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어느 날, 한 사람이 탄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갱 입구로 들어설 때 온통 석탄가루로 뒤덮인
그곳에 아름답고 흰 꽃이 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시커먼
광산에서 어떻게 이렇게 순결하고 깨끗한 꽃이 필 수 있지요?” 안내자가 말했습니다. “한번 땅에
있는 석탄 가루를 집어 그 꽃에 뿌려보세요.”
그 말대로 하자 그가 뿌린 검정색 석탄가루가 흰 꽃잎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꽃은
여전히 깨끗하고 흰 모습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꽃의 표면이 너무 부드러워 검정색 석탄가루가
달라붙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이 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죄악 많은 세상이지만
예배하는 삶과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깨끗하게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 시대에서도 그랬고 지금 세상도 성도를 무섭게 배척합니다. 마귀는 교회와 성도의 나쁜 점을
들추고 선전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성도의 삶은 어때야 할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물론 선을
행해도 항상 좋은 일만 있지 않고 때로는 어려움도 당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악마의 먹기가 됩니다. 특히 선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영적 게으름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누나와 동생이 예배를 드리는데 동생이 예배 중에 자꾸 딴 짓을 했습니다. 결국
누나가 말했습니다. “야! 예배 좀 잘 드려라.” 동생이 말했습니다. “누나! 너무 지루해!” 그러자
누나가 동생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원래 교회가 지루한 곳이잖아. 조금만 더 참아!”
지금 이 처럼 예배를 지루해하고 전도와 선교에 무관심한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더욱 예배와 기도와 선행에 대한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인은 행위에 관심이 없고 자신만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내
행위를 지켜보는 사람의 구원에도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 주님을 인식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합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심하게 욕하고 저주하며 싸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교회의 한 청년은 그 모습에 크게 실망했습니다.이 처럼 성도는 항상 교회
안에서의 말과 교회 밖에서의 행동이 일치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이야기)
2.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베드로는 이제 곧 있을 박해를 염두에 두고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여기고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켜 마귀에게 당하게 만듭니다.
미국에 블랙 바트(Black Bart)는 유명한 도둑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 미국을 벌벌 떨게
했습니다. 그는 1875년부터 1883년까지 29번이나 역마차를 털었지만 한번도 총을 쏘지 않은
상태에서 역마차를 털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가 나중에 붙잡혔을 때, 누군가 그에게 “어떻게 총 한번 쏘지 않고 역마차를 털었느냐?”고 묻자
그는 사람들의 공포감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도둑질을 할 때 항상 두건을 썼습니다. 그리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무서운 말을 해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결국 그가 나타나서 말 몇
마디만 해도 가장 용감한 역마차 경호원들까지 벌벌 떨었기에 마음껏 역마차를 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블랙 바트처럼 성도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힘든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은 변해도 주님(Master)은 변하지 않고, 말씀(Message)도 변하지 않고,
사명(Mission)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감리교 목사 중에 윌리암 생스터(William Sangster)란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근육 무력증으로 죽을 것이란 진단을 받고 곧 4가지 결심을 했다고합니다. 첫째, “나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I will never complain).” 둘째, “나는 가정을 밝게 만들겠다(I will keep the home
bright).” 셋째, “나는 축복을 세며 살겠다(I will count my blessings).” 넷째, “나는 고통을 유익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겠다(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살다보면 때로 두려운 일도 생기지만 그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때 미소를 잃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내일의 축복을 생각하며 더 감사하십시오. 두려움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포영화를 보면 그 전까지는 없었던 공포감이 생깁니다. 즉 공포란 생각에 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공포감을 가지면 공포는 진짜처럼 내 삶을 위협하지만 공포감을
버리면 공포는 곧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3.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성도가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궁금해서 물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그때 전도하려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성도는 항상
전도에 최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이발사가 부흥집회에서 전도의 사명을 도전받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는 매일
저녁 교회 전도교실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2주 동안 열심히 강의를 듣고, 전도와 관련된
성경구절과 질문도 익혀 마침내 모든 과정을 끝낸 패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이발소 벽에 그 패를 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 문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손님을 전도하게 하소서.” 바로 그때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빡빡 깎은 건장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손님에게 전도하려고 했지만 전도와 관련된 로마서 말씀과 질문이 입에서만
맴돌았습니다. 만약 그 손님에게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죽을 준비가 됐습니까?”라고
말하면 꼭 맞아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이발을 다 마칠 때까지 전도하지 못하고 그 손님은 이발소를 나갔습니다. 그날 오후까지 그는
아무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 따라 이상하게 손님도 없었습니다. 오후 5시쯤 되자 그는 마음이
상해서 울먹이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정말 이번에는 전도를
잘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깔끔한 한 신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신사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는 손님의 몸에 천을 덮으며 전도교실에서 배운
성경구절과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이발하는 내내 잘 기억나지
않았고, 이발 후 면도를 하려고 신사의 얼굴에 면도용 크림을 바를 때까지도 여전히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초조해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는 면도하려고 면도날을 혁지에 갈면서도
성경구절과 질문을 떠올렸지만 여전히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신사의 얼굴에 막 면도날을 대며 생각나는 대로 신사에게 소리쳤습니다. “ARE YOU PREPARED TO
DIE?(당신! 죽을 준비 됐어?)”
요즘 전도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도방법이 개발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전도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졌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따라 살면 전도는 자연적으로 됩니다. 전도는 라이프스타일이지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우리는 관심을 프로젝트에 두지 말고 사람에게 두어야 합니다. 그처럼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사랑을
베풀면 전도는 이루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하라고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를 치료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디매오를 하찮은 거지로 봤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도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이 처럼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시간을 내고 관심을 주십시오.
전도는 관심입니다. 전도는 경작과 같습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씨를 뿌리고, 매일 물을 주고, 이틀에
한번씩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전도는 어려운 일이지만 성도는 전도라는 최대 사명에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다 걸어야 합니다.
4.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 구절에서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잘 길들여진 것’을
뜻하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마음’을 뜻합니다. 즉 전도를 잘하려면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강한 자, 꾀가 많은 자, 변화무쌍한 자가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온유한 자가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진짜 강한 것은 온유한 것이고,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딤전 1:15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고, 약 5:17에서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새
예수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괴한 신앙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고 따라가는
것은 환난과 시험을 부르고 점차 헐벗게 되는 길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설교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소리입니다. 성도는 성도
이전에 사람부터 되고, 거만한 모습으로 설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을 직설적으로 위협하듯이 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슈퍼스타나 세일즈맨으로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이루어가는 신실한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와 겸손한 자는 속마음 안에는 선한 양심이
있기에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비방하는 자을 부끄러움을 가져가 줄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 사람들은 잘못된
편견을 깨고 우리를 통해 주님을 새롭게 보고 주님 앞에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윌리엄 윌리먼(William Willimon)이란 사람이 고등학교 때 겪었던 일입니다. 그는 거의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데이트를 하러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어머니가 문 앞에서 잘 갔다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꼭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너는 네가 누구인지 항상 잊지 말아라.”
엄마의 말은 아들의 기억력이 나쁘니까 이름과 집 주소를 잘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데이트를 할 때, 혹은 파티 중에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잊고 잘못된 행동을 할 것을 염려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입니다. “김 집사야! 이
집사야!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 항상 그 음성을 기억하며 성도답게 주님의 빛을 드러내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08-11-2024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밥으로 육신을 관리 할수
있지만 영혼 관리는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관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 4:4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밥만 먹고 만족하십니까? 마 4:4 말씀은
보면 사람은 밥으로만 살수 없다, 영적인 양식이 공급되어야 한다라는 말도 포함되어 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죠. 육적인 무너짐은 영적 무너짐과는 다르다. 육적 무너짐은 휴식을 취하거나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되지만 영적인 회복은 다름을 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 스럽다는 걸…
우리는생명의 떡(양식)을 먹어야 한다.
1. 생명의 떡이란 무엇인가?
빵은 전 세계 많은 문화권에서 필수적인 음식 중 하나입니다. 많은 식단의 주식이며, 수세기 동안
모든 부와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빵 유대인들에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데, 사막에서 그들의 백성을 살려준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하는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구원과 주님과의 관계는 달콤한 간식과 같지 않습니다. 만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즐겁습니다. 고기와 같지 않습니다. 고기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많은 상황에서 균형
잡힌 식단에서 중요합니다.
구원은 인간 존재에 필수적이며 영생에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자신이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양을 공급하셨듯이, 그분은 죄로 인해 그분과 분리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예고하심으로써 자신이 이 구원의
길이심을 강조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이 없다면 세상의 죄는 갚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인류는 율법 아래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8:3-4 설명하듯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사건의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그분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실 때까지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고, 약속된 구원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과 구원의 관계는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을 기록합니다. 그는 40일 동안 금식하셨고, 사탄이 세
가지 시험을 가지고 그에게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육체적 배고픔을 표적으로 삼아, 주님께 돌을 빵으로 바꾸어 배고픔을 달래라고
유혹 할 때 예수님은 유혹에 마 4:4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군중에게 말씀하셨듯이, 세상의
음식은 일시적인 배고픔 상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죄와 영적 어둠의 영원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더 큰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은유적 표현으로 누룩이 들어간 빵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에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문화권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만난 후, 마태복음 16:6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이전에 은유적으로 빵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분이 문자
그대로의 빵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바로잡으시고, 그들은 누룩이 두 그룹의
거짓된 가르침을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빵이 의미하는예수의 구원하는 본성이라는 상징의 정점은마태복음 26:26 최후의 만찬에서 찾아본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사 축복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여기서 주님은 다가올 십자가 처형의 본질과 영원토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의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밝히신다.
주님의 몸이 찢기고 십자가에서 피가 흘려짐으로써 인간의 죄에 대한 빚이 갚아졌고, 하늘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유월절 식사에서 먹은 빵은 몇 시간 동안만 배고픔을 달래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그들을 영원히 지탱해 줄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어떻게 생명의 빵이신가?
요한복음의 주제 중 하나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지,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설명으로 그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6장에서 그는 주님의
기적 중 하나와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춥니다. 주님이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권위 있게 성경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때때로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에서 주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셨습니다. 그날 밤, 그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다음 날, 그 수천 명이 다시
모여서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일시적인 양식이 아닌 구원, 즉 영원한
영양을 제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26-27,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의 기적을 오프닝 행위로 제시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류는 일시적으로만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을 위해 수고하고 노동해야 하며, 결국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음식을 증식시킬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믿는다면, 그들은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를 떠난 후 광야에서 아버지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만나를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 살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떡을 통한 영생에 대한 이 제안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불평하고,
심지어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수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살아있는 물, 그리고 길로 밝히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의 근원으로
제시하지 않고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분 없이, 생명의 떡 없이는 구원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용서의 근원으로 밝히심으로써 회개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는
길을 모든 사람이 간단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추가적인 희생이나 행위는
필요없습니다. 로마서 10:9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개혁한글) “네가 네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KJV). 생명의 떡은 물질적인 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원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쇄신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배고픔을 인지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예수님 곁을 떠나지 마세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며, 주 예수
앞에 나오는 자와 십자가를 지키는 자들이 되어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사무엘 하 11:26-27
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마음 속의 죄,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죄는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형통하고 평안할 때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죄 이기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 십계명 중 제 마지막 계명을 거역하는 죄를 짓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이 말씀은 이웃의 모든 소유을 말한다. 다윗은 죄는 평온한 삶속에 본인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가 목욕하는 모습에 마음에 숨겼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간음을 하였으며,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본인의 권력으로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다윗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죄성을 경계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에서 얻어지는 교훈을 함께 나누길 소망합니다.
1. 다윗은 한 가정을 파괴한 죄입니 다.
다윗의 내면의 삶 즉 숨어있던 순간적으로 나타난 정욕 때문에 한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간음하여 한 평온한 가정을 파괴 했습니다. 가정은
태초 우리에 주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신성한 제도를 그 누구도 파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 행위 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이라는 권력을 앞세워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전쟁터를 오가는 부하의 아내를 부끄럼없이 취하여 그 소중하고 신성한 한 가정을 혼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완강하게 침묵했습니다. 시편 32:3과 시편 32:9를 보면
그는 자신의 범죄를 사람들에게 숨기려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의 불의"를 자신에게
인정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기를 침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고백하려는 충동이
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온 힘을 다해 그것에 맞섰습니다.
지금 오늘날도 이와 같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 간통죄가 폐지되고 전에는 숨어서
했는데, 지금은 부끄럼도없시 일어나고 있다고합니다. 유부남 유부녀들이 애인 하나쯤은 있어야하는
현재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있는 죄의 본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마음 속에 음욕을 품는 것도 범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이 내재하는 죄까지도 항상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2. 자기 기만적인 교활한 죄를 은폐하기 위한 더 큰 죄를 만듭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교활한 마음이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양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양심에 정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려는 데 있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더 날카로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서로 비난하고 변명하는
갈등에서 오는 갈등이 증가합니다. 철학자 헹스텐베르크는 "죄에 빠진 직후에 나타나는 이 교활함의
뿌리는 교만, 신에 대한 신뢰 부족, 죄에 대한 사랑이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죄에대한 교활함은
죄를 은폐하려는 마음이있고 그 마음은 더 큰 죄를 만들어 냅니다. 다윗은 음란한 욕심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 받친 우리아 장군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더 큰 죄를 행했습니다. 순진한 우리아는 11절에
기록 되있든 다윗에게 고하는데,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이후에 우리아가 자기 집에 가지아니하자, 다윗은 전쟁터에서 홀로 맨 앞에
두어 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시키기 위해
의로운 사람을 죽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그 얼마나 무서운 죄악입니까? 하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다윗은 자신의 잘 못이 들어날까 두려워 자신의 신하를 전쟁터로
몰아가 간접 살인 죄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직접이 아닌 간접적으로 타인을 곤경에 빠지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사소한 죄라도 양심에 꺼리김 없는 행동을 하시면 항상 내재하는 죄를 경계해야
겠습니다.
3.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 입니다.(고통)
우리는 죄로 인해서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를 짓누르는 짐, 비밀의 짐, 위선적 모습, 내면의 타락에
대한 지식,등 주변 사람들에게는 눈처럼 깨끗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51:3에서 고백 했듯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가라앉힐 수 없는 양심의 후회, 신의 불쾌감, 다가오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편 51:11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끊임없이 계속되며, 생명력을 소모하고 육체적 힘을 고갈시킵니다.시편 38: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50:21에서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리라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죄 이후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 됩니다. 비록 한동안
감춰져 있었지만, 때가 되면 드러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6). "죄의 열매가 먼저 드러나고(27절),
완고해진 죄인이 자신의 범죄를 부인하거나 숨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양심을 고문으로 깨지지 않은 그의 마음을 깨뜨리시고, 선지자의 책망을 느끼도록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은 다윗에게 찾아왔을 때 다윗이 자신의 죄의 성격에 대해 완전히
눈멀고 살았다면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의 무게로 눈 뜨게
했으며, 그가 한때 기쁨의 충만함으로 말씀하셨던 그 임재의 무게로, 폭풍우 전의 공기와 같은 이러한
억압과 함께 모든 습기와 삶의 신선함이 말라붙고 열병의 타는 듯한 열기가 왔을 때 선지자 나단이 이
모든 것을 그의 의식에 가져왔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정해진 시간에 그에게 분명한 말로, 생생한 예를
통해, 그가 몇 달 동안 마음속에서 중얼거림을 들었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의와 자비의
하나님이, 한 마리의 어린 양과 함께 있는 불쌍한 사람 우리아를 돌보셨고, 불의하고 무자비한 행위에
대해 왕인 그를 부르신다고 말했습니다. 나단은 그가 빛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고, 그 빛이 선하고,
무섭고 증오스러운 것은 어둠이라고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가 빛으로 돌아서서 빛이 다시 한번 그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 침투하여 그를 차지하기를 갈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행한 일은
여호와를 불쾌하게 했습니다(역대기상 21:7). 이것은 성스러운 역사가가 다윗의 행동에 대해 한
유일한 언급입니다. 그것은 햇살처럼 그 진정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도덕적 결정을
담고 있으며, 마치 이 죄로 인해 다윗과 그의 집에 내린 신의 심판에 대한 초안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은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으로 부터 벗어나 하나님 말씀만을 따르는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윗은 범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린 행동이며, 그 죄를 은폐하려고 또 다른
죄를 범하였으며, 이 두 범죄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마음 속에
죄가 있다면 속히 하나님 앞에 회개를 통하여 용서를 구하시길 바라며, 빛으로 나아가 빛의 자녀로
우리는 내재하는 죄를 엄히 경계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에베소서 3:14-15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이 서신에는 두 가지 큰 기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울은 복음이 너무도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사람이 그 영광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영원토록 하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그의 숭고한 설명 이후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여,
그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그 소망을 알게 하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알려면 영적인 조명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무릎을 꿇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이 그
이름을 받았습니다."
1절과 14절은 같은 세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바울이 2장에서 이방인들이 본성적으로 어떠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무엇이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이 빈곤과 죽음에서 부와 영광으로
놀랍게 상승한 것은 바울이 그들이 항상 그들의 고귀한 지위를 실질적으로 즐기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큰 신비입니다. 저는 기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작동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I.기도가 효과적이려면 웅변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바울의 기도가 짧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두 기도 모두 짧습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기도는 매우 짧습니다.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면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위대한 기도는 단 세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32,33장)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에 맞서 홀로 하나님을 위해 갈멜산 꼭대기에 서서 한 구절 길이의 위대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느헤미야의 위대한 기도는 단 일곱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짧은 기도는 시몬
베드로의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마태복음 14:30). 그는 갈릴리 바다의 파도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이 기도를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여, 그것은 기도였고 즉시 응답되었습니다. 기도는 간결하고 요점을
잡아야 합니다.
II. 기도는 항상 우리에게 가능하다.
바울은 감옥에서 에베소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1절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라고 묘사합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에베소 사람들을 방문할 수 없었고, 그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감옥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병원 침대에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집에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항상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은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당신에게서
기도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다른 신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슴을알 수 있다.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내 기도에
때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 1:3-4).
•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
•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너희를 말함은"(살전 1:2).
우리가 전혀 필요하지 않거나 수익성이 없는 많은 일에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아닌가요?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까?
III. 기도는 항상 교육 만큼이나 필요하다.
1.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바울도 탐을 내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
•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0-32).
•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살후 3:1)
2.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 기독교 신앙을 설득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설득하여 믿게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1:17-18말씀에 있듯이 성령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일할 때만 그들은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IV. 기도는 형식주의로 부터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의 자세에 대한 전체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바울은 기도에 필요한 자세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참된 기도에 필요한 특정한
자세가 없다는 것을 알 수입니다.
•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재했을 때, 그는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창세기 18:22).
•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때 그는 “여호와 앞에 와서 앉았더라”(대상 17:16).
•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신당하실 때 기도하실 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니라"(마태복음 26:39).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릎을 꿇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강렬한 감정의
시간에 기도하는 자연스러운 자세입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나니"(행 20:36-38).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진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V. 기도는 언제나 경건해야 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자신이 자신보다 지위, 존엄성, 권위가 훨씬 높은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을 "우리 구원의 반석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큰 하나님이시요 큰 왕이시요" 온 땅의
창조주로 선포한 후에, "오라, 우리가 경배하고 엎드려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합니다 (시편 95:1-6).
바울은 하나님과 마주하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경건한 가운데 하나님과
만남으로 가져가는 통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신에 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사6:5).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땅에 쓰러졌습니다(계 1:17).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살짝 엿볼 수만 있다면,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분과 마주하는 것에 떨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바울은 3:12에서 "우리는 그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라고 썼습니다. 이 구절이 "나는 무릎을 꿇습니다"와 그 안에 결합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다. 담대함이 뻔뻔스러움을 의미하지 않고, 확신이 쉬운 친숙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2:28-2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았다면, 그것은 바로 이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또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경건함과 경건한 두려움"을 동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도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마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이 그 이름을 받으신 분"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하늘에 있는" 사람들과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개혁 한글)
한분의 하나님,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니"(4:6 KJV)
"하나님의 권속(개역 한글), 하나님의 가족"(2:19 KJV)
바울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이런
표현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며, 그들은 이 표현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위대한 가족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잊혀졌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무도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는 우리를 주시하고 계시다는 사실 기억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았던 위대한 성도만큼이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5가지 주제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고 깨닫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마가복음 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라고 질무하면 생각하게 될 것리다.
그러면서 무엇이 나를 피곤하게 하며,나의 삶은 얼마 남았을까? 이것 저것을 생각하게 되겠지요.
현대인들에게 주는 피곤함은 반복되는 변화가 없는 삶이라 말씀할 수 있습니다. 아침 읽찍 일어나서
직장 갈 준비하고 시간이 모자라 아침도 거르고 빵 쪼가리에 커피 한잔 들고 혹은 요구르트 한 병
마시거나 하죠. 출근해서 많은 업무와 직장 상사의 잔소리에 시달리다 보면 하루 일과가 끝나 지친
몸으로 퇴근하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소파에 팽개치듯 털썩 주저앉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을 내리깔고 잠시 자는듯 조는 듯 상태가 됩니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지쳐있습니다! 우리는 침대에 몸을 쏟고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짧은 밤을
보냅니다. 육체적 피로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상이며, 이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휴식입니다. 하지만 휴식은 항상 막연하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딘가에 있지만 아마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휴식이 없으면 다음 단계에 있어 능룰과 집중력이 떨어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기때문에 우리는
느리고, 짜증나고, 일에서 최고가 안됩니다. 적절한 휴식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지내면 통계적으로
심장병, 당뇨병, 고혈압 등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합니다. 육체적 피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피로는 어떻습니까? 혹시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나요? 행복과 성취를 추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 여러분은 삶이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머피의 법칙의 불가피성을 증거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언제입니까? 과거의
죄책감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편안한 평화를 앗아가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우리를
지치게 하고, 짓누르고, 희망을 잃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면 오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나 예수님의 모습을 뵙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안식 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들이 회개, 즉 죄에서 돌이켜 구주를 신뢰하도록 전파하기 위해 둘씩 둘씩 전도
여행을 보내신 후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록합니다. 사도들이 예수 주위에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경험을 예수님께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말씀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자 오고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먹을 겨를도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런 하루를
보낸 적이 있나요?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안식에 대한 초대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구석구석까지 전하는 일로 바빴습니다. 그들은 설교하고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이는 힘든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곤했지만 아마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6장을 펴서 이 직전의 구절들을 보면 왜 제자들에게 휴식과 수련회가 필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를 전파한 세례 요한은 처형당했습니다. 술 취한 왕주 때문에 참수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똑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그의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에게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면 제자들은 무슨 일이 생길까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친 제자들은 안식을 주시는 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부드러운 초대를
들었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하신 일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일시적이고 헛된 추구인 세상의 일들로부터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하지만
알지도 못했던 것, 즉 그분의 안식을 우리에게 값없이 완전하게 주십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낮잠을 자며 함께 보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 것 같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인간에게 가치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모든 수업과 시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을
파악하셨나요? 목자의 모습, 그리고 양들의 궁극적이고 위대한 목자이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시고 초대하실 때, 그분은 그것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복음
약속이 성취된 푸른 초장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에게 마실 생수를 주시고,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그분의 말씀을 통해 행하십니다.
복음의 약속은 위대하지만 그것은 나중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다며 나는 시편
23편을 읽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그러나 그가 나의
미래를 보장할 만큼 충분한 녹색 달러 지폐를 가지고 있는 푸른 초원에 나를 눕힐 수만 있다면 나는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나 나는 아직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고통, 거절, 고난을 결코 경험할 필요가 없는 조용한 물가로 인도해 주기만 한다면 우린
정말로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나 나는 아직도 원합니다. 내 이름과
명성을 위해 나를 성공과 성장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면! 천성적으로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평화와
안전, 안식을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할 힘이 없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그렇게' 조정하고 이를 최대화하고 최소화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둘 수 있다면
우리는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구세주를 만들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괴롭힘을 당하고 무력해지고, 길을 잃고 홀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휴식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모든 마을에서 도보로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가 배에 오르는 것을 보고 건너편으로 달려가서 예수와
함께 있으려고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고 쉬게 하려고 한동안 제자들을
따로 따로 데리고 가셨는데, 사람들이 계속 왔습니다! 쉬는 날 회사 전화를 받을 때나, 한밤중에
누군가가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 어떤가요?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반응하시는 방식을 지켜보고 놀라십시오. 그들의
마음과 뜻을 다 아시면서도 “집에 가세요,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라고 군중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공짜 식사만을 바라거나 기적을 조금이라도 바라는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 그분을 찾고 있으며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죄인들의 무리를 지켜보았고 혐오감을 느끼며 돌아설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십니다.
약속하신 안식을 제공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바쁜 일정이나 재정적 부족이 아닌 가장 큰 문제인
우리의 죄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그를 너무나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 죄의 짐을 짊어지고 말았습니다. 평화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그를
너무나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우리의 몫인 죽음에 자신을 삼키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죄가
정복되고, 사탄이 정죄받고, 죽음이 무너지고, 천국이 보장된다는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안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안식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쉬십시오.
조직화된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 삶이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관계가 긴장될 때, 일정이 빡빡할 때, 아무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과 안식이 가득한 마음으로 죄로 지친 세상과 그 안식을 나눌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종류를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종류를 아는 사람. 모든 죄에 대한 용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약속, 한계가 없고 끝이 없는 사랑,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바쁜 하루와 빡빡한 일정의 삶에서, 세상과 죄로 지친 삶 속에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안식을 주시고 오직 개인만을 위해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2. 고독 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매일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의 주요 요소 중 하나, 그분을
특별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를 우리는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 어머님는 음식 만들는 것을 참 좋아헤셨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음식 몇가지 중에 가지찜과
함경도식 가재미 식혜를 참 좋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알려준 레시피로 만들어 먹어 보았지만 그
맛이 아닐때 나는 그 맛이 주는 행복함으로 살아왔는데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 문제가
간단한 것 같지만 문제의 해답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있다면, 그것을 느낌으로 만들려고 할 수도
있고, 만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함경도식 가재미 식혜의 같은 맛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주 가끔 만들어 먹어보지만 그 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예수님의 삶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여기는... 고독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혼자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보내심으로써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마 4:1-11). 열둘을 택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밤새도록 광야 언덕에서 혼자 지내셨습니다(눅 6:12). 그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가셨다”(마 14:13). 기적적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혼자 산에 올라가사…”(마태복음 14:23). 긴 밤의 일을 하신 후,
“새벽이 되기 훨씬 전,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가시니라…”(막 1:35). 열두 제자가 설교와
치유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라”(막 6:31)고
지시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광야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누가복음
5:16).
이제 요점을 알 것 같을까요? 하지만 제 질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셨다면 우리는 왜 안 됩니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혼자 남겨져 겁을 먹은 적이
있습니까?
나는 어둡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에도 뭔가를 듣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 기억합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혼자라는 생각, 즉 고독 속에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혼자 있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혼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불안하고 지루해지며 무엇가를 시간을 차지할 것을 찾습니다. 기도를 못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5분 정도 지나면 우리는 자신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우선,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정당한 이유 없이는 누구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독을 삶의 일부로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침묵과 고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분명하게 듣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자주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결코 조용하고 혼자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외로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알게 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 때 "외로움"을 두려워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곳
그렇다면 어떻게 고독을 삶의 일부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미 가지고 있는 작은 고독의 순간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아이들이 깨어나기
전의 순간입니다. 인생이 너무 바빠지기 전의 순간. 일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커피 한잔. 그러면
하루 종일 모든 것을 멈추고 그냥 있을 수 있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을 정해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반나절 정도 금식과 같은 것
하나님 앞에서 몇 시간 동안을 침묵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캠핑을 다니다 보면
고요한 밤에 모닷불 앞에서 사방이 고요할 때 나는 모든 소리가 들립니다. 새 우는 소리, 풀 벌레 우는
소리, 늑대 우는 소리, 주변에 물 흐리는 소리가 낮 보다는 고요한 밤에 더 세밀하게 드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침묵속에서 우리는 고독도 느끼지만 또한 하나님이 우리 향해 말씀 하시는 음성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의 고독한 시간 속에 늘 하나님을 만나고, 듣는 모습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침묵과 고독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처럼 "우리는 따로 조용한 곳에 가서 잠시 쉬자..." 이것이 우리를 위한
여러분들에 기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2024
에베소서 1:3-6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울은 자신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이 영적 축복이 "하늘의 장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의 장소에서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선택된 영혼에게 영적 축복을 쏟아붓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에베소서 2:5-6을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의
장소까지 높여져서 영적으로 승천한 자로서 신성한 목적 이셨다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성한 축복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축복으로 이 "하늘의 장소"로
가서 그러한 유리한 입장에서 신성한 계획이 어떻게 보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시는 사랑으로 복 받은자로 살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I.축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3절)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모든 것의 머리에 두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에서
모든 영적 축복이 나옵니다. 은혜의 분배는 아버지에 의해 가려집니다. 가정의 사랑의 근원이 부모의
마음에서 자녀를 향한 모든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에게 다양한 성공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사랑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희미하지만 실제적이며, 우리는 유추의 확고한 발판을 통해 인간 경험에서
신성한 사랑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마치 지상의 아버지들이 자녀를 위해 온갖
축복을 계획하고 특정한 이해에 따라 그들에게 주는 것처럼, 위에 계신 무한하신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II. 아버지는 창세 전에 우리는 택함 받은 자로 축복을 계획하셨다.(4절)
모든 축복의 규칙은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하며, 다음으로 우리가 그의 입양된 자녀로
축복이 영원부터 의도적으로 계획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의
사랑이 택함 받은 자녀가 필요 사항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으로 반영될 때, 우리는 그를 영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그가 지상의 아버지와 같이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하신
아버지가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고 가장 사소한 세부 사항을 명확하게 모든 것을 정돈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정돈에 실수가 없으신 분이기도 하시고, 여지를 남기시지 안습니다. 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그럴까? 그러므로 예정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전능하신 아버지가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고 그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허약한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그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장 확고하게 믿는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는 많은 고급 수학 문제가
있고,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에게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과학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둘 중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극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신성한 예정과 피조물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 해결책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상적 계산을 넘어선다. 우리는 둘 다 사실로
믿고, 미래에 화해를 가져온다. 그리고 영이 우리를 날아오르게 도와주는 천상의 장소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신성한 계획에 대한 생각에 기뻐한다.
III. 축복의 규칙은 그의 계획에 대한 좋은 기쁨이었습니다.(5절)
이제 우리가 영으로 하늘의 장소로 올라갈 때, 우리는 이 계획의 진실과 적절성을 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세상은 그 주민들이 모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좋은 기쁨에
동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의 뜻에 대한 기쁨이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는 데 만족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규칙과 법으로
받아들이면서 영원한 축복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도달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지 깨닫고 그의 뜻에 대한 좋은 기쁨에 즉시 동의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선하셔서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가 그의 피조물 중 누구에게나 복수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복수가 처벌을 받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너무나 반대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이 그런 계획에 즉흥적으로 동의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의 선한
기쁨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조금만 올라가서 그가 얼마나 선하신지 보면, 우리는 그의 기쁨을 항상 선한 것으로 기꺼이 감사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IV. 개인을 택하신 것은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함과 흠 없는 품성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4절)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나님의 택하시는 사랑에서 목표로 하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이 없이는 어떤 영혼도 구원에 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죄와 거룩함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택하심은 거룩함을 위한
것입니다. 영혼이 죄를 사랑하고 거룩함을 미워하는 한, 그는 어떤 택하심도 확언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는 나중에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그 안에 있는 증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고 거룩함을 미워하는 영혼은 이 택하심의 교리를 건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그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거룩하다고 여겨져서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로 구별받을 자격이 있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종심이나 개인적 순수성 때문에 거룩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V.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성한 가족으로 입양되고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됩니다.(5, 6절)
우리는 무한하신 아버지가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신성한 가족 안에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두셨습니다. 영원한 아버지는 영원한 아들을 두셨고, 그들은 영원한
영을 통해 영원부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 아들은 사랑받는 자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8:29말씀 처럼 “내가 항상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7말씀에 그의 이름이 찬송받으시기를, 그는 자신의
유업에서 자신과 함께 "공동 상속자"를 두는 것에 만족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것과 형제가 많은 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를 입양하기 시작하셨고,
그 지위나 보상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을 매혹적인 범위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입양아는 그가 형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게 됩니다. 강력한 가족의 맏아들인
예수는 아버지께 너무나 사랑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위해 그의 가족으로 입양된 탕자의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입양될 대한 이유가 없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입양된 것은 단순히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제시된 계획에는 자랑할 근거가 없습니다. 선택과 입양은 모두 하나님의 뜻의 선한 기쁨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주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몇가지를 생각 해야 합니다.
1. 왜 우리가 택함 받았나?
2.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나?
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가 되었나?
우리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며 우리가 택함 받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사무엘하 5: 5,10, 12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5절을 보면 수도는 전국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국가 생활의 심장과 두뇌가 될 수 있는 필요한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습니다. 왕국의 신성한 보물을 침해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요새화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특징이 예루살렘에 섞여 있었고, 다윗의 신의 인도에 따른
판단에 맡겼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사울과 크게 달랐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도시인 기브아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기브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곳이었고, 흉악한 범죄의 현장이었으며, 그 악명은 지워질
수 없었습니다.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다면 나머지 이스라엘의 질투를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그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은 너무 낮은 요점을 쳤을 것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국경에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할 만한 곳은 없었고, 세 면이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한 면인 북쪽은 강력하게
요새화되어 있었습니다. 목동 이었던 다윗는 왕이되어 삼십 삼 년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목자의 직업이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첫 번째 경우입니다. 창세기로
부터49:24; 창세기 48:15" 라반의 양 떼를 먹인" 야곱은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민수기 27:7이후에 "이드로의 양 떼를 지킨" 모세는 여호와께서 "회중 위에 한 사람을
세워" 그의 후계자로 삼아 그들이 "목자가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해)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먹이던" 다윗에게
왕의 목적지에 관해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라아: ‘준비하다’, '돌보다', '목자 역할을
하다'와 동등]"고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사무엘하 7: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시 78:70-72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예레미야 23장: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 예레미야 5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미가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떼에게 먹여서)
스가랴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목자의 일은 모든 양떼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양떼인 인류를 다스리도록 정해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왕의 직분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래서 왕은 백성의 목자라고 불리는데, 꾸지람이 아니라 가장 특별하고 탁월한 영예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 떼의 주인이 아니라 먹이고 다스리는 직책입니다. 왕은 더 이상 재산권자도
아니고 백성의 주인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했듯이 '열방'은 '그의 상속 재산'입니다. 그러나 왕의
직책은 백성을 다스리고,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첫 번째 왕인
다윗이
목자에서 옮겨졌다는 것은 신비롭다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한 말은 그가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모든 왕, 통치자, 행정관, 주인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세운 왕 사울을 통해서 보았고, 지금
세상의 몇몇 대통령 또한 나라와 민족를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 권력, 용망,등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있지않습니까? 그 모습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개인 역시 특히 그리스도인
이라면 나 보다는 가족을 이웃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목숨 같이 지키고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I. 왕의 직책는 신성이며 권위와 권능이 있는 직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인데, 백성의 소유자, 통치자, 대 목자이십니다. 스스로 된것도
아니고 혈통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하위 목자에게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시편 101편)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방어하고, 회복시키고, 일반적으로 근면, 사려 깊음,
부드러움, 인내, 자기 부정, 자기 희생으로 그들의 복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카파도키아의 목동들이 양 떼를 너무나 사랑해서 때로는 함께 3일 동안 양 떼를 따라가다가 눈에
덮쳐도 견뎌낸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리디아에서는 양 떼와 함께 황무지와 뜨거운 태양 속에서 한 달
동안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 썼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사람들의 목동들에게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신의 면전에서 그 용도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이 양들이 무엇을 행하였나이까?"(사무엘하
24:17). "왕은 지상의 필멸의 신이며, 살아 계신 신이 큰 영예로 자신의 이름을 허락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처럼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만해져서 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본성도 부여했다고 자만했습니다."
II. 그의 번영의 신성한 근원. "다윗은 시온의 요새를 정복한 후 계속 나아가
성장했습니다"(6-10절).
그는 대장으로서, 사무엘하 7:9"백성의 지도자와 사령관"(또한 그들의 목자)으로서, 권세와 명예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사무엘상 1:3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의
목자로서, 시편 23:1, 사무엘하 22:35-37. 대장으로서 성경에 기록합니다.
그가 자신의 부름에 헌신한 방식을 인정합니다. 충실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필요 조건이며,
그것은 항상 마음과 양심에서 증거되며, 종종 외적인 사건으로 드러납니다(창세기 39:2, 21).
그가 부름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도록 돕고, 그를 강화하고, 옹호하고, 지시하고, 보호합니다.
그의 사명에서 그의 노력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과 어떤 기술이나 노력도, 신성한 협력 없이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자의 수고가 헛 되며…" . 사무엘상 10:11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동안 사울은
번영했습니다. 혼자 남겨졌을 때 그는 왕국과 생명을 잃었습니다.
II. 그의 직책에서 그의 승격과 확립의 신성한 목적. "다윗은" 히람의 친절한 도움으로
그의 궁전이 건립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2절).
이 말씀은 시온 요새를 점령하고, 그 주변에 건물을 더 세우고, 특히 다윗을 위해 왕궁을 짓는다는
서술 이후에 소개됩니다. 그것은 왕국 전체를 위한 대도시를 세운 것이었고, 사물의 안정된 상태를
입증하고 촉진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다윗의 생각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승영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인식된 사실이 여호와의 작용 입니다. 여호와는 다윗을 왕좌에 올려 세우고 그 위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단계에서 신의 손이 분명했습니다. 특히 그 손은 모든 단계, 그 연결과 결과가
고려될 때 더욱 분명했습니다. 두번째는 신성한 목적입니다. 모든 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유하고 사치스럽고 명예롭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지파들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고
통합되어 자유롭고, 안정되고, 안전하고, 번영하고, 영광스럽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덕적, 종교적 삶에서 고양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출된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고,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예배를 유지하고, 그분의 진리를 보존하고, 그분의
찬양을 나타내고, 세상에서 그분의 왕국을 증진하는 데 더 적합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에게서 구세주와 구원이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아들도
자신을 위해서만 고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하나로 모으고" 요한복음 11:52
말씀 처럼 그리고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고, 고양시키고, 영원히 구원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1:22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전서 3:21-23 사람에게 부여된
모든 권세, 지위, 권위 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어지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속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주어집니다.우리는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축복을 받고 인류에게 축복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III. 이러한 사실에 대한 데이비드의 인식입니다.
그는 자신이 영위하는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교만을 억제하고 겸손과
감사를 낳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위한 삶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야망을 억제하고 국가의 이익을 위한 진심 어린 헌신을 낳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대행과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깊은 인상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 능력, 지위 또는 소유물, 시간적이든 영적이든 그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야
하며, 모든 것이 단순히 또는 주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 특히 그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번영하고, 연합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인류를 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신성한 목적이며,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우리는 하나님과 지적인 협력자가 되고, 우리의 삶은 의미, 존엄성, 가치로 가득 차고,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꺼이,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세상에 적합한 준비가 될 것이고
그러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5:17, 21 찬송가 210장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21.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오늘 5장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거라사인 지방과 저편 하면 건너편 이겠죠
이편 바다가 사람과 저편 바다가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분리했지만 도덕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양쪽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었고, 그의 권능의 일들이 보였지만 그 결과는 얼마나 다른 지
성경에서 보여주는데 현재의 우리와 같이 기질과 성향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변덕스럽고, 어떤 때는 상냥했다가 우리는 이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 많은
사람들의 성향은 갈릴리 호수와 같습니다 때로는 폭풍우에 휘몰아치고, 때로는 미소 띤 하늘 아래
고요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에게는 그런 가변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올리브 산에서 종려나무
가지가 흔들릴 때 쾌활하지 않았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라사에서 한 가지가 아니고 가버나움에서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곳을
살펴봐야 하며, 그 원인은 성격과 운명이 매우 크게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오늘 날 같은
교회에 공간에 앉아 있는 두 모습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다양한 측면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했습니다. 우리는
성격의 한 측면에서 위대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모든 측면에서 위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거부와 수용을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
1. 그는 교사로 오셨습니다.
회당에서, 해변에서, 군중 속에서 그는 신성한 진리를 전했고, 그의 청중들에게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기대했다. 그는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 옛
경륜의 의미, 삶의 현상, 다가올 미래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떤 주장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엇이고 무엇인지에 근거하여 그의 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받아들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권위 있는 자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 그리스도를 교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추상적인 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 유대인 경제에 대한 견해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대중의 죄를 몰아낼 원칙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의 계시를 받아들여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2. 그는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생각과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롭게 섞였으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섞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교사는 그들의 몸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정화하는 자였다. 이 복잡한 일은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고,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셨으며, 나병환자에게 건강을 회복시키셨는데, 이는 그가 사람들을 위해 이루신 일의
표징이었습니다. “죄있는, 병든자, 가난한 자 다 내게로 와서 편히 쉬어어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로 안내자
이시자 우리의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3. 그는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는 가버나움과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베드로의 집에서 병을 고치고, 다른 집에서
아이들을 축복하고, 가나에서 축제를 나누고, 베다니에서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이 우정을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그 친구의 임재가 폭풍 속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그는 각 사람의 마음에 나타나, 등 말씀하시길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말씀은 무슨의미 일까요? “너희는 나를 기다리게 하지마”
이러한 예수의 모습과 행동들이 사람들에게 미친 것과 같고 서로 다른 효과로 보이는 것은, 이는
제자들의 행동과 치유된 귀신 들린 사람의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거라사인 사람들의 상태와 가버나움
사람들의 상태를 대조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주셨으면, 우리를 친구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교할 것은 거라사인 사람과 가버나움 사람을 비교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의 신앙인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1. 거라사인 지방은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도 소유물을 더 소중히 여기고 순수함과 사랑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영을 가진 사람에게 베푸셨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돼지를 잃은 것은 처음에는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아첨과 고집이 뒤섞인 채 "그에게 그들의 지경에서 떠나라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소원에 굴복했고, 우리가 아는 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나사렛(누가복음 4:29)과 예루살렘(마태복음 23:37)에서도
거부당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건에서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람을 두려워했던 것보다 거룩하신
분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돼지를 파괴하는 자에 대항하여 무장했습니다. 그들은
형제를 구출하는 것보다 돼지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재산은 개인의 권리보다 더
탐욕스럽게 방어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양보다 낫다는 원칙을 세우셨고, 그는 거라사에서
행한 행동에서 그 원칙을 표현하셨습니다. 소유물과 지위가 우리 주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순종보다
더 선호되어,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여전히 거부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2.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포용 했습니다.
호수 건너편에서 왕족의 환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의 힘으로 집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았고, 그의 지혜와 사랑의 말씀을 간절히 경청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을 구원하고
위로하기 위해 온 그리스도가 없는 것처럼 일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떠나자, 그들은 작은 배가
다시 바다를 건너오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배의 돛이 처음 보이자 그 소식은 재빨리 멀리
퍼졌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동료들을 부르러 달려가서 "예수님이 오신다!"고 말했다.
늙은이들은 예수가 오시기 때문에 비틀거리며 바다로 내려갔어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애도하던
여인들은 그의 동정심에 감사와 사랑으로 생각했어을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시장에서 노는 것을
그만두고 그의 미소에 기뻐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여전히 진지한 말씀으로, 신성한 노래로,
거룩하고 거룩한 생각으로, 엄숙한 추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보물을 쏟아내고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라고 외치며 날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뻐하세요, 날마다 감사하세요, 그리고 날마다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사무엘 상 15:35 – 16:2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15장을 전체를 보면 1-10절은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사람의 왕과 양과 소 그리고 기름진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가치 없는 것으
진멸합니다. 이모습에 바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길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말씀하삽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가? 불순종하는가?로
결정을 합니다. 11-20절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순종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아각을 끌어 왔다고 변론합니다.
21-23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와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제사가 여호와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든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라고
말하니 사울이 바로 사무엘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또 자기의 범죄하게 된 것을 백성에게
돌림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매달리지만 사무엘이 돌아서니 사울은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다
찢어진니라 오늘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리고 당신 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다 라고 말하고
사울에게 저주와 같은 말씀을 남기고 사울을 떠나며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고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바로 이스라엘 왕으로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
붓기를 명하십니다. 여기까지가 15장과 16절 초반부 입니다.
우리는 15장을 앍어보면 왜 사무엘이 사울을 떠나게 되었는가와 16장에서는 왜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기름을 붓기를 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정하여 놓은 구원의 자질(자격)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자질를 어떻게 판단하지요? 나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정합니다. 그러면 나쁜 사람의
기준과 나쁜 사람의 기준은 어떻게 정하지요? 이러한 방식은 인간의 방식이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디릅니다. 순종 자와 불순종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자질은 바로 이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사무엘서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미개한 오지로 선교사를 모집했을 일입니다. 신청자를 대상으로 겨울 어느 추은 날 새벽
세 시경에 시험이 시작된다고 공고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이 왔으나 시험을 실행하기 위해서 다시
오전 여덟 시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험 문제는 ‘2X2=?” 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도 대답
할 수 있는 문제를 통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가? 다섯 시간을 기다는 인내심이 있는가?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가지에 합격을 해야 만이 선교사로써 선교지에 열악한 환경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교사를 뽑음에 있어서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사람을 뽑을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데 있어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자질”이 있다 없다를 어떻게 판단 할까요? 우리는 보통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으로
구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악한 사람의 기준는 무엇이고, 선한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
이러한 것부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판단 할 수 있는 것이아닙니다.
오늘 말씀 35절를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라고 합니다. 사울이 처음 부터 악한
사람이었을 까요?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셨다” 사울은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은 슬퍼하고, 여호와는
후회 했을까요?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 즉 선택받은 자는 전혀 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울은 악한자가 거짓된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실수 한것이 있는데 바로
여호와의 음성에 청종하지 아니하고,순종하지 않았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사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위심할 여지 없이 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근원이 있는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애정을 가졌습니다. 사울은 많은 "구속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특성들은 그를 대단히 인기 있게 만들기 위해 계산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좋아할 만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사무엘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그의
성격에 대해 전혀 착각하지 않고도 나쁜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앞에 있는
경우처럼 그가 바로 신의 정죄를 선언한 사람임에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불러일으켰다는 단순한 사실로 위험하다고 여겨야 할 사람들의 실제
성격에 대해 그릇된 길로 인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았고, 거룩한 사무엘이 그가 왕국을 잃었을 때 그를 몹시 슬퍼했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우리는 사울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틀렸을 것입니다.
사울과의 개인적 교류가 중단된 것은 또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과 교제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구속적 특성"이 그의 성격의 예외적인 점 대신 주요 특징을 구성할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 합리적인 희망이 있는 한, 초기 교제에서 눈에 띄지 않게 행사된 영향력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한, 우리가 그의 중대한 잘못을 인식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교류는 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자마자, 이러한
희망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면, 존경심이 여전히 남아 있더라도 친밀한 교제는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사례에는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 특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이롭지 않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사악한 소통은 좋은 매너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리 작거나 눈에 띄지 않게라도 서로
바뀌지 않고는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복음의 교훈에 명백하고 과시적으로 반대하는 경우, 우리가 평소보다 더 종교적이고
확고하지 않다면 우리의 끊임없는 교제는 좋은 효과를 낼 가능성이 없습니다.
사무엘은 늙은이요, 선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자요, 사울에 대한 강한 애정을 지닌 그에게도 "더
이상 그를 보지 않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낀 때가 왔을 때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실 준비가 되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승진시키실
준비가 되셨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더 높은 곳으로 들어올리실 준비가 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충성스럽고
헌신적이며 당면한 일에 헌신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윗의 모습이 하찮고 부족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것을
취하여 더 크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위가 아무리 낮더라도 신뢰할 수 있고, 헌신적이며,
충실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과 신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는 이유는, 무리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으로 여겨졌던 사람, 다윗을 가장 약하고,
연약하고, 보잘것없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형제들이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내려놓는 사람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신이
그들을 들어올릴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뒤로 밀어내는 사람에 대해 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신이 그들을 앞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으니까요. 신은 우리가 가장 적게 여기는
사람들을 승진시키고, 높이고, 일으키는 방법을 아는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네가 사울을 위하여 언제까지 애통하겠느냐 내가
그를 버려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분은 네 뿔에
기름을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보내리니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을
예비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느냐?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암소 한 마리를 데리고 가서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리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여라. 내가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 주겠다. 내가 네게 이름 붙인
자에게 기름을 부어라. 라고 3절은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기름 부을 사람을 찾을 때 다윗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왕을 찾을 때 양치기 다윗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사람은 재능, 능력, 선물, 역량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품성을 중시한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잠언 18장 16절에서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를 위대하고 강력한 사람들 앞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선물은 당신을 위대한 사람들 앞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당신이 그곳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은 당신의 성격입니다.
요셉의 선물은 그를 파라오 앞으로 인도했지만,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만든 것은 그의 선물이 아닌
그의 성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본질적으로 내가 이새의 아들들을 주시하고, 그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들 중 한 명을 선택하여
나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거인을 죽였을 때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위대함은 큰 방식으로 한 가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작은
일을 위대한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윗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단지 목동으로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그에게서 목적과 약속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과 사울, 자신과 사무엘, 자신과 다윗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나는 구원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말씀을 얼마나
청종하면 순종하고 있는가? 이 시간이 여러분의 믿음 삶의 길을 올바른 길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고린도후서5:9
찬송가 344 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삶에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 처럼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두 가지를 해야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에 목표 중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1. 우리가 삶의 목표로는 "받아들여지는 것"과 "기쁘게 여겨지는 것" 입니다
그저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얼굴에 미소를 가져다주고, 그분의 마음에 우리에 대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마음에 품길 소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각의
완전한 자극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현재 관계에 대한 매우 놀라운 개념을 함축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군대에 간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분이 우리가 바라는 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을 보실 때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것은 거룩함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놓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동기입니다. 이러한 동기는 사람들이 때때로 선하게 살라고 권고받고, 모든
일에 낮은 이유보다 얼마나 더 축복받은 것일까요? 우리가 이것은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하면 더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와
"그분이 우리가 그것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의 차이는 얼마나
큰지요. 의무를 감사로 바꾸고 의무와 자기 호소 앞에 그리스도를 두신다면, 순종의 모든 어려움과
짐이 쉬워지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 하나의 목표는 크든 작든 모든 다양한 형태로 모든 삶을 통해 수행될 수 있습니다. 작은 것과 큰
것,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모두 하나의 동기의 부여를 받아 하나의 끝까지 협력할 때 우리의 존재
전체에 축복받은 통일이 주어집니다. 그 하나의 확고한 목표를 철봉처럼 여러분의 삶에 밀어 넣으면,
그것은 삶에 강인함과 일관성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유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동기에 의해 헌신하기에 너무 작은 것은 없습니다. 그 힘을 소유하기에 너무 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나 항상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유일한 것은 그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의식적인 동기로 참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도 그렇게 확실히 줄 수 없는 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빠른 분별력을 줄
것입니다.
2. 목표에 필요한 집중된 노력은 "노동"으로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명예를 좋아하거나 명예에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전환되어 명예와 관련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야망을 기르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깊은 곳에서 칭찬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기에 두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등을 두드리고 "잘했어!"라고 말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로움에 대한 다른 엄숙한 동기에 더하여 우리를
길로 인도할 이 가장 높은 야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약간의 기르기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칭찬을 받기 위해 우리의 행로를 형성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모든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다른 사람이 자신 외에 하는 말을 건전하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라케다이몬(Lacedaem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라코니아의 왕이자 제우스와
플레이아데스 타위게테의 아들이었다. 그는 에우로타스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이기도
한 스파르타와의 사이에서 아미클라스와 에우리디케를 낳았다. 에우로타스 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인 라케다이몬에게 왕국을 넘겨주었고, 라케다이몬은 나라의 이름을 왕비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로 바꾸었다.
* 라케다이몬(Lacedaem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라코니아의 왕이며 제우스와 플레이아데스 타위게테 의 아들이었다.
그는 에우로타스 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이기도 한 스파르타와의 사이에서 아미틀라와 에우리디케를 낳았다.
에우로타스 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인 라케다이몬에게 왕국을 넘겨주었고, 라케다이몬은 나라의 이름을 왕비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로 바꾸었다.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스파르타에서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할까?"라는 생각으로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습니다. 어떤 영국 식민지의 총독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우닝가에 보고하고,((Downing Street)는 영국 잉글랜드 런던의 거리로,
영국 내각의 최고 수석장관 두 명이 공식 거주하는 저택이 300년 넘게 자리해 있는 거리기도 하다.
그 두 장관은 제1재무상과 제2재무상으로, 전자는 영국 총리를 일컫는 말이며 후자는 영국
재무장관이 맡는 자리다.)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무부의 의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신경를 많이 써서 누군가에게 보고합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주변에 있는 동료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에게 가장 큰 보상은
우리을 향한 하나님의 미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미소를 성취하기 위해 최대한의 에너지로 노력하십시오. 바울이 받아들일 만한
봉사에 대한 개념은 사람이 많은 것을 억누르고 많은 것을 극복하여 가져오는 봉사였습니다. 그의
은유를 보십시오. 전쟁, 경주, 투쟁, 어떤 위대한 성전 구조물의 건설 등 모두 인내심 있고, 끈기가
있고, 계속적인 수고의 개념을 암시하며, 대부분은 또한 내부나 외부에서 적대적인 세력과
어려움과의 투쟁의 개념을 암시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어깨를 수레바퀴에 대고, 등을 일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보다 더 깊고 깊은, 그리고 그것의 근원이자 생명보다 더 깊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이 들어오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그 존재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오래된 숙련공이 용광로 옆에 앉아 녹은 금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순수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분 자신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영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영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의 분량에 따라 그분 안에서 형성한 것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3. 이 목표가 모든 외부적 요소를 얼마나 무의미하게 만드는지.
"존재하든 부재하든!"에 어떤 조건의 차이가 포함되어 있을까요? 이 문구 안에 생사의 차이가 있고,
무엇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혹 우리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외롭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든,
젊든 늙었든 상관없다면? 하나의 목표가 우리 앞에 떠오르고, 그 위대한 문제의 빛을 눈 속에 비추는
자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부 주의 하다면?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는 믿음, 영적
삶과 구원을 얻는데 아무소용 없는 것에 시간과 열정을 소모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이 동일한 목표와 동일한 결과가 여기나 저곳에서 동등하게 추구되고 달성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지상에서, 죽음에서, 영원을 통해 그러한 삶은 동질적이고, 어느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목표가 잊혀지고 보이지 않을 때에도 이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저곳에서 각자의
성취된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멘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목표를 무엇에 두고 신앙 생활하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인 아닌지, 혹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의식주, 명예, 권력을 누리고자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4
고린도 후서 12:8-9
찬송가(347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진정한 삶에있어 어떤 개념과 필요성은 무엇인가?
단순이 사람이 움직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근육과 뼈입니다. 그러나 더 세부적으로 본다면, 인체의
내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 근육과 뼈라는 사실입니다. 즉 신체가 건강해야 모든 다양한 행동에 있어서
통일성, 단순성, 효과를 부여하는 삶에 대한 단순한 개념이 있다. 삶이 그 감싸고 있는 개념을 즉시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정도는 실제로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삶의 존엄성,
아름다움, 유용성은 그것에 달려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개념과 이 개념에 대한
필요성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특별한 생명에 그리고 개념에 주목 하시길바랍니다. 인간의 생명은 필요한 모든 것을
풍부하게 공급받아야 하지만, 이 모든 풍부함은 저절로 얻어지거나 그 자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 자체가 신성한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개념은 두 가지는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 인간에게는 충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자신의 충분함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지요! 자존감 떨어지고 낙담한 사람들은 "인간의 삶은 예정된 실패이며,
. 공급이 없는 욕구로 가득 차 있고, 답이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감 있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인간은 자신 안에서 만족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하기만 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모든 질문에 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아니, 둘 다 틀렸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만, 본인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충분 하다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충분ㅚㄹ까요?"라고 물어보고 싶습니다.이 질문의 초점이 세상 쪽인가 아니면 하나님 쪽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질문하시길 “너는 나의 은혜가 충만한가? 말씀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다. 그 대답이 “예”라고 했을때 과연 본인 중심의 대답인지? 하나님 중심의
대답인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공급을 받고 살아가야하는 존재입니다. 그 공급은 하나님, 예수님이요,
성령님으로 부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분이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믿는 그
신에게 무엇을 공급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끊임없는 증거인 것은 내가 어떻게 살고있으며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고 있을때 그
공급이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끊임 없는 공급으로 인해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때 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고 삶을 살아가 사람과 한계를 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달려가는 자가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항상 아버지의
삶의 광대함을 스스로 주장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의 영역 주위에 선을 긋는다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이 당신이 알 수 있는 한계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사랑스러움에 한계를 정할 수 있을까요? 가장 인간적인
야망으로 성격을 추구하는 사람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그게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에 모든 패턴 넘어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는 진정한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한한 존재는 자신이 속한 무한한 존재의 음성을 듣고, 항상 그 음성에 응답하며, 곧바로 끝없는
여정에 안주하며 만족 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인간은 영원히 무신론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이나 사람이
무신론자가될 수도 있지만, A라는 아이가 B라는 아버지를 친 아버지라 부인하거나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아이인 인간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낌과 자신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항상 그를 가장 두려움과 외롭다는 생각에 어두운 곳에서 방황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곳에서 자유함을 얻고자 유일한 음성을 듣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꼭 사도 바울 처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IV. 그리고 이제, 만약 인간의 영혼이 쉬어야 할 곳이 여기라면, 인간의 영혼이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쉼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은혜의 충분함 위에 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삶의 비밀과
힘이라면, 그 쉼은 인간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서 존재하는 영원한 요소여야 하며, 특별한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가끔씩 부르는 조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나의 누구를 항해 충만함
얻는가? 나는 지금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마치 하나님이 옆집에 있는 사람, 필요할 때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만약 여러분이 기도할 때 그 음성을 들었다면 분명한 것은 하나님 은혜가 나에게 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을 대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쳤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알았기에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찬양으로 고백과 기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찬양 중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들으며 가슴이 벅찹니다. 이 찬양은 내가 숨차게 힘들 때 그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난뒤
돌아보면 내가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얼마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에 사기를 당했는데 사기꾼을 고소 했는데 변호사는 3년
넘게 해결 못하다 결론의 답변이 사기가 성립 않되어 고소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호사는
병에 걸려 누워있다고 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하는 말씀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겁니다.
하는데 하나님은 정말 계신가요? 하시며 말씀을 들었을때 내 얼굴이 화근하더군요.
목사인 나로써 어떻게 할 말이 없다라고 하더군요. 나의 대답은 이렇게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0 년 넘도록 본인이 어렵게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지금 그 문제로 환경이
바뀌었습니까? 사기 당하기 전이나 후나 또같이 살고 계시고 본인 항상 하나님을 찾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런지요.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지금 눈에 보이게 해결 되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해답은 성경말씀에서 우리는 잘 배우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마태복음 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있는데 바로 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벌하는데 때가 있으니 그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를 기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런지요. 우리가 구할 것이
악한자가 벌받아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시는 걸까요?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엘라 골짜기의 장면은 항상 기억 할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영원합니다. 골리앗은 교만하고 힘이 무척 강하여 그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는 힘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돌팔매와 돌밖에 없는 연약한 유다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힘 외에는 힘이 없었고,
입술에 기도만 있으며 아무것도 없이 이긴 투쟁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위대한
근육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지 모르지만, 그 힘은 그에게 완전한 힘이라는 생각에 자랑하고, 자신의
힘만 믿고 합니다. 다윗의 힘은 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 뒤에 있으며, 돌을 던지는 돌팔매를 비틀기
위해 그의 손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흘러내립니다. 이 말씀의 결론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가? 입니다.
이 은혜의 충만은 예수님으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를 닮아야한다, 예수의 마음을
본 받아야한다.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항상 아버지의 삶과 연합하여 사는 것처럼 대했고,
아버지의 삶에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어린아이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삶을 열어두어 아버지의 삶이 그 안을 흐르도록 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시여,
나의 아버지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이 십자가의
고뇌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그분의 사람이 되도록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의 성격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힘을 키운 후, 당신이 밤새도록 지키고, 먹이고, 힘을 주고, 피로에서 구해 주고, 자존심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면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던 것이 우리에게
분명해집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에 가깝게 움직여 앞으로 그분의 일부가 되게 하신다면,
그 결합이 가장 완전해지기 위해 그분과 우리 사이에 있는 분리가 될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삶과 우리 주님의 삶 사이에 있던 벽이 무너지는 것은, 그 무너짐을
통해 앞으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삶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된다면 그것 역시 우리에겐 그 얼마 큰 은혜가 될까요?
앞으로 우리는 생각하며 믿음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 생활를 얼마를 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를 질문하면서 내안에 예수님이 있다면 나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를 질문하며 충성된 예수님의 올바른 제자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찬송가 277장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나는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별로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휴대전화가 많은 일을 하지만 몇 가지만 사용해도 저는 행복 합니다.
비행기가 무슨 과정으로 만들어 지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비행기가 얼마나 편리함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중력을 공부 했기에 높은 곳을 올 가기 위해 사다리를 사용해서 위에 올라가면 떠어지지 않기위해 붙잡는다 사실.
오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이러한 비슷한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어떻게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각 위격이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실 수 있습니까?
삼위일체는 우리가 설명할 때 하나님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매 주일 예배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입니다.
또한 우리가 삼위일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는 우리를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나 삼위일체 중 한 분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매우 다양한 대답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손자, 녀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푸시는 친절한 할아버지 같은 인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아들 예수는 세상에서 길 잃은 양을 위해 이곳 저곳 다니시면 복음을 전하셨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신 분으로 표현 할 것이고 성령를 설명하긴 좀 어려운가요?
지난 주에 우리가 들었던 성령이 우리에게 강림하여 주신 목적을 떠올리고 또한 예수님의 세례의 비둘기나 불의 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일체를 우리가 상상하고 설명과 이사야가 본 모습을 비교해 보시며 오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사야서 6장 1절 표현을 잠시 보면 그림이 나오죠?
“나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여기에 그분의 모든 위엄과 영광을 지닌 하나님이 계십니다.
연약한 어린 아기나 온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을 통치하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보았을 때 “그 옷이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이 깨끗한 양털 같고 그분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 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2절에서 하나님의 보좌 옆에 서 있는 천사들인 스랍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흔히 묘사되는 귀엽고 작은 그룹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설명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2.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더라.”
천사는 완벽한 창조물입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얼굴과 발을 가리고 그들의 거룩함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일치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거룩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온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들은 샌달을 신은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에게 분명한 것은 그가 있는 곳은 아무 상관이 없고 분명히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속한 불경건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보호되어야 하며,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독했다고 확신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사람이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중 누구도 이사야와 자리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하나님을 볼 것을 알고 그날을 소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우리의 차이점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해 거룩하게되었지만 우리가 죽으면 거룩하게 될지?
안될지 모르는 가운데 소망 가운데 지금도 우리는 열심히 사명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압도적인 거룩함을 직면하기 위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부름을 받길을 원하는 성도도 있지만, 부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고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섬기는 교회들에게 말씀 들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눈을 피할 수도 없고 어둠 속에서 그분에게서 숨을 수도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계시고 있는지 확인도 않되지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만, “본인과 본인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이웃”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죄성”과 같은 거룩하지 않은 삼위일체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죄가 많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가운데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는 분이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스랍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떨어야 합니다.
너무나 거룩하셔서 천사들도 그분의 거룩하심을 기리기 위해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많은 우려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실망하고 화를 내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세례를 받고 선택받은 자로서 그분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그를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규례를 정하시면 그 규례를 우리가 바꿀수는 없으나, 그분은 하실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그분과 함께 먹은 장로들은 죽지 않았고, 이사야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6. “그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입에 손을 대며 말했습니다.
7.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보라, 이것이 이사야 입술에 닿았습니다. 네 죄가 제하여졌고 네 죄가 속하여졌느니라.
8. ” 이사야는 천사가 이사야의 죄와 부정함을 정결케 하기 위해 희생 제단에서 숯을 가져오는 것을 지켜봅니다.
죄가 용서받고 죄가 없어짐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고,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모세, 다니엘, 요한, 바울은 경험한 후에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하시고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분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보고 싶나요?
우리는 그분께서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빈 무덤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본인의 살과 피로 우리을 만지시고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우리의 죄가 속죄된 곳이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제단에 불태워진 분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만지시고 여러분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분이 우리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셨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셨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영원하신 성령을 보내사 너희를 믿음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느니라. 말씀하시것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우리는 천사들의 노래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분의 영광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속죄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움츠러들기보다는 찬양 하십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거룩함을 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제쳐두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아들의 거룩함이 우리를 완전히 덮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참으로 거룩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성령께서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거듭거듭 전해 주셔서 우리가 죽음과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셨나요?
성경은 우리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충분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시고 우리가 천국의 노래로 모든 천군과 합류할 때까지 그 믿음 안에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느니라. 아멘
요한복음14:16-17/ (참고)요한복음 14:26-27
찬송가 427장 (내가 매일 기쁘게)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대해서 병 고침을 위해서,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믿음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오늘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기를 원합니다.
1. 우리에게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거듭남’이란 사람이 다시 어머님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남’이란 성령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의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감히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신 제일 큰 목적은 바로 중생의
체험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중생의 체험은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또한 거듭남의 특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값진 보배로도 절대로 살 수 없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제가 바라고 믿기로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이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체험을 경험하고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줄로
믿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에 아직까지 중생의 체험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선포되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고서 거듭남의 비밀을 깨우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던지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것을 보고서 칼을 들고서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쳐서 잘라 버렸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다혈질적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놀랍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매우 다열적인 성격에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변화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기록된 것처럼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이제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베드로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매를 보고서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성령을 보내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사랑의 열매,
희락과 화평의 열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날마다 주렁주렁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3. 복음 전파로 사명 감당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처럼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사명 감당 하라고
성령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사명은 너무나 귀중한 사명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내는 선교에 참으로 열심인 한 교회가
있는데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보내는 선교란, 나 자신은 선교지로 가지는 못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그곳으로 다른 사람을 보내어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고 물질로
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빌립보 4장 15-16절은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라고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보내는 선교를 잘 감당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서 비록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지로 후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복음을 증거하다가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싸움도
벌어졌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입어서 병자를 고치고
마술사들과의 영적인 대결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오늘날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곳은 복음의 능력으로 뒤집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체험을 경험케 하고, 성령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마지막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날로 날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이때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귀한 사명들을 더욱 더 충실히
감당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를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소서 또환 하나님의 뜻 성령 목적을 이루게 하사
우리가 거듬나는 삶을 살게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이루게 하옵기를 바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이름 -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복음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바로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전쟁의 위험이 있고 질병의 위험이 있고 그의 예기치 않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적 부담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위험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만 할까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따르는 자가 누군가가 중요한 것아닌 불쌍히 여기시며 위험으로부터 돌아보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한 첫 조건이 함께 즉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함께한다는 말은 다시말해서 관계가 좋다 아니다로 결정됩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분을 영접했다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 했듯이 장소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롯 유다 예수님과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형식적인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과 동행 한다는 것이 주님으로 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 마음 가운데 즉 우리의 모든 것에 중심이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성도가 세상의 위험에서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91:7에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이 말씀과 시편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여 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에 그늘이 없도록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말과 행동을 할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2. 주님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항상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어느 분은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 같은지 큰게 외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8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구 요청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필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있을때 구하라고 야보고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내, 의심없이, 믿음으로 구하라(요청)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4: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 의미는 욕심, 욕망이, 악이 가득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치 안니한 것을 구할 때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로 약속한 것은 끝까지 인내로 구하여야 합니다.
에스겔 36:37 말씀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즉 하나님이 이루어 준다고 약속 했을 지라도 너희들 내게 구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난의 때에나, 육신이 병들었을 때에나, 시험을 당할 때에 주님께 요청을 하지만 평상시에도 우리가 보호 받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8:20 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진정 주님의 보호를 받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과 항상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는 돕는다는 약속은 먼저가 해야할 일를 너희들이 했을 때 나는 ‘이 모든을 너희에게 더하하겠다’은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너희들이 해야할일를 먼저 한 뒤 나에게 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7,18 말씀에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은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의무와 사명을 성실히 이행함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나의 구원로 믿으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의 보호가 필요 없는 성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존재이고 죄인된 자라면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순간순간 마다 필요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주님과 함께 해야 하고, 주님께 적극적으로 보호를 기도로 요청해야 합니다.
또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감을 열심히 잘 감당함으로 주님이 보살펴 주시기에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8:1.2에 말씀 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시 길 소망합니다. 아멘
찬송 / 491(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
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제가 두 주전에 말씀 드렸던 것을 기억 하시는지요?
우리가 평강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바로 하나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관계’ 두 번째 말씀으로 “내 안에 거하라”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거하시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가 좋다라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증명 하실 수 있나요?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살면서 성도의 삶을 대부분 이렇게 말씀 하실겁니다.
1. 교회 출석 잘하고
2. 헌금 잘하고
3. 성경 열심히 읽고
4.교회 봉사 잘하고
5. 기도 잘(열심히) 하고 등… 있겠지요.
이것이 전부 일까요? 아니요 이러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하라’는 히브리어로 메노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핵심적인 단어로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 간에 연결되는 생명(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 바로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새 생명을 얻은 생명체임을 잊고 살아가면 안됩니다.
오늘도 ‘내안에 거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1. 거한다는 정의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거하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머무는 것은 믿음 이상의 것이 되지만, 머무는 것은 결코 진정한 믿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제거된 가지조차도 “그 안에” 있다고 말하며 최소한의 표면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통해 구원과 죄 사함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이 믿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겠죠.
예수님과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진정한 믿음은 가지를 포도나무에 고정시는 것이고,우리는 그가 말씀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7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과 우리 안에 거하는 그분의 말씀을
연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킴으로써 예수님과 계속 관계를 유지합니다. 또한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 요한 1서 2:24에서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참고로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딤후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유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한다는 것과,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0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8:31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은 유대인 무리에게“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계속해서 교제하며 충성을 다한다는 비유라말할 수 있으며,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는 것을 강조하고있습니다.
또한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계속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계속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결은 지속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물리적으로 함께 계셨지만 제자들로 부터 떠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떠나더라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합니다.
요한복음 14:15~17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4:23에서도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한다는 정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할 때 항상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우리안에 거하는 겁니다.
2. 포도나무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덧붙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연결하는 포도나무라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힘과 영양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수액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거한다의 증거가 바로 우리의 열매로 증거됩니다.
믿는자들 중에도 열매가 있고, 없고에 따라 비교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한다는 증거는 열매인데 “열매”가 성령의 열매 또는 의로운 삶(갈라디아서 5:22 ) 또는 복음을 나누는 결과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열매를 하나의 특정한 이해에만 국한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가 “열매”를 신자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과 성령의 모든 명백한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열매도 포함될 것이고, 삶에 맺히는 성령의 열매도 포함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열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에서 예수께서는 이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목적과 최종 목표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내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또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되돌리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명백해집니다.
모든 삶이 구원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십니다.
그의 통치와 그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이 계획에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고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할 때, 그분의 구속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두 번째는 또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신도들의 삶 속에서 경건한 성품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본질적으로 삶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포도나무에 거함으로써 변화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만이 하나님 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좋은 열매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는 증거임을 기억하고, 행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아멘
04-07-2024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요한복음 20:1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4:7
4.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께서 부활 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주는 평강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평강에는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무엇일가요? 어느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평강은 관계다. 관계가 좋은가 아니면
나쁜가에 그 관계 속에 평강이 있고 없고 한다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믿음 생활하시면서
성경을 읽으면 여러분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아담 관계에 있어서는 에덴 동산에 분명히 평강이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로 인하여 평강은
다시말해 관계가 무너지므로 평강역시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며 근심 걱정 없이 평강이 마음 속에 항상 있던가요? 우리는 솔직한 마음으로 살고있나요?
아니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안에서는 갈등하고 자신과 싸우며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인간의
기본 심리 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근심, 걱정, 불안, 우울증, 공항장애, 욕심, 욕망 등 없을까요?
우리는 욕심이 있습니다. 좀더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하고, 내 자식을 좀더 좋은 것으로 키우길 원하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를 원하고, 좋은 학군에서 공부하길 원하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자신의 중심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마음과 생각인지. 우리는 대부분 자가자신을 위함이 더 많았을 겁니다.
빌립보서 4:6-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평강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염려없이 기도와 간구로 기도가
되던가요?
저 역시 사역자로 들어 서기전 저 자신과 3~4년을 생각하고, 미국에와서 12년 후에 결정했습니다. 신학원 생활
1년차되던해 전도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면서 항상 걱정이 앞서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이 어린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있을까?하멱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하니 그들에게서 배우고 나을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사역자길로 들어서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쓴 소리 보다는 단
소리만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이을 먹다보니 이제는 잘못된 부분을 알면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잘못된 한 부분이 굳어졌기 때문이죠.
우리의 신앙도 같은 것 같습니다. 첫 만만이 잘못되니 자신의 신앙 생활만이 고집합니다. 우리에게 평강이란
내가 노력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것이 안되듯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가질 만한 사람이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강 할 수 있을까요?
1.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두려워 한 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 닥칠 상황에 위압감에 어찌해야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찾아 오셔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듣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바로 평강은 어둠에서 빛을 만날 때와 갇이 두렵고, 고통 속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쁨 가운데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회개한 후 평강이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공통점이 바로 누군가에 혹은 자기 스스로 잘못했을 때가 아닐까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행복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할 그곳 항상 하나님의 평강만이 있어야 할 곳에서 왜
두려워 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기에
평강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고통, 두려움, 고난, 불안 등 속에서 살아졌습니다. 그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고,우린 예수님을 통해 회개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우리에게는 평강이 회복됩니다.
3.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평강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7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누군가와 함께 할때 더 힘이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가 생각을
지켜지나요?
또한 그 속에 평강이 있던가요? 아니요 어느 정도 정상이되면 각자 마음과 생각이 달라짐이, 배신과
경제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을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때 우리는 예수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항상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부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으로 항상 평강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죄사함 받게 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평강이 우리에게
새 언약(예레미야 31:31-34)
예레미야 31:31-34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산봉우리 중 하나에서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새 언약에 대한 유일한 언급이며 예레미야의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증하며 또한 이 말씀을 준수할 때 약속된 축복이 있다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렇게 귀한 언약 율법이 파기되었으며 주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언급하고 있는 새언약이 옛 언약이 지켜오던 율법과 별개의 것이 아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이나 형식적에서 옛 언약의 차이점이 없으며, 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다른 점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구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과 죄 많은 인간과 맺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만 삶과 은혜가 성취됨을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옛 언약의 조건에 따라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락으로 인해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따라 생활하신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이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문제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31장의 문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고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31: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친히 새 언약 아래 구원자를 마련하심으로 이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죄 없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약속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이 구절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새 언약은 문자 그대로 새 언약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고린도전서 11:25; 고린도후서 3:6ff; 히브리서 8:8-9:28; 10: 16; 로마서 11:25-26).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이 이제 제정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구원 계획을 설명합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순종할 수 있도록 내적 본성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속사람의 “원하는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33절). 그분은 그들 안에,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율법”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의지를 지배할 것입니다. 모세의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출애굽기 31:18; 34:28-29; 신명기 4:13; 5:22). 필요한 것은 타락하고 죄 많은 사람의 안팎의 변화였습니다. 인간의 죄 많고 변질 된 본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모세의 언약이다(출애굽기 19:1-24:11).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주권자 하나님이시니라. 언약의 조건은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순종하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은 징벌을 가져올 것입니다.
2. 이스라엘과 맺은 새 계약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 곧 유대 민족 전체와 맺은 것입니다(31절).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1장).
이 구절들은 나라 전체가 메시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소수만이 아닌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회복을 봅니다(이사야 5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 31:33 ; 로마서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백성을 포용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강조합니다. 구원받을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일시적으로 굳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의 영원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500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시며 그분의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34절에서는 각 사람이 “여호와를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안다라는 단어는 관찰을 통해 직접적으로 정확한 개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간접 지식이 아니라 야훼에 대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이는 마음, 감정 및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서로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얻는 지식을 나타냅니다.
3. 모든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는 언약입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마지막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예루살렘 감옥 너머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의 날까지 보았습니다. 보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새로운 영적 감각이 있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레미야 31:33-34은 참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약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중생하여 성령 안에서 교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의 급격한 변화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이 신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즉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고 걷고 존재합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고 정착하시며 자신을 집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새 언약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것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 율법의 요구를 남김없이 다 충족시켰더라면 규정된 대로 복을 얻고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신명기28:1-14) 그 누구도 구약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었으며, 결국 엣 언약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구원 얻을 수 없는,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가르쳐주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에서 이루지 못했던 죄인의 구원을 예수의 피로 완성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을 전하여 새 언약이 죄인을 구원하는 새 언약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8장 6-7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흠이 없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만일 그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두번째 잘못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율법 주의적인 법과 규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임재를 적용함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어느 시점에 다음에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거리가 있다는 척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의 죄악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것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함께 걷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그분과의 교제를 유지할 때 우리는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1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는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아름다운 특권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새 언약은 각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을 통해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지식은 도덕적 더러움을 버림으로써 얻게 됨이요, 그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될 것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새 언약의 적용을 받아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분 자신을 계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이 실제로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너무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가가서 만날 수 있을 때가 있습니까? 그분께서 알려진 모든 죄를 마음에서 깨끗이 하시고 당신이 그분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 그분은 당신이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그분 자신을 당신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언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 언약에 참예한 우리 성도들을 우리 안에 게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전심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표하시길 바랍니다.
약속과 의심 가운데 확신하고 굳게 서기. 02-25-2024
로마서 4:20–21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 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4:20-21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삶을 보이시나요? 나와 여러분의 삶에서 진실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느끼시나요?
아브라함에 대해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야기 내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전체 요약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 졌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에 이르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질문 1.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까?
질문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우리의구원은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내용의 요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행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화해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일회성 신뢰가 아니라 그로부터 점점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입니다.
로마서 4:20-21은 믿음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 삶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신앙(믿음 없는) 삶으로부터 지켜주소서.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약속과 의심 가운데에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굳게 서게 도와주세요. 또한 우리가 하나님 영의 지도력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방식과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어둠 가운데, 슬픔 가운데, 그의 슬픔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불가능을 생각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고려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게 된 이유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낙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기
낙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약속하신 것의 성실성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상황을 볼때에만 옵니다.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질 때 어떠한 고백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은 훌륭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당신이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과 같이 우리가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녀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셔서 그들이 낙담에 면역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며 우리는 때때로 끈질긴 기도로 그 분께로 향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완성 자 이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라 생각합니다. 더더욱 2 절 말씀처럼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증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 생활할 수 있고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증거,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기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전당이다. 나열된 각 사람은 전투기였습니다. 그들은 낙담이 그들의 믿음을 훔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힘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역시 믿음 힘으로 우리 상황을 바뀌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 안에 누가 계신가요?
우리는 각자 영혼의 미래를 놓고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지자. 하나님을 찾고, 기도로 새 힘을 얻고, 다시는 낙담의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우리가 때론 무너지고, 의심할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어떤 한 젊은 변호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서 칼과 면도칼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우울증 기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는 우울증 회복하여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확신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준 것이라 믿고 확신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실 것임을 우리가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앙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삶을 살게해주시기를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서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오늘 능히 이루실 수 있음을 확신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는 기초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반석이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대한 우리의 신뢰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친숙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숙하지 아니한데 어찌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낙심치 않고, 믿음을 견고케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고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레미아 29:13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전심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진심으로, 진실로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찾는다는 말씀은 같으나 의미는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아에 찾는다는 의미는 너희들이 나를 만나고자 하면 진심, 전심 아무 조건 없는 만남을 원하는 전심으로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 만나겠다는 의미이고 오늘 본문의 찾다 의미는 분명히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병이 낳기 위함이고 예수님의 이적 기적을 보기 위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찾을 때 마다 조건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오늘은 마가복음 1장 36-37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이 스쳐지나 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묵상하시면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나는 영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나 스스로 질문을 해봅니다.
1. 무엇을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가?
2. 예수님을 찾았나, 아니면 아직도 찾고 있나?
3. 나는 무엇을 찾고 있나?
4. 난 무엇을 얻었나?
5.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무엇을 했나?
오늘 저도, 여러분도 오늘 말씀 중심에 자신을 세워 보시고 답을 함께 찾아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1장 전체 내용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보다 먼저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뒤에 오시는 예수를 예비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이후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이 성령이 입재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이후 광야에서 40일 주야로 금식하며 시험을 받은 이후 갈릴리에 돌아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 왔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고로 복음 전도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변을 지나시면 제자를 부르시는데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고 잠시 더가시여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4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안식일에 회당을 가셔서 복음 전하는 말씀에는 권위가 있고 서기관들과 다르다고 기록합니다.
21-34까지 예수님의 기적,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이 순종하고, 귀신이 떠나고, 열병에 붙잡혀 있던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는 이적이 사실로 온 동네에 펴져서 알려졌을 때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느 부흥회서 병이 낳고,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시각으로 부흥 강사는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 분의 부흥회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고마는 경우를 나는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찾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찾는 방법이 잘 못되어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하면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찾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36절에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이 절을 보면 제자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떠나기 싫은 모습이 보이고, 제자들의 행동과 생각이 현명하지 못하여 예수님이 보시기에 부정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를 따르다’는 의미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의 표현을 적대적인 인물을 따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고, 병이 낳고 하는 이적을 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보기를 원하여 가버나움에 사람들이 “주를 찾나이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표현은 개인 적인 욕구가 폭함 된 것입니다.
마가 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요한복음 6: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다른 생각 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리며 빨리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혹시 우리 마음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거나,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찾으라 하시는 말씀 의미를 우리는 잘 못 알고 주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
저는 오늘도 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예수를 무엇 때문에 찾을까?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마태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 7:-8“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신앙인으로 무엇을 구하였고, 무엇을 찾았으며, 어디를 두드렸을까요?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공허했으며, 때로는 우리는 기쁨이 없었으며, 찾기보다는 구하는 것을 많이 했으며 두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 그러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깊은 암흑 가운데에서 길을 못 찾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의 기도 가운데 나를 찾아 주세요! 하며 하나님께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은 지금도 끝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으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나를 부르고 계실까요?
얼마전 한 뉴스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넓은 옥수수 밭에서 일어나
아이의 실종 사건이었습니다.
옥수수 밭에 들어간 아이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점점 불안해가기 시작했고 그 넓은 옥수수 밭에서 지쳐 울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경찰에 신고했고 많은 사람들과 경찰이 동원되었지만 결국 아이를 찾지 못하고 밤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포기할 때쯤 드론에 적외선 카메라를 장착하여 수색을 시작할 때 적외선 카메라에 물체가 잡혀 그곳으로 달려가 그 아이를 찾았다 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 생활을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빛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만족이 없고 무기력하고, 나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못 찾는다면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쁨과 기도 그리고 감사가 끝임없이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서 성경 말씀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진정과 신실 하므로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 시길 주님의 소망합니다.
성만찬 예식 성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01-14-2024(주일)
“나를 좇으라”(요한복음 1:43)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자의 성육신 (1:1-18)
2. 성자 예수의 표적과 선언(1:19-12:50)
3. 성자 예수의 교훈(13:1-17:26)
4. 성자 예수의 고난과 부활 (18:1-21:25)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신약 성경 중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젊은 신도들에게 요한복음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손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기록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책에서 자신이 누구 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요,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요, 부활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참 포도나무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신성이셨고 그것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 누구의 아들을 고치셨으며, 다리 저는 사람을 고치셨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고, 물 위를 걸으시고, 맹인을 보게 하시고,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넷째 날. 이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손끝에 힘을 갖고 계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그의 창조물 사이를 거닐며 그의 창조물을 도우셨고, 슬프게도 그 당시와 오늘날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분의 몸은 피곤 하셨고, 그분의 영혼은 우리를 향하여 안타까워하셨으며, 그분은 영으로 신음하셨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밝힙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것 무엇을 혹은 누구를 따르셨고, 좇으셨나요? 신앙인으로서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며, 우리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따르라는 요청을 받거나 명령을 받았을 때, 이는 우리가 따르도록 요청 받았다면 바람직한 경로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다음 목표를 달성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가고 있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이 멈춤이 쉬울 수도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이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레미콘안에 콘크리트가 굳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리고 공사장까지 신속하게 도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작업이 끝나서 물로 레미콘 안에 있는 시멘트를 물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보게 뵙니다. 새로운 시멘트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로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달성하기 가장 쉬운 모습은 아닙니다. 예) 지하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기차는 철길을 따라 달리 수는 있어도 자동차처럼 돌리는 가나 자유롭게 유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약간의 전환이 필요하며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물론 기차는 역방향으로 느린 속도로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지만 이는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가끔 뒤로 걸어보세요. 우리가 천천히 발을 섞고 직선적이고 장애물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전할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면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좇는 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길로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셋 번째, 일단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때 사탄이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위해 길에 놓아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문은 좁고 길이 넓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예수님을 좇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성경의 이 부분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 달, 다음 주, 내일, 심지어 한 시간 정도 후에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추측을 해보고 그것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부분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너희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1 그들은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니라. 신문에 광고를 내고 배와 고기잡이 사업을 먼저 팔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고 대신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읽습니다. 사도행전 8장과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이야기에 26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남쪽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이것은 사막 길이다.) 27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이 주님의 명령을 맡은 천사를 따르는 데 지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팔로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시작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상황을 너무 많이 접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4~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 부르시고 말씀하길 어리다는 고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스스로 같은 변명을 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사역의 기회를 놓친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길, 즉 거룩함과 의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우리가 오랫동안 걸어온 알려진 길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보다 익숙한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더 쉬워졌습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시작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는 다가오는 느낌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에 반대되는 향하는 것에 중독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정말 어려운 단계가 됩니다. 우리 삶에서 중독을 제거했을 때, 우리는 채워야 할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이 공허함을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우지 못하면 사탄이 와서 다른 것으로 채울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돌아서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전환점을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을 읽습니다(3-6절). 3. 그가 여행하는 중에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더라. 4. 그가 땅에 엎드러지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니 5.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그런 다음 10-20절로 넘어가서 사울이 안나니아를 만나고 그로 인해 시력을 되찾게 된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손에 의한 기적적인 변화입니다. 이전 삶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는 행위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 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어 있는 영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영원히 안식을 누리며 예배할
영혼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기대할 것이 거의 없거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서 가장 큰 보물을 발밑에 놓이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은 사람에서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전 생활 방식에서 등을 돌린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부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나쁜 일을 그만두고 좋은 일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을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믿음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와 다른 믿음의 소유자들과 한번 그리스도를 선택했다고 그것은 영원히 확정하고 일단 고백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계속 죄를 짓고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는 믿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첫째 편지 5장 20 읽습니다.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니 이 원칙을 편견 없이 지키고 아무 일에든지 차별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멈추고 돌아서면 이제 진행할 시간이 됩니다. 이제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볼 수 있고 여행하기 훨씬 더 쉬워 보이는 길을 설정하십니다. 그 길에는 작은 보상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길에서만 마지막 상, 즉 천국에서의 영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길에 많은 출구를 마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선택한 새로운 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제 그 출구, 지름길처럼 보이는 우회로는 파멸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다, 따른다는 의미는 헬라어로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어로 1. 따르다 2. 본받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새벽 예배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예수님을 무엇을 본받는 삶 속에 어떠한 그리스도인 될 것인가를 매일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12-17-2023(주일)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세 번째 촛불의 의미인 기쁨(Rejoyce) 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로 정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앞으로 한 주로 다가오니 기쁘십니까?
아마도 지금 어쩌면 누군가는 택배로 선물을 보내신 분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택배를 기다리고 계실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무척 힘들고 고심 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설렘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까지 며칠 남았는지에 대한 업데이트가 매일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노래에 우리는 신나서 한 동안 마음이 설레 이겠지요?
우리는 매년 돌아오는 이 날이 기다려지고 매순간 들 떠있는 마음으로 시즌을 보냅니다.
크리스마스는 들 떠있는 마음이 아닌 차분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말씀의 중심을 보면 “항상 기뻐하되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므로 주께서 가까우시니 기뻐하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기다림 대해 생각할 때 항상 기쁨이 함께하십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하나는 정말 기뻐하는 모습과 또 하나는 불안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 한가요?
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해동안을 잘 준비한 사람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불안 사람은 준비가 안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아침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대림절 준비에 기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앞으로 다가올 며칠과 몇 주가 어떻게 스트레스가 아닌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에 지나치게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영원에 초점을 맞춘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후에 여러분이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바울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들에 대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짧은 편지 전반에 걸쳐 지속되는 주제입니다.
여기 4장에서도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전히 사물에 대해 즐겁고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했을 때 그들을 위한 몇 가지 장기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상황이 그들에게 정말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한번 말 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생에서 기쁨을 누리는 관점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걱정할 이유와 기뻐할 이유를 모두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 든 우려되는 그들의 죄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주님은 분명히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앞으로 오실 구주를 가리켰습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설교하는 동안 요한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계셨다는 것을 압니다.
요한은 오실 구주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의 불을 가져오실 것과 그분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셔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 기뻐할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동기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지옥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에게 많은 세부적인 지시를 줍니다.
그분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고 시작하십니다.
관용이라는 단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관용이란?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 성격의 친절 성 등을 의합니다.
또한 관용은 기쁨의 원인이며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다르지만 포용함”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인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혹은 실제로는 그 어떤 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면, 한 걸음 물러서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온유함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가?
아니면 나는 성급한 성격인가?
나의 인내심 부족인가? 내 마음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무능력인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화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내 자녀, 배우자, 부모,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 대해 더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그 모임에서 말하는 방식이나 내가 길을 운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나의 기쁨은 내가 가게의 점원이나 선출된 대표자, 교회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갑자기 내가 온화하지 못한 모습이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나는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화를 내거나 조급함이나 이기심을 다시 품게 되었습니다.
나는 온화하고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나의 기쁨이 내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너는 용서받았어.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온유함을 우선시하여 그 용서를 기뻐하십시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쁨은 만족으로 인한 자신감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항상 훌륭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거나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직면하기 힘든 문제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부족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은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멈추어 있는 것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훨씬 더 생산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간구에 의한 바울의 표현은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갑니다.
즐거운 삶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마음에는 더 힘들고 더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매우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특별한 경우들을 인정합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 씨름할 때, 매우 구체적인 요청을 하나님께 가져오십시오.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인도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위해 기도하고, 온유할 수 있는 힘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가장 어려운 일들을 그분께 가져갈 때,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가 불타고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삶의 다른 부분은 아마도 좋아지고 있거나 적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식량이 어디서 나오는지 항상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이 삶이 지금 우리에게 거대한 용광로의 불길일지라도,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이자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거나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실 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여전히 재림절 준비의 일환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렵다고 느끼셨나요?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은 죄의 본성을 갖고 이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더 자주, 나는 온화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내가 아내, 자녀, 회중, 친구, 지역 사회에 대한 나의 실패에 대해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았듯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용서를 예수님 안에서 찾으시 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편지의 이 짧은 부분을 결론짓는 방식이며, 사실 바울이 우리 회중에게 대부분의 설교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아마도 이 단어의 의미에 약간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감각해지지 마십시오.
신선한 눈으로 보고, 신선한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기 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창조주와 전쟁이 아니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를 위해 죄와 사망과 지옥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옵니다.
이 평화는 괴로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평안은 우리가 시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안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살고 죽으셨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현실이며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삶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혼자 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때와 괴로운 때를 거치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 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얼마나 오래 갈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삶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그분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설명한 모든 이유로 인해 무서운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섭지 않은 수많은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신 구세주를 통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12-03-2023(주일)
“소망”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대림 절기의 색상은 보라색과 청색이나 대부분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보라색은 따뜻하면서 침착함 가지며 희망과 동경의 색입니다.
절기동안 사용하는 보라색은 왕의 존엄, 참회, 금식을 상징합니다.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의 다섯개의 촛불이 있는데 첫째 주의 촛불은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냅니다.
세상에 어둠 속에 살아가 자들에게 빛으로 소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주일 촛불은 회개의 촛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복음의 전파에 방해되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의 의미의 촛불입니다.
이 주간에는 특별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셋째 주일 촛불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도시는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만 그 뒤에 감춰진 상처받고, 배고프고, 외로움에 쓸쓸히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고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들입니다.
넷째 주일 촛불은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과 만남과 화해를 의미로 촛불을 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했으며,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촛불의 의미를 되새기며 복음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개의 촛불 중 가운데 촛불은 25일 아기 예수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는 의미로 촛불을 켜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것으로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며 새롭게 출발합니다.
오늘 저는 대림절 첫 째를 맞이하여 소망이라는 주제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며 대림절 첫 주일을 맞이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중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제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조금 전에 대림절 촛불 의미인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소망의 촛불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로마서 5장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소망의 중요성을 깨닫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소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함께 자세히 나누길 원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에도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소망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과 소망을 사랑과 함께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소망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한때 믿음을 어둠 속의 도약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을 부정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저 위에 우리를 잡아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며 심연 속으로 필사적으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이 “실체”라고 말합니다.
실체인 어떤 것이 곧 어떤 것입니다.
거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ὑπόστασις )는 기초 또는 기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기초 위에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고전 3:11).
이 기초는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유대인들이 바라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 소망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닙니다.
요한은 사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고 말합니다(요일 1:1).
이것이 바로 대림절이 크리스마스가 아닌 이유이다.
우리는 구유에 누울 아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기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 마음에 소망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사시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가르치시며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40일 동안 많은 증인에게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40일 만에 아버지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분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을 보고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아버지께서 이 사건들의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눈먼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말할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무엇을 드릴지 물어볼 수 있는 인간 증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느 정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완전히 눈먼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것을 바울처럼 인정합니다”(고전 13:12).
그러나 소망은 우리가 지금 희미하게 보는 것을 대면하여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어두운 밤의 등불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또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아침에 해가 떠오를 것과 같음을 기대합니다.
그것은 어둠 속의 도약이지만 맹목적인 도약은 아닙니다.
(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 한다면 어떻게 생각 할까요?
“나는 믿음의 도약을 하고 미시시피 강을 뛰어넘을 것입니다.”
이 말은 모두가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은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강 너머로 더 멀리 갈 수 있을까요?
그 넓은 강을 어떻게 뛸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은 그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소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완전한 분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소리 질러 그분의 대답을 듣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분의 완전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행글라이더가 행글라이딩 복장을 입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이 사람은 높은 곳에서 점프하여 반대편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는 글라이더와 바람,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단순히 뛰어내리는 것이고 성공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날개이자 과업을 위한 지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인 능력에 관해서 본인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와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그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반대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르라 고 손짓하십니다.
물이 깊고 이 세상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날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다름 아닌 예수의 피와 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맹목적인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이 어둠 속에 빛이 비치었음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 1:5)
어둠은 이 빛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날, 그분의 재림의 날까지 소망이 우리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은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서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이 낮에는 얼마나 희미하게 보이는가!
보이지 않았던 믿음의 면이 보일 것입니다.
믿음은 신실함이 될 것이며 신실함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림절에 우리는 “복된 소망”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소망은 가라앉는 모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과학자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영적으로 눈먼 과학자들에게 있습니다.
과학의 빛은 순수한 어둠이다.
하나님이 과학의 창조자인 한 과학은 참이지만, 과학자들이 과연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모든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사실은 창조자의 목적에 의해 다른 모든 사실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는가? 그러므로 과학자들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맹목적인 희망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재림절의 약속을 가져올 수 없다면 정치인들이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철학자와 현자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전 1:20)고 말합니다.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소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요.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인류는 자신들이 견고한 기반 위에 있으며 별까지 바벨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류가 이미 탁한 강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에서 어둠 속으로 도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는 일에 동참하도록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마태 5:14)
우리는 사람들이 맹목적인 희망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희망은 어둠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은 언젠가 새로운 현실의 빛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입니다.
예배의 있어 필요한 것들(히브리서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배에 출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지는 안는지?
코로나 이후 코로나 전염되듯 나는 예배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갖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여전히 여러가지 방법 중 한 가지 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안는지?
토저(A.Tozer)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네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나?
“예배의 가장 깊은 수준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련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유혹이 있을 때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멀어 보일 때에도 그분 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무엇을 얻기를 소망합니까?
우리 얻기 위한 것은 대부분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회복을 하기를 원함, 은혜가 충만하기를 원 함이고,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들을 성취하기위해서는 우리 예배에 성경적 패턴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예배에 필요한 몇 가지를 함께 하려합니다.
1. 강력한 기도.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3. 십일조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5. 개인적인 간증.
1. 강력한 기도.
구약의 성전에서는 기도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새 성전을 봉헌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성전을 당신의 영광으로 채우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과 백성에게 말씀하여 이르시 길 역대하 7:15-16 “15.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이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 노라 내 눈과 내 마음은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신약에 와서는 교회 란? 예배의 집, 설교의 집, 친교의 집, 봉사의 집, 찬양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라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를 통해 누구를
만나야 하나? 바로 주님을 만나고 성령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의미 있는 음악과 노래.
1990년대 후반 영국 왓퍼드(Watford)곳에 Matthew Redma (곡을 쓰고, 찬양을 리더)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는 수준 높은 찬양 밴드와 예배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회중이 예배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일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Matthew에게 하나님께 헌금으로 무엇을 가져오시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Matthew Redman은 그 질문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진심 어린 기도와 감동의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Matt(매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찬양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벗겨진체 단순히 마음을 축복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가져오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나는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관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만든 일로 인해 죄송합니다.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당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음악에 대한 최초의 성서적 언급은 창세기 4장 2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멕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아다의 아들 유발은 수금과 피리를 연주하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해 읽습니다.
요한계시록 15:2-4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형태의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남성, 여성, 어린이의 예를 봅니다.
성령과 음악.
사도 바울은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음악과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사이를 직접 연결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편, 찬송가, 신령한 노래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드리는 예배 음악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음악과 노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그분께 노래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역대상 16:2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 할찌어다.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요한은 구속받은 자만이 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예배에서의 음악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계, 헌신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감사, 찬양,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3. 십일조
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영어를 보면 worth(가치) + ship(운반하다) = Worship(경배, 예배)
가치라는 단어와 운반하는 단어가 합쳐 만든 단어입니다.
즉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리는 것 중 하나님은 헌물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십일조 말씀입니다.
우리가 꼭 축복 받기위한 수단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소중한 것 중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 100%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시편 50:10-12 말씀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 말라기 3:8–11에서 말씀합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예수님 역시 십일조를 권장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특권입니다.
고린도후서 9:6-8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위에 말씀을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1. 우리는 우리가 드린 만큼 축복을 받습니다.
2. 우리는 억지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4. 하나님 말씀 설교와 가르침.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받아먹어야 할까요?
예레미야 15:16에서 답을 알려쥡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앞으로 우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먹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에는 항상 성경이 포함되었습니다.
느헤미야 8:5-6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설교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하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면하라.
그들이 건전한 교훈을 견디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영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14 “이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의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누가복음 4:18NKJV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배에는 항상 경전을 가르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많은 교회들이 제자도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설교를 듣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얻어먹어 야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행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개인적인 간증
지금까지 믿음 생활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주변 이웃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살아가고 있나요?
이제껏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은혜의 간증이 있나요?
우리가 은혜가 없고, 간증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슬픔 믿음 생활을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요한계시록 12:11에 “또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말씀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간증은 회중 참여의 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간증이 없다면 교회 예배에 형식적 의식으로 생각하고 영혼이 없는 하나의 의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그런 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간증은 예배의 귀중한 부분이며 믿음을 키워 줍니다. 교회의 모든 일과 우리의 삶이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자가 세워지고 충성된 주님의 자녀로서, 충성된 제자로서 말씀을 전파하고 간증하며 믿음 생활하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10-22-2023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행위(살로니가전서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 갔는
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 최고의 교회에 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사도들을 본받고 무엇보다도 주 예수를 본받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지역의 모든 믿는 이들의 모델이 되는 모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내 이웃의 모범이 되어갔는지, 되고 있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 모든 믿는 자의 모본이 되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받고 싶은 칭찬 아닐까요?
어떻게 이런 소문을 듣고 살아갈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느니라”(살전 1:9, 10).
이것은 매우 평범한 설교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둘째,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
셋째,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기를 기다리라
첫째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서로 상반된 것입니다.
우상은 죽었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상은 거짓이고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우상은 많고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우상은 눈에 보입니다.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돌아와서는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는 우상 숭배는 신과 여신들의 만신을 숭배하는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공통 종교였으며, 그들의 최고의 신 제우스의 거처는 그리 멀지 않은 올림푸스 산에서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그들의 사회 구조에 있었지만, 그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러분이 가족의 종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이 그들과 그들의 사회와 전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믿으며 부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교회에 속한 많은 헬라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우상을 거부하는 그들의 급진적인 개종은 빠르게 전파될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상과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 우상들은 얼마나 강력한가? 선교사들은 우상이 원시 민족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부족의 전통 우상은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 뒤에 숨어 있는 영들을 불쾌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으며, 영이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 이방인뿐만 아니라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도 역시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 외에 숭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며, 사람을 그 지배하에 가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희곡에 등장하는 사람을 자신의 창조주를 숭배하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이를 좀 더 깔끔하게 표현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완전히 미신적인 것이든 현대의 세련된 우상이든 어떤 우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영광스럽게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를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의 경험을 활용했습니다. 그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했고 그의 청중 중 일부는 마음속에 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들이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적인 의미의 믿음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 즉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으로” 믿었습니다(행 17:3-4).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몇 가지 사실(종교 역사의 몇가지 날짜와 사건)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훈련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과정을 설명할 때 그들이 돌이켰다 라는 행위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우상의 마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깨졌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우월한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바울 자신도 목숨을 걸고 재판을 받을 때 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판사에게 자신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를 하나님께로”(사도행전 26:18) 경험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종에는 충성의 급진적인 이전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과 능력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은 실제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우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버리고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섬겨라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사랑, 애정, 경의로 잘못되어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회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바울은 봉사하다 라는 다른 행동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닌,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들의 삶은 이제 다른 주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모르게 사탄을 섬겼지만 이제는 우회전하여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그의 위대한 교리 부분을 마친 후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면서 요약을 시작했습니다.
1. 이것이 귀하의 합리적인 서비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기대되는 표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려라!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요? 우리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제일 좋은 것을 추구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할까요? 우리 모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일가요? 아니면 자신이 쓰다 남은 재물일까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봉사에 있어 천박함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서비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 재능, 소유물 등을 그분의 청지기로서 사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섬김이 “산 제사” 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나, 그 때에도 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다스려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서비스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각자의 은사와 재능, 자원에 따라 수행해야 할 다양한 작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에 적합한지 아시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봉사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종이었지만 복음을 통해 두 번째 해방, 즉 완전한 자유인 하나님을 섬기는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찬송 중 조지 매더슨(George Matheson)이 쓴 곡에 “Make me a captive, Lord” (나를 포로로 삼아 주시면)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 시길 바랍니다.
기다려라
세 번째 전환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당시 이교도는 자신이 죽은 후 스틱스 강을 건너 자신의 선함과 신의 은총에 따라 좋은 미래를 누릴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지만 확실성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확실하며,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마지막 일의 교리인 종말론에 대해 충분히 가르쳐서 그들이 확실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 거하다, 머무르다, 기다리 다라는 단어의 강화된 형태이며 “미래의 사건에 관해 기대하면서 제자리 또는 상태에 머무르다 “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내와 신뢰의 개념을 추가하여 올 것이 알려지거나 예견된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아닌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자라. 그는 하늘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분은 다가올 진노의 위험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을 겁니다.
사도가 분명히 활동적인 “섬김”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과 연결시키는 것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개종자들에게 이 둘이 함께 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더라도,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보다 더 나은 세상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구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자주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통치의 최종 승리를 확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 세상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한가롭게 기다릴 권리가 있을까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동안 일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이 낮에 오시는지 밤에 오시는지 그 누구도 모르며,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의 의미는 경고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언제 올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생애에 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달력에서 다음으로 큰 사건은 큰 영광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개종자들에게 깨닫도록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준비 속에서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 삶의 가치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두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동일한 삶의 헌신하는 모범적인 기독교인으로 살자.
2.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분별하며 믿음 생활하자.
이 두 가지 우리의 믿음에 있어 본이 되는 모범적 그리스도인 되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0-01-2023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7:4-7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7장의 중심 내용은
1.르비딤에서 일어난 일
2.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오늘은 17장 전반부에 나오는 르비딤에서 일어난일 중 모세가 행한 일과 반석에 흐르는 물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물은 인간에게 없어는 안되는 필요한 물질입니다.
인간의 몸은 약 60-70%가 물입니다.
인체 구성은 산소가 25%, 탄소가 9.5%, 수소가 6.3%, 질소가 1.4%, 칼슘이 0.2%, 인이 0.2%, 칼륨이 0.07%로 총 42.67%구성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중요하듯 모세가 광야 생활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배고프 다하여 만나로 메추라기 로 다 해결해주니 이제는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리고 모세를 향하여 목이 마르니 물 달라고 겁박까지 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행한 행동과 말을 잘 드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거의 이성을 잃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닌 동물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좋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의 우리에게 도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의 물질적 필요와 주님의 물질적 축복을 살펴보고 그에 근거하여 판단하려는 유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이 보기에 성공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성경적 경건의 성격에 전적으로 반대된다는 점을 여러분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가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또한 물질적 축복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구원주요, 영적 축복자로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이들에게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의 번영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 때문이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올 때까지 그들은 꽤 오랫동안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을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공급을 통해 광야 생활을 함께하셨습니다. 그들의 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처벌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 그들이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자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을 시험하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번 시련은 음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없는 중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걸어본 적이 있다면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르비딤에 물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다시 하나님을 의심하고 모세를 불신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쟁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모세야, 당신은 우리를 돌보는 임무에 실패하였으므로 우리는 당신을 고소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저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저 또한 리더에게 불만을 표출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모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생각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고 리더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모세는 리더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달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그들의 불평은 더욱 악했습 다.
“이것이 너희가 우리를 목말라 죽게 하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것이냐?”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세상적인 위로를 즉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계신 주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그들을 보호해 주시거나, 적어도 빨리 해결해 주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통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 우리가 하늘에서만 누리게 될 영광을 요구하는 것이며, 또 다른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말씀하신 태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은 고난의 삶이지만 천국에서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인적인 고통을 피하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발생한 문제를 이해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발생한 이유 보다는 먼저 결과를 놓고 분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대하신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불평에 실제로 무엇이 달려 있는지를 인식했을 때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왜 나에게 불평합니까? 왜 주님을 시험합니까?”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은 모세를 통 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리더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일종의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장로들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성경 말씀을 사랑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가 개입하여 그들을 비난한다면 말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읽는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까지 자기 백성을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혹시 예전에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해본적이 있을까요?
모세는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모세는 한 행동을 보면 문제 해결책은 기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 4절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행동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문제 이해 방법은 바로 기도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모세는 그의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고난을 당했고, 그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의심스러울 때 기도로 그분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의심한 죄를 고백하고 그 약속이 새롭게 여러분에게 스며들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가운데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붙드시며 기도 생활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로운 해결책을 찾자.
5절과 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말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장 먼저 하라고 하신 일은 그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분은 이 화난 군중에게서 숨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에게 쏠릴 것임을 하나님은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세에게 향한 마음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모세에게 장로들 중 몇몇이 그와 동행해야 하라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공정한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가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일강을 강타한 그 지팡이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지팡이는 또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면서 지팡이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심판의 지팡이로 기억해 야합니다.
이 본문에서 백성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쳐서 심판하라고 말씀하실 것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백성들 옆을 지나가야 합니다.
심판은 그들을 지나쳐 버립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서 너희 앞에 서리라”(6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의 중심이므로 이야기에 매우 중요합니다(라틴어 십자가에서 유래).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시편 22:23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여 그를 찬양하라. 야곱의 모든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를 경외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분명히 자신의 죄 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반역적인 백성에게 실제로 어떻게 물을 공급하셨는지 살펴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이 서 계신 반석을 치면 거기서 물이 나와서 백성의 목마름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심판하시던 바로 그 지팡이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앞에 서 계신 반석을 치고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서셨습니다.
심판의 형벌은 그의 백성이 아니라 그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정죄를 담당하십니다!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을 신명기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영광스러운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르비딤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마련하실 것이다”와 같은 이름으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시험한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므리바는 ‘비난하다’라는 뜻으로 ‘다툼’을 의미합니다.
즉 “시험하고” “다투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즉 그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자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음식과 음료보다 훨씬 더 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게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망각할 때 우리 일상의 모습이 일생은 맛사와 므리바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반석이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속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은 고전 10:4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백성이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의 물을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
호렙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서 있는 반석을 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육신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의 범법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듯이, 이사야 53:5에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호렙에서는 사람들이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9:28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수를 공급하시기 위해 목마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에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아닌가?”라는 질문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의 교회와 우리 삶에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형벌을 받아야 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이는 우리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하나님께 매를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의심스러울 때 디도서 2:13에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생에서 사막을 통과할 때,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09-10-2023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하나?” 마태복음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회중으로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오늘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했나? 여러분은 어떠세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해보신 분 있나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으로 확신을 같기 위한 오늘의 말씀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이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가요? 그러나 때로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일하느라
바빴다면 예수님이 그토록 가까이 계시는 것이 그리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 자신이 불안하다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편리한 하나님, 우리의 의제와 우선순위를 승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론 우리가 하나님을 통제하려 고하고, 우리는 가끔은 기적을 맡기어 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할 때도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이 깊다 하시는 분들이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 보다 못한 신앙인의 모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 하신 가요?
우리가 주일 예배 모임, 친교 시간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돈을 어떻게 쓸지, 누구를 환영할지 결정할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둘러보며 말해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고민할 때,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으로 더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일상적인 삶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항상 선하고 친절하며 사랑이 많고 누구도 험담하거나 소문을 퍼뜨리거나 어떤 것에 동의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입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 순진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위원회에서 봉사하거나 교회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로 구성된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고대 세계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우리는 대립, 불일치, 상호 책임을 다루는 데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 공정하고 건설적으로 싸우는 방법, 건강한 공동체에서 함께 지내는 방법을 계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우리의 죄와 그 결과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지침을 제공합니다. David Lose 목사가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는데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공동체는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고 우리가 관련되면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즉, 상대방의 뒤에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성숙한 어른처럼 직접 가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저는 이 방법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추천합니다.
경전의 지혜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고함, 중상, 험담, 서로 모욕을 통해 갈등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해결과 화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 뜻대로 고집하여 부활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일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그 사람을 파문하거나 추방하거나 피하라는 지시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상식처럼 보이거나, 혹은 잠시 동안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세리, 창녀, 기타 외부인들과 자주 교류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신실하게 해석하는데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멀리 하기는 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대할 때 사랑으로 손을 내밀기를 결코 멈추지 말고, 깨어진 것을 회복시켜 줄 은혜를 갈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문맥이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이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홉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므로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 구절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올바르게 들었는지 확인합니다. “주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진정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이고 때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 살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친교와 임재를 실제로 경험할 때 지상 천국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어려울 때라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함께하는 삶을 통해 형성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성공회 사제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유에서도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두 개의 머리가 하나보다 낫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서로가 필요하며, 그들이 한 가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키기 위해 필요합니다.”
“가족이 올바르게 일할 때 가족은 공유하는 방법, 함께 일하는 방법, 서로 돌보는 방법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마치 항아리 속의 돌멩이를 굴리듯이 우리를 서로 비비게 함으로써 우리의 거친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만드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원하는 것 중 일부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웁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주고받는 것을 배우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제 우리 중 일부는 가족 내에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건강한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람보다 규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 중 일부는 좋은 말을 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배우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배우겠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공동체에서 그 누군가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혼자만 간직해야 한다고 배울 수 있지만, 저는 그 누군가와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조화, 심지어 조화의 환상조차도 가장 중요한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조화입니다. 갈등과 상처받은 감정을 다루는 이러한 건강에 해롭고 불경스러운 방법의 문제는, 우리가 이를 해결하고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결국 상처받은 감정과 원한을 모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을 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대해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인 것 같아요.
C.S.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이혼에서 지옥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그림을 그립니다.
지옥은 바깥 가장자리에만 사람이 살고 있고 중앙에 빈 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대한 회색 도시와 같다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한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웃과 다투고 이사하고 다투었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새로운 이웃과 함께 다시 이사를 했고, 텅 빈 거리에는 텅 빈 집들이 가득했다.
루이스는 지옥이 그렇게 커진 이유가 중앙이 비어 있고 변두리에만 사람이 거주하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싸움의 해결책으로 대결 대신 거리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사람을 정면에서 정면으로 마주보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의 길, 사랑의 길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기 기독교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화해의 사역을 맡았습니다.
오늘 복음 교훈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 때 화해를 위해 노력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옳은 것을 원하는가? 내가 화해하기 전에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우리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고 관계가 규칙보다 더 중요하고
화해가 보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상에는 허리케인, 지진, 화재, 증오의 표현, 불의 등 우리를 괴롭히고 도전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함께 살 때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서로를 묶고 푸는 방법을 세상에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갈등을 통해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힘으로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이 악보다 강하고,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 마음과 모습을 닮아가는 귀한 제자들이 되어 항상 하나님과 통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08-20-23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마가복음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광고 중에 얼마 동안은 얼마를 내시고 그 이후에는 얼마를 내시면 됩니다라는 광고를 볼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주 작은 글씨에는 우리가 생각한 조건과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면에 큰 글씨와는 다르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나를 따르면 이러한 것이 따른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안에는 세상의 딜콤한 광고같은 글귀가 아닌 우리를 예수님을 따를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중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신앙인들이 마음에는 모두가 잘되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있는 우리가 만상형통 중에 뒤 따른는 것이 바로 힘듬입니다.
세상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수 많은 노력, 수 많은 고통, 고민 속에 많은 것이 얻어지는 것 같이 예수님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것을 버리자라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이 무었인가를 예수님께 여쭈어 본 후 근심하여 떠난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위해서 희생 했을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희생 해야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 청년의 모습의 신앙인은 아닌가요?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의 소유를 다 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두 부자를 만나는데 오늘의 주인공 부자청년과 세리 삭개오 만남니다.
삭개오와 부자의 청년의 차이 점은 무엇인가요?
부자청년은 근심하였고,
누가복음 19:1-11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를 절반을 나누어주고, 본인이 토색한 자들에게는 사 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께 말했을때 예수님의 삭개오의 마음 보시고, 집에 구원이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하지만 혹시 우리 스스로 위안을 갖기위한 생각은 아난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지 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일에 대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참 제자가 되기위한 조건은우리 삶에 일순위가 하나님,예수님이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분보다 다른 목적이나 사람이나 소유물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유을 더 소중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아셨고,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너이 소유를 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올바른 신앙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증명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소유가 내것이 아니라는 사실알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내것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것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예배를 드리며 수요 성경공부에 참여 한다고 참 제자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참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 생각, 말씀에 맞추어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주제처럼 “우리가 예수를 따르면” 무엇을 얻으며, 무엇이 더해지는질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이생에서 배가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가 되는 축복을 받으셨나요?
앞으로 받을 준비가 되셨나요?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볼때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나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신도들은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나의 주변을 정리한다” 이 말씀에 생각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백 배의 축복은 좋아하겠지요?
왜? 우리는 광고와 같이 보고 싶은 것과 읽고 싶은 것 그리고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읽듯 성경의 말씀도 주일의 설교 말씀도 이와같이 하지는 않는지요?
또한 우리가 버려야 할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수 백번 아니면 수 만번 계산기로 계산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시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 즉 영생 을 얻기위한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는 돈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29절을 읽은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때론 집, 가족, 사업체, 농장 또는 직장을 떠나야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때 예수의 복음에 집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 예수로 복음 만을 집중할 때 이생에서 주신다는 약속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때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또한 그분을 따르면 큰 유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예수님을 따를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소속된다는 점 즉 “가족의 일원”이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족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히 예수님을 따르는 축복 중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분명히 있는데 바로 핍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에 대해 말씀한 후 예수님은 “핍박을 겸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얻는 것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써 우리의 삶에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0-12에서 핍박 받는 자에 관한 말씀이 ‘복이 있고, 천국이 있고, 상이 크다’라고 말씀입니다.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중 일부가 기념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영광스러운”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논쟁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관심을 가지거나 논쟁에 합하면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핍박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나의 복음을 위한 일를 할때 핍박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선교사의 삶)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복음에 집중하는 삶에서 핍박 받고 있지않다면 “왜일까?”를 생각해야합니다.
몇가지 질문을 생각 해보았습니다.
1. 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까?
2. 우리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도록 멀리 피해있는 않는가?
3. 혹시 진정으로 따르고 있는가?
4. 나는 십자가의 군인가? 아니면 어린 양의 추종인가?
5. 모든 질문에 잘 적응하는 신도인가?
3.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를 따름으로서 얻게 되는 세 번째는 “내세에 영생”입니다.
내세는 마지막 때이며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날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기대할 수 있는 단연코 가장 큰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우리가 다른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큰 상” 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찾고, 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앞부분에서 부자 청년 관원이 찾고 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습니다.
그는 지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뭔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영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은 당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듯이 인생의 길이 자체가 그렇게 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삶의 영원한 질, 곧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한 분의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소서.”
영생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6:11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의 “면전”에서 영원히 행복해집니다.
주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영원한 즐거움”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영생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기 연습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가 아니 남은 올 한 해가 지나가기 전에 깊은 상고와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 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7-30-2023(주일)
성령의 중보가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로마서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주 전에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하고 있을 때 한 인도 사람이 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당신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또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저는 자신만만하게 네! 잘 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대답에 충격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기도하는 삶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꾸준히 계속 기도가 끝어지않게 기도를 해야 하는 삶입니다. 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떠나고 저는 그의 말에 얼마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하나님이 흡족할만한 기도의 양을 하지 않고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저를 보고 기도를 더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를 말할때 그 시람은 나의 모습을 보고 알고 있다는있는 사실에 정작 알아야하는 나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에 황당해 하며 회개하며 다시 엎드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은 기도해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닐지라도 기도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8장 전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경이로움과 축복, 특히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을 닮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 새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며 우리를 축복하고, 강화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8장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심을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되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기도의 영이 있어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때론 기도의 행사가 이루어지는데 특권 중 하나임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필요에 대해 말하고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돕고 우리를 돕기위해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말씀하시길 우리를 위해 돕우시는 몇가지를 함께 알아가길 소망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 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기도의 영역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기도에서 발전할 수 없으며 결코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땅의 육신의으로 살고 있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여전히 거하는 이 육신을 통해 우리의 새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을 때까지 이 타락한 육신에서 해방되고 썩지 아니할 새 부활의 몸을 받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부패한 사실과 함께 우리는 현생에서 여전히 땅에 묶여 있기 때문에 불투명한 우리를 통해서만 영적인 것을 볼 뿐이며 여전히 인간의 지혜와 이해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숙할 때, 은혜의 수단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새 사람이 양육되고 새 사람 안에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영적인 영역을 더 완벽하게 보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연약함을 알기에 특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영역에서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거나 기도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고 기도로 분투하는 우리의 행동이 필요하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나 하루 중 여러 시간에 기도할 때 영이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은 그러한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한다면,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기뻐하시고 항상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항상 우리의 최상의 복지를 마음에 품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기도의 절반을 이룬 것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가치 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결코 아끼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기억할 때에 그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영이 이 생각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구절에서 우리에게 계시한 것처럼 성령의 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세번째 성령의 도우시는 기도 입니다
이 도움은 어떻게 표현하고 사용될까요?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에 대한 말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너무 부적절해 보입니다.
이러한 부족함 속에서 우리는 말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갈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로 무엇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곁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시며 거기에 있는 영적인 갈등과 갈망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에 갈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고 올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이 모든 미약한 기도의 노력을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해석하신 다음 올바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로 하나님께 표현하십니다.
한 출판사에서 좋은 책을 만들어 출간하듯 올바른 교정과 아름다운 편집 후 책을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책을 출간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면 불쾌감을 주거나 역효과를 낳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메신저로서 그는 기본 메시지나 요청을 받은 다음 우리가 수용할 수 있고 잘 넣을 수 있도록 그것을 다시 표현합니다.
성령의 중보란 이런 것입니다.
네번째는 이 성령의 중보 기도 결과 입니다.
이 중보기도의 효과는 27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바울의 추가 설명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중심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등과 갈망하고 추구하는 죄와 불완전함 너머를 보십니다.
그는 새로 거듭난 우리의 진정한 갈망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 마음의 핵심을 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 마음이 갈망하는 그의 해석을 읽으시지만, 그는 변화된 것을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중보기도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개혁하고 청소하십니다.
영은 약간의 수정과 재작성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영원한 구원의 계획에서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해석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수정하여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십니다.
이 복된 성령의 사역을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할 때 힘을 얻고 기도할 때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 사역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기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무가치하다고 느낄지라도 성령의 이 사역으로 인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적으로 사탄과 싸우고 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기도할 때 우리 곁에 계심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방식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영을 알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합당하게 되고,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며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합심 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 아십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
우리를 위해 항상 중보하는 성령님을 의지하시며 기도하시길 소망합니다.
07-09-2023
내 안에서의 투쟁(로마서 7:15-20)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서 벌어지는 큰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외부 적들과 맞서 싸움은 마귀와 대면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있는 불변의 상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죄성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신 사이의 끈질긴 싸움에 우리는 포함 되어있습니다.
이 두 라이벌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서로 적대적입니다.
이 싸움은 모든 신자의 영혼 안에 전쟁터에서 내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두 세력 사이에 합의된 휴전은 결코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어느 쪽도 백기는 결코 없습니다.
또한 휴전은 절대 없습니다. 전투는 계속 되며, 진행형입니다.
여러분이 이 내적 갈등의 강도를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우리 안에서 내적 싸움이 계속됩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신자 안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다른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는 내부 줄다리기를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로마서 7장 15-20절의 이 구절은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새 본성과 죄 있는 육체 사이의 싸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고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 이 말씀을 썼을겁니다.
바울 자신의 삶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죄 많은 육체와의 싸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바울 처럼 거룩함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싸움은 실제이고, 강렬하며, 지속적이고, 내적이며, 영적이며, 모든 참된 신자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 구절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을 보는 것과 같지 안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 완벽하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나쁜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신자가 직면하는 죄와의 진정한 투쟁을 발견합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7:15-20에서 우리는 바울이 계속해서 죄와 씨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로서도 그의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과 모든 신자에게서
발견되는 일곱 가지 죄의 실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죄는 당혹스러운 신비이다(7:15).
15절 전반부에서 우리는 죄가 곤혹스러운 신비입니다.
바울은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15절)라고 합니다.
바울이 “내가 하는 일”이라고 쓸 때 그는 자신이 죄에 가담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로 의를 구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리새인이었을 때의 삶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 시제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투쟁은 바울에게 그토록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당혹스럽습니다.
그가 경건과 거룩함을 원하기 때문에 이것은 큰 좌절의 시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진행되는 지점에서 죄에 빠짐을 발견했을 때 바울은 자신에 대한 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이 처럼 바울이 당혹스러운 모습에 신자인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느껴야 할 당혹감의 메아리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죄는 완전한 모순이다(7:15).
15절 후반 부에 바울은 죄와의 투쟁을 거룩함으로 창조된 그의 새로운 본성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하나니”(15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그가 싫어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반전되었습니다.
그는 하기 싫은 일을 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에는 딜레마가 있는데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바울은 태만죄와 범행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는 태만의 죄는 그가 행하지 않았지만 행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행죄는 그가 행한 것이지만 행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러나 나는 내가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불명예스럽게 하는 죄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는 증인을 타협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있지 않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전까지는 결코 영적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완전히 정직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알도록 돕기 위해 바울의 사적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현실은 신자로서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아닐런지요? 생각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세 번째는 죄는 법적 범죄입니다(7:16).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법적인 범죄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율법을 좇는 것이요 율법을 좋은 것이라고 시인하나니”(16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자도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진정한 신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도 바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놀라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와 싸우지 않고 영광을 향해 질주할 수 있었다면 신약성경 열세 권의 책을 저술한 바로 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숙한 신자일지라도 바울은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죄 많은 육신과의 전쟁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는 성숙한 신자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
신약성경은 “모든 죄는 불법”(요일 3:4)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확증합니다.
모든 죄는 율법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왕의 통치 법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늘과 땅의 주권자에 대한 도전적인 반역이라 말씀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자신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작은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대적인 반역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법치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율법에 대한 지독한 범죄입니다.
네 번째 죄는 내재하는 힘이다(7:17).
죄는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내재의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제”는 그가 현재로 말하고 있음을 더욱 강화합니다.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바울이 자신이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므로 잠재적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느님께 종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분리라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한 거짓된 계략 아래서는 어떤 죄도 그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몸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영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그 안에 새로운 본성이 있음을 인식합니다.
바울의 새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어느 날 천국에 갈 때 그의 새로운 본성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죄 있는 육체의 구속받지 못한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계속해서 바울 안에 거합니다.
그의 죄의 근원은 그가 된 새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문제는 그의 안에 남아 있는 옛 타락입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더 이상 그 안에서 왕 노릇하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거”합니다.
그것은 그에게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여전히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꿈을 꿉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깨어납니다.
여전히 그와 함께 일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와 함께 여행합니다.
매일 매 순간 그의 죄의 본성이 그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 있거나 피상적으로 우리 삶의 표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깊숙이 거합니다. 죄는 내재하는 힘입니다.
내재한 죄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 뿐이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죄는 상반 되는 힘이다(7:18)
죄는 신자의 새 본성과 반대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 사람과 우리의 죄 많은 옛 육체는 멍에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중간 지점은 없으며, 그들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반대되는 힘입니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나니”(18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된 새 사람은 분명히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주일에 교회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신의 새 사람도 성령의 권능과 당신을 도우시는 그분의 능력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새 본성과 새 마음을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두고 일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립과 자족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역동적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의 반대되는 힘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죄는 경쟁하는 악 이다. (7:19).
죄는 경쟁하는 악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라고 썼습니다.
바울은 이전의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 방식에서 새로운 욕구, 새로운 애정,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악을 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악(kakos)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악한, 파괴적인 의미하는 강한 단어입니다.
악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성품과 완전히 반대되는 강력한 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속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이 악은 그 안에 있는 지배적이고 지배적인 세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는 강력한 힘이다.
더 이상 운전석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차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우리와 함께 타고 있는 뒷좌석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쳐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일곱 번째 죄는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7:20).
우리는 죄가 모든 신자의 삶에 남아 있는 실재임을 봅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7절 앞부분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여 그가 죄를 짓고 있지만 진짜 바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 그가 회심한 것은 참된 바울이 아닙니다.
참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입니다.
죄가 그 안에 “거한다”는 것, “거한다”(oikeo)는 마치 다른 사람과 동거하고 집을 점유하는 것처럼 함께 살다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죄가 그 안에 집을 세우고 그 안에 거하고 있음을 재확인합니다. 그
것은 바울과 함께 집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고 결코 떠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죄 많은 육신은 항상 그의 어깨 너머로 보고 그의 귀에 속삭이는 영구적인 손님이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는 그 안에 사는 괴물과도 같습니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와 죄에 대한 승리에 관한 우리의 큰 소망을 강조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의사 방문은 우리의 괴로운 진단을 보여줌과 같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에게 건강해지는 방법에 대한 처방을 줄 것입니다.
올바른 진단이 치료의 절반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올바른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여 성경 공부에 참여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의 현실, 즉 정확한 진단을 상기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잘못된 부분을 볼 수 있도록 이 구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질병에 대한 처방은
로마서 7장 끝에서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했을 때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패배주의적인 태도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인해 우리는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죄에 대한 점점 더 큰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더욱 발전하고 전진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29).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성숙한 신자에게도 계속되는 죄의 문제를 봅니다.
그러나 앞에 놓인 구절에는 큰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하나임을 믿음으며, 우리 악과 마지막 그날까지 외적과 내적 분쟁을 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06-18-2023
하나님 사랑이 칭의입니다.
로마서5:6-8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칭의(일컬을 칭, 옳을 의)란 한자 그대로 표현한다면 옳은 것을 일컷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의롭지 못한 죄인을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세상에서 도 부끄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것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왔슴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한 구절에 멈추었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며 나 자신을 한번 생각 해보았습니다.
이 구절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하는 말씀이라 생각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이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주제이며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고 있었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에 대해 신선하고 강력하게 선포되는 말씀이며 다시 들어도 믿음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자에게 귀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연약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상태입니다.(6절)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고, 계명도 그와 같으니 우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가끔 영적 무력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무력감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는 성령이 아닌 악한 영이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매일 악한 영에 시험당하고, 위협 당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도록 약한 영에 지배되어 끔찍한 일을 버리고 살아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많은 사랑의 혜자이지만 그분에 대해 생각하거나 숭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죄를 고백하는 시간 보다는 우리는 세상을
즐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차가워 질때 주님은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들은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지만 주께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전능하신 주님을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 삶에서 완전히 변화시키려면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필요한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분은 본인을 사랑하면 본인을 의심하는 모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을 사랑하며 확신하면 그 또한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접촉하게 되든 – 따뜻한 방법이든 우리에 대한 적대적인 분노의 방법이든 간에 – 그 사람은 우리의 이웃이 되며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
우리는 꾸준히, 충실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은 우리가 무력(연약)하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에 경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6절).
하나님이 얼마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를 화나게 한 방식에 대한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세상과 평화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모든 면에서 완전히 선하고, 자신의 말을 충실히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의 시간과 행동의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분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일부 남자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리이까?”
그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거룩하고 죄를 미워합니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표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그분께 고백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모든 행동을 반대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그에게 올 수 없다는 말을 귀기우려야 합니다.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경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음으로 그를 원수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8절).
바울은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 위에 넓은 틈이 10미터 너비의 틈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그 틈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들과 노인들과 병든 사람들은 2미터나 3미터를 뛰지만 보통은 6에서 8미터를 뛸 수 있지만 운동 선수가 아니면 9미터 이상을 뛸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운동 선수의 기준이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표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의 표준은 그분의 영광, 그분의 빛나는 완전성, 그분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며 비열함이나 조급함이나 편협함이나 이기심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친절이 풍부하십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입니다. 그는 그의 도덕적 완전성이 풍부합니다.
그것이 그의 영광인데 우리는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녁을 놓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의해 하나씩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 중 어떤 것에는 80%의 순종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목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고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저주에서 그분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오용함으로써 우리의 말을 긴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며 그분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힘을 구합니다.
우리는 특히 늙고 연약할 때 사랑으로 섬기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 음행, 도둑질, 거짓말,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삶을 위해 설정하신 목표이며, 우리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 걱정과 그심과 불만이 가득 차있는 우리 모습은 죄인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이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그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를 미워하고 죽기를 원했던 사람.
그분은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영원히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광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 생각 해보면 우리 역시 죄인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으며 또한 오늘 말씀과 같이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여 예수를 재물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증거로 칭의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졌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무서운 웅덩이와 수렁에서 홀로 올라와 우리의 모든 진흙을 씻어내고 우리를 위하여 새 마음을 만들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또 넘어졌어.
나쁜 짓을 하다가 ‘당연히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고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럴 때 도움이 필요할때, 그럴 때 우리의 도움은 우리의 구원이 기초를 두고 있음을 기억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누구였습니까? 예수 였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럼 우리가 낙담하거나 그가 지금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완전히 죄인이었을 때, 힘도 없고 하나님께 바칠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끔찍한 악당을 위해 누가 죽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 죽는 자, “그를 없애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글쎄, 적이 누구였는지?
혹은 우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를 거닐며 그의 시냇물을 오염시키고 대초원을 먼지 그릇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얼굴에 내 주먹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항상 그를 숭배하지 않는 수많은 변명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바울이 "적절한 때"(6절)라고 부르는 때, 즉 우리가 구원받을 적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이웃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에게 적합하고 적절한 시간, 우리의 무력함과 죄의 시간, 그런 다음 우리가 극한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동정녀의 태와 목수로 잔인한 수치의 십자가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일어나셨고,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는 희망!
이제는 넘어져도 예수님의 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력할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뻤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토하고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는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때맞추어 영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어떤방식 으로 반응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을 때” “다 끝났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넘어짐에 절망에 다끝났다라고 반응하면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등이 삶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 보다는 옳은 선택해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행동은 우리의 죄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을 열 배 더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한 우리의 용서를 점점 더 깨닫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전에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하물며 그의 아들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셨으니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칭의의 축복으로 기쁘고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는지 하나님께 감사며, 충성하며, 헌신하며 매일 고백하며 살아 가시길 죽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서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연약(771) 아스데네마(asthĕnēma) ἀσθένημα, ατος, τό
어원 / 7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연약한 자(롬 15:1)
신약 성경 / 1회 사용
기약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은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한 순교자로 뿌려지는 복음 05-07-2023
사도행전 7:55-60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은 부활절 시즌에 많이 읽혀지며 기독교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에 대해 배움을 줍니다.
우리는 오월 마지막 주일이 오순절로 맞이하며 벅찬 가슴으로 예수님께 감사하며 오순절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대해 나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울에서 바울로 가는 과정인 사울의 회심에 대해 알게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 안에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많은 믿는 사람들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음식이 분배되지 않았고 과부들은 일부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 앞서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택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단어는 메신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토로스(Apostolo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제자라 부르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들은 메신저로 파송되었으며 사도행전에서 이들에게 사도로 기도하고 안수했다고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백성 중에 행한 자로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과 변론하려
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지혜와 성령을 능히 당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고발하기 위해 그를 의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평의회에서 매우 긴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7:51-53 의 마지막 말로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말씀으로 스데반 집사은 유대인을 자극 하게 되고 이 자극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자극으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54절 이후로 전개 됩니다.
저는 오늘 55절 이후의 말씀으로 스데반의 대답 같은 순교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믿음 생활를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순교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고 요즘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교사 들이 전하는 현지의 상황으로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상상을 합니다.
그곳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이고, 부족한 환경인가를 느낍니다.
우리는 가끔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목숨 잃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정말 아주 가끔 뉴스를 전하여 듣곤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누군가 모르는 곳에 선교하고 계신 선교사를 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곳 자곳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시며, 순교자로 살아가기를 헌신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의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곳에서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은 거짓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사드락,메삭,아벳느고에 관한 다니엘의 책에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출석하며 세 청년의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이들의 젊었을 때 시험이 있었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에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타지 아니한 세 사람, 그들은 살아날 줄 몰랐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데반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하웰(James Howell)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이야기에서 이 불의한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일하시지만 원인은 아니십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며, 소망은 이 땅의 삶을 넘어선 것입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삶의 비결은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 이유를 찾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1965년 Martin Luther King, Jr.가 셀마에서 행진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옳은 것을 옹호해야 합니다.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면 살 가치가 있는 것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마도 그가 큰 연설을 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부분은 그것 때문에 복음의 진보가 퍼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 중 한 명 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동의한 사울. 사울은 나가서 믿음 때문에 남녀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울은 여전히 그가 다메섹 도상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야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님, 저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의 공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나니야가 알지 못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나니야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고 사울의 마음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독교 개종자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누군가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긴장했거나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무엇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어느 선교사를 통해서 돌 같은 마음을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를 확인해 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계속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수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면서도 때때로 단순히 그리스도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고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성령을 믿는다면,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의심하겠습니까?
우리가 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순교자(Martyr)는마루투스(μάρτυς)
증인 μάρτυς;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자체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유사합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주님께 간청한다는 점에서 단어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순교자 스데반은 오래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에는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기독교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45년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독일 출신의 39세의 루터교 신학자였습니다.
Bonhoeffer의 첫 번째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세상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우리 동족과 나누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재건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갔고 나치가 항복하기 불과 며칠 전에 그의 처형이 명령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작품과 글은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유산은 지성과 영적으로 뛰어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의 그의 삶이 그가 설교한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스카 로메로는 엘살바도르의 용감한 사제였습니다.
그는 정권이 반대자들을 살해하던 시기에 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로서 그는 그들에게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군인들이 와서 그를 조금 거칠게 대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것이 그의 다가오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메로는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대부분의 엘살바도르 사람들처럼 그 병사들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니 일부 병사들도 " 당신도."
그의 추종자들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폭력의 현장이 자비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도의 무기는 전쟁의 무기보다 강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전파한다면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죽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기도 해봅니다.
“나의 삶이 천국의 완성이 아니라, 앞서 간 성도들과 선교사들를 뒤따를 성도들과 함께 십자가의 구원에 동참하는 삶이 되게하옵소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hbuhr)의 말을 옮기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미래는 우리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전적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을, 그리고 교회의 씨와 복음 전파의 일 동참하길 다짐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아멘
증인(證人)(마르투스. martüs )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발음 / 마르투스(martü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증인(마 18:16, 막 14:63, 눅 24:48)
신약 성경 / 35회 사용
04-165-2023
이호승목사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19-23
03-05-2023
이호승목사
제목 / 거듭난 자의 삶
성경 / 요한복음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You should not be surprised at my saying, 'You must be born again.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는 거듭났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거듭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거듭난 자의 삶에 관한 비밀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거듭남이란?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겐네데 아노텐’의미는 하늘로부터 태어나다.
또는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 의미는 육적인 출생이 아닌,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개인들이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함 받고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 새롭게 거듭난 영혼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영혼으로 분별되며, 사모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거듭남 이란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왜 거듭나야 할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율법 학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한다고, 사실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도덕적으로 모범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모범인 니고데모에게 왜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까요?
말씀의 의미는 도덕적 으로 모범적인 사람도 중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육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적이 아닌 영적 중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갱생은 중생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갱생은 마음를 새롭게하며, 몸 가짐을 바꾸는 행실이지만, 중생,거듭나는 것은 심적, 영적, 행실를 모두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5절)
첫 번째 거듭남을 물 세례이고,
두 번째 거듭남은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를 시작하면 학습세례를 받은 후 물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 세례를 받는다고 우리가 바뀌었나요?
바뀌었다면 무엇이 바뀌었나요?
세례에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자신 구원자로 영접 할 뿐 자신이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 모든 일에 자신이 다 했다고 생각 할때 다시 전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질 수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성령의 힘은 무 한계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셔서 직접 역사 할때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어가는 영과 육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거듭났다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즉 너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아니라,
거듭남은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삶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거듭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믿음 생활 하면서 거듭남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 우리가 거듭남에 대하여 생각도 못했고, 경험도 없다면 우리의 과거의 믿음의 삶이 니고데모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듭난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우리의 자세 즉 믿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첫 번째 예배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두 번째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세 번째 기도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네 번째 타인을 대하는 자세, 즉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위에 다섯 가지가 달라짐으로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거듭남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 충성돤 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2-12-2023
이호승목사
제목 / 순간의 선택
성경 / 신명기 30:15
오늘 함께 하실 말씀의 주제는 ‘순간의 선택’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삶의 중요한 선택에 관한 것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택에 필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선택을 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 가지가 다 포함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보기를 주시고 그중 너희가 선택하라는 예제를 주셨습니다.
확실히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갈림길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해야 할 때 그분이 우리를
어디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 해야합니다.
신명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 세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모세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 동쪽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새 땅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상기시켰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신앙여정의 다음 주요 단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전체가 이 특별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는 신명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 앞에 섰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제 그의 삶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 서서 고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선과 악,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사이의 선택권을 준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삶을 선택하라. 인생을 선택하십시오.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섬기십시오.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분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분께 충실하면 약속의 땅에서 잘될 것입니다.
그에게 불순종하면 문제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택이 거의 40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여졌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 새 땅,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의 부모를 어떻게 구해 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 곧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곧 지키게 될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지휘봉을 여호수아에게 넘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그 새로운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길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이 새로운 경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모세는 염려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그들을 다시 완전히 노예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세력의 올무에 걸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말하는 선택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무엇이 위험 있을까?
모든 것. 이것은 아이스 라떼 와 핫 라떼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Fish sandwich에 Tartar sauce 와 마이오네즈 캡찹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과의 관계에 다시 헌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할례로 상징되었습니다.
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이 불신에 빠졌을 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문자적 의미에서나 영적 의미에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포로를 상징했습니다.
이집트는 속박과 노예 제도를 상징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새 땅으로 이주했을 때 그들이 애굽에서 육체적 노예였던 것처럼 영적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많은 유혹에 직면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강력한 세력이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백성들이 갈림길에 직면했을 때 모세는 영적 노예 상태를 피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생명과 평안, 즉 풍성하고 놀랍고 즐거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절망과 고통,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냉혹하고 설득력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에 가까워졌습니다.
긴 지체 끝에 그들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판돈은 매우 높았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오늘 아침 우리의 본문은 결정에 관한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관해서는 "선택"이라는 개념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루터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 스스로 그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의 수단, 즉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길이나 세상의 길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루터의 교리문답에서 사도신경의 세 번째 항목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이성과 힘으로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거나 그분께 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복음으로 나를 [선택]하셨고, 그의 은사로 나를 비추어 주셨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참된 믿음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느 날 새 땅의 문턱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과 그분의 길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표류했다면 어떻게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거룩한 성사를 통해 그분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분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 주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다른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것, 즉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최우선에 두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심지어 이 지상
생활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보다 앞서 있기도 합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분을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분은
구원과 영생의 문을 열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경험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능력으로 우리는 이제 그분을 위해
삽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은 핵심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오늘 말씀 통해서 우리 모두가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 삶을 책임지어 주시는 성부,성자,성령을 나는 귀한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01-22-2023
이호승목사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oAQbN9hLW30
교회의 지침서 I
고린도전서 1:10-18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한글개역 개정
세상에는 가족, 학교, 단체, 회사, 교회등 각기 다른 공동체있고 각기 지침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침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공통점이 사랑과 나눔입니다.
이것이 화합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지침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라고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성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강조하며, 10절에서는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첫번째 “분쟁 없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
왜 이러한 지침을 가져야할까요?
9절에서 바울이 말씀했뜻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연합을 유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기독교인들이 구별되어야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받았지만, 세상의 다른 단체는 각기 단체장과 단체원들이 필요에 의해 부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부름 받았기에, 교회의 큰 일치는 회중들 한마음과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평강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힘써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연합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제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가질때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보다 못한 것은 결코 진정한 통합을 가져올 수 없으며, 비록 교회가 아무리 온화하고 평화적일지라도 항상 분쟁과 분열 있다면 하나님을 섭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지라도 이모습은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지침은 아닐겁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지침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두번째 잘 못된 섬김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있는 고린도의 종교인들 모습은 어떤가요?
그들은 로마인과 유대인으로 나누이고, 종파를 나누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모습은 고린도 교인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이면, 그들은 논쟁과 분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네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12이는 다름이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나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을 보면 이 당시 교린도 교회 회중들의 모습은 종이가 찢어지듯 갈라질 위기에 처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를 위함일까요?
무엇을 위함 일까요?
이들은 어느 목사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어리석은 모습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중요한가요?
분명한 것은 누구를 지도로 따를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런한 일들이 발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논쟁과 분쟁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기적인 생각과 주장이 아닐 생각합니다.
논쟁과 분쟁에 중심이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계셔야함에 인간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 연합하지 못하는 것 중심에 누가있습니까?
교회의 리더 그 리더가 하나님의 중심 생각이 아닌 자신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 일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교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만 따른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논쟁과 분쟁을 만들어 교회를 쪼개는 그들를 함께 비꼬듯이 묶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무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 들과 마찬가지로 틀렸고 교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그리스도, 아볼로와 그의 동료들을 위한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조차 이미 예수를 따르는 자세가 잘 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각으로 결정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 안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리더나 성도들이 있지않을까요?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약하고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느 지도자의 이름으로 세례 받지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의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하나요?
목사도 장로도 아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믿음 생활하시면서 누구에게 충성을 다하셨나요?
우리는 사람을 것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신뢰 해야할겁니다.
세 번째 참된 지혜와 유일하게 참된 연합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보내신 것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설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 십자가 아래 모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연합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삶, 죽음, 부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가르는 결정적이고 분별적인 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아래에 있는 우리의 위치, 즉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열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고 하나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스스도인으로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으므로 우리 예수와 하나가된것 아닌가요.
또한 우리가 하나 될 수있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연합을 갖기 위해 항상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예배와 봉사에서 우리를 연합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하늘과 땅 사이의 대륙에 남녀노소, 인종을 뛰어넘고,세대를 넘어 그분의 사랑하는 교회로우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첫번째 교회의 지침은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하나가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