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와 요단
첫째는 홍해란 강(바다),
둘째는 요단강
홍해는 자기 힘으로 건널 수 없고 오직 은혜의 기적으로 건널 수 있는 강(바다)입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자력이 아니라 은혜의 타력, 즉 하나님의 기적과 사랑을 통해 구원 얻음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바다를,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십자가란 길을 통해서 건널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구세주, Jesus is my Savior!)
이것은 영적 순례의 시작입니다.
가나안이란 목적지에 이르려고 하면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것은 요단강입니다.
이 강은 홍해처럼 기적으로 건너는 강이 아니라, 언약궤(말씀)을 앞세움으로 건너는 강입니다.
언약궤(말씀, 십계명)을 앞세우며 건넌다는 의미는 말씀에 대한 순종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태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패스포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능력이라고 합니다(Jesus is my Power!)
요단은 가나안 땅을 경계짓는 중요한 강으로 물을 공급하는 핵심적인 강이다.
북쪽으로는 네개의 수원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서 남쪽을 향해 흐른다.
수원지 중 유명한 것이 헐몬산이다.
시편 133:3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중간에 갈릴리 호수를 거친 뒤 사해에서 끝마쳐진다.
보통 이스라엘 영토 전체를 가리킬때, 관용어로 단에서 브엘세바라고 하는데, 여기서 단(지명)이 요단강이 시작되는 곳이며,
이스라엘 영토의 남쪽 끝이 브엘세바이다.
서쪽에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지방이 있고 동쪽에는 지금의 요르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은 아브람이 롯과 각자 거주지를 정할 때 처음 언급됩니다(창세기 13장).
신약성경은 요단강을 그리스어로 ‘이오르다네스(Ἰορδάνης)’라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곳입니다(마가복음 1:5)
Ἰορδάνης, ου, ὁ 2446
발음 / 이오르다네스(Iŏrdanēs)
- 어원 / 히브리어 338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요단(마 3:5, 4:15, 19:1, 막 1:5, 10:1, 눅 4:1, 요 1:28, 3:26, 10:40).
- 신약 성경 / 15회 사용
영어에서는 이오르다네스를 조르단(Jordan)으로 씁니다.
나라 이름 요르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정관사(the)를 함께 쓰면 요단강을 뜻합니다.
사람 이름이나 성씨로도 씁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광야 생활 마지막에 요단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섬기면 사망과 저주가 임할 것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명기 30:18~19, 새번역)
모세는 이 명령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므로 실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신명기 30:14)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간다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가나안 정복의 삶을 경험하려면 말씀의 다스림에 순복하는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므리바에서 물 사건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기 뜻대로 바위를 지팡이로 여러 번 내리쳤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는 모세의 한 번의 실수를 엄벌하는 의미가 아니라, 가나안 땅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야 했던 것처럼,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도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영적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의미, 즉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홍해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신 십자가라면, 요단강은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홍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요단강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영적 요단강을 건너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히브리어로 홍해는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뜻으로는 "갈대 바다"이다. 그것은 처음에 수에즈 만 위쪽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호수와 습지의 연쇄 지역을 가리켰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출 13장에 기록된 출애굽의 사건 현장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이름은 후에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을 다 포함하는 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
아카바 만*과 수에즈 만 및 오늘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북부 호수 지역을 포함하는 (또 아라비아 바다와 인도양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바다를 가리킨다.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구약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세계 창조의 과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창조를 하나님이 바다*를 정복한 사건으로 상징적인 언어로 찬양하기 때문이다(사51:9-10 참조).
이 같은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솔로몬 성전의 법궤를 찾아냈다고 하는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Ron Wyatt)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론 와이어트는 느웨이바 해안과 아라비아로 향한 바다 속에서 수많은 병거바퀴와 마구, 산호초에 둘러싸인 사람의 뼈와 말의 뼈를 발견하여 촬영하였다. 강력한 동풍으로 물러난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마른 땅으로 건너갔다면, 이는 얼마나 놀라운 행진인가?
이 놀라운 사건은 깊고도 풍성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바다 속으로 길을 내신다는 점이다. 사람의 상식으로 보면 바다는 건널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멸망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강력한 동풍으로 이곳에 바닷길을 내시는 분이시다. 이는 해저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다.
둘째는 이 길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집트의 심판이 교차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선민에게는 구원이지만, 대적하는 세력에게는 심판이다. 이 바닷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완전히 탈출하여 구원을 받는다.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을 추격하여 바다로 들어오지만, 병거바퀴가 빠지고 벗겨지며 물에서 심판을 받는다.
셋째는 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신다. 모세와 백성의 찬양이 터져 나오고 미리암의 찬송이 울려 퍼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는 중에 높임을 받으신다. 약하여 스스로 이집트에 저항할 수도 없는 이 백성을 노예상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찬양을 받아 마땅하다.
넷째는 이 기적을 통하여 고대의 두려움의 대상인 혼돈의 바다와 그 속에 노는 흑암의 세력이 심판을 받는다. 이사야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라합”이라는 용을 심판하는 사건으로 그린다.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9).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인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신다.
다섯째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그려진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제 뒤로 돌이킬 수 없다.
히브리어로 요단은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어로 요단은 야라드 (ירד)에서 파생한 야르덴 (ירדן)으로 표기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지게 된 근거는 골란고원에서부터 시작된 강줄기가 가파른 협곡을 지나 사해까지 이르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비록 자연현상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긴 했지만, 요단은 더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단”이라는 의미는 “내려가다” 혹은 “급하게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빠르게 흐르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밝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앃여 서리라.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에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야만 했다. 가나안 정복의 첫 과제는 인간이 쌓아올린
성벽이 아니라 요단강이라는 자연 장벽이었다. 가나안 정복 자체가 그러했듯이 요단강 문제도 여호와 전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앞서 전쟁을 수행하시는 하나님과 믿음으로 그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순종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레위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고이천 큐빗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언약궤를 뒤따라갔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잠기자 물은 북쪽 약 25km 떨어진 아담 성읍 주변에서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수 3:15-16). 그렇게 물 흐름이 끊어지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다.
여기에서 '강물이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는 것은, 지진활동으로 인하여 요단강 양쪽 언덕(고르지역)이 강 주변(조르지역)으로
무너져 내려 자연적인 댐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요단강 계곡 지역은 지금도 지진활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교훈을 가르쳐주셨다.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갖게 하신 것(수 4:24)과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수
3:7; 4:14).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넌 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다른 족속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여호와의 손이 얼마나 크고 강한 가를 목격한 주변의 모든 백성들은 마음이 녹아 내리고 정신마저 잃어버릴 정도였다(수
4:24; 5:1).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과 관련하여 성경은 후손들을 위한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열두 명을 선택하여 마른 땅이 된 요단강 안에서 각각 하나씩 열두 개의 돌을 가져오게 하였다(수 4:2-3).
그리고 그 돌을 길갈에 기념비로 세웠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승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가르치는 더
큰 목적의 기념비였다. 후일에 후손들이 그 돌들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면,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가르치라는
것이다(수 4:21).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요단강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져 아름다운 신앙 유산이 되었다. 교육은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재생산하는 거룩한 통로이다.
요단강 사건은 가나안 입국과 출애굽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는, 홍해와 요단강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넌 것이다.
두 사건 모두는 물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그 장벽을 기적으로 해결해주셨다(수 4:22-23).
둘째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력이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와 동등한 지도자임을 확증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고(수 3:7),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어 모세처럼 백성들이
두려워해야할 지도자가 되게 하셨다(수 4:14).
셋째는, 두 사건은 교육적 기능의 강조가 있다.
출애굽에서는 유월절을 통한 교육이 관련되어 있으여(출 12:26-27), 가나안 입국에서는 길갈의 돌기둥들이 교육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수 4:21-22).
출애굽이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시작이라면, 가나안 입국은 그 구원을 완결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가나안 입국에 실패하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새로운 영도력과 그를 따르는 순종의 신앙으로 가나안 정복을 이루는 주역이 되었다.
여호수아서는 그런 반전의 역사를 두 사건의 대비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