, 한국교회 건강 회복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 우리가 꿈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뜻을 이루는 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고,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사람이든,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고, 이미 이런저런 직분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든 다시 부탁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룩한 대제사장,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이 당할 모든 고통을 당하셨던 것, 그래서 영문 밖으로 버림받았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들 또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스스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엣 것으로는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 되시고 길 되시고 진리 되시며 믿음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궁극적인 실패일 따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천문학자가 망원경을 가지고 밤새도록 성좌를 바라봄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깊이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옆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리고 심판주가 되어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처럼 믿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눈에 보이는 충분한 근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롬8:24). 보이지 않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기 어려운 것들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에 그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인격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사도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란 말의 원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직분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는 참된 순종을 보이셨고 사람들에게는 참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체된 성도들을 양육하시고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목자되시어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삶을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셔서 가지인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도우시며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교회의 돌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랑되셔서 영원한 아버지 집에서 누릴 아름다운 삶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대제사장은 둘째 장막에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되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피는 백성의 죄와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물이 되어주시고 그의 흘리신 피로 우리를 대속하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하여는 죄 문제에 대한 화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동정과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말미암아 몸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히4:15).

    넷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1)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생각에는 위대한 힘이 있어서 마음으로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상대방이 내게 끌려오고 내가 그에게로 끌려가서 연합되고 동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 건설의 기초가 되며 또한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도 “대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2)심령이 단순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된 생각은 심령을 통일시켜서 단순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단순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번잡스런 세상의 고락에 휩쓸려 요동하지 않습니다. 본래 생각이라는 것은 기차,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천하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영력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힘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영력은 최고의 힙입니다. 성도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써 말씀의 새 힘, 기도의 새 힘, 지혜의 새 힘, 유혹을 이기는 새 힘, 환난을 이기는 새 힘, 핍박을 이기는 새 힘, 봉사의 새 힘, 전도의 새 힘, 기쁨과 감사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힘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4)죄악이 심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죄악의 씨를 뿌리는데,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탄이 들어올 길과 틈이 없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모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썩은 생선에 쇠파리가 날아오고 향기로운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는 것과 같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향기를 뿜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심령의 천국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천국을 이룬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천국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증거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5)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귀에 세상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고 눈에는 세상의 현란함 외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는 것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길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4)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을 때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으나 한 사람만 데려감을 당하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나 한 여자만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Ὅθεν, ἀδελφοὶ ἅγιοι, κλήσεως ἐπουρανίου μέτοχοι, κατανοήσατε τὸν Ἀπόστολον καὶ Ἀρχιερέα τῆς ὁμολογίας ἡμῶν Ἰησοῦν,(Nestle 1904)

    1절의 구조를 분해해 봅시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깊이 생각하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러므로’(Ὅθεν,)는 앞선 1-2장의 결론 또는 그 이유로 인해 마땅해 해야 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입니다. 1-2장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1-2장의 핵심은 ‘성육신’을 통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κατανοήσατε)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12:24에 사용되었습니다.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는 까마귀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까마귀가 먹고 살 수 있다면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겠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라는 구절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는 도리의 사도’와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인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이 사도는 삶의 본보기로서의 예수입니다. 이것은 선생으로서의 예수, 삶의 모범으로서의 예수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하셨던 삶, 언어, 생각까지 닮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믿는 도리’(ὁμολογίας)는 단어는 ‘고백’ ‘직업’이란 뜻을 같습니다. 왜 이런을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ὁμολογίας’라는 원 뜻은 ‘공적’이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어떠한 공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ὁμολογίας는 ‘λογίας’ 즉 이성과 논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당한 추론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좀더 의미를 확장한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 모세의 충성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 즉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모세와 비교합니다. ‘모세가 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로 충성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데 충성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넷째, 명을 받아 하나님의 집(성막)을 지었습니다.

    다섯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중보해 그들을 광야에서 진멸 당하지 않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이는 없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우월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역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모세를 앞서지 못합니다. 모세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충성의 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θεράπων)으로서 신실하였고’

    맞습니다. 그는 종이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백성들의 구약의 백성이나 선지자들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율법 아래 있었고, 우리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3) 우리는 그의 집이라

    모세의 충성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충성을 ‘집’에서의 충성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지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친히 집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럼 모세가 충성했다는 집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신약적을 말하면 교회입니다. 모세가 충성한 것을 앞서 말한 것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5절)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증언’입니다. 모세를 사역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합니다. 비밀에 갇혀 있는 같지만 이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1-2로 되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2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의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엄밀하게 복음이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앞으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들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입니다. 모세는 신약에 나타난 실체의 그림자이며, 도래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증언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하듯,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6절) 충성했습니다. 종인 모세의 섬김과 아들인 예수의 섬김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모세가 영원히 충성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아들로서의 섬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사역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망과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그의 집’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섬기고, 아들이 목숨을 다해 사랑했던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시며 믿음의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모방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아들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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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좋다 -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





    가. 성도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본문은 우리가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그와 보조를 맞추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는 ‘고백’ 또는 ‘찬양’의 뜻이다.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인 만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를 구원의 방편(수단)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고 높여야 할 목적으로서의 고귀한 분이다. 성도는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그의 신실하심을 소개하였다.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2절a). 여기서 ‘신실’(피스토스, faithful)은 ‘믿음의 충만’(faith + full)을 가리킨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신실함에 있다. 이를 고려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나. 예수님의 인성만 보면 안 된다.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하였다. 신실하심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모세가 같다.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2절)라고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집에 해당한다면 예수님은 집을 지은 이요, 집은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있다.

    * 예수님은 어떤 성현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행동하셨다. 그는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의 성품과 사역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참조하라(요13:14). 신성을 감추시고 참 인간으로 사신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 이는 바울이 ‘케노시스 기독론’으로 소개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 헤퍼는 이를 ‘이 세상으로의 초월’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다.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라.

    5-6a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따라 신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엔) 종으로서 신실하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에피) 아들로서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종의 믿음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욱 귀하다. 우리에게도 아들의 믿음이 필요하다.

    *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또한 주인의 엄한 벌이 무서워 두려움으로 복종한다. 율법을 따름이 이것에 비견된다. 그러나 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섬긴다. 복음적인 믿음은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을 맡아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그의 집을 맡은 이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삯군처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신실하게 행동하라.

    라. 신실한 이가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된다.

    6절b,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본문은 신실한 일꾼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그의 ‘집’(오이코스)은 ‘가족’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살려면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야 하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이라고 조건을 제시한 것을 참조하라.

    * 우선 최선을 다하려면 ‘소망의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확신’(파르레시아)은 ‘확신에 의한 담대함’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이므로 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데 여기에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또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르심에 대한 자랑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자랑’(카우케마)은 ‘자부심에 의한 즐거움’을 말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하는 길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따라야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다. 이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영광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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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시편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예레미야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열왕기하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께 고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고정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죄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유혹은 두 마음을 품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습관, 태도, 생각, 사고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도며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1절).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십자가 구원의 길을 통해 대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죽이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지만, 우리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스스로 고난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8:1).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
     
     
    둘째,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2~6절a).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와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간구와 기도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건축한 건축자였고, 모세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은(옛 언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서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고,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했던 역할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새 언약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주인이 대답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이제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마 25:21).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능력이 탁월하거나 재능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신실한 태도로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대제사장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고,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도 그분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충성인지 아닌지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충성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충성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십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6절b).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과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고, 예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고,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연약함과 절망스러운 상황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붙잡으면, 예수님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면 어떤 시련이 와도, 유혹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십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시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척이나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로 인해 노래도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까, 나 때문에 노래를 부르실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노래를 부르실 만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무한한 은혜이자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 된 모두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상황이 풍랑 가운데, 궁핍 가운데, 절망적인 상황일 때 진실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어둠, 사망, 심판에서 건질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아닙니까? 예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분이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를 갖고 나가신 것이 아니라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루지 못했던 옛 언약을 완성하신 새 언약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자랑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길입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그분에게 마음과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소망을 두고, 그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승리하십시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승리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7장:7-9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구세주(요 3:1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메시아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선택 받은 백성을 둘 필요가 없으셨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민족의 나라로부터 오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이유는 오로지 메시아를 태어나게 할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들이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선교사의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과 나라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속자이며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이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 곧, 세상에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03-31-2024(부활주일)
    하나되게 하소서
    에스겔 37:15-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지금은 한국교회와 한인이민교회는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권을 잡았고 김정일이 죽은 후에 또 그의 아들 김정은이 대를 이어 통치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3대 세습이라는 통치가 과연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스겔 37:17. 19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

    동독의 라이프찌히(Leipzig)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오랜 세월 성 토마스교회 악장으로 활동했던 음악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20세기에 이르러 라이프찌히는 독일의 통일에 기여한 니콜라이교회로 인하여 다시 세계인의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성 니콜라이는 상공인과 중소 실업인의 성자로 그 이름의 뜻은 ‘약자들을 돌보는 방패’입니다. 라이프찌히 도시의 설립과 같은 때에 지어진 이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교회는 도시의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처럼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의 역할을 했습니다.

    1981년 동독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운동’이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동독의 러시아 미사일 설치와 서독의 나토(NATO) 핵무기 설치 문제로 두 독일이 대립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15-22세)이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고, 그 모임은 매주 모이는 ‘평화를 위한 월요기도 모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여 이 기도회를 3-4년간 인도하였는데, 점차 300-400명이 매주 참석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큰 기도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독에 핵무기가 배치되자 실망한 사람들이 기도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회 참석인원은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작은 방으로 기도실을 옮겨야 했고 결국 기도운동을 중단하자는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감독자가 나서서, 기도모임을 절대 폐지하지도 말고 더욱이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며 저들을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3-4명이 모여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동독인들의 월요 평화기도모임에 함께 하셨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저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1961년에 세워진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인들에게 통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명의 젊은이들과 기성세대들이 마음을 합한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을 동서독 통일의 불쏘시개로 쓰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Now is the time to pray).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전심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실망하지 말고 기도할 때입니다. 이민교회와 조국교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입니다. 우리 당대에 38선의 철조망이 걷히고 독일처럼 한반도에도 통일이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통일한국이 마지막 때에 선교를 위하여 쓰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미주 전역에 기성세대와 다음세대에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부흥의 불쏘시개, 통일의 불쏘시개,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불쏘시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선교의 불쏘시개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마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나태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속 기도의 줄을 잡으세요.

    동독인들이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스교회에 모여서 기도했듯이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다음세대들이 통일한국과 하나님의 나라에 주역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들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독일통일의 역사에서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를 맨 앞에 놓는다.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와 성도들은 1981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평화기도회를 드렸다.
    1989년 10월 9일 평화기도회 후 7만 명의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펼쳤다.
    1개월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성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회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매주 통일기도를 드리고 있다.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서울목요기도모임이 5월 5일 900회를 맞는다.






    루마니아, 토케스 목사

    칼 바르트(K Barth)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루마니아는 1947년 공산인민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 차우세스크(N Ceausescu,1918~1989)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1965년 집권, 독재자가 되어 무자비하게 통치했다. 1989년 12월 25일 그의 부부는 총살형을 받고 27일 집행되었다. 그의 변호사마저 변호를 거부했다. 1980년대 초, 독재 권력의 인권 탄압이 한참일 때 차별 받는 동족들을 보살피기 위해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가 루마니아의 조그마한 마을 티미소아라(Timisoara) 교회에 부임했다. 전임(前任) 목사는 공산주의 정부를 지지했다. 이와는 달리 토케스 목사는 정부의 불의와 인권 탄압을 비난하며 저항했다. 주일마다 예배당 안에 교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임 당시 40명이었던 교인이 5천 명으로 늘어났다. 토케스 목사는 정보 요원들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경찰관들이 체포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수 백 명의 교인들이 목사의 사택(舍宅)을 에워쌌다. 촛불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체포하러 들어갔다. 시위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찰서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군중의 숫자가 2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군 병력이 동원되어 진압하려고 발포(發砲)를 했다. 1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불구하고 군중들은 해산하기를 거부했다. 토케스 목사가 연단에 올랐다. “기도합시다.” 수많은 시민들은 무릎을 꿇었다. ‘주기도문’을 드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단합된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었다. 저항의 함성(喊聲)은 수도 부쿠레슈티로 옮겨갔다. 얼마 뒤 루마니아를 철권(鐵拳)으로 통치하던 차우세스크 폭압 정부가 와해, 붕괴되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폴란드 공산 정권은 고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저항 운동이 시작되어 공산 정권을 무너뜨렸다. 폴란드 자유 노조가 항거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동독은 1982년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칼을 쳐서 쟁기로’ 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바흐(Bach)가 감동적인 연주를 했던 적이 있는 역사적인 교회였다. 1만, 9만…,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참가했다. 베를린에 이르자 5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철의 장막을 상징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통일을 이루어 냈다.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마르크스의 동상들은 한때 신(神)처럼 떠받들어졌지만 지금은 공터에 흉물로 버려져 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사 11:4)이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기도, 찬양은 악의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다.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 '기도의 혁명'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루마니아의 공산주의자는 천명이 채 안되었다. 그들 중 구두만드는 직공이었던 니콜 차우세스큐란 젊은이는 전쟁 중에 줄곧 교도소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석방되어 공산청년동맹의 비서가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소련을 등에 업고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정권을 쥔 그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통치술에 감명을 받고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나서 루마니아를 북한체제처럼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국민들을 거미줄 같은 조직의 틀 속에 묶어 체제를 유지했고, 4가정 중 한 명은 비밀경찰이었다. 수백만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이 투옥돼 죽어갔다. 국민들이 톱밥 섞인 빵을 사기 위하여 줄을 서 있는 동안 정부는 대부분의 식량을 수출했고,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당 간부들은 비만으로 고민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정부의 방침에 동조해 예배 참석자의 명단을 정부에 보고했다.

    그런데 반석 같이 견고했던 그의 권력기반이 198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갑자기 허물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그의 독재권력이 도대체 어떻게 허물어졌을까? 그 시작은 티미소아라시에 있던 50명 남짓한 작은 개혁교회로부터 시작됐다.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란 젊은 목사를 어수룩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기에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신심이 깊었고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다.

    그는 저녁시간에 작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엔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만 참석했지만 점점 기도가 절실해지고 나라와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기도회가 폭탄이 되어 차우세스큐 정권을 쓰러뜨릴 줄은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은 이렇게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부터 점화되었던 것이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①

    루마니아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1918∼1989) 공산 정권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 버금가는 독재정권이었다. 실제로 차우세스쿠와 김일성은 둘이 다 살아 있었을 때에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하였다. 독재하는 수법을 서로가 배우며 일인 지배의 살벌한 지배 체제를 구축한 그들이었다. 그런데 차우세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17일에 갑자기 허물어졌다. 마냥 순종하기만 하던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글은 루마니아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북한에서도 이런 날이 오게 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루마니아를 가로 질러 흐르는 베가 강이 있다. 베가 강 옆에 티미소아라(Timisoara)란 도시가 있다. 티미소아라 시(市) 한가운데에 긴 광장이 있다. 그 광장 가까이에 볼품사나운 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1층의 반은 안경점이고 반은 한 개혁교회가 차지하고 있다. 그 교회 벽에 4개 국어로 다음 같이 쓴 팻말이 붙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한 독재자를 쓰러뜨린 위대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지금 이곳은 루마니아 혁명의 성지가 되어 있다. 1989년 12월 17일에 일어났던 혁명이다. 백년 이백년이고 계속되어 질 것만 같았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이 어이없이 허물어진 민중혁명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1940년 7월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였을 당시에 루마니아에는 불과 750명의 공산당원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루마니아를 공산 국가로 만들어 가게 하는 데에 수백만의 국민들을 학살하며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차우세스쿠였다. 그는 제화공(製靴工) 출신으로 공산당 당원이 되어 2차 대전 중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한 추진력이 인정을 받아 그가 공산당청년연맹의 총비서로 임명 받게 되면서 루마니아의 비극은 시작 되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③

    라스즐로 토케스(laszlo tokes)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 전 그 교회를 시무하던 목사는 공산당 정부의 대변인과 같은 목사였다. 무엇이든 차우세스쿠 공산당 정부가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목사였다. 그런데 그 목사는 어느날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 이에 젊은 토케스 목사가 후임목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무신론 정권이 몰고 온 세속주의가 민족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낸 것에 대하여 늘 마음 아파하던 목사였다. 그러나 교회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치유할 수 있는 개혁에의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평소에 믿고 있었다. 1989년 그가 부임하던 날에 첫 설교에서 그는 다음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합니다.”

    그가 힘차게 목회를 시작하여 주민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자 50명으로까지 줄었던 교인들이 2년 내에 5,000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로 모여들게 되자 공산당 정부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비밀경찰과 기성교회 목사들은 불안을 느끼게 되어 그런 볼온한 교회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여겨 토케스 목사와 교회에 경고하였다. 국가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토케스 목사는 한 방송국 프로에 출연하여 차우세스쿠 독재를 비판하였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와 같은 경우를 다루어 본 경험이 풍부하였다. 협박과 탄압으로 중단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늘 그렇게 하여 성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젊은 목사는 달랐다. 탄압할수록 더 강력한 반독재의 설교는 하였고, 그럴수록 교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드디어 예배드리는 시간이면 비밀경찰단이 기관총을 메고 교회당 앞에 서서 교회 들어가는 교인들을 감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토케스 목사와 가족에게 식량배급이 중단되고 교인들에게 목사 추방운동에 가담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한 교인은 이에 불복하였다가 며칠 뒤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느 날 복면을 한 4명의 괴한이 토케스 목사 집에 침입하여 그를 헤치려 하였으나 목사를 지키려 와 있던 교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목사 얼굴에 상처만 내었다.

    비밀경찰은 토케스 목사를 죽이면 그를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 뿐임을 인식하고는 그를 죽이는 대신에 1989년 12월15일까지 교회와 집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혁명이 일어나게된 2일 전이었다.

    루마니아 혁명 이야기 ④

    12월 15일까지 교회와 사택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정부로부터 받은 라슬로 토케스(laszlo tokes) 목사는 12월 10일 주일날에 교인들 앞에서 다음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퇴거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에 불응할 것이고,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강제로 추방당할 것입니다. 저들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시키려 합니다. 저들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금요일에 여러분이 이곳에 오셔서 그날 일어날 일의 목격자가 되어 주십시오. 평안하십시오. 하지만 그날에는 꼭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5일 후인 12월 17일에 비밀경찰이 토케스 목사를 강제 퇴거시키려고 출동하였다. 그들은 트럭을 몰고 왔지만 자기들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신도들이 인간 방패를 만들어 교회당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소문을 들은 시민들이 시간이 갈수록 몰려들었다. 시민들과 신도들은 춥고 배고팠지만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가 어깨에 어깨를 맞대고 서서 견디었다. 토케스 목사가 밤 1시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집 주위에 수백개의 촛불이 둘러싸서 어둠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촛불 시위는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군중 속에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하였다.
     
    “자유! 해방!”
     
    이어서 금지되고 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여, 깨어나라”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면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하였다.
     
    “차우세스쿠와 공산주의를 타도하자!!”
     
    12월 17일 새벽녘에 비밀경찰이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인 군중을 힘으로 밀어부치고는 교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성경을 들고 서 있는 토케스 목사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고는 목사 부부를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군중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티미소아라 시 광장으로 소리 없이 이동하였다. 혁명이라는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침묵 속에서 군중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청년을 남편으로 맞았으나 북한 정권에 의해 사랑할 자유조차 박탈당한 채 55년을 그리움으로 지켜온 루마니아 여인이 있다.
    소설가 권현숙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루마니아의 연인’에 등장하는 ‘제오르제따 미르초이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남유럽의 진주’로 불리는 루마니아는 이 지역에서 우리나라와 유일하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이다.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을 예방하며 찾은 ‘코트로체니 대통령궁’은 루마니아의 마지막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영빈관으로 사용한 곳이다.
    그가 가장 존경한 이는 바로 김일성이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방문한 후 주체사상에 감화를 받아 이를 모방한 철권통치를 했다.
    전국적으로 도청 장치를 설치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했으며 반대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차우셰스쿠식 독재의 절정은 ‘김일성 주석궁’을 본뜬 ‘인민궁전’ 건설이었다.
    12층 건물에 1,100개의 방으로 이뤄진 인민궁전은 미국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로 축구장 면적의 47배에 달한다.
    한편으로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지하 비밀 터널, 천장이 열리는 실내 헬기장, 그리고 독살을 방지하기 위한 환풍시설 등이 설계돼 있어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는 독재자의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루마니아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이 투입된 인민궁전 건설은 한때 ‘유럽의 빵 공장’으로 불리던 루마니아에 극심한 식량난을 야기했다.
    1984년부터 이어진 공사로 루마니아 국민들은 5년간 굶주림에 시달렸다.
    성난 민심은 공산 독재체제에 종지부를 찍는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날 인민궁전의 완공도 보지 못한 채 부인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초호화 천연 대리석과 수정 샹들리에로 치장된 인민궁전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매년 수㎝씩 가라앉고 있다고 하니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흐름은 되풀이된다(History does not repeat itself but rhymes)”고 했다.

    루마니아의 지나온 역사는 오늘날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89년 시민혁명으로 독재 청산과 체제 전환에 성공한 루마니아는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으로 역내 평화와 안정에 적극 기여하고 있으며 연 5%대의 고도 성장으로 EU 회원국 중 가장 역동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억압받고 굶주리고 피폐했던 루마니아 국민들은 이제 당당한 EU 회원국 시민으로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북한은 주민들의 생활고와 인권을 무시한 채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집착하며 지난 한 해에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려 26차례나 위반했다. 최근에는 국제법적으로 절대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해 지도자의 형인 김정남마저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규탄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은 이제라도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역사의 흐름은 되풀이된다는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02-018-2024(사순절 첫 번째 주일)
    예수님의 흔적
    갈라디아서 6:17

    지난 1월 7일 신년주일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자!" 라는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혹시 본문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본문으로 소개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장 12절을 기억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것은 계속 채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된 권세는 내가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내가 생각하고 결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 집안에 태어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자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다워야 합니다.

    자녀답다는 것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너는 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놀렸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까?
    그렇다면 훗날 나의 부모님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어른이 저를 보시더니 “아버지가 집에 계시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 아버지가 집에 계십니다.” 하고 집으로 함께 가서 아버지 누가 찾아오셨어요.“ 하고 말을 했는데 아버지가 뛰어 나오면서 ”아이구, 형님“ 하고 반갑게 맞이하시더니 제게 ”너희 큰아버님이시다!“ 하고 소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확신했습니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구나!

    왜냐하면 나를 처음 보셨던 큰아버지가 나를 본 후에 곧 아버지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아버지가 보이고 아버지를 보면 내가 보인다는 것은 곧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설교 제목은 “예수의 흔적”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는 열성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전적으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일에 앞장서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빛에 의해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에게 예수님은 제자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안수하라고 합니다.

    아나니아는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가는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까?

    아마 이때 찬란한 빛에 의해서 어떤 신학자는 바울에게 안질이란 질병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몸에 무슨 질병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도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에 가졌던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었을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의 몸에 “육체의 가시”를 가졌다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와 같은 고통스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를 그의 몸에서 제거하여 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바울이 교만할 수 없도록 바울을 통제하는 영적 비밀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응답받고 해결 받습니다.
    만일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라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것도 바울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는 강력한 신호등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손가락을 갖고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 때문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손가락은 여전히 내게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믿음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생명의 빛이 되는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빛이란 곧 주의 말씀입니다(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나의 빛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빛은 생명입니다.
    그 빛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행하자!

    제가 대학 시절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저희 성가대 지휘자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이셨던 박태준박사님이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셨던 배명준목사님으로부터 성가대 지휘자의 신앙적인 삶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대부분 예배 한 시간 전에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예배를 마치고도 한 시간 이상을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예배를 위하여 입장하려고 할 때 박태준박사님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교수님의 딸이 세브란스병원에서 마지막 임종하기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교수님은 부지휘자에게 지휘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주일 예배를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남편에게 “아니 마지막으로 딸이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데 왜 이제 오느냐?” 하고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사랑하는 딸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다시는 드릴 수 없지 않는가?
    더구나 지휘자는 예배의 음악을 맡은 제사장과 같은 신분인데 어떻게 그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예수님의 흔적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단순하게 몸에 남아 있는 어떤 흔적이 아니라 그 흔적 까닭에 예배를 포기할 수 없고 그 흔적 까닭에 신앙의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지키려면 반드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흔적을 헬라어 성경에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가축 또는 노예의 몸에 주인의 표시를 위하여 새겨 넣는 불도장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몸에 시뻘겋게 달궈진 불도장을 찍는다면 그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예수님의 흔적은 이렇게 심각한 고통을 경험한 후에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박태준박사님이 사랑하는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그 말이 아버지 마음에 얼마나 애절한 울림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딸의 애원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 분명한 것을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2024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예수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녀야 할까요?

    말씀의 흔적을 새기자
    말씀과 설교는 다른 것입니다.
    대부분 설교를 말씀으로 착각합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새기지 않으면 육체의 생명은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나의 구원을 확증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증거는 내가 무슨 행위를 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대원 시절 종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던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는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고 하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는 어느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그의 아내와 딸이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 그림이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그림을 가져왔습니다.
    영상으로 그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 그림 위에 얼굴 윤곽과 눈에 표시를 한 후에 그림을 보여주며 이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느냐 하고 물었더니 정확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깨우친 후에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성경 암송카드를 갖고 다녔기 때문에 그 카드를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 카드를 주며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딸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래,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을 찾았다!” 이렇게 대답한 후에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구원을 얻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해야 한다.”며 말씀 카드를 꺼내어 말씀을 소개하라고 전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지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믿고 확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흔적(스티그마. stigma)  στίγμα
    스트롱번호 4742

    1. 표.  2. 흔적. 3. 낙인
    발음 [ stigma ]
    어원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표, 흔적, 낙인, 갈 6:17.

    구원은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구원의 말씀을 확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의 확신(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도 응답의 확신(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승리의 확신(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죄의 확신(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인도의 확신(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구속하시고 살리시기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부 하나님은 빛으로 나타나시고 성령 하나님은 빨간 불로 임하시므로 두 분 하나님의 얼굴의 이미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미지는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며, 지금도 우리 주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람들은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주님의 옷자락을 보았고 또 어떤 분들은 지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주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똑똑하게 보았다고 하는 분들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나마도 주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거의 환상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개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여 그린 그림과 사진을 모았습니다.
    마침 천국에서 온 많은 천사들이 엘리야 선교사님 곁에 와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검증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안수를 받았던 분인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또 그의 곁에 있는 천사들의 견해를 들을 수 있어서 절호의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그리고 주 예수님의 400개 사진은 구글 사이트에서 찾아낸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사진들을 모은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이나 수많은 작가들이 그렸거나 전해 내려온 사진들입니다.
    이 중에서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런 이미지나 사진은 어떤 것일까요?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200개 사진
    http://spiritlessons.com/Documents/Jesus_Pictures/Jesus_Christ_Pictures.htm
     
    예수님의 400개 사진
    http://spiritlessons.com/PICS/index.htm

    <출 처> WWW.MessianicBible.com
     
                                  
                               


                                                                            

    천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의 제자들은 대체로 그들의 신장이 2m 수준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장은 2m 20cm였다고 합니다.
    훤칠한 키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확실하여 시원하고 매우 자상한 모습이며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흠잡을 곳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씀을 묵상할 때,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마음에 그리며 기도한다면 훨씬 더 실감 있고 우리 주님을 가까이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일이 있을 때 바로 여기에 소개한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주님의 얼굴인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우리는 이 얼굴 모습을 떠올리며 금방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현재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는 김선교사님의 고백
    성경에는 이미 수많은 증거들이 계시되었다.
    그러멩도 불구하고 자꾸 나에게 무슨 이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을 바르게 믿지 못하는 증거라고 한다.

    한국 사람으로 우리 선교회의 엘리야 선교사님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주 예수님을 만나 안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오후 5시경 그가 그의 방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책상 바로 앞에 주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크게 놀라서 주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가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못 자국이 난 양손과 양발목을 엘리야 선교사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주 예수님은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얼떨결에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주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다. 놀라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그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안수하는 것이 목사들이 안수하는 것보다 더 낫겠지”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는 매우 감격스러워 하면서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습니다.
    주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기름 부음을 받은 엘리야 선교사님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그때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상하고 따뜻한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양치는 마을에 사는 두 젊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 규율이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힌 사람에게는 불에 달군 쇠로 'ST'라는 문자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낙인이 찍히자 이런 벌칙을 알지 못하는 동네로 도망을 쳐서 그의 남의 생을 이곳저곳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나 이마에 찍힌 낙인 때문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 낯선 사람의 이마에는 'ST'라는 낙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러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는 그 수치를 당하므로 그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생애를 추방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은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가 양을 훔친 것 때문에 당한 수치를 보상했습니다.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내 인격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친구들 과 이웃을 돌보며 자기 자신을, 이웃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헌신과 봉사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낯모를 사람이 그 마을에 와서 이 노인의 이마에 찍힌 'ST'라는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어느 중년 신사는 "글쎄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분의 이마에 표시되어 있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ST'란 글자는 성인 'Saint'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 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양을 훔친 벌로 머리에 찍힌 낙인을 성인의 약자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희랍의 전설 가운데도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애통은 확실히 가치가 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이사야 44: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에스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요한계시록 16: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류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