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이야기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이번주부터 목회서신(牧會書信. The Pastoral Letters)을 읽게 됩니다.
목회서신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세 권을 말합니다.
목회서신이란 용어는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세 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며 본문을 살펴보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새롭게 발견한 진리는 무엇인가?
3.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4. 내가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인가?
5. 내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6. 내가 간구해야 할 약속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한 후 새벽 묵상과 기도의 시간에 소개되는 내용을 종합하므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어버이주일 기도문
05-12-2024(주일)

어버이날 / 노천명

온 땅 위의 어머니들이
꽃다발을 받는 날
생전의 불효를 뉘우쳐
어머니 무덤에 눈물로 드린
안나 자아비드의 한 송이 카네이션이
오늘 천 송이 만 송이 몇 억 송이로
피었어라.
어머니를 가진 이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
어머니날을 찬양하자
앞산의 진달래도 뒷산의 녹음도
눈 주어볼 겨를 없이
한국의 어머니는 흑인노예 모양 일을 하고
아무 찬양도 즐거움도 받은 적이 없어라
이 땅의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싹을 내거니
청춘도 행복도 자녀 위해 용감히 희생하는
이땅의 어머니는 장하신 어머니
미친 비바람 속에서도 어머니는 굳세었다.
5월의 비취빛 하늘 아래 오늘 우리들의
꽃다발을 받으시라.
대지와 함께 오래 사시어
이 강산에 우리가 피우는 꽃을 보시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게 하소서
성 어거스틴의 기도

오 하나님,
이제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참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지배하에 거하고자 합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소서.
그러나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치료하여 열어주소서.
주님의 손짓을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치료하여 뜨게 하소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바로 식별할 수 있도록
나에게서 망상을 쫓아내주소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말씀해주소서.
주님이 명하시는 모든 것을 나는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몸 안의 독소를 키우는 것은 화(火)

정신의학자 "엘미게이스"가 감정 분석 실험 중 새롭게 발견한 이론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결을 시험관에 넣고 냉각하면 색이 있는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전물은 감정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화를 내고 있으면 밤색, 고통과 슬픔을 느낄 때는 회색, 후회의 말을 내뱉을 때는 복숭아색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색으로 변한 침전물을 모아 실험용 흰쥐에게 주사하면 짧은 시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화를 낼 때 우리 몸 내부에서 엄청난 독소를 뿜어내고 이 독소는 의학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무서운 독극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분노는 상당히 격렬한 감정이라서 화를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에 독소가 쌓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독소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 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
- 로버트 그린


어버이를 위한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부모를 모르는 인간을 속물과 같고 쓰레기 같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놀라고 있습니다
나를 창조 하신 하늘의 아버지와
나를 낳으신 눈에 보이는 아버지와 믿음으로
양육해 주시는 어버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르다 보니 위선과 거짓 경견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부모를 잘 모르다 보니 함부로 대하고 하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부모가 어떤 분인줄 모르다 보니 아버지에게 공손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경건한 척 하였고 잘 믿는 척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하자 마시고 보혈의 사랑으로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똑바로 잘 알지 못하다보니
우리 아버지를 깊은 속도 모르고 어머님의 절절한 사랑도
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내 방식대로 효도 하려 하였습니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부모를 대하려 하였습니다
효도하려고 유교식으로 제사를 잘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효도하려고 불교 식으로 49재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효도 하려고 납골당으로 흙으로 가벼린 묘지를 찿기에 바빳습니다
차라리 살아계실때 얼굴 한번 찿아 뵐껄 후회하고 있습니다
한번 더 인사 드리고 대접해 드릴걸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때늦은 후회만 하고 있는 저희를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비틀 비틀 교회가시는 어머니를 차량으로
모셔 드리지 못할망정 시도 때 도 없이 교회 간다고
짜증을 내어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릴적도 있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에게 넘어 지면 어쩌시려고 말하면서
생각해 드리는 척하면서 야단치며 구박 하였습니다
자녀위해 기도 하시는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도
해아리지 못하였으며 후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넓으신 배려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속좁은 저희를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갈라진 목소리로 찬송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스마트 폰을 도와 드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예배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더 잘 예배하도록
첨단 기능으로 도와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새벽기도를 좋아하셔서 새벽기도 가시는 어머니를
차량으로 모셔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헌금 드리기 좋아 하는 어머니 손에 한금을 쥐어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혹여 이런 저런 이유로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닌지
혹시 이런 저런 핑계로 어머님의 마음에 슬픔을 남긴 것은 아닌지
마음을 가다듬어 하늘 아버지께 우리의 불효를 자백드립니다







05-05-2024(어린이 주일)

맥아더 장군
자녀를 위한 기도(아버지의 기도) (1952년 5월)

A Father Prayer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May 1952)

내게 이런 자녀를 주시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시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 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않는 자녀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아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날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A Father Prayer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May 1952)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es will not take the place of deeds;
a son who will know Thee ?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04-28-2024(부활 후 제5주)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자

영국의 설교자 스펄젼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 ~ 1892. 1. 31)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외쳤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은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때로는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간증(干證)이 마치 굉장한 믿음으로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무장하려면  인간의 감각과 경험과 눈으로 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잘 알려진 어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6)

성경을 육신의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 읽는 방법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라고 합니다.
이번 주부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요한일서를 만나려고 합니다. 


  




04-14-2024(부활 후 제3주)

복음(福音)이란?

복음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혹은 넓은 의미로 ‘복음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 대한 죄인들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장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갈 1:7; 빌 1:27)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명령은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은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은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눅 2:11). 복음과 예수님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1:4).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나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동전의 안팎과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느냐고 물으면 복음의 정의에 따라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단순히 ‘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면 ‘예스’ 대답이 나오고, 복음의 정의를 ‘예수를 믿는 것+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면 ‘노’가 될 것입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대답이고, 후자는 믿음+행위라야 구원이라는 대답입니다. 이 두 갈래의 엇갈린 주장들은 지금도 신학계와 교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04-07-2024(부활 후 제2주)

복음(福音)이란?

"복음"이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복음적이란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복음적일 수 있습니다.
비복음적인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과 또는 성도로서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했습니다(빌 1:27).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삶을 요구하는 시대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의 현장이 부활의 진리를 목격할 수 있는 복음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성공해야 하겠습니다.






03-31-2024(부활주일)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피천득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02-11-2024(주현 후 마지막 주. 흰색 변화주일)

2024년 사순절 절기가 2월 14일부터 시작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성도들은 이마에 지난해에 사용했던 종료나무 가지를 태워 재가 된 것으로 이마에 성호(십자가)를 긋고 온종일 죄인된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생명을 얻고 살아간다는 고백을 합니다. 또는 거룩한 기름으로 이마에 성호를 긋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오후 9시) 출애굽기를 하루에 한 장씩 읽고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할 기도 제목들을 알려주시면 사순절 기간 동안 함께 기도하며 초대교회 때부터 역사하셨던 성령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동참하기를 기대합니다.

2024년 119기도회(하루에 한 번 9시)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것인가를 직접 체험하고 그 은혜를 부활주일에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한계시록 2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요한계시록 3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12-3-2023(성령강림 후 제27주)
주와 동행 365 #. 49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갈망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그 마음을 헤아리며 이번 주간에는 요한계시록 2:1-5을 암송합니다.

요한계시록 2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11-26-2023(성령강림 후 제26주)
주와 동행 365 #. 48

주와 동행 365 #. 48
이번 주간은 요한계시록 1:1∼20을 암송한 것을 복습합니다.
인도의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 한 마리를 관찰하다가 쥐가 고양이 앞에서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관찰하던 마술사의 마음에 쥐가 불쌍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는 마술을 부려서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변신한 고양이가 또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개를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더 불쌍하게 느낀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고양이는 개가 되자마자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또 다시 마술을 부려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변신하자마자 호랑이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호랑이를 보면서 마술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리 해보았자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그래서 다시 원래 모습인 쥐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영적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은 사탄입니다.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진리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1-19-2023(성령강림 후 제25주) 추수감사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7

어느 조류학자가 독수리 새끼를 닭장 안에 넣고 길렀는데 독수리 새끼가 병아리처럼 활동했다고 합니다.
독수리 새끼는 주위에 병아리밖에 없기 때문에 병아리처럼 걷고 병아리처럼 소리합니다.
세월이 흘러 새끼들은 많이 자랐습니다.
조류학자는 독수리가 완전히 퇴화했는지 살펴보려고 독수리를 마당에 갖다 놓고 날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날지 못하고 푸득거렸고 병아리 소리를 내기만 하더랍니다.
조류학자는 독수리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산 높은 곳에서 푸른 숲을 보여주고 날아가도록 했습니다.
그 순간 다른 독수리 한 마리가 세차게 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이 독수리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독수리는 더 이상 병아리가 아니라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좌절하고 주저앉아 낙심한다면 날지 못하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장부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간 암송할 말씀(요한계시록 1:16∼20)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1-12-2023(성령강림 후 제24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6

어떤 심리학자가 여러 마리 벼룩을 대상으로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나 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모든 벼룩들이 20cm는 충분히 다 뛸 수 있고, 어떤 벼룩은 무려 30cm를 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높이뛰기에 실력을 가진 벼룩들만 모아서 7-8cm 높이의 유리컵에 놓고 그 위에다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래도 벼룩들은 유리컵 안에서 계속 뛰었습니다.
그러나 유리컵의 한계 때문에 더 높이 뛰지 못하고 유리벽에 자꾸만 부딪쳤습니다.
한 두 시간이 지난 후 심리학자는 벼룩이 들어있던 유리컵의 뚜껑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상을 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룩들은 ‘이제 나는 그 이상 뛸 수가 없다.
이 7-8cm인 유리컵의 한계가 내 한계다’라는 생각에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한계를 너무 낮게 낮추어 버리고 인생의 어떤 난제 앞에서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점을 낮추지 말고 암송하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번 주간 암송할 요한계시록 말씀 1:11-15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1-05-2023(성령강림 후 제2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5

지난 주간에 암송할 요한계시록(1:1-5)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번 주간에 암송할 요한계시록의 말씀(1:6-10)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0-29-2023(성령강림 후 제2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4

2006년 발간된 얼스터대학의 리처드 린 교수와 핀란드 탐페레대학의 타투 바나넨 박사의 공저인 ''IQ와 세계불평등''이란 저서에서
미국인의 IQ는 100, 싱가폴, 홍콩인의 IQ는 108, 한국인의 IQ는 106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IQ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속한다.
이제부터 탁월한 한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요한계시록을 암송하는 것으로 그 우수성을 보여주자!
말씀을 암송하려면 세 가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집중(Concentration)
둘째는 반복(Repeat)
셋째는 인내(Patience)

이번 주간에 암송할 요한계시록의 말씀(1:1-5)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0-22-2023(성령강림 후 제21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3

‘톨레레게(tolle lege)’는 라틴어로 성경을 “집어서 읽어라”라는 뜻으로 초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기록한 <고백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청년 시절 마니교에 깊이 심취하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를 원하지만, 정욕과 세상 염려에 매여 번민합니다.
그런데 그의 집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울며 기도하던 중에 이웃집 아이들의 노랫소리 같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 로마서 13:13~14을 펴 읽고서는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아우수스티누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계 업 그레이드하여 이제는 "암송하여 읽어라(레시타 엣 레게, recita et lege)"는 교훈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여러 차례 의사를 면담하려고 담당 의사의 진료실을 찾을 때마다 어르신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어른들의 표정은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멋지게 나이가 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뇌를 자극하고 훈련하는 좋은 방법은 성경말씀을 통채로 암기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암송하려고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함께 동참하여 노후의 삶에 활력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북미장로교 선교사 권세열의 평전(評傳)
한국에서 성경 말씀과 씨름하며 반세기를 산 그의 사역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랜시스 킨슬러(한국명 권세열) 선교사는 일제강점기에 평양 숭실대학에서 교수로 사역하며 성경구락부운동(Korea Bible Club Movement)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대다수 아동들은 아동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매일 길거리에서 빈둥거리며 지냈습니다.
그 때 킨슬러 선교사는 미취학 빈곤층 아동들에게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기독교 전인교육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하는 ‘개척구락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킨슬러 선교사는 1930년 2월 추운 겨울날 평양의 한 서점의 따뜻한 방에서 여섯 명의 길거리 걸식 소년들을 데려다가 함께 첫날밤을 보냈었는데, 그날 이후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성경 한 구절에서 성경구락부를 아우르는 교육 원리와 실천 방법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경 본문이 누가복음 2장 52절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하시더라.”

킨슬러 선교사는 이 성경 말씀을 기독교교육의 실천 모델로 삼고, 소년 예수님이 자라면서 네 가지 생활 영역에서 조화와 균형을 보여준 것처럼 한국의 아동들을 원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무지와 가난 때문에 사회 참여와 봉사에 무관심하였던 한국 사회의 빈곤층 아동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다윗이 노년에 기록한 시편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유진 피터슨이 다윗의 영성에 대해서 묵상한 책을 ‘집어서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의 깊은 은혜의 경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은혜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다윗은 촌부 이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지만,
청년 시절부터 일생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골리앗처럼, 그를 죽이려고 달려오는 숱한 적군들이 있었고,
사울왕과 밧세바처럼, 그가 뛰어넘어야 할 무수한 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수없이 많은 인생의 담들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험난하였던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며
바로 그 비결을 ‘주를 의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0-15-2023(성령강림 후 제20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2

하나님은 사랑입니다(God is Love).
헬라어로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θεος αγαπη εστιν)"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첫째는 선제적 사랑, 둘째는 인격적 사랑, 셋째는 선택적 사랑
선제적 사랑이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으로 사랑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십니다.
인격적 사랑이란 사랑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선택적 사랑이란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이와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 두렵게 하는 것들은 "가난, 비판, 육체적 고통, 사랑의 상실, 자유의 상실, 늙어가는 것,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절대적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용서(容恕), 둘째는 희생(犧牲), 셋째는 영생(永生)

용서를 위한 가르침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2)
희생을 위한 가르침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b)
영생을 위한 가르침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잡한 세상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소망과 기쁨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08-2023(성령강림 후 제19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1

한글날 577돌을 맞아 "예수님의 언어"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는 ‘아람어’를 사용하셨고,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을 때는 '히브리어'로 읽으셨습니다.

아람어는 기원전 10세기 전후 유프라테스 상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페르시아만, 시리아, 이란, 팔레스티나, 지중해 연안까지 근동 아시아 모든 지역에서 사용하던 공용어이었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람 민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면서 언어도 그 지역 말과 섞여 히브리말로 고착됐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바벨론 유배 때까지 유대인의 언어는 히브리어이었으나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후 아람어의 다른 방언들에 눌리어 히브리어는 서서히 변화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회당에서 히브리어와 글을 지키려고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유대 지방의 히브리어로 성경을 필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하면서 페르시아 왕들은 아람어를 행정 공용어로 채택해 유포시켰고, 이스라엘도 그 영향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아람어는 이스라엘의 사제와 귀족 등 상류층의 언어가 되었고 히브리어는 일반 민중의 언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을 정복한 후 헬라어가 아람어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지방 사람들은 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탈리타 쿰” 이라고 하셨던 것(막 5:41),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신 것은 아람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사용된 죄패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적었습니다(요 9:19-20).

예수님의 언어는 사람을 죽이려는 말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던 것처럼 "용서의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든지 주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용서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10-01-2023(성령강림 후 제18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40

교만한 인간들이 노아 홍수 후에 다시는 흩어지지 않으려고
시날 평지에서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없게 하므로 인간들이 쌓는 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민족들이 그들의 나라를 세우고
그들의 언어와 글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언어와 글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영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심지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불어, 독일어, 일어와 같은
언어와 글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글의 우수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한글은 무슨 소리든지 문자로 표현이 가능하고 심지어 문자 그대로 발음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언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을 한글만이 갖고 있기 때문에 한민족은 장차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글을 사용하는 민족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 이념의 혼돈으로 어지럽고 미래가 불투명한 것 같지만 반드시 한글의 뛰어난 발음과 표현력 때문에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신실한 믿음으로 그 기초를 더욱
든든하게 다듬어 갑시다.

09-24-2023(성령강림 후 제17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39
“복기(復碁. Post Mortem)”라는 용어는 바둑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은 바둑 한 판에 사용하는 바둑돌의
수가 대략 400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국을 마치면 반드시
바둑을 두었던 것처럼 재현하는데 정확하게 바둑알이 놓였던 자리에 상대방의 바둑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회복할 復, 바둑 碁).
신앙생활에도 이와 같은 복기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회개를 위한 복기(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둘째는 설교를 위한 복기(잠언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선제적(先制的) 사랑(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
요한일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인격적(人格的) 사랑(누가복음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09-17-2023(성령강림 후 제1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8
/

담을 헐어버리자!

새벽마다 환상의 선지자가 전한 '에스겔'을 읽고 묵상합니다.
지난 토요일(9월 16일) 에스겔서 8장을 읽고 함께 나누었던 묵상의 주제를 생각해 봅니다
"담을 헐라(Dig in to the Wall)"
"담"이 사용되는 주목적은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목적으로 세워야 할 '담'을 잘못된 목적을 감추려고 쌓아가는 인간의 탐욕스런 모습이 도처에서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점점 더 높게 쌓아가는 어둠의 세상을 밝은 빛으로 이끌기 위하여 담을 헐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여!
오늘의 시대가 쌓은 담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죄의 담
둘째는 형제와 형제 사이를 분리시키는 '미움과 다툼의 담'
셋째는 민족과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휴전선의 담'
넷째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좌파의 담'

이 모든 담을 무너트리려면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죄의 특징은 나누고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베르린 장벽이 무너질 때 온 세상이 열광하던 감격과 기쁨의 역사적인 순간을 회상하며 이제는 우리의 감격과 기쁨으로 끌어 안기 위하여 죄의 담을 무너트려야 하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읊조려 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09-10-2023(성령강림 후 제15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7
/

조선의 문이 열리다

조선으로 향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입니다. 서상륜은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이고, 그의 동생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 땅 소래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그 당시 두 형제가 세운 교회당은 ‘초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이후 1895년 한옥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토착민들의 헌금으로 건축했던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잊혀진 구약성경 최초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은공 기린다’

잊혀진 한국 교회의 은인,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인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Alexander Albert Pieters.1871-1958)목사의 한국 교회를 위한 공헌이 재 조명 된다.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기념 사업회(회장 박준서, 연세대 구약학 명예교수)와 풀러신학교 코리안센터(원장 김창환 교수)는 오는 12월 1일(토) 오전 11시 LA 패서디나인근 알타디나(Altadena)에 있는 피터스 목사 묘역에 그의 은공을 담은 기념 동판 제막식을 갖는다.

기념 동판은 한글과 영어로 1895년 한국에 온 피터스 목사가 최초로 ’시편촬요’출간(1898년)과 구약전서 번역과 개역 구약성경 완역(1938년)에 주도적 역할을 한 내용등이 기록된다.

패서디나 인근 알타디나에 있는 피터스 목사 묘소를 손수락 기자가 직접 살펴보고 있다.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가 기록되어 있다. [사진 KernChe Lu]


피터스 목사의 묘소는 2017년 패서디나의 풀러신학교 연구 교수로 와 있던 박준서 교수에 의해 알타디나의 마운틴 뷰 묘역에 잡초와 흙으로 덮인 채 방치되어 있음이 확인됐다.


묘소의 석판에는 구약성경의 최초 한글 번역자임을 알리는 공적은 없이 이름과 출생,사망 년도만 기록 되어 있었다. 이에 박 교수는 한국교회가 공덕을 잊고 있는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 이를 추진하여 묘역에 기념 동판을 제막하게 됐다.

기념 사업회는 또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여사와 에바 필드 여사 묘역에도 피터스 목사의 공덕비 건립과 피터스 목사 기념 강좌도 개최할 계획이다.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있는 알타디나 마운틴 뷰 묘지 정문앞에선 박준서 교수(2017) [사진 기념사업회]


1898년 ‘시편 촬요’ 출간

사후 60년만에 한국 교회를 위한 헌신을 재 조명 받게 된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가정에서 태어났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현재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이삭 프롬킨(Itzhak Frumkin) 이다. 그는 유대교 회당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심해 러시아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미국인 선교사 알버트 피터슨 (Albertus Pieters) 목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세례를 준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피터스로 개명했다.

그는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의 권고에 따라 1895년 권서(勸書.colporteur)의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그는 2년간 한국 전역을 누비며 한국어를 습득했다. 불과 2년만에 한국어를 마스터한 피터스 목사는 평소 애송하던 시편 두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1898년 ‘시편촬요’를 출간했다.

시편촬요는 역사상 최초로 구약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며 이로써 한국인들은 구약성경을 한국어로 읽을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의 가사는 그가 시편 67편과 121편을 번역한 것으로 찬송가 가사로 운율화 한것이다.

피터스 목사가 1898년 한국어로 최초 번역한 ‘시편촬요’표지와 시편 23편.[사진 기념사업회]


한국서 46년간 봉사, 1941년 패서디나 이주

이후 1900년 피터스 목사는 미국으로 와서 맥코믹(mccormick)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은후 미국 북장로교회 목사로 안사를 받았다.


1904년 한국으로 나와 당시 공인 성경 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 구약성경 번역,1910년 최초의 한국어 구약성경이 완성되었다. 이후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1938년 ‘개역 구약성경’을 완성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1938년 피터스 목사의 주도로 완성 된 ‘개역구약성경’을 표준 맞춤법에 따라 일부 개정작업을 한것이다.

1941년 70세가 된 피터스 목사는 46년 봉사했던 한국을 떠나 패서디나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준서 교수는 “피터스 목사를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헌신과 공헌을 기념하는 일은 한국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일”이라면서 기념 사업에 많은 동참을 부탁했다.

알렉산터 피터스 목사 기념동판 제막식.

▲일시: 2018년 12월 1일(토) 오전11시.
▲장소: Mountain View Mausoleum.
2300 Marengo Ave.Altadena.CA 91101.
▲문의 :Fuller Korean Studies Center.
박준서 교수:parkjs@yonsei.ac.kr.


알렉산더 피터스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년 12월 30일 ~ 1958년 6월 29일, 한국명 피득)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1] 한국에서 구약성경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한 개신교 목사이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 150편 중 62편을 골라 우리말로 번역하여 '시편촬요'[2]를 출간한 것이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카운티 알타데나(Altadena) 소재 마운틴 뷰에 묻혔다.

생애[편집]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교(Orthodox Jew)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Reuben Frumkin이고 어머니는 Rebecca Kaidanovsky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가 자라났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해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단했다.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난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우여곡절 끝에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세례받고 기독교인으로 중생하여 한국의 선교사가 되었다.[3]

한국선교[편집]

1891년 ABS 루미스(Loomis, Henry) 일본 총무에 의하여 권서(Colporteur)로 채용되어 1895년 5월 16일 내한했다. 1895년 9월부터 1898년 6월까지 3년 간 ABS 권서 겸 한국 부총무로 활동하면서 빠른 시일에 한국어를 익혔다. 서울 근교와 호남과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성서도 판매했다. 1897년부터 시편 번역에 착수하여 1898년에 12월 6일, 62편의 시편을 번역하여《시편 촬요》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구약성서를 발행했다.[4] 그 후에 구약성경번역(1911)을 번역했고 <개역구약성경>(1938)의 완역에 헌신하였다.

각주[편집]

  1.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978886 박용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 1895-1911, 神學指南 2008年 봄호(통권 제294호), 2008.3, p.106-155
  2. 1898년 광무2년(고종35년) 크기는 17.8×10.5㎝
  3. 잊혀진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크리스챤투데이, 2017.12.18
  4. 알렉산더 A. 피터스(Pieters, Alexander Albert, 彼得, 1871~1958) 선교사


최초로 구약 성서를 한국말로 번역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은인이요 영원히 잊지못할 선교사이다. 대부분 신약 성서를 한글로 번역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 존 로스 목사(John Ross, 1842~1915)는 많이 알려졌지만 피터스 목사에 대해서는 무슨일을 했는지를 잘 모르는분이 많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12월 30일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그가 자라났던 19세기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했다. 결국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 1895년 4월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된다. 유대인 본명을 버리고,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Pieters)라고 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피터스’로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당시 피터스 청년이 189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피터스는 그 일을 감당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그는 구약성경 개역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개역 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 성경전서’가 출판 되었다. (1956년에는 한글 맞춤법에 맞추고, 문장구조를 손질해서 수정한 ‘개역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은 성경번역 위원회를 만들고, 피터스를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피터스는 미국 매코믹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치고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04년 9월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신학교에서 같이 신학 수업을 받던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아내 캠벨 여사는 서울 생활이 얼마 되지를 않아 폐결핵에 걸려, 결혼생활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 젊은 나이에 별세 했다.

부인의 죽음이후 피터스 목사는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운동을 전개하며 가난한 나라의 폐결핵 환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썼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의료 선교사였던 의사 에바 필드 여사와 재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필드 여사 역시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세브란스 병원서 별세했다. 피터스는 이방 땅에서 아픔과 상처를 한몸에 품고 안고 성경번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찬송가 383장과 75장 가사도 작사했다. 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은퇴할 나이가 되어 성경 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사역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LA근교 선교사 주거 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지는 목사 직함도, 공적도 없이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만 있었다.

피터스 목사의 구약 성서 번역은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 식민지 세력 밑에서 압제 당하는 한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게 해 주었다. 구약성경 번역은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잊혀가는 피터스 선교사 삶을 보면서 자기의 동족도 아닌 이방땅 한국에 와서 일평생을 바친 헌신과 열정과 애국은 영원히 기념이 될것이다.(참고문헌 : 박용규의 소논문 ‘알렉산더 피터스’/크리스천 투데이, 한국복음주의 역사학회 ‘양화진 선교사의 삶’)







08-27-2023(성령강림 후 제1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5
/

한국교회사

#. 1 선교사보다 먼저 찾아온 복음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선교의 놀라운 특징은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866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는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조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당시 셔먼호 선장이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해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죽기 직전 성경이 들어있는 작은 보따리를 '박춘권'이란 졸병에게 건네게 됩니다.
1899년,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지 33년이 지난 이 때 마펫 선교사 앞에서 한 남자가 이런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한 권의 성경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조선의 문이 열리다

조선으로 향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500여권의 성경을 배포했는데, 그 중 일부를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가져가 여관 벽을 도배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관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 그 중 홍신길은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됐으며,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인이었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장로가 됐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 특히 박영식은 자신의 집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은 선교사보다 먼저 복음을 접하고, 또 복음으로 준비된 나라였습니다.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입니다. 서상륜은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던 인물이고, 그의 동생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 땅 소래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그 당시 두 형제가 세운 교회당은 ‘초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이후 1895년 한옥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토착민들의 헌금으로 건축했던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이자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리더를 심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 두 사람이 1885년에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이뤄지게 됩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로서, 의료선교사인 부인과 함께 고아원과 고아학교인 구세학당을 설립했고,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아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직접 영한사전, 한영사전, 그리고 한국어문법서 등을 만들고 출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울의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 매진했고, 1887년 조선 첫 개신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복음 전파에도 힘썼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 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1885년 4월 9일, 제물포에 입국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드린 기돕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힘썼고, 근대교육에도 열정을 쏟았습니다. 배재학당을 세워 산수, 과학, 천문학, 지리, 그리고 야구와 축구, 정구 등 새로운 교육을 통해 서양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펼쳐 나갔습니다. 특히 일제치하의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 서재필 등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고자 군산으로 향하던 중 배가 침몰했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다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 조선 땅을 찾은 여성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남성 위주 교육제도와 교육내용을 안타까워하며 여성 교육 기관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는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것이 후에 7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명성황후는 여성의 순결성과 명랑성을 상징하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 세워졌습니다.

의학 민족의 마음을 싸매다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은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고, 고종을 설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합니다. 이로써 의료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광혜원은 후에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자 병원으로 현재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됩니다. 제중원을 시작으로,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기독교병원이 세워졌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치유하게 됩니다. 알렌의 동역자였던 스크랜튼은 1885년 정동에 민간의료기관으로 ‘시병원’을 열어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시병원은 부녀자들과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습니다.

문서선교의 출범

초기 문서선교는 한글보급과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교 초기에 성경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한글을 택한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에 복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한글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1900년경 북감리회 선교사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서들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책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얽매고 있는 무지와 문맹의 사슬을 끊도록 지속적으로 영감을 불어넣는 자들이다. 현재 나의 목회를 받고 있는 1500명의 개종자들 가운데서, 글을 읽지 못하나 부분적으로나마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이는 1900년경의 신자들 사이에 한글 보급률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성서공회에 의해 1906년 최초의 공인역 ‘신약전서’가 출간되고, 1911년 구약전서가 출간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커져갔고, 한글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을 품은 선교사

초기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자력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의 세 가지 원리를 세우고 교회의 조직과 운영 면에서 큰 선교열매를 거둡니다. 특별히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부터 시작된 사경회는 ‘전국적인 교회지도자 양성’의 열망으로 이어져 많은 신앙 인재들을 양성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협정을 세웠는데요. 이는 한국 선교에 있어 불필요한 중첩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서울은 공동지역으로 정하고, 경기와 충북, 경북, 황해, 평남, 그리고 평북지역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충남, 전북, 전남, 제주 지역은 남장로교 선교회가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함남과 함북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감당했으며, 경기와 충북, 강원, 황해, 평남, 평북지역은 북감리교 선교회가, 평북, 경기, 강원, 함남 지역은 남감리교 선교회가, 마지막으로 함남과 함북 지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회가 분할해 선교에 힘썼습니다. 이런 지역 분할로 인해 교단별로 더욱 활발한 선교가 이뤄지게 됩니다.

1903년 완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 선교사가 자기 안에 있던 그릇된 민족적 우월감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술과 능력을 의지한 교만함을 공개적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성령의 불길이 한반도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불길이 1907년 1월평양장대현교회로 이어지면서, 대대적인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다 함께 기도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온 세계에 한국식 기도로 알려진 통성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한반도를 뒤덮게 되면서, 차츰 교회가 조직화 되었습니다. 1907년 9월, 평양장대현교회 예배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는데요, 당시 독노회에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이 목사로 장립하는 안수식이 거행됐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당시 참석 총대는 목사 33명, 장로 36명, 선교사 38명이었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부흥의 역사는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참회와 회개의 영적대각성이 민족가운데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백만인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합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중심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나 김익두 목사처럼 복음의 열정에 불타 전국을 누비며 사경회를 인도하고 또 구령의 열정으로 전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한국교회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 운동은 후대에 민족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았던 놀라운 움직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관순, 주기철, 손양원

초기 한국 선교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하는 선교였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며, 복음의 능력으로 그 모든 고난을 견디게 만든 것이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소녀, 이화학당을 다니던 유관순은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일제의 잔혹한 총칼 앞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아우내에서 시작한 그녀의 독립운동은 그녀의 가슴 속에 가득했던 애국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신앙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곁에서 유관순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녀의 조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흘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녀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던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생애를 조국을 위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나고 자랐으며, 교회에서 배웠고, 교회에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예배로 마지막 삶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행복할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이 남긴 마지막 기도가 마음을 울립니다.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이 말은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온 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주님 품에 안긴 순교자입니다. 6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고, 일제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온갖 회유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런 기도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약한 사람이 고문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저의 마음이 변치 않게 기도해 주십시오. 남은 기족들을 부탁합니다.” 고통 중에 있던 그는, 감옥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동참할 때, 주님께서 쓰러져 있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너마저 날 버리겠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고통 가운데 이 말씀을 남기시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줄 알았는데,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지고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손양원 목사님입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뤘고,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는 두 아들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고 맙니다. 하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아들의 죽음에 가담한 청년을 살려주고, 또 용서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사랑의 원자폭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온전히 인정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9가지 감사기도문은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고, 또 겸손하게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순교자인 손양원 목사님은 6.25 때 공산군의 총에 맞아 48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늘 사랑하고, 늘 감사했던 그를 우리는 이 땅이 낳은 ‘성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 한국의 교회사

    1911년 기독교 각파 조선포교 구역도이다.

    한국의 교회사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역사, 즉 교회사를 말한다. 한국교회사라고도 한다.[1]

    가톨릭교회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조선시대에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모든 기독교 교파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유입되었다.

    정교회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정교회입니다.

    1900년에 흐리산프 쉐트코프스키 신부로부터 정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개신교회

    루터교회

    1834년 조선에서 약 25일간 머물렀던 독일 루터교카를 귀츨라프가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인 개신교 선교사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방문이었으며 루터교 교단 차원의 선교는 1958년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시작되었다.

    감리교회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

    1884년 6월 8일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를 하던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요코하마시를 출발하여 23일 인천에 도착하고, 24일 한양 미국공사관에 머물며 감리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김옥균이 일본에 유람할 대 맥클레 박사와 친분을 맺었는데, 맥클레가 한양에 도착한 당시 김옥균이 승정원 승지로 외무아문 사무를 보던 때라 맥클레 박사가 조선에 당도한 목적을 고종에게 아뢰었는데, 김옥균은 일본에서 감리교 선교부가 하던 복지사업들을 근거로 고종에게 감리교의 정주를 상소한다. 고종은 학교나 병원의 설립을 승인하겠다고 하교하였는데 이를 당시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에게도 전달하여 미국에도 보도된다.[2]

    미국 감리회에서는 이제 헨리 아펜젤러윌리엄 스크랜턴, 메리 스크랜튼도 파송한다. 이들은 이화학당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여러 병원도 세운다.[2]

    장로교회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예수교장로회 § 역사입니다.

    평안도 의주군에 살고 있던 인삼 장수 서상륜은 만주에서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존 로스 선교사와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1882년, 존 로스는 서상륜을 비롯한 의주 청년들의 도움으로 복음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다.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이듬해인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대구면 송천리에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3] 즉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후 1885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등 여러 교단의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1907년 한국 최초의 노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창설되었으며,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결성하면서부터 독립된 교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 문제로 조선총독부와 마찰을 보이다가, 제27차 총회(1938년)에서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일본 장로교 산하로 통합되며 해산한 이후, 1945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통합 기독교 교단에 흡수되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장로교회 재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 이래,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남측의 장로교 교인들만으로 1947년 총회를 다시 시작하였고,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1952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저항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제명당한 것을 계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이 출범하였고,[4]1953년에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장로교 계열이 한국기독교장로회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조직하여 분열해 나갔다. 1959년 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갈라졌다. 이후 1961년 김치선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 분립했고, 1974년 제24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에서 신자간에 일반 법원에서의 고소가 가능하다고 가결한데서 빚어진 교리의 신학적인 변질과 교회행정 문제에 항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측 총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반고소 고려파가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총회를 세워 나간 뒤로 대한민국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은 170여 개[5]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의 역사적 계승을 선언한 한국예수교장로회가 새로이 2012년 1월에 출범했다. 이러한 장로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복음주의 신학자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는 그 자신이 장로교 성직자임에도 한국장로교의 분열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독선에 따른 일이며, 이제라도 한국장로교회는 교제와 협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6]

    성공회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성공회입니다.

    1890년 잉글랜드 성공회찰스 존 코프(한국이름 고요한) 주교가 3대주교가 될 마크 트롤로프(조마가)사제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의사로서 현재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터에 성 루가교회(낙선시 병원, 선을 베푸는 병원)을 지어 의료선교를 한 랜디스(한국이름 남득시)와 함께 부산항으로 입국하였다. 대한성공회 선교 130주년을 기억하는 《성공회신문》2020년 9월 28일자 1면에 의하면, 1889년 11월에 주교서품을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받은 고요한 주교는 "임금이 없으므로 내핍생활을 해야 하며, 다른 성직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선교사 모집공고를 내었지만, 지원자가 없자 직접 지원자를 찾았다. 이에 호응한 이들이 조마가 주교와 남득시 선생이었다. 그날 존 코프 주교는 영국 세관원의 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7]첫 성공회 성당은 현재 인천 중구 내동 3번지 언덕에 있는 성공회 내동성당이며[8],서울 정동 1번지에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로 활동하는 교회를 세우며[9] 성공회는 한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성공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7년째인 1897년에 김희준(마가,?-1946년)과 김군명(요한)이 성공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10]

    존 코프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존 코프 주교는 1890년 조선에 입국하기전부터, 조선사람들이 빈곤질병으로 고통함을 알고는, 숙련된 의사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보도록 하는 의료선교를 생각하였다. 조선선교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순방 당시 많은 교우들이 자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미국인 랜디스(한국이름 남득시)가 존 코프 주교의 뜻을 존중하여, 성공회 내동교회에서 의료선교를 했다. 가마, 온돌을 사용하는 등 한국사람들의 전통을 존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영향으로 대한성공회는 1993년 관구 설정이 이뤄질때까지 잉글랜드 성공회 산하 교구로 활동하였고, 1965년 이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 조선교구로 활동하였다.

    각주


  2. “한국기독교회사(韓國基督敎會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4월 26일에 확인함.

  3. 양주삼 (1934년 6월 19일). “監理敎會宣敎五十週年 監理敎會가朝鮮에 宣敎를 시작한이야기”. 동아일보.

  4. “황해도 소래교회 -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 2012년 4월 26일. 2023년 1월 1일에 확인함.

  5. 이 교단은 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결합하였으나 신학적인 견해 차이 및 신학교 통폐합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1963년 환원하였다.

  6. 이중에는 개신교계에서 이단으로 판정되어 소속 교단에서 제명된 교회가 자체적으로 만든 비성경적인 장로교단도 포함된다.

  7. 뉴스 앤 조이 2006년 3월 31일자,김명혁 목사, “화해, 균형, 조화를 추구하며"

  8. 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성공회의 역사》. 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9. 천주교 답동성당, 내리감리교회와 같은 지역에 있어, 한국 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10. 1890년에 축성했을 때에는 한옥성당이었는데, 1926년에 지금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건축하여 축성함. 고딕양식을 생각했지만, 건축가 아서 딕슨의 도움말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11. 성공회의 역사/성공회 선교교육원 p.113


한국기독교사 개관

한국교회사는 로마 가톨릭을 포함할 경우 1784년부터를 다루지만 개신교를 중심으로 할 때는 알렌이 입국한 1884년부터를 기준으로 한다.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에서 무디 부흥운동을 통해 해외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스피어, 피어슨, 심슨, 고든, 무디로 대변되는 영향력 있는 부흥운동가들은 해외선교를 시대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었다.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서 해외선교 붐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에서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873년부터 만주우장에서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하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를 통해 1882년부터 한글성경이 번역(출판)되기 시작했다. 1882년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을 통해서 일본에서 한글성경번역이 진행되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이 성경을 가지고 입국했다. 이미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한글로 성경번역이 이루어졌다.

탁월한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정책

1884년 호러스 알렌이 입국한 후 한국에서는 세계선교의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했고, 이어 탁월한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선교는 1898년까지 미국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호주장로교선교회, 캐나다선교회 등 4개의 장로교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하고, 미감리교선교회가 1885년, 그리고 1896년 남감리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이어 성공회,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착수하여 한국에는 짧은 동안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선교를 착수하여 개신교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 한국장로교선교회는 나라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교단이 달랐지만 하나의 장로교선교회를 한국에 시작했고, 1907년 독노회를 결성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고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그것은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의 신학교 설립 목적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국에 파송된 초기 선교사들은 독자적으로 선교하지 않고 연합과 협력을 통해서 선교를 진행했다. 이들이 채택한 선교정책은 첫째, 의료 및 교육선교, 둘째, 문서 및 성경번역, 셋째, 선교지 분할정책, 넷째, 연합운동, 다섯째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수많은 학교들과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세브란스 병원, 상동병원 등 많은 병원들이 전국에 설립되었고 세브란스의전,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경신학당 등 수많은 학교들이 전국에 설립되었다. 기독교 학교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학생들로 받아들였다. 기독교 학교를 통해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었다. 사장된 언어 한글을 민중의 언어로 끌어 올린 것도 기독교였다. 춘향전 구운몽 등 한국의 고전을 영역하여 소개하였고 천로역정을 비롯한 많은 서양의 고전들을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였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성경중심의 기독교를 형성하고 문자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성경과 기독교 문서선교를 통해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기독교는 근대 한국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중심 틀을 제공하였고, 서양의 사상은 한국인들의 의식을 대단히 높여주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청교도 정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이어서 술과 담배를 금했고, 삶이 깨끗하였으며,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국을 다니며 순회선교를 했고, 사경회운동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감당했으며, 문선선교, 학교설립, 병원설립을 통해 치료하는 사역, 복음의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학습과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른 삶을 요구했고, 가정을 복음화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며, 결혼관계를 깨끗하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먼저 삶의 모범을 보였고, 복음전도를 실천했으며, 한국어를 잘 습득하여 한국인들을 교육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이상은 한국인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대부흥

20세기 초 우리 민족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부흥이 한반도에 임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그것이다. 이 놀라운 부흥운동의 시발은 1903년 화이트와 맥컬리의 기도와 하디의 회심에서 시작되었다. 부흥의 불은 1904년과 1905년에도 계속 타올랐다. 이 부흥의 영향으로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가 결성되었다. 1906년 신년부흥운동, 그해 8월 평양선교사사경회, 9월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의 서울선교회사경회, 10월 목포부흥운동, 그리고 그해 가을 계속된 성령의 놀라운 부으심을 사모하는 정오기도회는 부흥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이런 가운데 1907년 1월 14일 15일 놀라운 대부흥운동이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임했고 이 부흥의 불은 장대현교회에서 계속 타올랐고 이어 평양전역으로, 그리고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2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 임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목도한 노블 선교사는 아마 사도 시대 이후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매큔 선교사는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라고 고백하였다. 이길함 선교사는 1907년 1월 15일 어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일어난 어떤 부흥보다도 강력한 부흥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블레어는 그날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온갖 죄악들이 그날 밤 토로되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재연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대부흥운동은 한국인들만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 이 놀라운 부흥의 불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해외선교열을 고취하고 놀라운 성장을 가져다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사회각성으로 이어졌다. 대부흥을 경험한 후 기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사회와 민족을 선도한 한국교회

이 놀라운 부흥운동은 1910년부터 진행된 일제강점기를 준비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1910년대 민족운동이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일어나 1919년 삼일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1920년 김익두 부흥이 일어나 다시 한국교회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 수많은 병든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이 희망을 가졌으며, 불신 영혼들이 중생을 체험하고 세례를 받았다. 물산장려운동, 농어촌운동, YMCA, YWCA, 주일학교운동, 엡웻청년운동, 청년면려회, 금연금주운동 등 한국교회는 사회계몽운동을 통해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일을 감당했다.

하지만 무서운 자유주의 도전과 신사참배 도전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만났다. 일련의 자유주의 도전이 진행되면서 1930년대 한국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학조류들이 등장했다. 1930년대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부흥운동이 그것이다. 1935-1945년으로 대변되는 10년 동안 한국은 신사참배 강요로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일제의 용의주도한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다. 1936년 한국천주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고, 1937년 감리교회가, 그리고 1938년 장로교회가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한국교회는 배도했지만 선교사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한국교회는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신사참배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가지고 생명으로 맞선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옥중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생명을 내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안이숙, 박영창, 이기선, 한상동 등 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사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그것은 반쪽만의 해방이었다. 해방 후 남과 북은 극단적인 대립의 연속이었다. 북한교회는 김일성 공산정권에 의해 다시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고, 남한교회는 미군정의 지원과 선교사들의 귀환으로 급속하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는 좌파와 우파의 대립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았다.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너무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 극심한 피해 속에서 한국교회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남한 교회는 북한에서 피난 온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놀라운 회개운동이 한국전쟁기에 일어났고 그런 강력한 부흥의 불이 남한교회를 다시 갱신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60년 4.19와 5.16으로 대변되는 혁명의 시대 한국교회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경제발전이 강하게 진행되는 동안 한국교회는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대별되었다. 한쪽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체제를 인정하고 경제발전과 교회성장에 매진하였다. 예장합동은 1959년 통합과 분립된 후 만교회운동을 전개하며 교세 발전에 매진하였고, 신학교를 재건하였으며, 민족복음화운동에 동참했다. 1970년대부터 진행된 민족복음화운동과 대중전도운동에 예장합동은 중요한 일익을 감당하였다. 교세가 놀랍게 진행되었고, 놀라운 교회성장과 함께 해외선교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예장합동은 한국에서 가장 놀라운 선교의 모델이 되며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교회는 전에 없는 성장기를 맞았다. 거의 모든 교단들이 배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들이 여럿 등장하였다. 이런 놀라운 한국교회 성장은 개교회 성장을 통해 교회를 건축하고 묘지를 구입하고 기도원을 구입하는 등 물량적인 확장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교세는 성장했지만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인가 신학교가 대거 설립되어 무자격 목회자들을 대거 양산하고 말았다. 기복신앙, 한국교회의 세속화, 세습, 물량주의, 금권주의, 성적 타락, 금권선거, 이단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만나고 말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성령운동이 한국교회를 주도하였으나 기복신앙을 비롯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신비주의운동, 은사주의운동이 등장하였고, 극단적인 광신이 한국교회 안에 일어났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제자운동이 한국교회에 강하게 일어났다. 한국교회에 새로운 갱신운동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고, 그 같은 움직임이 20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 강력한 부흥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WCC 부산대회 유치, 한기총의 변천, 이단의 급증, 목회자들의 리더십의 부재로 한국교회는 다시 위기를 만나고 있다. 칼빈탄생 500주년을 2009년에 그리고 다시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난해 2017년에 맞은 한국교회는 진정한 부흥, 참된 개혁이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









08-20-2023(성령강림 후 제1



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4
/

스가랴 (Zechariah)

스가랴서는 제1스가랴서(1-8장)와 제2스가랴서(9-14장)로 구분합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백성에게 스가랴는 조상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회개하라는 경고로 메시지를 시작합니다(슥 1:3).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것이 폐허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나 성전 재건축은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스가랴와 동시대 선지자 학개는 이들을 격려하여 성전공사를 재개합니다. 스가랴는 그들을 격려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장래,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전함으로 백성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합니다(슥 9:9).

시대 상황
BC 586 : 유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
BC 538 :  바사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거 유다 백성 귀향 허용
BC 536 : 유다 백성 귀향 후 성전 재건 시작
BC 535 : 위협과 법적인 고소로 성전 건축 중단
BC 520 : 학개의 책망의 메시지로 건축 재개
BC 516 : 성전 재건 완료(스룹바벨 성전)

참조 /
BC 564 : 석가모니 출생
BC 551 : 공자 출생





08-13-2023(성령강림 후 제11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3
/


광복절은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로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되었다.
매년 8월 15일 경축행사를 개최하고 광복을 기념한다.

1절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작사가 정인보(1893∼1950)는 서울 출생으로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박은식,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이화전문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실학을 기초로 한 국학의 개념을 정립하였고 민족사관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저서로 『조선사 연구』,『담원 시조집』 등이 있다.

작곡가 윤용하(1922∼1965)는 황해도 은율 출생으로 박태현, 이흥렬 등과 함께 음악가협회를 통하여 음악운동을 전개하였고 가곡 「보리밭」과 동요 「나뭇잎 배」 등을 작곡하였다.





08-06-2023(성령강림 후 제10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2
/ 8월의 시

                         그날이 오면                                       
심훈(沈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07-23-2023(성령강림 후 제8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3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 세상이란 헬라어는 “땅(게스. γης)”라고 한다. 따라서 헬라어 성경에 의한 번역은 “너희는 그 땅의 그 소금”이라고 하겠다.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헬라어로 소금을 “할라스(halas. ἅλας)”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할라스’는 세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소금, 조미료나 비료, 제자들의 영적인 자질).
소금은 짠맛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밖에 버릴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지붕의 흙에 뿌려 흙을 단단하게 다듬는 것에 사용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 때 먼저 팔복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팔복의 내용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신령한 영적인 복을 강조하셨다.
따라서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은 세상에서 영적인 자질을 갖춘 신앙생활을 하라는 교훈이라고 하겠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뜻(데레마)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게스)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영적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07-16-2023(성령강림 후 제7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29

제헌절(制憲節. Constitution Day)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국경일이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지정하는 법정 국경일 가운데 유일하게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이기도 하다.





07-09-2023(성령강림 후 제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28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고 있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이름을 지어주려면 우선 하나님보다 먼저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그 배경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돌보고 있을 때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광경이란 가시나무에 불이 타올랐으나 나무는 타지 않는 진기한 상황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란 애급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모세는 갑작스런 상황에 대해서 만일 히브리 사람들이 누가 너를 보냈느냐? 하며 당신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누가 나를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라는 모세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들었던 모세의 기록에 따라 히브리 알파벳 4개의 문자로 이름을 표현했지만 י (요드), ה (헤이), ו (바브), ה (헤이) 유대인들이 그 문자를 읽을 때는 "야훼(יהוה)" "여호와(YHWH")" "아도나이(אדני)" "하쉠(השם )" 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여호와' '야훼'는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07-02-2023(성령강림 후 제5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 27
북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 물질적으로 가장 풍성한 삶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풍성하면 이전 보다 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할 텐데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들에게 감사하며 타락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백성들의 타락한 삶을 지켜보던 선지자 호세아는 이 백성들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 가지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세 가지란 “진실(眞實. 에메트. אֶמֶת)”과 “인애(仁愛. 헤세드. חֵסֵד)”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 다아트. דַּעַת)”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를 “음란한 마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란한 아음’은 곧 “음란한 영(루아흐 제누님. רוּחַ זְנוּנִים)”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려면 먼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예배하는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증인의 삶을 감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귀를 기우리는 경건의 삶이 회복될 때 비로써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2023년 전반기를 마감하고 하반기의 삶을 시작하는 7월의 첫 주일을 맞이하여 전반기에 실현하지 못한 것을 하반기에 성취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성령의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로 도와갑시다. 그리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송년주일을 기대해 봅시다. 



06-11-2023(성령강림 후 제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5

한국전쟁 / 6. 25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 한국교회 성명서

대한민국은 격변의 20세기 일제의 침탈 가운데 발아하여, 야만적 태평양 전쟁과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성장했다.
이념으로 갈린 동족상잔의 6.25는 서로 무고한 생명을 살육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초토화한 슬픈 전쟁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며, 전쟁 후 70년간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숭고한 참전 용사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6.25 전쟁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 기념 예배>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복음적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

모든 교회는 평화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시간이 더 길어지도록 행동하며 기도할 것이다.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복음으로 이념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이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과 국민통합으로 남남갈등 해소에 앞장서야 한다.

헌법 제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조문대로 평화적 통일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작금의 지나치게 적대적인 남남갈등의 해소를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저출산과 지구적 문제인 기후 위기는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국민과 함께 저출산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주변의 이웃을 돌아보는 사랑 실천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


06-11-2023(성령강림 후 제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4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마가 4:12).
진리가 무엇일까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는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얻기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진리가 살아서 행동하지 못하고 기억에서만 춤을 추게 될 뿐입니다.
믿음이 행동하는 삶이 될 때 진리는 내안에서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가 자유하게 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점점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깨닫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내려주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도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영의 사람이 됩시다.
살리는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시간이 갈수록 약하고 병들고 시들기 때문입니다. 



06-04-2023(성령강림 후 제1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3

이번 주 수요일부터 마가복음을 읽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 복음서는 4권 입니다(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은 마가복음입니다.
각 복음서는 상징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사자복음(왕의 복음)으로 유대인을 향한 말씀
마가복음은 송아지 또는 황소복음(종의 복음)으로 로마인을 향한 말씀
누가복음은 인자(人子)복음(사람의 복음)으로 헬라인을 향한 말씀
요한복음은 독수리복음(사람의 아들 예수)으로 모든 인류를 향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죽음, 부활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며, 대체로 구주의 권능 있는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러 행적 중에 으뜸은 속죄이며, 마가는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속죄를 강조합니다.
구주께서 속죄라는 사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다룬 마가의 기록과 간증을 읽으면서 복음으로 더 깊이 개종하게 되고 구주를 따를 용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05-28-2023(성령강림절)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2

이윤영 의원의 대표기도(일동 기립하여)  - 제헌국회 의원 198명 참석 -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 꺼내 보임)하신 것으로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자료 출처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속기록
미국 국가를 위한 기도의 날 / 매년 5월 첫째 목요일



05-21-2023(부활절 제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1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급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출애굽기 3:1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은 “순종(順從)”입니다.

누구에게 순종하였는가를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창 12:1)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습니다(창 22:10)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말에 순종했습니다(창 27:8-10)


성경은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믿음은 절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생각하고 그 말씀 따라 생활하므로
진리가 자유케 하는 기쁨을 누려 봅시다





05-14-2023(부활절 제6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0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변한다"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계속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세상의 역사 즉 일반역사는 세속사로 사람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구원사 또는 구속사는 하나님의 중심입니다.
구속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속사를 사용하여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인간들의 비합리적인 사건과 요소들을 사용하여 목적을 실현하시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20년 동안 수고했던 품삯을 결정할 때 마치 주술적인 방법으로 양과 염소가 새끼를 갖게 하므로 우성의 양과 염소를 외삼촌 라반의 몫으로 열성의 양과 염소는 야곱의 몫으로 약속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몫을 더 강하고 튼튼한 것으로 증가시켜 야곱으로 하여금 부를 이루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과정은 세속사의 방법을 사용할지라도 그 목적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05-07-2023(부활절 제5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19

창세기 12장부터 24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브라함의 신관(神觀)에서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 고백을 네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8, 19, 20, 22)
- 창세기 14장에서만 4회 사용(축약형 엘룐, 민 24:16, 신 32:8)(축약형 엘룐 시편에서 22회)

둘째는 엘 솨다이(전능하신하나님)(창 17:1)

셋째는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창 21:33)

넷째는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창 24:3, 7)

하늘의 하나님(엘로힘 솨마임) 땅의 하나님(엘로힘 에레츠)을 사자성어로 축약하면 "천지주재(天地主宰)"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천지주재라고 고백할 때는 그의 나이가 140세가 되었을 무렵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임종하므로 140의 나이는 노년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고령화 사회가 되는 때에 나이가 많다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신앙의 극치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하여 자녀와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고령화 사회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비생산적인 고령화 사회는 문제를 야기 시키겠지만 생산적 고령화 사회는 모두에게 유익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을 검색한 결과

하늘의 하나님 : 17회(구절)
창세기 24:3, 7. 에스라 6:9, 10, 7:12, 21, 23.  느헤미야 1:4, 5, 2:4, 20. 시편 136:26.  다니엘 2:44.  요나 1:9
요한계시록 11:13, 16:11

땅의 하나님 : 1회(구절)

창세기 24:3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 1회(구절)

창세기 24:3
내가 너로 하늘하나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 : 모든 것을 아시는 주
땅의 하나님 :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

천지주재(天地主宰)
하늘 천, 땅 지, 임금 주, 재상 재  -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주인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설명은 24장 이삭의 신부를 선택하고 찾는 내용입니다.
24장을 끝으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의 이야기가 나오고, 죽었다는 보고가 될 뿐이지 아브라함의 행적을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며느리를 구하기위해서 집의 일을 맡아보던 종과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 지는 그 아브라함의 원숙한 믿음의 경지는 정말 ‘도통한 경지 사통발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부르던 그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8, 19, 20, 22)
- 창세기 14장에서만 4회 사용(축약형 엘룐, 민 24:16, 신 32:8)(축약형 엘룐 시편에서 22회)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2. 아브람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을 들어 맹세하노니



둘째는 엘 솨다이(전능하신하나님)(창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셋째는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창 21:33)

아브라함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넷째는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창 24:3, 7)

3. 내가 너로 하늘하나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7. 하늘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찌니라.


04-23-2023(부활절 제3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17

창세기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제1부분은(1-11장) 서론에 해당하며 "원역사(原歷史. Primeval‎ history)"라고 합니다.
primeval = 최초의(prime) + 시대(ave. age)
원역사란 인류의 시작에 관한 것으로 천지창조와 아담과 하와의 타락
그리고 노아 시대의 대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제2부분은(12-50장) 본론에 해당하며 "족장의 역사(族長史, 聖祖史. the history of the patriachs) "라고 합니다.
족장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여호와(야웨. Yehôvâh. יְהֹוָה)
여호와(야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실 때는 "언약(言約. 베리트. berîyth. בְּרִית)"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둘째는 하나님(엘로힘. ’ĕlôhîym. אֱלֹהִים)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실 때는 "신적 권능(神的 權能)"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엘로힘)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매일 아침 창세기를 읽어가며 나는 어떤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있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의 삶에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도 삶의 변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아직 생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신앙생활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에 붙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면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4-16-2023(부활절 제2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16

모세 오경이란 다섯 권의 두루마리는 율법서(토라)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가장 먼저 “레위기”를 가르칩니다.
‘레위기’는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Harrison).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선택(12:1∼2)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구원(3:10)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성화(거룩)(11:44∼45)
‘민수기’는 이스라엘의 연단(21:8)
‘신명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쉐마)(6:4∼5)
요즈음 매일 아침 창세기를 읽고 있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창세기의 주제를 정리해 봅시다.
1장은 태초에(레베쉬드)
2장은 안식(솨바트)
3장은 뱀(나하쉬)
4장은 죄를 다스리라(하타트. 죄)
5장은 하나님의 형상(데무트)
6장은 하나님의 아들들(벤 엘로힘)
매일 아침 말씀을 읽고 듣고 나누면서 그 말씀이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거짓을 물리치고 진리가 다스리는 거룩한 땅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04-09-2023(부활주일) 주보 칼럼

부활과 소생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부활(復活)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후에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하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의 증거가 되는 유일한 존재는 예수님입니다. 
소생(蘇生)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후에 잠시 세상에 머물렀다가 다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죽었던 나사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떨어졌던 유두고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불교의 내세관은 윤회(輪廻) 사상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애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내세관은 인간의 삶은 수태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모태에 수태되어 영원한 내세의 삶을 살기까지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첫 단계는 모태에서의 삶
두 번째 단계는 현세에서의 삶
세 번째 단계는 무덤에서의 삶(Barzakh)
네 번째 단계는 내세(천국 혹은 지옥)에서의 삶
이슬람 내세관에서 일반 종교와 다른 점은 “무덤에서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에서의 삶은 현세의 삶을 마치고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 날까지 무덤에서 임시적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가족, 부, 업적" 이 세 가지가 무덤까지 따라간다고 합니다.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업적이며 그 업적 때문에 자살특공대와 같은 조직이 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 알라 앞에서 오직 자신의 업적(믿음의 척도)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정의는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부활이란 그림속에 있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지만 현실에서는 부활의 씨앗으로 심어져야 합니다.
부활의 씨앗이란 "신실한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04-02-2023(고난주일) 주보 칼럼


2023년 고난주간을 맞이하며(4월 2일 -8일)
주와 동행 365 #.14

고난주간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으로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화,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들이 전개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각 요일마다 그 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억하며 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고난 주간의 원래 명칭은 “큰 주간” 즉 하나의 큰 일주일이라는 뜻의 “대주간(Great week)”이었습니다. 이 명칭은 동로마 교회의 고난 주간 행사를 기록한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언급되었으며 서로마 교회에서도 “대주간”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공식 명칭으로 대주간을 의미하는 “Hebdomada Magna” 또는 “Hebdomada Major” 등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救贖)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선악과를 두고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 했으므로 원래의 규정대로 죽어 영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공의의 원칙대로 처벌하시면서도 구원받을 새로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대속 희생으로서의 고난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구속의 법을 가장 처절한 사형수단이었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영육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주권을 버리고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수난을 당하신 주님의 사역에 담긴 공의와 사랑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창세기 3:15, 이사야 53:1∼12).

고난주간의 유래

고난 주간은 사순절 절기 내에 포함된 절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주간이다.

이러한 고난 주간이 언제부터 지켜지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로마서 6:3-5, 고린도전서 11:23-26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주간이 전교인의 공식적인 절기로 공개적으로 지켜진 것은 A.D.313년 콘스타티누스 대제의 신앙 자유령이 포고된 이후였다.


03-26-2023(주일) 주보 칼럼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자!

유대인들은 성경을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란 "토라(율법서)"와 "선지서(느비임)" 그리고 "성문서(케투빔)"의 첫 문자를 합성하면 "TNK"가 됩니다.
'TNK'를 발음하기 위하여 모음 "A"를 넣어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에서 '율법서(토라)'에 해당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권의 목적을 알고 있습니까?

창세기는 선택(12:1-2)
출애굽기는 구원(3:10)
레위기는 성화(11:44-45)
민수기는 연단(21:8)
신명기는 경고(6:4-5)

새벽마다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제사법 : 1-10장
정결법 : 11-16장
성결법 : 17-27장

이제부터는 레위기서를 율법 또는 제사라는 규례로 읽을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속죄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레위기서에서 예수 복음을 깨닫는 지혜와 믿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03-19-2023(주일) 주보 칼럼

시대를 분별하자!
"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태 16:3)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대를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쥐고 흔들려는 세력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세상을 장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사회를 흔들고 있는 문제는 대통령으로 출마했던 사람이 법질서를 철저하게 위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조롱하는 소식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바르게 보도하고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과 같은 문제들을 들추어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JMS(정명석 교주) 사건을 드러내어 보수 정통 교회를 흔들려고 합니다.
최근에는 전직 대통령의 손자가 폭로하는 자기 집안의 범죄 형태가 마치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도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심밖의 영역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다른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세상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여론이 이미 검은 세력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확한 소식을 볼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심지어 한국의 전통 보수교단의 총회장들의 목회서신을 통하여 종전협정과 평화협정이란 그럴듯한 언어 장난에 동조하도록 모든 노회와 교회가 서명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합니다.

공산주의는 언어의 유희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정신을 차리고 영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바로 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2023년은 3.1 운동 104주년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1919년 3. 1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ㅡ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년간의 구금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일제의 폭정에 굴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3·1운동에 깃든 기독교 정신 … 부활, 순교, 비폭력 평화주의


 

오늘은 3·1절(삼일절)이다.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뜻 깊은 날이다.
그런데 3·1절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3·1절을 ‘삼점일’로 읽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현 교육정책이 낳은 안타까운 결과다.

삼일절은 1919년 3월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평화적인 시위를 벌인 날이다.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 선조들의 공헌이 그만큼 컸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계 인사가 16명이나 된다. 불교계 2명, 천도교계 15명이다. 3·1운동의 역사와 의의, 기독교 선조들의 공헌을 살펴봤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삼일절 노래’의 첫 구절이다. 노래 가사처럼 3·1운동은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정오에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1년 가까이 지속된 대규모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한다.
구한말 조선은 진퇴양난이었다. 왕실의 무능과 집권계층인 사대부의 부정부패에 농민과 하층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폈다.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이 시기 일본은 미국 페리 함대의 협박으로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했다. 그리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그렇게 근대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지정부는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조세를 개혁하고, 징병제를 실시했다.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다. 국력이 강해진 일본은 19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한일수호통상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강요로 맺게 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로부터 30년도 되지 않아 조선은 일본에게 완전히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권마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 사건이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실상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이 공포함으로써 한국 식민지화를 완성했다. 이 사건이 경술국치(庚戌國恥)다.

 

3·1운동, 서막이 오르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혹했다. 일제 군대와 경찰들은 악랄한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토자조사사업을 벌여 농토도 강탈했다. 한민족 말살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이에 민중들의 저항과 독립의식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고종의 서거와 ‘2·8독립선언’은 3·1운동이 일어나는데 기폭제가 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서거했다. 일본은 이 사실을 하루 숨겼다가 다음날인 22일,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비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일제와 친일파에게 고종은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고종 독살설이 유포되기 시작했고, 고종에 대한 애도는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를 뜻함)을 기해 전국에서 수많은 유림들과 유력인사들이 대거 상경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쿄에서 재일조선인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투쟁 의지를 천명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2·8독립선언이 귀국한 유학생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됐다. 그렇게 3·1운동의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던 당시 사회에서 대규모 거사를 모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계의 한용운을 중심으로 단일조직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각 학교, YMCA청년 대표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거사를 도모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에도 만전을 기했다. 비밀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1000장이 서울, 평양, 임실, 용강, 해주, 원산, 의주 등지로 철도편으로 전달됐다. 그렇게 3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독립선언서가 배달됐고, 곳곳에 격문이 붙었다.
3월 1일 정오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음식점)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늦게 도착했거나 중국으로 피신한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만세 시위는 서울을 시작으로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서울, 평양,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에서 폭발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222개 부(府), 군(郡)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중국 동부,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국, 일본 등 이역만리의 재외동포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짧은 시간 안에 한반도는 물론 해외 각지로 3·1운동 소식이 전파된 데에는 인쇄된 독립선언서 전파가 큰 역할을 했다. 시위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사람들의 입소문,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 귀향한 사람들이나 서울 유학생들의 귀향 보고 등도 시위 확산과 지속에 일조했다. 오산, 숭실, 신성, 양실학교 등 종교계 학교를 비롯한 200여 학교의 동맹휴학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은 일제의 강제진압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3·1운동 정신은 이후 여러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계승됐다. 4월 11일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3·1운동에 기초해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독립투쟁과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체가 되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3·1운동에는 기독교정신이 발현되어 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딛은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앞장섰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부산진일신여학교, 정신여학당, 계성학당, 신명여학교,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등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당시 소외된 어린 여학생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반상의 차별도 없앴다.
복음과 더불어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3·1운동 전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확인됐다.
3·1만세 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는 증거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교회 여전도회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인 예다. 3·1운동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교회와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을 봐도 기독교정신이 깃들어 있다.

첫째, 부활정신이 나타나 있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에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만세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의 칼날과 총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 모진 고문 앞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에,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순교자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 순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기독교는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종교다. 순교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경 앞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용기는 순교자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이었다.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지만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주요 수단은 무장봉기를 해 적군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폭력을 동원한 무장봉기가 아니었다. 일제의 살인적인 진압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3·1운동의 방법이었다. 이는 강포와 무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정신의 발현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지만(마 26:53),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비폭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교회가 정착한지 불과 30여 년. 기독교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교회폐쇄, 성도 수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이웃으로 십자가 정신을 발휘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이었다.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기독교가 중심이 된 3·1운동이 끝난 후 교회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제암리학살사건이다. 3·1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얼마 뒤 발안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은 4월15일 제암리교회 30여명의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학살했다. 일본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한 ‘우발적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명단을 파악해 교회로 소집시킨 점과 주변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했다. 철저히 계획된 만행이었다.
기독교가 입은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교회당의 손해가 41동이었다. 1919년 6월 30일 투옥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조선의 전 인구가 1700만 명이었는데 기독교인의 수는 2%도 채 되지 않는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년 동안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수감된 자는 약 9000여 명, 이 중 기독교인이 22.4%로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조들은 멈추지 않았다.

 

3·1운동의 얼, 유관순 열사

유관순. 신사임당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여성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95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순히 어린 소녀의 몸으로 독립을 외쳤다는 것? 그녀는 단순히 만세운동의 주역뿐만아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실천가 중 하나였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가 옆에 매봉교회가 있다. 매봉교회는 천안지역 3·1운동 당시 중심역할을 한 지령리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다. 지령리에 기독교가 전파되자 온 마을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유관순 집안도 아버지를 제외하고 예수를 믿었다. 지령리교회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천안 만세운동의 주도자였던 조인원과 유중무(숙부), 유우석(오빠)도 지령리교인이었다.
그녀는 공주 영명학교를 1년 정도 다니다 1915년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학업에 임했다. 일요일에는 담 하나 사이에 있는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이화학당의 학생들도 같이 참여하려고 했으나 당시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교문을 막았다. 유관순과 이화학생들은 학교 담을 넘어 시위에 동참했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졌다.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변에 알리고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기해 거사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3월 1일이어서 서울에서 시작한 3·1독립운동의 뜻을 살리기에 좋은 날이었다.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의 시위운동을 위해 수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연락하며 시위운동을 조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4월 1일 당일, 아우내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에 놀란 일본군은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날 시위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가 현장에서 일본군에 의해 죽고, 유관순과 오빠 유우석, 유중무는 체포됐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공판에서 유관순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받은 형량이 최고 3년이었던 것을 볼 때, 유관순이 시위운동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고, 일본 검사와 판사에 굴하지 않고 얼마나 당당하게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에 항소한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1921년 1월 2일 출옥 판정)을 확정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그러나 체포될 당시 입은 부상과 갖은 고문과 열악한 형무소 생활에 출옥을 몇 달 앞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만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꽃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일제에 분연히 일어나 항거한 용기와 모진 고문과 부당한 판결 앞에서도 의연했던 그녀는 그 어느 성인보다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가치를 우리는 가슴에 기억해야 한다.

 

03-12-2023(주일) 주보 칼럼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교회는 세상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침묵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정교분리라는 거짓 교훈을 주장하며 교회를 흔드는 법이 우후죽순처럼 제정되는 현실입니다.
서구의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속임수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정교분리의 이해가 더 복잡해졌습니다.
왜냐하면다변화와 다양화, 다민족과 다인종, 그리고 이민 커뮤니티의 형성과 확장, 다양한 종교들이 한 국가에서의 공존으로 인하여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적 원리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며 오늘의 교회가 시대를 향한 바람직한 자세를 독립선언서의 공약에서 살펴봅니다.

첫째, 부활정신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에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
만세운동을 탄압하는 일제의 칼날과 총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 모진 고문 앞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죽음 저편의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에,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순교자적 정신
순교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기독교는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종교다. 순교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경 앞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용기는 순교자적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해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지만 철저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주요 수단은 무장봉기를 해 적군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은 폭력을 동원한 무장봉기가 아니었다. 일제의 살인적인 진압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3·1운동의 방법이었다. 이는 강포와 무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정신의 발현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지만(마 26:53),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비폭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교회가 정착한지 불과 30여 년. 기독교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교회폐쇄, 성도 수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이웃으로 십자가 정신을 발휘했다.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이웃이었다.

03-05-2023(주일) 주보 칼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3·1운동에는 기독교정신이 발현되어 있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발을 내딛은 후에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병원과 학교를 세워 교육선교와 의료선교에 심혈을 기우렸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숭실학당, 부산진일신여학교, 정신여학당, 계성학당, 신명여학교,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등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당시 소외된 어린 여학생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양반과 상놈의 차별도 없앴다.
복음과 더불어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은 3·1운동 전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확인됐다. 
3·1만세 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는 증거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교회 여전도회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3·1운동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은
교회와 학생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위하여........






02-26-2023(주일) 주보 칼럼

3·1 정신을 기억하자

약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해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인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3·1운동에 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오히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8·15해방만큼 3·1운동은 중요하다.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3·1정신’이라는 말은 있으나 8·15정신이라는 말은 없는 것처럼, 3·1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단순히 역사책 속의 한 줄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희생 덕에 지금 우리는 평화와 풍요 속에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3·1운동 때 외쳐진 ‘자유’를 먹고 산다.
3·1운동은 우리 현대사의 기본을 만들고 기반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3·1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해야 하는 이유다.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삼 장

一.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남을 배척하는 감정으로 그릇되게 달려 나가지 말라.
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든지 밝고 정당하게 하라.

 






02-19-2023(주일) 주보 칼럼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지대한 관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3.1운동, 학교, 병원, 복지시설, 조국 근대화 발전 등 그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열릴 때도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4대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론" 이었습니다.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했고,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했으며, 군대에 군종제도를 도입해 병사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를 도입해 옥중의 죄수들에게도 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정부 요직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권장했습니다.
기독교 신문사 및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W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 그리고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기간과 그 후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기독교 단체 등을 통해 배분토록 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가는 곳마다 목사를 만나고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와 정치는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02-12-2023(주일) 주보 칼럼

‘정치적 올바름’은 경계해야 할 프레임


세실과 모리스가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다.
세실이 물었다.
“모리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모리스가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목사님께 한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세실이 먼저 목사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목사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

세실로부터 목사님의 답을 들은 모리스가 말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보겠네.”
이번에는 모리스가 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목사님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이나 한국 사회에 때 아닌 프레임 전쟁이 일고 있다.
상황을 바라보는 눈들이야 제각각이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크게 두개의 세력으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프레임의 원리, 그렇다면 작금의 시대에 광풍과 같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프레임 전쟁에서 과연 크리스천들은 어떤 시각으로 프레임을 이해해야 할까요?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탈성경적 프레임에 현옥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절대적 진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02-05-2023(주일) 주보 칼럼

팬데믹과 남은 자 신앙(미가 2:12-13)

야곱
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떼 같이 하며 초장의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코로나 19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 미국내 한인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대략 20%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은 자 신앙"을 강조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미국 내 한인교회들의 수가 최근 2년 사이 658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남은 자 즉 렘넌트(Remnant) 신앙을 강조합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힘을 모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이러한 믿음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와서 보라!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새 일을 이루었노라고!
이와 같은 믿음을 위하여 마음을 추스립시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중보기도자로 무장합시다.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소돔과 그 성을 엎으실 때에 롯과 두 딸을 그 성에서 불러내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코로나 팬데믹에 갇혀버린 사람을 불러내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러내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하여 열매를 얻기까지 중보기도로 헌신하는 즐거움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발언을 금기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딘지 설득력이 부족한 구실 찾기처럼 들리기도 한다.교회에서 세상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므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분명히 있다. 성도들의 종교적 성향에 대한 마찰을 피하므로 논쟁의 소지를 처음부터 없애고 될 수 있는한 교회에 더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국가에서 무슨 정책을 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넋을 놓고 있다가는 정작 기독교에 반하는 정책이나 악법이 시행될 경우 그 피해는 분명히 교회가 고스란히 받게 된다. 그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의 말처럼 “교회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목사가 왜 정치적 발언을 하느냐고 비판하지만, 예언자적 사명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은 어디까지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어디쯤에서 멈춰야 하는 것일까?
이 명제를 들춰보기 이전에 이번 달에는 ‘정교분리’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야 과연 교회나 목사나 혹은 성도들이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설 것이다.

 

미국의 정교분리 출발은 미국헌법 제정시 ‘국교’ 부인


엘정책연구원(Eternal Liberty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대표 이정훈 교수는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청교도 회중교회만이 진짜 교회야, 다른 거 하지마~” 식의 청교도 교회 외의 다른 종파, 즉 침례교도라든지 감리교도 등을 박해나 차별하지 말라는 원리, 다시 말해 ‘자유의 원리’라는 핵심가치가 ‘정교분리’의 근본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장로교 교인이 되던 침례교에 출석하든 국가권력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강요가 아닌, 개인의 자유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종파나 종교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핵심은 국가권력이 교회를 위한답시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교단만 국교로 정해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다 인정하지 않는 차별을 막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즉 정교분리의 출발은 자유입니다.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헌법에 탑재시킨 것을 미국인들은 위대한 실험이라고 표현했고, 미국헌법에서 가장 멋진 것이 바로 ‘정교분리’ 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가치는 ‘자유의지’이며, 이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을 인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교분리’라고 말한다.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이 쓴 <성경에 따른 정치(Politics according to the Bible)>의 내용을 인용해 “인간은 속박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고, 원하는 대로 말하고,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의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해야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정부에 속한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정부의 가장 큰 책임이다. 따라서 세상 정부는 인간의 행복을 극대화 해줄 수 있는 정부가 바람직한 정부다. 이런 정부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정부가 작아야 한다. 정부의 기능이 작을수록 국민의 자율성이 크다. 그러나 반대로 전체주의 독제주의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라는 큰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정부는 국민의 모든 것을 규제하고 간섭하려 든다. 잘못된 정교분리에 대한 상식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정교분리의 해석을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신학자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 연구위원)는 ‘정교분리의 복잡한 역사’란 논문에서 “기독교와 깊은 관계를 맺어 온 서양은 근대사회에 진입한 이후 각자의 고유한 경험을 토대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법적·현실적으로 재구성했지만,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가 국교로 기능했던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는 생각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며 한국사회의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의 편차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정교유착 혹은 정교갈등의 명분으로 사용되어 왔던 혼란스런 역사의 부정적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교분리를 교회의 정치참여 금지로 이해하는 사람들, 국가의 종교 간섭을 배제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혹은 양자 간의 월권행위 금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배 박사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정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는 단서조항이 삽입되어 있어 한국사회에서의 정교분리가 상대적 개념을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에벤에셀교회 이충근 목사의 경우는 정교분리와 관련해 대한민국은 기독교를 따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엘정책연구원 이정훈 교수는 정교분리를 현대적 시각에서 해석할 때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실행함에 있어 어떤 특정 종교집단과 유착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차별을 하는지의 유무로 보아야할 것을 지적한다.

“정부는 특정 종교집단에 예산을 밀어준다든지 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특정 종교를 차별하고 괴롭히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정교분리의 핵심입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교회가 ‘다원주의와 타협 합시다’란 말에 침묵하고, 카이퍼적인 신학과 신앙을 하면 정치적인 것이라 안 되고, 무신론과 타협하고, 공교육에서 무신론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더라도 크리스천들이 침묵하고, 크리스천 선생님이 학생이 배가 아프다고 해서 기도해줬더니 교육청이 징계를 해도 모르는 척 하는 것 등, 다른 것이 정치화가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 정치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상황이 이러함에도 교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정교분리의 뜻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가령 ‘A가 옳다. B가 옳다’에서 크리스천에게 확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즉, 상대가 다원주의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나는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계속 얘기하고, 너도 계속 얘기해! 그러니까 - 내가 저 사람 입을 막아, 또는 저 사람은 내 입을 막아 - 이런 거 하지 말고, 말해! 괜찮아! 이겁니다.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선포할 수 있으면 우리가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기독교의 입을 막아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게임(정교분리)이 아니기 때문에 그 법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프레임이란 무엇인가?

프레임은 한마디로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지(認知, Cognition)된 상황은 프레임을 통해 인식(認識, Perception)으로 도출되고, 인식은 행동을 유발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지를 전인식, 행동을 후인식이라고도 합니다.
하나의 사건을 보고 각기 달리 판단하기도 하는 이유는 바로 각자가 가진 프레임이 다른데서 온다고 볼 수 있는데, 프레임이 “누구에게 프레임을 씌웠다”라고 할 때 ‘누명’이라는 뜻의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수가 동일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현상을 빚게 되면 그 프레임은 사회적 프레임을 이룹니다.
그래서 정당, 정치인 등 사회적 영향력을 얻고자 하는 조직이나 개인은 프레임을 제시하게 되는데, 제시된 프레임이 널리 받아들여지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이 프레임으로 사회의 제반 현상을 인식하게 되어 정당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인은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에는 다양한 조직과 개인이 존재하며 서로 이익이 상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상대에겐 불리한 프레임이나 역프레임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 제시된 프레임이 견해의 차이인 ‘다름’을 벗어나 옳지 않거나 불의 또는 거짓인 ‘틀림’이 되면 개인의 경우 누명이 되고, 사회의 경우 병들어 혼란스러운 사회로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방향의 프레임이 바람직 한가?

앞에서 말 한대로 프레임은 판단의 기작(機作, mechanism)이 되기 때문에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프레임은 개인이나 사회를 거의 지배한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인류 최초로 우주에 다녀온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 나가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했지만, 미국 우주인은 “우주에서 보는 지구와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레임이 다르니 같은 것을 보고도 정반대로 인식하게 되는거죠.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지향점과 방식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삶에 무엇이 좋고 싫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평등이고, 공정이고, 정의인지, 삶을 재미찾기(fun seeking)로 살아야 하는지 의미찾기(meaning seeking)로 살아야 하는지 등 다시 말해 폭넓은 의미에서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이런 것들이 개인들마다 그동안 쌓여온 프레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을 정의할까요?
외모, 지위, 소유, 관계 등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생각 즉 사고방식을 이루는 프레임이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를 규정하려면 그 사회가 가진 프레임을 종합해보면 됩니다.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프레임이고 문화도 여러 프레임으로 이루어집니다.
또 시대마다 풍미하는 프레임이 있기도 합니다. 일종의 사조(思潮)라고 말하죠.
그래서 제시된 프레임이 건강해야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프레임은 패배와 절망에 허우적이던 한국사회를 신명과 희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그 결과를 기적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상황은 잘못된 퇴행적 프레임으로 인한 좌절과 분노가 사회 곳곳에 가득차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대표적인 프레임 사례가 있다면.

프레임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정치란 프레임 설정이고 설정된 프레임을 국민에게 설득시켜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프레임 예로는 ‘맥카시 선풍(McCarthy 旋風)’을 들 수 있습니다.
맥카시선풍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었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맥카시가 미국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대부분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던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직업을 잃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정부였던 미국이 공산주의 영향을 크게 두려워 한 풍조를 이용한 프레임이었습니다.
1953년 공화당이 집권하며 매카시즘에 대한 매력을 상실해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니 일종의 집권 프레임이었던 셈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트럼프가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프레임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미국사회는 아직 비교적 건전해서 근거 없는 프레임에 휩쓸리는 경우가 적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라 불리는 PC(Political Correctness)는 지도자나 기독교인이 경계해야 할 프레임 중 하나입니다.
언뜻 옳게 들리는 이 프레임의 결과는 그름을 그르다고 명확히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옳음조차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즉 매력적으로 들리는 ‘인권’이나 ‘평화’나 ‘포용’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개인의 ‘자유’나 ‘권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권 즉 ‘개인의 존엄’이 묵인되거나 말살되는 역차별을 가져오는 “정치적 위선 완장질”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용어는 이미지를 주입하고, 주입된 이미지는 프레임을 구성합니다.
프레임은 대상의 평판을 만들고, 평판은 대중의 선택이라는 행동을 유도하게 합니다. 

일례로 적법하지 않게 미국에 체류하는 사람들을 공화당은 ‘불법외국인(Illegal Alien)’으로 부르지만 민주당은 ‘서류미비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라고 부릅니다.
공화당이 나쁘게 보이고 민주당이 좋게 여겨지게 합니다.
또 서류미비 이민자라는 말은 불법체류자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립니다.
그만큼 용어는 프레임 설정에 핵심적 역할을 합니다.
불법체류자의 자녀를 꿈꾸는 사람 즉 ‘드리머(Dreamer)’로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불법체류자의 자녀만 꿈꾸는 게 아닙니다.

또 하나 짚을 것은 ‘소수자 인권’ 프레임입니다.
소수자 인권! 좋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온 것이 ‘동성애 프레임’입니다.
동성애 옹호는 앞서 말한 PC와 결부되어 이미 미국 사회에 많이 받아들여져 있고, 또 많은 분들이 말하고 있으니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크리스천들이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PC와 소수자 인권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탈성경적, 탈중심적, 탈이성적, 다원적 사고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절대 주권자, 절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기독교의 정신과는 전혀 상반된 것으로 허울 좋게 포장된 프레임에 현옥되지 않도록 근신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 프레임은 아무리 착하고 좋게 들려도 인본주의일 뿐”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타고르는 해고해야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딸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한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하지만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달리 해야 한다. 질문이 달라지면 답 또한 달라진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이나 한국 사회에 때 아닌 프레임 전쟁이 일고 있다. 상황을 바라보는 눈들이야 제각각이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크게 두개의 세력으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현상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프레임의 원리, 그렇다면 작금의 시대에 광풍과 같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프레임 전쟁에서 과연 크리스천들은 어떤 시각으로 프레임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지난호에 이어 후편을 토브포럼(Tov Forum) 대표 스테반 오 박사를 통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최근 한국에서의 프레임으로 인해 발생한 대표적 사례가 있다면.

한국은 프레임 전쟁이 첨예할 전형적인 환경을 갖춘 나라입니다. 건국 역사가 짧은 것도 그렇고 건국 전부터 지금까지 좌우가 대립하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해방과 건국 이후 6.25, 4.19, 5.16을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사례로는 친일파 프레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분노를 이용해 대한민국을 일군 우파세력을 친일로 매도하고, 좌파를 항일세력으로 미화하는 프레임은 억지가 많습니다. 얼마 전 조국 임명 국회청문회 때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대한민국은 연좌제를 폐지했으니 조국 일가가 저지른 불법은 조국 후보자와 상관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요.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식민 당시의 매국 친일파는 다 죽고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일인명사전도 매우 급진적인 좌파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는 ‘세상을 뒤집자’는 포스터가 붙어있었습니다. 당연히 공정성에 문제가 되었었지요. 위안부, 배상문제, 일제의 잔혹행위 등에도 프레임에 의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행히 최근 이영훈 교수가 앞장서 집필한 <반일종족주의>가 출판되어 이 부분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사 청산’이란 이름으로 제주 4.3사건, 5.18 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프레임 전쟁의 일환이고 효순·미선 사건, 광우병 파동도 다 ‘반미프레임’의 일환입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도 프레임입니다. 좌파가 스스로를 ‘진보’로 우파를 ‘보수’로 지칭하며 정착되었는데 용어가 주는 ‘이미지의 선호도’를 이용한 프레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우파와 좌파라는 잘 정의된 용어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상황을 배태(胚胎)한 최근 사례로는 ‘탄핵 프레임’을 들 수 있습니다. 권력은 권위에서 나옵니다. 권위 없는 공권력은 상상할 수 없지요. 탄핵프레임은 대통령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거짓보도를 기점으로 대통령이 독신여성인 점을 이용해 많은 추문이 나돌았습니다. 주입된 이미지가 프레임을 구성하며 권위가 무너져 선택의 우위를 차지할 조건이 마련되자 태블릿PC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조작된 프레임에 속은 국민은 탄핵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국민이 탄핵프레임에 속지는 않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프레임의 예를 찾아볼 수 있나.

성경이 창세기 처음과 계시록 끝 몇 장을 빼놓고 갈등(Conflict)으로 가득차 있듯이, 성경은 또한 프레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구속사 자체를 큰 의미에서 하나님이 설정하신 하나의 위대한 프레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과 롯이 땅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둘은 같은 것을 보았지만 롯은 풍요를 인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비전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른 인식으로 이끈 프레임 차이의 결과는 창세기 19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프레임 전쟁이라는 제목을 보아 아마 의도는 ‘누명’ 이나 ‘혹세무민(惑世誣民)’ 측면에서의 프레임을 염두에 두신 듯합니다.
이런 종류의 프레임도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이 재산증식을 위해 외삼촌 라반을 속이는 프레임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씌운 프레임도 있고, 요셉이 양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누명 씌우는 프레임도 있습니다.

반면 정치인이 아니라 일반인이 만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프레임도 있지요.
이 프레임에 의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울 때 다윗의 무예를 시기한 블레셋 지도자들은 다윗에 프레임을 씌워 함께 싸우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다윗이 동족의 피를 흘리지 않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성경에 나오는 프레임 중 압권은 십자가의 구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민심이 예수에게 쏠리자 질투한 당시 지배층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신성모독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프레임’을 씌워 예수를 처형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이기심과 공포라는 죄성에서 비롯된 각종 프레임의 결과를 엮어 ‘구속사’를 만들어내십니다.

크리스천 입장에서 다양한 사회적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고 세상을 선도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방법과 크리스천의 마음가짐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씀해 달라.

현대문명은 과학적 사고인 헬레니즘(Hellenism)과 기독교 사상인 헤브라이즘(Hebraism)의 양대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기 때문에 역사,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에서 성경을 모르고는 그 심층까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문화가 아니지만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는 세속문화 따라가기에 바빠 대응할 뿐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레임은 맥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별사안에 매몰되다 보면 맥락을 놓치고 그만 상대방이 제시하는 프레임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명상’은 마음을 비워 세속을 떠나게 하지만, ‘묵상’은 말씀으로 마음을 채워 세상으로 뛰어들게 한다”고 합니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 프레임은 아무리 착하고 좋게 들려도 인본주의일 뿐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공하는 여러 프레임을 정서가 아닌 이성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뇌는 감정적, 이성보다 정서를 자극하라”는 근거 없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입니다. 정서가 이끄는 판단은 속기가 매우 쉽습니다. 앞에서 ‘탄핵 프레임’에 속은 사람과 속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요. 아침 저녁으로 바뀌는 정서에는 책임도 없습니다. 또한 ‘분노’는 자기감정만 해결할 뿐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는 프레임에 이성적으로 대응하고, 기독교적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서는 그런 프레임을 제시하는 기술이 되겠습니다.

 

세상을 선도하려면 자연히 불이익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요즘 교계는 누리기만 할 뿐 희생에는 부족한 듯합니다. 불이익을 줄이려면 세상이 교계에 기대하는 그런 청결함을 갖추어야 하는데 교계는 이런 쪽에도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희생을 두려워하면 사명을 맡기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견해를 키워드로 요약하자면 맥락, 말씀, 공의, 이성, 희생이 되겠습니다.

 

2018년 9월 8일 허가되지 않았던 인천 퀴어축제 강행 시 반대 입장을 외치던 지역교회 목사가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다. 주요 언론에는 거의 보도된 바 없지만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각종 SNS를 타고 퍼진 소식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특히 교계는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한국기독교연합과 한국교회언론회 등은 성명서를 내고 “불법적인 집회를 강행하는 동성애자들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호한 채, 양심과 도덕과 윤리의 정신에 따라 반대하는 목회자를 현장에서 수갑을 채워 체포하는 경찰은 도대체 어느 나라 경찰인가. 이는 공권력(公權力)이 아니라, 공포의 권력을 가진 공권력(恐權力)”이라며 현 정부와 경찰을 성토했다.

울산대 법학과 이정훈 교수(엘정책연구원 대표)는 “역사 속에서 헌법이 종교, 모임, 거주이전, 자유 등을 보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보호하면서부터다. 미국에서 강조되는 정교분리의 원칙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특정 종교나 종파가 국가권력과 연합해 다른 이들을 차별해 온 유럽의 경우를 반면의 교사로 삼아 ‘국교부인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교회에서 절대 정치를 얘기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정치를 생각하고 기독교의 믿음에 부합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국가권력이 종교인이 갖는 예배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작금의 한국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유럽이나 캐나다의 경우처럼 기독교인이 표현의 자유에 기반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고소당하고 제지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선거에서 투표로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리스천은 올바른 투표를 해야 한다.
무조건 사람이나 출신 지역, 정당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올바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선거에서 뽑아야 한다.
동성애 반대, 낙태 반대, 진화론 반대, 사회주의 반대, 무상복지 반대, 종북 반대, 친북 반대 등과 기업의 자유, 가난한 사람 배려, 의로운 자 등의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와 좌익, 좌파주의자는 물과 기름과 같다 교회도 나라가 있어야 한다.
사회가 전체 건물이라고 가정해 보라.
사회가 붕괴하면 교회도 무너진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앞으로 교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교회 안의 좌익 목사들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친중, 종북, 반미를 외치는 자들이 외치는 평화, 인권, 정의라는 구호에 더 이상 선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된다.
기독교인은 말씀만 전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말은 하나님의 사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교회를 허무는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기독교 모임인 다니엘기도회가 전신인 트루스포럼(Truth Forum)은 서울대학교에서 시작해 현재 전국 30여개 대학에서 활동 중이다.
서울대 법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있는 트루스포럼 김은구 대표 역시 투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국민이 대표를 잘못 뽑으면 국가가 망가지고 교회가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독교인 후보가 나오면 그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의 질문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후보가 정말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살펴야 한다.
건전한 기독교적 사고에서 나온 국방, 경제 등의 탄탄한 정책을 보고 찍어야 한다.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다하더라도 바른 기독교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면 반기독교적이거나 기독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정책은 펴지 않을 것이다.
이 진리만이 분열된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고, 앞으로 나가게 할 것이다”고 역설한다. 

크리스천포스트 객원 칼럼니스트이자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를 지낸 프랭크 터렉 박사(크로스이그재민드 대표)는 한 대학의 강의에서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정치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혹자는 크리스천은 정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 아니니 정치에 너무 깊이 몰두해 완전히 빠져서는 안된다. 또는 정치는 우리와 상관없으니 크리스천이라면 딴 얘기 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법이 실제로 우리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즉 자유, 교회, 자녀, 가족, 건강, 돈, 사업, 재산, 학교, 안전, 가난한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복음 등등.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무신론자나 크리스천이나 모두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예는 대한민국과 북한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을 보면 남쪽은 빛이 밝고 생산도 넘치지만 북한은 암흑이다. 전기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한 마디로 정치다. 남한은 자유가 있고, 북한은 자유가 없다. 남한은 복음이 퍼져 있으며, 적어도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은 아닐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화한 나라들 중 하나인 반면 북한은 강제 노동 수용소가 있다. 당신이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정치다. 그렇지 않고 종교의 자유가 없다면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수 없고, 모임을 가질 때 지하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터렉 박사는 “다만 우리는 신실하게 행동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정치적인 논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우리는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깊이 관여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벤에셀교회 이충근 목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회는 친북, 종북 좌파 세력들과 동성애, 이슬람, 반기독교 악법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며, 잘못된 법을 지적하고, 잘못된 정치와 목숨 걸고 싸워서 다음세대를 위해 목숨을 건 신앙으로 나가는 것이 진짜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를 이용해, 법을 이용해 기독교의 가치를 말살하려는 시도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외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이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살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이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진짜 기독교인은 교양있게 신앙생활하며 정치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요. 그것이 진짜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자의 삶이 아닙니다.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진정 기독교인이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기도로 세워진 나라가 끝까지 예수님을 찬양하고 끝까지 예배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목숨을 거는 자일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03년 28살 당시 ‘두 가지 편벽됨’ 이란 글에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을 남겼다. <전문>을 소개한다. 

“내 일신이나 돌아보며, 세상 시비에 상관하지 말며, 믿음으로써 영원한 복이나 구하리라 하여, 전국 동포가 다 죽을 고초를 당하였다 하여도 조금도 동심치 아니하며, 일국강토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여도 들은 체 아니하며, 다만 기도하는 바는 나의 몸을 구제하소서, 나의 집안과 부모 처자와 친척 친구를 복 많이 주소서 일뿐이라...이 어찌 예수의 본이며 하나님의 기쁘게 드리시는바라 하리요. 이는 이른바 교회의 편벽되기를 주의함이라.”

 




01-29-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5

1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강조한 역사적인 배경은 일제 강압 시대에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에게 자유독립 운동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려고 의도한 것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신앙을 근거로 출발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 시장으로 정치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도시에 적용시켰습니다.

‘정교분리’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당시 세 가지 중요한 원칙에서 출발했습니다.
첫째는 세상 정부는 교회를 탄압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둘째는 세상 정부는 교회에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
셋째는 대통령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세상 정치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정치적 발언을 금하는 주장을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곳이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에서 정치적 이야기를 하면 서로 얼굴 붉히게 되니 될 수 있는대로 하지 않는게 좋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은 잘못된 것은 바로 깨우쳐야 합니다.

01-22-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4

22일은 설날입니다(음력 1월 1일)
설날은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로, ‘설’은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 ‘삼가다’ 등의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였고 본래의 설날을 구정(舊正)이라고 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화력(和曆)을 양력으로 바꿀 때 음력 설을 구정(旧正)이라고 부르면서 만든 말이다.

음력설은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시절 설날을 쇠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졌다.
을미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1896년부터 공식적인 새해 첫날의 기능은 양력 1월 1일(양력설)에 내주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40여년간 음력설은 명절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양력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이유로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하였고,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일부 가정에서는 양력설을 쇠는 풍토가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 가정에서는 여전히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음력설도 공휴일로 지정하여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정부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민속의 날이라고 하여 음력 1월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6월 항쟁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민족 고유의 설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받아들여 1989년 음력설을 설날로 하고, 섣달 그믐(음력 12월 말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3일 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01-15-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3

주와 동행하려면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말씀은 기록된 성경을 마음판에 새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시험을 받아셨던 예수님께서 기록된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암송하였던 말씀들을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1월에 암송할 말씀은 산상복음 중에서 '팔복'에 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1월의 암송 구절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01-08-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2

신앙을 색갈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색 중에서 나는 "흰색"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흰색'은 "순수함"과 "정결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純白).
그런데 흰색에 다른 색이 떨어지면 다른 색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교단"과 "교리"는 흰색 위에 다른 색을 떨어트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본질은 흰색이지만 그 위에 어떤 색을 떨어트리느냐에 따라 독특한 색이 나타납니다.
선교라는 색을 떨어트리면 선교를 강조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봉사라는 색을 떨어트리면 봉사를 강조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색을 떨어트리면 교육을 강조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원리가 목회자와 교회에 적용하면 흰색은 다른 깃발로 휘날리게 됩니다.
이민교회는 어떤 색을 떨어트려야 할까요?
어느 색갈을 취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한인이민교회는 이민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민 1세대들과 함께하는 목회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막을 내려야 하는 때에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도록 서로 섬기며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형통하다(7919) 사칼(sâkal) שָׂכַל

1. 바라보다,  2. 신중하다,  3. 피엘형 : 창 48:14(어긋맞기다)
Bible verse / 지혜롭다(삼상 18:30, 잠 1:3, 시 94:8), 어긋맞기다(창 48:14), 선포하다(시 64:9), 깨닫다(시 106:7, 사 44:18, 단 9:25), 명철하다(시 119:99), 알다(느 8:13), 가르치다(느 9:20, 시 32:8), 지키다(신 29:9, 수 1:8), 형통하다(왕상 2:3, 왕하 18:7, 사 52:13), 완전하다(시 101:2), 슬기롭다(잠 16:23, 19:14), 능숙하다(대하 30:22, 단 1:4), 지혜있다(단 12:3,10), 주의하다(잠 16:20), 감찰하다(잠21:12), 노련한(렘 50:9).
[명] 지혜자(암 5:13), 지혜(욥 34:35, 시 36:3, 47:7), 명철(잠 21:16, 렘 3:15), 총명(단 9:22)

01-01-2023(주일) 주보 칼럼

주와 동행 365
“주와 동행 365” 2023년 교회 표어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구약 잠언 13장 20절에서 그 비결을 찾고자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동행이란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깊은 교감 속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Delitzsch).

동행이란 히브리 단어는 “할라크(hâlak. הָלַךְ)” 라고 합니다.

‘할라크’는 “삶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주와 동행하려면 먼저 주님의 삶의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삶의 방식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행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나와 함께 신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혼자서만
가는 것보다 두 세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전도서 4:12)


주님과 동행하려면 내 안에 예배 처소가 세워져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모이는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예배는 내 마음의 예배 처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를 예배의 자리로 만들고 삶의 선교지라 생각하고 2023년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로
헌신의 삶을 결단하고 실천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행이 무엇인가요?

성경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
다른 하나는 "새 사람"

옛 사람은 하나님 없는 삶을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 '옛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방식(God's Way)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가 가는 길이 그 목적을 벗어나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인데, 우리가 가는 길이 살다가 썩어 없어질 길이라면? 이 둘은 결코 동행할 수 없죠.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따라오셔야 할까요?
다른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쉬울까요? 어떤 것이 편안할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간단한 답이 나옵니다. 우리의 욕망이 움직이는 데로 사는 것이 편안하고 쉬운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옛사람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놓자마자 다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의 본성이 늘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긴장”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45:2-8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요셉

4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45. Now therefore be not grieved, nor angry with yourselves, that ye sold me hither: for God did send me before you to preserve like.


사람은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동행" 이란 말은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과 동행하면 좋은 인격자가 되고, 거친 사람들과 동행하면 어느 순간 나쁜 행동이 물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시1: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주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집사님 남편이 퇴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신경질부터 내고 거침없이 욕을 퍼붓고, 아이들과도 마주치면 야단부터 치고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늘 부정적이어서, 설교를 늘 불평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서 아내 집사는 늘 기도제목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가 갑자기 남편이 변하기 시작하였답니다.

갑자기 아이들을 안아주고 대화를 하고 격려하고 축복기도를 해주고 아내에게 꽃도 사다 주고 “여보! 사랑해”라는 말도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어찌된 건가 하고 물었더니 근래 새로운 거래처
사장님을 만났는데 그 분은 좀 실수가 있어도 용서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힘내라고 격려해 주며 긍정적으로 살라고 용기를 주더랍니다.

하루는 그분이 지난 삶을 이야기 하는데 손대는 것마다 다 잘 풀리고 많은 복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장로님이더랍니다.

그 장로님을 만난 후 인생관이 달라져서. 그 후 당당하게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신앙으로 사업을 일궈나가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인격을 갖춘 사람,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야 믿음이 성숙해 지고, 인격이 변화되고, 바른 가치관이 세워집니다.

사람은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과 자주 만납니까?

긍정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비젼을 갖고 희망을 꿈꾸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늘 불평불만하고 남을 험담하고, 세상 적이고 혐오스런 사람들을
만나면 본인도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가고, 또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어도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과 동행하므로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고, 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동행한 요셉을 통하여 함께 은혜나누길 원합니다.

먼저: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3~4절)

야곱이는 자녀들을 편애하여 요셉을 유난히 사랑했습니다.
요셉만 채색 옷을 입힐 정도로 편애하며 그만 사랑했습니다.

그러기에 형제들의 심한 시기. 질투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음모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있을때 만난 사람을 통해 황제의 꿈 해몽으로 총리에 발탁되어 장차 닥쳐올 흉년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노예 신분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야곱이 사는 땅에 극심한 흉년이 찾아왔고,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사기위해 애굽을 찾아갔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아우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힙니다.

요셉의 말에 형들은 기겁을 했습니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동생 요셉이 총리가 되어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모두 다 용서했고 오히려 사랑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도 마소서,
(창45:5)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도 오년 동안 흉년이 되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다고 했습니다. (6절)

지금도 생생한 2008년 12월 8일 F18기가 훈련도중 샌디에고 한국인
윤도균씨 집에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아내와 두 자녀와 산후조리 때문에 오셨던 장모까지 4명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런데 원망스럽게도 그 비행기 조종사는 살아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겪고 있었지만 장례식을 마치고 그는 조종사를 용서했습니다.

또한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참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하면 평생 먹고 살 만큼 보상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국 주요언론은 그의 눈물의 인터뷰를 전국에 생중계 했습니다.

그 조종사는 아마도 순간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어 그는 "나는 미국을 사랑 합니다.
미국은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미국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고 인터뷰 하며 절규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각 지에서 위로성금이 도착했는데 그 것마저 기독교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소수민족 한국인의 가슴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성경에 스데반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어 죽어 가면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침 밷고, 채찍으로 때리고 수많은 고초를 겪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분노와 참을 수 없는 미움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인격이
지배하면 문제가 풀어지고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립니다.

둘째: 요셉은 문제를 하나님의 섭리로 알았습니다.(5절)

요셉은 형들에게 근심하지도 말고, 한탄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도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그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나로 바로의 아비로 삼으시고, 그 온 집에 주를 삼으시며, 애굽의 온 땅을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8절)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근심과 불안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동산 한쪽에 숨었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를 감추고 살다가 죄가 드러날 때 후회하는 것입니다.

다윗역시 죄를 지은 후 나단선지의 책망을 듣고 매일 밤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팔은 형들을 용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을 인간의 감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해석하고 깨닫고 믿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에 아주 훌륭하신‘사랑의 원자탄’의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순천 반란 사건때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빨갱이 전재선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그를 용서하고 전재선이를 양아들 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과 용서와 화해정신은 지금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기독인들 가슴에 새겨야 할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문제의 답이 보입니다.

세상에 절대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인간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그 손에 뽑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으로 개인뿐 아니라 가정과 민족 세계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낙심하고 절망할 시간에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열왕기 서에 이스라엘이 고난당하는 것이나, 법궤를 빼앗긴 것도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고 아말렉이 괴롭힌 것도 하나님이 채찍의 몽둥이로 사용해서 돌이키게 하는 섭리였습니다.

반대로 나라가 평안하고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오고 번성한 것도 우연히
아니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까지 아시고 길을 섭리하고 인도하십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이곳까지 인도 하셨고,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시고 인도하십니다.

젊은 선교사지망생이 선교지에 떠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 마지막 준비를 위해 시장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순간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치료가 다 된 후에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였습니다.

지역에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식인종들이 몰려와서 그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잡아먹으려고 했답니다.

선교사는 순간 무릎 꿇고 기도한 후 자기 한쪽 의족을 빼서 식인족 추장에게 던져 주었답니다, 식인종들은 의족을 먹으려고 입에 넣는 순간, 고무다리에 놀라 “아! 신이다" 고 하며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서야 선교사는 자신의 한쪽다리를 잃게 하신 뜻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환경에서도 전화위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좌절하고 절망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손 데시면 음지도 양지가 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환경에서 좌절하고 낙심했어도, 광명한 새날이 밝을 줄
믿습니다.

셋째: 요셉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8절)

요셉의 고백에 철저히 하나님 주권을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8절)

요셉은 철저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종살이를 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서도 원망하거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이 꿈을 잊지 않고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왕도 요셉에게 하나님이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패망한 나라에서 온 종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바로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인정함은 그의 정직함과 진실함이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이루도록 능력도 주셨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던지 요셉처럼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능력과 환경에 상관없이 꿈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뜻을 깨닫고, 온갖 수치와 고난속에서도 우리들천국으로 인도하시고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낀 사람은 삶을 다르게 삽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다릅니다.

우리는 오로지 천국을 바라보며 성령충만한 영성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깨닫고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도바울이 그랬고,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았습니다.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는 물질을 아까워하지 아니했습니다.
비단장수 루디아도 복음이 전파되고 성전을 세우는데 자기 집을 내 놓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우리 선교사님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인간사에 느끼는 행복 따윈 생각지 않고 아버지의 원하는 뜻을 이루어 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보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 꿈이 달라야 합니다.

하늘에 뜻을 두고 기도하며 하늘에 신령한 것을 사모하므로 성령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고,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으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 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인생이 막힘없이 형통합니다.
안될 것 같은 일도 나중에 보면 더 잘되어 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성도로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되시길 축복합니다.







언젠가 제가 결혼 주례를 하는 커플과 식사를 하면서 제가 신혼 때의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제 아내는 날씬한 편에 속합니다. 그 반면에 저는 조금 비만인 편에 속하죠. 농담처럼 한 이야기지만, 결혼하면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살찌는 사람은 한 사람이면 족하니 당신은 50kg을 넘는 일이 없도록….
사실 부부는 가장 편한 사이지만, 서로 관리하지 못하면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상대방을 위해 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병이나 연약함으로 어찌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 긴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장 21-24절에 보면 에녹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녹 하면 생각나는 것이 “동행”입니다.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동행했을까요? 아마도 그 이전에는 그렇게 신실한 삶을 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창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 의미가 ‘죽음 뒤에는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에녹이 아들을 낳은 후 심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죠.
심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평가를 받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한 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심판 아닐까요? 오늘 죽음 앞에서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일까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세계적인 대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호텔에 배달된 신문기사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에는 “알프레드 노벨, 사망”이란 기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 이름을 잘못 기록한 오보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종일 호텔에 머물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계적인 발명가라는 명예와 엄청난 재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명예와 엄청난 재물이 죽음 앞에서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인간 역사에 큰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인간을 마구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은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바로 그 기금으로 노벨상(Nobel Prize)이 만들어졌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신문의 오보가, 노벨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되겠느냐는 물음이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만들었습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동행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동행은 일치입니다. 무엇과의 일치입니까?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합창단이 멋지고 훌륭한 합창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단원이 일제히 악보와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서 노래해야만 합니다. 악보와 지휘자에게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내 뜻이나 욕심 등의 것들을 일제히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면서 왜 그토록 사랑스러워합니까? 자녀가 부모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타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밥값을 내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고향이라고 하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맞춘다는 것, 하나님과 공통분모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누구와 동행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이며, 무슨 일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갈 것입니까?


“동행” 그 점진적 거룩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이나 건강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새 사람”을 입는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점진적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살지 않는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야망이 바뀝니다. 주로 환경적인 요인에 따른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적이 같습니다. 그 목표는 “새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름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시작하지만 “동행”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하나님도 인정하실 수 있을까? 이 기준은 늘 “진리” 앞에서 판가름납니다. 우리 나름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역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뜻을 유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심을 핑계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떤 행위들도 허용하지 마십시오. 거룩은 당신의 발걸음이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고, 당신의 혀로 더러운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머리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사를 거치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늘 정당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잠깐 타협을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타협이 목적이 되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는 그 어떤 것을 떠난 것도 우리 삶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을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만나 교회를 시작하면서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꿈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여야 하고, 모인 사람들이 훈련을 받고 흩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고 나니까, 흩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순간 모여진 교인들도 목적은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목회자인 저도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보면서 참 도전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목회자들이 은퇴할 때가 되면 일을 벌이지 않으려 합니다. 편안하게 은퇴하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하게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따라!” 끝까지 의와 진리의 길을 갈 수 없는가?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주님의 삶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십자가 상에서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절정에 이르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그곳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핍박받는다는 이유로 어떤 마을들을 급하게 지나지 않으셨고, 그분이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어떤 마을에 오래 머물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감사나 배은망덕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뜻을 한 치라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구습을 벗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새사람을 입어야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옛사람 그대로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해도 하나님이 떠나고 같이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려면 주님과 성격이 같도록 하려면 우리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늘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설교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더러워집니다. 매일 같이 세수하지 않아요. 옷도 정기적으로 빨아 입지 않아요. 방도 매일같이 청소하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 방 청소는 내 담당인데 우리 형제간이 아홉이기 때문에 언제나 방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애들이 다 일어나서 그냥 옷도 이 구석 저 구석 던져 놓고 요강에 오줌도 넘치도록 해서 방바닥에 오줌이 흥건하고 뭐 쓰레기가 매일 많습니다.
항상 아버님께서 저에게 청소를 하라고 해서 하루는 청소를 하다가 하도 화가 나서 빗자루를 땅에 확 던지면서 “이놈의 소제 밤낮 해도 무슨 소용이냐?” 해놔도 또 더러워지고 또 더러워진다.
아버님께서 “용기야 이리 오너라!” 가니까
“너 여기 앉아라.”
“뭐라고 그랬냐?”
“아무리 청소해도 자꾸 더러워지기 때문에 청소하지 말고 그대로 살자고 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인생은 밤낮 청소하는 것이다. 밤낮 더러워지면 밤낮 청소하고 밤낮 더러워지기 때문에 때를 또 씻고 목욕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옷을 빨래하고 밤낮 더러워지므로 얼굴을 씻고 밤낮 양치질을 하는 것은 늘 더러워지기 때문에 씻어야 하느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산다는 것
우리가 이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의와 진리를 따라 살 때 가능한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기꺼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의와 진리의 길임을 굳게 믿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의 저자 케이티 데이비드는 그의 사역의 현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내가 알기로 그중에 안전하게 살라는 명령은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안전한 삶으로 부르신 적이 없다. 대신, 위험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손안만큼 안전하고 좋은 곳은 없다.
우리는 흔히 의와 진리를 따라 사는 일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힘든 것은 “결단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결단하고 나면 그 길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케이티의 고백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역자가 같은 고백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친구들과의 삶 속으로, 새로운 문화의 한복판으로 한참 들어간 뒤에야 하나님이 나를 둘러싼 패러독스들을 통해 내 시각을 바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내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은 뒤집어진 내 세상을 똑바로 세우고 계셨다. 미국에서는 100달러로 신발 한 켤레밖에 살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100달러면 굶주린 가족이 몇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전에는 바쁜 하루를 보낸 뒤에는 소파에 쓰러져 청춘 드라마를 보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간다에서는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서 예수님께 새로운 힘을 달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지친 몸과 마음을 풀 데가 없다.

의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사실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장소’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멋진 말이죠.
“주님은 모두를 돌보지 않아도 좋으니 ‘딱 한 명만’을 위해 가던 발걸음을 멈추라고 말씀하신다.”
참 희한한 일이죠?
우리는 너무 거창한 일을 꿈꾸며 사소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동행”은 우리 삶의 작은 혁신을 의미합니다.
실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실천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혁신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결단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즘 경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innovation’이라는 말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 신상품을 내놓는 것이나 사업 모델 혁신이라고 하죠.
미국 네브래스카대학의 석좌교수인 이상문 씨는 ‘이노베이션 3.0’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노베이션 1.0시대는 내부 자원만을 가지고 활용하는 폐쇄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2.0시대에는 일부 분야에서 기업들이 아웃소싱이나 제휴 등을 통한 경영을 했고, 3.0시대에는 외부에서 자원과 아이디어를 갖다 쓰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자원을 외부에 제공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P&G는 전체 제품의 52%를 외부 아이디어에서 얻고 있다고 하죠. 기저귀 같은 경우 기저귀를 사용하는 아기 엄마들보다 기저귀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라고,
미국 통신회사 AT&T도 새로운 서비스 개발을 위해 아이디어를 공모하면 3만 개씩 몰리기도 합니다.
일라이릴리(Eli Lilly)라는 제약 회사는 연구개발 과정에서 18만 명의 과학자 네트워크를 활용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외부에서 자문하고 채택된 아이디어에 대해선 보상도 합니다.
개그 콘서트라는 코미디프로에서도 소재를 외부에서 얻습니다.
‘애정남’이나 ‘꺾기도’ 같은 프로그램의 소재가 고갈되자 시청자들이 참여해 아이디어를 내고 채택된 것으로 개그를 만드는 것이죠.

이제 일반 사회에서도 잘 아는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참 혼자 노력했던 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동행”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의 혁신은 최고이신 그분과 동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는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런 상황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에 그대로 해당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안 되고 동의할 수 없으면 결국 떠납니다. 더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흉내를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믿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떠나게 됩니다. 그 제자가 모두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말씀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부도덕하거나 비상식적으로 운영되어서, 또는 따뜻한 사귐이 없어서 거기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는 것은 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지만, 그들이 복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부단히 영적으로 도전을 해야 합니다.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충실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하게 해야 합니다.

동행은 시작입니다.
조건을 딱 맞추고 동행을 시작하려는 것은 어쩌면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을지 모릅니다.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많은 미혼자가 남성의 경우엔 경제적 사회적 준비가 덜 갖추어졌다는 이유로, 여성은 과중한 직장생활과 육아 등 가정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경험자로서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준비나 자신감이 확실해지는 시점이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이다.
회사에 할 일이 잔뜩 밀려 있는데 친구들이 여행일정을 잡으면 무척 부담스럽다. 이번에는 빠졌으면 좋겠는데, “같이 안 가면 죽음!”이라는 친구들의 협박에 출발 직전까지 무리를 거듭해서 겨우 함께 떠난다. 어떻게든 출발해서 차창 밖으로 흔들리는 풍경을 볼 때, 그제야 ‘그래도 떠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이 그런 것 같다. 준비도 자신도 없지만 일단 함께 출발하고 나면,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께서, 누군가 결혼을 주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애 낳는 것 연습해보고 시집가는 여자 없다”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마음먹었거든, 실행하라.

그렇죠?
의와 진리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죠.
동행의 시작입니다.
동행의 paradox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가기에는 버거운 그 길에 주시는 힘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죠.
동행은 “능력을 받아” 가는 길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길입니다.
동행의 끝에는 진리가 기다리고 있고, 그 길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동행은 결단입니다.
결단이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결단입니다.
이 세상에 주여, 주여 하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동행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023년 나와 동행할 믿음의 친구를 찾아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나와 동행할 믿음의 친구
나와 동행할 믿음의 동반자
나와 동행할 믿음의 사람을 찾아 봅시다.



본문: 창세기 5:21-24

서론: 어떤 여자 성도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고 보니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서 남편을 믿게 해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데 하루는 남편을 잘 설득해서 함께 교회에 가기로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기뻤어요. 그런데 주일 예배 시간이 다가올수록 염려가 됩니다. 모처럼 교회에 출석하는 남편에게 교회가 어떤 인상을 줄 것인지, 그리고 오늘 예배에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특히 오늘 목사님 설교에 남편이 마음의 문을 열 것인지,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 남편이 목사님의 설교에 고꾸라지게 해 주세요”하고 말이죠. 그런데 주보를 받고 보니 이만저만 실망이 아닙니다. 그날 성경 본문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5장이었거든요. 아무리 읽어봐도 누가 죽고 누가 죽고 이야기 밖에 없어요. 이런 말씀에 신앙 없는 우리 남편이 은혜 받을 것 같지 않아서 낙심이 되고, 은근히 목사님이 원망스러워요. “아, 그래,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런 본문을 택하셨을까?” 어쨌든 목사님의 설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슬쩍슬쩍 남편 표정만 살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이 열심히 듣고, 또 때로는 고개도 끄덕끄덕 거리는 거예요.

집으로 돌아왔어요.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그래, 오늘 예배 어땠어요?”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남편이 “나, 지금부터 교회 다니기로 했소!”하는 겁니다. 이것 참 반가운 소리인데 조금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또 물어보았어요. “오늘 도대체 무엇에 은혜를 받았어요? 내가 보기에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별로 신통치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에요?”

그랬더니 남편이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거예요. “오늘 성경책을 보니까 누구는 몇 살에 죽고 누구는 몇 살에 죽고, 이렇게 죽고 죽고를 쭉 읽어 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래요. ”너도 죽는다.“ 지금까지는 죽음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만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내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절실히 와 닿더래요. 그리고 ”나도 이렇게 죽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노라고 말하더랍니다.

맞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옵니다. 아담이 낳은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은 의로운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십니다. 셋의 자손이 노아와 그 자녀들 세대까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오래 살았으나 결국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5절,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8절, 셋은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11절, 에노스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14절, 게난은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17절, 마할랄렐은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20절, 야렛은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27절,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31절, 라멕은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장수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100세를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천 살까지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겨지지 않는 일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마 꾸며낸 이야기일거야? 그러나 이때는 인간이 타락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원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유전인자가 그리 많이 변질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연도 오염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전이니까 대기층에는 물막이 형성되어 있어서 태양빛 중에서 피부에 노쇠를 가져오는 해로운 자외선도 차단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기후도 아주 온화하게 감싸주는 대기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노아홍수를 맞이하여 급격한 생태계의 파괴로 사람들의 수명이 120세로 단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거의 천 살을 살던 그들도 결국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오래 살았지만, 어쩌면 왜 이리 빨리 안 죽나 하고 지긋 지긋했을지도 몰라요. 인간이 일찍 죽는 것도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 있어요.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 같은 사람들이 천 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모두 다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느냐? 예, 놀랍게도 있었습니다. 에녹만은 예외였습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에녹은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는 창세기 5장, 아담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우리가 에녹의 삶을 주목하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에녹에 관한 구절이 아주 짧게 나오지만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의 삶이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라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죽고, 죽고, 또 죽고 하는데 에녹만이 예외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하늘나라도 데려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도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라고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6:23에서는“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9:27에서는“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이기 때문에 이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죽음과 심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 이 땅에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하셨고, 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과 심판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에녹은 이 죽음이라는 과정도 겪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아마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은 죽을 때에 고통 없이, 밤에 잠을 자다가 ‘깨어 보니 천국이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에녹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천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에녹이이런 복을 누릴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는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에녹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창 5:22-24)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동행의 본래 의미는 ‘산책한다’, ‘교제하며 걷는다‘는 뜻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풀어보면 ’하나님과 함께 친교하며 걷는다‘입니다. 구약성경의 어떤 사본에는 ’기쁘게 한다‘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로 받아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서로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어떤 요구 조건을 걸지 않으시며 현재 이 모습 이대로 기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를 향해 못마땅하여 뚱한 표정을 짓거나 성난 표정으로 마지못해 하시는 것 아닙니다. 우리를 보고 즐거워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또한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분과 함께 인생길을 가는 것이 즐겁습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마치 무거운 형벌을 받고 사는 것쯤으로 인상을 주고 사는 것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습니까? 그 원인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 대신에 인간의 종교 활동으로 메우려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교의 의무를 다하고, 계명을 지키고, 종교 의식에 빠지지 않고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종교의 엄숙함과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종교주의가 교회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예화) 목사님, 담배 피우세요?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심령의 안정과 평안이 있습니다. 삶과 마음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에녹 말고 또 나오는데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악을 행하였지만 노아만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해 줍니다.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창세기 17장에도 아브라함이 구십구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창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이 말씀은 동행한다는 말입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노아, 아브라함은 아주 특별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과 특별한 계시, 그리고 특별한 사건의 중심에 선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던 분들입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짓어 홍수로부터 건짐을 받아 구원의 표상이 된 노아,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쳐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이에 비하면 에녹은 아주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에녹이 300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의 업적을 적어놨는데 자녀를 낳았다는 것 밖에 없어요. 22절 “무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지극히 평범하게 가정중심의 삶을 살았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맞습니다. 노아나 엘리야처럼 극적인 삶을 살기 어렵겠지만 에녹처럼 사는 것이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 평범한 날들을 가장 위대한 날들로 바꾸는데 성공한 사람입니다.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어 올림을 받았기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다. 물론 승천한 사건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위대한 점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점입니다. 왜 이것이 위대합니까?

그 당시에는 모두 900년 이상씩 살았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으로 전제로 할 때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생각이 더 많아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더 넓어지며 돌보아야 할 사람도 많아집니다. 이 말은 그만큼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나쁜 영향도 끼칠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녹은 4장에 등장하는 가인의 후손 라멕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입니다. 라멕은 살인죄를 짓고서 죄인으로서 다소곳하게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범죄를 뽐내면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로다“고 큰 소리치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니까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900년을 살 정도니까 몸이 얼마나 건강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잘 먹었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부족함이 없이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에너지와 힘과 지혜를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했습니다. 죄악이 밤이 점점 깊어갑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300년 동안에 자식을 낳으면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별로 궁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에녹아, 너만 하나님을 믿니? 너만 그렇게 잘났냐? 왜 그리 특출하게 구냐?“ 이런 식으로 300년 동안 비웃음과 조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왜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의 믿음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에녹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300년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평범한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날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에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평범한 날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찮고 시시한 일이라고 해서 무시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가인처럼 성을 쌓지도, 라멕과 그의 자녀들처럼 탁월하게 업적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무너무 평범해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무엇을 했느냐,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를 권하면 “애들 다 키워 놓은 후에 하겠다.”고 말합니다. 혹은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잡은 후에 하겠다.” “은퇴한 후에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상 애들 다 크고, 은퇴한 다음에 늙어서 병들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은퇴한 다음이나 애들 모두 키워 놓은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몸이 병들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 동기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본문 21절과 22절을 잘 살펴보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을 낳고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안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므두셀라의 출생이 어떤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입니다.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줄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다음과 같은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에녹을 불렀습니다. “에녹아! 이 세상이 너무 악해졌구나. 나의 거룩성과 의로움은 더 이상 세상의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심판해야겠다. 이 세상에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한 징표를 네게 주마. 너는 장차 아들을 낳거든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짓거라. 그 이름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이다.” 드디어 에녹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그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저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하셨는데’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게 된 계기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내년 이맘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면 지금처럼 살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삶에 어떤 변화가 분명히 옵니다. 평생 지은 죄과를 낱낱이 밝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감히 또 죄 지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라도 말씀대로 살고자 애쓸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글에 어떤 집사님의 간증을 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어요. 처음에는 무척 놀랐고 낙심되었으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빚을 다 갚고 유서까지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시한부로 선고한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몸이 말짱했습니다. 확인 차 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해 보았더니 암이라는 진단은 오진이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주변에서는 죽을 것으로 예상하고 모아 놓은 재산을 거의 다 써 버린 데 대해서 아까워서 어쩌냐고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는 말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시한부 인생으로 산 때처럼 인생을 진지하고 보람 있게 산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에녹의 삶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근거가 신약성경에 있습니다. 유다서 14절, 15절 말씀을 보면 에녹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유 1:14-15)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에녹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믿었고, 또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그분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불의는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불의한 언어와 불의한 행동을 낱낱이 감찰하시며 모든 죄를 아십니다. 그분이 인생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에녹도 아들 므두셀라의 죽음이 모든 인생을 심판하는 시작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결론: 다음과 같은 에녹에 대한 동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가 뜨면 에녹의 집에 와서 “에녹아 내가 왔다. 나가자”하고 대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러면 에녹은 반갑게 나가 맞이하며 하나님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나갔다가 해가 지면 하나님이 에녹을 집에 데려다 주곤 했답니다. 그것이 삼백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너무나 좋은 날, 에녹과 하나님이 함께 길을 떠났는데 너무 멀리 가서 해가 져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은 그냥 우리 집에 가자”고 하셔서 하나님의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도 에녹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동화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살다가 어느 날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 가서 영원히 함께 살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집으로 이사하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 여러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과 같은 목적을 갖게 되고 목적이 같아야 같은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101 하이웨이를 타도 북쪽 방향으로 가면 샌프란시스코가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로스앤젤레스가 나옵니다. 샌프란시스코로 갈 사람이 남쪽으로 달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계획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도 가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함께 동행하려면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은 친구와 여행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남의 입장을 고려할 줄 모르는 무례한 사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사람과 함께 길을 가보십시오. 이런 사람과 먼 길을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행길은 고통일 것입니다. 즐거운 여행길이 되려면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어줄 줄 알고, 이해해 주고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알아야 거기에 맞출 것 아닙니까?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이 쓴 씨 중에 “나에게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된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나에게도 주소서
주께서 좋아하시는 것 나도 좋아하도록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 나도 싫어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심령을 나에게도 주소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 나도 기뻐하도록
주님이 슬퍼하시는 것 나도 슬퍼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에게도 주소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도 사랑하도록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 나도 미워하게 하소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만을 좇아 평생 살게 하소서
좌로나 우러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만을 닮게 하소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내게서 거룩한 향기가 나게 하소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마음이 통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부담스럽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질러 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뒤쳐져서도 안돼요. 함께 보조를 맞춰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꾀를 내어서 약삭빠르게 행동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면서도 미적미적 되면서 게으름을 피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최고의 복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것은 저주와 사망의 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까지만 가고 그 이상은 넘어서지 말자.’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평범한 일, 하찮은 일, 시시해 보이는 일, 귀찮은 일부터 피하려 들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아이를 키우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행하십시오.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 나라로 옮겨 주실 것입니다.




동행에 대한 예화 모음

 

130년 간의 동행 

1981년 흑인 가운데 가장 장수한 찰리 스미스가 130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 바토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130년의 세월은 고통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고통 속에서 살았다. 미국의 남부와 서부를 헤매며 매맞고 모욕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어 죽을 고비를 스무 번도 넘게 경험했다. 한때는 서부 최고의 총잡이 제시 제임스의 마구간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130년 간 고생만 하다가 죽은 스미스씨는 임종하기 며칠 전 자신을 방문한 스티븐스 목사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나게 했음에 감사드립니다. 고통스러운 노동 생활도 감사합니다. 130년 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스티븐스 목사는 이 기도를 들으며 "이런 신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라고 말했다.

 

같이 가는 길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 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진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같이 타고서도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문학가 안데르센(1805-1875)의 청년 시절의 일화이다. 그는 스웨덴의 여류 소설가 브레멘을 만나볼 계획으로 여객선을 탔다. 선장과 대화를 하다가 자기의 여행 목적을 이야기했더니 선장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브레멘 여사는 지금 외국 여행중이라는 신문 기사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모처럼의 방문 여행인데 헛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은 몹시 낙심하였다. 그러나 한 시간 후 선장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안데르센씨, 기적입니다. 당신이 만나려는 브레멘 여사가 바로 이 배에 타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

성경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변역하기 어려운 것이 '보혜사'라는 단어다.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保惠師)'인데, 이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하다. 즉 '안위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훈계한다', '권고한다', '격려한다', '도와 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시다.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에서 생명의 말씀에서 안위를 찾으며 죄와 세상 염려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영혼과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한다. 근심에 쌓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로운 혼란으로 사방에 흐트러진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 밑에 두신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여러 가지 걱정을 피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정신요법적 마술로 우리 생각을 잊어버리라고 함으로써 걱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생각을 통제하는 것 즉 꽉 동여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리는 화평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

엘리자벳 빌타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2층 침실에서 일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잠깐 쉬는데 빨랫줄에 아름다운 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찬란한 햇빛을 받고 있는 파랑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얼마간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다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 그 파랑새가 또 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 파랑새가 앉아 있나 밖을 내다보다 이번에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처럼 아름답던 파랑새가 누런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해가 구름 속에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은 빛과 이토록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빛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더 아름답고 고귀해 보인다. 특히 인간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여 빛을 발하지 않는 이상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미는 마치 어둠 속에 있는 한 송이의 장미와 다를 바 없듯이 그리스도 없는 삶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돈과 명예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 없는 지식은 교만해지고 그리스도가 없는 과학은 결국 불행한 오점을 찍을 뿐이라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 

이탈리아 제노바(Genoa)에 있는 예수 상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동상인데 높은 언덕에 세우지 않고 이 항구도시의 가장 낮은 장소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름을 깊은 데 계신 그리스도라고 붙였다. 제 2차 대전 때 제노바 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군함이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들을 회상하며 부모들이 헌금하여 예수 상을 봉헌한 것이다. 이 예수 상은 예수님이 높은 곳에 우뚝 선 예수가 아니라 깊은 곳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고통 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어느 젊은이가 꿈에 하나님을 만나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구경하던 중 각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그려 놓은 모래밭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모래밭에는 발자국이 두개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나님께 따지듯이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내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들아,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단다. 너와 동행하다가 네게 고난이 닥쳤을 때는 내가 널 업고 다녔단다."

 

내가 직접

민규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그 산은 처음 가보는 산인데다가 친구 중 그 누구도 길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 헤매다 보니 날이 점점 어두워 왔습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자그마한 산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산장엔 턱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할아버지, 저희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산 아래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죠?" 민규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너의 힘만으로는 이 산을 내려 갈 수가 없어. 이 산은 키 높은 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길도 험하여 너희들에게는 지도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민규와 친구들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내가 직접 마을로 데려가 주지. 나와 같이 간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거야." 민규와 친구들은 그 날 밤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는데는 그 산에서 평생을 산 그 할아버지와 동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돌봐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의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다가는 나만 바보 소리들을 텐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때로는 손해도 보고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하늘나라의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보다 더 확실한 삶의 길은 없습니다.

 

너와 함께 하리라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죽음의 나찌 포로 수용소에서의 일이다. 한 특별한 수용소는 일을 하기 위한 수용소였는데 포로들이 일을 하는 한 그들은 가스실에서 구제될 수 있었다. 솔로몬 로젠버그 가족 중에는 연로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80살이 가까운 할아버지는 비인간적인 조건 하에서의 장시간의 노동과 영양분의 결핍과 불결한 위생시설로 인해 곧 쓰러지게 되었고 이내 가스실로 옮겨지고 말았다. 솔로몬은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스실로 끌려갈 사람은 제일 어린 아들 데이빗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데이빗은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작업량이 점점 더 줄어들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가족들은 각자 다른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수용소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아버지 솔로몬은 혹시 막내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과 전율로 몸을 떨어야 했다. 매일 밤 막사에 돌아오면 솔로몬은 재빨리 데이빗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큰아들 야곱과 아내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침내 솔로몬이 두려워하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일터에서 돌아와보니 가족 중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미칠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사랑스런 가족의 얼굴을 찾았다. 드디어 큰아들 야곱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와 어린 데이빗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야곱에게 다그쳐 물었다. "얘야 내게 말해다오. 데이빗이 오늘 끌려갔단 말이냐?" "네, 아빠. 오늘 그들이 와서 데이빗을 데려갔어요. 데이빗은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네 엄마는 어디 있느냐? 네 엄마는 아직 건강하지 않느냐? 그들이 엄마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겠지?" 야곱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사람들이 처음에 데이빗을 데리러 왔을 때 데이빗은 몹시 겁을 냈어요. 그리곤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 때 엄마가 말했어요. 울지 마라, 데이빗. 내가 함께 가서 너를 꼭 붙들어주마. 그리고 엄마는 데이빗이랑 같이 가스실로 가신 거예요. 데이빗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너의 심장 속에 내가 있다 

시에나의 성녀 캐더린(Catherine of Siena)에 대한 신비한 전설들이 많다. 캐더린 수녀는 몹시 고통스러운 어느 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던 주님께서 내 심장이 찢어질 만큼 괴로운 이 때에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지금 너의 심장 속에 있다."

 

눈길의 발자국

옛날 북서 아메리카에 한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추장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방문객을 오두막집에서 나오게 한 후 물었다. "당신은 지난밤에 이 오두막집을 통과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방문객은 눈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한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추장에게 "한 사람밖에 지나간 적이 없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추장은 그에게 그 날 밤 그 오두막집을 수백 명의 인디언들이 다시 말해서 한 부족 전체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추장은 그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을 때는 추장이 제일 선두에 걷고, 나머지 모든 부족이 일렬로 그를 따라가면서 추장이 밟았던 발자국을 정확히 밟고 지나감으로써 하나의 발자국만을 남깁니다. 따라서 수백 명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지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계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부족의 적들은 그들이 간 길을 발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장이시다. 그는 생명의 길을 따라 제일 먼저가시면서 우리에게 그의 발자국 즉 그의 모범을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주님이 남겨 놓으신 이 발자국을 따라야만 한다.

 

동업자

최고로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알라후에라시 외곽에 있는 구릉지대를 걸으면서 나는 양쪽에 있는 커피농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름칠을 한 듯 반질거리는 검푸른 잎새들이 아열대의 태양을 반사하였습니다. 길을 따라 지은 작은 집들의 현관과 잔디밭에는 가지각색의 꽃과 관목이 가득했고, 화려한 붉은 꽃이 피는 굵은 덩굴이 담벽과 현관지붕을 큰 무늬로 뒤덮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 소박한 주택에 붙여서 지은 작은 목공소를 못 볼 뻔 했습니다. 목공소 한쪽이 열려있길래 나는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업장은 아주 소박하게도 작았습니다. 침대 제작소였습니다. 뒤쪽에는 양쪽에 굵은 나무껍질이 붙은 채로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로부터 목수는 아름답고 멋진 침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침대는 각기 튼튼하고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변했습니다. 목수가 공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그의 작업을 칭찬했습니다. "여기 일하는 사람이 모두 몇 명입니까?"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둘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있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손끝을 하늘로 가리켰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여기서 일하지요. 하나님은 나무를 만드시고, 나는 침대를 만들어요."

 

막대기와 지팡이가 위안이 되는 이유

캐시는 여러 해 동안 막대기와 지팡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때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라는 속담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엄한 수련 방법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을 읽다가 의혹을 품게 되었다. 그 책에 보면 막대기는 양들을 때리는 도구가 아니라 목자가 단순히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있음으로써 양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아 주고 올바른 곳으로 가도록 부드럽게 인도한 것이라고 하였다. 캐시는 기뻐서 소리치고 싶었다. 예수께서는 그 분의 제자들을 양떼나 어린양으로 비유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결코 매로써 억지로 복종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올바른 방향으로 부드럽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큰 위안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멍에를 같이 한 자

일찍이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면 빙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 번 보습 쟁기를 잡아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니다. 양쪽 소를 번갈아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이며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 4:3에서 표현한 참으로 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유기적이며 균형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준다

나이지리아 칼라브르의 위대한 선교사 슬레서는 8년 동안 떠나있다가 다시 역경의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도착은 대단한 흥분을 자아냈으며, 그녀의 체류기간은 그야말로 오랜 리셉션과 같았다. 하루종일 선교사관은 시장 같았다. 가까운 데서는 물론이고 아주 먼 데서도 사람들이 술레서 선교사에게 인사하러 일부러 찾아왔다. 그녀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시시각각 몰려들었다. 평소 그녀는 이렇게 말해왔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당신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 당신에게 빵을 주실 것이고 물을 주실 것입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함께 끝내야 합니다."(G. C. Britton)

 

본문은 기억하지 못하나

한 가난한 여자가 어느 날 교회에서 부정직에 관한 설교를 듣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그 날 설교의 본문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자 그 여자는 잊어 버렸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내가 집에 돌아와 한 부셀짜리 되를 태워 버렸다는 것은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설교를 더 많이 하고 계신다.(J. Berrey)

 

사자의 꾀임에 빠진 네 마리 황소 

친한 네 마리 황소가 있었다. 이 황소는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맛있는 풀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떤 위험이 닥쳐오면 네 마리가 힘을 합쳐 위험을 물리쳤다. 이 네 마리의 황소를 노리는 사자가 있었다. 이 사자는 한 마리씩 사냥하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힘을 합한 네 마리의 방어에는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이다가 하루는 꾀를 내어 약간 뒤에 처져있는 황소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 마리의 황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네 친구들은 서로 불신하였고, 크게 싸우다가 마침내 각기 흩어져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분열을 노린 사자는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마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마틴 루터가 크게 낙심하고 있자 어느 날 그의 아내는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누가 죽었소?"라고 그가 묻자 "하나님이 죽었습니다"라고 아내가 답변하였다. "괜한 소리 그만 두시오. 하나님은 영원 불멸하시는 분이시오. 지금까지도 살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오"라고 루터가 소리쳤다. "그러나 당신은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요?"라고 그의 아내가 되물었다. 그때야 루터는 아내의 뜻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의심이 구름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손자를 위한 기도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스마트 박사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사고로 눈꺼풀이 크게 찢어진 어린 딸을 아버지가 안고 황급히 응급실로 들어왔다. 스마트 박사는 그 소녀의 상태를 살핀 후 소녀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찢어진 곳을 몇 바늘 꿰매야 하는데 따님은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스마트 박사는 소녀에게 "내가 바늘로 상처를 꿰맬 때 참고 뛰쳐나가지 않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이때 소녀는 "아빠가 내 손을 붙들어주면 뛰쳐나가지 않을래요." 하고 대답했다. 이 소녀는 아빠가 잡아주는 손에 매달려 상처를 꿰매는 동안 아픔을 참으며 한 번도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그 딸에게 어떤 힘을 준 것일까. 아버지가 손을 잡음으로 상처를 꿰매는 횟수가 줄어들거나 아픔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손을 잡아줌으로 용기를 얻게 되고 참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환난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또한 역경으로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세상을 이기신 능력 있는 주님이 오늘 나와 함께 계신다.

 

술 취한 친구 

루터가 하루는 이런 예화를 든 적이 있다. "술 취한 친구를 말에 태워 집에 보내기는 아주 어렵다. 이쪽에서 올리면 저쪽으로 떨어지고 저쪽에서 말에 올리면 이쪽으로 떨어진다. 방법은 친구 하나가 함께 안장에 앉아 가는 것이다."

 

엄마가 소개한 친구

어떤 고아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너는 엄마가 없으니 고민 거리가 생길 때 어떻게 하니?"그러자 그 고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나한테 예수님께 가라고 하셨어. 그는 우리 엄마의 친구고 또 내 친구셔."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니. 그는 너한테 신경 쓰기 위해 모든 일을 멈추진 않으실 거야." 친구의 반박에 고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가 들어 주실 거라는 거야. 내겐 그걸로 충분해." 우리에게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에피소드

오래 전에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편집인, 즉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고미술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신기한 도자기 하나가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꼭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힘과 노력을 들이면서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에피소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그 귀한 보화를 사서 자기 집의 광속에 두고는 그 보화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 얼마나 어처구니없습니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스의 산문 

지난 15일 롱아일랜드에서의 화재로 인해 6명의 아이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중 아홉 살 난 엘리스(Allis Shedrick) 양이 죽기 이틀 전에 학교 숙제로 쓴 <나의 가장 좋은 친구>란 산문이 <데일리 뉴스>지에 소개되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하나님이다.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말상대가 되어 주신다. 무엇인가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누구든지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은 우선 하나님과 의논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나는 언젠가 하나님의 큰집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영혼의 파이프가 잘 연결되었나

 미국의 한 신문사가 어떤 병원의 소방시설에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문에 그 기사를 실었다. 35년 간이나 화재로부터 안전하였던 그 병원의 소방시설이 도시의 주요 수도시설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병원의 소방시설의 수도 파이프가 지하로 4피트 정도 뻗어 나가더니 거기서 끊겼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병원 측에서는 곧바로 예산을 세워서 시의 수도 파이프에 병원의 소방수도 파이프를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기사를 보고서 매우 불안해한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나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던 일꾼들도 아니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의하여 생명수의 물줄기까지 자신들의 영혼의 파이프가 잘 연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중간에 끊겨 있지나 않는지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오직 우리의 생명수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Pilgrim)

 

예수님과 동석한 자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한 자들을 천국에서 천사들이 예수님 앞에 아뢴다. "이 사람은 인류생활에 편리한 필수품을 연구 발명한 문명의 혜택을 끼친 발명가입니다." "수고 많았다. 천사장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사물의 근본원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 학문을 가르친 철학자입니다." "수고가 많았다. 그 사람을 이성의 천사 라파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국가 수호를 위해 칼 들어 적군을 물리치고 전승의 유공자 군사입니다." "수고 많았다. 무사천사 미가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작사 작곡하여 많은 교회에서 찬양에 수고한 음악가입니다." "수고가 많았다. 기쁜 소식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 곁에 앉게 하라." "이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죄인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시킨 전도인입니다." 천군 천사 모두 환영함과 예수님 친히 기립 영접하여 함께 앉았다. 예수님과 동석한 자는 전도자였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예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사랑이가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는 아무리 아파도 수술은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사랑이를 억지로 병원에 데려가서 수술을 받게 한 아버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수술이 다 끝나고 아버지가 사랑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수술을 받는 동안 무섭지 않았니?" 사랑이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뇨.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수술하는 게 겁이 난다던 네가 안 무서웠단 말이니?"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처음에는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수술실에 예수님 그림이 걸려 있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의사 선생님들이 수술을 하고 있고 또 예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사랑이의 대답에 아버지는 예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이가 수술을 받으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마음의 근심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려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또한 사랑이가 안심하고 수술을 받게 된 다른 이유는 수술을 할 의사 선생님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이러한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행동을 바르게 해야 될 것입니다.

 

이 더하기 이는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은 경제학자입니다. 그 분은 경제학 박사이며 대학에서 수학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루는 제가 설교를 하다 말고, 그 장로님께 "이 더하기 이가 뭐지요?" 하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바라보시며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문제가 너무 쉽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저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대신 얼굴에 잔득 힘을 주고는 뭔가 심오한 것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의 표정도 심각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분은 머리 속으로 2라는 숫자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온갖 방정식을 다 떠올리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모든 회중들이 조용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잠시 후 그 장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줄에 어떤 꼬마가 앉아 있길래 저는 그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이 더하기 이가 뭐지?" "넷이요." 그 꼬마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질문은 경제학박사님이 대답하시기에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그토록 쉬운 질문을 던졌을 것이라곤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너무 간단했기 때문에 그 분은 제 질문 속에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눈을 뜨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계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그 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과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분과 함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삶이라는 것은 대단히 쉬워집니다.

 

인간의 기술과 하나님의 손길

어떤 유명한 외과의사가 복잡한 수술을 하는 것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정성을 다해 수술 준비를 마친 그의 표정에서 자신감과 함께 조금은 긴장된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하고 로버트가 묻자 "거의 다 됐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잠시 동안 멈추어 서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긴장을 푼 평온한 모습으로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수술하는 동안 그의 손길은 결코 주저함 없이 능숙하게 움직여나갔다. 수술이 끝난 후 로버트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수술에 임하기 전에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의사들은 자기의 기술에만 의지한다고 생각 했었거든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의사도 인간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기적을 만들 수는 없지요. 저는 인간보다 훨씬 탁월한 어떤 힘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학이 오늘날의 수준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의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맺는 것이었다. "저는 수술을 할 때문 언제나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것이 나의 기술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손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임재하심의 체험

플라벨이라는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는 칼빈주의자였으며 평신도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말을 타고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감당할 수없는 힘으로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힘이 점점 강하게 밀려들기 때문에 급기야는 말을 타고 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잠잠하니까 말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플라벨이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말을 몰지 않으니까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여기저기 나무에 찔려 플라벨의 얼굴이 찢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내려와서 얼굴을 씻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그 때의 느낌을 플라벨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내가 말등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젖어있던 그 순간이 천국이 아니었다면 설혹 다른 데에 천국이 있다고 해도 내가 체험한 그것만큼은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은혜스러운 날 저녁에 플라벨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임재에 사로잡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그런데도 훗날 그가 기록하기를 "나는 어느 날 밤보다도 그곳에서 잔 그 날 밤만큼 푹 쉰 날이 없었다. 그전에는 생전 알지 못하였던 것들을 내 영혼이 믿음으로 보고들은 밤이었다."라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런 것이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자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추운 겨울날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몸을 떨며 말을 잘 못하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추위를 탔으나 다른 한 사람은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한 사람은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제대로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찬바람같이 불어대는 마귀와 눈을 뿌리는 구름같이 떠 있는 유혹 속에서 부족한 인간은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경계하여 머리에는 소망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진실의 띠를 묶고, 발에는 평화의 신을 신고, 손에는 성령의 검을 잡고, 앞에는 믿음의 방패를 세우고, 하늘에는 기도로 무전선을 놓고, 항상 굳게 서서 모든 원수를 다 이기며 하늘을 향해 나아가다가 만일 기진맥진한 경우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무전을 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혜사라는 대장을 속히 파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적군을 무찌르리니 걱정할 것이 없다. 마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에게는 추운 날이 없는 것과 같다.(홍승한)

 

조지 뮐러의 일기

 5월 7일 내가 매일 해야 할 일 중 으뜸가는 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많이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가가 아니고. 나의 내적 자아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영적인 영양 공급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북돋아줄 수 있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도 있고, 또한 나 자신의 다른 면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주 안에서 기뻐하지 않고 나날이 나의 내적 자아가 영적인 영양 공급과 힘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역을 그릇된 정신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해야 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때로는 경고와 채찍질도 받게 되는 것이다. 대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기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집중이 안 될 때는 흔히 15분에서 1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곤 했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이런 문제는 없다. 나는 가끔씩 신앙생활의 초창기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에 대해 놀라곤 했다. 외적인 자아가 먹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내적 자아 또한 그렇다. 물이 수도관을 통과하듯이 우리 마음 속을 통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읽는 성경구절을 묵상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어떤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먼저 달려갑니다. 그런데 앞에서 큰 개를 발견합니다. 개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손을 잡고 뒤로 돌아 미소를 지으면서 개를 봅니다. 그러나 개는 여전히 큰 개입니다. 그리고 개는 여전히 사납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안전합니다. 아버지 손을 잡았을 때 평안을 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평안은 한 인격자와의 관계에서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장소에서 삽니다. 한 장소는 제한된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몸과 같이 유한한 곳입니다. 그러나 또 한 곳은 무한한 곳입니다. 하나님만큼 무한한 세계입니다. 한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이며 또한 세계는 신령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똑같이 실제적인 두개의 세계인 것입니다. 환난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실제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세상에서 있게 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셨던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승리의 기도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삶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여왕이 당신을 종종 방문을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 나는 몇 번 여왕의 심방을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심방한 일이 있습니까?" 하고 또 한 번 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심방을 받지 않습니다. 그 분과 항상 같이 삽니다. 그 분이 여기서 나와 같이 삽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과 같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의사

어느 큰 병원의 유명한 한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의 놀라운 의술과 수술에 대한 꼭 필요한 침착성은 많은 젊은 의사들로 하여금 이 외과 의사의 성공적인 수술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련의가 용기를 내어 그 외과 의사에게 이 사실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 외과 의사는 "그렇다네. 이 두 가지 사이엔 분명한 관계가 있다네. 내가 아주 까다로운 수술을 집도 할 때도 많고, 수술 후에도 환자의 상태가 예상 못할 지경에 빠질 때도 수없이 많은데 이럴 때 나는 어찌해야 될지를 모른다네. 그렇지만 나는 곧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게 되며 주님께서는 내게 수술을 성공하도록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네. 나는 먼저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수술 칼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부터 "주님과 함께 수술하는 의사"라는 말이 이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생명의 귀중함을 아시고, 겸손한 의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환자를 치료할 때 먼저 주님께 도움을 구한 다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환자를 돌보는 헌신적인 분들에게 감사를 해야 됩니다.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지원병 중에서 독일에 보낼 스파이를 많이 뽑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독일식 음식, 군복, 언어, 이름, 생활풍습에 대하여 매일 맹훈련을 받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독일 군인일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마저도 독일화되어 독일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인정될 때 비로소 스파이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한스이고, 고향은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아니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바꿔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완전히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훈련 마지막 단계에서 수십 리나 되는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행군을 합니다.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사이에 새벽 두세 시경 갑자기 낯선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곤히 잠든 훈련병을 깨우면서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제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실격입니다. 그는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 한스입니다."라고 엉겁결에라도 독일말로 대답할 수 있을 때 정식 스파이가 된다고 합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나는 독일 군인이라는 것이 잠재의식에도 깊이 박혔을 때 스파이로서의 교육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어 어디에서 보아도 크리스천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모든 생각이 집중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정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은 유태인이 방랑하는 외국생활에서 그들의 신앙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딸들에게 철저하게 신앙을 통한 가정 교육을 시키며 말한다. "너희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는 것이나, 숄(shawl)을 걸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그것은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전통적인 표시이다. 우리를 지켜 주신 하나님을 떠나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캐셔 속의 못 

런던 시 템플 교회에 70세가 가까워 오는 에밀 메틀러(Emil Mettler)씨가 있다. 그는 알버트 슈바이처 협회(의료 구호 사업)의 간부이다. 그는 40년 동안 작은 식당을 경영해 왔다. 손님들은 요금을 지불할 때 메틀러 씨의 캐셔(현금 보관함) 속에 들어 있는 이상한 물건을 보고 놀란다. 6인치의 큰 못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오는 손님은 질문을 한다. "캐셔 속에 못은 왜 넣어두었습니까?" 메틀러 씨는 심각한 얼굴로 설명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못을 집의 책상 서랍 속에 둘 수도 있으나 캐셔 속에 둔 것은 직업과 내 생활 속에 예수님이 계심을 자주 상기하기 위해서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중국 선교에 온 정성을 바친 허드슨 테일러(1832~1905) 선교사가 전도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몹시 지쳐 있었다. 그는 말씀을 읽다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는 구절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후에 이 때를 떠올리며 "내가 정신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나는 마치 주님이 나를 떠나신 줄 알고 불신 속에서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신 이상 나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간증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16세기의 카르멜회 수사였던 브라더 로렌스는 오랜 세월 동안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고 지속적인 사랑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임재하심을 실생활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어떻게 배웠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번철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하다 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무슨 일에나 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할 때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좀 더 쉽고 직접적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는 데는 복잡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정직하고 단순하게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브라더 로렌스의 본을 통해 특별히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된 것이 사색적인 많은 책들을 읽거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는 자기의 일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이라면 직장보다 더 좋은 훈련장은 없습니다. 까다로운 상사, 패배감과 부족감, 직장 일에 따르는 큰 압력 등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도구로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며 압력 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를 성격상의 결점들을 다루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극단적인 별난 데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할 때 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손은 보호를 의미한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녹스는 적들의 사악한 음모로부터 무수히 도피하였다. 그는 그의 집의 식탁머리에 있는 창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왠지 그는 그의 지정석에 앉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을 앉게 하지고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에 그를 죽일 계획으로 창문을 통해서 총알이 날아왔다. 그 총알은 그가 늘 앉았던 의자를 스쳐 지나가 등잔의 밑동에 구멍을 냈다.

 

하나님의 약속 

리빙스턴이 16년 간 아프리카 정글의 고독과 싸우다가 고국에 돌아와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데 한 학생이 물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 간을 살 수 있었습니까?"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 대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맡기는 것

중국 오지에 간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로서는 거의 견딜 수 없는 믿음의 시련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 경우마다 한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로 인해 신뢰와 평화가 회복되었다. "내 영혼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친구가 보내온 편지가 우리와 예수가 일치되어 있다는 진실을 나에게 계시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편지 내용을 요약한다면 믿음이란 것은 더 많은 믿음을 가져보겠다고 내 힘으로 애쓰는 데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는 데서 강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읽는 동안 디모데후서 2:1의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십니다."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바라보며 혼자 말했다. "나는 애타지 않으련다. 그가 친히 약속하신 것을 어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1960년 딘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말기의 고통을 겪을 때 찬양이 그의 삶에서 새로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겠지만 이 땅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동안에도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딘은 그의 병실을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몇 달 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의 가까운 어느 친구는 "그의 병실은 지성소 같았고, 그가 누웠던 침대는 설교단상 같았으며, 그에게 병문안 왔던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찬양을 했다고 해서 그의 암이 나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믿음을 통하여 딘은 고통스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새로운 기쁨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축복 가운데 있을 때나 고난 가운데 있을 때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임재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대적들은 꼼짝 못하고 사탄의 세력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분이 임재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과 영광과 기쁨과 능력 가운데 살게 됩니다. 사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임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한 풍성함을 여러 면으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찬양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허드슨 테일러 목사는 임종을 몇 달 앞두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그의 절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게, 나는 지금 몸이 너무 쇠약해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고 심지어 기도도 못하고 있네. 단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팔에 안긴 어린 아기와 같이 누워 있는 것이라네. 그리고 그 어린 아이가 하나님을 믿듯이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을 뿐이라네."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길을 걸었던 위대한 테일러 목사가 지금은 육체적 고통과 쇠약함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조용히 누워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태도다. 그 분은 당신이 곤경에 빠져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더 강해지려고 애쓰지 말아라. 단지 그냥 그대로 너의 믿음을 지키고 있어라."(제임스 H. 매콘케이)

 

할머니 교우의 설교 

랠프 턴불 목사는 <하나뿐인 교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말한다. 양로원에서 심한 신경통으로 오래 누워 있는 할머니 교우를 심방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하고 문안하자 노인은 손을 보이며 말했다. "이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은 평안합니다." 또 노인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머리에 가시가 박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노인은 다시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옆구리는 창에 찔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심방 갔던 턴불 목사가 오히려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

 

할인판매

어떤 것을 살 때는 지불한 금액에 상당하는 것만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 교훈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할인 판매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은 돈이 많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문에 실린 백화점의 바겐 세일 광고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나는 싼 김에 원래 계획보다 많은 물건을 헐값에 사서 쓰지 못하고 버리곤 합니다. 반면 어떤 것들은 결정을 참 잘했던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 집 가구는 대부분이 화재로 모든 것들이 불에 타고나서 마련한 것들로 22년이나 묵었습니다. 나는 우리 식탁을 사던 때를 기억합니다. 건장하게 생긴 외판원이 덧판을 펼쳐 보이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제품의 질은 참으로 뛰어났습니다. 쉽게 닳지를 않아 식사 중에 생긴 자국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네 아이들이 수많은 흠집을 내놓고 자국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식탁은 지금도 여전히 튼튼합니다. 비싼 만큼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헌신에 있어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싸구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헌신의 질은 그 치르는 값으로 나타납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함께 하고 있는데도

한 남자가 여러 달에 걸쳐 몇 차례고 거듭 사랑하는 여자에게 구애를 했건만 번번이 매몰차게 퇴짜만 맞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 여인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만나러 오라며. 그 때 그 곳에서 그 남자는 마침내 애인 곁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한 무더기 꺼내 놓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썼던 열렬한 연서들로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을 털어놓고 사랑과 결합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불타는 욕망을 고백하는 내용들이었다. 연인은 그것을 애인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가건만 여전히 그는 읽고 읽고 또 읽고만 있는 것이었다. 결국 여자가 말했다. "별 바보 같은 남자 다 보겠네. 이 편지는 그러니까 모두가 당신이 절 갈망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 아녜요. 그런데 보세요. 여기 당신 곁에 제가 앉았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줄곧 그 멍청한 편지나 읽고 있으니 대체 어찌 된 거냐 말예요." 열렬한 신봉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 여기 네 곁에 내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는 줄곧 머리로 나에 관하여 궁리나 하고, 혀로 나에 관하여 얘기나 하며, 책으로 나에 관하여 읽기나 하는구나. 언제면 고요해져 나를 맛보려느냐."

 

함께 하는 사랑 

신학자 바르트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다 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아야 한다. 나는 그를 보는데 그는 딴 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짝사랑이다. 무릇 사랑이란 마주보고 자신의 마음을 주고,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마주보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만 가지고는 온전할 수 없다. 함께 일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일해야 한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에수님의 영혼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본받고 따라야 한다. 요즘 부부들을 보면 이혼하는 쌍도 늘고, 부부간에 크고 작은 갈등으로 여간 시끄럽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함께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함께 사역해야 한다. 함께 하는 사역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녀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 아이가 생겨야 하는데 공동 작품인 아이가 없으면 서로 사랑이 식어지기도 한다. 함께 노력함으로 만든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소위 신세대 부부들의 이혼율이 늘어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일하게 되어있는 사회구조가 그것을 부채질한다. 우리네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남편이 들에 나가서 일하면 아내는 점심을 싸 가지고 들로 나간다. 또 남편이 당을 일구어 놓으면 아내는 그곳에 씨앗을 뿌린다. 타작할 때도 아내는 타작기에 벼를 집어넣고 벼이삭을 모으면 남편은 그것을 가마니에 담아 창고에 들이거나 건조시킬 수 있는 마땅한 장소로 이동시킨다. 이렇게 평생을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에 가끔 부부가 작은 봉고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야채나 과일이나 생선을 팔러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아름다워 보인다. 한 사람은 "수박 사세유" 하고 한 사람은 밖에서 "어서 오세유" 하면서 하루종일 함께 하니 그 사랑이 식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요즘 많은 부부들은 함께 하는 일이 없다. 모두들 제각기 이다. 어떤 남편은 자기 아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그런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만큼의 월급을 받는지조차도 모르는 아내도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 서로 다르고 이루는 것도 각자가 스스로 이루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함께 누리는 보람이 없는 것이다. 함께 하고 함께 모으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주께서 마 12: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함께 하는 고난

우리 동네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한 곳으로 중산층에 어울리는 좋은 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부근에 오래된 낡은 집이 하나 있는데 방이 열 개나 되었습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최근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임대하여 문제 청소년들을 위한 갱생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곳에 수용된 청소년들은 모두 자기 집에서는 살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약 중독자가 있는가 하면, 전과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갱생원은 지역보호를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네 주민들은 집 값이 하락하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동네 한가운데 문제의 수용소가 생기면 집 값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을 가진 부모들은 더욱더 걱정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었고, 어떤 아주머니들은 과민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정부에 진정서를 보냈습니다. 이들을 동네에서 쫓아내고 자신들의 재산과 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주민들은 거의 다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서명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자기 자식도 그런 암흑 속을 헤맬 수도 있음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온 탕자들이 다시 하나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온 탕자를 다시 쫓아내는 일에 서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