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주일 설교 자료 제공(01. 01.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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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설교 자료 / 12-25-2022 성탄주일 설교
이승혁목사

성탄의 의미(마태복음 1:21)

동영상 자료 /

성탄(聖誕)이란 한자의 파자(破字)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탄(誕)'이란 한자의 의미
"말을 널리 늘이는 것"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


성탄(聖誕)이란 한문자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요한 1:14) 크게 듣고 크게 말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하기 위한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언령신앙(言靈信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언어가 갖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화분에 꽃을 심고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하나의 화분은 아침마다 물을 주며 지난 밤에 잘 잤니? 오늘은 더 아름답구나! 이렇게 긍정적인 인사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화분은 물을 주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라든지 말든지 이렇게 무관심한 자세로 대하면 얼마 후에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유리병에 물을 담아놓고 하나의 물병을 향해서 너는 참 좋은 물이야!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다른 물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긍정적인 반응으로 대하는 물병의 물은 육각수 형태의 좋은 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대한 물병의 물은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어(言語)는 존재(存在)의 집

불란서의 회의론을 창시한 철학자 데칼트(Renatus Cartesiu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이런 사람은 비서라고 합니다.

똑똑똑, "통화중!"
이런 사람은 전화교환원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이런 사람은 백화점과 호텔의 엘리베이커 걸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오라이"
이런 사람은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똑똑똑, "믿습니까?"

호모 로쿠엔스(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말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오늘의 시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부활절에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추수감사절에는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크리스마스에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말을 하면 거부반을을 나타내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최근에는 뉴욕주에서 마리화나(대마초)를 시중에서 판매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머지않아 거리마다 대마초에 취하여 정신이 몽롱한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닐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佛敎)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극락(極樂)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으므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생전에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였어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시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죽은 사람의 몸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수 많은 물고기, 짐승, 동물의 죽은 몸둥아리는 가격에 따라 팔려갑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몸을 어느 누구도 돈을 주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단을 위한 제안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먼저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야 애급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단계를 말합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을 건너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확신한 후에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권세와 능력의 주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카바 만*과 수에즈 만 및 오늘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북부 호수 지역을 포함하는 (또 아라비아 바다와 인도양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바다를 가리킨다. 홍해라고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갈대 바다'를 뜻한다. 출13:17-14:9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행진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홍해를 건넌 것'은 나일 하류 호수 지역에서 일어났고 '바다'는 그 지역의 평평한 '갈대 호수'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구약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세계 창조의 과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창조를 하나님이 바다*를 정복한 사건으로 상징적인 언어로 찬양하기 때문이다(사51:9-10 참조).

* “요단”이라는 의미는 “내려가다” 혹은 “급하게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빠르게 흐르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요단은 야라드 (ירד)에서 파생한 야르덴 (ירדן)으로 표기됩니다. 이 단어 뜻은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기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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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표어 : 주와 동행 365
            성구 :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Enoch walked with God; then he was no more, because God took him away.

2023년은 주일(일요일)로 시작하는 "계묘년(癸卯年)" 즉 "검은 토끼의 해" 입니다.

2023년은 설교자 협동목회를 시작한 목회자가 교대로 주일마다 설교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호승목사, 황선민목사, 이승혁목사
이렇게 주 마다 교대로 설교하며 2023년을 "주와 동행 365" 라는 신앙의 목표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2023년 교회력 및 국가 기념주일(전반기 1월∼6월)

교회력

기념주일

설교자

비고

1

1

주현절(6일)

신년주일

이호승

 

8

주님의 수세주일

 

황선민

 

15

미국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16일)

 

이승혁

 

22

 

 

이호승

 

29

 

 

황선민

 

2

5

 

 

이승혁

 

12

 

 

이호승

 

19

산상변모주일, 재의 수요일(22일)

미국 대통령의 날(20일)

황선민

 

26

 

 

이승혁

 

3

5

 

3.1절 기념주일

이호승

 

12

 

 

황선민

 

19

 

 

이승혁

 

26

 

 

이호승

 

4

2

종려주일(고난주일), 성 금요일(7)

고난주간(3-8일)

황선민

 

9

부활주일

 

이승혁

 

16

 

 

이호승

 

23

 

 

황선민

 

30

 

 

이승혁

 

5

7

어린이주일

 

이호승

 

14

어버이주일, 주님승천일(18)

 

황선민

 

21

 

 

이승혁

 

28

오순절, 성령강림주일

미국 종전 기념일(29일)

이호승

 

6

4

삼위일체주일

 

황선민

 

11

 

 

이승혁

 

18

 

 

이호승

 

25

 

6. 25 기념주일

황선민

 

* 매월 첫째 주일 : 성찬예식


            2023년 교회력 및 국가 기념주일(후반기 7월∼12월)

교회력

기념주일

설교자

비고

7

2

 

미국 독립기념일(4일)

이승혁

 

9

 

 

이호승

 

16

 

제헌절 기념주일

황선민

 

23

 

 

이승혁

 

30

 

 

이호승

 

8

6

 

 

황선민

 

13

 

광복절 기념주일

이승혁

 

20

 

 

이호승

 

27

 

 

황선민

 

9

3

 

미국 노동의 날(4일)

이승혁

 

10

 

 

이호승

 

17

 

 

황선민

 

24

 

 

이승혁

 

10

1

 

개천절 기념주일

이호승

 

8

미국 컬럼버스의 날(9일)

한글날 기념주일

황선민

 

15

 

 

이승혁

 

22

 

 

이호승

 

29

종교개혁기념주일

 

황선민

 

11

5

 

 

이승혁

 

12

 

미국 재향군인의 날(11일)

이호승

 

19

 

 

황선민

 

26

추수감사주일

 

이승혁

 

12

3

대림절 첫 주일

 

이호승

 

10

 

 

황선민

 

17

 

 

이승혁

 

24

성탄주일

 

이호승

 

31

 

 

황선민

 

* 매월 첫째 주일 : 성찬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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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료를 자유롭게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없습니다.

완성된 자료가 아니라 기초 자료를 제공하여 설교자의 기도와 경험과 은혜를 첨가하여 완성된 주일 강단의 외침으로 무너지는 자유대한 민국의 질서와 선교한국을 향한 믿음을 함께 세워나가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뉴욕에서 이승혁목사(Pastor Victor S Lee)

이메일 주소 / victor@nykcn.org

카카오톡 ID / victorka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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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He who walks with wise men will be wise, But the companion of fools will suffer harm.

동행(同行) : 한가지 동(同). 다닐 행(行)

1.  문장(文章)에 있어서 글자의 같은 줄. 동일(同一)한 행(行).
2. 그 행(行). 이 행.
3. 길을 같이 감. 또는 그 사람. 동도(同道).
4. 부역(賦役)에 함께 감. 반행(伴行).
5. 불교(佛敎)의 수행(修行)이 같음. 또는 같은 수행(修行)을 하는 사람.

accompany, go with

I accompanied him on his European tour.
나는 그의 유럽 만유(漫遊)를 동행(同行)하였다.


동행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할라크" 라고 합니다.

할라크(1980) הָלַךְ

1. 가다,  2. ㉠ 창 7:18. ㉡ 대하26:8. ㉢ 수 16:8. ㉣ 느 6:17. 3. אֶל

발음  / 할라크(hâlak)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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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동행하다(창 14:24, 5:22), 가다(창 19:2, 민 32:41, 삼상 23:13), 오다(창 26:29, 왕상 13:17), 돌아가다(창 31:30, 신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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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파스칼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제아무리 유식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 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기만 하는 사람

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 입니다. 하나님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읍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하는 사람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위대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 1, 2 )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증거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창세기 5:24, 22, 6:9)

"에녹
(순종하는 자, 시작한다, 바친다, 가르친다)"
"므두셀라
(대확장, 창을 던지는 사람)"
"노아
(위로)"

에녹(Enoch)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셋의 계보 아담의 7대손에 해당.
므두셀라의 아버지(창 5:18-24).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4).
죽지 않고 승천했다(히 11:5).


에녹이란 분은 최초의 사람이셨던 아담의 7대 손으로 야렛의 아드님이십니다.
그 이름은 '순종하는 자, 시작한다, 바친다, 가르친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생애를 살아가신 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분들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된 사람은 에녹과 노아와 므두살레라 입니다.

창세기 5:21-24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 육십 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6:9-10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리고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입니다.

열왕기하 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이렇듯 에녹이란 분은 65세부터 시작하여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분입니다.
삼백 육십 오 세를 사시는 동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고 사셨던 분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임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란 분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삼백 육십 오 세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고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라고 하면 우선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이 죄 많은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령하려면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出家), 즉 가족을 비롯한 맺어진 인연의 줄을 끊고 홀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도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님들처럼 수도원으로 가든지, 비록 세상에 살아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소위 믿음 좋다고 평을 듣는 일부 개신교의 성도님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믿음이 좋다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남다른 은혜를 받고, 색다른 영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신령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사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 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령하게 살고 영적인 사명을 감당한다면서 가정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신령한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방을 따로 써야 한다고 고집하게 됩니다.
툭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기도원으로 올라가거나, 은혜가 역사 한다는 소문을 따라 이곳 저곳을 쏘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하는 증거를 얻고 살아가신 에녹이란 분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면서도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주어진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에녹이란 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문제를 피하여 도피하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문제 많은 세상에 살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들 속에 살면서 괴롬과 죄를 이겨나가는 것이 바른 성도의 자세입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서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쓰던 찬송가는 가사가 달랐습니다.

'괴롬과 죄가 많은 곳 나 어이 여기 살리까...'라고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가를 새롭게 개편하면서 왜 이 가사를 바꾸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올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괴롬과 죄가 많은 세상, 괴롬과 죄가 많은 가정, 괴롬과 죄가 많은 그 사람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구원받은 성도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괴롬과 죄가 많은 세상, 괴롬과 죄가 많은 가정 속에서 괴롭과 죄가 많은 그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그 사람에게서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란 증거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에녹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의 사람들 한 분 한 분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 중에 에녹이란 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죽임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려 올라가신 분으로 소개하면서, 그 분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첫째,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상(賞)을 주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실 성도가 믿노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 볼 때의 행동과 혼자 있을 때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전혀 딴판일 수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사실 말이지 우리의 헌금 생활이나 봉사 생활이 자원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억지 춘향이 식으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에녹이라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생활이 한결 같았습니다.
틈만 나면 육신의 편함을 좇고 쾌락을 좇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힘쓰고, 이를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녹이란 분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쓰는 만큼 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만큼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신 바된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기억하시고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에 신바람이 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란 분에 비해서 과연 성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시간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넘치십니까? 상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에 신명이 나고 신바람이 나십니까?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65세부터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림을 받을 때인 삼백 육십 오 세가 될 때까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시다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들림을 받은 분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에녹이란 분하고 나하고는 하늘과 땅차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기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이 에녹과 같은 분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요? 에녹이란 분이 65세 이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몇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든지 간에 그때부터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 구원받은 성도는 에녹이란 분처럼 죽음으로 생애를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모두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5:51-52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는 에녹이란 분처럼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6-17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므두셀라(Methuselah)

창세기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므두셀라(Methuselah) : 창 던지는 사람, 대확장
므두셀라는 대확장이라는 뜻과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므두셀라는 에녹의 아들이며 노아의 조부였다.
그는 9백69세를 살아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가 되었다.

이 당시에 9백세 이상 생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창조과학회나 고고학을 연구한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식생활이 채식이었고 궁창에
물층이 있어서 자외선의 피해를 막아 장수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조건이 변형되었고 인간의 생존이 힘들어졌으며 허약해졌다. 하나님은 이를 대비하여 홍수후에 육식을 허락하셨으나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므두셀라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은 노아나 에녹같이 종교적인 사명이나 사역에 대한 훌륭한 생애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9백69세로 장수하였는데도 그의 약력을 보면 1백87세에 라멕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8백2년동안 자녀를 낳다가 죽었다는 기록으로 끝나고 있다. 그의 공로나 업적이나 인격의 감화나 모범적인 신앙등 아무런 언급이 없는 쓸쓸한 인생의 이력을 보게 된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보다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므두셀라는 많은 세월을 낭비하고 의미없이 세상을 산 것같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의 길이 있고 자기가 하고 갈일이 있으며 자기의 사명이 있다.

교훈과적용

첫째,내용이 없는 장수는 부끄러운 일이다. 반드시 자기 인생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둘째,자기의 생존과 생애를 하나님과 관련을 짓자.신앙적인 삶이 아니면 생존의 가치가 없다.


노아(Noah)

창세기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아담의 8대손

라멕이 182세에 낳고 노아라 이름하니 뜻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우리가 수고 하는 것을 이 아들이 위로한다 하는 뜻인데 그것은그리스도의 오실 표적이다 (창 5:28).

시대가 악하여(눅 17:27) 홍수로 진멸하시고자 하실 때 오직 노아만이의로운 고로 방주를 만들고 피하라고 미리 지시하셨다.120년간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간 후 40일동안 비가 내려 창수가 나서 지상의모든 산을 넘쳐 방주밖에 있는 생물은 다 죽어 버렸다. 5개월 후부터물이 줄기 시작하여 7개월만에 완전히 물이 빠지니 꼭 1년 10일을 방주에서 살았다. 방주가 머문 산은 5,185미터의 아라랏 산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기로 약속하시고 그 표로 무지개를 주셨다.노아는 홍수 뒤에 350년을 더 살아있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950 세에 세상을 떠났다. 홍수 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 부부, 아들 셋, 며느리 셋 도합 8명이었다(창 9장)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으로 라멕의 아들이었습니다(창5:28-29).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세의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 6:9-10).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실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백 20년 동안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과 소돔,고모라의 불 심판은 세상 끝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시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한 사회와 국가를 심판하실 때 끝까지 권고하고 최종적으로 심판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선용 해야 합니다.

첫째, 노아는 당세의 의인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윤리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완전했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볼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 노아는 순종의 시범자

1백20년을 하루같이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노아는 신앙의 시범자

일시적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온 세상이 타락할때 자기 가족만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주변 사람이나 당시의 상황이나 여건이 노아의 신앙을 흔들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신앙이었 습니다.
더우기 1백20년동안이나.......

기독학자들은 지구상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각종 화석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입증한다.
다지층나무화석이 그 한 예다.
다지층나무화석은 커다란 나무가 몇개의 지층에 걸쳐 화석상태로 발견된 것으로 미국 테네스주에서 발견된 래피도덴드리드나무도 그중 하나다.
이 나무는 6m의 길이로 여러 퇴적암층을 관통해 뻗어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몇개의 지층이 형성되려면 엄청난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 화석은 그 세월을 무시한채 세로로 세워져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일시적인 지각의 변동으로 나무가 지층을 뚫고 화석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변동이란 홍수를 뜻한다고 한다.
북부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는 약 5백 만마리의 맘모스 시체가 매장돼 있다고 한다.
이들 맘모스가 짧은 순간에 파묻혔다는 증거가 많이 있으나 특히 위와 입속에서 채 소화가 안된 녹색식물, 야생콩등이 발견된 점이 이를 증명 한다고 한다.

일부 진화론자들은 이를 두고 먹이를 취하려다 강이나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고도 하지만 5백만마리가 한꺼번에 추락해싸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결국 맘모스의 떼가 대홍수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됐다고 생각하면 의문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미국 남다코라주 블랙힐즈에 있는 불가사리와 똑같다는 점에서 창조론을 뒷받침한다고 이야기 되어진다.
즉 전혀 진화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홍수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창조가 입증되면 홍수도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학자들은 이를 자료로 사용한다.
네브래스카의 화석지층에서 발견된 코뿔소 낙타 멧돼지등 9천여마리 동물들의 뼈 화석은 석회암 언덕에 길게 뻗쳐있어 분명히 물로 인해 묻히게 됐음을 입증한다고 한다.

텍사스의 파룩시강에선 껍질을 닫은 상태인 조개와 보통의 경우 화석이 되기 힘든 벌게들의 화석이 발견됐다.
어떻게 이런 생물들이 화석으로 됐을까?
이것도 대홍수사건을 인정해야만 의문은 풀리게 될 것이란 주장을 기독학자들은 펼친다.
대규모 홍수에 휩쓸린 침전물들이 덮쳐 급격히 화석화 됐다는 것이다.


노아(창세기 9:1-29)

전인류의 역사를 심판이란 기준에서 보면, 노아홍수를 중간으로, 창조에서 노아홍수까지, 그리고 노아홍수에서 세계 종말까지 둘로 나눌 수 있다.

그만큼 노아홍수는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노아시대 이전까지의 죄악은 홍수로 심판하셨다면, 홍수 이후 시대의 죄악에 대해서는 최종 불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예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창조 세계는 죄악의 오염으로 인해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인의 후예들과는 달리 여호와 신앙을 보존, 확산하는 사명을 맡았던 셋 가계는 처음에는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성을 잃지 않고 계속 번성해 갔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셋 가계 내에서도 세속의 가치관에 동조하며, 죄악된 문명에 친숙해가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러한 불경건함이 셋의 후예들에게도 깊숙이 침투하여 마침내 그들마저 완전 동화되고 말았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하여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지적하였다(6:3).
육체적 욕망과 가치관의 혼란에 젖은 인간들은 또한 절제의 능력을 지니지 못한 채 죄악을 가속화시켰으며, 끝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다.

홍수 전의 세상을 성경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라고 묘사하였다(6:11).
‘패괴’라는 말은 썩었다는 뜻으로, 거역, 불순종, 방종 등 온갖 악으로 인해 악취가 나는 상태를 가리킨다.
‘강포’는 해치다, 빼앗다의 뜻으로, 살인, 약탈, 강간 등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도무지 진실과 정의가 발붙일 틈이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환경에 물들지 않은 고독한 의인 한 명을 발견하셨다. 그가 바로 노아였다.

노아는 신앙적 측면에서는 ‘의인’이며, 인격에 있어서는 ‘당세에 완전한 자’였고, 그 생애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서 그 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인물이었다.

물론 노아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기’(6:8)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아는 홍수에 의해 영적으로 정결케 된 땅에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어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노아의 행적을 통해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고, 교훈을 얻자.

1. 죄악된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않은 의로운 성품

의인이요 완전한 자
- 당시대의 극심한 타락 상황 가운데서도 특별히 노아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경건했고, 도덕적 측면에서 순결했다는 의미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았다는 의미

특이한 것은, 5장의 족보와 비교해 볼 때, 유달리 자녀를 낳은 나이가 늦다.
보통 100세 전후인데 노아는 500세 된 후에 셈,함,야벳을 낳는다.
-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노아의 경건생활이 당시의 풍조와 달리 늦은 결혼과 늦은 자녀출산으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누가복음 7:26-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뿐만아니라, 방주 바깥으로 나온 노아가 먼저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세에는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교훈해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나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고, 정말 혼탁한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들림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2. 하나님의 방주 건조 명령에 순응한 순종의 성품 

노아의 방주 건조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아직 비가 안오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에 따라 방탕하게 살아갈 때에도 오직 말씀에 따라 방주를 건조한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경험과 계산과 판단을 아무리 동원해도,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의 이해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한마디도 반항하거나 대꾸하지 않는다.

(6:22)을 보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도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생각하여 하나님 말씀에 신실히 순종하여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3. 100년에 걸쳐 방주를 건조한 인내의 성품

노아는 길이 약150m, 너비 25m, 높이 15m 가량의 거대한 배를 100년에 걸쳐 건조한다.
말이 100년이지,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난을 감수했겠는가?
얼마나 괴로운 순간이 많았겠는가?
그러나 노아는 낙심하거나 의심없이 끈기있게 방주를 건조한다.

100년을 방주를 만든 인내의 사람이니, 홍수가 났을 때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40일 동안의 집중적인 폭우, 해일, 범람, 노아 일가족이 방주 생활을 시작한 때로부터 정확히 370일이 지난 때에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었고, 그로부터 다시 57일이 지난 다음에야 땅을 밟게 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처럼 성숙한 기독교인은 잘 참아야 한다.
끝까지 참아야 한다.
나는 얼마나 잘 참고 견디는가?
노아와 같은 인내의 사람이 되자.

4. 포도주를 마시고 술취하여 벌거벗는 실수를 하는 인간적 허점을 가진 자 

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산기슭을 개척하여 포도밭을 일군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 즉 셈, 함, 야벳이 있었다.
어느날 함이 장막 안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벌거벗고 있었다.

“눈꼴사납구만. 아니, 노인네가 망령이 났지. 술에 취했으면 취한거지 왜 옷은 다 벗고 저렇게 누워 있담.”

밖으로 나온 함은 셈과 야벳에게 빈정거리며 아버지 흉을 보았다. “형제들, 아버지가 이젠 갈 데까지 간 것 같구만. 술주정에 옷가지 모두 벗고..... 동네 창피해서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

노아는 자식들에게 술에 취해 추한 모습을 적잖게 보여준 것 같다. 작은 아들 함이 아버지를 조롱하고 비웃은 것을 감안하면, 노아는 자주 술주정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 뒷걸음쳐 들어가 옷을 입혀 드렸다. 사실 두 아들의 심정도 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함은 겉으로 흉을 보았고, 다른 둘은 마음 속에 묻어둔 것뿐이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한 술 더 떠 큰 실수를 저지른다. 자기를 흉보았던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리고 셈과 야벳은 축복한다.

“아버지가 일하다가 한 잔 하고 실수 좀 했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녀? 네 형과 동생 발 뒤꿈치라도 닮아라. 이런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사실 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고통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술에 취해 자주 행패를 부리게 되면 가족 관계는 미움과 불신이 생겨 비뚤어지기 마련이다.
술주정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노아처럼 벌거벗은 몸을 자식들에게 보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의인으로 칭송받은 노아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과거의 의연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비웃음을 사는 술주정뱅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 노망이 들었단 말인가?

우리도 노아도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노아가 긴장감이 풀렸다고 생각도 되고, 혹시 시간이 흐르면서 교만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죄와 잘못을 저지르고 살지만 하나님과 함께 살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의인인 노아도 늘 한결같을 수는 없었다.
인간이기에 때로는 흐트러지고 망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화도 불같이 내고 욕설도 서슴지 않는, 그런 보통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노아를 더 친근하게 느낀다.

어떤 사람도 완전한 존재는 없다.
완전을 향해 때로는 성공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가치판단은 다르다.
부족한 면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노아. 그러나 믿음을 가졌던 노아.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보통사람’이었다.

노아는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으나 노년에는 포도주를 먹고 술취함으로 벌거벗고 눕는 추태를 보였다.
이것은 아무리 의로운 자라 할지라도 인간이기에 실수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깨어 근신하고 주의함으로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에녹의 삶은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다.


에녹(Enoch) / 뜻 : 바친다

셋의 계보 아담의 7대손에 해당.
므두셀라의 아버지(창 5:18-24).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4).
죽지 않고 승천했다(히 11:5).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5:21-24에 짧게 기록된 에녹의 삶의 행적에서 동행의 비결과 내용을 헤아려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 많은 힌트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행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사할라크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무려 1,562번이나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뜻은 ‘걷다, 가다’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에는 ‘동행’이라는 특별한 의미나 개념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든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걷기’를 의미한다.
뜻이 단순할수록 쓰임새는 오히려 다양하다.
‘할라크’라는 동사도 함께 쓰이는 동사나 목적어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1. 짐승과 피조 세계의 움직임

가장 일반적인 의미가 사람의 걸어감(출 14:29 - “바다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을 뜻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짐승의 움직임, 물의 흐름과 소리의 확대를 포함하여 폭넓게 사용되었다. 

뱀의 기어다님(창 3:14 - “배로 다니고”)
여우들의 노님(애 5:18 -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배의 항해(창 7:18 - “방주가 물 위에 떠다녔으며”)
물의 흐름(창 2:14 -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나팔소리의 커져감(출 19:19 -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이상의 몇 가지 대표적인 용례만 살펴봐도 ‘할라크’라는 동사는 사람의 걷는 동작뿐 아니라 짐승과 사물의 모든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운행되는 것까지 포함한다.

뱀이나 여우가 움직이고 배가 물 위에 떠다니며 물이 흐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시 78:39)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호 6:4), 비가 내리고 “그치는”(아 2:11) 것들도 모두 동사 ‘할라크’가 쓰였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처음 창조한 창조의 모습대로 움직이며 동행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심으로 동행하길 원하는 대상은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이다.

2. 하나님의 ‘오심’과 사람의 ‘패역’

‘할라크’라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찾아오시는 것을 나타내는 경우에 많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삼하 7:23)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시 80: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출 33:14)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출 13:21)
“내가 네 앞서 가서”(사 45:2).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바람을 뿌리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릇된 길로 가고 말았다.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달려나가 맞이하는 동행의 삶을 살지 않은 것이다.
거짓 신들을 좇아갔고(렘 5:23 -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대로 행하였다(렘 7:24 -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렘 11:8 -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사 9:2)이라 표현하였다.
모두 ‘할라크’라는 동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패역한 삶의 행적을 묘사하고 있다.

3.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

패역한 세상, 하나님의 ‘오심’을 뿌리치고 제 갈길로 갔던 사람들 틈에 에녹과 노아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창 5:24, 6:9).
에녹과 노아의 ‘동행’은 히브리어 ‘할라크’의 재귀동사(히트파엘형) 이트할레크가 쓰였다.

1,562회의 ‘할라크’ 동사의 쓰임 중 재귀동사인 히트파엘형으로 쓰인 것은 60회인데, 이 중에서 ‘동행’으로 번역된 것은 에녹과 노아의 경우(창 5:22, 24, 6:9) 단 세 번뿐이다.

나머지는 ‘할라크’ 동사의 기본 의미인 ‘걷다, 가다’와 연관된 의미들이다.

“거니시는”(창 3:8)
“행하다”(창 13:17, 신 23:15, 17:1, 레 26:12, 삼상 2:30, 2:35)
“섬기는”(창 24:40, 48:15)
“두루 다니며”(수 18:4, 8, 대상 21:4, 슥 1:11)
“출입하느니라”(삼상 12:2)
“왕래하다”(삼상 30:31, 에 2:11)
“거닐다가”(삼하 11:2)
“유리하였도다”(시 105:13)
“횡행하는도다”(시 12:9)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2:2)
“급히 흐르는”(시 58:8)

이처럼 ‘할라크’ 동사는 함께 쓰인 동사나 대상에 따라 ‘동행’의 의미를 갖게 된다.
에녹과 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반드시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동반자인 부부가 동행하기로 작정한 것도 마음이 맞아서다.
그런 부부일지라도 마음이 틀어지면 결국 갈라져서 동행의 삶이 끝나게 된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동행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순종하려 애쓰는 삶이다.
하나님 또한 에녹과 노아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그들의 삶에 지팡이가 되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4. 마음을 나누는 동행

예수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 11:17) 세대를 한탄하며 책망하셨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한 질책이었다.
이 비유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동행의 삶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남의 기쁨을 질시하고, 남의 슬픔을 조롱하거나 비웃는 경향이 많다.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며 축하해 줄 때 상대방은 나를 진정한 동반자로 여기게 마련이다.
남의 슬픔을 같이 슬퍼하며 애통해 할 때 상대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인생을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겪는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공유했다.
하나님 또한 여느 피조물보다 사람과 함께 동행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할라크’) 완전하라”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에 쓰인 ‘할라크’ 동사를 에녹과 노아의 경우에 대입하면 “너는 나와 동행하여 완전한 삶을 살아라”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에녹과 노아처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동행’하기를 원하셨고, 명령하신 것이다.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축복을 받았듯, 오늘 우리 또한 이들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구원의 축복에 동참하는 역사가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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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매주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자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앙과 은혜를 더하여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2023년 제1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1일 - 7일)

창세기 1장 - 창세기 19장          
마태복음 1장 -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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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2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주와 동행 365
성경 /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도입 이야기
오래 전 울산 목사회 총무로 섬길 때 어느 여름에 목회자 하계 수양회로 모였습니다.
울산지역을 벗어나 경남 마산 지역에 돝섬이란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행 중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식사 때가 되면 밥만 먹고 잘 때가 되면 잠만 자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저 사람과 다니면 재미가 없어, 같이 다니면 말도 하고 웃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해야지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행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재미가 있습니까?
어떤 재미를 즐기고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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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1

2023년 1월 1일(주일)
신년주일(新年主日)


제목 /  새로운 피조물
성경 /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2022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게 지내왔습니다.
감사합니까?
감사를 표현하셨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표현할 줄 아는 것으로 증거합니다.
이전에는 감사하다는 것을 돈이 필요 없는 립 서비스(Lip Service)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감사를 물질로 표현합니다.
2023년 매주일 예배 때마다 감사예물을 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앙생활의 기쁨을 함께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제 경우를 소개합니다.
저는 매주일 감사예물을 20불씩 합니다.
이 감사는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가장 기초가 되는 감사를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명목으로 감사예물을 드립니다.

여러분들도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변화
둘째는 물질의 변화
셋째는 습관의 변화

첫째, 언어의 변화(言語의 變化) Change of Language

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원래 언어는 오직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창세기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그러나 죄가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할 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므로 의사소통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1:6-7,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화점과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걸은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라는 말을 하루 종일 사용합니다.
이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무를 볼 때 누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 "올라갑니다" 또는 "내려갑니다" 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통화중"이라고 합니다.
전화 교환원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볼 때 누가 그 문을 두드리면 무엇이라고 반응할까요?
예, '통화중' 이라고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주위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
둘째는 시위를 떠난 화살
셋째는 입에서 나온 언어(말)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세상이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한 말과 언어의 남발, 아첨과 중상모략,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들로도 점차 오염되고 병들고 있다.
매스컴과 같은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지는 언어의 왜곡과 조작이 병리학적인 인간화를 조장한다.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노출시킨다.
먼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하려는 사람의 인격과 대인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언젠가 말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훈련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말과 행실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인정과 포용의 말, 희망과 용기의 말, 지혜의 말, 친절과 동정의 말, 감사의 말, 격려와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믿음의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며 나의 인격과 같다.
따라서 성경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성경적 언어는 성경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다.

둘째, 물질의 변화(物質의 變化) Change in Money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이유는 도적이 있기 때문이며, 종이 돈은 좀이 먹고 구리돈은 동록이 쓸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랍비와 신부와 목사가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헌금을 어떻게 하는가?
랍비는 돈을 모두 하늘로 던지며 하나님의 것은 하늘로 올라가고 내 것은 땅으로 쏟아지라고 합답니다.
그러자 신부는 땅에 금을 긋고 그곳으로 돈을 던지면서 저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몫 이쪽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은 원을 그리고 그곳으로 돈을 던진 후에 원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몫 원밖에 있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한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드린다는 믿음입니다.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바쳐서 감사해야 하지만 이것만이라도 바침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신앙생활에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원리를 살펴봅니다.

대인관계의 원리(마 6:2-4) : 구제
대신관계의 원리(마 6:5-15) : 기도
대아관계의 원리(마 6:16-18) : 금식
대물관계의 원리(마 6:19-32) : 보물(물질)

결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성경적인 언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성경적인 물질관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물질관의 대표적인 인물을 욥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4천 년 전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우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생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해서 양이 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급작스런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들 딸, 열 명이 맏이 집에 모여 잔치를 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도떼가 급습해서 들판에서 가축을 치는 종들을 죽이고 모든 가축을 강탈해 갔습니다.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말로 욥의 심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그 비보를 전해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연자실하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여러분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족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출발은 욥과 같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아브라함보다 더 큰 부자로 등장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비관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누적된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인 파탄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 재산을 다 잃었으니 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잃은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자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기 때문에 충격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사람들과 욥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무이자로 돈을 천만 원 빌려주어서 잘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빌린 돈을 돌려주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까요?
돌려주는 것이 아까울까요?
좀 아쉽기는 해도 억울하거나 아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욥은 그가 살던 나라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명망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 재산을 상실했다는 것은 그 때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명예가 물거품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나와 상속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상속 재산을 분배하는 일로 분쟁이 생기면 랍비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랍비처럼 생각하고 찾아왔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상속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재산을 더 많이 갖고 적게 갖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청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대풍이었습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날 밤늦게까지 사업 구상에 몰두하다가 잠든 부자는 이튿날 아침,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눅 12:21).

부자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가진 재물을 다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심지어 그는 자기가 생명의 주관자라도 되는 양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부자처럼 많은 재물이 자기들의 영혼에 만족을 줄 줄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줄 알고 돈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언젠가 이 부자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욥과 같이 생명과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습관의 변화(習慣의 變化) Change in Habits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이란 자주 반복된 삶의 행동이 굳게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린도전서 8: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사랑한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부분이 무엇인가요?

사랑하면 닮습니다.
말하는 것, 입는 것, 분위기까지 닮아갑니다.
예수님의 습관을 닮는 것,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통해 당신의 영혼을 빛나게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자녀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길들여진 버릇 하나, 습관 하나가 한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선배들의 경우 하나님을 향한 자신만의 거룩한 습관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
그의 삶은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했고, 고비가 많았지만
그만큼 그의 찬양도 시편을 가득 매울 만큼 성경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그는 복음 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도, 이방민족의 위협 앞에서도, 모진 고문과 굶주림 속에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 편지로 작성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습관은 새벽 미명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외진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습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시는 모습 등 각각의 습관들을 통해 우리의 안일한 신앙생활을 바로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2023년 신년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경적인 생각으로 다듬어서 이전보다 보람있는 인생,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확인하는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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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자료 / 10-03-2022(월) 오늘의 묵상을 중심으로 새벽 기도회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적 하나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인이 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성립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따르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의 숫자는 1,200만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속에는 허수도 끼어있습니다.
교회 정착을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면서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교인 숫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고 교회의 위상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는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서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으신 영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거룩한 영적 형상이 파괴되고 죄의 지배를 받는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과 회복의 길을 터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것이 되려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이전 것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새 것,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집을 새로 구입하여 이사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옛 주소와 새 주소로 구분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구분합니다.
이전 주소를 사용하면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집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냐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현재는 가장 쉬운 천문학 지식이지만 몇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고 있었다.

​성경의 여러 말씀이 그러하거니와, 지구가 정지하고 않고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려웠다.
감히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이러한 발전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인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천문학자임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이전까지 전해오던 지구중심설인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을 놓고 생각하다가, 그 모형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성스러운 신전을 비추어 주는 촛불을 어디에 놓아야 전체를 동시에 비출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곳은 당연히 중앙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곧 태양을 중심에 두어야 빛이 골고루 비추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추측을 발판으로하여 소위 태양중심설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새로운 체계를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잘 알다시피, 자신의 체계가 당시의 상식과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결국 1543년에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임종 때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자신의 천문학자적인 체계로 인해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다.
교회와의 갈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출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의 임종에 맞추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무튼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주장을 전해 듣고,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천문학의 '천'자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며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에서 '회전'이라는 단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180도를 돈다는 뜻의 '회전'이라는 단어가 나중에는 정치적인 격변을 뜻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혁명'이란 뜻의 어원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책 제목에서 나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전환이 서양 역사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더 자세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시간보다도 더 정확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철학자 칸트였다.
칸트가 철학에서 이룩한 인식론상의 전환은 자연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이룩한 전환과 아주 비슷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정신이 대상들을 인식하려고 대상들의 주위에 돌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것을 칸트는 대상들로 하여금 정신이라고 하는 중심적 사실의 주위를 돌게 했다.

이제는 정신이 대상의 조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정신이 정해 놓은 조건에 따르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인식은 대상에 의거한다고 이제까지 생각되어 왔지만,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는 이것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주관과 대상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별자리가 관측자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보아서는 천체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코페르니쿠스가, 오히려 관측자의 편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별의 위치를 정지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좀더 합당한 해답이 얻어질 수 있으리라는 획기적 사상을 제시했던 것에 비길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커다란 전환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라도 정작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에 비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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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8일(주일) 주님의 수세주일   

2023년 제2주간 성경 읽기 범위(1월 8일 - 14일)

창세기 20장 - 창세기 35장          
마태복음 6:19 - 10:1-20

제목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성경 /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교회력에 따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구원을 위한 성결 예식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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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 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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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고 자료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인침입니다.
이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 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몇 가지로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1.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의 출발을 다짐하고 공표하는 것으로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표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회개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데 인간의 죄에 대한 씻음으로 물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을 상징하며 그 보혈로 죄 씻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3.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의 역사로서 변화된 새로운 생을 출발하게 됨을 의미 합니다.

4. 세례에 임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하나 되는 자격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가지며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수행에 책임이 부여 됩니다.

가.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변환기적이며 소개적인 세례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입니다.

오늘의 세례 기준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세례에서 찾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마 28;19-20).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나. 세례의 방법 

침례회가 침례를 주장하는 근거는 로마서 6:3-6과 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하게 물속에 잠기는 것과 물속에서 나오는 것의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합니다(마 3:16, 행 8:38-39)

레위기 11: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죽음이 병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 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레위기 15:13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로마서 6:3-5 골로새서 2:11-12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지 세례의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 침례를 강조한 내용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나타난 정결 의식은 뿌리는 것으로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레 14:4-7, 16, 49-53, 16:19, 민 8:5-7, 19:18-19)

고린도전서 10:1-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다니엘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민수기 19:21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 질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 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너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침수(침례) 라고 주장하기보다 뿌리는 세례를 뜻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도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

사도행전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 니라.

성경의 세례 방법은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리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신약의 세례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과 성결의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이 언약을 후손 대대에 지킬 하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7:11-14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에 참여한 사람 : 아브람, 이스마엘, 집에서 난자, 돈으로 사온 이방인, 아브람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친자, 서자, 남의 자식은 관계가 없음)

할례의 시기 : 칭의의 후입니다.
바울은 이 순서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더라.

로마서 4:9-11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 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고린도전서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름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집단 홍해바다 도강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 도당이 출애굽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은 세례가 구원보다 앞 설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죄 씻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요한의 세례 

“칼 헨리” 는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는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적인 것에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요건에 관련된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의 특성은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조라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마태복음 3:13-15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태복음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 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사도행전 18:25
그가(아볼로)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누가복음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누가복음 7:29-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마 3:5),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메시아로서의 사역의 출발을 선포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며 이 세례를 통하여 인가의 죄와 비애를 짊어지시는 사역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누가복음 12:4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희생물로 바치고 죽는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에 대하여 해석하셨을 뿐 아니라 승인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22-26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마가복음 16:15-16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들의 세례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린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말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행 2:37-38)
성령의 은사가 동반된 회개의 세례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 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니라.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린도전서 1:14-17
그리스보와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니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유아 세례

세례는 신앙고백을 통한 확증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말도 잘 못하는 유아들이 어떻게 신앙할 고백할 수 있으며 믿음의 확증을 알 길이 없으므로 유아세례는 찬반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면서 난지 8일만에 행한 것은 언약적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확실한 명령이 없으며 또 유아세레를 시행한 사례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할레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에 대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교제이고 축복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창세기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할례는 신앙에 의한 표시이며 그 신앙의 확증입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동등하게 적용되며 할례와 세례는 언약관계 외에 성결과 확증으로 효력과 입회의 조건도 동등할 것입니다. 할례를 유아에게도 주어졌다면 세례도 유아에게 적용되어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하고자하더니

누가복음 2: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에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마태복음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눅 18;16).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사도행전 16:14-15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

사도행전 16: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족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유아세례의 대상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표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자격과 조건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유아의 계약관계를 가집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되 한편 부모만 믿어도 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문답할 때 유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자녀의 하나님도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되도록 부모가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서약이요 하나님께 유아를 바치는 봉헌이며 하나님의 영이 은혜로 임하는 언약과 구원적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의 효력  세례교육 자료(문답용)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유아세례의 효력도 성인세례의 효력과 동일하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니며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성령의 중생함에 의하여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함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됨을 표시하므로 유아세례는 장년세례와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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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교육 자료(문답용)

Long Island 연합감리교회 자료 제공

성경 The Bible

1. 성경은 모두 몇 권으로 되어 있습니까?
How many books does the Bible have?
A: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Old Testament has 39 books and New Testament has 27.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the Bible is the Word of God?
A: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하는 가르침이란 것을 의미합니다.It means that we must learn and follow the instructions of the Bible in our life.

3.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What does the Bible teach us?
A: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인간, 죄, 구원, 삶의 원리, 그리고 영생과 죽음 등을 가르칩니다.
It teaches: God, Jesus Christ, human being, sin, salvation, principle of life, and life after death.

4. 복음의 중심내용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major theme of the Gospel?
A: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It is the love of God toward humankind which is revealed through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5. 십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ten commandments (Ex 20: 1-17; Deut 5: 6-21).
A: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First,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말든지 말며, 그것들에 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Second,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below.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셋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Third,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
Fourth,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Fifth,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여섯째, 살인하지 말지니라.
Sixth, You shall not murder.

일곱째, 간음하지 말지니라.
Seventh,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Eighth, You shall not steal.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Ninth,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Tenth,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6. 가장 큰 두 계명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greatest commandments? (Matthew 22: 37-40)
A: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
랑하라.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Fir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Seco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7. 주기도문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Lord’s Prayer (Matthew 6: 9-13).

A: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
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Our Father, Who are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8. 성경을 매일 읽습니까? 하루에 몇 장을 읽습니까?
Do you read the Bible everyday? How many chapters do you read daily?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의 말씀을 말씀해 보십시오.
Please say the most favorite words in the Bible.
A:

9.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까?
Will you try to learn and follow the teachings of the Bible in your life?
A: 예, 노력하겠습니다. Yes, I will.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1. 성경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Who does the Bible say Jesus is? (Matt 16: 16; Phil 2: 6)
A: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He is not only the Son of the living God but also the eternal God manifested in a human body.

2.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How was Jesus born? (Matt 1: 18, 25)
A: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He was born in a virgin’s body,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3.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Why did Jesus come into this world? (Matt 1: 21)
A: 죄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He came into this world to save people from their sin.

4.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What did Jesus do to save humankind?
A: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으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He died on the cross bearing all the sins of humans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What happens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om 4: 255:10)
A: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됨으로써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All humans can be forgiven and righteous through thei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ey can have the fellowship with the holy and almighty God.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당신과 관계가 있습니까?
Is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related to you?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How is it related to you?
A: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자비 속에서 사는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Jesus Christ died for my sins and he was raised for my new life
in the merciful God.

7.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Who is Jesus to you?
A: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He is my savior and my Lord.

8. 부활 후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What happened to Jesus Christ after his resurrection?
(1 Cor 15: 5-8; Luke 24:51)
A: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올라 가셨습니다.
He has appeared to his disciples for forty days and was taken up
to the right hand of God in heavens.

9.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What is Jesus Christ doing now? (1 John 2: 1)
A: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He prays for all his believers and works among them through the Holy Spirit.

10.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Jesus Christ will come again on the last day? (Matt 24: 29-31; John 5: 27-29; 1 Thess 4: 16-7)
A: 모든 죄와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완성하실 겁니다.
By judging the sin and evil, Jesus Christ will accomplish the whole redemptive plan of God toward all humans.

구원 Salvation

1.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alvation?
A: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변화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This means the whole process of transformation in which we are freed from sin and our relationship with God is recovered and we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2. 죄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sin?
A: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This is that we disobey the words of God by placing not God but ourselves in the center of our life.

3. 죄로부터의 자유는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Why is our freedom from the sin so important?
A: 가장 복되고 의미있는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는데, 이 올바른 관계는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most blessed and meaningful life depends on our 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at we place God in the middle of our life and obey the words of God.

4.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How can we be freed from the sin?
A: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주님이란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We can be freed from the sin by confessing that we are sinners and believing that 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5.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What does it mean that we believe,”Jesus Christ is my Savior and my Lord”? (John 1: 12; II Cor 5: 14-19)
A: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영원히 용서를 받았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It indicates that we receive the truth that all our sins are forgiven forever by means of Jesus’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and we are new creations that Jesus Christ rules and leads.

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How can you explain the new life in Jesus Christ?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죄를 극복하고 매일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Through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believers overcome sins and are daily recreated to b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7.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되어가는 구원의 과정을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process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are recreated as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성화라고 합니다. Sanctification.

8.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단계를 무엇이라 합니까?
What is the final phase of salvation called, that believers finally become the righteous people of God?
A: 영화라고 합니다. Glorification.

9. 이 전 구원의 과정이 완성하는데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the most to accomplish their salvation?
A: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0.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What can you do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A: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을 통해 가능합니다.
I can pray and read the Bible for the deep fellowship with God.

1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일들을 하시겠습니까?
Will you pray and read the Bible to walk in the deep fellowhip with God? A: 예. Yes, I will.

교회 Church

1. 교회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Church? (1Cor 12:27; Eph 1: 23)
A: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성도들은 이 몸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believers who serve Jesus Christ as the Lord. In the Bible, this community is also described as the body of Christ, where Jesus Christ is its head and his believers are its parts.

2.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urch?
A: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The Church participates in the divine work that God saves people from sin and evil.

3.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하는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important things that the Church must do in order to accomplish its purpose?
(Rom 12: 1-2; Matt 28: 18-20; Act 1: 8; Act 2: 44-47; 1 Pet 4: 7-11; 1 John 1:3-4)
A: 예배, 교육, 선교, 교제, 그리고 봉사입니다.
Worship, Education, Mission, Fellowship, and Service.

4. 예배란 무엇입니까? (Ps 29: 1-2, 66: 1-4, 145:1-2)
What are the worship?
A: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It is praising, honoring, and exalting God.

5.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 (성례)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two sacraments that Jesus Christ commanded the Church to do? (Matt 28:19; Luke 22: 14-20)
A: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6. 세례는 무엇입니까?
What is the Baptism? (Rom 6: 3-5; 1Cor 12: 13; Gal 3: 26-28)
A: 세례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새 삶이 탄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Baptism is a ceremony that represents the death of our old self
and the birth of our new life.

7.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What do the bread and the wine represent? (Luke 22: 19-20)
A: 떡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찟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고 포도주는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The bread represents Christ’s body which was broken, and the wine symbolizes Christ’s blood which was shed for the forgiveness of our sins.

8. 성찬식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됩니까?
What is required of partaking worthily of the Lord’s supper? (1Cor 11: 27-29)
A: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세례 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주님의 몸을 분별할 줄 아는 가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순종에
관해 자신들을 살펴야 합니다.
Before partaking of the Lord’s supper, The baptized believers are
required to examine themselves of their faith and knowledge to
discern the Lord’s body,
and of their repentance, love and obedience.

9. 기도는 무엇입니까?
What is prayer? (John 15:16)
A: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청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Prayer is a conversation with God by which believers listen to His word
and offer their own desires unto Him in the name of Jesus Christ.

10.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What day is the Lord’s day (Sunday)? (Acts 20:7)
A: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This is the day when believers gather and worship God in a church through celebrating the resurrection of Christ because Jesus Christ was raised on Sunday.

11. 헌금(십일조)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importance of offering(Tithe)?
A: 헌금(십일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로서, 드려진 헌금(십일조)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는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The offering is our confession that everything which we have originally belongs to God, not us. And through offering churches can do many good works to reveal
the mercy and glory of God.

그리스도인의 삶 The Christian Life

1.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urpose of the Christian life?
A: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praise and enjoy God forever.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How may we glorify God? (Matt 5: 13-16)
A: 우리 안에서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한 행위들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We glorify God by demonstrating our good deeds which God creates in us.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야 하는 선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What are the good deeds that Christians must demonstrate to the world?
A: 두 가지 계명, 곧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Theses deeds mean that Christians perform the two commandments:
(1)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2)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4. 예수님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재차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How did Jesus explain about the two commandments? (John 13: 34-35)
A: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5. 남편과 아내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결혼의 경우)
What does the Bible teach to you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a husband and a wife? (If married) (Eph 5:22-33)
A: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들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모든 것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Husbands ought to love their wives as their own bodies.
Wives ought to submit to their husbands in everything.

6. 부모와 자녀들에 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Eph 6: 1-4)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parents and children?
A: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과 기도 속에서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Parents must not exasperate their children but bring them up in the instruction of the Lord and prayer. Children must obey their parents in the Lord.

7.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must Christians do with their country? (Rom 13: 1-7; 1Peter 2: 13-16)
A: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들을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은 주님께 달려 있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Christians must do all of their duties to the country in the Lord,
and pray for it because its prosperity depends on God.

8.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think of their job?
(2 Thes 3: 8-12; 1 Tim 4: 4-5)
A: 직업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They should consider it as holy and work sincerely to reveal the glory of God.

9. 성경은 물질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money? (Deut 8: 11-20; Acts 4: 32-35)
A: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물질을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물질을 버는 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물질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물질을 관리해야 합니다.
Believers must remember that they do not get money by themselves but with the help of God. Unless God is with them, they cannot do anything including earning money by themselves. And they must remind themselves that they are stewards to God, Therefore, they must manage money according to the good will of God who is the real lord over money.

10. 세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What should Christians do for the world?
(John 17: 22-26; Eph 1: 22-23)
A: 하나님의 사랑을 보임으로써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래서 세상에 평화가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By showing the divine love, they should make an effort that the world is united in Christ Jesus and peace is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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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는가?
신명기 3:23-27

출애굽기 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민수기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Take the staff, and you and your brother Aaron gather the assembly together. Speak to that rock before their eyes and it will pour out its water. You will bring water out of the rock for the community so they and their livestock can drink."

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and drank the same spiritual drink; for they drank from the spiritual rock that accompanied them, and that rock was Christ.

그동안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첫째는 모세의 혈기 때문(민수기 20:12)

반석을 두 번 쳤다.

둘째는 율법의 대표(요한복음 1:17)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율법은 모세


셋째는 모세의 희생의 기도(출애굽기 32:32)

내 이름을 주의 책에서 지워버려 주옵소서.

제가 소개하려는 것은 반석의 의미에서 찾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치라는 히브리 단어는 "나카(nâkâh. נָכָה)"라고 합니다.

נָכָה 5221

1. 치다,  2. 니팔형 : 매맞은 3. 피엘형 :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관련 성경 / 맞아 죽다(삼하 11:15), 상하다(창 37:21, 출 9:31), 치다(창3 2:8, 대상 18:9, 말 4:6), 죽이다(창 34:30, 신 19:6), 때리다(민22:28, 신 25:3), 쳐죽이다(민 35:16), 찔러 넣다(삼상2:14), 살육하다(수 10:20, 삼상 14:14), 맞다(왕하 8:29, 대하 22:6), 패하다(렘 46:2), 공격을 받다(렘49:28), 멸하다(창8:21), 쳐부수다(창14:17),채찍질하다(민22:23,25), 녹이다(삿20:31), 취하다(렘40:14), 격파하다(수11:8), 죽임을 당하다(민25:14, 삼상4:2), 이기다(삼상17:50), 박다(삼상18:11, 19:10), 찔리다(삼상24:5, 26:8), 찌르다(삼하2:23, 4:6), 자책하다(삼하24:10), 쏘다(왕하9:24, 대하18:33), 박수하다(왕하11:12), 쬐다(욘4:8), 살인하다(민35:11,15, 사66:3), 암살하다(신27:24), (실수로)죽이다(수20:3), 함락되다(겔33:21, 40 : 1),내어주다(렘18:21). [명] 죽임(창4:15), 태형(신25:2), 상처(슥13:6).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나카는 "살해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반석을 친다는 것은 "반석을 죽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반석을 신령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반석을 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사건을 이루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의 사건은 단 일회적인 사건으로 충분합니다.
반석을 명하라고 하신 것은 이제부터는 구원은 선포해야 할 명령입니다.

민수기 20장 8절에서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명령이란 히브리 단어는 "다바르( dâbar. דָּבַר)" 라고 합니다.

דָּבַר  1696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관련 성경 / 말씀하다(대상 17:17, 시 51:4, 사 1:2), 명령하다(삿1:20), 이르다(창16:13, 신5:31, 겔37:21), 안위하다(에10:3), 명하다(욘3:2), 말하다(욥33:2, 미7:3), 진술하다(창24:33). 허락하다(창28:15, 출12:25), 고하다(신20:2, 겔2:7), 기도하다(민 21:7), 선포하다(신1:1, 렘35:17,36:31), 강론하다(신 6:7, 11:19), 언약하다(신 23:23), 확언하다(신 26:18), 대답하다(왕상 2:30, 창34:13), 전하다(왕하 1:17, 20:19), 고발하다(에 7:9), 아뢰다(삼하 22:1), 베풀다(렘 1:16), 선언하다(렘11:17, 22:1, 25:13), 비방하다(민12:8), 여쭙다(삼하14:15), 구하다(왕하4:13, 삿8:8), 이야기하다(출 33:11, 욥 41:3), 공포하다(레 23:44), 담화하다(삼상 9:25), 쟁론하다(왕상 3:22), 위로하다(대하 30:22), 질문하다(렘 12:1), 권하다(대하 33:18), 복종하게 하다(시 18:47, 47:3). [명] 말(민 27:7, 삼하 13:36, 사 65:24), 말씀(민 36:5, 수 24:27, 욥 11:5), 명령(창 44:2).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일회적인 구원의 사건을 다시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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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2023 / 주현 후 제 2주(녹색)
설교자 : 이승혁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라(요한복음 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3.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without him nothing was made that has been made.


지난 12월 30일 어느 목회자로부터 카톡을 받았습니다.

술주정뱅이는 예배방해자이므로 성전안에서 내보냈습니다. 이건 문제가 되는가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를 내쫒으라. 도 하나님의 말씀인데요.

제가 이렇게 회신을 했습니다.

내쫓는 은혜 보다
그 사람이 교회로 들어왔으니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더 큰 은혜는 어떨까요?

주와 동행 365를 실현하려면
말씀으로 동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술주정배이를 교회에서 내쫓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불러 이방인의 전도자로 세우셨던 주님의 가르침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말씀으로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래 전에 처음 목회지에서 교회 바로 앞에 거주하는 김씨가(김장엽) 예배 시간에 술에 취하여 쌀을 한자루 들고 들어와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목사 양반 우리 아들 취직 좀 시켜 주소!
마침 설교를 시작한 때인지라 뒤에서 안내를 하던 남자 집사님께서 그 분을 조용히 모시고 나가셨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 집을 방문하여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취직을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고 일러주고 정말 아들을 취직 시키려면 아버지가 먼저 올바른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도입 이야기 /
희랍의 설화 "밀가루 포대 만드는 사람"
'내가 막아버렸지.........'

어느 마을에 평생토록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내가 막어버렸지!"
"내가 막아버렸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그 나라의 어진 왕이 그 가게 앞을 지나다가 할아버지가 웅얼거리는 말을 듣고 "왜 매일 '내가 막아버렸지!' 이렇게 똑같은 말을 반복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임금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임금님은 그날 저녁 신하를 불러 할아버지에게 궁궐에서 만든 맛 있는 빵을 접시에 담아 보내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궁궐에서 임금님이 먹는 빵을 받은 할아버지가 그 빵의 숫자를 살펴보더니 이 정도의 빵으로는 한끼 분량밖에 안 되는구나 하며 얼른 빵집으로 달려가서 "오늘 저녁 임금님께서 이 빵을 보냈는데 우리 식구 수가 많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빵을 드릴테니 빵을 얼마나 주시겠소!" 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빵집 주인은 도대체 임금님은 궁궐에서 빵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아 밀가루 포대 만드는 할아버지에게 하루 치 분량의 빵을 주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얼른 임금님이 보낸 빵을 주고 모든 가족들이 하루동안 배 부르게 먹을 빵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며 매우 흐뭇해 했습니다.
며칠 후 포대를 만드는 가게 앞을 지나게 된 임금님은 할아버지가 여전히 '내가 막아버렸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참 이상하구나! 지난 번 보낸 빵으로 부족한가?' 하며 이번에는 궁궐에서 임금님이 즐겨 먹는 칠면조 한 마리를 요리하여 보냈습니다.
포대 만드는 할아버지는 궁궐에서 보낸 칠면조를 받은 후에 고기도 매일 먹던 사람이 먹어야 소화가 잘 되는데 차라리 이 칠면조를 고기 집에 가서 다른 것과 바꾸기로 하고 칠면조 요리를 주고 거의 일주일을 먹을 수 있는 빵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은 빵을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며 아주 좋아했습니다.
얼마 후 임금님이 그 할아버지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아직도 똑같은 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어진 임금님은 이번에는 신하에게 날이 어두워 질 무렵 포대 만드는 사람이 집으로 돌이가려면 반드시 작은 다리를 건너가야 하므로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할아버지가 건너가는 다리 위에 놓아두라고 분부했습니다.
드디어 포대 만드는 할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다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수 십년 동안 이 다리를 건너다녔는데 오늘은 아예 눈을 감고 건너보자 하며 두 눈을 꼭 감고 다리를 건너가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신하는 금화가 가득한 자루를 들고 임금님에게 자초지종을 다 아뢰었습니다.
신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임금님은 하는 수 없구나!
그 사람은 평생을 어렵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야 하며 안타까워 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꿈을 꾸었는데 어느 넓고 넓은 들판에 수 많은 샘물이 솟아나는데 샘물마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샘물에서는 물이 솟구치도록 솟아나고 어떤 샘물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자기 샘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솟구치지 못하고 졸졸 흐르고 있기에 주위를 살펴보니 긴 장대가 있어 그 장대를 갖고 샘물 구멍에 넣고는 마구 휘저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흙탕물 같은 물이 솟구치더니 잠시 후에는 그나마 물이 나오는지 마는지 물기만 있는 샘이 되었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참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보냈던 빵과 칠면조 요리와 금화자루를 모두 포대 만드는 사람이 막아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포대만드는 사람은 평생토록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중얼거리며 지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떤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놀라운 경험을 하며 인생의 역전 드라마와 같은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행복하게 즐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떤 교인은 늘 듣는 그 말씀에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2023년 주와 동행 365라는 표어에 따라 능력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갖도록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 나만이 갖는 기쁨과 은총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은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1년 52주에 최소한 52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10년이면 520번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많은 설교 중에서 나를 감동시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암송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초식 동물들 중에 되새김질을 하는 대표적인 가축은 '소'라고 하겠습니다.
낮 동안에 들판에 소를 풀어 놓으면 하루 종일 소는 풀을 뜯어 먹습니다.
해가 질 무렵 외양간에 소를 데려오면 그때부터 소는 되새김질을 시작합니다.
소는 위가 4개라고 합니다.

  4

첫번째 위 : 혹위(양)                

양 또는 양곱창이라고 하며, 소의 위 중에서 꽤 비싼 부위 중 하나이며,                
소가 음식물을 먹으면 제일 먼저 음식물이 저장되는 공간이란다.                
되새김질 할때 여기서 음식물을 가져와 되세김질 하며 4개의 위중 가장 크다.

두번째 위 : 벌집위(그물위)               

순대처럼 기다란 모양인데 곱창집에서 흔히 볼 수 없으며,               
내장탕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세번째 위 : 겹주름위               

세번째 위로서 흔히 처녑이라고 한다.        
기능은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역할을 수행한다.               
기름에 찍어 생으로도 먹는다.

네번째 위 : 주름위               

막창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막창하면 왠지 소장 또는 대장 쯤으로 연상하기 쉬우나,               
소의 마지막 위(4개중 4번째니깐 마지막이죠) 여서 막창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바로 위산이 분비되며 소화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위 위를 사람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앞의 2개는 위의 기능이라기 보다는 저장공간이며
뒤의 2개가 사람의 위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묵상(메디켈루스, Medikelus) 默想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그 안에 있는 빛으로 인해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실까요?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옛적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경험했습니다.
어떤 이는 불로, 어떤 이는 바람과 지진으로, 또 어떤 이는 술취함으로 경험했습니다.
또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바 되었습니다(요일 1:1).

이제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경험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와서 말씀을 증거하시며, 경험하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말씀이 직접 우리의 영과 육체와 인격과 삶에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경험되어야 할까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요한복음 19:4~6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e Man, Ecce Homo)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상황을 목격하더라도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듣고, 보고, 느끼고,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입니다.
이런 심리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머리에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총독 관정 발코니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이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 “Ecce Homo!”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화가가 “Ecce Homo”를 주제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중에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가 그린 “Ecce Homo”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똑같은 그림을 두 장을 그렸는데 하나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훗날 많은 사람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정신병이 들어 바젤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Ecce Homo”를 주제로 자서전을 썼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듣는 순간에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처럼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똑같이 보고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왕관 대신 가시나무로 만든 가시관을 쓰시고, 그 가시에 찔려 얼굴에 피가 흐르는 모습에서 첫째는 우리 죄를 위해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신 예수님, 둘째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모진 고난 앞에서도 잠잠하신 예수님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묵묵히 고난의 잔을 마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빌라도(요 19:1~5)

첫째,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대제사장 가야바는 새벽에 예수님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총독 관정으로 끌고 가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특별 사면해 주는 관례를 따라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보다 강도인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외쳤습니다(요 18:38하~40). 이에 빌라도가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도록 하였습니다(요 19:1)

로마 시대의 채찍은 여섯 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는데 끈 하나하나에 납덩이나 뼈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채찍질할 때는 옷을 벗기고 사람을 틀 위에 묶어 놓고 건장하고 억센 군인이 등에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 채찍질이 너무 아프고 포악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채찍질은 사람을 죽이는 시해 행위다”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십자가형과 채찍질을 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로마인에게는 채찍 40대, 유대인에게는 특별히 채찍 120대를 때리도록 했습니다.

로마 군인은 예수님에게 채찍으로 120대를 때렸습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예수님의 등을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등에는 깊은 상처가 패이고 피가 온 등을 적셔 흘러내렸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무지막스럽게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에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리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렸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고(마 27:30), 마가복음에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했다고 했습니다(막 15:19).

로마는 힘으로 전 세계를 평정했습니다. 그런데 힘없고 나약한 예수님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가, 조롱하고 침 뱉고 멸시한 것입니다. 시편은 조롱받는 예수님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부자가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주님과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무엇이 되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힘으로 세계를 제패한 로마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조롱과 침 뱉음과 멸시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겸손이 교만을 이기고, 순종이 힘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함과 겸손과 순종으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 관저에서 예수님을 왕의 모습으로 분장시킨 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러면 왕관을 써야지?”하면서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이라면 왕의 옷을 입어야지?”하면서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이라면 이것을 들어야지?”하면서 갈대를 손에 쥐어 주며, “야, 이렇게 차리니 정말 왕 같은데? 유대인의 왕 만세!”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모욕하고 심문했지만 아무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총독 관저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나는 그를 아무리 심문해도 죄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너희에게 알리고자 밖으로 그를 끌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빌라도에게 끌려 나온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었고, 자색 옷이 입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눈을 감고 조용히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예수님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하였고, 자색 옷이 입혀 있는 모습으로 모욕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을 한번 바라봅시다.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얼굴에 피가 흐르며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영국의 프란시스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독일 유학 중에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그림을 보는 순간에 크게 은혜를 받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 찬송가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내 너를 위하여”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새찬송가 311장)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 또한 19세 때 뷔르츠부르크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그림을 보는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감동했습니다.

그는 그림 앞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씨가 보였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글씨와 음성에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을 위해 어떤 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주님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고향 독일 드레스덴(Dresden)으로 돌아가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성경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백작으로서 일생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Moravian Brethren)를 만들어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세기 초 교회는 세계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안 형제회는 1732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0년 동안에 세계 14개국에 3,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잠자던 선교를 깨웠습니다. 한국의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도 모라비안 형제회 출신입니다. 그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 1832년 7월 25일에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황해도와 충청남도 서산 보령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고 최초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을 시도했고, 감자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뮐러(Georg Muller)를 회심시켜 영국으로 보낸 것도 모라비안 형제회였고,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회심에 영향을 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1729년, 미국 선교를 위해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평화롭게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웨슬리는 그들에게서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고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로 회심한 하버갈과 진젠도로프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고, 자색 옷이 입혀진 예수님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시고 빌라도의 공관 발코니에 서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으셨다. 예수님이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예수님이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예수님이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조롱받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시고 갈대를 쥐고 계시지만, 이제 장차 우리는 조롱의 자색 옷 대신 빛나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 가시로 만든 관 대신에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 갈대 지팡이 대신에 우주를 통치하실 홀을 들고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침묵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호사를 앞세워 무죄를 주장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자 변명합니다. 파렴치한 죄를 범한 사람일수록 살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변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로마 군인들의 수치와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말씀만 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진리는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온갖 수치과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두 가지인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기도 제목, 하나님께 청구하는 청구서가 잘못되었다는 응답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기다리라는 응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여 당신이 언제까지 침묵하고 계십니까?”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하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십니까? 왜 보고만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침묵하고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용서입니다.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준 빌라도(요 19:6~16)

빌라도는 고문으로 죽음 상태에 이르게 된 예수님을 보여줌으로 유대인들의 동정을 사서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그의 아랫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요 19:6)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애를 믿고 유대인들과 타협하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너희가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의 법에 예수는 당연히 죽을 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합니다. 발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는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부터냐?”고 심문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을 해야 만이 대답이 아닙니다. 침묵은 무서운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내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데 왜 자기에게 호소하지 않는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했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물고 ‘당신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습니다’(요 19:12,15)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가이사에게 수없이 반역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이사의 충신인 양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내면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면 군중심리에 이끌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흔들리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없이 떠돌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을 내려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빌라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진리를 알지만, 진리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유대인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과 현실의 유익을 잃지 않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는 판결을 마친 후에 손을 씻으며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마 27:24).
그럼에도 역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현실의 유익과 자신을 잃지 않고자 진리를 행치 않고 현실과 타협합니다.
예수님을 믿다가도 조금 핍박을 받거나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미련 없이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좀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를 것 같으면 예수님과 교회를 등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버리고 현실의 유익을 좇아 사는 빌라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진리 편에 서서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현실의 유익을 좇을 때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용서와 기다림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 우리 삶의 장바구니

“제 삶의 장바구니엔 하나님 나라가 부재했습니다.” … 이 말은 지난주일 ‘채찍질하더라 2’는 제목의 설교 가운데 제가 나눴던 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말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바구니’라는 실재의 개념 속에 실현되고 구체화됩니다.

사복음서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예수님의 이적이 ‘오병이어’(마 14, 막 6, 눅 9, 요 6)입니다. 그런데, 그 이적이 굳이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도시락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도시락이야 말로 어린 아이에게 실재하는 장바구니요,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자기권리를 내려놓고, 자기 것을 나누는 그 속에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미가 자리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기편의 만을 추구하는 제국의 시스템 하에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오병이어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지자체와 정부의 재난지원금을 생각해 볼 때, 단순히 얼마만큼의 공돈을 받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이의 고백처럼, 이전에는 좀 더 싸고, 가성비 좋은 것을 찾아 다니다 보니, 물건값과 물건만 눈에 들어왔다면, 동네에서 재난지원금을 쓰다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이 보인다는 겁니다.

경제적인 부분 뿐 아니라, 환경과 기후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채찍을 휘두름으로써 우리 또는 인간의 이익을 계속 극대화 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모두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더 늦기 전, 지금이라도 우리는 주변의 이웃들과 공존의 방향을 모색하고, 공생의 방법을 연습해 가야 합니다.


지난주 월요일이었습니다. 매주 설교를 나누는 ‘설교와 목회’ 멤버들이 동기형이 목회하는 교회(합정동 다운교회 석정일 목사)에 모였습니다. 여러 나눈 이야기들도 유익했지만, 그 교회를 들어가면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습니다. 그 교회 현관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에 조그마한 유리냉장고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 냉장고 안에는 시원한 음료수들이 들어있고, 앞 면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택배기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더운 날씨에 편하게 꺼내드세요”



2. 보라, 이 사람이로다


오늘 본문으로 갑니다.

흥분해 있던 유대인 무리를 진정시키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단순히 채찍질만 한 것이 아니라, 가시관을 만들어 머리 위에 눌러 씌웠습니다. 자색옷을 입혀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조롱하고 모멸했습니다. 한편으론 예수님을 구명하려는 듯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철저하게 정치적 계산에 의해 행동하는 빌라도는 영락없는 세속 정치인의 전형이었습니다.


4절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고난을 가한 뒤 관정 밖에서 소리치는 유대인 무리에게로 다시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채찍질에 이미 온 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살점이 뜯겨져 간 예수님은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서는 것조차 버거운 예수님을 빌라도는 제사장 무리 앞에 세웠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말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던 빌라도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5절 후반절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매를 맞아 홀로 설 힘조차 없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은 한마디로 볼품없는 몰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외친 말이 “보라, 이 사람이로다”였습니다. 그 말 속엔 이런 의미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디 한번 보시오! 당신들이 말하는 이 사회를 전복시킬 자의 모습이 이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반역할 힘이 있습니까? 사람을 좀 보고 소리치시오!”



3. 렘브란트의 Ecce Homo


작년 사순절 기간에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했습니다. 39일째 되던 날 바로 오늘 본문인 요 19:5과 더불어 렘브란트의 그림 Ecce Homo를 나누었습니다.


라틴어 Ecce Homo는 "이사람을 보라”는 빌라도의 말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내용을 작품화하면서 판화 기법(etching)으로 만들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1655년 처음 제1판을 시작으로, 1665년 제8판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타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작가의 삶의 여정과 잇닿아 있습니다. 아내에 이어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고, 가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생의 끝자락에서 렘브란트는 그렇게 볼품없는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렘브란트는 빌라도의 법정 위에 초라한 인간 예수님과 더불어 자신을 세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생의 실패같은 몰락과 더불어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초라한 Ecce Homo의 예수님 속에서 렘브란트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렘브란트가 <Ecce Homo>의 6번째 판부터 뚜렷하게 고친 곳이 바로 법정 하단 부분입니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유태인 군중들을 제거하고 법정 하단 전면부에 두개의 큰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해골의 눈 같기도 한 두 구멍 사이에 머리카락을 풀어해친 한 사람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그리스 신화 속 죽음의 강과 지하의 신 하데스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것이다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개신교인이었던 렘브란트가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했다기 보다는 처절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육체적 고통, 제자들의 배신,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것들의 형상화입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 후 지옥에 있는 이들을 위해 그곳까지 내려가실 것에 대한 예시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서인지 예수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나이들어 보이고 서글퍼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렘브란트의 <Ecce Homo>를 ‘가장 슬픈 왕의 초상’이라고 하기도 하며, ‘우리의 원죄가 해결받는 순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을 확대해 살펴보니 그 눈빛이 군중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을 쳐다보는 우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물끄러미 그림을 보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4. 이 시대가 잃어버린 것


누군가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것의 하나가 ‘초월적 형이상학의 바탕’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말인 것 같은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신)을 상실한 채 세속적인 물욕만 추구한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대에서 근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 밖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부정되는 시대 속에서도 스며드는 선명한 빛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렘브란트의 판화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비방과 모멸이 난무한 빌라도 법정에서 말없이 서 있는 예수님은 이해보다는 오해 받았고, 경외보다는 시기되었으며, 칭송보다는 비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분의 진실은 신성모독이라 오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의 사랑이 아니라, 눈빛과 온몸에 배어 있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모함하며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결국은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랑,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인해 죽어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랑은 그처럼 강하지도, 순전하지도 않습니다. 허약한 체력을 드러내며 베드로처럼 칼이라는 손 쉬운 방법을 꺼내 듭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불법과 부정이 조작되고 자행됩니다. 변종이 본래의 것보다 훨씬 본질다워 보이고 강해 보이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눈멀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잃어버린 채 변종적 사랑의 MSG에 길들여 살고 있습니다.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속의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원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할지 보여주는 좌표가 됩니다.


이 땅, 그 누구도 기대치 못했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에게조차 영접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검정물감을 뿌려놓은 듯 검게 보이는 빌라도의 재판장 위에 서 계십니다. 점점 밀려오는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분은 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듯이 서 계십니다. 렘브란트의 <Ecce Homo> 이 작품 속에서 2천 전 부당하게 판결내렸던 빌라도의 법정을 봅니다. 그리고 오염된 신앙으로 정의를 억압하던 렘브란트의 시대를 그려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대신한 종교권력과 권력의 부나방이 되어 기획화된 수사와 판결을 하는 굽어진 우리시대의 법정을 봅니다.


빌라도의 법정 위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과 시선을 맞추다 보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저 법정 어딘가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5. Ecce Homo와 진젠도르프, J. 웨슬리, F.R 해버갈


1) 진젠도르프(1700년-1760년, 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도미니크 페티의 <Ecce Homo>

렘브란트 이외에도 <Ecce Homo>라는 제목의 작품을 남긴 화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 1589-1623)입니다.
그의 그림은 렘브란트의 것과는 전혀 다른 초상화 타입입니다.
빌라도가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라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입니다.

페티의 그림에 대중이 주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 그림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페티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년이 지난 1719년 5월 어느 날, 이 그림 앞에 서 있던 열아홉 살 청년 진젠도르프였습니다.
그는 개신교적 신앙 때문에 독일에서 망명한 오스트리아 귀족 집안의 후예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그림의 맨 아래에 적혀 있는 "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라는 라틴어 문구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자기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을 얻기 위해 주님께서 어떤 값을 치러야 하셨는지를 자문했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 예수께 자신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생태적 백작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안온하고 호화로운 삶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자기 소유의 저택도 예배와 모임의 장소로 내어놓았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체코에서 이동한 모라비안 교도들(체코의 개혁자 존 후스를 따르는 루터 이전의 개신교도들)을 자신의 영지인 헤른후트로 피신하게 해 그곳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모라비안 운동이 할레대학과 함께 근대 선교의 불을 일으켰고 1832년 7월,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를 조선의 서해안으로 보낸 시초가 되었습니다.

​2) 웨슬리(John Wesley, 1703년-1791년)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이들보다 훨씬 더 헌신적이었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은 당시 개신교 신자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옥스퍼드 출신의 존 웨슬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1729년,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행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난 뒤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평화로운 그들의 모습에 웨슬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말을 듣고 웨슬리는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습니다. 그것이 영국신앙의 본격적인 갱신운동의 시발점이었고,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3) 해버갈(Francis Ridley Havergal, 1836-1879)

그로부터 다시 100여년이 훨씬 지난 1858년, 영국의 시인이요 찬송가 작사자인 프란시스 해버갈이 독일 유학 중 친구를 따라 뒤셀도르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 옛날 진젠도르프가 보았던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 <에케호모>와 문구를 보았습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해버갈은 온몸의 힘을 잃은 듯 그림 앞에 주저앉았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무는 듯 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머리 속에 흐르듯 떠오르는 찬송시를 종이에 써 내려갔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I Gave My Life For Thee)입니다.
그 첫 소절의 가사가 이러합니다.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6. Ecce Homo와 성령강림주일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고 빌라도가 외칠 때, 그 앞에 서 있던 나사렛 청년 예수는 초라했고, 볼품없었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서 있던 그의 몰골 그 어디에도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중세의 가을’이라고 일걷는 14세기-16세기의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과 그를 이은 18세기의 계몽주의 (Enlightenment)의 영향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나아가 이성과 과학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신의 부재의 시대엔 볼품없는 나사렛 예수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빌라도의 법정 위에 선 그 나사렛 예수로 인해 삶이 바뀌고, 생이 달라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초라했던 그 예수가 자신들의 전 생애를 맡길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들로 인해 시대의 어두움이 밝혀졌고, 그 사회가 정화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계몽주의 시절 한 사람, 도메니코 페티의 손 끝을 통해 Ecce Homo의 예수님을 화폭에 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진젠도르프를 불러 경건주의 운동의 기수로 쓰셨습니다.
이어 그 뿌리에서 또다시 존 웨슬리를 불러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사람의 생각과 계획 덕분일까요? …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치 앞 자신의 운명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수백년, 수천년의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 굴곡진 그 시대마다 사람의 속에 역사하셨던 성령 하나님 덕분입니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숨 쉬게 하셨고, 힘있게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의 부재의 시대, 더군다나 전염병의 시기에 어느 누가 우리의 행위를 아름답게 보겠습니까? 날씨도 더운데 마스크 착용하고 이렇게 예배드리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인생낭비로 보이겠습니까? … 하지만, 이 초라함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성령님이 믿는 사람들 속에 임재하신 날을 기념하는 오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임재하셨던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기를 구합니다. 불의 혀와 같은 모양으로 임하셔서 사람의 언어를 바꾸시고, 사람과 사람을 소통하게 하셨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바뀌시고,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교통케 하시기를 구합니다.

​칼 라너와 더불어 20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 손 꼽히는 한스 큉에 의하면, 고대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영(Geist)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붙잡힐 듯 하나 붙잡히지 않고, 볼 수 없으나 강력하며, 사람들이 숨쉬는 공기와 같이 삶에 필수적이며, 바람과 폭풍처럼 힘찬 것이 성령이다.’

성령님의 이러한 역사가 창조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역사하셔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지길 구합니다.
모세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사사들을 비롯하여 왕들과 예언자들을 감동시키시고, 사도들과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셨던 것처럼 우리 속에도 침투해 들어오시기를 구합니다. 

꺾이고 초라해진 삶을 거쳐 마침내 생의 기쁨을 새로이 발견한 어떤 이의 고백은 이러했습니다.
‘살리는 영(고전 15:45)으로 우리 속에서 오신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살리는 교회, 살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단 한번이라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른후트(Herrnhut)에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진젠도르프(Zinzendorf·1700∼1760) 백작 무덤을 갔을 때였다.
헤른후트는 독일과 체코,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인구 1200여명의 마을.
이곳의 영주였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체코 서부 보헤미아의 경건한 복음주의자들로 18세기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에 정착한 모라비안 교도들과 형제단을 만들어 근대 독일의 영적 각성을 이끌었다.
헤른후트 ‘하나님의 피난처’ 또는 ‘하나님의 오두막’이란 뜻.

헤른후트 마을 내 ‘하나님의 영지(Gottesacker)’라 불리는 모라비안 교회 묘역에 있는 진젠도르프 무덤까지 올라가는 도중 두 갈래로 길이 갈라져 있었다.
오른쪽이 진젠도르프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로 가야’ 진젠도르프 무덤에 도달한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19세에 뒤셀도르프에서 이탈리아의 화가 도메니코 페티의 작품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에 묘사된 예수 수난 장면의 그림을 보고 평생 주님의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총독 빌라도는 가시면류관을 쓴 채 자신 앞에 끌려 온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했다.
채찍에 맞아 살점이 찢겨 나온 처연한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 있었다.
군중들은 빌라도의 말에 답한다.
“십자가에 다시오!”

진젠도르프도메니코 페티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내면의 음성이 들렸다.

“내 너를 위해 이 일을 했건만, 넌 날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

그 음성이 한 청년의 인생을 과격하게 변화시켰다.
그가 한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에 선교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에케 호모”란 절체절명의 말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빌라도 당시 군중들은 그 말을 통해 살인의 충동을 느꼈다.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오!”
그때 이래로 이 땅 사람들은 ‘살인의 추억’ 속에 살아가야 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예수를 다룬 자신의 책 제목을 ‘에케 호모’라고 지었다.
그것은 지독한 경멸의 언사였다.
물론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젠도르프와 같이, 또 한 사람 프랜시스 하버갈과 같이 에케 호모에 응답해 새 길을 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영국인 하버갈은 페티의 그림을 보고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를 작사했다.
어찌 그들뿐인가.
윌리엄 캐리가, C T 스터드가, 짐 엘리어트가, 길선주 장로가, 주기철 목사가, 구름 같이 둘러싼 믿음의 선진들이 ‘에케 호모’에 응답해 자신의 길을 버리고 그분의 길을 따랐다.

무수한 사람들이 페티의 작품 앞에 섰지만 누구나 진젠도르프와 같이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온 천지에 풍긴 벚꽃 향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빛 자욱이 선명한 시즌이다.
“에케 호모!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을 보라.”
이 소리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21세기를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말하신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을 주느냐?”


예수님이 끌려나오셨다. 그 분의 몸은 단단한 밧줄에 매여있다. 얼마 전까지 자유의 몸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의 손은 포박을 당했다. 문둥병자를 만져주고 아픈 자를 고쳐주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던 그 손이 밧줄에 묶여 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온 양같이 잠잠히 계실 뿐 아니라 외로이 서 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를 보호해줄 사람도 없다. 그토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셨건만 온데 간데 없다. 예수님은 굶주린 야수들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야수들이 으르렁대며 달려들 태세다. 무자비한 야수들은 송곳같은 이빨을 내놓으며 난폭한 본성을 노출한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호위병들은 예수님을 마구 구타하였다. 전쟁터에서 싸웠던 강인한 손과 팔로 예수님을 가격하였다. 구세주의 뺨을 때렸고 가슴을 걷어찼다. 땅에 엎어진 예수께서는 멍든 눈으로 그들을 올려 보았다.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침을 뱉었고 시종일관 놀림을 받았다. 못된 병사들은 폭력을 재미삼아 휘두른다. 그들은 살인에 이력이 나 있고 피에 굶주려 있다. 누구든 그들에게 붙잡혀오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수모와 고문을 받는다.

이번에는 구타당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튼튼한 나무기둥에 묶는다. 채찍을 가하기 위해서다. 그 채찍은 아홉 줄의 가죽끈에다 작은 철고리들을 달았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채찍을 맞고 벌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살인적인 가죽끈이 예수님의 발가벗긴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억센 채찍이 몸에 감기면서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핏방울들이 바닥에 튄다. 피부가 벗겨지고 하얀 뼈가 드러난다. 한번 채찍이 있을 때마다 고통이 몰려온다. 그 고통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눈물의 강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소리내지 않으신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눈물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예수의 눈가가 흐려진다. 아무도 그 분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가 없다. 육체적 고통, 제자들의 배신, 버림받은 고독이 예수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이처럼 괴롭고 외로울 때가 없었다.

빌라도가 죄수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자 잔인한 호위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광장으로 나왔다. 가장 슬픈 왕의 초상이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외친다. 그러자 증오심에 불타는 군중이 주먹 쥔 팔을 뻗으며 외친다.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예수님의 피와 상처, 깨어진 마음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빌라도는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이만하면 되었을 텐데.. 어쩌지? 내 손에 피를 뭍히는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잖아" 빌라도의 우물쭈물하는 심경을 간파한 대제사장이 결정적인 말을 내뱉는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시저의 충신이 아니지요."

위협적인 말이다. 협박이나 다름없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진다. 빌라도는 선택의 막판에 서게 되었다. 예수를 놓아주었다는 사실이 로마에까지 알려진다면 정치적 생명이 끝날 것은 뻔한 일이다. "예수를 놓아주어 민란의 원인을 제공해서도 안될 말이지.. 내가 얼마나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힘썼는데..." 잔인하지만 영악했던 빌라도는 재빨리 앞날을 그려본다.

그도 젊었을 때는 지금같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쯤은 가릴 줄 알았다. 그러나 야심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면서 인생궤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조금 더 인기를 얻고 자리를 유지하려면 은밀한 거래를 해야 했고 기생충같은 자들과 공모해야 했고 그런 일을 하면서 그의 순수성은 점차 퇴색해갔다. 예전의 고상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란 타협과 편의, 개인적 야심 따위이다.
빌라도는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하기로 하는 순간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로 재판을 뒤바꿀 용기가 없었다. 그는 현실에 굴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추악한 자신의 정욕에 굴종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대야를 찾았다. 손을 씻는다고 그의 죄가 용서될 리 없었다. 그의 죄는 육신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양심을 판 죄요 진리를 외면한 죄악이었기 때문에 손을 아무리 깨끗이 씻는다 한들 소용이 없다. 죄없는 예수를 놓아주라는 아내의 진심어린 이야기를 듣는 대신 군중이 질러대는 광란의 요구를 듣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그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그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오셨다. 자기백성들에게 오셨지만 그를 영접한 사람은 없었다. 재판정과 사람들은 검정물감을 뿌려놓은 듯이 시꺼멓게 보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고 간고를 겪는다.(사 53:3)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를 피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악을 뒤집어쓰셨다. 이런 환란을 받을 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맞이하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사 53:7)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예수님이 깊이 사랑하셨던 자들에게 받으셨던 고통을 생각한다.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주님이 치르셔야 했던 아픔을 생각한다. 나도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저들처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친 죄인이었다.

나는 그 분에게 상처를 주었으나 그 분은 내게도 손을 내미셨다. 나의 허물과 죄악을 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감싸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세상 염려 때문에 천국생활에 대한 모든 열망을 사장시킨 나를 회복시켜주셨다. 이 세상을 마치 영원한 안식처로 생각하고 내 힘으로 지은 깨지기 쉬운 보금자리를 안전한 곳으로 생각한 나를 바로 잡아주셨다. 영원에 대한 체험만이 이 세상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을 경멸하거나 멸시하지 않으면서 참되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다. 하나님의 증거들로 말미암아 미래에 있을 더 좋은 영광을 갈망하게 길을 열어주셨다.

그런 예수님을 나의 가장 귀한 친구요 구원자로 섬기리라. 사랑의 선물을 주신 그 분을 찬송하리라.

“내 작품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도대체 다른 책들을 더 이상은 견뎌낼 수 없게 된다.
내 책보다 더 긍지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더 세련된 종류의 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독자의 모습을 내 머리 속에 그려보면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이 되고 만다.
게다가 그는 탄력 있으면서도 꾀가 많은 신중한 자이며, 타고난 모험가이자 발견자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근본적으로 누구에게만 말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것보다 더 표현을 잘할 수는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누구에게만 자기의 수수께끼를 던지는가?
너희, 대담한 탐험가, 모험가들. 그리고 언젠가 영민함의 돛을 달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 적이 있는 자들에게, 너희, 수수께끼에 취해 있는 자들, 불투명함을 즐기는 자들, 피리 소리로도 온갖 미궁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런 영혼의 소유자들에게. 그것은 너희가 겁먹은 손으로 한 가닥 실을 찾아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추측할 수 있는 곳에서는 추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니체전집 15 『이 사람을 보라』(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옮김, 책세상, 2002, 321-388)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에서-

‘어떻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전적 고백록이자 마지막 저작인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보여주는 그의 놀라운 자신감을 보십시오.
루터교 목사의 아들답게 제목도 성경의 요한복음 19장 5절에서 빌려왔습니다.
채찍을 때린 후 가시관과 자색 옷을 입힌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내보이면서 ‘정말 이 사람을 죽이라는 말이오?’ 라는 빌라도의 속내가 담긴 말이 "보시오, 이 사람이오." 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When Jesus came out wearing the crown of thorns and the purple robe, Pilate said to them, "Here is the man!")

이 책을 쓸 당시 44세의 니체 역시 자신이 사랑한 철학에 배신당한 상처로 스위스의 산골에서 쫒기 듯 글을 썼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처럼, 평생을 철학의 전투장에서 싸우다 병 들었지만 철학사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긍지를 갖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쓴 책이라고 합니다.

니체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이면서 손에 들게 되는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니체전집13, 2014)입니다.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다음의 제5복음서이자 미래세대를 위한 새로운 성경이라고까지 언급할 정도로 니체에게 있어 이 책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감히?”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만큼 니체에게는 자기 사상의 결정판인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독일어 명칭으로, 당시 기독교에 도전한 이단인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입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단의 이름을 빌려 예수 정신을 왜곡한 당시의 잘못된 기독교 사상을 전복시키려 했다고 해석합니다.
「반시대적 고찰」과 「안티크리스트」 역시 예수를 이용한 당시 종교 장사치들과 잘못된 기독교 정신에 대항한 니체의 전면전으로 보았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재미난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1부에서 4부까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가 나중에 합본이 되었습니다.
총 4부의 구성에 각 부마다 10개에서 20개 정도의 주제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담았습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1-3부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읽되, 3부까지 읽은 후에 4부를 읽어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1부에는 세 변화에 대하여, 배후 세계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늙은 여인들과 젊은 여인들에 대하여 라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보입니다.

2부에는 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잡것에 대하여, 자기극복에 대하여, 고매하다는 자에 대하여, 세상살이를 위한 책략에 대하여 라는 질문이 있고,

3부에는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감람산에서, 배신자에 대하여,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란 질문이, 마지막 4부에는 실직, 더없이 추악한 자,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 최후의 만찬, 과학에 대하여 란 질문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니체에 푹 빠져있는 몇 주간, 새롭게 알게 된 음악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곡입니다.
독일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체의 장대한 철학 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8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해 교향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 곡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철학의 음악화’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네이버에서 1분씩 잘라놓은 네 편의 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동명의 곡을 함께 듣는다면 특별한 경험이 되실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가지 변화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아니 세 가지 단계로 질적인 변신을 하라고 우리를 도전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 사상이자 니체의 첫 독자와 열혈 독자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주제입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제일 낮은 단계의 인간의 정신을 ‘낙타적 정신’이라 칭합니다.

이윤호 교수님은 낙타가 주인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해본 적이 없고, 자주 무릎을 꿇는 예의바르고 착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자존심은 높이 세우지만, 자신의 자존심에는 크고 많은 상처를 입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낙타는 공경과 공포심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살아가는 인간을 비유합니다.
자신의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어 희생하고 체념하며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사람, 무엇보다 당위의 정신인 “You should!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형식주의와 노예도덕의 의무에 묶여 살아가는 인간을 통칭합니다.

두 번째 단계의 인간은 ‘사자’입니다.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러나 외롭기 짝이 없는 저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이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드디어 낙타적 인간은 의무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분연히 일어섭니다.
사자처럼 남의 말을 안 듣는 동물이 없고, 사자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목숨부터 내놓아야 한다고 이윤호 교수님은 말합니다.
그에게 무언가를 시키려고 하면 으르렁거리기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자에겐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습니다.

사자의 정신은 “아니오”를 분명히 표현하며, “I will,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정신입니다.
그렇지만 용과의 두려운 일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비늘 짐승인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가 정신이 가는 길을 금빛도 찬란하게 가로막는다.
그 비늘 하나하나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들 비늘에는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치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용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그 용은 “모든 사물의 가치는 내게서 찬란하게 빛난다고 거들먹거린다.
가치는 이미 모두 창조되어 있다.
창조된 일체의 가치, 내가 바로 그것이다.
진정 ‘나는 하고자 한다는 요구는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다.”

“용이 하는 말이다.
형제들이여, 무엇 때문에 정신에게 사자가 필요한가?
짐을 질 수 있는 짐승, 체념하는 마음 그리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짐승이 되는 것만으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사자라도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
형제들이여,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경건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용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사자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슬프게도 사자는 용과 격렬하게 싸우다 지쳐갑니다.
사자는 낙타처럼 삶을 사막으로 만들진 않지만, 그의 삶 역시 웃고 즐길 만한 것은 아닙니다.
사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에 내몰린 병사와 같습니다.
사자는 용에게 의무에 대해 싫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많이 알지 못합니다.

용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왔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릅니다.
여전히 법과 제도, 시스템과 도덕, 종교적 명령이라는 천년 정신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지만, 안타깝게도 분노와 비판으로 으르렁대기만 하는 냉소주의에 머물고 맙니다.

마지막 단계의 인간 정신인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는 해낼 수 있는가?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 너희에게 정신의 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노라.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죄의식이나 편견 없이 자유롭고, 잘 잊을 줄 알아 늘 새롭게 관계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규칙을 스스로 창조하며 놀이하듯 살되 혼자서도 즐기며, 어떤 어려움도 반길 줄 아는 긍정의 에너지를 가졌습니다. “I am,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야!”라며 놀이하는 정신입니다.

어린아이는 도덕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도덕을 갖고 있지도 않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용이 나타난다면 용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이 됩니다. 설령 의무를 강요하는 용을 만난다고 해도 으르렁대지 않고 웃음으로 응대합니다. 진정 용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사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 독일어로는 ‘위버멘쉬’(übermensch), 인간을 넘어선 인간인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인간의 정신 중에 어느 단계에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도대체 무엇이고,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게는 도덕과 종교적인 명령들이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제 속의 당위성이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걸 니체를 통해서도 다시금 발견합니다.

그리고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매순간 묻고 답하는 중입니다.
낙타로 머물지 않고 사자의 포효하는 단계로, 어린아이의 놀이하는 삶으로 올 한해 꾸준히 발전해가기를 소망합니다.

<니체의 책 읽기 길라잡이>

*백승영 교수님은 니체를 읽기 위해 우선적으로 읽을 필수적인 세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먼저, 니체의 철학적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
두 번째는 니체 자신이 “요약된 내 철학”이라고 말한 니체철학의 정수인 『우상의 황혼』
세 번째는 『도덕의 계보』 로, 『선악의 저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소개한 사상을 논문형식으로 니체의 사유들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술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바그너의 경우』」를, 종교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안티크리스트』를, 그리고 좋은 니체 개론서를 찾아 읽기를 권합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한 권의 책으로 니체를 읽으려는 분들께 고명섭 기자의 『니체극장』(고명섭, 김영사, 2012)을 초강추합니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니체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며 써내려간 니체 평전의 결정판이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두께지만, 니체의 중심사상을 이해하기 원하신다면,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 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EBS <인문학 특강>으로 방영된 내용이 토대인 이진우 교수님의 『니체의 인생강의』(Humanist, 2015)도 좋습니다.

*단행본 원작을 읽을 분이라면, 민음사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장희창 옮김)도 번역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니체에 푹 빠져 살고 싶은 분이라면, 책세상 출판사가 내놓은 「니체 전집」 21권도 훌륭합니다. 니체관련 저작출판의 결정판으로, 니체정본으로 평가받는 독일 발터 데 그루이터사가 펴낸 '니체비평전집'을 완역한 데다 그동안 번역된 적이 없던 니체의 유고집이 12권이나 포함되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대표작은 재번역까지 했다고 합니다.








첫째, 비로 경험하라

신명기 32: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신명기 32:1-3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은 내 입의 말을 들을찌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위에 가는 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찌어다.



비는 씻어주고, 성장하여 자라게 하며, 생명을 공급합니다.
비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열매가 있으며, 풍성함이 있습니다.

시편 65: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단비는 곧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의 단비로 경험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신명기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찬송 / 성령의 단비를 내려 새 생명 주옵소서

둘째, 불로 경험하라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불은 태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성, 독성, 죄악성을 태워줍니다.
또한 불은 능력을 줍니다.
불은 폭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불로 경험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불은 올라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로 경험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
땅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합니다.
끊임없이 천성을 향해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방망이로 경험하라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방망이는 깨어 부수는 것입니다.
내 이론, 내 주장, 내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 부서져야 합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부서질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생깁니다.
또한 방망이는 부드럽게 만듭니다.
온유한 사람을 만들고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줍니다.
방망이는 구겨진 것을 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패로 구겨지고, 절망으로 구겨진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와 방망이처럼 두드리게 될 때, 실패가 성공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넷째, 등불로 경험하라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를 줍니다.
성공은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서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로 경험한다면, 그 빛으로 인해 우리는 형통할 것입니다.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길로 다니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다섯째,  꿀송이로 경험하라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9: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신앙생활이 꿀처럼 달아야 합니다.
삶도 꿀처럼 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 만족하는 역사, 기쁨이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잠언 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 19: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사도행전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여섯째, 치료하는 광선으로 경험하라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영적인 치유, 육적인 치유, 언어의 치유, 생각의 치유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굽어진 생각과 부정적인 말들이 치유되고, 모든 육체의 질병이 치유되며, 죄와 허물로 죽어진 영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일곱째, 검으로 경험하라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수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경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와 인격과 삶이 말씀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여 그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모든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나고 고쳐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수술하는 검으로 우리 육체와 인격과 삶에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지혜로 경험하라

시편 119: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편 119:99-100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로 경험했기 때문에, 동방에 최고로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지혜로 다가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철로 다가와서 우리 인생을 승리하게 하고, 형통하게 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말씀이 경험되고 소유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말씀을 소유한 자는 어디를 가나 형통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능히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비로, 불과 방망이로, 등불과 빛으로, 꿀송이와 치료하는 광선으로 경험되어 2023년 한 해를 주와 동행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승리하는 은총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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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아 쿨파(mea culpa) 내 잘못/ 그래 내 탓이라고 하자!

원어민들이 라틴어 관용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고상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중국의 고사 성어나 특이한 외국어를 끌어오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에서 많이 쓰이고 색다르고 격식 있는 표현을 하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은 라틴어 관용구를 살펴보자. 

유행어처럼 많이 쓰이는 라틴어 관용구는 단연 per se다. per se는 부사로 by itself, by definition이라는 의미이고 그 자체로,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정도로 해석된다.
한국어 번역에서 ‘그 자체로’를 빼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듯이 영어에서도 per se는 큰 의미가 없다.
문장을 강조하고 대화의 묘미를 더하기 위해 쓰는 표현이다. The drug is not harmful per se, but is dangerous when taken with alcohol. 그 약이 그 자체로 해롭지는 않지만 술과 함께 먹으면 위험하다.

carpe diem은 seize the day라는 뜻으로 현재를 즐겨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라틴 표현이다. 로마의 시인 호레이스(Horace)의 시에서 나온 문구로 미국에서는 1989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대사로 나오면서 유행어처럼 퍼져 나갔고 이제는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라틴어 표현이 됐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 Enjoy yourself while you have the chance.”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mea culpa는 내 탓   이야, 내 잘못이야(my fault/my bad)라는 뜻이고 주로 농담조로 사용한다. 라틴어 mea=by me, culpa=fault에서 나온 표현이다. 잘잘못을 따지다가 “그래! 내 탓이라고 해두자”라는 뉘앙스(nuance)로 “mea culpa!”라고 말하는 식이다. 명사로 쓰이면 언론 기사의 정정, 고침을 뜻한다.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기도 문구에서 기원한 표현이다. 

persona non grata도 재미있는 표현인데 원래는 외교 용어로 타국에서 물의를 일으켜 추방 명령을 받은 외교관, 외국인을 칭했지만 지금은 이상하고 용납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 특정 장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person not welcomed) 또는 인기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verbatim도 자주 사용하는데 말한 그대로, 원본 글자 그대로라는 뜻으로 비즈니스 용어로 많이 쓴다. 명사처럼 보이지만 부사/형용사로 쓰인다.  타인의 말을 인용할 때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대로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면 적절한 단어다. I can remember lines from movies verbatim. 나는 영화의 대사를 한자 한자 그대로 기억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라틴어 표현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장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의 vice versa, 사실상이라는 의미의 de facto, 현재 상황이라는 의미의 status quo, 즉석의 의미의 ad hoc 등이 있다. 출신 학교는 alma marta라고 표현하는데 alma marta의 원뜻인 인자한 어머니(nourishing mother)와 한국어 모교(母校)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 etc는 et cetera의 줄임말로 ~등등이라는 뜻이고 circa는 줄여서 c.라고 많이 쓰는데 시간을 나타날 때 약, ~경이라는 뜻이다. c. 1960=1960년 경. 진실한, 진짜(real)라는 의미의 bona fide와 무료의, 공익을 위해라는 의미의 pro bono도 많이 사용하는 라틴어 단어다. He acted bona fide. 그는 진실되게 행동했다. pro bono lawyers 공익을 위해 무료로 봉사하는 변호사. 

라틴어 문구들은 모두 소문자로 쓰고 하이픈(hyphen -)이나 별도의 문장 부호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에서도 고사성어를 남발하면 어색하고 잘난척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라틴어 관용구도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문장의 맛을 살리기 위해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